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학년도 수시 2-2 대학별 논술 특강 2011 년 대입의 마지막 전략 수시 논술의 비기 파이널 서강대편 논술비기팀 1
서강대학교 수시논술 대비 秘 器 서강대 "근거제시형, 그리고 긴 논술문 작성" 2세트, 3문항으로 구성 그리 길지 않은 제시문이지만, 핵심을 찾아낸 뒤 다른 제시문과의 관계 속에서 근거로 활용해야 한다. 1000자 이상을 요구하는 마지막 문항에서는 제시문의 공통점을 찾아 자신의 생 각을 더해 논술하는 유형이다. 2
PART1 제시문 분석연습 LEVEL 1 예제1-비교요약형 11 (가)와 (나)에 나타난 역사관을 각각 정리하여 200자 내외로 비교하라. (가) 랑케에 따르면 역사는 이미 정해진 일정한 목표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초기의 역사를 일종의 수단이나 준비과정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고 하나의 개성을 소유한 시기로서 독자적 품위를 소유하게 되며 나아가서 모든 시기가 신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는 역사의 가치를 역사로부터 무엇이 나타났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에서 찾았 고 각 시대는 독자성을 가지며 자격과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보았다. 랑케는 역사에 있어서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 즉, 우연을 인정하여 역사에 있어서 우연의 중요성 을 강조하였는데 그에게 우연이란 바로 신의 섭리로 생각되어져 역사 내에 일정한 장소를 할애했 다. 그러나 이러한 신의 섭리를 역사상의 사건과 관련을 시켜 설명해야 하는 데서 어려움에 빠진 그는 지상에 나타난 신의 뜻을 인간은 각자가 주관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객관적이란 불가능하 다고 생각했고 역사 서술 또한 시대의 변화에 따르게 되어 시대성이 반영된 역사가 후대에 전달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연구함에 있어서는 개성을 제거하는 대신 역사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역사가는 본래 일어난 일 그대로를 서술해야 한다고 하면서 역사에 있어서 개체의 독특함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역사의 주제가 이러 한 살아 움직이는 개체들이었으며 그것들은 일정한 역사적 조건 아래서 독자적인 의미 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것들은 각각 개별전인 원리를 지니고 있었고 그것이 내부로부터 작용하면서 동시 에 외계의 변화에 따라 그 작용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역사가의 임무에 대해서 랑케는 먼저, 비판적인 입장에서 역사적 사실을 편찬하는 일과 다시 이 것을 역사적 과정의 단일성 속에서 재구성하는 일을 들었다. 그리고 역사 연구의 목표는 사건의 중요한 시기의 연구와 보편적 관계의 연구라고 표현하였는데 이 일반적 관계의 인식은 지식을 바 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감정과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했다. 이것으로서 랑케는 단순히 무엇 이 일어났는가 만을 아는 것이 아니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정말 사실이 어떠했는가를 알려고 하 였으며 이것은 결론적으로 전체사적 과정의 모습을 역사주의의 입장에서 고찰하고자 한 것이었다. (나) Carr는 19C의 랑케의 실증사학에 반기를 들었다. 즉, 역사적 사실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사실 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그 사실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자신의 해 석에 따라 재구성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역사가는 그가 사는 시대와 사회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므로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기준은 현재에 있다. 따라서 역사란 현재의 역사가와 과거 사실의 끊임없는 대화 인 것이다. 즉, 역사를 배우는 이유 는 과거 사실에 대한 단순한 암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비추어 과거에 대한 이해 를 촉진하고 과거에 비추어 현재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며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미래를 위 한 교훈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근대 역사학의 확립자 랑케는 역사가란 자기 자신을 죽이고 과거가 본래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 가를 밝히는 것을 그 지상과제로 삼아야 하며, 오직 사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해야 한다 고 언 3
급함으로써 역사적 사실들. 그 자체에 큰 비중을 두었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되는 역사인식론 이 금세기에 크로체(Benedetto Croce)나 콜링우드(Robin G. Collingwood)에 의해 피력되었었다. 즉 모든 역사는 현대의 역사(contemporary history)다 모든 역사적 판단을 기초를 이루는 것 은 실천적 요구이기 때문에 모든 역사에는 현대의 역사라는 성격이 부여된다. 서술되는 사건이 아무리 먼 시대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역사가 실제로 반영하는 것은 현재의 요구 및 현재의 상황 이며, 사건은 다만 그 속에서 메아리 칠 따름이다. 라는 글들에서 보듯이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 재의 눈을 통하여 현재의 문제의 관점에서 과거를 본다는 데에서 성립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 에 역사가의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 E.H. 카는 그러나 중심을 과거에 두는 역사관과 중심을 현재에 두는 역사관의 중간 입장을 취하 고 있다. 즉,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과는 평등의 관계에 있는 것이며 말하자면 기브 앤드 테이크 (give and take)의 관계에 있다. 역사가는 사실의 천한 노예도 아니오, 억압적인 주인도 아니다. 역사가란 자기의 해석에 맞추어서 사실을 형성하고 자기의 사실에 맞추어서 해석을 형성하고 하 는 끈임없는 과정에 종사하고 있다. 요컨대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가 필요하다, 사실을 못 가진 역사가는 뿌리를 박지 못한 무능한 존재이다. 역사가가 없는 사실이란 생명없는 무의미 한 존재라는 것이다. 역사란 결국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 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 거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카의 첫째 해답인 것이 다. 4
예제2-대립관계형 12 다음 제시문을 대립되는 논점이 잘 드러나도록 비교하시오. (500자) (가) 나라에서 돈을 쓰는 것은 어진 정치를 베풀기 위하여 당연한 처사지만 정부로서는 부득이한 일이 기도 하다. 법률이 공평하게 시행되고 교육이 골고루 베풀어져 풍속이 순후한 나라에서는 국민들 이 저마다 자기의 돈을 내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집을 짓기도 하고, 옷이나 음식을 나누어 서로 돕기도 한다. 그러나 정부가 이러한 풍속만 믿고 가난한 국민들을 생각하지 않으면 당연한 직분을 행하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민간인의 개인적인 재력으로는 사정이 미치지 못해서 구 제하는 방책이 때를 놓치는 적도 있으며, 때를 놓치는 염려는 없다고 하더라도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그 임무를 감당치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가 이 일을 담당하여 전국적인 세금으로 집행하고, 민간인들이 개인적으로 지은 구제소가 있으면 미풍양속을 권장하는 것도 좋 다. 구제하는 대상을 들자면 부모가 없는 고아, 집이 없는 홀아비나 과부, 빌어먹는 장애자, 생계 가 없는 병자 및 교육받지 못한 빈민 등이다. 이와 같이 남에게서 구제받기를 바라는 자라도 모 두 폐인은 아니다. 그 가운데 힘든 일을 할 수 있는 자도 있고, 재주가 뛰어난 자도 있으며, 또 이 두 가지 일을 못하지만 가르치면 할 수 있는 자도 있다. (유길준, 서유견문( 西 遊 見 聞 )) (나) 한 인간의 효율성은 그의 신체적 조건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이나 의지와도 광범위하게 연관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중략) 사고와 건강을 위한 보험에 대한 파괴주의적 관점은 무엇보 다도 그러한 제도가 사고와 질병을 촉진시키고 건강회복을 방해하며 질병과 사고를 초래하는 기 능적 무질서를 매우 자주 조성할 뿐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강화하고 장기화시킨다는 사실에 근 거하고 있다. (중략) 일을 잘 하고자 하는 의지를 약화시키거나 완전히 파괴해 버림으로써 사회보 장제도는 질병과 일에 대한 무능력을 창출한다. 그것은 그 자체가 노이로제인 불평하는 습관이나 다른 형태의 노이로제를 생산해 낸다. (중략) 그것(출제자 주: 노이로제)은 마치 사회제도처럼 사 람들로 하여금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게 하거나 최소한 질병을 증식시키고 장기화하며 강화하는 데 일조한다. 그러므로 사회보장제도는 보험에 대한 노이로제를 위험한 대중적 질병으 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질병을 확대하고 더욱 악화시키고 있음이 분명한 그 제도는 확산될 것이 다. 어떠한 개혁방안도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건강에 대한 의지를 약화 시키거나 파괴함으로 질병에 걸리는 것이다. (한스헤르만 호페, 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 5
예제3-대립관계형 13 다음 제시문을 대립되는 논점이 잘 드러나도록 비교하시오. (800자) (가)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 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앗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 자던 그 방랑객들 은? 시골길, 초원, 숲속의 빈터, 자연과 더불어 사라져버렸는가? 한 체코 격언은 그들의 그 고요 한 한가로움을 하나의 은유로써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그들은 신의 창( 窓 )들을 관조하고 있다고. 신의 창들을 관조하는 자는 따분하지 않다, 그는 행복하다. 우리 세계에서, 이 한가로움은 빈둥거 림으로 변질되었는데, 이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빈둥거리는 자는, 낙심한 자요, 따분해하며, 자기에게 결여된 움직임을 끊임없이 찾고 있는 사람이다. 느림과 기억 사이, 빠름과 망각사이에는 어떤 내밀한 관계가 있다. 지극히 평범한 상황 하나를 상 기해 보자. 웬 사내가 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문득, 그가 뭔가를 회상하고자 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순간, 기계적으로, 그는 자신의 발걸음을 늦춘다. 반면, 자신이 방금 겪은 어떤 끔찍한 사고를 잊어버리고자 하는 자는, 시간상, 아직도 자기와 너무나 가까운, 자신의 현재 위치로부터 어서 빨리 멀어지고 싶다는 듯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한다. 실존 수학에서 이 체험은 두 개의 기본 방정식형태를 갖는다.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 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 나는 실존 수학 교본 맨 첫 번째 장들 가운데 하나에 드는 이 유명한 방정식을 상기한 바 있다. 속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는 것. 이 방정식에서 우리는 여러 필연적 귀결들을 연역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우리 시대는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고 있으며 그래서 너무 쉽게 자신 을 망각한다. 한데 나는 이 주장을 뒤집어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시대는 망각의 욕망 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속도의 악마를 탐닉하는 것이라고. 그가 발걸음 을 빨리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주길 이제 더 이상 바라지 않음을, 자신에게 지쳤고, 자신을 역겨워하고 있으며, 스스로 기억의 그 간들거리는 작은 불꽃은 훅 불어 꺼버리고 싶음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고 싶어서라고 (나) 빨리 빨리 가 우리의 발목을 잡은 뼈 아픔 사례를 뒤로 하고 창조적으로 극복한 우리의 빨리빨리 서비스 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얼마 전 계열사 사우의 영국의 느려터진 서비스를 지적 한 리포트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역시 한국의 발 빠른 서비스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뛰어나다는 점이었다. 인터넷의 인프라가 세계 최고 수준이며, 장비나 인터넷 속도에 따른 정보 전달 속도 또 한 세계에서 최고다. 이를 반영하듯 한국에서 고객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면 서비스 속도가 따라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원칙을 이미 우리네 기업은 물론 글로벌 기업들도 알고 있는 듯하다. 사 우의 글을 읽고 있다 보니 비단 느려터진 애프터서비스가 단순히 영국의 경우만 아니라 선진국일 수록 서비스 시간대가 한정되어 있고 일을 느긋하게 처리하는 그네들의 습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 후진국의 경우는 서비스 체계가 제대로 갖추어 지지 않아서 어차피 신속한 서비스를 기대할 수 없는 환경을 가지고 있다. 기왕 인터넷을 예로 들었으니 인터넷으로 서비스 이야기로 가보자! 유학생, 이민자자 할 것 없이 세계 어느 나라에든 정착 초기에 하는 일 중에 하나는 인터넷을 설치하는 일이다. 정보에 민감한 한국 국민에게 인터넷은 기본적인 생활 기반이자 수단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서비스를 처리 하는데 있어서 1주일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 영국과 같은 나라에서 한국인이 만족하는 서비스 속 도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5분 만에 끝난 계약이었지만 설치되는 데 까지는 3주일이 걸렸다고 했던 그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방문 날짜와 시간을 정해서 방문하고 친철하게 전화로 6
확인까지 해 주는 우리의 서비스 방식으로 방문 시간이 9시부터 5시 사이라고 말해주는 건 이해 할 수 없을 정도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본인이 일본에 체류하던 몇 년 전, 인터 넷설치를 위해서 1달여를 예약하고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그 중에 몇 번은 모뎀을 잘못 가져왔다면서 기사가 다시 되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아무리 재촉을 해도 바꿔지지 않는 그들의 서비스 체계에 한국인 유학생이 고향에 대한 향수를 진하게 느꼈던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겠다. (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빠른 것을 선호하면서 단기간에 이루어낸 경제성장을 생각해 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빨리빨리 문화가 가져온 부작용도 적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빨리 빨리를 선호하며 공사기간을 단축하는 것은 삼풍 백화점 등 건물과 시설의 붕괴를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고 과속은 세계 제 1위의 교통사고율이라는 부끄러운 기록과 함께 되돌릴 수 없는 인명 피 해를 불러 왔다. 또한 멀쩡히 사용가능 한 컴퓨터를 조금 더 빠른 초고속으로 계속해서 대체함으 로써 자원을 낭비하고 환경을 망가뜨리고 있다. 또 이런 빨리빨리 기질은 사람들간의 관계를 피 상적이게 하고 한국 사람들로 하여금 인내심이 없다는 소리를 듣게 하며, 빨리 해결이 되지 않는 일이나 작은 일에도 심하게 흥분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가져왔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꾸 준히 질서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무던히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질서를 잘 유지를 하지 않는 모 습을 보이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경기장을 입장하거나 도로에서 차량을 운전하면서 자신 이 빨리빨리 가기 위해 간단한 기본질서 조차 지키지 않고 있다. 화장실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차 례차례 서서 기다리는 것이 오히려 더 빠른 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빨리빨리 자기 먼 저 사용하려는 등 질서를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인의 급한 성격 때문에 이런 간단한 기본질서를 지키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엄청난 불편함과 피해를 우리는 인식하고 고쳐 나아가야 한다. (라) 옛날 옛적 아담이 하와 곁에 길게 누워 생명의 나무 그늘 밑에서 세상 기쁨을 맛보던 이래, 게으 름의 찬양 을 노래하여 마땅할 시절이 돌아온 것은 우리 시대가 처음인 줄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는 치열한 생활을 자랑하고 있는데, 치열한 생활이란 실상 소동의 생활에 지나지 않기 때문 입니다. 우리 시대의 상징 또한 경쟁이고 보면, 뛰어났다고 과시하는 온갖 발명 역시 슬기의 발명이라기 보다는 모두 속도의 발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삶이 제대로 인간적이려면- 마냥 한가롭 기만 해야 할 것은 없지만 -거기에는 느림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허기야 일의 찬양 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일이나 힘씀은 역시 쉼에서 비롯돼 쉼에서 그쳐야 하는 법이고, 위대한 업적이나 크나큰 기쁨은 뛰면서는 이루어 질 수도 음미될 수도 없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주에 경주를 거듭한다는 것은 산에 산을 포개 쌓는 게 아니라 바람에 바람 을 포개는 꼴이 됩니다.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며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자꾸 뭘 하고만 있으면 뭐가 돼도 되겠지. 우선 해 놓고 나중에 봅시다." 하고 현대인은 말합니 다. 옛날엔 양반이면 아시다시피 일하기를 부끄러워했습니다. 그것은 그른 생각이었습니다. 꿋꿋 하고 반듯하게 하는 일, 인간적인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하는 일이라면 인간을 들어 높이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떻습니까? 이제는 양반이면 아무것도 '안' 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이것 또한 그 릇된 생각입니다. 부질없는 것을 피해 마음의 저 깊이를 되찾게 하는 한가로움을 부끄러워해서야 되겠습니까? (러끌레르끄, 게으름의 찬양) 7
(마) 할아버지 어디 가세요? 할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서울 아들네. 어디 사세요? 목사동 대곡. 대곡이라면 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보성강 건너의 마을이다. 거기서 여기까지 오시기가 여기서 서울 가는 길보다 더 힘드셨을텐데요. 시골의 교통편이라는 게 말할 수 없이 옹색하다는 것을 잘 아는 나는 할아버지가 대곡에서 여기 읍내 기차역까지 오신 그 여정이 만만치 않았을 것에 이상하게 가슴이 아렸다. 더군다나 할아버 지는 시골 노인네들 특유의 짐들을 바리바리 싸 짊어지지 않았는가. (중략) 괜찮어. 했다. 괜찮어. 자식 보러 가는 길인데 뭐가 힘들어? 하나도 안 힘들어. 하지 않은 뒷말은 아마 틀림없이 그런 말들이었을 것이다. 대곡에서 어떻게 오셨는데요? 대곡에서 석곡 가는 차가 다섯 시. 네 시 반에 저녁 먹고 다섯 시 차 타고 석곡 왔지. 그래서요? 나는 침을 꼴딱 삼켰다. 석곡서 읍내 가는 버스가 일곱 시에 있어서 기다렸다가 타고 왔지. 할아버지는 천진하게 말했다. 천진무구하게. 하나도 어려울 것 없어. 차 시간에 맞춰 타고 왔지 뭐. 서울 가는 건 몇 시 기차예요? 물으면서도 나는 자꾸만 왜 이렇게 니 아부지 탄 기차가 안 온다냐고 말할 줄도 모르는 아들 녀 석에게 푸념처럼 말을 건넸다. 자꾸 역사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도 또 할아버지와의 대화에 슬슬 재미가 일고 있었다. 열 한 시 사십 분. 세상에나! 일곱 시 삼십 분에 역에 도착하여 그때부터 아홉 시 사십 분인 지금까지 줄창 이 자리 에 이대로 앉아 계셨단 말인가. 그러고도 또 앞으로도 두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할아버지가 타고 갈 기차가 온다. 나는 그만 억장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아니다. 눈물이 다 나올 것만 같았 다. 오후 네 시 반에 저녁을 잡숫고 출발하여 대곡에서 석곡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 석곡에서 곡 성 읍내까지 또 버스를 타고 와서 읍내 터미널에서 역전까지 또 짐을 짊어지고 걸어와서 그때부 터 지금까지 장작난로 앞에서 기차를 기다리시는 할아버지. 가슴이 턱 막히는 어떤 느낌, 그것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아, 바로 그것이었다. (바) 분당서울대병원이 작년 서울 및 분당지역 직장인 1289명을 대상으로 직장인 식사습관에 대해 설 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식사시시간이 10분-15분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응답자의 49%인 623명, 5 분-10분은 22%인 289명, 5분 이내에 식사를 마친다는 사람도 15명으로 나타난 바 있다. 즉, 조사결과에 의하면 무려 72%의 직장인이 15분 이내에 식사를 마친다고 응답한 것. 또한 하 루 세끼 중 식사시간이 30분 이상인 경우가 몇 회 정도 되냐는 질문에는 64%인 819명이 전혀 없다고 응답해 대부분의 직장인이 식사를 쫓기듯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급하게 식사를 하는 습관은 특히 비만과도 연관될 수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포만 감을 인지하는 호르몬이 식사 후 약 15~20분 후에 나오므로 이 시간 전에 식사를 끝낸다면 많 이 먹어도 배부르다는 느낌이 덜하기 때문에 식사를 더 많이 할 수 있다. 더불어 소화 과정에서 나오는 음식을 분해하는 타액 등이 충분히 나오지 못해 같은 성분이라도 지방으로 갈 수 있는 확 8
률도 높아진다. 가천의대길병원 가정의학과 이규래 교수는 급하게 먹으면 음식의 흡수, 소화 등의 과정이 충분 히 제 역할을 하기 전에 이미 음식이 축적되기 때문에 쉽게 비만해 질 수 있다 고 충고한다. 이 교수는 최근에는 위장에서 분비되는 식욕을 느끼는 호르몬인 그렐린(ghrellin)도 식사 속도가 빠 르면 분비가 촉진돼 더 빨리 배가 고파질 수 있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으며 포만감을 느끼게 하 는 호르몬인 렙틴 역시 먹는 속도에 좌우된다고 알려져 있다 고 말했다. (사) 속도가 문제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속도가 최고의 관건임을, 그것이 국운과 사운과 개인의 명 운까지 좌우할 지고의 가치임을 강변하는 표어들로 가득 차 있다. 펜티엄 칩의 처리속도, 인터넷 망이나 화상 디지털 전화의 전송 속도에 대한 각 업체의 광고는 실로 오늘날의 가치가 속도 그 자체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 뿐인가. 지난 근대화 시대 내내 우리를 지배한 것은 남보다 더 빨리 였다. 아이 교육에서부터 대형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남보다 더 빨리 앞서가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오지 않았던가. 그 부작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질주하는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매우 빠른 속도는 우리의 익숙한 시공 간을 해체시키면서 동시에 오로지 저 소실점에 꽂혀있는 목표물만 보도록 만든다. 밀란 쿤데라는 그게 바로 우리 시대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는 질주하는 역동성보다는 느림의 성찰성을 강조한다. 그는 소설 <느림>에서 이렇게 말한다.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이 다. 오토바이 운전자와는 달리, 뛰어가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육체속에 있으며, 뛰면서 생기는 미묘한 신체적 변화와 가쁜 호흡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우리는 뛰고 있을 때 우리 자신 의 체중이나 나이를 느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우리의 인생을 사고한다. 그러나 기계에 속도의 능력을 의탁하는 순간 우리는 곧장 우리의 현실로부터 이탈되어 비신체적인 속도의 드라이브에 몰입한다. 쿤데라는 이를 테크닉의 싸늘한 몰개인성과 엑스터시의 기묘한 결합 이라고 불렀다. (아) 인도인이 느린가? 우리가 빠른가? 인도에 가면 누구나 알게 되는 1분만요~ 그 1분은 순식간에 수십 재로 부풀어 버리기 십상이 다. 되는 것도 없지만 결국은 안 되는 것도 없는 인도는 인내를 배울 수 있는 최상의 나라이다. 인도에 유학 간 첫 해 나는 빨리빨리 가 미덕인 나라에서 살다가 온지라 강의실까지 5분 거리를 늘 뛰어다녔다. 자동차며 인력거며 오토바이, 달구지 그리고 사람들 천지로 그 사이를 뛰지 않고 서는 다니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인도인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넌 늘 그렇게 뛰어다니니? 질문의 뜻을 몰라 어리 둥절해하는 나에게 그녀는 인도에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냥 천천히 걸으면 다 알아서 비 켜 간다는 것이다. 인도인에게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순환 고리이다. 과거에 일어난 일이 반복되 고 돌아오며 시간 역시 시작도 끝도 없는 순환이며 신도 사람도 모두 이 순환 소리 속에 들어있 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되풀이된다고 믿으니 인도인은 여유로울 수밖에. 이번 생에 다 못 이루 면 다음 생이 있으니까. 70평생에 모든 것을 거는 우리에게 영겁을 두고 작음 꿈을 키우는 인도 인들이 당연히 느리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70과 영겁. 인도인이 느린 것인지, 우리가 빠른 것인 지... (이옥순,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 (자) 시간은 단수( 單 數 )가 아니다. 단수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일직선 위에 배열하는 것을 뜻한다. 시 간이 단수라고 여기는 한, 앞의 물음들은 그저 불가지( 不 可 知 )나 신비주의의 영역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시간은 단수가 아니다. 유( 有 )와 무( 無 )의 경계를 넘나들고, 관현악의 화음처럼 중첩 되어 있으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과 끝이 맞물려 있다. 시공간이 연출하는 이 화려한 퍼레이 9
드를 목격하면서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하나의 선분 위에 일렬로 늘어서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이것들을 그저 포스트모던 의 징후로 돌리는 건 적절치 않다. 분명 근대 이 전에도 시간은 복수( 複 數 )였다. 중세적 문명론은 천( 天 ) 지( 地 ) 인( 人 )이 함께 어우러진 복합적 시 공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단수가 된 건 20세기 근대의 산물이다. 오직 인간의 활동 만으로 역사를 구성하게 되면서 시간은 단 하나의 척도로 가늠되었다. 시간의 주름들 이 얇게 펼쳐지면서 과거와 현재, 미래가 일직선으로 늘어서게 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시간은 계산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간 주되었다. 어떤 대상을 수로 측정할 수 있다는 건 모든 것이 동일한 질량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전제한다. 균질화! 모든 시간이 동일한 질량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오, 그걸 정말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사랑하는 이와 뜨겁게 교감하는 시간과 증오와 분노로 마음지옥을 헤매는 시간, 혁명적 열정으로 바리케이 트 위를 지키는 전사의 시간이 어떻게 동질화될 수 있단 말인가 토굴에서 7년 동안 면벽하는 달 마 대사의 시간과 아무런 목포도 의지도 없이 방황을 거듭한 나의 20대가 어찌 같은 척도로 측 정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시간을 수로 계산하고, 그에 대한 맹목적 집착을 강제한 다. 그 이유는 바로 시간이 돈 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균질화하는 배후의 동력은 화폐라는 숨은 신 이다. 시간은 돈이다! 돈이기 때문에 단 한 순간도 헛되게 보내서는 안 된다. 시간을 낭비하는 자 는 처벌받아 마땅하다. 자본주의 사회가 고귀한 가치처럼 내세우는 노동의 신성함 역시 그 기저 에는 시간의 화폐화 라는 원리가 작동한다. 그러므로 상식처럼 통용되는 노동/게으름 의 이분법 은 사실 돈이 되는 짓 을 하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자신이 아무리 즐거워도 돈이 안되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고 따라서 마땅히 비난 받아야 한다. 아니, 그 이전에 스스로 알아서 죄의식을 느낀 다. 자신에게, 가족에게, 그리고 국가와 인류에게. 속도에 대한 신앙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요컨대 지금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속도의 문화는 화폐화된 시간의 단신성 그 자체에 있다. 잘게 쪼개서 화폐로 계산되고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도록 강제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피로함!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가는 맹목의 리듬, 속도! 이 궤도를 벗어나는 순간 삶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죽 거나 나쁘거나! 오직 하나의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 외부 를 꿈꾸지 못하게 하는 것, 이 것을 이름하여 속도의 파시즘 이라 할 수 있으리라. 속도의 파시즘은 20세기 초 기차와 함께 이 땅에 도래하였다. 10
예제4-공통차이형 14 다음 제시문을 읽고 논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약술하시오. (500자) (가) 모든 감성에 있어서 각기 거기에 대응하는 쾌락이 생길 수 있음은 분명한 일이다. (우리는 보는 것이나 듣는 것에 대해서 즐겁다고 말한다.) 또한 감성이 최선의 상태에 있으면서 최선의 대상에 대해서 활동할 때에 두드러지게 쾌락이 생긴다는 것도 분명한 일이다. 대상과 지각자가 모두 최 선의 상태에 있을 때에는 언제나 쾌락이 있는 법이다. 거기엔 쾌락의 주체와 객체가 모두 있으니 말이다. 쾌락이 활동을 완전하게 하는 것은 활동의 주체에 내재하는 상태가 그렇게 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쾌락은 마치 한창 나이의 왕성한 기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따르는 꽃다운 청춘과 같은, 부가적인 하나의 목적으로서 활동을 완전케 한다. 그러므로 지적 대상 혹은 감성적 대상과, 식별하는 능력 혹은 관조하는 능력이 다 같이 마땅히 있어야 할 상태에 있는 한 그 활동 에는 언제나 쾌락이 있을 것이다. 주체와 객체가 다 같이 불변하고 또 같은 방식으로 서로 관계 하고 있을 때에는 같은 결과가 자연히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무도 계속해서 즐거워할 수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우리가 피로해지기 때문에 그러한 것인가? 사실 모든 사람은 계속적으로 활동할 수 없다. 그러므로 쾌락 역시 계속적일 수 없다. 쾌 락은 활동에 수반하는 것이니 말이다. 어떤 일들이 새로운 것일 때 우리를 즐겁게 해주지만, 얼마 있으면 처음만큼 즐겁게 해주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것은 마치 어떤 물건을 우리가 응 시할 때에 우리의 시각이 그렇듯이 처음에는 정신이 자극을 받아 그런 일들에 대해서 강렬히 활 동하지만, 얼마 후에는 우리의 활동이 이완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또한 쾌락도 힘을 잃게 되 는 것이다. 누구나 살기를 희구하는 까닭에 또한 쾌락을 욕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활동 이요 또 사람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것에 관해서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능력을 가지고 활동 한다. 가령 음악가는 여러 가지 음률에 관해서 청각으로 활동하고,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론 적인 문제에 관하여 이지( 理 智 )로 활동한다. 그런데 쾌락은 이러한 활동들을 완전케 하며, 따라서 사람들이 욕구하는 삶도 완전케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쾌락을 찾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중 략) 사실 활동이 없으면 쾌락이 생기지 않으며, 또 모든 활동은 거기에 따르는 쾌락으로 말미암아 완 전하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나) 쾌락이란 무엇인가? 이 말이 여러 가지로 쓰이고 있긴 하지만 가장 많이 쓰이는 용례로 볼 때 (살아 있다는 의미에서의) 능동성의 충족과는 무관한 욕망의 충족이라고 정의되기가 더 쉬울 것 이다. 그런 쾌락은 강도가 높은 것일 수도 있다. 사회적 성공을 거둠으로써 느끼는 쾌락, 돈을 많 이 버는 데서 느끼는 쾌락, 복권이 당첨됨으로써 느끼는 쾌락, 보통 말하는 성적 쾌락, 맘껏 먹는 데서 느끼는 쾌락, 경주에서 이기는 쾌락, 음주 환각 약품 등에 의해 고양된 상태, 혹은 살아 있 는 것을 죽이거나 난도질하려는 격정을 충족시키는 데서 느끼는 쾌락 등이 예거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부유해지거나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바쁘다는 의미로 매우 활동적이어야 하지만 내 적 탄생 (birth within)이라는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 목표를 성취했을 때 그들은 스릴 을 느 끼고 아주 만족하며 절정 에 도달했다고 느낄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절정인가? 아마 흥분의 절정, 만족의 절정, 환각적, 광란적 상태의 절정일 것이다. 이런 상태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은 그 들의 열정이다. 그러나 이 열정은 인간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본질적으로 인간 조건의 적절 한 해결을 향하지 않는 한 병적인 것이다. 그러한 열정은 더욱 위대한 인간의 성장이나 힘을 낳 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불구로 만든다. 극단적 쾌락주의자의 쾌락, 항상 새로운 물욕( 物 11
慾 )의 충족, 현 사회의 쾌락 등은 정도가 서로 다른 흥분 을 일으키지만 기쁨 을 갖다 주지는 못 한다. 실상 기쁨이 없기 때문에 항상 새롭고 한층 더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 사회는 3천 년 전에 헤브루 인들이 처했던 상황과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장 사악한 죄악 중의 하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들은 모든 사물의 충만함 가운데서 마음 속의 기쁨 과 즐거움 으로 주 하느님을 섬기지 않았다. <신명 기 28: 47> 기쁨은 생산 행위에 따른 부수물이다. 그것은 절정에 이르렀다가 급작스레 끝나 버리 는 절정 경험 (peak experience)이 아니고 오히려 사람의 본질적인 능력의 생산적 표현을 동반 하는 지속적 감정 상태이다. 기쁨은 순간적인 몰아( 沒 我 )의 불꽃이 아니다. 기쁨은 존재와 함께 오는 빛이다. 쾌락과 스릴은 소위 절정에 도달하고 난 후에는 슬픔을 낳는다. 왜냐하면 스릴은 경험했지만 그 용기( 容 器 )가 커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내적 힘은 증가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비생산적 활동의 권태를 돌파하려고 시도하였고 잠시 동안 이성과 사랑을 제외한 그의 모든 에너지를 결합 하였다. 그는 인간의 힘을 벗어나 초인( 超 人 )이 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그는 승리의 순간에 도 달한 것 같이 느끼지만 그 승리에는 깊은 슬픔이 뒤따른다. 그의 내부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다) 백 년이란 사람 목숨의 최대 한계여서 백 년을 사는 사람은 천에 하나도 안 된다. 설사 그러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어려서 안기어 있던 때로부터 늙어 힘없는 때까지가 거의 그 반을 차지할 것이고, 밤에 잠잘 때의 활동이 끝난 시간과 낮에 깨어 있을 적에 헛되이 잃는 시간이 또 거의 그 반을 차지할 것이다. 아프고 병들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자기를 잃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시간이 또 거의 그 반은 될 것이다. 십 수 년 동안을 헤아려 보건대 즐겁게 자득하면서 조그마한 걱정도 없는 때는 한시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살면서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무엇을 즐겨야 하는가?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을 입어야 하고 음악과 미인을 즐겨야 한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을 항상 만족스럽게 구비 할 수는 없고, 좋은 음악과 미인을 언제나 데리고 놀 수도 없다 그리고는 또 형벌과 상에 의하여 행동이 금하여지기도 하고 권면되기도 하며, 명예와 법에 의하여 나아가게도 되고 물러나게도 된 다. 황망히 한때의 헛된 명예를 다투고 그저 죽은 뒤에 남는 영화를 도모하여 우물쭈물 귀와 눈 으로 듣고 보는 것을 삼가고 몸과 뜻의 옳고 그름에 전전긍긍하면서 공연히 좋은 시절의 지극한 즐거움을 잃고 한시라도 자기 멋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이것이 형틀에 매어 있는 죄수와 무엇이 다른가? 태고적 사람들은 삶이 잠시 오는 것임을 알았고, 죽음은 잠시 가는 것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마음 을 따라 움직이면서 자연을 어기지 않았으니, 그가 좋아하는 것은 몸의 즐거움에 합당한 것이어 서 그것을 피해 가지 않았고 명예를 좇아 행동하지 않았다. 본성에 따라 노닐면서 만물이 좋아하 는 바를 거스르지 않았으며, 죽은 뒤의 명예는 취하지 않았다. (열자, 양주편) 12
예제5-근거활용형 15 다음 (가)의 글은 현대 소비사회의 특성을 묘사하고 있다. 오늘날 (나)와 (다)의 삶의 방식이 (가)의 소비사회와 갈등을 빚는 이유와 양상을 서술하고, 그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논술하시오. (800자) (가) 소비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상품의 논리가 일반화되어 노동과정이나 물질적 생산품뿐만 아니라 문 화, 섹슈얼리티, 인간관계, 심지어 환상과 개인적 욕망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모든 것이 이 논리 에 종속되어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모든 기능과 욕구가 이윤에 의해 대상화되고 조작된다고 하 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진열되어 구경거리가 된다는, 즉 이미지, 기호, 소비 가능한 모델로 환기되고 유발되고 편성된다는 보다 깊은 의미에서이다. 소비과정은 기호를 흡수하고 기 호에 의해 흡수되는 과정이다. 기호의 발신과 수신만이 있을 뿐이며 개인으로서의 존재는 기호의 조작과 계산 속에서 소멸한다. 소비시대의 인간은 자기 노동의 생산물뿐만 아니라 자기 욕구조차 도 직시하는 일이 없으며 자신의 모습과 마주 대하는 일도 없다. 그는 자신이 늘어놓은 기호들 속에 내재할 뿐이다. 초월성도 궁극성도 목적성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이 사회의 특징은 반성 의 부재, 자신에 대한 시각의 부재이다. 현대의 질서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는 장소였던 거울은 사라지고, 대신 쇼 윈도만이 존재한다. 거기에서 개인은 자신을 비춰보는 것이 아니라 대량의 기호화된 사물을 응시할 따름이며, 사회적 지위 등을 의미하는 기호의 질서 속으 로 흡수되어 버린다. 소비의 주체는 기호의 질서이다. 소비의 가장 아름다운 대상은 육체이다. 오 늘날 육체는 광고, 패션, 대중문화 등 모든 곳에 범람하고 있다. 육체를 둘러싼 위생, 영양, 의료 와 관련한 숭배의식, 젊음, 우아함, 남자다움 혹은 여자다움에 대한 강박관념, 미용, 건강, 날씬함 을 위한 식이요법, 이것들 모두는 육체가 구원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육체는 영혼 이 담당했던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문자 그대로 넘겨받았다. 오늘날 육체는 주체의 자율적 인 목적에 따라서가 아니라, 소비사회의 규범인 향락과 쾌락주의적 이윤창출의 원리에 따라서 다 시금 만들어진다. 이제 육체는 관리의 대상이 된다. 육체는 투자를 위한 자산처럼 다루어지고, 사 회적 지위를 표시하는 여러 기호 중의 하나로서 조작된다. (나) 그는 애정을 담은 눈길로 흘러가는 강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속이 맑게 들여다보이는 초록빛 강 물은 온갖 불가사의한 무늬를 만들어내며 수정처럼 빛나고 있었다. 찬연히 빛나는 진주들이 물 속 깊은 곳에서 솟아올라 물거품을 내며 거울 같은 수면 위를 헤엄쳐 다녔다. 그 물거품 속에는 하늘의 푸른빛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강물은 초록색, 하얀색, 투명한 하늘색, 그런 형형색색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 강물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이 강물은 나를 얼마나 황홀 하게 해주는가! 나는 이 강물에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가!' 그는 마음속으로부터 새로이 깨어난 음 성이 자신을 향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음성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강물을 사랑하라!그 곁에 머물러라! 강물로부터 배우라!' 그는 강물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강물이 들려주는 말에 귀 를 기울이기로 했다. 강물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다면, 더 많은 비밀, 나아가 모든 비밀까지도 이 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얻기를 탐내는 자는 만족함이 없으니, 모두가 사치를 좋아하는 일념 때문이다. 만약 마음이 담담 하여 만족할 줄 알면 세상 재물을 구해서 어디에 쓰겠는가. 청풍명월( 淸 風 明 月 )은 돈으로 사는 것 이 아니요, 대 울타리 띠집에도 돈 쓸 일이 없고, 책을 읽고 도( 道 )를 이야기하는 데도 돈이 필요 하지 않으며, 자신을 깨끗이 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데도 돈이 필요하지 않다. 다만 사람을 구제하 13
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는 돈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을 가다듬고 성찰하면 세상 맛에서 초탈하게 될 것이니 탐욕스러운 마음이 또 어디로부터 나오겠는가? 14
LEVEL 2 예제1-비교요약형 16 다음 제시문의 핵심사항을 요약하시오. (400자) 정당방위에는 두 가지 기본 사상이 깔려 있다. 그 하나가 자기 보존의 사상이다. 누구나 타인의 위법한 공격에 직면할 때 자기 자신 또는 제 3자를 보호하기 위해 방어 조치를 취하는 것은 개인 의 자연권을 보호하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개인적으로 향유( 享 有 )하는 이익이 눈앞에서 위 법 부당한 공격으로 침해되는 것을 보고서도 오히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똥이 더러워 피하 지 무서워 피하는 것이냐 라고 달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법은 보통 사람들에게 오히려 이 경우 자기 보존을 위해 공격자를 무력화시킬 선제공격이나 기선을 제압( 制 壓 )하는 공격을 허용하고 있 는 것이다. 정당방위는 개인의 자기 보존 사상 외에도 법이 무엇인가를 확충시켜 주어야 한다는 사상을 밑에 깔고 있다. 자기 자신을 위법 부당한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자는 이로써 법질서 전체의 효력까 지도 방어하는 것이다. 이 사상을 옛날부터 부정( 不 正 ) 대 정( 正 )의 원칙 이라고 불러 왔다. 즉 법은 불법에 양보해서는 안 되며, 정당한 것이 부당한 것에 길을 비켜 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 처럼 법질서 전체의 효력을 확보하기 위한 정당방위의 옳음에 대한 신봉( 信 奉 ) 때문에 정당방위 는 가차 없는 방어 수단을 들이대도 허용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침해 받은 이익이 재산적 가치밖에 없는 것인데도 방어 수단으로는 그 공격자의 인명에 손해를 가해도 허용된다. 정당방위의 이 같은 과단성( 果 斷 性 )*이 제대로 인식된 것은 우리 법문화에서 비교적 최근의 일이 다. 196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 법원은 정당방위의 성립 여부를 판단할 때 아직도 큰 이익과 작은 이익의 갈등 사이를 비교하려는 법익 교량( 法 益 較 量 )의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부정( 不 正 ) 대 정( 正 )의 사상은 피해자가 도망할 수 있는 경우에 도망하지 아니하고 가해자에게 공격한 경우 까지도 허용하는 입장이다. 부당한 공격에 정당한 것이 길을 비켜야 할 이유가 없듯 공격을 당하 는 자에게 비겁하게 도망하라고 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정당방위가 무제한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자기 보전과 법질서의 확충이라는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원칙적인 금지에 대해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것이지 정당방위가 당당히 나서서 꼭 실현해야 할 권리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과격한 정당방위 에도 그 내재적인 한계가 있다. 먼저 방어 행위는 사실상 방어의 필요성을 갖춘 것이어야 한다. 방어자는 위법한 공격에 대해 불 안전한 방어 수단만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주먹으로 방어해도 될 일에 무기를 사용했다 해서 언 제나 정당방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방어자는 공격을 확실하고 위험 없 이 막기 위하여 많은 수단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 중 가장 경미( 輕 微 )한 것으로도 중한 것과 동 일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수단을 선택해야 한다. 더 나아가 방어 행위는 규범적으로 요구된 행위여야 한다. 법질서 전체의 입장에서 요구되지 않 은 방어 행위는 정당방위가 아니라 권리 남용에 해당한다. 요구된 행위이기 위해서는 목적과 수 단의 상당성( 相 當 性 )**이 있어야 한다. 방어 행위에 의해 야기( 惹 起 )된 손해가 공격 위험에 비해 극단적인 불균형을 이룰 때 정당방위의 자기 보전 근거가 탈락된다. 만약 이 같은 극단적 불균형 이 존재함에도 방어 행위를 실행한다면 그것은 권리 남용일 뿐 정당방위는 아니다. (김일수, 정당 방위는 어디까지 허용되나) *과단성:일을 딱 잘라 결정하는 성질 **상당성:어떤 일이 어떤 경우나 상태에 알맞거나 합당한 상태를 이루는 것 15
예제2-대립관계형 17 다음 제시문을 대립되는 논점이 잘 드러나도록 비교하시오. (500자) (가) 개인들이 모일 때마다 곧바로 군중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서로 뒤섞이고 합해져서 변모한다. 그들은 자신의 성질을 억누르는 공통된 성질을 획득하며, 자신들의 개별적인 의지를 침 묵시키는 집단의지에 복종하게 된다. 이러한 압력은 실제적인 위협을 나타내는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인가에 휩쓸리고 있다고 느낀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항상 움직이며 우글거리는 이 사회적 동물을 볼 때, 어떤 사람들은 그 속에 무턱대고 자신을 던지기 전에 뒤로 살짝 물러서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진짜 공포 증을 느낀다. 이러한 반응들은 군중의 힘과 그것이 일으키는 육체적인 반향( 反 響 ) 그리고 그 반향 을 통해서 사람들이 군중에게 있다고 추정하는 효과를 증명한다. 모파상(Maupassant)은 필적할 만한 학자가 별로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그 효과를 훌륭하게 묘사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게다가 또 하나의 다른 이유에서 나는 군중을 싫어한다. 나는 극장에 들어갈 수도 공적인 축제 에 참가할 수도 없다. 그곳에서 나는 곧 마치 저항할 수 없는 신비한 영향력과 전력을 다해 싸우 는 것처럼 괴상하고 참을 수 없는 불편함과 굉장한 신경질을 느낀다. 그리고 사실 나는 나의 마 음속에 파고들려고 하는 군중의 혼과 싸운다. 나는 사람이 혼자서 살 때는 지성이 강해지고 향상 되지만, 다른 사람들과 섞이면 지성이 약해지고 쇠퇴하는 것을 여러 번 확인하였다. 사람들과의 접촉, 널리 퍼져 있는 관념, 사람들이 말하는 모든 것, 듣고 들리며 또 대답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은 사고에 영향을 준다. 여러 관념들이 머리에서 머리로, 집에서 집으로, 거리에서 거리로, 도 시에서 도시로, 민중에서 민중으로 밀려왔다가 사라지면서 어떤 수준이 확립되는데, 그것은 수많 은 개인의 집합체 전체가 만들어 낸 지성의 평균이다. 사람이 혼자 있을 때 갖고 있는 자질, 즉 지적인 창의력, 자유의지, 분별 있는 성찰력, 심지어는 통찰력 등의 자질이 그가 많은 사람들 속 에 섞이면 일반적으로 곧 사라진다. (나) 노동의 생산물은 노동의 대상과 사용된 재료에 노동이 첨가된 것이다. 이 생산물 가치의 대소( 大 小 )에 비례해서 고용주의 이윤이 크거나 작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자본을 사용해 서 노동을 유지하는 것은 이윤을 얻기 위해서다. 따라서 그는 그 생산물이 가장 큰 가치를 가질 수 있게 하는 노동, 즉 그 생산물이 가장 큰 양의 화폐나 다른 재화와 교환될 수 있게 하는 노동 에 자기의 자본을 사용하려고 힘쓸 것이다. 그러나 한 사회의 연간수입은 그 사회의 노동의 연간 총생산물의 교환가치와 정확하게 같다. 또 는 오히려 그것의 교환가치와 정확하게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각 개인이 최선을 다해 자기 자본 을 본국 노동의 유지에 사용하고, 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노동을 이끈다면, 각 개인 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연간 수입이 가능한 한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 된다. 사실 그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지도 않고, 공공의 이익을 그가 얼 마나 촉진하는지도 모른다. 외국 노동보다 본국 노동의 유지를 선호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 의 안전을 위해서였고, 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그 노동을 이끈 것은 오로지 자기 자 신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이 경우 그는, 다른 많은 경우처럼, 보이지 않는 손(an invisible hand) 에 이끌려서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회에 좋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흔히, 그 자 신이 진실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는 경우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그것을 증진시킨 다. 나는 공공이익을 위해 사업한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좋은 일을 많이 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사 16
실 상인들 사이에 이러한 허풍은 일반적인 것도 아니며, 상인들은 말 몇 마디만 해도 그런 허풍 을 떨지 않는다. 각 개인은 자기의 자본을 국내산업의 어느 분야에 투자하면 좋은지, 그리고 어느 산업분야의 생 산물이 가장 큰 가치를 가지는지에 대해, 자신의 현지 상황에 근거해서 어떠한 정치가나 입법자 보다도 훨씬 더 잘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17
예제3-대립관계형 18 다음 제시문을 대립되는 논점이 잘 드러나도록 비교하시오. (800자) (가) 산업혁명 이후 기술 발달로 인류는 풍요를 누려 왔다. 그러나 인류 문명은 써버리면 없어지고 마 는 고갈성의 자원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풍요를 위한 대량 생산은 자원의 고갈이라는 문제 를 만들었으며, 개발에 따른 환경 변화와 환경 문제도 불가피하게 발생하였다. 이에 인류는 개발 과 보전을 두고 논쟁과 대립을 해 왔으며, 결국 타협점으로 찾은 것이 지속 가능한 개발이다. 1992년 유엔 환경 개발 회의에서 채택된 리우 지구 환경 선언 은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환경적 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개발 을 추구하도록 요구하였다. 지속 가능한 개발이란 장기적인 영향 을 고려한 개발이며, 세대 간 형평성을 고려한 개발, 철저한 오염 관리로 생태계를 보전하려는 개 발이다. 또, 자원의 순환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개발이며, 최적의 생활 조건을 고집하 지 않는 개발이다. 우리의 다음 세대로 쾌적한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꾸려 갈, 권리 가 있음을 인정하고 배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고등학교 사회, 교학사) (나) 지구상에 사는 생명체가 만들어지는 데에는 수억 년이 걸렸다. 마치 영겁처럼 느껴지는 이 기간 동안 생물들은 계속 진화하고 분화해 가면서 주변 환경에 적응하고 균형을 이루어 나갔다. 그런 생물들을 형성하고 인도하는 주변 환경에는 도움이 되는 요소뿐 아니라 적대적인 요소가 포함되 어 있다. 어떤 암석은 위험한 방사능을 방출한다. 모든 생명체의 에너지원이 되는 태양 빛에도 해 로운 방사능이 존재한다. 단지 몇 년이 아니라 수천 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생명체는 환경에 적 응하고 그 결과 적절한 균형 상태에 도달한다. 이렇게 시간은 생명체의 생존에 있어서 필수적 요 소였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충분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충동적이고 부주의한 활동에 의해 자연의 신중한 속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빠른 속 도로 새로운 변화가 초래된다. 방사능은 암석에서 방출되거나 우주로부터 오기도 하고, 지구상체 생명체가 존재하기 전부터 있던 태양 자외선에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오늘날의 방사능은 원자 조작을 통해 만들어진 인공적인 산물이다. 생물들이 적응해야 할 대상은 칼슘, 규소, 구리를 비롯해 암석으로부터 씻겨 내려와 강을 타고 바다로 흘러가는 광물질만이 아 니다. 이제는 인간의 상상력이 고안해내고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그렇기 때문에 자연상태에서는 어떤 대응 상대도 없는 합성물질에도 적응해야 한다. 생명체가 화학물질에 적응하려면 자연의 척도에 따라 적절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는 그저 인간이 생각하는 몇 년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몇 세대에 이르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설령 기적이 일어나 이런 물질에 쉽게 적응한다고 해도, 실험실로부터 계속 새로운 화학물질들이 꼬리 를 물고 쏟아져 나올 것이므로 별 성과가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만 매년 500여 가지의 화학물질 이 등장해 사용된다. 이 놀라운 수치가 암시하는 것은 인간과 동물이 매년 500종의 새로운 화학 물질에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인데, 이는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다) 생산 항목에 포함되는 것은 경제 계산에 종속되지만, 소비 항목에 포함되는 것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실제 삶은 이렇게 분류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생산자로서의 인간과 소비자로서의 인간은 사실상 생산과 소비가 항시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동일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노동 자도 공장에서 흔히 노동 조건 이라고 불리는 어떠한 쾌적함 을 소비하며, 이 쾌적함 에서 불충 분함이 나타나면 그 일을 계속할 수 없거나 포기하게 된다. 아울러 물과 비누를 소비하는 사람들 18
조차 청결함을 생산하는 존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중략) 이 이중성은 토지를 이용하는 데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농부는 단순히 가능한 방법을 이용 해서 비용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여야 하는 생산자로 여겨질 뿐이다. 이 과정에서 그가 소비자로 서 토양의 건강성과 아름다운 경관을 파괴하며, 그 결과로 인구를 토지에서 몰아내고 도시의 과 밀화를 초래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오늘날 대농, 원예업자, 식품 제조업자, 과수원 운영자처럼 자신의 생산물을 소비한다고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다행스럽게도 충 분한 돈이 있으므로 유독 물질을 이용하지 않고 유기 농법으로 생산된 제품을 구입할 수 있다 고 말한다. 이들에게 왜 유기농법을 채택해서 유독 물질의 이용을 피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이들은 그럴 정도의 경제적 여유는 없다고 대답한다. 여기서 생산자로서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과 소비 자로서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양자는 동일한 인간이므로, 인간 - 또는 사회 -이 실질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끝없는 혼동을 야기한다. 토지와 그 위에 살고 있는 생명체를 오로지 생산 요소 로만 취급하는 한, 이러한 혼동에서 벗어 날 길은 없다. 물론 이것들은 생산수단, 즉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이것들에게 이 특성은 부차적인 것이지, 일차적인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것들은 목적 자체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메타경제학적인 것이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신성하다고 말해도 이성적으로 타당할 수 있다. 인간 은 이것들을 만들지 못한다. 자신이 만들지도 못하고 만들 수도 없으며, 한번 파괴되면 재창조할 수도 없는 것을 자신이 만든 것과 똑같은 방식과 정신으로 취급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행동이다. (E. 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라) 농업경제학자들에게는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가 증가하면 식물 성장이 촉진되고 온실 농업이 발달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지구 전체에서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하면 물 사용의 효율이 증가 할 뿐만 아니라 식물 생산성이 향상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이산화탄소 증가로 인해 따뜻해진 기후는 식물의 태양 에너지 전환 능력을 향상시키기 때문에 지구 온난화가 농업에 좋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예측은 이치에 맞다. 이러한 이슈에 관한 경제적 측면의 연구들에서도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 적당한 지구 온난화는 국민총생산과 평균 소득을 증가시켜 경제적으로 순이익 을 창출해낼 가능성이 많다. (중략) 지구 온난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가장 끔찍하고 널리 알려진 예측 중 하나는 해수면 상 승이다. 온난화로 인해 해수면이 상승하면 방글라데시와 같은 많은 섬과 해안 저지대가 수몰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그러나 사실 해수면은 지금도 상승하고 있으며 이미 수천 년 동안 계속 상승 해왔다. 한때는 시베리아와 알래스카가 육지로 연결되어 인류가 아시아에서 북미까지 걸어서 이 주할 만큼 해수면이 매우 낮았다. 최근 연구에서 지난 3,000년 동안 해수면이 1세기에 약 12센 티미터 상승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20세기에 직접 관측한 기록을 분석한 일부 연구에서는 해수면 이 더 빠른 속도인, 1세기에 약 10~25센티미터 상승하고 있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연구들에서는 그 속도가 이보다는 느리다고 결론지었다. 상승 정도가 얼마나 가속되었든 간 에 해수면 변화는 산업화 이전에도 발생했던 것이다. (잭 M. 홀랜더, 환경 위기의 진실) (마) 신과 인간의 이성은 인간에게 이 대지를 정복할 것을 명한다. 즉 이 대지를 생활에 도움이 되도 록 개량하여 그곳에다 그 자신의 것인 어떤 것, 즉 그의 노동력을 투하할 것을 명한 것이다. 이러 한 신의 명령에 따라서, 토지의 어떤 부분을 점유하여 그것을 갈고 씨를 뿌린 사람은 그의 노동 력을 그것에다 첨가한 셈이다. 따라서 이것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은 아무런 권리도 없으며, 이것 을 그로부터 빼앗으려고 한다면, 그러한 행동은 그에 대한 권리의 침해가 되는 것이다. 또한 토지의 어떤 일부분이라도 그것을 개량함으로써 - 즉, 그것에 울타리를 치고 개간을 함으로 써 - 이와 같이 점유하는 일은 다른 어떠한 사람에 대해서도 손해를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19
땅 위에는 아직도 토지를 손에 넣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음껏 이용하고도 남을 만한 정도 의 전과 다름없이 충분한 토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로 누군가가 자기 자신을 위 하여 공유지를 울타리로 둘러싸서 점유한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몫으로서 남겨진 토지가 조금 도 감소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충분히 이용할 수 있을 정도의 것을 남 겨 놓기만 한다면 그는 전연 아무것도 점유하지 않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잔뜩 배 불리 물을 퍼마셨다 해도 그 후에도 똑같은 양의 물이 여전히 남아 있어 자기도 그 물로써 충분 히 갈증을 풀 수만 있다면 누구도 그것 때문에 손해를 입었다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존 로크, 통치론) (바) 가난한 사람들이 경제 수준이 향상되고 더욱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되면 먼저 자신이나 가족 의 생계와 건강 같은 기본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역사를 통해, 지금은 선진국 국 민이 된 사람들도 가난했던 과거에 이렇게 행동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런 사실을 확신할 수 있 다. 부와 자유(둘 다 중요하다)가 증가하면 사람들은 정치적 의지, 경제적 자원, 그리고 기술적 독 창성을 환경 문제에 관해 좀더 광범위하게 논의하는 데 활용하려는 동기를 얻게 되고, 실제 활용 할 수 있게 된다.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지만, 건전한 경제와 환경의 질 사이에 본질적인 갈등은 없으며 실제로 이 둘은 함께 발전하는 관계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부유한 국가에서 활발한 경제 성장과 지속적인 환경 개선이 동시에 일어난 사실은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미래 산업국가에서 우수한 환경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환경 친화적이고 경제성 도 뛰어난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활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산업국가뿐만 아니라 새롭 게 시작하는 개발도상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행히도 오늘날의 개발도상국들은 과거에 비해 유 리한 점이 많다. 지금의 개발도상국은 각 기술 분야에서 모든 경험적 학습 과정을 다시 밟을 필 요가 없다. 그들은 초기 산업국가들이 지나간 경로나 실수들을 뛰어넘고 21세기의 친환경적이며 더욱 우수한 기술에 곧장 도달할 수 있다. (중략) 21세기 소비자 중심주의는 낡은 공해 유발 기술을 자원 효율적이고 환경 친화적인 새로운 기술 로 점점 대체하게 될 것이다. 좋은 환경의 질을 유지하는 핵심 열쇠인 기술 혁신과 경제적 효율 성은 개발도상국들이 부유한 민주국가가 되면서 점점 떠 뿌리내리게 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잭 M. 홀랜더, 환경 위기의 진실) (사) 오늘날 생산 방법이 이미 산업시대 인간의 본질을 침식하고 있음은 명확하지 않은가? 많은 사람 들에게는 이것이 결코 명확한 게 아니겠지만 말이다. 오히려 이들은 생산 문제가 해결된 오늘날 이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과연 전보다 잘 먹고 잘 입고, 쾌적한 주거 환경 에서 생활하며, 좋은 교육을 받고 있는가? 물론 그렇다. 부유한 국가에서, 모두는 아닐지라도 대 다수가 그러하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본질 이라고 언급했던 말이 의미하는 바는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국민총생산으로 측정될 수 없다. 그것은 어떤 상실의 징후를 제외하고는 결코 무엇도 측 정할 수 없다. (중략) 생산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신념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치명적인 오류 중의 한 가지라고 말했 다. 필자가 보건대, 이 환상은 주로 근대 산업체계가 지적 정교함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기 반 자체를 잠식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에서 비롯된 듯 보인다. 경제학자들 용어를 빌자면, 이 체계는 대체 불가능한 자본에 의존하면서도 이것을 즐겨 소득으로 취급한다. (아) 성장 이 0퍼센트 주위를 왔다갔다하는 오늘날과 같은 경제 상황에서도 고용 협약당사자들 이 지 키려는 낡은 원칙은 예전에도 항상 그랬듯이 비현실적인 희망사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20
언어에서 벌써 분명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경제 생산이 현재 수준에서 정체해 있는데도 여전히 성장 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단어는 제로 성장 이다. 더군다나 생산 수치 가 전체적으로 감소할 때도 여전히 성장이란 말이 사용된다. 마이너스 성장 이라는 표현으로 말 이다. 이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난센스다! 특별한 형태의 성장이라는 말인가? 중요한 것은 항상 성장이다. 성장 없이는 아무 일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경제적 몰이 해를 우리는 아직도 현실 정치라고 부르고 있다. 착각 속에 빠진 정치인들의 언어 속에서 이 사 실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성장이 전부가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성장 없이는 모든 것 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들은 옛 것을 관리할 능력도 거의 없고, 새로운 것은 꾸미기에는 상상력 이 너무 부족한 것이다. 경제와 사회 분야의 늙은 전문정치인들이 새로운 행태 문제가 낡은 사회 문제를 몰아냈다는 것을 아직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심각한 보복이 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생존의 기초 를 파괴하는 것보다 더 비사회적인 것은 없다. 우리 자식들과 손자들은 우리가 연금을 더 받거나 덜 받는 것을 가지고 우리를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맑은 물, 건강한 땅, 그리고 깨끗한 공기를 물려주는 것을 가지고 우리를 평가할 것이다. 오늘날의 대다수 경제학자 와 정치가는 여전히 시장은 그 자체로 도덕적이고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는다 고 주장했던 200년 전의 경제이론가이자 도덕철학자 아담 스미스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이 경제종교는 도 그마가 되어버렸다. 종교의 맹신자들은 순수한 시장경제(사실은 순수하지도 않고 경제적이지도 않다)에서는 가난한 자와 부자 사이의 간격이 점점 더 크게 벌어진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이 순수한 시장경제 가 초래하는 환경손상은 또한 경제 파탄을 가져온다. 스위스의 사회윤리학자 한스 루(Hans Ruh)는 시장이 그 자체로서는 도덕적일 수 없다는 것을 분 명하게 보여주는 네 가지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1. 시장은 출발점에서 참여자들에게 주어진 기회가 균등하지 않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장애 인과 병자를 배제하는 것이다. 2. 생태적인 고려를 조금도 하지 않는다. 3. 단기적으로만 생각한다. 4. 가치를 모른다. 예를 들어 시장은 생명을 유지시키는 식품뿐 아니라 생명을 파괴하는 무기도 생산한다. 그 의미 에 대해서는 조금도 묻지 않고 말이다. 그러나 의미에 대한 물음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어 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생산해야 하는가? 살기 위해서 생산하는가, 생산하기 위해서 사는가? 생태사회적인 시장경제는 경제적, 생태적, 사회적, 도덕적 요소들이 서로 어우러져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정부, 기업, 투자자, 그리고 소비자들이 국가 내에서뿐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모든 행동을 도덕적인 기준에 맞출 때에만 가능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수준으로부터 까마득하게 떨 어져 있다. (프란츠 알트, 생태적 경제기적) (자) 생태계의 위기의 원인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는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있다. 생태주의는 생명 중심적 평등성, 생물학적 평등성을 주장한다. 세계는 최소 단위로 분해될 수 없는 것으로, 통일된 전체를 구성해 주는 여러 부분들이 복잡하게 상호 관계를 맺고 있는 그물망이며, 본질적으로 역 동성을 갖고 있다. 세계는 실체의 존재론으로서가 아니라 관계의 존재론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우 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의견상 불변의 사물들도 사실은 어떤 본질적인 과정의 작용, 즉 자연의 지속적이고 역동적인 흐름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생태주의는 태양과 물 그리고 바람의 순환 과정 및 강물의 흐름과 더불어 작동되는 태양력과 같은 소프트 에너지 생산을 지지한다. 또한 우 리와 지구의 상호 의존성을 반영하는 적절한 기술의 발전을 요구하며 자연적 해충방제 수단을 사 용하는 재생 농업을 옹호한다. 21
(차) 과학 기술은 생활 수준을 향상시켰고, 통신 및 교통 시설의 발전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인간에 게 충분한 여가를 가져다 주었다. 과학기술에 의한 경제 성장은 인류가 계속 추구해 나가야 할 지향점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이를 통한 경제 성장이야말로 자원 부족, 환경문제 등 인류가 직 면해 있는 문제점을 해결해 줄 수 있다. 과학 기술의 발달이 오늘날의 환경문제를 낳았다 하더라 도, 이는 과학의 포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과학을 더욱 더 폭넓게 사용함으로써 근절될 수 있다. 22
예제4-공통차이형 19 다음 제시문을 읽고 논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약술하시오. (500자) (가) 주희( 朱 熹 )는 경( 敬 ) 을 성문( 聖 門 )의 제일의( 第 一 義 )로 삼고, 요( 堯 )가 천하를 다스린 것이나 孔 子 의 이른바 극기복례( 克 己 復 禮 )나 기타의 千 言 萬 語 도 모두 敬 이라는 글자 하나로 귀결된다고 하 였다. 敬 을 분류하면 內 外 의 두 방면이 있다. 內 는 조금도 게으름 없이 마음이 잘못되지 않은지 살피는 것이고 外 는 기거동작( 起 居 動 作 )을 조심성 있게 하는 것인데, 이른바 성찰( 省 察 )은 敬 의 내적 방면이고 정좌( 靜 坐 )는 敬 의 외적 방면이다. 이러한 內 外 의 노력이 어우러져야 하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이는 天 地 의 원리에 자신을 합치시키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으로서, 기질지성 ( 氣 質 之 性 )의 작용으로 말미암은 인욕( 人 欲 )을 억제하고 天 地 의 선한 이치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 이다. 주자( 周 子 )가 주정( 主 靜 )*을 말하고 정이천( 程 伊 川 )이 靜 坐 를 높이 산 이래 靜 坐 에 찬성하지 않는 학자가 없게 되었다. 주희의 이른바 敬 은 동정일관( 動 靜 一 貫 ), 즉 움직임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항상 일관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理 와 氣 의 관계에 대해 양자의 대등한 지위를 인정하는 주희의 理 氣 二 元 論 的 입장에서는 天 理 의 사회적 표현인 도덕 규범과 禮 는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하는 객관적 실체이다. 도덕 규범과 禮 가 객관적 실체이기에 만인에게 공통적으로 적 용되어야 하듯이 敬 또한 天 理 에 이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공통적인 수행 과정이 되어야 하는 것 이다. ( 馮 友 蘭, 중국철학사 ) * 주정( 主 靜 ) : 욕망을 가라앉혀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 (나) 인간 정신은 태고 이래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으며 과학과 기술의 진보와는 달리 역사가 처음 시 작되었을 때나 지금이나 항상 똑같은 상태에 있다. 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 정신도 진보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증명할 수 있다. 외적 강제 를 자기화 또는 내면화하는 과정은 인류의 발전과 보조를 같이 한다. 즉 인간의 특별한 정신 기제인 초자아(super ego)가 수용한 외 적 강제를 자신의 도덕 기준에 포함시키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거듭하면서 인류의 발전이 진행되 어 온 것이다. 우리는 이런 변화 과정을 어린이가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로 성장해 나가는 것 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초자아는 엄격한 이상적 기준을 요구하고, 그것에 복종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한다. 본능의 욕구가 초자아를 압도하게 되면 초자아는 무의식의 뒷전으로 물러나서 도덕적 비난의 목 소리만을 내게 된다. 그런데 초자아의 요구를 의식의 전면으로 끌어내 보면, 그것은 현재의 문명 적 초자아의 명령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자아가 강화된 사람은 문명의 대립자에서 문 명의 전달자로 변하게 된다. 그러므로 초자아의 강화는 심리학적으로 볼 때 귀중한 문화 유산이 라고 할 수 있다. (S. 프로이트, 환상의 미래, 문명 속의 불만 ) 23
예제5-근거활용형 20 다음 제시문들은 쾌락 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을 보이고 있다. 제시문 (가)를 긍정적 논거로 활용하 여 쾌락 의 의미에 대해 논술하라. (단, 반드시 제시문 (나), (다)의 내용을 구체적 논거로 활용할 것.) (1000자) (가) 모든 감성에 있어서 각기 거기에 대응하는 쾌락이 생길 수 있음은 분명한 일이다. (우리는 보는 것이나 듣는 것에 대해서 즐겁다고 말한다.) 또한 감성이 최선의 상태에 있으면서 최선의 대상에 대해서 활동할 때에 두드러지게 쾌락이 생긴다는 것도 분명한 일이다. 대상과 지각자가 모두 최 선의 상태에 있을 때에는 언제나 쾌락이 있는 법이다. 거기엔 쾌락의 주체와 객체가 모두 있으니 말이다. 쾌락이 활동을 완전하게 하는 것은 활동의 주체에 내재하는 상태가 그렇게 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쾌락은 마치 한창 나이의 왕성한 기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따르는 꽃다운 청춘과 같은, 부가적인 하나의 목적으로서 활동을 완전케 한다. 그러므로 지적 대상 혹은 감성적 대상과, 식별하는 능력 혹은 관조하는 능력이 다 같이 마땅히 있어야 할 상태에 있는 한 그 활동 에는 언제나 쾌락이 있을 것이다. 주체와 객체가 다 같이 불변하고 또 같은 방식으로 서로 관계 하고 있을 때에는 같은 결과가 자연히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무도 계속해서 즐거워할 수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우리가 피로해지기 때문에 그러한 것인가? 사실 모든 사람은 계속적으로 활동할 수 없다. 그러므로 쾌락 역시 계속적일 수 없다. 쾌 락은 활동에 수반하는 것이니 말이다. 어떤 일들이 새로운 것일 때 우리를 즐겁게 해주지만, 얼마 있으면 처음만큼 즐겁게 해주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것은 마치 어떤 물건을 우리가 응 시할 때에 우리의 시각이 그렇듯이 처음에는 정신이 자극을 받아 그런 일들에 대해서 강렬히 활 동하지만, 얼마 후에는 우리의 활동이 이완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또한 쾌락도 힘을 잃게 되 는 것이다. 누구나 살기를 희구하는 까닭에 또한 쾌락을 욕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활동 이요 또 사람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것에 관해서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능력을 가지고 활동 한다. 가령 음악가는 여러 가지 음률에 관해서 청각으로 활동하고,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론 적인 문제에 관하여 이지( 理 智 )로 활동한다. 그런데 쾌락은 이러한 활동들을 완전케 하며, 따라서 사람들이 욕구하는 삶도 완전케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쾌락을 찾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중 략) 사실 활동이 없으면 쾌락이 생기지 않으며, 또 모든 활동은 거기에 따르는 쾌락으로 말미암아 완 전하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나) 쾌락이란 무엇인가? 이 말이 여러 가지로 쓰이고 있긴 하지만 가장 많이 쓰이는 용례로 볼 때 (살아 있다는 의미에서의) 능동성의 충족과는 무관한 욕망의 충족이라고 정의되기가 더 쉬울 것 이다. 그런 쾌락은 강도가 높은 것일 수도 있다. 사회적 성공을 거둠으로써 느끼는 쾌락, 돈을 많 이 버는 데서 느끼는 쾌락, 복권이 당첨됨으로써 느끼는 쾌락, 보통 말하는 성적 쾌락, 맘껏 먹는 데서 느끼는 쾌락, 경주에서 이기는 쾌락, 음주 환각 약품 등에 의해 고양된 상태, 혹은 살아 있 는 것을 죽이거나 난도질하려는 격정을 충족시키는 데서 느끼는 쾌락 등이 예거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부유해지거나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바쁘다는 의미로 매우 활동적이어야 하지만 내 적 탄생 (birth within)이라는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 목표를 성취했을 때 그들은 스릴 을 느 끼고 아주 만족하며 절정 에 도달했다고 느낄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절정인가? 아마 흥분의 절정, 만족의 절정, 환각적, 광란적 상태의 절정일 것이다. 이런 상태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은 그 들의 열정이다. 그러나 이 열정은 인간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본질적으로 인간 조건의 적절 24
한 해결을 향하지 않는 한 병적인 것이다. 그러한 열정은 더욱 위대한 인간의 성장이나 힘을 낳 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불구로 만든다. 극단적 쾌락주의자의 쾌락, 항상 새로운 물욕( 物 慾 )의 충족, 현 사회의 쾌락 등은 정도가 서로 다른 흥분 을 일으키지만 기쁨 을 갖다 주지는 못 한다. 실상 기쁨이 없기 때문에 항상 새롭고 한층 더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 사회는 3천 년 전에 헤브루 인들이 처했던 상황과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장 사악한 죄악 중의 하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들은 모든 사물의 충만함 가운데서 마음 속의 기쁨 과 즐거움 으로 주 하느님을 섬기지 않았다. <신명 기 28: 47> 기쁨은 생산 행위에 따른 부수물이다. 그것은 절정에 이르렀다가 급작스레 끝나 버리 는 절정 경험 (peak experience)이 아니고 오히려 사람의 본질적인 능력의 생산적 표현을 동반 하는 지속적 감정 상태이다. 기쁨은 순간적인 몰아( 沒 我 )의 불꽃이 아니다. 기쁨은 존재와 함께 오는 빛이다. 쾌락과 스릴은 소위 절정에 도달하고 난 후에는 슬픔을 낳는다. 왜냐하면 스릴은 경험했지만 그 용기( 容 器 )가 커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내적 힘은 증가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비생산적 활동의 권태를 돌파하려고 시도하였고 잠시 동안 이성과 사랑을 제외한 그의 모든 에너지를 결합 하였다. 그는 인간의 힘을 벗어나 초인( 超 人 )이 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그는 승리의 순간에 도 달한 것 같이 느끼지만 그 승리에는 깊은 슬픔이 뒤따른다. 그의 내부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다) 관능의 숭배는, 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이따금 비난 받아 왔다. 그것은 인간이 그 자신보다도 더 강하다고 여기는 정열과 감정에 대해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고, 또한 인간만큼 고도로 조직화되지 않은 존재 형태를 가진 것에도 관능이 있다고 의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 들이 관능의 참다운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것을 야만적이고 동물적인 것으로 여기 는 것은, 그들이 아름다움에 대한 섬세한 본능을 그 지배적인 성격으로 하는 새로운 영성( 靈 性 )의 요소로 관능을 승화시키지 못하고 굶주림과 고통으로 그것을 억제하고 말살하려 해 왔기 때문이 라고 도리언 그레이는 생각했다. 역사 속의 인간을 되돌아보았을 때, 그는 일종의 상실감에 사로 잡혔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포기되어 왔던가! 더구나 아무런 의미도 없이! 거기엔 격렬하고도 완 고한 거부( 拒 否 ), 기이한 형태의 자기 학대와 자기 부정이 있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공포심이며, 그 결과는 인간이 무식하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써 온 그 상상적인 타락보다도 훨씬 더 무서운 타락이었다. (중략) 우리 시대에 야릇한 부흥을 보이고 있는 가혹하고 꼴사나운 청교도주의( 淸 敎 徒 主 義 )로부터 인생 을 구할 새로운 쾌락주의 가 일어나야만 한다. 그것은 틀림없이 지성( 知 性 )에도 도움을 주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떠한 형태의 것일지라도 정열적인 체험을 희생으로 하는 이론이나 체계를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실제로, 쾌락주의의 목적은 체험 그 자체여야 하는 것이지, 체험이 달든 쓰든 간에 그 결과여서는 안 된다. 관능을 죽이는 금욕주의에 대해서는, 역시 관능을 무디게 하는 저속한 방탕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쾌락주의가 전혀 관여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쾌락주의는 그 자체가 순간에 불과한 인생의 모든 순간에 자기를 집중하게 하는 것을 인간에게 가르쳐야만 한다. (중략) 우리는 그만두었던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렇게 되면 판에 박은 듯한 습관 이 똑같이 지루하게 되풀이되는 속에서 힘을 지속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는 두려운 느낌에 어느새 사로잡히게 된다. 어쩌면,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뜨면 밤의 어둠 속에서 우리의 쾌락을 위해 새로 이 개조된 세계, 모든 사물이 신선한 형태와 색채를 드러내어 일변하거나 그 전과는 다른 비밀을 간직한 세계, 과거는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적어도 의무라든가 후회라든가 하는 의식적인 형태로 는 남아 있지 않은 희열의 회상에까지도 쓰라림이 따르고, 쾌락의 기억에도 고통이 있으므로 그 와 같은 세계가 찾아오기를 열광적으로 동경하게 될지도 모른다. 25
도리언 그레이에게 있어선 그와 같은 세계의 창조야말로 인생의 참다운 목적이거나 적어도 참다 운 목적 중의 하나인 것같이 여겨졌다. 그리고 새로우면서도 즐겁고, 더욱이 로맨스에는 없어서는 안 될 그 이상한 요소를 가진 온갖 감각들을 추구함에 있어서, 그는 때때로 그의 천성에 전혀 어 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어떤 사고 방식을 받아들여, 그 미묘한 영향력에 몸을 맡기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를테면 그 색조를 포착하여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켰다.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26
LEVEL 3 예제1-대립관계형 21 다음 제시문을 대립되는 논점이 잘 드러나도록 비교하시오. (500자) (가) 수의학에서의 안락사는 어떨까? 법적으론 물론 안락사에 대하여 특별한 문제가 없다. 병원에 따 라서 수의사의 경험에 따라서 안락사를 권유하는 경우도 있고, 고객의 요청에 따라 안락사를 시 키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근데 문제는 안락사의 시점이다. 상황에 따라 도저히 안 될 것 같다는 상황이 왕왕 있다. 근데 고객에게 안락사를 시키자는 말을 차마 못한다. 곧 죽을지 알면서도 강아지의 고통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면서도 안락사가 유일한 방법인줄 알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꼬마의 얼굴을 보면서 자식처럼 키우다 나이가 들거나 사고로 죽음을 앞둔 강아지 앞에서 슬퍼하는 노부부를 보면서 일주일간의 입원 후에 극심한 경련을 하는 강아지를 곁에 두고 문병 온 주인 앞에 안락사 이야기를 할 때의 입장이란 수의사가 된 후 제일 힘들 때가 이 때다. (나) 한림대 법학부 이인영교수는 전국 16개 시도 지역에서 전체 인구 비율에 따라 추출한 조사대상 자 1020명을 대상으로 고통이 극심한 불치병 환자가 죽을 권리를 요구할 때 의료진은 치료를 중단해야 하는가? 라고 물은 결과 69.3%가 이에 동의했다. 반면 치료중단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27.5%에 그쳤다. 이번 조사결과를 담은 보고서 (존엄사의 고찰)는 2일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와 밝은 죽음을 준 비하는 포럼, 한림대 생사학 연구소 등이 소극적 안락사 논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를 주제로 개 최하는 포럼에서 발표될 예정이다. 소극적 안락사는 의학적으로 회생가능성이 없는 환자나 가족 등의 대리인이 생명유지 치료를 비롯한 진료의 중단이나 퇴원을 요구하는 경우 의사가 이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응답자들은 의사가 환자의 호소를 받아들여 약물이나 의료기구로 환자를 죽게 하는 적극적 안락사에 대해서도 56.2%가 찬성했다. 적극적 안락사에 반대한다는 응답은 39.1% 였다. 또 환자가 의식불명일 경우를 대비해 환자 스스로 사전에 치료 거부 또는 치료중단의 의사표시를 했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존엄사에 대해서도 역시 찬성한다는 응답이 반대 한다는 응답보다 70.8%, 25.3%로 훨씬 많았다. 그리고 안락사를 법제화해야 하나 라는 질문에는 사법연수생 397명(86.3%), 전공의 160명 (91.4%)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이들 가운데 안락사 허 용 정도를 소극적 안락사까지 라고 답한 사람은 사법 연수생 304명 (76.6%), 전공의 106명 (66.2%)이었고 적극적 안락사까지 허용해야 한다는 응답자는 사법연수원생 93명(23.4%), 전공의 54명 (33.8%) 였다. (다) 에케의 아들을 안락사시켜 달라는 스튀들레의 부탁을 거절하고 난 후. 앙투안느는 인간이 고통스 러워하는 것을 보는 데 익숙해 있었다. 갓난아이의 고통까지도. 그런데 오늘밤은 어째서 무감각해 질 수 없는 것일까? 다른 사람의 임종 때는 언제나 불가사의하고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 전혀 각오가 안 된 사람에게 그러하듯 오늘밤에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 는 마음 속 깊은 데까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자기 자신과 자기의 행동에 대한 신뢰는 물론, 과 27
학과 생명에 대한 신뢰마저도 철저하게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그것은 마치 그를 침몰시키는 파도와 같았다. 그의 눈앞에는 불길한 행렬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가 불치의 진단을 내렸던 환자들의 행렬... 오늘 아침의 명단만 해도 상당수가 된다. 병원에서 진찰한 네댓 명의 환자들. 위 게트, 에른스트의 어린 아들, 눈먼 갓난애, 지금의 경우... 그리고 또 있었는데 잊어버렸구나!... 그는 의자에 처박히듯 앉아 두터운 입술을 우유로 축이고 있던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생각했다... 몇 주일 뒤에, 고통스런 몇 날 몇 밤을 보낸 뒤에, 그 건장한 노인도 똑같이... 그렇다. 모든 사람들은 차례 차례로!,... 그리고 이런 보편적인 불행에는 어떤 이유도 있을 수 없 지... '그렇다. 삶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삶은 사악한 것이다!' 그는 마치 고집 센 낙천가에게 말 하듯 이렇게 격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고집 센 사람, 멍청하게 안주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으며, 매일매일의 앙투안느였던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는데, 이것이 오히려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승락하기 위 해서는 거절하는 것 이상의 의지력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도 두 가지 해결책 가운 데 어느 것을 택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헤매게 될 때, 그는 흔히 더 많은 의지를 필요로 하는 쪽을 택해 왔다. 그는 자기 경험에 비추어보아 그런 선택이 언제나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그러나 오늘밤만은 자신이 옳게 판단했으며 정당한 길을 택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 다. 그는 자신이 입에 담았던 몇 가지 말 때문에 괴로웠다. 그는 스튀들레에게 '생명의 존엄성...'이라 고 말했다. 이렇게 통상적인 어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언제나 경계해야 할 일이었다. '생 명의 존엄성...' 존엄성인가 아니면 맹목적 숭배인가?... (로제 마르탱 뒤 가르, 티보 가의 사람 들) (라)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환자가 생기면 유토피아인들은 환자들을 극진히 돌보아주며,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면 약이든 음식이든 무엇이든지 줍니다. 불치병에 걸린 환자의 경우에는 간호부가 옆에 앉아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어 기분을 돋우어 주며, 증상을 제거할 수 있는 모든 처치 를 해줍니다. 그러나 불치병인 데다가 질병이 극심한 고통을 계속 일으키는 경우에는 신부들과 공무원들이 찾아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솔직히 말합시다. 당신은 정상적인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는 귀찮 은 존재에 지나지 않고 당신 자신에게도 짐이 됩니다. 사실, 당신은 실제로는 죽은 사람과 마찬가 지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계속 병균을 기르고 있습니까? 당신의 생활이 비참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 왜 죽기를 주저합니까? 당신은 고문실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왜 탈출을 해서 더 좋은 세계로 가지 않습니까? 그럴 생각이 있으면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우 리는 당신의 해방을 위한 준비를 하겠습니다. 당신의 사망은 상식일 뿐입니다. 또한 신부는 하느 님을 대신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신부의 충고에 따르는 것은 경건한 행위입니다." 환자는 이러한 권고를 타당하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굶어 죽거나, 또는 수면제를 먹고 고통 없이 비참한 상태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유 의사에 따르게 되어 있어서, 만일 환자가 살기를 원하면, 누구나 전과 마찬가지로 친절하게 돌보아 줍니다. 공인된 안락사는 명예로 운 죽음입니다. 그러나 신부나 트라니보루스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로 자살을 하면 매장 또는 화장을 할 권리를 박탈당하며, 시체는 아무런 의식 없이 연못에 던져 버립니다. (토마 스 모어, 유토피아) 28
예제2-병열구성형 22 (가)-(다)는 현대인이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글이다. 그 양상을 분석하시오. (500자) (가) 지난 몇 십 년 사이에 고객의 위상에 상당한 변화가 생겼다. 소매 상점에서는 찾아오는 고객을 개인적으로 친절하게 대했다. 고객은 중요한 사람으로 대접받았고, 그의 일상까지도 상점의 주인 과 함께 의논할 수 있었다. 물건을 사는 행위 그 자체에서 고객은 자기의 중요함과 품위를 느낄 수 있었다. 오늘날 백화점의 경우, 고객은 우선 거대한 건물과 수많은 점원들과 잔뜩 진열된 상품 에 의해 압도된다. 이 모든 것에 비해 그는 자기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를 느끼게 된다. 백화점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으로서의 그는 아무런 중요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단지 한 사람 의 고객일 뿐이다. 백화점은 고객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는 단지 추상적인 고객으로서 대 접받을 뿐이지 구체적인 고객으로서 중요시되지 않는다. 이런 상태는 현대의 광고 방법에도 잘 드러난다. 거대한 현대 광고는 상품의 효용성을 강조하여 합리적으로 소비자를 설득하기보다는 감성에 호소하거나 호기심을 자극한다. 즉 같은 일을 몇 번이고 반복하거나, 사교계의 부인과 유 명한 권투선수에게 특정 상표의 담배를 붙여 물게함으로써 권위 있는 이미지를 생기게 한다든가, 아름다운 소녀의 성적인 자극을 내세워 비판력을 마비시키려고 한다든가, 어떤 셔츠나 비누를 삼 으로써 뭔가 전 생애가 갑자기 변화하는 듯한 그런 공상을 자극하기도 한다. (에리히 프롬, 자유 로부터의 도피) (나) 지나간 두 세기 동안 기계적인 생활 수단이 전 세계적 규모로 보급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내 면 생활이 풍요로워지거나 예술 창작과 향유에 쓰여지는 시간적 여유가 많아지기는커녕 우리는 우리 자신이 기계화의 과정에 더욱 깊이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심지어 우리의 상상력까 지도 그 대부분이 내발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우리의 상상력은 기계에 비끄러 매이거나, 라디오 나 텔레비전의 도움 없이는 자체적 실재성을 보유할 아무런 힘도, 생존 능력도 갖지 못한다. 우리 의 현재 상황을 17세기, 즉 기술 면에서 비교적 원시적이던 그 시대의 상황과 비교해 보라. 그 당시 평범한 런던 시민들은 심지어 하인들을 뽑을 때에도 그가 저녁 시간에 벌어지는 가족음악회 에 한몫 낄 수 있을 만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느냐를 고려하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는, 야외에서 기계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자유롭게 노래 부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며, 휴대용 음향기 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면서 강변을 거니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루이스 멈퍼드, 예술과 기술) (다) 우리는 복도에서 헤어져서 사환이 지적해 준, 나란히 붙은 방 세 개에 각각 한 사람씩 들어갔다. 화투라도 사다가 놉시다. 헤어지기 전에 내가 말했지만 난 아주 피곤합니다. 하시고 싶으면 두 분이나 하세요. 라고 안은 말하고 나서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도 피곤해 죽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라고 나는 아저씨에게 말하고 나서 내 방으로 들어 갔다. 숙박계엔 거짓 이름, 거짓 주소, 거짓 나이, 거짓 직업을 쓰고 나서 사환이 가져다 놓은 자 리끼를 마시고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나는 꿈도 안 꾸고 잘 잤다.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안이 나를 불렀다. 그 양반 역시 죽어 버렸습니다. 안이 내 귀에 입을 대 고 그렇게 속삭였다. 예? 나는 잠이 깨끗이 깨어 버렸다. 방금 그 방에 들어가 보았는데 역시 죽어 버렸습니다. 29
역시. 나는 말했다.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까? 아직까진 아무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린 빨리 도망해 버리는 게 시끄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살이지요? 물론 그것이겠죠. 나는 급하게 옷을 주워 입었다. 개미 한 마리가 방바닥을 내 발이 있는 쪽으 로 기어오고 있었다. 그 개미가 내 발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는 얼른 자리 를 옮겨 디디었다. 밖의 이른 아침에는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빠른 걸음으로 여관에서 떨 어져 갔다. 난 그 사람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안이 말했다. 난 짐작도 못 했습니다. 라고 나는 사실대로 얘기했다. 난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코트의 깃을 세우며 말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합니까? 그렇지요. 할 수 없지요. 난 짐작도 못 했는데. 내가 말했다. 짐작했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가 내게 물었다. 씨팔 것, 어떻게 합니까? 그 양반 우리더러 어떡하라는 건지. 그러게 말입니다. 혼자 놓아두면 죽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게 내가 생각해 본 최선의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난 그 양반이 죽으리라고는 짐작도 못 했다니까요. 씨팔 것, 약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모양 이군요. 안은 눈을 맞고 있는 어느 앙상한 가로수 밑에서 멈췄다. 나도 그를 따라서 멈췄다. 그 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김형, 우리는 분명히 스물다섯 살짜리죠? 난 분명히 그렇습니다. 나두 그건 분명합니다. 그는 고개를 한번 기웃했다. 두려워집니다. 뭐가요? 내가 물었다. 그 뭔가가, 그러니까. 그가 한숨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린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입니다. 나는 말했다. 하여튼. 하고 그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 여기서 헤어집시다. 재미 많이 보세요. 하고 나도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마침 버스가 막 도착한 길 건너편의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버스에 올 라서 창으로 내어다 보니 안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는 눈을 맞으며 무언지 곰곰이 생각 하고 서 있었다.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30
예제3-공통차이형 23 다음 제시문을 읽고 논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약술하시오. (500자) (가) 하루는 여자 둘이 임금에게 나아가 그 앞에 섰다. 한 여자가 말하였다. 저의 임금님! 저와 이 여 자는 한집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아이를 낳을 때에 이 여자도 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 이를 낳은 지 사흘째 되던 날, 이 여자도 아이를 낳았습니다. 집에는 저희 둘 말고는 아무도 없었 습니다. 집 안에는 저희 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밤에 이 여자가 아들을 깔고 자는 바람에 그 아 들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이 여자는 그 밤중에 일어나, 당신 여종이 잠자는 사이에 곁에 있던 제 아들을 데려다 자기 품에 뉘어 놓고, 죽은 자기 아들을 제 품에 뉘어 놓았습니다. 제가 아침에 일 어나 제 아들에게 젖을 먹이려다 보니 죽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이어서 그 아이를 자세히 보 니 제가 낳은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여자가 천만에! 산 아이는 내 아들이고 죽은 아이가 너의 아들이야. 하고 우겼다. 처음 여자도 아니야. 죽은 아이가 너의 아들이고, 산 아이 가 내 아들이야. 하고 우겼다. 그렇게 그들은 임금 앞에서 말다툼을 하였다. 그때에 임금이 말하 였다. 한 사람은 살아 있는 아이가 내 아들이고 죽은 아이가 너의 아들이다. 하고, 다른 사람은 아니다. 죽은 아이가 너의 아들이고 산 아이가 내 아들이다. 하는구나. 그러면서 임금은 칼을 가져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시종들이 임금 앞에 칼을 내오자, 임금이 다시 말하였다. 그 산 아 이를 둘로 나누어 반쪽은 이 여자에게, 또 반쪽은 저 여자에게 주어라. (나) 이 깊고 긴 겨울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에다 무우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우꽃이 피 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주더니 이제 그 중 큰 놈 몇 개를 뽑아 너와지붕 추녀 끝으 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재워 무우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 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어루어 시경강의보( 詩 經 講 義 補 )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의재( 四 宜 齋 )에 앉아 시 몇 줄을 읽으면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 고 그리움도 남해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다) 80년대 말 YK는 경쟁 환경의 심화, 경영 악화, 심한 노사간의 불신 등으로 경영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YK는 정리 해고를 통한 인원 감축이라는 일반적인 대처 방식 대신에 일부 경영 진과 노조가 합심하여 3조 근무 방식을 4조 근무 방식으로 전환하고 다양한 경영혁신을 추진했 다. 단순하게 보면 이것은 일자리 나누기(job sharing)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으나, 일자리 나누 기와 함께 모든 노동자에게 교육훈련의 기회를 주는 것이 주요한 특징이다. 특히 4개조 2교대 근 무방식을 채택한 YK는 예비 학습조를 도입함으로써 노동자에게 평생학습의 기회를 제공한다. 예 비조 도입에 따른 인건비 및 교육비 증대는 설비가동률 제고와 생산성 향상으로 보전될 수 있었 다. YK모델의 핵심인 4개조 2교대 작업방식은 기존의 통상적 작업체계에 비해 여러 가지 장점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산업안전성이 크게 높아졌고, 다양한 경영참여 기회가 주어짐에 따라 일에 대한 보람과 만족도가 크게 제고되었다. 그리고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삶의 질 을 제고해줄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활동에도 참여의 가능성을 확대시켜준다. 이러한 개별기업 차원에서의 노사관계 혁신이 집적될 경우 국가 전체의 노사관계 개혁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며, YK사례는 정규직 과 비정규직으로 양극화되고 있는 노동시장의 분단구조를 해소할 수 있는 메시지도 주고 있다. 31
예제4-근거활용형 24 (가)에서 사마천은 백이와 숙제를 의로운 사람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불행한 삶에 대해 당혹한 심 정을 토로하고 있다. 사마천의 이러한 시각을 (나)와 (다)을 바탕으로 논박하시오. (800자) (가) 백이와 숙제는 고죽군의 아들들이다. 아버지 고죽군은 숙제를 후계자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숙제 는 형인 백이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였다. 그러나 백이는 그것은 아버지의 명령 이라며 사양하고 도망가 버렸다. 그러자 숙제도 도망쳐 버렸다. 그 후 백이와 숙제는 주( 周 ) 나라의 문왕( 文 王 )이 노인을 잘 대우한다는 말을 듣고 귀의하려고 찾아갔다. 주 나라에 이르니 마침 문왕은 죽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무왕이 나무로 만든 문왕의 신주 ( 神 主 )를 수레에 싣고 은( 殷 ) 나라의 주( 紂 ) 임금을 정벌하러 가는 중이었다. 백이와 숙제는 그의 말고삐를 잡고 간언하였다. 아버지가 돌아 가셨는데 장사를 지내지 않고 곧장 군사를 일으키는 것을 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신하가 주인 격인 은 나라를 치는 것을 인( 仁 )이라 할 수 있 겠습니까? 무왕의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해치려 하자, 태공망이라는 사람이 이들은 의 인( 義 人 )이다. 라고 하며 무사히 떠나게 하였다. 무왕이 은 나라를 정벌하자 천하는 무왕의 주( 周 ) 나라를 종주( 宗 主 )로 받들었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는 그것을 부끄러이 여기고 의( 義 )를 지켜 주( 周 ) 나라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 산에 숨어서 고사리만 캐먹다가 마침내 굶어 죽고 말았다. 백이와 숙제 같은 사람은 정말 선인( 善 人 )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처럼 인( 仁 )을 쌓고 깨 끗한 행동을 하였는데 굶어 죽고 말다니! 공자는 70명의 제자 중에서 안회( 顔 回 )만이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추켜세우지 않았던가? 그러나 안회는 굶기가 일쑤였고 술지게미조차 배불리 먹지 못 한 채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하여 베푸는 것이 어찌 이럴 수가 있 는가? 반면 도척은 매일같이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고기를 먹었으며, 흉포한 행동을 제 멋대로 하면서 수천의 무리를 모아 천하를 횡행하였지만, 결국 천수를 다 누렸다. 그가 무슨 덕 ( 德 )을 쌓았기 때문이란 말인가? 또한 근세에도 법도에 어긋난 행동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만 골라서 하면서도, 일생을 편안히 살 뿐 아니라 대대로 부귀를 누리는 자들이 있다. 반면 땅을 가 려서 밟고, 때가 되어야 말을 하며, 사잇길을 가지 않고 공정한 일이 아니면 행하지 않음에도 불 구하고, 재앙을 만나는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나는 심히 당혹함을 금치 못하겠다. 도 대체 이른바 천도( 天 道 )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사마천, 사기( 史 記 )) (나) 은 나라의 후반기 통치계급은 갈수록 부패해갔다. <상서( 尙 書 )>에는 당시 왕들은 농사짓는 어려 움과 백성의 고통을 알지 못하고, 오직 쾌락과 안일만 추구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은 나라 말기 주( 紂 ) 임금 때의 상황이 가장 심각하였다. 그는 사치와 향락에 탐닉하였으며, 엄한 형 벌 제도를 만들어 백성을 탄압하였다. 지배계급 내부의 분열도 심각해졌다. 주( 紂 ) 임금의 충신이 었던 비간은 간언하다가 처형되었고, 기자는 미친 척했으며, 미자는 도망가 버렸다. 이처럼 충직 한 신하들이 주( 紂 ) 임금을 지지하지 않게 되자, 통치집단이 붕괴 상태에 빠졌으며, 이것은 은 왕 조의 멸망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한편 이 무렵 주( 周 ) 나라에서는 문왕( 文 王 )이 왕위에 올랐다. 문 왕은 농업생산의 제고에 진력하였으며, 백성들의 아픔을 돌보는 어진 정치로 인망( 人 望 )을 모았다. 이러한 국력의 배양과 민심의 지지를 기반으로, 문왕의 아들인 무왕( 武 王 )은 백성을 도탄에 빠뜨 린 은 나라의 주( 紂 ) 임금을 정벌하였다. (전백찬, 중국전사( 中 國 全 史 )) (다) 인간은 자기의 행위를 개조할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 능력에 의해 운명의 여신의 세력권 밖에 32
머물러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이 여신의 은총을 받아도 대단하게 여기지 않으며, 또 미움을 받아도 위축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경지를 음지라고 하건 양지라고 하건 그것은 자유다. 그러나 이 경지는 본래 음지도 아니고 양지도 아니다. 다만 낮에는 밝고 밤에는 어두울 뿐이다. 부귀와 건강, 미모, 명예, 권력 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며, 이와 반대되는 고뇌와 질병, 추방, 죽음 등 의 경우도 그렇다.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서는 가치중립적이며, 인간의 행복과는 관계가 없다. 이 것들이 덕성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서 선으로도 생각되고 악으로도 생각될 뿐이다. 울부짖거나 신음하는 것은 인간의 본분에 대한 거부로, 이와 같은 약점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때 로 좋아서 어쩔 줄 모르기도 하고 때로 실망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름지기 자기 운명을 가만히 기다리기보다는 애써 창조할 일이다. 자기의 운명을 자기 힘으로 창조해 나가기만 하면, 운명의 여신이 얼굴을 찌푸린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그 여신이 웃는 얼굴을 지어 보인다고 해서 황홀해할 필요가 없다. (L. 세네카, 행복론) 33
예제5-근거활용형 25 제시문 (가)의 주장에 대해 제시문 (나) (다) (라)의 사례를 적용해 비판하시오. (800자) (가) 차별적, 혐오적인 언어로 소수그룹을 모욕하는 것을 막자는 취지에서 생겨난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 은 성차별적이거나 특정 인종, 민족, 또는 장애인 등을 비하하는 표현을 지양하고 공공에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적절한 언어사용을 주장한다. 이 주장은 일면 언어의 문법구조가 그 언어를 구사하는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준다는 사피어-워프 가설과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fireman 이라고 하면 무의식중에 소방관은 늘 남성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어떤 종류의 말과 용어를 쓰느냐가 인간의 사고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곧 성차별적인 어휘를 쓰다 보면 성차별주의자가 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fireman 은 firefighter 로, black (미국 흑인)은 African American 으로 중성적이거나 차별성이 적은 용어로 대체하는 것이 정치적 올바름의 기본 정신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차별적 언어를 순화하여 극단적 감정을 억제시킨다는 측면에서 지지를 받고 있지만, 지나친 강조로 인하여 오히려 본래의 의미를 왜곡하는 부작용을 낳는 동시에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땅콩을 건강에 좋은 식품이라고 표현할 때 땅콩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 학생들에게는 편파적이 라는 이유로 이러한 표현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이다. (나) 감독 겸 배우 멜 깁슨(50)이 취중에 내뱉은 반유대인 발언 때문에 일생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깁슨은 지난달 28일 로스앤젤레스 말리부 해안도로에서 과속 및 음주운전으로 체포된 후 조사를 받던 중 세상의 전쟁은 모두 같은 유태인들 때문이다 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면서 그 파문이 거세지고 있다. (중략) 할리우드와 미국의 미디어산업이 유대인 큰손 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 은 주지의 사실. 게다가 깁슨의 경우, 지난 2004년 자신이 제작, 감독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 이스트 의 내용이 반유대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은 경력이 있어 더욱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 다. 할리우드내의 파워 단체인 반유대인 명예훼손리그(ADL)는 성명을 즉각 발표하여 깁슨이 마 침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냈으며, 자신의 영화를 둘러싼 논쟁 중 자신이 포용력 있고 폭넓 은 사랑을 지닌 사람이라고 한 말이 속임수임이 드러났다 고 맹비난했다. (중략) 사태가 악화일로 로 치닫자 깁슨은 1일 성명을 발표, 유대인 사회에 용서를 구했으며, 그의 사과를 유대인 사회 및 할리우드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주목된다. ( 반유대 발언 멜 깁슨, 할리우드에서 왕따, 연합 뉴스, 2006. 8. 2.) (다) 요즘 미국 학교에서는 빨간색 잉크 사용이 금지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언행을 조심하는 정치적 올바름 의 관례를 흉내 내려는 듯 교육계에서도 웃지 못 할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즉 답 안 채점 과정에서 틀린 답에 빨간색으로 X 마크를 하면, 스트레스와 모욕감 등 학생들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교사들은 보다 부드러운 색을 사용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다. 이 는 어른, 특히 교사들이 학생들을 가련한 온실의 꽃 으로 생각하고 실망과 좌절로부터 보호해야 만 된다는 생각에 빠져 있다는 또 하나의 예이다. 또한 교정에서 피구( 避 球 ) 뿐만 아니라 술래잡 기도 금지되고 있다. 한 초등학교 교장이 학부모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설명했듯이, 이 게임에는 희생자 가 있게 마련인데, 이것은 학생들의 자존심을 상할 염려가 있다 는 것이다. 모든 경쟁적 인 스포츠를 폐지하고 혼자 하는 운동으로 대체하자는 교육자들도 있다. 이런 난센스는 누구에게 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늘날 교육 당국자들이 가장 내세우는 가치가 자존심인 것 같은데, 강한 자존심이 성공과 관계가 없다는 것은 여러 연구를 통해 증명된바 있다. 중국이나 인도같이 미국 34
에 도전하고 있는 나라들의 학교 교실들은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곳으로 교사들이 빨간 펜을 주저 없이 사용하고 있다. 성장발전하기 위해서 젊은이들은 경쟁과 비판, 실패의 경험이 필요하다. 학생들은 빨간 펜, 줄다리기, 피구 모두를 감당해낼 수 있다. 술래 가 되어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 (...학교 방침 재고해야, 매경 USA Briefing, 2005. 6. 17.) (라) 농촌봉사활동(농활)을 떠난 일부 대학 학생들이 농민들의 성희롱성 발언을 이유로 중도 철수하는 사태가 잇따르고 있다. 아줌마, 아가씨 등 농민들에게는 통상적인 발언이 여대생들에게는 성희 롱 발언으로 받아들여지는 인식 차 때문이다. 서울 모 대학의 한 농활대는 마을잔치에서 농민들 이 여학생을 아줌마 로 지칭하고 다른 농민과 이야기하는 여학생에게 지금 둘이서 사귀냐 고 말 하는 등의 상황을 접했다. 학생들은 이를 언어적, 정황적 성폭력 이라고 규정한 뒤 자신들의 입 장을 농민들에게 설명했다. 사과는 받아냈지만 학생들은 농활을 계속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해 철수했다. 이에 해당 대학 총학생회는 아예 농활을 폐지하는 방안까지 논의 중이다. (중략) 농활 철수에 대해 일부 대학가에서는 비판적 시각이 나오고 있기도 하다. 서울 모 대학 학생회장 류모 씨는 농민들이 고의적으로 그런 발언을 한 것이 아니라 그런 발언이 성폭력일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할 뿐 이라고 지적했다. 농활에 참가했던 한 학생도 인식의 차이를 극복 해결 하는 것도 농활의 한 과정으로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고 강조했다. ( 성희롱 논란 휩싸인 농 활, 경향신문, 2004. 7. 7.) 35
LEVEL 4 예제1-대립관계형 26 다음 제시문을 대립되는 논점이 잘 드러나도록 비교하시오. (800자) (가) 각 개인이 자신의 생산 활동에 도움이 되도록 자본을 투자 운영하는데 최대한 노력하고, 그리하 여 제품이 최대의 가치를 확보하도록 생산 활동을 운용한다면, 각 개인은 결국 사회 전체의 연간 소득을 늘리는 데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그는 공공의 이 익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한 것도 아니고, 또한 그가 얼마나 공익의 증대에 기여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산 활동에 노력을 기울여 오직 자기 자신의 삶의 안정만을 보 장하려 하고, 자신의 제품이 최대의 가치를 확보하도록 생산 활동을 벌임으로써 오직 자기 자 신 의 이윤만을 높이려 한다. 그리고 그 경우에도 다른 수많은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보이지 않는 손 에 이끌려 자신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공익 증진의 결과를 낳는다. 공익 증진이 그의 생 산 활동에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사회 전체에 언제나 해를 끼치는 것은 아 니다. (아담 스미스, 국부론) (나) 고자가 말했다. 사람의 본성이란 바구니를 만들 때 쓰는 버드나무 가지와 같네. 의로움이란 버드 나무 가지로 만든 바구니라고 할 수 있지. 사람의 본성을 가르쳐 어질고 의롭게 만드는 것은 버 드나무 가지를 구부리거나 휘어서 바구니를 만드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맹자가 말했다. 자네는 바구니를 만들 때 버드나무 가지의 성질을 잘 이용해서 만드는가, 아니면 버드나무 가지 본래의 성질을 어그러뜨려서야 바구니를 만드는가?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사람에 대해서도 본성을 어그러뜨려서야 어질고 의롭게 만드는 것이겠네 그려? 세상사람 모두로 하여금 어짊과 의로움을 해치게 만드는 것은 분명 그대의 말일 것이네. 고자가 말했다. 사람이 본성이란 갇혀서 소용돌이치는 물과 같은 것이지. 동쪽을 터주면 동쪽으 로 흐리고, 서쪽을 터주면 서쪽으로 흐르는 법이네. 사람의 본성에는 선함이니 선하지 못함이니 하는 구분이 없네. 이것은 물에 본래 동쪽과 서쪽의 구분이 없는 것과 같네. 맹자가 말했다. 물에 동쪽과 서쪽의 구분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 그러나 높고 낮음의 구분도 없을까? 사람의 본성이 선을 향해 움직이는 것은 물이 낮은 데로 흐르는 것과 같네. 사람은 누구 나 선을 향해 움직이고, 물은 어느 것이나 낮은 데로 흐르는 법이네. (맹자, 고자 상편) (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악한 것이니, 선이란 인위적으로 된 것이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추구 하게 마련이므로, 그대로 내버려두면 서로 싸우고 빼앗고 하여 양보란 있을 수 없을 것이요, 또 나면서부터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게 마련이므로, 그대로 내버려두면 남을 해치고 상하게 할 줄만 알 뿐 신의나 성실성은 없을 것이다. 또 귀로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눈으로 아름다운 것을 보려 는 감각적 욕망이 있으니, 그대로 두면 무절제해져서 사회규범으로 지켜야 할 예의나 규범의 형 식적 절차인 문리( 文 理 )는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타고난 성질이나 감정에 맡겨버린다면 반드시 서로 싸우고 빼앗아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고 세상을 혼란에 빠지게 할 것이니, 반드시 스승의 교 회와 예의의 법도가 있어야 한다. 그리해야 남에게 사양할 줄도 알고 사회의 질서를 지킬 줄도 알아 세상의 평화가 유지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람의 천성은 원래 악한 것이 분명하며, 선이란 인위적인 것임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