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서울대학교-제주평화연구원 공동정책회의 발표문.hwp



Similar documents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 hwp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개

<3130BAB9BDC428BCF6C1A4292E687770>

<3133B1C732C8A328BCF6C1A4292E687770>

기사스크랩 (160504).hwp

산림병해충 방제규정 4. 신문 방송의 보도내용 등 제6 조( 조사지역) 제5 조에 따른 발생조사는 다음 각 호의 지역으로 구분하여 조사한다. 1. 특정지역 : 명승지 유적지 관광지 공원 유원지 및 고속국도 일반국도 철로변 등 경관보호구역 2. 주요지역 : 병해충별 선단

김기중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인터넷 내용심의의 위헌 여부.hwp


내지4월최종

래를 북한에서 영화의 주제곡으로 사용했다든지, 남한의 반체제세력이 애창한다 든지 등등 여타의 이유를 들어 그 가요의 기념곡 지정을 반대한다는 것은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는 반민주적인 행동이 될 것이다. 동시에 그 노래가 두 가지 필요조 건을 충족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 1. 법 제34조제1항제3호에 따른 노인전문병원 2. 국민건강보험법 제40조제1항의 규정에 의한 요양기관(약국을 제외한다) 3. 삭제< > 4. 의료급여법 제2조제2호의 규정에 의한 의료급여기관 제9조 (건강진단) 영 제20조제1항의 규

노인복지법 시행규칙

입장

<B3EBB5BFB0FCB0E8B9FD20B1B9C8B820B0E8B7F920C0C7BEC828C3D6C1BE29A4BB2E687770>

DBPIA-NURIMEDIA

4) 이 이 6) 위 (가) 나는 소백산맥을 바라보다 문득 신라의 삼국 통 일을 못마땅해하던 당신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더 커지는 것이라는 당신의 말을 생각하면, 대동강 이북의 땅을 당나라에 내주기로 하고 이룩한 통 일은 더 작아진 것이라는 점에서,

민주장정-노동운동(분권).indd

untitled


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C0CEBCE2BABB2D33C2F7BCF6C1A420B1B9BFAAC3D1BCAD203130B1C72E687770>

E1-정답및풀이(1~24)ok

6±Ç¸ñÂ÷

교사용지도서_쓰기.hwp

<C1B6BCB1B4EBBCBCBDC3B1E2342DC3D6C1BE2E687770>

0429bodo.hwp

최우석.hwp

< BDC3BAB8C1A4B1D4C6C75BC8A3BFDC D2E687770>

cls46-06(심우영).hwp

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C3D6C1BE5FBBF5B1B9BEEEBBFDC8B0B0DCBFEFC8A C3D6C1BEBABB292E687770>

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é¸ñ¼Ò½ÄÁö 63È£_³»Áö ÃÖÁ¾

177

제주어 교육자료(중등)-작업.hwp

01Report_210-4.hwp

<C3D1BCB15FC0CCC8C45FBFECB8AE5FB1B3C0B0C0C75FB9E6C7E D352D32315FC5E4292E687770>



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시험지 출제 양식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상품 전단지

:::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2

DBPIA-NURIMEDIA

화이련(華以戀) hwp

ÆòÈ�´©¸® 94È£ ³»Áö_ÃÖÁ¾

歯1##01.PDF

<5BC1F8C7E0C1DF2D31B1C75D2DBCF6C1A4BABB2E687770>

120229(00)(1~3).indd

[편집]국가인권위원회_국내 거주 재외동포와 인권(추가논문-보이스아이).hwp

< BBF3B9DDB1E228C6EDC1FD292E687770>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C5F0B0E82D313132C8A328C0DBBEF7BFEB292E687770>

<C1A4BCBCBAD0BCAE D30332D28BCBCBFF8292E687770>

-목 차 - Ⅰ.주승용의원 대표발의안( ) 1 1.제안경위 1 2.제안이유 및 주요내용 1 3.검토의견 2 가.중개사무소 개설 등록의 결격사유에 민법 상 성년후견 제도 도입 2 Ⅱ.주승용의원 대표발의안( ) 4 1.제안경위 4 2.제안이유 4

zb 2) 짜내어 목민관을 살찌운다. 그러니 백성이 과연 목민관을 위해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목민관이 백성 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이정 - ( ᄀ ) - ( ᄂ ) - 국군 - 방백 - 황왕 (나) 옛날에야 백성이 있었을 뿐이지, 무슨 목민관이 있 었던

<3031C8ABB5E6C7A52E687770>

<C6EDC1FD20B0F8C1F7C0AFB0FCB4DCC3BC20BBE7B1D420B0B3BCB120BFF6C5A9BCF32E687770>

ㅍㅍㅍㅍ통계지식과 경제적 상상의 구축

망되지만, 논란은 더욱 증폭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단 광주지역 민주화 운동 세력 은 5.18기념식을 국가기념일로 지정 받은 데 이어 이 노래까지 공식기념곡으로 만 들어 5.18을 장식하는 마지막 아우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걱정스러운 건 이런 움직임이 이른바 호남정서

<BCD2B0E6C0FCBCAD20C1A62032B1C72E687770>

<33C6E4C0CCC1F620C1A63139C8A320B8F1C2F72E687770>

2015년 2월 12일 사랑의 동삭교육 제 호 (2월) 년 2월 12일 사랑의 동삭교육 제 호 (2월) 6 겨울이 되면 1-4 박지예 겨울이 되면 난 참 좋아. 겨울이 되면 귀여운 눈사람도 만들고 겨울이 되면 신나는 눈싸움도 하고 겨울이

05.PDF

남사고의 유토피아 2

640..

주류-비주류 프레임으로 본 19대 대선구도 예측 좌클릭-우클릭 논쟁 넘어 새로운 대선방정식 필요 단일대상 프레임의 넘어 듀얼 프레임 필요 본 보고서는 <데일리한국>에 기고한 2017 대선, 좌클릭-우클릭 논쟁 넘어 새로운 듀얼 전략 필요 의 원본 보고서이다(2015년

역사의 위조(僞造)는 용서할 수 없다.

<544F50C4C4C6DBB4CF5FC3D6C0E7BCBAC0C7BFF820C5E4B7D0C8B820C0DAB7E1C1FD5FB3BBC1F62E687770>

3) 지은이가 4) ᄀ에 5) 위 어져야 하는 것이야. 5 동원 : 항상 성실한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해. 에는 민중의 소망과 언어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고,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 는

지 생각하고, 재료를 준비하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이 작업을 3번 반복 하는 것만으로 하루가 다 간다. 그들이 제작진에게 투쟁하는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재료를 얻기 위해서다. 그 이상의 생각은 하고 싶어도 할 겨를이 없다. 이 땅은 헬조선이 아니다. 일단

<30312DC8ABBDC2C7E52E687770>

<312E B3E2B5B520BBE7C8B8BAB9C1F6B0FC20BFEEBFB5B0FCB7C320BEF7B9ABC3B3B8AE20BEC8B3BB28B0E1C0E7BABB292DC6EDC1FD2E687770>

< B5BFBEC6BDC3BEC6BBE E687770>

11민락초신문4호


194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삼외구사( 三 畏 九 思 ) 1981년 12월 28일 마산 상덕법단 마산백양진도학생회 회장 김무성 외 29명이 서울 중앙총본부를 방문하였을 때 내려주신 곤수곡인 스승님의 법어 내용입니다. 과거 성인께서 말씀하시길 道 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어울려야만 道 를 배울 수 있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새만금세미나-1101-이양재.hwp

??

의정연구_36호_0828.hwp

652

歯 조선일보.PDF

<33B1C7C3D6C1BEBABB28BCF6C1A42D E687770>

<C1DFB1DE2842C7FC292E687770>

96부산연주문화\(김창욱\)

죄형법정주의2 20문 및 해설.hwp

???? 1

untitled

참여연대 이슈리포트 제 호

한반도포커스_제35호

ePapyrus PDF Document

2005년 6월 고1 전국연합학력평가

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한 사 람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으며,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해쳐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04 5

Transcription:

동아시아의 민주화와 반공국가의 대응 - 대만과 한국 반공국가의 밖 과 안, 그리고 토대 - 김 재 영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외교학전공 석사과정) Ⅰ. 서론 Ⅱ. 동아시아의 냉전과 반공국가 1.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형성 2. 냉전적 합의(the Cold War Consensus) 와 반공국가 3. 민주화, 탈냉전, 그리고 반공국가의 위기 Ⅲ. 반공국가의 밖 과 안 1. 반공국가의 밖 : 중국과 북한의 위협 2. 반공국가의 안 : 국내정치구도의 재편 * 목 차 * Ⅳ. 반공국가의 토대?: 반공주의의 내면화( 內 面 化 )와 정체성 1. 대안적 시각의 모색 2. 대만의 외생적 반공주의 (exogenous anticommunism) 3. 한국의 내생적 반공주의 (endogenous anticommunism) Ⅴ. 결론 Ⅰ. 서론 1949년 7월 28일, 대한민국(이하 한국)의 대통령 이승만은 중화민국(이하 대만) 총통 장제 스( 蔣 介 石 )의 방한을 앞두고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장개석 총통이 한국을 방문하려는 것은 공산주의의 조류를 방지하기 위한 극동의 자유국가군의 일 치단결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우리들은 우리의 자유와 주권을 보전하기 위한 투쟁의 총결산기에 접근하고 있으므로 아세아의 모든 자유국민들은 모든 우리들이 당면한 위협에 대항할 수 있는 집단적 방어태세를 형성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우리들은 태평양주변의 모든 민 주국가가 이해와 협력을 가지고 이 전체주의세력을 조지( 阻 止 )하는 동시에 아세아의 확고한 평화 를 보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1) 이처럼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자유민주국가들의 단결이라는 의미를 부여받으며 그해 8월 개최된 진해회담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 간의 대결로부터 시작된 냉전이 국공내전 과 한반도 분단을 거치며 동아시아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또한 공산혁명 을 위한 한반도 북부의 기지 건설을 우선한다는 민주기지론으로부터 무력사용을 불사한 한 반도 전역의 공산화를 추구하는 국토완정론으로 방침을 전환한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의 스 탈린, 중국의 마오쩌둥( 毛 澤 東 )과 잇따라 접촉하며 한국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시점에서, 공 산주의 연합에 대응하는 반공주의 연합의 태동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국공내전과 한국 전쟁이라는 열전( 熱 戰 ) 을 경험하면서 대만과 한국은 반공 진영의 최전방에 서게 되었다. 동아시아 냉전체제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반공의 기지라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 대만과 한 국은 이에 부합하는 국가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그 결과 등장한 반공적 권위주의 국가는 반 공주의를 이념적 토대로 삼는 한편, 국가에 의한 정치적 통제와 이를 위한 폭력의 사용을 1) 이승만, 장( 蔣 ) 총통의 방한은 단결을 증명 http://www.pa.go.kr/research/contents/speech/index.jsp (검색 일: 2015년 10월 19일). - 1 -

정당화하는 법률체계를 통해 물리적으로 구현되었다. 대만의 반공적 권위주의 국가는 장제 스 장징궈( 蔣 經 國 ) 부자가 이끄는 국민당이 국가와 사회를 통제하는 준레닌주의적 당국체제 ( 黨 國 體 制, party-state system)의 형태로 나타났고, 이는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 動 員 戡 亂 時 期 臨 時 條 款 )에 그 기반을 두었다. 한국의 반공적 권위주의 국가는 이승만의 개인독재, 박 정희와 전두환의 군부독재와 국가보안법 간의 결합을 통해 형성 유지되었다. 임시조관과 국 가보안법은 공산주의 국가들로부터 야기되는 외부적 위협에 대응하고 반공적 권위주의 정권 의 유지를 위해 내부적 통제를 수행하는 수단이자, 냉전의 최전선을 담당한 반공국가의 정 체성을 표현하는 상징이었다. 대만과 한국은 이러한 반공국가의 정체성에 기초하여 연대의 식을 형성해 나갔으며, 미국과의 군사동맹 체결, 국가 주도의 경제성장, 민주화 등에 있어 유사한 발전의 경로를 보이게 된다. 한편,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만과 한국의 반공적 권위주의 국가는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남유럽에서 시작된 민주화가 동아시아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대만과 한국의 반공국 가는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상이한 경로를 보이게 되었다. 대만의 반공국가는 1987년 장징궈에 의한 계엄령의 해제, 1991년 4월에 개최된 국민대회에서의 임시조관 폐지 결의, 5월 총통인 리덩휘( 李 登 輝 )의 지시에 따른 동원감란시기의 종료를 거쳐 해체되었다. 반면, 같은 해에 한국에서는 민주화 이후 전개된 수차례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 집권당인 민자당의 단독처리에 의해 국가보안법이 개정된 채 유지됨에 따라 반공국가가 온존하게 되 었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이 글에서는 왜 민주화를 거치며 대만의 반공국가는 해체된 반 면, 한국의 반공국가는 온존하였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형성과 발전의 과정에서 많은 유사성을 보여온 두 반공국가가 1980년대의 전환기를 거치며 상이한 경로를 보이게 된 원 인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반공국가의 안 과 밖, 그리고 토대 에 해당하는 요인으 로서 민주화로 인한 국내정치적 세력구도의 재편, 중국과 북한으로부터의 위협, 반공국가 정체성의 내면화( 內 面 化 ) 수준에 주목하여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대만과 한국의 국가형성과 발전에 관한 비교연구는 그동안 주로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 민주화(democratization), 민주주의 공고화(democratic consolidation), 분단국가의 대외정책 등의 주제들을 중심으로 시도되어왔으나, 민주화로 인한 반공국가의 해체라는 관 점에서 두 국가를 본격적으로 비교한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대만과 한국의 민주 화 과정에서 촉발된 반공국가의 위기는 냉전으로 인한 외부적 위협의 상시화를 정당화의 근 거로 삼으며 유지되어온 권위주의 체제가 청산되는 과정의 일부이며, 양국이 민주화로부터 민주주의의 공고화로 나아가는 중간단계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여겨진다. 또한 이는 전세계에 걸쳐 구축된 냉전질서를 구성하는 핵심적 하위체제였던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변화 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역적 의미도 함께 지닌다고 하겠다. 이 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Ⅱ절에서는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성립과 더불어 반공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일종의 냉전적 합의 에 근거하여 대만과 한국의 반공국가가 형성되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반공국가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법률로서 대만의 임시조관과 한국의 국가 보안법이 갖는 의미, 그리고 제정과 변화의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Ⅲ절에서는 민주화 이후 대만과 한국의 반공국가가 상이한 경로를 보이게 된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밖 과 안 의 요 인에 해당하는 중국과 북한으로부터의 안보위협, 국내정치적 세력구도의 재편을 검토함으로 써 양자가 갖는 설명력의 한계를 지적한다. Ⅳ절에서는 반공국가의 밖 과 안 에 주목한 접 근이 갖는 한계를 비판적으로 보완하기 위한 시도로서 반공국가의 토대, 즉 대만과 한국에 - 2 -

서 진행된 반공주의의 내면화 수준에 주목하는 접근법을 제시하고 양국의 반공주의를 외생 적 반공주의(exogenous anticommunism) 와 내생적 반공주의(endogenous anticommunism) 로 각각 규정함으로써 그 차이를 대비시키고자 한다. Ⅱ. 동아시아의 냉전과 반공국가 1.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형성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인해 발발한 한국전쟁은 동아시아 냉전은 물론 세계 냉전의 향 후 전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2) 이 전쟁을 연구한 박명림은 이른바 대쌍관계의 동학(interface dynamics) 라는 틀을 사용하여 개전 이전 한반도의 상황을 분석하였는데, 이는 38도선을 경계로 분단된 남한과 북한의 국내정치가 남북관계를 매개로 상호작용하면 서 한국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음을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3) 그러나 당시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정세를 살펴본다면, 이러한 분석틀이 한국과 북한이 대립하던 한반도 내의 이념적 균열선 뿐 아니라,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결이 전개되 던 중국 대륙의 이념적 균열선, 나아가 한반도와 중국 대륙이라는 두 개의 공간 사이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한국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동아시아에는 공산주의와 반 공주의라는 두 개의 이념, 한반도와 중국 대륙이라는 두 개의 공간이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중층적인 대쌍관계의 동학 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공간적 차원에서 대쌍관계의 동학 은 반봉건주의,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의 대두라는 내적 조건과 미소관계의 전개에 따른 얄타체제의 부침이라는 외적 조건의 결합에 기반한 동아시 아 냉전체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중국 대륙과 한반도 간에 밀접한 상호작용의 관계가 성립 함에 따라 등장하였다. 4) 우선, 대륙에서 전개된 국공내전에서 수세에 몰린 국민당 정권이 대만으로 패퇴함에 따라 중국이 분단되었고, 이는 한반도에서 해방전쟁을 구상하던 북한 지 도부와 이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보이던 스탈린을 고무시킴으로써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 는 하나의 여건을 제공하였다. 한편, 한국전쟁의 발발과 중국 공산당의 참전은 국민당의 패 배로 인해 중국을 매개로 한 동아시아 개입의 구상이 좌절된 이후 이 지역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보여온 미국이 적극적인 개입으로 선회하게 된 계기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한반도 뿐 아니라 대만해협에도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였으며, 이는 대만의 국민당 정권에게 는 회생의 기회였다. 당시 대만으로 패퇴한 국민당 내에서는 한반도에서 고조된 긴장을 활 용하여 유리한 정세를 조성함으로써 위기를 탈피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하고 있었다. 5) 이 처럼 사건의 연쇄를 통해 대륙과 한반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지속적인 상호작용은 동아시 2) 한국전쟁이 미친 세계사적 영향에 관해서는 Robert Jervis, "The Impact of the Korean War on the Cold War," The Journal of Conflict Resolution, Vol. 24, No. 4(1980); 김명섭, "한국전쟁이 냉전체제의 구성에 미친 영향," 국제정치논총 제43집 1호(2003)을 참조. 3) 대쌍관계의 동학 의 개념에 관해서는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Ⅱ): 기원과 원인 (서울: 나남출판, 1996)를 참조. 4) 마상윤, 글로벌 냉전과 동북아시아, 세계정치 제22호(2014), pp. 73-100. 5) 국민당 정권의 외교관이자 초대 주한대사였던 샤오위린( 邵 毓 麟 )은 1949년 7월 한국에 부임하기 전 장개석을 두 차례 면담하여 당시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한반도의 정세를 활용함으로써 국민당의 실패를 만회해야 한다 는 주장을 펼쳤다. 이러한 샤오위린의 정세조성론 에 관해서는 김경일, 홍면기 역,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기 원: 한중관계의 역사적 지정학적 배경을 중심으로 (서울: 논형, 2005), pp. 247-51을 참조. - 3 -

아 냉전체제의 형성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였다. 이념적 차원에서 대쌍관계의 동학 은 공산국가와 반공국가, 공산주의 진영과 반공주의 진 영 간에 전개된 대결 속에서 성립되었다. 항일투쟁과 탈식민사회의 건설을 둘러싼 경쟁을 거치면서 동아시아에서는 공산주의 세력과 반공주의 세력 간의 대결을 위한 여건이 마련되 어 있었고 6), 한국전쟁의 준비과정에서 북한의 김일성, 중국의 마오쩌둥, 소련의 스탈린 간 에 긴밀한 협조가 구축됨에 따라 국제적인 공산주의 연합이 먼저 구체화되었다. 한편, 공산 주의 세력의 국제적 연대에 대응하기 위한 반공주의 연합의 형성은 미국의 불개입과 반대로 인해 지속적으로 난항을 겪었으나, 한국전쟁을 거치고 미국의 아이젠하워가 핵무기 도입과 지역별 집단안보체제를 활용한 방위비 감축을 지향하는 뉴룩(New Look) 전략을 채택한 이 후 다시금 추진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1954년에 한국과 대만이 주도하는 아시아민족반 공연맹(APACL)이 창설되었다. 7) 2. 냉전적 합의(the Cold War Consensus) 와 반공국가 국공내전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대만과 한국은 이른바 반공의 기지 로 부상했다. 대만해협 과 한반도는 전세계에 걸쳐 구축된 냉전의 전선 중에서도 열전이 발발할 수 있는 위험이 가 장 큰 지역들 중 하나였으며, 그곳에 위치한 대만과 한국은 반공주의 진영의 최전방을 담당 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지정학적 맥락 속에서 대만과 한국의 국가체제는 일종의 냉전 적 합의 에 기초하여 형성되었다. 냉전적 합의란 냉전 시기에 대만과 한국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국가 형태에 관한 합의 로서, 표면적으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표방하되 실질적으로는 반공주의, 권위주의, 개 발 또는 발전주의 간의 결합에 근거하는 이중적인 속성을 보였으며, 이러한 결합의 핵심요 소는 반공주의였다. 반공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범위를 제한함과 동시에 권위주의와 경제성장을 정당화함으로써 냉전적 합의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결합시키고 반공국가 라는 국가정체성의 원천을 제공하였다. 8) 대만의 냉전적 합의는 장제스 장징궈 부자가 이끄 는 국민당의 당국체제로, 한국의 냉전적 합의는 이승만의 장기집권, 박정희와 전두환을 중 심으로 한 군사정권의 형태로 구현되었다. 냉전적 합의에 기초하여 수립된 반공국가인 대만과 한국의 국가정체성은 법률의 형식을 갖추며 성문화되었다. 반공국가로서 대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법률은 동원감란시기임시조 6) 김경일의 경우, 관념적 연대라는 관점에서 한국전쟁 발발 이전 동아시아에서 형성된 장제스와 이승만, 마오쩌 둥과 김일성 간의 4자관계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김명섭과 김석원은 한국전쟁을 초국적 관념의 충돌로 규정 하고 그 관념적 기원을 추적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김경일(2005); 관념충돌로서의 전쟁: 임진왜란과 6 25 전쟁의 관념적 기원을 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제53집 3호(2013)을 참조. 7) 한국과 대만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반공주의 연합 형성에 대한 미국의 개입과 반대에 관해서는 최영호, 이 승만 정부의 태평양동맹 구상과 아시아민족반공연맹 결성, 국제정치논총 제39집 2호(1999), pp. 170-76; 노기영, 이승만정권의 태평양동맹 추진과 지역안보구상, 지역과 역사 제11호(2002), pp. 187-218를 참 조. 아이젠하워가 미국의 새로운 국가안보전략으로 채택한 뉴룩의 성격과 내용에 관해서는 권오신, 아이젠하 워 대외정책의 기조: 뉴룩(New Look) 정책과 아이젠하워 독트린, 미국사연구 제21집(2005); 박인숙, 아이젠하워와 평화 의 수사학, 미국사연구 제22집(2005) 등을 참조. 8) 냉전 시기에 대만과 한국에서 나타난 반공주의에 의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제한, 권위주의와 성장담론의 정당화를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연구로는 조경란, 1950년대 동아시아의 반공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대 한 재검토: 자유중국( 自 由 中 國 ) 과 사상계 의 대항담론 형성 가능성, 시대와 철학 제22권 1호(2011); 김지형, 1960~70년대 박정희 통치이념의 변용과 지속: 민주주의와 반공주의 및 상호관계를 중심으로, 민 주주의와 인권 제13권 2호(2013) 등을 참조. - 4 -

관이었다.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중국 대륙에서는 국민당과 공산 당 간의 내전이 재개되었으며, 국민당 정권은 공산당을 제압하기 위해 1947년 7월에 동원 감란시기 돌입을 선언하고 총동원령을 공포하였다. 이후 1948년 4월에 소집된 국민대회는 임시조관을 통과시킴으로써 국가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총통에게 긴급처분권의 행사를 일임 하였고, 중국 본토에서 국민당의 패색이 완연해진 1949년 5월에는 장제스의 측근이자 대만 성 주석인 첸청( 陳 誠 )이 대만 전역에 대한 계엄령을 발포하였다. 9) 이후 1960년, 1966년 2 월과 3월, 1972년에 네 차례에 걸쳐 수정된 임시조관은 대만 반공국가의 토대를 이루었다.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은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동원( 動 員 ) 과 감란( 戡 亂 ), 즉 총동원 체제의 수립과 공산당이 일으킨 반란의 진압을 정당화하는 법률적 조치였으며, 그 실질적 효력은 1946년 12월 제정된 중화민국 헌법에 우선하였다. 임시조관이 네 차례의 수정을 거 치면서 법률제정권( 創 制 權 )과 재결권( 複 決 權 )과 같은 국민대회의 권한이 회복되고 중앙민의 대표기구에 해당하는 국민대회, 입법원, 감찰원에 대한 선거를 실시되는 등 국가비상사태를 명분으로 지속되어온 정치적 통제가 일부 완화되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총통의 연임 규정 이 철폐되고, 총통을 주석으로 하며 국정의 운영에 있어 특권적 지위를 누리는 국가안전회 의가 설치됨으로써 당국체제를 공고화하는데 기여하였다. 10) 임시조관은 대만 전역에 대한 계엄령, 징치반란조례( 懲 治 叛 亂 條 例 )나 감란시기검숙비첩조 례( 戡 亂 時 期 檢 肅 匪 諜 條 例 )와 같은 형법과 결합하며 구체적인 효력을 발휘하였다. 11) 임시조 관 하에서 적용된 이 법률들은 헌법이 인정한 기본권인 사상, 언론,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 고 전국민에게 간첩신고와 검거에 대한 기여의 의무를 부과하였다. 또한 근대 형법이 기본 권의 보호를 위해 출발점으로 삼는 무죄추정( 無 罪 推 定 ) 의 원칙이 아니라 의혹이 있는 자가 무죄를 입증하지 못할 경우 유죄로 간주되어 처벌을 받게 되는 유의필벌( 有 疑 必 罰 ) 의 원칙 을 도입하였다. 아울러 비상사태를 명분으로 좌파 및 반체제 세력에 대한 광범위한 국가의 폭력, 즉 백색테러( 白 色 恐 怖 ) 가 자행됨으로써 계엄령이 실시된 기간(1949~86) 동안 공식 집계만으로도 699명의 처형자를 포함하여 총 6천 명의 피해자가 발생하였다. 12) 반공국가로서 한국의 정체성은 국가보안법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 9 월 국회에서 논의 중이던 내란행위특별조치법 이 10월 발생한 여순반란을 거치며 발전하여 그해 12월에 제정되었다. 13) 국가보안법은 실질적으로 그 효력이 헌법에 우선하여 발휘되었 고,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다양한 기본권들을 침해했다는 점에서 대만의 임시조관이나 그에 연동된 하위법률들과 다를 바 없었다. 국가보안법은 실제로 나타난 구체적 행위가 아니라 목적, 목적한 사항의 실행을 위한 협의, 선동, 선전 등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처 벌의 대상을 규정하였으며, 집회나 결사의 자유와 같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였다. 14) 초 기에는 불과 6개조의 조문으로 구성되었던 국가보안법은 1949년부터 1997년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의 개정을 거치며 그 내용이 점차 풍부해지고 구체화되었으나, 여전히 헌법이 규정한 9) 謝 居 福, < 中 華 民 國 憲 政 史 硏 究 >, 臺 南 科 技 大 學 通 識 敎 育 學 第 8 期 (2009), pp. 35-37; 若 林 正 丈, 洪 金 珠 許 佩 賢 譯, 台 灣 : 分 裂 國 家 與 民 主 化 ( 台 北 : 新 自 然 主 義, 2004), pp. 82-85. 10) 曾 建 元, < 動 員 戡 亂 時 期 臺 灣 憲 法 變 遷 的 環 境 動 力 >, 中 華 人 文 社 會 學 報 第 2 期 (2005), pp. 42-44. 11) 陳 顯 武, < 法 律 的 政 治 分 析 : 論 戒 嚴 時 期 的 政 治 刑 法 >, 國 家 發 展 硏 究 第 6 卷 2 期 (2007), pp. 158-64. 12) Naithe Wu, "Transition without Justice, or Justice without History: Transitional Justice in Taiwan," Taiwan Journal of Democracy, Vol. 1, No. 1(2005), p. 11. 13) 김득중, 빨갱이 의 탄생: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탄생 (서울: 선인, 2009), pp. 518-31; 박원순, 국가보 안법연구(1): 국가보안법 변천사 (서울: 역사비평사, 1992), pp. 78-83. 14) 박원순(1992), pp. 97-101; 서희경, 한계상황의 정치 (politics of extermity)와 민주주의: 1948년 한국의 여순사건과 국가보안법 관련 논의를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제38집 5호(2002), pp. 15-27. - 5 -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고 추상적이고 모호한 규정으로 인해 남용의 우려가 있었다는 점에 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1961년에는 반공법이 제정됨에 따라 한국의 반공국가가 근거한 국가보안법 체제가 더욱 정교화되었다. 5 16 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한 박정희의 제1기 군사정권은 반공을 재차 국시 ( 國 是 )로 선언하며 그해 7월에 반공법을 제정하였고, 반공법은 신법우선의 원칙과 목적이 아닌 외견상의 결과만으로도 처벌이 가능하다는 장점으로 인해 국가보안법보다 더욱 빈번히 적용되었다. 15) 이후 1980년에 전두환이 이끄는 제2기 군사정권이 집권하면서 반공법의 규 정들은 재차 국가보안법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대만의 임시조관과 한국의 국가보안법이 갖는 세 가지 성격을 다 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겠다. 첫째, 두 법률은 반공국가가 외부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내부를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대만과 한국의 반공국가는 냉전이라는 전쟁의 과정에서 형성 된 국가였다. 두 국가는 중국, 북한과 같은 공산주의권으로부터 초래되는 상시적 안보위협 에 노출되어 있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임시조관이나 국가보안법과 같은 규정에 근거 한 내부적 통제가 절실히 요구되었다. 둘째, 두 법률은 냉전적 합의 에 기초하여 수립된 반공적 권위주의 정권의 통치수단이었 다. 전술한 바와 같이 대만과 한국의 반공국가는 반공주의를 중심으로 한 권위주의와 발전 주의의 결합, 반공주의에 의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제약을 그 특징으로 했다. 이 과정에 서 반공과 결합한 권위주의 정권과 자유 민주의 가치에 근거한 저항세력은 끊임없이 충돌했 으며, 대만과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은 자유와 민주의 논리를 제압하기 위해 각각 임시조관 과 그 하위법률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동원했다. 셋째, 두 법률은 그 자체로 냉전을 국가체제로 내면화한 반공국가의 정체성을 상징했다. 임시조관에 근거한 동원 과 감란 은 중국 공산당의 활동을 반란으로 규정하고 이를 진압한 다는 목표를 제시했으며, 국가보안법이 처벌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 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 는 북한과 공산주 의 세력을 지칭하였다. 이는 임시조관과 국가보안법에 근거한 대만과 한국의 국가체제가 공 산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 반공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3. 민주화, 탈냉전, 그리고 반공국가의 위기 1970년대 중반, 남유럽으로부터 시작된 민주화는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개혁과 개방, 정치적 자유에 대한 요구를 불러일으켰다. 이는 소련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이 국가들의 내부로부터 자유화와 민주화를 추동하였고, 결국에는 소련을 비롯 한 공산주의권의 붕괴를 야기함으로써 탈냉전이 도래하였다. 냉전 시기의 국제관계가 미국 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양극 혹은 양두체제의 양상을 보였다면, 공산주의권의 민주화로 인 한 탈냉전으로의 이행은 전세계적 차원에서 형성된 국가군( 群 ) 대 국가군 간의 이념적 대립 구도를 해소시켰을 뿐 아니라 소련에 대한 대항세력으로서 미국이 갖는 배타적 위상을 약화 시킴으로써 국제관계의 상대적 자유화와 민주화를 수반하였다. 남유럽으로부터 시작되어 탈냉전으로까지 이어진 민주화는 대만과 한국이 위치한 동아시 아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냉전의 전장에서 반공주의 진영의 최전방을 맡아온 두 반공 15) 박원순(1992), p. 197. - 6 -

국가의 위기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민주화와 탈냉전이 결합된 거시적 변화 속에서 대만과 한국은 상이한 경로를 보였다. 즉, 대만의 반공국가는 민주화 과정에서 임시조관의 폐지, 동 원감란시기의 종료와 더불어 해체된 반면, 한국의 반공국가는 민주화 과정에서 불거진 폐지 요구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이 유지됨으로써 온존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만에서는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장제스의 뒤를 이어 국민당의 당국체제를 이끌어온 장징궈의 주도 하에 일련의 자유화가 단행되었다. 장징궈는 부총통 리덩휘를 비롯하여 대만 본토 출신인 이른바 본성인( 本 省 人 ) 들을 대거 기용함으로써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이후 대 륙으로부터 건너온 외성인( 外 省 人 ) 들이 주도해온 국민당의 대만화 또는 본토화 를 추진하 였다. 또한 1986년에는 국민당의 대만 천도 이후 최초의 야당인 민진당의 창당을 묵인하였 고, 1987년에는 38년 동안 지속되어온 계엄령을 해제한 가운데 대만인들의 중국 대륙 방문 을 허용하였다. 특히 계엄령의 해제는 대만의 반공국가가 새로운 전환의 단계에 진입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988년 장징궈가 사망하고 본성인 출신의 리덩휘가 총통직과 국민당 주석직을 잇따라 승 계함으로써 정치개혁과 민주화는 더욱 속도를 내게 되었다. 리덩휘는 국민당 원로들의 견제 를 물리치고 당내 권력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당내에 확립된 자신의 권력과 대만 인 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본성인 출신이라는 배경을 개혁의 동력으로 삼았다. 마침내 1991년 4월 개최된 국민대회는 임시조관의 폐지를 결의하였고, 총통인 리덩휘의 지시에 따라 5월부 로 동원감란시기가 종료되었다. 이로써 대만의 반공국가는 해체되었다. 한국 역시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민주화의 단계에 진입하였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야당과 시민사회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전두환의 군사정권은 위기에 직면하였고, 전두환 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민정당의 노태우는 이른바 1987년의 6 29 선언 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하여 민주화 세력이 제시한 조건들을 대폭 수용하였다. 민정당은 이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됨으로써 집권 연장에 성공했으나, 뒤이어 실시된 총선거에 서는 과반 의석을 획득하는데 실패함으로써 국가보안법 개폐 논쟁이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 했다. 그러나 1990년 1월에 이르러 민정당이 야당인 공화당, 민주당과의 합당에 성공함으로써 거대여당인 민자당이 창당되었고, 이로 인해 국가보안법 폐지론은 점차 지지를 상실하고 유 지론 내지는 개정론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결국 이듬해 5월 민자당은 국회 내에서의 압 도적 우위를 확보한 민자당은 기습적이고 단독적으로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처리하였다. 공 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국민대회의 결의와 총통의 지시에 따라 해체된 대만의 반공국가와 달리, 한국의 반공국가는 국가보안법의 유지와 함께 온존하게 된 것이다. Ⅲ. 반공국가의 밖 과 안 앞서 논한 바와 같이 대만의 임시조관과 한국의 국가보안법은 동아시아 냉전체제과 더불 어 형성된 반공국가의 존립 근거였던 냉전적 합의 가 구현된 결과로서, 외부적 위협에 대응 하기 위한 내부 통제의 수단, 반공적 권위주의 정권의 통치수단, 냉전을 국가체제로 내면화 한 반공국가 정체성의 상징이라는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이는 각각 반공국가의 밖, 안, 그리고 토대 에 비유될 수 있으며, 민주화 시기에 이 세 가지 측면에서 일어난 변화를 검토 함으로써 대만과 한국의 반공국가가 해체와 온존이라는 상이한 경로를 보이게 된 원인을 도 - 7 -

출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절에서는 우선 반공국가의 밖 과 안 에 해당하는 중국과 북한으 로부터의 위협, 민주화로 인한 국내정치적 세력구도의 재편 양상을 살펴보고, 이 요인들이 대만과 한국의 반공국가가 보여준 변화에 대하여 적절한 설명력을 갖는지 평가해볼 것이다. 1. 반공국가의 밖 : 중국과 북한의 위협 반공국가가 밖 의 요인으로 인해 직면할 변화의 조짐은 이미 197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 작했다. 당시 베트남 전쟁의 부담이 가중됨에 따라 아시아에 대한 개입을 축소할 필요가 있 었던 미국, 공산주의 진영의 주도권, 영토 문제 등으로 인해 소련과 갈등하던 중국은 소련 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응하기 위해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데탕트의 단계에 진입하였으 며, 마침내 1979년 국교정상화에 이르게 된다. 동아시아 냉전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 였던 미국, 중국, 소련간 삼각관계의 변화는 반공주의 진영의 최전방을 담당하고 있던 대만 과 한국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반공국가이자 미국의 피후견국으로 발전해온 대만의 입장에서 후견국인 미국과 적대적 경 쟁상대인 중국 간의 데탕트는 엄청난 타격이었다. 미중 간에 협력이 모색되는 과정에서 대 만은 1971년 UN 회원국의 자격을 중국에게 빼앗겼고, 1979년에는 미중수교로 인해 미국 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한국의 입장도 대만과 다를 바가 없었다. 미국이 추진한 아시아 개입의 축소는 미중 데탕트, 나아가 주한미군의 감축으로 이어졌고, 한국은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여 불가피하게 북한과의 대화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과 미중관계의 정상화로부터 촉발된 대만해협과 한반도의 변화는 대만이나 한국과 같은 반 공국가의 존재가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동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1980년대 공산주의권의 민주화, 개혁, 개방으로 인해 탈냉전이 도래하였을 때 반공국 가의 위기가 재현될 수 밖에 없었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만은 1980년대에 들어 동아시아 냉전체제가 점차 이완되는 가운데 개혁개방을 본격화 한 중국의 거센 평화통일공세에 직면해야만 했다. 중국은 1979년 1월 대만 동포들에게 고 함( 告 臺 灣 同 胞 書 ) 이라는 공개성명을 발표하여 대만 삼통( 三 通 ) 과 사류( 四 流 ) 를 제안하였 고, 1985년에는 하나의 중국 안에 두 개의 정치제도가 공존할 수 있다는 이른바 일국양제 ( 一 國 兩 制 ) 를 평화통일을 위한 기본노선으로 제시함으로써 대만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16) 대만은 이러한 중국의 변화에 대하여 한동안 접촉하지 않고, 담판하지 않으며, 타협하지 않는다( 不 接 觸, 不 談 判, 不 妥 協 ) 는 이른바 삼불( 三 不 ) 을 내세우며 소극적으로 반응하였으 나, 1987년에 이르러 장징궈를 비롯한 국민당 지도부가 계엄령을 해제한 데 이어 대만 주 민들의 대륙 내 친지 방문을 허용하는 탐친( 探 親 ) 을 실시함으로써 대만해협 양안 간의 교 류를 공식화하였다. 이로써 냉전질서의 가장 위험한 발화점 중 하나였던 대만해협에서 전 개될 화해와 협력에 대한 기대가 고조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평화통일공세와 대만의 호응이 대만해협에 존재하는 긴장의 근본적인 해소 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첫째, 대만이 제한적이나마 중국과의 교류를 허용한 것은 1970 년대 이후 고착화 되어가던 국제적 고립의 탈피를 모색하려는 방어적 성격의 대응임과 동시 에 지속적인 접촉을 통해 대만이 그동안 이룩한 발전의 성과를 전파함으로써 중국 내부로부 16) 삼통은 통우( 通 郵 ), 통항( 通 航 ), 통상( 通 商 )을 뜻하며, 사류는 경제, 문화, 과학기술, 체육 방면의 교류를 가리 킨다. - 8 -

터의 개혁과 민주화를 유도하려는 의도가 함축된 일종의 반격이기도 했다. 둘째, 리덩휘 집 권 이후 설치된 대만의 국가통일위원회가 1991년 발표한 국가통일강령 은 중국과 대만의 관계를 중앙정부와 고도의 자치권을 누리는 지방정부로 규정하는 일국양제를 거부하고, 중 국과 대만이 서로를 대등한 실체로 인정한 이후에야 비로소 통일을 위한 유의미한 발전이 가능하다는 이른바 일국양구( 一 國 兩 區 ) 의 입장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 대만해협에서는 화 해와 협력을 위한 일정한 수준의 성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안 간에는 근본적 이견이 존재했던 것이다. 1995년과 1996년에 걸쳐 발발한 대만해협 위기는 양안관계가 언제든 과 거의 대결상태로 회귀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미중 데탕트에 힘입은 대화를 통해 1972년 7 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여 자주, 평화, 민 족대단결이라는 세 가지 원칙에 합의함으로써 협력의 기초를 놓았던 남북관계도 1980년대 에 들어 보다 본격적인 변화의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1990년대 접어들 면서 고위급회담 개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과 같은 일련의 성과로 이어지면서 대만해협과 더불어 냉전질서의 최전선이었던 한반도에서의 긴장 완화에 대한 기 대를 불러일으켰다. 1980년대에 이르러 중국과 소련 등 공산주의권 국가들이 잇따라 자국의 상황을 반영한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가운데 위기감을 느낀 북한은 기존의 경제관련법률과 기업운영체제를 정비하는 등 북한식의 변화를 모색하였다. 또한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도 한국을 대화상대로 인정하는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며 통일공세를 전개하였다. 17) 한국 역시 1988년 7 7선언 을 발표함으로써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목표로 하는 이른바 북방정책 을 공식화하 였고, 북한에 대해서도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였다. 이는 북한을 적대의 대상이 아니라 민족 의 일원이자 협력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인식의 전환, 고립과 압박이 아닌 협력을 통해 북한 의 국제사회 참여를 지원하는 정책기조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8) 그러나 이전 시기에 비해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첫째, 민주화와 탈냉전이라는 변화 속에서 북한에 대한 자신감에 기반한 한국의 대북정책은 현실주의적 대외인식과 포용정책으로서의 자유주의적 지향 간에 괴리, 이를 주도해오던 대통령과 청와대의 레임덕, 한국 정부 내의 관료정치로 인해 점차 추진력을 잃어갔다. 19) 둘째, 한국이 추진한 북방정책의 성과로 이루어진 한소수교와 한중수 교, 한미의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 미국의 압력을 수용한 일본의 북한에 대한 핵 재처리시 설 포기 요구 등은 북한의 고립감과 위기감을 자극하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20) 셋째, 1993 년 발생한 제1차 북핵위기는 이 시기 북한이 느끼고 있었던 위기감이 단순히 한국과의 화 해협력만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 등 주변 강대국들이 개입하여 형성된 동아 시아 냉전체제의 구조 그 자체와 결부된 심층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1980년대를 전후하여 동아시아의 민주화, 그로 인한 탈냉전이 진행 되고 있던 반공국가의 밖 을 살펴보았다. 이 시기에 동아시아의 냉전체제가 어느 정도 완화 되고, 대만해협과 한반도에서 화해와 협력을 증진시킴에 있어 유의미한 발전이 있었던 것은 17) 이정철, 김일성의 남방정책과 남북기본합의서: 냉전 해체의 비대칭성과 동맹 재편 전략의 좌절, 역사비 평 제197호(2011), pp. 49-55. 18) 박찬봉, 7.7선언체제의 평가와 대안체제의 모색: 기능주의에서 제도주의로, 한국정치학회보 제42집 4호 (2008), pp. 342-44. 19) 이정철, 탈냉전기 노태우 정부의 대북정책: 정책연합의 불협화음과 전환기 리더십의 한계, 정신문화연구 제127호(2012), pp. 133-46. 20) 이정철(2011), pp. 62-66. - 9 -

사실이다. 그러나 일국양제론과 일국양구론의 충돌, 북방정책의 좌절, 대만해협의 위기와 북 핵위기 등은 밖 에서 진행된 일련의 변화가 반공국가 형성의 핵심적 요인이었던 외부적 위 협과 긴장을 근본적으로 해소시키지는 못했음을 의미하며, 나아가 밖 의 요인에 근거하여 대만과 한국 반공국가가 상이한 경로를 보인 원인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갖는 타당성의 한계 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2. 반공국가의 안 : 국내정치구도의 재편 민주화 이후 대만과 한국에서 진행된 국내정치적 변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은 바로 권위주의 계승정당(authoritarian successor party) 의 출현이다. 록스턴(Loxton)에 따르면, 권위주의 계승정당이란 권위주의 정권 시기의 집권당이 민주화 과정에서 생존하는데 성공하 거나, 민주화에 대응하여 권위주의 정권의 집권 엘리트들에 의해 창당된 정당을 지칭한 다. 21) 민주화 이후에도 대만과 한국에서 각각 집권에 성공한 국민당과 민정당은 전형적인 권위주의 계승정당의 사례에 해당한다. 국민당이 대만에 구축한 정치체제는 농민과 노동자에 대한 광범위한 침투, 간부의 훈련 등을 강조하는 레닌주의적 특성을 지닌 국민당이 국가를 장악한 가운데 지방자치와 같은 민 주헌정의 요소를 제한적으로 가미한 준레닌주의적 당국체제였다. 22) 국공내전에서의 패배를 경험한 국민당은 이후 전면적인 당의 개조( 改 造 )에 착수하였고, 당을 통한 정치의 통제( 以 黨 領 政 ), 당을 통한 군의 통제( 以 黨 領 軍 ), 정보기관에 기초한 당국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장제스는 당내의 경쟁자들을 제압하고 독보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23) 이러한 국민당의 당국체제가 민주화 이후에도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장징궈가 시작하고 리덩휘가 계승한 일련의 개혁 때문이었다. 장징궈는 부총통 리덩휘를 비롯한 다수의 본성인 들을 등용함으로써 외성인들이 요직을 독점해오던 국민당의 본토화 또는 대만화 를 추진 하였다. 그 결과 1988년에 장징궈의 사망으로 리덩휘가 총통직을 승계한 이후 열린 국민당 제13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본성인 출신과 신진관료들이 대거 당 지도부에 진출하였으며, 1990년에 개최된 국민대회에서는 리덩휘와 그가 지지하던 리위엔추( 李 元 簇 )가 각각 총통, 부총통으로 선출되었다. 24) 이로써 본성인 출신이었던 리덩휘는 당내에서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고, 국민당의 주류를 점해온 외성인 출신 원로와 보수파들의 지속적 저항, 민진당을 비롯한 민주화 세력의 부상, 중국과의 관계라는 도전에 직면한 가운데 국민들에게 직접 호 소함으로써 개혁에 대한 지지를 강화해나갔다. 25) 당내 권력투쟁에서의 승리와 국민에 대한 직접적인 호소로 지지기반을 확충한 리덩휘가 추진한 여러 개혁 중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임시조관에 근거한 동원감란체제의 혁파로 상징 되는 정치개혁이었다. 1948년 제정되어 대만 반공국가의 법적, 제도적 기반을 제공해왔던 임시조관이 1991년 4월에 개최된 국민대회의 결의를 통해 폐지되고, 5월에는 리덩휘의 지 21) James Loxton, "Authoritarian Successor Parties," Journal of Democracy, Vol. 26, No. 3(2015), pp. 158-60. 22) 국민당의 레닌주의적 특성에 관해서는 후지이 다케시, 당국체제의 연쇄: 동아시아의 내전과 냉전, 동북아 역사논총 제43호(2014), pp. 89-95를 참조. 23) 薛 化 元, 1950,1960 年 代 台 湾 政 治 发 展 的 历 史 评 价 问 题 : 冷 战 架 构 下 的 一 个 考 察. 중앙사론 제38집(2013), pp. 70-75. 24) 문흥호, 대만의 정치민주화와 인권, 민주주의와 인권 제1권 2호(2000), pp. 469-71. 25) Chia-lung Lin and Bo Tedards, "Lee Teng-hui: Transformational Leadership in Taiwan's Transition," American Asian Review, Vol. 20, No. 2(2002), pp. 80-86. - 10 -

시에 따라 동원감란시기가 공식적으로 종료된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이와 더불어 임 시조관에 근거한 사회통제와 동원을 뒷받침해오던 징치반란조례, 대만경비사령부도 잇따라 폐지되었다. 26) 이로써 대만의 반공국가는 철저히 해체되었다. 한국의 반공국가에서 궁극적인 권위의 소재는 군대였다. 5 16 군사정변을 계기로 군이 정 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정당이란 군이 입법부의 영역에 개입하기 위해 활용하는 수단에 지나 지 않았다. 군에 의한 국가와 사회의 장악은 당국체제 하에서 절대적 우위를 보유한 집권당 이 모든 것을 통제했던 대만의 반공국가와는 다른 한국 반공국가의 특징이었다. 이와 같은 군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선거나 입법부 선거는 지속적으로 실시되었으며, 정당은 대 통령, 군과 더불어 군사독재체제를 구성하는 한 축으로 기능하였다. 군사독재체제를 위한 정당이었던 민정당은 대만의 국민당과 마찬가지로 민주화 과정에서 생존하는데 성공하였다. 제2기 군사정권의 핵심인물인 전두환의 후계자였던 노태우는 민주 화 요구를 전폭 수용함으로써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었으며, 이 선거에서 민주화 세력이 김영삼 지지세력과 김대중 지지세력으로 분열된 가운데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민 정당은 집권을 연장할 수 있었다. 또한 민정당은 1991년에 야당인 공화당, 민주당과의 3당 합당을 통해 거대여당인 민자당을 창당함으로써 민정당 대 공화당, 민주당, 평민당의 구도 를 민자당 대 평민당의 구도로 역전시켰다. 민자당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 참여했던 인사 들이 주축을 이룬 민정당과 공화당이 김영삼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화 세력 일부와 연합한 권위주의 계승정당으로 볼 수 있으며, 민자당의 창당으로 노태우 정권을 뒷받침할 새로운 주류가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 정치의 이념적 균열이 강화되었다. 27) 그러나 리덩휘의 지도 하에 권위주의 계승정당으로 변모한 국민당에 의해 해체된 대만의 반공국가와 달리 노태우 정권과 민자당은 국가보안법을 유지시켰고, 이로 인해 한국의 반공 국가 역시 온존하게 되었다. 민주화 초기에는 국가보안법을 비롯하여 민주주의의 가치에 부 합하지 않는 법률의 개폐를 논의하기 위해 국회 안에 특별위원회가 설치되고, 이 위원회가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건의하는 등 반공국가의 해체가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되었다. 28) 그러 나 노태우 정권은 1989년 일부 민간인사들의 북한 방문을 구실로 한 공안정국의 조성, 3당 합당과 민자당의 창당을 통해 정치적 주도권을 회복하였고, 마침내 1991년 5월 민자당의 단독처리로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통과됨으로써 한국 반공국가는 생존할 수 있었다. 한편, 민주화 이후 촉발된 국가보안법 개폐 논쟁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야당의 태도 이다. 입법부 내에서 민주화 요구를 제기하던 야당과 그 중심인물인 김영삼, 김대중은 국가 보안법의 폐지를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그러나 3당 합당을 통해 국내정치가 권위주의 계 승정당인 민자당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김영삼은 국가보안법 폐지에 유보적인 태도 를 취했고, 김대중은 국가보안법 폐지로부터 민주질서보호법 제안을 통한 대체입법 시도, 국가보안법 개정으로 점차 후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29) 이 시기 야당이 취한 보수적 태도의 원인에 관해서는 다음 절에서 분석하기로 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반공국가의 안 에 해당하는 국내정치구도의 재편이라는 요소는 민주 화 이후 대만과 한국의 반공국가가 상이한 경로를 보인 원인을 설명하기 불충분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민주화 이후 반공국가의 안 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특징은 권위주의 계승정당 26) 문흥호(2000), pp. 471-73. 27) 강원택, 3당 합당과 한국 정당 정치, 한국정당학회보 제11권 1호(2012), pp. 177-84. 28) 박원순(1992), pp. 238-44. 29) 박원순(1992), pp. 251-70. - 11 -

의 집권이었다. 그러나 록스턴의 지적에 따르면 권위주의 계승정당은 권위주의 정권의 유 산(heritage) 과 부담(baggage) 을 함께 물려받으며, 그로 인해 기득권 유지를 위해 민주화 를 저해하는 방향으로 행동할 수도 있고, 반면에 개혁을 지향하며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에 적극적으로 순응하는 태도를 취할 수도 있다. 30) 즉, 민주화 이후 대만과 한국에서 공통적으 로 나타난 권위주의 계승정당 주도의 국내정치는 그 자체가 모호성과 불확실성을 가지며, 이로 인해 두 반공국가의 상이한 발전 경로에 대해 충분한 설명력을 제공할 수 없다고 여겨 진다. Ⅳ. 반공국가의 토대?: 반공주의의 내면화( 內 面 化 )와 정체성 1. 대안적 시각의 모색 대만과 한국의 국가형성은 반공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냉전적 합의에 기초한 것이었으며, 냉전적 합의는 임시조관이나 국가보안법과 같은 일련의 법률체계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또 한 임시조관과 국가보안법은 외부적 위협에 대한 대응과 권위주의 정권의 유지를 위한 수단 이라는 대외적, 대내적 측면과 더불어 반공국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으로서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민주화 이후 대만과 한국의 반공국가 가 해체와 온존이라는 상이한 경로를 보인 원인을 논함에 있어 밖 과 안 에 상응하는 외부 적 위협과 국내정치구도의 재편에 주목한 시도는 충분한 설명력을 갖지 못했다. 이로부터 반공국가의 토대 에 해당하는 정체성의 문제를 고찰하려는 시도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즉, 대만의 반공국가가 해체된 반면, 한국의 반공국가가 온존하게 된 원인을 이해하려면 양국에 서 반공주의가 내면화된 수준의 편차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1950년대 한국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다룬 손호철의 연구는 이러한 접근을 시도하기 위한 분석틀을 정립함에 있어 참고할 만하다. 31) 그는 이데올로기를 사회적 현실에 대한 세계관 으로 정의한 가운데, (1)정치 공식-사회 비공식과 (2)지배-대항의 두 축을 중심으로 한 사분 면을 설정하였다([그림1] 참조). 정치 공식 이데올로기란 엘리트에 의해 체계화된 이데올로 기, 사회 비공식 이데올로기란 엘리트에 의한 체계화를 결여한 채 대중적으로 공유된 이데 올로기, 지배 이데올로기란 기존질서의 유지와 재생산에 기여하는 이데올로기, 대항 이데올 로기란 기존질서에 대한 저항을 촉발하는 이데올로기를 각각 가리킨다. 지 배 대 항 정치 공식 사회 비공식 [그림1] 이데올로기 지형을 이해하기 위한 분석틀(손호철(1996), p. 78)에서 재인용 후 수정) 30) Loxton(2015), pp. 164-68. 31) 손호철, 1950년대 한국사회의 이데올로기: 한국전쟁 이후시기를 중심으로, 한국정치연구 제5권(1996)을 참조. - 12 -

엘리트와 대중, 지배와 저항이라는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한 손호철의 분석틀을 반공주 의의 내면화 수준과 반공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분석에 적용할 경우 핵심적으로 검토해야 할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엘리트 내에서의 반공주의 수용 여부와 내면화 수준이다. 엘리 트들은 사회 각계에서 주요한 지위를 차지함으로써 권력과 권위를 갖는다. 따라서 특정한 이념에 대한 이들의 입장은 국가정체성을 결정함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이다. 단, 이 글에서 사용하는 엘리트의 개념은 정권을 장악한 집권 엘리트 뿐만 아니라 그에 도전하는 대항 엘 리트까지 아우르는 포괄적인 범주이다. 둘째, 대중 내에서의 반공주의 수용 여부와 내면화 수준이다. 국가정체성을 결정함에 있 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대중들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특정한 이념이 엘리트들에게 수용되고 국가정체성으로 표방된다 하더라도 대중들에게 외면 받는다면 그 이념을 핵심으로 한 국가정체성의 기반은 매우 취약하다고 보아야 한다. 셋째, 사회 내에서 반공주의가 확산되고 공유되는 구체적인 방식과 그 효과이다. 엘리트 들이 공유하는 이념과 대중들이 공유하는 이념은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전사회적 합의 를 거쳐 국가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이는 엘리트들이 지지하는 이념이 엘리트들 에게 부과된 결과일 수도 있고, 대중들이 지지하는 이념을 엘리트들이 수용한 결과일 수도 있다. 때로는 의도치 않은 사건(event) 과 같은 외부적 충격에 의해 특정한 이념이 엘리트 와 대중 모두에게 공유됨에 따라 국가정체성이 형성될 수도 있다. 물론 반공주의의 내면화 수준과 정체성을 중심으로 반공국가의 해체와 온존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갖는 난점도 존재한다. 무엇보다 핵심적인 것은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타당성을 확보 한 주장을 제시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이다. 이는 특정 이념의 내면화 수준, 정체성이라는 연 구대상 자체의 추상성에 기인하는 바가 크며,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수준의 정체성을 살펴 보기 위해서는 엘리트, 대중, 양자 간의 상호작용이 포괄적으로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기 도 하다. 손호철 역시 앞서 인용한 연구를 통해 이와 같은 사회 이데올로기 연구의 난점 들 을 지적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표출되는 정치이데올로기 와 달리 대중들의 실질적인 의식상태를 보여주는 사회이데 올로기 는 그것이 지배사회이데올로기이건 대항사회이데올로기이건 그 실상을 파악하는데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32) 지배사회이데올로기로서의 반공, 자유민주주의, 친미주의, 반일주의 역시 그것이 얼마나 지배적 이었으며 얼마나 깊이 일반대중들에게 내면화되어 있었는가 하는 지배성의 정도, 내면화의 정도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한 주제이다. 33) 반공주의가 50년대(나아가 이후 한국사회의) 지배사회이데올로기였다는 데에는 모두들 동의를 하 지만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느냐는 데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이 두 가설[ 능동적 동의 론 과 자포자기적 순응 내지 방어적 수동적 동의 ] 중 양자택일적인 방식이 아니라 계급 계층적 지위, 한국전쟁의 개인적 경험(북한의 학살경험이냐 교차학살이냐, 우익의 보복학살이냐 등)에 따 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전제 하에 이같은 요인들과 반공주의의 다양한 존재양식 간의 관계를 규명 해 나가야 한다 하겠다. 34) 32) 손호철(1996), p. 64. 33) 손호철(1996), p. 66. - 13 -

이 글도 정체성, 이념의 내면화와 같은 추상적 대상을 다루고 있는 만큼, 손호철의 연구 가 직면한 방법론적 과제와 한계를 공유하고 있다. 이에 이 글은 반공주의의 내면화 수준, 즉 정체성과 토대 의 문제가 반공국가의 해체와 온존 여부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을 실증 적으로 검증하기 보다는, 대만과 한국의 반공주의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을 비판적으로 검토 하고 종합함으로써 이 글에서 이루어진 문제제기가 향후에도 방법론에 관한 천착과 병행하 여 지속적으로 발전시켜볼 만한 여지를 지니고 있음을 밝히는데 주안점을 두고자 한다. 2. 대만의 외생적 반공주의(exogenous anticommunism) 대만의 집권 엘리트는 대륙 출신으로 국민당의 당국체제에 속한 외성인들이었다. 그 핵심 인물인 장제스는 국민당 총재 겸 중화민국 총통으로서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했으며, 유교와 개신교의 영향, 소련과의 반목 등으로 인해 강한 반공주의적 성 향을 지니고 있었다. 35) 국공내전을 경험하면서 오랫동안 공산당과 투쟁해왔고, 내전의 전세 가 기울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에 항복하지 않고 대만으로 건너온 국민당의 지도부와 당 원들도 기본적으로는 장제스와 같은 반공주의적 성향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만에는 본토 출신의 지주들이 중심이 된 본성인 엘리트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국민당의 진주와 더불어 몰락하게 되었다. 국민당은 농지와 농회( 農 會 )에 대한 대대 적인 개혁을 실시했으며 36), 이로 인해 본성인 지주들은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권위를 상실 하였기 때문이다. 국민당의 외성인 엘리트들은 잔존한 본성인 엘리트들과 혼인관계를 맺거 나 후견-피후견 관계를 형성하여 이들의 선거직 진출을 지원함으로써 포섭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성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선거는 타이베이 등 대만의 핵심지역을 제외한 채 실 시되는 제한적인 수준의 지방선거 뿐이었다. 국민당이 국공내전에서 패배하기 전인 1948년 대륙에서 선출된 국민대회, 입법원, 감찰원 등 이른바 중앙민의대표기구의 대표들이 사법원 의 결정에 따라 무기한의 임기를 보장받음으로써, 본성인 엘리트들이 이러한 기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당국체제가 확립된 이후에는 지방에 대한 국민당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당 중앙이 단독으로 후보자들을 결정하거나 지방계파들 간의 상호 경쟁과 견제를 조장하였고, 본성인 엘리트들은 지방선거의 참여 기회마저 제약받게 되었다. 국민당의 당국체제 하에서 본성인 엘리트들은 주체가 아닌 주변적 존재 또는 도구에 불과했 던 것이며 37), 민주화 이전 대만의 정치에서 대항 엘리트는 사실상 부재했다고 볼 수 있다. 본성인 엘리트들을 배제한 당국체제와 외성인 엘리트들은 경성통제(hard control) 와 연 성통제(soft control) 를 함께 구사함으로써 반공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경성 통제는 물리적인 폭력이나 강제력의 직접적 활용을 통해 이루어졌다. 국민당이 일본으로부 터 대만을 회복한 이후 실시한 폭압적 통치에 대한 본성인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폭발한 1947년의 2 28 사건, 뒤이은 국민당군의 무자비한 진압과 학살은 당국체제가 보유한 막대 34) 손호철(1996), pp. 71-72. 35) 김명섭 김주희, 20세기 초 동북아 반일 민족지도자의 반공: 이승만과 장개석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정 치외교사논총 제34집 2호(2013), pp. 83-91. 36) 若 林 正 丈 (2004), pp. 111-16. 37) 정형아, 전후 초기 대만 혼란의 원인: 권력주체 사이의 갈등, 탐라문화 제47호(2014), pp. 175-76. - 14 -

한 폭력의 자원을 확인시켜주었다. 대만으로 패퇴한 이후 국민당은 군대, 경찰, 정보기관, 법률에 의존하는 가운데 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한 모든 반대세력을 공비( 共 匪 ), 간첩( 間 諜 ), 비첩( 匪 諜 ) 등으로 규정하고 이들에 대해 합법적, 초법적 폭력을 행사하였으며, 38) 지방자치 조직에 대한 침투, 보갑제( 保 甲 制 )의 실시, 호구조사, 신분증 제도, 공산주의자들의 가속에 대한 감시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39) 폭력이나 강제력에 직접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다양한 방식의 연성통제도 시도되었다. 우 선, 반공적 문예 활동이 장려되었다. 중화문예장금협회나 중국문예협회처럼 국민당의 후원 을 받는 관방적 성격의 단체들이 수립되고 이들이 주도하는 반공 문학체제가 등장하였다. 40) 반공주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오웰(G. Orwell)의 작품들이 대만에서 널리 읽히게 된 것도 국민당의 후원 하에 반공주의 문학이 발전하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았으 리라 여겨진다. 41) 또한 국민당의 허용에 따라 상영된 반공주의 연극은 계엄령의 실시로 인 해 결사의 자유가 제한받던 상황에서 대중들이 공유할 수 있는 오락의 기회를 제공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반공주의 정서를 자극하였다. 42) 연성통제의 또다른 수단 중 하나는 라디오와 같은 방송매체였다. 대만이 일본의 식민통치 를 받던 1920년대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라디오는 대만인들에게 가장 친숙하고 대중화된 매 체로 자리잡았다. 다수의 인원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고, 많은 자본이 필요하지 않으며, 거 리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라디오라는 매체의 특징은 반공주의를 확산시켜야 하는 국민당 에게 유용한 선전의 도구가 될 수 있었다. 43) 국민당이 일본으로부터 대만을 회수한 직후 실 시한 조치들 중 하나는 바로 라디오 방송국을 서둘러 접수하는 것이었다. 연성통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교육이었다. 장제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장징궈의 지휘를 받은 구국단( 救 國 團 )은 청년과 학생들을 조직화한 준군사단체이자 교육단체였다. 이 후 구국단은 반공운동을 위한 조직의 성격이 점차 약화되고 청년과 학생들의 체육활동을 주 최함으로써 당국체제에 대한 이들의 호감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교과 서도 시대적 상황에 따라 반공항아( 反 共 抗 俄 ), 반공대륙( 反 攻 大 陸 ), 광복대륙( 光 復 大 陸 ) 등 다양한 주제를 강조해가며 반공주의를 전파하는 중요한 매개로 활용되었다. 44) 본성인이 대부분인 대만의 대중들은 당국체제가 도입한 다양한 통제에 대해 대체적으로 순응하는 태도를 보였다. 국민당이 대만에 진주한 초기에는 본성인들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반감을 표출하기도 하였으나, 2 28 사건의 진압 과정에서 국민당이 보유한 압도적인 폭력을 경험한 이후에는 그와 유사한 형태나 규모의 저항이 시도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로부터 38) 曾 薰 慧, 藏 汝 興 박강배 역, 적기( 異 己 ) 쓰기: 50년대 백색테러 시기 비첩( 匪 諜 ) 의 상징 분석, 제노사이드 연구 제2호(2007), pp. 207-212. 39) Yun-han Chu and Jih-wen Lin, "Political Development in 20th-Century Taiwan: State-Building, Regime Transformation and the Consturction of National Identity," The China Quarterly, Issue 165(2001), pp. 113-17; 蘇 慶 軒, < 國 民 黨 國 家 機 器 在 臺 灣 的 政 治 秩 序 起 源 : 白 色 恐 怖 中 對 左 翼 勢 力 的 整 肅 (1948-1954)>, 政 治 科 學 論 叢 第 57 期 (2013), pp. 132-38. 40) 최말순, 민족에서 개인으로: 1950년대 냉전대만의 문학풍경, 중앙사론 제38집(2013), pp. 341-50. 41) 대만에서 오웰의 작품들이 누렸던 높은 인기와 그 배경에 관해서는 Te-hsing Shan, "The Reception of George Orwell in Taiwan," Concentric, Vol. 40, No. 1(2014)을 참조. 42) Li-wen J. Wang, "Beyond Political Propaganda: Performing Anticommunist Nostalgia in 1950's Taiwan," Theatre History Studies, Vol. 33(2014), pp. 197-99. 43) 林 果 顯, < 日 常 生 活 中 的 反 共 知 識 建 構 : 廣 播 雜 誌 爲 中 心 (1952-1956)>, 國 史 館 學 術 集 刊 第 14 期 (2007), pp. 186-93. 44) 王 恩 美, < 冷 戰 時 期 學 校 教 育 中 的 反 共 形 象 : 以 臺 灣 與 韓 國 兩 地 小 學 教 科 書 為 中 心 的 分 析 >, 思 與 言 第 48 卷 2 期 (2010), pp. 53-59. - 15 -

자극을 받아 국민당에 반대할 여지가 많아 보였던 노동자들의 경우, 폭력적 억압 뿐 아니라 국민당이 구축한 경제체제 하에서 향유하는 이익에 대한 고려에 따라 자발적인 순응을 보이 기도 했다. 45) 국민당도 노동조합의 형성에 관여하거나 이들의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 는 조합주의적 방식을 통해 잠재적인 불안요소를 관리하였다. 46) 반공주의적 당국체제에 대 한 저항을 조직해야할 공산주의자들은 계파 간의 경쟁으로 분열되었을 뿐 아니라 47), 미숙한 혁명전술을 구사함에 따라 당국체제의 수립 초기에 이미 큰 타격을 받았다. 48) 그러나 각종 통제의 수단을 활용하여 반공주의를 전사회적으로 내면화시키려는 국민당의 정책에 대한 대중들의 태도를 살펴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실은 대중들이 반공주의를 자발 적이고 능동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계기, 즉 사건 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반공주의 와 공산주의의 투쟁이었던 국공내전은 당국체제의 엘리트들을 비롯한 외성인들에게만 국한 된 경험이었다. 대만의 인구 중 다수를 차지하는 본성인들 중 중국 공산당과의 직접적인 무 력 충돌을 경험한 이들은 대륙에서 활동했거나, 양안 간의 포격전으로 인해 두 차례의 대만 해협 위기(1954, 1958~59)가 발생했던 진먼( 金 門 ), 마주( 馬 祖 ) 등 대륙에 인접한 일부 도 서지역의 주민 등으로 소수에 불과했다. 49) 오히려 당국체제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본성인들 에게 각인되었던 것은 외성인들의 억압과 폭력, 착취와 부패였으며, 일본 식민통치의 종식 이후 진주한 국민당에 대한 본성인들의 반감은 개가 가고 돼지가 왔다( 拘 去 猪 來 ) 라는 구절 로 표현되며 널리 회자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2 28 사건과 국민당의 유혈진압은 외성인과 당국체제에 대한 본성인들의 반감이 고착화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국민당도 이와 같은 본성인들의 반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국체제에 대한 지지를 유도하고 반공주의에 대한 대중적 공감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앞서 언급한 반공주의 연 극의 대표적 작품 중 하나였던 대파산의 사랑 ( 大 巴 山 之 戀 )을 예로 들면, 남녀 주인공이 서로에 대한 오해를 극복하고 화해하면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저항하는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반공주의와 더불어 외성인과 본성인 간의 화합을 그려내고자 하였다. 50) 또한 반공주의를 확 산시키는 중요한 수단이었던 교과서에서는 외성인과 본성인 모두 하나의 중국 을 이루는 일원임을 강조하면서 동질의식을 고취시키려는 서사구조가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기억의 창조 는 전사회적으로 공유될 수 있는 경험이 부재했던 당시 대만의 상황에서 하나의 중국 이라는 가치를 상정하고 공산주의자들을 그 가치를 파괴하는 세력으로 규정함으로써 반공주 의를 촉발시키려는 시도였다. 51)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보았을 때, 대만의 반공주의는 국민당의 당국체제에 속한 소수의 외 성인들에게만 공유된 채 사회의 다수를 이루는 본성인들에게 다양한 통제의 수단을 통해 부 과된 외생적 반공주의 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당국체제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본성인들 45) Ming-sho Ho, "From Resistance to Accommodation: Taiwanese Working Class in the Early Postwar Era(1945-55)," Journal of Contemporary Asia, Vol. 44, No. 3(2014), pp. 493-94. 46) 若 林 正 丈 (2004), pp. 122-24. 47) 蘇 慶 軒 (2013), pp. 129-32; Ho(2014), pp. 490-93. 48) 대만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다룬 대표적인 연구로는 Frank S. T. Hsiao and Lawrence R. Sullivan, "A Political History of the Taiwanese Communist Party, 1928-1931,"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42, No. 2(1983); Anna Belogurova, "The Civic World of International Communism: Taiwanese communists and the Comintern(1921-1931)," Modern Asian Studies, Vol. 46, No. 6(2012)을 참조. 49) 냉전이 진먼 등 도서지역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미친 영향을 다룬 연구로는 Michael Szonyi, Cold War Island: Quemoy on the Front Lin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을 참조. 50) Li-wen J. Wang(2014), pp. 199-204. 51) 王 恩 美 (2010), pp. 105-9. - 16 -

의 삶에 보다 직접적인 충격을 준 것은 반공주의 대 공산주의의 투쟁인 국공내전이 아니라 2 28 사건으로 상징되는 외성인들의 억압이었다. 이는 대만에서 국민당과 외성인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공유된 반공주의의 사회적 기반이 협소했음을 의미하며, 반공국가의 토대 가 갖는 이러한 취약성은 민주화와 탈냉전이 수반한 안 과 밖 의 변화 속에서 대만 반공국 가의 해체를 용이하게 했으리라 여겨진다. 3. 한국의 내생적 반공주의(endogenous anticommunism) 한국의 집권 엘리트들은 반공주의적 지향을 지속적으로 보여왔다. 이승만의 경우, 장제스 처럼 유교와 개신교의 영향, 소련과 공산주의 세력과의 갈등으로 인해 평생 동안 반공주의 의 노선을 견지했으며, 그의 반공주의는 국공합작을 위해 타협을 감수하기도 했던 장제스의 반공주의보다 훨씬 일관된 면모를 보였다. 52) 박정희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군부세력도 반 공주의적이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군부는 1948년 여순반란 이후 대대적으 로 진행된 숙군 작업을 거치며 한국에서 가장 반공적인 집단으로 변모하였다. 53) 5 16 군사 정변 이후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반공을 국시로 선언한 데 이어 반공법을 제정하고 집행함 으로써 반공적 집단으로서의 성격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었다. 흥미로운 점은 국가 수립의 초기단계부터 집권 엘리트들과 줄곧 대립해온 대항 엘리트들 도 강력한 반공주의적 지향을 공유해왔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정치에서 등장했던 야당들의 모태가 되었던 한국민주당은 본래 송진우, 김성수 등 대지주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반혁 명적이고 보수적인 성격의 정당으로, 이승만과 함께 우파 지배연합을 형성하고 한국에서의 국가 수립을 주도하였으나 권력의 배분을 놓고 이승만과 갈등하게 되었던 것이다. 해방 이 후부터 한국의 국가형성 초기까지는 좌파나 민족주의 성향의 중도파 등 반공주의를 공유하 지 않는 엘리트들도 존재했으나, 이들은 미국의 후원을 받은 우파 엘리트들에 의해 도태되 었다. 이로써 한국의 집권 엘리트와 대항 엘리트 간에는 권력 배분을 둘러싼 경쟁과 반공을 위한 협력이라는 이중적인 관계가 수립되었다. 한민당에 기원을 두고 발전해온 한국의 대항 엘리트들이 갖는 보수적 속성은 국가보안법 개폐 논쟁을 통해서도 거듭 확인되었다. 한민당의 후신으로 이승만의 실각 이후 집권에 성 공한 민주당의 장면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부분적으로 개정하는 데에는 동의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반공임시특별법 의 입법을 시도하는 등 이승만에 못지 않은 반공주의적 지향을 보여주었다. 54) 민주화 이후 활발히 전개된 국가보안법 개폐 논쟁에서도 대항 엘리트들은 여 전히 반공주의적 성격을 드러냈다. 대항 엘리트들의 핵심 인물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오 랫동안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강력히 요구해왔다. 그러나 민주화가 달성된 이후 김영삼은 강 경한 운동권 세력과 점차 거리를 두기 시작해 3당 합당 이후에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김대중도 가칭 민주질서보호법안 의 제안을 통한 대체입법의 시 도, 집권 엘리트들의 국가보안법 개정안 수용 등으로 점차 후퇴하였다. 한국의 집권 엘리트들도 대만의 국민당처럼 경성통제와 연성통제를 복합적으로 활용함으 로써 반공주의를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한국의 집권 엘리트들이 활용한 경성통제의 수단은 52) 김명섭 김주희(2013), pp. 76-83. 53) 김득중(2009), pp. 450-58. 54) 후지이 다케시, 4 19/5 16 시기의 반공체제 재편과 그 논리: 반공법의 등장과 그 담지자들, 역사문제연 구 제25호(2011), pp. 10-20; 박원순(1992), pp. 159-77. - 17 -

국가보안법, 반공법, 계엄령과 긴급조치 등이었다. 특히 그 핵심이었던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은 애매하고 모호한 규정으로 인해 대량의 피해자를 양산했으나, 권위주의 정권에게는 그만 큼 사회의 저항세력을 효과적으로 억압하며 반공주의를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공 산주의에 동조하는 이들을 포함하여 반공적 권위주의 국가에게 도전하는 모든 세력은 빨갱 이 로 규정되어 철저한 탄압을 받았는데, 빨갱이 는 일본의 아카( 赤 ), 서양의 코미 (commie) 등 공산주의자들을 폄하하는 그 어떤 용어보다도 노골적인 적대감을 담고 있었 으며 55), 공산주의에 가담하는 언행에 대해 강렬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연성통제를 통한 반공주의의 확산도 시도되었다. 국가의 주도 또는 후원 하에 청년단체, 사회단체 등 다양한 반공조직이 결성되었다.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등 반공주의를 지향하 며 결성된 우익 성향의 청년단체들은 여순반란 이후 이승만과의 협의를 거쳐 대한청년단으 로 통합되었다. 56) 이들은 사회 내에서 반공주의의 확산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을 뿐 아니라, 공산주의 게릴라들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군과 경찰을 보조하는 준군사단체의 역할도 담당하 였다. 국가보안법과 연계되어 창설된 국민보도연맹은 공산주의 활동에 가담했다가 전향한 국민들을 내세워 반공주의를 선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을 지속적으로 감시하는 이중 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다. 교육은 대만에서와 마찬가지로 반공주의의 내면화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이 승만과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조직되었던 학도호국단은 학생들을 준군사단체로 조직화하여 규율하였을 뿐 아니라, 반공주의를 학습하는 장으로 기능하였다. 도덕교육의 일부로 시행된 반공교육은 공산주의자들을 비도덕적, 비인간적 존재로 각인시킴으로써 공산주의에 대한 경 계와 반감을 강화시켰다. 북한의 잇따른 무력도발과 간첩파견은 대중들의 반공의식을 제고 시킴과 동시에 반공교육의 소재로 활용되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었다. 57) 법적, 관습적 차원에서 작동한 연좌제는 반공주의의 수용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구조를 형 성했다. 빨갱이 로 규정된 인사들과 그들의 친인척들은 국민 의 범주에서 철저히 배제됨으 로써 국가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상실했다. 또한 사회적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생계를 유지 하거나 자유롭게 개인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공 주의의 수용 여부는 정치적 사상적 신념에 따른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당위의 문제였다. 국가와 엘리트 주도의 반공주의 확산에 대한 대중들의 태도를 고찰함에 있어 주목할 만한 점은 한국에서는 대만과 달리 대중들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반공주의를 수용하고 내면화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엘리트와 대중들이 함께 체험한 한국 전쟁이라는 사건 과 이 전쟁의 발발을 전후하여 전개된 내전적 상황의 강력한 파급력에 기 인한다. 즉, 한국전쟁은 반공주의를 매개로 엘리트와 대중들을 연결하고, 전자의 반공주의 동원에 대해 후자가 호응할 수 있는 공유된 기억을 형성했던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직후부터 한반도에서는 반공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 간 에 정치적, 물리적 충돌이 빈발했다. 한국 내에서 전개된 1946년 말의 추수봉기, 여순반란, 빨치산들의 게릴라 투쟁, 38선을 사이에 두고 연쇄적으로 발생한 크고 작은 교전은 한국의 대중들이 내전적 상황 속에서 공산주의와 반공주의를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 다. 58) 한국전쟁의 발발은 앞서 언급한 내전적 상황에서 누적된 갈등이 북한의 남침을 계기 55) 김득중(2009), pp. 559-61. 56) 전갑생, 한국전쟁 전후 대한청년단의 지방조직과 활동, 제도사이드 연구 제4호(2008), pp. 14-19. 57) 王 恩 美 (2010), pp. 62-64. - 18 -

로 폭발하여 한반도를 무대로 한 국제전으로까지 비화된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국의 반공주의는 이념이나 사상의 수준을 넘어 일상적 체험에 근거한 감성, 감정, 정서의 형태로 더 심층적인 기반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59) 대만인들이 대륙에서 전개된 국공내전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없었던 것과 달리, 한국전 쟁은 공산주의 세력과 반공주의 세력 간의 진퇴에 따라 한반도 전역에 걸쳐 전개되었고, 한 국인들의 삶에 직접적이고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60) 한국전쟁이 한국인들에게 미친 중요한 영향 중 하나는 폭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반공주의의 수용이었다. 북한군의 점령이 장 기화되자 북한군의 강제징용과 공출에 대한 불만, 북한군에 협력한 좌익 인사들의 전횡에 대한 반감이 형성되었다. 내전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한국군은 대중들의 반공의식과 충성심을 강요하고 시험했으며, 대중들은 생존을 위해서 반공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만 했다. 61) 이처럼 한국전쟁은 국민당과 소수의 외성인들만의 배타적 경험이었던 국공내전과는 대조적으로 전사회적인 파급력을 지닌 실제적 경험이었다. 이는 반공주의를 고취시키기 위해서 외성인과 본성인을 아우르는 하나의 중국 을 각인시키는 기 억의 창조 가 선행되어야 했던 대만과 달리, 한국에서는 한국전쟁의 경험을 끊임없이 상기 시키는 기억의 재생산 을 통해 반공주의가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62) 한반도에서의 내전적 상황과 한국전쟁이 한국 대중들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반공주의 수 용에 기여할 수 있었던 또다른 요인은 38선과 월남인( 越 南 人 )의 존재이다. 미국과 소련에 의해 획정된 38선은 세계 냉전이 한반도에 미친 영향과 공산주의 사회와 반공주의 사회로 양분된 한반도의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38선을 기준으로 물리적 생존과 이념적 자유 를 추구하는 대대적인 인구의 이동이 발생했는데 63), 북한으로부터 38선 이남으로 이동한 월남인들 중 상당수는 북한에서 진행된 공산주의 혁명과 그로 인한 탄압을 피하기 위한 정 치적, 사상적 동기를 갖고 있었으며, 이들은 월남 이후 서북청년단과 같은 반공주의 단체를 조직하여 집권 엘리트들과 결탁하기도 했다. 64) 이처럼 정치적, 사상적 동기로 인한 인구이 동은 38선을 기준으로 수립된 공산주의 사회와 반공주의 사회가 내부적으로 이념적 동질성 을 제고하는 계기이자, 양자 간의 적대와 대립이 격화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65) 이상의 논의로 미루어 보았을 때, 한국의 반공주의는 정권을 장악한 지배 엘리트 뿐만 아 58) 38선에서 전개된 한국과 북한 간의 교전에 관해서는 박명림(1996), 제11장을 참조. 59) 반공주의를 지식인 수준에서의 이데올로기, 이념, 사상을 넘어 사회적으로 유통 확산되는 감정이자 정서로 파 악해야 한다는 주장에 관해서는 이하나, 1950~60년대 반공주의 담론과 감성 정치, 사회와 역사 제95집 (2012)를 참조. 60)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가 1989년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1989년을 기준으로 1950년 한국전쟁 발 발 이전 출생하여 전쟁을 직접 경험한 연령층인 40대(57.3%), 50대(66.1%), 60대(64.3%)에서는 전쟁의 피해 와 자신의 연결성을 인정하는 비율이 20대(43.9%)나 30대(47%)에 비해 훨씬 높게 나타났다. 연세대학교 인 문과학연구소, 6 25 전쟁 관련 국민의식조사 (서울: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89), p. 183; 정수복, 한국전쟁이 남북한사회에 미친 이데올로기적 영향, 통일문제연구 제2권 2호(1990), p. 130에서 재인용. 61) 이에 관해서는 김동춘, 전쟁과 사회: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서울: 돌베개, 2004), 제2장을 참 조. 62) 王 恩 美 (2010), pp. 101-5. 63) 정성호, 한국전쟁과 인구사회학적 변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현대사의 재인식(7): 한국전쟁과 사 회구조의 변화 (서울: 백산서당, 1999), pp. 14-32. 64) 월남자들이 발생한 시기는 한국전쟁 발발 이전과 이후를 모두 포괄하며, 월남자 중에는 뚜렷한 정치적, 사상 적 이유로 월남한 경우 외에도 단순히 생활고나 전쟁의 참화를 피하기 위해 월남한 경우도 포함된다. 월남자 들이 한국에서 반공주의 확산의 주체 중 하나였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모든 월남자들을 반공주의자로 간주하 는 일종의 신화 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연구로는 김귀옥, 아래로부터 반공 이데올로기 허물기: 정착촌 원남인 의 구술사를 중심으로, 경제와 사회 제43호(1999)를 참조. 65) 한반도의 분단에서 38선이 갖는 의미와 영향에 관해서는 박명림(1996), 제7장을 참조. - 19 -

니라, 대항 엘리트, 대중들에 의해 자발적이고 광범위하게 공유된 내생적 반공주의 의 면모 를 보여주었다. 한국의 반공주의는 한국전쟁이라는 사건 과 한반도에서 전개된 내전적 상황 을 통해 대만의 반공주의와는 다른 내생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례로 민주화 직후 인 1989년에 실시된 한 설문조사에서는 한국전쟁을 직접 경험했던 40-60대층에서 다른 세 대에 비해 북한에 대해 훨씬 높은 수준의 적대감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결과는 한국전쟁의 경험이 대중에 의한 자발적인 반공주의 수용에 미친 영향을 대략적으로나마 추측해볼 수 있 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자료이다([표1] 참조). 66) 이처럼 한국의 반공국가는 엘리트와 대중들 에 의한 반공주의의 능동적인 수용과 내면화를 통해 대만의 반공국가보다 훨씬 더 견고한 토대 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민주화와 탈냉전으로 인한 안 과 밖 의 변화에도 불 구하고 온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령 동반자 적 둘다 아님 사례수 전체 1,490 49.9% 1,424 47.7% 69 2.3% 2,983 20대 525 64.9% 271 33.5% 13 1.6% 809 30대 522 53.3% 353 44.6% 17 2.1% 792 40대 210 38.5% 319 58.4% 17 3.1% 546 50대 202 41.9% 272 56.4% 8 1.7% 482 60대 이상 131 37.0% 209 59.0% 14 4.0% 354 [표1] 북한관(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원(1989), p. 183; 정수복(1990), p. 135에서 재인용) Ⅴ. 결론 이 글은 국가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많은 특징을 공유한 대만과 한국의 반공국가가 민 주화를 거치면서 해체와 온존이라는 상이한 경로를 보였음에 주목하고 그 원인을 고찰하고 자 하였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반공국가가 근거한 냉전적 합의 의 구체적 표현인 대만 의 임시조관과 한국의 국가보안법이 갖는 의미를 분석하고, 두 법률이 외부적 위협에 대한 대응, 반공적 권위주의 정권의 통치 수단, 반공국가 정체성의 상징이라는 밖, 안, 그리고 토대 의 측면을 가지고 있음을 밝혔다. 나아가 각각의 측면에 해당하는 중국과 북한의 위 협, 민주화 이후 국내정치구도의 재편, 반공주의의 내면화 수준이라는 요인들이 대만 반공 국가의 해체와 한국 반공국가의 존속에 대해 제공하는 설명의 타당성을 비교하고, 그 결과 반공주의의 내면화라는 정체성과 토대 의 요인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민주화와 탈냉전, 그리고 반공국가의 정체성 변화에 관한 이 글의 문제제기는 국내적 의 미와 국제적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국내정치의 관점에서 본다면, 권위주의 정권의 통치수 단이자 상징이었던 임시조관과 국가보안법의 개폐 여부는 대만과 한국의 민주주의 공고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 중 하나이다. 제3의 민주화 물결 을 경험하며 동아시아 민주화의 선도국가로 부상한 대만과 한국이 임시조관과 국가보안법에 결부된 과거의 유산을 극복하는 방식과 그 성과는 두 국가의 민주주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는 임시조관과 국가보안법의 개폐가 동아시아의 탈냉전 이행에 대한 대만과 한 66)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원(1989), p. 183; 정수복(1990), p. 135에서 재인용. - 20 -

국의 대응을 살펴봄에 있어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는 냉전질서 하에서 대만과 한 국의 대외관계를 규정해왔던 반공국가의 정체성이 민주화를 거치며 내부로부터 해체된 상황 에서 어떤 대안적 국가정체성이 등장할 것인가의 문제로 연결되며, 이와 관련하여 반공적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봉인되었던 외성인과 본성인 간의 갈등, 반공주의의 제약을 받지 않 는 민족주의의 부상 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특정한 이념의 내면화를 통한 국가정체성의 형성에 주목했 던 이 글의 주장을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연구방법론과 연구방법에 대한 고민이 지속되 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즉, 이념이나 정체성과 같은 연구대상 자체의 추상성을 인정하면서 도, 이를 정치학을 비롯하여 실증적인 과학을 지향하는 현대 사회과학의 흐름과 어떻게 조 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천착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반공주의의 내면 화 수준이 반공국가의 온존과 해체 여부에 영향을 미쳤다는 이 글의 주장은 실증적이고 명 확한 인과성(causality)을 보여주고 있기 보다는 여전히 민주화를 전후하여 대만과 한국이 직면한 국내적, 국제적 여건을 검토한 가운데 시도된 개연성(plausibility) 있는 문제제기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여겨진다. - 21 -

참 고 문 헌 1차 자료 대통령기록관 대통령기록연구실 http://www.pa.go.kr/research/contents/speech/index.jsp 국가법령정보센터 http://www.law.go.kr/lsw/main.html 2차 자료 강원택, 2012, 3당 합당과 한국 정당 정치, 한국정당학회보 제11권 1호. 권오신, 2005, 아이젠하워 대외정책의 기조: 뉴룩(New Look) 정책과 아이젠하워 독트 린, 미국사연구 제21집. 김경일, 홍면기 역, 2005,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기원: 한중관계의 역사적 지정학적 배경을 중심으로, 서울: 논형. 김귀옥, 1999, 아래로부터 반공 이데올로기 허물기: 정착촌 원남인의 구술사를 중심으로, 경제와 사회 제43호. 김동춘, 2004, 전쟁과 사회: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서울: 돌베개. 김득중, 2009, 빨갱이 의 탄생: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탄생 서울: 선인. 김명섭, 2003, "한국전쟁이 냉전체제의 구성에 미친 영향," 국제정치논총 제43집 1호. 김명섭 김석원, 2013, 관념충돌로서의 전쟁: 임진왜란과 6 25전쟁의 관념적 기원을 중심으 로, 국제정치논총 제53집 3호. 김명섭 김주희, 2013, 20세기 초 동북아 반일 민족지도자의 반공: 이승만과 장개석의 사례 를 중심으로,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34집 2호. 김지형, 2013, 1960~70년대 박정희 통치이념의 변용과 지속: 민주주의와 반공주의 및 상 호관계를 중심으로, 민주주의와 인권 제13권 2호. 노기영, 2002, 이승만정권의 태평양동맹 추진과 지역안보구상, 지역과 역사 제11호. 마상윤, 2014, 글로벌 냉전과 동북아시아, 세계정치 제22호. 문흥호, 2000, 대만의 정치민주화와 인권, 민주주의와 인권 제1권 2호. 박명림, 1996,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Ⅱ): 기원과 원인, 서울: 나남출판. 박원순, 1992, 국가보안법연구(1): 국가보안법 변천사 서울: 역사비평사. 박인숙, 2005, 아이젠하워와 평화 의 수사학, 미국사연구 제22집. 박찬봉, 2008, 7.7선언체제의 평가와 대안체제의 모색: 기능주의에서 제도주의로, 한국 정치학회보 제42집 4호. 이정철, 2011, 김일성의 남방정책과 남북기본합의서: 냉전 해체의 비대칭성과 동맹 재편 전략의 좌절, 역사비평 제197호. 이정철, 2012, 탈냉전기 노태우 정부의 대북정책: 정책연합의 불협화음과 전환기 리더십의 한계, 정신문화연구 제127호. 이하나, 2012, 1950~60년대 반공주의 담론과 감성 정치, 사회와 역사 제95집. 서희경, 2002, 한계상황의 정치 (politics of extermity)와 민주주의: 1948년 한국의 여순 사건과 국가보안법 관련 논의를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제38집 5호. 손호철, 1996, 1950년대 한국사회의 이데올로기: 한국전쟁 이후시기를 중심으로, 한국정 치연구 제5권. 정수복, 1990, 한국전쟁이 남북한사회에 미친 이데올로기적 영향, 통일문제연구 제2권 - 22 -

2호. 정형아, 2014, 전후 초기 대만 혼란의 원인: 권력주체 사이의 갈등, 탐라문화 제47호. 전갑생, 2008, 한국전쟁 전후 대한청년단의 지방조직과 활동, 제도사이드 연구 제4호. 조경란, 2011, 1950년대 동아시아의 반공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재검토: 자유중국 ( 自 由 中 國 ) 과 사상계 의 대항담론 형성 가능성, 시대와 철학 제22권 1호. 曾 薰 慧, 藏 汝 興 박강배 역, 2007, 적기( 異 己 ) 쓰기: 50년대 백색테러 시기 비첩( 匪 諜 ) 의 상징 분석, 제노사이드연구 제2호. 최말순, 2013, 민족에서 개인으로: 1950년대 냉전대만의 문학풍경, 중앙사론 제38집. 최영호, 1999, 이승만 정부의 태평양동맹 구상과 아시아민족반공연맹 결성, 국제정치논 총 제39집 2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현대사의 재인식(7): 한국전쟁과 사회구조의 변화, 서울: 백 산서당, 1999. 후지이 다케시, 2011, 4 19/5 16 시기의 반공체제 재편과 그 논리: 반공법의 등장과 그 담 지자들, 역사문제연구 제25호., 2014, 당국체제의 연쇄: 동아시아의 내전과 냉전, 동북아역사논총 제43호. Belogurova, Anna, 2012, "The Civic World of International Communism: Taiwanese communists and the Comintern(1921-1931)," Modern Asian Studies, Vol. 46, No. 6. Chu, Yun-han and Jih-wen Lin, 2001, "Political Development in 20th-Century Taiwan: State-Building, Regime Transformation and the Consturction of National Identity," The China Quarterly, Issue 165. Ho, Ming-sho, 2014, "From Resistance to Accommodation: Taiwanese Working Class in the Early Postwar Era(1945-55)," Journal of Contemporary Asia, Vol. 44, No. 3. Hsiao, Frank S. T. and Lawrence R. Sullivan, 1983, "A Political History of the Taiwanese Communist Party, 1928-1931,"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42, No. 2. Jervis, Robert, 1980, "The Impact of the Korean War on the Cold War," The Journal of Conflict Resolution, Vol. 24, No. 4. Lin, Chia-lung and Bo Tedards, 2002, "Lee Teng-hui: Transformational Leadership in Taiwan's Transition," American Asian Review, Vol. 20, No. 2. Loxton, James, 2015, "Authoritarian Successor Parties," Journal of Democracy, Vol. 26, No. 3. Shan, Te-hsing, 2014, "The Reception of George Orwell in Taiwan," Concentric, Vol. 40, No. 1. Szonyi, Michael, 2008, Cold War Island: Quemoy on the Front Lin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Wang, Li-wen J., 2014, "Beyond Political Propaganda: Performing Anticommunist Nostalgia in 1950's Taiwan," Theatre History Studies, Vol. 33. Wu, Naithe, 2005, "Transition without Justice, or Justice without History: Transitional Justice in Taiwan," Taiwan Journal of Democracy, Vol. 1, No. 1. - 23 -

謝 居 福, 2009, < 中 華 民 國 憲 政 史 硏 究 >, 臺 南 科 技 大 學 通 識 敎 育 學 第 8 期. 薛 化 元,2013, 1950,1960 年 代 台 湾 政 治 发 展 的 历 史 评 价 问 题 : 冷 战 架 构 下 的 一 个 考 察. 중 앙사론 제38집. 蘇 慶 軒, 2013, < 國 民 黨 國 家 機 器 在 臺 灣 的 政 治 秩 序 起 源 : 白 色 恐 怖 中 對 左 翼 勢 力 的 整 肅 (1948-1954)>, 政 治 科 學 論 叢 第 57 期. 王 恩 美, 2010, < 冷 戰 時 期 學 校 教 育 中 的 反 共 形 象 : 以 臺 灣 與 韓 國 兩 地 小 學 教 科 書 為 中 心 的 分 析 >, 思 與 言 第 48 卷 2 期. 林 果 顯, 2007, < 日 常 生 活 中 的 反 共 知 識 建 構 : 廣 播 雜 誌 爲 中 心 (1952-1956)>, 國 史 館 學 術 集 刊 第 14 期. 曾 建 元, 2005, < 動 員 戡 亂 時 期 臺 灣 憲 法 變 遷 的 環 境 動 力 >, 中 華 人 文 社 會 學 報 第 2 期. 陳 顯 武, 2007, < 法 律 的 政 治 分 析 : 論 戒 嚴 時 期 的 政 治 刑 法 >, 國 家 發 展 硏 究 第 6 卷 2 期. 若 林 正 丈, 洪 金 珠 許 佩 賢 譯, 2004, 台 灣 : 分 裂 國 家 與 民 主 化, 台 北 : 新 自 然 主 義. - 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