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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한국학연구 49(2014.6.30), pp.103-128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870년대 이후 分 院 官 窯 변천 1)방병선* 국문초록 본 논문은 1870년대부터 1910년까지 조선시대 왕실용 자기 생산을 담 당했던 사옹원 분원의 변천 과정과 원인, 이와 관련된 장인과 관리, 제작 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연구 방법은 문헌자료 분석을 중심으로 하였 으며 대상 문헌은 分 院 邊 首 復 設 節 目 (1874)과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1873-76), 分 院 磁 器 貢 所 節 目 (1894)과 같은 분원 관련 문헌과 조선왕 조실록 과 내장원 完 文 과 같은 관찬사료, 지규식의 荷 齋 日 記 (1891-1910)와 같은 민간자료 등으로, 시기는 고종 연간인 1870년대부터 1910년까지로 하였다. 먼저 1870년대 분원은 여러 가지 적폐가 노정되어 제대로 된 자기진 상이 어려웠다. 16명에서 24명에 이르는 원역들과 복설과 폐설을 거듭한 두 명의 변수들은 자본을 모으고 이를 통해 이익을 챙기려 하면서 서로 간의 갈등으로 분원의 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변 수를 파하였다가 1874년 변수복설의 조치를 내리고 낭청과 원역, 변수의 협업 체제를 지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복설이 된 이후도 분원의 병폐 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한편 장인들은 분원응역에 응하지 않는 수가 * 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미술사 전공. 본 논문은 2014년도 고려대학교 인문 대학 특성화연구비 지원을 받아 수행되었음.

104 한국학연구 49 누적되어 타지역의 장인을 불러오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장인들의 경제 적 보상을 위한 사번 자기의 판매는 매우 제한적이어서 이익을 얻기 어 려웠다. 반면 퇴임한 분원 관리들은 設 店 하여 판매에서 여러 이득을 취 하고 있었다. 1880년대 들어 왕실재정의 축소와 재정 운용의 합리화에 따라 1883년 낭관 파견금지와 허민번조를 중심 내용으로 하는 감생청의 공안이 발표 되었다. 이어 원역 가운데 공인 12인을 지정하여 자기를 진상토록 하는 내용의 分 院 磁 器 貢 所 節 目 이 1884년 공표되면서 분원은 분원공소로 탈바꿈하였다. 이후 지규식의 荷 齋 日 記 에 따르면 분원공소(1884-1895)는 정부의 원료 공급과 일부 재정 부담에도 불구하고 진상과 판매에서 성공을 거두 지 못하였다. 새로운 기술 개발의 부재와 경영 실패로 문을 닫았고 이후 번자회사(1896-1905), 번사회사(1906-1910), 자기회사(1910) 등과 같은 회사체제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정교한 디자인과 대량생산을 위 한 철저한 분업화와 기술 혁신, 학교 교육을 통한 근대식 기술자 양성, 금융지원 등이 거의 전무하거나 미진하여 결국 근대화된 회사로 성공하 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반면 일본인들은 채기 제작과 청화 안료 유통을 장악하며 조선 자기 시장의 상당 부분을 잠식하고 있었다. 주제어: 조선백자, 분원, 하재일기, 분원공소, 번자회사, 번사회사, 자기회사, 분원변수복설절목, 분원각항문부초록, 분원자기공소절목 Ⅰ. 서론 조선시대 왕실 전용 그릇을 생산하던 관요인 사옹원의 분원은 고종 이 후 여러 가지 풍파를 겪으며 점차 내용과 형식에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자기진상의 문제점과 조선 왕실 재정의 악화가 자리하

1870년대 이후 分 院 官 窯 변천 방병선 105 였다. 진상시 각 단계에서의 인정잡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생산비 용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고 분원 운영을 위한 제반 비용을 감당해야 할 왕실 재정은 점차 고갈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게다가 조선백자의 막 강한 후원자이자 수요자였던 왕실과 사대부들은 중국도자에 경도되어 조 선 자기 시장의 최고 지위는 이제 분원백자가 아닌 수입자기 몫이 되었 다. 이미 조선에 많은 수요처를 확보한 화려한 중국자기 이외에 일본자 기도 공장제 생산을 기반으로 왕실과 고급 수요층을 비롯한 조선 자기시 장을 점유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대내외의 여러 변화된 환경 속에서 분원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올바른 자기 진상을 위해 분원의 자기 생산 체제는 어떻게 변화되었을까. 이에 따라 분원 장인들은 체제 변화에 어떻게 적응하려했을까. 분원의 새로운 체제는 어떤 것이었으며 이후 진상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일본 의 지배력이 강화되던 20세기 이후 분원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본고에서는 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고종 연간 분원의 현황과 분원이 공소가 되는 원인과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후 분원 공소가 혁파되고 번자회사와 번사주식회사로 전환되는 내용을 검토하고 이를 통해 분원의 변천 과정과 분원 장인, 진상 체제, 자기 시장의 변화 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연구 방법은 분원공소 이전까지는 分 院 邊 首 復 設 節 目 과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分 院 磁 器 貢 所 節 目 과 같은 분원 관 련 문헌과 왕조실록과 각종 관찬 사료, 분원공소 이후로는 荷 齋 日 記 를 중심으로 문헌 분석을 실시하고, 시기는 고종 연간인 1870년대부터 1910 년까지로 하였다. 내용의 순서는 편의상, 분원과 분원공소시기, 회사시기 등 분원이 변천된 명칭으로 나누었다. Ⅱ. 分 院 : 1870-1883 고종 연간 들어 이전의 진상과 운영 과정의 적폐로 분원은 위기에 직

106 한국학연구 49 면하고 있었다. 진상은 더욱 힘들어지고 장인과 관리들 역시 사리에 더 치중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무엇보다 자기 제작에 따른 원료비 지급과 그릇 수가 등의 여러 가지 경제적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때문 이었다. 본 장에서는 분원이 공소로 바뀌기 전까지의 상황을 선행 연구 와 각종 사료를 바탕으로 시기 별로 고찰하고자 한다. 1) 1. 1870년대: 分 院 邊 首 復 設 節 目 과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고종 초반을 거쳐 1870년대의 분원의 상황을 전해주는 자료로 1874년 공포된 分 院 邊 首 復 設 節 目 과 2) 1873년에서 1876년까지의 기록인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이 있다. 3) 분원변수복설절목 은 분원 변수가 혁파된 후 이를 다시 복설하게 된 배경과 향후의 변수의 임무 등에 관해 정해 놓은 절목으로 규정과 같은 것이다. 이에 비해 분원각항문부초록 은 일 자 별로 분원을 에워싸고 일어난 분원 관련 문제와 상소에 대해 기록한 초록이다. 변수와 원역의 우두머리인 都 吏, 사령, 교리 등의 숫자와 세세 한 인명, 진상가와 백토가 지급 문제, 변수와 도리의 파산 등 분원 내부 의 문제점이 적혀있어 분원 운영을 입체적으로 분석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들 두 문헌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먼저 당시 분원의 운영은 중 앙에서 파견되는 郎 官 과 현지의 員 役, 자기를 제작하는 장인들의 우두머 1) 강경숙, 한국 도자사 (예경출판사, 2012); 姜 萬 吉, 朝 鮮 時 代 商 工 業 史 硏 究 (한 길사, 1984); 박은숙, 개항 후 分 院 운영권의 민간 이양과 운영실태 - 荷 齊 日 記 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142(한국사연구회, 2008), 대한제국기 번자회사의 설 립과 운영, 한국사연구 149(한국사연구회, 2010); 방병선, 고종 연간의 분원 민영 화과정, 역사와 현실 33호(한국역사연구회, 1999), 조선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2000), 하재일기를 통해 본 조선 말기 분원, 강좌미술사 34(한국불교미술사학회, 2010); 宋 贊 植, 李 朝 後 期 手 工 業 에 관한 硏 究 (서울대학교출판부, 1973). 2) 分 院 邊 首 復 設 節 目 (규장각 古 大 4256-10) 同 治 十 三 年 (1874) 甲 戌 十 一 月 日 邊 首 復 設 節 目 爲 節 目 成 給 事 (하략) 3)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규장각 상백 古 382,051 B886)은 1873년에서 1876년 사이에 분주원보등( 分 廚 院 報 騰 ) 과 각종 첩보를 일기 형식으로 서술해 놓은 것으로 분원 에서 사용되는 각종 원료 및 원료가, 진상의 현황, 분원 변수 등의 실명이 등장한다. 방병선, 앞의 논문(1999), pp. 198-199.

1870년대 이후 分 院 官 窯 변천 방병선 107 리인 邊 首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낭관은 중앙에서 파견되었으므로 실제 분원 운영의 책임은 都 吏 와 원역, 2명의 邊 首 에게 있었다. 4) 이중 원역의 수는 원래 27인으로 戊 午 년(1866)에 3인을 감하여 이후 24인으로 매년 8 명씩 作 三 番 으로 하였고 16인은 假 名 이 되는 것이 정식이었다. 5) 이후, 번조관이 상사에 알려 8인을 감하여 이를 신유년(1871)부터 16인으로 작 이번으로 하였다가 임신년(1872)부터 20인으로 작이번, 즉 매년 10명씩 원역이 되었다. 6) 이들 원역과 변수들은 자본을 모으고 이를 통해 이익을 챙기려 하면서 서로간의 갈등으로 분원의 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었다. 또한 원역들은 자금을 공동으로 출자하였지만 7) 근래 들어 원역이 되면 태반이 도산한 것이 근 십년이다. 라는 기록 8) 은 원역들이 자금을 투자하여 분원자기의 사번을 통한 이득을 공동으로 분배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역들은 甲 番 과 例 燔 이외에도 엄청난 양의 별번, 즉 내하 별번과 진작소용 종친부 기명, 운현궁 기명 등의 수천 죽의 별번과 人 情 雜 費 의 증가로 9) 인해 도산하기도 하였다. 변수들은 대게 나이가 많아 80 이상인 경우도 있었고 김재순의 경우 60이 넘은 노련한 인물들이다. 10) 한편 분원 자기의 생산량이 증가함에 따라 양구, 춘천 등지의 백토 수 급량도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지만 백토가를 제 때 지급하지 못하여 춘천 처럼 색리들이 자주 바뀌게 되었다. 11) 또한 이전에 보이지 않던 여주 지 4)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報 牒 癸 酉 (1873) 八 月 凡 磁 器 進 上 之 法 吏 廳 都 吏 與 邊 房 兩 邊 首 輪 回 分 半 擧 行 박은숙, 앞의 논문(2008), p. 256 각주 14에서 재인용. 5)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乙 亥 (1875) 六 月 6)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癸 酉 (1873) 八 月 7)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丙 子 (1876) 七 月 원역들은 자기 제작에 필요한 物 力 확보를 위해 일정한 자금을 공동 출자하여 사용했다. 원역들의 자금은 한 때 3ㆍ4만 金 을 넘 기도 했지만, 고종 초기에는 3천여금에 정도에 그쳤다. 또한 吏 廳 의 錢 은 3천여 金 이고 매년 都 吏 에게 出 給 하여 設 燔 에 붙여 사용하도록 한다. 8)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乙 亥 (1875) 六 月 ; 방병선, 앞의 논문(1999), p. 200. 9)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癸 酉 (1873) 三 月 爲 牒 報 事 今 此 內 下 別 燔 与 宗 親 府 大 宗 會 時 所 用 及 進 爵 器 皿 數 近 三 千 竹 而 燔 納 事 ; 癸 酉 (1873) 四 月 今 內 下 別 燔 与 進 爵 所 用 宗 親 府 器 皿 雲 峴 宮 器 皿 數 近 累 千 竹 10)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甲 戌 (1874) 12 月. 11)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癸 酉 (1873) 八 月

108 한국학연구 49 역이 새롭게 백토 수급지로 떠오면서 여주 백점토의 사용량이 크게 증가 하게 되었다. 12) 장인들의 우두머리인 변수들도 사번을 통한 이득을 취하고자 하였는 데, 원역에 비해 자금과 경영 능력이 부족하여 결국 상인들이 변수를 조 정하거나 아예 자신들이 변수가 되어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였다. 13) 예를 들어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에는 邊 首 金 在 淳 이 3월에서 10월까지 가마 7칸 중 1칸을 갑기 번조에 사용하는 것이 정례임 에도 불구하고 5칸을 甲 器 번조에 사용했다고 되어있다. 14) 또한 정례적 인 작업이 시작되기 전인 정월과 이월에 갑기를 번조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역과 변수간의 알력이 치열해지 고 분원의 본업인 자기 진상의 의무에 차질이 생기게 되자 변수를 폐하 였지만, 사번을 통한 이득을 잃게 된 장인들의 처우를 딱하게 여겨 1874 년 변수복설의 조치를 내리고 낭청과 원역, 변수의 협업 체제를 지원하 고자 하였던 것이다. 15) 그러나 변수는 복설이 된 이후도 병폐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續 燔 과 不 燔 을 거듭하였다. 분원의 장인과 변수들이 이러한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은 이미 20여 년 전부터로 기록하고 있어 1850년대 고종 연간 이후 부터 분원 경영은 사실상 위기에 봉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16) 또한 핵심 기술인 물레성형을 맡은 造 器 匠 처럼 분원 인근에 거주하지만 응역하지 않는 수가 누적되어 타지역의 장인을 불러오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 12)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癸 酉 (1873) 4 月 爲 牒 報 事 進 上 燔 需 所 用 白 土 年 年 貿 取 於 呂 州 境 內 靑 堂 里 방병선, 앞의 논문(1999). P. 200. 13)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員 役 匠 卒 狀 甲 戌 (1874) 8 月 云 云 僞 造 文 字 眩 惑 聰 明 左 何 恨 而 未 有 今 日 趙 聖 福 也 役 員 之 效 果 有 邊 首 各 色 而 邊 首 則 邊 卒 之 所 關 都 書 員 則 員 役 之 所 關 是 白 乎 所 逐 朔 進 上 与 許 多 器 皿 与 都 吏 分 年 燔 納 是 白 加 尼 匠 卒 俱 以 八 路 聚 會 會 類 不 知 次 納 之 所 重 14)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員 役 匠 卒 朱 狀 甲 戌 (1874) 12 月 左 右 曰 所 謂 頭 目 年 過 八 十 襲 且 㤼 於 員 役 之 威 脅 釜 一 座 七 間 內 五 間 甲 器 燔 自 三 月 至 十 月 每 日 邊 首 之 所 關 燔 出 自 正 二 月 冬 二 朔 七 間 甲 器 自 三 月 至 十 月 每 日 一 間 甲 器 都 吏 之 所 關 燔 出 自 是 該 院 定 例 15) 방병선, 앞의 논문(1999), pp. 195-196 참조. 16)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員 役 匠 卒 朱 狀 甲 戌 (1874) 12 月.

1870년대 이후 分 院 官 窯 변천 방병선 109 어 양구 방산점 인근에 거주하던 진상 조기장 韓 岩 의 경우처럼 방산점 戶 首 임에도 거주지를 옮겨 다니며 進 上 應 役 에 응하지 않아 잡아 올리라 는 기록도 있어 진상의 어려움은 내외로 가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17) 분원 장인들의 요미지급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양근 화전세로 충당하 고 있었다. 18) 장인들의 경제적 보상을 위한 사번 자기의 판매는 사기전 은 물론 시장 규모가 큰 五 部 내에서는 장인들이 직접 그릇을 짊어지고 와서 판매하는 것도 금지되어 이익을 얻기 어려웠다. 19) 반면 퇴임한 분 원 관리들은 咸 啓 皥 의 경우처럼 設 店 하여 外 部 私 店 의 기명을 판매하는 등 장인들과는 달리 판매에서 여러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20) 외읍 사점 계는 본원 진상점임에도 읍역 등의 징수로 인해 환산하는 경우도 있었 다. 21) 또한 외읍 사기점으로 양구의 芳 山 사기점이 등장하여 실제 요지 와 부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22) 한편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에 등장하는 인명과 기록된 연도와 월은 다 음과 같다. 변수 趙 聖 福 (1874.8, 1876.2), 춘천 백토색리 金 熙 周, 춘천색 리 池 奐 用 (1873.8), 춘천백토 색리 池 成 龍 (1873.12), 변수두목 金 在 淳 (1874, 8), 탐관오리로 지목된 본원 과졸 尹 學 吉 (1874.8), 都 吏 李 鐘 完 (1874.9, 1876.7), 원역 李 熙 豊, 鄭 東 華, 李 忠 求 (1875. 6), 경오 가역 落 戶 色 원역 李 基 宅, 鄭 東 寫 ;, 임신 가역 官 釜 色 柳 素 植, 張 有 馨 ; 금번 가역 昆 土 色 金 永 煥, 韓 正 植 (1875. 5, 6) 도리 李 鐘 勳, 李 泰 煥 (1876.7), 번소 사령 韓 客 律, 金 德 友 (1873.5), 造 器 匠 卒 金 學 好, 白 活 口 (1873.6), 홍천 거주 李 谷, 金 聖 心 (1873.6), 芳 山 店 韓 岩 (1875.2) 등으로 매우 다양하고 17)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乙 亥 (1875) 2 月 爲 相 考 事 進 上 造 器 匠 卒 多 居 京 畿 地 每 多 堆 欠 切 貴 邑 芳 山 店 居 韓 岩 地 見 捉 耳 復 燔 足 18)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乙 亥 (1875) 1 月 28 日 爲 牒 報 事 燔 所 匠 卒 料 米 每 年 以 楊 根 田 稅 米 中 移 劃 自 是 定 例 19)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丙 子 (1876) 5 月 爲 牒 報 事 內 外 沙 器 廛 布 許 無 分 院 沙 器 負 載 商 賈 五 部 之 內 一 切 禁 斷 自 作 都 賈 獨 專 其 利 20)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移 文 秒 癸 酉 (1873) 6 月 爲 相 考 事 弊 院 退 吏 咸 啓 皥 設 店 貴 邑 境 內 芳 山 店 用 萬 一 亥 各 難 燔 造 給 賣 外 處 私 店 之 燔 送 足 徵 21)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移 文 秒 癸 酉 (1873) 5 月. 22)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乙 亥 (1875) 2 月

110 한국학연구 49 구체적이다. 결국 1870년대 분원은 분원의 관리와 원역, 장인의 우두머리인 변수, 장인 등 구성원 모두가 사실상 분원의 원래 기능인 진상을 제대로 수행 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진상보다는 상행위에 더 열을 올 리는 분원 관리와 장인들로, 도자기 를 매개로 모순된 조선 말기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 1880-1884: 分 院 磁 器 貢 所 節 目 고종 후반 들어 조선 왕실은 재정 부분에서 심각한 문제가 노정되고 이는 점차 재정 악화와 국가 경제 전체의 침체로 번지게 되었다. 이에 조 정은 국가 재정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정부조직과 인 원을 축소ㆍ감원하는 減 省, 곧 구조조정을 단행하였다. 1882년 8월에 고 종은 비용 절감을 위해 어용 膳 服 과 宮 掖 의 인원 수와 경외 이속의 수를 재감하도록 명하였다. 23) 10월에 의정부에서는 담당 기관을 減 省 廳 으로 호칭하고 觀 象 監 에 처소를 두도록 하였다. 24) 감생청의 설치 목적은 절 약과 검소함을 숭상하고, 군더더기를 없애고, 국용을 넉넉하게 하며, 백 성의 폐해를 없애려는 25) 것이었다. 1882년 12월 29일에 발표된 감생안은 22개 조목에 달하는 감생별단에 구체화되었다. 26) 감생의 내용은 그간 모순이 누적되어 왔던 왕실과 정부 의 불필요한 기구의 폐지ㆍ축소, 관원과 員 役 의 감축 등으로, 당시로서 는 매우 혁명적인 구조조정 방안이었다. 감생별단에는 분원과 상급기관 인 사옹원의 개혁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는데, 그 내용 은 다음에 나올 분원자기공소절목 의 핵심 내용과 유사하다. 이 별단에 서 주목되는 것은 지금까지 여러 부서에 중복되어 있던 궁궐 음식에 관 23) 高 宗 實 錄 고종 19년(1882) 8월 23일 24) 高 宗 實 錄 권19 고종 19년(1882) 10월 20일 25) 高 宗 實 錄 권19 고종 19년(1882) 12월 29일 26) 高 宗 實 錄 권19 고종 19년(1882) 12월 29일

1870년대 이후 分 院 官 窯 변천 방병선 111 한 일을 사옹원으로 일원화하여 비용을 절감하려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는 사도시ㆍ내섬시ㆍ내자시ㆍ사재감ㆍ의영고ㆍ장원서ㆍ사포서 등의 혁 파와 提 調 수의 감축이었다. 그리고 왕실에 바치는 각종 물자는 사옹원 에 직접 바치고, 사옹원의 제조와 낭관이 분장하여 물품을 검사하도록 하였다. 27) 또한 사옹원 분원에 대해서는 민간 번조를 허용하고, 여러 가지 폐단 의 근원이었던 燔 造 奉 事 를 보내지 않도록 한 것이다. 왕실 전용 도자기 생산의 관요체제에서 공인에 의한 납품 체제, 즉 반관반민의 체제로 전 환하였던 것이다. 결국 갑신년 일 년 전부터 공안에 대한 개혁 작업이 진 행되어 점차 진배물종을 줄이고 각 司 의 분담을 보다 확실히 하는 등 이 전의 폐단을 개혁하고 보다 안정적인 진상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28) 당 시 공인들과 백성들이 어려움을 토로하였기에 29) 감생의 의도와 명분 역 시 이를 시정하고자 위함이었다. 30) 분원 공인 池 圭 植 이 쓴 하재일기 를 보면, 분원공소는 이미 계미년인 1883년 9월에 전재하고 있어, 공소 전환 이 시작된 것은 1883년부터로 보인다. 31) 이것이 보다 구체적으로 마무리 되어 정식으로 발표된 것이 分 院 磁 器 貢 所 節 目 으로 다시 갑오년에 개 번하였다. 32) 27) 高 宗 實 錄 권20 고종 19년(1882) 12월 29일 一 司 饔 院 卽 掌 供 御 膳 之 地 而 供 上 各 司 之 另 設 官 署 實 涉 繁 冗 司 䆃 寺 內 贍 寺 內 資 寺 司 宰 監 義 盈 庫 掌 苑 署 司 圃 署 竝 革 罷 提 調 減 下 郞 官 竝 屬 之 戶 曹 稱 以 員 外 郞 令 該 曹 單 付 進 排 各 貢 使 之 直 納 于 該 院 米 穀 魚 鹽 柴 炭 果 蔬 油 淸 等 物 本 院 提 調 郞 官 分 掌 照 檢 各 貢 之 曾 前 進 排 該 司 時 謬 例 雜 費 竝 勿 施 以 存 體 恤 有 可 以 留 儲 外 司 者 設 外 院 於 司 䆃 寺 隨 時 進 排 掌 苑 署 司 圃 署 兩 處 之 有 關 祭 享 物 種 令 該 貢 移 納 於 奉 常 寺 事 一 分 院 之 挽 近 爲 弊 公 私 受 損 亦 不 可 不 及 今 變 通 燔 造 奉 事 勿 爲 劃 送 許 民 燔 造 而 供 上 需 用 作 貢 進 排 外 司 及 廚 院 堂 郞 之 重 徒 例 納 等 名 色 及 進 上 時 情 費 一 竝 勿 施 昆 陽 土 移 定 於 原 州 廣 州 土 移 定 於 驪 州 定 式 貢 價 外 年 例 應 下 與 修 補 米 錢 木 槽 廣 板 排 板 等 費 從 今 永 減 俾 便 公 私 受 價 條 年 終 會 計 以 附 近 邑 公 納 中 劃 給 竝 依 戶 曹 別 貿 例 磨 鍊 成 給 事 28) 高 宗 實 錄 卷 20, 20 年 5 月 28 日, 방병선, 앞의 논문(1999), p. 205 참조. 29) 高 宗 實 錄 卷 19, 19년 11 月 18 日. 30) 高 宗 實 錄 卷 19, 19년 12 月 29 日. 減 省 廳 以 今 此 減 省 設 廳, 寔 出 於 崇 節 儉 汰 浮 冗 裕 國 用 祛 民 瘼 之 盛 德 至 仁, 凡 在 中 外 臣 民, 孰 不 欽 仰 攢 祝? 31) 박은숙, 앞의 논문(2008), pp. 251-294. 하재일기 1894년 9월 22일(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 하재일기 2, 326쪽) 少 頃 入 府 中 佇 立 軒 前 大 臣 招 余 引 前 分 付 曰 汝 之 癸 未 作 貢 時 不 聽 吾 言 願 爲 貢 人 矣 十 餘 年 進 排 其 所 利 宜 何 如

112 한국학연구 49 分 院 磁 器 貢 所 節 目 은 許 給 秩 (왕실에서 지급을 허락한 것에 대한 조 항)ㆍ 永 減 秩 (왕실에서 지급을 영원히 혁파할 것에 대한 조항)ㆍ 應 下 條 計 價 秩 (경상비에서 값을 계산해 줄 것에 대한 조항)ㆍ 受 價 秩 (진상기명의 값을 정하는 것에 대한 조항)ㆍ 各 樣 應 行 定 式 秩 (반드시 시행해야 할 분 원 운영 전반에 관한 조항)ㆍ 器 皿 定 價 式 秩 (분원에서 진상하는 그릇의 가 격을 元 進 上 貢 價 와 內 出 別 燔 器 皿 貢 價 로 나누어 제시한 조항)의 6개 항목과 30여개의 세부조항으로 구성되었다. 分 院 磁 器 貢 所 節 目 내용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원역 가운데 새로 12명의 공인을 뽑아 그들에게 생산에 필요한 원료와 연료, 심지어 장인 들의 급료 등 이전의 분원에서 제공하던 것 중 일부 품목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을 제공하고 대신 진상을 맡긴 것이었다. 또한 공인들이 진상하는 백자에 대해서는 원진상가와 별번가로 나누어 급가하도록 하고 구체적으 로 품목별 가격을 정하여 놓았다. 왕실 입장에서는 永 減 秩 항목의 내용 처럼 일부 품목의 공급을 제외시켰으나, 분원 원역 가운데 공인을 지정 하여 진상을 확실히 책임지게 하고 이에 따른 공가를 지급하는 등 일부 경비 절감의 효과와 안정적인 진상제도의 개혁을 실현하고자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은 과정을 거친 끝에 분원은 국영의 형태에서 반관반민, 좀 더 정확히 말해 국가에서 제반 물자와 자본을 대여하고 진상을 책임지게 한 32) 高 宗 31 年 (1894) 分 院 磁 器 貢 所 節 目 (규장각 古 4256-11) 置 分 院 光 緒 二 十 年 甲 午 四 月 日 分 院 貢 所 節 目 甲 申 節 目 改 飜 謄 右 節 目 爲 永 久 遵 行 事 分 院 磁 器 進 上 原 有 定 數 而 挽 近 進 排 之 節 比 前 倍 蓰 人 情 之 費 逐 年 加 增 所 謂 都 吏 一 經 該 任 則 擧 皆 蕩 産 渠 等 之 矜 憐 姑 捨 莫 重 御 用 至 於 闕 供 之 境 已 自 減 省 廳 特 軫 公 燔 之 狼 狽 具 別 單 啓 下 内 以 爲 分 院 之 挽 近 爲 弊 公 私 受 損 亦 不 可 不 及 今 變 通 矣 燔 造 奉 事 勿 爲 劃 送 許 民 燔 造 而 供 上 需 用 作 貢 進 排 内 外 司 及 厨 院 堂 上 郎 廳 重 徒 例 納 等 名 目 及 進 上 時 情 費 一 并 勿 施 昆 陽 土 移 定 于 原 州 廣 州 土 移 定 于 呂 州 改 付 標 復 舊 定 式 貢 價 外 年 例 應 下 與 修 補 米 木 槽 廣 板 排 板 等 費 從 今 永 減 俾 便 公 私 授 價 條 年 終 會 計 以 附 近 邑 公 納 中 劃 給 并 依 戸 曺 別 貿 例 成 給 事 傳 曰 允 啓 下 辭 意 奉 承 施 行 以 燔 所 員 役 中 勤 實 堪 任 者 十 二 人 作 爲 新 貢 矣 器 皿 進 排 與 年 例 應 下 受 價 磨 各 樣 應 行 節 目 逐 條 定 式 臚 列 于 左 自 政 府 反 帖 成 給 三 件 爲 去 乎 一 置 本 院 一 置 戸 曺 一 置 貢 所 相 考 遵 行 毋 敢 違 越 永 遠 勿 替 事 條 例

1870년대 이후 分 院 官 窯 변천 방병선 113 分 院 貢 所 로 거듭나게 되었다. Ⅲ. 分 院 貢 所 : 1884-1895 분원은 1884년 분원공소로 바뀌었고 이후의 사정은 荷 齋 日 記 를 통 해 잘 알 수 있다. 33) 당시 분원공소에는 원료의 공급과 자기의 납품ㆍ판 매 등 분원 자기의 제조와 공급에 관련된 일체의 사무를 관장하는 공인 들과 그릇을 만드는 장인들, 그 외에 부수적으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 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분원이 공소로 거듭나기 이전 원역과 변 수가 협업체제로 운영을 하였던 것처럼 공인들은 貢 房 都 中 을, 장인들은 邊 房 都 中 을 조직하여 자신들의 이익과 친목을 도모하였으며, 각각 貢 房 과 邊 房 을 두어 소속 회원들이 모여 회의하고 업무를 처리하였다. 34) 원 역의 우두머리인 貢 房 都 中 의 업무를 총괄하는 大 行 禮 와 邊 房 都 中 의 우 두머리인 변수가 있어 각각의 조직을 대표하였다. 35) 그러나 분원공소의 운영은 엄청난 양의 납품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재 정이 고갈되면서 축적된 미수금의 증가와 36) 관료와 아전들의 수탈, 그리 고 시장판매의 어음거래와 37) 외상거래의 미수금으로 인해 자금난에 시 달리게 되었다. 38) 이는 결국 분원공소의 경영을 악화시키는 주된 요인으 로 작용하여 1894년 8월에 공소는 혁파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39) 이후 1895년 4월에 典 膳 司 가 세워지면서 사옹원이 폐지되었고 40) 33) 방병선, 앞의 논문(2010), p. 276. 34) 박은숙, 앞의 논문(2008), p. 275. 35) 당시 변방도중의 두목은 장성화( 張 聖 化 )라는 기록이 있다. 荷 齋 日 記 1892년 1월 24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2, 2007, p. 57). 36) 荷 齋 日 記 1894년 9월 22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2, 2007, p. 325). 37) 荷 齋 日 記 1891년 1월 17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1, 2005, p. 66). 38) 荷 齋 日 記 1894년 9월 22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2, 2007, p. 326).; 1894년 10월 25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2, 2007, p. 334). 39) 荷 齋 日 記 1894년 8월 19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2, 2007, p. 313). 40) 高 宗 實 錄 卷 33, 32 年 (1895) 4 月 2 日. 박은숙, 앞의 논문(2010), p. 285 각주 13에

114 한국학연구 49 1895년 일기에 분원은 이미 혁파되었다고 기록하였으며 41) 실제 분원공 소는 1895년 궁내부에 이전되었다. 42) 결국 공소 受 價 50만 냥의 탁지부 문서를 20만 냥으로 영원히 방매하기로 결정하고, 모든 공소의 회원이 서명하였다. 43) 이로써 분원 공소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분원공소의 실제 진상자기 제작에 소용되는 원료와 진상, 판매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 원료 1891년 지규식은 백토ㆍ 水 土 (유약 원료인 물토)ㆍ 灰 石 (유약원료인 석회 석) 등 도자기를 만드는 원료의 상납에 관련하여 각종 告 目 과 傳 을 작성하 고 공당의 집을 수차례 방문하여 처리해줄 것을 간청하였다. 일기에 등장 하는 유약 산지로는 원주 수토ㆍ광주 灰 石, 태토 원료인 양구 백토 44) ㆍ진 주토 등이 자주 언급되었다. 45) 또한 分 院 磁 器 貢 所 節 目 에서 광주토를 여주로 이정하였기 때문에 일기에 여주토가 자주 등장하였다. 46) 2. 진상과 판매 분원공소의 공인들은 궁궐과 관청에서 요구하는 그릇을 진상할 뿐 아 서 재인용. 41) 荷 齋 日 記 1895년 3월 16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3, 2008, p. 52). 42) 荷 齋 日 記 1895년 3월 18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3, 2007, p. 53). 43) 荷 齋 日 記 1895년 11월 20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3, 2007, p. 117). 44) 荷 齋 日 記 1891년 1월 13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1, 2005, p. 60), 10월 23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1, 2005, p. 232). 45) 荷 齋 日 記 1892년 6월 22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2, 2007, p. 111), 8월 27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2, 2007, p. 142), 9월 1일(서 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2, 2007, p. 143). 46) 荷 齋 日 記 1892년 1월 25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2, 2007, p. 58), 1894년 4월 11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2, 2007, p. 284). 여주 토는 앞에서 보았듯이 1870년대부터 자주 등장하였다.

1870년대 이후 分 院 官 窯 변천 방병선 115 니라 서울 외 전국 각지의 器 廛 과 일반인들에게 그릇을 판매하였다. 공 인들은 서울ㆍ경기지역 내 그릇의 판매독점권을 장악하고 外 邑 私 店 器 에 대한 단속권을 행사하는 등의 특권과 정부에서 제공하는 원료와 급료 등 의 지원을 바탕으로 그릇의 시장 판매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여 자본을 축적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그릇의 진상가는 分 院 磁 器 貢 所 節 目 에 소개되어 있는 元 進 上 價 와 別 燔 價 에 의해 受 價 를 정산하여 지 급 받게 되어 있지만, 실제로 受 價 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 다. 예로 1894년 공인들은 受 價 를 받기 위해 정부 관련자들을 찾아가 부 채가 백만 냥이나 되는 사정을 호소하였지만, 재정이 바닥난 정부로서는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47) 실제 왕실 연회에 사용된 그릇은 1887년의 경우 갑번자기만 6000개가 소용되었다. 모자랄 경우 사기전이나 다른 반사기계 등에서 공급을 받았 다. 48) 1892년 내외진찬등록 에는 외진찬의 대전대탁과 세자궁, 내진찬 의 대전, 중궁전, 세자궁, 세자빈궁에 銀 器 城 上 5명과 沙 器 城 上 10명을 배치하여 은기와 사기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49). 여기에 쓰이는 기 명들은 대접시 3000개, 중접시 6000개, 소접시 2400개, 소대접 2400개, 사발 1600개, 탕기 7200개, 보아 3000개, 종자 3700개로, 50) 총 29,300개 의 엄청난 양이었다. 왕실 연회 뿐 아니라 공당댁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에게 상당량의 그릇 이 上 納 되었으며, 담당 관료들과 서리ㆍ하인들에게조차도 뇌물용으로 제 공하여야 했다. 뿐만 아니라 진상 기명을 간색하는 상궁들이 그릇의 질 을 핑계로 다시 구워 바칠 것을 요구면서 퇴짜를 놓는 경우도 많았고, 대 신들도 상납 그릇에 대해 퇴자를 놓거나 트집을 잡아 재상납하라는 경우 47) 荷 齋 日 記 1894년 9월 22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2, 2007, p. 326). 48) 丁 亥 進 饌 儀 軌 는 大 王 大 妃 神 貞 王 后 趙 氏 (1808~1890)의 80살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고종이 設 行 한 진찬의식에 관한 기록이다. 49) 김윤정, 고려말ㆍ조선초 官 司 銘 梅 甁 의 製 作 時 期 와 性 格, 흙으로 빚은 우리 역사 단호문화연구 제8호(2004), pp. 154~157. 성상은 궁 내의 각 전ㆍ청에서 器 物 을 맡아 지키는 사람이며, 조선초부터 존재가 확인된다. 50) 內 外 進 饌 謄 錄 該 用 器 皿 雜 物 秩

116 한국학연구 49 가 빈번하여 공인들이 분통을 터트렸다. 궁궐과 관청은 공인에 대한 지 배력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신에 분원에 특권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어 쩔 수 없었다. 또한 분원공소는 원래 진상 이외에도 1891년 병조 결속색이 요구했던 茶 鍾 과 尿 腔 처럼 원래 唐 沙 器 契 에서 진상하던 것을 떠맡는 경우도 있었 다. 51) 상납한 기명의 종류는 다양하며 반상기와 사발, 대접을 중심으로 청화백자 용준도 들어 있었다. 또한 깨진 용준을 선물로 바친 경우도 있 으며 청화 요강과 촛대ㆍ비누합ㆍ찬합ㆍ분경대ㆍ자라병ㆍ지석ㆍ명기ㆍ 양치기 등 매우 다양하다. 특히 오늘날 잘 알려진 戒 盈 盃 는 일본인 水 野 小 助 가 주문하여 제작한 것으로 일정 부분 물을 채우면 내부 관을 통해 물이 밑으로 빠지게 한 것이다. 52) 가격은 시기 별로 주문자별로 다른 것 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칠첩반상기의 경우 1892년 5월에 60냥에 판 매하였으나, 1893년 6월에는 80냥에 판매하기도 하였다. 지규식은 궁궐과 관청에 그릇 일체를 납품하는 대신 서울ㆍ경기지역 에 대한 판매 독점권을 부여 받아 外 店 ㆍ 私 店 에 대한 단속과 특권을 행 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 등지에서 수입한 그릇을 거래하는 상 인들에 대한 압박과 감시로 분원자기의 경쟁력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53) Ⅳ. 燔 磁 會 社 : 1896-1905 분원공소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자 1896년 지규식은 번자회사를 설립 하였다. 당대 권세가들인 탁지부의 김국장과 한용직 54), 김종한을 찾아가 번자회사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을 변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55) 후에 번 51) 荷 齋 日 記 1891년 9월 9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1, 2005, p. 207). 52) 하재일기 1904년 12월 10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하재일기 권7, 2009, p. 157). 53) 荷 齋 日 記 1891년 9월 2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1, 2005, p. 202). 54) 荷 齋 日 記 1896년 11월 10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4, 2008, p. 45). 55) 荷 齋 日 記 1896년 11월 13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4, 2008, p. 46).

1870년대 이후 分 院 官 窯 변천 방병선 117 자회사의 사장이 되는 김종한으로부터 자금을 변통해주겠다는 내락을 얻 고, 56) < 燔 磁 會 社 節 目 > 초안을 작성하여 김종한에게 주어 살펴보도록 하 였다. 57) 지규식은 광주 분원에 번자회사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이전에 정부로 부터 받았던 특권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는데 그 예가 분원 7면 화속세 감이다. 58) < 燔 磁 文 蹟 草 偐 >의 작성과정에는 궁내부의 劉 主 事 와 법부의 協 瓣 朴 鏞 和 가 관여하였는데 59) 이는 번자회사가 왕실 소용 그릇 공급이 라는 어용적 성격을 여전히 지닌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60) 지규식은 1897년 1월 < 分 院 成 冊 > 세 권을 작성하여 한 권은 사장인 김종한 집에, 한 권은 안중기 집에, 그리고 나머지 한 권은 분원에 비치하였다. 61) 번자회사는 이후 서울의 본사와 분원의 이원체제로 운영되었으며, 사 원 전원이 경영에 참여하고 이익을 공동 분배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었 다. 62) 그러나 운영방식의 문제점과 자금난에 시달리던 번자회사는 1899 년에 5월부터 각 사원이 별도로 자본을 준비하여 設 役 하고, 탁지부의 수 가조는 9등분하여 사원 9명에게 문권을 만들어 나누어주도록 하였으며, 관련사항을 다시 절목을 만드는 것으로 공론을 정하였다. 63) 1900년 이후에는 개별운영체제로 바뀌어 분원의 사원들이 회사의 가 마와 창고 등의 각종 시설세를 서울 본사에 납부하였고, 왕실 器 皿 의 주 문과 납품에 대해서는 본사 사원들이 여전히 관장하고 있었다. 64) 56) 荷 齋 日 記 1896년 11월 19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4, 2008, p. 47), 57) 荷 齋 日 記 1896년 11월 19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4, 2008, p. 48). 58) 荷 齋 日 記 1897년 2월 28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4, 2008, p. 68). 59) 荷 齋 日 記 1896년 12월 8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4, 2008, p. 51), 1896년 12월 10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4, 2008, p. 51), 1896 년 12월 14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4, 2008, p. 52). 60) 完 文 1898. 2(규장각 古 4259-44) 一 自 更 張 以 來 分 院 擧 行 雖 歸 廢 止 御 用 法 器 不 可 闕 焉 故 所 以 有 會 社 之 新 設 也 曰 會 曰 社 自 有 業 主 雖 異 於 廚 院 之 分 設 然 御 用 法 器 由 是 以 無 闕 61) 荷 齋 日 記 1897년 1월 14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4, 2008, p. 64). 62) 荷 齋 日 記 1898년 1월 3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4, 2008, p. 69). 63) 荷 齋 日 記 1899년 1월 23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5, 2009, p. 41). 64) 荷 齋 日 記 1901년 6월 15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6, 2009, p. 94).

118 한국학연구 49 한편 일기에는 번자회사에서 소용되는 원료와 청화안료 뿐 아니라 분 원장인과 일본인의 분원 진출, 채기 제작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어 흥미 롭다. 1. 원료와 청화안료 원료를 보면 1898년에는 춘천토의 품질이 우수하다고 인정하였고, 65) 18세기 설백자 생산지로 유명한 퇴촌 金 沙 洞 앞 시내를 파서 백토를 얻 기도 하였다. 66) 1901년에는 경기도 광주의 강천 수을토를 사용하기도 하 였다. 67) 또한 고랑리 백토 중의 흙덩이를 유약으로 시험 삼아 입혀본 경 우도 있다. 68) 유약 원료로는 수을토 이외에 調 合 藥 이라는 것을 사용하여 유약을 제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9) 또한 갑번자기용 흙은 따로 보 관하였는데 갑발을 씌우는 것 이외에도 원료를 달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70) 청화 안료는 일본에서 들여온 倭 靑 을 주로 사용하였다. 71) 왜청을 판매 한 일본인 가게는 서울의 谷 川 과 72) 坂 井 가게로 73) 실제 지규식이 직접 방문하여 구매하였다. 선수금을 지급하고 기다리는 것이 태반일 정도로 당시 왜청의 수입이 원활하지 않아 왜청을 얻기 위해 인천항까지 사람을 보내 구입하기도 하였다. 74) 왜청의 가격은 동일한 해에 구입한 것이라도 가격차이가 상당히 있고, 특히 1898년에 구입한 왜청의 가격은 1근에 360여 냥으로 가장 비싸다. 65) 荷 齋 日 記 1898년 3월 8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4, 2008, p. 143). 66) 荷 齋 日 記 1898년 윤3월 23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4, 2008, p. 151). 67) 荷 齋 日 記 1901년 7월 26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6, 2009, p. 99). 68) 荷 齋 日 記 1902년 10월 8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7, 2009, p. 34). 69) 荷 齋 日 記 1892년 10월 25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2, 2007, p. 167). 70) 荷 齋 日 記 1900년 5월 22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5, 2009, p. 154). 71) 荷 齋 日 記 1891년 1월 18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1, 2005, p. 67). 72) 荷 齋 日 記 1891년 10월 17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1, 2005, p. 225). 73) 荷 齋 日 記 1891년 1월 22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1, 2005, p. 69). 74) 荷 齋 日 記 1898년 7월 2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4, 2008, p. 171).

1870년대 이후 分 院 官 窯 변천 방병선 119 이렇게 왜청이 많이 사용된 이유는 아마도 안료의 가격이 중국산 蘇 渤 泥 靑 에 비해 저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발니청은 1904년 일기에 12냥 쭝에 650냥을 주고 구입한 기록이 있고, 75) 왜청은 1898년의 경우 120냥 쭝에 1820냥으로 1냥쭝에 15.2냥 정도였다. 76) 즉 시기 차이는 있지만 蘇 渤 泥 靑 이 일본산 왜청에 비해 1냥쭝에 54.2냥으로 세 배가 훨씬 넘는 비 싼 가격이었다. 2. 장인 1900년대 이후 번자회사가 본사에 시설 대여비를 지급하는 개별운영 체제로 바뀌면서부터는 우수한 장인들을 여러 번소지점에서 불러들여 자 기제작의 완성도를 높이고자하였다. 예를 들어 여주 오금점에서 물레대 장으로 작업하던 전창오 77) 와 신성국 78) ㆍ김선희 79) 는 여주와 분원을 오가 며 작업을 하였고 분원에서는 이들을 데려오기 위해 여러 방안을 강구하 였다. 80) 특히 진찬용 용준은 장성화에게 맡기는 것으로 보아 그가 당시에 가장 뛰어난 물레장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성화는 1898년 궁내부 完 文 에는 造 器 匠 장성화로 기명되었고, 荷 齋 日 記 에는 장인득으로도 명명 되었다. 81) 지규식이 장성화에게 용준을 만들게 하려 했는데 장성화의 業 75) 荷 齋 日 記 1904년 7월 9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7, 2009, p. 136). 76) 荷 齋 日 記 1898년 11월 14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5, 2009, p. 27). 77) 전창오는 1901년 1월 8일의 일기에는 한문으로 全 昌 浩 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후 기 록에는 全 五 로 기재되어 있으나 동일인물이다. 荷 齋 日 記 1903년 9월 17일(서울 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7, 2009, p. 92), 1903년 9월 24일(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7, 2009, p. 94), 1903년 9월 27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7, 2009, p. 94). 78) 荷 齋 日 記 1901년 6월 11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6, 2009, p. 93). 79) 荷 齋 日 記 1901년 4월 20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6, 2009, p. 86). 80) 荷 齋 日 記 1891년 7월 16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1, 2005, p. 54), 1901년 4월 19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6, 2009, p. 86). 81) 荷 齋 日 記 1901년 4월 23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6, 2009, p. 86), 장성화는 분원 장인들의 우두머리로써 수차례 일기에 등장하며, 1891년 1월 11일, 1월

120 한국학연구 49 主 인 변주헌이 꺼린다는 82) 내용으로 보아 1900년대 이후 분원번자회사 의 운영체제가 바뀌면서 솜씨가 좋은 장인들을 따로 고용하여 전속시키 기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83) 또한 박광적은 完 文 에서는 乾 火 匠 으 로 기재되어 있으나 신성국이 아팠을 당시에 그릇을 만드는 造 器 匠 으로 활동하였다. 84) 참고적으로 분원 사기장의 수는 시기에 따라 변하였다. 국초에는 경 국대전 에 380명이 등록되고 이를 좌, 우번 둘로 나누어 190명씩 관리하 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수를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고 응 역 방법도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순조 33(1832)년 기록에는 분원장인이 500명이고, 연간 150명이 윤번 응역한다고 되어 있어, 한 해 분원에서 번 역에 참여하는 장인의 수가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85) 이런 장인의 숫 자는 1898년 간행된 궁내부 완문 에는 116명으로 더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86) 15일, 6월 8일, 1893년 7월 16일의 일기에 4번 장인득 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 두 사 람이 동일 인물임은 중요문형문화재 사기장 김정옥 선생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김 남희, 조선 말기 문경 관음리 망동요 연구 (고려대 석사학위논문, 2013), p. 33 각주 134 재인용.) 82) 荷 齋 日 記 1901년 4월 23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6, 2009, p. 86) 그러나 이후 8월 17일에 장성화가 사준 8쌍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83) 荷 齋 日 記 1901년 4월 23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6, 2009, p. 86), 1901년 5월 21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6, 2009, p. 91). 84) 荷 齋 日 記 1901년 7월 18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6, 2009, p. 98). 85) 承 政 院 日 記 순조 33년 2월 30일( 申 未 ). 分 院 工 匠 之 案 付 者, 爲 五 百 名, 而 每 年 一 百 五 十 名 式 輪 回 應 役 矣 此 輩 專 以 燔 瓷 爲 業, 而 不 事 農 作, 故 一 遇 凶 荒, 便 束 手 待 盡, 卽 必 然 之 勢 也 謹 考 本 院 謄 錄 86) 宮 內 府, 1898년 2월. 完 文 (규장각 古 4259-44) 完 文 爲 完 文 成 給 事 分 院 之 燔 磁 厥 惟 久 矣 在 昔 匠 卒 之 名 在 案 額 者 咸 知 奉 公 之 所 重 不 敢 營 私 而 占 便 一 自 更 張 以 來 分 院 擧 行 雖 歸 廢 止 御 用 法 器 不 可 闕 焉 故 所 以 有 會 社 之 新 設 也 曰 會 曰 社 自 有 業 主 雖 異 於 厨 院 之 分 設 然 御 用 法 器 由 是 以 無 闕 則 此 不 可 與 尋 常 商 會 同 日 以 語 也 匠 卒 輩 亦 應 知 其 輕 重 而 徃 徃 應 募 適 他 致 令 燔 役 狼 貝 事 之 駭 惋 莫 此 爲 甚 玆 將 該 匠 等 姓 名 開 録 于 左 另 成 完 文 出 給 使 之 恪 勤 執 役 無 敢 藉 托 謀 避 而 雇 錢 計 給 亦 從 公 議 質 定 無 或 由 社 員 恣 意 低 昻 以 爲 公 私 兩 便 爲 宜 者 光 武 二 年 二 月 日 宮 内 府 ( 宮 内 大 臣 之 印 ) 造 器 (7 人 ) 張 聖 化 洪 景 浩 朴 文 約 金 先 喜 金 星 老 金 英 順 金 伯 元 磨 造 (6 人 ) 李 德 有 李 文 有 柳 用 玄 張 同 順 李 英 培 李 好 俊 乾 火 (6 人 ) 金 允 根 卞 致 德 許 洛 玄 李 允 景 金 景 文 朴 廣 積 釜 火 (4 人 ) 洪 宅 先 閔 得 信 孫 致 西 金 鎭 國 修 理 (2 人 ) 朴 仁 山 朴 貴 男 助 役 (3 人 ) 朴 奉 先 卞 致 學 朴 德 心 衣 土 着 水 (1 人 ) 朴 順 回 隨 從 (4 人 ) 李 五 乭 朴

1870년대 이후 分 院 官 窯 변천 방병선 121 3. 일본인의 분원 진출 번자회사에는 일본인들이 회사에 소속되기도 하고 독자적으로 일본 그릇의 조선 수출 뿐 아니라 조선 내 생산을 위해 조선내 도자기업 진출 을 시도하고 있었다. 87) 1897년 6월에는 대신 安 炯 壽 가 일본인 7명과 광 주 奉 安 店 을 다시 설치하고 새로 大 通 會 社 를 만들 것이며, 분원 사람 중 에는 趙 奉 稷 과 李 元 裕 가 참여한다고 하였다. 88) 그리고 1904년에는 일본인들이 번자회사 소속으로 분원에서 가마를 차리고 작업을 하기 시작하는데, 작업을 위해 역부를 모집하지만 지원자 가 없어 꽤 번거로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89) 같은 해 12월에는 일본 효고현에서 온 田 村 久 平 이 분원으로 찾아와 분원사기 번조 작업이 개연 하지 못함을 충고하며 그릇 제조기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자 지규식이 내심 불쾌해하며 돌려보내는 일화가 있었다. 90) 또한 1905년에는 일본 九 州 大 分 縣 에서 온 姬 野 見 次 郞 이 내방하여 사기번조를 문의하고 일본에 서 수비한 백토로 그릇을 구워 간색하기를 청하여 그렇게 해주었다. 91) 일본인들은 조선의 요업실태 파악을 위해 한성부 훈령을 가지고 분원 일대를 두루 살피고 각종 물력과 값, 백토 산지를 기록하였다. 92) 이러한 작업은 경기도 광주 분원 뿐 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시행되었고 당시 일 본인의 식민지 산업 부흥책의 일환이었다. 1905년에는 분원의 실력자인 광주의 慶 義 河 가 분원에서 번조 허락을 貴 奉 朴 有 成 閔 九 奉 畵 青 (2 人 ) 鄭 永 必 鄭 大 燮 負 軍 (4 人 ) 宋 奉 安 趙 用 甫 李 景 老 朴 吉 同 水 飛 (9 人 ) 李 鍾 國 金 順 基 咸 順 官 朴 聖 業 朴 元 甫 鄭 官 奉 李 命 喜 嚴 應 添 金 才 根 鍊 正 (5 人 ) 琴 詩 絃 琴 舜 道 鄭 光 漢 李 永 辰 徐 時 五 舂 士 軍 二 十 名 䂨 木 軍 二 十 名 馬 軍 十 名 結 卜 軍 十 名 使 喚 二 名 居 管 一 名 ( 宮 内 府 印 一 四 個 處 ). 87) 방병선, 앞의 논문(2010), p. 282. 88) 荷 齋 日 記 1897년 5월 20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4, 2008, p. 88). 89) 荷 齋 日 記 1904년 7월 13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7, 2009, p. 137) 90) 荷 齋 日 記 1904년 12월 28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7, 2009, pp. 160-161) 91) 荷 齋 日 記 1905년 5월 23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8, 2009, p. 48). 92) 荷 齋 日 記 1905년 9월 21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8, 2009, p. 65).

122 한국학연구 49 받고, 93) 1906년 일본인 3명을 데리고 와 그릇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94) 이들 일본인 중 水 野 小 助 는 상당기간동안 분원 번조소에서 작업을 하였 고, 1908년에는 서울 공업전습소의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95) 일본인 佐 瀨 熊 哲 가 충주에서 내려와 일본인들이 제작해서 실험 번조한 시제품 그릇들을 보고 색상과 품질에 대해 매우 만족하였는데, 96) 그가 충주에서 온 것으로 보아 혹 충주 미륵리 가마와 상관있지 않을까 추정 된다. 97) 4. 彩 器 제작 한편 1902년 이후 분원에서는 당시 시장에서 판매되던 왜사기인 彩 器 를 분원에서도 제작하여 판매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채기 제작은 지금까 지 조선에서 시도되지 않았던 상회자기 제작으로 매우 이례적인 것이며 새로운 기술에 대한 도전이자 실천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인 庵 主 를 고 용하여 채요를 축조하고, 98) 일본인이 사용하고자했던 물레를 역소에 설 치하여 庵 主 에게 그릇을 빚도록 하였다. 99) 초벌구이 후 庵 主 로 하여금 채색을 하게 하여 번조를 시도한 이래 실패를 거듭하면서 채기에 맞는 衣 土 와 조합 약품, 그리고 번조시간 등을 개선하여 결국 한 짐 분량의 채기를 번조에 성공하였다. 100) 12월 6일에는 2천량의 채기를 판매하기도 하였다. 101) 다만 1909년 10월에 서울에서 한인 두 명이 내려와 채기를 93) 荷 齋 日 記 1905년 7월 5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8, 2009, p. 54). 94) 荷 齋 日 記 1906년 4월 24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8, 2009, p. 98). 95) 荷 齋 日 記 1908년 9월 30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8, 2009, p. 233), 1908년 10월 4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8, 2009, p. 234), 1909년 7월 8-9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8, 2009, p. 272). 96) 荷 齋 日 記 1906년 9월 20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8, 2009, p. 122). 97) 방병선, 앞의 논문(2010), p. 238. 98) 荷 齋 日 記 1902년 10월 14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7, 2009, p. 36), 1902년 10월 22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7, 2009, p. 37) 99) 荷 齋 日 記 1902년 10월 18-19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7, 2009, p. 37) 100) 荷 齋 日 記 1902년 10월 28-11월 22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7, 2009, pp. 38-42)

1870년대 이후 分 院 官 窯 변천 방병선 123 시험하고 간색한 일 102) 이외에는 더 이상 채기 번조의 기록은 보이지 않 는다. 아마도 일본인이 제작한 저렴하고 품질이 우수한 채기에 밀려 더 이상 시장을 확보하지 못한 까닭이 아닐까 여겨진다. Ⅴ. 燔 砂 株 式 會 社 : 1906-1910 번자회사가 경영 악화로 문을 닫게되자 1906년 지규식은 번사주식회 사를 설립하였다. 양재익과 참여의사를 밝힌 회원들의 성명록을 작성하 고 번사주식회사의 협동회원이 되었다. 103) 그러나 번사주식회사 역시 자 금난과 기술부족으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1909년 이후로는 그간의 제작기술을 반성하고 그릇의 품질 개량을 위한 논의를 지속적으로 진행 하였다. 104) 한편 번사주식회사가 문을 여는 1906년에는 일본인 3명이 분원으로 들어와 그릇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105) 이들 일본인 중 水 野 小 助 는 상당 기간동안 분원 번조소에서 작업을 하였고, 1908년에는 서울 공업전습소 의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106) 같은 해 9월 일본인 佐 瀨 熊 哲 가 충주에서 내려와 일본인들이 제작해서 실험 번조한 시제품 그릇들을 보고 색상과 품질에 대해 매우 만족하였는데, 107) 그가 충주에서 온 것으 로 보아 혹 충주 미륵리 가마와 상관있지 않을까 추정된다. 108) 101) 荷 齋 日 記 1902년 12월 16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7, 2009, p. 47) 102) 荷 齋 日 記 1909년 10월 11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8, 2009, p. 286) 103) 荷 齋 日 記 1906년 10월 21일~23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8, 2009, p. 126). 104) 荷 齋 日 記 1909년 7월 10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8, 2009, p. 272), 7월 17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8, 2009, p. 273). 105) 荷 齋 日 記 1906년 4월 24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8, 2009, p. 98). 106) 荷 齋 日 記 1908년 9월 30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8, 2009, p. 233), 1908년 10월 4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8, 2009, p. 234), 1909년 7월 8-9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8, 2009, p. 272). 107) 荷 齋 日 記 1906년 9월 20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8, 2009, p. 122). 108) 방병선, 앞의 논문(2010), p. 238.

124 한국학연구 49 Ⅵ. 磁 器 會 社 ( 砂 器 會 社 ): 1910 1910년 들어 지규식은 공업전습소 선생 水 野 小 助 와 협동하여 자기를 개량하여 새로운 사기회사를 설립하고자 계획하고 109) 1여년 만에 발기 인을 정하는 등 회사를 유지하고자 꾸준히 노력하였다. 110) 그러나 이 회 사 역시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대한제국기 광무년간 설립한 다른 회사들도 성장ㆍ발전하지 못하고 결국 도산되고 말았는데, 이는 근 대적 경영체제의 부족ㆍ자금력의 한계ㆍ자본주의 상품들과의 경쟁력 부 재 등 시대적ㆍ역사적 배경과 맞물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일 수도 있 다. 111) Ⅶ.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조선말기 분원은 왕실의 개혁과 구조조정의 의지를 반영한 분원공소로 거듭났으나, 전통적 수공업체제에서 근대화로 의 전환을 모색하였지만 일제 강점이라는 역사적 맥락과 현실 속에서 조 선의 운명과 함께하였다. 분원은 分 院 邊 首 復 設 節 目 (1874)과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1873-1876) 을 통해 알 수 있듯이 1870년대부터 여러 가지 적폐가 노정되어 제대로 된 진상이 어려웠다. 16-24인의 원역들과 복설과 폐설을 거듭한 변수들 은 자본을 모으고 이를 통해 이익을 챙기려 하면서 서로간의 갈등으로 분원의 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었다. 원역과 변수간의 알력이 치열해지고 분원의 본업인 자기 진상의 의무에 차질이 생기게 되자 1874년 변수복설 의 조치를 내리고 낭청과 원역, 변수의 협업 체제를 지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복설이 된 이후도 병폐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續 燔 과 不 燔 을 109) 荷 齋 日 記 1909년 7월 18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8, 2009, p. 273). 110) 荷 齋 日 記 1910년 6월 25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荷 齋 日 記 권8, 2009, p. 316). 111) 박은숙, 앞의 논문(2010), p. 316.

1870년대 이후 分 院 官 窯 변천 방병선 125 거듭하였으며 분원응역에 응하지 않는 장인의 수가 누적되어 타지역의 장인을 불러오는 경우도 있었다. 분원 장인들의 요미지급은 이전과 마찬 가지로 양근 화전세로 충당하고 있었으며 장인들의 경제적 보상을 위한 사번 자기의 판매는 매우 제한적이어서 이익을 얻기 어려웠다. 반면 퇴 임한 분원 관리들은 設 店 하여 판매에서 여러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1880년대 들어 왕실재정의 축소와 합리화에 따라 1883년 감생청의 공 안이 발표되고 낭관 파견 금지와 허민번조를 위해 공인 12인을 지정하여 진상토록 하는 내용의 分 院 磁 器 貢 所 節 目 이 1884년 공표되면서 분원 은 분원공소로 탈바꿈하였다. 지규식의 荷 齋 日 記 에 따르면 분원공소(1884-1895)는 장인과 원료, 연료 공급에도 불구하고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았다. 이후 설립된 번자회 사(1896-1905), 번사회사(1906-1910)와 자기회사(1910) 등 회사들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도산하였다. 정교한 디자인과 대량생산을 위한 철 저한 분업화와 기술 혁신, 장인들에 대한 대우와 학교 교육을 통한 근대 식 기술자 양성, 설비 확충과 판매 신장을 위한 금융지원 등이 미진하거 나 전무하여 결국 화사 체제를 끌고 가지 못한 것이다. 반면 일본인들의 진출은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채기 제작과 청화 안료 유통 등으로 조선 자기 시장의 상당 부분을 잠식하고 있었다. 이미 조선은 자기를 산업화 할 힘이 없었던 상태였고 개인이 감내하기에는 어림없었으며 그릇의 질 역시 수입도자와의 격차가 더 벌어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高 宗 實 錄,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分 院 邊 首 復 設 節 目, 分 院 磁 器 貢 所 節 目, 承 政 院 日 記, 完 文, 丁 亥 進 饌 儀 軌, 荷 齋 日 記 방병선, 조선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2000. 宋 贊 植, 李 朝 後 期 手 工 業 에 관한 硏 究, 서울대학교출판부, 1973.

126 한국학연구 49 김남희, 조선 말기 문경 관음리 망동요 연구, 고려대 석사학위논문, 2013. 김윤정, 고려말ㆍ조선초 官 司 銘 梅 甁 의 製 作 時 期 와 性 格, 흙으로 빚은 우리 역사, 단호문화연구 제8호, 2004. 박은숙, 개항 후 分 院 운영권의 민간 이양과 운영실태 - 荷 齊 日 記 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142, 한국사연구회, 2008.. 대한제국기 燔 磁 會 社 의 설립과 운영, 한국사연구 149, 한국사연구회, 2010. 방병선, 고종 연간의 분원 민영화과정, 역사와 현실 33호, 한국역사연구회, 1999., 李 亨 祿 의 冊 架 文 房 圖 八 曲 屛 에 나타난 중국도자, 강좌미술사 28호,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007., 하재일기( 荷 齋 日 記 를 통해 본 조선 말기 분원, 강좌미술사 34호,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010. 엄승희, 일제강점기 도자정책과 제작구조 연구, 숙명여자대학교박사학위논문. 2009.

1870년대 이후 分 院 官 窯 변천 방병선 127 Abstract A Study on the Analysis of Transition Period of the Joseon Royal Kiln(1870~1910) Bang Byungsun(Professor of Korea University) This thesis examines the transition period of the Joseon royal kiln from 1870 to 1910. Some of the major issues are as follows: the cause of the change, the activity of potters and officers, production and technique. I have analysed several public and private documents, such as The Reinstatement of the Kiln Master of the Royal Kiln( 分 院 邊 首 復 設 節 目, 1874), The Abstract of Provision Document of the Royal Kiln( 分 院 各 項 文 簿 抄 錄, 1873-76), The Regulation of Tribute System of the Royal Kiln( 分 院 磁 器 貢 所 節 目, 1894), other government compilation of the royal kiln and the Diary of Ji Kyusik( 荷 齋 日 記, 1891-1910). In 1870s, due to the inner corruption, the royal kiln failed to pay the tribute. There were 16 to 24 officers stationed at the royal kiln. The officers and the royal kiln masters made efforts to make profits from the porcelain production and sales, however the continuous corruptions and inner conflicts deteriorated the situation. Thus in 1874, the kiln master, who had been dismissed for neglecting his duties of the tribute, was reinstated in the service. But it failed. On the other hand, the public potters continued to drop out and the government officers had to reemploy potters for substitute. The private sale of public potters was highly restricted and less profitable. In the meantime, retired officers from the royal kiln opened the ceramic shops and started to make profits.

128 한국학연구 49 From 1880s, the government reduced budget of royal kiln and banned dispatching officers in 1883. Futhermore, The Regulation of Tribute System of the Royal Kiln was enacted in 1884 and appointed 12 officers in charge of tribute system. Thus, the royal kiln was designated as the Bunwon tribute office. According to the Diary of Ji Kyusik, the tribute office(1884-1895) closed down because of the financial difficulty. Later it was run by the Beonja company(1896-1905), the Beonsa company(1906-1910) and the Porcelain company(1910). However it failed to make regular tributes and profitable sales. Lack of innovative ideas in design, mass production technology, training school for potters and financial support were inevitable to the consequence. On the other hand, Japanese merchants cornered the Joseon market in porcelain with overglazed wares and sales of cobalt pigment. Key Word : Joseon porcelain, royal kiln of Joseon in Bunwon: Branch of Sawongwon, Diary of Ji Kyusik, Bunwon Tribute Office, Beonja company, Beonsa company, Porcelain company, The Reinstatement of the Kiln Master of the Royal Kiln, The Abstract of Provision Document of the Royal Kiln, The Regulation of Tribute System of the Royal Kiln 방병선 소속 : 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전자우편 : bjsbang@korea.ac.kr 논문투고일 2014. 05. 07 / 심사완료일 2014. 06. 15 / 게재결정일 2014. 06.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