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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萬 國 公 法 과 淸 末 의 海 洋 紛 爭 -1860-70년대를 중심으로- 曺 世 鉉 ( 釜 慶 大 ) Ⅰ. 머리말 Ⅱ. 만국공법의 수용과 전파 1. 대고구( 大 沽 口 )선박사건 2. 알라바바호( 阿 拉 巴 馬 號 )사건 Ⅲ. 만국공법과 초기 동북아 해양 분쟁 1. 유구표류민사건 2. 강화도사건 Ⅳ. 맺음말 Ⅰ. 머리말 19세기 이전 청조는 이른바 중국적 세계 질서를 축으로 비교적 안 정적인 국제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명청대에 시행된 海 禁 政 策 은 화 이질서의 중심축의 하나로 동북아 지역 간 해양 교류를 억제함으로서 해적들의 발호가 없지 않았으나 대체로 해양 분쟁이 발생하는 것을 막 을 수 있었다. 1842년 淸 英 南 京 條 約 체결 이후 청조는 계속해서 구 미 각국과 통상조약을 맺어 조약체제 를 확립하며, 근대적 외교관계를 전개하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조선 월남 등과 전통적 조공체제 를 유 지하면서 이른바 조공-조약체제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1) 1864년 마틴 (W. A. P. Martin, 중문명 丁 韙 良 )이 번역한 萬 國 公 法 이 출판되기 전까지 청조는 외국과 24개의 불평등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런 조약들 *이 논문은 2010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 아 수행된 연구임(NRF-2010-327-A00042). 1) 林 學 忠, 從 萬 國 公 法 到 公 法 外 交 ( 上 海 古 籍 出 版 社, 2009), p.2.

38 中 國 史 硏 究 第 78 輯 (2012. 6) 은 영사재판권, 고정관세, 조계지협정을 비롯해 해관과 항해 업무 등의 내용을 담고 있어 국제법 수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청말 국제법의 수용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는 1864년부터 19세기 말까지로 만국공법 이 대표적인 번역서이며, 2단 계는 20세기 초부터 청조가 멸망할 때까지로 유일 학생이 일본의 국제 법을 번역해 소개한 것이다. 2) 光 緖 원년 이후 청조는 서양 국제법 저 작을 16부 이상 번역했는데, 이전 同 治 시기(1862-1874)에는 만국공법 한 부만이 있었기에 그 의미는 각별하다. 이 책이 1864년에 공식 출 판되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19세기 후반에 국제법을 보통 공법 혹은 만국공법 이라고 부른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조약체결과 국제법 수용을 통해 중국에 근대적인 국가 관념이 들어오면서 국경과 영토에 대한 인식 전환이 일어났는데, 해양에서도 해양 경계와 영역에 대한 새로운 인식 체계가 나타났다. 기존 만국공법 연구는 외교사의 각도나 사상사의 각도에서 주로 이 루어졌고, 혹은 서양 법률 개념의 번역과 수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 2) 佐 藤 慎 一 은 전통중국적 세계관(화이질서)와 근대적 세계관(국제법질서)을 분석 의 축으로 삼아 청말 중국인의 국제법관과 문명관의 상호관계 및 중국인이 어 떻게 국제법 규범을 받아들이는가 문제를 분석하면서, 문명관의 전변이 곧 자 아 해부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양무 변법 혁명이라는 중국근대사의 기 본 발전 과정에 따라 각 시기마다 만국공법에 대한 이해가 심화된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川 島 眞 은 중국 국제법의 수용 과정을 3단계로 설명한다. 제1단계 는 文 本 의 접수 로 서양의 international law를 만국공법 으로 번역해 총리아 문에서 반포하고 출사 대신이나 지방 관원의 막료가 읽는 과정이다. 제2단계는 程 序 의 수용 으로, 청조가 어떻게 실제적인 교섭과정 중에 국제법의 문본 내 용을 응용하여 맞추고 모색하는 과정이다. 제3단계는 가치 해석의 수용 으로 국제법의 배후에 있는 방법과 가치 취향을 생각하는 과정이다. 이 시기는 20세 기 최초 20년간으로 전체적으로 서양식 근대 와 문명국화 가 목표였다고 본다. 한편 林 學 忠 은 국제법 지식 자원의 차원에서 본다면 20세기 초 유일 법정 학 생이 대량으로 일본국제법 저작을 번역하기 전에 청말 지식인들이 접촉할 수 있었던 것은 여전히 마틴과 프라이어의 번역서라고 보았다. 그는 중국에서 국 제법 지식이 본격적으로 전파된 것은 청일전쟁 후 급증한 유일 학생에 의해서 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林 學 忠, 위의 책, pp.22-25, pp.36-37; 川 島 眞, 中 國 にお ける 萬 國 公 法 の 受 容 と 適 用 ( 東 アジア 近 代 史 2, 東 アジア 近 代 史 學 會, 1999), pp.10-11].

萬 國 公 法 과 淸 末 의 海 洋 紛 爭 ; 1860-70년대를 중심으로 ( 曺 世 鉉 ) 39 었다. 3) 이 글은 시각을 달리하여 청말 중국과 외국과의 해양 분쟁에서 만국공법이 어떻게 적용되었는가를 분석할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 하자면 만국공법의 수용 과정이나 초기 동북아 국제분쟁에서 해양이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밝히려는 것이다. 책봉조공체제 아래서의 해양과 국제법 체제 아래서의 해양이 어떻게 다른지 명확하게 구분하 기 위해 일단 만국공법의 수용과 전파에 관련된 해양 분쟁 사례로 제 한해, 주로 1860 70년대 특히 同 治 시기를 중심으로 다룰 것이다. 여 기서는 청조가 근대적 조약체제에 편입됨에 따라 해양 관련 국제법이 제국주의에 의해 어떻게 이용되는가를 살펴보고, 이에 대한 청조 측의 대응 논리에도 주목할 것이다. Ⅱ. 만국공법의 수용과 전파 1. 대고구( 大 沽 口 ) 선박 사건 만국공법 의 번역과 출판은 우연한 기회에 총리아문의 지지를 얻 으면서 손쉽게 이루어졌다. 그 우연한 기회란 중국 연해를 배경으로 발생한 프로이센-덴마크 간 해양 분쟁이어서 의미심장하다. 4) 따라서 이 사건의 진행 과정과 만국공법 의 해양 관련 법규와의 관련성을 살 펴볼 필요가 있다. 대략의 줄거리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864년 초 프로이센의 수상 비스마르크(O. von Bismarck)는 슐레스 비히-홀슈타인공국 문제로 오스트리아와 연합해 덴마크와 전쟁 중이 3) 만국공법에 대한 연구사 정리는 적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조세현, 萬 國 公 法 에 나타난 해양관련 국제법 ( 역사와 경계, 2011년 제80호, pp.113-114)을 참고. 4) 王 維 檢, 普 丹 大 沽 口 船 舶 事 件 和 西 方 國 際 法 傳 入 中 國 ( 學 術 硏 究, 1985년 제5 기)과 况 落 華, 大 沽 口 船 舶 事 件 : 晩 淸 外 交 運 用 國 際 法 的 成 功 個 案 ( 安 慶 師 範 學 院 學 報, 2006년 제1기) 등이 대고구 선박사건을 다룬 논문이다.

다. 5) 총리아문이 이 사건을 처리할 때 활용한 원칙 가운데 하나는 만국 40 中 國 史 硏 究 第 78 輯 (2012. 6) 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그 해 봄 중국으로 발령받은 신임 프로이센공 사 레프스(G. von Rehfues)는 가젤(Gazelle) 군함을 타고 천진을 경유 해서 북경으로 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대고구에서 천진으로 가던 중 바다에 정박 중이던 덴마크 선박 3척을 발견하고는 이들을 나포하였 다. 이 일로 말미암아 청조는 프로이센과 외교적인 마찰을 빚게 되었 공법상의 법규였는데, 당시 만국공법 은 갓 번역된 상태여서 총리아 문의 고위 관리들은 번역 원고를 읽은 상태였다. 문제의 핵심은 프로 이센이 중립국인 청의 영해에 있는 덴마크 선박을 나포할 권리가 있는 가 여부였다. 이와 관련해 만국공법 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 일반적인 관례로 적의 화물이 자신들의 영토 내에 있거나 局 外 의 땅 에 있으면 모두 戰 權 의 밖에 있는 것이니 나포할 수 없다. 국외의 땅 에 있으면 나포할 수 없는 까닭은 적국의 영역 안에 있기 않기 때문으 로 실로 우방국의 권리를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6) 여기서 局 外 란 중립국이란 의미로, 중립국의 주권을 존중하여 전쟁권을 행사하지 않 는 것은 전쟁법의 중요한 원칙이었다. 7) 그런데 프로이센과 덴마크의 전쟁에서 청은 중립국의 위치에 있었다. 만국공법 제4장 제6절 연해 근처를 관리하는 권리 항목에는 영 해에 관한 규정이 있다. 8) 당시 영해 3해리설은 구미 열강 간에 국제법 5) 청조는 1861년과 1863년에 프로이센과 덴마크와 각각 통상조약과 해관세칙을 맺었다[ 王 鐵 崖 編, 中 外 舊 約 彙 編 ( 第 一 冊 ) ( 三 聯 書 店, 1957년)(이하 中 外 舊 約 彙 編 ( 第 一 冊 )으로 약칭], pp.163-175, pp.197-207]. 6) ( 美 ) 惠 頓, 萬 國 公 法 ( 上 海 書 店, 2002)(이하 萬 國 公 法 으로 약칭), 제4장 제1 절. 7) 만국공법 에서는 局 外 者 가 관할하는 곳에서는 戰 船 이 적국의 선박과 화물을 나포하는 것은 범법일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은 반드시 없어야 한다 ( 만국공법 제4권 제3장)라고 하고 또 만약 사람이 局 外 의 땅을 빌려 군사력을 준비하 거나 다른 국가의 화물선을 나포하는 것은 局 外 의 分 을 침범하는 것이며 局 外 의 法 을 위반하는 것이다 ( 만국공법 제2권 제2장)라고 하였다. 8) ( 領 海 에 대해서) 각국이 관할하는 海 面 과 海 口 澳 灣 長 磯 所 抱 의 바다와, 그밖

萬 國 公 法 과 淸 末 의 海 洋 紛 爭 ; 1860-70년대를 중심으로 ( 曺 世 鉉 ) 41 상 합의가 있었는데, 영해주권 원칙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3 해리는 포탄이 미치는 거리로 산업혁명 전의 포탄의 거리였다. 총리아 문 측은 중국이 각 바다를 나누는 데 專 條 가 있고, 각국과의 和 約 에 도 고루 이런 예가 있다. 귀국의 화약 중에도 中 國 洋 面 글자가 실려 있을 것이니 각국의 아는 바와 비교하면 더욱 분명할 것이니 어찌 알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9) 라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프로이센 공사 가 덴마크 선박을 나포한 일은 청조와 체결한 조약준수 규정을 위반한 것이었다. 총리아문은 프로이센 공사가 나포한 덴마크 상선이 있던 수 역은 중국의 內 洋 ( 領 水 )이며, 국제법의 원칙에 따르면 청조의 관할에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프로이센 측을 압박하였다. 이에 대해 프로이센 측은, 이 선박을 구류한 것은 유럽에서 정한 군법에 따른 것으로, 그 구류한 장소는 해안으로부터의 원근 역시 萬 國 律 例 의 적선을 포획하는 거리에 따랐다. 10) 고 반박하였다. 프로이센 공사 레프스는 자신의 행동이 국제법에 어긋나지 않으며, 선박을 구류 한 곳은 공해이지 중국 영해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대고구 주변 선박을 규류한 장소는 의심할 바 없는 청조 관할의 內 洋 으로 만 국공법 에서 규정한 閉 海 에 해당하였다. 11) 총리아문의 恭 親 王 奕 訢 등은 프로이센 공사를 비판하며, 귀 대신 이 병선을 타고 와서 현재 중국의 洋 面 에 있으면서, 덴마크의 상선을 구류한 것은 매우 심각한 사건이다. 외국인이 중국의 양면에서 다른 에 연해 각처와 해안으로부터 10리 거리 떨어진 곳은 관례에 따라 역시 그 관 할이다. 대체로 대포의 포탄이 미치는 곳은 국권도 미치는 곳으로, 무릇 전부 가 그 관할에 속하며 타국에게 주지 않는다 ( 萬 國 公 法 제4장 제6절 管 沿 海 近 處 之 權 ). 한편 公 海 에 대해서도 洋 海 가 해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 각국은 專 管 을 할 수 없다 공법에서 이것을 논의하는 것에 이견이 없다. 진 실로 大 海 (지금의 公 海 )는 본래 만국 공용으로 날씨나 태양과 같이 사람이 사 사로이 가질 수 없는 것이니, 단지 만국의 통행과 왕래를 걱정할 뿐이다 ( 萬 國 公 法 제4장 제10절 大 海 不 歸 專 管 之 例 )라고 언급하였다. 9) 籌 辦 夷 務 始 末 ( 同 治 朝 ), 권26, p.2626. 10) 籌 辦 夷 務 始 末 ( 同 治 朝 ), 권26, p.2625. 11) 况 落 華, 앞의 논문, pp.22-23.

42 中 國 史 硏 究 第 78 輯 (2012. 6) 나라의 선박을 구류한 것은 분명하게 중국의 권리를 침탈하는 것으로 큰 문제가 있다. 귀 대신은 귀국에서 파견한 것이니 장차 귀국과 중국 간에도 큰 관계가 있는 일이다. 먼저 문제를 매듭짓고 장차 기일을 정 해 접대할 것이다. 12) 라고 응수하였다. 이처럼 청조는 프로이센 공사 가 덴마크 상선을 석방하지 않으면 외교사절로 접대하지 않을 것이라 고 위협하였다. 실제로 총리아문은 영해 개념과 청프조약의 관련 조항 을 가지고 프로이센이 유럽의 분쟁을 중국에 가져온 것을 항의하면서 신임 프로이센 공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프로이센 공사의 행위가 분명하게 국제법의 관련 규정을 위반한 것 이 드러나자, 결국 청조의 주지 아래 구류중인 세척의 덴마크 선박 가 운데 두 척은 교섭 초기에 석방되었고, 세 번째 선박은 프로이센으로 부터 1,500파운드의 배상을 받고 풀려났다. 레프스는 그 해 6월 중국을 떠나 독일로 돌아갔으며 1865년 말 다시 돌아왔는데, 이 때 비로소 총 리아문은 정식 공사로 인정하였다. 13) 1864년 8월 30일 총리아문의 奕 訢 은 만국공법 번역 업무를 황제 에게 보고하면서 말하기를, 신들이 이 외국 율례의 책을 조사하여 보 니 중국 제도와 모두 합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중에는 역시 채택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금년 프로이센이 천진 해구에서 덴마크 선박을 억류한 사건이 있어서 신들은 이 율례 중의 말을 몰래 채용하 여 변론했더니 프로이센 공사는 곧 착오를 인정하고 말이 없었는데 이 것이 하나의 증거입니다. 14) 라고 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총리아 문은 이 사건을 처리할 때 만국공법 을 공공연하게 이용한 것이 아니 라 암묵적으로 활용했으며, 주로 양국 간 조약 내용에 근거해 논리를 전개하였다. 15) 12) 籌 辦 夷 務 始 末 ( 同 治 朝 ), 권26, pp.2623-2624. 13) 프로이센-덴마크 전쟁의 결과는 덴마크의 패배로 끝나 관련 공국의 통치권을 포기하였다. 근대 유럽사에서 이 전쟁은 비스마르크가 무력으로 독일을 통일하 는 첫 걸음이었다( 王 維 檢, 앞의 논문, p.87). 14) 籌 辦 夷 務 始 末 ( 同 治 朝 ), 권26 (김용구, 만국공법 (소화, 2008년), pp.69-70); 田 濤, 丁 韙 良 與 萬 國 公 法 ( 社 會 科 學 硏 究, 1999-5), p.111 참고).

萬 國 公 法 과 淸 末 의 海 洋 紛 爭 ; 1860-70년대를 중심으로 ( 曺 世 鉉 ) 43 프로이센 측은 덴마크와의 분쟁 중에 국제법을 준수하겠다는 의지 는 보여주었지만 그들이 항상 국제법에 따라 청과 교류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청조 관리들에게 국제법의 의의를 인식 시키는 계기를 마련했고, 직접적으로는 양무파 관료들로 하여금 만국 공법 의 출판을 촉진시켰다. 의외의 성과에 고무된 청조는 총리아문의 비준을 얻어 번역이 갓 끝난 만국공법 을 300부 인쇄해 각성의 독무 에게 널리 활용하도록 하였다. 이 사건은 만국공법이 청조의 주목을 받게 된 사건이자, 해양 분쟁의 해결에 처음 활용된 사례였다. 이 분쟁이 비교적 쉽게 해결된 원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 도 있다. 16) 첫째, 프로이센의 입장에서 보면, 국내적으로 통일과 전쟁 에 바쁘고 중국과의 교류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과 같은 열강 과는 달리 아직 시작 단계라 영향력이 많지 않았고 청조와 마찰을 일 으키고 싶지 않았다. 둘째, 열강의 입장에서 보면, 이 사건은 자신들의 이익에 직접적인 관계가 그리 많지 않았고 프로이센 공사는 열강의 지 지를 별로 받지 못하였다. 오히려 열강은 프로이센의 영향력이 중국에 서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덴마크와 가 까웠다. 셋째, 청조의 입장에서 보면, 奕 訢 이 총리아문의 권력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외교 등 여러 분야에서 의욕이 왕성해서 이 사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청조의 주권을 수호했다는 것이다. 대고구 선박사건은 1868년 체결된 淸 美 續 增 條 約 ( 蒲 安 臣 條 約 )에 도 영향을 미쳤다. 청조는 이직하는 미국공사 블링게임(Anson Burlingame, 중문명 蒲 安 臣 )을 흠차대신으로 삼아 서양처럼 외교사절단을 파 견하였다. 블링게임은 마틴이 만국공법 을 번역하는 데 도움을 준 인 물로, 청조에 국제법을 적극 추천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고구 선박사건 15) 林 學 忠 은 청조가 만국공법 을 간행한 이유는 以 夷 制 夷 의 논리에 있다고 보 았다. 열강의 무리한 요구를 막기 위해서는 외교 교섭에서 유럽 국가의 국제법 을 활용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아래 기술적 도구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川 島 眞, 앞의 논문, p.10). 16) 况 落 華, 앞의 논문. p.23; 王 維 檢, 앞의 논문, p.90 재인용 참고.

44 中 國 史 硏 究 第 78 輯 (2012. 6) 당시 중국인들이 만국공법에 관심을 가지길 기대하였다. 블링게임 사 절단의 주요 성과는 蒲 安 臣 條 約 (1869년)으로 나타났는데, 청조가 아 편전쟁 이래 처음으로 평등한 주권국가 위치에서 미국과 조약을 맺은 것이었다. 17) 여기에는 국제법상의 領 海 主 權 과 局 外 中 立 의 원칙이 반영 되었고, 영사, 이민, 학교, 종교분야 등에서 쌍방 대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였다.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청조가 능동적으로 서양과 담판 을 해서 얻어낸 것은 아니었으며, 최종 비준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청조의 대외 교섭에 중요한 국제법적 근거를 제공하여 1870년 대 이후에도 영향을 미쳤다. 18) 그밖에도 同 治 시기에 만국공법과 관련이 깊은 외교적 사건으로는 외국공사의 황제 알현 문제나 청조의 해외공사관 설치 문제 등이 있었 다. 이런 것들은 전통 질서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들 이었다. 2. 알라바바호( 阿 拉 巴 馬 號 )사건 청조가 처음 만국공법을 받아들일 때, 미국과 영국 간에 벌어진 해 양 분쟁인 알라바마호 사건(The Alabama Case)의 소개가 중요한 계 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19) 비록 알라바마호 사건은 앞의 사건 17) 蒲 安 臣 條 約 제1조는 대청국 대황제는 조약에 따라 각국 상민에게 通 商 口 岸 과 水 陸 洋 面 에서 무역을 행하는 곳을 지정한다. 원래 조약 내의 이 조항의 뜻에 따르고, 아울러 없었던 관할지방 水 面 의 權 도 함께 논의해 통합한다. 앞 으로 어떤 나라가 미국과 혹시 평화를 잃고 전쟁에 이르면, 해당국의 관병은 중국 영토와 洋 面 이나 외국인이 거주하거나 이동할 수 있는 곳에서 미국인과 싸워 화물과 인명을 빼앗을 수 없다. 미국이 혹시 다른 나라와 평화를 잃으면 역시 중국의 영토와 양면이나 외국인이 거주하거나 이동할 수 있는 곳에서 쟁 탈의 일을 할 수 없다 ( 中 外 舊 約 彙 編 ( 第 一 冊 ), pp.259-260). 18) 1874년 페루와의 淸 秘 通 商 條 約 조약에서 상호 균등한 최혜국 대우와 영사재 판권을 얻어내었을 뿐만 아니라, 공사와 영사 파견, 양국 국민의 상대국 여행 과 거주, 양국 병선의 상대국 왕래와 병선의 항구입항, 양국 병선이 상대국 연 해에서 재난을 만났을 때 상호 구제해 주는 등 기본적으로 평등한 내용을 담 았다[ 田 濤, 國 際 法 輸 入 與 晩 淸 中 國 ( 濟 南 出 版 社, 2001), pp.266-267].

萬 國 公 法 과 淸 末 의 海 洋 紛 爭 ; 1860-70년대를 중심으로 ( 曺 世 鉉 ) 45 과는 달리 청과 직접적인 관련은 적었지만 19세기 국제법 역사상 매우 유명한 판례라 만국공법의 전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대략의 줄거 리는 아래와 같다. 1861년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북군은 전함으로 남부의 여 러 항구를 봉쇄하고 남군이 영국이나 프랑스로부터 군사 물자를 구입 하는 것을 4년간 막아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 다. 당시 영국은 미국 남부의 여러 주를 교전 단체로 승인하면서 중립 을 선언하였다. 전쟁 중 남부동맹은 개인 명의로 영국으로부터 선박을 구매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1862년 5월 영국의 한 조선소에서 건조된 알라바마호가 있었다. 이 배는 처음에는 이름이 없었고 단지 290호라 고만 불리며 비무장으로 출항한 후 아소로스 군도 부근에서 런던에서 온 두 척의 영국 선박으로부터 함장, 사관, 무기, 제복, 식량 및 유류 등을 공급받아 인적이나 물적으로 완벽하게 무장하였다. 그 후 북군의 선박을 대량으로 나포하면서 미국의 통상을 위협한 가장 유명한 순양 함 가운데 한 척이 되었다. 대서양과 인도양은 물론 심지어 중국 해안 까지 돌아다녔는데, 2년에 미치지 못한 기간 동안에 북군 소속 약 70 척의 선박을 침몰 소각 약탈하였다. 이처럼 남북전쟁에서 해군력이 열 세였던 남군이 개인 선박으로 북군 측의 상선을 포획하는 경우가 잦았 다. 결국 북군 군함의 추격을 받다 영불해협에서 1864년 6월 18일 침 몰 당해 승무원들은 사장되었다. 20) 19) 田 濤, 阿 拉 巴 馬 號 案 與 晩 淸 國 人 的 國 際 法 印 象 ( 天 津 師 範 大 學 學 報, 2002년 제3기)이 알라바마호사건을 다룬 대표논문이다. 20) 영국인 선교사 프라이어(J. Fryer)와 중국인 학자 華 衡 芳 이 공역한 防 海 新 論 (1874년)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서양의 해방사상 이론을 전면적으로 소개한 번역서이다. 본래 이 책은 독일인 해군장교 슈리허(V. von Scheliha)가 미국의 남북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기초로 1868년에 쓴 책이다. 본문에서는 남북전쟁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면서 해방은 반드시 병력을 집중하고 방어설비를 갖출 것, 해방의 가장 적극적인 방안은 전함을 이용해 적국의 해구를 봉쇄하는 것이라 는 주장을 폈다. 중국인들이 남북전쟁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 로 보인다[ 鄒 振 環, 西 方 傳 敎 士 與 晩 淸 西 史 東 漸 ( 上 海 古 籍 出 版 社, 2007), pp.172-188).

46 中 國 史 硏 究 第 78 輯 (2012. 6) 남북전쟁 동안 미국 정부는 영국에 남부동맹을 위해 군함을 건조하 는 행위를 항의했고, 알라바마호가 몇 차례 영국 항구에 진입해도 나 포하지 않자 영국 정부에 손실 배상을 청구하였다. 21) 국제법상 전쟁 당사국이 외국의 도움(예를 들어, 무기를 구입하거나 병사를 모집하는 일 등)을 빌어 다른 우방국을 공격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 다. 22) 특히 런던 주재 미국 공사 애덤스를 통해 영국 정부에 항의한 일은 유명하다. 그는 영국의 중립 의무 위반을 주장하면서 영국에서 건조되어 사용된 선박에 의한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여기에는 알라바마호 말고도 영국에서 건조된 남부동맹 소속 몇 척의 순양함이 포함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1871년 5월 8일 미국과 영국은 워싱톤조약 을 맺 으면서 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중재 법정을 제네바에 설립하기로 합 의하였다. 이 때 海 戰 에 관한 권리와 의무에 관한 3가지 규칙(워싱톤 3원칙)을 만들어 재판 처리를 위한 법률 근거로 삼았다. 요점은 전시 중립국은 자국 영해 내에서 전쟁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는 선박들이 무장을 갖추어 출항하는 것을 금지해야 하며, 자국 항구나 수역이 다 른 교전 당사국에 대한 작전기지로 사용하거나 군사 장비나 무기의 교 체 및 증강에 사용하도록 허용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23) 이 원칙은 중립국의 방지 의무에 관한 기준을 최초로 명백히 한 것이다. 영국 미 21) 이민효, 해상무력분쟁법 (한국학술정보(주), 2010), p.14; 陳 致 中, 國 際 法 案 例 ( 法 律 出 版 社, 1988), pp.479-483( 田 濤, 위의 논문, p.60 재인용). 22) 公 法 便 覽 권4 제1장 제6절은 중립국 위반의 사례 중 알라바마호 사건과 같 은 경우를 설명한다[한국학문헌연구소편, 公 法 便 覽 (한국근대법제사료총서2)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1981), pp.597-601]. 23) 워싱턴조약 에서 해전에 관한 권리와 의무에 대한 세 가지 규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중립국은 반드시 그 국경 내에서 선박을 제조해 출항시켜 우호국 과 교전하는 것을 엄금하며, 만약 그 국경 내에서 만든 선박은 반드시 사사로 이 경계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둘째, 교전국이 본국의 항구나 海 中 을 교전의 땅으로 빌리거나 국경 내에서 용병을 고용하거나 군수품과 식 량을 구입하는 것은 모두 허락하지 않는다. 셋째, 본국의 국경 내에 있는 사람 들은 이상의 두 가지 항목을 침범하지 않는다 [ 各 國 交 涉 公 法 論 二 集 序 ( 田 濤, 위의 논문, pp.32-33 재인용)].

萬 國 公 法 과 淸 末 의 海 洋 紛 爭 ; 1860-70년대를 중심으로 ( 曺 世 鉉 ) 47 국 스위스 이탈리아 브라질 등 5개국 대표로 구성된 중재법정은 1872 년 9월 14일 최종적으로 영국 측이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정했으 며, 이에 따라 배상금 총액 1,550만 달러를 미국 측에 지급하도록 판결 했다. 이 판례는 19세기 국제법 학계에 광범위한 주목을 받으며 큰 영 향을 미쳤는데, 국제법상 처음으로 간접 손해가 문제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24) 1864년 봄 청조가 알라바마호의 존재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 해 3월 8일 미국공사 블링게임이 총리아문에 미 국 남부 반역자의 군대가 북군의 상선을 약탈한다는 한 건의 조회를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재 미국이 추적하는 몇 척의 남 부 반역자의 화륜선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척인 알라바마호가 도주 하여 장차 중국 연해에 나타날 것이라고 하였다. 현재 남양에서 미국 의 화물 선박이 몇 척 불탔다고 하는데, 본 공사는 우선 예방차원에서 중국 각 항구의 지방관에게 알려 알라바마호를 조사하게 하고 어떤 경 우라도 항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조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아울러 남부 반역자는 자칭 동맹국이라고 하나 국가를 세운 적이 없으며 다른 국가들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25) 이에 대해 3월 16일 총리아문은 블링게임에게 공문을 보내 연해독 무와 지방관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 알라바마호가 중국 항구에 진입하 지 못하도록 했으며, 러시아 영국 프랑스 3국의 공사에게도 내용을 알 렸다고 하였다. 이것은 청조가 국제법의 규범에 따라 움직였음을 보여 준다. 그 후 블링게임은 미국 남부 반군의 선박이 중국의 항구 사용을 못하도록 한 것에 대해 청조에 감사의 뜻을 전하였다. 미국 국무부 역 시 만족을 표시하며 알라바마호에 대한 외교교섭을 매듭지었다. 26) 이 24) 陳 致 中, 國 際 法 案 例 ( 法 律 出 版 社, 1988), pp.479-483. 25) 中 央 硏 究 院 近 代 史 硏 究 所 編, 中 美 關 係 史 料 同 治 朝 上 ( 臺 北, 1968), p.147( 田 濤, 위의 논문, p.31 재인용). 26) ( 美 ) 芮 瑪 麗, 同 治 中 興 - 中 國 保 守 主 義 的 最 後 抵 抗 ( 中 國 社 會 科 學 出 版 社, 2002), p.295.

48 中 國 史 硏 究 第 78 輯 (2012. 6) 교섭이 있을 당시 알라바마호가 중국 연해에서 약탈한 기록은 없으며, 앞서 언급했듯이 알라바마호는 프랑스 부근 바다에서 미국 정부의 군 함에 의해 침몰되었다. 27) 블링게임은 알라바마호 사건으로 청조와 교 섭하는 과정에서도 중국이 구미 열강의 국제법 질서를 이해하기를 희 망하였다. 남부동맹의 반군이 각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그들의 행 동이 만국의 例 에도 위반된다는 외교상 표현에서도 엿보인다. 여기 서 만국의 例 란 곧 만국공법으로 청조가 국제법을 이해하는 한 계기 가 되었다. 이 교섭이 있은 지 오래지 않아 앞서 소개한 대고구 선박 사건이 발생하였다. 알라바마호 사건은 비록 만국공법 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1870년 대 이후 대표적인 국제법 번역서에 이 사건에 대한 소개와 평론이 실 리면서 청말 지식계와 외교계에 영향을 미쳤다. 알라바마호 사건을 가 장 먼저 언급한 국제법 역저는 1878년 同 文 館 에서 출판한 公 法 便 覽 이다. 이 책의 원저는 미국학자 울시(T. D. Woolsey)가 쓴 국제법 연 구서설 로, 미국 뉴욕 태생인 저자는 철저한 기독교 국제법의 제창자 였다. 당시 동문관 총교습이던 마틴이 그의 학생들과 함께 번역하였다. 울지는 책 중에 알라바마호 사건에 대한 유래와 경과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면서 이 사건을 국제 교섭의 유명한 판례라고 소개하였다. 28) 2년 후인 1880년에 출판한 公 法 會 通 역시 마틴과 학생들이 독일 법학자 블룬츨리(J. C. Bluntschli)의 저서 문명국가들의 근대 국제법 을 번역한 것이다. 블룬츨리는 당시 동아시아에 알려진 누구보다도 학 문적 수준이 높은 서양 법학자였다. 그런데 이 원서는 본래 1868년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알라바마호 사건에 대한 내용이 없었다. 하지만 마 틴 등이 프랑스어 판본을 가지고 중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 이 추가 삽입되었다. 글 중에서 몇 차례에 걸쳐 알라바마호 사건에 대 해 언급하면서 국제법의 공정성을 선전하였다. 29) 청말 중국 사회에 국 27) 田 濤, 앞의 논문, p.31. 28) 公 法 便 覽 보론 제17절, 앞의 책, pp.937-940. 29) 公 法 會 通 제489장에는 두 국가 간의 분쟁에 다른 국가를 초청해 그 판단에

萬 國 公 法 과 淸 末 의 海 洋 紛 爭 ; 1860-70년대를 중심으로 ( 曺 世 鉉 ) 49 제법을 소개한 대표 인물 마틴은 알라바마호 사건을 매개로 국제법의 유용성을 널리 전파하였다. 그는 총리아문의 위탁을 받아 1880-82년 간 서양 각국의 교육을 고찰한 후 귀국해 쓴 西 學 考 略 (1883년)이란 책에서도 이 재판의 경과에 대해 소개하였다. 30) 그 후 1894년 상해의 강남제조국에서 출판한 各 國 交 涉 公 法 論 은 당시로서는 가장 내용이 풍부한 국제법 번역서였다. 책의 원저자는 영 국인 필리모어(R. J. Philimore)로 프라이어(John Fryer, 중문명 傅 蘭 雅 )와 兪 世 爵 이 함께 번역하였다. 이 책에서도 알라바마호 사건에 대 한 내용을 언급했는데, 저자가 영국인이기 때문인지 영국이 심히 불 복했으나 미국에 우호적인 뜻을 분명히 보여주고 장래에 이런 일들을 피하기 위해 각 항목에 따라 일을 처리하였다. 라고 조금 다르게 평가 하였다. 31) 책 중에는 워싱턴조약 에서 합의한 해전에 관한 권리와 의 무에 대한 세 가지 규칙을 소개하기도 했다. 마틴이나 프라이어 등은 알라바마호 사건을 국제중재방식으로 해결 한 것은 청조가 국제법을 준수하도록 만드는데 매우 좋은 사례라고 여 겼다. 이 사건이 유난히 널리 선전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인지 청말 알라바마호 사건은 중국인들에게 비록 잠시나마 국제정치의 공리 와 정의, 국제법의 존재 의의를 설명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32) 하지만 맡기는 조항을 설명하면서 알라바마호 사건의 사례를 든다[한국학문헌연구소 편, 公 法 會 通 (한국근대법제사료총서3,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1981), p.317]. 30) 국제법 소개로 유명한 마틴은 西 學 考 略 과 格 物 入 門 이란 책을 통해 19세 기말 서양의 근대지식을 전면적으로 소개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특히 서학 이라는 용어가 서양 근대지식을 뜻하는 용어로 중국 사회에 보편화하는 계기 를 마련하였다[한림과학원 편, 동아시아 개념연구 기초문헌해제 (선인, 2010 년), pp.172-174]. 31) 各 國 交 涉 公 法 論 은 프라이어가 구술 번역하고 兪 世 爵 이 받아 적은 것이다. 원래 영국인 필리모어가 저자이며 원서명은 Commentaries Upon Inter -national Law이다. 번역본은 1집4권, 2집4권, 3집8권, 별책1권으로 1집에는 공 법교섭의 기원, 국가주권, 관할권을 다루고, 2집에서는 평시국제교류 즉 조약, 공사, 영사 등의 문제를 다루며, 3집에서는 전시 국제법을 다루었다[ 田 濤, 丁 韙 良 與 萬 國 公 法 ( 社 會 科 學 硏 究, 1999년 제5기), p.101]. 32) 1872년 10월 天 津 敎 案 을 사과하기 위해 崇 厚 와 동행해 프랑스로 건너간 張 德

50 中 國 史 硏 究 第 78 輯 (2012. 6) 강권이 공리였던 시대에 그 의미는 결국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덧붙이자면, 일본에서 만국공법은 경전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유 포되었으며, 개국 이데올로기로서 明 治 정부의 개국 정책에 명분을 부 여하였다. 그런데 일본 역시 만국공법의 수용과 전파과정에서 시대의 영웅 坂 本 龍 馬 가 관련된 해양 분쟁인 伊 呂 波 丸 事 件 ( いろは 丸 事 件 )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867년 坂 本 龍 馬 는 大 洲 藩 으로부터 160톤급 증기선 伊 呂 波 丸 호를 15일간 500량에 빌려 무기와 탄약을 가득 싣고 나가사키에서 오사카로 향하였다. 항해 도중 4월 23일 11시를 전후해 伊 呂 波 丸 은 해상에서 紀 州 藩 의 887톤급 증기선 明 光 丸 호와 충돌하여 배는 침몰하고 坂 本 龍 馬 를 비롯한 사람들은 겨우 明 光 丸 에 올라탔다. 해상 충돌에 관한 예방 규칙이 없는 상태에서 빌린 배가 침몰한 것이다. 쌍방은 伊 呂 波 丸 호의 손실 배상을 놓고 담판을 벌였으나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실질적인 성과가 없었던 까닭은 紀 州 藩 이 德 川 幕 府 와 매우 가까운 친분이 있었 기 때문이었다. 坂 本 龍 馬 는 사건의 교섭 과정에서 철저한 담판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는 明 光 丸 호의 항해일지를 압수해 세부적인 사실들을 확인하였다. 그 과정에서 항해시 갑판에 파수꾼을 배치해야하는 것이 국제법규임에도 불구하고 선박이 해상에서 서로 충돌할 때 明 光 丸 호에 는 어떤 사관도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坂 本 龍 馬 는 이것은 만국 공법의 위반이라고 주장해 紀 州 藩 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쌍방은 이 문 제를 놓고 여러 차례 논쟁을 거친 끝에 1867년 5월 29일 明 光 丸 호 측 이 배상금 8만 3천 냥을 지불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 다. 이 때 坂 本 龍 馬 가 주장한 세상의 公 論 이란 바로 만국공법 의 해 彝 의 일기에 파리를 지날 때 한 미국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알라바마호 사건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리고 1878년 첫 번째 주외 공사인 郭 嵩 燾 의 출사일기에도 알라바마호 사건에 대한 언급이 있다. 또한 1880년 초 영국 프랑스 공사에 부 임한 曾 紀 澤 이 이리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페테르부르그에 가는 도중 파리에서 총리아문에 건의하는 글 중에 알라바마호 사건이 나온다. 단 曾 紀 澤 이 처음 읽 은 국제법 책은 공법편람 이지 만국공법 은 아니었다.

萬 國 公 法 과 淸 末 의 海 洋 紛 爭 ; 1860-70년대를 중심으로 ( 曺 世 鉉 ) 51 상항해에 관한 규정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33) 위와 같이 만국공법의 수용과 전파에 대고구 선박사건이나 알라바 마호 사건과 같은 해양 분쟁이 직접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伊 呂 波 丸 사건을 통해서도 동아시아의 만국공법 수용 과정에서 해양 문제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Ⅲ. 만국공법과 초기 동북아 해양 분쟁 1. 유구표류민사건 만국공법은 중국 내 분쟁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중국적 세계 질서가 해체되어 근대적 국제 질서 바뀌는 데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이 것 역시 해양 분쟁과 관련이 깊다. 아래에서는 이와 관련한 초기 대표 적인 동북아 분쟁 가운데 두 가지 사례를 해양의 각도에서 살펴보자. 처음으로 책봉조공 질서가 파산을 맞이한 것은 청과 유구와의 종속 관계이다. 그 계기는 대만에서 발생한 이른바 유구표류민사건 (유구선 원 피살사건, 혹은 대만사건)이다. 1871년 12월 19일 유구 공선의 선원 들은 태풍으로 인해 대만 동남지역 해안가 암초에 부딪혀 표류하였다. 그 때 육지로 올라온 66인 중 54인이 현지 원주민 부족인 高 山 佛 과 牧 丹 社 에게 피살되었다. 나머지 12인은 대만 거주민 劉 天 保 梁 友 旺 등의 도움으로 겨우 구출되어 대만 지방관의 보호 아래 대만부와 복주의 유 구관을 거쳐 유구로 돌아갔다. 이와 같은 사건은 대만해협에서 종종 발생한 조난 사고였을 뿐이었다. 특히 아편전쟁 후 五 口 通 商 이 이루어 지면서 외국 상선의 조난이 잦았는데, 유구 선박이 청과의 무역교류 33) 陳 秀 武, 坂 本 龍 馬 與 萬 國 公 法 ( 外 國 問 題 硏 究, 2010년 제2기), pp.53-54; 유재곤, 19세기 일본의 만국공법 수용과 인식 ( 淸 溪 史 學 13집), pp.311-312 참고.

52 中 國 史 硏 究 第 78 輯 (2012. 6) 중에 대만에서 표류한 사건은 동치 시기에만 무려 8차례나 있었다. 34) 유구가 청의 종속국이란 사실은 유구와 조약을 맺은 미국(1854년), 프랑스(1855년), 네덜란드(1859년) 등 서양 국가도 잘 알고 있었다. 일 본은 이 관계를 무력화하기 위해 실제적 점유 관계라는 만국공법 조항 을 통해 유구를 편입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1868년 明 治 정부는 유구 왕국을 일본 鹿 儿 島 縣 의 관할 아래에 두었고, 그 후 정부의 직할지로 삼았다. 1872년 9월 일본은 유구의 외교권 조세 행정 형법 등을 자국 의 통제 아래 두었다. 1873년에 다시 유구를 일본의 부현과 동급에 놓 아, 내무성의 관할을 받도록 했으며 조세를 대장성에 납부하도록 했다. 이처럼 일본은 유구에 관리를 파견해 통치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등 실제 관할권을 주장할 수 있도록 준비했는데, 이른바 만국공법을 응용 한 조치였다. 35) 1873년 6월 일본 특명전권대사 副 島 種 臣 과 柳 原 前 光 은 북경에 도착 하자마자 대사인 副 島 種 臣 은 예부에 가서 淸 日 修 好 條 規 의 비준 문제 와 청제알현 문제를 상의했고, 부사였던 柳 原 前 光 은 총리아문에 가서 판사대신 董 恂 과 毛 昶 熙 를 만나 유구 표류민이 대만에서 피살된 사건 을 질의하였다. 淸 日 修 好 條 規 는 그 해 우여곡절 끝에 체결되었는데, 구미와 불평 등조약을 맺지 않을 수 없었던 청과 일본으로서는 처음 맺은 대등한 조약이었다. 이 조규의 제1조에서는 양국에 속한 영토는 각자 예로서 서로 대우하며 침략할 수 없다. 고 규정해 서로의 국토를 침범하지 않 을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연해 각 항구에서 자유로운 무역을 하는 34) 同 治 시기 영국 선박이 대만에 표류한 경우가 29차례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 다음이 유구 선박이다[ 湯 熙 勇, 淸 代 臺 灣 的 外 籍 船 難 與 救 助 ( 中 國 海 洋 發 展 史 論 文 集 (제7집), 1999), p.551 표]. 1873년 3월초 일본 中 州 人 左 藤 利 八 등 4 명이 소형 어선에 소금을 운반하다 태풍을 만나 대만 鳳 山 에 표류했다가, 현지 관리의 도움으로 上 海 道 衙 門 에 호송된 후 본국으로 귀환한 사건도 있었다. 35) 楊 秀 芝, 19세기말 유구의 멸망과 군주권 ( 동북아문화연구 제19집, 2009), p.99; 琉 球 王 國 의 滅 亡 -왕국에서 오키나와현으로 ( 근대중국연구 제1집, 2000), p.22.

萬 國 公 法 과 淸 末 의 海 洋 紛 爭 ; 1860-70년대를 중심으로 ( 曺 世 鉉 ) 53 조항 이외에 직접적으로 바다와 관련해 언급한 조항은 제14조와 제15 조가 있었다. 제14조에서는 양국의 병선은 지정된 항구만을 왕래하며 자국의 상민을 보호할 수 있으나, 연해에 지정되지 않은 항구 등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이를 위반할 경우 처벌한다고 명시하면서도 태풍이나 위험을 피해 항구에 들어오는 것은 예외라고 하였다. 제15조 에서는 양국이 다른 나라와 전시 상황에 놓이면 각 항구를 방어하는 사실을 알리고 무역과 선박 출입을 잠시 중단해 오해로 인한 사고를 막는다고 하였다. 평시에 일본인은 중국의 지정된 항구나 주변 洋 面 에 서, 중국인은 일본이 지정한 항구와 주변 洋 面 에서 적대국과의 충돌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36) 청조가 과거 미국이나 영국과 맺은 불평 등 조약 중에도 중국 근해에서의 해난 구조나 해적 체포 등의 의무 조 항은 있었지만, 37) 당시 영해 관념이 명확하지 않아 각종 조약에서 중 국의 海 面 성질이나 넓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다. 아울러 副 36) 中 外 舊 約 彙 編 ( 第 一 冊 ), p.319. 37) 예를 들어, 청조가 미국과 맺은 淸 美 望 夏 條 約 (1844년 7월) 제26관에서 만 약 합중국 상선이 중국이 관할하는 內 洋 에서 도적들에게 약탈을 당하면, 중국 지방 문무관이 이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엄히 강도를 잡아서 법에 따라 처벌 해야 한다. 제27관에서 합중국 무역 선박이 중국의 洋 面 에 있을 때 태풍을 만나거나 암초에 부딪혀 난파하거나 도적을 만나 파괴가 되면 연해지방관이 이 사실을 알면 즉각 구조하고 무휼해야 한다. 항구로 보내 수리를 할 때 일체 의 식량을 구입하거나 담수를 얻고자 할 때 모두 금지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 상선이 外 洋 에서 파손이 되어 중국 연해 지방으로 표류해오면 관리가 조사한 후 역시 일체의 무휼과 판리를 해야 한다 ( 中 外 舊 約 彙 編 ( 第 一 冊 ), pp.55-56). 淸 英 天 津 條 約 (1858년 6월)에는 영국 선박이 중국 연해나 근안에서 파손되거 나 바람을 만나 항구에 왔을 때 지방관이 이를 알면 즉각 구조해야 하며 주변 영사관에 사실을 알리도록 하였다( 中 外 舊 約 彙 編 ( 第 一 冊 ), p.98). 이에 따라 청조는 해난을 당한 영국 선박에 구조를 실행해야 하는 조약 의무를 가지고 되었으며, 지방관은 법정 구조인으로 해난구조 업무의 전권을 책임지고 반드시 관할 구역 내의 영국 선박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였다. 그 후 해난구조 의 경제적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복주 영국 영사는 구조보상제도를 도입해 酬 賞 失 事 洋 船 章 程 을 만들어 민절총독을 통해 총리아문으로 보냈다. 총리아문 은 1869년 각성 연해의 지방관과 각 항구 영사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에 따라 중국인의 구조 활동에 따른 보상의 취득과 분배에 관한 합리적인 규정이 만들어졌다[ 酬 賞 失 事 洋 船 章 程 (1869) ( 中 外 舊 約 彙 編 ( 第 一 冊 ), p.314].

54 中 國 史 硏 究 第 78 輯 (2012. 6) 島 種 臣 은 동치황제를 접견하는 예절문제도 또 다른 외교 사안으로 논 의하였다. 한편 柳 原 前 光 은 유구표류민사건과 관련해 대만의 生 蕃 이 일본인 을 살해했기 때문에 대만을 응징할 것이다. 왜 대만의 생번에게 일본 국민을 살해하도록 방치해 놓고도 청국은 이들을 처벌하지 않느냐? 고 물었다. 이에 청조는 사람을 죽인 자들은 모두 蕃 人 으로 化 外 之 民 이 어서 중국의 政 敎 가 미치지 못한다. 고 대답하였다. 일본 측은 권력이 미치지 못하면 無 主 의 땅이라는 논리를 펴자, 청 관리들은 일본의 아 이누족이나 미국의 인디언이나 모두 왕화에 복종하지 못한다. 는 논리 로 일본을 반박하였다. 하지만 만국공법 의 국가 주권의 정의부분에 는 自 主 半 主 의 구분은 있어도 生 蕃 熟 蕃 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유구표류민사건의 처리과정에서 청조는 일본이 대만을 침략하 려는 진정한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고 담판 중에 대만 生 蕃 의 귀속 문 제에 집착하였다. 일본 측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 대만 출병의 근거로 삼았다. 1874년( 同 治 13년) 4월 4일 일본 정부는 臺 灣 生 蕃 探 險 隊 를 조직해 4 척의 배에 3천여 명의 군인을 실어 대만으로 향하였다. 이 때 미국 장 교를 고용하고 영국과 미국 선박을 빌려 군대와 탄약을 운반하였다. 5 월 7일 대만 남부에 상륙해 牧 丹 社 를 점령하고 기지를 만든 후, 일본 군은 청군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만 원주민과 충돌 하였다. 이 사건은 明 治 정부 최초의 해외 파병이었다. 일본은 청조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교화가 덜 된 생번을 교화해 주겠다는 논리로 대 만을 침략했으며, 당장 이 곳을 차지할 가능성은 희박해도, 적어도 유 구만큼은 차지할 수 있다는 계산 아래 전투를 벌였다. 여기에는 政 敎 不 及 지역은 野 蠻 無 主 이니 문명국이 쳐들어가 식민지로 삼을 수 있다 는 만국공법의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38) 보통 표류민 사건이 발 생한 경우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거나, 대표를 파견해 사건을 38) 양수지, 琉 球 王 國 의 滅 亡 -왕국에서 오키나와현으로, pp.23-24.

萬 國 公 法 과 淸 末 의 海 洋 紛 爭 ; 1860-70년대를 중심으로 ( 曺 世 鉉 ) 55 조사하고 실종된 선원을 구조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이처럼 무력으로 보복하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었다. 39) 일본이 대만에 출병하자 청조 는 일본 측이 淸 日 修 好 條 規 위반한 것이라고 하였다. 제1조를 위반했다면서 이는 만국공법을 이홍장은 일본의 침략에 분노했으며, 또한 미국인이 자국 상선에 일본 병력과 무기를 실어준 것은 모두 만국공법과 미국과의 조약 제1 관을 위반한 것 40) 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총리아문으로 하여금 미국 과 교섭해 만국공법에서 전쟁 중의 국가를 도와줄 수 없는 원칙, 즉 만약 기존 조약이 허가하지 않을 경우에는 兵 馬, 軍 器 와 火 砲 등을 도와줄 수 없다. 41) 는 조항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미국의 주 일공사는 미국 정부가 일찍이 대만을 청국의 관할이라고 승인했기 때 문에 일본 정부가 미국 선박과 미국인을 고용해 생번 을 정벌하는 것 을 방관할 수 없으며, 이는 미국과 청국이 맺은 조약을 위반한 것이라 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1874년 8월 초 일본 정부는 大 久 保 利 通 을 특명전권대신으로 하여 20여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나가사키에서 출발해 천진을 거쳐 북경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40여 일 동안 머물면서 총리아문 대신들과 7차례 회담을 가졌다. 앞의 5차례 회담의 주요 내용은 대만 번지가 청조의 판도에 속하느냐 여부의 논쟁이었다. 청과 일본이 북경담판을 할 때 大 久 保 利 通 은 함께 온 프랑스인 법 률고문 부아쏘나드(Boissonade, 중국명 巴 桑 納 )의 의견에 따라 만국공 법상 대만은 무주의 땅이라는 기본 관점을 제시하였다. 총리아문에서 39) 유구표류민사건이 발생하기 몇 해 전인 1867년( 同 治 6년 2월)에도 미국 상선 로버호가 대만 해안에 좌초되어 해안에 오른 선장 부부와 선원 13인이 생번에 게 피살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 군함이 180여명의 중무장한 군인 을 데리고 대만 남부에 출병해 원주민과 충돌한 사례가 있었다[ 陳 在 正, 臺 灣 海 疆 史 ( 揚 智 文 化, 2003), pp.146-150]. 이 경우가 무력을 사용한 거의 유일한 전례였다. 40) 吳 汝 綸 編, 論 日 本 圖 攻 臺 灣 ( 李 文 忠 公 全 書 ( 譯 署 函 稿 ), 金 陵 刻 本, 1905년 권 2), p.24. 41) 萬 國 公 法, p.129.

56 中 國 史 硏 究 第 78 輯 (2012. 6) 는 대만은 청의 속지라며 청일수호조약을 지키지 않을 것인가 라고 반박하였다. 이에 일본은 생번의 땅은 화외의 땅이며, 청조가 비록 대 만을 중국 판도라고 하지만 유효한 통치를 하지 못하므로 국제법상 무 주지이므로 선점과 정복의 원칙에 따라 출병해 점령한 것이라고 주장 을 되풀이하였다. 42) 그리고 유구와 청의 조공관계가 국제법상으로 일 본에 불리한 부분이기 때문에, 외교 협상에서 조공관계는 부정되어야 할 전근대적인 유산이라고 선전하며 실질 지배가 중요하다는 논리를 폈다. 43) 총리아문이 가진 제한된 만국공법 지식으로는 담판을 유리하게 끌 고 나가지 못했고, 오히려 국제법은 청조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번 속체제와 국제법 관념의 충돌은 청조에게 논쟁 중에 혼란을 안겨주었 는데, 유구인을 일본의 백성으로 인정한 것이 최대의 패착이었다. 결국 양국은 淸 日 北 京 專 條 (1874년 10월 31일)를 맺어 대만인이 일본국의 속민에게 망령되게 가해했으며, 일본국의 이번 행동은 백성을 보호하 기 위한 의거로 중국은 이를 인정한다는 조항을 이끌어 내었다. 44) 그 후 이 조약은 유구에 대한 일본의 권력 을 사실상 인정해 주었고, 일 본은 유구에 대한 본격적인 병탄 작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유구표류 민사건으로 뒤늦게나마 청조의 지방 관리들은 대만 원주민을 직접 관 할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 사건은 동아시아 책봉조공체제 의 붕괴가 시작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45) 서양 열강이나 일본과 대치한 상황 속에서 영토 재편을 추진하던 청조는 대만사건 후 海 防 이야말로 오늘날 홀시할 수 없는 정책임을 실 42) 林 學 忠, 앞의 책, p.273. 43) 김광옥, 19세기 후반 일본의 유구병탄과 청과의 영토분쟁 처리 ( 역사와 경계 65집, 2007), p.156. 44) 北 京 專 條 제1조 日 本 國 此 次 所 辦, 原 爲 保 民 義 擧 起 見, 中 國 不 指 以 爲 不 是. ( 中 外 舊 約 彙 編 ( 第 一 冊 ), p.343). 45) 1879년 일본정부의 일방적인 무력행사를 통한 유구처분에도 불구하고 유구의 행방은 청일전쟁까지 정해지지 않았다. 결국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고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유구는 일본의 영토로 확정되었다(김광옥, 앞의 논문, p.155).

萬 國 公 法 과 淸 末 의 海 洋 紛 爭 ; 1860-70년대를 중심으로 ( 曺 世 鉉 ) 57 감하였다. 일본의 대만 침공을 계기로 총리아문에서는 그 해 9월 27일 練 兵 簡 器 造 船 籌 餉 用 人 持 久 등 6조에 걸친 해방책을 상주함으로서 양무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10월 10일에는 前 江 蘇 巡 撫 丁 日 昌 에 의해 海 洋 水 師 章 程 6조도 건의되었다. 특히 海 防 과 塞 防 에 관 한 본격적인 정책 토론이 벌어져 해방과 새방을 동시에 추진한다는 절 충적인 결론을 맺고 끝났지만, 이 과정에서 전통에서 근대로의 해방 인식 변화는 신식 해군의 건설로 이어졌다. 46) 그런데 유구표류민사건 과 유사한 해양 분쟁이 조선에서도 발생한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 다. 2. 강화도사건 조선에서 강화도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도 구미 국가와 접촉과 충돌 이 있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대표적인데, 이 두 가지 사건은 강 화도 사건과 마찬가지로 바다와 관련이 깊다. 우선 이를 간단히 소개 하면 아래와 같다. 1866년 프랑스의 조선에 대한 침략은 조선의 천주교 탄압을 응징하 겠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 해 3월에 병인사옥이 발생해 대원군이 프랑스인 베르뇌(Bemeux) 주교를 비롯해 신부 9명을 처형하고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하자, 리델(Ridel) 주교는 청으로 탈출하여 이 사실을 프 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P. G. Roze) 제독에게 알렸다. 이에 로즈 제독 은 7척의 군함으로 10월 13일 물치도에 정박한 후 갑곳과 강화부성을 점령해 은괴, 무기, 서적들을 노획하였다. 10월 26일에는 문수산성에서 전투가 있었고, 11월 9일에는 정족산에서 전투가 있었다. 그 후 11월 21일 프랑스군은 철수하였다. 널리 알려졌듯이, 병인양요는 조선근대사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46) 黃 順 力, 海 洋 迷 思 - 中 國 海 洋 觀 的 傳 統 與 變 遷 ( 江 西 敎 育 出 版 社, 1999), pp.252-259.

58 中 國 史 硏 究 第 78 輯 (2012. 6) 전통적 책봉조공체제와 서구 자본주의 세력의 砲 艦 政 策 에 따른 근대적 조약체제의 최초의 충돌사태로 한중관계의 근본적인 전환을 예고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47) 총리아문의 지시를 받은 청조관리들은 조선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예의에 따라 처리하고, 프랑스에 대해서는 서양 열 강과 교섭하는 방식으로 접근하였다. 당시 총리아문은 조선이 중국의 屬 邦 이지만 내치와 외교에서는 自 主 라는 이론을 견지하며 프랑스 선 교사의 살해 책임과 배상 문제를 회피하였다. 이런 태도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신미양요는 미국의 해적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1866년 8월 9일 미국 상인의 소유선박 제너널 셔먼호는 중국 천진을 떠나 조선을 향하였다. 이 배가 조선에 온 목적은 통상이라고 했지만 무장한 상태였으며, 실 제로는 평양 근처의 왕릉을 도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48) 이 해적선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조선 측 화선 공격으로 불태워졌 다. 미국 정부는 제너럴셔먼호가 표류선이라고 주장하며, 이 선박의 소 실 사건을 응징한다면서 조선을 침략하였다. 로저스 아시아 함대 사령 관은 군함 5척과 1,230명의 병력으로 강화도에 접근하였다. 미군이 강 화해협을 측량하자 강화도 손돌목의 포대가 포격을 가했으며 이를 핑 계로 침략적인 약탈을 자행하였다. 미 해병은 초지진 광성진 덕진진을 함락시키며 350여명의 조선인을 무참히 살해한 후 물러났다. 미국 대 통령 그랜트 대통령은 1871년 12월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우리의 난파된 선원들을 야만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조선 침공을 자신이 명 령했다고 말하면서 로저스 제독이 용감하게 공격 을 가하여 범죄인 들을 응징 했다고 자랑하였다. 49) 47) 병인양요가 발생하기 직전이자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인 1866년 6월 대원군 정권은 평안도 鐵 山 府 앞바다에 조난당한 미국 상선 서프 라이스호에 탑승했던 서양인 6명과 중국인 1명을 청으로 송치하였다. 이는 전 통적인 조공관계의 원칙에 따라 조난 선박 구호 조치를 한 것이다[권혁수, 근 대 한중관계사의 재조명 (혜안, 2007), p.21]. 48) 김용구, 세계관 충돌의 국제정치학: 동양 예와 서양 공법 (문학과 지성사, 1997), p.106.

萬 國 公 法 과 淸 末 의 海 洋 紛 爭 ; 1860-70년대를 중심으로 ( 曺 世 鉉 ) 59 한편 李 鴻 章 이 대조선 외교 업무에 처음으로 직접 개입한 것은 1871년 3월 21일 총리아문으로부터 미국 함대의 조선출동 계획을 통보 받은 것부터이다. 신미양요 사건이 종결되는 시점인 1871년 7월 무렵 그는 흠차전권대신으로 임명되었고, 그 후 일본과 조약체결 교섭을 총 괄하면서 청조의 외교 분야 주요 정책 결정자로서 등장하였다. 50) 앞 절의 유구사건이 표류민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나 신미양요가 난 파선(혹은 해적) 문제에서 불씨가 된 사실은 기억할 만하다. 1876년 9월 20일 강화도사건이 발생하였다. 일본 군함 雲 揚 號 는 그 해 5월 부산에 나타났다가 다시 9월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나 청으로 가는 해로를 측량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에 접근하였다. 그들은 담수를 구한다는 구실로 강화도 연안을 탐색하며 초지진에 이르자 조선 측 포 대에서 발포하였다. 운양호는 이를 보복한다며 초지진과 연평도를 포 격하고 상륙해 약탈과 살육을 자행해 조선인 35명이 전사하였다. 주지 하듯이 강화도사건은 일본이 불법적으로 조선의 연해를 측량하다 포격 을 받은 사건으로, 조선의 연해를 측량한 것은 곧 조선의 주권을 침범 한 것이다. 오늘날 이 군함이 담수를 구하려고 강화도에 기항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없다. 강화도사건은 국제 문제로 비화되어 청과 일본 간 이른바 종주권 담판으로 이어졌다. 조선과의 교섭 전 일본은 청조의 태도와 조청 관계의 실질을 탐색하기 위해 森 有 禮 를 청으로 파 견하였다. 1876년 1월 森 有 禮 공사는 李 鴻 章 과 회견할 것을 요청하였 다. 이에 1월 24일과 25일 두 차례 회견이 있었다. 여기서 강화도사건 과정에서 조선이 운양호에 발포한 책임 문제를 토론하였다. 51) 49) 김용구, 위의 책, p.145. 50) 훗날 朝 美 通 商 條 約 (1882년) 중 제3조에는 난파선과 그 선원 구조에 관한 규 정을 두고 있다. 그러나 朝 英 通 商 條 約 을 비롯한 다른 조약들은 이런 사항을 제 7조에서 규정하고 있다. 조미조약이 조약 초반부에 난파선 문제를 삽입한 것은 미국이 중요시하는 것이 난파선 문제였음을 암시하고 있다(김용구, 위의 책, pp.422-423). 51) 林 學 忠, 앞의 책, p.276.

60 中 國 史 硏 究 第 78 輯 (2012. 6) 森 有 禮 : 종전에 사절을 거부하고, 근래에 일본 병선이 고려 해변에서 담수를 얻으려하자 그들은 곧 대포를 쏘았는데, 우리 선박이 훼손되었다. 李 鴻 章 : 당신들의 병선은 고려 해구에서 해안 측량을 했는데, 만국공 법 을 살펴보면 해안 주변 10리의 땅은 곧 본국의 영토에 속한다. 일본은 아직 통상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불응하고 측량하니까 고려가 대포를 발사한 까닭이다. 森 有 禮 : 중국 일본과 서양은 만국공법을 인용할 수 있으나 고려는 아 직 조약을 맺지 않았으니 만국공법을 인용할 수 없다. 李 鴻 章 : 비록 그와 같으나 그러나 일본이 할 수 없음에도 가서 측량한 것은 일본의 잘못이 먼저이다. 고려가 대포를 발사한 것도 작은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일본이 또 상륙하여 그들의 포대를 파괴하고 그들 을 살상한 것 또한 일본의 실수이다. 고려가 움직이려하지 않는데, 일본 이 단지 가서 그들에게 무엇을 하려는가? 52) 위와 같이 森 有 禮 의 운양호가 단지 담수를 얻기 위해 접근했는데 조선 측이 발포했다는 항의에 李 鴻 章 은 만국공법 가운데 3해리 영해 규정을 이용해 연해 10리의 땅은 본국의 영토인데 불법 측량하자 대포 를 발사한 것이라고 답변하였다. 이에 森 有 禮 공사는 청과 일본은 만 국공법을 원용할 수 있으나 조선은 아직 조약을 체결하지 않아서 이를 원용할 수 없다는 논리로 대응하였다. 즉 조선처럼 공법을 알지 못하 는 나라는 공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반론한 것이다. 그리고 조선이 일본에 적절한 사과를 표시할 것과 조선의 해양에서 일본 선박을 보호 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한편 속방 문제에 관해서 일본 공사는 조선이 과연 청의 속국이라면 청이 조선에서 발생한 모든 일을 책임질 것이냐 고 추궁하였다. 이에 대해 李 鴻 章 은 총리아문의 기존 외교 원칙, 즉 조 선은 중국의 속방이지만 내치와 외교에서는 자주라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하자 양자 간의 논쟁은 평행선을 달렸다. 53) 이런 담판은 유구표류민사건 당시 柳 原 前 光 과 李 鴻 章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의 연장 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52) 日 本 使 臣 森 有 禮 署 使 鄭 永 寧 來 署 晤 談 節 略 ( 光 緖 원년 12월 28일) ( 李 文 忠 公 全 集. 譯 署 函 稿 권4), pp.35-36. 53) 中 日 交 涉 史 料 (상), pp.4-5(김용구, 앞의 책, p.191 재인용).

萬 國 公 法 과 淸 末 의 海 洋 紛 爭 ; 1860-70년대를 중심으로 ( 曺 世 鉉 ) 61 同 治 5년(1866년) 병인양요부터 光 緖 원년(1875) 강화도사건까지 조 선 문제에 대한 청의 양무 관료들의 인식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李 鴻 章 은 잠시나마 일본의 조선 침략 위협에 대해 淸 日 修 好 條 規 제1 조가 침략 억지력을 지녔다고 판단했으나, 강화도사건이 일어나자 그 억제력이 회의적이라고 시인하였다. 그것은 전년에 있었던 일본의 대 만침공의 경험을 통해 얻어졌을 것이다. 54) 강화도사건이 발생한 다음 해 강화부에서 조선과 일본이 담판을 할 때, 黑 田 淸 隆 전권대신은 조선 측에 만국공법에 의거해 조약을 맺을 것을 천명하였다. 1876년 2월 11일 회담에서 黑 田 淸 隆 이 우리 선박인 운양함이 작년 貴 境 人 의 포격을 입었으니 어찌 교린의 誼 가 있다고 하겠는가? 질문한데 대해, 조선관리 申 憲 은 경내에 들어오는 것이 금 지된 것은 禮 經 에 실린 규정이다. 55) 어떤 나라의 함정이 무슨 일로 오는지 몰랐고 방수처에 직진하자 戌 兵 이 발포했으니 이는 부득이한 일이라고 답변하였다. 이에 黑 田 淸 隆 은 운양함 세 돛대에 모두 국기를 세워 우리나라임을 표지하였거늘 어찌 몰랐는가? 라고 따지자, 申 憲 은 그때의 선기는 황색이어서 다른 선박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응수하 였다. 56) 비록 申 憲 이 예경 을 빌어 논리를 전개하고 있지만 기존 연구에 따르면 강화도조약을 교섭할 당시 조선 측에서도 이미 청을 통해 만 국공법 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57) 특히 양측의 협상 과정에 대해 일 본 측 사료에서는 만국 보통의 예, 만국 교제의 법 이라고 기록되어 54) 권석봉, 청말 대조선정책사연구 (일조각, 1986), pp.75-77. 55) 禮 記 曲 禮 상편에 국경에 들어와서는 금하는 것을 묻고, 도성에 들어와 서는 풍속을 묻고, 대문에 들어와서는 꺼리는 것을 묻는다. 라는 구절이 있다. 56) 신헌 지음, 심행일기 -조선이 기록한 강화도조약 (푸른역사, 2010), p.112; 김용구, 앞의 책, p.195. 57) 1877년 12월 17일 만국공법 의 조선전래를 말해주는 최초의 공식문서가 남 아있어 다수의 학자가 이를 전래된 시기로 잡고 있지만, 이런 저런 고증을 통 해보면 만국공법 이 적어도 1876년 2월 이전에 조선에 전래된 것은 확실하다 고 본다[이광린, 한국에 있어서의 만국공법의 수용과 그 영향 ( 동아연구 제1집, 1982), p.142; 김용구, 앞의 책, pp.230-236].

62 中 國 史 硏 究 第 78 輯 (2012. 6) 있는데 반해, 신헌의 기록에서는 만국공법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사실 은 흥미롭다. 비록 신헌이 조선은 외국과 통상한 일이 없어 만국 교제 의 법에 생소하다고 말하지만 정확하게 만국공법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58) 그런데 운양호 포격 사건의 진상은 최근 새롭게 밝혀졌다. 운양호 함장 井 上 良 馨 이 9월 29일에 처음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강화도 초 지진에 접근한 운양호 병사들의 보트는 국기를 달지 않았다. 담수를 얻기 위한 것이란 접안 목적도 이때는 언급되지 않았다. 오로지 조선 수비대의 발포를 유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양측 간의 전투는 3일이 나 계속된 치열한 전투였다. 일본정부의 수뇌부는 운양호 함장으로부 터 전투 상황을 보고 받고 10월 8일에 보고서를 새로 작성하였다. 새 보고서는 3일간의 전투를 하루로 바꾸면서 운양호 측의 곤경을 감추는 한편, 처음부터 일본 국기를 여러 개 게양한 것으로, 그리고 접안 목적 을 담수를 구하려던 것으로 내용을 변조하였다. 59) 강화도 회담 중 일 본 정부는 프랑스 법률고문 부아쏘나드에게 국제법상 조선과 전쟁할 수 있는 조건을 연구하도록 시키는 등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였다. 1876년 2월 26일에 체결한 朝 日 修 好 條 規 는 조선이 역사상 처음으 로 체결한 근대 국제법에 따른 합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약의 내 용에 대해 두 나라는 책봉조공 질서와 만국공법 질서 간 첨예한 인식 차이를 드러내었다. 강화도조약의 제1조 조선국은 자주 지방으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는 유명한 구절에 대해 일본은 조 선 측과 달리 과거 조선과 일본이 사대교린 질서의 해체를 합의한 것 으로 해석하였다. 60) 이 조항은 1874년 3월 프랑스와 베트남이 체결한 58) 신헌 지음, 앞의 책, pp.128-129. 59) 이태진, 19세기 한국의 국제법 수용과 중국과의 전통적 관계 청산을 위한 투쟁 ( 역사학보 제181집, 2004), pp.134-135. 60) 김용구는 이 조항은 사대 질서의 개념인 자주 와 서양 공법 질서의 개념인 독립 두 개념이 충돌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았다. 조선 측은 사대 질 서 안에서 외번의 정교와 금령은 자주에 임하여 왔다는 의미로 이 조항을 인 식하였다. 그러나 일본 측은 자주는 곧 독립을 의미하며 서양 국제법에서 말하

萬 國 公 法 과 淸 末 의 海 洋 紛 爭 ; 1860-70년대를 중심으로 ( 曺 世 鉉 ) 63 사이공조약 의 내용을 일본이 의도적으로 모방한 것으로, 일본의 조 선 침략에 대해 청조의 간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것이었다. 朝 日 修 好 條 規 (총 12관) 가운데 직접적인 해양 관련 조항은 두 가 지였다. 제6조(조난, 표류): 일본국 선박이 태풍 또는 연료 식품의 결 여 등 불가항력의 경우 개항장 이외의 지역에 기항할 수 있으며 또 표 류선원을 보호하여 송환한다. 그리고 제7조(해안측량): 조선국 연해 의 섬과 암초는 종전에 審 檢 을 거치지 않아 극히 위험하다. 일본국의 항해자가 자유로이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가하고 그 위치의 深 淺 을 소 상하게 밝혀 圖 志 를 編 製 하여 양국의 선객들이 위험을 피하고 안전을 도모할 수 있게 한다. 61) 이런 조항들은 어느 정도 영해 주권을 침해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측은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고 동의하였 다. 조선의 만국공법에 대한 인식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연구에 따르면 조선의 형식적인 개국이 강화도조약(1876년)이었다면, 실질적인 개국은 朝 美 通 商 條 約 (1882년)이라고 한다. 62) 왜냐하면 1880년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 정부의 만국공법 인식은 부정적이어서 공법이 강대국의 침략을 막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63) 요컨대 만국공법은 비록 중외가 무사하고 십년이 안녕한 同 治 中 興 의 시기에 그 작용은 제한적이었지만, 유구표류민사건이나 강화도사 건에서 보이듯 초기 동북아 국제 분쟁에서 해양 문제와 맞물려 관련되 는 주권국가로 해석하였다[김용구, 만국공법 (소화, 2008), p.95]. 61) 최덕수 외 지음, 조약으로 본 한국근대사 (열린책들, 2010), p.47 참고. 62) 金 鳳 珍, 東 アジア 三 國 の 開 國 と 萬 國 公 法 の 受 容 ( 北 九 州 大 學 外 國 語 學 部 紀 要 제84호, 1995), p.59. 63) 朝 鮮 策 略 의 유입 이후 高 宗 의 대외 인식은 큰 변화가 나타났다. 조선책략 의 내용 중에는 약소국인 조선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주권 문제나 세력 균형 에 관한 내용이 다수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高 宗 은 적극적인 개방정책 을 추진했으며, 1882년 4월 미국과의 朝 美 通 商 條 約 의 체결을 시작으로 서구열 강과 차례로 조약을 맺어 본격적으로 만국공법 질서에 편입하였다. 이런 高 宗 의 인식변화는 1885년 영국의 거문도 점거 사건 때, 이 문제를 국제법을 통해 해결하려는 자세로 나타났다[김세민, 한국 근대사와 만국공법 (경인문화사, 2002), 제2장 참고].

64 中 國 史 硏 究 第 78 輯 (2012. 6) 어 있음을 알 수 있다. Ⅳ. 맺음말 19세기 후반 중국의 국제관계는 대체로 청을 중심으로 하는 조공 시스템과 구미를 중심으로 하는 조약 시스템이 상호 대립 갈등하면서 전개되다가 청조가 조약 시스템에 포섭되는 과정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64) 여기서 조약 시스템이란 만국공법체제를 말한다. 이 글에서는 청조가 만국공법체제에 편입할 때 제국주의의 주된 통로인 해양에 대 해서 새로운 인식과 방어체제를 모색한 사실에 주목하였다. 청말 구미 열강은 조난이나 난파선 문제를 제기하거나 불법적으로 해양을 측량하 면서 중국의 주변 바다를 침범하기 시작하였다. 청조는 갓 번역을 마 친 만국공법 을 이용해 프로이센-덴마크 간 대고구 선박사건을 성공 적으로 해결하면서 국제법의 수용에 주목했고, 미국 남북전쟁 시기 발 생한 알라바마호 사건의 소개를 통해 국제법의 전파가 널리 이루어졌 다. 同 治 시기 청조는 만국공법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옹호했지만 서 양의 국제법 이론을 완전히 접수한 것은 아니었다. 즉 총리아문은 用 의 수준에서 만국공법을 당시의 대외 교섭에 선택적으로 활용하였다. 전통 관념과 외래 이론과의 혼용은 외교사무 처리 과정 중 중국의 번 속체제와 서양의 조약체제와의 충돌과 적용에서도 나타났다. 해양분쟁 에서 촉발된 유구와 조선의 종속 관계 처리과정에서 총리아문과 李 鴻 章 등은 전통적 방식과 근대적 방식을 선택적으로 활용해 위기를 벗어 나려고 했다. 유구나 조선 역시 전통적 종속 관계를 최대한 이용하면 서 국제법상의 독립자주의 지위를 얻으려 노력하였다. 해양 분쟁은 그 후 청불전쟁이나 청일전쟁과 같이 동북아의 세력 64) 川 島 眞, 中 國 近 代 外 交 の 形 成 ( 名 古 屋 大 學 出 版 會, 2004), p.32.

萬 國 公 法 과 淸 末 의 海 洋 紛 爭 ; 1860-70년대를 중심으로 ( 曺 世 鉉 ) 65 판도를 바꾼 전쟁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1880년대의 청불전쟁은 청조가 국제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대응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1884년 8월 말에 벌어진 馬 尾 海 戰 은 전쟁의 출발점으로 군함이 타국 항구에 정박하는 문제가 쟁점이었으며, 10월말 프랑스 해군의 臺 灣 封 鎖 는 전시 상대방 항구에 대한 군사적 봉쇄 문제가 쟁점이었다. 1890 년대의 청일전쟁은 일본 측이 국제법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벌인 침 략전쟁이었다. 이 전쟁 역시 1894년 7월말 일본 군함이 선전포고도 없 이 청이 임대한 영국선박 高 升 號 등을 침몰시키면서 바다에서 시작하 였다. 65) 청조가 만국공법 을 수용할 초기에는 유교적 도덕을 매개로 자연법의 이해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나, 그 후 19세기말 본격적인 제국 주의의 시대에 들어가면서 국제법을 사회진화론적 약육강식, 적자생존 의 차원에서 이해하기 시작했다. 정리하자면, 만국공법의 수용과 전파과정에서 대고구 선박사건이나 알라바마호 사건과 같은 영해 및 해적선 분쟁이 직간접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청말 대표적인 동북아 외교 분쟁인 대만사건이 나 강화도사건에서도 표류민 및 해안측량과 같은 해양 분쟁이 국제법 문제와 맞물려 깊이 연관되어있다. 이처럼 해양의 관점에서 근대 중국 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를 가진다. 65)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은 약소국에게는 외교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전형 적인 사례였는데, 전쟁 중에도 다양한 해양분쟁이 발생하였다. 이와 관련한 문 제는 앞으로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

66 中 國 史 硏 究 第 78 輯 (2012. 6) (abstract)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and Ocean Disputes in the Late Ching Dynasty - Focused on 1860-70 - Cho, Se Hyun This treatise analyzes how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was applied in ocean disputes between China and foreign countries in the late Ching era. More exactly, this study aims to illuminate the roles the ocean played in the process of accommodation of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as well as in early international disputes in Northeast Asia. Scope of this study is limited to ocean disputes connected with accommodation and propagation of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focusing on Emperor Tongzhi era in the 1860-70s in particular. In the late Ching era, the western powers began to invade China's near oceans by posing problem with ships in distress or wrecked, or by illegal maritime measuring. Using just translated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the Ching Dynasty could successfully resolve the boat case between Prussia and Denmark, which led China to realize importance of international law and to adopt it. Thereafter, international law was widely propagated through introduction of the Alabama Case which occurred during the Civil War in the US. China's mixed use of traditional concept and foreign theory was

萬 國 公 法 과 淸 末 의 海 洋 紛 爭 ; 1860-70년대를 중심으로 ( 曺 世 鉉 ) 67 also reflected in the conflict between China's tribute notion and western treaty system in its handling of foreign matters, as well as in its application. While handling subordinate relationships with Ryukyu and the Joseon Dynasty in the wake of ocean disputes, Li Hongzhang and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strived to overcome the crisis by selective use of traditional and modern methods. On the other hand, Ryukyu and the Joseon Dynasty also tried to secure independent position under international law by making the most of traditional subordinate relationships. In early stage when The Ching Dynasty adapted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it was understood as a kind of natural law mediated by Confucian morality, but entering the late 19th century with waves of imperialism, China began to understand and interpret international laws in the perspective of the law of the jungle and survival of the fittest in the process of social evolution. 주제어: 청말, 만국공법, 해양분쟁, 동치시기, 대고구선박사건, 알라바마호사건, 유구표류민사건, 강화도사건 關 鍵 詞 : 淸 末, 萬 國 公 法, 海 洋 紛 爭, 同 治 時 期, 大 沽 口 船 舶 事 件, 阿 拉 巴 馬 號 事 件, 琉 球 漂 流 民 事 件, 江 華 島 事 件 Keywords: the late Ching era,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ocean disputes, Tongzhi era, the boat case between Prussia and Denmark, the Alabama Case, Ryukyu incident, Ganghwado incident (원고접수: 2012년 4월 24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6월 11일, 수정원고 접 수: 6월 14일, 게재 확정: 6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