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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 스포츠의 관점에서 본 화랑과 기사의 신체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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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서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交 通 放 送 은 96 年 상반기도 한 달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交 通 專 門 放 送 으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자 모든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委 員 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 더욱더 사랑 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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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의 수준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비 롯한 국학연구 기관들과 국립과천과학관, 한국천문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 는 조선시대 역서들의 숫자들을 모두 합하더라도 불과 수백 책의 수준을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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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經 學 研 究 集 刊 特 刊 一 墓 誌 銘 等 創 作 於 高 麗 時 代 與 朝 鮮 朝 時 代, 此 是 實 用 之 文 而 有 藝 術 上 之 美. 相 當 分 量 之 碑 誌 類 在 於 個 人 文 集. 夢 遊 錄 異 於 所 謂 << 九 雲 夢 >> 等 夢 字 類 小 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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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요약 사찰에 소장되었던 고서는 그 출처와 소장내력을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월 인천강지곡 또한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평소 사찰 문헌이 원래의 소장처와 그 전래 경 위가 밝혀지지 않은 것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어왔다. 이 글에서는 월인천강지곡 의 한국학중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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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관논총103집(전체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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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財 ) 東 西 文 物 硏 究 院 調 査 硏 究 報 告 書 第 80 81 冊 朝 鮮 王 陵 ( 惠 陵 元 陵 康 陵 ) 守 僕 房 및 水 剌 廳 -조선왕릉(구리 동구릉 혜릉 원릉, 서울 태릉과 강릉의 강릉) 수복방 및 수라청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 朝 鮮 王 陵 (서울 宣 陵 과 靖 陵 ) 宣 陵 神 路 - 서울 선릉 참도 유적 시굴조사 - 상 : 혜릉 수복방 및 수라청, 하 : 혜릉 수복방 2015 ( 財 ) 東 西 文 物 硏 究 院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

( 財 ) 東 西 文 物 硏 究 院 調 査 硏 究 報 告 書 第 80 冊 朝 鮮 王 陵 ( 惠 陵 元 陵 康 陵 ) 守 僕 房 및 水 剌 廳 -조선왕릉(구리 동구릉 혜릉 원릉, 서울 태릉과 강릉의 강릉) 수복방 및 수라청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 2015 ( 財 ) 東 西 文 物 硏 究 院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

일러두기 1. 이 책은 조선왕릉(구리 동구릉 혜릉 원릉, 서울 태릉과 강릉의 강릉) 수복방 및 수라청 복원을 위한 발굴조 사에 대한 최종 발굴조사 보고서로서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와 (재)동서문물연구원의 발굴조사 용역계약 에 의해 발간되었다. 2. 유구 도면의 방위는 자북을 기준으로 한다. 3. 유구 실측도에 표기한 수치는 해발고도를 나타낸다. 4. 유구 및 유물의 축소비는 다음과 같다. 1) 유구 : 1/60 2) 유물 : 토기류 1/3, 기와류 1/4 1/6, 금속류 1/1 1/2, 옥석류 1/4 3) 축소비를 달리할 경우 별도의 축척표시를 하였다. 5. 유구 토층의 색조는 日 本 農 林 水 産 省 農 林 水 産 技 術 會 議 事 務 局 監 修 財 團 法 人 日 本 色 彩 硏 究 所 色 票 監 修, 新 版 標 準 土 色 帖, 2008년판을 참고하였다.

목 차 Ⅰ. 조사개요 1 Ⅱ. 유적의 위치와 환경 3 1. 자연 환경 및 입지 3 1) 구리 동구릉 3 2) 서울 태릉과 강릉 7 2. 역사적 배경 14 1) 혜릉의 조성 및 공간구성 14 2) 원릉의 조성 및 공간구성 17 3) 강릉의 조성과 공간구성 25 Ⅲ. 조사범위와 방법 30 1. 혜릉 원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30 2. 강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33 Ⅳ. 조사내용 38 1. 혜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38 1) 수복방 40 2) 수라청 50 2. 원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57 1) 수복방 58 3. 강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70 1) 수복방 71 2) 수라청 74 Ⅴ. 고 찰 80 Ⅵ. 맺음말 105 - i -

도 면 목 차 도면 1. 구리 동구릉 지형 수계 현황도 5 도면 2. 구리 동구릉 및 조사지역(혜릉 원릉) 위치도 6 도면 3. 선원보감의 태릉과 강릉 능역도 9 도면 4. 서울 태릉과 강릉 및 조사지역(강릉) 위치도 10 도면 5. 海 東 地 圖 의 서울 태릉과 강릉, 구리 동구릉 11 도면 6. 大 東 輿 地 圖 의 서울 태릉과 강릉, 구리 동구릉 12 도면 7. 서울 태릉과 강릉, 구리 동구릉 위치도 13 도면 8. 혜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위치도 35 도면 9. 원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위치도 36 도면 10. 강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위치도 37 도면 11. 혜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건물지 배치도 39 도면 12. 혜릉 수복방 실측도 41 도면 13. 혜릉 수라청 실측도 53 도면 14. 원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건물지 배치도 57 도면 15. 원릉 수복방 실측도 61 도면 16. 원릉 수라청 실측도 67 도면 17. 강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건물지 배치도 70 도면 18. 2Tr 토층 실측도 72 도면 19. 강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건물지 배치도 75 사 진 목 차 사진 1. 구리 동구릉 전경 3 사진 2. 구리 동구릉 위성사진 4 사진 3. 서울 태릉과 강릉 위성사진 7 사진 4. 서울 태릉과 강릉 1973년 위성사진 8 사진 5. 강릉 전경 9 사진 6. 혜릉 전경 15 사진 7. 원릉 전경 18 사진 8. 원릉 정자각 전경 19 사진 9. 원릉 향어로 전경 19 사진 10. 강릉 전경 26 사진 11. 강릉의 능침 전경 27 사진 12. 혜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전경 30 사진 13. 혜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조사 전 전경 31 사진 14. 혜릉의 수복방 조사 모습 31 - ii -

사진 15. 혜릉의 수라청 조사 모습 31 사진 16. 원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전경 32 사진 17. 원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조사 전 전경 32 사진 18. 원릉의 수복방 조사 모습 32 사진 19. 원릉의 수라청 조사 모습 33 사진 20. 강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전경 34 사진 21. 강릉의 수복방 조사 전 중 전경 34 사진 22. 강릉의 수라청 조사 중 전경 34 사진 23. 혜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전경 38 사진 24. 혜릉 수복방 조사 전 전경 40 사진 25. 혜릉 수복방 전경 40 사진 26. 혜릉 수복방 기단 및 초석 전경 42 사진 27. 혜릉 수복방 초석 세부 43 사진 28. 혜릉 수복방 중앙칸(어칸) 세부 44 사진 29. 혜릉 수복방 고맥이석 세부 44 사진 30. 혜릉 수복방 아궁이 전경 및 토층 45 사진 31. 혜릉 수복방 고래시설과 배연시설(개자리, 굴뚝) 전경 및 세부 45 사진 32. 혜릉 수복방 유물 출토 상태 45 사진 33. 혜릉 수라청 조사 중 전경 50 사진 34. 혜릉 수라층 전경 및 토층 51 사진 35. 혜릉 수라청 바닥 전석 세부 52 사진 36. 혜릉 수라청 적심석 세부 52 사진 37. 혜릉 수라청 유물 출토상태 52 사진 38. 원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전경 58 사진 39. 원릉의 수복방 조사 전 전경 58 사진 40. 원릉 수복방 전경 59 사진 41. 원릉 수복방 초석 토층 60 사진 42. 원릉 수복방 기단 토층 60 사진 43. 원릉 수라청 정면 전경 및 기단 외부 토층 65 사진 44. 원릉 수라청 우측면 전경 및 세부 66 사진 45. 원릉 수라청 배면 및 초석 추정자리 세부 66 사진 46. 원릉 수라청 유물 출토상태 66 사진 47. 강릉의 수복방 조사지역 전경 71 사진 48. 강릉 수복방 2Tr 전경 및 토층 72 사진 49. 강릉 수복방지 현대 교란토 내 할석 전경 73 사진 50. 강릉 수라청 조사 전경 74 사진 51. 강릉의 수라청 기단 초석 전경 및 토층 76 사진 52. 강릉의 수라청 교란된 초석 전경 77 사진 53. 강릉 수라청 고맥이석 세부 77 사진 54. 강릉의 수라청 유물 출토상태 77 - iii -

Ⅰ. 조사개요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는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릉 능제 복원의 일환으로, 구리 동구릉( 東 九 陵 ) 의 혜릉( 惠 陵 )과 원릉( 元 陵 )의 수복방( 守 僕 房 ))과 수라청( 水 剌 廳 ), 서울 태릉( 泰 陵 )과 강릉( 康 陵 ) 의 강 릉 수복방과 수라청에 대한 정밀 발굴조사 후 각각의 수복방과 수라청을 원형으로 복원할 계획이다.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10-1번지와 산8-1번지에 위치한 구리 동구릉 혜릉 원릉의 수복방과 수 라청,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산 227번지에 위치한 서울 태릉과 강릉의 강릉 수복방과 수라청에 대한 정밀 발굴조사는 동서문물연구원에서 수복방 터 3개소(210m2:70m2 3)와 수라청 터 3개소(210 m2:70m2 3) 420m2에 대하여 2014년 5월 27일부터 동년 6월 30일까지(실조사 20일) 실시하였다. 구리 동구릉은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능인 건원릉을 비롯하여 9개의 능에 17위의 유택이 있고, 2009년 2월 2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9개의 능 중 조사 대상의 혜릉은 조선 제20대 왕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 端 懿 王 后 )의 능으로 단릉이며, 원릉은 조선 제21대 왕 영조( 英 祖 )와 계비 정순왕후( 貞 純 王 后 )의 능으로 쌍릉이다. 서울 태릉과 강릉은 사적 제201호로, 태릉은 제11대 중종( 中 宗 )의 왕비 문정왕후( 文 定 王 后 ) 능이 고, 강릉은 제13대 명종( 明 宗 )과 왕비 인순왕후( 仁 順 王 后 )의 능으로 쌍릉이다. 구리 동구릉의 혜릉과 원릉의 수복방은 기단과 초석이 현 지표에 노출되어 있으며 수라청은 초석 일부만 지표에 노출되어 있다. 서울 태릉과 강릉의 강릉은 수복방은 지표에 거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고 수라청은 기단과 초석이 일부 원형으로 남아 있다. 혜릉, 원릉, 강릉의 수복방과 수랑청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각각의 수복방과 수라청은 왕릉의 규 모, 상설제도, 건축물 등에 대하여 수치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정조 12년경(1788)에 유의양에 의 해 편찬된 春 官 通 考 에 기록된 문헌자료와 일치하는 3칸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강릉의 수 복방은 후대 교란으로 훼손되어 그 규모와 원형을 파악하기 어렵다. 발굴조사된 내용은 향후 계획된 조선왕릉 수복방과 수라청의 복원을 전제로, 학술자문회의(2014. 6. 24)를 개최하여 수복방과 수라청의 규모와 구조 및 그 원형을 검토한 후 조사를 완료하였다. 발굴조사에 참여한 조사단 구성은 다음과 같다(조사당시 직책) 조 사 단 장 : 김형곤(동서문물연구원 원장) 책임조사원 : 문백성(동서문물연구원 자료정리실장) 조 사 원 : 여창현(동서문물연구원 연구원) 준 조 사 원 : 정민기(동서문물연구원 연구원) 보 조 원 : 손태진(동서문물연구원 연구원) - 1 -

발굴조사 보고서는 현장조사를 담당했던 조사원을 비롯하여 자료정리실의 연구원이 다음과 같이 분담하여 작성하였다. 총괄 : 김형곤 유구 원고 작성 : 문백성, 여창현 도면 및 사진 편집 : 문백성, 여창현, 정혜정 유물 정리 : 정민기, 손태진, 박경란, 박현주 금속 유물 보존처리 : 정세림, 강민정, 조원경 유물 사진 촬영 : 권영호 유물 원고 작성 : 박진현 유물 실측 및 편집 : 박진현, 노은정, 강미정, 서순이, 신영희 교정 및 교열 : 김형곤 행정 사무 : 김동석, 천신우 그 외 발굴조사와 보고서 간행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신 박기화 김왕직 자문위원 선생님과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를 비롯하여 구리 동구릉과 서울 태릉과 강릉의 관리 소 직원들의 많은 도움이 있었다. - 2 -

Ⅱ. 유적의 위치와 환경 1. 자연 환경 및 입지 1) 구리 동구릉 구리 동구릉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번지 일원에 위치하며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 다. 동구릉은 구리시 북쪽에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남양주시 도농동과 인접하고, 서쪽으로는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 남쪽으로는 구리시 교문동과 인접하여 있다. 동구릉의 동쪽으로 서울외곽순환고속 국도가 지나가고, 남쪽으로 북부간선도로가 지나가며, 43번 국도는 진입부 지역을 관통하여 지나가 고 있다. 경복궁에서는 약 14.2km 정도 떨어져 위치한다. 사진 1. 구리 동구릉 전경 동구릉은 동쪽에 있는 아홉 능 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왕조의 9개의 능에 17위 의 유택이 있다. 동구릉의 조성은 조선왕조 전 시기에 걸쳐 이루어졌기에 동오릉( 東 五 陵 ) 1), 동칠릉 ( 東 七 陵 ) 2) 이라 명명된 적도 있었으며 동구릉( 東 九 陵 )이란 명칭은 추존황제 문조의 수릉이 들어선 1855년 철종 때의 일이다. 1) 英 祖 實 錄 卷 89, 33 年 (1757) 5 月 18 日, 虎 入 東 五 陵 局 內, 命 軍 門 捕 之 2) 純 祖 實 錄 卷 32, 31 年 (1831) 5 月 19 日, 東 七 陵 主 脈 汰 落 處 補 土 訖 役, 堂 上 楊 州 牧 使 以 下, 施 賞 有 差 - 3 -

동구릉은 검암산 중앙 북쪽의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 健 元 陵 )을 중심으로 동쪽 언덕에 제14대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인 목릉( 穆 陵 ), 그 남쪽으로는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 顯 陵 ), 그 다음으로 추존왕 문조와 그의 비 신정왕후 수릉( 綏 陵 )이 있다. 건원릉의 서쪽으 로는 제16대 인조 계비 장령왕후의 휘릉( 徽 陵 ), 그 다음으로 제24대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 계비 효 정왕후의 경릉( 景 陵 )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아래로 다시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원릉( 元 陵 ), 그 다음으로 제20대 경종 원비 단의왕후의 혜릉( 惠 陵 ),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 의 숭릉( 崇 陵 )이 조성되어 있다. 이번 발굴조사는 원릉과 혜릉의 수복방과 수라청이 그 대상이다. 동구릉은 건원릉 휘릉 혜릉의 단릉( 單 陵 ) 외에 쌍릉( 雙 陵 )의 숭릉과 원릉, 동원이강릉( 同 原 異 岡 陵 )의 현릉과 목릉, 합장릉( 合 葬 陵 )의 수릉, 경릉은 삼연릉( 三 連 陵 )으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 한 능의 형식으로 조영되어 있다. 동구릉은 검암산에 조성되어 있는데 최고 높이가 해발고도 177.8m이고, 주변 봉우리들은 해발고도 사진 2. 구리 동구릉 위성사진 - 4 -

80~170m를 이루고 있으며, 진입부 지역은 해발고도 20~45m이다. 동구릉을 대표하는 왕릉인 건원 릉은 해발고도 70m에 위치하고, 목릉은 가장 높은 곳에 입지한 왕릉으로 해발고도 74m에 입지하며, 수릉은 가장 낮은 해발고도 42m에 입지하여 전체적으로 40~70m 내외에 왕릉이 위치하고 있다. 조사지역에 해당하는 동구릉의 혜릉은 위도 37 37 21, 경도 127 07 42 이고, 해발고도 60m에 입지하고 있으며, 원릉은 위도 37 37 13, 경도 127 07 47 이며, 해발고도 46m에 있다. 동구릉 내에는 3개의 수계가 형성되어 있는데 검암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는 수계는 건원릉을 거쳐 현릉, 수릉까지 이어진다. 검암산 정상 부근의 계곡에서 발원하는 서쪽 수계는 동구릉 내 수계 중 가장 길고, 수계의 경로는 경릉과 원릉을 거쳐 북쪽 수계와 합류 후 왕숙천으로 이어지고 있다. 숭릉과 혜릉 사이 계곡에서 발원한 수계는 혜릉의 남쪽 측면을 지나 다른 수계와 합류한 후 왕숙천 으로 이어진다. 동구릉 내에 형성된 3개의 수계는 동구릉의 명당수로서 하나의 물길로 합류되며 현 배수로를 통하여 왕숙천까지 흐르고 있는데, 43번 국도에서부터 물길은 근래에 조성된 인공 배수로 를 따라 왕숙천으로 이어진다. 3) 도면 1. 구리 동구릉 지형 수계 현황도(문화재청, 2010, p.39) 3) 문화재청, 2010, 동구릉 능제복원 기본계획 연구, pp.38~39-5 -

3 1 5 4 9 6 2 7 구리 동구릉 (사적 제193호) 8 원릉 10 혜릉 16 12 13 14 범례 1. 갈매동 유물산포지 1~8 2. 갈매동 도촌마을 산치성지 3. 사노동 산치성지 4. 사노동 유물산포지3 17 5. 왕숙천 제방도로 확장구간내 유적 6. 사노동 유물산포지 7. 인창동 추정 지석묘군 8. 인창동 등창마을 산신바위 9. 도농동 배양리 유물산포지 10. 도농동 유물산포지 11. 인창동 택지개발사업부지내 유적 12. 인창동 추정 유적지 13. 인창동 지석묘 14. 인창동 유물산포지2 15. 인창동 배틀고개 유물산포지 16. 구능산 유물산포지 0 250 17. 교문동 관방유적 15 11 500 750 1Km (1:25,000) 도면 2. 구리 동구릉 및 조사지역(혜릉 원릉) 위치도 -6-

2) 서울 태릉과 강릉 서울 태릉과 강릉은 서울특별시 노원구 화랑로 681번지 일원에 위치하며, 사적 제201호로 지정되 어 있다 서울 태릉과 강릉은 조선 제11대 중종( 中 宗 )의 두 번째 비 문정왕후 윤씨의 태릉과 이번 조 사 대상에 해당하는 제13대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인 강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적지 내에는 국제 사격장과 태릉선수촌 등이 들어서 있다. 태릉과 강릉은 남측 경계와 접한 부분에는 화랑로와 경춘선이 지나며 그 건너편으로 태릉컨트리 컬럽이 있고, 강릉의 동쪽으로는 경기도 남양주시 경계와 인접하며 능역과 시 경계사이에 삼육대학 교가 있다. 북측으로는 능침의 주맥을 잇는 살줄기인 불암산 자연공원과 연결되고 서측으로는 태릉 푸른동산과 서울여자대학교에 인접하고 있다. 강릉 태릉 사진 3. 서울 태릉과 강릉 위성사진 - 7 -

강릉 태릉 사진 4. 서울 태릉과 강릉 1973년 위성사진(서울특별시 항공사진서비스http://aerogis.seoul.go.kr/) 태릉과 강릉은 지형상으로는 태백산맥 철령 부근에서 갈라져 서남주하는 광주산맥의 일부에 위치 하며, 수락산을 주맥으로 육군사관학교 남쪽 구룡산을 안산으로 하고 좌청룡과 우백호의 맥이 능선 을 감싸고 있는 지형으로, 각 능선을 따라 좌우측으로 수계가 흐르고 강릉 앞에서 수계가 합류하여 연지를 거쳐 공릉천으로 흐르고 있다. 주종산인 수락산(637.7m)과 불암산(508m)은 북한산보다 산 세가 낮지만 해발고도 300m 이상은 매우 급한 경사를 이루며, 평균 200~300m 안팎의 뾰족한 봉 우리를 이루는 화강암 풍화지형이다. 1931년에 쓰여진 璿 源 寶 鑑 에 따르면 태릉은 양주 노원면 수 락산 아래에 있다고 되어 있다. 수락산을 주산으로 하여 내려온 주맥이 서쪽으로 이어진 맥의 서쪽 에 태릉이 있고 동쪽에 강릉이 입지하고 있다. 경위도상으로 태릉은 북위 37 38 05 동경 127 05 49, 강릉은 북위 37 38 22 동경 127 06 18 에 위치한다. 경복궁에서는 동북방향으로 직선거리 12.5km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4) 4) 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태릉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Ⅲ, pp.451~453 국립문화재연구소, 2013, 강릉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Ⅳ, pp.108~111-8 -

태릉과 강릉 내 노원구를 관통하는 하천으로는 수락산에서 발 원하여 남서측으로 흘러 중량천과 합류하는 당현천이 있고 태릉 과 강릉의 서측에는 묵동천이 남쪽으로 흘러 신내동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하여 화랑로를 따라 흘러서 월릉교 부근에서 중량천과 합류되고 있다. 현재 태릉과 강릉의 남측에 화랑로가 개설되면서 묵동천의 상류가 변형되었으며 수계도 따라 변형되었다. 태릉과 강릉의 수계는 璿 源 寶 鑑 에는 강릉 동편 산릉 동쪽의 물이 남 서측으로 흐르고 태릉 서편 산릉 서쪽의 물이 남동측으로 흘러 태릉과 강릉의 남측 수구에서 합류되어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에 서 남으로 흐른 물과 합류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5) 도면 3. 선원보감의 태릉과 강릉 능역도( 左 :태릉, 右 :강릉) 사진 5. 강릉 전경 5)이창환 이상필 정종수 전혜원 김규연 최종희, 2009, 조선 왕릉의 능제복원 연구 -태릉 강릉을 중심으로- 韓 國 傳 統 造 景 學 術 誌 27-2, p.65, 韓 國 傳 統 造 景 學 會 - 9 -

1 3 2 4 5 6 7 강릉 서울 태릉과 강릉 (사적 제201호) 태릉 8 9 범례 1. 2. 3. 4. 5. 6. 7. 8. 9. 화접리 화접리 화접리 화접리 화접리 갈매동 하계동 공릉동 갈매동 유물산포지 1 유물산포지 2 유물산포지 3 유물산포지 4 유물산포지 5 담터마을 산치성지 벽진이씨 묘역 서울여대 부지내 유적 유물산포지 1~8 0 250 500 750 1Km (1:25,000) 도면 4. 서울 태릉과 강릉 및 조사지역(강릉) 위치도 - 10 -

서울 태릉과 강릉 구리 동구릉 도면 5. 海 東 地 圖 (18세기)의 서울 태릉과 강릉, 구리 동구릉 - 11 -

서울 태릉과 강릉 구리 동구릉 도면 6. 大 東 輿 地 圖 (19세기 중엽)의 서울 태릉과 강릉, 구리 동구릉 - 12 -

서울 태릉과 강릉 강릉 태릉 구리 동 구 릉 원릉 혜릉 0 500 1Km 1.5 2Km 도면 7. 서울 태릉과 강릉, 구리 동구릉 위치도(1926년 제작, S:1/50,000) - 13 -

2. 역사적 배경 1) 혜릉의 조성 및 공간구성 사적 제193호로 지정된 구리 동구릉의 혜릉은 조선 제20대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 심씨(1686-1718년)의 능이다. 단의왕후는 숙종 12년(1686) 5월 21일 태어나 숙종 22년(1696) 세자빈에 책봉 되고 숙종 44년(1718)2월 7일에 창덕궁 장춘헌에서 33세로 승하하여 같은 해 4월 19일 동구릉에 모셔졌다. 경종이 왕으로 즉위(1720)함과 동시에 왕후로 추존되어 묘에서 능으로 격상되었지만 능제 에 맞춰 보토하거나 석물 수량을 늘리는 공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혜릉에는 봉분주위 로 난간석이 돌려져 있고 무인석과 석마 각 1쌍이 배열되었으며, 석양과 석호 역시 총 2쌍이 증가되 어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1722년 석물이 추가되어 능제 형식에 따라 봉릉되었기 때문이다. 6) 혜릉은 동구릉의 서쪽 능선 숭릉과 경릉 사이에 조성된 단릉으로 조선의 왕릉들이 대부분 북침 을 하고 있는 반면에 혜릉의 좌향은 유좌묘향( 酉 坐 卯 向, 정서에서 정동방향)으로 서쪽에 머리를 두 고 다리를 동쪽으로 향했다. 혜릉의 능역 공간구성은 죽은자와 산자가 만나는 공간인 정자각을 중 심으로 산자의 공간인 진입공간, 성속의 공간인 제향공간, 성역의 능침공간으로 구분된다. 7) 진입공간은 일반적으로 연지, 재실, 금천교, 홍살문으로 이어지는 공간이다. 혜릉의 재실은 春 官 通 考 에 전사청이 6칸이며, 집사방이 7칸으로 홍살문 60보에 있고, 제기고는 2칸으로 전사청 옆에 있으며, 안향청은 7칸, 재실은 8칸으로 전사청에 붙어 있다. 연지는 없다. 고 기록되어 있다. 8) 현재 혜릉의 재실은 확인할 수 없다. 금천교도 문헌과 현황에서 확인할 수 없다. 제향 전이공간은 판위, 향어로, 정자각, 수복방, 수라청 등으로 구성된다. 홍살문 앞 우측에는 제 례의 시작을 알리는 판위가 있다. 홍살문 앞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향어로는 2단으로 향로가 어 로보다 9cm 높다. 정자각은 정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배위청은 정면 1칸, 측면 2칸으로 정전이 배 위청보다 단이 9cm 높게 조성되었다. 조사대상에 해당하는 수복방과 수라청은 春 官 通 考 에 수라청 은 정자각 우측에 3칸, 수직방(수복방)은 좌측에 3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9) 능침공간은 곡장 안의 봉분은 병풍석 없이 12칸의 난간석만 둘러져 있고, 봉분 주위에는 각 2쌍 의 석호와 석양, 장명등, 망주석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을 중심으로 한 석물이 놓인 곳을 능침의 상계라고 하며 사자의 중심공간이다. 상계 앞의 한단 낮은 곳은 문인의 공간으로 중계라 불 리며 이 공간의 중심에 팔각의 장명등이 있으나 혜릉의 장명등은 일부 흔적만 있을 뿐 장명등이 없 다. 조선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장명등이 훼손된 곳이다. 장명등 양 옆으로 안쪽을 향해 문석인이 한 쌍 배치되어 있으며 한발 뒤 한발 옆으로 석마가 배치되어 있다. 하계에는 무석인이 석마와 공간을 같이하여 중계와 나란히 구성되어 있다. 6) 국립문화재연구소, 2014, 혜릉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Ⅶ 7) 국립문화재연구소, 2014, 혜릉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Ⅶ, pp.31~38 8) 春 官 通 考 12 冊 卷 20, 吉 禮 陵 寢, 典 祀 廳 六 間 執 事 房 五 間 在 紅 箭 門 六 十 步 祭 器 庫 二 間 在 典 祀 廳 傍 安 香 廳 七 間 齋 室 八 間 在 典 祀 廳 接 蓮 池 無 9) 春 官 通 考 12 冊 卷 20, 吉 禮 陵 寢, 水 剌 廳 三 間 在 丁 字 閣 右 守 直 房 三 間 在 左 - 14 -

사진 6. 혜릉 전경 - 15 -

朝 鮮 王 朝 實 錄 의 惠 陵 관련 기사 10) 景 宗 修 正 實 錄 卷 1, 卽 位 年 (1720 庚 子 ) 6 月 15 日 ( 庚 戌 ) 尊 惠 順 王 妃 爲 王 大 妃, 封 嬪 魚 氏 爲 王 妃 追 封 端 懿 嬪 沈 氏 爲 端 懿 王 后, 殿 號 永 徽, 陵 號 惠 陵 혜순 왕비( 惠 順 王 妃 )를 추존하여 왕대비( 王 大 妃 )로 삼고, 빈( 嬪 ) 어씨( 魚 氏 )를 봉( 封 )하여 왕비( 王 妃 )로 삼았 다. 단의빈( 端 懿 嬪 ) 심씨( 沈 氏 )를 추봉( 追 封 )하여 단의 왕후( 端 懿 王 后 )로 삼았는데, 전호( 殿 號 )는 영휘( 永 徽 ), 능호( 陵 號 )는 혜릉( 惠 陵 ) 이다. 純 祖 實 錄 卷 25, 22 年 (1822 壬 午 ) 10 月 4 日 ( 乙 巳 ) 惠 陵 莎 草 修 改 監 ( 蕫 ) 董 政 府 以 下, 施 賞 有 差 혜릉( 惠 陵 ) 의 사초( 莎 草 ) 수개( 修 改 )를 감독한 의정부 이하의 관원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純 祖 實 錄 卷 32, 32 年 (1832 壬 辰 ) 6 月 26 日 ( 辛 丑 ) 貞 陵, 獻 陵, 明 陵, 弘 陵, 穆 陵, 寧 陵, 崇 陵, 惠 陵, 元 陵, 皆 有 雨 頉, 分 遣 奉 審 後, 命 待 快 晴 修 改 정릉( 貞 陵 ) 헌릉( 獻 陵 ) 명릉( 明 陵 ) 홍릉( 弘 陵 ) 목릉( 穆 陵 ) 영릉( 寧 陵 ) 숭릉( 崇 陵 ) 혜릉( 惠 陵 ) 원릉( 元 陵 )에 모두 비의 피해가 있으므로, 사람을 나누어 보내서 봉심하게 한 뒤에 쾌청( 快 晴 )을 기다려 보수하라고 명하였다. 高 宗 實 錄 卷 2, 2 年 (1865 乙 丑 ) 7 月 11 日 ( 癸 酉 ) 禮 曹 啓 : 今 番 暴 雨, 崇 陵, 惠 陵, 仁 陵, 睿 陵, 陵 上 莎 草 蹲 縮 ; 顯 陵, 穆 陵, 徽 陵, 景 陵, 陵 上 曲 牆 頹 圮, 各 齋 官 所 報, 次 第 來 到 矣 各 陵 寢 有 此 意 外 之 患, 萬 萬 驚 悚 慰 安 祭, 不 卜 日 設 行, 而 修 改 之 節, 依 法 典, 政 府 以 下 進 去 奉 審 後, 稟 處 何 如? 允 之 仍 敎 曰 : 除 下 直 進 去 예조( 禮 曹 )에서 아뢰기를, 이번 폭우로 숭릉( 崇 陵 ) 혜릉( 惠 陵 ) 인릉( 仁 陵 ) 예릉( 睿 陵 )의 능상의 사초( 莎 草 )가 내려앉았고 현릉( 顯 陵 ), 목릉( 穆 陵 ) 휘릉( 徽 陵 ) 경릉( 景 陵 ) 능상의 곡장( 曲 牆 )이 무너졌다는 각 재관( 齋 官 ) 들의 보고가 차례로 이르렀습니다. 각 능침( 陵 寢 )에서 이런 뜻밖의 사고가 일어났으니 더 없이 놀랍고 두렵습 니다. 위안제( 慰 安 祭 )는 날을 잡지 말고 설행하고, 수개( 修 改 )하는 절차는 법전에 의거하여 정부( 政 府 ) 이하가 나아가 봉심( 奉 審 )한 뒤에 품처( 稟 處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하직( 下 直 )은 그만 두고 나아가라. 하였다. 高 宗 實 錄 卷 5, 5 年 (1868 戊 辰 ) 6 月 16 日 ( 壬 戌 ) 禮 曹 以 穆 陵, 惠 陵, 元 陵, 今 番 雨 水, 或 曲 牆 頹 圮, 階 砌 汰 落, 丁 字 閣 滲 漏 慰 安 祭 不 卜 日 設 行, 改 築 之 節, 自 臣 曹 奉 審 後, 稟 處 啓 예조( 禮 曹 )에서, 목릉( 穆 陵 ) 혜릉( 惠 陵 ) 원릉( 元 陵 )이 이번 비에 곡장( 曲 墻 )이 무너지기도 하고 계단이 떨어져 나가기도 하였으며 정자각( 丁 字 閣 )도 비가 샜습니다. 위안제( 慰 安 祭 )는 날을 받지 않고 설행( 設 行 )할 것이며 개 축( 改 築 )하는 절차에 대해서는 본조( 本 曹 )에서 봉심( 奉 審 )한 후에 품처( 稟 處 )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10) 朝 鮮 王 朝 實 錄 의 惠 陵 관련 기사는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http://sillok.history.go.kr/에서 원문과 국문 인용, 元 陵 과 康 陵 의 朝 鮮 王 朝 實 錄 관련 기사도 http://sillok.history.go.kr/ 에서 인용 - 16 -

2) 원릉의 조성 및 공간구성 구리 동구릉의 원릉은 조선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쌍능으로 조성되어 있다. 영조는 숙 종 20년(1694) 9월 13일 숙종의 4째 아들로 창덕궁 보경당에서 탄생하여 경종 원년(1721)에 세제 로 책봉되었다가 1724년 8월 30일 즉위하였다. 1776년 3월 5일 경희궁 집경당에서 승하하여 같은 해 7월27일 동구릉에 모셨다. 원릉의 좌향은 해좌사향( 亥 坐 巳 向, 북서에서 남동방향)이다. 영조는 원비 정성왕후( 貞 聖 王 后 )가 있는 서오릉의 홍릉( 弘 陵 ) 옆자리에 묻히기를 바랐으나 정조가 지금의 위치에 능지를 정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원릉이 있는 자리는 원래 효종의 능인 영릉 ( 寧 陵 )이 있었던 곳으로 영릉은 1673년 풍수가 좋지 않다는 상소가 제기되어 경기도 여주 세종 영 릉 옆으로 천릉되었다. 계비 정순왕후 김씨는 영조 35년(1759) 왕비에 책봉되어 순조 5년(1805) 정월 12일 창덕궁 경복 전에서 승하하여 같은 해 6월 20일에 원릉의 영조와 함께 쌍릉으로 모셔졌다. 원릉은 문인석과 무 인석 사이의 계단을 없애고 동일 평면에 배치하였으며 이후 조성되는 왕릉은 이 제도를 따랐다. 원릉의 공간구성은 정자각을 중심으로 한 제향공간과 재실, 금천교 등의 산자의 공간인 진입공간, 봉분을 중심으로 한 능침공간으로 구분된다. 11) 원릉의 진입공간은 연지와 재실은 현재 확인할 수 없으며 금천교가 홍살문 앞 수십 미터에 입지하 고 있다. 원릉의 재실은 春 官 通 考 에 전사청은 9칸으로 홍살문 남쪽 131보에 있고, 제기고는 3칸으 로 전사청 옆에 있으며, 안향청은 6칸, 재실은 8칸으로 전사청 옆에 있다. 라고 되어 있다. 12) 원릉의 금천교는 긴 장대석을 연견한 구조로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원릉의 제향 진입공간은 홍살문 우측에 판위가 있고 홍살문 앞에는 향어로가 정자각으로 이어진 다. 정자각은 정전이 정면 3칸, 측면 2칸, 배위청이 정면 1칸, 측면 2칸으로 맞배지붕이다. 정자각 앞의 양 옆에는 이번 조사대상지인 수라청이 흔적만 남아 있고, 수복방이 기단과 초석 일부가 흔적 만 남아 있다. 春 官 通 考 에는 정자각 우측 30보에 3칸의 수라청, 좌측 31보에 3칸의 수직방(수복 방)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3) 정자각 후면 동북측에는 왕과 왕후의 업적과 이력이 기록된 비 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비각 안에 설치되어 있다. 그 외 산신에게 제사 지내는 산신석이 능침의 강 이 끝나는 정자각 뒤 동북측에 설치되어 있다. 원릉의 능침공간은 능침 주변에는 동 서 북 3면을 둘러싸는 곡장 안으로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 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능침을 중심으로 밖을 향해 배치되는 석호와 석양, 왕릉과 왕비릉 앞에는 혼 유석이 각각 놓여 있고,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세워져 있다. 능침공간의 중계와 하계는 공간구분이 없어지면서 문인석과 무인석이 같은 층계에 위치하게 되며, 능침의 중간에 놓인 장명등을 중심으로 동서쪽에는 장명등을 바라보도록 문인석과 석마가, 그리고 무인석과 석마가 문인석의 남쪽으로 위치 한다. 11) 국립문화재연구소, 2014, 원릉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Ⅶ, pp.139~147 12) 春 官 通 考 12 冊 卷 20, 吉 禮 陵 寢, 典 祀 廳 九 間 在 紅 箭 門 一 百 三 十 一 步 祭 器 庫 三 間 在 典 祀 廳 傍 安 香 廳 六 間 齋 室 八 間 在 典 祀 廳 傍 13) 春 官 通 考 12 冊 卷 20, 吉 禮 陵 寢, 水 剌 廳 三 間 在 丁 字 閣 右 三 十 步 守 直 房 三 間 在 左 三 十 一 步 - 17 -

사진 7. 원릉 전경 - 18 -

사진 8. 원릉 정자각 전경 사진 9. 원릉 향어로 전경 - 19 -

朝 鮮 王 朝 實 錄 의 元 陵 관련 기사 英 祖 實 錄 卷 127, 52 年 (1776 丙 申 ) 3 月 10 日 ( 辛 巳 ) 大 臣, 政 府 西 壁, 館 閣, 六 曹 參 判 以 上, 會 于 賓 廳, 上 大 行 大 王 諡 號 曰 : 翼 愛 民 好 治 文 道 德 博 聞 宣 聖 善 周 聞 武 保 大 定 功 熙 無 註 敬 夙 夜 儆 戒 顯 行 見 於 中 外 孝 繼 志 成 文 廟 號 曰 : 英 宗, 殿 號 曰 孝 明, 陵 號 曰 元 陵 대신( 大 臣 )과 정부 서벽( 政 府 西 壁 )과 관각( 館 閣 )과 육조 참판( 六 曹 參 判 ) 이상이 빈청( 賓 廳 )에 모여 대행 대왕 ( 大 行 大 王 )의 시호( 諡 號 )를 익( 翼 ) 백성을 사랑하고 태평한 것을 좋아함. 문( 文 ) 도덕( 道 德 )이 널리 알려짐. 선( 宣 ) 성선( 聖 善 )이 두루 알려짐. 무( 武 ) 대위( 大 位 )를 보전하고 공( 功 )을 정함. 희( 熙 ) 주( 註 )가 없다. 경 ( 敬 )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경계함. 현( 顯 ) 행실이 중외( 中 外 )에 나타남. 효( 孝 ) 뜻을 이어 문채를 이 룸. 라 올리고, 묘호( 廟 號 )를 영종( 英 宗 )이라 올리고, 전호( 殿 號 )를 효명( 孝 明 )이라 올리고, 능호( 陵 號 )를 원 릉( 元 陵 )이라 올렸다. 英 祖 實 錄 卷 127, 52 年 (1776 丙 申 ) 3 月 10 日 ( 辛 巳 ) 七 月 二 十 七 日 酉 時, 葬 于 元 陵 在 健 元 陵 右 二 罔 7월 27일 유시( 酉 時 )에 원릉( 元 陵 ) 건원릉( 健 元 陵 ) 오른쪽 둘째 산등성이에 있다. 에 장사하였다. 正 祖 實 錄 卷 1, 卽 位 年 (1776 丙 申 ) 4 月 11 日 ( 壬 子 ) 壬 子 / 定 大 行 大 王 山 陵, 議 上 陵 號 曰 元 陵 山 陵 初 定 弘 陵, 又 審 昭 寧 園 局 內, 議 不 合, 屢 遣 大 臣 禮 堂, 遍 尋 諸 處 至 是 有 以 舊 寧 陵 爲 十 全 吉 地 言 者, 召 見 領 議 政 金 陽 澤, 左 議 政 鄭 存 謙, 判 中 樞 金 致 仁, 李 溵, 錦 城 尉 朴 明 源, 相 地 官 金 基 良, 金 田, 柳 東 亨, 金 尙 鉉 等 于 廬 次, 遍 詢 僉 見, 陽 澤, 溵 曰 : 已 驗 之 地, 似 若 有 待 也 存 謙 曰 : 寧 陵 遷 奉 時, 一 隊 人 慫 慂 宗 室, 疏 稱 莫 重 之 地 有 罅 隙, 先 正 臣 宋 時 烈 疏 中, 有 石 灰 堅 凝, 斧 斤 相 激, 臣 心 痛 霣, 如 斧 落 胸 之 語 矣 上 曰 : 予 亦 見 閔 文 忠 奏 議, 有 檃 度 于 中 矣 基 良 曰 : 舊 寧 陵 體 勢, 與 健 元 陵 無 異 且 局 勢 雖 主 健 元 陵, 而 正 榦 精 神, 盡 在 於 此 矣 東 亨 曰 : 佛 巖 山 正 榦 面 目, 皆 向 此 處, 誠 爲 十 全 大 地 矣 尙 鉉 曰 : 一 局 中 元 氣 都 聚 於 此 看 山 五 十 年, 未 見 如 此 吉 地 舊 壙 亦 無 嫌 也 命 大 臣 以 下 奉 審, 及 復 命 齊 聲 仰 贊 是 日 仍 召 見 大 臣, 備 局 堂 上 歷 詢, 諸 臣 無 異 議, 乃 定 陵 議 號 대행 대왕의 산릉( 山 陵 )을 정하고, 능 이름을 원릉( 元 陵 )으로 의논하여 올렸다. 산릉을 처음에는 홍릉( 弘 陵 ) 으로 정했다가 다시 소령원( 昭 寧 園 )의 국내( 局 內 )를 살펴보았는데 의논이 일치되지 않으므로, 여러 차례 대신 과 예조 당상을 보내어 두루 여러 곳에서 찾아 보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옛 영릉( 寧 陵 )이 완전한 길지( 吉 地 )인 것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영의정 김양택( 金 陽 澤 ) 좌의정 정존겸( 鄭 存 謙 ) 판중추부사 김치인( 金 致 仁 )과 이은( 李 溵 ) 금성위( 錦 城 尉 ) 박명원( 朴 明 源 )과 상지관( 相 地 官 ) 김기량( 金 基 良 ) 김전( 金 田 ) 유동형( 柳 東 亨 ) 김상현( 金 尙 鉉 ) 등을 여차( 廬 次 )에서 소견하고 두루 각자의 의견을 물으니, 김양택과 이은이 말하기를, 이미 증험해 본 땅이 마치 기다리고 있은 듯합니다. 하고, 정존겸이 말하기를, 영릉을 옮겨 모실 때에 한 대오의 사람들이 종실( 宗 室 )을 종용하여 상소에서 더없이 중요해야 할 자리에 틈 - 20 -

이 있다. 고 했었고, 선정신( 先 正 臣 ) 송시열( 宋 時 烈 )의 상소에서도 석회가 굳게 엉키어 있어 크고 작은 도끼가 서로 부딪치므로, 신의 마음이 애통스러우며 마치 도끼가 가슴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 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또한 문충공( 文 忠 公 ) 민진원( 閔 鎭 遠 )의 주의( 奏 議 )를 보고 대략 마음속에 헤아려지는 바가 있었다. 하였다. 김기량이 말하기를, 옛 영릉 자리의 체세( 體 勢 )는 건원릉( 健 元 陵 )과 차이가 없습니다. 또한 국세( 局 勢 ) 가 비록 건원릉이 주가 되기는 하지만 정간( 正 榦 )의 정신은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하였고, 유동형이 말하기를, 불암산( 佛 岩 山 )의 정간의 면목이 모두 이곳을 향하고 있으니, 진실로 완전한 대지( 大 地 )입니다. 하였으며, 김 상현이 말하기를, 온 국( 局 ) 안의 원기가 모두 이 곳에 모여 있습니다. 산을 보아 온 지 50년이지만 이와 같은 길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옛 광( 壙 )이라도 또한 꺼릴 것이 없습니다. 하니, 대신 이하가 봉심하도록 명했었는 데, 복명( 復 命 )에 당하여 똑같은 말로 칭찬하여 아뢰었다. 이 날에 이어서 대신과 비국 당상들을 소견하여 두 루 물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이의가 없으므로, 이어 능을 결정하고 명칭을 의정한 것이었다. 正 祖 實 錄 卷 9, 4 年 (1780 庚 子 ) 6 月 1 日 ( 戊 申 ) 戊 申 朔 / 禮 曹 以 元 陵 莎 草, 因 雨 汰 缺 啓 上 曰 : 宵 夢 異 常, 故 曉 起 特 遣 注 書 奉 審 此 啓 忽 至, 不 勝 驚 慮 遂 命 大 臣 禮 堂 奉 審, 行 慰 安 祭 예조( 禮 曹 )에서 원릉( 元 陵 )의 사초( 莎 草 )가 비로 인하여 사태가 났음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밤에 꿈이 이상하여 새벽에 일어나서 특별히 주서( 注 書 )를 보내어 봉심( 奉 審 )하게 하였는데, 이 계( 啓 )가 뜻 밖에 이르니 이루 놀랍고 걱정된다. 하고, 드디어 대신( 大 臣 )과 예조 당상이 봉심하고 위안제( 慰 安 祭 )를 지내라 고 명하였다. 正 祖 實 錄 卷 11, 5 年 (1781 辛 丑 ) 閏 5 月 19 日 ( 辛 酉 ) 元 陵 莎 草, 因 雨 頹 圯 長 五 尺 五 寸, 廣 十 二 尺, 深 八 寸 上 震 驚, 命 政 府 諸 臣, 馳 往 奉 審 後, 行 慰 安 祭 원릉( 元 陵 )의 사초( 莎 草 )가 비로 인하여 무너진 부분이 길이가 5척 5촌이고, 너비는 12척, 깊이는 8촌이었다. 임금 이 매우 놀라서 의정부의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달려가서 봉심( 奉 審 )한 뒤에, 위안제( 慰 安 祭 )를 지내게 하였다. 正 祖 實 錄 卷 16, 7 年 (1783 癸 卯 ) 8 月 6 日 ( 乙 丑 ) 元 陵 莎 草 頹 圯, 命 設 都 監 修 改 以 鄭 弘 淳 爲 元 陵 修 改 都 監 都 提 調, 徐 有 隣, 李 在 恊 爲 提 調, 鄭 昌 順 爲 同 知 經 筵 事 원릉( 元 陵 )의 사초( 莎 草 )가 무너졌으므로, 도감( 都 監 )을 설치하여 수개( 修 改 )하도록 명하였다. 정홍순( 鄭 弘 淳 ) 을 원릉 수개 도감 도제조( 元 陵 修 改 都 監 都 提 調 )로, 서유린( 徐 有 隣 )과 이재협( 李 在 協 )을 제조( 提 調 )로, 정창순 ( 鄭 昌 順 )을 동지 경연사로 삼았다. 純 祖 實 錄 卷 7, 5 年 (1805 乙 丑 ) 3 月 1 日 ( 乙 酉 ) 乙 酉 朔 / 摠 護 使 徐 邁 修 啓 言 : 謹 稽 丁 丑 謄 錄, 則 依 下 敎, 新 舊 表 石, 同 安 一 閣 矣 今 此 元 陵 碑 閣 爲 二 間, 新 表 石 奉 安 於 下 邊 空 間 似 好 兩 陵 間 石 欄 干, 合 爲 一, 圍 依 崇 陵 制 度 事, 頃 伏 承 下 敎 矣 謹 稽 癸 亥 謄 錄, 則 兩 陵 間, 僅 爲 二 尺, 故 先 陵 左 邊 欄 干 下 磚 石 七 箇 撤 去 後, 合 設 新 磚 石, 仍 又 合 設 前 後 石 柱 矣, 今 亦 依 此 爲 之 似 好 先 陵 左 邊 下 磚 石, 撤 去, 改 設 之 時, 當 有 莎 草 改 補 之 事 謹 稽 癸 亥 謄 錄, 陵 上 莎 草, 筵 稟 修 改 矣, 今 亦 依 此 臨 時 擇 日 擧 行 似 好 - 21 -

을 소견하였는데, 원릉( 元 陵 )의 국내( 局 內 )에 불이 난 곳을 봉심( 奉 審 )한 뒤 복명( 復 命 )하였기 때문이었다. 임 금이 말하기를, 국내에 불이 났으니 너무도 놀라운 일이다. 연소( 延 燒 )된 곳이 대단( 大 段 )에까지 이르지는 않 았는가? 하니, 김사목이 말하기를, 연소된 척수( 尺 數 )를 아울러 서계( 書 啓 )에 기재하였습니다. 왕후( 王 后 )의 능상( 陵 上 )에 있는 곡장( 曲 墻 )의 뒷면에서 대왕( 大 王 )의 능상에 있는 곡장 서쪽편까지의 사초( 莎 草 )가 불에 탔는데, 뒷면의 남북이 1백 6척( 尺 )이고 동서가 1백 76척이고 서쪽편의 남북이 1백 46척이고 동서가 66척이 고 남쪽으로 정자각( 丁 字 閣 )까지가 98척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초를 만일 수개( 修 改 )하지 않을 경우 지금 보기에 어떠할 것 같던가? 오래되면 저절로 무성하여질 것이다. 하니, 김사목이 말하기를, 조금 기 다리면 봄에 사초가 저절로 무성해질 것이라는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호판의 소견 은 어떠한가? 하니, 한만수가 말하기를, 사체( 事 體 )로 말한다면 수개할 것을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능상 ( 陵 上 )의 지척인 땅을 손을 움직여 개수한다는 것은 도리어 황송스런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불에 탄 다음의 봄에는 사초가 더욱 쉽게 무성하여 집니다. 하였다. 이어 수복( 守 僕 )과 산직( 山 直 )을 엄히 조사하여 유배( 流 配 )시키라고 명하였다. 純 祖 實 錄 卷 15, 12 年 (1812 壬 申 ) 4 月 13 日 ( 乙 卯 ) 元 陵 陵 上 莎 草 修 改, 政 府 以 下 命 施 賞 有 差 禮 曹 判 書 李 集 斗 加 崇 祿, 繕 工 監 提 調 李 勉 兢 加 崇 政, 地 方 官 楊 州 牧 使 金 孝 建 加 嘉 義 원릉( 元 陵 )의 능 위 사초( 莎 草 )를 개수( 改 修 )하고, 정부( 政 府 ) 이하에게 시상할 것을 명하였는데, 차등이 있었다. 예조 판서 이집두( 李 集 斗 )는 숭록 대부( 崇 祿 大 夫 )를, 선공감 제조( 繕 工 監 提 調 ) 이면긍( 李 勉 兢 )은 숭정 대부( 崇 政 大 夫 )를, 지방관인 양주 목사( 楊 州 牧 使 ) 김효건( 金 孝 建 )은 가의 대부( 嘉 義 大 夫 )를 가자 대부( 加 資 大 夫 )하였다. 純 祖 實 錄 卷 32, 32 年 (1832 壬 辰 ) 6 月 26 日 ( 辛 丑 ) 貞 陵, 獻 陵, 明 陵, 弘 陵, 穆 陵, 寧 陵, 崇 陵, 惠 陵, 元 陵, 皆 有 雨 頉, 分 遣 奉 審 後, 命 待 快 晴 修 改 정릉( 貞 陵 ) 헌릉( 獻 陵 ) 명릉( 明 陵 ) 홍릉( 弘 陵 ) 목릉( 穆 陵 ) 영릉( 寧 陵 ) 숭릉( 崇 陵 ) 혜릉( 惠 陵 ) 원릉( 元 陵 )에 모두 비의 피해가 있으므로, 사람을 나누어 보내서 봉심하게 한 뒤에 쾌청( 快 晴 )을 기다려 보수하라고 명하였다. 高 宗 實 錄 卷 5, 5 年 (1868 戊 辰 ) 6 月 16 日 ( 壬 戌 ) 禮 曹 以 穆 陵, 惠 陵, 元 陵, 今 番 雨 水, 或 曲 牆 頹 圮, 階 砌 汰 落, 丁 字 閣 滲 漏 慰 安 祭 不 卜 日 設 行, 改 築 之 節, 自 臣 曹 奉 審 後, 稟 處 啓 예조( 禮 曹 )에서, 목릉( 穆 陵 : 선조( 宣 祖 )의 능) 혜릉( 惠 陵 : 단의 왕후( 端 懿 王 后 )의 능) 원릉( 元 陵 : 영조( 英 祖 )와 정순 왕후( 貞 純 王 后 )의 능)이 이번 비에 곡장( 曲 墻 )이 무너지기도 하고 계단이 떨어져 나가기도 하였으 며 정자각( 丁 字 閣 )도 비가 샜습니다. 위안제( 慰 安 祭 )는 날을 받지 않고 설행( 設 行 )할 것이며 개축( 改 築 )하는 절차에 대해서는 본조( 本 曹 )에서 봉심( 奉 審 )한 후에 품처( 稟 處 )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高 宗 實 錄 卷 16, 16 年 (1879 己 卯 / 청 광서( 光 緖 ) 5 年 ) 4 月 28 日 ( 辛 未 ) 健 元 陵, 顯 陵, 穆 陵, 徽 陵, 崇 陵, 惠 陵, 元 陵, 綏 陵, 景 陵 碑 閣 丁 字 閣 修 改 時 監 役 齋 官 以 下, 施 賞 有 差 건원릉( 健 元 陵 ), 현릉( 顯 陵 ), 목릉( 穆 陵 ), 휘릉( 徽 陵 ), 숭릉( 崇 陵 ), 혜릉( 惠 陵 ), 원릉( 元 陵 ), 수릉( 綏 陵 ), 경릉( 景 - 22 -

癸 卯 年 本 陵 莎 草 有 頉 修 改 時, 用 尖 上 豐 下 之 制, 高 則 減 五 寸, 圍 圓 則 增 爲 八 十 八 尺 七 寸 矣, 封 陵 周 回, 本 爲 八 十 一 尺, 崇 陵 則 兩 陵 相 距 之 間, 各 減 尺 數, 爲 八 十 尺 矣 陵 形 高 廣 之 差 減 尺 數, 或 因 特 敎, 或 因 稟 定, 其 例 不 一 今 於 改 莎 封 築 之 時, 亦 依 崇 陵 雙 陵 尺 數, 似 爲 便 好 頃 以 丁 字 閣 本 月 臺, 御 路, 設 木 雲 梯 事 稟 定 矣, 謹 稽 丁 丑 謄 錄, 則 香 御 路, 只 設 石 階, 不 設 雲 梯 旣 不 設 雲 梯, 則 不 必 代 用 木 雲 梯, 依 丁 丑 例, 只 設 層 階 似 好 矣 竝 從 之 총호사 서매수( 徐 邁 修 )가 아뢰기를, 삼가 정축년의 등록( 謄 錄 )을 상고하여 보건대, 하교에 의하여 신구( 新 舊 ) 표석( 表 石 )을 같은 비각( 碑 閣 )에다 함께 봉안( 奉 安 )하였습니다. 지금 이 원릉( 元 陵 )의 비각은 두 칸으로 되어 있으니, 신표석( 新 表 石 )은 아랫쪽 빈칸에다 봉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두 능( 陵 ) 사이의 석난간( 石 欄 干 )은 이를 합쳐 하나로 빙 둘리게 한 숭릉( 崇 陵 )의 제도에 따라서 하도록 지난번 삼가 하교를 받들었습니다. 삼가 계해년의 등록을 상고하건대, 두 능 사이가 겨우 2척( 尺 )이기 때문에 선릉( 先 陵 )의 왼쪽 난간 아래에 있 는 전석( 磚 石 ) 일곱 개를 철거한 뒤 새 전석과 합쳐서 설치하였으며 이어 또 전후 석주( 石 柱 )도 합쳐 설치하였 으니, 지금도 또한 이에 의거하여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선릉( 先 陵 )의 왼편 아래 있는 전석을 철거하고 다시 설치할 때에는 의당 사초( 莎 草 )도 다시 보수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삼가 계해년의 등록을 상고하여 보건대, 능( 陵 ) 위의 사초에 대해서는 연석( 筵 席 )에서 품주( 稟 奏 )한 다음 수 개( 修 改 )했으니, 지금도 이에 의거 임시( 臨 時 )하여 날짜를 가려서 거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계묘년 1417) 에 본릉( 本 陵 )의 사초( 莎 草 )에 탈이 나서 수개할 적에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편편하게 하는 제도를 써 서 높이는 5촌( 寸 )을 줄이고 둘레는 88척 7촌( 寸 )을 증가시켰으며, 봉릉( 封 陵 )의 둘레는 본래 81척으로 하게 되어 있지만 숭릉( 崇 陵 )은 두 능의 거리를 각각 척수( 尺 數 )를 줄여서 80척으로 만들었습니다. 능의 모양이 높 고 넓은 차이와 척수를 줄이는 것은 혹 특교( 特 敎 )에 따르기도 하였고 혹 품정( 稟 定 )에 따르기도 하여 그 예 ( 例 )가 한결같지 않았습니다. 지금 사초를 개수하고 봉분을 축조할 때에도 또한 숭릉의 쌍릉( 雙 陵 ) 척수에 의 거하여 하는 것이 편리하고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 번 정자각( 丁 字 閣 )의 본래 월대( 月 臺 )와 어로( 御 路 )에는 나무로 운제( 雲 梯 )를 설치할 것으로 품정( 稟 定 ) 했었습니다만, 삼가 정축년의 등록을 살펴보건대, 향어로( 香 御 路 )에는 단지 석계( 石 堦 )만을 설치하고 운제는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운제를 설치하지 않았다면 나무로 만든 운제를 대신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 정축년의 예( 例 )에 의거하여 단지 층계만을 설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純 祖 實 錄 卷 12, 9 年 (1809 己 巳 ) 2 月 11 日 ( 辛 丑 ) 召 見 右 議 政 金 思 穆, 繕 工 監 提 調 李 晩 秀, 禮 曹 判 書 韓 晩 裕, 觀 象 監 提 調 金 羲 淳, 元 陵 局 內 失 火 處, 奉 審 後 復 命 也 上 曰 : 局 內 失 火, 萬 萬 驚 心 延 燒 處, 不 至 大 段 乎? 思 穆 曰 : 延 燒 尺 數, 幷 載 書 啓 自 王 后 陵 上 曲 墻 後 面, 至 大 王 陵 上 曲 墻 西 邊, 莎 草 被 燒 後 面 南 北 一 百 六 尺, 東 西 一 百 七 十 六 尺, 西 邊 南 北 一 百 四 十 六 尺, 東 西 六 十 六 尺, 南 至 丁 字 閣 九 十 八 尺 矣 上 曰 : 莎 草 如 未 修 改, 目 下 所 見 似 如 何? 而 久 當 自 茂 矣 思 穆 曰 : 少 俟 之, 則 春 莎 自 當 茂 茁, 下 敎 至 當 矣 上 曰 : 戶 判 所 見, 何 如? 晩 秀 曰 : 以 事 體 言 之, 雖 不 得 不 仰 請 修 改, 而 咫 尺 之 地, 動 手 修 改, 還 切 惶 悚 且 火 餘 春 莎, 尤 易 茂 盛 矣 仍 命 守 僕 山 直, 嚴 覈 流 配 우의정 김사목( 金 思 穆 ), 선공감 제조 이만수( 李 晩 秀 ), 예조 판서 한만유( 韓 晩 裕 ), 관상감 제조 김희순( 金 羲 淳 ) - 23 -

陵 )의 비각( 碑 閣 )과 정자각( 丁 字 閣 )을 고칠 때 역사( 役 事 )를 감독한 재관( 齋 官 )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高 宗 實 錄 卷 27, 27 年 (1890 庚 寅 / 청 광서( 光 緖 ) 16 年 ) 3 月 15 日 ( 甲 申 ) 召 見 右 議 政 趙 秉 世 元 陵 表 石 竪 立 陵 上 奉 審 後, 復 命 也 우의정( 右 議 政 ) 조병세( 趙 秉 世 )를 소견( 召 見 )하였다. 원릉( 元 陵 )에 표석( 表 石 )을 세우고 능상( 陵 上 )을 봉심( 奉 審 )한 후 복명( 復 命 )하였기 때문이다. 高 宗 實 錄 卷 27, 27 年 (1890 庚 寅 ) 3 月 16 日 ( 乙 酉 ) 元 陵 表 石 竪 立 時 廟 號 都 監 都 提 調 以 下, 施 賞 有 差 원릉( 元 陵 )에 표석을 세울 때의 묘호도감( 廟 號 都 監 )의 도제조( 都 提 調 )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高 宗 實 錄 卷 27, 27 年 (1890 庚 寅 ) 6 月 15 日 ( 癸 丑 ) 元 陵 表 石 竪 立 時 廟 號 都 監 都 提 調 以 下, 施 賞 有 差 원릉( 元 陵 )에 표석( 表 石 )을 세운 일을 본 묘호도감( 廟 號 都 監 )의 제조( 提 調 )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였다. 高 宗 實 錄 卷 35, 34 年 (1897 丁 酉 ) 8 月 4 日 ( 陽 曆 ) 宮 內 府 大 臣 李 載 純 奏 : 卽 接 徽 陵 丁 字 閣 重 建 廳 堂 上 照 會, 內 開 : 局 內 諸 陵 隨 毁 修 補 事, 旣 承 筵 飭, 而 詳 審 工 役, 已 極 浩 大, 又 値 無 前 巨 浸 顯 陵 曲 牆 頹 圮, 元 陵 丁 字 閣 瓦 落 椽 折, 滲 漏 尤 甚 綏 陵 莎 土 蹲 縮, 萬 萬 驚 悚, 修 改 之 節, 不 可 暫 緩, 而 預 算 役 費, 少 不 下 四 千 元, 請 斯 速 支 劃 云 矣 各 陵 園 修 理 費 儲 置, 數 旣 不 敷, 今 此 巨 款, 無 他 措 劃 之 方 何 以 爲 之 乎? 制 曰 : 重 建 廳 役 費 支 出 者, 尙 有 餘 數 之 未 劃 云 就 其 中 四 千 元, 卽 速 輸 送 事, 分 付 度 支 部 궁내부 대신( 宮 內 府 大 臣 ) 이재순( 李 載 純 )이 아뢰기를, 휘릉( 徽 陵 ) 정자각( 丁 字 閣 )의 중건청 당상( 重 建 廳 堂 上 )이 올린 공문을 받아 보니, 그 구역 안에 있는 모든 능을 허물어지는 데 따라 수축하는 문제를 이미 경연( 經 筵 ) 에서 신칙하였기 때문에 그 명령을 받들고 자세히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공사가 매우 방대한 데다가 전에 없 던 큰 홍수 침해를 받아서 현릉( 顯 陵 )의 곡장( 曲 牆 )이 무너졌고 원릉( 元 陵 ) 정자각의 기와가 떨어지고 서까래 가 꺾여 물이 새는 것이 아주 심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릉( 綏 陵 )의 사토( 莎 土 )가 쭈그러져서 함몰된 일은 천만 번 놀랍고 송구스러운 일이니 수리하는 절차는 조금도 지체시킬 수 없는데 미리 공사비용을 계산해 보니 적어도 4,000원( 元 )이 들므로 빨리 지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습니다.각릉( 各 陵 )과 각원( 各 園 )의 수리비를 저축해 둔 것은 더 내줄 것이 없으니 오늘 이 거액의 돈을 마련할 특별한 방도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 야 좋겠습니까? 하니, 제칙( 制 勅 )을 내리기를, 중건청의 공사비의 지출 항목에서 아직 획급해 주지 않은 나머지 액수가 있다고 하니, 그 중 4,000원을 빨리 수송하도록 탁지부( 度 支 部 )에 분부( 分 付 )하라. 하였다. 純 宗 實 錄 純 附 8 卷, 10 年 (1917 丁 巳 ) 11 月 16 日 ( 陽 曆 ) 命 派 員 檢 査 健 元 陵, 貞 陵, 顯 陵, 思 陵, 泰 陵, 康 陵, 穆 陵, 徽 陵, 崇 陵, 懿 陵, 惠 陵, 元 陵, 綏 陵, 景 陵 各 所 修 改 工 事 告 竣 직원을 파견하여 건원릉( 健 元 陵 ), 정릉( 貞 陵 ), 현릉( 顯 陵 ), 사릉( 思 陵 ), 태릉( 泰 陵 ), 강릉( 康 陵 ), 목릉( 穆 陵 ), 휘릉( 徽 陵 ), 숭릉( 崇 陵 ), 의릉( 懿 陵 ), 혜릉( 惠 陵 ), 원릉( 元 陵 ), 수릉( 綏 陵 ), 경릉( 景 陵 ) 등의 각 소를 수리하고 고쳐 준공한 것을 검사하도록 명하였다.. - 24 -

3) 강릉의 조성과 공간구성 사적 제201호로 지정된 강릉은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 능인 태릉과 약 1km 정도 떨어진 언덕에 위 치한다. 강릉은 조선 제13대 명종과 인순왕후를 같은 언덕에 좌우로 배열한 쌍릉이다. 문화재보존 을 위해 비공개 능으로 관리되어 왔으나 2014년 1월 1일부터 전면 개방되었다. 명종은 문정왕후의 상사를 치르고 2년 뒤에 승하했으나, 장지가 왜 현 위치에 정해졌는지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명종이 생전에 문정왕후의 장지를 정하면서 정릉( 靖 陵 ) 옆에 쌍분으로 하지 않고 지금의 자리인 양주 대방동을 장지로 최종 결정했던 사실과 모친의 능이 근방에 자리 잡 고 있는 사실 등이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14) 명종 능이 조성된지 8년 째(1575년) 되던 해 인 순왕후가 승하하자 논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명종 능 옆의 해좌사향( 亥 坐 巳 向, 북서에서 남동방향)에 모시기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강릉은 왕과 왕후릉이 같은 언덕에 좌우로 배열된 쌍릉으로 조성되었다. 조선시대 능역의 공간구성은 죽은자와 산자가 만나는 정자각을 중심으로 산자의 공간인 진입공간, 왕의 혼백과 참배자가 만나는 성과 속의 공간인 제향공간, 봉분을 중심으로 성역의 능침공간으로 구분된다. 강릉의 공간구성은 다음과 같다. 15) 진입공간은 외홍살문, 연지, 재실, 금천교, 홍살문으로 이어지는 공간으로 강릉에서는 외홍살문, 연지, 재실은 확인되지 않으며 금천교는 좌측의 백호수가 흘러내리는 홍살문 수십보 앞에 놓여 있으 며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강릉의 금천교는 장대석의 지지를 위해 배흘림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春 官 通 考 에 의하면 연지는 재실 동측 380보 지점에 길이 57보 넓이 41보이고, 재실은 전사청은 8칸으로 홍살문에서 서쪽으로 300보에 있으며 제기고는 전사청 옆에 있다 안향청은 6칸 재실은 10칸으로 전사청에 접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6) 제향공간은 홍살문 앞 우측에는 제례의 시작을 알리는 배위가 있고, 홍살문 앞에는 얇은 돌을 깔 아 만든 신 어로가 정면의 정자각까지 이어진다. 정자각은 정면 1칸, 측면 3칸의 배위청과 이와 맞 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전으로 구성되는데, 정전의 단은 3치 높게 조성되어 있다. 정자각은 맞배지붕이다. 예감은 정자각 북서쪽에서 위치한다. 정자각 배면 동북쪽에는 돌아간 왕과 왕후의 업 적과 이력이 기록된 비각이 설치되어 있다. 이번 조사대상에 해당하는 수복방과 수라청은 초석과 기단 일부만 흔적으로 남아 정자각을 중심 으로 서로 마주하고 있다. 春 官 通 考 에 의하면 수라청은 3칸이며 정자각의 서쪽 15보에 있고 수직 방(수복방)은 3칸이며 정자각의 동쪽 23보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7) 능침공간은 봉분의 좌우 뒷면 북 동 서 3면에 곡장이 둘러져 있으며, 둥근 봉분은 방위를 나타 내는 12방의 병풍석과 난간석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주변으로는 석양, 석호, 장명등, 망주석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상계 앞의 한단 낮은 중계에는 문인의 공간으로 이 공간의 중심에 팔각의 장 14) 김윤식, 2012, 朝 鮮 朝 明 宗 의 學 術 活 動 과 書 籍 文 化 에 관한 考 察 書 誌 學 硏 究, pp. 245-276 15) 문화재청, 2013, 강릉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Ⅳ, pp. 112~129 16) 春 官 通 考 11 冊 卷 18, 吉 禮 陵 寢, 蓮 池 在 齋 室 東 三 百 八 十 步 長 五 十 七 步 廣 四 十 一 步 典 祀 廳 八 間 在 紅 箭 門 西 三 百 步 祭 器 庫 在 典 祀 廳 傍 安 香 廳 六 間 齋 室 十 間 在 典 祀 廳 接 17) 春 官 通 考 11 冊 卷 18, 吉 禮 陵 寢, 水 剌 廳 三 間 在 丁 字 閣 西 五 十 步 守 直 房 三 間 在 東 二 十 三 步 - 25 -

명등이 있으며, 양옆으로 안쪽을 향해 문석인이 한 쌍 배치되어 있으며 한발 뒤 한발 옆으로 석마가 배치되어 있다. 하계에는 무석인이 석마와 공간을 같이 하여 중계와 나란히 구성되어 있다. 하계 앞 은 20m 정도의 평지를 이루다가 경사지어 사초지로 조성되어 있다. 사진 10. 강릉 전경 - 26 -

사진 11. 강릉의 능침 전경 - 27 -

朝 鮮 王 朝 實 錄 의 康 陵 관련 기사 明 宗 實 錄 卷 34, 22 年 (1567 丁 卯 ) 6 月 28 日 ( 辛 亥 ) 丑 時 上 薨 于 景 福 宮 養 心 堂 小 寢 也 中 殿 傳 于 政 院 曰 : 無 復 可 望 矣 承 傳 色 李 忠 邦 來 傳 也 內 外 擧 哀 축시에 상이 경복궁 양심당( 養 心 堂 ) 소침( 小 寢 )이다. 에서 훙하였다. 중전이 정원에 전교하였다. 다시는 가망이 없으니 승전색 이충방( 李 忠 邦 )이 와서 전했다. 내외가 거애( 擧 哀 )하라. 宣 祖 實 錄 卷 5, 4 年 (1571 辛 未 ) 8 月 27 日 ( 丙 辰 ) 康 陵 丁 字 閣, 失 火 燒 盡 九 重 震 驚, 卽 白 服, 五 日 而 除, 百 官 皆 然 外 官 文 書 到 日, 皆 白 服, 五 日 而 除 강릉( 康 陵 ) 정자각( 丁 字 閣 )이 실화로 소진( 燒 盡 )되었다. 궁중이 몹시 놀래어 즉시 5일 동안 흰옷을 입었고 백 관들도 모두 그렇게 하였다. 외관( 外 官 )들도 문서가 도착한 날로부터 5일 동안 흰옷을 입었다. 宣 祖 實 錄 卷 9, 8 年 (1575 乙 亥 / 명 만력( 萬 曆 ) 3 年 ) 1 月 11 日 ( 辛 亥 ) 上 定 諡 號 等, 下 于 政 院 徽 號 則 取 宣 烈 懿 聖 諡 號 則 取 仁 順, 魂 殿 則 取 敬 慕, 皆 從 首 望 也 상이 시호 등을 정하여 정원으로 내렸는데, 휘호는 선열 의성( 宣 烈 懿 聖 )을 취하고 시호는 인순( 仁 順 )을 취하 고 혼전은 경모( 敬 慕 )를 취하였으니 모두 수망을 따른 것이다. 宣 祖 實 錄 卷 9, 8 年 (1575 乙 亥 ) 1 月 8 日 ( 戊 申 ) 左 議 政 朴 淳 率 山 陵 都 監, 往 觀 因 山 之 處, 卽 康 陵 一 支 也 좌의정 박순( 朴 淳 )이 산릉 도감( 山 陵 都 監 )을 거느리고 인산( 因 山 )할 곳을 가보았으니, 곧 강릉( 康 陵 )641) 의 한 지맥( 支 脈 )이었다. 宣 祖 實 錄 卷 9, 8 年 (1575 乙 亥 ) 1 月 16 日 ( 丙 辰 ) 大 行 大 妃 山 陵, 楊 州 地 康 陵 乾 金 山 亥 坐 巳 向 之 原, 在 傍 定 用 事, 下 禮 曹 대행 대비( 大 行 大 妃 )의 산릉( 山 陵 )을 양주( 楊 州 ) 땅에 있는 강릉( 康 陵 ) 건금산( 乾 金 山 ) 해좌 사향( 亥 坐 巳 向 ) 의 언덕 옆에 쓰기로 정한 일을 예조에 내렸다. 宣 祖 實 錄 卷 9, 8 年 (1575 乙 亥 / 명 만력( 萬 曆 ) 3 年 ) 5 月?? 日 祔 葬 仁 順 王 后 于 康 陵 上 始 用 白 布 衣 冠 視 事, 從 持 平 閔 純 議 也 인순 왕후( 仁 順 王 后 )를 강릉( 康 陵 )에 부장( 祔 葬 )하였다. 상이 비로소 백포( 白 布 ) 의관으로 시사( 視 事 )하였다. 이는 지평 민순( 閔 純 )의 의논을 따른 것이다. 宣 祖 實 錄 卷 12, 11 年 (1578 戊 寅 ) 1 月 11 日 ( 癸 亥 ) 司 諫 院 啓 : 康 陵 丁 字 閣 改 搆, 曾 未 七 八 年, 衝 椽 扇 皆 拔 起, 其 不 用 意 之 罪 大 矣 請 工 匠 推 考, 都 廳 色, 郞 廳 罷 職, 監 董 提 調 推 考 答 曰 : 依 啓 사간원이 아뢰기를, 강릉( 康 陵 ) 의 정자각( 丁 字 閣 )은 다시 지은 지가 7 8년도 못되었는데 충연( 衝 椽 )과 선연 ( 扇 椽 )이 모두 빠져나갔으니 마음써서 짓지 않은 죄가 큽니다. 공장( 工 匠 )을 추고하고 도청 색랑( 都 廳 色 郞 )은 - 28 -

파직시키고 감동 제조( 監 董 提 調 )를 추고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宣 祖 實 錄 卷 34, 26 年 (1593 癸 巳 ) 1 月 22 日 ( 丁 丑 ) 金 千 鎰 馳 啓 曰 : 十 二 月 十 六 日, 賊 率 騎 步 兵 五 十 餘 名, 又 抄 發 城 中 民 五 十 名, 向 康, 泰 陵 鑿 破, 陵 上 灰 隔 堅 實 未 破, 日 暮 罷 還, 又 向 大 院 君 墓 所, 掘 破 未 穿 而 還 司 圃 署 奴 孝 仁, 當 初 指 嗾 曰 : 陵 寢 中, 金 銀 入 藏 云 司 憲 府 書 吏 崔 業, 爲 倭 書 員, 專 掌 掘 陵 一 事, 抄 發 坊 里 人 丁 云 김천일이 치계하였다. 12월 16일에 적이 기병과 보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또 성중의 주민 50명을 뽑아 강릉 ( 康 陵 )과 태릉( 泰 陵 )에 가서 능을 팠지만 능 위에 회( 灰 )가 단단하게 막혀서 깨뜨리지 못하고 날이 저물어 파 하고 되돌아왔으며, 또 대원군( 大 院 君 )의 묘소에 가서 팠지만 뚫지 못하고 되돌아왔습니다. 사포서( 司 圃 署 )의 종 효인( 孝 仁 )이 당초에 능침( 陵 寢 ) 속에 금은( 金 銀 )을 넣어 간직하였다. 고 사주하였으며, 사헌부 서리( 司 憲 府 書 吏 ) 최업( 崔 業 )이 왜의 서원( 書 員 )이 되어 전적으로 능을 파는 일을 관장하여 방리( 坊 里 )의 인정( 人 丁 )을 뽑 았다고 합니다. 宣 祖 實 錄 卷 35, 26 年 (1593 癸 巳 ) 2 月 20 日 ( 乙 巳 ) 雲 川 君 愼 等, 奉 審 陵 寢 還 報 曰 : 光 陵 兩 陵 上 及 石 物, 皆 依 舊, 丁 字 閣 窓 壁 處 處 打 破, 齋 室 廳 半 被 火 燒, 奉 先 殿 窓 壁 處 處 打 破, 影 幀, 則 有 一 寺 僧, 移 安 于 潔 處, 晝 夜 守 直, 至 今 奉 安 云 康 陵, 則 大 王 陵 上 處 處 燒 痕, 王 后 陵 上 無 遺 被 燒 兩 陵 石 物 皆 依 舊, 丁 字 閣 盡 燒 泰 陵 陵 上 前 面, 爲 半 堀 破, 闌 干 石 前 面, 半 爲 打 破 醜 奴 犯 順, 非 但 九 廟 爲 墟, 至 於 辱 及 先 陵, 神 人 之 痛, 於 玆 極 矣 운천군( 雲 川 君 )이신( 李 愼 ) 등이 능침을 봉심( 奉 審 )하고 돌아와서 아뢰었다. 광릉( 光 陵 ) 두 능은 능과 석물이 모두 전과 같으나 정자각( 丁 字 閣 )의 창과 벽이 여기저기 파손되었고 재실청( 齋 室 廳 )이 반은 소실되었으며, 봉 선전( 奉 先 殿 )의 창과 벽이 여기저기 파손되었습니다. 영정은 한 중이 청결한 곳으로 옮겨 밤낮없이 지키면서 지금까지 봉안하고 있다고 합니다. 강릉( 康 陵 )은 대왕의 능은 여기저기 불탄 흔적이 있고, 왕후의 능은 모두 불에 탔습니다. 두 능의 석물은 모두 전과 같고 정자각은 소실되었습니다. 태릉( 泰 陵 )은 능 전면이 반쯤 파졌 고 난간석의 전면이 반쯤 파손되었습니다. 추노( 醜 奴 )들이 패역하여 구묘( 九 廟 )가 폐허화되었을 뿐 아니라 치 욕이 선조들의 능침에까지 이르렀으니 신인( 神 人 )의 통분함이 망극하다. 宣 祖 實 錄 修 正 卷 5, 4 年 (1571 辛 未 ) 8 月 1 日 ( 庚 寅 ) 朔 庚 寅 / 康 陵 丁 字 閣 火 上 與 百 官, 素 服 五 日, 禮 也 강릉( 康 陵 ) 정자각( 丁 字 閣 )에 화재가 나 상이 백관과 함께 5일 간 소복( 素 服 )하였으니, 예이다. 仁 祖 實 錄 卷 48, 25 年 (1647 丁 亥 ) 8 月 28 日 ( 丙 申 ) 改 康 陵 莎 草 강릉( 康 陵 )의 잔디를 개수하였다. - 29 -

Ⅲ. 조사범위와 방법 조선왕릉 수복방 및 수라청 복원을 위해 실시한 이번 발굴조사는 사적 제193호로 지정된 구리 동구릉 내의 혜릉과 원릉의 각 수복방과 수라청, 사적 제201호로 지정된 서울 태릉과 강릉 내 강릉 의 수복방과 수라청에 대하여 실시하였다. 1. 혜릉 원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구리 동구릉 혜릉과 원릉의 수복방과 수라청은 春 官 通 考 에 혜릉의 경우 수라청은 정자각 우측 에 3칸, 수직방(수복방)은 좌측에 3칸, 원릉은 정자각 우측 30보에 3칸의 수라청, 좌측 31보에 3 칸의 수직방(수복방)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혜릉은 현재 정자각 앞의 향어로를 중심으로 남측에는 수복방의 기단과 초석이 양호한 상태로 노 출되어 있으며, 북측에는 수라청의 기단과 초석 일부만 노출되어 있다. 원릉은 정자각의 남측에 수 라청의 기단 일부만 지표에 노출되어 있고, 수복방은 기단과 초석 1열이 노출되어 있다. 수라청과 수 복방의 발굴조사는 초석을 중심으로 十 字 둑을 남겨놓고 전면 제토를 실시하였다. 건물지 기단과 초 석 등의 내부시설을 확인하여 고고학적 기록을 완료한 후에는 조사지역의 위치를 측량한 후 조사를 완료하였다. 수라청 수복방 사진 12. 혜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전경 - 30 -

수복방 수라청 수복방 사진 13. 혜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조사 전 전경 사진 14. 혜릉의 수복방 조사 모습 사진 15. 혜릉의 수라청 조사 모습 - 31 -

수라청 수복방 사진 16. 원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전경 수복방 수라청 사진 17. 원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조사 전 전경 사진 18. 원릉의 수복방 조사 모습 - 32 -

사진 19. 원릉의 수라청 조사 모습 2. 강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서울 태릉과 강릉 내 강릉 수복방과 수라청은 春 官 通 考 에 수라청은 3칸이며 정자각의 서쪽 15 보에 있고 수직방(수복방)은 3칸이며 정자각의 동쪽 23보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복방과 수라청은 정자각의 동쪽과 서쪽에 마주하여 흔적이 남아 있다. 수복방은 석재 일부만 산재되어 위치도 파악하기 어려우며, 수라청은 조사전 기단의 대부분이 지표에 노출되어 있어서 그 규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수복방은 지표상에서 위치 및 배치상태 등을 파악할 수가 없어 먼저 3개의 트렌치를 구획하여 잔 존양상을 파악한 후 전면 제토를 실시하였다. 수라청은 현재 남아 있는 초석을 중심으로 동-서방향 의 둑을 남기고 기단 내부 및 외곽까지 전면 제토 후 기단 내부를 노출하여 건물지의 구조를 파악하 였다. 수복방과 수라청은 내부 조사 완료 후 측량을 실시하여 능역 공간내 위치를 명확히 하였다. - 33 -

수라청 수복방 수라청 수복방 사진 20. 강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전경 사진 21. 강릉의 수복방 조사 전 중 전경 사진 22. 강릉의 수라청 조사 중 전경 - 34 -

5 1 2 7 3 6 수라청 수복방 4 0 10 20 30 40 50m 수복방터 (1:1,000) 조사지역 도면 8. 혜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위치도 - 35 -

5 2 1 7 수라청 3 6 수복방 4 0 10 20 30 40 (1:1,000) 50m 수복방터 조사지역 도면 9. 원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위치도 - 36 -

10 4 3 2 9 1 1Tr 5 수라청 2Tr 3Tr 수복방 6 7 8 0 10 20 30 40 (1:1,000) 50m 조사지역 도면 10. 강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위치도 - 37 -

Ⅳ. 조사내용 구리 동구릉의 혜릉과 원릉, 서울 태릉과 강릉의 강릉 각 수복방과 수라청에 대한 조사내용은 각 능별로 수복방과 수라청으로 구분하여 기술하였다. 1. 혜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수라청 수복방 사진 23. 혜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전경 - 38 -

X : 211617.690 Y : 557527.659 X : 211616.223 Y : 557549.197 수라청 수복방 0 5 10 15 20 25m (1:500) 도면 11. 혜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건물지 배치도 - 39 -

1) 수복방 가. 유구 혜릉의 수복방은 조사 전 지표에 기단 및 초석 대부분과 고맥이석 일부가 노출되어 있었다. 건물지의 동쪽 기단은 대부분 결실 되었고, 건물지 복동쪽에는 원 위치를 이탈 한 초석과 기단석 1매가 놓여 있었다. 조사 는 먼저 수복방의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노 출되어 있는 기단과 초석의 방향을 기준으 로 十 字 둑을 남기고 트렌치를 설치하였다. 내부조사는 토층 양상을 파악한 후 건물 지 노출을 실시하였다. 사진 24. 혜릉 수복방 조사 전 전경 수복방은 정자각에서 서쪽으로 약 25m 거리에 위치한다. 수복방지의 평면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정면의 주칸 거리는 2.3~2.55m, 측면칸은 2.55m이다. 기단은 초석 중심에서 1.1m~1.2m 외측에 화강암의 장대석으로 면을 맞추어 평면형태 장방형으로 조성하였다. 기단의 규모는 잔존 길이 는 9.3m이고, 결실된 기단을 복원하면 추정 복원 길이는 약 10m이다. 너비는 5m이다. 사진 25. 혜릉 수복방 전경 수복방지의 기저부는 기반토인 화강암풍화토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완만하게 경사짐에 따라 갈색 사질점토를 성토하여 기저부를 정지하였다. 기저부 정지 후에는 기단을 마련한 후 그 내부에 초석, 고맥이시설, 아궁이시설과 고래시설 등을 축조하였다. - 40 -

C 1 1 1 4 3 2-1 5 2-2 2-3 1 3 5 C 1 35.5m B 36.0m A A B B B 4 C C 1 9 정 면 5 D D 35.5m D D 3 E E 2 아궁이(추정) 6 7 1. 등색(Hue 7.5YR 6/6)사질점토-현대 부식토 2-1. 갈색(Hue 7.5YR 4/6)사질점토 2-2. 명황갈색(Hue 10YR 7/8)사질점토 2-3. 암갈색(Hue 7.5YR 3/4)사질점토 3. 갈색(Hue 7.5YR 4/6)사질점토-기단 내부정지토 4. 명황갈색(Hue 10YR 7/6)사질점토-기단 외부보강토 5. 갈색(Hue 7.5YR 4/4)사질점토-기저부 정지토 A A 36.0m 35.5m E 4 3 5 1 2-2 5 2-3 2-1 3 1 1 4 E (1 : 60) 도면 12. 혜릉 수복방 실측도 - 41 -

기단은 기저부 정지토 위에 길이 60~150cm 정도의 장대석을 이용하여 평면형태 장방형으로 구획 하였다. 일부 기단석은 소형할석을 받쳐서 수평을 맞추었다. 기단석 외측에는 명황갈색 사질점토를 15~30cm정도 두께로 채워서 보강하였다. 기단석은 높이가 30~50cm이지만 기단석 바깥의 보강토 를 고려하면 20cm내외의 높이만 노출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수복방지의 동쪽 우측면과 배면 일부 기단은 결실되었다. 초석은 4 2열의 8매 중 1매는 수복방지 바깥의 북동쪽에 원 위치를 이탈하여 노출되어 있고, 나 머지 7매는 원 위치에 놓여 있다. 초석의 크기는 높이 50~60cm, 상면 너비 35~50cm, 하면 너비 45~60cm 정도이다. 기단 내부의 초석 하부에는 잡석을 이용하여 두께 35~40cm 정도로 지정하였 으며, 초석 직하에는 적심의 형태로 할석이 놓여 있다. 사진 26. 혜릉 수복방 기단 및 초석 전경 - 42 -

사진 27. 혜릉 수복방 초석 세부 고맥이시설은 어칸에 해당하는 중앙칸의 초석과 초석 사이에 남아 있다. 고맥이석은 길이 10~35 cm 정도의 할석을 이용하여 2열로 축조하였다. 아궁이와 고래시설은 중앙칸에서 확인된다. 아궁이는 중앙칸의 우측면(동쪽)에서 소토와 함께 재 층이 일부 잔존하는데 아궁이 시설로 추정된다. 고래는 대부분 결실되고 좌측면(서쪽) 고맥이석과 나란하게 1열의 고래만 남아있다. 배연시설은 중앙칸 좌측면(서쪽)의 고래가 일직선으로 이어져 배면(북쪽)의 고맥이석 아래를 통과하 여 개자리를 마련하고 기단 바깥으로 개자리 끝에는 할석을 이용하여 字 형으로 굴뚝 자리를 설치 하였다. 개자리 바닥에는 기와가 전면적으로 깔려 있으며 굴뚝의 바다에는 판석 1매가 깔려 있다. 유물은 내부 노출 과정에서 백자발을 비롯하여 수막새, 장식기와, 동전, 편자 등이 출토되었다. - 43 -

아궁이(추정) 고래 고맥이 개자리 굴뚝 사진 28. 혜릉 수복방 중앙칸(어칸) 세부 사진 29. 혜릉 수복방 고맥이석 세부 - 44 -

사진 30. 혜릉 수복방 아궁이 전경 및 토층 사진 31. 혜릉 수복방 고래시설과 배연시설(개자리, 굴뚝) 전경 및 세부 사진 32. 혜릉 수복방 유물 출토 상태 - 45 -

나. 유물 1. 백자 발 저부 저부 및 동하위의 1/2 정도만 잔존한 다. 태토는 회백색의 치밀질 점토이다. 내 저면은 넓고 편평하고 굽은 높은 죽절굽이 다. 굽 안바닥은 깊고 오목하게 깎아내었 다. 전체적으로 회색의 유약을 시유하였으 며, 굽 안바닥은 저화도 소성으로 회자색 을 띤다. 내저면과 굽 접지면에는 굵은 모 래 받침흔이 관찰된다. 잔존기고 5.9cm, 복원굽경 6.6cm (1 : 3) 2. 백자 잔 구연부 일부가 결실되었다. 태토는 회백색의 치밀 질 점토이다. 굽은 평굽으로 굽 안바닥이 약하게 오 목한 편이다. 전체적으로 회색의 유약을 시유하였으 며, 용융상태가 고르지 못하다. 내외면에는 빙렬현 상이 확인된다. 굽 바닥에는 굵은 모래받침흔이 관 찰된다. 기고 3.4cm, 구경 8.1cm, 굽경 3.8cm (1 : 3) 3. 백자 저부 저부만 잔존한다. 태토는 미백색의 조밀질 점토이다. 굽은 높은 수직굽에 가까우며, 굽 안바닥은 깊고 오목하게 깎아내었다. 전체적으로 회백색의 유약을 시유하였으며, 용융상태는 불량하다. 내저 면에는 굵은 모래받침흔이 관찰되고 굽 접지면은 흙물은 묻힌 후 굵은 모래를 받쳐서 번조하였다. 잔존기고 3.9cm, 굽경 6.0cm (1 : 3) - 46 -

4. 백자 저부편 저부의 1/3 정도만 잔존한다. 태토는 회백색의 치밀질 점토이다. 굽은 낮은 수직굽이며, 굽 안바 닥은 깊고 편평하게 깎아내었다. 전체적으로 회백색의 유약을 고르게 시유하였다. 굽 접지면에는 가 는 모래 받침흔이 확인된다. 잔존기고 2.8cm, 복원굽경 6.4cm (1 : 3) 5. 수막새 드림부의 끝부분과 수키와의 좌측 및 미구가 결실되었다. 태토는 석립이 혼입된 점토이다. 드림부 의 형태는 원형으로 추정된다. 주연부의 폭은 2.0cm, 깊이 0.3cm이며, 내측에는 측면형의 봉황문을 간략화하여 시문하였다. 봉황의 긴 꼬리는 3가닥으로 머리 부분까지 감싸고 있으며, 몸은 서쪽으로 향하고 있다. 수키와의 외면은 타날하였으나 드림부와 접합 후 목판긁기 정면하여 타날은 대부분 지 워져 있다. 내면은 물손질 정면하였으며, 포목흔과 윤철흔, 드림부와의 접합을 위해 점토를 덧댄 흔 적이 관찰된다. 와도방향은 양측 모두 내면에서 외면이며, 주변은 와도로 정리하였다. 소성은 도질이 며, 색조는 암회청색이다. 잔존장 28.0cm, 드림부 잔존장 11.6cm, 드림부 폭 13.0cm, 수키와 폭 14.2cm, 두께 2.7cm (1 : 4) - 47 -

6. 수막새편 드림부와 수키와의 일부만 잔존한다. 태토는 석립이 혼입된 점토이다. 드림부의 형태는 달걀형이 며, 끝이 뾰족하다. 주연부의 폭은 2.2cm, 깊이 0.2cm이며, 중앙에는 머리를 아래쪽으로 향하고 날 개를 양쪽으로 펼친 봉황이 양각되어 있으나, 머리와 몸체 일부가 결실되었다. 수키와의 외면은 타 날하였으나 드림부와 접합한 후 긁기 또는 물손질 정면으로 대부분 지워져 있다. 내면에는 포목흔이 관찰된다. 수키와의 와도방향은 알 수 없다. 드림부의 내외면에는 세사립이 다량 부착되어 있다. 소 성은 와질이며, 상태는 보통이다. 색조는 회색이다. 잔존장 21.0cm, 드림부 장 14.6cm, 드림부 폭 13.6cm, 두께 2.2cm (1 : 4) - 48 -

7. 장식기와편 장식기와의 외면에 부착되어 분리된 것으로 동물의 형상을 띤다. 태토는 세사립이 혼입된 점토이 다. 용을 형상화하였으며, 측면으로 바라보게 성형하였다. 전체 형태 중에서 얼굴과 몸통 상위만 잔 존한다. 얼굴에는 눈과 코가 결실되었고 입은 크고 이빨 1개가 뾰족하게 부착되어 있다. 배쪽에는 비늘을 표현하였고 다리에는 발가락 또는 발톱이 장식되어 있다. 표면은 물손질 또는 긁기 정면하였 다. 후면은 접합면 그대로 떨어진 상태이다. 소성은 도질이며, 상태는 보통이다. 색조는 회청색이다. 잔존장 19.2cm, 폭 12.3cm, 두께 3.9cm (1 : 3) 8. 동전 중앙 일부가 결실되었으다. 전면에는 常 平 通 寶 글자가 확인되나, 후면은 부식으로 인해 판독이 불 가능하다. 직경 3.1cm, 두께 0.2cm (1 : 1) - 49 -

9. 편자 전체 형태는 U자형이며, 한쪽 하위가 결실되었다. 양쪽 하위로 갈수록 폭은 좁아진다. 단면형태는 세장방형이다. 장 9.9cm, 폭 9.4cm, 두께 0.3cm (1 : 2) 2) 수라청 가. 유구 혜릉의 수라청은 조사전 초석으로 추정되는 석 재가 일부 노출된 상태였다. 조사는 먼저 수라청 의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十 字 둑을 설정하고 트 렌치를 설치하였다. 트렌치는 너비 40cm 정도로 설정하고 건물의 기반토까지 층위를 파악하였다. 표토층의 바로 아래에서 전석이 전면적으로 깔린 상태로 확인되었다. 수라청은 정자각의 서쪽에 향어로를 경계로 수 복방과 마주하여 위치한다. 수라청지의 평면규모 는 잔존양상에서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판단되 며, 정면칸의 주칸 거리는 2.25~2.3m이고, 측 면칸은 2.5m이다 수라청지는 기반토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면 서 완만한 경사로 낮아지는데, 수라청의 남측은 기단석 직하에서 기반토가 확인되지만, 북측은 기반토 상부에 잡석으로 지정하였다. 사진 33. 혜릉 수라청 조사 중 전경 - 50 -

기단은 길이 60~135cm 정도의 장대석으로 놓았으며, 수라청의 우측면(서쪽)과 배면(남쪽) 일부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결실되었다. 북서쪽 모서리 부분과 우측면(동쪽)에도 길이 115~130cm의 장대 석 2매가 놓여있지만 배치상태에서 원 위치의 기단석으로 보기는 어렵다. 북서쪽 모서리의 장대석은 배치양상에서 적심석 위에 놓은 초석으로 이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은 외부는 명갈색 사질점토를 두께 20cm 정도의 두께로 성토하여 기단석을 보강하고, 내부는 기반토 갈색~명갈색 사질점토를 이용하여 정지한 후 그 상부에 전석을 깔았다. 초석은 6개가 확인되지만 모두 원 위치를 일부 이탈한 상태이다. 초석의 크기는 상면 너비 40~45cm, 하면 너비 55~60cm, 높이 50~55cm이다. 초석의 원 위치에는 대부분 원형의 할석으로 적심석이 설치되어 있다. 북서쪽 모서리의 장대석은 적심석과 대칭되는 초석의 위치에 놓여져 있다. 전석은 내부 바닥 전면에 설치하였으며 후대의 교란으로 인해 ⅓정도만 남아 있다. 전석의 크기는 너비 25cm, 두께 5cm 정도이다. 남동쪽 모서리 부근에서는 전석을 세운 것이 확인되는데 끝부분을 마감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백자발, 백자접시, 수막새 등이 출토되었다. 사진 34. 혜릉 수라층 전경 및 토층(좌 : 기단 외부, 우 : 기단 내부) - 51 -

사진 35. 혜릉 수라청 바닥 전석 세부 사진 36. 혜릉 수라청 적심석 세부 사진 37. 혜릉 수라청 유물 출토상태 - 52 -

C C 33.0m 1 1 2 1 1 1 3 4 32.5m 정 면 14 C 12 17 11 B 15 B A D D 16 13 C 10 A D 1. 갈색(Hue 7.5YR 4/6)사질점토-현대 부식토 2. 명갈색(Hue 7.5YR 5/8)사질점토-기단 내부 정지토 3. 명갈색(Hue 7.5YR 5/8)사질점토-기단 외부 보강토 4. 갈색(Hue 7.5YR 4/4)사질점토-기저부 정지토 A A 32.5m B B (1 : 60) 32.5m 도면 13. 혜릉 수라청 실측도 - 53 -

나. 유물 10. 백자 발 전체 기형의 1/4 정도만 잔존한다. 태토는 회백색의 조밀질 점토이다. 굽 은 낮은 죽절굽이며, 굽 안바닥은 깊 고 편평하게 깎아내었다. 전면에 걸쳐 회백색의 유약을 시유하였으나, 굽 접 지면은 유약을 닦아내었다. 내저면과 굽 접지면에는 굵은 모래를 받쳐서 번 조하였다. 기고 8.5cm, 복원구경 14.8cm, 복원 굽경 8.4cm (1 : 3) 11. 백자 발편 저부 및 동하위의 1/2 정도만 잔존한다. 태토는 회백색의 치밀질 점토이다. 굽은 높은 수직굽이며, 굽 안바닥은 깊고 오목하게 깎아내 었다. 전체적으로 담회백색의 유약 을 시유하였으며, 광택이 강하다. 내저면과 굽 접지면에는 굵은 모래 를 받쳐서 번조하였다. 잔존기고 6.1cm, 굽경 6.7cm (1 : 3) 12. 백자 접시 전체 기형의 1/2 정도만 잔존한다. 태토 는 회백색의 조밀질 점토이다. 굽은 낮은 수 직굽이며, 굽 안바닥은 깊고 오목하게 깎아 내었고 중앙부가 약하게 돌출되어 있다. 전 체적으로 회색의 유약을 시유하였다. 내저 면과 굽 접지면은 굵은 모래를 받쳐서 번조 하였다. 기고 2.8cm, 복원구경 10.9cm, 굽경 4.6cm (1 : 3) - 54 -

13. 백자 종지 종지의 저부로 보이며, 저부 및 동하위만 잔존한다. 태토는 회색의 치밀질 점토이다. 내저면은 내 저원각을 이루고 굽은 높은 수직굽이다. 굽 안바닥은 깊고 오목하게 깎아내었다. 전체적으로 회청색 의 유약을 시유하였으며, 광택이 강하다. 내저면에는 모래 받침흔이, 굽 접지면에는 모래비짐흔 4개 가 잔존한다. 잔존기고 3.2cm, 굽경 4.1cm (1 : 3) 14. 백자 저부 저부만 잔존한다. 태토는 회백색의 치밀질 점토이다. 굽은 높은 수직굽에 가깝고 굽 안바닥은 깊 고 오목하게 깎아내었다. 전체적으로 회색의 유약을 시유하였으며, 용융상태가 불량하다. 내저면과 굽 접지면에는 굵은 모래를 받쳐서 번조하였다. 잔존기고 3.5cm, 굽경 5.3cm (1 : 3) 15. 백자 저부 저부 일부만 잔존한다. 태토는 회백색의 조밀질 점토이다. 내저면은 내저원각을 이루고 굽은 높은 수직굽이다. 굽 안바닥은 깊고 오목하게 깎아내었다. 전체적으로 회청색의 유약을 시유하였으며, 광 택이 강하다. 소성상태는 불량하여 기포가 형성되었다. 내저면과 굽 접지면에는 굵은 모래비짐을 각 6개와 4개를 사용하였다. 잔존기고 2.5cm, 굽경 5.0cm (1 : 3) - 55 -

16. 수막새편 드림부의 일부만 잔존한다. 태토는 세사립이 다량 혼입된 점토이다. 드림부의 형태는 계란형으로 추정된다. 주연부의 폭은 1.6cm~2.2cm, 깊이는 0.2cm이고 중앙에는 도안화한 喜 자문이 양각되었 다. 내면에는 수키와를 접합한 흔적이 확인된다. 소성은 와질이며, 상태는 양호하다. 색조는 회황색 과 회색이다. 잔존장 11.2cm,13.1cm, 두께 2.3cm (1 : 4) 17. 수키와 수키와로 하단만 결실되었다. 태토는 석영이 소량 혼입된 점토이다. 외면은 집선문과 창해문 타날 을 하였으나 물손질 정면으로 일부 지워진 상태이다. 내면에는 포목흔과 윤철흔이 관찰된다. 와도방 향은 양측 모두 내면에서 외면이다. 소성은 도질이며, 상태는 보통이다. 색조는 암회청색이며, 외면 에는 종방향으로 중첩소성흔이 관찰된다. 잔존장 27.5cm, 폭 12.7cm, 두께 3.0cm (1 : 6) - 56 -

2. 원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X : 211520.086 Y : 557826.511 X : 211565.465 Y : 557862.613 수라청 수복방 0 5 10 15 20 25m (1:500) 도면 14. 원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건물지 배치도 - 57 -

사진 38. 원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전경 1) 수복방 가. 유구 원릉의 수복방은 조사 전 지표에 기단과 일렬의 초석 4매가 노출되어 있었다. 사진 39. 원릉의 수복방 조사 전 전경 - 58 -

수복방은 현 표토층에서 120~130cm 정도 아래에서 구하도 퇴적층이 형성되어 있고 그 상부는 현대 쓰레기가 포함된 교란된 층이다. 현재 노출되어 있는 4개의 초석도 모두 교란된 층에 놓여 있 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기단과 초석은 후대에 복원된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수복방의 평면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정면칸의 주칸거리는 2.45~2.5m이다. 기단 의 규모는 길이 8.7m, 너비 4.1 m 정도이다. 유물은 백자발, 백자잔, 수키와, 편자 등이 출토되었다. 사진 40. 원릉 수복방 전경 - 59 -

사진 41. 원릉 수복방 초석 토층 사진 42. 원릉 수복방 기단 토층 - 60 -

E 1-1 1-2 3 1-1 1-1 2-1 2-2 3 E 1-1 1-2 3 29.0m C C E E D D C 29.5m B C A A A 20 21 18 정 면 23 19 22 B A 29.5m B B 29.5m (1 : 60) D 1-1 1-2 3 29.5m 1-1 2-1 2-2 3 1-1 1-2 3 D 1-1. 등색(Hue 7.5YR 6/8)사질점토 1-2. 등색(Hue 7.5YR 6/6)사질점토 2-1. 명갈색(Hue 7.5YR 5/6)사질점토 2-2. 명갈색(Hue 7.5YR 5/8)사질점토 3. 암갈색(Hue 10YR 3/4)사질점토 * 1~3층 현대 교란층 29.0m 도면 15. 원릉 수복방 실측도 - 61 -

나. 유물 18. 백자 발편 저부 및 동하위의 일부만 잔존한다. 태토는 회색의 조밀질 점토이다. 굽 안바닥은 깊고 편평하게 깎아내었으며, 굽 접지면의 폭은 일정하지 않다. 전체적으로 회청색의 유약을 시유하였으며, 빙렬현 상이 있다. 굽 접지면은 흙물을 묻힌 후 모래를 받쳐 번조하였다. 잔존기고 4.8cm, 복원굽경 4.8cm (1 : 3) 19. 백자 잔 전체 기형의 1/3 정도만 잔존한다. 태토는 회백색의 치밀질 점토이다. 굽은 평굽이며, 안 바닥은 약간 오목한 편이다. 전체적으로 회백색의 유약을 시유하였다. 굽바닥에는 모래비짐흔이 관찰된다. 기고 3.9cm, 복원구경 8.4cm, 복원경 4.4cm (1 : 3) 20. 수키와편 수키와의 상단만 잔존한다. 태토는 세석립이 혼입된 점토이다. 외면은 복합문 타날 후 횡방향으로 물손질 정면하여 대부분 지워져 있다. 내면에는 분할계선과 포목흔, 윤철흔이 관찰된다. 와도방향은 내면에서 외면이다. 소성은 도질이며, 상태는 보통이다. 색조는 회청색이다. 잔존장 12.7cm, 폭 13.5cm, 두께 2.6cm (1 : 6) - 62 -

21. 수키와편 수키와 하단 좌측의 일부만 잔존한다. 태토는 석립이 혼입된 점토이다. 외면은 창해타날 후 하위 만 물손질 정면으로 인해 타날이 지워져 있다. 내면은 물손질 정면하였으며, 포목흔과 분할계선이 확인된다. 와도방향은 내면에서 외면이다. 소성은 도질이며, 상태는 보통이다. 색조는 회청색이나 외 면 일부는 불완전 연소로 회갈색이다. 잔존장 13.2cm, 잔존폭 10.2cm, 두께 2.4cm (1 : 6) 22. 석제품 원추형의 석제품으로 표면은 박리가 심하다. 하면은 편평하게 가공하였다. 전장 14.3cm, 폭 12.6cm (1 : 4) - 63 -

23. 편자 완형이며, 잔존상태는 양호하다. 평면형태는 U자 모양에 가깝고 양단의 폭은 좁아진다. 장방형의 홈이 5개 배치되어 있으며, 1개소에만 장방형의 못이 박혀 있다. 단면형태는 제형과 장방형이다. 장 10.4cm, 폭 8.0cm, 두께 0.4~0.9cm (1 : 2) 2) 수라청 가. 유구 원릉의 수라청은 조사 전 기단석 1매와 내부에 깔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전석들이 일부 노출되어 있으며 참굴피나무 3그루가 식재되어 있었다. 수라청은 정자각에서 남쪽으로 약 25m 정도 이격되어 위치한다. 평면 규모는 잔존양상에서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초석은 확인되지 않지만 추정 주칸거리는 약 2.3m, 측면의 주칸거리는 2.5m이 다. 기단을 포함한 규모는 잔존 길이 7.4m, 잔존 너비 3.6~3.9m 정도이다. 수라청은 현표토층에서 45~50cm 정도 아래에서 구하도 퇴적층이 확인되며 그 상부에 갈색~명갈 색 사질점토를 이용하여 두께 20cm 내외로 기저부를 정지하였다. - 64 -

기단은 수라청의 정면(북동쪽)에만 길이 80~145cm 정도의 장대석이 남아 있다. 기단석의 외부는 갈색 사질점토를 15~20cm 정도의 두께로 성토하여 보강한 것으로 확인된다. 결실된 우측면(북서쪽) 을 제외하고 좌측면(남동쪽)과 배면(남서쪽)은 초석은 확인되지 않지만 초석이 놓였을 것으로 추정되 는 초석자리 사이에 길이 20~35cm 정도의 할석으로 바깥 면을 정연하게 맞추어 일렬로 놓았다. 초석은 확인되지 않지만 정면 좌측에 기단석과 연접하여 상면이 편평한 할석 2매가 놓여 있는데 기단석과는 크기와 형태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초석으로 이용한 석재의 가능성도 있다 이 할석을 초석으로 가정해도 원 위치에서 약간 이탈한 것으로 판단된다. 건물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초석과 적심은 확인되지 않지만 초석과 초석 사이의 하방 아래에 놓은 할석을 통해 할석이 없는 지점이 초석이 놓였던 자리로 추정된다. 내부 바닥은 전면에 전석을 깔았다. 전석은 후대의 교란으로 인해 ⅔정도만 남아 있다. 전석의 크 기는 너비 30cm, 두께 5cm 정도이다. 유물은 백자 접시, 수막새 등이 출토되었다. 사진 43. 원릉 수라청 정면 전경 및 기단 외부 토층 - 65 -

사진 44. 원릉 수라청 우측면 전경 및 세부 사진 45. 원릉 수라청 배면 및 초석 추정자리 세부 사진 46. 원릉 수라청 유물 출토상태 - 66 -

1. 회갈색(Hue 7.5YR 4/2)사질점토-현대 부식토 2. 갈색(Hue 7.5YR 4/4)사질점토-기단 외부 보강토 3. 탁한갈색(Hue 7.5YR 5/4)사질점토-기저부 정지토 4. 명갈색(Hue 7.5YR 5/6)사질점토 31.5m D 1 4 3 2 3 1 4 D C 1 3 2 3 4 C 31.5m A 31.5m 나무 D D 나무 나무 C C 나무 B B A A A 28 27 26 24 정 면 25 B B 31.5m (1 : 60) 도면 16. 원릉 수라청 실측도 - 67 -

나. 유물 24. 백자 접시편 전체 기형의 1/4 정도만 잔존한다. 태토는 백색의 치밀토 점토이다. 굽은 낮은 수직굽이며, 굽 안 바닥은 깊고 편평하게 깎아내었다. 외면에는 모란화문이 청화기법으로 장식되어 있고 내저면에는 2 조의 음각선, 구연부의 내면에는 1조의 음각선이 시문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반투명의 담회백색의 유약을 시유하였으며, 광택이 강하다. 굽 안바닥의 내측에는 가는 모래 받침흔이 관찰된다. 기고 2.6cm, 복원구경 9.7cm, 복원굽경 4.8cm (1 : 3) 25. 백자 접시 구연부의 일부가 결실되었다. 태토는 백색의 조밀질 점토이다. 굽은 낮은 수직굽이고 굽 안바닥은 얕고 편평하게 깎아내었으며, 굽 접지면 폭은 일정하지 못하다. 전체적의 담회백색의 유약을 시유하 였으며, 용융상태는 불량하다. 굽 안바닥에만 번조시 사용한 모래가 부착되어 있다. 잔존기고 2.7cm, 구경 9.5cm, 굽경 5.1cm (1 : 3) 26. 백자 구연부편 구연부 일부만 잔존한다. 태토는 백색의 조밀질 점토이다. 전체적으로 담회백색의 유약을 시유하 였으며, 광택이 강하다. 잔존기고 4.5cm (1 : 3) - 68 -

27. 수막새편 드림부의 끝부분만 잔존한다. 태토는 석립이 혼입된 점토이다. 드림부의 끝부분은 뾰족하며, 가장지 리에는 폭 1.2cm, 깊이 0.2cm의 주연부가 있다. 문양은 일부만 잔존하여 도안화한 壽 또는 喜 자문으 로 추정된다. 내외면은 물손질 정면하였다. 소성은 도질이며, 상태는 보통이다. 색조는 회청색이다. 내 외면에는 세사립이 다량 부착되어 있다. 잔존장 5.5cm, 잔존폭 11.3cm, 두께 1.5cm (1 : 4) 28. 수키와편 수키와의 하위만 잔존한다. 태토는 세사립이 혼입된 점토이다. 외면은 창해파문과 종선문 타날하 였으며, 하단은 물손질 정면하였다. 내면은 물손질 정면으로 포목흔은 대부분 지워졌고 점토 접합흔 과 분할계선흔이 확인된다. 내면의 단부 조정 길이는 3.7cm 정도 이다. 와도방향은 양측면 내면에서 외면이다. 소성은 도질이며, 상태는 보통이다. 색조는 암회청색이다. 잔존장 17.7cm, 폭 12.2cm, 두께 2.5cm (1 : 6) - 69 -

3. 강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X : 209296.984 Y : 559976.740 1Tr 수라청 수복방 3Tr 2Tr X : 209349.815 Y : 560001.109 0 5 10 15 20 25m (1:500) 도면 17. 강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건물지 배치도 - 70 -

1) 수복방 강릉의 수복방은 조사 전 초석으로 추정되는 2매의 석재만 지표에 노출되어 있고 나머지 부재는 확 인되지 않아 건물의 구조와 배치양상을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먼저 수복방의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동-서 방향으로 2개, 남-북 방향으로 1개의 트렌치를 설치하였다. 토층 조사 결과, 현 지표에서 50cm 정도 깊이까지는 후대에 교란된 상태였다. 교란층 아래에는 건물의 기초와 관련된 지정석으로 추정되 는 할석들이 확인되었다. 할석의 범위는 폭 약 5m정도이며 명황갈색 사질점토층 상부에 놓여 있다. 1Tr 2Tr 3Tr 사진 47. 강릉의 수복방 조사지역 전경 - 71 -

수복방지로 추정한 조사지역은 표토 아래에서 할석들이 일부 노출되었지만 현대 교란층 내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에 수복방과 관련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수복방은 트렌치 내에서 확인된 지정석 을 통해 건물이 위치했을 것으로만 추정 될 뿐 후대 교란으로 상부에 기단과 초석 및 내부시설 등이 남아 있지 않아 건물의 구조를 파악할 수 없다. 지표에 노출된 초석으로 추정한 석재도 원위치를 이 탈 한 것으로 판단된다.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1Tr 2Tr 2Tr 2Tr 사진 48. 강릉 수복방 2Tr 전경 및 토층 4 6 2 3 5 1 47.0m 7 1~5. 현대 교란층 6. 명황갈색(Hue 10YR 7/6)사질점토 7. 명황갈색(Hue 7.5YR 7/8)사질점토 (1 : 60) 도면 18. 2Tr 토층 실측도 - 72 -

사진 49. 강릉 수복방지 현대 교란토 내 할석 전경 - 73 -

2) 수라청 가. 유구 강릉의 수라청은 조사 전 대부분의 기단과 좌측면에 해당하는 남쪽 모서리 부분의 초석 2매가 지 표에 노출되어 있었다. 수라청은 정자각에서 서쪽으로 약 13m 이격되어 위치한다. 평면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정면칸의 주칸 거리는 2.35~2.45m로 추정되고, 측면의 주칸 거리는 2.4m이다. 기단의 규모는 길 이 9.35m, 너비 4.8m 정도이다. 수라청지의 기반토에 해당하는 황갈색 풍화암반토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면서 완만한 경사로 낮 아지며, 수라청지는 기반토 위에 명황갈색 사질점토를 이용하여 정지하였다. 사진 50. 강릉 수라청 조사 전경 - 74 -

48.0m A A 30 32 31 정 면 29 C C B B A A 1. 등색(Hue 7.5YR 6/6)사질점토-현대 부식토 2. 명갈색(Hue 7.5YR 5/6)사질점토-기단 내부 정지토 3. 명갈색(Hue 7.5YR 5/6)사질점토-기단 외부 보강토 4. 명황갈색(Hue 7.5YR 7/6)사질점토-기저부 정지토 48.5m C 1 3 4 1 1 2 2 2 4 4 3 C (1 : 60) B 48.5m B 도면 19. 강릉의 수복방과 수라청 건물지 배치도 - 75 -

기단은 길이 65~160cm 정도의 장대석을 이용하여 평면형태 장방형으로 축조하였다. 정면(동쪽) 모서리 기단석은 50cm 정도 돌출되어 있고, 조사 전 지표에서 확인되지 않은 정면의 기단석은 후대 의 교란으로 원 위치를 이탈하여 노출되었다. 초석은 조사 전 지표에 노출되어 있던 좌측면(남쪽)의 2매만 원 위치에 남아 있고 나머지 6매는 후대 교란으로 내부에 흩어진 상태이다. 초석의 크기는 높이 75~85cm, 너비 100~110cm 정도이다. 원 위치의 초석 아래에는 직경 10~35cm 정도의 할석이 적심되어 있다. 내부가 대부분 교란되어 내부 시설은 대부분 남아 있지 않지만 원 위치의 초석이 남아 있는 남측 에는 고맥이석이 확인된다. 고맥이석은 원형의 초석이 남아 있는 좌측면(남쪽)을 중심으로 잔존한다. 고맥이석은 소형 할석을 이용하여 좌측면의 초석과 초석사이에는 1단 1열로 놓여 있고, 배면(서쪽) 에는 일부 2단 2열로 잔존한다. 나머지는 후대 교란으로 결실되었다. 유물은 백자 접시, 수막새, 기와 잡상 등이 출토되었다. 사진 51. 강릉의 수라청 기단 초석 전경 및 토층 - 76 -

사진 52. 강릉의 수라청 교란된 초석 전경 사진 53. 강릉 수라청 고맥이석 세부 사진 54. 강릉의 수라청 유물 출토상태 - 77 -

나. 유물 29. 백자 접시 구연 및 동체부의 일부가 결실되었다. 태토는 회백색의 치밀질 점토이다. 굽은 수직굽이며, 굽 안 바닥은 얕고 오목하게 깎아내었다. 전체적으로 회색의 불투명 유약을 시유하였다. 내저면은 굵은 모 래를, 굽 접지면은 진흙을 묻힌 후 굵은 모래를 받쳐서 번조하였다. 기고 3.5cm, 복원구경 13.8cm, 굽경 4.6cm (1 : 3) 30. 수막새편 드림부만 잔존한다. 태토는 세석립이 혼입된 점토이다. 드림부의 형태는 타원형에 가깝고 주연부 없이 제작하였다. 외면에는 화문이 양각되어 있으나 조잡한 상태이다. 외면은 부분적으로 깎기 또는 긁기 정면하였으며, 내면에는 수키와와 접합한 흔적이 확인된다. 소성은 도질이며, 상태는 보통이다. 색조는 회청색이다. 잔존장 14.2cm, 폭 16.1cm, 두께 1.6cm (1 : 4) 31. 수막새편 수막새의 드림부만 잔존한다. 태토는 세사립이 혼입된 점토이다. 드림부의 형태는 달걀형이며, 끝 이 뾰족하다. 가장자리에는 폭 2cm, 깊이 0.3cm의 주연부가 있다. 주연부의 내측에는 1조의 원문이 - 78 -

돌려져 있고 중앙에는 운문과 화문이 양각되어 있다. 내면에는 수키와와 접합하기 위해 점토를 덧댄 흔적이 확인된다. 소성은 도질이며, 상태는 보통이다. 색조는 암회청색이다. 드림부 장 17.1cm, 폭 15.3cm, 두께 1.9cm (1 : 4) 32. 잡상편 잡상편으로 일부만 잔존한다. 태토는 세석립이 혼입된 점토이다. 봉황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 다. 머리 및 벼슬 일부만 잔존하나 표면 박리가 심하다. 소성은 도질이며, 색조는 회색이다. 잔존장 7.9cm, 잔존폭 10.cm, 두께 5.0cm (1 : 3) - 79 -

Ⅴ. 고찰 조선왕릉 守 僕 房 의 존재형태와 왕릉 관리 배 상 현* - 차 례 - 1. 머리말 2. 조사의 현황 3. 수복방의 존재형태 4. 수복방과 왕릉의 관리 5. 맺음말 1. 머리말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에 대해서는 그동안 다각도의 조사가 실시되어 왔고 이에 대한 종합 보고서도 속속 제출되고 있다. 1) 최근 들어서는 오랜 세월이 경과하면서 일부 변형되거나 민멸된 부 분에 대해서도 그 자취를 찾아 원형을 복원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기울어지고 있다. 왕릉 내 소재하 였던 각종 건물지와 시설물에 대한 관심과 조사도 그 일환으로 실시되고 있다. 2) * 동서문물연구원 역사연구실장 1) 그동안 조선왕릉에 대한 학술조사 결과는 아래와 같이 보고서를 도출하였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Ⅰ 2009.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Ⅱ 2011.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Ⅲ 2012.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Ⅳ 2013a.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Ⅴ 2013b.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Ⅵ 2014a.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Ⅶ 2014b. 2)그동안 조선왕릉 내 건물지 발굴조사 사례로는 아래 보고서가 확인된다. 1 한울문화재연구원, 건원릉 수라간지 및 현릉 수복방지 복원공사부지 시굴조사 보고서, 2012a. 2 한울문화재연구원, 순릉 수라간지 및 수복방지 복원공사부지 시굴조사 보고서, 2012b. 3 한울문화재연구원, 파주 장릉 재실 유적 시굴조사 보고서, 2012c. 4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육상궁 내 초가정자 복원공사부지 시굴조사 보고서, 2012d. 5 한울문화재연구원, 고양 서오릉 내 익릉 수복방지 및 수라간지 시굴조사 보고서, 2013a. 6 한울문화재연구원, 동구릉 현릉 수라간지 복원공사부지 시굴조사 보고서, 2013b. 7 한울문화재연구원, 사적 제193호 구리 동구릉 목릉 수라간지 시굴조사 보고서, 2013c. 8 한울문화재연구원, 사적 제199호 서울 선릉과 정릉의 선릉 수라청지 시굴조사 보고서, 2013d. 9 한울문화재연구원, 사적 제208호 서울 정릉 수라청지 시굴조사 보고서, 2013e. 10 한울문화재연구원, 사적 제198호 고양 서오릉 창릉 수복방지 및 수라청지 시굴조사 보고서, 2013f. - 80 -

아마도 이러한 성과들은 향후 세계유산 조선왕릉의 가치와 의미를 드높여 주게 될 것은 물론이거 니와, 이들 문화유산을 통해 조선왕조 당대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을 조명하는데 있어서도 소중한 자산을 보태게 될 것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 유적에 대한 조사의 내용들이 단지 현상에 대 한 파악에 그치지 않고 관련 자료를 통하여 이해의 지평을 넓혀가야 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금번 조사는 한양의 동쪽에 위치한 능이라 하여 東 九 陵 이라 이름이 붙여진 왕릉 가운데 惠 陵 元 陵 康 陵 등 3기의 능역 내 일부 건물터에 대한 현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실시되었다. 3) 비록 짧은 기 간에 국부적으로 실시된 조사이긴 하지만 조사 내용 중에는 이들 왕릉의 관리와 직결된 시설물- 守 僕 房 -이 포함되고 있어 이에 대한 약간의 검토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사료되었다. 이에 조사 내용 에 더하여 보완 설명의 차원에서 검토 내용을 보태고자 한다. 2. 조사의 현황 그동안 조선왕릉 내 수복방지에 대한 조사는 모두 7차례에 걸쳐 실시되어 그 결과가 도출되고 있 다. 4) 여기서는 먼저 조사의 대상이 된 능별 조성 및 관리의 경과를 살피고, 고고학적 발굴 조사에 의해 얻어진 성과를 일별하여 이들의 실체적 모습을 살피는 기초 자료로 삼고자 한다. 사적 제193호로 지정된 동구릉(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번지 일원) 내 위치한 顯 陵 은 文 宗 과 顯 德 王 后 의 同 原 異 岡 陵 으로, 수복방은 정자각 전면 좌측인 남동측에 자리한다. 시굴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수복방 건물은 정면 3칸에 측면 1칸의 - 자 형태의 건물로 파악되었다. 특히 건물지 내에서는 고래, 고래 둑, 개자리와 굴뚝으로 추정되는 유구 등과 함께 온돌시설의 구조가 구체적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금속제 편자와 와전류 등이 출토되었으며, 와편들 중에는 봉황문의 일부가 남아있는 막새편도 수습되었다. 5) 그림 1. 현릉의 수복방 유구 및 평면도 3)동서문물연구원, 조선왕릉(구리 동구릉 혜릉 원릉, 서울 태릉과 강릉의 강릉) 수복방 및 수라청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 약보 고서 2014. 4)이상의 조사들은 조선왕릉의 체계적 보존 관리 및 복원을 위한 기초자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문화재청 궁능문화재과 및 조선 왕릉관리소의 의뢰로 실시되었다. 5) 한울문화재연구원, 앞의 보고서, 2012a. - 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