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1976-0604 Journal of Eastern-Asia Buddhism and Culture
목 차 <특집> 나가르주나와 서양철학의 이해 플라톤의 덕(a)reth/)론과 용수의 공의 윤리학 조 해 정 3 칸트의 二 元 論 과 나가르주나의 二 諦 說 연구 박 종 식 45 무한분할을 통해서 본 베르그송의 지속 과 나가르주나의 공 안 호 영 77 중론 관거래품 으로 읽는 말라르메의 주사위 던지기 장 정 아 111 <논문> 정토사상의 인도적 배경에 대한 일고( 一 考 ) 김 지 곤(운제) 149 휴정의 회통사상 조 수 동 179 한국불교음악의 전통과 미래 윤 소 희 207 戰 後 台 灣 新 創 佛 曲 的 發 展 與 變 遷 高 雅 俐 237 불교와 정치권력 - 정교분리에 관한 붓다의 관점을 중심으로 - 윤 종 갑 249 정보화 역기능에 대한 불교윤리적 관점 연구 하 병 석 289 부록 319
특 집 플라톤의 덕(a)reth/)론과 용수의 공의 윤리학 / 조 해 정 칸트의 二 元 論 과 나가르주나의 二 諦 說 연구 / 박 종 식 무한분할을 통해서 본 베르그송의 지속 과 나가르주나의 공 / 안 호 영 중론 관거래품 으로 읽는 말라르메의 주사위 던지기 / 장 정 아
동아시아불교문화 제8집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1 플라톤의 덕(a)reth/)론과 용수의 공의 윤리학* 1)조 해 정 ** 국문초록 윤리학에서 지( 知 )와 행( 行 )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는 중요한 문제 다. 윤리학의 지식은 삶의 방식 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용수의 윤리학은 지와 행이 일치되는 지행합일 의 입장에서 전개된다. 이로부 터 두 사람의 윤리학에 대하여 상호문화철학적 읽기를 시도하였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저작에서 지행합일의 이상적 모델로 등장한 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자 라는 신탁을 받을 정도로 지혜로운 자 이지만, 스스로는 무지자 를 자처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의 무지를 일 깨우는 것을 소명 으로 삼는다. 여기서 지식 은 삶의 방식에 관한 지식, 즉 덕(a)reth/)에 관한 지식이다. 플라톤 윤리학에서 덕 그 자체의 지식 에 도달한 사람의 영혼은 온갖 욕망과 무지로부터 완전히 정화되어 순 수한 선의 상태, 즉 덕 그 자체와 일치하는 상태로 된다. 그리고 이러한 영혼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이 지혜로운 자 이며, 철학자란 바로 이러한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다른 한편 번뇌에서 벗어나 지혜의 성취를 목표로 하는 불교 윤리의 이상은 마음의 내적 상태의 전환에 의거하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지행 * 이 논문은 2007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 아 수행된 연구임(NRF-2007-361-AM0059) ** 부산대학교 철학과
4 조 해 정 합일을 넘어 인식과 존재의 일치의 관점에 입각해 있다. 용수는 이러한 기본 입장을 계승한 위에서 공( 空 의) 관점에 의해서 재해석한다. 용수 윤리학에서 모든 번뇌와 무지는 희론( 戱 論 )으로 되고, 희론은 공성( 空 性 ) 에 의해서 적멸( 寂 滅 )되므로, 그에게 최고의 지식이란 공성의 성취 에 다름 아니다. 희론이 적멸된 공성의 상태는 나와 나의 것 이라는 모 든 분별과 욕망이 사라진 비움의 상태다. 희론이라는 분별이 사라지면 너와 나라는 경계를 초월하므로 용수는 세속과 열반이 하나 라고 하였 다. 이로부터 내적 전환을 이루기 위한 지혜의 추구와 사회적 실천이 원 리적으로 통일된다. 상호문화철학적 읽기에서 지행합일의 윤리적 목표는 두 사람의 상호 문화적 겹침의 첫 번째 장소가 된다. 그리고 지혜가 욕망과 이기심으로 부터 자유로운 영혼의 순수한 정화 상태이자 선을 실천할 수 있는 내적 능력을 나타낸다는 점에서도 겹친다. 또한 지혜에 장애가 되는 용수의 희론이 몸으로부터 기인하는 온갖 욕망과 착각, 무지를 포함한다는 점 에서, 플라톤의 욕망과 속견, 무지의 상태와 상통하고 있다. 이와 같이 상호문화적 읽기는 진행될수록 각각의 내면을 풍부하게 하면서 겹침 또 한 더욱 중첩되는 것을, 그래서 전통은 있으되, 소통되는 경계의 지점도 다양화하는 것을 지향한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내부를 풍부하게 하면 서도 겹침 또한 더욱 중첩될 수 있는 방법의 모색에 있을 것이다. 주제어: 플라톤(소크라테스), 용수, 윤리(학), 공(śūnya), 덕(a)reth/), 상 호문화철학 1. 여는 말 윤리학에서 지식에 도달하는 것과 지식의 실천과 관련된 문제는 중요
플라톤의 덕(a)reth/)론과 용수의 공의 윤리학 5 한 주제 중의 하나다. 만약 지( 知 )와 행( 行 )의 합일이 윤리학의 목표라 고 한다면 실천과 분리된 지식은 목적에 봉사하는 수단의 위치에 있게 될 것이다. 플라톤은 지와 행이 합일되는 윤리학을 지향하였고 그의 저 작에서 소크라테스 1) 는 지행합일의 윤리적 이상이 구현된 인물로 등장 하고 있다.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에서는 주관과 객관의 연속적 관계 에 바탕하기 때문에 불교 윤리의 지행합일적 성격은 자체에 내재해 있다. 불교에서 아는 것, 즉 깨달음은 곧 존재의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불교 윤리의 실천적 성격은 용수의 공관에 의해서 오히려 더욱 강조되 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에 의하면 공의 관점에 입각해서만 윤리 적 인간의 완성은 가능하다. 불교에서 윤리적 인간의 완성은 고집멸도 ( 苦 集 滅 道 )의 사성제( 四 星 諦 )에 의해서 욕망과 번뇌로부터 벗어나 최고 의 지혜에 도달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데, 그에 따르면 공의 관점에 의해 서만 사성제는 성립되기 때문이다. 윤리학에서 탐구되는 지식이란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삶의 방식에 관한 것, 즉 어떻게 올바르게, 잘, 행복하게 혹은 훌륭하게 살 것인가 라 는 물음들에 대하여 답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학에서 문제로 되는 지식은 처음부터 삶의 현장으로부터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탐구 이고, 탐구 결과로서의 지식은 다시 실천적으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할 것 이다. 이러한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한 탐구와 실천이라는 차원을 중심축 으로 하여, 플라톤과 용수라는 상이한 두 사람의 윤리학에 대한 철학적 입장을 상호문화철학 2) 적 읽기를 감히 시도해 보고자 한다. 3) 상호문화 1) 이 글에서 소크라테스는 역사적 소크라테스와 등장인물 소크라테스를 구별하지 않고 저자인 플라톤의 의도가 투영된 작품 속 등장인물을 가리킨다. 2) 상호문화철학은 철학에서 작용하는 중심주의와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주 변화되고 배제되어 온 다양한 사유전통들이 함께 만나 대화하면서 대안적 공론 을 장을 열고자 하는 시도로서 시작되었다. 상호문화철학적 방법은 단순히 다양 한 사유전통을 통합시키거나 비교하는 차원을 넘어 철학 내부에 작용하는 중심 주의와 권력구조에 대한 철학적 비판을 출발점으로 한다. 이러한 시도는 1989년 부터 격년으로 개최되는 2010년 14차에 이른 <남북반구의 철학대화 세미나>와
6 조 해 정 철학의 관점은 단순히 현상적인 유사성과 그 차이를 가리는 병렬적 비 교의 차원을 넘어, 양자를 가로지르는 겹침과 차이가 중첩되면서도 상 호 이해되고 이해할 수 있는 소통의 지점을 발견하고 상호 적용해 보고 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용수의 공의 관점으로 플라톤을 읽기도 하고 역으로 플라톤의 덕론을 용수의 윤리적 입장에 적용해보기도 하면 서 상호의 겹침과 다름을 드러내 보이도록 할 것이다. 상호 소통의 중요 지점들은 플라톤과 용수의 윤리학에서 지행합일적인 지식 4) 의 의미와 윤리적 인간의 완성을 의미하는 자각 내지는 영혼의 전환(parāvṛitti, 轉 依 ) 5) 에 있다. 1995년부터 격년으로 개최되어 현재 9차에 이르고 있는 <국제상호문화철학대 회>로 구체화되고 있다. 현재 국제적 대화의 중심에는 라울 포르넷-베탕쿠어(쿠 바 출신, 독일 브레멘대학 교수)가 있으며, 대회 참석자로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출신의 참석자들이 70~80%에 이르고 있어 서구철학자 중심의 대회와 사뭇 다르다. 대회의 주제적 측면에서는 하나로 초점을 맞추나, 각각이 속한 사회문화 적 맥락을 바탕으로 논의하므로 다양한 문화적 전통이 잘 드러나는 특징이 있다. 한국에서는 2009년 4월 <한국상호문화철학회>(회장: 김혜숙)가 결성되었다. 3) 용수와 플라톤에 대한 상호문화적 읽기는 국내에서는 주광순 교수의 존재론 을 중심으로 한 연구( 그리스 고대 존재론과 용수의 존재론의 비교적 고찰, 유 럽 중심주의 비판을 위하여-레비나스와 용수 이외 거의 전무한 듯하다. 국내 에 소개된 해외 연구자도 토마스 멕에빌리( 불교사상과 서양철학 중 제5장, 118-125)의 고대 헬라스 철학과 중관사상의 비교 속에 한 부분으로 소개된 것을 제외하면 용수와 다른 서양의 다름 의 예로써 짤막하게 언급된 단편적 언급들이 거의 전부가 아닐까 한다. 4) 산스크리트어에 영어의 knowledge 에 해당하는 단어는 70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대체로 지식에 해당하는 단어는 jñāna를 사용하고 경험과학적 인식의 용어는 vijñāna를 사용한다. 그리고 서양과 달리 불교에서 지식은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용어라기보다 실천적이고 종교적 용어로 사용된다. (Hajime Nakamura, Knowledge and Reality in Buddhism, (ed..) Brian Carr & Indira Mahalingam, Companion Encyclopedia of Asian Philosophy, 435 참조)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지식 이라는 용어는 거의 쓰지 않고 주로 지혜 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것 같다. 또 대승불교에서 지혜의 완성 내지는 최고의 지혜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는 Prajña(반야, 팔리어로 pañña)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지혜와 지식은 특별한 구 별이 필요한 문맥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포괄적으로 사용하였다.
플라톤의 덕(a)reth/)론과 용수의 공의 윤리학 7 플라톤의 덕론은 초기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변론 과 중기대화편 파 이돈, 그리고 국가 편을 중심으로 하였고, 용수의 공의 윤리에 대해서 는 용수의 중론 17장, 18장, 24장과 25장을 중심으로 하였다. 2. 플라톤의 덕(a)reth/) 6) 론 2.1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역설 플라톤 철학에서 지식(e)pisth/mh)은 실천과 분리된 이론적 분야에 한정되지 않았다. 7) 오히려 그의 지식(e)pisth/mh) 개념에는 fro/nhsij 5) Suzuki는 Studies in the Lankavatara Sutra에서 분별적 집착의 세계로부터 무분 별의 지혜의 눈으로의 내면적 전환이라는 점에서, 지혜에 입각해서 보느냐 아니 냐의 마음이 의지하는 장소, 즉 입각점의 차이로 보아 轉 依 라는 의미상 정밀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는 서양과 공유될 수 있는 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서 전환 이라는 번역어를 선택하기로 한다.( 불교윤리의 현대적 이해 에서 안옥 선도 전환 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6) 이 글에서 덕으로 번역되는 헬라어는 a)reth/를 지칭한다. (이 용어의 헬라스에서 의 쓰임에 대해서는 조해정의 소크라테스와 용수의 귀류법에 대한 상호문화철 학적 이해를 위하여 각주 9를 참조할 것) 서양에서 이 용어는 대체로 virtue, Tugend, goodness, excellence 등으로 번역되며 근래 들어 덕이나 훌륭함을 뜻하 는 virtue, Tugend, goodness보다 탁월함의 의미인 excellence를 선호하는 경향 이 있다. 그러나 플라톤 윤리학에서의 엄밀한 의미의 진정한 덕이란 덕 그 자체 에 대한 앎의 성취에 두기 때문에 비교적 우위의 의미를 함의하는 excellence와 는 일정한 괴리가 있다. 플라톤의 덕 그 자체에 대한 앎은 영혼의 내적 상태 내 지는 적용 능력 으로서 지식이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이 용어는 어떤 기능이나 기술적 능력에서의 비교적 우위의 개념이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훌륭함 의 상태 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에 이 글에서는 a)reth/를 탁월함 으로 번역하지 않고 덕 으로 통일하여 옮겼다. 7) 서양철학에서 최초로 이론적 지식(e)pisth/mh)과 실천적 지식(fro/nhsij)으로 나누고 이론적 학문과 실천적 학문을 분리시키기 시작했던 철학자는 아리스토텔 레스다.
8 조 해 정 (실천적 지혜)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플라톤 철학에서 어 떤 것에 관한 지식의 소유는 그것을 실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능력 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로부터 윤리적 가치 개념인 덕 (a)reth/) 에 관한 지식이란 삶의 방식 에 관한 지식을 의미하고, 따라서 덕 (a)reth/)에 관한 지식 가진 사람은 지혜로운 자 또는 현자 로 지칭 되었다. 8) 플라톤 철학에서 이론과 실천이 결합되는 지행합일적인 지식은 소크 라테스에 의해 구현된다. 플라톤은 논증적 글쓰기 아닌 대화와 행동으 로 표현되는 극문학 형식에 철학적 논증을 결합한 글쓰기를 선택했다. 9) 그는 등장인물 소크라테스의 삶의 방식과 행동 속에 자신의 철학적 태 도와 내용을 투영하는데, 소크라테스는 전 생애를 아테네 시민들의 무 지를 일깨우는 신이 보낸 등에로서의 소명 (변론, 30e)을 실천하는 데 보낸다. 소크라테스의 소명의식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 라는 신 탁과 무지의 지 라는 역설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10)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대화자와 함께 X 라는 덕에 관한 정의 규정을 시도하는 소크라테스는 명시적으로 무지자 를 자처하고 있다. 11) 그럼에 8) 이로부터 우리는 어원적으로 지혜(sofi/a)에 대한 사랑(fi loj)이라는 철학 (fi losofi/a)과 철학자(fi losofoj)의 의미를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다. 9) 극문학적 성격을 고려한 플라톤 읽기 대해서는 김진, 플라톤, 어떻게 읽을 것 인가 를 참조할 것. 10) 소크라테스의 소명과 무지의 역설은 플라톤 최초의 작품으로서 역사적 소크라 테스에 가장 근접하게 기술되었다고 평가받는 소크라테스의 변론 편에 잘 드 러나 있다. 11) 이에 대한 대표적인 해석은 대화자로 하여금 진리 탐구에 동참하도록 이끌기 위해서 소크라테스가 무지 를 가장한다는 것이다. 이 입장의 해석은 소크라테 스는 실제로 X 가 무엇인지 아는 자 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이에 대한 대 표적인 반론은 소크라테스는 언어로써 명제화된 지식은 부정하고 참된 신념을 표현하려 했다 (T. Irwin, Plato's Moral Theary, 39-40.)는 것이다. (소크라테 스의 무지에 대한 해석 경향에 대해서는 G. Vlastos와 L. H. Lesher의 동일한 제목의 Socrates' Disavowal of Knowledge 를 참조할 것.) 그런데 G. Vlastos
플라톤의 덕(a)reth/)론과 용수의 공의 윤리학 9 도 소크라테스는 자신보다 현명한 자는 아무도 없다는, 말하자면 소크 라테스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 는 아폴론의 신탁을 받는다(변론, 20c-21a).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의미를 확실히 알기 위해 지혜로움에 있어서 내로라하는 자들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들은 무지자를 자처하 는 소크라테스와 달리, 하나같이 자신이 가장 훌륭한 자요, 현명한 자라 고 주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중에는 실제로 상당히 많은 시민들 로부터 현명한 자로 인정도 받고 있다. 그들은 주로 당대의 유명한 정치 인과 시인들, 그리고 기술 분야의 장인( 匠 人 )들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는 그들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지식, 즉 그들의 견해들을 예의 문답 법 (to diale/gsqai)) 12) 으로 검토 해 본 결과 13) 그것은 불확실하거나 자 체로 모순되는 오류의 지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14) 그들은 검 증되지 않은 지식을 확실한 지식이라고 착각하고, 스스로 현명하며 훌 는 소크라테스가 지식 의 의미를 문맥에 따라서 다르게 사용한다는 독특한 입 장을 취한다. 이 글에서는 관련되는 여러 논의들에 대한 검토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소크라테스의 논박적 대화가 'X'라는 덕의 규정에 실패로 종결되고 소크 라테스 스스로 그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하기로 한다. 12) 소크라테스의 문답법 (to diale/gsqai)은 어원적으로도 묻고 답하는 기술 이다. 플라톤 철학의 발전론적 시각에 의하면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새로운 지식에 도달하지 못하고 아포리아로 끝나는 초기대화편의 논박적 문답으로서 본격적인 플라톤 철학에 입문하기 위한 예비적 단계의 dialektkh을 일컫고 플라톤의 디 알렉틱(dialektkh)은 플라톤 고유의 이데아의 인식에 이르기 위한 철학의 방 법으로서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의 소크라테스가 저자 플라톤의 의도가 투영된 등장인물 소크라테스임을 지칭하는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두 사람의 dialektkh을 엄밀하게 구별하지 않기로 한다. 두 사람의 dialektkh의 동일성 에 대한 논증은 Noburu Notomi,의 Socratic Dialogue and Platonic Dialectic 140-143을 참조할 것. 13)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의 특징과 논박적 사례 분석은 조해정, 앞의 논문, 223-236 참조. 14) 신탁에 대한 확인을 위한 탐방과정에 대해서는 소크라테스의 변론, 21b-22e 참조. 소크라테스는 이들의 무지를 논박적 대화 를 통해서 폭로하여 그들로부 터 미움을 사게 되었다고 법정 진술의 형식으로 말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구체 적인 대화 과정은 생략되어 있다.
10 조 해 정 륭한 사람이라고 자만하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즉 알고 있다고 주장하 는 자들은 실제로는 무지한 자들 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이들보다 자신이 더 지혜롭고 훌륭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신탁의 뜻에 따르기로 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이 알지 못 한다 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알지 못한다 는 사실은 알고 있기 때문 이다. 내가 알고 있지 못하는 것들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 사실 로 해서 내가 더 현명한 것 같아. (변론, 21d) 소크라테스의 법정진술에서, 자칭 현자이나 실제로는 무지한 자들 에 대한 비판, 특히 시민의 진정한 행복과 복지보다는 저마다 개인적인 명 예와 부를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는 당대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은 대단 히 신랄하다. 그리고 이 비판이 바로 자신의 생명이 걸려있는 법정에서 행해졌다는 사실은 그의 소명의식 과 관련하여 간과될 수 없는 대목이 기도 하다. 가장 평판이 좋은 자들이 거의가 가장 모자라는 자들인 반면에, 이들 보다 한결 못한 걸로 여겨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분별이 있다는 점에 서 더 나은 자들이라 여겨졌습니다. (변론, 22a) 말하자면 일반 대중보다도 지배층에 해당하는 정치인들이 더욱 무지 하다는 것이다. 시인들은 스스로 작품의 참된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자 신의 작품을 옳게 해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무지 하지만 적어도 훌륭한 작품을 쓰기도 한다. 기술 분야의 장인들은 자기 분야에 한정된 지식에 입각해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그를 현자이게 하는 지식 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자기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은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시인과 장인들은 정치인보다는 낫긴 하다. 그러나 시민의 영혼을 보살
플라톤의 덕(a)reth/)론과 용수의 공의 윤리학 11 피는 교육을 담당했던 시인이나 물질적으로 필요한 재화의 공급을 담당 했던 수공업자나 현자이게 하는 지식, 즉 덕에 관한 지식 을 갖지 못했 다는 점에서는 정치가와 다를 바 없다. 이 점에서 이들은 모두 무지한 자들 이지 결코 현자가 될 수 없다. 그런데 가장 지혜로운 자 라는 신탁을 받은 소크라테스가 이들과 구 별되는 점은 자신의 무지를 자각( 自 覺 ) 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는 이러한 자신의 무지의 지 라는 지혜를 인간적인 지혜 라고 믿는 다. 15) 그리고는 현자라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조차 모르는 무지한 자들을 일깨우는 것이 신의 뜻을 실천하는 소명 16) 이라 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문제의 지식이 삶의 방식 에 관한 윤리적 가치 개념들 즉, 덕 에 관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지행합일적인 관점에서 덕에 관한 잘못된 지식은 잘못된 행위 즉 선이 아닌 악을 실천하는 것과 관 련된다. 삶의 방식으로서의 덕에 관한 지식이란 최종적으로 무엇이 선 이고 악인가 에 대한 지식 내지 실천적 판단능력으로 귀결될 것이기 때 문이다. 이 점에서 당대 정치와 교육을 담당했던 사람들의 착각과 무지 는 인간의 삶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러므 로 소크라테스의 소명은 바로 그들의 잘못된 지식과 대결하는 것이며 그 목표는 선한 삶 사람으로서의 훌륭한 삶 이었다. 그 때문에 인간의 지혜 로 인한 그의 소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죽음도 멈추게 할 수 15) 인간들이여, 그대들 중에서는 이 사람이, 즉 누구든 소크라테스처럼, 지혜와 관 련해서는 자신이 진실로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가 가장 지혜로운 자이 니라. (변론, 23a-b) 플라톤 철학에서 인간적인 지혜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 하는지에 대한 세부적 논의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여기서는 다만 이 인간 적 지혜의 한계로부터 소크라테스가 무지자 로 자처하는 것과 덕에 대한 지식 을 언어로 표현하기를 꺼리게 된다는 사실만 고려하기로 한다. 플라톤철학과 고대 헬라스 전통에서 삶의 방식과 관련하여 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적인 판단 은 신적인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16) 이 소명이 바로 아테네 시민들을 일깨우는 등에로서의 소명 이며 그 실천 방법 이 논박 과 산파술 적 성격의 문답법 이다.
12 조 해 정 없었던, 전적으로 지행합일적인 소크라테스의 삶 자체로 되었던 것이 다. 17)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지행합일적인 삶과 소명은 플라톤의 대화편에 서 착각에 빠진 무지한 자들의 생각 또는 견해에 대한 논박적 문답법 으로 구현되어 있다. 초기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문답법 으로 아테 네 시민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한편, 덕 (a)reth/)이 무엇인지 함께 탐구 하는 실천적 철학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작품 속 등장인물인 한, 그는 플라톤의 의도가 투영된 있어야 할 소크라테스 이기도 하다. 그러면 플라톤 저작에 대한 통일성의 관점 에서 보자면, 초기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를 통해 제기되는 물음들과 실천은 그의 철학함의 목적과 동기를 밝힌 서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 을 것이다. 그러면 플라톤 철학의 목적은 크게 보아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한 삶의 문제였으며, 주 탐구 대상은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행위 규준으로서의 덕(a)reth/)들 18) 에 대한 지식과 그 실천적 적용의 문 제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19) 이런 관점에서 플라톤 철학의 목표는 17) 이 때문에 저는 아직까지도 그 신으로 하여 돌아다니면서 누군가 지혜로 운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이면 가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리고서 제가 보기에 그 사람이 지혜롭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면 그 신을 도와 그가 지혜롭지 못하다 는 것을 지적해 줍니다. 그리고 이 분주함으로 해서 나라일이나 집안일을 돌볼 겨를도 없었고 오히려 신에 대한 이러한 봉사로 인해 가난한 신세가 되었습니 다. (변론, 23c) 18) 국가 편에서 덕의 종류는 절제, 용기, 정의, 지혜의 4가지이며, 이것을 4주덕 이라고 한다. 때로는 4주덕에 경건의 덕을 더하여 5주덕을 논하기도 한다.(플라 톤의 4주덕에 관해서는 Terence Irwin 2, The Parts of the Soul and the Cardinal Virtues 를 참조할 것) 이 글에서는 덕들의 종류와 각론에 대한 논의 는 생략한다. 19) 플라톤 철학의 이와 같은 구조가 가장 잘 드러난 대화편은 국가 편이다. 국 가 편에서 소크라테스와 대화자들이 덕 그 자체 가 무엇인지 공동으로 탐구하 는 과정에서 이데아론 이 제시되고 그 이데아 너머에 선의 이데아 가 있다. 즉 선의 이데아는 탐구의 정점에 위치하고 그 선의 이데아를 인식한 사람이 철학 자 또는 철인왕 이다.(철인왕 개념에 대한 논의는 Robert Spaemann, Die
플라톤의 덕(a)reth/)론과 용수의 공의 윤리학 13 올바른 현실 인식을 통한 현실 구제 가 된다. 20) 소크라테스의 삶에서 윤리적 덕목들에 대한 참된 지식을 탐구하는 과정과 현실 구제를 위한 실천의 과정이 하나로 합일되는 것은 플라톤 철학에서 지식 (e)pisth/mh)은 실천과 분리되지 않고 그의 e)pisth/mh에는 fro/nhsij (실천적 지혜)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2.2 플라톤의 덕(a)reth/)론 플라톤 윤리학에서 훌륭한 삶은 일차적으로 영혼을 훌륭하게 가꾸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덕에 관한 지식은 무엇보다도 영혼을 건강하게 잘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라는 의미이며, 도덕적인 실천 능력이란 덕의 지 식으로 인한 영혼의 덕스러운 상태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덕론에서 덕에 대한 지식은, 몸으로부터 기인하는 온갖 욕망 들의 제거와 무지자들과 같은 잘못된 착각으로부터 벗어나는 영혼의 정 화와 관련된다. 나아가 플라톤 윤리학에서 삶의 방식과 관련되는 덕에 관한 지식은 훌륭함 과 아름다움 과 가장 중대한 일 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신탁을 확인하기 위해서 만났던 자칭 현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평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훌륭하디 훌륭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하면서 대단한 걸 알 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변론, 21d) 이들 또한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말하지만 자신들이 말하는 것들에 대 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까요 (변론, 22c) Philosophenkönige, 주광순2 플라톤의 철인왕 개념, 염수균의 좋음의 이 데아와 목적론적 해석, 플라톤의 국가에서 좋음의 이데아와 세 가지 비유 참 조.) 20) 이상인2, 플라톤과 유럽의 전통 199-203 참조.
14 조 해 정 적어도 이들만은 훌륭한 것들을 알고 있는 자들임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걸 알고 (그런데) 이들도 제 기술을 훌륭히 발휘할 수 있다고 해서 가 장 중대한 다른 일들에 있어서도 자신이 가장 현명한 것으로 여기더군 요. (22d-e) 정치인, 시인, 장인의 순서로 언급되는 인용문에서 덕에 관한 지식은 각각 훌륭한 것 아름다운 것, 그리고 가장 중대한 일들 이라고 지칭되 고 있다. 그리고 이 지식을 소유한 자는 현명한 자 또는 지혜로운 자 로 여겨졌다. 플라톤에게 덕에 대한 지식의 성격과 그 지식을 소유자가 지혜로운 자 라로 규정하는 정의(dikaiosu/nh)의 덕 에 관한 언급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그것(정의)은 외적인 자기 일의 수행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영혼]내적 인 자기 일의 수행, 즉 참된 자기 자신 그리고 참된 자신의 일과 관련된 것일세. 참된 의미에서 자신의 것들을 잘 조절하고 스스로 자신을 지 배하며 통솔하고 또한 자기 자신과 화목함으로써 이 모든 경우에 있 어서 이 성격 상태를 유지시켜 주고 도와서 이루게 하는 것을 올바르고 아름다운 행위로 그리고 이러한 행위를 관할하는 지식(e)pisth/mh)을 지 혜(sofi/a)로 생각하며 그렇게 부르네. 언제나 이 상태를 무너뜨리는 것 을 올바르지 못한 행위로, 그리고 이러한 행위를 관할하는 의견(do/ca)을 무지로 생각하며 그렇게 부르네.(국가, 443c-444a) 여기서 정의의 지식은 영혼의 내면적인 자기 통제 능력으로서 자 신을 잘 통솔하여 조화롭게 하는 작용(기능, e )/r g o n)하는 것을 이른 다. 플라톤 윤리학에서 덕 의 지식에 도달한 사람은 덕 그 자체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덕 그 자체와 일치한다. 21) 말하자면 정의의 덕은 건강 한 것들이 건강을 생기게 하고 병든 것들이 질병을 생기게 하듯이 영혼의 건강은 정의로운 행위의 원인이고 혼의 불건강은 부정의한 21) 주광순1, 그리스 고대 존재론과 용수의 존재론의 비교적 고찰, 183 참조.
플라톤의 덕(a)reth/)론과 용수의 공의 윤리학 15 행위의 원인으로서 영혼의 내적 상태인 것이다(국가, 444c-d). 그리 고 지식을 가진 지혜로운 자는 영혼의 건강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선( 善 )을 행하고, 지식이 아닌 의견 (d o /c a)은 건강하지 못한 무지 로서 선이 아니다. 의견을 가진 자는 영혼의 건강한 상태를 무너뜨 리기 때문에 올바르지 못하며 따라서 의견 은 곧 무지 가 된다. 그 러므로 의견 은 덕의 지식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무지자들의 착각과 일치한다. 플라톤의 덕론에서 이러한 덕 의 지식에 도달하기 위한 훈련과정은 영혼의 정화 과정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다음에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이 그것(영혼) 을 가장 순수한 상태로 하게 되겠지? 가능한 한, 각각의 것에 사유 자체로만 접근하는 사람, 즉 사유함에 있 어서 시각을 이용하지도 않으며, 그 밖의 다른 어떤 감각도 추론에 끌어 들이지 않고 사유 그 자체만을 순수한 상태로 추구하려 드는 사람이, 요 컨대 눈과 귀와 같은 몸에서 최대한 해방된 사람이 누군가 참된 진실 에 이르게 된다면, 바로 이 사람이야말로 그럴 사람이 아니겠는가?(파이 돈, 65e-66a) 정화는 일체의 감각으로부터 해방된 영혼 그 자체로의 회귀, 즉 감각 의 의존으로부터 순수한 정신으로의 전환이다. 그리고 영혼의 전환은 바로 참된 진실 즉 참된 지식에 이른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일체의 감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오로지 사유 로만 접근해야 한다. 즉 사유는 참된 지식에 도달하는 수단 또는 방편이 된다. 그러므 로 참된 지식 은 사유 너머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왜 무 지자 를 자처하는지, 그리고 인간적인 지혜 의 의미에 대해서 추정할 수 있는 단초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만 참된 지식이란 덕에 관 한 지식과 관련되므로 그것은 삶의 방식을 바꾸도록 하는 내면적 영혼 의 변화와 관련된다는 것만 주목하기로 한다.
16 조 해 정 그런데 플라톤이 보기에 사유를 담당하는 인간의 영혼은 몸과 결합되 어 온갖 결함으로 뒤범벅이 된 상태다. 그것은 혼을 혼란스럽게 하여 혼이 진리와 지혜를 획득하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파이돈, 66a) 그래 서 사람들은 몸의 갖가지 욕망들을 채우는데 몰두하고 그로 인해 분주 하게 되어 지혜를 구할 여가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벗어나 는 영혼의 정화과정 없이는 덕의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영혼의 정화 과정 없이는 몸이 영혼을 돌보는데 종사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영혼이 몸에 종속된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몸은 우리를 욕정들과 욕망들, 두려움들(무서움, 공포) 그리고 온갖 환 영( 幻 影 )과 하고많은 어리석음으로 가득 채우게 되어서는 바로 그 몸으 로 해서 전쟁들과 불화들 그리고 싸움들을 일으키는 것은 다름 아닌 몸과 이로 인한 욕망들이지. 재물(pa/qoj)의 소유 때문에 모든 전쟁이 일어나지만, 우리가 재물을 소유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은 몸으로 인 해서이니 우리는 몸의 보살핌을 위해 그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게야.(파이 돈, 66c-d) 플라톤의 덕론에서 정화되어야 할 장애들은 욕구와 욕망들, 두려움, 그리고 착각과 무지다. 참된 지혜를 구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욕망적 인간 의 현실에 대한 플라톤의 진단은 놀라울 정도로 불교적 인간관과 유사 성을 보인다. 특히 참된 지혜를 구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이유로 제시되는 밑줄 친 부분은 불교에서 영혼의 전환을 위해 제거해야 할 번뇌( 煩 惱 ) 의 내용인 욕망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삼독( 三 毒 ), 또는 삼악( 三 惡 ) 과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진리 탐구와 영혼의 정화에는 이러한 몸으로 인한것들이 장애로 된다. 몸으로 인한 이 모든 것 때문에 우리는 철학(지혜에 대한 사랑)과 관련 해서 여가 부족의 상태로 지내게 되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약한 것은, 어쩌다가 우리에게 몸의 보살핌에서 벗어나 여가라도 생겨서 무언가를
플라톤의 덕(a)reth/)론과 용수의 공의 윤리학 17 고찰해 보려 들기라도 하면 이번에는 몸이 우리의 탐구 과정 도처에 끼 어들어서는 소란과 혼란을 일으키며 얼빠지게 만들어, 몸으로 인해서 참 된 것(진리, a\lh/qeia)을 볼 수 없게 되고 말지.(파이돈, 66d) 혼이 지혜롭게 되려면 이러한 몸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 다. 이처럼 몸의 어리석음 (aswfrosu/h) 22) 에서 해방되어 순수화 되 어야 일체의 순수한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순수하지 못 한 이에게 순수한 것이 포착된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 (파이돈, 67b) 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철학에서 이러한 영혼의 정화과정은 국가 편 에서 50년에 이르는 철인왕 교육 과정으로 제시된다. 이처럼 몸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어 영혼이 완전히 정화된 철학자가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파이돈, 68b). 그러니까 죽게 되었다 해서 성을 내는 사람은 이는 결국 지혜를 사랑하 는 사람(철학자)이 아니라 몸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니겠는 가. 아마도 그런 사람은 재물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명예를 좋아 하는 사람이기도 하여 둘 가운데 어느 한쪽이거나 둘 다이거나 할 거 야.(68b-c) 그리고, 아직 완전히 정화되지 못하고, 도정에 있는, 몸으로 인한 집착 이 남아있는 보통의 시민들은 재물을 좇거나 명예를 좇거나 혹은 양자 모두를 좇는 사람들이다. 플라톤 덕론에서 재물을 쫓는 욕망적의 인간 은 절제의 덕으로 도야되고, 명예를 쫓는 것은 용기의 덕과 관련된다. 세상 사람들에게 용기란 더 크게 나쁜 것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죽음을 참고 견디는 것이므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용 감한 사람들은 모두 어떤 무서움 으로 해서다(파이돈, 68d). 마찬가지 22) 어원적으로 사려분별 또는 건전한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swfrosu/h에 부정 접두어 a 가 붙은 형태다.
18 조 해 정 로 시민적인 절제의 덕이란 것도 일종의 무절제로 해서, 즉 다른 즐 거움을 빼앗기는 게 두려워서 다른 즐거움에 지배당함으로써 어떤 즐거 움들은 멀리하는 것 일 뿐이다(파이돈, 68e-69a). 따라서 시민적 절제의 덕은 여전히 즐거움에 지배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용기의 덕은 두 려움과 분노로 인해서 생겨나는 덕에 불과하므로 아직 완전한 덕은 아 니다. 23) 이는 용수의 표현에 따르자면, 타자에 의존해서 생겨나는 것이 기 때문에 세속적 의미의 덕, 즉 시민적 차원의 덕인 것이다. 시민적 덕 차원에서 선악의 기준은 견해(d o /c a)에 근거하므로,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자칭 현자들의 착각 내지는 무지를 연상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견해 차원의 덕들은 사람으로서 훌륭한 상태인 덕과 바른 교환 이 될 수 없고, 참된 덕과 교환되어야 할 참된 화폐는 바로 지혜 (fro/nhsij)여야 한다. (파이돈, 69a) 플라톤 덕론에서 지혜만이 참된 용 기요 절제이며 정의가 될 수 있으며(파이돈, 69b), 지혜란 영혼의 정화 를 표현하는 다른 방식이다. 플라톤의 덕론에서 참된 덕은 국가 편에서는 선의 이데아 에 대한 인식이라는 절대적인 지식의 문제로 제시되며, 그 역시 혼의 정화 을 전제로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영혼의 정화가 몸으로부터 기인되는 모 든 욕망과 어리석음으로 인한 무지(또는 속견)로부터 벗어난 순수한 사 유 상태라는 측면에서, 플라톤의 완전한 지혜는 용수의 윤리학에서 모 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지혜의 상태인 공성 ( 空 性, emptiness)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와 같은 순수 사유, 정화된 영혼의 상태에 의거 해서만 소크라테스의 윤리적 규준인 X 그 자체 에 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언어 표현으로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플라톤 윤리학에서 이러한 지식에 도달한 철학자는 지식은 또한 실천능력을 의미하므로 현실을 구제하는 여러 가지 방법(즉, 방편)적 실천이 가능 23) 플라톤의 덕의 개념은 덕 그 자체의 지식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지식 을 필요로 하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개념과 구별된다. 플라톤에게 완전 한 지식을 전제하지 않은 덕은 시민적인 덕에 불과하다.
플라톤의 덕(a)reth/)론과 용수의 공의 윤리학 19 한데, 소크라테스의 경우 주로 문답법 (to diale/gsqai)으로 구현된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논박의 궁극적 목표 또한 욕망과 속견(d o /c a)에 가려진 영혼을 정화하고 절대적인 지혜를 구하라는 것에 있다 할 것이 다. 3. 용수의 공의 윤리학 3.1 공관으로 보는 지혜(prajña)와 번뇌 인간이 지혜를 추구하는 삶을 목표로 할 때, 지혜가 삶과 유리된 것이 라면 지혜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불교 수행의 목적 은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즉 번뇌에서 벗어나 지혜를 성취하 는 것에 있다. 번뇌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마음이 선악의 갈등에 제약 되지 않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윤회로부터 벗어난 해탈이기도 하고 윤 리적으로는 절대적인 선의 완성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불교의 핵심은 선의 실천에 있으며 윤리를 제외한 불교는 무의미하다. 24) 그런 점에서 용수 역시 예외가 아니며, 그는 다만 공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있 을 뿐이다. 25) 초기불교에서 지혜의 성취는 탐진치( 貪 -탐욕, 瞋 -성냄/미 워함, 癡 어리석음)의 모든 번뇌 혹은 집착으로부터 벗어남의 상태를 의 미한다. 26) 그런데 용수의 공관( 空 觀 )에 따르면 제거되어야 할 모든 번 24) 안옥선3, 불교의 선악론, 3. 25) 中 論 17장은 특히 도덕적 책임 문제와 관련해 다루는데, 여기서 용수는 법 ( 法 )으로 한역된 것은 주로는 bhava(존재)를 가리키나 도덕적으로 선한 생활을 말하고자 할 대는 업( 業 ) 대신에 법(dharma)라는 용어를 사용한다.(David J. Kalupahana 1, 박인성 譯, 나가르주나, 146-148) 이 글에서는 용수의 공의 관 점에 의한 윤리학을 중심으로 하였다. 26) 貪 慾 을 떠나, 성냄을 떠나, 어리석음을 떠나 번뇌가 없는 자가 되어 ( 테라 가타 704, 김용환2, 初 期 佛 敎 에 있어 知 慧 (paññā)와 煩 惱, 410에서 재인용)
20 조 해 정 뇌란 한마디로 희론 ( 戱 論, prapañca) 27) 이며, 그 희론은 공성( 空 性, śūnyatā)에 의해서 사라진다. 28) 용수에게 탐진치의 번뇌란 곧 희론 을 의미하며, 지혜의 성취란 공에 대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즉 용수는 번뇌로부터 벗어나 지혜의 성취 라는 초기불교의 윤리 개념을 공의 관 점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다. 29) 초기불교에서 지혜(prajña, pañña)는 붓다를 성도( 成 道 )에 이르게 한 지혜인 연기( 緣 起 )와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에게 요구되는 지혜 를 포함 30) 하는 개념이다. 연기는 불교 교의의 핵심이며 연기법을 아는 것이 지혜를 성취하는 것이다. 용수 또한 연기법이 참된 진리임을 중 론 첫 게송에서 밝히고 있다. 능히 이런 인연법 (연기법)을 말씀하시어 온갖 희론( 戱 論, prapañca)을 잘 진멸시키시도다. 내가 머리 조아려 부처님께 예배하오니 모든 설법 가운데 제일이로다.(1-1) 희론이 적멸한 길상한 연기를 설하신 정각자( 正 覺 者 ), 설법자 중 제일 인 그분께 예배합니다.(산스크리트어 번역)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연기의 법칙 을 본다면 능히 불( 佛 )을 볼 수 있고 고집멸도( 苦 集 滅 道 )를 본다고 설한다.(24-40) 27) 박태원, 언어, 붙들기와 여의기 그리고 굴리기 97-104에 희론에 관하여 상세 하게 설명하고 있다. 28) 업과 번뇌의 지멸에 의해서 해탈이 있다. 업과 번뇌는 사유분별 때문에 생긴다. 그것들은 프라판차(prapañca, 희론)에 의한다. 프라판차는 空 性 에 의해 滅 한다. ( 중론, 18-5) 29) 여기서 용수가 새롭게 해석하는 중요한 방법이 공의 관점 이기 때문에 그의 윤 리학을 공의 윤리학 이라고 명명하기로 한다. 그리고 공의 윤리학이란 초기불 교의 윤리를 전제로 한 새로운 해석이지 별개의 윤리학이 아니라는 점에서, 용 수의 윤리적 입장이 전체불교와 관련되는 경우 포괄적인 시각으로 고찰하였다. 30) 김용환2, 初 期 佛 敎 에 있어 知 慧 (paññā)와 煩 惱, 406.
플라톤의 덕(a)reth/)론과 용수의 공의 윤리학 21 연기는 희론을 적멸시킨다. 그런데 희론은 다시 공성 에 의해서 적멸 된다(18-5). 그러므로 연기는 즉 공이 된다. 말하자면 용수의 공( 空 )은 새로운 진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법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 는 철학적 방법 이다. 그리고 용수가 새롭게 해석한 연기의 진리는 연 기는 공 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용수에 의하면, 연기법에 의해 적멸되어 야 할 번뇌란 희론 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용수의 윤리학에서 우선적으 로 해명되어야 할 것은 한편으로 연기와 공의 관계이고, 다른 한편으로 는 번뇌와 희론의 관계일 것이다. 용수에 의하면 연기는 공이며, 연기가 공인 이유는 모든 연기적 존재 는 무자성 ( 無 自 性 )이기 때문이다. 즉 공은 연기를 해명하는 수단이지 공이 연기인 것이 아니며, 연기가 비실체성의 무자성이므로 연기라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인연으로 생한 존재를 나는 무( 無, 무자성)라고 말한다. 또 가명( 假 名 )이라고도 하고 중도( 中 道 )의 이치라고도 한다.(24-18게) 연기인 그것을 우리들은 공성이라고 말한다. 그것(공성)은 의존된 가명 이며 실로 중도( 中 道 )이다.(산스크리트어 번역) 인연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일체는 공 아닌 것이 없다.(24-19) 여기서 자성 ( 自 性 )이란 고유한 본질 또는 불변적 실체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연기에 의해 생하는 것이며(24-19), 연기에 의해 생 하는 모든 존재는 무자성 (24-18)이다. 따라서 일체 존재는 공 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용수의 입장에 따르면 존재의 모든 존재는 연기생이며, 연기생은 무자성이요, 공성이므로 불변적 실체, 즉 자성을 인정하면 연 기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용수는 자성론의 입장에서는 붓다 의 연기법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22 조 해 정 공의 이치가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성립할 수 있다. 만일 공의 이치가 없다면 어떤 존재도 성립하지 않는다(24-13) 여기서 우리는 용수가 붓다의 연기법을 진리로써 인정하면서 다시 공 의 개념을 도입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용수는 공관에 의해서 자성론적인 아비달마불교로부터 붓다 본래의 연기법을 지켜내고자 했 던 것이다. 왜냐하면 자성론 에 의하면 연기법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 다. 그는 공성에 의해서 연기의 본질을 보다 명확하게 제시하였던 것이 다. 31) 공의 관점에 의하면 초기불교의 무아사상 을 아비달마의 법유론 을 넘어 법무아( 法 無 我 )론으로까지 확대된다. 아비달마의 자성론적 입 장은 인무아( 人 無 我 )만 인정하고, 법무아( 法 無 我 )는 인정하지 않는 법 유론 의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이에 용수는 공의 관점에 의해 아공법 공 ( 我 空 法 空 )이라는 확장된 무아설, 즉 인무아( 人 無 我 ) 법무아( 法 無 我 ) 의 이무아설 ( 二 無 我 說 )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용수의 이 무아설 은 공의 관점에 의해 붓다 본래의 연기법인 무아설을 보다 철저 하게 적용한 결과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무아설은 대승불교와 소승 불교와 구별되는 가장 주요한 특징의 하나 다 32) 그리고 용수의 이무아 설 은 일체법의 무자성과 공성을 주장함으로써 연기법의 본질을 철학적 으로 새롭게 해석한 결과로서 도출된 개념이다. 이러한 법무아 또는 이무아설 이 불교 윤리에서 중요한 결정적인 이 유는 일체 존재가 공하므로 집착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철학적으 로 해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무아 란 인간의 모든 집착과 번뇌는 어떤 대상과 관계되는 것인데, 그 어떤 대상에도 고정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 이다. 즉 서양철학의 개념으로 보자면 용수는 존재 일체를 해체하는 것 이다. 일체 존재의 실체성이 해체되면, 인간의 모든 집착과 번뇌, 욕망 31) 平 川 彰 楣 山 雄 一 高 崎 直 道 編, 윤종갑 譯, 中 觀 思 想, 113 참조, 32) 이무아설은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구별되는 특징 중 하나다. (Daisetz Teitaro Suzuki, 169)
플라톤의 덕(a)reth/)론과 용수의 공의 윤리학 23 이란 착각이요 망상이 된다. 왜냐하면 욕망과 집착이란 무엇 에 관한 욕 망과 집착인데, 용수의 무아설에 의하면 그 무엇 은 실체가 없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모든 번뇌와 집착은 일체 존재의 공성을 알지 못하는 무 지 와 고유한 자성이 있다는 착각 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된다. 이로부 터 용수에게 지혜의 성취는 이러한 착각과 무지로부터 벗어나 공성 을 참으로 아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다른 한편 용수는 아비달마의 분석적인 법의 철학 으로부터 연기법을 지켜내고자 했다. 여기서 분석적인 법의 철학 이란 당시 아비달마불교 의 법유론을 지칭하는데, 그들은 연기를 고유의 존재의 범주의 입각하 여 즉 자성론에 입각하여 사물들 사이의 인과적 관계 를 나타내는 것 으로 이해하였다. 33) 그러니까 법유론에서 연기는 사물 과 사물 사이, 즉 A라는 존재와 B라는 존재 사이의 인과적 연관이라는 것이다. 34) 용 수가 보기에 이들 입장에서 A와 B라는 불변적이고 고정된 실체성, 즉 자성( 自 性 )을 인정하게 되면 변화 는 불가능하므로 연기법 자체가 성립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성론에 입각한 연기법을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언설( 言 說 )일 뿐, 연기법 그 자체를 지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법유론 의 교설은 희론 에 불과하다. 스스로 알며 다른 것에 끄달리지 않는다. 적멸하고 희론이 없으며 다르 지 않고 분별도 없다. 이것을 실상( 實 相 )이라고 부른다.(18-9) 희론을 적멸해야 존재의 실상에 도달할 수 있다. 여기서 실상( 實 相 )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 즉 연기의 진리를 말한다. 그러므로 참된 지식에 33) 平 川 彰 楣 山 雄 一 高 崎 直 道 編, 윤종갑 譯, 앞의 책, 113. 34) 이들의 인과성에는 논리적으로 시간적 선후관계가 반드시 수반된다. 그러나 용 수는 상의성 연기 개념을 도입하여 연기법의 개념을 극대화시킨다. 그러나 이 에 관한 상세한 논의는 생략한다. 상의성 연기 에 관한 논의는 윤종갑의 학위논 문( 龍 樹 의 緣 起 說 에 대한 硏 究 中 論 을 중심으로 )을 참조할 것
24 조 해 정 도달하기 위해서 희론은 제거되어야 할 번뇌와 같다. 그리고 희론은 분 별 즉 언어와 사유에 의해 구별하는 것이다. 업과 번뇌가 사라기지 때문에 해탈이 있다. 업과 번뇌는 분별에서 (일어 나고), 그것(즉 분별)은 희론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희론은 공성에서 사라진다.(18-5) 제법( 諸 法 )의 실상은 마음의 작용이니 언어가 끊어져 있다. 발생도 없고 소멸도 없으며 적멸하여 열반과 같다.(18-7) 마음이 작용하는 영역이 사라지면 언어의 대상이 사라진다. 실로 발생하 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법성( 法 性 )은 열반과 마찬가지다.(산스크리 트어 번역) 이와 같이 용수는 업과 번뇌가 분별, 즉 사유에서 발생하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희론으로부터 발생한다고 본다. 한마디로 용수에게 번뇌의 근원은 희론 이다. 용수에게 희론은 탐진치라는 일체의 욕구와 욕망, 그 리고 무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제시된다. 희론에서 분별이 생하고, 분별에서 업과 번뇌가 발생한다. 35) 무르띠에 의하면 모든 판단과 모든 철학적 체계들은 분별이며 희론이며, 그릇된 근거부여 작용이거나 사고 의 축조물 이다. 36) 이런 점에서 용수의 희론적멸은 플라톤이 덕에 대한 참된 지식의 성취를 위해서는 몸으로부터 기인하는 온갖 욕망들과 그 로 인한 견해(d o /c a ), 즉 무지 로부터 벗어난 영혼의 정화라고 보는 것 과 상통한다. 그러나 용수의 윤리학에서 희론의 제거는 훨씬 근원적으 로 작동한다. 그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모든 번뇌 망상이 희론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에, 희론이 사라져야 경계를 구분하는 분별적 사유도 사 라지고 언어의 대상도 사라질 수 있다. 주의할 점은 여기서 부정되는 것 은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희론이라는 무자성의 공한 존재에 대한 잘못 35) 윤종갑1, 공의 언어와 깨달음: 龍 樹 의 四 句 分 別 과 戱 論 寂 滅 을 중심으로, 51. 36) T. R. V. Murti, 김성철 역, 佛 敎 의 中 心 哲 學 중관체계에 대한 연구, 269.
플라톤의 덕(a)reth/)론과 용수의 공의 윤리학 25 된 집착과 분별이라는 것이다. 37) 이런 점에서 용수의 공은 연기법을 철 학적으로 해명하여 일체의 존재론적 망상과 인식론적 언어적 착각을 제 거하기 위한 방편(methological tool)이라고 본 Padhye의 해석은 타당하 다. 38) 희론은 공성에 의해 적멸되며, 따라서 용수에게 열반은 희론이 적 멸된 공성의 상태와 동일하다. 이와 같이 공성에 의해 희론이 제거되므 로 공은 최고 지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3.2 공의 윤리학 공성은 존재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인 최고의 지혜와 동일하므로 공성 에 대한 통찰은 연기적 존재에 대한 자각과 동일하다. 따라서 용수의 공 의 부정논리에서 부정되는 것은 지혜를 가리는 착각과 무지요, 다른 이 름으로서의 희론이지 연기법이 아니다. 용수의 있음 도 아니요 없음 도 아니라는 공의 논리인 이중의 부정법은 참된 지식으로 인도하는 부 정의 역설로서의 긍정이다. 39) 부정을 통한 긍정이라는 점에서, 공의 논 리는 논박을 통해 대론 상대를 정화시킴으로써 욕망과 속견(d o /c a)에 가려진 영혼을 정화하고 지혜를 추구하도록 하는 소크라테스의 문답법 과 닮은 점이 있다. 용수의 공은 소크라테스의 논박처럼 방편으로서 가 명( 假 名 )인 것이다. 40) 용수의 부정의 논리 근저에는 공관 또는 중관( 中 37) 平 川 彰 楣 山 雄 一 高 崎 直 道 編, 윤종갑 譯, 中 觀 思 想, 135 참조, 박태원, 앞 의 논문 같은 곳 참조, Daisetz Teitaro Suzuki, 157-9 참조, 38) A. M. Padhye, The Framework of Nagarjuna's Philosophy, 58-61 참조. 그는 용수의 철학을 연기, 공, 열반, 중도의 중심 개념들은 긴밀한 내적 연관에 입각 해서 이해야지 그렇지 않고 각각의 개념들을 분리된 채로 보면 용수 철학의 전 모를 이해할 수 없다고 본다. 39) 비록 공하지만 단멸( 斷 滅 )이 아니고 비록 존재하지만 상주( 常 住 )가 아니다. (17-20) 40) 공은 말할 수 없고 비공도 말할 수 없다. 공과 비공이 함께건 함께가 아니건 말 할 수 없다. 단지 가명으로 설한다.(22-11)
26 조 해 정 觀 )이라는 철저한 철학적 입장이 놓여 있다. 용수의 공의 관점은 자아를 포함한 일체 존재에 적용되어 공관에 의해서만 모든 업과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왜냐하면 존재 고유의 불 변적 실체성인 자성을 인정하면 업과 번뇌 또한 영구불변한 것으로 되 어 고집멸도 ( 苦 集 滅 道 )라는 사성제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 성론의 입장에서는 고제든 멸제든 사제 중 어느 하나 법도 성립되지 않 으므로, 도성제를 수행해도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도 따라서 해탈도 불 가능하게 된다. 만일 고( 苦 )가 확고한 자성을 갖는다면 어떻게 집( 集 )에서 생하겠는가? 그러므로 공의 이치를 파했기에 집은 존재하지 않는다.(24-22) 고가 만일 확고한 자성이 있다면 소멸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대는 확고 한 자성에 집착하므로 멸제( 滅 諦 )를 파괴하게 된다.(17-33) 고가 만일 확고한 자성이 있다면 수도( 修 道 )는 존재하지 못한다. (반대 로) 만일 도가 수습할 수 있다면 확고한 자성은 존재하지 못한 다.(24-24) 만일 고제가 존재하지 않고 집제나 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고를 멸할 수 있는 것인 도는 어떻게 도달하겠는가?(24-25) 만일 모든 존재가 공하지 않다면 죄나 복을 짓는 자도 없다. 공하지 않은 것은 그 자성이 확고히 있는데 어떻게 지어지겠는가?(24-33) 만일 일체의 것이 공하지 않다면 생멸( 生 滅 )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 면 사성제( 四 星 諦 )의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24-20)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연기의 법칙을 본다면 능히 佛 을 볼 수 있고 苦, 集, 滅, 道 를 본다. 고 설한다.(24-40)
플라톤의 덕(a)reth/)론과 용수의 공의 윤리학 27 이와 같이 용수에 의하면 일체 존재의 공성에 바탕해서만 사성제는 성립될 수 있다. 사성제란 무아와 일체 존재의 무상성을 알지 못하는 무 지로 인한 집착하기 때문에 번뇌하는 것이며(고제, 집제) 바른 수행(도 제)으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멸제)는 소위 말해진 법 이다. 그런데 사성제의 언설이 지시하는 것은 일체의 사유와 분별을 넘어선 실재 자 체에 대한 통찰 이다. 이로부터 용수는 다시 말해진 법, 즉 언어에 대한 공성을 밝히는 것이며, 따라서 언어는 진리를 가리키는 방편 이 된다. 그대가 연기이고 공성인 것을 파괴한다면 그대는 또 세간에서의 모든 언 어관습을 파괴하는 꼴이 된다.(24-36) 용수에 의하면 참된 지혜는 말해진 사성제의 문자적 의미를 초월하는 것이나, 그 언어를 방편으로 하지 않고는 참된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는 표현된 언어 자체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언어 자체와 전적으로 무관한 것도 아니다.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비유 와 같 이 여기서 언표된 사성제가 없으면 참된 지혜에 도달할 수도 없다. 그러 나 언표된 사성제 자체가 진리 자체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고집멸도라 는 언설 역시 공성인 것이다. 다른 한편 용수의 공관은 있음 과 없음 이라는 양극단을 떠난 중 도 로서 중관의 방법이다. 중관의 입장은 나와 나의 것 이라는 동일성 과 타자라는 차이와 같은 대립을 떠나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즉 진리를 보게끔 한다. 만일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나의 것 이 존재하겠는가. 나와 나의 것 이라는 생각이 없어지므로 무아의 지혜를 얻었다고 말한 다.(18-2 안이건 바깥이건 나와 나의 것이 모두 사라져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 든 취( 取, 집착)이 사라지게 되고 취가 사라지면 몸도 사라진다.(18-4)
28 조 해 정 나의 것이라는 관념을 떠나고 자의식(나에 대한 생각, 즉 코기토 ) 41) 이 사라진 그런 자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것이라는 관념을 떠나고 나라는 관념을 떠난 것을 보는 자는 제대로 보는 것이다.(18-3, 산스크 리트어 번역) 모든 분별의 핵심은 나와 나의 것 에 대한 구별에 있다. 그리고 이러 한 희론 분별은 권력욕과 연관되는 것이며, 공성의 지혜를 성취하는 것 은 인간의 권력욕을 근저에서부터 해체하는 것이다. 42) 그러므로 나와 나의 것 이 사라지는 공성은 부정의 논리를 넘어서는 긍정으로서 모든 것을 포용한다. 또 공을 아는 것은 곧 열반으로서 윤리적 인간의 완성이 기도 하다. 공의 입장에서 열반이란 존재의 본성에 내재해 있는 공성의 상태에 도달함 을 의미하며 바로 그 장소가 정신의 전환 이 일어나는 마 음자리다. 43) 공을 체득한 사람은 생명과 힘으로 가득 채워져서 일체의 중생에 대한 자비를 품게 된다. 44) 그러므로 용수의 윤리학에서 공성의 지혜는 자비행의 실천을 수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공의 윤리학에서 는 어떤 윤리학보다 지행합일 적인 성격이 강조된다. 지행합일의 관점에서 공관의 탁월성은 무엇보다도 철학적 입장으로 서뿐 아니라 실제로도 세속과 분리된 승가만의 열반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일치시켰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45) 대승불교의 실천수행에 서 깨달음을 구하는 구도( 求 道 )의 과정과 중생을 위한 구제( 救 濟 )의 과 정은 동일한 세속과 동일한 시공의 장소에서 수행된다. 세속과 분리되 지 않는 대승의 구도의 과정은 구제( 救 濟 )의 서원을 실천하는 이타( 利 他 )가 전제되므로 양자는 동일한 과정의 양 측면으로 된다. 물론 열반을 41) David J. Kalupahana 1, 앞의 책, 346. 42) 박태원, 129 참조. 43) Daisetz Teitaro Suzuki, 128. 44) 나카무라 하지메 지음, 남수영 옮김, 용수의 중관사상 299. 45) 불교 승가의 현실 정치와 사회와 분리되는 배경에 대해서는 이범홍의 불교의 사회참여 문제 를 참조할 것.
플라톤의 덕(a)reth/)론과 용수의 공의 윤리학 29 구하는 수행이 곧 선을 실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양 과정이 동일한 선의 실현임은 소승도 마찬가지지만, 세속과 분리된 소승의 수행은 상대적으 로 열반을 추구라는 자리( 自 利 )가 중심이 된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의 윤리는 지혜를 구하는 구도와 자비를 실천하는 구제가 하나의 보살도 ( 菩 薩 道 )로 완전히 통일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열반이 세간과 다르 지 않다 는 공의 관점이 바탕이 된다. 여러 인연을 취해 생사를 윤회하는 중에 그 모든 인연을 취하지 않는 것, 그것을 열반이라고 부른다.(25-9) 열반은 세간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세간도 열반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25-19) 열반의 참된 한계와 세간의 한계, 이 양자의 한계는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다.(25-20) 열반과 세속이 하나라면, 세속의 악이 선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개인 의 열반 성취는 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현상의 세속이 그 대로 자비행의 실천 장소로 된다. 공관으로 보는 선악은 고정된 것도 이 분법적으로 구별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세속의 삶의 현장은 마음의 심해탈( 心 解 脫, ceto-vimutti)과 혜해탈( 慧 解 脫, Pañña-vimutti)을 성취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 善 )으로 전환시키는 장소인 것이다. 마음에 지혜가 증대하면 그 만큼 번뇌는 줄어들 것이고 반대로 번뇌가 증대하면 그 만큼 지혜는 감소할 것이다. 마음에서 번뇌가 줄어들어 번 뇌로부터 마음이 완전히 벗어난 상태를 심해탈( 心 解 脫, ceto-vimutti)이 라고 하는데, 이를 지혜를 중심으로 말하면 지혜가 증대하여 그 영향으 로 번뇌가 소멸한 것이다. 그런데 무명( 無 明, avijjā)의 멸( 滅 )이 명 ( 明,vijjā)이요, 지혜이며, 무명에서 마음이 완전히 벗어난 상태가 혜해
30 조 해 정 탈( 慧 解 脫, Pañña-vimutti)이다. 그러므로 심해탈과 혜해탈은 보는 관점 에 따른 명칭상의 구분일 뿐이며 마음자리에서 보면 심해탈이 다름 아닌 혜해탈인 것이다. 46)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일한 마음 안에서 지혜는 증대시켜야 하는 것이고 번뇌는 제거되고 정화되어야 할 대상 이다. 마음의 내적 상 태를 중심으로 하는 불교의 선악의 개념은 플라톤의 행위 능력으로서의 영혼의 건강 불건강 상태로 보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47) 선과 악이 동일한 마음 안의 작용이므로, 이제 지혜는 성취해야 할 목표 이면서 동시에 번뇌를 제거하는 수단과 방법 이 된다. 왜냐하면 지혜 도 번뇌도 모두 분리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동일한 마음의 상반된 작 용이기 때문이다. 48) 이러한 마음의 전환을 중심으로 보는 번뇌와 지혜 관계는 용수에게서도 다르지 않다. 오히려 획득되는 것도 아니고 도달 되는 것도 아니며 단멸된 것도 아니고 상주하는 것도 아니며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닌 (25-3) 열반이란 한 마디로 공성의 상 태를 말한다. 49) 공성은 모든 욕망과 번뇌가 정화된 무집착의 텅빔 상태 로서 정신의 전환이 된다. 이제 내면의 정신에서 공성을 성취한 사람은 모든 존재를 공성의 눈으로 보고 실천한다. 그러나 철저하게 마음 을 중 46) 김용환2, 위의 논문, 413. 47) 원시근본불교에서 선과 악을 지칭하는 개념은 각각 쿠살라(Kusala, 선)와 아쿠 살라(Akusala, 악)이다. 선이란 건전한 혹은 건강한 의 의미를 가지며, 악은 불건전한 혹은 건강치 못한 등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선하다 라고 하는 것 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하다는 말이고 악하다 는 또한 정신적 육체적으 로 건강치 못하다는 뜻이 된다.(Kalupahana 3 윈시근본불교철학의 현대적 이 해, 97) 48) 김용환2, 위의 논문, 410-412 참조. 49) 불교가 선악을 공하다고 할 때 그것은 선과 악이 없다는 의미에서 공하다는 것 이 아니다. 선악은 고정적인 것도 아니고 절대적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도 아니 다. 선악은 연속적이고 상호규정적이고 상황의존적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선악 은 공하다.(안옥선3, 불교의 선악론, 6)
플라톤의 덕(a)reth/)론과 용수의 공의 윤리학 31 심에 두는 불교의 사회적 실천은 처음부터 사회적인 삶의 장소를 전제 로 하는 플라톤의 덕론과는 다르다. 불교에서 마음 안의 지혜가 욕망과 집착을 제거하는 유일한 수단인 것은 아니나, 최종적인 장소도 마음이 고 그 완성도 마음 자체의 전환이 되는 것이다. 즉 아는 것 이 되는 것 이다. 그러므로 용수의 윤회와 열반은 하나 라는 입장은 전환의 장소로 서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사회적 실천과 다르지 않음을 철학적으로 해 명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덕론에서는 마음 내부가 아닌 선악이 충돌하는 사회로부터 출발하고 사회적 적용을 전제로 하면서 논의되는 데 반해, 불교에서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마음 을 살필 것을 주문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 를 보인다. 이는 한편으로는 플라톤의 덕론에서는, 정치적 공동체와 분 리되었던 불교의 승가 ( 僧 伽 )와는 달리, 50) 개인의 완성과 정치적 공동 체의 선의 실현 장소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무지 를 깨우치기 위한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철저하게 정치적 공동체 안에 서 이루어지고 있다. 다른 한편 불교의 윤리학은 서양과는 달리, 세계를 바꾸는 방식이 아니라 주관의 내면적인 반응 방식을 바꾸는 것에 중점 을 두었던 사정과도 관련이 있다. 51) 플라톤은 참된 지식의 본질을 밝히 기 위해 국가론 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행위를 정 치철학 이라는 제도적 대안 모색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이러한 차이로부 터 용수의 공의 윤리학에서는 52) 선악과 지혜가 동일한 정신의 내적 작 용임이 일관되게 견지되는 데 반해, 플라톤에서 개인과 사회는 일정한 긴장관계를 형성하게 되며, 이러한 개인과 사회의 긴장관계는 장차 의 무론적 윤리학의 전개를 예고하고 있다. 53) 이로부터 또한 열반과 세속 50) 이범홍, 불교의 사회참여 문제, 177-182 참조. 이런 점에서 대승불교는 정치 적 공동체와 유리된 승가 중심의 소승불교와 대립된다. 51) 안옥선1, 불교윤리의 현대적 이해, 69 참조. 52) 이는 비단 용수 윤리학의 특징일 뿐 아니라 전체 불교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플 라톤 윤리학과 통약 불가능한 차이의 장소일 것이다.
32 조 해 정 을 하나로 보는 공의 윤리학에서는 원리적으로 인식과 존재가 일치하고 있지만, 플라톤에서는 반드시 일치한다고는 볼 수 없는 여지가 있게 된 다. 4. 상호문화철학적 읽기 플라톤 윤리학에서 소크라테스의 실천적 능력을 보증하는 지혜 내지 참된 지식의 내용이나 영혼의 전환에 대한 논의는 이성과 믿음의 극단 적인 분리로부터 출발한 근대서양철학의 전통에서 의도적으로 회피되 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플라톤이 X 그 자체 에 대 한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을 주로 언어적 논의 에 의존하여 전개함으로 서 최고의 지식 에 대한 논의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에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철학에서 인식의 목표는 결코 한정된 이론 적 정보적 지식의 영역에서 한정되지 않았으며, 지식의 추구와 현실 구제라는 실천이 전적으로 분리되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플라톤 철학을 축소시키고 이론과 실천을 분리시켜 철학의 영역에서 지혜를 제 외시킨 책임은 플라톤에 있는 아니라, 플라톤 철학에 대한 해석의 태도 에 기인하는 바 크다 하겠다. 시민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기 위해서, 소크라테스가 무지자를 자처한 이유는 붓다가 언어적 명제로 규정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물음에 대하 여 무기 로써 침묵을 지킨 이유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는 칸트의 변 증론 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세계의 시초의 유무와 같은 문제들은 있다 53) 소크라테스 역시 정치권력과의 불화로 사형을 받게 되지만, 그 외에도 플라톤 은 곳곳에서 참된 정치가 내지는 선의 이데아를 관조한 철학자는 아무도 자발 적으로 정치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기보다 못한 자의 지배를 받도록 하 는 벌 에 의해서 또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로써 이들로 하여금 통치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플라톤의 덕(a)reth/)론과 용수의 공의 윤리학 33 고 해도 모순되고 없다 고 해도 모순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소크라 테스가 문답의 방편으로 삼은 질문에서, X 라는 윤리적 가치 개념 그 자체는 주어와 술어로 구성되는 명제로 완벽하게 규정될 수 없는, 일종 의 말해질 수 없는 법 과 같은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언어적 명제가 아닌 X 그 자체 라는 진리에 의거하여, 경험적 사례와 언어로 표현되는 상대방의 주장 자체로부터의 모순에 근거한 논박 의 방법으로 대화 상 대자로 하여금 내면을 성찰하도록 유도하였다. 반면, 용수는 공의 관점 으로 언어적 개념적 규정이 곤란한 난제들을 이중의 부정법으로 고정된 언어가 아닌 언어 너머의 의미로 향하게끔 한다. 요컨대 소크라테스의 무지와 용수의 공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진리를 향하도록 하는 언설이 근거하는 하나의 입각점과 같은 유사성을 가진다. 여기서 용수의 공의 논리는 서양의 형식논리와 동일성 철학 54) 으로 는 불가능한 삶과 실재의 영역을 드러내는 데 대단한 탁월함을 보인다. 그리고 용수의 비밀은 철저한 언어와 사유의 한계 에 대한 인식에 근거 해 있다. 서양과 달리 불교의 지식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언어와 개념 으로 표현되는 사유되고 분절(articulated)된 지식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 이다. 불교에서 최고의 지식은 사변적으로 논증되는 정보적 지식이 아 니라 깊은 내적 성찰을 통하여 자각하는 직접적 지식으로서 그 자체로 영혼의 전환이다. 내적 전환은 나와 타자, 선과 악을 구별하는 모든 분 별에 의존하여 보는 상식적인 세계인 따라서 근본적으로 견해(d o /c a)일 수밖에 없는 세속의 진리 를 초월한 마음의 변환이다. 불교에서 이러한 전환을 성취한 사람을 붓다, 즉 각자( 覺 者 )라고 한다. 붓다는 완전한 지 식을 자각한 자라는 점에서 플라톤의 철인왕 과는 상당한 겹침이 있으 며, 서양철학에서 현자는 언제나 인간적 지혜 의 한계 안에 있다는 점에 서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포괄적으로는 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러 54) 서양의 동일성철학에 대한 논의는 주광순3, 유럽 중심주의 비판을 위하여, 312-4를 참조할 것.
34 조 해 정 나 플라톤과 용수는 그것을 표현하고 서술하는 방식에서는 상당한 차이 를 보인다. 물론 플라톤의 철학을 통일적인 구조로 본다면, 초기 대화편 에서 사용하는 소크라테스의 무지와 논박적 문답법은 용수의 공에 입각 점 및 이중부정의 공의 논리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중기 대화편 이후 사용하는 이데아론 이라는 언어적 방편은 용수가 사용하는 공이라는 고정되지 않은 유동성의 방편과 다르 다. 55) 용수의 공관에 의하면 열반과 윤회는 하나 일 뿐 아니라 열반이란 곧 공성의 성취를 의미한다. 이러한 입장은 특히 대승불교 고유의 실천성 을 잘 보여준다. 열반이 곧 공성이기 때문에 구도와 구제는 분리되지 않 고 통일되는 보살( 菩 薩 ) 이라는 보편적 윤리적 이상이 제시될 수 있다. 반면 플라톤의 덕론에서는 개인의 선의 실현 장소가 정치적 공동체와 분리되지 않는다. 따라서 플라톤의 윤리학이 출발하는 장소는 각자의 마음 자체라기보다는 선악이 충돌하는 사회로부터 출발하고 사회적 적 용을 전제로 하면서 논의된다는 점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로부터 플라톤 윤리학에서는 개인과 사회가 일정한 긴장관계를 형 성하면서, 한편으로 현실과 유리된 잉여의 사변적 지식 의 산출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구제 자체보다 제도적 구제의 해결을 모 색하려는 서양철학의 경향성으로 응축되었다고 생각된다. 상호문화철학적 읽기에서 플라톤이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소크 라테스의 무지 와 지혜 를 해명하는 데, 용수의 공관을 방법을 적용하 면, 목욕물을 버리면서 지혜 라는 아기까지 버리는 우를 범한 근대서양 철학적 전통의 오류를 잘 드러낼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그러한 오류 를 지닌 서양 근대문명의 영향이 다만 환영 으로 무시할 수 없다면, 불교 역시 사회정치적 영역에 대한 분석의 도구로써 플라톤 55) 용수의 공과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관계는 이 논문의 중심 주제가 아니므로 그 에 대한 세부적 논의는 생략한다.
플라톤의 덕(a)reth/)론과 용수의 공의 윤리학 35 적 사유방법이나 제도적 해법들을 방편 으로 수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양자 사이의 고유성이나 경계가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며, 또 사라져서도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적 방법이 방편 으 로서 유용한 것이라면 최후의 의미는 내부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만 들어 줄 수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상호문화적 읽기는 진행될수록 각각의 내부를 풍부하게 하면서 겹침 또한 더욱 중첩되는 것을, 그래서 전통은 있으되, 소통되는 경계의 지점도 다양화하는 것을 지향한다. 따 라서 전통의 고유성이 훼손되는 소통이 아니라 각각의 내부를 풍부하게 하면서도 겹치는 불일불이( 不 一 不 異 )의 지점들 또한 증대할 수 있는 길 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각의 고유성과 차이에 대한 상 호 이해와 존중의 태도가 필수적으로 선행되고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5. 닫는 말 철학과 종교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물음은 동과 서, 지역과 시간을 초월하여 여전히 유의미한 질문일 것이다. 이 물음은 그냥 사는 것 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 에 관한 물음이기 때문에 질문한 사 람 자신이 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이 지혜 또는 깨달음을 얻는 구 도( 求 道 )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각한 것을 문자화하거나 실천 으로 드러내는 것이 응답의 과정이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에 대한 응 답은 시대와 장소, 각각의 철학적 입장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다. 그리고 그 내용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결합하여 일정한 관습적 특질 을 만들고, 관습은 다시 철학과 사유에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고유한 문 화적 전통으로 응축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문화들 사이에 연관과 교 류의 정도가 낮을수록, 그리고 각각의 역사와 전통이 깊을수록 문화들 사이의 통약 가능성보다는 고유성이 더 짙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상의
36 조 해 정 어떠한 문화권도 절대적으로 폐쇄된 고유의 전통으로 형성되지는 않았 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어떠한 전통의 고유성이나 차이에도 상대성 의 측면은 있을 것이다. 상호문화철학적 관점에서 어떠한 철학적 입장이나 전통도 절대적 일 치도 불일치도 아니다. 각각의 입장과 전통은 고유한 독자성을 가지면 서도 통약 가능성 또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문화들은 내부적 으로는 다양이지만, 외부적으로는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내 부와 외부는 그처럼 날카롭게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상호문화적 관점 은 문화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하나의 전통 내부에서도 수행될 수 있으 며, 수행되어야 한다. 56) 그러므로 상호문화적 입장에서 각각의 문화들 사이는 물론이고 각각의 전통 그 자체 또한 불일불이( 不 一 不 異 )가 된다. 가령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용수도 또한 다양한 해석의 전통이 있음을 인정한다면, 완전한 하나가 아니라 불일불이라 할 것이며, 마찬가지로 서양에서 플라톤 역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그 다름이 플라톤 아닌 것이 아니지 않은가. 문화들 사이의 소통에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내부를 풍부하게 하면서도 겹침 또한 더욱 중첩될 수 있는 방법 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Platon, 박종현 역주 국가 정체( 政 體 ), 서광사, 2003, 박종현 역주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56) 상호문화철학은 다른 문화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한 문화 내에서도 수행한다. 유럽철학, 인도철학, 중국철학을 하나로 만드는 논의는 이념화하는 작업이 다. (Claudia Bickmann, R. A. Mall 외, 김정현 엮음, 상호문화철학의 논리와 실천 중 R. A. Mall 의 상호문화적 관점에서 바라보기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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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덕(a)reth/)론과 용수의 공의 윤리학 41 <Abstract> Plato's discourse on virtues and Nāgārjuna's ethics from perspective of emptiness Jo, Hae-Jeong(Pusan Univ.) It is very important theme in the realm of ethics how we see the the relationship between knowledge and deed because the knowledge of ethical issues focuses 'how to live'. Plato and Nāgārjuna have a common ground in that there is no division between knowledge and deed on ethical issues. In this paper, I will try to read their ethics from intercultural-philosophical perspective. Socrates is an ideal model whose action is coincided with knowledge in PLato's works. He claimed that he was an ignorant man, although he was acknowledged by a by a priestess of temple as the most wise man in Athens and he strongly believed his mission was to let Athenians to recognize their own ignorance. The knowledge is 'how to live' or the knowing of virtue(a)reth/) itself. The state of a soul, freed from desires and ignorances, purified and reached to the virtue itself, is coincided with virtue itself. These men and women are 'the wise', and also philosophers are those who pursuit the very wisdom. While the ideal of buddhist ethics, is to be freed from desires and passions and aims at realizing wisdom, it is based on revolutionizing inner state of the mind. For this reason, buddhist ethics is beyond the
42 조 해 정 coincidence with knowledge and deed, and extends itself to the perspective of unified recognition and being. Nāgārjuna reinterpretates the view of buddhist ethics with emptiness(śūnya). All of the passions and ignorances are the images of the language( 戱 論, prapañca) and they are destructed by emptiness in Nāgārjuna's ethics. According to him, the best knowledge is nothing but an achievement of the emptiness. It is not only a void state to extinguish all of languages, but also an absent state which absolutely extinguishes discrimination of me and mine from objects and passions. Nāgārjuna says that the mundane world and nirvana are one because if there is no discrimination of language, there is no discrimination of me or myself and others. Therefore, according to him, it is united by principle which achieves inner revolution through the investigation of knowledge and social practice. According to my intercultural-philosophical reading, the first place of overlapping is the ethical aim which is coincided with the knowledge and deed. And there is an overlapping point as well in that wisdom or the best knowledge is a purified soul free from all of desires and selfishness as well as an inner ability to do goodness. Futhermore Nāgārjuna's view of language(prapañca), an obstacle to wisdom, overlaps with Plato's desires, opinions(d o /c a) and ignorance-oriented body, because his view includes all of desires and illusions and ignorances, too. So the more intercultural-philosophical reading proceeds, the more their contents and enrich each other. Therefore I hope that the particular traditions will be kept while the overlapping places are enriched. What is an important point here is to search for the method to enrich inner contents as well as overlapping
플라톤의 덕(a)reth/)론과 용수의 공의 윤리학 43 points. Key words: Plato(Socrates), Nāgārjuna, ethics, emptiness(śūnya), virtue(a)reth/), intercultural-philosophy 투고일 : 2011. 11. 12. 심사일 : 2011. 12. 03. 게재결정일 : 2011. 12. 21.
동아시아불교문화 제8집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1 칸트의 二 元 論 과 나가르주나의 二 諦 說 연구 1)박 종 식 * 국문초록 칸트의 이원론과 나가르주나의 이제설은 인식과 실천, 세속제와 승의 제, 현상계와 물자체계, 지식과 지혜라는 두 가지 측면을 절묘하게 결합 시키고 있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한다는 역설을 통해서 칸트와 나 가르주나는 우리에게 절대적 진리를 체험하라는 강조한다. 언어적 진리 는 언어적 진리 자체를 넘어서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자기모순 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언어의 한계와 역설을 드러냄으로써 언어에 의 지하지만 결국 언어를 넘어서는 방식을 체득해야 한다. 이처럼 언어가 지닌 이중적 측면을 체득할 때 언어는 더 이상 버려야 할 대상도 아니 고 집착해야 할 대상도 아니고 우리에게 진리의 길을 인도해 주는 수단 이 된다. 따라서 절대적 진리는 개념적 사유가 아니라 직관과 체험을 통 해서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에게 인간의 본성은 도덕적 존재이지 만, 나가르주나에게 인간의 본성은 佛 性 을 지닌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두 사람 모두 이론적 인식을 넘어선 실천적 측면을 강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칸트는 이것을 실천이성의 우위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인 간은 누구나가 자연인과성 계열을 벗어나서 자유인과성을 시작할 수 있 는 결단의 자유를 지니고 있다. 세속제를 문자적으로 이해한다고 하더 * 부산대학교 철학과
46 박 종 식 라도 체득하지 못한다면 승의제의 대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그리고 자 연인과성 계열을 벗어나서 자유인과성 계열을 시작했다고 해서 자연인 과성 영역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유인과성의 계열을 실천하는 사 람은 자연인과성 속에서 살아가면서 동시에 자연인과성을 넘어서 자유 를 누리는 것이다. 세속제의 진리를 인식하고 이를 체득한 사람은 여전 히 세간 속에서 살면서 세간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세간을 부정하는 것 이 아니라, 세간 속에서 살아가되 세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세간 속에서 세간을 벗어나는 것이며, 이를 일러서 출세간은 세간과 같 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다는 不 二 法 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칸트와 나가르주나가 추구하는 목표가 자유라는 점에서, 그리고 이론적 측면보다는 실천적 행위를 우위에 둔다는 점에서, 결국은 인간 본성의 긍정성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상당한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 러나 인간의 본성을 칸트는 도덕성으로 본 반면 나가르주나는 공성과 불성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주제분야: 불교철학, 중관철학, 서양철학, 비교철학 주제어: 이원론, 二 諦 說, 세속제, 승의제, 해탈, 자유, 표현불가능성 1. 들어가면서 칸트는 감성과 오성을 구분하면서 감성에 주어진 대상을 범주화함으 로써 비로소 인식이 성립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인식은 모두 범주화 작 용의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범주화 작용을 통해서 인간 인식의 보편성 과 필연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범주화 작용, 즉 감성적 재료에 인 간의 지성화 작용을 적용할 때에만 비로소 인간 인식이 성립된다. 이러 한 범주화 작용은 인간 인식이 성립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이러
칸트의 二 元 論 과 나가르주나의 二 諦 說 연구 47 한 범주화, 지성화 작용이 없다면 인간의 인식은 성립할 수 없고 오로지 지각의 광시곡, 즉 지각들이 혼란스럽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현상들만이 존재할 것이다. 이런 지각의 광시곡은 영국경험론의 한계이다. 따라서 인간 인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혼란스런 지각들을 통일시킬 수 있는 통일화 작용, 지성화 작용, 범주화 작용이 반드시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범주화는 인간 인식의 성립을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인 작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범주화 작용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물들을 범주를 통해 서 사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범주화 작용을 통해서 구성된 사물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 이 아니다. 범주에 의해서 구성된 사물과 범주화 작용이 가해지기 이전의 사물, 즉 물자체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구분이 바로 칸트 철학에 내재해 있는 現 象 과 물자체의 二 元 論 이라는 문제이 다. 인간의 인식은 오로지 범주를 적용해서 나온 결과이기 때문에, 범주 를 적용하기 이전의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모습에 대해서는 인간은 전 혀 알 수가 없다. 범주화 작용을 통해서만 인식이 성립하기 때문에 범주 는 인식이 성립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물론 범주만 있어서는 인식이 성립할 수 없다. 감성 형식에 인식 자료가 주어지고 이러한 자료를 범주 화시킬 때 비로소 인식이 성립한다. 따라서 감성에 주어지기 이전에 있 는 그대로의 사물은 우리의 인식 형식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라고 규정할 수 없는 물자체인 것이다. 규정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의 인 식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며,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은 우리의 인식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규정될 수 있다는 것과 규정될 수 없다 는 것은 인식과 비인식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 현상은 규정 되고 인식될 수 있는 영역인 반면 물자체는 규정할 수도, 인식할 수도 없는 영역이다. 나가르주나 역시 언어로 표현된 진리의 영역과 언어를 넘어서 있는 진리의 영역을 구분하는데, 전자는 世 俗 諦 이고 후자는 勝 義 諦 인데, 이러
48 박 종 식 한 두 가지 진리 영역을 二 諦 說 이라고 한다. 세속제는 언어로 표현된 진 리이기 때문에 이러한 진리는 문자로 표현된 경전이나 말로 전해지는 교육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세속제를 방편으로 삼아 말과 언어와 문자 를 넘어선 영역으로 직접 육박해 들어갈 때 비로소 언어로 표현된 진리 를 證 得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직접 證 得, 體 得 된 진리가 勝 義 諦 이다. 결 국 나가르주나는 이론적 인식인 세속제와 실천적 체험인 승의제를 구분 하면서 이론적 인식은 실천적 체득을 위한 실마리이자 방편인 것이지 결코 절대적 진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제설에 근거할 때에 만 해탈의 경지, 아라한의 지위에 도달할 수가 있다. 진리에 대한 이론 적 인식이 곧 진리의 체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진리는 이론 적인 것이 아니라 인식 초월적인 것이며, 실천적 체득이라는 것이다. 언 어와 문자로 표현된 진리를 넘어서서 이론적, 명제적 지식을 직접 체득 할 때에만 승의제에 이르는 것이다. 물론 언어와 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 는 진리를 표현하는 것은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역설과 모순은 언어적 진리의 한계를 통해 진리의 실천성을 드러내 주는 미장센 (mise-en-scène)이다. 이처럼 칸트와 나가르주나는 현상과 물자체, 세속제와 승의제, 인식과 실천을 구분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과 나타나지 않는 것, 우리가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인식과 초월과 같은 인식론 과 존재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결국 그들은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 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세계가 진정으로 존재하는 세계인가, 우리는 어 떻게 진정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가, 어떻게 보는 것이 세 계를 올바로 보는 방법인가, 진정한 삶은 어떤 삶이며 그런 삶에 이르는 길은 어떤 것인가 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삶의 목적과 방향 을 각각 다르게 제시하는데 그 근원적인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칸트의 二 元 論 과 나가르주나의 二 諦 說 연구 49 2. 칸트의 二 元 論 과 나가르주나의 二 諦 說 칸트 이전의 서양철학은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고정 불변의 실체에 대 한 인식을 철학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런 실체가 정신 또는 자아라고 간주하는 관념론과 고정적이고 불변적인 실체는 물질이며 정신은 물질 로부터 발생한 파생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유물론이 대표적인 실체 중심 의 철학이다. 서양철학은 이처럼 출발부터 고정불변한 실체가 무엇이며, 그런 실체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 다. 서양 고대에는 영원불변하는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나 플라톤의 이데 아와 같은 실체가 철학의 중심이 되었다. 중세에 이르러서는 플라톤 철 학을 신학에 이용하여 영원불변하며 전지전능하고 至 高 至 善 한 절대자 神 을 제1실체나 不 動 의 原 動 者 로 간주하면서 신을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논증이 철학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신과의 정신적, 직관적 합일이나 沒 我 의 방식을 통한 신존재 체험이 중시되기도 했다. 이론적 논증을 통해 서는 신을 올바로 인식할 수 없기에 신에 대한 인식은 직관적, 초월적, 신비적 합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르네상스의 분위기에 힘입어 신중심의 철학에서 인간중 심으로 철학으로 철학의 중심을 변경시킨다. 실체에 대한 존재론이 아 니라 실체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인식론으로 철학 방법론을 변경시킨다. 그는 방법적 懷 疑 라는 철학적 방법론을 통해서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라는 근대철학의 대명 제를 확립시킨다. 神 이 아니라 自 我 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철학의 토대가 된 것이다. 물론 그는 외부 세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처 음에는 거부했던 신을 이차적으로 끌어들이기는 한다. 그러나 데카르트 는 근대철학을 자아 중심의 철학으로 확립했지만, 여전히 자아의 실체 성을 부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자아를 불변하는 실체로서 주장한다. 실 체를 존재론적으로 체계화하는 철학으로부터 실체를 인식론적으로 정
50 박 종 식 당화하는 방법론의 변경을 수행했지만 그는 여전히 고정불변한 실체를 전제하는 철학에 머물러 있었다. 이처럼 스스로 존재하는, 자신의 존재 를 더 이상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이러한 실체가 철학의 중심이 된 것이 서양철학의 전체적인 흐름이었다. 반면 흄은 모든 인식의 근원은 감각적 지각 또는 감각 인상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감각 인상으로 환원 되지 않는 것은 모두 상상을 통해서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 자아, 세계, 대상, 인과율 등은 모두 감각 인상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상을 통해서 꾸며낸 것에 불과하게 된다. 자아, 세계, 대상, 인 과율 등은 우리의 주관적 습관의 산물일 뿐이며, 결코 영원불변한 실체 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감각 인상들과 그 것으로 환원되는 감각적 지각들, 관념들뿐이다. 흄은 이처럼 무아론, 무 세계론을 주장하면서 실체를 부정하는 서양 철학의 이단아에 속한다. 흄이 이처럼 자아, 세계, 인과율을 부정하는 것에 충격을 받은 칸트는 독단론의 선잠에서 깨어난다. 흄이 실체에 가한 비판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불변적 실체를 정당화하는 형이상학은 불가능하다고 칸트는 주장 한다. 따라서 새로운 형이상학이, 고정된 실체를 전제하지 않는 새로운 종류의 형이상학이 요구된다. 영원불변한 실체에 대한 인식은 불가능하 지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인간적 인식은 분명 우리에게는 정당한 것이 다. 이제는 영원불변한 진리가 아니라 인간적인 진리, 인간에게는 정당 화되는 진리가 요구된다. 대상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 중심적 진리관은 대상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다는 독단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독단적 관점은 신적 관점에 의거한 관점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러한 신적 인식능력이 없기 때 문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에게 드러난 현상뿐이다. 오로지 현상에 대해서만 우리는 알 수 있다. 현상의 배후에 있다고 생각되는 사 물 그 자체(Ding an sich)는 다만 생각 속의 존재 (ens rationis)일 뿐, 결코 현실적인 존재가 아니다. 생각 속의 존재는 우리의 감성 형식인 공
칸트의 二 元 論 과 나가르주나의 二 諦 說 연구 51 간, 시간 속에 주어진 질료에 범주를 적용할 때 성립하는 현상적, 객관 적 존재가 아니다. 물자체는 감성형식과 오성형식을 넘어서 있다는 의 미에서 현상에 대비되는 가상적 존재에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의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단지 우리의 경험의 한계 바깥에 있 을 것이라고 생각된 X일 뿐이다. 그런 물자체 X는 우리의 인식 대상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우리의 감성, 오성이라는 규정을 넘어서 있기 때문 에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물자체 X, 경험적 대상과 구 별된다는 의미에서 선험적 대상 X라고 불린다. 따라서 물자체 X는 우 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인식할 수도, 규 정할 수도, 우리에게 주어지지도 않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非 存 在 와 다 름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칸트는 외부 대상을 수동적으로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는 반영 론 또는 모사설을 거부하고 대상은 우리 주관의 형식에 의해서 구성된 다는 인식 구성설을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대상은 우리 주관이 구성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 주관이 구성하지 않는 것은 우 리에게 주어질 수 없고, 우리 주관이 구성하지 않는 대상은 어떤 모습일 까 하는 문제는 원리적으로 제기될 수 없다. 이처럼 대상중심의 인식론 에서 주관중심의 인식론으로 이행한 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라고 한 다. 1) 이러한 전회를 통해서 대상은 우리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우리 주관에 의해서 구성된 주관적 대상일 뿐이다. 물론 이때의 주관적이라는 의미는 개인적 주관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보 편적으로 주어져 있는 인간 주관의 형식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보편 적인 인식 형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각자에게 주어진 현상을 보편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존재는 더 이상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 형식에 의해서 구성된 이차적인 의미의 존재이다. 이것의 의미는 외부 1) KrV( 순수이성비판 )., B ⅩⅥ-ⅩⅦ 참조.
52 박 종 식 대상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다만 구성된 현상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외부 대상의 실체성은 칸트에 와서 비로소 사라지게 된 다. 반면 칸트에게 있어서 각 개인의 인식을 통일하는 경험적 자아는 감 성과 오성의 대상으로서 인식 대상이다. 이것은 외적인 물질적 대상이 인식 대상이듯이 내적인 주관적 의식 역시 인식의 대상이 된다. 이런 측 면에서 물질 대상뿐만 아니라 주관적 의식 역시 현상으로서 인식 대상 이 되기 때문에, 물질과 주관적 의식은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불변적 실체가 아니다. 그러나 감성의 질료에 오성의 범주를 적용해서 경험을 통일하는 근원적 의식은 개별적인 주관적 의식과는 구별된다. 개인의 경험적 의식을 통일하는 개별적 자아와는 달리 인간의 의식 구조는 모 든 사람에게 동일하며, 이러한 보편적 자아를 순수 의식 또는 순수 통 각, 선험적 자아라고 부른다. 이러한 선험적 자아는 감성과 오성이라는 인간 주관의 형식의 적용을 받지 않고 그런 주관적 형식을 넘어서 있다. 즉 선험적 자아는 인식 대상이 아니라, 인식 대상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 적 조건이다. 따라서 경험 대상과 주관적 자아의 통일성을 가능하게 하 는 선험적 자아는 인식 대상이 아니라, 인식의 성립 근거가 된다. 칸트 에게 있어서 이러한 선험적 자아는 인식의 대상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이 역시 물자체이다. 우리의 인식 한계를 넘어서 있기 때문에,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따라서 인식 대상인 현상과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물자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칸트는 이러한 선험적 자아의 존재가 없으면 인식이 통일될 수 없고 그럴 경우 우리는 오직 지각의 혼란스러운 광상곡만이 펼쳐질 것 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경험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통일적 인식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경험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선험적 자아는 경험의 통일성을 가능하 게 하는 필요조건이다.
칸트의 二 元 論 과 나가르주나의 二 諦 說 연구 53 그런데 이러한 선험적 자아는 실체인가? 칸트는 선험적 자아를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 파악하고 있는가, 아니면 선험적 자아도 현상으로서 파악하고 있는가? 또는 선험적 자아는 실체가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서 파악되는가? 칸트는 선험적 자아를 고정된 실체로서 파악하고 있지 않 다. 선험적 자아는 다른 것이 없이도 그 자체로 존재하며, 자신의 존재 를 위해서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그러한 실체가 아니다. 경 험적 현상이 통일될 때 선험적 자아의 존재가 요청되는 것이며, 경험적 통일성 없이는 선험적 자아는 드러나지 않는다. 경험적 통일성을 통해 서 선험적 자아의 통일성을 추리할 수 있으며, 선험적 자아는 오직 경험 적 통일성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선험적 자아는 실 체가 아니라 현상적 통일성의 상관물(Korrelat)이다. 이것은 실체 중심 의 세계관에서 관계 중심의 세계관으로 이행한 것이다. 모든 것은 상관 관계를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다른 것들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 고고 하게 존재하는 그런 실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지점이 칸트와 붓 다, 나가르주나가 연결되는 부분이다. 이런 측면에서 선험적 자아는 자 신의 존재를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의 존재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실 체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선험적 자아는 경험적 통일성의 상관물이며 경험적 자아에 대비되는 존재로서, 경험적 통일성을 가능하게 하는 근 거로서 간주된다. 따라서 칸트의 선험적 자아는 실체가 아니라 경험적 통일성의 상관물로서 요청된다. 이런 측면에서 칸트는 선험적 대상과 선험적 자아라는 물자체는 실체로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현상과 대 비되는 생각 속의 존재 로서 간주되며, 인식이 성립하기 위한 통일성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으로서 요청되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는 고 정 불변하는 실체성에 근거한 철학을 거부하고 인식이란 인식 주관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며, 이런 인식의 통일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 로 선험적 자아이며, 선험적 자아는 인식의 통일성을 위해 요청된다는 요청 철학을 전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