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우리나라 통화개혁의 비교 연구* 배 영 목** 논문초록 1) 우리나라 정부는 1953년에는 인플레이션의 수습을 위해, 1962년에는 경제개발 재원의 확보를 위해 호칭단위의 변경, 호칭가치의 절하 및 예금동결을 주요 정책 수단으로 하는 통화개혁을 실시하였다. 두 개혁의 핵심적인 정책수단은 모두 비 은행민간부문을 대상으로 한 예금동결조치이었다. 제2차 조치가 제1차조치보다 더 강력하였으나, 신용경색과 경기침체라는 부작용으로 1달 만에 철회되었다. 두 통화개혁의 결과로 단기적으로 통화량이 수축되고 예금의 회전율이 하락하고 신 용거래가 일시적으로 위축되고, 제2차 통화개혁시에는 산업생산이 계속 정체되었 다. 그리고 두 개혁 이후 통화팽창세에 이어 물가상승세가 재현되었다. 우리나라가 새로운 호칭단위로 원을 사용한 것은 우리나라 화폐의 시간적 공간적 수용성을 높이는 것과 함께 독자성을 높이는 것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고, 두 단계의 호칭가치의 절하는 경제적 혼란기의 누적된 물가상승을 현실화하고 고액 화로 증대된 거래비용을 절감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통화개혁 자체는 단 기적으로 물가안정이나 환율안정에 별로 기여하지는 못했으나, 통화개혁 이후에 실시된 재정금융안정계획은 물가안정에 기여하였고 환율현실화는 물가안정기조 를 약화시켰으나, 가격체계를 국제화하는 것에는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경험에만 의거하더라도 예금동결은 그 파급효과를 고려해 볼 때,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은 정책수단이고, 통화개혁 자체 못지않게 그 이후의 물 가안정정책과 환율현실화 정책이 매우 중요하였고, 호칭단위의 변경과 호칭가치 절하를 병행한 리디노미네이션의 장기적 영향도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핵심 주제어: 통화개혁, 리디노미네이션, 예금동결, 안정화정책 경제학문헌목록 주제분류: E5, N1 투고 일자: 2010. 1. 26. 심사 및 수정 일자: 2010. 3. 19. 게재 확정 일자: 2010. 3. 23. * 이 논문은 2008년도 충북대학교 학술연구지원사업의 연구비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논문 의 수정 보완에 많은 도움을 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 충북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과 교수, e-mail: ymbae@chungbuk.ac.kr
114 經 濟 學 硏 究 제 58 집제1 호 Ⅰ. 서 론 우리나라에서 광복 이후 두 차례의 통화개혁이 있었는데, 한국전쟁 중에 실시된 1953년의 통화개혁과 경제개발계획이 발표된 이후에 시행된 1962년의 통화개혁이 다. 1953년 2월의 통화개혁은 한국전쟁으로 누적된 인플레이션이 경제질서와 국민 생활의 파국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과잉구매력을 흡수하고 체납국세와 연체 대출금도 회수함으로써 통화가치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종합적인 인플레이션 대책으 로 시행되었고(한국은행, 2000, p.390), 1962년 6월의 통화개혁은 5 16 이후 확장 적 재정 금융정책에 의하여 누적된 과잉통화를 흡수하고 아울러 퇴장자금을 끌어 내어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한 산업자금화하기 위해 시행되었다(한국은행, 2000, p.423)고 알려져 있다. 통화개혁(currency reform)이란 넓게는 통화가치 안정을 위한 화폐발행제도의 변 경, 환율제도의 재편, 중앙은행의 재편 등 통화제도 및 통화정책 전반의 개혁을 말 하지만(Keynes, 1929; Bordo, 1993), 우리나라에서는 호칭단위의 변경, 호칭가치 의 절하, 현금과 예금 일부의 동결 또는 봉쇄 등을 목적으로 신구화폐의 교환을 추진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한국은행, 1954, pp.2.1-7). 통화개혁 중 리디노미 네이션을 실시한 대부분의 나라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이나 높은 인플레이션율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나라들이지만 통화통합을 추진하였던 나라들도 있었다(Wikipedia/ redenomination). 물가의 누적적인 급상승으로 통화가치가 이미 폭락한 나라들은 이로 인해 거래비용이 증가하고, 통화정책에 대한 신뢰가 크게 손상되어 새로운 통 화체제로 재출발하지 않으면 통화남발과 인플레이션 간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 었기 때문에 통화개혁을 추진하였다. 이와는 달리 독일의 통합이나 유로화 탄생 과 정에서 보듯이, 통화개혁이 있어야만 정치적 통합이나 경제적 통합이 완성되기 때 문에 이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이나 통화통합과 관련된 연구(Cagan, 1956: Gadea, 2009)는 적 지 않지만 통화개혁의 핵심수단인 리노미네이션이나 예금동결의 효과에 관한 이론 적 실증적 연구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중앙은행의 독립성, 고정환율제도, 균 형재정원칙 등이 인플레이션 수습에 미치는 영향을 검증하려는 연구(Bernholz and Kugler, 2009)가 있고, 리노미네이션의 심리적 효과(anchoring bias)를 실험을 통해 확인해 보려는 연구(Sonia Amado, 2007)가 있지만, 이것도 우리가 검토하고자 하
우리나라 통화개혁의 비교 연구 115 는 통화개혁의 효과에 관한 연구와는 거리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통화개혁 및 그 효과에 대한 연구는 1953년 통화개혁에 집중되어 있다. 이대근(1987)은 한국전쟁 중의 주요경제정책 중의 하나로 통화개혁을 다룬 바 있고, 김동욱(1994)은 1950년대 경제안정화정책의 일환으로 통화개혁을 검토하 고 있고, 이명휘(2007)는 1950년대 중반 사금융 확장의 배경이 되는 민간에 대한 긴축정책의 주요원인으로 통화개혁을 다루고 있고, 배영목(2009)은 1953년의 통화 개혁을 한국전쟁의 산물로 파악하고 그 구체적 실상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통화개혁 핵심수단의 효과에 대한 이론적 연구는 물론 실증적 연구도 없고, 지금까 지 진행된 연구도 1953년 통화개혁의 실상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다. 따라 서 우리나라에서 시행된 통화개혁 전체를 대상으로 통화개혁의 효과와 한계를 파악 하고 나아가 미래의 통화개혁에도 대비하기 위해서 통화개혁의 단기적 파급효과 및 장기적 영향에 대해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본 연구는 통화개혁이라는 극단적인 정책의 의의와 과제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나 라에서 실시되었던 두 통화개혁의 목적과 주요내용 및 전개과정, 통화개혁의 단기 적 파급효과와 장기적 영향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한국전쟁기 에는 통계적 공백으로 인해 분석할 수 있는 통계가 많지 않아 분석대상이나 분석방 법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통화개혁 전후의 경제지표 또는 경제정책의 변화 에 주목하여 그 영향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첫째, 두 통화개혁의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두 통화개혁의 목적과 주요내용, 그리고 전개과정 등을 제시한 다음 비교한 다. 둘째, 통화개혁의 단기적 파급효과를 비교하기 위해 통화개혁 전후의 통화, 금 융, 물가 및 생산의 변화를 검토해 본다. 셋째, 우리나라 통화개혁 전체의 장기적 영향을 제시하기 위해 화폐의 호칭단위의 변경, 호칭가치의 절하, 통화개혁 이후의 경제정책의 변화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앞서 제시된 검토 결과에 의거하여 통화 개혁의 의의를 제시하고 통화개혁에서 문제가 되는 과제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Ⅱ. 통화개혁의 개요 1. 목적과 주요내용 1953년 2월의 통화개혁이 검토되고 있던 1952년 하반기에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116 經 濟 學 硏 究 제 58 집제1 호 통화량 급증과 인플레이션 간의 악순환을 해소할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였다. 1) 한국은행 보고서에 의하면, 정부는 한국전쟁 중 통화남발의 주요인의 하나이었던 UN군 대여금이 단절된 시기를 활용하여 통화개혁을 통해 물가안정을 달성할 의지 를 미국 정부에게 보이면 UN군 대여금 달러화 상환이 촉진되는 동시에 외국원조의 증대를 도모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정부는 통화개혁을 통해 전시이득층에 편재된 과잉구매력을 봉쇄하는 동시에 전쟁 중 연체된 국세의 납부 및 연체대출의 회수를 촉진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호칭가치를 절하하면 가치표시 및 가격계산의 비용도 줄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한국은행, 1954.4, 긴급통화조치의 필요성 ). 따 라서 1953년 제1차 통화개혁은 유엔대여금 상환과 원조증대라는 당시의 현안을 해 결하는 동시에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해 실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군사정부는 1962년 1월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발표하고, 5월에는 한국은행 법을 개정하여 정부의 통화신용정책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은행법을 개 정하여 시중은행을 대형화하고자 하였다. 한편 이 정부는 과열된 증권시장의 결제 불이행을 막기 위해 여러 차례 구제금융을 실시하고 있는 와중에, 계획된 통화개혁 을 1962년 6월에 단행하였다. 군사정부는 부정축재 및 구정권 부패에 의해 축적된 상당한 음성자금이 온존하고 있지만 이것이 장기저축으로 전환되고 있지 않고 또한 5 16 이후 확장적 정책으로 급증한 통화량이 급격히 투기화할 위험이 존재하기 때 문에 통화개혁을 통해 음성자금과 과잉구매력을 장기저축으로 유도하고 이를 투자 재원으로 활용하게 되면 경제개발계획은 추진력을 갖고 더불어 인플레이션도 미연 에 방지할 수 있고 보았다(한국은행, 1962.10, pp.21-22). 따라서 1962년 제2차 통 화개혁은 군사정권이 등장한 이후의 재정 금융확장 정책에 의하여 누적된 과잉통 화를 흡수하고 아울러 퇴장자금을 끌어내어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한 산업자금으로 이용하기 위해 시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1) 당시 백두진 재무부 장관은 통화남발의 핵심요인은 유엔군대여금의 달러상환이 거의 이루어 지지 않고, 달러방출을 통한 통화환수도 이승만 대통령의 달러애착으로 추진하기가 어렵고 조세증징, 대출규제로는 통화량 규제 효과를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백두진, 1975, pp.157-161).
우리나라 통화개혁의 비교 연구 117 <표 1> 우리나라 통화개혁의 주요목적 및 주요내용 주요 목적 긴급 통화 조치 주요 내용 긴급 금융 조치 주요 내용 1953년 2월 제1차 통화개혁 인플레이션 근본적인 수습 유엔군 대여금 원화상환 촉진 및 대외원조 증대 촉구 호칭단위: 圓 (원)에서 圜 (환)으로 호칭가치: 1/100 절하 (100 圓 =1 圜 ) 圓 표시화폐의유통과거래를 금지 신 환화표시 화폐를 발행 유통 구권, 지급지시 등 금융기관 예입 금융기관, 국가, 지방자치단체 등 시행령에 지정한 자의 거래는 예외 생활비로 1인당 5백환 신권 지급 모든 원화표시 금액을 1/100 환화표시로 변경 구권예금은 예입액 체감률로 자유계정으로 전환 나머지 금액의 1/4 은 3년 만기 특별국채저금으로 3/4은 2년 만기 특별정기예금으로 봉쇄 2.14 이전 재래예금 중 저축성예금은 자유계정으로 전환, 기타예금은 예입액 체감률 만큼 자유계정으로 전환 나머지는 1년 만기 특별정기예금으로 봉쇄 국가, 지방자치단체, 금융기관, 보험업, 무진업, 국제연합군, 국제연합기관, 외국외사절단, 정기예금, 정기적금 급부금, 금전신탁, 국민저축, 어린이저금 등은 전액 자유계정 1962년 6월 제2차 통화개혁 음성자금 및 과잉구매력의 장기저축 전환을 통한 투자재원 활용 인플레이션 방지 호칭단위: 圜 (환)에서 원으로 변경 호칭가치: 1/10 절하 (10 圜 =1원) 圜 표시 화폐의 유통과 거래를 금지 신 원화표시 화폐를 발행 유통 구권, 지급지시 등 지정금융기관 예입 금융기관, 국가, 지방자치단체, 정부관리기업, 계획부문 회사 등은 예외 생활비 세대당 500원 한도 신권 지급 모든 환화표시 금액을 1/10 원화표시로 변경 구권예금은 금액구분과 체증률을 적용하여 봉쇄계정으로 전환 나머지 자유계정으로 전환 기한 1년 미만 재래 저축성예금: 계좌당 3만원 기초공제 후 소정의 비율로 봉쇄하고 나머지는 자유계정 1년 미만 저축성예금은 자유계정으로 전환(6.30) 재래 요구불예금은 3만원 기초공제한 후 구권 금액별 체증율을 적용하여 봉쇄 봉쇄예금은 한은지준금으로 예치, 연 15% 이자지급, 산업개발공사 주식으로 전환 국가, 지방자치단체, 금융기관, 보험 회사, 정부관리기업체, 경제개발계획 부문 사업체, 국제연합기관, 외국사절단, 국제연합군, 소속외교관 개인, 군인, 군속 등은 전액 자유계정 자료: 韓 國 銀 行 調 査 部 (1954.4) 緊 急 通 貨 措 置 綜 合 報 告 書. 韓 國 銀 行 調 査 部 (1955), 經 濟 年 鑑. 韓 國 銀 行 調 査 部 (1962.10), 緊 急 通 貨 措 置 綜 合 報 告 書. 제1차 통화개혁에서는 1953년 2월 17일부터 구 圓 표시 한국은행권과 錢 표시 조
118 經 濟 學 硏 究 제 58 집제1 호 선은행권, 일본정부 지폐와 주화 등 구화폐의 유통과 거래를 금지하였고, 제2차 통 화개혁에서도 구 圜 표시 현 예금의 유통과 거래를 금지하였다. 또한 제1차 통화 개혁에서는 1953년 2월 17일을 기하여 화폐의 호칭단위를 圓 (원)에서 圜 (환)으로 변경하고 호칭가치를 100 圓 =1 圜 으로 절하하고 한국은행이 새로 발행하는 환표시의 은행권, 전리 표시의 은행권 또는 주화만을 법화로 규정하였다. 1962년에는 6월 10 일부터 호칭단위를 圜 화에서 원화로 바꾸고 호칭가치를 10 圜 (환)=1원으로 절하하 였다. 결과적으로 화폐의 호칭단위는 1953년 2월 17일 圓 에서 圜 으로 변경되고, 1962년 6월 10일 圜 에서 원으로 변경되었고, 화폐의 호칭가치 절하가 1953년 1/100, 1962년 1/10 발생함으로써 광복 이후 우리나라 화폐의 호칭가치는 누적하 여 1/1000 절하되었다. <표 1>에서 제시되어 있듯이, 두 통화개혁 모두가 호칭가 치의 절하(denomination)를 위해 호칭단위의 변경도 병행하는 리디노미네이션 (redenomination)이 주요정책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두 통화개혁의 또 다른 정책수단인 예금동결(deposit freeze)의 주요내용이 <표 1>에 제시되어 있다. 제1차 및 제2차 통화개혁에서 긴급통화조치(법)에 근거하여 구통화 표시 화폐와 지불지시를 구권예금으로 편입하여 동결하고, 긴급금융조치법 에 근거하여 재래예금의 일부를 동결하는 조치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두 통화개혁 의 목적에 더 부합하는 정책수단으로서 리디노미네이션보다 더 중시된 핵심적인 정 책수단이었다. 두 긴급통화조치에서 금융부문과 공공부문은 예외로 처리하고 그 대상을 자연인 과 민간법인으로 한정하였다. 구권과 지불지시는 예입하여 그 일부를 구권예금으로 동결하는 조치를 실시하면서 민간부문의 경제활동에 대한 제약을 완화하기 위해 1 인당 또는 세대당 인출한도를 설정하여 구권예금의 인출을 제한적으로 허용하였다. 1953년에는 예입한 금액 중에서 생활비로 세대별 가구에 속하는 1인당 500환(구권 5만 圓 )을 한도로 하여 신권으로 교환하게 하였고, 1962년에는 자연인의 경우 1인당 500원 정도의 법정생활비를 인출하도록 하였다. 이밖에도 특수한 사정이 있는 경우 에는 예외적으로 적지 않은 예금의 인출이 허용되었다. 정부는 제1차 통화개혁시 구권예금에 대해서는 동결대상자가 예입한 금액을 제외 한 나머지에 대해서 금액규모별로 자유계정으로 전환할 산출액을 정하고, 그 잔여 금액 중에서 1/4은 기한 3년의 특별국채저금계정으로 전환하고 나머지 3/4은 기한 2년의 특별정기예금계정으로 전환하기로 하였다. 금융기관의 금전채무(이하 재래예
우리나라 통화개혁의 비교 연구 119 금)중 1천환을 초과하는 금액에 대해서는 3/4은 자유계정으로 전환하고 1/4은 1년 기한의 특별정기예금으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국회는 긴급금융조치법 심의과정에 서 구권예금의 기초공제액을 1천환에서 3만환으로 30배 인상하고, 금액구분과 체 감률을 완화함으로써 예금보유자의 불만을 줄였지만, 대신에 현 예금 동결 폭은 계획보다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군사정권 하의 제2차 통화개혁은 국회를 대신한 최고회의 결정에 따라 긴급금융 조치법도 1953년 경우와는 달리 원안대로 시행되었다. 구권예금 중 국가 등 예외부 문의 예입분은 제2차 자유계정으로 전환하고, 심사에 의해 정당하다고 인정된 금액 도 자유계정으로 전환하고 나머지는 국고에 귀속시켰다. 자연인, 일반법인 또는 임 의단체 신고 예입분은 금액별 체증률을 적용하여 봉쇄예금으로 전환시켰다. 재래예 금 등 환화표시 금전채무는 소정의 기준에 따라 일부는 자유계정으로, 그 나머지는 봉쇄계정으로 전환하였다. <표 2> 통화개혁시 예금금액별 적용 봉쇄율(%) 1953년 통화개혁 1962년 통화개혁 금액구간 구권예금 요구불예금 금액구간 구권 재래예금 3만환 이하 0% 3만원 이하 0% 3-5만환 20% 0% 3-5만원 20% 5-10만환 40% 5-10만원 30% 10-25만환 60% 25% 25-50만환 80% 25% 10-50만환 50% 50-100만환 90% 50% 50-100만환 65% 100-200만환 75% 100-500만환 85% 200만환 이상 100% 500-1000만원 95% 100% 1000만원 초과 100% 자료: 韓 國 銀 行 調 査 部 (1955), 經 濟 年 鑑. 韓 國 銀 行 調 査 部 (1962.10), 緊 急 通 貨 措 置 綜 合 報 告 書. 이와 같이 긴급금융조치는 긴급통화조치에 상응하여 모든 금융자산을 새로운 통 화표시로 전환하는 동시에 신권으로의 교환을 제한함으로써 발생한 구권예금과 통 화조치 이전에 예치된 금융기관의 재래예금 중에서 일부를 보유주체나 보유금액에 따라 1953년에는 체감률을, 1962년에는 체증률을 적용하여 봉쇄계정으로 동결하
120 經 濟 學 硏 究 제 58 집제1 호 고, 그 나머지는 자유계정으로 편입하여 자유롭게 인출하도록 하였다. 금액별로 봉 쇄계정으로 전환하는 비율로 통일한 것이 <표 2>이다. <표 2>에 의하면, 기준금액은 예금종류별 및 금액구간별로 차이가 있지만 대략 10배 정도 인상되었고, 분포 상으로 뚜렷한 차이는 아니지만 1962년 봉쇄율이 상대 적으로 더 높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53년에는 구권예금과 요구불예금 봉쇄율 간 에 차이를 두었지만, 1962년에는 두 예금간 차이를 두지 않았다. 특히 제2차 통화 개혁에서는 제1차 통화개혁에서 봉쇄대상이 되지 않았던 1년 미만의 저축성예금까 지 봉쇄하고 이 예금은 기간에 따라 봉쇄율을 달리 적용하였다. 2) 따라서 긴급금융 조치를 통한 예금동결 또는 예금봉쇄 효과는 전체적으로 1962년 조치가 1953년 조 치보다 더 강력하도록 설계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53년 통화개혁과 1962년 통화개혁은 모두 화폐의 호칭단위를 변경하는 동시에 호칭가치를 절하하는 리디노미네이션을 실시하였고, 나아가 구권 지불표시, 구권 표시 예금의 신통화 표시 현금과 예금으로 전환을 일부 제한하여 현 예금의 일부 를 봉쇄 또는 동결하는 것을 핵심수단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긴급금융조치가 주로 정부공공기관, 금융기관을 제외한 자연인, 즉 개인, 민간기업, 단체 등, 간단 히 말해 비금융민간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과 예금의 동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두 통화개혁은 목적의 우선순위에서 차이가 있 었고, 또한 봉쇄대상 예금의 범위나 봉쇄정도에 있어서는 1962년 통화개혁이 1953 년 통화개혁보다 더 광범위하면서 강력한 것으로 설계되어 있었다는 점에서도 차이 가 있었다. 2. 전개과정 우리나라 정부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敵 性 通 貨 인 불법 조선은행권을 구축하 기 위해 1950년 9월부터 실시한 긴급통화교환조치에서 구조선은행권과 신한국은행 권과의 교환을 실시하고 10월 제2차 통화교환 시에는 구권예금 일부를 동결하였다. 1950년부터 9월부터 1951년 1월까지 실시된 긴급통화교환조치의 결과, 교환대상액 771억 圓 중에서 93%인 717억 圓 이 순조롭게 회수되었다. 2) 기한 1년 미만의 저축성예금은 계좌당 3만원(구화로 30만환)을 기초공제하고 3개월 미만은 45%, 3-6개월은 40%, 6개월-1년 미만은 35%를 봉쇄하였다.
우리나라 통화개혁의 비교 연구 121 <표 3>에서 보듯이, 1953년 통화개혁 이전의 구권발행고는 11,367억 圓 이었으나 이 중에서 11,066억 圓 이 회수되어 미회수액은 301억 圓 으로, 구 발행권의 2.6%에 불과할 정도로 화폐교환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이 구권 회수액 11,066억 圓 에 지 불지시 예입 1,197억 圓 을 추가하면 총 12,263억 圓 (122.6억 圜 )이 긴급통화조치 이 후에 환수되었다. 금융기관 시재금, 국고금, 국가지방차지단체자금, 군인 군속 및 외교사절 보유 현 예금 등은 이 대상에서 제외되었는데, 그 금액은 통화조치대상 의 18.0%를 차지하였다. 당시 개인생활비로 지출된 금액은 6,410억 圓 으로 전체 금액의 52.3%에 달했다. <표 3> 1953년 2월 긴급통화조치 및 긴급금융조치법의 시행결과 단위: 백만 圜 (억 圓 ), ( ): % 구권발행고(1953년 2월 14일) 11,367 구성비 전체대비비율 통화조치수입액(A) 12,263 (100.0) 환수조치제외 금액(B) 2,205 (18.0) 소계( A - B) 10,056 (100.0) (82.0) 자연인 생활비지출 6,410 (63.7) (52.3) 일반법인 구권예입계정(C) 4,375 (43.5) (35.7) 예입금액 금융기관 금전채무계정(D) 4,570 (37.3) 소계 8,945 (100.0) (72.9) 조치미제금액(E) 98 (1.1) (0.8) 체납국세납부(F) 382 (4.3) (3.1) 긴급금융조치 연체대부변제(G) 330 (3.7) (2.7) 대상금액 ( C + D ) 특별정기예금 및 국채 (H) 1,285 (14.4) (10.5) (E)+(F)+(G)+(H) 2,095 (23.4) (17.1) 특수계정전환액 113 (1.3) (0.9) 자유계정전환액 6,737 (75.3) (54.9) 자료: 한국은행(1955), 경제연감 I45-48, 한국은행조사부(1954), p.7 12-13 제1차 통화개혁에서 긴급통화조치에 따라 실시된 구통화 표시 은행권 및 지불표 시의 신통화 표시 은행권 및 예금 등으로 교환 또는 전환은 전쟁 중이었음도 불구하 고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신권으로의 교환과정에서 큰 혼란도 없었는데(한규훈, 1986, pp.180-189), 이것은 1950년 통화교환조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22 經 濟 學 硏 究 제 58 집제1 호 그러나 긴급금융조치를 통해 민간이 보유한 구권예금 및 재래예금의 일부를 동결하 여 과잉구매력을 해소하려는 정부의 계획은 국회의 의결과정에서 그 동결 폭이 완 화됨에 따라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표 3>에서 보듯이, 긴급금융조치 대상 중 72.9%인 8,945억 圓 만이 긴급금융조 치 대상이 되었다. 이 중에서 6,737억 圓 (67.37억환)이 자유계정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전체 금액 대비 54.9%이고, 긴급금융조치대상금액 대비 75.3%이다. 나머지 금액 중에서 특별 정기예금 또는 국채로 동결된 금액은 1,285억 圓 (12.85억환)으로 전체 대비 10.5%, 금융조치대상금액 대비 14.4%에 불과하였다. 정부는 원래 구권예금계정 중에서 국가, 지방자치단체, 금융기관이 예입한 금액 을 제외한 금액에 대해 금액규모별로 체감액을 정하여 자유계정으로 하고 그 나머 지인 22억환 정도를 특별정기예금 또는 특별국채예금 계정으로 동결하고, 금융기 관의 금전채무의 3/4을 자유계정으로 전환하고, 그 나머지 1/4인 8억환 정도를 특 별정기예금으로 동결하여 긴급금융조치대상 금액 89.5억 圜 (환)의 33.5%를 동결하 고자 하였으나 정기예금 및 국채로 동결된 금액은 그 목표치의 42.8%인 12.9억환 에 불과하였다. 3) 그리고 통화조치에서 금융조치로 연결되는 2월 15일부터 2월 27 일까지 12일 동안 9대 도시 현금잔고가 총예금 80%에서 35%로 줄어들고, 대상세 대수가 60만 세대로 예상하였으나 실제로는 총세대의 1%에 불과한 4천세대로 크게 줄어들었다(한국산업은행, 1955, p.429). 4) 따라서 통화개혁을 통한 현 예금 동결 은 기대 이하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표 3>에서 보듯이, 1953년 2월의 통화개혁은 적지만 체납국세 징수와 연체대출금 회수에 도움이 되었고, 원조 증대 와 유엔군 대여금 상환 촉진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유엔군 대여금 중 에서 1953년 3월 16일 환율 1달러=60환으로 환산된 8,580만달러(57.1억환)가 상환 되었는데, 이 금액은 이전 상환된 금액에 비해 거액이었다. 5) 3) 이와 같이 동결액이 목표치의 1/2 이상도 되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도 국회 심의과정에 기초공 제액이 생활비 기초공제가 1,000환에서 30,000환으로 대폭 인상되었고, 금액구분도 단순화 되었기 때문이다(백두진, 1975, pp.167-168). 4) 정부의 세대 현금분포에 대한 예측 상의 오류에서도 비롯하겠지만 12일 동안 도시의 거액 현 금이 차명으로 인근 농촌으로 분산되어 예치되거나 교환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5) 통화개혁 이전의 유엔군 대여금 상환을 보면, 1951년 10월 1,215만달러, 1952년 8월 2,550 만달러, 11월 1,800만달러, 12월 885만 달러가 상환되었을 뿐이다(한국은행, 1955, 통계편, p.107).
우리나라 통화개혁의 비교 연구 123 제2차 통화개혁은 그 자체가 예상치 않는 것이었고 기간도 1주일이라는 짧은 기 간이었기 때문에 큰 혼란이 우려되었다. 하지만 구통화 표시 은행권 및 지불표시의 신통화 표시 은행권 및 예금 등으로 전환이나 교환이 강원지방에서 수송상의 문제 로 지체된 것을 제외하고는 큰 혼란없이 진행되었다(한규훈, 1986, pp.426-431). 1962년 긴급통화조치의 결과로 1962년 6월 17일까지 예입된 총액은 1,873억환인 데, 이중에서 1,582억환은 현금이고, 나머지 291억환은 수표 등의 지급수단이었 다. 6월 9일 당시 우리나라의 화폐발행액은 1,653억환이었으므로 71억환만이 회수 되지 않았는데 그 비율은 2.4%에 불과하였다. 그 이후에도 추가예입을 받아 미회 수 화폐발행액은 40억환으로 줄어들었다. <표 4> 1962년 긴급금융조치의 예금자별 금융조치 내역(1962년 6월 23 현재) 단위: 천원 예금잔액 전환대상예금 봉쇄계정 봉쇄율(%) (6.17) (6.23) (B) (B)/(A) 금융기관 9,923,322 9,934,682 1 0.0 국가, 지방자치단체 4,496,288 4,505,622 12,973 0.3 지정법인 3,517,205 3,454,015 1,260 0.0 특수인 3,383,926 3,385,246 261 0.0 일반인 법인단체 7,835,789 7,298,220 4,445,664 60.9 자연인 25,116,184 24,823,461 5,346,168 21.5 소계 32,951,974 32,121,681 9,791,832 30.5 합계 54,272,714 53,401,245 9,806,326 18.4 자료: 한국은행(1962.10), 통계 pp.32-33, pp.42-43. 군사정부가 긴급금융조치법을 실시하기 직전인 1962년 6월 17일의 구권예금과 재래예금을 포함한 예금잔액은 542.7억원이었고, 전환대상예금은 534.0억원이었 다. <표 4>에서 보듯이, 긴급금융조치대상 534.0억원의 18.4%인 98.1억원이 봉쇄 계정으로 편입되어 동결되었다. 이와 같이 전체 예금의 동결률은 제1차 통화개혁에 서는 14.4%이었으나, 제2차 통화개혁에서는 18.4%로 더 높아진 것이므로 1962년 의 예금동결이 1953년 예금동결보다 더 강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제2차 통화개혁에 따른 금융 실물경제의 경색이 심각해짐에 따라, 긴급금융조 치가 시행되는 6월 17일 이후 금융기관의 긴급융자요령이 제정되는 것을 계기로 정
124 經 濟 學 硏 究 제 58 집제1 호 부는 사후적인 각종 보완조치를 본격적으로 실시하였으나 신용경색과 이로 인한 경 기침체는 완화될 조짐이 나타나지 않았다. 정부는 긴급통화금융조치로 금융기관에 대한 공신력이 하락하고 민간저축의 증대를 기대할 수 없게 되자 7월 1일 저축성예 금에 대한 봉쇄를 전면적으로 해제함으로써 22억원 정도가 봉쇄계정에서 자유계정 으로 전환되었다. 6) 정부는 긴급통화조치를 추진한 주요 배경으로 거액 퇴장자금의 산업자금화를 내 세웠으나, 퇴장자금의 실체는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신고액을 보면, 예상과는 달 리 현금으로 퇴장된 거액자금의 비중도 높지 않았고, 그것마저도 개인이 보유한 것 이 아니라 법인 단체가 보유한 것이었다. 100만환 이하 금액이 90.5%를 차지하였 고 1억환을 초과하는 경우 불과 7건으로 금액은 12억환에 불과하고 비중으로도 0.8%에 불과하였고, 1천만원 초과하는 금액도 4%에 불과하였다(한국은행, 1962.10, 통계 p.8). 정부가 기대하였던 퇴장자금의 산업자금화도 어려워지고 통화개혁에 따른 신용 경색과 경기위축이 해소되지 않아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추진마저도 어렵게 됨에 따 라 7월 13일에 긴급통화조치법에 의한 봉쇄예금에 대한 특별조치법 을 공포하였 다. 7) 이 조치에 따라 봉쇄예금의 1/3은 자유계정으로, 나머지 2/3는 연리 15%의 특별정기예금으로 전환시키고 특별정기예금도 금리를 포기하면 중도 해약을 할 수 있게 되어 예금동결은 사실상 전면적으로 해제되었다. 그리고 봉쇄예금을 재원으로 설립할 예정이었던 산업개발공사 계획은 8월 1일에 발족하기로 7월 2일에 발표는 되었으나 이 계획도 7 13조치로 인해 무산되었다. 6) 정부는 30일 박정희 의장겸 내각수반 주재아래 열린 임시각의에서 동결된 저축성예금을 전면 해제하고 중소기업을 위한 봉쇄예금견질긴급융자를 추가키로 의결하였다. 김현철 경제기획원 장관은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개발자금을 동원하면서 유통질서를 회복시킨다는 두 가지 목적 을 조화시키기 위한 긴급융자계획은 긴급한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는 일단 이것으로 해결된 것 이다고 하였다(동아일보, 1962년 7월 1일). 7) 신임 김현철 내각수반은 통화개혁의 기본목적은 과거 구정권하의 편재적으로 축적된 음성자 금과 언제든지 투기성자금화할 수 있는 거액의 대기성 자금을 장기저축화하여 경제개발에 필 요한 투자로 전환하려고 하였던 것이나 통화조치 실시결과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이와 같은 자금의 편재가 없었다는 것이 판명된 것도 이 조치의 큰 이유의 하나이다 라고 담화문에서 밝 히고 있다(동아일보 1962년 7월 14일).
우리나라 통화개혁의 비교 연구 125 Ⅲ. 통화개혁의 단기적 파급효과 우리나라에서 실시된 두 통화개혁 모두 예금동결을 주요수단으로 하였기 때문에 통화개혁의 일차적 충격은 통화량의 감소로 나타났다. 1953년 통화개혁은 통화량 증가세를 둔화시켜 인플레이션을 수습하는 것을 일차적 목적으로 하였기에 통화량 감소 자체가 가장 중요한 표적이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53년 통화개혁은 저축성예금을 동결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구 은행권 일부와 요구불예금의 일 부를 동결하였기 때문에 통화량(제1통화량: 화폐발행고+요구불예금)은 통화개혁 직 후에는 당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1962년 통화개혁은 개발자금의 동 원을 일차적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통화량 감소 자체는 부차적인 목적이었다. 어 떻든 요구불 예금의 동결이 있었기 때문에 통화개혁 직후에는 통화량(M1: 민간보유 현금 + 요구불예금)이 줄어들었다. <그림 1>에서 통화개혁 전후의 통화량을 보면, 1953년 통화개혁은 물론 1962년 통화개혁 실시된 그 달에는 모두 통화량이 크게 감소하고 있는데, 그 상대적인 감 소폭은 1962년 통화개혁에서 보다 1953년 통화개혁에서 더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 다. 그것은 예금동결 강도는 1962년 통화개혁이 더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1962년 통화개혁에서 예금동결에 대한 보완책으로 대출이 신속히 확대되었기 때문 이다. 따라서 적어도 통화개혁 직후까지는 1953년 통화개혁이 인플레이션 수습을 위한 통화량 통제라는 목표에는 더 충실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53년 통화 개혁 이후의 물가안정을 위한 통화량 통제는 일시적인 것으로 끝내고 통화량이 3개 월 이후에는 종전수준으로 회복한 이후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3년 통화개혁 이후에 민간부문에 대한 긴축정책이 지속되었다는 인식은 <그림 2>에서 보듯이 통화개혁 이후 당좌예금 회전율의 급격한 하락으로 인한 것으로 보 인다. 반면에 1962년 통화개혁 이후에는 <그림 1>와 <그림 2>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 통화량 팽창도 상대적으로 작고 당좌예금 회전율도 회복되지 않아 긴축기조가 일시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었다. 인플레이션 수습을 목표로 하는 통화개혁이라면 통화개혁 이후 통화량 통제와 같 은 경제안정화정책이 수반되어야 통화개혁의 정책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통화개혁을 보면, 인플레이션 수습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한 1953년 통화 개혁 이후에는 통화량에 대한 통제는 일시적으로 그친 반면에 인플레이션 수습을
126 經 濟 學 硏 究 제 58 집제1 호 이차적인 목적으로 한 1962년 통화개혁 이후에 도리어 통화량에 대한 통제가 잘 유 지되고 있다. 통화개혁을 인플레이션 수습을 위한 통화정책이라는 측면에서만 보 면, 제1차 통화개혁은 사후적인 안정화정책의 결여로 임기응변적인 정책으로 그쳤 다고 할 수 있다. <그림 1> 통화개혁 전후의 월별 통화량 지수 <그림 2> 통화개혁 전후의 당좌예금회전율 300 250 200 150 100 50 0-12 -10-8 -6-4 -2 0 2 4 6 8 10 12 14 개혁 전월 통화량 지수= 100 1953.2 1962.6 25 20 15 10 5 0-12 -10-8 -6-4 -2 0 2 4 6 8 10 12 14 % 총지불액/순잔고 1953.2 1962.6 자료: 한국은행, 경제연감, 경제통계연보. 1953년 통화개혁은 민간의 현금과 요구불예금의 부분적 동결을 주요수단으로 하 고 있고, 1962년 통화개혁은 민간의 현금, 요구불예금과 단기 저축성예금의 부분적 동결을 핵심수단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통화개혁은 어음거래의 기반이 되는 결제수 단의 동결을 통해 신용경색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신용경색은 어음거래의 위축 과 이에 따른 어음부도율 증가로 확인할 수 있다. 두 통화개혁 직후에 모두 어음교 환액이 1-2달 동안 급격히 감소하였다가 다시 증가하고 있음을 <그림 3>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어음부도율은 1962년 통화개혁 이후 일시적으로 상승하였으나, 1953년 통화개혁 직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가 4-5개월 후부터 상승하고 있다. 특 히 1962년 통화개혁 당시에는 극심한 신용경색이 발생하여 어음거래액이 격감하고 어음부도율도 일시적으로 급증하였으나 1달만의 예금동결의 철회로 신용경색이 해 소되어 어음거래액도 크게 증가하고 어음부도율도 크게 낮아졌음을 <그림 3>과 <그 림 4>에서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통화개혁은 어음거래를 크게 위축시켰지만 그 것은 일시적인 것으로 그쳤다. 하지만 높은 어음부도율로 표현되고 있는 금융불안 이 통화개혁이 반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재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민간에 대한 과도
우리나라 통화개혁의 비교 연구 127 한 긴축정책의 결과라는 설명(이명휘, 2007)이 있지만 이것이 통화개혁의 결과인지 는 분명하지 않다. <그림 3> 통화개혁 전후 일일어음교환액 추이 <그림 4> 통화개혁 전후 어음부도율 추이 2000 1800 1600 1400 1200 1000 800 600 400 200 0 백만환 -12-10 -8-6 -4-2 0 2 4 6 8 10 12 14 1953.2 1962.6 3500 3000 2500 2000 1500 1000 500 0 백만원 1.2 1.0 0.8 0.6 0.4 0.2 0.0-12 -10-8 -6-4 -2 0 2 4 6 8 10 12 14 % 부도액/교환액 1953.2 1962.6 자료: 한국은행, 경제연감, 경제통계연보. <그림 5> 통화개혁 전후 산업생산지수 월별추이 통화개혁 해당월 생산액=100 기준 <그림 6> 통화개혁 전후 물가지수 월별추이 통화개혁 전월 기준 160 140 120 100 80 60 40 20 0 62:제조업생산지수 53: 광목생산지수 -12-10 -8-6 -4-2 0 2 4 6 8 10 12 14 1953.2 1962.6 300 250 200 150 100 50 0-12-10-8 -6-4 -2 0 2 4 6 8 10 12 14 16 18 20 22 24 개혁전월물가지수=100 1953.2 1962.6 자료: 한국은행, 경제연감, 경제통계연보. 통화개혁의 실물경제에 대한 영향을 보기 위해 산업생산 지표를 검토해 보자. 1953년 월별 산업생산은 품목별로만 제시되어 있어 대표적인 상품인 광목으로만 제 시하고, 1962년 산업생산은 제조업 생산지표로만 제시한 것이 <그림 5>이다. 산업 생산은 제1차 통화개혁 이후에는 완만한 상승세를 보이지만, 제2차 통화개혁 이후
128 經 濟 學 硏 究 제 58 집제1 호 에는 상승세가 둔화된 다음 정체되고 있다. 1953년의 경우 품목이 한정되어 큰 의 미를 부여하기는 어렵지만 제2차 통화개혁은 산업생산에 악영향을 준 것임을 <그림 5>를 통해 대략 확인할 수 있다. 통화개혁이 물가에 미친 영향을 검토하기 위해 물가지수를 검토해 보자. 1953년 의 물가지수는 서울소매물가지수이고 1962년 물가지수는 서울소비자물가지수인데, 통화개혁 직전 달을 기준으로 물가지수를 제시한 것이 <그림 6>이다. 물가지수는 두 통화개혁 이후에도 계속 상승하고 있고 상승폭은 높은 편이다. 그런데 물가지수 상승폭은 1962년 통화개혁 이후가 1953년 통화개혁 이후보다 더 낮고, 특히 제2차 통화개혁 이후 1년간 물가상승폭이 높지 않다. 이와 같이 제1차 통화개혁 이후에는 물가안정기조가 사라졌지만, 제2차 통화개혁 이후에는 물가안정기조가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정기조는 1년 밖에 유지되지 못했다. Ⅳ. 통화개혁의 장기적 영향 1. 화폐의 호칭단위 변경 1953년 2월 긴급통화조치에 따라 圓 (원) 표시 한국은행권과 錢 (전) 표시 조선은 행권, 일본정부 지폐와 주화 등 구화폐의 유통이 금지되었고, 화폐단위가 圓 (원)에 서 圜 (환)으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화폐의 호칭단위가 圓 에서 圜 으로 바뀌었음에 도 불구하고 한글로는 원이라는 호칭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미군정기에 미국에서 제작하여 조선은행에 보관하고 있던 은행권을 1953년 통화개혁에서 사용 하였기 때문이다. <그림 7>에서 보듯이, 이 은행권의 호칭단위는 한글로는 원, 한 자로는 圜 이었다. 圜 이라는 호칭단위는 1888년부터 간혹 사용되었지만 그 당시에 는 원으로 발음하였다. 제1차 통화개혁에서 정부가 화폐의 호칭단위를 바꾸기 위해 圜 을 환으로 발음하게 하고 이를 계기로 圜 은 호칭단위로서 원이 아니라 환으로 불 리게 되었던 것이다. 신설된 조폐공사가 1953년 3월에 직접 새로운 은행권을 제조 하면서 화폐의 호칭단위를 圜 으로 하되, 한글로는 환, 영어로 Hwan로 표기함으로 써 제1차 통화개혁에서 제시된 내용이 비로소 은행권에 반영되었다. 1962년 긴급통화조치에 따라 圜 (환) 표시 한국은행권의 유통이 금지되었고, 영 국에서 제조된 은행권이 신권으로 사용되었는데, 한글로는 원으로 표시되고 영어로
우리나라 통화개혁의 비교 연구 129 는 Won으로 표시되었다. 이와 같이 1962년 통화개혁으로 화폐의 호칭단위가 圜 (환)에서 원으로 변경되었다. 우리나라가 1905년 화폐정리사업 이래로 일본통화 계열임을 명시하는 圓 이라는 호칭단위를 오랫동안 사용하면서 대외적으로는 모두 Yen으로 표시하였기 때문에 또 다시 圓 이라는 호칭단위로 복귀하는 것은 우리나라 화폐단위의 기원을 일본 통화단위인 円 ( 圓 )에 두는 것이 다름없는 것이므로 바람직 하지 않다. 1953년 통화개혁 이래로 원으로 발음하였던 圜 을 음을 달리하여 작위적 으로 환이라고 부르게 한 것은 1953년 통화개혁 당시에 이미 제조된 은행권을 사용 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를 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 리나라는 근대적 화폐제도를 도입한 이래로 한자로는 圜, 元, 圓 세 가지 호칭단위 를 번갈아 사용하였으나, 한글로는 계속 원으로 불러왔기 때문에 원이라는 한글 명 칭은 화폐제도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적합한 명칭이다. 그리고 북한에서 호 칭단위를 한글 원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장래에 있을 수 있는 화폐통합에서 호 칭단위 선택의 문제는 원의 사용으로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그림 7> 1953년 통화개혁에 사용된 은행권 자료: 한국은행, 1982, p.272. 1962년 통화개혁에서 새로운 호칭단위로 원을 사용한 것은 그 선택 이유가 무엇 이든 일본계열 통화로서 각인된 圓 이라는 화폐단위를 청산하고, 궁여지책으로 채택 된 환( 圜 )이라는 호칭단위를 시정하고, 우리나라 호칭단위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고, 나아가 남북한 전체에서 호칭단위가 자연스럽게 통합되는 효과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원이라는 호칭단위의 도입은 우리나라 화폐의 시간적 공간 적 수용성을 높이는 것임에 동시에 독자성을 높이는 것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고 할 수 있다.
130 經 濟 學 硏 究 제 58 집제1 호 2. 화폐의 호칭가치 절하 많은 나라가 누적된 물가상승으로 하락한 통화가치를 화폐의 호칭가치에 반영하 는 것은 화폐경제에서 발생하는 경제계산과 관련된 각종 거래비용을 줄이는 동시에 이를 계기로 강력한 물가안정정책을 추진하여 화폐제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 해서이다. 이러한 호칭가치의 절하(denomination)는 1953년 1/100, 1962년 1/10 시행함으로써 우리나라 화폐의 호칭가치가 광복 이후 1/1000 절하되었다. 그 부수 적인 결과로서 원 이하의 錢 (전)이라는 보조 호칭단위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이 호칭가치 절하는 시행시점으로부터 계속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통화개혁의 장기 적 영향을 논의할 때는 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문제이다. 우리나라는 광복 이후의 급격한 물가상승이 있었음은 물론 한국전쟁 이후에도 급 격한 물가상승이 있었다. <표 5>에서 생산자 물가지수, 구체적으로 서울도매물가 지수를 기준으로 보면, 광복 이후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 물가지수는 500배 가까이 상승하였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부터 1차 통화개혁 직후인 1953년 3월 까지 물가지수가 17배 정도 상승하였다. 이러한 급격한 물가상승의 누적은 화폐제 도에 대한 신뢰를 손상시키는 것만이 아니다. 즉 급격한 물가상승의 누적은 각종 거래에 필요한 금액을 증대시켜 계산 회계비용을 높이는 동시에 모든 상품의 빈번 한 가격조정을 유발함으로써 거래비용을 증대시키고, 나아가 현물투기를 유발하여 원자재와 완제품을 퇴장시킴으로써 거래는 물론 생산도 위축시킬 수 있다. 1945.06 =100 1945.06 100 <표 5> 각 기준연도별 생산자 물가지수의 추이 1946.3 =100 1946.03 4,771 100 1950.6 =100 1950.06 49,854 1,044 100 1953.3 =100 1953.03 864,427 18,113 1,734 100 1961.6 =100 1961.06 3,782,767 79,273 7,588 438 100 1962.06 4,078,398 145,367 8,181 472 108 자료: 한국은행 경제통계 DB.
우리나라 통화개혁의 비교 연구 131 <그림 8> 기준연도별 생산자(도매)물가 지수의 추이 7.0 6.0 5.0 4.0 3.0 2.0 1.0 0.0 45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61 62 LOG10P 1945.6=2 1946.3=2 1950.6=2 1953.3=2 자료: <표 5>와 같음. 우리나라가 제1차 통화개혁에서 호칭단위를 1/100 절하하였는데, 그 절하의 근 거를 검토해 보자. 1953년 3월의 물가수준은 광복 직전(1945년 6월)을 기준으로 하 면 8,644배이고, 1946년 3월을 기준으로 하면 181배이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 년 6월을 기준으로 하면 17배이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의 물가상승만 반영한다면 1/10절하로 충분하지만 광복 이후의 급격한 물가상승까지 반영한다면 적어도 1/1000은 절하되어야 한다. 따라서 1953년 2월 통화개혁에서 1/100 절하는, <표 5>에 의거하면, 한국전쟁 중의 물가상승은 물론이고 1946년 중 물가상승분 일부까 지 반영하는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림 8>을 보면, 물가지수는 광복 직후부 터 1947년 말까지 대략 100배 가까이(상용로그값으로 2) 증가하였고, 1946년부터 1953년 통화개혁까지도 100배 정도 증가하였다. 이와 같이 1953년 통화개혁에서 1/100 절하는 광복 직후의 급격한 물가상승분을 제외한 물가상승폭을 반영하고 있 기 때문에 1953년 통화개혁에서 호칭가치 절하 폭은 물가상승폭에 비해 과소하였다 고 할 수 있다. 또한 1962년 통화개혁에서 호칭단위를 1/10 절하하였는데, 그 절하의 근거도 검 토해 보자. 1962년 통화개혁 직후인 1962년 6월의 물가수준은 제1차 통화개혁 직 후인 1953년 3월의 물가수준을 기준으로 하면, 4.7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림 8>을 보아도 한국전쟁 이후에 물가상승 폭은 이전에 비해 훨씬 낮아져 그 동안
132 經 濟 學 硏 究 제 58 집제1 호 변화 폭이 5배(상용로그값 0.67) 정도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두 통화개혁 기간 동안 의 물가상승폭을 감안하면, 1962년 통화개혁에서 호칭가치 1/10 절하는 물가상승 폭에 비해 과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광복 이후 누적된 물가상승분을 고려하여 호칭가치의 절하를 두 단 계로 분산시켰다고 한다면 그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1962년 6월까지 누적된 물가 상승폭은 보면, 1945년 6월(해방 직후)부터는 4.08 10 4 배이고, 1946년 3월부터는 0.96 10 3 배이고, 1950년 6월(한국전쟁 직후)부터는 8.18 10 1 배이다. <그림 8>에서 보면, 물가지수는 10 3 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 1962년 6월 기준으로 한다면, 1946년 이후의 물가상승분은 모두 반영된 수준이므로 누적치로 본 1/1000 호칭가치 절하는 대략 1946년 초부터 1962년 6월까지의 물가상승분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1946년 이후부터 1962년까지의 물가상승분을 두 단계로 나누어 호칭가치 절하에 반영하였다고 할 수 있다. 3. 통화개혁 이후의 안정화정책 통화개혁을 추진하는 목적은 나라와 시기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대부분 나라에 서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는 최종목적은 통화가치의 안정인데 대내적으로 물가안정 이고 대외적으로 환율안정이다. 악성인플레이션 위협에 직면한 나라들이 통화개혁 이라는 극단적인 처방에 의존하여 통화량 급증과 인플레이션 간의 악순환을 수습하 고자 하지만, 통화개혁 이후에 물가안정 또는 환율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안정화정 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통화개혁은 인플레이션을 예방하는 정책이라기보다는 정당 화하는 정책으로 그칠 수 있다. 통화개혁 이후에 물가가 도리어 폭등하는 것은 후 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수요측면의 양의 충격과 함께 공급측면의 음의 충격이 동시에 작용 한 결과로 물가상승률이 통화증가율을 크게 상회한 시기는 광복 직후와 한국전쟁 직후임을 <그림 9>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광복 직후 일본인의 예금인출사태, 미군정 의 재정적자, 곡물매집 등 다양한 원인으로 인한 통화남발이라는 양의 수요충격이 있었고, 전시물자통제체제의 붕괴, 생산기반의 손상이라는 음의 공급충격도 작용 하였다(배영목, 2002, pp.351-356).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전쟁으로 인한 재 정적자와 유엔군대여금 등에서 비롯된 통화남발이라는 양의 수요충격이 있었고, 전
우리나라 통화개혁의 비교 연구 133 쟁으로 인한 생산기반의 손상이라는 음의 공급충격이 있었다(배영목, 2002, pp.361-367). 따라서 예외적으로 물가상승률이 통화증가율을 상회한 시기는 음의 공급충격이 있었던 시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정부는 1953년 통화개혁 이후에 유엔군 대여금 상환이 실현되고 대한원 조가 확대되면서 물가상승세가 완화되고 산업생산이 회복세를 보이게 되자, 전후 복구를 위한 팽창적 통화정책을 시행하였고 그 결과로 물가상승률도 시차를 두고 높아졌다. 1953년 통화개혁의 결과로 나타난 통화량 감소는 <그림 1>에서 확인하 였듯이, 일시적인 것으로 그치고 통화증가세가 재현되었기 때문에 연도별 증가율을 제시한 <그림 9>에서 보면 1953년에 통화증가율도 급상승한 것으로 나타난다. 통화개혁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물가상승세가 재현됨에 따라 도입된 물가안정 책이 1957년부터 시행된 재정금융안정계획 이다.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1953년 말에 경제재건과 재정안정계획에 관한 합동위원회 협정 을 조인하고 미국 정부는 한국정부가 재정 금융긴축을 통해 물가안정과 환율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고 보고 재정금융안정계획을 협의할 것을 계속 요구하였고, 1957년부터 매년 재정금융안정 계획을 수립하여 1957년부터 집행하였다. 이러한 재정금융안정계획은 상당한 성과 를 거두어 <그림 9>에서 보듯이 1950년대 후반에는 통화증가율이 낮아지고 물가상 승률도 낮아졌다. <그림 9> 통화량 증가율과 소비자물가상승률 연도별 추이 450 400 350 300 250 200 150 100 50 0-50 1946 1953 1962 1970 1980 1990 2000 % 통화량(M1) 소비자물가지수 자료: 한국은행(2005), 경제연감, 경제통계연보.
134 經 濟 學 硏 究 제 58 집제1 호 우리나라 정부가 1962년 통화개혁의 부작용 때문에 예금동결을 1달만에 사실상 철회하였지만 <그림 1>에서 보았듯이 팽창적인 통화정책으로까지 선회하지는 못했 다. 그 결과로 <그림 9>에서 보듯이 통화개혁 직후에는 통화증가율이 크게 증가하 지 않았지만 1년 이상 지난 뒤에는 통화개혁 수습을 위한 유동성 증가와 산업생산 침체로 물가상승률이 다시 상승하기 시작하였다(한국은행, 2000a, p.425). 정부는 물가상승률이 높아지고 외환보유고가 격감하자 물가안정과 환율안정을 위해 5 16 이후 중단하였던 재정안정계획 을 1963년에 다시 시행하였다. 이 재정안정계획은 과거의 재정금융안정계획과 달리 통화량 통제에 초점을 둔 것은 아니었다. 통화정 책은 이 계획에도 불구하고 1964년부터 다시 팽창적으로 되어 통화증가율이 높아졌 다. 1953년 통화개혁 이후 거액의 유엔군 대여금 상환은 환율안정은 물론 물가안정에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53년 3월 유엔군 대여금 상환액 8,580만달러(환화 57.1억환)는 1953년 무역 및 무역외 달러수입액 1억 7,330만달러 및 원조수입액 1 억 9,641억원 합계 3억 6,971만달러의 23.2%, 1953년말 통화량 265.0억환의 21.5%에 해당할 정도로 큰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림 9>에서 보듯이, 1953년 물가상승세가 크게 둔화되었으나, 미국은 누적된 인플레이션을 근거로 공 정환율의 인상을 요구하여 1953년 12월 한국정부는 1달러=60환에서 1달러=180환으 로 3배로 대폭 인상함으로써 통화의 대외가치가 1/3로 대폭 절하되었다. 그 결과로 <그림 10>에서 보듯이 1953년 통화개혁 이후의 환율상승폭이 물가상승폭을 상회하 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정부는 1962년 통화개혁의 실패로 인한 산업활동의 위축을 막기 위해 유동성 공급을 확대하였지만 산업생산 회복이 늦어 1963년부터 물가상승률이 크게 높아지고 미국의 원조도 축소되어 외환시장의 수급불균형으로 환율도 폭등하 는 등 외환위기 조짐이 나타났다. 정부는 1964년부터 물가불안과 외환위기를 수습 하기 위해 재정금융긴축을 강화하고 공정환율을 시장환율에 일치시키는 환율현실화 도 추진하게 되었다. 당시에 환율이 1달러=130원에서 1달러=255원으로 대폭 인상 되었을 뿐 아니라 단일변동환율제가 도입되고 외환시장에 대한 규제도 크게 완화되 었다(한국은행, 2000a, pp.114-116). 그 결과로 <그림 10>에서 보듯이 1962년 통화 개혁 이후에도 환율상승폭이 물가상승폭을 상회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정부가 1953년, 1962년 두 차례의 통화개혁에서 통화긴축을 통한 물가
우리나라 통화개혁의 비교 연구 135 안정을 달성하지 못하였고, 또한 그 때문에 환율상승을 억제시키는 것에는 성공할 수도 없었다. 환율상승이 물가상승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환율인상을 최대한 억제하 였던 우리나라 정부가 통화개혁의 사실상 실패로 누적된 물가상승을 반영하는 환율 의 대폭적인 인상, 이른바 환율현실화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림 10>에서 보듯 이, 이 환율인상폭은 통화개혁 이후의 물가상승폭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그림 10> 통화개혁 전후의 환율지수와 물가지수의 월별 추이 350 300 250 200 150 100 50 0-12 -10-8 -6-4 -2 0 2 4 6 8 10 12 14 16 18 20 22 24 53.2 환율지수 62.6 환율지수 53.2 물가지수 62.6 물가지수 자료: 한국은행, 경제연감, 경제통계연보. 이러한 통화개혁 이후의 환율의 대폭적인 인상에 의한 환율현실화는 우리나라 정 부의 대내적 통화가치 안정에 대한 정책적 의지를 약화시킴으로써 장기적으로 물가 안정에 대한 정책적 기조를 완화시키는 부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이 동 시에 환율인상을 통해 한국경제의 가격체계를 국제적인 가격체계로 수렴시킴으로써 한국경제의 대외적 개방에 대한 적응력을 높이는 긍정적인 측면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Ⅴ. 맺음말 본 연구는 통화개혁이라는 극단적인 정책의 의의와 과제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나 라에서 실시되었던 두 통화개혁의 목적, 주요내용, 전개과정과 통화개혁의 단기적
136 經 濟 學 硏 究 제 58 집제1 호 파급효과와 장기적 영향을 비교해 보고자 하였다. 우리나라 정부는 1953년 2월에 실시한 제1차 통화개혁을 통해 한국전쟁으로 남 발된 통화를 환수하는 동시에 이를 계기로 하여 유엔군 대여금 상환과 원조증대를 도모함으로써 통화남발과 인플레이션 간의 악순환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였던 반면 에 1962년 6월에 실시한 제2 통화개혁을 통해 퇴장자금과 과잉유동성을 환수하면서 이의 일부를 경제개발에 필요한 장기 투자재원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두 통화개 혁이 목적의 우선순위에서는 차이가 있었지만 두 통화개혁 모두 화폐의 호칭단위를 변경하는 동시에 호칭가치를 절하하는 리디노미네이션을 실시하였고, 나아가 구권 지불표시, 구권표시 예금의 신통화 표시 현금과 예금으로 전환을 일부 제한하여 현 예금의 일부를 봉쇄 또는 동결하는 것을 주요한 정책수단으로 하고 있었다. 그 런데 봉쇄대상 예금의 범위나 봉쇄강도는 제2차 통화개혁이 제1차 통화개혁보다 더 광범위하면서 더 강력한 것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통화개혁의 결과, 구권의 신권으로 교환이 순조로워 제1차에서 교환대상액의 97.4%가 회수되었고, 제2차에서 교환대상액의 97.6%가 회수되었다. 그리고 긴급 금융조치 대상액의 봉쇄율은 1953년 통화개혁에는 14.4%이었지만, 1962년 통화개 혁에서는 18.4%이었기 때문에 예금동결조치는 제2차 통화개혁에서 더 강력하였다 고 할 수 있다. 두 통화개혁의 목적에 더 부합하는 것은 예금동결이었고, 이 예금 동결은 비금융민간부문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민간경제의 신용경색과 경기침체는 많 은 사후 수습책에도 불구하고 잘 수습되지 않았다. 정책당국이 제2차 통화개혁에서 1달 만에 예금동결 자체를 철회한 것은 예금동결 조치 자체가 잘못 기획된 것임을 자인한 것이었다. 두 통화개혁의 결과 민간 보유의 현 예금의 일부 동결 때문에 단기적으로 통화 량, 신용거래, 산업생산이 일시적이지만 큰 변화를 보였다. 통화량은 두 통화개혁 에서 모두 일시적으로 축소되었으나, 제1차 계획 이후에는 곧바로 증가세로 돌아섰 다. 신용거래와 당좌예금의 유통속도는 두 통화개혁으로 모두 줄어들었으나 곧 회 복되었다. 산업생산은 제2차 통화개혁에서 예금동결 철회에도 불구하고 잘 회복되 지 않았다. 그리고 물가상승세는 통화개혁으로 당장 변화를 보이지는 않았다. 물가 상승세는 통화개혁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제1차 개혁 이후에는 팽창적인 통 화정책의 결과로 그 상승세가 도리어 강화되었다. 두 차례의 통화개혁은 예금동결을 핵심적인 정책수단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
우리나라 통화개혁의 비교 연구 137 로 신용경색과 생산과 유통의 위축부터 초래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의 경우 그 충격 이 민간부문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민간의 경제활동이 통화개혁으로 극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반면에 공공부문과 금융부문은 별다른 규제를 받지 않아 그 효과도 작고 통제의 실효성도 작았기 때문에 이로 인한 경제내 불균형은 더 심화되었다. 통화개혁에서 예금동결이 단기적으로 금융 실물부문에 주는 충격은 물론 그 교란이 이와 같이 심각하기 때문에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전개되는 것과 극단적인 상황이 아 니면 이 정책수단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고, 불가피한 경우라도 공공부문 과 민간부문간의 불균형을 심화시키지 않도록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두 차례의 통화개혁이 초래한 단기적인 충격과 교란에 주목하여 실패한 정책으로 만 평가하고 있지만 장기적인 영향도 보고자 리디노미네이션의 효과와 통화개혁 이 후의 경제안정화정책 변화 등을 검토하였다. 우리나라가 제2차 통화개혁으로 새로운 호칭단위로 원을 사용한 것은 우리나라 화폐의 시간적 공간적 수용성을 높이는 것임에 동시에 독자성을 높이는 것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원의 사용은 일본계열 통화로서 각인된 圓 이라 는 화폐단위를 청산하는 동시에 궁여지책으로 채택된 환( 圜 )이라는 호칭단위를 시 정하는 동시에 우리나라 호칭단위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고 나아가 남북한 전체 에서 호칭단위가 통합되는 효과를 가지기 때문이다. 제1차 통화개혁에서 1/100 호칭가치 절하는 광복 직후 물가폭등을 현실화하는 것에서 부족하고 제2차 통화개혁에서 1/10 호칭가치 절하는 두 통화개혁 간의 물가 상승을 현실화하는 것에서 과도하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만, 누적한 1/1000 호 칭단위는 절하는 1946년부터 1962년 통화개혁 시까지의 물가상승분을 두 단계로 나누어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두 단계의 호칭가치의 절하는 경제적 혼 란기의 누적된 물가상승을 현실화하고 고액화에 따른 거래비용을 절감하는 데에 긍 정적인 효과를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통화개혁이 단기적으로는 물가안정이나 환율안정에 별로 기여 하지는 못했지만 장기적인 영향을 고려하면 그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통화개혁의 사실상 실패로 물가안정과 환율안정이 어려워짐에 따라 그 대웅책으로 재정금융안 정계획이 장기간 시행됨으로써 급격한 물가상승세가 억제된 것은 물론 장기적으로 물가상승률까지 하락되었다. 그리고 물가상승을 이유로 환율인상에 반대해 오던 우 리나라 정부가 통화개혁 실패 이후에 추진한 환율의 대폭적인 인상은 물가안정기조
138 經 濟 學 硏 究 제 58 집제1 호 를 약화시킨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국의 가격체계를 국제적 가격체계로 수렴시키는 것에 기여하였고, 이것은 한국경제가 개방체제로 이행하는 것에도 도움 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나라이든 급격한 물가상승의 누적이나 화폐통합이 있을 경우 그 문제점이 적지 않은 현 예금동결은 피할 수 있지만 리디노미네이션 문제를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도 물가안정에 실패한 많은 나라와 새로운 통화체제로 이행하는 많은 나라가 우리가 경험했던 통화개혁과 비슷한 내용의 통화개혁을 다시 실시하고 있 다. 통화개혁의 주요수단은 호칭단위 및 호칭가치 변경이 포함된 리디노미네이션과 예금동결이다. 우리나라 경험에만 의거하더라도 예금동결은 너무나 많은 문제를 가 진 정책수단이고, 통화개혁 이후에 실시되는 물가안정 및 환율안정을 보장하는 정 책이 매우 중요하고, 그리고 리디노미네이션의 장기적 영향도 중요할 수 있다는 점 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이 강건한 통계분석의 결과가 아니라는 문제점은 남아있다. 참 고 문 헌 1. 金 東 昱, 1940-1950년대 韓 國 의 인플레이션과 安 定 化 政 策,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994. (Translated in English) Kim, Dong Wuk, A Study on Inflation and the Stabilization Policy in Korea during the 1940s and 1950s, Ph. D. Thesis, Yonsei University, 1994. 2. 東 亞 日 報 社, 東 亞 日 報, 1962. (Translated in English) Dong-A Ilbo Co, Dong-A Ilbo, Seoul, 1962. 3. 裵 永 穆, 韓 國 金 融 史, 도서출판 개신, 2002. (Translated in English) Bae, Young Mok, A History of Banking in Korea, Cheonju, Kaeshin Press, 2002. 4. 배영목, 한국전쟁과 화폐개혁, 社 會 科 學 硏 究, 제26권 제1호, 忠 北 大 學 校, 社 會 科 學 硏 究 所, 2009. (Translated in English) Bae, Young Mok, Korean War and Currency Reform, Journal of Social Sciences, Vol. 26, No. 1, Chungbuk National University, 2009. 5. 白 斗 鎭, 白 斗 鎭 回 顧 錄, 大 韓 公 論 社,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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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통화개혁의 비교 연구 141 A Comparative Study of Currency Reforms in Korea Young-Mok Bae* Abstract 8) This study aims to compare two currency reforms which Korean government carried out in 1953 and 1962. I analyze the goals, instruments, and the effects of these reforms both in short-term and long-term perspectives. While the currency reform of 1953 was designed as anti-inflationary policy, the currency reform of 1962 was designed as economic development policy to mobilize more resources from non-bank private sectors. But two reforms used the same instruments: conversion of currency, re-denomination, and deposit freeze. Although the reform of 1953 had effects on monetary contraction, the effects were temporary and the money growth rate rebounded soon. Because of severe credit crunch and economic decline after deposit freeze, the deposit freeze of 1962 had to be cancelled after a month later. But two-staged currency re-denomination has contributed to constructing Korean monetary unit, Won which had longer history than Hwan in Korean language, separated from Japanese Yen, and to reducing the transaction cost due to higher prices. The Fiscal and Monetary Stabilization Planning which Korean government implemented as anti-inflationary measure after two currency reforms lowered the inflation rate of Korean economy in the long run. Although two sharp depreciation policies of Korean currency after currency reforms were originally considered for anti-inflationary policy at that time, they helped Korean price systems to be better aligned to international price system than before. Key Words: currency reform, re-denomination, deposit freeze, stabilization policy Received: Jan. 26, 2010. Revised: March 19, 2010. Accepted: March 23, 2010. * Professor, Department of Economics, Chungbuk National University, 410 Seongbongro, Cheongju, Chungbuk 361-763, Korea, Phone: +82-43-261-2219, e-mail: ymbae@ chungb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