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C6E4C0CCC1F620C1A63139C8A320B8F1C2F72E687770>



Similar documents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 hwp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개

< B5BFBEC6BDC3BEC6BBE E687770>

기사스크랩 (160504).hwp

산림병해충 방제규정 4. 신문 방송의 보도내용 등 제6 조( 조사지역) 제5 조에 따른 발생조사는 다음 각 호의 지역으로 구분하여 조사한다. 1. 특정지역 : 명승지 유적지 관광지 공원 유원지 및 고속국도 일반국도 철로변 등 경관보호구역 2. 주요지역 : 병해충별 선단

김기중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인터넷 내용심의의 위헌 여부.hwp


래를 북한에서 영화의 주제곡으로 사용했다든지, 남한의 반체제세력이 애창한다 든지 등등 여타의 이유를 들어 그 가요의 기념곡 지정을 반대한다는 것은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는 반민주적인 행동이 될 것이다. 동시에 그 노래가 두 가지 필요조 건을 충족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 1. 법 제34조제1항제3호에 따른 노인전문병원 2. 국민건강보험법 제40조제1항의 규정에 의한 요양기관(약국을 제외한다) 3. 삭제< > 4. 의료급여법 제2조제2호의 규정에 의한 의료급여기관 제9조 (건강진단) 영 제20조제1항의 규

노인복지법 시행규칙

며 오스본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정부, 시장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에 대응 하여 노동당은 보수당과 극명히 반대되는 정강 정책을 내세웠다. 영국의 정치 상황은 새누리당과 더불어 민주당, 국민의당이 서로 경제 민주화 와 무차별적 복지공약을 앞세우며 표를 구걸하기 위한

4) 이 이 6) 위 (가) 나는 소백산맥을 바라보다 문득 신라의 삼국 통 일을 못마땅해하던 당신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더 커지는 것이라는 당신의 말을 생각하면, 대동강 이북의 땅을 당나라에 내주기로 하고 이룩한 통 일은 더 작아진 것이라는 점에서,

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교사용지도서_쓰기.hwp

cls46-06(심우영).hwp

untitled

민주장정-노동운동(분권).indd

0429bodo.hwp


<C0CEBCE2BABB2D33C2F7BCF6C1A420B1B9BFAAC3D1BCAD203130B1C72E687770>

E1-정답및풀이(1~24)ok

< BDC3BAB8C1A4B1D4C6C75BC8A3BFDC D2E687770>

<C1B6BCB1B4EBBCBCBDC3B1E2342DC3D6C1BE2E687770>

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최우석.hwp

6±Ç¸ñÂ÷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C3D6C1BE5FBBF5B1B9BEEEBBFDC8B0B0DCBFEFC8A C3D6C1BEBABB292E687770>

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é¸ñ¼Ò½ÄÁö 63È£_³»Áö ÃÖÁ¾

177

제주어 교육자료(중등)-작업.hwp

01Report_210-4.hwp

<C3D1BCB15FC0CCC8C45FBFECB8AE5FB1B3C0B0C0C75FB9E6C7E D352D32315FC5E4292E687770>



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시험지 출제 양식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상품 전단지

:::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2

DBPIA-NURIMEDIA

화이련(華以戀) hwp

ÆòÈ�´©¸® 94È£ ³»Áö_ÃÖÁ¾

歯1##01.PDF

<5BC1F8C7E0C1DF2D31B1C75D2DBCF6C1A4BABB2E687770>

120229(00)(1~3).indd

VISION2009사업계획(v5.0)-3월5일 토론용 초안.hwp

zb 2) 짜내어 목민관을 살찌운다. 그러니 백성이 과연 목민관을 위해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목민관이 백성 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이정 - ( ᄀ ) - ( ᄂ ) - 국군 - 방백 - 황왕 (나) 옛날에야 백성이 있었을 뿐이지, 무슨 목민관이 있 었던

<C6EDC1FD20B0F8C1F7C0AFB0FCB4DCC3BC20BBE7B1D420B0B3BCB120BFF6C5A9BCF32E687770>

망되지만, 논란은 더욱 증폭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단 광주지역 민주화 운동 세력 은 5.18기념식을 국가기념일로 지정 받은 데 이어 이 노래까지 공식기념곡으로 만 들어 5.18을 장식하는 마지막 아우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걱정스러운 건 이런 움직임이 이른바 호남정서

2015년 2월 12일 사랑의 동삭교육 제 호 (2월) 년 2월 12일 사랑의 동삭교육 제 호 (2월) 6 겨울이 되면 1-4 박지예 겨울이 되면 난 참 좋아. 겨울이 되면 귀여운 눈사람도 만들고 겨울이 되면 신나는 눈싸움도 하고 겨울이

640..

3) 지은이가 4) ᄀ에 5) 위 어져야 하는 것이야. 5 동원 : 항상 성실한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해. 에는 민중의 소망과 언어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고,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 는

지 생각하고, 재료를 준비하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이 작업을 3번 반복 하는 것만으로 하루가 다 간다. 그들이 제작진에게 투쟁하는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재료를 얻기 위해서다. 그 이상의 생각은 하고 싶어도 할 겨를이 없다. 이 땅은 헬조선이 아니다. 일단

<312E B3E2B5B520BBE7C8B8BAB9C1F6B0FC20BFEEBFB5B0FCB7C320BEF7B9ABC3B3B8AE20BEC8B3BB28B0E1C0E7BABB292DC6EDC1FD2E687770>

<3130BAB9BDC428BCF6C1A4292E687770>

11민락초신문4호


194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삼외구사( 三 畏 九 思 ) 1981년 12월 28일 마산 상덕법단 마산백양진도학생회 회장 김무성 외 29명이 서울 중앙총본부를 방문하였을 때 내려주신 곤수곡인 스승님의 법어 내용입니다. 과거 성인께서 말씀하시길 道 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어울려야만 道 를 배울 수 있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새만금세미나-1101-이양재.hwp

??

652

歯 조선일보.PDF

<33B1C7C3D6C1BEBABB28BCF6C1A42D E687770>

<C1DFB1DE2842C7FC292E687770>

96부산연주문화\(김창욱\)

???? 1

untitled

참여연대 이슈리포트 제 호

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한 사 람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으며,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해쳐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04 5

2005년 6월 고1 전국연합학력평가

<34B1C720C0CEB1C7C4A7C7D828C3D6C1BEC6EDC1FD D28BCF6C1A4292E687770>

160215

참고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1. 개인정보보호 관계 법령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령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전자금융거래법 시행령 은행법 시행령 보험업법 시행령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자본시장과

hwp

<38BFF920BFF8B0ED2DC8F1BFB5BEF6B8B620C6EDC1FDBABB2E687770>

580 인물 강순( 康 純 1390(공양왕 2) 1468(예종 즉위년 ) 조선 초기의 명장.본관은 신천( 信 川 ).자는 태초( 太 初 ).시호는 장민( 莊 愍 ).보령현 지내리( 保 寧 縣 池 內 里,지금의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는 통훈대부 판무

<C1DFB0B3BBE7B9FD3128B9FDB7C92C20B0B3C1A4B9DDBFB5292E687770>

ad hwp

<C1D6BFE4BDC7C7D0C0DA5FC6EDC1FDBFCF28B4DCB5B5292E687770>

시편강설-경건회(2011년)-68편.hwp

untitled

정 관

주택시장 동향 1) 주택 매매 동향 2) 주택 전세 동향 3) 규모별 아파트 가격지수 동향 4) 권역별 아파트 매매 전세시장 동향 토지시장 동향 1) 지가변동률 2) 토지거래 동향 강남권 재건축아파트 시장동향 15 준공업지역 부동산시장 동향

3. 은하 1 우리 은하 위 : 나선형 옆 : 볼록한 원반형 태양은 은하핵으로부터 3만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 2 은하의 분류 규칙적인 모양의 유무 타원은하, 나선은하와 타원은하 나선팔의 유무 타원은하와 나선 은하 막대 모양 구조의 유무 정상나선은하와 막대나선은하 4.

근대문화재분과 제4차 회의록(공개)

교육실습 소감문

1

가입 감사의 글 삼성화재 보험상품에 가입해 주신 고객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삼성화재는 국내 최고를 넘어 글로벌 초일류 보험회사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에 앞서 가장 먼저 갖춰야 할 덕목은 고객만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저희 삼성화재는 고객님이 보

¼þ·Ê¹®-5Àå¼öÁ¤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109

역사교과서 문제는 여전히 뜨겁다

단위: 환경정책 형산강살리기 수중정화활동 지원 10,000,000원*90%<절감> 형산강살리기 환경정화 및 감시활동 5,000,000원*90%<절감> 9,000 4, 민간행사보조 9,000 10,000 1,000 자연보호기념식 및 백일장(사생,서예)대회 10

Transcription:

종친회 순례 ④ 忠節과 禮의 名門 : 김녕김씨(金寧金氏) 高興 貫祖墓 奉安으로 金寧史를 새로 쓰다 金寧金氏中央宗親會 篇 金鍾彬 중앙종친회장 VS 김녕김씨중앙종친회가 지난 2013년 4월 6일 전남 고흥(高興)에 새로이 조성한 김녕김씨(金寧金氏) 관조(貫祖) 김녕군(金寧君) 시호(諡號) 문열공(文烈公) 휘(諱) 시흥(時興)님의 묘역을 봉안(奉安)함으로써 김녕종사(金寧宗史)에 길이 남는 큰 족적을 남겼다. 이 거룩한 행사를 열정적으로 추진한 김종빈(金鍾彬) 중앙종친회장을 만나 관조묘 봉안에 관련된 이야기와 금년 첫 번째 관조묘제를 봉행하며 느낀 심정들을 듣기로 하였다. 김녕김씨의 관조묘는 그간 송악산 자락에 있었다고 전해왔을 뿐 실전(失傳)되어 자손들이 묘소를 확인할 수도 없고, 참배도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었고 더욱이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는 더욱 그 아쉬움이 모든 종친들의 마음에 오랜 숙제로 남아 있었다. 이런 오랜 과업을 속시원하게 해결한 장거에 깊은 찬사를 보낸다. 26 본지의 지난호 특집에서 북한 구월산 소재 문화류씨의 시조 대승공 류차달 선조 묘역 성역화 를 소개한 바 있 는데, 현재 북한에 시조 또는 선조의 묘역과 유적을 남겨둔 많은 종중ㆍ문중의 관계자에게 새로운 하나의 방법론 으로써 김녕군 시조묘 봉안을 그 두 번째 사례로 공유하고자 지난 10월 7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소재 김종 빈(金鍾彬) 회장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가진 대담을 여기에 싣는다. <편집자 주>

Q : 안녕하십니까? 한국성씨총연 합회 청년위원회 부위원장 김형선입니다. 첫인 상이 다른 대종회장님과는 달리 젊은 분이어서 대단히 패기 넘쳐 보이십니다. 대개 대종회장 은 연로한 이미지를 떠오르게 되는데, 김녕김 씨는 젊은 회장님이 활동하시니 문중일이 많이 활발할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우선 회장님 소 개를 간단히 해주셨으면 합니다. 金鍾彬 회장 : 저는 지난 2011년 6월 1 일부터 김녕김씨중앙종친회 제22대와 23대 회장을 맡고 있는 김종빈입니다. 제34대 검 찰총장(檢察總長)을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법무법인 화우에서 변호사로 또 고려대학교 법대 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김녕김씨 32개파 중 종가인 영돈령공파(領敦寧公派) 의 자손(子孫)으로 김녕군 할아버님의 29세 손입니다. Q : 김녕김씨중앙종친회의 연혁 과 구성을 말씀해 주시지요. 金鍾彬 회장 : 우리 김녕김씨중앙종친회 는 약100여만 김녕김씨를 대표하는 종친회 로 중앙종친회결성은 44년전으로 1970년 7 월 중앙종친회의 규약을 만들고 故 김재규 님을 초대 회장으로 출범한 이래 현재까지 23대까지 활동 중입니다. 현재 중앙종친회 사무실은 서울 서초구 서초동 현대ESA II 오피스텔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중앙종친회 는 32개파 종친회와 청장년회, 시도종친회, 시군구종친회 및 다양한 종친회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Q : 2013년에 4월에 김녕김씨의 역사에 길이 남을 관조(貫祖) 묘(墓) 봉안(奉 安) 사업을 성공리에 마치셨는데 늦었지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 큰 사업을 추진 하게 된 배경과 추진 과정을 간단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관조 묘역의 비석 (전 대통령 김영삼 서) 金鍾彬 회장 : 우리 김녕인의 오랜 숙 원이었던 관조묘를 설치, 봉안하는 일은 그 동안 관조묘가 개성 송악산 자락에 있었으나 실전(失傳)되었으며, 이후 제사도 제대로 모 셔지지 않고 있다는 후손으로서 안타까움에 서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간 관조 묘를 설치, 봉안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세계 (世系)문제로 일부 종파간에 이견(異見)이 있어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정립 하기 위한 원로회의를 수차례 개최, 중론(衆 論)을 모아 위선사 중 관조묘 설치에 뜻을 같이 하고, 결정된 내용들을 절차에 따라 계 보심의위원회(2012년 5月4日)와 관조묘설치 실행위원회(2012년 10月18日)를 구성하고, 7명의 실행위원이 선임되었고, 저를 위원장 에 만장일치 추대하였습니다. 이후 저는 굳은 의지와 강한 추진력으로 2013년 계사년 봄에 봉안 고유제(奉安告由 祭)를 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원로 종친 의 고견을 청취해 의견을 나누고 그 뜻을 존중하면서, 고문단, 회장단, 연합원로회의 27

를 수십차례 열었습니다. 회의에서 거론된 문제점을 연구하고 검토된 사항을 결정하 여 우리 실정에 맞게 세밀히 계획을 세웠 습니다. 아울러 전국의 종친들께 그 취지 문(趣旨文)을 발송, 종친들에게 헌성금(獻 誠金) 협조를 부탁하는 등 다각적인 활동 을 통해 본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Q : 전남 고흥(高興)에 김녕군 관 조묘를 모시게 된 연유는 무엇인지요? 金鍾彬 회장 : 이 곳은 김녕군의 10세 종손인 돈령부(敦寧府) 영사(領事) 휘(諱) 준(遵)의 묘소가 안치된 종가 집성촌입니다. 영돈령공 휘(諱) 준(遵)은 1409년 서울 필 동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여 문리선해(文理善解)로 빙장인 안문숙공(安文 肅公) 휘(諱) 숭선(崇善)의 문하에서 수학 (修學), 1426년(세종8) 18세 때 과거에 급제 하여 청헌관을 거쳐 정2품 자헌대부 병조판 서,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 돈령부영사에 이르렀습니다. 1456년(세조2) 병자사화 때 충의공 백촌 (白村) 휘(諱) 문기(文起) 선조가 단종 복위 를 도모하다 순절직전에 김녕군 10世 종손 인 휘 준(遵)에게 멸문지화(滅門之禍)를 피 하도록 유촉(遺囑)하였습니다. 백촌(白村)선 조가 순절하자 영돈령공은 삼종숙의 뜻에 따 라 모든 관직을 버리고 스승이자 장인인 안 문숙공이 제수(諸守)로 계신 흥양(興陽:현재 의 고흥(高興))에 은거하여 살았습니다. 이후 단종(端宗)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월악산에 들어가 3년간 복상(服喪)하 고, 세조(世祖)의 좌의정 등용 제의도 고사 하였습니다. 고흥의 과역면 가산마을 앞에 정사(精 28 舍)를 짓고, 분한 마음을 달래며 나라 일 을 걱정하는 충성된 마음속에 만지(晩池) 로 당호(堂號)를 지어 현판을 걸고, 다하 지 못한 절개(節槪)와 의리에 한 많은 세 월을 보냈던 곳입니다. 그분은 구치잠(九恥箴) 과 계자문(戒子文) 으로 향인(鄕人)과 후손(後孫)을 계도하였습 니다. 이리하여 1456년 병자사화를 피해 현 재(現在) 과역면 가산(佳山)마을에 정착하게 된 김녕문중의 종손종가(宗孫宗家)로 영돈령 공파(領敦寧公派)를 이루는 집성촌이 되었습 니다. 가산(佳山)마을은 김녕군 10세 종손 인 돈령부(敦寧府) 영사(領事) 10세손 휘 (諱) 준(遵)의 묘소와 제사를 모시는 봉암사 (鳳巖祠-관조 영돈령공 봉계공의 위패 봉안) 과 함께 이여재(二如齋)가 있는 김녕김씨에 게는 아주 유서 깊고 의미있는 곳입니다. 가산 마을 전경 관조묘 봉안할 장소를 물색하던 중 위토가 있는 여러 문중에서 의사를 전해 왔고, 관조 묘소 관련 종가의 상징성, 봉암사 및 이여재 등 집성촌이 잘 이뤄져 있어 사후관리에 유 리하며, 시설 관리에 필요한 경제성까지 고 려하여 관조묘 실행위원회의 검토와 수차례 의 원로고문단 회의, 회장단 회의를 통해 종 원들의 고견을 청취, 김녕인의 정서가 깃들

어 있는 고흥으로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Q : 관조이신 김녕군 문열공 휘 시흥님은 어떤 분이신지요? 金鍾彬 회장 : 관조 김녕군(金寧君) 휘 (諱) 시흥(時興, 시호 문열(文烈))님은 경순 대왕의 8세손으로 1090년(고려 선조7년)에 태어나 고려 인종조 때 문과에 급제, 한림원 한림(翰林)을 거쳐 전라부사, 김녕대도호부 부사를 거쳐 종2품 정당문학으로 입상, 광록 대부 평장사, 검의부 찬성사로 지내시다가 나이가 많아 벼슬을 내놓으셨습니다. 병마사 당시 묘청의 난을 김부식(金富軾)과 함께 서 경(西京)을 평정함에 왕이 위사공신으로 훈 공을 기록하고 공을 금주군(金州君)에 봉하 였습니다. 금주(金州)는 고려24대 원종(元 宗) 때 김녕(金寧)으로 개칭하니 금주(金州) 가 김녕(金寧)이고 오늘날의 김해(金海) 땅 입니다. 이후 자손들이 김녕군을 관조(貫祖) 로 모시고 본관을 김녕(金寧)으로 정하게 되 었습니다. 계획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계획과 절차 에 따라 업무를 추진하였습니다. 먼저 필요 예산의 파악과 재정확보방안을 수립했습니다. 그리고 관조묘의 형세와 기본 조건에 대해 결정을 하였구요. 실력 있는 풍수가의 감정을 통해 명당을 선택하고, 이 를 설치하기 위한 설계 및 인허가를 득하는 절차를 거쳤습니다. 동시에 묘역 시공에 경 험이 풍부하고 안정성 있는 시공업체를 선정 하는 일도 중요했습니다. 다음으로 비명과 비문(행장)을 누구에게서 받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아주 어려운 절차가 있었습니다. 모든 절차를 마무리하면서 토목공사 및 석 물 제작에 들어가고 최종적으로 봉안고유제 를 봉행할 날짜 선택과 행사계획을 수립하여 진행하였습니다. 관조묘 봉안을 위한 원로회의 가산마을 소재 봉암사 Q : 관조묘를 봉안하기 위해 구 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어 결실을 보게 되었 는지 좀 더 상세히 말씀해 주시죠. 金鍾彬 회장 : 관조묘에 대한 설치. 봉안 먼저,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원로회의에서 성금을 설정하여 각 시도종친회와 종파에서 3백만원씩, 임원 및 일반종친은 성심성의껏 헌성금을 받기로 결정하고 취지문을 전국의 각 종친과 종친회에 발송했습니다. 관조묘 설치 시 인근에 위치한 돈령부 영 사공의 묘소로 가는 지기(地氣)의 맥(脈)이 손상되지 않도록 위치를 잘 조정하고, 돈령 29

부 영사공의 묘보다는 더 위쪽에 위치하도록 하면서 품위(品位)와 격(格)에 맞도록 하였 습니다. 시공사(施工社) 선정 시 실행위원들이 전 국 명문가 묘소의 석물설치 현황을 견학한 후 토목공사와 조경, 그리고 석물제작에 대 한 발주를 진행하였습니다. 개토제(開土祭)를 거행하여 관조묘를 설치 하오니 보우(保佑)해 주시도록 토지신(土地 神)께 고유하고 제수준비하여 배례하고 흙을 파서 주변에 뿌리자 봉안을 위한 건립이 정 식 개시되었고, 개토제가 끝나자 본격적 토 목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장이 현지에 내려가 고유제(告由祭)를 지내 기 위한 최종 준비를 했습니다. 강풍과 폭우 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대책(對策) 을 마련하고 행사장에 행사천막을 7개동을 설치하고, 제수와 집사분정, 식장 점검을 마 치고, 식장 장소 확보와 편의 시설 준비, 기 타 모든 사항에 철저하게 준비토록 하여 봉 안고유제와 제막식 그리고 식후행사를 성공 리에 무사히 마치게 되었습니다. 관조묘 봉안고유제 우천대비 천막설치 Q : 관조묘소 봉안고유제의 행사 는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평토제 모습 체백(體魄)이 없기 때문에 저를 비롯한 종 친 등 50여명이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 부근 의 밤나무를 현지에서 직접 구입해 관조(貫 祖)와 배(配)인 부부인(府夫人) 개성왕씨(開 城王氏)의 육신 모습을 조각하고 정중하고 엄숙하게 체백을 안치한 후 잔을 올려 제례 (祭禮)를 드렸으며, 최상급 석관(石棺)에 최 고급 고려복(高麗服)으로 모셨고 유택은 서 광이 깃들어 있는 신령한 땅으로 평토제(平 土祭)를 드린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석물의 설치를 시작하였습니다. 행사 3일전에 실행위원 중 김진완 사무총 30 金鍾彬 회장 : 기록으로 보면, 관조이신 김녕군께서는 1090년(선조7년)에 탄생하시어 1176년(명종6년) 87세를 일기로 서거(逝去) 하셨으니 실로 공의 서거 838년만에 다시금 제례를 치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셈입 니다. 당일 일기가 불순하였지만 비바람을 무릅 쓰고 전국 각지에서 아침 일찍부터 현장에 속속 도착. 행사에 적극 참여하시어 1,300여 종친이 참석하였고, 관조묘로 향하는 긴 행 렬은 장관을 이루어 보는 이의 가슴을 설레 게 하였습니다. 행사 전날 밤부터 쏟아지던 빗줄기는 다 행히 행사 시각이 가까워지면서 그쳤습니다.

전국에서 새벽같이 출발하였으니 그 정성 또 한 깊지 않았겠습니까?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허투루 있는 말은 아니었던 같습니다. 제례상이 차려진 묘소의 상석 앞은 넓지는 않지만, 내빈들이 빈틈없이 자리하였고, 다 른 참가 종친들은 상하부, 좌우 광장에 모여 새로 조성된 웅장한 봉분과 석물들을 배경으 로 촬영하는 모습들이 밝게 보였습니다. 김영삼(泳三) 전 대통령께서도 참석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갑자기 건강상태가 좋지 않으셔서 참석 못하셨습니다. 강풍이 예고된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덕룡 민족화해협력 범국민협의회의장(상임고문)과 봉조(민주동 지회장, 전국회의원:상임고문), 재현(전 토지 공사사장:부회장)을 비롯하여 각 시도회장, 원로고문, 회장단과 임원 종친을 위시하여 전국에서 많은 종친이 참석하셨고, 박병종 고흥군수와 박금래 의회의장, 김치중 고흥경 찰서장과 지역의원들 그리고 이 지역 출신 김승남 국회의원 등 많은 인사들이 자리를 빛내주셨습니다. 관조묘 봉안고유제를 향한 행렬 묘비 제막은 저를 비롯하여 원로종친과 고흥군수, 기관장 등 100여명이 참석하였으 며, 묘비에 씌워놓은 묘비막(휘장)은 봄비에 흠뻑 젖어 있었고, 많은 참배객의 환호 속에 제막식이 거행되었습니다. <平章事 金寧君 文烈公 金公 諱時興 配府 夫人 開城王氏 祔左之墓>라는 큰 비명이 공식적으로 드러난 행사였으며, 역사적 순간 이었고 말 그대로 감개가 무량하였습니다. 관조묘소의 실전이 어느 시기인지, 어느 해까지 제사를 모셨었는지 지금은 알 수 없 으나 실로 오랜만에 드리는 제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남달랐다고 하겠습니다. 제례상 위에는 이미 제수가 진 설되었으며, 드디어 고유제를 봉행하기로 한 정오가 되었습니다. 고려(高麗) 제복(祭服)을 단정하게 입은 삼헌관(三獻官)과 제 집사(諸執事)의 입장과 타고(打鼓)를 시작으로 제례(祭禮)는 진행되 었습니다. 제례상 앞에는 제관(祭官)과 종인 (宗人)들이 빈틈이 없었고, 들어오지 못한 종친들은 주변과 이여재(二如齋), 봉암사(鳳 巖祠) 경내, 종택(宗宅) 뜰과 행사장 상하 좌우에 준비되어 있는 천막 안에서 참제(參 祭)하였습니다. 집례(執禮)의 창홀(唱笏)에 따라 법도 있 게 봉행하는 제사! 알자(謁者)와 찬인(贊人) 의 인도를 받은 삼헌관(三獻官)은 관수세수 (盥水洗手)하고, 제집사의 수발을 받으며, 신 위(神位)에 잔을 올리고 경건하게 배례(拜 禮)를 하였으며, 축관(祝官)은 오늘의 성사 를 관조(貫祖)님께 고(告)하니, 이로서 관조 (貫祖) 묘원(墓苑)은 김녕가(金寧家)의 성지 (聖地)가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Q : 관조 묘역의 성역화 사업에 대한 회장님의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金鍾彬 회장 : 짧은 기간에 이처럼 웅장 하고 거대한 묘소를 봉안하였으니 어찌 조상 님의 음우(陰佑)하심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문중이 길이 번창하여 하늘처럼 장대(長大) 31

하고 땅처럼 영원할 것입니다. 관조묘가 봉안된 곳은 이름도 아름다워 가산(佳山)입니다. 좌청룡 우백호가 살포시 안은 듯, 둘러싸인 곳으로 밝은 땅에 모셔드 렸고, 옆이 봉암사입니다. 이곳은 봉(鳳)이 깃들어 있다는 명지로, 큰 바위 밑에는 용이 숨어있다는 곳으로 전해집니다. 김녕가에게 하늘이 아껴놓은 땅이며, 하늘이 허락하신 명당(明堂)입니다. 후손 모두 엎드려 맑은 술 올려드렸으니 김녕(金寧)의 32개(三十二 個) 무성한 가지(派)가 대운(大運) 받아 대 한민국 대성(大姓)으로 이어 갈 것입니다. 후손인 14대 대통령 김영삼(泳三)님께서 석덕(碩德)의 비문(碑文)과 비명(碑銘)으로 뚜렷하게 큰 글씨 새겨놓아 주셨으니, 참으 로 아름답게 빛이 납니다. 제사를 올려드릴 수 있는 땅을 허락하신 영돈령공대종회와 문 중에 감사드리며 뜨거운 열정으로 큰 관심과 협조로 참여하여 주신 모든 종친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Q : 김녕김문의 최우선 숙원사업 을 성공리에 마무리하심에 경의와 찬사를 보 냅니다. 또 다른 시급하고 중대한 과제가 있 다면? 金鍾彬 회장 : 관조묘 설치 봉안만큼이나 중요한 과제는 대동보 발간입니다. 지난 1988년도 대동보를 발간한 이후 지금까지 27년이 경과하였기 때문에 시급히 대동보를 현대적인 체계를 함께 동반해 발간해야 합니 다. 이미 지난 관조묘제에서도 대종군(大宗 君)의 지상명령으로 과제를 하달 받은 상태 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관조묘 설치봉안과 같은 어려움이 산재해 있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32 만약, 대동보를 발간한다면 과거와 같이 책자 족보만으로는 더 이상 호응을 얻기가 곤란합니다. 인터넷족보를 병행해 구축함으 로써 젊은 세대들은 시간과 장소, 족보 상식 의 유무와 무관하게 자신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주어야하는 것이 저희 집 행부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인터넷족보와 대동보의 발간은 우리 김녕김씨의 정체성과 정당성에도 상당한 의 미가 있는 사업입니다. 김녕김씨의 자손이 라면 누구나 쉽게 자신의 뿌리에 대해 확인 하고 등재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줘야겠 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호적제도가 폐지된 이후 가족부로 대체된 현재의 가족제도는 핵가족화를 더욱 심화시켜 가족의 핵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현 실로, 우리의 유구하고 아름다운 미풍양속인 전통가족제도인 족보문화 를 후대에도 계승 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새롭게 만 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귀 연합회에서 좋은 방안을 제시해 준다면 우리 김녕김씨중앙종 친회에서도 적극 활용하고 싶습니다. Q : 저희 연합회에서는 이런 문 중 종중의 어려움과 공동의 과제를 극복 해 결하고자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체계를 준비 해 오고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찾고자 하는 방법이 벌써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같은 경 순대왕의 자손인 부안김씨 가 인터넷상에서 열람하고 등재할 수 있는 인터넷족보 를 구 축하였습니다. 이를 참조하고 활용하신다면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金鍾彬 회장 : 아주 반가운 소식으로 저 희도 적극 활용하고 싶습니다. 저희 에게 협 력할 수 있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 시길 부탁합니다.

Q : 김녕김씨의 관조 묘역 설치 봉안사업은 다른 종중문중에서 큰 관심과 참조 가 될만한 사례입니다. 다른 종중문중의 경우 자문을 구한다면 도와주실 수 있는지요? 金鍾彬 회장 : 저희 중앙종친회의 경험은 모든 종친회가 공유할 수 있도록 적극 자문 에 응해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왕에 선조를 잘 모시고자 하는 종친회에서 자문을 구한다 면 마다할 이유가 없겠지요! <임진왜란> 시 순국한 겁암(㥘巖) 영년 (永年)공, 임란공신으로는 은암(隱岩) 헌(槐) 공, 세동(世棟)공, 순복(舜福)공, 후진(厚振) 공, 절재(節齋) 영호(永浩)공, 용호(龍虎)공, 송(松)공, 복(福)공. 임란 의병장으로는 수매 (守梅)공, 응배(應陪)공, 연학(淵鶴)공, 학 (鶴)공, 귀희(貴希)공, 응천(應天)공이 있고, 임란호가(扈駕)공신은 승전(承銓)공, 범(範) 공, 무치(武致)공, 언복(彦復)공이 있으며, 순국공신은 창도(昌度)공이 있습니다. Q : 선조님 중에 충열에 대해 후 손에게 귀감이 되는 분을 소개해 주시죠. 金鍾彬 회장 : 가장 대표적인 분으로 말 씀드리면 서울 노량진에 가면 사육신묘역이 있지요. 그곳 의절사(義節祠)에 봉안되어 계 신 백촌 충의공 김문기 선조님을 들 수 있 습니다. 백촌 김문기 선조님은 사육신 중의 한분입니다. 또한, 지난 1월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 광복회에서 공동으로 선정 서울 노량진 사육신묘역 내 의절사 한 선정한 이달의 호국인물 로 선정되신 벽산 김도현 선조님도 우리나라의 광복운 동에 귀감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이 외에 아사(餓死) 순국한 중원(重源)공, 종부순절(從父殉節)한 군수(郡守)공 휘 현석 (玄錫), 아사(餓死) 순절한 인석(仁錫)공. 산수암 위에 만들어진 도해단 기념비 (경북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또한 이괄의 난 진무공신(振武功臣) 사수(泗 秀)공, 충효가문 후창(厚昌)공이 있으며, 병 자호란 시엔 인조(仁祖) 호종(扈從) 논학(論 鶴)공, 병자호란 공신 천경(天景)공, 향병장 연국(連國)공, 순국한 충좌(衷佐)공, 순국 절 도사(節度使) 대명(大鳴)공, 남한산성 증축 중만(重萬)공, 영국원종공신 효남(孝男)공, 이인좌의 난의 공신 윤정(潤鼎)공과 의병장 기성(基聲)공,공신 훈련원 부정(訓練院副正) 중익(重益)공과 홍경래의 난의 공신 복태(福 泰)공. 또 갑오동학혁명 때 왜군을 격파한 석 권(碩權)공, 임오군란 전사 규성(奎聲)공, 의 병대장 벽산 도현(道鉉)선생, 항일의병 호현 (浩鉉)공, 순흠(舜欽)공, 벽산 의진에서 전사 한 용흠(溶欽)공과 장흠(漳欽)공이 있으며, <독립협회원> 용현(溶鉉)공, 의병으로 순국 33

한 용하(溶河)공, 의병장 용중(溶仲)공, 한말 순국의사(殉國義士) 용호(溶昊)공, 한말(韓 末) 의병장(義兵將) 현권(顯權)공과 언규 (彦圭)공, 만주의 항일투사 탁성(鐸聲)공과 용익(溶益)공, 용철(溶哲)공, 근세의 민의원 용진(溶珍)공, 애국지사 윤권(潤權)공, 항일 의사(抗日義士) 기용(基用)공, 독립운동 자 금책 효권(孝權)공, 항일(抗日) 비밀결사 형 기(炯璣)공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三 一운동 때> 옥고를 치른 경성 (慶聲) 공, 三 一운동의 주도자 형주(炯柱) 공, 민족대표 일재(一齋) 병조(秉祚)공, 三 一만세 때 순국한 준규(準圭)공, 파고다공원 에서 만세 선창한 병서(秉瑞)공, 순국한 선 오(善五)공, 만세 주도 준연(俊淵)공, 영천 당곡문중 기학(基鶴)공, 임시정부의 동호(東 鎬)공, 독립투사 교훈(敎勳)공과 독립운동의 선구자 홍조(弘祚)공, 十년 형을 받은 보형 (寶炯)공, 순국옥사한 형창(炯彰)공, 여래(礪 來)공, 언론인 형두(炯斗)공, 의정사(議政史) 의 거성(巨星) 형일(炯一)공, 독립투사 문교 부장관 법린(法麟)공, 三 一만세 주동 국회의 원 택천(澤天)공, 순국지사 진훈(珙焄)공, 민 주화의 선구 재규(載圭)공, 六 二五 때 공이 큰 공군참모총장 창규(昌圭)공, 성룡(成龍)공 등이 있습니다. Q : 정말 국가에 헌신하신 자랑 스런 선조님들을 많이 두셨군요. 이번에는 현재 왕성하게 활동중인 대표적인 종친을 간 단히 소개해 주세요. 金鍾彬 회장 : 저희 종친은 워낙에 많은 인원이 있기 때문에 모두 거론할 수는 없지 만, 현직에 있는 종친을 위주로 거론하면 다 음과 같습니다. 우선 정계에는 제14대 대통령을 지내신 거산 김영삼 전 대통령님입니다. 이번 관조 34 묘 봉안행사에서 묘비명을 지으시고, 직접 글까지 내려주신 열성을 보여주셨죠. 전 국 무총리 김성수, 전정무장관 김덕룡, 전 국회 의원 김봉조, 전 헌법재판관 김진우, 전 부 총리 김진표님이 저희 중앙종친회 고문으로 활동합니다. 국회의원으로 김재원, 김세연, 김진태, 김 명연의원이 현역으로 활동중입니다. 학계에는 김준영 성균관대총장과 김성진 한경대총장이 있고, 문화체육계에서는 IOC 부위원장, 세계태권도연맹회장, 대한체육회장 을 역임한 김운용님과 김종규 문화유산국민 신탁 이사장을 비롯한 기타 재계, 관계, 군 등 다양한 분야의 종친들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 중앙종친회는 이런 종친들간에 친목과 유대를 강화하여 상호발전할 수 있는 문중문 화를 조성하는 데 노력하고 있습니다. Q : 다음에는 후손들이 선조님 유적을 알고 싶은 경우 꼭 방문해 보기를 권 하고 싶은 곳은 어딘가요? 충남 아산시 도고면에 위치한 도고사에서 헌관들과 함께 한 김종빈회장(맨 왼쪽) 金鍾彬 회장 : 저희 선조의 유적은 전국에 아주 많습니다. 그중 가장 먼저 추천하는 곳 은 당연히 작년에 봉안한 전남 고흥의 관조 묘역으로 자손이라면 최우선적으로 방문해 야겠지요. 그곳은 김녕김씨의 종가인 영돈령 공파의 집성촌이기도 하며, 당연히 여기에는

영돈령공파조이신 준(遵) 선조님의 묘역과 함께 이여재(二如齋) 와 봉암사(鳳巖祠) 가 있고, 그리고 노량진의 사육신묘의 충의 공 사적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위의 유적들은 각 문중별로 중앙종친회와 각급 종친회에서 제공하는 자료를 참조하여 선조님의 다양한 유적으로 찾는 것은 후손으 로서의 매우 뜻깊은 일일 것입니다. 전국에 산재해 있는 선조 유적을 본인의 여행 일정 과 함께 조율해 가면서 좋은 계획을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선조님께서 내려주신 좋은 글귀인 영돈령공의 구치잠(九恥箴) 과 계 자문(戒子文) 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는 김녕김씨 자손만이 아닌 모든 이들이 함께 알아두면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될 좋을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구치잠(九恥箴) 아홉 가지 부끄러움에 대하여 가르쳐 경계가 되는 말 9. 일찍이 잘못이 없도록 미리 조심(操心)하지 못 하면 늙어서 부끄러울 것이다. 계자문(戒子文) 자식에게 경계하는 글 너희들에게 한마디 경계(警戒)하니 항상 조심하 여 자신을 수양(修養)하라. 말이 충성신실(忠誠信 實)하지 못하면 향리에서도 행세하기 어려울 것 이며, 손에서 책을 놓지 말고 학업(學業)을 깊고 넓게 닦아 자신을 간단없이 단속하고 조심해서 행동할 것이며, 한평생 무엇보다도 주색을 조심하 여 함부로 마시지 말고, 잠깐 사이라도 행덕(行 德)에 힘쓰야 하느니라. Q : 끝으로 저희 한국성씨총연합 회와 (사)한국뿌리문화보존회에 대해 한 말 씀 주시면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金鍾彬 회장 : 성씨문화 차원이 아니라 뿌리문화보전 차원에서, 개별적인 종친회 가 볼 수 있는 범위와 수준보다는 좀 더 높고 폭 넓은 시각에서 사업목표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뿌리문화는 충 과 효를 기반으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그 외에 것에서 뿌리문화의 답을 찾는 것 은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 뿌리문화의 이해와 보존이 잘 되어 야 국가적으로도 융성의 기운이 깃들고 나 라의 번영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 으로 한국성씨총연합회와 (사)한국뿌리문 화보존회의 힘찬 역할 기대합니다. 1. 임금님께 충성(忠誠)하지 못하면 절개와 의리 를 세우는데 부끄러울 것이요. 2. 부모님께 효도(孝道)하지 못하면 인도(人道)를 펴는데 깊이 부끄러울 것이요. 3. 형인지 아우인지 모른다면 천륜(天倫)에 부끄 러울 것이요. 4. 집안을 먼저 바로 잡지 못하면 일가들에게 부 끄러울 것이요. 5. 이롭지 못한 벗만 있고 유익한 벗이 없으면 사귀는 데 부끄러울 것이요. 6. 손님을 소홀하게 대접(待 接)하면 예의에 부끄러울 것이요. 7. 언어가 진심(盡心)으로 하지 못하면 대인에게 부끄 러울 것이요. 8. 일에 시비(是非)가 많으 김종빈 회장(중앙)과 면 처세하는 데 부끄러울 김진완 사무총장, 인터뷰어 김형선(오른쪽) 것이요. : 감사합니 다. 김녕김씨중앙종친회 가 더욱 번창 발전하기 를 기원합니다. 인터뷰어: 金炯善 <한국성씨총연합회 청년위 부위원장> 35

지상중계 화보 ① 6백여년 忠節의 恨 - 제비탄에 풀리다 <牧隱 李穡 先生 追慕碑 除幕> 한산이씨대종회 성균관 주최, 여주 남한강변에서 고유제 올려 <본문기사 참조> <맨 위> 행사 광경 < 왼쪽> 徐正淇 성균관장의 개 회사 < 오른쪽> 추모비 전경 李完馥 이사장 추모사 李尙馥 전 이사장의 추모사 왼쪽 徐正淇성균관장 헌화 오른쪽 기념식수 왼쪽부터 李 完馥 대종회 이사장, 李尙馥 전 이사장, 徐正淇 성균관장 오른쪽 단체 기념촬영 모습 36

37

誌上中繼 ① 牧隱 李穡 先生 追慕碑 除幕式 경과보고 7년간의 추진 계획, 전 종원이 힘 모아 성균관, 서원, 유림 관련단체장 연석회의 발의 경과보고를 하는 李壽馥 대종회 부이사장 海東大賢 牧隱 李穡先生 追慕碑 建立 經過報告 2007.03 한산이씨대종회 代議員 總會에서 추모비 건립에 대한 決議 2007.07 成均館. 書院. 儒林 등 關聯團體長 宴席會議에서 한산이씨대종회 理事 長을 추진위원장으로 推戴 2007.07 驪州市에 건립 建議 2007.10 여주시로부터 건립 妥當性 承認 2009.08 여주시와 推進委員會間에 건립 場所에 대한 協議 2010.07 여주시와 建立 費用에 대한 豫算策定에 관한 協議 2010.08 한산이씨대종회 대의원총회에서 예산 8,000만원 책정 決議 2011.05 驪州博物館 新築과 連繫, 건립 방안을 檢討했으나 場所 및 時期가 不 適切하여 재고함 2012.11 여주시 현암동 215-10번지(國有地)를 후보지로 선정, "서울地方國土管 理廳"에 許可 신청 2013.02 "서울지방국토관리청"으로부터 占用許可를 取得 2013.05 추모비 건립을 위한 조감도 및 細部設計圖 確定 2013.11 추모비製作 및 工事업체로 대신석재(夫餘 소재)를 選定하여 契約 2013.11 冬節期 工事 問題로 "서울지방국토관리청"으로부터 翌年으로 건립 計劃 變更 협의 承認 2014.02 原任 成均館長 月城 崔昌圭로부터 文撰 2014.05 成均館長 徐正淇로부터 碑文書 2014.06 約 1850字 刻字 完了 2014.06 石裝面積9.1坪에 碑身9尺. 거북座臺10.5尺. 龍冠3.8자. 地壇石1.2尺으 로서 總長17尺이며, 石物代(6,200萬원)과 부대비용(1,800萬원) 총액 9,800萬원으로 建立 西紀 2014年 6月 18日 38

誌上中繼 ① 牧隱 李穡 先生 追慕碑 除幕式 제막식사 三隱의 표상을 기리며 德治仁政을 위한 儒道中興의 계기로 삼아야 제막식사 徐正淇 성균관장 오늘 우리 성균관은 1천만 유림과 더불어 海東大賢牧隱李穡先生追慕碑를 성대하게 제막합니다. 이 웅장한 17척의 추모비는 우리 성균관의 과거를 역사 적으로 자랑함은 물론 장차 성균관 발전의 활력을 되살리는 매우 뜻 깊은 聖 地가 될 것입니다. 牧隱先生은 고려 말,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토착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선생은 유교의 예절을 실천 보급하고, 3년상 제도를 조정에 건의하 여 시행케 하셨고, 성균관 대사성 재직 시 국학을 重營하고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였으며, 圃隱 鄭夢周 陶隱 李崇仁 선생 등을 학관으로 등용케 하여 성리학의 연구와 발전을 주도하셨으니, 이는 실로 우리나라의 성 리학 정착에 있어 지대한 공헌이라 말씀 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리하여 조선 왕조 5백년에 孔孟의 도가 널리 실현되어 동방예의지국을 건설하는 데 이르렀 으니, 이는 분명 선생이 이루어놓은 기틀에 의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거대한 선생의 추모비를 이곳 여주에 건립하여 제막함에 있어, 또한 장차 새시대 세계 속에 빛나는 한국 유교의 王道政治가 크게 일어나 德治仁 政을 베풀어 평천하의 화평세계를 건설하여 億兆萬民이 융성하게 발전함으로 써, 성균관 재건 및 대한민국의 유도중흥의 결정적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 라는 바입니다. 오늘 참으로 뜻 깊은 제막식에 참석해 주신 斯文元老를 비롯하여 각계 인사 와 牧隱先生 후손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檀紀 4347(2014)年 6月 18日 39

誌上中繼 ① 牧隱 李穡 先生 追慕碑 除幕式 추모사 1 위축되고 폄하된 牧隱 위상 되찾아야 牧隱集의 千載有 知音 그날을 오기를 기다리며 추모사 뜻 깊은 목은선조님 추모비 제막식에서 여러분들 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공사다망 하신데도 불구하시고 전국에서 이렇게 많이 참석해 주시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추모비 건립을 추진해 주신 원임 성균관장님들과 비문을 찬 해주신 月城 崔 昌圭 원임 성균관장님 어려운 끝마무리와 제막식 행사를 준비 해주신 勳 老 徐正淇 성균관장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또한 오랜 기간 추모비 건립에 심혈을 기울여 주 신 추모비 건립추진 위원님들과 추모비 건립에 많 은 협조를 해주신 여주시장님, 각 기관 관계관님들, 또한 성균관 유림제현님들께 이 자리를 빌 어 고마 운 인사를 드립니다. 牧隱 先祖님은 1396年 5月7日. 恨 많은 69세의 생애를 유언이나 유서 한자 못 남기시고 원인도 모 르게 生을 마감하신 이곳. 바로 驪江, 淸心樓, 燕 子灘 江上 입니다. 우리 後孫들은 여강. 연자탄, 청심루 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저려오고 얼굴 이 붉혀지며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는 장소입니다. 牧隱 先祖님이 生을 마감하신 장소라는 정확한 기록을 갖고 있고 代代로 전하는 말씀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지금까지 標石도 못 세운 현실은 후손들의 솔직한 悔恨 이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어 려운 사정이 몇 년전 다시 알려져 成均館과 全國 儒林諸賢들이 推仰하고자 하시는 큰 뜻이 발로되 고, 後孫들의 爲先 崇祖精神이 合致됨에 이에 驪 州市의 적극적인 참여로 逝世 하신지 618年이 지 난 오늘 역사적 현장에 追慕碑를 세우게 되니 萬 感이 교차합니다. 40 牧隱 선조님의 훌륭하신 삶을 뒤 돌아 보고 우 리국민의 마음에 牧隱精神을 심어야 한다는 使命 의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된데 큰 의의가 있다고 하 겠습니다. 牧隱先祖님은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이 高 麗가 朝鮮으로, 元나라가 明나라로, 국교가 佛敎 李完馥 이사장 에서 儒敎로 바뀌는 大 變換期에 많은 학자들로부 터 儒宗으로 섬김을 받으셨습니다. 國學은 風化의 源泉이며 人才는 政敎의 根本이 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시고 오랫동안 成均館에서 祭主와 大司成으로 재직하시며 學制를 바꾸시어 인재를 양성하여 수백 명의 成均弟子를 길러 내시 고, 다섯 번이나 科擧管掌을 하시여 과거제도를 개 혁하시고, 134명의 俊才를 선발하여, 국가의 棟梁 으로 나라 일을 책임지게 하시니 鴻儒碩學으로 推 仰 받으셨으며 젊은 시절 中國을 여러 번 왕래하 시며 넓히신 見聞과 3년 넘게 훌륭한 中國의 학자 들로 부터 많은 배움을 받으시고, 특히 性理學의 淵源을 切磋琢磨(절차탁마) 窮究(궁구)하신 後, 귀 국하시여 壯元 及第하시고, 肅雍府 丞으로 관직 시작, 最高職인 門下侍中까지 順次로 오르셨고 中 國의 制科에 次上及第 하시어 大夫까지 승진하시 며, 國內外에 官職을 역임하시면서 우리나라의 여 러 어려운 外交問題 등을 해결 하셨습니다. 또한 後代들을 위한 좋은 詩와 文章(문장)으로 牧隱集 55卷을 남기시니, 集大成的 위치에서 牧隱 의 思想 哲學, 국가관 역사관은 물론 高麗 말의 文化, 政治, 社會를 後學들이 알 수 있게 하셨으니 現代人들 까지도 賢明하게 하는 歷史書로 역할을 다 하게 하고 있습니다. 좋은 思想과 훌륭한 哲學, 많은 文集을 남기셨 지만 易姓革命이란 역사적 흐름에 따라 牧隱의 位相은 너무 위축되고 貶下(폄하)되어 왔으나, 成 均館 弟子 圃隱 鄭夢周와 丙寅年 門生 冶隱 吉 再가 儒學家 자리에 스승이 누구인지 밝히지 못 하면서도 다행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牧隱集이 널리 읽혀지는 時代가 到來되면 東方儒學原流 圖 의 誤謬도 바로 잡히고, 나의 스승이 牧隱이며 牧隱의 學統은 益齋와 稼亭이라는 정확한 學問 系統이 밝혀 질 날이 얼마 남지 아니 했다고 확 신 할 수 있습니다.

600年前 最大 最高의 名文 三不朽(삼불후)의 牧隱集이 여러 어려움을 겪으며 天佑神助로 잘 保全 되어 國家事業으로 잘 번역하여 原文의 影 印本과 함께 잘 보급되어, 앞으로 관심있는 後學 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해 놓았으니 牧隱集의 千載有 知音 이라는 글 內容대로 千年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伯牙絶絃(백아절현) 親舊인 知 音 이 나타나 牧隱의 글을 펼치리라고 하셨으니 그 날이 올 날이 얼마 남지 아니한 것 같습니다. 오늘 같이 좋은 날에도 웬지 恨스럽고 원통한 생각만 가득 할 뿐입니다. 아무리 좋은 사상, 아무 리 좋은 글이 있으면 무엇 합니까? 가려지고 왜곡 誌上中繼 ① 되고 못 펼쳐진 세월이 600년이 넘었는데! 우리 후손들의 성심이 너무 모자랐다고 반성해 봅니다. 다행히 오늘 목은선조님이 관직생활 중 제일 아 끼시고 가장 오래 살피셨던 성균관에서 관장님을 비롯한 유림제현이 목은선조님이 일생을 마감하신 장소에 훌륭한 추모비를 세워 주시니, 목은사상과 글이 만방에 펼쳐져 나라와 인류공영에 이바지 할 날이 멀지 않아 반드시 찾아 올 것이란 확신을 갖 게 하며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참석하신 분들 모두 건강 하시고 가정마다 행복 이 깃드시기를 빌면서 추모사에 갈음합니다. 감사 합니다. 牧隱 李穡 先生 追慕碑 除幕式 추모사 2 牧隱 先祖의 孝心이 깃든 이곳에서 슬픈 우리 가족의 역사를 되새기며 추모사 618년전, 이곳 여주 청심루 아래 연자탄에서 돌 아가신 목은선조의 유덕을 기리며, 오늘 그 추모비 를 건립하고 제막식을 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 합니다. 여주의 여강은 목은선조께서 1396년(병자)6월 12일(음 5월 7일)에 배안에서 임금이 하사한 술을 드신 후 갑자기 비명에 급서하신 곳으로, 600여년 의 한이 서린 곳입니다. 급격하게 돌아가심은, 정도 전 조준 등이 꾸민 술책에 의한 독주 때문이라는 설이 야사에 실려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신륵사는 목은선조께서, 부친 가정 공이 모친 삼한국대부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발원 하신 불경 간행의 유지를 받들어 불경을 판각하시 어, 이곳에 봉안 하신 곳이기도 하여 목은선조의 효심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목은 선조께서는 생전에 이곳 여주에 산천 을 좋아하시어 만년을 이곳에 전원을 장만하여 조 李尙馥 전 이사장 용한 여생을 보내시려하시던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위화도 회군하던 1388년 그 아드님 문양공이 비 명에 죽고, 고려가 망하던 해 1392년 둘째아들 인 재공이 목 졸려 돌아가니, 목은공은 돌아가기 전에, 여강에 피서하시면서 산속에 들어가 우시며 소리 없이 울면 내마음 번거롭고, 소리내어 울면 남의 귀에 들리네. 두 가지가 하나도 좋은 게 없어 깊은 산속에 들어가지만 같지 못하여 소리 높여 종일토 록 운다고 부자지간의 정이 다 하겠는가. 창자는 마디마디 끊어지고 눈물도 말랐으며, 꿈에라도 이 런 일 또다시 볼 수 없으리 라는 처절한 심정을 토해 내신 마지막 시를 남기시었습니다. 목은선조와 그 두 아드님께서 그렇게 반대하시 던, 송제(松齊) 이성계의 나라도 이미 사라진지 100년이 더 지난 오늘, 목은선조께서 돌아가시던 이곳 여주에 와, 후손 상복은 엎드려, 그날의 처참 하던 우리가족의 역사를 되새기며 삼가 추모비 제 막식에 엎드려 곡하나이다. 41

誌上中繼 ① 牧隱 李穡 先生 追慕碑 除幕式 牧隱 李穡先生 偉績 追慕 獻詩 태양같은 선생의 학문, 만년을 이어가리 후학과 후손들이 유허지에 단을 쌓아 추모하다 文化柳後人 道山 獻詩 헌시[其一] 柳映烈 敬頌 獻詩 헌시 [其二] 先生性學似春陽 [선생성학사춘양] 牧翁聖學總由天 [목옹성학총유천] 偉蹟銘碑與日長 [위적명비여일장] 斯道開來繼萬年 [사도개래계만년] 德可治人全敬義 [덕가치인전경의] 長效程朱遺後輩 [장효정주유후배] 仁能濟世立綱常 [인능제세입강상] 尊崇孔孟慕多賢. [존숭공맹모다현] 驪江繫楫朝聞道 [여강계즙조문도] 驪江酒宴千秋錄 [여강주연천추록] 古寺聞鐘夕斅良 [고사문종석효양] 松嶽風雲一廟遷 [송악풍운일묘천] 遺址封壇追慕際 [유지봉단추모제] 神眷吾東傳令德 [신권오동전영덕] 斯文洪業永難忘 [사문홍업영난망] 生涯塵世不攀緣 [생애진세불반연] 선생의 성리학은 봄의 태양 같네 목은선생 성학은 모두 천도에 연유했으니 위적을 빗돌에 새기니 해와 더불어 장구하리 사도가 개래하니 만년을 이어가리라 덕으로 가히 치인함에 경과 의가 온전하고 주정도학을 늘 본받아 후배에 이어줬고 인으로 능히 제세하니 강상이 바로 서다 공맹철학 존숭하니 현인들이 앙모했다. 여강에 배를 매고 아침마다 도를 듣고 여강의 술자리는 천추에 슬픈 역사요 고사의 종소리 들으며 늦게 精良을 깨우치네 송악의 풍운이 일국종묘 바꿨다네. 유허지에 단을 쌓고 추모하는 때에 하늘이 오동을 사랑하사 덕업을 전하니 사문의 창업을 길이 잊기 어렵네. 한 생애 진세와 인연을 맺지 않았다네. [양평출생. 아호:道山. 당호;聽泉齋. 본관;文化. 성균관 한시수련원 부원장, (사)숭모회 이사 역임 현 성균관 부관장, (사)한시협회이사, 임란공신 충의선양회회장 42

誌上中繼 ① 牧隱 李穡 先生 追慕碑 除幕式 牧隱 李穡先生 偉績 追慕 獻詩 유월의 바람에 실려 다시 오소서 우국충정의 그 큰 가르침 오늘에 더 목마릅니다. 한산이씨 며느리 시인 붉고 붉은 충정이 서린 燕子灘아! 새들마저 울고 가는 들녘에서 불러도 대답 없으신 목은선조님이시어! 통한의 세월 속에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하시며 병자년 여름 淸心樓 아래 연자탄에서 비탄으로 서세하신 목은선조님, 오늘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서세하신 지 618 주년, 이제야 후손들이 목은선조님의 공덕과 절의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 앞에 엎드려 통곡합니다 천지를 물들이는 꽃과 나무들 산새의 울음도 추모의 향기로 퍼져갑니다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랴 는 그 마지막 말씀 이젠 들을 수 없음에 애절한 그 음성 바람 되어 들려주소서 애끓는 한이 서린 燕子灘은 오늘도 흘러가는데 목은 선조님의 <麗江의 述懷>를 떠올리며 덧없는 인생, 호연히 돌아갈 듯 어디로 가야하나 한숨지으시던 시 한 구절이 가슴저려옵니다 목은선조님이시여! 길이길이 영면하소서 김현신 낭송 아, 연자탄아! 한을 씻지 못하는 긴 긴 세월아! 못 다한 충절, 애틋한 그리움은 6월의 바람이소서 목은 선조님이시어! 생전의 덕망과 충절로 후손을 굽어살펴 주옵소서 온 누리 빛나는 스승으로 대문호로 우국충절로 거족을 남기신 그 이름 역사는 절절히 밝혀 후세에 길이 영원할 것입니다 깊은 뿌리셨던 목은선조님! 후손들의 번영과 학문숭상을 기원하는 선조님의 유훈 후손들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강물처럼 깊은 지조로 망국의 한을 달래시던 불멸의 공신 그 높은 뜻은 후세에 혼불로 빛나오리다 망국의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故山에 묻을 뿐이라며 끝내 출사를 고사하시던 고고한 삶의 흔적 옛 청심루淸心樓 에 앉아 시를 짓고 읊으시던 그 음성 바람에 실려 되돌아오소서 오늘도 연자탄은 붉은 넋으로 굽이쳐 흐르는데 망국의 유신이 되어 갈 곳이 어디냐고 하시던 목은선조님의 충절을 그리움에 담아<추모시>를 바칩니다 한산이씨 광목공파종회장 이경구 부인 /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 (국어교육전공-석사) 2003년 교직에서 정년 퇴임 / 계간 시현실 로 등단 /- 시집 나비의 심장은 붉다 / 우수문예지 시 와 세계 연구기획위원 시와세계 시학회 회장 / 계간 스토리문학 편집위원/ 고리섬들 편집인 43

충남 천안시 구성동99번지 6만평에 이르는 오천재 전경 지상중계 화보② 恭度公 烏川 李文和선생 追慕 講演會 盛況 서거 6백주년 기념, 인천이씨공도공파종회 <본문 기사 참조> 이규준회장의 인사말씀 수백명이 참석한 행사 스케치 행사에 참가한 타 문중 임원들 44

좌 고유제에서 헌작 모습 우 공로 표창을 수여하고 있는 李圭峻회장 수상자 <왼쪽부터> 이대하, 이희환, 이병엽, 이종찬, 이영조 이윤식. <오른쪽 끝> 李圭峻회장 <중앙청년회 기념촬영> 이날 행사 는 인천이씨 중앙청년회가 조직적으로 봉사함으로써 더욱 빛이 났다. <뒷줄 왼쪽부터> 이상찬, 이우진, 이순동, 이화주 청년회장과 이애희 강 원대 교수, 이우동, 이경하, <앞줄 왼 쪽 부터>이정호, 李鎭玉 총무이사, 이 연옥, 이종택, 이인홍 45

誌上中繼 ② 李文和 先生 逝去600周年 追慕講演會 개회사 어진이를 높이고 의를 소중히 여기며 왕조교체기, 시호 공도(恭度)의 의미대로 전 국사편찬위원장 오늘 우리 인천이씨 선조 오천(烏川) 이문화(李 文和, 1358~1414) 선생의 서거 600주년을 맞아 후손들이 경건한 뜻을 모아 추모의 예전을 마련 했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해 주신 여러 내빈께와 종인들께 먼저 감사와 존경의 뜻을 표합니다. 오늘 추모 예전을 올리는 이문화 선생은 본관 이 인천(소성, 인주)이요, 호를 오천이라 했으며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 초에 57세를 일기로 서거 하였습니다. 선생의 선대는 기록상 고려 초부터 현관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그 혈통은 신라와 가 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세계(世系) 화되고 있습니다. 신라말경부터 토호세력이었던 인천 이문은 고려 초에 외척으로 등장, 고려 중기 까지 현관요직을 배출했으나, 중기의 정란에 휩쓸 리게 되어 장화공(章和公, 子淵)계가 대부분 퇴출 당하게 되었고, 상서공(尙書公, 子祥)계는 근왕세 력인 문충공(文忠公, 公壽)과 그 아들 문정공(文 正公, 之氐)을 거쳐 오천 선생에 이르게 되었습 니다. 오천 선생은 세보(世譜)상 득성조(得姓祖) 허기(許奇)로부터는 22세손, 관향조(貫鄕祖) 허겸 (許謙)으로부터는 13세손에 해당하며 중서사인 조부 익세(益歲)를 거쳐 전공판서 심(深)과 안동 권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인은 충주최 씨이며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습니다. 46 선생은 고려 말에 태어나 윤택(尹澤, 호:栗亭) 의 학맥을 이었다고 전해지며, 당대 최고의 학인 들로 알려진 삼은(三隱: 牧隱 李穡, 陶隱 李崇 仁, 圃隱 鄭夢周)과 권근(權近, 호:陽村) 같은 선 배들로부터 촉망받는 후배로 인정받았습니다. 우 왕 6(1380)년 23세 때에 대과에 장원급제한 선생 은 선배들로부터 이장원(李壯元)이라는 칭송을 받 았습니다. 선생이 과거에 급제하여 환로에 나서게 되는 때는 조선조가 개창되기 12년 전입니다. 역 성혁명(易姓革命)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그의 공직생활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공은 이성계 를 중심으로 한 신흥세력에 협조하지 않았던 것 으로 추정되는데, 선생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李萬烈 박사 왕조 교체기에 국록 먹기를 꺼려했고 고려왕조 에 대해서 일정하게 의리를 지키려고 했던 것으 로 보입니다. 그러나 선생의 그런 자세가 이미 기 울어진 고려 왕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충성을 보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선생이 조선왕조 개창 후에도 관직을 유지한 것으로 보아,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새왕조 의 개혁에 대해 어느 정도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선생이 새 왕조 개창 후 에 경연(經筵)에서 정치의 요체라 할 홍범(洪範) 을 강의한 것으로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선생은 또 이방원의 1차 왕자의 난 때에도 시세 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선생의 이런 정치적 태도 는 새 왕조 세력 특히 이방원(태종) 세력에게는 그렇게 탐탁하게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 고 실권을 잡은 세력은 그를 내치지 못했습니다. 선생이 돌아간 때는 태종 때입니다. 조정은 그 에게 왕조 교체기에 훈공을 세운 이들에게 수여 할 수 있는 그런 시호보다는 그의 성품에 알맞은 시호를 내리는데, 어진이를 높이고 의를 소중히 여기며 마음 씀씀이가 의에 맞는다 는 뜻의 공도 (恭度)라는 시호를 내리고 3일간 철조(輟朝)했다 고 합니다. 이를 감안하면, 혁명기에 그가 어떻게 처신했을까 하는 점이 어렴풋이 감지되기도 합니 다. 천품(天稟)이 온화 했던 선생은 그 혁명기 에 자신의 천품에 알맞은 처신을 했습니다. 그의 처신에 맞는 공도라는 시호는 이를 의미합니다. 그의 공직생활은 내직으로는 좌간의대부, 도승 지, 예문관 대제학, 대사헌, 참찬의정부사, 삼군부 사 및 예조 형조 호조 판서를 역임했고, 외직으로 는 경상도 도관찰 출척사와 개성 유후사 유후를 역임했습니다. 그가 돌아간 후 조정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 輔國崇祿大夫) 영의정(領議政)을 증직하고 시호 공도를 내렸습니다. 이런 환로를 통해 기억할 만 한 업적도 남겼습니다. 그중 왕이 사초(史草)를 보려고 했을 때 이를 간하여 바른 기록이 유지되도록 했던 것은 오늘

誌上中繼 ② 李文和 先生 逝去600周年 追慕講演會 축사 7백만 가락종친들이 새시대를 열어가자 공도공 할아버님의 거룩한 뜻을 이어서 가락중앙종친회 회장 오늘은 恭度公 派祖 李文和 선생 서거 600주년 이 되는 뜻 깊은 날입니다. 파종(派宗)을 뛰어넘어 가락의 후예들이 자리를 함께 하여 그분의 위업을 되새기며 감사와 추모의 예를 올리는 자리에 함께 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동안 공도공 할아버님을 정성으로 모시며 자 랑스런 종친회로 발전 시켜 오신 李圭峻 회장님과 李永權 인천이씨대종회장을 비롯한 종친 여러분께 도 감사를 드립니다. 인천이씨 공도공파는 종원 간에 화합하여 조상 의 전통과 유지를 계승 발전시키며, 후손들을 위한 종사교육을 매년 실시하고, 장학사업이 모범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종회로 정평이 나있는 것이 사실 입니다. 또한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고 있어 저는 가락중앙종친회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늘 고맙고 자랑스런 마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가락중앙종친회는 인천이씨대종회, 공도공파종회 와 최선의 친목과 협조관계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李永權 대종회장님과는 의원시절부터 선후배로 각 날까지 조선왕조실록이 보존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것입니다. 선생은 또 조선조 초기 대명(對明)외교에서도 볼만한 업적을 남겼고 목민 관으로서도 어진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선조 오천 선생에 대해서 소략하게 살 폈습니다마는, 앞으로 후손들은 그 어른과 후손들 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 분들이 어떻게 그 시대 를 고민하면서 사회에 봉사했는가를 살펴 본받아 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오천 선생의 서거 600주년 을 추도하는 의미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최근 많은 문중들에서 혈족들이 모여 여러 형태의 기 념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기념사업이 자칫 자 기 혈족이나 일문의 명예를 높이려거나 배타적 자존의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 니다. 그런 경우를 보면서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을 받기도 합니다. 오천 선생의 후예들도 그 런 행태의 문중행사에 부화뇌동해서는 안될 것입 니다. 그러지 않아도 남북, 동서로 분열되어 있는 金杞載 별한 인연을 쌓아오고 있으며 李圭峻 회장님과는 내무부에 재직하면서 동고동락 해오던 개인적인 신뢰가 깊은 관계로 가락종친회를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에는 세 사람이 함께 인도를 방문하여 미쉬라 왕손과 아요디아 시장을 비롯한 주요 기관 장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허황옥 시조할머님 기념 비 건립 13주년 행사를 성대히 거행하기도 했습니 다. 지금 가락중앙종친회는 서울의 중심부인 중구 필동에 지하2층, 지상10층짜리 건물을 매입 이전 하여 충무로 시대를 새롭게 열어가고 있습니다. 또 한 이번 6.4 지방선거에서는 100명이 넘는 김해김 씨, 허씨, 인천이씨 종친들이 시도지사, 시장군수, 지방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오늘 공도공파 파조이신 李文和 할아버님의 서 거 60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7백만 가락 종친들 은 할아버님의 거룩한 뜻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서로의 끈끈한 정과 단결을 통해 새 시대를 주도 하는 자랑스러운 후손이 될 것을 다짐하는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나라가, 이런 문중모임을 통해 혈연에 의한 분열 분파의식을 조장하게 된다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혈족들의 힘을 모아 우리 후손들을 잘 교육시켜 우리 사회와 세 계에 봉사하는 젊은이들로 양성해야 할 뿐만 아 니라 우리 종문(宗門)도 지역사회와 국가에 봉사 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 문중 혈 족들이 모여 조상을 기리고 혈육의 정을 돈독히 하는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를 성취하고 나아가 세계와의 유대와 협력을 추구하는 책임이 주어져 있습니다. 오늘 선조 오천 선생을 추도하는 이 모임이 그런 귀한 사명을 재확인하고 다짐하는 귀한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거듭 오늘 이 자리를 찾아주신 여러 내빈들과 종인들에게 평강이 넘치기를 기원하면서 제 인사 말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7

誌上中繼 ② 李文和 先生 逝去600周年 追慕講演會 추모사 오천재를 성현의 터로 닦겠습니다. 시대적 소명을 다하는 후예가 되어야 인천이씨공도공파종회 회장 존경하는 종인(宗人) 여러분! 그리고 자리를 함께 해 주신 내외 귀빈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고려말 조 선초기의 대표적 名臣으로 우리 派祖이신 恭度公 烏川 諱 文和 선조님 서거 600주년을 맞이하여 높 으신 위업(偉業)을 기리고 추모하고자 이 자리에 모 였습니다. 먼저, 朝鮮 건국초기 新進 知識人으로서 愛國愛民으로 백성의 삶이 편안하고 부강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일생을 다 바치신 오천(烏川)할아 버님의 영령께 삼가 경건한 마음으로 명복을 빕니다. 公께서는 1358년 전공판서(典工判書) 휘 심(諱 深) 공의 장남으로 태어나시어 일찍부터 비범 탁월 하고 온화한 용모로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셨으며 1380년 23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시어 우정언, 우헌 납, 예문응교를 거쳐 성균사예로 경상도안렴사를 맡 아 울산읍성을 축조하셨습니다. 48 조선조에 들어와 신진 지식인으로 발탁되시어 도 승지, 경기좌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관찰사를 역 임하시면서 王朝 전환기의 적폐(積弊)와 어지러운 민심을 수습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고 조정에서 태조, 정종, 태종임금 등 세 조정에서 이조 형조 예조 호조 판서와 사헌부대사헌, 예문관대제학, 개성유후사유후 를 역임하시고 참찬의정부사직을 수행하시는 동안 오로지 위국애민(爲國愛民)의 충정으로 나라의 안정 과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조선 태조임금께서 사초(史草)를 바치라 하자 공 께서는 도승지로서 역사는 사실대로 바로 써서 숨 김이 없어야 하는데 군주와 대신들이 스스로 보게 된다면 숨기고 꺼려서 사실대로 바로 쓰지 못함 을 아뢰었고 할 일없이 국록을 축내는 검교시중직(檢校 侍中職)을 혁파하도록 주청하였으며 농사짓는 방법 을 도식화(圖式化)한 가색도(稼穡圖)를 만드시고 호 조에서 만든 지폐 인 호조저화(戶曹楮貨)를 사용하 게 하시는 등 임금께는 강직하게 직언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되게 하셨음은 6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마음 깊이 추앙하고 계승 발전해야 할 덕목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李圭峻 공께서 1414년 음력 6월 1일 참찬의정부사 재직 중 에 향년 57세를 일기로 서거하시자 태종임금은 매우 슬퍼하며 3일동안 朝會를 중지하고 대광보국숭록대 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하고 공 도(恭度)의 시호를 내리고 禮葬으로 모셨습니다. 1495년 성종임금이 승하(昇遐)하여 공의 묘소자리 에 선릉을 조성하게 되어 서울 청담동으로 모셨다가 서울도시확장계획으로 1971년도에 이곳 천안으로 유 택(幽宅)을 옮겨 모시면서 오천재(烏川齋)를 이건(移 建)하고 교육관을 신축, 매년 대학 신입 후손을 대상 으로 조상님들의 빛나는 얼을 일깨우는 뿌리교육과 장학금을 지급하며 훌륭한 후예를 양성하기 위해 노 력하고 있으며 올가을에는 묘소도 재정비하고 중장 기적으로는 영정각도 새로 짓고 동재와 서재도 개축 하는 등 묘역주변을 성역화하여 명실상부한 성현(聖 賢)의 터 로 조성해 나가고자 합니다. 특히, 오늘 공의 서거600주년 추모강연회를 개최 하는 뜻은 오로지 憂國衷情과 애민정신으로 일관되 게 살다 가신 오천(烏川) 할아버지의 위대한 생애와 경세사상(經世思想)을 재조명하여 자랑스러운 삼한갑 족(三韓甲族) 공도공의 후손으로서 공의 위업을 계 승 발전하여 나아가 인천 이씨 모두가 소통하고 화 합 단결하면서 시대적 소명을 다 하는 문중이 되고 자 하는데 있습니다. 천상에 계신 할아버지께서도 저 희들을 항상 지켜봐 주시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지혜롭게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베풀어 주시옵기를 기원올리면서 할아버님께 한없는 존경과 추모의 정을 바치며 영원한 안식과 명복을 빕니다. 끝으로 오늘 추모강연회를 주관하여 주신 우리 종 회 뿌리연구위원장이신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님 과 허철회 이애희 연사님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며 무더운 날씨에 바쁘신 일정을 뒤로 하시고 참석하시 어 자리를 더욱 빛내주신 내외빈 여러분과 경향 각 처에서 오신 종인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더욱 건강하시고 가정과 직장에 행운이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誌上中繼 ② 李文和 先生 逝去600周年 追慕講演會 추모강연 선생의 일대기로 본 麗末鮮初의 역사 유적지 탐방을 통해 선생의 사료 재조명해야 양천허씨 충정공파종회 학술회장 공도공 이문화의 성장과정 오천 이문화(1358-1414) 선생은 고려말과 조선초 기를 살다가신 문인이며 관료 출신이다. 올해 2014년 은 돌아가신 지 600주년을 맞는다. 이문화 선생은 자 는 백중(伯中)이고 호는 오천(烏川)이다. 인천이씨의 비조(鼻祖)는 이허기(李許奇)이고, 시조는 이허겸(李 許謙)이다. 공은 시조 이허겸의 13세손이고 조부는 중서사인을 지낸 익세(益歲)이다. 부친은 심(深)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 검교공파 후손이다. 부인은 충주최 씨 양정공 최렴의 따님으로 자녀는 6남2녀를 두셨다. 공도공은 고려 말인 공민왕 7년 1358년에 탄생하 였는데 용모가 준수하고 천품이 온화하였으며 어렸을 때부터 벌써 의젓하여 대인의 기상이 넘쳤다. 총예 영민하여 글을 배움에 학업이 날로 진취되고 예의로 서 몸을 가졌으며 효우가 두터워 부모님 곁에서 온 종일 화순한 얼굴로 분부가 내려지기 전에 뜻을 받들 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 상사를 당하여 슬퍼함 이 예절에 맞았고 여묘에서도 3년의 상을 마치었다. 그는 율정 윤택(栗亭 尹澤)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때로는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문하에 추종 하였으며, 그 당시의 유명한 학자인 양촌 권근 선생 과 도은 이숭인, 상촌 김자수 선생과도 서로 벗삼으 며 강론하였기에 문장과 경술에 추앙을 받았다. 대과 장원급제, 빛나는 행적 그는 고려말기 우왕 때 1380년이 23살의 나이였는 데 진사로서 대과에 장원급제하여 문학대천(文學大 闡)의 기풍을 떨치었다. 한편 목은 이색 선생은 장원 급제를 축하하는 시를 지어주면서 공도공의 자인 백 중(伯中)에 대한 자설(字說)을 지어주며 공의 깊은 학 식과 기상을 칭송하였다. 그의 행적을 세밀하게 살펴 크고 작은 많은 유사 중 중요한 사실만 간추려서 수록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조 태조 때는 좌간의대부를 지냈는데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하여 조선을 세웠으나 아직 국가의 기틀 許喆會 이 안정적으로 다져지지 않는 과도기라서 고려말의 잔폐와 백성들의 민심은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 이 때 공은 경기도안렴사로 나아가 여말의 잔폐와 불안 한 민심을 선무하고 민생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나라에 공헌이 있거나 연로하여 나랏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늙은 신하를 대우하기 위하여 검교이라는 명예관직을 무원칙하게 제수하는 폐습이 있었다. 공은 이같은 폐습은 국록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관직의 위계질서를 문란케하는 처사라고 규정, 이 폐습을 없애 상훈관리가 개선되도록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태조가 왕위에 오름으로서 그의 부, 조, 증조, 고조 등 4대조를 왕으로 추존하여 함경도 지방 동북면에 위치한 이태조 선대의 네 분에 대한 4 계절 제향 행사를 거행하여왔다. 이 행사가 거행됨에 따라 사신들의 왕래가 많고 또 제향과 관련한 각종 민폐가 극심하여 원성이 자자하였다. 그래서 공은 이와같은 민폐를 바로잡기 위하여 우 정승 김사형과 함께 과감하게 개선해 갔다. 당시 부 모에 대한 효행을 크게 장려, 많은 효자가 발굴되었 으나 효의 근본을 벗어나 가식적인 효행도 많아서 그 진실을 가리는데 혼란도 있었다. 공은 각종의 효렴무 재(孝廉茂才)를 접견하고 사실이 아니거나 허황한 자 등 70여 명을 엄격하게 심사, 추방함으로써 효행에 대한 질서를 잡아 나갔다. 그리고 왕명을 받아서 송 태조의 내시에 대한 고사에 의거하여 특별히 유비고 (有備庫)를 설치하여 군수물자에 대비하고 납입된 전 (錢)과 곡(穀),포(布), 화(貨)를 삼사에서 회계를 맡아 수납에 의해 지출을 하게하고 만약 병란이 있으면 임 금께 아뢰어 쓸 수 있는 법칙을 마련, 회계 질서를 마련하였다. 사관은 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실을 기록하여 사기의 초본을 작성한다. 왕이 말한 한 마디까지 그 대로 기록되는 것이 사초이다. 그런데 이 사초를 왕 이 보고 싶어하여 간혹 사관에게 명하여 사초를 가져 오게 하여 열람코자 함을 탐지하고 공은 단호히 사초 를 열람함이 크게 잘못된 것이라 간하여 사초의 바른 기록이 유지되도록 했다. 공이 도승지이던 조선조 정종 때에는 마침내 왕자 49

50 의 난이 일어났다. 공은 이와같은 틈바구니 속에서도 대의를 좇아 신하로서 처신을 원만히 했다. 1400년 방간의 난 때는 왕명을 받아 방간을 설득시키는데 노 력하여 더 큰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조선의 선군( 船 軍 )은 그 운영 관리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었고 폐단도 극심하였다. 공은 그 폐단을 없애고 문제점을 개선키 위해 동북방면 즉 함 경도와 강원도의 선군은 혁파하고, 경기도,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풍해도(황해도) 등의 선군은 삭감하여 민폐도 줄이고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는 개선안을 마 련하였다. 그리고 도승지 3년 동안 말은 진실한 것만 간하여 왕지를 바르게 하고 백관과의 조화가 이루어 져 다스림의 효험을 기약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태 종대왕 때는 삼군부사, 예문관 대제학, 경상도 도관찰 출척사, 예조판서, 형조판서, 호조판서, 대사헌, 개성 유후사유후, 참찬 의정부사 등 고관을 역임하였다. 삼군부사 - 공이 삼군부사에 발탁되어 조선과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에 노력했다. 공이 명나라 북경 에 갈 때가 공마 30 마리를 선사하는 등 노력으로 양 국간의 우의를 다지고 조선의 입장을 이해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예문관대제학 - 1401년부터 1408년까지 3회에 걸쳐 임명되었다. 왕명에 따라 각종 문장을 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 그 문장력은 뛰어났다. 그리고 문학과 유학을 진흥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진헌사 - 공은 진헌사로서 1408년 명나라에 갔 다가 1409년에 귀국하였고, 국가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경상도 도관찰 출척사 - 고려말의 적폐를 빠짐 없이 제거하고 사습( 士 習 )을 개선함에 왕으로부터 특 별 명을 받고 이에 진력, 향민의 환영을 받았다. 예조판서(2회 임명) - 공은 영의정부사 등 고위 직관원들이 조례가 있는 날에만 출석하고 관장하는 일도 극히 일부여서 일의 추진과 처리방법도 절도와 질서가 없는 등 자세가 옳지 않음을 지적하며, 관직 의 고하를 막론하여 일정한 장소에서 근무토록 하고 품의는 문서화하여 시행되도록 개선해 나갔다. 풍수 재해를 당하여 재상들과 그 대책을 논의할 때 공의 지략과 의연한 자세는 비범했으며, 왕도 좋게 받아들 이고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관직자의 본을 보였다. 좌명 1등공신인 신극례( 辛 克 禮 )의 예장에 있어서 왕 의 상등예장 지시에 대하여 공은 예장은 직급의 고하 로서 상, 중, 하 3등으로 결정하는 것이지 공신 1, 2 등급에 비례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예장 질서 를 확립하였다. 형조판서 - 1405년에 형조판서에 임용되어 서울 을 천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작은 민원소송에 대하여 공정하게 처리하여 국민의 원성을 잠재웠다. 대사헌 공은 옳고 그름을 사심없이 간하여 대 의를 좇아 극명하고 바르게 처리하여 기강을 확립해 나갔다. 대사헌 재임시에 국가적인 큰 사건을 소신과 불굴의 의지로 처리하고 난국을 헤쳐나갔다. 개성유후사 유후 - 대사헌에서 해임되고 개성유 후사 유후로 옮겨 공은 전과 같은 의롭고 곧은 심정 으로 국사에 협조하였다. 공은 가색도와 분재 그리고 다보생 감초 천엽동백을 임금께 올려 신하로서 순수 한 예의를 잃지 않았었다. 참찬 의정부사 1402년에 이어 1414년 참찬 의정부사에 임명되고 그해 6월에 공이 세상을 떠나시 니 향년이 57세이다. 공의 별세에 임금도 애도를 금 치 못하여 3일 동안 조회를 폐지하고 후한 부의를 하 사하여 관에서 장사를 주관하였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와 영의정을 증직했으며 현인을 높이고 의를 귀중히 여기며 마음 씀씀이가 의에 맞는다는 두 가지의 시법 을 써서 공도( 恭 度 )란 시호를 내렸다. 공의 후예들과 향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은 6남2녀를 두었고 6남은 모두 재상급이었고 외손녀는 정희왕후이다. 장남 이효인, 차남 이효의, 3 남 이효례, 4남 이효지, 5남 이효신, 6남 이효상은 높 은 관직을 받았다. 한편 장녀는 윤번에게 출가하였는 데 윤번은 파평부원군이 되었으며 정희왕후의 아버지 다. 차녀는 류개동에게 출가하였다. 묘소는 공이 서거하실 때 경기도 광주 학당동에 예 장으로 모셨는데 1495년 성종이 승하하자 그 곳으로 모심으로 인하여 인근 숙동 신좌에 이장하였다. 476 년 후인 1971년 서울특별시 도시확장으로 다시 천안 시 동남구 구성동 구곡산 건좌의 현 위치로 이장, 묘 역을 단장하였고 오천재와 동재와 서재를 건립하였으 며 매년 청명, 한식일을 전후로 날을 정하여 시제를 모시고 있다. 공을 주벽으로 향사하는 서원이나 사당 은 대구 서계서원, 함안 도천사, 장흥 금계사 등이다. 오천 이문화 선생의 유적지를 일일이 답사하면서 새롭게 발굴되거나 알려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의 친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안동에 는 오천이라는 마을이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안동시 와룡면 오천동인데 안동댐으로 수몰되기 전에는 예안 면 오천동이었다. 지금은 600여 년간 세거한 광산김 씨 오천종가가 있다. 여기서 오천이라는 마을이름이 유래된 것은 까마귀같이 까만 조약돌이 냇가 바닥에 깔려 있어서 흐르는 물이 새까맣게 보인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문화의 부친이신 이심 선생이 세 거했을 가능성을 추정한다.

둘째, 그의 외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경상북 도 상주시 공검면 율곡리에는 안동권씨 검교공 척파 권육의 후손이 세거하는데 공업사를 경영한다. 세째, 그의 처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충청북 도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 내동종가인데 그의 장인이 신 검교정승 양정공 최렴 선생의 산소 등 유적지가 잘 보존되어 있다. 네째, 그의 사승관계를 살펴보면 무송윤씨 윤택 선 생의 진면목을 학문적 시각에서 살펴보고 그의 유사 와 율정 선생의 스승인 익재 이제현 선생의 학문세계 도 영향을 미쳤다. 다섯째,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발굴한 문집 <공도공 유고>가 실려 전하는 소성세고는 그의 많지 않은 시 작품이 실려 전하는데 문학적 향기가 가득한 작품들 이다. 산일된 자료를 찾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여섯째, 그의 간찰이나 필적이나 고문서 등을 찾아 내어 얻은 결과는 장철정사공신록권, 조온정사공신록 권 등이다. 전자는 1398년에 작성된 천안 거주 장철 선생 후손이 소장하고 있고, 후자는 1399년에 작성본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보관 중이다. 필자가 2006년 7월 15일 발굴하여 경향신문에 보도된 장철정사공신록권 은 1398년 정종 1년 11월에 왕명에 따라 도승지 이 문화가 담당하여 장철 공신에게 발급한 공신록권이다. 정종대왕은 즉위 직후 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운 신하들을 추증, 협찬 난정사공신으로 녹훈하였다. 그 런데 정사공신록권은 현재까지 전해지는 유일본으로 개인 소장본이며 보물급 자료이다. 이 녹권에는 일등 공신 12명, 이등공신 17명이 수록되었고, 그 특전 내 용은 개국공신의 경우와 거의 마찬가지다. 상급내용 중 전지와 노비란을 보면 일등공신에게는 전 200결, 노비 25구씩, 그리고 2등공신에게는 두 등급으로 나 누어 상등급은 전 150결, 노비 15구씩, 하등급은 전 100결에 노비 10구씩을 주었다. 장철은 이등공신으로 상등급에 책정되었다. 일곱째, 그의 유적지 가운데 시를 남긴 창작 공간 인 의성 후죽동의 문소루는 밀양의 영남루와 진주의 촉석루와 함께 영남의 3대 누각이다. 그리고 밀양의 영원사 선조루는 유적지가 그대로 보존되지 못하여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보인다. 그리고 경주 감포 이 견대는 현대식 건물로 복원하여 그 모습을 전한다. 여덟째, 그의 맏아들인 이효인의 처가를 방문하였 는데 함창김씨의 유래를 확인하고, 경북 상주 함창읍 증촌리에 남아있는 태조왕릉 유적과 경북 봉화군 도 촌리의 김석재 옹의 종가를 방문한 바 김석재 옹은 600년만에 오신 손님 이라며 후하게 대접하였다. 아홉째, 그의 이장시 발견된 모습을 증언한 분의 전언을 종합하면 9척 깊이에 관이 2중으로 설치되었 고, 그의 체구가 장대하고 황골상으로 치아가 가지런 한 편이었고, 공주박물관 이한상씨는 고려식 분묘라고 증언하였고, 습기를 제거하기 위하여 숱을 사용하여 예장하였다고 한다.(청양 문중 故 이석규 옹 증언) 열째, 그의 별장이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구담동 에 있었다는 것을 양촌 권근의 문집 양촌집에 실린 한시가 입증하고 있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상주목사 권집경과 이웃에 살면서 친구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 며, 술을 즐기며, 풍류남아의 기상을 지닌 인물로 가 한 기록이 나온다. 열한번째, 그의 사상과 종교를 지나치게 유교 일변 도로 서술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사상은 불교와 유교가 융합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후대 역사가와 연구자가 자신의 입장에서만 그의 단 면을 보고 서술하는 예가 많다. 열두째, 그의 서거일은 음력 6월 1일이라는 조선왕 조실록의 기록을 따라야 한다. 열세째, 그의 선고이신 이심 선생의 장지가 보주라 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건대 보주(甫州)는 현재 의 경북 예천이다. 추정하건대 현재 경북 안동시 풍 천면 구담리는 옛날에는 경상도 보주 용궁현에 속했 다. 지금은 경상북도 도청이 대구광역시에서 옮겨와서 2015년 3월에 개청하는 곳이 바로 안동 풍천과 예천 호명이다. 열네째, 현재 충남 천안시 동남구 구성동 산소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옮겨왔다. 열다섯째, 이문화 선생을 이야기하는 자료에 대한 깊은 관심이 촉구된다. 이규상 편저인 정원실록(초 상, 초 하), 소성세덕(초간 1957년, 번역 1985년), 오 천실기(1977), 경상도선생안, 국조보감, 국조방목, 동 유학안, 한국인물대사전,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등이 중요하다. <참고문헌> 이문화, 공도공유고, 소성세고, 1962년 오 천실기 <허철회> 오천 이문화평전, (생각의 나무: 2010) <허철회> 이문화평전을 위한 초석놓기 뿌리교 육(인천이씨공도공파종회) <이성진> 오천 이문화 유 사(뿌리교육 2005.6) <이애희> 오천 이문화의 생애와 경세사상, 학자들이 평가하는 선조의 얼- 제1권(인천 이씨공도공종회) 공도공 오천 이문화 선생의 경세사상 (인천이씨대종회), 뿌리(인천이씨공도공파종회) 인천이 씨세보(편찬위원회) 지면이 넘쳐 다음호에 게재합니다. 烏川 李文和 선생의 經世思想 筆者 李愛熙 (江原大學校 敎授)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