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자연환경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제1절 자연환경 1. 위치 사천시는 한반도의 남단 경상남도 서남부의 남해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고 성군, 서쪽은 하동군, 남쪽으로는 한려수도를 건너 남해군과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진 주시와 하동군이 인접하고 있다. 가. 수리적( 數 理 的 ) 위치 사천시의 동단은 정동면, 서단은 곤명면, 남단은 동서동, 북단은 곤명면으로 그 경 위도상의 위치는 아래와 같으며, 비슷한 선상에 있는 세계 각국의 주요 도시로는 미국 서해안의 로스엔젤레스, 일본의 시모노세끼( 下 關 )와 오오사까( 大 阪 ) 등이 있다. 사 천 교 육 사 37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사천시의 위치> 시청 소재지 방 위 지 명 극 점 연 장 거 리 극 동 정동면 동경 128 10 동서간 27.9km 극 서 곤명면 동경 127 55 사천시 용현면 덕곡리 501번지 극 남 동서동 북위 34 51 남북간 32.0km 극 북 곤명면 북위 35 10 나. 지리적( 地 理 的 ) 위치 사천시는 주로 산악지형(임야 60.4%, 농경지 24.6%, 대지 2.6%, 기타 12.4%)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해안을 따라 섬 주위에는 10개의 유인도와 35개의 무인도가 있다. 맑고 깨끗한 청정해역으로서 수산물의 집산지이고 내륙의 평야지에서는 미곡을 비롯 한 각종 식량작물을 생산하여 농 수산물이 풍부하며 먹거리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 사천만에 접하고 있는 산지는 동남쪽은 와룡산(798m), 흥무산(454m), 각산(398m) 이 바다로 걸쳐 있어 자연적 방파제 구실을 하고, 서북쪽은 미영산(570m), 송비산 (243m)이 지리산 줄기로 형성되어 있어 크고 작은 산들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풍부한 산림자원을 이루고 있다. 하천으로는 삼천포천, 덕천강, 사천강, 죽전천, 백천천, 곤양천이 흘러 수리 이용이 용이하고 토양이 비옥하여 농업소득 향상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사천시는 수려한 자연경관과 첨단 항공산업의 요람으로서 서부 경남의 중심 도시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으며, 2001년 11월 대전 진주간 고속도로 개통에 이어 사 천의 대방과 남해의 창선을 연결하는 창선 삼천포대교가 2003년 4월에 완공되어 관광 객이 급증하고 있고, 사천시의 중심부가 될 중남부권과 서부권을 연결하는 용현 주문 서포 자혜간 사천대교가 2006년 준공되어 지역발전이 크게 기대되고 있다. 남부권에는 수산자원과 관광자원이 풍부하여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싱싱하고 맛있 는 생선회와 활어를 중심으로 수산관광도시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하고 있으며, 중부권에는 우리나라 항공산업의 중심부인 진사지방산업단지가 있다. 그리고 2001년 8월에 외국기업전용단지 165천m2가 지정되었으며 추가로 330천m2를 지정하여 조선 산업단지가 형성되었다. 앞으로 사천시는 장기종합개발과 관광종합개발계획의 추진으로 지역여건에 맞는 농 공 수 관광산업이 어우러진 풍요롭고 살기좋은 항공우주산업과 해양수산관광도시 로 크게 발전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38 사 천 교 육 사
제1절 자연환경 2. 면적 사천시의 일정한 평면( 平 面 )의 크기와 넓이인 총 면적은 369.83km2로서 이를 다시 용도별로 보면 임야가 60.4%, 농경지 24.6%, 대지 2.6%, 기타 12.4%를 차지하고 있 으며, 1960년대에 곤명면의 연평리 전부와 신흥리 정곡리 금성리의 일부가 남강댐으 로 인하여 수몰( 水 沒 )지구로서 진양호( 晋 陽 湖 )에 편입되고, 해안선을 낀 사남면 초전 리 방지리, 곤양면의 대진리 중항리, 그리고 서포면의 내구리 다평리 선전리 자혜리 조 도리 구랑리 구평리와 대방동의 각산마을 앞 간사지가 매립 간척지( 干 拓 地 )로 조성되 어 면적에 다소의 변화를 가져왔다. 사천시의 면적은 경상남도 전체 면적 10,516.7km2의 3.8%에 해당하며 14개 읍 면 동별 면적 중 가장 큰 곤명면은 69.81km2이며, 곤양면 61.141km2, 서포면 48.01km2 순이 며 가장 적은 읍 면 동은 동서금동이 0.89km2, 선구동 3.38km2, 동서동 9.65km2 순이다. 3. 지형 및 지질 가. 지형의 개황( 槪 況 ) 사천시는 동 서 남이 남해의 한려수도와 연해에 있으면서 동쪽으로는 고성군, 서쪽 으로는 하동군, 남쪽으로는 통영군 사량도, 남해군 창선과 인접해 있다. 동남쪽은 와룡산(798m) 주봉이 길게 놓여 있고, 그 지맥은 명지재( 峙 )를 지나 봉대 산( 峰 臺 山 )으로 뻗어 용현면과 사남면의 경계를 이루고, 또한 흥무산( 興 霧 山 :454m)을 지나 이구산( 尼 丘 山 )을 거쳐 성황산( 城 隍 山 :210m)에 이르러 사남면과 정동면의 경계 를 이루며, 봉대산( 烽 臺 山 :310m)과 무선산( 舞 仙 山 :278m)이 고성군과 진주시를 경계 하고 있다. 하천( 河 川 )은 죽천천( 竹 川 川 )과 사천강, 중선포천이 동서로 뻗어 사천만에 유입( 流 入 )되고, 덕천강( 德 川 江 )은 지리산에서 발원하여 곤명면과 진주시를 경계하고 있으면 서 진양호에 유입되며, 진양호 방수로( 放 水 路 )는 축동을 지나 사천만으로 빠져 흐르고 있고, 곤양천은 곤명에서 초량천( 草 梁 川 ) 오천( 梧 川 ) 추천( 楸 川 )의 흔적을 남기면서 곤양 앞바다로 빠지고, 와룡산에서 발원한 백천천( 白 川 川 )과 문화천( 文 化 川 )은 각산과 남양 평야를 거쳐 사천만으로 유입되며, 봉현천과 삼천포천은 삼천포항으로 빠지고 있다. 평야는 대부분이 하천의 침식( 浸 蝕 )으로 이루어진 충적토( 沖 積 土 )로서 사천과 사남 평야, 곤명면의 덕천강 유역의 분지평야( 盆 地 平 野 )가 있으며 그 외에도 작은 평야가 산재해 있고, 사천만 일대와 서포면의 해안지대는 삭마( 削 磨 )로서 밀리는 작용으로 해 사 천 교 육 사 39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수가 유입하는 하천에 퇴적현상( 堆 積 現 狀 )이 겹쳐져 바다밑이 차차 매몰되어 사지( 砂 地 ) 또는 갯벌을 넓게 형성하는 탓으로 간석지( 干 潟 地 ) 평야가 많이 일구어졌다. 나. 하천 현황 사천시는 많은 강과 하천을 가지고 있는데 국가하천은 2개소로 덕천강 6.5km, 가 화강 4.8km이며, 지방2급 하천은 27개소로 150.7km, 소하천은 86개소 125.4km, 총 287.40km이다. 다. 산형( 山 形 ) 사천시의 산세( 山 勢 )는 지리산( 智 異 山 ) 소백산맥( 小 白 山 脈 )에서 갈라져 나와 하동군 옥종( 玉 宗 )에 제산( 諸 山 )을 이루면서 곤명( 昆 明 )의 송비산( 松 飛 山 ) 봉암산( 鳳 岩 山 ) 봉명 산( 鳳 鳴 山 )을 만들고, 곤양( 昆 陽 )의 남산( 南 山 )에서 놓쳤다가 거악( 巨 岳 )을 만들어 주위 에 각산( 角 山 )을 끼고 있으며, 이 테두리 안에 평야지대로서 농경지가 자리하고 있다. 사천시에 있는 산에는 와룡산, 어정산, 부봉산, 이구산, 구룡산, 성황산, 봉대산, 흥 무산, 옥산, 송비산, 봉명산, 옥녀봉, 남산, 각산 등이 있다. 라. 도서( 島 嶼 ) 사천시는 긴 해안선과 넓은 바다를 끼고 있어 육지 주변에 크고 작은 섬을 갖고 있 는데 대부분이 화산으로 이루어진 화산도로 형성되었다. 사천시가 갖고 있는 도서는 모두 45개 도서인데 동서동은 마도를 비롯하여 저도 늑도 초양도 신도와 신수도 등 6 개의 유인도를 관할하고 있고, 서포면은 비토섬 진도 별학도 월등도 등 4개의 유인도 를 갖고 있어 유인도는 모두 10개 도서이다. 무인도는 동서동의 둥근섬을 비롯하여 동서금동의 목섬, 향촌동의 장도, 대방동의 코섬, 모개섬과 서포면의 작은 노루섬, 곤양면의 띠섬, 질매섬, 용현면의 법섬, 죽도 등 모두 35개가 있다. 마. 해안( 海 岸 ) 사천시의 해안은 174.3km로 갯벌이 많아 간척이 이루어진 곳이 많으며 1930년대 에는 일본인들이 해안의 갯벌을 막아 농토로 만들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하안( 河 岸 ) 40 사 천 교 육 사
제1절 자연환경 해안( 海 岸 ) 둑을 보호하기 위해서 호안( 護 岸 )을 만들었다. 사천시에는 국가가 관리하 는 방조제가 4개소(4,037m)로 서포면 조도리에 있는 산전( 山 田 ) 방조제(2,480m), 용 현면 신촌리의 신촌방조제(1,030m), 서포면 내구리의 내구방조제(287m), 서포면 구 랑리의 구랑방조제(240m)로 총 길이 4,037m이다. 바. 조석( 潮 汐 )과 조류( 潮 流 ) 조석( 潮 汐 )은 달 태양 등의 천체의 인력작용( 引 力 作 用 )으로 해면이 1일 2회(때와 장소에 따라 1일 1회) 주기적으로 오르내리는 현상을 말하는데 조석현상을 지구 전체 에 대하여 보면, 각각 주기가 12시간 25분(1/2 태음일)이 되는 2개의 파장으로 생각 할 수 있다. 사천만은 만이 작고 골이 장형( 長 形 )으로 일방적 조류이며 조수의 시간을 보면 다 음과 같다. 물(시) 구 분 만 조 간 조 비 고 (일자) 1 차 2 차 1 차 2 차 11물 02:34 14:24 08:21 21:11 09.24 12물 04:05 16:24 10:21 23:02 10.25 13물 05:48 17:12 12:00 23:04 11.26 14물 06:49 19:08 12:15 12:00 12.27 15물 07:32 19:50 13:05 13:32 13.28 16물 08:41 20:22 13:42 14:03 14.29 17물 08:41 20:54 14:17 14:35 15.30 8물(대조) 09:12 21:26 14:49 15:04 16.01 19물 09:44 21:58 15:22 15:35 17.02 10물 10:16 22:32 15:55 16:07 18.03 11물 10:49 23:08 16:30 16:39 19.04 12물 11:24 23:47 17:05 17:16 20.05 13물 12:00 12:01 17:45 17:55 21.06 14물 12:32 12:46 18:32 18:43 22.07 15물(소조) 13:28 13:44 19:36 19:47 23.08 사 천 교 육 사 41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사. 지질( 地 質 ) 사천시의 해침( 海 浸 )이 발달된 해안변에는 신라통( 新 羅 統 )의 퇴적층이 해식( 海 蝕 ) 등 외적 영향으로 말미암아 지반( 地 盤 )이 넓게 깎이고 다듬어져서 나타나고 있다. 또 퇴적암을 관입하여 중생대 말기 백악기에 분출된 화성암이 도처에 용솟음쳐 깔려 있다. 화성암( 火 成 岩 )의 산상( 産 狀 )은 심성암( 深 成 岩 ) 및 반( 半 ) 심성암으로 화강암( 花 崗 岩 )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화강섬록암( 花 崗 閃 錄 岩 )은 삼천포의 서부 지역과 와룡산 일대 및 고성군 일대에 걸쳐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화성암의 분출로 신라 통은 도처에서 삭박( 削 剝 ), 노정( 露 程 ) 등으로 금광( 金 鑛 )을 구성하는 계기가 된다. 사천시의 지질은 주로 중생대 퇴적층인 소위 경상계의 퇴적암류와 이것들에 관입 ( 貫 入 ), 혹은 분출된 화성암류에 의하여 구성되었다. 퇴적암층으로는 마동층( 馬 洞 層 )이 곤양 덕천강 유역에서부터 곤양 묵곡리 환덕리를 거쳐 삼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천읍과 정동면의 북동에 선상부( 先 上 部 ) 대동계( 大 同 系 )의 화강암층이 있으나, 대부분의 지대는 중생대의 낙동계에 속하며 서포면 자혜리 구간에는 식물수간화석층 ( 植 物 樹 幹 化 石 層 )이며, 공룡화석으로 보이는 암층이 있다. 축동면 사다리, 곤양면 중항 리의 흑색 세일 중에 무연탄의 렌즈상( 狀 ) 박층( 薄 層 )이 협재( 夾 在 )하나, 현재 소단위 만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사남면 방지리( 芳 芝 里 ) 일대의 해변 지점의 흑색 세일 중에서 유질물( 油 質 物 )이 검 출되었으나 함유층( 含 油 層 )의 존재는 아직 확증되지 않고 있다. 충적층은 고결( 固 結 ) 이 안된 역사( 礫 砂 ) 이토( 泥 土 ) 등이 잡다하게 집적된 지층으로 사천시에서는 사천읍 서남부에 넓은 지역으로 분포되어 있고 북부의 덕천강 유역이 두번째로 넓은 분포를 보이고 있다. 광석 함유의 안산암( 安 山 岩 )은 정동면 소곡리( 所 谷 里 ) 주변에 깔려 있고, 화강섬록 암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와룡산 일대의 광역을 거쳐 삼천포 고성 쪽으로 연결되어 있 다. <자료:진주 박물관> 사천시의 토양은 해안지대를 제외하면 진흙이며, 크고 작은 알갱이의 모래와 찰흙 으로 되어 있어 벼농사에 적합하고 보리 고등채소 재배가 타 지방보다 발달되어 있음 은 작물 재배에 알맞은 토성( 土 性 )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겸하여 낙농, 과수원이 산지 ( 山 地 )의 구릉지를 이용하여 발달되었고, 해안의 간척으로 인한 농지 확장으로 전반적 으로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 사천시의 토층( 土 層 )은 하천의 범람으로 퇴적 생성된 홍함지( 洪 涵 地 )와 하구( 河 口 ) 의 발달된 퇴적토, 그리고 하천의 수식( 水 蝕 )에 의하여 하단구( 河 段 丘 )와 해성충적토 42 사 천 교 육 사
제1절 자연환경 ( 海 成 沖 積 土 )로 양분되며, 해안지대의 편마토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천시의 국토이용계획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사천시 토지 이용 계획> 구분 계 도시지역 준도시지역 농림지역 준농림지역 (단위 : km2, %) 자연환경 보전지역 면 적 504,195 78,695 4,254 231,967 89,872 99,407 구성비 100.00 15.60 0.9 46.0 17.8 19.7 (자료 : 사천시 도시기본계획) 4. 기후 기후는 고대( 古 代 )로부터 인류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쳐 왔다. 그것은 인류의 생존 이 비롯되면서 지구의 대기속에서 그 생존을 영위해 왔기 때문이다. 인류생활은 대기 의 변화에 민감한 영향을 받으므로 인류는 오랜기간 기상( 氣 象 )의 변화를 예측하기 위 한 노력을 계속하였으며, 그 필요성을 인식하여 왔다. 가. 기상관측( 氣 象 觀 測 )의 연혁 우리나라의 기상소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1967년부터 1969년까지 경제개발 특별회계 및 청구권자금 특별회계에서 전국에 81개소의 지역(도) 또는 보조 농업기상관측소(지금의 군 분실)를 설치하였다. 장비로서는 각종 기상요소를 원격조정 자동 기록시키는 종합자동관측 기록장치인 농업기상관측기계를 일본으로부터 도입하 였으며 연구용 기자재도 함께 도입되었다. 삼천포 사천의 관측소 분실은 1968년 3월 16일 진주시 칠암동에 진주농업기상관 측소 가 건립되어 1968년 12월 9일 중앙관상대 진주농업기상관측소 로 창설되었다. 1969년 3월 1일 진주농업기상관측소로 발족됨과 동시에 농업기상 및 종관 기상에 대 한 정규 관측이 개시되고, 1970년 7월 18일 직제 개편으로 중앙관상대 부산지대 진주 측후소로 개칭되면서 산하에 농업기상관측을 위한 12개 분실( 分 室 )이 설치되었는데, 이때 삼천포농촌지도소에 분실의 설치를 계획하게 되었다. 1971년 1월 1일 부산지대 진주측후소 삼천포분실이 시내 벌리동에 설치되고 사천 사 천 교 육 사 43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은 비행훈련단의 관측소에 의해 일기를 관측하게 됨으로써, 삼천포분실과 유기적인 협 조로 농업기상관측이 실시되어 오다가 1978년 4월 15일 진주관측소 산하 삼천포 울 주 함양 김해 하동 등 5개 분실이 폐쇄됨에 따라 삼천포분실은 없어지고 관측기구는 농촌지도소에서 관리하게 되었다. 나. 기상개황 사천시는 위도 34 선상에 위치한 관계로 온대지방에 속하며 지리적으로는 아시아 대륙의 동단( 東 端 )에 위치하고 있어 동쪽으로 일본열도( 日 本 列 島 )를 거쳐 태평양에 임 하고 있으므로 겨울철에는 시베리아 몽고지방에 발달한 대륙성( 大 陸 性 ) 고기압의 지 배를 받고 여름철에는 북태평양 해상에서 형성되는 소위 오가사하라( 小 笠 原 ) 고기압 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사철을 통하여 사천시를 포함한 남해안의 기상은 한난( 寒 暖 )의 차가 적고, 강우량 도 다른 지방에 비교하면 풍부한 편이며 겨울철에는 난류( 暖 流 )의 영향으로 다른 지방 보다 더 따뜻하여 전국에서도 좋은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으나 봄철에는 꽃샘바람이 강하고 건습하여 화재의 발생과 해운활동에 다소 지장을 받고 있다. 다. 기후요소 기후요소( 要 素 )는 기온 강수량 습도 바람 증발 일조 일사 등의 요소로 이들 중 그 중요한 요소들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기온( 氣 溫 ) 사천시는 남해와 접하고 있어 제주해류( 濟 州 海 流 )와 러시아의 캄자카반도에서 내 려오는 북해류( 北 海 流 )의 영향을 받는 해양성( 海 洋 性 ) 기후로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온화하며 연평균 기온은 13.4, 월 평균 기온은 7월이 26.5 로 가장 높고 1월이 -1.1 로 가장 낮다. 풍속( 風 速 )은 연간 1.8m/sec로 여름철에는 해안성 열대대기권으로부터 불어오는 남동계절풍이 주축을 이루고 겨울철에는 대륙으로부터 차고 건조한 북서계절풍이 불 어오며, 강수량은 최근 5년간 평균 1,597mm로서 12월이 가장 적고 8월이 가장 많으 며, 7 8월의 연간 강수량이 40%로 하절기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사천시의 연 평균 습도는 66%이며 여름철 79%, 겨울철 55%로서 다소 다습하여 44 사 천 교 육 사
제1절 자연환경 작물재배는 물론 인간생활을 영위하기에 매우 적합한 천혜의 기후적 여건을 갖추고 있다. 2) 강수( 降 水 ) 사천시의 연 평균 강수량은 최근 5년 평균은 1,684mm이나 1986년부터 1995년 사 이 10년 동안의 평균 강수량은 1,377mm로 다소 적은 편이다. 1998년에는 1,932.8mm, 1999년 2,067.4mm, 2000년 1,466.4mm, 2001년 1,200mm, 2002년 1,756.2mm로 강수 량이 평균치를 넘고 있으며 우리나라 연평균 강수량 1,150mm, 세계 평균 강수량 743 mm에 비하면 많은 수량으로 다강수지역( 多 降 水 地 域 )에 속한다. 최근 5년간 월별 강수량을 보면 6월부터 9월 사이에 평균 100mm이상을 상회하는 것을 보면 장마전선과 강우전선, 태풍, 소나기 등의 영향이 많은 것으로 보이며 2000 년 6월에는 115.7mm, 7월에는 312.1mm, 8월에는 무려 506.6mm가 내려 홍수로 인한 많 은 피해를 입었다. 3) 바람( 風 ) 사천지역의 겨울철에는 시베리아 몽고지방에서 발달한 대륙성 고기압의 영향을 받 아 서고동저( 西 高 東 低 )의 기압배치를 형성할 때가 많으므로 북서풍이 약 35%이고 서 풍은 14% 정도이다. 1월에는 북서풍이 36.6%, 서풍이 15.1%이며, 2월에는 북서풍이 33%에 서풍이 12.9%이다. 봄철인 3월과 4월 사이에는 대륙성 고기압의 영향과 북고남저( 北 高 南 低 ) 의 기압배치를 형성하여 동서풍이 많은 편이다. 여름철에 들어 6월, 7월에는 역시 남풍계의 바람이 많아진다. 따라서 6월에는 남서 풍이 11.1%로 가장 많고 오호츠크해( 海 ) 고기압의 영향을 받아 북동풍이 11.0%로서 다음을 차지한다. 7월에는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남서풍이 14.0%로서 수위( 首 位 )이며 북동풍 이 11.8%이고, 8월에는 북동풍 계열이 단연 우위에 오른다. 9월에는 북동풍 계열이 우세하고 10월에는 북동풍계가 18.3%, 북풍이 10.8%이다. 11월에는 북서풍이 가장 많은 편이다. 사천지방의 1986년부터 1995년 사이의 연 평균 풍속은 1.8m/sec이다. 풍속 13.9m/sec 이상의 바람을 폭풍으로 정의( 定 義 )하고 있는데 12월과 1월, 2월 사이 겨울 3개월간에 36%의 비율로 폭풍이 불고 있다. 사천지역의 주풍( 主 風 )은 남서풍으로 최대풍( 最 大 風 ) 역시 남서풍이며 평균 최대가 사 천 교 육 사 45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남서풍 24.0m/sec이며, 순간 최대가 37.6m/sec 기록이 있으며 최근 10년 동안에 폭 풍은 12회 내습하고 있고 1987년에 17.5m/sec, 1986년에 17.0m/sec, 1988년에 16.7m/sec, 1995년에 16.7m/sec 등이 내습했다. 4) 습도( 濕 度 ) 사천지방의 연평균 습도는 66%로서 여름철 79%, 겨울철 55%로 다소 낮은 편이며 부산 통영과 비슷하다. 습도는 하루 중 내내 변화하는데 기온의 일변화와는 정반대가 된다. 즉, 새벽에 습 도가 가장 높아지고 오후 2 3시, 최고기온이 나타날 무렵에 최저습도가 나타난다. 연변화는 지역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지역이 우기( 雨 期 ) 인 7월에 80% 이상의 최고습도가 나타나며, 건조기인 1월을 중심으로 한 겨울철에 50 70%의 최저습도가 나타나고 있으나, 서해안 쪽의 내륙지방인 광주 전주 서울 평양 및 중강진 지방은 봄철인 3 4월경에 나타나고 있다. 사천지역은 여름철에는 80% 이 상으로 다습하고 겨울철에는 현저하게 저습하여 강한 북서계절풍과 함께 화재의 위험 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고 5월까지는 산불의 위험성도 계속 안고 있는 실정이다. 라. 계절상황( 季 節 狀 況 ) 계절은 1년을 기후의 추이( 推 移 )에 따라 구분한 것을 말하는데 북반구의 중위도 지 방에서는 기온의 변화에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로 구분한다. 1) 봄( 春 季 ) 봄철 날씨의 특징으로는 아지랑이, 이동성 고기압, 황사현상, 심한 일교차( 日 較 差 )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로 인해 농작물에 피해가 오는 때가 있다. 2) 여름( 夏 季 ) 여름에는 북태평양에 있는 해양성 열대기단( 熱 帶 氣 團 : 해양성 고기압)의 세력권 안에 들게 되므로 남쪽의 계절풍의 영향이 커 고온 다습한 기류의 유입이 많기 때문에 집중적 으로 호우( 豪 雨 )가 내리기 쉽고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는 특징이 있다. 또한 8 9월 초에 걸쳐서 태풍의 내습이 있어 집중호우나 강풍으로 농작물과 가옥 등에 심한 피해를 주고 있는데 근년에는 1999년과 2002년에도 태풍과 호우로 많은 피해를 입고 있다. 46 사 천 교 육 사
제1절 자연환경 4) 가을( 秋 季 ) 사천지역에는 9월이 1년 중 가장 비가 많이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1999년과 2002년에도 9월에 많은 비를 내렸고 태풍도 동반하고 있었다. l0월로 접어들면 강수량이 줄고 공기 중의 습도가 낮아져 맑고 상쾌한 날씨가 계속 되어 천고마비( 天 高 馬 肥 )의 계절이라고 한다. 맑은 가을하늘의 특징은 구름의 모양으 로 수평방향으로 흐르는 권운( 卷 雲 :털구름, 새털구름)과 고적운( 高 積 雲 : 양떼구름, 높 쌘구름) 등이 자주 눈에 띈다. 가을하늘이 맑은 것은 대기의 대류가 여름보다 약해서 먼지가 고공( 高 空 )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쉽게 비에 씻겨 내리기 때문이다. 4) 겨울( 冬 季 ) 한냉건조한 대륙성(시베리아) 고기압의 영향으로 비교적 맑은 날씨에 한냉건조하 며 최저기온은 영하 10 까지 내려가는 경우가 있으나 극히 드물고 강수량은 1년중 제일 적어 옛날에는 식수난과 밭작물이 고사하던 때도 있었다. 요즈음은 비닐하우스와 관개시설이 잘 되어 있어 크게 걱정은 하지 않으며 봄철 영 농준비와 온실재배로 겨울철을 모르고 농사를 짓는 편이다. 마. 기상현상( 氣 象 現 狀 ) 1) 월별개요( 月 別 槪 要 ) 1월은 1년 중에서 가장 추운 달이나 눈은 거의 오지 않는다. 2월은 산간지역의 얼었던 땅이 녹는다. 3월이 되면 개나리, 진달래, 벚꽃 등이 피기 시작하며 철새들이 오고 가는 것을 볼 수 있고 제비가 집을 짓는다. 4월이 되면 뱀이 나오고 못자리나 하천에 개구리가 알을 낳는다. 5월은 중국대륙에서 황사( 黃 砂 )가 날아오는 경우가 잦다. 6월에는 말경부터 장마가 시작되어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이 많아지고 내륙 지방에는 소나기와 뇌우( 雷 雨 )가 많아진다. 7월에는 중순까지 여전히 장마가 계속되며 무덥고 때로는 태풍도 오는 수가 있다. 8월에는 연중 가장 덥고 태풍 장마 등으로 기상현상이 돌변하는 날이 많다. 9월에는 차차 더위가 물러나고 초순에는 간혹 태풍이 오는 때가 있으며 북쪽에서 철새가 남쪽으로 날아오는 달이기도 하며 가을이 무르익어 간다. 사 천 교 육 사 47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10월은 강우량이 적고 맑은 날이 계속되며 예로부터 천고마비의 달이라 일러왔다. 11월은 북쪽에서부터 찬바람이 불어오고 날씨가 점점 추워진다. 12월은 북서계절풍이 강해지고 하천이 얼기 시작하여 추위가 본격적으로 달려드는 달이다. 우리나라의 겨울기후인 삼한사온( 三 寒 四 溫 )이 시작되었으나 지금은 기후의 변 동으로 이런 현상이 사라졌다. 2) 계절변화 현상 가) 첫 서리 사천지방에서는 보편적으로 매년 11월의 초순에서 중순사이에 첫서리가 내린다. 경상도내의 내륙지방에 해당하는 산청( 山 淸 ) 함양( 咸 陽 ) 거창( 巨 昌 ) 등지에는 10월 15일을 전후하여 첫서리가 내리는 것에 비해 약 1달가량 늦은 편이다. 그리고 마지막 서리는 3월 하순경에 내린다. 나) 첫눈 사천지방에 첫눈이 오는 것은 12월 하순경이며 어떤 때는 1월이나 2월에 내리는 때도 있고 눈이 오지 않고 지나는 해가 많다. 다) 첫얼음 사천지역은 11월말경이나 12월 초순에 첫얼음이 언다. 또한 해빙은 2월말경이나 3 월 초순경이 된다. 그런데 요즈음 날씨는 종잡을 수 없어 평균을 훨씬 오르고 내려 예 측이 어렵다. 바. 기상재해( 氣 象 災 害 ) 우리나라는 기상재해가 많은 편으로 태풍 저기압 전선( 前 線 ) 등의 영향을 받기 쉬 운 지리적 위치, 헐벗은 산이 많아 홍수 산사태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고 있다. 1) 풍수해( 風 水 害 ) 기상재해 가운데 풍수해는 태풍( 颱 風 )의 내습과 호우( 豪 雨 ) 등으로 인하여 뜻하지 않은 막대한 피해를 당하게 되는 경우인데 태풍이 그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1959년 태풍 사라호 와 1999년 태풍 매미, 2002년 태풍 루사 등은 사천지역의 삼천포지방, 특히 동서금동을 비롯하여 연안동인 향촌동, 선구동, 대방동, 실안동, 대 48 사 천 교 육 사
제1절 자연환경 포동 등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사천지방에는 1분간 최대풍속이 9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 북동풍이 35.5m/sec, 부산에서는 10시 22분에 동북동풍이 34.7m/sec를 각각 관측하였는데 이 기록은 연 최대치로서 기록되었고, 이로 인한 인명피해가 10여 명, 동금동과 서금동 연안의 주택 이 300여 동이 파괴되는 등 유사 이래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1979년 8월 16일 아침에 들이닥친 어빙호 와 3일 뒤 또다시 닥친 쥬디호 의 내습 으로 10여 일간 내린 526mm의 강우는 인해 동서금동 해안변 방파제 유실과 쥐치어 가공공장 및 가옥침수 등 많은 피해를 입혔다. 1980년 7월 23일 11시 45분에 남해군 창선면에서 발생한 토네이도(tornado:큰 회 오리 바람)현상이 노대동 노례 대례 심포마을을 급습, 돌풍으로 변하여 300여년 된 나 무가 뽑히고 돌 절구통과 경운기 등이 날아가는 등 기상천외의 조화가 5여 분간 이루 어져 주택 146여 채가 파손되고 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1천여 만원의 피해가 발 생하기도 했다. 1987년 7월 15일부터 17일까지 불어닥친 셀마호 태풍으로 동서금동과 서포면 일대에 해일이 발생하여 동서금동의 주택이 큰 피해를 입어 주택 324동 및 도로, 상 하수도 등 공공시설 파손으로 총 420,913천원의 피해가 발생하여 이를 복구하는데 1,269,329천원의 예산이 투입되어 복구 완료하였다. 1993년 8월 20일부터 21일까지 내린 강우는 254mm로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2 시간동안 184mm의 집중호우로 인해 선구동 150번지 일대 복개천변 주변 주택 및 차 량이 급류에 침수 파손되는 큰 피해가 발생하여 54세대 196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2 명이 부상하고 1명이 사망하였으며, 농경지 53ha 유실과 농경지 95ha침수, 가옥 14 동 전파, 33동 반파, 선박 1척 파손, 도로 제방 사방지 등이 유실되어 총 9,533,960천 원의 피해를 입혔는데 이때 삼천포 출향인사들의 성금이 15,800천원이 답지되어 피해 복구에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로도 사천 지역에는 계속된 태풍의 내습으로 해가 갈수록 그 피해가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2) 한발( 旱 魃 ) 한발은 장기간에 걸친 물부족으로 나타나는 기상재해( 氣 象 災 害 )로 가뭄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강수량의 부족만으로 일어난 건조한 기간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분 야별 관점에서는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주어진 기간의 강수량이나 무강수, 계속일 사 천 교 육 사 49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수 등으로 정의하는 기상학적 강수한발도 있다. 최근 한발의 피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64년 7월 8월의 전국적인 가뭄과, 1967년 4월과 6월의 가뭄은 경남지방에 극심한 피해를 주었으며, 1971년 10월과 12월의 가뭄, 1972년 6월부터 7월 2일까지 의 가뭄, 1973년 3월부터 4월 22일까지의 가뭄, 1973년 6월부터 8월 15일까지의 가 뭄은 사천지방에 많은 피해를 주었으며, 1975년 1월부터 4월 25일까지의 가뭄, 1976 년 1월부터 2월까지의 가뭄도 사천지방에 피해를 주었고, 5월과 6월과 7월의 가뭄, 1977년 2월의 가뭄, 6월의 가뭄, 1978년 3월과 6월의 가뭄, 9월과 10월의 가뭄은 도 서지방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가) 안개( 霧 ) 안개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사천지방과 같이 남해 연안과 도서지방에서는 6월 하순부터 7월에 걸쳐서 해무( 海 霧 ), 즉 바다안개가 발생한다. 해무가 발생하는 이 계 절에는 연안 선박(( 沿 岸 船 舶 )의 운항이나 어선들의 운항에 많은 지장을 초래한다. 요즈음은 진주의 진양호에서 발생하는 안개로 농작물에 대한 피해가 극심하고 일 조량( 日 照 量 )이 줄어들어 생태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현상이 점차로 나타나고 있어 사 천지방의 내륙에 많은 피해가 예상된다. 나) 쾌청( 快 晴 ) 사천지방은 전국적으로 보아서 비교적 쾌청일이 많은 편에 든다. 그러니까 흐린 날 보다는 맑은 날이 훨씬 많은 편이다. 이는 지형적인 영향도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사천지방의 월별 쾌청일수의 평균 치를 보면 10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2월까지에 이르는 겨울철이 훨씬 많으며 반대로 여름철에는 비교적 쾌청일이 적게 나타난다. 다) 구름( 雲 ) 사천지방은 비교적 여름철을 제외하면 구름끼는 날이 적은 편인데 월별 평균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월별평균치> (단위 : 일수) 월별 1 2 3 4 5 6 7 8 9 10 11 12 일수 3 6 9 10 11 15 17 16 10 6 5 3 50 사 천 교 육 사
제1절 자연환경 라) 눈( 雪 ) 사천지방에서는 1년 내내 눈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는 해도 있다. 이는 지형적인 영향과 해양성 기후로 타지방에 비해 따뜻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 기후현황( 氣 候 現 況 ) 사천지방의 기후는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기후가 그러하듯이 시베리아의 대륙성고 기압과 북태평양고기압에 따라 형성되고 있다. 겨울철에는 몽고나 시베리아 방면에 있는 차고 메마른 대륙성고기압의 세력이 남 동으로 뻗어 북서에서 오는 계절풍과 함께 찬 공기( 空 氣 )를 몰고 오게 되어 12월에서 이듬해 2월 사이에 평균기온은 2.4 로서 추운 편에 속하는 것이며 내륙( 內 陸 )보다 0.2 가 평균적으로 높은 편이다. 옛날부터 우리나라 겨울철 기온의 변화하는 양상을 삼한사온( 三 寒 四 溫 )이란 말로 일러오고 있는데 요즈음은 자연환경의 변화와 파괴로 엘리뇨 현상이 자주 발생하고 지구의 온난화 현상에 따라 계절도 바뀌어 봄, 가을이 없이 여름과 겨울도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어 계절의 변화가 옛날같지 않은 것이 특징이고 혹한이나 혹서가 찾 아와서 인간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고 있는 실정이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겨울에 위세를 떨쳤던 대륙의 고기압도 약해지고 중국대륙에 서부터 이동성 고기압이 우리 한반도를 자주 지나게 되어 기온도 오르며 강우량도 약 간 많아지는 봄이 찾아온다. 3 5월의 사천지방 평균기온은 12 로서 이웃 부산이나 통영 등지와 비슷한 편이며 호남지방의 광주, 목포 등지와도 비슷한 현상이다. 요즈음은 봄철에 찾아오는 황사현상으로 우리의 생활과 위생면에서 적지 않은 피 해를 입고 있는데 특히 노약자나 어린이들에게 눈병이나 기관지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어 많은 환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농작물에도 적잖은 피해를 가져오게 하고 있다. 여름철이 시작되면 비교적 냉습한 오호츠크해( 海 ) 고기압 사이에 장마전선이 동서 로 형성되고 이 전선상인 중국의 양자강( 揚 子 江 ) 유역으로부터는 파상적인 저기압이 한반도 쪽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음산한 날씨에 자주 비가 오게 되며 특히 사천지방은 북동풍이 매일 불고 기온도 낮아진다. 장마철이 지나가면 한여름이 다가오는데 6월과 8월 사이의 평균 기온은 23.6 로 부산지방의 평균기온과 비슷한 것으로 여름을 지나 기는 다소 나은 편이 된다. 사 천 교 육 사 51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아. 지진( 地 震 ) 지진이란 지구의 내부를 구성하고 있는 암석이 갑자기 파괴될 때 생기는 진동이 사 방으로 퍼져나가는 현상이다. 우리나라에서 지진이 있었던 기록을 보면 가장 피해가 컸던 지진은 신라 혜공왕( 惠 恭 王 ) 때인 서기 779년 경상도 경주지방의 지진으로 삼국사기 는 당시의 상황을 수 많은 가옥이 무너지고 1백여 명이 사망했다 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명 종( 明 宗 ) 9년(1553년) 3월 경상도 관찰사 정응두( 丁 應 斗 )의 말에 의하면 이번 2월 8 일 도내 50여 읍에 지진이 나서 지붕 또는 벽이 무너지고, 산성이 무너지고, 지진 후 에는 대풍( 大 風 )이 일어나 연기도 아니고 안개도 아닌 것이 공중에 퍼져 산야와 하늘 을 가리지 못했다 고 기록되는 등 특히 1500년대에 지진 피해가 많은 기록이 나타나 고 있다. 지진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인 활성단층은 우리나라에서 경주일대를 중심으로 크게 형성되어 있다. 특히 최근에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월성에 활성단층 활동이 두 번 있었 다는 과학기술부 산하 한국지질자원연구소의 보고서가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 다. 사천지역에도 지진이 일어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지진의 영 향을 언제 받을지 염려되는 지역으로 차후에는 건축시 지진을 이기는 내진건축설계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52 사 천 교 육 사
제2절 역사적 환경 제2절 역사적 환경 1. 사천시 연혁 가. 삼한에서 신라시대까지 시 기 내 용 삼한시대 가야 및 삼국시대 삼국시대 변진 12국 중에 속함 포상팔국중의 하나인 사물국에 속함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에서 한 때는 백제에 속함 통일 신라 신라에 정복되어 합쳐졌으나, 사물현, 곤명현 등으로 법흥왕(6세기경) 나누어져 있었음 법흥왕 19년(532) 사물현으로 강등됨 지방제도 개편에 따른 군현의 명칭을 한식화하면서 경덕왕 16년(757) 사수현이라고 고치고 고성군의 영현이 된다. 나. 고려시대 시 기 내 용 태조 23년(940) 성종 14년(995) 현종 6년(1015) 현종 9년(1018) 명종 2년(1172) 곤명현이라 개칭 산남도(10도 중의 하나)의 진주목 예속 사주로 개칭 서부(곤명현)는 하동군에서 진주목에 예속 감무(현감)를 설치 사 천 교 육 사 53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다. 조선시대 시 기 내 용 태종 13년(1413) 태종 15년(1415) 세종 2년(1419) 세종 5년(1423) 세종 12년(1430) 세종 19년(1437) 세종 27년(1445) 세조 14년(1468) 고종 32년(1895) 읍호를 다시 사천이라 고쳐 현감이 설치됨 사천진을 두어 병마사가 판현사를 겸함 남해현을 곤명현에 합쳐 곤남군으로 승격 병마절제사 임명 읍성을 축성하고 읍기를 지금의 곤양면 성내리에 둠 남해현을 다시 설치하고 진주목에 딸렸던 금양부곡(하동 의 진교, 금남)을 예속시켜 곤양군이라 개칭 읍성을 축성, 현기를 지금의 사천읍 선인리에 둠 사천진이 혁파되고 현감으로 고치어 병마절제사가 현감 을 겸함 팔도제 폐지, 전국을 23부제 실시로 곤양군과 합병되면 서 사천군으로 되고 진주부에 속함 라. 근 현대 시 기 내 용 1885. 05. 26 칙령 제98호 공포로 진주부 사천군이 됨 1912. 08. 01 부령 제129호에 의해 고성군 남양면, 진주군 문선면 편입 1914. 03. 01 1918. 05. 10 부령 제111호에 의거 진주군의 축동면, 부화곡면과 곤양 군의 서면, 금양면을 제외한 일원이 사천군으로 편입 도령 제7호에 의거 수남면, 문선면을 합하여 삼천포면이 됨 54 사 천 교 육 사
제2절 역사적 환경 시 기 내 용 1918. 07. 00 수남면과 문선면이 합하여 삼천포면을 설치(10면) 1931. 08. 00 읍동면을 정동면으로, 읍서면을 사남면으로, 읍남면을 용 현면으로 각각 개칭 1931. 11. 01 삼천포면이 읍으로 승격(1읍 9면) 1956. 07. 08 1983. 02. 15 1988. 05. 28 1995. 05. 01 1995. 05. 10 1998. 09. 12 법률 제390호로 삼천포읍과 남양면이 통합되어 삼천포시 로 승격(8면) 대통령령 제11027호(1983.01.10 공포)로 곤양면 가화리 1부를 진양군 내동면에 편입, 서포면 무고리, 맥사리를 곤양면에 편입 사천군 조례 제1034(1988.5.25 공포)로 평화, 선인, 정 의, 수석, 사주동을 리로 개칭 삼천포시 조례 제1448호에 의거 동서동, 봉이동, 향촌동, 대방동, 남양2동, 남양1동 등 6개동 통합함 도농 복합 형태의 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 제4348호에 의거 삼천포시와 사천군의 시군통합, 사천시로 개칭 사천시 조례 제274호에 의거 대방동을 동서동으로, 동좌 동을 선구동으로, 봉이동을 향촌동으로 통합, 남양1,2동 을 남양동으로 통합하여 1읍, 7면, 6동으로 개편 2. 역사적 배경 가. 선사시대의 유적 사천 지역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모두 조개더미 유적으로서 여러 종류의 조가비를 사 천 교 육 사 55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비롯하여 젖먹이 짐승뼈와 물고기뼈, 도기, 뼈연모, 서기, 치레거리 등이 발굴된 서포 면 구평리의 조개더미 유적, 신석기 늦은 시기에서 청동기시대, 초기 철기시대로 이어 지는 단계의 단면삼각형 점토대 토기를 특징으로 하는 늑도유적, 돌널형식의 무덤방과 그 위쪽 부분에 깔려진 판판한 돌의 모습을 하고 있는 특이한 무덤의 구조와 장례에 관련된 당시 사람들의 의식까지도 엿볼 수 있는 정동면 소곡리의 신월유적, 매장 문화 재의 분포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발굴된 곤명면 본촌리 유적, 민무늬 토기시대의 집자 리, 삼한시대의 널무덤, 삼국시대의 돌덧널 무덤, 돌방 무덤 등이 확인된 이금동 유적 등이 대표적 선사시대 유적이다. 나. 포상팔국의 성립과 사물국 사천지역의 정치체의 실제적인 모습은 3세기 삼국지 위지동이전기사의 변진고 자미동국과 변군미국이라는 소국명에서 찾을 수 있다. 국읍과 읍락을 기본구성으로 하 는 고자미동국과 군미국이 언제 성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반도 남부의 일반적 인 상황을 고려할 때, 위에서 언급한 기원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3세기에 사물국( 史 勿 國 )은 변진 12국(13국)외 별읍으로 이웃인 고자국( 古 自 國 )과 함께 성장한다. 변진 12국과 또 여러 별읍이 있다 고 한 것은 변진 12국 외에 별도 의 읍락들이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들 별읍들은 때로 소국으로 인정되기도 했을 것이다. 포상팔국 명칭에도 변진 12국에 나오지 않는 소국이 등장한 다. 그렇다면 변진에는 12국 이상의 소국들이 존재했을 것인데, 사물국의 경우 12국 외 별읍이 거론되는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의 규모를 갖춘 소국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사물국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현재 사천만의 동안인 동부지역과 도서지역범 위이며 중심읍락이 인근 읍락들과 도서지역읍락 가운데서 국읍으로서의 구심력을 가 진 상태였을 것이다. 하지만 진왕으로부터 우호를 더해 받는 함안의 안야국이나 김해 의 구야국보다는 상대적으로 약한 소국이었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포상팔국이란 3세기경 가야제국과는 달리, 지금의 한려수도를 중심으로 경남 남해 안에 형성된 별읍의 여덟 개 나라의 해상세력을 말하기도 한다. 이들 나라 중 사천만 의 사물국, 고성 통영을 아우르는 고사포국, 칠포국, 마산만의 골포국, 보라국 등 5개 의 나라는 그 이름이 기록되고 나머지 3국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세력은 전남해안 까지 미쳤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이 지역은 가야 세력권 밖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 성하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지정학적인 측면 뿐 아니라 대외교역상의 문제 즉, 한군현 56 사 천 교 육 사
제2절 역사적 환경 이나 왜국을 상대로 했던 해상교역에서 김해의 가락국이 전기 가야의 여러 나라들 사 이에서 재분배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을 추정한다면 가야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 다고 보여진다. 다. 통일신라시대 삼국의 통일은 신라로 하여금 무엇보다도 넓은 영토를 확보하게 해 주었으며, 확대 된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지방조직의 정비가 필요하였다. 그리고 이러 한 과업을 수행한 왕이 신문왕( 神 文 王 :681 692)이었다. 그는 5년(685)에 주 군 현을 기본으로 한 지방통치조직을 갖추었다. 주( 州 )는 통일 전에도 영토의 확장에 따라 차 례로 설치되어온 것이지만,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뒤에 새로이 편입된 지역을 포함하 여 이를 9주로 정비하였다. 이때의 전국 지방조직은 9주 5소경 117군 293현이었고, 이 가운데 강주(진주)의 관령( 管 領 )은 11군 27현이며, 사천의 근본지는 고자군(고성)의 사물현과 한다사군(하 동)의 하읍현이다. 오늘날 사천시의 연원( 淵 源 )은 순수한 우리 토박이 말인 사물( 史 勿 ) 에서 찾아지는 데, 그 의미요소는 물( 勿 )이 부정( 否 定 )을 나타내는 없음 을 뜻하고 금지( 禁 止 ) 를 뜻 하는 말로도 사용되고 있으나 음( 音 )으로는 슈( 水 )와 물 수( 水 )와 같은 소리값을 내고 있으므로 물( 水 )의 음차자( 音 借 字 )이거나 동음차자( 同 音 借 字 )로 표기하여 사물( 史 勿 ) 또는 사물( 思 勿 )이 사수( 泗 水 )로 훈차( 訓 借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물은 사주( 泗 州 )의 사( 泗 )자나 사수( 泗 水 )의 수( 水 )자도 모두 강과 바다 즉 물과 같은 뜻으로 풀이 되어 사수 하면 수향( 水 鄕 )임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아무튼 어느 지명과는 달리 문헌상에 처음 보이는 사물 이 3세기초에서부터 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약 6세기 동안 줄곧 습용( 襲 用 )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고려 태조 23년(940)에 강주를 진주로 개 명할 때 하읍현을 곤명현이라 개명하였고, 또 조선 세종대에 이르러서는 곤명현을 곤 남군( 昆 南 郡 )으로 승격시켰으므로 자연히 고적조에 그 고호( 古 號 )로서 이름만 남기게 되었다. 오늘의 사천시 서부지역인 곤양, 곤명, 서포면이 이에 해당한다. 라. 고려시대 성종이 최승로의 건의에 따라 전국에 12목( 牧 )을 설치하여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성종 2년에 12목이 설치된 곳은 양주( 楊 州 ) 광주( 廣 州 ) 충주( 忠 州 ) 청주( 淸 州 ) 공주( 公 사 천 교 육 사 57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州 ) 진주( 晋 州 ) 상주( 尙 州 ) 전주( 全 州 ) 나주( 羅 州 ) 승주( 昇 州 ) 해주( 海 州 ) 황주( 黃 州 )의 12주이다. 12목 중 사천지역은 진주목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때 사천지방은 고성군의 영현( 領 縣 )으로 속해 있던 사수현이 진주목 관할로 내속 되고 아울러 조운제( 漕 運 制 )의 실시로 통양창( 通 陽 倉 )이 설치되었다. 진주목 관내의 경우 진주, 합주, 사주가 명칭상으로는 같은 주지만 진주는 목이 설 치된 반면 합주는 지사군( 知 事 郡 )이며, 사주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진주목 관할의 속현이었다. 이후 현종 2년 교서를 내려 사수현을 사주( 泗 州 )로 승격시켰지만 당시의 지방 제도 상 주로 승격시켰다고 해서 외관이 파견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상징적인 주로서의 사 주는 진주목의 한 속현으로 존재했을 뿐이다. 마. 조선시대 1) 사천현 곤양군의 행정구역 오늘날의 사천에 해당하는 사천현과 곤양군은 경상우도에 속했으며, 조선전후기에 걸쳐 읍격( 邑 格 )에는 변화가 없었다. 다만 같은 진주권역이었지만 지정학상 사천만이 기다랗게 남북으로 가로 놓여 조선후기까지 한번도 합쳐질 수 없는 요인이 되기도 하 였다. 경국대전 편찬 당시 사천현은 종6품의 현감이 부임하는 고을이었고, 곤양군 은 사천현보다 그리 큰 지역은 아니지만 두 품계 높은 종4품 군수가 부임하는 고을이 었다. 이런 읍격은 조선후기 고종 32년(1895) 5월 전국이 23부제로 개편되면서, 사천 현이 사천군으로 바뀔 때까지 변동이 없었다. 이후 곤양군은 1914년 3월 행정구역 개 편 때 처음으로 사천군에 병합되었다. 가) 조선전기의 사천현 사천은 고려 초에만 하더라도 진주 임내( 任 內 )에 딸린 속현이었다. 현종 신해년 (1011)에 사주( 泗 州 )로 명호를 높였으며, 명종 임진년(1172)에 비로소 감무( 監 務 )를 두어 주읍이 되었다. 조선조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 계사년(1413)에 예개( 例 改 )에 의하여 종래의 명호인 사주를 고쳐 사천( 泗 川 ) 이라 하고 현감( 縣 監 )을 두었다. 계사년의 예개란 전국의 지방제도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계수관의 단부( 單 府 )를 제외 한 무릇 군현의 이름 가운데 고을주( 州 )자를 딴 것은 모두 메산( 山 )자 또는 내천( 川 )자 로 고쳐 부르게 함에 따른 것이다. 이로써 고려 현종대 이후 사주의 명호는 조선초 태 종 때에 이르러 오늘날의 사천으로 그 이름이 굳혀진 셈이다. 58 사 천 교 육 사
제2절 역사적 환경 2년 후인 태종 을미년(1415) 9월에 진( 鎭 )이 설치되고 병마사( 兵 馬 使, 정3품)가 파 견되어 사천현의 일을 겸무하였다. 그러다가 세종 5년 계묘(1423)에 병마 첨절제사 ( 兵 馬 僉 節 制 使, 종3품)로 낮추었다. 그 후 세조 14년 무자년(1468)에 사천진은 혁파되 고, 진주진관 소속의 제진으로 개편되면서 병마절제도위의 현감으로 다시 환원되었다. 나) 조선전기의 곤양군 본래는 하동군의 영현으로 고려 현종 무오년(1018)에 진주에 소속된 곤명현이다. 조선초 세종 즉위년(태종 18, 1418) 11월 5일 왕의 어태( 御 胎 )를 현에서 20리 북쪽 소곡산( 所 谷 山 )에 매안( 埋 安 )하고, 윈년 기해(1419) 3월 27일 남해현을 곤명현에 합하 여 승격시켜 곤남군( 昆 南 郡 )을 만들었다. 곤남 이란 명호는 곤명과 남해 두 고을의 머 릿글자를 합하여 만든 합성 지명이다. 세종 19년(1437)에는 남해현을 분리하고 진주 임내의 금양부곡을 딸려서 곤양군 ( 昆 陽 郡 ) 이라 개칭하였다. 곤양 이란 이름 역시 곤남의 머릿글자와 금양의 두 번째 글 자를 따서 합성한 명호가 되었다. 2) 조선후기 가) 사천현 곤양군의 행정조직 조선후기의 사천과 곤양은 역시 전기와 마찬가지로 사천은 사천현, 곤양은 곤양군 관할 밑에 각기 놓여 있었다. 사천현은 경상도에 있었던 38개 현( 縣 )중의 하나이고, 곤 양군은 역시 경상도에 있었던 23개 군( 郡 ) 중에 하나로, 그 행정상의 책임을 지고 있 던 사천현감과 곤양군수는 각각 무6품(절제도위)과 무4품(동첨절제사)의 외관직으로 동반( 東 班 )의 무관이 임명되었는데, 그 임기는 두 고을 다 900일(2년 6개월)이었고, 사천현감은 1610년(광해군 2년) 8월에 정운( 鄭 橒 )이 부임한 뒤부터 1863년(철종14) 3월에 홍의선( 洪 義 宣 )이 이임할 때까지 253년 사이에 141명의 현감이 교체되었다. 그 리고 곤양군수는 광해조 때 김예직( 金 禮 直 )이 부임한 뒤부터 철종대에 장두표( 張 斗 表 ) 가 이임할 때까지 약 255년 사이에 142명의 군수가 교체되었다. 나) 사천 곤양군의 면리 구성 조선후기에 있어서 사천 곤양의 행정구획과 호구( 戶 口 )의 수는 문헌에 비교적 자 세히 나타나 있다. 즉 경상도읍지 에 따르면, 사천현의 행정 구획은 읍내( 邑 內 )를 중심으로 상주내면( 上 州 內 面 ) 동면( 東 面 ) 근남면( 近 南 面 ) 삼천리면( 三 千 里 面 ) 하남면 ( 下 南 面 ) 중남면( 中 南 面 ) 상서면( 上 西 面 ) 하서면( 下 西 面 ) 북면( 北 面 )의 9개 면으로 나뉘 사 천 교 육 사 59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어져 있었는데, 남녀 합하여 14,620명의 인구가 3,313호에 살고 있었다. 따라서 곤양 군의 행정 구획은 동부면( 東 部 面 ) 서부면( 西 部 面 ) 초량면( 草 梁 面 ) 가리면( 加 利 面 ) 소곡 면( 所 谷 面 ) 성방면( 城 方 面 ) 곤명면( 昆 明 面 ) 양포면( 兩 浦 面 ) 금양면( 金 陽 面 ) 서면( 西 面 ) 의 10개 면으로 나뉘어져, 남자 7,871명, 여자 7,401명 도합 15,272명의 인구가 3,686호에 살고 있었다. 바. 1914년 이후 1914년 4월 1일부터 시행하게 된 총독부령(1913. 12. 29 공포) 제111호에 의하여 도의 관할구역과 부 군의 명칭 위치 관할구역이 개편, 통합되었다. 특히 부 군 관할구 역의 대폭적인 합병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종래의 곤양군이 다시 사천군으로 통폐합되 어 대체로 오늘날의 행정구역의 명칭과 규모의 기틀이 확립되었다. 1914년 군면폐치 분합에 따라 사천군으로 편입된 지역과 각 면별 관할구역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곤양군의 10개 면중 서면( 西 面 )과 금양면( 金 陽 面 )이 하동군으로 이속되고 나 머지 8개면 즉 동부( 東 部 ) 가리( 加 里 ) 서부( 西 部 ) 양포( 兩 浦 ) 곤명( 昆 明 ) 소곡( 所 谷 ) 초 량( 草 梁 ) 성방( 城 方 ) 등이 편입되었으며, 다음은 진주군의 부화곡면( 夫 火 谷 面 ) 축동면 ( 杻 洞 面 ) 축곡면( 杻 谷 面 )의 수거동( 樹 巨 洞 ) 및 연향동( 蓮 香 洞 )의 각 일부, 가차례면( 加 次 禮 面 )의 상동( 上 洞 )과 하동( 下 洞 )의 각 일부, 고성군 상리면( 上 里 面 )의 가슬동( 歌 瑟 洞 ) 일부와 하이면( 下 二 面 )의 수청( 水 淸 ) 남곡( 襤 谷 ) 및 신덕( 新 德 )의 일부가 편입되어 읍내( 邑 內 ) 읍동( 邑 東 ) 읍서( 邑 西 ) 읍남( 邑 南 ) 남양( 南 陽 ) 수남( 洙 南 ) 문선( 文 善 ) 축동 ( 杻 洞 ) 곤양( 昆 陽 ) 서포( 西 浦 ) 곤명( 昆 明 ) 등 11면 117동리로 개편되었다. 1918년 5월에 수남면, 문선면을 합하여 삼천포면( 三 千 浦 面 )이 탄생하여 지정면으 로 승격되었다. 이때 삼천포면의 인구가 얼마였는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1911년 현재 수남면과 문선면은 모두 1,536호에 인구는 7,569명이었고, 일본인은 109호에 인구 444명이었다. 그러므로 삼천포면은 개항 이래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는 추세여서 지 정면이 되었을 무렵에는 인구가 거의 만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5년에는 사천군의 읍내면을 사천면( 泗 川 面 )이라 고쳤다. 그 후 1931년 4월 1일 에는 부령 제12호(1930. 12. 1 공포)의 시행에 따라 종래의 지정면을 읍으로 승격시켰 는데, 이에 따라 같은 해 11월 1일에 삼천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이는 면제에 의한 면 가운데 인구가 비교적 많고 도시다운 형태를 이룬 면을 총독이 지정한 것인데, 이 60 사 천 교 육 사
제2절 역사적 환경 역시 1920년 면제의 개정으로 보통면과는 그 처우를 달리 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 다. 그리고 삼천포읍이 승격된 그 해 8월에 사천군 읍동면을 정동면( 正 東 面 ), 읍서면을 사남면( 泗 南 面 ), 읍남면을 용현면( 龍 見 面 )으로 각각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 정부수립 1) 사천군의 시작 1947년 11월 14일, UN총회는 한국의 독립을 촉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UN한국 위원단(8개국)의 공식적 구성을 의결했다. 소련의 동위원단이 북한에 들어갈 것을 동 의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1948년 2월 26일에서 그 임무를 수행하도록 결의하여 결국 남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이 났다. 사천에서 당선된 제헌 국회의원은 항일운동가로서 전 다솔사( 多 率 寺 ) 주지였던 무 소속의 최범술( 崔 凡 述 )이었으며, 1949년 10월 18일에는 제3대 경남지사로 문시환( 文 時 煥 )이 임명되고, 각 시군에서 사천은 군정말에 이미 임명된( 48. 6. 4 49. 6. 20) 황남팔( 黃 南 八 )이 초대 군수로 사천의 행정은 정상적인 체계를 갖추어 군정( 郡 政 )을 펴나가기 시작하였다. 2) 삼천포읍의 시 승격 1956년 7월 8일 지방자치법이 개정될 때 사천군의 관할구역의 변경이 있었다. 그 것은 7월 3일 제46차 민의원본회의에서 당시 자유당 소속의 최갑환(경남 고성출신) 의원이 제출한 심의안건 중 <삼천포읍의 시 설치 문제와 군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법 률안>이 상정되어 표결로서 통과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56년 7월 8일 법률 제390호로 종래의 삼천포읍과 남양면을 병합하여 삼천포시( 三 千 浦 市 )로 승격되어 사천군에서 분리되었으며, 동시에 법률 제393호로 사 천면은 읍( 邑 )으로 승격되었다. 이에 따라 사천군은 1읍 9개면에서 1읍 7개면으로 군 세가 위축된 반면, 신생 삼천포시는 법정 27개동을 관할하는 임해 신흥 도시로 발전할 가능성을 안고 출범하였다. 1956년 7월, 시 승격 당시의 삼천포시 상황을 보면 총면적 58.85km2에 법정 동수는 27개동으로 가구수 8,249호, 인구 남자 24,536인, 여자 26,752인 계 51,288인이었 고, 사천군은 1958년 12월 31일 현재, 1읍 7면에 법정 90리동, 총면적 346.28km2, 가 구수 13,953호, 인구 남자 40,552인, 여자 42,240인 계 82,792인이었다. 사 천 교 육 사 61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3) 통합사천시의 출범 1995년 5월 10일 도 농 복합형태의 시 설치에 관한 법률 제4948호에 의거 삼천포 시와 사천군이 통합되어 새로운 도 농 복합형태의 사천시가 출범하게 되었다. 출범에 앞서 1995년 4월 3일 11시에 사천군 용현면사무소 2층 회의실에서 삼천포 시와 사천군이 통합시로 발족하기 위하여 한창일 삼천포시장, 황철곤 사천군수, 정동 주 사천군의회 의장, 그리고 기관 단체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통합시 설치준비단을 출 범시키고, 통합시 설치를 위한 기획과 조정, 통합시 기구 정원조정에 대한 내무부 승 인을 받아 직제 및 인사, 자치법규 정비(조례 규칙 등의 제정 폐지 등)를 서두르는 한 편 조직운용을 위한 예산조치, 재산관리, 청사, 장비, 집기, 부대시설 확보 등 통합시 개청행사와 홍보에 관한 제반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양 시 군 의회에서는 행정기구 조정과 조례를 정비하여 통합 에 대비하게 되었는데, 1995년 4월 4일 삼천포시청 상황실에서 시 조정위원회를 개최 하고 조정되는 동명칭, 구획획정과 동장의 정수 조례 개정안과 시청 및 동사무소 소재 지에 관한 조례 개정안을 심의하여 종래의 16개 행정동을 10개동으로 조정하고 늑도 동( 勒 島 洞 ) 신수동( 新 樹 洞 )에는 각각 출장소를 두게 되었다. 1995년 5월 10일, 통합시 출범과 동시에 사천시의회가 구성되었고, 통합시의 행정 구역은 1읍 7면 10동으로 되었다. 이로써 1956년 7월, 양 시군으로 분리된 이래 실로 39년만에 역사적, 문화적 동질성을 회복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사천 전체가 다시 하나 되어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통합 후 사천시의 기구는 한시 기구로 설치해 놓고 있는데 기구를 요약하면 5국, 2 소, 1실, 6담당관, 24과, 1출장소, 106계를 두고 1읍 7면 10개동으로 조직되어 있다. 당시의 공무원 수를 보면 총 1,074명으로 기획예산담당관실 14명, 문화공보실 14 명, 감사담당관실 11명, 전산통계담당관실 15명, 총무국 152명, 사회환경국 92명, 산 업경제국 92명, 건설교통국 115명, 사업소 52명, 의회사무국 18명, 보건소 87명, 농 촌지도소 51명, 읍 면 동 361명 등으로 되어 있다. 62 사 천 교 육 사
제3절 문화적 환경 제3절 문화적 환경 1. 행정구역과 인구 시의 동쪽과 남쪽은 고성군과 남해군을 경계하여 와룡산과 바다에 걸쳐 있고 서북 쪽은 진주시와 하동군이 경계하며 지리산이 뻗어내린 산악으로 형성되어 있어 해안평 야가 남북으로 전개되어 있다. 행정구역은 1읍 7면 6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분 세대수 합계 읍면동별 <세 대> 내 국 인 2007. 08. 31현재(주민등록인구) 외 국 인 계 남 여 계 남 여 합 계 44,144 113,668 112,624 56,609 56,015 1,044 673 371 읍 면 계 23,456 59,894 59,209 29,811 29,398 685 453 232 사 천 읍 6,484 16,951 16,852 8,511 8,341 99 57 42 정 동 면 4,001 11,520 11,409 5,738 5,671 111 68 43 사 남 면 3,888 9,986 9,679 4,871 4,808 307 223 84 용 현 면 2,604 6,147 6,122 3,094 3,028 25 8 17 축 동 면 972 2,289 2,227 1,147 1,080 62 52 10 곤 양 면 1,992 4,795 4,751 2,374 2,377 44 34 10 곤 명 면 1,554 3,497 3,481 1,735 1,746 16 8 8 서 포 면 1,961 4,709 4,688 2,341 2,347 21 3 18 동 계 20,688 53,774 53,415 26,798 26,617 359 220 139 동 소 계 3,811 9,582 9,509 4,829 4,680 73 46 27 서 동 서 동 3,632 9,103 9,030 4,591 4,439 73 46 27 동 신수출장소 179 479 479 238 241 0 0 0 선 구 동 3,101 7,811 7,726 3,887 3,839 85 65 20 동 서 금 동 2,970 7,128 7,079 3,461 3,618 49 32 17 벌 용 동 6,019 16,565 16,507 8,190 8,317 58 28 30 향 촌 동 2,498 6,788 6,720 3,505 3,215 68 41 27 남 양 동 2,289 5,900 5,874 2,926 2,948 26 8 18 사 천 교 육 사 63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2. 문화적 특성 사천은 예로부터 풍속이 무( 武 )와 예( 芸 )를 숭상하였고( 俗 尙 武 芸 ), 형승( 形 勝 )은 가 장 남쪽에 있는 요충지라고 권기( 權 技 )의 기문( 記 文 )에 기록되어 있으며 비옥한 들판 을 굽어보니 뭇 산봉우리가 기이하게 솟아 있다고 신석조( 辛 碩 祖 )의 기문에 기록되어 있음을 보아 사천지역 조상들은 일찍부터 무와 예를 숭상하고 산자수명( 山 紫 水 明 )한 고장에서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면서 한편으로는 무를 익혀 국방을 튼튼히 하며 나라 를 지키고, 때를 맞추어 예와 기술을 길러 명실상부한 무와 예가 겸비된 고장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배양된 문화 예술은 일찍이 상고시대부터 부족국가인 사물국 ( 思 勿 國 )이 나라를 터 잡았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할 것이다. 그것은 고 금 동서를 막론하고 인류가 탄생시킨 문화와 문명은 대부분 강이나 바닷가의 비옥한 유역에서 발생하였듯이, 이 사천지역도 기름진 농경지가 많고 수륙( 水 陸 )양면의 물산 ( 物 産 )이 풍부했을 뿐 아니라 하늘의 기후 또한 온화하고 비가 많아 천혜( 天 惠 )를 받은 복된 고장이라 할 것이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문화유적은 당시의 융성( 隆 盛 )했음을 짐작케 해 주며 출토된 유물은 이러한 추정을 확정케 해 주는 것이다. 특히 삼면이 바다에 접해 있어 연안 각 지에 분포해 있는 조개무지나 고인돌, 무덤과 고분, 그리고 토석기류와 청동기, 철기 등의 출현은 이 고장이 일찍이 역사 이전 시대부터 농어업 문화가 잉태되어온 고장임 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다. 지난 2001년 11월 11일 KBS에서 방영한 늑도, 2 천년 전 국제무역항이었다 는 역사스페셜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신라, 고려시대의 불교문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다만 가야시대 불교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가락국 건국신화에도 나오듯이 이 지 역은 일찍이 신라가 고구려에서 불교문화를 받아들이기 이전에 이미 해양불교 또는 남방불교가 들어온 전래지( 傳 來 地 )로 가야불교가 융성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은 폐허화된 와룡사지( 臥 龍 寺 址 )와 귀룡사지( 歸 龍 寺 址 )로서 이 두 절은 김수로왕의 둘째 왕자가 창건했다는 설화가 짙게 서려 있는 곳이다. 그리고 범승( 梵 僧 ) 연기( 緣 起 )의 처 음 창설로 알려진 전통불교 고찰인 다솔사( 多 率 寺 ) 또한 이에 속한다. 한편 고려말에 불교가 쇠퇴해짐에 따라 남해안 일대에는 왜구의 빈번한 침입을 당 했다. 이때 이 지역 사람들은 왜적의 침입을 불력( 佛 力 )으로 막으려고 했던 호국불교 64 사 천 교 육 사
제3절 문화적 환경 ( 護 國 佛 敎 )의 발로가 보안암석굴( 普 安 庵 石 窟 ) 이며 또한 매향비( 埋 香 碑 )이다. 석굴 의 장육석불( 丈 六 石 佛 )은 경주 토함산의 석가여래상보다는 규모가 작으나 항마상( 降 魔 相 )을 하고 동쪽 사천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고미술품의 걸작품이다. 그리고 곤양 면 흥사리 매향비는 4,100명의 불교신자가 중심이 되어 향계( 香 契 )를 맺고 침향목( 沈 香 木 )을 땅에 뭍은 뒤 그 위에 빗돌을 세우고 204자의 금석문( 金 石 文 )을 새겼으며 향 촌동 매향비(암각)는 30여 명의 불교신자들이 수륙무차대회( 水 陸 無 遮 大 會 : 요즈음의 풍어제)를 겸한 행사를 끝내고 매향행사를 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민속신앙인 미륵 보살에게 현세의 국태민안( 國 泰 民 安 )과 내세의 구복( 求 福 )을 기원한 발원문으로서, 보 물급에 속하는 문화재로서의 옛 정취를 물씬 풍겨주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향교와 서원 등 사림( 士 林 ) 중심의 유교문화가 발전되어 왔고, 학자 들은 누정( 樓 亭 )이나 정수( 亭 樹 )를 건립하여 시를 짓고 자연을 노래하는 일들이 많았 다. 산천은 인걸( 人 傑 )을 낳고 그 인걸은 문화예술의 창조를 기약하여 왔던 것이며, 사 천지역의 지령( 地 靈 )이 수사( 洙 泗 )의 성역( 聖 域 )과 닮았다 하여 동로( 東 魯 ) 로 까지 일 컬어 왔으며 와룡산이 동남으로 뻗어 있고 그 중앙에 남양( 南 陽 )이 자리 하고 있어 이 고장이 중국 산동성 사람 제갈량이 태어난 산등성 남양과 같다 하여 문천( 文 千 )과 무 만( 武 萬 ) 즉, 제갈량 같은 현인문사가 수천이나 나오고 무인이 만명이나 태어날 고장 이라는 지리 참의설이 전하는 고장이다. 또한 유교의 학풍은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이 땅에 수많은 문장가를 배출하였고, 이 고장 이르는 곳마다 효렬선행( 孝 烈 善 行 )의 정려 ( 旌 閭 )를 보게되는 것이다. 어디 이 뿐인가. 명종 때의 문신 학자로 성리학의 대가였던 구암( 龜 岩 ) 이정( 李 楨 )을 탄생시킨 것도 따지고 보면 수려한 산수의 지령 때문이었으 리라. 당시 구암 이정을 비롯하여 관포( 灌 圃 ) 어득강( 魚 得 江 ), 퇴계( 退 溪 ) 이황( 李 滉 ), 남명( 南 冥 ) 조식( 曺 植 ), 옥계( 玉 溪 ) 노신( 盧 所 )등 유현들이 이 고장 대관대( 大 觀 臺 ), 쾌 재정( 快 哉 亭 ), 그리고 작도( 鵲 島 ) 등지에서 남긴 제영( 題 詠 )은 우리의 소중한 정신적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그런가 하면 사천읍 두량리 추동 뒷산의 나지막한 아홉고개( 九 夫 塚 )에서 연유되었 다는 <가루지기 타령>과 <가산오광대>의 가면극, 진주 삼천포 농악12차 등 유무형 문 화재는 이 고장 전통문화예술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에 충분하며 문하 목태림의 동 성부와 산옹의 수양수필은 사천의 역사 풍물은 물론 수려한 문장이 일품이며 개화기 의 삼천포 팔문장( 八 文 章 )은 새로운 문학의 태동기를 열고 있었던 것이다. 사 천 교 육 사 65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3. 문화예술 행사 가. 와룡문화제 문화제( 文 化 祭 )는 지방 고유의 문화적 특색을 자랑하는 향토의 축제로서 지역마다 향토문화제로 열려 왔다. 마을축제의 성격을 갖는 문화제는 민중의 예술과 문화를 오늘 에 되살려 이어나가기 위한 행사이며 아울러 마을의 단결과 협동을 다지기 위한 잔치 로서 농악 민속놀이 민요 민속무용 민속극 등을 중심으로 한 문화제는 새로운 민속의 발굴과 함께 지방색이 짙은 고유의 특색을 자랑하는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지고 있다. 사천시에서 처음 문화제가 개최된 것은 진주의 영남예술제, 밀양에서 개최되던 아 랑제에 이어 1958년 10월에 최동수( 崔 東 秀 )가 주축이 되어 뜻있는 유지들로 구성된 사천문화제 추진위원회의 주최로 제1회 사천문화제 가 서막을 올렸다. 이후 사천문화 제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1966년 9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게 되고 21년동안 휴 면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삼천포지역에서는 1960년 10월 22일부터 24일까지 한국예총 삼천포지부 지부장이던 손병준( 孫 丙 準 )이 주축이 되어 제2공화국 수립 경축 제1회 향토문화제를 개최하고 4년간 쉬었다가 삼천포항이 개항장으로 승격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한 개항 경축 향토문화제가 1965년 10월에 제2회 향토문화제란 이름으로 예총지부장 손병준이 개최하게 되었다. 그 다음 해인 1966년 예술제 명칭을 향토문화 제에서 노산문화제 로 명칭을 바꾸어 개최하였다. 명칭을 다시 한려문화제 로 고치고 1969년 제5회 한려문화제로 개최되었다. 한려 문화제는 1970년에 5회부터 시작하여 1988년 12회까지 8회를 개최하다가 정부의 지 방문화 활성화 시책에 힘입어 국풍( 國 風 )에 따라 그 명칭도 시민한마당 큰 잔치 로 바 뀌게 되고 1989년 제13회를 시작으로 1994년까지 시민한마당 큰 잔치라는 이름으로 관 주도에서 민 주도로 바뀌면서 5회를 마지막으로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이어서 1995년 5월 10일 도 농 통합 정책에 따라 삼천포가 사천과 통합됨으로써 이 고장을 대표하는 영산( 靈 山 ) 와룡산의 기상을 따서 와룡문화제란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나. 풍어제 풍어제는 어민들이 바다에 나가서 어로작업을 하여 많은 고기를 잡고 험난한 바다 66 사 천 교 육 사
제3절 문화적 환경 에서 무사하도록 안전을 비는 어민들이 하는 일종의 공동축제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사천시 또한 남쪽과 서쪽은 바다에 접해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풍어와 어로의 안전을 비는 풍어제가 시작되었으리라 짐작되나 언제부터 누가 시행했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최근 향촌동에서 발견된 매향비( 埋 香 碑 )에 새겨진 수륙무차대회( 水 陸 無 遮 大 會 )라는 문구로 보아 일종의 풍어제가 영락 무술이월( 永 樂 戊 戌 二 月 : 조선태종 18년, 1418년)에 무차대회를 하였음을 볼 때 그 이전에도 풍어제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거제도를 중심으로 하여 한산도 사량도 욕지도 등지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 으며, 남해안 별신굿은 당골 이라는 명칭과 함께 남부지방 특유의 무당 천시 경향에 의해, 세습무인 사제무 계승이 안되고 있으며 사천지역 풍어제 또한 명맥만 이어오고 있을 뿐이다. 사천지역에는 일찍부터 풍어제가 다시 살아났다가 사회의 동질화시대에서 이질화 되어 가는 동제나 풍어제가 배신을 받았고 과학적 사상과 문명 이기의 보급으로, 신흥 종교의 보급과 미신으로 간주된 행사로, 정부의 미신타파 정책에 의해 차츰차츰 사라 지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 풍어나 어로의 안전을 기리는 풍어제는 개인이나 집단(마을 어촌계, 어협), 주민 공동체가 주축이 되어 출어를 앞두고 실시하 거나 음력 정월이나 시월 상달을 통하여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삼천포 풍어제(정인진 논문)에 관한 자료에 의하면 최근인 1965년 10월 11일부 터 14일까지 실시한 풍어제가 삼천포시에서 가진 풍어제로는 처음이라는 기록이 있 으나 신수도나 늑도 대방 실안 마도 등지에서는 8 15광복 이후 매년 정월이나 10월 에 부정기적으로 시행되었고 일제 강점기에도 소규모 풍어제는 실시한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삼천포시의 풍어제는 용왕굿의 성격을 갖고 있고 대개 정월 초사흘날부터 보름까 지 실시하였으며 선주 개인의 뱃굿과 마을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당산제, 용왕제 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 항공우주엑스포 1) 기간 : 매년 10월 08일~10일(4일간) 2) 장소 : 항공 박물관, 사천 공항 사 천 교 육 사 67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3) 주관 : 사천시, KAI 한국우주산업(주) 4) 내용 : 항공대회, 에어쇼, 항공스포츠 체험 및 이벤트 5) 주요행사 항공우주의 꿈! 우리 힘으로! 사천 항공 우주엑스포는 21세기형 항공과학 문화 도시로 도약과 항공인프라의 고 부가가치화로 항공산업의 시너지 창출하기 위함이며 21세기 첨단 산업도시로 도약과 외국인 기업 투자유치에 그 목적이 있다. 또 각종 체험활동과 부대행사를 통해 자라나 는 어린이들에게 항공우주산업의 꿈을 키워주고 직접 체험을 볼 수 있는 장을 마련하 고 있다. 라. 와룡산 비룡제 1) 기간 : 매년 5월 1주~2주 사이 2) 장소 : 와룡산 일원 3) 주관 : 삼천포 산악회 4) 내용 : 산신제, 야영대회, 자연보호 및 철쭉 산행 지리산 영봉의 정기를 따라 웅장한 맥락( 脈 絡 )이 이어지는 와룡산을 통해 이 고장 의 뿌리와 흐름을 알고 건강한 시민문화의 창조와 영달을 위하여 온 시민이 와룡을 향 해 복된 고장, 영광된 고장 이 이룩되도록 정성을 모아 민재봉 제단에 사천시민의 정 성어린 제수( 祭 需 )를 올리고 비룡을 기원하기 위함. 마. 삼천포항 팔포 전어 축제 1) 기간 : 매년 8월 중순경 4일간 2) 장소 : 사천시 삼천포항 팔포매립지 3) 주관 : 팔포상가 번영회 4) 내용 : 해산물 깜짝 경매, 어민 팔씨름 대회, 전어그림 그리기, 전어 빨리 먹기 대회 등 68 사 천 교 육 사
제3절 문화적 환경 본 축제 행사로는 모형비행기 시연, 해산물 깜짝 경매, 어민 팔씨름 대회, 팔포와 전 어를 아시나요, 해녀 수영대회를 시작으로 시민과 관광객이 즉석에서 참여할 수 있는 현장 노래방, 즉석 전어그림 그리기, 전어 빨리 먹기 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 진다. 잡수시고! 노시고! 주무시고 가이소! 라는 슬로건으로 개최되는 삼천포전어축제 는 전어 풍어기에 먹을거리, 볼거리가 풍부한 테마형 사천 관광의 지역특성을 살릴 뿐 만 아니라 싱싱한 해산물과 전국 제일의 전어 생산지인 사천시를 전국에 알리고 있다. 바. 삼천포중앙시장 한아름 건어물 축제 1) 기간 : 매년 10월 중순경 2일간 2) 장소 : 중앙시장 주차장 특설무대 3) 주관 : 중앙시장번영회 4) 내용 : 중앙시장 전 점포 20~30% 세일, 한아름노래자랑, 초대가수공연 등 한아름 건어물 축제는 중앙시장번영회에서 고객에 대한 친절, 믿음, 알뜰, 사랑에 대한 약속으로 100년을 자랑하는 중앙시장의 전통을 자랑으로 2006년도부터 시작한 축제이다. 사. 사천시농업한마당 축제 1) 기간 : 매년 11월 초순경 2일간 2) 장소 : 사천공설운동장 3) 주관 : 사천시농업한마당축제위원회 4) 내용 : 축하행사(불꽃놀이), 판매행사, 전시행사, 체험행사, 종합행사(사천단감 마당), 민속놀이, 부대행사 등 사천시농업한마당 축제는 전통이 살아있는 다양한 볼거리, 먹거리와 체험거리가 가 득 준비되어 있으며, 품질 좋은 단감, 참다래, 코뚜레한우 등 사천우수농산물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축제이며, 부대행사로 이루어지는 삼베짜기, 전통두부 만들 기, 소달구지체험 등 오랫동안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행사가 준비되어 있다. 사 천 교 육 사 69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아. 사천시 삼천포항 수산물 축제 1) 기간 : 매년 10월 초순경 3일간 2) 장소 : 삼천포항 일원(등대앞 특설무대) 3) 주관 : 수산업경영인사천시연합회 4) 내용 : 전시행사, 기획행사, 체험행사, 부대행사 본 축제는 전시행사로 지역특산물, 해양환경 사진전, 수산기자재 전시가 이루어지 며, 기획행사로 생선회 시식회, 선박퍼레이드, 모터보터 쇼, 물고기모형 유등 기원등 소망등 달기 등이 이루어지고, 체험행사로는 어탁뜨기와 오리보터 타기, 부대행사로 향토음식 먹거리 장터, 페이스페인팅, 수산물 포토존, 즉석 노래방, 시음회 등의 행사 가 이루어진다. 70 사 천 교 육 사
제3절 문화적 환경 4. 문화예술 단체 및 공간 가. 사천문화원 1) 위치 : 사천시 선구동 254-5번지 2) 설립년월일 : 1996. 1. 15 3) 규모 : 대지 661m2, 건물 1,194m2 4) 건물형태 : 지상 4층 슬라브 5) 건립연도 : 1967년 12월 6) 임원 및 회원 : 원장 1명, 부원장 2명, 이사 18명, 감사 2명, 회원 371명 문화원은 표류하는 우리 문화의 얼을 바로 잡고, 향토문화를 개발하고 문화를 지키 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문화를 보급하는 봉사활동에까지 힘쓰고 있으면서 현재는 명 실상부한 지역문화 진흥의 기수로서 활동하고 있다. 1950년대 말에는 경상남도에 함양, 밀양 등을 선두로 전국에 78개의 문화원이 있 을 무렵 삼천포에서는 뜻있는 유지들이 사재를 털어 문화원 창설을 서둘렀고 1963년 전국에서 13번째로 인가를 받았으며 구 사천문화원은 1983년 문공부 제467호로 사 단법인 사천문화원이 문을 열게 되었다. 삼천포 사천문화원 설립이후 문예진흥사업을 실시해 오다가 정부의 도 농 통합시책 으로 구 삼천포시와 사천군이 1995년 5월 10일 통합됨으로써 양 문화원도 통합작업 을 착수하게 되었는데 양 문화원에서 5명씩, 10명으로 통합추진위원회를 운영하여 1996년 1월 5일 삼천포 사천문화원이 통합되고 초대 원장에 전 삼천포 문화원장 황성 환( 黃 成 煥 )이 선임되었고 지방문화원 설립인가(문화체육부 제359호)를 받게 됨으로써 새로운 사천문화원 이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그 해 첫 사업으로 춘계 무형문화재 발표 공연을 가졌으며, 통합 사천시 1주년 기념 한글시 백일장 행사를 주관했다. 그해 지방문화원 설립 등기를 마치고 가정의 달을 맞 아 경로효친을 위한 경로잔치를 문화원 대강당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또한 하계 청소년 문화유적지 탐방을 실시하고, 시민을 위한 서울 팝오케스트라 공연을 가졌으며, 제398 주기 조명연합군 전몰 위령제를 봉행하였고 와룡동에 있는 와룡사지에 표석을 세웠다. 사천문화원은 1996년부터 지금까지 눈부신 활동을 하면서 문화예술 진흥에 앞장 사 천 교 육 사 71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서 일했을 뿐만 아니라 시민의 문화 수용 욕구에 한발 앞서서 일하는데 많은 노력을 아 끼지 않았다. 그러나 문명의 이기라 부르는 컴퓨터 보급과 각종 매스컴의 범람으로 질 높은 문화향수를 꿈꾸는 다수 시민의 욕구를 미리 읽고 그들에게 살아 있는 문화예술 을 보급하는 기지 역할을 할 때 사천문화원은 더욱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나. 한국예총 사천지부 사천시의 문화예술단체를 보면 한국예술문화총연합회 사천시지부 내에 문인협회 국악협회 연예협회 미술협회 음악협회 연극협회 무용협회 사진협회가 있다. 한국예총 사천시지부는 많은 예술진흥 사업을 실시했는데 그 중 중요한 사항을 간 추려 보면 사천시 향토사랑 구전가요모음 발표회를 가져 사천지역에서 부르던 향토가 요를 발굴하여 발표회를 가져 잊혀져 가던 향토가요를 찾아 재조명하고 보전하기 위 하여 녹음 테이프 1천 점을 만들어 관내 유관기관, 학교 등에 배포하고 있다. 또한 향 토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유명 교수들을 초빙하여 세미나를 개최하고 지역문화예술 발 전방향을 모색하였으며, 경남 향토사랑 순회사진전을 개최하였고, 와룡문화제와 함께 경남예술한마당 큰잔치를 베풀어 경남 예술인들의 역량과 친선을 도모하고 있다. 국악 협회 사천시지부에서는 국악한마당잔치를 베풀어 사천시민들에게 국악의 진수를 보여 주었고 와룡문화제 잔치에서 국악공연과 전국시조 경창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문인협회 사천시지부는 선진벚꽃축제 부대행사로 한글시 백일장을 열었으며 삼천 포청년회의소가 주관한 어린이날 기념행사로 개최한 한글시 백일장을 주관하였고, 박 재삼 문화제 를 개최 시화전, 백일장, 시 낭송대회 등을 실시하여 박재삼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와룡문화제에서 한글시 백일장과 이야기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미술협회 사천시지부에서는 선진벚꽃축제 부대행사로 학생미술실기대회와 와룡문 화제에서 학생미술대회를 주관했다. 각종 대회와 문 예한마당 미술실기대회를 개최하 여 미술의 저변확대를 기하기도 했으며 회원들의 작품을 다른 전시회에 많이 출품하 기도 했다. 연예협회 사천시지부에서는 와룡문화제 행사에서 시민 노래자랑대회를 개최하였으 며 음악협회 사천시지부에서는 음악경연대회를 시작으로 와룡문화제 행사에서는 초청 음악회를 개최하고 있다. 72 사 천 교 육 사
제3절 문화적 환경 다. 사천문화예술회관 1) 위 치 : 사천시 동림동 190번지 2) 개 관 : 2002. 02. 27 3) 홈 피 : http://art.sacheon.go.kr 4) 공연 관람 내용 : 오페라, 대중음악, 무용, 국악, 교향악, 연극, 뮤지 컬, 발레 등 다양한 문화 행사 및 공연 사천문화예술회관은 부지 21,576m2, 연건평은 4,615m2의 대공연장 850석, 소공연 장 192석으로 지하2층, 지상3층 건물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수려한 산과 바다와 그리고 시가지를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웅장한 모습은 전통과 특색을 가진 향기 짙은 지역문화를 빚어 내고 찬란한 예술을 창조하는 요람이자 전당이다. 라. 사천예술촌 사천시의 사천예술촌이 사천시 사남면 초전리 551번지의 1 옛 초전초등학교를 빌 려 둥지를 마련하고 비상의 날을 기다리다 2년여 만에 창립총회를 2002년 1월 4일 18시에 갖고 첫 날개 짓을 푸른 하늘을 향하여 힘껏 펼쳤다. 지난 1999년에 폐교된 초전초등학교를 빌려 예술촌을 가꾸기 위해 사천지역 예술인들이 피나는 노력 끝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던 것이다. 개촌식에는 테마프로그램, 기획프로그램, 부대행사 등으로 강연과 전시 공연 등의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되었는데 오전 10시에는 진주전문대 고원규 교수가 지역사회와 사천예술촌 이라는 주제로 초청강연을 하는 것을 시작으로, 장승세우기, 솟대심기 등을 중심으로 장승놀이, 비나리 대북공연, 민속연 등 축하행사가 이어지고 오후 4시부터는 전시장이 처음 문을 열었으며, 진주오광대 축하공연을 끝으로 행사의 막을 내렸다. 사천예술촌은 공연 미술 문학 민속분과에서 사천지역의 문화를 총망라한다는 계획 아래 명실공히 사천의 문화의 생산지 로의 역할을 목표로 삼고 문화예술인과 지역민 들의 어울림 장 마련에 최선을 다할 것을 기획하고 있다. 또 전시 효과적이고 소모적 사 천 교 육 사 73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인 행사를 지양하고 향후 예술촌의 분명한 방향성과 지역 독자성을 갖추는데 이바지 하며 시민과 예술인에게 애향심과 공동체의식을 심어주고 또한 문화도시에 비전을 만 들어 갈 수 있는 동기부여에 주안점을 두고 운영해 나갈 계획으로 노력하고 있으며 예 술 문화진흥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마. 진주 삼천포 12차 농악 전수관 1) 위 치 : 사천시 송포동 177-2번지 2) 지 정 : 1966. 06. 29 3) 지정번호 : 중요무형문화재 제11-가호 4) 공연 관람 내용 : 진주 삼천포 12차 농악 공면 및 체험 연수 진주 삼천포농악은 진주, 삼천포 지역에 전래되고 있는 농악으로 영남농악에 속한 다. 진주 삼천포농악에 쓰이는 악기에는 꽹과리, 징, 장구, 북, 법고가 있으며, 편성은 기수( 旗 手 )와 쇠, 징, 북, 장구, 법고 그리고 양반과 포수로 되어 있다. 모두가 흰바지와 색깔 있는 저고리의 농악 복에 색 띠를 두르고, 모자(상모)를 쓴 채 연주하는데 개인놀이가 비교적 발달하였다. 판굿에서는 채상모 놀이가 돋보이며, 군사놀이인 팔진해식진( 八 陣 解 式 陣 )굿이 특이하다. 빠른 가락을 모는 경우가 많아 힘 차고 가락이 다채로워 흥겹다. 해마다 서울 놀이마당에서의 정기공연과 지방발표회 및 각급 학교에서의 농악부 창설, 전국대학생들에게의 전수, 지역의 젊은 농악인 들에게 농악을 전수하면서 후진 양성에 정열을 쏟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지역문화 축제에도 선두에 나서 활동함으로써 지역문화를 선도해 나가고 있다. 바. 가산오광대 전수관 1) 위 치 :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 830-2 2) 지 정 : 1980. 11. 17 3) 지정번호 : 중요무형문화재 제73호 4) 공연ᆞ관람 내용 : 가산오광대 공연 및 전수관 관람 74 사 천 교 육 사
제3절 문화적 환경 가산 오광대는 경남 사천시의 가산리에서 전승되어 온 영남형 민속가면극이다. 가 산리의 노인들에 의하면 약 2~3백년의 역사를 가진 것이라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 한 문헌이나 기록은 없다. 현재의 기능보유자 계보만 가지고 보아도 약 100년의 역사 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마을은 조선말까지 조창(배로 실어 나를 곡식을 쌓아두는 집)이 있었던 곳으로 3백호 가량 들어선 시장이 섰다고 하며 오광대놀이도 놀았는데 그 이름을 조창 오광 대 라 했었다 한다. 1960년대까지는 어렵게나마 전승이 되다가 일시 중단된 것을 1980년에 중요 무형 문화재 제73호로 지정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능 보유자로는 한계홍(1904~1987, 악사, 탈 제작), 한윤영(1918~, 말뚝이-할 미, 가면 제작), 김오복(1920~, 양반-오방신장)이 인정되었는데 한계홍은 타계하였다. 탈은 두꺼운 마분지, 창호지, 대소쿠리, 바가지 등으로 만드는데 총 28점이다. 중앙 황제장군, 동방 청제장군, 북방 흑제장군, 서방 백제장군, 남방 적제장군, 영노, 도문둥 이, 문둥이1,2,3,4, 어딩이, 손님하는 아이, 큰양반(영감탈 겸용), 작은 양반1,2 말뚝이, 소무, 서울애기, 노장, 상좌, 할미, 마당쇠, 옹생원(봉사1과 겸용), 봉사2, 큰 무당, 무 당1,2,3,4 등이다. 사. 향토역사관 1) 위 치 : 사천시 죽림동569-7번지 2) 개 관 : 1999. 02. 3) 홈 피 : http://www.artvil.or.kr 4) 공연ᆞ관람 내용 : 문화유적 분포도, 사천의 전경, 사천의 역사 패널, 농기구 44, 생활도구155, 어구41 부지 824m2평에 건물 326m2의 지상 2층 건물이다. 향토문화의 전통과 역사를 알아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각종 농기구와 어구들이 전시되어 있어 우리조상들의 생활모습 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전시품목 1층 : 문화유적 분포도, 사천의 전경, 사천의 역사 패널 설치 2층 : 240점(농기구44, 생활도구155, 어구41) 사 천 교 육 사 75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5. 문화재 가. 개관 순번 지정별 지정번호 이 름 소 재 지 1 국가지정 보물 614 사천 매향비 곤양면 흥사리 산48 2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 11-가 진주 삼천포12차 농악 송포동 177-1 3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 73 가산오광대 축동면 가산리 626-1 4 국가지정 사적 450 사천늑도유적 늑도동 일원 5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287 비자나무 곤양면 성내리 194-9 6 도지정 유형문화재 39 다솔사 보안암석굴 곤양면 무고리 산 43 7 83 다솔사 대양루 곤명면 용산리86 8 220 사천향교 곤양면 선인리 119 9 221 곤양향교 곤양면 송전리 355 10 288 매향암각 향촌동 산 46-1 11 도지정 문화재 자료 40 구계서원 사천읍 구암리 산 43 12 93 대방진 굴항 대방동 250 13 95 각산 산성 대방동 산 40 14 96 각산 봉화대 대방동 산 2 15 116 환덕리 조씨고가 곤양면 환덕리 569 16 148 다솔사 극락전 곤명면 용산리 86 17 149 다솔사 응진전 곤명면 용산리 86 18 234 경백사 용현면 온정리 517 19 274 사천 선진리성 용현면 선진리 402 20 도지정 기념물 30 세종대왕 태실지 곤명면 은사리 산 27 21 31 단종 태실지 곤명면 은사리 산 438 22 39 신벽 지석묘 신벽동 494 23 49 덕곡리 지석묘군 용현면 덕곡리 136-1 24 80 사천 조명군총 용현면 선진리 402 25 141 사천 연천숲 사남면 우천리 495-1 26 144 사천읍성 사천읍 선인리 580-2외 2 27 175 안점산 봉화대 용현면 신복리 산 4 28 176 우산봉화대 곤명면 남만외리 산 1 29 177 금성리 토성지 곤명면 금성리 산 40 486-1 30 178 용산리 사지 곤명면 용산리 334 336-1 31 179 와룡동 사지 와룡동 279 32 32 사천 성황당 산성 사천읍 예수리 산 45-1 33 도 민속자료 3 가산리 석장승 축동면 가산리 626-1 34 도지정 무형문화재 8 판소리 고법 벌리동 주공아파트103-210 35 9 판소리 수중가 사천읍 구암리 223-5 76 사 천 교 육 사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제11-가 매향비란 내세( 來 世 ;미래의 세상)의 발원( 發 願 ; 소원을 비는)을 위하여 향( 香 )을 강이나 바다에 잠가 묻고 그 사실을 돌에 새겨 기념하기 위해 세우는 비( 碑 )를 말한다. 이 비는 고려 말 우왕 ( 禑 王 ) 13년(1387)에 세운 것으로, 당시 왜구의 발호(횡폭하게 날뜀)가 극심하여 나라의 운명마저 불안해지자 승려 중심의 불교신자 4,100명이 향 계( 香 契 )를 맺고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살기가 평안함을 미륵보살( 彌 勒 菩 薩 )께 비옵니다 라는 뜻 의 204자의 글을 새겨 놓았다. 따라서 매향처가 바닷가나 섬 등지에 한정되어 있는 매향비는 사 천매향비 를 비롯하여 현재까지 알려진 곳은 전국 에 모두 10여 곳이 있다. 사천 매향처도 옛날에는 바닷물이 들어 온 곳이 었음을 알 수 있다. 이름 진주 삼천포12차농악 위치 사천시 송포동 177-1 진주 삼천포농악 놀이 순서 - 11차(첫번째마당) : 오방진 풀이 - 12차 : 열림굿 - 13차 : 덧배기 버꾸놀음 - 14차 : 길군악 - 15차 : 영산 다드래기 - 16차 : 멋 버꾸놀음 - 17차 : 등맞이 굿(품앗이 굿) - 18차 : 안전 버꾸놀음 - 19차 : 호호 굿놀이(점호굿) - 10차 : 개인 영상놀이 - 11차 : 별 굿놀이(장수를 추모하는 놀이) - 12차 : 흩음굿 제3절 문화적 환경 나. 향토 문화 유적 자료 국가지정보물 614 이름 사천매향비 위치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 산48 사 천 교 육 사 77
국가지정 사적 제450호 가산 오광대는 경남 사천시 축동면의 가산리에 서 전승되어 온 영남형 민속가면극이다. 가산리 의 노인들에 의하면 약 2~3백년의 역사를 가진 것이라 하지만 문헌이나 기록은 없다. 현재의 기 능보유자 계보만 가지고 보아도 약 100년의 역 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가산은 조선 조 말까지 조창이 있던 곳으로 약 300호의 큰 고을이어서 항상 시장이 열렸는데, 그 때 탈놀음 이 행하여 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가산리에 거 주하는 한씨가 정착한 지가 11대에 이르는 것과 동제인 천룡제와 오광대놀이가 밀착되어 있는 것 등을 미루어 오랜 전통을 지닌 놀이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이름 사천늑도유적 위치 늑도동 일원 늑도는 삼천포항의 서남쪽에 위치한 조그마한 섬으로 커다란 패총( 貝 塚 )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 다. 초기 철기시대인 B.C 1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주거지 11동( 棟 )과 무덤 74기( 基 )가 확인되었으 며 바리형 민무늬토기, 덧띠토기, 민무늬 항아리 등 12점과 숫돌 2점, 사슴뿔 2개 등이 출토되었 다. 이 유적으로 생활방식이 농경, 어로, 수렵의 수단에 의존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대까지도 이 고장에 있었던 애기장( 葬 :어린아이가 죽으면 아무런 격식도 없이 땅속에 관을 묻는 것)이 아 득한 옛날부터의 유습( 遺 習 )과 습속( 習 俗 )으로 끈 질기게 이어져 온 흐름에 새삼 놀라게 된다.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73 이름 가산오광대 위치 축동면 가산리 626-1 78 사 천 교 육 사
도지정 유형문화재 39 본래 이 비자나무가 서 있는 자리는 옛 곤양군 시절의 당시 읍성 안에 청사가 즐비해 있었던 그 가운데 형방( 刑 房 :죄인을 구치하던 곳)터였다고 전해진다. 한 그루는 높이 21m, 둘레 5m 가량이 며, 또 한 그루는 지상에서 3~4m 높이의 줄기가 썩기 시작하다가 가지가 새로 돋아나서 지금은 나무의 키가 약15m에 이르고 있다. 이 나무는 늘 푸른 비자나무과에 딸린 바늘잎 큰키나무로서 높이 25m, 지름 2m에 달한다고 한다. 열매는 핵과( 核 果 )로서 두 끝이 뾰족하고, 기름이 많으며 맛이 떫고 구충제( 驅 蟲 劑 )로 쓰이는데 특히 촌충 ( 寸 蟲 )이 잘 죽는다고 한다. 이듬해 9~10월에 붉 은 자주색으로 성숙하고,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일본, 중국에 분포하고 있다. 이름 다솔사 보안암석굴 위치 곤양면 무고리 산 43 보안암( 普 安 庵 )은 다솔사( 多 率 寺 )에 딸린 암자 로 일명 미륵암( 彌 勒 庵 )이라고도 했으며 창건년 대는 명확하게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14세기 (1336년)경 이곡( 李 穀 )이 쓴 기록에 의하면, 서 봉사( 栖 鳳 寺 :지금은 절은 없고 그 터만 남아 있 다.) 남쪽 천령( 天 嶺 ) 위에 석굴을 만들어 미륵석 상을 봉안한 것은 신라 신문왕( 神 文 王 : 681~691) 대의 두 왕자에 의해 창건했다. 라는 것과 17세 기 중엽의 최응천( 崔 應 天 )도 미륵봉의 석실 안에 <장육석불( 丈 六 石 佛 )>이 봉안되어 있다고 서술했 다. 이런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안암 석굴의 창 건년대는 신라 때인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제3절 문화적 환경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287 이름 비자나무 위치 곤양면 성내리 194-9 사 천 교 육 사 79
도지정 유형문화재 220, 221 이름 다솔사는 흔히 곤양 다솔사로 많이 알려져 왔 으나 사실은 곤명면 용산리에 자리한 고찰( 古 刹 ) 이다. 대양루는 다솔사 경내에 있는 큰 누각( 樓 閣 )으로서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 고 이후 7년동안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이 그러 했듯이 다솔사도 병화( 兵 火 )를 입고 폐허화( 廢 墟 化 ) 되었다. 그로부터 거의 100년이 지난 후인 숙종 12년(1686)에 승려들이 힘을 모아 10년 세 월에 걸쳐 중창불사( 重 創 佛 事 :절을 다시 이룩함) 로 크게 중흥하였다. 그러나 62년이 지난 후인 영조 24년(1748)에 큰 불로 말미암아 불행히도 재앙을 겪었다. 1974년 2월 16일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후 건물이 오래되어 몸체가 비스듬이 기 울기 시작했는데 1986년 8월 몸체와 지붕을 모 두 수리하였다 사천향교 곤양향교 위치 사천읍 선인리 119 곤양면 송전리 335 향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에 계승된 지방의 학교로서 오늘의 중고등학교이다. 조선중기 이후 의 향교는 과거의 준비장으로 되고 서원( 書 院 )이 발흥( 發 興 )하게 되자 점차 쇠퇴하여졌고, 고종 31년(1894) 말에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향교 는 완전히 이름만 남아 지금은 문묘를 향사( 享 祀 :제사)할 다름이다. 곤양향교는 곤양면 송전리 355번지의 언덕배기에 위치하며 사천향교와 함 께 지방문화재로 1983년 8월 6일 지정되었다. 창건 연대는 명확하게 전해지고 있지 않으므로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곤양군이 세종 원년(1419) 에 군으로 승격되었음을 상기할 때 향교도 세종 대에 창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도지정 유형문화재 83 이름 다솔사 대양루 위치 곤명면 용산리 86 80 사 천 교 육 사
고려시대 우리 나라 연안을 빈번히 침범하던 왜구의 노략질을 방비( 防 備 )하기 위하여 설치한 구라량( 仇 羅 梁 )의 영( 營 )이 있던 곳으로 수군만호 ( 水 軍 萬 戶 )가 있었다. 그 뒤 구라량이 폐영이 되면서 소규모의 선진 ( 船 鎭 )으로 남아 있다가 조선시대 말경 순조 때 비로소 이곳에 굴강( 掘 堈 )을 축조하였다. 이 역사에는 진주목에서 관내 72개 면민을 동 원하여 부역( 賦 役 )을 시켰으며 굴강이 축조된 다 음에는 이 곳에 조곡 운송선과 전함이 정박했다. 제3절 문화적 환경 도지정 유형문화재 288 이름 매향암각 위치 향촌동 산 46-1 국가지정보물 제614호인 매향비와 같은 불교의 식을 지칭하는 것으로 미래 구복적( 求 福 的 )인 성 향이 강한 미륵신앙의 한 형태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므로 매향비에 나타난 발원 형태는 모두 미 륵환생신앙과 연결된다고 하겠다. 이 비문은 조 선 초기 태종 18년(1418)에 승려와 신도들이 이 곳에 매향하고 그 내용을 암각한 것이다. 그 당 시는 왜구에 의해 격심한 침탈을 받던 해안 지방 의 백성들 입장에서는 왜구의 창궐이 보다 큰 불 안이요, 현실적 위기감이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따라서 매향지의 백성들은 그들이 피부로 느끼고 있는 이와 같은 현실적 고통감과 불안감으로부터 구원받는 방법으로서 미륵신앙과 접합된 종교의 식으로서 매향을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지정 문화재 자료 93 이름 대방진 굴항 위치 대방동 250 사 천 교 육 사 81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도지정 문화재 자료 40 이름 구계서원 위치 사천읍 구암리 산 43 향교가 고려시대부터 조선에 계승된 지방의 공 공기관이라 한다면, 서원은 조선 중기에 보급된 사학기관으로서 유현( 儒 賢 )의 위패를 모시고 유 림(유학자)들의 학문을 장려한 기관이라 하겠다.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에서 고려시대의 학자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이 듬해 백운동서원이라 한 것이 우리 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서원이다. 또한 황폐되어 가던 향교를 대신하여 국가의 보조를 받는 서원이 각처에 설 치되었다. 구계서원은 명종 때 높은 벼슬을 두루 거친 문 신이자 학자인 구암 이정 선생을 기리고 향사하 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도지정 문화재 자료 95 이름 각산 산성 위치 대방동 산 40 삼천포항을 서남 방향으로 병풍처럼 둘러 쳐 있는 산이 각산인데 바다를 한 눈에 굽어 볼 수 있는 지역으로서 이 산의 8부 능선에 길이 242m를 돌로 쌓은 석성( 石 城 )이 남아 있으니 이 곳이 각산 산성이다. 성의 남쪽 성문은 원형대로 남아 있으나 성벽의 대부분이 허물어져 있어 복 원을 하였다. 이 성은 백제의 제30대 무왕 6년 (A.D 605년)에 축성한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 다. 백제는 전성기에 영토를 이 지방까지 확장한 적이 있다. 이 산성은 그 뒤 고려시대에는 삼별 초난( 三 別 抄 亂 )을 토평( 討 平 )하는데도 활용되었으 며 극심했던 왜구의 침범에는 각산리의 주민들이 이 산성을 의지해서 대응했던 곳이다. 82 사 천 교 육 사
제3절 문화적 환경 도지정 문화재 자료 95 이름 각산 봉화대 위치 대방동 산 2 봉수( 烽 火 )라 함은 산 위에다 일정한 장소를 정 하여 횃불을 올리는 것을 말하며, 고대 통신 방 법의 하나로 조선 세종 때 정식으로 봉수제도를 마련하였는데 평시에는 횃불을 1개, 적이 나타나 면 2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3개, 국경을 넘어 오면 4개, 접전을 하면 5개를 올렸다. 만약 구름 이 끼거나 바람이 불어서 연락이 불가할 때에는 봉졸( 烽 卒 )이 차례로 달려서 보고하였다. 이 봉화를 옛날에는 승냥이의 똥으로 태웠다고 하는데 승냥이 똥에는 인( 燐 )이 많이 섞여 있어 서 불빛이 푸르고 밤에는 더욱 멀리 보이는 이점 이 있기 때문이었다. 도지정 문화재 자료 116 이름 환덕리 조씨고가 위치 곤양면 환덕리 569 함안조씨 덕곡파 11대손 조용헌이 을미년( 乙 未 年, 1895)에 건립하였다. 안채와 사랑채가 일자 형 평면으로 앞뒤에 나란히 놓여지고 안채 좌우 에 익랑( 翼 廊 )채와 곡간채가 직각으로 놓여진(튼 ᄆ자형) 전형적인 남부형 민가( 民 家 )이다. 경사지 를 이용하였으므로 기단( 基 壇 )이 높다. 안채는 정 면 5칸이며 대청이 2칸으로 넓고 대청의 후퇴간 ( 後 退 間 )에는 판벽( 板 璧 )으로 벽을 막고 제사( 祭 祀 )에 쓰이는 물건을 수장하는 제청의 기능을 갖 고 있다. 민가에서 가묘( 家 廟 )가 없을 경우 의례 대청이 의례( 儀 禮 )공간( 空 間 )으로 쓰이는데 이것 을 잘 보여준다. 안채의 구조는 삼량구조( 三 樑 構 造 )이며 부재( 部 材 )와 치목수법( 治 木 手 法 )은 건실 하다. 사 천 교 육 사 83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도지정 문화재 자료 274 이름 사천 선진리성 위치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402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의 선진리성은 사적 제50호로, 사천읍에서 서남쪽 7Km지점, 사천만 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다. 임진왜란 때 거북선 이 처음 출전한 곳이며 구름의 지형을 이용하여 구축한 섬으로 이곳에는 조명군총위령비, 충무공 해전승첩비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 길을 끄는 것은 역시 1,000여 그루의 벚나무이 다. 이곳은 봄철 벚꽃 개화기가 되면 매일 1만명 의 상춘객이 붐빌 정도로 유명한 벚꽃 명소이다. 도지정 문화재 자료 148 이름 다솔사 극락전 위치 곤명면 용산리 86 다솔사 경내에 있는 전각이다. 정면 3간, 측면 2간, 목조와가의 맞배집으로 되어 있다. 임진난 때의 병화로 폐허화되고 몇 차례에 걸쳐 중건하 였다. 그러나 영조 24년(1748)에는 3전( 殿 )과 3 당( 堂 )이 불타고, 1914년에 또 화재로 대양루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자 3년간 걸친 중창불 사 끝에 현존한 것이 이 건물이다. 가구( 架 構 )는 대개 지대석 위에 마루가 없으며 기둥 사이에 넛 살문이 셋이고 주심포 짜임에 서까래는 연목과 부연으로 되어 있다. 이 전각의 주존불( 主 尊 佛 :으 뜸으로 모시는 부처)은 아미타불 이다. 아미타라 는 말은 산스크리트말의 아미타유스(Amitayus), 혹은 아미타바(Amitay)에서 따온 것이다. 84 사 천 교 육 사
제3절 문화적 환경 도지정 문화재 자료 149 이름 다솔사 응진전 위치 곤명면 용산리 86 다솔사 경내에 있으며 정면 3간, 측면 2간 목 조와가의 맞배집이다. 이 전각도 앞서의 극락전 과 같은 시기에 건립한 건물로서 건축구조도 역 시 극락전과 동일하다. 응진전은 석가모니불 가 섭( 迦 葉 :과거 7불의 여섯번째 부처)과 아난타( 阿 難 陀 :석가의 십대 제자 중의 한 사람)를 비롯한 16나한( 羅 漢 )을 모신다. 나한은 아라한의 약칭 으로 산스크리트 아라한을 음역한 것이다. 응공 ( 應 供 )? 응진( 應 眞 )의 뜻을 지녔다. 공양을 받 을만한 자격자, 진리에 응하여 남을 깨우치게 하는 자 즉 성자를 아라한이라 부른다. 도지정 문화재 자료 234 이름 경백사 위치 용현면 온정리 517 1997년 1월 3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34 호로 지정되었으며 평산신씨보존회에서 소유, 관 리하고 있다. 3동으로 되어 있으며 1926년 신상 과 신항, 신건 등 3명이 힘을 합하여 창건하였 다. 고려 개국 벽상공신 장절공 신숭겸( 申 崇 謙 ), 고려 말기의 학자인 신현, 성리학자 이색( 李 穡 ), 은사( 隱 士 ) 원천석 등 4현을 모신 조두지소( 俎 豆 之 所 )이다. 부속건물로는 장충문과 영수제 등이 있다. 사당에는 신숭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해 마다 음력 3월 중정( 中 丁 )에 평산신씨 문중과 지 방 유림에서 제례를 지낸다. 사 천 교 육 사 85
도지정 기념물 31 곤명면 은사리 소곡산에 있으며, 일명 태봉( 胎 峯 )이라고도 한다. 이 태실지는 세종 임금이 왕 위에 오르던 해인 1418년에 곤양군의 전신인 옛 곤명현( 昆 明 縣 ) 소곡산이 전국에서 가장 좋은 길 지( 吉 地 )라 하여 임금(세종)의 태를 이곳에 안치 하였던 것이다. 그로 인하여 이듬해인 세종 1년 (1419)에 곤명현( 昆 明 縣 )은 남해현과 합하여 큰 고을로 승격하게 되었다. 이름하여 곤남군( 昆 南 郡 )이라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에 게 짓밟히는 불운을 겪어 선조( 宣 祖 ) 34년(1601) 3월에, 대대적인 수리를 하고 영조 10년(1734) 에는 태실비( 胎 室 碑 )를 세우고 <태실수개의궤( 胎 室 修 改 儀 軌 ):수리한 기록 문서>를 남겼다. 이름 단종 태실지 위치 곤명면 은사리 산 438 제1장 사천의 위치와 환경 도지정 기념물 30 이름 세종대왕 태실지 위치 곤명면 은사리 산 27 단종태실지는 세종대왕이 임금자리에 오른지 23년(1441)에 그의 애손( 愛 孫 )인 단종이 태어나 자 자신의 태실 앞산에 태실을 안치토록 어명을 내려 곧 그해에 조영( 造 營 )하였다. 임진란 때 왜적이 몰려와 세종대왕의 태실은 거의 파괴되었으나, 단종 태실은 화를 면했다. 영 조 10년(1734) 세종대왕의 태실비를 세울 때 단 종의 태실비도 함께 세웠다. 단종은 세종 23년 (1441)에 태어나 12살의 어린나이로 문종( 文 宗 ) 의 뒤를 이어 1452년에 제6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숙부( 叔 父 )인 수양대군(세조)에게 1455년 재위 3년만에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 魯 山 君 )으 로 강원도 영월( 寧 越 ) 땅에 유배되었다가 그의 숙부인 세조 3년(1457)에 죽임을 당한,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슬픈 운명의 임금이었다. 86 사 천 교 육 사
조선 선조( 宣 祖 ) 30년(1597) 정유재란 당시 선 진리성에 있던 왜적을 몰아내기 위해 조명연합군 이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가 산화한 희생자의 넋 이 잠들고 있는 곳이다. 무덤의 형태는 사방 20 간(35m)의 방형분묘로서 흔히 당병무덤 이라 일 컬었으며, 속칭 뎅강무데기 라고도 한다. 무덤 위에 당병공양탑이라 쓰인 높이 1m 가량의 표석 이 서 있었으나 해방 후에 없어졌다. 그러나 이 무덤만은 약 400년 동안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잘 보존되어 왔으며, 지금은 조 명연합군전몰 위령비가 무덤 앞에 세워져 있고 또 1985년 11 월 14일 지방문화재가 도지정 기념물로 지정되 어 조명군총( 朝 明 軍 塚 )이라 명명하여 보호되고 있다. 제3절 문화적 환경 도지정 기념물 39, 49 이름 신벽동 지석묘 덕곡리 지석묘 위치 신벽동 494, 용현면 덕곡리 136-1 신벽동 지석묘군은 신벽마을 국도 3호선 산쪽 으로 약 50m 가량의 논밭가운데 모두 7기( 基 )가 북두칠성의 형태로 놓여 있다. 고인돌무덤 이라고 하는 이 지석묘는 모두 15 기( 基 )나 되며 1979년 12월 29일 지방문화재 기 념물로 지정하였다.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은 고인돌 또는 돌멘 (Dolmn)이라고 하는 지석묘와 돌무덤을 만들어 시체를 매장하였는데, 묘제에 따라 부장품이 석 기류, 동기류, 토기류, 철기류 등 각각 달리하며, 지석묘는 선돌(입석)과 함께 거석문화의 상징으 로서 오늘날 남아 있는 대표적인 선사시대의 생 활유적이다. 도지정 기념물 80 이름 조명군총 위치 용현면 선진리 402 사 천 교 육 사 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