심포지엄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일시 2018 년 5 월 28 일 ( 월 ) 오후 2 시 ~6 시 장소 한국교회 100 주년기념관 4 층 2 연수실 주최 기지촌여성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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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지촌여성인권연대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일시 : 5월 28일 ( 월 ) 오후 2시 ~6시 장소 : 한국교회100 주년기념관 4층 2연수실 주최 : 기지촌여성인권연대 문의 : 두레방 (031-841-2609) 후원 : PeaceWomen across Globe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3
심포지엄순서 사회 고유경 (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운영위원 ) 인사말 - 유영임 ( 기지촌여성인권연대상임대표 ) 1부 (14:10~15:45) 신세타령에서부터비판적의식과여성주의실천에이르는 : 기지촌여성을위한정의 - 마고오카자와-레이 (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명예교수 ) 현장의목소리 - 김태정 ( 두레방활동가 ) - 박영자 ( 두레방. 소송원고 ) - 유인경 ( 햇살사회복지회간사 ) - ㅇㅇ숙 ( 햇살사회복지회. 소송원고 ) 휴식 (3:45~4:00) 2부 (16:00~18:00) 기지촌 미군위안부 판결의의미와과제 하주희 (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 건강한병사 ( 와 ' 위안부 ') 만들기 : 주한미군성병통제의젠더 / 생명정치 박정미 ( 충북대사회학과 ) 미군기지촌 위안부 운동과당사자 증언 의의미 : 포스트식민서발턴의사회적형상화와초국적여성연대 이나영 ( 중앙대사회학과 ) 종합토론 4 2018. 5. 28
글싣는순서 인사말 : 심포지엄 이라는이름의소박한잔치상 유영임 신세타령에서부터비판적의식과여성주의실천에이르는 6 9 : 기지촌여성을위한정의 마고오카나와 - 레이 두레방, 언니들, 그리고 미군위안부 국가배상청구소송 17 꼭알리고싶다. 햇살할머니들과함께하며 저는햇살사회복지회회원입니다. 기지촌 미군위안부 판결의의미와과제 건강한병사 ( 와 ' 위안부 ') 만들기 : 주한미군성병통제의젠더 / 생명정치 미군기지촌 위안부 운동과당사자 증언 의의미 김태정박영자유인경ㅇㅇ숙하주희박정미 24 29 35 38 54 70 : 포스트식민서발턴의사회적형상화와초국적여성연대 이나영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5
인사말 심포지엄 이라는이름의소박한잔치상 유영임 ( 기지촌여성인권연대상임대표 ) 오늘이뜻깊은자리에함께해주신모든분들을따뜻한마음으로환영합니다. 비록화려한자리에서많은분들이모여서하지는못하지만이심포지엄은기지촌여성운동을하는저희들에게많은의미가있습니다. 첫째는순서를맡아주신분들께감사드립니다. 특히기조발제를해주시기위해서태평양을건너오신마고오카자와 -레이선생님은저희들모두의큰스승이라는데더욱큰의미가있습니다. 우리들에게 군사주의 라는어렵고도뿌리깊은구조악을바라볼수있는혜안을가르쳐주시고이의제거를위한활동을하기위한실천적토대를마련해주셨을뿐만아니라스스로실천하는지식인의모습을겸손하게가르쳐주셨습니다. 마고선생은우리가동료활동가로서커오기까지 20여년간등뒤에서기다리셨고우리를빨리가라고등떠밀지않으셨습니다. 오늘발제제목만으로도심장이쿵하는감동을주셨습니다. 발표를맡아주신세분모두우리에게너무소중한분들이십니다. 이나영교수님은오랫동안물과기름처럼학문과실천이묘하게분리된채움직이는한국사회에서지식인이현장의변화를위해서활동하면얼마나큰시너지를발휘하는지를몸소실천하셨을뿐만아니라학문이약자를대변할때비로소살아있는학문이된다는것을실천해주셨고늘우리의현장활동을지지하고부족한부분을 6 인사말 : 심포지엄 이라는이름의소박한잔치상
채워주셨습니다. 박정미교수님은가장늦게까지근대화과정을거치지못하고있던한국의성매매정책을법률적측면에서연구해오셨고성매매의뿌리가일제시대이후미군사정권을거치고한국전쟁을거치는기나긴과정을연구하시면서우리의성매매정책을연구해왔고, 이번기지촌재판과정에서그근거가되는자료들을찾아내고제출할수있도록열과성을다하셨습니다. 게다가두분교수님은직접재판의증인으로서주심으로써판결에많은기여를해주셨습니다. 다시한번깊이감사드립니다. 하주희변호사님은이재판이승소할수있도록무료변론해줄젊고양식있는변호사님들을조직하고법리해석이가능하도록수년간노력하셨고사실상승소판결을얻어내셨습니다. 다시한번무료변론을해주신변호사님들께감사드립니다. 그리고오늘생존자로서증언을해주신햇살사회복지회의ㅇㅇ숙선생님, 두레방의박영자선생님두분선생님께도감사드립니다. 당사자의증언이없이는위에열거한모든분들의노력이물거품이라할것입니다. 자기의아팠던삶을대중앞에드러낸다는것이얼마나많은용기와인내가필요한것인지잘알기에매번아픈상처를드러내면서동료들의인권을대변하는두분께깊이감사드립니다. 그리고이분들께끊임없이, 일상적으로다가서서아픔을같이하고힘주기위해서노력했던활동가김태정, 유인경두분의헌신과인내또한너무감사합니다. 구슬이서말이라도꿰어야보석으로서의쓰임새가생기듯이, 이각각의장에서노력하는여러분들을실무적으로엮어내는일은또다른전문영역에속합니다. 이또한오늘사회를맡아주신고유경선생님이우리들을독려하면서해결해주셨습니다. 두번째로는통역을맡아주신장보람변호사님, 김조이스에게감사드립니다. 이심포지엄이가능하도록노력해주신분들을일일이열거할수없어서안타깝습니다. 이제우리사회깊숙이뿌리내리고있던 군사주의 라는이름의반인권적인활동이재판과정을거치면서우리사회의수면위로떠오르기시작했습니다. 앞으로의활동을좀더많은사람들이참여하고공감하는활동이되기를소망합니다. 이심포지엄에예산을지원해주신 PeaceWomen Across the Globe 에도감사드립니다.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7
오늘이심포지엄은사실상 2012년 8월기지촌여성인권연대가결성되고 2014년 6 월 25일재판을시작한지 3년 7개월만에비로소승소판결을이끌어낼수있도록지지하고협력했던이자리의모든분들이함께만든 심포지엄 이라는이름의소박한잔치상입니다. 이자리에오신여러분들과함께이기쁨의잔치상을함께하고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여러분모두깊이사랑합니다. 8 인사말 : 심포지엄 이라는이름의소박한잔치상
신세타령에서부터비판적의식과 여성주의실천에이르는 : 기지촌여성을위한정의 마고오카자와 - 레이 1) (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명예교수 ) 2018 년 5 월 28 일 오늘저는미국의 진정한안보를위한여성들 (Women for Genuine Security) 과스위스의 PeaceWomen across Globe 를대신하여, 이심포지엄을개최하는데함께할수있게된것에대해무척영광이라는인사를여러분께드립니다. 이역사적인심포지엄을조직해주신분들에게감사드리며, 제가참여할수있게되어무척감사하고영광입니다. 특별히두레방을설립한분들과이끌어오신분들, 활동가들에게감사드립니다. 두레방은기지촌여성과미군아버지가버린다인종 (mixed-race) 아동의실태를처음으로드러낸이들로, 놀라운일들을해냈습니다. 여성들과아이들의인간성을확고히했으며, 그들도타인의수용과무관하게한국사회에서기본권과존엄성을갖고있는존재임을보여주었습니다. 이심포지엄은두레방 1) 마고오카자와 -레이박사는필딩대학원대학리더십연구과정의교수이며,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명예교수이다. 1994 년부터군사주의와여성에미치는영향에대해활동해오고있다. 한국, 오키나와, 괌, 하와이, 푸에르토리코, 일본, 미국등에서군사주의에저항하는여성들의국제네트워크를만든창립한사람들중한명이다. 1997 년한국의다인종 (mixed-race) 아동실태에대한첫조사논문중하나인 GI 타운의아메라시안아이들 : 미국군사주의의유산 를을여성학아시아저널에발표했다. 그녀는한국자매들을무척사랑하고생명을사랑하며현재의역사적순간에깨어있는사람으로자신을소개한다.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9
과새움터, 햇살센터, 개인지지자들이연대하여군사화된성매매에국가가공모했다는한국법원의판결을이끌어낸것을기념하는자리입니다. 저는먼저페미니스트연구자이자활동가로서기지촌여성의실태를접하게된개인적인계기를얘기해보겠습니다. 1994년봄과여름은제가미국시민이자페미니스트연구활동가로서심오한깨달음을얻은시기입니다. 풀브라이트연구과정을진행하던저는한국에 100여개의미군기지와시설이전국적으로산재해있다는사실과, 기지주변에군인들에게 필요하다고여겨진 술과섹스, 의복, 신발, 패스트푸드, 선물-기지주변의여성들은가발과긴머리도요구되었음 - 등을공급하는사업이생겼다는것을알게되었습니다. 미군기지주변의기지촌 ( 제가나중에알게된한국말 ) 에대해처음에저는개인또는가족기업들로이곳이운영된다고알았는데, 그게아니라한국정부와미국방부, 특별히아시아태평양사령부의지원아래에기지촌이존재한다는것을알게되었습니다. 이것은특별히군사회된성매매와 유흥 사업의경우그러했으며, 군인을보호할목적으로성병감염검사와같은공식적인보건요구사항들을여성들이갖추도록했습니다. 조사연구를하는동안한국여성들이기지촌에서의삶과다인종 (mixed-race) 아동의삶을나누고자제게했던감동적인이야기를진지하고깊이있게 ( 통역을통해서 ) 들었습니다. 기지촌여성으로서최초로이문제를공개적으로증언했던송탄의김연자는처음으로제게그녀의이야기를들려주었고, 여러지역에저를데리고다니며기지촌여성들과아이들의이야기를들을수있게했습니다. 제게기지촌을알려주고가끔저와동행했던페미니스트작가인안일순선생님은여성들이그녀의 " 어둠의이야기들 " 을제게들려주고있다고말했습니다. 후에군인과결혼한한국여성에대한논물을쓴한국교수가제게신세타령이라는개념을가르쳐주었습니다. 저는제가들은이야기들속에담긴감정과영성과역사성의맥락들의복합체를이해하게되었습니다. 저는개인의레벨에서이해했는데더깊이이해할필요가있었습니다. 두레방이나새움터, 햇살센터의자매들은수십년간여성들과생존자들, 아이들을지원하면서수백번반복하여이야기들을들어왔습니다. 하지만그녀들은듣는것이상의것을해야했습니다. 그녀들은비판적으로연구하고분석해서, 기지촌여성들의이야기가일본의한국식민지화와일본제국군의 위안부 시스템과연결되어있다는것을이해하게되었고, 한국정부와미군, 좋은여성 과 나쁜여성 에대한문화적 10 신세타령에서부터비판적의식과여성주의실천에이르는 : 기지촌여성을위한정의
기대와평가, 남성성의구축, 한국상품의국제적수요에부응하려고만든공장들과사업의조직, 군사주의와미군기지와자본주의와의관계등에연관된다는것도알게되었습니다. 오랫동안많은경험을통해활동가들은기지촌여성들의삶과계급적배경, 청소년기가족구성원의성폭력경험등과기지촌에서의그들의활동과의근원적인관계를이해하기위해필요한비판적인식을발전시켰고한국전쟁이후미국과 좋은관계를유지 하고국가경제를구축하기위해여성들을이용했던한국정부의의도를알게되었습니다. 기지촌여성들을위한정의를향해걷는세번째여정은, 어려운작업이며페미니스트활동가들의페미니스트실천 ( 성찰적행동 ) 으로서정부의책임을묻고제도의변화를만드는것이었습니다. 그들은곧성찰에기초하여행동에나섰습니다. 그들을일하면서투쟁해왔습니다. 투쟁은수십년동안진행되었고, 2월법원의판결로그들의투쟁이옳은것이었음이확인되었습니다. 법적인승리는또한 할머니 와 언니 들의용기를바탕으로이뤄냈습니다. 이들은법정에서판사와변호사, 청중들을향해그들의경험과고통을직접이야기했고언론앞에도나섰습니다. 조용하면서도용감하고, 지혜로운두레방의박영자언니는그녀가겪은일과고통에대해공개법정에서위엄있게진술했습니다. 손이떨리는와중에도분명하고강한목소리로그녀는진술을마무리했습니다. 판사를포함한법정의모든사람들은조용히그녀의이야기가끝나기를기다려주었습니다. 법원의판결후열린기자회견에서도그녀는언론앞에목소리를냈습니다. 법정에서비공개로진술한다른여성도있습니다. 햇살센터의김숙자와같은할머니들은연극, 뮤지컬, 합창등많은공연을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이법정에서진술하지는않았지만창조적인방법으로그들의이야기와메시지를전했습니다. 이승리를뒤이어한반도에서는가족과민족이다시함께할수있는통일의가능성이나오고있습니다. 오늘날기지촌여성의삶을위한투쟁에서미국과미국에있는페미니스트들은어떤역할을할수있을까요? 우리는신세타령에서부터비판적인식과페미니스트실천에이르기까지어떻게나아가야할까요? 다음단계는미국활동가들이한국에서여성들에게가해진폭력과군사화된성매매를실시하고유지해온데미국의역할을묻는소송을미국법정에제기해야할것입니다. 지구화된신자유주의경제시스템의결과한국의경제보다필리핀의경제가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11
더열악하고, 필리핀여성들의노동도한국여성들보다더열악해졌습니다. 그결과현재기지촌여성들의다수는필리핀여성들입니다. 그래서기지촌이슈는한국과한국여성의문제보다더커지고있으며, 투쟁은과거보다더초국가적인것이되고있습니다. 기지촌이슈에초점을두는것이상으로우리미국페미니스트들은우리의끔찍한정부가평화프로세스를지원하는데책임을갖도록하는데최선을다할것입니다. 저와제동지들은한반도가군사훈련이나기지, 무기, 군인들이없는비군사화지역으로선포되기를깊이소망합니다. 그대신, 한반도의민중들은오키나와, 필리핀, 괌등아시아태평양지역의이웃들과함께진정안전한세상에서살수있을것입니다. 이는어떤형태의폭력도없고, 모든사람들이존엄하며안전하게살수있고, 모든생명체를응원하는건강한자연환경에서살아가는것입니다. 감사합니다. 12 신세타령에서부터비판적의식과여성주의실천에이르는 : 기지촌여성을위한정의
From Shinsaetaryoung to Critical Consciousness to Feminist Praxis: Justice for Kijichon Women Margo Okazawa-Rey 2) Professor Emerita, San Francisco State University 2018 May 28 I bring greetings today on behalf of Women for Genuine Security in the USA and PeaceWomen across Globe in Switzerland to help recognize and honor the work that has led us to this symposium. Deepest appreciations for the organizers of this historic symposium and for allowing me to participate. I am grateful and honored. I especially want to thank the founders, staff, and leaders of Du Re Bang who were among the first to recognize the situation of kijichon women and their mixed-race children abandoned by US military fathers and did something extraordinary: affirmed their humanity and showed they are part of Korean society with basic human rights and dignity, regardless whether anyone else accepts that. This symposium celebrates Du Re Bang and the coalition of NGOS including Sae Woom Tuh and Sunlit Center, and individual supporters whose activism and community-organizing led to victorious verdict in the Korean court that ruled government complicity in militarized prostitution. I will begin with my own personal connection as a feminist researcher and 2) Dr Margo Okazawa-Rey is professor in the School of Leadership Studies, Fielding Graduate University, and Professor Emerita at San Francisco State University. Since 1994, she has been working on the issue of militarism and impacts on women. She is a co-founder of international Women's Network against Militarism that includes members from Korea, Okinawa, Guam, Hawaii, Puerto Rico, Japan, and US. In 1997, she published one of the first research papers about the situation of mixed-race Korean children, "Amerasian Children of GI Town: Legacy of US Militarism" in the Asian Journal of Women's Studies. She describes herself as deeply loving her Korean Sisters, loving life, and being alive in the current historical moment.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13
activist to the situation of kijichon women. Spring and summer of 1994 was a time of profound awakening for me as US citizen, feminist academic activist. While conducting my Fulbright Researcher study, I discovered that nearly 100 US military bases and installations existed across South Korea and that, surrounding the bases, businesses were established to service what military personnel needed : alcohol, sex, clothes, shoes, fast foods, souvenirs; the military women needed even wigs and long hair. The kijichon (the Korean word I later learned) around US military bases, I learned were operated by individual and family entrepreneurs BUT existed with the sup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and US Department of Defense, specifically Asia Pacific Command. This was/is particularly so in the case of militarized prostitution and the entertainment industry, with is official health requirements imposed on kijichon women such as tests for sexually transmitted infections, primarily to protect servicemen. Doing the research, I listened very carefully and deeply to Korean women (through interpreters mostly) who shared their moving stories of being in kijichon and about the lives of their mixed-race children, if they were mothers. Kim Yon Ja, of Songtan, one of the first kijichon woman to speak publicly about the issues was the first woman who shared her story and accompanied me to many places in Korea to listen to women s and children s stories. Ahn Il Soon feminist writer sunsangnim, who introduced me to kijichon in the first place and accompanied me sometimes, said the women were telling me their darkness stories ; later a Korean Professor who had done his dissertation on Korean women married to servicemen, taught me the concept of shinsaetaryoung. I came to understand the complex emotional, spiritual, historical threads in the stories I was privileged to have been told. I understood at the individual level but needed deeper understanding. The sisters of Du Re Bang, and in the newer organizations like Sae Woom Tuh and Sunlit Center, heard the stories hundreds and hundreds and hundreds of times over the many decades as they supported the women, the survivors, and 14 신세타령에서부터비판적의식과여성주의실천에이르는 : 기지촌여성을위한정의
their children. But they also had to do more than listen. They had to study and analyze critically and come to understand all the ways the women s stories were connected to history of Japanese colonization of Korea and comfort women system of Japanese Imperial Army; to Korean government and US military; to cultural expectations and judgments about good woman and bad woman ; to constructions of masculinity; to organization of work and factories established to serve global demands for Korean goods; and to the relationship between militarism, US bases, and capitalism. Over the years, and through numerous experiences, the activists developed the critical consciousness required to understand the fundamental relationship between kijichon women s lives, their class backgrounds, and experiences of childhood incest, for example, and their work in kijichons, to Korean government s intention to exploit the women to build the national economy and maintain good relations with the US after the Korean War. The third part of the journey toward justice for kijichon required hard work and feminist praxis action with reflection of feminist activists organized to hold the government accountable and create institutional change. They acted then reflected on their actions. They worked and struggled; the struggles have been decades long, but the February Court ruling affirmed the correctness of their struggle. The legal success was also built on the courage of halmoeney and eunni who spoke about their experiences and hardships directly to the judges, lawyers, people in the courtroom, and later to the press. One elderly client of Du Re Bang, Park Yung-Ja, a quiet, brave, and wise woman, testified without cover and with great dignity what she had experienced and ways she has suffered. She finished reading her testimony with a clear and strong voice, although her hands were shaking. All people in the court including judges kept silent and waited for her to finish her story. She also spoke at the press conference after announcement of the court ruling. Another spoke to the judges behind closed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15
doors. Other halmoeney, like Kim Sook-Ja at the Sunlit Center created and produced many performances including theater, musicals, and chorus. Though these women did not testify in front of the judges, they carried the stories and messages in creative ways. This victory is followed by the possibility of a re-unified Korea where the families and the nation can be together again. Today, what is the role of American and US-based feminists in the struggles for kijichon women s lives? How must WE move from Shinsaetaryoung to Critical Consciousness to Feminist Praxis? The next step must be for US activists to bring similar lawsuit to US courts for the US role in the creation and maintenance of militarized prostitution and violence against the women in Korea. Now, because many of kijichon women are Filipinas result of the globalized neoliberal economic system that places Philippines economy below Korea and women s labor below Korean women s. Thus, the kijichon issue has become bigger than Korea and Korean women and the struggle even more transnational than before. More than focusing specifically on kijichon issues, we US feminist will do our best to hold our wretched government accountable for supporting the peace process. I bring my comrades and my deepest hope and desire to declare the Korean Peninsula a de-militarized zone soon: no military exercises, bases, no weapons, no military personnel. Instead, the people of the Peninsula along with Asian and Pacific neighbors of Okinawa, the Philippines, and Guam will live in a truly secure world: free from violence of any form; all people living in dignity and with secure livelihoods; and healthy natural environment that can support all life. Thank you! 16 신세타령에서부터비판적의식과여성주의실천에이르는 : 기지촌여성을위한정의
두레방, 언니들, 그리고 미군위안부 국가배상청구소송 김태정 ( 두레방활동가 ) 들어가며 두레방의일상은좁은두레방복도에둘러앉아마치어제의일처럼 30년전의일을들려주시는언니들의이야기보따리를푸는것으로부터시작된다. 매일같은내용의이야기를반복하여도언니들은지겹지않은것처럼우리들에게이야기하신다. 사실활동가는하루종일듣는것에힘듦을느꼈던적도있었겠지만반복되는이야기속에도가끔씩다양한일들이일어나기때문에결코허투루들을수없었다. 언니들은자신들이묵혀놓았던젊은시절들을들어주는이가있어더욱신나게이야기를꺼내시는것같다. 언니들의이야기를듣고있을때면언니의젊은시절의모습을보고있는것같았다. 나는아무것도모르는상태에서두레방활동을시작하였다. 기지촌의문제도, 여성의문제도, 사회문제도모르는나는언니들표현에따르면풋내기였다. 처음활동을시작했을때그저할수있는일이없어언니들의이야기를더많이들었던것같다. 어느날은하루종일언니들의이야기를듣다가해야할일을못해야근까지하는경우도종종있었다. 그런세상모르는풋내기도언니들의이야기를듣고 이건아니다 내가살고있는이나라에서? 정말이건아니겠지? 이런의심과함께언니들에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17
게폭력을행사한국가의실태를언니들이야기속에서알게되었다. 어느역사책에서나미디어에서결코알지못했던일들을작은마을뺏뻘에서배우게된것이다. 두레방에서일년활동남짓됐을무렵두레방은기지촌여성들에대하여국가가저지른폭력성을알리고자하는국가손해배상청구소송을고민하고있었다. 그때까지도풋내기인내가언니들의진술을잘받을수있을까라는의심과언니들에게왜이소송을해야하는지에잘설명할수있을지자신감이없었다. 그러나언니들은달랐다. 굳이소송하는것에대한설명을하지않아도당연히해야하는행동이라고생각하였고이런소송을준비해주는두레방과관심가져준사람들에게감사하다고하였다. 그러나소송을준비하자고한말로부터실제시작을하기까지조금은오랜시간이걸렸다. 정확한증거자료나소송을맡아줄변호사단체가쉽게나타나지않았기때문이다. 그동안두레방은계속언니들의이야기를들으며지내고있었다. 그리고여러학자들과관련단체들을알게되었고그들의덕분에재판에서언니들의억울함이드러날수있는증거자료를모을수있게되었다. 그리고언니와두레방은함께국가폭력에대한손해배상청구소송을시작하였다. 기지촌여성인권연대활동기지촌여성인권연대의활동을이야기하지않고국가배상청구소송과정을이야기할수없을것이다. 연구모임, 홍보활동, 심포지엄등하며차근차근소송준비를진행하였다. 연대의여러단체와변호인단, 학자, 관련개인들이함께하였기에언니들이기지촌에서겪은삶을한국사회에드러내는활동을할수있게되었다. 2008년 11월6일기지촌여성과함께하는여성연대 ( 가칭 ) 기획회의 2008년 12월 29일기지촌여성과함께하는여성연대 ( 가칭 ) 기획회의 ; 과거사자료정리 2009년 2월 19일기지촌여성문제에대한단체워크샵 2010년 12월 8월기지촌여성인권연대소모임 2011년 2월 24일국가손해배상청구소송준비처음단계 2011년 3월 28일국가손해배상청구소송, 특별법제정운동을위한연구소모임 2012년 8월 31일기지촌여성인권연대출범식 2013년 6월12일기지촌성매매여성지원등을위한법률 ( 안 ) 공청회사전간담회 2013년 10월 20일성매매근절을위한한소리회 25주년기념국제심포지엄 : 성매매, 기 18 두레방, 언니들, 그리고 미군위안부 국가배상청구소송
지촌, 그리고인권 2013년 12월16일기지촌여성지원법안마련을위한입법공청회 2014년 2월 20일경기도기지촌여성지원등에관한조례안마련을위한간담회 2014년 3월 3일국가손해배상청구소송소장을내기위한진술작업정리시작 2014년 4월 8일기지촌여성국가배상소송비마련을위한일일주점행사 2014년 6월 25일한국내기지촌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청구소송소장제출및기자회견 2014년 12월 19일한국내기지촌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청구소송첫변론기자회견 2017년 1월 20일한국내기지촌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청구소송 1심판결에대한기자회견 2017년 3월 20일미군 위안부 소송결과의법제정을위한토론회 2018년 2월 8일한국내기지촌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청구소송항고심판결에대한기자회견 한국내기지촌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청구소송과정언니들의이야기를담다-진술서작업 ; 2014년 3월본격적으로언니들의진술서작업이진행되었다. 진술서, 변호사위임계약서작성, 신분증, 주민등록초본, 통장사본등준비하여변호사에게전달해야하였다. 준비과정에서다른서류들은쉽게진행이되었지만진술서부분에서활동가도언니들도힘들어하였다. 재판에서언니들의피해가잘드러날수있는진술서작성이필요한데언니들에게법적조력을주며작성하기엔활동가들의법적역량이약했기때문이다. 몇번의진술서작업후에야제시간안에소장을제출할수있었다. 2014년 6월 25일소장을내고서도국가의피해가더드러날수있는진술서를위해내용의수정이있었다. 사실대부분의사람들은어제의일도기억해내기힘들다. 그러나언니들의경우 30년전의일들을기억해내는것은여간힘든일이아닐수없다. 언니들은피해사실에대한기억은있지만재판에서원하는정확한날짜, 횟수등을기억하기어렵다. 또한인생에서지우고싶은날이었기때문에증거가될수있는자료들은이미버린지오래이다. 이런상황에서유일한증거로는언니들의진술인데그기억을유추하기위한작업은하루만에끝을낼수없었다. 당시대통령을생각하며연도를유추하고, 같은시간에함께했던언니들끼리기억을맞추며유추하였다.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19
비록언니들은정확한수치로기억해내긴어려웠지만그당시어떠한피해를입었는지, 국가의조장이있었는지기억하였다. 기억하는가운데당시의설움이생각나눈물을훔치는언니들도있고, 젊은활동가에말하기힘들어하는언니들도있고, 화가나서진술내내욕을퍼붇는언니들도있었다. 국가폭력에맞서증인으로나서다-당사자증언 ; 국가손해배상청구소송의 1심은 11번의재판이있었다. 그과정안에는여러중요한증언들이있었다. 학자, 보건소의사그리고당사자들의이야기가있었다. 당사자증인에참석한언니는그동안재판을오가면서적나라한피해를자세하게설명이없는증언에답답함을호소하였던중당사자증인이필요하다는이야기에언니에게요청하였고언니는공개재판으로하여증언에나서겠다고하였다. 재판에서시간의차례로사건의차례로잘설명을하기위해변호사는두레방에방문하여언니의이야기를정리하는시간을가졌다. 그과정은언니에겐결코가볍지않았다. 과거일을생각하며자기가가진상처를이야기하는것은들려주는내내눈물이끊이지않게만들었기때문이다. 언니는눈물이많은자신을탓하면재판에서울지않기위해일주일내내정리한내용을연습하였다. 그리고 2016년 7월 8일언니는재판에들어가기전담배로긴장을풀며마지막연습을끝으로재판장앞에서서증언을시작하였다. 마지막으로하고싶은말을적어온언니는판사를향해읽어내려갔다. 언니는증언내내울지않았던눈물이벌컥쏟아졌고재판에참석한다른언니들도, 활동가들, 변호사등모두가눈물을흘렸다. 판사는눈물을참아내려눈이벌겋게되었다. 판사는언니에게 왜그당시에고발하지못하였습니까? 질문하였고언니는 감히어떻게할수있겠어요? 대답이이어졌다. 그리고언니의증언재판은마무리되었다. 1심판결을받고 ; 소송을시작하기전에여러곳에서조언을받았을당시들려온대답은주장은할수있겠지만과연국가를상대로하는재판에서이길수있겠냐라는부정적인인식들이었다. 그래서그랬던지 1심에대해아무기대도없었고언니들에게기대하지 20 두레방, 언니들, 그리고 미군위안부 국가배상청구소송
말라는뉘앙스를주었던거같았다. 그러나 1심판결을우리의주장일부가인정되어것에희망을가지게되었다. 물론판사들이법적부분을이해하고판결을내렸겠지만마치증언에서눈물을쏟게하였던언니의덕이큰건아닌가하는생각이들었다. 1심판결은주요내용은 1977.8.19. 구전염병예방법시행규칙시행이전이루어진성병감염인에대한격리수용치료는위법하다는내용으로소송에참여한 122명중 57명이인정되었고피고측인한국정부가주장한소멸시효에대한주장은받아들이지않았다. 1심판결결과를듣고언니들의주장은갈라졌다. 본인들이받은불법적인요소가법에의해구분되어누구는되고누구는안된다고하는것이말이되냐? 하는주장과나이많은언니들이라도지원받게계속그렇게주장해라하는주장이오갔다. 우리는그판결을떠나모두가피해를받았기때문에처음에주장한내용으로다시항고를시작할것을설명하였고언니들에게항소심도계속진행할것인지이야기나눴다. 언니들은당연진행하겠다고의견을내주었다. 항소진행- 최후변론 ; 항소를시작하면서 1심판결을참고하여진술서수정이들어갔다. 새로운내용이들어간것이아닌시대적으로 57명안에들어가야할사람들이포함되지않아그부분에대한날짜부분을유추하여다시진술서작성하는과정이필요했다. 다시진술하는것을힘들어하는언니들이있었지만그러면서도우리가고생한다고생각하시는지다시돌아와마지막이라며으름장을내고진술서진행을하였다. 항고심재판은한국의성산업역사에대한증언을끝으로최후변론까지 1심이약 4년에걸친기간에비해 1년정도시간밖에안걸렸다. 언니들도두레방식구들도 1 심과비슷한결과를가질것이라예상하였고부디 57명에들어가지못한언니들이항고심에서는들어가길바라는마음이었다. 재판에참석한언니들은 1심과다르게본인들의이야기를말하는자리가없는것이아쉬움으로남는다고하였다. 판사가우리의얘기를들어야더좋은것이아니야는문의가있었고 1심이그런자리였고 2심항고심에서전체역사적인부분을설명하는자리라고설명을하였지만쉽사리아쉬운마음은사그라지지않았다. 그리고최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21
후변론에당사자의목소리가들어갔으면좋겠다는의견에 1심에서공개증언을하신언니가다시자신의목소리를내기로하였다. 최후변론의준비는전에증인으로나섰을때와다르게준비되었다. 모든언니들에게판사에게이야기하고싶은이야기를한마디씩할것을의견을내었고언니들은기꺼이두마디이상씩하였다. 그내용을정리하여대표로재판에서발언하기로하였다. 이과정도일주일정도걸렸다. 언니가쉽게말을할수있도록언니말에맞춰작성해갔다. 2017년 12월 21일최종변론이있는재판에서양측변호사는준비한법적내용을설명하였고마지막으로언니가변론을하였다. 언니는첫문장을읽음과동시에눈물이쏟아졌다. 부들부들떨면서도, 눈물이계속나면서도, 언니는끝까지읽어내려갔다. 재판장에있는모든이들이눈물을흘렸다. 언니는피고측정부변호사의변론에너무화가나고억울하여감정을다잡을수없어울수밖에없었다며정확한음성으로판사에게본인의이야기를들려주지못한것에아쉬움을내비치셨다. 2심판결-정부의위법함이인정되다. 2018년 2월 8일항고심판결이있었다. 그저 1심과같은판결정도로감사하는마음이었다. 그러나판결은우리들이주장한정부가기지촌을조장하여여성들이피해받은부분이인정되는방향으로나왔다. 판사가결과를이야기할때장안에서는언니들이숨죽이며눈물을참았다. 그리고재판장을나서며기쁨의눈물을흘리며언니들과활동가들관련된사람들은모두가부둥켜안았다. 판결의요지는재판부는국가기관이작성한문서를통해그들이기지촌에서여성들의성적서비스를향상시키고영업시설을개선하는등성매매를조장했다고주장을인정하였고또한과거위안부등록제와 애국교육 이실시된것을통해기지촌에서성매매행위를적극조장했다고보았다. 국가가미군위안부들의성 ( 性 ) 내지인간적존엄성을군사동맹의공고화또는외화획득의수단으로삼았다고보고, 이로인해미군 위안부 들이정신적피해를입었다고보았다. 국가기관들이 토벌 이나 컨택 으로 위안부 여성들을낙검자수용소에강제로데려온후의료진단없이무차별적으로페니실린을투약한것은위법하다고판단했다. 22 두레방, 언니들, 그리고 미군위안부 국가배상청구소송
정부측이상고를준비할것이라언니들에게설명을하였다. 그러나언니들은이날 만은이판결이우리의판결이라믿고수고해주었던변호인단, 관련단체학자들에게 감사의말을전했다. 마무리재판이끝나고돌아오는길에언니들과같이먹는저녁시간이좋았다. 메뉴는다양하지않았지만언니들이선택한메뉴가있는식당으로가서밥을먹으며그날재판에서있었던내용들, 오랜만에만난다른지역의언니들을만나이야기등여러이야기가오가는그자리가좋았다. 그래서돌아오는운전은매번내가한이유일수도있다. 처음소송을시작할때국가와싸우는일이라서오랜시간이걸리는일이니언니들에게잊고지내자고하였다. 언니들의건강을생각하지않은무심한말이었다. 2심판결까지약 5년의시간이지났다. 그동안소송에참여하신언니들몇분은우리의주장이인정된판결을듣지못한채돌아가셔안타까움이더해졌다. 늘언니들의젊은시절이야기를듣고보통할머니들과다른젊은감각과생각을가지고있는언니들과지내면서나도모르게언니들이언제까지나건강한모습으로끝까지소송을진행할수있다고망각하고있었다. 이미언니들은어느새할머니의모습을하고있었고건강은작년과올해가다르고해가거듭할수록달라지고있었는데말이다. 언니들의건강을유심히체크하며끝까지좋은날을맞이할수있도록노력을할것이다. 또한소송시작전에도, 소송이진행중에도, 기지촌여성인권연대의멤버는각자자리에서언니들을위한활동을계속하였다. 여전히과제로남은경기도기지촌여성조례제정과현재국회에계류중인법안관련하여하루빨리제정될수있도록계속노력할것이다. 언니들과십년이넘는시간동안두레방에서함께하였다. 그시간이언제지나갔는지도모르게언니들과늘함께동행하고있었다. 그동행의길끝엔더나은삶을, 더행복한삶을사는언니들의모습이있기를바란다.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23
꼭알리고싶다. 박영자 ( 두레방. 소송원고 ) 의정부뺏뻘에는 30년동안두레방이한결같이옆에있어주었다. 어느날은밥을먹고어느날은떡을먹으며두레방에둘러앉아두레방식구들과동네언니들과함께있었다. 그시간은결코아무런의미없이지나는가는시간이아니었다. 나는두레방식구들와함께한지 10년이넘어서야내가기지촌에있었던것이정부로부터의폭력이라는것을차츰알게되었다. 그리고옛날일을하나하나다시짚어보니더욱화가치밀러올랐다. 나만그런것은아니었다. 두레방에오는여자들도모두가국가로받은폭력을알고나서욕까지저절로나왔으니말이다. 우린자연스럽게우리가받은피해를알게되었다. 그래서소송하기시작하기까지많은시간이걸린건아닐까라는생각이든다. 처음원장님으로부터국가에게손해배상청구소송에대한이야기를들었고나의피해를드러내자고했을땐믿어지지않았다. 그시절나는감히정부가하는일에반기를들겠다고생각할수없었기때문이다. 두레방식구들이도와준다고하고나는소송에서나의피해사실을진술하는과정부터시작하였다. 그시절정부는기지촌에서나를이용하면서달러를벌면서애국자라칭하고많이벌어준다고맙다하였다. 하지만밖으로나가면나는사람들에게손가락질을받은여자이었다. 기지촌에서나올라고해도나올수없게만든국가로부터나는나의손가락질받은여자가아니평범한여자임으로나의명예를회복하고싶었다. 24 꼭알리고싶다.
소송의진행은길게느껴졌다. 두레방식구들과법원을갈때마다아픈허리때문에고생을하였다. 준비한방석을깔고나서야재판에집중할수있었고증인으로나온사람들의이야기를들으며답답함을느꼈다. 그것은나만느낀것이아니었다. 재판이진행되는동안평택에서, 동두천에서온여자들도같은마음일것이다. 재판장안에서하고싶은말들이너무나많았다. 그래서증인할수있게냐는제안에쉽게손을들었을것이다. 증언준비를하는동안옛기억을더듬으며다시북받쳐올라왔다. 바보같이그안에서답답하게당하고살았을까? 왜국가에게이용을당했을까? 후회스러운마음에증언준비를하며눈물을많이흘렸다. 남앞에서말을한다는것이너무나힘들었지만일주일을꼬박증언하는연습을하고자신감이생겨잘말할수있겠다생각이들었다. 재판당일연습을많이해서그런지연습하는기간내내북받쳤던느낌이사라져눈물이나오지않았다. 그러나마지막하고싶은발언을준비한종이를읽으며다시감정이잡을수없었고눈물을흘리며마무리하였다. 재판항소심을한다고다시허락을구하는연락을두레방에서받았고당연진행한다고이야기하였다. 첫번째재판과다르게이번재판에서는여자들의이야기를듣지않는부분이이해가가지않았다. 나중에변호사님과두레방식구들에게설명을들었지만그래도아닌것같다라는생각이들었고그래서항소심마지막최후의진술에서할수있겠냐는문의가왔을때바로한다고했을지도모른다. 그리고잘읽을수있도록일주일동안단어와문장을고치며준비하였다. 우리쪽변호사가화면으로자료를준비하여자세한설명이끝나고반대편변호사가이야기하는데너무나화가났다. 그젊은여자변호사는아무것도모르면서공무원들이잘못이없다고말을할수있는가? 그자리에있는모든여자들이화가났다. 그리고최후의진술을하는데너무나억울해서죽을거같았다. 연습한대로읽어내려가는데그억울함때문인지첫문장부터눈물이났고결코멈출수가없었다. 손이떨렸다. 그들이무엇을알까나에대해서우리에대해서어떻게저렇게말을할수있을까너무나억울했다. 그래도나는준비한발언을중간에멈출수없었다. 판사가꼭내말을들어주어나의억울함을풀어주길바랬다. 그리고항고심의결과는너무나기뻤다. 우리의이야기를들었구나우리의이야기를이해했구나하는생각이들었다. 우리의비통함을알아주는판결을받아서너무나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25
기뻤다. 나는재판이끝나고돌아오는길에두레방식구들과삼겹살을먹는것이너무나좋았다. 비록늘재판에오고가고하는것이너무나힘들었지만그런나날을두레방식구들과저녁을하며재판의이야기를하고나의증언에대해나의최후의진술에대해이야기나누고다음의재판에대해논하는것이좋았다. 많은사람이아니어도우리의이야기를알리고싶었다. 우리같은사람들, 타의에의해서이러한피해를당하고이렇게살아왔다는것을, 우리가원해서그렇게살았던것이아니라는것을, 꼭알리고싶다. 박영자원고의법정증언 - 2016 년 7 월 8 일 1 심재판 9 차변론기일 꼭말하고싶은게있었습니다. 우린태어난이나라에서버려졌습니다. 우리나라가개입하여만든기지촌거기서우리는폭력과갈취이용만당했습니다. 아무도우리입장을생각해주지않았습니다. 국가는기지촌으로들어가게만든직업소개소와포주를다묵인해주었습니다. 거기서우리가번돈은상상이상일것입니다몸을버렸으면돈이라도벌었어야죠. 돈버는사람은하나도없고포주만돈을버는이런구조를만든우리나라가우리를이용해먹고버린겁니다. 사람들은우리가원해서그곳에갔다고합니다. 하지만우리는직업소개소에속아기지촌으로빚을지고가게되었습니다. 빚은돈을벌수록이상하게더오르게되고십대임에도불구하고아무도도와주는어른도없었습니다. 하루에상대하는미군은하루거르지않고 5명이상입니다. 이런것이너무무섭고싫어서도망가면찾아잡아오고때리고, 도와달라고이야기하면포주한테일러서빚을올려다른곳으로팔려가게되었습니다. 판사님이런상황에서제가나올수있었을까요? 억울합니다. 옛날에박정희경제개발했다고그러지만우리가애국자소리들으면서달러엄청 26 꼭알리고싶다.
많이벌어들인거예요. 그때는아파트해준다는말도들었습니다. 일본위안부있는데국가에서관리해준다고들었습니다. 우리나라는미성년자라고집에보내는것도없고나라에서다버린거잖아요그럼책임져야죠. 군산타운백태하라는사람은달러를많이벌었다고상 3번탔다면서요그달러누가다벌어드렸는데요? 아가씨들이다벌어드린건데아파죽어가도의사하나안내려다보고오로지성병검진만했습니다. 성병검진은미군을위해서미군요청의해서해준거지우리를위해해준건아니잖아요. 나라의무관심에우리의몸은병들고돈도못벌고이용만당했습니다. 그러니까나라가책임져야죠. 이말을하고싶었습니다. 박영자원고의법정진술 - 2017 년 12 월 21 일항소심최종변론 존경하는재판장님, 우리는글도모르는사람이기도하고, 가난한집안의딸이기도하며, 가정에서내몰린사람들입니다. 그런우리는가족을위해서, 보다나은삶을위해국가가허가해준직업소개소를찾았고그직업소개소를통해기지촌으로팔려오게되었습니다. 우리가팔려가고싶어기지촌으로팔려간것이아닙니다. 우리의어리숙함을빌미로인신매매를당한것입니다. 우린어린미성년이었습니다. 기지촌에서십대인여자아이를도와주는어른은어디에도없었습니다. 포주는가짜주민등록증을만들어주고그것을이용하여검진증을만들었습니다. 국가는그것조차모르고보건소에서검진을하고미군들에게성병이없는깨끗한여성으로내몰았습니다. 숫기가없다며약복용을강요받았고그렇게우리는기지촌에갇혀달러를버는기계로살아왔습니다. 몸이아파도일을나가야했습니다. 임신을하면낙태를시켰고그비용은빚으로올리고, 기지촌은돈을벌면벌수록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27
여러가지이유로빚이쌓여가는이상한구조였습니다. 기지촌을나오고싶으면도망을나오거나미군과의결혼이었습니다. 그러나도망을나오면포주한테잡혀폭력을받고빚을더올려다른집으로보내졌습니다. 미군과결혼을한다고하면상상도안되는금액을불렀고그래서결혼을포기하게만들어계속기지촌에묶어두었습니다. 우리에게국가는없었습니다. 도망가고싶어서도움을요청한파출소는다시우리를포주에게도로돌려보냈습니다. 보건소에서는고통스럽고치욕스럽던성병검진을일주일에두번이나해야했고성병이없음에도토벌, 컨텍으로보건소에서페니실린주사를맞으며감옥같은생활을해야했습니다. 우리가아무리아파도보건소에서는주사한번약한번처방해주지않았습니다. 우리는국가가기지촌을형성하고내버려둔책임이있다고봅니다. 국가가형성했으면그안이어떻게돌아가는지봐야하고관여를했어야한다고생각합니다. 우리를애국자라칭송한국가는기지촌에서수시로일어나는미군폭력과악랄한포주에대한처벌을하지않았고인신매매의창구가되는직업소개소를단속하지않아많은여성들이기지촌으로팔려왔습니다. 판사님왜국가가나서서기지촌을더활발하게만들어야했었을까요? 우리가잘못한게무엇이기에내나라에서버림을받아야하나요? 안에서는달러벌이애국자로밖에서는손가락질받는그런삶을살아온우리의삶이너무나억울합니다. 우리가주장한돈천만원, 우리가겪은고통에비해절대위로가되지않습니다. 만약에우리가다시그때로돌아간다면나역시평범한사람들처럼결혼을하고자식을낳고그렇게떳떳하게살고싶습니다. 존경하는재판장님, 부디우리의억울함을들으시고바른판단을내려주시기를간곡히부탁드립니다. 28 꼭알리고싶다.
햇살할머니들과함께하며 유인경 ( 햇살사회복지회간사 ) 사람들이최근들어미군 위안부 라고부르기시작한, 우리햇살할머니들을제가처음만난것은 2010년 10월이었습니다. 사실저에게 미군위안부 는낯선존재들이아니었습니다. 어린시절을군산에서보낸터라주말에시내에나가면미군들과함께쇼핑을나온미군 위안부 들을자주볼수있었으니까요. 미군 위안부 를그여성들을두고마을사람들은 누구네이모가양공주가되었더라 ~ 고하였습니다. 미군 위안부 들이란실상저에게는누구네 이모 였던것입니다. 햇살사회복지회에서처음일하게되었을때머리가좀복잡했던것은그누구네 이모 들을미군 위안부 라고부르면서국가폭력에희생당한피해자들이라는부르고있었기때문이었습니다. 도대체이이모들을미군 위안부 라고부르면서국가폭력의희생자라고표현하는것이이해가되지않았기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의문이시간이얼마지나지않아서풀렸습니다. 2011년 기지촌할머니들의잃어버린생애사다시쓰기 _ 햇살할머니들의기억으로말하기Ⅱ 구술집제작프로젝트에참여하게된것이계기였습니다. 중앙대사회학과이나영교수님께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역사에관한강의를들었던것입니다. 아마도적지않은사람들이이나영교수의강의를듣기전의저처럼우리할머니들을 미군위안부 나 국가폭력의희생자 라고부르는게어색할거라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29
고생각합니다. 이어색함넘어가고자햇살사회복지회는 우리할머니들에대한인식개선 이라고부르며여러가지프로그램을진행했습니다. 오늘은제가햇살사회복지회에서할머니들과함께하는동안진행했던 미군위안부에관한인식개선 을위한연극과뮤지컬공연등의프로젝트와미군위안부국가배상소송에참여하며있었던이야기들을함께나누려고합니다. 저희는 2012년 ~2014 년동안 숙자이야기 라는연극공연을여러차례하였습니다. 이연극은할머니들이자신들의자전적이야기를털어놓고극으로만들어직접무대에올라공연하는즉흥연극이었습니다. 저도매주빠지지않고연습에참석해서이야기도하고장면을맞춰봐야하는터라연습전날이면할머니들께전화를드려야했습니다. 반은연습에꼭나오라고협박을하고, 반은아양을떨고구슬러가며연습에나오실수있도록했습니다. 연습이있는날은작은선물이라도나눠드리고식사라도준비해서할머니들을기쁘게해드려야하는숙제가있어서좀힘들었지만, 그마음을알아차리기라도했는지마지못해나오는척하는할머니들이아이들처럼귀엽기도했습니다. 연습시작초반에는자신의근황에대해서말한마디도못했던이모들이연습을거듭할수록한분한분가슴속에묻어두었던이야기를꺼내기시작했습니다. 긴세월안정리에서함께 이웃 으로살아왔던할머니들조차도마치새로나온아침드라마를보듯이서로가서로의이야기에귀기울였고, 그동안서로알지못하였던그사람의진짜속내에피울음을쏟아냈습니다. 엄마의학대와폭행을견디다못해집을나오게되었던이모, 친구따라아는집에놀러갔다가포주에게팔려가기지촌에들어왔던이모, 미군과사이에서태어난혼혈아를입양보내고힘들게지내왔던이모의사연들은햇살의안방흘러나와평택과서울의연극무대로까지흘러갔던것입니다. 할머니들은가슴에만묻어두었던자기이야기들을조명아래에서객석에앉은수백명의사람들을향해자신의목소리로말했습니다. 2016년부터 2017년까지우리할머니들은연극에서갈고닦은실력을바탕으로 쥬크박스뮤지컬 _ 그대있는곳까지 공연도하였습니다. 연극배우에서뮤지컬배우로변화된우리할머니들은연습이진행되는동안다시한번서로의사연들에혀를끌끌차기도하고, 사소한에피소드하나에도열살소녀들처럼박수를치며까르르웃어댔습니다. 각자털어놓은이야기가하나씩끝날때마다 아이그!... 니가그런 30 햇살할머니들과함께하며
일이있었구나! 하면서새롭게알게된이야기에또가슴이아파눈물을쏟기가부지기수였습니다. 뮤지컬장면중에서 TV를보다가잠든엄할머니가생일을맞아꿈속에찾아온아들에게미역국을먹여보내는장면이있었습니다. 엄할머니는이장면을연습할때마다미국으로입양보낸아들을그리워하며눈물을흘렸습니다. 연습을거듭하던어느날엄할머니의사연이소개된신문을봤다는사람을통해입양보낸아들의소식을듣게되었습니다. 입양보낸아들은어느덧 2명의자녀를둔가장이되어있었습니다. 사진속아들과손주들의모습을본할머니는 살아있다는것만으로도너무감사하다 며눈물을흘렸습니다. 정말연극내용이현실이된것같은기분마저들었습니다. 그뿐이아니었습니다. 뮤지컬의마지막장면에서 소나무 노래를합창할때할머니들이다함께힘을다해 소 ~ 나무야 ~ 소 ~ 나무야!~ 부를때 관객들도할머니들과한마음이되어, 정말하나가되어노래하는장이만들어지기도했습니다. 할머니들은노래했습니다. 이풍진세상을만났지만곰곰이생각하면이세상모든만사가춘몽과같다고말입니다. 세월은누구에게나공평하게흘러가지만, 동시대를살아온우리할머니들의얼룩지고굴곡진세월을나의세월과삶에올려놓고이해하고공감할수있을때비로소제가사람들이말하는 소통 과 이해 가무엇인지진정이해하게되는것은아닐까생각하게되었습니다. 2014년여러단체들과함께 한국내기지촌미군위안부국가배상청구소송 을시작하면서할머니들께소송에관해설명하고진술서를받는과정에서몇가지어려움들이있었던기억도납니다. 클럽에서일만했지미군을상대하지않았다는할머니, 소송이질게뻔한데창피하게그런이야기를할필요가없다는할머니등대부분의할머니들은소송에대해회의적이었습니다. 진술을하시더라도피해시기와장소등을정확히기억하지못하는분들도많았습니다. 심지어그동안여러번의구술자료집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31
을만들며진행했던인터뷰내용과전혀다른이야기를하는할머니들도많았습니다. 진술에서고향도달라지고기지촌에유입되었던나이도달라당황한적도많았습니다. 실제로기억을제대로하지못하는할머니들도계셨겠지만, 아마도본인스스로자기의가슴에주홍글씨를새겨달고있었을할머니들의이런행동들이도리어우리의가슴을먹먹하게만들었습니다. 그리고재판일정이잡히는날이면어김없이여러할머니들과함께서울지방법원을향해출발합니다. 할머니들은큰가방안에약봉지며물병등을챙겨넣고, 필수아이템인커다란모자와썬그라스를쓰고등장합니다. 아픈다리를절룩이며뒤뚱뒤뚱걸으며따라오시는분, 휠체어를이용하지않으면이동할수없는분등서울까지이동하기에는체력적으로부담이많았을텐데무엇이그녀들을이렇게간절하게만들었을까요. 그래도다행히대한민국법원은지난 2월 8일에있었던 한국내기지촌미군위안부국가배상청구소송항소재판 에서의미있는판결을내렸습니다. 서울고등법원재판부는 " 정부는기지촌내성매매방치및묵인을넘어적극적으로조장및정당화했다 " 며 1심에비해국가의책임을더욱크게인정하는판결을하였습니다. 이판결을들은할머니들은지난날들에대한보상이라도받은듯눈시울을붉히며기뻐하셨습니다. 요즘우리는미군위안부지원조례제정을위한연구모임, 시민강연회, 시민토론회등의활동도하고있습니다. 하루라도빨리미군위안부지원조례가제정되어할머니들의아픔과고통을치유하고, 지역사회의차별과편견을해소하여진정한인권회복과현실적인지원체계가마련되기를희망합니다. 〇햇살이걸어온길 2002년 햇살센터로개원 / 주1회모임시작 2003년 1주년기념및이전감사행사 (8/25)- 평택시팽성읍안정리 113-195 2004 년 정서함양프로그램사업. 햇살로수놓아요 및소식지 3호발행 2005년 제9차세계여성학대회에 안정리기지촌할머니들의상황 발표 2006년 아름다운시민상 민들레홀씨상 수상 ( 평택참여연대 ) 32 햇살할머니들과함께하며
아름다운노년, 인생그림새로그리기 프로젝트사업 ( 경기도사회복지공동모금회후원 ) 2007 년 이제라도밝은노후만들자 사업 ( 경기도여성발전기금지원 ) 2008 년 경기도기지촌여성노인실태조사 ( 경기도여성발전기금지원 ) 기지촌할머니들을위한상담서비스 ( 경기도여성발전기금지원 ) 기지촌할머니를위한정서함양프로그램 ( 경기도사회복지공동모금회지원 ) 2009 년기지촌할머니들을위한정서지원프로그램실시 ( 미국감리교선교부 ) 기지촌할머니들의주거대책을위한시민네트워크발대식및한여름밤의음악회개최, 7 주년행사 'Developing Home Sweet Home Award' 상수상 (Hillside UMC, 미국 ) 공동생활가정 햇살로수놓는집 개소 (3 층 6 가구다세대주택 / 대한주택공사 ) 2010 년정서안정을위한감성치유프로그램 - 햇살 Life"-( 평택시사회단체보조금지원 ) 2011 년 기지촌할머니들을위한효도나들이 -평화의휴식-( 경기도여성발전기금지원 ) 8주년행사및 여덟바퀴를돌아서 연극공연 (6.8)/ 햇살소식지 9호발행 (10.20) Dark Roots Of Lotus(' 기지촌여성노인들의기억으로말하기 책을영어로번역 ) 발행기지촌할머니들의정서함양프로그램 내안의나를찾아서 ( 평택시사회단체보조금 ) 기지촌할머니들의잃어버린생애사다시쓰기 ( 경기도여성발전기금지원 ) 9 주년행사 (6.1) / 햇살소식지 10 호발행 (10.20) 기지촌할머니들의기억으로말하기 Ⅱ 발행 (11.15) 2012 년할머니들이출연한 숙자이야기 연극공연 (7.10/ 10.25 팽성국제교류센터 ) 기지촌할머니들의트라우마치유프로그램 - 이제라도밝게살자! ( 평택시사회단체보조금 ) 트라우마치유를위한연극치료워크샵 - 밝고당당하게살자! ( 경기도사회복지공동모금회 ) 기지촌할머니들의삶에대한공감을위한연극공연 - 일곱집매 ( 경기도여성발전기금 ) 10 주년행사 (5.15) / 자료집 기지촌할머니들의기억으로말하기 Ⅲ 발행 (5.15) 햇살소식지 11 호발행 (10.20) 2013 년댄스 (Dance) 프로그램 - 앞으로, 뒤로, 터닝! ( 평택시사회단체보조금 ) 플레이백시어터 나와우리의연극만들기 ( 경기도여성발전기금 / 강사 : 노지향대표 ) 11 주년기념행사 ( 장소 : 팽성복지타운 / 5.14) 숙자이야기 연극공연 ( 제 15 회서울변방연극제개막작 / 구로아트밸리예술극장 ) 자료집 햇살할머니들의기억으로말하기 Ⅳ 발행 ( 현대자동차기금 / 10.20) 햇살소식지 12 호발행 (10.30) 기지촌여성지원법안마련을위한입법공청회 ( 국회 2 소회의실 / 12.16) 2014 년드라마테라피 (Drama therapy) 행복한나만들기 ( 평택시사회단체보조금 ) 숙자들의안정리바깥나들이 - 기지촌여성노인들의위풍당당프로그램과사회적인식개선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33
프로젝트 ( 경기도여성발전기금 ) 12 주년기념행사 (5 월 9 일오후 2 시 / 장소 : 평택평화센터 ) 기지촌할머니들의사진전 < 보통이름숙자 > (SPACE99/10.23~11.19) 연극 숙자이야기 공연 ( 서울여성플라자 1 층아트홀봄 /11.2) 햇살소식지 13호발행 (11.10) 햇살 언니들의하모니 : 썬샤인 (SUNSHINE) -기지촌할머니들, 노래로소통하 2015 년다. ( 경기도여성발전기금 ) 정서함양및신체활성화프로그램 - 해피투게더 (Happy Together) ( 평택시사회단체보조금 ) 소식지 햇살이야기 14호 발행 (10.10) 쥬크박스뮤지컬 - YOU ARE MY SUNSHINE! ( 경기도성평등기금기금 )_(10.31 2016 년공연 / 더기쁜아트홀 ) 햇살 14주년행사 (4.21/ 팽성복지타운 ) 기지촌할머니들의플레이백씨어터 - 나의이야기극장 ( 평택시여성발전기금 )_(7.1 공연 / 더기쁜아트홀 ) 소식지 햇살이야기 15호 발행 (11.20) 기지촌할머니들의트라우마치유프로그램 그래! 이제부터시작이야 ( 평택여 2017 년성발전기금 ) 기지촌여성노인들의쥬크박스뮤지컬 그대있는곳까지 ( 경기도성평등기금기금 )_(9.12 공연 / 서울여성프라자 ) 햇살 15주년행사 (5.18/ 팽성복지타운 ) 소식지 햇살이야기 16호 발행 (11.10) 2018년기지촌여성노인들의그림책만들기 그래도괜찮아! ( 경기도성평등기금 ) 기지촌여성노인들의감정표출작업 즐거움 UP, 속상함 DOWN ( 평택시여성발전기금 ) 햇살 16주년행사 (5.10/ 시온성교회벧엘관 ) 34 햇살할머니들과함께하며
저는햇살사회복지회회원입니다. ㅇㅇ숙 ( 햇살사회복지회. 소송원고 ) 안녕하세요? 저는햇살사회복지회회원입니다. 저는서울왕십리에서 2남 1녀중차녀로태어났습니다. 그당시삶은우리집뿐만아니라대부분너무가난해서끼니조차해결할수없을정도였습니다. 그래서저는항상빨리돈을벌어서부모님밥이라도제대로챙겨먹을수있게되는날을상상하곤했습니다. 그러던어느날제가 19살되던해였던것같습니다. 삼각지에서우연히만나친구집에놀러갔습니다. 가서보니그친구는미군과함께살고있었고제눈으로보기엔미제물건도가득하고침대도있는집이너무부럽기도했습니다. 항상가난에서벗어나가족들이굶지않고살수있는날을상상했던나는 미군과만나면저렇게잘살수도있구나 ~ 라는어리석은생각을했습니다. 친구가미군과지내면큰돈을벌수있다며일할곳을소개해주어서안정리에오게되었습니다. 처음엔돈을벌려고갔지만그곳에서는제가상상도못할일이벌어지고있는지옥이었습니다. 어떤사람이골목골목번쩍이는클럽들이밀집해있는곳에더피스라는간판이붙어있는건물 2층으로나를데리고갔습니다. 다닥다닥붙어있는방이수도없이많이있었고그중방하나를제방이라며쓰라고했습니다. 방엔침대하나거울하나가전부였습니다. 포주는저에게미군들을상대하라며화장도해주고이상하게화려한옷도입혀놓고미군들을보면그냥웃으라고했습니다.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35
너무무서워서집으로간다고했더니무섭게소리치며외출도하지못하게하고삼촌들에게저를잘감시하라고제앞에서얘기했습니다. 심지어화장실에갈때도감시를받았습니다. 이때부터미군들을상대하는일을시작했습니다. 아무리일을해도제가돌아오는돈은없었고심지어빚만늘었습니다. 밥값, 화장품값, 옷갑, 목욕비등이라며다공제하고제가필요한물건을얘기하면포주가사다주는방식으로살았습니다. 너무무서워서차마돈달라는말도못했습니다. 심지어클럽에내려가서미군들에게호객행위를잘하는지구석에서지켜보며감시도했습니다. 한순간도나만의시간은없었습니다. 그리고성병검진도일주일에두번씩이나받았습니다. 안정리시장골목에있는임시보건소에아가씨들을다깨워서데리고갔습니다. 이때도포주가보낸삼촌들이우리를감시하러따라다녔습니다. 안정리에있는팽성약국아저씨가검진을했습니다. 검진도검진이지만검사를받을때마다성추행도당했습니다. 우리같은사람이성추행을당했다고얘기를해도손가락질을당할까봐말도하지도못했습니다. 지금도생각하면너무분하고억울합니다. 그리고 1985년에도검진에서떨어졌다며평택보건소몽키하우스에일주일동안감금당한적도있습니다. 페니실린을맞고 4일이지나도안보내줘서말대답을했더니괘씸하다며 3일더가뒀다고했습니다. 지금생각해보면세상천지에북한도아니고말을안들었다며감금을했다는것은있을수도없는일이고믿을사람도없을것입니다. 저는 19살이후로안정리기지촌에서지금까지살고있습니다. 제가 42년동안이나이곳을떠나지못하는이유는다른사람들이제과거를알면저랑은상대를해주지않을것같아서다른곳으로갈엄두도못낸것입니다. 심지어동네경로당에도가지못하고지내고있습니다. 그나마숨을트고말할곳은햇살사회복지회밖에없습니다. 그래도이곳에는저랑같은처지에있는언니들과친구들이있으니까그나마위로가되었습니다. 우리는가슴에커다란돌덩어리를달고살아오고있습니다. 자기가슴에스스로주홍글씨를달고사는삶이어떤것인지는여러분들도상상하지못할것입니다. 36 저는햇살사회복지회회원입니다.
지난달이나영교수님의강연을듣고보니기지촌에서미군을상대하며일했던일은우리의선택도아니고우리의잘못도아니라는것을알았습니다. 알고보니정부에서짜놓은판에재수없게얻어걸려가지고달러벌이로이용당한것같아너무분하고억울합니다. 하지만더불어용기도났습니다. 이제는가만히앉아서당하지만않겠습니다. 우리의이야기를하고정부의잘못도인정하라고소리칠것입니다. 우리의소송을위해서함께해주시는많은분들이있다는것은알고있습니다. 우리언니들과친구들을대표해서제가감사하다는인사는꼭드리고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37
기지촌 미군위안부 판결의의미와과제 하주희 (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 ) 1. 들어가며 - 기지촌 미군위안부 국가배상청구소송제기의경위 2014. 6. 25. 기지촌미군 위안부 122명 3) 은대한민국을상대로손해배상소송을제기했다. 1992년 윤금이사건 을계기로기지촌여성인권에대한사회적관심이환기되고공론화된이후로꾸준히모든노력을경주해왔던중요한결과중의하나였다. 원고들과고락을함께해온여러단체들은이미많은진술과자료를확보하고국가가원고들의 삶 에얼마나불법적으로개입하였는지를알리기위해많은노력을해왔었지만, 법률가들이이를습득하고이해하는데에는시간이걸렸다. 기지촌여성들의국가배상청구에관한법리검토의견서를최초로작성한것이 2013. 3. 경이었고, 원고들의소송결심후민변여성인권위원회와미군문제연구위원회위원들을중심으로약 20여명의광범위한대리인단을구성한후에도소를제기하기까지 1년여의시간이걸렸다. 단체들과의간담회, 전문가들의연구문헌검토, 원고들의진술청취, 영상을포함한 3) 두레방, 새움터, 쉬고 ( 파주 ), 햇살사회복지회등의단체들이주축이되었다. 현재대법원계류중인 이사건의원고는 115 명이다. 38 기지촌 미군위안부 판결의의미와과제
각종자료를탐독한후에야기지촌성매매에대한광범한국가의개입과관리의증거들을확인할수있었고, 법률상금지된행위인성매매를국가가묵인하는것을넘어조장 권유심지어미군을위한 알선 행위까지한것이아닌가라는의혹이충분히불법행위가된다는확신을얻게되었다. 아래에서는소송의진행과정과현재까지판결의내용, 앞으로의과제에대해서발표할예정인데, 소송의진행과정에대해서비교적상세하게설명한것은이사건에관한문제의식의발전과정을전하기위해서이므로참고하면족할것이고, 주로는판결의내용과향후과제를위주로살펴보면될것이다. 2. 소송의진행과정 2014. 6. 25. 에제기된소송은최근 2018. 2. 28. 에이르러항소심판결이선고되었고, 현재대법원에계류중이다. 항소심판결이나기까지 16번의변론기일이열렸고, 원고가제출한서증은 142호증의 9까지 547개에이르고, 여러명의전문가증인이함께해주었다. 법정에서는원고들의목소리를빠짐없이재판부에전달하기위해노력하는과정이었고, 되도록많은것을있는그대로드러내어여러사람들에게알려지길바랐다. 1) 1 심진행과정 2014. 6. 25. 소제기 ( 원고 : 기지촌미군위안부 122 명, 피고 : 대한민국 ) 2014. 12. 19. 제 1 차변론기일 : 소장진술및답변내용 * 소장진술요약우선원고들이생애를정리하며이사건소송에이르게된그무게를우리법원이함께해주길간절히바라면서이사건소송의청구원인에대해서말씀드리겠습니다. 이사건원고들은 1960년대부터주한미군기지주변소위 기지촌 에서성매매여성으로살아온경험이있는자들입니다. 정부는공식적으로이들을 위안부 라고기록하고있습니다. 피고대한민국은 1961. 제정공포된윤락행위방지법에의해성매매가전면금지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39
되었음에도불구하고기지촌을형성관리하여사실상성매매를방조권유조장하기까지함으로써원고들의인권을침해하였습니다. 피고는 (1) 윤락행위방지법에성매매와관련한모든행위, 즉권유, 유인, 강요, 조장, 장소제공을금지하고있음에도불구하고성매매가가능한 특정지역 을지정하고, 미군을상대로한성매매가이루어지고있다는사실을알면서도대통령산하에 기지촌정화위원회 를만들어미군기지주변의성매매를권유, 조장하였습니다. (2) 또한피고는기지촌여성들을모두등록하게하고, 특별한법적근거없이모든기지촌여성에게성병검진을강제하고, 역시특별한법적근거없이성병감염자로의심되거나성병감염자를성병관리소에감금하여약물을투여하기도하였습니다. (3) 피고는또한기지촌여성들을상대로정기적으로 애국교육 을실시하여 달러를벌어들이는여러분들은진정한애국자이며, 나중에국가가취업보장, 노후보장, 전용아파트제공등의방법으로보상할것이라며 직접적으로기지촌성매매를독려하기까지하였습니다. 이런기지촌여성들의관리에는국가혹은지방자치단체의관리하에한미친선협의회나자매회같은민간조직이동원되기도하였습니다. (4) 끝으로피고는기지촌내에서불법적인성매매뿐만아니라, 포주에의한감금및화대착취, 미군에의한각종범죄및미군에의한성병단속등불법행위가벌어지고있다는사실을알면서도이에대해아무런조치를취하지않았습니다. 피고의위와같은행위가위법함은피고스스로 1962년조약제933호로발효한인신매매금지및타인의매춘행위에의한착취금지에관한협약을통해서도확인할수있습니다. 위협약은체약당사국에게 성매매목적의일체의행위를처벌하여야할의무를부과하고있을뿐만아니라, 성매매행위에종사하거나또는종사한다는요의를받는자들이특별등록, 특별문서의소유또는감독과통고에관한특별한요건에따르도록하는취지를규정한모든현존법규또는행정규정을폐지하기위하여필요한모든조치를취할 의무도부과하고있습니다. 따라서어느모로보더라도피고의기지촌형성관리성매매권유조장은위법함이분명하고이로인하여원고들에게정신적고통을주었으므로손해를배상할의무가있다고할것입니다. 끝으로다시한번원고들이낸용기의무게를감안하여, 새롭게마주하게된역사적사실에대해서직시하며원고들의청구를인용하여주시기바랍니다. 40 기지촌 미군위안부 판결의의미와과제
2015. 1. 30. 2 차변론기일 * 원고들진술 : 이사건특수성에비추어재판시반드시고려되어야할사항에대한진술 - 성매매금지와권유, 조장의분리정책, 한미친선협의회, 애국교육등조직적관리, 구청경찰공무원의위법행위, 페니실린과다투약등의모든기지촌위안부들의공통적경험 - 개별공무원의불법행위책임에한정되는것이아니라, 기지촌관리에관한불법정책을수립, 집행관여총체적불법행위에대한책임의특수성반영되어야 - 피고는원고들주장의주요사실에대한답변을누락하고있음, 한미친선협의회등의존재, 운영에대해서입장밝혀야할것 - 기지촌위안부용어사용의중요성 1960년대이후사용했다는피고의주장부당전염병예방법령상위안부 70년대후반까지 ' 위안부 ', ' 유엔군을상대하고 ' 표현된각종증거제시설명 - 성매매단속을하지않은부작위에대한주장이아니라, 적극적으로미군상대성매매를권유, 조장하며기지촌관리정책을집행한작위에대한책임주장하는것임 - 관세청의윤락행위대가취득품관리문서등증거제시하며설명 * 법무부, 보건복지부, 국토교통부, 여성가족부, 각지방자치단체및보건소에사실조회신청및증인신청 * 피고진술 - 국가가단체를통해관리를했다는사실을인정할수없고, 자료를직접보유하고있지않다 - 현재원고들을어떻게표현하고지칭할것인가의문제로위안부부당기지촌여성이라고표현해야한다. 일본군위안부와구별된다. - 소멸시효완성 2015. 5. 29. 3차변론기일 : 각기관에대한사실조회결과고지. 대부분보관하고있는자료가없다는취지 2015. 7. 24. 4차변론기일 : 증인신청 2015. 9. 11. 5차변론기일 : 증인김연자 ( 아메리카타운왕언니죽기오분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41
전까지악을쓰다 의저자 ) 2016. 1. 22. 6 차변론기일 : 이나영 ( 중앙대학교사회학과교수 ) 증인신문 2016. 3. 18. 7차변론기일 : 문정주 ( 서울대학교의과대학의료관리학겸임교수, 의정부보건소의무사무관근무 ) 증인신문성병균이발견되면 벤자틴페니실린 이라는약을처방하였는데, 이약은 1회며칠동안이나근육주사로투여를해야하고, 저렴하고효력이강력해서각광을받기는했지만, 갖은쇼크의원인이되는부작용도있는약이었다. ( 본인이진료를하던 ) 그때도이미 42 기지촌 미군위안부 판결의의미와과제
쇼크사때문에의사들로서는회피하는약이었는데그약을썼습니다. 2016. 5. 13. 8차변론기일 : 조영애 ( 파주현장사진연구소, 다큐멘터리준비중 ) 증인신문, 당시성병검진및성병관리소에근무했던공무원들에대한촬영동영상에대한검증정부에서지정한성병진료소와치료를위한성병관리소가있었다는사실, 성병검진은미군을상대로성매매를하는여성들위주로이루어졌다는점, 당시기지촌성매매여성들을위안부라고부르며별도의대장을두어관리했다는사실확인 2016. 7. 8. 9차변론기일 : 당사자본인신문꼭말하고싶은게있었습니다. 우린태어난이나라에서버려졌습니다. 우리나라가개입하여만든기지촌거기서우리는폭력과갈취이용만당했습니다. 아무도우리입장을생각해주지않았습니다. 국가는기지촌으로들어가게만든직업소개소와포주를다묵인해주었습니다. 거기서우리가번돈은상상이상일것입니다몸을버렸으면돈이라도벌었어야죠. 돈버는사람은하나도없고포주만돈을버는이런구조를만든우리나라가우리를이용해먹고버린겁니다. 사람들은우리가원해서그곳에갔다고합니다. 하지만우리는직업소개소에속아기지촌으로빚을지고가게되었습니다. 빚은돈을벌수록이상하게더오르게되고십대임에도불구하고아무도도와주는어른도없었습니다. 하루에상대하는미군은하루거르지않고 5명이상입니다. 이런것이너무무섭고싫어서도망가면찾아잡아오고때리고, 도와달라고이야기하면포주한테일러서빚을올려다른곳으로팔려가게되었습니다. 판사님이런상황에서제가나올수있었을까요? 억울합니다. 옛날에박정희경제개발했다고그러지만우리가애국자소리들으면서달러엄청많이벌어들인거예요. 그때는아파트해준다는말도들었습니다. 일본위안부있는데국가에서관리해준다고들었습니다. 우리나라는미성년자라고집에보내는것도없고나라에서다버린거잖아요그럼책임져야죠. 군산타운백태하라는사람은달러를많이벌었다고상 3번탔다면서요그달러누가다벌어드렸는데요? 아가씨들이다벌어드린건데아파죽어가도의사하나안내려다보고오로지성병검진만했습니다. 성병검진은미군을위해서미군요청의해서해준거지우리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43
를위해해준건아니잖아요. 나라의무관심에우리의몸은병들고돈도못벌고이용만당했습니다. 그러니까나라가 책임져야죠. 이말을하고싶었습니다. 차변론기일 당사자본인신문 44 기지촌 미군위안부 판결의의미와과제
2016. 11. 18. 11 차변론기일 : 최종의견진술 2017. 1. 20. 1 심판결선고 2) 항소심진행과정 (5 회변론 ) 2017. 6. 15. 항소심첫변론기일 : 쌍방항소 / 항소이유서진술 원고의항소이유 : 기지촌조성및관리 운영책임, 단속면제및불법행위방치책임, 성 매매정당화 조장책임, 조직적 폭력적성병관리, 위자료과소산정과피해원고의누락 2017. 7. 20. 2 회변론기일 : 증인신청 2017. 9. 31. 3 회변론기일 : 박정미교수 ( 충북대사회학과 ) 증인신문 2017. 10. 26. 4 회변론기일 : 추적 60 분 < 국가란무엇인가 > 동영상검증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45
2017. 12. 21. 5 회변론기일 : 항소심최종의견진술 2018. 2. 8. 항소심판결선고 3) 상고심 (3 심 ) 진행중 쌍방상고 현재쌍방상고이유서및답변서제출후대법원에서법리검토중 3. 기지촌미군위안부국가배상청구소송판결의내용과의미 1) 1심판결의내용 1심법원은 1977. 8. 19. 구전염병예방법시행규칙시행이전에성병치료소인낙검자수용소등에격리된적이있던여성들에대한손해배상청구의일부를인용하였다 (2014가합 544994). 구 전염병예방법 제 2조제1항은 제3종전염병 을 결핵, 성병, 라병 으로규정하고있으나, 격리수용하여야할환자 에관하여같은법제29조제1항은 제1종전염병환자와라병환자는전염병원, 격리병사, 격리소, 요양소혹은특별시장또는시, 읍, 면장이지정한장소에격리수용되어치료를받아야한다 라고만규정하고있었다. 그이외에다른이들에대한격리수용치료의근거가없었던것이다. 즉구 전염병예방법 시행규칙이제정 시행된 1977. 8. 19. 까지는성병환자를격리수용할법적근거가없었으므로, 기지촌위안부들을낙검자수용소등에격리수용하여치료한행위는위법하다는판단이었다. 이는헌법이신체의구금과수용, 자유에관하여국민의기본적권리를보장하고있는데에근거한것이었다. 이판결은원고들의나머지주장, 구조적으로미군의요청에의하여국가가기지촌에서의성매매를조장 권유하였다는점을받아들이지는않았으나, 기지촌위안부들의존재와그들에대한인권침해사실을최초로공식적으로확인한것이라매우의미가컸다. 특히피고의소멸시효주장을권리남용으로배척하면서한판단들은이사건의본질에관하여매우정확하게설시하고있기도했다. 2) 2 심판결의내용 46 기지촌 미군위안부 판결의의미와과제
항소심판결의요지항소심법원은원고들의주장을 4가지로정리하여판단하였다. 원고들의주장은 불법적인기지촌조성 관리 운영행위 ( 제1주장 ), 불법행위단속면제및불법행위방치 ( 제2주장 ), 조직적 폭력적성병관리 ( 제3주장 ), 애국교육 등을통한성매매정당화 조장행위 ( 제4주장 ) 로인하여국가가원고들에게손해배상책임을져야한다는것이었는데, 법원은제1 4 주장에관하여 국가의전반적인보호의무 를위반하였다는주장은배척하였지만, 성매매의정당화 조장행위 주장을받아들여피고의위법성을인정하였고, 제2주장은전부배척하였으며, 제3주장에관하여는 1977. 8. 19. 개정전염병예방법시행규칙이전강제격리수용한행위, 1977. 8. 19. 이후 토벌 이나 컨택 등과같이의사의진단없이강제격리수용한행위에대하여위법하다고보았다. 국가의위법성인정 국가의성매매정당화 조장 기지촌운영 관리의구체적목적과성매매조장 피고가단지기지촌내위안부성매매를소극적으로방치 묵인하거나최소한도의관리를한것에불과하였다고볼수없고 적극적 능동적으로 외국군의사기진작 이나 외화획들 을위해외국군을상대로한기지촌위안부들의성매매행위자체또는성매매영업시설을개선하고자한것 작성주체가다양한공문서들을주된근거로판단 한국전쟁중이던 년경보건부작성 청소및접객영업위생사무취급요령위생사무추가지시에관한건 위안부 를 땐사 나 접객부 와구별하여 위안소에서외군을상대로하는위안접객을업으로하는부녀자 로정의 이영업은 동란을계기로전쟁수행에수반된특수영업형태이며의법적공인된사업이안이라는것을충분히고려하여취급할것 이라고기재하여적법성이담보될수없다는점을피고스스로인식하고있었음 경기도가시행한 유엔군간이특수음직점영업허가사무취급세부기준수립 유동하는위안부의고정수용을전제로업소장소의위치나종업원수제한 영업시설개선등에관한논의 공문에 현지주둔유엔군에대한위안또는사기양양면을고려 한다는점 외화획득과국가예산절약 유엔군에게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47
보다나은휴식처를제공할수있게되어그들의사기를진작시키고혁명후한국에대한인식을더욱새롭게할수있음 이라는목표명시 용산경찰서장 미군접객업에종사하는여러분에게 지금까지여러분이미군에게최선의서비스를하고있는줄믿습니다만 본의아니게일부 에게불쾌감을조장한일도있었을것입니다 그러한과거의일들은반성하고시정합시다 그러한사소한사건도여러분의적들에게유리하게이용된다는것을아셔야되겠습니다 또한이점에서볼때 여러분은무의식적으로적들을돕고있으며 이로써여러분 국내안보는약화된다는것도아셔야되겠습니다 미군은여러분을도와서대한민국을북한의침략과파괴행위로부터방어하기위해한국에와있다는것을아십시오 여러분의사업과여러분의국가의안전을위해서도 우리와함께당면문제를해결하도록협력해주시기바랍니다 춘천시 한미친선협의회조례공포 공동관심사 로 주한미군을고객으로하는접객업소의서비스개선 내외시설개선 위생감독 성병보균자및업태부의선도 등열거 애국교육 의실시와성매매정당화 조장 교육의내용에위안부들을 외화를벌어들이는애국자 라고치켜세우며성병검진의중요성강조 가랑이를벌리지마라 등통상포주가지시할만한사항들을담당공무원들이위안부를상대로직접교육 미군을주로상대하는거니까미군을의식해야죠 미군한테서비스를잘해라 교육은어느홀이면홀을정해놓고거기로집합을시켰어 시간대를맞춰서그렇게집합을시키죠 파주시교육담당공무원 위법한절차에따른성병치료와성매매조장기지촌의운영 관리를위해필연적으로수반되는위안부들의성병치료를행함에있어법령에별다른근거가없음에도불구하고의사등의료전문가에의한진단등의합리적절차도거치지않은채 토벌 컨택 등의이름아래원고들을곧바로 낙검자수용소 등의강제수용시설에격리수용하거나신체적부작용이클수있는페니실린을무차별적으로투여하는등의방법으로원고들의인격권 48 기지촌 미군위안부 판결의의미와과제
과신체의자유등기본권을직접적으로침해 국가의위법성인정 조직적 폭력적성병관리 이전격리수용치료행위 구 전영병예방법 시행규칙시행이전에이루어진격리수용행위는법적근거가아예존재하지않았으므로 그전에위안부들을강제로낙검자수용소등에격리수용하여치료한행위는법령의근거가없는행위에해당하므로위법 이후격리수용치료행위 의사등의료전문가의진단없이성병의심자에불과한위안부들을곧바로작검자수용소등에격리한경우 즉 토벌 이라이름붙여진합동단속당시보건증 패스 을소지하지않았거나 이를소지하였더라도정기성병검진도장이찍혀있지않다는이유만으로대상자를곧바로격리수용한행위 외국군은성병을옮긴성매매상대방으로지목하였다는이유만으로의료진단없이대상자를격리수용한 컨택 에해당하는행위의경우여전히법령상근거없이행해진강제수용내지사실상의구금행위로서위법 원고들의손해발생여부및상당인과관계에대한판단피고는원고들이피고가설치한특정지역내에서성매매에종사하였다는것만으로피고의행위가위법한것은아니라고주장하였으나법원은위법성의핵심은피고가 적극적 능동적으로 성매매행위를조장 정당화하여원고들의인격권과인간의존엄성을침해하였다는점에위법이핵심이있다는점을강조하면서원고들에대한손해배상책임을인정하였다 소멸시효에대한판단 국가가소멸시효완성을주장하는것은권리남용 국민이담당공무원등의성매매정당화 조장이나강제적인격리수용에따른손해배상청구권을가짐에도그권리행사기회를국가에의하여사실상차단당한채장기간시일이경과 이러한사실상태에서국가입장에서계속하여손해배상청구권이행사되지않을것이라는믿음은보호가치없는믿음 강제격리수용치료를받은때로부터상당한기간이경과한후에도상당기간지속되었던권위주의통치시대와그당시미군위안부등에대해폐쇄적이었던국민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49
정서 남성중심적이고가부장적으로형성되었던사회문화 다시되풀이되어서는안될중대한인권침해 당시원고들의나이 경험 교육수준 시대상황에비추어보면원고들이위법성을쉽게인식하기어렵고 채무자인국가가원고들의권리행사를현저히곤란하게만든것이므로이는원고들이손해배상청구를할수없는객관적장애사유가되었음 3) 판결의의미 기지촌미군위안부에대한국가의관여를드러내는첫번째과정누구나알고있었으나 아무도말하지않았던아픈현대사의단면 한때산업역군으로치켜세우던세상은이들을등졌고 원고들은아직기지촌에남아외로운삶 재판과정을통해처음으로공식화되고법의영역으로소환 원고들이직접진술하고 이를법원이중요한입증방법으로인정대부분고령인원고들이생의마지막순간에모든것을털어놓은 매우어려운결단의결과라는점과각진술이개별적임에도피해내역은당시사회의 구조적 모습을반영한매우유사한양태라는점을고려하여법원이중요한사실인정의자료로인정 보편적이고국제적인인권가치의확인과국가의책임규명 인신매매금지및타인의매춘행위에의한착취금지에관한협약 이규정한체약당사국의의무를재확인하면서 이를위반한국가의불법행위에대해소멸시효항변을배척하면서반드시책임져야하는일임을확인 4. 향후의과제 1) 입법, 조례를통한진실규명및지원의제도화 위판결에도불구하고아직기지촌위안부문제와관련하여서는밝혀야할진실이 50 기지촌 미군위안부 판결의의미와과제
여전히많이남아있다. 사건을진행하는과정에서가장큰문제는모든위안부들을등록하게하였다는사실이분명하였음에도불구하고 등록부 를비롯하여그어떤기관의공식적인자료협조를얻을수없었다는점이다. 또한최근미측에서공개된한미합동위원회회의록등은미군과한국정부가여성을 공급 하기위하여어떤노력을해왔는지적나라하게드러나있는데, 이에대한충분한분석과검토도함께이루어져야그책임의규명이입체적으로가능할것으로보인다. 위와같이이사건의진상을규명하는데필요한것들은원고들개인에게맡겨둘수는없다는것을의미하고관련기관의협조가필요한일이므로입법을통해서해결이가능할것이다. 기지촌위안부들은고령이고가족들로부터도지원을받기어려운형편이어서생활상의어려움또한극심하다. 실질적지원이이루어지기위한보다시급한조치가필요한데, 경기도기지촌외국인여성성매매피해실태분석 4) 자료에따르면 1964년도에등록된성매매여성은총 19,986명이며, 1962년부터 1968년동안기지촌의보건소에등록된여성의수는동두천 7,000명, 의정부 3,200명등만여명정도라고하니이를구제할필요성도충분해보인다. 이문제가역사와공동체의문제라는점을공유하는차원에서도이문제를입법 제도적으로해결하여야하는필요성을더한다. 결국진상규명과실질적지원을시급히가능하게하는입법을위해지혜를모으는과정이필요하다. 현재 20대국회에서유승희의원등 18인이 미군위안부문제에대한진상규명과명예회복및지원등에관한법률안 을발의해둔상태이고, 경기도기지촌여성지원등에관한조례 가입법예고까지되었으나통과되지는못한상태이다. 2) 성매수자 미군의책임규명성매매는기본적으로 대향범 이다. 현재단계에서 ( 비록대법원에서확정되기전이지만, 그결과가어떠하든역사적진실은변하지않을것이다 ) 우리는성매매피해자가있음을확인하였고, 성매매매개행위를 적극적 능동적 으로한자가있음도확인하였다. 그렇다면논리필연적으로성을매수한자가가당연히존재할텐데, 지금까지성명불상의성구매자들에대해서는따로언급하지는않았다. 그러나이미제출된자 4) 안태윤, ( 재 )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 2012. 4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51
료와이번소송을통해서밝혀진사실에의하더라도혹시성을매수한자들도 ' 조직적이거나 그렇지않다면적어도개인의성매매행위를 조장 한것이아닌가하는의심을하기에충분한사실관계가존재한다. 더글라스그윈 ( 전의정부캠프스탠리소속중위 ) 은자신이한국에파견되자마자브리핑이있었는데 그들이말하는태도만봐도우리가매춘부들과성행위를할것이라는것을짐작할수있다 고말했다. 5) 실제로미군당국은병사들에게콘돔을무료로지급했고, 콘돔을소지않으면밖으로나갈수없도록하기도했다. 제임스해서웨이 ( 미8군예방의학장교 ) 는 1971년육군성장군이한국을방문했는데성병율이비정상적으로너무높다고우려했다. 사령부에서는이를심각하게받아들였고, 성병을줄이는작업을시작하라고지시했다. 그것은사령관지시사항이었다 라고말한바있는데 6), 실제로 1971. 11. 19. 한미합동위원회민군관계소위원회에서는 병이완치될때까지성병을가진자들을격리및필요한치료를보장하도록할것 을건의했다. 당시까지완성되지못했던건강과위생관련패널의첫번째보고서는 1971. 11. 24. 작성되었는데, 당시미군은 Registering women, Enforcing regular VD checks, Isolating women infected with VD 을요청하였다. 7) 즉, 여성들을등록시켜라. 정기적인성병검사를강화하라. 감염된여성을격리시켜라 는것은모두미군의요청에의한것이었다. 1972. 7. 31. 민군관계소위원회의보고서에의하면주한미군사령부의운용우선계획 (a priority command program) 에의하여, 한국정부는각접대부 (entertainer) 들의보건증사본, 성병진료소명단까지주한미군측에제공하기도하였다. 8) 또한당시국내에서성병을치료할때사용했던페니실린양은 120만단위정도였는데, 미군은 480만단위에서 600만단위를권장했다 (1973. 3. 22. 민군관계소위원회회의록 ). 위에서언급된예방의학과장이었던제임스해서웨이는 1974년에이르러서는각지역의성병진료소를방문하여보고서를작성한바있는데, 보고서에의하면 비록소수일지라도실제로페니실린알러지가있 다는점을기재하고있음에도불구하 5) 2003. 2. 9. 방영 MBC 특별기획 이제는말할수있다 61회, 섹스동매, 기지촌정화운동 인터뷰 6) 이제는말할수있다. 인터뷰 7) 갑제97 호증 8) 갑제103 호증 52 기지촌 미군위안부 판결의의미와과제
고한국보건당국자들이페니실린양을과소하게사용하는것에대해 480만단위 (unit) 를사용할것을지도하기도했다. 9) 이에더하여기지촌에서의한국정부의조직적 폭력적성병관리는 2차대전기미군의성매매정책과관련이있다는연구결과도확인된다. 10) 즉 조직적 일지도모르는미군의성구매, 조직적 폭력적성병관리의지시자혹은적어도협력자로서의미군에대한책임규명은역사적진실과묵과할수없는중대한인권침해의재발방지를위해필수적으로규명되어야할것이다. 인신매매금지협약의체약국인미국이자국에서금지된행위를타국에서하도록하는것역시용납될수없는행위이다. 결국기지촌에서일어났던원고들과미군 위안부 들에대한인권침해는 한국정부와미국정부가손잡고시스템을만든것 일수밖에없다. 그책임규명의방식으로어떤경로를택할지와관련하여오늘의자리는너무중요한자리가될것이다. 5. 나가며오늘의심포지움이기지촌미군위안부운동에있어서더나아간과제를모색하는중요한자리가될것임을믿어의심치않는다. 매우오랜세월동안기지촌미군위안부들과함께생활하며, 이야기를경청하고, 문제의본질을모색하고, 연구해온모든분들에게고마움의인사를전한다. 9) 갑제110 호증 10) 박정미 ( 충북대 ), 건강한병사만들기 : 주한미군성병통제의젠더 / 생명정치, 가네코아유무 ( 메이지대 ), 미군의성매매정책과젠더및섹슈얼리티의역사적전개 :19세기부터제2차세계대전까지 // 일본군 위안부연구회 한일공동워크숍, 2018. 2. 28.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53
건강한병사 ( 와 ' 위안부 ') 만들기 : 주한미군성병통제의젠더 / 생명정치 Making Healthy Soldiers (and Prostitutes): The Gender/Bio Politics of STD Control by U.S. Forces in South Korea 박정미 ( 충북대학교사회학과 ) (** This is an incomplete manuscript. Please DO NOT cite or circulate it without the author s permission.) Introduction A booklet entitled Korea: Hills, Rice Patties, and Whores starts with the following preface: This story basically tells about, how much United States Military Property that was given away by U.S. Army Personnel, for the payment of prostitution. This activity took place during their 13 month tour of duty in Korea. ( ) At least 80% of the men, who were stationed in Country of South Korea, they were involved in some type of solicitation of illegal prostitution, with 54 건강한병사 ( 와 ' 위안부 ') 만들기 : 주한미군성병통제의젠더 / 생명정치
stolen property. All of these incidents took place after August 12, 1954, when the Korean War ended. As its title and preface show, this booklet describes an American soldier s sexual adventures during his stay in South Korea. The author is Mac E. Woods, who was 17 years old when dispatched to Korea in 1959. As the typo in the title rice patties and the wrong historic fact in the preface Korean hostilities concluded with the signing of an armistice on July 27, 1953 imply, it appears that he was not highly educated and published this 14-page booklet without someone else s editing. It is unclear when it was published, how many copies were circulated, and how it was finally received by the Library of Congress. However, one thing is clear: it reveals sexual encounters between American soldiers and Korean prostitutes amazingly frankly from the perspective of the ranks without any censorship. Did the U.S. military authorities in Korea know about this underworld of prostitution patronized by their soldiers? From Woods testimony and other similar records, it is hard to imagine that they did not notice it. What then was the policy towards this phenomenon and what impact did it have on the soldiers and prostitutes? To answer these questions, this paper investigates the history of prostitution policy of the U.S. military in Korea. It pays particular attention to the control of sexually transmitted diseases, since the U.S. military in Korea took prostitution seriously mainly because it was considered a source of STDs, among the most prevalent illnesses to affect servicemen. The Interlude of Confusion To analyze the STD control policy of the U.S. military in Korea, it is necessary first to trace the policy back to the first part of the 20 th century.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55
In World War I, the U.S. forces attempted to pose themselves as the cleanest army in the world. The main means of achieving this self-image was to prohibit prostitution entirely and emphasize continence (abstinence) to the soldiers (Brandt, 1987). With the outbreak of World War II, the U.S. government reinforced this policy by enacting in 1941 the May Act, a federal law that prohibits prostitution around military and naval establishments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42: 583). Also during WWII, according to one official history of the U.S. Army, there were changes in the basic philosophy regarding STD control: ending punishment of infected servicemen; an increased emphasis on sex hygiene education; and an extensive contact-tracing program to cure and rehabilitate infected civilians (US Army Medical Department, 1960: 139-140). These changes had gender-specific effects. On the one hand, the U.S. military permitted male soldiers sexual freedom provided they did not contract STDs, in particular, by issuing free condoms. On the other hand, civilian women who had sex with servicemen were located, examined, and if proven to be infected, forcibly quarantined until cured (Parascandola, 2008; Park JM, 2017). When the 24 th Corps occupied South Koreaon September 8,1945,, it deployed these policies in the battle against prostitution and STDs. At first, it was confident about their victory. The 1945 annual report of the Office of Surgeon said, due to placing all brothels Off Limits, excellent MP work, and an extensive and thorough educational program, we had had a commendable venereal disease rate (HQ 24 th Corps, January 29, 1946). Prophylactic devices were also distributed widely, sometimes even forcibly (HQ USAFIK, August 29, 1946). However, the initial optimism soon faded. The STD rate of the 24 th Corps rose from 22 per 1,000 troops in 1945 to 102 in 1946 (HQ 24 th Corps, March 11, 1947). While the military authorities analyzed this rapid increase in STDs from various angles, their explanations can 56 건강한병사 ( 와 ' 위안부 ') 만들기 : 주한미군성병통제의젠더 / 생명정치
ultimately be reduced to one reason: difficulty in controlling both their servicemen and Korean prostitutes, who were regarded as the main source of STDs. In a letter to his subordinate commanders, John R. Hodge, the Commanding General of USAFIK deplored his soldiers conduct (HQ USAFIK, August 13, 1947): I have talked to several soldiers on the subject of venereal disease and drunkenness which are closely allied. Some of the answers are startling. Too many of them take the line why should I make any effort to keep myself clean and holy. ( ) They sleepwalk through the day so they can get drunk again at night. They associate loosely with Korean women or any others they can get their hands on. Military standards deteriorated, off limits regulations were disregarded, and patronizing prostitutes prevailed. In another letter, Hodge said his soldiers act as though Koreans were a conquered nation rather than a liberated people (HQ 24 th Corps, May 3, 1946; HQ USAFIK, November 6, 1946). Sexual indulgence was an expression of such a domineering attitude. Professor Seungsook Moon concludes that American soldiers in Korea under the occupation were similar to Europeans in their colonies, in that both of them regarded sexual access to occupied women as their entitlement (Moon, 2010: 43). The U.S. military was not able to establish control over Korean women either. The military authorities thought that the women who consorted with their soldiers were mostly, if not all, prostitutes (HQ 24 th Corps, March11, 1947). Interestingly, they shared this perspective with Japanese colonizers, who considered STDs the demimonde disease or the disease of prostitutes. The colonial government registered prostitutes and other women deemed liable to render sexual services kisaeng (traditional female [ 심포지엄 ] 한국내기지촌미군 ' 위안부 ', 역사와소송의의미 57
entertainers), barmaids, and waitresses. These women were confined to red light districts and forced to submit to regular STD testing (Park JA, 2009; Park JM, 2011). This colonial regulation was contrary to the U.S. government policy to prohibit prostitution. USAFIK initially followed its government by breaking up or declaring brothels off limits and rounding up prostitutes with the help of Korean police officers. However, the Surgeon s office was cautious about this practice, arguing it rendered more difficult the problem of following up contacts. Even when Korean contacts were located, it was difficult to treat them properly due to lack of adequate facilities. Apprehended prostitutes were usually given inadequate treatment by prison physicians rather than being referred to public health clinics (HQ 24 th Corps, March 11, 1947; HQUSAFIK, 1947). To overcome these problems, the U.S. military in Korea attempted to reinforce control over Korean women. In 1946, the U.S. military government enacted an ordinance to punish Korean women who had STDs for engaging in or soliciting sexual intercourse with any member of the occupying forces. If an infected woman merely solicited, even though she did not actually provide sexual services, she could be arrested. While the Korean women s movement strongly demanded repeal of licensed prostitution, the military government refused to do so (Park JM, forthcoming). Instead, it continued regular STD testing of entertainment girls, and established free clinics in major cities to treat infected Koreans (HQ USAMGIK, 1947; July 27, 1948). Control over American troops was also strengthened. In late 1947, all major commands started to establish VD indoctrination teams to inculcate their soldiers with sex hygiene and continence, as well as VD control councils to discuss effective policies to suppress STDs. The result of every VD council meeting was reported to the headquarters of USAFIK. On November 4, 1947, a VD Rehabilitation Training Center was 58 건강한병사 ( 와 ' 위안부 ') 만들기 : 주한미군성병통제의젠더 / 생명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