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1:1~18 스가랴 1 장 1. 스가랴에게 말씀이 임한 다리오 왕 2년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학개 선지자가 말씀을 받은 해(학 1:1), 성전공사가 16년 만에 재개된 해(스 4:24, 6년에 완공됨): 그 러니까 학개(두 달 먼저)와 스가랴가 함께 성전 재건을 위한 메시지를 전하면서 백성들을 위로하 고 독려한 모양이다. 하나님도 바쁘시다. 학개 부르랴, 스가랴 부르랴? 하나님도 한 사람만으로는 안 되던 모양인가? 두 사람의 메시지가 사실은 좀 다르다. 학개는 현실적인 성전을, 스가랴는 미 래의 메시야 성전을!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불러서 모든 능력을 다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가진 능력을 적절하게 발휘하도록 하신다. 그래서 때로는 여러 사람과 협력해서 사역하게 하셨다(모세와 아론, 바울이 함께 사역했던 바나바와 실라와 누가 등, 12 제자들). 2. 잇도, 베레갸, 스가랴 이 세 사람의 이름 뜻이 기억할 만하다. 끝에 야 는 여호와의 축약형이다. 잇도는 적절한 때에 라는 뜻이며 베레갸는 현재 미국 대통령의 이름(버락)과 관련이 있다(바라크= 축복하다). 스가랴의 자카르 는 기억하다는 뜻이다. 그러면 세 사람의 이름을 한 문장으로 엮어보 자. 여호와께서 기억하셨다가 적절한 때가 되면 축복하실 것이다: 스가랴서의 주제와 잘 부합된다. 3. 여호와께서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셨다(2), 열조를 본받지 말라(4)고 하는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자기들의 어려운 처지가 조상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달았을 것: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 이다. 이들 대부분이 바벨론에서 태어나서 조상들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꿈에 그리던 곳이었겠지 만 돌아와서 보니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나라도 없고, 성전도 성읍도 제대로 복구하지 못한 채 지내면서 왜 우리 삶이 이렇게 고달플까? 싶었을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 라는 표현을 반복해서(3 절에만 세 번) 쓰는 이유도 이런 백성을 격려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우리 하나님이 그렇게 허약한 분이 아니다! 4. 이스라엘이 돌아오는 것과 하나님께서 돌아오시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먼저일까? (하나님도 참, 그냥 돌아오시면 되지 꼭 너희는 돌아오라 고 하시는가?) 형식상으로는 이스라엘이 돌아오는 것이 전제조건처럼 보이지만 실질상(내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이미 돌이키셨다. 아니, 오래 전에 징계하실 때부터 그렇게 마음을 먹으셨던 일이다. 돌아 오라 고 하시기 전에 이미 맞이할 준비를 다 해 두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천국을 가까이 붙여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회개해도 소용이 없다.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회개가 먼저가 아니다. 우리 입장에서만 보면 회개가 먼저이긴 하다. 그래서 회개는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적인 행위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이다. 5. 사라진 열조나 선지자들을 찾는(5) 이유가 뭘까? 하나님의 이 말씀에 동의할 것(4, 6): 지금 살아있다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6b)라고 말을 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온전하게 성취되었다고 고백할 것이라는 말이다. 열조나 선지자는 사라 져도 그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살아 역사하고 있지 않느냐! 사라진 열조와 영원한 하 나님의 말씀이 대조를 이룬다. 6. 6절 끝에 하다 라는 동사를 네 개나 중첩시켜 놓았다. 각각의 주어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자. 아 마도 이렇게 말이 어렵도록 중복시켜 놓은 것도 이유가 있기는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말을 간 편하게 하느라고 생략해버리는 것을 몇 십 년 전 어른들은 이렇게 쓴 모양이다(참고 창 50:17). 우리에게 (과거에 여호와께서) 행하셨도다 (열조와 선지자가 말) 하였다 (지금 하나님께서) 하셨느 니라 (앞으로 스가랴가) 하라: 조상들이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너희들에게 전하라고 하셨다는 말이다. 7. 이제부터 긴 환상 얘기로 이어진다(1:7-6:8). 그러니까 8가지 환상을 보여주기 전에 짧은 메시지 (2-6)를 준 것은 그 환상을 이해하는 열쇠가 바로 이 메시지라는 것이다. 그러면 전체 환상의 핵심 은 무엇이라는 말인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회개하라): 이 메시지를 전제로 환상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세례요한과 예수님께서 외치신 말씀도 그러하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나님께서 일이 되도록 다 해 두시고 하시는 말씀이 돌아오라 는 것이다.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데... 얼마나 쉬운 일인가? 조 상들 흉내 내지 말고 돌아오라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일의 근본이다. 회개 없이는 그 무엇도 기 대할 수 없다. 8. 첫 환상(7-17)의 내용대로 연극을 한다고 하면 최소한 등장인물이 몇 명이 필요한가? 아마도 8명: 홍마를 탄 자(8), 내게 말하는 천사(9),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선 자(10, = 홍마를 탄 자? 기마대 대장격 아닐까?), 여호와께서 보내신 자들(= 홍마, 자마, 백마 탄 자들),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11, 12 = 아마도 홍마를 탄 자?)외에 스가랴와 하나님 역도 포함해야 하니까. 9. 성전재건축이 시작된 것은 다리오(다니엘서의 다리오는 메대왕으로 다른 사람임) 2년 6월 24일 - 1 -
스가랴------------------------------------------ 1:1~18 이다(학 1:15). 스가랴가 받은 첫 환상은 그로부터 5개월 뒤다. 그러면 이 메시지는 책망일까, 칭찬 일까? 위로(13, 15): 위로가 필요한 상황을 추측해 보면 성전이 재건축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형편은 어 렵다. 이방 세력의 조롱과 압제에서 벗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겠 느냐? 는 식으로 자포자기 하지 않도록 격려하는 셈이다. 10. 하나님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천사를 보내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왕들의 하는 일에 빗댄 것이다(특히 절대군주 다리오의 통치방식). 이 천사들의 역할은 색깔과 관련이 많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계시록에서 붉은 말은 전쟁과 죽음과 관련이 있다(계 6:4). 그런 점을 감안해서 홍마를 탄 사람의 역할이 뭘까? 안일한 열국에 하나님의 진노를 내리는 것(15). 11. 온 땅이 정온한 것(11)과 그 말을 들은 여호와의 사자가 하나님께 탄원하는 것(12), 그러자 여호 와께서 위로의 말씀을 하는 것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온 땅이 정온한 것이 예루살렘과 유다에게는 복이 아니다. 아직도 이스라엘의 대부분은 포로로 잡혀가 있다. 이런 상태를 언제까지 방치하시렵니까? 라는 탄원이기에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는 것 이다. 물론 갚을 때가 되면 갚겠지만(14-15)! 12. 바벨론 포로 생활이 70년이면 마친다고 했는데 그들이 돌아온지 벌써 20년이 다 돼 가는데 아 직도 노하신지 70년이라고(12)?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이스라엘이 고통을 겪어야 했던 오랜 기간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13. 하나님께서 진노하신지 벌써 70년입니다. 언제까지 노하시렵니까? 라는 질문에 하나님의 사자 는 14-17절의 말씀으로 대답하신다. 선한 말씀이요, 위로의 말씀이다.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뭘까? 믿고 기다려라: 반드시 회복시키실 터이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는 셈이다. 14. 안일한 열국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일까? 때리는 시늉만 내라고 했더니 아예 병신을 만들어 놨다(15)? 내 백성을 저렇게 만들어 놓고 잘 먹 고 잘 살지? 이제는 네가 죽어봐라! 예전에 앗수르도 그랬다가 책망을 들었다. 간 큰 도끼라고(사 10:12-15)! 사람을 상대로 하는 일은 왜 이렇게 기대와 다른가? 하나님의 다른 일은 눈꼽만큼의 오 차도 없이 정밀한데 사람을 상대하기만 하면 이렇게 오차가 생긴다. 하나님에게 사람은 정말로 특별한 존재다. 아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특별하게 만드신 탓이다. 15. 하나님께서 돌아오셨는데 웬 먹줄이 쳐지지(16)? 먹줄은 목수의 연장이다. 건축물의 길이를 재거나, 모양을 다듬기 위한 도구로 성전 건축을 위시 하여 예루살렘이 재건될 것을 말한다. 홍마 탄 자가 골짜기 속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서 있다는 것 도 이스라엘의 번영을 의미한다. 화석류 나무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이며(사 41:19, 55:13), 골짜기 속 이란 골짜기에 있는 깊은 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사 41:18). 보통 2m 정도 자라는 나무지만 여건이 좋으면 7-10m까지 자란단다. 16. 첫 번째 환상(7-17)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사자들을 보내서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열방을 징계하시고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실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환상(18-21)이 첫 번째 환상의 어떤 내용과 연관이 있는가? 열방에 대한 징계: 네 개의 뿔은 유다를 친 이방나라(21)를 의미하는데( 해친 이 아니라 헤친 즉, 흩어버린 이다) 그게 쇠로 된 것이었다. 네 명의 공장(대장장이)은 이 뿔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기술자들이다. 뿔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한다. 쇠로 된 뿔처럼 강력하고 영원 할 것만 같은 바벨론, 바사도 하나님의 손에서 녹아내릴 수밖에 없다. - 2 -
스가랴------------------------------------------ 2:1~13 스가랴 2 장 1. 첫 번째 환상(1:7-17)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사자들을 보내서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열방을 징계하시고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실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환상(2:1-5)이 첫 번째 환 상의 어떤 내용과 연관이 있는가? 예루살렘의 회복: 정확하게 말하면 회복을 넘어서 번영하는 모습이다. 두 번째 환상에서 예루살렘 을 헤친 뿔들을 떨어치는 것으로 외부의 적을 제거하고 이제는 내부적으로 번영하는 모습을 그린 다. 이렇게 번영하는 예루살렘은 메시야 왕국의 번영에 대한 예시이기도 하다. 2. 예루살렘을 척량한다고? 왜? 측량 아니고? 예루살렘을 재건한다는 뜻이다: 척량은 자로 길이를 재는 것인데 건축을 하기 위한 기본 작업이 다. 측량은 여러 가지 도구를 써서 길이, 높이, 깊이, 거리 등을 재고 생각을 하고 헤아리는 것이 니 현대적인 작업에 알맞은 용어인 셈이다. 3. 고대에 이스라엘의 유명한 도시는 높은 산 위에 성을 세우고 그 안에 거주했는데 성곽 없는 촌 락이 무슨 뜻일까? 크게 번성한 성읍: 성곽 내에만 거주하는 것은 안전하긴 하지만 지역이 좁다. 성곽이 없으면 아주 넓은 지역으로 확장이 가능하다. 로마의 국경이 튼튼하던 시절에는 대부분의 백성들이 성벽이 없 는 평지에서 살았다. 수도 로마의 성벽도 철거해 버렸다. 국경이 무너지자 산성이 있는 지역으로 올라가서 살았다. 경제적으로 엄청나게 위축되어 버린다. 성곽이 없으면 외적의 침입에 아주 취약 하지만 외적은 하나님께서 이미 제거하셨다(1:18-21).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불성곽이 되어 지키신다 (5). 4. 천사도 담당분야가 있나보다. 말을 전달하는 천사도 있고 그 천사를 교육시키는 천사도 있으니 말이다! 계시록에 보면 성도를 보호하는 천사, 찬양하는 천사, 심판하는 천사도 나온다. 내게 말하 는 천사(3)는 담당분야가 무엇인가? 말을 전달하는 천사인가보다: 내게도 말하지만 척량 줄을 잡은 소년에게도 말을 전하니까! 척량 줄을 잡은 사람(1)과 4절의 소년 이 동일한 것 같다. 이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약간은 헷갈리는 점이 있어서 정리해 보고자 질문한 것이다. 5. 도망쳐 나와야 할 북방 땅이 어디일까? 바벨론: 6절과 7절은 같은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 백성들이 흩어졌지만 이제 돌아오라 는 것이다. 북방 땅에서 예루살렘으로 도망하라는 말이다. 아직도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정착 하고 있다. 귀환을 촉구하는 셈이다. 이미 귀환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4-5), 아직 귀환하지 않은 유대인들에게는 귀환을 촉구(6-7)하는 것이다. 6. 바벨론 성에 거하는 시온이 바벨론에서 피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기 때문: 소돔과 고모라 같은 심판은 아닐지라도 내 백성이 거기에 그 렇게 머물러 있을 곳이 아니라는 얘기다. 역으로 예루살렘의 번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안 되는 얘기다. 예루살렘은 다 허물어진 변방의 소읍이고 바벨론은 세계 최대의 도시인 데? 요는 예루살렘의 번성과 바벨론의 심판이 핵심이다. 7. 8절과 9절에 따옴표를 넣어보자.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 는 스가랴인 셈이 다.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 자를 범하는 것이라 이렇게 붙이는 것도 가능하단다. 그러면 보냄을 받은 나 는 메시야가 되는 셈이다. 즉 본문을 역사적으로 보느냐, 영적인 메시지로 보느냐의 차이다. 선지자의 메시지가 이 런 이중성을 띠는 일은 흔하기 때문에 양쪽으로 보아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특히, 10절 이하 의 내용이 메시야 시대를 뜻하는 내용으로 보이기에 이런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8.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것은 하나님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지? 죽었지 머!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거리가 되는 것(9)은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눈동자에 비유한 것은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잘 표현한 것이 다. 눈동자같이 사랑하셨으니까(신 32:10)! 9. 10-11절의 말씀이 단순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넘어 메시야 시대를 상징하는 말이라는 가장 분명 한 증거는 무엇일까? 많은 나라가 여호와의 백성이 될 것(11): 복음이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을 향하는 일이 결코 쉬 운 일이 아니었다. 이방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메시야 시대의 가장 놀라운 특징 중의 하 나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의 성취이기도 하다(창 12:3). 10. 시온의 딸, 즉 유다가 기뻐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함께 거하시기 때문(10):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이다. 하나 님을 기뻐해야 하는데 우리는 흔히 그 분의 손에 들린 작은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11. 가나안이 어떻게 거룩한 땅 인가? - 3 -
스가랴------------------------------------------ 2:1~13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땅이니까: 당연한 것 같지만 이 표현이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온다. 겔 36:20 에 여호와의 땅 이라고까지는 했지만 직접 거룩한 땅 이라고 언급한 것은 여기뿐이다. 그만큼 스 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전하는 메시지가 강렬하다는 뜻이다. 그 어떤 땅이라도 하나님 때문에 거 룩한 땅이 되는 것이다. 12. 사회자가 이 안에 동의하는 분은 숨을 쉬십시오. 이러면 100% 찬성이다. 선지자도 이런 수법 을 썼는가?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여 잠잠하라(13). - 4 -
스가랴------------------------------------------ 3:1~10 스가랴 3 장 1. 스가랴가 받은 환상은 시리즈물 같다. 첫 번째 환상(1:7-17)은 열방의 징계와 예루살렘의 회복 이 라면 두 번째 환상(1:8-21: 열방의 징계2)과 세 번째 환상(2:1-13: 예루살렘의 회복2)은 첫 번째 환상 을 좀더 세부적으로 설명하는 셈이다. 네 번째 환상은 앞의 세 가지 환상과 어떻게 연관이 있는 가? 제사장을 정결케 함(=제사장의 회복): 예루살렘의 회복의 핵심은 성전의 회복인데 회복된 성전이 제 역할을 하려면 반드시 정결한 제사장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제사장의 회복 이라고 제목 을 붙여도 좋겠다. 2.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당시의 제사장이다. 제사장을 상대로 사단이 하는 역할이 무엇인가? 대적하는 일: 뭔가를 세우기 위함보다는 허물기 위함이요, 격려하기보다는 좌절시키는 말을 하고, 좋은 말보다는 못된 말을 하는 것이 그의 본성이다(욥 1:9-11, 벧전 5:8, 계 12:10). 더러운 옷을 입 었기에 더럽다고 말하는 것도 사단의 일이다. 하나님은 더러운 옷을 벗기고 정결한 옷으로 갈아 입히신다. 3. 예루살렘을 왜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로 표현할까? 징계를 받았으나 회복시키실 것에 대한 상징: 이스라엘이 징계를 당하긴 하여도 완전히 재가 되 어 사라지게 하지는 않는다(암 4:11). 좋은 조각가의 손에 들리면 다시 멋진 작품으로 태어날 수 있다. 4. 대제사장이 더러운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란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엇을 비유하는 걸까?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비유다(4): 그 더러움을 제하여 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다. 아 무런 이유도 없이 그 더러움을 제하여 버린다. 죄지은 인생을 깨끗하게 하시는 것도 사실은 무조 건적인 은혜다.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신 독생자 그 분의 희생이 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은혜다. 5. 관을 씌우는 일은 선지자가 나설 자리가 아닌데 나선 것 아냐?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하실 일인데 함부로 참견하고 말이야? 선지자가 왜 그랬을까? 다급함 때문 아닐까? 대제사장이 정결케 되지 않는다면 성전회복도 소용없다. 온전한 대제사장이 세워져야 한다는 다급함 때문에 나서지 않아도 될 일에 나선 것 아닐까? 관은 제사장의 복장 중 에 반드시 필요한 모자다. 6.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셨으면(4-5) 만사가 끝난 것 아닌가? 깨끗케 하신 후에 율례를 지키라고 하신다(7): 회개하고 용서 받았으면 제대로 된 자녀가 되어야 한다. 회개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셨으니 구원받은 자답게 살아야 한다. 거 듭났으면 성화의 길을 걸어야 한다. 7. 제사장도 여호와의 도를 준행하며 율례를 지키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지극히 당연하다: 실제로는 백성들만 그렇게 지켜야 하고 자신은 하나님의 법을 주관, 혹은 집행 하는 특권을 가진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하나님의 법을 다루는 제사장이 먼저 하나님의 법을 지 켜야 한다. 8.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며 율례를 지키면(7) 무슨 특권을 누리게 되는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됨: 세 가지, 집을 다스리는 것, 뜰을 지키는 것, 여기(하나님 앞에) 서는 자들 중에 왕래하는 것 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유일하게 대제사장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신다. 9. 대제사장과 그 동료들(제사장들)이 예표의 사람이라면 무엇에 대한 예표일까? 순 이라는 하나님의 종이 오게 될 것에 대한 예표(사 11:1, 렘 23:5의 한 가지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진짜 종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10. 대제사장 앞에 웬 돌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진 돌, 땅의 죄악을 제하게 하는 돌, 일곱 눈 이 있는 돌(9),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돌(10)이다. 무슨 돌일까? 오실 메시야에 대한 상징이다: 예수님을 가리켜 건축자들의 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라고 하셨 다(마 21:42, 행 4:11). 메시야를 가리켜 순 이라고도 하고 돌 이라고도 하는 것은 그 분의 양면성을 잘 보여준다. 이 돌의 특징도 눈여겨 볼 일이다. 예수님은 한 시도 하나님의 뜻을 잊은 적이 없다 (=말씀이 새겨진 돌). 그렇게 해서 믿는 모든 자의 죄악을 사하셨다. 전지하신(=일곱 눈을 가진 돌) 하나님이셨다. 11. 이스라엘이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는 그 날이 어떤 날인가?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날: 여호와의 종, 순, 돌이라고 표현되는 메시야의 사역이 온 전하게 이루어지는 날을 가리킨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는 모습은 온 성도의 교제가 회복된 모습이다. 가장 이상적인 평화로운 모습을 묘사하는 히브리 문학적 표현이 다. - 5 -
스가랴------------------------------------------ 4:1~14 1. 자는 사람을 깨우면 어떻게 되는가? 스가랴 4 장 죽은 것 같은 사람이 각성해서 움직이게 된다: 이 표현은 사람을 흥분시켜 뭔가를 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는 경우(신 32:11)나, 창을 들어 사람을 치려할 때(삼하 23:18), 때로는 하나님께서 감동시키다 (스 1:1)는 뜻으로 쓰였다. 천사가 스가랴로 하여금 일(성전 건축을 완성하도록 촉구하는 것)하게 하시는 것이다. 2. 선지자가 본 순금 등대는 본래 어디에 있는 것인가? 알 수 없다: 성전에 있던 등대와 모양이 다르다. 흔히 메노라 라고 불리던 성전의 등대는 좌우로 7개의 등잔이 일렬로 나란히 선 모양이다. 선지자가 본 등대는 등대 위의 가운데 기름 그릇이 있 어서 등잔과 관으로 연결된 독특한 형태이다. 처음 보는 것이니 어디에 있던 것인지 모른다. 더구 나 옆에 감람나무가 두 그루 서 있으니 성전 안도 아닌 모양이다. 3. 순금 등대라고 하면서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5)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등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말: 그러니까 천사의 질문은 이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 지 알지 못하느냐? 라는 뜻이다. 4. 하나님의 계시는 보는 즉시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스가랴는 선지자에게 그 의미를 물어보았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냈다(행 11:16). 환상을 보여주시고 해석을 덧붙인 경우도 많다(렘 1:11-12, 13-14). 오늘 우리가 계시를 받았다면 성경에 그 의미를 물어야 한다. 5. 등대와 그 옆에 서 있는 감람나무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 등대에 쓰이는 기름은 감람나무 열매에서 짠 것이다: 그렇다고 등대 옆에 감람나무가 서 있나? 어쨌거나 감람나무에서 기름이 넉넉하게 공급되는 순금 등대는 아름다운 빛을 발하게 된다. 6. 한국의 어떤 이단 교주는 자신을 가리켜 감람나무 라고 했다. 무슨 뜻으로 그랬을까?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로 포장한 말이다: 여기서 감람나무는 교회의 근본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상 징하기 때문이다. 7. 순금 등대와 감람나무의 의미에 대한 천사의 대답(6-7)이 완전히 동문서답 아닌가? 스룹바벨이 성전 건축을 마칠 것(9)이라는 뜻이다: 감람나무가 순금 등대 옆에 서 있음으로 등대 가 온전하게 제 역할을 다하듯이 스룹바벨에 의해서 완성될 성전도 이렇게 온전하게 역할을 다할 것이다. 더 나아가면 장차 그리스도에게 기름을 공급받는 순금과도 같이 소중하며 등대처럼 빛을 발하는 교회의 역할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면 스룹바벨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이런 메시 지를 선지자에게 주어서 선지자로 하여금 스룹바벨을 격려해서 일을 마치도록 하라는 것이 사람 을 쓰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8. 현재 스룹바벨이 하는 일은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다. 이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 이 무엇일까? 하나님의 신(6): 스룹바벨이 열심을 내고 백성들을 지휘하지만 실제로 그 일을 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신(성령)이시다. 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때도 그랬다(출 31:2-3)!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 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자는 복되다(신 8:18). 겉보기에는 사람이 일을 하는 것 같아 보여도 실상 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범사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알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9. 산이 평지가 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비유다. 스룹바벨 앞에 놓인 산이 무엇을 가리킬까? 성전건축에 대한 어려움: 반대자들, 경제적 어려움, 무관심 등을 포함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 어려 움에도 불구하고 (그 산에서? 이전 성전에서?) 머릿돌을 떠낼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 할 것이다(Grace to it!). 10. 스가랴가 이렇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라는 증거가 무엇인가? 성전 완공(9): 하나님께서 주시는 증거는 이렇게 일이 끝나봐야 안다(출 3:2, 7:5). 일이 되어진 후에 여호와를 알리라 는 표현이 성경에는 무수하다. 일이 끝나기 전에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나 마찬 가지다! 하나님은 믿어야 안다! 믿는 자에게만 증거가 있다. 11. 성전 건축을 멸시하는 자들도 있었다(10). 물론 새로 짓는 성전이 이전의 성전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을 수도 있지만 이들은 도대체 무얼 모르는 사람들인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 스룹바벨과 함께 하고 있음을: 성전 건축을 멸시하고 방해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셈이다. 보잘 것 없고, 힘이 없어 보인다고 교회나 하나님의 일 꾼을 대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 그랬던 사람들은 성령훼방죄 를 짓는 것이라고 책망을 들었다(마 12:31, 막 3:29). 12. 일곱 이란 일곱 등잔을 가리키는데 온 세상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이란다. 하나님의 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오겠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훤하게 보이는 것은 무엇일까? 스룹바벨의 손에 있는 다림줄: 현재로서는 이것이 가장 큰 관심사이다. 성전이 재건되는 것이 곧 자기 백성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눈도 보는 - 6 -
스가랴------------------------------------------ 4:1~14 모든 것이 기억되는 것이 아니다. 관심 있는 것이 잘 보인다. 아니, 관심 있는 것만 보이기도 한 다. 13. 선지자가 본 감람나무의 이상한 점이 무엇인가? 두 가지만 금 기름을 흘리는 것(12): 번역상의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두 감람나무에서 두 가지만 금 기름(혹은 금빛 나는 기름)이 나는 특이한 현상에 대해서 물은 것 같다. 7개의 등잔 중에서도 두 개만 좀 특별한 것 같다. 이는 기름을 부어 세우는 당시의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지 도자(=왕의 역할) 스룹바벨을 가리킨다. 선지자와 제사장은 정말 특별한 은혜를 공급하는 자이다. - 7 -
스가랴------------------------------------------ 5:1~11 스가랴 5 장 1. 6번째 환상은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본 것이다. 이 두루마리의 몇 가지 특징을 찾아보자. 굉장히 넓다(9m 4.5m): 일반적인 두루마리의 크기는 30cm 20cm 인데 비하면 엄청나게 넓은 것 이다. 글씨가 많지 않다: 한 쪽에는 도적질하는 자는 망하리라! 반대편에는 거짓 맹세하는 망하리라 고 적혀 있다. 우리말로는 길어 보이지만 히브리어로 보면 겨우 두 단어씩이다. 저주의 말만 기록되었다: 특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아무리 저주를 발해도 구원이나 회복의 메시지 가 있기 마련인데 이 두루마리에는 없다. 글씨를 너무 크게 써서 경고만 발하기 때문인가! 이상의 특징을 고려해서 살펴보면 이 두루마리는 날아가는 것이라기보다는 날아다니는 것이며 광고 효과를 노리는 것이므로 펄럭이며 아래 위가 뒤집히기도 하는 것이다. 요즈음 식으로 보면 공중에 연막으로 글씨를 쓰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노리는 셈이다. 엄청난 심판이 임할 때 못 봤 다 고 말하지 말라! 빨리 돌아서라는 경고다. 2. 도적질과 거짓맹세보다 더 무서운 죄가 많을 텐데? 도적질이나 함부로 맹세하는 것은 다른 더 큰 죄를 짓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참고, 약 2:10). 도적질이 사람에 대한 악행이라면(5-10계명) 망령된 맹세는 하나님에 대한 악행이다(1-4계명).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굳이 더 끔찍한 죄를 언급할 필요가 없다. 3. 하나님께서 발하시는 저주는 어느 정도의 효력이 있는가? 빚 받으러 가서 돈을 줄 때까지 아예 드러누워 버리는 것만큼: 옛날에는 그랬다. 요즈음에는 빚진 사람도 간이 커서 그냥 당하지 않는다. 함부로 그랬다가는 무단침입죄로 걸리는 모양이다. 하나님 의 저주는 죄인의 집에 들어가서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머무른다 4. 7번째 환상은 에바의 여인 이다. 1에바는 약 36.44 이니까 거의 두 말짜리 통이다. 큰 편인가? 조그마한 사람이 들어가서 쭈그리고 앉기에 딱 알맞은 크기다. 5. 이 통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모양이 이 통과 같다 는 것은 무엇 을 의미하는가? 저주받아서 사라져야 할 악을 상징하는 것이다. 앞의 환상의 내용이나 이 에바에 악을 상징하는 여인이 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렇다. 6. 세상의 악을 왜 여인에 비유했을까? 여자들이 기분 나쁘게? 좋을 때는 한 없이 좋지만 무서운 유혹이기도 하다. 음행, 음녀, 우상숭배와 관련되기도 한다(계 17장). 한자에서도 이런 갈등이 보인다(,,,,,, ). 그래서 여자는 요물이란 다. 최소한 남자에게는 그렇다. 그럴만한 매력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여자들이 알고 선하게 잘 쓰면 세상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7. 악을 상징하는 여인을 통에 던져 넣고 납 조각으로 덮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악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악을 잡아서 통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가장 무거운 금속인 납으로 눌러버렸다. 8. 두 여인은 누구이며, 학의 날개는 무엇이며, 날개의 바람은 무엇인가(9)? 선지자의 관심은 에바가 어디로 옮겨지는가? 에 있다. 우리의 관심도 거기에 쏟는 것이 옳다. 굳 이 해석을 하자면 날개 달린 여인의 모습을 한 두 천사가 하나님의 능력(=날개의 바람)을 입어 에 바를 옮기는 것 아닐까? 학의 날개는 크다. 무거운 것을 들어 올려서 훨훨 나는 모습을 그리기에 적격이다. 비둘기 날개라면 쳐다보는 사람이 불안하지 않을까? 9. 시날 땅이 어디지? 인류가 반역하여 바벨탑을 세운 땅이다(창 11:3): 음녀가 심판받는 곳이며(계 17:5), 귀신과 더러운 영들이 거하는 곳이며(계 18:2), 심판으로 사라질 곳이다(사 47:1, 렘 51:60-64, 계 18:21). 10. 시날 땅에 짓는 집의 용도는 무엇인가? 감옥: 심판당할 악을 에바에 가두고 뚜껑을 단단히 덮어서 악의 시발점인 시날 땅 자기 처소에 머물게 한다? 악에 대한 심판이면서 동시에 더 이상 악한 영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날 땅으로 잡혀갔던 것처럼 악이 유배 당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11. 6, 7번째 환상의 내용이 그 이전의 것과 어떻게 다른가? 앞의 환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인데 반하여 6, 7번째 환상의 내용은 심판에 관한 것이다. - 8 -
스가랴------------------------------------------ 6:1~15 스가랴 6 장 1. 네 병거에 대한 환상(1-7)은 스가랴의 마지막 환상이다. 첫 번째 환상(1:7-17)과 비교해 보자. 첫 번째 환상의 의미가 사자들을 보내서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열방을 징계하시고 예루 살렘을 회복시키실 것 이라고 한다면 네 병거에 대한 환상은 뭐라고 할까? 내 마음을 시원케 하 였느니라 는 표현을 참고하면? 심판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 첫 번째 환상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회복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마지막 환상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2.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병거들이 하필이면 놋산에서 나올까? 출발 지점은 그들이 하는 일과 무관 하지 않다. 놋은 강한 능력(왕상 4:13)과 심판(신 28:22-24)을 의미한다: 고대인들에게 놋은 가장 강한 물건이며 (오늘날의 철), 산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견고한 놋산처럼 흔들리지 않고 이 세상을 주관하고 계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3. 네 병거를 이끄는 말들이 색깔이 왜 각양각색일까? 일반적으로 본다면 한 부대에서 나오는 병 거는 같은 모양, 같은 색깔인데? 맡은 영역과 임무가 각기 다르다는 뜻: 구체적인 의미를 하나하나 살피기보다는 세상의 모든 영 역(기쁨과 슬픔, 전쟁과 심판 등)을 주관하시는 하나님(5, 온 세상의 주)의 역사하심을 상징하는 것 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흔히 홍마는 전쟁과 피, 흑마는 재난과 절망, 백마는 기쁨과 번영, 어 룽진 말은 심판의 가혹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건장한 이란 표현은 네 종류의 말에 모두 해당하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단다(7절 참고). 4. 하나님께서 가장 관심이 있는 땅은 아무래도 북방인 모양이다. 북방에는 무엇이 있길래? 심판 받을 자들: 대적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해온 주방향이 북쪽이다. 앗수르, 바벨론이 그렇다. 애 굽만 남쪽이고. 그러니까 이 병거들이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주목적이 대적에 대한 심판이다. 당 할 자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시원해졌다. 에덴에서 시작된 구원의 역사 가 이렇게 해서 막을 내리고 하나님께서도 최종적인 안식을 누리게 되신다. 5. 환상을 보여주시면 그것으로 메시지의 전달이 충분하지 않은가? 환상을 보여주신 것으로 끝이 아니라 해설(여호와의 말씀)이 따라 붙는다. 예수님도 비유로 말씀 하시고 따로 풀이해 주시기도 하셨다. 꿈이든, 환상이든 성경이 해설이다. 단, 9-15절의 말씀은 8번 째 환상에만 따른 것이 아니라 전체 환상에 대한 결론적 해설이다. 6.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는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성전 재건에 필요한 특별한 재료를 가져왔다: 그 중에서 은과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라는 것 이다. 7. 대제사장에게는 본래 특별한 관(모자)이 있다(3:5). 그런데 왜 또 면류관을 만들어 씌우라고 하실 까? 면류관은 본래 누가 쓰는 것인지 생각해 보자. 왕관을 쓴 제사장, 즉 제사장과 왕의 역할을 겸한 분이 등장할 것에 대한 예언이다. 8. 순(새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는 말씀이 어떻 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 되는가(3:6-10과 비교)?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라는 표현은 사 11:1의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라는 구절을 연상시키며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는 말씀은 진정한 성전은 예수님 자신이 라는 말씀(요 2:21)에서 성취된다. 9. 13절에 위 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온다. 을 의미하는 걸까, 아니면 를 가리킬까? 자리를 뜻하는 이다: 왕의 자리에 제사장이 있음에도 이 둘 사이에 조화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 다.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이기도 하다. 10. 언제 먼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였는가? 문자적으로는 그런 일이 없다: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고 하나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게 될 것에 대 한 예표이다. 일차적으로 성전건축을 격려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정한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다. 11. 이런 놀라운 일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 해야(15) 이루어지는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루어지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그 것을 누릴 수 있느냐 마느냐, 그 일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 9 -
스가랴------------------------------------------ 7:1~14 스가랴 7 장 1.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백성들을 책망하던 다리오 왕 사년은 어떤 일이 진행되던 때인지 찾아보자(학 1:1, 15, 슥 1:1, 스 6:15). 성전공사중: 선지자가 처음 하나님의 계시를 본 때는 다리오 왕 2년이었고(1:1), 그 해에 성전공사 가 재개되었다(학 1:15). 다리오 왕 6년에 완공된다(스 6:15). 그러면 지금은 성전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이렇게 수고하고 있는데? 2. 벧엘 사람들이 제사장과 선지자들 찾아와서 물은 것은 정말 잘 한 일이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벧엘은 북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 중심지였고, 찾아온 사람들의 이름은 바벨론식 이름이다. 이로보 건데 이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기에 제사장과 선지자를 찾아온 모양이 다. 잘한 일인데? 바른 대답을 말씀하시지는 않고 그냥 야단만 치신다. 도대체 어떤 태도로 금식 을 했느냐는 것이다. 3. 칠십년, 즉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왜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을까(5, 왕하 25:8-9, 렘 41:1-3)? 포로 생활이 시작되는 초기에 무슨 슬픈 일이 있었을까? 오월에 금식한 이유는 예루살렘의 멸망(왕하 25:8-9)을 슬퍼함이고, 칠월 금식은 그다랴의 암살(렘 41:1-3)을 애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지금도 계속 해야 하는 것인지 묻 는 셈이다. 4. 이스라엘이 금식하고 애통했는데 그것이 어떻게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신 게 (6) 될까? 절기에 따른 금식이 어떻게 자기를 위한 금식일 수 있는가? 금식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랑이나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라면 그럴 수도 있다: 형식적인 종교행위가 아닌 말씀에 대한 순종이 우선이다(사 58:6). 마음을 먼 저 드려야 한다. 인격적인 예배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에서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 벧 엘 사람들의 질문에 이스라엘 전체(5)를 책망하시는 셈이다. 5. 선지자의 말을 청종할 때에는 예루살렘과 사면에 사람이 많았단다(7). 지금은? 왕래하는 사람이 없다(14). 사람이 없는 것이 황무함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짐승이 많아도 사람이 없으면 황무한 것이다(사 23:13). 6. 이스라엘은 지형을 몇 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남방은 네게브라 불리는 사막지대고 평원 은 세펠라라고 부르는데 평지다. 그러면 예루살렘과 사면 읍은 무엇이라고 불릴까? 산지 7. 공의로운 재판, 인애와 긍휼,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말 것은 한 두 번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신 10:18, 사 1:17, 렘 5:28, 암 2:6-8... ). 금식은 하는데 이건 왜 안 될까?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다(11). 이원론적 사고, 변질(초점이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내 것을 희생하지 않으려하는 것이 주원인 아닐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이원론적 사고가 주원인이고 이스라엘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변질 아닐까? 이웃을 돌아보려면 내 돈이 들어가야 하는 탓인가? 아무래도 이런 분들께는 야고보서를 읽혀야 할까보다. 8. 이스라엘이 얼마나 말을 듣지 않았을까? 고의적이다: 등으로 향하며 라는 말은 등을 돌리는 정도를 넘어 소가 끌려가지 않으려거나, 멍에 를 메지 않으려고 뻗대는 정도의 의미다. 목이 곧은(신 9:6, 느 9:29), 암소처럼 완강하다(호 4:16)는 표현과 비슷한 의미다. 그러면서 귀를 틀어막고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순종하지 않았다. 어려운 형 편에 처해서 어쩔 수 없이 불순종한 것이 아니다. 9. 아름다운 땅이 왜 황무하게 되었는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원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찾아두신 가장 아 름다운 땅이었다(겔 20:6). 10. 금식의 여부에 대한 질문의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다음 장에 나올까? 나온다고 봐야죠! - 10 -
스가랴------------------------------------------ 8:1~23 스가랴 8 장 1.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질투하시나(2)? 철없는 여자도 아니면서? 질투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다. 한 쪽에서는 사랑을 하는데 상대방 이 사랑받는 자의 도리를 다하지 못할 때 생기는 현상이 질투다. 만물의 창조자가 되시는 그 분 이 인간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인간을 한낱 피조물 중의 하나 로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대등한 인격을 갖춘 존재로, 교제의 대상으로 만드셨고 그렇게 대우하 시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하나님의 질투나 분노의 궁극적인 목적은 시온을 위하여 이다. 2. 하나님께서 떠나시면 이스라엘도 떠나게 되고 하나님께서 돌아오시면 이스라엘도 돌아오게 된 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이제 할 일은 무엇인가? 돌아오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 예루살렘이 다시 번영하는 비결이다. 그래야 예루살렘이 진리의 성읍이 되고 성산이 된다(1). 그게 잘 안 돼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다시 제대로 길을 가르쳐 주셨 다(요 4:24).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3. 훗날 하나님께서 이루실 평화로운 나라의 가장 큰 특징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면 무엇인가(3-5)? 하나님의 임재, 장수: 결과적으로 노인들에게 여유로움이 넘쳐나고, 아이들의 장난이 끊이지 않는 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남은 자의 눈에는 꿈같은 일이다(6). 남은 자 는 본 래 포로에서 귀환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사 10:22, 습 2:7, 학 1:12) 여기서는 신약의 성도 들을 가리킨다. 4. 스가랴 선지자 시대에 돌아올 사람은 다 돌아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또 온 세상에서 백성들 을 불러 모으시는가? 결국 이 본문은 신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불러 모아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에 대한 예언이다(계 21:1-7). 9:9절을 참고하라. 5. 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일어난 선지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학개와 스가랴(9): 결국 지금 당장에 이들이 용기를 내서 해야 하는 일은 성전을 완공시키는 일이 다. 그 일을 마치도록 독려하면서 동시에 진짜 성전을 세우는 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6. 선지자들의 말을 듣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선지자들의 말을 들었으면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 가? 손을 견고히 해야 한다(9, 13): 기운을 내라 담대하라 는 뜻이다(삿 7:11).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다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있어야 하나 님의 일도 이루어진다. 7. 이스라엘이 일을 해도 삯을 얻지 못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전쟁통: 대적이 끊임없이 쳐들어오는 탓이다. 물론 자연적인 재난이 있을 수 있고, 악한 주인을 만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나 이 경우에는 시대가 평화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적이 침략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삯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말씀에 순종 할 때 주시는 복은 풍성하다(12, 레 26:3-10, 신 28:11-12, 겔 34:25-31). 8. 조상들이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였단다. 그런데 왜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푸 시는가? 이유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징계를 내리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징 계를 내리시지만 영원하지 않다. 하나님 스스로 노여움을 푸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녀로 삼은 탓이다.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런 관계로 창조하셨고 이 인간을 상대로 하실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징계를 내리셔도 반드시 회복의 이야기가 뒤를 잇는다. 조그마한 건수만 있어도 그걸 핑계로 복을 내리신다. 이런 의도를 가지신 하나님께 순종하고 따르면 얼마나 큰 복이 있을까? 9. 조상들에게 노를 발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서 은혜를 베풀 테니 감사하라고 하시는 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라(=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다(16-17): 여행길에서 뜻하지 않은 젊은 목사를 만났더니 부목사로 있는 자기 교회를 자랑했다, 상식이 통하는 교회입니다. 이게 큰 자랑이었다. 나도 동감했다. 상식이 통하기만 해도 좋은 교회라니?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 있 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예배, 선교, 전도(=하나님을 향한 사랑)에는 열심이면서 이웃을 향한 사랑 은 부족한 탓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마땅히 이웃을 사랑하는 자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 간의 책임적 반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10. 7장의 질문, 즉 벧엘 사람들이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이 여기 있다면? 금식이 변하여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이 될 것(19): 금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과 화평을 사 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대답하는 셈이다. 11. 하나님께서는 어떤 시대를 꿈꾸고 계시는가? 온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쁨으로 찾는 시대(20-23): 이스라엘이 기억하는 네 개의 절기는 슬 픔을 기억하는 날이다. 10월 금식은 예루살렘이 포위된 날을(왕하 25:1), 4월 금식은 예루살렘이 점 - 11 -
스가랴------------------------------------------ 8:1~23 령된 날(렘 39:2)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런 아픈 기억들을 떨어버리고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을 누 리라는 것이다. 12. 이스라엘은 열방에 인기가 많다. 옛날에도 온갖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오더니 장차 또 찾 아온단다. 이 방문이 이전과 비교해서 어떻게 다른가? 이전에는 침략이었지만 장차는 여호와의 은혜를 구하러 온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 12 -
스가랴------------------------------------------ 9:1~17 스가랴 9 장 참고) 쓸데없는 소리지만 어떤 신학자들은 9-14장을 예레미야의 글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내용과 형식이 앞부분과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용은 종말론적이며 형식은 앞부분과 달리 운문이다. 이 사야 다음으로 메시야 예언이 많다. 초림(3:8, 9:9-10, 11:11-13, 12:10, 13:1, 6)과 재림(6:12, 14:1-21)에 관 한 것과 종말론적인 그 날에 라는 표현이 18회나 사용되었다. 예레미야와 닮은 점은 성전에 관한 언급이다. 이스라엘의 미래, 미래의 성전을 말하기 때문에 차이가 난다! 1. 여호와께서 누구에게 경고를 발하시는가? 온 세상 사람들(1-7): 이들을 구체적으로 세 그룹으로 나누면 수리아 지역(하드락, 다메섹, 하맛)과 베니게(두로, 시돈)와 블레셋(아스글론, 가사, 에그론, 아스돗: 가드만 빠졌다?)이다. 이들은 이스라 엘의 대적자들이면서 동시에 메시야에 대한 대적자들을 상징한다. 이 말씀은 알렉산더에 의해서 역사적으로 성취되고 메시야의 출현으로 이어진다. 1절 후반부의 해석이 어렵다. 세상에 임하는 하나님의 징계를 모든 사람이 바라보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어떨까? (역본마다 차이가 있다) 2. 아는 것이 힘 이란 말도 있고, 자본주의에서는 돈도 실력 이라는 말도 있다. 맞는 말인가? 하나님을 빼고는(사람 사이에서는)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는 지혜(두로 와 시돈)도, 돈(두로)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자기를 위하여 이런 것들을 쌓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 을 피하지 못한다. 3. 블레셋은 결국 어떻게 되는가? 유다의 한 두목 같이, 여부스 사람 같이(7): 일부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도 여부스 사람들을 추방하지는 않았다(왕상 9:20-21). 성전이 세워 진 아라우나의 타작마당도 여부스 사람의 것이다(삼하 24:16). 여부스 사람이 이스라엘과 함께 거 하듯이 블레셋도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거하게 된다는 것은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가서 이방 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4. 이방에 대한 심판은 자기 백성을 돌아보시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불같이 화를 내시는 분이(1-7) 돌아서서 따뜻한 미소로 자기 백성을 바라보신다(8). 하나님의 이런 양면성이 종말에는 어떻게 나 타나는가? 영생과 영벌(마 25:46): 혹자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영벌을 내리시겠는가? 라고 하지 만 하나님은 사랑만 넘치는 분이 아니시다. 끝내 돌이키지 않는 자에게는 영벌을 내릴 만큼 모진 (?) 면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마이 있으니 가마이떼긴 줄 아나? 이러면 죽었다고 봐야지! 5. 9절은 대단히 유명한 구절이다. 이 구절을 잘 인용한 분이 두 분이라면 누구일까? 예수님과 헨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이 구절을 기억하시면서 나귀를 타셨다. 헨델 은 메시야의 18번 소프라노 솔로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 의 가사를 이 구절에서 땄다. 6. 왕이 하필이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시나? 정복이나 군림하기 위한 왕이 아니라 겸손한 왕이시기 때문: 초림의 예수님은 겸손한 왕으로 오 셨다. 그런 모습으로 오시니 붙잡혀서 고난을 당하시지(구원). 그러나 결국에는 악한 자를 심판하 시러(공의) 다시 오실 것이다. 7. 말도 안 된다. 병거와 말과 활을 끊으면서 어떻게 정권이 땅 끝까지 미친단 말인가(10)? 평화의 나라는 그렇게 온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려는 그 나라는 무력이나 권력으로 다스리는 나라 가 아니라 겸손함으로 화평을 누리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은 더 이상 인간의 세상이 아 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세상이다. 물론 그 이면을 보면 하나님께서 대신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른다(13-15). 반드시 제압해야 할 사탄의 무리가 있기 때문인데 하나님께서 처리하실 일 이다. 8. 하나님께서 갇힌 자들을 구원해서 돌아오게 하시고 배나 갚아주시는(11-12) 이유가 무엇인가? 언약의 피 때문에(11): 모든 제사에는 피 흘림이 따르는 것도, 언약을 세우실 때 피를 흘린 것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은 일이다. 9. 병거와 말과 활을 끊으면서 평화의 나라를 세우시겠다더니 갑자기 이렇게 피를 뿌리는가(13-15)? 이 예언이 후일에 있을 마카비 가문이 헬라 군대를 밀어내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13) 궁극적으 로는 영적인 싸움, 즉 메시야 왕국의 적대자들에게 완벽한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상징적인 표현 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우리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 대적을 완전히 섬멸하는 전투는 어쩔 수 없다. 이것이 영적인 전투를 가리키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병거와 말과 활을 끊으라는 것이다. 교 회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전투도 돈이나 힘을 통한 전투는 아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두 가 지 싸움을 해야 한다. 사랑으로 정복하여 형제를 살리는 싸움과 무력으로 처절하게 죽여야 하는 싸움이다. 10. 대적은 핏빛으로 물들겠지만(13-15)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과 같을까? 양떼, 면류관의 보석: 양은 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목자가 되셔서 이들을 돌보시겠다는 것이다. 양떼와 보석 중에 어느 것이 더 아름다울까? 어쨌든 최고로 아름다운 존재로 이끄시겠다는 뜻이다. 11. 요즈음 소년의 아름다움은 근육질 몸매, 처녀는 섹시함인가보다. 막상 결혼하려면 돈을 따지면 - 13 -
스가랴------------------------------------------ 9:1~17 서도! 그 옛날에도 곡식이 풍성하고 포도주가 넘치는 것이 가장 큰 복이었을까? 여기 곡식과 포도주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결과물이다. 하나님도 없는 곡식과 포도주가 문제 지 하나님을 우선으로 한 결과로서의 곡식과 포도주는 복이다. - 14 -
스가랴------------------------------------------ 10:1~12 스가랴 10 장 1. 이사야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고 했다(사 55:6).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하시지 않으면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 성숙한 기도는 하나 님께서 이루려고 하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다. 포로 생활 70년이 찬 것을 알고 기도한 다니엘이 그러하고(단 9장) 비가 올 것을 알고 열심히 기도한 엘리야의 기도가 그렇다(왕상 18장). 선지자는 언제 무엇을 구하라고 하는가? 봄비 때에 비를: 봄비가 와야 할 때에 비를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때가 되면 오히려 기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연히 올 건데? 비가 오는 것이 자연현상을 넘어 하나님께서 주관 하고 계심을 믿는다면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당연히 누리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주 시는 은총인 것을 믿는다면 이런 것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아쉬워서 기도하는 것이야 누구 나 하는 것이지만! 2. 하나님과 우상은 어떻게 다른지 본문을 근거로 설명해 보자. 하나님은 비를 내려 채소를 자라게 하지만(1) 우상은 허탄한 것과 거짓을 말함으로 백성을 유리하 게 만든다(2). 3. 하나님께서 왜 목자들과 숫염소들을 벌하시는가? 그릇된 지도자들이기 때문이다: 삯군 목자는 백성들을 그릇 인도하여 우상을 섬기게 했고, 숫염소 도 그 양떼들의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렘 50:8). 4. 유다 족속이 만날 이방 족속들에게 침략이나 당하면서 살았는데 언제 전쟁의 준마같이 되는가? 언제 세상을 정복해본 적이 있어야지? 영적인 전쟁을 가리킨다: 모퉁이 돌이 되시는 예수께서 오셔서 사랑과 희생으로 온 세상을 정복 하셨다. 5.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면 무엇이 무엇으로 변하는가? 유리하던 양 떼가 전쟁의 준마로! 양은 자신을 지켜낼 능력이 전혀 없는 동물이다. 이런 양이 어 떻게 전쟁터를 누비는 준마가 된단 말인가? 우리 눈에 기이할 뿐이다. 6. 유다 족속이 말 탄 자를 부끄럽게 할 수 있는 것은 모퉁이 돌, 말뚝, 싸우는 활, 권세 잡은 자 덕분이다. 이런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가? 메시야: 모퉁이 돌은 견고한 기초, 말뚝은 튼튼하게 왕국을 지탱하는 힘, 싸우는 활은 대적을 제 압하는 능력, 권세 잡은 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한다. 메시야가 세운 교회는 이런 능력으로 말 탄 자를 부끄럽게 할 것이다. 교회가 이런 모습으로 악을 점령해야 한다. 7. 유다 족속과 요셉 족속을 구원하시면 나머지 10지파는 어떻게 하나? 유다 족속은 분열 당시 남쪽 유다를, 요셉 족속은 북 이스라엘의 10지파(=에브라임)를 가리키는 말이다. 결국 12 지파 전체를 가리키는데 실제로는 북 이스라엘의 10지파는 지파의 모습으로 회복 되지 않는다. 신약의 모든 성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약의 모든 성도가 바로 구약의 하나님의 백 성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이다. 8. 회복된 이스라엘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즐거움(7):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특징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감사할 줄 아는 것이다(살전 5:18). 어 떤 형편에 처해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다(신 33:29, 하박국 3:18-19, 행 26:29). 눈물도 은사지만 그 눈물은 분명히 기쁨의 눈물일 것이다. 9.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거나 흩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였다. 하나님께서 뿌리신 것이다. 뿌린다는 말에는 흩어지게 한다는 뜻도 있지만 씨를 뿌린다는 의미도 있다. 이스라엘이 흩어진 것 은 어느 쪽인가? 양쪽 다: 징계로 흩으셨지만 그것을 선한 목적으로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흩어짐에 대 해서 바울은 몹시 마음이 아팠다(롬 9:3). 그러나 그것을 선하게 이용하셔서 자기 백성을 불러 모 으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서는 감격의 찬송을 불렀다(롬 11:25-36). 10. 하나님도 휘파람을 부시는가? 목동이 양떼를 모으는 신호로 부는 휘파람이다. 목동이 양떼를 불러 모으듯이 자기 백성들을 불 러 모으시겠다는 말이다. 11. 애굽, 앗수르, 길르앗, 레바논(10)은 어떤 곳을 의미하는가? 애굽, 앗수르는 이스라엘이 종 되었던 땅이며 길르앗, 레바논은 이스라엘이 번성할 땅이다. 압제 에서 해방으로, 노예에서 자유민으로, 죄악에서 의로, 사탄의 지배 하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옮기 우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12. 하나님의 구원은 생각만 해도 감격스럽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어떤 말씀이 그렇 게도 감격스러울지 두 가지를 지적한다면? 길르앗 땅과 레바논도 거주지로 좁을 것(10): 원방에서 돌아오는 정도를 넘어서 넓은 땅에서 엄청 나게 번성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 15 -
스가랴------------------------------------------ 10:1~12 애굽도 앗수르도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을 것(11): 고해를 지나게 하며 바다 물결을 쳐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른다는 것은 출애굽시 홍해를 건너는 장면을 연상시키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 겠고 애굽의 홀이 없어지리라는 것은 이 두 나라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위협적인 세력이 되지 못 한다는 뜻이다. 13. 결과적으로 보면 언젠가는 불러 모을 것을 기대하면서 뿌린 셈이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내어보내실 때 언젠가는 다시 불러들일 것을 전제로 한 것과 마찬가지다. 범죄한 인생을 이런 과 정을 거쳐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결국에는 어떻게 되는 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견고한 나라를 세우실 것(12): 메시야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렇 게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왕래하는 나라다. 14. 본문을 근거로 이스라엘의 회복 과정을 간단하게 요약해 보자(1-3 4-7 8-12). 우상을 버림(1-3: 지도자들이 잘못 인도한 결과다) 대적을 물리침(4-7: 우상을 버리면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도우신다) 하나님께서 이끄심(8-12: 불러 모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 의 백성답게 살아갈 것이다) - 16 -
스가랴------------------------------------------ 11:1~17 스가랴 11 장 1. 앞에서는(9-10장) 이스라엘이 받을 축복을 얘기하더니 여기서는 별안간 웬 저주인가? 하나님의 속성 중에 공의와 사랑은 상반되는 측면이 있어서 결과적으로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임 할 수 있다. 양과 염소의 구분을 철저하게 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축복이 임할 때 바 로 그 옆에 저주가 임하기도 한다. 2. 온통 징계에 관한 내용이다. 징계의 대상이 몇 가지인가? 삼림(1-10, 이 땅의 거민들), 목자들(15-17, 지도자들). 3. 레바논의 백향목과 잣나무이나 바산의 상수리나무에 무슨 원한이 있어서 불로 태우고 베어 넘 기는가? 6절에 대한 비유다: 심판받을 이 땅 거민들의 현재 모습이 무성한 삼림과 같다는 것이다. 쭉쭉 뻗 어있는 아름드리 나무처럼(겔 31:3) 얼마나 보기에 좋을까마는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면 깨끗이 사 라지고 말 것이다. 4. 어린 사자는 왜 부르짖을까? 삶의 근거가 사라졌기 때문: 삼림이 없어졌고 목자가 곡을 할 만큼 양떼도 사라졌는데 무얼 먹고 살아? 요단의 자랑 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기름지고 숲이 무성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영화 로운 것). 5. 스가랴 선지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그것이 무엇에 대한 상징인지 생각해 보자. 잡아먹힐 양떼를 먹이는 일(4, 7, 막대기 둘을 취하는 것은 여기에 포함되는 일), 고가를 받아 토기 장이에게 던짐(13), 막대기 자르기(10, 14), 우매한 목자 노릇(15): 앞의 두 가지 일은 선한 목자의 일 로서 초림의 메시야에 대한 상징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판하시는 이유는 메시야를 배척 하기(4-14) 때문이라는 것이다. 스가랴는 그러다가 철저하게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우매한 목자 노 릇까지 보여준다. 이것은 로마의 Titus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6. 양을 산 사람이 잡아먹겠다는데 무슨 죄가 있으며, 팔아서 돈을 받은 사람이 여호와께 찬송하 는 게(5) 무슨 문제인가? 요는 양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6): 하나님은 잡아먹힐 양조차 돌보고 계시는데 이들 은 도무지 양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양이, 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 하는 것이다. 내 돈 주고 샀는데 잡아먹든 말든? 돈이 생겼으니 감사! 이왕에 잡아먹힐 것! 이런 식이다. 아무도 양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도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겠다는 것이 다. 7. 한 달 동안에 세 목자를 끊어버린 이유를 무엇이라고 하는가(7-9)? 내가 양떼를 싫어하고 양떼도 나를 싫어하기 때문(9): 8절의 그들 은 7절의 양떼를 가리킨다. 어차 피 죽을 양떼지만 최선을 다해서 돌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기에 버리는 것이다. 목자를 끊어버 리는 것이 양떼를 버리는 최상(?)의 방법이다. 세 목자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지만 이런 문맥에 따 라서 이스라엘의 세 지도층(왕, 선지자, 제사장)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돌보시는 선한 목자이시기도 하지만 끝내 돌이키지 않는 자는 버려두신다(롬 1:24, 26,28). 8. 목자를 끊어버리고 양떼를 버려두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죽거나 망하거나 뜯어 먹히거나(9): 자연사하거나(죽는 자) 전쟁으로 죽거나(망하는 자) 기근으로(살 을 먹히는 자) 죽는다. 하나님께서 버리시는 것은 자유나 해방이 아니라 죽음이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아무리 잘 나가는 듯이 보여도 철로를 벗어난 기차, 어항 밖으로 뛰쳐나온 붕어일 뿐이다. 9. 목자를 끊고 양떼를 버려두는 것(7-9)이 곧 은총을 거두고 언약을 폐하는 것(10-11)이다. 최악의 상태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와중에서도 선지자의 행위가 여호와의 말씀인 것을 깨닫는 자는 복되다. 버려지는 자 가운 데서도 소수지만 구원받는 자는 항상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자 가 궁극적인 행복자이다. 10. 은 삼십과 토기장이 얘기는 어디에 나오는가? 예수님을 팔고(마 26:15) 받은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행려병자)의 묘지로 삼은 것(마 27:7)에 대한 예언이다. 11. 선지자가 왜 고가(품삯)을 달라고 하는가? 무슨 일을 했기에? 선한 선지자의 역할(4, 7a): 품삯을 받는 것이 선지자의 목적이 아니었음에도 이렇게 요구하는 것 은 다분히 풍자적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돈을 요구하는 것, 즉 부모가 어린 자 식에게 양육비를 청구하는 것과 비슷한 행위이다. 뭔가를 깨우치려는 것이지 돈이 목적이 아니다. 12. 선지자가 한 일에 대해서 제대로 값을 쳐주었을까? 은 삼십이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출 21:32)? 죽임 당한 노예의 몸값이니 그리 많은 액수는 아니다(출 21:32): 군대서 흔히 하는 말로 훈련소에 서 죽으면 (장례비로) 개 한 마리 값밖에 나오지 않는다 는 말처럼 경멸적인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선지자가 행한, 값으로 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뭔가를 깨달으라고 한 소 - 17 -
스가랴------------------------------------------ 11:1~17 리 했더니 이렇게 경멸적인 대답을 한 셈이다. 차라리 주지 않는 것보다 더 경멸하는 셈이다. 그 러니 그 돈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제사장들이 준 예수님의 몸값도 그런 셈이다. 이렇게 선한 목자를 이렇게 조롱하고 배척한 결과는 우매한 목자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 다. 그리하여 양떼도 죽고(16), 자신도 망한다(17). 13. 은총이란 기쁨, 즐거움 이란 뜻으로 외부적인 위협으로부터 안전함을 의미하는데 연락이란 통 일, 화합 을 의미한다. 이런 것을 의미하는 연락이라는 막대기가 잘라진 것은 이스라엘의 장래가 어떠할 것임을 의미하는 걸까? 예수님 이후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완전히 사라지고 민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지파별 개념마 저 사라진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지파인지 모른다. 14. 목자의 기구 란 양떼를 돌보는 도구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우매한 목자의 기구 란 무엇을 가리 키는 말일까? 양떼를 잡아먹는 도구(16): 하는 일이 살찐 양을 잡아먹을 궁리나 하고 있으니... 양떼를 잘 돌보라 고 준 도구도 그렇게 못된 짓거리에 사용될 수 있다. 로마교회처럼 베드로의 열쇠를 교권싸움에 사용하거나, 교회의 치리권을 인간적인 권리 다툼에 사용하는 것이 그런 예일 것이다. 이런 목자 의 비참한 최후(17)는 종말에 있을 최종적인 심판을 가리킨다. - 18 -
스가랴------------------------------------------ 12:1~14 스가랴 12 장 1. 11장과 비교해 보면 내용이 여기서 어떻게 바뀌는가? 죽임당하는 데서 승리와 구원으로! 9-11장은 초림의 메시야를 배격하는 것에 대한 경고였지만(특 히 11장) 12-14장은 메시야의 재림과 통치에 관계된 경고의 말씀이다. 메시야를 배격한 육적 이스 라엘이 징계를 당했지만 메시야를 영접한 영적 이스라엘은 종말적인 승리와 구원을 노래하게 된 다. 2. 많은 사람들이 사람은 동물의 일종이요,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짐승을 잡듯이 사람 을 죽이는 모양이다. 무서운 생각이다.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실까? 내 눈에는 하늘과 땅과 심령(사람)만 보인다 : 사람이 하늘보다 땅보다 더 귀한 존재다(마 16:26). 사람을 위해서 하늘과 땅이 존재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수많은 아이들 가운데서도 자기 아이만 보이는 엄마의 눈처럼! 참고로 내가 사람을 나의 형상대로 지었 다 이것은 창세기를 공부할 때의 정답이다. 사람에게는 심령을 주셨다 이것은 좀 더 나은 대답 이지만 정답에는 미치지 못한다. 3. 새삼스럽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영혼을 주셨다고 언급하는 이유가 무 엇일까? 새로운 창조(=구속)도 가능하다는 것이다(=이어지는 내용의 확실함을 강조): 이렇게 전능하실 뿐 아니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므로 능히 이스라엘에 승리와 구원을 베푸실 수 있다 는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혼취(몽롱하도록 취함)케 하는 잔으로 만들어버리면 대적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맛있다고 홀짝거리면 죽어나는 거지: 대적들이 가볍게 보고 침략하다가는 그런 꼴이 난다는 말이 다(계 16:16-21). 예루살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유다 전역을 그렇게 돌보실 것이다(2). 5. 이스라엘이 무거운 돌이면 무슨 일이 생길까? 잘못 들었다가는 발등 깨지! 무거운 것일수록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실수하면 그만큼 크게 다치기 때문이다. 6. 하나님께서 말( )을 치시면 어떻게 되는가? 대적의 기병대가 끈 떨어진 연이요, 앙꼬없는 찐빵이지: 놀라게 하며 미치게 하되 눈이 멀게 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불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치시는 방법이었다(신 28:28). 이제는 대적을 그 렇게 치실 것이다. 이스라엘을 돌아보신다는 말을 직역하면 내가 눈을 뜰 것이라 는 말이다(I will open My eyes on the house of Judah, NKJV). 7. 지독하게 말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도 그제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게 될 모양이다(15). 어떤 은혜를 베풀어야 알아듣는가? 주변 모든 대적의 말이 눈이 멀면: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아본다. 기드온에게 300명의 군사만 허락하신 이유도 그렇다(삿 7:2). 우리 인생이 그런 모양이다. 뒤돌아보 면 알 텐데(미 6:5)!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는데(요 20:29)! 8. 나무 가운데 화로 나 곡식단 사이에 횃불 은 무슨 의미인가? 아무도 이스라엘을 해할 수 없다: 나무나 곡식이 화로나 불을 해롭게 하려고 덤비면 자신만 피해 를 입을 뿐이다. 애초에 싸움의 상대가 아니다. 대적이 전혀 없는 상태다. 그 본 곳 예루살렘 은 교회를 가리킨다. 교회를 없애려고 시도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건만 굳건하게 전진하고 있는 것을 보라. 때로는 외적에 의해, 때로는 내부의 연약함으로 사라질 것만 같았던 교회가 여전히 전 진하고 있지 않은가! 교회는 주님 오실 날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교회가 염려스러워 잠 못 이루는 성도가 적지 않지만 교회의 주인 되시는 그 분이 계시는 한 평안할지어다. 9. 다윗의 집은 다윗이 일으켜 세운 강성한 나라를 가리키고 예루살렘 거민의 영광은 그 강성한 나라 백성의 자부심을 가리킨다. 그러면 유다의 장막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금은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실 더 강성한 나라: 장막은 임시처소일 뿐 영구적인 요새가 아니다. 그런 장막을 하나님께서 세우시면 다윗이 세운 나라보다 더 강성한 나라가 된다. 그 나라 의 약한 자도 다윗 같다(8)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약한 자 같으나 하나님의 편에 서는 자가 진 정으로 강한 자임을(고후 6:9-10) 잘 보여준다. 요는 하나님께서 가장 강성했던 다윗의 왕국보다 더 강성한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10. 유다를 이렇게 강성한 나라로 세우시려고 치러오는 열국을 멸하겠다고 하시면서(1-19) 예루살렘 에 애통이 있다니(10)? 전혀 다른 내용으로 바뀐 탓이다: 가령 꿈속의 얘기하다가 갑자기 꿈에서 깨는 것처럼! 이전까지 는 장차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내용이었는데(1-9) 이제는(10-14) 그 나라를 이루 기 위한 예수님의 수난 장면으로 돌아온 것이다. 혹은 이스라엘의 외적회복에서 내적회복으로 바 뀌었다고 보아도 되겠다. 11.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다니? 무슨 뜻일까? - 19 -
스가랴------------------------------------------ 12:1~14 앞에 죽은 이라는 말을 삽입해서 읽으면 된다: 극도의 슬픔을 의미하는 비슷한 장면이 성경에 많 이 있기 때문에, 즉 익숙한 장면이라서 설명을 생략한 것뿐이다(출 11:5-6, 렘 6:26, 암 8:10). 말 안 해도 아는 사람은 안다! 익숙한 속담은 반만 잘라서 써도 알아듣는 것처럼! 12. 예루살렘 거민이, 나아가서 온 땅의 족속마다 이렇게 통곡하는 것은 그들이 찌른 그 분(원문상 으로는 나 )을 위하여 통곡하는 것이다. 찌를 때는 언제고 통곡은 왜 하는 거야? 어떻게 이런 반전 이 일어날까? 하나님께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셨기 때문(10):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건을 가리킨다. 독생자를 주신 것은 가장 큰 선물이다. 그게 그렇 게 큰 선물인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또 다른 은혜(선물)다. 우리 스스로 그런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다! 13. 애통하는 장면에 므깃도는 왜 나올까? 거기서 애굽의 바로와 싸우다 죽은 요시야 왕에 대한 애통함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대하 35:20-25): 통치자를 잃은 백성들의 슬픔과 같은 애통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훗날 이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게 된다(행 2:37). 하다드림몬의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14. 애통도 한 군데 모여서 않고, 개인별로 해야 하는가? 거국적인 회개라 할지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회개해야 한다. 구원이 공동체적인 성격이 분 명히 있음에도 개인적인 것이다. 따로란 말이 11번이나 반복된다. 천국에 단체입장은 없다! 아내 덕 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내들이 따로 15. 문맥상 나단은 다윗의 아들 나단을 가리킨다(삼하 5:14, 대상 3:5, 14:4, 눅 3:31). 여기 시므이도 레위의 손자다(출 6:17,민 3:18, 21, 대상 23:7, 10). 결국 두 족속을 예로 들고 나머지 지파는 단체로 취급했다. 이 두 지파는 왜 따로 언급했을까? 다윗 족속은 통치를, 레위 족속은 제사를 맡은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대표성을 지닌다. - 20 -
스가랴------------------------------------------ 13:1~9 스가랴 13 장 1. 예루살렘이 죄와 더러움을 씻는 것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죄와 더러움을 씻으려면 무슨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샘을 열어 주셔야 가능한 일이다: 회개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천국 을 가까이 끌어다 주셨기에(마 4:17) 회개가 유효한 것이다. 또, 제물만 있으면 제사를 드릴 수 있 는 것이 아니다. 제물을 끌고 제단에 가보면 이미 번제가 드려지고 있다. 그 번제물 위에 나의 제 물을 올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주시지 않는 한 죄인에게는 길이 없다(레 9:17, 6:12, 출 29:25). 우리는 믿는다고 고백하기만 하면 되지만 그것이 가능하기까지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희 생이 먼저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조지 오웰이 쓴 1984에 언어조작을 통한 사회통제 에 대한 기초적인 언급이 나온다. 즉 빅브라 더의 통치 이념에 어긋나는 모든 단어를 모든 문헌에서 삭제하는 장면이 나온다. 말을 없앤다고 생각마저 달라질까? 가능하단다: 이름을 불러주면 그 때부터 존재하는 것이다(김춘수의 꽃 ).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존 재해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참고, 전 6:10). 반면에 이름이 사라지면 존재도 없어진다. 그날에 우 상의 이름을 끊는다는 것은 아예 우상은 생각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오직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는 세상이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세 상! 3. 그날에는 우상이 완전히 제거될 것이다. 우상을 어느 정도로 싫어할까? 부모가 우상을 섬기는 자식을 찌를 정도: 도대체 얼마나 미우면 그럴까? 거짓 예언에 대한 미움 이 극에 달하는 세상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다. 4. 선지자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누가 잘 아는가? 부모(3):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야 진짜다. 부부에게서, 자녀들에게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아도 진짜이어야 한다. 5.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을 입다? 사람을 속이는데 왜 털옷을 입을까? 선지자도 아니면서 털옷을 입고 선지자인척 한다는 말이다: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띤 것이 안락 한 삶과는 거리가 먼 선지자의 복장이었다(마 3:4, 왕하 1:8). 오늘날 잘 다루어진 모피 털옷과는 전혀 다른 거친 옷이다. 왕궁에 사는 사람은 비단과 같은 부드러운 옷을 입는다(마 11:8). 오늘날에 도 이런 유의 털옷을 즐겨 입는 자들이 많다. 기도할 때나 설교할 때 거룩한 척하는 말투나 태도 도 이런 유다. 작의적인 눈물이나 표정도! 6. 우상이 완벽하게 제거된 세상에는 더 이상 선지자도 필요 없고, 예언도 필요 없다. 그런 세상에 서 예언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다. 존재할 수도 없는 거짓 선지자는 자신의 신분을 어떻게 속 이는가? 털옷을 입지 않고, 거짓말을 함: 선지자 행세를 아예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 날에 는 우상도, 우상을 섬기는 거짓 선지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7. 거짓 선지자에게 웬 상처가 있을까? 우상을 섬기던 시절에 얻은 상처다(왕상 18:28, 레 19:28): 그래서 거짓말로 친구의 집에서 얻은 상 처라고 하는 것이다. 두 팔 사이는 몸통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8. 내 목자, 내 짝된 자 는 위에서 말한 거짓 선지자일까? 아니다: 거짓 선지자나 못된 목자를 가리켜서 내 목자, 내 짝된 자 라고 한 적이 없다. 짝된 자 라는 말은 나와 교제하는 아주 가까운 자라는 뜻이다. 이렇게 목자를 치면 양떼가 흩어지리라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적용하셨다(마 26:56, 막 14:50). 나아가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배척함으 로 결국은 만민 중에 흩어지는 것에 대한 예언이다. 위에 언급한 그 아름다운 세상은 예수 그리 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9.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는 표현(7b)은 긍정적인 의미일 수도 있고, 부정적인 의미일 수도 있다. 흩어지는 양들 가운데서도 작은 무리에게 구원을 베푸신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은이나 금을 연단하듯이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시는 분이시니까(9, 사 6:13, 벧전 1:7). 그 렇게 해서 위에 언급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실 것이다. - 21 -
스가랴------------------------------------------ 14:1~21 스가랴 14 장 1. 예루살렘 성읍이 또 함락되고 사로잡혀 간다고? 한 차례 바벨론에 잡혀 갔다가 돌아온 쓰라린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무슨 끔찍한 얘기인가? 최종적으로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것은 AD 70 년 로마에 의한 것이다. 본문이 그 사건에 대한 예언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점이 본 문에 있다. 그냥 짐작으로 맞추어 보자. 백성의 절반이 성읍에 남는 것(2), 혹은 열국이 아니라 로마가 단독으로 한 일: 로마 장군 디도가 예루살렘을 깨끗하게 멸망시켜 버렸다. 그러다가 AD 135년에 로마의 한 지방 성읍으로(Aelia Capitolina) 다시 재건되어 명맥을 잇게 되었다. 이런 차이점이 있으므로 이 본문은 그리스도의 재 림 때에 되어질 일, 즉 종말에 대한 예언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2. 재물을 약탈당하는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찾으신다: 보물을 캐기 위해서는 굴을 파고 바위를 폭파시 키고, 채로 쳐서 골라낸다. 자기 백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찾기 위함이다(13:7-9). 성도들이 엉뚱 한 곳에 정신이 팔려 있으면 더더욱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종말에는 그런 의미에서 에스겔 의 곡과 마곡의 전쟁(겔 38-39장, 계 20:7-10), 계시록의 아마겟돈 전쟁(계 16:12-16)이 일어나는 것이 다. 2절은 전쟁의 일반적인 참혹상이다. 3. 여호와께서 열국을 치시는 날이 어느 날인가? 남은 백성이 끊어지지 않는 날(=자기 백성을 확인하신 날): 예루살렘이 약탈당하는 것은 그냥 두 시고 보실 모양이다. 자기 백성이 누구인지 확인(?)하신 다음에 친히 간섭하신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누구인지 몰라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니 그의 백성 들은 어떤 경우에라도 그 분을 믿고 변치 말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이왕 전쟁 날에 싸운 것같이 란 말은 과거에 이적적인 방법으로 전쟁에 승리케 하신 것을 가리킨다. 4. 예루살렘이 내려다보이는 감람산 기슭에는 수 없이 많은 무덤이 있다. 좁은 땅에 너무 많은 무 덤이 몰려 있어서 관을 묻을 때 세워서 묻었단다. 여기에 웬 무덤이 그렇게 많을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빨리 뛰어가려고: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재림하셔서 동편 문(소위 황금문) 으로 입성하실 때 함께 따라 들어가려고(5c) 노리는 사람들이 이 곳을 가장 좋은 명당(?) 자리로 여겼기 때문이란다.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나 지리적으로 한정시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너무 가볍게 여긴 탓이다. 그 날에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있던지 동시에 주님을 뵙게 될 것 이다. 죽었든지 살았든지, 화장을 했든지 매장을 했든지, 예루살렘에 있든지 한국에 있든지... 아무 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공간을 초월하신 그 분에게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성도는 열국이 몰 려와서 재물이 노략을 당할지라도 평안하라는 것이다(1-3)! 5. 하나님께서 감람산에 임하시면 이 산이 쪼개질 것이다. 산을 왜 쪼개시는가? 위엄을 보이시려 고? 자기 백성들에게 도피할 길을 내시기 위해서: 아셀까지 피할 수 있는 길을 내신다는 뜻이다. 계시 록에서는 독수리 날개로 태우고, 용이 토해내는 물을 땅이 삼킨다(계 12:13-17). 철저하게 성도를 보호하신다는 상징적인 표현들이다.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6.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그 날에 빛이 없다면 세상이 어두울 것이라는 말인가? (본문이 단순한 이 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는지 우주적 종말을 말하는 것인지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진다) 더 이상 해와 달에 의존한 세상이 아닌 새로운 세상이 등장할 것이라는 뜻: 낮과 밤, 계절의 변화 는 해와 달을 창조한 후에 생긴 일이다. 지금까지 이런 방식으로 자연계가 유지되었지만 그 날이 되면 해와 달이 빛을 잃는다(마 24:29, 계 6:12-14). 해와 달에 의존하지 않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빛이 되신다.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는 나라(=새 예루살렘)가 된다는 뜻 이다. 7. 예루살렘에서 물이 솟아나서 흘러넘치는 장면은 에스겔 47장에도 있다. 물이 귀한 곳에서는 꿈 같은 얘기다. 예루살렘에서 언제 이렇게 물이 흘러넘친 적이 있는가? 예수님을 통해서 전해주신 복음이 온 세상을 뒤덮는 것: 장차 임하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비유의 최종판이겠지만(계 21:1-22) 일차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수라고 하신 말씀(요 7:38)에서 이루 어진 것이다. 8. 하나님께서 빛, 생수, 왕이 되시면 무슨 일이 생길까? 예루살렘이 안연한 성읍이 된다(10-11): 9. 예루살렘이 어떻게 안연한 성읍이 되는지 설명을 자세히 보자. 게바는 유다 북쪽 경계이고(왕하 23:8) 림몬은 예루살렘 남쪽인데 전부 산악지대다. 이 땅이 어떻게 된다고? 평지: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된단다. 아라바는 황무지, 혹은 평원이란 뜻이다. 높이 들려질 예루살 렘과 대조를 이룬다. 그러면 예루살렘은 평지 가운데 높이 솟은 지역이다. 요새라는 뜻이다. 그러 면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 라는 말은 예루살렘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10.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는 빛, 생수, 왕이 되시지만 대적자들에게는 무엇이 되는가? - 22 -
스가랴------------------------------------------ 14:1~21 재앙: 질병(12), 자멸(13), 탈취당함(14), 짐승들도 이런 재앙을 당하게 된다(15). 11. 안 믿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은 자기만 하나님이신가? 혹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만 사랑하시 는가? 이러면서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이들이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가? 말은 맞지만 하나님은 대적자들 가운데서도 남은 자를 찾으신다 는 사실도 추가로 알았으면 좋겠 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 절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간절한 소망이다(사 66:23). 회개하고 돌이키면 이 모든 것이 자기의 복이 되도록 길을 열어주셨건만 그 길로 들어오지 않고 불만만 토로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 이다. 12. 많은 절기 중에 하필이면 초막절을 지키라고 하실까? 초막절을 지키는 이유와 관련지어 보자. 출애굽에 동참하라는 말이다: 임시로 초막을 짓고 거기 거하는 이유는 광야의 방랑생활을 기억하 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을 향해서 방랑했던 그 시절을 기억하며 감사하듯이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 행렬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13. 중동지역에서는 비를 내리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징벌에 해당한다(17). 애굽은 왜 다를까? 애굽은 나일강물로 농사를 짓기 때문: 애굽은 나일강이 창일하지 않으면 농사는 불가능하다. 다른 대부분의 역본은 비가 내리지 않을 것 이라고 하는 반면에 개역성경에는 창일함이 라는 말이 작 은 글씨다. 원문에는 없다는 말이다. 지리적인 정황을 감안해서 번역한 셈이다. 14. 원래 여호와께 성결 이란 표현은 대제사장의 관의 정금판에 새긴 것이다.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봉헌되었다는 뜻으로 쓰던 말을 왜 말 방울에 기록할까? 말 방울에도 이런 말씀을 기록했다면 어디엔들 기록하지 않았을까? 대제사장만 성결한 것이 아니 라 일반인의 일반적인 삶도 성결하다는 의미이다. 말 방울이 일반적인 삶을 의미한다면 여호와의 전의 솥은 거룩한 삶을 말하고, 제단 앞 주발은 지극히 거룩한 삶을 말한다. 이런 것들이 구별되 지 않고 모든 것이 성결하다는 말이다. 그 날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되리라는 것 이다. 15. 모든 것이 성결한 세상에 가나안 사람은 왜 없을까? 가나안 사람이란 악인을 가리킨다. 정결하고 성결한 하나님의 나라에 악인은 결코 들어갈 수 없 다(사 35:8, 계 21:27, 겔 44:9). 16. 스가랴의 결론에 해당하는 14장은 계시록의 요약판이나 다름없다. 14장을 몇 단락으로 나누고 계시록의 내용으로 요약해 보자. 1-5: 어린 양의 싸움(계 19:1-21): 하나님께서 친히 적그리스도와 싸우신다. 엄청난 재앙이 쏟아지지 만 성도들을 보호할 뿐 아니라 끝내 승리를 거둔다. 계시록의 재앙은 절대로 성도들을 두렵게 하 는 것이 아니다. 6-11: 새 예루살렘(계 21:10-21): 온갖 아름다운 보석으로 이루어진 성일뿐 아니라 대적도 슬픔도 없 다. 비교할 대상도 없는 아름다운 성이다. 12-15: 적그리스도에 대한 형벌(계 19:17-21): 악한 무리가 아무리 잘 나가는 듯해도 하나님께 대적 하는 무리는 결국은 영벌에 처할 수밖에 없다. 16-21: 단장한 신부와 같은 하나님의 나라(계 21:2): 악이 존재하지 않는 거룩한 세상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가지셨던 소망이다. - 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