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5BFBEC6BDC3BEC6B9AEC8ADBFACB1B820C1A63536C1FD28BABBB9AE2C20C7D1B1DB E687770>

Similar documents
<B3EDB9AEC0DBBCBAB9FD2E687770>

* pb61۲õðÀÚÀ̳ʸ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내지-교회에관한교리

금강인쇄-내지-세대주의재고찰

152*220

- 2 -

#7단원 1(252~269)교

ÃѼŁ1-ÃÖÁ¾Ãâ·Â¿ë2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B3EDB9AEC1FD5F3235C1FD2E687770>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국어 순화의 역사와 전망

10월추천dvd

82-대한신경학0201

2002report hwp

04 Çмú_±â¼ú±â»ç

01¸é¼öÁ¤

5 291

7 1 ( 12 ) ( 1912 ) 4. 3) ( ) 1 3 1, ) ( ), ( ),. 5) ( ) ). ( ). 6). ( ). ( ).

CR hwp

,,,,,, ),,, (Euripides) 2),, (Seneca, LA) 3), 1) )

한국성인에서초기황반변성질환과 연관된위험요인연구

고3-02_비문학_2_사회-해설.hwp


viii 본 연구는 이러한 사회변동에 따른 고등직업교육기관으로서 전문대 학의 역할 변화와 지원 정책 및 기능 변화를 살펴보고, 새로운 수요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문대학의 기능 확충 방안을 모색하 였다. 연구의 주요 방법과 절차 첫째, 기존 선행 연구 검토

41호-소비자문제연구(최종추가수정0507).hwp

<B3EDB4DC28B1E8BCAEC7F6292E687770>

041~084 ¹®È�Çö»óÀбâ

트렌드29호가제본용.hwp


³»Áö_10-6

Drucker Innovation_CEO과정

08학술프로그램

나하나로 5호

핵 심 교 양 1 학년 2 학년 3 학년합계 문학과예술 역사와철학 사회와이념 선택 교양학점계 학년 2 학년 3 학년합계비고 14 (15) 13 (

º´¹«Ã»Ã¥-»ç³ªÀÌ·Î

11¹Ú´ö±Ô

~

<5B DB1B3C0B0C0DAB8A65FC0A7C7D15FB5F0C0DAC0CEBBE7B0ED5FC5F8C5B62E706466>

<313020C1A4BFECBAC034332E687770>

A Time Series and Spatial Analysis of Factors Affecting Housing Prices in Seoul Ha Yeon Hong* Joo Hyung Lee** 요약 주제어 ABSTRACT:This study recognizes th

03-ÀÌÁ¦Çö

영상문화27호 (보람편집)_수정 (4).hwp

278 경찰학연구제 12 권제 3 호 ( 통권제 31 호 )

CC hwp

DBPIA-NURIMEDIA

2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문화재이야기part2

현장에서 만난 문화재 이야기 2

Jkafm093.hwp

Journal of Educational Innovation Research 2019, Vol. 29, No. 1, pp DOI: (LiD) - - * Way to

핵 1 학년 2 학년 3 학년합계 문학과예술 역사와철학 사회와이념 선택 학점계 학년 2 학년 3 학년합계비고 14 (15) 13 (14) 27 (29) 2

다문화 가정의 부모

CT083001C

아태연구(송석원) hwp

Journal of Educational Innovation Research 2018, Vol. 28, No. 1, pp DOI: * A Analysis of

한국어의 발달과 성서의 영향


Journal of Educational Innovation Research 2017, Vol. 27, No. 2, pp DOI: : Researc


[NO_11] 의과대학 소식지_OK(P)

쌍백합23호3

01정책백서목차(1~18)

歯M PDF

step 1-1

hwp

해외금융계좌내지뉴

È޴ϵåA4±â¼Û

»êÇÐ-150È£

한국조경학회지 47(3): 39~48, J. KILA Vol. 47, No. 3, pp. 39~48, June, 2019 pissn eissn

요람 교육과정편람 사범대학.hwp

歯kjmh2004v13n1.PDF

182 동북아역사논총 42호 금융정책이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일제 대외금융 정책의 기본원칙은 각 식민지와 점령지마다 별도의 발권은행을 수립하여 일본 은행권이 아닌 각 지역 통화를 발행케 한 점에 있다. 이들 통화는 일본은행권 과 等 價 로 연

274 한국문화 73

0001³»Áö

저작자표시 - 비영리 - 변경금지 2.0 대한민국 이용자는아래의조건을따르는경우에한하여자유롭게 이저작물을복제, 배포, 전송, 전시, 공연및방송할수있습니다. 다음과같은조건을따라야합니다 : 저작자표시. 귀하는원저작자를표시하여야합니다. 비영리. 귀하는이저작물을영리목적으로이용할

춤추는시민을기록하다_최종본 웹용

<3032BFF9C8A35FBABBB9AE5FC7A5C1F6C7D5C4A32E696E6464>

DBPIA-NURIMEDIA

2ÀåÀÛ¾÷

Microsoft PowerPoint - chap02-C프로그램시작하기.pptx

1. 경영대학

泰 東 古 典 硏 究 第 24 輯 이상적인 정치 사회의 구현 이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따라서 천인 합일론은 가장 적극적인 경세의 이론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권근은 경서의 내용 중에서 현실 정치의 귀감으로 삼을 만한 천인합일의 원칙과 사례들을 발견하고, 이를 연구하여

<B9ABC1A62D31>

<B3EDB9AEC1FD5F3235C1FD2E687770>

(012~031)223교과(교)2-1

¾Æµ¿ÇÐ´ë º»¹®.hwp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26권4호-교정본(1125).hwp

<C3E6B3B2B1B3C0B C8A32DC5BEC0E7BFEB28C0DBB0D4292D332E706466>

Journal of Educational Innovation Research 2017, Vol. 27, No. 2, pp DOI: * Review of Research

???德嶠짚

Art & Technology #5: 3D 프린팅 - Art World | 현대자동차

**09콘텐츠산업백서_1 2

교육학석사학위논문 윤리적입장에따른학교상담자의 비밀보장예외판단차이분석 년 월 서울대학교대학원 교육학과교육상담전공 구승영

<C0FCB9AEB1E2BCFA20BFDCB1B9C0CEB7C220B3EBB5BFBDC3C0E520BAD0BCAE2E687770>

충청북도교육청고시제 호 발간등록번호충북 충청북도교육과정각론 - 초등학교 -

DBPIA-NURIMEDIA

01.내지완완

<C1DF29B1E2BCFAA1A4B0A1C1A420A8E8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Transcription: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6집 309~345쪽 2014.2 19세기 말 在外 외국인의 한국시가론과 그 의미 이상현(1저자)*, 윤설희(2저자)** 55) <차 례> 1. 머리말 2. 한국지 (KOPEИ)에 새겨진 쿠랑 한국문학론의 중심기조 3. 한국지 에서 소거된 19세기 말 외국인 한국시가론의 맥락 4. 맺음말 [국문초록] 이 연구의 목적은 재외에서 출판된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 1865~1935)과 오카쿠라 요시사부로(岡倉由三郎, 1868~1936) 그리고 러시아 대장성의 한국시가(詩歌) 관련 기록물을 분석, 검토하는 것에 있다. 특히, 19세기 말 외국인들의 한국 시가론이 근대지식으로 유통된 한 사례로 3편의 논저를 검토함으로, 19세기 말 한국의 시가가 문학이라는 근대적인 지식으로 정립되는 과정과 그 의미를 고찰하는 것에 있다. 나아가 그 구성과정 속에서 소거된 외국인이 한국이라는 낯선 이문화와 접촉했던 흔적은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것에 있다. 러시아 대장성의 한국지 는 1900년까지의 서구인 한국학 논저를 집성한 저술이다. 한국에 관한 종합지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던 단행본 저술 한국지 에서 한국문학은 하나의 주제항목 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는 전시기 서양인 저술과는 다른 큰 변별점이었다. 한국지 의 편자 들이 한국문학 주제항목을 구성하는 데 가장 많이 참조한 저술은 쿠랑의 한국서지 서설 (1894)이었다. 그 이유는 쿠랑의 서설 이 한국문헌의 전반적인 기술이었을 뿐 아니라, 이를 서구의 근대 학술 체계에 맞추어 질서화 해준 논의였기 때문이다. 또한 충실한 서지조사 및 실 * ** 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HK연구교수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

310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6집 증작업을 통해, 한국에는 자국어로 된 고유성과 높은 문예성을 지닌 국민문학이 부재하다 는 당시 서양의 한국문학담론을 논증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쿠랑, 오카쿠라 요시사부로의 한국시가 관련 기록물에는 한국지 가 미처 포괄하지 못한 두 사람의 현장적 체험이 존재했다. 그것은 서구적 근대문학개념에는 낯선 한국의 시가문학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두 사람의 곤경 이었다. 동시에 이는 서구적 근대문학개념에 의거해 한국의 국문시가가 본래의 음악적 향유 혹 은 노랫말이 아닌 문학적 텍스트로 전환되는 순간이며, 한문시가와 분리되어 한국의 국민문학 으로 재조명받는 지점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가와 외국인의 접촉 그리고 그 번역의 현장은 한국지 에 새겨지지 못했다. 쿠랑은 한국시가문학을 문학텍스트로 재규명하기 위해 국문 시가의 주제와 율격문제에 대 한 문제를 논의하였다. 국문시가가 담아내고 있는 주제적 특성 및 중국 문학의 영향 관계를 지 적하는 한편, 비록 규칙적인 운이나 자수 등 율격의 실상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시조를 문학 적 텍스트로 인식하고 그 문학적 형식을 이야기 하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쿠랑이 한국서지 서설 을 작성할 때 참고문헌으로 제시한 오카쿠라 요시사부로의 논문은 19세기 방각본 가집 남훈태평가 소재 시조 작품을 번역한 최초의 사례였다. 이는 일본-서구 동양학 학술 네트워 크에 한국 시가를 알린 최초의 시도였다. 그는 한국 시가에 사용된 언어-한국어, 한자어-표현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외국문학이자 번역의 대상으로서 한국 시가작품의 존재를 인식했으며 최 대한 본래 시가작품의 모습을 번역 재현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시도는 개신교 선 교사의 시가론과 함께 한국지 에 거의 수용되지 않았다. 일례로 유일하게 한국지 에 수용된 헐버트의 시가론은 한국 시가의 연행 환경의 실제에 가까웠을 뿐 아니라, 번역 자체가 서구인 에게 낯선 한국 시가 작품과의 교감을 모색하는 훌륭한 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쿠랑에 비해 많은 부분이 배제되었던 것이다. 이는 한국의 시가를 문학이라는 근대지식으로 소환하려 했던 한국지 의 지향점을 잘 말해주는 것이었다. [주제어] 근대지식으로서의 문학, 민족(국민)성 담론, 언어내셔널리즘, 한국시가율격론, 한국 시가의 번역, 한국지 (KOPEИ (1900)),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 한국서지 (Bibliographie Coréenene(1894~1896, 1901)), 오카쿠라 요시사부로(岡倉由三郎), 조선의 문학 (朝鮮の文學(1893)),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한국의 시 (Korean Poetry(1896)), 가곡원류, 남훈태평가 1. 머리말 본고는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 1865~1935), 오카쿠라 요시사부로(岡 倉由三郎, 1868~1936), 러시아 대장성의 한국시가(詩歌) 관련 기록을 분석, 검토 함으로써 19세기 말 외국인들의 한국 시가 담론의 특성과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 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1) 한국시가론을 비롯한 한국문학에 대한 학술적인 논의는 주로 20세기 초, 경성

19세기 말 在外 외국인의 한국시가론과 그 의미 311 제국대학의 교수진을 필두로 한 일본인 학자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일반적으 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겨진 다양한 기록들의 실체는 한국 문학에 대한 학술적인 접근이 19세기 말 조선에 체류했던 외국인들의 실천 속에서도 그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음을 증언해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근, 그동안 논의되지 않 았던 서구인들의 한국문학 관련 저술들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먼저 고소설 분야에서는 구운몽 영역본과 같은 개별 영역(英譯)작품에 대한 연 구에서 시작하여 그 성과가 고소설 및 설화 영역본 전반, 번역자 제임스 게일 (James Scarth Gale, 1863~1937)에 대한 연구로 그 지평이 넓어졌다.2) 또한 고전시가 분야에서는, 그 시기적 연원을 19세기 말로 소급하여 호머 헐버 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를 비롯한 개신교 선교사들의 초기 한국 문학 담론이 조명되었고 한국 시가 번역 및 한국 시가 인식에 대한 논의부터, 개 별 인물 혹은 민요를 포함한 보다 다양한 차원의 진전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추세이다.3) 외국인들의 한국 문학에 대한 저술들은 당대 한국 문학의 일면을 살 1) 본고에서 중점적으로 살필 자료는 다음과 같은 세 편의 논저이다. 모리스 쿠랑, 이희재 옮김, 韓 國書誌 (일조각, 1997)[(Bibliographie Coréenene, 3tomes, 1894~1896, Supplément, 1901)]; 오 카쿠라 요시사부로[岡倉由三郎], 朝鮮の文學, 哲學雜誌 8券, 74~75號(1893) 4~5면; 러시아 대 장성 지음, 국역 한국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옮김(전광사업사, 1984)[(러시아 대장성, KOPEИ, S-Peterburg, 1900)] 모리스 쿠랑의 경우는 한국시가와 관련된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피고자 하는 데, 이는 1894년에 출판된 한국서지 1권이다. 2)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외국인들의 한국문학 관련 기록에 대한 논의는 주로 선교사들의 논저 들을 중심으로 한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제임스 게일이 출간했던 고소설 및 필기, 야담류의 번역 서들에 대한 논의는 연구자들로 하여금 19세기 말 외국인들의 한국문학 담론에 대한 다양한 관심 을 불러일으켰다. 제임스 게일이 출간한 고소설, 필기, 야담류 등의 번역서에 대한 최근의 주목할 만한 논의로는 장효현, 한국 고전소설 영역의 諸문제, 고전문학연구 19집(한국고전문학회, 2001); 장효현, <구운몽>영역본의 비교, Journal of Korean Culture 6(BK21 Korean Studies, 2004); 이상현, 제임스 게일의 구운몽 벙역과 문화의 변용 (성균관대 석사학위 논문, 2005); 오윤선, 韓國 古小說 英譯의 樣相과 意義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오윤선, 한국 고소 설 영역본으로의 초대 (지문당, 2008); 백주희, J. S. Gale의 Korean Folk Tales 연구 : 임방의 천예록 번역을 중심으로 (성균관대 석사학위 논문, 2008); 이상현, 제임스 게일의 한국학 연구와 고전 서사의 번역 : 게일 한국학 단행본 출판의 변모와 필기, 야담, 고소설의 번역 (성균관대 박사 학위 논문, 2009); 이상현, <춘향전> 소설어의 재편과정과 번역 : 게일 <춘향전> 영역본 출현과 그 의미, 고소설 연구 30집(한국고소설학회, 2010); 이상현, 한국 고전 번역가의 초상 : 게일의 고전학 담론과 고소설 번역의 지평 (소명출판, 2013) 등이 있다. 3) 19세기 말 외국인들의 시가 번역 및 시가 인식에 대한 논의로는 김승우의 다음과 같은 논의들 구한말 선교사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의 한국시가 인식, 한국시가연구 31권(한 국시가학회, 2011); 한국시가(詩歌)에 대한 구한말 서양인들의 고찰과 인식 James Scarth Gale 을 중심으로, 어문논집 64권(민족어문학회, 2011);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의 아리

312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6집 필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이상의 논의들 또한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지 만, 그 실상을 면밀히 살피기 위해서는 여전히 연구되어야 할 지점이 남겨져 있다. 이와 관련하여 본고에서 게일 헐버트 등의 개신교선교사의 한국시가론과 동시기 에 출현한 쿠랑, 오카쿠라 요시사부로의 논저들, 또한 향후 그 지식의 유통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러시아 대장성의 한국지 를 검토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 정도 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외국인 한국문학론의 전체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연구대상의 외연을 보 다 넓게 산정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19세기 말 한국문학론 및 한국학 담론을 창출한 주체는 비단 한국 내 개신교선교사 집단과 The Korean Repository, The Korea Review 등과 같은 그들의 영미정기간행물로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외 교관 혹은 외국어학교 교사의 신분으로 한국을 일정기간 머물렀던 애스턴, 스콧, 쿠랑, 오카쿠라 요시사부로 등의 업적도 중요성을 지닌 논저이다. 본고의 주제로 한정할지라도, The Korean Repository가 휴간된 1893~1894년 사이 한국의 시가 문학을 번역하여 소개한 최초의 사례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아니라 漢城 日語學堂 의 교사로 초빙 받았던 오카쿠라 요시사부로의 논문이었다. 이는 단순히 일본인의 업적이 아니었다. 쿠랑의 한글문헌에 관한 서술과 그의 시가론은 오카쿠라의 논저 를 중요한 선행연구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들의 논저가 프랑스, 일본 등지에서 설립된 동양학 학술단체에서 출판된 동양학 저널에 게재되 어, 서로 참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들은 결코 개신교 선교사와 동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일례로 후일 서구어로 된 한국학 논저를 집성한 元漢慶(H. H. Underwood, 1890~1951) 랑 논의에 대한 분석적 고찰, 비교한국학 20권 2호(국제비교한국학회, 2012); 선교사 프레더 릭 S. 밀러(Frederick S. Miller)의 한국시가론, 비교한국학 21권 1호(국제비교 한국학회, 2013); 19세기 말 미국민속학보(the Journal of American Folklore) 에 소개된 한국시가의 특징 애나 스미스(Anna T. Smith)의 한국 자장가(Nursery Rhymes) 고찰, 우리문학연구 40집(한 국문학회, 2013) 이 주목된다. 이밖에도 송민규의 논의들 The Korean Repository 에 소개 된 ODE 연구, Journal of Korean Culture 22집(한국어문학국제학술포럼, 2013); The Korean Repository 에 소개된 LOVE SONG 연구, 현대문학이론연구 52권(현대문학이론학회, 2013); The Korean Repository 에 소개된 SONG 연구, 비교한국학 21권 1호(국제비교한국학 회, 2013)와 신은경의 A Reception Aesthetic Study on Sijo in English Translation The Case of James S. Gale,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Vol.26(2013); 강혜정, 20世紀 前半期 古時調 英譯의 展開樣相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등의 논의가 있다.

19세기 말 在外 외국인의 한국시가론과 그 의미 313 은 애스턴, 쿠랑 등의 한국문학논저를 중요한 초기 업적물로 포괄했다.4) 재외의 공간에서 출판된 그들의 논저 역시 19세기 말 개신교 선교사의 한국문학론에 있 어 중요한 선행연구이자 동시대적 연구성과였던 것이다. 주한외교관들 역시 파리 외방전교회의 한국어학적 성과물을 수용하며, 한국문학을 주목한 논저를 생산했 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개신교 선교사와 일종의 협업적 관계였던 셈이다. 외국 인들의 한국시가 및 고소설의 번역, 이에 대한 비평적 담론의 출현은 한국의 문호 가 개방된 이후, 한국어 연구에서 한국문헌 에 관한 연구방향이 전환되는 19세 기 말 외국인 한국학 연구의 흐름에 부응한다. 특히, 쿠랑이 출판한 한국서지 (1894~1896, 1901)는 한국 개신교선교사 나아가 재조선 일본민간학술단체의 한 국문학 및 역사 연구에도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 논저이다.5) 둘째, 이는 외국인 한국문학론을 탐구하는 관점의 문제인데, 19세기 말 서구인 의 한국 문학론은 그들의 학술네트워크 속에서 일종의 공유 유통되는 지식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쿠랑의 한국서지 역시 외국인의 한국학 논저가 전무(全 無)한 상태에서 돌출된 것은 아니었다. 즉, 한국서지 를 비롯한 그의 논저는 전 문 학술잡지 및 학술저서의 형태로 출판이 가능했다. 이를 통해 상호 참조 공유 되며 그 타당성이 논해질 수 있는 학술적 기반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 점이 가능 했던 까닭은 한국을 논하는 그들의 서구어는 그들 각국의 표준 균질화된 공통어, 국민어 이자, 서구적 근대 분과학술개념으로 수렴되는 학술어 였기 때문이다. 이 러한 학술적 기반의 차이로 인해, 서구어는 한국을 근대 학술의 영역에서 체현(體 現)하며 유통시킬 수 있는 권위와 힘을 지닌 강한 언어였다. 요컨대, 서구어가 한국어보다 더 쉽게 필요한 근대적 지식을 생산하고 배치시킬 수 있는 언어였던 시기가 존재했던 셈이다.6) 즉, 그들의 언어를 통해 전해진 한국의 문학에 대한 이야기는 곧, 한국 문학에 대한 학술적 지식, 한국 문학론 이라는 개념으로 논의 4) H. H. Underwood, A partial Bibliography of Occidental Literature on Korea, 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Royal Asiatic Society 20, 1931, pp.39~45. 5) 이 점에 대해서는 이상현, 삼국사기 에 새겨 진 27년 전 경성의 추억 모리스 쿠랑과 한국의 고전세계, 국제어문 55(국제어문학회, 2013)를 참조. 6) 언어와 지식의 편성과 분배가 근본적으로 불균형하고 불공평하다는 시각은 탈랄 아사드, 영국 사회 인류학에서의 문화의 번역이라는 개념, 제임스 클리포드, 조지 E 마커스 편, 이기우 역, 문 화를 쓴다 민족지의 시학과 정치학 (한국문화사, 2000)을 참조했다.

314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6집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자료가 1900년까지 서구인 한국학 논저 를 집성한 한국지 이다. 1882년 출판되어 서양인의 한국학 연구를 종합 집성하 고 있는 그리피스(W. E. Griffis)의 저술과 달리, 한국지 는 한국문학이 별도의 주제항목으로 배치되어있다. 그 서술 수준은 부록항목으로 사전적이며 단편적인 서술을 보이는 그리피스의 저술과는 변별되는 것이었다.7) 본고에서는 개신교 선교사의 한국시가론으로 한정되어 그간 주목받지 못한 동 시기 재외의 공간에서 출현한 세 편의 시가 관련 기록물을 문학이라는 지식의 유 통과 공유라는 관점에서, 그 상호연관성을 검토해보도록 할 것이다. 이는 각 저술 의 출현시기에 따라 연원을 소급해보는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2장에서는 한국 지 (1900)에 집성된 서구인의 한국문학론이 지닌 중심적 논리기조가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볼 것이다. 또한 3장에서는 한국문학론의 참조집성에 있어서 가장 큰 기반이 되었던 모리스 쿠랑 한국서지 서설 (1894) 속 한국문학론에서 한국지 가 선택/배제한 점을 고찰할 것이며, 외국인 한국시가론의 시원이자 쿠랑 서설 속 한국시가론의 중요한 참조문헌이었던 오카쿠라 요시사부로의 논저(1893)를 탐구 할 것이다. 그리고 이상의 내용을 기반으로 한국지 가 참조했던 개신교 선교사 헐버트의 시가론(1896)과 대비를 통해, 오카쿠라 모리스 쿠랑, 한국지 의 한국 시가론이 지닌 의미를 도출해보고자 한다. 2. 한국지 (KOPEИ)에 새겨진 쿠랑 한국문학론의 중심기조 러시아 대장성이 상트페테르부르크(Sankt Peterburg)에서 출판한 한국지 (KOPEИ )는 청일전쟁(1895) 이후 극동지역에 대한 세부 자료수집의 필요성을 느 낀 러시아가 정부가 정치 경제적 목적 하에 동양학자들을 동원해 한국에 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하여 만든 결과물이었다.8) 러시아 한국학의 요람이었던 그 7) W. E. Griffis, Corea : the hermit nation(new York : Charles Scribner s Sons, 1882), p.449. 8) 이민희, 파란, 폴란드, 뽈스카 (소명출판, 2005), 54~56면.

19세기 말 在外 외국인의 한국시가론과 그 의미 315 흔적은 여전히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과 러시아 학술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에 남 겨져 있다. 최근 방문조사 연구를 통해 한국 고서 목록과 그 자료적 가치가 여러 논자들을 통해 조명 받고 있다.9) 일찍이 모리스 쿠랑은 이곳에 보관된 한국의 장 서목록이 존재하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이에 대한 조사를 수행하지 못한 사실을 한국서지 서설 에 밝혀놓을 수밖에 없었다.10) 본고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모리스 쿠랑, 오카쿠라 요시사부로, 러시아대장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련되었는지를 논증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지 가 보여주 는 바는 19세기 말 외국인의 한국 문학론을 모아, 한국문학이라는 별도의 주제항 목을 구성할 수 있었던 사실과, 쿠랑의 논의가 이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물 론 한국인의 말과 글, 혹은 문헌이라는 실체적인 대상이 없이는 한국문학 이라는 근대적 지식은 구성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국지 에서 한국문학 이라는 주제 항목을 확정하고, 구성한 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인들의 말과 글, 그 자체는 아니었 다. 오히려 한국지 를 구성하는 지식의 원천들은 바로 한국 문학 작품을 매개로 생산된 서구인의 언어, 그들의 한국문학논문이었다. 한국지 에는 다음과 같은 주 제 항목으로 한국의 문학이 구성되어 있다. 제9장 한국의 언어, 문학 및 교육 1. 언어 2. 문자(한자와 이두 / 언문) 3. 문학(불교문학 / 도교문학 / 유교문학 / 시가작품 / 행정기관의 저작 / 법전 / 역사서 / 병서 / 자연과학 및 의학서 / 수학 및 천문학서 / 어학서 / 도서간행 / 국민문학 / 그리스도교문학) 한국지 의 편자들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간행한 영미 정기 간행물과 저서를 분 명히 참조했다. 또한 한국어와 관련된 항목에서는 1890년을 기점으로 출판된 언 9) 허경진 유춘동, 러시아 상트베테르부르크 국립대학과 동방학연구소에 소장된 조선전적에 대한 연구, 열상고전연구 36(열상고전연구회, 2012); 정병설, 러시아 상트베테르부르크 동방학연구 소 소장 한국 고서의 몇몇 특징, 규장각 34(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13). 10) 모리스 쿠랑, 이희재 옮김, 앞의 책, 5면.

316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6집 더우드, 게일, 스콧 등의 업적을 주석 상에서 한국어학에 관한 중요한 선행연구로 인정했다.11) 하지만 이는 한국문학과 관련된 기술부분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이었 다. 언어 가 아닌 한국의 문자/문학 에 대한 한국지 의 분류방식과 그 항목을 구성하는 내용들의 대부분은 쿠랑의 한국서지 서설 이었다. 쿠랑은 서설 에 서 그가 수집한 한국의 서적들의 연원과 계보를 각각 서적의 종이, 인쇄, 출판의 형태(Ⅱ장), 기록된 문자와 언어(한문, 국문, 이두)의 문제(Ⅲ장), 문학=literature 보다 광의의 문학개념으로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불교, 도교, 유교 사상의 영향(Ⅳ 장)과 유교의 영향이 드러난 한국인의 小考, 書簡文, 보고서, 의례서, 祝願文및 기타 跋文, 序文, 獻辭 의 글쓰기(Ⅴ장), 국문으로 쓴 대중적인 한국의 서적(Ⅵ장) 을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그 가운데 한국지 의 내용은 서설 Ⅲ~Ⅵ장의 요지를 요약한 것이었다. 한국지 에 수록된 문학항목을 중심으로 가장 핵심이 된 쿠랑의 한국서지 서설 부분과 다른 논저들을 구분하여 그 참조양상을 정리해보면 다 음과 같다. <표 1> 한국지 문학항목의 쿠랑 서설 에 대한 참조양상 한국지 문학 항목의 소항목 한국지 에 반영된 쿠랑 서설 불교문학 / 도교문학 / 유교문학 모리스 쿠랑, 서설 Ⅳ장(한국의 한문문 헌) 전반을 요약 시가작품 / 행정기관의 저작 / 법전 / 역사서 / 병서 / 자연과학 및 의학서 / 수학 및 천문학서 / 어학서 / 도서간행 모리스 쿠랑, 서설 Ⅴ장(한국의 한문문 헌) 전반을 요약 국민문학 / 그리스도교문학 모리스 쿠랑, 서설 Ⅵ장(한국의 한글문 헌) 전반을 요약 11) 러시아대장성, 한국정신문화원 옮김, 앞의 책, 391~392면. 언어(한국어) 항목에 대한 한국지 의 내용 구성 및 그 의의는 이상현, 언더우드의 이중어사전 간행과 한국어의 재편과정, 동방학지 151(연세대 국학연구원, 2010), 228~238면 을 참조. 또한 19세기 말 재외 외국인의 한국어연구에 대한 검토는 고영근, 민족어학의 건설과 발전 (박문사, 2010)을 참조.

19세기 말 在外 외국인의 한국시가론과 그 의미 317 <표 2> 한국지 문학항목의 서구인 논저에 대한 참조양상 한국지 문학 항목의 소항목 참조논저 한국지 의 참조양상 역사서 H. B. Hulbert, An Ancient Gazetteer of Korea, Korean Repository, 1897. 역사서 輿地勝覽 에 관한 헐버트의 소 개글을 참조. W. E. Griffis, Corea, the Hermit Nation, 1889. 그리피스가 한어문전 에 수록된 이야 기(야담)를 영역[재번역]한 부분을 참조. H. B. Hulbert, Korean Poetry, Korean Repository, 1896. 한국의 시가문학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서정시이며 서사시가 없다는 헐버트의 진술을 참조. M. Courant, Bibliographie Coréenene 1, 1895. 쿠랑이 번역한 남훈태평가 수록 춘 면곡 과 가곡원류 소재 시조 4수를 한국시가의 표본으로 제시함. E. B. Landis, Some Korean Proverbs, Korean Repository, 1896~1897. 1896~1897년 사이 랜디스가 연재한 한 국속담 소개 기사에서 선별해 예시를 제시함. A. Kenmure, C. C. Vinton, The Literary Needs of Korea, Korean Repository, 1897. 1895년 이후,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 인들 위해 복음서 이외에도 다양한 분 야에 걸친 유익한 서적을 발간하기 위 한 계획했다는 기사를 소개. W. H. Wilkinson, Introduction Corean Government, 1897. 조선에서 官報가 1894년부터 변화되는 모습을 기술한 내용을 참조. I. B. Bishop, Korea and her Neighbours, 1898. 1896년 이후 출판된 한국의 신문 및 월 간지, 부산, 제물포에서 발행된 일본어 로 된 신문을 소개를 참조. Notes and Commnets, Korean Repository, 1897. 한국에서 발행된 독립신문 에 대한 소 개를 참조. 국민문학 그리스도교 문학 이상의 도표를 통해 살필 수 있듯이, 한국지 가 한국문학이라는 지식을 구성 하기 위해서 서설 이외의 논저를 참조한 양상은 극히 미비한 수준이다. 헐버트 의 동국여지승람 개괄과 한국 시가 장르에 대한 부연설명, 그리고 쿠랑 한국서 지 의 본문과 개신교 선교사의 영미 정기 간행물에서 실제 작품의 모습을 예증하 기 위해서 부수적으로 참조했을 따름이다. 나아가 이는 한국지 의 전체 서술 부 분의 극히 한정적인 분량이었다. 다만 예외적인 부분은 그리스도교 문학 이라는 소항목으로, 한국지 는 이 부분에서만큼은 쿠랑의 저술보다는 다른 서구인 논저

318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6집 를 상대적으로 더욱 많이 참조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쿠랑이 1892~1894년 사 이 한국에 머물렀고, 한국서지 가 1894~1896년 사이에 출판되었던 정황 때문이 다. 1896년에서 1900년 사이 한국의 출판물들은 한국서지 (1894~1896)에는 의 당 반영되지 않았다. 예컨대, 대한제국의 관보, 한국의 신문, 개신교선교사의 영미 정기 간행물과 관련된 쿠랑의 기술은 1901년 출판된 한국서지(보유편) 에서 발 견할 수 있는데, 쿠랑의 한국서지(보유편) 은 한국지 가 참조할 수 없었던 저술 이었다. 요컨대, 한국지 는 쿠랑의 서설 을 한국의 문학을 말해주는 가장 핵심적인 지식으로 채택한 셈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추론된다. 첫째, 쿠랑의 서설 은 당시 한국문헌 전반을 실증적으로 검토한 가장 포괄적이며 총체적인 기술이었 기 때문이다. 실제, 19세기 말~20세기 초까지 가장 많은 한국 문학론을 개진한 개신교 선교사는 헐버트였다. 하지만 그의 논저는 쿠랑과 대비해 본다면, 한국문 학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큰 이유는 헐버트의 논의가 쿠랑과 달리, 한국지 의 국민문학 항목 즉, 한국의 설화와 국문(언문 한글)문학에 초점이 맞 춰져 있었으며, 한문문헌 역시 주로 역사서 쪽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쿠랑의 서설 은 서구인들이 한국 문헌전반에 접근하는 데 나침반을 제공해주었 기 때문이다. 그는 각종 한국문헌들을 종교, 언어, 교육, 역사, 문학 등과 같은 서 구 근대 분과 학술 체계에 맞춰 질서화 하였다. 이러한 면모는 한국지 문학 항목의 소항목들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는 쿠랑이 한국문헌 전반의 내용을 기술 하기 위해, Literature 를 그들의 자명한 개념범주가 아니라, 그 어의 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 문자로 써서 표현된 정신의 산물 로 규정하여 활용했기 때문이 다.12) 즉, 문장 과 학문 을 포괄하는 광의의 문학개념은 한국문헌의 전체상을 이 야기하는 데 그만큼 유용했던 방식이다. 또한 쿠랑의 서설 은 한국문학의 전체상을 아우르는 이러한 포괄성과 더불어 국어=모어 라는 언어내셔널리즘 그리고 작가 개인의 창작적 산물/언어예술 이 라는 관념에 의거한 협의의 문학개념을 통해, 한국문학을 이야기할 수 있는 비평 12) 모리스 쿠랑, 이희재 옮김, 앞의 책, 287~288면; 쿠랑의 원문은 littérature dans le sens le plus large, en y comprenant toutes les productions de l espirt exprimées par le langàge écrit. 이다.

19세기 말 在外 외국인의 한국시가론과 그 의미 319 적 관점을 제공해주었다. 즉, 쿠랑 서설 의 이러한 비평적 관점은 한국지 문 학 항목의 소항목, 시가문학과 국민문학의 존재 그 자체와 내용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서 한국문학에 투영된 협의의 문학개념 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광 의 와 협의 라는 두 층위의 문학개념 중 한국문학의 가치를 판별해주는 기준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협의의 문학개념이란 점도 마찬가지이다. 쿠랑의 두 문학개념의 실제 용례는 다른 층위였다. 광의의 문학개념은 한국인 의 근원적인 정신 유교적 사상을 기술하는 데 투영되며, 협의의 문학개념은 한국 만의 독립된 민족성을 측정하는 준거로 활용되었다. 쿠랑에게 광의의 문학개념으 로 기술되는 한국문학은 개신교와 대비되는 고도의 윤리규범(유교)을 지녔지만, 민족어로서는 미달된 한문 글쓰기를 지닌 중국문학에 대한 모방작 이었다. 비록 국문문학은 협의의 문학개념에 부응하며 동시에 국문 글쓰기라는 요건을 충족시 켜주지만, 그가 보기에 이는 한국 문인지식층이 창출한 문학성과 한문문헌을 대신 할만한 수준의 문학은 아니었던 것이다.13) 어디까지나 국문문학은 고전 이 아니 라, 당시 향유되는 저급한 대중적인 독서물 이었다. 즉, 서구인이라는 관찰자, 한 국의 문학 이라는 대상, 그 속에 놓인 서구와 한국의 번역적 관계는 유비의 관계 일 뿐 결코 대등한 관계 는 아니었다. 따라서 한국은 중국의 종속변수로 놓이게 되는, 따라서 국민/민족 단위의 독자적인 민족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존재로 형상 화된다.14) 근대적 문학 개념으로 한국문학을 비평하는 쿠랑의 이러한 시각은 한국의 시가 문학에 대한 한국지 의 서술방식에 있어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한국의 시가 문학은 한문시가와 국문시가가 각각 시가문학 과 국민문학 에 배치되어 있다. 전 자는 한국 유가 지식층이 창작 향유한 한문으로 된 시문을 지칭하는 것으로 유 교의 이념에 지극히 충실한 작품으로 기술된다. 이는 지식인들의 공적/사적인 생 활 속에서 향유되었으나, 중국적인 시가의 형식과 내용을 지녔으며, 개별 작가의 단행본(시집) 형태로 출판되지 않는 것이었다.15) 그리고 후자는 한국의 국문시가 13) 위의 책, 72면. 14) 이에 대한 상술은 이상현, 근대 조선어 조선문학의 혼종적 기원 조선인의 심의 (1947)에 내 재된 세 줄기의 역사, 사이間SAI 8(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 2010), 113~123면을 참조. 15) 러시아대장성,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옮김, 앞의 책, 399~400면.

320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6집 로 고소설, 속담과 함께 국민문학 으로 분류된다. 이러한 분류와 배치에는 한국인의 국어=모어 를 한국의 고유한 문학으로 인식 하는 논리가 반영된 것이다. 실제 장르론적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시가문학 항목 에 속해야 하는 국문시가가 국민문학의 항목으로 수록된 것이 그러하다. 하지만 국문시가 역시 한국의 고유성을 표상해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한국지 와 모리스 쿠랑은 한국의 국문시가, 나아가 한국인의 구술로 전하는 순수한 민요에 있어서 조차 중국의 강한 영향이 눈에 띠게 나타나 있음 을 지적했다. 비록 한국지 는 쿠랑의 서설 을 충실히 완역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지 는 쿠랑의 서설 을 일 독할 때, 발견할 수 있는 이러한 중요한 시각과 그 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19세 기 말 출현한 재외의 한국문학에 대한 접근시각을 묶을 수 있는 중심기조 로 근대 적 문학개념을 한국고전에 투사하려는 행위이며 접근방법이었다. 이러한 접근방 식을 통해 그들이 도출한 결론은 바로 중국문화에 종속된 한국문학의 전근대성 이었다. 요컨대 그 요지는 한국에는 한문이 아닌 자국어로는 심오한 학술적 사상 을 표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측면, 한글로 씌어진 고유성과 예술성을 지닌 문학작 품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는 한국에는 진정한 국민문학이자 문학 =literature 에 상응하는 것이 없다는 일종의 한국문학부재론 이었다.16) 비록 주제 항목으로 한국문학이 상정되어 있었지만, 그 중심적 논리와 기조는 한국문학이 주 제항목으로 설정되지 않은 채 단편적으로 거론되는 논의와 큰 차별성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쿠랑의 논의는 충실한 서지조사 및 실증작업을 통해, 한국 에는 자국어로 된 고유성과 높은 문예성을 지닌 국민문학이 부재하다 는 당시 서 양의 한국문학담론을 면밀히 논증해준 것만은 틀림없었다. 16) 당시 서양인들의 그 구체적 논의들은 김승우, 한국詩歌에 대한 구한말 서양인들의 고찰과 인식 James Scarth Gale을 중심으로, 앞의 책, 9~16면; 강혜정, 앞의 글, 56~63면에서 잘 검토되어 있음으로 생략한다. 하지만 우리는 두 논자와 달리, 한국에 거주했던 애스턴, 모리스 쿠랑과 같은 외교관, 오카쿠라 요시사부로와 같은 외국어교사들의 경우, 동일한 한국문학부재론을 이야기했지 만 동시에 한국도서 및 그 출판, 유통의 현장을 그들이 증언했다는 측면과 실제 문학작품을 번역 했다는 측면에서 과거 재외 외국인 학자들과는 변별성이 존재한다는 관점에서 이 연구를 수행한 다. 또한 서울에서 거주했던 파리외방전교회의 업적들과 그들의 서간을 중심으로 한국천주교회 사 를 구성했던 샤를 달레의 경우도 별도의 연구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9세기 말 在外 외국인의 한국시가론과 그 의미 321 3. 한국지 에서 소거된 19세기 말 외국인 한국시가론의 맥락 1) 모리스 쿠랑, 한국서지 (1894) 근대문학개념과 19세기 말 한국의 문학현장 사이 균열의 지점 한국지 에는 쿠랑이 생각한 한국 문학론의 중심기조가 잘 반영되어 있다. 쿠랑 은 한국에 대한 중국문화의 영향력 과 당시 한국의 한문/국문(한글 언문)이 지 닌 서로 다른 사회적 위상 과 같은 문제들을 논의하기 위하여, 한국 도서의 출판 유통문화 그에 대한 역사적 연원을 살폈다. 그리고 종국적으로 근대적 문학개념에 의거한 문학성과 민족 고유성의 좌표로 한국의 국문문학을 소환하여 비평했다. 쿠 랑의 비평에는 한국의 국문문학을 서구 근대문학의 문예성을 지니지 못한 작품 이 며 고유성을 제시하는 국민(민족)문학으로는 미달된 작품 으로 인식하는 문명론적 이며 비판적인 시각이 분명히 내재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한국문학에 관한 규 정은 한국을 짧은 기간 방문했거나, 중국 혹은 일본 측 사료를 통해 구성된 서구인 의 단편적인 한국문학 기술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다. 그렇지만 모리스 쿠랑, 이후 살펴볼 오카쿠라의 시가관련 기록에는, 낯선 한국문학을 대면했던 곤경 과 이를 이해하려는 지향점이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문학 이라는 서구적 근대 학술개념과 한국문학 사이의 균열의 지점으로 드러난다. 이는 양자 간 역동적인 상호작용의 모습인데, 본고에서는 그 몇 가지 단초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먼저, 쿠랑 등 외국인 혹은 근대적 문학개념의 개입으로 한국문학 자체를 소환 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모습이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시각을 통해 우리는 한국의 국문시가가 초점화되며 학술적 대상으로 재탄생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 은 서설, 한국지 에 한국의 한글문학이 한국의 국민문학이라는 소주제로 배치 된 양상, 즉 국문시가가 소환되며 근대적 지식으로 전환되는 양상 속에 잘 반영되 어 있다. 한국서지 (1894)의 지향점을 반영한 한국지 (1900)에 초점을 맞춰보 자. 한국지 는 문학 텍스트 로 한국의 시가를 살필 때 대면하게 되는 한국시가의 주제 및 율격 의 문제를 기술했다. 또한 한국서지 에서 보이는 국문시가에 대한 쿠랑의 강조 즉, 한국의 국문시가에 대한 쿠랑의 변별된 기술양상에 주목했다. 쿠 랑의 한국서지 를 보면, 한국에서 출판된 중국서적과 한국인의 한문시에 대해서

322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6집 는 서지사항과 간략한 해제만이 제시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국문시가에 관해서 는 남훈태평가 가사부에 수록된 가사 <춘면곡> 1수와 가곡원류 에 수록된 시 조(가곡) 4수를 번역하고 있다. 한국지 는 이를 반영하여 시조 4작품과 <춘면곡> 을 한국시가의 표본으로 제시하였다.17) 그렇지만 한국지 는 어디까지나 쿠랑 서설 의 완역이 아니라 일종의 축역이었 다. 따라서 쿠랑이 본래 제기했던 세부 기술에 대한 생략이 존재한다. 그것은 쿠랑 이 19세기 말 대면했던 한국시가문학의 현장이었다. 쿠랑 서설 의 한문시가, 국문 시가 관련 서술양상에 초점에 맞춰 이 점을 살펴보도록 하자.18) 먼저 한문시가와 관련하여 본래 쿠랑은 한국의 한문학 전반에 관해 기술했지만, 한국지 에서는 산 문에 대한 내용은 생략했으며 오로지 운문만을 다루고 있다는 차이점이 보인다. 산문에서 한국인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고전 수사 학보다 훨씬 엄격하고 훨씬 세밀한 중국 수사학인 문장을 공부하지는 않는다. 그 러나 운문의 체재는 같아서, 시작법에의 모든 요구는 언제나 증대되는 어려움이 따르고, 따라서 모든 개인적 영감은 배제된다. 19)라는 쿠랑의 진술을 통해서 그 이유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쿠랑의 진술 속에서 유교 이념과 중국의 문학형식을 잘 드러내 주는 한국의 문학은 한시와 같은 운문이었기에, 한국지 는 이에 더욱 초점을 맞춰 그의 논의를 요약한 셈이다. 둘째, 한국지 는 쿠랑이 서설 에서 기술한 詩, 賦, 銘을 구분하는 행과 자수, 17) 모리스 쿠랑, 이희재 옮김, 앞의 책, 200~207면; 러시아대장성,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옮김, 앞의 책, 406~408면. 한국지 에 번역, 수록된 가곡원류 소재 시조 4수의 원문으로 추정되는 작품들 은 다음과 같다. ① 우는거시 벅국 가 푸른거슨 버둘쑵가 / 漁村 두 세집이 暮烟에 겨세라 / 夕陽에 일흔 갈멱이는 오락가락 더라( 가곡원류(국악원본) (=이하 원국 으로 약칭)#281) ② 萬頃滄波 欲暮天에 穿魚換酒 柳橋邊을 / 客來問我 興亡事여늘 笑指蘆花 月一舡이로다 / 술 醉코 江湖에 져이시니 節 가는 쥴 몰 라( 원국 #282) ③ 故人無復洛城東이요 今人還對落花風을 / 年年歲歲 花相似여늘 歲歲年年 人不同이로다 / 花 相似 人不同 니 그를 슬허 노라( 원국 #283) ④ 春風 和煦好時에 범나뷔 몸이 되어 / 百花叢裏에 香氣 졋져 노닐거니 / 世上에 이러 豪興 을 무어스로 比헐소냐( 원국 #305) 18) 한국지 는 쿠랑의 서설 이 도출되는 과정, 이에 대한 자료 조사 작업을 모두 참조할 수 없었다. 쿠랑이 중국 및 한국의 시가작품을 검토하며 서설 의 논리를 도출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이상현, 19세기 말 한국시가문학의 구성과 문학텍스트 로서의 고시가 모리스 쿠랑 한국시가론의 근대 학술사적 의미, 비교문학 61(한국비교문학회, 2014)을 참조. 19) 모리스 쿠랑, 이희재 옮김, 앞의 책, 56면.

19세기 말 在外 외국인의 한국시가론과 그 의미 323 운, 대구법과 같은 세밀한 차이점에 대해 생략했다. 그것은 쿠랑이 詩, 賦, 銘을 각각 송가 (ode), 불규칙한 시 (irréguliers), 碑文 혹은 풍자시 (épigramme)로 번역한 모습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한국지 는 서구인들의 소네트를 연상시키는 간결함과 시 작법 상의 엄격한 규칙을 지닌 詩, 구성 상 내재율의 영향을 적게 받는 불규칙한 賦, 간결하면서도 시 작법상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銘 이라는 세 가지 형식으로 정리했다.20) 한국지 의 이러한 간략한 요약진술로 인해, 쿠랑 의 서구와 동양(중국/한국)의 시문학에 관한 세밀한 변별점은 누락되게 된다. 그 것은 동양의 시문학에서 파격 은 제한적일 뿐이고, 엄격한 규칙 이 적용됨으로 작가 개인의 자유와 영감 을 손상시키며 억압한다는 쿠랑의 진술이다. 사실, 이 러한 쿠랑의 진술은 내재율 과 자유시 라는 서구적 근대문학 관념으로 동양(중국 /한국)의 한시문을 비평하는 모습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셋째, 한국지 는 이러한 한문시가가 과거와 같은 임용, 연희, 의례와 같은 공 적이며 사적인 생활문화 속에서 향유되는 측면, 한국에서 중국 시집이 많이 출판 되는 모습과 독자적인 시집의 형태가 아니라 문집 속에 수록된 모습 등을 잘 정 리했다. 다만, 한국지 는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弔義帝文 을 한국의 독창적인 시가작품 이라고 서설 에는 없는 해석을 덧붙였다.21) 쿠랑은 김종직의 弔義帝文 이 1498년 士禍를 불러일으킨 예와 같이 한국의 한시문이 한국에서 역사적인 역할 을 수행하기도 했음을 지적했을 뿐이다. 쿠랑은 한국의 한시가 한국인의 문집, 산문에, 또한 공적, 사적인 생활에 개입되는 모습을 말하는 데 에 초점이 있었던 것이다. 즉, 쿠랑은 한시가 한국 지식인의 생활문화 속에서 깊 이 관여하는 점만을 말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쿠랑은 한국에서 한국인의 한시 향유 자체를 주목하여 독창성을 도출하고자 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지 는 이를 한층 더 적극적으로 해석한 셈이다. 한국의 국문시가는 한문 시문학에 비해 문학개념 을 통해 도출하기 어려운 문 제가 존재했다. 무엇보다 문자문화 및 인쇄문화가 내면화된 서구인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국문시가는 소설 다음으로 가장 대 20) 러시아 대장성,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옮김, 앞의 책, 399~400면; 모리스 쿠랑, 이희재 옮김, 위의 책, 56~57면(M. Courant, op. cit, pp.130~131) 21) 모리스 쿠랑, 이희재 옮김, 앞의 책, 58면; 러시아대장성,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옮김, 앞의 책, 400면.

324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6집 중적인 문학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쿠랑이 잘 번역했듯이 노래들(chansons) 이었 다. 비록 국문시가는 책자로 전하기는 하나 그 출판양상은 인쇄형태 라기보다는 사본의 형태 이며, 저자나 창작 출판 연대가 문제시 되지 않으며, 일종의 노랫 말 이었기 때문이다.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랑은 이러한 국문시가를 학술적 차 원에서 소환할 수 있었다. 그것은 첫째, 국문시가의 내용과 주제를 통한 접근이었 다. 쿠랑은 국문시가가 주로 자연에 대한 강렬한 감정, 묘사의 진정한 수완, 때로 는 감성적이며 가벼운 야유 를 담고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사랑과 그 기쁨, 술 마시는 즐거움, 세월의 흐름, 인생의 짧음 등이 가장 빈번히 보이는 주제를 담고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이와 같은 국문시가의 주제 그리고 그 이후 시가율격 에 관한 쿠랑의 진술은 한국지 에 잘 반영되었다. 하지만 국문시가의 율격의 문 제와 관련해서는 단순히 이러한 한국지 의 요약만으로는 한정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한국지 는 한국시가의 율격과 관련하여, 그 출처를 쿠랑의 서설 을 참조항목 으로 밝혔다. 하지만 그 실제의 참조는 한국의 국문시가 작품으로 예시된 쿠랑의 한국서지 본문 속 기술로 보인다. 한국지 의 서술양상은 한국서지 에서 쿠랑 이 가곡원류 를 해제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요약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詩調라 불리우는 이 장르의 노래들은 아주 짧아 3행 또는 4행시로 되어 있다. 가장 긴 시들은 그 의미와 음악에 의해 3행의 절로 나뉘어 졌다. 한국의 시는 각운이 나 음절의 장단이 없고 음절의 수는 조금씩 변한다. 12-20 사이로 각 문장 또는 구절이 한 시를 만든다. 시적 표현의 탐구, 몇 장 대신 20여 음절밖에 안 되는 간결한 문장 그리고 장단가락은 운문과 산문의 유일한 차이점들이다. 이 노래들은 피리, 현 악기 및 북들의 반주로 이루어진다. / 歌詞로 불리는 노래들은 훨씬 긴 것으로 각 절로 나뉘지 않으며 반주는 앞의 것들과 비슷하다. / 雜歌는 哀歌[chantées]의 종류 들로 때로 1인 또는 2인의 표현으로 나타난다. 박자는 북으로 표시된다. 이 가사와 잡가의 두 장르는 광대들에 의해서만 표현된다. 23) 22) 위의 책, 70~71면. 23) 모리스 쿠랑, 이희재 옮김, 앞의 책, 200~201면. 쿠랑의 원문을 보면 그는 한자와 이에 대한 한글 음을 병기하여, 時調, 歌詞, 雜歌를 제시했다(M. Courant, op. cit., p.238).; 당시 쿠랑을 비롯한

19세기 말 在外 외국인의 한국시가론과 그 의미 325 한국지 의 이러한 선택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무엇보다 한국서지 의 가 곡원류 해제부분과 달리, 시조, 가사, 잡가 라는 이 3가지 장르명칭을 쿠랑 이 서설 에서는 다음과 같이 생략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여러 차례 한국의 운율론의 규칙에 대해 설명 받고자 했으나 내가 물어본 모든 사람들은 이 주제에 대해 아주 모호한 생각 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기를 한국에는 세 종류의 노래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짧은 노래로, 거의 비슷한 길이의 음절로 나뉘어 작은 시적 묘사에 몇 가지 도덕적인 생각을 덧붙인 것이며, 또 하나는 그보다 훨씬 길고 운율의 구분이 없는 것으로, 각기 연결되는 일련의 장면 들을 포함하고 있다. 두 가지 모두 언제나 음악의 반주와 함께 혼자서 부르는 것이다. 행동을 포함한 哀歌가 그 세 째 부류로, 반주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인데 2, 3인의 무용수의 표현이 곁들여진다. 한국의 운문은 그 분량, 脚韻, 半諧音, 음절의 수 등이 정해지지 않아 그 본질을 규정짓기 어렵다.24) 쿠랑의 가곡원류 에 대한 해제에서는 실제 한국에서 유통되는 한국시가의 구 체적인 장르명칭 시조, 가사, 잡가 과 율격에 대한 내용 글자수나 행단위, 연행환경 등 을 상세히 풀어놓고 있다. 하지만 서설 속 국문시가의 율격에 관한 쿠랑의 진술 가운데에는 매우 주목할 부분이 함께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서 설 에는 가곡원류 에 대한 해제부분에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시가 장르 및 율격 에 대한 쿠랑의 현지적 체험이 추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쿠랑의 가곡원류 에 대한 해제와 한국지 에서 생략된 부분은, 첫째, 한국의 시가를 3가지 형태로 규 정하고 있는 그의 진술이 쿠랑 본인의 지식이 아니라 한국인을 통해 얻게 된 지식 이라는 점이다. 조선 후기에 향유된 국문시가의 가장 대표적인 장르인 시조, 가사, 잡가에 대한 언급과 각각의 장르의 개별적인 연행 방식과 특징 등에 대한 서술은 실제 그가 참고한 가곡원류 의 서문과 발문 그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은 내용으 프랑스인의 한국어와 한국시가장르에 관한 인식은 조재룡의 논문( Les premiers textes poétiques coréens traduits en franc ais aˋ l époque de l ouverture au monde, 통번역학연구 17(4)(통번 역연구소, 2013))을 참조. 24) 위의 책, 71면.

326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6집 로써, 이는 국문시가에 대한 구분이 그가 조사, 정리한 서적으로부터 얻게 된 지 식이 아니라 당시의 국문시가 연행환경에 대한 부가적인 관찰 혹은 체험[혹은 한 국인의 구술자료]에 의한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도 한시문에 대한 서술과 대비하여 볼 때, 국문시가 율격의 본질을 쿠랑이 명확히 인식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보다 주목해야할 사실은 이러한 한계점이 당시 서구인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서구인들의 저술 속에 옮겨진 한국의 시가문학은, 그것이 창 작 향유되던 당시의 실상과 구별되는 대상 즉, 근대 학술분과의 문학이란 지식을 구성하기 위해, 재편된 작품들이었다. 따라서 작품의 가치를 생산하는 외부의 언 어, 작품을 설명하는 한국어(근대 학술문어/근대 학술분과 학문)의 부재 상황은, 국문시가에 대한 모호한 생각 밖에 전달할 수 없었던 당시의 실상과 긴밀히 관계 된다. 국문시가를 서정 장르로 만드는 그 기반은 통사적 의미구조의 차단이라는 억제발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오히려 율격의 본질이자 장르적 특성은 고전 시가가 전통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악곡적 음율 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 컨대, 노래(가창과 연행)의 형태로 사실상 분류되는 세 가지 형식 시조, 가사, 잡 가를 언어 텍스트 차원으로 환원하며 그 속에서 율격을 찾으려는 쿠랑의 행위 그 자체는 그러한 시가를 실제 창작, 향유하고 있었던 당시 한국인들에게는 무용(無 用)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가 서술하고 있는 국문시가의 3가지 형태에 대한 서술이 실제 연행환경과 관련이 깊다는 사실은 그러한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텍스트 내용상의 시적인 표현, 산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분 량만이 쿠랑과 한국지 의 논자들이 파악할 수 있는 고소설과 분리된 국문시가의 율격적 특징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운문은 그 분량, 脚韻, 半諧音, 음절의 수 등이 정해지지 않아 그 본질을 규정짓기 어렵다. 산문과 구분되는 것은 시적인 표현과 상징의 어떤 기교이며, 또한 산문은 흔히 문구가 몇 페이지에 걸쳐 전개되는 반면 운문은 20음절이 넘지 않는 간략한 문구를 형성하고 있다.25)

19 세기말在外외국인의한국시가론과그의미 327 결국, 한시에비해국문시가는규칙적인운과자수등의규칙을발견할수없었기에그율격의원리와본질을파악할수없었던셈이다. 물론, 쿠랑은정작한국인들조차모호한생각밖에가지고있지않았던국문시가, 특히시조의율격에대한나름의고민을풀어내기위한나름의노력을기울였다. 이에 3행의절, 각운이나음절의장단의부재, 12~20음절의구성, 장단가락등과같은시조의형식적특성을짚어냈던것이다. 물론쿠랑의이와같은서술은시조의율격을풀어내는데에는기여하지못하였지만, 시조의문학적형식에대한접근이라는측면에서는매우큰의미가있다고할수있을것이다. 이처럼쿠랑은한국국문시가의고유한율격을규명할수없었기에, 민요를포함한모든시가작품들, 심지어통속적인것에서조차중국의사물에대한암시와중국시작품의무의식적인차용을순간순간발견할수 밖에없었던것이다. 26) 그렇지만또한가지염두에두어야할사실이있다. 국문이라는서기체계를지닌시가작품임에도그들이한국의고유성을발견할수없었던저간에는또다른사정이놓여있었기때문이다. 그것은한국시가를외국문학혹은 번역 이라는관점에서접근할때대면하는시가속언어의문제와관련된다. 또한한국시가어속한자어를보는해석의문제가포함된다. 1890년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는한국어문법서를출판하며, 서구인들의한국어에대한오해를지적한바있는데, 이는중요한시사점을던져준다. 이는 1890년대한국시가를접촉했던외국인들이대면했던현실이기도하기때문이다. 그것은첫째, 서구인의 말 (speech) 은언문 이라는인식이었다. 하지만언문 ( 국문 한글 ) 은단지 표기체계 (a system of writing) 이었을따름이다. 구어와문어를포괄하는서구의언어라는개념적범주로접근할수없는측면이존재했던것이다. 둘째, 한국어가 2개의언어로존재한다 는오해였다. 언더우드는 한자 = 문어, 언문 = 구어 라는인식이한국어의복잡한실상을이해할수없게하는허구적인것이란사실을알고있었다. 즉, 길가를지나가며들을수있는상인들, 중간계층, 머슴들 의언어와관리, 학자들의언어는서로다른 25) 모리스쿠랑, 이희재옮김, 앞의책, 71면. 26) 위의책, 71면.

328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6집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후자는 한자로부터 파생된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일 분 틀 림없는 한국어 란 점을 지적했다.27) 한국의 시가문학과 그 속의 한국어는 정서법 과 사전, 문법서가 상징해주는 언어세계, 국민(민족) 단위의 균질화된 인공어는 아 니었기 때문이다. 2) 오카쿠라 요시사부로, 朝鮮の文學 (1893) 외국문학, 민족[국민]문학으로서의 한국시가, 시가어, 번역의 문제 오카쿠라 요시사부로(岡倉由三郎, 1868~1936)가 1893년 哲學雜誌 8권 74~ 75호에 연재한 朝鮮の文學 은 19세기 말 재외 한국시가론의 유통과 관련하여 주 목해야 될 논저이다.28) 오카쿠라는 일본의 영어학자로, 또한 메이지시대 저명한 미술사가 이자 미술교육자 인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 1862~1913)의 동생으로 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1868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1887년 동경제국대학 문과대학 선과에 진학한 후 1890년 졸업했다. 1891-1893년 사이 한국의 서울에 서 일본어를 가르친 후, 1896년 도쿄고등사범학교의 강사가 되어 이듬해부터 영 어 및 영문학을 담당했다. 일본의 영어교육자였던 오카쿠라가 한국을 체험한 시기 는 한국인의 일본어교육을 위해 입국한 1890년경이었다. 그는 1891년 6월 20일 조선 정부의 초청으로 관립일어학교[日語學堂]의 교사를 맡아, 그 후로 2년여 동 안 그 직무를 역임했다. 그가 부임했던 日語學堂은 1895년 관립일어학교, 1906년 관립한성일어학교, 1908년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일어부로 변천하면서 1911년 11 월까지 존속하여, 일본어 보급에 큰 역할을 담당한 곳이었다.29) 한국지 에는 오카쿠라의 논문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오카쿠라의 논문 이 서구어가 아닌 일본어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미 모리스 쿠랑의 서설 은 오카쿠라의 논문을 포괄하며 집성할만한 한국문학론이었다. 하지만 쿠랑의 한국 서지 집필과정 중에는 사정이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점은 쿠랑이 서설 의 27) H. G. Underwood, Introductory remarks on the study of Korean, 韓英文法 (An Introduction to Korean Spoken Language)(Yokohama : Kelly & Walsh, 1890), pp.1~2. 28) 오카쿠라 요시사부로[岡倉由三郎], 朝鮮の文學, 哲學雜誌 8券(74~75號)(1893.4). 29) 稻葉繼雄, 홍준기 옮김, 구한말 교육과 일본인 (온누리, 2006), 248~251면.

19세기 말 在外 외국인의 한국시가론과 그 의미 329 말미에 오카쿠라의 논저를 중요한 참고문헌으로 밝힌 사실이 잘 말해준다. 쿠랑은 오카쿠라의 논문을 한글로 된 도서와 문학에 대해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려주고, 일본어번역으로 몇 몇 대중적인 시를 복제해 실은 논고 30)라고 평했다. 쿠랑의 지적대로, 오카쿠라의 논문은 고소설, 시가 등의 국문 문헌의 출판 유통 문제를 거론한 일종의 한국 문학론이다. 이미 한국 문학연구자에게 오카쿠라의 논 저는 고소설의 세책문화를 증언하는 자료로도 익히 알려져 있는 글이기도 하다. 하지만 쿠랑이 오카쿠라의 논문에서 고찰하고자 한 가장 중심대상은 어디까지나 한국시가 였다. 여기서 쿠랑이 지적한 한국의 대중적인 시 는 바로 시조창 가집 南薰太平歌 의 수록 작품들을 지칭하며, 오카쿠라의 논문에도 역시 그에 대한 원 문과 번역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오카쿠라가 19세기말 한국문학 연구동향을 의식한 지향점이 투영된 것임에 주목된다. 오카쿠라는 한국 설화(야담)를 번역한 파리외방전교회의 韓語文典 (1880), 설 화와 고소설을 번역한 알렌의 저술(1889)과 같이 한국의 이야기 문학의 성과물이 다루지 못한 한국문학의 미개척지를 소개하려고 했다. 그는 조선의 노래가 그 생 겨난 나라를 벗어나서 외국인에게 알려지는 것은 실로 이것이 처음이 라고 인식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처럼 하나의 논문이 아니라, 외국어 번역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학술적 업적으로 통용되는 이 시기의 특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번역대상으로 존재하는 한국의 국문은 이들의 선행연구와 오카쿠라의 논문을 묶는 중요한 연결고리였던 셈이다.31) 그것은 외국어로 한국어[한글 국문]가 조 명되며, 이에 따라 한국의 한글서적이 재조명되는 19세기 말 외국인 한국학의 학 술적 현장이었던 것이다. 기왕의 외국인 선행논자들과 마찬가지로 오카쿠라의 중심논지는 서구적 근대 문학작품이라고 그 의의를 평가할 수 있는 국문문학의 부재 이다. 국문문학은 표 기의 문제를 넘어 한국의 고유성과 등치되는 것으로, 그 부재는 일종의 한국 민족 고유성의 부재이자 중국문화에 종속된 한국의 민족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가 이러한 논거를 든 이유는 첫째, 한국에서 국문은 한문에 비해 사회적 위상이 낮은 30) 모리스 쿠랑, 이희재 옮김, 앞의 책, 79면. 31) 이상현 이은령, 19세기 말 고소설 유통의 전환과 민족지 로서의 고소설, 비교문학 59, 한국 비교문학회, 2013, 47~55면.

330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6집 것이며, 그 활용이 지극히 한정적인 측면 (1) 經書 등에 붙이는 한자의 음과 뜻, (2) 여성 그 밖의 한글을 모르는 사람들의 서간 (3) 소설 및 謳歌 에 있었다. 둘 째, 한국의 고소설은 비록 고유성을 지닌 작품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문예미가 결핍 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언문으로 씌어졌다고는 하지만 경작한 적이 없는 토지와 같이 그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본래의 고아한 취향도 없이 얼토당토않게 서로 덧붙인 사건을 표음문자로 써낸 것이다. 진실로 修辭의 방법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도저히 문학 이라는 명칭을 붙여 이것을 논평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를 않는다.32) 즉, 그가 보기에 한국의 고소설은 아동문학과 같은 서사 구성적인 결핍, 여성 및 하층의 애독자에 부합한 권선징악적 결말구조를 지닌 작품이었다. 또한 지극 히 조잡한 종이질과 저급한 인쇄 및 출판상태, 서적 판매를 본업으로 하는 책사 가 아니라 잡화상과 같은 가게 앞에서 판매되는 문학, 판매를 하는 입장에서도 부끄러워하는 서적이었다. 하지만 세책가를 통해서 그 명맥은 유지되고 있는 작 품들이었다. 그는 이야기책 이외에 문학으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대안적인 작 품을 노래(謳歌) 로 보았다. 왜냐하면 조선인이 사물에 느끼는 음악과 곡조에 따라서 나오는 노래야말로 무엇보다도 가장 문학적 趣味를 머금은 것 이었기 때문이다.33) 그것은 분명히 한국의 문학에 접근하는 생산적인 관점이기도 했다. 시가는 고 소설에 비해, 소설 중심의 근대 문예적 관점 속에서 학술적 의의가 규정될 소지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고전시가를 한국문학의 대 표적인 장르로 인식하고 문학텍스트로 접근할 때 대면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무엇 보다도 그 난점은 일차적으로 가집자료를 입수하기 어려운 사정에 있었다. 32) 岡倉由三郎, 朝鮮の文學, 哲學雜誌 8(74), 844면. 33) 위의 글, 846면.

19세기 말 在外 외국인의 한국시가론과 그 의미 331 노래를 모아서 출판한 책은 여기 조선에는 매우 드문 일이다. 명작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정도의 작품은 하나하나 돌아다니는 것을 빌려서 필사(筆寫)하여 비밀스럽게 간직한 것이므로 이것을 빌리는 것조차 매우 용이하지 않다. 나는 다행히 이즈음 남훈태평가 라는 제목의 한 가집(歌集)을 손에 넣고 언젠가 이것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였다.34) 이와 관련하여 쿠랑이 참조한 또 다른 중요한 한국문학론을 주목할 필요가 있 다. 1890년 발표된 애스턴의 논문에서 한국의 국문문학은 흥미롭고 고유한 국가 적인 특성 이 드러나는 경우가 없으며, 한국시가어를 구성하는 국문은 위대한 작 가가 부상하여 그들의 문학적 능력을 발달시키지 못한, 모든 언어 중에서 초보적 수준 으로 규정된다. 그가 보기에 그들의 서사시, 서정민요 에 부응할 작품도 한 국에는 없었던 것이다. 애스턴이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게 된 것은 국문시가 가집 자체를 입수하기 어려웠던 사정이 반영되어 있었다. 애스턴은 고유한 형태의 시 가 있다 는 정보를 분명히 얻었지만, 그는 이런 류의 시가 적힌 인쇄물이나 원고 를 결코 발견할 수 없었 기 때문이다.35) 이러한 사정을 감안할 때, 오카쿠라의 논 문(1893)에서 남훈태평가 에 대한 번역은 일본-서구의 동양학 학술네트워크에 한국시가를 알린 셈이 된다. 남훈태평가 소재 작품을 저본으로 한 게일의 시조 번역이 The Korean Repository의 권두시로 출현한 것도 1895년경이었다. 편집자 들은 이 번역물이 영미권에서는 최초의 시도이자 사례라는 점을 재차 강조했 다.36) 이러한 진술들은 이들의 번역이라는 사건 그 자체가 외부세계에 한국의 시 가문학을 유통시킨 계기이며, 고소설에 비해 시가문학은 외국인에게 공개된 것이 아니었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19세기 한국의 방각본 이라는 출판 및 유통문 화를 기저로 한 고소설에 비해, 외국인에게 한국의 시가문학은 널리 유통되지 않 았으며 외국인에게는 상대적으로 접촉하기 힘든 텍스트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가 집은 수집할 수 있는 대상일지는 몰라도, 시정 및 저자거리에서 구매할 수 없는 34) 앞의 글, 847~848면. 35) W. G. Aston, On Corean Popular literature, Transactions of the Asiatic Society of Japan Vol. ⅩⅧ(1890), p.106. 36) J. S. Gale, Korean Love Song, The Korean Repository Ⅱ(1895.4), p.123.

332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6집 텍스트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국문시가의 발견은 이처럼 서적으로 된 가집을 통 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이에 방각본으로 출판된 예외적인 형태인 남훈태평가 에 대한 외국인의 접촉 은 한국시가문학의 존재를 발견하게 해준 것이다.37) 쿠랑 역시 그가 한국서지 (1894)에서 상세하게 그 해제를 서술한 가집은 가곡원류 와 남훈태평가 2종이 었다.38) 두 가집은 한국서지 에서 한국문학의 소항목 詩歌類 에서 한국어로 쓰 인 시집의 대표적인 것으로 가장 먼저 소개된다. 두 가집에 대하여 쿠랑이 기술한 그 서지사항과 내용을 보면, 이는 쿠랑이 한국의 서목을 참조하여 제명만을 기재 한 것이 아니었다. 쿠랑은 두 가집의 총면수, 인쇄 및 책자의 형태와 같은 구체적 인 서지사항과 가곡원류 의 수록서문, 남훈태평가 에 재수록된 가곡원류 의 작품과 작가들의 특성 등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다. 즉, 그는 2종의 가집을 실제로 조사했고 점검했던 것이다.39) 두 가집의 소장처는 프랑스 동양어학교 도서관으로 되어 있으며, 이곳의 도서 들은 한국서적을 수집 기증한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 장서가이자 주한프랑스공사 콜랭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 1853~1922)의 안목이 반영된 것이었다. 이 가집의 자료적 가치는 인정되었던 셈이다. 비록 쿠랑은 가곡원류 에 수록된 작품을 노래 로 분명히 인식했지만, 그 曲調와 음악적 특성을 주목하지는 못했 다. 오히려 그의 초점은 가곡원류, 나아가 남훈태평가 의 언어에 맞춰져 있었 다. 오카쿠라, 게일 등과 같이 번역되어야 할 문학텍스트였다. 이때의 중요한 문제 는 오히려 표기의 문제였다. 가곡원류 의 노래들에 관해서, 쿠랑은 (한국에서 쓰 37) 성무경, 보급용 가집 남훈태평가 의 인간과 시조 향유에의 영향(1), 한국시가연구 18(한국시 가학회, 2005); 전재진, 남훈태평가 의 인간과 개화기 한남서림 서적발행의 의의, 인문과학 39(성균관대 인문과학연구소, 2007). 38) 모리스 쿠랑, 이희재 옮김, 앞의 책, 200~203면. 39) 쿠랑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살펴보면, 실제 가곡원류 를 참고하여 해제를 작성한 실상을 살필 수 있다. 목소리, 용어의 발음, 노래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내용. 이 저술 속에 담긴 노래 목록, 반주로 쓰이는 북을 칠 때 지킬 규칙들. 이 노래들은 中 韓 표현들이 漢字로 표시되어 한 글로 쓰여졌는데 내가 아는 바로 이 두 가지 문자를 혼합한 유일한 時調集이 아닌가 싶다. 이 노래들은 대부분이 조선의 高官들의 것이며 그 중 몇몇은 高麗朝, 나머지는 18C의 것들이다. 라 는 그의 서술 속에는 가곡원류의 서문과 발문에 대한 해석 및 가집의 서두에 수록되어 있는 가지 풍도형용, 매화점 장단, 장고장단, 가집수록 작품의 작가 양상 등에 대한 내용들이 축약적으로 담 겨져 있기 때문이다(위의 책, 200면).

19세기 말 在外 외국인의 한국시가론과 그 의미 333 이는) 한자(로 된) 표현[les expressions sino coréenes]이 漢字가 표시되어 국문으 로 씌어진 사실을 주목했고, 그가 접촉한 유일한 국한문혼용 표기의 가집이란 점 을 강조했다. 남훈태평가 의 언어 표현 역시 동일한 것이었지만, 이와는 달리 국 문으로 표기되었음을 지적했다. 더불어 이러한 언어표현은 한국인에게도 어려운 것이라고 했다.40) 가곡원류, 남훈태평가 의 국문을 쿠랑은 한자-한글 표현[les expressions sino coréenes]이라고 말했다. 그가 국문을 이렇게 지칭한 이유는 그가 보기에, 한 국에서 가장 통속적으로 쓰이는 말까지 중국식 표현으로 채워지지 않은 곳이 없 으며, 가장 하층민의 말 속에서도 들을 수 있고 통속소설이나 노래에서도 발견 되는 것이기도 했다. 중국식 표현 은 상용어휘의 반을 차지하며, 한국어에 있 어 불변의 어근이 되어 各格들의 接辭가 되기도 하고, 조동사인 하다 와 함께 형 용사나 동사로도 가능하게 쓰 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표현을 가능한 많이 넣는 글 이 대체적으로 격식이 있는 것이며, 한자 단어와 약간의 국문접미사가 포함될 뿐 이기에, 예상 못하고 듣는 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 이라고 했다. 쿠랑이 진술한 이 국문표현은 소설과 노래 에도 동일한 것이었다.41) 이러한 고소설과 시가의 국 문을 통해서 쿠랑이 도출한 결론은 역시 언어문화 속에서도 그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는 중국문화에 대한 종속성 이었다. 쿠랑과 마찬가지로 오카쿠라 역시 한국의 시가를 서적의 형태이자 언어 텍스트 로 접근했다. 물론 오카쿠라는 한국의 시가가 악기에 맞춰 구성됨으로 일본시가문 학의 5 7조와 같이 일정한 글자 수대로 운을 다는 특성과의 유사점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이 유사점의 발견이 쿠랑과 마찬가지로 한국 고유의 율격을 규정하는 곳 까지는 나아가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한국의 시가문학은 그 구상에 있어 서 순수한 조선풍 이라기보다는 중국풍 의 것이 많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한국 의 시가어 속 漢語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그의 눈에 남훈태평가 의 시조는 중국 의 시문에 표음문자를 섞어서 이곳에 곡을 붙여서 노래한 것 으로 보였다. 그는 그 예로 남훈태평가 소재 6수에 대한 그의 번역 및 주석을 제시했다. 여기서 그 40) 모리스 쿠랑, 이희재 옮김, 앞의 책, 200~201면(M. Courant, op. cit, pp.239~240). 41) 위의 책, 39면.

334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6집 가 중국풍과 한국풍의 예로 든 작품 세 수를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42) (一) 간밤에 부든 만졍도화 지거다 아희는 뷔를 들고 스로랴 는고야 낙화들 고지 아니랴 스러 무 ( 남훈태평가 #1) よむべ吹きにし風の為て / にはの面のもも皆散れり/ 童子は 箒掃へて / 散りにし花を振かむとす / 落花とて花ならずや は / ははく心ぞいぶかしき(지난밤 불어온 바람 때문에 / 정원의 복숭아꽃 모두 떨어지니 / 동자는 비로 쓸어서 / 떨어진 꽃을 없애버리려 하는데 / 낙화인들 꽃이 아니냐) (二) 인 이 둘 솃 이 몸이 네다셧가 비러온 인 이 꿈에 몸 가지구셔 일 에 살풀닐만 고 언제 놀녀 ( 남훈태평가 #7) いのちは二つ三つやある / 此身とて四つ五つつかは / 憐れ はかなき人の身の / 夢見る心地する物を / 悲しみてのみ過 ぐしなば / いつの世かまた楽しまん(목숨이 두셋 있고 / 이 몸 또한 네다섯인가 / 가련한 이내몸은 / 꿈에 뵈는 물건 인 걸 / 슬퍼만 하며 보내노니 / 어느 때에나 즐겨보려나) (三) 록초 장졔상에 도긔황독 져 목동아 셰상 시비사를 네아느냐 모르느냐 그 아희 단젹만 불면셔 소이부답 ( 남훈태평가 #32) 草みどりなる岡の上 / あめ牛に乗りり 行く / 彼の牧童に 物問はむ / 浮き世の中の事の是非 / 汝知りてか知らずてか / 童子は笛のみ吹きすさび / ほほゑみしのみ答へせず(푸르러 지는 언덕 위에 / 저 소에 걸쳐타고 가는 / 저 목동에게 물 어보노니 / 덧없는 세상사의 시비를 / 너는 아느냐 모르냐 / 동자(童子)는 피리만 불면서 / 웃기만 하고 대답 않네) 오카쿠라는 (一)과 (二)에 관해서는 한자가 적게 포함된 시가이며, 그 구상에 있어서 조선인의 사상을 드러내 준다고 말했다. 특히, (二)는 미래에 희망이 전 혀 없는 사방이 비참한 모습으로 둘러 쌓여 만사에 희망을 잃은 나머지 무슨 놈의 세상인가 라고 말하는 것 같다 고 지적했다. 이러한 종류의 시가가 조선인의 마 음으로 보기에 마땅하며 남훈태평가 속에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했다. 이에 비해, (三)은 한자가 많이 포함된 경우이며, 구상이 중국풍인 사례로 들었다. 그의 이러한 지적은 어디까지나 한국시가작품에 한자 비중에 초점이 맞춰진 견해였다. (三)의 경우 笑而不答 등과 같은 한국어 통사구조가 아니라 한문 통사구조의 모 습은 (一)과 (二)보다 더욱 중국풍의 작품으로 인식한 원인으로 보인다. 이는 사실 訓讀 이라는 일본의 어문전통과는 다른 한국 시가문학을 보는 일종 의 착시현상이기도 했다. 쿠랑은 한국도서 중에 한자와 한글이 혼용된 경우 가 있으나, 이 혼용은 일본인이 자신들의 철자표시와 함께 표의문자[한자]를 사용하 는 것과는 다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글은 傳寫를 위해서건 번역을 위해서건 한자 본문 옆에 놓여 문장을 설명하고 글자의 발음을 표시하는 데 사용되나 한자 42) 岡倉由三郎, 앞의 글, 846~847면.

19세기 말 在外 외국인의 한국시가론과 그 의미 335 문장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되어 한글은 교육받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첨가될 뿐인 것이었다. 또한 쿠랑은 한자와 한글의 혼용되며 한글이 문법적 小辭로 한 문장 안에 들어 있는 경우 를 가곡원류 밖에 확인하지 못했음을 고백했다.43) 오카쿠라가 번역한 남훈태평가 의 표기는 어디까지나 국문이었으며, 수록 작 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내용은 남녀 간의 사랑노래였으며, 비관적이거나 인생무상 차원의 작품들의 분량은 그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은 것이었다.44) 이러 한 관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게일이 The Korean Repository에 번역한 작품들이 더욱 남훈태평가 의 전반적 작품경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는 오카쿠라의 남훈태평가 번역 속에는 오히려 그의 주관적인 해석적 관점이 깊이 개입되어 있었음을 확인케 한다. 특히 그가 한국인의 사상과 한국시가의 보 편적 형태라고 지적한 (二)는 비참한 주변 상황 속에 인생의 좌절감을 느끼고 있 는 화자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라는 그의 해석과 달리, 오직 이 하나뿐인 몸으로 단 한번밖에 살 수 없는 소중한 인생에 빌려온 인생, 꿈과 같은 몸을 가지 고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만 가득 안고 살아가느니, 오히려 걱정 보다는 여유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자는 긍정적인 태도를 가진 작품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속에는 일본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폄하의 시선, 한국 민족성 담론이 개입된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시가에 함축된 시가어의 의미를 번역하는 이 행위는 당시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난제였던 사정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오카쿠라의 진술이 주목된다.45) 오카쿠라는 한국시가 어에 그가 접촉한 당시의 한국말에는 이미 없어졌지만 글에는 아직 존재하는 것 도 있고 또한 근래에 생겨난 말이 글에는 알려지지 않은 어격도 있어 언문(言 43) 하지만, 이러한 사정은 쿠랑이 접했던 가집이 남훈태평가 를 제외하고, 가곡원류 뿐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 가곡원류 외의 다양한 가집들이 한글과 한자를 병용하여 표기하 고 있다. 모리스 쿠랑, 이희재 옮김, 앞의 책, 21면 참조. 44) 남훈태평가 계열의 12권의 가집에 중복 수록 되는 작품 242수를 주제별로 분석한 고미숙의 논 의( 19세기 시조의 예술사적 의미 (태학사, 1998))에 따르면 남훈태평가 계열의 가집에 수록된 작품들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내용이 바로 사랑과 그리움에 대한 노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사랑과 그리움에 대한 노래가 38% 정도로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어 무상취락에 대한 내용의 노래가 19%, 강호한정을 노래하는 작품이 14% 정도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5) 岡倉由三郎, 앞의 글, 847~848면.

336 동아시아문화연구제 56 집 文 ) 사이에는다소다른것과같은것이있다 고말했다. 즉, 그가보기에한국어는언문일치가상정된언어가아니었으며, 구절과곡조를정리하기위해 생략혹은轉置 등의문식이존재했기에, 번역하기쉬운대상은아니었던것이다. 그는시가에표현된본래한국어를인쇄하는것의어려움을토로했다. 즉, 한국어를인쇄하는것자체가난제였던시기, 그의한국시가번역이출현한것이었다. 그는자신의일본어번역문이 실로한푼의가치도없는것은스스로도인정하고부끄러워하는바 라는겸사를덧붙였다. 아울러독자들이그의번역문을통해, 조선문학의일부분이나마살펴볼수있다면 그는깊은영예라고이야기했다. 여기서독자는실제로시가문학을향유했던한국인을지칭하는것은아니었으며, 그의번역목표는시가를향유하는한국인의감성과체험을그대로재현하는행위를의미하는것도아니었다. 오히려이속에서한국시가는번역되어야할언어였다. 한국시가의언어가번역의대상으로소환됨은시가속의언어를일종의의사소통의도구, 즉, 사전과문법서가표상해주는규범화된언어로재편하는행위였다. 한국의국문시가를번역한결과물이생성되었다는것은, 시가어를해독가능한 외국어 = 한국어 로재편하는행위였기때문이다. 쿠랑은오카쿠라의논의를선행연구로수용했다. 오카쿠라의논조와비교해볼때, 실제쿠랑의중심기조는큰변별점을지니고있지않았다. 조선문헌에대한지금까지의긴고찰은, 우리에게그것이독창적이지못하고, 언제나중국정신에젖어있으며, 흔히단순한모방에그친다는점들을보여주었다 와 중국문학과역시외부로부터빌어왔으나독창적인일본문학보다는뒤떨어진것이지만, 조선문학은몽고나만주, 그리고그외의중국을본뜬국가들이내놓은것보다는훨씬우수하다 46) 라는 서설 의결론은이러한점을잘말해준다. 왜그랬던것일까? 그것은 1890~1892년사이그가체험했던한국의출판문화와오카쿠라의논의가상당량일치했기때문이다. 또한문학이라는개념을투영하며, 한국국문시가의언어문제를논하고자할때, 그의견해는오카쿠라와변별되는것이아니었기때문일것이다. 46) 모리스쿠랑, 이희재옮김, 앞의책, 73~74 면.

19세기 말 在外 외국인의 한국시가론과 그 의미 337 4. 맺음말 지금까지 살핀 재외에서 출판된 외국인의 한국시가론 3편은 19세기 말 한국 시가의 유통의 전환을 보여주는 사례이자 사건이다. 이는 한국의 시가문학이 한국 의 출판문화 혹은 한국인 독자가 향유한 제한된 시공간에서 소통되는 문학이 아 니라, 일종의 혼종성을 지닌 텍스트로 변모됨을 보여주는 증언이기 때문이다. 이 들의 증언은 서구문화와는 다른 이문화의 산물이자 번역되어야 할 외국문학 작품, 한국민족을 알기 위해 살펴야 할 민족지 로 존재하게 된 한국시가의 새로운 형상 을 보여준다. 이는 물론 지금까지 검토한 세 편의 논저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1893~1900년 사이 한국시가론을 제시했던 외국인들의 논의가 지닌 공통된 함의 였다. 오카쿠라와 모리스 쿠랑의 한국시가론은 그 시원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재외 공간에서 한국의 언어생활, 교육, 문화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공통 적 논의, 한국에는 한국의 고유성과 문예미를 지닌 자국어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는 한국문학부재론 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한국문학부재론 은 결코 동일한 차원의 담론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각기 프랑스정부가 파견한 외교 관, 조선정부가 초빙한 漢城 日語學堂의 교사로 1890~1893년 사이 한국을 체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논저 속에는 한국의 시가문학이란 낯선 존재를 대면했던 문제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19세기 말 한국 출판유통문화의 현장을 접하며 서구적 근대문학개념을 통해 한국시가문학을 설명하고, 외국문학 으로 시가문학을 번역해야했던 그들의 처지와 상황이다. 하지만 러시아 대장성의 한국지 는 이러한 낯선 문화와 외국인의 이질적 대화 를 모두 반영할 수는 없었다. 물론 일본어로 쓰인 언어로 인한 문제였을지 모르나, 남훈태평가 에 대한 최초의 외국어 번역 사례인 오카쿠라 논저 속 낯선 시조작 품에 대한 번역은 반영되지 못했다. 쿠랑이 한국시가문학의 전체상을 구성하는 과 정, 현지인의 증언을 통해 시가의 율격문제를 탐구하는 과정은 소거되었다. 오히 려 남겨진 것은 시조를 서적의 형태로 접촉하고 자국어(한글 언문 국문)로 된 한국의 국민문학으로 소환한 결과물, 문학적 지식으로 전환된 한국의 시가문학이 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국지 가 보여준 소환의 방식은 결국 본래 음악이자 노래

338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6집 로 향유되던 한국인의 시가를 문학텍스트로 재편하는 행위였다. 나아가 한층 더 오랜 시간 한국과 한국인을 체험했던 개신교 선교사들의 시가 번역 및 시가론이 한국지 에 포괄되지 못한 문제를 간략하게나마 언급할 필요가 있다. 19세기 말 한국 개신교선교사, 그들의 영미정기간행물에 수록된 시가관련 기록의 존재는, 본고에서 검토한 3편의 논저들 즉, 재외에서 출간된 단행본 및 논 저와 보색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논저 역시 문명론의 관점을 완연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 속에는 개신교 선교사들 스스로 내세웠던 자신의 입장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한국에 대한 오랜 체험을 바탕으로 상대적으로 한국을 깊이 이해했던 개신교 선교사들이 자신들과 서구인들을 변별시킨 바로 내지인의 관점 이다. 즉, 증기선 위 관광객, 여행객 이라는 입장에서 관찰되는 피상적인 한국의 모습들, 오해에 찬 시각에서 묘사되는 한국과는 다른 모습, 그들이 제시한 것은 진정한 한국의 모습 이라는 논리였다.47) 그럼에도 한국지 에 반영된 개신교 선 교사의 한국시가론은 헐버트의 논저(1896)가 유일한 것이었다. 헐버트의 시가론은 쿠랑 및 오카쿠라의 한국시가론이 보지 못한 한국 시가문학 의 象을 포착한 것이었다. 그는 두 사람 보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본 한국시가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그려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국시가에 대한 축자역 만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시어에 담긴 한국인이 지니고 있는 감성과 의미 를 번역 하고자 했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쿠랑 오카쿠라와는 완연히 변별되는 모습이었다. 이는 한국의 국문시가어 속에서 그 비중을 차지하는 한자어의 문제를 통해 중국문화의 종속성을 논하는 관점보다, 시가를 향유하는 한국인에 더욱 접근 한 시각이었다. 즉, 헐버트는 한국 시가작품과 교감의 지점을 모색하고자 하는 지 향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지향점은 한국지 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한국지 가 헐버트의 논의를 참조 표시한 부분을 발췌해 보면 다음과 같다.48) 47) 류대영, 초기 미국선교사 연구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175~179면; A. Schmid, 오리엔탈 식 민주의의 도전 Anglo-American 비판의 한계, 역사문제연구 12(역사문제연구소, 2004), 168 면; 개신교 선교사인 게일과 헐버트의 시가론에 대한 논의는 김승우의 구한말 선교사 호머 헐버 트(Homer B. Hulbert)의 한국시가 인식 과 강혜정의 논문, 94~114면을 참조. 48) H. B. Hulbert, Korean Poetry, The Korean Repository Ⅲ(1896.4).

19세기 말 在外 외국인의 한국시가론과 그 의미 339 한국인들은 국민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특정인들에 의해서 창작된 모국어로 된 많은 노래와 시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들 노래와 시의 저자의 이름은 대부분 남아 있지 않다. 국민의 순수한 시가집은, 현재 알려지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간행되지 않았으며 민요의 대부분은 심지어 전혀 기록되지 않았다. 한국의 국민시가는 순수한 서정시이며 서사시적인 시가의 典型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있다. [①강조 및 밑줄 : 인용자]49) 상기 인용문 및 이후의 본문에서 헐버트의 논의가 인용된 사례는 ①에 불과했 으며, 그 나머지 기술은 쿠랑의 서설 에 기반하고 있었다. 또한 한국지 가 한국 시가의 표본으로 삼은 한국의 국문시가는 헐버트의 번역문이 아니라, 쿠랑의 한 국서지 에 수록된 것이었다. 이처럼 헐버트의 번역이 유통되지 못한 그 이유는 무 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헐버트의 번역문은 축자역이 전제되지 않은 의역이며, 해당원문의 출처를 병기하지 못한 측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가곡을 논한 헐버트의 글은 이러한 결핍을 충분히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의 논의는 원문과 번역문이 병기되어 있으며, 음악과 분리되지 않은 한국 국문 시가의 율격을 말해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훌륭한 논의였다.5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헐버트의 논문이 한국지 에 반영되지 않았던 것은 당 시 한국인에게 향유되는 음악 이자 노래 가 아니라 시문학 으로 한국의 국문시 가를 말하고자 한 한국지 의 지향점 때문이었다. 또한 학술적 논의로 그 타당성 을 보장받을 수 있는 논의가 쿠랑의 논의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문시가를 음악 이 아닌 서적 속의 언어텍스트 이자 문학 으로 소환하는 방식에, 부합한 시각과 지식은 쿠랑의 논의였던 것이다. 다만, 한국 시가문학의 장르적 특성을 순수한 서 정시로 규정한 헐버트의 진술만이 이 소환방식에 부합한 것이었던 셈이다. 사실 문학 이라는 근대지식으로 한국의 시가문학이 소환되는 사건은 19세기 말 한국인 이 시가를 향유한 실상과 교감의 문제와 별개의 영역이었다. 쿠랑을 비롯한 외국 인들이 대면한 상황은, 한국 국문시가의 율격을 말할 수 있는 한국인의 부재, 정 49) 러시아 대장성,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앞의 책, 406면. 50) H. B. Hulbert, Korean Vocal Music, The Korean Repository Ⅲ(1896.2).

340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6집 서법이 완비되고 규범화된 언어로 근대 인쇄물에 새겨진 국문시가의 부재, 국문시 가를 한시문과 대등한 문학작품이자 고전으로 인식하는 한국인 스스로의 언어-담 론적 기반의 부재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지고 있었다. 쿠랑은 한국서지 의 보유편 (1901)에서 서설 (1894)과는 달리, 그는 한국의 국문 글 쓰기를 통해 한국의 자주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변모된 국문(언문 한글) 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다.51) 쿠랑이 보여준 이 시선의 변모와 그 계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19세기 말 개신교 선교사의 출판물, 學務衙門이 출판한 교과서, 官報, 漢城 旬報 獨立新聞 每日新聞 皇城新聞 등의 신문들, 1897년 이봉운(李鳳雲) 이 지은 한국 최초의 근대문법 연구서로 평가받는 國文正理 와 같은 한국인의 저 술 등을 통해, 그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것은 1890~1892년 사이 체험했던 한국의 모습과 다른 국문의 발전상이었다. 즉, 이는 그의 국한문 혼용문 체험이 가곡원류 로 한정되었던 시기와는 변별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한자를 단어들의 語根에, 한 글을 속사나 동사의 어미에 사용하였다. 물론 이는 수세기 전부터 거의 모든 도서 에 이와 비슷한 혼용문자를 사용해온 일본에의 모방 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개선의 결과로, 교육의 확산과 한글문학의 창조 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그는 한국인에 의해 한글로 쓰인 최초의 한글문법서 를 보았다. 즉, 한국어로 한국 의 학술을 말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변모에 동참한 외국인은 쿠랑 과 같은 재외 한국학자가 아니라, 한국의 개신교 선교사였다. 요컨대, 한국지 에는 반영되지 않았지만, 1893~1894년 한국의 시가문학이 발견되고, 학술적으로 소환되 며 번역되는 지점 사이 한국은 분명히 변모되고 있었다. 그것은 쿠랑과 다른 헐버트 의 시가론이 지향했던 지점이자 그 탄생의 저변이기도 했다. 투고일 14.01.06 심사완료일 14.02.04 51) 모리스 쿠랑, 이희재 옮김, 앞의 책, 767면. 게재확정일 14.02.10

19세기 말 在外 외국인의 한국시가론과 그 의미 341 참고문헌 1. 자료 모리스 쿠랑, 韓國書誌, 이희재 옮김, 일조각, 1997((Bibliographie Coréenene, 1894~1896, 1901). 러시아 대장성 지음, 국역 한국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옮김, 전광사업사, 1984(러시아 대장성, KOPEИ, S-Peterburg, 1900)). H. B. Hulbert, Korean Poetry, The Korean Repository Ⅲ, 1896.4. H. B. Hulbert, Korean Vocal Music, The Korean Repository Ⅲ, 1896.2. H. H. Underwood, A partial Bibliography of Occidental Literature on Korea, 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Royal Asiatic Society 20, 1931. 오카쿠라 요시사부로[岡倉由三郎], 朝鮮の文學, 哲學雜誌 8券, 74~75號, 1893.4. 2. 논저 강혜정, 20世紀 前半期 古時調 英譯의 展開樣相,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고미숙, 19세기 시조의 예술사적 의미, 태학사, 1998. 고영근, 민족어학의 건설과 발전, 박문사, 2010. 김승우, 구한말 선교사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의 한국시가 인식, 한국시가연구 31, 한국시가학회, 2011. 김승우, 한국시가에 대한 구한말 서양인들의 고찰과 인식 : James Scarth Gale을 중심으로, 어문논집 64, 민족어문학회, 2011. 김승우,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의 아리랑 논의에 대한 분석적 고찰, 비교한국학 20(2), 국제비교 한국학회, 2012. 김승우, 19세기말 미국민속학보(The Journal of American Folklore) 에 소개된 한국시가의 특징, 우리문학 연구 40, 한국문학회, 2013. 김승우, 선교사 프레더릭 S. 밀러(Frederic S. Miller)의 한국시가론, 비교한국학 21(1), 국제비교한국학회, 2013. 류대영, 초기 미국선교사 연구,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백주희, J. S. Gale의 Korean Folk Tales 연구 : 임방의 천예록 번역을 중심으로, 성균관대 석사학위 논문, 2008. 성무경, 보급용 가집 남훈태평가 의 인간과 시조 향유에의 영향(1), 한국시가연구 18, 한국시가학회, 2005. 송민규, The Korean Repository에 나타난 ODE 연구, Journal of Korean Culture 22, 한국어문학국제학술 포럼, 2013. 송민규, The Korean Repository에 소개된 Love Song 연구, 현대문학이론연구 52, 현대문학이론학회, 2013. 송민규, The Korean Repository에 소개된 Song 연구, 비교한국학 21(1), 국제비교한국학회, 2013.

342 동아시아문화연구제 56 집 오윤선, 韓國古小說英譯의樣相과意義, 고려대학교박사학위논문, 2005. 오윤선, 한국고소설영역본으로의초대, 지문당, 2008. 이민희, 파란, 폴란드, 뽈스카, 소명출판, 2005. 이상현, 제임스게일의 구운몽 벙역과문화의변용, 성균관대석사학위논문, 2005. 이상현, 제임스게일의한국학연구와고전서사의번역 : 게일한국학단행본출판의변모와필기, 야담, 고소설의번역, 성균관대박사학위논문, 2009. 이상현, < 춘향전 > 소설어의재편과정과번역 : 게일 < 춘향전 > 영역본출현과그의미, 고소설연구 30집, 한국고소설학회, 2010. 이상현, 근대조선어 조선문학의혼종적기원- 조선인의심의 (1947) 에내재된세줄기의역사, 사이間 SAI 8,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 2010. 이상현, 언더우드의이중어사전간행과한국어의재편과정, 동방학지 151, 연세대국학연구원, 2010. 이상현, 삼국사기 에새겨진 27년전경성의추억 모리스쿠랑과한국의고전세계, 국제어문 55, 국제어문학회, 2013. 이상현, 한국고전번역가의초상 : 게일의고전학담론과고소설번역의지평, 소명출판, 2013. 이상현, 19세기말한국시가문학의구성과 문학텍스트 로서의고시가-모리스쿠랑한국시가론의근대학술사적의미, 비교문학 61, 한국비교문학회, 2014. 이상현 이은령, 19세기말고소설유통의전환과 민족지 로서의고소설, 비교문학 59, 한국비교문학회, 2013. 장효현, 한국고전소설영역의諸문제, 고전문학연구 19집, 한국고전문학회, 2001. 장효현, < 구운몽 > 영역본의비교, Journal of Korean Culture 6, BK21 Korean Studies, 2004. 전재진, 남훈태평가 의인간과개화기한남서림서적발행의의의, 인문과학 39, 성균관대인문과학연구소, 2007. 정병설, 러시아상트베테르부르크동방학연구소소장한국고서의몇몇특징, 규장각 34,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13. 조재룡, Les premiers textes poétiques coréens traduits en franc ais aˋ l époque de l ouverture au monde, 통번역학연구 17(4), 통번역연구소, 2013. 탈랄아사드, 영국사회인류학에서의문화의번역이라는개념, 제임스클리포드, 조지 E 마커스편, 이기우역, 문화를쓴다-민족지의시학과정치학, 한국문화사, 2000. 허경진 유춘동, 러시아상트베테르부르크국립대학과동방학연구소에소장된조선전적에대한연구, 열상고전연구 36, 열상고전연구회, 2012. A. Schmid, 오리엔탈식민주의의도전-Anglo-American 비판의한계, 역사문제연구 12, 역사문제연구소, 2004. 稻葉繼雄, 홍준기옮김, 구한말교육과일본인, 온누리, 2006.

19세기 말 在外 외국인의 한국시가론과 그 의미 343 th The Foreign Poetry Discours in late 19 Century and its Meanings Lee, Sang-Hyun* Youn, Seol-Hee** 52) The purpose of study is to analyze and review the traces of Maurice Courant (1865~1935), Okakura Yoshisaburo (1868~1936), and Russian Finance Ministry in regards to Korean poetry. Through this, the report is to study the characteristics and meanings of Korean poetry discourse of Foreigners in late 19th century. In particular, reviewing the 3 studies as examples of Korean poetry discourse distributed by foreigners in late 19th century as modern knowledge, this report has focused to study over the process and significance of late 19th century Korean poetry being established as modern knowledge in a form of literature. Furthermore, this report is to examine the directions and practices of foreign scholars, which were lost within such establishment. Russian financial ministry s KOPEИ is a collection of Korean studies of foreigners untill year of 1900. KOPEИ, characterized as publication writing about Korea in general, has set a separate chapter on a specific subject, Korean Literature, which is the difference compared with other writings of westerners on Korea. The most used reference by editors of KOPEИ on composing a whole chapter of Korean Literature was Courant s Introduction(1894). This was * ** HK Research Professor, Institute of Jeompiljae, Pusan National University Completed the doctor s course, The department of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Sung Kyun Kwan University

344 동아시아문화연구제 56 집 because Courant s Introduction was not only a description on Korean Literature in general, but also was the first organized discussion about Korean literature under modern studying categories and system of western countries. Also, through enough bibliographic research and demonstration, the Introduction has made objectivity against ready-existing Korean Literature discourse of Westerners which asserted that Korea does not have a native language-composed, highly literary and unique national literature. However, the writings on Korean Literature of Courant and Okakura Yoshisaburo holds experiences which were not involved in KOPEИ :they are the difficulties Courant and Okakura had in discussing the Korean Poetry which was new and unfamiliar to western literature concepts. At the same time, these are the works that are the threshold of Korean poetry literature being converted from musical format like lyrics of songs into literary text; being separately reviewed from Chinese written poetry as a Korean national literature. On the other hand, KOPEИ could not blend the foreign contact to Korean poetry and the translating process. Courant has discussed the subject and metrical issues of Korean poetry in order to redefine Korean poetry as a literary text : pointing out the influential relationship with Chinese literature and the characteristics of subject in poetry on one side, Courant had taken Korean poetry as literary text and discussed the literary format on the other side, let alone the frequency in rhyme, numbers of letters and meter in actual counts. Furthermore, Okakura Yoshisaburo s report, which Courant has taken under consideration when writing the Bibliographie Coréenne, is to be highlighted for translating the works of Sijo in 19 th century Bang-gak-bon Ga-jip Nam-Hun-Tae-Pyeong- Ga. This is because such was the first experiment of interpretation of Korean Literature coming from Japan-Western Oriental studies network. Also, Okakura was interested in Language-Korean and Chinese character-expression which was used in Korean poetry. He had taken Korean poetry pieces as

19세기 말 在外 외국인의 한국시가론과 그 의미 345 foreign literature piece and as a subject of translation, which led him to concentrate on translating and reviving the Korean poetry with its own characteristics untouched. These efforts of Courant and Okakura were, along with other poetry discourse of foreign missionaries, were not accepted or given credit by KOPEИ. For example, the only foreign poetry discourse published in KOPEИ, of Herbert, was far more disregarded compared to that of Courant s ; however, Herbert s poetry discourse was not only very close to actual mode in performance of the Korean poetry then, but were a highly valuable attempt interacting with Korean poetry pieces which were unfamiliar for westerners even translation itself. Such disregard shows direction of KOPEИ focussed on reviewing Korean poetry analyzed under Modern Knowledge frame. Key Words : National discourse, Language Nationalism, Korean Poetric Meter Theory, Translation of Korean Poetry, KOPEИ(1900), Maurice Courant, Bibliographie Coréenene(1894~1896, 1901), Okakura Yoshisaburo(岡倉由三郎), Korean Literature[(朝鮮の文學)(1893)], Gagokwonryu, Namhuntaepyeongg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