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7돌 한글날 기념 누구나 알아야 할 한글 이야기 10+9
펴내는 글 한글의 꿈, 우리의 미래 올해는 한글 창제 570돌, 한글 반포 567돌이 되는 해입니다. 더욱이 한 글날이 공휴일로 다시 지정된 첫해이기도 합니다. 이런 뜻깊은 때에 한글 과 한글날의 의미를 더욱 널리 알리고자 한글날 기념 홍보책을 만들게 되 었습니다. 한글은 인류의 문자가 지향해야 할 최고의 문자입니다. 한국의 대표 상 표이자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이러한 한글의 가치와 의미를 함 께 나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책은 바로 국민 모두가 알아야 할 한글 상식을 담았습니다. 이 책은 모두 19문항으로 구성하였습니다. 10월 9일 한글날을 기리기 위 해 10+9 라는 상징 숫자를 구성하였고, 거기에 맞춰 19문항으로 정한 것 입니다. 전문 여론 조사 기관(오픈서베이)을 통해 초ㆍ중ㆍ고등학생 천 명 과 일반인 천 명, 모두 이천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를 참고로 하 여 문항을 구성하였습니다. 한글은 소통과 교육의 문자입니다. 세종대왕은 온 백성이 소통하고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을 만들었습니다. 일부 계층만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시대 에 하층민과 여성을 비롯하여 누구나 글을 통해 지식을 얻고 세상과 소통 할 수 있게 문자를 만든 것입니다. 한글은 어울림의 문자입니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이 어울리고 첫소리 글 자와 가운뎃소리 글자, 끝소리 글자가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도형 문자이 자 예술 문자입니다. 한글은 음악의 문자입니다. 세종대왕은 음악가로서 기본 표준음을 만들 었습니다. 그리고 그 표준음들이 서로 어울리어 무궁무진한 소리를 빚어내 는 이치를 문자에 그대로 담았습니다. 한글은 철학의 문자입니다. 한글은 음양오행의 동양 전통 철학뿐 아니라 하늘과 땅과 사람이 두루 조화되는 철학이 담긴 문자입니다. 한글은 수학과 과학의 문자입니다. 점과 원과 선만으로 이루어진 간결한 수학의 문자이면서도 발음 기관과 조음 작용의 과학을 반영한 규칙적이고 체계적인 문자이기도 합니다. 한글은 융합 학문의 꽃입니다. 세종대왕은 음악과 천문학, 언어학, 과학, 수학 등 거의 모든 학문을 융합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습니다. 요즘 꼭 필요한 통합 학문과 문화융성의 뿌리는 이미 훈민정음에 담겨 있습니다. 소통과 어울림의 시대에 이 작은 책이 한글의 참가치와 한글 사랑을 북돋 는 징검다리가 되길 바랍니다. 특히 초ㆍ중ㆍ고등학생들이 이 책을 통해 한 글 사랑을 더욱 키워 나가길 바랍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유진룡 2 3
차례 펴내는 글 첫째 마당. 한글(훈민정음) 창제 이야기 1. 한글은 언제 만들었나요? 2. 한글을 왜 만들었나요? 3. 일부 신하들은 왜 한글 반대 상소를 올렸나요? 4. 한글을 반포할 때 도움을 준 신하는 누구인가요? 2 8 10 12 14 넷째 마당. 한글 역사 이야기 14. 세종대왕 이후의 임금들은 훈민정음을 어떻게 사용하였나요? 15. 조선 시대에도 띄어쓰기와 맞춤법이 있었나요? 16. 일제 강점기에 우리 말글을 어떻게 지켰나요? 17. 광복 후에 우리 말글은 어떻게 발전했나요? 46 48 50 52 둘째 마당. 15세기 훈민정음 이야기 5. 훈민정음, 언문, 한글 등의 용어는 어떻게 쓰였나요? 6. 훈민정음 28자를 만든 원리는 무엇인가요? 7. 한글(훈민정음)을 왜 과학적인 글자라고 하나요? 18 20 24 다섯째 마당. 세계 속의 한글 이야기 18. 세종대왕상 은 어떤 상인가요? 19. 세종학당 은 무엇인가요? 56 58 8. 훈민정음 해례본은 무엇인가요? 9. 훈민정음 언해본은 무엇인가요? 28 30 부록 한글날 주요 연표 60 셋째 마당. 현대 한글 이야기 참고 문헌 62 10. 한글날은 왜 10월 9일이 되었나요? 34 11. 15세기 훈민정음 28자 가운데 없어진 글자는 무엇이며 36 왜 없어졌나요? 12. 왜 ㄱ, ㄷ, ㅅ 을 기역, 디귿, 시옷 이라 부르게 되었나요? 38 13. 현대 한글의 자모로 조합할 수 있는 글자 수는 몇 자인가요? 41
첫째 마당 한글(훈민정음) 창제 이야기 1. 한글은 언제 만들었나요? 2. 한글을 왜 만들었나요? 3. 일부 신하들은 왜 한글 반대 상소를 올렸나요? 4. 한글을 반포할 때 도움을 준 신하는 누구인가요?
1. 한글은 언제 만들었나요? 내었습니다. 한글은 언어학과 음악, 철학 등 여러 학문을 두루 잘 알고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종대왕과 집현전 같은 훌륭한 연구소와 세종대왕 과 뜻을 함께하는 많은 인재들이 있었기에 창제되고 반포될 수 있었습니다. 한글은 1443년에 창제되었고, 1446년 훈민정음 이란 책자가 완성, 반 포되면서 우리는 이날을 한글 반포 기념일로 삼게 되었습니다. 한글 창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의 기록입니다. 조선왕조실록 1443년 음력 12월 30일 자에 이달에 임금(세종대왕)께서 친히 언문(훈민정음) 28 자를 만드셨으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다음 세종대왕과 정인지를 포함한 집현전 학사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 여덟 신하는 글자 훈민 정음을 만든 취지와 원리, 풀이와 용례 를 자세하게 쓴 책 훈민정음 해례 본을 1446년 음력 9월 초에 펴냈습니다. 이로써 한글은 세상에 널리 알려 지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세종대왕 서문과 예의( 例 義 ), 정인지 서문은 조선왕조실록 1446년 음력 9월 29일 자에도 실려 있습니다. 정인지 서문에는 계해년 (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여, 간략하게 용례와 뜻 을 적은 것을 들어 보여 주시며 그 이름을 훈민정음 이라 하셨 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신하들은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에 아아, 훈민정음이 만 들어짐에는 천지만물의 이치가 모두 갖추어졌으니, 그 신령함이여! 이는 틀림없이 하늘이 임금(세종대왕)의 마음을 열어 그 솜씨를 빌려 주신 것이 로다!라고 적었습니다. 신하들의 대표인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 정 인지 서문 에 우리 전하는 하늘이 내린 성인으로서, 지으신 법도와 베푸 신 업적이 모든 왕들을 뛰어넘으셨다. 라고 훈민정음 창제의 기쁨을 나타 8 9
2. 한글을 왜 만들었나요? 만든 것입니다. 이 밖에도 한글(훈민정음)은 한자음을 정확히 적을 수 있는 발음 기호와 같은 문자 구실도 할 수 있으니, 다목적용 문자라 할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한자(한문)를 몰라 자기들의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백성들이 글을 통해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해 편안한 삶을 살도록 하 기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습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기 전에는 우리말을 적을 문자가 없어 한자 를 빌려 적었습니다. 입으로는 한국말을 하고, 글을 쓸 때는 한문을 쓰는 이중 언어생활이 가장 큰 문제였지요. 입으로는 난 책을 좋아해. 라고 하 고, 글로는 我 好 冊 (난-좋아해-책을) 이라고 쓰다 보니 불편한 점이 많았 습니다. 그나마 양반 사대부들은 한자를 배울 수 있었지만, 일반 백성들은 한자를 배우는 게 쉽지 않았지요. 그래서 세종대왕은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우리말을 자유롭게 적 을 수 있는 훈민정음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이 표현 하고 싶은 뜻이 있어도 한자로는 소통할 수 없는 것을 가엾이 여겨 백성들 이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는 문자를 만든 것입니다. 또한 죄지은 사람들의 자세한 사정을 적은 문서들이 한문이나 이두로 되어 있다 보니 죄인을 다 스리는 관리들이 문서를 잘못 이해하여 그릇된 판결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 니다. 세종대왕은 이를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던 세종대왕은 성현의 가르침과 생활 정보, 올바른 생활 태도 등도 책을 통해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한문으로 된 책은 한문을 익힌 사대부들만 읽을 수 있으니 소용이 없었습니다. 누구나 쉽게 익혀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배우기 쉬운 문자가 필 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하루아침에 배워 쓸 수 있는 쉬운 글자를 1449년에 어떤 사람이 하정승(하연)아, 나 랏일을 어지럽게 망치지 마라. 라고 비판한 한글 벽서를 썼다. 그 한글 벽서는 남아 있지 않으며 한문 번역만 전한다. 글씨 청농 문관효 조선왕조실록 1449년 10월 5일자에 기록된 왼쪽의 한문 번역 내용을 그 당시 한글로 재현 한 것이다. 10 11
3. 일부 신하들은 왜 한글 반대 상소를 올렸나요? 히려 대부분의 사대부 양반들이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를 반대하지 않았다 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444년 2월 20일 최만리를 비롯하여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 처검, 조근 등이 언문(훈민정음)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훈민정 음이 창제된 1443년 이후, 최만리 외 몇몇 신하들이 올린 상소를 보면 이 들도 훈민정음의 과학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상소문 첫 문장에 신 등이 엎드려 보건대, 언문(훈민정음)을 만든 것이 매우 신기하고 기묘 하여, 지혜를 나타냄이 저 멀리 아득한 옛것으로부터 나온 것을 알겠습니 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최만리 외 몇몇 신하들은 크게 세 가지의 이유를 들어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하였습니다. 첫째, 훈민정음 창제는 중국을 떠받드는 사대주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오랑 캐나 하는 일이라고 본 것입니다. 세종대왕도 중국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 니다. 중국의 것을 따를 것은 따르되 우리의 것을 지켜 나가자는 것이지요. 둘째, 훈민정음이 학문에 정진하는 데에 오히려 손해만 된다는 것이었습 니다. 이에 대해 세종대왕은 언문(훈민정음) 창제가 학문만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며 학문보다 백성들이 편안하게 사용하는 것이 더 중요 하다고 여겼습니다. 셋째, 억울한 죄인이 생기는 것은 죄인을 다루는 관리들이 공정하지 못한 탓이지 죄인들이 문자를 몰라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세종대왕 은 훈민정음을 통해 억울한 죄인을 구제하고 교화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세종대왕은 반대 상소문을 올린 신하들을 설득한 후, 더 철저히 훈민정음 반포를 준비했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반대 상소는 단 한 건뿐이었으니, 오 12 13
4. 한글을 반포할 때 도움을 준 신하는 누구인가요?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 집현전 학자들에게 훈민정음 해설서 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훈민정음 해설서 집필에 참 여한 집현전 학자는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입니다. 정인지는 훈민정음 연구 분야에서 큰 역할을 맡았습니다. 1446년에는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을, 1447년에는 용비어천가 를 지었지요. 정인지 는 세종대왕의 서문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 해설ㆍ보충하고, 해례본의 편찬 경위와 참여자, 훈민정음 창제자를 밝혀 놓음으로써 훈민정음의 진정한 가 치를 세상에 널리 알렸습니다. 또한 역사, 천문, 음악 등에도 재주가 뛰어 나 훈민정음 사업의 책임자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최항 역시 훈민정음 연구 분야에서 공적을 남겼습니다. 용비어천가 의 발문을 쓰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집필하는 큰 역할을 맡았습니다. 역사와 어학에 재주가 있어 고려사, 동국정운 등을 편찬할 때에도 주도적인 역 할을 하였습니다. 1444년(세종 26)에는 집현전 교리로서 오례의주 를 편 찬하고 운회 를 번역했습니다. 1461년(세조 7)에는 양성지의 잠서 를 한 글로 번역해서 펴냈습니다. 신숙주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집필하고 동국정운 을 펴낸 중요한 인 물입니다. 신숙주는 동국정운 머리말에서 성운(글자의 소리)은 곧 훌륭 한 사람의 길을 배우는 시작입니다. 이리하여 우리 임금(세종대왕)께서 말 소리에 마음을 두시고 고금의 모든 것을 두루 살피시고 지침이 될 만한 훈 민정음을 만드시어 수억 년 동안 어리석게 살아 온 자들을 깨우치셨습니 다. 라고 하였습니다. 동국정운 은 이상적인 중국 한자음의 표준을 적은 책인 만큼 그 책을 펴 낸 것만으로도 훈민정음 연구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이지요. 신숙주는 이두는 물론 중국어ㆍ일본어ㆍ몽골어ㆍ여진어에도 뛰어나 훈민정음 및 한 자음의 연구와 보급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성삼문은 훈민정음 해례본 반포 1년 전인 1445년에 신숙주와 함께 중 국 요동을 여러 번 방문하여 중국의 음운학자인 황찬에게 중국 한자음에 대한 의견을 구했습니다. 인물 (생몰 연대) 세종 대왕 1397~ 1450 정인지 1396~ 1478 최항 1409~ 1474 박팽년 1417~ 1456 신숙주 1417~ 1475 성삼문 1418~ 1456 강희안 1417~ 1464 이개 1417~ 1456 1443 47세 48세 35세 27세 27세 26세 27세 27세? 1446 50세 51세 38세 30세 30세 29세 30세 30세? 직책 임금 집현전 대제학 정2품 집현전 응교 정4품 집현전 부교리 종5품 집현전 부교리 종5품 집현전 수찬 정6품 돈녕부 주부 정6품 훈민정음 해례본 완성 당시(1446년)의 세종대왕과 공동 저자들의 나이와 직책 (강희안은 1446년 당시에는 집현전 학사가 아니었으나 나중에 학사가 됨.) 집현전 부수찬 종6품 이선로?~ 1453 집현전 부수찬 종6품 14 15
둘째 마당 15세기 훈민정음 이야기 5. 훈민정음, 언문, 한글 등의 용어는 어떻게 쓰였나요? 6. 훈민정음 28자를 만든 원리는 무엇인가요? 7. 한글(훈민정음)을 왜 과학적인 글자라고 하나요? 8. 훈민정음 해례본은 무엇인가요? 9. 훈민정음 언해본은 무엇인가요?
5. 훈민정음, 언문, 한글 등의 용어는 어떻게 쓰였나요? 생에 의해 1913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최남 선이 이름을 지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1927년에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한글 이라는 잡지를 매달 발간하였고, 1928년 11월 11일에 조선어연구 회에서 가갸날 을 한글날 로 고쳐 부르며 더욱 널리 퍼졌습니다. 훈민정음, 언문, 한글 모두 1443년에 창제되고 1446년에 반포된 우리 나라 고유의 문자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 쓰임새는 조금 다릅니다. 조선 시 대에는 주로 언문( 諺 文 ) 이라는 이름으로, 그 이후에는 한글 이라는 이름 으로 불리었고, 특별한 경우에 훈민정음 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주로 훈민정음 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 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로 언문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고, 세종 대왕도 그러했습니다. 훈민정음 은 말 그대로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바른 소리 라는 뜻으로 주로 특별한 때만 사용되었습니다. 언문 은 보통 우리 고유의 문자 훈민정음 의 낮춤말로 알려져 있지만, 실 제로는 전하는 말이나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을 그대로 옮기어 적을 수 있 는 문자 라는 뜻입니다. 세종대왕도 이 이름을 사용한 기록이 있고 특별한 경우에만 훈민정음 이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언문 은 궁중과 일부 양반층,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훈민정음 을 얕잡 아 언문 이라고 쓰다 보니 낮춤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 이 후에도 국서( 國 書 ), 국문( 國 文 ) 또는 조선글 로 불리기도 하였지만 주로 언문 으로 불렸습니다. 한글 은 오직 하나의 큰 글, 한나라 글 이라는 의미로 1910년 이후에 주 한글배곧죽보기 (조선어강습원 연혁) 한글모죽보기 (국어연구학회 연혁) 시경 선생에 의해 널리 퍼졌습니다. 특히 주시경 선생은 1913년 3월 23 일 조선언문회( 朝 鮮 言 文 會, 지금의 한글학회) 총회에서 배달말글몯음 을 한글배곧 (조선어강습원) 졸업장 한글모 로 바꾸기로 결정하였고, 1914년 4월에는 조선어강습원 을 한글 배곧 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런 흐름으로 볼 때 한글 은 주시경 선 18 19
6. 훈민정음 28자를 만든 원리는 무엇인가요? 어금닛소리 ㄱ 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본뜬 것이고, 혓소리 ㄴ 은 혀가 윗잇몸에 닿는 모양을 본뜬 것이며, 입술소리 ㅁ 은 입의 모양 을 본뜨고, 잇소리 ㅅ 은 이의 모양을 본떴으며, 목구멍소리 ㅇ 은 목구멍 의 모양을 본뜬 것입니다. 그 다음 이 글자들을 바탕으로 다른 글자들을 만들었습니다. ㄱ, ㄴ, ㅁ, 현대 한글은 자음 14자, 모음 10자 모두 24자입니다. 하지만 15세기 훈 민정음은 모음 ㆍ (아래아), 자음 ㆆ(여린히읗), ㅿ(반시옷), ㆁ(옛이응)을 더해 28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훈민정음은 자음 17자, 모음 11자로 이루 어졌습니다. ㅅ, ㅇ 의 소리는 거세지 않은 소리입니다. 그런데 이 소리들보다 입김을 많 이 내어 세게 소리를 내면 거센 소리가 됩니다. 거센 소리를 나타내기 위해 획을 더하여 9자를 더 만들었습니다. 이 밖에도 이체자 ㆁ,ㄹ,ㅿ 세 자가 더 있어 훈민정음의 자음자는 모두 17자입니다. 자음은 닿소리 라고도 말하는데, 닿소리란 목구멍에서 숨이 나올 때 그 숨이 입안 어딘가에 닿으면서 만들어진 소리라는 뜻입니다. 그 를 천천히 갈래 상형 원리 기본자 가획자 이체자 크게 발음해 보면 ㄱ 은 자음이고, ㅡ 는 모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음 소리를 작게 내면 자음 ㄱ 의 발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래 그림은 자음을 발음할 때 발음 기관의 모양입니다. 이 그림을 보고 오른쪽 ㄱ 표시 부분을 확인하면 어떻게 ㄱ 이란 글자가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음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습니다. 어금닛소리(아음) 혓소리(설음) 입술소리(순음)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혀끝이 윗잇몸에 닿 는 모양 입의 모양 잇소리(치음) 이의 모양 목구멍소리(후음) 목구멍의 모양 15세기 훈민정음 자음자 17자의 제자 원리 이러한 자음에는 다음 표와 같이 음악(오음)과 철학(오행)의 원리도 적용 되어 있습니다. 우리 입안에서 닿소리가 만들어지는 자리는 어금니, 혀, 입술, 이, 목구 멍 모두 다섯 곳입니다. 그 다섯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든 5개의 기본 자가 바로 ㄱ, ㄴ, ㅁ, ㅅ, ㅇ 입니다. 20 21
갈래 자음 오음 입술소리 (순음) ㅁㅂㅍ 잇소리 (치음) ㅅㅈㅊ [ㅿ] 어금닛소리 (아음) ㄱㅋ [ㆁ] 혓소리 (설음) ㄴㄷㅌ [ㄹ] 목구멍소리 (후음) ㅇㆆㅎ 오음(음악) 궁 상 각 치 우 양성 상형 원리 하늘의 둥근 모양 기본자 양 성 초출자 합성 원리 재출자 오행 흙 쇠 나무 불 물 오시(계절) 늦여름 가을 봄 여름 겨울 음성 땅의 평평한 모양 음 성 오방(방위) 중앙 서 동 남 북 자음 17자에 적용된 음악과 철학 원리 중성 사람이 서 있는 모양 15세기 훈민정음 모음자 11자의 제자 원리 모음은 홀소리 라고도 하는데, 홀소리란 목구멍에서 숨이 나올 때 입안 어디에도 닿지 않고 혼자서 나는 소리라는 뜻입니다. 모음의 기본자 역시 자음의 기본자처럼 모양을 본떠서 만들기는 하였으나,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뜬 것이 아니라 하늘ㆍ땅ㆍ사람 삼재( 三 才 )의 모양을 본뜬 것입니다. 먼저 하늘의 둥근 모양을 본떠 ㆍ 를 만들고, 땅의 평평한 모양을 본떠 ㅡ 를, 사람이 서 있는 모양을 본떠 ㅣ 를 만들었습니다. 모음은 소리를 낼 때 혀의 모양이 각각 다르고 그 느낌도 서로 다릅니다. ㆍ 는 혀가 오그라 들고 소리가 깊으며, ㅡ 는 혀가 조금 오그라들고 소리가 깊지도 얕지도 않 으며, ㅣ 는 혀가 오그라들지 않고 소리는 얕습니다. 그리고 기본자( ㆍ, ㅡ, ㅣ)를 한 번씩 합쳐,,, 의 네 자 를 만들었습니다. ㅡ 에 ㆍ 를 위아래로 합쳐, 를 만들고, ㅣ 에 ㆍ 를 바깥쪽과 안쪽에 합쳐, 를 만들었습니다.,,, 는 ㆍ 를 두 번씩 합쳐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음 11자를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모음자는 하늘(양성)과 땅(음성)의 음양 사상과 여기에 사람(중 성)까지 함께 조화롭게 어울리는 삼조화 사상을 담은 천지자연의 문자 철 학을 담고 있습니다. 22 23
7. 한글(훈민정음)을 왜 과학적인 글자라고 하나요? 한글은 천지자연의 소리를 발음하는 원리와 철학을 바탕으로 만든 과학적 인 글자입니다. 수학처럼 규칙적이고 정확하며, 바둑판처럼 체계적인 것을 과학이라 합니다. 이러한 과학은 누구에게나 언제 어디서나 합리적이어서 객 관적이고 보편적이며 실용적인데 한글이 바로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는 좀 더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문자를 만들고자 애써 왔습니다. 그래 서 한자와 같은 뜻 문자나 자음과 모음이 분리되지 않는 일본의 음절 문자 보다는 자음과 모음이 분리되어 실용적인 영어 알파벳(로마자)과 같은 자 모 문자(음소 문자)가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한글은 과학성과 실용성을 두 루 갖춘 문자입니다. 15세기 훈민정음 28자를 중심으로 그 근거를 다섯 가 지로 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말소리가 나오는 발음 기관과 조음 작용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분 석하여 이를 문자에 반영했기 때문에 과학적입니다. 특히 자음은 특정 발 음 기관에 닿아 나는 소리이기 때문에 그림과 같이 다섯 곳(입술, 이, 윗잇 몸에 닿는 혀, 목구멍을 막는 혀, 목구멍)을 본떠 만들었습니다. 모음 기본 석 자(ㆍ, ㅡ, ㅣ)는 각각 하늘과 땅과 사람을 본떠 만들었지만 이는 양성 은 양성끼리 음성은 음성끼리 어울리는 우리말의 특성을 반영하기 위한 전 략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자연의 소리나 사람의 말소리를 가장 정확하게 적을 수 있는 과학적인 문자가 되었습니다. 둘째, 기본자를 바탕으로 다른 글자를 만드는 과정이 규칙적입니다. 자 음은 ㅅ-ㅈ-ㅊ 과 같이 획을 더하는 방식이 규칙적이고, 모음은 세 개의 기본자를 합성하는 방식이 규칙적입니다. 이렇게 한글은 최소의 문자를 통해 기본 글자를 만들어 간결하고 실용적 입니다. 훈민정음은 모두 28자이지만 기본자는 모음 석 자(ㆍ, ㅡ, ㅣ), 자 음 다섯 자(ㅁ, ㅅ, ㄴ, ㄱ, ㅇ)에 불과합니다. 나머지는 기본자에서 규칙적 으로 확장된 문자이므로 간결한 과학적 특성을 갖춘 것입니다. 또한 받침으로 쓰는 끝소리 글자는 첫소리 글자를 가져다 써서 최소의 낱 자로 많은 글자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각, 몸 과 같은 글자입니 다. 만약 끝소리 글자를 다른 모양으로 만들었다면 글자 수가 너무 많아 쉽 게 배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셋째, 첫소리 글자, 가운뎃소리 글자, 끝소리 글자를 합쳐 모아쓰는 방식 이 규칙적이고 실용적입니다. 그 덕에 글자를 빨리 읽고 쓸 수 있습니다. 만약 한글 을 ㅎㅏㄴㄱㅡㄹ 과 같이 풀어썼다면 쉽게 이해할 수 없고 읽 는 속도도 느려졌을 것입니다. 풀어쓸 때보다 모아쓸 때 2.5배 더 빨리 읽 는다는 실험 결과도 있습니다. 24 25
a 의 다양한 발음 [e] 발음을 나타내는 다양한 알파벳 넷째, 소리 성질과 문자 모양이 규칙적으로 대응합니다. 예사소리 ㄱ, ㄷ, ㅂ, ㅈ, 된소리 ㄲ, ㄸ, ㅃ, ㅉ, 거센소리 ㅋ, ㅌ, ㅍ, ㅊ 이 규칙적으 fam i ly [fǽməli] gar den [gάːrdn] wa ter [wɔ ːtər, wάt-] parent [peərənt].... 가족 정원 물 부모 aesthetic [esθetɪk] desk [desk] friend [frend] weather [weðə(r)].... 심미적 책상 친구 날씨 로 대응합니다. 한글의 과학적 특성은 과학의 최첨단 분야인 휴대 전화에서 더욱 빛을 발 하고 있습니다. 모음자 합성 방식의 과학을 잘 살린 천지인 방식과 자음자 가획 방식의 과학을 잘 살린 나랏글 방식이 그것입니다. 제품명 배치도 특징 소리 성질과 문자 모양 규칙 대응 천지인 모음 합성 원리를 잘 살림 다섯째, 한 글자는 하나의 소리로, 한 소리는 하나의 글자로 대부분 일치합 니다. 영어에서 a 라는 글자는 여러 가지로 소리가 납니다. 하지만 한글의 아는 아버지, 아리랑 과 같이 하나의 소리로 납니다. [아] 소리는 ㅏ 글자로만 쓰고, ㅏ 글자는 [아] 소리로만 나는 것입니다. 나랏글(EZ) 자음의 획 더하기 방식을 잘 살림 26 27
8. 훈민정음 해례본은 무엇인가요?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발견 당시 표지와 맨 앞 두 장, 총 네 쪽이 없었습니 다. 다행히 이 부분의 내용이 <사진 2>와 같이 조선왕조실록 에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간송본에서 이 두 장을 복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종대왕 서 문의 맨 마지막 글자인 耳 를 <사진 1>과 같이 矣 로 잘못 복원하였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훈민정음을 알기 쉽게 풀이한 책입니다. 세종대왕 은 1443년에 훈민정음을 만들고, 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훈민정음 해 례본을 통해 백성들에게 새 문자 훈민정음과 그것을 만든 원리와 운용 방 법을 알렸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창제의 취지와 원리, 역사적 의미 등을 비롯하여 문자의 다양한 예시 등이 실려 있습니다. 이 책은 세종대왕을 비롯해 집현 전 학사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 여 덟 명이 함께 지었습니다. 세종대왕이 쓴 부분을 예의편 또는 본문 또는 정음 이라 부르고, 신하들이 풀어 쓴 부분을 정음 해례 또는 해례편 이라 고 부릅니다. 예의편(본문) 은 세종대왕의 서문과 예의로, 해례편(정음 해 례) 은 해례 와 정인지 서문 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1책으로 전체 33장입니다. 예의 부분은 장마다 14 행에 매 행 11자이며, 해례 부분은 장마다 16행에 매 행 13자이며, 해례 끝 의 정인지 서문은 한 글자를 내려 적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의와 해례 사이 에 행과 글자 수에 차이가 나는 것은 임금이 작성한 예의는 글자의 크기를 크게 하고, 신하들이 작성한 해례 부분은 임금을 공경한다는 뜻에서 글자 의 크기를 작게 했기 때문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목판본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이 직접 펴낸 초간본은 오랜 세월 알려지지 않다가 1940년에 경상북도 안동에서 이용준 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 책을 간송 전형필 선생이 사들여 지금은 간송 미술관(서울 성북구 소재)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국보 제70호로 <사진 1>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 첫째 장 <사진 3>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 용자례 <사진 2> 세종대왕 서문이 수록되어 있는 조 선왕조실록 1446년 9월 29일 자 기사 28 29
9. 훈민정음 언해본은 무엇인가요? 훈민정음 언해본은 훈민정음 해례본 가운데 세종대왕이 직접 쓴 서문 과 예의 부분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한 것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 래된 자료로는 세조가 펴낸 것으로 정확한 제목은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 御製訓民正音) 입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살아 있을 때 번역ㆍ간행한 자 <사진 1> 훈민정음 언해본 첫째 장 료가 남아 있다면 그 제목은 훈민정음(訓民正音) 이었을 것입니다. 1446 년에 펴낸 훈민정음 해설서 훈민정음 해례본은 내용이 한문이라 한자(한 문)를 모르는 백성들은 읽을 수 없었습니다. 이 언해본은 세종대왕 때에 나 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언제 누가 번역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언해본은 단행본으로 나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마 그것을 세종대왕 당 시 수양대군이 지은 석보상절 의 권1ㆍ2 앞부분에 붙였을 것입니다. 세 종대왕이 세상을 떠난 후, 임금으로 등극한 세조는 세종대왕이 지은 월인 천강지곡 과 그의 석보상절 을 합본한 월인석보 를 만들면서 권1ㆍ2 앞 <사진 2> 훈민정음 언해본 첫째 장 복원본 에 이 언해본을 붙여 세조 5년(1459)에 간행하였습니다. 훈민정음 언해본이 나온 때는 훈민정음이 반포된 뒤 1년 이내일 것이 며, 이 언해본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훈민정음을 깨쳐 나갔을 것이고, 그 문 자의 힘은 역사 변혁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사진 1>은 훈민정음 언해본의 첫 장을 펼쳐 놓은 것입니다. 목판으로 인쇄했으며, 반듯한 글꼴로 된 훈민정음 해례본보다 부드러운 흘림체 글 꼴로 되어 있습니다. <사진 2>는 국어사학회에서 2007년에 세종대왕 당대 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고, <사진 3>은 세종대왕 서문의 맨 끝 부분입니다. <사진 3> 훈민정음 언해본 세종대왕 서문 마지막 장 30 31
셋째 마당 현대 한글 이야기 10. 한글날은 왜 10월 9일이 되었나요? 11. 15세기 훈민정음 28자 가운데 없어진 글자는 무엇이며 왜 없어졌나요? 12. 왜 ㄱ, ㄷ, ㅅ 을 기역, 디귿, 시옷 이라 부르게 되었나요? 13. 현대 한글의 자모로 조합할 수 있는 글자 수는 몇 자인가요?
10. 한글날은 왜 10월 9일이 되었나요? 한글날은 훈민정음을 해설한 책 훈민정음 해례본을 만들어 반포한 것 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몇 권을 찍었는지 알 수 없으나,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다가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원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훈민정음 반포 날짜를 음력 9월 29일로 정하고 1926년부터 한 정 통 십 일 년 구 월 상 한 글날 기념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런데 훈민정음 해례본 맨 뒤를 보면 정 통 십일 년 구 월 상한( 上 澣 )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정통 11년은 1446년을 간행 날짜가 적힌 훈민정음 해례본 가리키고, 상한은 상순 과 같은 말로 1일부터 10일까지를 뜻하는데, 당 시 조선어학회에서는 1일부터 10일 중 어느 날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상순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10일을 훈민정음 해례본을 반포한 날로 정 했습니다. 그래서 1945년부터 음력 9월 10일을 양력으로 바꿔 10월 9일에 기념식을 거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훈 민 정 음 성 그렇다면 북한에도 한글날이 있을까요? 남한처럼 한글날 이라고 부르지 는 않지만 북한에서도 한글 창제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다만 남한은 훈민 정음을 반포한 날을, 북한은 훈민정음 창제 기념일 이라 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한 날을 기념하고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1443년 음력 12월 30일 자 정 인 지 서 조선왕조실록 에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으셨다. 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달에 라고 했으니, 정확히 12월 어느 날에 새 문자가 만들어졌 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북한은 12월의 중간인 12월 15일을 창제일 로 잡고, 그 날짜를 양력으로 바꾸어 1월 15일을 기념일로 삼고 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간행 사실 을 알린 조선왕조실록 1446년 음력 9월 29일자 기록. 訓 民 正 音 成 이라 한 뒤 세종대 왕 서문과 예의, 정인지 서문을 수록하였다. 34 35
11. 15세기 훈민정음 28자 가운데 없어진 글자는 무엇이며 왜 없어졌나요? 약하게 나오다 보니 (사이), (가을), (이어) 같은 데 쓰였으나 대부분 없어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임진왜란 이후 일어났습니다. ㆍ(아래아) 는 ㅏ 와 ㅗ 의 중간음으로 혀 뒤쪽에서 낮게 나오는 소리입 니다. 제주도에서는 이 소리가 아직도 등의 낱말에 남아 있습니 다. 15세기에는 ㅡ 와 대립을 이루는 양성 모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할 때 글자 수는 28자였습니다. 지금은 24자이 니 모두 네 자를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 글자는 자음 ㆁ(옛이응), ㆆ(여린 히읗), ㅿ(반시옷), 모음 ㆍ(아래아) 입니다. ㆁ(옛이응) 은 마치 사과처럼 꼭지가 붙어 있어 꼭지이응 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옛이응 으로 부르는 것이 바른 명칭입니다. 받침으로 쓰이는 경우는 (짐승), (백성) 등과 같이 오늘날의 이응 받침과 소릿값이 같습니 니다. 소리로는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다른 소리로 바뀌어 > > >마음 과 같이 ㅡ 와 ㅏ 로 바뀌었습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소 매 처럼 ㅗ 로 바뀐 경우도 있고, >하루 와 같이 ㅜ 로 바뀐 경우도 있 습니다. ㆍ 음은 인접한 다른 모음에 밀려 변화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ㆍ 의 소리는 18세기에 이미 사라졌지만 표기는 1933년 한글 맞춤법이 제 정될 때까지도 쓰였습니다. 다. ㆁ(옛이응) 이 받침으로 쓰일 때는 글자의 형태만 ㅇ(이응) 으로 바뀌 었고, 첫소리 자리에 쓰일 때는 그 긔> * 그어긔>거기 와 같이 글자는 ㅇ(이 응) 으로 변하고 발음은 없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 >방울 과 같이 ㆁ(옛이응) 이 앞 음절의 받침으로 이동하면서 글자는 ㅇ(이응) 으로 바뀌 고 발음은 그대로 유지된 경우도 있습니다. ㆆ(여린히읗) 은 ㅎ 과 같은 계열의 목구멍소리로 ㅎ 보다 약한 소리를 나타낼 때 쓰려고 만들었지만 실제로는 특별 기호처럼 쓰였습니다. 동국정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ㆆ ㅿ ㆁ ㆍ ㅏ ㅑ ㅓ ㅕ ㅗ ㅛ - ㆍ (아래아) ㆆ (여린히읗) ㅿ (반시옷) ㆁ (옛이응) = 24글자 운식 한자음에서는 (정음), (편안) 과 같이 쓰였는데 오 ㅜ ㅠ ㅡ ㅣ 늘날과 같이 정음, 편안 이라고 발음할 때 음 과 안 을 목에 힘을 주면서 짧게 발음하면 ㆆ(여린히읗) 과 비슷한 소리가 납니다. 이 밖에도 (할 바가), (못 할 놈이), (하늘의 뜻) 과 같이 쓰였지만 성 종 시대부터 사라졌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뜻을 구별하는 소리로 잘 인 식되지 않다 보니 없어진 셈입니다. ㅿ(반시옷) 은 ㅅ 의 울림소리(유성음)로 ㅅ 보다 더 약한 소리입니다. ㅅ 처럼 발음하되 혀를 더 낮춰 ㅅ 발음을 약하게 하면 됩니다. 이렇게 36 37
12. 왜 ㄱ, ㄷ, ㅅ 을 기역, 디귿, 시옷 이라 부르게 되었나요? 장합니다. 조선 시대 어학자 최세진이 당시에 통용된 것을 기록으로 남긴 것입니다. 훈몽자회 를 보면 자음의 이름을 한자로 적을 때 -은, -을 음은 대응되는 한자 隱 (은), 乙 (을) 로 적었으나, 대응되는 한자가 없는 -윽, -읃, -읏 은 비슷한 한자의 음이나 뜻을 빌려 기역, 디귿, 시옷 으 로 적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역 은 其 役 (기역) 으로, 디귿 은 池 末 (디 말) 로, 시옷 은 時 衣 (시의) 로 적은 것입니다. 윽 은 役 (부릴 역) 으로 비슷한 한자음을 취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읃 의 경우는 뜻의 음이 비슷한 末 (끝<귿 말) 에서 귿 을 따오고 읏 도 뜻의 음이 비슷한 衣 (옷 의) 에서 옷 을 따와 자모의 명칭으로 삼았습니다. 이들 명칭은 다른 명칭과 다르기는 하지만 첫소리의 자음과 끝소리의 자음을 모 두 보여 주는 방식은 니은, 리을 등의 다른 자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오랜 전통을 존중하여 기역, 디귿, 시옷 으로 부르 지만, 북한에서는 다른 것과의 일관성을 좇아 기윽, 디읃, 시읏 으로 명칭 을 삼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한글 자음의 글자 수는 14자입니다. 그 자음을 부르 는 이름 가운데 ㄱ, ㄷ, ㅅ 세 글자는 명칭의 규칙에서 조금 벗어나 있습 니다. 기윽, 디읃, 시읏 이 아닌 기역, 디귿, 시옷 인 것입니다. 다른 자 음들은 모음 가운데서도 기본 모음인 ㅣ, ㅡ 를 활용해 나타냅니다. 자음 은 혼자 발음할 수 없고 모음의 도움을 받아야 발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두 모음을 통해 첫소리에서 나는 자음과 끝소리에서 나는 자음을 동시에 드러내는 니은(ㄴ), 리을(ㄹ) 식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기역, 디귿, 시옷 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글 기본 자음의 이름은 1527년 최세진이 펴낸 훈몽자회 에 처음 등 38 39
13. 현대 한글의 자모로 조합할 수 있는 글자 수는 몇 자인가요? 대 한 민 국 자음(19자) 순 서 ㄱ ㄲ ㄴ ㄷ ㄸ ㄹ ㅁ ㅂ ㅃ ㅅ ㅆ ㅇ ㅈ ㅉ ㅊ ㅋ ㅌ ㅍ ㅎ 이 름 기 역 쌍 기 역 니 은 디 귿 쌍 디 귿 리 을 미 음 비 읍 쌍 비 읍 순 서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ㄲ ㄸ ㅃ ㅆ ㅉ 시 옷 쌍 시 옷 이 응 지 읒 쌍 지 읒 치 읓 키 읔 티 읕 피 읖 히 읗 한글은 모음자를 중심으로 모아서 씁니다. 모음자를 중심으로 첫소리 자 음과 끝소리 자음(받침)을 모아서 쓰는 것이지요. 물론 받침이 없는 글자 도 있습니다. 가로로 풀어쓰는 영어 알파벳과 다른 이런 특징 때문에 한글 은 가로뿐만 아니라 세로로도 글자를 배열할 수 있는데, 그래서 바둑판처 럼 논리정연하게 배열되는 음절표가 생긴 것입니다. 북 한 대 한 민 국 북 한 이 름 기 윽 니 은 디 읃 리 을 미 음 비 읍 시 읏 이 응 지 읒 치 읓 그 느 드 르 므 브 스 으 즈 츠 크 트 프 흐 끄 뜨 쁘 쓰 쯔 모음(21자) 순 서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ㅜ ㅝ ㅞ ㅟ ㅠ ㅡ ㅢ ㅣ 이 름 아 애 야 얘 어 에 여 예 오 와 왜 외 요 우 워 웨 위 유 으 의 이 순 서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ㅐ ㅒ ㅔ ㅖ ㅚ ㅟ ㅢ ㅘ ㅝ ㅙ ㅞ 이 름 아 야 어 여 오 요 우 유 으 이 애 얘 에 예 외 위 의 와 워 왜 웨 자음과 모음의 남북 명칭과 배열 순서 키 읔 티 읕 피 읖 히 읗 된 기 윽 된 디 읃 된 비 읍 된 시 읏 된 지 읒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ㄲ ㄸ ㅃ ㅆ ㅉ ㅏ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까 따 빠 싸 짜 ㅑ 갸 냐 댜 랴 먀 뱌 샤 야 쟈 챠 캬 탸 퍄 햐 꺄 땨 뺘 쌰 쨔 ㅓ 거 너 더 러 머 버 서 어 저 처 커 터 퍼 허 꺼 떠 뻐 써 쩌 ㅕ 겨 녀 뎌 려 며 벼 셔 여 져 쳐 켜 텨 펴 혀 껴 뗘 뼈 쎠 쪄 ㅗ 고 노 도 로 모 보 소 오 조 초 코 토 포 호 꼬 또 뽀 쏘 쪼 ㅛ 교 뇨 됴 료 묘 뵤 쇼 요 죠 쵸 쿄 툐 표 효 꾜 뚀 뾰 쑈 쬬 ㅜ 구 누 두 루 무 부 수 우 주 추 쿠 투 푸 후 꾸 뚜 뿌 쑤 쭈 ㅠ 규 뉴 듀 류 뮤 뷰 슈 유 쥬 츄 큐 튜 퓨 휴 뀨 뜌 쀼 쓔 쮸 ㅡ 그 느 드 르 므 브 스 으 즈 츠 크 트 프 흐 끄 뜨 쁘 쓰 쯔 ㅣ 기 니 디 리 미 비 시 이 지 치 키 티 피 히 끼 띠 삐 씨 찌 ㅐ 개 내 대 래 매 배 새 애 재 채 캐 태 패 해 깨 때 빼 쌔 째 ㅔ 게 네 데 레 메 베 세 에 제 체 케 테 페 헤 께 떼 뻬 쎄 쩨 ㅖ 계 녜 뎨 례 몌 볘 셰 예 졔 쳬 켸 톄 폐 혜 꼐 뗴 뼤 쎼 쪠 ㅒ 걔 냬 댸 럐 먜 뱨 섀 얘 쟤 챼 컈 턔 퍠 햬 꺠 떄 뺴 썌 쨰 ㅘ 과 놔 돠 롸 뫄 봐 솨 와 좌 촤 콰 톼 퐈 화 꽈 똬 뽜 쏴 쫘 ㅚ 괴 뇌 되 뢰 뫼 뵈 쇠 외 죄 최 쾨 퇴 푀 회 꾀 뙤 뾔 쐬 쬐 ㅙ 괘 놰 돼 뢔 뫠 봬 쇄 왜 좨 쵀 쾌 퇘 퐤 홰 꽤 뙈 뽸 쐐 쫴 ㅝ 궈 눠 둬 뤄 뭐 붜 숴 워 줘 춰 쿼 퉈 풔 훠 꿔 뚸 뿨 쒀 쭤 ㅟ 귀 뉘 뒤 뤼 뮈 뷔 쉬 위 쥐 취 퀴 튀 퓌 휘 뀌 뛰 쀠 쒸 쮜 ㅞ 궤 눼 뒈 뤠 뭬 붸 쉐 웨 줴 췌 퀘 퉤 풰 훼 꿰 뛔 쀄 쒜 쮀 ㅢ 긔 늬 듸 릐 믜 븨 싀 의 즤 츼 킈 틔 픠 희 끠 띄 쁴 씌 쯰 받침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ㄲㅆㄳㄵㄶㄺㄻㄼㄽㄾㄿㅀㅄ 현대 한글 음절표 40 41
무엇보다 모아쓰기 음절 글자의 장점은 자음과 모음을 결합하여 수많은 음절 글자를 생성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과학적 원리의 실용성을 보여 주 는 장점입니다. 한글 맞춤법에서는 한글 기본 자모의 수를 다음과 같이 24자로 규정하 11,172자 가운데 실제 쓰이는 글자 수는 2,500자 안팎입니다. 오늘날 우 리나라에는 말소리가 없어져 쓰이지 않는 글자가 많지만, 이런 글자를 응 용해 인류의 다양한 말소리를 적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한글은 잠재적 실 용성이 뛰어난 문자입니다. 고 있습니다. 자음 모음 ㄱ(기역) ㄴ(니은) ㄷ(디귿) ㄹ(리을) ㅁ(미음) ㅂ(비읍) ㅅ(시옷) ㅇ(이응) ㅈ(지읒) ㅊ(치읓) ㅋ(키읔) ㅌ(티읕) ㅍ(피읖) ㅎ(히읗) ㅏ(아) ㅑ(야) ㅓ(어) ㅕ(여) ㅗ(오) ㅛ(요) ㅜ(우) ㅠ(유) ㅡ(으) ㅣ(이) 위와 같은 기본 24자 외에 기본자를 바탕으로 응용하여 확장해 만든 글 자로는 자음 5자, 모음 11자가 더 있습니다. 자음 ㄲ(쌍기역) ㄸ(쌍디귿) ㅃ(쌍비읍) ㅆ(쌍시옷) ㅉ(쌍지읒) 모음 ㅐ(애) ㅒ(얘) ㅔ(에) ㅖ(예) ㅘ(와) ㅙ(왜) ㅚ(외) ㅝ(워) ㅞ(웨) ㅟ(위) ㅢ(의) 위의 자모를 가지고 계산을 해 봅시다. 첫소리에 올 수 있는 자음자의 수 는 (14자+5자=)19자입니다. 가운뎃소리에 올 수 있는 모음자의 수는 (10 자+11자=)21자입니다. 끝소리에 올 수 있는 받침 자음자의 수는 모두 27 자입니다. 받침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ㄲㅆㄳㄵㄶㄺㄻㄼㄽㄾㄿㅀㅄ 그렇다면 받침 없는 글자 수는 (19자 21자=)399자가 되고, 받침 있는 글자 수는 (399자 27자=)10,773자가 됩니다. 이렇게 나온 받침 없는 글 자 수와 받침 있는 글자 수를 모두 합치면 11,172자가 됩니다. 이러한 놀 [사진] 11,172명이직접 쓴 손글씨 한글 11,172자를 돌에 새긴 한글 문자마당(서울 세종로) 라운 숫자는 한글의 과학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그만큼 말소리를 적을 수 있는 영역이 넓다는 증거가 됩니다. 42 43
넷째 마당 한글 역사 이야기 14. 세종대왕 이후의 임금들은 훈민정음을 어떻게 사용하였나요? 15. 조선 시대에도 띄어쓰기와 맞춤법이 있었나요? 16. 일제 강점기에 우리 말글을 어떻게 지켰나요? 17. 광복 후에 우리 말글은 어떻게 발전했나요?
14. 세종대왕 이후의 임금들은 훈민정음을 어떻게 사용하였나요? 세종대왕 이후의 임금들도 훈민정음이 널리 사용되도록 많은 노력을 기 울였습니다. 비록 연산군이 훈민정음 탄압 정책을 폈다고는 하나 훈민정음 임진왜란 때(1593년) 선조가 포로들을 회유하는 훈민정음 포고문 으로 번역한 책은 제외했으니, 전면 탄압을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조는 왕자(수양대군) 시절에 훈민정음으로 지은 산문집인 석보상절 임금이 백성에게 이르는 글 과 세종대왕이 지은 월인천강지곡 을 합치고 훈민정음 언해본을 붙여 월인석보 를 펴냈습니다. 또한 과거 시험과 그 당시 최고의 대학인 성균 관의 공부 과목에 훈민정음 을 넣어 훈민정음을 널리 알렸습니다. 더욱이 1461년에 간경도감이라는 관청을 세워 불경을 한글로 번역한 책을 많이 간 행함으로써 훈민정음이 널리 퍼지게 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성종은 삼강행실도 나 구급간이방 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한 책을 백성 들에게 직접 보급하였습니다. 또한 승정원에 훈민정음으로 공문서를 보내 는 등 훈민정음 보급을 앞서 실천하였지요. 그뿐 아니라 훈민정음으로 적 은 고려 가요가 실린, 조선 시대의 음악책인 악학궤범 (성현 외 지음)을 펴내 언어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선조는 세종대왕 때부터 시도한 논어언해 등 사서의 언해를 완성하였습 너희가 왜놈들에게 휘둘려 다닌 것이 너희 본마음이 아닌 줄을 과인도 알고 있다. 나오다가 왜놈들에게 붙들리면 죽을 것으로 여기기도 하고, 도리어 나라의 의심을 받을 것이 두렵기도 하여 왜놈들 속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나라가 [너희를] 죽일까 두려워 여태껏 나오지 않는구나. 이제는 의심하지 말고 서로 권하여 다 나오너라. [나라가] 너희에게 따로 벌주지 아니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왜놈을 데리고 나오거나, 나올 때 왜놈들이 하는 일을 자세히 알아내거나, 붙잡혀 갇힌 조선인을 많이 구해 내거나 하는 등의 공이 있으면 평민이든 천민이든 가리지 않고 벼슬도 줄 것이다. 너희는 더는 의심하지 말고 빨리 나오너라. (뒤는 생략) 니다. 임진왜란 중에는 조정에서 훈민정음으로 방문(방)을 쓰는 등 절실한 현실 문제에 직접 훈민정음을 사용하여 훈민정음의 가치를 높였습니다. 또 만력 21년(1593년) 9월 일 한 여러 편의 친필 훈민정음 편지를 써서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정조는 백성과의 소통을 위해 훈민정음을 공문으로 아주 많이 사용하였 <권이도 개인 소장> 습니다. 오늘날 전해지는 자료 중에 원손 시절과 세손 시절에 직접 쓴 훈민 정음 편지가 남아 있기도 합니다. 46 47
15. 조선 시대에도 띄어쓰기와 맞춤법이 있었나요? 조선 시대에 맞춤법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훈민정음을 만들었을 때 에는 사 이 사 미, 깊으니 기프니 와 같이 소리 나는 대로 글자를 쓰 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받침은 대체로 8개(ㄱ, ㄴ, ㄷ, ㄹ, ㅁ, ㅂ, ㅅ, ㆁ)의 자음만 사용하고, ㅈ, ㅊ, ㅋ, ㅌ, ㅍ, ㅎ은 받침으로 쓰지 않아 낯 낫, 높고 놉고 와 같이 썼습니다. 일반 백성이 문법 지식이 부족한 상 1896년에 발행한 독립신문 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신문이면서, 본 격적으로 띄어쓰기를 한 신문입니다. 독립신문 이 나오기 전까지는 지금 과 같은 띄어쓰기가 없었습니다. 나는 밥을 맛있게 먹었다 와 같은 문장을 나는밥을맛있게먹었다 와 같이 썼던 것이지요. 이렇게 붙여 써도 뜻 전달 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므로 불편을 못 느꼈던 듯합니다. 또한 종이가 매우 귀해 종이를 절약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듯합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었을 때는 어떠했을까요? 지금과 같은 띄어쓰기는 없었지만 권점( 圈 點 ) 이라는 둥근 점을 찍어 표시를 했답 황에서 당장 편하게 새 문자를 쓸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소리 나는 대로 쓰 는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대한제국기에는 한글 맞춤법 정리가 필요하여 1907년에 국문연구소 를 만들어 맞춤법 문제를 연구한 기록이 있습니다. 국문연구소에서 국문연 구의정안 (1909)을 만들었는데 국운이 기울면서 공표되지 못하고 말았습 니다. 지금 우리가 따르는 맞춤법의 근간은 1933년에 정해졌습니다. 1933 년 조선어학회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법칙과 그것을 옮겨 적는 글자 법칙을 잘 살펴 합리적인 한글 맞춤법을 만들었습니다. 니다. 용비어천가 를 보면 오늘날 쉼표는 가운데에 찍는 권점으로, 마침 표는 오른쪽 끝에 찍는 권점으로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그 전통이 후대에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권점으로 띄어쓰기에 준하는 표시를 한 용비어천가 독립신문 창간호(1896. 4. 7.) 1쪽 48 49
16. 일제 강점기에 우리 말글을 어떻게 지켰나요? 희생이 있었기에 광복 후 우리의 국어 교육도 다시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압수되었던 조선어학회의 사전 원고는 다행히 되찾아 보완을 거쳐 1957년 에 큰사전 (6권)이 완간됩니다. 일본어가 국어 이고 일본의 가나 문자가 국문 이었던 일제 강점기에 우 리말과 우리글은 수난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한글 운 동의 선각자인 주시경 선생은 우리 말글을 지키는 길만이 겨레를 지키고 독립을 쟁취하는 길임을 믿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주 시경 선생은 제자들과 1908년에 국어연구학회 를 창립하였고, 제자 권덕 규, 최현배, 신명균, 이병기 등이 1921년에 이 학회의 이름을 조선어연구 회 로 바꾸고 스승의 한글 사랑의 뜻을 이어 갑니다. 조선어연구회는 1926 년에는 가갸날 (한글날)을 제정하여 기념하고 1927년부터는 동인지 한글 을 간행하면서 한글 연구와 보급 운동에 힘을 쏟다가 1931년에 조선어학 회로 이름을 바꿉니다. 1929년에는 각계를 대표하는 108인이 뜻을 모아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여 조선말대사전 편찬을 시작하였는데, 이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 조선어학회 주도하에 한글 마춤법 통일안 (1933), 사정( 査 定 )한 조선어 표 준말 모음 (1936)이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사전 편찬도 조선어학회가 맡게 되어 10여 년의 노력 끝에 1942년 사전 조판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말부터 민족 말살 정책을 펼치던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눈엣가시로 알고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1942)을 일으킵니다. 사전 원고 를 압수하고 회원들을 함흥 형무소에 수감해 모질게 고문하여 이윤재, 한 징 선생은 옥사하고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선생 등은 광 복을 맞은 후에야 풀려납니다. 조선어학회는 광복 후 한글학회 로 이름을 바꾸어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조선어학회 선열들의 이런 북경 한글 강습회 기념 사진 (1933년 7월 26일)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 모습 50 51
17. 광복 후에 한국어는 전 세계에서 약 7천9백만 명이 모어로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5 우리 말글은 어떻게 발전했나요? 천만 명 이상이 모어로 사용하는 언어가 20개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국어의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10대 무역 대국 이 되는 등 국력이 커지면서, 표음성이 뛰어나고 익히기 쉬운 한글을 배우 는 외국인도 늘어 한국어와 한글의 위상은 앞으로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광복이 되고 1948년에 정부를 수립하면서 한글 마춤법 통일안 (1933)이 대한민국의 맞춤법으로 통용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말이 바뀌어 1970년 대부터 정부가 맞춤법 개정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이를 전문적으로 담당할 기관이 필요하다는 여론에 따라 1984년에 국어연구소를 설립하여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1984), 외래어 표기법 (1986), 한글 맞춤법 (1988), 표준어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말을 더욱 품위 있게 사용하고 한글을 아름답게 가 꾸고 사랑해야겠습니다. 국어문화학교 연락처: 02-2669-9729, 9662 국어 생활 종합 상담실: (가나다 전화) 1599-9979 (온라인 가나다) http://www.korean.go.kr/09_new/minwon/qna_list.jsp 규정 (1988)을 제 개정하게 됩니다.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은 2000년에 다 시 개정되었습니다. 국어연구소는 1991년에 국립국어연구원 으로 승격되었고, 2004년에는 국립국어원 으로 이름을 바꾸어 세종대왕 시대의 집현전과 같은 역할을 하 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국립국어원은 한글의 과학성과 실용성을 밝혀 한글 의 가치를 드높이는 연구를 하는 것은 물론 국민이 어문 규범을 더욱 쉽고 편리하게 익히도록 이를 관리하고 보급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표 준국어대사전 편찬, 국민의 국어 능력 증진, 공공언어 및 매체 언어 개선, 외국인과 다문화 가정을 위한 한국어 교육 과정과 교재 개발 등 다양한 사 업을 하면서 우리 말글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국립국어원은 국어문화학교 를 운영하여 어문 규범, 공문서 작성 등 국 어 생활에 대한 교육을 제공하며, 찾아가는 국어문화학교 운영을 통해 전 국 어디에서나 요청하는 곳이 있으면 직접 가서 우리 말글에 대한 교육을 <국립국어원> 하고 있습니다. 또한 국어 생활에 관한 상담을 하는 국어 생활 종합 상담실 (가나다 전화, 온라인 가나다)을 개설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52 53
다섯째 마당 세계 속의 한글 이야기 18. 세종대왕상 은 어떤 상인가요? 19. 세종학당 은 무엇인가요?
인 9월 8일 유네스코 본부가 있는 프랑스 파리에서 시상합니다. 수상자에 18. 세종대왕상 은 게는 상금과 메달, 상장이 수여되고, 수상자들은 유네스코 본부에서 주최 어떤 상인가요? 하는 문해 포럼과 다양한 문해 관련 행사에 참여하게 됩니다. 세종대왕상의 정확한 이름은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King Sejong Literacy Prize) 입니다. 이 상은 유네스코(UNESCO)가 한글을 만든 세종 대왕의 거룩한 정신을 기리고 문해 보급에 헌신한 개인 및 단체를 격려하 기 위해 주는 상입니다. 문해 란 글을 읽고 이해한다 는 뜻입니다. 세종대 왕 문해상은 우리 정부의 요청으로 1989년에 제정되었습니다. 1990년 제 1회부터 2013년 제24회까지 총 42명(단체)의 개인 및 단체가 이 상을 받 았습니다. 이 상은 문해 사업 직접 진행, 국가 또는 지역 단위의 문해 사업 추진, 문 해 보급을 위한 언론 캠페인, 문해 관련 자료 개발 또는 학술 연구 및 조사, 청소년 대상 문해 사업 수행, 언론을 통한 문해 사업 전개 등 특히 개발 도 상국 모국어의 발전ㆍ보급에 기여한 개인 및 단체에게 주어지는 상입니다. 제1회 인도부터 가나, 페루, 중국, 르완다 등 상을 받은 단체가 속한 나라 2013년 세종대왕 문해상 시상 장면- 인도, 차드공화국의 수상 단체 대표들 는 대륙별로 다양합니다. 세종대왕 문해상은 크게 수상 기관 공모 심사 시상 으로 진행됩니다. 각국에서 모집된 후보자를 국제심사위원단이 심사 평가하며, 유네스코 사 무총장이 세종대왕 문해상 수상자를 최종 선정합니다. 2013년 올해에는 인도 국립문맹퇴치국의 문맹 퇴치 운동인 삭샤르 바라트 미션(Saakshar Bharat Mission, 글을 읽을 수 있는 인도) 과 아프리카 차드공화국 구에라 (Guera) 지역의 모국어 문해 프로그램(The programme Mother Tongue Literacy) 이 세종대왕 문해상 수상 대상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차드공화국 모국어 문해 프로그램 수상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 축사 세종대왕 문해상은 매년 세계 문해의 날(International Literacy Day) 56 57
19. 세종학당 은 무엇인가요? 세종학당(King Sejong Institute)은 대한민국 정부가 지원하는, 한국어 와 한국 문화 교육 기관입니다. 세종학당은 케이팝, 드라마 등 한국의 대 중문화가 국외에서 많은 인기를 끌고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이 확대되면서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외국인이 증가함에 따라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보급할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세종학당은 2007년 3개국 13개소로 시 작했으며, 2013년 현재 전 세계 51개국에 117개소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국어기본법 19조 2항을 근거로 세종학당을 총괄ㆍ관리하는 기관인 세종 학당재단이 2012년 10월에 설립되었고, 2013년 1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 기관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세종학당재단은 세종학당을 지정ㆍ지원하 며, 누리집 누리-세종학당(www.sejonghakdang.org) 을 개설하여 운영 합니다. 누리-세종학당은 현재 11개국 언어로 서비스되며 2014년부터 모 바일 기기에서도 이용이 가능합니다. 누리-세종학당에서는 학습자 외에 국외 한국어 교육 기관의 교원들이 수업에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한국 관 련 사진 및 동영상, 애니메이션 등 교육 자료도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재단은 국립국어원과 함께 한국어 표준 교육 과정 및 교재를 개발하 여 국외 세종학당에 보급하며 한국어 교원을 양성해 파견하는 등 세종학당 의 국제 위상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아랍 에미리트(1) 대만(1) 세종학당 지정 현황 (2013년 10월 현재) 10 58 59
부록 한글날 주요 연표 1443년 음력 12월(세종 25년, 47세) 훈민정음을 창제하다. 1446년 음력 9월 상순(세종 28년, 50세) 훈민정음 해례본을 펴내다. 1926년 11월 4일(음력 9월 29일) 조선어연구회와 신민사가 함께 훈민정음 해례본 관련 실록 기록 날짜인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 로 선포(한글 반포 8회갑=480돌) 하다. 1928년 11월 11일(음력 9월 29일) 가갸날 을 한글날 로 명칭을 고치다. 1932년 10월 29일 음력으로 기념해 오던 한글날 을 수학 전문가 이명칠이 환산하여 이해부터 양력 10월 29일에 기념하다. 1934년 10월 28일 음ㆍ양력의 환산 방법을 그레고리력을 기준으로 이해부터 10월 28일에 기념하다.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이 발견되다.(정확한 날짜 모름) 1945년 10월 9일 조선어학회에서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온 간행 날짜인 음력 9월 상순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10일을 훈민정음 반포일로 잡아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여 1446년 10월 9일이 한글 반포의 날임을 확정하다. 1946년 10월 9일 한글 반포 500돌을 맞이하여 미 군정청에서 한글날 을 공휴일로 정하다. 조선어학회가 중심이 되어 성대한 한글날 기념식을 치르다. 1981년 10월 9일 한글날 기념식이 정부(서울시) 주관으로 바뀌다(535돌). 1982년 5월 15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의 개정에 따라 한글날 기념행사에 관한 업무가 서울시에서 문화공보부 주관으로 바뀌다. 1990년 11월 5일 대통령령 제13155호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이 공포됨에 따라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제외되다. 1991년 2월 전국 국어 운동 대학생 연합회 학생들이 서울 탑골공원에서 한글날의 국경일 승격을 주장하며 거리 행진을 하다. 1991년 10월 1일 한글 문화 단체 모두모임(회장 안호상)이 정부와 국회에 한글날 국경일 제정 청원서 를 제출하다. 1999년 7월 9일 한글 단체 주최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한글날 국경일 제정 공청회 를 열다. 2000년 10월 2일 신기남 의원 외 34명의 국회의원이 한글날 국경일 지정을 골자로 한 국경일에 관한 법률 중 개정 법률안 을 발의하다. 이어 11월 15일에는 여야 의원들이 한글날 국경일 추진을 위한 의원 모임 을 결성하다. 2001년 2월 5일 한글 단체와 각계 인사, 시민 등 10만여 명이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범국민 추진 위원회 (위원장 전택부, 본부장 서정수, 사무총장 이대로)를 결성하고 3월에 홍보물 첫째 호를 내다. 2001년 4월 10일 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한글날 국경일 제정 추진 범국민 결의 대회 를 열다. 2002년 10월 9일 세종문화회관에서 한글날 국경일 제정 촉구 대회 를 열다. 이 자리 에서 한글날을 국경일로 란 기록 영화(이봉원 제작)를 상영하다. 2003년 4월 20일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범국민 추진 위원회가 한글날을 국경일로 홍보물 둘째 호를 내다. 2003년 9월 20일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범국민 추진 위원회와 한글학회,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등 시민 단체들이 서울 여의도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한글날 국경일 제정 촉구 국민 대회 를 열다. 2004년 7월 15일 신기남 의원 등 여야 국회의원 67명이 한글날을 국경일로 승격시키기 위해 국경일에 관한 법률 중 개정 법률안 을 국회에 공동 발의하다. 2004년 11월 18일 이규택 의원이 대표로 국경일에 관한 법률 중 개정 법률안을 국회에 별도로 발의하다. 2005년 5월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범국민 추진 위원회가 한글날을 국경일로 홍보물 셋째 호를 만들어 모든 국회의원에게 돌리다. 2005년 10월 5일 국회 문화관광위 소속 의원들이 한글날 국경일 승격 결의문을 발표하다. 국회 한글문화 세계화를 위한 의원 모임 도 한글날 국경일 제정 촉구 성명서를 발표하다. 2005년 10월 9일 한글 단체들(한글날 국경일 제정 범국민 추진 위원회, 한글학회,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외솔회, 우리말 살리는 겨레 모임, 전국 국어 운동 대학생 동문회, 한글문화연구회, 국어문화운동본부, 한글문화연대, 한글 사랑 누리통신 모임 등)이 국회의장과 행정자치위원장에게 2005년 중에 반드시 한글날 국경일 지정 법안 이 국회에서 통과되게끔 협조해 달라는 건의문을 발송하다. 2005년 12월 1일 행정자치위원장이 한글날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법안을 내기로 여야가 합의하다. 2005년 12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한글날 국경일 지정 법안 이 만장일치로 통과되다. 2006년 10월 9일 한글이 세상에 나온 지 562년 만에 한글날을 국경일로 기념하다. (공휴일은 아님) 2012년 12월 28일 한글날 공휴일 재지정 법령을 공포하다. 2013년 10월 9일 한글날이 국경일이자 공휴일인 첫해가 되다. 60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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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아야 할 한글 이야기 10+9 발행일: 2013년 10월 4일 발행인: 유진룡 발행처: 문화체육관광부 기획: 문화체육관광부 국어정책과 지음: 국어단체연합 국어문화원 제작: 피어나 맵시: 구슬기(한글 디자이너, 서울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전임 연구원) 편집: 김성진(편집 기획자) 감수: 국립국어원 집필 위원 김슬옹(한글학회 연구 위원, 국어단체연합 국어문화원 연구 교수) 남영신(국어단체연합 국어문화원 원장) 공동 연구원: 김성화(한글 이야기 구성작가), 김수정(세종한말글연구소 연구 위원) 자문 위원(가나다순) 정우영(동국대학교 국어국문 문예창작학부 교수, 자문위원장) 성기지(한글학회 학술부장) 우경숙(영문초등학교 교사) 이건범(한글문화연대 대표) 이대로(우리말 우리얼 대표) 이창덕(경인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외솔회 이사) 이창수(배달말누리 www.baedalmal.kr 운영자) 장미경(세종학당 부장) 조상민(선정중학교 교사) 한재준(서울여자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홍현보(세종대왕기념사업회 연구원) * 비매품(이 자료 파일은 문화체육관광부 자료실에서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 이 책자의 저작권은 문화체육관광부에 있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