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낭독의 발명 제2회 서울, 젊은 작가들 축제 리뷰 김중혁 소설가 세계의 젊은 작가들이 서울에 모였다. 한국문학번역원 에서 마련한 서울, 젊은 작가들 축제에서다. 각국에 서 온 40명의 시인과 소설가들이 5월 18일부터 일주일 동안 홍 대 앞 곳곳에서 낭독회를 열고, 모여서 수다를 떨고, 함께 MT도 가고, 축구 경기도 했다.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그들은 어떻게 축제 를 즐겼을까. 기획위원이자, 낭독자이자, 축구선수(!)로 이 행사에 참여한 소설가 김중혁이 전하는 제2회 서울, 젊은 작가 들 리뷰, 혹은 참가기.
페스티벌? 페스티벌! 벌써 2년이 지났다. 하지만 2년 전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는 일산의 어느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적당히 취해 있었고 기분이 좋은 상태 였다. 소설가 김연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술 마시냐? 5월에 행사가 하나 있는데, 참여할 생각 있냐? 김연수는 대뜸 그렇게 물었다. 오랜 친구니까 반 말로 얘기한 건 그렇다 쳐도, 무슨 행사인지는 설 명해줘야 할 것 아냐. 그래, 술 마신다. (떫으냐?) 행사? 무슨 행산 데? 페스티벌. 페스티벌? 세계의 젊은 작가들이 서울에 모여서 일주일 동 안 페스티벌을 여는 거야. 재미있겠지? 재미있겠네. 참여할 거지? 그러지 뭐. 라고 쉽게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술에 취해서 그랬 던 것도 있겠지만, 나는 페스티벌이라는 단어에 마 음이 흔들렸다. 페스티벌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내 머리 속에서는 음악이 울려 퍼졌고, 열렬한 춤 과 웃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결국, 노 는 거란 얘긴데, 그것도 작가들과 함께 노는 거란 얘긴데, 그러면,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행사의 정식 명칭은 Seoul Young Writers Festival (이하 줄여서 SYWF)이었다. 나는 그 명칭을 듣고 무릎을 쳤다. 세상에, 어쩜 이렇게, 절대 함께 쓰지 못할 것 같은 네 개의 단어를 하나로 연결시켜 놓 았을까. 서울과 젊음과 작가와 페스티벌을 한데 모 아놓으니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작가와 페스티 벌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고(작가들이란 혼자 놀 기의 달인 이 아닌가, 나는야 16년 동안 계속 혼자 서만 놀아온 축제 김중혁 선생이란 말인가), 젊음 과 작가라는 단어도 어울리지 않아 보였고(2006 SYWF 때 소설가 김연수는 서울 젊은 작가 페스 티벌에 참가하기엔 우리가 지나치게 올드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 서울과 페스 티벌은 그래도 좀 어울리나 싶다가도 그건 어쩐지 조작의 냄새가 풍기는 것 같아 곰곰이 생각해보 면, 서울과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일, 야근, 경제, 성 장 과 같은 살벌한 분위기의 낱말들이 아닌가 싶 다. 이왕 시작한 김에 조합을 끝내보자. 남은 게 뭐 가 있나. 서울과 젊음, 서울과 작가, 젊음과 페스티 벌. (아, 머리 아프다. 이래서 내가 문과를 선택했 던 것이다.) 아무튼 서울 젊은 작가 페스티벌 이라 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느꼈던 묘한 이질감이 지 금도 생생하다. 뭐든지 처음이란 건 난처한 법이다. 첫사랑이 그 렇고, 첫경험도 그렇고, 1번 타자도 그렇고, 1회 수 상자도 그렇다. 1회 대회도 마찬가지다. 제1회였던 2006 SYWF는 난처함의 연속이었다. 자, 그럼, 우 리 이제 서로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보아요. 라 고 생각했지만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번역된 작품 이 없었고(오, 이런!), 에이, 작품이 없으면 어때요, 그럼 우리 문학에 대한 진실한 속마음을 나눠보아 요 라고 생각했으나 나는 영어를 못하고, 너는 한 > 리뷰 191
국어를 못하고, 통역은 문학을 모르고, 심지어 통 역은 자리를 비우고, 우리 둘만 남으니, 할 말이 없 고, 하우 아 유 두잉? 잘 지낸다는데, 계속 잘 지내 느냐고만 묻고, 이러다 보니 슬슬 피하는 상황이 되고 난 역시 한국 작가들과 말이 잘 통해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외국 작가들과 짧 은 영어로 계속 얘기를 나누었다. 4일쯤 지나자 그 래도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있 었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웠고, 외국 작가들은 천천 히 말하는 법을 익혔다. 난처한 순간이 많았지만 2006 SYWF는 좋은 경 험이었다.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았다. 외국 작 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고, 재미있는 한국 작가들을 많이 만나기도 했다. 일 주일 동안 집에도 가지 못하고 호텔에서 지냈는데, 그것도 재미있었다. 서울이 외국 같았고, 일산의 집 으로 돌아가니 여행에서 돌아온 기분이었다. 2년이 흘러, 2008 SYWF의 기획위원을 하지 않 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딱 10초 정도 망설 였다. 두 가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왼쪽 마음은 이랬다. 음, 아무 것도 못하고 일주일을 보내야 하 는데, 그리고 외국작가들과 힘겹게 영어로 이야기 해야 하는데, 게다가, 기획위원이라면 아이디어도 내야 하는데. 반대쪽에 있던 오른쪽 마음은 이 랬다. 그래, 네가 생각하는 문제점을 밑바탕으로 좀더 좋은 2008 SYWF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니? 그것이 바로 네가 해야 할 일인 것이야. 그리고, 가 장 중요한 것은 5월에 너 할 일이 별로 없지 않아? 그랬다. 5월엔 할 일이 없었다. 할 일이 생길지도 몰 랐지만 소설가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해야 할 일 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그리고 좀더 재미있는 2008 SYWF을 만드는 데 조금이라 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진심이었다. 내가 생각한 2006 SYWF의 문제점은 크게 세 가 지였다. 첫째, 한국 작가의 작품이 영어로 번역되지 않아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는 점. 둘째, 통역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여 작가들의 대화 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 셋째, 작가들이 한국의 독자들과 만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행사를 열었던 한국문학번역원도 그 문제점을 알고 있었 다. 그것만 고치면 훌륭한 페스티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획위원들(소설가 오수연이 기획위원장이었으 며, 시인 성기완, 문학평론가 정여울, 문화평론가 김종휘, 그리고 내가 기획위원이었다)은 한 달에 한 번 만났다. 기획위원들이 아이디어를 내면, 한국 문학번역원의 실무진들이 검토했다. 시간이 지나면 서 행사의 큰 틀이 잡혔다. 2006 SYWF의 가장 큰 문제점은 모든 행사가 비공개였다는 것이다. 작가 들과 독자들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우린 그걸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낭독회 였다. 낭독회만 멋지게 치러진다면, 다른 곳에서 문 제가 발생한다 해도 상관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페스티벌 몇 달 전부터는 어떤 방식으로 낭독회를 열 것인지에 기획회의의 초점을 맞췄다. 순식간에 시간이 지났다. 할 일이 없을 것 같던 5월에 할 일이 많았고(사는 게 그렇다), 아차, 하고 나니 페스티벌 개막일이 되었다. 192 Artists and Audience >
작가, 자신들의 비밀스러운 우주를 꺼내다 나는 한 번도 낭독회를 해본 적이 없었다. 다른 작 가의 낭독을 본 적은 있지만 내가 주인공이 되어 본 적은 없었다. 어느 정도의 분량을 읽어야 듣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을지, 어떤 방식으로 읽어야 내 글이 잘 전달될 것인지, 어떤 장소가 내 글과 어울 릴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그걸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페스티벌을 통해 다른 작가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래서 실제 어 떻게 낭독을 하는지 직접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작 가들의 낭독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페스티벌의 의의는 충분했다. 내가 들었던 것 중 가장 재미있는 낭독을 한 작 가는 (나와 같은 조에 속해 있던) 노르웨이 작가 엔드레 룬드 에릭센(Endre Lund Eriksen)이었다. 그 는 <악동 테리에>라는 작품을 읽었는데(한국에도 번역되어 예담출판사에서 출간됐다), 변화무쌍한 목소리와 완벽한 대사전달이 놀라웠다. 그의 낭독 을 5분쯤 듣고 나니 뒷이야기가 궁금했다. 외국에 서는 새 책이 출간되면 작가들이 전국 낭독 투어를 한다는데 그럴 만도 하겠다 싶었다. 낭독 투어를 하면 책도 많이 팔리겠지만, 그것보다 부러운 것 은 그 분위기다. 나와 같은 조였던 노르웨이의 엔 드레, 브라질의 미셸 라웁(Michel Laub), 불가리아 의 알렉 포포프(Alek Popov)는 모두 낭독회 유경험 자들이었는데 다들 낭독회의 분위기를 사랑한다 고 했다. 전국 낭독 투어를 한다고 해서 수많은 팬 들이 몰려드는 것은 아니다. 작은 서점에서, 혹은 학교에서 적은 인원이 모여 작가의 목소리를 듣는 다. 책장 사이로 나지막한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은 우두커니 앉아 작가의 목소리를 듣고, 가 끔 웃고, 종종 감동하기도 하고, 밑줄 긋고 싶은 대 목에서는 마음속의 페이지에다 형광펜을 칠하기 도 한다. 그 분위기가 그저 부러울 뿐이다. 이번 페스티벌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던 작 가는 미국의 시인 어니스 모쥬가니(Anis Mojgani) 였다. 그는 미국의 National Individual Poetry Slam (우리말로 옮기자면 전국 낭독 대회 쯤 되겠다), 프랑스의 World Cup Poetry Slam (낭독 월드컵!), 캐나다의 Individual World Poetry Slam (세계 낭 독 대회)과 같은 각종 대회를 휩쓴, 이른바 낭독 전 문가였다. 페스티벌 전에 그의 동영상 하나를 보았 는데, 시 한 편을 듣고 난 직후 나 역시 그의 팬이 되고 말았다. 페스티벌에서도 그의 낭독은 단연 하 이라이트였다. 그는 목소리와 몸동작과 얼굴 표정 을 모두 사용해 최대한의 시를 만들어냈다. 하나의 단어를 발음할 때는 정말 그 단어를 생각하게끔 말했다. 하나의 문장을 만들어낼 때는 최초로 그 문장을 만든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랩퍼가 그 러는 것처럼 사람들을 조금씩 도발해 자신의 호흡 에 끌어들였다. 나만의 발견도 있었다. 소설가 한유주의 낭독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이전에도 그의 소설 이 한 편의 시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직접 작가의 목소리로 들으니 시가 아니라 음악이었다. 느리게, 빠르게, 어눌하게, 재치 있게 자신의 소설을 자유 자재로 다루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부럽기도 했다. 한유주의 낭독은 작가들이 왜 낭독회를 여는가 에 대한 답변 같았다. 그의 낭독을 들으면서, 이 부분은, 이런 리듬으로 쓴 거죠. 아시겠죠? 이렇게, > 리뷰 193
빠르게, 그러다가 여기에선 조금 축 처지게 되는 거 죠. 그래서 느리게, 느리게, 아주 느리게, 그러다 다 시 빨라지는 거예요. 라는 설명을 작품에 담을 수 떼레사 까르데나스 의 낭독을 보지 못한 것 없으니, 작가가 직접 읽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은 두고두고 안타깝다. 이 멋진 춤을 테이프로만 보다니. 었다. 그리고, 모든 낭독이 재미있었다. 형식적인 인사 가 아니라 정말 그랬다. 한 작가의 낭독을 듣는 것 스테파노스 단돌로스 가 낭독할 때 은 그 작가의 문학과 생각과 세계와 우주를 이해 하는 것이다. 축구 선수가 모든 슛에 자신의 체중 을 싣듯, 작가는 모든 문장에 자신의 우주를 묻어 는 얼굴을 보면 재미있다. 찡긋거리다가 웃다가 하는 얼굴 표 둔다. 하나의 단어를 선택하고, 다음 단어를 생각 하고, 두 개의 단어를 잇고, 하나의 문장을 완성할 때, 작가는 하나의 완벽한 우주를 완성하는 것이 정에서 대사가 들리는 듯하다. 엔드레 룬드 에릭 다. 그런데 심지어 작가가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그 호흡을, 창작의 비밀을 발설하는데, 그런 순간이 재미없을 리가 없지 않은가. 센 의 표정, 목소리, 대사는 단연 최고다. 낭독회의 문제점이 있었다면 동시에 두 곳에서 행사가 진행됐다는 것이었다. 기획위원이기에 앞 서 작가로서 나 역시 모든 낭독회를 보고 싶었지만, 마티아스 괴리츠 는 거구다. 2미 도저히 합리적인 계획표를 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절반의 낭독회밖에 보지 못했다. 대신 지금 내 손에는 모든 작가들의 낭독을 찍어놓은 터쯤 될까? 평소엔 장난기가 가득한데, 시를 읽을 때는 다른 비디오테이프가 들려 있다. 이 리뷰를 쓰기 위해서, 라는 핑계를 대고 빌린 테이프지만 내게는 보물이 나 다름없다. 나는 두고두고 이 테이프를 리플레이 사람으로 변해버린다. 피에트로 그로시는 쾌활 해 볼 것이다. 리뷰를 쓰기 위해 지금도 나는 작가 들의 낭독을 보고 있다. 한 성격에 걸맞게 춤을 추듯 낭독한다. 스티븐 홀 은 맥주를 마시며 낭독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설을 뒤죽박죽 읽는다. 자신의 소설은 194 Artists and Audience >
내용을 몰라도 상관없기 때문이란다. 영국 특유의 악센트를 듣고 있으면, 감미롭다. 한유주 의 소설은 음악이다. 전성태가 낭독한 작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의 작품이다. 은, 뭐, 그저 그렇다. 김경주 의 정이현 의 목소리는 또랑또랑하다. 시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다는 것 자체 탈의실 장면에서 주고받는 대사는, 참, 쓸쓸하구나. 가 행복이다. 김선우 의 목소 강영숙 의 신중한 목소리, 그의 진심 어 리는 사람을 벨 듯하다. 차갑고 날카롭다. 자신 린 말투가 좋다. 김종광 의 입 의 작품을 건조하게 읽어 나가는 김윤영 의 으로 직접 듣는 사투리는, 생생하다. 직접 들으니 더 웃기다. 목소리에서는 조용한 냉소가 느껴진다. 투나 키 김경욱 의 낭독은 언뜻 어눌해 레밋치 는 시도 좋지만 노래를 부르는 그 목 보이기도 하지만 남녀의 목소리를 번갈아 내면서 작품 속의 소리가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권여선 은 무뚝뚝 유머를 모두 전달한다. 김중혁 하다. 하지만 대사를 읽을 때는 또 어찌나 > 리뷰 195
상냥한지. 미셸 라웁 에게는 렇지 않지만. 오수연 의 낭독 뭔가 아스라한 느낌이 있다. 낭독을 할 때도 그렇다. 을 들으면 어쩐지 정확하다는 느낌이 든다 백가 이재웅 은 생각했던 그대로다. 어떤 생 흠 의 저음은 가슴 밑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각이냐면, 그게 참, 말로 표현하기 곤란하다. 이 건드리는 힘이 있다. 앨빈 팽 장욱 의 목소리는 서늘하고 서늘하다. 시집 은 웃기는 친구다. 마지막으로 낭독한 코믹 시가 압권이다. 에서 읽었을 때보다 감동이 두 배다. 울찌턱스 박성원 은 낭독 전부터 이상 루산도르지 의 목소리를 한번 듣고 나면 그 한 영어로 사람들을 웃기고 시작한다. 하지만 막상 낭독에 돌 의 팬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농담 전문가다. 입하니 사뭇 진지하다. 이런 모습 처음이다. 알 어니스 모쥬가니 야 더 말할 필요가 베르트 산체스 피뇰 의 작품은 조금만 들어 없겠다. 혹 시간이 된다면 유투브 같은 곳에서 동영상을 찾아 봐도 매력적이다. 한국에도 번역돼 있으니 (<차가운 피부>, 들 보길 바란다. 나카무라 후미노 녘 펴냄) 꼭 사서 읽어봐야겠다. 로랑스 플라즈 리 는 소년 같다. 자신의 작품을 읽을 때도 그렇다. 작품은 그 네 는 불어로 읽었다. 프랑스 작가니까 당연 196 Artists and Audience >
한 것이다. 불어 발음만 들으면 어쩐지, 어쩐지 마음이 녹아내 마 타크로리 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 린다. 알렉 포포프 의 소설은 는 당신 뒤에 숨결을 불어 넣는다. 그 시구처럼 조용하고 나 워낙 재미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연신 웃는다. 그의 작품 전체 지막하게 시를 읽는다. 그리고 노래도 부른다. 를 읽어보고 싶다. 신용목 은 할레조체 체흘라나 는 늘 긍정적으로 보인 천천히 얘기하면서 은근히 사람을 웃긴다. 그가 시를 읽는 템 다. 예미 의 목소리는 자막을 포도 좋다. 안냐 시킹 의 목소 보지 않고 듣고 있기만 해도 어떤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중 리에는 수줍음이 들어 있다. 심윤경 은 내 예상 국어의 사뿐한 리듬감은, 아름답다. 올가 발렌 보다 훨씬 목소리가 좋은 작가였다. 그리고, 취츠 는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다가 시 누군가에게 책을 어떻게 읽어주어야 하는지를 아주 잘 아는 를 읽길 반복한다. 한편의 오페라를 듣고 있는 듯하다. 작가다. 성기완 은 시집을 칼 노트북을 보면서 띄엄띄엄 천천히 시를 읽어나가는 이 로 찢어 나눠주는 특유의 퍼포먼스를 한다. 그러나 낭독의 압 원 의 낭독은 어쩐지 전위적이다. 권은, 친환경을 선도하는, 짜깁기 노래 다. 바시 > 리뷰 197
언어의 장벽을 넘어, 필심( 筆 心 )으로 대동단결 낭독회가 독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면, 작 가들의 수다 는 말 그대로 작가들만의 시간이었다. 정해진 시나리오도 없었고, 질문지를 미리 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얘기가 겉도는 느낌이 있 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재미있는 얘기들이 많이 나 왔다. 침묵으로 유머를 만들어낸 작가도 있었고(몽 골의 울찌턱스 루산도르지는 모든 대답을 네, 아 니오, 얘기하자면 길다, 이따 술 먹으면서 얘기하 자 로 일관해 끝내 작가들을 웃게 만들었다), 능청 스러운 유머감각으로 사람들의 배꼽을 빼놓은 작 가도 있었고(쿠바의 떼레사 까르데나스가 대화를 많이 하고 싶지만 한국 작가들이 너무 입을 닫고 있다 고 얘기하자, 소설가 김경욱은 오해다. 한국 사람들이 입을 닫고 있는 것은 상대방에게 어떻게 하면 잘 보일 것인가 머릿속에서 고민하고 있기 때 문이다. 그럴 때는 저 작가가 머릿속에 영감이 떠올 랐나보다, 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 고 농담을 던졌 다), 뜬금없고 갑작스런 질문으로 사람들을 웃겼 던 작가(소설가 박성원과 김종광)도 있었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우리들은 모두 글을 쓰는 작가들이라는 암묵의 연대감이 밑바닥 에 깔려 있었다. 그 연대감은 수많은 나라의 작가 를 하나의 끈으로 연결시키고 있었다. 기획위원장이었던 소설가 오수연은 환영의 인사 에다 이렇게 적었다. 문학에 대해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문학도 삶에서 나옵니다. 언어로 쓰이지만 문학은 언어 이상입니다. 언어와 삶 사이, 있을 수밖에 없는 간격을 없애려고 애를 씁니다. 문인과 독자들은 영원한 목표를 추구하는 자들이 며, 동지들입니다. 당신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당 신들의 삶을 느끼고 싶습니다. 서로 만나 달라지는 만큼 문학도 달라질 겁니다. 언어의 짐을 지고 언어 너머로 향하는, 모든 사람들을 환영합니다. 언어 의 너머에서 작가들은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고 있 었다. 언어의 너머에서 작가들이 서로를 이해하려 애 쓰다보니(라기보다는 남자 작가들이 모두 축구를 좋아하다보니) 축구시합도 벌어졌다. 축구시합에 서만큼은 말이 필요 없었다. 페스티벌의 첫날, 이 탈리아 작가 피에트로 그로시가 팀 결성을 제안했 고, 대부분의 남자 작가들이 동의했다. 사실, 제1회 SYWF 때에도 (말이 좋아) 한국 슈퍼스타 작가팀 대 (혹시 몰라) 세계 올스타 작가팀의 축구시합 이 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축구시합을 공식 행사로 넣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축구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의견 때문에 무산됐다. 그런데 이 번에는 작가들이 스스로 축구시합을 제안한 것이 다. 하지만 이번 페스티벌에서도 (말이 좋아) 한국 슈퍼스타 작가팀 대 (혹시 몰라) 세계 올스타 작가 팀의 시합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글로벌 한 연 대가 이뤄졌다. 세계 소설가팀 대 세계 시인팀의 맞 대결이 벌어졌다. 영주 선비촌 근처의 작은 운동장 에서 벌어진 시합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전반전 이 끝나고 난 후 나를 포함한 몇몇 작가는 급격한 체력저하로 인해 피를 토하며 쓰러질 뻔했고, 후반 전이 시작되자 외국의 작가들 역시 달리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명색이 젊은 작가들인데, 이 건 뭐, 젊다고 보긴 힘들었다. 그리스의 스테파노 스 단돌로스(유로2004 우승국가답다), 브라질의 198 Artists and Audience >
미셸 라웁(어설퍼도 브라질인데)이 있었기에 소설 가팀이 신승을 거뒀다. 막상막하였고, 그래서 재미 있는 경기였다. 덕분에 노르웨이의 엔드레는 반바 지 차림으로 부석사로 향해야 했고(그는 부석사로 향하는 버스에서 내 옆자리에 앉았는데, 아무래 도 부석사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며 내내 안 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부상자 명단에 오른 작가들 도 있었지만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경기였다. 몇몇 여자 작가들은 축구장 옆 배구장에서 배구를 했는 데, 그 풍경 역시 아주 아름다웠다. 축제는 계속되어야 한다 페스티벌은 별다른 사고 없이 끝났다. 그러나 여전 히 문제도 많았다. 한국 작가의 작품이 늦게 영역되는 바람에 외국 작가들이 읽을 시간이 없었고(대부분의 작가들이 집에 돌아가서 보겠다 고 했지만, 우리도 안다, 집에 가면 안 본다), 짧은 기간에 많은 낭독회를 하다보니 기획의 집중력이 떨어진 점도 있었다. 여기에다 페스티벌의 문제점 을 모두 적어보라고 한다면, 아주 긴 리포트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1회 때에도 그랬듯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이 많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낭 독회에서 수많은 작가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 을 수 있었고, 신나게 놀았으며, 새로운 사람들을 겪었다. 아무리 이 페스티벌에 문제가 많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이 페스티벌은 이제 겨우 2회째일 뿐이 다. 2010년에 세번째 페스티벌이 열리고, 2012년에 다시 네번째 페스티벌이 열리고, 그렇게 시간이 지 나서 열번째 페스티벌이 열릴 때쯤이면, 분명히 무 엇인가 바뀌어 있을 것이다. 페스티벌도 바뀌어 있 을 것이고, 페스티벌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바 뀌어 있을 것이다. 그 지속의 힘이야말로 페스티벌 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2년 전, 나는 페스티벌이라는 말에 이끌려 행사 에 참여했다. 올해의 SYWF에도 페스티벌이었기 때문에 참여한 것이었다. 심포지엄이나 세미나, 혹 은 발표회 같은 이름이 붙어 있었더라면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근처에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세번 째, 네번째 페스티벌에 참가할 작가들에게 부탁하 고 싶다. (아, 나는 더 이상 Young Writer에 속하지 못할 것 같다.) 부족한 점은 조금씩 채워나가면 되 겠지만, SYWF가 페스티벌 이라는 사실만은 모두 들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세번째, 네번째 페스티벌 의 기획위원들은 좀더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좀더 의미 있게 놀 수 있는 페스티벌을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 신나게 웃고 떠들고 놀았으면 좋겠다. 페스티벌을 위해서라면 일주일의 시간쯤 은 허비해도 괜찮다, 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것 이 허비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다. 글쓴이 김중혁 1971년생. 2000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중편 <펭귄뉴 스>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작품집으로 <펭귄뉴스>, <악기들의 도서관> 이 있다. 단편소설 <엇박자D>로 제2회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리뷰 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