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次> 차례 1~3쪽 머리말 4 1. 계대 연구자료 7 가. 증 문하시랑동평장사 하공진공 사적기 7 나. 족보 변천사항 9 1) 1416년 진양부원군 신도비 음기(陰記)상의 자손록 9 2) 1605년 을사보 9 3) 1698년 무인 중수보 9 4) 1719년 기해보 10 5) 1999년 판윤공 파보 10 - 계대 10 - 근거 사서 11 (1) 고려사 척록(高麗史摭錄) 11 (2) 동국통감 척록(東國通鑑摭錄) 11 (3) 고려사절요경인5년(1110) 12 다. 탁회 선조 관련문헌 13 1) 증 종형 헌납군 시서 13 2) 진양하씨 세계변 15 2. 대동보 발간에 대하여 16 가. 족보 현황 16 1) 족보 발간연혁 16 2) 문중 상계 생몰년도 재구성(추산) 17 가)상계선조 생몰년도 재구성표의 검토 및 宗史상 시사 점 19 나)상계 생몰년도 재구성(추산) 근거 21 나. 문중별 파보 발간에 따른 문제점 21 다. 대책 22 1) 대동보체제 족보 발간 23 2) 수록 기준(안) 24 3) 운수당공파의 계대문제 해결로 족보의 흠결 해소 노력 23 4) 시조공의 현양(顯揚) 및 숭조정신 함양 23-2 -
라. 대동보 발간시의 문제점과 대책 24 마. 끝맺음 25 붙임 1. 시조공의 은덕이 기록된 역사서 사료 26 붙임 2. 진양부원군 하공 신도비명 수정 전후 비교표 29 붙임 3. 진양부원군 하공 신도비 음기 내용 정리표 36 붙임 4. 진양부원군 신도비명 내용중 상치부분에 대한 소고 39 <참고> 사료 1-1. 고려역대왕의 직계도 41 사료 1-2. 고려왕조 왕가 계보도-후비포함 42 사료 1-3. 고려왕조 王代表 43 사료 1-4. 고려시대 관직표 45 사료 2-1. 진양부원군 하공 신도비명 Ⅰ<1415년 태종15,영락13> 46 사료 2-2. 진양부원군 하공 신도비명 Ⅱ<1413년 태종13,영락11> 53 사료 3-1. 신도비 음기 <번역문 및 원문> 63 사료4. 문충공 하륜 묘지명 <번역문 및 원문> 67-3 -
머리말 宗史란 우리 조상님들이 이 세상을 살아오시면서 이루신 일 들을 체계적으 로 엮어 후손들이 뿌리를 이해하고 이 세상을 통찰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문중의 역사기록입니다. 근세 이전에는 우리글이 보급되지 않아 선비의 학식을 갖춘 특정의 조상님 들께서만 한문으로 기록을 남기셨기 때문에 다양성과 기록분량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우리 문중은 남명학의 줄기를 이룬 영남의 거족 이라 그나마 다행으로 많은 기록을 전수 받고 있습니다. 현세에 들어 한문기 록을 해득하는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니어서 문중의 문헌을 통해 종사를 탐 구한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닌 것이 현실입니다. 근래에 우리문중에서 조상님 들이 훌륭하게 이루어 놓으신 가문의 전통을 오늘에 다시 되살리려는 노력과 일족간의 돈목정신이 진작되어 종중회의 재 건, 문중의 역사와 문화를 밝혀 정리하고 홍보하는 도록의 발간 및 홈페이지 의 개설, 판윤공 후손 친목회의 결성 모임 등 경향 각지의 친족들이 단합의 힘을 모으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 진주 충의당 대종회에서 대동보의 발간 여부에 대한 각 문중의 의견 제출 요청에 대하여 우리 판윤공파의 의견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우리 문중의 중요 宗史를 문중의 일족들에게 알려드려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 바 람직하다는 문중 어른들의 말씀에 따라 이 책을 편찬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엮는 과정에서 시조공의 구국 충절이 고려조정과 만백성, 그리고 우 리 후손에게 내린 은덕과 조선 태종 때의 명재상 하륜 방조께서 문중을 아 끼는 정성을 느끼게 되어 자긍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종사연구에서 주요사항은 시조공 다음대부터 6세 박사공 윗대 사이의 선조 계대에 있어서 구족보 계대의 모순점에 관한 것입니다. 창주공께서 1605년 창보이후 1621년 하씨세계변을 찬하면서 창보의 원전인 진양부원군신도비에 박사공이 고려 고종때의 선조라는 근거도 없고 수긍도 되지않는 모순 사항에 대하여 소상하게 밝히셨습니다. - 4 -
상술하면 창보시 고려6대(성종)~8대(현종)때 활약한 시조公 (966년추정~ 1011년)과 2세조로 시조공 이후 200년 후인 고려 23대 고종(1213~1259) 때에 벼슬하였다고 진양부원군신도비문에 기록된 박사공을 (2세로)등재하시 면서 그 사이 계대가 절연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麗史에 거듭 기 록된 시조공의 아들 칙충祖와 현손 준祖가 우리의 직파인지 여부가 자상하 지 않아 족보에 올리는 것은 유보하고 우선 박사공을 2세로 올렸으니 후손 들이 박사공을 시조공의 아들로 오인 할 것을 염려하시면서 후손들로 하여 금 박사공 이전의 선조를 밝혀 開創족보의 모순된 계대를 바로 잡을 것을 유훈으로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2세 칙충조와 5세 준조에 대하여는 고려정사에 기록되어 국사의 일부분이 되고 있어 다행히 칙충조는 1719년 기해보부터 2세조로 모심으로써 위 염 려가 부분적으로는 해소되었으나 그러나 200년의 절연기간은 칙충조 1세대 의 보완만으로는 박사공이 시조공의 손자(족보상 3세)로 등재되어 위 절연기 간이 해소 되지 않는 것입니다. 5세祖 준公에 대하여는 아직도 구족보 계대를 고수하여 조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일부 족친이 있어 문헌을 상고한 바 우리 송정공께서 기록하 여 남기신 송정문집에 고려16대 예종이 준조에게 내리신 어필 시가 우리문 중 판윤-송정 종가에서 가보로 전승되어 오다가 임진병란때 소실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사실이 바로 준조가 우리문중의 直祖임에 대한 문헌상의 고증이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창보 선조인 창주공께서 준조를 족보에 올리 지 않은 사유인 직조(直祖)여부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의문점으로 지적될지도 모를 사항은 진양하씨 세계변상 준조의 직함으로 내시주부라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고려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록 이므로 내시위(內侍衛)주부를 약기(略記)한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내시위 주부는 조선시대의 환관이 담당하던 직책이 아니고 고려조 궁중 의 의장(儀狀).儀容을 담당하는 종7품의 직책인 것입니다. 따라서 시조공의 현손 준조가 환관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기우에서 우리 조상으로 족보에 등재 하지 않는다면 이는 완전히 오류인 것입니다. 시조공의 후손은 구국순절공신 의 자손으로서 고려 왕조 대대로 관직등용의 특전을 받아 왔으므로 시조공 의 현손이 환관이 될 필요도 없었으며 행여나 여사하였다면 나라로부터 문 책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일인데 고려조정에서 환관으로 봉직한다는 것은 - 5 -
어불성설에 해당된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창주공께서 내시주부라 고 기록한 시조공의 현손 준조는 우리문중의 5세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준 조를 족보상에 5세조로 모시는 것은 후손으로서 정당하고 당연한 의무입니 다. 1999년 판윤공파가 주도한 기묘보에서 上系 계대를 역사적 사실에 맞게 변 정(辨正)하여 시조공의 현손 준조를 5세조로 올림으로서 송정공께서 족보서 문 말미에서 강조하신 무홀차보(毋忽此譜: 족보의 관리를 소홀히 하지않음따라서 오류를 오류로 방치하지 않음)와 창주공께서 세계변에서 上係 系代 모순점의 변정을 바라는 유훈이 완수되어 비로소 우리종사의 상계 계대가 사실대로 사리에 맞게 정리된 것입니다. 진양하씨 世系辨(창주公 찬) 말미의 유훈 내용 直恐 後人見此譜者 以博士 認爲 平章之子 故聊記一 二 以竢知者 직공 후인견차보자 이박사 인위 평장지자 고료기일 이 이사지자 이 족보를 보는 후손들이 박사공을 시조공의 아들로 인식할까 염려되어 본 세계변에 한,두가지 기록하니 이를 밝혀 알리는 자를 기다린다 깊이 생각해 볼 때 모르고 오류를 범하면 용서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알면서 도 오류를 지속하여 후손에게까지 누를 끼치는 일은 단연코 배제되어야 할 것이므로 본 서를 통하여 이를 강조하고자 합니다. 조상님들의 유업이 현세대를 통하여 후세에 올바르게 전승된다면 우리 당대 의 의무를 조금이나마 이행하는 것이 될 것이므로 일족 여러분께서 이책을 정감을 가지고 읽어보시고 종사에 대하여 다음 세대를 해득시키는 자료로 활용하여 주시면 큰 영광이 되겠습니다. 2012. 12. 시조공 34세손 송정공파 하홍근 근서 - 6 -
1. 계대 연구자료 가. 증문하시랑동평장사 하공진공(河拱辰公) 사적기?~1011, 경종 즉위 전후 ~ 현종 2년 고려 충절신 하공진공(河拱辰公)은 진양하씨(晋陽河氏)의 시조(始祖)이다. 고려 제6대 성종(成宗 13년994)에 압록강 구당사(鴨綠江 勾當使)에 임명(任 命)되었으며 제7대 목종(穆宗)때에는 중낭장(中郎將)으로서 왕의 호위임무를 맡았다. 이어 상서좌사랑중(尙書左司郞中)에 올랐다.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손자 대량원군 순(大良院君 詢)을 삼각산 신혈사 에서 모셔와 제8대 현종(顯宗)으로 옹립하는데 공을 세웠다. 현종은 대량원 군 시절 목종의 모후 천추태후(千秋太后)의 외척인 김치양(金治陽)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자식이 없는 목종이 12세 연하의 당숙인 대량원군으 로 왕위를 잇게 하려 했기 때문이다. 김치양은 천추태후와 사통하여 얻은 자 신의 아들이 목종의 후사가 되도록 하기 위해 대량원군을 죽이려 했던 것이 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목종은 고려의 사직이 타성(他姓)에게 넘어가는 것 을 막기 위해 서북면 도순검사(西北面 都巡檢使) 강조(康兆)를 개경으로 불 러들였다. 하지만 개경에 들어 온 강조는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는데 그치지 않고 목종(穆宗)을 폐한 뒤 살해하였다. 이것이 강조(康兆)의 정변 이다. 고려가 친송(親宋) 정책을 펴는데 불만을 품고 있던 거란족의 요(遼)나라는 고려의 내우를 침공의 빌미로 삼았다. 요나라 성종(聖宗)은 현종 1년1010 신하로서 임금을 죽인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40만 대군을 직접 이끌 고 우리나라에 쳐들어왔다. 이것이 바로 거란의 2차 침공이다 거란군과 대적한 강조는 통주(通州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패배한 뒤 사로 잡혀 죽음을 당했다. 고려의 주력군을 물리친 거란군은 그 기세를 몰아 개경 을 함락하기에 이르렀다. 현종은 남행으로 몽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몽진행 차가 양주 도봉사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 왕의 행재소를 찾아 배알한 하공진 은 거란의 침략 명분이 강조의 시해사건에 있었던 만큼 강조가 이미 사로 잡혀 죽임을 당한 이상 사신을 보내어 화의를 요청하면 반드시 회군할 것입 니다 라며 화의 사신 파견을 상주하였다. 이에 현종은 하공진을 거란 진영 에 보내어 화의를 요청키로 하였다. 고려왕을 추격하여 현종의 행재소와 지척의 거리(자전거로 40분 소요)인 창 화현(昌化縣:현 경기도 양주)까지 도달한 거란의 선봉을 하공진이 화친사의 자격으로 조우하여 능변으로 적들이 추격을 멈추고 되돌아가게 한다. 경각의 - 7 -
위기에서 현종이 살아 남아 후일을 기약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공진은 국왕은 어디에 있느냐 는 요나라 성종의 물음에 강남 수만리 밖으로 떠나서 지금 어디에 계신지 알 수 없다 고 답 하였다. 당시 요나라 군대는 비록 수도 개경은 함락 했지만 곳곳에서 고려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 딪히고 있던 터였다. 성종은 하공진으로부터 국왕이 이미 먼 남쪽지방으로 피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 이상의 추격을 포기하고 철군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하공진공과 호조 원외랑 고영기(高英起)를 인질로 삼아 함께 데리고 갔 다. 인질이 된 하공진공은 요의 성종에게 충성을 바치는 태도를 취했다. 성 종의 환심을 산 하공진은 고영기와 함께 본국이 이미 멸망하였으니 자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점검하고 돌아오겠노라고 청하였다. 물론 탈출을 위한 계교였다. 그동안 보인 거짓 충성심에 하공진을 깊이 신뢰한 요의 성종은 이 를 허락했다. 그러나 고려왕의 환도 소식이 전해지자 마음을 바꿔 하공진에 게 연경(燕京): 현 북경에 살도록 명했다. 첫 계교가 실패하자 하공진은 준마 를 몰래 매입하여 다시 탈출을 도모했으나 발각되고 말았다. 요나라 성종의 직접 신문을 받게 된 하공진은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고려의 신하로서 어찌 두 마음을 품을 수 있느냐 며 너희들을 섬겨 살기 를 원하지 않는다. 고 외쳤다. 성종이 하공진의 기개에 감복하여 갖은 방법으로 마음을 돌려보려고 하였 으나 하공진을 회유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하공진은 간을 꺼내어 씹히는 참 혹한 죽음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현종 2년1011 12월의 일이었다. 현종은 하공진의 구국순절에 대하여 교지를 내려 그 공훈을 찬양하고 아 들 하칙충(河則忠)에게 녹과 관직을 올려주었다. 하공진에 대한 현창은 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제11대 문종文宗 6년1052에는 왕이 거란군 침입 때 하공진은 일신을 나라에 바치기로 작정하고 적진에 직접 들어가 세치의 혀로서 대군을 물리 쳤다 고 치하했다. 이와 함께 문하시랑동평장사로 추증하고 공신각에 하공진 의 영정을 모시도록 했다. 또 아들 하칙충에게 품계를 뛰어 넘어 5품직을 내 렸다. 제16대 예종睿宗 5년1110 9월에는 왕이 재상급 고관들과 천수전(天授 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연극으로 하공진의 업적과 순절을 찬미하자 왕이 감격하여 하공진을 추념한 다음 그의 현손 내시위위內侍衛尉 주부注簿 준濬을 합문지후(閤門祗侯)로 삼고 시(詩)한수를 지어 하사하였다. 이 어필 詩는 판 윤.송정 종손가에서 가보로 전승되어 오다가 임진병란때 소실되었다. 하공진은 세치의 혀로 수십만 대군을 물리쳤으며 그의 장렬한 최후는 오 - 8 -
래도록 살신보국(殺身報國)의 표상이 되었다. 조국을 향한 일편단심은 1.000 년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참고 : 고려통일 대전지(高麗統一大殿誌) 하공진 편] 나. 족보 변천사항(族譜變遷事項) 1) 1416년 진양부원군신도비 음기(陰記) 상의 자손록(子孫錄) 계대(系代) 始祖 河拱辰...博士公 卓回 -탁회子 정재 -정재子 남수 -남수子 昭 -소子 부심 -부심子 식 -식의子 시원(신도비主 윤린공의 親考 -시 원子 진양부원군 하윤린 -정사.좌명공신 의정공 하륜 시조公과 탁회祖 사이는 부자관계를 기록하지 않았으나 탁회祖이하 부터는 부자 관계를 명시하여 기록하였슴 2) 1605년 을사보(乙巳譜) 을사보 족보는 창주공(滄洲松) 하증(河 )선조께서 창보(刱譜)를 하셨고 서문은 송정 河受一 선조께서 찬(撰)하셨다. 족보는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서문에 의해 족보가 처음 만들어 졌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서문을 을사년(1605)에 찬(撰)하셨으므로 을사보라 칭함. (송정문집 p131참조) 3) 1698년 무인 중수보(戊寅 重修譜) 계대(系代) 一世 天 二世 地 始祖 河拱辰 - 卓回 三世 玄 - 挺才 四世 黃 - 南秀 중수(重修)라는 명을 붙인 것으로 보아 1605년에 처음 족보를 만든후 93년 후에 족보를 다시 중수(重修)를 해서 족보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족보는 필사본이며 표지는 진양하씨 족보 무인년 3월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9 - 되어있고
이때 서문은 滄洲公 河 선조께서 1621년에 창변(創辨)하신 진양하씨 세계변을 85자를 빼고 족보서문으로 수록하였다. 진양하씨 세계변은 하증 선조께서 1605년에 乙巳譜를 창보(刱譜)하시면서 박사공의 계대를 2세로 설정함에 대한 문제점들을 지적하여 남기신 문헌이다. 진양 하씨 세계변은 진양지 추록에 수록 되어 있다 4) 1719년 기해보 계대(系代) 一代 二代 三代 四代 始祖 河拱辰 - 河則忠 - 河卓回 - 河挺才 서문은 지명당 하세응선조께서 찬하셨는데 현 시중에서 볼 수 있는 기해 보 복사본에는 창주공께서 찬하신 진양하씨 세계변을 본 기해보의 서문으로 표제를 바꾸어서 달고 있으며, 단지공 하협(河悏)선조의 손자 하형(河 )선조 께서 발문을 지어셨다. 무인중수보(1698)가 발간된 21년 후 족보를 발간 하 였는 데 이때 시조공의 아드님 칙충(則忠)선조를 시조공의 아드님으로 모셨 다. 칙충공이 시조공의 아드님이란 근거는 다음과 같다. 근거(根據) 동국통감 척록(東國通鑑摭錄) 中略-문종6년(1052) 임진 춘3월에 교서를 내려 좌사랑중 하공진은 통화 28년에 있었던 거란병 침입시에 적에 다달라 일신을 망치면서 세치의 혀를 능변으로 능히 대적을 물리쳐 형용을 그려 공신각위에 모심이 가하다 하고 그의 아들 칙충(則忠)을 불러 5품직을 주고 이어서 그 공훈을 기록하고 상서공부시랑의 벼슬을 추증하다. 이 기록을 근거로 하여 칙충공을 시조공의 아드님으로 수록하다. 5) 1999년 판윤공파 파보(判尹公派派譜) 계대(系代) 始祖 二世 三世 四世 五世 河拱辰 - 則忠 - 失諱 - 失諱 - 六世 濬 - 卓回 - - 10 - 七世 挺材
판윤공파보(判尹公派譜)는 1999년에 발간되었는데 계대가 3대가 늘어났다 계대가 3대가 늘어나게 된 이유는 준(濬)선조가 시조공의 현손이라는 사서 (史書)에 근거하여 준(濬)선조를 시조공의 현손으로 모신 것이다. 사서 내 용은 다음과 같다. 근거 사서(史書) (1) 고려사 척록(高麗史摭錄) 994년(성종 13년甲午)에 이승건을 압강도 구당사로 삼았다가 얼마 뒤에 하공 진을 보내어 교체하다. 1009년(목종 12년己酉)에 친종장군 유방, 중랑장 유 종, 탁사정, 하공진으로 근전문을 늘 지키게 하다. 1010년(현종 원년경술) 5월에 상서 좌사랑중 하공진과 화주 방어중 유종을 원도로 귀양 보내다 공진이 동 여진을 치다가 패함을 보고 유종이 한탄하더 니 조금 뒤에 여진족 95명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매 유종이 모두 살해한 연고 로 함께 귀양살이를 하다. 12월 계해에 하공진과 유종을 불러 돌아오게 하 고 그 벼슬을 도로 주다 임신에 왕이 후비와 더불어 거란병을 피하여 남으 로 거동 할 새 갑술일에 양주에 도달하여 공진과 호부 원외랑 고영기에게 표상을 받들어 거란 진영으로 화의를 청하다 1011년(현종 2년辛亥) 12월 기 유일에 거란이 하공진을 살하다. 1110년(예종 5년庚寅 )9월 갑술일에 왕이 여려 재상과 천수전에서 연회를 하드니 날이 밝아서야 파했는데 왕이 시를 지어 유신에게 명하여 화답게 하 더니 우인이 있어 선대 공신 하공진을 기려 층미 있는 놀이를 하니 왕이 그 충혼을 추모하여 그 현손 내시위 주부 濬을 합문지후로 삼고 연이어 절 구 시 한수를 지어 하사하다 (2) 동국통감 척록(東國通鑑摭錄國譯) 中略睿宗 庚寅五年 九月 甲戌 王宴諸宰樞于天授殿 達曙乃罷 王賦詩 命儒臣和進 有優人 因戱稱美先代功臣河拱辰 王追念其功 以其玄孫內侍衛主簿濬 爲閤門祗 - 11 -
後 仍製詩一絶賜之 - 中略 중략예종 경인 5년(1110) 9월 갑술 왕이 천수전에서 여러 중신(重臣)들과 연회 를 베풀었는데 새벽이 되어서야 파 하였다. 왕이 詩를 지어 유신(儒臣)들에 게 화답시(和答詩)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어떤 광대가 선대 공신 하공진을 찬미하는 연극을 하였는데 王이 하공진의 공적을 추념하였다. 그 현손(玄孫) 인 내시위주부(內侍衛注簿) 준(濬)을 합문지후(閤門祗侯)로 삼았고 인하여 (詩) 일절(一絶)을 지어 하사(下賜)하였다. (3) 고려사절요 경인 5년(1110) 因戲稱羔先代功臣河拱辰 王追念其功 以其玄孫 衛尉注簿 濬 爲閣門祗候 인희칭고선대공신하공진 왕추념기공 이기현손 위위주부 준 위각문지후 仍製詩賜之 잉제시사지 연극으로써 선대의 공신 하공진(河拱辰)을 칭찬하니,왕은 그 공을 추념하여 그의 현손 위위주부 준을 합문지후로 삼고 시를 지어 하사하였다. 준(濬)선조는 위와 같이 사서(史書)에 명시되어 있는 근거에 의해 1999년 판 윤공파보 보사시 준(濬)선조를 시조공의 현손으로 모신 것이다. 다. 탁회(卓回)선조 관련 문헌 사문박사 탁회公은 고려 23대왕 고종조(1213~1259)때에 벼슬을 하셨다 는 기록이 하륜 의정공께서 세운 진양부원군 신도비와 증헌납군시서에 수록 되어 있다. 시조공께서 辛亥年(1011)에 구국순절 하셨고. 탁회조가 시조공의 아들로써 고려 고종조에 벼슬을 하셨다면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년수가 200 여년 차이가 난다. 을사보 창보시에 시조공이신 아버지와 2세조로 계대한 탁회조간의 사이에 200여년 차이가 나는데 이 내용은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할 것이다. - 12 -
1) 증 종형 헌납군 시서(贈宗兄獻納君詩序) 우리 조상은 대대로 진양(晋陽)의 사족(士族)이었다. 진양은 삼한시대(三 韓時代)에는 진한(辰韓)에 예속(隸屬)되었고,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신라 (新羅)에 예속되었다. 고려(高麗)시대에 가서 신라를 통합하였는데, 우리 좌사랑중공(左司郞中公)이 현왕(顯王)의 조정에 공이 있어 증문하시랑동평 장사(贈門下侍郞同平章事)를 증직(贈職)하였고 그 뒤에 사문박사공(四門博 士公)이 고왕(高王)의 조정에 벼슬하였는데, 당시에 바야흐로 난리가 많음 으로 어버이의 늙음을 빙자하여 벼슬을 내놓고 시골로 돌아가 그 아들과 손 자를 가르쳐서 대대로 과거에 올랐다. 그 끝 손자의 증손은 우리 증조인 진원군공(晋原君公)이요, 그 둘째 손자의 증손은 헌납군의 증조인 천남처사(川南處士)이다. 대대로 같은 시골 에서 살며 아침저녁으로 왕래하고 출입할 때 서로 기다리고, 환란이 있으면 서로 구원하며 농사짓고 글 읽는 즐거움을 같이 하고 명절 때에 어울려 놀 며 친애(親愛)함이 돈독하여 촌수가 멀다 해도 조금도 덜하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에 헌납군이 나보다 아홉 살이 많아 먼저 향교에 들어갔고 내 나이 열다섯에 비로소 향교에 가서 같이 글도 읽고 시도 지은 지 5년 만 에 뜻밖에 내가 먼저 급제하고 헌납군은 학업에 더욱 진력하여 그 뒤 12년 만에 높은 과거에 뽑혀 성균관(成均館)에 벼슬하다가 갑자기 예관(禮官)으 로 옮기고 다시 나가 군수가 되었는데 백성에게 은혜로운 정사를 한 점을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벼슬을 내놓고 한가히 산수 사이에 있는 지 수십년 만에 조정의 공론이 노성한 사람으로 존중히 여기어 과관(課官)으로 천거하 니 헌납군이 70여세가 되었지만 정신과 기운이 조금도 쇠하지 않아서 조정 에 들어올 적에 긴 눈섭과 흰머리로 화락하게 나아가고 물러가니,주상은 예 로 대우하고 조정의 백관 들은 우러러 쳐다보았다. 거룩한 조정에 빛을 내 는 것이 적지 않았다. 여러 사대부들 중에 안면이 있는 사람은 시詩를 지어 축하하니 좌정승 이곡선생(移谷先生)이 동년생(同年生)이다. 하며 극진한 예로써 대우하고 그 시에 화답해 주었다. 헌납군이 나에게 그 책 위에 서문 을 써 달라 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옛날 사람이 재상을 팔 다리라 하고, 간 관을 이목(耳目)이라고 하였다, 팔다리와 이목이 비록 크고 작은 차이는 있 으나 원수(元首)의 한 몸이 된 것은 같으니 어떤 것은 중(重)하고 어떤 것 은 경(輕)하다 할 수 없다.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임금이 알아줌을 입어서 간관이 되었다면 또한 잘 만났다고 아니할 수 없다. 나는 재주도 없이 공연 - 13 -
히 정승(政丞)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헌납군은 임금의 부름을 받아 간관이 되었으니 이것이 모두 조상들이 덕을 쌓고 어진 일을 행한 음덕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발현(發顯)된 것이 아니겠는가. 팔다리의 책임은 내가 참으로 부 끄러움이 많지만 이목의 책임은 그대가 잘해야 한다. 하였다. 헌납군은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나 이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감히 힘 을 다하여 우리 조상에게 욕을 돌아가지 않게 할 생각을 안 할 수 있겠는 가. 하였다. 내가 듣고서 기뻐서 그 말을 서문(序文)으로 쓴다. 註 문충공(휘 崙)이 종형 득부得浮를 위해 지은 시의 서문이다. 동문선에 실려 있다. 헌납군은 조선시대 사간원司諫院 정 오품 벼슬을 말하며 태종 때1407 70세의 나이로 임금의 부름을 받아 간관이 된 것을 적은 글이다. 헌납군의 증조부는 천남 처사이며, 사문박사(卓回)의 끝 손자가 진원군(晋原君) 湜선조의 증조이시다. 문충공보다 연령이 9살 많다. (원문) 贈宗兄獻納君詩序 <河崙 撰> 吾祖宗世爲晋之士族晋在三韓時隷辰韓及三國時隷新羅至高麗氏合新羅吾 左司郞中公有功顯王朝贈門下侍郞同平章事其後四門博士公仕高王朝時方 多難以親老乞免還鄕敎養子若孫連世登第季孫之曾孫則吾曾祖晋原君公仲 孫之曾孫則獻納君之曾祖川南處士公世居一鄕晨夕徃還出入相俟患難相救 農圃圖書之同樂歲特伏臘之與游親愛之篤不以世疎而小殺矣予少日獻納君 長我九年先我在鄕校予年十五而始赴校與之講習唱和者五年予不意濫先登 第獻納君學益進後十二年而捷高科入仕成均驟遷禮官出爲郡寄人稱有惠政 官罷官閑以山水自娛者數十年廷議重老成擧以爲諫官獻納君年餘七十神氣 不小衰及其來朝厖眉皓首進退雍容主上禮貌廷臣聳觀其爲盛朝之賁飾不爲 小矣諸大夫士有舊者爲詩以賀之左政丞移谷先生公謂曰同年生待以優禮和 其詩爲贈獻納君請予序其卷端予曰古之人謂宰相爲股肱諫官爲耳目股肱耳 目雖有大小之殊然其爲元首之一體則同不可以輕重言也士生斯世見知於人 主而得爲諫官亦不爲不遇矣予以不才承乏相職而獻納君彼徵爲諫官豈非祖 宗積累之厚而發於吾二人也哉股肱之責則予實有愧矣耳目之責君其勉之獻 納君曰予老矣苟一息之尙存則敢不盡力以無忝我祖宗爲念哉予聞耳喜之書 以爲序 - 14 -
2) 진양하씨 세계변(世係辨) 하씨가 진주의 대성으로서 그 근본은 동일하되 파별이 삼분되니 그 일은 고려 증 문하시랑중서평장사 휘 공진(拱辰)공 이시니 즉 우리의 소자출이 라 역년이 오래되어 자손이 번성하나 병화 뒤에 보첩을 보전치 못하니 오 호라 한 자손으로서 마침내 도인같이 서로 알지 못하게 된다면 어찌 크게 슬프지 아니 하리오 내 이것이 두려워 부지런히 가첩을 구하다가 다행이 이상사(李上舍) 명 덕(明悳)씨 집에서 한권을 얻으니 즉 우리 성족 하여관 河汝灌의 소장한 바라 공경하고 중애하여 견문을 참고삼아 내외 지유를 열기하야 고쳐 일본 을 선사(線寫)하니 길이 가중의 보물이 될 지라 한번 피람(被覽)하면 선대 의 소목분파를 역역히 알게 되니 이 또한 다행치 않으리요? 그러나 세대가 오인되어 의심됨을 그대로 전하지 못하겠기에 변명치 알 수 없는 바라 평장공의 아드님이 탁회 라 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니 변춘정이 지은 진산부원군 윤린(允潾) 신도비에 왈 선세 좌사랑중 휘 공진공이 유공 현왕조 하야 증 문하시랑중서평장사하고 사문박사 휘 탁회 사 고왕조 하다 가 이 친노로 환향이라 하였으니 이를 본다면 평장공은 현종 때요 박사공 은 고종 때니 왕실 13세에 년 수는 200년이 지났으니 박사공이 평장공의 아드님이란 고증이 잘못되었고 또 려사에 현종이 교서를 내려 공신을 기록 할 때 평장공의 아드님 칙충에게 록자를 더하고 문종6년에 또 칙충에게 5 품직을 주었다. 예종5년 우인 금지 비우이 연극으로서 선대 공신 하공진을 칭미하더니 그 공로를 생각하여 현손 내시주부 준濬으로 합문지후로 삼았다하니 이를 본 다면 박사가 칙충과 지후에 직파인지 아닌지는 자상치 않으나 세대가 절연 함은 틀림이 없는 바요 1522년(중종17년, 가정 초년)에 조趙 단성 응경(應 卿)씨가 또한 河家 외예로서 정성을 다 하야 글을 모아서 진양 4대성 족보 를 만드니 3하 4강 10정의 분간이 절연명비라 진주 향사청에 장치하니 마 땅히 상고하여 여온이 없는 터이나 성산 이순(李淳)씨가 내외 족보를 수집 하면서 하씨 내 파중에 탁회로서 칙충의 개명이라고 진주 향사당에서 얻었 다하니 저어하건대 조 단성의 사대성 족보도 고증이 완전치 못 한 바라 또 한 살피건대 려사 의종조에 박사공의 아드님 정재(挺才)공께서 십운시로 장원 되었으니 의종부터 아래로 고종조까지 4대를 지나 7. 8십년이라 어찌 박사공이 70~ 80년 후에 면관하고 아드님이 7. 8십년 전에 장원 할 수 있 겠는가? - 15 -
그렇다면 박사공이 고종조에 벼슬했다는 것은 려사에 나타나지 않았고 또 한 춘정이 어디에 근거한바 되어 말했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대저 세대가 절원하고 화하여 박사공 이상으로 평장공 이하에 궐루되고 산실된 것은 고거 할 수 없는지라 고로 하 승지 락洛이 선대 비문을 지을 새 또한 평장공으로 부터 3. 4대를 지나서 박사공에 이르다 하였으나 이로 서 본다면 어찌 3. 4대 뿐 이리요 후인이 이 족보를 보고 박사공을 평장공 의 아드님으로 오인 할 가 저어하여 애오라지 한두 가지 증거를 기록하여 서 아는 자를 기다리노라 서기1621년 8월 상한 박사 16세손 진사 하증 근지 2. 대동보 발간에 대하여 가. 족보 현황 1) 족보 발간 연혁 가) 1592년 임진왜란 이전 : 족보가 있었으나 임진 병란으로 소실 (1) 송정공께서 찬하신 진양하씨 족보서문에서 족보가 이전부터 있었으나 임진병란때 소실되었다고 기록하셨으며 창주공께서도 하씨세계변에서 임란중에 보첩을 보전하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음. 송정공께서 창주 공이 성보한 임란후 첫 족보인 을사보 서문을 1605년 찬하시면서 족보를 소중히 관리할 것(勿忽此譜)을 후손에게 유훈으로 남기고 있슴. (2) 송정공문집중-어필 모신 쌍 장자와 가훈 적은 두 병풍(御題雙障子 家訓 兩屛風)이 임진병란중 소실된 것은 관리상의 불비에 기인한 것으로 자책하 는 심경을 시문으로 남기셨음. 위 족보관련 (1)항의 족보서문과 (2)항의 가보 소실을 안타까워하는 기 록을 보면 족보와 예종이 하사한 어필이 판윤.송정종가에서 전승되고 있었 으나 임란중 소실되었음을 알 수 있음 (본자료 25쪽하단~26쪽상단 송정문집/춘일회구거春日懷舊居 참조) 나) 1605년 창주공 성보-을사보 (1) 1세 시조공 : 문하시랑 동평장사공 휘 하공진 (2) 2세조 : 고려 고종조 사문박사 하탁회 - 16 -
(근거) 진양부원군 신도비문 (영락13년 수정본) : 四門博士諱卓回 仕高王朝 以親老 免官還鄕 사문박사휘탁회 사고왕조 이친노 면관환향 비문에서 박사공은 학사공을 낳고 학사공은 남수공을 낳고...상계의 부자 관계를 명시하고 있으나 시조공과 박사공간의 父子 출생관계 如否는 기록하지 않고 있슴 (3) 하씨세계변에서 박사공을 시조공의 아들로 계대함은 사리에 맞지 않 으므로 고증을 찾아 계대를 시정할 것을 후손에게 유훈으로 남기셨음. (4) 창주공께서 1621년에 창보하셨다고 기록하기도 하나 1605년에 이미 성보하여 송정공께 보여드려 송정공께서 서문을 찬하셧고 동 족보는 현재 서문만 실존함. 기록상 창주공 성보연대는 1605년(을사년)으로 그 슬러 올라가므로 족보의 명칭을 乙巳譜로 하기로 2011.1.8일 시조공 기제사 봉행후 개최한 대종회 고문회의에서 결정. 다) 1698년 무인중수보 -필사본 라) 1차간행 : 1719년 기해보 (1)칙충공을 각문중 족보에서 2세조로 계대한 문중이 많고 고려사 역사서에 의거 시조공 2세로 계대함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여 기해보에 올림. 고려8대 현종16년(1025년)과 문종6년(1052년)에 시조공의 공훈을 기려 아들인 칙충공에게 벼슬을 올려준 사실이 역사서의 기록에 나옴. (2) 운수당공파는 시조공의 후손이기는 하나 중간파분이 실전되어 족보 하 편 끝에 적음. 마) 2차간행 : 1770년 경인보(단목에서 발문을 담, 1774년 하한통 봉사손) 바) 3차간행 : 1820년 경진보 사) 4차간행 : 1900년 경자보 (낙수암에서 중간) 아) 5차간행 : 1936년 병자보 자) 6차간행 : 1965년 을사보 (사곡 하종근 종손 서문) 차) 7차간행 : 1999년 기묘보 (판윤공 파보-신족보계대로 변정) (1) 정보화시대가 열림으로써 옛문헌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됨에따라 기묘 보사시 고려正史에 기록된 시조공의 현손 준조를 5세로 계대하여 모심.. - 17 -
합문지후공 준祖를 5세로 계대함에 따라 3세와 4세는 고증을 찾지못하여 3세(실휘), 4세(실휘)로 계대하여 신계대를 채용함. 그러나 종전의 구계대 고수 문중에서는 문중별 독자 파보를 만듦으로써 판윤공파의 신계대와 종 전의 구계대로 계대체제가 2원화되고 종전의 대동보에서 각 문중별 독자 파보로 분리됨. (2) 1999년 이후 창주공파, 죽헌공파, 단지공파 등이 문중 파보 독자 발간 (3) 신계대와 구계대의 중요 차이점 계대 구 계대 신 계대 2세 3세 4세 5세 6세 비 칙충 탁회 정재 남수 소 칙충 실휘 실휘 준 탁회 고 300년전 첫간행 기해보 체제 고수 史書에 근거 구족보에 누락된 상 계 3대조를 3세~5세로 올려 변정 (4)운수당의 5대손 진영공의 묘역에서 매비(埋碑)가 발견되어 하륜정승의 서자인 상호군 휘 영이 동 문중의 직조로 고증되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운수당의 조고인 산음현감공 휘 순을 上記 상호군 휘 영의 子로 등재하고 운수당은 시조공 18세로 계대함으로써 비로소 혈족간의 소목관계를 밝힐 수 있게 됨. 운수당공파중 안린을 중시조로 하는 세보파에서 위 내용에 대하여 수정 요구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대법원 상고심에서 족보수록과 관련하여 법적 보호의 대상이 되는 신분상. 재산상의 사건이 아니므로 소송제기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명예훼손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시하여 상고를 기각하고 원 고 패소 원심을 확정 2) 문중 상계 생몰 연대 재구성(추산 ) 고려왕조 王家 우리문중 系代 휘 수명 王代數(直系) 1 시조 966 1011 45 6~7 2 칙충 995 1052 57 3 (칙충의 자) 실휘 1030 1074 44 4 ( 손자) 실휘 1060 1112 52 5 ( 증손) 준 1080 1137 57 재세기간 왕조 재세 기간 수명 성종 960 997 37 목종 980 1009 29 8 현종 992 1031 39 11(현종의 자) 문종 1019 1083 64 14( 증손) 헌종 1084 1097 13 15( 손자) 16( 증손) 숙종 예종 1054 1079 1105 1122 51 43-18 -
고려왕조 王家 우리문중 系代 휘 재세기간 수명 王代數(直系) 현손) 탁회 1106 1180 74 17( 현종 5대손) 정재 1135 1187 52 8 ( 6대손) 남수 1171 1223 9 ( 7대손) 소 1196 1248 10( 8대손) 부심 1226 11( 9대손) 식 12( 10대손) 6 (칙충의 7 ( 왕조 재세 기간 수명 현손) 인종 1109 1146 19( 5대손) 명종 1131 1202 22( 6대손) 강종 1152 1213 61 52 23( 7대손) 고종 1192 1259 67 1278 52 24( 8대손) 원종 1219 1274 55 1250 1302 52 25( 9대손) 1236 1308 72 시원 1285 1327 42 26( 1 0대손) 1275 1325 50 평균 53.3 55.5 52 충렬 왕 충선 왕 평균 37 71 참고) 사료1-1) 고려역대왕 직계도 참조 가) 상계선조 생몰년도 재구성표의 검토 및 宗史상 시사 점 (1) 시조공과 진강부원군 휘 시원공의 몰년은 역사서와 신도비에 의해 고증 (2) 위 우리문중 직계 선조 연대 추산표는 고려의 직계 기준 역대 왕의 연 대표와 비교 할 때 유사성을 확보하고 있으므로 역사적 실 사례에 근접 한 것임 시조공께서 순절한 현종2년 1011년에 현종은 19세(1009년 17세에 등 극), 칙충공은 16세 (시조공 순절 45세 추정-득남 29세 추정=칙충공 16 세 추정)로 현종과 칙충공은 연령대가 비슷한 동시대인으로 추정됨. 준祖는 역사기록에 의거 시조공의 현손이므로 칙충공의 증손이고 예종도 현종의 증손이므로 위표에서 양인의 재세시기가 비슷한 것은 사실적임. 위표는 직계기준으로 작성된 것이며 예종이 준조에게 하사한 어필이 판 윤-송정공파 종가에서 가전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준祖가 우리종중의 직계 선조라는 증거가 됨. 본 종사연구자료 (붙임 1) 25쪽하단~26쪽상단 참조 역사서에서 준祖가 시조공의 현손이라는 기록은 부정할 근거가 없음 (3) 위 상계 재세기간에 대한 추산표는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1대 (다음세대 출생시 까지의 기간)는 30년을 통일적으로 적용한다면 누구나 큰 차이 없이 작성할 수 있을 것임 - 19 -
(4) 시조공 탄생시로부터 12세 시원공 몰년까지 361년을 12대로 나누면 1 세대 평균기간은 30.1년이므로 현실적으로 선조 12세대가 재세하였다는 것은 합리성이 있고, 시원공의 몰년은 고증된 것이므로 시조공의 생년을 서기 966년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무리가 없음 시조공의 탄생연도는 고려 조정에서의 지위와 역할을 감안하여 졸년인 1011년에서 45세를 차감하여 추정한 것임. (5) 헌종1년 1095년 시조공(顯廟功臣 河拱辰)의 자손 1인 등사 허용 시조공4세 (실휘)의 재세시대로 추정되는 시기 (1060년~1112년)의 보훈 조치 이므로 4世祖(실휘)의 실존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슴. 판윤종가 (중심) 평균수명 계산 비고 족보 계대 휘 생년 졸년 수명(세) 13 윤린 1321 1380 59 종파 14 륜 1347 1416 69 15 지돈 1365 1427 62 판윤공파 18 운수당 윤 1452 1500 48 운수당공파 19 희서 1501 1570 69 판윤공파 20 면 1537 1580 43 이하 상동 21 수일 1553 1612 59 22 완 1588 1617 29 24 억 1626 1658 32 25 세희 1647 1686 39 26 윤청 1697 1743 46 27 달중 1723 1799 76 28 경태 1747 1781 34 29 우현 1768 1799 31 30 봉운 1790 1843 53 31 재후 1809 1872 63 32 우진 1834 1872 38 33 영규 1871 1926 55 34 종근 1891 1974 83 평균수명 53.3 22대 선조는 30세 이전에 조서하여 대상에서 제외 - 20 -
나) 상계 生歿연도 재구성(추정) 근거 계 대 휘 생년 몰년 수명 子출생時 父歿時 연령 연령 역사서,기록고증 1 2 3 시조 칙충 실휘 966 1011 995 1052 1030 1074 45 57 44 29 35 30 16 22 4 실휘 1060 1112 52 20 14 5 준 1080 1137 57 26 32 예종1110년 위위시(衛尉寺) 주부 (종7품) 합문지후(정7품), 비교적 하위직으로 30세 추정 몰년 1011년을 45세로 추정 문종1052년 상서공부시랑 미상 헌종(獻宗) 1년 1095년 十一月, 顯 廟功臣河拱辰 許其子孫一人 入仕 6 탁회 1106 1180 74 29 31 인종(1122~1146)시 문과급제,四門 박사(정8품).30세때 준祖56세로 以 親老免官還鄕 기록과 일치. 1126 년 :이자겸의난, 1135년 :묘청의난 사회혼란시기. 7 정재 1135 1187 52 36 45 의종5년1151년 십운시 장원,한림 원학사,.무신정권시대(1170년의종 24~1270 원종11) 8 남수 1171 1223 52 25 16 9 소 1196 1248 52 30 27 10 부심 1226 1278 52 24 22 11 식 1250 1302 52 35 28 12 시원 1285 1327 42 36 17 53.3 29.6 25.4 평균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군기소윤(軍器小尹). 몽고의 내 침(1231~1254년) 고려24대 원종 (1259년~1274년). 몽고침입시대.벼슬하지 않음 선관서승(膳官署丞).고려25대 충렬 왕(1274년~1308년) 조서하였으므로 생년은 歿年에서 42세를 차감하여 추정. 충선왕 복 위년(1308년) 식목록사. (주) 2세祖~12세祖 간의 평균 나. 문중별 파보 발간에 따른 문제점 1) 대종내 각 문중 파보에서 상계3대의 계대를 통일하지 못함에 따라 족보 계대가 2원화되어 혼란을 일으키고 있음. 2) 파보체계로 분리 발간함에 따라 타문중의 혈족에 대하여 소외감 우려 3) 구족보 체계에서의 문제점 가) 1719년 기해보 발간시 족보등재 기준 적용의 미흡: 시조공의 아들 칙충공은 족보에 2세로 정당하게 모셔졌으므로 역사서 내용을 고증으로 인정한 것이되므로 시조공의 현손 합문지후공 휘 준祖 - 21 -
역시 고려정사 내용을 고증으로하여 5세조로 모셔야 함이 타당하나 누락 되고 있음. 호군공의 발문에서 창주공의 하씨세계변을 존중하여 서문으로 올렸는바 창주공세계변에서 환성재공께서 시조공으로부터 3~4대를 지나 박사공 이라고 하신 것을 그 이상 (4대 이상)도 지나 박사공에 이를 수 있다고도 하셨는데 시조공으로부터 4대이면 현손인바 역사서에서 시조공의 현손으로 준祖를 기록하고 있으며 준祖를 지나 그 다음대인 6세조가 박사공이라고 하는 것에는 의문점을 찾을 수 없는 것이고 이는 환성재공, 창주공, 호군공 께서 지적한 론지와도 일치하는 것임. 나) 운수당공파의 계대문제를 밝히지 못하여 혈족이면서 소목관계를 알수 없는 부지소종래 不知所從來의 불명예 흠결을 우리족보에 안겨주고 있음. 다. 대책 1) 대동보체제 족보 발간 가) 대동보 발간은 각문중을 망라하는 사업이므로 각 문중의 합의하에 발간 함이 필수적임 나) 족보 수록 기준을 설정하여 엄격 적용하고 기준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수록 배제 2) 수록 기준(안) 가) 역사서에 수록된 사항은 고증으로 인정하여 반영 나) 역사서 이외 비문이나 문집에 수록된 기록은 해당문중의 해석을 거쳐 대종회의 의견을 참고함. 다) 기존 족보 내용중 오류가 발견되면 수정 - 선대로부터 시작된 오류가 대대로 후손에게 전승되는 것을 척결하고 문 중의 올바른 역사를 후손에게 전해 주어야 함. -우리족보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진양부원군 신도비에서 원문이나 번역문중 오류사항을 확정하여 동 변정내용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함. 오류내용이 신도비문과 음기를 찬한 변춘정과 윤회, 또는 기타 참여자 등의 이해부족 또는 단순한 착오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으므로 오류를 포함한 그대로의 비문을 금과옥조로 취급할 것 까지는 없는 것임. - 22 -
3) 운수당공파의 계대문제 해결로 족보의 흠결 해소 노력 가) 시조공의 후손이라면 혈족내에서 양자를 주고 받는 것은 미덕이며, 큰 집. 작은집의 조상을 구별함이 없이 같은 조상으로 숭조관념을 가져야 함이 마땅. 나) 문제해결(안) 운수당공파중 통합보파는 운수당의 아들 휘 취굉공을 하륜정승공의 2남 상호군 휘 영公의 양현손(養玄孫)으로 입적하여 가칭 상호군공파로하고 시조공19세로 함 다) 고증이 밝혀지면 동 고증에 따라 확정. 4) 시조공의 현양(顯揚) 및 숭조정신 함양 시조공의 충절은 만인의 추앙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려조에는 그 공 훈이 대대로 자손에 미쳐 후손이 입은 은덕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음. 따라서 족보에 시조공을 현양하여 족보와 우리문중의 위상을 제고하여야 할 것이며 조상에 대한 숭조사업을 대대로 계승하여 나가야 할 것임. 시조공께서 후손에 남기신 은덕 (붙임 1. 시조공의 은덕 수록 史書 참조 ) 1) 고려 8대 현종 16년 1025년 시조공의 구국충절에 대한 훈공으로 아들 칙충공에게 록과 관직을 올려줌 2) 고려 11대 문종 6년 (1052년) 시조공을 문하시랑 동평장사공으로 추증하고 공신각에 영정을 모심과 아들 칙충에게 5품직을 제수함. 3) 고려 14대 헌종 1년 1095년 현종조 공신 하공진의 자손1인의 등용을 허락함-4세공(실휘)를 위한 보훈임 4) 고려 16대 예종5년 (1110년) 왕이 천수전 연회후 시조공을 추념하고 현손 하준에게 위위시(衛尉寺) 주부직에서 합문지후직을 제수하고 시 한수를 지어 하사함. 예종이 합문지후公 준祖에게 하사한 어필 시는 판윤.송정공파 종가에서 쌍장자로 모셔져 가보로 전승되어왔는데 임진병란때 소실됨. 5) 고려 26대 충선왕 복위년(1308년) - 23 -
시조공의 내외 현손의 현손(즉10대후손)에게 전례에 따라 벼슬길을 열어줌(관직등용) -12세조 휘 시원공(1285~1327)의 재세시대로 진양부원군신도비에 공 은 식목록사(정8품)로 기록됨 6) 고려 27대 충숙왕 12년 (1325년) 역대공신의 공을 기려 그 후손들을 기존제도에 따라 음직으로 등용. 7) 고려 31대 공민왕 5년 (1356년) 역대 공신의 자손을 특별히 등용하여 우대함 (시조공13세 휘 윤린공 시기) 우리문증은 구국충절신의 후손가로서 고려 8대 현종 이후 王家직계 15代 중 7대의 왕으로부터 시조공에 대한 보훈으로 후손선조들이 관직등용의 우대를 받음. 라. 대동보 발간시의 문제점과 대책 1) 문제점 가) 최근 파보를 1999년 이후에 발간한 문중의 경우 1세대기간(30년)이 경 과하지 않아 현실적으로 신족보 발간에 대한 호응을 얻기가 쉽지 않음. 나) 대동보의 경우 각 문중의 수단을 취합하여야하므로 책의 분량이 방대하 여 발간 및 배포가 용이 하지 않을 것임 2) 대책 가) 각 파별 파보 독자 발간은 자제를 요쳥하고 문중별로 족보수요를 파악 하여 발간 여부를 결정. 나) 대동보의 각권을 문중별로 구분하여 제책함으로써<(예) 판윤공 문중:1 권~8권, 송강공 문중: 9권~ㅇ권,.>각 문중단위 권별 수요를 파악하여 발간 및 배포 구 분 문제점 대 책 대동보 소요 여부 현 족보가 1999년 이후에 발간 문중별로 족보 수요를 파악하여 된 문중의 경우 소요기간 (약30 발간여부 결정 년) 미경과 대동보 분량 방대 각문중의 수단 분량의 방대함으 문중별로 제책하여 문중별 권별 로 발간 및 배포의 어려움 수요를 파악하여 발간 및 배포 - 24 -
마. 끝맺음 족보는 직계 혈족과 방계혈족의 소목관계를 보여줌으로써 시조공으로부터 내려오는 같은 자손이라는 관념으로 돈목과 단결, 숭조정신을 함양시켜주고 있슴. 문중의 역사서인 족보를 올바르게 기록함으로써 후손들이 조상의 뿌리를 올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조상에 대한 도리이며 후손에 대한 책무임. 후손들이 현재의 위치와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을 얻는데 있어 바르지 못 한 역사서를 전승함으로 인하여 오도된 길로 인도하여서는 안되기 때문임. 과거사에서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일시적 의견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 나 그 시대에서 보편 타당성이 있으며 합리성이 부여 되어 있다면 과거나 지금이나 판단의 기준은 동일 할 것이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그 가능성을 검 토하고 의견의 차이를 해소하는데 노력을 하여야 할 것임. 종중회의 주요한 역할이 선조先祖의 유업을 계승하여 충효와 돈목,상조를 장 려하는 것이라면 후손이 선대의 실전失傳을 찾아 그 조상을 밝히고 혈족간 의 소목관계를 잇는 일에 적극 지원하여야 할 것임. 뿐만아니라 우리문중에 서 시조공 다음으로 문세門勢를 일으킨 하륜방조의 혈손을 찾아드리는 일에 도 역점을 두어야 함.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섭리에 의해 종중의 결속이 이 루어지는 것이므로 자식이 부모를 찾아 가는 일, 나아가 후손이 조상을 찾는 일을 권장하고 지원함이 마땅할 뿐만 아니라 우리종종회의 주요 현안사항 중의 하나로 하여야 함. 족보의 발간이 당위론적으로 필요하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부담감의 저항 이 더 크게 느껴지는 상황이라면 이 또한 신중히 판단하여야 함. 현실적으로 비용과 그 부담을 감수하려는 의사 여부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임. 따라서 대동보의 발간은 전 문중의 합의하에 추진되어야 함. 요약하면 올바른 역사를 족보에 수록하되 전 문중의 합의하에 시의에 맞게 대동보가 발간되어야 한다는 것임. <집필자 : 판윤.송정공파 하홍근 > - 25 -
(붙임1) 시조공의 은덕이 기록된 역사서 사료 1. 고려사절요 1) 제3권 현종 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16년 을축(1025) - 6월에 교하기를, 강민첨(姜民瞻)과 하공진(河拱辰)의 공로가 모두 현 저한데도 포상이 후하지 못하였으니 각기 그 아들에게 벼슬을 올려주 라." 하였다. 본문(本文) - 六月 敎曰 姜民瞻 河拱辰 功勞俱著 旌賞未優 各加官其子 2) 제4권 문종 인효대왕 1(文宗仁孝大王一) 임진 6년(1052) - 5월에 제하기를, 좌사낭중 하공진(河拱辰)은 통화 28년에 거란 군사가 입하자 적과 맞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뛰어난 말솜씨로 능히 많은 군사들을 물리쳤으니, 그 형상을 공신각에 그려 붙이고 그 아들 칙충 (則忠)은 계급을 뛰어넘어 5품직을 제수하라." 하였다 -8월에 제하여 한식(韓式)ㆍ문질우(文質牛)등이 성고(聖考)께서 남순(南 巡)하실 때에 호종한 공이 있었다 하여 아울러 좌우위 상장군을 추증하 다. 본문(本文) - 五月 制曰 檢校太師 內史令崔士威 在聖考朝 以淸節直道 屢 有裨益 弘濟艱難 保安宗社 以致中興 可配享廟庭 其甥姪未官 者,超授八品職 左司郞河拱辰 在統和二十八年 丹兵入侵 臨敵 忘身 掉三寸舌 能却大兵 可圖形閣上 超授其子則忠 五品職 - 八月 制以韓式 文質牛 奇理 金悅等 於聖考南巡 扈從有功 竝追贈左右衛上將軍 3) 제6권 헌종 공상대왕(獻宗恭殤大王) 을해 1년(1095) - 현종조 공신 하공진의 자손1인의 등용을 허락하다 본문(本文) - 26 -
- 十一月, 顯廟功臣 河拱辰 將軍宋國華 及庚戌年 如契丹 見留 使副 許其子孫 一人 入仕 시조공 4세(실휘) 재세 (1060~1112추정) 시기에 고려14대 헌종(獻宗 1084 1097)의 관직 허용은 4세公의 실존 사실을 대변함. 4) 제7권 예종 문효대왕 1(睿宗文孝大王一) 경인 5년(1110) - 9월에 여러 왕씨,재신과 추신에게 천수전(天授殿)에서 주연을 베풀고 밤 을 새우고서야 파하였다. 각각 폐백을 하사하였다. 왕이 시를 짓고 유신 에게 명을 내려 화답하여 올리게 하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어느 광대가 연극으로써 선대의 공신 하공진(河拱辰)을 칭찬하니, 왕은 그 공을 추념하여 그의 현손 위위시(衛尉寺) 주부(注簿) 준(濬)을 합문지 후로 삼고 거듭하여(仍) 시를 지어 하사하였다. 주)위위시(衛尉寺):의장(儀仗)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주)합문(閤門) :나라의 의식(儀式) 주)주부(注簿): 각 관청의 종7품 관직/ 지후祗侯: 정7품 관직 본문(本文) - 九月 宴諸王 宰樞于天授殿 達曙乃罷 各賜侑幣 王 賦詩 命儒 臣和進 賜物有差 有優人 因戲稱羔 先代功臣河拱辰 王 追念 其功 以其玄孫 衛尉注簿濬 爲閣門祗候 仍製詩賜之 [판윤공파족보 등재] 위 사료(史料)에 의거 송정공15세 하병태 종손께서 1999년 판윤공파 족보(判尹公派族譜) 기묘보를 발간하시면서 준(濬)선조를 시조공의 현손 (玄孫)으로 모시고 (시조) 하공진-(2세조) 칙충-(3세조) 실휘失諱 -(4세 조) 실 휘-(5세조) 준-(6세조) 탁회로 상계 계대를 온전(穩全)히 변정함 송정공 문집 卷之一 (1권32쪽) / 춘일회구거 2수(春日懷舊居 2首) -금서琴書는 7代 이은 가업인데, 화재 당해 一朝에 없어졌다. 누각은 쓰러져 느티나무 쓸쓸하고, 전원은 황폐해 국화 반쯤 남았다. - 어필 모신 쌍 장자와 가훈 적은 두 병풍(御題雙障子 家訓兩屛風)은 보관이 소홀해 도둑을 맞았으니, 난리 당한 탓이라 말하지 말아라.(誨盜由藏謾 休論喪亂中) 위 예종이 준先祖(1080~1137추정)에게 하사한 어필시(御筆詩)가 - 27 -
송정문집에 기록된 판윤.송정가에서 가보(家寶)로 전승하던 어필(御筆) 로 추정되다. 따라서 송정문집의 위 시문은 하증 방조께서 을사년 창보시 진양하씨 세계변에서 박사공이 칙충과 지후에 직파인지 아닌지는 자상치 않으 나 라고 하신 사항에 대하여 박사공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종중은 시조공의 현손이신 준조의 직파인 것을 밝혀주는 문헌임 2. 증보 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 -정조6년(1782)~광무 年間 편찬, 증보 및 보완 발간 - 廣州지평 이만운 편찬, 박용대 보완발간 1) 충선왕 복위년(1308) 사략 : 현왕조 공신 하공진 노전 양규 등 내외 현손의 현손을 예에따라 각 1명씩 초직을 허용 하다. 본문(本文) 顯王朝 功臣 河拱辰 盧戩 楊規 等 內外 玄孫之 玄孫 例以 一戶一名 許初職 2) 충숙왕 12년 (1325년) 사략 : 역대 공신의 기존 음직 자손은 구 제도에 의하고 갑술년 이후 전공이 있는 자 및 전망인의 자손을 각각 등용하라 하다 본문(本文) 歷代 功臣 蔭職幷依舊制其 甲戌年 以來 有戰功人及 戰亡人子孫 各加余用 3) 공민왕 5년 (1356년) 사략 : 역대 공신의 자손을 특별히 등용하고 장려하라고 명하다. 본문(本文) : 敎 歷代 功臣其子孫 優加 將用 - 28 -
(붙임2) 진양부원군 하공 신도비명 수정 전후 비교표 영락 11년 변계량 찬 비명 원전 영락 13년 수정 비명 원전 대비 永樂十一年歲在壬辰冬十月 議 永樂十三年歲在乙未冬十二月議 -원전을 2년 屬季 政府左政丞晉山浩亭先生 囑季 政府左議政浩亭先生 후 수정 良曰 惟我先考種德裕後 良曰 惟我先考種德不食 委祉 -용어 변경: 而予小子再與勳盟 濫登峻秩 後人 而余小子再 勳盟 位冠 정승 의정 且承恩典 封贈三世 此 百僚 且承恩典 封贈三世 此 -2구 委祉後 其碑于墓道 以示來世者 其碑于墓道 以示來世 俾知先 人 位冠百僚 宜 有 辭 塋之所在 而無敢或訛 宜有辭 삭제 而闕焉 子其筆之 季良不敢 而闕焉 君其筆之 季良不敢 -2句 俾知先 辭 謹按 公姓河氏 諱允潾 字所 辭 謹按 公姓河氏 諱允潾 塋之所在 而 開 晉陽望族也 先世仕高麗左 字所開 晉陽大族也 先世有左 無敢或訛 삭 司郞中諱拱辰 有功顯王 司郞中諱拱辰 有功高麗 顯三 제 朝 贈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四 -曾祖不仕 삭 朝 贈門下侍郞同平章 事 曾祖 門博士諱卓回仕高王朝以親老免 제 考諱富深 及第隱不仕 官還鄕博士生挺才挺才生南秀南 -박사공~ 以 秀生邵邵生諱 深於公爲 祖自 下4 세 曾祖공 博士而下四世相繼登第曾祖公與 까지 출생관 其兄浩及扶又皆登第以國制廩其 계,급제,포상 母時人歆之 祖諱湜 贈純忠補祚 사실 삽입 祖考諱湜 贈純忠補祚 功臣輔國崇祿大夫判司平府事晉 功臣輔國崇祿大夫判司平府事晉 康君 考諱恃源 贈純忠積德秉 原君 考諱恃源 贈純忠積德秉 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 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 政府右政丞判兵曹事 晉康府院 政府右政丞判兵曺事晉康府院 君 娶承奉郞豊儲倉副使鄭諱均 君 娶承奉郞豊儲倉副使鄭諱均 之女 以元至治辛酉四月丁巳 之女 以元至治辛酉四月丁巳 生公姿質異凡兒年七歲丁內憂哭 生公 年七歲 丁內憂 呼泣盡 泣盡哀若成人然庚午始就學癸酉 - 姿 質異 凡 兒 哀若成人然庚午始就學 癸酉 鄕之長者 贈崇祿大夫議政府贊 삽입 鄕之長者 贈崇祿大夫議政府贊 成事判戶曹事姜公諱承裕見而奇 成事姜公諱承裕謂公曰 先世有 - 判戶曹事,見 之 以其子妻 功於國者 其後必昌 以其子妻 而奇之삽입 之 贊成性嚴 公父事之 至正 之 贊成性嚴 公父事之 至正 - 公 曰 先 世 丙戌 始仕忠穆王朝 爲式目都 甲申 始仕忠穆王朝 爲式目都 有功於國者 監錄事 丁亥春 姜氏得吉夢有 監錄事 丁亥春 姜氏得吉夢有 其後必昌삭제 娠 冬 十二月 生男 卽議政公 -初仕年수정 娠 冬 十二月 生男 今政丞公 也 壬辰 授膳官丞 乙未 陞 갑신 병술 也 己丑 授膳官丞 壬辰 陞 - 29 -
爲令 丙申 遷門下錄事 高麗 爲令 丙申 遷門下錄事 之季 公廩虛竭 門下府朝夕之 之季 門下府大小供億 一委錄事 費 一委錄事 而責其豊潔 爲 高麗 -관직 발령연 도 수정 爲 - 公廩虛竭,而 公盡心營辦 責其豊潔삭제 錄事者 多乞免 公盡心營辦 錄事者率多乞免 府官稱之 略無難色 府官稱之 戊戌 拜 戊戌 拜 庚子 遭外艱終 - 略 無難 色 삭 宣德郞北部令 庚子 遭外艱終 宣德郞北部令 知肅州郡事 階朝奉 제 制 癸卯 知肅州郡事 階朝奉 制 癸卯 郞 實恭愍王十三年也 僞王 郞 反 帖木兒 蒙 漢兵將入寇 塔思 實恭愍王十三年也 帖木兒率蒙 僞王 漢兵將入寇 其將 諸道軍會西北 僞王敗走 其將 諸道軍會西北 僞王敗走 皆道于肅 公待之無 帥 往 來 皆 道 于 肅 公 待 之 無 帥往來 軍士還者多菜色 闕 其年饑 軍士還者多菜色 闕 其年飢 公減俸祿 又勸郡人之有蓄者相 公減俸祿 又勸郡人之有蓄者相 多所全活 爲政以仁恕 助賑濟 多所全活 爲政以仁恕 助賑濟 抽歛絶而刑罰省 吏民德 爲本 抽斂絶而刑罰省 吏民德 爲本 之 及其見代 涕泣以 送 乙巳 春 還鄕 秋 政丞公登第 明 年 爲史官 公曰 有子立朝 吾老矣 不欲復仕 乃與鄕之父 老 結爲金剛社 優游卒歲 時 倭寇方熾 公語族人曰 吾鄕西 南濱海 島寇歲至 西南人先受 其害 勢必及邑里 宜移就北 村 以避其鋒 至丁巳秋 遂 家結廬于桐谷 明年秋 寇果入 邑里 闔境擾攘 多被刦掠 公 自桐谷 入江城縣之山城 擧家 獨全 鄕人服公先見 政丞公時 爲大司成 上書宰相曰 島夷數 至 老親輒入山城 不勝其艱 今順興府使 儒者也 乞以自 代 除父順興 俾獲安處 宰相 之及其見代至有涕泣以送者乙巳 春 還鄕 秋 議政公登第 年 選爲史官 公曰 有子立朝矣 吾 不必復仕 老 結爲金剛社 倭寇方熾 海 乃與鄕之父 優遊卒歲 時 公語族人曰 吾鄕濱 島寇歲至 其害 明 西南人先受 勢必及邑里 村 以避其鋒 至丁巳秋 家結廬于桐谷 邑人 宜就北 明年秋 多被劫掠 寇果入 公 自桐谷 入江城縣之山城 擧家 - 闔 境擾 攘 삭 獨全 鄕人服公先見 議政公時 제 爲大司成 上書宰相曰 老親所 在島夷數至吾未嘗頃刻而自安 今順興府使 代 儒者也 除父順興 乞以自 - 老 親輒 入 山 宰相 城 不勝其艱 授公府使 階 俾獲安處삭제 - 老親所在,吾 奉翊 先是 公 嘗受員外官 奉翊 先是 公 嘗受添設官 累 未嘗頃刻而自 至奉翊大夫禮儀判書 故 轉至奉翊大夫禮儀判書 故今爲 安 삽입 義其言 庚申春 授公府使 階 府使 因其資云 旣至有惠政 義其言 庚申秋 因其資云 - 30 - 旣至有惠政 - 今 爲府 使 삭
九月二十四 제 民 方 慕 悅 而 疾 作 九 月 二 十 四 民方慕悅而疾作 日 謂夫人曰 吾年六十 子亦 日 謂夫人姜氏曰 吾年六十子亦 有何遺恨 況人生脩短 成立 有何遺恨 況人生脩短 成立 皆歸於盡 只有先後 莫非天命 皆歸於盡 只有先後 莫非天命 耳 勿傷心 語竟乃絶 政丞公 耳 勿傷心 奉 柩 歸 晉 陽 以 其 年 十 二 月 甲 聞病備藥 語竟乃絶 議政公 二日而 -문맥 가다듬 음 申 葬于桐房洞坎山北 距先考 至 不及屬纊 辟踊摧折 奉柩歸 墓幾步距先妣墓幾步 始政丞公 于晉陽 晝夜不離側 以其年十二 -葬事일 변경 聞 病 備 藥 倍 道 疾 馳 二 日 而 月甲寅 葬于桐房洞坎山之岡北 甲申 甲寅 至 未及承訣 擗踊摧折 晝夜 距先妣墓九步又其北距先考墓十 不離殯側 棺用全木 槨用七 步 寸 凡喪葬之具 一依文公家 寸 疾馳 棺用全木 槨用七 凡喪葬之具 一依文公家 禮 不用浮屠法 至國朝戊寅 禮 以政丞公定社功 贈忠勤翊戴愼 以議政公定社功 贈忠勤翊戴愼 德守義協贊功臣 特進輔國崇祿 德守義協贊功臣 特進輔國崇祿 大夫門下右政丞判兵曺事晉陽 伯 壬午 以佐命功 加領議政 府事晉陽府院君 公稟資厚重 操履廉簡 不妄語 亦無戲言 未嘗以營 留意 孝友出於天 性 睦於族親 和於鄕黨 愉愉 如也 公之先考早逝 伯父不肯 均分蒼赤 弟侄欲訴於官 公 曰 安敢與叔父爭 力止之 伯 父歿 弟侄以前言 之 公曰 從兄弟相訟 亦不可 及公歿 從兄弟相訟乃分之 政丞公不受 曰 吾先子之所不爲也 吾敢受 乎 請與諸子曰 諸子受 是吾 受也 竟不許 姜氏善治家 動 循禮則 奉親以孝 事夫以順 至國朝戊寅 大夫門下右政丞判兵曹事 伯 壬午 - 不 用浮 屠 法 삭제 晉陽 以佐命功 加領議政 府事晉陽府院君 公稟資厚重 操履廉簡平生不妄語 未嘗以營産留意 性 孝友出於天 睦於族親 如也 亦無戱言 和於鄕黨 愉愉 先考早逝 均分蒼赤 公 -백부 숙부 弟姪欲訴於官 曰 安敢與叔父爭 父沒 叔父不肯 止之 弟姪以前言强之 從兄弟亦豈可相訟 叔 수정 公又曰 - 상동 及公沒 弟姪之子孫與再從兄弟訟諸官分 之 議政公不受曰 吾先子所不 爲也 請與諸子公曰 諸子受 是 吾受也 不許 姜氏善治家 動 循禮則 奉親以孝 事夫以順 敎子孫嚴而恕 待族姻惠 而周 敎子孫嚴而恕 待族姻惠 而周 乙亥夏 寢疾 議政公時爲中樞 乙亥夏 寢疾 政丞公時爲中樞 院使 謁告馳馹 三日而至 嘗 院事 謁告馳馹 三日而至 嘗 藥以進 姜氏曰 汝父逝己久 藥以進 姜氏曰 汝父逝已久 吾至今未亡 足見汝榮養 不願 吾至今未亡 足見汝榮養 不願 飮藥求生也 - 31 - 公涕泣以勤 七月
謂議政公曰 人之死 飮藥求生也 公涕泣以勸 七月 初四日 汝及汝娣俱無 初 四 日 謂 政 丞 公 曰 人 之 死 生 不在老少 生 不 在 老 少 汝 及 汝 娣 俱 無 恙 吾 今先逝 豈不自幸 不須 明曰卒 年七十六 恙 吾今先逝 豈不自幸 不須 强進諸藥 進諸藥 明日卒 年七十六 以九月丙午 附于公墓之南十一 以 九 月 丙 午 祔 于 公 墓 之 南 幾 步 戊寅 贈辰韓國大夫人 男 步 戊寅 贈辰韓國大夫人 男 諱崙 奮忠仗義同德定社佐命功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諱崙 奮忠仗義同德定社佐命功 臣 修文殿大提 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 領經筵春秋館 書雲觀 左政丞 判吏曺事 修文殿大提 學 學 領經筵書雲觀事 監春秋館 事 世子師 晉山府院君 娶奉 - 判 吏曺 事 삭 事 世子傅 晉山府院君 娶奉 翊大夫 禮儀判書星山李公諱仁 제 翊大夫 禮儀判書星山李公 諱仁 美之女 丙戌 封辰韓國大夫 人 女適正順大夫延安府使柳克 恕 政丞男久 中軍都摠制府都 摠制 娶奉翊大夫 知密直司事 李種德之女 長女適吏曺右參議 洪涉 次女適左軍都摠制府摠制 李承幹 庶男三 長 延 皆 美之女 丙戌 封辰韓國大夫 人 女適正順大夫延安府使柳克 恕 議政男久 中軍都摠制府都 摠制 娶 知密直司事 李公種德之女長女適吏曺右參議 洪涉 次女適左軍都總制府摠制 李承幹 庶男三 長 延 皆 幼 永 義興侍衛司大護軍 - 奉 翊大 夫 삭 제 幼 永 義興侍衛司大護軍 庶 女三 長適知谷山郡事金秩 次 適中軍司直張希傑 次幼 府使 男汀 通德郞刑曹正郞 余惟政 丞公道德文章之美 名位勳業之 盛 無有比擬 固嘗謂其必有發 之者久矣 嗚呼 晉陽公之積善 成德 宜享其報矣 而不克有於 其躬者 豈非天將大其報而遲之 也歟 古人有言 爲善無不報 余 府 使 男汀 戶曹正郞 予 惟議 政公道德文章之美 隆 無有比擬 固嘗意其必有發 之者久矣 鳴呼 成德 名位勳業之 晉陽公之積善 宜享其報矣 而不克有於 其躬者 - 庶 女三 長 適知谷山郡事 金秩 次適中 軍司直張希 傑 次幼 삭 제 豈非天將大其報而遲之 也歟 古人有言 爲善無不報 予 於晉陽公而徵之矣 於晉陽公而徵之矣 自今至于千 其流澤之久 餘慶之永 - 自 今至 于 千 萬世 其流澤之久 餘慶之永 又可旣耶 鳴呼休哉 銘曰 萬世 삭제 又可旣耶 嗚呼休哉 銘曰 有流斯長 維蓄其源 有枝斯 有 流 斯 張 維 畜 其 源 有 枝 斯 茂 維固其根 懿哉河氏 實維 茂 維固其根 懿哉河氏 實惟 德門 卓彼左司 克有殊勳 乃 - 32 -
德門 卓彼左司 克有殊勳 乃 厚厥積 以啓後昆 振振晉陽 厚其積 以啓後昆 振振晉陽 維德是勤 厚倫息訟 人服其 惟 德 是 勤 厚 倫 息 訟 人 服 其 義 移家避寇 人服其智 惠于 義 移家避寇 人服其智 惠于 二州 民慕怙恃 義智且惠 顯 -仁義且智 二州 民慕怙恃 仁義且智 顯 融是宜 歛而家居 竟莫以施 義智且惠수정 融是宜 斂而家居 竟莫以施 天錫爾類 乃生英賢 相我聖 天 錫 爾 類 克 生 英 賢 遇 我 聖 主 位極朝聯 - 以 相朝 鮮 主 以相朝鮮 安危呼吸 談笑 從容廊廟 庶績維隆 安危呼吸 談 指陳 從容廊廟 百度維新 泰 勳德之魁 笑指陳 百度 山其重 滄海其容 勳德之魁 斯文之宗 王曰政丞 實予同 維新 泰山其 斯 文 之 宗 王 曰 政 丞 實 予 同 德 定社佐命 懋乃丕績 追爵 重 滄海其 德 定社佐命 予懋丕績 追爵 三世 並峻其秩 旣勳而階 領 容 삭제 三世 並峻 其秩 旣勳而階 領 府維崇 錫之妣爵 辰國是封 位 極 朝 聯, 府維崇 錫之妣爵 辰國是封 不顯潛德 雖死猶生 晉山峩 庶績維隆삽입 不 顯 潛 德 雖 死 猶 生 晉 山 峨 峩 晉水冷冷 瞻彼坎麓 維吉 峨 晉水冷冷 瞻彼坎麓 維吉 之叢 維考維妣 俱葬其中 綿 之叢 維考維妣 俱葬于中 綿 綿流慶 曷其有終 刻銘豊碑 綿餘慶 曷其有終 刻銘穹碑 以告無期 昭玆來裔 孰不公 以告無期 昭玆來裔 孰不公 思 永樂十四年三月 日 思 奉正大夫直藝文館知製敎兼春秋 館記注官僉知承文院事 朴熙中書幷篆 -비명원전을 수정한 영락 13년12월 이 후 3월만에 박희중으로 하여금 비석 에 새길 전서 체 비문을 쓰 게함. - 33 -
<진양부원군 신도비명 주요 수정부분 번역> 삭 제 삽 입 委祉後人 복을 후손에게 끼쳤기에 位冠百僚 四門博士諱卓回 사문박사 휘 탁회는 모든 신료들의 우두머리에 있 仕高王朝 고종(高宗: 1213-1259 )때 으며 벼슬했는데 以親老免官還鄕 부모님이 연로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俾知先塋之所在 선영의 소재를 알려 而無敢或訛 감히 혹시 잘못 전하는 일 博士生挺才 박사(博士: 卓回)가 정재 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를 낳았고 曾祖不仕 증조는 벼슬하지 아니했다. 挺才生南秀 정재가 남수를 낳았고 先世有功於國者 선대에 고려조에 공이 南秀生邵 남수가 소를 낳았고 있어 其後必昌 후손이 반드시 창성하게 된다 邵生諱 深 소가 휘 부심을 낳았는데 公廩虛竭, 성품이 엄격했는데 於公爲 祖 공公에게 증조부가 된다 而責其豊潔 넉넉하게 마련하도록 책임지 自博士而下四世 우니, 略無難色 박사로부터 아래로 4대에 걸쳐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 相繼登第 계속해서 과거에 올랐다 으니 闔境擾攘 우리나라에 침입했으므로, 曾祖公與其兄 증조부와 그 형님이신 老親輒入山城 어버이가 번번이 산성에 浩及扶又皆登第 호 및 부 역시 과거 들어가게 되니 에 올랐다 不勝其艱俾獲安處 안전하게 지낼 수 있 以國制廩其母 나라의 제도에 따라 그 도록 해주소서 어머니에게 녹祿을 지급했으므로 今爲府使 지금 부사가 된 것이니 不用浮屠法 時人歆之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그 품계를 따른 것이라고 姿質異凡兒 자질이 보통 아이들과 달 한다 랐다 判吏曺事 판이조사, (윤린公의 추증직명) 判戶曹事, 판호조사(의정공의 외조부) 奉翊大夫 봉익대부 見而奇之 한번 보고는 기특하게 여겨 老親所在, 연로하신 부모님이 계신 곳에 吾未嘗頃刻而自安 저는 잠시도 편안 長適知谷山郡事金秩 장녀는 지곡산군사 한 적이없었습니다 김질에게 출가하고 庶女三 서녀(庶女)가 셋 있으니, 次適中軍司直張希傑 다음은 중군 사직 (中軍司直) 장희걸(張希傑)에게 출가하고, 次幼 다음은 어리다 自今至于千萬世 지금으로부터 천만대에 이르기까지 - 34 -
삭 제 삽 입 시문 시문 以相朝鮮 조선의 재상이 되었네 位極朝聯 지위가 조정 신하들 가운데 에서 으뜸이었네 安危呼吸 안위가 경각에 달렸는데 庶績維隆 여러 가지 업적이 높았도다 談笑指陳 담소하며 일을 주선하고 百度維新 온갖 일이 새롭게 되었네 泰山其重 그 무계 태산 같고 滄海其容 그 도량 바다 같으니 주) 1. 변계량의 춘정집 수록 비명 대비 오방재 소재 실제 비석의 비문이 수정된 주요 부분임. 2. 비문에서 서녀부분을 삭제한 대신 박사공이하 10세조 부심공까지의 세계와 특기사항을 추가로 지어 포함시킴 -서녀부분은 비명에서는 삭제하되 비석 뒷면의 음기에서 맨처음에 올림. 3.신도비 연혁 -1412년 태종 12년(영락10년) 임진10월 의정공, 변계량에게 신도비명 찬을 부탁 -1415년 태종 15년(영락13년) 을미12월 비문 교정 (위 수정 전후비교 참조) -1416년 태종 16년 丙申 신년 들어 태종에게 사직허용을 상주하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대신 조회참여는 면해짐 -1416년 3월 박희중으로 하여금 신도비명을 전서체로 쓰게함 -1416년 9월 박희증으로 하여금 신도비음기를 쓰게함 -음기를 관찰한 결과는 신도비를 세운후 비석 뒷면에 각자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으며 이는 이시기 이전에 비를 세웠다고 추정해 볼 수 있슴 -1416년 11월 함길도 출장중 귀임길에 정평(定平)관아에서 별세함. - 35 -
(붙임3) 진양부원군신도비 음기 내용 정리표 (태종16년 1416. 9 박희중찬) 12세 하시원 13세 14세 하윤린 하륜 15세 김질/곡산부사 16세 도이공/의영고 부직장 /문정 딸1/ 어리다 공 장희걸/중군사직 장미/ 어리다 2딸/ 어리다 3째서녀/어리다 하구/중군 도총제부도총제 복생/ 어리다 홍섭 /이조우참의 이승간 / 이공전/ 공정고副使 좌군도총제부 총제 이신전/ 사재직장 이성전외 2아들 / 모두 어리다 딸1/ 어리다 하 영 /의흥시위사대호군 계생/ 어리다 딸1/ 어리다 장,연 / 어리다 유극서 / 연안부사 유정/호조정랑 유혜생/ 미성 강여위 작은딸/ 어리다 유효산, 2아들 /미성 딸1 / 어리다 장온 / 낭장 장익 /검교한성소윤 장경/학생 아들2,딸1 / 어리다 장필/부사정 아들2,딸2 / 어리다 조전/학생 정환/ 풍저창주부 아들/ 미성 손번/ 사정 아들2,딸1 / 어리다 김남갑 김효우 정하/학생 /사복부정 /회인감무 아들1,딸1 / 어리다 - 36-17세
12세 13세 하윤구 /종부령 14세 하유 15세 16세 하지혼 /한성소윤 /검교한성윤 하지돈 /울산군사 하영/미성 성규/장흥고주부 아들2,딸2/어리다 하지명 /공조정랑 하현/미성 아들2,딸2/어리다 하지행/풍저창주부 거원/ 전객령 이수 / 하유종 밀직부사 을지 /성주목사 / 청천군 을숙 하렴 / 별장 / 낭장 하축 /학생 아들3 /어리다 황유 /학생 최유강 /협주 지사 최수생/호군 최중성/의령현감 황근 /생원 정중산/사직 정신덕/사재령 아들2/미성 모간/감무 주봉의/의정부녹사 정하손 /군위현감 하취유 /개곡처사 하취동 을부/군 /공조전서 기감판사 하승해/상호군 정조,정장 /미성 딸2/어리다 하함/학생, 아들1/미성,딸1/어 리다 하제/부사정 배유문/학생. 딸2/어리다 하경복 /좌군동지총제 하경리/칠원현감 하승호/부사직 - 37 - 아들1,딸2/어리다 17세
12세 13세 14세 거원/ 을순 하굉 / 사정 전객령 /중랑장 15세 하응/학생, 아들4/어리다 이지 / 학생 하사호 을빈/ 해령천호 /의정부녹사 아들3, 딸2 /어리다 강원립/학생 을정/ 아들1,딸4 / 전구서승 어리다 박보석,박필석 박응/ 善州知事 /미성 하결 /성균관주부 딸1 /미성 강로 /봉상령 강시중 강안 / 사정 /학생 을생 /산원 - 38-16세 17세
(붙임4) 진양부원군 신도비명 내용중 앞뒤 상치부분에 대한 소고 1. 비문 내용 1례 (재종15년 영락13년 수정비명) 以元至治辛酉四月丁巳 生公 年七歲 丁內憂 哭泣盡哀 若成人然 庚午 始就學 癸酉 鄕之長者贈崇祿大夫議政府贊成事姜公諱承裕謂公曰 先世有功 於國者 其後必昌 以其子妻之 贊成性嚴 公父事之 至正甲申 始仕忠穆王 朝 爲式目都監錄事 丁亥春 姜氏得吉夢有娠 冬 十二月 生男 今政丞公 也 己丑 授膳官丞 壬辰 陞爲令 丙申 遷門下錄事 高麗之季 公廩虛 竭 門下府朝夕之費 一委錄事 而責其豊潔 爲錄事者 多乞免 公盡心營 辦 略無難色 府官稱之 戊戌 拜宣德郞北部令 庚子 遭外艱終制 癸卯 知肅州郡事...(생략)... 公稟資厚重操履廉簡平生不妄語亦無戱言未嘗以營 産留意孝友出於天性睦於族親和於鄕黨愉愉如也 先考早逝 叔父不肯均分蒼赤弟 姪欲訴於官... 위 신도비문중 상호 관련 부분의 원문 및 번역은 아래와 같음 1) (원문)年七歲 丁內憂 (번역) 공 7세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丁(정):당하다. 內(내):어머니. 憂(우):喪 2) (원문)庚子 遭外艱終制 (번역) 경자년(1360년)에는 부친상을 당했으므로 遭(조):당하다/ 外(외):밖 / 艱(간):괴로워하다 終(종):죽다/ 制(제):규격대로 하다 3) (원문) 先考早逝 (번역) 부친이 일찍 돌아가셨는데 2. 소고 신도비문 위 1항)과 2항)에서는 진강부원군 휘 시원공의 배위가 먼저 몰하 고 그 33년후에 공께서 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위 3항)에서는 공 이 일찍 몰하셨다는 기록을 분석하여 보면 -위 1항,2항에 의거 공이 배위보다 33년을 더 생존하셨다면 배위께서 2남 - 39 -
윤구공을 최대한으로 앞으로 당겨서 20세에 득남하셨다고 가정하더라도 시 원공은 53세에 몰하신 것으로 계산되므로 3)항처럼 공이 일찍 세상을 떠나 셨다(先考早逝 )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임. 뿐만아니라 우리 족보상 휘 시원공의 몰년 1327년(윤린공 7세)와도 상치하 는 것임.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 때 배위께서 장남 윤린공(7세)과 2남 윤구공 형제가 어릴 때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면 공께서는 재취를 맞지 않을 수 없었을 것 이며 이때에 공께서는 20~30대의 연령으로 재취에서 여러 자녀를 두었을 것으로 예상 할 수 있음. 그러나 족보상으로나 문헌상으로 그런 기록은 전연 없슴. 비문에 오류로 판단되는 기록이 발견되는 사유는 현존 碑文의 원작 진양부 원군신도비명을 찬한 변춘정이 우리문중 내력을 잘 모르는 문외인으로서 하 륜 정승으로부터 중요내용을 간지로 받고 문중 내력을 구술로 설명 들을 때 이해의 부족에서 연유한 것으로 봄이 타당 할 것임. 이는 분재문제를 두고 쟁송내용을 기술한 부분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이는 내용의 분별이 어려운 정도이므로 변춘정 본인도 그 내용을 확실히 모르고 기술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임.(원작의 내용은 백부와 숙부를 구분하지 못하 고 있었으나 수정비문에서 伯字를 모두 叔字로 수정함으로써 이해가 약간 용이해 졌음) 비문중 탁회조께서 고려 고종때 사문박사를 지내셨다고 한 부분은 현실적으 로 맞지 않은 기록이므로 하륜 정승에게까지 내려오는 전승 과정중에 착오 가 있었다고 보아야 하며 따라서 신도비문을 문자 그대로를 금과옥조로 하 여 후세에 전승할 것이 아니라 오류가 있는 부분은 변정하여 옳은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 후손들의 오해가 없도록 하여야 할 것임. - 40 -
(사료 1-1) 고려 역대왕의 직계도 혈통대수 1세 1태조왕건 2세 3세 4세 5세 6세 2.혜종 3.정종 4.광종 5.경종 7.목종 세종(욱) 6.성종 - 안종(욱) 8.현종 9. 덕종 10.정종 11.문종 혈통대수 16.예종 7세 8세 9세 10세 17.인종 18.의종 19.명종 22.강종 23.고종 20.신종 21.희종 혈통대수 13세 14세 15세 16세 25.충렬왕 26.충선왕 27.충숙왕 28.충혜왕 29.충목왕 30.충정왕 31.공민왕 32.우왕 34.공양왕 20대(8세) 신종의6 대손(8+6) - 41-12.순종 13.선종 14.헌종 15.숙종 16.예종 11세 12세 24.원종 25충렬왕 17세 33.창왕
(사료 1-2) 고려왕조 王家 계보도-후비포함- - 42 -
(사료 1-3) 고려왕조 왕대표(王代表) (918~1392. 473년간 34대왕, 혈통대수 17대) 대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왕 명 태조(太祖) 877-943 혜종(惠宗)? ~945 정종(定宗) 923~949 광종(光宗) 955~981 경종(景宗) 955~981 성종(成宗) 960~997 목종(穆宗) 980~1009 현종(顯宗) 992~1031 덕종(德宗) 1016~1034 정종(정종) 1018~1046 문종(文宗) 1019~1083 순종(順宗) 1046~1083 선종(宣宗) 1049~1094 헌종(獻宗) 1084~1097 숙종(肅宗) 1054~1105 예종(睿宗) 1079~1122 인종(仁宗) 1109~1146 재위기간 약 사 이름은 왕건(王建), 태봉국 궁예의 신하에서 왕으로 옹립되어 송 918-943 도에 도읍을 정하고 개국함. 935년 신라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함 943~945 945~949 975~981 975~981 981~997 997~1009 휘는 무(武),태조의 맏아들. 대광인 왕규(王規)의 음모에 신경쓰다 병사함 왕규의 난을 평정하고 불교를 숭상함.서경(평양)에 왕성을 쌓고 천도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 휘는 소(昭). 자 일화(日華). 노비 안검법을 제정하고,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를 실시함 휘는 주(宙). 자는 장민(長民). 광종의 아들. 전시과를 제정함. 방 탕한 생활로 정사를 돌보지 않았음 휘는 치(治).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유교를 국가지도의 원리로 삼 아 중앙 직권적 봉건제도를 확립함 휘는 송(誦). 경종의 맏아들. 전시과를 고치고 학문을 장려 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강조(康兆)에게 피살됨 휘는 순(詢). 천추태후의 강요로 중이 되었다가 강조의 옹립으로 1009~1031 즉위함. 거란의 침입으로 혼란 하였으나. 강화하여 국내가 안정되 고 문화가 발전함 1031~1034 1034~1046 1046~1083 1083 1083~1094 1094~1095 1094~1105 1105~1122 1122~1146 휘는 흠(흠). 왕2년에 천리장성을 쌓고. 국사편찬 사업을 벌임 휘는 형(亨).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고. 장자 상 속과 적서 구별을 법으로 정하였다. 휘는 휘(徽),.자는 촉유(燭幽). 많은 법률을 제정허여 내치의 기초 를 닦음. 학문을 좋아하고 세예에 능함 문종의 맏아들로 즉위한 해에 죽음 휘는 운(運). 문종의 둘째 아들.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 국 송나라에서 불경을 연구하고 오든 중 고려문화의 융기를 이룸 휘는 욱(昱) 즉위하자 이자의(李資義)의 난을 평정하고 다음해에 신병으로 숙부에게 왕위를 물려줌 문종의 셋째아들. 조카인 헌종을 폐위 시키고 즉위함. 해동통보를 주조하여 화폐 제도를 시작. 고려의 황금시대를 이룸. 휘는 우. 학문을 좋아하여 학교를 세우는 등 학문을 크게 진흥 시켰음 휘는 해(偕)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등을 격 었으나 선정을 베품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케 함 - 43 -
대 18 19 20 21 22 23 24 25 왕 명 의종(毅宗) 1124~1173 명종(明宗) 1131~1202 신종(神宗) 1146~1204 희종(熙宗) 1181~1237 강종(康宗) 1152~1213 고종(高宗) 1192~1259 원종(元宗) 1219~1274 충렬왕(忠烈 1236~1308 재위기간 약 사 휘는 현(晛). 인종의 맏아들. 무신을 천대하고 문신을 우대하다. 1146~1170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 폐위되고, 명종3년에 경주에서 살해 됨 1170~1197 휘는 호(皓). 의종의 동생. 정중부의 추대로 즉위하고 최충헌(崔 忠獻)에 의하여 쫏겨남. 1197~1204 휘는 탁(晫). 인종의 다섯째 아들로. 최충헌이 옹립한 왕임 1204~1211 휘는 영. 신종의 아들. 최충헌을 없애려다 오히려 쫏겨남. 1211~1213 휘는 숙(璹). 명종의 맏아들. 명종과 함께 쫏겨 났다가 최충헌에 게 옹립되어 왕위에 오름.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로 천도한 뒤 28년 동안 항쟁 하였으나 1213~1259 결국 굴복함. 몽고를 불교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팔만대장경 을 조판함 1259~1274 1274~1308 휘는 정(禎). 몽고에 굴복을 당한 뒤 즉위. 임연(林衍)의 난. 삼별 초의 난 등으로 화평한 날이 없었음. 원(元)나라에 굴복하여. 원의 제국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는 등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을 받았음 휘는 장(璋). 몽고 황실의 딸과 결혼하고 1298년 왕위에 올랐으 26 충선왕(忠宣 1275~1325 1308~1313 나 7개월만에 충렬왕이 다시복위. 이후 10년간 원나라에 머물다 다시 즉위하여 원나라에서 국정을 봄. 고려와 원나라의 학문교류 에 힘을 씀 27 28 충숙왕(忠肅 1313~1330 휘는 도(燾).정사에 영증을 느껴 아들 충해왕에게 양위 하였다가 1294~1339 1332-1339 충혜왕(忠惠 1330~1332 행실이 좋지 않자 2년 만에 복위함 1315~1344 1339-1344 로 귀양을 가다 병사함 29 충목왕(忠穆 1344~1348 30 31 32 33 34 충정왕(忠定 1337~1352 공민왕(恭愍 1330~1374 우왕(禑王) 1364~1389 1348~1351 1345~1394 휘는(欣). 원나라에 볼모로 있다가 8세에 원나라에 의하여 즉위 함. 어머니 덕영공주(德寧公主)가 섭정함 휘는 저. 12세에 즉위하여 외가친척인 윤시우(尹時遇)와 즉위 3 년만에 폐위됨 원나라 배척운동을 벌여 친원파인 기(奇)씨 일족을 제거하고. 빼 1351~1374 앗긴 영토를 수복하여 국위를 떨침. 말년에 왕비인 노국공주가 죽자 정사를 그르쳐 최만생(崔萬生)과 홍륜(洪倫)에게 시해 당함 1374~1388 창왕(昌王? 1388~1389 공양왕(恭讓 휘는 정(禎). 행실이 좋이 않아 정사를 혼란에 빠뜨렸음. 원나라 1389~1394 공민왕의 아들, 10세에 즉위하나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 성계에게 폐위됨 이성계등이 우왕을 내쫒은 후 창왕을 내세웠으나 1년 만에 강화 도로 쫒겨나 10세 때 시해됨 휘는 요.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위에 올났으나 실권을 빼앗기고 정몽주가 살해당한 후 폐위 당하고 고려는 멸망함 - 44 -
(사료 1-4) 고려시대 관직표 품계 정1품 종1품 정2품 종2품 정3품 종3품 정4품 종4품 정5품 종5품 정6품 종6품 문관직 現 在 태사 태부 태보 태위 사도 사공 중서령, 문하시중, 상서령, 6부 판사 (재상겸직) 감수국사 (시중 겸직), 판삼사사(삼사) 부총리 차관보 관리관 상장군 대장 대장군 중장 장관 좌 우복야(상서성), 수국사(재상겸직) 차관 판추밀원사 동지추밀원사 추밀원사(중추원) 좌우상시(중서문하성), 어사대부 (어사대) 추밀원부사 좌우승선(중추원), 상서(6부) 좌우승(상서성), 지사(6부), 사천감(사천대) 이사관 위위경(위위시), 전중감(전중성) 국장 좌우간의 대부(중서문하성), 시랑(6부) 부이사관 군기감(군기감) 어사중승 지어가대사(어사대) 국장 국자사업(국자감), 소감 소경(각사) 좌우사랑중(상서성), 랑중(6부) 시독학사 (시강), 학사(한림원), 합문사(합문) 기거주 기거랑 기거사인 (중서문하성) 어사집산 시어사(어사대) 좌우보궐(중서문하성),좌우사원외랑(상서성) 원외랑(6부), 전중시어사(어사대) 좌우습유(중서문하성),좌우사원외랑(상서성) 장군 서기관 과장 부군수 사무관 계장 중랑장 랑장 원외랑(6부), 전중시어사(어사대) 당후관(중서문하성), 국자박사(국자감) 주사 통신사인 합문지후(합문), 직장(각사) 계장 종7품 주부(각사), 권지합문지후(합문) 정8품 사문박사(국자감), 녹사(각사) 주사보 종8품 율학박사(형부), 직사관(사관) 정9품 학정 학록(국자감) 교위 종9품 율학조교(형부), 서학박사 산학박사(국자감) 정7품 - 45 - 現在 국무총리 중서시랑평장사,문하시랑평장사(중서문하성) 참지정사 정당문학 지문하성사(중서문하성) 무관직 별장 산원 대정 소장 준장 대령 중령 소령 대위 중위 준위 소위
(사료 2-1) 진양부원군 하공 신도비명 (Ⅰ) (번역문) 진주 오방재 소재 실존 비문<1415년 태종15,영락13년乙未 撰> 유명 조선국 증 충훈익대신덕수의협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진양 부원군 하공 신도비 명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승부윤敬承府尹 수문전修文殿 제학提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세 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 변계량卞季良1) 지음. 영락永樂2) 13년 을미乙未 : 1415 겨울 12월에, 의정부議政府 좌의정左議政 호정선 생浩亭先生3)이 계량季良 : 변계량에게 부탁하시기를,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께서 는 덕德을 심어 후손들을 위해서 넉넉히 은택恩澤을 끼쳤기에 나 이 보잘것없 는 자식이 두 번이나 공신功臣들의 회맹會盟4)에 참여하고, 외람되게 높은 관직 에 올랐고, 또 임금님이 내리는 은혜로운 특전特典을 입어, 위로 3대에 걸쳐 봉호封號5)를 받거나 증직贈職을 받았소. 이에 묘소 가는 길에 비석을 세워 다 가오는 후세들에게 보여야 하니, 마땅히 문장이 있어야지 없어서는 안 될 것 이오. 그대는 글을 지어주기 바라오. 라고 했다. 계량季良이 감히 사양할 수 가 없었다. 삼가 살펴보니, 공公의 성은 하씨河氏요, 휘諱6)는 윤린允潾, 자字는 소개所開, 진양晋陽의 명망 있는 집안이다. 윗대 조상 가운데 고려高麗 때 벼슬해서 좌사낭중左司郞中을 지낸 휘 공진拱辰은 현종顯宗 때 공훈이 있어 문하시랑동중서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에 추증追贈되 었다. 사문박사四門博士 휘諱 탁회卓回는 고종高宗 : 1213-1259 때 벼슬했는데, 부모님이 연로하였기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박사博士 : 卓回가 정재挺才를 낳았고, 정재가 남수南秀를 낳았고, 남수가 소邵를 낳았고, 소邵가 휘諱 부심富深을 낳았는데, 공公에게 증조부가 된다. 박사로부터 아래로 4대에 1) 변계량卞季良 :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본관은 밀양密陽.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조선 초기의 명문장가로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지었다. 시호는 문숙文肅. 문집 춘정집春亭集 이 있다. 2) 영락永樂 : 명明나라 제3대 성조成祖의 연호年號. 1403-1424년. 3) 호정선생浩亭先生 : 진양부원군의 아들 하륜河崙의 호가 호정이다. 자는 대림大臨, 본관은 진주晋州. 문과 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록冊錄되 고,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태종太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문집 호정집浩亭集 과 편서로 동국사략東國史略 등이 있다. 4) 회맹會盟 : 공신들과 임금이 모여서 맹세하고 이름을 적어 기록으로 남기는 행사. 5) 봉호封號 : 나라에 공이 있어 국왕이 봉해 줄 때의 칭호. 6) 휘諱 : 일반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은 명名이라 하나, 별세한 사람은 휘諱라고 한다. - 46 -
걸쳐 계속해서 과거에 올랐다. 증조부와 그 형님 호浩 및 부扶도 모두 과거에 올랐다. 나라의 제도에 따라 그 어머니에게 녹祿을 지급했으므로 당시 사람들 이 부러워하였다. 조부 휘諱 식湜은 증순충보조공신贈純忠補祚功臣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판사평 부사判司平府事 진강군晋康君이다. 부친 휘諱 시원恃源은 증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우정승右政丞 판병조사判兵曹事 진강부원군晋康府院君이다. 승봉랑承奉郞 풍저창부사豊儲倉副使 정균鄭均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원元나라 지치至治7) 신유辛酉 : 1321년 4월 정사일 丁巳日에 공을 낳았다. 자질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7세 때 모친상을 당했는 데, 곡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이 어른과 같았다. 경오庚午 : 1330, 10세년에 처음 으로 스승에게 공부하러 나갔다. 계유癸酉 : 1333년에 고을의 어른 증숭록대부贈 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찬성사贊成事 판호조사判戶曹事 강승유姜承裕공이 보고서 기 특하게 여겨 그 딸을 시집보냈다. 강공姜公은 성격이 엄하였는데, 공은 아버지 처럼 섬겼다. 지정至正8) 병술丙戌 : 1346, 26세년에 처음으로 충목왕忠穆王 : 1344-1348의 조정에 벼슬하여 식목도감式目都監 녹사錄事가 되었다. 정해丁亥 : 1347, 27세년 봄에는 강씨가 길한 꿈을 얻어 임신을 했다가 12월에 아들을 낳았으니, 곧 의정공議政公 : 河崙이다. 임진壬辰 : 1352, 32세년에 선관서승膳官署丞에 제수되었다. 을미乙未 : 1355, 35세년 에는 선관서령膳官署令으로 승진하였다. 병신丙申 : 1356, 36세년에는 문하부門下部 녹사錄事로 옮겼다. 고려 말엽에는 문하부의 크고 작은 물자 공급을 녹사에게 맡겼으므로, 녹사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모두 그만두려고 했다. 공은 마음을 다해서 마련하기를 도모하니, 문하부의 관원들이 칭찬하였다. 무술戊戌 : 1358, 38세년에는 선덕랑宣德郞9) 북부령北部令에 임명되었다. 경자庚子 : 1360, 40세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상복喪服을 입고 상주 노릇하여 상기喪期를 마쳤다. 계묘癸卯 : 1363, 43세년에 지숙주군사知肅州郡事가 되었는데, 품계는 조 봉랑朝奉郞10)이었다. 실로 공민왕恭愍王 13년11)이었으니, 가짜 왕 탑사첩목아塔 思帖木兒12)가 몽고족蒙古族 군대와 한족漢族 군대를 거느리고 장차 고려를 침략 하려고 했는데, 여러 도道의 군대가 서북지방에 모였다. 가짜 왕이 패배하여 달아났는데, 장수들이 왕래하는 길이 모두 숙주肅州13)를 경유하였다. 공은 이 7) 지치至治 : 원元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1321-1323년. 8) 지정至正 :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연호. 1341-1367년. 9) 선덕랑宣德郞 : 고려시대 문관文官 정7품 하下의 품계. 중간에 없어졌다가 1310년부터는 종6품으로 회복 되었다. 10) 조봉랑朝奉郞 : 고려시대 종5품 문관 품계. 11) 13년 : 비석에 새긴 글이나 춘정집春亭集 에 실린 비문에 모두 13년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 계묘 년은 공민왕恭愍王 12년이다. 12) 가짜 왕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 : 고려 충선왕忠宣王의 셋째 아들. 승려가 되어 있다가 쫓겨난 뒤, 원나 라로 도망쳐 원나라 황제에게 아부하여 고려에 갖가지 폐해를 끼쳤다. 원나라 황제로부터 고려왕高麗 王으로 책봉을 받았다. 1364년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려로 쳐들어 왔으나, 최영崔瑩 등에게 참패 하여 원나라로 돌아갔다. 원래 이름은 왕혜王譓,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는 몽고식 이름이다. 13) 숙주肅州 : 평안남도 숙천군肅川郡의 고려 때 이름. - 47 -
들을 대접하는 데 있어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그 해는 흉년이 들었으므로, 돌아온 군사들은 굶주려서 얼굴이 누렇게 뜬 사람이 많았다. 공은 자신의 녹祿 을 덜어내고, 또 고을 사람 가운데서 곡식을 쌓아두고 있는 사람에게 권하여 도와 구제하게 하여 살린 사람이 많았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있어 어짐과 용 서를 근본으로 삼아,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이는 일을 없애고 형벌을 줄이니, 아전이나 백성들이 은덕恩德을 입었다고 여겼다. 다른 사람과 교대하게 되자, 눈물을 흘려 울면서 전송하는 사람이 있기까지 했다. 을사乙巳 : 1365, 45세년 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해 가을에 의정공議政公 : 河崙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그 다음해 사관史官으로 선발되었다. 공이 말하기 를, 아들이 있어 조정에서 벼슬하니, 나는 다시 벼슬할 필요가 없도다 라 고 하고는, 고을의 노인들과 금강사金剛社라는 모임을 만들어 느긋하게 지내며 세월을 보냈다. 그 당시 왜구倭寇가 한창 날뛰었다. 공이 집안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고을은 바닷가에 있어 섬 오랑캐들이 해마다 침략해 오고 있소. 서남쪽에 사 는 사람들이 먼저 그 해를 입는데, 형세를 보니 반드시 읍내까지 오겠소. 의 당 북쪽 마을로 가서 그 칼날을 피하는 것이 옳겠소 라고 하고는, 정사丁巳 : 1377, 57세년에 집안을 이끌고 동곡桐谷으로 가서 집을 지었다. 그 다음해 가을 에 과연 왜구가 읍내까지 왔으므로 노략질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공은 동 곡으로부터 강성현江城縣14)의 산성山城으로 들어가 온 집안이 홀로 온전할 수 있었다. 고을 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탄복했다. 의정공議政公이 그 때 대사성大司成15)으로 있으면서 재상宰相에게 글을 올리기 를, 연로하신 부모님이 계신 곳에 섬 오랑캐가 자주 이르니, 저는 잠시도 편안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순흥부사順興府使는 유학자儒學者입니다. 바라건 대, 저 대신 그 사람을 대사성에 임명하시고, 저 부친을 순흥부사로 임명해 주십시오 라고 하니, 재상이 그 말을 의롭게 여겼다. 경신庚申 : 1380, 60세년 가을에 공을 부사로 임명했는데, 품계는 봉익대부奉翊大 夫16)였다. 이 이전에 공은 원외랑員外郞17) 관직에 임명되어 봉익대부奉翊大夫 예 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그래서 옛날 품계品階를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부임하여 은혜로운 정치가 있어 백성들이 바야흐로 흠모하면서 좋아하 였으나, 병이 나 9월 24일에 부인 강씨姜氏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나이가 육십이고, 아들도 뜻대로 다 잘 되었으니, 무슨 남은 한이 있겠소? 하물며 사 람의 수명이 기냐 짧으냐 하는 것은 천명天命 아닌 것이 없으니, 모두가 다 끝 나는 데로 돌아가지요. 단지 먼저 가느냐 나중에 가느냐만 있을 따름이니, 상 14) 강성현江城縣 : 단성현丹城縣의 고려 때 이름. 일제 초기 산청군山淸郡에 병합되었는데, 그 지역은 산청 군 단성면丹城面등 남부 일대이다. 15) 대사성大司成 : 성균관成均館의 실질적인 책임을 맡은 관직으로 정3품 당상관堂上官이다. 16) 봉익대부奉翊大夫 : 고려시대 문관 종2품 하下 품계. 17) 원외랑員外郞 : 고려시대 각 관아의 정6품직 관직. - 48 -
심하지 마시오. 라고 했다. 말을 마치자 곧 숨을 거두었다. 의정공은 부친이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약을 준비하여 이틀을 급히 달려 이르렀으나, 운명殞命하는 것을 보지는 못하였다.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마 음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영구靈柩를 받들어 진양晋陽으로 돌아가 밤낮으로 그 옆을 떠나지 않았다. 그 해 12월 갑인일甲寅日에 동방동桐房洞 감산坎山의 산에 안장安葬하였다. 공公 의 어머니 묘와는 9보步 떨어져 있고, 또 그 북쪽 아버지의 묘와는 10보 떨어 졌다. 관棺은 통나무를 그대로 쓰고, 곽槨은 7촌 두께로 했다. 상례喪禮와 제례 祭禮에 필요한 모든 도구는 문공文公 : 朱子이 쓴 주자가례朱子家禮 에 전적으로 의거하였다. 우리 조선왕조朝鮮王朝 무인戊寅 : 1398년에 의정공議政公이 정사공신定社功臣18) 이 됨으로 해서 공에게 충훈익대신덕수의협찬공신忠勳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 특진보 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19)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판병조사判兵曹事 진양백晋陽伯 을 추증追贈하였다. 임오壬午 : 1402년에는 의정공이 좌명공신佐命功臣20)이 되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을 더해주었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두텁고 무거우며 몸가짐이 청렴하고 간결하였다. 평생 아 무렇게나 말하지 않았고, 또 농담을 한 적도 없었다. 재산을 늘리는 것에 마 음을 둔 적도 없었다. 효성과 우애는 천성에서 나왔고, 일가들과 화목하게 지 냈고, 고을에서는 온화하게 처신하여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부친이 일찍 돌 아가셨는데, 숙부가 노비를 고루 나누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여러 아우나 조 카들이 관가에 소송을 하려고 하자, 공은, 어찌 감히 숙부와 다툰단 말인 가? 라고 말하며 그들을 말렸다. 숙부가 세상을 떠나니, 아우와 조카들이 전 에 소송하려던 말을 강하게 주장하자, 공은 또 종형제끼리 어찌 서로 소송 을 할 수 있겠느냐? 라고 말했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아우와 조카의 자손 과 재종형제들이 소송하여 요청하니 관가에서 나누어주었다. 의정공議政公은 받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돌아가신 우리 부친께서 하려고 하지 않던 바이 다 라고 했다. 여러 아들들에게 주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여러 아들들 이 받는 것이 곧 내가 받는 것이다 라고 하고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강 씨姜氏는 집안을 잘 다스렸고 늘 예법을 따랐다.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고, 순종함으로써 남편을 섬겼다. 자손들을 가르치는 것은 엄하면서도 이해를 잘 했고, 일가나 인척들을 대하는 데는 은혜로우면서도 두루 마음이 미쳤다. 을 해乙亥 : 1395년에 병으로 눕게 되었다. 그 때 의정공議政公은 중추원사中樞院使로 있었는데, 임금님을 뵈옵고 휴가를 요청하여 역마驛馬를 달려 3일 만에 이르렀 18) 정사공신定社功臣 : 1398년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이 있는 신하들을 책록策錄한 공신 칭호. 19)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 조선왕조 건국 직후의 문관 산계散階 정1품 품계. 그 뒤 곧 없어졌 다. 20) 좌명공신佐命功臣 :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太宗이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운 신하들을 책 록한 공신 칭호. - 49 -
다. 약을 맛보고서 바치니 강씨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죽지 않아 너의 영광스런 봉양을 보게 되었으니, 약을 마셔서 살기를 구하기를 원치 않는다 라고 하셨다. 의 정공은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권했다. 7월 초4일에 의정공에게 일러 말하기 를,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늙었느냐 젊었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너와 너의 누이가 모두 아무 탈이 없으니, 내가 이제 먼저 가는 것이 어찌 다행한 일 아니겠느냐? 여러 가지 약을 억지로 들이려고 하지 말아라 라고 했다. 그 이튿날 한평생을 마치니, 76세였다. 9월 병오일丙午日에 공公의 묘소의 남쪽 11보步 되는 곳에 붙여 안장하였다. 무인戊寅 : 1398년에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 人에 추증追贈되었다. 아들은 휘 륜崙인데, 분충장의동덕정사좌명공신奮忠仗義同德定社佐命功臣 대광보 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의정左議政 수문전修文殿 대제학大提學 영경연춘추서운관사領經筵春秋書雲觀事 세자사世子師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이다.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 성산星山 이공李公 휘諱 인미仁美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병술丙戌 : 1406년에 부인이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봉해졌다. 공의 따님은 정순대부正順大夫 연안부사延安府使 유극서柳克恕에게 시집갔다. 의 정공議政公의 아들 구久는 중군도총제부中軍都摠制府 도총제都摠制이다. 지밀직사 사知密直司事 이종덕李種德공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의정공의 맏 따님은 이조우참의吏曹右參議 홍섭洪涉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 따 님은 좌군도총제부左軍都摠制府 총제摠制 이승간李承幹에게 시집갔다. 의정공의 서자가 셋인데, 장長과 연延은 모두 어리다. 영永은 의흥시위사義興侍衛司 대호 군大護軍이다. 부사府使 : 柳克恕의 아들 유정柳汀은 호조정랑戶曹正郞이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의정공議政公의 도덕과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이름과 공훈의 융 성함은 견줄 데가 없다. 진실로 생각해 보니, 반드시 그 복록福祿을 발하게 된 유래는 오래 되었을 것이다. 아아! 진양공晋陽公 : 允潾이 착한 일을 계속하고 덕德을 이루었으니, 그 보답을 누리는 것은 마땅하지만, 그 자신에게서 받지 못 한 것은, 하늘이 장차 그 보답을 크게 하기 위해서 늦춘 것이 어찌 아니겠 는가? 옛사람21)이 말하기를, 착한 일을 하면 보답하지 않음이 없다 라고 했는데, 나는 진양공에게서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 흘러내린 은택恩 澤이 오래 가고 남긴 경사가 긴 것이 끝이 있겠는가? 아아! 훌륭하도다. 명銘은 이러하다. 흐름이 펼쳐져 나가려면, 有流斯張, 그 원천源泉이 쌓여 있어야 한다네. 維蓄其源. 가지가 무성하려면, 有枝斯茂, 21) 옛사람 : 송나라의 문학자 구양수歐陽脩. 이 말은 그의 농강천표瀧岡阡表 에 나오는 말이다. - 50 -
그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네. 維固其根. 훌륭하도다! 하씨는, 懿哉河氏, 실로 덕德이 있는 가문이로다. 實惟德門. 우뚝한 저 좌사낭중左司郞中 : 河拱辰은, 卓彼左司, 특별한 공훈이 있었다네. 克有殊勳. 이에 그 덕德을 두터이 쌓아, 乃厚其積, 후손들의 길을 열어주셨도다. 以啓後昆. 미덥고 후하신 진양공晋陽公 : 河允潾이시여! 振振晉陽, 오직 덕德을 부지런히 닦았다네. 惟德是勤. 천륜天倫을 중히 여겨 집안의 송사 막았도다. 厚倫息訟, 사람들은 그 의리에 감복했네. 人服其義. 집을 옮겨 왜구를 피했나니, 移家避寇, 사람들이 그 지혜에 탄복했도다. 人服其智. 두 고을을 은혜롭게 다스렸나니, 惠于二州, 백성들은 부모처럼 사모했네. 民慕怙恃. 의롭고 지혜롭고 또 은혜 베풀었으니, 義智且惠, 현달하여 이름나는 것 마땅하건만, 顯融是宜. 다 거두고 물러나 고향 집에서 살아가, 斂而家居, 마침내 경륜을 펼치지는 못했다네. 竟莫以施. 하늘이 후손을 내려주어, 天錫爾類, 영명하고 어진 인물 낳았도다. 乃生英賢. 우리 성스러운 임금님을 도우시어, 相我聖主, 지위가 조정 신하들 가운데서 으뜸이었네. 位極朝聯. 차분하게 조정에서 일을 처리하여, 從容廊廟, 여러 가지 업적이 높았도다. 庶績維隆. 공훈과 은덕恩德은 으뜸이고, 勳德之魁, 유학의 최고 대가였네. 斯文之宗. 임금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네. 정승이여! 王曰政丞, 실로 나와 덕德을 같이하였나니, 實予同德. 사직을 안정시키고 천명을 도운 그대의 큰 공적을, 定社佐命, 내가 훌륭하게 여기고 있다오. 懋乃丕績. 위로 삼대에 벼슬을 추증하시어, 追爵三世, 그 관직이 모두 다 높았다오. 並峻其秩. 정승공政丞公 : 河崙 공훈으로 품계 받으니, 旣勳而階,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의 관직 높았다네. 領府維崇. 모친에게도 작위를 추증하여, 錫之妣爵,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봉했다네. 辰國是封. - 51 -
잠겨있던 덕이 크게 드러남에, 不顯潛德, 세상을 떠났지만 살아 계신 것과 같았네. 雖死猶生. 진산晋山22)은 높고 높고, 晉山峨峨, 진수晋水 : 南江은 넘실넘실 흘러가는구나. 晉水泠泠23). 저 감산坎山 기슭을 바라보니, 瞻彼坎麓, 길한 기운 모였도다. 維吉之叢. 아버님 어머님이, 維考維妣, 다 그 속에 안장됐다오. 俱葬于中. 계속 흘러내려가는 경사는 綿綿流慶, 어찌 그 끝이 있겠는가? 曷其有終. 우람한 비를 새겨서, 刻銘豐碑, 가없는 오랜 후세에 알린다네. 以告無期. 밝은 후손들이여! 昭玆來裔, 누구인들 공公을 생각하지 않으리오? 孰不公思. 문학박사 경상대학교慶尙大學校 교수 허권수許捲洙 삼가 번역함 임진壬辰 : 2012년 양력 3월 25일. 22) 진산晋山 : 지리산智異山이라고 보는 설도 있고, 비봉산飛鳳山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23) 泠泠 : 춘정집春亭集 에 冷冷 으로 되어 있는 것은 잘 못이다. 라는 뜻이다. - 52 - 영령泠泠은 물 흘러가는 소리
(원문) 진주 오방재 소재 실존 비문임 有明朝鮮國贈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晉陽府院君 河公神道碑銘幷序 嘉靖大夫敬承府尹修文殿提學同知春秋館事世子左副賓客 卞季良撰 永樂十三年歲在乙未冬十二月議政府左議政浩亭先生屬季良曰惟我先考種德裕後而 予小子再與勳盟濫登峻秩且承 恩典封贈三世此其碑于墓道以示來世者宜有辭而闕 焉子其筆之季良不敢辭謹按公姓河氏諱允潾字所開晉陽望族也先世仕高麗左司郞中 諱拱辰有功顯王朝贈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四門博士諱卓回仕高王朝以親老免官還 鄕博士生挺才挺才生南秀南秀生邵邵生諱 深於公爲 祖自博士而下四世相繼登第 曾祖公與其兄浩及扶又皆登第以國制廩其母時人歆之祖諱湜 崇祿大夫判司平府事晉康君考諱恃源 贈純忠補祚功臣輔國 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政丞判兵曹事晉康府院君娶承奉郞豊儲倉副使鄭諱均之女以元至治辛酉四 月丁巳生公姿質異凡兒年七歲丁內憂哭泣盡哀若成人然庚午始就學癸酉鄕之長者 贈崇祿大夫議政府贊成事判戶曹事姜公諱承裕見而奇之以其子妻之贊成性嚴公父事 之至正丙戌始仕忠穆王朝爲式目都監錄事丁亥春姜氏得吉夢有娠冬十二月生男卽議 政公也壬辰授膳官丞乙未陞爲令丙申遷門下錄事 高麗之季門下府大小供億一委錄 事爲錄事者率多乞免公盡心營辦府官稱之戊戌拜宣德郞北部令庚子遭外艱終制癸卯 知肅州郡事階朝奉郞實恭愍王十三年也僞王塔思帖木兒率蒙漢兵將入寇諸道軍會西 北僞王敗走其將帥往來皆道于肅公待之無闕其年飢軍士還者多菜色公減俸祿又勸郡 人之有蓄者相助賑濟多所全活爲政以仁恕爲本抽歛絶而刑罰省吏民德之及其見代至 有涕泣以送者乙巳春還鄕秋議政公登第明年選爲史官公曰有子立朝矣吾不必復仕乃 與鄕之父老結爲金剛社優遊卒歲時倭寇方熾公語族人曰吾鄕濱海島寇歲至西南人先 受其害勢必及邑里宜就北村以避其鋒至丁巳秋 家結廬于桐谷明年秋寇果入邑人多 被劫掠公自桐谷入江城縣之山城擧家獨全鄕人服公先見議政公時爲大司成上書宰相 曰老親所在島夷數至吾未嘗頃刻而自安今順興府使儒者也乞以自代除父順興宰相義 其言庚申秋授公府使階奉翊先是公嘗受員外官至奉翊大夫禮儀判書故因其資云旣至 有惠政民方慕悅而疾作九月二十四日謂夫人姜氏曰吾年六十子亦成立有何遺恨況人 生脩短莫非天命皆歸於盡只有先後耳勿傷心語竟乃絶議政公聞病備藥疾馳二日而至 不及屬纊辟踊摧折奉柩歸于晉陽晝夜不離側以其年十二月甲寅葬于桐房洞坎山之岡 北距先妣墓九步又其北距先考墓十步棺用全木槨用七寸凡喪葬之具一依文公家禮至 國朝戊寅以議政公定社功贈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特進輔國崇祿大夫門下右政 丞判兵曹事晉陽伯壬午以佐命功加領議政府事晉陽府院君公稟資厚重操履廉簡平生 不妄語亦無戱言未嘗以營産留意孝友出於天性睦於族親和於鄕黨愉愉如也先考早逝 叔父不肯均分蒼赤弟姪欲訴於官公曰安敢與叔父爭止之叔父沒弟姪以前言强之公又 - 53 -
曰從兄弟亦豈可相訟及公沒弟姪之子孫與再從兄弟訟諸官分之議政公不受曰吾先子 所不爲也請與諸子公曰諸子受是吾受也竟不許姜氏善治家動循禮則奉親以孝事夫以 順敎子孫嚴而恕待族姻惠而周乙亥夏寢疾議政公時爲中樞院使謁告馳馹三日而至嘗 藥以進姜氏曰汝父逝己久吾至今未亡足見汝榮養不願飮藥求生也公涕泣以勤七月初 四日謂議政公曰人之死生不在老少汝及汝娣俱無恙吾今先逝豈不自幸不須强進諸藥 明曰卒年七十六以九月丙午附于公墓之南十一步戊寅 贈辰韓國大夫人男諱崙奮忠 仗義同德定社佐命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修文殿大提學領經筵春秋館 書雲觀事世子師晉山府院君娶奉翊大夫禮儀判書星山李公諱仁美之女丙戌封辰韓國 大夫人女適正順大夫延安府使柳克恕議政男久中軍都摠制府都摠制娶知密直司事李 公種德之女長女適吏曺右參議洪涉次女適左軍都總制府摠制李承幹庶男三長延皆幼 永義興侍衛司大護軍府使男汀戶曹正郞予惟議政公道德文章之美名位勳業之隆無有 比擬固嘗意其必有發之者久矣鳴呼晉陽公之積善成德宜享其報矣而不克有於其躬者 豈非天將大其報而遲之也歟古人有言爲善無不報予於晉陽公而徵之矣其流澤之久餘 慶之永又可旣耶鳴呼休哉銘曰有流斯長維蓄其源有枝斯茂維固其根懿哉河氏實維德 門卓彼左司克有殊勳乃厚厥積以啓後昆振振晉陽維德是勤厚倫息訟人服其義移家避 寇人服其智 惠于二州民慕怙恃 義智且惠顯融是宜歛而家居竟莫以施 天錫爾類乃 生英賢相我聖主位極朝聯從容廊廟庶績維隆勳德之魁斯文之宗王曰政丞實予同德定 社佐命懋乃丕績追爵三世並峻其秩旣勳而階領府維崇錫之妣爵辰國是封不顯潛德雖 死猶生晉山峩峩晉水冷冷瞻彼坎麓維吉之叢維考維妣俱葬其中綿綿流慶曷其有終刻 銘豊碑以告無期昭玆來裔孰不公思 永樂十四年三月 日 奉正大夫直藝文館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僉知承文院事 朴熙中書幷篆 - 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