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仁 成 學 校 유지운동과 폐교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1. 머리말 2. 인성학교유지회의 조직 1) 인성학교의 재정 형편 2) 인성학교유지회의 조직 3) 국민대표회의 이후의 유지운동 3. 인성학교유지회의 재조직 1) 협성리 교사 이전과 유지회의 재조직 2) 윤봉길의거 이후의 시련과 폐교 4. 맺음말 1. 머리말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1910년대 초부터 중국 上 海 에는 한인사 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상해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늘어나면서 자녀 교 육 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교민 자체의 교육시설 이 없어 상해 한인 자제들은 외국학교에서 교육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상해에서 활동하던 한인 지도자들은 날로 늘어나는 자제들에 대한 교육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요구를 받아들여 설립되었던 교민학교가 바로 仁 成 學 校 였다. 인성 학교는 1916년 9월 1일 상해 公 共 租 界 虹 口 지역 昆 明 路 載 福 里 75호에서 4 상해 仁 成 學 校 유지운동과 폐교 59
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다. 그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 교민단이 인성학교 를 인수하여 운영하면서 인성학교는 공립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인 성학교의 교육은 민족교육을 통해 민족정신과 역량을 배양하고 자활능력을 양성하여 완전한 민주시민을 육성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인성학교 는 당초 일정한 재정 자산없이 출범하였기 때문에 설립 직후부터 재정난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1932년 4월 尹 奉 吉 의 홍구공원의거 이후 상해 일본 총영사관의 일본어 교육 강요로 1935년 11월 11일 결국 폐교되고 말았다. 인성학교가 일제시기 상해 한인교육의 상징적인 의미를 띠고 있음에도 불 구하고 지금까지 그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1) 다만 1) 인성학교 관련 연구업적은 다음과 같다. 다만 李 明 花 의 논문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내용이 소략하다. 金 鎬 逸, 大 韓 民 國 臨 時 政 府 의 敎 育 思 想 - 建 國 綱 領 에 나타난 三 均 主 義 를 中 心 으로-, 韓 國 史 論, 國 史 編 纂 委 員 會, 1981. 千 敬 化, 日 帝 下 在 中 國 韓 國 人 民 族 敎 育 運 動 硏 究, 국사관논총 9, 국사편찬위원회, 1989. 김형석, 상해거류 한인기독교도들의 민족운동, 용암차문섭교수화갑기념 사학논총, 1989. 유준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육, 문화, 홍보활동, 한민족독립운동사 7, 국사편찬 위원회, 1990. 李 明 花, 上 海 에서의 韓 人 民 族 敎 育 運 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 독립기념관 한국독 립운동사연구소, 1990. 金 正 義, 韓 國 少 年 運 動 史 : 1860년~1945년, 民 族 文 化 社, 1992. 김희곤, 상해 대한인교민단의 성립과 독립운동, 水 邨 朴 永 錫 敎 授 華 甲 紀 念 韓 民 族 獨 立 運 動 史 論 叢, 탐구당, 1992. 崔 志 鷹, 大 韓 民 國 臨 時 政 府 在 上 海 的 敎 育 活 動, 檔 案 與 史 學 5 月 號, 上 海 市 檔 案 館, 1995. 崔 景 珉, 上 海 大 韓 人 僑 民 團 의 結 成 과 活 動,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6. 60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
필자는 최근 인성학교의 설립과 운영, 1945년 일제 패망후 인성학교의 재개 교와 변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고찰한 바 있다. 2) 계속하여 필자는 인성학교 에 대한 일련의 연구 차원에서 인성학교가 재정난으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하 기 위해 벌인 유지운동과 상해 일본총영사관의 압박으로 폐교에 이르는 과정 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본고는 상해지역 민족교육의 상 징적 존재였던 인성학교의 전체적인 모습을 복원하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생 각한다. 2. 인성학교유지회의 조직 1) 인성학교의 재정 형편 인성학교는 당초 재정적인 자산없이 출범하였다. 처음 학교 설립에 필요한 경비는 상해 교민들이 출연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수입보다는 경상 비로 지출되는 비용이 많아 재정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 때문에 인성학교는 1935년 폐교될 때까지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렸다. 孫 科 志, 上 海 韓 人 社 會 史 (1910~1945), 한울, 2001. 孫 安 石, 一 九 二 年 代, 上 海 の 朝 鮮 人 コミユニテイ 硏 究, 東 京 大 學 博 士 學 位 論 文, 1998. 金 鎬 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육활동, 大 韓 民 國 臨 時 政 府 樹 立 80 周 年 紀 念 論 文 集 ( 下 ), 國 家 報 勳 處, 1999. 姜 德 相, 呂 運 亨 評 傳 2 : 上 海 臨 時 政 府, 東 京 : 新 幹 社, 2005. 2) 김광재, 광복이후 상해 仁 成 學 校 의 재개교와 변천, 한국근현대사연구 34, 한국근현 대사학회, 2010. 김광재, 일제시기 上 海 仁 成 學 校 의 설립과 운영, 동국사학 50, 동국사학회, 2011. 상해 仁 成 學 校 유지운동과 폐교 61
인성학교의 예산 현황을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920 년과 1934년의 경우 간략한 예산 현황을 알 수 있을 뿐이다. 1920년의 학교 운영 예산 현황을 보자. 학교가 문을 연지 4년이 지난 1920년부터 학교가 정 비되면서 인성학교는 1년간의 경상비로 2,600원을 책정하였다. 교민단에 소 속된 500여 명의 교민에게 매월 수 角 의 교육비를 징수하였고, 몇몇 유지들 의 특별 捐 助 金, 그리고 소수의 학부형에게 수업료 10원씩을 거두어 학교 유 지비로 충당하였다. 다음은 인성학교가 폐교되기 한 해 전인 1934년의 예산 현황이다. 이 해 에는 매년 2학기로 나누어 매학기에 유치반 5원, 예비반 8원, 보습반 10원을 학비로 받아 7백원 정도의 수업료를 받았고, 상해교민들이 의연금 약 7백원 을 모금하였다. 당시 필요한 1년간 학교경상비는 4천원 정도로 1년간의 수업 료와 의연금을 모두 합쳐도 턱없이 부족하였고 학교운영은 계속 적자상태를 유지하였다. 3) 인성학교가 늘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것은 상해 교민사회가 가난했기 때문 이었다. 인성학교 학생들의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때문 에 학생들은 학비를 내지 못하는 일이 적지 않았고 이것이 다시 인성학교의 재정난을 가중시켰다. 임시정부 요인 金 九 의 아들로 힘들게 인성학교를 다녔 던 金 仁 의 경우에서 이러한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매일아침 김구가 아들 김 인을 교민 집에 데리고 가서 아침을 얻어 먹이고 난 다음에 인성학교에 등교 시키고 점심때 다시 학교로 가서 김인을 데리고 나와 교민 집에 가서 점심을 얻어 먹였다고 한다. 4) 1930년 인성학교를 졸업했던 崔 允 信 ( 崔 重 鎬 의 딸)의 졸업식과 관련된 회고를 보자. 3) 東 亞 日 報 1934년 12월 7일자, 異 域 風 霜 에 艱 步 20 年 經 營 難 中 의 仁 成 學 校. 4) 金 信 구술( 李 炫 熙 對 談, 韓 國 獨 立 運 動 證 言 資 料 集,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59쪽). 62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
하루는 백범 선생님이 들어오세요. 그러고는 얘는 왜 이렇게 울고 앉았어? 그 러시자 우리 어머니 말씀이 철없는 것이 먹고 살기도 힘들고, 아버지 병이 나서 약값 때문에도 힘든 형편인데, 졸업식이 뭐 대단한 거라고, 졸업식에 헌 옷 빨아서 입고 가라니까 서러워서 울고 앉았어요. 그렇게 얘기하시더라고요. 그 이튿날 선 생님이 아침 일찍 오셨어요. 그러곤 돈 1원을 어머니 앞에 내놓으시면서, 제수씨, 윤신이 옷 한 벌 해주세요. 어머니가 깜짝 놀라서, 선생님, 또 어디 가서 뭘 저당 잡히셨어요? 그땐 돈 없으면 여름에 겨울 것을, 겨울엔 여름 것을 저당해야 돈이 쉽게 나오거든요. 어디 가서 돈 구할 데가 없으니까 당장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말 하시더라고요. 선생님께선 웃으시면서 글쎄, 그건 묻지 말고, 그 어린 것이 자 기 딴엔 졸업식인데 어서 옷 해 입혀 졸업식에 보내세요 하시더라고요. 어린 맘에 그게 어찌나 기뻤던지, 제가 지금 여든이 넘었는데 아직도 그 일이 제 가슴 속 에서 쟁쟁합니다. 5) 위의 회고에서 우리는 최윤신으로 대표되는 상해 프랑스조계 한인 가정의 어려운 형편을 넉넉히 볼 수 있다. 또한 학비를 납부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노아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이노아의 부친 이치겸은 天 津 주재 미군에 복무할 때 이치선과 혼인하여 1921년 노아를 낳았다. 그런 데 이치겸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알카즈섬 부대로 전근하면서 서로 떨어져 살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치겸은 상해에 두고 온 처자에게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그런데 그후 이치겸이 군대에서 제대한후 부터는 소식이 끊어지 게 되었다. 상해에서 어린 아들을 데리고 문전걸식을 하다시피 어려운 생활 을 하던 부인은 미국의 신한민보에 여러차례 편지를 보내 남편을 찾아 달라 고 호소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노아도 1933년 11월경 재상해 미국영사에 5) 崔 允 信 구술(이봉원, 대한민국임시정부 바로 알기, 정인출판사, 2010, 70쪽). 상해 仁 成 學 校 유지운동과 폐교 63
게 호소하였으나 아버지를 찾을 길이 없었다. 다행히 이들 모자의 사연을 들 은 미국 동포들이 미화 15달러(상해 달러 45원 10전)를 거두어 상해의 元 昌 公 司 趙 尙 燮 을 거쳐 노아 가족에게 보내 주었다. 인성학교도 노아에게 학비 를 받지 않았는데, 덕분에 노아는 1934년 인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6) 인성학교가 운영상의 어려움을 겪은 데는 외부적인 요인도 컸다. 우선 1920년에 접어들면서 인성학교의 최대 지원단체였던 임시정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임시정부의 정보 및 자금의 통로였던 교통국과 연통제가 일제에 의해 무너지면서 상해 독립운동계에 혹심한 고통이 몰아닥쳤던 것이다. 이 러한 상해 독립운동계의 고통은 인성학교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7) 그리고 1925년 이후 교민단의 권위가 떨어져 교육비 징수가 어렵게 됨에 따라 그만 큼 인성학교의 재정도 어려워졌다. 8) 상해 교민단에서는 인성학교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議 事 會 를 여러 차례 소집하여 상해에 거주하는 교민들로부터 기부금을 요청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9) 인성학교의 재정난은 학교의 잦은 이전으로 나타났다. 인성학교가 처음 昆 明 路 載 福 里 75호에서 설립된 다음해인 1917년에는 근처의 梅 原 里 로 옮겼 다가 1918년 10월 공공조계 北 四 川 路 (현재의 사천북로)에 위치한 明 强 中 學 校 내로 이전하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10) 임시정부가 수립된지 몇 달이 지난후인 1919년 9월 28일에는 프랑스조계 霞 飛 路 長 安 里 로 옮겼다가 다 시 같은 조계 안에서 康 寧 里 등을 전전하다 마지막에 協 成 里 에 안착하였다. 11) 6) 新 韓 民 報 1934년 10월 25일자, 리로아에게 동졍금. 7) 김희곤, 상해 대한인교민단의 성립과 독립운동, 834쪽. 8) 仁 成 學 校 維 持 會 發 起 文 (1928. 1), 日 本 外 務 省 陸 海 軍 省 文 書 (218), 144~145쪽. 9) 金 正 明 編, 朝 鮮 獨 立 運 動 2, 東 京, 原 書 房, 1967, 307쪽. 10) 玄 圭 煥, 韓 國 流 移 民 史 上, 語 文 閣, 1967, 679쪽. 11) 유준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육, 문화, 홍보활동, 104쪽. 64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
인성학교의 이전지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표> 인성학교 이전지 현황 12) 년 도 조 계 주 소 비고 1916. 9. ~ 昆 明 路 載 福 里 75호 1917. 당시 공공조계 提 藍 橋 排 原 里 46호 梅 原 里 의 오기임 1918. 10.~ 北 四 川 路 明 强 中 學 校 내 1919. 9. 당시 愷 自 爾 路 長 安 里 267호 민단사무소 1919. 10.~ 霞 飛 路 康 寧 里 2호 민단사무소 1920. 9. 당시 白 爾 路 239호 민단사무소 1920. 9. 30.~ 프랑스조계 厚 福 里 370호 1922. 10. 白 爾 路 人 傑 里 320호 1923. 1월말 辣 斐 德 路 友 記 里 1호 1926. 10.~1935. 11. 馬 當 路 協 成 里 1호 폐교 때까지 사용 2) 인성학교유지회의 조직 재정난으로 인한 인성학교의 폐교를 막기 위한 유지운동은 1920년부터 본 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상해 한인사회에서는 仁 成 學 校 維 持 會 를 조직하여 인 성학교를 후원하였다. 13) 그후 유지회는 몇 차례 해산되었다가 다시 조직되곤 하였다. 첫 번째 유지회가 설립된 것은 1920년이었다. 유지회가 조직되면서 인성학교는 교민단에서 분리되어 유지회가 관리하게 되었다. 14) 이후 인성학 교는 중간에 교민단이 다시 학교의 관리권을 회복하는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 12) 이 표는 李 明 花 ( 上 海 에서의 韓 人 民 族 敎 育 運 動 )의 논문을 참조하되 일부(이탤릭체) 보완하였음을 밝혀둔다. 13) 國 會 圖 書 館 編, 韓 國 民 族 運 動 史 料 ( 三 一 運 動 篇 其 一 ), 1977, 737쪽. 14) 獨 立 新 聞 1922년 9월 20일자, 仁 成 學 校 開 學 期. 상해 仁 成 學 校 유지운동과 폐교 65
으로 유지회가 학교를 운영하였다. 1920년 현재 유지회의 회원 및 특별 찬조 자, 고문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유지회회원 : 崔 昌 植 鮮 于 爀 韓 鎭 敎 呂 運 亨 李 光 洙 金 泰 淵 金 順 愛 趙 基 千 특별찬조자 : 李 東 輝 李 東 寧 李 始 榮 安 昌 浩 申 圭 植 南 亨 祐 孫 貞 道 고 문 위 원 : 피치(G. F. Fitch, 미국선교사) 파아카(A. P. Parker, 미국선교사, 재상해 잡지 興 華 報 의 주필) 로링손(A. Rawlinson, 미국선교사, 재상해 잡지 차이니즈 레코 더의 주필) 메이슨(Isac Mason, 프랑스 외국선교사협회 부속 프랑스 선교사) 질레트(P. L. Gillitt, 미국선교사, 재남경 중국기독청년회 주사) 15) 이와 같이 인성학교유지회 회원 및 특별찬조자는 대개 임시정부 요인들이 었다. 이채를 띠는 것은 인성학교유지회 고문위원에 당시 상해 및 남경에서 활동하고 있던 5인의 외국 선교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16) 당시 이들 서양 선교사들은 음으로 양으로 한국독립운동을 원조하고 있었다. 외국 선교사들을 고문위원으로 선정한 것은 아마도 기독교단의 후원을 얻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국내와 만주, 특히 간도지역의 미션계통 학교들의 운영은 기 독교단 본부의 재정적 후원에 전적으로 의지하였는데, 인성학교에 관계하던 15) 國 會 圖 書 館 編, 韓 國 民 族 運 動 史 料 ( 中 國 篇 ), 274~275쪽. 16) 이기동, 피치-한국의 독립운동과 기독교청년회를 도운 은인, 한국사시민강좌 34, 2004, 61쪽. 그런데 1920년 당시 상해 일본영사관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인성학교 고문이었던 피치를 부친 피치가 아닌 아들 피치로 오인하고 있다. 피치 부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자서전이 참고가 된다. George Ashmore Fitch, My Eighty Years in China, Taipei, Meiya, 1967. 66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
교민단의 구성원들 가운데 기독교도가 많았다는 점에서 외국선교사들의 협 조와 후원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인성학교 외국인 고문위원 가운데 특기해야 할 인물로는 피치(Gorge Field Fitch, 중국명 費 啓 鴻 ) 목사를 꼽아야 할 것이다. 1910년대 후반 그는 상해에 온 한인들의 정착을 돕거나 미국으로 유학가는 경우 비자를 주선하 는 등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獨 立 新 聞 의 보도에 의하면, 1920 년 당시 피치 목사는 상해의 한인들을 위하여 다수의 의복과 침구류, 구제금 을 모집하여 전달하였다. 1920년 2월 그는 재중 선교사들과 함께 韓 人 救 濟 會 를 조직하여 상해에 거주하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한인들을 도왔다. 피치 의 한인을 위한 자선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상해 일본총영사관은 상해 미 국영사에게 항의하였다. 미국영사관에 호출된 피치는 한인을 원조하는데 대 한 자신의 소신을 당당하게 밝혔다. 즉 그는 余 는 政 治 的 으로 韓 人 의 獨 立 運 動 을 幇 助 한 일이 업노라. 그러나 饑 寒 에 泣 하는 韓 國 同 胞 를 爲 하야 救 濟 의 事 業 은 經 營 하노니 이는 宣 敎 師 인 나의 神 聖 한 義 務 라 라고 하였던 것이 다. 17) 獨 立 新 聞 은 피치 목사를 同 胞 의 恩 人 이라고 칭송하였다. 18) 선교사 였던 그의 아들(Gorge Ashmore Fitch, 중국명 費 吾 生 ) 역시 선교활동을 하 면서 한국독립운동을 원조하였다. 특히 그가 윤봉길의거 이후 일제의 추격을 받고 있던 김구 일행을 자택에 숨겨주었던 사실은 한국독립운동사의 미담으 로 남아 있다. 19) 미국 출신의 YMCA 운동가인 질레트(P. L. Gillett, 1874~1939) 또한 한국 독립운동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그는 1901년 조선에 건너와 1903년 10월 서울YMCA를 창설하고 총무에 취임했다.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 의 전 17) 獨 立 新 聞 1920년 2월 7일자, 救 濟 會 의 活 動. 18) 獨 立 新 聞 1920년 2월 7일자, 時 事 短 評. 19) 김구 저 도진순 주해, 白 凡 逸 志, 돌베개, 1997, 338 342~343쪽. 상해 仁 成 學 校 유지운동과 폐교 67
모를 해외에 알리려다 발각된 그는 1913년 6월 일제에 의해 중국으로 추방 되었다. 그후 남경YMCA, 상해YMCA 총무로 재직하며 중국내의 한국독립운 동을 지원했다. 일설에 의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에 재정지원을 했다 고 한다. 20) 피치와 질레트 외의 다른 외국인 고문위원에 대해서는 자료 부족 으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인성학교유지회는 취지서를 만들어 재미교포들에게 인성학교 교사건축 기금을 호소하였다. 21) 서양인들에게는 KOREAN SCHOOL, SHANGHAI CHINA, AUGUST 15, 1920 라는 제목의 영문 팜플랫을 만들어 배포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해의 한인학교는 1916년 가을, 한 개인집에서 5인의 학생으로 시작하였다. 학 생은 급증하여 2년이 지난 후에는 집에서 넘쳐날 정도였다. 1918년 가을, 학교는 로저스 교장의 친절한 허가하에 明 强 學 校 로 이전하였다. 1919년 가을 학기가 개 시될 때 학교는 다시 이곳에서 프랑스조계의 작은 집으로 옮겼는데, 불행히도 입학 을 열망하는 자제를 모두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좁았다. 적어도 35인, 혹은 40인의 신입생이 금번 가을에 입학을 희망하고 있는데, 현재 시설로서는 우리는 한 사람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상해의 한인 인구는 최근 몇 년간, 특히 작년 3월 조선독립선 언 이래 급속하게 늘어가고 있다. 이미 800인에 육박하고 있으며, 금후 얼마나 많 은 사람들이 올지 상상할 수 없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정치적인 망명객이며 따 라서 정치문제가 만족스럽게 해결될 때까지는 귀국이 불가능한 실정이다. 우리는 20) 김상태 편역, 윤치호 일기 : 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 시기, 역사비평사, 2001, 75쪽. 21) 新 韓 民 報 1920년 11월 4일자, 상해한인학교 긔본금모집취지서 ; 上 海 韓 人 學 校 의 基 金 募 集 과 外 人 援 助 에 關 한 件, 大 正 10 年 (1921 年 1 月 27 日 ), 高 警 第 2068 號 ( 國 史 編 纂 委 員 會, 韓 國 獨 立 運 動 史 資 料 3, 臨 政 篇 Ⅲ, 1973, 313~316쪽). 68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
금후 수년간 상해에 한인 취학 적령기 아동이 200명이 넘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다. 우리들은 작년 (취학) 요망에 응할 수 없었는데, 시설 개선이 되지 않으면 금년에 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150명에서 200명의 아동을 입학시킬 수 있는 넓은 교사를 건설하는데, 약 2만 달러의 자금을 조달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자금의 반액은 한인들이 스스로 모집하고 학교의 유지도 또한 그들이 담당할 것이다. 우리 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교육, 문명 그리고 휴머니즘의 중요성을 믿는 모든 인사들의 원조를 통해 나머지 반액을 모집하고자 한다. 손정도(C. D. SOHN) 여운홍(W. H. LYUH) 한송계(S. K. HAN) 김태연(T. Y. KIM) 선우혁(H. SOHNOUGH) 22) 위의 5인 가운데 손정도 여운홍 김태연 선우혁의 4인은 모두 인성학교 교장을 역임한 인물들이다. 한송계, 즉 한진교는 인성학교 설립 때 재무를 맡 아 학교 설립자금을 모금하였는데, 여기에는 그가 경영하던 海 松 洋 行 의 고려 인삼 판매자금이 적지 않게 투입되었다고 한다. 23) 이 팜플랫의 내용은 상해의 서양 신문인 상해가제트(Shanghai Gazette, 英 文 滬 報 1920년 9월 16일) 와 차이나프레스(China Press, 大 陸 報 1920년 9월 20일) 등에 실렸다. 24) 22) KOREAN SCHOOL, SHANGHAI CHINA, AUGUST 15, 1920 ( 不 逞 鮮 人 의 行 動 에 관한 件 2, 1920년 8월 25일, 不 逞 團 關 係 雜 件 鮮 人 의 部 在 上 海 地 方, 국사편찬 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하 동일). 이 팜플랫에는 인성학교 39명의 생도와 여운형 등 7인의 교사가 함께 찍은 단체사진이 실려 있다. 23) 韓 泰 東 구술, 2010년 4월 9일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24) 上 海 鮮 人 의 動 靜 에 관한 件 3, 1920년 9월 20일( 不 逞 團 關 係 雜 件 鮮 人 의 部 在 上 海 地 方 ). 상해 仁 成 學 校 유지운동과 폐교 69
기사의 내용은 위의 영문 팜플랫의 내용과 대동소이한데, 다만 마지막에 영 문 팜플랫에는 보이지 않는 신축될 교사의 배치 및 용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 다. 인성학교 교장 여운홍의 계획에 의하면, 학생 200~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3층 건물을 세우는데 25,000달러의 비용을 상정하고 있다. 건물의 1층 은 사무실 및 신문 열람실, 2층은 교실, 3층은 예배당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예배당을 같이 건축하기로 한 것은 상해 한인 기독교도들이 변변한 교당이 없어 중국인 교회나 YMCA를 전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문기사는 기부를 희망하는 경우 교사신축 주비처 사무실이 있는 龍 門 路 206호나 혹은 사천로 중국기독교청년회 피치(G. A. Fitch) 간사 경유, 피치 (G. F. Fitch) 박사에게 전달할 것을 요청하였다. 25) 龍 門 路 206호는 여운형이 살던 곳으로 26) 당시 동생 여운홍과 함께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인 성학교 교장 여운홍의 교사 신축 계획은 1920년 9월 사천로 중국기독교청년 회에서 인성학교유지회 및 서양인 고문단의 합동회의에서 승인된 것임에 틀 림없을 것이다. 유지회는 서양 인사들에게 학교신축 자금의 원조를 요청하는 편지도 보냈 다. 그 가운데 인성학교 교장 여운홍의 요청을 받은 상해 美 隆 洋 行 의 미국인 친구 큐란(Garner Curran)이 미국 시애틀 상업회의소 소속 광고구락부 서기 에게 편지와 취지서를 함께 보낸 바 있었다. 27) 여운홍은 중국측 인사들에게도 상해 한인학교 건축을 위한 의연금 모금을 25) 영자신문에 실린 기사내용은 그 다음날 중국신문 時 報 (1920년 9월 17일, 旅 滬 韓 人 募 捐 興 學 ; 9월 20일, 韓 人 在 滬 興 學 續 誌 ; 9월 23일, 旅 滬 韓 人 興 學 三 誌 )에 번역 소개되었다. 秋 憲 樹, 資 料 韓 國 獨 立 運 動 2, 연세대 출판부, 1972, 36~38쪽. 26) 1920년 2월말 현재 여운형은 龍 門 路 206호에 거주하고 있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9, 280쪽). 27) 國 會 圖 書 館 編, 韓 國 民 族 運 動 史 料 ( 中 國 篇 ), 273~274쪽. 70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
알림( 上 海 韓 人 學 校 建 築 募 捐 啓 ) 이라는 중국어로 된 취지서를 발송하여 기 부를 요청하였다. 여운홍은 이 모연계를 휴대하고 직접 중국 남방의 혁명근 거지인 廣 州 로 가서 廣 東 護 法 政 府 요인들을 방문하고 지원을 호소하였다. 28) 1920년 11월 28일 孫 文 이 광주로 돌아가 호법정부를 재건하고 1921년 5월 호법정부 비상대총통에 취임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여운홍을 광주에 축 하사절로 파견하였던 것이다. 29) 상해 한인들의 호소에 중국의 유지인사들도 화답하였다. 광동호법정부 사 법부장 徐 謙, 상해현 지사 沈 寶 昌, 광동호법정부 대리 사법부장 吳 山, 강소 성 교육회 회장 黃 炎 培 등은 한인 교육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는 성명서를 발 표하였다. 30) 이들 가운데 徐 謙 은 호법정부 손문의 측근으로 중한호조사에서 중국측을 대표하는 인물로 상해 한인들을 많이 도와준 친한 인사였다. 31) 그는 한인의 복국운동은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주어 중국에 대한 침략 야 심을 저지시켜 줄 수 있다. 때문에 한인들이 스스로 독립을 도모하는 것은 간 접적으로 중국을 돕는 것이 된다. 중국이 그 능력을 다해서 한인의 독립을 도 와주는 것은 중한호조의 정신을 실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중국을 위한 자위 28) 呂 運 弘 ノ 行 動 ニ 關 スル 報 告 ノ 件 (1921.5.4) (독립기념관 데이터베이스). 29) 徐 方 民, 中 韓 關 係 史 ( 近 代 卷 ), 社 會 科 學 文 獻 出 版 社, 1996, 187쪽. 30) 不 逞 鮮 人 呂 運 弘 ノ 行 動 ニ 關 スル 件 (1921.5.4) ( 外 務 省 外 交 史 料 館 藏, 外 務 省 警 察 史 第 53 卷, 支 那 ノ 部 南 支, 東 京 : 不 二 出 版 ( 株 ), 2001, 21~22쪽). 31) 朝 鮮 日 報 1923년 9월 8일자, 徐 謙 氏 를 惜 別. 徐 謙 은 그후 상해 중국기독교 구 국회장을 지내다가 1923년 광동의 嶺 南 大 學 문과 주임교수로 갈 때 상해의 한인들 은 그의 도움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 위해 동년 8월 28일 南 京 路 의 大 東 旅 社 에서 惜 別 宴 을 베풀었다. 徐 謙 의 정치활동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이 참고된다. 민두기, 徐 謙 (1871~1940); 政 客 과 革 命 家 의 사이 國 民 革 命 期 政 治 指 導 者 像 에의 한 接 近, 東 洋 史 學 硏 究 제33집, 1990. 상해 仁 成 學 校 유지운동과 폐교 71
방법이기도 하다 고 피력한 바 있다. 32) 沈 寶 昌 (1883~1935)은 浙 江 省 사람 으로 1903년 鄕 試 에 합격하여 擧 人 이 되었으며 1914년부터 1924년까지 상 해현 지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상해현 지사 재임중 체육사업을 중시하여 중 국 최초의 공설운동장인 상해 公 共 體 育 場 을 건설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화재 의 외국 유출을 막는 등 중국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였던 인물이다. 33) 吳 山 은 한국독립운동에 동정과 원조를 보내던 친한인사로 특히 윤봉길의거 이 후 어려움에 처한 한국독립운동가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34) 그는 상해의 한인 들이 중국 국적으로 귀화할 때 그 보증을 서기도 하였다. 35) 黃 炎 培 는 중국의 저명한 교육학자였다. 36) 아무튼 중국 교육계 인사들은 한인학생들을 각지 학 32) 民 國 日 報 1923년 5월 30일자. 33) 紹 興 縣 報 2010년 10월 10일자, 沈 寶 昌 : 国 内 第 一 个 建 造 体 育 場 的 安 昌 人 (2012년 3월 22일 중국 포털사이트 百 度 에서 검색). 34) 國 會 圖 書 館 編, 韓 國 民 族 運 動 史 料 ( 中 國 篇 ), 751쪽. 吳 山 (1876~1936)은 중국 四 川 省 출신으로 일찍부터 반청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여러차례 체포되거나 도피생활을 하였 다. 후에 일본으로 가서 明 治 大 學 법과에서 수학하였다. 1915년 11월 2일 中 華 革 命 黨 사천지부 회계과 과장이 되었다. 袁 世 凱 사후 오랫동안 광동에서 정치활동에 종사하였 다. 이후 북벌군이 남경에 들어오기 전부터 상해에 체류하여 전국철로협회 총간사의 직 함으로 배일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항일단체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劉 國 銘 主 編, 中 國 國 民 黨 百 年 人 物 全 書 上, 北 京, 團 結 出 版 社, 2005, 1015쪽. 35) 朝 鮮 日 報 1923년 5월 23일자, 同 胞 의 歸 化. 36) 黃 炎 培 (1878~1965)는 중국 江 蘇 省 川 沙 縣 (현재의 上 海 ) 출신으로 상해 南 洋 公 學 에서 수학하였으며 蔡 元 培 의 소개로 同 盟 會 에 가입하였다. 민국 초 강소성 敎 育 司 司 長 을 지 냈으며 1916년에는 직업교육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19년 5 4운동시기 江 蘇 省 敎 育 會 책임자로서 상해 각학교 교장 회의를 소집하여 5 4운동을 성원하였다. 1928년 조선과 일본을 시찰하였으며 귀국후 朝 鮮 등을 저술하여 조선 망국의 경험을 본보기로 자국 인에게 경고하였다. 중일전쟁 중에는 國 民 參 政 會 상임위원, 民 主 同 盟 의 중진으로서 민 주주의의 옹호에 진력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후 政 務 院 부총리 등을 역임 하였다( 劉 國 銘 主 編, 中 國 國 民 黨 百 年 人 物 全 書 下, 2067쪽). 그리고 황염배가 지은 72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
교에 입학시키기로 결의하고 동시에 인성학교 교사건축 모금운동을 벌여 다 소의 교사건축비를 기부하였다고 한다. 37) 한편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던 인성학교는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 다. 교민단장 金 澈 은 교원 金 秉 祚 로 하여금 인성학교 小 女 夏 期 臨 時 演 劇 團 를 조직하여 모금하도록 하였다. 연극은 1922년 8월 5일 저녁 三 一 堂 에서 개최 되었다. 38) 교민들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형편이었기 때문에 모금은 성공적이 지 못했다. 39) 때문에 연극회는 9월 4일에도 개최되었다. 이번에는 신임 교민 단장 여운형의 주도로 번화한 공공조계 慕 爾 堂 에서 연극회를 개최하였던 것 이다. 연극 개회시 교민단장 여운형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다. 우리 동포의 자유를 얻고자 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국권의 회복에 힘써야 합니다. 나라의 광복도 민족의 행복 발달 향상도 그 기초는 국민 교육에 기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대 기관도 현재는 경비가 나오는 곳이 없어서 폐교의 모습이 되었습니 다. 나는 이번에 단장에 당선된 이상 당연한 책임자로서 이를 차마 방관할 수 없습 니다. 모름지기 제군의 원조에 맡겨 하다못해 집세만이라도 얻어 하루라도 빨리 개 교하는 것을 급무라고 생각하여 이번에 이 연극회를 개최한 것이니 여러분도 저 소 녀들의 미숙한 재주에 만족은 할 수 없겠지만 이것이 우리 민족의 자유로 이끄는 朝 鮮 ( 上 海 : 商 務 印 書 館, 1929)이라는 책자의 부정적이고도 왜곡된 韓 國 觀 에 대해서 는 일찍이 임시정부 요인인 李 始 榮 이 感 時 漫 語 (1934)라는 중문으로 된 책을 지어 痛 駁 한 바 있었다( 李 始 榮, 感 時 漫 語 - 駁 黃 炎 培 之 韓 史 觀, 一 潮 閣, 1983으로 번역됨). 37) 崔 志 鷹, 大 韓 民 國 臨 時 政 府 在 上 海 的 敎 育 活 動, 64쪽. 崔 志 鷹 은 당시 중국 교육계 인 사들이 한인측에 1만원을 기부하였다고 하는데, 그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38) 獨 立 新 聞 1922년 8월 12일자, 小 女 夏 期 演 劇 會. 39) 假 政 府 의 財 政 難 其 他 에 관한 건, 1922년 8월 7일( 不 逞 團 關 係 雜 件 - 朝 鮮 人 의 部 - 上 海 假 政 府 ). 상해 仁 成 學 校 유지운동과 폐교 73
것이라 생각하여 최후까지 연극을 관람해주시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40) 위의 연설에서 여운형은 국권 회복과 광복의 기초는 국민 교육이라고 강조 하였다. 여운형의 호소때문인지 몰라도 이번에는 연극회 입장자가 대폭 증가 하였다. 지난달의 80여 명에서 한인 170명, 중국인 35명 등 205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입장료 수입 123원 가운데 제 경비를 공제하고 순익으로 2개월분 의 집세를 지불할 수 있었다. 1922년 해산되었던 유지회는 그해 다시 조직되었다. 1922년 임시정부와 교민단은 인성학교의 운영과 경비 마련을 위해 유지회를 다시 조직하였다. 같은해 9월 7일 프랑스조계 新 民 里 2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제2회 유지회가 열렸는데, 이때의 간부진은 다음과 같다. 회장 : 金 仁 全 위원 : 呂 運 亨 安 昌 浩 尹 琦 燮 趙 尙 燮 南 亨 祐 車 利 錫 韓 松 溪 金 九 41) 朴 鎭 宇 金 鍾 商 위와 같이, 유지회에는 임시정부와 교민단의 주요인사가 망라되어 있었 다. 이 날 회의에서 교장이던 안창호가 사임하였고 후임에 金 鍾 商 이 결정되 었다. 42) 또 교민단장 여운형은 인성학교가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 40) 교민단대회에서의 남북 선인의 감정 충돌과 仁 成 學 校 궁핍에 관한 건, 1922년 9월 7 일, 상해총영사 외무대신(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1, 관련단체 Ⅰ, 2009, 43쪽). 41) 朝 鮮 人 仁 成 學 校 維 持 方 針 및 校 長 辭 職 에 관한 件, 1922년 9월 13일( 不 逞 團 關 係 雜 件 - 鮮 人 의 部 - 在 上 海 地 方 ). 42) 獨 立 新 聞 1922년 9월 20일자, 仁 成 學 校 開 學 期. 김종상은 9월 13일에 열린 제3회 인성학교유지회 회의에서 교장직을 사임하였으므로 유지회 회장인 金 仁 全 이 교장으로 74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
으므로 우선 교민단비를 지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남형우가 교민단에 그만한 여유가 있는지 의문을 표시하면서 여운형의 발언에 제동을 걸었다. 이에 대해 여운형은 국내의 여운홍으로부터 재외동포위문회가 이미 4만원을 모집하였고 인성학교에 대해서는 매년 2천원씩 지원금이 올 것으로 통보를 받았다고 밝혔다. 계속하여 그는 교육은 국민의 의무이므로 상해 재주 아동 은 상해 거주민이 교육시킬 의무가 있다 고 발언하여 참석자 모두가 공감하 였다. 43) 유지회는 수업료로 예비반 7원, 본과 10원을 징수하기로 결정하고 白 爾 路 321호 2층의 7간을 월 58달러에 임대하여 이전하고 9월 22일부터 수 업을 개시할 수 있게 되었다. 44) 물론 외부의 기부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종래 교민단에서는 프 랑스조계 당국으로부터 인성학교에 대한 교육자선사업보조금 으로 매년 600불씩 지원을 받고 있었다. 45) 또 1920년대 초에는 이른바 모스크바 자금 가운데 극히 일부 금액이 교민단과 인성학교에 유입되기도 하였다. 1919년 12월 韓 馨 權 이 모스크바에서 레닌으로부터 받은 60만 루불 가운데 남은 20 만 루불을 가지고 상해에 왔는데, 그 가운데 인성학교에 135원, 교민단에 결정되었다( 仁 成 學 校 維 持 方 針 決 定 에 관한 件, 1922년 9월 16일( 不 逞 團 關 係 雜 件 - 鮮 人 의 部 - 在 上 海 地 方 ). 43) 朝 鮮 人 仁 成 學 校 維 持 方 針 및 校 長 辭 職 에 관한 件, 1922년 9월 13일( 不 逞 團 關 係 雜 件 - 鮮 人 의 部 - 在 上 海 地 方 ). 44) 鮮 人 仁 成 學 校 授 業 開 始 에 관한 件, 1922년 9월 20일( 不 逞 團 關 係 雜 件 - 鮮 人 의 部 - 在 上 海 地 方 ). 45) 大 韓 僑 民 團 의 近 況, 1934년 1월 26일자, 상해총영사 외무대신(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1, 관련단체Ⅰ, 2009, 73쪽). 1934년경 교민단은 프랑스조 계 당국의 인성학교에 대한 지원금을 600불에서 1,000불로 인상하여 요구하기로 결정 하였다. 상해 仁 成 學 校 유지운동과 폐교 75
500원이 지원되었다. 46) 그러나 135원이라고 하는 액수는 인성학교가 정상화 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음에 분명하다. 국민대표회의 개최비용이나 자파와 가까운 단체에 수 만원 이상의 큰 금액이 지원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3) 국민대표회의 이후의 유지운동 인성학교를 살리기 위한 교민들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경영난 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1923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상해에 모인 한인들은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분주 하였다. 국민대표회의에서는 한인 교육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논의되었 다. 47) 국민대표회의의 교육분과위원회는 한인 교육에 관한 다음과 같은 결의 안을 통과시켰다. 1. 교육종지는 조국광복의 정신하에서 건전한 시대적 인물을 양성할 것. 2. 교육방침은 최신 교육의 원리를 응용하여 우리 민족에 적합하도록 학교 특수 46) 倍 達 公 論 제2호, 1923년 10월 1일(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별 책3, 배달공론 독립공론, 2010, 44쪽; 윤대원, 상해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서 울대학교출판부, 2006, 253쪽). 한형권이 가져온 20만 루불의 사용 내역은 다음과 같다. 온다 간다하는 여비로 5만 5천 3백 55원, 기밀통신 기타 잡비 1만 1천 9백 44원, 국민 대표회의에 준 것 6만 4천 9백 75원, 정부에 준다하고 일허먹은 것 3만원, 정부유지운 동비라는 것 6천 3백 35원, 의열단에 준 것 4만 6천 7백원, 신의단에 준 것 4천 7백 58 원, 十 八 團 에 준 것이 2천 3백 50원, 인성학교에 1백 35원, 상해민단에 5백원, 활자매입 비 1천 10원, 폭탄매입비 6백원, 쓰다 남은 것이 4백 20원 등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최 근 러시아에서 발굴된 자료들에서도 입증되고 있다(조철행, 國 民 代 表 會 前 後 민족운 동 최고기관 조직론 연구,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0, 99쪽). 47) 孫 科 志, 上 海 韓 人 社 會 史 (1910~1945), 159쪽. 76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
의 양종 교육을 시행할 것. 3. 교육제도는 현대의 실용제도를 채용하되, 소학은 남녀 만 7세부터 13세까지 의무제로 할 것. 4. 교과용 도서는 중앙교육기관에서 최단기간 내에 편찬 발행토록 할 것. 48) 위의 결의안도 교육종지를 조국광복의 정신 으로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자제교육에서 민족의식 향상에 역점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한 의무 교육 제도 실시도 강조하였다. 하지만 처음 의욕적으로 발족한 국민대표회의 가 임시정부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창조파와 개조파, 임시정부 고수파 등으로 나뉘어져 결렬되면서 교육문제에 대한 논의도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1923년 6월 국민대표회의가 끝난후 인성학교는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하 여 자구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민단장과 인성학교 교장을 겸임하 고 있던 都 寅 權 이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후 노령으로 떠나버려 교장이 공석 으로 있었다. 49) 교민단에서는 도인권을 면직시키고 노병회 경리부장으로 있 던 李 裕 弼 을 교민단장에 선정하였다. 50) 인성학교유지회에서도 도인권에 대해 교장의 직분을 버리고 타지로 갔다고 하여 면직처분을 하고 이유필을 교장으 로 호선하였다. 51) 1923년 8월 25일부터 교민단장 이유필이 인성학교 교장을 겸임하였으며 교감에는 조상섭, 학감으로는 尹 琦 燮 이 임명되었다. 52) 명예교 사로 金 承 學, 白 基 俊 등 4~5인을 초빙하고 교육방법을 일신하여 9월 10일 48) 獨 立 新 聞 1923년 6월 13일자, 國 民 代 表 會 議 記 事. 49) 都 寅 權, 竹 軒 都 寅 權 自 敍 傳, 石 室, 2010, 61쪽. 50) 朝 鮮 日 報 1923년 9월 8일자, 民 團 長 更 迭. 51) 朝 鮮 日 報 1923년 9월 12일자, 仁 成 校 長 更 迭, 리유필시로 選 任. 52) 김광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혁명가 윤기섭, 역사공간, 2009, 127~128쪽. 상해 仁 成 學 校 유지운동과 폐교 77
개학하였다. 53) 새로이 취임한 인성학교 운영진은 우선 각계에 인성학교에 대한 지원을 호 소하였다. 인성학교는 재외동포위문회에 편지를 보내 이미 모집된 후원금의 일부를 송금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54) 앞에서 살펴 본 바 있거니와, 1920년 여 름에 여운홍이 미국에서 돌아와 교장으로 선임됨과 동시에 인성학교 육성책 을 제시하고 교사신축계획을 발표한 바 있었다. 여운홍 교장은 교사신축에 필요한 2만 5천원의 기금을 모금하기로 예정하고, 예정금액의 반은 상해 교 민들과 고국에서 구하여 충당하고 나머지 반액은 재미 교포들에게 갹출하기 로 계획하였다. 그리고 교민단과 임시정부 학무부는 외국인들로부터도 자금 을 모집하기로 협의하였다. 55) 인성학교 신축기금 모집운동을 가속화하기 위 해 교장 여운홍은 1921년 9월 직접 국내로 들어갔다. 학교 운영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내 동포들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여운홍이 모금운동을 하는 동안 인성학교는 극심한 재정난을 겪 고 있었다. 인성학교는 인성학교의 사정을 내외지동포에게 訴 하는 글 이라 는 호소문을 각계에 배포하였다. 국내의 조선일보에 게재되었던 호소문의 내 용은 다음과 같다. 인성학교의 직원된 저희들은 여러분께 인성학교를 위하여 힘을 도와주시기를 53) 東 亞 日 報 1923년 9월 20일자, 上 海 仁 成 學 校 교실까지 신축계획. 이때 인성학교는 아울러 학교 명칭도 변경하였다. 즉 인성소학교 라는 명칭 앞에 공립 이라는 말을 붙여 공립인성소학교 라고 개정하였다( 朝 鮮 日 報 1923년 11월 12일자, 仁 成 學 校 의 名 稱 公 立 二 字 를 增 加 ). 이는 임시정부 내무부령으로 설립된 교민단이 경영한다는 취지에서 학교의 공립적인 성격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었다. 54) 朝 鮮 日 報 1923년 10월 9일자, 仁 成 學 校 의 維 持 困 難. 55) 不 逞 鮮 人 의 行 動 에 관한 件 2, 1920년 8월 25일( 不 逞 團 關 係 雜 件 - 朝 鮮 人 의 部 - 上 海 假 政 府 ). 78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
바라고 삼가 고하나이다. 이 학교는 본래 칠년전부터 멧멧 사람들이 이곳에 사는 여러 동포의 아희들을 가르치려고 세운 것이올시다. 그세울 때로부터 지금까지 오 도록 아모 밋쳔도 업고 집 한 간도 업시 오직 여러사람의 의연금과 학도의 학비금 으로 솃집에서 근근히 지내와 늘 곤난이 막심하엿슴니다. 이제와셔는 학도는 점점 늘어셔 오십명이나되고 집세와 물가는 더욱 올라셔 경 비지출은 만하가는데 학부형의 살님이 더욱 간고하여가고 유지자의 의연금은 만 치못하여 학교를 지탱하여가기가 매우 어려워가옵니다. 교육을 계속하여가자니 경 비지출이 길이 업고 교육을 그만두자니 피어나오는 꼿송이를 꺽기는 참아 못하겟 나이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당한 처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푸지 안음닛가. 이것은 우 리가 배우지 못한 죄갑시라 하려니와 그 인목이 번 하고 행동이 활발하고 천진이 난만한 꼿송이갓흔 우리의 져 아희들이야 무슨죄로 개밥의 도토리가 되옵잇가. 또 우리가 압길을 생각하면 우리가 암만 애를 써셔 사업을 이루어노흘지라도 이것을 지니고 늘이어갈 져 아희들을 도야지갓치 버리어두면 헛일이 안이오닛가. 허물며 멀지 않이하여서 져 아희들도 우리의 큰 일에 몸소 참예하게 되겟슴에오닛가. 그런 즉 우리가 엇지 아희들의 교육을 헐후하게 여기겟슴닛가. 더구나 이곳은 모든 나라사람이 모이어 사는 데임으로 각국사람들은 각각 져의 후생들의 잘난 것을 나타내는데 우리는 엇지 아모데로 뜨더보아도 남의 아희들보 다 못하지안은 우리의 아희들로 남의 밋에 들게하여 우리가 두번 부끄러움을 당하 겟슴닛가. 이것은 참아 못할 것이 아니오닛가. 그러한데 우리의 일은 우리박게 셔로 함 하여 갈이가 업슴니다. 그러함으로 비 록 여러분의 어려우심은 알으오나 티끌모아 태산되고 백지장도 마조들면서 쉽다 함을 생각하고 이 사정을 들이고하오니 깁히 생각하사 힘써 도아주심을 바라고 밋 삼나이다. 인하와 여러분의 건강하심을 삼가빌으옴나이다. 上 海 法 租 界 辣 斐 德 路 友 記 里 一 號 상해 仁 成 學 校 유지운동과 폐교 79
仁 成 學 校 校 長 李 裕 弼 校 監 趙 尙 燮 56) 學 監 尹 琦 燮 이러한 인성학교의 호소에 조선일보도 칼럼을 실어 성원하였다. 57) 이와 같 은 호소에 의한 결과 일부 후원금이 접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몇 몇 경우가 신문에 보도되었다. 예를 들어, 평북 초산군에 거주하는 李 瑞 容 이 라는 이는 인성학교의 곤경을 접하고 주머니를 털어 돈 60전을 상해인성학 교에 보내달라고 조선일보사에 기탁하였다. 58) 경기도 이천군의 김정목, 구종 서 두 사람은 후원금 55전을 인성학교에 보내달라고 맡겨왔다. 59) 1924년 교민단은 의사회를 개최하여 인성학교 규칙을 개정하였다. 교민단 의사회에서는 교육문제를 전담하면서 인성학교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학무위원회를 두었다. 60) 동년 1월부터는 교민단 학무위원회 조례를 마련하고 학무위원을 선임하였다. 학무위원회는 교민단의 교육행정에 협조하기 위해 교민단 구역내에 거주하는 학식과 덕망이 있는 10인의 인사들을 학무위원으 로 선정하였다. 61) 文 伯 宇 閔 弼 鎬 吳 永 鮮 閔 橿 鄭 光 好 金 枓 奉 呂 運 亨 羅 昌 憲 趙 德 津 62) 金 甲 56) 朝 鮮 日 報 1923년 11월 18일자, 仁 成 學 校 의 事 情 을 內 外 地 同 胞 에게 訴 하는 글. 57) 朝 鮮 日 報 1923년 11월 20일자, 民 聲. 58) 朝 鮮 日 報 1923년 11월 22일자, 李 瑞 容 君 美 擧. 59) 朝 鮮 日 報 1923년 12월 25일자, 仁 成 學 校 에 同 情. 60) 朝 鮮 日 報 1924년 1월 24일자, 인셩학교에 학무위원회를 두어. 61) 朝 鮮 日 報 1924년 1월 4일자, 上 海 僑 民 團 의 新 事 業, 義 警 隊 와 學 務 委 員 會 를 設 置. 62) 上 海 日 本 總 領 事 館 警 察 部 第 2 課, 朝 鮮 民 族 運 動 年 鑑, 1923년 12월 16일 1924년 1 80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
학무위원회는 김두봉을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매년 1월과 7월에 정기회의 를 열고 교육사항을 의결하기로 하였다. 63) 또 임시정부에서 교육정책으로 지 향하던 의무교육제에 입각하여 학령에 달한 아동과 소학교육을 받아야 할 아동은 반드시 인성학교로 입학할 것을 권유할 것 을 결정하였다. 아울러 인 성학교 경비에 관하여 교민단 의원 전부의 연서로써 교민들에게 동정을 구하 는 한편, 교육비 납부 관념을 고취할 것을 결정하였다. 64) 예를 들어, 1924년 2 월 2일 上 海 留 學 生 會 가 프랑스조계 모처에서 정기총회를 개최하자 학무위 원장 김두봉과 정광호가 여기에 참석하여 인성학교 교사 건축에 대한 협조를 당부하는 연설을 하였다. 유학생회에서도 이에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을 약속 하였다. 65) 인성학교는 공립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국내외 동포들의 호응을 받아 학교 도서관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사실 인성학교는 참고서적류가 부족 하여 학생 교육에 애로를 겪고 있던 중이었다. 66) 이들 참고서적류는 인성학교 뿐만 아니라 상해에 있는 일반 동포들에게도 열람하도록 하여 문화발전에 이 바지한다는 취지에서 국내외의 동포들에게 신문, 잡지와 책을 기부해줄 것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67) 그 결과 도서관 설치를 위해 필요한 일부 도서들이 답 지하였는데, 인성학교측은 책을 보내준 동포들에게 감사장을 발송하였다. 한편 인성학교 지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간 여운홍은 거의 반 월 12일(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별책 2, 조선민족운동연감, 2009, 145쪽). 63) 朝 鮮 日 報 1924년 1월 4일자, 上 海 僑 民 團 의 新 事 業, 義 警 隊 와 學 務 委 員 會 를 設 置. 64) 東 亞 日 報 1924년 2월 9일자, 仁 成 學 校 建 築 決 定. 65) 東 亞 日 報 1924년 2월 11일자, 上 海 留 學 生 會 任 員 을 새로 改 選. 66) 朝 鮮 日 報 1924년 1월 5일자, 上 海 仁 校 附 屬 文 庫 計 劃. 67) 東 亞 日 報 1923년 9월 20일자, 上 海 仁 成 學 校 교실까지 신축계획 10월 13일자, 上 海 仁 成 學 校 圖 書 寄 附 勸 誘 각처에 향하여 12월 12일자, 圖 書 寄 附 希 望. 상해 仁 成 學 校 유지운동과 폐교 81
년만에 동아일보 주필 장덕수, 조사부장 김동성 등과 함께 재외동포위문회를 조직하였다. 68) 재외동포위문회가 적극적인 모금운동을 벌였지만 모금액이 상 해로 온 것은 여운홍이 국내에 들어간지 2년 여의 시간이 흐른 뒤인 1924년 1월이었다. 일제의 방해 등 여러가지 사정으로 재외동포위문회가 모금액을 송금하는데 2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1924년 1월 국내 재외동포위문회의 후원금 1,144원이 상해에 도착했다. 69) 인성학교는 이 가운데 1,000원을 학교와 교민단의 숙원사업인 교사신축비로 예치해 두었다. 70) 나머지 144원은 校 費 로 충당하였다. 71) 이렇게 재외동포위문 회의 성금은 상해 뿐만 아니라 동북, 미주 등지에도 보내져 한인 아동교육을 위해 긴요하게 활용되었다. 72) 1924년에는 학교를 전담하는 교장과 교민단장을 분리하기로 하여 趙 尙 燮 이 인성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73) 조상섭은 부임 직후 교사신축을 계획하 고 1만원의 예산을 책정하였다. 그는 학교에서 소요되는 겨울철 연료 비용을 절약하였으며 교사들도 교장의 이러한 열의에 감동되어 자신들의 월급을 희 68) 姜 德 相, 呂 運 亨 評 傳 2 : 上 海 臨 時 政 府, 64쪽. 69) 朝 鮮 日 報 (1924년 1월 23일자, 仁 校 에 千 五 百 圓 )에는 이때 인성학교에 송금된 금액이 1,500원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1,144원의 오기로 보인다. 그런데 이보다 전인 1923년 3월 안창호가 북경에 가서 이광수를 만났는데, 이때 안창호는 동아일보사의 재 외동포 위문금 1,700원을 전달받았다고 한다( 李 明 花, 島 山 安 昌 浩 의 獨 立 運 動 과 統 一 路 線, 338쪽). 70) 新 韓 民 報 1924년 2월 14일자, 인셩학교 건튝비를 모흐려고 내디유지의 긔부를 갈 망한다. 71) 金 正 明 編, 朝 鮮 獨 立 運 動 2, 307~308쪽. 72) 新 韓 民 報 1924년 4월 24일자, 東 亞 日 報 와 海 外 同 胞 慰 問 會. 신한민보는 이와 같은 제목으로 이들 단체의 해외 아동교육을 위한 성금 전달에 대해 감사하고 높이 평가하였 다. 73) 유준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육 문화 홍보활동, 106쪽. 82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
사한 결과 몇 천원의 기금을 모을 수 있었다. 여기에 용기를 얻은 조상섭은 국 내외에 있는 유지와 교육에 열성을 보이는 국내외 교민들에게 請 捐 文 을 보내 교사 신축에 필요한 지원금을 기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74) 1925년에 가서는 교민단과는 별도로 仁 成 學 校 贊 助 會 라는 조직도 생겨났 다. 이 조직은 상해 교민들이 인성학교의 재정난을 덜어주기 위해 자발적으 로 조직한 단체로 보인다. 찬조회는 매월 1회 銀 1불의 彩 票 복권 를 발행하 여 발행액 총액의 반은 당첨자에게 교부하고 나머지 반액은 인성학교에 찬조 금으로 충당하고자 하였다. 찬조회의 임원은 다음과 같다. 회장 : 秦 熙 昌 재무 : 李 根 永 74) 東 亞 日 報 1924년 4월 2일자, 仁 成 校 請 捐 文. 동아일보는 당시 인성학교의 교사 신 축 노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건축비 긔부 간망, 임의 여러번 보도한 바 와 가치 상해에 있는 우리 동포의 자뎨를 교육하는 인성학교( 仁 成 學 校 )는 그 학교의 집 을 건축하기 위하야 년래에 당국자들이 힘써 왓섯스나 경비의 여의치 못한 것으로써 뜻 을 이루지 못하얏든 바 최근에 그 학교의 새로 선임된 교댱 조상섭( 趙 尙 燮 )씨가 취임한 뒤에 긔어히 금년안으로 실현케 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금년도 예산에까지 편입하야 대 개로 일만원은 가저야 할 터인데 현재에 잇는 돈으로는 년래에 당국자가 학교 집을 짓 기에 목뎍을 세우고 치운 겨울에 어린 학생들은 발발 떨어도 석탄 한 짐을 사서 피우지 못하며 교사들이 곤궁하여도 월급을 타서 쓰지 아니하여 가면서 모아둔 돈 수천여원밧 게 업다 만일 금년 안에 집을 짓지 아니하면 장래에 지을 긔회가 영영히 업게 되겟는 고 로 그 학교 당국에서는 이왓가치 터문이가 업시 부족한 건축비를 엇지하면 보충하야 녀 태에 경영하든 것을 성공할까하야 백방으로 연구중이엿는데 근일에 와서 한가지 방침을 생각하고 그 학교장 조상섭씨의 일흠으로 해내외( 海 內 外 )에 잇는 유지와 종래 교육에 렬심하든 여러사람들에게 청연문( 請 捐 文 )을 보내고 이 부족한 건축비를 도와서 상해 부 두( 埠 頭 )에 우리 동포의 자제를 교육하는 긔관 하나가 완전히 잇게 되도록 하기를 바란 다더라 (상해) 상해 仁 成 學 校 유지운동과 폐교 83
위원 : 朴 昌 世 金 貞 根 朴 奎 明 李 斗 煥 75) 위의 임원 가운데 회장 秦 熙 昌, 朴 昌 世, 朴 奎 明 등은 전차 검표원으로 있 었고 그 외의 인사들도 모두 고정된 직업과 수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 마도 고정수입이 있는 이들이 찬조회를 조직하여 인성학교를 돕고자 했던 것 으로 보인다. 찬조회는 별도로 회칙 겸 추첨 방법 등을 배포하고 이미 60여 매의 추첨권을 발매하고 2월 14일 제1회 추첨을 하기로 예정하였다. 76) 하지 만 그 후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찬조회의 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3. 인성학교유지회의 재조직 1) 협성리 교사 이전과 유지회의 재조직 1926년 인성학교는 馬 浪 路 (현재의 馬 當 路 ) 協 成 里 1호에 교사를 마련하 여 이전하면서 이전과 같은 잦은 이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협성리 교사는 인성학교가 폐교되는 1935년까지 사용되었다. 하지만 재정적인 어려움은 여 전하였다. 한때 인성학교가 거의 폐교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자 교민사회에서 75) 獨 立 新 聞 1925년 3월 1일자, 仁 成 學 校 贊 助 會. 인성학교 찬조회가 처음 생긴 것은 1923년으로 보인다. 이해 인성학교의 재정난을 덜기 위해 김두봉의 발기로 인성학교 찬 조회를 조직하여 은화 334불의 의연금을 모집한 바 있었다( 朝 鮮 日 報 1923년 7월 16 일자, 仁 成 校 의 義 捐 金 ). 76) 仁 成 小 學 校 贊 助 會 設 置 에 관한 件, 1925년 2월 12일( 不 逞 團 關 係 雜 件 - 鮮 人 의 部 - 在 上 海 地 方 ). 84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
는 학교는 절대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고조되면서 새로운 학교운영 방안을 두고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8년 1월 교민단 단장 韋 惠 林 을 중심으로 51명의 인사들이 발기하여 인성학교유지회를 다시 조직하였다. 77) 교민단은 인성학교 경영권 을 유지회에 이양하였다. 2월 25일 오후 7시부터 辣 斐 德 路 聖 德 學 校 에서 유 지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회원 97명이 참석한 회의에서 이동녕이 임시주석에 추대되고 정태희가 서기로서 회무를 진행하였다. 이유필의 취지 설명, 김두 봉과 곽헌의 발기회 경과보고가 있은 후 유지회 규약을 수정, 통과시켰다. 78) 아울러 유지회 규약 외에 구체적인 세칙도 마련하였다. 79) 이날 회의에서는 이 동녕 정태희 이유필 김두봉 황훈 김철 등 6인의 임시위원을 선임하여 3 월 정기총회 개최 준비 및 상해 한인 전부를 망라하는 회원 모집에 노력하기 로 하고 산회하였다. 이들 임시위원들은 3월 1일 삼일절 기념식이 끝난 후 참 석자들에게 유지회의 취지를 선전하고 기부금을 모집하였다. 그 결과 유지회 의 창립에 대해 화동한국학생연합회는 선언문을 발표하여 유지회를 성원하 였다. 80) 이어 유지회는 1928년 3월 16일의 집행위원 선거에서 39명의 집행위원을 선거하고 그 가운데 상무위원으로 다음과 같은 9명의 인사들을 선출하였다. 77) 在 外 朝 鮮 人 学 校 教 育 関 係 雑 件 第 一 巻 3. 中 国 (2) 上 海 仁 成 学 校 ( 日 本 國 立 公 文 書 館 アジア 歴 史 資 料 センタ-데이터베이스). 78) 仁 成 學 校 維 持 會 規 約, 別 紙 第 二 號 ( 日 本 外 務 省 陸 海 軍 省 文 書 (218), 147~150쪽). 79) 仁 成 學 校 維 持 會 細 則, 在 滬 鮮 人 團 體 綱 領 規 約 宣 言 聚, 在 上 海 日 本 總 領 事 館 警 察 部 第 2 課, 1932. 80) 在 外 朝 鮮 人 学 校 教 育 関 係 雑 件 第 一 巻 3. 中 国 (2) 上 海 仁 成 学 校 ( 日 本 國 立 公 文 書 館 アジア 歴 史 資 料 センタ-데이터베이스). 상해 仁 成 學 校 유지운동과 폐교 85
李 東 寧 嚴 恒 燮 趙 琬 九 尹 琦 燮 秦 熙 昌 金 枓 奉 鄭 泰 熙 宋 秉 祚 黃 勳 81) 유지회는 다음해인 1929년 10월 4일 현재 176명으로 구성된 유지회 명부 를 작성하여 회원들에게 우송하였다. 이어 유지회 집행위원의 선거를 통신투 표에 부쳤는데, 10월 12일 인성학교에서 개표한 결과 다음과 같은 집행위원 이 선정되었다. 집행위원장 : 秦 熙 昌 상 무 위 원 : 鮮 于 爀 金 枓 奉 尹 琦 燮 金 澈 安 昌 浩 鄭 泰 熙 宋 秉 祚 82) 韓 鎭 敎 李 溟 玉 金 玄 九 李 春 泰 嚴 恒 燮 10월 21일 집행위원장 진희창 명의로 유지회 간부 및 부서 조직, 직원의 선임을 발표하였다. 유지회는 규약에 제시된 바대로 집행위원회를 두고 집행 위원과 상무위원을 선출하였다. 집행위원회는 서무 학무 재무의 3과를 두 어 학교의 유지, 운영에 관한 모든 업무를 관장토록 하였다. 서무과 : 安 昌 浩 鄭 泰 熙 金 澈 (주임) 재무과 : 宋 秉 祚 (주임) 韓 鎭 敎 李 溟 玉 李 春 泰 嚴 恒 燮 金 玄 九 학무과 : 鮮 于 爀 (주임) 金 枓 奉 尹 琦 燮 83) 81) 在 上 海 仁 成 學 校 維 持 會 執 行 委 員 選 擧 ニ 關 スル 件 ( 日 本 外 務 省 陸 海 軍 省 文 書 (218), 153쪽). 82) 위와 같음. 83) 在 外 朝 鮮 人 学 校 教 育 関 係 雑 件 第 一 巻 3. 中 国 (2) 上 海 仁 成 学 校 ( 日 本 國 立 公 文 書 館 アジア 歴 史 資 料 センタ-데이터베이스). 86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성학교는 재정난으로 인해 거의 문을 닫을 곤경에 빠 졌다. 그럴때 마다 인성학교 후원금 기부가 없지 않았다. 1928년경 상해에서 성공한 실업가였던 玉 觀 彬 이 안창호를 통하여 인성학교에 2천원의 금액을 기부하였다. 국내의 재외동포위문회가 보내온 지원금이 1천여원임을 고려할 때 2천원의 기부액은 상당한 액수임에 틀림없다. 옥관빈의 기부에 의해 폐교 기로에 있던 인성학교는 얼마동안 학교를 충실히 할 수 있었다. 84) 옥관빈은 일찍이 국내에서 105인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3 1운동 후 상해에 망명하 여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1920년대 전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 어 상해 유수의 한인 실업가가 되었던 인물이다. 85) 동아일보와 신한민보는 옥 관빈의 기부를 보도하면서 상해에도 한인 사업가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인성학교의 재정난도 호전될 것으로 낙관하였다. 86) 그후에도 인성학교에 대해서는 국내외에서 간헐적으로 기부금이 들어오 곤 했다. 1930년대 초반 인성학교 교사를 역임했던 구익균의 회고에 의하면, 1931년 8월 구미 순방을 마치고 귀국길에 상해에 들른 김성수가 안창호를 84) 東 亞 日 報 1928년 12월 12일자, 上 海 仁 成 校 曙 光. 85) 옥관빈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고가 참고된다. 金 光 載, 玉 觀 彬 의 상해 망명과 활동, 한 국근현대사연구 제59집, 2011. 86) 위의 東 亞 日 報 및 新 韓 民 報 1929년 1월 10일자, 상해인셩학교의 셔광. 그런데 당시 옥관빈의 기부를 둘러싸고 異 論 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즉 일부 독립운동단체에 서는 옥관빈이 1920년대 후반부터 독립운동진영을 이탈하여 일제 관헌과 내통한다는 혐의를 두고 있었다. 그는 佛 慈 藥 廠 이라는 제약회사를 운영하면서 상해의 유명사업가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안창호를 통하여 임시정부와 인성학교에 후원금 지원 의향을 밝혀 왔다. 임시정부는 옥관빈의 제의를 반대했지만 인성학교의 윤기섭, 김두봉, 조완구는 우 선 학교를 살리기 위해 옥관빈의 기부금을 수용하였다고 한다. 상해 독립운동가들간에 는 옥관빈의 기부 제의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놓고 며칠동안 심각한 논의가 있었다고 한 다( 鄭 華 岩,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자유문고, 1992, 154~155쪽). 상해 仁 成 學 校 유지운동과 폐교 87
찾아가 인성학교 후원금을 내놓았다. 87) 김성수는 1929년 11월 국내를 출발 하여 세계 각국의 교육, 문물을 시찰하였는데, 1년 10개월만인 1931년 귀국 하였던 것이다. 88) 앞에서 보았거니와 김성수의 동아일보사가 관여한 재외동 포위문회는 1924년 1,144원을 인성학교에 기부한 바 있었다. 인성학교는 각 신문사에도 지원 호소문을 보냈다. 인성학교와 안창호 등 상해 한인사회 지도자들은 미주의 한인 신문인 신한민보사에 원조를 요청하 는 편지와 광고문을 보내 게재하였다. 먼저 인성학교 교장 김두봉의 협조 요 청 편지 전문이 신한민보 1930년 7월 17일자 1면 사설란에 게재되었다. 신 한민보사는 광고문 뿐만 아니라 편지도 신문에 게재함으로써 미주 동포들의 인성학교 지원을 호소하였다. 편지 전문은 다음과 같다. 귀샤에서 우리 민족사업을 위하야 분투하여 오심을 앙모하오며 아울러 그 사업 발젼을 비압나이다. 본교에서 귀샤의 공무에 분망하신줄을 알면서도 본교의 넘우 절박한 사졍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이 성가신 쳥을 안이할 수 업게 되엇습니다. 본 교는 상해 우리 교민의 유일한 교육긔관인 바 이제 경비 곤란으로 도져히 유지키 불능한 지경에 이를엇는데 뎍의 관게로 내디 동포에게는 쳥연할 형편이 되지 못하 고 그러하고 그냥 문을 닫을 수도 업서서 부득이 만리 밖에서 고생하시는 미 묵 포 재류 동포 여러분께 귀보를 통하여 쳥연하는 것이 비교뎍 유망한 일로 아오며 겸하여 귀사에서 잘 주션하여 주실줄로 믿고 별기한 광고문(뎨 三 면 뎨 六 란 참조) 을 올다오니 만흔 동졍으로 이 광고를 내여주시고 이 일이 잘 되도록 특별 주션하 87) 구익균, 새역사의 여명에 서서-격동속의 일생을 돌아보며, 일월서각, 1994, 127쪽. 구익균은 상해에 들른 김성수가 인성학교에 대한 기부금 외에도 안창호에게 독립운동 지원금도 기부하였을 것으로 회고하였다. 88) 仁 村 紀 念 會, 仁 村 金 性 洙 傳, 1976, 786~787쪽. 88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
여 주심을 간절히 바라나이다. 89) 긔원 四 二 六 三 년 六 월 十 二 일 상해 인셩 학교 교쟝 김두봉 인성학교 교장의 편지와 아울러 상해 임시정부 요인이자 한인사회의 지도 자들인 이동녕 안창호 김구 3인도 연명으로 편지를 써서 신한민보에 게재 하였다. 이들의 편지는 인성학교 교장 김두봉의 호소를 측면에서 지원하는 목적이 있었다. 편지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귀샤의 여러분 동지께 간구하는 바는 이곳에 있는 인셩학교의 사졍을 그곳에 게 신 여러 동포의 앞에 넓히 소개하고 힘쓰어 주션하여 그 학교로 만흔 돕음을 얻도 록 하여 주십시사함이외다. 인셩학교의 사졍은 그 학교의 교쟝 김두봉씨의 귀샤에 보내는 공함을 의지하여 자세히 알오시겟스며 또 바다밖에 헡어지어 사는 우리의 어린 아이들은 우리가 우 리의 글로 가르치지 못하고 외국학교에서 배우게 하는데 대하여 큰 고통을 당함은 여러분의 몸소 격거 보시어 잘 아시는 바가 안이오닛가. 이 곧에 헡어 나오아 자라는 우리의 어린 아이들을 우리 글로 가르치는 기관은 오즉 이 인셩학교 하나 뿐이온데 이 곧 있는 동포들이 맘과 피를 암만 쥐여 짜아내 나 본시 이 곧 동포들의 젼톄 경졔가 곤란하므로 학교의 형편이 해마다 늘어가기는 고사하고 그나마 지탱하여 가기가 졈졈 길이 업서 가오니 이 엇지 아프지 안이 합 니까. 우리가 일흔 옛 나라를 찾는 운동에 직접 골몰하여 다른 일을 돌아볼 겨를이 업다 하겟사오나 그 한 이유로 우리 겨레의 새싹이며 새나라의 주인될 이 우리의 어린 아이들의 우리 글로 가르침을 엇지 예사롭게 보겟나잇가. 89) 新 韓 民 報 1930년 7월 17일자, 상해인셩학교의 곤경. 상해 仁 成 學 校 유지운동과 폐교 89
우리녜의 졀박한 사졍은 먼저 우리네 끼리 서로 알아 힘있는데 까지 서로 돕기 를 구함이 우리의 올흔 일이므로 이에 이 사졍을 들어 여러분 동지께 간구하는 바 이오니 만히 힘쓰어 주시옵기를 바라고 믿나이다. 대한민국 十 二 년 六 월 十 二 일 리동령 안창호 김구 (도쟝) 90) 교장 김두봉은 편지와 아울러 인성학교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는 광고문도 함께 보냈다. 먼저 광고문은 미주 동포들이 인성학교의 형편을 잘 알 수 있도 록 인성학교의 간단한 현황을 제시하였다. 이 광고문은 그후 4개월 가까이 11 회에 걸쳐 신한민보의 제3면에 고정적으로 실렸다. 91) 신문을 통한 지원 호소 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주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미주 동포들이 임시정부나 미주 한인단체에 대한 각종 의무금을 이 미 내고 있었기 때문에 추가로 인성학교 후원금을 낼 수 있는 여력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신한민보사는 1930년 10월 16일자 사설에서 다시 한 번 더 인성학교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였다. 92) 신한민보의 재차 호소 때문인지 몰라도 약간의 지원금이 들어왔지만 93)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었다. 90) 新 韓 民 報 1930년 7월 17일자, 상해인셩학교의 곤경. 91) 新 韓 民 報 의 상해인셩학교를 돕아주소서 라는 광고문은 1930년 7월 17일 이래 8월 7일, 8월 14일, 8월 21일, 9월 11일, 9월 18일, 9월 25일, 10월 2일, 10월 9일, 10월 16 일 등 11차례에 걸쳐 게재되었다. 92) 新 韓 民 報 1930년 10월 16일자, 상해인셩학교에 동졍심을 표합시다. 93) 新 韓 民 報 1930년 11월 20일자, 상해인셩학교를 위하야 에는 미주 뉴욕 흥사단 월 례회회 十 원, 차경석 五 원 이라고 하여 인성학교에 대한 후원금이 들어온 것으로 보도되 었다. 90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
2) 윤봉길의거 이후의 시련과 폐교 1932년 4월 29일의 윤봉길의거는 침체에 빠져 있던 임시정부가 기사회생 하는 중대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동시에 상해 한인사회와 임시정부는 물론 인성학교에도 시련을 안겨주었다. 상해 일본총영사관은 프랑스조계 당국에 압력을 가해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이때 인성학교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후원하던 안창호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일제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게다가 프랑스조계 公 董 局 은 한인에 대해 일체의 집회금지 령을 내렸기 때문에 상해 한인사회의 활동이 한때 마비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 인성학교도 일시 휴교령이 내려졌다가 그해 9월 다시 개교하였다. 인성학교는 다시 개교하였지만 재정난은 여전하였다. 인성학교를 조직적 으로 지원했던 한인 검표원(인스펙터)들이 전차회사에서 대량 해고되는 바 람에 더 이상 인성학교에 대한 지원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인성학교로서는 이중삼중의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새로이 교장에 취임한 선우혁은 재정난 을 타개하기 위해 다시 미주의 신한민보사에 편지를 보내 미주 동포들의 인 성학교에 대한 원조를 호소하였다. 교장 선우혁이 1933년 8월 보낸 편지는 그 전문이 1933년 9월 28일자의 신한민보 제3면에 게재되었다. 94) 1934년에 가서는 학생들이 근로하여 학교 경비를 보충한다는 계획을 세울 정도로 재정난은 극심하였다. 이때 동아일보는 1934년 12월 7일자의 上 海 特 信 으로 인성학교의 어려운 상황을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95) 이 기사에 의하면, 학교운영을 위한 1년 경상비가 최소 4천원 이상인데, 수입으로는 수업료로 7 백원, 학부형의 의연금 7백원이 있었는데, 이 둘을 합쳐도 2천 5백원 이상은 부족한 형편이었다. 때문에 교장 선우혁은 자신의 직업은 희생하고 심지어 94) 新 韓 民 報 1933년 9월 28일자, 인셩학교 교졍(쟝)의 호소. 95) 東 亞 日 報 1934년 12월 7일자, 異 域 風 霜 에 艱 步 二 十 年 經 營 難 中 의 仁 成 學 校. 상해 仁 成 學 校 유지운동과 폐교 91
행상까지 해서 학교 경비를 보태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학과시간에 근 로시간을 도입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하루 1시간씩 수공예품을 만들게 하여 경비를 보충하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96) 설상가상으로 상해 일본총영사관은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난 후 외롭게 프 랑스조계에 남아 민족교육을 유지해가던 인성학교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 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프랑스조계와는 달리 공공조계에는 상해거류조 선인회 등 일제에 협력하는 교민단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97) 일본총영사관 과 상해거류조선인회는 프랑스조계의 인성학교를 온건한 교육기관 으로 바 꾸려고 인성학교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98) 1935년 10월 일본총영사관은 인성학교에 대해 같은 해 11월 10일부터 일 본 국정교과서에 의한 일본어교육을 실시하라고 강요하였다. 상해에 남아 있 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요구에 타협하는 한인이 있다면 암살도 불사하겠 다고 하는 강경한 자세로 맞섰다. 99) 인성학교 당국도 11월 4일 부형회와 유지 회를 소집하여 이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그러나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다가 최종적으로 학교당국의 판단에 따를 것을 결정하고 그에 대한 조치 를 일임하였다. 결국 1935년 11월 11일 선우혁 교장을 비롯하여 학교 교직 원들이 일제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모두 사직하였다. 인성학교는 무기한 휴교 96) 金 孝 淑 에 의하면, 당시 상해 한인 부인과 아이들은 와이샤스 단추구멍 감치기, 아르리케 수, 핸드빽 만들기, 아동복 수놓기 등의 부업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박은식의 며 느리가 되는 최윤신이 어린 시절 이런 일들을 가장 많이 했는데, 나중에는 어깨가 굽을 정도였다고 한다( 金 孝 淑, 上 海 大 韓 民 國 臨 時 政 府 와 나 ( 未 刊 行 回 顧 錄 ), 1996, 21쪽). 97) 金 光 載, 上 海 居 留 朝 鮮 人 會 (1933~1941) 硏 究, 한국근현대사연구 제35집, 2005, 161쪽. 98) 韓 民 1936년 4월 29일자, 其 罪 可 殺 의 甲 寧 昌 植 輩. 99) 千 敬 化, 日 帝 下 在 中 國 韓 國 人 民 族 敎 育 運 動 硏 究, 253쪽. 92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
상태에 들어가면서 사실상 폐교되었다. 100) 4. 맺음말 인성학교는 날로 늘어나는 상해 이주 한인들의 자제 교육을 위하여 1916 년 9월 1일 상해 공공조계 곤명로 재복리 75호에서 4명의 학생으로 개교하 였다. 당초 인성학교는 사립학교로 출발하였으나 1918년 가을 상해에 한인 교민단체가 조직되면서 인성학교의 관리는 교회로부터 교민단체로 이관되 었다. 그럼으로써 인성학교는 사립학교에서 공립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인성학교의 교육목표나 내용은 임시정부의 교육정책에 그 기반을 두었다. 민족교육을 통해 민족정신과 역량을 배양하고 자활능력을 양성하여 완전한 민주시민 육성과 신민주국가를 건설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인성학교는 학생들에게 투철한 韓 國 魂 을 주입하여 민족의식을 잃지 않는 인재로 양성하고자 하였다. 德 智 體 의 三 育 을 바탕으로 건전한 육체와 인격 을 갖춘 인재 양성을 중시하였다. 하지만 인성학교의 어려운 재정은 험난한 앞날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인성 학교는 당초 일정한 재정 자산없이 출범하였기 때문에 설립 직후부터 만성적 인 재정난에 시달렸다. 수입보다는 경상비로 지출되는 비용이 많아 재정확보 에 어려움이 많았다. 교민단이나 유지회, 찬조회 등을 조직하여 인성학교의 재정을 지원하고자 하였다. 인성학교 교직원들도 무보수로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100) 村 田 左 文, 上 海 及 ビ 南 京 方 面 ニ 於 ケル 朝 鮮 人 思 想 狀 況, 朝 鮮 總 督 府 高 等 法 院, 1936( 金 正 柱 編, 朝 鮮 統 治 史 料 10, 864~865쪽). 상해 仁 成 學 校 유지운동과 폐교 9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성학교의 재정적인 어려움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 다. 설상가상으로 1932년 4월 윤봉길의 홍구공원의거로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나가자 상해 일본총영사관은 외롭게 프랑스조계에 남아 민족교육을 지속 해가던 인성학교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1935년 10월 일본영사관은 인 성학교에 대해 같은 해 11월 10일부터 일본 국정교과서를 사용하는 일본어 교육을 실시하라고 강요하였던 것이다. 결국 1935년 11월 11일 선우혁 교장 을 비롯하여 학교 교직원들이 일제의 요구를 거부, 모두 사직하면서 인성학 교는 사실상 폐교되고 말았다. 94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9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