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요약 사찰에 소장되었던 고서는 그 출처와 소장내력을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월 인천강지곡 또한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평소 사찰 문헌이 원래의 소장처와 그 전래 경 위가 밝혀지지 않은 것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어왔다. 이 글에서는 월인천강지곡 의 한국학중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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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 積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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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1호 2005년 4월 1일(금) 學 術 院 소식 3월 임원회 개최 사위원회는 학술원 회원과 교수 등 관련 3월 임원회가 3월 4일(금) 오후 2시 학술 분야 전문가로 구성하여 4월 11일(월) 오 원 중회의실에서 임원 15명 전원이 참석한 후 2시에 제1차 심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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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의 수준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비 롯한 국학연구 기관들과 국립과천과학관, 한국천문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 는 조선시대 역서들의 숫자들을 모두 합하더라도 불과 수백 책의 수준을 넘

Transcription:

藏 書 閣 32 월인천강지곡 의 부안 실상사 소장 경위와 그 전래 과정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유학영 미래엔교과서박물관 관장 Ⅰ. 머리말 Ⅱ. 월인천강지곡 의 실상사 봉안과 효령대군 Ⅲ. 근 현대 시기 월인천강지곡 의 보존과 국묵담 스님 1. 국묵담 스님의 월인천강지곡 인수와 인계 2. 월인천강지곡 자료조사 Ⅳ. 맺음말 1918년에서부터 1972년까지 48

국문요약 사찰에 소장되었던 고서는 그 출처와 소장내력을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월 인천강지곡 또한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평소 사찰 문헌이 원래의 소장처와 그 전래 경 위가 밝혀지지 않은 것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어왔다. 이 글에서는 월인천강지곡 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기탁을 계기로 본 도서의 이동 경로 및 그 원인과 배경을 구명하였다. 세종대왕이 지은 歌 詞 월인천강지곡이 어떻게 외진 전라도 변산반도의 실상사에 보관되어 있었는가? 실상사와 월인천강지곡, 그리고 효령대군과는 어떠한 因 果 가 있었는가? 라는 근본적 물음에서부터 동학농민전쟁, 일제강점기, 6 25전쟁이라 는 근대사 전개과정에서 월인천강지곡의 소장 경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요컨대 이 글은 월인천강지곡이란 책자가 1462~1466년 실상사 奉 安 된 이후 1960~1970년 대까지 약 500년간 역사적 공간을 추적해 그 傳 存 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5세기 중엽 효령대군에 의해 부안 실상사에 월인천강지곡이 佛 腹 藏 됨 20세기 초, 1462년과 1466년에 작성된 실상사 三 尊 佛 조성을 위한 普 勸 詞 ( 勸 善 文 ) 2건과 실상사 중창 發 願 文 1건이 발굴되었다. 이 3건의 고문서를 통해 효령대군 에 의해 실상사 삼존불이 조성되었고, 4년 뒤에 실상사가 중창되었다는 사실을 확인 하였다. 삼존불 조상과 사찰의 重 建 을 계기로 월인천강지곡이 효령대군에 의해 佛 腹 藏 되었다. 실상사에 월인천강지곡이 소장된 것은 이 절이 바로 세조의 願 堂 으로서 사 회 경제적 위상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2 19세기 말 동학농민이 실상사 불상을 파괴하면서 월인천강지곡이 세상에 나오 게 됨 1894년 동학농민들은 실상사 부처의 몸에 금은보화가 숨겨져 있다는 말을 믿고 불상을 파괴하였다. 이때 금은보화는 발견되지 않고 다수의 고서와 고문서가 불복장 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때 월인천강지곡이 세상에 나왔으나 이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3 1914년 白 鶴 鳴 스님이 부안 實 相 寺 불복장에서 월인천강지곡을 발견함 1914년 봄, 부안 來 蘇 寺 에서 20리 거리에 있는 실상사의 법당이 퇴락하고 本 尊 佛 도 더 이상 수리할 수 없게 되자 당시 내소사 주지였던 백학명 스님이 불상의 腹 中 에 월 인 천 강 지 곡 의 부 안 실 상 사 소 장 경 위 와 그 전 래 과 정 49

藏 書 閣 32 봉안된 월인천강지곡 상권 1책을 발견하였다. 4 1918년 鞠 黙 潭 스님 인수함 1918년 10월, 국묵담(1896~1981) 스님이 내소사에서 당시의 실상사 주지 金 性 連 스님에게서 월인천강지곡 상 을 인수해 왔다. 이후 국묵담 스님의 주석처를 따라 백양 사 청류암, 담양 용화사에서 보관, 관리하였다. 5 1961년 光 州 遞 信 廳 陳 錤 洪 청장 인수함 1961년 1월 23일, 국묵담 스님이 월인천강지곡을 陳 遞 信 廳 長 님께 드리는 말씀 이 라는 서한과 함께 월인천강지곡을 당시 광주체신청 청장이었던 진기홍 씨에게 인계하 였다. 1963년 9월 2일, 문화재청은 진기홍 씨가 소장하던 월인천강지곡을 보물 제 398호로 지정하였다. 6 1972년 大 韓 敎 科 書 주식회사 金 光 洙 사장 인수함 1972년 7월 21일, 대한교과서 주식회사(현 미래엔) 김광수 사장이 진기홍 청장 으로부터 월인천강지곡을 인수하여 회사에서 收 藏 하였다. 7 2013년 韓 國 學 中 央 硏 究 院 藏 書 閣 에서 위탁 관리함 미래엔에서 월인천강지곡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寄 託, 2013년 6월 26일 기탁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주)미래엔 김영진 사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정길 원장 등이 참석하였고, 이때부터 장서각이 관리의 주체가 되었다. 주제어 월인천강지곡, 부안, 실상사, 효령대군, 발원문, 백학명 스님, 국묵담 스님, 진기홍, 김광수, 미래엔 투고일자 2014년 9월 2일 심사일자 2014년 9월 4~22일 게재확정일자 2014년 9월 26일 50

Ⅰ. 머리말 1468년 세조는 思 政 殿 에서 宗 親 宰 臣 諸 將 과 담소하다가 아버지 생각이 났다. 종 친에게 명하여 기생 8명을 불러 諺 文 歌 詞 를 주고 부르게 하였다. 말없이 듣고 있던 세조는 갑자기 눈물을 흘렸고, 곁에 있던 신하들도 따라서 눈물 흘렸다. 이때 기생들 이 불렀던 가사가 월인천강지곡 이다. 1) 이로부터 545년이 지난 2013년, 월인천강지 곡이 왕실도서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탁되었다. 월인천강지곡이 국가 차 원의 관리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하나의 달이 천개의 강을 비추듯 모든 국민들이 쉽게 월인천강지곡에 담긴 세종대왕의 뜻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옛 책들 고서, 특히 사찰에 소장되었던 고서는 그 출처와 소장내력을 잘 알지 못하 는 것들이 많다. 이는 한국적 佛 家 전통에 상당부분 기인한다. 宗 家 중심의 문서관리 체제가 확립된 儒 家 와 달리 佛 家 는 독자적이고 그 계승에 있어 단절성이 높다. 일제 강점기 이후 지금까지 그 전통은 계속되고 있다. 이 때문에 佛 腹 藏 유물의 불법적 거 래와 문화재 거래상들 간 출처 숨기기가 하나의 관행이 되었다.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문화유산의 보존이라는 국가정책에도 큰 구멍이 생겼다. 국가는 문화재 지정과 관리 에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유통 경로나 출처가 불확실한 고서 고 문서를 문화재로 지정하는 경우이다. 이는 일본의 경우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소장 처가 확실하지 않거나 傳 存 경위가 밝혀지지 않은 것을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은 법 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이른바 아카이브학에서 말하는 出 處 主 義 의 존중의 원칙에 위 배되며 史 料 로서의 역사성도 훼손된다. 2) 필자는 평소 상당수의 사찰 문헌이 원래의 소장처와 그 전래 경위가 밝혀지지 않은 것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어왔다. 비록 일례 월 인 천 강 지 곡 의 부 안 실 상 사 소 장 경 위 와 그 전 래 과 정 1) 世 祖 實 錄 卷 46, 14 年 (1468) 5 月 12 日 ( 辛 未 ). 遣 都 承 旨 權 瑊, 齎 大 箭 四 筒 狼 尾 二 虎 箭 二, 分 贈 于 姜 玉 等, 又 贈 田 犬 二 十 六. 又 遣 右 副 承 旨 成 允 文, 請 玉 等, 玉 等 至, 迎 入 思 政 殿. 玉 等 請 殿 下 南 向 坐, 上 不 獲 已 於 北 壁 稍 東 而 坐, 設 宴. 上 令 高 靈 君 申 叔 舟, 語 玉 等 曰 : 今 朝 送 田 犬 二 十 六, 大 人 令 我 擇 送, 乃 與 宰 相 擇 其 良 者 二 十, 分 呈 令 牽 入 於 庭. 玉 等 下 庭 見 之, 上 殿 扣 頭 謝. 上 語 玉 曰 : 姪 子 少 弱, 不 可 拜 高 官, 姑 授 卑 職, 兼 賜 衣 服. 玉 卽 就 前 免 冠 扣 頭 謝. 玉 等 請 抽 侍 殿 宗 宰 佩 箭, 命 各 抽 一 矢 與 之, 玉 等 扣 頭 謝. 宴 罷 辭 出, 上 送 至 勤 政 殿, 遣 都 承 旨 權 瑊 問 安. 輔 歷 入 母 家, 遣 左 承 旨 李 克 增, 齎 酒 肉 就 賜 之. 克 增 至 其 家, 則 輔 已 謁 還 館, 克 增 就 館 示 之, 輔 令 頭 目, 送 於 母 家. 上 御 思 政 殿, 與 宗 宰 諸 將 談 論, 令 各 進 酒. 又 命 永 順 君 溥, 授 八 妓 諺 文 歌 詞, 令 唱 之, 卽 世 宗 所 製 月 印 千 江 之 曲. 上 慕 世 宗 默 然, 呼 戶 曹 判 書 盧 思 愼 與 語, 良 久 墮 淚, 思 愼 亦 伏 俯 泣 下, 左 右 皆 變 色. 命 厚 饋 衛 士 及 妓 工 人. 2) 최근 상주에서 발굴되었다 지금은 그 행방이 묘연한 훈민정음 해례본이 대표적 사례이다. 문화재 지정이나 국가 기관의 감정 평가에 있어 출처와 소장 내력을 철저히 따진다면 상인과 업자들 사이에서도 그 거래가 음성적이지 않고 유물의 훼손도 일정부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51

藏 書 閣 32 에 불과하지만 월인천강지곡의 장서각 기탁을 계기로 불법 사찰 문화재 거래 방지와 문화재 지정 관행이 개선되기를 기대한다. 세종대왕의 歌 詞 월인천강지곡이 왜 변산반도 실상사에 보관되어 있었을까? 문화 재청의 실상사지 해설에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최근 새 로 지은 실상사 표지판에도 400여 년간 실상사에 월인천강지곡이 보존되어 있었다 는 언급은 없다. 후술하지만 6 25전쟁 때 사찰이 불탄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그동 안 월인천강지곡의 소장 내력을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표 1 월인천강지곡의 소장 관리 日 誌 3) 연도 소장 관리자 내용 1914년 부안 實 相 寺 佛 腹 藏 에서 발견 1914년 봄, 부안 내소사에서 20리 거리에 있는 실상사의 법 당이 퇴락하고 本 尊 佛 도 더 이상 수리할 수 없게 되자 당시 來 蘇 寺 주지였던 白 鶴 鳴 스님이 聖 像 이 심하게 파손된 경우 장성을 다해 致 齋 하고 소각하는 관행에 따라 불상을 소각하 였다. 이때 불상의 腹 中 에 봉안된 七 寶 物 4) 과 기타 佛 經 을 건 져 낼 때에 월인천강지곡 상권 1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400여 년 불복장되어 있던 문화재가 처음 세상에 다시 빛을 보게 되 었다. 1918년 鞠 黙 潭 스님 인수 1918년 10월, 국묵담(1896~1981) 스님이 내소사에서 圓 覺 經 을 배우고자 실상사에 참배갔을 때, 실상사 주지 金 性 連 스 님에게 부탁해 純 銀 鑄 像 地 藏 菩 薩 과 월인천강지곡 상 을 인 수해 왔다. 이후 국묵담 스님의 주석처를 따라 백양사 청류암, 담양 용화사에서 보관, 관리하였다. 1961년 光 州 遞 信 廳 陳 錤 洪 청장 인수 1961년 1월 23일 국묵담 스님이 월인천강지곡을 陳 遞 信 廳 長 님께 드리는 말씀 이라는 서한과 함께 월인천강지곡을 당시 광주체신청 청장이었던 陳 錤 洪 씨에게 인계하였고, 1963년 9 월 2일에 문화재청에 의해 보물 제398호로 지정되었다. 1972년 2013년 大 韓 敎 科 書 주식회사 金 光 洙 사장 인수 韓 國 學 中 央 硏 究 院 藏 書 閣 위탁 관리 1972년 7월 21일, 대한교과서 주식회사(현 미래엔) 金 光 洙 사장이 진기홍 청장으로부터 월인천강지곡을 인수하여 회사 에서 收 藏 하게 되었다. 미래엔에서 월인천강지곡을 한국학중앙연구원 藏 書 閣 에 寄 託 하여 2013년 6월 26일 기탁식 거행하였다. 이때 (주)미래엔 김영진 사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정길 원장 등이 참석하였 고, 이때부터 장서각이 관리의 주체가 되었다. 3) 1918년 이후 월인천강지곡이 대한교과서주식회사에 보관되기까지 과정은 이종국 전 혜천대 교수의 다음의 연구 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종국, 大 韓 敎 科 書 史,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8. 4) 七 寶 物 : 일곱 가지의 보배. 無 量 壽 經 에서는 금, 은, 玻 璃, 瑪 瑙, 車 渠, 유리, 산호를 가리키며, 法 華 經 에는 금, 은, 마 노, 유리, 거거, 진주, 玫 瑰 를 가리킨다. 52

Ⅱ. 월인천강지곡 의 실상사 봉안과 효령대군 세조가 기생들을 시켜 월인천강지곡을 부르게 하고 이를 들은 세조가 눈물을 흘릴 정도의 책이 실상사에 보존되었다면 세조와 월인천강지곡 원본이 발굴된 실상사 사 이에 어떠한 인과관계가 성립해야 한다. 필자는 이점을 염두에 두고 자료조사에 착수 하였고,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1607년에 沈 光 世 (1577~1624)가 쓴 遊 邊 山 錄 에 그 실마리가 있다. 그의 여행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龍 淵 뒤편에서 불꽃놀이를 본 뒤 온 길을 되돌아와서 淸 臨 洞 口 로 나왔다. 10여리 를 가서 實 相 寺 에 도착하니 光 陵 (세조)의 願 堂 이다. 절의 규모가 크고 높았으며 불상 이 매우 盛 大 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5) 월 인 천 강 지 곡 의 부 안 실 상 사 소 장 경 위 와 그 전 래 과 정 심광세는 실상사를 언급하면서 이곳이 光 陵, 즉 세조의 願 堂 이었다는 점을 언급하 였다. 연구사에서 실상사가 세조의 원당이었다는 것은 처음 밝혀진 사실이다. 세조의 원당은 많다. 금강산 유점사, 합천 해인사, 고성 건봉사, 오대산 상원사, 화순 쌍봉사 등이 세조의 대표적 원당이다. 楞 伽 山 실상사도 세조 원당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위에서 심광세가 언급한 것처럼 절의 규모가 방대하였고 불상이 성대하였던 것이다. 세조의 지원이 있었음은 불문가지이다. 심광세의 관찰 가운데 불상이 성대한 것은 뒤 에 언급하지만 佛 腹 藏 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示 唆 를 준다. 이는 곧 실상사에 대한 효령대군의 佛 事 와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15세기 중엽 이후 실상사가 부안 변산반 도 안의 여러 사찰 가운데 首 寺 刹 이 되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饒 足 하게 된 것 또한 실상사가 세조의 원당이 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6)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扶 安 實 相 寺 址 에 대한 설명에 의하면, 실상사는 신라 신문 왕 9년(689) 草 衣 禪 師 에 의해 창건되었고 조선조 때 양녕대군이 중창하였다고 전해 5) 한국고전번역원, 한국문집총간 休 翁 集 卷 5 雜 著 < 遊 邊 山 錄 >, 觀 火 龍 淵 後 還 從 來 路 出 淸 臨 洞 口 行 十 餘 里 始 到 實 相 寺 乃 光 陵 願 堂 制 度 宏 敞 像 設 甚 盛. 6) 실상사가 매우 부유했던 사찰이었다는 사실은 연산군 당시 다음의 실록 기사에서 짐작된다. 연산군일기 권45, 연산군 8년(1502) 8월 12일(신해), 趙 玉 崑 이 아뢰기를, 신이 전라도 扶 安 에 살 때에 實 相 寺 의 田 結 이 매우 많았으니, 學 田 에 소속시키기는 청합니다. 또 각 官 衙 에서 나누어 기르는 무소는 수령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사육하게 하므로 폐단이 아주 많고 국가의 用 度 에도 이익이 없으니 목장에 놓아 기르기를 청합니다. 53

藏 書 閣 32 진다 라고 써있다. 7) 이는 근대에 만들어진 부안읍지 에서 인용한 것으로 그 근거가 미약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실상사가 변산에 있다 라는 구절 이외에는 구체적 기록이 없다. 8)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扶 風 勝 覽 에는 실상사가 일천 수십 년 전에 초 의선사에 의해 창립되었으며, 변산반도에서는 大 刹 로서 다수의 사찰을 總 攝 하였다 고 쓰여 있다. 9) 아마도 양녕대군의 중창은 口 傳 된 것으로 보이며 근거 자료는 없다. 이와 같이 지리지의 검토를 통해서는 실상사에서 월인천강지곡을 보관했는 지에 대 한 어떠한 단서도 찾을 수 없다. 다만 여행한 선비의 기록에 따르면 실상사는 변산반 도의 수사찰로서 사찰 안에 옛 물건, 즉 古 物 이 많았다고 한다. 10) 효령대군은 승복을 입고 다닐 정도로 佛 家 的 인물이어서 전국의 사찰을 순회하였 다. 호남 지방의 사찰을 순회한 곳은 다음과 같다. 강진의 萬 德 寺, 화순 雙 峰 寺, 곡성 泰 安 寺, 구례 華 嚴 寺, 영광 佛 甲 寺, 해남 대흥사, 남원 實 相 寺, 등이다. 불갑사에는 대 군의 頌 德 碑 의 碑 身 이 雙 鐘 樓 아래에 묻혀있다고 하며, 座 臺 는 지금도 남아있다. 해 남 대흥사에는 대군이 아낀 恩 重 經 經 板 이 보존되어 있다. 11) 필자는 실상사와 효령대군이 관련이 있다는 실상사 연혁 설명문을 인터넷으로 보 고 효령대군파 종중 사무소인 淸 權 祠 에 연락을 하여 효령대군의 행적과 관련된 일체 의 자료를 요청하였다. 며칠 뒤 청권사 문화부장 이인재 씨로부터 온 우편물을 수령 하였다. 우편물에는 孝 寧 大 君 史 蹟 大 觀 과 함께 靑 權 祠 報 복사물이 첨부되어 있었 다. 이 자료는 새로 발굴한 楞 伽 山 實 相 寺 孝 寧 大 君 事 蹟 12) 과 楞 伽 山 實 相 寺 事 蹟 7) 실상사지: 전라북도 기념물 제77호. 실상사는 신라 신문왕 9년(689) 草 衣 禪 師 에 의해 창건되어 조선 讓 寧 大 君 이 중창하였다고 전해진다. 변산 6대 사찰의 하나로,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고 하나 6 25전쟁 때 전소되었다. 전소되 기 전까지는 대웅전 나한전 산신각 요사채 등이 있었고, 150cm 크기의 立 佛 로 된 목조 관세음보살상이 유명하 였다고 하며, 절의 북쪽에는 浮 屠 庵 이 있었다 한다. 실상사지는 내변산의 직소폭포( 龍 湫 )로 가는 천왕봉과 인장봉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주위 형세가 온통 바위로 된 암산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원불교 교조인 朴 重 彬 이 절의 옆에 조그만 초당을 짓고 3년간 수도하였기 때문에, 이곳은 원불교의 4대 성지 가운데 하나 인 邊 山 聖 地 로 일컬어진다. 실상사지는 그동안 폐사지 상태로 내려오다가 1995년부터 복원 불사가 진행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 8)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제34권 全 羅 道 扶 安 縣, < 佛 宇 >. 9) 한국근대읍지 41, 전라도 9 < 扶 風 勝 覽 >, 인문과학원, 1991, 實 相 寺 在 來 蘇 北 七 里 許 距 今 一 千 數 十 年 前 草 衣 禪 師 創 立 爲 邊 山 內 大 刹 總 攝 多 數 寺 刹 後 有 天 王 峯 如 屛 風 形 寺 前 有 將 巖 浮 石 巖. 10) 한국고전번역원, 한국문집총간 豹 菴 稿 卷 4, < 遊 禹 金 巖 記 >, 到 實 相 寺. 寺 甚 宏 壯. 今 多 頹 圮. 寺 僧 出 示 古 物. 有 烏 銅 香 爐. 烏 銅 龜 鶴. 烏 銅 楊 枝 甁. 製 作 亦 皆 奇 雅 精 巧. 龜 鶴 僧 輩 不 知 爲 何 物. 余 曰 此 乃 含 線 香 於 鶴 口 以 爇 之. 亦 香 爐 類 也. 僧 輩 相 顧 不 信. 爲 之 一 笑. 仍 留 宿. 11) 청권사, 청권집유, 속 2편. 12) 이 글은 청권사 문화차장 李 秀 澤 氏 가 썼으며, 청권사보 19호(1994)에 실려 있다. 54

記 13) 였다. 楞 伽 山 實 相 寺 事 蹟 記 는 한말 효령대군파(보성군)의 李 康 濟 란 인물이 실 상사를 찾아가 효령대군 관련 고문서를 조사하고 이를 傳 寫 한 것이다. 뒤에 언급하지 만 실상사는 근현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찰 자체가 全 燒 되어 그 寺 址 만 남았 다. 따라서 그의 기록은 실상사 역사 복원에 있어 결정적 자료이다. 청권집유 年 譜 에 의하면, 효령대군은 나이 67세 때인 1462년(세조 8) 3월에 부안 변산의 실상사 삼존불 조성에 勸 善 하였고 그 普 施 文 이 있다고 썼다. 또 1466년(세조 12) 4월에 다시 실상사에 갔다고 한다. 청권사 소장 고서 가운데 이강제가 저술한 感 先 錄 卷 11, 靖 孝 公 遺 事 에 수록된 實 相 寺 事 實 에는 효령대군과 관련된 두 문건 이 기록되어있다. 楞 伽 山 實 相 寺 事 蹟 記 14) 로 명명된 3건의 고문서는 이 글과 관련 하여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번역을 통해 자세히 분석하겠다. 월 인 천 강 지 곡 의 부 안 실 상 사 소 장 경 위 와 그 전 래 과 정 1 孝 寧 大 君 등 왕실 친인척 普 勸 詞 15) 楞 伽 山 實 相 寺 堂 主 毗 盧 遮 那 佛 藥 師 如 來 無 量 壽 佛 丈 六 像 萬 人 同 願 敬 成 祝 上 作 法 諸 緣 普 勸 詞 능가산 실상사의 당주인 비로자나불 약사여래 무량수불 16) 丈 六 像 을 만인이 同 願 하여 공경히 축하하는 17) 上 作 法 으로 여러 인연들에게 普 勸 하는 글 三 佛 弘 誓 廣 無 際 涯 세 부처님 18) 의 크나 큰 誓 願, 넓고도 끝이 없으니 十 方 諸 佛 齊 立 下 風 시방의 모든 부처 나란히 서서 風 化 를 내리네 若 人 有 敬 必 蒙 慈 接 引 사람들이 부처님을 공경하면 자비의 인도를 받을 것이리라 予 故 發 誠 欲 邈 尊 容 내가 이에 정성을 내어 부처님 모습을 맞이하였더니 幸 諸 仁 者 同 推 願 輪 다행히도 여러 어진 이들이 소원의 수레를 함께 밀어 주네 端 爲 奉 祝 聖 籌 無 窮 진실로 봉축하노니, 임금의 籌 가 무궁하시고 13) 사적기는 청권사보 (19호, 1994)에 게재되었고, 事 蹟 硏 究 資 料 의 하나로 소개되어 있다. 14) 楞 伽 山 實 相 寺 事 蹟 記 는 청권사보 (19호, 1994)에 번역되어 있다. 본고는 이 글을 원문은 그대로 따랐고 번역은 필자가 하였다. 15) 普 勸 詞 : 普 勸 文. 두루 권하는 글. 佛 事 에 동참을 권유할 때 쓰이는 불교적 용어로 福 泉 寺 重 修 普 勸 文 과 龍 門 寺 念 佛 普 勸 文 이 대표적이다. 16) 丈 六 像 : 1장 6척의 불상. 17) 上 作 法 : 뛰어나게 좋은 글을 지은 것. 18) 삼불: 세 부처. 毗 盧 遮 那 佛 藥 師 如 來 無 量 壽 佛. 55

藏 書 閣 32 國 祚 長 新 나라의 복록이 길고도 새로워지리라 19) 天 順 六 年 壬 午 三 月 幹 善 比 丘 20) 擧 目 21) 香 木 衣 金 彩 色 漆 布 供 養 22) 布 施 23) 孝 寧 大 君 叔 善 24) 永 膺 大 君 25) 順 成 君 26) 淨 業 院 住 持 李 氏 ( 着 圖 書 ) 貞 夫 人 泰 氏 ( 着 圖 書 ) 惠 人 金 氏 朴 石 堅 27) 花 林 君 溪 川 君 判 中 樞 院 事 尹 鄭 好 明 2 孝 寧 大 君 普 勸 詞 楞 伽 山 實 相 寺 堂 主 毗 盧 遮 那 佛 藥 師 如 來 無 量 壽 佛 丈 六 像 萬 人 同 願 敬 成 祝 上 作 法 諸 緣 普 勸 詞 十 方 淨 土 歡 娛 者 시방정토에서 歡 娛 하는 자, 盡 是 前 生 作 福 人 모두 전생에 복 지은 사람이라네 作 善 無 如 成 佛 像 선행을 함에 불상 조성만한 것이 없으니 19) 天 順 六 年 壬 午 : 세조 8년. 1462년. 20) 擧 目 : 불상 조성에 소요된 물목. 21) 香 木 衣 金 彩 色 漆 布 : 香 木 이하 물품은 등은 불상 조성에 소요되는 佛 具. 22) 布 施 : 보시한 사람의 명단. 23) 叔 善 : 효령대군의 字 는 원래 善 叔 이나 때로는 글자의 앞뒤를 바꾸어 쓰기도 한 듯하다. 효령대군은 字 를 도장에 새겨 찍었다. 24) 永 膺 大 君 : 1434~1467년. 이름은 琰, 세종의 여덟 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昭 憲 王 后 沈 氏 이다. 25) 順 成 君 : 이름은 李 顗, 양녕대군의 아들이다. 26) 淨 業 院 住 持 李 氏 : 淨 業 院 은 왕실 여인들이 모여 살던 사찰로서 도성 안에 있었다.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 영응대 군부인 정씨 등이 거주하기도 하였다. 여기서의 이씨는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27) 花 林 君 : 益 安 大 君 李 芳 毅 의 증손 李 伯 規. 56

丹 那 毋 惜 舊 秘 珍 28) 丹 那 여! 秘 藏 한 보물들을 아끼지 말 지어다 因 玆 奉 祝 吾 君 壽 億 載 이로서 봉축 드리오니, 우리 임금 억만년 壽 하시고 垂 示 度 靑 春 가르침을 내리시어 우리 동방 백성들을 濟 度 하리라 天 順 六 年 壬 午 三 月 日 幹 善 比 丘 同 日 施 主 擧 目 上 仝 孝 寧 大 君 叔 善 3 實 相 寺 重 創 發 願 文 楞 伽 山 實 相 寺 重 創 千 人 同 發 願 冊 買 園 邀 佛 側 黃 金 동산을 매입해 부처님을 맞이해 황금을 깔았으니 須 達 遺 風 振 古 今 29) 須 達 의 遺 風 이 고금에 떨쳤다네 玉 殿 珠 樓 無 盡 樂 玉 殿 珠 樓 의 다함없는 樂 은 只 出 當 人 一 寸 心 오직 30) 當 人 의 한조각 마음에서 나왔다네 普 告 檀 那 知 斯 意 檀 那 에게 두루 이 뜻을 알게 하고 此 時 須 成 功 德 林 이때를 맞아 모쪼록 功 德 林 을 이루리라 天 堂 佛 刹 生 生 樂 천당의 절간은 生 生 의 樂 이요 成 佛 殊 因 幷 最 深 成 佛 의 아주 특별한 인연은 아울러 깊어라. 端 將 奉 祝 我 主 上 단정히 우리 主 上 을 위해 봉축하노니 壽 岳 崢 嶸 福 海 深 長 壽 의 산줄기는 높고 복의 바다는 깊어지리라 艨 艟 絶 海 烽 火 絶 城 전투선은 바다에서 사라지고 烽 火 는 성에서 없어지니 太 平 典 搖 功 德 林 태평의 노래가 功 德 林 을 흔드리라 월 인 천 강 지 곡 의 부 안 실 상 사 소 장 경 위 와 그 전 래 과 정 28) 丹 那 : 檀 那 라도도 한다. 산스크리트어인 dāna의 음역으로 布 施 라는 뜻이며 산스크리트어와 한어를 합쳐서 檀 施 라고도 한다. 또한 보시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檀 越 (dānapati)과 혼용되어서 사원이나 승려에게 의식주를 시여 하는 신자를 승려 쪽에서 단야, 단월이라고 하였다. 중국에는 단나제도는 없으며, 사원이 특정한 단월에 지지되 는 경우는 적었는데, 귀족 호민에게는 일가의 보시사를 세워서, 사원에 주어진 특권을 횡취하거나 사원에 재산 을 기탁해서 식산을 도모하는 자도 있었다. 종교학대사전, 1998(http://terms.naver.com/entry). 29) 須 達 : Sudtta, 석존과 같은 때 사위성에 살던 부호, 기원정사를 지어 부처님께 드린 사람. 30) 當 人 : 실상사의 重 創 을 위해 發 願 을 하는 당사자. 즉 효령대군을 비롯한 왕실 사람들. 57

藏 書 閣 32 成 化 二 年 31) 四 月 日 誌 化 主 僧 雪 悟 丙 戊 同 願 讓 寧 大 君 孝 寧 大 君 32) 蘂 城 府 天 人 鄭 氏 33) 帶 方 府 夫 人 宋 氏 永 膺 大 君 34) 昌 原 君 王 孫 億 千 氏 4 고문서 傳 寫 者 李 康 濟 35) 의 後 記 이강제가 일찍이 길을 가다가 실상사를 경유하였다. 스님이 내가 효령대군의 후손 임을 물어서 알고는 이 세 帖 子 를 내보이면서 말하였다. 이 절은 실로 효령대군이 창 건했다고 하면서 두 帖 子 에는 대군의 36) 字 章 印 의 붉은 인주가 문드러지지도 않았고 손때가 아직도 새로웠다. 그 옛적에는 帖 子 를 숨기고 있다가 오늘에야 내놓은 의도를 물으니 스님이 말하였다. 지난번 갑오년(1894)에 불상을 37) 東 徒 가 파괴하였는데 佛 腹 에서 이 세 帖 子 가 들어있었다 고 하였다. 이 일은 효령대군께서 한 것이 분명하여 의심이 없다. 그런데 讓 寧 大 君 은 기유년(1462)에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4년 뒤(1466) 에 (효령대군과) 함께 발원한 것으로 이름이 등재되어 있는 것은 오로지 38) 幽 明 에 상 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39) 위의 사적기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462년 실상사의 三 尊 佛 조성을 위해 31) 成 化 二 年 : 세조 12년, 1466년. 32) 蘂 城 府 夫 人 鄭 氏 : 효령대군의 처, 蘂 城 府 夫 人. 예성부부인은 좌찬성 해주정씨 鄭 易 의 딸이며 효령대군과의 사이 에서 6남 1녀를 낳았다. 33) 帶 方 府 夫 人 宋 氏 : 단종의 國 舅 宋 玹 壽 의 누이동생인 여산송씨. 世 宗 의 여덟째아들 永 膺 大 君 (144~1467)의 부인 도 帶 方 府 夫 人 이라 칭했으나 위의 발원문에서 부인의 座 次 를 볼 때 영응대군의 부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34) 세조와 貴 人 朴 氏 사이에 낳은 아들 李 晟. 35) 李 康 濟 : 효령대군 자손으로 보성군 자손으로 고종 대에 진사를 지냈다고 한다. 李 秀 澤, 1994, 앞의 논문 참조. 36) 字 章 印 : 효령대군의 字 인 叔 善 을 새긴 도장. 37) 東 徒 : 東 學 徒 즉 동학농민군. 38) 幽 明 : 이승과 저승. 원문의 幽 命 은 幽 明 의 誤 字 인듯 하다. 39) 李 秀 澤, 1994, 앞의 논문, 康 濟 嘗 路 由 實 相 寺 僧 問 知 爲 大 君 後 孫 出 示 此 三 帖 子 曰 此 寺 實 是 大 君 之 所 剏 云 而 二 帖 則 着 大 君 字 章 印 紅 不 渝 手 澤 尙 新 問 其 昔 晦 今 顯 之 意 僧 曰 去 甲 午 佛 像 爲 東 徒 之 所 破 佛 腹 中 有 此 三 帖 子 云 其 爲 大 君 事 斷 斷 無 疑 也 而 讓 寧 大 君 則 沒 己 酉 四 載 同 願 則 一 故 無 間 幽 命 耶. 58

2건의 普 勸 詞 가 작성되었다. 1은 효령대군을 비롯한 왕실 및 사대부 인물들 다수가 참여한 보권사였다. 2는 효령대군 단독으로 참여한 보권사이다. 3은 1466년 실상사 의 중창을 위한 發 願 文 이다. 이때 효령대군의 형인 양녕대군을 필두로 왕실의 유력 인물들이 참여하였다. 요컨대 1462년에 실상사 삼존불이 조성되었고, 4년 뒤 1466년 에는 건물이 중창되었다. 여기서 월인천강지곡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보권사와 발원 문의 주제자가 누구인가 이다. 주제한 사람이 월인천강지곡 책자도 함께 불복에 넣었 을 것이기 때문이다. 1, 2의 보권사에서 주도한 사람은 효령대군이다. 삼존불 조성 에 소요되는 비용 즉 香 木, 衣 金, 彩 色, 漆 布, 供 養 비용에 있어서 그 布 施 者 명단의 맨 앞에 기재되어있기 때문이다. 3의 중창 발원문에는 형 양녕대군이 맨 처음에 기 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1919년에 작성된 李 康 濟 後 記 에 그 이유가 설명되 어 있다. 40) 유명을 달리한 양녕대군이 살아서 발원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떠 났지만 복을 비는 차원에서 이름을 올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월인천강지곡은 언제 腹 藏 되었을까? 삼존불 조성 당시인 1462년일까? 아니면 중창 때인 1466년일까? 삼존 불 조성 당시에 삼존불에다 넣었을 수도 있고 重 創 할 때 넣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1462년 혹은 1466년에 월인천강지곡이 복장되었다고 판단된다. 고문서 3건의 뒤에 붙은 이강제의 後 記 는 여러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이강제가 실 상사에 들렀던 것은 1919년 전후였다. 41) 실상사 스님이 그에게 3건의 고문서를 내주 었는데, 그 내용의 요점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佛 腹 藏 에서 효령대군과 유관한 3 건의 고문서 帖 子 가 발굴되었고, 그 상태가 매우 양호하였다. 둘째 이 첩자의 존재는 그동안 그 절에 살던 스님들조차 認 知 하지 못하다가 1894년 동학도들이 불상을 파 괴하면서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셋째, 1462년 실상사 삼존불 조성과 1466년의 중창 발원문의 주제자는 양녕대군이 아니라 효령대군이었다는 것이다. 1466년 중창 발원 문에 4년 전에 죽은 양녕대군 이름이 들어간 것은 그의 죽음과 무관하게 공적을 쌓 기 위해 넣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강제의 후기에서 눈여겨 볼 점은 불복장 유물이 세 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은 동학도에 의한 불상 파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정리해보자. 월인천강지곡은 1462년 3~4월의 삼존불 조성 당시, 혹은 1466년 4월 월 인 천 강 지 곡 의 부 안 실 상 사 소 장 경 위 와 그 전 래 과 정 40) 이강제는 이 고문서를 전사하여 感 先 錄 이라는 책자로 만들었고, 이 책은 청권사에 기증되었다고 한다( 청권사 보 15, 사적연구자료 ). 41) 이는 그의 저술 感 先 錄 이 1919년 5월 11일에 편집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를 전후한 시점에서 실상사를 방 문, 효령대군의 사적을 채록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59

藏 書 閣 32 의 중창 당시에 위 3건의 帖 子, 그리고 아래에 국묵담 스님이 언급하는 바의 종교적 유물인 七 寶, 그리고 불경 등이 함께 봉안되었다. 월인천강지곡도 이때 이들 전적과 함께 봉안되었다. 물론 합리적 추정이다. Ⅲ. 근 현대 시기 월인천강지곡 의 보존과 국묵담 스님 15세기 효령대군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佛 事 에 의해 월인천강지곡은 450년 가까이 복장 속에서 보존되었다. 1894년 동학도에 의해 불상이 파괴되면서 다수의 고서와 고문서가 불복장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때까지도 월인천강지곡의 존재와 그 가치를 아는 이가 없었다. 1914년이 되어 그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 나타났으니, 律 僧 이자 학 식이 높았던 鞠 黙 潭 스님이었다. 1910~1960년대 월인천강지곡의 보존과 전래와 관련 해서는 그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국묵담 스님은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으며 속명은 鞠 聲 祐 이다. 백양사에서 得 道 하 여 조계종 5, 6, 7대 종정과 태고종 9, 11대 종정을 역임하였다. 律 師 로서 이름이 높 았다. 담양 龍 華 寺 는 스님이 말년에 주석했던 곳으로 기념관이 세워져 있으며, 전적 등 다수의 유물이 전한다. 묵담 스님의 글인 月 印 千 冮 曲 冊 를 陳 逓 信 廳 長 님께 드리는 말씀 이 계기가 되어 필자는 자료조사 갈 곳을 두 곳으로 정했다. 부안의 실상사지 중심으로 주지스님 등 현재의 실상사 관련 인사를 만나보는 일, 그리고 국묵담 스님 의 마지막 주석처 담양 용화사를 찾아 관련 인사와 스님의 흔적을 조사하는 일이었다. 우선 국묵담 스님의 친필 서신은 월인천강지곡의 출처와 관련하여 기본 자료이다. 다소 길지만 佛 家 의 자료 전수와 관련하여 매우 특이한 사례에 속하므로 전문을 소 개한다. 60

1. 국묵담 스님의 월인천강지곡 인수와 인계 月 印 千 冮 曲 冊 를 陳 逓 信 廳 長 님께 드리는 말씀 42) 43) 距 今 四 十 四 年 前 戊 午 十 月 分 에 全 北 扶 安 郡 山 內 面 來 蘇 寺 에 가서 佛 敎 內 典 中 圓 覺 經 을 修 學 케 된 그 時, 一 日 은 來 蘇 寺 에서 二 十 里 距 離 된 実 相 寺 를 參 拜 차로 山 넘어 간지라. 實 相 寺 는 高 麗 中 葉 時 代 에 創 建 한 古 寺 刹 인 바 本 尊 釋 迦 牟 尼 佛 坐 軆 像 이 五 尺 以 上 大 佛 像 이신바 年 久 歲 深 으로 因 하야 法 堂 이 退 落 된 그 時 에 聖 像 까지 破 像 에 이르게 된지라. 李 朝 時 代 에 法 堂 을 重 修 하고 佛 像 을 補 决 케되는 時 에 最 初 佛 像 造 像 時 에 많은 七 寶 物 을 腹 藏 中 에 모신 바는 그대로 모시고 다시 佛 經 幾 十 卷 과 月 印 千 冮 曲 冊 을 腹 藏 中 에 모셨는 바가 事 實 인 바다. 至 今 부터 44) 四 十 八 年 前 甲 寅 春 에도 亦 是 法 堂 이 退 落 되고 本 尊 佛 像 도 다시 더 補 决 할 수가 없게 된지라. 來 蘇 寺 住 持 白 鶴 嗚 禪 師 는 悟 道 禪 寺 로 該 首 班 地 實 相 寺 가 聖 像 까지 破 像 에 이름을 悲 觀 하 시고 僧 家 에 聖 像 이 破 像 되는 境 遇 에는 誠 心 致 齋 하고 燒 却 하는 法 規 에 依 하여 佛 像 을 燒 却 케 됨으로 破 佛 像 腹 中 에 奉 安 된 七 寶 物 과 其 他 佛 經 冊 等 을 모셔내고 燒 却 하신 바인데 本 沙 門 이 戊 午 年 十 月 分 來 蘇 寺 에서 實 相 寺 를 參 拜 次 로 갓을 적에 當 時 住 持 金 性 連 師 에게 純 銀 鑄 像 인 地 藏 菩 薩 님과 月 印 千 冮 冊 을 요청했드니 고마웁게 주셔서 地 藏 菩 薩 님과 月 印 千 冮 冊 을 四 十 四 年 間 誠 心 으로 모시고 지내오든 바, 歲 月 은 나로 더부러 멈추지 안은지라. 無 常 한 本 人 의 歲 年 이 老 軀 에 臨 한지라. 不 久 에 無 常 의 길을 밥게 되지 않을 수 없는 바, 때마침 光 州 遞 信 廳 으로 就 任 하신 陳 廳 長 께서 本 來 부터 信 佛 敎 人 으로 信 仰 이 깊으시고 古 物 保 藏 에 徹 底 한 精 神 이 많으시기로 信 傳 하여 드린 바입니다. 45) 檀 紀 四 二 九 四 年 一 月 二 十 二 日 潭 陽 邑 秋 月 山 龍 華 寺 鞠 黙 潭 合 掌 월 인 천 강 지 곡 의 부 안 실 상 사 소 장 경 위 와 그 전 래 과 정 42) 본 자료는 현재 그 원본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위의 내용은 그 원본의 복사본이 미래엔교과서박물관에 소장되 어 있어 이용하였다. 복사물이 국묵담 스님의 친필임은 담양 용화사에 소장된 스님의 다른 필적과 국묵담 스님 의 제자인 수진 스님의 증언으로 확인하였다. 43) 戊 午 : 1918년. 44) 甲 寅 : 1914년. 45) 檀 紀 四 二 九 四 年 : 1961년. 61

藏書閣 32 사진 1 국묵담의 月印千冮曲冊를 陳逓信廳長님께 드리는 말씀 46) 46) 국묵담 스님의 서신 원본은 1998년 7월 3일 大韓敎科書 社史 집필 시 이종국 혜천대 교수가 진기홍 청장으로부 터 복사본을 입수하여 위의 社史에 처음 소개하였고, 2013년 재복사본을 미래엔교과서박물관에 제공하였다. 62

국묵담 스님은 월인천강지곡이 실상사 本 尊 佛 像 의 腹 中 에 봉안된 것에 대하여 비 교적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실상사 本 尊 釋 迦 佛 座 体 像 이 5 尺 의 대불상이지만 오래되어 깨지는 지경에 이 르게 되었다. 통상 법당을 重 修 하고 불상을 수리를 할 때에는 최초 불상 造 像 할 때에 복중에 넣은 七 寶 物 은 새 불상으로 교체한 뒤에도 그대로 모시고 여기에 더하여 불 경과 월인천강지곡 같은 책자를 복중에 봉안하였다. 즉 월인천강지곡도 중수할 때에 佛 腹 藏 되었다. 둘째, 1918년 10월, 국묵담 스님이 來 蘇 寺 에서 실상사에 참배갔을 때 실상사 주지 金 性 連 스님에게 요청하여 純 銀 鑄 像 地 藏 菩 薩 과 함께 월인천강지곡을 인수해 왔다. 셋째, 1961년 1월 23일, 국묵담 스님은 월인천강지곡을 陳 체신청장에게 드리는 말씀 이라는 서한과 함께 월인천강지곡을 당시 陳 錤 洪 청장에게 인계하였다. 월 인 천 강 지 곡 의 부 안 실 상 사 소 장 경 위 와 그 전 래 과 정 2. 월인천강지곡 자료조사 가. 조사자: 안승준(장서각 책임연구원) 유학영(미래엔교과서박물관 관장) 나. 일 정: 2014. 2. 27(목) 05:30 장서각 출발 08:30 부안 실상사 도착(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164) 면담자: 주지 智 眼 스님, 전북문화재연구원 김종문 교수 외 1인 6 25전쟁 이전 실상사 소장 전적 및 유출 경위 월인천강지곡 등 경전 목판 관련 조사 孝 寧 大 君 과 實 相 寺 에 대한 관련 자료 여부 13:00 전 개암사 주지 曉 山 스님 면담(부안군 개화면 개화리 336) 6 25전쟁과 실상사, 내소사 실상사의 경전목판 관련 증언 白 鶴 鳴, 金 性 連, 鞠 黙 潭 스님 관련 증언 15:00 담양 용화사 도착(담양군 담양읍 남촌길77 남산리105) 면담자: 주지 守 眞 스님 63

藏 書 閣 32 鞠 黙 潭 스님 행적, 필적 및 印 章 조사 鞠 黙 潭 스님과 陳 錤 洪 체신청장 鞠 黙 潭 기념관 유물 조사 佛 祖 歷 代 通 載 (보물 제737호) 등 관련 자료 조사 23:30 장서각 도착 다. 조사내용 1 실상사 주지 智 眼 스님 면담 실상사는 소실되었고 實 相 寺 祉 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77호(1986. 9. 8)로 지정되어 있음. 6 25전쟁 직후의 戰 火 로 실상사에 관한 제반 기록은 없다. 효령대군과의 관련 자료와 효령대군원문 등의 자료도 없다. 네이버 지식란에 나와 있는 효령대군 생애와 연보 및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과 凊 權 祠 의 1462년(세조 8, 67세)에 3월 부안 변산 실상사 삼존불 조성을 권선하심 (전북 기념물 제77호에는 1466년 4월자로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후에 청권사 자료에서 1462년과 1466년 두 차례 있었음을 확인함. 지금 실상사지의 발굴은 일단락된 상태로 조사보고서가 나와 있다(현장설명), 실상사를 중건하고자 하지만 예산이 없다(현재 본당과 삼신각은 지음). 전통 사 찰 지정을 위해 지인들과 함께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현 주지인 지안 스님은 20여 년 전부터 사찰의 중건에 힘쓰고 있으며 3년 전부터 주지를 다시 맡고 있다. 원불교 소태산 박중빈이 교리를 제정, 정리한 곳으로 원불교 4대 성지의 하나인 변산성지 가 사찰 관내에 있다. 실상사는 변산의 4대 사찰(실상사, 내소사, 선계사, 청림사) 중 가장 큰 사찰이 었다. 내소사에 실상사 관련 자료가 있는지 알아보겠다(지안). 내소사중수기에 실상 사 사적기 기록되어 있다고 함 효령대군에 대한 것은 곡성 태안사에 유물이 남아있었으나 6 25전쟁 때 소실 됨. 태안사 시주 銅 鉢 에 효령대군 관련 명문이 있다고 함. 또 태안사에는 효령대 군이 어머니 소헌왕후를 위해 원당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함 실상사의 옛 그림을 가졌다는 어느 상인이 구매 여부를 문의하며 그림 사진을 64

보여주겠다고 약속함. 원광대 박선호 교수가 인천 쪽에서 실상사 권선문을 구매 하겠다는 요청이 있었다고 연락함 실상사지에서 만력원년 명문이 적힌 기와가 출토되었다고 함 주지 지안 스님은 성 태안사 조실을 지낸 청화 큰스님이 俗 家 형님이라고 함 자료 획득: 부안 실상사지 발굴 조사 보고서, 원광대 마한 백제문화연구 소, 2000. 6 지안 스님은 (주)미래엔 사장 일가인 고 김성식 사장님 장례 시 집례에 참여 했다고 함 2 전 개암사 주지 효산 스님 면담 30여 년 동안 개암사 주지를 지내고 환속한 지 20년 이상이 되었고 그 후 일반 인은 물론 불문과도 절연하며 은둔하고 있다. 효산 스님은 대처승으로서 백양사 등시에서 있다가 6 25전쟁 이후 개암사 중수 후 절에서 나왔다. 1926년생인 바, 11세에 개암사에 들어가 머물면서 인근인 실상사에 명절과 초 파일 등에 인사하러 다녔다. 그 때(1937년 이후) 본 바로는 실상사 본당의 불상 곁에 양쪽으로 경판이 쌓여 있었다. 6 25전쟁 이후 1953년경 실상사는 소실되었다. 실상사 표지판에는 1950년이라 고 되어 있으나 효산 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1953년이 맞음 육당 최남선의 심춘순례 는 백양사부터 실상사까지의 기행문이므로 육당의 기 록은 맞을 것이다. 白 鶴 鳴 스님은 주지보다 위에 있는 고승으로서 내소사에 계셨으나 관내의 인근 실상사 정비를 주도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원불교에서 특별 조치법으로 실상사를 가져갔으나 재판을 통해 실상사지를 찾 았고, 실상사지 일부에 원불교 사적지를 두게 된 것이다. 원불교 창시자 박중빈 소태산은 백학명 스님에게서 배웠다. 1980년대에 전경환(전두환 대통령 동생)이 실상사지에 새마을운동 중앙연수원 을 세우려고 추진하였으나, 효산 스님이 중심이 되어 이를 막아냈다. 연수원을 건립하면 산수가 더렵혀진다고 여김 국묵담 스님은 내소사에 있다가 백양사 청류암으로 이거했는데, 柳 錦 海 스님과 월 인 천 강 지 곡 의 부 안 실 상 사 소 장 경 위 와 그 전 래 과 정 65

藏 書 閣 32 절친했다고 함. 따라서 월인천강지곡은 실상사에서 청류암으로 옮겨갔고, 6 25 전쟁 이후에 장성 용화사로 가져갔을 것으로 추정함 실상사에 구전된 목판은 불경 경판이었고 열반경, 화엄경인 듯했다고 함 3 담양 용화사 주지 수진 스님 증언 수진 스님은 기축생(1949)이며 16세부터 국묵담 스님을 侍 奉 함 오히려 수진 스님이 미래엔이 월인천강지곡을 소장하게 된 경위를 물었다. 이 에 진기홍 전 광주체신청장이 개인이 소장하는 것보다 교육기관이 소장하는 것 이 마땅하다는 뜻에서 평소 친분이 있는 김광수 당시 대한교과서 사장에게 전 수한 것임을 알려줌 국묵담 스님이 진기홍 씨에게 써준 서신을 보고, 국묵담 스님의 필적과 도서(인 장)가 맞는다고 확인해주었다. 국묵담기념관에서 국묵담 스님이 쓴 족자의 필적 과 고서에 찍힌 도서 국묵담 스님의 서신 사본의 것과 부합함을 확인하고 사진 촬영함 수진 스님은 묵담 스님이 1960년 진공관식 녹음기 2개를 받고 1961년 서신과 함께 진기홍 씨에게 월인천강지곡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1960년대부터 국묵담 스님은 녹음기를 이용하여 선방에서 법문의 육성을 녹음하였고, 이후 문도들이 이를 편집하여 10개의 카세트테이프로 된 법문 녹음집을 제작하였다 함 국묵담 스님이 월인천강지곡을 실상사에서 가져왔다는 사실을 1974년 수진 스 님의 법문 노트 내용을 보여주며 확인시켜 줌 묵담 스님이 월인천강지곡과 함께 가자고 온 純 銀 지장보살은 도난당했고 함 보물로 지정된 용화사 역대불조통재 또한 실상사 소장본으로 불복장에서 동시 에 나온 것으로 간주된다고 함 월인천강지곡에 난 얼룩은 오래되고 낡아서 생긴 것으로 판단함 전주 관음선원에는 국묵담 스님의 비구니 제자들이 주석하고 있음. 추가적 질의 는 거기 가서 해도 된다고 함 자료 획득: 국묵담 스님의 녹음테이프 법문집 용화사 소장인 불조역대통재(보물 제737호) 를 조사하고 촬영함 자료조사와 답사를 통해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국묵담 스님이 진기홍 광주체 66

신청장에게 월인천강지곡을 인계하면서 써 준 月 印 千 冮 曲 冊 를 陳 逓 信 廳 長 님께 드리 는 말씀 은 사실과 부합하였다. 찍힌 인장 또한 국묵담 스님이 고서에 늘 찍던 인장으 로서 의심할 바가 없었다. 국묵담 스님은 원 주석처였던 백양사 청류암을 거쳐서 1950년 6 25전쟁 이후에 담양 용화사로 월인천강지곡을 옮겨왔다. 1961년 월인천강 지곡을 진기홍 광주체신청장에게 인계한 것은 그가 불자이자 교육가로서 지극한 정 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약간의 대가로 일제 녹음기 2대를 받았는데, 국묵담 스님 이 불경 강의를 녹음하는데 쓰였다고 한다. 월 인 천 강 지 곡 의 부 안 실 상 사 소 장 경 위 와 그 전 래 과 정 Ⅳ. 맺음말 1918년에서부터 1972년까지 1918년 국묵담 스님의 월인천강지곡(상권) 반출 이후 실상사는 어떤 모습이었을 까? 중권, 하권은 어디로 간 것일까? 효령대군이 작성한 고문서 세 帖 子 와 18세기 강 세황이 유람하면서 본 보물들, 烏 銅 香 爐, 烏 銅 龜 鶴, 烏 銅 楊 枝 甁 은 다 어디로 갔을 까? 최남선의 1925~1926년 호남지역 탐방기, 尋 春 巡 禮 를 보자. (전략) 곧 실상사가 되니 영락한 지 오래다. 4대 사찰 중 으뜸이던 풍모는 겨우 그 대적광전의 모습으로 볼 뿐이다. 퍽 크게 만든 관음상인데 잘록한 허리매와 널따란 옷자락과 너그럽고도 어우러진 모습이 고려조 초기의 것임이 의심 없으며, 절에서 전 하는 바로는 서역으로부터 배를 타고 원암 앞바다에 와 닿았는데, 처음 수상한 배가 들어오니 주민들이 다투어 붙잡으려 하였지만 속인에게는 물러나더니, 47) 蕙 丘 頭 陀 가 나가니 저절로 달겨들어 비로소 그 위에 앉으신 이 관음상을 모셔 내리고, 그로 인해 이곳을 石 浦 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수십년 전까지도 당우가 여러 채 더 있고 불 상도 오래된 것이 많았었는데, 집들은 불타 없어지고 부처는 많이 파손되어 이렇게 소잔하여 졌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한 불상은 보화가 많이 들어있다 하여 일찍이 도 적이 들었었다. 도적은 별다른 것이 나오지 않자 실망하고 돌아갔으나, 그 복장에서 47) 蕙 丘 頭 陀 : 백제 때 부안 내소사를 창간했다고 전해지는 여승. 67

藏 書 閣 32 효령대군의 願 文 과 古 寫 經 及 古 印 經 이 수백권 나왔는데, 더러는 도난당하고 아직 남 아있는 대부분은 높이 쌓아두고 있다. 대개 해인본이 제종경론이요, 그 밖에 고려판 화엄경소 같은 희귀본도 몇 가지 끼어 있다. 이 밖에 법화경 판목이 한켠에 쌓여있을 뿐이요, 다른 아무 불상이 없음은 미상불 소조한 생각이 든다. 48) 최남선의 언급 가운데 도적이 보화가 들어있다고 생각한 불상에서 효령대군의 願 文 과 古 寫 經 及 古 印 經 이 수백권 나왔다는 대목이 특히 주목된다. 이때까지 15세기에 작성된 효령대군의 발원문은 존재하고 있었다. 국묵담 스님이 월인천강지곡(상)을 가 지고 나온 뒤 중 하권의 행방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점을 미루어보면 중 하권 은 국묵담 스님이 반출하기 이전, 즉 1914년 이전에 이미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湮 滅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변산반도의 6 25전쟁은 실상사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에 대해서 는 최근 허철구가 네이버 블로그에 쓴 글, 봉래구곡작전 과 실상사의 글을 보면 대략 의 당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49) 그는 변산 빨치산 출신으로서 현재 줄포에 사는 김 영권 씨로부터 실상사가 불타게 된 내력을 들었다. 1951년 여름 빨치산 토벌대들은 사자동 실상사에 진을 치고 변산 빨치산 토벌에 나섰다. 당시 빨치산들은 병력도 많 지 않고 화력도 형편없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빨치산들은 약 15명 정도였지만, 일당백 으로 토벌대와 싸워 크게 이겼다. 이를 빨치산들은 봉래구곡작전이라고 했다. 빨치산 에게 크게 패한 토벌대들은 퇴각하였는데, 토벌대 후미가 막 빠져나갈 무렵 실상사에 불길이 솟았다. 봉래구곡작전에 패한 국군이 실상사에 불을 지른 것이다. 효령대군의 삼존불 보권사와 발원문 등 귀중한 전적이 이때 모두 불타버린 것이다. 만약 국묵담 스님이 월인천강지곡을 반출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면 상권마저도 전소되었을 것임은 불문가지이다. 아찔하다. 1961년 국묵담 스님이 진기홍 씨에게 인계한 월인천강지곡은 또 한 번의 우여곡절 을 겪었다. 진기홍 씨는 통문관 이겸로 선생과 상의하여 1962년에 영인본 200책을 발간해 학계에 보급하였다. 진기홍 씨가 월인천강지곡을 보관하게 되자 그의 노모가 자꾸 흉한 꿈을 꾼다고 하면서, 佛 寶 物 을 개인이 가진 것 때문인 듯하다 고 말하면 48) 최남선, 尋 春 巡 禮, 동아일보, 1925. 3~1926. 49)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에 게재된 글을 인용한 것이다(blog.naver.com/bmyoo6?Redirect=Log&log No=60027807884). 68

서 남에게 주라고 적극 권한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진기홍 씨는 1972년에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김광수 사장에게 양도하였다. 50) 대한교과서 주식회사는 현재 미래엔의 전신이며, 김광수 사장의 손자가 현 김영진 대표이다. 월인천강지곡의 운명을 살펴보면 우리 역사의 소용돌이의 한 복판에 있었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다. 변산반도 외진 절 실상사 부처님 복장 속에서 임진왜란과 동학란, 일제강점기를 견뎌냈다. 6 25전쟁과 빨치산활동 시기에는 천행으로 그 장소를 피해 있었다. 어떠한 일이건 반복되는 우연은 없는 법이다. 월인천강지곡이 오늘날까지 전 해진 데에는 이를 지키고자했던 사람들의 노력과 정성을 빠트리고는 설명할 수 없다. 15세기 효령대군을 비롯한 왕실 인물들의 부처와 부모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孝 心, 효령군파(보성군) 이강제의 종중에 대한 향념과 고적 정리, 근대에 들어와서는 국묵 담 스님의 선견지명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책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1894년 동학 도가 불상을 파괴하였고, 6 25전쟁 직후 좌익 인물들의 빨치산 활동과 이로 인한 사 찰의 全 燒, 이 과정에서도 월인천강지곡은 천행으로 살아남았다. 달은 하나이지만 천개의 강을 비춘다 는 月 印 千 江 본래의 뜻은 작금에도 멈추지 않아 이 귀중한 자료가 장서각에 기탁되었다. 필자는 월인천강지곡의 내용 자체가 가 지는 학술적 문화재적 가치도 대단하지만, 이를 500년 이상 지켜왔던 인물과 역사성 월 인 천 강 지 곡 의 부 안 실 상 사 소 장 경 위 와 그 전 래 과 정 이 결합될 때 온전한 문화유산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판단한다. 51) 표암 강세항은 실상사를 비롯해 변산반도를 관광하고 그림같이 묘사한 유람기와 그림 한 점을 남겼다. 52) 실상사는 세조의 원당이었고 효령대군의 염원으로 월인천강 50) 진기홍 씨가 김광수 사장에게 양도한 것에 대해서는 대한교과서사 및 중앙경제신문 1989년 8월 2일자로 쓰인 윤철규 기자의 명품유전 에 소개되어 있다. 51) 이 글을 작성하는 데 도움을 주신 실상사 주지 지안 스님, 용화사 주지 수진 스님, 개암사 주지 효산 스님, 효령대 군파 종중 청권사 이인재 문화부장께 더없는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52) 이 그림과 글씨는 실상사 주지 지안 스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어느 지인이 구매를 권하면서 주었다고 한다. 글은 강세황의 遊 禹 金 巖 記 이며, 그림은 전문가에게 문의해본 결과 강세항의 작품으로 보이지만 자세한 것은 실물을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한국문집총간, 豹 菴 稿 卷 之 四 記 遊 禹 金 巖 記, 出 扶 安 縣 西 門. 向 西 南 行 十 餘 里. 野 田 茫 茫. 左 見 遙 山 隱 見 天 際. 爲 古 阜 井 邑 等 地. 右 有 連 峰 延 綿 盤 互. 氣 勢 䧺 秀. 卽 邊 山 也. 山 之 東 麓 有 東 林 書 院. 又 行 數 里. 野 中 平 阜. 有 松 數 百 株. 松 下 有 柳 川 書 院. 又 行 十 餘 里. 右 入 邊 山 之 口. 折 以 行 數 里. 㙜 殿 翼 然 於 亂 松 間. 乃 開 巖 寺 也. 入 寺 仰 見. 寺 後 萬 丈 高 峰. 揷 入 雲 際. 峯 頭 有 三 石. 高 皆 百 餘 丈. 乘 肩 輿 上. 石 底 有 窟. 大 如 百 間 屋. 深 可 數 十 丈. 壁 紋 縱 橫 如 文 錦 焉. 是 爲 禹 陳 或 云 金 窟. 窟 前 有 小 蘭 若. 眉 扁 玉 泉 菴 三 字. 仍 繞 窟 右 踰 嶺 數 里. 始 得 平 路. 左 右 奇 峯. 應 接 不 暇. 淸 流 層 壁. 非 復 人 境. 時 値 仲 春. 尙 餘 殘 雪. 陸 離 相 映 於 深 林 幽 磵 中. 以 肩 輿 行 二 十 餘 里. 到 實 相 寺. 寺 甚 宏 壯. 今 多 頹 圮. 寺 僧 出 示 古 物. 有 烏 銅 香 爐. 烏 銅 龜 鶴. 烏 銅 楊 枝 甁. 製 作 亦 皆 奇 雅 精 巧. 龜 鶴 僧 輩 不 知 爲 何 物. 余 曰 此 乃 含 線 香 於 鶴 口 以 爇 之. 亦 香 爐 類 也. 僧 輩 相 顧 不 信. 爲 之 一 笑. 仍 留 宿. 朝 起 周 覽. 聞 月 明 菴 之 勝. 促 肩 輿 循 寺 後 上 峻 峯. 峯 勢 壁 立. 石 路 如 線. 不 可 着 足. 登 頓 五 里 餘 至 絶 頂. 南 望 海 口. 風 帆 來 往. 有 一 點 小 島. 云 是 興 德 地. 北 折 而 循 山 腰 行. 餘 69

藏 書 閣 32 지곡을 보관한 원 소장처이다. 이러한 의미가 되살려진다면 21세기 실상사의 重 創 복 원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雪 尙 積. 深 可 沒 脛. 側 徑 危 甚. 下 臨 千 丈 懸 崖. 若 一 蹉 跌. 性 命 難 保. 輿 僧 大 呼 疾 走. 輿 竿 或 觸 於 松 樹. 僧 足 或 陷 於 深 雪. 氷 滑 石 峭. 傾 側 欲 顚 者 數. 屢 戒 輿 僧 而 不 能 緩 步. 或 下 輿 而 步. 逢 泥 深 雪 厚. 艱 難 萬 狀. 到 月 明 菴. 地 勢 最 高. 俯 視 全 山. 如 浪 疊 雲 屯. 山 外 海 色 微 茫. 時 値 雲 陰. 不 能 歷 歷 指 點. 卽 循 故 路 而 還 至 實 相 寺 之 右. 轉 向 龍 湫. 石 路 之 危. 比 月 明 菴 路 尤 甚. 不 可 以 輿. 扶 杖 匍 匐 踰 數 嶺. 飛 瀑 瀉 於 兩 崖 間. 高 幾 數 十 丈. 噴 雪 跳 珠. 勢 極 奇 壯. 風 氣 相 豗. 聲 震 林 壑. 循 瀑 而 上. 登 登 不 已. 又 上 山 頂. 俯 視 海 門. 折 而 東 下. 又 折 而 北. 自 月 明 菴 行 二 十 里. 到 來 蘓 寺. 寺 後 峰 卽 實 相 寺 案 山 之 外 也. 寺 經 回 祿 而 重 建. 雖 遜 壯 麗. 頗 極 整 新. 皆 未 及 加 丹 雘. 仍 炊 午 飯. 始 捨 輿 策 馬. 出 山 口 向 北 而 行. 復 尋 開 巖 洞 口 昨 行 之 路. 日 纔 入 還 歸. 70

그림 1 강세황이 그린 실상사도와 부분 그림 2 6 25전쟁으로 全 燒 되기 전의 실상사 71

藏 書 閣 참고문헌 증언 32 한국고전번역원, 한국문집총간, 休 翁 集 (심광세), 豹 菴 稿 (강세황).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제34권 全 羅 道 扶 安 縣, < 佛 宇 >. 조선왕조실록 DB(국사편찬위원회). 청권집유, 청권사(www.hyor.or.kr). 한국근대읍지 41, 전라도 9 < 扶 風 勝 覽 >, 인문과학원, 1991. 최남선, 尋 春 巡 禮, 동아일보, 1925. 3~1926. 국묵담 스님, 月 印 千 冮 曲 冊 를 陳 逓 信 廳 長 님께 드리는 말씀, 이종국 혜천대 교수 제공. 이종국, 大 韓 敎 科 書 史,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8. 李 秀 澤, 새로 발굴한 楞 伽 山 實 相 寺 孝 寧 大 君 事 蹟, 楞 伽 山 實 相 寺 事 蹟 記, 청권사보 19호, 1994.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증언 1 실상사 주지 智 眼 스님. 2 전 개암사 주지 효산 스님. 3 용화사 주지 수진 스님. 72

Abstract The Sequence of Possession of Weolincheongangjigok ( 月 印 千 江 之 曲 ) of Silsangsa ( 實 相 寺 ) Temple in Buan Ahn, Seung-jun Yu, Hak-young 월 인 천 강 지 곡 의 부 안 실 상 사 소 장 경 위 와 그 전 래 과 정 Many old books stored in temples are without reliable source of their origin and sequence of possession, including Weolincheongangjigok. The author has been interested in the origin of temple books and started a research taking the opportunity that the book is deposited in Jangseogak library,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This article traces the original place where the book was stored and the sequence of possession including background. How the book written by King Sejong was stored in the remote place of Silsangsa temple in Byeonsanbando peninsula in Jeollado province? How Silsangsa temple, the book, and Prince Hyoryeong were related? How the book was handed down through Donghak peasant revolution,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Korean war? This article tracks the historical space of the book s existence from 1462-1466 when it was stored in Silsangsa temple to 1960-70, covering about 500 years. The findings are as follow. 1 In mid 15th century, it was stored inside of a buddha statue in Silsangsa temple, Buan, by prince Hyoryeong. 2 articles 普 勸 詞 ( 勸 善 文 ) written in 1462 and 1466 encouraging donation to build triple buddha 三 尊 佛 in Silsangsa temple and an article 發 願 文 for rebuilding the temple were found in early 20th century. The three documents confirmed that the triple buddha in Silsangsa was built by 73

藏 書 閣 32 prince Hyoryeong and the temple was rebuilt 4 years later. At the time the book was stored inside the buddha. Silsangsa was a prestigious temple 願 堂 dedicated for the heavenly peace of King Sejo. 2 In 1894 Donghak devotees destroyed the buddha to find gold and silver treasures inside the buddha believing in a rumour. Instead, old books and documents came out. However no one paid attention to the book, Weolincheongangjigok, among them. 3 In the spring of 1914, monk Hakmyeong Baek 白 鶴 鳴 who was in charge of Naesosa 來 蘇 寺 temple, about 20-ri (8km) away from Silsangsa temple, discovered volume 1 of the book inside a buddha in Silsangsa, Buan. At the time the building and buddha in Silsangsa were decayed and impossible to repair. 4 In 1918, monk Gukmukdam 鞠 黙 潭 (1896~1981) took over the volume 1 from the chief monk 金 性 連 of Silsangsa at the time. Monk Gukmukdam stored and maintained the book in his residences of Cheongryuam in Baekyangsa temple and Yonghwasa temple, Damyang. 5 On January 23rd, 1961, monk Gukmukdam hand over the book to Gihong Jin 陳 錤 洪, chief officer of Gwangju Regional Communication Office 光 州 遞 信 廳, with an accompanying letter words (a letter) sending a book, Weolincheongangjigok, to chief officer Jin of Gwangju Regional Communication Office. The book possessed by Jin was designated as treasure no. 398 by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6 On July 21st, 1972, Gwangsu Kim 金 光 洙, c.e.o. of Daehangyogwaseo Korea textbook 大 韓 敎 科 書 company (later Mirae N) took over the book and stored in the company. 7 On June 26, 2013, Mirae N Co., Ltd. deposited the book to Jangseogak library and hold a ceremony with the presence of c.e.o. Yeongjin Kim of Mirae N. and president Jeonggil Jeong of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From then on, Jangseogak maintains the book. Key Words Weolincheongangjigok, Silsangsa temple, prince Hyoryeong, Balwonmun prayer, monk Baek Hakmyeong, monk Gukmukdam, Jin Gihong, Kim Gwangsu, Mirae N Co. Ltd. 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