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 여러분, 우리 서로 칭찬합시다! 2016년 1월 22일(금) 사할린주 (음력 12월 13일) Пятница 22 января 2016 г. 3(11671) 사회정치신문 Общественнополитическая газета Сахалинской области 1949년 6월 1일 창간 С Э К О Р Ё С И Н М У Н ( Н О ВА Я К О Р Е Й С К А Я ГА З Е ТА ) Цена свободная 단신 사할린주재정상으로 안나 하르첸코 부임 사할린주 재정상대리로 하르첸코 안나가 임명되었다고 밝혀졌다. 그 전에 그는 약 7 년간 아무르주 재정부상으로 활약했다. 전에 사할린주 재정상은 주정부 부수상 을 겸했는데 지금부터 그는 상의 직무만 맡 아하고 부수상은 다른 이가 될 것으로 알려 졌다. 작년 3월부터 전 사할린주지사 알렉산드 르 호로샤윈이 체포된 이후 주정부내 인사 이동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 호로샤윈 전 지사와 함께 근무한 주 정부 부수상은 한명도 남지 않았고 부처 상 으로는 한 2-3명(교육상, 사회보호상 등) 이 남았다. 풍설로 스키장 케이블카 곤돌라 떨어져 유즈노사할린스크, 주현절 맞아 1월 19일은 러시아 정교회 명절 주현절이다. 이날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전통적으로 워스크레센스키 성당에서 명절예배가 있은 뒤 정교인들의 행진이 있었다. 보통 이날 맑고 추운 날씨였는데 이번에는 아침에 시작된 눈보라 때문에 낮 온도는 그리 낮지 않았지만 바람이 세서 추웠다. 다행히 이때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았다. 행진 목적지가 이 전과 같이 가가린공원 웨르흐녜예호수였지만 행렬은 이번에 공원 정문이 아니라 동쪽 편 문으로 들어갔다. 이번에 도 신성화된 호숫물에서 많은 사람들이 수영했다. 그중에는 사할린주지사 올레그 코제먀코를 비롯 주정부 관계자들 도 있었다. 전통에 따라 많은 주민들은 신성화된 물을 집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이예식기자 촬영) 2016년 사할린에서 새 의료시설 12개 완공 계획 2016년에 사할린주에서 의료시설 12개를 신축할 계획이다. 그중 9개는 의료조산실, 아니와 구역 트로 이츠코예촌 진료소(교대당 120명 방문), 주종양센터 의 외과건물과 주산기센터 등이다. 섬지역 의료개발 에 2016년에 주예산에서 185억 루블리를 할당할 예 정이다. 이것은 작년 예산보다 거의 10% 더하다. 사회적 약국 확대 사업도 계속할 예정이다. 연말까 지 지역에서 새 사회적 약국 5개가 문을 열 것이다. 작년부터 주의치프로그램에 따라 추가로 <전쟁의 아이(대조국전쟁 시 미성년)>들이 무료로 의치서비스 를 받게 되었다. 2016년에 이 서비스를 2800여명이 받을 것이다. 이에 8850만루블리가 지출된다. 지난해 총결을 지으면서 주보건부 관계자는 2015 년에 일련의 새 중요 시설을 운영하였다고 지적했다. 실례로, 쉬코탄 섬에서 병원-진료소(교대당 50명 방 문), 오하중앙구역병원 소속 약국, 노글리키중앙구 역병원의 전염과 등이다. 작은 마을들(위소코예, 워스 크레센스코예, 야스노모르스코예, 미출룝카 촌)에서 도 진료시설이 준공됐다. 사할린취업관리국, 2015년 사업 총결 사할린취업관리국에서 지난해 총결보고가 있었다. 관리국 관계자에 따르면 작년에 외국인 1만9500여명이 취업 서류를 작성했는데 그중 6%는 고급 전문가, 30%는 전문근로자, 64% 는 노동시장에 요구되는 노동직업의 근로자들이다. 근로자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한국, 베트남과 인도에서 가장 많이 사할린을 찾아온다. 비자 없이는 전 독립국가 연합나라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킈르기즈스탄, 우크라이나 등 국민들이 취업하러 사할린으로 오고 있다. 외국인 근로자 대다수는 건설분야(57%), 소비서비스분야 (11%), 농수산업(6%), 가공업체(5%)에서 일하고 있다. 취업국은 주에서 우선적인 취업권리는 사할린주민들에게 있 다고 밝혔다. 2015년에 외국인근로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예상했 던 일자리에 사할린주민 750명이 취직했다고 알려졌다. 취업관리국에 따르면 현재 사할린주에는 전문가들이 많이 부족 하다. 특히 고급 엔지니어기술전문가, 그리고 높은 수준의 전문노 동자들이 부족하다. 가장 많은 근로자들이 요구되는 분야는 건설분 야다. 거기에는 근로자 1만1900명이 필요하다고 알려졌다. 또 취업관리국은 2011년부터 <외국에서 거주하던 러시아국 민들의 사할린주 자발적 이민 협조>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2015년에 이민프로그램에 850만루블리를 지급했다면 2016년에 는 550만루블리를 지불할 계획이다. 2016년 신문주문 계속! 존경하는 독자 여러분! 2016년 새고려신문 구독을 계속 한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앞으로도 사할린 한민족지를 애독하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1개월 구독료는 72루블리 55코페이카입니다. 신문은 사할린 모든 우체국에서 신청 할 수 있습니다. 신문 인덱스는 53740입니다. (본사 편집부) 1월 19일 낮에 풍설로 인해 <고르늬 워 스두흐>스키장 케이블카 곤돌라 중 하나가 떨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와 관련해 사할린주 올레그 코제먀코 지사는 사건 조 사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 같은 날 저녁에 사할린주스포츠청소년정 책상 안톤 자이체브는 <고르늬 워스두흐> 스포츠관광종합체 대표이사 안드레이 아계 옌코 해임 명령을 내렸다. 곤돌라가 떨어졌지만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그런데 바람이 초속 27미터였던 당 시에 왜 케이블카가 작동돼 있었는지? 현재 <고르늬 워스두흐>스키장은 사할 린주 선도개발지역 중 하나이다. 새해방학 때 본 스키장 이용에 대한 정권당국측과 방 문객측의 불만이 많았었는데다가 위 같은 사건이 터져 지도자 해임문제가 당연하다고 들 한다. 대표이사 대리임무는 임시 왈레리 포포 브 부대표가 맡을 것이다. <에트노스>학교 한민족과 20주년 기념공연 준비 2월 8일 음력설날 오후 6시 30분 유 즈노사할린스크시 <스톨리차>센터 콩그레 스홀에서 <에트노스>아동예술학교(교장 에 이지노와 나탈리아) 한민족예술과의 공연 이 있을 것이다. 주최측에 따르면 <계절> 갈라콘서트는 한민족과 20주년 기념행사다. <에트노스>학교 한민족과는 2015년 9 월 1일에 20주년을 맞이했지만 학생들이 다양한 축제, 행사에 참가하기 때문에 기념 공연이 2016년 겨울로 미뤄졌다. 마침 한민 족과는 해마다 설기념공연을 개최하기 때문 에 이 행사를 개설기념행사겸 하기로 했다. 공연입장은 유료다. 달력을 전달하기 위해 이미 보도된 바와 같이 1월 25일 KIN (지구촌동포연대, 공동대표 배덕호) 대표단 이 사할린을 방문한다. 10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은 코르사코브, 마카로브, 돌린스크 등지에서 거주하는 사할린 한인 1세 어르신 들에게 <세상에서 하나뿐인 달력 2016>을 직접 전달하고 인터뷰 할 것이다. 7박8일 방문시 대표단은 사할린한인단체장들을 비 롯 한인활동가들과 만날 것이다. 달력 전달 대표단 단원들로는 배덕호 킨 공동대표, 최상구 운영위원을 비롯 사진작 가, 청소년수련관 직원, 킨 단체 인턴으로 활약하는 대학생 등이다.
(2) 새 고 려 신 문 2016년 1월 22일 이미 보도된 바와 같이 지난해 연말에 제2회 <영감의 날개로>사할린주 문화회 관 우수전문가콩쿨 수상자 이름이 발표되 었다. 5개 부문 우승자 중 한 사람은 스 타로루스코예 문화회관 공예써클담당자 김 와실리사 였다. 그는 <민속 전통 보호 자>부문에서 우승해 시상되었다. 행사장을 다녀온 본사 이예식 사진기 자는 이날 김 전문가가 제작한 러시아 민 속 의상을 보고 의상이 정말 훌륭했다고 필자에게 말했다. 그는 러시아 민속 의상 에 전통이 살아있고 진실이 담겨있는 것 이 느껴진다고 김 와실리사의 작업을 높 이 평가했다. 사실 필자는 김 와실리사와 이미 인사 를 나눈 사이 였다. 2013년 4월에 <인민 외교단> 단원으로서 함께 한국여행을 떠 났던 적이 있었다. 교사, 의사, 예술분야 근로자 등 30명으로 구성된 이 방문단의 방한은 자비였지만 유익한 방문이었다. 그때 한림대학교 컨퍼런스에도 참가하 고 민속촌을 비롯 여러 견학도 하고 인천 복지회관 등을 찾아 사할린영주귀국자 어르신들과 만나기도 했다. 처음 조상들의 나라를 찾아간 와실리 사는 매우 기뻤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 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 기 억에 남았다. 인천 복지회관 할머니, 할아 버지들과 만났을 때 그녀가 손수 재봉한 선물도 많이 선사했다. 우리 현대인 그때 와실리사가 사할린동포가 아니 라 고려인 출신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 저는 우즈케키스탄에서 태어났고 1972년에 부모와 함께 우즈베키스탄 국경 인근에 있는 카자흐스탄 침켄트 주 사릐아차그이란 도시에 이사갔죠. 아버님이 농사를 하셨거든요. 농사할 수 있는 지역으로 옮긴 것이었죠. 와 실리사가 소개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서전문기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타 쉬켄트의 큰 공장에 있는 기술도서관 에서 거의 20년 근무했다. 타쉬켄트가 가깝기 때문에 매일 카자흐스탄의 작 은 도시에서 출근할 수 있었단다. 바느 질을 잘하는 그는 주문을 받아 거의 저 녁마다 이웃사람, 친구, 그를 소문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드레스를 비롯 여러 옷을 만들어줬다. 도서관원 봉급이 적기 때문에 이 추가 돈벌이가 일상에서 큰 도 움이 되었다. 소련이 무너지면서 국경이 닫혀졌다. 더 이상 공장 도서관에서도 일할 수가 없 어져 카자흐말을 유창하게 하는 와실리사 는 카자흐중학교에 사서로 취직했다. 그 때가 1993년 연초였는데 12월에는 둘째 딸을 낳았다. - 제가 그 당시에 39살이 넘었거든요. 이미 딸이 하나 있었지만 너무나 애를 갖 고 싶었어요. 이렇게 막내 레라를 낳았죠. 사실 레라도 새고려신문과 인연이 있 는 처녀다. 고등학생 시절에 그는 가족에 대한 작문을 쓴 적이 있다. 글쓰기 대회에 서도 수상되고, 조상들에 대해 시작한 그 의 가족 이야기가 새고려신문 러시아어판 에 실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학생의 가 족에 대한 사랑, 관심, 자부심이 마음에 들었다. 1997년에 사할린에서 연락이 왔다. 셋째 여동생 남편이 시골에다 집을 샀으 니 이 쪽으로 이사 올 생각 없느냐고 했다. 그당시 여동생 둘이 이미 사할린에 와 있 었다. 형제 2남4녀 중에서 큰딸 와실리사 는 부모님이 사는 곳에서 그대로 살고 있 었으니 나중에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오빠 둘, 둘째 여동생도 다른 곳에서 지내 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도 덜 외 롭게, 자기도 동생 옆에 살면 좋겠다는 생 바느질, 공예로 놀라게 하는 김 와실리사 저는 첫 눈에 사할린에 반했어요 각에 식구 모두가 사할린으로 떠나왔다. 제부는 스타로루스코예 마을에서 집 을 샀다. 유즈노사할린스크시내에서 버스 로 40분 되는 거리다. 현재 이 시골에 250명이 살고 있는데 주로 러시아인들이 다. 한인 몇 밖에 되지 않는다. 손재간 많 은 남편이 집수리를 잘 해 살만해졌다. - 저는 사할린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요. 기후도, 자연도 너무 좋아요. 첫눈에 반했습니다. 여기 와서 거의 1년은 먹고 사는데 아무 걱정이 없었습니다. 여동생 둘 다 사할린동포와 결혼했는데 제부들 의 친척이 아주 많아요. 그래서 이들이 갔 다준 음식, 옷 등으로 1년 살아왔죠. 우리 를 반가이 마중하고 진짜 화목해요. 이들 덕분에 빨리 정착한 것 같아요. 미소를 지으면서 와실리사가 얘기했다. 항상 낙천적이고 활발한 와실리사는 사할린에서 좋아하는 일도 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엔 베레즈냐키중학교에서 재봉사(의상담당자)로 한 1년 일했다. 바 느질도 진짜 잘하고, 무엇보다 창의력이 풍부하고 직접 의상 모델링한다는 소문을 들은 당시 스타로루스키 문화회관 관장 이 그녀를 찾아와 새해맞이행사로 동화를 무대에 올리려고 한다면서 단막극 의상을 부탁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의상이 마 음에 들어서 관장은 바로 그를 문화회관 에 취직시켰다. 그 후부터 와실리사는 계 속 이 문화회관에서 일하고 있다. 사실 탐나는 인재여서 그에게 다른 데 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다. - 전에는 제가 러시아 민속 의상에 대 해서는 아무 개념이 없었어요. 학교, 그리 고 문화회관에서 일하다보니 행사를 준비 할 때 러시아 민속 의상이 많이 필요하다 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에 대해 공부했죠. 잡지도 찾아보고 체호브극장 복장실, 인형극장도 찾아보고 기술과 재 료를 부탁했죠. 저는 호기심이 많아요. 새 의상을 만드는 게 얼마나 재미있고 흥미로 운데요. 이런 말을 하는 와실리사의 두 눈은 빛났다. 진정 광채가 어려 있었다. 러시아 민속 의상의 훌륭한 제작자로 알려진 그는 그동안 달녜예촌 문화회관 합창단 단원들을 위한 의상, 노워알렉산 드롭스크 문화회관 행사를 위한 여러 복 장 등을 제작해 냈다. 그의 러시아민속 의 상 몇 벌은 일본에도 있다. 그곳 러시아문 화센터가 구입했단다. 문화회관 직원으로서 또한 그는 그 동 안 많은 활동을 해왔다. 여러 공예과정도 담당했고 옛날에 하계어린이캠프에서 요 리써클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의 요리는 항 상 인기가 많았단다.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보내는 시간은 더할 나위 없이 그의 마음 에 들었다. 현재 그는 어르신들을 위한 문 화회관 휴일클럽을 계속 담당하고 있다. 여러 공예에 호기심이 많은 그는 구슬 세공, 아플리케 등을 배우기도 하고 여러 전시도 펼치고 합동 전시에도 많이 참여 한다. 몇년 전에 한인문화센터를 찾아 전시 부탁을 한 적이 있었는데 동의를 얻지 못 했다는 와실리사의 말에는 아쉬움이 들려 졌다. 대신 주도서관에서 성공적으로 전 시할 수 있었단다. 항상 낙천적이고 하루하루를 즐기는 와실리사는 <영감 날개>콩쿨의 상금 일 부로 자신이 탈 수 있는 자전거를 구입하 고, 막내딸에게 전자책(리드부그), 큰딸에 겐 일금을 주었다. 인터뷰할 때 고려인과 사할린동포 생 활 차이 점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나누기 도 했다. 사실 고려말을 잘하지만 그는 여기 사할 린에서는 주로 현대 한국말을 하고 있으니 고려말과 많이 달라 어색해 입을 꼭 다물 고 있을 때가 많다 한다. 사할린에 와 있으 니 이곳 동포식으로 제사를 하기도 한다. 사할린이 고향이 아니지만 사할린 4 계절 모두를 매우 좋아하는 그는 우즈베 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으로 떠날 생각은 없다고 했다. 사할린에서 그의 취미가 직업으로 되 었고, 사할린국립대 정보학 교수로 활약 한 큰 딸을 여기에서 시집 보냈고 손자를 봤다. 그리고 아직 엄마집을 떠나지 않은 막내딸은 작년에 사할린국립대를 우수하 게 졸업하고 취직하고 계속 공부하고 있는 것 또한 어머니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2015년에 회갑을 맞이한 와실리사는 현재 또 다른 공예기술을 익히는 중이다. (배순신기자) 이모저모 사할린 학생, 전러시아글쓰기경연대회 수상자명단에 편입 문학의 해에 러시아연방 교육과학성은 재능있는 학생들을 발굴하기 위해 전러시아글쓰기경연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콩클 주요 목적은 각 학생에게 독서에 대한 취미 를 배양하고 유식한 서술 기능과 필요성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었다. 콩클 주최측은 일부로 글쓰기 주제를 정하지 않고 참가자가 직접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 대회는 4 단계로 진행되었다. 연방단계에는 국내 85지역을 대표하는 340개 글이 올랐다. 에세이는 각 단계에서 4개 연령 그룹(4-5반, 6-7반, 8-9반, 10-11반)에서 심사원 3명이 평가했다. 이것은 실로 독창적이고 재능있는 글을 선발할 수 있게 했다. 전문 심사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우수 에세이 100건이 선 정되었다. 사할린주에서는 수상자명단에 학생 2명이 올랐다. 유즈노사할린스크 제2김나지아 10학년생 알렉산드 라 플리트뉴크와 스미르늬흐구역 부유클릐 5학년생 니키타 그녜우세브이다. 섬지역 학생들은 <좋은 독자 없이는 좋은 책이 없다>란 부문의 우수한 수상자들 이다. 그들의 글은 전러시아우승자 선집에 편입됐다 고 주교육성이 전했다. Сахалинские школьники вошли в число победителей всероссийского конкурса сочинений В год литературы Министерство образования и науки РФ выступило инициатором проведения всероссийского конкурса сочинений, призванного выявить талантливых школьников. Главной задачей конкурса являлось привить каждому школьнику любовь к чтению, сформировать навыки и потребность к грамотному письму. Организаторы конкурса специально не задавали тему, по которой нужно было писать сочинение, представив ее выбор участникам. Конкурс проводился в четыре этапа. По итогам на федеральный уровень вышло 340 работ из 85 субъектов страны. Сочинения оценивались на каждом из этапов конкурса тремя членами жюри в четырех возрастных группах: 4-5, 6-7, 8-9 и 10-11 классы. Это позволило отобрать действительно оригинальные и талантливые работы. По решению экспертного совета было отобрано 100 лучших сочинений. От Сахалинской области в число победителей вошли сразу два обучающихся. Ученица 10 класса гимназии 2 Александра Флитнюк и 5-классник из Буюклы Смирныховского района Никита Гнеушев. Островные школьники стали одними из лучших в номинации "Без хорошего читателя не бывает хорошей книги". Обе работы вошли в сборник сочинений победителей областное мини- всероссийского конкурса, сообщает стерство образования. 사할린의학전문콜레즈, 연방감사장 받아 사할린의학전문콜레즈가 청소년연방청 세르게이 포스펠로브 청장의 감사장을 받았다. 교육기관은 1941-1945년 대조국전쟁 승리 70 주년 기념 전러시아자원봉사대에 참가활동하여 포상 되었다. 별도로 전문학교 라리사 지오와 학장은 개인 감사장을 수여받았다. 그에 앞서 사할린의학콜레즈는 현대 경제조건에서 높은 지표를 보여주고 질높은 서비스를 제공한 부문 및 지역에서 사회적 의미가 있는 기관으로서 <우수 한 사회적 교육기관 2015>명단에 기입됐다고 기관 홍보실이 전했다 Сахалинский медколледж отмечен на федеральном уровне Сахалинский базовый медицинский колледж получил благодарность от руководителя Федерального агенства по делам молодежи Сергея Поспелова. Образовательное учреждение было отмечено за участие в работе Всероссийского волонтерского корпуса 70-летия Победы в Великой Отечественной войне 1941-1945 г. Отдельную персональную благодарность получила директор колледжа Лариса Дзиова. Ранее Сахалинский медицинский колледж был также внесен в реестр «Лучшие социально значимые учреждения образования-2015» за высокие показатели организации в современных экономических условиях, качественное оказание предоставляемых услуг, социальную значимость в своей отрасли и регионе, сообщает пресс-служба учебного заведения. (8면에 계속)
2016년 1월 22일 새 고 려 신 문 (3) "어느 사할린잔류조선인의 생애" (전호의 계속) 니시사쿠탄의 탄광 회사가 가족을 부르기 위 해 안정한 생활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학교로 다 니도록 하겠다고 한 약속을 믿고 호윤은 가족을 불러주기를 회사에 요청하였다. 한국에서 교육은 오직 초등학 수준으로서 일 본어는 물론 한글도 잘 모르는 아이들이 많았다. 더구나 1938년에는 한국말을 기초로 한 교육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사할린은 그 당시 한반도 수준의 식민 지가 아니라 사할린청이 관할하는 지역으로 되어 일본인이나 한인이나 똑 같은 교육을 받았으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진학 할 수 있었다. 조선 총독부보다 사할린청이 실행하는 학교교육 이 더욱 앞섰었다. 이것은 카라후토 개발의 미래 를 위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일본 정책이었다. 호윤이 사할린으로 떠난 후 고향에 남은 가 족은 괴로움과 쓰라림을 겪으면서 살았다. 위에 진술한 춘궁의 나날이었다. 아이들은 농가에서 는 필수적 생활 수단인 소를 보살피는 책임, 학 교의 수업 후 산에서 불 땔 나무를 하는 일, 또한 계절에 따라 여러 농사일을 도와주는 하루하루 였다. 시계가 없는 세상에서는 닭 우는 소리로 깨어나 밤 늦도록 별이 나올 때까지 일을 하였 다. 밤에는 공부하려고 해도 전등과 촛불이 없어 서 작은 접시에 담은 채종유에 심지를 넣어 등 류춘계의 일기 (전호의 계속) 그녀가 기생이 된 원인은 정 신병자가 된 아버지를 노량진 뇌병원에 입원시키고 보성 중 학교 3학년인 동생과 늙은 어 머니를 모신 그녀의 할 수 없는 길이었지만 이화고녀의 우등졸 업생인 그로서는 아까운 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또한 학 식이 풍부하여 옛날 기생이 능 가능무우시능이요 월야삼경환 부능이라더니, '달 밝은 야밤에 지아비 바꾸는 능력은 적당하 지 않아도 노래와 춤 다능한데 시까지 능하다'란 말은 그녀에 게 적당한 말이었다. 노래나 춤 은 말할 것도 없이 문학을 사랑 하는 그녀는 도한 즉흥시인이 어서 즉석에서 시를 지어 가야 금을 안고 노래를 곧잘 불렀다. 누구든지 그에게 어째서 불사 춘이라는 기명을 가졌는가고 물으면 언제나 그는 웃으며, '춘 래에 불사춘이지요 나 같은 게 무슨 봄이 있나요?'라고 하였다. 아까운 청춘의 몸으로 가엽게 도 생활의 희생이 되여 인생의 봄을 망각한 그를 마음 있는 사 람이면 누구나 안타가워하였지 만은 그러나 남의 도움을 바라 지 않는 그의 고결한 성격을 도 저히 흐리지는 못하였다. 불사춘과 비슷한 학식을 가 진 기생이 어찌 없었으리요. 양 중원이니 설중매니, 배금향, 금 일선이 등 여러 사람이 있었지 만 그들은 원래 성격이 불사춘 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들은 정말로 기생으로서 고급 기생이 었지만 불사춘인 김순희는 기생 이면서도 투사였으니, 그녀는 1939년 가을부터 민족의 독립 을 도모하는 지사들의 단체에 가담하였던 것이다. 내가 겨우 이 지사들의 심부름꾼 노릇밖에 하지 못할 때 그는 어려운 연락 사업을 맡아 보았으니, 요리집 인 국일관 제일 뒷방에서 겨우 3엔짜리 상을 놓고 불사춘을 부 를 때에는 의례히 지사들의 간 부 회합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각부로의 연락을 대부분 불사춘 이 맡아 하였으니, 그것은 사람 들이 많이 드나드는 화류계가 적당하다는 점도 물론 있었으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점은 불사 춘이란 사람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는 경찰들 의 의향을 조사하는 일을 맡았 으니, 그것은 그의 일본말이 다 른 기생들 보다 능란했을 뿐 아 니라 그들의 취미에 적합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그들이 노는 모임에 불사춘을 가장 자주 불 렀던 까닭이다. 날짜도 잊지 않는 1940년 9월 4일, 경찰들의 손이 거의 뻗쳐짐을 안 그녀는 주요 간부 들을 다 피하게 하였으니 이날 저녁부터 그는 경찰에 감금되 었던 것이다. 1940년 12월 19일 한강에 서 불어오는 바람이 맵짜게 종 로를 스치고 해조차 놀라서 소 스라쳐 구름 속에 숨던 날, 원통 하게도 불사춘은 종로경찰서 유 치장에서 시체로 변하고 말았다. 석 달 동안 경찰들의 혹독한 고 문과 모진 매에 견디지 못하여 쓰러지면서도 피한 동지들의 거 처는 물론 남아 있는 동지들의 이름을 한사람도 대지 않았다.... 역사는 반드시 그녀의 공적 을 기록해야 할 것이다. 생각하면 가슴쓰린 일이지 만, 내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 났을 때는 그녀가 죽기 닷새 전 인 12월 14일로 월파 이원호 형가 함께였다. 쇠창살로 얽은 30평방 센티미터의 창문으로 퉁퉁 부은 얼굴과 손을 내밀며 - 선생님들! 순식[그의 동 저자: 카타야마 미치오 불로 이용했다.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태식은 공부를 더욱 열심히 했다. 한번은 늦도록 학교에서 태식이 돌 아오지 않아 걱정된 어머니가 장남인 성태와 같 이 깜깜한 밤에 근처에 있는 산으로 가서 이름 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미친 듯이 평정을 잃은 어머니는 교사들께 도움을 받기 위해 학교 로 갔더니 등불로 약간 환한 교실에서 태식이 촛불 밑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어 머니는 꾸지람 대신에 태식을 껴안았다. 1941년 태식이 학교로 간 어느 날 교실의 책 상 위에 오오야마 타이쇼크( 大 山 泰 植 )라는 이 름패가 붙어있었다. 1939년 정월에 조선민사령 개정으로 "창시개명( 創 氏 改 名 )"이 강행되어 조 선총독부는 다음 해 2월 11일부터 시행하였다. 오오야마( 大 山 ) 라는 성은 면사무소에서 "일본 에 오오야마 이와오 원수 라는 유명한 군인이 있었는데 오오야마는 아주 좋은 성이다"라는 말 에 태식의 할아버지께서는 "오오야마"나 "코야 마" 어느 것이던지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오오 야마"라고 결정했다 한다. 1941년 2월에 "정"이 라는 한자 성을 일본어로 "태이"라고 불렀다. 그 러나 사할린으로 들어 갈 때 발급된 신분증명서 에는 "오오야마"로 기재되었다. (계속) 한국어 번역: 전학문 사할린영주귀국자 (김포시), 미생물 박사 생]이와 어머니를 좀 부탁합시 다.'하였고, 우리가 그녀를 위로하자 태연히 - '일 없어요, 나는 아무것 도 잘못한 일이 없으니 웃으며 죽을 수 있어요, 제가 죽는다고 저의 뜻까지 죽을라고요?'하였 다. 이 얼마나 숭고한 말이냐? 경찰들의 갖은 모욕과 참혹 한 형벌을 당하다가 불쌍하게 떨어진 한 떨기의 꽃, 그는 결 코 온실에서 키워져 장식용으 로 밖에 쓰지 못하는 꽃이 아니 며, 돈 있는 사람들의 응접실에 서만 향기를 피우는 그런 꽃인 게 아니라 모진 비바람과 몹쓸 놈들의 발자국에 짓밟히면서도 조선의 땅 위에 자라나 꿋꿋이 서 있으며, 조선의 백성들을 위 하여 깨끗하고 그윽한 조선의 향기를 피우던 그런 꽃이다. "[95-100쪽] 다른 측면에서 우리는 류시 욱이 모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 망감에 사로잡혔음을 볼 수 있다. 한국의 분할과 남북 간의 전쟁이 그에게는 비극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반도에서의 사건을 편파 적으로 알려주는 소비에트의 프 로파간다에 굴복하지 않았다. "비록 북한만이 옳은 궤도를 걷는다고 일방적인 자랑을 하지 만 어차피 남북 간에 허리가 끊 어져 두동강이가 난 몸뚱이가 된 내 고향이 아니가?"[176쪽] 이 논문에서는 사할린의 작 가이자 시인인 류시욱의 일기 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류시 욱이 그 자신의 일기에 기록하 고 있는 사건과 철학적 성찰이 사할린과 러시아 독자들에게 흥미로울 것임에 의심의 여지 가 없다. 이 중요한 역사적 자 료를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것 은 사할린 한국학의 우선적 과 제이다. (끝) 진 율리야, 사할린주국립 역사문서보관소 연구원 다큐소설 고독한 영웅 안중근 장군 38선에 다시 묻다 (전호의 계속) 동지의 열정이 도진의 심장에 남아 있고, 도진의 모습이 그 동지의 심장에 남아 있다. 그 동지의 이름은 바로 이연경. 연경은 지금쯤 훈춘에 도착했을 게다. 하얼빈에서 기차를 탄 연경은 훈춘을 거쳐 평양으로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알겠습니다. 동지, 제 심장을 걸겠습니다." 그때 천신만고 끝에 유해를 찾았을 때 도진은 장군의 유언을 다시 되새겨야 했다. "조국이 완전히 독립된 후에 시신을 조국으로 반장해 달라" 남북으로 분단된 현실은 안중근 장군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독립이 결코 아니다. 남한으로의 반입에 망설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정을 알았는지 중국 당국의 압박은 거세지고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하얼빈 공항은 물론이고 대련 항 등 한국으로 가는 배 편 까지도 안전이 담보되지 못했다. 안중근 장군 유해 를 안전하게 모시고 한국으로 갈 길이 모두 차단된 것이다. 그 때 나타난 활로가 연경이었다. 2013년 1월 미국에서 타계한 안중근 장군의 직손인 안응호 박사가 생전에 남긴 말을 우리는 기억해야 했다. "조부님 유해를 찾으면 남과 북이 아닌 38선상에 묻어 주십시오" 안중근 장군 유해를 38선에 묻어달라는 이 짤막한 한 마디 는 직계속자 안응호 박사도 할아버지 안중근 장군의 조국독립 과 남북분단이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는 의미다. 조국이 분단된 상태에서는 안중근 장군 유해가 조국 으로 옮겨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38선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도진은 이런 그림을 그렸다. '안중근 장군 유해는 서울로 갈 수도 없다. 그렇다고 고향인 황해도로 가는 것도 아쉽다. 안중근 장군 직계 손의 유언이 정 답이다. 서울서 개성공단 쪽으로 통하는 도라산 역 부근 남북 경계선에 모시는 것이 답 아닐까?' '그래, 2015년 3월 26일 장군의 순국 105주기에 고 노무현 대통령이 걸어서 북으로 갔던 그 지점에 유해를 모시는 거다. 바로 그거야.' 동지, 연경과 도진은 엄청난 비밀을 고유하고 있었다. 이진학 회장에게도, 김달범에게도, 전길운에게도, 아직 말하 지 않은 비밀이다. 리민 여사에게 맡긴 백자기 말고 안중근 장군의 진짜 유해가 따로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연경이 갖고 북한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세 사람 밖에 없다. 연경 역시 중국 공안과 국안부에 드러나 있는 인물이었기에 그녀를 통해 반출하는 것은 위험 했다. 도진은 병원에서 퇴원해 훈춘으로 가는 선화에게 유해를 맡 겼다. 그녀라면 감시망에서 벗어나 있었고 믿을 수 있었기 때문 이다. 선화는 복부 붕대 속에 귀한 물건을 모시고 훈춘으로 갔 고 잘 도착 했다는 연락도 받았다. 당초 훈춘 오두막에 보관하 려 했었는데... 난징 라운지에서 오랜 대화와 토론이 있은 후 도진은 모든 작전을 연경에게 알려주었다. "그럼 리민 녀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절반이요." "그래요?" "그토록 어렵게 찾은 유해를 온전히 중국에 다 남길 순 없었 소." 연경도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나누지 않았다. 연경에게 다 얘기해 줄 필요는 없었다. 그녀를 위해서였다. 도진은 나지막하게 연경의 이름을 불렀다. "이연경 동지." "네?" "당신이 장군 유골을 갖고 공화국으로 가시오." 도진이 가슴속에 계속 담고 있었던 그날 만남의 최종병기였 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계속 중국에 놔 둘 수도 없는 일이기도 하고 또 어린 학생 선화에게 큰 짐을 지우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오. 처음부터 이 생각을 했고 선화에게도 당신 말고는 아무에게도 그것을 내 주지 말라고 얘기 해놨소." "그래도... 어떻게. 저 같은 게..." (계속) 저자 정광일 ("고독한 영웅 안중근 장군 38선에 다시 묻다"책에서)
(4) 새 고 려 신 문 2016년 1월 22일 О диаспоре, и не только Колонка историка ИСТОРИЯ КОРЕИ В последней статье мы с вами рассматривали историю царствования короля Муёля, первого короля Объединенной Силлы, а также ту значительную роль, которую играл в то время знаменитый военачальник Ким Юсин. Сегодня мне хотелось бы зайти в этой истории чуть назад и рассказать вам о другом правителе Силла, который оставил очень значительный след в истории Кореи. Речь идет о первой в истории Кореи королеве по именисондок. Она носила титул Ёван, что (в отличие от Ванби жены короля) означало именно царствующую королеву, единоличную правительницу. Это событие было для патриархальной Кореи знаковым и отражало возросшую роль женщин в корейском обществе.во всем королевстве женщины являлась главами семей, но в тоже время существовали для них существенные ограничения. Удачное царствование Сондок привело на королевский трон Силлы еще двух королев после нее. Ни в период династии Корё, ни в период династии Чосон королевы на престол не всходили. Согласно Самгук саги она была дочерью короля Чинпхёна и правила 15 лет с632 г. до 647 г. Отец, по хронике, оставил ей трон в виду отсутствия у него сыновей. Также согласно Самгук саги Сондок (до восшествия на престол носила имя Тонман) была старшей дочерью короля, что оспаривается другими источниками считается, что у нее была как минимум одна старшая сестра принцесса Чхонмён, мать будущего короля Муёля. За период правления Сондок пришлось преодолеть восстания и беспорядки внутри королевства, а также вести активную внешнюю политику сначала она боролась против Пэкче в союзе с Когурё, потом отношения с Когурё ухудшились. Она укрепляла союз с Танским Китаем, расширяла торговые и дипломатические связи, посылала молодых корейцев на учебу в Китай. Как и китайские императоры исповедовала буддизм. Однако позже Сондок провозгласила эру благодеяния и стала добиваться независимости от династии Тан. Сондок известна своими памятниками ко времени ее правления относится строительство буддисткого храма Пунхванса, девятиэтажной пагоды Хваннёнса (высота 80 м), монастыря Тхондоса, старейшей из сохранившихся обсерваторий Чхомсондэ в столице Силлы Кёнджу. Также Сондок приписывают создание и ведение корейского кодекса хваранов юношеского социального института, в котором юноши получали специальное воспитание, изучали конфуцианские и буддистские тексты, путешествовали, посещали священные места, учились управлять страной, обучались воинскому искусству.именно хваран способствовал формированию в Силла военной стратегии, что позволило в будущем избежать завоевания Китаем. Сондок так и не вышла замуж, предпочтя править самостоятельно. В 647 г. представители знати устроили мятеж, недовольные тем, что королева возвысила Ким Юсина. Ким Юсин собрал армию и атаковал мятежников около дворца Вольсон. Восстание было подавлено, мятежников казнили. Однако королева Сондок умерла в тот же год от неизвестной болезни. Поскольку она не оставила прямых наследников, на престол взошла ее двоюродная сестра Чиндок, после которой воцарился ван Муёль, племянник Сондок. Королева Сондок невероятно популярная фигура в корейском фольклоре и искусстве. В легендах она описывается как добрая правительница, заботящаяся о бедных и покровительс твующая буддизму. Летописи пестрят необычными историями про королеву Сондок, прославляющими ее ум, прозорливость, доброту, способность предвидеть будущее.в корейском кинематографе королева Сондок отражена в нескольких сериалах, в том числе популярном сериале «Королева Сондок», вышедшем в 2009 г. Рисунок 1. Известная корейская актриса Ли Ёвон в роли королевы Сондок в одноименном сериале (Продолжение следует) Юлия Дин, научный сотрудник ГИАCO СТОМАТОЛОГИЧЕСКАЯ КЛИНИКА "РАДИКС" Сделай свою улыбку красивой!!! Руководителям общественных организаций корейцев России и СНГ ОБРАЩЕНИЕ Уважаемые руководители корейских общественных организаций! К вам обращается национально-культурная автономия корейцев Приморского края, которая находится в г. Уссурийске. Многие российские корейцы знают о деятельности нашей организации, которая ведет работу в следующих направлениях: историческом, возрождении национальных традиций и образовании. Приморский край это земля, с которой начиналась история российских корейцев, земля, на которую впервые ступили наши отцы и деды. Наша организация, прилагает всевозможные усилия, для того, чтобы восстановить исторические факты и события, связанные с историей российских корейцев. В нашем городе, сохранился дом, где в последние годы проживал лидер корейцев, известный общественный и политический деятель Чхве Дже Хен (Цой Петр Семенович), который внес неоценимый вклад в жизнь российских корейцев, возглавил антияпонское движение в Приморье. Приморские корейцы мечтали приобрести этот дом, и долгие годы вели работу в этом направлении. На подтверждение исторических фактов и получение разрешения ушло более 10 лет. В 2015 году, национально-культурной автономии корейцев г. Уссурийска, удалось приобрести этот дом, где планируется создание дома-музея Чхве Дже Хёна. Однако, для реконструкции дома нужны денежные средства. Мы обращаемся ко всем корейцам России и СНГ поддержать наш проект и оказать посильную финансовую помощь. В настоящее время корейцы Приморья уже приступили к сбору денег. НКА корейцев г. Уссурийска создала фонд дома-музея им. Чхве Дже Хёна. Уважаемые соотечественники, мы очень надеемся на вашу помощь, потому что, несмотря на огромные расстояния, есть то, которое всех нас связывает и которое никогда от нас не уйдет это общая история и память о наших предках. Мы должны быть, как никогда, едины чтобы не прерывалась связь поколений, чтобы наши дети, также как и мы, знали и уважали свою историю. Спасибо. С уважением, председатель ОО НКА корейцев Приморского края Ким 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Тел.: 50-00-50; 43-31-31 реклама р/с 40703810100229000014 ПАО «Дальневосточный банк» г. Владивосток БИК 040507705 к/с 30101810900000000705, ИНН : 2511031718 КПП : 251101001 ОГРН : 1042500000190 Основание платежа: пожертвование Фонду Домамузея им. Чхве Дже Хёна Реквизиты: ОО НКА корейцев г.уссурийска 692503, Приморский край, г. Уссурийск, ул. Амурская,63, тел./факс. (4234) 33-37-47 е-mail: sinmoon@mail.ru Краткая биография Чхве Дже Хён(Цой Петр Сергеевич)а публикуется на 5-ой странице. Общество с ограниченной ответственностью «СОВА-2012» предоставляет следующие услуги: - Охрана имущества предприятий и организаций всех форм собственности - Монтаж охранно-пожарной сигнализации - Оповещение, видеонаблюдение - Кнопка экстренного вызова полиции - Заключаем договора на техническое обслуживание Телефоны: +7962-152-11-53 27-90-30 реклама
2016년 1월 22일 새 고 려 신 문 (5) О Корее и корейцах РК и Россия выразили озабоченность действиями Пхеньяна Республика Корея и Россия выразили озабоченность действиями Пхеньяна, нарушающими резолюции Совета Безопасности ООН. Они подчеркнули важность совместных усилий всех заинтересованных государств в целях недопущения роста напряжённости в Северо- Восточной Азии. Как отмечается в сообщении, опубликованном на сайте МИД России, об этом шла речь в ходе состоявшихся во вторник в Москве консультаций спецпредставителя МИД РК по вопросам мира и безопасности на Корейском полуострове Хван Чжун Гука и замминистра иностранных дел России Игоря Моргулова. Они обсудили перспективы урегулирования ядерной проблемы Корейского полуострова в свете объявленного Пхеньяном испытания водородной бомбы. «С российской стороны акцентирована необходимость скорейшего возобновления диалога, нацеленного на поиск путей политико-дипломатического урегулирования ситуации, в том числе, в контексте перевода в практическое русло работы по формированию механизма мира и безопасности в регионе», говорится в сообщении российского внешнеполитического ведомства. Ответственным за отношения Пхеньяна с Сеулом назначен генерал Ким Ён Чхоль 70-летний генерал Ким Ён Чхоль, до сих пор возглавлявший северокорейскую военную разведку, назначен ответственным за отношения Пхеньяна с Сеулом. Как сообщил в среду источник в Национальной службе разведки РК, Ким Ён Чхоль назначен секретарём ЦК ТПК и заведующим Отделом единого Фронта ЦК ТПК. В конце декабря занимавший эти должности 73-летний Ким Ян Гон погиб в автокатастрофе. Известно, что Ким Ён Чхоль с 2009 года отвечал за разведывательные операции за рубежом, в том числе, за электронную и кибер разведку. Как полагают, в 2010 году он организовал потопление южнокорейского сторожевого корабля «Чхонан» и артобстрел острова Ёнпхёндо. Президент РК Пак Кын Хе призвала решить проблему рабочих мест 20 января президент РК Пак Кын Хе ознакомилась с планами работы на наступивший год четырёх министерств - труда и занятости, образования, по делам женщин и семьи, здравоохранения и социального обеспечения. Все четыре министерства поставили перед собой задачи, которые включают рост числа рабочих мест и улучшение благосостояния народа. Министерство образования решило улучшить систему подготовки кадров для тех отраслей экономики, в которых ожидается их нехватка. Министерство труда и занятости подготовило программу реформирования рынка труда и создания рабочих мест для молодёжи. Министерство по делам женщин и семьи решило направить усилия на содействие гражданам страны в успешном совмещении работы с домашними делами. Министерство здравоохранения и социального обеспечения активизирует выявление фактов насилия в отношении детей и усилит меры по их предотвращению. Заслушав отчёты глав министерств, глава государства призвала их организовать эффективный контроль за реализацией намеченных программ. В РК лечение туберкулеза сделают бесплатным С этого года лечение туберкулёза в РК становится полностью бесплатным. Об этом говорится в рабочем отчёте министерства здравоохранения и социального обеспечения, представленном 20 января президенту РК Пак Кын Хе. Отмечается, что заболевшие туберкулезом будут полностью освобождены от оплаты лечения с июля этого года. По данным ВОЗ, по состоянию на 2014 год уровень заболеваемости туберкулезом в РК составлял 86 случаев на 100 тыс. человек. Это самый высокий показатель среди стран-членов ОЭСР. Министерство также намерено оказать поддержку в проведении исследований в данном направлении. В РК растёт популярность мобильных систем оплаты Каждый шестой кореец оплачивает покупки через смартфон. Такими стали результаты исследования, проведённого Банком Кореи среди 2,5 тысяч человек в возрасте старше 19 лет. 15,8 процента респондентов заявили, что использовали мобильные системы оплаты. 44 процента отметили, что прибегали к таким сервисам от одного до трёх раз в месяц, 23 процента до двух раз в неделю. В Банке Кореи отмечается, что популяризация мобильных систем оплаты связана с ростом количества пользователей банковских услуг в интернете. В этой связи указано на необходимость укрепления безопасности, повышения комфорта и доверия к подобным системам. (RKI) ВСЕМИРНО ПРИЗНАННАЯ ПЕВИЦА ЧО СУМИ (СОПРАНО) ПЕРВЫЙ ЧЕЛОВЕК ИЗ КОРЕИ, НОМИНИРОВАННЫЙ НА ОСКАР Всемирно известная оперная певица Чо Суми первый человек из Кореи, который удостоился чести быть номинированным на Оскар! Чо Суми исполнила OST «Simple Song #3», написанный Дэвидом Лэнгом к фильму«молодость» (2015 г), и эта песня вошла в список номинантов 88-й церемонии вручения наград премии «Оскар». То, что Чо Суми была номинирована на получение награды, большой сюрприз, так как организаторы «Оскара» часто критикуются за «притеснение» людей неевропейского происхождения. Чо Суми первый человек из Кореи, когда-либо посещавший церемонию награждения. Она также была номинирована на получение награды «Золотой глобус» в этой же категории, но, к сожалению, ее трек проиграл треку из фильма «Спектр». Источник: www.soompi.com Семеро иностранцев, работавших в РК, присоединились к ИГ Семеро иностранцев, работавших в РК после 2010 года, впоследствии присоединились к террористической организации «Исламское государство». Об этом сообщил в среду член парламентского комитета по делам разведки, представитель правящей Сэнури Ли Чхоль У, сославшись на информацию, полученную от Национальной службы разведки, в ходе обсуждения вопросов борьбы с терроризмом, в котором участвовали члены правительства и правящей партии. По данным разведывательной службы, только в прошлом году из страны депортирован 51 иностранец по подозрению в связях с международными террористическими организациями, в том числе, с «Исламским государством». 48 из них депортированы в ноябре по подозрению в поддержке террористических организаций, а впоследствии ещё трое. Республика Корея не является страной, свободной от террористических угроз, учитывая наличие в ней 155 тысяч человек из мусульманских стран, подчеркнул парламентарий. (KBS World) Биография Цой Петра Семеновича(1860-1920) 15 августа 1860 г. Родился в Кенвоне провинции Хамгенбук (Корея), в семье Цой Хын Пека вторым сыном. 1869 г. (9лет) Вместе с отцом и старшим братом перебирается в деревню Тизинхе Приморского края. 1871 г. (11лет) Побег из дома, становится юнгой на русском торговом судне, стоявшем на якоре в Посьете. Получает русское имя Петр Семенович, в честь капитана корабля. 1871-77 гг. (11-17лет) Работает 6 лет юнгой на русском торговом корабле, изучает русский язык и литературу с помощью супруги капитана. Дважды совершает маршрут Владивосток-Петроград, знакомится с достижениями мировой культуры. 1878 г. (18 лет) Работа в торговой компании во Владивостоке (в течении 3 лет) 1881 г. (21 год) Переезд в Янчихе, воссоединение с семьей. 1882 г. (22 года) Переводчик ведомства по строительству железной дороги Раздольное Красное Село. Первый брак (1 сын и 2 дочери). Во время 4-х родов жена умирает вместе с ребёнком. 1886 г.(26лет) Выделяет стипендии для корейцев, и отправляет их на учёбу в Петроград и другие крупные города России. 1888 г. (28 лет) Получает серебряную медаль «За проявленное рвение и трудолюбие в строительстве дорог». 1891 г. (31 год) Открывает Николаевскую начальную школу в Янчихе. 1893 г. (33 года) Становится первым корейцем волостным старшиной и удостаивается 2-ой серебряной медали. 1894 г. (34 года) Участвует в 1-ом Всероссийском собрании волостных старшин в Петрограде. 1896 г. (36 лет) Присутствует на коронации царя Николая в Петрограде и Москве. 1897 г. (37 лет) Вступает во 2-ой брак, с Ким Еленой Петровной (3 сыновей и 5 дочерей). 1899 г. (39 лет) Николаевская начальная школа в Янчихе получает бронзовую медаль на выставке в Хабаровске в категории «образование». 1902 г. (42 года) Организация антияпонского движения среди российских корейцев. 1904 г. (44 года) Удостаивается высшей награды русского правительства золотой медали. 1905 г. (45 лет) Поездка в Японию (6 месяцев), с целью получения информации о японской политике на корейском полуострове. Переезд в Новокиевск. 1906 г. (46 лет) Создание первого корейского партизанского отряда. 1908 г. (48 лет) Создает общество корейцев за общие цели и становится его председателем. 1910 г. (50 лет) Переезд в Славянку. 1911 г. (51 год) Угроза выселения из Приамурского Края, вследствие японских интриг. Уход в отставку с должности волостного старшины. Создание в июне этого года «Общества развития труда». 1913 г. (53 года) Назначается председателем «Общества развития труда» на специальном всеобщем собрании. Участие в делегации из 7 корейских представителей на праздновании по случаю 300-летия Дома Романовых. 1914 г. (54 года) Деятельность в качестве председателя «Общества развития труда» и председателя организационного комитета по проведению мероприятий по случаю 50-летия со дня переезда корейцев в Россию. 1915 г. (55 лет) Создание фонда помощи русским военным во время 1-ой мировой войны. 1916 г. (56 лет) Арест русскими военными в Славянке, перевод в Никольск-Уссурийск, освобождение от ареста. 1917 г. (57 лет) После февральской революции назначается председателем Янчихинского волостного исполкома. 1918 г. (58 лет) Переезд в Никольск-Уссурийск, назначение главным земским старшиной и председателем ревизионной комиссии. 1919 г. (59 лет) Избирается национальным представителем на Парижскую мирную конференцию в январефеврале. Назначается министром иностранных дел в Корейском Народном Собрании в марте. Избирается министром финансов во Временном Корейском Правительстве, созданном в апреле в Шанхае. 1920 г. (60 лет) Арест японцами (5 апреля). 7 апреля убит вместе с Ким И-Чиком, Ом Чу-Пилем и Хван Кён- Собом. (Материал предоставлен ОО НКА корейцев Приморского края)
(6) 새 고 려 신 문 2016년 1월 22일 Назначение Веры Щербины на должность председателя регионального Правительства единогласно поддержали депутаты Сахалинской областной Думы 21 января её кандидатуру представил губернатор Олег Кожемяко. Ранее по его инициативе был начат процесс по внесению изменений в Устав области. И н с т и т у т разделения полномочий губернатора и председателя правительства существует более чем в 20 регионах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Сахалинские эксперты детально проанализировали законодательство некоторых из них. Региональная концепция разработана с учётом этих выводов. - Губернатор в любом случае отвечает за всё, что происходит в регионе. Но у меня достаточно много рабочих поездок по области и за её пределами. А многие вопросы надо решать на месте оперативно, большой объём документов также надо рассматривать. Вера Георгиевна много лет проработала в органах власти. Понимает всю специфику работы регионального правительства. Считаю, что она может его возглавить и решать поставленные задачи, представил краткую характеристику Олег Кожемяко. Кандидатуру Веры Щербины депутаты поддержали единогласно. Должность первого заместителя председателя правительства Сахалинской области, которую она занимала ранее, теперь упраздняется. Сразу после голосования последовали вопросы и предложения. В частности, приглашения побывать в муниципальных образованиях. Рассказала Вера Георгиевна и о приоритетных направлениях работы. - Одно из главных контроль за эффективностью бюджетных расходов. К примеру, аналитика показывает, есть разнобой по закупке продуктов питания для бюджетных учреждений. Слишком велика разница в ценах по одним и тем же позициям. Вот этого точно больше не будет. С первого января создано новое министерство по госзакупкам. Сейчас мы тотально мониторим ситуацию на всей территории области, чтобы эффективно расходовать бюджетные средства, отметила Вера Щербина. На Сахалине станут выращивать больше овощей На два гектара выросла общая территория теплиц совхоза «Тепличный». В новом комплексе уже растут помидоры. На торжественной церемонии сотрудники предприятия рассказали губернатору Олегу Кожемяко, что первый урожай планируют собрать в начале марта. В «Тепличном» бережно относятся к истории. Собрана коллекция символических ключей, которые передавались во время открытия новых цехов. Самый старый экспонат 1972-го года, его продемонстрировал руководитель совхоза Виктор Бутков. Сегодня «связка» пополнилась ещё одним экземпляром. Его мини-копии вручили всем участникам церемонии. В их числе много людей, которые проработали на предприятии не один десяток лет. - Я в 1974-м в совхоз устроился. Нам совсем в других условиях приходилось работать, всё вручную делалось. Тот же полив со шлангом бродили по теплице, а сейчас всё на автоматике, рассказал Прокоп Остапчук. Для сотрудников совхоза каждый рабочий день - путешествие в маленькое лето. За стеклом сугробы и мороз. А внутри разносится аромат зелени, летают шмели, опыляя томаты. 20 тысяч квадратных метров «одели» в стекло всего за несколько месяцев, работы начались в мае 2015-го. Этой весной здесь снимут первый урожай. - Свет это основное, что нужно растениям. Общая светопропускаемость этих конструкций семьдесят процентов, в наших старых теплицах не более пятидесяти. Уже сейчас мы видим, что томаты, высаженные одновременно здесь и в других теплицах, растут с разной скоростью. В новом комплексе мы соберем первый урожай на 15 дней раньше, отметил главный агроном совхоза «Тепличный» Павел Бутков. Модернизация ведётся в рамках региональной программы по развитию сельского хозяйства. Субсидии из средств области составляют 50% от стоимости теплиц. Масштабная работа проводится в несколько этапов, завершить её планируют в 2017-ом. Общая площадь новых закрытых площадей составит 8 гектаров. И если в старых теплицах в год с квадратного метра собирают по 32 кг. томатов, то теперь этот показатель вырастет до 50 кг. Новые капитальные крытые комплексы по выращиванию овощей появятся и на Курильских островах (на Кунашире - 1 га, на Итурупе 0,5 га). Ещё одно направление строительство современных плёночных теплиц по японской технологии. Такие объекты появятся в фермерских хозяйствах Поронайского и Ногликского районов, площадь каждого - 1 га. - Наша основная задача обеспечить жителей области качественными овощами. Ввод нового комплекса в эксплуатацию это существенный прорыв. Каждый год, сдавая по 2 гектара в «Тепличном», мы будем наращивать объёмы производства. Новые теплицы появятся и в других муниципалитетах. Результаты этой комплексной работы в 2018-ом позволят нам закрыть потребность региона в тепличных овощах, подчеркнул губернатор Олег Кожемяко. Реализация всех проектов по строительству теплиц на территории Сахалинской области позволит получать 7220 тонн тепличных овощей в год (в 2015-ом в закрытом грунте в регионе выращено 3508 тонн овощей). Новый аэровокзал Южно-Сахалинска должен быть удобным для пассажиров Такую задачу поставил губернатор Олег Кожемяко в ходе совещания с представителями отрасли. Оно было посвящено теме развития главных воздушных ворот островного региона. В теплое время года проведут реконструкцию взлетно-посадочной полосы в аэропорту Южно-Сахалинска. Ее общая длина - более трех километров. Планируется реконструировать участок протяженностью в 2,2 километра. Остальные участки полосы отремонтировали ранее. Сейчас ширина полосы составляет 45 метров. Расширение ее до 60 метров позволит принимать широкофюзеляжные самолеты типа «Боинг-747». К реконструкции полосы предполагалось приступить весной 2015 года. Однако начало работ было временно отложено для проверки проектных решений, уточнения сметы и повторного проведения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й экспертизы. По словам министра транспорта и дорожного хозяйства Владимира Дегтярева, сейчас уже получено положительное заключение контролирующих органов по поводу сметной стоимости переработанного проекта. Она составляет 1,85 миллиарда рублей. Напомним, прежде предполагалось, что реконструкция полосы обойдется в сумму, превышающую два миллиарда рублей. В ближайшее время будет объявлен конкурс на проведение работ по реконструкции. - Проект очень ответственный, - сказал губернатор. Поэтому важно, чтобы его реализацией занималась компания, которая имеет опыт успешного строительства подобных объектов в России. Также почти полностью готово техническое задание на проектирование нового здания аэровокзала. Это еще один объект, с которым связано будущее главного островного аэропорта. Напомним, осенью 2014 года корейская компания LS Networks представила технико-экономическое обоснование проекта нового аэровокзала. Общая стоимость - свыше семи миллиардов рублей. Но позднее областные власти решили отказаться от столь дорогого начинания. Летом прошлого года инженеры компании «ВиПС» из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представили три новых концептуальных решения аэровокзала. Их обсуждение проводилось на популярных сахалинских сайтах. Один из эскизов, который получил одобрение большинства участников, ляжет в основу будущего проекта. При этом будут учтены и некоторые наработки корейских инженеров. Здание аэровокзала рассчитано на обслуживание 800 пассажиров в час (550 человек на внутренних авиалиниях и 250 - на международных). В нем будет пять телескопических трапов. По ним люди будут попадать в самолет, не выходя на улицу. Также проект должен учитывать все современные наработки в сфере обслуживания авиапассажиров. Не менее 13 процентов площади здания отведут под коммерческие цели киоски, магазины, кафе, детские игровые комнаты. - Аэровокзал должен быть удобным для людей, - уточнил Олег Кожемяко. Здесь следует предусмотреть все необходимое, чтобы пассажир в случае задержки рейса, например, по погодным условиям мог с комфортом провести время. (Материалы пресс-центра Правительства Сахалинской области) "위안부로 끝난 것 아니다 강제징용 원폭 사할린 그대로" 강제징용 소송담당 장완익 변호사 도쿄 포럼서 문제제기 "위안부합의 청구권협정 헌소 각하, 다른 식민지피해 해결에 어려움 초래" "일본에서는 한일간의 최대 외교현안이었던 위안부 문제가 해결됐기에 모든 것이 해결됐다 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한국에서는 다르다. 원폭 피해자, 사할린 억류 피해자, BC 급 전범 문제 등이 그대로 남겨져 있다." 강제징용 손해배상 소송에 관여해온 장완익 변호사는 14일 오후 도쿄 변호사회관에서 열린 전후보상 재판 관련 포럼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한일청구권협정의 위헌 여부에 대한 판단을 회피한 한국 헌법재판소의 지난달 23일 결정과 같은달 28일 "정치적 타결로 이뤄진" 군위안부 합의는 강제징용 등 식민지 시기의 다 른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장 변호사는 "한국 헌법재판소가 (2011년 정부가 군위안부 해결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위 헌이라고 판단하면서) 요청한 것은 한일청구권 협정의 내용 해석을 통해 군위안부 문제를 해 결하라는 것이었는데, 한일 양국 정부는 이를 우회한 채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이라고 선언해 버렸다"고 지적했다. 또 한일합의에 따라 한국 정부가 설립할 군위안부 지원 재단에 일본 정부가 출연하기로 한 것에 대해서도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해결 방안의 하나로 재단 설립 방안이 논의되고 있었는 데 (위안부 관련 재단만 설립키로 한 것은) 재단 설립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격이었다"고 말했 다. 그는 또 한국 대법원에 계류중인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철주금 관련 강제징용 배상 소송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지난달 한일청구권 협정의 위헌 여부를 판단했다면 대법원도 어떤 결정이 든 빨리 내릴 수 있었을 텐데 헌재가 결정을 회피함으로써 대법원이 언제 선고할지 모르는 지 경이 됐다"고 말했다. 장 변호사는 이어 "결론적으로 한일 양국의 12 28 위안부 합의와 지난달 23일 한일청구 권 관련 헌법소원 각하 결정은 서로 맞물리면서 한국의 (식민지) 피해자 운동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도쿄=연합뉴스) 사할린 동포에게 제2의 고향은 '남양주시' 남양주시 북부희망케어센터에서는 1월 12일 진접읍에 거주하고 있는 사할린 동포 30가정 45명을 초청하여 정서적 위안과 정다운 이웃 형성을 위한 사할린 동포와 함께 하는 추억의 자리를 마련했다. 사할린 동포들 은 2010년 남양주 시 진접읍 휴먼시아 아파트에 32가구 59명이 처음 입주 를 시작하여 현재 30가구 52명이 생 활하고 있다. 남양주시에서는 사할린 동포들의 정 착과 안정을 위하여 북부희망케어센터 가 중심이 되어 지역자원을 연결하고 나들이와 돌봄사업을 적극 추 진하는 등 제2의 고향으로 정착 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주고 있다. 행사에 참석한 이석우 남양주 시장은 고국으로 돌아와 남양주시 에 정착한 사할린 동포들이 평안하고 행복하게 생활 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지역사회단체의 참여를 당부하고 시에서도 찾아가는 행정 으로 적극 도울 것을 약속했다. 5회를 맞이한 이번 행사로 사할린 동포들은 사할린에 남겨진 가 족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달래줄 좋은 계기가 되었다. 출처 : 남양주시청 보도자료
새 고 려 신 문 2016년 1월 22일 (7) Êîðåéñêàÿ êóõíÿ 소스 바른 닭튀김 Курица в кляре под соусом <Ингредиенты 재료 및 분량> 닭 가슴살 750g, 튀김가루 200g, 녹말가루 1 큰술, 소금 1작은 술, 후추가루 약간, 생강즙 약간, 맛술 1작은 술, 물 2/3,컵, 식용유 Куриное филе 750 гр, мука для кляра 200 гр, кукурузный крахмал 1 ст.л, соль 1 чайная л, немного черного перца, немного имбиря, водка 1 чайная л, вода 2/3 стакана, растительное масло 소스: 고추장 2큰술, 토마토케첩 4큰술, 간장 1큰술, 물 4큰술, 물엿 4큰술, (양념장) 고운고추가루 1작은 술 Соус: перцовая паста 2 ст. л, томатный кетчуп 4 ст.л, соевый соус 1 ст.л, вода 4 стакана, мелкий красный перец 1 ч.л. <Подготовка ингредиентов 재료준비하기> 닭 가슴살을 손질하여 씻은 후 소금, 후추, 맛 술, 튀김가루 등 모든 재료를 넣고 물을 넣어 반죽 유학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 이름은 아나스타시야 라고 합니다. 러시아 하바롭스크 태평양국립대학교, 경제경영학과, 전공은 국 제 경영학이며 4학년생입니다. 저는 러시아 사람이고 21 살입니다. 많은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 다. 그 중에 하나인 것이 바로 외국어 배우기입니다. 제가 태평 양국립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1년 유학을 할 꿈을 키웠고 유학을 갔다왔습니다. 작년에 한국에 있는 제주 도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한국은 크고 매우 발전한 나라입니다. 제가 지냈던 것이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 한국은 문화, 역사, 아름다운 장소가 많이 있습니다. 어느 도시이든 아주 흥미로운 건축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비행기로 서울에서 제주까지 1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서울 도시 중심 에 흐르는 청계천과 대도시에 많은 식물과 나무가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러분, 만약 에 한국에 간다면 반드시 남산, 롯데월드, 경복궁을 구경하세요. 제주도는 자연이 풍부한 섬입니다. 제주도는 매우 깨끗하고 살기 좋은 아름다운 섬입니다. 제주도는 화산 폭발에 의해서 형성되었습니다. 현재 섬의 중심지에는 한라산이 위치해 있습 니다. 저는 두번 등산했습니다. 한번 겨울에 올라가고 한번 여름에. 등산을 하기엔 힘들었지만 만약 여러분이 동료와 가신다면 즐겁습니다. 제주도의 특산물은 아주 맛 있는 귤입니다. 게다 가 "해녀" 라고 불리는 여자가 있으며, 친절하고 웃는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제주대학교는 한라산 근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학교에는 많은 학과와 흥미로운 학생 생 활을 할 수 있는 동아리가 있습니다. 제가 피아노와 테니스를 배웠고 재미있었습니다. 기숙사 는 매우 편리했습니다. 저는 제주대학교에서 경제학, 영어와 한국어를 공부했습니다. 한국어는 러시아어보다 어려웠습니다. 매일 수업 시간에 우리는 받아쓰기 시험을 보았습 니다. 처음에 점수를 잘 받지 못 했으나 나중에는 100 점을 받았습니다. 또한 한국어는 재미있 고 한국어를 통하여 한국 문화와 전통을 알 수 있습니다. 매월 유학생반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했었습니다. 한번은 제주도 전통 마을에 다녀 왔는 데 민속놀이와 떡 만들기 체험, 그네 타기 등을 경험해봤습니다. 제주도에 있는 많은 섬들을 다녀 오기도 했습니다. 학기말에 대학교 행사가 있었는데 우리 유학생반은 출연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추석 날을 기념하여 모든 가게들은 문을 닫고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모습이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한국 젊은이들은 어르신 분들을 공경합니다. 100 일, 돌잔치, 결혼식 날은 국 수를 먹는 전통이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전통 한복을 입어 보는 체험을 했었는데 재미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기념 사진도 찍 었는데 귀국 후에 그 사진을 보면서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는 속으로 기념 사진을 찍어준 사 람에게 여러분의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 한국의 모든 음식은 모두 매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친구 들은 가장 매운 음식을 잘 먹을 수 있는지 내기도 했습니다. 이후에 저는 익숙해졌고 결국 매 운 음식에 빠졌습니다. 특히 떡볶이, 라면, 불고기를 좋아했습니다. 에휴 지금 먹고 싶다!! 지금 저에겐 한국에서 만난 많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전 세계 미국, 베트남, 필란드, 중국, 타이완, 캐나다의 친구입니다. 지금은 그들과 헤어졌지만 아주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함께 섬 을 여행 다녔고 주말에 서울에 다녀 오곤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편지를 주고 받거나 전화로 서로의 안부를 전해줍니다. 가끔 저는 가족을 보고 싶었지만 늘 저를 많이 도와줬던 선생님과 친절했던 친구들이 격려해주었습니다. 지금 보고 싶습니다! 한번 더 돌아본다면 아마 유학이 제 인생의 하이라이트 중의 하나 입니다. 저는 문화와 역 사를 배우고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한국을 경험해봤습니다. 제가 갈 수 있으면 운이 좋다고 생 각합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한국에서 공부하고 일하길 바랍니다. 여러분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한국에서 만나 봅시다! ТОГУ, факультет «Экономика и управление», 4 курс Граюшева Анастасия 하여 20분정도 재워 둔다. 1 Куриное филе разделать, хорошо промыть, затем добавить соль, перец, водку, кляр, залить водой, перемешать и оставить на 20 минут. 냄비에 소스 (양념장) 재료를 모두 넣어 불에서 10~15분 정도 저어가며 걸죽하게 끊여 놓는다. В кастрюлю положить все ингредиенты для приготовления соуса, варить 10-15 минут, помешивая, пока не загустеет. < Способ приготовления 만드는 방법> 후라이팬에 식용유를 부은 후에 적당한 온도가 되면 재료 1을 넣고 튀겨낸다. 2번 튀겨내면 튀 김이 더욱 바싹 해진다. На сковороду налить растительное масло, нагреть до определенной температуры, обжарить филе, замоченное в кляре 1, выложить на салфетку, дать маслу стечь, а затем обжарить еще раз, тогда корочка будет более хрустящей. 튀김닭을 소스(양념장)를 끼얹어 잘 버무린 후 접시에 담아낸다. Обжаренную курицу хорошо перемешать с приготовленным соусом и выложить на тарелку. (사할린한국교육원 제공) (Материал предоставлен Центром просвещения и культуры Республики Корея на Сахалине) Уроки корейского языка 행복예식장이지요? (전호의 계속) Практическая грамматика (1) 건마는(-건만) "хотя на..." 일이 잘 되기를 바랐건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Хотя я хотел, чтобы это дело успешно завершилось, но ничего так и не вышло. 최선을 다 했건만 여의치 못했다. Мы сделали все возможное, однако наши надежды не оправдались. (2) -게끔 "так, чтобы" Данное соединительное окончание указывает на цель, причину или условие главного действия. 잘 되게끔 합시다. Давайте стараться, чтобы получилось. 후원을 받을 수 있게끔 경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Чтобы получить спонсорскую поддержку, нам необходимо победить в конкурсе. 부모님이 안심하시게끔 전화 드려. Позвони родителям, чтобы они не волновались. (3) -(고)서라도 "даже (сделав)...", "даже после того как...", "хотя бы (пришлось)..."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목표를 달성해야 합니다. Мы должны достичь своей цели, даже если нам придется пойти на жертвы.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그 사람과 결혼을 꼭 해야겠니? Неужели тебе действительно нужно жениться на ней, несмотря на настойчивый протест твоих родителей? (4) -고서야 "только (сделав)...", "после..." Указывает на действие, предшествующее главному действию предложения. Предшествующее действие является своего рода основополагающим главного действия. Данная форма представляет собой "усиленный" вариант соединительного окончания -고서. 내 말을 듣고서야 모든 오해가 풀렸다. Только после моих слов все недоразумения были устранены. 상태를 직접 보고서야 평가를 내릴 수 있다. Я смогу дать оценку, только после того, как сам ознакомлюсь с ситуацией. 수많은 책을 읽고서야 논문을 썼다. Я написал диссертацию, только после прочтения множества книг. (5) -결코+부정, 절대로+부정 "ни в коем случае не...", "больше никогда не...", "вовсе не..." 지금 나가면 절대로 안됩니다. Сейчас ни в коем случае нельзя выходить. 이제 그런 일은 결코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Я больше никогда не сделаю это. 이것은 결코 (절대로) 농담이 아닙니다. Это вовсе не шутка. 쓰기 연습 Письменныеупражнения 1. '건마는, -건만'을 사용하여 두 문장을 완성하세요. (1) 내가 늦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 또 늦습니까? (2) 그는 일을 열심히 하기는 하다 / 성과가 별로 없다. (3) 모스크바에서 3년을 살았다 / 러시아어를 잘 하지 못한다. (4) 저에게 도와 달라고 말을 하면 도와 주겠다 / 통 말이 없네요. (5) 2시간 전에 출발했으면 벌써 도착했겠다 / 무슨 일인지 오질 않습니다. 2. '게끔'을 사용하여 두 문장을 완성하세요. (1) 제시간에 도착하다 / 좀 빨리 서둘러야 해요. (2) 모든 사람들이 믿을 수 있다 / 말과 행동을 하세요. (3) 국민들의 생활이 향상되다 / 복지 정책을 세우도록 하세요. (4) 그 식당은 손님들이 다시 찾다 / 서비스를 잘 한다. Урок 5 (5) 한국에 대하여 관심을 갖다 / 이야기를 잘 하세요. (계속) (한국 국립국제교육원 한국어교과서 자료 이용) / (사할린한국교육원 제공)
(8) 새 고 려 신 문 2016년 1월 22일 (2면의 계속) 이모저모 사할린 어린 재능자, 170 점 그림과 공예품 체호브책 박물관에 전시 <사할린 섬>아.페.체호브 책 박물관에서 1월 15 일 대규모의 사할린 및 쿠릴 어린이 예술전시회가 열렸다. <큰 세상에 대한 작은 걸작>프로젝트가 스 타트했다. 작은 것은 그림이든 공예품이든 모든 작 품의 크기가 작기 때문이다. 전시콩쿨은 사할린주에서 이미 5번째 진행된다. 올해 주최측 앞으로 자기 작품을 쿠릴열도를 포함하 여 주내 모든 구역에서 6세부터 16세까지의 작자 425명이 보내왔다. 어린이들이 자기 작품 거의 500점을 보냈는데 관람객들이 겨울내내 즐길 수 있 는 전시에는 170점의 그림과 공예품이 출품되었다. 벽과 진열대에는 그림물감, 펜, 마커로 한 회화와 선 화 그림, 소금이 든 반죽으로 만든 공예품, 도자기, 실제품, 플라스틸린 제품이 전시되었다. 전시에는 짚 으로 만든 의식 인형, 종이 인형, 스팀판크기술로 돼 있는 입체 모델과 그림도 출품되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은 2월 12일 심사위원회가 평가하여 수상자 이름을 발표할 것이다. 170 рисунков и поделок юных дарований Сахалина выставили в музее книги Чехова В музее книги А.П. Чехова «Остров Сахалин» 15 января открылась большая выставка художественного творчества юных сахалинцев и курильчан. Стартовал проект «Маленькие шедевры о большом мире». Маленькие потому что все работы будь то рисунки или поделки выполнены в миниатюрном размере. Выставка-конкурс проходит в Сахалинской области уже в пятый раз. В этом году в адрес организаторов свои работы прислали 425 авторов в возрасте от 6 до 16 лет из всех районов области, включая Курильские острова. Ребята направили почти 500 своих работ. В экспозицию, которая будет радовать посетителей музея до конца зимы, вошли 170 рисунков и поделок. На стенах и витринах представлены живописные, графические рисунки, выполненные красками, ручками, фломастерами, а также изделия из соленого теста, керамики, ниток, пластилина. На выставки представлены обрядовые куклы из соломы, куклы папье-маше, объемные модели и картины в технике стимпанк. Работы, выставленные в музее, будет оценивать конкурсная комиссия, которая объявит имена победителей 12 февраля. 중화인민공화국 국민 사할린에서 300 여만루블리 내가려다가 사할린 세관 러시아연방 형법 200.1 조항 1부 (대규모 현금 밀수)에 따라 중국 국민에 대한 형사 소송이 제기됐다. 유즈노사할린스크-하얼빙 편으로 떠날 외국인이 현금을 신고하지 않고 고국으로 가져가려고 했다. 그의 수하물에서 316만4750루블리와 73위안이 발 견되었는데 이것은 4만5761 미국달러에 해당하다. 외화는 압수되어 증거품 보관실에 있다. 이 사건 은 조사 중이다. 현금 밀수에 대한 처벌은 불법 현금 액수보다 10배 더한 벌금을 물어야 하고, 2년의 자 유박탈형에 처할 수 있다. 일시 현금 또는 여행 수표가 총 1만달러가 넘는 경우 위 현금 또는 여행 수표 전액에 대한 세관 신 고를 서면으로 제출해야 한다고 사할린주 세관 홍보 실이 전했다. Гражданин КНР пытался незаконно вывезти с Сахалина более трех миллионов рублей Сахалинская таможня возбудила уголовное дело по части 1 статьи 200.1 УК РФ (контрабанда наличных денежных средств в крупном размере) в отношении гражданина КНР. Иностранец, отправлявшийся рейсом Южно- Сахалинск Харбин, пытался вывезти на родину без декларации крупную сумму наличных. В сопровождаемом багаже таможенниками была обнаружена валюта в сумме 3 164 750 рублей и 73 юаней, что в пересчете составляет 45 761 доллар США. Валюта изъята и помещена в камеру хранения вещественных доказательств. Ведется расследование. За контрабанду валюты гражданину грозит штраф до десятикратной суммы незаконно перемещенных средств, возможно ограничение свободы сроком до двух лет. При единовременном вывозе наличных и (или) дорожных чеков на общую сумму, превышающую в эквиваленте 10 000 долларов, указанные деньги и (или) дорожные чеки подлежат таможенному декларированию в письменной форме путем подачи пассажирской таможенной декларации на всю сумму, сообщает пресс-служба Сахалинской таможни. (사할린주언론기관 자료들에서) 알립니다! 사할린주한인회는 2016년 2월 6일 16시 한인문화센 터에서 음력설맞이행사 개최함을 알려드립니다. 입장료는 1200루블리. 75세 이상의 1세는 무료입장. 입장권(유료, 무료 상관 없이)은 2월 3일까지 한인문 화센터에서 받아야 합니다. 문의전화: 510-482 조직위원회 제 46 회 한국어능력시험 운영 계획 1. 목 적 가. 재외동포 외국인의 한국어 학습 방향 제시 및 한국 어 보급 확대 나. 한국어 능력을 측정 평가하여 그 결과를 국내 대학 유학 및 취업 등에 활용 2. 대 상 :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외국인 및 재외동포 3. 일 시 : 2016. 04. 17(일) 09:30~16:00 가. TOPIK I : 오전 / TOPIK II : 오후 TOPIK Ⅰ TOPIK Ⅱ 교시 1교시 1교시 영역 듣기 읽기 듣기 쓰기 나. 입실시간 : 매 교시 20분 전 4. 장소 및 시행처 : 사할린한국교육원 5. 시험 관리기관 및 역할 가. 주최 : 국립국제교육원 나. 주관 : 주유즈노사할린스크출장소 다. 시행 : 사할린한국교육원 6. 원서교부 및 접수 입실 시 간 가. 일시 : 2016. 2.1 ~ 2016. 2. 12 나. 장소 : 사할린한국교육원 다. 접수비용 : 300루블, 사진 3장 시작 종료 시험 시 간(분) 09:10 09:30 11:10 100 12:10 12:30 14:20 110 2교시 읽기 14:40 14:50 16:00 70 교 부 장 소 주 소 전 화 사할린 한국교육원 유즈노사할린스크 미라 83-A 7-4242-510-489 7. 시험결과 발표 : 2016. 06.16 이후 사할린한국교육원장 реклама Редакция не несет ответственности за содержание объявлений и рекламных материалов. Рукописи не рецензируются и не возвращаются. Мнение редакции не всегда совпадает с мнением авторов. 광고의 내용에 대해서 신문사가 책임을 지지 않음. Издатель: АНО «Редакция газеты «Сэ корё синмун» ( Новая корейская газета ) Гл. редактор Бя В.И. 사장(주필) 배 윅토리아 Учредители газеты: автономная некоммерческая организация «Редакция газеты «Сэ корё синмун», Правительство Сахалинской области Адрес издателя и редакции: 693020 г. Южно-Сахалинск, ул. Чехова, 37 Телефон/факс: 43-59-80, 43-72-94, 43-67-85 E-mail: skr@sakhalin.ru http://www.609studio.com http://cafe.naver.com/sekoreasinmun. Отпечатано в ОАО «Сахалинская областная типография», ул. Дзержинского, 34 Время подписания в печать: По графику четверг 14-00 Фактически - четверг 17-00 Издаётся с 1 июня 1949 года. Выходит по пятницам 50 раза в год. Индекс 53740 Тираж 1300 экз. Газета зарегистрирована Управлением Федеральной службы по надзору в сфере связи, информационных технологий и массовых коммуникаций по Сахалинской области. Свидетельство о регистрации СМИ ПИ ТУ65-096 от 22 сентября 2011 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