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초록 坦 齋 筆 衡 과 老 學 庵 筆 記 에서는 여요 성립의 계기로 정요백자의 有 芒 을 꼽 았다. 有 芒 의 芒 의 의미에 대해서는 그것이 芒 口 를 가리킨다는 견해와 光 芒 을 가리 킨다는 견해가 있는데, 두 문헌의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본 결과 전자가 타당하다고



Similar documents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第 6 條 ( 壹 株 의 金 額 )..

<C3CAC1A DC1DFB1B92E687770>

<C0BDBEC7B0FA2028BEC8B8EDB1E2292E687770>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 石 村 洞 百 濟 初 期 積 石 塚 이도학, (서울의 백제고분) 석촌동 고분, 송파문화원, 서울 特 別 市, 石 村 洞 古 墳 群 發 掘 調 査 報 告, 고창지석묘군 高 敞 支 石 墓 群 문화재관리국,

Readings at Monitoring Post out of 20 Km Zone of Tokyo Electric Power Co., Inc. Fukushima Dai-ichi NPP(18:00 July 29, 2011)(Chinese/Korean)

<B0C5C1A620BFC1C6F7BCBA20B9DFB1BCC1B6BBE720BEE0BAB8B0EDBCAD2E687770>

놀이. 스포츠의 관점에서 본 화랑과 기사의 신체활동

<4D F736F F D D B27BA6E6A6D2BBCDA8EEABD72DBEC7BEA7A558AAA9AAC02E646F63>

赤 城 山 トレイルランニンング レース 大 会 記 録 第 10 回 赤 城 山 選 手 権 保 持 者 男 子 須 賀 暁 記 録 2:35:14 女 子 桑 原 絵 理 記 録 3:22:28 M1 ミドル 男 子 18~44 歳, 距 離 32km 総 登 高 1510m ( 注 :DNF:

<3630C1FD28BCF6C1A4292E687770>

jc0inb001a.HWP

대해서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交 通 放 送 은 96 年 상반기도 한 달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交 通 專 門 放 送 으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자 모든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委 員 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 더욱더 사랑 그러면

한류동향보고서 26호.indd

다문화 가정 중학생의 문식성 신장 내용

한류동향보고서 16호.indd

16 經 學 研 究 集 刊 特 刊 一 墓 誌 銘 等 創 作 於 高 麗 時 代 與 朝 鮮 朝 時 代, 此 是 實 用 之 文 而 有 藝 術 上 之 美. 相 當 分 量 之 碑 誌 類 在 於 個 人 文 集. 夢 遊 錄 異 於 所 謂 << 九 雲 夢 >> 等 夢 字 類 小 說.

건강증진 시범보고서 운영을 위한 기술지원 연구


hwp

토픽 31호( ).hwp

중국기본고적 데이타베이스 기능수첩

<B0EDBCBA20C0B2B4EB20B3F3B0F8B4DCC1F620B9AEC8ADC0E720C1F6C7A5C1B6BBE720BAB8B0EDBCAD28C3DFB0A1BCF6C1A4BABB292E687770>

표1 고려불화의 本 地 : 직조방식 場 160 本 地 3 平 織 A 奈 良 國 博 明 代 1 a 善 導 寺 14 變 化 平 織 B b 鏡 神 社 1310 本 地 畵 幅 奉 安 4 A B 1 2 A 5 Ⅱ. 고려불화의 本 地 : 絹 織 物 의 조직 160 zoom B A

40 / 延 世 醫 史 學 제11권 제1호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던 신창희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 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의 생애에 관한 개략적인 소개가 있었지만, 1) 여전히 많은 부분이 확인되지 않은 실정이다. 본고 또한 여전히 짧고 소략한 내용

<C0A7B7C9B0F82E687770>

356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5권 釜 山 口 設 海 底 電 線 條 欵 / 海 底 電 線 設 置 ニ 關 スル 日 韓 條 約 漢 日 在 朝 鮮 國 日 本 人 民 通 商 章 程 / 朝 鮮 國 ニ 於 テ 日 本 人 民 貿 易 ノ


Microsoft Word - km doc

國 史 館 論 叢 第 93 輯 法 의 실시, 良 役 變 通 의 논의 등 사회 경제적 변화가 추진되는 양상도 그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2) 그렇다면 조선왕조의 체제구축과 성리학의 이기심성론은 어 떠한 관계가 있는 것이며, 그것을 둘러싼 논쟁

untitled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3429BFC0C1F8BCAE2E687770>

그렇지만 여기서 朝 鮮 思 想 通 信 이 식민본국과 피식민지 사이에 놓여 있는 재조선일본인의 어떤 존재론적 위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식민본국과 피식민지의 Contact Zone 에 위치한 재조선일본인들은 조선이라는 장소를 새로운 아이덴티티의 기

역대국회의원_PDF변환용.hwp

What is Critical & Creative Thinking? (Definitions and Elements) CREATIVE Thinkng is the thinking we do when we generate ideas Pose questions Imagine

국사관논총103집(전체화일)


152*220

<C1A4C3A530302D31302DBFCFBCBABABB2E687770>

<5B DB4EBC7D0BFE4B6F D B1E2B1B82E687770>


<3035B1E8BFECC7FC2E687770>

金 喜 甲 委 員 ; 金 喜 甲 委 員 입니다. 本 委 員 은 地 下 鐵 淸 掃 用 役 繼 續 締 結 要 望 에 대한 請 願 을 하 고자 합니다. 請 願 의 基 本 要 旨 는 1974 年, 즉 21年 前 부터 地 下 鐵 公 社 와 隨 意 契 約 으로 淸 掃 用 役 을


14 이용복 간단히 알아본다. 이어 고조선 강역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적과 발굴된 당시의 청동 기 유물을 통하여 천문학적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특히 청동기 유물에 나타난 문양을 통하여 천문학적 요소나 흔적을 알아보고자 한다. II. 고조선의 역사 고려( 高 麗 ) 시


I. 경기부양을 위한 지방채 발행 년 2월 국무원에서 발표한 2009년 지방정부 채권 발행에 관한 보고 에 따라 지방채 발행이 초읽기에 들어감 - 경기부양책의 일환으로 시행될 2009년 지방채 발행 규모는 2,000억 위안에 달할 전망이며, 지방채로 조달된

제141호 2005년 4월 1일(금) 學 術 院 소식 3월 임원회 개최 사위원회는 학술원 회원과 교수 등 관련 3월 임원회가 3월 4일(금) 오후 2시 학술 분야 전문가로 구성하여 4월 11일(월) 오 원 중회의실에서 임원 15명 전원이 참석한 후 2시에 제1차 심사위


<BFACB1B82D30352DBFC0C7F6BCF62DC8B8B3B2C0DA20B1E2C0E720A1AEB0A5BCAEA1AFB0FA20A1AEBFE4BCF6A1AFB8A62D31C2F7BCF6C1A42E687770>

<C1F6C7A5C1B6BBE7BAB8B0EDBCAD3134C1FD2E687770>

<3120B1E8B1D9BFEC2D31C2F7C6EDC1FD DB1B3C1A4BFCFB7E E292E687770>

<B3EDB9AEC0DBBCBAB9FD2E687770>

sme_beta[1](류상윤).hwp

빈면

98 농업사연구 제 6권 1호, 한국농업사학회, 주요어 : 농업기술, 농서집요, 농상집요, 수도, 휴한법, 연작법 1. 머리말 한국사에서 14세기는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 국가 지배체제가 크게 격변한 시기였다. 고려말 고려 사회 내부와 외부에서 발생한 여

<302DC7D1B1B9B5B6B8B3BFEEB5BFBBE733392E687770>

항일 봉기와 섬멸작전의 사실탐구

모두 언어와 상관없이 시국적 내용이다. 발표매체별 집필 수(K=조선어 N=일본어) 1939년 기사 등 K 文 章 3 三 千 里 2(좌담2포함) 女 性 1 作 品 1 東 亜 日 報 1 N 国 民 新 報 2 소설 K 文 章 년 기사 등 K 三 千 里 10(좌담4

<652DB7AFB4D720BFECBCF6B1E2BEF720BAB8B5B5C0DAB7E E687770>

한국 시장경제체제의 특질에 관한 비교제도분석

DBPIA-NURIMEDIA

AMR-0216-A改字型.indd

- 2 -

7 청보 ( 對 삼성 )~4. 5( 對 빙그레 ) NC ( 對 롯데 )~4. 10( 對 LG) 팀별 연패 기록 삼 미 18 연패 ( ~4. 29) 쌍방울 17 연패 ( ~10. 5) 롯 데 16 연패 ( 0

<312D3034C1A4BFEBBCAD2E687770>

Ⅰ. 중국 고급 냉장고 1) 시장의 성장 년 중국 가전하향( 家 電 下 鄕 ) 정책에 힘입어 보급형 냉장고 매출이 크게 증가했고, 동시에 고급 냉장고 시장도 빠르게 성장 - 시장 선점을 위해 (, )은 고급 냉장고 생산기지 건설을 추진 중이고, (, )는 2

<30342DB9E6BAB4BCB134392D312E687770>

박광현발표.hwp

untitled

특수의약품 개발 및 수요전략- 現況및 問題點中心으로 -

Microsoft Word - BRHCCMLSDNIQ.doc

DBPIA-NURIMEDIA

70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의 수준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비 롯한 국학연구 기관들과 국립과천과학관, 한국천문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 는 조선시대 역서들의 숫자들을 모두 합하더라도 불과 수백 책의 수준을 넘

수업내용 1 2 도자기란 무엇인가 도자기의 시대적 변천 2

見 積 書

untitled

Microsoft Word - 論文上傳最終版本(有書名頁但無頁碼)_ docx

需給調整懇談会の投資調整―石油化学工業を中心に

目 次 1. 國 家 體 制 2. 確 認 事 項 3. 檀 君 ( 高 離 國 )의 고대사와 중세사 4. 檀 君 (코리아)와 씨족사 5. 檀 君 (코리아)와 李 氏 (대한)의 이념과 헌법 차이점 6. 국제연합결의문을 통해 본 國 家 호칭과 心 體 制 명칭 7. 선거와 국가호

제국주의로서의 근대일본자유주의

醫藥分業 實施에 따른 院外 電子處方傳達시스템 構築 方案

<BBFDB8EDBFACB1B83232C1FD2D E687770>

지 않은 상태이고, 그러한 시도도 찾아 보기 힘 든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 론 最 近 에 들어 國 內 國 녔3 學 界 나 i1îi 會 經 濟 史 學 界 에서 당시의 政 治 社 會 經 濟 文 化 의 諸 現 象 에 對 한 昭 究 가 활펠허 이루어지고

국악원 논문집 다. 거운고짧-의 統 對 的 年 代 )1댐의 分 類 는 樂 5앞에 年 代 가 明 記 되지 않은 것이 있어서 困 維 하지만, 그 樂 렘에 실린 짧 l111 의 內 容 에 依 히.0,1 相 對 的 年 代 JI\N의 分 쨌는 퍼 能 할 것드로 생 각한다. 年

<C3E2B7C25F C8A320B0F8BAB85F E687770>

#39-0 머리말외.indd

Journal of Gεography (Jirihak Nonchong) Monography Series 45 Apr.2002 Geographical Study on the Boundary and the Administrative District of the Capita

<30332DB1E8C0B1C1A435352D312831BFF935C0CFBCF6C1A4292E687770>

JCAK 09

cls49-04(이기훈).hwp

<4D F736F F D20B1E2C1B6B0ADBFACB9AE28B1B9B9AE29>

<B1B9C5E4C1A4C3A FC1A C8A35FC0CCC7F6C1D65FC3D6C1BE2E687770>

청주 지동동 산28-1번지 외 4필지 태양광발전소건립부지 내 문 화 재 지 표 조 사 보 고 서 2015

주 요 행 사 일 시 임시총회 및 부회 (금), 14:00 학술세미나 5. 11(금), 10:00 學 術 院 소식 임원회 개최 11월 임원회가 11월 3일(금) 오후2시 학술 원 중회의실에서 임원 15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번 임원회에서는

[맹자] 맹자( 孟 子 )가 말하였다. 본심( 本 心 )을 기르는 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맹자] 우산( 牛 山 )의 나무들이 아름다웠었는데, 큰 나라의 교외에 있어서 도끼로 남벌하였다. 그러니 그 산이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이것은 밤낮

DBPIA-NURIMEDIA

8.김민희.hwp

Transcription:

제23호(2015.7) 115~149쪽 북송 여요의 성립과 그 의의 이희관* 목차 Ⅰ. 문제의 소재( 所 在 ) Ⅱ. 여요 성립의 계기 定 州 白 磁 器 有 芒, 不 堪 用 의 재검토 Ⅲ. 여요의 성립시기 Ⅳ. 여요의 성립과 어용자기 조달방식의 변화 Ⅴ. 여요의 성립과 휘종 Ⅵ. 나머지말 여요의 전개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들 * 前 호림박물관 이 논문은 2014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4S1A5B5A07040390) 115

국문초록 坦 齋 筆 衡 과 老 學 庵 筆 記 에서는 여요 성립의 계기로 정요백자의 有 芒 을 꼽 았다. 有 芒 의 芒 의 의미에 대해서는 그것이 芒 口 를 가리킨다는 견해와 光 芒 을 가리 킨다는 견해가 있는데, 두 문헌의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본 결과 전자가 타당하다고 판 단된다. 그리고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芒 口 가 여요 성립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역사 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그다지 타당성이 높지 않다고 생각된다. 즉 여요 성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정요백자의 芒 口 였다. 여요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지만,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자료에 의거하여 판단하면, 徽 宗 大 觀 年 間 (1107~1110)에서 政 和 年 間 의 전반기 (1111~1114)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여요의 성립으로 어용자기의 주류가 정요백 자에서 여요자기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그 주요 조달방식도 購 買 의 방식에서 注 文 制 의 일종인 製 樣 須 索 의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여요의 성립은 휘종대의 禮 制 改 革 의 큰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여요가 성립되기 전 에는 황실이나 신료 및 민간인들이 동일한 요장의 자기를 共 有 하였지만, 여요의 성립 을 계기로 그러한 시대는 막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즉 황실과 신료 민간인 사이에 瓷 質 器 皿 의 사용에 있어서 명확한 境 界 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여요 의 성립은 적어도 어용자기의 전개과정에서 볼 때 空 前 의 개혁이었다. 이 개혁을 주도 한 사람은 휘종이었으며, 그는 강력한 정치권력을 바탕으로 그러한 개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다. 주제어 : 汝 窯, 성립, 有 芒, 製 樣 須 索, 徽 宗 116 제23호

Ⅰ. 문제의 소재( 所 在 ) 북송후기에 어용자기의 생산 및 공급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여요의 성립과 북송관요의 설립이 그것이다. 북송관요가 설립되기 이전 에 어용자기는 민간요장에서 생산한 자기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달하여 충당하였다. 그러나 북송관요의 설립을 기점으로 이러한 체제는 크게 변화하였다. 어용자기만을 전문 적으로 생산한 관요가 어용자기 공급의 중심 요장으로 자리잡았으며, 이러한 체제는 기 본적으로 청대에까지 이어졌다. 북송관요의 설립을 시작으로 관요시대의 막이 오르게 된 것이다. 북송관요보다 약간 이른 시기에 성립된 여요는 비록 民 窯 였지만, 기본적으로 供 御 를 목적으로 자기를 생산한 요장이었다( 李 喜 寬 2012: 260-270). 그리고 이러한 여요의 토대 위에서 북송관요가 설립되었다. 따라서 여요의 성립은 곧 북송관요의 설립으로 대표되는 북송후기 어용자기 생산 공급 체제의 변화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요의 성 립에 주목해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요의 성립과 관련하여 가장 구체적인 내용을 전하는 기록은 남송 중엽경에 葉 寘 가 찬 한 坦 齋 筆 衡 일 것이다. 이 문헌에는 여요의 성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A) 宋 葉 寘 坦 齋 筆 衡 云 本 朝 以 定 州 白 磁 器 有 芒, 不 堪 用, 遂 命 汝 州 造 靑 窯 器, 故 河 北 唐 鄧 耀 州 悉 有 之, 汝 窯 爲 魁.([ 元 ] 陶 宗 儀 撰 1959: 362-363) 위 기록은 정요백자가 有 芒 하여 쓰기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汝 州 로 하여금 靑 窯 器, 즉 여요자기를 소조하도록 명하였다고 하여, 여요가 정요백자의 有 芒 으로 말미암아 성 립하게 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1) 즉, 이 기록에 따르면, 정요백자의 有 芒 은 여요 성립의 가장 중요한 계기 혹은 배경이 되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탄재필형 보다 약간 이른 시 기에 찬술된 老 學 庵 筆 記 에도 실려 있다. (B) 古 都 時, 定 器 不 入 禁 中, 惟 用 汝 器, 以 定 器 有 芒 也.([ 宋 ] 陸 游 ( 李 劍 雄 劉 德 權 點 校 ) 1979: 23) 1) 사료(A)에는 당시 정요백자가 어느 용도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인지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연구 자들은 그것이 어용자기로 사용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의미로 파악하고 있다. 이 점은 老 學 庵 筆 記 에 사료(A)와 사실상 동일한 내용 을 전하면서 古 都 時, 定 器 不 入 禁 中, 惟 用 汝 器, 以 定 器 有 芒 也 [사료(B) 참조]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된 다. 117

위 기록은 古 都 時, 즉 북송시기에 궁정에서 정요자기를 들이지 않고 여요자기를 사용 하게 된 이유를 설명한 대목인데, 여기에서도 그것을 정요자기의 有 芒 때문이라고 명 시해 놓았다. 이 기록은 직접적으로 여요의 성립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내용상 앞서 살펴본 사료(A)와 동일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두 사료는 동 일한 계통의 자료나 정보를 토대로 하여 서술된 것이 아닐까 한다( 李 喜 寬 2010: 68-71). 사료(A)와 (B)는 여요의 성립 문제를 검토하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의 핵심에 해당하는 정요백자의 有 芒 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 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일치된 견해가 없다. 심지어 일부 연구자들은 두 기록의 내용 자체 가 역사적 사실과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과연 有 芒 은 무엇을 의 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여요 성립의 계기를 정요백자의 有 芒 에서 찾고 있는 두 기록은, 일부 연구자들의 주장과 같이, 사료적 가치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여요의 성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의문들부터 해명할 필요가 있다. Ⅱ. 여요 성립의 계기 定 州 白 磁 器 有 芒, 不 堪 用 의 재검토 사료(A)에 따르면, 定 州 白 磁 器 有 芒, 不 堪 用 과 遂 命 汝 州 造 靑 窯 器, 즉 여요의 성립은 인과관계를 이루고 있다. 定 州 白 磁 器 有 芒, 不 堪 用 은 여요 성립의 계기가 되는 셈인데, 이 대목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내용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당시 정요백자가 有 芒 하였다 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때문에 정요백자가 어용자기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 으로 문제시되었다는 점이다. 이제까지 연구자들은 주로 전자에 주목하였지만, 여요 성 립의 계기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사실을 모두 염두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림 1> 芒 口 된 定 窯 白 瓷 龍 紋 盤, 國 立 故 宮 博 物 院 정요백자의 有 芒 이 내포하고 있는 구체적인 내용과 의 미를 파악하는 데 관건이 되는 사항은 有 芒 의 芒 이 무엇 을 가리키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 하나는 芒 이 芒 口, 즉 기물의 구연부의 유 약을 닦아내어 거칠어진 부분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그림 1). 2) 이러한 芒 口 가 주로 覆 燒 法 과 관련이 있다는 점은 잘 아 는 사실이다. 또 다른 하나는 芒 이 기본적으로 光 芒 을 가리 2)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이 견해를 따르고 있는데, 이 견해가 구체적으로 누가 언제 제창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118 제23호

킨다는 견해이다. 3) 光 芒 은 사물이 반짝거리는 현상을 의미하므로, 芒 을 光 芒 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정요백자가 有 芒 하다는 것은 그것의 광택이 강하다는 뜻이 된다. 많은 연 구자들은 첫 번째 견해를 지지하지만, 두 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연구자도 적지 않다. 과 연 어느 견해가 타당한 것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 다시 사료(A)와 (B)에 주목해보기로 하자. 이 두 기록이 전하는 내용의 핵심은 어용자기가 정요백자에서 여요자기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른바 棄 定 用 汝 이다. 그리고 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정요백자의 有 芒 이었다. 이것은, 역으로 말하 면, 정요백자가 어용자기로 사용되던 시기에는 有 芒 이 없었거나, 설사 있었다고 하더라 도 크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4) 그러던 것이 북송후기의 어느 때 에 이르러 정요백자에 有 芒 현상이 나타나거나 심화되고, 그것이 문제가 되어 정요백자 가 어용자기에서 밀려나고 여요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요백자에서 망구 현상이 관찰되기 시작하는 것은 대략 오대시기부터이다( 孫 新 民 1994: 324-326). 하지만 북송후기에 접어들기 이전 시기의 정요백자 가운데 망구를 한 기물은 매우 드 물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에는 소성하기 전에 구연 부의 유약을 닦아낸 것도 있지만, 소성한 후에 금속 테를 씌우기 위하여 釉 를 갈아낸 경우도 있다( 穆 靑 2002: 160-161)(그림 2). 후자의 경우는 覆 燒 와는 전 혀 관계가 없다. 전자의 경우라 할지라도 모두 복소 법으로 소성한 것은 아니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元 德 李 后 陵 (1000)에서 출토된 정요백자이다. <그림 2> 口 沿 의 釉 를 갈아낸 定 窯 白 瓷 花 口 碗, 國 立 故 宮 博 物 院 3) 이 견해 역시 누가 언제 제창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淸 乾 隆 帝 가 문제의 芒 을 光 芒 의 의미로 이해한 것이 그의 御 製 詩 에서 확인된다. 예컨대, 定 州 粉 色 厭 光 芒, 特 建 官 窯 珍 異 常, 此 日 小 甁 同 致 貴, 中 庸 卄 九 注 來 詳 ( 郭 葆 昌 編 2003: 1196)을 참조 하라. 4) 혹 정요백자가 어용자기로 사용되던 시기에도 有 芒 현상이 있었지만,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다가 북송후기의 어느 때에 이르러 갑 자기 그것이 문제화되었을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芒 이 光 芒 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일부 연구자들은 사실상 이러 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예컨대, 陳 文 平 (1990: 65-66)ㆍ 方 石 平 (2001: 5) 등은 여요가 휘종대에 성립되었다는 전 제 위에서 휘종이 玉 과 같은 색조와 질감을 선호한 반면 정요백자의 색조나 질감을 싫어하는 심미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때에 이르러 정요백자의 有 芒 이 문제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휘종이 그러한 심미관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의 주장은 결과론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한편, 鄭 嘉 勵 (2005: 257-259)는 元 豊 元 年 (1078) 에 여요가 성립되었으며, 북송조정이 不 堪 用 하다고 판단한 것은 정요백자 전체가 아니라 그 가운데 제사용백자에 한정되었다는 생각의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토대 위에서 그는 정요백자의 색조와 질감 자체가 제사용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 문에 도자제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元 豊 元 年 경에 이르러 정요백자의 有 芒 이 문제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鄭 嘉 勵 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정요백자의 有 芒 이 문제가 되어 그 결과로 성립된 여요에서 제작한 기물들의 주류는 의당 祭 器 여야 할 것이다. 그러 나 청량사여요지에서 출토된 기물들이나 전세여요자기 가운데 제기형 기물은 극히 희소하다. 그러므로 그의 견해에도 동의하기 어 렵다. 요컨대, 정요자기의 有 芒 이 한동안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다가 북송후기의 어느 시점에 이르러 갑자기 그것이 문제화되었 을 실제적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119

<그림 3> 定 窯 白 瓷 托 盞, 定 州 市 淨 志 寺 塔 (977) 出 土, 定 州 市 博 物 館 元 德 李 后 陵 에서는 모두 37점의 정요백자가 출토 되었는데, 碗 이 26점이고, 盤 이 11점이다. 모두 품 질이 매우 높으며, 적지 않은 기물의 저부에 官 銘 이 있다( 河 南 省 文 物 考 古 硏 究 所 編 1997: 324-326). 37점의 정요백자 가운데 6점만이 구연부에 시유되 었고, 그 나머지 31점은 모두 구연부가 露 胎 되어 있 다( 孫 新 民 1994: 48). 즉 그 대부분이 망구인 셈이 다. 어느 연구자는 이들 31점의 망구 현상이 복소법과 관련이 있다고 파악하였다( 孫 新 民 1994: 48). 하지만 이 능에서 출토된 정요백자의 저부를 잘 살펴보면, 37점 가운데 구연부 에 시유된 것뿐만 아니라 망구된 것까지 모두 굽다리의 접지면이 노태되어 있다. 만약 망 구된 기물들을 복소하였다면 굳이 굽다리 접지면의 유약을 닦아낼 까닭이 없다. 이 점에 서 볼 때, 元 德 李 后 陵 에서 출토된 망구된 정요백자들은 모두 仰 燒 法 으로 소성되었다고 판단된다. 5) 이와 같이 망구되었지만 앙소된 사례는 定 州 市 淨 志 寺 塔 (977)에서 출토된 정 요백자탁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北 京 藝 術 博 物 館 編 2012: 94)(그림 3). 이것도 품질이 매우 높다. 앙소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연부의 유약을 닦아낸 것이 소성한 후에 금속테를 씌울 때 마찰력이나 접착력을 높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점은 이미 蔡 玟 芬 (1977: 137)이 지적한 바가 있다. 元 德 李 后 陵 과 淨 志 寺 塔 에서 출토된 망구된 정요백자가 하나같이 품질이 높 고, 당시 금속테를 씌운 기물들이 그러한 고급 기물들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러한 견 해는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 시기에 망구가 하나의 결함으 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은 배제하여도 좋을 것 같다. 요컨대, 북송후기 이전에는 정요백자 가운데 망구된 기물이 매우 드물었을 뿐만 아니라, 망구가 있는 경우에도 그것이 어용자 기로서의 결함으로 문제화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된다. 정요백자의 망구가 문 제가 되었다면, 그것은 정요백자에서 망구가 유행하기 시작한 북송후기에 접어든 이후의 일일 공산이 매우 크다. 한편, 자기의 광택은 빛이 기물의 표면에 반사하여 생기는 것으로, 주로 釉 의 투명도 굴절률 구조 등의 요인들이 다양하게 조합되어 각기 다른 종류의 광택을 내게 된다. 정 5) 한편, 劉 淼 는 元 德 李 后 陵 에서 출토된 망구된 정요백자가 合 口 式 겹쳐쌓기의 방식으로 소성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對 口 疊 燒 ) ( 劉 淼 2006: 122). 그렇지만 이제까지의 발굴이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요에서 合 口 式 으로 소성한 것은 盒 과 같은 특수한 기종 에 한정되었으며, 合 口 式 겹쳐쌓기의 방식으로 소성한 실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북송초기의 경우, 元 德 李 后 陵 에서 출토된 것과 같 은 고급정요백자는 갑발 안에 한 개의 기물을 놓고 소성하였다( 匣 鉢 單 件 裝 燒 ). 정요의 장소공예에 대해서는 李 鑫 2012: 266-268쪽을 참조하라. 120 제23호

요백자의 경우, 광택의 종류나 강도 등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분석한 자료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북송후기에 접어들기 이전과 이후의 광택이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필자가 양 시기의 정요백자 표본들을 관찰한 바에 따르면, 북 송후기에 접어든 이후에 정요백자의 광택의 종류가 달라지거나 그 강도가 현저하게 높아 진 현상은 발견되지 않는다. 북송후기의 어느 때에 이르러 정요백자에 有 芒 현상이 나타나거나 심화되고, 그것이 문제가 되어 정요백자가 어용자기의 주류에서 밀려나고 여요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定 州 白 磁 器 有 芒, 不 堪 用 에 보이는 芒 이 光 芒 을 가 리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된다. 정요백자의 光 芒 현상은 북송후기에 접어든 이후에 나타났다거나 보다 심화되었다거나 하는 모습 자체가 관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반 해서 정요백자의 망구 현상은 북송후기에 접어들기 이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다가 그 이 후에 그러한 현상이 보편화되면서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문제의 芒 은, 많은 연구자들이 이해해온 바와 같이, 망구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듯싶다. 요컨대, 정요백자의 망구가 그것이 어용자기에서 밀려나는 데 주요한 빌미를 제 공하였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연구자들은 이러한 이해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은 북송후기에 정 요백자가 어용자기로서 不 堪 用 하였다는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 장한다. 그리고 정요백자의 망구 현상도 금속테를 씌우거나 아예 앙소법으로 소성함으로 써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棄 定 用 汝 의 계기가 되었다고 보기 어렵 다고 한다( 尾 崎 洵 盛 1955: 29; 陳 文 平 1990: 65-66; 蔡 玟 芬 1997: 67-75; 石 方 平 2001: 5; 呂 成 龍 2001: 41; 李 建 毛 2001: 59-62; 鄭 嘉 勵 2005: 257-258; 李 仲 謨 2005: 395-397; 胡 志 剛 2005: 353; 秦 大 樹 외 2013: 43). 이러한 주장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사실 여요가 성립된 이후에도 정요백자가 어용자기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宋 會 要 輯 稿 에 보이는 다음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C) 宣 和 七 年 六 月 二 十 六 日 詔, 近 命 有 司 考 不 急 之 務 無 名 之 費, 特 加 裁 定. 應 殿 中 省 六 尙 局 諸 路 貢 物, 可 止 依 今 來 裁 定 施 行. 尙 食 局 中 山 府 瓷 中 樣 矮 足 裏 撥 盤 龍 湯 盞 一 十 隻 幷 罷 貢.([ 淸 ] 徐 松 輯 1957: 2318-2319) 이 기록은 휘종이 崇 寧 2년(1102)에 설치한 尙 食 尙 藥 尙 醞 尙 衣 尙 舍 尙 輦 등 六 尙 局 에 대한 공물, 즉 이른바 六 尙 局 貢 과 관련된 내용이다([ 淸 ] 徐 松 輯 1957: 2812). 이에 따르면, 휘종은 宣 和 7년(1125)에 詔 를 내려 六 尙 局 貢 가운데 일부를 폐지시키거 121

나 그 액수를 감하였다. 이때 폐지된 공물 가운데 中 山 府 에서 尙 食 局 에 공납하던 瓷 中 樣 矮 足 裏 撥 盤 龍 湯 盞 10 隻 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산부는 본래 定 州 로서, 정화 3년(1113)에 부로 승격되었다( [ 元 ] 脫 脫 等 撰 1977: 2127). 문제의 瓷 中 樣 矮 足 裏 撥 盤 龍 湯 盞 10 隻 은 의 당 정요백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조치가 취해진 宣 和 7년(1125)은 이미 여요가 성립된 이후였다. 정요백자잔 10척이 당시 中 山 府 에서 공납한 정요백자의 전부였는지 아니면 그 일부였는지는 판단하기 힘들지만, 아무튼 이 조치는 여요가 성립된 이후에도 정요백자가 어용자기로 쓰였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그리고 망구된 정요백자가 이 시기에 어용자기로 쓰였다는 사실도 실물자료로 확인된 다. 항주에서 출토된 喬 位 銘 定 窯 白 瓷 碟 이 그 하나의 예다( 胡 雲 法 金 志 偉 2005: 293) (그림 4). 이 碟 은 작고 평저이며 내면에는 蛟 龍 紋 이 刻 花 되어 있다. 여요자기나 고려청 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기종이다( 河 南 省 文 物 考 古 硏 究 所 2008: 99-101; 조선관요박물 관 편 2005: 도183). 喬 位 銘 은 이 기물을 소성하기 전에 새겨 넣은 것이다. 구연에는 금 속테가 씌워져 있기 때문에( 銅 釦 ) 구연의 상태를 확인하기가 힘들지만, 저부에 支 燒 나 6) 墊 燒 의 7)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복소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 로 당연히 망구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定 窯 白 瓷 碟 은 대체로 북송말기에서 금대에 이르는 시기에 유행하였는데( 劉 淼 2006: 49-53), 문제의 喬 位 銘 定 窯 白 瓷 碟 은 문양이나 제작공예 등의 측면에서 북송말기의 풍격을 지니고 있다( 胡 雲 法 金 志 偉 2005: 293). 喬 位 는 喬 氏 성을 가진 妃 의 處 所 를 가리키는데, 이 시기에 교씨 성을 가진 비는 휘종의 喬 貴 妃 밖에 없다([ 元 ] 脫 脫 等 撰 1977: 8643-8644). 그러므로 이 定 窯 碟 은 휘종대에 교귀비 의 처소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북송말기에 교귀비의 처소에서 사용하던 것 <그림 4> 喬 位 銘 定 窯 白 瓷 碟, 胡 雲 法 所 藏 6) 支 燒 는 굽의 안쪽 면에 墊 圈 이나 支 釘 을 받치고 소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는 굽다리 바닥에 받침의 흔적이 남지 않는다. 12 세기 이후의 고려청자에 흔히 보이는 규석받침도 여기에 해당한다. 7) 墊 燒 는 굽다리 바닥의 유약을 닦아내고 그곳에 내화토를 받치고 소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소성한 후에 굽다리 바닥에 내화 토 자국이 남는다. 122 제23호

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남송시기에까지 전해진 셈이다( 胡 雲 法 金 志 偉 2005: 293). 이상의 문헌기록과 고고학 자료를 근거로 보면, 북송후기에 정요백자가 어용자기로서 不 堪 用 하였다는 탄재필형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 는 면이 있다. 이 점은 定 器 不 入 禁 中, 惟 用 汝 器 라고 한 노학암필기 의 기록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탄재필형 과 노학암필기 의 기록을 과도하게 문자 그대로 해석하 여 그 사료적 신빙성 자체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두 문헌에 보이는 해 당 기록을 말 그대로 각각 여요의 성립 이후 실제로 궁중에서 전혀 정요백자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여요자기만을 사용하였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믿는다. 궁중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자기가 필요했을 터이고 그것들을 여요에서 모두 소조할 수도 없었을 것이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에 있어서도 궁중에서 앞 서 설명한 정요 이외에도 용천요 건요 경덕진 湖 田 窯 등 다양한 요장에서 생산한 기물 들을 사용했음은 문헌이나 고고학 자료에서 확인된다. 8) 탄재필형 과 노학암필기 의 해 당 기록은 북송후기의 어느 시점에 어용자기의 주류가 정요백자에서 여요자기로 바뀐 현 상을 어느 정도 과장되게 서술한 것일 뿐,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것으로 판단되지는 않는 것이다. 한편, 망구된 정요백자에 금 은 동의 금속테를 씌운 예는 흔히 볼 수 있다(그림 5). 그리고 이 시기 에 정요에서는 복소법 뿐만 아니라 앙소법도 채용 되고 있었기 때문에( 李 鑫 2012: 258-265) 복소법 대 신 앙소법으로 공어용백자를 소성하는 것은 어려 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정요백자의 망구 현상 이 금속테를 씌우거나 아예 앙소법으로 소성함으로 써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는 지적은 일정한 <그림 5> 定 窯 白 瓷 刻 花 蓮 花 紋 洗, 大 阪 市 立 東 洋 陶 磁 美 術 館 설득력을 갖는다. 어느 연구자는 이러한 점 등에 근거하여 定 州 白 磁 器 有 芒, 不 堪 用 은 棄 定 用 汝 를 위한 핑계거리에 지니지 않는다고 보기도 한다( 蔡 玟 芬 1997: 67-75; 胡 志 剛 2005: 353). 말하자면, 定 州 白 磁 器 有 芒, 不 堪 用 이 棄 定 用 汝 의 실제적인 계기가 되었다 고 보기 힘들다고 이해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는 몇 가지 의문이 있다. 8) 龍 泉 窯 의 경우는 處 州 龍 泉 縣 又 出 靑 瓷 器, 謂 之 秘 色, 錢 氏 所 貢, 蓋 取 於 此. 宣 和 中, 禁 庭 製 樣 須 索, 益 加 工 巧 ([ 宋 ] 莊 綽 撰 ( 蕭 魯 陽 點 校 ) 1983: 5)라는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宣 和 年 間 (1119~1125)에 製 樣 須 索 의 방식으로 궁정용자기를 제작ㆍ공급하였다. 建 窯 의 경우도 建 盞 에 새겨진 供 御 와 進 琖 의 명문을 통하여 공어용자기를 생산했음이 확인된다. 顧 文 璧 (1986)의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建 盞 을 공어한 기간은 政 和 2년(1112)~ 乾 道 6년(1170)이다. 1997년에는 景 德 鎭 湖 田 窯 址 의 宋 代 堆 積 層 에서 迪 功 郞 浮 梁 縣 丞 臣 張 昻 措 置 監 造 라는 명문이 있는 공납용 청자완편이 발견되었는데, 肖 發 標 (2006)의 정치한 연 구에 의하면, 이 청자완은 政 和 6년(1116)~ 重 和 元 年 (1119)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123

당시 어느 요장의 기물을 어용자기로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조정이나 궁정이 었다. 그러므로 어용자기의 주류를 바꾸기를 원했다면, 조정이나 궁정이 결정하면 그만 이었을 뿐 굳이 핑계를 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설사 특별한 사정, 예컨대, 棄 定 用 汝 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거나 하여 棄 定 用 汝 의 구실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고 하더라 도, 만약 정요백자의 망구 현상이 실제적으로 棄 定 用 汝 의 구실로서 타당성이 없었다면 그러한 핑계는 효과를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북송의 조정이나 궁정이 그렇게 타당성이 없는 구실을 찾았을 리는 만무하다. 결국, 어떻게 보더라도 정요백자의 망구 현상이 棄 定 用 汝 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고 믿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어용자기의 생산에 있어서 정요의 역할을 이어받은 여요에서 망구를 한 기물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흥미롭다. 碗 이나 盤 과 같은 일반적인 기 물은 물론이거니와, 정요나 용천요 등에서 흔히 발견되는 망구를 한 蓋 碗 의 경우도(그림 6 7) 여요의 경우는 망구를 한 예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河 南 省 文 物 考 古 硏 究 所 2008: 75-76)(그림 8). 심지어 여요의 전통을 이은 고려청자와 남송관요의 蓋 碗 의 경우도 망구 를 한 예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필자는 이러한 현상이 定 州 白 磁 器 有 芒, 不 堪 用 과 일 정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 6> 定 窯 白 瓷 刻 花 蓮 花 紋 蓋 碗 ( 碗 ), 曲 陽 縣 定 窯 窯 址 出 土, 河 北 省 文 物 硏 究 所 <그림 7> 龍 泉 窯 蓮 瓣 紋 蓋 碗 ( 碗 ), 遂 寧 金 魚 村 南 宋 窖 藏 出 土, 四 川 宋 瓷 博 物 館 <그림 8> 汝 窯 蓋 碗 ( 碗 ), 淸 凉 寺 汝 窯 址 出 土, 河 南 省 文 物 考 古 硏 究 所 많은 연구자들은 일찍부터 망구가 기물에 있어서 일종의 결함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망구를 한 기물이 망구를 하지 않은 기물보다 상대적으로 유약이 없는 구연부가 거칠고 아울러 미관상으로도 떨어지게 마련이라는 점에서 볼 때, 망구를 한 기물의 결점에 대한 지적은 기본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러한 결점은 구연에 금 속테를 두르거나 아예 앙소를 함으로서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볼 때, 망구가 棄 定 用 汝 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당시의 조정이나 궁정이 단지 그러한 망구의 결점만으로 정요백자가 어용자기로서 不 堪 用 하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보기에는 석연치가 않다. 망구와 관련된 또 다른 요인이 조정이나 궁정으로 하 여금 그러한 판단을 내리게 하는 데 영향을 미쳤던 것을 아닐까? 이 점을 추적하기 위해 124 제23호

서는 망구의 기능과 그것이 정요백자에 미친 영향 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요의 경우 대략 북송전기까지는 어용백자와 같은 품질이 높 은 기물의 구연에 금속테를 씌우는 데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망구를 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복소법과 전혀 관련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결함으로 인식되지도 않았 다. 오히려 이 시기의 망구는 극히 한정된 고급정요백자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러한 정요백자의 망구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대략 북송중기의 일로 이해된다. 9) 이 시기에 이르러 그 이전 시기의 망구와 전혀 다른 기 능의 망구가 출현한 것이다. 그것은 支 圈 을 사용한 복소법의 출현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그림 9). 기물을 복소하기 위하여 口 沿 의 유약을 닦아내면서 금속테를 씌울 목적의 망구와는 전혀 다른 기능의 망구가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복소법이 유행하면서 망구는 더 이상 고급백자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보다 품질이 떨어지는 일반백자들에까지 망구가 확산되었다. 복소법을 채용하는 한, 정요백자의 망구 현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일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산된 망구 기물들에 모두 금 속테를 씌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시기의 정요백자의 출토 예를 통하여 볼 때, 금속테 를 씌운 경우는 그 일부에 한정되었다. 국가에서는 특정 재질의 금속테를 씌우는 것은 법 으로 제한하기도 하였다([ 元 ] 脫 脫 等 撰 1977: 3575). 금속테를 씌우지 않은 기물에 있어 서 망구는, 말할 나위도 없이, 일종의 결함이었다. 적어도 망구를 하지 않은 기물을 기준 으로 볼 때는 그러하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도 그렇게 인식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 은 남송시기에까지 이어졌다고 판단되는데, 탄재필형 [사료(A)]이나 노학암필기 [사료 (B)]의 기록이 그 근거가 될 것이다. 금속테를 씌우지 않은 채로 사용한 정요백자의 수량 이 늘어날수록 그러한 인식은 심화되고, 아울러 정요백자가 결함을 가진 기물이라는 인 식이 확산되었을 공산이 높다. <그림 9> 碗 形 支 圈, 曲 陽 縣 定 窯 窯 址 出 土, 河 北 省 文 物 硏 究 所 북송의 조정이나 궁정이 망구의 결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 국 棄 定 用 汝 의 조치를 취한 것은 바로 이러한 당시의 정요백자에 대한 인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10) 조정이나 궁정으로서도 당시 사람들이 결함이 있다고 인식하 는 기물을 계속 주된 어용자기로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9) 이 점에 대해서는 본고의 제3절 참조. 10) 한편, 王 建 保 (2012: 364-370)는 망구가 棄 定 用 汝 의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거리 및 교통운수조건의 제약과 자연재해 그리고 전쟁 등이 棄 定 用 汝 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25

관점에서 볼 때, 정요백자에 뒤이어 어용자기의 주류가 된 여요자기에서 망구 현상을 거 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Ⅲ. 여요의 성립시기 탄재필형 에 보이는 여요 및 북송시기의 그 밖의 요장과 관련된 기록은 여요의 성립시 기에 대한 시간적 기준을 제시한다. (D) 宋 葉 寘 坦 齋 筆 衡 云 本 朝 以 定 州 白 磁 器 有 芒, 不 堪 用, 遂 命 汝 州 造 靑 窯 器, 故 河 北 唐 鄧 耀 州 悉 有 之, 汝 窯 爲 魁. 江 南 則 處 州 龍 泉 縣, 窯 質 頗 麤 厚. 政 和 間, 京 師 自 置 窯 燒 造, 名 曰 官 窯.([ 元 ] 陶 宗 儀 撰 1959: 362-363) 즉, 이 기록에 의하면, 여요가 성립한 것은 정요백자의 망구 현상이 나타나고 아울러 북송의 조정이나 궁정에서 그것을 문제 삼은 이후의 일이 분명하다. 또한 그것이 북송의 조정이 京 師 自 置 窯, 즉 북송관요를 설립한 정화연간(1111~1117) 이전이라는 점도 의문 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정요에서 복소법의 채용에 따른 망구 현상이 유행 하기 시작한 시점이 언제인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정요백자 의 많은 기종 가운데 완 반 발 碟 등과 같은 일부 기종에서만 복소가 행하여졌다는 사실이다. 응당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 보아야 할 것도 이들 기종이 될 것이다. 많은 연구자들은 정요에서 복소법으로 기물을 소성하기 시작한 것이 북송중기의 일로 파악하고 있다( 中 國 硅 酸 鹽 學 會 編 1982: 234; 謝 明 良 2008: 164-165; 兪 永 柄 1994: 74). 정 요백자가 출토된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天 津 薊 縣 獨 樂 寺 塔 (1058)이 있다( 天 津 市 歷 史 博 物 館 考 古 隊 等 ( 紀 烈 敏 執 筆 ) 1989). 이 유적에서는 35점의 정요백자가 출토되었는 데, 大 盤 이 2점, 菊 花 瓣 圈 足 小 碟 이 19점, 六 瓣 圈 足 小 碟 이 3점, 圓 口 圈 足 小 碟 이 1점, 六 瓣 平 底 小 碟 이 6점, 圓 口 小 碟 이 2점, 小 罐 이 2점이다. 발굴보고자는 이 기물들의 망구 여부 나 裝 燒 工 藝 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해놓지 않았다. 그런데 이 가운데 六 瓣 平 底 小 碟 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圈 足 의 接 地 面 에 유약이 입혀져 있지 않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 점 으로 미루어 볼 때, 이것들은 모두 앙소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들과 달리 六 瓣 平 底 小 碟 의 경우 기물의 전면에 유약이 입혀져 있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그런데 다른 연구 자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문제의 六 瓣 平 底 小 碟 이 망구되어 있다고 한다( 張 栢 主 編 2008: 7). 이 두 가지 현상에 의거하면, 이 六 瓣 平 底 小 碟 은 복소법으로 소성되었음이 분명하다. 126 제23호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天 津 薊 縣 獨 樂 寺 塔 에서 출토된 六 瓣 平 底 小 碟 은 복소법으 로 소성된 망구의 정요백자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기년명 자료이다. 그렇지만 이 유적 에서 출토된 33점의 반과 碟 가운데 복소법으로 소성된 것은 六 瓣 平 底 小 碟 6점에 불과하 다. 이는 이 시기에는 대부분의 기물을 앙소하고 平 底 小 碟 과 같은 일부 한정된 기형의 기 물만을 복소하였음을 보여준다. 天 津 薊 縣 獨 樂 寺 塔 보다 약간 늦은 시기의 유적인 庫 倫 前 勿 力 布 格 1 號 墓 (1080)의 출토품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확인된다( 吉 林 省 博 物 館 等 ( 陳 相 偉 王 健 群 執 筆 ) 1973). 이 유적에서는 모두 18점의 정요백자가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기 형을 복원할 수 있는 것은 총 10점으로, 완이 7점이고 발이 3점이다. 완은 모두 망구가 되 어 있지 않으므로 앙소된 것이 분명하다. 발은 모두 망구되었지만, 보고서의 서술만으로 는 저부의 상태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앙소하였는지 복소하였는지 판단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러한 유형의 定 窯 白 瓷 鉢 의 경우 비록 망구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蓋 碗 과 마찬가 지로 앙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이 발들의 경우도 앙소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고 생각된다. 요컨대, 庫 倫 前 勿 力 布 格 1 號 墓 에서 출토된 정요백자완과 발은 모두 앙소되 었거나 앙소되었을 공산이 크다고 판단된다. 발굴 자료에 따르면, 이러한 현상은 북송말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法 庫 肖 袍 魯 墓 (1090)에서와 같이 복소한 망구정요백자만 출토된 경우도 있지만 11) 이러한 경우는 예외적이고, 대다수 유적에서의 복소한 망구정요백자의 출토 상 황은 그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컨대, 敖 漢 旗 羊 山 2 號 墓 ( 劉 祜 墓 )(1099)에서는 定 窯 産 으로 판단되는 3점의 백자완과 2점의 백자반이 출토되었다( 邵 國 田 1999: 8-9). 이것들 가 운데 망구를 한 기물은 확인되지 않으므로, 이것들은 모두 앙소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昭 烏 達 盟 遼 尙 暐 符 墓 (1099)에서는 白 瓷 平 沿 大 碗 2점과 백자대반 1점 그리고 백자대완 1점 이 출토되었는데( 鄭 隆 1961: 51), 보고문에는 북방명요산품으로 파악되어 있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정요산으로 판단된다( 謝 明 良 1987: 12). 이들 가운데에서도 망구를 한 예 는 확인되지 않으며, 白 瓷 平 沿 大 碗 의 경우는 권족의 접지면에 받침 흔적이 남아 있는 것 으로 미루어( 鄭 隆 1961: 51) 앙소되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현상은 12세기에 접어든 이후의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懷 安 西 坪 山 窖 藏 이 여기 에 해당된다( 劉 建 華 徐 建 忠 1990). 이 窖 藏 에서는 大 觀 重 寶 가 한 점 출토되었는데, 이 금속화폐의 구체적인 주조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관연간(1107~1110)에 주조된 것만 은 확실하다. 따라서 이 窖 藏 의 연대는 1107~1110년 이후의 어느 때가 되는 셈이다. 연 11) 法 庫 肖 袍 魯 墓 에서는 총 4점의 定 窯 白 瓷 碟 과 碗 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口 沿 部 에 유약이 입혀져 있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복소된 것으로 판단된다( 馮 永 謙 1983: 627-628). 127

구자들은 이 窖 藏 의 연대가 遼 의 멸망 이전일 것으로 추정하므로( 劉 建 華 徐 建 忠 1990: 91 83), 결국 이 窖 藏 은 1107~1110년부터 1125년 사이의 어느 때에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窖 藏 에서는 총 19점의 백자가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7점이 정요백자로 판단 된다( 喩 珊 2010: 附 表 13). 이들 정요백자 가운데 망구의 기물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므 로 이것들도 모두 앙소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지만 대략 휘종 정화연간(1111~1117)에 이르러 복소한 망구정요백자의 출토 상황 은 그 이전과 크게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예컨대, 江 西 省 의 鄱 陽 施 氏 墓 (1111)에 서는 총 5점의 정요백자가 출토되었는데( 范 鳳 妹 1986), 그 가운데 한 점이 발이고 2점이 완이다. 완과 발 모두 전형적인 정요의 각화모란문이 시문되었으며, 망구이다. 단, 발이 구연부만 노태되어 있는 것과 달리, 완들의 경우는 구연과 굽이 모두 노태되어 있기 때문 에, 이 유물을 직접 관찰하지 못한 필자로서는, 과연 그것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소성하였 는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보고자는 그것들을 복소한 것으로 보고 있다. 보고 자의 견해에 따르면, 3점의 정요백자는 모두 복소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易 縣 淨 覺 寺 舍 利 塔 地 宮 (1115)에서도 백자화형반 1점이 출토되었다( 河 北 省 文 物 管 理 處 ( 石 永 土 執 筆 ) 1986). 보고문에서는 그 산지와 장소공예에 대해서 별다른 설명이 없지만, 彭 善 國 의 견해에 따르면, 그것은 정요백자이며 망구되었다고 한다(2008: 46-47). 이러 한 기형은 북송말기부터 정요에서 크게 유행하였고 일반적으로 복소법으로 소성되었다 는 점에서 볼 때, 그의 견해는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이 화형반도 응당 복소 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林 州 劉 朝 宗 墓 (1112)에서는 총 28점의 정요백자가 출토된 것으 로 보고되었는데( 張 增 午 李 銀 錄 2002), 그 가운데 15점의 花 口 碟 과 3점의 碗 이 포함되 어 있다. 花 口 碟 은 모두 복소된 반면, 완은 앙소되었다. 복소된 기물의 수량이 앙소된 것 들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그러하기는 望 都 沈 家 庄 遺 蹟 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유적 에서는 정요백자와 더불어 19점의 금속화폐가 출토되었는데, 가장 시기가 늦은 것은 정 화 원년(1111)에 주조된 정화통보이다. 그러므로 이 유적의 연대는 1111년 이후가 되는데, 이곳에서 출토된 정요백자의 연대가 북송말기를 벗어날 것으로 판단되지는 않는다( 喩 珊 2010: 54-59). 말하자면 이 유적에서 출토된 정요백자는 북송 최말기에 제작된 것이 되는 셈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정요백자는 총 9점인데, 합 1점을 제외하면 모두 완(6점)과 반(2 점)이다. 보고문에 따르면, 완과 반 가운데 6점의 완은 복소되고 한 점의 반은 앙소되었 음이 확실하다. 그렇지만 나머지 한 점의 반, 즉 평저의 6판화형반의 경우는, 보고문의 내 용만으로는 망구의 여부와 장소공예의 방법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반과 같은 기형의 정요백자반이 이 시기에 일반적으로 복소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이 반의 경우도 복소되 었을 공산이 크다. 128 제23호

이상의 검토를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복소한 망구의 정요백자는 북송중기의 유 적에서부터 출토되기 시작하지만, 대체로 정화연간에 접어들기 이전까지의 유적에서는 그 출토 예가 그다지 많지 않다. 수량적인 측면에서 앙소를 한 정요백자의 비중이 훨씬 크다. 그런데 정화연간에 접어들 무렵부터 복소한 망구정요백자가 출토되는 유적이 크게 늘어나고 복소한 망구정요백자의 수량 또한 현저하게 증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보면, 복소에 따른 정요백자의 망구 현상이 보편화되고 아울러 북송의 조정이 나 궁정이 그것을 문제 삼은 시점은 정화연간 무렵이었을 개연성이 높다. 즉, 이 무렵에 여요가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이 점은 淸 凉 寺 汝 窯 址 의 발 굴결과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여요자기라고 일컬어 온 것은 여주의 많은 요장에서 소조한 자기들 가운데 각별히 공어용으로 제작한 것들을 의미한다. 이 공어용의 여요자기가 청량사여요에서 제 작되었다는 것은 다 아는 일이다. 이 요지는 2000년에 발굴되었는데( 河 南 省 文 物 考 古 硏 究 所 2008), 발굴보고자는 이 요장의 발전단계를 初 期 段 階 와 成 熟 期 段 階 로 구분하였다. 각각의 단계는 소성한 자기의 양상뿐만 아니라 窯 爐 의 구조와 규모 등의 측면에서 크게 다르다. 전자의 경우, 다양한 종류의 자기, 즉 우리가 흔히 臨 汝 窯 靑 瓷 로 부르는 요주요 계 청자를 비롯하여 백유자기 흑유자기 등 을 제작하였으며, 天 靑 釉 瓷 器 는 극히 소량만 이 제작되었을 뿐이다. 窯 爐 는 규모가 비교적 큰 馬 蹄 形 窯 爐 를 사용하였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소성한 자기의 거의 대부분(99% 정 도)이 품질이 지극히 높은 천청유자기이고(그 림 10) 그 밖의 자기는 겨우 1% 정도를 차지할 뿐이다. 요로도 초기단계 의 馬 蹄 形 窯 爐 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橢 圓 形 窯 爐 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발굴결과를 통하여 여요의 성립시기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먼저 청량사여요의 발전단계에서 어느 시점부터 공어용의 여요자기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는가 하는 점부터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이때가 곧 여요가 성립된 시점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미 별도의 논고에서 성숙기단계 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공어용 여요자기를 제작하기 시작하 였다는 점을 자세히 언급한 바가 있다( 李 喜 寬 2012: 257-259).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성 숙기단계 가 시작된 시점이 곧 여요의 성립시기가 되는 셈이다. <그림 10> 天 靑 釉 汝 窯 瓷 器 片, 淸 凉 寺 汝 窯 址 出 土, 河 南 省 文 物 考 古 硏 究 所 청량사여요지에서는 성숙기단계 가 시작된 구체적인 시점을 파악하는 데 단서를 제공 하는 중요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요지에서 출토된 금속화폐들이 그것이다. 보고서에 129

따르면, 이 요지 T11의 3층에서 원부통보와 정화통보가 각각 한 점씩 출토되었는데( 河 南 省 文 物 考 古 硏 究 所 2008: 35-36, 121), T11은 이 요지 발굴구역의 북쪽 중앙부에 위치하 고 있으며 그것들이 출토된 퇴적층은 성숙기단계 에 형성된 것이다. 원부통보와 정화통 보는 각각 元 符 원년(1098)과 政 和 원년(1111)에 주조되었다( 彭 信 威 1958: 990-991). 그렇 다면 이 퇴적층은 정화 원년(1111) 이후에 형성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T11이 위 치한 곳은 본래 성숙기단계 의 작업장(F1)이 있던 곳이었다. T11의 3층은 이 작업장의 활동지면 위에 형성된 퇴적이다. 그러므로 이 작업장(F1)은 T11의 3층이 형성되기 시작 한 시점보다 이른 시기에 건립되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보고서에 따르면, 문제의 원부 통보와 정화통보는 T11 3층 퇴적의 최하층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F1이 건립된 시점과 그것들이 출토된 퇴적층이 형성된 시점 사이의 시간적 격차는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으 로 판단된다. 성숙기단계 의 작업장은 이곳(F1) 한 곳뿐이다. 그러므로 이 작업장(F1)은 성숙기단 계 의 요업이 시작될 당시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성숙기단계 가 시작된 시점의 상한은 정화 원년(1111)보다 약간 이른 시기가 될 것이다. 대체로 대관연 간(1107~1110)이 여기에 해당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성숙기단계 가 시작 된 시점이 곧 여요의 성립시기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하한은 북송관요가 설립된 정화연 간(1111~1117) 이후로 내려갈 수가 없다. 여요가 북송관요가 설립되기 이전에 성립된 것 은 누구나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청량사여요의 성숙기단계 가 시작 된 시점의 하한은 대략 정화연간의 전반기에 해당할 공산이 높다. 결국 청량사여요는 휘 종 대관연간(1107~1110)에서 정화연간의 전반기(1111~1114)에 이르는 기간의 어느 시점 에 성숙기단계 로 진입하였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청량사여요의 성숙기단 계 가 시작된 시점이 곧 여요의 성립시기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시점이 곧 여요의 성립 시기가 되는 셈이다. Ⅳ. 여요의 성립과 어용자기 조달방식의 변화 여요의 성립으로 북송 어용자기의 주류는 정요백자에서 여요자기로 바뀌었다. 게다가 어용자기의 조달방식 자체에도 큰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요가 성립되기 이전에 어용자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조달되었다. 그 가운데 먼저 주 목해보아야 할 것은 土 貢 이다( 單 鵬 2007, 2009). 토공은 尙 書 禹 貢 條 에 나오는 任 土 作 貢, 즉 전국 각지의 토산물을 통치자에게 진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 아는 바와 같이, 130 제23호

자기도 일찍부터 토공품에 포함되어 있었다. 북송시기의 자기의 공납과 관련해서는 다음 기록부터 검토할 필요가 있다. (E) 瓷 器 庫 在 建 隆 坊, 掌 受 明 越 饒 州 定 州 靑 州 白 瓷 器 及 漆 器 以 給 用, 以 京 朝 官 三 班 內 侍 二 人 監 庫.([ 淸 ] 徐 松 輯 1957: 5717) 宋 會 要 輯 稿 에 실려 있는 이 기록은 북송시기의 瓷 器 庫 와 관련된 것인데, 이 기록 가 운데 靑 州 白 瓷 器 는 잘못 抄 錄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 대목은 응당 靑 白 瓷 器 나 靑 瓷 白 瓷 器, 또는 靑 州 瓷 器 로 바로잡아야 될 것으로 판단된다. 12) 이렇게 보 면, 자기고의 임무는 明 州 越 州 饒 州 定 州 또는 明 州 越 州 饒 州 定 州 靑 州 에서 자기 및 칠기를 수납하여 급용하게 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들은 응당 토공품으 로서 수납되었을 터인데( 鄭 建 華 1999: 182), 월주와 요주 그리고 정주의 경우, 당시 각각 품질이 높은 청자 청백자 백자를 생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자기와 칠기 가운 데 자기를 공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지만 이 기록만으로는 이들 주에서 구체적으 로 언제부터 자기를 공납하기 시작하였는지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자기고 자체가 神 宗 熙 寧 3년(1070)에 雜 物 庫 에 편입되었으므로([ 淸 ] 徐 松 輯 1957: 5717), 늦어도 희녕 3년 이 전부터 자기를 공납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공납된 자기들이 주로 어용자기 로 쓰였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元 德 李 后 陵 에서 출토된 37점의 정요백자의 전부 혹은 일부도 이러한 방식으로 조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각각 熙 寧 원년(1068)과 元 豊 3년(1080)의 토공의 내역이 기록되어 있는 宋 會 要 輯 稿 와 元 豊 九 域 志 에는 定 州 의 경우 토공에 자기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淸 ] 徐 松 輯 1957: 5556-5557; [ 宋 ] 王 存 撰 ( 王 文 楚 魏 嵩 山 點 校 ) 1984: 78-79). 그리고 숭녕연간 (1102~1106)의 토공 내역을 알려주는 것으로 판단되는 宋 史 지리지의 중산부조에도 자 기가 토공으로 기재되어 있지 않다([ 元 ] 脫 脫 等 撰 1977: 2127). 이것은 정요백자가 공납되 기 시작한 이후 언제인가 토공에서 제외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앞서 인용한 사료(C)에 따르면, 휘종은 선화 7년(1125)에 정주의 후신인 중산부 에서 尙 食 局 에 六 尙 局 貢 의 명목으로 바치던 瓷 中 樣 矮 足 裏 撥 盤 龍 湯 盞 10 隻 의 공납을 파 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는 六 尙 局 貢 이 제정되면서 정요백자가 다시 공납되기 시작하였 음을 알려준다. 六 尙 局 貢 이 출현한 시점은 일반적으로 六 尙 局 이 설치된 휘종 숭녕 2년 12) 鄭 建 華 (1999: 182)는 문제의 靑 州 白 瓷 器 를 靑 白 瓷 器 나 靑 瓷 白 瓷 器 로 바로잡아야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필자는 그것이 靑 州 瓷 器 를 잘못 초록하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131

(1103)으로 알려져 있지만, 蔡 京 이 殿 中 省 六 尙 局 供 奉 庫 務 勅 令 格 式 을 修 成 하여 올린 숭 녕 3년(1104)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元 ] 脫 脫 等 撰 1977: 3881). 아무튼 숭녕 2년(1103) 또는 3년(1104)에 정요백자가 다시 공납되기 시작하였음은 분명한 일이다. 토공에 의한 어용자기의 조달방식에서 간취되는 한 가지 특징은 공납 자기의 수량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이다. 13) 문헌기록을 통하여 볼 때, 적어도 북송후기의 경우는 그러 하다. 예컨대, 元 豊 3년의 토공 내역을 알려주는 원풍구역지 에 의하면, 자기를 공납한 주부는 河 南 府 邢 州 耀 州 越 州 뿐이었으며, 그 수량도 각각 200 事 10 事 50 事 50 事 에 불과하였다([ 宋 ] 王 存 撰 ( 王 文 楚 魏 嵩 山 點 校 ) 1984: 4, 80, 111, 208-209). 물론 이것은 토공 가운데 常 貢 의 액수에 한정된 것이지만, 부정기적인 雜 貢 의 액수를 감안한다고 하 더라도 그 액수가 그다지 크게 달라지리라고 판단되지는 않는다. 황궁에는 황제를 비롯 한 다수의 황실구성원들이 거주하였으며, 아울러 수많은 의례가 거행되고 연회가 개최되 었다. 게다가 자기질 기물은 파손되기 쉬운 소모품이다. 따라서 상당한 수량의 어용자기 가 필요했을 것이라는 점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휘종시기의 연회 모습을 그린 < 文 會 圖 >를 보면, 10여 명이 참가한 궁중의 작은 연회에도 무려 150개에 가까운 자기그릇이 소 용된 것으로 묘사되었다( 林 柏 亭 主 編 2006: 156-160; 靳 靑 萬 2007: 103). 그렇다면 어용자 기의 조달방식에서 토공이 차지한 비중은 상당히 작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어 용자기의 대부분은 다른 방식으로 조달되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어용자기의 조달방식으로서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購 買 에 의한 방식이다. 북송시기 에는 궁정에서 필요로 하는 많은 물품을 시장에서 구매하여 조달하였다( 李 曉 2007: 138-142). 심지어는 토공품의 상당량도 구매하여 진상하였다( 單 鵬 2007: 29). 본래 궁정용품의 공급 임무를 맡은 관부는 환관기구인 內 東 門 司 이고([ 淸 ] 徐 松 輯 1957: 3085), 그 물품을 직 접 구매하는 임무를 맡은 관부는 雜 買 務 였다([ 淸 ] 徐 松 輯 1957: 2938). 그러나 실제에 있어 서는 內 東 門 司 가 직접 그 물품들을 구매하기도 하였다( 李 曉 2007: 141). 熙 寧 5년(1072)에 王 安 石 의 주도로 市 易 法 이 시행되면서 이와 같이 궁정 물품을 구매하여 조달하는 방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훨씬 커지게 되었다( 李 曉 2004). 그리고 정부에서 특정 상인에게 대금을 지급하고 물품의 구매와 공급을 위임하는 請 負 制 도 시행되었다( 李 曉 姜 雪 燕 2006). 북송시기에 어용자기를 구매의 방식으로 조달하였음을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문헌기 록이나 고고학 자료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남송시기의 고고학 자료 를 통하여 유추해 볼 수 있다. 근래 杭 州 에서는 많은 수량의 정요백자편들이 발견되었는 13) 貢 物 의 수량이 매우 한정적이고 재정적 의미도 크지 않았던 것은 자기뿐만 아니라 송대 土 貢 의 일반적 특징이었다( 單 鵬 2009: 237). 132 제23호

데, 그 가운데 일부 편들에는 殿 德 壽 奉 華 皇 太 后 殿 壽 成 殿 坤 壽 慈 殿 東 宮 婉 儀 位 閤 子 庫 後 苑 內 苑 德 壽 苑 (그림 11) 苑 苑 天 後 苑 三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胡 雲 法 金 志 偉 2005: 285-296; 杭 州 南 宋 官 窯 博 物 館 編 2010: 160-163). 이 러한 명문들은 이들 정요백자가 궁정에서 사용 된 후 폐기되었음을 말해준다. 이것들 가운데 송 황실이 金 에게 쫓겨 南 遷 하면서 가지고 온 것들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 대부분은 송 황실이 오늘 날의 항주인 臨 安 에 자리잡고 난 후에 조달된 것들이었을 것이다. 문제의 정요백자 가운 데 금대 풍격의 인화문양이 시문되어 있는 것들이 많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胡 雲 法 金 志 偉 2005: 287-293). 그런데 당시 정요는 금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그러므로 남송 의 궁정이 토공 등의 방식으로 정요백자를 조달했을 가능성은 아예 없다. 그것들은 필경 구매의 방식으로 조달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어용자기를 조달하는 방식이 남송시기에 접 어들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볼 이유는 없는 것이어서, 북송시기에도 이러한 구매 방식 의 어용자기 조달방식이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 각한다. 구매 방식으로 어용자기를 조달할 경우, 그 임무를 담당한 雜 買 務 나 內 東 門 司 가 어용 자기의 생산 과정에 관여할 수 있는 길은 매우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원칙적으로 그 관부 들은 단지 구매자의 입장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우 어용자기와 일반상품 자기 사이에 품질 등의 측면에서 차이는 있었을 개연성이 있지만, 그 밖의 측면, 예컨대, 기형이나 문양 및 유색 등에서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판단된다. 그러한 요 소들을 결정하는 것은 요장의 窯 主 나 도공들이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더 나아 가 특정 요장에서 일반상품자기와 별도로 어용자기를 생산하여 판매하거나 했을 가능성 도 높지 않다고 생각된다. 14) <그림 11> 德 壽 苑 銘 定 窯 白 瓷 片, 南 宋 官 窯 博 物 館 어용자기를 조달하는 또 다른 방식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注 文 制 의 방식이다. 이는 궁정이 특정 민간요장에 어용자기의 제작을 위탁하여 조달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궁정 이 見 樣 을 특정 민간요장에 내리고( 降 樣 ), 그 요장에서는 그 견양에 의거하여 자기를 제 작한 후 특정 官 員 의 품질검사( 選 品 )과정을 거쳐 공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徐 飇 2007: 14) 예컨대, 정요의 경우도 수많은 요장( 窯 戶 )에서 공어용백자와 一 般 商 品 白 瓷 를 같이 생산한 것으로 추측된다( 秦 大 樹 2012: 269). 133

115-116). 그리고 자기를 주문한 궁정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그 요장에 경제적 대가를 지 불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어용자기를 조달한 가장 확실한 실례는 다음 기록에 보이는 용천요의 경우가 아닐까 싶다. (F) 處 州 龍 泉 縣 又 出 靑 瓷 器, 謂 之 秘 色, 錢 氏 所 貢, 蓋 取 於 此. 宣 和 中, 禁 庭 製 樣 須 索, 益 加 工 巧.([ 宋 ] 莊 綽 撰 ( 蕭 魯 陽 點 校 ) 1983: 5) 위 기록은 남송초기에 莊 綽 이 저술한 鷄 肋 編 에 보이는 용천요에 대한 내용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용천요의 靑 瓷 器 는 선화연간(1119 1125)에 禁 庭 이 製 樣 須 索 을 하 면서 더욱 工 巧 해졌다고 한다. 製 樣 須 索 은 말 그대로 製 樣, 즉 견양을 제작하고 須 索, 즉 그 견양에 의거하여 제작한 자기를 거두어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제양수색의 주 체는, 사료(F)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禁 庭, 즉 궁정이었다. 궁정이 견양을 제작해 내려보낸 것은 자신들의 의도에 부합하는 자기를 주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沈 岳 明 2010: 18). 이 기록은 제양수색이 일종의 주문생산을 통하여 어용자기를 조달하는 방식이 었음을 알려준다. 한편, 福 建 省 建 陽 縣 水 吉 鎭 의 建 窯 址 와 그 밖의 유적에서는 御 件 및 進 琖 銘 建 盞 片 들 이 발견된 바가 있다( 中 國 硅 酸 鹽 學 會 編 1982: 278; 海 のシルクロードの 出 發 點 福 建 展 開 催 實 行 委 員 會 編 2008: 72)(그림 12). 御 件 과 進 琖 은 이것들이 공어용으로 제작되었음을 <그림 12> 供 御 銘 建 盞 片, 福 建 博 物 院 말해준다. 顧 文 璧 의 정치한 연구에 따르면, 이 들 御 件 및 進 琖 銘 建 盞 은 휘종 정화 2년(1112)경부터 제작되었다고 한다( 顧 文 璧 1986: 136-138). 당시 궁정이 이 건잔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조달하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일단 그것들이 토공의 명목으로 공어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 각한다. 문헌기록 등에서 건요에서 건잔을 공납하였다는 사실 자체가 전혀 확인되지 않 을 뿐만 아니라, 공납품에 이러한 내용의 명문을 새긴 실례 또한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 다. 구매의 방식으로 조달하였을 가능성도 그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상품용의 건잔에 御 件 이나 進 琖 銘 을 새겨 넣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들 건잔이 주문제의 방식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공어하는 건잔에 각별히 御 件 이나 進 琖 銘 을 새겨 넣은 것으로 미루어 보면, 건요에서는 아마도 궁정에 서 제공한 견양을 토대로 이것들을 제작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御 件 이나 進 琖 銘 도 134 제23호

견양에 의거하여 새겨 넣었을 것으로 믿어지는 것이다. 요컨대, 이들 건잔도 제양수색의 방식 으로 조달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요백자에서도 북송시기의 어용자기 조달방 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명문이 확인되 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尙 藥 局 尙 食 局 銘 과, 앞서 언급한 바 있는 喬 位 銘 이다. 이들 가 운데 尙 藥 局 (그림 13) 尙 食 局 銘 定 窯 白 瓷 (그 림 14)는 六 尙 局 貢 의 명목으로 각각 尙 藥 局 과 尙 食 局 에 바치기 위하여 제작한 것들이다( 鄭 嘉 勵 2005: 257). 그러나 喬 位 銘 定 窯 白 瓷 는 六 尙 局 貢 의 명목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 고 해서 일반적인 토공품로 보기도 힘들다. 황 제에게 공납하는 토공품에 특정 后 妃 의 처소명 을 새긴다는 것이 매우 어색하거니와 그러한 예 도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판매 용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상품용자기에 喬 位 銘 을 새겨 넣었을 까닭이 없 기 때문이다. 喬 位 는 필경 이 명문이 새겨진 백자의 注 文 處, 즉 교귀비의 처소를 표시한 것이리라. 결국, 喬 位 銘 定 窯 白 瓷 도 御 件 이나 進 琖 銘 建 盞 과 마찬가지로 주문제 방식 의 하나인 제양수색의 방식으로 조달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15) 그런데 교귀비가 자신의 처소명을 새긴 전용기물을 주문 제작하여 사용하였다는 점 은 당시 그녀가 궁중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李 仲 謨 2005: 397). 교 귀비는 휘종 치세 전반기 무렵에는 義 姉 妹 를 맺은 高 宗 의 母 인 韋 妃 와 함께 주로 鄭 皇 后 를 모셨다([ 元 ] 脫 脫 等 撰 1977: 8640-8641, 8643-8644). 위비가 대관(1107~1110) 初 에 이 르러서야 겨우 內 命 婦 의 5 品 가운데 하위에 속하는 婕 妤 가 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元 ] 脫 脫 等 撰 1977: 8640, 3837), 이 시기 교귀비의 지위도 그다지 높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녀의 지위가 높아지게 된 것은 아마도 휘종치세 후반기에 접어든 이후의 일 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문제의 喬 位 銘 定 窯 白 瓷 는 여요가 성립되고 난 후에 제작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림 13> 定 窯 白 瓷 尙 藥 局 銘 盒, 曲 陽 縣 定 窯 窯 址 出 土, 定 窯 遺 址 文 物 保 管 所 <그림 14> 定 窯 白 瓷 尙 食 局 銘 碗, 曲 陽 縣 定 窯 窯 址 出 土, 河 北 省 文 物 硏 究 所 제양수색과 같은 주문제 방식이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 15) 沈 岳 明 도 북송의 궁정이 정요로부터 제양수색의 방식으로도 백자를 조달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沈 岳 明 2010: 18). 135

다. 16) 그런데 앞서 살펴본, 북송시기에 어용자기를 주문제의 방식으로 조달하였거나 조 달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실례들은 모두 여요가 성립되고 난 후이거나 정화 선화연간의 것들이다. 이는 이러한 조달방식이 이 시기에 접어든 이후에 성행하기 시작하였음을 시 사한다. 즉, 그 이전 시기에는 설사 주문제 방식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용자기의 조달방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통하여 볼 때, 북송시기의 어용자기 조달방식, 즉 토공 구매 주 문제의 방식 가운데, 적어도 여요가 성립되기 바로 전 시기에는 토공과 주문제작방식에 의한 조달은 그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시기에는 주로 구매의 방식으로 어용자기를 조달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정요백자의 경우도 이 시기에 어용자기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예외였다고 볼 까닭이 없다. 이러한 어용자기의 조달방식은 여요의 성립을 계기로 크게 변화하였다. 여요는 일반 상품용자기를 주로 생산하던 정요와는 성격이 크게 다른 요장이었다. 17) 즉 여요는 본래 민요였지만, 기본적으로 궁정이 제공한 견양에 따라 공어를 목적으로 자기를 제작한, 전 문적인 제양수색요였다. 여요가 성립되고 여요자기가 어용자기의 주류가 되면서 주문제 작방식의 일종인 제양수색이 어용자기의 주요 조달방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공어에서 탈락한 일부 여요자기가 일반에 판매되었지만, 그것들도 본래는 공어용으로 제작되어 특 정 관원의 選 品 과정을 거친 것들이었으며, 여요의 전체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그 다지 크지 않았다. 이러한 여요의 성격에 걸맞게 여요와 여요자기에 대한 조정이나 궁정 의 관리도 매우 엄격하였다. 조정이나 궁정은 그 요장에서 자기를 생산하고 공어하는 과 정뿐만 아니라 낙선품을 일반에 판매하는 것도 사실상 통제하였다. 결과적으로, 여요의 성립을 계기로 어용자기를 조달하는 주된 방식은 구매 방식에서 주문제 방식의 일종인 제양수색의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중대 한 의미를 지닌다. 이와 관련하여 각별히 여요와 여요자기의 관리체제를 다시 한 번 음미 해볼 필요가 있다. 여요의 성립 이후 북송의 궁정은 청량사여요 이외의 요장에서는 여요자기를 생산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李 喜 寬 2012: 240-248). 이것은 청량사여요에서만 여요자기를 독점적으 로 생산 공급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조치를 통하여 여요자기의 생산과 공급은 사 실상 조정이나 궁정이 통제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요자기의 殘 次 品 을 깨뜨 려버림으로써( 陸 明 華 2001: 131-132; 王 光 堯 2010: 91-93), 그것들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 16) 沈 岳 明 은 製 樣 須 索 이 五 代 後 周 時 期 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沈 岳 明 2010: 18). 17) 여요의 성격에 대해서는 李 喜 寬 2012를 참조하라. 136 제23호

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였다. 그 결과 이제 황실 이외의 사람들이 여요자기를 소유할 수 있 는 기회는 극히 제한되었다. 자연히 여요자기가 점점 황실 이외의 사람들은 손에 넣기 힘 든 진귀한 공어용자기로 인식되어갔을 것임은 짐작하기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실 여요가 성립되기 전에는 특정 요장의 자기가 공어용으로 선정되었다고 하더라도 황실 이외의 사람들이 그 요장의 자기를 사용하는 데 제한이 없었다. 18) 심지어 공납되어 자기고에 입고된 자기 가운데 일정 수량의 공어용을 제외한 나머지를 일반에게 판매하기 도 하였다([ 淸 ] 徐 松 輯 1957: 5717). 이 시기에 어용자기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정요백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어용자기의 범주에 속하는 元 德 李 后 陵 출토 정요백자와 비어용자기인 定 州 市 靜 志 寺 塔 과 淨 衆 院 塔 의 地 宮 에서 출토된 정요백자는 기형이나 문 양 등의 측면에서 큰 차이를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품질의 측면에서도 우열을 가리기 가 힘들다( 李 仲 謨 2005: 395-396). 요컨대, 여요의 성립을 계기로 동일한 요장에서 생산한 자기를 황실과 황실 이외의 사 람들이 공유하던 시대는 막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御 用 瓷 器 와 非 御 用 瓷 器 의 차별 화의 시작을 알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곧 이어 북송관요가 설립되고 관요 시대가 열리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적어도 明 嘉 靖 年 間 까지 관요자기는 원칙적으로 황제 와 한정된 그의 일족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權 奎 山 2005: 61-62). 신료들과 민간인은 원칙 적으로 관요자기의 사용이 엄금되었다. 관요가 설립되면서 황실과 신료 민간인들 사이 에 瓷 質 器 皿 의 사용에 있어서 명확한 경계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 서막을 연 것이 여요 의 성립이었던 셈이다. Ⅴ. 여요의 성립과 휘종 이제까지 검토한 바에 따르면, 정요백자의 망구 현상이 문제가 되어 휘종 대관연간 (1107~1110)에서 정화연간의 전반기(1111~1114)에 이르는 시기에 여요가 성립되면서 북 송 어용자기의 주류는 정요백자에서 여요자기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어용자기의 주요 조달방식도 구매 방식에서 제양수색의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그 결과 조정이나 궁정은 어용자기의 생산이나 조달 과정에 보다 깊숙이 관여하고 더욱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 18) 단 蔡 玟 芬 은 龍 紋 등은 황실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문양이 시문된 자기의 경우 황실 이외의 사람들은 사용할 수 없었다 고 주장하였다( 蔡 玟 芬 1997: 72). 하지만 李 仲 謨 (2005: 396)의 견해에 따르면, 龍 紋 定 窯 白 瓷 의 경우 모두 궁정용은 아니었다 고 한다. 定 州 法 興 寺 遺 蹟 에서 12점의 定 窯 白 瓷 龍 紋 盤 ㆍ 碗 ㆍ 缸 이 출토된 것을 비롯하여( 妙 濟 浩 ㆍ 薛 增 福 1984: 86-88) 적지 않은 유적에서 龍 紋 定 窯 白 瓷 가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보면, 李 仲 謨 의 주장이 더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137

게 되었다. 어용자기의 전개과정에서 볼 때, 이러한 여요의 성립은 空 前 의 개혁으로 평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개혁의 중심에 있는 인물로 당시의 황제인 휘종을 떠올릴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은 이러한 변화에 휘종의 의중이 깊숙이 반영되어 있었으리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그가 여요자기를 선택한 의도를 주로 그의 예술적 심미 안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여요 성립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여요의 <그림 15> 徽 宗 政 和 6년(1116)에 商 代 의 鼎 을 倣 製 한 政 和 鼎, 國 立 故 宮 博 物 院 성립 과정에 있어서 휘종의 역할과 그것이 지 니는 정치적 의미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 가 있다고 생각한다. 휘종은 기명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황제로 유명하다. 그는 수많은 古 銅 器 를 수집하였으 며, 그것을 토대로 宣 和 博 古 圖 를 편찬하고, 그것에 의거하여 三 代 의 고동기를 방제하였 다( 陳 芳 妹 2001; 韓 巍 2006)(그림 15). 이른바 新 成 禮 器 가 그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그가 추진한 예제개혁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즉 그러한 일들은 예 제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었다. (G) 大 觀 三 年 三 月 六 日, 上 御 集 英 殿, 試 禮 部 奏 名 進 士, 內 出 制 策 曰, 昔 者, 先 王 治 定 而 制 禮, 功 成 而 作 樂, 以 合 天 地 之 化. 禮 之 數 五, 施 之 七 敎, 形 之 八 政, 有 典 有 職, 定 親 疎, 決 嫌 疑, 別 同 異, 明 是 非, 然 後 小 大 貴 錢 ( 賤 의 誤 記 ) 之 分 定. ([ 淸 ] 徐 松 輯 1957: 4371) 위 기록은 휘종이 대관 3년(1109) 3월에 있었던 殿 試 에서 낸 制 策 의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서 휘종은 禮 는 親 疎 를 정하고( 定 親 疎 ), 의문을 풀고( 決 嫌 疑 ), 同 異 를 구분하며( 別 同 異 ), 시비를 밝히는( 明 是 非 ) 것이라는 예기 의 문구를 인용하고, 예가 만들어진 후에 야 大 小 貴 賤 의 本 分 을 정할 수 있다( 小 大 貴 賤 之 分 定 ) 고 하여, 制 禮 의 핵심을 大 小 貴 賤 의 本 分 을 정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당시 사람들의 그것과 다르 지 않은 것이다. 즉 制 禮 는 군주통치체제 아래의 전통적인 중국 왕조에서 일종의 사회질 서를 설정하고 세우는 일이었다( 劉 靜 貞 2008: 461). 사회 구성원들은 각자의 신분이나 사 회적 지위 등에 따라 서로 행하거나 지켜야 할 예가 다르게 마련이었다. 황제와 신료들이 거행하는 의례의 종류가 다르고 아울러 거기에 사용하는 기명( 禮 器 )의 종류와 수량이 다 138 제23호

르게 규정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예제는 사회적 차별을 제도화한 장치의 하나였 으며, 기명( 禮 器 )의 사용도 거기에서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여요의 성립도 기명과 관련된 개혁의 결과물이었다. 여요의 성립을 계기로 비로소 황 실과 신료 민간인들 사이에 瓷 質 器 皿 의 사용에 있어서 명확한 경계가 생기기 시작하였 다. 물론 이러한 자질기명 사용상의 엄격한 차별화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제도적 토대 위 에서 이루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예제에서 황제와 신료들 사이에 의례에 사 용하는 기명( 禮 器 )의 종류와 수량을 다르게 규정하였다거나, 휘종이 추구한 制 禮 의 궁극 적인 목적이 大 小 貴 賤 등 사회적 질서를 바로 정하는 것이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면, 이것 역시 예제에 근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자질기명 사용에 있어서의 차별화의 시발 점이 된 여요의 성립도 휘종이 추구한 예제개혁의 큰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믿어지 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청량사여요지에서 출토된 청동예기를 방제한 기물편 들이 매우 흥미롭다. 2000년 청량사여요지를 발굴할 때, 이 요지의 금 원대 퇴적층과 灰 坑 에서 三 代 의 청 동예기를 방제한 기물편들이 출토되었는데, 발굴조사자의 견해에 따르면, 이 유물들은 모두 청량사여요의 성숙기단계가 끝나기 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河 南 省 文 物 考 古 硏 究 所 2008: 129-131, 2009: 67). 흥미롭게 도 이것들은 모두 초벌구이편들로서, 외면에 는 三 代 의 청동예기에서 흔히 보이는 獸 面 紋 등이 정치하게 시문되어 있다(그림 16). 이러 한 유형의 기물은 2011~2012년 발굴시에도 다 수 출토되었다. 발굴보고자는 이 기물들이 모 두 물레성형을 한 후 각화나 획화 그리고 剔 花 技 法 으로 문양을 새긴 것으로 파악하였다( 河 <그림 16> 獸 面 紋 초벌구이 片, 淸 凉 寺 汝 窯 址 出 土, 河 南 省 文 物 考 古 硏 究 所 南 省 文 物 考 古 硏 究 所 2008: 130). 하지만 필자가 직접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것들은 틀성 형을 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 기물들 가운데 내면에 틀성형을 하여 접합한 흔적이 남 아있다는 점 등에서 그러하다. 청량사여요에서 소성한 일반 기물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 들은 자칫 유약을 입혀 재벌구이를 하기 전에 폐기된 것들로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청량 사여요지에서 이러한 유형의 기물에 유약을 입히거나 재벌구이를 한 片 들이 전혀 발견되 지 않았다는 점에서 볼 때( 河 南 省 文 物 考 古 硏 究 所 2008: 130), 실제에 있어서 그러했을 가 능성은 희박하다. 이것들은 모두 본래 초벌구이만으로 완성되는 陶 質 禮 器 라고 여겨진다 ( 森 達 也 2012: 190). 이러한 유형의 도질예기는 남송교단하관요지에서도 출토되었으며( 中 國 社 會 科 學 院 考 古 硏 究 所 等 1996: 41), 그밖에 항주의 여러 유적에서도 다수 발견되었다 139

( 沈 一 東 2007, 2010; 王 屹 峰 2012). 청량사여요지에서 출토된 이러한 도질예기들은 조정이나 궁정에서 내린 견양에 의거 하여 제작되었으며, 국가의례 등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 기록이 우리의 주 목을 끈다. (H) ( 大 觀 四 年 四 月 二 十 八 日, 議 禮 局 ) 又 言, 祭 法 曰 燔 柴 於 泰 壇 祭 天 也, 瘞 埋 於 泰 折 祭 地 也. 諸 儒 皆 以 謂 祭 天 卽 南 郊 所 祀 感 生 之 帝, 祭 地 卽 北 郊 祭 神 州 之 神. 歷 代 崇 奉 以 爲 天 地 大 祠, 故 牲 以 繭 栗, 席 以 藁 鞂, 器 以 陶 匏, 其 儀 必 與 昊 天 上 帝 皇 地 祗 等. 今 太 常 祠 感 生 帝 神 州 祗 儀 注, 牲 用 繭 栗, 席 用 藁 鞂, 已 合 古 禮, 而 所 用 之 器 與 宗 廟 同, 卽 爲 非 稱. 伏 請 自 今 祠 感 生 帝 神 州 之 祗, 並 用 陶 匏. 從 之.([ 淸 ] 徐 松 輯 1957: 619) 이 기록에 따르면, 대관 4년(1110)에 議 禮 局 은 天 地 에 제사를 지낼 때 古 禮 에 따라 陶 匏 로 만든 제기를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陶 匏 의 陶 는 곧 도질예기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보다 앞선 神 宗 元 豊 원년(1078)에도 詳 定 禮 文 所 에서 같은 건의를 한 바가 있었 다([ 元 ] 脫 脫 等 撰 1977: 2429-2430). 그러나 신종이 그 건의에 따랐다는 내용이 보이지 않 고 또한 휘종대에 이르러 다시 같은 건의가 이루어진 점으로 미루어, 당시에는 제대로 시 행되었던 것 같지 않다( 鄭 嘉 勵 2006: 42-43). 이에 반해 휘종은, 위 기록에 보이듯이, 의예 국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자연히 대관 4년 또는 그 이후부터는 황제가 거행하는 천지제사 에 도질예기의 사용이 본격화되었을 것이다. 청량사여요지에서 출토된 도질예기들은 그 러한 천지제사에 사용하기 위하여 제조된 예기들이라고 생각된다. 휘종의 예제개혁 과정 속에서 성립한 여요에서 그러한 도질예기를 제작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 다. 요컨대, 여요는 휘종이 주도한 예제개혁의 큰 틀 안에서, 누구보다도 그의 의도에 따라 성립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황실이 아닌 신료나 민간인이 여요자기를 손쉽게 취득 할 수 있는 사실상 차단되었다. 그들은 공어되고 난 후 조정이나 궁정에 의해 出 賣 가 허 락된 소수의 여요자기만 구입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이 한정적이나마 황실이 아닌 집단이 여요자기를 구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은, 여요의 성립이 가져온 개혁에 대한 반발을 고려한 조치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곧 이어 북송관요가 설립되면서 그 러한 길마저 차단되었다. 이제 신료들은 원칙적으로 황제의 恩 賜 에 의해서만 관요자기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황실과 신료 민간인들 사이에 자질기명의 사용에 있어서의 경계를 명확히 하려는 휘종의 개혁은 여요의 성립에서 시작하여 북송관요의 설립에 이르 140 제23호

러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역사는 흔히 휘종을 두고 문약하고 정치적 소양이 부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황음무도하 여 결국 북송을 몰락의 길로 몰아넣은 昏 君 으로 평가한다( 張 邦 煒 2005). 많은 연구자들 이 휘종이 어용자기의 주류로 여요자기를 택한 까닭을 그의 예술적 심미관에서 찾고 있 는 것도( 陳 文 平 1990: 65-66; 呂 成 龍 2001: 41-42) 그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 평가와 무관하 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적어도 이제까지 살펴본 여요의 성립이 가지는 개혁적인 성격에 주목해 보면, 그러한 휘종에 대한 일방적인 평가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 각이다. 여요의 성립은 어용자기와 관련된 空 前 의 개혁이라고 평가할 만한 것으로서, 그 것을 주도한 휘종의 정치적 소양이 부족하거나 그의 정치권력이 미약했다면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강력한 정치권력을 기반으로 각종 개혁을 통하여 더욱 강력한 황권을 추구한 황제였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우 리는 이제 휘종이 비록 예술가적 기질은 있지만 정치적 역량이 미달된 황제라거나, 심지 어는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는 오랜 편견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다. 그것은 단지 휘종시기가 끝나고 곧바로 북송이 금에게 함락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때 문에 내려진 결과론적인 평가일 뿐이라고 판단된다. 같은 맥락에서, 휘종이 단행한 그 밖 의 많은 개혁들 역시 그 역사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할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Ⅵ. 나머지말 여요의 전개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들 여요가 성립되고 난 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거의 없다. 예컨대, 여요의 성립에 뒤이어 정화연간(1111~1117)에 북송관요가 설립되면서 여요에 어떤 변화 가 있었을 법도 하지만, 그것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거의 없다고 하여도 과언 이 아니다. 여요가 언제 소멸되었는가 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여요의 전개과 정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간단한 생각을 덧붙이는 것으로 본고에서의 논의를 마무리하고 자 한다. 편의상 여요의 소멸시기 문제부터 살펴보았으면 한다. 여요에 대한 가장 신뢰할만한 내용을 전하는 탄재필형 에도 여요의 소멸시기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나 그것을 추정할 만한 단서는 남아 있지 않다. 서긍이 선화봉사고려도 경 에서 汝 州 新 窯 器 를 언급하였지만, 19) 이것이 언제 존재하였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실체에 대해서도 다양한 견해가 대립하고 있어서 이 역시 여요의 구체적 19) 汝 州 新 窯 器 에 대해서는 李 喜 寬 2012: 249-269 참조. 141

인 소멸시기를 파악하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때문에 현 시점에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가장 신뢰할 만한 자료는 역시 고고학 자료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고고학 자료 가운데 여요의 소멸시기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청량사여요지에서 출토된 다수의 금속화폐이다. 이 요지에서는 모두 31점의 금 속화폐가 출토되었는데, 북송시기의 것이 가장 많고(16점), 다음으로 청대(12점) 당대(2 점) 명대일본금속화폐(1점)의 순이다( 河 南 省 文 物 考 古 硏 究 所 2008: 119-121). 북송시기 의 금속화폐 가운데 가장 시기가 늦은 것은 정화 원년(1111)에 주조된 정화통보이다. 이 정화통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요장의 성숙기단계 의 퇴적층에서 출토되었는 데, 이 점은 청량사여요의 소멸시기가 정화 원년 이후였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청량사여 요지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이 요장은 성숙기단계 의 시작부터 끝까지 줄곧 공어용의 천청유자기(여요자기)를 생산하였다. 이 성숙기단계 의 끝이 여요의 소멸시기라는 점은 다 아는 일이다. 말하자면 이 요장은 공어용 여요자기의 생산이 중단되면서 종말을 맞이 한 셈이다. 정화 원년 이후에 공어용 여요자기 생산의 중단을 초래했을 가능성이 있는 일로는 다음 의 두 가지 경우를 떠올릴 수 있다. 그 하나는 북송관요의 설립이다. 즉, 북송관요가 설립 되고 이 요장에서 전문적으로 어용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여요에서 공어용 여요자 기의 생산이 중단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북송관요를 설립한 시 점, 즉 정화연간(1111~1117)이 여요의 소멸시기가 되는 셈이다. 또 다른 하나는 북송정권 의 붕괴이다. 이때까지 여요에서 공어용 여요자기를 생산하고 있었다면, 북송정권의 몰락 과 함께 공어용 여요자기의 생산도 중단되었으리라는 점은 누구나 쉽게 추론할 수 있는 일이다. 이 경우에는 북송정권이 붕괴된 1127년이 여요의 소멸시기가 되는 셈이다. 과연 이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실제에 있어서는 어느 쪽이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는,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청량사여요지에서 출토된 정화통보가 쥐고 있다. 이 정화통보는 청량사여요 성숙기단계 의 요업을 시작할 당시에 건립한 작업장(F1)의 최하층에서 출토되었다( 河 南 省 文 物 考 古 硏 究 所 2008: 35-36). 즉 문제의 정화통보는 이 요 장에서 막 공어용 여요자기를 제작하기 시작한 시점에 형성된 퇴적층에서 출토된 셈이 다. 이 퇴적층의 위에 초벌구이편과 유약 등 적지 않은 성숙기단계 의 요업폐기물이 쌓 인 점으로 미루어 보면( 河 南 省 文 物 考 古 硏 究 所 2008: 35-36), 이 퇴적층이 형성된 후에도 일정한 기간 동안 어용자기의 제작이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화통보는 정화 원년 (1111)에 주조되었으므로, 이 정화통보가 출토된 퇴적층이 형성된 上 限 은 정화 원년이거 나 그보다 약간 이른 시기가 될 것이다. 물론 그 하한은 정화 원년 이후가 될 것이다. 그런데 북송관요는 정화연간(1111~1117)에 설립되었다. 그렇다면 정화통보가 출토된 142 제23호

퇴적층의 형성과 북송관요의 설립 사이에는 시간적 격차가 거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청량사여요에서 정화통보가 출토된 퇴적층이 형성되고 난 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 공어용 여요자기의 제작이 지속되었다는 관점에서 보면, 북송관요가 설립되고 난 후 곧바로 공 어용 여요자기의 생산이 중단되었을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북송관요가 설립되고 난 후에도 여요는 여전히 공어용 여요자기를 제작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여요는 북송정권의 붕괴와 함께 여주 지역이 금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여요에서의 공 어용 자기 생산이 중단되고 아울러 요업도 끝이 나게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요컨대, 여요는 북송정권이 붕괴된 欽 宗 靖 康 2년(1127)경에 소멸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이제까지 적지 않은 연구자들은 청량사여요가 북송관요가 설립된 정화연간을 기 점으로 성격이 크게 변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특히 북송관요가 곧 청량사여요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정화연간 이전의 청량사여요는 공어용 자기를 생 산하던 민요였지만, 그 이후에는 관부의 전속요장 즉, 관요로 성격이 변화하였으며, 이것 이 곧 북송관요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20) 이 견해에 따르면, 정화연간에 민요인 청량사여 요을 接 收 한 것이 곧 북송관요이며, 이것이 북송관요 설립의 실제적 내용이라는 이야기 가 되는 셈이다. 과연 이러한 이해는 타당한 것일까? 앞서 인용한 사료(D)에 보이는 탄재필형 에서 섭치는 북송관요의 설립에 대해서 政 和 間, 京 師 自 置 窯 燒 造, 名 曰 官 窯 라고 언급하였다([ 元 ] 陶 宗 儀 撰 1959: 362-363). 京 師 는 지리적 개념으로 오늘날의 開 封 市 에 해당하는 東 京 을 가리킨다는 견해와 북송의 조정 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는데, 두 견해에 대해서는 別 稿 에서 자세히 검토한 바 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되풀이하지 않기로 한다( 李 喜 寬 2010: 55-62). 이 기록에서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주목해 보아야 할 대목은 自 置 窯 燒 造 라고 생각한다. 自 置 窯 는 북송 의 조정이 스스로 요장을 설립하였다는 의미이다. 즉, 북송관요는 북송의 조정이 직접 새 로 설립한 요장이었다. 그러므로 이 탄재필형 의 내용을 부정하지 않는 한, 북송관요가 민요인 청량사여요를 접수한 것이라는 주장은 성립되기 어렵다. 21) 이 대목이 북송관요와 20) 이들의 견해에 대한 더욱 자세한 내용은 謝 明 良 2012: 207-209 참조. 21) 혹 북송의 조정이 청량사여요를 접수한 이후에 기존의 요장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 북송관요를 설립했을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볼 때, 실제에 있어서 그러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당시 북방지 역은 남방지역과 달리 요장의 입지조건이 그다지 까다롭지 않았다는 점이다. 남방지역은 일반적으로 窯 爐 가 龍 窯 이기 때문에 일 정한 경사도가 있는 곳이 아니면 사실상 요장을 설립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북방지역은 기본적으로 요로가 馬 蹄 型 이어서 평평한 곳이라면 어렵지 않게 요장을 설립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요업을 운영하고 있는 청량사여요를 접수하여 그것을 철거 하고 새로운 요장을 설립하였을까? 둘째, 만약 북송의 조정이 공어용 자기를 생산하던 청량사여요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요장(북송관요)를 설립하였다면, 이 요장에서 공어용 자기를 생산하던 성숙기단계 중간의 어느 시점의 遺 構 에서 새로운 요장을 설립한 흔적이 발견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요컨대, 청량사여요를 접수한 이후에 기존의 요장 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 북송관요를 설립했을 가능성은 배제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143

관련된 최초의 기록으로, 가장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북 송관요가 설립되고 난 후에도 청량사여요의 성격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청량사여요는 북송관요가 설립된 후에도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공어용 자기를 생산하는 민요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북송관요가 성립된 후 북송 어용자기의 생산체제는 사실상 여요(청량사 여요)와 북송관요의 二 元 的 인 체제로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관요체제가 확립되고 아울러 북송관요에서 전문적으로 어용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청량사여 요에서 여전히 공어용 자기를 생산하였다는 점을 다소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 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이원적인 어용자기 생산체제를 불가능한 것으로 간 주하여 그 자체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王 光 堯 2010: 99). 남송시기에도 그러 한 예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수내사관요와 교단하관요의 이원적인 어용자기 생산체제가 그것이다. 논문접수일(2015.4.17) 심사완료일(2015.6.2) 게재확정일(2015.6.16) 144 제23호

참 고 문 헌 李 喜 寬, 2012, 北 宋 汝 窯 와 그 性 格 問 題 - 宋 代 文 獻 記 錄 에 대한 再 檢 討 를 중심으로-, 역사와 담론 64, 237-279, 湖 西 史 學 會. 조선관요박물관 편, 2005, 靑 磁 의 色 과 形, 廣 州 : (재)세계도자기엑스포. 顧 文 璧, 1986, 建 窯 供 御, 進 琖 的 年 代 宣 和 遺 事 建 溪 異 毫 琖 正 誤, 東 南 文 化 1, 133-138, 南 京 博 物 院 東 南 文 化 雜 誌 社. 郭 葆 昌 編, 2003, 淸 高 宗 御 製 詠 瓷 詩 錄, 中 國 古 代 陶 瓷 文 獻 輯 錄 3, 北 京 : 全 國 圖 書 館 文 獻 縮 微 復 制 中 心. 權 奎 山, 2005, 江 西 景 德 鎭 明 淸 御 器 ( 窯 ) 廠 落 選 御 用 瓷 器 處 理 的 考 察, 文 物 5, 54-63, 文 物 出 版 社. 吉 林 省 博 物 館 等 ( 陳 相 偉 王 健 群 執 筆 ), 1973, 吉 林 哲 里 木 盟 庫 倫 旗 一 號 遼 墓 發 掘 簡 報, 文 物 8, 2-18, 文 物 出 版 社. 單 鵬, 2007, 宋 代 土 貢 制 度 考 略 以 常 貢 爲 中 心, 江 蘇 科 技 大 學 學 報 ( 社 會 科 學 版 ) 3, 27-32, 江 蘇 科 技 大 學., 2009, 述 宋 代 土 貢 之 特 點 以 元 豊 貢, 紹 興 貢 爲 中 心, 大 慶 師 範 學 院 學 報 1, 135-138, 大 慶 師 範 學 院. [ 元 ] 陶 宗 儀 撰, 1959, 南 村 輟 耕 錄, 中 華 書 局 點 校 本, 北 京 : 中 華 書 局. 穆 靑, 2002, 定 窯 藝 術, 石 家 庄 : 河 北 敎 育 出 版 社. 妙 濟 浩 薛 增 福, 1984, 河 北 曲 陽 北 鎭 發 現 定 窯 瓷 器, 文 物 5, 86-88, 文 物 出 版 社. 范 鳳 妹, 1986, 記 江 西 出 土 的 北 方 名 窯 瓷 器, 江 西 歷 史 文 物 2, 120-122, 江 西 省 博 物 館. 北 京 藝 術 博 物 館 編, 2012, 中 國 定 窯, 北 京 : 中 國 華 僑 出 版 社. 謝 明 良, 1987, 定 窯 白 瓷 槪 說, 定 窯 白 瓷 特 展 圖 錄, 3-33, 臺 北 : 國 立 故 宮 博 物 院., 2008, 金 銀 釦 陶 瓷 及 其 有 關 問 題, 陶 瓷 手 記, 161-175, 臺 北 : 石 頭 出 版., 2012, 北 宋 官 窯 硏 究 現 狀 的 省 思, 陶 瓷 手 記 2, 189-214, 臺 北 : 石 頭 出 版. 森 達 也, 2012, 汝 窯 與 南 宋 官 窯 燒 造 技 術 和 器 種 的 比 較, 故 宮 博 物 院 八 十 五 華 誕 宋 代 官 窯 及 官 窯 制 度 國 際 學 術 硏 討 會 論 文 集 上, 163-194, 北 京 : 故 宮 出 版 社. [ 淸 ] 徐 松 輯, 1957, 宋 會 要 輯 稿, 北 京 : 中 華 書 局. 徐 飇, 2007, 兩 宋 物 質 文 化 引 論, 南 京 : 江 蘇 美 術 出 版 社. 石 方 平, 2001, 定 瓷 有 芒 指 光 芒, 中 國 文 物 報 8월 22일, 中 國 文 物 報 社. 邵 國 田, 1999, 敖 漢 旗 羊 山 1 3 號 遼 墓 淸 理 簡 報, 內 蒙 古 文 物 考 古 1, 1-43, 內 蒙 古 文 物 145

考 古 硏 究 所. 孫 新 民, 1994, 宋 陵 出 土 的 定 窯 貢 瓷 試 析, 文 物 春 秋 3, 47-51, 文 物 春 秋 雜 誌 社. 沈 岳 明, 2010, 官 窯 三 題, 故 宮 博 物 院 院 刊 5, 16-25, 故 宮 博 物 院. 沈 一 東, 2007, 南 宋 官 窯 陶 質 祭 器 探 索, 東 方 博 物 24, 16-23, 浙 江 省 博 物 館., 2010, 南 宋 官 窯 陶 質 祭 器 器 物 屬 性 探 析, 東 方 博 物 34, 49-58, 浙 江 省 博 物 館. 呂 成 龍, 2001, 汝 窯 的 性 質 及 相 關 諸 問 題, 中 國 古 陶 瓷 硏 究 7, 39-47, 中 國 古 陶 瓷 硏 究 會. 王 建 保, 2012, 宋 徽 宗 棄 定 用 汝 的 背 景 因 素 探 討 以 定 窯 爲 中 心, 中 國 定 窯, 362-372, 中 國 華 僑 出 版 社. 王 光 堯, 2010, 汝 窯 與 北 宋 汴 京 官 窯 從 汝 窯 址 考 古 資 料 看 宋 代 官 窯 的 出 現 及 官 窯 制 度 的 形 成, 故 宮 博 物 院 院 刊 5, 90-100, 故 宮 博 物 院. [ 宋 ] 王 存 撰 ( 王 文 楚 魏 嵩 山 點 校 ), 1984, 元 豊 九 域 志, 北 京 : 中 華 書 局. 王 屹 峰, 2012, 近 年 發 現 南 宋 官 窯 陶 質 祭 器 的 初 步 整 理, 故 宮 博 物 院 八 十 五 華 誕 宋 代 官 窯 及 官 窯 制 度 國 際 學 術 硏 討 會 論 文 集 下, 339-354, 北 京 : 故 宮 出 版 社. 劉 建 華 徐 建 忠, 1990, 懷 安 縣 西 坪 山 發 現 遼 代 窖 藏 瓷 器, 文 物 春 秋 3, 91, 83, 文 物 春 秋 雜 誌 社. 劉 淼, 2006, 金 代 定 窯 瓷 器 的 硏 究, 南 開 大 學 博 士 學 位 論 文. 喩 珊, 2010, 出 土 定 窯 瓷 器 硏 究, 北 京 大 學 碩 士 學 位 論 文. 兪 永 柄, 1994, 宋 遼 金 紀 年 墓 葬 和 塔 基 出 土 的 瓷 器, 考 古 1, 74-93, 中 國 社 會 科 學 院 考 古 硏 究 所. 劉 靜 貞, 2008, 法 古? 復 古? 自 我 作 古? 宋 徽 宗 文 化 政 策 的 歷 史 觀 照, 開 創 典 範 : 北 宋 的 藝 術 與 文 化 硏 討 會 論 文 集, 447-469, 臺 北 : 國 立 故 宮 博 物 院. 陸 明 華, 2001, 寶 豊 汝 窯 出 土 標 本 及 有 關 問 題 探 討 - 兼 述 汝 州 市 文 廟 窯 址 的 屬 性, 中 國 古 陶 瓷 硏 究 7, 127-135, 中 國 古 陶 瓷 硏 究 會. [ 宋 ] 陸 游 ( 李 劍 雄 劉 德 權 點 校 ), 1979, 老 學 庵 筆 記, 北 京 : 中 華 書 局. 李 建 毛, 2001, 汝 窯 及 相 關 問 題 三 則, 中 國 古 陶 瓷 硏 究 7, 59-64, 中 國 古 陶 瓷 硏 究 會. 李 仲 謨, 2005, 上 海 博 物 館 藏 宋 金 定 窯 白 瓷 及 相 關 問 題, 中 國 古 代 白 瓷 國 際 學 術 硏 討 會 論 文 集, 387-399, 上 海 : 上 海 書 畵 出 版 社. 李 曉, 2004, 王 安 石 市 易 法 與 政 府 購 買 制 度, 歷 史 硏 究 6, 54-68, 中 國 社 會 科 學 院., 2007, 宋 朝 政 府 購 買 制 度 硏 究, 上 海 : 上 海 人 民 出 版 社. 李 曉 姜 雪 燕, 2006, 宋 朝 政 府 購 買 制 度 中 的 承 包 制, 學 術 硏 究 11, 106-112, 廣 東 省 社 會 科 學 聯 合 會. 李 鑫, 2012, 定 窯 分 期 硏 究, 北 京 大 學 碩 士 硏 究 生 學 位 論 文. 146 제23호

李 喜 寬, 2010, 北 宋 官 窯 與 京 師 及 惟 用 汝 器 - 北 宋 官 窯 硏 究 序 說, 故 宮 博 物 院 院 刊 5, 55-72, 故 宮 博 物 院. 林 柏 亭 主 編, 2006, 大 觀 北 宋 繪 畫 特 展, 臺 北 : 國 立 故 宮 博 物 院. 張 邦 煒, 2005, 宋 徽 宗 角 色 錯 位 的 來 由, 宋 代 政 治 文 化 史 論, 226-241, 北 京 : 人 民 出 版 社. 張 栢 主 編, 2008, 中 國 出 土 瓷 器 全 集 2, 北 京 : 科 學 出 版 社. [ 宋 ] 莊 綽 撰 ( 蕭 魯 陽 點 校 ), 1983, 鷄 肋 編, 北 京 : 中 華 書 局. 張 增 午 李 銀 錄, 2002, 河 南 林 州 市 北 宋 墓 葬 出 土 陶 瓷 器 考 略, 中 國 古 陶 瓷 硏 究 8, 84-93, 中 國 古 陶 瓷 學 會. 鄭 嘉 勵, 2005, 定 窯 尙 食 局 款 瓷 器 及 有 芒 不 堪 用, 中 國 古 陶 瓷 硏 究 11, 256-260, 中 國 古 陶 瓷 學 會., 2006, 北 宋 官 窯 形 成 的 文 獻 考 察, 故 宮 博 物 院 院 刊 6, 40-44, 故 宮 博 物 院. 鄭 建 華, 1999, 越 窯 貢 瓷 與 相 關 問 題, 紀 念 浙 江 省 文 物 考 古 硏 究 所 建 所 二 十 周 年 論 文 集, 174-201, 杭 州 : 西 泠 印 社. 鄭 隆, 1961, 昭 烏 達 盟 遼 尙 暐 符 墓 淸 理 簡 報, 文 物 9, 50-51, 文 物 出 版 社. 中 國 硅 酸 鹽 學 會 編, 1982, 中 國 陶 瓷 史, 北 京 : 文 物 出 版 社. 中 國 社 會 科 學 院 考 古 硏 究 所 等, 1996, 南 宋 官 窯, 北 京 : 中 國 大 百 科 全 書 出 版 社. 秦 大 樹, 2012, 定 窯 的 歷 史 地 位 及 考 古 工 作, 中 國 定 窯, 256-271, 中 國 華 僑 出 版 社. 陳 文 平, 1990, 中 國 古 陶 瓷 鑑 賞, 上 海 : 上 海 科 學 普 及 出 版 社. 陳 芳 妹, 2001, 宋 古 器 物 學 的 興 起 與 宋 仿 古 銅 器, 國 立 臺 灣 大 學 美 術 史 硏 究 集 刊 10, 37-160, 國 立 臺 灣 大 學 藝 術 史 硏 究 所. 靳 靑 萬, 2007, 宋 徽 宗 文 會 圖 中 所 繪 瓷 器 辨 析, 漳 州 師 範 學 院 學 報 ( 哲 學 社 會 科 學 版 ) 4, 102-106, 漳 州 師 範 學 院. 蔡 玟 芬, 1977, 定 窯 瓷 器 之 硏 究, 國 立 臺 灣 大 學 歷 史 硏 究 所 ( 藝 術 史 組 ) 碩 士 論 文., 1997, 論 定 州 白 瓷 器, 有 芒 不 堪 用 句 的 眞 確 性 及 十 二 世 紀 官 方 瓷 器 之 諸 問 題, 故 宮 學 術 季 刊 15(2), 63-102, 國 立 故 宮 博 物 院. 天 津 市 歷 史 博 物 館 考 古 隊 等 ( 紀 烈 敏 執 筆 ), 1989, 天 津 薊 縣 獨 樂 寺 塔, 考 古 學 報 1, 83-119, 中 國 社 會 科 學 院 考 古 硏 究 所. 肖 發 標, 2006, 再 論 張 昻 監 造 貢 瓷 的 燒 造 年 代 兼 李 放 先 生 商 榷, 故 宮 博 物 院 院 刊 6, 29-39, 故 宮 博 物 院. [ 元 ] 脫 脫 等 撰, 1977, 宋 史, 中 華 書 局 點 校 本, 上 海 : 新 華 書 店 上 海 發 行 所. 彭 善 國, 2008, 定 窯 瓷 器 分 期 新 探 以 遼 墓, 遼 塔 出 土 資 料 爲 中 心, 內 蒙 古 文 物 考 古 2, 41-49, 內 蒙 古 文 物 考 古 硏 究 所. 147

彭 信 威, 1958, 中 國 貨 幣 史, 上 海 : 上 海 人 民 出 版 社. 馮 永 謙, 1983, 遼 寧 法 庫 前 山 遼 肖 袍 魯 墓, 考 古 7, 624-635, 中 國 社 會 科 學 院 考 古 硏 究 所. 河 南 省 文 物 考 古 硏 究 所 編, 1997, 北 宋 皇 陵, 鄭 州 : 中 州 古 籍 出 版 社. 河 南 省 文 物 考 古 硏 究 所, 2008, 寶 豊 淸 凉 寺 汝 窯, 鄭 州 : 大 象 出 版 社., 2009, 汝 窯 與 張 公 巷 窯 出 土 瓷 器, 北 京 : 科 學 出 版 社, 河 北 省 文 物 管 理 處 ( 石 永 土 執 筆 ), 1986, 河 北 易 縣 淨 覺 寺 舍 利 塔 地 宮 淸 理 記, 文 物 9, 76-80, 83, 文 物 出 版 社. 韓 巍, 2006, 宋 代 仿 古 製 作 的 樣 本 問 題, 宋 韻 四 川 窖 藏 文 物 輯 粹, 288-296, 北 京 : 中 國 社 會 科 學 出 版 社, 杭 州 南 宋 官 窯 博 物 館 編, 2010, 淸 雅 南 宋 瓷 器 精 品, 北 京 : 中 華 書 局. 胡 雲 法 金 志 偉, 2005, 定 窯 白 瓷 銘 文 與 南 宋 宮 廷 用 瓷 之 我 見, 中 國 古 代 白 瓷 國 際 學 術 硏 討 會 論 文 集, 285-300, 上 海 : 上 海 書 畵 出 版 社. 胡 志 剛, 2005, 對 北 京 出 土 邢, 定, 龍 泉 務 窯 白 瓷 的 幾 點 認 識, 中 國 古 代 白 瓷 國 際 學 術 硏 討 會 論 文 集, 349-356, 上 海 : 上 海 書 畵 出 版 社. 尾 崎 洵 盛, 1955, 汝 窯 考, 大 和 文 華 16, 25-33, 大 和 文 華 館. 秦 大 樹 外, 2013, 定 窯 の 歷 史 的 位 置 づけと 考 古 發 掘 の 新 たな 成 果, 定 窯 優 雅 なる 白 の 世 界 窯 址 發 掘 成 果 展, 27-53, 神 奈 川 : 株 式 會 社 アサヒワールド. 海 のシルクロードの 出 發 點 福 建 展 開 催 實 行 委 員 會 編, 2008, 東 アジアの 海 とシルクロー ドの 據 點 福 建, 愛 知 : 海 のシルクロードの 出 發 點 福 建 展 開 催 實 行 委 員 會. 148 제23호

Ru Kiln and Huizong The Establishment of Ru Kiln in the North Song Dynasty and Its Significance Hee-gwan Lee (former Chief Curator of Horim Museum) Tan Zhai Bi Heng ( 坦 齋 筆 衡 ) and Lao Xue Yan Bi Ji( 老 學 庵 筆 記 ) picked You Mang( 有 芒 ) of Ding wares as an opportunity to establish Ru kiln. Mang( 芒 ) means Mang Kou( 芒 口 ). it was Mang Kou( 芒 口 ) of Ding wares that directly led to the establishment of Ru kiln. Ru kiln was highly likely to be established between the era of Daguan (1107~1110) to the first half of the ear of Zhenghe (1111~1114) under the reign of Emperor Huizong. Not only the mainstream of imperial wares changed from Ding wares to Ru wares due to the establishment of Ru kiln, but also the key procurement method altered from purchasing to preparation in request ( 製 樣 須 索 ), a kind of on-demand supply. Ru kiln was established within the huge framework of reformation of manners ( 禮 制 改 革 ) under the reign of Emperor Huizong. Ru kiln started to make a clear boundary between the ceramic wares used by the imperial family, courtiers and commoners. In this sense, the establishment of Ru kiln was an unprecedented reform in the development process of imperial ware. Emperor Huizong led the reform and successfully completed it based on his mighty political power. Key words : Ru kiln, establishment, You Mang( 有 芒 ), preparation in request ( 製 樣 須 索 ), Huizong 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