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ㆍ 大 韓 政 治 學 會 報 ( 第 20輯 1 號 ) 도에서는 고려 말에 주자학을 받아들인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국가적인 정책을 통해 민간에까지 보급되면서 주자 성리학의 심 화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1)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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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 내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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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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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군 관광종합개발계획 제6장 관광(단)지 개발계획 제7장 관광브랜드 강화사업 1. 월출산 기( 氣 )체험촌 조성사업 167 (바둑테마파크 기본 계획 변경) 2. 성기동 관광지 명소화 사업 마한문화공원 명소화 사업 기찬랜드 명소화 사업 240

israel-내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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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출 문 환경부장관 귀하 본 보고서를 폐기물관리 규제개선 방안연구 에 관한 최종보고서로 제출합니다 연구기관 한국산업폐기물처리공제조합 연구책임자 연 구 원 연구보조원 이 남 웅 황 연 석 은 정 환 백 인 근 성 낙 근 오 형 조 부이사장 상근이사 기술팀장 법률팀장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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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rk License Administrator 4.0 사용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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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내지-8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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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립 중앙 도서 관 출 판시 도서 목록 ( C I P ) 청소년 인터넷 이용실태조사 보고서 / 청소년보호위원회 보호기준과 편. -- 서울 : 국무총리 청소년보호위원회, p. ; cm. -- (청소년보호 ; ) 권말부록으로 '설문지' 수록 I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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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2시간 되는 거리를 매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으나, 저는 다니는 동안 나름의 체력이 길러졌다고 생각합니다. 지하철로 이동하는 약 40분 정도 시간 동안 강의를 녹음한 것을 들으면서 굳이 책을 보지 않고도 강의를 복 습함으로써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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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 畿 鄕 土 史 學 第 16 輯 韓 國 文 化 院 聯 合 會 京 畿 道 支 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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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출 문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 귀하 이 보고서를 연구용역사업 공공갈등의 정치화 경로분석 및 대응방안 연구 과제의 최종보고서로 제출합니다. 2014년 12월 단국대학교 산학협력단장 박 성 완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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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 7월 24월이면 세월호 대참사가 발생한지 100일째다! 그 동안 우리는 실종자들 모두가 가족 품으로 돌아오고, 세월호 참사의 원인과 책임이 밝혀지길 소망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10명의 실종자가 바다 속 어딘가에서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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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보고 항쟁 구술기록 수집 연구용역 최종보고서 연구 책임자 :김주관(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원) 연 구 원 :신동호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연구위원) 연구 보조원 :박재홍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연구원) 행정,촬영지원 :엄경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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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 신권 교재 1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발행

09 강제근로의 금지 폭행의 금지 공민권 행사의 보장 중간착취의 금지 41 - 대판 , 2006도7660 [근로기준법위반] (쌍용자동차 취업알선 사례) 11 균등대우의 원칙 43 - 대판 , 2002도3883 [남녀고용평등법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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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메디치 효과와 창의성 네트워크 사회를 설명하는 법칙 중 카오의 법칙 라는 것이 있다 네트워크에서의 창의성은 네트워크의 다양성에 비례한다 는 법칙 이다 네트워크를 통해 다양한 생각과 관심이 만나면 그 속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고 창의성이 발현될 수 있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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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니 내지-00-5

지급14 01-도비라및목차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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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치학회보 20집 1호 2012년 6월: 77~99 세종과 소학( 小 學 ) : 민풍( 民 風 ) 과 사풍( 士 風 ) 의 교화* 1) 박홍규 ㆍ송재혁 고려대학교 요 약 2 기존 소학 에 대한 연구들은 주로 중종( 中 宗 ) 시대 사림( 士 林 ) 과의 연관선상에서 소학 의 의미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소학 에 대한 존숭 의식은 이미 조선 전기 관학파들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실천윤리를 강조하고 있는 소학 책의 성격을 고려해 본다면, 소학 은 사변적 측면을 강조했던 사림 시기의 유학보다는 오 히려 조선 전기의 실천적인 유학과 더 정합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사림보다 앞선 시기, 그 중에서도 특히 세종( 世 宗 ) 시대에 이루어졌던 소학 보급의 양상을 확인하고, 그 속에서 소학 이 가지고 있었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논문에서는 민풍( 民 風 ) 과 사풍( 士 風 ) 이라는 개념에 주목할 것이다. 소 학 의 대상은 민( 民 ) 과 사( 士 ) 의 두 계층으로 나뉠 수 있으며, 소학 은 이러한 인민의 풍속과 선비 및 관료의 기풍을 교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세종시 대에는 수성기로 진입했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민풍과 사풍의 문제 를 해결해기 위해 소학 을 통한 교화가 시도되고 있다. 특히 본 논문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사표( 師 表 ) 로서의 세종( 世 宗, 재위 1418 1452) 의 역할이다. 세종은 학문과 수기를 통해 정치의 장에서 신하들보다 우위를 확보 했으며, 이를 통해 사표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고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소학 을 보급했 다. 세종시대 소학 의 보급에는 군주와 신하로 이루어진 권력관계 속에서 군주로서의 권위를 확립하고 정치를 주도해 나가는데 소학 이 활용되었던 측면이 존재했던 것이 다. 이러한 세종시대 소학 보급의 양상은 중종시대에 사림들이 소학 을 보급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제어 : 세종( 世 宗 ), 소학( 小 學 ), 민풍( 民 風 ), 사풍( 士 風 ), 교화( 敎 化 ) I. 머리말 중국 송( 宋 ) 대에 주자학이 흥행하면서, 소학( 小 學 ) 은 대학( 大 學 ) 을 공부하기 이전의 유학ㆍ 주자학 학습의 기본 교재 역할을 담당하는 중요한 경전으로 인식되어 왔다. 한반 * 이 논문은 2012년도 두뇌한국 21 사업에 의하여 지원되었음 (BK21-2012- 인09A1408). - 77 -

2 ㆍ 大 韓 政 治 學 會 報 ( 第 20輯 1 號 ) 도에서는 고려 말에 주자학을 받아들인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국가적인 정책을 통해 민간에까지 보급되면서 주자 성리학의 심 화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1) 조선시대의 소학 에 관한 기존 연구는 주로 사림( 士 林 ) 과의 연관선상에서 이루어져 왔 다. 여기에는 주자학을 체화하고 있었던 사림이 등장한 이후에야 본격적인 소학 의 보급 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시각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림이 중앙 정계에 등 장하기 전, 즉 중종( 中 宗, 1488 1544) 이전의 소학 보급의 모습은 경시되어 왔다. 2) 중종시대에 소학 존숭의 분위기가 나타나는데 있어 사림의 노력이 주요한 요인이 되 었다 할지라도, 사림이 중앙 정계에 등장하기 이전까지 이루어졌던 일련의 소학 보급 이 그 기반이 되었다는 사실을 폄하할 수는 없다. 또한 비록 사림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 한다 하더라도 이른바 관학파들의 주자 성리학에 대한 인식을 살펴본다면, 조선 초기부 터 이루어진 소학 의 보급이 주자학에 대한 이해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 을 것이다. 여기에 조선 초기 유학의 실천적인 성격을 고려해본다면, 3) 리( 理 ) 보다는 사 ( 事 ) 의 교육을 통하여 생활 속의 실천윤리를 강조했던 소학 은 오히려 조선 초기 유학 자들과 친화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종중시대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인 조광조 ( 趙 光 祖, 1482 1519) 는 경연에서 중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8 세가 되어 소학 을 배우기 시작하면 동몽의 교양이 지극히 바르고 지수( 持 守 ) 하는 것이 굳게 정해지나, 후세에는 대학 과 소학 이 전부 폐퇴하였으므로 인 재가 나지 않고, 혹 호걸스런 선비가 있어서 그것을 일으키더라도 그 학술은 대개 부족하 1) 소학 에 관한 연구 중에서 이러한 논지를 주장하고 있는 논문으로는 대표적으로 이수건의 朝 鮮 時 代 小 學 敎 育 에 대하여 ( 嶺 南 大 論 文 集 제2 집, 1969) 와 김준석의 朝 鮮 前 期 의 社 會 思 想 - 小 學 의 社 會 的 機 能 分 析 을 中 心 으로 ( 東 方 學 誌 제29 집, 1981) 를 들 수 있다. 특히 이수건의 연구는 조선 전기의 소학 교육에 관한 서설적 연구로서, 소학 의 출전을 상세히 밝히면서 조선의 유교사회화의 한 원인으로 소 학 교육의 숭상과 보급을 제시하고 있다. 2) 예를 들면, 박연호는 조선 전기의 소학 보급은 솔선수범을 보일 수 있는 사표가 존재하지 않았고, 단순 히 제도와 법령과 같은 강제에 의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 박연호, 1981, 朱 子 學 의 根 本 培 養 說 과 朝 鮮 前 記 의 小 學 敎 育, 淸 溪 史 學 제2 집, 82 쪽). 이춘호도 비슷한 견 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춘호, 1998, 朝 鮮 朝 前 期 의 小 學 敎 育 에 關 한 硏 究, 漢 字 漢 文 敎 育 제4 집, 201-202 쪽). 3) 문철영은 원( 元 ) 의 관학이 노제( 魯 齌 ) 허형( 許 衡 ) 을 중심으로 주자성리학의 실천윤리 측면을 우선 수용했 으며, 이를 받아들인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의 신유학 역시 거경( 居 敬 ) 중심의 실천적 성격을 가지게 되 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문철영, 1984, 朝 鮮 初 期 의 新 儒 學 수용과 그 性 格, 韓 國 學 報 제10집 3 호, 32-40 쪽). 이는 중종 이후의 사림이 궁리( 窮 理 ) 중심의 사변적 측면을 중시했던 것과는 차별되는 점이 라 할 수 있다. - 78 -

세종과 소학( 小 學 ) : 민풍( 民 風 ) 과 사풍( 士 風 ) 의 교화 ( 박홍규 ㆍ 송재혁) ㆍ 3 니, 이 책을 궁벽한 촌간에까지 보급한 후에야, 사람들이 모두 효도로 아비를 섬기고 충성 으로 임금을 섬길 줄 알아서 선후와 차서가 분명히 갖추어질 것입니다. 세종조 ( 世 宗 祖 ) 에서는 오로지 소학 의 도( 道 ) 에 마음을 썼으므로 책도 중외( 中 外 ) 에 반 포하였는데, 근래는 사람들이 읽지 않을 뿐 아니라 책도 아주 없어졌으며, 뜻이 있는 선비 들까지도 몸소 행하기를 꺼립니다. 대사성 ( 大 司 成 ) 유운( 柳 雲 ) 이 바야흐로 소학 을 가르치 므로, 관중( 館 中 ) 과 사학( 四 學 ) 으로부터 여항( 閭 巷 ) 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를 따르고,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 ( 金 安 國 ) 도 도내의 선비에게 읽어 익히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상께서 단연코 그것을 읽으시면, 사림( 士 林 ) 이 듣고서 고무 진작되어 다스려지게 하는 바른 방도를 얻게 될 것입니다 ( 중종실록 12년 9월 13 일). 조광조는 중종에게 소학 의 강독을 요구하면서, 세종시대에 이루어졌던 소학 보급 을 모범적인 사례로 언급하고 있다. 사림 등장 이전에도 분명 소학 의 보급은 이루어지 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세종시대에는 수성기로 진입했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대두하기 시작한 교화( 敎 化 ) 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학 의 보급이 두드러지게 시도되고 있다. 이 글은 세종시대에 이루어졌던 소학 보급의 양상을 확인하고, 그 속에서 소학 이 가지고 있었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논문에서는 민풍( 民 風 ) 과 사풍 ( 士 風 ) 이라는 개념에 주목할 것이다. 소학 의 대상은 민( 民 ) 과 사( 士 ) 두 계층으로 나뉠 수 있으며, 적으로 한다. 소학 은 이러한 인민의 풍속과 선비 및 관료의 기풍을 교화시키는 것을 목 세종시대에 들어 관리들의 부패가 문제로 대두되고, 백성들의 사회범죄 역시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책의 일환으로 세종은 소학 보급을 통한 민풍과 사풍의 교화를 시도했다. 세종은 교육기관의 정비와 함께 소학 교재를 보급하고, 모범을 통해 권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소학 교육에 대한 법령을 강화한다. 또한 당시 일반 백성들 에게는 언어의 한계가 존재했기 때문에, 세종은 소학 의 이념 중에서도 인륜에 주목하 여 삼강행실도 ( 三 綱 行 實 圖 ) 를 간행하여 교화정책을 펴나가고 있다. 특히 본 논문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사표( 師 表 ) 로서의 세종( 世 宗, 재위 1418 1452) 의 역할이다. 세종은 학문과 수기를 통해 정치의 장에서 신하들보다 우위를 확보했으며, 이를 통해 사표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고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소학 을 보급했다. 세종시 대 소학 의 보급에는 군주와 신하로 이루어진 권력관계 속에서 군주로서의 권위를 확립 하고 정치를 주도해 나가는데 소학 이 활용되었던 측면이 존재했다. 이것은 중종시대에 사림들이 소학 을 보급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4) 4) 기존 연구에서 주목하고 있었던 중종시대 사림은 사풍의 광정에 역점을 두고 있었지만, 민풍의 교화도 염 - 79 -

4 ㆍ 大 韓 政 治 學 會 報 ( 第 20輯 1 號 ) II. 소학 에서의 민풍( 民 風 ) 과 사풍( 士 風 ) 주희( 朱 熹, 1130 1200) 는 소학 의 머리말인 소학서제 ( 小 學 書 題 ) 를 통해, 소학 을 편찬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날 소학교에서 사람을 가르치되, 물 뿌리고 쓸며 응하고 대답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절[ 灑 掃 應 對 進 退 之 節 ] 과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스승을 높이고 벗을 친히하 는 도리[ 愛 親 敬 長 隆 師 親 友 之 道 ] 로써 하였으니, 이는 모두 몸을 닦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히 하는 근본[ 修 身 齊 家 治 國 平 天 下 之 本 ] 이 되는 것이다 ( 小 學 書 題 ). 주희에 의하면, 옛날 소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쇄소( 灑 掃 ), 응대( 應 對 ), 진퇴( 進 退 ) 와 같 은 간단한 예절과 애친( 愛 親 ), 경장( 敬 長 ), 융사( 隆 師 ), 친우( 親 友 ) 의 비근한 방도를 가르 쳤다. 5) 언뜻 보기에 단순해 보이는 이러한 소학의 과정은, 후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 ( 修 身 齊 家 治 國 平 天 下 ), 즉 대학의 과정을 습득할 수 있는 기반으로서 중요성을 가진다. 이에 그는 교육의 원칙을 세운다는 입교( 立 敎 ), 인륜을 밝힌다는 명륜( 明 倫 ), 몸가짐을 공경히 한다는 경신( 敬 身 ) 의 3 가지 기본 강령과 함께, 중국 춘추시대 이전의 고대로부터 삼강령 의 실례를 든 계고( 稽 考 ) 편을 합쳐 내편을 구성하고, 여기에 중국 한( 漢 ) 대 이후의 가언 ( 嘉 言 ) 과 선행( 善 行 ) 중에서 선별하여 입교ㆍ 명륜ㆍ 경신의 삼강령을 실증한 외편을 합쳐 소학 을 편찬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소학 이 교화( 敎 化 ) 에 기여하기를 희망했다. 소학 의 첫 번째 강령인 입 교( 立 敎 ) 편은 다음과 같은 중용( 中 庸 ) 의 수장을 머리말로 제시하고 있다. 자사자 ( 子 思 子 ) 가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명령해 준 것을 성( 性 ) 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 道 ) 라 하고, 도를 품절( 品 節 ) 한 것을 교( 敎 ) 라고 한다. 하셨다. 하늘의 밝은 명( 明 命 ) 을 본받고 성인( 聖 人 ) 의 법을 따라 이 책을 지어 스승이 된 자로 하여금 가르칠 바를 알게 하며 제자로 하여금 배울 바를 알게 하노라( 小 學, 立 敎 第 一 ). 주희는 인간이 수신( 修 身 ) 을 통해 사사로운 인욕( 人 欲 ) 을 극복하고 공공의 천리( 天 理 ) 로 돌아가 현실의 공리( 功 利 ) 의 세계를 넘어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이러한 세계 두에 두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6 장에 후술한다. 5) 이것들을 소학 에서는 삼절( 三 節 ), 사도( 四 道 ) 라고 칭하며, 주요한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 80 -

세종과 소학( 小 學 ) : 민풍( 民 風 ) 과 사풍( 士 風 ) 의 교화 ( 박홍규 ㆍ 송재혁) ㆍ 5 의 가능성을 성( 性 ), 즉 인간의 선한 본성에서 찾았다. 하지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품 부받은 기질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본성을 깨우치는데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인간의 본성을 먼저 깨우친 사람, 즉 성인( 聖 人 ) 이 나서서 사람과 물건이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따라 품절하여 천하에 제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주희가 소학 의 입교 편에서 제시하 는 교( 敎 ) 이다. 주희는 대학 서문에서 자신이 이상시하는 삼대( 三 代 ) 성인의 교육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늘이 생민을 내림으로부터 이미 인의예지 ( 仁 義 禮 智 ) 의 성( 性 ) 을 부여하지 않음이 없건 마는 그 기질을 받은 것이 간혹 같지 못하다. 이 때문에 모두 그 본성의 고유함을 알아 온 전히 함이 있지 못한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총명하고 예지하여 그 본성을 다할 수 있는 자가 그 사이에 나오면 하늘이 반드시 그에게 명하시어 억조 만백성의 군주와 스승[ 君 師 ] 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백성을 다스리고 가르쳐서 그 본성을 회복하게 하시니, 이는 복희 ( 伏 羲 ), 신농( 神 農 ), 황제( 黃 帝 ), 요( 堯 ), 순( 舜 ) 이 하늘의 뜻을 이어 법칙을 세우고 사도( 司 徒 ) 의 직책과 전악( 典 樂 ) 의 벼슬을 설치한 이유이다 ( 大 學 章 句 序 ). 이어서 주희는 요( 堯 ) 와 순( 舜 ) 같은 성왕이 펼쳤던 삼대의 교육 내용에 대해 설명한 다. 왕궁과 국도로부터 여항( 閭 巷 ) 에 이르기까지 학교가 있지 않은 곳이 없어, 사람이 태어 나 8세가 되면 왕공으로부터 서인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학에 들어가게 해서 이들에 게 물 뿌리고 청소하며 응하고 대답하며 나아가고 물러가는 예절[ 灑 掃 應 對 進 退 之 節 ] 과 예 악사어서수의 문[ 禮 樂 射 御 書 數 之 文 ] 을 가르치고, 15세가 되면 천자의 원자ㆍ 중자로부터 공 경ㆍ대부 ㆍ원사의 적자와 일반 백성의 준수한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학( 大 學 ) 에 들어가 게 해서 이들에게 이치를 궁구하고, 마음을 바루며, 자신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방법을 가 르쳤다( 大 學 章 句 序 ). 그에 의하면 삼대의 교육에서 소학의 과정은 후일 대학에서의 교육에 근본이 되는 것 이었지만, 주( 周 ) 나라가 쇠함에 이르러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 聖 賢 之 君 ] 가 나오지 않아 학교( 學 校 ) 의 정사가 닦이지 않아서 교화가 침체되고 풍속이 무너졌다고 한다( 大 學 章 句 序 ). 시골에는 좋은 풍속이 없고[ 鄕 無 善 俗 ] 세상에는 훌륭한 인재가 없어서 [ 世 乏 良 材 ], 사람들은 이익을 위한 욕심으로 가득하고 세간에는 이단( 異 端 ) 의 말이 난무하게 되었다 ( 小 學 題 辭 ). 이 때문에 주희는 성인이 다스리던 삼대( 三 代 ) 의 이상적인 교육의 구현을 목표로 삼고 소학 을 저술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당대의 풍속을 선하게 하고, 세 - 81 -

6 ㆍ 大 韓 政 治 學 會 報 ( 第 20輯 1 號 ) 상에 인재가 넘쳐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러한 주희의 복안에 의하면, 소학 은 두 가지 대상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그 첫 번째 대상은 민( 民 ) 이다. 소학 은 입교( 立 敎 ), 명륜( 明 倫 ), 경신( 敬 身 ) 이라는 세 가지 강령을 통해 쇄소응대 ( 灑 掃 應 對 ) 의 소절( 小 節 ) 이나 효제충신 ( 孝 悌 忠 信 ) 의 도를 가르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는 실천윤리의 강조를 통해 근본적인 인간의 교화를 모색하였고, 풍속을 교화하는 [ 風 敎 ] 출발점으로 삼으려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소학 의 일차적인 대상은 민( 民 ), 즉 백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성들의 풍속, 즉 민풍( 民 風 ) 의 교 화를 통해 삼대의 이상사회로 이르는 기초로서 소학 을 편찬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학 은 또 다른 대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 바로 백성을 다스릴 관 료예비군, 즉 사( 士 ) 계층이다. 주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반드시 성현( 聖 賢 ) 이 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 분 성현을 높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낮추어 보기 때문에, 성현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데 만약 성현이 본래 자질이 높아서 이미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면, 밤낮으로 노력하는 것 은 자신의 직분을 넘어서는 특별한 일이기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되고, 해도 된다. 그러나 성 현이 품부받은 본성은 보통 사람과 같다. 이미 보통 사람과 같은데, 어찌 성현이 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이 생겨난 뒤로 수많은 사람이 태어났지만, 자신의 본성을 다하려고 노력한 사람은 수천만 명 가운데 한두 사람도 되지 않으며, 함께 부대끼며 한 세상을 그럭저럭 살아갈 뿐이다( 朱 子 語 類, 卷 第 八, 學 二, 總 論 爲 學 之 方 ). 주자학은 성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학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목표를 이룰 수는 없다. 인간에게는 기질의 차이가 존재한다. 일반 백성들의 경우, 이러한 공부는 기껏해야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윤리의 습득 차원에 머무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백성들을 다스리 게 될 관료예비군으로서의 사 계층은 학문 그리고 수기( 修 己 ) 를 통해 백성들의 모범이 될 것이 요구된다. 유가 경전의 기록 속에서 보이는 뛰어난 정치가들은 먼저 자신의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수기치인 ( 修 己 治 人 ) 의 전형을 보여준다. 주희에 의해 편찬된 소학 역시 단순히 백성의 교화만을 염두에 두고 않고, 나아가 미래에 위정자가 될 인재들을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소학 의 경신( 敬 身 ) 편과 이후의 외편의 내용들은 주희가 이러한 관료예비군들을 염 두에 두고 책을 편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먼저 경신 편의 경우 심술( 心 術 ), 위의( 威 儀 ) 등 선비들이 갖추어야 하는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주로 다루고 있어 수신의 대법 이라고 평가되며, 대학 으로 이어지는 교두보라 할 수 있다. 또한 외편을 이루고 있는 가언( 嘉 - 82 -

세종과 소학( 小 學 ) : 민풍( 民 風 ) 과 사풍( 士 風 ) 의 교화 ( 박홍규 ㆍ 송재혁) ㆍ 7 言 ) 과 선행( 善 行 ) 편의 내용들은 대부분 이정전서 ( 二 程 全 書 ), 송조명신언행록 ( 宋 朝 名 臣 言 行 錄 ), 온공가범 ( 溫 公 家 範 ) 등 중국 송대 사대부들의 기록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러 한 소학 의 편제는 당시의 사풍( 士 風 ) 을 이학풍 ( 理 學 風 ) 으로 유도하고자 하는 주희의 의 도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III. 세종시대 소학 보급의 배경 1418년 8월 8 일,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하였다. 이것은 조선 초기의 태조의 찬탈, 태종 의 정변 등으로 점철된 권력정치의 종언을 선언하는 사건이었다. 이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택현( 擇 賢 ) 이다. 태종은 양녕을 폐위하면서 택현 을 이유로 양녕의 아들이나 자신의 둘째인 효령을 제쳐두고, 셋째인 충녕을 세자로 삼았다. 충녕을 세자로 정한 이유로 태종은 학문을 좋아한다 [ 好 學 ] 는 점과 통치의 요체를 안다[ 識 治 體 ] 는 점을 들고 있다( 태종실록 18년 6월 3 일). 이것은 태종이 자신을 이을 군주의 자질로서, 유가 적 정체성과 함께 뛰어난 국정 운영능력을 요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태종은 앞 으로의 시대가 자신과는 다른 새로운 시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태종은 세종 이 즉위한 후 다음과 같이 공언하고 있다. 왕위를 전한다 해도 만일 적당한 사람[ 其 人 ] 을 얻지 못하였다면, 비록 시름을 잊고자 하 나 어찌 가능하겠는가. 주상은 참으로 문을 지켜 태평을 열어갈 임금[ 守 文 太 平 之 主 ] 이다( 세 종실록 즉위년 8월 18 일). 주상은 문을 지킬 임금[ 守 文 之 主 ] 이니, 경들은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보좌하라 ( 세종실 록 즉위년 11월 16 일). 태종은 자신 이후의 시기를 수문( 守 文 ) 6)의 시대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태종에 의한 세종의 즉위는 셋째인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다는 유가적 종통의 문제가 있긴 했지만, 건국 이후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태종의 기대에 보답하여, 양위를 받은 세종은 즉위하면서 교서를 통해 발정시인 ( 發 政 施 仁 ) 7)을 6) 守 文 이란 문을 지킨다, 선조의 법칙을 따른다, 선조의 위업을 계승하여 나라를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7) 맹자 양혜왕 하 5 장에 나오는 말로, 맹자가 제( 齊 ) 나라의 선왕( 宣 王 ) 에게 주( 周 ) 문왕( 文 王 ) 의 왕도정치 ( 王 道 政 治 ) 를 설명하면서 사용한 용어이다. - 83 -

8 ㆍ 大 韓 政 治 學 會 報 ( 第 20輯 1 號 ) 제시하며 인정( 仁 政 ) 을 표방하였다. 즉위년 11월에 세종은 중앙과 지방의 신료들에게 시 행해야할 것들로써 농상, 학교, 수령, 빈민, 조세, 형벌, 탐관오리, 정표의 8가지 조목으로 유시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세종이 어떠한 정치를 추구했는지를 보여 준다. 극심한 가뭄과 흉년 등의 자연재해 속에서도 세종이 표방한 인정은 실효를 거두어, 세 종 9 년에 이르면 지금은 태평한 세월이 오래 되어[ 今 昇 平 日 久 ]( 세종실록 9년 4월 4일) 라든가 지금 무사태평한 때를 당하여 [ 今 當 治 平 無 事 之 時 ]( 세종실록 9년 10월 8 일) 와 같은 기록이 빈번하게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기록들은 당시에 국가가 안정되었다는 인식이 보편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정치가 세종의 집권이라는 측면에서, 기본적인 백성의 삶을 보장하고 왕권의 안정화를 이루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제도화의 측면으로, 태조와 태종의 권력정치 속 에서도 진행되었던 유교적 제도화가 세종시대에 성공적으로 정착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의 창업 이후 지속되어온 사전혁파와 전제개혁, 수리시설의 정비와 조세부담 을 줄이기 위한 수취제도의 개선, 그리고 공법시행의 노력 등을 통해서 세종시대에 이르 러 백성들을 부유케 하는 왕도정치의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화의 정착, 국내외의 안정화 속에서, 또 다른 문제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바로 민풍( 民 風 ) 과 사풍( 士 風 ) 의 문제였다. 세종시대에 민풍과 사풍의 문제가 대두되었다는 사실은 실록에 등장하는 백성들의 사 회범죄, 관리들의 부패문제의 빈도가 급격하게 증가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아래에서는 세 종시대 민풍과 사풍의 문제를 이러한 두 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사회 범죄의 부각이다. 세종 10년 5 월의 좌사간 ( 左 司 諫 ) 김효정 ( 金 孝 貞 ) 의 상소는 당시 안정화 속의 이면을 보여주고 있다. 요사이 간혹 일반 백성이 수령을 구타한 자가 있고, 혹은 역리가 조신을 능욕한 자도 있 어서, 보는 사람마다 이를 한심하게 여기고, 듣는 사람마다 놀라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 밖의 분수를 어기고 풍속을 어지럽게 하는 무리는 진실로 죄다 거론하기가 어렵습니다. 우 리 전하께서 정성을 다하여 다스리기를 꾀하시어서 법과 제도는 크게 갖추어지고, 은택은 생령에 미치어 태평한 세월이 오래 되었습니다 [ 昇 平 日 久 ]. 그러나 백성들의 심정이 안일에 만 익숙하여져서, 도리어 분수에 안주하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교만하고 사치하여져서 풍속 이 날로 경박하여지더니 그 조짐은 진실로 자라게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시대 에서도 오히려 이러하니 장래의 근심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 세종실록 10 년 5월 26 일). - 84 -

세종과 소학( 小 學 ) : 민풍( 民 風 ) 과 사풍( 士 風 ) 의 교화 ( 박홍규 ㆍ 송재혁) ㆍ 9 세종 초기의 정치를 통해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백성들의 삶을 보장하는 데는 성공했 지만, 그 이면에는 백성들의 교육의 문제, 즉 민풍의 문제가 등장하고 있었다. 세종실록 의 곳곳에서 살인ㆍ 강도ㆍ 강간ㆍ 패륜 등의 사회범죄에 대한 수많은 기록들을 볼 수 있는 데, 이러한 사회범죄의 부각은 당시 민풍의 문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 다. 인정( 仁 政 ), 애민( 愛 民 ) 정치를 구사한 성군이라는 세종의 이미지로 볼 때, 법적 처벌 이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 세종실록 의 기록은 법적 제제가 강력 하게 시행됐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례로서 세종 재위 6년부터 15년까지 실록에 참형 ( 斬 刑 ) 의 실시가 기록된 횟수를 살펴본다. 표. 세종실록 의 참형의 시행기록 등장 횟수 ( 재위 6년~15 년) 구분 6년 7년 8년 9년 10년 11년 12년 13년 14년 15년 합계 횟수 11 14 18 14 13 13 14 9 10 9 125 태조실록 이나 태종실록 의 기록과 비교해 볼 때, 세종실록 에 기록된 참형의 횟수 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된 수치를 보여준다. 참형 이외에도 다른 처벌 형태인 교 형( 絞 刑 ) 이나 거열형 ( 居 烈 刑 ) 의 시행횟수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참형( 斬 刑 ) 이 시행된 기록 횟수로 볼 때, 태조실록 과 태종실록 의 전 시기를 모두 합쳐도 각각 십 여회, 이십 여 회에 불과하지만, 세종시대에는 크게 증가하여 재위 8년의 기록만 해도 18회에 달하고 있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사실은 이러한 형벌의 대상이 주로 정치범이었던 태조나 태종 시대와는 달리, 세종 시대에는 살인ㆍ강인 ㆍ패륜 등의 사회범죄자였다는 것이다. 사회범 죄의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 가장 빈번한 횟수를 보인 세종 8년의 기록을 중심으로 몇 가지를 인용해 본다. 형조에서 계하기를, 용인( 龍 仁 ) 죄수 양녀( 良 女 ) 내은이 ( 內 隱 伊 ) 가 간부( 奸 夫 ) 최슬라 ( 崔 瑟 羅 ) 와 함께 본부( 本 夫 ) 를 살해하였으니, 내은이는 능지 처참하고, 최슬라는 참형( 斬 刑 ) 에 처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8년 9월 11 일). 형조에서 계하기를, 수안( 遂 安 ) 죄수로 아비를 때린 김득부 ( 金 得 富 ) 는 율이 참형( 斬 刑 ) 에 해당하고, 순천( 順 天 ) 죄수로 싸우다가 사람을 죽인 백성 이벌개 ( 李 伐 介 ) 는 율이 교형 ( 絞 刑 ) 에 해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8년 12월 17 일). 형조에서 계하기를, 충주( 忠 州 ) 의 죄수 종 내근내 ( 乃 斤 乃 ) 가 본주인을 구타했으니, 형률 - 85 -

10 ㆍ 大 韓 政 治 學 會 報 ( 第 20輯 1 號 ) 에 의거하면 참형에 해당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9년 2월 10 일). 이러한 사례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세종실록 에는 다양한 사회 범죄에 대한 처벌 의 기록이 등장하고 있다. 나아가 세종실록 의 형벌은 위의 기록처럼 살인ㆍ 강도ㆍ 강간 ㆍ 패륜 등의 사회 범죄에 대하여 사용되고 있는데 비해, 태조실록 이나 태종실록 의 형벌은 주로 정치범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커다란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태 조실록 과 태종실록 의 참형의 기록을 분석해보면 몇 가지 사례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정치범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세종실록 에서 볼 수 있는 빈번한 사회범죄에 대한 처벌 의 기록은 개국 초인 태조와 태종시대를 지나 수성기로 접어든 세종시대에 이르러서야 민풍의 문제가 국가적인 관심사로서 수면 위로 등장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민풍의 문제와 함께, 사풍의 문제 또한 실록을 통해 빈번하게 부각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서 관리들의 부패문제가 대두된 것을 들 수 있는데, 사회범죄의 사례에 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태조나 태종의 창업기에는 관행으로 여겨졌던 일들이 세종시대에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문제시되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먼저 세종 8년에 일어났던 김도련 ( 金 道 鍊 ) 의 노비 증여 사건을 살펴봄으로써 당시 사풍의 문제에 대한 세종의 인식 을 살펴본다. 대신으로서 이러한 일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으 니 작은 문제가 아니다. 조연( 趙 涓 ) 은 수상이 되었고, 조말생 ( 趙 末 生 ) 은 크게 기대하던 것 이 판서로 있을 때뿐만 아니라, 태종께서도 대언으로 있을 때부터 신임하셨고, 나도 신임한 것이 다른 신하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제 결국 이렇게 되었으니, 이러한 일은 옛날 에 정치가 잘 이루어졌던 세상에서는 절대로 없었던 일이다 ( 세종실록 8년 3월 4 일). 이러한 언급을 통해, 당시의 안정화 속에서 비로소 부패 문제에 시선을 돌리게 된 세 종의 인식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의정을 역임했던 정탁( 鄭 擢 ), 평성부원군 ( 平 城 府 院 君 ) 조견( 趙 狷 ), 공조참의 ( 工 曹 參 議 ) 를 역임했던 조숭덕 ( 曺 崇 德 ), 우의정 조연( 趙 涓 ), 곡산 부원군 ( 谷 山 府 院 君 ) 연사종 ( 延 嗣 宗 ), 병조판서 ( 兵 曹 判 書 ) 조말생 ( 趙 末 生 ), 좌의정을 역임했 던 이원( 李 原 ) 등 대규모의 대신들이 관련되었던 이 사건은 시초에 불과했다. 이후 세종 은 재임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관리들의 부패 스캔들로 인해 곤혹을 치루게 된다. 세종 8년 11월의 다음과 같은 사헌부의 계는 당시 관료들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사 례라고 할 수 있다. - 86 -

세종과 소학( 小 學 ) : 민풍( 民 風 ) 과 사풍( 士 風 ) 의 교화 ( 박홍규 ㆍ 송재혁) ㆍ 11 조연( 趙 涓 ) ㆍ조대림 ( 趙 大 臨 ) ㆍ민여익 ( 閔 汝 翼 ) ㆍ권진 ( 權 軫 ) ㆍ맹사성 ( 孟 思 誠 ) ㆍ안수산 ( 安 壽 山 ) ㆍ이담 ( 李 湛 ) ㆍ유은지 ( 柳 殷 之 ) ㆍ전흥 ( 田 興 ) ㆍ원민생 ( 元 閔 生 ) ㆍ성개 ( 成 槪 ) ㆍ홍의로 ( 洪 義 老 ) ㆍ이열 ( 李 烈 ) ㆍ윤수미 ( 尹 須 彌 ) ㆍ윤득홍 ( 尹 得 洪 ) 은 제주( 濟 州 ) 와 정의( 旌 義 ) 등의 수령이 보 내 온 물건을 공공연히 받아서, 조정의 기강을 흐리고 어지럽게 하였사오니 심히 부당하옵 니다. 조종생 ( 趙 從 生 ) 은 근신( 近 臣 ) 으로서 또한 주는 뇌물을 받고 실정을 숨기어 사건의 추 이를 관망하고 있다가, 찰방( 察 訪 ) 의 계본( 啓 本 ) 이 본부에 내려진 뒤에야 할 수 없이 사실 대로 아뢰었사오니, 더욱 간사하고 정직하지 못하오니, 청컨대 모두 율에 의하여 죄를 부여 하소서 ( 세종실록 8년 11월 22 일). 이와 같은 기록은 당시 관료계가 전체적으로 부패의 관행에 빠져있었음을 보여준다. 총체적 부패의 양상은 요직에 있는 대신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종시대의 명재상으로 알려진 영의정 황희( 黃 喜 ), 우의정 맹사성 ( 孟 思 誠 ) 조차 당시 관리들의 부패 관행을 벗어 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비리에 연루될 정도로 당시의 관계는 부패의 양상을 보이고 있 었다. 황희가 관련된 한 뇌물사건에서 사관은 황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정권을 잡은 여러 해 동안에 매관매직하고 형옥( 刑 獄 ) 을 팔았으나, 그가 사람들과 더불 어 일을 의논하거나 혹은 고문( 顧 問 ) 에 대답하는 등과 같을 때에는 언사가 온화하고 단아 하며, 의논하는 것이 다 사리에 맞아서 조금도 틀리거나 잘못됨이 없으므로, 임금에게 무겁 게 보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심술( 心 術 ) 은 바르지 아니하니, 혹시 자기에게 거스르는 자 가 있으면 몰래 중상하였다 ( 세종실록 10년 6월 25 일). 사관의 기록이 사실인지 혹은 과장인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18년 동안이나 영의 정에 재임하면서 세종이 가장 신임했던 명재상 황희에 대한 사관의 이러한 평가는 세종 시대 사풍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IV. 사표( 師 表 ) 세종 세종은 민풍과 사풍에 대한 교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세종의 언급은 앞서 살펴보았던 민풍과 사풍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해야할 임무로 생각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생각건대, 하늘이 준 바른 덕과 진심[ 降 衷 ] 그리고 의젓하게 타고난 천성은 생민이 - 87 -

12 ㆍ 大 韓 政 治 學 會 報 ( 第 20輯 1 號 ) 똑같이 받은 것이기 때문에, 인륜을 돈독히 하여 풍속을 이루게 하는 것은 나라를 가진 자 의 선무( 先 務 ) 이다. 세상의 도리가 이미 떨어지고 순박한 풍속이 예전과 같지 않아, 천경 ( 天 經 ) 과 인기( 人 紀 ) 가 점점 진실을 잃어버림으로써 신하는 신하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아들은 아들된 직책을 바치지 못하고, 아내는 부덕( 婦 德 ) 을 온전히 못하는 자가 간혹 있으 니 진실로 탄식스러울 뿐이다, 옛적의 성제( 聖 帝 ) 와 명왕( 明 王 ) 이 친히 행하고 몸소 가르 쳐, 옳은 도리를 드러내고 주창( 主 倡 ) 하며 이끌고 나아가 집집마다 봉( 封 ) 함을 받을 만하게 하였음을 생각하고, 돌아보건대 나의 박덕으로는 비록 그의 만분의 일이라도 바랄 수는 없 지만, 그윽이 이에 뜻을 두었노라 ( 세종실록 16년 4월 27 일). 세종의 인식 속에서 군주는 옛날의 성제( 聖 帝 ) 와 명왕( 明 王 ) 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행하고 가르칠 수 있는 사표( 師 表 ) 가 되어, 자신이 다스리는 신하와 백성들을 교화시켜야 하는 존재이다. 세종은 학문과 수기를 통해 이러한 사표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세종 12년 8 월에 당시 성균대사성 ( 成 均 大 司 成 ) 황현( 黃 鉉 ) 은 세종의 학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 이 묘사하고 있다. 우리 전하께서는 천성이 총명하시면서도 학문에 밝으시고 넓으시며, 과거를 실시하시고 성리학을 숭상하시니, 위로는 왕궁으로부터 아래로는 궁벽한 시골까지 한 지방도 배우지 않는 곳이 없고, 한 사람도 가르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이는 학문의 본체가 이미 서고 학문의 공효가 이미 행하는 것으로서, 비록 도당씨 ( 陶 唐 氏 ) 와 유우씨 ( 有 虞 氏 ) 의 진실을 바 탕으로 한 학문이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 세종실록 12년 8월 22 일). 이러한 언급이 어느 정도 과장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당시의 신하들이 세종의 학문적 실력과 사표로서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종의 학문에 대한 자질과 열의, 그리고 그가 보여주었던 수기의 모습은 이미 택현( 擇 賢 ) 이라는 명분을 통해 세자가 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다음 기록은 충녕( 忠 寧 ) 을 세자로 임명할 당시의 책문이다. 충녕대군 도( 祹 ) 는 관홍( 寬 弘 ) ㆍ장중 ( 莊 重 ) 하고 효제( 孝 悌 ) ㆍ겸공 ( 謙 恭 ) 하여, 사랑과 공경 으로써 어버이를 섬기되 항상 조심하며, 총명한 자질에 배움을 즐겨하여, 날마다 부지런히 하여 나라 일을 부탁함에 합당하고, 신하와 백성이 우러러 소망을 두기에, 너를 책봉하여 왕세자를 삼노라 ( 세종실록 총서). 세자 시절부터 뛰어난 학문적 실력을 갖추었던 세종은 즉위 후에도 노력을 그치지 않고 - 88 -

세종과 소학( 小 學 ) : 민풍( 民 風 ) 과 사풍( 士 風 ) 의 교화 ( 박홍규 ㆍ 송재혁) ㆍ 13 있다. 그는 식사를 할 때에도 반드시 책을 좌우에 펼쳐 놓고, 밤늦게까지 책을 보았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은 후에 글은 읽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경서( 經 書 ) 를 읽는 데는 반드 시 백 번을 넘게 읽고, 자사( 子 史 ) 는 반드시 30 번을 넘게 읽었다. 8)는 성과로 이어진다. 세종의 학문에 대한 열의는 그가 재위 기간 동안 시행했던 경연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세종은 재위기간 동안 총 1,898 회의 경연을 개최하고 있는데, 정종이 30 회, 태종이 12회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해 본다면 세종이 경연에 기울였던 정성을 알 수 있을 것이 다. 9) 경연에 사용했던 강서도 질과 양을 달리하는데, 사서오경뿐만 아니라 성리대전 ( 性 理 大 全 ), 송조명신언행록 ( 宋 朝 名 臣 言 行 錄 ) 등이 경연에서 사용되었으며, 통감강목 ( 通 鑑 綱 目 ), 사기( 史 記 ), 송감( 宋 鑑 ) 등의 역사서도 중시되었다. 이 밖에 법전인 육전 ( 六 典 ) 과 악서인 율려신서 ( 律 呂 新 書 ), 중국어 습득을 위한 교재로써 직해소학 ( 直 解 小 學 ) 까지도 경연을 통해 강연되었는데, 세종의 학문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보여준다고 하 겠다. 세종이 대군 시절부터 보여주었던 수기의 모습 역시 재위에 오른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세종의 사후, 지중추원사 ( 知 中 樞 院 事 ) 이선( 李 渲 ) 등을 북경에 보내 부고를 고하고 시호를 청하는 글은 세종의 일상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왕은 매일 4 고( 四 鼓 ) 에 일어나서, 환하게 밝으면 군신의 조참을 받은 연후에 정사를 보 며, 모든 정사를 처결한 연후에 윤대( 輪 對 ) 를 행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묻고, 수령의 하직을 고하는 자를 불러 보고 면담하여, 형벌 받는 것을 불쌍하게 생각하며, 백성을 사랑 하라는 뜻을 타이른 연후에, 경연에 나아가 성학( 聖 學 ) 에 잠심하여 고금을 강론한 연후에 내전( 內 殿 ) 으로 들어가서 편안히 앉아 글을 읽으시되, 손에서 책을 떼지 않다가, 밤중이 지 나서야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 세종실록 32년 2월 22 일). 이러한 학문적 실력과 남다른 수기를 바탕으로 세종은 자신을 사표로 자임하고 있다. 내가 생각해 보니 만일 한번 술을 금지한다면 곧 나부터 이것을 절제해야 될 것이다. 만 일 그렇지 못하다면 이보다 더 불공평한 법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 세종실록 8년 2월 23 일). 대체로 위에서 마음을 바르게 하는 도리가 있으면, 곧 대신이 보고 감화되는 것은 자연 스러운 일이니, 나 자신에게 관계된 문제다 ( 세종실록 8년 3월 4 일). 8) 세종실록 32년 2월 22 일. 9) 민지대, 1980, 朝 鮮 初 期 의 經 筵 制 度, 韓 國 史 論 제6 권, 163 쪽. - 89 -

14 ㆍ 大 韓 政 治 學 會 報 ( 第 20輯 1 號 ) 유생들이 시학( 詩 學 ) 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내가 시학을 숭상하지 않기 때문이 다. ( 중략) 예전의 성현들로서 시와 부에 모두 능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나도 역시 시학 에 뜻이 있다. 위에서 좋아하는 이가 있으면 누가 좋아하지 않겠는가 ( 세종실록 17년 6월 8 일). 위의 사례 이외에도 많은 기록들은, 자신이 솔선수범을 해야만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따를 것이라는 세종의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세종에 대하여 군주정에서 정점에 서서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 군주로서의 의식과, 수신을 통해 덕을 함양하고 이를 통하여 아랫사람들을 교화해야하는 사표( 師 表 ) 로서의 의식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 이다. 세종시대에는 이러한 군주 세종에 의해 주도적으로 소학 이 보급되고 있다. 세종 이 주도한 소학 의 보급은 세종이 군주와 신하로 이루어진 권력관계 속에서 군주로서의 권위를 확립하고 정치를 주도해 나갔던 세종시대 정치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V. 세종의 소학 진흥 이번 장에서는 세종시대에 소학 이 군주 세종에 의해 주도적으로 보급되었던 모습을 사안 별로 살펴본다. 우선 소학 진흥의 기반으로서 교육기관의 정비와 교재의 보급을 다루고, 이러한 기반 하에서 이루어진 소학 에 대한 권장정책과 법령의 강화를 살펴본 다. 마지막으로 언어의 문제로 인해서 소학 의 이념을 백성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행해 졌던 삼강행실도 의 간행을 살펴볼 것이다. 10) 10) 2 장에서 이미 서술한 것처럼, 주희( 朱 熹 ) 는 대학장구서 에서 군사( 君 師 ) 라는 개념을 통해 군주의 지위 와 스승으로서의 자격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삼대의 성왕들을 이상적인 군왕으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그 는 이러한 성왕들로 이루어진 도통( 道 統 ) 의 계보를 중용장구서, 서경집전 등의 경전을 통해 구성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 조선시대 소학 을 보급하는데 있어 사표( 師 表 ) 로서의 세종의 역할에 주목하는 것은, 세종이 이렇게 주희에 의해 구성된 군사( 君 師 ) 로서의 성인( 聖 人 ) 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 문이다. 군주로서 세종은 이러한 주희의 생각을, 자신의 재위 기간 동안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고 생각된 다. 최상용 ㆍ 박홍규는 정치가 정도전 ( 까치, 2007, 30 쪽) 에서, 주희는 자신이 지향했던 삼대의 이상적 인 세계, 즉 절대불변적인 천리의 세계 로의 가능성을 인성( 人 性 ) 에서 구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주희에게 있어 수기( 修 己 ) 란 결코 윤리에 그치지 않고, 정치와 직결된다. 면서 주희가 이야기하고 있는 수기치인 ( 修 己 治 人 ) 논리의 정치적 의미를 주자주의 ( 朱 子 主 義 ) 라는 말로 개념화하여, 주희의 정치사상을 조선에 서 구현하려 했던 정도전을 주자주의자로 설명하고 있다. 본 논문은 정도전이 신( 臣 ) 의 입장에서 조선의 건국시기에 주자주의를 실천하려 한 것처럼, 세종 역시 군주의 입장에서 조선이 수성기로 진입하고 있었 던 당대에서 주자주의를 실천하려 한 것으로 본다. 세종에 의해 주도된 세종시대의 소학 보급은 바로 이러한 정치사상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 90 -

세종과 소학( 小 學 ) : 민풍( 民 風 ) 과 사풍( 士 風 ) 의 교화 ( 박홍규 ㆍ 송재혁) ㆍ 15 1. 교육기관의 정비와 교재의 보급 조선에서 중앙의 교육기관은 성균관과 오부 학당으로 구성되었다. 성균관이 15세 이상 의 유생들이 입학하여 사서와 오경 등의 경전을 중심으로 공부하는 곳이었다면, 오부학 당은 소학 의 가르침만을 맡고 있어, 거기에 입학한 생도에게는 먼저 소학 을 가르치 고 나서 다른 서적을 가르친다. ( 세종실록 7년 12월 23 일) 는 말처럼 동몽을 위한 교육 을 전담하고 있었다. 태종시대에는 성균관과 오부학당의 법제가 확립되기는 했으나, 실제 적인 운영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오 부 학당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교관의 편성과 증원, 여기에 재정적인 지원도 추가함으 로써 오부 학당의 교육 활성화를 이루고자 노력하고 있다. 중앙의 오부 학당에 비해 느렸지만, 지방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향교에 대한 정비와 지원도 이루어졌다. 세종 즉위년 11월에 신료들에게 유시한 조목 중에 지방의 향교에 관 한 사항도 포함되어 있는데, 향교의 생도들에 대해 수령이 사역( 使 役 ) 시켜서 학업을 폐하 게 되는 일을 금지시키고, 유사( 儒 士 ) 들이 개인적으로 서원( 書 院 ) 을 설치하여 생도들을 가르치는 것을 포상하게 하여 미비한 지방의 교육을 보완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세종실 록 즉위년 11월 3 일). 세종 재위 11년 1월에 이르러서는 지방의 교육에 대한 제도적 정 비를 꾀하고 있고, 진흥책도 고려되고 있었다. 재위 13년 10 월에 세종은 오부 학당의 사기( 士 氣 ) 를 진작시키고 문풍( 文 風 ) 을 떨칠 수 있는 유인을 조성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할 것을 의정부와 육조에 명하고 있는데 ( 세종실 록 13년 10월 28 일), 이러한 논의는 학업에 우수한 자들에게 바로 생원회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지방 교육의 진흥책도 중앙의 이러한 정 책을 따라 권려하는 방식을 취하여, 세종 15년 5월에는 각도의 도회 생도들 중에서 강경 ( 講 經 ) 에 뛰어난 자를 각 도회마다 3 명씩 뽑아, 바로 생원 회시에 응시하도록 하고 있다 ( 세종실록 15년 5월 17 일). 재위 15년 9 월에는 강경뿐 아니라 제술( 製 述 ) 에 대한 교육 도 확대할 것을 주청하는 예조의 계에 따라, 강경과 제술에 대한 성적을 합산하여 우수 한 자들을 뽑도록 하여, 지방의 교육에서 제술에 대한 공부까지 권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교육기관의 정비를 기반으로 세종은 소학 교재를 보급하고 있다. 세종 7년 12 월에는 예조에서 오부학당의 기본 교재로 사용되는 소학 은 경사자집 ( 經 史 子 集 ) 의 요긴한 말을 모아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많다. 면서, 음훈과 주해 가 완비되어 있지 않은 국내의 소학 대신에, 중국의 집성소학 ( 集 成 小 學 ) 을 사오도록 - 91 -

16 ㆍ 大 韓 政 治 學 會 報 ( 第 20輯 1 號 ) 해서 교육할 것을 주청하고 있다( 세종실록 7년 12월 23 일). 관학의 정비로 인해 교육 의 진흥이 이루어기 시작하면서, 을 것이다. 소학 을 보다 체계적으로 가르치려는 시도로 볼 수 있 세종 9년 7 월에는 강원도 감사 정효문이 새로 간행한 소학 을 바치고 있으나 ( 세종실 록 9년 7월 1 일), 예조에서는 지금 판각한 책은 글자가 이지러지고 인쇄된 것을 알아 볼 수가 없어서 배우는 사람들에게 불편하다. 면서, 이전에 들여왔던 집성소학 을 주자 소에 보내 인쇄하여 보급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세종 재위 17년에 이르러서는 허조가 집성소학 을 배우는 자들이 얻지 못해 애쓰고 있다. 면서, 관원과 공장에게 종이 혹은 쌀과 콩으로 밑천을 대주어서 만여 본을 찍어내어 팔게 하도록 주청하고 있는데 ( 세종실 록 17년 4월 8 일), 이러한 언급은 국가적인 보급 노력을 통해 일반 백성 사이에서 소 학 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난 사실을 보여준다. 2. 소학 의 권장과 법령의 강화 세종 재위 1 년에 동지경연 ( 同 知 經 筵 ) 탁신( 卓 愼 ) 은 소학 은 사람마다 읽어야만 할 책 이기 때문에, 과거를 보기 전에 소학 을 강( 講 ) 하게 한 이후에야 이름을 과거의 명부에 올리도록 법으로 정하였는데, 통하지 못한 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고 그간의 상황을 평하고 있다( 세종실록 1년 2월 17 일). 그는 지방의 향학( 鄕 學 ) 이나 서울의 성균 관ㆍ 오부학당에서 소학 에 능통한 자를 선택하여 사표( 師 表 ) 로 삼고 먼저 소학 을 가 르친 뒤에 경전을 가르칠 것을 주청하여, 하고 있다. 소학 의 교육이 실제로 시행되는 방안을 제시 이러한 상황 하에서 세종은 먼저 재위 3년에 8 세가 된 세자에게 소학 을 가르침으로 써 모범을 보이고 있다( 세종실록 3년 1월 12 일). 이어서 12월에는 세자를 소학에 입학 하게 하여 소학 의 머리말인 소학제사 를 강하도록 하고 있는데 ( 세종실록 3년 12월 25 일), 세종의 학문 속에서 소학 이 가지는 위치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 다. 이러한 그의 세자 교육은 세종 재위 30 년에 왕세손에게도 반복해서 시행되었고, 조선 시대 전 기간을 통해 세자 교육의 전형으로서 기능하였다. 세종의 소학 에 대한 중시는 관학뿐만 아니라 종친들을 교육하기 위해 건립한 종학 ( 宗 學 ) 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종학의 운영은 동몽들을 가르치는 오부학당의 예에 의 해여 시행되었으며 ( 세종실록 12년 4월 4 일), 소학 은 가장 기본적인 교재로써 활용되 었다. 종학에 나아가서 배우는 종친 가운데, 소학 과 사서 중에서 한 가지라도 능통한 - 92 -

세종과 소학( 小 學 ) : 민풍( 民 風 ) 과 사풍( 士 風 ) 의 교화 ( 박홍규 ㆍ 송재혁) ㆍ 17 자는 만 40 살이 되면 방학시킨다. ( 세종실록 25년 8월 26 일) 는 기록은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직해소학( 直 解 小 學 ) 11) 에 대한 기록 역시 세종의 소학 에 대한 중시를 엿볼 수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태조 이래로 직해소학 은 본래 사역원에서 중국어 습득의 기본 교재로서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세종은 재위 16 년 초에 직해소학 을 요동에 보내서 수 준이 어떠한지를 평가받도록 하고 있다. 그는 책의 가치를 인정받은 이후에 경연에서 직 해소학 을 진강하도록 하고 있는데 ( 세종실록 16년 5월 18 일), 비록 중국어의 습득을 위하여 직해소학 을 진강했다 할지라도, 수많은 교재 중에서 소학 을 외국어 학습의 교재로 삼았다는 사실은 의미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그 정도로 소학 에 대한 이해도가 깊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종은 세자에게도 직해소학 을 공부하도록 하고 있으며 ( 세종실록 20년 3월 1 일), 직해소학 을 2백 권 간행하여 각 고을의 향교 와 문신에게 반사하고 있다( 세종실록 23년 10월 18 일). 세종은 이러한 소학 교육의 권장정책과 함께, 소학 교육에 대한 법령을 강화하고 있다. 세종 5 년 참찬( 參 贊 ) 탁신( 卓 愼 ) 의 다음과 같은 진언은, 법령을 강화할 필요성이 있 었던 세종시대 초기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풍교( 風 敎 ) 를 교화시키는 데는 소학 과 같은 책이 없습니다. 국가의 시험에서 이름을 기록할 때에 먼저 소학 을 통하였는가의 여부를 상고하는 것은 이미 분명한 법령이 있는 데, 시험에 나오는 무리들이 일찍이 관심에 두지도 않고, 소학 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 서 이름을 기록하는 사례가 많다고 하며, 이름을 기록하지 못한 자는 혹 소송을 하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대개 풍화( 風 化 ) 가 일게 되는 것은 반드시 문교( 文 敎 ) 가 있어야 되는 것인 데, 선비의 무리들이 이러한 상황이니 염치( 廉 恥 ) 의 도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원컨대 이후 로는 특히 문신 한 명에게 명하여 맡겨서 그들의 고강( 考 講 ) 을 감독하게 하여 법과 같이 아니하는 자는 엄중하게 법으로 다스리소서 ( 세종실록 5년 5월 28 일). 위의 기록은 소학 에 대한 법규가 형식적으로만 존재하여, 제대로 준수되지 못했던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건의를 수렴하여 세종은 재위 8년 1월에 처음으로 생원시에 응시하는 자들에 대하여 문신을 배치하여 감찰을 실시하게 하고, 소학 과 가 례( 家 禮 ) 를 그 시험과목으로 정하고 있다( 세종실록 8년 1월 27 일). 세종 재위 18년 예조의 상소에서는 소학 이 학문을 증진하는 기초인데도 불구하고, 융회 관통( 融 會 貫 通 ) 11) 본래 위구르인이었으나, 고려 말에 귀화하여 태조대에 판삼사사까지 역임했던 설장수 ( 偰 長 壽, 1341 1399) 가 소학 을 중국어로 번역하고 주해를 단 책이다. - 93 -

18 ㆍ 大 韓 政 治 學 會 報 ( 第 20輯 1 號 ) 하는 자가 대체로 적었던 그간의 실상을 지적하고, 이제부터는 사부( 四 部 ) 의 생도로 하 여금 모두 소학 을 습독하게 하여서 강독하고 연구하여 수미본말 ( 首 尾 本 末 ) 을 모두 융 회 관통한 연후에야, 교관이 문부에 기록하여 성균관에 통보하면, 성균관에선 이 통보를 전수하고는 인원에 상관없이 똑같이 전례에 의해 시험 선발하여 성균관에 승보( 升 補 ) 하는 것 을 항규로 삼도록 주청하고 있다( 세종실록 18년 윤6월 25 일). 소학 에 대한 법적 규정이 비로소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었다. 이후 소학 은 세종 29 년에 무과 전시의 선택과목으로까지 지정되고 있다. 3. 삼강행실도 의 간행 소학 의 명륜 편은 서장에 상( 庠 ) ㆍ서( 序 ) ㆍ학( 學 ) ㆍ교( 校 ) 를 설치하여 가르친 것은 모두 인륜( 人 倫 ) 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라는 맹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되고 있다. 당시 일반 백성들에게는 언어의 한계가 존재했기 때문에, 세종은 소학 의 이념 중에서 도 인륜에 주목하여 삼강행실도 ( 三 綱 行 實 圖 ) 를 간행하고 있다. 12) 유학에서 삼강( 三 綱 ), 즉 부자, 군신, 부부 관계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로서 중시되 었다. 이러한 세 가지 인간관계는 위로는 자연의 법칙에 합치되고, 아래로는 인간사회를 유지하는 근간으로 인식되었으며, 다른 인간관계로 확대ㆍ 적용되었다. 13) 세종은 이러한 삼강에 주목하여 삼강행실도 를 편찬하고, 이를 보급함으로써 풍속을 교화하려 하였 다. 재위 13 년 세종은 집현전에 다음과 같이 삼강행실도 를 편찬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삼대( 三 代 ) 의 정치가 훌륭했던 것은 모두 인륜( 人 倫 ) 을 밝혔기 때문이다. 후세에는 교화 가 점점 쇠퇴해서, 백성들이 군신( 君 臣 ) ㆍ부자 ( 父 子 ) ㆍ부부 ( 夫 婦 ) 의 커다란 인륜에 친숙하 지 아니하고, 거의 다 타고난 천성( 天 性 ) 에 어두워서 항상 각박한 데에 빠졌다. 간혹 훌륭 한 행실과 높은 절개가 있어도, 풍속ㆍ 습관에 옮겨져서 보고 듣는 사람의 마음을 흥기시키 지 못하는 일도 또한 많다. 내가 그 중 특별히 남달리 뛰어난 것을 뽑아서, 그림과 찬을 만 들어 중앙과 지방에 나누어 주니, 우매한 남녀들까지 다 쉽게 보고 느껴서 분발하게 되기 를 바란다. 이렇게 한다면, 이것도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루는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 다( 세종실록 14년 6월 9 일). 12) 본 논문에서는 삼강행실도 의 편찬을 언어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세종시대에 소학 을 보급하기 위한 한 가지 방편으로 간주한다. 중종실록 12년 6월 27 일의 기사에서는 홍문관에서 삼강행실도 의 간략성 을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소학 을 한글로 번역하고 반포할 것을 청하여 승인받고 있는데, 소학 과 삼 강행실도 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3) 김항수, 2003, 조선 전기 삼강행실도와 소학의 편찬, 韓 國 思 想 과 文 化 제19 권, 194 쪽. - 94 -

세종과 소학( 小 學 ) : 민풍( 民 風 ) 과 사풍( 士 風 ) 의 교화 ( 박홍규 ㆍ 송재혁) ㆍ 19 삼강행실도 는 중국에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동방 고금의 서적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을 모아 편찬하였다. 효자, 충신, 열녀로서 기술할만한 자를 각각 1백 인을 찾아내어 앞에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뒤에는 사실( 事 實 ) 을 기록하였으며, 모두 시를 붙였는데, 효자에 대해서는 명나라의 태종 문황제 ( 太 宗 文 皇 帝 ) 가 내린 효순( 孝 順 ) 의 사실을 읊은 시 를 기록하고, 겸하여 권부( 權 溥 ) 가 찬술( 撰 述 ) 한 효행록 ( 孝 行 錄 ) 에 기록된 이제현 ( 李 齊 賢 ) 의 찬을 실었다. 이 밖에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나누어 충신과 열녀의 시를 뽑아서 싣 도록 하고, 문신들에서 나누어서 제술하게 하기도 하였다. 세종 14년 6월 9 일에는 집현전에서 삼강행실도 를 편찬하여 시와 전문을 붙여서 올 리고 있고, 세종 15년 2월 24 일에는 예문대제학 ( 禮 文 大 提 學 ) 정초( 鄭 招 ) 에게 발미( 跋 尾 ) 를 지어 올리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 후에 재위 16년 4월 27일에야 비로소 세종은 삼강행실도 를 인쇄하여 반포하고 가르치게 하였다. 세종 16년 11월에는 종친과 신하들 및 여러 도에 삼강행실도 를 내려주고 있으며, 이후 재위 21년 3월과 재위 25년 2월의 실록의 기록은 삼강행실도 를 지속적으로 민간에 보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세종시대를 통해 삼강행실도 를 편찬하고 보급한 전례는 조선시대를 통해 전 형으로 기능하였다. 성종시대에는 삼분의 일 가량으로 축소하여 언해해서 편찬되었고, 중 종시대에는 속삼강행실도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륜행실도 로 만들어지는 등, 조선 전 시기를 통해 교화의 VI. 사림과 소학 중종시대 소학 은 단순히 사풍의 교화만을 목적으로만 보급되지 않았다. 사림 역시 사풍의 교화뿐 아니라 민풍의 교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중종 12년 8월에 조강에서 장 령( 掌 令 ) 정순붕 ( 鄭 順 朋 ) 은 중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풍속( 風 俗 ) 과 사습( 士 習 ) 의 그릇됨이 근일보다 심한 때가 없으므로 지속적으로 해결책을 강구하지만, 고치는 방도로서는 교화가 가장 좋습니다. 근래에 속삼강행실 ( 續 三 綱 行 實 ) 을 널리 반포하였고, 또 소학 을 인쇄하여 반포하려 하였지만 배우는 자가 없습니다. 여염의 노유( 老 儒 ) ㆍ 서얼( 庶 孽 ) 과 사대부의 자제로서 나이 많은 자는 배울 수 없겠으나, 나이가 어 린 무리라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가르치게 해야 합니다 ( 중종실록 12년 8월 27 일). - 95 -

20 ㆍ 大 韓 政 治 學 會 報 ( 第 20輯 1 號 ) 정순붕의 언급은 중종 시대에 사림이 정계에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고민했던 문제가 무 엇이었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반정의 여파가 가라앉은 당시의 상황에서 민풍( 民 風 ) 과 사 풍( 士 風 ) 의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방안으로 속삼강행실도 와 소학 을 찍어 반포하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처음부터 사림은 민( 民 ) 과 사( 士 ) 라는 소학 의 대상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렇게 민풍의 교화라는 측면을 고려하여 사림의 소학 보급을 살펴본다면, 기존에 사풍의 교화를 꾀한 것이라고 해석됐던 것들도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사풍의 교화 역 시 외연을 넓게 한다면 민풍의 교화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러한 논리로서 중종 12년 11 월 참찬관 ( 參 贊 官 ) 유운( 柳 雲 ) 의 말을 살펴본다. 배우는 자는 동몽( 童 蒙 ) 의 교양부터 시작해야 하며, 동몽의 교양이 바르지 않으면 사람 이 될 수 없습니다. 반드시 8 세부터 먼저 소학 을 읽어서 그 터전을 세운 다음에 대학 을 읽어서 소학 의 공효( 功 效 ) 를 거두어야 그 행신( 行 身 ) 하는 방도가 한결같이 바른 데에 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근래 동몽의 학( 學 ) 이 퇴폐하였으므로, 가르치는 자가 힘쓰지 않고 수업하는 자도 즐겨 배우지 않습니다. 사대부의 자제가 야비하게 여겨서 비웃으므로 부형 이 된 자도 따라서 가서 배우게 하지 않으니, 동몽의 교양이 바르지 않은 것은 대개 여기 서 기인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스승 노릇을 감당할 만한 생원ㆍ 진사를 가려서 한 부( 部 ) 안에서 동학( 童 學 ) 의 장( 長 ) 으로 삼아 진퇴하는 예절과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를 가르쳐서 그 덕성을 기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동몽의 교양이 이미 바르게 되 면 집에서 행하고 나라에서 미루어 행하는 것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 중종실록 12 년 11월 20 일). 유운은 국가가 다스려지는 근본으로서 동몽을 위한 소학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져함 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사대부의 자제들이 소학 을 경시하고 있는 사풍의 문제를 비판 하고 있는데,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사풍의 교화는 오히려 민풍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선결과제로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중종시대 소학 의 보급은 사풍의 교화에 역점이 두 어졌지만, 민풍의 교화 역시 중요한 목적이었다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서론에서 지적한 것처럼 소학 에 대한 기존 연구들은 주로 사림( 士 林 ) 과의 연관 선상에서 이루어져 왔다. 중종시대 정계에 부상하기 시작한 사림들의 기본정신으로 소 학 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4)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중종시대의 소학 이 정치적으로 이용된 측면에 치우쳐서, 소학 의 의미를 사풍의 교화에 국한시키고 있다고 생각된다. 15) 14) 최연식 ㆍ 이지경, 2005, 사림의 지치주의 정치사상, 한국정치사상사, 백산서당, 282 쪽. - 96 -

세종과 소학( 小 學 ) : 민풍( 民 風 ) 과 사풍( 士 風 ) 의 교화 ( 박홍규 ㆍ 송재혁) ㆍ 21 물론 중종시대 사림들이 소학 에 주목했던 것은 바로 소학 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기능 때문이라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 사림들은 자신들의 학문적 전통이 소학 이념의 전승을 통해 이어져왔음을 강조했다. 그들은 길재( 吉 再, 1353~ 1419), 김숙자 ( 金 淑 子, 1389~1419), 김종직 ( 金 宗 直, 1431~1492), 김굉필 ( 金 宏 弼, 1454~ 1504), 조광조 ( 趙 光 祖, 1482~ 1519)로 이어지는 자신들의 학문적 도통이 바로 소학 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림이 부당한 권력행사에 저항하면서 이념적 기반으로 삼았던 소학 은, 중종 시대에 그들이 중앙 정계에 대두하면서 연산군 시대까지의 정치적 유산을 청산하고 진정 한 의미의 반정( 反 正 ) 을 완성하기 위한 시대적 상징이 되었다. 16) 검토관 ( 檢 討 官 ) 기준( 奇 遵 )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당시 정계에 대두하기 시작한 사림들의 과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옛사람의 학문하는 방법은, 들어가면 효( 孝 ) 하고 나가면 제( 悌 ) 하며 행하고서 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배우는 것이었는데, 지금 국가가 진흥시키는 방법은 다만 사장을 제술( 製 述 ) 하 고 훈고( 訓 詁 ) 를 외는 일에 힘쓸 뿐이고 효제충신 등의 일은 업신여깁니다. 그러므로 사기 가 저상하여 직언하고 힘써 간하는 선비가 없으니, 이는 반드시 화( 禍 ) 를 겪었기 때문에 그 럴 것입니다. 한때 김종직 ( 金 宗 直 ) 의 문도로 김일손 ( 金 馹 孫 ) 등이 모두 형륙을 당하여 국맥 이 남김없이 끊어져 없어졌고, 우리 세종조 ( 世 宗 朝 ) 에서 성삼문 ( 成 三 問 ) 등 인재를 길렀으나 마침내 보전하지 못하였고, ( 중략) 사림이 화를 겪은 이래로 학사( 學 舍 ) 가 쓸쓸하고 인심이 참연( 慘 然 ) 하여 조정에 충직하고 강개한 기풍이 없었습니다 ( 중종실록 12년 8월 27 일). 그의 언급은 세종시대와 중종시대의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요약하고 있다. 사림들은 세조( 世 祖 ) 와 연산군 ( 燕 山 君 ) 시대의 참혹한 경험을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세조의 찬탈, 연산군의 폭정, 그리고 두 차례의 사화( 士 禍 ) 를 통해 조선사회가 세종시대의 찬란 한 정치에서 이탈했다고 본 것이다. 사림들에게 세종시대의 성공적인 정치의 경험과는 다른, 세조 시대와 연산군 시대의 참혹한 경험은 군주 개인의 도덕성에 의존하는 군주제 의 정체 속에서 군주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제한하고 현명한 신하들에 의해 정치가 주 도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져왔을 것이다. 중종 이들은 소학 을 내세우면서 훈구대신들과 대립하였고, 조광조가 대사헌으로 임명된 10 년을 전후로 중앙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면서, 경연에서까지 소학 을 진강 15) 윤병희의 연구 역시 소학 을 중종시대 사림의 도덕정치 구현과 관련시켜 이해하고 있다( 윤병희, 朝 鮮 中 宗 朝 士 風 과 小 學 : 新 進 士 類 들의 道 德 政 治 具 現 과 관련하여, 歷 史 學 報 제103 집, 1984, 41-78). 16) 최연식 ㆍ이지경, 상동. - 97 -

22 ㆍ 大 韓 政 治 學 會 報 ( 第 20輯 1 號 ) 시키는데 성공했다. 소학 을 내세워 도덕적 명분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했던 것이다. 이후 이들은 중종에게까지 자신들의 정책을 강요하여 왕권까지 도 견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중종시대 사림들이 정치의 주도권을 확보하는데 소학 의 이념이 활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을 가진 중종시대 사림의 소학 보급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었 다. 이미 서론에 제시한 대로, 중종시대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인 조광조는 세종시대의 소 학 보급을 전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위의 유운의 언급에 대해서도 조광조는 새로 세 우는 법이 아니라 조종( 祖 宗 ) 의 성헌( 成 憲 ) 에 따르는 것 이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여기서 의 조종의 성헌이란 세종시대를 언급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소학 이 가지고 있었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사림을 떠나서 그 이전의 시기를 살피는 것은 당연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조선시대 속에 서 소학 이 보급되었던 전체적인 양상이며, 세종시대는 그 시작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VI I. 맺음말 소학 은 이론적인 지식보다, 인간이 행해야 하는 일상적인 실천과제와 인륜규범의 구 체적인 실행절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유학의 기본 정신과 윤리규범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에, 소학 을 읽은 사람들은 주자학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주자학의 일상적 실천을 강조하고, 군주의 솔선수범이 유교적 이상사 회를 실현하는 근본적인 방법이라고 믿었던 사림은, 소학 의 보급을 통하여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논문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세종시대는 중종시대 보다 앞서 이미 이러한 소학 의 의미에 주목하고, 민풍과 사풍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학 보급을 꾀했던 선구적인 시대였다. 그러나 각각의 시대 속에서 소학 보급의 양상은 차이를 보여준다. 세종시대에는 군 주 세종이 사표( 師 表 ) 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주도적으로 소학 을 보급하고 있었던 반면, 중종시대 소학 보급의 중심에는 사림들이 있었다. 세종은 학문과 수기를 통해 정 치의 장에서 신하들보다 우위를 확보했으며, 사표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신하들과 백 성들에게 소학 을 보급했다. 이것을 중종시대 사림 주도의 소학 보급과 연관시켜 생 각해 본다면, 군신관계 속에서 학문적 담론이 국정 운영의 주도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 98 -

세종과 소학( 小 學 ) : 민풍( 民 風 ) 과 사풍( 士 風 ) 의 교화 ( 박홍규 ㆍ 송재혁) ㆍ 23 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군주와 신하로 이루어진 권력관계 속에서 권위를 확립하고 정치를 주도해 나가는데 소학 이 활용되었던 측면이 존재했던 것이다. 세종과 사림 모 두 각자의 시대 속에서 소학 이라는 학문적 담론을 통하여, 권위를 확립하고 정치를 주 도해 나가고 있다. 다만 사림들은 사풍의 교화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이들은 세조와 연산군 시대의 참혹 한 경험을 통하여, 군주 개인의 도덕성에 의존하는 군주제의 정체 속에서 군주의 자의적 인 권력 행사를 제한하고 현명한 신하들에 의해 정치가 주도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 고 있었다. 이것을 소학 의 보급을 통해 이루려 했던 것이다. 세종시대 군주 세종과 중 종시대 사림에 의한 상이한 소학 의 보급의 사례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환경의 제약을 극복하면서 자신의 이념을 구현해가는 정치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小 學, 大 學, 大 學 章 句, 孟 子, 朱 子 語 類 太 祖 實 錄, 太 宗 實 錄, 世 宗 實 錄, 成 宗 實 錄, 中 宗 實 錄 김준석, 1981, 朝 鮮 前 期 의 社 會 思 想 : 小 學 의 社 會 的 機 能 分 析 을 中 心 으로, 東 方 學 誌 제29 집: 105-192. 김항수, 2003, 조선 전기 삼강행실도 와 소학 의 편찬, 韓 國 思 想 과 文 化 제19 권: 191-221. 문철영, 1984, 朝 鮮 初 期 의 新 儒 學 수용과 그 性 格, 韓 國 學 報 제10집 3 호: 30-55. 민지대, 1980, 朝 鮮 初 期 의 經 筵 制 度, 韓 國 史 論 제6 권: 117-170. 박연호, 1981, 朱 子 學 의 根 本 培 養 說 과 朝 鮮 前 期 의 小 學 敎 育, 淸 溪 史 學 제2 집: 81-128. 박홍규 ㆍ 이세형, 2006, 태종과 공론정치 : 유신의 교화, 한국정치학회보 제40집 3 호: 5-30. 윤병희, 1984, 朝 鮮 中 宗 朝 士 風 과 小 學 : 新 進 士 類 들의 道 德 政 治 具 現 과 관련하여, 歷 史 學 報 제 103 집: 41-78. 이수건, 1969, 朝 鮮 時 代 小 學 敎 育 에 대하여, 嶺 南 大 論 文 集 제2 집. 이춘호, 1998, 朝 鮮 朝 前 期 의 小 學 敎 育 에 關 한 硏 究, 漢 字 漢 文 敎 育 제4 집: 189-223. 최상용 ㆍ 박홍규, 2007, 정치가 정도전, 까치. 최연식 ㆍ 이지경, 2005, 사림의 지치주의 정치사상, 한국정치사상사, 백산서당 : 281-302. 17) 논문투고일 : 2012 년 4월 30 일 / 논문심사완료일 : 2012 년 6월 20 일 / 게재확정일 : 2012 년 6월 26일 - 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