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동남아해양교류-해양대콜로키움[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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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학연구 제 호 목 차 인성교육의 위기와 가족문화 정범모 기독교위임체계에 의한 대리의 효 연구 박철호 성경적 효사상 연구 김시우 삼국유사 를 통해본 삼국시대의 효문화 김덕균 글로벌 시대 효학의 방향과 역할 서은숙 고령화 사회와 출산장려정책에 관한 고찰 노인의 재혼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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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대학소식 Humanities Newsletter 02 서울대 인문강좌 인문학 열린 광장 열린 광장-서영거교수 열린 광장-박명진교수 제 29회, 제 30회 인문대 열린 광장이 각각 3월 24일(목)과 4월 28일(목)에 서울대 인문강좌 2011년 두 번째 인문강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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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는 25실의 장애우실과 38실의 준 장애우실이 마련되며 장애우실에는 장애우 학생 1명과 도우미 학생 1명이 함께 입사 하게 된다. 국제학사의 완공으로 교환학생 교류나 교수교환 등 서강의 국제화가 탄력을 받게 될 뿐만아니라 영어졸업인증제 도, 영어강의수강의무제 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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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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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논문은 2009 년도성신여자대학교학술연구조성비지원에의하여연구되었음. 2) Francis Fukuyama, "The End of History," National Interest, No. 16 (Summer 1989), p. 4. 3) 이러한구분에관해서는존베일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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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rosoft Word - 국제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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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고대 한반도와 동남아시아의 해양 교류 조흥국(부산대학교 국제전문대학원) Ⅰ. 이끄는 말 한국의 동남아시아 교류사는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모두 아우르는 넓은 의미의 동 아시아 세계에서 일어난 교류의 역사로, 그 교류는 바다로부터 생각하고, 바다의 아시아 를 논의하는 것 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1) 한국과 동남아시아 간 교류는 주로 바다를 통 해 이루어졌으며, 그것은 이미 선사 시대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바다를 통한 교류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항해로, 이것은 항해자가 선박을 적극적인 의지로 이동시킴으 로써 목적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해상 활동이다. 다른 하나는 표류로, 이것은 선박이 사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해류를 따라 흘러가는 것이다. 2) 항해를 통한 교류의 항로는 주로 연안 항로였다. 그러나 횡단 항로도 일찍부터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로 한반도 남부 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지석묘( 支 石 墓 )를 들 수 있다. 지석묘는 동서양의 해안 을 따라서 분포하는 대표적인 해양문화 교류의 증거 이다. 3) 한국과 동남아시아 간 교류의 또 다른 가능성은 표류이다. 예컨대 표류한 자가 계절풍과 해류( 海 流 )를 따라 동남아시아에 서 한국으로 혹은 거꾸로 한반도에서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오갈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필 리핀 해역에서 발원하여 대만과 일본의 쓰시마( 對 馬 ) 섬을 거쳐 한반도의 북동 방향으로 흐 르는 쿠로시오( 黑 潮 ) 난류를 이용하면 동남아시아에서 한반도에 용이하게 도달할 수 있다. 4) 한국과 동남아시아 간 교류에 대해서는 그동안 상상과 추측에 근거한 많은 이야기가 나 왔다. 선사 시대 한반도와 동남아시아 간의 교류에 대한 논의는 무엇보다도 쿠로시오 난류 와 이를 이용한 고대인들의 해양 활동을 그 추측의 근거에 두고 있다. 고고인류학자인 김병 모는 그러한 교류의 증거로 입석( 立 石 ), 석관묘( 石 棺 墓 ), 지석묘 등 거석 기념물과 이러한 거석문화와 관련된 농경문화 및 농경사회의 신앙 등을 제시한다. 종교적 목적을 위해 세워 진 것으로 보이는 입석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등에도 널리 퍼져 있는데, 특히 머리 부 분이 모자를 씌워놓은 듯한 인도네시아의 어느 입석은 전라남도 순천에서도 발견된 것과 비 슷한 형상이다. 석관묘는 시신의 매장을 위한 구조물로 그 분포가 동북아시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만과 동남아시아와 인도 등에서도 확인된다. 사자( 死 者 )의 영혼 숭배와 관련 된 것으로 보이는 지석묘는 우리나라에서는 전라도 지방에 가장 많이 있지만, 만주, 중국, 대만, 일본,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인도 등 아시아 도처에 분포되어 있다. 대개 하천 유역 에서 발견되며 물을 이용한 농경생활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지석묘는 그 분포가 암시하는 것처럼 해양 활동을 통해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5) 김병모는 또한 신라와 고구려의 여러 왕들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소위 난생설화( 卵 生 說 話 )가 인도의 아쌈(Assam), 미얀마,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의 칼리만탄(Kalimantan) 섬과 1) 하마시타 타케시( 濱 下 武 志 ), 바다에서 본 아시아 - 해국 중국의 등장과 새로운 주변 내셔널리즘, 정문길ㆍ최 원식ㆍ백영서ㆍ전형준 편, 주변에서 본 동아시아,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4, 292면. 2) 안경숙, 바다를 통해 교류된 한국 고대 문물, 김영원 외, 항해와 표류의 역사, 서울: 솔, 2003: 260면. 3) 김병근, 수중고고학에 의한 동아시아 무역관계 연구, 서울: 국학자료원, 2004, 88~90면. 4) 김병근, 앞의 책, 89면, 100면. 5) 김병모, 한국 거석문화 원류에 관한 연구, 한국민족학회 편, 문화론 하나, 서울: 문덕사, 1995, 117~133면 - 1 -

술라웨시(Sulawesi) 섬과 자와(Java) 섬 그리고 중국 남부의 하이난( 海 南 ) 섬과 대만 등에 도 있다는 점을 중시한다. 이 지역들은 흥미롭게도 모두 오늘날 동남아시아의 민족들을 형 성하고 있는 소위 남부 몽골로이드(Southern Mongoloid) 민족 그룹에 속한다. 6) 그밖에도 한국과 동남아시아 간의 문화적 교류의 가능성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의 많은 지석묘에서 반 구형( 半 球 形 )으로 움푹 들어간 곳 이른 바 컵 마크(Cup Mark) 가 확인되는데, 그와 비슷한 것이 인도네시아의 술라웨시 섬과 자와 섬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이상의 증거를 근거로 김병모는 한국의 입석과 지석묘를 남방 문화적 요소로 간주하며, 특히 동남아시아에서 난생 설화가 퍼져 있는 지역의 지석묘 거석문화와 한국의 지석묘 거석문화 간에 모종의 연관성이 존재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7) 고고인류학적인 이러한 추측은 한민족과 한국 문화의 남방 기원 및 근원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것으로 많은 흥미를 불러일으키지만 모두 가설에 불과할 뿐이다. 한국의 고대 문화가 부분적으로는 남방에서 온 것이라는 한국 문화의 남북혼합설도 있지만, 8) 이와 관련하여 국내의 학계에서는 한민족의 동북아시아 기원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9) 한민족 및 한국 문화와 남방 민족 및 남방 문화 간 상관성이 밝혀지기 위해 서는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뿐만 아니라 인도와 시베리아 그리고 오세아니아 등에 광범위 하게 퍼져 있는 거석문화 유물들의 상관성이 더욱 구체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농경문화와 관련된 농기구와 토기의 유형, 특히 장례풍습 등에 대한 더욱 체계적이 고 객관적인 연구가 요구된다. 통속적인 문화연구가인 김병호는 중국 윈난( 雲 南 )성의 나시( 納 西 )족 마을 사람들이 쓰는 지게, 윈난성과 인도네시아에서 사용되는 낫과 호미와 도리깨, 윈난성의 다리( 大 理 )에서 본 상투와 꼭대기에 새를 단 솟대( 鳥 竿 ), 윈난성 이( 彛 )족이 모자에 꽂는 깃털, 태국 북부 라후 (Lahu)족의 색동옷, 아카(Akha)족의 솟대와 새가 장식된 문, 리수(Lisu)족의 절 풍습 등에 주목하여 이들을 한국의 문화와 연결시킨다. 그는 심지어 고구려의 멸망 후 중국으로 끌려 간 고구려인 포로 20만 명 중 일부가 남하하여 윈난 지방뿐만 아니라 태국과 라오스 북부 에도 갔을 수 있다고 본다. 10) 한편으로는 한국 문화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남방에서 기원 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윈난성과 태국 북부의 몇몇 고산족들의 문화가 고구 려 유민에 의해 전해진 한국의 전통 문화일 것이라는 이러한 추측은 심증으로부터 나온 것 일 뿐 구체적인 물증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 윈난성의 나시족 및 이족과 태국 북부의 라후족과 아카족과 리수족 등은 모두 중국-티베트(Sino-Tibetan) 어계의 하위 그룹인 티베 트-버마(Tibeto-Burman) 어족에 속한다. 한국의 문화와 윈난성 및 태국 북부의 고산족들 간 문화의 유사성을 논하기에 앞서, 동일한 언어 그룹에 속하는 이들 소수민족 상호간의 문 화적 유사성을 더욱 중시해야 할 것이며, 그와 더불어 티베트족 및 버마족과 몽골족 간 관 6) 태국의 타이(Thai)족, 아쌈의 아홈(Ahom)족, 하이난의 리( 黎 )족은 모두 따이-까다이(Tai-Kadai) 어계에 속하 고, 미얀마의 버마(Bama)족과 카렌(Karen)족과 까친(Kachin)족과 아카(Akha)족과 라후(Lahu)족 등은 중국- 티베트(Sino-Tibetan) 어계의 하위 그룹인 티베트-버마(Tibeto-Burman) 어족에 속하며, 필리핀인과 인도네 시아인 그리고 대만의 고산족( 高 山 族 )은 오스트로네시아(Austronesian) 어계에 속한다. 이에 대해 Amara Prasithrathsint, The Linguistic Mosaic, In Grant Evans, ed., Asia s Cultural Mosaic: An Anthropological Introduction, Singapore: Prentice Hall, 1993, pp. 75~80; 박장식, 동남아시아 언어세계 의 다양성, 박장식 외, 동남아의 사회와 문화, 서울: 오름, 1997, 13~23면 참고. 7) 김병모, 앞의 논문, 135~147면. 8) 이종호, 한민족ㆍ한국인은 누구인가(2), 국정브리핑 2005-02-19. 9) 이선복ㆍ한영희ㆍ노혁진ㆍ박선주, 한국 민족의 기원과 형성(상), 서울: 소화, 1996. 10) 김병호, 우리 문화 대탐험 - 민족의 뿌리를 찾아 아시아 10만리, 서울: 황금가지, 1997. - 2 -

계 그리고 몽골족과 한민족 간 관계의 연결 선상에서 한국의 문화와 윈난성 및 태국 북부의 고산족들 간 문화의 유사성을 조사해야 할 것이다. Ⅱ. 교류의 시작 한국의 동남아시아 교류사에 대한 이야기는 우선 한국사의 삼국 시대 즉 1세기경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 이유는 한국 역사가 대략 그 시기부터 비교적 명백한 형태 로 전개되기 시작하고 그 역사의 흐름에 대한 구체적인 사료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동남아 시아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도, 동남아시아의 역사가 중국과 인접한 베트남의 역사를 제외 하면 대략 1세기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본 연구의 주제를 위에서 언급한 시기부 터 고찰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기원 이후의 시기에 대한 이러한 낙관적인 의미 부여에도 불구하고, 삼국-신라 시대 즉 1세기부터 9세기까지의 기간 한반도와 동남아시아 간 교류에 대해서는 사료가 별로 없으며, 그나마 약간 있는 사료들의 내용도 그 역사적 사실의 여부가 불확실하다. 사료들도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한문 사료밖에 없으며, 동남아시아에서는 관련 사료가 발견되지 않았다. 특 히 후자의 측면과 관련하여, 장기 보존이 곤란하거나 불가능한 재질인 목재, 야자수 잎, 천, 종이 등에 작성된 고대의 역사적 기록은 매우 습하고 무더운 동남아시아 지역의 기후적 특 성으로 모두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사료의 이러한 제한성 때문에 한국의 동남아시아 교류사에 대한 연구는 풍부한 역사적 상상력과 추리 그리고 때로는 직관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따라서 그만큼 더욱 흥미롭고 더욱 가치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때로는 지나친 비약이 수 반된 연구는 독자에게 고대 한국과 동남아시아 간 교류에 대한 애매모호한 상상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간 한국과 동남아시아 간 교류 가운데 가장 구체적인 것은 일본 사료인 일본서기 ( 日 本 書 紀 ) 에 기록되어 있는 6-7세기 백제와 동남아시아 간 접촉, 그리고 당( 唐 )의 승려 의정( 義 凈 )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 大 唐 西 域 求 法 高 僧 傳 ) 과 신라승 혜초( 慧 超 )의 왕오천 축국전( 往 五 天 竺 國 傳 ) 과 당의 승려 혜림( 慧 琳 )의 일체경음의( 一 切 經 音 義 ) 에서 엿볼 수 있는 7-8세기 한국의 불교 승려들의 동남아시아 여행 등에서 나타난다. 이 글에서는 특히 이 두 부분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일본서기 의 백제와 동남아시아 지역 간 6세기 접촉에 대한 기록은 일본과 한국의 소수 역사학자의 관심을 끌어왔다. 일본의 미키 사카에( 三 木 榮 ) 11) 와 한국의 이도학, 임길채, 김현구ㆍ박현숙ㆍ우재병ㆍ이재석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김현구ㆍ박현숙ㆍ우재병ㆍ이재 석 등은 백제와 동남아시아 지역 간 접촉이 직접 일어난 것이 아니라 중국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12) 그에 비해 이도학과 임길채 등은 백제와 동남아시아가 상호 직접 교류한 것으로 간주한다. 13) 나는 한국과 동남아시아 간 역사적 관계를 다룬 다른 논문에서 일본서기 의 기록에 대한 신중한 해석이 바람직하다고 썼는데, 14) 그 입장은 여전히 동일 11) 三 木 榮, 日 暹 交 通 史 考, 東 京 : 古 今 書 院, 1934. 12) 김현구 등,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Ⅱ), 서울: 일지사, 2003. 13) 이도학, 백제의 교역망과 그 체계의 변천, 한국학보 63, 1991; 이도학, 살아 있는 백제사, 서울: 휴머니스트, 2003; 임길채, 매몰된 백제 역사를 복원한다! - 해상무역국가로서의 백제의 모습(하), 서울: 범우사, 2003. 14) 조흥국, 근대 이전 한국과 동남아시아간 접촉에 대한 역사적 고찰, 국제ㆍ지역연구 8(1), 1999, - 3 -

하다. 7-8세기 한국의 불교 승려들 특히 혜초의 동남아시아 및 인도로의 이른 바 구법( 求 法 ) 여행에 대해서는 여기서 나열하고 소개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할 정도로 국내외에서 많은 연 구가 되어 있다. 나는 6-7세기 백제와 동남아시아 간 접촉에 대해서는 사료와 기존의 연구 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분석함으로써 필자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할 것이다. 그에 비해 불교 승려들의 인도로의 구법 순례를 통한 7-8세기 한국과 동남아시아 간 접촉은 관련 사 료를 소개하고 기존의 연구를 정리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한편 9세기에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일본 간 활발히 해상 무역을 전개한 해상왕 장보 고( 張 保 皐 )는 최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 그의 해상 활동과 신라 시대 한국의 동아시 아 무역에 대한 많은 연구가 생산되었다. 15) 한국인의 해양 진출 내지는 해상 무역 활동이 동아시아의 대부분 나라들에 비해 저조하고 빈약한 한국 역사에서 장보고의 사례는 학술적 인 주목을 받기에 충분한 주제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보고의 활동은 그의 해상 활 동 무대가 한ㆍ중ㆍ일 삼국에 국한되었다는 점에서 한국과 동남아시아 간 교류를 다루는 본 연구에서는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Ⅲ. 해로를 통한 한국과 동남아시아 간 교류 고대 한국과 중국 간 교역은 육로 외에 해로( 海 路 )를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그 해로는 우회로( 迂 廻 路 )라고도 불리는 연안 항로 혹은 연해로( 沿 海 路 )와 직항로( 直 航 路 )라고도 불리 는 횡단 항로 혹은 횡단로( 橫 斷 路 )의 두 가지가 있었다. 연해로는 한반도의 서해 연안에서 서북쪽으로 요동( 遼 東 )반도 그리고 산동( 山 東 )반도의 연안까지 이어지는 북방 연해로와 산동 반도 연안에서 남쪽으로 중국의 동남부 연안까지 연결되는 남방 연해로의 두 구간으로 구분 된다. 횡단로는 한반도 서남 해안에서 황해를 횡단하여 중국의 동남부 해안 지방에 이르는 바닷길을 일컫는다. 중국 연안 지방과 한반도 사이의 교류는 대부분 연해로를 통해 이루어 졌지만, 횡단로도 중요한 루트로 작용했다. 그리하여 백제는 4세기 후반 중국 동진( 東 晋, 319-420)과 교류할 때 그리고 5세기 후반 중국 북조의 북위( 北 魏, 386-534)와 접촉할 때 횡단로에 의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16) 하지만 횡단로는 그 전부터 한반도와 중국 연안 그리 고 나아가서는 남양 지역 간 교류의 중요한 통로로 사용되어, 이 해로를 통해 인도와 동남 아시아를 포함한 남양 세계의 문물이 한반도로 유입되었다. 고려 시대 불교 승려인 일연( 一 然 )이 쓴 삼국유사( 三 國 遺 事 ) 에 아유타( 阿 踰 陁 )국 즉 갠지스 강 유역에 있었던 고대 인도의 아요디야(Ayodhyā) 왕국의 공주 허황옥( 許 黃 玉 )이 기원후 48년에 한반도에 와 당시 경남 김해 지역에 있었던 가락국( 駕 洛 國 )의 김수로( 金 首 露 ) 왕과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17) 고고인류학자인 김병모는 허황옥이 기원전 2세 기 경 인도의 아요디야 왕국을 떠나 중국의 쓰촨( 四 川 ) 지방의 안웨( 安 岳 )에 정착한 집안의 후손으로, 47년에 쓰촨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의 와중에 안웨를 떠나 중국 후베이( 湖 北 ) 지 26~28면. 15) 손보기 편, 장보고와 청해진, 서울: 혜안, 1996; 허일 외, 장보고와 황해 해상무역, 서울: 국학자료 원, 2001; 권덕영 외, 대외문물교류연구, 서울: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2003; 윤명철, 장보고의 나 라, 서울: 정신세계사, 2003; 강봉룡, 한국사의 미아 해상왕 장보고의 진실, 서울: 한얼미디어, 2004; 최덕수, 장보고와 한국 해양네트워크의 역사, 서울: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2006. 16) 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 서울: 사계절, 2001, 663~674면. 17) 일연, 三 國 遺 事, 卷 2, 紀 異 2, 駕 洛 國 記. - 4 -

방의 우창( 武 昌 )을 거쳐 황해를 건너 48년에 가락국에 도착했다고 설명한다. 18) 삼국유 사 에 허황옥이 금수( 錦 繡 )와 능라( 綾 羅 ) 등을 많이 갖고 왔다는 기록도 이들이 중국산일 개연성이 높다는 점에서 허황후의 중국 경유설이 설득력 있게 보인다. 19) 그러나 허황옥이 인도에서 바로 한반도로 왔다고 볼 수 있는 근거도 있다. 삼국유사 의 다른 기록은 허황옥이 가락국에 올 때 항해의 안전을 위해 파사석탑( 婆 娑 石 塔 ) 을 배에 싣고 왔는데, 그 석탑의 돌이 우리나라에 나지 않는 것이라고 전한다. 20) 허명철 박사는 파 사석탑의 돌이 실제로 한국에는 없고 인도의 아유디야 지방에서만 나는 것임을 알아냈을 뿐 만 아니라, 그 탑의 형식이 인도의 아잔타(Ajanta) 동굴사원 등에서 볼 수 있는 축소형 불 탑의 것과 유사하다는 것도 밝혀냈다. 21) 그밖에 서울대 의대의 서정선 교수와 한림대 의대 의 김정일 교수는 2004년에 허황옥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김해 예안리 고분의 왕족 유골의 DNA를 분석한 결과 그 유골의 주인이 인도의 남방계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22) 어쨌든 이상 살펴본 삼국유사 의 허황옥 이야기에서 이미 기원 1세기에 바닷길을 이용한 교류 가 한반도와 중국 사이는 물론 심지어 인도와도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횡단 해로를 통해 인도 및 동남아시아의 문물이 한반도로 유입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로 1-2세기 유적인 전남 해남군의 군곡리 패총과 3세기 유적인 경남 창원시 삼 동동의 옹관묘와 6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진 공주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리구슬을 들 수 있다. 인도 외에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등에서 발견되어 인도-패시픽 유리구슬(Indo-Pacific glass beads) 로 불리는 이들은 주로 인도 동남부 해안에서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생산되어 세계 도처로 교역되었다. 23) 신라 흥덕왕( 興 德 王 )은 834년에 자단( 紫 檀 ), 침향( 沈 香 ), 공작미( 孔 雀 尾 ) 즉 공작새 꼬리, 비취모( 翡 翠 毛 ) 즉 비취새 의 깃털 등을 백성들이 사용할 수 없도록 했다. 이 품목들은 오늘날 인도네시아, 말레이시 아,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 등지가 그 주산지인데, 이 사실 또한 해로를 통해 고대에 동남 아시아와 한반도 간 교류가 일어났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24) Ⅳ. 동남아시아의 해상 무역 왕국 부남 위에서 살펴본 한반도와 중국 및 남양 간 해로를 통한 교류의 가능성은 고대 한국의 해 양 교류에 대해 풍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일본서기 의 킨메이( 欽 明 ) 천황 4년 즉 543년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서술이 있다. 가을 9월에 백제의 성명왕( 聖 明 王 )은 전부( 前 部 ) 내솔( 奈 率 ) 진모귀문( 眞 牟 貴 文 )과 호 덕( 護 德 ) 기주기루( 己 州 己 婁 ) 그리고 물부( 物 部 ) 시덕( 施 德 ) 마기모( 麻 奇 牟 ) 등을 보내 어 부남( 扶 南 ) 산 물품과 노예 2명을 바쳤다. 25) 18) 김병모, 한ㆍ일( 韓 ㆍ 日 ) 쌍어문( 雙 魚 紋 ) 비교연구, 민족학연구 1, 1995, 92~93면; 김병모, 김병모의 고고학 여행 2, 서울: 고래실, 2006, 133~175면. 19) 일연, 三 國 遺 事, 卷 2, 紀 異 2, 駕 洛 國 記. 20) 일연, 三 國 遺 事, 卷 3, 塔 像 4, 金 官 城 婆 娑 石 塔. 21) 이종호, 한민족ㆍ한국인은 누구인가(2), 국정브리핑 2005-02-19. 22) 강성보, 아유타국, 경향신문 2004.08.19; 조병철, 허황후, 세계일보 2004.08.18. 23) 이인숙, 유리와 고대 한국, 실크로드와 한국 문화, 서울: 소나무, 1999, 227~228면. 24) 趙 汝 适, 諸 蕃 志, Translated by Friedrich Hirth and W.W. Rockhill, St. Petersburg: Printing Office of the Imperial Academy of Sciences, 1911, pp. 204~206, 208~209, 235~236; 정수일, 문명교류사연 구, 서울: 사계절, 2002, 213~214면. - 5 -

위의 기록 중 전부( 前 部 ) 내솔( 奈 率 )의 내솔 은 백제의 관등 체계에서 6번째 관등이었고, 물부( 物 部 ) 시덕( 施 德 )의 시덕 은 8번째 관등이었다. 일본어에서 호( 護 ) 의 음역 고 와 고 ( 固 ) 의 음역 코 가 서로 비슷한 점을 고려하여, 호덕( 護 德 ) 을 고덕( 固 德 ) 으로 읽는다면, 호덕 은 9번째 관등에 해당한다. 26) 백제의 성명왕은 한국사에서는 성왕( 聖 王, 재위 523-554)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와 부남 그리고 일본 간 접촉을 시사하는 일본서기 의 상기 기록에 대해 최초로 주목한 자는 일본의 역사학자 미키 사카에( 三 木 榮 )인 것으로 보인다. 미키 사카에는 부남을 오늘날 태국과 말레이시아 사이에 놓여 있던 나라로 간주한다. 27) 그러나 부남은 현 캄보디 아 남부와 베트남 남부의 코친차이나(Cochinchina) 지역에 걸쳐 있었던 나라였다. 캄보디아의 남부에서 기원 1세기 후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부남 왕국은 6세기 중엽 까지 오늘날 캄보디아의 남부와 메콩(Mekong) 강 델타 지역에서 번성했다. 중국 사료 양 서( 梁 書 ) 에 의하면, 남쪽에 있는 요( 徼 )라는 나라로부터 귀신을 섬기는 사람인 혼전( 事 鬼 神 者 字 混 塡 ) 이 배를 타고 부남 땅에 도달했다. 28) 요 는 인도나 말레이 반도 지역으로 간 주되며, 귀신을 섬기는 자 는 인도의 브라만 사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베트남 중부 지방에 있었던 참파(Champa) 왕국의 유적에서 발견된 한 비문에 나타나는 브라만 카 운딘야(Kaundinya)와 동일시된다. 29) 위의 중국 역사책은 그가 부남에서 그곳의 여왕인 유 엽( 柳 葉 )을 아내로 삼아 나라를 다스렸다고 전한다. 이 설화에서 동남아시아의 초기 왕국 건설 과정에 미친 인도의 영향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부남은 3세기 초에 크게 팽창하여 그 영향력이 서쪽으로는 말레이 반도 중부에서 미얀 마까지 이르렀고 동쪽으로는 베트남 중부에 닿았다. 이러한 국력의 바탕에는 해상 무역을 통한 경제적 힘이 있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던 부남은 옥에오 (Oc-eo) 항구를 중심으로 남중국해의 중계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30) 또 양서 에 따르면, 부남은 비옥한 메콩 강 델타의 농업 자원 외에도 금, 은, 구리, 주석, 침향( 沈 香 ), 상 아 등을 생산했다. 31) 부남의 옥에오 유적에서 2세기에서 5세기 사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인 도 산 반지, 그리고 비쉬누(Vishnu), 시바(Shiva) 등 인도 신들이 새겨진 주석 호부( 護 符 ) 등이 발견되었다. 또 152년경에 제작된 로마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재 위 138-161)의 금박 휘장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재위 161-180) 시 대의 것으로 보이는 주화가 출토되었고, 후한( 後 漢 ) 시대(25-220) 중국의 청동거울 파편도 발견되었다. 이것은 옥에오가 한 때 인도와 중국 간뿐만 아니라 유럽과 중국 간 교역의 중 요한 중계항이었음을 말해준다. 32) 부남의 민족에 대해서는 이들이 몬-크메르(Mon-Khmer) 어족의 민족 즉 오늘날 캄보디 25) 日 本 書 紀, 卷 19, 欽 明 天 皇 4년 秋 9월. 26) 이도학, 살아 있는 백제사, 서울: 휴머니스트, 2003, 547면. 27) 三 木 榮, 日 暹 交 通 史 考, 東 京 : 古 今 書 院, 1934, 22~23면. 28) 梁 書, 卷 54, 列 傳 48, 諸 夷, 扶 南 國. 남제서( 南 齊 書 ) 에는 혼전의 출신국이 격( 激 ) 으로 표기되어 있 다. 南 齊 書, 卷 58, 列 傳 39, 蠻 東 南 夷, 扶 南 國. 29) Georges Cœdès, Les États Hindouisés d Indochine et d Indonésie, Paris: E. de Boccard, 1964, pp. 75~76. 30) Nguyen The Anh, Indochina and the Malay World, Asia Journal 3(1), 1996, pp. 108~111. 31) 梁 書, 卷 54, 列 傳 48, 諸 夷, 扶 南 國. 32) Bernard Philippe Groslier, Hinterindien: Kunst im Schmelztiegel der Rassen, Baden-Baden: Holle Verlag, 1980, pp. 62~63. - 6 -

아 민족의 선조라는 것과, 33) 오스트로네시아(Austronesia) 어족의 민족 즉 오늘날 말레이- 인도네시아 민족과 같은 계통의 민족이라는 것, 34) 그리고 부남의 주민이 이 두 가지 민족으 로 이루어졌다는 것 35) 등 여러 가설이 존재한다. 부남이 다른 말레이-인도네시아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활발한 해상 무역 활동을 전개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그들을 오스트로네시아 계 민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해상 무역을 기반으로 번영했던 부남은 5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도 4세기경 중국인들이 동남아시아 무역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되면서 인도네시아 지역과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역이 발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남은 5세기에 참파의 공격 을 받았고 6세기 중엽에는 내란으로 국력이 더욱 약화되었으며 마침내 북쪽에서 내려온 크 메르(Khmer)족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36) 미키 사카에는 백제가 부남의 물품과 노 예를 구입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시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백제 가 부남의 물품과 노예 2명을 일본에 선물한 543년은 부남이 크게 약화되어 쇠퇴 일로에 놓여 있던 6세기 중엽의 시점과 일치된다는 점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 Ⅴ. 6세기 백제의 동남아시아 및 인도와의 교역에 대한 추측 백제사 연구자인 이도학은 5세기 말에 탐라( 耽 羅 ) 즉 제주도를 그 영향권 하에 넣은 백 제가 탐라국이 이용하고 있었던 해상 활동 루트를 장악함으로써 일본과 중국 푸젠( 福 建 )성 의 푸저우( 福 州 )뿐만 아니라 대만, 류큐( 琉 球 ) 그리고 동남아시아까지 그 항로를 확대했다고 본다. 그는 그 증거로 백제가 일본 조정에 부남의 물품과 노예들을 진상했다는 위의 일본 서기 543년의 기록을 든다. 37) 재야 역사학자인 임길채도 백제가 일본에 부남의 노비를 바칠 수 있었던 것은 백제가 뱃길을 따라 동남아시아에 직접 가서 이들을 획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추측한다. 38) 이도학은 백제의 해상 활동 범위가 심지어 인도까지 미쳤다고 단정하면서 그 증거로 일본서기 킨메이 천황 15년 즉 554년의 다음 기록을 든다. 겨울 12월에 백제가 하부( 下 部 ) 간솔( 杆 率 ) 문사간노( 汶 斯 干 奴 )를 파견하여 서신을 올 려 말하기를, 백제 왕인 신하 명( 明 )은 [중략] 현재 일이 매우 급하여 배 한 척을 보내어 아룁니다. 좋은 비단 두 필, 탑등( 毾 㲪 ) 하나, 도끼 300개 그리고 사로잡은 성 의 주민으로 남자 2명과 여자 5명을 바칠 따름입니다. 라고 했다. 39) 백제의 사신 문사간노( 汶 斯 干 奴 )의 관직명인 하부( 下 部 ) 간솔( 杆 率 ) 중 간솔 은 백제의 관등 체계에서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40) 백제의 왕으로 소개된 명 은 일본서 33) Georges Cœdès, Les Peuples de la Péninsule Indochinoise: Histoire - Civilisations, Paris: Dunod, 1962, p. 65; D.R. SarDesai, Southeast Asia: Past & Present, Boulder: Westview Press, 1997, p. 23. 34) Daniel George E. Hall, A History of South-east Asia, London and Basingstoke, 1981, p. 25; Nguyen The Anh, 앞의 논문, p. 110. 35) Bernard Philippe Groslier, 앞의 책, p. 57. 36) Nguyen The Anh, 앞의 논문, pp. 110~113. 37) 이도학, 백제의 교역망과 그 체계의 변천, 한국학보 63, 1991, 96~97면. 38) 임길채, 앞의 책, 253면. 39) 日 本 書 紀, 卷 19, 欽 明 天 皇 15년 冬 12월. 40) 이도학, 살아 있는 백제사, 서울: 휴머니스트, 2003, 547면. - 7 -

기 543년 기록의 성명왕( 聖 明 王 ) 즉 성왕( 聖 王 )을 가리킨다. 이도학이 위의 일본서기 554년의 기록에서 백제의 해외 교역과 관련하여 중시하는 부분은 백제가 일본 조정에 탑등 이란 품목을 선물로 바쳤다는 것이다. 그는 탑등( 毾 㲪 ) 이 페르시아어의 탑탄(taptan) 혹은 타페탄(tapetan) 의 한자 음역에 따른 표기라는 점에 주 목하여, 백제가 당시 양모를 주성분으로 하는 페르시아 직물로서 북부 인도에서 생산되던 양탄자를 일본에 선물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백제가 인도와 직접적인 교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41) 이도학은 백제가 6세기에 인도와 해상 교역을 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다른 증거로 20세 기 초 한국의 역사학자인 이능화( 李 能 和 )가 소개하는 미륵불광사사적기( 彌 勒 佛 光 寺 事 蹟 記 ) 의 다음 기록을 든다. 백제 성왕 4년에 불교 승려 겸익( 謙 益 )이 계율을 구하기로 작심하여 바닷길로 돌아 중인도( 中 印 度 )의 상가나대율사( 常 伽 那 大 律 寺 )에 이르렀다. 42) 이도학은 상기 인용의 기록을 겸익이 526년에 배를 타고 직접 인도로 간 것으로 해석한 다. 임길채 역시 겸익이 당시 해로를 따라 인도로 유학을 갔다고 말한다. 43)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6세기 전반 백제의 해상 교역 범위는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인도까지 뻗어 있었던 것이 된다. 이도학은 6세기 백제와 동남아시아 간 교류의 또 다른 증거로 7세기 중엽에 활동했던 백제의 신하인 흑치상지( 黑 齒 常 之 )라는 인물을 든다. 흑치상지(630-689)는 의자왕( 義 慈 王, 재위 641-660) 말기에 백제의 관리로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으며, 백제가 멸망한 후 에는 중국 당 나라의 장군으로 활약했다. 중국에서 출토된 흑치상지의 묘지명( 墓 誌 銘 )은 흑 치상지의 선조가 백제의 왕족 가운데 하나인 부여씨( 扶 餘 氏 ) 가문의 출신으로 흑치( 黑 齒 )라 는 지역에 봉해졌으며, 흑치상지는 그렇게 생겨난 흑치 가문의 후예 중 한 사람이라고 전한 다. 이도학은 흑치상지의 왕족 출신 부여씨 선조가 흑치에 봉해진 것이 백제 시대 왕족을 지방에 분봉하는 이른 바 담로( 擔 魯 ) 체제에 따른 것이라고 본다. 그는 또 이 담로 체제가 538년 이후에는 시행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여, 흑치상지의 선조가 흑치에 봉해진 것이 6세기 중엽 이전에 일어난 일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44) 백제와 동남아시아 간 관계와 관련하여 이도학이 중시하는 것은 흑치 의 개념이 무엇인 가 그리고 흑치 가 어떤 지역을 가리키는 것인가의 두 가지 문제이다. 그는 흑치 의 문자적 의미에 주목하여 흑치 가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습속이 널리 퍼져 있는 동남아시아의 어느 한 지역의 지명이라고 본다. 그는 특히 흑치 를 오늘날 필리핀 지역과 동일시하는 대만의 역사학자인 량자빈( 梁 嘉 彬 )의 견해를 수용한다. 45) 그는 이상의 몇 가지 단서를 근거로, 일본 과의 교역 루트를 확보한 백제가 6세기 전반에 동남아시아로 무역 활동을 확대하면서 필리 핀에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과 인도와의 교역을 위한 백제 선박들의 기항지를 설립했으며, 41) 이도학, 백제의 교역망과 그 체계의 변천, 한국학보 63, 1991, 97~98면. 임길채(앞의 책, 253~254 면)도 비슷한 주장을 펼친다. 42) 이능화, 朝 鮮 佛 敎 通 史 상편, 1918, 聖 王 31년. 43) 이도학, 앞의 논문, 97~99면; 임길채, 앞의 책, 251면. 44) 이도학, 백제인물사, 서울: 주류성, 2005, 235~237면. 45) 이도학, 백제인물사, 서울: 주류성, 2005, 238~240면; 이도학, 백제장군 흑치상지 평전, 서울: 주류 성, 1996, 32~41면. - 8 -

부여씨의 한 백제 왕족에게 흑치씨라는 새로운 성( 姓 )을 하사하여 그를 그 기항지의 관리자 로 세웠다고 추측한다. 즉 그는 흑치씨의 필리핀 분봉을 백제의 동남아시아 진출의 또 다른 형태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필리핀에 백제의 식민지가 건설된 것이 백제가 부남 의 물품과 노예를 일본에 바친 성왕 시대(523-554)에 일어난 것으로 본다. 46) Ⅵ. 중국을 경유하여 이루어진 백제의 동남아시아 및 인도와의 교역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이도학 등의 역사학자들은 백제의 선박이 부남에 직접 갔으며, 백제 정부가 필리핀에 교역 기지를 세웠으며, 백제의 상선이 인도양까지 진출하여 인도 시 장에서 직거래를 했으며, 백제 승려가 백제의 선박을 타고 한국에서 인도까지 항해했다는 등 6세기 백제와 동남아시아 및 인도 간 교역 내지는 교류가 직접적으로 일어났다고 본다. 백제와 동남아시아 및 인도 간 교류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그러나 대부분 단편적이고 애매 모호한 증거를 그 바탕에 둔 것이다. 특히 백제가 6세기 전반에 필리핀에 무역 기지를 세웠 다는 주장은 흑치상지 의 흑치 라는 빈약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허무맹랑한 가설에 불과하 다.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흑치 의 습속은 사실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지에 도 있었다. 47) 특히 흑치 는 660년에 멸망한 백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한반도 에 파견할 정도로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고 백제와 많은 인적 교류가 있었던 일본 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만약 당시에 백제가 필리핀으로 그처럼 중요한 해외 팽창 사업을 실제로 벌였다면, 그 전통이 후대에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이어졌어야 할 것이 며, 또 적어도 그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 나 삼국유사 등의 한국 사료에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백제와 필리핀 간 모종의 접촉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단서 조차 찾아볼 수 없으며, 한국인의 필리핀으로의 사업 진출은 20세기가 되어서야 이루어졌을 뿐이다. 백제가 543년에 부남 물품과 노예를 일본에 바쳤다는 일본서기 의 이야기에 대해 살 펴보자. 만약 백제가 부남 왕국과 직접적인 교역 관계에 있었다면, 그것을 입증하는 보다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남이나 부남 주위의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관련 비문이나 그 지역으로 백제의 선박이 왕래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해양고고학적인 유물은 이 때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또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등 한국 측 사료에도 백제 사람 들이 부남 내지는 동남아시아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무역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 없는 것은 물론 적어도 그것을 암시하는 단서조차 보이지 않는다. 백제는 만약 부남에 직접 가지 않았다면 부남의 물품과 노예를 어떻게 획득했을까? 나는 그것이 중국이라는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근거로 여러 사료들에서 확인되는 6세기 백제와 중국 간 교류와 중국과 부남 간 교류에 주목하고자 한다. 남사( 南 史 ) 와 양서 는 이미 5세기 초부터 중국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공물을 바치기 시작한 백 제가 6세기에 들어서서도 중국에 수시로 조공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48) 고려 시 대의 역사가인 김부식( 金 富 軾, 1075-1151)이 편찬한 삼국사기 는 이 중국 사서들의 기 46) 이도학, 백제인물사, 서울: 주류성, 2005, 243면; 이도학, 살아 있는 백제사, 서울: 휴머니스트, 2003, 457면. 47) 김용운, 한국이 보는 일본, 한국국제교류재단 편, 한국과 세계의 만남, 서울: 지문당, 2002, 243면. 48) 南 史, 卷 79, 列 傳 69, 夷 貊 下 東 夷 西 戎 蠻 西 域 諸 國 北 狄, 百 濟 ; 梁 書, 卷 54, 列 傳 48, 諸 夷, 百 濟. - 9 -

록을 확인시켜주며 때로는 그 내용을 보완해주기도 한다. 예컨대 남사 와 양서 는 무령왕( 武 寧 王 ) 시대(501-523) 백제가 양( 梁, 502-557) 나라 조정에 조공 사신을 파견한 것이 521년 한 번만 발생한 것으로 기록해 놓은 것에 비 해, 삼국사기 에는 백제가 521년 외에 512년에도 중국으로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되어 있다. 49) 양 나라와의 교류는 성왕( 聖 王 ) 재위 기간(523-554)에도 계속 되었다. 특히 백제가 543년에 부남의 물품과 노예를 일본에 바쳤다는 일본서기 의 기록과 관련하여, 백제의 534년과 541년 양 나라로의 조공 사신 파견은 중요한 것으로 판단된다. 양서 에 따르 면, 백제는 534년과 541년에 양에 수차 사신을 파견하여 토산물을 진상하면서 중국 정부에 게 열반경( 涅 槃 經 )을 비롯한 경서( 經 書 )와 모시( 毛 詩 ) 박사( 博 士 ) 즉 시경( 詩 經 )에 능통한 학 자, 그리고 공장( 工 匠 )과 화공( 畵 工 ) 등을 요청했는데, 양 조정이 그 청을 들어주었다고 한 다. 50) 삼국사기 에도 양서 의 이 기록과 비슷한 내용의 기록이 발견된다. 51) 중국과 부남 간 교류는 중국과 백제 간의 것보다 더욱 빈번하게 일어났다. 남제서( 南 齊 書 ) 에 의하면, 부남은 성이 교진여( 僑 陳 如 )이고 이름이 사야발마( 闍 耶 跋 摩 )라는 왕이 남 북조( 南 北 朝 )의 송( 宋 ) 나라 시대(420-479) 말기 즉 추측컨대 470년대에 중국의 광저우( 廣 州 )로 화물을 실은 상선을 보냈다. 인도식으로 읽을 때 자야바르만(Jayavarman) 으로 읽히 는 이 왕은 484년경에는 제( 齊, 479-502) 나라 조정에 금박에 아로새긴 용왕좌상( 龍 王 坐 像 ), 백단( 白 檀 ) 나무로 만든 형상, 상아로 된 탑, 유리 장식품, 빈랑( 檳 榔 )을 놓는 쟁반 등 을 바쳤다. 52) 양서 에 따르면, 부남 왕 자야바르만은 503년에 양 나라 조정에 토산물과 함께 산호로 된 불상을 진상했으며 511년과 514년에도 조공 사신을 보냈다. 그의 후계자인 유타발마( 留 陁 跋 摩 ) 즉 루드라바르만(Rudravarman)도 517년, 519년, 520년, 530년, 535 년, 539년에 양 나라에 조공 사신을 파견했다. 중국 황제에게 진상된 선물에는 종종 토산물 과 함께 불교 관련 물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53) 김현구 등은 삼국사기 에 나타나는 백제와 중국 간 교류의 기사 가운데 특히 541년 의 기록이 중국의 문물과 전문 인력의 백제로의 수입을 이례적으로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여, 541년 시점에 상기 기록의 내용 외에도 다른 물품과 인력이 많이 백제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들은 백제가 이 때 부남 산 물품과 노예 2명 도 함께 획득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54) 이 설명도 확실한 근거를 바탕에 둔 것이 아닌 추 측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살펴본 양 나라와 부남 간 6세기 전반의 교역 및 교류를 감안할 때 백제가 부남에 직접 가서 교역을 했다는 주장보다는 설득력이 더욱 강 하다. 같은 맥락에서 백제가 일본에 진상한 인도 산 탑등 도 백제가 인도에서 직접 구했다기 보다는 중국에서 획득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비슷하게 백제 승려 겸익이 526년에 인도 에 간 것도 이도학 등이 주장하는 것처럼 당시 백제와 인도 사이에 직접적인 해상 교역 관 계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백제와 중국 간 교역 관계 그리고 중국과 동남아시 아 및 인도 간 해상 루트를 통한 교역 관계가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이해되어 야 할 것이다. 49) 김부식, 三 國 史 記, 卷 26, 百 濟 本 紀 4, 武 寧 王 12년 夏 4월, 武 寧 王 21년 冬 11월. 50) 梁 書, 卷 54, 列 傳 48, 諸 夷, 百 濟. 51) 김부식, 三 國 史 記, 卷 26, 百 濟 本 紀 4, 聖 王 19년. 52) 南 齊 書, 卷 58, 列 傳 39, 蠻 東 南 夷, 扶 南 國. 53) 梁 書, 卷 54, 列 傳 48, 諸 夷, 扶 南 國. 54) 김현구 등, 앞의 책, 152면. - 10 -

남북조 시대(420-589)에 남조의 송, 제, 양 등의 나라들은 전쟁 관계에 있던 북조의 나 라들 때문에 육로를 통한 서역과의 교역이 어렵게 되자 그 대안으로 해상 교역로를 이용하 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중국의 이러한 관심은 곧 동남아시아의 몇몇 왕국들의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Sumatra) 섬과 자와(Java) 섬 연안의 왕국들 은 오래 전부터 인도와 무역을 하고 있었으며 또 이미 부남 등을 통해 중국과도 간접적인 교역 관계에 있었다. 중국의 적극적인 관심과 그에 대한 동남아시아 해양 왕국들의 긍정적 인 반응의 결과 중국에서 동남아시아를 경유하여 인도까지 이르는 해상 교역로가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55) 남사 에 의하면, 송 나라 황제는 449년에 가라단국( 呵 羅 單 國 ), 파황국( 婆 皇 國 ), 파달 국( 婆 達 國 ) 등 세 나라로 사신을 파송하여 그 통치자들을 그 나라의 왕으로 책봉했다. 56) 이 세 나라들은 모두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자와 섬 혹은 수마트라 섬에 있었던 것으로 간주된 다. 57) 송 조정이 인도네시아의 이 세 왕국에 직접 사신을 파견할 정도로 관심을 보인 것은 중국인들이 당시 그만큼 이 지역을 경유하여 인도까지 이르는 해상 교역로를 중시했기 때문 인 것으로 보인다. 양 나라가 2만 척에 달하는 선박을 이용하여 동남아시아 지역뿐만 아니 라 스리랑카와 인도, 그리고 심지어 이란과 이라크 등지와 교역을 했다고 하는데, 58) 그것도 남양과의 해상 교역에 대한 중국의 능동적인 관심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5세기 초에 동진( 東 晋, 317-420)의 승려인 법현( 法 顯, 337-422)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돌아올 때 믈라카(Melaka) 해협 혹은 순다(Sunda) 해협을 통해 말레이 반도 남단이나 보르 네오(Borneo) 섬의 서부 연안에 도착한 후 거기서 동남아시아의 항구에 들르지 않고 남중 국해를 지나 곧장 광둥( 廣 東 )성의 광저우로 왔다. 화교 연구자인 왕겅우( 王 賡 武 )는 법현이 타고 온 배가 인도 선박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59) 법현의 사례로부터도 유추할 수 있듯 이, 중국에서 믈라카 해협 혹은 순다 해협을 거쳐 인도까지 가는 바닷길은 6세기 전반에 이 미 중국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었고, 당시 중국과 빈번한 교류를 맺고 있던 백제에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겸익이 우선 백제에서 중국까지 갔다가 거기서 동남아시아 를 거쳐 인도로 갔을 것이라고 본다. 중국에서 인도까지의 항해는 중국 선박을 이용했을 수 도 있지만, 중국 항구에 온 인도 상선을 타고 갔을 수도 있고 혹은 수마트라 섬이나 자와 섬의 동남아시아 왕국에서 온 상선을 타고 믈라카 해협이나 순다 해협 혹은 말레이 반도 동 부 연안의 한 항구까지 갔다가 그 곳에 정박해 있던 인도 상선을 타고 인도까지 계속 여행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Ⅶ. 7세기 백제와 곤륜의 접촉 이도학은 백제와 동남아시아 간 교역이 7세기에도 계속 되었다고 보면서, 그 증거로 일본서기 고쿄쿠( 皇 極 ) 천황 원년 즉 642년의 다음 기록에 주목한다. 60) 55) Nguyen The Anh, 앞의 논문, p. 111. 56) 南 史, 卷 78, 列 傳 68, 夷 貊 上, 海 南 諸 國, 呵 羅 單 國, 婆 皇 國, 婆 達 國. 57) Wang Gungwu, The Nanhai Trade, Journal of the Malayan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31(2), 1958, p. 55. 58) 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 서울: 사계절, 2001, 660면. 59) Wang Gungwu, 앞의 논문, pp. 42~43. 60) 이도학, 백제의 교역망과 그 체계의 변천, 한국학보 63, 1991, 98면. - 11 -

백제에서 조문을 위해 온 사신의 시종들이 아뢰기를 [중략] 백제의 사신이 곤륜( 崑 崙 )의 사신을 바다로 던져버렸습니다. 라고 말했다. 61) 백제가 일본에 조문 사신을 보낸 것은 조메이( 舒 明 ) 천황(재위 629-641)이 죽었기 때문 이었다. 상기 인용에서 백제와 동남아시아 간 교류의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곤륜 의 개념이 무엇인가 하는 점과 백제 사신이 곤륜의 사신 을 바다에 던진 배경 및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10세기에 편찬된 중국의 역사서인 구당서( 舊 唐 書 ) 에서 곤륜 은 다음과 같이 하나의 민족 개념으로 파악되어 있다. 임읍( 林 邑 ) 이남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고수머리에 몸이 검은데, 그들을 통칭하여 곤 륜이라고 부른다. [중략] 진랍( 眞 臘 )국은 임읍의 서북쪽에 위치해 있는 나라로, 본래 는 부남의 속국이었으며 곤륜의 부류에 속한다. 62) 상기 인용에서 임읍는 현 베트남 중부 및 남부 일대에 있었던 참파 왕국을 가리키며, 진 랍은 부남을 멸망시킨 크메르족의 나라로 오늘날 라오스 남부와 캄보디아 일대에 있었다. 구당서 에 따르면, 10세기 중국인들은 곤륜 을 대략 베트남 중부와 라오스 이남의 지역 에 살던 원주민들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곤 륜 은 당시 북부 베트남 지역에 살던 비엣(Viet)족을 제외한 동남아시아의 피부색이 비교적 검은 야만적인 토착 원주민들을 지칭하던 용어가 아니었나 싶다. 영국의 동남아시아 역사 연구자인 다니엘 조지 홀(Daniel George E. Hall)은 곤륜 이 원래는 인도차이나 연안에서 해양 활동을 하는 주민들을 지칭한 개념이었지만 뒤에 도서 동남아시아의 주민들에게도 확 대되었다고 추측하는데, 63) 곤륜 을 동남아시아 전 지역의 원주민들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간주하는 그의 이러한 견해는 구당서 의 곤륜 개념에 가깝다. 그에 비해 동남아시아 고 대사 연구자인 폴 휘틀리(Paul Wheatley)는 곤륜 을 말레이 반도부터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쪽 연안 지대까지의 지역 즉 동남아시아의 대륙부에 사는 주민들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본 다. 64) 한편 한국의 역사학자인 고병익은 그 역시 구당서 의 곤륜 에 대한 설명을 중시 하고 있지만, 이를 특이하게 해석하여 곤륜 을 지리적으로는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섬과 자와 섬을 포함한 지역으로 그리고 민족적으로는 말레이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으 로 간주한다. 65) 그러나 일본서기 의 곤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당서 에 나 타나는 중국인들의 곤륜 개념을 보다 중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중국의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 일본과 남북조의 중국 왕조들 간 교류를 감안할 때, 66) 일본인들이 사용한 곤륜 개념은 중국인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에 기초한 것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구당서 의 곤륜 개념을 수용한다면, 곤륜의 사신 은 구체적으로 동남아시아의 어떤 61) 日 本 書 紀, 卷 24, 皇 極 天 皇 원년 2월. 62) 舊 唐 書, 卷 197, 列 傳 147, 南 蠻 西 南 蠻, 林 邑 國. 63) Daniel George E. Hall, 앞의 책, p. 9. 64) Paul Wheatley, The Golden Khersonese: Studies in the Historical Geography of the Malay Peninsula before A.D. 1500, Kuala Lumpur: University of Malaya Press, 1961, p. 283. 65) 고병익, 혜초의 인도 왕로에 대한 고찰, 불교와 諸 科 學 : 개교80주년기념논총,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1987, 877면. 66) 예컨대 南 史, 卷 79, 列 傳 67, 夷 貊 下 東 夷 西 戎 蠻 西 域 諸 國 北 狄, 倭 國. - 12 -

나라의 사신이었을까?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은 첫째 7세 기 중엽이라는 시기, 둘째 그 나라는 당시 중국해를 무대로 해상 무역 활동에 참가하거나 특히 중국과 교류를 하고 있던 나라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나라로는 무엇보다도 7세기 전반에 중국으로 여러 번 사신을 파견한 참파와 진랍 등이 있 다. 67) 당( 唐 ) 나라의 태종( 太 宗 ) 통치 시대(627-650)에 중국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친 말레이 반도 동안( 東 岸 )의 반반국( 盤 盤 國 )도 그 후보 국가 중 하나이다. 68) 이렇게 볼 때, 위에서 언급한 폴 휘틀리의 곤륜 개념에 대한 이해도 적어도 본 연구의 주제와 관련된 7세기의 맥락에서는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들 국가 중 곤륜의 사신 을 배출한 나라는 중국, 일본 등에 지리적으로 비교적 가까운 참파나 진랍이 아닌가 싶다. 백제 사신의 시종들의 진술에 따르면, 백제 사신이 곤륜의 사신을 바다로 던져버렸는데, 이것을 이도학은 백제 사신이 곤륜 사신을 바다에 밀어넣어 죽인 것 이라고 본다. 69) 그러 나 원문에는 단순히 곤륜 사신을 바다 안으로 던졌다 70) 고 되어 있다. 곤륜의 사신이 살해 되었다고 간주하는 것은 이 에피소드의 해석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지만, 자구( 字 句 )의 번역 은 원문에 충실해야 한다. 곤륜의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린 배경 및 동기와 관련하여 그들이 곤륜의 사신 이란 용 어의 곤륜 을 어떤 개념으로 이해하고 썼을까? 이 의문과 관련하여, 우선 곤륜 이 구당 서 등 중국 사료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중국에서 베트남을 제외한 동남아시아의 민족 들을 가리키는 애매모호하고 포괄적인 개념으로 쓰였다는 점과 백제와 중국 간 교류를 고려 할 때, 나는 당시 백제 사람들도 곤륜의 사신 이 명확히 어떤 나라에서 온 것인지를 모르 지만 대충 동남아시아 내지는 남양에서 온 사람인 것으로 알고 그를 곤륜 사람이라고 지 칭했을 것으로 본다. 또 따져보아야 할 문제는 백제 사신 일행이 곤륜의 사신을 만난 곳은 어디이며 그를 바 다로 던진 곳이 어디인가 라는 점이다. 그들이 곤륜 사신을 만난 곳은 당시 백제의 교역 활동 범위와 곤륜 이란 나라의 중국과의 교역 관계를 고려할 때 중국의 항구와 일본의 항 구 두 군데 중 하나일 것이다. 그것이 중국의 항구일 경우, 백제 사신이 곤륜 사신을 바다 에 던져버린 곳은 중국 항구나 중국 근해, 혹은 곤륜 사신이 백제 사신의 배를 타고 일본으 로 동행했다면 중국에서 일본으로의 항해 도중 혹은 일본 근해나 항구 등 여러 가능성이 있 다. 백제 사신 일행이 곤륜의 사신을 만난 곳이 일본의 항구일 경우, 일본에 온 백제 사신 이 일본에 온 곤륜 사신을 만나 그를 일본 항구에서 바다에 던져버린 것이 된다. 백제 사신이 일본에 온 것은 일본서기 에 의하면 642년 음력 2월이었으며, 백제가 당 나라에 조공 사신을 파견한 것은 삼국사기 에 의하면 642년 음력 1월이었다. 71) 항해 와 조공에 따르는 제반 일정 등을 감안할 때, 당에 파견된 백제 사신과 일본에 온 백제 사 신이 동일한 인물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642년의 백제 사신은 일본 천황의 서거에 대한 조 문을 목적으로 백제에서 일본으로 직접 파송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 사신 일행이 곤 륜 사신을 처음으로 만난 곳은 자연히 일본 근해나 항구가 된다. 백제 사신이 일본에서 만난 곤륜 사신을 왜 바다에 던져버렸을까? 두 사신이 함께 술을 마시다가 백제 사신이 명정( 酩 酊 )의 상태에서 곤륜 사신을 상대로 완력을 자랑한 것인가? 67) 舊 唐 書, 卷 197, 列 傳 147, 南 蠻 西 南 蠻, 林 邑 國 및 眞 臘 國. 68) 唐 書, 卷 222 下, 列 傳 147 下, 南 蠻 下, 盤 盤. 69) 이도학, 앞의 논문, 100면. 70) 日 本 書 紀, 卷 24, 皇 極 天 皇 원년 2월: 擲 崑 崙 使 於 海 裏. 71) 김부식, 三 國 史 記, 卷 28, 百 濟 本 紀 6, 義 慈 王 2년 정월. - 13 -

아니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백제 사신이 곤륜 사신으로부터 모욕을 받았기 때 문이었는가? 두 사신 간 직접적인 만남이 있었다면, 상호 의사소통은 어떤 언어로 이루어졌 을까? 두 사신 간에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난 것의 배경에 대한 이러한 상상 외에, 그 충돌 을 백제와 곤륜 이라는 나라 간 상업적 이해관계의 갈등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견해 도 있다. 이도학은 곤륜의 나라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과의 교역 관계를 독자적으 로 수립하려고 하자, 당시 동남아시아 무역을 독점하여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던 백제가 곤륜의 사신 을 해상에서 살해했다고 본다. 72) 곤륜의 나라 가 일본으로 사신을 파견한 것은 일본으로 그 무역 활동을 확대한 백제와 무역 경쟁을 벌이 기 위해서였다고 말하는 임길채의 주장도 이도학의 것과 별 차이가 없다. 73) 곤륜 으로 추정한 참파나 진랍 등 동남아시아 해상 무역 왕국들이 7세기에 일본과 독 자적인 교역 관계를 수립하려고 했다는 것은 일본 사료나 중국 사료 어느 곳에서도 고증되 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곤륜의 사신이 일본까지 온 것을 일본에 대한 모종의 상업적 목적 때문이었다는 것보다 더욱 그럴듯한 이유로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 비록 백제가 7세기 중엽에 일본 무역을 독점하려고 했다는 것이 삼국사 기 나 일본서기 등의 사료에서 확인되지 않지만, 백제가 일본의 무역 시장에 곤륜 이 란 새로운 나라가 끼어드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그 사신을 바다로 밀쳐버렸다는 이도학 등 의 주장도 진지한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Ⅷ. 7-8세기 한국 승려들의 동남아시아 및 인도 항해 7세기 초 중국이 당에 의해 통일된 이후 한국의 많은 승려들은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중국으로 갔으며, 그 중에는 불교에 대한 더욱 깊은 공부를 위해 인도로 간 자들도 적지 않 았다. 74) 인도까지 간 한국의 스님들 중에는 중국에서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의 남중국해를 건너간 자들도 더러 있었다. 이들이 이처럼 당 나라 시대 중국에서 해로를 따라 동남아시아 를 경유하여 인도까지 여행했던 것은 5세기 이후 중국과 동남아시아 및 인도 간 해상 교통 이 본격적으로 발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당의 의정(635-713)이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 에는 아리야발마( 阿 離 耶 跋 摩 ) 법사( 法 師 ), 혜업( 慧 業 ) 법사, 현태( 玄 太 ) 법사, 현각( 玄 恪 ) 법사, 혜륜( 慧 輪 ) 선사( 禪 師 )와 익명의 두 사람 등 모두 일곱 명의 신라 스님들이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인도에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중 혜륜 선사는 당의 태종( 太 宗 ) 연간(627-650)에 육로를 따라 인도에 갔으며, 현태 법 사는 650년에서 656년 사이에 티베트와 네팔을 거쳐 역시 육로로 인도에 도착했다고 한다. 한편 아리야발마 법사와 혜업 법사와 현각 법사 등의 인도 여정은 그것이 육로인지 해로인 지 밝혀져 있지 않다. 75) 그에 비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두 명의 신라 스님은 당시 당의 수도인 장안( 長 安 )에서 출발하여 배를 타고 인도에 가다가 실리불서국( 室 利 佛 逝 國 )의 서쪽에 있다는 파로 사국( 婆 魯 師 國 )에 이르러 그곳에서 모두 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76) 실리불서국 은 7세기 72) 이도학, 앞의 논문, 100면. 73) 임길채, 앞의 책, 254면. 74) 고병익, 혜초의 길을 따라, 서울: 동아일보사, 1985, 11~13면. 75) 義 淨, 大 唐 西 域 求 法 高 僧 傳, 이용범 역, 서울: 동국대학교부설 역경원, 1980, 16~17면, 37~41면, 53~54 면. 76) 義 淨, 앞의 책, 41면. - 14 -

에 수마트라 섬 중부 북안( 北 岸 )의 팔렘방(Palembang)을 중심으로 흥기한 인도네시아의 고 대 해상 왕국인 스리위자야(Srivijaya)임이 확실하며, 파로사국 은 수마트라 섬 서북부의 바 루스(Barus) 일대에 있었던 고대 왕국으로 추정된다. 77) 대당서역구법고승전 은 또 고구 려 출신의 현유( 玄 遊 )란 자가 중국의 승철( 僧 哲 ) 선사를 따라 7세기에 뱃길로 인도에 가다 가 사자국( 師 子 國 ) 즉 오늘날 스리랑카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전한다. 78) 현유도 익 명의 두 신라승처럼 믈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항로를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8세기에도 한국인으로서 중국에 공부하러 간 불교 승려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인도로 구법 순례를 떠난 자들이 종종 있었으며, 그러한 인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혜초가 있다. 신라에서 704년경에 출생한 혜초는 719년에 중국에 가서 불교 중에서도 특히 밀교 ( 密 敎 )를 공부했다. 그는 723년에 당시 중국 남부의 최대 항구였던 광저우에서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의 바닷길을 통해 인도양 벵골만의 서북부 연안에 위치해 있었던 동천축국( 東 天 竺 國 )에 도착한 후 인도의 여러 지방과 오늘날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등을 여행했다. 그는 727년에 중국의 신장( 新 疆 )성을 통해 수도 인 장안에 돌아온 후 780년에 입적할 때까지 중국에 머물면서 밀교 경전들을 번역하고 연 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79) 혜초는 그가 뱃길을 따라 인도까지 간 여정에서와 인도와 그 주위 나라들에서 보고 듣고 겪은 것을 왕오천축국전 이란 여행기에 기록했다. 왕오천축국전 은 1908년 프랑스의 폴 펠리오(Paul Pelliot)라는 한 동양학자가 중국 간쑤( 甘 肅 )성의 둔황( 敦 煌 )의 한 석굴에서 발견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발견된 왕오천축국전 은 혜초가 쓴 원래 의 여행기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이 사실은 8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당 나라에서 활동한 혜 림(737-820)이 편찬한 일체경음의 를 통해 드러났다. 당시까지 중국에 알려져 있던 주 요 불교 서적들에 실려 있는 난해한 단어들의 음과 그 의미를 설명해 놓은 일종의 주석서인 일체경음의 는 혜초가 썼다는 왕오천축국전 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왕오 천축국전 은 모두 세 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에 수록된 어휘를 폴 펠리오가 발견한 두루마리 사본의 것과 비교한 결과, 둔황 석굴의 왕오천축국전 은 총 세 부분으로 구성 된 원본의 절략본( 節 略 本 )이며 그것도 첫 부분 전체와 두 번째 부분의 앞머리와 끝 부분의 일부가 잘려나간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80) 혜림의 일체경음의 를 통해 알 수 있게 된 또 다른 중요한 것은 혜초가 중국에서 배 를 타고 동남아시아를 거쳐 인도로 갔다는 사실이다. 일체경음의 에 각멸( 閣 蔑 ) 이란 지 명이 소개되어 있다. 혜림은 이 단어를 곤륜( 崑 崙 ) 지방의 말이다. 옛 이름은 임읍국( 林 邑 國 )이다. 여러 곤륜 지방의 나라들 중에 이 나라가 최고로 컸는데 이 나라 또한 삼보( 三 寶 ) 를 공경하고 믿었다. 라고 설명한다. 81) 중국어 발음으로 거몌 가 되는 각멸 은 그러나 임읍 국 즉 참파 왕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오늘날 캄보디아에 대한 현지인들의 명칭인 크메 즉 크메르(Khmer)로 읽어야 타당할 것이다. 이 주장은 진랍 즉 캄보디아에 77) Oliver William Wolters, Early Indonesian Commerce: A Study of the Origins of Śrīvijaya,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67, pp. 185~186. 辭 海 - 地 理 分 冊 ㆍ 歷 史 地 理, 上 海 : 上 海 辭 書 出 版 社, 1982, 415면 참고. 78) 義 淨, 앞의 책, 102~104면. 79) 정수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서울: 학고재, 2004, 36면; 정수일, 한국 속의 세계 (하) - 우리는 어떻 게 세계와 소통해왔는가, 서울: 창비, 2005, 33면. 80) 정수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서울: 학고재, 2004, 37~49면. 81) 慧 琳, 一 切 經 音 義 10, 김혜경 역, 서울: 동국대학교 부설 동국역경원, 2000, 342면. - 15 -

대한 다른 명칭으로 길멸( 吉 蔑 ) 을 소개하는 당서( 唐 書 ) 의 기록에 의해 뒷받침된다. 82) 각멸 은 일체경음의 의 혜초왕오천축국전의 상권 중 첫 번째로 등장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혜초가 중국의 광저우에서 출항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캄보디아에 들렀거나 그 연 안을 지나갔다는 것을 암시한다. 83) 그밖에 일체경음의 의 혜초왕오천축국전의 상권에는 큰 바다가 넘쳐 솟아오르는 것 을 묘사하는 발해( 渤 澥 ) 와 큰 파도가 용솟음치는 것 을 묘사하는 분궁창( 湓 穹 蒼 ) 과 바다에 떠다니는 큰 배 를 가리키는 압박( 壓 舶 ) 등의 단어가 수록되어 있다. 84) 이것은 혜초가 캄보디아를 들렀거나 그 연안을 지나간 후 인도를 향해 계 속해서 배를 타고 여행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85) 일체경음의 의 혜초왕오천축국전의 중권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단어는 나형국( 裸 形 國 ) 이다. 혜초가 문자 그대로 벌거벗은 주민들을 만난 것으로 보이는 이 나라는 대개 말 레이 반도 북부 서안( 西 岸 )의 한 왕국이거나 수마트라 섬의 북부 바다에 있는 니코바르 (Nicobar) 제도로 간주된다. 86) 혜초는 캄보디아 남부 연안을 거쳐 니코바르 제도 혹은 말레 이 반도 북부 서안에 도달하기까지 도중에 믈라카 해협을 통과했을 것이다. 옛날부터 남중 국해에서 인도양으로 혹은 인도양에서 남중국해로 항해할 때는 일반적으로 믈라카 해협을 지나는 뱃길이 이용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7세기 익명의 신라 스님들이 수마트라 섬 서부의 바루스까지 간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당시 중국에서 인도로 가는 승려들 가운데 많은 자 들이 믈라카 해협을 지나가는 항해 여정을 선호했다. 중국에서 믈라카 해협을 통과하여 인도로 가는 불교 승려들은 이 해협을 끼고 발달해 있 었던 스리위자야 왕국에 들러 종종 머물렀다. 예컨대 의정은 671년에 스리위자야에 와서 6 개월간 머물면서 산스크리트어 문법을 배운 후 그 이듬해 인도에 갔다. 87) 그는 또 689년에 광저우에서 중국 승려 네 명을 데리고 다시 스리위자야에 가서 694년까지 그 곳에 체류하 면서 이들로 하여금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게 하고 자신은 대당서역구법고승전, 역잡경 론( 譯 雜 經 論 ), 남해기귀내법전( 南 海 寄 歸 內 法 傳 ) 등을 집필했다. 88) 의정이 인도로 가려 는 불교 승려들에게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불경을 공부하는 데 적합한 곳으로 추천한 스리 위자야는 이처럼 7세기 후반에 인도로 가는 중국 승려들에게 인도 유학을 위한 일종의 예 비 학습 장소였다. 89) 고병익은 혜초가 의정의 저술들을 읽었을 것이며 그 책들에 나와 있는 의정의 행적을 따라 스리위자야에 들러 그곳에서 몇 달 혹은 1-2년 체류했을 가능성도 배 제할 수 없다고 말한다. 90) 혜초가 중국 광저우에서 인도까지의 뱃길에 들렀거나 지나갔을 것으로 보이는 각멸 과 나형국 등을 고려할 때, 상기의 추측은 그다지 무리한 것으로 보이 지 않는다. Ⅸ. 맺는 말 82) 唐 書, 卷 222 下, 列 傳 147 下, 南 蠻 下, 眞 臘. 83) 고병익, 혜초의 인도 왕로에 대한 고찰, 불교와 諸 科 學 : 개교80주년기념논총,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1987, 876면. 84) 慧 琳, 앞의 책, 345~346면. 85) 고병익, 앞의 논문, 874면. 86) 고병익, 앞의 논문, 882~885면; 정수일, 앞의 책, 50면. 87) Oliver William Wolters, 앞의 책, p. 207. 88) Daniel George E. Hall, 앞의 책, p. 48; 이용범, 해제, 義 淨, 大 唐 西 域 求 法 高 僧 傳, 서울: 동국대학교부 설 역경원, 1980, 191면. 89) Oliver William Wolters, 앞의 책, p. 253. 90) 고병익, 앞의 논문, 879~880면. - 16 -

6-7세기 한국과 동남아시아 간 접촉의 가능성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우리나라의 고대 대외관계 연구가 종래 중국, 일본, 류큐 등 동북아시아와의 관계에 집중되어 온 현실에서 한국과 동남아시아 지역 간 해상 교류의 가능성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보였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 연구들에서 제기된 주장은 이 글에서 지적된 것처럼 대부분 근거가 희박하고 비약이 심하다. 예컨대 6세기에 백제가 부남 산 물품과 노예 그리 고 인도 산 양탄자를 획득한 것, 백제의 승려 겸익이 배를 타고 인도에 간 것은 백제가 부 남 및 인도와 직접적인 교역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주장되고 있지만, 그것은 당 시 백제와 중국 양 나라 간 교역과 양 나라와 동남아시아 및 인도 간 관계를 고려하여 중국 을 경유하여 혹은 중국을 매개체로 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서기 의 기록을 바탕으로 주장되는 백제와 동남아시아의 곤륜 간 7세기 접촉은 중국이 아니라 일본을 매개체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백제와 곤륜 간 접촉이 상업적 배경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했지만, 그것 역시 확실한 전거가 아니라 추측에 바탕을 둔 것 임을 다시 한 번 밝혀둔다. 이 글에서 살펴본 삼국-신라 시대 한국과 동남아시아 간 교류에서 그 흔적이 가장 분명 한 것은 7-8세기 인도로 갔거나 가려던 불교 승려들의 동남아시아 여행일 것이다. 이들은 한반도에서 중국을 거쳐 바로 동남아시아 및 인도로 간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장기간 체류 하다가 중국 승려들이 당시 인도로 갈 때 취한 뱃길을 따라 동남아시아 혹은 인도로 갔다. 이 점에서 그들의 동남아시아 및 인도 여행은 한국과 동남아시아 간 해상 교류라기보다는 중국과 동남아시아 및 인도 간 교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그들을 다룬 것은 그들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중시했 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의정이 대당서역구법고승전 에서 언급한 익명의 신라 스님 두 사람과 고 구려 출신 현유 스님 등이 동남아시아에서 어떤 여정을 밟았는지에 관해 아무런 기록이 남 아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특히 혜초가 동남아시아에서 어떤 나라들을 방문했는지에 관한 기록이 현존하는 왕오천축국전 에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동남아시아를 거쳐 간 한국 스 님들의 여행기가 제대로 전해 내려와 있다면, 우리는 7-8세기 한국인들의 눈에 동남아시아 의 사회와 문화가 어떻게 비쳤는지 혹은 그들이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어떻게 인식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상상과 추리를 펼칠 수 있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강봉룡, 한국사의 미아 해상왕 장보고의 진실, 서울: 한얼미디어, 2004. 강성보, 아유타국, 경향신문 2004.08.19. 고병익, 혜초의 길을 따라, 서울: 동아일보사, 1985. 고병익, 혜초의 인도 왕로에 대한 고찰, 불교와 諸 科 學 : 개교80주년기념논총,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1987. 권덕영 외, 대외문물교류연구, 서울: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2003. 김병근, 수중고고학에 의한 동아시아 무역관계 연구, 서울: 국학자료원, 2004. 김병모, 한국 거석문화 원류에 관한 연구, 한국민족학회 편, 문화론 하나, 서울: 문덕 -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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