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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셋째 이응인의 사실진술서인 초사, 넷째 증인인 이희무의 초사, 다섯째 경주 부 공증문서인 사급입안으로 구성되어 있다. 점련된 순서대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 번째 소지에서 이전인이 자신의 동생인 이응인과 노비를 교환한 사실에 대해 사 급입안을 발급해줄 것을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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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 逑 (1543-1620)의 학자 관료적 삶과 安 東 府 使 재임 김 학 수 * 30) Ⅰ. 머리말 Ⅱ. 부임에 얽힌 사연 1. 임명에서 부임까지의 역정 2. 풍기 예안을 거쳐 부임한 뜻 Ⅲ. 다스림의 방식과 그 자취 1. 관료적 권위와 학자적 포용성 1) 원칙과 권위의 리더십 2) 鄕 論 끌어안기 - 尊 賢 및 同 門 意 識 의 표명- 2. 士 論 장악과 學 術 文 化 事 業 1) 講 學 과 한강학파의 외연 확대 2) 학술문화사업 의 의욕적 추진 3. 退 溪 景 慕 論 의 여운 - 溪 門 嫡 傳 意 識 - Ⅳ. 맺음말 국문초록 鄭 逑 (1543-1620)는 선조~광해군대에 활동한 조선중기의 대표적 학자 관료의 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이황 조식 양문의 고제답게 한국유학사에 빛나는 다수의 名 著 를 남겼고, 무려 342명에 이르는 문인을 양성함으로써 조선후기 사상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점했다. 그는 주로 학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누구보다 학문의 실천성을 중시하여 중년 이후로는 벼슬길 에 나아가 經 世 論 을 펼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특히 그가 애 착을 보인 직책은 백성들과 호흡을 같이하는 지방관이었다. 그는 일생 11 차례 지방관에 임명되었고, 그 가운데 7차례(수령 6, 감사 1) 부임하여 곳 곳에 많은 치적을 남겼다. 1607년 3월부터 동년 12월까지 역 9개월 동안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학자료조사실장(책임연구원) / 전자우편: ksoya@aks.ac.kr 75

제17호 (2010) 수행한 안동부사는 그에게 주어진, 또 그가 수행한 마지막 지방관이었다. 그가 수행한 많은 고을살이 중에서 안동부사만큼 기록이 풍부하고, 사 연이 다채롭고, 치적이 현저한 예는 드물다. 특히 안동부시 재임기는 그의 생애 후반기로서 학문과 경륜이 최고 경지에 올라 있었음은 물론 퇴계 남 명의 수제자라는 학문적 자부심을 바탕으로 嶺 南 盟 主 意 識 을 강하게 표출 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 퇴계학파의 본거지인 안동부사 부임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이 글은 안동부사 임명에서 사직, 환향에 이르는 11개월간의 자취를 아 주 세밀하게 그려본 것이다. 임명 직후 사직을 곡진하고도 강도 높게 표 현하면서도 끝내 수락한 내면적 이유와 부임 과정에서부터 사퇴하는 순간 까지 한결같이 표출했던 이황에 대한 연모의 마음은 영남맹주의식 과 맥 이 닿아 있었다. 행정책임자로서의 제도적 권한과 사림 영수로서의 학자 적 권위는 원칙을 강조하는 다스림의 실현에 커다란 보탬이 되었다. 아울 러 지역 인사에 대한 포용적 태도와 학술적 우월성은 학술문화사업 의 효 율적 수행을 넘어 한강학파 의 기반 확대라는 부가적 효과를 창출하였다. 이 점에서 정구의 안동부사 부임은 공적 임무의 수행과 사적 포부의 신장 이라는 다면적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정구의 관료 학자적 생애에 서 차지하는 안동부사의 의미이며, 이 글을 작성하게 된 이유이다. 주제어 -------------------------------------------------------------------------------- 鄭 逑, 안동, 안동부사, 지방관, 寒 岡 學 派, 이황, 조식, 嶺 南 盟 主 意 識, 退 溪 景 慕 論, 溪 門 嫡 傳 意 識, 永 嘉 誌 76

鄭 逑 (1543-1620)의 학자 관료적 삶과 安 東 府 使 재임 (김학수) Ⅰ. 머리말 벼슬은 입신양명의 척도로서 조선시대 양반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자 리였다. 하지만 벼슬하는 이유와 방식은 저마다의 처지와 환경, 역량에 따 라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의 경우 관료가 될 수 있는 길은 과거, 음서, 천거 세 가지가 있었다. 문치주의를 표방한 조선 사회가 가장 선호 한 것은 역시 문과를 통해 문신이 되는 것이었지만 전문성에 바탕한 실무 능력, 학덕 및 도덕성에 토대를 둔 경륜에 있어서는 음직이나 천거직도 관직사회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었다. 이 글의 주인공인 정구(1543-1620)는 비록 문과 출신은 아니었지만 조선 개국공신의 후예이자 사림파 도통의 중요한 한 마디를 차지한 金 宏 弼 (1454-1504)의 외후손이라는 점에서 누구보다 가문적 배경이 탄탄한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이었던 이황 조식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이들 사후에는 그 시대가 주목하는 학자로 발돋 움해 나갔다. 줄곧 학문에만 정진하던 정구의 존재는 30세 되던 1572년(선조5) 李 珥 (1536-1584)가 그를 介 士 로 평가하고, 이듬해인 1573년 동향의 벗 金 宇 顒 (1540-1603)이 어전에서 그를 재식과 학문을 갖춘 선비로 추천하면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 때 선조는 정구의 고향과 나이를 묻는 등 자못 관 심을 보였고, 뒤이어 예빈시 참봉의 자리를 내렸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정 구가 宦 籍 에 이름을 올린 것은 이로부터 7년 뒤인 1580년 창녕 현감에 부임하면서였다. 이 때 이이는 자신의 經 筵 日 記 에다 정구를 예학에 힘 을 쏟고, 율신이 엄격하고, 논의가 英 發 하며, 淸 名 이 날로 드러나는 사람 으로 특별히 기록하였다. 이후 그는 동복 현감, 함안 군수, 강릉 부사, 통 천 군수, 성천 부사를 거쳐 1607년 안동 부사로 부임하게 되었고, 가는 곳마다 치적을 남겼다. 특히, 한 고을도 빠트리지 않았던 지리지의 편찬은 지방관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希 蹟 이었다. 77

제17호 (2010) 그렇다고 정구의 관직생활이 지방관으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었다. 1581년(선조14)에는 사헌부 지평, 1594년(선조27)에는 우승지와 공조 참 판을 역임했고,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1608년에는 대사헌이 되어 일국 의 언론권을 주재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정구가 내직보다는 외직을 선호했다는 것인데, 이는 당쟁에 휘말리기 쉬운 내직 보다는 외직이 자신의 배움을 현실에 적용 또는 실천하는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점에서 정구의 외직 선호는 학자적 이상과 소신의 구체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구에게 안동부사는 여러 면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우선 안동부 사는 생애 마지막으로 부여받은 외직이었고, 더구나 안동은 자신의 학문 적 고향의 하나인 예안과 가장 인접한 고을이었다. 65세라는 노령과 그에 따른 건강상의 문제가 걸리기는 했지만 한 번 쯤은 맡아보고 싶은 자리임 에 분명했다. 더구나 그가 생애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꿈꾸던 학자적 야망 을 고려할 때, 안동부사는 더 없이 매력적인 자리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다. 이것이 정구의 안동부사 부임을 단순히 관직 수행의 차원을 넘어 학 자 관료적 삶과 결부시켜 다뤄야 하는 이유이다. Ⅱ. 부임에 얽힌 사연 1. 임명에서 부임까지의 역정 정구가 생애 마지막 외관직인 안동부사에 임명된 것은 1607년(선조40) 정월 13일이었다. 1) 그는 1580년(선조13) 창녕현감을 시작으로 관직 세계 에 발을 내딛었고, 이후 동복현감(1584년), 함안군수(1587), 강릉부사 (1594), 통천군수(1591), 강원감사(1596), 성천부사(1598) 등을 거치면서 지방관으로서는 최고 수준의 자질과 경륜을 갖추게 되었다. 비록 성천부 1) 宣 祖 實 錄 卷 207, 宣 祖 40년 1월 13일(정축). 78

鄭 逑 (1543-1620)의 학자 관료적 삶과 安 東 府 使 재임 (김학수) 사 재직 시절에는 왕실 사람들에게 특혜를 베풀었다는 비난도 있었지만 2) 부지런히 일한 공로[ 勤 勞 之 功 ] 가 인정되어 특별진급의 영예가 따랐다. 3) 修 己 가 전제된 治 人, 학자적 憂 患 意 識 에 바탕한 경세관은 여느 목민관 과는 차별되는 정구만의 장점이었다. 솔선과 포용, 원칙을 강조하는 德 化 의 리더십은 그 시대가 추구하는 다스림 의 본보기가 되었고, 빈곤의 타 파와 민폐의 해결, 백성들의 정신적 풍요까지 아울러 추구했던 그의 통치 철학은 郡 縣 經 營 의 새로운 paradigm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런 그를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었던 조정에서는 영월군수(1601), 충주목사(1602), 홍주목사(1603), 광주목사(1606) 임명장을 연거푸 내려보내며 출사를 재 촉해 왔다. 그러나 정구는 나이 60을 넘기면서부터 벼슬살이에 버거움을 느끼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居 敬 窮 理 와 沈 潛 反 復 이 절실히 요구되는 학문에 대한 애착은 관직의 선별적 수행을 불가피하게 했다. 선조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영월군수, 홍주목사, 광주목사의 직임을 단호히 뿌리친 것도 이 런 이유에서였다. 이런 그가 안동부사만은 끝내 수락한 배경은 무엇일까? 물론 정구는 임 명 초기만 해도 부임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이미 여러 차례 임 금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바 있었고, 더구나 君 命 을 집에 앉아 물리치는 것은 신하된 도리가 아니라는 판단에서 일단 상경한 뒤에 사직소를 올리 고 낙향할 생각이었다. 내심 거취가 결정되자 일종의 상경 환송연을 겸한 뱃놀이를 기획할 정 도로 정구의 마음은 홀가분해져 있었다. 그가 뱃놀이를 위해 南 行 한 것은 정월 27일이었다. 4) 이 날 저녁에는 靈 山 蒼 巖 으로 가서 남명문하의 동문 2) 宣 祖 實 錄 卷 141, 宣 祖 34 年 9 月 18 日 ( 壬 子 ). 3) 宣 祖 實 錄 卷 105, 宣 祖 31 年 1 月 6 日 ( 戊 午 ). 4) 趙 任 道, 澗 松 集 別 集 卷 1, < 龍 華 山 下 同 泛 錄 後 序 > 蓋 先 生 嘗 得 石 之 可 碣 者 留 置 江 濱 因 失 其 所 在 者 二 十 年 矣 或 慮 其 沈 埋 沙 水 欲 倩 海 夫 搜 剔 而 出 之 故 有 是 行 云 ). 이하 龍 華 同 泛 에 대해서는 趙 任 道 의 < 龍 華 山 下 同 泛 錄 後 序 > 참조. 79

제17호 (2010) 郭 再 祐 (1552-1617)의 忘 憂 亭 에서 하루를 묵었다. 28일 정구는 배를 타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景 釀 臺 를 비롯한 주변의 명승지를 유람했고, 일행 을 태운 뱃머리가 함안 道 興 村 에 닿았을 때 뱃놀이는 그 절정으로 치달았 다. 이 모임에는 郭 再 祐 朴 忠 後 張 顯 光 등의 귀빈을 비롯하여 함안 영산 창 녕 현풍 고령 성주 등지의 선비 35명이 앞다투어 참여하여 5) 자리를 크게 빛내주었다. 흥이 무르익자 정구는 이 모임을 특별하게 기념하고 싶어 했다. 금세 선생의 뜻을 알아차린 명필 李 明 怘 가 먹을 갈아 정구 곽재우 박충후 장현광 순으로 참가자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적는 6) 순간 이 날의 모임은 역사가 되었다. 洛 江 의 고사이자 寒 旅 門 下 의 美 談 으로 회자되는 龍 華 山 下 同 泛 錄 은 이런 과정을 통해 文 獻 化 되어 열성 문인 安 侹 의 집에 갈무리되었다. 7) 이튿날인 정월 29일 정구는 서둘러 강을 건너 성주 武 屹 精 舍 로 돌아갔 다. 상경 날짜가 임박했기 때문이었다. 며칠간의 채비를 끝낸 정구는 2월 초순 서울로 올라가 미리 준비한 사직소를 올렸는데, 그 말은 공손했지만 그 뜻은 어느 때보다 견고해 보였다. 안동부사를 사양하는 소[ 辭 安 東 府 使 疏 ] 에서 그가 제시한 사직의 사유 는 1 집안에 喪 禍 가 겹친 탓에 병이 더욱 깊어지고 기력이 쇠잔하다는 점, 2 정신이 온전치 못해 직무를 감당키 어렵다는 점, 3 국법에 65세 된 자에게는 수령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 등이었다. 8) 사실이 분명하 고 논리 또한 합당했지만 선조의 반응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작심이라 도 했는지 정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려 했고, 사람의 기력은 저마다 같지 않다 고 하며 高 齡 이라는 나이 핑계마저도 일축하며 부임을 재촉할 따름이었다. 9) 5) 趙 任 道, 澗 松 集 別 集 卷 1, < 就 正 錄 >. 6) 鄭 逑, 寒 岡 全 書 檜 淵 及 門 錄 卷 2, < 李 明 怘 > 以 文 藝 筆 法 鳴 於 世 7) 鄭 逑, 寒 岡 全 書 檜 淵 及 門 錄 卷 3, < 安 侹 > 先 生 歿 築 臺 于 咏 歸 亭 前 立 石 題 曰 先 師 寒 岡 先 生 之 臺 8) 鄭 逑, 寒 岡 集 卷 2, < 辭 安 東 府 使 疏 >( 丁 未 ). 9) 鄭 逑, 寒 岡 全 書 年 譜 < 丁 未 > 正 月 拜 安 東 大 都 護 府 使 陳 疏 請 辭 答 曰 至 80

鄭 逑 (1543-1620)의 학자 관료적 삶과 安 東 府 使 재임 (김학수) 이제 번거롭지만 두 번째 사직소가 불가피해졌고, 대응의 강도 또한 높 여야만 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두 번 째 상소에는 1604년 말에서 떨어 진 뒤로 백약이 무효한 딱한 처지가 새롭게 추가되었다. 10) 그럴싸한 핑계 였다. 이렇게 회심에 찬 상소문을 막 탈고할 무렵 달갑잖은 풍문이 들려 왔다. 소문의 진상을 확인해 보니 어느 대신이 자신의 사직을 절대로 받 아들이지 말 것을 선조께 건의했다는 것이었다. 11) 소문은 사실로 드러났 고, 그는 상소를 올리는 대신 肅 拜 를 서둘렀다. 하루라도 빨리 도성을 빠 져나가고 싶은 마음에 3월 초 선조께 인사하고 임지를 향해 떠났다. 정구의 안동부사 부임과 관련하여 한강집 과 한강연보 에는 임명과 동시에 정해진 사직의 마음, 신하된 도리로서의 상경, 간곡한 사직소, 불가피한 선택으로서의 부임 이 강조되어 있지만 과연 이것이 전부였을 까? 물론 정구가 여러 이유를 들어 부임을 사양한 진정성은 인정되지만 이 과정에서 어떤 갈등이나 번민은 없었을까? 정구에게 있어 안동은 매우 특별한 곳이었다. 안동은 스승 이황의 근거 지인 禮 安 과 인접한 고을로서 퇴계문하를 빛낸 우뚝한 인재들이 즐비하여 예안과 더불어 퇴계학파의 양대 거점으로 인식된 곳이었다. 마침 안동 예 안지역 퇴계학파는 정구가 안동부사에 임명되던 1607년을 전후하여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지역 3대 高 弟 가운데 김성일(1538-1593) 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에 이미 순국했고, 조목(1524-1606)은 한 해 전인 1606년에 사망했다. 그나마 생존해 있던 류성룡(1542-1607) 조차도 이 무렵에는 병세가 매우 위독하였다. 3고제의 사망 또는 병환으 로 인한 사회 학문적 활동의 중단은 자연스럽게 퇴계학파의 세대 교체를 촉진시키고 있었다. 학문적 구심점의 상실로도 해석될 수 있는 안동 예안 지역 퇴계학파의 세대 교체는 퇴계 남명 양문의 고제로서 嶺 南 盟 主 意 識 을 한층 강화하고 있던 정구에게 있어 자신의 학문적 위상을 강화하고, 於 年 歲 之 事 則 人 之 氣 力 不 同 何 必 拘 也 卿 宜 勿 辭 10) 鄭 逑, 寒 岡 集 卷 2, < 擬 上 再 辭 安 東 府 使 疏 >. 11) 鄭 逑, 寒 岡 全 書 年 譜 < 丁 未 > 更 擬 陳 辭 乞 遞 聞 有 議 請 留 者 遂 寢 其 疏 81

제17호 (2010) 학파의 외연을 확대시킬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정구는 만년에 이르러 親 退 溪 的 인 입장을 보다 강화한 것 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12) 正 脈 高 風 辨 13) 등의 기록에 따르면, 정구는 정 인홍(1535-1623)과의 불화와 대북의 정치적 공격이라는 난관 속에서도 조식에 대해 거의 일관된 입장을 유지했고, 이러한 입장은 말년으로 갈수 록 더욱 심화된 측면도 없지 않았다. 물론 정구는 五 先 生 禮 說 分 類, 心 經 發 揮 등의 저술을 통해 이황에 대한 계승의식[ 嫡 傳 意 識 ]을 드러낸 바 있고, 14) 1603년(선조36)의 東 岡 輓 詞 에서는 이황을 正 脈, 조식을 高 風 으로 평하는 등 친퇴계적 입장 을 강조해 온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정구의 인식은 정인홍으로부터 조식 에 대한 폄박으로 간주되어 반박을 당하기도 하며, 또 동강만사 에 이황 에 대한 비교 우위적인 뉘앙스가 내재되어 있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를 조식에 대한 폄박보다는 퇴계 남명에 대한 양측적 계승의식의 표현으 로 해석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정구의 퇴계 남명에 대한 양측적 계승의식은 이른바 嶺 南 盟 主 意 識 으로 치환될 수 있다. 정구는 김우옹을 애도한 이듬해인 1604년에는 濂 洛 羮 墻 錄, 洙 泗 言 仁 錄, 臥 龍 庵 志, 景 賢 續 錄, 谷 山 洞 庵 志 등을 편차, 찬 술하고, 도동서원의 건립을 발론했고, 1605년에는 檜 淵 草 堂 을 복설하는 등 저술과 강학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15) 그리고 정인홍이 고풍정맥 변 을 지어 자신을 공박하던 1606년 가을에는 삼가의 龍 巖 書 院, 진주의 덕천서원 및 조식의 묘소, 함양의 灆 溪 書 院 을 심방하고 鄭 汝 昌 의 묘소에 12) 徐 廷 文, 朝 鮮 中 期 의 文 集 編 刊 과 門 派 形 成,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 문, 2006, pp.112~116. 13) 辨 誣 < 正 脈 高 風 辨 >( 晉 州 晉 陽 河 氏 知 命 堂 河 世 應 後 孫 家 所 藏 本 ). 14) 특히 心 經 發 揮 의 저술은 眞 德 秀 李 滉 으로 이어지는 심경 에 대한 정통 적 이해 를 정구 자신이 계승했다고 하는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退 溪 嫡 傳 意 識 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서정문, 앞의 논문, p.115 참조. 15) 김학수, 17세기 嶺 南 學 派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pp.24-25. 82

鄭 逑 (1543-1620)의 학자 관료적 삶과 安 東 府 使 재임 (김학수) 치제하는 등 우도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산시켜 나갔다. 16)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는 안동부사에 전격 발탁된 직후인 1607년 2월 장현광을 대동하여 용화산 아래에서 郭 再 祐, 李 厚 慶 등 30여명의 사림들 과 회합하는 등 영남의 학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켜 나가고 있 었다. 결국 정구의 안동부사 부임은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형식논리를 넘어 이 황에 대한 연원의식의 강화, 안동 예안권 인사들에 대해 영향력의 확대라 는 학문적 포부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정황 은 부임 과정에서 나타난 일련의 행위, 약 9개월 동안 재직하는 과정에서 추진한 크고 작은 사업 및 행사, 각종 모임에서 확연하게 드러나게 된다. 2. 풍기 예안을 거쳐 부임한 뜻 1607년 3월, 숙배를 마친 정구는 임지 안동을 향해 출발했다. 單 車 赴 任 이란 표현처럼 부임 행차는 지나칠 정도로 검박 간소했다. 부임길에 정 구가 맨 먼저 찾은 곳은 楊 根 소재 6대조 할머니의 묘소였다. 그가 굳이 이곳을 찾은 것은 얼마 전 들불이 번져 산소를 태우는 未 安 한 일이 있었 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미련이 남아서인지 정구는 이번 안동행의 사유를 이렇게 고했다. 여러 번 임금의 은혜를 입어 거듭 사양하였는데, 그렇게 사양하고 나니 이제는 사양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7) 16) 鄭 逑, 寒 岡 全 書 年 譜 < 丙 午 > 九 月 造 玄 風 謁 道 東 院 祠 十 月 祭 金 先 生 墓 十 一 月 往 三 嘉 謁 龍 巖 院 祠 仍 向 晉 州 謁 德 山 院 祠 祭 曺 先 生 墓 歷 山 陰 祭 吳 德 溪 墓 至 咸 陽 謁 灆 溪 院 祠 祭 鄭 先 生 墓 ; 鄭 慶 雲, 孤 臺 日 錄 < 丙 午 冬 11 月 12 日 > 與 渭 瑞 往 拜 寒 岡 先 生 于 山 陰 之 道 士 軒 ; < 丙 午 冬 11 月 18 日 > 寒 岡 先 生 自 德 山 遊 龍 湫 臨 書 院 ( 蘫 溪 書 院 - 筆 者 註 ) 余 與 猶 子 往 拜 于 院 午 後 先 生 祭 一 蠹 先 生 墓 余 讀 祝 文 ; < 丙 午 冬 11 月 28 日 > 聞 寒 岡 路 由 火 界 抵 于 武 屹 云 云 可 想 其 意 17) 鄭 逑, 寒 岡 集 卷 12, < 告 六 代 祖 妣 貞 順 宅 主 樂 安 金 氏 墓 文 >. 楊 根 西 始 面 堂 父 里 에는 정구의 6대 조모 貞 順 宅 主 낙안김씨의 묘소가 있다. 정순택주는 조선 開 國 功 臣 에 책훈된 정구의 6대조 鄭 摠 의 부인이다. 83

제17호 (2010) 묘소 참배를 마친 정구는 일정을 서둘렀고, 부임 노정은 죽령 풍기 예안을 거쳐 안동으로 가는 코스로 정해졌다. 왜 하필 정구는 이 코스를 택했을까? 정구에게 이번 걸음의 형식은 안동부사 부임 행차였지만 내용 은 선대를 기리는 追 遠 과 학문의 연원을 찾아가는 尋 源 에 있었기 때문이 었다. 이런 속마음은 이미 양근 성묘 때 얼핏 드러났고, 풍기를 지날 때 보다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풍기 경내에 들어서자마자 정구는 內 谷 行 을 지시했다. 내곡은 어릴 때 자신을 가르쳤던 黃 俊 良 (1517-1563)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이황의 문 인으로 1560(명종15)~1563년(명종18)까지 성주목사를 지낸 황준량은 교 육활동에 매진하여 지역의 문풍을 크게 진작시킨 공이 있었다. 정구 역시 鹿 峯 精 舍 에서 18) 그의 가르침을 입은 선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물론 정 구는 1563년 황준량이 사망했을 때 풍기로 가서 조문한 바 있지만 스스 로의 표현처럼 무려 45년 만에 다시 옛 선생의 무덤을 찾아 술 한 잔을 올린 것이었다. 19) 황준량의 산소를 뒤로 한 정구는 예안 땅 陶 山 書 院 을 향해 급하게 발걸 음을 옮겼다. 3월 7일 땅거미가 질 무렵 문인 예닐곱을 대동하고 서원에 도착한 그는 원장을 비롯한 인근 선비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선비들은 그를 인근 고을의 수령이기보다는 士 友 의 예로써 맞아주었다. 조촐하면서 도 정갈한 술자리가 이어졌고, 이들의 묵은 대화는 밤이 깊어서야 끝이 났다. 20) 한강 鄭 令 公 이 안동부사에 임명되어 서울에서 바로 도산으로 가서 사 18) 建 瓴 山 아래 자리한 녹봉정사는 황준량이 성주목사 재임 때 건립하여 선비들 의 학업을 권장한 곳으로( 黃 俊 良, 錦 溪 集 卷 4, < 與 鹿 峯 精 舍 諸 生 書 >), 이황 으로부터도 비상한 주목을 받은 바 있었다( 李 滉, 退 溪 集 卷 20, < 答 黃 仲 擧 >) 19) 鄭 逑, 寒 岡 集 卷 12, < 祭 黃 錦 溪 俊 良 墓 文 >. 20) 金 光 繼, 梅 園 日 記 < 丁 未 3 月 7 日 > 寒 岡 初 昏 來 到 院 余 與 諸 友 具 剌 入 謁 山 長 爲 設 酒 肴 余 亦 持 酒 肴 行 數 巡 陪 話 甚 穩 夜 久 乃 罷 84

鄭 逑 (1543-1620)의 학자 관료적 삶과 安 東 府 使 재임 (김학수) 당을 참배하고, (퇴계의) 묘소에 치제했다. 퇴계 선생께서 돌아가신 뒤로 는 이번 걸음이 처음이었다. 21) 정구가 퇴계문하에 최초로 입문한 것은 21세 되던 1563년(명종18)이었 다. 이후 그는 이황에게 心 經 을 질문하고, 川 谷 書 院 의 院 號 를 품의하여 정하는 한편 서신 왕래를 통해 사제관계를 꾸준히 이어나갔다. 그러나 정 구는 1570년(선조3) 이황이 사망했을 때 병으로 인해 조문하지 못했 고, 22) 退 溪 集 의 간행을 비롯한 이황 관련 각종 추양사업에서도 존재와 역할이 별로 부각되지 못했다. 이는 그가 曺 植 의 상례를 사실상 주관했고, 南 冥 集 의 간행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23) 것과는 자못 대조적이었다. 무려 40년 만에 도산을 다시 방문한 정구의 감회는 남달랐다. 도산서당 은 서원으로 확대되어 교학의 전당이 된 지 오래였다. 주변의 경치와 풍 물도 예전 같지는 않았지만 선생의 체취를 느끼려고 애를 썼다. 동이 트 기가 무섭게 의관을 정제하고 문 밖으로 나섰다. 그가 맨 먼저 찾은 곳은 巖 栖 軒 觀 瀾 軒 天 淵 臺 였다. 여기서 그는 옛날을 회상하였고, 이른 조반을 들기가 무섭게 이황의 무덤이 있는 溪 上 으로 향했다. 아침에 한강이 巖 栖 軒 과 觀 瀾 軒 및 天 淵 臺 를 둘러 보았는데, 나는 여러 벗들과 함께 수행했다. 아침을 들고 한강은 溪 上 으로 가서 퇴계선생 산소 에 술을 올렸다. 24) 1607년 3월 8일 오전, 정구는 이황의 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순간 21) 金 坽, 溪 巖 日 錄 < 丁 未 3 月 8 日 > 鄭 寒 岡 令 公 拜 花 伯 自 京 直 造 陶 山 謁 廟 祭 墓 盖 嘗 受 業 于 先 生 而 先 生 沒 後 此 其 始 到 也 22) 鄭 逑, 寒 岡 全 書 年 譜 < 庚 午 > 十 二 月 退 溪 先 生 訃 至 爲 位 而 哭 先 生 草 土 之 後 積 年 沉 痼 未 得 奔 赴 23) 徐 廷 文, 朝 鮮 中 期 의 文 集 編 刊 과 門 派 形 成,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 문, 2006. 24) 金 光 繼, 梅 園 日 記 < 丁 未 3 月 8 日 > 朝 寒 岡 歷 觀 巖 栖 觀 瀾 軒 天 淵 臺 余 與 諸 友 從 行 焉 食 後 寒 岡 往 溪 上 酹 酒 于 退 陶 先 生 墓 85

제17호 (2010) 그는 백 리의 땅을 맡은 부사도 아니었고, 온 나라 선비들의 중망을 받는 사림의 영수도 아니었다. 학자를 꿈꾸며 도산을 찾았던 40년 전의 小 生 으로 돌아가 선생에게 잔을 올릴 뿐이었다. 25) 이 엄숙한 광경은 그를 시 종하던 많은 선비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예를 마친 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산을 내려온 정구는 月 川 [달내]으 로 걸음을 옮겼다. 지난해 10월 유명을 달리한 동문 선배 趙 穆 에게 예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정구가 기억하는 조목은 爲 己 之 學 에 힘쓰는 참된 선 비, 덕스럽고 모범적인 선배, 朱 門 의 蔡 西 山 에 비길만한 退 門 의 고제였다. 이러한 존경의 마음은 조목의 무덤에 올린 제문에서 거듭 환기되었고, 26) 도산서원을 비롯한 조목과 관련된 각종 院 享 論 에서 자문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더욱 깊어지게 된다. 27) 서울에서 예안은 65세 노인이 감당키 어려운 1,000리 역정이었지만 정구는 빡빡한 일정을 정력적으로 소화했 고, 3월 8일 오후 안동부 관사에 도착했다. Ⅲ. 다스림의 방식과 그 자취 1. 관료적 권위와 학자적 포용성 1) 원칙과 권위의 리더십 조선시대의 모든 지방관은 解 由 라 불리는 인수인계를 마쳐야 공식적인 임무 교대가 이루어졌다. 정구의 임무 교대 대상자는 퇴계문하의 동문 金 玏 (1540-1616)이었다. 김륵은 학식과 경륜에다 廉 潔 까지 갖춘 정통 관료 25) 鄭 逑, 寒 岡 集 卷 12, < 祭 退 溪 李 先 生 墓 文 > " 逑 也 小 生 幸 早 及 門 提 掖 之 厚 敢 忘 隆 恩 " 26) 鄭 逑, 寒 岡 集 卷 12, < 祭 趙 月 川 穆 墓 文 >. 27) 朴 賢 淳, 16~17세기 禮 安 縣 士 族 社 會 硏 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 金 鶴 洙, 17세기 嶺 南 學 派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86

鄭 逑 (1543-1620)의 학자 관료적 삶과 安 東 府 使 재임 (김학수) 였다. 안동부사 재직 때는 홍수로 유실된 廬 江 書 院 [ 虎 溪 書 院 ]을 중건하는 등 師 門 의 일에도 向 念 이 깊은 사람이었다. 28) 지난 정월 13일 자로 부사직에서 갈린 그는 신임 부사가 오기도 전에 고향 영주로 돌아가 모처럼의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이에 정구는 부임 길에 영주 龜 鶴 亭 으로 가서 그와 임무 교대를 했고, 뒤이어 이취임을 겸 한 잔치가 베풀어졌다. 이 자리에서 정구는 고지식하리만큼 당시의 잔치 문화 를 수용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이것은 常 스러운 놀이문화 에 대한 강한 거부감의 표현일 수도 있었다. 부임 길에 영주를 들러 龜 鶴 亭 에서 (김륵과) 임무 교대를 했다. 술기운 이 거나해지자 연못 앞에 작은 배를 띄우고 두 명의 여종에게 명하여 陶 山 十 二 曲 을 연주케 했는데, 선생이 이를 물리치게 하셨다. 주인(김륵)은 선생이 俗 樂 을 좋아하지 않음을 알고는 있었으나 이 곡은 老 先 生 ( 李 滉 )께 서 지은 것이라서 반드시 금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선생은 이마저도 거 절하였다. 29) 학문과 일상 생활, 심지어 즐김의 자리에서조차도 바름 을 지향했던 치 열한 자기단속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자세는 治 民 에 있어 서도 예외일 수 없음을 천명한 것인 동시에 철저한 자기관리 를 통해 부 사로서의 권위를 확립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정구의 다스림은 부지런하고 민첩함[ 勤 敏 ], 너그럽고 간명함[ 寬 簡 ], 맑고 조용함[ 淸 靜 ], 공순하고 검소함[ 恭 儉 ] 에 그 줄기가 있었다. 아울 러 그는 자신의 본분은 법도로써 지켜나갔고, 선비는 예로써 대했으며, 백 성에게는 관대했지만 관속들은 위엄으로 다스렸다. 30) 簡 嚴 으로 집약되는 목민리더십 은 일생을 관통하는 居 官 의 지침이었다. 28) 廬 江 志 卷 1, < 重 建 事 實 >. 29) 鄭 逑, 寒 岡 全 書 言 行 錄 卷 1, < 律 身 >. 30) 鄭 逑, 寒 岡 全 書 言 行 錄 卷 3, < 居 官 >. 87

제17호 (2010) 창녕현감 시절에는 학교를 일으켜 문교를 진작시키는 한편 鄕 飮 酒 禮 와 鄕 射 禮 를 통해 禮 讓 의 습속이 뿌리내리게 했으며, 성천부사 재직 때에는 왕자 대군도 그가 두려워 기생을 건들지 못할 정도로 위엄을 세웠다. 함안 군수 시절에는 현명한 판결로써 부자간의 천륜을 바로 잡았고, 身 役 을 고 르게 하고 租 稅 를 낮추어 민생을 크게 안정시켰다. 동복의 生 祠 堂 과 함안 의 頌 德 碑 31)는 바로 이러한 遺 愛 에 따른 士 民 의 속 깊은 보답이었다. 정구가 안동을 다스리면서 가장 중점을 둔 것 중의 하나는 綱 常 과 紀 綱 의 확립이었다. 그것은 임금[수령]이 하늘로 삼는 것은 백성이라는 유교 적 보편주의에 기초하였다. 당시 안동에는 어느 종이 권력가의 위세를 끼 고 횡포를 일삼고 있었다. 양반을 모욕하는가 하면 심지어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강탈하는 등 그 폐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전의 수령 들은 그 세력이 두려워 제압할 엄두조차 내지 못함으로써 고을의 걱정거 리가 된 지 오래였다. 반륜과 불법을 묵과할 정구가 아니었다. 그는 부임 즉시 그 종을 붙잡 아 옥에 가두고 경상감사에게 보고한 다음 곤장을 쳐서 物 故 를 내 버렸다. 온 고을 사람들이 이를 통쾌히 여겼음은 물론이고 종의 주인조차도 감히 군소리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32) 너그러움의 정치를 추구하되, 강상을 어 기거나 불법을 저지르는 자에 대해서는 추호의 용서가 없었던 이러한 다 스림의 원칙은 입소문을 통해 온 고을로 무섭게 전파되어 갔다. 2) 鄕 論 끌어안기 - 尊 賢 및 同 門 意 識 의 표명- 신임 수령이 부임하여 인수인계를 마친 뒤에 반드시 챙겨야 할 일은 고 을 元 老 들에 대한 인사이다. 禮 訪 형식의 이 인사는 고을 사정에 밝은 어 른들로부터 민간의 현안이나 고충을 듣는 일종의 민정시찰 또는 민생탐 31) 함안 頌 德 碑 는 1588년 8월 정구가 군수직에서 물러나자 군민들이 그의 공덕 을 기리기 위해 三 樹 亭 안에 건립한 것이다. 이후 1672년에는 道 林 書 院 을 건 립하여 정구의 위패를 봉안했다. 32) 鄭 逑, 寒 岡 全 書 年 譜 < 丁 未 > 有 一 寺 奴 假 威 權 相 侵 刻 小 民 收 捕 鞠 治 人 多 救 解 而 竟 不 貸 其 事 ; 鄭 逑, 寒 岡 全 書 言 行 錄 卷 3, < 居 官 >. 88

鄭 逑 (1543-1620)의 학자 관료적 삶과 安 東 府 使 재임 (김학수) 방 이었다. 그런데 임지에 도착한 정구가 맨 먼저 챙긴 것은 산 자가 아닌 죽은 이 였다. 그냥 사자가 아닌 온 고을이 존경하는 어진이, 즉 賢 人 이 그 대상이 었다. 이는 정구가 유교문화의 거점의식을 갖고 있던 안동 사민들의 정서 를 꿰뚫어 보고 있었음을 뜻한다. 어진이를 높이는 일보다 더 유교적 명 분에 부합되고, 또 사민들의 정서에 살갑게 다가서는 교화의 방식도 없었 던 것이다. 정구가 예방 대상으로 삼은 이는 權 幸 金 方 慶 權 橃 金 誠 一 및 한창 병마와 싸우고 있던 동문 柳 成 龍 이었다. 흔히 權 太 師 로 불리는 권행은 안동권씨의 시조이자 안동 역사의 開 山 祖 였다. 그는 신라말 古 昌 (안동의 옛 이름)의 성주 金 宣 平, 읍인 張 吉 과 함 께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에 책봉되고 太 師 의 작위를 받은 인물 이었다. 33) 이들은 각기 안동김씨, 안동권씨, 안동장씨의 시조로서 무한한 추모의 대상이 되었고, 안동 사람들은 太 師 廟 라 불리는 사당을 지어 그 공덕을 기렸다. 34) 권태사는 안동 역사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정구에게는 외선조가 된다. 정구의 증조 淸 城 君 鄭 胤 曾 의 부인이 전성군 李 思 義 의 증손이고, 이사의 의 부인 문화유씨의 외고조가 예천부원군 權 漢 功 (미상-1349)이었다. 이것 이 정구가 살던 시대의 자손의식 과 조상챙기기 의 실상이다. 아쉽게도 정구는 병으로 인해 몸소 묘소를 참배하지는 못했다. 물론 정 성들여 지은 제문에는 외선조에 대한 추모의 마음이 넘쳐 흘렀지만 35) 이 예법이 외자손으로서의 도리 치레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안동 부사 라는 직분을 고려할 때, 권태사에 대한 치제는 안동을 상징하는 인물에 대한 예우, 나아가 안동토박이의식 이 확고했던 권씨 일문을 향해 내민 請 援 의 손길이나 마찬가지였다. 33) 太 師 權 公 實 紀 ( 天 地 人 ) 및 太 師 廟 事 蹟 ( 上 下 ). 34) 김학수, 안동 太 師 廟 위차논쟁의 정치 사회적 성격, 仁 荷 史 學 10, 인하사 학회, 2003. 35) 鄭 逑, 寒 岡 集 卷 12, < 祭 權 太 師 墓 文 >. 89

제17호 (2010) 이 점에서는 김방경(1212-1300)의 치제도 예외일 수 없었다. 삼별초 의 난 을 정벌하여 유명해진 김방경은 고려시대를 통틀어 안동이 배출한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 1283년 관직에서 물러날 당시 그에게 주어진 식 읍이 무려 1,000호였으니, 그 의식의 족했음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정구의 9대조 청하군 鄭 㥽 은 곧 그의 손녀 사위였다. 청주정씨는 정책 의 아버지 鄭 瑎 ( 章 敬 公 ) 鄭 㥽 ( 淸 河 君 ) 鄭 䫨 ( 雪 軒 ) 鄭 誧 ( 雪 谷 ) 鄭 樞 ( 圓 齋 ) 鄭 極 ( 漢 城 尹 ) 鄭 摠 ( 復 齋 ) 鄭 擢 ( 春 谷 )을 거치면서 국중의 명가로 발돋움했 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방경의 후광이 청주정씨의 번성에 영향을 미쳤 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번에도 정구는 직접 참배치 못하고 집안사 람 鄭 士 信 (1558-1619)을 대신 보내기는 했지만 제문 곳곳에는 흠모의 정 이 가득했다. 36) 권태사와 김방경에 대한 치제가 자손의식 에 바탕을 둔 일종의 爲 先 禮 節 이었다면 권벌 김성일 류성룡에 대한 치제 및 문병은 사림의식 에 기초 한 주자학적 존현 예법이었다. 내성현 酉 谷 山 으로 가서는 학문과 道 義 에 힘쓰며 정도로써 충의를 행한 권벌의 삶을 숙연한 마음으로 칭송했고, 37) 안동 佳 樹 川 소재 김성일의 묘역에서는 망자를 보석[ 琳 琅 ], 자신은 잡 석[ 碔 砆 ] 에 비기며 황량한 무덤 앞에서 애도의 눈물을 흘렸다. 38) 퇴계 학이 맺어준 동문의 情, 忠 義 가득한 골수와 道 理 충만한 심장으로 의로 운 삶을 마감한 김성일의 장렬한 생애가 절로 비감한 마음이 들게 했던 것이었다. 이처럼 김성일에 대해 동문의식 이 특별했던 정구는 10년 뒤인 1617 년 鶴 峯 行 狀 및 鶴 峯 墓 表 를 탈고함으로써 벗에 대한 묵은 빚을 조금이 나마 갚게 된다. 정구가 김성일의 문인 및 자손으로부터 찬술 요청을 받은 것은 1611 1612년 쯤이었다. 망자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는지 정구는 5년 동안 집 36) 鄭 逑, 寒 岡 集 卷 12, < 祭 外 先 祖 金 忠 烈 公 墓 文 >. 37) 鄭 逑, 寒 岡 集 卷 12, < 祭 權 忠 定 公 墓 文 >. 38) 鄭 逑, 寒 岡 集 卷 12, < 祭 金 鶴 峯 墓 文 >. 90

鄭 逑 (1543-1620)의 학자 관료적 삶과 安 東 府 使 재임 (김학수) 필을 미루다 마침내 1617년 9월 25일 동년 10월 20일까지 약 25일만 에 학봉행장 의 초본을 단숨에 탈고했고, 이후 세밀한 수정을 거쳐 완고 를 본가로 돌려보냈다. 39) 또한 그는 학봉묘표[ 一 名 : 題 鶴 峯 墓 傍 石 ] 도 지 었고, 1607년 김성일의 제향처로 건립된 臨 川 鄕 祠 를 서원으로 승격토록 주선한 사람도 정구였다. 40) 특히, 김성일의 일생을 89자에 담은 학봉묘 표 41) 는 절제된 표현이 돋보이는 묘도문의 名 作 으로 꼽힌다. 정구가 친구 류성룡을 문병하기 위해 豊 山 西 美 洞 을 찾은 것은 1607년 4월 초 어느 날이었다. 1606년 3월부터 서미동 草 堂 에서 요양 중이던 류 성룡의 병세는 그 해 12월에 접어들면서 더욱 위독해졌다. 병마와 싸우고 있는 옛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 그래서 한 시라도 빨리 손이라 도 한번 잡아보고 싶은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다. 두 사람은 40년 친구였 지만 11년 전에 잠깐 만난 이후로는 서로 상면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초당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맞은 것은 면회사절 을 뜻하는 謝 客 牌 였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때때로 문병객을 맞았던 류성룡이 4월부 터는 면회를 일절 사절했기 때문이었다. 城 主 의 지위로도 편안하고 조용 하게 造 化 로 돌아가고자 했던 친구의 마지막 뜻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 다고 차마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던 정구는 류성룡 곁에서 하룻밤을 묵 고 가기로 했다. 그날 밤 류성룡은 정구에게 쪽지를 보내 성의에 답했고, 정구는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지난날의 가슴 뭉클한 우정을 가슴에 새겼다. 사실 류성룡은 정구가 안동부사로 부임한다는 기별을 듣고 누구보다 기 뻐했고, 빨리 병석에서 털고 일어나 친구와 함께 봄놀이를 하고 싶은 마 음이 간절했다고 한다. 42) 하지만 정구가 문병을 다녀간 지 약 한 달 뒤 5 39) 김학수, 鄭 逑 文 學 의 創 作 現 場 과 遺 跡 에 대한 연구, 大 東 漢 文 學 29, 대동 한문학회, 2008, pp.169 172. 40) 金 誠 一, 鶴 峯 集 年 譜 < 戊 午 > 陞 臨 川 鄕 社 爲 書 院 從 寒 岡 鄭 先 生 之 議 云 41) 鄭 逑, 寒 岡 集 卷 13, < 金 鶴 峯 墓 表 >. 42) 鄭 逑, 寒 岡 集 卷 12, < 弟 柳 西 厓 成 龍 文 >. 91

제17호 (2010) 월 6일 류성룡은 6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였다. 부음을 접한 정구는 궤연 앞에서 끝내 손 한번 잡지 못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며 목놓아 울었다. 43) 이황의 문하에는 이른바 溪 門 四 高 弟 라는 명목이 존재한다. 조목 류성 룡 김성일 정구를 두고 이르는 말인데, 저마다 퇴계학을 계승하여 독자적 인 산맥을 이룬 사람들이다. 정구가 안동부사로 부임하면서 이황을 제외 하고 가장 만나고 싶어했던 사람이 바로 이들이었다. 이 가운데 두 사람 은 이미 고인이 되었기에 무덤을 찾을 수 밖에 없었고, 그나마 생존해 있 었던 류성룡과의 만남도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정구는 안동부사가 되어 40년 만에 당당하게 자신의 학문적 고향 에 입성하였지만 평소 그가 그리던 단 한사람의 옛 친구도 만나지 못한 셈이다. 하지만 조목 김성일 류성룡으로 이어지는 참배와 위문은 학문 이 맺어준 아름다운 인연, 즉 동문사랑 의 소중함을 새롭게 自 覺 하는 계 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은 온 고을이 존경하는 어진이였기에 이 들과의 학우관계는 정구의 권위를 더욱 높여주기에 충분했다. 이제 정구 는 한 손에는 국가로부터 위임받은 행정책임자로서의 제도적 권한을, 다 른 한 손에는 계문4고제 의 한 사람이라는 학문적 권위를 쥐고 안동을 다 스릴 수 있게 되었다. 2. 士 論 장악과 學 術 文 化 事 業 1) 講 學 과 한강학파의 외연 확대 정구는 1543년(중종 38)에서 1620년(광해군 12)까지 78년 생애의 대 부분을 학자 문인으로 살았고, 더러는 관직에 나아가 경륜을 펼치기도 했 던 사람이다. 이 때문에 그는 조정에 있을 때는 儒 臣 으로 예우되었고, 재 야에 있을 때는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인물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그의 학문적, 정치적 성장 및 개인적 권위 구축에 있어 커다란 장점으로 작용 43) 鄭 逑, 寒 岡 集 卷 1, < 挽 柳 西 厓 >(2 首 ) 92

鄭 逑 (1543-1620)의 학자 관료적 삶과 安 東 府 使 재임 (김학수) 하였다. 44) 지방관 재직 때 정구가 가장 중시한 것은 학문과 교육이었다. 학인으로 서의 본분의식 과 관료로서의 책무의식 이 조화를 이룬 결과였다. 守 令 7 事 의 하나였던 興 學 校 는 모든 수령의 의무사항이었지만 그의 교육 학문 열은 제도적 요구치를 훨씬 넘어서 있었고, 출세를 위한 공부보다는 올바 른 사람됨의 학문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 지향도 달랐다. 하지만 일종의 텃새랄까 부임 초기만해도 안동 선비사회의 분위기는 그다지 녹녹치만은 않았다. 본디 정구는 師 道 가 존엄하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사제간의 엄격 한 질서는 학문과 일상을 막론하고 엄격히 적용되었다. 심지어 그는 여행 또는 유람 때에도 문인들과 잠자리를 함께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고, 이 동할 때에는 늘 가마나 말에 오름으로써 도보로 이동하는 문인들과는 철 저히 차별을 두었다. 45) 1 한강은 일찍부터 중명이 있어 師 道 로서 스스로를 높였다. 한번 제자 로 일컬어지면 때로 藍 輿 를 메기도 하고, 혹은 밥을 짓거나 죽을 끓이기 도 했다. 46) 2 樂 齋 ( 徐 思 遠 )는 선생보다 일곱살 아래였는데, 산중에 올 때마다 낮 에는 같은 책상을 마주했고, 밤에는 이부자리를 나란히 하면서도 새벽에 44) 김학수, 鄭 逑 文 學 의 創 作 現 場 과 遺 跡 에 대한 연구, 大 東 漢 文 學 29, 대동 한문학회, 2008, p.139. 45) 김학수, 鄭 逑 (1543-1620) 문학의 창작현장과 유적에 대한 연구, 한문학 의 창작 현장과 관련 유적에 대한 심층적 탐색, 대동한문학회 2008년 추계 학술대회 발표요지, 대동한문학회, p.120. 46) 金 坽, 溪 巖 日 錄 ( 草 ) < 丁 未 11 月 6 日 > 寒 岡 夙 有 重 名 以 師 道 自 尊 一 經 弟 子 之 稱 則 或 擧 藍 輿 或 炊 飯 粥 (이수건, 고문서의 조사 정리와 사료적 가치, 고문 서 조사 정리의 현황과 과제 (경북대학교 부설 영남문화연구원 제7회 학술대 회 발표자료집, 2006)에서 재인용. 학계에 보급되어 있는 溪 巖 日 錄 (국사편 찬위원회, 1997)에는 < 丁 未 11 月 6 日 條 > 자체가 누락되어 있으며, 공개되지 않은 溪 巖 日 錄 ( 草 )에서만 이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93

제17호 (2010) 일어나 씻고 머리를 빗은 뒤에 들어가 책상 앞에서 절을 하면 선생께서는 방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답하셨다. 47) 이런 그였건만, 부임 초기 정구는 일부 유생들의 강회 불참 사태에 직 면하면서 적잖은 충격에 빠지게 된다. 그 파동의 중심에는 자신의 친구 김성일의 생질 柳 復 起 (1555-1617)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코 상황을 좌시 할 수 없었던 정구는 마침내 경내 유생들에게 통고문을 내려 보내게 된다. 극심한 자괴감 때문이었는지 어조도 전에 없이 격해져 있었다. 통독회의 정상화를 촉구한 이 글의 명목은 통고문이었지만 해당 유생들에게는 준엄 한 경고문처럼 들렸다. 고을의 유생들이 心 學 에 뜻을 두고 通 讀 會 를 만들었으니, 매우 가상한 일입니다. 다만 강회에 참여한 제군은 모두 나이 어린 후학들이므로 학문이 크게 성취되고 기질이 원만한 權 淳 과 柳 復 起 같은 자들 24 員 이 마땅히 좌석에 나와 이 모임을 빛내야 할 것인데, 오히려 뒤로 물러앉아 함께 어울리려 하지 않으려 하니, 이 어찌 나와 같은 늙은이와 함께 공부 하는 것이 불만스러워서가 아니겠습니까. 이는 마땅히 이 사람이 수치로 여길 일입니다. 48) 유복기 등 일부 안동 유생들이 심경강독모임 을 거부한 까닭은 자세하 지 않다. 다만, 조목 김성일 류성룡의 문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당시 안동 의 학풍을 고려할 때, 정구가 학문적인 이방인으로 느껴질 여지는 얼마든 지 있었다. 그런 이방인이 師 道 를 표방하며 관학 및 사학을 좌우하는 것 에 대해 마땅찮은 감정을 가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학봉문인 柳 復 起 등의 태도는 이런 정서의 우회적 표출이었던 것이다. 정구의 강경책은 시의 적절한 처방이 되었던 것 같다. 이후 통독회는 곧바로 정상화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안동 예안 선비들이 관사로 찾아와 정 47) 裵 尙 龍, 藤 庵 集 卷 3, < 寒 岡 先 生 言 行 錄 > 樂 齋 少 先 生 七 歲 每 到 山 中 晝 對 一 案 夜 聯 枕 席 而 晨 起 盥 櫛 入 拜 案 前 先 生 但 憑 案 以 答 48) 鄭 逑, 寒 岡 集 續 集 卷 5, < 播 諭 安 東 諸 生 文 >. 94

鄭 逑 (1543-1620)의 학자 관료적 삶과 安 東 府 使 재임 (김학수) 구와 토론을 벌이는 일도 중요한 일상의 하나가 되어 4월 24일 오후에는 참봉 任 屹 (1557-1620)이 김광계(1580-1646)와 함께 찾아와 해가 저물 도록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49) 그리고 6월 26일에는 정구가 예안 유생들 을 소집하여 心 經 을 강독하였는데, 좌중에 있었던 김광계는 이 날의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선생께서 여러 유생들을 불러 心 經 을 강독했다. 이 날은 더위가 혹독 하여 땀이 물처럼 흘러내렸으나 선생께서는 근엄한 모습으로 반듯하게 앉 아 논설하셨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선진들이 덕에 나아가는 마음에는 잠시의 쉼도 용인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50) 학문에 대한 타고난 열정, 어떤 질문도 해박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학 문적 깊이,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던 학자적 면모를 바탕으로 정구는 어느새 일향 선비들의 마음 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이전까지의 정구가 그 저 소문으로만 듣던 鄭 某 였다면 이들이 직접 대면해 본 지금의 정구는 바다처럼 넓은[ 海 闊 ] 학문과 산처럼 우뚝한[ 山 高 ] 기상을 두루 갖춘 한강선생 이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학문적 권위를 당당하게 회복한 정구 주변에는 선비 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모여든 선비들은 속속 입문의 절차를 밟 으면서 안동 예안지역 한강학파의 주요 구성원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이 들은 정구가 구상하고 있었던 여러 학술문화사업에 투입되어 제 몫을 톡 톡히 해내게 된다. 안동 예안 봉화지역 한강문인의 수는 20여 명에 이르며, 51) 대부분 49) 金 光 繼, 梅 園 日 記 < 丁 未 4 月 24 日 > 陪 任 丈 到 府 乃 得 入 拜 盧 豊 基 景 任 申 秀 才 亮 在 座 矣 盧 申 二 公 先 出 任 丈 乃 進 坐 于 亟 丈 前 橫 經 問 難 探 索 義 理 至 暮 乃 罷 50) 金 光 繼, 梅 園 日 記 < 丁 未 6 月 26 日 > 又 招 諸 生 講 讀 心 經 是 日 盾 炎 之 酷 汗 流 如 漿 而 先 生 乃 儼 然 端 坐 論 說 不 厭 亦 可 見 先 進 進 德 之 心 無 湏 臾 息 也 51) 檜 淵 及 門 錄 ( 鄭 逑, 寒 岡 全 書 )에 따르면, 안동 예안 봉화 지역의 한강문인은 金 中 淸, 金 潗, 張 興 孝, 金 允 安, 任 屹, 鄭 佺, 權 泰 一, 李 蒔, 李 苙, 李 蒧, 金 奉 祖, 禹 鎭, 金 榮 祖, 金 是 樞, 金 光 繼, 柳 袗, 鄭 俶, 金 光 岳, 金 柱 宇, 權 思 邈, 柳 袨, 金 95

제17호 (2010) 정구의 안동부사 재임 때에 입문한 사람들이다. 정구의 표현처럼 조목 류 성룡의 연이은 사망은 나라의 아픔 이었지만 52) 어떤 면에서 이들의 공백 은 안동 예안지역에 한강학맥이 뿌리를 내리는 호기로 작용했다. 더구나 안동 예안지역 퇴계학파의 맹장 조목 김성일 류성룡 구봉령의 애제자였 던 金 中 淸 (월천문인), 張 興 孝 (학봉문인), 柳 袗 (서애문인), 權 泰 一 (백담연원) 등의 입문은 한강학파 의 중량감을 한층 높여 주었다. 특히, 김중청(1567-1629)은 1607년 정구가 안동에서 심경 을 강론할 때 입문한 53) 이후 학문과 각종 예법 등을 줄기차게 자문하였고, 장흥효 (1564-1633)는 1617년 김성일의 행장을 받기 위해 泗 水 로 가서 깊이 있 는 문답을 주고받으며 사제의 끈을 이어갔다. 54) 그리고 정구의 신뢰와 사 랑을 한 몸에 받았던 김광계는 후일 寒 岡 集 의 편찬과 관련하여 예안지 역 有 司 의 책임을 맡게 된다. 55) 물론 이들이 한강문하를 출입했다고 해서 사승관계의 기본 틀이 바뀌거나 연원의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수반된 것은 아니지만 정구가 조목 류성룡 김성일과 더불어 명실 공히 퇴계문하 4인방 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는데 56)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했다. 한편 안동의 사론의 귀일과 입문 제자의 증가로 힘을 받게 된 정구는 평소 그가 구상했던 학술 문화사업에 더욱 열정을 보였다. 도내 사람들 鑌 등 22명이다. 52) 鄭 逑, 寒 岡 集 續 集 卷 7, < 答 李 養 久 時 發 > 月 川 西 厓 相 繼 殞 歿 殄 瘁 之 痛 其 何 可 言 53) 金 中 淸, 苟 全 集 年 譜 < 丁 未 > 四 月 拜 寒 岡 鄭 先 生 于 安 東 時 鄭 先 生 爲 府 使 聚 士 講 心 經 先 生 往 拜 仍 留 講 54) 張 興 孝, 敬 堂 集 卷 1, < 南 行 錄 > ( 九 月 ) 二 十 三 日 乙 酉 晴 質 心 經 發 揮 疑 處 于 先 生 ; 敬 堂 集 卷 2, 附 錄 < 行 狀 > 又 嘗 以 喜 怒 哀 樂 之 未 發 及 靜 中 須 有 物 者 反 復 論 辨 於 寒 岡 鄭 先 生 鄭 先 生 心 服 其 學 有 心 得 55) 金 光 繼, 梅 園 日 記 < 辛 未 2 月 26 日 > 昔 年 寒 岡 門 下 諸 公 以 我 爲 有 司 使 裒 聚 寒 岡 書 札 在 此 地 者 謄 寫 以 送 而 遷 延 未 果 頃 見 茂 伯 書 寒 岡 文 集 修 整 垂 畢 當 汲 汲 寫 送 云 云 56) 李 萬 敷, 息 山 集 卷 18, < 退 陶 淵 源 筆 帖 跋 > 今 江 右 上 遊 之 論 主 西 厓 而 及 于 愚 伏 星 山 以 下 之 論 主 寒 岡 而 及 于 旅 軒 永 嘉 一 帶 並 稱 厓 鶴 而 宣 城 人 最 尊 月 川 故 陶 山 配 食 惟 月 川 一 人 而 已 96

鄭 逑 (1543-1620)의 학자 관료적 삶과 安 東 府 使 재임 (김학수) 이 그의 善 政 을 칭송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57) 여러 사업 가 운데 그가 가장 공을 들인 것은 退 溪 喪 禮 의 교정 및 永 嘉 誌 의 편찬 이었다. 이황 저술의 정리사업이었던 退 溪 喪 禮 의 교정 작업은 평소 신뢰하던 임흘과 김광계에게 일임되었고, 58) 金 得 礒, 權 益 鄰 등이 이를 적극 보조하 였다. 안동의 문헌정비사업 이었던 永 嘉 誌 의 편찬에는 權 紀, 金 得 硏, 柳 友 潛 등의 愁 苦 가 따랐다. 흥미롭게도 유우잠(1575-1635)은 얼마 전 통 독회의 거부와 관련하여 정구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지목된 바 있는 유복 기의 아들이었다. 읍지 편찬은 정구가 일생 동안 애착을 보인 학술문화사업의 하나로서 그가 편찬한 읍지만도 昌 山 誌 (1580), 同 福 誌 (1584), 咸 州 誌 (1587), 通 川 誌 (1592), 臨 瀛 誌 (1594), 關 東 誌 (1596), 忠 原 誌 (1603), 福 州 誌 ) (1607) 등 8종에 이른다. 59) 이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함안 읍지인 咸 州 誌 뿐이지만 정구의 의욕적인 편찬 활동은 후일 사찬읍지로 불리 는 영남지역 군현 읍지의 편찬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 이 중에서 도 함주지 는 조선후기 지지 편찬의 기본 모델이 되었다. 지지 편찬은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하려 했던 寒 岡 學 의 독특한 학풍의 하나로 규정할 수 있으며, 이런 정신은 장현광에게 전해져 더욱 풍부한 결실을 맺게 된 다. 60) 본래 영가지 는 1602년 류성룡이 문인 權 紀 (1546-1624)를 시켜 편찬 케 한 것이었다. 61) 이후 권기는 약 5년여 작업을 거쳐 1607년 봄에 초고 57) 孫 處 訥, 慕 堂 日 記 < 丁 未 4 月 23 日 > 聞 寒 岡 先 生 政 聲 時 守 永 嘉 58) 金 光 繼, 梅 園 日 記 < 丁 未 5 月 20 日 > 食 後 入 拜 寒 岡 先 生 見 權 諶 及 任 參 奉 丈 先 生 命 我 及 任 參 奉 丈 ( 任 屹 : 筆 者 註 ) 校 退 溪 先 生 喪 禮 余 有 故 欲 來 而 不 聽 還 不 得 已 與 任 丈 退 寓 私 家 校 之 同 校 者 金 義 精 權 弘 甫 權 臣 哉 隣 哉 李 以 敬 柳 仁 植 以 寓 舍 有 非 便 事 告 先 生 移 寓 鄕 校 59) 정구의 읍지 편찬에 대해서는 김문식, 16-17세기 寒 岡 鄭 逑 의 地 理 誌 編 纂, 民 族 文 化 29, 민족문화추진회, 2006, 참조. 60) 김학수, 17세기 旅 軒 學 派 형성과 학문적 성격의 재검토, 한국인물사연 구 13, 한국인물사연구회, 2010, pp.34-41. 97

제17호 (2010) 를 완성하였고, 류성룡의 교열을 거쳐 간행할 요량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해 5월 류성룡이 사망하여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자 권기는 편찬을 일시 보류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때마침 부사로 부임한 정구의 주선으로 작 업이 재점화 된 것이었다. 이때 府 廳 한 켠에 地 誌 廳 을 설치하는 62)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작업에는 主 筆 권기를 비롯하여 金 得 硏 權 晤 李 爀 裵 得 仁 李 適 柳 友 潛 李 遵 義 權 克 明 金 近 孫 浣 등이 참여하였고, 불철주야 노력한 끝에 열흘만에 수정 및 편찬을 완료하였다. 비록 영가지 는 정구 재임 때 간행하지 못하고 1899년(광무3) 權 紀 의 후손에 의해 公 刊 되지만 체재와 내용은 정구의 지휘 하에 그 가닥이 잡혔 던 것이다. 寒 岡 年 譜 의 편찬자가 < 丁 未 年 >(1607) 조항에 복주지를 완 성했다[ 福 州 誌 成 ] 고 기술한 것은 이런 흐름을 반영한 것이었다. 2) 학술문화사업 의 의욕적 추진 수령은 왕을 대신하는 직임인 만큼 부여된 권한도 컸지만 그에 따른 책 무도 막중한 자리였다. 더구나 영남의 雄 府 였던 안동은 그 행정이 광범위 했을 뿐만 아니라 송사 등 때맞춰 챙겨야 할 민생 사안도 산적해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번다한 사무로 지칠 만도 했지만 정구는 촌각을 아꼈고, 한시도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다. 우선 정구는 공무의 여가에 선대를 비롯한 일가족의 문헌을 정리하는데 일정한 시간을 할애했다. 8월과 9월 두 달 동안에는 아버지 鄭 思 中 의 묘 지를 비롯하여 할머니 서흥김씨, 외조부 李 煥, 백형 鄭 适, 장인 李 樹 의 묘 지 등 총 5편의 글을 단숨에 탈고했다. 63) 바쁜 와중에도 일가들을 모아 花 樹 會 를 열어 悅 話 의 정을 다졌고, 회원 명부인 西 原 鄭 氏 族 會 圖 에는 자 진해서 서문도 붙였다. 64) 중형 鄭 崑 壽 (1538-1602)의 유지를 이어 선대 61) 永 嘉 誌 卷 末, < 永 嘉 誌 序 >( 權 紀 ). 62) 金 光 繼, 梅 園 日 記 < 丁 未 5 月 20 日 > 與 義 精 入 地 誌 廳 見 權 紀 金 得 硏 丈 李 義 遵 金 性 之 孫 淸 遠 及 朴 櫓 餘 不 盡 記 63) 이 5편의 묘지는 鄭 逑, 寒 岡 集 卷 13에 수록되어 있다. 64) 鄭 逑, 寒 岡 集 卷 10, < 西 原 鄭 氏 族 會 圖 序 >. 98

鄭 逑 (1543-1620)의 학자 관료적 삶과 安 東 府 使 재임 (김학수) 유고집인 西 原 世 稿 를 발간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65) 정구의 학자적 일생을 30대[ 寒 岡 精 舍 期 ], 40-50대[ 檜 淵 草 堂 期 ], 60대 [ 武 屹 精 舍 期 ], 70대[ 蘆 谷 泗 陽 精 舍 期 ]로 구분할 때, 가장 왕성한 저술활 동을 한 시기가 바로 60대였다. 66) 안동에서 보여 준 놀라운 저술 및 출 판 욕구도 이러한 삶의 연장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의 대표적 저술의 하나인 古 今 人 物 志, 儒 先 續 錄 도 안동에서 완성 하였고, 비록 자신의 저술은 아니지만 도학의 지침서인 讀 書 要 語 續 選 도 이해 7월 안동에서 간행했다. 67) 이처럼 어렵사리 간행한 儒 先 續 錄 이 1614년 蘆 谷 精 舍 화재 때 소실되고 만 것은 68)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었 다. 이때 정구는 각종 저술의 원고, 사우간의 왕래 서간 등 무려 100여 권의 문적을 잃고 크게 상심했다. 69) 학자 관료로서의 정구의 존재 가치는 국가의 주요 서적을 간행하는 과 65) 鄭 逑, 寒 岡 集 別 集 卷 2, < 書 西 原 世 稿 譜 圖 下 >. 66) 본문에서 언급한 것 외에 정구가 武 屹 精 舍 에 주로 거주하던 1604년(62세) 1612년(70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濂 洛 羮 墻 錄, 洙 泗 言 仁 錄, 臥 龍 庵 志, 景 賢 續 錄, 谷 山 洞 庵 志, 書 洙 泗 言 仁 錄 後 (1604), 書 啓 蒙 圖 書 節 要 後 (1607), 書 武 夷 志 附 退 溪 李 先 生 李 仲 久 家 藏 武 夷 九 曲 圖 後 (1609), 書 讀 書 要 語 續 選 後 (1607), 題 止 止 堂 集 下 附 佔 畢 齋 詩 後 (1606), 書 景 晦 堂 屛 後 (1607), 書 川 谷 書 院 額 板 下 (1607), 書 安 東 蓮 亭 追 揭 退 陶 先 生 和 松 齋 詩 後 (1607), 深 衣 製 造 法 (1610), 五 先 生 禮 說 分 類 序 (1611), 治 亂 提 要 小 敍 (1606), 武 夷 志 跋 (1604), 宣 城 九 老 會 帖 跋 (1610), 書 古 鏡 重 磨 方 後 (1607), 書 道 東 書 院 額 板 下 (1607) 등이 있다. 67) 鄭 逑, 寒 岡 集 卷 10, < 書 讀 書 要 語 續 選 後 >. 이 책은 정구가 성주 川 谷 書 院 에 서 간행한 바 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이때에 와서 일부 수정을 가해 중간한 것이다. 68) 정구의 저술은 寒 岡 集 외에 聖 賢 風 範, 中 和 集 說, 濂 洛 羮 墻 錄, 古 今 忠 謨, 卧 龍 庵 志, 谷 山 洞 庵 志, 樂 天 閒 適, 古 文 會 粹, 儒 先 續 錄 (이상 소실되어 전하지 않음), 洙 泗 言 仁 附 錄, 心 經 發 揮, 五 先 生 禮 說, 朱 子 詩 分 類, 古 今 人 物 志, 古 今 名 宦 錄, 五 服 沿 革 圖, 深 衣 制 造 法, 景 賢 續 錄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절반 가량이 1614년 노곡정사 화재 때 소실된 것으 로 보인다( 蔡 夢 硯, 投 巖 集 卷 3, < 擬 再 上 申 象 村 > 擬 問 目 第 23 條 ). 69) 鄭 逑, 寒 岡 全 書 言 行 錄 卷 3, < 著 述 > ( 前 略 ) 並 百 餘 卷 亦 沒 入 灰 燼 先 生 嘆 曰 天 喪 余 天 喪 余 [ 李 所 錄 ]. 99

제17호 (2010) 정에서 또 한 번 빛을 발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난리통에 소실된 서적을 복구하기 위한 간행사업이 대대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한국의학사에 빛 나는 명저 許 浚 의 東 醫 寶 鑑 (1613년 간행)도 이 일환에서 추진된 국책사 업이었다. 예상대로 안동부사 정구에게도 서책을 간행해서 올리라는 경상감사의 關 文 이 하달되었다. 정구에게 서적의 간행은 일상사나 마찬가지였고, 또 누구보다 자신 있는 영역이었다. 그에게 맡겨진 간행 서목은 易 傳, 太 極 圖 說, 啓 蒙 圖 書, 通 鑑 등 한결같이 학술전문서적이었다. 70) 역전 의 경우 善 本 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기도 했지만 양질의 출판을 위해 정 성을 다했고, 계몽도서 는 도산서원 소장본을 크게 참조하였다. 간행 과 정에서 그가 보여준 노력 속에는 나라의 명에 부합하려는 책무의식도 있 었지만 조선 유학의 밝은 내일을 바라는 학자적 기대감이 더 크게 자리하 고 있었다. 그런 여망은 계몽도서절요 에 직접 붙인 후지에 잘 담아두 었다. 71) 서적 간행으로 여념이 없을 때 朱 子 書 節 要 도 간행하라는 경상감사 鄭 賜 湖 의 지시가 다시 내려 왔다. 이를 마다할 정구가 아니었지만 문제는 사론의 동향과 사환 의욕의 감퇴였다. 이 무렵 정구는 벼슬살이에 대해 적잖게 권태감을 느꼈던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주자서절요 와 논어 의 선후 문제를 두고 사론이 분분해지면서 권태감도 더욱 커졌다. 그래서 그 는 이런저런 사유를 대면서 주자서절요 의 간행을 후임자의 몫으로 슬그 머니 미루어 버렸던 것이다. 72) 책에 대한 강한 애착은 때로 원망을 초래하기도 했다. 1607년 9월 예 안의 향교 서원에서 인근 선비들에게 통문을 띄웠다. 내용인즉, 서책 寫 役 에 협조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실제 부탁자는 안동부사 였다. 정구는 퇴계문하의 동문 權 文 海 (1534-1591)가 편찬한 大 東 韻 府 群 70) 鄭 逑, 寒 岡 集 續 集 卷 2, < 答 鄭 方 伯 賜 湖 > ; 續 集 卷 7, < 與 洪 唐 興 府 院 君 >. 71) 鄭 逑, 寒 岡 集 卷 9, < 書 啓 蒙 圖 書 節 要 後 >. 72) 鄭 逑, 寒 岡 集 續 集 卷 2, < 答 鄭 方 伯 賜 湖 >. 100

鄭 逑 (1543-1620)의 학자 관료적 삶과 安 東 府 使 재임 (김학수) 玉 을 열람하고는 소장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1589년(선조22) 권문 해가 대구부사 재직 때 완성한 이 책은 1591년(선조24) 김성일의 요청으 로 나라에서 간행할 뻔 했다가 임진왜란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형편이 이 렇다 보니 이를 소장하기 위해서는 필사를 통해 부본을 만드는 것 외에는 다른 방안이 없었다. 그러나 대동운부군옥 은 20권 20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더 구나 당시 안동의 선비들은 정구의 지시로 大 明 一 統 誌 를 필사하느라 겨 를이 없었다. 이에 정구가 인근 수령들에게 협조를 구했던 것인데, 예안 校 院 의 통문은 이런 내막 속에 사림에 뿌려졌던 것이다. 73) 예안의 최상류 양반이었던 金 光 繼 에게도 백지 100여 장이 드는 두 권 분량이 배당될 정 도였으니 74) 그 나머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안동부사의 개인 책 필사 작업에 동원될 필요가 있느냐는 볼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지만 75) 큰 반발은 없었던 것 같다. 약 두 달 만에 사역이 완료되자 정구는 도산서원에 위로잔치를 열어 선비들의 노고에 답하였다. 76) 정구가 사역을 서둘렀던 것은 이해 윤6월부터 내비친 바 있었던 사직의 뜻이 가을에 접어들면서 완전히 굳혔기 때문이었다. 당 초 정구는 임지에서 사직을 청하려는 요량으로 부임했던 것인데, 류성룡 의 사망, 선조의 건강 악화 등 제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반 년을 끈 것일 뿐이었다. 77) 73) 金 坽, 溪 巖 日 錄 < 丁 未 9 月 13 日 > 聞 校 院 以 膽 寫 花 伯 寒 岡 令 公 冊 子 出 回 文 士 林 盖 寒 岡 求 得 權 承 旨 所 纂 大 東 韻 玉 欲 傳 寫 而 卷 秩 浩 多 且 以 本 府 士 子 方 寫 大 明 一 統 志 無 暇 及 他 遂 廣 請 于 各 邑 宰 此 縣 則 吏 胥 無 能 書 者 故 堤 叔 主 言 于 土 主 倡 出 此 議 有 司 亦 皆 奉 行 74) 金 光 繼, 梅 園 日 記 < 丁 未 9 月 11 日 > 來 時 入 見 土 主 授 我 以 大 東 群 玉 二 卷 及 紙 百 餘 張 請 諸 生 傳 寫 乃 寒 岡 之 所 請 於 土 主 者 也 75) 金 坽, 溪 巖 日 錄 < 丁 未 9 月 13 日 > 顧 以 出 回 文 令 多 士 所 係 不 輕 豈 爲 安 東 府 使 寫 私 冊 而 爲 此 擧 措 乎 殊 非 後 生 之 所 可 詳 也 76) 金 坽, 溪 巖 日 錄 < 丁 未 11 月 8 日 > 聞 以 寒 岡 大 東 韻 玉 謄 寫 餉 功 事 聚 儒 生 陶 院 設 酌 可 笑 事 也 77) 鄭 逑, 寒 岡 全 書 言 行 錄 卷 3, < 出 處 > 卽 日 拜 辭 疾 馳 出 城 爲 到 府 呈 告 計 101

제17호 (2010) 3. 退 溪 景 慕 論 의 여운 - 溪 門 嫡 傳 意 識 - 부임 길에 잠시 도산을 들렀던 정구가 다시 도산을 찾은 것은 6월 20 일 경이었다. 이황의 자취가 서린 淸 凉 山 을 거쳐 도산에 이르는 이때의 여정은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지난날을 추억하는 회고의 길이었다. 청량산 유람을 마친 정구 일행이 도산에 도착한 것은 6월 25일 저녁이었 다. 서원에서 하룻밤을 묵은 정구는 이튿날 아침 이황의 묘소를 참배한 다음 퇴계댁 을 방문했다. 그날 오후에는 예안 유생들을 모아 심경 을 강론하며 자신의 진면목을 남김없이 보여주었고, 78) 해질녘에는 巖 栖 軒 과 天 淵 臺 로 산책을 나섰다. 79) 암서헌을 거쳐 천연대로 가는 이 산책로에서 정구는 40년 전의 추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가 처음 도산을 찾았을 때는 나이 고작 21세였고, 참 된 학자를 꿈꾸었기에 선생의 학문은 물론 行 德 까지 배우려 노력했다. 학 문에 대한 열정은 그로 하여금 23세 때 다시 도산을 찾게 만들었고, 그런 그를 이황은 英 敏 한 사람, 학문에 뜻을 두고 선을 좋아하는 선비 라는 찬사를 붙여 기억해 주었다. 80) 그러나 모든 추억이 반드시 아름다운 것은 아니며, 아름답지 않다고 해 서 소중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아래는 김중청이 스승 조목으로부터 들은 내용을 기록해 둔 것이다. 안동 또는 예안 중심적 사고와 표현이 투영되 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젊은 시절 정구의 일면을 생생하게 증언해주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정묘년(1567년) 도산서당에 가서 鄭 寒 岡, 金 鶴 峯 과 함께 지냈다. 한강 赴 任 初 有 西 崖 之 喪 繼 有 宣 祖 不 豫 之 音 牽 仍 半 歲 78) 金 光 繼, 梅 園 日 記 < 丁 未 6 月 26 日 > 食 後 寒 岡 往 退 溪 謁 先 生 之 墓 訪 先 生 之 宅 日 午 還 院 午 飯 後 暫 部 決 官 事 又 招 諸 生 講 讀 心 經 79) 위와 같은 곳, 薄 暮 先 生 與 院 長 由 巖 栖 軒 出 天 淵 臺 80) 鄭 逑, 寒 岡 全 書 年 譜 < 癸 亥 > 春 拜 退 溪 李 先 生 ( 細 註 ) 李 先 生 答 柳 希 范 書 曰 有 鄭 逑 者 來 留 一 月 而 去 甚 英 敏 答 李 龜 巖 楨 書 曰 曾 見 鄭 崑 壽 及 其 弟 逑 者 皆 志 學 好 善 之 士 102

鄭 逑 (1543-1620)의 학자 관료적 삶과 安 東 府 使 재임 (김학수) 은 啓 蒙 을 배웠는데, 선생께서, 정아무개는 沈 潛 涵 養 하는 습관이 없는 것 이 병통이다 고 하셨다. 이때 성주 사람들이 喪 祭 禮 문목을 나열하여 적어 서는 한강으로 하여금 선생께 품질하게 했다. 마침 선생께서 병이 들어 이에 답할 수가 없었는데, 한강이 스스로 글씨를 써 넣어 答 詞 를 만들자 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와 작별할 때, 학봉이 우리가 성의로써 친구 를 대하지 않은 것 같다. 아무개의 접때 일은 크게 잘못된 것이지만 나무 라지 않았으니 이는 우리의 잘못이다. 고 하고는 즉시 급하게 편지를 보내 질책하였다. 한강이 미처 10리도 못가서 이 편지를 보고는 바로 심복하였 는데, 허물을 고침이 흐르는 물처럼 빨랐다고 한다. 81) 물론 이 사료가 전달하는 주된 메시지는 퇴계문하의 責 善 美 談 이지만 하필이면 정구가 그 대상이 되었을 뿐이다. 각박하게 해석하면, 이황이 말 한 영민함 이 沈 潛 涵 養 하는 습관의 부족함 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젊은 시절 정구가 발군 자질을 갖 추고 있었고, 때로 그것이 경솔함으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벗들의 책선과 자기성찰을 통해 극복되었다는 것이다. 조야가 존경하는 학자로 성장한 정구의 모습 그 자체가 그 증거인 것이다. 아픈 기억은 오래가는 법이다. 안동으로 부임 길에 도산을 지나면서건, 이황의 산소 앞에서건, 오늘 암서헌과 천연대를 오가면서건 그의 뇌리에 서 이 기억이 완전히 소멸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기억들로 인해 이황에 대한 존경과 애착의 마음이 더 강렬해졌는지도 모른다. 지난 봄 청량산 유람 때의 일이다. 4월 어느 날 정구는 한가한 날을 틈 타 청량산에 올랐다. 이황의 자취를 찾기 위해서였다. 청량산은 산봉우리 와 절, 한 포기의 풀, 한 조각의 돌조차도 이황과 무관한 것이 없었기에 퇴계학 의 聖 山 처럼 여겨진 곳이었다. 일행이 致 遠 庵 에 이르렀을 때, 정구 81) 金 中 淸, 苟 全 先 生 講 院 日 錄 < 乙 卯 12 月 26 日 > 丁 卯 年 往 陶 山 書 堂 與 鄭 寒 岡 金 鶴 峯 同 栖 寒 岡 學 啓 蒙 先 生 曰 鄭 某 無 沉 潛 涵 養 之 習 乃 是 病 痛 云 云 其 時 星 人 有 列 書 喪 祭 問 目 使 寒 岡 禀 質 適 先 生 病 未 能 答 寒 岡 自 爲 塡 書 答 詞 余 乃 笑 之 旣 別 鶴 峯 曰 吾 輩 待 友 不 以 誠 某 也 之 事 甚 非 而 不 爲 責 之 吾 輩 誤 矣 卽 馳 簡 書 責 之 寒 岡 行 到 十 里 許 見 書 卽 服 改 過 如 流 云 103

제17호 (2010) 는 벽 위에 쓰인 이황의 친필을 보자마자 옷깃을 여미고 공경의 마음을 표하며 한참 동안 탄식했다고 한다. 이황이 문인 및 자제들을 대동하고 청량산을 유람한 것은 1564년(명종 19) 봄이었다. 82) 이황에게 청량산은 일상의 공간처럼 친숙한 곳이었지만 이날따라 이황은 遊 山 을 특별히 기념이라도 하듯 자신을 비롯한 수행한 인사들의 이름을 일일이 적었다. 정구의 옷깃을 여미게 한 것이 바로 이 글씨였던 것이다. 이황의 청량산 유람이 1564년 4월 13일의 일이었고 보 면 정구가 굳이 4월을 택한 이유도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존경의 마음은 현창사업 으로 이어졌다. 즉석에서 정구가 치원암의 중 수를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승려 一 勳 을 化 主 로 삼아 일을 주관케 했고, 문장이 뛰어나고 인망이 높았던 김중청에게는 의연금의 모금 임무를 맡겼 다. 김중청이 모금을 위해 지은 글인 致 遠 庵 重 修 勸 牓 의 말미에 이런 표 현이 있다. 퇴계 선생에 대한 한강 선생의 지극한 존경의 마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이번 일이 어찌 구구한 암자 하나에 한정되는 일이겠는가. 우리 주 변의 모든 사람들이 만약 이 뜻을 잘 이해하여 약간의 쌀과 베를 기부하 여 조금이라도 돕는다면 역시 한강의 제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83) 정구를 위해서라도 기꺼이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는 이 글의 행간에서 우리는 퇴계추양사업 에서 점하고 있었던 정구의 독점적 지위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정구 자신만이 아는 회고적 감상에서 발동한 것이었 으며, 6월의 도산 再 訪 도 이런 행보의 연장으로 기획된 것이었다. 6월 27일, 정구는 새벽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른 아침부터 인근 선비 들의 작별을 겸한 문안 행렬이 이어져 서원 앞 마당이 시끌시끌했다. 정 구는 典 敎 堂 에서 이들을 맞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뒤 아침을 들었다. 82) 李 頤 淳, 後 溪 集 卷 7, < 識 跋 敬 書 遊 淸 凉 山 題 名 錄 後 >. 83) 金 中 淸, 苟 全 集 卷 5, < 致 遠 庵 重 修 勸 牓 >. 104

鄭 逑 (1543-1620)의 학자 관료적 삶과 安 東 府 使 재임 (김학수) 이제 안동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출발이 임박하자 정구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침에 한강 선생을 모시고 전교당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아침을 드신 뒤 선생께서 출발하려 할 때 巖 栖 軒 에 들어가서는 배회하며 위를 쳐다 보 시면서 일어서려 하다가도 다시 앉곤 하셨는데, (퇴계선생을) 연모한 나머 지 차마 떠나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 보였다. 다시 천연대로 나가서는 한 참 앉아 계시다가 해가 저물자 비로소 출발하였다. 84) 암서헌에 들어가 안절부절했고, 해가 저물도록 자리를 뜨지 못한 채 연 연해하는 정구의 모습은 도산이라는 공간, 이황이라는 인간에 대한 연모 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물론 정구는 11월 사역에 동원된 유생들을 위로하기 위해 잠시 도산서원을 다녀간 바 있지만 6월 27일의 광경은 정 구가 이황의 고제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웅변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로부터 약 5개월이 지난 1607년 12월 초 정구는 감사에게 사직을 청 한 85) 뒤 修 道 山 武 屹 精 舍 로 돌아갔다. 여기서 그는 萬 卷 의 서책에 파묻혀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했다. 1616년 7월 정구는 중풍 치료차 영주 온천으 로 가기 위해 上 行 을 하기는 했지만 안동 예안을 들르지는 않았고, 1620 년 1월 5일 만년 강학처인 칠곡 泗 陽 精 舍 持 敬 齋 에서 78세를 일기로 생 을 마감하였다. Ⅳ. 맺음말 이상에서 논의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구는 목민관으로서 탁월한 역량을 인정받았으며, 1607년의 안 84) 金 光 繼, 梅 園 日 記 < 丁 未 6 月 27 日 > 朝 陪 話 于 典 敎 堂 食 後 寒 岡 先 生 將 發 入 巖 栖 軒 徘 徊 瞻 眺 欲 起 還 坐 有 慕 戀 不 忍 去 之 意 又 出 天 淵 臺 久 坐 日 晩 乃 發 85) 鄭 逑, 寒 岡 集 續 集 卷 7, < 答 鄭 方 伯 賜 湖 >. 105

제17호 (2010) 동부사 임명도 그런 맥락에서 취해진 인사 조처였다. 둘째, 정구는 안동부사에 임명된 직후 연령 및 건강문제, 역량상의 이유 를 들어 사임을 적극 요청하면서도 끝내 부사직을 수락한 것은 영남의 웅 부인 안동에서 목민의 뜻을 펼쳐보고자 했던 관료로서의 포부를 넘어 이 무렵 그가 표출하기 시작했던 영남맹주의식 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 로 파악되었다. 영남맹주의식 은 퇴계 남명 양 학파의 통합의식으로 규정 지을 수 있으며, 시기적으로 조목, 유성룡 등 이황 고제들의 사망과 맞물 리면서 그의 안동부사 부임으로 퇴계학파의 본거지인 안동 예안지역으로까 지 자신의 학문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그가 부임길 에 도산서원에 들러 이황의 사당에 참배한 뒤 임지로 간 것도 이런 맥락 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셋째, 정구는 원칙과 권위를 강조하는 다스림의 방식을 고수하면서도 사림 내지는 향촌의 정서에 살갑게 다가서는 태도를 취하여 경내 사민들 을 우호 세력으로 확보함으로써 수령권의 안정화를 도모하였다. 권태사, 김방경, 권벌, 조목, 김성일, 류성룡에 대한 치제 및 문병은 이런 맥락에서 기획된 일종의 文 字 政 治 또는 禮 訪 政 治 였다. 이들과의 인연은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 자문, 김성일의 행장 및 묘표의 撰 述 로 이어져 정구가 안 동 예안권 사림들과 굳건한 교유를 지속하는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되었다. 넷째, 정구는 醇 儒 로서의 학문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안동의 사론을 휘 어잡을 수 있었고, 이것은 안동권[예안 봉화지역포함]을 대상으로 자신의 문인기반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 永 嘉 誌 의 편찬, 易 傳, 太 極 圖 說, 啓 蒙 圖 書, 通 鑑 의 간행 등 각종 학술문화사업 을 효과적 으로 수행하는 토대가 되었다. 다섯째, 부임 단계에서부터 사임하기 직전까지 일관되게 표출했던 이황 에 대한 강렬한 경모심은 주변 사림들로 하여금 자신이 이황의 고제, 나 아가 적전임을 천명하는 의미를 내포하였다. 이런 면모는 그가 17세기 중 엽 이후 정구가 조목, 류성룡, 김성일과 함께 溪 門 4 高 弟 의 한 사람으로 106

鄭 逑 (1543-1620)의 학자 관료적 삶과 安 東 府 使 재임 (김학수) 인식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첨언하자면, 정구가 안동부사에 임명된 것은 1607년 1월이 었지만 임무를 수행한 것은 동년 3월부터 12월까지 약 9개월이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정구는 생애 마지막의 지방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 음은 물론 퇴계학파의 본거지에 자신의 학문적 존재성을 너무도 강하게 각인시켰다. 물론 권위의식에 바탕한 사론의 동원에 따른 물의가 빚어져 그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안동부사는 그의 관인 학자적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음에 분명했다. 이 논문은 2010년 4월 30일( 金 )에 투고 완료되어 2010년 5월 15일( 土 )부터 5월 25일( 火 )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2010년 6월 1일( 火 ) 편집위원회에서 게재 결정된 논문임.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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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 逑 (1543-1620)의 학자 관료적 삶과 安 東 府 使 재임 (김학수) 黃 俊 良, 錦 溪 集 ( 民 族 文 化 推 進 會, 韓 國 文 集 叢 刊 37) <논저> 權 延 雄, 檜 淵 及 門 諸 賢 錄 小 考, 韓 國 의 哲 學 13, 경북대 퇴계연구소, 1985, pp.83-123. 김학수, 廬 江 書 院 과 嶺 南 學 統, 朝 鮮 時 代 의 社 會 와 思 想, 朝 鮮 社 會 硏 究 會, 1998, pp.449-481. 김학수, 안동 太 師 廟 위차논쟁의 정치 사회적 성격, 仁 荷 史 學 10, 인하사학 회, 2003, pp.597-630. 徐 廷 文, 朝 鮮 中 期 의 文 集 編 刊 과 門 派 形 成,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 문, 2006, pp.1-203. 이수건, 고문서의 조사 정리와 사료적 가치, 고문서 조사 정리의 현황과 과 제, 경북대학교 부설 영남문화연구원 제7회 학술대회 발표자료집, 2006, pp.1-13. 朴 賢 淳, 16~17세기 禮 安 縣 士 族 社 會 硏 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6, pp.1-276. 김문식, 16-17세기 寒 岡 鄭 逑 의 地 理 誌 編 纂, 民 族 文 化 29, 민족문화추진 회, 2006, pp.73-218. 김학수, 17세기 嶺 南 學 派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pp.1-421. 김학수, 鄭 逑 文 學 의 創 作 現 場 과 遺 跡 에 대한 연구, 大 東 漢 文 學 29, 대동 한문학회, 2008, pp.7-78. 김학수, 17세기 旅 軒 學 派 형성과 학문적 성격의 재검토, 한국인물사연구 13, 한국인물사연구회, 2010, pp.3-52. 109

제17호 (2010) Abstract The Chung ku s scholarly and government official life during his term as Andong busa. Kim, Hak-su Chung ku is a representative scholar and government official in the mid-joseon period(seonjo~gwanghaegun). Also, he published many outstanding masterworks in Korea Confucian history as a distinguished disciple of Lee hwang and Cho sik and cultivated as many as 340 disciples. So, he was a worthy of notice in the late-joseon world of thought. Although he is a famous as a scholar now, he laid more emphasis on putting his theory into practice than anyone. After his middle age, Chung ku had spent a lot of time administrating the state to relieve the people s suffering. Especially, he wished to be a local official who sharing joys and sorrows with people. He had been appointed local official 11 times in his life. Among those times, he had started for his new post as local official 7 times (suryeong 6 times, gamsa 1 time) and left a legacy of achievements. Andong busa was his final appointment as local official. He had been in service as Andong busa from March until December in 1607. Chung ku s official life as Andong busa is an exceptional case. The reasons are that he had left so many legacies of achievements during that time, and that there is a great deal of material and diverse story. When he serviced as Andong busa, Chung ku became 110

鄭 逑 (1543-1620)의 학자 관료적 삶과 安 東 府 使 재임 (김학수) a man of great scholarship and had experienced eyes. Most of all, he had much pride in himself as an outstanding disciple of Lee and Cho, and expressed the hegemony leadership in Yeongnam on that pride. In this perspective, it is great significant that his new post as local official was Andong, the stronghold of Teogye-school. This article describes vividly Chung ku s life as Andong busa from his appointment time to his resignation and returning hometown time. Right after he had been appointed, he asked for resignation, but eventually accepted. His behavior is related to the hegemony leadership in Yeongnam. During his official life as Andong busa, he had the greatest respect for Teogye. His respect also is related to the hegemony leadership in Yeongnam. He was the approved scholar as sarim leader and authorized administrator. This is a great help to govern in principle. Chung ku was generous to landed people and had the superiority of scholarship. His character improved efficiency to perform scholar-culture projects, and produced the ground expansion of Hankang-school as additional effects. In these facts, his official life as Andong busa is the combination of his private ambition and public duty. In other words, that is the multi-faceted event. The purpose of this article reveals the meaning of his official life as Andong busa Key Words: Chung ku, Andong, Andong busa, Hankang-school, Lee hwang, Dosan Seowon, the hegemony leadership in Yeongnam, the respect for Teogye, The mind of direct connection with Teogye.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