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로메르, <오 후작부인> 1. 문학과 회화, 말과 이미지 오 후작부인 쥴리에타(Giulietta)는 나폴레옹 전쟁 동안 러시아 군대에 점령된 성채인 북부 이탈리아의 한 도시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젊은 미망인(두 딸이 있다)이다. 그녀는 난폭한 군인 집단에게 폭행을 당하는 중에 젊은 러시아 군인 백작에게 구출된다. 백작은 나중에 아편 탕약을 먹은 후 잠들어 있는 동안 그녀를 강간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백작과의 관계를 모르는 후작부인의 임신은 신성한 선물인지 신의 은총의 갑작스런 표현인지 설명할 수가 없다. 그것 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녀나 부모가 받아들일 수 없다. 많은 고통을 겪은 후 쥴리에타 는 누군지 모르는 아이의 아버지가 기일 내에 나타난다면 그와 결혼할거라는 결심을 알리는 글을 지방신문에 싣는다. 이야기는 백작과 쥴리에타의 완전한 재결합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사실상 이야기는 인간 본성은 양면적이라는 그녀의 인식으로 결론을 내린다. 말(word)과 이미지의 대립은 에릭 로메르 영화와 저작에서 중요하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 트(Heinrich von Kleist, 1777-1811, 독일의 극작가)의 주인공의 이름과 작품명이 동일한 중 편 소설(1811, 신고전주의의 배경)에 기초한 영화 <오 후작부인>(1975)에서, 감독은 18세기까 지 거슬러 올라가 19세기로 이어지는 전통을 불러들인다. <라오콘Laocoön> 1) (1766)에서 레싱 (Gotthold Lessing) 2) 은 문학은 시간의 예술이고 회화는 우선적으로 공간을 다루어야한다. 고 했다. 이후 영국 시인이자 미학자 매슈 아널드(Matthew Arnold, 1822-1888)는 시는 생각하 고 예술은 그렇지 않다. 둘을 조합하면 시간의 예술로서 문학은 마음을 위한 것이고 공간의 예술로서 회화는 감각을 위한 것이다. 로메르는 <오 후작부인>에서 조형적인 부분에는 말을, 이미지에는 성찰을 부여함으로써 이 두 가지 상반적인 용어를 재정립한다. <오 후작부인>에서 회화는 사유에 연결되어있다. 그것 은 인물의 정신활동, 말하자면 사고, 감정, 오해, 기대 등의 구불구불한 통로이다. 사유와의 연계성으로 회화는 이차원의 표면에 깊이를 주고 영화적 이미지를 다면적으로 만든다. 말없는 시로서의 회화는 추상적 개념에 문을 열고, 말하는 그림으로서의 시는 감각을 흡수 한다. 1988년 출판된 인터뷰에서 로메르는 자신을 감독-화가가 아니라 감독-건축가로 생각한 다고 했다. 감독-건축가에게 영화는 세계 속에 이미 잠재된 공간적 구성을 보이게 하기 위해 상연을 구성하는 예술이다. 로메르의 사유는 블레즈 파스칼(Pascal)의 아포리즘과 일치한다. 예술이 곧 회화라는 것이 얼마나 헛된가. 회화는 우리가 원본에서 찬양하지 않는 대상의 재 현에 대해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과도한 탐미주의는 회화가 세계를 무대화(상연)하는데 종속 되지 않을 때 발생한다. 그래서 로메르는 영화와 회화가 연극적인 공간의 공유된 의미에서 만 나는 한(인위적인 전시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배우들의 살아있는 출현을 통해 세계와 연결 된 공간)에서 회화를 영화에 활용한다. 이 영화에서 말과 이미지는 연극과 건축 사이에 존재 한다. 왜냐하면 시간의 예술인 문학은 그 자체를 무대에 올리고 공간적인 대상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공간의 예술인 회화는 미로와 같은 심리 발전에 시간의 궤적을 그려놓기 때문이다. <오 후작부인>에서 말과 이미지의 변증법은 마음과 감각, 이성과 감정 사이의 갈등에 근거를 1) 라오콘(그리스어: Λαοκόων)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폴론을 섬기는 트로이의 신관이다. 트로이 전 쟁 때 그리스군의 목마를 트로이 성안에 끌어들이는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사, 해신 포세이돈이 보낸 두 마리의 뱀에게 두 자식과 함께 졸려 죽었다. 2)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은 독일의 극작가, 비평가이다. 계 몽주의의 대표적 극작가 평론가로서 독일문학 연극의 근대화를 촉진시킨 시조라 하겠다. - 1 -
둔다. 퓨젤리John Henry Fuseli, 악몽The Nightmare, 1781 로메르의 <오 후작부인>의 장면 - 2 -
클라이스트 중편의 텍스트에서 후작부인의 강간은 서사에서 생략되어 있다. 그곳에서 그녀 는 쓰러져 완전히 의식이 없었다. 여기서 그는 정돈을 했다. 곧 그녀의 놀란 하녀들이 의사를 부르러 나타났기 때문이다. 로메르는 이 공백을 퓨젤리의 고딕식 환상인 <악몽>으로 대체한 다. <악몽>에 나오는 말의 눈은 영화에서는 백작의 눈으로 볼 수 있다. 범행은 클로즈업에서 정면으로 잡은 얼굴과 그와 우리를 에워싸는 어둠으로 나타난다. 마치 퓨젤리의 악령 (incubus)이 그의 마음과 우리의 눈 속으로 돌아다닌 것처럼. 로메르 영화에서 퓨젤리의 악령 의 비가시성은 클라이스트 텍스트의 폭력의 생략과 상응한다. 백작의 행동의 폭력을 외부대상 인 후작부인으로부터 백작의 주체성의 깊은 곳으로 돌린다. 퓨젤리의 그림은 여성 에로티즘의 광경이라기보다는 어둠의 거울, 관람자가 필연적으로 공유하게 되는 남성의 욕망이다. 클라이 스트 중편에 퓨젤리의 <악몽>의 첨가는 시각적 삽입의 한 예이다. 이성과 감정, 모럴리스트와 정신분석가, 의식과 무의식이 공유한다. 여기에는 또한 사회적 규범의 위선과 개인적 행동의 모순이 나타난다. 로메르의 까메오 장면은 탁자 위에 펼친 큰 지도 옆에 선 러시아 군인 사무 원으로 나타나는데, 백작은 쥴리에타를 폭행한 군인에 대한 질문에 답한다. 레오파르도는 후 작부인에게 수면제를 가져다주게 함으로써 강간을 의심하게 만든다. 로메르에게 클라이스트의 텍스트는 행동의 지도이다. 그는 그 지도를 하인들이 조용히 일하는 집안구석구석을 알 정도 만큼이나 상세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영화에 반영한다. 2. 회화, 건축, 영화의 공간 영화는 공간 예술이다. 시간의 흐름은 무성 영화에서처럼 막간의 자막 텍스트로 시각화되 고, 설명적인 플래시백은 아이의 아버지를 찾으려는 쥴리에타의 결정에 다가가는 가족의 걱정 스런 기다림으로 나타나는데, 원인을 알 수 없는 임신의 진행에 기초한 영화의 감정적인 속도 를 보여준다. 알랭 레네의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1961)이 기억의 힘에 대한 이야기라면 <오 후작부인>은 위치(로케이션)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이다. 잠자는 동안 강간을 당한 후작부 인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녀의 가족 공간 속에 백작의 등장으로 모든 것을 결정한 다. 말의 예술을 변형하여 회화적 접근과 연극성에 고전적 형상의 회화를 활용한다. 이미지와 말, 회화와 사유가 서로 반전된다. 영화는 아름다운 회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의 몸을 통한 세계에서 그 기원을 주목해야 한다. 로메르의 영화, 공간, 회화, 내적 성찰은 연극 에 대한 관찰에서 나온다. 연극적 공간과 비교하여 영화적 공간은 시각적 표면의 협소함(프레 임으로 한정)과 행동 장소의 폭넓음(다양한 촬영 장소)으로 규정한다. 연극보다는 영화에서 회 화는 배우의 생각의 리듬과 행동이 호흡을 같이 하도록 만들기 위해 스크린의 조형성과 상호 작용할 수 있다. 로메르의 <셀룰로이드와 대리석>에서 회화의 프레임은 공간에 방향감각상실 의 어떤 구역을 형성한다. 프레임은 내부로 향한 공간, 회화 내부로만 열린 반영의 영역과 외 부경계의 표시를 설정하는 우리의 능동적인 경험과 본성의 공간과 병치한다. 라고 말한다. 앙 드레 바쟁에게 회화가 마음의 풍경 이라면, 로메르의 영화에서는 내적 이미지, 자기발견, 자 기 앎, 자기수용을 반영한다. 시간과 공간의 반영은 혁명이후의 신고전주의 스타일과 후기 계몽주의와 초기 낭만주의로 나타난다. 인물들의 신중한 행동, 공민도덕에 대한 무언의 믿음, 단순한 생활방식은 금욕주의 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 3 -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호라티우스의 서약>(1786)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호라티우스의 서약>(1786)은 남성 동료애와 용 기에 대립되는 여성의 경건함과 고통, 이성과 감성의 대조를 담고 있다. 표면상의 부드러움은 다비드의 고전적 형태 아래 우리가 느끼는 동일한 강렬함으로 도전받은 사회관습에 불과하다. <서약>의 회화적 공간은 성( 性 )에 따라 분리되어있다. 후작부인의 집안도 마찬가지이다. 어머 니는 항상 딸과 함께 앉아있고, 아버지는 항상 아들과 함께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만 쥴리 에타와 백작은 동일한 자리를 공유한다. 그렇게 공유한 자리를 통해 쥴리에타와 백작은 자신 들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저지른 실수를 이해한다. 다비드Jacques-Louis David, 레카미에 부인Madame Récamier (1800) - 4 -
로메르의 <오 후작부인>에서 의사의 쥴리에타 임신 진단 장면 로메르의 영화에서 회화는 행위(세계는 연극과, 사실성은 상연과 오브랩된다)로 나타난다. 다비드의 초상화는 쥴리에타와 어머니의 묘사에 필요한 포즈와 대상들을 제공한다. 예를 들 면, 후작부인의 머리띠와 의사가 방문했을 때 그녀 방의 가구는 다비드의 <레카미에 부 인>(1800)의 장식을 차용한다. 색채의 터치, 감정, 욕망에 대해 쥴리에타와 어머니는 숄, 긴 스카프, 작은 느슨한 줄무늬의 코르셋으로 그들의 단순한 의상을 강조한다. 로메르의 여배우 들은 다비드의 <엘리자베드 보나파르트Elisabeth Bonaparte>와 <드 세르방 부인Madame de Servan>의 초상화처럼 옷차림을 하거나 포즈를 취한다. 케어스팅Georg Friedrich Kersting, 램프 불빛 옆에서 바느질하는 젊은 여인Junge Frau, beim Schein einer Lampe nähend (1828) - 5 -
로메르의 <오 후작부인>에서 쥴리에타가 자수를 놓는 장면 또한 로메르는 독일 여배우들 촬영하면서 19C초 플랑드르 낭만주의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케어스팅(Georg Friedrich Kersting)을 참조한다. 로메르는 뜨개질하는 쥴리에타의 모습을 케어스팅의 회화에서 홀로 조용히 일하는 여성의 집안 장면으로 포착한다. 케어스팅의 <등불 아래서 바느질하는 젊은 여인Young woman sewing by lamplight>(1828)이나 속삭이는 부 부의 모습을 담은 <창문에 선 커플Couple at the window>(1817)은 그러한 묘사의 예로 작 용한다. <오 후작부인>에서 각색의 전략은 프랑스와 독일의 원료들을 덧씌우는 것이다. 케어스팅Georg Friedrich Kersting, 창문가의 커플 Paar am Fenster (1817) 다비드의 역사의 찬양과 더불어 장 바티스트 그뢰즈(Jean-Baptiste Greuze)의 가정의 갈등 을 담은 회화들은 영화 속의 장면들 묘사에 일조한다. 그뢰즈의 <부모의 저주The paternal - 6 -
Curse>(1777-1778), <벌 받은 아들The punished son>(1778)은 <오 후작부인>에서 아버지 와 딸의 갈등, 죄를 인정한 백작에 대한 쥴리에타의 격렬한 거부 등을 묘사하는데 이용된다. 공중에 팔을 뻗고, 졸도를 하고, 애원을 하고, 최후통첩을 하고, 문을 쾅 닫는 것은 희비극점 으로 향해 위험스럽게 치우친다. 신고전주의적인 상반신, 기둥, 작은 조각품, 벽기둥 등 이러 한 장식물들을 위해 다비드와 그뢰즈 회화의 사용은 쥴리에타와 그 친족들이 살아가는 도덕적 규범에 주의를 기우리는 것이다. 그뢰즈Jean-Baptiste Greuze, 부모의 저주La Malédiction paternelle, 1777-7 -
그뢰즈Jean-Baptiste Greuze, 벌 받은 아들Le Fils puni (1778) 로메르의 <오 후작부인>에서 백작 본이이 강간한 범인이라고 밝히는 장면 반대로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를 참조하는 것은 가족 풍습의 순진한 표면 - 8 -
아래에 역시 존재하는 열정들을 가리킨다. 퓨젤리 회화의 강조는 쥴리에타의 일렁이는 흰 가 운 위에 있고, 다음날 아침 후작부인과 아버지가 다시 만날 때 쥴리에타의 하얀 얼굴모습은 짙은 붉은 커턴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빗장Le Verrou, 1780-9 -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사랑의 진전: 만남Les Progrès de l'amour - Le rendez-vous, 1771 그 중요성은 프라고나르의 <빗장>(1780)으로부터 세트 디자인과 약간 닮았다는 것을 상기한 다. 아버지는 딸을 포옹하면서 나는 항복해야 했지만 나의 명예는 지켰다. 고 말한다. 아버지 는 프라고나르의 <사랑의 진전: 만남>(1771)의 중심부에 있는 전쟁과 사랑 사이에서 그 유사 성을 허용한다. 이 그림에서 용감한 구혼자는 정원에 혼자있는 여인에게 가기 위해 담을 기어 올라간다. 마찬가지로 이 장면 속의 남자는 후작부인의 영지의 경계를 침범하는 백작과 유사 하다. 프라고나르가 저택에서 후작부인을 쫓는 백작의 묘사에 도상을 제공하는 반면에, 쥴리 에타를 둘러싸는 열린 공간과 야외의 조명은 가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정원 테라스>(1811-1812)를 상기시킨다. - 10 -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정원 테라스Die Gartenterrasse, 1812 로메르의 <오 후작부인>. 쥴리에타가 집에서 쫓겨나 시골 저택 정원에서 독서 중 백작의 침입 - 11 -
이 그림에서는 한 여성이 벽에 둘러싸인 사유지 나무 아래서 홀로 독서를 하고 있다. 강간 이 수면제로 인해 생략된 로메르의 영화와는 달리 프라고나르의 <빗장>에서는 흐트러진 침대, 소홀과 비밀 유지의 일반적인 분위기, 붉은 커턴 속에 주름살의 관능은 문을 잠근 후에 남녀 사이에 일어날 일을 암시한다. 이처럼 프라고나르의 세트 디자인에 대한 로메르의 암시는 아 버지와 딸 사이의 포옹이 근친상간(백작의 결혼 제안에 비합리적인 거부 등)의 내포적 의미를 제공한다. 백작의 열린 정면의 시선에 비해 아버지와 딸의 만남을 보는 어머니의 시선은 열쇠 구멍으로 엿보는 시선으로 대체된다. 또한 어머니의 보살핌은 조르주 드 라 뚜르(Georges de la Tour)의 조명방식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영화에서 회화적 암시는 고전적 통제와 멜로드라 마적인 표현의 양극점(공손한 매너와 불의의 사랑)을 강화한다. 이러한 이중적인 접근은 또한 퓨젤리의 <악몽>의 사용을 정당화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술사의 어떤 표준 조사가 나폴레옹 시대의 이분법의 창설(공중도덕의 요구 하에 자라나는 불안의 모호한 느낌)에 주목하는 것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퓨젤리가 혁명 이후의 엄격함에 탐욕스런 거울의 박으로 사용되는 반면에 가장 바이런적인 낭만주의 화가 중의 한 사람인 위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는 신고 전주의 개관의 예기치 못한 원천이다.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사르다나팔의 죽음La Mort de Sardanapale, 1827-12 -
로메르 <오 후작부인>에서 러시아군에 폭행당하는 쥴리에타 로메르는 <사르다나팔의 죽음>(1826)에서 여자노예의 육감적인 옆모습을 러시아 군인들에 대항하는 쥴리에타의 필사적인 모습을 전하는 긴장하고 곡선의 굽은 자세로 바꾼다. 이것은 백조의 반항하는 자세를 메아리치게 한다. 퓨젤리의 불안정한 잠의 효과는 인물들이 걱정스럽 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에서 다시 나타난다. 딸과 어머니는 아버지 집과 시골 영지로 다 니고, 아들은 부모의 숙소와 여동생의 방을 왕복하고, 영화의 끝에서 그는 처음에 보였던 여 관으로 돌아온다. 독일어로 말하는 러시아인 백작은 이탈리아에서 싸우고 콘스탄티노플과 나 폴리, 나폴리와 생 페테르스부르크 사이를 여행하고, 다비드의 나폴레옹 초상 같이 보인다. 이 러한 모든 여행은 혼의 움직임이다. 수많은 장소 변화의 심리적 의미는 외부를 경시하는 덕분 에 더욱 선명해진다. 우리는 결코 후작부인의 가족들을 둘러싸고 있는 도시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대조적으로 쥴리에타의 집안에서 조심스럽게 손질되고 격리된 교외의 공간 (정원, 거 실, 현관, 침실, 식당)은 위기의 순가네 얼핏 보는 뒤집혀진 가구에서 보여지는 힘의 감정의 폭풍을 감춘다. 아버지는 백작의 성채와 딸의 점령에 분개한다. 어머니는 혼외의 임신을 비난 하고 미망인 딸이 재혼하기를 바라는 것 사이에서 가슴 아파한다. 후작부인 자신은 백작에 끌 리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 13 -
로메르의 <오 후작부인>. 아이레벨시점으로 찍은 전쟁으로 쥴리에타 가족들이 쫓기는 장면 고야Francisco de Goya, 5월 3일El Tres de Mayo, 1814-14 -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어두운 측면으로서 <악몽>을 보는 것은 꿈의 신 모피우스 (Morpheus)에 의해 유발된 임신에 대한 영화의 시작에서 고야(Goya)의 전쟁장면의 암시를 설명해준다. 성채의 점령을 묘사할 때 로메르는 고야처럼 거창한 스케일을 피하고 부드럽게 완화시킨 색채를 사용하고 연기를 가득 채우면서 영광스럽게 만드는 로우 앵글보다는 아이레 벨 시선을 선호한다. 집단적인 기병 대신에 땅에 뒤얽힌 육체를 보여준다. 고통과 죽음의 사 실적인 묘사로 악명 높은 스페인 화가 고야는 판화 <이성의 잠은 괴물들을 낳는다The sleep of reason produces monsters>(1794-1799)는 작품으로 <악몽>과 유사하게 초자연, 무의 식, 이성 시대의 종말에서 공포에 대한 점진적인 관심의 징후를 보여준다. 그러나 로메르는 몽환적인 주제의 고야의 판화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모럴리스트적이 고 정신분석적인 극점의 균형을 깨지 않기 위해서이다. <오 후작부인>을 통한 클라이스트의 비판은 출산을 괴물스런 일로 보고 전쟁을 정상으로 여기는 일에 대한 것이다. - 15 -
고야Francisco de Goya, 이성의 잠은 괴물들을 낳는다The Sleep of Reason Produces Monsters, 1799-16 -
로메르의 이미지는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든다. 나머지 가족들과 비교하여 엄 청난 스트레스를 겪는 쥴리에타는 거의 말이 없다. 그녀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후작부 인의 생각을 거의 포착할 수 있다. 특히 우리가 공중에 페인팅 붓을 잡고 있거나 손에 작은 책을 잡고 방을 걷거나 자수를 놓고 빛의 후광을 받으면서 정원에 앉아있는 것을 볼 때 그렇 다. 조용한 반성과 심리적 친밀감을 보이는 순간은 음악의 부재로 매우 생생해진다. 음악은 로메르에게 문학의 추상화와 시각예술의 감각성을 결합하는 형태의 예술이다. 음악은 그가 내 적인 말로서 회화, 연극적인 도구로서 말의 사용이라는 말과 이미지의 변증법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끊임없이 영화에서 생략하는 예술이다. <오 후작부인>에서, 말을 눈에, 이미 지를 귀에 연결하는 것을 용이하게 해주는 음악의 부재는 또한 열려있거나 비어있는 것을 채 우도록 요청받게 되는 관객들에게 특별히 능동적인 역할을 만들어낸다. 쥴리에타의 집에서 거 대하지만 조용한 하프는 인물들의 생각의 소리를 조율하는 장치인 듯하다. 로메르의 공간의 강조는 이야기가 집의 장식과 건축을 탈피하기 위한 것처럼 만든다. 다른 종류의 자리(베르제르, 다고베르, 레카미에)는 분위기의 미묘한 변화를 기록한다. 종종 복도, 문, 출입구, 창문, 벽같은 박스형 쇼트는 열리고 닫힌, 안정되고 유동하는 공간의 역동성을 부 여한다. 이런 것들은 관람자가 상황이 저절로 해결되거나 보다 복잡해지려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해준다. 특히 관람자의 기대나 의심은 복도를 가로질러 안내되거나 알코브 뒤의 커다 란 방을 일별함으로써 반향된다. 어머니는 사유지에 있는 쥴리에타를 만나기 위해서는 출입구 를 통과해야 한다. 쥴리에타는 항상 벽과 문으로 인해 백작과 아버지로부터 분리되어있다. 로메르의 건축 공간은 장식적 요소가 중요해 보이지 않아 보이는 추상적인 지역이다. 반면 에 순수한 색채의 표면(하양, 밝은 파랑, 어두운 빨강, 검정, 약간 황금색)은 몬드리안의 캔버 스를 상기시키는 패턴을 만들어낸다. 인물의 망설임과 마음의 변화는 정리처럼 합리적이고 명 료한 격자무늬 색깔에 반대해서 울려 퍼진다. 공간의 분리는 생각과 대화의 겹치는 선들로 변 한다. 주관적 관점의 쇼트를 피하기 위해 로메르는 외부에서 모든 대화를 찍는다. 인물의 정 신 공간 속으로 들여놓는 것에 대한 거부는 공간에서 외적 변화가 배우의 내부에서, 행동 표 면 뒤에서 일어나는 관계에서 의미 이동을 표시한다. 로메르의 말의 기하학은 백작의 첫 가족 방문이 적어도 세 개의 공간 사이의 교체로 특징지워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아버지 와 하는 대화, 나머지 가족들과 나누는 시선의 교환, 백작의 말을 경청하고 그의 아버지가 말 할 때 가족 구성원의 상호 반응. <오 후작부인>의 영화적 공간은 엄격함으로 특징지워지는데, 카메라의 작은 움직임은 깊은 감정적 반향은 아니라도 부인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 로메르는 대부분 행동의 가장자리에 머문다. 말의 뉘앙스는 내부로부터 이미지를 방향지우고 디자인한다. 두 가지 카메라의 움직 임은 시각과 마음의 확장의 혼합된 효과를 달성한다. 수평의 팬과 트래킹 쇼트는 보통 가족의 일상과 사회적 관습의 표면에 연결되고, 반면에 수직 운동은 그들의 강렬함을 주장한다. 예를 들면, 카메라는 백작과 쥴리에타를 따라 군인들이 강간을 시도한 잠시 후에 좁은 계단에서 지 하저장고로 내려간다. 이러한 하강 움직임은 영화의 나머지 부분에서 계속된다. 카메라는 밤 에 방문하는 중에 쥴리에타의 침대에 백작을 동반하고, 이것은 그의 폭력의 심연을 측정케 한 다. 카메라는 그녀가 임신했다는 첫 번째 의심을 수용하기 시작할 때 집에서 계단을 내려갈 때 쥴리에타를 따라간다. 카메라의 수직 운동은 또한 마부 레오파르도의 멋진 등의 윤곽을 잡 는다. 쥴리에타와 어머니는 근심이 없는 순간에 그에게 매혹된다. 마지막으로 결혼식 동안에 - 17 -
쥴리에타의 시선은 하늘에서 사탄의 추락을 묘사하는 거대한 바로크풍의 캔버스의 수직적 구 성을 훑어본다. 가장 아름다운 천사는 가장 무시무시한 악마로 변한다. 그러나 인간은 선과 악이 섞여있는 본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그녀는 깨닫는다. 그녀는 일방적인 자지 독선의 한계 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백작의 이중의 본성은 그의 카메라에서 교묘한 자연스러움을 위한 은유로 보일 수 있다. 로 메르는 종종 자신을 부재중의 작가(auteur-in-absentia) 로 규정했고 장식, 허영, 자기애의 스타일을 지우기 위한 노력으로부터 서명이 생겨나는 감독이라고 정의했다. 로메르의 겸손은 또한 현대의 추상 예술에 대한 거부를 설명해준다. 추상예술에서 주체는 보여진 세계가 아니 라 예술가의 퍼포먼스이다. 비재현적인 현대 회화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후작부인이 잠자는 동안 지켜볼 때 백작의 욕정에 가득찬 생각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사실상 동일한 죄의 순간은 그가 앙리 마티스에게 응답하는 글에서 나타나는 것 같다. 로메르는 스크린을 정신적 공간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건축에 의존하고, 배우의 매개를 통한 외부 세계와 연극을 연결하기 위해 연극에 의존한다. 보여진 세계와 생각하는 마음의 두 양극 단 사이에서 로메르의 영화 스타일은, 로메르의 영화에서 회화를 만나는 보상(생각을 통한 느 낌의 즐거움과 우리를 둘러싼 것에 새로운 수준의 시각적인 주목)으로 관찰자인 우리에게서 떠나면서, 상연되지 않은 리얼리티처럼 투명해지고 스크린은 희미해지고, 감독은 사라진다. - 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