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가을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이주동안 내리고 있습니다. 아직 2015년 을사년은 남아있습니다만 추수동장 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계절입니다. 경북의 중심지 김천에서 이번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에 대하여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정근재 김천문화원장님을 비롯한 여러 어르신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 다. 그리고 이번 학술대회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김천시 관계자 여러분 특히 박보생 시장님을 대신해서 이 자리에 참석하신 서정하 안전행정국장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발표를 해 주시는 김성우 교수님, 정재훈 교수님, 추제협 교수님 세 분 교수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김천은 한국 교통의 중심지로서 사통팔달의 요지입니다.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로 연결 되는 중요한 지역이자, 경상도 안으로는 상주 대구로 연결되는 중요한 곳입니다. 그러므 로 조선시대에도 성리학이 선산 김천지역에서 먼저 그 꽃을 피워 점필재 김종직 선생을 비롯한 매개 조위 선생, 노촌 이약동 선생 등 초기 사림들의 유향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 다. 그러므로 김천에서 김천의 선비정신을 보여주는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번 학술대회는 김천의 이러한 선비 정신과 학문적 성장을 살펴보는 자리입니다. 특 히 이약동 선생은 초기 사림의 기틀을 세우신 강호 김숙자 선생의 문인으로 효성이 지극 하셨을 뿐만 아니라 청백리로도 명성이 높으신 분입니다. 노촌 선생의 뒤를 이어 한국 성리학의 맥을 계승한 오봉 이호민 선생, 감호 여대로 선생은 김천의 학문을 풍부하게 만드신 분입니다. 이러한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김천이 학문과 충절의 고장으로 맥맥히 이어져 한말 공산 송준필 선생이 이곳에 학당을 세우고 학문과 독립 정신을 이어나가도 록 후학을 가르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개최하는 학술대회는 저희 한국국학진흥원이 주관하고, 김천문화원이 후원하는 학술대회입니다. 이번 학술대회는 조선시기 김천의 학문과 사림정신을 재조명하는 자리 입니다.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류들에 의해 창건된 조선왕조는 이전의 왕조였던 고려왕조와 는 달리 사림이라는 세력들이 왕조를 계획적으로 설계하고 운영하였으며, 이는 조선이 지식기반 사회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조선의 지배층인 사림들은 중국에서 도입된
성리학을 사회 운영의 기본 원리로 삼고, 그들이 꿈꾸었던 이상사회를 만들어 나갔습니 다.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한 사람들이 선비 입니다. 조선 선비들은 애민정신과 민본사상 을 바탕으로 이상사회를 구현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16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지배층이 되었던 선비들은 그들이 꿈꾸었던 이상사회를 만들 기 위하여 향약을 전국적으로 시행하였고, 또 임진왜란 이후 피폐되었던 사회를 회복하 기 위하여 여러 방안을 모색하여 조선후기의 안정적인 사회를 이룩하였습니다. 이번 학술대회가 주목하게 된 것도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였던 선비들의 삶과 지향 입니다. 조선은 중국에서 시작된 성리학을 조선의 상황에 맞추어 새로운 관점 에서 재해석. 비록 그 근거는 유교경전에서 가져왔다고 할지라도 조선의 사회에 맞는 새 로운 학문으로 그리고 제도로서 대동법과 균역법을 비롯한 조선의 특유한 제도들을 만들 어 운영하였습니다. 16세기부터 꽃피운 사림정신은 이러한 조선의 선비정신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례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김천의 대표적인 사림이자 청백리이신 노촌 이약동 선생에 대하여 발 표해주시는 정재훈 교수님을 비롯하여 오봉 이호민 선생의 학문에 대하여 발표해주시는 추제협 교수님, 감호 여대로 선생과 그 후학들에 대하여 발표해주시는 김성우 선생님 세 분 선생님들께 깊은 사의를 표합니다. 오늘의 이 학술회의는 조선왕조 500년을 만들어 나갔던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어떻게 백성을 생각하고, 지역사회를 생각했는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리입니다. 오늘 이 자 리에서 조선시대의 지배층인 사족들의 삶과 지향을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것은 단순한 호 고好 古 취미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당시 사회와 백성의 현실을 고민하면서 살아갔던 선비들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는 선현들의 정신을 계승하여 오늘의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앞으로도 한국국학진흥원은 우리의 고유한 정신문화를 집약하여 민족문화의 창달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사업을 진행해 나갈 것입니다.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인사말에 대신하고자 합니다.
2015년 지역기반 활용 한국학학술대회 조선중기 김천사림과 청백리 정신 진행일정 구 분 시 간 내 용 등록 14:30~15:00 개회식 15:00~15:30 15:30~16:00 진행 : 김 형 수( 한국구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 개회 및 국민의례 개회사 축 사 : 한국국학진흥원장 16세기 사림의 성장과 노촌 이약동 정 재 훈( 경북대학교 교수) 주제발표 16:00~16:30 오봉 이호민의 생애와 학문관 추 제 협( 계명대학교 교수) 16:30~17:70 감호 여대로와 성산여씨 기동파의 종족 활동 김 성 우( 대구한의대학교 교수)
2015년 지역기반 활용 한국학학술대회 조선중기 김천사림과 청백리 정신 목 차 16 세기 사림의 성장과 노촌 이약동 1 _ 정 재 훈( 경북대학교 교수) 오봉 이호민의 생애와 학문관 13 _ 추 제 협( 계명대학교 교수) 감호 여대로와 성산여씨 기동파의 종족 활동 39 _ 김 성 우( 대구한의대학교 교수)
2015년 지역기반 활용 한국학학술대회 조선중기 김천사림과 청백리 정신 16세기 사림의 성장과 노촌老村 이약동李約東 정 재 훈 _ 경북대학교
16세기 사림의 성장과 노촌 이약동 정 재 훈 _ 3 16 세기 사림의 성장과 노촌老 村 이약동 李 約 東 정재 훈_ 경북대학교 목 차 1. 2. 3. 4. 머리말 초기 사림의 성장 노촌 이약동의 생애와 활동 맺음말 1. 머리말 노촌( 老 村 ) 이약동( 李 約 東, 1416 1493) 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서 태종 연간에 태어나 서 성종때까지 활동한 인물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 淸 白 吏 ) 로 알려진 이약동이 어 떤 인물이었지에 대해서는 실록의 몇 개의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성종 22 년(1491), 1 월에 벼슬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이때 실록에서는 사신( 史 臣 ) 이 논평하기를, 이약동은 문과( 文 科 ) 출신으로 겸하여 사예( 射 藝 ) 에도 능하였 으며, 일찍이 제주 목사( 濟 州 牧 使 ) 가 되어서는 청렴, 개결하였고 은혜로운 정사도 있었다. 사대부 ( 士 大 夫 ) 로서 지위가 2 품에 이르렀는데, 나이 70 을 넘어 전야( 田 野 ) 로 물러나서 여 유롭게 즐기며 여생을 마치기를 이약동과 같이 한 사람도 세상에 드물 것이다. 하였다 1) 라고 하여서 그의 은퇴에 대해 매우 높은 평가를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약동에 대 한 높은 평가는 그의 사후에 기록된 실록의 졸기( 卒 記 ) 에서도 볼 수 있다. 고향으로 돌아 온 지 2년 뒤인 78세가 되던 해 6 월에 타계하자 실록에서는 이약동은 천성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마음가짐이 굳세고 확실하여 청렴하다고 일컬어졌다. 여러 차례 외직( 外 職 ) 에 보임( 補 任 ) 되어 훌륭한 공적이 있었다. 2)고 하여 역시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1) 성종실록 권249, 성종 22년 1월 23 일( 경자)
4 _ 2015년 지역기반 활용 한국학학술대회 조선중기 김천사림과 청백리 정신 무엇보다도 그의 사후에 이약동은 김종직과 나란히, 연로하여 은퇴할 때 국가에서 우대한 모범적인 사례로 거론되기도 하였다. 3) 나아가 그는 청백리에 선정될 정도로 후대에 그의 청 렴함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4) 이러한 평가로 미루어볼 때 이약동은 매우 오랜 관료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능력을 충분 히 인정받았으며, 특히 청백리로서 인정될 정도로 모범적인 관료생활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약동은 청백리로서만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일생과 활동을 살펴 보면 그는 문과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도사 등 무관직을 수행하면서 많은 활약을 하였 으며, 개성유수나 전라도 관찰사 등의 외직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 고 한성부좌윤 이조참판 등의 중앙관직도 지냈다. 그런데 이약동이 관료로 지내던 후반부의 시기는 김종직( 金 宗 直, 1431 1492) 을 대표로 하는 사림들이 정치적 진출을 하던 시기였다. 더구나 이약동은 자기보다 15세 아래인 김종 직과 지역적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깊은 교분을 나누고 있었다. 따라서 이약동은 사림들과도 일정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글에서는 이러한 점을 유의하여, 초기 사림의 성장과 이약동의 생애와 활동을 연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약동의 삶은 아직 사림의 등장이 본격화되기 이전이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사림들의 지향과 일치하는 점이 적지 않았다. 청렴한 생활로 청백리가 된 것도 그러한 예이지만 유향소의 회복을 건의하거나 지방행정에 역량을 발휘한 점 등은 사림파 관 료로서 보아도 손색이 없는 예가 될 수 있다. 2. 초기 사림의 성장 조선왕조의 초기에 해당하는 15세기에는 성리학을 받아들여 이를 기반으로 유교국가를 만 들었다. 유교정치에서는 백성을 근본으로 여긴다는 민본( 民 本 ) 의 이념이 중요하였다. 따라서 조선초기에는 민본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정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를 뒷받침 해 준 성리학은 원나라로부터 들여온 것으로서, 이것의 특징은 국가운영의 원리로서 성리학 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그 결과 조선초기의 제도정비와 국가운영에는 일정한 역할을 하지 2) 성종실록 권279, 성종 24년 6월 13 일( 을해) 3) 중종실록 권20, 중종 9년 2월 5 일( 기해) 4) 중종실록 권21, 중종 9년 12월 25 일( 계축)
16세기 사림의 성장과 노촌 이약동 정 재 훈 _ 5 만, 동시에 국왕으로 상징되는 국가가 전면에 등장하였고, 또 국가의 지배대상인 민은 모두 비슷한 존재가 되는 것을 요구받았다. 현실정치에서는 국왕을 뒷받침해주는 세력으로 관료가 있었지만 특히 공신의 역할이 컸 다. 공신은 왕자의 난 등 조선초기의 여러 정치적 사건 때문에 많이 배출이 되었다. 이들은 강력한 국왕을 뒷받침하여 현실을 좌지우지하였다. 이들이 흔히 훈구( 勳 舊 ) 라고 불리웠던 세력으로 훈구세력의 핵을 이룬 공신들은 태조 때 개국공신 52명을 시작으로 정종대의 정사 공신 29 명, 태종대의 좌명공신 26 명, 세조대의 정난공신 43 명, 좌익공신 46 명, 적개공신 45 명, 예종대의 익대공신 39 명, 성종대의 좌리공신 75 명 등 끝없이 양산됐으며, 중종반정 때 의 반정공신 은 무려 117 명에 이르렀다. 이들에겐, 1등 공신의 경우 본인과 부모 처자를 3 계급 승진시키거나 조카, 사위를 2 계급 승진시켰다. 그리고 전 150결과 은 50냥 등 막대한 재물을 안겼고 반상 10 명, 구사 7 명, 노비 13 명, 말 한 필을 주었다. 중종반정 주도자 박원 종에게 연산군 때의 시녀 조를 좀 먹고 있었다. 300 명을 상으로 따로 주었다. 자자손손 대물림한 이들 특권이 왕 그러한 공신 가운데서도 특히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계유정란 ( 癸 酉 靖 亂 ) 에 참여한 정인지, 최항, 양성지, 신숙주, 서거정 등 정난공신 ( 靖 難 功 臣 ) 은 이후 문제되었던 훈구의 원조가 되었다. 15세기 후반 이래 정치를 장악하였던 훈구는 중앙의 관 직을 독점하고, 대대로 부를 쌓는 일을 저질렀다. 그 가운데는 권력을 이용한 불법적인 행위 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서해안에 권력을 이용하여 해안을 개간하여 토지를 사유화하는 것 등을 사례로 들 수 있다. 이에 대해 사림파라고 하는 세력이 등장하여 이들의 행위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성종 때 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사림파의 비판에 대해 훈구는 정치적인 공격을 가해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화가 발생하였다. 사림파의 시작은 성종 때에는 길재의 제자인 김숙자를 시작으로 하 여 그의 아들인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이 차례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 서 시작된다. 이 가운데 김굉필 같은 사람은 별명이 소학동자 ( 小 學 童 子 ) 였는데, 이는 성리 학의 기본교과서였던 소학 을 철저하게 따를만큼 원칙을 중요시하고 성리학을 내면화하여 실천하려고 했던 경향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결국 훈구의 비도덕적이고, 정치경제적인 비리 를 고발하려는 문제의식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사림파의 뒤에는 성종이 있었다. 성종은 커져가는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비 교적 젊고, 원칙을 뚜렷하게 지녔던 사림을 등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이후 중종 때 나 선조 때에 사림이 등장할 때에도 비슷하게 보이는 정치적 특징이다. 왕권 측에서 왕권에 한계를 느끼거나 명분이 약해졌을 때 이를 보완하는 방법으로 사림의 정치적 진출을 적극적 으로 돕는 경향이 있었다.
6 _ 2015년 지역기반 활용 한국학학술대회 조선중기 김천사림과 청백리 정신 이런 흐름에서 볼 때 성종대의 위상은 사림들이 아직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이전의 초기사 림에 해당하였다. 성종 중기 이전에는 김종직을 비롯한 김맹성( 金 孟 性 ) 조위( 曹 偉 ) 김흔( 金 訢 ) 양희지( 楊 熙 止 ) 등 약간의 인물들만이 정치적인 진출을 한 것이 눈에 보일 뿐, 중앙의 모든 권력기구는 훈구에 의해 독점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흔히 사림파의 비조로 길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영남지방의 학통이 이어지는 면을 주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종직 이전에 길재에서 김숙자로 이어지 는 학통은 후대에 만들어진 측면이 있으며 현실에서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실제의 현실에 서는 김종직이 후진에 대한 교육활동을 본격화하여 문인들을 하나의 세력으로 자각하면서부 터 일정한 현실적인 영향을 갖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김종직은 29세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한 세조 5 년(1459) 이후 62세로 사망하는 성종 23년 (1492) 이전까지 많은 제자 문인을 양성하였다. 특히 본격적인 교육활동은 성종 원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종직은 그의 대표적 문인인 김굉필과 정여창 등과 다양한 방식 으로 접하면서 교육을 하였다. 이들은 산발적인 만남을 통해 접촉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비 교적 연대의식은 매우 강하였다. 김종직이 성종 8 년 선산부사 ( 善 山 府 使 ) 로 있을 때 자신을 방문한 문인들을 전송하면서 쓴 시에서 우리당 吾 黨 5) 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학문적 차원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이들 가운데는 중앙의 정계에 진출한 인물은 거의 없었다. 성종 16년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이들이 늘어났다. 김흔( 金 訢 ) 표연말( 表 沿 沫 ) 조위( 曹 偉 ) 유호인( 兪 好 仁 ) 김심( 金 諶 ) 양희지( 楊 熙 止 ) 김맹성 ( 金 孟 性 ) 강경서( 姜 景 敍 ) 강백진( 康 伯 珍 ) 이의형( 李 義 亨 ) 강겸( 姜 謙 ) 주윤창( 周 允 昌 ) 최부 ( 崔 溥 ) 김기손( 金 驥 孫 ) 등 14명은 성종 15 년 정도까지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런데 이 숫자 는 점차 늘어 성종 16년부터 연산군 4 년(1498) 까지는 박한주( 朴 漢 柱 ) 이종준( 李 宗 準 ) 권경 유( 權 景 裕 ) 홍한( 洪 瀚 ) 권오복( 權 五 福 ) 강혼( 姜 渾 ) 김일손( 金 馹 孫 ) 유순정( 柳 順 汀 ) 이주( 李 胄 ) 이수공( 李 守 恭 ) 이원( 李 黿 ) 이계맹( 李 繼 孟 ) 방유령( 方 有 寧 ) 손중돈( 孫 仲 暾 ) 임유겸( 任 由 謙 ) 정여창( 鄭 汝 昌 ) 조광림( 趙 廣 臨 ) 김굉필( 金 宏 弼 ) 정승조( 鄭 承 祖 ) 안구( 安 覯 ) 남곤( 南 袞 ) 이목( 李 穆 ) 정희량( 鄭 希 良 ) 강중진( 康 仲 珍 ) 이철균( 李 鐵 均 ) 임희재( 任 熙 載 ) 허반( 許 磐 ) 조유형( 趙 有 亨 ) 등 28 명이 문과에 진출하였다. 이들은 대개 대간이나 홍문관 등 언론기관에 진출하였다. 특히 홍문관에 진출하여 숫적인 열세를 극복하면서 훈구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비리를 비판하는 데에 힘을 썼다. 홍문관원 의 후보자 명단인 홍문록 ( 弘 文 錄 ) 의 선발에 자신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면서 사림들이 언관 5) 佔 畢 齋 集 문집 부록 점필재 선생 年 譜
16세기 사림의 성장과 노촌 이약동 정 재 훈 _ 7 에 진출하도록 힘을 썼다. 홍문관원이 되어서는 국왕의 경연에 참여할 수 있다는 장점을 활용 하여 경연에서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강력한 언론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홍문관이 사헌부, 사간원의 양사와 함께 삼사( 三 司 ) 로 자리매김하는 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김종직이 김천과 관련이 되는 것은 김종직( 金 宗 直 ) 은 58세 때인 1489 년( 성종 20) 모든 관 직을 사퇴하고 아내의 고향이며 아버지의 임지( 개령현감 ) 를 따라 면학하던 곳이요, 아내와 아들 김목아( 金 木 兒 ) 가 묻혀 있어 가장 애착이 가는 김천의 백천으로 돌아온 것이 계기이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 서당인 경렴당( 景 濂 堂 ) 을 짓고 평소 공부하던 경서( 經 書 ) 등 천 권의 서 책을 옮겨 학문 강론의 거점으로 삼았다. 김종직이 이곳에 오게 되면서 김천은 새로운 학문 의 바람이 불게 되었다. 3. 노촌 이약동의 생애와 활동 이약동은 본관은 벽진( 碧 珍 ) 이고, 자는 춘보( 春 甫 ), 호는 노촌( 老 村 ) 이다. 시조는 이총언 ( 李 忩 言 )으로서 태조 왕건의 삼한 통합을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서 벽진장군에 봉해져 이때 부터 자손들이 여기에 살게 되었다. 조선조에서는 판 종부시사 희목( 希 牧 ) 이 증조가 된다. 할아버지는 존실( 存 實 ) 이고 군기소감 ( 軍 器 少 監 ) 을 지냈고, 아버지는 남해현령을 지낸 증 호 조판서 덕손( 德 孫 ) 이며, 어머니는 공조전서 유무( 柳 務 ) 의 딸이다. 이약동은 태종 16 년(1416) 5 월에 금산군( 金 山 郡 ) 하로촌( 賀 老 村 : 현재 김천시 양천동) 에서 태어났다. 6) 1441 년에 진사가 되었고, 문종 1 년(1451) 증광 문과( 增 廣 文 科 ) 에 급제한 뒤 사 섬시 직장( 司 贍 寺 直 長 ) 을 거쳐 1454 년( 단종 2) 감찰 황간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세조4년 (1458) 유장( 儒 將 ) 으로 특별히 사헌부 지평( 持 平 ) 이 되고, 7) 이듬 해 사직했다가 1464년 선 전관으로 복직하였다. 1466 년 종부시정 ( 宗 簿 寺 正 ) 이 되고 구성부사 등을 역임하다가 1468 년 병으로 사직하였다. 특히 외직에 나가서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고 온 경우가 많았다. 성종 1 년(1470) 제주목 사 때에는 관아 이속들의 부정과 민폐를 단속, 근절시키고 공물의 수량을 감해 백성의 부담 을 더는 등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또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모르고 들고 온 관 6) 노촌선생실기 ( 老 村 先 生 實 紀 ) 권3, 연보 참조. 이하 생애와 관련된 서술에서 연보의 내용은 특별히 주를 붙이지 않음. 7) 성종실록 권279, 성종 24년 6월 13 일( 을해)
8 _ 2015년 지역기반 활용 한국학학술대회 조선중기 김천사림과 청백리 정신 물( 官 物 ) 인 말채찍을 성루 위에 걸어놓고 왔으며, 항해 중 배가 파선의 위기에 놓이자 하늘 을 속인 노여움이라 단정하고 배 안을 살펴 부하들이 몰래 넣어둔 갑옷을 찾아내 강물에 던 진 투갑연( 投 甲 淵 ) 의 일화는 유명하다. 성종 5 년(1474)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성종 8 년(1477) 대사헌이 되어 천추사( 千 秋 使 )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해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호조참판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성종 18 년(1487) 한성부좌윤 이조참판 등을 거쳐, 성종 20 년(1489)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 하다가 성종 22 년(1491) 에 지중추부사 ( 知 中 樞 府 事 ) 로 치사( 致 仕 ) 하였다. 33 세에 선산 교도로 관직생활을 시작하고, 36세에 증광 문과에 합격한 후 본격적으로 관 직에 나간 이후 초기의 관직 생활에서 특징적인 점은 43 세에 유장으로 천거된 점이다. 이약 동은 이후 문관직에도 나가지만 선전관을 겸하거나 오위의 장군이나 수군 절도사에 제수되 기도 하였다. 8) 특히 는 데에 활약하였다. 10) 51 세에 구성절제사에 제수된 뒤, 9)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토벌하 제주목사가 된 것도 구성에서 53세에 돌아온 뒤 2 년 후였다. 제주목사 시절에도 이약동은 성종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글을 받았다. 제주 목사( 濟 州 牧 使 ) 이약동 ( 李 約 東 ) 에게 하서( 下 書 ) 하기를, 공진( 供 進 ) 하는 모든 물건을 민간에 강요하니, 그 폐단이 작지 않다. 이제부터는 회실 ( 灰 實 ) 이 없는 패자( 貝 子 ) 는 올리지 말고, 녹자( 鹿 子 ) 와 장피( 獐 皮 ) 는 본시 50 장( 張 ) 으로 정 하였으나 이제 40을 감하고 단지 10 장만을 봉하여 올리고, 진주( 眞 珠 ) 앵무배 ( 鸚 鵡 杯 ) 같 은 것은 얻는 대로 올리는 것이 옳다. 이제 들으니, 세 고을의 수령이 타렵( 打 獵 ) 하는데 비 록 하룻밤을 지내더라도 반드시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서 거처하므로 그 폐단이 매우 많다 하니, 대저 임금의 거가( 車 駕 ) 가 이르는 곳도 다만 장막을 설치할 뿐인데, 신자( 臣 子 ) 로서 이같이 할 수 있겠느냐? 앞으로는 이와 같이 하지 말아서 민폐를 제거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11) 이와 같이 성종이 공납하는 물건에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사냥하는 데도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단을 최소화하려고 하였던 것은 이약동의 보고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이 역시 이약동의 노력에 의해 취해진 조치라고 할 수 있다. 8) 성종실록 권43, 성종 5년 6월 27 일( 경진) 9) 세조실록 권39, 세조 12년 9월 15 일( 계미) 10) 세조실록 권42, 세조 13년 6월 22 일( 을묘) : 앞의 책, 권43, 세조 13년 7월 9 일( 임신) 11) 성종실록 권15, 성종 3년 2월 23 일( 경인)
16세기 사림의 성장과 노촌 이약동 정 재 훈 _ 9 제주목사에서 돌아온 이약동은 대사간이나 대사헌 직을 수행하면서 자신이 겪은 변방에서 의 경험을 십분 발휘하였다. 변경의 수비를 맡은 변장( 邊 將 ) 으로서의 직무를 소홀히 한 하숙 부( 河 叔 溥 ) 에 대해 논죄하는 차자를 올리거나, 12) 경연에서 제주의 수령들이 백성들의 말을 취하지 않도록 국마( 國 馬 ) 를 취하여 사용할 것을 건의한 사례 등도 이에 해당한다. 13) 경상우도 절제사의 경험 역시 국정에서 적극 활용되었다. 이약동은 경연에서 강을 마친후에 신이 일찍이 경상도 처치사 ( 慶 尙 道 處 置 使 ) 가 되었었는데, 군사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자 는 선군( 船 軍 ) 입니다. 선군은 매양 한 달[ 一 朔 ] 마다 서로 교체( 交 遞 ) 하므로, 한달 사이에서 왕복( 往 復 ) 하는 것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한가한 날이 8~9 일에 지나지 아니하는데, 수령 ( 守 令 ) 이 또 뒤쫓아서 이를 부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가난한 자는 유망( 流 亡 ) 하고 부자는 피하기를 꾀하여서, 이로 말미암아 선군들이 그 역( 役 ) 에 오래 종사 하여 배[ 船 ] 를 다루는 데 익숙한 자가 있지 않습니다. 옛적에는 선군의 전지( 田 地 ) 는 사람 들이 매매( 買 賣 ) 할 수 없고, 수령이 부호( 扶 護 ) 하지 않는 자는 죄를 주었는데, 지금은 이런 영( 令 ) 이 없기 때문에, ( 선군들이 ) 유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한 사람을 정하고 내일 한 사람을 정하니, 사람들이 그 역에 오랫동안 종사하는 자가 없으며, 또 수호( 首 戶 ) 한 사 람이 독자( 獨 自 ) 로 입번( 立 番 ) 하여 그 업( 業 ) 을 오로지하게 하나, 그 사람이 죽으면 뒤에 다른 사람이 그 일을 계승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동거( 同 居 ) 하는 자식 ( 子 息 ) 과 고공( 雇 工 ) 은 다른 역을 정하지 말고, 다시 서로 체대( 遞 代 ) 하여 입역( 立 役 ) 하게 하면, 수호( 首 戶 ) 는 어깨를 펴고 쉴 수 있고, 물에 익숙한 자도 또한 많아질 것입니다. 14) 라고 하여서 선군( 船 軍 ) 의 고역을 덜어줄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약동의 제 안은 제안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다음날 국정에서 이에 대해 종합적으로 토론하는 기회를 만들게 되어 바로 성종의 하교로 대책이 나오게 만들었던 것이다. 15) 앞서 이약동이 제시한 제주의 수령에게 국둔 아마를 가려내어 훈련시키게 하고, 좋은 말은 올리게 만들자는 제안도 병조에 의해 건의되어 시행되기도 하였다. 16) 이러한 활발한 국정의 참여로 인해 곧 중국에 천추사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7) 이후에도 내외직을 번갈아 가며, 활발하게 국정에 참여하였다. 천추사로 중국에 다녀온 이듬해인 63 세 때에 경주부윤으로, 68 세에는 호조참판에, 69 세에 동지성균관사에, 71세에 전라도 관찰 사, 72 세에 한성부 좌윤, 이조참판, 다시 74 세에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12) 성종실록 권76, 성종 8년 2월 22 일( 신묘) : 앞의 책 2월 23 일( 임진) 13) 성종실록 권77, 성종 8년 윤2월 2 일( 경자) 14) 성종실록 권77, 성종 8년 윤2월 10 일( 무신) 15) 앞의 책, 윤2월 11 일( 기유) 16) 앞의 책, 윤2월 14 일( 임자) 17) 앞의 책, 권83, 성종 8년 8월 25 일( 기미)
10 _ 2015년 지역기반 활용 한국학학술대회 조선중기 김천사림과 청백리 정신 한편 이약동은 이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유향소( 留 鄕 所 ) 의 복설에 관한 논의에 참여하였 다. 18) 유향소는 주지하다시피 조선 초기에 향리( 鄕 吏 ) 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로잡기 위해 지 방의 품관( 品 官 ) 들이 조직한 자치기구이다. 유향소와 연관된 조직으로 경재소도 있었다. 경 재소는 조선시대 지방의 유향소를 통제하기 위하여 설치한 중앙 기구로서 그 지역의 유향소 품관을 임명, 감독하는 역할을 하였다. 경재소에 의해 임명된 유향소는 군현 지배권을 향리 로부터 회수하기 위해서 경재소의 힘을 빌렸던 것이며, 재경관인들은 각기 경재소를 발판으 로 하여 그 읍 수령과 유향소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연고지의 지방행정은 물론, 자기들의 경제적 기반도 부식해 갔던 것이다. 재지사족들은 성장해감에 따라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확립하고 새 농법을 적용, 지역개발 을 활발히 추진하는 데서 그들의 정치 사회적 세력도 신장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유향소 를 발판으로 한 재지사족들의 향촌지배에 대한 신장추세는 결국 세조의 전제정치와 관권 중 심의 중앙집권화와 충돌하여 세조 이후 유향소 복설에 관한 운동은 성종 복설에 관한 논의에 참여한 성종 13 년에 폐지되고 말았다. 13 년부터 다시 전개되었다. 따라서 이약동이 유향소 19년은 세조대에 폐지된 유향소를 복설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현장이었다. 이때 성종의 장인이었던 윤호( 尹 壕 ) 와 같은 훈구는 설립이 불편( 不 便 ) 하다 고 하면서 그 근거로 만일 유향소를 설립하여 적당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읍재( 邑 宰 ) 와 겨루 게 되고, 공사( 公 事 ) 를 방해하기만 할 것이라고 하였다. 관권 위주의 전형적인 논리였다. 이에 비해 이약동을 비롯한 다른 의견은, 의논하는 이들이 말하기를, 수령을 적당한 사람을 얻으면 유향소 ( 留 鄕 所 ) 는 없어도 되고, 유향소에 적임자가 아니면 그 폐단이 간활( 奸 猾 ) 한 아전보다 심하다. 하였습니다만, 신 등의 의견에는 간활한 아전이 여러 가지로 폐단을 일으키는 것은 수령이 듣고 보는 것으로써 다 감 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중앙의 경재소 ( 京 在 所 ) 와 지방의 유향소가 서로 들은 대로 규찰 ( 糾 察 )하여 간활한 아전을 억제시키고 시골의 풍속을 유지시킨다면 풍속을 좋은 방향으로 개 선하는 계기에 있어서 도움이 될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지금의 유향소는 바로 옛날의 사심 관( 事 審 官 ) 이니 회복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19) 이라고 하여 관권의 규찰에도 한계가 있으니 향촌 사회에서 이를 도와서 풍속을 유지하는 방향, 곧 향촌사회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유향소의 복설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결국 유향소 복설절목 에 의거하여 새 모습으로 유향소가 복설되기는 한다. 그러나 복설된 유향 소는 향사당( 鄕 射 堂 ) 과 같은 시설의 확충, 조직의 강화, 향안( 鄕 案 ) 의 작성, 향규( 鄕 規 ) 의 제 18) 앞의 책 권 성종 년 월 일 을해, 216, 19 5 12 ( ) 19) 앞 주와 같음
16세기 사림의 성장과 노촌 이약동 정 재 훈 _ 11 정과 함께 수령 치읍의 보조기관인 군현의 이아( 貳 衙 ) 로 정비되어 갔다. 당초 사림파가 의 도했던 방향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관권 주도로 나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약동이 이 시기 유향소의 복설을 주장한 것은 그의 지향이 사림파와 연결됨을 보여주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도 지적하였듯이 이약동은 김종직을 중심으 로 한 성종대의 사림파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김종직과는 관직 생활을 같이 하며 시를 주고 받을 정도로 긴밀한 친분이 있었다. 이약동의 고향인 김천은 김종직이 고을 원을 하였던 선산( 善 山 ) 과 가까웠을 뿐 아니라, 김 종직이 한때 김천에서 경렴당( 景 濂 堂 ) 이라는 정자를 짓고 살았기 때문에 깊은 친분을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종직은 이약동에게 보낸 시에서 백관 중에서도 가장 고루 덕이 뛰 어나다 든가 공은 시서( 詩 書 ) 에서 모든 사람의 참된 우두머리 라고 하여 최고의 칭송을 전하 였다. 김종직은 또 문무의 재질 갖추고 덕 또한 겸했네 라거나 군덕( 君 德 ) 을 보익( 補 益 ) 할 인물을 구한다면 공론이 응당 세상에 우뚝 솟아난 그대에게로 돌아가리 라고 하기도 하였다. 또 이약동이 외직으로 나가든가 할 때에는 거의 전별하는 시를 전하기도 하였다. 20) 도비문> 과 같은 금석문의 기록에서도 이약동은 김종직과 조위( 曺 偉 ) 와 더불어 함께 도의( 道 義 ) 로 벗이 되어 함께 학문을 강마하였다고 하였다. 21) 이러한 이약동의 활동과 평가 때문에 그는 금산의 경렴서원 ( 景 濂 書 院 ) 이나 제주도의 귤림 서원( 橘 林 書 院 ) 에 제향되었던 것이다. 김천 지역에서 최초로 세워진 경렴서원에 모셔진 인 물은 김종직과 조위, 이약동이었다. 인조 26 년(1648 년) 김산군수 조송년( 趙 松 年 ) 이 감천면 금송리 사미정( 四 美 停 ) 자리에 창건하였던 경렴서원은 주렴계를 존경한다는 의미에서 세워 졌는데, 이약동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사례이다. < 신 4. 맺음말 이상에서 노촌 이약동의 생애와 활동을 사림과 연결하여 살펴보았다. 이약동이 주로 활동 하던 시기인 세조~ 성종 사이에는 15세기에 만들어진 조선사회의 틀이 어느 정도 안정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던 때이다. 정치적으로 이전과는 다른 사림 세 20) 속동문선 권7, 칠언율시( 七 言 律 詩 ) 절도사 이약동( 李 約 東 ) 이 진에 부임할 제 연아( 演 雅 ) 운으로 차운하다 [ 次 李 節 度 約 東 赴 鎭 韻 演 雅 ] - 김종직( 金 宗 直 ) 21) 노촌선생실기 권4, 신도비문( 神 道 碑 文 )
12 _ 2015년 지역기반 활용 한국학학술대회 조선중기 김천사림과 청백리 정신 력이 등장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문제점에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약동은 조선전기의 인물 가운데서 전형성을 보이는 인물이다. 문과 로 과거 급제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장( 儒 將 ) 으로 천거되어 문무를 겸비하였다. 또 관료 로서 내직과 외직을 고루 거쳤다. 특히 외직으로 지방행정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점은 그가 관료로서 매우 유능하였다는 점을 말해준다. 본격적으로 초기 사림들이 진출하는 시기이기는 하지만 성종대에는 아직 사림세력들이 중 앙의 정치를 장악하지는 못했다.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일부의 모임이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 하는 시기였다. 다만 훈구의 비리가 본격화되면서 사림 역시 이를 본격적으로 비판하기 시작 하였다. 사림 세력들이 언로를 장악하여 훈구 대신들에 대한 비판을 본격화하였다. 이약동이 활발한 활동을 펼친 시기는 이와같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였으므로 많 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이약동은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구성절제사, 제주목사, 전라도관찰사 등의 경험은 현실의 문제를 절실하게 다룰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데에 기여하였다. 중앙의 내직에 있으면서도 이러한 경험을 통해 문제 가 되었던 현실을 바꾸는 데 노력하였다. 바로 이러한 점은 그의 청백리 정신과 함께 관료로 서 전범이 될 수 있는 측면이었다. 중앙관직으로 나가서 이약동은 그 사이에 문제가 되었던 유향소의 복립을 청하는 등 사림 들과 입장을 같이하였다. 이약동은 김종직과 막역한 교유를 나누어서 자신이 지방관으로 내 려갈 때 전별시를 주고 받을 정도였다. 지역적 연결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지연의 문제는 아니었고, 지향과 관련된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당장은 이들의 지향이 현실에서 충분하게 소통되지만 못했지만 결국 사림들이 조선을 바꾸는 데 일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청렴이라는 가치를 내면화하고, 지방에서 수령으로서 백성들에게 부당하게 내려지는 세금 이나 억업을 줄이려고 했던 것, 합리적인 행정을 지향한 것, 일방적인 통치보다는 사대부 사 회의 자율성을 존중하겠다는 의미 모두 이전의 장점을 활용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 는 모습이었다. 김종직, 조위와 함께 김천에서 최초로 세워지는 서원에 모셔졌던 것은 그만 큼 이약동이 새로운 시대정신을 보여주었던 인물이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16세기 사림의 성장과 노촌 이약동 정 재 훈 _ 13 2015년 지역기반 활용 한국학학술대회 조선중기 김천사림과 청백리 정신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의 생애와 학문관 추 제 협_ 계명대학교
오봉 五 峯 이호민 李 好 閔 의 생애와 학문관 추제협_ 계명대학교 목 차 1. 2. 3. 4. 5. 들어가는 말 이호민의 가계와 생애 학문적 계보와 인적 교류 학문 및 사상적 경향 나오는 말 1. 들어가는 말 이호민李 好 閔 (1553~1634) 은 본관이 연안延 安 이며 호는 오봉五 峰 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6세 때에 이미 글자를 깨우쳤고 7 세 때부터 스승에게 나아가 경사經 史 에 통달했다 고 한다. 32 세 때 벼슬길에 올라 대제학, 좌찬성 등 중앙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1592 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용만龍 灣 ( 의주) 으로 이거하는 왕을 호종하며 당시 위급한 상황에서 나라의 모든 공식 문서를 책임지다시피 했다. 이런 그를 이항복李 恒 福 과 이정구李 廷 龜 는 천재天 才 1)라고 칭송했을 만큼 그의 문장은 탁월했다. 특히 그는 시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현재 문집에 남아있는 1000여 수의 시편 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이식李 植 은 그의 시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 시詩 로 말하면, 상식적인 격조格 調 를 완전히 떨쳐버리고 이미 죽은 말死 語 은 더욱 기 피했으며, 기초정발 奇 峭 珽 拔 한 시풍詩 風 은 두보杜 甫 가 기협夔 峽 을 읊은 시를 연상케 한다. 이는 세속에서 답습하는 필묵의 세계를 뛰어넘고 있으니, 취청배백 取 靑 媲 白 을 최고로 여기 는 세상의 안목으로 보면 혹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2) 1) 李 明 漢, 白 洲 集 권18, 神 道 碑, 延 陵 府 院 君 李 公 神 道 碑 銘, 及 聞 先 府 君 ( 李 廷 龜 ) 之 詔, 輒 曰, 五 峯 天 才 也, 不 佞 益 心 艶 之. 及 後 游 白 沙 李 相 公 之 門, 不 佞 以 心 所 艶 之 者 問 之 相 公, 相 公 曰, 汝 不 見 其 盛 時 尒, 五 峯 天 才 也, 不 佞 又 愈 益 心 艶 之.
16 _ 2015년 지역기반 활용 한국학학술대회 조선중기 김천사림과 청백리 정신 이 말은 흔히 시의 전범이 있어 시작을 할 때 기존의 언어와 형식을 따르는 것이 관례인 데, 그는 이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것을 취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보통 사람 들의 눈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이러 한 지적은 그의 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특징이 될 수 있음은 물론 학문관을 파악하는 데에도 유효한 시야를 열어준다. 따라서 이에 주목한 연구가 없지 않았다. 다만 지금까지 보고된 성과로는 시에 관한 고작 두 편의 연구가 전부일 만큼 빈약하다. 3) 그 이유는 시의 난해함에도 있겠지만 짐작하는 바 와 같이 그의 일생 대부분이 관료로서의 삶이었던 만큼 그 내용이 다채롭지 못하다는 점이 더 클 것이다. 실제로 그의 시를 살펴보면, 대부분이 관료생활에서 쓴 우국충정시 愛 國 衷 情 詩 와 교유한 인물들이 떠나갈 때 쓴 증별시贈 別 詩, 남의 시에 스스로 응한 차운시次 韻 詩, 일상의 정감을 쓴 즉흥시卽 興 詩 등 시사적인 내용이라기보다는 일상의 내용들을 담백하게 표현한 경우가 많다. 여기에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보조 자료 역시 전란 중 많은 양이 소실되어 논의 자체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해 볼 때 그나마 이렇게라도 그에 대한 관심이 있게 된 것이 다행스러 운 일이기는 하나 정치권력의 중심부에 있으면서 문명文 名 을 떨쳤던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기존의 성과를 토대로 하여 그의 생애와 학 문적 경향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그의 가계와 생애, 그리고 학문적 계보와 인적 교 류에 대해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의 학문 및 사상적 경향에 대해 간략히 검토해 보고자 한다. 특히 사상에 대해서는 남긴 자료가 매우 빈약하여 단편적인 것이라도 적극적으로 해석 하려고 했음을 미리 밝혀둔다. 2. 이호민의 가계와 생애 이호민은 자가 효언孝 彦 이고 호는 오봉五 峯, 수와睡 窩 이며 시호는 문희文 僖 이다. 그는 1553년 명종 8년 5월 16 일 서울 반송리에서 이국주李 國 柱 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584 2) 李 植, 澤 堂 先 生 集 권9, 五 峯 李 相 國 遺 稿 後 題, 其 詩 絶 去 常 調, 尤 忌 死 語, 奇 峭 挺 拔, 得 老 杜 夔 峽 之 音, 而 敻 出 筆 墨 蹊 逕 之 外. 宜 乎 世 之 取 靑 媲 白, 以 爲 工 者 之 見 之 也, 或 不 省 爲 何 等 語 也. 3) 민병수, 오봉 이호민의 시세계, 한국한시작가연구 7 집, 한국한시학회, 2002; 정경훈, 오봉 이호민의 시문 학 연구, 한문고전연구 15 집, 한국한문고전학회, 2007.
오봉 이호민의 생애와 학문관 추 제 협 _ 17 년( 선조 17 년) 에 관료 생활을 시작하여 1612 년 광해군 때 김직재金 直 哉 의 옥사에 연루되어 성남 교외로 대명될 때까지 20 여 년을 중앙 정계에 머물렀다. 벼슬길에 물러난 후에는 여러 벗들과 시회를 열어 풍류를 즐기다 1634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이후 청백리 淸 白 吏 에 올랐다. 인 그의 가계는 당나라 중랑장中 郞 將 을 지냈던 이무李 茂 를 비조로 한다. 이무는 당 고종 5년 660년에 소정방의 부장이 되어 백제를 정벌하러 왔다 돌아가지 않고 연안에 머물러 연안 후延 安 侯 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 후손은 통례문부사 通 禮 門 副 使 를 지낸 이지李 漬 와 이현려 李 賢 呂, 대장군 이원주李 元 株 와 이습홍李 襲 洪 을 파조로 하는 4 개의 분파로 나누어졌다. 이 중 이호민은 이지로부터 내려오는 통례문부사공파 通 禮 門 副 使 公 派 의 9 세에 해당한다. 이지의 아들인 이계손李 係 孫 은 공조전서 工 曹 典 書 를 지냈고 아들 즐騭 과 양亮 을 낳았다. 이 중 3 세 양은 판전의감을 지냈다. 그의 아들(4 세) 이백겸李 伯 謙 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보 민補 民, 보정補 丁, 말정末 丁 (1395~1461) 이다. 이들은 주로 경기도 양평군에 세거하고 있었 으나 이보정과 이말정에 의해 경북 금릉군 지례면( 지금의 김천 지역) 으로 옮기게 된다. 그 이유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으나 이말정의 장인이자 태종 때 이조판서와 좌찬성을 지 낸 한옹韓 擁 (1352~1425) 이 말년에 양천동 하로마을에 은거했던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본다. 이보정의 후손은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에, 이말정의 후손은 구성면 상원리와 부항면 사 등리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이보정은 조선 전기 병조판서와 대제학 등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인 이숭원李 崇 元 은 성종 때 한성판윤과 병조판서에 이어 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으며 청백리로 유명했다. 또한 이말정은 예빈시소윤 禮 賓 寺 少 尹 을 지냈고 연성부원군 延 城 府 院 君 에 추증되었는데, 이 분이 이호민의 고조가 된다. 그는 5남 1 녀를 두었는데,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감으로써 명문 가의 반열에 올랐다. 장남 이숙황李 淑 璜 은 성균관직강을, 차남 이숙형李 淑 珩 은 사헌부감찰 을, 삼남 이숙규李 淑 珪 는 현령縣 令 을 지냈다. 사남인 정양공靖 襄 公 이숙기李 淑 琦 는 형조판 서와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적개공신 敵 愾 功 臣 과 좌리공신 佐 理 功 臣 으로 공훈에 두 번 책록되어 연안군延 安 君 에 봉해졌으며 불천위不 遷 位 사당에 배향되었다. 오남인 문장공文 莊 公 이숙함李 淑 瑊 은 이조참판과 홍문관부제학을 지냈고 당시 김천에 머물러 있던 김종직金 宗 直 과도 교분이 있었다. 이 중 이숙기가 바로 이호민의 증조가 되며 그의 아들인 이세범李 世 範 은 홍문관 수찬으로 좌찬성左 贊 成 에 추증되었다. 그는 아들이 없어 숙황의 둘째 아들인 교수공敎 授 公 형례亨 禮 의 둘째 아들인 연선공延 善 公 이국주李 國 柱 를 아들로 삼았는데 이 분이 이호민의 부친이다. 이국주는 이천현감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연선부원군에 추봉되었다. 그는 첫부
18 _ 2015년 지역기반 활용 한국학학술대회 조선중기 김천사림과 청백리 정신 인이었던 여주 민씨가 죽고 큰아들 우민友 閔 의 주선으로 사직司 直 을 지낸 박여朴 旅 의 딸인 비안比 安 박씨朴 氏 와 재혼하여 67 세 때에 넷째 아들을 얻었는데 그가 바로 이호민이었다. 이호민의 생애는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출생에서부터 1583년까지 여러 스승들 을 찾아다니며 경사 등을 배웠던 수학기修 學 期, 1584년 대과에 급제하여 1608년까지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활동하던 사환기仕 宦 期, 그리고 1609년부터 1634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여러 지우들과 시회를 열어 시작 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냈던 은퇴기隱 退 期 이다. 4) 이호민은 4 세 때 부친상을 당하였기에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어 릴 때부터 총명하여 6 세 때에 이미 글자를 깨우쳤다고 한다. 7세 때부터 여러 스승들로부터 효경孝 經, 동몽선습 童 蒙 先 習, 사략史 略, 중용中 庸, 논어論 語, 시전詩 傳, 서 전書 傳, 역경易 經 등을 익혔고, 특히 그는 15세 때 이충원李 忠 元 에게 3년 동안 왕래하 면서 수학하였는데, 경사는 물론 시작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18 세 때에는 사직司 直 을 지낸 윤문로尹 文 老 의 딸인 파평坡 平 윤씨尹 氏 와 혼인을 했다. 그 해에 도산에 가서 이황李 滉 을 알현하고 이어 유희춘柳 希 春 의 문하에 나아갔다. 이렇게 수학기를 보낸 그가 벼슬길에 나아간 것은 1584 년(32 세) 이다. 초직으로 성균관成 均 館 전적典 籍 에 제수되었으나 노수신盧 守 愼 이 공의 재주를 높게 보아 천거하니 승정원承 政 院 주서注 書 에 제배된다 (33 세). 이 때 선조가 경연에서 분苯 의 자의와 소거巢 車 제도에 대해 물었는데 대답하는 신하가 없자 이호민에게 대답하기를 권하니 자세히 답하므로 크게 칭찬했다. 5) 이어 이 사람은 기재寄 才 이니 인재를 양성하는 데 상규常 規 에 구애받지 않아야 한다고 하며 사가독서 賜 暇 讀 書 하여 학업에 전념하도록 명하였다. 6) 1586년 홍문관 저작이 되어 교정청의 사서삼경 고증에 참여하고 지제교知 製 敎 로 선발되었다가 수찬, 정언, 지평, 교리 등에 이어 1589 년 부수찬에 이르렀다. 이렇게 순탄하게 이어오던 관직생활도 그 해에 일어난 정여립 옥사로 한 차례의 고비를 맞긴 하지만 이내 복직되어 정언, 수찬, 예조 병조 좌랑 등을 역임하게 된다. 4) 정경훈의 논문( 앞의 논문, pp.74~80) 에서 이호민의 생애를 간략히 정리한 것이 있긴 하나 가계에 대한 부분이 나 생애 또한 빠진 부분이 많았다. 이하의 서술은 이를 바탕으로 하되 이명한이 작성한 신도비명神 道 碑 銘 과 연보, 이민구가 작성한 시장諡 狀 등을 참고하여 보충 및 재구성하였다. 5) 李 好 閔, 五 峯 先 生 文 集 권9, 附 錄, 年 譜, 經 筵 講 書 中, 有 苯 字, 上 問 字 意 左 右 幷 不 能 對, 上 曰, 聞 李 某 富 有 文 學 爾, 其 進 解 公 辭 因 對 曰, 此 字 出 於 文 選 西 京 賦, 有 曰, 苯 蓬 茸, 皆 草 木 茂 盛 之 貌. 我 朝 宰 相 中 有 鄭 苯 者, 亦 此 字 也. 又 於 他 日, 經 筵 語 及 軍 務, 上 問 繅 車 之 制, 左 右 亦 不 能 對, 上 曰, 注 書 言 之 對 曰, 繅 車 雲 梯, 皆 攻 城 之 具 也. 仍 解 其 制 甚 悉. 上 喜 曰, 宲 副 予 所 聞 此 正 際 遇 之 會 也. 6) 李 好 閔, 五 峯 先 生 文 集 권9, 附 錄, 年 譜, 入 直 史 局 公 嘗 入 侍, 上 曰, 李 某 寄 才, 欲 培 養 旣, 賜 暇 則 何 可 以 常 規 入 直 乎, 特 命 出 去 讀 書 此 異 數 也. ; 李 明 漢, 白 洲 集 권18, 神 道 碑, 延 陵 府 院 君 李 公 神 道 碑 銘, 俄 薦 授 內 翰, 賜 暇 書 堂. 敎 曰, 此 人 奇 才 也, 培 養 不 可 拘 常 規. 命 脫 禁 直, 專 意 學 業.
오봉 이호민의 생애와 학문관 추 제 협 _ 19 1592 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이호민의 관직생활에 최대 위기이자 기회였다. 그는 이조좌 랑으로서 임금을 호종하며 국난을 몸으로 겪어야만 했지만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당시 명나라로 보내거나 신하, 백성들에게 내리는 크고 작은 문서가 모두 그에 의해 이루어졌다. 특히 그 해 겨울 명나라 신종이 이여송李 如 松 을 보내니 이호민 이 조정의 상황을 설명하고 이들을 오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명나라 장수 황응양黃 應 暘 이 출발에 앞서 국내의 유민들을 회유할 격문을 부탁하니 그가 즉석에서 지어 올렸는가 하며 선조의 죄기교서 罪 己 敎 書 를 지었는데 초고임에도 그 글이 비통하고 절실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의 상황을 시로 지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기도 했다. 임금의 수레가 용만으로 옮겨와 있을 때 요하를 건너야 할 것인지 의논하였는데, 그때 그는 용만의 한 구 석이라/ 천운이 험난하고 / 내 땅도 여기서 끝이 났으니/ 내 장차 어디로 간단 말이냐 7) 라고 읊 었다. 또한 의병장 곽재우의 승전보가 들려오자 그는 홍의장군 이야기 들으니/ 노루 쫓듯 왜 놈 쫓는다네 / 말하노니 끝까지 힘 다하여/ 곽분양 닮아주오. 8) 라고 하여 그 기쁨을 표현했다. 특히 적의 수중에 있는 서울을 삼도三 道 의 군사가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었다는 용만 행재 하삼도병진공한성 龍 灣 行 在 下 三 道 兵 進 攻 漢 城 이란 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작품이 되기도 했다. 난리통에 누가 색동옷을 입었는가 인간사 모든 일이 부질없는 것 땅의 기세는 이미 난자섬에서 다했고 행인이 한양으로 돌아감을 못 보네. 하늘의 뜻은 뒤섞이고 막혀 강물에 임했고 조정의 방책은 처량하게 저녁노을을 마주했네 남쪽 군대가 승세를 탔다는 기별 들리는데 어느 때 삼도가 왕의 땅을 회복하리. 9) 1593년 동부승지가 되고 개성의 이여송을 보러 가는 길에 모친상을 당하니 벼슬을 그만두 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조정에 사명을 주관할 사람이 없어 선조가 간곡한 말로 재차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1596년 일본과 명의 휴전 협정이 이루어지며 그 사이 이호민은 상을 7) 李 瀷, 星 湖 僿 說 권29, 諭 嶺 南 書, 龍 灣 一 隅, 天 步 艱 難, 地 維 已 盡, 予 將 何 歸, 8) 河 謙 鎭, 東 詩 話 권2, 李 好 閔 詩, 聞 道 紅 衣 將, 逐 倭 如 逐 獐, 爲 言 終 戮 力, 須 似 郭 汾 陽. 9) 李 好 閔, 五 峯 先 生 集 권4, 七 言 律, 龍 灣 行 在, 聞 下 三 道 兵 進 攻 漢 城, 干 戈 誰 着 老 萊 衣, 萬 事 人 間 意 漸 微, 地 勢 已 從 蘭 子 盡, 行 人 不 見 漢 陽 歸, 天 心 錯 漠 臨 江 水, 廟 筭 凄 凉 對 夕 暉, 聞 道 南 兵 近 乘 勝, 幾 時 三 捷 復 王 畿.
20 _ 2015년 지역기반 활용 한국학학술대회 조선중기 김천사림과 청백리 정신 마치고 좌승지, 대사간, 부제학에 이어 대사헌에 올랐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또 다시 국난의 상황을 맞게 되는데, 그는 대사헌, 홍문관 제학을 거쳐 예조판서의 중책을 맡게 된다. 1598 년 전쟁의 종결과 함께 그는 북경에 사신으로 가게 되고, 그 때 천자로부터 받은 백금으로 선영 아래에 창사정彰 賜 亭 을 지어 말년을 자연과 벗하며 시작으로 보내기를 바랐다. 1599 년 일과의 화의 주청을 이유로 류성룡柳 成 龍 을 비난하는 논의가 극심하여 사직을 청 했으나 임금은 경이 어버이를 떠나서 나를 따랐으니 충효는 일월을 관통하기에 충분하다. 어찌 유독 오늘날에 나를 버리려 하는가? 천하에는 참된 시비가 있는데 일시의 과격한 논의 는 생각할 것이 못 된다. 10) 라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10월에는 형조판서가 되어 사은 사謝 恩 使 로 중국에 다녀와서 서호西 湖 ( 지금의 서강西 江 ) 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 때 군은君 恩 에 감사하고 지난날 임란의 아픔을 회고하면서 벼슬길에 나아가기보다는 자연을 벗하면서 청빈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을 담은 서호가西 湖 歌 라는 가사를 지었다. 기해己 亥 윤사월 閏 四 月 의 용만龍 灣 의 봉사奉 使 ᄒᆞ여 오월五 月 의 도라와 복명復 命 을 ᄒᆞ오리다 금곡金 谷 의 ᄇᆡᄅᆞᆯ 타 서호西 湖 의 드러오니 강산江 山 은 의구依 舊 ᄒᆞ고 풍색風 色 이 엇더ᄒᆞ 뇨 군은君 恩 은 그지업서 삼순三 旬 을 놀니시니 장하강촌 長 夏 江 村 의 와실蝸 室 이 소조蕭 條 ᄒᆞ야 시문柴 門 이 본ᄃᆡ 업서 밤인ᄃᆞᆯ 다ᄅᆞᆯ 소냐 발이 하 성긔니 물보기 더욱 됴타 소루小 樓 의 누어시니 크나큰 천지天 地 ᄂᆞᆯ 벼개우 ᄒᆡ 다 볼노라 첨하檐 下 하 여트니 석양夕 陽 도 들거니와 비발 드리틴다 님 그려 저즌 ᄉᆞ매 볏 아니면 뉘 ᄆᆞᆯ 늬며 우국憂 國 ᄒᆞ야 ᄐᆞᆫ 가ᄉᆞᆷ 을 비 아미면 엇디 살니 동서東 西 의 분주奔 走 ᄒᆞ여 주야晝 夜 ᄂᆞᆯ 몰혜더니 오날은 엇던 날고 이 몸이 편안커니 보리밥 몰니겨 아ᄒᆡ 아 걱졍마라 11) 10) 李 明 漢, 白 洲 集 권18, 神 道 碑, 延 陵 府 院 君 李 公 神 道 碑 銘, 上 批 曰, 卿 離 親 從 予, 忠 孝 足 以 貫 日 月. 豈 獨 於 今 日 棄 予? 天 下 有 眞 是 非, 一 時 過 激 之 論, 不 足 數 也. 11) 진동혁, 새로 발굴된 이호민의 서호가, 국어국문학연구의 오늘, 아세아문화사, 1998.
오봉 이호민의 생애와 학문관 추 제 협 _ 21 1600년 예조판서로 임명되고 1601 년에 명나라에서 고천준顧 天 峻 과 최정건崔 廷 健 두 사 신이 오자 영위사迎 慰 使 로 뽑혔고 이듬 해 봄 원접사遠 接 使 로 갔다 돌아와 양관의 대제학 에 임명되었다. 1603년 숭록대부의 품계에 오르고 좌참찬 겸 지경연사가 되었고 이듬 해 공신으로 책봉되어 연릉군에 봉해지며, 7 월에는 부원군에 책봉되었다. 1606 년에 주지번朱 之 蕃 과 양유년梁 有 年 두 사신을 접대하였는데 이 때 사신들이 이호민의 글을 칭송하였다고 전한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영창대군의 즉위를 반대하고 적서를 구별하지 말고 장자를 옹립 해야 한다는 입장론立 長 論 을 폈으며 광해군이 즉위하여 이를 고하기 위해 고부사告 訃 使 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 때 광해군光 海 君 이 적통嫡 統 이 아니라는 이유로 위호位 號 를 준봉하지 않자 조정에서 이에 대한 책임론이 대두되어 이이첨과 정인홍의 참언에 결국 파직된다. 이로써 그는 20 여 년간 지속된 화려한 벼슬길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 이후 한 차례의 옥 사를 겪긴 하지만 여생 또한 평온한 삶을 영위했다고 하겠다. 1609 년 서운관書 雲 觀 제조提 調 로서 대구태실 大 丘 胎 室 을 살피러 가는 길에 선산을 참배하고 구택舊 宅 을 방문하는데 이 때 정인홍의 거처를 지나가게 되었다. 이호민은 그의 사람됨을 미워해 가지 않아 정인홍은 악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둘의 악연은 이렇게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612 년 질서姪 壻 김직재金 直 哉 의 옥사에 연루되어 하옥되었다가 풀려난다. 이어 1615년 정인홍이 다시 이호민의 무신년 일을 빌미로 귀향을 보내고자 했으나 광해군이 답하지 않고 7 년간 성남城 南 교외에 대명했다. 1621년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구신으로 예우 받게 되고 1628 년 이유간李 惟 侃, 윤동로尹 東 老, 서성徐 渻, 강인姜 絪 등과 칠십계회 七 十 契 會 를 만들 어 풍류를 즐겼다. 1634년 윤8월에 미질에 감염되어 향년 82 세로 세상을 떠났다. 임금은 슬퍼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고 시호를 문희文 僖 로 내렸다. 학문에 힘쓰 고 좋아하였기에 문文 이라고 했고 매사에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임했기에 희僖 라 하였다고 한다. 11월 8 일에 양근군楊 根 郡 북쪽 마유산馬 遊 山 에 장사 지냈다. 이후 1636년 에 문집이 발간되고 1787 년에 남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이호민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났고 풍채가 깨끗했다고 한다. 늘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관 대를 갖추어 엄숙히 좌정하곤 했으며 집에 있을 때는 효우가 돈독했다고 한다. 항상 자제들 에게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면서 밤낮으로 학업을 닦아 벼슬길에 올라 한 번이라고 편히 봉양하고자 했다. 그러나 병란을 만나 끝내 예제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내 평생의 애통함이다. 문한에 선임되는 것은 처음부터 소망한 것이 아니었고 훈작의 영예 또한 잠자는 꿈에서도 미친 바가 아니었다. 12) 라고 했다. 조정에 있을 때는 충성으로 잘못을 바로잡고자 했다고 한다. 그 한 예로 1611년 겨울에 정온이 직언을 하다가 외지로 전보되는 일이 있었는데, 이호민이 차자를 올려 보류할 것을
22 _ 2015년 지역기반 활용 한국학학술대회 조선중기 김천사림과 청백리 정신 청하며 전에 언사言 事 로 인해 임금의 뜻을 거슬렸던 자로 김늑金 玏 같은 이는 선조의 구신 으로 70 세 나이에 영해領 海 밖에서 지내게 되었고 심집沈 輯 은 은계찰방 銀 溪 察 訪 에서 경성 鏡 城 으로 옮겨 보임되었으며 이준李 埈 은 일을 논하다가 화합하지 않아 혼자 배를 타고 남쪽 으로 돌아갔는데, 반드시 변방 먼 곳에서 죄를 헤아릴 것입니다. 정관政 官 이 임금의 뜻에 영 합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이는 감히 그 그릇됨을 바로 잡지 못할 뿐만이 아닙니다. 13) 라고 하였다. 또한 이호민은 몸단속을 검약하고 바르게 하여 평소에 옷이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선조가 이를 보고 연신筵 臣 은 모두 무늬 있는 비단옷을 입는데, 경은 홀로 그렇지 않으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14) 라고 하여 어의御 衣 를 들어 보이는데 무명 도포였으므로 좌우 가 부끄러워하였다고 한다. 3. 학문적 계보와 인적 교류 이호민은 6세 때에 어머니로부터 천자문을 익히고 7세 되던 해부터 여러 스승으로부터 학 문을 익혔던 것으로 보인다. 향학에 나아가 강엄姜 儼, 안정란安 庭 蘭, 박동朴 洞 에게서 효경 孝 經 과 동몽선습 童 蒙 先 習, 사략史 略, 논어論 語 등을, 이웃에 있던 김질성金 質 成 에 게서는 중용中 庸 을 배웠는가 하며 13 세 때부터는 큰형인 이우민에게서 시전詩 傳, 서 전書 傳, 역경易 經 등을 익혔다. 이어 15세 때에는 한성부판윤과 공조판서를 지낸 이충원 李 忠 元 (1537~1605) 에게서 수학하였는데 3 년간 있으면서 고문선古 文 選, 한유문韓 愈 文, 사기史 記, 한서漢 書, 치제술治 製 述 등 다양한 학문을 배웠다. 이어 그는 18세 때에 이황 을 알현하고 유희춘의 문하에 수학하게 된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선행연구에서 이호민을 유희춘의 문인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15) 그가 과거를 거쳐 벼슬길에 나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유희춘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사실을 미암선생시장 眉 巖 先 生 諡 狀 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를 유희춘의 문인으로 12) 李 明 漢, 白 洲 集 권18, 神 道 碑, 延 陵 府 院 君 李 公 神 道 碑 銘, 早 失 嚴 訓, 只 奉 偏 慈, 日 夜 治 博 士 業, 覬 發 身 得 一 便 養. 遭 罹 兵 亂, 終 未 得 守 制, 是 吾 平 生 之 痛. 文 翰 選 任, 本 非 始 望, 勳 爵 之 榮, 又 非 夢 寐 所 及 也. 13) 李 明 漢, 白 洲 集 권18, 神 道 碑, 延 陵 府 院 君 李 公 神 道 碑 銘, 且 言 前 言 事 忤 旨 者 如 金 玏, 以 先 朝 舊 臣, 七 十 之 年, 崎 嶇 嶺 海 之 外, 沈 諿 自 銀 溪 移 補 鏡 城, 李 埈 論 事 不 合, 一 舸 南 歸, 必 擬 之 邊 遠. 政 官 之 迎 合 上 旨 如 此, 此 非 但 不 敢 矯 其 非 也. 14) 李 明 漢, 白 洲 集 권18, 神 道 碑, 延 陵 府 院 君 李 公 神 道 碑 銘, 筵 臣 皆 衣 文 綺 卿 獨 不 然 予 甚 嘉 之. 15) 정경훈, 앞의 논문, p.77.
오봉 이호민의 생애와 학문관 추 제 협 _ 23 보는 데에 무리가 없을 듯하다. 16) 그런데 그가 이황 사후 퇴계선생집 을 간행하는 과정에 깊이 관여했고 17) 도산급문제현 록 에도 제자로 분류되고 있다는 점 18) 에서 단순히 그렇게만 볼 수 없을 듯하다. 실제로 연보 나 도산급문제현록 에 보면 그가 도산에 머물면서 배움을 청하였고, 그 일화로 하루 는 이황이 시의 운자를 내자 이호민이 바로 응하여 크게 칭찬을 받은 사실을 언급하고 있 다. 19) 물론 이것 외에 그가 정확히 며칠을 머물렀는지, 그동안 무엇을 배우고 질문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이 사실만으로도 제자로 보기에 무리가 없 어 보인다. 다만 궁금한 것은 그가 이황에서 유희춘의 문하로 왜, 그리고 어떻게 나아가게 된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한 가지 짐작되는 바는 그가 도산을 방문한 것이 1570년이고 이 해는 이황이 세상을 떠난 때이다. 즉 그는 이황의 병세가 위독함으로 인해 배움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던 듯하다. 그리고 당시 유희춘은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유배되었다가 선조가 즉위한 1567 년 기나긴 유배 생활을 청산하고 경연관이자 성균관 직강으로 재출사해 있던 때였다. 그는 당대 당하관으로서 대사성에 오를 만큼 박학하였고, 특히 경서의 대가로 알려졌다. 또 한 호남출신임에도 이황과 함께 어록해語 錄 解 를 편찬하거나 속몽구분주 續 蒙 求 分 註 에 대한 교정을 부탁하는 등 빈번한 교류가 있었으며 이황 사후 그는 사림의 종사로서 높이 평 가되었다. 따라서 이호민이 그의 문하에 나아간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유희춘은 당시 홍문관 부제학에 있었고 직접적으로 제자를 양성하는 것을 꺼려했 다. 다만 가르침을 구하는 사람을 거절하지 않았던 듯한데, 20) 이호민 또한 비슷한 상황으로 짐작된다. 그러니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수학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아무튼 그는 여기서 16) 柳 希 春, 眉 巖 先 生 集 권20, 附 錄, 諡 狀, 好 閔 嘗 及 摳 衣 問 學 於 公 之 門, 未 閱 歲, 遽 遭 山 頹 之 痛. 17) 柳 成 龍, 西 厓 先 生 集, 年 譜, 十 五 年 丁 亥 [ 先 生 四 十 六 歲 ], 三 月. 被 召 西 行, 在 道 辭 還, 又 累 召 不 赴. [ 有 齋 居 讀 易 詩 一 絶, 竆 簷 讀 易 歎 吾 迷, 晨 起 硏 劘 至 日 西, 莫 道 羲 文 消 息 遠, 隔 窓 春 鳥 數 聲 啼.] 編 次 退 溪 先 生 文 集. [ 先 生 嘗 與 李 五 峯 書 曰, 老 先 生 文 集, 與 金 士 純 編 次 於 屛 山 院 中, 欲 更 有 所 商 訂, 不 意 宣 城 人 遽 用 草 本 入 梓, 其 中 有 曾 經 先 生 手 自 刪 去 者, 尋 常 繙 閱, 未 嘗 不 慨 歎 云.]. 18) 김종석은 퇴계급문제현록 에 등재된 인물을 분류하면서 이호민을 직접 수업을 들은 인물로 분류하고 있다. 도산급문제현록과 퇴계학파, 퇴계학의 이해, 일송미디어, 2001, p.232. 19) 李 好 閔, 五 峯 先 生 集 권9, 附 錄, 年 譜, 初 到 門 下 納 刺, 則 先 生 出 迎 中 門 外, 待 以 賓 禮 公 不 堪 當, 卽 隨 先 生 之 後, 先 生 揖 讓 强 請 就 客 位, 公 終 不 肯 仍 留, 一 日 時 當 暮 春 陪 游 陶 山, 先 生 寓 興 呼 韻, 公 卽 應 曰, 造 化 神 工 妙 且 淵 春 來, 何 處 覓 中 邊 下 句 逸 之. 先 生 大 加 稱 賞. 20) 이선경이 대학혹문 을 가지고 배움을 청하니 유희춘은 자신의 노쇠한 나이를 이유로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柳 希 春, 眉 巖 先 生 集 권9, 日 記, 임신년(1572) 9월 23 일, 李 善 慶 持 大 學 或 問 來 請 學, 余 固 辭, 以 衰 年 養 氣, 不 可 開 敎 人 之 門.
24 _ 2015년 지역기반 활용 한국학학술대회 조선중기 김천사림과 청백리 정신 유희춘이 죽은 1577 년까지 배움을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배운 것은 정확하지는 않 지만 유희춘이 경서의 대가였던 만큼 여기에 준하는 공부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유희춘의 미암일기 眉 巖 日 記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유생 이호민 李 好 閔 은 고故 유수留 守 우민友 閔 의 아우이고, 이선경 李 善 慶 은 후백後 白 의 아들이다. 함께 와서 대학 에서 의심나고 어려운 곳을 묻기에 내가 대략 입으로 대답해 주고 책을 펴지 말라고 하였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문호를 열기 싫어서였다. 21) 이것이 1574년의 기록이고 보면 이호민이 유희춘의 문하에 들어간 지 5 년이 지난 때이다. 유희춘은 여전히 문하생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경전을 통해 체계적인 교육을 하기보다 는 질문이 있어 찾아오는 경우에만 간단히 답하는 것으로 가르침을 대신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호민은 그와 유사한 학문적 경향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짐작해 볼 수 있 는 이야기가 어유야담 에 전하고 있어 흥미롭다. 유근柳 根 이 도승지가 되었을 때, 이호민 李 好 閔 이 임금의 명에 따라 시문을 지어 바쳤 다. 유근이 보고 여러 곳에 표를 붙여 이호민에게 돌려주면서 고치라고 하니, 이호민이 어떤 것은 고치고 어떤 것은 고치지 않았다. 그러자 유근이 아전을 시켜 그 시문을 다시 고치라고 했는데, 특히 합( ) 자에 표를 붙여 그것이 무슨 글자냐? 라고 물었다. 그러자 이호민이 웃으며 도승지께서는 우리나라 시문만 읽고 중국의 문선文 選 은 읽지 않으셨단 말인가? 하고 붓을 들어 주해하기를 문선부 文 選 賦 에 있는 野 噴 山 ( 들을 들이 마시고 산 을 내뿜어) 禮 國 口 ( 예의 나라 호흡을 들이 마시네 ) 에 있는 합( ) 은 흡( 吸 ) 의 옛 글자 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도 유근이 표한 곳을 모두 고치라 청하니, 이호민이 참지 못하 고 유근에게 화를 내며 따지니 유근이 미안하다고 사과하였다. 그로부터 유근은 신참관 원이 써가지고 오는 형편없는 글이라도 고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유근이 심희수 沈 喜 壽 와 태학사 ( 홍문관대제학 ) 가 되었을 때도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 있으면 화가 난 표정은 지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22) 어우야담 於 于 野 談 에 실린 내용이 대개 야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 웃고 지나칠 이야기 이긴 하지만 당시 세태에 대한 풍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저작이다. 여기 서 우리는 유희춘과 비슷한 이호민의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유희춘은 자구 해석에서는 당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었다. 23) 특히 경연석상에서 이러한 점은 쉽게 드러났다. 이 이 21) 柳 希 春, 眉 巖 先 生 集 권12, 日 記, 갑술년(1572) 하 윤12월 18 일, 十 八 日. 儒 生 李 好 閔, 故 留 守 友 閔 之 弟 也, 李 善 慶, 後 白 之 子 也. 幷 來 問 大 學 疑 難 處, 余 略 對 以 口, 不 令 開 冊, 不 欲 開 授 徒 之 門 也. 22) 柳 夢 寅, 於 于 野 談 권3, 社 會, 文 藝.
오봉 이호민의 생애와 학문관 추 제 협 _ 25 야기에서 이호민도 바로 이러한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그의 생애를 언급할 때 경연석상에서 선조가 물은 자구에 대해 명쾌하게 풀이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이와 무관 하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이들의 인연은 유희춘이 1577 년에 운명을 달리 하면서 끝나게 된다. 그리고 이호 민은 2년 뒤인 1579년에 진사시에 장원을 하고 5년 뒤 대과에 합격함으로써 수학기를 끝내 고 벼슬길에 나아가게 된다. 이호민의 관직 생활에서 우선 눈여겨 볼 것이 교유관계이다. 그와 교유했던 대표적인 인물 만 언급하면 이식, 윤근수, 최립, 이항복, 한준겸, 이준, 이정구, 신흠, 허균, 이안눌, 신익성, 이민구, 이명한 등이다. 인물 면면을 보면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을 망라하는 것으로 그가 당 대에 어떠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인가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물론 이것이 그가 폭넓은 교유 관계를 했다고 단언하긴 어렵다. 선조실록 宣 祖 實 錄 에 따르면 글재주에 비해 사람됨이 경 박했다 24) 거나 기국氣 局 이 작았다 25) 등의 언급에서 자신의 성향이나 뜻을 같이 하는 인물 들만 함께 하는 매우 제한적인 교유관계를 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따라서 이들 중 그와 상 당히 가까운 인물들을 통해 그의 교유관계 양상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이호민이 존경했던 인물로 기대승과 류성룡을 언급할 수 있다. 우선 기대승奇 大 升 (1527~1572) 은 자가 명언明 彦 이고 호가 고봉高 峰 이다. 155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 문원 부정자가 되나 대쪽 같은 성품으로 인해 훈구파들에게 늘 견제의 대상이 되었고 급기 야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에 정진한다. 1559년부터 8년 동안 이어져 온 이황과의 사단칠정논 쟁은 당대의 학문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호민의 스승이었던 이황과 유희춘 모두 교류가 있었고 당연히 그에게는 학문적 흠모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짧았고 이에 대한 슬픔 또한 컸다. 이를 이호민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아! 몽매한 나 자신은 강석에서 모셨는데 재주 따라 가르쳐 나갈 방향 알게 하니 가야 할 곳 다름 아닌 효제로써 권면했네 절실하게 당부하여 23) 송재용, 미암일기 연구, 단국대 박사학위논문, 1996, p.172. 24) 선조실록 권151, 선조 35년 6월 14 일, 李 好 閔, 爲 人 輕 躁, 然 善 屬 文. 25) 선조실록 권171, 선조 37년 2월 13 일, 李 好 閔, 長 於 文 詞, 但 小 器 量.
26 _ 2015년 지역기반 활용 한국학학술대회 조선중기 김천사림과 청백리 정신 성취 멀리 바랐는데 끝내 아니 드러남은 내 정성이 없음일세 앞으로는 잘하리라 우리 선생 믿었는데 비통할사 오늘날에 기둥 홀연 부러지니 울부짖어 봐도 소용없어 원통하기 그지 없네 모습 영원히 멀어져 가르침 청할 기약 없으니 애통해라 이 소자는 문을 나서 어디로 갈꼬. 26) 류성룡柳 成 龍 (1542~1607) 은 자가 이견而 見 이고 호가 서애西 厓 이다. 이황의 직전 제자로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자 도체찰사로 군사를 총지휘했다. 이호민이 벼슬길을 순탄하게 이 어갈 수 있었던 이유이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가장 가까이 지냈던 사람 중 하나이다. 류 성룡은 1598년 명나라 경략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칠 것이라는 모함하 자 이를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가게 된다. 이때 이 호민이 이별을 슬퍼하며 쓴 시가 있어 둘 사이의 관계를 짐작케 한다. 흰 눈이 온 세상 가득한데 음습한 바람이 고목에 부네. 한강루에 올라 보니 하늘 끝에 저 사람 옥과 같네. 27) 흰 눈과 음습함 바람이 현실의 상황을 암시하고 있긴 하지만 전별시 치고는 전체적으로 매우 담백하다. 자신의 감정이 매우 절제되어 있는 반면 존모의 대상로서 전별의 인물을 부 각시키고 있다. 즉 한강루에 올라 저 멀리 사라져 가는 류성룡을 옥 으로 표현하며 한없는 존경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한편 그와 교유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정구, 이항복, 이안눌, 이식, 서사원 등을 들 수 있 26) 奇 大 升, 高 峯 先 生 別 集 권1, 祭 文, 李 好 閔, 咨 余 愚 蒙, 幸 承 函 丈, 隨 才 授 訓, 使 知 趨 向, 靡 他 其 適, 畀 勸 孝 悌, 見 勵 深 切, 遠 期 造 詣, 厥 終 罔 顯, 由 我 不 誠, 方 來 之 善, 恃 我 先 生, 那 知 今 日, 樑 木 忽 摧, 攀 號 莫 及, 慟 怨 難 裁, 儀 刑 永 隔, 就 正 無 期, 哀 哀 小 子, 出 門 何 歸. 27) 李 好 閔, 五 峯 先 生 集 권1, 五 言 絶 句, 贈 別 柳 西 厓, 白 雪 滿 平 陸, 陰 風 吹 古 木, 登 臨 漢 江 樓, 天 末 人 如 玉.
오봉 이호민의 생애와 학문관 추 제 협 _ 27 다. 우선 이정구李 廷 龜 (1564~1635) 는 자가 성징聖 徵 이고 호가 월사月 沙 이다. 윤근수尹 根 壽 의 문인으로 1590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앞서 정응태의 무고사건에 류성룡이 고사했던 것 에 이항복, 한호와 함께 명나라에 대신 가게 되었다. 이때부터 문장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되 었는데 신흠, 장유, 이식과 함께 조선시대 4 대 문장가로 일컬어진다. 이호민보다 11살 아래 였지만 같은 연안인으로서 어릴 때부터 가까이 지내던 사이로, 특히 시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관심사를 공유하곤 했다. 다음 시는 이호민이 이정구의 시에 차운한 것이다. 시가 왔을 때 그대 또한 홀로 우는 줄 알았거니 어찌 좋은 친구가 외로운 등불을 원망하지 않겠나. 호숫가 물굽이에 밝은 달이 함께 하는데 술동이 앞에 옛 친구 적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네. 28) 친구가 보낸 시를 보자 지난날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서로 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지금은 외로운 등불만이 그때를 기억할 뿐 함께 할 친구가 많지 않음을 슬퍼한다. 결구에서 옛 친구의 허전함이 한스러움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그런 점에서 자연스러운 감정이며 호 숫가에 뜬 밝은 달이 어울림은 이러한 한스러움을 더욱 배가되게 한다. 이항복李 恒 福 (1556~1618) 은 자가 자상子 常 이며 호가 백사白 沙 이다. 이호민보다는 어리 지만 지우로서 가장 가까운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광해군 때 정승의 자리에 올랐지만 이이 첨의 폐모론廢 母 論 에 반대하다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다음은 이호민이 유배 가는 이항복을 전별하면서 쓴 시와 이에 대한 답시이다. 여기는 해마다 나그네 ( 逐 客 ) 를 보내던 곳이라 산단山 壇 에서 술잔을 들고 강가에서 제를 올리네. 나의 길이 가장 늦으니 어디로 갈 것인가 이제는 벗이 없어 이별할 수도 없겠네. 29) 운일雲 日 은 쓸쓸하고 한낮이 어두컴컴한데 북풍은 원정인 遠 征 人 의 옷을 불어서 찢누나. 요동의 성곽은 응당 예전 그대로이겠으나 다만 영위令 威 가 가서 돌아오지 않을까 염려되도다. 30) 28) 李 好 閔, 五 峯 先 生 集 권1, 七 言 絶 句, 次 月 沙 人 日 見 寄 詩 韻, 詩 到 知 君 亦 獨 吁, 豈 無 良 友 怨 燈 孤, 湖 邊 灣 上 俱 明 月, 惟 恨 樽 前 少 舊 徒. 29) 李 好 閔, 五 峯 先 生 集 권2, 七 言 絶 句, 戊 午 正 月 初 九 日, 山 壇 路, 送 逐 客 李 白 沙, 此 地 年 年 送 客 歸, 山 壇 擧 酒 祭 江 籬, 吾 行 最 晩 當 何 處 無 復 故 人 來 別 難.
28 _ 2015년 지역기반 활용 한국학학술대회 조선중기 김천사림과 청백리 정신 다시 보지 못할 것을 예견이라고 한 것일까? 지우를 보내는 마음이 편치 않음이 마지막 구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 서운한 마음을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며 풀어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고 오히려 자기 삶의 마지막을 어떨지를 생각하게 된다. 자신 또한 이러한 삶으로 끝나지 않을까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이항복의 답시에서도 느껴지는데, 실제로 그는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 되 었던 것이다. 이안눌李 安 訥 (1571~1637) 은 자가 자민子 敏 이며 호가 동악東 岳 이다. 18세에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했으나 동료들의 모함으로 일찍부터 벼슬길을 포기하고 학문에 열중했다. 그 가 과거를 다시 치게 된 것은 모친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던 것으로 1599년 그의 나이 29세 때의 일이다. 이호민과의 인연은 이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그의 연보에 의하면 1593년에 그가 후학임에도 이호민과 이정구가 직접 찾아와 망년지교 忘 年 之 交 를 맺었다고 기록되어 있 다. 여기에 윤근수와 권필 등이 참여하면서 이른바 동악시단 東 岳 詩 壇 을 형성하게 된다. 윤근수尹 根 壽 (1537~1616) 는 자가 자고子 固 이며 호는 월정月 汀 이다. 윤두수尹 斗 壽 의 동 생으로 이황과 조식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와 의 외교를 담당했고 이후 호성공신 2 등에 봉해졌다. 한편 권필權 韠 (1569~1612) 은 자는 여 장汝 章, 호는 석주石 洲 이다. 어릴 때부터 과거에 뜻이 없었고 자유분방한 삶을 살고자 했다. 명나라의 대문장가인 고천준이 사신으로 왔을 때 영접할 문사로 뽑힐 정도로 시에 뛰어났는 데, 특히 외척의 방종을 비판하는 궁류시宮 柳 詩 를 지을 만큼 현실 비판적인 시들이 많았 다. 이호민과 함께 김직재金 直 哉 의 무옥에 함께 연루되어 해남으로 귀양을 가다 죽었다. 이로 보면 이호민이 이러한 인물들과 교유하게 된 것은 이안눌의 영향이 컸으며, 또한 그 가 시작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던 것도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다음은 이안눌의 시에 차운한 시이다. 다락 높고 하늘 넓어 쉬이 노을 지는데 강 위의 푸른 산이 공연히 다시 길어지네. 오늘 밤 놀이에는 모름지기 촛불을 밝혀야겠지만 내일 아침 이별할 때에는 더욱 간장을 녹이겠네. 31) 30) 李 恒 福, 白 沙 先 生 集 권1, 詩, 到 靑 坡, 移 配 慶 源, 又 移 三 水, 正 月 九 日, 改 北 靑, 延 陵 諸 君 携 壺, 送 于 山 壇 道 左, 雲 日 蕭 蕭 晝 晦 微, 北 風 吹 裂 遠 征 衣, 遼 東 城 郭 應 依 舊, 只 恐 令 威 去 不 歸. 31) 李 好 閔, 五 峯 先 生 集 권1, 七 言 絶 句, 次 東 嶽 道 中 韻, 樓 高 天 闊 易 斜 陽, 江 上 靑 山 空 復 長, 今 夜 歡 娛 須 秉 燭, 明 朝 離 別 剩 銷 腸.
오봉 이호민의 생애와 학문관 추 제 협 _ 29 이식李 植 (1584~1647) 은 자가 여고汝 固 이며 호가 택당澤 堂 이다. 그가 이호민을 알게 된 것은 이안눌에 의해서이다. 이안눌은 이식의 종숙從 叔 이 된다. 그는 이호민의 아들 이경엄의 부탁으로 유교집의 발문을 쓰게 되는데, 여기에 이호민과의 인연을 간략히 적고 있다. 그는 숙부와 교분이 두터운 이로 이호민을 익히 들었고, 이어 이호민의 조카인 이경의李 景 義 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를 계기로 그에게 나아가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이리저리 떠돌다 중년에야 뵙게 되었음을 안타까워했다. 이호민의 만사 3수 중 세 번째 수를 들면 다 음과 같다. 홍곡鴻 鵠 이라 원래부터 이 땅을 멀리 초월한 분 푸른 바다 그 깊이를 어찌 잔으로 헤아리랴 등용이 늦었던 걸 한탄하고 있었는데 절창絶 唱 을 뉘라서 이어 부를꼬 높은 풍도風 度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도다 가슴 아파라 이신의 저택이여 다시는 술잔 올릴 길이 없으니 32) 서사원徐 思 遠 (1550~1615) 은 자가 행보行 甫 이고 호는 낙재樂 齋 이다. 정구鄭 逑 의 제자로 대구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음직으로 동몽교관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호조정랑에 이르렀으 며 임진왜란 때에는 청안현감으로 있었는데 의병을 모아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말년 에는 이강선사를 지어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그는 이호민과 동갑이며 평상시 서로 의 안부를 묻고 낙동강에서 낚시를 즐기며 자연을 완상하곤 했다. 33) 이호민은 그에 대해 이 렇게 시로 표현했다. 나그네 금호강 길 지나가다가 봄 깊은 서처사 집 찾아들었네. 아들 형제 방초 길에 마중 나오고 매화 같은 고운 딸 규방으로 들어가더라. 늙은이는 세상사를 조심하라 하건만 젊은이는 화려한 일 좋아하는구나. 32) 李 植, 澤 堂 先 生 集 권6, 詩, 五 峯 挽 詞, 黃 鵠 元 超 壤, 滄 溟 詎 測 杯, 登 龍 方 恨 晩, 刻 棘 謬 稱 才, 絶 調 知 誰 續, 高 風 挽 不 回, 傷 心 履 信 第, 無 復 奉 樽 罍. 33) 徐 思 遠, 樂 齋 先 生 年 譜, 附 錄, 尺 牘, 新 春 見 林 下 書, 蘇 慰 倍 常, 第 審 尊 兄 衰 年 食 貧, 至 不 能 自 聊. 聞 李 生 口 申, 奉 慮 不 置. 生 積 病 之 餘, 又 遭 家 變, 盖 積 罪 在 耳. 耐 老 不 死, 殃 咎 如 此, 只 自 歎 咄. 踰 六 望 七 之 年, 雖 安 居 自 頤, 難 望 康 寧, 憂 灼 又 如 此, 何 能 久 長? 一 任 長 逝 在 近, 餘 生 能 復 與 兄 同 釣 洛 江 魚 耶? 思 之 悵 然, 千 萬 珍 愛, 忉 怛 不 宣.
30 _ 2015년 지역기반 활용 한국학학술대회 조선중기 김천사림과 청백리 정신 서처사 대구로 돌아온 뒤에 밤마다 신선을 꿈꾼 것을 알겠네. 34) 이호민은 그의 삶이 늘 부러웠던 듯하다. 그가 있던 곳인 이강선사를 지날 때면 어김없이 들러 자연을 벗하며 사는 즐거움을 순간이나마 느끼고자 했다. 그럴 때마다 세상을 경계하라 고 충고하지만 그곳에 대한 미련은 여전히 남아 이곳에 머물러 있기를 주저하게 했다. 그런 데 서사원은 이곳에 돌아온 뒤부터는 그렇지 않았기에 부러울 뿐인 것이다. 아마도 이호민이 1598 년에 중국에 사신을 가서 받은 백금으로 창사정彰 賜 亭 ( 亦 恩 亭 )) 을 지은 것이나 실제로 말년을 벗과 함께 시를 지으며 유유자적했던 것도 이러한 삶을 희구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 4. 학문 및 사상적 경향 이제 이호민의 학문 및 사상적 경향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문집 에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시이기에, 이를 통해 그의 학문, 특히 사상적 경향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여기서 그의 시에 대한 평문은 단편적이긴 하지만 매우 중요 한 자료가 된다. 우선 이호민의 문장과 시에 대해 신도비명 에 있는 이명한의 말부터 살펴 보자. 공의 문장은 천재天 才 에서 나왔고 글은 육경六 經 에 근원을 두고 논어論 語 에서 힘을 얻었다. 시는 기氣 를 위주로 해서 호탕방일하여 법도를 일삼지 않았으나 노을빛과 별이 반짝이는 것 같았기에 읽으면 항상 이진易 盡 을 두려워하였고 비록 성편成 篇 되지 않은 것 이 있더라도 또한 청봉일모 靑 鳳 一 毛 에 비유하였다. 고문高 文 대책大 策 은 국승國 乘 에 기 재되었고 척독尺 牘 과 소운小 韻 으로 급히 붓을 휘둘러 쓴 글에도 반드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한 마디가 들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보관하여 보배로 여겼다. 35) 이렇게 이호민의 문장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허균許 筠 은 그의 시를 보고 마치 백옥과 같이 뛰어나 세상에 영원히 전해져야 할 시 36) 로 인식했다고 하니 위의 말과 크게 34) 大 丘 府 編, 大 丘 邑 誌, 爛 柯 臺, 客 過 琴 湖 路, 春 深 處 士 家, 雁 迎 芳 草 逕, 梅 入 小 窓 紗, 白 首 微 人 事, 靑 年 玩 物 華, 應 知 歸 洛 後, 夜 夜 夢 南 涯, 35) 李 明 漢, 白 洲 集 권18, 神 道 碑, 延 陵 府 院 君 李 公 神 道 碑 銘, 公 之 文 章, 出 於 天 才, 文 原 於 六 經, 而 尤 得 力 於 論 語. 詩 以 氣 爲 主 而 豪 逸, 不 事 繩 尺, 霞 輝 星 燦, 讀 之 常 恐 易 盡, 雖 有 不 成 篇 者, 亦 譬 之 靑 鳳 一 毛. 高 文 大 策, 載 之 國 乘, 尺 牘 小 韻, 造 次 揮 灑 者, 必 有 一 語 驚 人, 人 皆 藏 去 而 珍 之.
오봉 이호민의 생애와 학문관 추 제 협 _ 31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러한 평가의 근거는 무엇일까? 인용문에서 보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한 마디가 들어 있다고 했는데, 이는 아마도 이식이 지적한 기존의 것을 답습하기보다 자신의 독창적인 것을 더 선호했다고 하는 말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예 로 다음 시를 보자. 한식날 봄바람이 아직은 매서운데 들판의 제비와 참새 깃털이 높아지네. 오랜 세월 살아온 늙은 학은 고결한 서리옷 입고 바위 위에 홀로 서서 큰 바다를 꿈꾸네. 37) 봄바람이 차가운데 제비와 참새가 높이 나는 모습에서 한식날의 유래인 충신 개자추 介 子 推 를 떠올린다. 그는 한식날의 감회보다는 개자추를 통해 현실의 상황을 담백하게 드러냄으 로써 늙은 학의 고고한 이상에 빗댄 자신의 기상을 상대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표 현의 묘미를 이준李 埈 은 꾸미지 않았지만 곱고 기발하다 38)라고 평가하지 않았을까 한 다. 39)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옛 것을 무조건 배척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음 언급은 그 가 여전히 경사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또 일찍이 듣건대 상공의 학문은 논어論 語 에 뿌리를 두고, 예기禮 記 좌전 左 傳 과 반고班 固 의 한서漢 書 등의 특히 뛰어난 점을 널리 수용하였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글에 질박한 요소도 있고 화려한 요소도 있어 하나의 틀에 국한시킬 수 없는 점이 있지만, 뜻이 분명하고 이치에 막힘이 없어 스스로 진부한 말이나 상투적인 문장으 로 떨어지지를 않고 있다. 40) 이식은 이호민의 학문이 논어 를 비롯한 다양한 옛 고전들의 특징을 수용하였다고 했다. 이는 그가 독창적인 개성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옛 것에 대한 충분한 인식을 바탕 으로 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앞서 그의 생애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고전에 대한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이안눌이 중심이 된 동악시단과 서성徐 省 등이 참여한 남지기로회 南 池 耆 老 會 등 다양한 모임에 참여하여 시 36) 許 筠, 惺 所 覆 瓿 藁 권20, 上 李 五 峯, 拜 奉 佳 什, 如 獲 拱 璧. 此 行 信 富 矣. 當 刻 之 琬 琰, 以 傳 不 朽. 37) 大 東 詩 選 권3, 寒 食 松 溪 途 中, 寒 食 東 風 剗 地 號, 平 郊 燕 雀 羽 毛 高. 千 秋 老 鶴 霜 衣 潔, 獨 立 巖 蔜 ( 嗸 ) 夢 海 濤. 38) 李 好 閔, 五 峯 先 生 集, 附 錄, 諡 狀, 不 繪 而 麗, 不 繪 而 奇. 39) 민병수, 앞의 논문, p.10. 40) 李 好 閔, 五 峯 先 生 集, 跋, 五 峯 李 相 國 遺 稿 後 題 植 又 嘗 與 聞 相 公 之 學, 本 諸 論 語, 博 采 禮 記, 左 氏, 班 史 之 長. 故 其 文 有 質 有 華, 雖 不 囿 於 格, 而 意 明 理 暢, 自 不 墮 陳 言 臼 壘 中.
32 _ 2015년 지역기반 활용 한국학학술대회 조선중기 김천사림과 청백리 정신 화나 역학 등에 대한 공부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은 그가 고전을 통한 옛 것을 탐독하되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자양분으로 활용하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가 특히 힘입은 것이 바로 논어論 語 라는 점이 눈에 띈다. 이는 아마도 스승 유희춘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유희춘은 존주자의식 尊 朱 子 意 識 이 강했던 인물로 학문의 중 요한 핵심이 사서四 書 에 있다고 보았다. 41) 그 중에서도 논어 와 맹자 를 매우 중요시 했 는데, 이는 이호민과 다르지 않다. 그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부賦 형식의 사단부四 端 賦 라 는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유 전체를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그 일면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글이기에 전체를 인용해 본다. 맹자 를 펼쳐놓고 옷깃을 여미며 홀로 깊이 생각하여 고요히 살폈노라. 성인의 말씀을 좇아서 마음으로 반성하니 네 가지 덕( 四 德 ) 이 실마리 있음에 감동하였네. 이는 진실로 마음에서 저절로 드러난 것이니 어찌 근본이 없이 싹틀 수 있으리오. 오호라! 내 자신이 삼립三 立 에 근거하였으니 하늘의 명을 받아 밝게 빛나는구나. 마음( 靈 臺 ) 이 풍성하고 그 가운데가 우뚝하니 태극의 혼연함에 젖어 있네. 만 가지 선행을 두루 담은 한 가지 물건이여 내 자신의 푸른 하늘을 살피노라. 그러나 산 아래에는 물이 있으니 어찌 넘쳐나지 않고 터트릴 수 있으리오. 무덤이 슬프면서도 참혹하며 조묘는 엄숙하면서도 경건하다네. 이리 와서 먹으라니 밝게 격동하고 곱고 추한 모습 만날 때마다 지혜가 피어나도다. 비로소 소용돌이치듯 몸과 합쳐지니 마침내 가지를 빌려와 차례가 세워졌다네. 비유컨대 뽕나무 누에가 명주실을 간직하고서 온갖 실마리를 토해내니 밝고 깨끗함과 같구나. 중용의 덕을 좇음이 이와 같으니 41) 송재용, 앞의 논문, p.145.
오봉 이호민의 생애와 학문관 추 제 협 _ 33 어찌 애써 힘쓰며 지어 하겠는가. 이 사강四 綱 이 지극히 중대하니 이로 말미암아 좆아 다할 수 있겠도다. 그 실마리의 정미한 이치를 풀어놓으니 샘물은 아무리 가늘어도 흐르지 않음이 없구나. 진실로 졸졸 흘러도 흐려짐이 없으니 사해에 두루 미쳐 주행周 行 할 수 있겠구나. 이 밝디 밝음이 그 가운데 있음이여 성스럽고 넉넉지 않다면 어리석고 인색하겠지. 올벼 씨앗을 먼지 속에 두는 것과 같으리니 누가 생생한 의지를 없앨 수 있으리오. 군자는 좋은 생각을 펼치니 이 실마리를 알아 돈독하게 돌아오는 구나. 우레가 작게 울려도 땅에 있음이여 온갖 문으로부터의 개벽이로다. 도가 어찌 멀리 이르지 않겠는가 이치가 어찌 숨어 빛나지 않겠는가. 천지의 지극한 덕을 온전히 함이여 참으로 임금과 신하의 큰 자리로다. 하물며 위의와 문장이 풍성하고 화려함이여 문장과 관찰에도 이치가 있도다. 모두 눈앞에 있는 궤적을 쫓아 온 천하 세상 끝까지 본보기 되네. 뭇사람들 믿지 못함이 염려스럽나니 첫머리를 미루어서 실마리를 찾지 말게나. 살면서 집을 깎으니 스스로 어리석도다 그래서 참된 본성이 이와 같다 하는 것이네. 사단을 살펴보니 사람과 같아도 유독 저 갓난아이는 만나지 못했도다. 만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피어오른다면 진실로 성인의 공덕이 여기에 있는 것이로다. 그윽이 내가 마음에서 느끼는 바가 있어 그 글을 새겨 스스로 어여뻐 하노라. 글은 다음과 같다. 나에게 이러한 본성이 있어서 합하여 이러한 실마리 되었도다. 귀와 눈이 서로 도와주는 것 같아 그 사이에서 발현되었다네.
34 _ 2015년 지역기반 활용 한국학학술대회 조선중기 김천사림과 청백리 정신 알면서도 넓히지 못함이여 맑음이 갈수록 더욱 넘쳐나네. 진실로 그것을 채울 수만 있다면 마치 불만에 찬 말을 타는 듯하네. 본성이 있는 것 모두 그러하니 누가 그것이 없는 자 있으리오. 42) 이호민은 맹자의 사단에 대한 깨달음과 오늘날 사람들이 이러한 본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 하고 스스로를 망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우선 그는 내 마음에 네 가지 본성이 있으니 이는 태극의 리를 품고 있음을 말한다. 이것이 하나의 실마리가 되어 빛나고 있는데 사람들 은 이것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마치 산 아래에 물이 있지만 넘치지 않고 흐를 수 없는 것과 같는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하려고 하지 말고 자연스레 측은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한다면 자연히 성인의 공덕이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도는 늘 우리 가까이 에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주희의 사단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근거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주희는 인간의 마음에 본성인 사덕이 있어 그것이 마치 사단지심을 드러내는 원인으로 설명하고 있다. 43) 이는 맹자의 본래 의도를 상당히 왜곡하고 있는 것인데 44), 그렇게 받아들였던 이유는 주희 의 철학 체계에 근거한다. 그는 천리가 인간에 현현하는 것이 바로 성이며 이 성은 마음에 본성이다. 그 본성은 당연히 맹자의 성선을 따르고 있다. 주희는 이 말의 연장선상에서 선한 본성인 인예의지가 이미 내 마음에 구비되어 있고 그러한 마음이 있기에 사단지심이 일어날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여기서 이호민은 사단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사단이 42) 李 好 閔, 五 峯 先 生 集 권7, 賦, 四 端 賦, 啓 鄒 篇 而 整 襟 兮, 獨 深 思 以 淵 觀. 遵 聖 言 而 內 省 兮, 感 四 德 之 有 端. 是 誠 中 心 之 自 現 兮, 豈 無 本 而 乃 萌. 謇 吾 參 身 於 三 立 兮, 受 天 命 之 昭 明. 靈 臺 欝 其 中 峙 兮, 涵 太 極 之 渾 然. 罩 萬 善 而 一 物 兮, 監 自 家 之 蒼 天. 然 山 下 之 有 水 兮, 豈 無 瀹 而 可 决. 丘 墓 悽 而 慘 惻 兮, 朝 廟 儼 而 敬 肅. 遇 嗟 來 而 義 激 兮, 觸 姸 媸 而 智 發. 始 淵 淪 而 合 體 兮, 卒 條 叚 之 有 秩. 譬 桑 繭 之 蘊 絲 兮, 吐 千 緖 其 皎 潔. 循 中 德 其 若 玆 兮, 寧 勉 强 而 做 出. 伊 四 綱 之 至 大 兮, 率 由 此 而 可 悉. 縱 厥 緖 之 徼 妙 兮, 泉 罔 細 而 不 流. 苟 涓 涓 之 無 溷 兮, 溥 四 海 其 可 周. 斯 昭 昭 之 在 中 兮, 非 聖 裕 而 愚 嗇. 如 種 稑 之 處 塵 兮, 詎 生 意 之 可 滅. 肆 君 子 之 克 念 兮, 認 斯 端 而 敦 復. 雷 隱 隱 而 在 地 兮, 自 千 門 之 開 闢. 道 何 遠 而 不 至 兮, 理 何 隱 而 不 燭. 全 天 地 之 至 德 兮, 眞 君 臣 之 大 位. 况 儀 章 之 殷 縟 兮, 與 文 察 之 有 理. 咸 順 軓 於 眼 前 兮, 準 四 域 而 涯 涘. 悶 衆 人 之 不 諒 兮, 莫 推 端 而 尋 緖. 處 剝 廬 而 自 愚 兮, 謂 眞 性 其 若 此. 相 四 體 其 猶 人 兮, 獨 不 見 夫 孺 子. 若 惻 隱 之 心 發 兮, 諒 聖 功 之 在 是. 竊 余 感 於 中 情 兮, 銘 厥 辭 而 自 媚. 辭 曰, 我 有 斯 性 兮, 合 有 斯 端. 耳 目 交 如 兮, 發 現 其 間. 知 而 不 擴 兮, 冷 過 悠 漫. 苟 能 充 之 兮, 如 乘 快 馬. 有 性 皆 然 兮, 誰 其 無 者. 43) 孟 子, 公 孫 丑 上, 惻 隱 羞 惡 辭 讓 是 非, 情 也. 仁 義 禮 智, 性 也. 心, 統 性 情 者 也. 端, 緖 也. 因 其 情 之 發, 而 性 之 本 然, 可 得 而 見, 猶 有 物 在 中 而 緖 見 於 外 也. 44) 정약용이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맹자요의, 公 孫 丑 上, 鏞 案, 仁 義 禮 智 之 名, 成 於 行 事 之 後. 豈 有 仁 義 禮 智 四 顆, 磊 磊 落 落, 如 桃 仁 杏 仁, 伏 於 人 心 之 中 者 乎.
오봉 이호민의 생애와 학문관 추 제 협 _ 35 우리에게 있음을 확신하고 그것을 자기 스스로 체인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말하 자면 그는 시를 통해 이를 드러내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차별성이 없지 않다. 유희춘이 좌전 에 대한 회의적 태도를 취한 것과 달리 그 는 이 또한 중요히 하여 그 장점을 취했다는 점이다. 이는 스승보다는 유연한 학문적 태도를 취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학문 자체에 대해 고수하는 입장이기 보다 자신만의 개성적 성취를 위한 밑거름으로 인식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만 이러한 자신만의 개성적 성취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시가 다분히 자의적일 수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다음은 소화시평 小 華 詩 評 에 실린 이호민의 시에 대한 이산해李 山 海 의 평은 이러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오봉 이호민이 어느 날 소낙비가 창문을 두드리자 갑자기 시 한 구절을 얻었다. 산비 가 창문을 후드득 치네. 그리고서 그 위구를 이어 지었다. 시냇물은 대밭을 뚫고 가늘 게 흘러가네. 마침내 신 한 편을 채워 아계 이산해에게 보냈다. 그러자 아계가 산비는 의 구절에만 비점을 찍어 돌려보냈다. 오봉이 뒤에 그 까닭을 물었더니 아계가 말했 다. 공이 실제 경물을 만나서 먼저 이 구절을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구절 을 모두 추후에 만든 것이다. 시 전편에 참된 뜻은 모두 이 구절에 있기 때문에 그곳에만 비점을 쳤다. 아계의 시에 대한 감식안이 이와 같았다. 45) 시경詩 經 에서 시란 뜻이 가는 것이고 마음에 있으면 뜻이 되고 말로 나타나면 시가 되는 것이다. 46) 라고 말했듯이 시란 마음에 느껴 뜻을 담을 때 자연스레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의적인 표현은 오히려 그 뜻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산해는 이 시의 모든 뜻은 이미 첫 구절에서 끝났으며 그 다음은 군더더기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했 던 것이다. 즉 대교약졸 大 巧 若 拙 ', 정말 큰 기교는 겉으로 보기에는 언제나 서투르게 보이 는 법인데 그런 점에서 그의 시는 지나치게 세련된 것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그의 시 이면에 자리한 시인의 의식적 지향 또한 다분히 분열적이다. 그는 삶 의 마지막 몇 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관료생활이었다. 그 생활 속에서 시에 대한 열정은 늘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없지 않았지만 현실에 대한 미련이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다음 시에서도 이러한 면이 두드러진다. 45) 洪 萬 宗, 小 華 詩 評, 五 峯 適 見 急 兩 打 囱, 忽 得 一 句 曰, 山 雨 落 窓 多, 仍 續 上 句 曰, 磵 流 穿 竹 細. 遂 補 成 一 篇, 寄 示 鵝 溪. 只 批 點 山 雨 之 句 而 還 之. 五 峯 後 問 其 故, 鵝 曰, 公 必 値 眞 景, 先 得 此 句. 而 餘 皆 追 後 成 之. 一 篇 眞 意 都 在 此 句 故 耳. 其 詩 鑑 如 此. 46) 詩 經, 序, 詩 者, 志 之 所 之 也. 在 心 爲 志, 發 言 爲 詩, 情 動 於 中 而 形 於 言, 言 之 不 足, 故 嗟 嘆 之, 嗟 歎 之 不 足, 故 永 歌 之, 永 歌 之 不 足, 不 知 手 之 舞 之, 足 之 蹈 之 也.
36 _ 2015년 지역기반 활용 한국학학술대회 조선중기 김천사림과 청백리 정신 준법사가 백운사에 머물며 노니니 작년에도 이 꽃동산에 왔네. 꽃동산의 암자 새로 지은 절에 견줄까 붉은 담장에 난 창에 시냇물이 흐르네. 산은 흰 구름보다 낮고 꽃동산도 그윽한 등불만큼 찬란하지 않네. 여기 와서 새봄의 비와 이슬에 감응感 應 하니 골짜기의 바람은 넘실넘실, 빽빽한 소나무. 왕손은 아직 돌아가지 못하는데 무성한 수풀만이 동서의 두둑 길을 뒤덮었네. 시냇가에서 지팡이 만들 나무를 찾고 신神 은 이따금 진실로 괴이한 재주를 부리니. 한 번 와서 돌아가지 못하는 해害 가 얼마나 오래갈까 갔다가 왔다가 하는 모양이 물새와 같구나. 새 사람은 오지 않더라도 옛 사람은 오래 머무르네. 원숭이의 창자를 어찌 끊으리오. 깊은 밤 까마귀 울어도 괴이하게 생각하지 마오. 천도天 道 는 어찌하여 이와 같지 않은가. 깊은 슬픔에 빠져 적막한 산에 있는 듯하네. 시를 지어도 그대의 깊음을 깨닫지 못하니 그대여. 나의 괴로움을 저어마오. 47) 세속을 떠나 백운사에 머무르는 승려 준법사를 자신의 모습과 대비하고 있다. 사방으로 펼 쳐진 자연의 풍광은 세속을 잊기에 충분하다. 당연히 나 또한 여기를 올 때마다 돌아가지 못 하곤 했지만 이내 다시 현실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니 이곳에 머물러 있는 당신의 깊은 의식 세계를 알 길이 없다고 탄식하면서도 자신의 괴로움 또한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 고 있다. 그 괴로움이란 관료로서의 삶과 시인으로서의 삶이 공존하되 자신은 늘 정치 현실 속에 존재하지만 시인으로서의 삶을 희구하는 데에서 오는 것일테다. 그러나 그러한 갈망은 현실적으로 매우 제한적으로 충족될 뿐이었고, 그러다 보니 시가 가진 기발함은 반감될 수밖 47) 李 好 閔, 五 峯 先 生 集 권6, 七 言 古 詩, 抱 川 齋 供 風 樹 菴, 贈 俊 法 師, 俊 在 白 雲 寺 裏 遊, 前 年 從 我 來 花 丘. 花 丘 精 舍 比 新 就, 丹 壁 臨 牕 溪 水 流. 山 比 白 雲 雖 少 淺, 花 丘 亦 倚 懸 燈 幽. 我 來 新 春 感 雨 露, 谷 風 瀏 瀏 松 笙 稠. 王 孫 猶 作 未 歸 人, 萋 萋 芳 草 東 西 疇. 尋 溪 溪 盡 柱 筇 思, 造 物 往 往 眞 差 謀. 一 來 無 往 何 害 久, 幢 幢 往 來 如 驚 漚. 新 人 雖 不 來, 舊 人 如 長 留. 巳 猿 膓 豈 斷, 夜 烏 啼 應 休. 天 道 如 何 不 如 此, 使 我 愁 死 空 山 頭. 題 詩 不 覺 語 君 深, 我 意 良 苦 君 休 尤.
오봉 이호민의 생애와 학문관 추 제 협 _ 37 에 없다. 만년에 지우들과 시회를 열어 창작된 다수의 시들은 이러한 점이 두드러지며 그렇 기에 메마른 정서만이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 48) 5. 나오는 말 이 글은 이호민의 가계와 생애, 그리고 교유관계를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의 학문 및 사상적 경향을 살펴본 것이다. 그의 문집 대부분이 시였기에 이에 대한 검토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졌으나 그 평가는 상이하다. 시 전체에 흐르고 있는 재발才 發 한 면모를 극찬하고 있 는가 하며 초기 시에 대한 시적 기발奇 拔 함이 후기에는 메마른 정감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비판하기도 한다. 시에 대한 이러한 평가를 수용하면서 우리는 그의 시에 대한 평문을 중심 으로 그의 학문 및 사상적 경향을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이호민의 생애를 세 시기로 나누면 출생에서부터 1583년까지 여러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경사 등을 배웠던 수학기修 學 期, 1584년 대과에 급제하여 1608년까지 여러 관직을 역임하 며 활동하던 사환기仕 宦 期, 그리고 1609년부터 1634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여러 지우들과 시회를 열어 시작 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냈던 은퇴기隱 退 期 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특히 그의 사환기는 선조시대 대부분을 차지하며 화려한 관료 생활로 채워졌다. 성 균관 전적에서 시작된 벼슬길은 대사헌, 예조판서를 거쳐 연릉부원군에 봉해졌고 특히 임진 왜란 당시 이조좌랑을 맡아 선조를 호종하여 국가의 모든 문서를 도맡아 했을 정도였다. 그 가운데 그는 문장 특히 시에 남다른 재능을 발휘했다. 즉 진부하거나 상투적인 표현보다는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기발함을 더 선호했고 거기에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이 있 음을 드러내고자 했다. 물론 이러한 개성적 표현이 옛것을 무시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호민에게도 여전히 고 전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데 방점이 찍힐 뿐이 다. 문제는 이러한 창조적 표현이 자칫 기교에 편중되다 보면 시가 가진 본래의 의미를 왜곡 하게 된다는 것이다. 시란 마음에서 느끼는 것이 뜻이 되어 말로 표현하는 것인데 이를 지나 치게 자의적으로 하다보면 거기에는 메마른 정감만이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이산해의 지적 48) 민병수는 이호민의 시 次 子 敏 韻 을 이러한 예로 들고 있다. 민병수, 앞의 논문, pp.22~28. 李 好 閔, 五 峯 先 生 集 권5, 七 言 詩, 次 子 敏 韻, 相 别 時 多 相 見 遲, 相 逢 無 語 侑 深 巵, 雲 邊 鴈 影 回 南 信, 梅 上 春 心 動 北 枝, 醉 面 易 紅 猶 詑 壯, 踈 眉 雖 白 可 言 衰, 江 湖 滿 地 鄕 情 苦, 文 字 拚 歡 一 餉 宜.
38 _ 2015년 지역기반 활용 한국학학술대회 조선중기 김천사림과 청백리 정신 은 바로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또한 이러한 점을 몰랐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의 시에 언뜻 보이는 정서적 분열이 이 를 말해준다. 즉 관료로서의 삶과 시인으로서의 삶이 공존하되 여전히 정치 현실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에 안타까워하는 것은 이러한 생각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 러나 벼슬길에 물러나 은퇴기에 쓴 다수의 시는 이러한 점이 희석되기는커녕 오히려 일상의 흥취를 형식과 언어의 무미건조함에 의존하고 있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시적 탄력 성이 많이 완화된 감이 없지 않다.
오봉 이호민의 생애와 학문관 추 제 협 _ 39 2015년 지역기반 활용 한국학학술대회 조선중기 김천사림과 청백리 정신 鑑湖 呂大老와 星山呂氏 耆洞派의 宗族 활동 김 성 우 _ 대구한의대학교
鑑 湖 呂 大 老 와 星 山 呂 氏 耆 洞 派 의 宗 族 활동 김성우_ 대구한의대학교 Ⅰ. 머리말 목 차 Ⅱ. 16 세기 초반 呂 從 濩 의 耆 洞 上 里 개척 Ⅲ. 16 세기 후반 呂 應 龜 의 활동 Ⅳ. 16 세기 후반~17 세기 초반 呂 大 老 의 활동과 그에 대한 평가 Ⅴ. 17 세기 이후 星 山 呂 氏 耆 洞 派 의 宗 族 활동 Ⅵ. 맺음말: 김산 대표 班 族 으로의 진입과 宗 族 員 들의 자부심 I. 머리말 흔히 김산의 士 族 社 會 를 대표하는 5 대 班 族 으로 벽진이씨, 화순최씨, 영일정씨, 창녕조 씨, 성산여씨 등 5 개 종족을 든다. 1) 이들은 각각 고가대면 하로 상곡( 벽진이씨 ), 하로 하곡 ( 화순최씨 ), 파며면 봉계( 영일정씨, 창녕조씨 ), 과내면 기동( 성산여씨 ) 을 세거지로 하고 있다. 사실상 16 세기 초반 呂 從 濩 가 결혼을 통해 과내면 기동 중리로 입향 당시만 해도, 그의 가 계는 김산에 거주했던 수많은 士 族 어온 무수한 가계들이 명문 가계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같은 시기 김산으로 들 宗 族 으로 성장하는 데 실패했던 데 반면, 이 가계만은 거의 유일 할 정도로 김산을 대표하는 명문 종족으로 성장해 갔다. 2) 그런 점에서 성산여씨의 사회적 1) 1914 년 일본 총독부에 의한 대대적인 행정구역의 통합 조처 이후, 김천지역의 5 대 반족 은 미세 조정이 일어 났다. 李 淑 琦 (1429~1489) 를 현조로 하는 지례 원터의 연안이씨가 이 대열에 합류하면서, 영일정씨와 창녕조씨 가 공동 세거하는 봉계를 5 대 반촌 으로 통합 인식한 것이 그러한 조정의 산물이다. 2) 동일 조상의 후손들로 구성된 친족조직은 宗 法 수용 여하에 따라, 家 系 (clan) 와 宗 族 (lineage) 으로 크게 나뉜 다. 한국사회에서도 17 세기 전반 종법제도의 수용 이전 시기의 친족조직을 가계로, 종법제도를 수용한 17세기 중 반 이후의 그것을 종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종법에 기초한 중국 친족조직의 운영구조에 대해서는 Maurice Freedman, Lineage Organization in Southeastern China (The Athlone Press, 1958/ 金 光 億 譯, 東 南 部 中 國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