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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국제학술대회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n Rethinking Northeast Asian Interstate Relations 일시 2015. 4. 17(금) 장소 강원대학교 인문2호관 210호(인문공간) 주최 만주학회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만주학센터 후원 한국연구재단 강원대 산학협력단

이 발표논문집은 2014년도 정부재원(교육부)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발간되었음.

환영사 안녕하십니까? 올봄에 호반의 도시 춘천에서 매우 뜻있는 학술 행사를 마련했습니다. 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는 만주지역 과 북방민족 에 대한 학술 연구를 주도해 온 만주학회 그리고 고려대 만주학센터와 공동으로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라는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합니다. 북방민족 은 동아시아 역사상 다양한 학술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만주 지역 은 한반도와 인접해 있다는 점에서 현재 및 미래와 관련해서도 우리 학계의 중요한 연구 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번 국제학술대회에서는 특히 전근대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주된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 형성과 변천 과정을 재조명하 면서 만주지역과 북방민족에 대한 새로운 연구 방법과 과제를 모색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또한 한국 중국 일본의 학자들이 만나서 서로의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토론하는 흥미로운 자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해주시고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15년 4월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장 김남연 만주학회장 임성모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주학센터장 김선민

학술대회 일정 Program 08:30 09:00 등록 사회 韓 成 周 (강원대) 09:00 09:20 개회식 개회사 강원대인문과학연구소장 환영사 만주학회장 09:20 11:00 제1부 10~16세기 북방민족과 국제관계 사회 金 大 起 (강원대) 10~12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의 조공체제 이론의 대안 모색 / 尹 榮 寅 (영산대) 新 世 纪 契 丹 语 文 研 究 的 新 进 展 及 其 对 历 史 研 究 的 贡 献 / 康 鹏 Kang Peng ( 中 国 社 会 科 学 院 历 史 研 究 所 ) 우량카이3위의 활동과 15세기 滿 洲 / 尹 銀 淑 (강원대) 遼 陽 東 寧 衛 에 대한 재고찰 / 南 義 鉉 (강원대) 11:00 12:00 약정토론 陸 貞 任 (경희대), 유빛나 Ryu Vit Na(전북대), 崔 允 精 (경북대), 林 常 薰 (원광대) 12:00 13:30 점심식사 13:30 15:40 제2부 17~19세기 만주족과 국제관계 사회 盧 基 植 (동북아역사재단) 满 文 及 满 文 文 献 / 赵 令 志 Zhao Lingzhi ( 中 国 中 央 民 族 大 学 历 史 学 院 ) 対 外 政 策 に 関 する 言 説 のあり 方 に 見 る 清 朝 中 期 の 国 家 秩 序 観 / 村 上 信 明 Murakami Nobuaki ( 日 本 創 價 大 學 ) 淸 초기 理 藩 院 의 위상과 인적 구성 / 李 善 愛 (고려대)

简 论 满 洲 人 对 漠 南 蒙 古 各 部 统 治 的 确 立 / 额 尔 敦 巴 特 尔 EERDUNBATEER( 中 国 内 蒙 古 大 学 ) 명청교체기와 티베트 / 柳 靜 我 ( 日 本 鳥 取 大 学 地 域 文 化 学 科 ) 15:40 17:00 약정토론 洪 性 鳩 (경북대), 金 宣 旼 (고려대), 方 京 一 (한국학중앙연구원), 權 容 徹 (고려대), 沈 赫 周 (한림대) 17:10 17:50 종합토론 사회 徐 正 欽 (안동대) 북방민족과 동북아 국제관계 연구의 방법과 과제

목차 Contents 제1부 10~16세기 북방민족과 국제관계 10~12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의 조공체제 이론의 대안 모색 / 尹 榮 寅 (영산대) 9 新 世 纪 契 丹 语 文 研 究 的 新 进 展 及 其 对 历 史 研 究 的 贡 献 / 康 鹏 Kang Peng( 中 国 社 会 科 学 院 历 史 研 究 所 ) 23 우량카이3위의 활동과 15세기 만주 / 尹 銀 淑 (강원대) 33 遼 陽 東 寧 衛 에 대한 재고찰 / 南 義 鉉 (강원대) 45 제2부 17~19세기 만주족과 국제관계 满 文 及 满 文 文 献 / 赵 令 志 Zhao Lingzhi( 中 国 中 央 民 族 大 学 历 史 学 院 ) 59 対 外 政 策 に 関 する 言 説 のあり 方 に 見 る 清 朝 中 期 の 国 家 秩 序 観 / 村 上 信 明 Murakami Nobuaki( 日 本 創 價 大 學 ) 73 淸 초기 理 藩 院 의 위상과 인적 구성 / 李 善 愛 (고려대) 107 简 论 满 洲 人 对 漠 南 蒙 古 各 部 统 治 的 确 立 / 额 尔 敦 巴 特 尔 EERDUNBATEER( 中 国 内 蒙 古 大 学 ) 135 명청교체기와 티베트 / 柳 靜 我 ( 日 本 鳥 取 大 学 地 域 文 化 学 科 ) 151

10~12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조공체제 이론의 대안 모색 尹 榮 寅 (영산대) 1. 머리말 2. 세력균형, 실리주의, 호혜주의의 다원적 국 제질서의 시각 3. 세계체제이론 (World Systems Theory) 4. 불교문화권 시각에서의 국제관계와 교류 5. 비한문사료의 활용 6. 맺음말 1. 머리말 역사 사료에 자주 등장하는 조공 과 책봉 의 용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연 고려 가 송에 조공 하였다는 것은 송의 우월성 을 인정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조 공체제 (Tribute System)혹은 중국적 세계질서 는 유교적 이념에 의거한 한족중심적 문 화론(culturalism)을 기초로, 1) 중원[한족]왕조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다른 국가와 지역을 선진 중화문명에 동화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다. 한족왕조의 역사 서술은 종종 중 국 의 우월성을 유지하기 위해 사료를 왜곡 또는 삭제하였기에 전근대 중화주의( 中 華 主 義 )의 문화적 편견이 가장 극명하게 표현된 곳이다. 조공체제 이론은 한족왕조의 일 방적이자 자의적 기록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그 용어의 한족중심적 국제질서의 이상과 위배되는 정치적 현실을 왜곡하였고 역사적 현실의 다양성을 간과한다. 다시 말하자면 조공체제 이론은 조공체제 에 의한 국제질서가 계속 존재하였다고 하는 가정 을 사 실 로 인정하고 시작한다. 조공체제가 주목하는 정기적이자 체계적인 교류의 기록은 국 제관계 범위의 설정에는 유용할지 모르지만 국제질서는 중앙정권의 정치적 교류만으 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나아가 조공체제(The Tribute System) 또는 한족의 세계질서 (The Chinese World Orde 1) 조공 혹은 책봉 체제 이론의 핵심 내용은John K. Fairbank, ed., The Chinese World Order: Traditional China's Foreign Relation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68), 西 島 定 生, 中 國 古 代 國 家 と 東 アジ ア 世 界,( 東 京 : 東 京 大 學 出 版 社, 1983)에 정리되어 있다. - 9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r) 이론은 정치 군사적 관계를 특정 문화(즉 한족문화)의 기준으로 이해하려는 인식론 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 페어뱅크(John K. Fairbank)는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세 가지 유형과 범위로 나누고 북방 초원의 유목민족을 내륙 아시아 지역 (Inner Asian Zo ne)으로, 중국왕조와 산발적인 교류에 머물렀던 동남아시아, (특정 시기의) 일본, 그리 고 서방 국가들은 외부 지역 (Outer Zone)으로 설정하였지만 문화 제도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한화 ( 漢 化 )가 이루어졌다는 한반도와 베트남은 한족문화지역 (Sinic Zone)으 로 분류하였는데 바로 이 한족문화지역 의 대 중원과 관계에서만 정치 군사적 요소 가 문화 이념적 요소에 비해 부차적이자 일시적이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문화적 유사성 이 국제관계에서 일관되게 혹은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사례는 많지 않다. 오히려 유목민족인 거란과 농경 정착민인 한족 사이의 경제 문화적 차이가 양자 간의 접촉을 저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계를 촉진하기도 하였다. 2) 국가 대 국가의 일대일 공식적 교류에 치중하는 조공체제 이론의 문화론적 편견과 역사적 실체와의 모순에 대한 학계의 비판이 있었고, 3) 특히 10세기에서 12세기까지의 동아시아는 세력균형에 의해 성립 유지된 다국가체제 (Multistate System)의 또는 다원 적 국제관계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4) 레쟈드(Gari K. Ledyard)는 일찍이 동북아시아 국제관계에서 한반도 왕조의 중요성을 파악하여 양국 간의 교류 범위를 넘는 거시적 시각으로 중원-만주-한국의 삼각관계를 통해 중원 한족왕조의 팽창과 수축의 역사적 순환과정을 이해하고자 하였다(1983: 313-353). 바필드 (Thomas Barfield) 역시 북방민족 과 한족왕조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교역 혹은 약탈 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가 아닌 중원, 초원(몽골지역), 그리고 만주의 세 지역의 상호관계에 주목하였다. 5) 스탠든 (Naomi Standen)은 10세기 거란과 송의 관계사 연구에서 당시에는 정치적, 지리적, 민족 적, 그리고 이상적 일관성을 가진 중국 은 물론 현대적 개념의 민족 도 존재하지 않 았고 이러한 시대착오적 개념이야말로 올바른 역사인식의 가장 큰 장애물로 보았다. 6) 2) Naomi Standen, (Re)Constructing the frontiers of tenth-century North China, in Frontiers in Question: Eurasian Borderlands, 700-1700, ed. Daniel Powers and Naomi Standen (London: MacMillan, 1999), 55-79. 3) 조공체제의 문제점에 대한 이론적 비판은 James L. Hevia, Cherishing Men from Afar: Qing Guest Ritual and the Macartney Embassy of 1793 (Durham and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1995), pp. 9-15. 4) Morris Rossabi, ed. China among Equals: The Middle Kingdom and Its Neighbors, 10th-14th Centurie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3), pp. 225-29, and Herbert Franke and Denis Twitchett, eds.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6,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pp. 16-21. 5) Thomas Barfield, The Perilous Frontier: Nomadic Empires and China, 221 BC to AD 1757(Cambridge MA & Oxford, UK: Blackwell, 1989), 167-177. - 10 -

10~12세기동아시아국제관계사 조공체제 이론의 대안 모색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중국과 한국 등 현대국가의 국사영역을 기준으로 접근하 는 것은 당시 내륙아시아 세계를 구성한 초원, 중원, 만주, 한반도는 물론 대륙의 서남 부와 동남아시아, 중앙유라시아, 그리고 일본 등을 모두 포함하는 광활한 지역의 국제 질서를 축소하거나 단순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전근대 동아시아국제질서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위해서는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조공체제 이론의 모순을 검토 보충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의대안과 시각의 모색이 필요하다. 2. 세력균형, 실리주의, 호혜주의의 다원적 국제질서의 시각 10~12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는 그 어느 시기보다도 조공체제 의 이상과 가장 확연 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일찍이 학자들은 이 시기를 다원체제 (Multistate System) 혹은 맹약관계 (Treaty Relations)의 틀로 접근하였다. 7) 특히 송과 거란이 서로 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전연의 맹약이야말로 다원적 국제관계 의 기본 틀이었으며 맹 약에 의해 획정된 국경은 문화적, 언어적, 혹은 생태적 경계라기보다는 세력의 균형으 로 유지된 정치적 경계선이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주변 국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조공 체제 의 논리를 적용하여 고려가 거란의 연호를 시행하고 조공을 통하여 다국적 [국제 관계의] 현실 (multi-state reality)로부터 가리어져 있었다는 주장이나, 8) 고려왕조는 중 국 의 여러 왕조로부터 책봉 받은 충성스러운 제후국 (a loyal vassal)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9) 소위 주변 에 속하는 고려와 대하가 조공체제 의 형식을 어느 정도 따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이는 속국 의 개념과 달랐다. 실제 고려와 대하가 정복왕조와 한족 왕조의 충돌과 경쟁을 적극 이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에서 의 양국의 위상과 영향력을 말해준다. 거대한 정복왕조와 한족왕조 사이에서 국경의 안 보를 유지해야 하는 지정학적 상황에 놓였던 고려와 대하가 매우 유사한 대외정책을 보여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실제로 宋 史, 遼 史, 金 史 는 종종 고려와 6) Naomi Standen, Unbounded Loyalty: Frontier Crossings in Liao China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7), 31. 7) Herbert Franke and Denis Twitchett, eds.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6,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16-21. 8) Michael C. Rogers, The Chinese World Order in Its Transmural Extension: The Case of Chin and Koryŏ, Korean Studies Forum 4 (1978), 10. 9) Herbert Franke and Denis Twitchett, eds.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 6,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112. - 11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하를 같이 묶어서 서술하는데 몽골제국시기에 편찬된 遼 史 는 조공체제의 문화론적 선입관이 아닌 당시 국제질서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고려와 대하를 서술한 권115 마지 막 부분에서사관은 논 을 통해 양국의 조공 이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을 밝 히고 있다. 논하여 말하자면, 고려와 서하가 요를 섬겼고 비록 청혼하여 [공주]가 하가하였지만 어 떻게 그들의 확고한 의지 [즉 충성]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삼한( 三 韓 ) [즉 고려]은 땅이 접해 있었는데 그들이 언행을 바꾼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양주( 涼 州 ) [즉 대하]는 멀리 있 지만 반역의 무리를 거두고 변강을 침략하고 틈을 보아 번번이 움직였다. 공물을 바치는 사신들이 돌아가자마자 분쟁이 바로 일어났다... 論 曰 : 高 麗 西 夏 之 事 遼, 雖 嘗 請 婚 下 嫁, 烏 足 以 得 其 固 志 哉? 三 韓 接 壤, 反 覆 易 知 ; 涼 州 負 遠, 納 叛 侵 疆, 乘 隙 輒 動 ; 貢 使 方 往, 事 釁 隨 生... 10) 비록 현존하는 사료에서는 고려와 대하 사이의 직접적인교섭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양국은 세력균형을 통해 형성된 국제질서의 중요한 축으로서 밀접하게 연결되 어 있었다. 예를 들자면 994년 6월 거란을 치자는 고려의 제의를 송이 거부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시기에 송나라가 탕구트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거란과의 충 돌을 피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11) 高 麗 史 어디에도 보이지 않지만 고려의 대외관계 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던 탕구트의 존재는 조공관계 의 틀을 벗어나 다원적 국제 질서의 현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 대하는 거란과 송에 모두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그 두 국가와 모두 직접적인 충돌 이 있었고, 12) 이에 비해 고려와 송은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았기에 당연히 군사적 충돌 도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조공체제 이론은 더욱 한화 가 이루어진 고려가 송에 게 더 충성스러운 조공국 이었다고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후대에 금이 중원 회하의 이북 지역을 차지하면서 송과 하가 더 이상 국경을 공유하지 않게 되자 평화로 운 관계가 수립된 사실은 지정학적인 논리에서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10-12세기 동 아시아 국제질서는 조공과 책봉의 상하관계 보다는 상호 불간섭, 호혜주의, 그리고 실 리주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다원적 국제질서의 현실에서 송은 조공체제의 이상을 실현 할 정치 군사적 힘이 없었기에, 고려가 조공체제의 허상을 수용하도록 하사품 의 명목 으로 경제적 보상을 제시하기도 하였지만 고려는 단 한 번도 송의 군사동맹 제의를 수 10) 遼 史, 115.1529. 11) 高 麗 史, 3:27b4-5, 續 資 治 通 鑑 長 編, 36.789-90, 74.1695. 12) 윤영인, 하-송의 5년전쟁 (1039-44)과 11세기 동아시아 세력균형, 만주연구, 16 (2013). - 12 -

10~12세기동아시아국제관계사 조공체제 이론의 대안 모색 용하지 않았다. 호혜주의는 조공 의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사서에 방물( 方 物 ) 혹은 토물( 土 物 )로 기록된 조공품은 그 경제적 이익의 추구보다는 상징적인 것으로 대체로 높은 가 치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대량으로 보낸 것도 아니었다. 거란과 금 역시 이에 하사품 은 물론 따로 생신사( 生 辰 使 )와 횡선사( 橫 宣 使 ) 13) 등 정기 사절을 고려에 파견하여 회 답하였다. 거란은 997년 처음으로 생신사를 파견한 이래 14) 전쟁 등 양국관계가 원활하 지 못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빠짐없이 생신사를 보냈으며 여진도 거란시기의 제도를 그 대로 지속하였다. 횡선사가 가져온 선물은 기본적으로 초원의 특산품 인 양 2,000두였 고 때로는 마차, 옷감, 안장, 무기, 불경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15) 거란을 대신하여 회하 이북 중원의 중심지역과 많은 한족 인구를 통치하게 된 금은 스스로를 국제질서의 중심으로 인식하였다. 1203년에 금 황제는 왕조의 오행이 북송의 火 를 계승한 土 에 속한다고 선언하며 남송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16) 그러 나 현실적으로 금은 동아시아 다원적 국제질서를 유지한 세력균형의 재편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대하는 거란과 금의 충돌에서 거란을 지원하였지만 군사 대부분이 중원에 투 입된 상황에서 금나라는 대하와의 충돌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1124년 대하 서북쪽에 거란의 황족인 야율대석이 세운 카라키타이(서요( 西 遼 )) 17) 는 내륙아시아의 지정학적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18) 카라키타이는 금을 공격하여 거란의 이전 영토를 되찾는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는데 만일 금이 대하를 압박한다면 탕구트와 카라키타이의 동맹으로 진행될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대하 역시 그들의 서쪽 변경에 위치한 카라키타이와의 관계에 주의해야 하였기에 양국 사이에는 서로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타협이 이루어졌 다. 대하는 명목적 조공을 통해 금을 인정하였고 금은 변경지역의 영토를 대하에 할양 하면서 평화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는 고려가 압록강 유역의 보주성을 점령한 후 금에 조공 을 하는 전제로 그 소유권을 인정받은 사실과 유사하다. 19) 즉 금이 고려와 13) 횡선사에 대해서는 박한남, 高 麗 前 期 橫 宣 使 小 考, 阜 村 申 延 澈 敎 授 停 年 退 任 紀 念 史 學 論 叢, (일월서각, 1995), 501-24 참조. 14) 高 麗 史, 3:32a2. 15) 高 麗 史, 11:10b1-2, 11:18b6-7. 16) Hok-lam Chan, Legitimation in Imperial China: Discussions under the Jurchen-Chin Dynasty (1115-1234)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84). 17) 카라키타이는1211년까지 88년 동안 지금의 중국 신강지역을 중심으로 탕구트, 아랄해, 발하쉬호, 그리고 힌두쿠시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통치한 국가로 중국학계에서는 西 遼 라는 이름을 사용 한다. 18) Michal Biran, The Empire of the QaraKhitai in Eurasian History: Between China and the Islamic World.(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19) 박한남, 고려 인종대 대금정책의 성격 - 보주양여( 保 州 讓 與 )와 투입호구추쇄( 投 入 戶 口 推 刷 ) 문제를 - 13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대하와의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세력균형의 국제질서에서 이루어 진 타협의 결과였던 것이다. 다원적 국제관계에서 조공체제의 위계적 질서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다만 명목적으로 상하관계에 있는 국가사이에는 조공과 책봉으로, 동등한 관계의 국가 간에는 맹약을 통해 정치적 상호 승인과 영토보전을 보장하였다. 즉 동등 한 국가 간의 명목적 상하관계를 표현한 것이 조공-책봉체제였다면 실질적 상하관계에 명목적 동등 관계를 설정한 것이 맹약체제라고 할 수 있다. 20) 3. 세계체제이론 (World Systems Theory) 21) 국제질서의 조공체제 이론을 재조명하고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에 유용한 이론 중 하 나가 세계체제 이론 (World-Systems Theory[WST])이다. 세계체제(World systems)란 여 러 사회 사이에 형성된 다양한 연계망(network)을 통해 일어나는 무역과 전쟁, 정보 등 의 상호작용은 복합적 사회구조를 재창조하는데 기여하며, 지역적인 구조에서 일어나 는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생필품 연계망(Bulk Good Netw ork[bgn]), 권위품 연계망(Prestige Good Network[PGN]), 정치 군사 연계망(Political-Mil itary Network[PMN]), 정보 연계망 (Information Network[IN])의 네 연계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특히 PMN은 조공체제가 강조하는 중앙집권 세력 간의 정치적 교류, 즉 조공과 책봉의 사신 행렬과 공적 무역에만 관심을 가지는 기존 방법론과는 다른 시각 에서의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22) 세계체제 이론은 체제의 변혁 과정에서 준변방 (semi-periphery)의 역할을 강조하는데 여기서 준변방 은 중심과 주변의 둘 사이에 위치하는 지역, 또는 두 중심 간에 위치한 지역이며 중심과 주변의 성격이 혼합되어 나타나거나, 중간적인 형태를 띠는 연결의 공 간이다. 즉 준변방 은 중심에 의해서 지배될 수도 있으며, 주변지역을 지배할 수도 있 으며, 중심과 주변의 관계에 따라 그 위상이 변화하기도 한다. 결국 10-12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에 대한 연구의 초점을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거란이나 송에만 치우치 지 않고 동시에 준변방 에 해당하는 한반도와 기타 지역의 시각과 역할에 주시하는 노 중심으로, 한국중세사연구, 3 (1996). 20) 윤영인, 10-13세기 동북아시아 多 元 的 國 際 秩 序 에서의 冊 封 과 盟 約, 東 洋 史 學 硏 究, 第 101 輯 (2007). 21) 이 장의 내용은 대체로 윤영인, 10~12세기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한중관계,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동북아역사재단, 2010), 148-152쪽을 요약하였다. 22) Christopher Chase-Dunn and Thomas D. Hall, Rise and Demise: Comparing World Systems, (Boulder, CO: Westview Press, 1997), 28, 52. - 14 -

10~12세기동아시아국제관계사 조공체제 이론의 대안 모색 력이 필요하다. 전근대동아시아 세계체제 의 연계망에 대한 연구 성과는 아직 드물지만 배튼(Batten) 이 WST를 전근대 일본사에 적용하여, 지리적 특수성으로 고립된 (isolated) 일본이라는 개념을 재고한 연구가 돋보인다. 배튼은 현대 민족국가의 명확한 국경과는 달리 전근대 역사에서의 국경은 매우 모호한 것을 인식하고 경계(border)가 언제 어떠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가를 외부와의 연계망을 통해 찾으려고 하였다.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일 본의 대외정책은 내부의 정치적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한 집권층의 노력에 의한 것으로 PMN의 형성에 중요한 요인으로 보았는데 외부의 영향(중국내부의 분열과 통일)과 내 부적인 요인(예를 들면 주변부 에로 팽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고 시기의 변화에 따 라 수축과 팽창을 반복한다고 분석하였다. 23) 10-12세기 내륙아시아에 존재하였던 PMN 연계망 범위가 어떻게 변화하였는가에 대한 고찰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이해에 중 요한 단서를 제시한다. 정기적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정치 군사적 교류를 토대로 동 아시아 의 PMN을 설정한다면 북방초원, 중원, 내륙아시아, 한국, 일본, 동남아지역에까 지 확대된다. PGN과 IN은 모두 PMN보다 큰 규모였다. 조공시스템에 의한 경제활동은 정치적 동 의 아래 이루어져 PMN의 범위 내에서 발생하였지만 PGN은 종종 정치적 관계의 범위 를 초월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권위상품은 종종 정치 집권층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기에 공무역의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았기에 조공체제에서의 공무역 에 보이는 품목과 유사하지만 교역에서의 중앙집권세력의 독점이 약화되고 사무역이 PGN에 참여하면 종종 PMN보다 거대한 연계망을 형성하곤 하였다. 그리고 IN에는 국 가가 주체가 되는 공적인 영역과 비공적 영역이 존재하는데 공적영역은 정보는 외교관, 스파이, 그리고 공적인 지원을 받은 탐험가 등이 담당했으며, 비공적 영역에서는 순례 자, 학생, 성직자, 상인, 용병 등이 참여하였기에 기술과 지리적 지식들은 PMN보다는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유입되었다. 아부-루고드(Abu-Lughod)는 몽골 제국을 전후한 시 기에 교통과 교류의 발달로 인한 소위 세계 체제의 형성 과정을 그려내면서 8개의 세계 체제를 설정하였는데, 그녀가 설정한 세계체제의 세부 교역권 중에서 III과 VIII을 합친 지역[아래 지도 참조]에 한반도와 일본을 포함하면 10-12세기 내륙아시아에 형성된 PG N 혹은 IN과 대체로 일치할 것이다. 24) 23) Bruce L, Batten, To the Ends of Japan: Premodern Frontiers, Boundaries, and Interactions(Honolulu: University of Hawai i Press, 2003), 146-152. 24) Janet Abu-Lughod, Before European Hegemony: the World System A. D. 1250-1350(New York &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283. - 15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그렇다면 10-12세기 거란과 금, 한족왕조 송, 고려와 대하, 그리고 카라키타이 등 여 러 국가를 모두 포함하는 국제질서의 범위는 내륙아시아 세계체제 의 PMN, PGN 혹은 IN의 범위를 비교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설정이 가능할 수 있을지 모른다. 특히 여러 연계망이 중첩되는 국제질서( 내륙아시아 세계체제 )의 범위는 교류가 단절 혹은 급격 히 감소하는 공간에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이러한 경계에는 산맥, 바다, 사막 등 의 지리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변경을 통제하고 국가의 안보를 지키려는 중앙권력의 정 치적 노력도 간과할 수 없다. 다양한 형태의 무역과 정보교환 전달과정과 여러 연계망 의 형성과 해체에 대한 구체적 연구는 조공체제 이론의 문제점을 통찰할 수 있다고 시각과 계기를 제공한다. 4. 불교문화권 시각에서의 국제관계와 교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전체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기존 조공체제 가 강조하는 정치 군사적 관계만이 아니라 경제 문화적 교류(예를 들면 음식과 기술의 전파 등)으로 시 각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문화와 종교적 교류는 종종 국제질서의 경계를 결정하는 중 - 16 -

10~12세기동아시아국제관계사 조공체제 이론의 대안 모색 요한 요소로 작용하였으며 정치적 세력 확장은 지역 내 문화 융합을 촉진하였다. 반면 문화적 교류가 정치적 확장의 기반이자 정당화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문화적 경계는 정치적 경계와 항상 일치하지 않아, 정치적 영토가 문화적 영역보다 넓었던 때 가 많았으나 그 반대가 성립했던 적도 있었다. 정치적 교류와 문화적 교류 범위의 차이 와 충돌은 국제질서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정치적 요인은 문화교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절대적인 요인이 아니었으며 이에 대한 이해는 복잡한 국제질서와 문 화교류의 상황을 모두 고려한 포괄적 접근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10-12세기 국제질서에서 대한 문화 교류적 접근에서는 특히 초원(유목)과 농경(정착) 문명의 경계를 초월하였던 거대한 불교 문화권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10-12세기 불 교의 사상적, 예술적 교류는 매우 활발하였고 그 범위는 고려, 거란, 대하는 물론 송과 중원 서남쪽에 위치한 대리국, 서역(중앙아시아)의 카라키타이, 나아가 인도 북부지역 까지 포함한다. 불교는 당시 내륙아시아 각 지역에서 국교로 인정받으며 크게 흥성하였 고 여러 지역 사이의 교류에 중요한 매개체였다. 거란의 칸(황제)들은 자신을 보살의 화신 혹은 전륜성왕 (Cakravartin)을 자칭하며 불교를 독실하게 추종하고 후원하면서 제 국에 널리 전파하였으며 대하의 군주 역시 자신을 전륜성왕으로 주변의 유목부족들에 게는 부처칸 (Burqan Khan)으로 인식되었다. 25) 거란 불교는 원래 한족불교전통에 기반을 두었지만 11세기 중반에 이르면 거란 고유 의 전통을 수립하였고 송보다 더 뛰어난 대장경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거란대장경은 고 려에 전해져 고려대장경을 편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지만 고려와 거란불교 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아직 매우 소략하여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런 데 최근거란과 고려의 불교 문화적 교류에 대한 일련의 연구들이 보인다. 11~12세기 고 려의 불탑이 송보다는 거란 불탑의 양식과 더 많은 유사성이 보여준다는 연구는 물 론, 26) 고려의 도자기가 중원남부의 영향만이 아니라 11세기 고려 도자기의 제작기술, 기종, 장식기법과 문양 등에서 거란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확인하기도 하며, 27) 11~12세 기 고려의 정병( 淨 甁 ), 동경, 장도, 등자 등에 나타나는 금속공예의 우수성은 거란조정 이 보낸 선물과 고려에 정착한 거란유민들의 영향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28) 결국 거란과 고려의 관계는 조공체제의 틀이 보여주는 공식적인 사신왕 25) Christopher P. Atwood, Encyclopedia of Mongolia and the Mongol Empire (New York: Facts on File, 2004), 48. 26) 강병희, 고려 전기 사회변동과 불탑: 11-12세기 불탑의 북방적 영향, 미술사학, 23, (2009), 287-88. 27) 장남원, 10~12세기 고려와 요금 도자의 교류, 미술사학, 23 (2009), 171-203. 28) 안귀숙, 고려금속 공예에 보이는 요문화의 영향, 이화사학연구, 40 (2010), 119-120. - 17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래보다 밀접한 문화적인 왕래가 있었으며 그 매개체는 유교적 전통이 아닌 불교의 사 상과 예술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거란과 대하, 그리고 고려와 대하의 관계에 나타나는 불교문화의 모습을 통해 당시 국제관계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리고 이러한 노력에는 단순히 문헌적 사료만이 아니라 고고학과 미술 등 다른 학문분 야와의 학제간 교류가 필요하다. 불교문화권 교류의 시각으로 국제관계 연구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먼저 교류의 주체 였던 특정 인물이나 사건, 혹은 불교사상과 예술의 상호 흐름 등 구체적인 주제에 관심 을 기울여야 한다. 예를 들면 문수보살의 도량[ 道 場 ]으로 인식된 중국 산서성 오대산 공간의 역사적 실체와 중요성에 대한 고찰을 통해 10-12세기 불교문화권 교류의 모습 을 파악할 수 있다. 29) 오대산은 이미 5세기부터 중요한 불교성지로 7세기에 이르러 동 아시아 전역은 물론 티베트와 인도의 순례자들이 찾았던 동아시아 여러 지역의 종교와 문화 전통이 교차한 공간이었다. 기존 연구들은 당과 송대의 한족지역 불교전통에서의 오대산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곤 하지만, 실제 오대산의 문수신앙은 특히 만주의 정복왕 조와 몽골, 티베트 불교전통에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30) 송에 의해 오대산으 로의 길이 막히자 대하의 조정은 그 경내에 11세기에는 따로 그들만의 오대산 을 조성 하기도 하였고, 31) 거란과 몽골도 오대산을 복제 하였다. 32) 동아시아 나아가 내륙아시 아 여러 제국의 정치적 정통성을 조공체제의 책봉 이나 다원적 국제관계의 맹약 이라 는 국가 사이의 정치적 의례나 타협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오대산 문수보살 신앙 을 통해 형성되었던 과정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29) Karl Debreczeny, Wutaishan: Pilgrimage to Five Peak Mountain, Journal of 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Tibetan Studies, 6 (Dec 2011), pp. 1-133. 30) Raoul Birnbaum, Buddhist Meditation Teachings and the Birth of Pure Landscape Painting in China, Studies on the Mysteries of Manjusri(Society for the Study of Chinese Religions Monograph 2, 1983), Raoul Birnbaum, Visions of Manjusri on Mount Wutai, in Donald Lopez, ed., Religions of China in Practice(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Robert Gimello, Chang Shang-ying on Wu-ta i Shan, in Susan Naquin and Chen-fang Yu, ed., Pilgrims and Sacred Sites in China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2), 89-149. 31) Ruth Dunnell, The Great State of White and High: Buddhism and State Formation in Eleventh-century Xia (Honolulu: University of Hawai i Press, 1996), 35-36. 32) Isabelle Charleux, Mongol PilgrimagestoWutaiShanintheLateQingDynasty, Journal of 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Tibetan Studies, no. 6 (December 2011). - 18 -

10~12세기동아시아국제관계사 조공체제 이론의 대안 모색 5. 비한문사료의 활용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에서 비한족국가들에 대한 연구도 거의 한문기록에 전적 으로 의존해 왔기에 한문기록에 내재되어 있는 한족중심적 시각의 극복은 쉽지 않았다. 조공체제를 초월하는 전체적 시각의 확립을 위해서는 먼저 기존의 한족중심적 시각을 극복해야 하며 비한문 사료, 특히 북방민족 고유의 언어와 문자(거란, 탕구트, 그리고 여진문자)를 적극 활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거란문자로 기록된 자료는 그 희소성과 해석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거란의 역사, 그리고 나아가 북방민족 역사와 언 어 연구에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거란족은 그들의 언어를 기록하기 위해 920년 한자를 모방한 표의문자 거란대자를, 그리고 약 5년 뒤에는 초보단계의 표음문자로 보 이는 거란소자를 창제하였는데, 거란문자의 완전한 해독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지만 지 금까지의 성과만으로도 한자문헌에만 의존해온 기존의 연구에 새로운 시각과 단서를 제공한다. 거란문자의 해독을 통한 거란의 국호에 대한연구들은 이러한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거란은 민족 이름으로, 요 ( 遼 )는 거란족이 세운 정복왕조 제국의 국호로, 그리고 요 가 망한 후에 그 유민들이 중앙유라시아로 이주하여 세운 나라는 카라키타 이 혹은 서요 로 알려져 있다. 송나라의 문헌자료는 거란이 契 丹 ( 大 契 丹 )과 遼 ( 大 遼 )를 번갈아 국호로 사용하였다. 즉 916년 건국에서 937년까지는 大 契 丹, 938년에서 982년까지는 연운십육주 등 한족지역에서는 大 遼 를 그 외 지역에서는 大 契 丹 으로 2개의 국호를 동시에 사용하였으며, 983년에서 1065년까지는 다시 大 契 丹 을, 그리고 1066년부터 나라가 망하는 1125년까지는 다시 大 遼 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인데 정작 遼 史 에는 947년 거란 태종이 국호를 大 遼 라고 하였다는 기사만 보이며 변경 기록은 모두 누락되어 있다. 그런데 한문이 아닌 거란문자와 여진문자의 기록에서는 시 종일관 거란의 국호가 모두 哈 喇 契 丹 혹은 大 契 丹, 契 丹 國, 契 丹 등으로 나타난 다. 33) 즉 거란제국의 거란어 국호는 카라키타이에서 바뀌지 않았기에 遼 史 에는 기록 되지 않았고 거란이 망한 후 야율대석이 중앙유라시아에 세운 나라의 이름인 카라키타 이는 실제 거란의 옛 국호와 동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하사연구도 20세기 초 탕구트 문자로 기록된 문헌들이 발견되면서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돈황에서 스타인(Aurel Stein)과 펠리오(Paul Pelliot)가 소량의 탕구트 문헌을 발 33) 刘 浦 江, 辽 朝 国 号 考 释, 历 史 研 究, 2001 年 6 期, pp. 40-43; 刘 凤 翥 (2006-2), 从 契 丹 文 字 的 解 读 谈 辽 代 契 丹 语 中 的 双 国 号 兼 论 哈 喇 契 丹, 东 北 史 研 究, 2006 年 第 2 期. - 19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견하였고 러시아의 코즐로프(Kozlov)의 카라고토(Kharakhoto) 발굴에서 대량의 탕구트 문헌을 발견하였다. 1970년 말엽부터 중국학계에서 탕구트의 역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고 특히 탕구트문자에 대한 연구에서 큰 성과를 거두어 음과 뜻이 대부분 해 독되었고 특히 韓 小 忙 가 그의 학위논문인 西 夏 文 正 字 研 究 에서 9종의 탕구트 사전을 바탕으로 총 6,066개 ( 正 字 5861개, 別 體 169개, 訛 體 36개)의 탕구트 문자를 열거하고 분석하였다. 34) 중국의 비교적 활발한 연구와는 대조적으로 외국학계의 탕구트 연구는 여전히 소략하여 다만 던넬(Ruth Dunnell)과 키차노프(Kychanov)의 연구가 돋보인다. 35) 대하문자로 기록된 문헌의 대다수는 불교관련 내용에 국한되어 정치 중심의 국제관계 사 연구에는 거의 활용되지 못하였지만 문화적 교류의 연구에서는 거란문자와 더불어 기존의 한문사료의 선입관을 극복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6. 맺음말 10 12세기 동아시아(혹은 내륙아시아) 국제질서를 조공체제 의 일원적 시각으로 접 근하는 것은 한문사료에 내재된 편견과 왜곡을 비판 없이 수용하는 것이다. 비록 동아 시아 국제관계의 형식과 용어는 중원 한족왕조의 시각과 전통을 반영하지만 역사적 현 실은 여러 국가와 부족 사이에 이루어진 다양한 정치적 타협과 문화적 교류의 산물이 었다. 10-12세기 거란과 금 시대의 맹약체제 는 중원에서의 전통적 조공체제와는 역사 적 배경과 내용, 전개에 있어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이러한 맹약체제 혹은 다원적 국제관계 의 성립은 한족중심적 조공체제의 와해를 전제로 한다.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 연구는 고려나 대하, 나아가 카라키타이 등 주변 의입장 이 반영된 시각으로 재조명을 함으로써 중심 에 집착하는 한족 중심적 문화론적 조 공제도의 틀을 극복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조공체제 이론의 틀에 의한 형식적인 해 석보다는 다원적 국제관계에서의 지정학적 세력균형과 실리주의에 입각한 각 국가의 외교정책을 비교 분석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더불어 근대 국가가 설정한 일국사적 입장과 현재 주의적 범위를 넘어 일본, 티베트, 나아가 중앙유라시아와 동남아시아의 34) 韓 小 忙, 西 夏 文 正 字 研 究 陝 西 師 範 大 學 博 士 學 位 論 文, 2004. 35) Ruth W. Dunnell, The Great State of White and High: Buddhism and State Foundation in Eleventh-Century Xia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6), E. I. Kychanov, Izmennyiizanovoutverzhdenny ikodeksdevisatsarstvovaniianobesnoeprotsvetanie (1149-1169), vol. 1(1988), vol. 2(1987), vol. 3 & 4(1989). - 20 -

10~12세기동아시아국제관계사 조공체제 이론의 대안 모색 여러 지역과 부족연맹들의 역할과 관점이 모두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2000 여 년에 걸 쳐 진행되어온 동아시아와 내륙아시아 국제관계를 하나의 이론으로 접근하여 일률적 으로 적용하는 것은 시대적 특성을 무시하고 이론적 틀에 끼워 맞추는 행위에 그칠 가 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세계체제 이론, 불교문화권의 시각으로 설정한 국제질서, 비한 문사료의 활용 등의 여러 이론적 대안과 새로운 시각을 모색하고, 이러한 이론과 시각 을 도입하여 분석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문제와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공체제 의 틀에 의해 가리워졌던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역사적 실체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 21 -

新 世 纪 契 丹 语 文 研 究 的 新 进 展 及 其 对 历 史 研 究 的 贡 献 康 鹏 ( 中 国 社 会 科 学 院 历 史 研 究 所 ) 一 新 资 料 的 公 布 与 解 读 二 契 丹 文 语 音 与 语 法 研 究 三 契 丹 文 与 其 它 语 言 的 比 较 研 究 四 契 丹 文 对 于 历 史 研 究 的 贡 献 1922 年 6 月 21 日, 比 利 时 传 教 士 凯 尔 温 (R.P.Louis.kervyn, 汉 名 梅 岭 蕊, 1880-1939) 在 永 兴 陵 中 发 现 了 辽 兴 宗 和 仁 懿 皇 后 的 的 契 丹 小 字 哀 册 随 后 将 这 一 信 息 发 表 在 北 京 天 主 教 会 通 讯 (Le Bulletin Catholique de Pèkin) 1923 年 第 118 期 上 同 年, 法 国 汉 学 家 伯 希 和 (P.Pelliot) 将 该 文 删 改 后 转 载 通 报 (T'oung Pao) 第 22 卷 上, 从 而 引 起 学 界 重 视 失 传 数 百 年 之 久 的 契 丹 文 文 字 得 以 重 建 天 日, 契 丹 文 字 的 研 究 亦 肇 始 于 此 时 至 今 日, 已 有 九 十 余 年, 在 上 个 世 纪 几 近 八 十 年 的 时 间 里, 中 外 学 界 共 计 出 版 契 丹 文 专 著 四 种, 1) 发 表 论 文 近 四 百 篇 及 至 进 入 新 的 世 纪, 也 就 是 21 世 纪, 契 丹 文 字 的 研 究 取 得 了 突 飞 猛 进 的 进 展 在 新 世 纪 短 短 十 余 年 的 时 间 里, 就 已 出 版 专 著 二 十 种, 发 表 论 文 三 百 余 篇, 无 论 是 数 量 还 是 质 量, 均 远 远 超 越 了 上 个 世 纪 面 对 如 此 丰 硕 的 研 究 成 果, 本 文 不 求 面 面 俱 到, 仅 择 其 要 者 予 以 简 单 的 介 绍 具 体 而 言, 本 文 将 分 成 新 资 料 的 公 布 与 解 读 契 丹 文 语 音 与 语 法 研 究 契 丹 文 与 其 它 语 言 的 比 较 研 究 契 丹 文 对 于 历 史 研 究 的 贡 献 等 几 个 部 分 加 以 申 述 至 于 契 丹 文 词 义 的 研 究, 因 其 大 多 包 含 在 第 一 和 最 后 一 部 分 之 中, 故 本 文 不 再 单 独 详 述 一 新 资 料 的 公 布 与 解 读 新 世 纪 发 现 或 公 布 的 契 丹 文 资 料 之 中, 有 一 件 极 为 重 要 的 资 料, 那 就 是 俄 罗 斯 科 学 院 东 方 文 献 研 究 所 东 方 文 献 与 写 本 研 究 室 的 契 丹 大 字 写 本 由 于 该 抄 本 系 用 草 书 书 写, 字 迹 难 1) 这 四 种 专 著 为 : 金 毓 黻 编 辽 陵 石 刻 集 录, 奉 天 图 书 馆 刊, 1934 年 ; 厉 鼎 煃 契 丹 国 书 略 说, 仁 声 印 刷 所, 1934 年 ; 清 格 尔 泰 刘 凤 翥 陈 乃 雄 于 宝 林 邢 复 礼 契 丹 小 字 研 究, 中 国 社 会 科 学 出 版 社, 1985 年 ; 即 实 谜 林 问 径 契 丹 小 字 解 读 新 程, 辽 宁 民 族 出 版 社, 1996 年 此 外 还 有 刘 凤 翥 契 丹 大 字 资 料 汇 辑 (1973 年 ) 刘 凤 翥 于 宝 林 契 丹 大 字 资 料 汇 辑 辑 补 (1975 年 ) 两 种 资 料, 因 其 为 内 部 油 印 本, 仅 在 很 小 的 范 围 内 散 发, 故 本 文 未 计 入 正 式 出 版 物 之 列 - 23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以 辨 认, 故 长 期 被 人 误 认 为 是 女 真 文 字 俄 罗 斯 科 学 院 的 扎 伊 采 夫 (Viacheslav Zaytsev) 先 生 首 次 将 这 一 发 现 公 诸 于 世, 2) 引 起 契 丹 文 字 学 界 的 强 烈 关 注 中 日 两 国 学 者 很 快 将 其 发 表 的 俄 文 论 文 翻 译 成 本 国 的 语 言 文 字, 3) 以 便 于 学 界 进 一 步 研 究 利 用 该 写 本 很 可 能 出 土 于 吉 尔 吉 斯 斯 坦 境 内 ( 原 西 辽 地 域 ), 共 计 一 百 余 页, 草 书 契 丹 大 字 一 万 有 余 目 前 学 界 已 辨 认 或 释 读 出 大 中 央 辽 契 丹 国 重 熙 十 四 年 二 月 皇 帝 林 牙 等 词 汇 4) 这 份 契 丹 大 字 写 本 中 的 文 字 数 量 已 超 过 之 前 所 有 契 丹 大 字 资 料 的 总 和, 其 份 量 可 想 而 知 ; 更 为 重 要 的 是, 这 是 全 世 界 唯 一 一 份 用 纸 质 媒 介 书 写 的 契 丹 文 文 字, 其 重 要 性 也 是 不 言 而 喻 的 但 是 由 于 俄 方 仅 仅 公 布 了 一 页 材 料, 导 致 人 们 还 没 有 办 法 认 识 这 一 材 料 的 性 质, 更 无 法 展 开 具 体 的 研 究 工 作 可 以 想 见, 如 果 俄 方 公 布 了 全 部 的 材 料, 这 份 写 本 一 定 会 成 为 21 世 纪 学 界 最 为 重 要 的 发 现 之 一, 其 重 要 性 不 亚 于 1922 年 庆 陵 契 丹 小 字 的 发 现 这 一 时 期, 刘 凤 翥 先 生 对 于 众 多 墓 志 展 开 了 研 究 工 作, 撰 写 了 数 量 众 多 的 考 释 文 章, 例 如 契 丹 小 字 < 萧 大 山 和 永 清 公 主 墓 志 > 考 释 契 丹 大 字 < 耶 律 习 涅 墓 志 铭 > 再 考 释 等 等 5) 这 些 成 果 集 中 收 录 在 刘 凤 翥 先 生 的 契 丹 文 字 研 究 类 编 中 6) 该 书 为 精 装 八 开 四 巨 册, 共 分 七 个 部 分, 涵 盖 了 迄 今 为 止 最 新 的 契 丹 语 文 研 究 成 果 和 契 丹 文 研 究 资 料 该 书 最 有 价 值 的 部 分 是 第 四 至 七 部 分 第 四 部 分 为 契 丹 文 字 的 释 义 与 拟 音, 凝 聚 了 刘 先 生 一 生 的 心 血, 可 以 说 是 世 界 上 第 一 部 反 映 契 丹 文 字 最 新 研 究 现 状 的 契 丹 文 字 字 典 第 五 六 七 部 分, 公 布 了 全 世 界 所 有 的 契 丹 文 字 没 有 争 议 的 真 品 的 摹 本 和 图 版 照 片, 汇 集 了 现 今 最 为 全 面 最 为 清 晰 的 契 丹 文 字 拓 本 照 片, 其 中 有 些 拓 本 是 海 内 孤 拓, 有 些 则 是 首 次 公 布 的 珍 贵 资 料 此 书 的 出 版 历 时 近 三 年, 在 此 期 间, 海 内 外 学 者 纷 纷 打 探 此 书 的 出 版 进 度, 翘 首 以 盼, 给 予 了 极 高 的 关 注 吴 英 喆 杨 虎 嫩 契 丹 小 字 新 资 料 以 及 吴 英 喆 契 丹 小 字 新 発 見 資 料 釈 読 問 題 两 书 公 布 了 七 方 契 丹 小 字 新 资 料, 7) 爱 新 觉 罗 乌 拉 熙 春 的 中 央 民 族 大 学 古 文 字 陈 列 馆 所 藏 2) Зайцев В. П. Рукописная книга большого киданьского письма из коллекции Института восточн ых рукописей РАН // Письменные памятники Востока, 2(15),осень зима2011. М.:«Наука»,Издат ельскаяфирма«восточнаялитература»,2011. 3) 扎 伊 采 夫 著, 任 震 寰 译 : 俄 罗 斯 科 学 院 东 方 文 献 研 究 所 收 藏 的 契 丹 大 字 手 稿 书, 隋 唐 辽 宋 金 元 史 论 丛 第 三 辑, 上 海 古 籍 出 版 社 2013 年 ;Viacheslav Zaytsev, 荒 川 慎 太 郎 訳, ロシア 科 学 アカデミ 東 洋 文 獻 研 究 所 所 藏 契 丹 大 字 写 本, 内 陸 アジア 言 語 の 研 究 ⅩⅩⅦ, 日 本 中 央 ユ ラシア 学 研 究 會, 2012 年 4) 参 见 前 揭 扎 伊 采 夫 文 及 陶 金 契 丹 大 字 考 证 三 则, 中 西 文 化 交 流 学 报 第 6 卷 第 1 期, 2014 年 5) 袁 海 波 刘 凤 翥 契 丹 小 字 < 萧 大 山 和 永 清 公 主 墓 志 > 考 释, 文 史 2005 年 第 1 辑 ; 刘 凤 翥 契 丹 大 字 < 耶 律 习 涅 墓 志 铭 > 再 考 释, 国 学 研 究 第 22 卷, 2008 年 6) 刘 凤 翥 契 丹 文 字 研 究 类 编, 中 华 书 局, 2014 年 12 月 因 出 版 审 查 等 原 因, 该 书 将 于 2015 年 5 月 份 才 会 正 式 公 开 发 行 7) Wu Yingzhe and Juha Janhunen, New Materials on the Khitan Small Script:A Critical Edition of Xiao Dilu and Yelü XiangWen, UK:Global Oriental Press, 2010; 吴 英 喆 契 丹 小 字 新 発 見 資 料 釈 読 問 題, 日 本 東 京 : 東 京 外 國 語 大 學 アジア アフリカ 言 語 文 化 研 究 所, 2012 年 - 24 -

新 世 纪 契 丹 语 文 研 究 的 新 进 展 及 其 对 历 史 研 究 的 贡 献 时 代 最 早 的 契 丹 大 字 < 痕 得 隐 太 傅 墓 志 > 一 文 则 公 布 了 一 方 刻 于 应 历 五 年 (960) 的 契 丹 大 字 墓 志, 这 是 迄 今 为 止 刊 刻 年 代 最 早 的 完 整 的 契 丹 大 字 墓 志 8) 由 于 这 些 墓 志 均 系 征 集 而 来, 故 而 学 界 对 其 真 伪 展 开 了 激 烈 的 争 论 9) 即 实 先 生 的 新 著 谜 田 耕 耘 契 丹 小 字 解 读 续 ( 辽 宁 民 族 出 版 社, 2012 年 ) 无 疑 也 是 一 部 令 人 瞩 目 的 作 品 全 书 大 致 可 分 为 三 个 部 分, 第 一 部 分 对 1993 年 至 2009 年 刊 布 的 耶 律 宗 教 墓 志 萧 居 士 墓 志 等 19 件 契 丹 小 字 石 刻 资 料 进 行 释 读 研 究 ; 第 二 部 分 主 要 是 将 作 者 释 读 成 果 编 成 新 拟 改 拟 字 音 表 词 语 释 义 表, 在 两 表 之 后 附 有 < 辽 史 > 指 误 草 记 一 文, 指 摘 辽 史 讹 误 共 计 37 条 ; 第 三 部 分 则 是 摹 录 上 世 纪 20 年 代 至 2009 年 公 诸 于 世 的 全 部 志 石, 作 者 对 32 件 石 刻 详 加 校 勘, 绝 大 部 分 录 文 之 后 均 附 有 校 勘 记, 这 一 工 作 极 大 地 便 利 了 学 者 的 研 究 除 此 之 外 还 有 一 些 零 星 的 关 于 墓 志 考 释 的 文 章, 如 刘 浦 江 关 于 契 丹 小 字 < 耶 律 糺 里 墓 志 铭 > 的 若 干 问 题 韩 世 明 吉 本 智 慧 子 梁 国 王 墓 志 铭 文 初 释 爱 新 觉 罗 乌 拉 熙 春 契 丹 小 字 墓 志 综 考 康 鹏 契 丹 小 字 < 萧 敌 鲁 副 使 墓 志 铭 > 考 释 康 鹏 契 丹 大 字 < 耶 律 祺 墓 志 铭 > 补 释 等 等 10) 8) 爱 新 觉 罗 乌 拉 熙 春 中 央 民 族 大 学 古 文 字 陈 列 馆 所 藏 时 代 最 早 的 契 丹 大 字 < 痕 得 隐 太 傅 墓 志 >, 首 都 博 物 馆 馆 刊 第 24 辑, 2010 年 9) 相 关 文 章 主 要 有 刘 凤 翥 契 丹 小 字 < 萧 敌 鲁 墓 志 铭 > 和 < 耶 律 廉 宁 墓 志 铭 > 均 为 赝 品, 中 国 社 会 科 学 报, 2011 年 5 月 19 日 第 5 版 ; 聂 鸿 音 契 丹 小 字 墓 志 真 伪 辩 兼 与 刘 凤 翥 先 生 商 榷, 中 国 社 会 科 学 报, 2011 年 6 月 16 日 第 5 版 ; 刘 凤 翥 再 论 < 萧 敌 鲁 墓 志 铭 > 为 赝 品 说, 中 国 社 会 科 学 报, 2011 年 6 月 16 日 第 5 版 ; 刘 凤 翥 再 论 < 耶 律 廉 宁 墓 志 > 为 赝 品, 中 国 社 会 科 学 报, 2011 年 11 月 10 日 第 5 版 ; 陈 智 超 给 文 物 热 泼 点 冷 水 从 < 萧 敌 鲁 墓 志 铭 > 真 伪 之 辨 说 起, 中 国 社 会 科 学 报, 2011 年 11 月 10 日 第 5 版 ; 吴 英 喆 契 丹 小 字 < 萧 敌 鲁 墓 志 铭 > 及 < 耶 律 详 稳 墓 志 > 绝 非 赝 品 与 刘 凤 翥 先 生 商 榷, 中 国 社 会 科 学 报 2011 年 12 月 8 日 第 5 版 ; 杨 虎 嫩 撰 唐 均 译 契 丹 小 字 碑 铭 真 伪 辨 答 刘 凤 翥 先 生, 中 国 社 会 科 学 报 2011 年 12 月 8 日 第 5 版 ; 吴 英 喆 : 契 丹 小 字 < 胡 覩 堇 审 密 墓 志 铭 > 考 释, 唐 彩 兰 主 编 契 丹 遗 珍 ( 巴 林 左 旗 契 丹 博 物 馆 馆 藏 珍 品 选 金 银 器 铜 器 玉 器 卷 ), 线 装 书 局, 2011 年 ; 刘 凤 翥 所 谓 契 丹 小 字 < 萧 德 里 辇 胡 覩 堇 墓 志 铭 > 为 赝 品 说, 北 京 辽 金 城 垣 博 物 馆 编 : 大 辽 遗 珍 辽 代 文 物 展, 学 苑 出 版 社, 2012 年 ; 刘 凤 翥 : 契 丹 小 字 < 萧 微 哩 辇 汗 德 墓 志 铭 > 为 赝 品 说, 辽 宁 省 辽 金 契 丹 女 真 史 研 究 会 编 辽 金 历 史 与 考 古 国 际 学 术 讨 论 会 论 文 集 ( 下 ), 辽 宁 教 育 出 版 社, 2012; 刘 凤 翥 解 读 契 丹 文 字 不 能 顾 此 失 彼, 要 做 到 一 通 百 通, 辽 金 史 论 集 第 13 辑, 中 国 社 会 科 学 出 版 社, 2013 年 ; 即 实 读 谜 谈 解 补 说 < 刍 拈 墓 志 >, 韩 国 檀 国 大 学 北 方 文 化 研 究 所 北 方 文 化 研 究 第 5 卷, 2014 年 10) 刘 浦 江 关 于 契 丹 小 字 < 耶 律 糺 里 墓 志 铭 > 的 若 干 问 题, 北 大 史 学 第 14 辑, 北 京 大 学 出 版 社, 2009 年 ; 韩 世 明 吉 本 智 慧 子 梁 国 王 墓 志 铭 文 初 释, 民 族 研 究 2007 年 第 2 期 ; 爱 新 觉 罗 乌 拉 熙 春 契 丹 小 字 墓 志 综 考, 收 入 氏 著 契 丹 语 言 文 字 研 究, 京 都 大 学 东 亚 历 史 文 化 研 究 会, 2004 年 ; 康 鹏 契 丹 小 字 < 萧 敌 鲁 副 使 墓 志 铭 > 考 释, 辽 宁 省 辽 金 契 丹 女 真 史 研 究 会 编 辽 金 历 史 与 考 古 第 4 辑, 辽 宁 教 育 出 版 社, 2013 年 ; 康 鹏 契 丹 大 字 < 耶 律 祺 墓 志 铭 > 补 释, 形 象 史 学 研 究 (2013), 人 民 出 版 社, 2014 年 - 25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二 契 丹 文 语 音 与 语 法 研 究 在 契 丹 文 解 读 过 程 中, 契 丹 文 的 语 音 研 究 无 疑 占 据 着 重 要 的 位 置 清 格 尔 泰 先 生 契 丹 小 字 釋 読 問 题 一 书 最 有 价 值 的 部 分 是 已 释 读 原 字 的 述 评, 这 一 部 分 对 契 丹 小 字 原 字 的 音 值 进 行 了 系 统 的 总 结 分 析, 非 常 便 于 学 者 利 用 研 究 契 丹 文 字 的 语 音 状 况 11) 刘 凤 翥 先 生 对 于 契 丹 小 字 的 音 值 也 予 以 了 总 结, 他 在 最 近 20 年 来 的 契 丹 文 字 研 究 概 况 一 文 和 遍 访 契 丹 文 字 话 拓 碑 一 书 中 专 门 胪 列 了 已 释 读 的 契 丹 小 字 原 字 音 值 12) 澳 大 利 亚 的 康 丹 先 生 的 契 丹 语 言 与 文 字 一 书 对 诸 家 拟 音 观 点 一 一 梳 理, 并 提 出 了 自 己 的 读 到 观 点 康 丹 先 生 的 著 作 为 西 方 学 界 认 识 契 丹 语 文 研 究 状 况 搭 建 了 一 座 坚 实 的 桥 梁 13) 此 外, 爱 新 觉 罗 乌 拉 熙 春 契 丹 小 字 的 语 音 构 拟 清 格 尔 泰 关 于 契 丹 小 字 地 支 的 读 音 清 格 尔 泰 契 丹 小 字 几 个 常 用 原 字 读 音 研 究 爱 新 觉 罗 乌 拉 熙 春 < 梁 国 王 位 志 铭 > 新 考 兼 拟 契 丹 小 字 的 音 值 宝 玉 柱 契 丹 小 字 及 其 替 换 字 研 究 陈 晓 伟 释 < 辽 史 > 中 的 大 汉 一 名 兼 论 契 丹 小 字 原 字 的 音 值 问 题 等 文 对 于 契 丹 小 字 原 字 具 体 的 拟 音 都 进 行 了 细 致 的 探 讨 14) 在 契 丹 小 字 音 值 讨 论 的 基 础 上, 一 些 学 者 进 一 步 研 究 了 契 丹 小 字 拼 读 规 律, 这 方 面 比 较 有 代 表 性 的 文 章 是 : 清 格 尔 泰 契 丹 小 字 释 读 工 作 中 运 用 元 音 和 谐 律 的 问 题 吴 英 喆 契 丹 小 字 中 的 元 音 附 加 法 武 内 康 则 契 丹 小 字 で 表 記 された 漢 字 音 から 見 た 契 丹 語 音 体 系 の 硏 究 15) 孙 伯 君 聂 鸿 音 契 丹 语 研 究 一 书 则 对 契 丹 语 的 语 音 系 统 展 开 探 讨, 同 时 对 个 别 契 丹 小 字 的 音 值 进 行 了 构 拟 16) 以 往 的 研 究 中, 学 界 倾 向 于 将 契 丹 小 字 认 作 表 音 文 字, 契 丹 大 字 则 是 表 意 文 字 但 是 随 着 研 究 的 深 入, 人 们 意 识 到 契 丹 大 字 不 仅 表 意, 也 可 以 表 音 刘 凤 翥 先 生 在 契 丹 大 字 11) 清 格 尔 泰 契 丹 小 字 釋 読 問 题, 日 本 东 京 外 国 语 大 学 亚 非 言 语 文 化 研 究 所, 2002 年 12) 刘 凤 翥 最 近 20 年 来 的 契 丹 文 字 研 究 概 况, 燕 京 学 报 新 11 期, 2001 年 ; 刘 凤 翥 遍 访 契 丹 文 字 话 拓 碑, 华 艺 出 版 社, 2005 年 13) Daniel Kane,The Kitan Language and Script,Brill Academic Pub,2009. 14) 爱 新 觉 罗 乌 拉 熙 春 : 契 丹 小 字 的 语 音 构 拟, 立 命 馆 文 学 第 577 号, 2002 年 12 月, 第 1-63 页 1. 清 格 尔 泰 : 关 于 契 丹 小 字 地 支 的 读 音, 陈 乃 雄 包 联 群 编 契 丹 小 字 研 究 论 文 选 编, 内 蒙 古 人 民 出 版 社, 2001 年 12 月 第 1 版, 2005 年 11 月 第 1 次 印 刷, 725-740 页 ( 原 文 刊 于 内 蒙 古 蒙 文 专 科 学 校 蒙 古 学 研 究 ( 蒙 文 版 )1991 年 第 2 期, 13~24 页 ) 2. 爱 新 觉 罗 乌 拉 熙 春 : < 梁 国 王 位 志 铭 > 新 考 兼 拟 契 丹 小 字 的 音 值, 爱 新 觉 罗 乌 拉 熙 春 女 真 契 丹 学 研 究, 日 本 松 香 堂, 2009 年 2 月, 第 267-276 页 4. 清 格 尔 泰 : 契 丹 小 字 几 个 常 用 原 字 读 音 研 究, 蒙 古 学 集 刊 2007 年 第 1 期 1. 宝 玉 柱 : 契 丹 小 字 及 其 替 换 字 研 究, 内 蒙 古 大 学 学 报 ( 人 文 社 会 科 学 版 )2006 年 第 1 期, 第 8-12 页 陈 晓 伟 : 释 < 辽 史 > 中 的 大 汉 一 名 兼 论 契 丹 小 字 原 字 的 音 值 问 题, 民 族 研 究 2012 年 第 2 期, 第 62-68 页 15) 清 格 尔 泰 契 丹 小 字 释 读 工 作 中 运 用 元 音 和 谐 律 的 问 题, 蒙 古 学 集 刊 2005 年 第 2 期 ; 吴 英 喆 契 丹 小 字 中 的 元 音 附 加 法, 民 族 语 文 2007 年 第 4 期 ; 武 内 康 则 契 丹 小 字 で 表 記 された 漢 字 音 から 見 た 契 丹 語 音 体 系 の 硏 究, 京 都 大 学 大 学 院 文 学 研 究 科 言 语 学 专 修 修 士 论 文, 2007 年 16) 孙 伯 君 聂 鸿 音 契 丹 语 研 究, 中 国 社 会 科 学 出 版 社, 2008 年 - 26 -

新世纪契丹语文研究的新进展及其对历史研究的贡献 耶律昌允墓志铭 之研究 中为189个契丹大字构拟了音值, 进一步确定了契丹大字并非单 纯的表意文字, 而是表音与表意相混合的语素文字, 该文将契丹大字的解读水平提高到一 17) 个崭新的阶段 上文介绍的刘凤翥先生的 契丹文字研究类编 一书, 在该书的第四部分, 刘先生对于 契丹大字和小字的音值予以了系统的介绍, 并一一指出拟音的根据, 是目前为止最为全面 的关于契丹大小字音值构拟的论著 新世纪关于契丹语语法的研究, 最为重要带点成果就是吴英喆先生对于契丹语中的 性 语法范畴的揭示 契丹语中存在与蒙古语类似的 性 语法, 有着阴 阳性的区分 吴英喆认为契丹语的基数词 序数词 天干等词语均存在着 性 语法规律 值得一提 的是, 学界曾经对契丹小字的基数词存在带点字(如 )和不带点字(如 )的现 象百思不得其解, 吴英喆先生通过 性 语法的视角, 指出不带点的字为阴性, 带点的字为阳 18) 性, 可谓确论 契丹语语法方面的相关文章还有爱新觉罗 乌拉熙春 契丹语的动词后缀 契丹语 名词的格与数, 聂鸿音 契丹语的名词附加成分*-n和*-in 吴英喆 契丹语静词领属语 法范畴研究 等 19) 三 契丹文与其它语言的比较研究 傅林 论契丹小字与回鹘文的关系及其文字改革 一文按时间线索梳理契丹小字文 献的拼写方式差异, 指出契丹小字在初始的符号系统设计上受到了回鹊文的直接影响 20) 武内康则 拓拔语与契丹语词汇拾零 对属于同一语族的拓拔语和契丹语的同源词进行 了分析, 阐明了拓拔语和契丹语里存在中世纪蒙古语中所没有的硬腭鼻音, 指出拓跋语和 21) 戴光宇 试论鲜卑语 契丹语和满 契丹语的关于颜色的词汇与满语存在着对应关系 17) 刘凤翥 王云龙 契丹大字 耶律昌允墓志铭 之研究, 燕京学报 新17期, 2004年 18) 吴英喆 契丹小字 性 语法范畴初探, 内蒙古大学学报 2005年第3期 吴英喆 从带点与不带点的原字论 说契丹语 性 语法范畴, 中央民族大学学报, 2006年第6期 吴英喆 再论契丹文天干阴阳之别, 韩国檀 国大学北方文化研究所 北方文化研究 第5卷, 2014年12月 吴英喆 契丹语静词语法范畴研究, 内蒙古大 学出版社, 2007年 19) 爱新觉罗 乌拉熙春 契丹语的动词后缀, 收入同氏 契丹语言文字研究, 京都大学东亚历史文化研究会, 2004年 爱新觉罗 乌拉熙春 契丹语名词的格与数, 收入同氏 契丹语言文字研究, 京都大学东亚历 史文化研究会, 2004 聂鸿音 契丹语的名词附加成分*-n和*-in, 民族语文 2001年第2期 吴英喆 契 丹语静词领属语法范畴研究, 韩国檀国大学北方文化研究所 北方文化研究 第4卷, 2013年 20) 傅林 论契丹小字与回鹘文的关系及其文字改革, 华西语文学刊 第8辑(契丹学专辑), 四川文艺出版社, 2013年 21) 武内康则撰 申英姬译 拓拔语与契丹语词汇拾零, 华西语文学刊 第8辑(契丹学专辑), 四川文艺出版社, 2013年 - 27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语 的 关 系 则 主 要 从 汉 文 文 献 阐 释 鲜 卑 语 契 丹 语 和 满 语 三 者 之 间 的 关 系 22) 契 丹 语 和 蒙 古 语 之 间 存 在 亲 属 关 系 早 已 为 学 界 所 公 认, 所 以 学 者 关 于 这 方 面 的 成 果 较 多 齐 木 德 道 尔 吉 从 原 蒙 古 语 到 契 丹 语 乌 拉 熙 春 契 丹 语 与 蒙 古 语 吉 日 嘎 拉 试 析 契 丹 语 和 蒙 古 语 的 共 用 语 言 武 内 康 则 契 丹 语 和 中 古 蒙 古 语 文 献 中 的 汉 语 喉 牙 音 声 母 等 皆 属 于 这 方 面 具 有 代 表 性 的 文 章 23) 瑶 百 舸 契 丹 宗 教 词 汇 与 阿 尔 泰 语 系 民 族 语 言 文 化 则 从 萨 满 教 佛 教 的 角 度 对 天 福 等 六 个 契 丹 语 词 汇 与 阿 尔 泰 语 系 语 言 之 间 的 关 系 进 行 了 探 讨 24) 韩 国 的 李 圣 揆 则 对 契 丹 语 与 韩 语 进 行 了 初 步 的 比 较 研 究, 他 指 出 契 丹 小 字 的 (*iri, 名 号 ) (ai, 年 ) (mas, 第 一 ) 与 韩 语 存 在 一 定 的 相 关 性 25) 孙 伯 君 聂 鸿 音 契 丹 语 研 究 一 书 则 系 统 梳 理 了 汉 文 文 献 中 契 丹 语 汇, 并 借 助 鲜 卑 语 突 厥 语 女 真 语 中 古 蒙 古 语 满 语 等 语 言 对 契 丹 语 词 加 以 注 释 26) 四 契 丹 文 对 于 历 史 研 究 的 贡 献 大 约 十 余 年 前, 一 位 知 名 的 历 史 学 家 曾 在 一 次 会 议 上 对 契 丹 文 字 专 家 刘 凤 翥 先 生 说, 契 丹 文 研 究 对 于 历 史 学 研 究 没 有 什 么 用 处 造 成 这 种 认 识 的 原 因 是 : 一, 破 解 契 丹 文 的 过 程 极 为 艰 难, 文 字 资 料 不 够 丰 富, 种 类 单 一 ( 绝 大 多 数 为 墓 志 ), 契 丹 文 字 研 究 者 将 主 要 精 力 集 中 在 语 言 文 字 的 破 解 上, 很 好 兼 顾 史 学 方 面 的 研 究 ; 二 是 历 史 学 家 对 于 契 丹 文 字 研 究 状 况 不 甚 了 了, 无 从 入 手 利 用 可 以 说 当 时 这 位 知 名 历 史 学 家 的 看 法 较 为 符 合 那 一 期 的 状 况, 不 过 在 最 近 十 余 年 里, 这 种 状 况 发 生 了 明 显 的 转 变 越 来 越 多 的 历 史 学 家 意 识 到 对 契 丹 大 小 字 石 刻 对 辽 史 契 丹 史 研 究 的 潜 在 价 值, 若 能 对 此 充 分 发 掘 和 利 用, 其 重 要 性 将 不 亚 于 甲 骨 文 之 于 殷 商 史, 突 厥 语 文 之 于 突 厥 史, 蒙 古 语 文 之 于 蒙 元 史, 满 语 之 于 满 清 史 27) 刘 浦 江 康 鹏 编 纂 的 契 丹 小 字 词 汇 索 引 一 书 也 为 历 史 学 家 利 用 契 丹 语 言 文 字 22) 戴 光 宇 试 论 鲜 卑 语 契 丹 语 和 满 语 的 关 系, 满 语 研 究 2014 年 第 2 期 23) 齐 木 德 道 尔 吉 从 原 蒙 古 语 到 契 丹 语, 中 央 民 族 大 学 学 报 2002 年 第 3 期 ; 吉 日 嘎 拉 试 析 契 丹 语 和 蒙 古 语 的 共 用 语 言, 赤 峰 学 院 学 报 ( 汉 文 哲 学 社 会 科 学 版 )2011 年 第 4 期 ; 爱 新 觉 罗 乌 拉 熙 春 契 丹 语 与 蒙 古 语, 收 入 同 氏 契 丹 语 言 文 字 研 究, 京 都 大 学 东 亚 历 史 文 化 研 究 会, 2004 年 ; 武 内 康 则 著, 聂 鸿 音 译 契 丹 语 和 中 古 蒙 古 语 文 献 中 的 汉 语 喉 牙 音 声 母, 满 语 研 究 2012 年 第 2 期 24) [ 德 ] 瑶 百 舸 (Joerg Baecker) 契 丹 宗 教 词 汇 与 阿 尔 泰 语 系 民 族 语 言 文 化, 聂 鸿 音 孙 伯 君 编 中 国 多 文 字 时 代 的 历 史 文 献 研 究, 社 会 科 学 文 献 出 版 社, 2010 年 25) 이성규, 거란소자표기단어와한국어의비교연구, 韩 国 檀 国 大 学 北 方 文 化 研 究 所 北 方 文 化 研 究 第 4 卷, 2013 年 26) 孙 伯 君 聂 鸿 音 契 丹 语 研 究, 中 国 社 会 科 学 出 版 社, 2008 年 27) 参 阅 刘 浦 江 康 鹏 契 丹 小 字 词 汇 索 引 前 言, 中 华 书 局, 2014 年 - 28 -

新 世 纪 契 丹 语 文 研 究 的 新 进 展 及 其 对 历 史 研 究 的 贡 献 提 供 了 较 为 便 利 的 条 件 28) 那 么 具 体 而 言, 契 丹 语 言 文 字 对 于 历 史 研 究 究 竟 有 哪 些 贡 献 呢? ( 一 ) 契 丹 文 对 于 辽 代 家 族 世 系 研 究 的 价 值 众 所 周 知, 辽 代 皇 族 和 后 族 的 世 系 极 为 复 杂, 汉 文 文 献 记 载 多 有 疏 漏 舛 乱 之 处 如 何 厘 清 契 丹 人 的 血 缘 宗 族 关 系, 还 必 须 从 契 丹 文 字 本 身 入 手 契 丹 文 石 刻 资 料 大 多 会 在 墓 志 前 半 部 分 叙 述 自 己 的 家 族 世 系, 如 果 将 诸 多 的 石 刻 资 料 合 并 起 来, 进 行 通 贯 的 研 究, 必 然 会 有 重 大 的 发 现 这 方 面 的 代 表 学 者 是 爱 新 觉 罗 乌 拉 熙 春 先 生, 她 在 辽 金 史 与 契 丹 女 真 文 ( 日 本 京 都 : 京 都 大 学 东 亚 历 史 文 化 研 究 会, 2004 年 ) 一 书 中 利 用 契 丹 文 资 料 对 于 契 丹 皇 族 的 横 帐 后 族 的 国 舅 帐, 以 及 耶 律 氏 萧 氏 等 一 系 列 问 题 展 开 了 讨 论 其 中 乌 拉 熙 春 对 于 匣 马 葛 的 考 释, 解 开 了 数 百 年 来 的 谜 团 由 于 辽 史 的 误 记, 人 们 普 遍 认 为 匣 马 葛 帖 剌 蒲 古 只 是 同 一 个 人, 系 一 人 三 名 即 便 是 契 丹 注 明 考 据 学 家 钱 大 昕 也 作 如 是 观 但 是 实 际 情 况 并 非 如 此, 乌 拉 熙 春 指 出 蒲 古 只 为 帖 剌 长 子, 匣 马 葛 为 帖 剌 次 子, 厘 清 了 契 丹 早 期 皇 族 的 世 系 情 况 乌 拉 熙 春 的 其 它 几 部 著 作, 契 丹 文 墓 誌 より 見 た 遼 史 ( 日 本 京 都 松 香 堂, 2006 年 ) 愛 新 覺 羅 烏 拉 熙 春 女 真 契 丹 學 研 究 ( 日 本 京 都 松 香 堂, 2009 年 ) 韓 半 島 から 眺 めた 契 丹 女 真 ( 与 吉 本 道 雅 合 著, 日 本 京 都 大 学 学 术 出 版 会, 2011 年 ) 吉 本 道 雅 : 新 出 契 丹 史 料 の 研 究 ( 与 吉 本 道 雅 合 著, 日 本 京 都 松 香 堂, 2012 年 ) 也 大 多 是 因 循 这 一 理 路 展 开 研 究 乌 拉 熙 春 先 生 对 于 辽 代 世 系 研 究 的 贡 献, 点 燃 了 历 史 学 家 的 激 情, 很 多 学 者 开 始 关 注 辽 朝 的 皇 族 和 后 族 内 蒙 古 大 学 的 史 凤 春 先 生 吉 林 大 学 的 韩 世 明 蒋 金 玲 孙 伟 祥 等 学 者 均 开 始 利 用 契 丹 文 字 研 究 辽 朝 的 家 族 世 系 情 况 这 虽 然 是 一 个 很 好 的 现 象, 但 学 者 们 扎 堆 关 注 家 族 问 题, 难 免 会 造 成 研 究 成 果 的 重 复 撞 车 那 么 契 丹 文 对 于 历 史 研 究 的 贡 献 仅 仅 在 于 家 族 世 系 的 梳 理 吗? 答 案 是 远 非 如 此 ( 二 ) 契 丹 文 对 于 辽 朝 国 号 等 重 大 问 题 具 有 重 要 贡 献 众 所 周 知, 辽 朝 在 历 史 上 曾 数 次 更 改 国 号, 然 而 辽 史 对 于 如 此 重 要 的 事 件 竟 语 焉 不 详 这 就 造 成 学 者 不 得 不 利 于 宋 朝 以 及 高 丽 王 朝 的 史 料 对 此 加 以 研 究 这 方 面 有 代 表 性 的 成 果 是 刘 浦 江 先 生 的 辽 朝 国 号 考 释, 29) 文 中 将 辽 朝 国 号 更 改 情 况 总 结 为 下 表 28) 刘 浦 江 康 鹏 契 丹 小 字 词 汇 索 引, 中 华 书 局, 2014 年 29) 刘 浦 江 辽 朝 国 号 考 释, 历 史 研 究 2001 年 第 6 期 - 29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年 代 汉 文 国 号 非 汉 文 国 号 916-937 年 大 契 丹 哈 喇 契 丹 ( 全 称 ) 938-982 年 大 辽 ( 燕 云 汉 地 ) 大 契 丹 ( 辽 朝 故 地 ) 983-1065 年 大 契 丹 大 契 丹 契 丹 国 契 丹 ( 简 称 ) 1066-1125 年 大 辽 但 是 事 情 并 非 如 此 简 单 上 个 世 纪, 刘 凤 翥 先 生 最 先 释 读 出 契 丹 小 字 中 的 契 丹 ( ) 一 词, 不 过 学 界 对 于 经 常 出 现 在 契 丹 前 后 的 一 词, 没 有 明 确 的 释 读 意 见, 仅 仅 将 其 音 译 为 哈 喇 所 以 学 者 一 般 认 为 非 汉 文 文 献 中 契 丹 国 国 号 的 全 称 为 哈 喇 契 丹 刘 凤 翥 先 生 以 契 丹 大 字 耶 律 祺 墓 志 铭 的 志 盖 和 志 文 均 以 ( 相 当 于 契 丹 小 字 的, 汉 译 为 大 哈 喇 国 ) 为 国 号 作 为 突 破 口, 结 合 契 丹 大 小 字 资 料, 将 原 来 音 译 为 哈 喇 的 ( ) 意 译 为 辽 刘 凤 翥 先 生 发 现 除 去 耶 律 祺 墓 志 铭 单 称 国 号 为 大 辽 国 和 耶 律 习 涅 墓 志 铭 单 称 国 号 为 契 丹 国 之 外, 契 丹 字 墓 志 多 作 辽 契 丹 国 或 作 契 丹 辽 国, 辽 代 实 行 的 实 际 是 双 国 号 制 度 在 汉 文 文 献 称 国 号 为 契 丹 的 时, 在 契 丹 文 字 中 则 称 国 号 为 契 丹 辽 国, 双 国 号 中 的 契 丹 置 于 辽 之 前 ; 在 汉 文 文 献 称 国 号 为 辽 的 时 期, 在 契 丹 文 字 中 则 称 国 号 为 辽 契 丹 国, 双 国 号 中 的 辽 置 于 契 丹 之 前 30) 这 一 发 现 因 其 了 历 史 学 家 的 重 视, 陈 智 超 先 生 还 曾 发 专 文 予 以 介 绍 31) 以 前 曾 经 指 称 契 丹 文 字 没 有 用 处 的 历 史 学 家 对 于 这 一 发 现 也 予 以 肯 定, 并 表 示 将 这 一 成 果 写 在 其 著 作 之 中 可 以 想 见, 如 果 没 有 契 丹 文 字, 辽 朝 的 双 国 号 制 度 将 永 远 无 法 为 世 人 知 晓 除 此 之 外, 学 界 对 于 汉 人 阻 卜 鞑 靼 等 民 族 族 称 的 释 读, 32) 也 极 具 重 要 的 意 义 例 如 阻 卜 与 鞑 靼 之 谜 堪 称 一 道 世 纪 的 难 题, 史 学 家 正 式 借 助 于 契 丹 文 的 研 究 成 果 破 解 了 这 一 难 题 33) ( 三 ) 对 于 契 丹 历 史 文 化 的 研 究 具 有 重 要 的 意 义 契 丹 人 的 历 史 文 化 是 古 代 北 亚 民 族 中 的 重 要 一 环, 如 果 能 够 对 于 宝 贵 的 契 丹 语 文 资 料 善 加 利 用, 那 么 契 丹 历 史 文 化 的 研 究 其 实 还 大 有 深 入 的 余 地 和 展 拓 的 空 间 刘 浦 江 先 生 曾 根 据 契 丹 文 字 揭 示 出 契 丹 人 父 子 连 名 制 这 一 特 殊 的 文 化 现 象 就 是 很 好 的 例 证 以 往 的 历 史 学 家 根 据 辽 史 等 汉 文 文 献 对 契 丹 人 名 字 曾 作 出 种 种 诠 释, 可 惜 均 未 能 揭 示 它 的 真 谛 34) 刘 浦 江 先 生 根 据 刘 凤 翥 先 生 30) 参 见 刘 凤 翥 : 契 丹 大 字 < 耶 律 祺 墓 志 铭 > 考 释, 内 蒙 古 文 物 考 古 2006 年 第 1 期, 第 52-54 页 ; 同 氏 从 契 丹 文 字 的 解 读 谈 辽 代 契 丹 语 中 的 双 国 号 兼 论 哈 喇 契 丹, 东 北 史 研 究 2006 年 第 2 期 ; 同 氏 契 丹 文 字 中 辽 代 双 国 号 解 读 的 历 程, 邓 广 铭 教 授 百 年 诞 辰 纪 念 论 文 集, 中 华 书 局, 2008 年 31) 参 见 陈 智 超 辽 契 丹 双 国 号 制 的 发 现 评 刘 凤 翥 关 於 契 丹 语 双 国 号 制 的 新 发 现, 燕 京 学 报 新 24 期, 2008 年 32) 参 见 乌 拉 熙 春 辽 金 史 札 记, 辽 金 史 与 契 丹 女 真 文, 京 都 大 学 东 亚 历 史 文 化 研 究 会, 2004 年 ; 王 弘 力 契 丹 小 字 墓 志 研 究, 民 族 语 文 1986 年 第 4 期 33) 参 见 刘 浦 江 再 论 阻 卜 与 鞑 靼, 历 史 研 究 2005 年 第 2 期 - 30 -

新 世 纪 契 丹 语 文 研 究 的 新 进 展 及 其 对 历 史 研 究 的 贡 献 将 契 丹 人 名 字 中 的 释 读 为 第 二 的 ( 名 ) 这 一 关 键 性 的 释 读 意 见, 35) 总 结 出 契 丹 人 有 孩 子 名 ( 小 名 ) 和 第 二 名, 契 丹 文 中 的 孩 子 名, 辽 史 列 传 通 常 将 它 当 作 传 主 的 名 ; 而 契 丹 文 字 石 刻 中 所 称 的 第 二 名, 在 辽 史 里 则 被 称 为 传 主 的 字 而 且 第 二 名 词 尾 均 由 五 个 原 字 之 一 构 成, 这 五 个 原 字 均 以 -n 音 结 尾, 具 有 属 格 后 缀 的 语 法 意 义 若 是 结 合 文 化 人 类 学 的 知 识, 则 可 以 判 定 契 丹 人 父 亲 的 名 字 和 长 子 的 名 字 显 然 存 在 着 某 种 关 联, 虽 然 这 种 关 联 已 逐 渐 削 弱, 但 在 某 些 契 丹 文 墓 志 中 还 可 看 到 契 丹 人 父 名 和 长 子 名 字 之 间 存 在 关 联, 即 父 亲 的 第 二 名 仅 仅 比 长 子 的 孩 子 名 字 多 一 个 词 尾 ( 即 五 个 原 字 之 一 ) 这 种 五 种 属 格 后 缀 实 际 上 是 契 丹 人 父 子 连 名 制 的 一 种 残 留 在 古 代 阿 尔 泰 民 族 中, 契 丹 人 的 名 字 制 度 相 对 来 说 是 比 较 复 杂 的 幸 运 的 是, 正 式 通 过 契 丹 文 字 材 料 的 解 读, 才 使 得 这 种 早 已 湮 灭 的 民 族 文 化 能 够 重 新 为 学 界 所 知 36) ( 四 ) 对 汉 语 史 研 究 的 贡 献 契 丹 文 字 研 究 的 成 果 引 起 了 汉 语 学 家 的 重 视, 由 于 契 丹 小 字 是 一 种 表 音 文 字, 很 好 的 记 录 了 当 时 的 语 音 状 况, 尤 其 是 其 中 的 汉 语 借 词 美 国 的 沈 钟 伟 先 生 充 分 地 利 用 了 契 丹 文 字 的 解 读 成 果 来 研 究 中 古 汉 语 音 韵, 把 汉 语 官 话 的 时 间 上 推 了 300 年 37) 除 此 之 外, 学 界 对 于 辽 代 汉 语 入 声 韵 尾 的 脱 落, 支 思 韵 在 辽 代 分 立 契 丹 小 字 的 韵 文 汉 语 的 声 调 契 丹 语 与 辽 代 汉 语 的 关 系 等 问 题 均 进 行 了 一 系 列 的 研 究 工 作 38) ( 五 ) 对 于 中 西 交 通 史 研 究 的 贡 献 通 过 契 丹 文 的 研 究, 可 以 确 定 中 亚 文 献 中 记 录 的 某 些 晦 涩 难 懂 的 契 丹 语 词 汇, 从 而 重 新 勾 勒 出 辽 朝 的 中 西 交 通 路 线 39) 可 以 说, 契 丹 文 对 于 历 史 研 究 的 贡 献 远 不 止 此, 相 信 随 着 契 丹 语 言 研 究 与 历 史 研 究 之 间 的 联 系 日 渐 加 深, 一 定 会 有 更 多 的 成 果 面 世 34) 参 见 都 兴 智 : 契 丹 人 的 姓 氏 和 名 称, 辽 宁 师 范 大 学 学 报 1990 年 第 5 期 ; 张 国 庆 : 略 谈 辽 代 契 丹 人 的 命 名 习 俗, 博 物 馆 研 究 1991 年 第 2 期 ; 冯 继 钦 : 金 元 时 期 契 丹 人 姓 名 研 究, 黑 龙 江 民 族 丛 刊 1992 年 第 4 期 35) 刘 凤 翥 唐 彩 兰 高 娃 : 辽 代 萧 乌 卢 本 等 三 人 的 墓 志 铭 考 释, 文 史 2004 年 第 2 辑 36) 刘 浦 江 康 鹏 契 丹 名 字 初 释 文 化 人 类 学 视 野 下 的 父 子 连 名 制 文 史 2005 年 第 3 辑 ; 刘 浦 江 再 论 契 丹 人 的 父 子 连 名 制 以 近 年 出 土 的 契 丹 大 小 字 石 刻 为 中 心, 清 华 元 史 创 刊 号, 商 务 印 书 馆, 2011 年 37) 沈 钟 伟 辽 代 北 方 汉 语 方 言 的 语 音 特 征, 中 国 语 文 2006 年 第 6 期 38) 吴 英 喆 契 丹 小 字 中 的 汉 语 入 声 韵 尾 的 痕 迹, 蒙 古 学 集 刊 2006 年 第 4 期 ; 吴 英 喆 再 论 契 丹 文 中 之 汉 语 入 声 韵 尾 的 痕 迹, 韩 国 檀 国 大 学 北 方 文 化 研 究 所 北 方 文 化 研 究 第 2 卷 第 1 号, 2011 年 ; 孙 伯 君 从 契 丹 小 字 看 支 思 韵 在 辽 代 的 分 立, 中 国 语 文 2009 年 第 1 期 ; 沈 钟 伟 契 丹 小 字 韵 文 初 探, 民 族 语 文 2009 年 第 3 期 ; 沈 钟 伟 契 丹 小 字 汉 语 音 译 中 的 一 个 声 调 现 象, 民 族 语 文 2012 年 第 1 期 ; 傅 林 契 丹 语 和 辽 代 汉 语 及 其 接 触 研 究 以 双 向 匹 配 材 料 为 基 础, 北 京 大 学 中 国 语 言 文 学 系 博 士 学 位 论 文, 2013 年 39) 参 见 康 鹏 11-12 世 纪 阿 拉 伯 文 献 中 的 契 丹 都 城 兼 谈 辽 代 的 中 西 交 通, 中 国 民 族 史 回 顾 与 展 望 暨 杜 荣 坤 先 生 学 术 思 想 研 讨 会, 2014 年 - 31 -

우량카이 3위의 활동과 15세기 滿 洲 尹 銀 淑 (강원대) Ⅰ.머리말 Ⅱ. 우량카이 3위의 성립 Ⅲ. 우량카이 3 衛 의 남하와 15세기 만주 Ⅳ. 맺음말 Ⅰ.머리말 明 朝 280여년의 통치 기간 동안 명과 몽골의 대치 상황은 자연스럽게 지정학적으로 명과 몽골의 중간지대에 위치한 우량카위(Üriyangqai, 兀 良 哈 ) 3 衛 역할을 부상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명 스스로가 우량카이 3위를 藩 籬 또는 京 師 의 背 後 라고 할 정도로, 우 량카이 3위는 북으로 몽골과 긴밀히 연결되었다. 또한 남으로는 명의 통치지역으로 통 하며 동으로는 고려(조선) 여진세력과 연결되는 지정학적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우 량카이 3위의 향방은 명과 몽골의 대립 속에서 늘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우량카이 3위의 주체세력은 원 소멸 이후 만주에 남아있던 최후의 몽골세력이었던 칭기스칸의 諸 弟 가문인 옷치긴 왕가와 카치온 왕가로부터 출발하였다. 토구스 테무르 (Togüs Temür, 脫 古 思 帖 木 兒 ) 카안을 제거하고 대칸이 된 이수데르(Isüder, 也 速 迭 兒 )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았던 몽골세력들이 이탈하는 과정에서, 이들 제제 가문들은 1388년 에 明 朝 에 투항했고 이듬해 朱 元 璋 이 우량카이 3위를 설립함으로서 형성되었다. 그러 나 우량카이 3위의 명칭은 명조가 붙인 칭호일뿐 몽골사료에서는 대흥안령의 남쪽에 있는 萬 戶 라는 의미인 우르 투멘(Ölu : Ölge, Tümën, 山 陽 萬 戶 )으로 불리고 있다. 1) 성립 초기 우량카이 3위는 옛 동방왕가의 주요 활동지였던 북만주 일대에 있었으나 15세기 초부터 100여 년간 남하를 시도해 최종적으로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명을 압박 했다. 명은 主 敵 인 몽골의 동향을 파악하고 몽골의 직접 침입을 막는 완충지대로서 우 량카이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일정부분 이들의 이주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우량 카이는 명과 몽골의 치열한 대치 속에서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명에 入 朝 를 반복하면 서 15세기 만주에서 역량을 강화하고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 阿 勒 坦 汗 傳 68절, 內 蒙 古 人 民 出 版 社, 1990. - 33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우량카이 3위에 대한 연구를 처음 시작한 이는 일본학자 和 田 淸 이다. 그는 東 亞 史 硏 究 ( 蒙 古 篇 ) 라는 방대한 연구서를 통해 우량카이 3위의 성립과 활동상을 분석했지만 초기 연구의 특성상 주로 한적 사료에 나타난 우량카이 3위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 한계 가 있다. 2) 우량카이의 정체성과 관련된 논의는 曹 永 年 3), 周 竟 洪 4), 다르자브 5), 오윤빌리 그 6) 과 바얀후 7) 등의 연구가 있다. 각각 명과 몽골에 우량카이가 예속되었다는 관점을 제시하고는 있으나 우량카이의 실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또한 우량카이 3위 의 남하를 동 서 몽골과의 충돌론적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한 학자로는 남의현 8), 奧 登 9), 李 健 才 10) 등이 있는데, 이들의 연구는 충분한 타당성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본고는 우량카이의 내력을 통해 그들의 실체에 접근하고 명조의 북방정책과 우량카이 3위의 관련 여부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량카이 3위가 15세기 만주사에 끼 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우량카이 3위의 성립 1387년에 나가추가 명에 투항하자 만주 일대를 완전히 상실한 토구스 테무르 정권은 대내외적으로 고립되었다. 대내적으로는 몽골리아에 있던 유목 세력들과 단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토구스 테무르에 동조했던 많은 세력들이 나가추의 투항을 계기로 명에 항복함에 따라 통치 기반이 크게 동요되고 있었다. 몽골 전체가 동요되고 있던 상황에 서 1388년 4월에 藍 玉 휘하의 15만에 이르는 명군이 원의 정치 중심인 쿨룬 부이르 지 역을 급습해서 무방비 상태의 토구스 테무르의 全 軍 을 궤멸시켰다. 1388년 10월에 토구 스 테무르 일행은 몽골리아의 톨강 유역으로 도망쳤으나 오이라트 部 의 지지를 받고 있 던 아릭부케의 후손 이수데르의 습격을 받아 다시 카라코롬 근처로 피신했다. 재차 이 2) 和 田 淸, 東 亞 史 硏 究 ( 蒙 古 篇 ), 東 洋 文 庫, 1959. 3) 曹 永 年, 蒙 古 民 族 通 史, 內 蒙 古 大 學 出 版 社, 2002. 4) 周 竟 洪, 論 明 代 兀 良 哈 三 衛 與 東 西 蒙 古, 女 眞 的 關 係, 內 蒙 古 社 會 科 學 1992-4, 内 蒙 古 社 会 科 学 院 5) 達 力 扎 布, 有 關 明 代 兀 良 哈 三 衛 的 幾 個 問 題, 明 淸 蒙 古 史 論 稿, 民 族 出 版 社, 2003 : 明 代 漠 南 蒙 古 歷 史 硏 究, 內 蒙 古 文 化 出 版 社, 1998. 6) 烏 雲 畢 力 格, 關 于 朶 顔 兀 良 哈 人 的 若 干 問 題, 蒙 古 史 研 究 7, 內 蒙 古 大 學 出 版 社, 2003 : 烏 雲 畢 力 格 白 拉 都 格 其, 蒙 古 史 綱 要, 內 蒙 古 人 民 出 版 社, 2006. 7) 薄 音 湖, 關 于 北 元 汗 系, 宋 遼 金 元 史, 1987-4, 中 國 人 民 大 學 書 報 資 料 中 心, 1984. 8) 남의현, 15세기 북방정세와 명의 변경정책의 재검토, 인문과학연구 20,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1. 9) 奧 登, 蒙 古 兀 良 哈 部 落 的 變 遷, 社 會 科 學 輯 刊 43, 1986 10) 李 健 才, 東 北 史 地 考 略 吉 林 文 史 出 版 社, 1986. - 34 -

우량카이 3위의 활동과 15세기 滿 洲 수데르의 습격을 당한 토구스 테무르와 태자 天 保 奴 가 독살됨으로써 元 은 사실상 소멸 되었다. 11) 쿠빌라이가 아릭부케로 부터 대칸의 자리를 찬탈한지 100여년 뒤에 아릭부 케의 후손이 쿠빌라이계로부터 다시 몽골 제위 계승권을 회복해 오면서 사실상 元 은 막을 내리게 된다. 12) 오이라트 部 의 전폭적인 지지로 1388년에 즉위한 이수데르 카안은 13) 몽골 체제의 회 복을 선언한 뒤에 국호를 예케 몽골(Yeke Mongol) 로 바꾸고 14), 쿠빌라이의 중국 지배 이래 사용되어 왔던 중국식 年 號 와 廟 號 사용을 정지했다. 이제 몽골은 몽 원제국 이전 의 전통적인 유목국가 상태로 회귀했으며, 명과의 여러 차례 교전으로 쇠약해진 동몽골 세력을 대신해 서쪽의 오이라트 몽골이 세력을 신장하고 있었다. 당시 동 서 몽골은 느 슨한 연맹국가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토구스 테무르 카안이 사망한 1388년 이래 1403년까지 이수데르, 엥케(Engke, 恩 克 ), 엘베그(Elbeg, 額 勒 伯 克 ), 군 테무르(Gün Temü r, 坤 帖 木 兒 ), 굴리치(Guliči, 鬼 力 赤 또는 Örüg Temür)에 이르는 5명의 대칸들이 연이어 교체되었다. 이러한 대칸의 잦은 교체 원인은 동 서 몽골의 權 臣 들이 대칸 옹립을 두고 대립하면서 자신들이 옹립한 대칸을 즉위시키는 과정에서 교체와 즉위를 반복했기 때 문이다. 한편, 토구스 테무르 카안 사후에 이수데르의 통치를 거부했던 원의 잔여세력들은 남 하해 명에 투항했다. 원의 丞 相 시레문과 知 院 네케르 등은 口 溫, 全 寧 과 應 昌 일대로 11) 栗 林 均 編, 華 夷 譯 語 ( 甲 種 本 )モンゴル 語 全 單 語 語 尾 索 引, 東 北 アヅア 硏 究 センタ 一 叢 書 第 10 號 ( 東 北 大 學 東 北 アヅア 硏 究 所 センタ 一, 2003), p.102. 知 院 네케르는 아릭부케의 자손 대왕 이수데르 등이 오이라트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우리 카안(토구스 테무르)을 독살했습니다. 大 印 을 가지고 갔으며, 백성들의 집을 부수고 파괴 했습니다 라는 상주문을 주원장에게 보내 이수데르의 찬탈을 알리고, 얼마 뒤에 명에 투항했다. 12) Ч. Далай, Монголын Түүх(1260~1388), УБ., Эрдэм, 1992. p.145. 13) 薄 音 湖, 關 于 北 元 汗 系, 宋 遼 金 元 史, 1987-4, 中 國 人 民 大 學 書 報 資 料 中 心, pp.83-84. 14) 尹 胼 ( 峨 岷 山 人 ) 譯 語 記 錄 匯 篇, 野 克 莽 官 兒. 明 史 권327, 韃 靼 傳 에서는 鬼 力 赤 이라는 자가 위 를 찬탈하여 可 汗 을 칭하고 국호를 버리고 韃 靼 이라고 칭했다 라고 해서 몽골이 韃 靼 이라고 자칭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몽골은 스스로를 Yeke Mongol( 野 克 莽 官 兒 ) 이라 했고, Tatar( 韃 靼 )라고 하지 는 않았다. 韃 靼 이란 칭호는 몽골의 자칭이 아니라 명대인들의 簡 稱 으로 보아야 한다.( 和 田 淸, 1959 : 達 力 扎 布, 北 元 史 硏 究 三 題, 黑 龍 江 民 族 叢 刊 1991-2 : 蒙 古 民 族 通 史 編 寫 組, 蒙 古 民 族 通 史, 內 蒙 古 大 學 出 版 社, 2002) 미야자키 준코( 宮 脇 淳 子 저, 조병학 역, 最 後 의 몽골유목제국, 백산출판사, 2000, p.118)는 명조인들이 몽골을 韃 靼 이라고 부른 것은 元 과 몽골의 후계 관계를 단절시키기 위한 것이 라고 분석했다. 즉, 원의 정통을 계승한 것을 자임한 명조에게 몽골은 부담스러운 존재였기 때문에 그들을 韃 靼 이라고 부르게 되면 문명의 중심을 떠나 야만스러운 옛 유목민 무리로 돌아간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보았다. 이수데르 카안 당시 국호를 예케 몽골 이라 칭하기는 했으나 이후에 경우에 따라 大 元 이라 하기도 했다. 또한 北 元 이란 칭호는 高 麗 史 에만 보이는 칭호로 고려가 변화하는 동아시아 정세를 민감하게 수용해 북상한 원을 북원으로 부른 것으로 해석된다.(윤은숙, 고려의 北 元 칭호 사용과 동아시아 인식 -고려의 양면 외교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연구 15, 2010) - 35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남하했고, 명으로부터 네케르는 全 寧 衛 指 揮 使 에 임명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수데르 정 권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1389년에 이들은 다시 몽골에 귀부했다. 나가추 투항이후 만 주에 남은 최후의 몽골세력은 동방3왕가이다. 동방3왕가의 수장인 옷치긴 왕가의 遼 王 아자스리(Aǰasri, 阿 扎 失 里 )는 원의 소멸과 승상 시레문, 지원 네케르 등의 몽골지배층의 투항 도미노까지 겹치게 되자 위기위식이 크게 심화되었다. 결국 주원장이 보낸 詔 書 15) 를 통해 명의 뜻을 전달 받은 요왕 아자스리는 1388년 9월에 臣 屬 49인과 함께 遼 東 都 指 揮 使 司 를 방문했다. 16) 명으로부터 울루스의 독립적 경영을 확보한 아자스리는 같은 해 11월에 會 寧 王 타빈 테무르 17) 와 함께 明 에 항복했다. 18) 최종적으로 남아 있던 동방3왕가로 대표되는 만주 세력의 항복으로, 요동을 장악한 주원장은 1389년 5월에 泰 寧 朶 顔 福 餘 3 衛 指 揮 使 司 를 설치하고 이를 우량카이 3 衛 ( 兀 良 哈 3 衛 )라고 했다. 19) 泰 寧 朶 顔 福 餘 등의 명칭은 이들의 자칭이 아니라 명조가 이들을 부른 他 稱 이다. 朶 顔 은 스스로를 우량카이( 兀 良 哈, 五 兩 案 )라고 했는데, 우량카이 3위란 명칭은 이들로부 터 파생되었다. 이와 관련해 1389년 투항한 토쿠차르(Toqüchar, 脫 魯 忽 察 兒 )는 우량카 이( 兀 良 罕 ) 林 木 백성들은 칭기스칸의 분봉이래 예케 두얀 운두르(Eke döyan Ündür, 額 客 多 延 溫 都 兒 ) 촐 무렌(Chöl müren, 搠 木 連 ) 등지에서 거주했다. 20) 라고 해서 자신들을 우량카이라고 했음을 밝히고 있다. 泰 寧 은 자신들을 옹니우드(Ongniud, 翁 牛 特, 往 流 )라 고 했는데, 옹(Ong)은 왕을 의미하고 니우드(niud)는 복수형 어미로 옹니우드란 왕의 것들 즉 왕의 백성들 이라는 말이다. 21) 여기서 왕이란 遼 王 아자스리를 지칭하는 것인 데, 본래 이 일대가 칭기스칸의 末 弟 가문인 옷치긴 왕가가 대대로 통치해 왔기 때문에 생긴 명칭으로 현재에도 옹니우드로 불리고 있다. 福 餘 는 스스로를 우지예드(Üǰiyed, 烏 15) 栗 林 均 編, 2003, pp.64-71. 너 아자스리 등은 몽골 카안의 일족으로 하늘의 운명을 알고 있다. 너 아자스리 등은 진심으로 歸 附 해야하고 다른 마음을 먹어서는 안된다. 예전에 몽골과 한인 이 하나가 되어 몽골이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하늘의 뜻이 바뀌어 근래에는 몽골과 한인이 하나 가 됐고 大 明 이 세계의 주인이 됐다. 하늘의 뜻이 바뀐 것은 명백하므로 너는 聖 旨 와 법도를 따라 야 한다. 물과 풀을 따르는 것은 하늘의 오랜 가르침이다. 어진 마음으로 가르침을 따르면 편안해 지고 백성들이 번성할 것이다. 하늘의 법칙에 순응하면 흥하지 않는 것이 없다. 16) 明 太 祖 實 錄 권193, 홍무 21년 9월조. 17) 和 田 淸, 1959, p.120. 會 寧 王 은 명사 에서는 惠 寧 王 이라 했는데, 아자스리는 泰 寧 衛 指 揮 使 가 되고, 회녕왕 타빈 테무르는 그 부장인 泰 寧 衛 指 揮 同 知 가 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는 아자스리 일족으로 짐작된다. 18) 明 太 祖 實 錄 권194, 홍무 21년 11월조. 19) 明 史 권3, 太 祖 本 紀 권3, 洪 武 22년 4월, 5월조. 置 泰 寧, 朶 顏, 福 餘 三 衛 於 兀 良 哈. 20) 華 夷 譯 語, pp.96-97. 21) 武 備 志 권227, 北 虜 譯 語. - 36 -

우량카이 3위의 활동과 15세기 滿 洲 濟 業 特, 我 着 )라고 했는데 22), 우지(Üǰi)는 삼림을 뜻하는 만주어이고 예드(yed)는 복수형 어미로 삼림의 백성들 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명칭은 복여위의 대부분 지역이 여 진인들 거주지였던 것과 관련되어 있다. 아울러 우량카이 3위라는 명칭 역시 한적 사료의 기술이고, 몽골 사료에서는 이들을 산의 남사면을 의미하는 몽골어 우르(Ölu, Ölge)와 一 萬 을 뜻하는 투멘(Tümën)을 결합 해 우르 투멘 으로 불렀다. 23) 阿 勒 坦 汗 傳 에서는 우르 투멘 을 山 陽 萬 戶 라고 음역 하기도 했다. 24) 여기서 산의 남사면은 동방3왕가의 거주지였던 대흥안령 산맥의 남사 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과 대비해, 몽골을 대흥안령의 북사면에 있는 몽골이라는 의 미로 아르 몽골(Aru Mongol)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朱 元 璋 의 우량카이 3위 설치 목적은, 몽골세력의 남하를 막아내며, 향후 몽골과 고려, 여진의 연결을 차단시키는 것이었다. 25) 그러나 명은 수도인 金 陵 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우량카이 3위 지역을 통제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나 실제적으로 상주해 관할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다만 주원장은 大 寧 都 司 를 설치하고, 1391년에 자신의 아들 朱 權 을 寧 王 으로 봉해 鎭 守 하게 했다. 그러나 대령도사가 설치된 대령(현 赤 峰 市 寧 城 縣 )은 우량카이 3위의 중심지가 있던 태령위(현 吉 林 省 白 城 市, 興 安 盟 齊 齊 哈 爾 일대)까지는 군사력이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주원장이 동방왕가에게 항복을 종 용하면서 그 두목에게 무리를 통령케 해 畜 牧 을 안정시킨다 26) 라고 했기에 우량카이 3위는 명의 통제권 밖에서 독자적으로 지배지역을 통치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명목 상으로 초기에는 大 寧 都 司 에 속해 있다가 奴 兒 干 都 司 의 관할로 들어갔으나 임시군사기 구의 성격을 가진 노아간도사가 우량카이 3위를 통제할 수는 없었다. 27) 따라서 우량카 이 3위는 명조의 편제로 보면 衛 에 해당하지만 명조 내지의 다른 衛 들과는 성격이 다른 시종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명은 동방왕가의 수장격인 옷치긴 왕가의 요왕 아자스리를 泰 寧 衛 指 揮 使 에, 타빈 테 무르를 指 揮 同 知, 카사르난다를 福 餘 衛 指 揮 同 知 임명하고, 카치운 왕가의 토쿠차르를 朶 顔 衛 指 揮 同 知 로 삼아 각 부를 管 領 하게 했다. 28) 또한 영락제는 정난의 변 때 우량카 22) 武 備 志 권227, 北 虜 譯 語. 23) Саган сэцэн, Эрдэнийн товч, сонгомол эх бэлтгэж, хөрвүүлэг, тайлбар зүүлт хийсэн М. Баярсайх ан, VIII, УБ, 2006. 24) 阿 勒 坦 汗 傳 68절, 內 蒙 古 人 民 出 版 社, 1990. 25) 明 世 宗 實 錄 권146, 가정12년 정월조. 26) 明 太 祖 實 錄 권196, 洪 武 22년 5월조. 27) 남의현, 明 代 遼 東 支 配 政 策 硏 究, 강원대학교 출판부, 2008, p.158. 28) 明 太 祖 實 錄 권196, 홍무 22년 5월조. - 37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이 3위의 도움을 받아 寧 王 을 생포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대량의 관직을 하사했다. 140 3년에 두얀위의 토구차르를 左 軍 都 督 府 都 督 僉 事, 카롤타이를 都 指 揮 同 知 로 삼았고, 복 여위의 안추(Anchü, 安 出 )와 토부신을 함께 都 指 揮 僉 事 에 임명했으며, 태령위의 카라반 코(Qarabanko, 忽 剌 班 胡 )를 都 指 揮 僉 事 로 삼았다. 또한 나머지 357명에게 각각 指 揮, 千 百 戶 등의 대량의 관직을 하사했다. 29) 그런데 3위의 수령 임명이나 관직의 계승은 3위가 마음대로 결정하고 명은 추후 승인 하는 형식을 취했기에 명이 간섭할 수 있는 여지가 매우 적었다. 30) 대체로 그 직위는 자손에게 세습되었는데, 예를 들면 태령위의 아자스리는 자신의 아들 토구치(Toqüchi, 脱 火 赤 )에게 계승했고, 이후 주치(Jüchi, 拙 赤 )로 이어졌으며, 두얀위의 都 督 카단(Qadan, 哈 丹 )은 자신의 장자 코르 볼로르에게 계승하였다. 이처럼 우량카이 3위가 독자적으로 수령을 임명하거나 명으로부터 받은 직위를 자손으로 계승하고 있음은 다른 위와는 기 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독립성을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31) 게다가 명으로부터 받은 관직 은 명에 입조해 상사와 호시에 필요한 용도로만 사용되었고, 자신들의 통치지역에서는 여전히 예전 원에서 사용하던 王, 太 尉, 平 章 과 知 院 등의 지위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 다. 32) 따라서 명조가 우량카이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매우 제한적이었고, 우량카 이는 옛 원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만주 일대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Ⅲ. 우량카이 3 衛 의 남하와 15세기 만주 주원장이 요왕 아자스리를 泰 寧 衛 指 揮 使 에 카치운 왕가의 토쿠차르를 朶 顔 衛 指 揮 同 知 로 임명한 것에서 보면 대대로 이 일대에서 수장의 지위를 유지해 온 옷치긴 왕가의 실제적 지위를 인정해 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우량카이 3위의 가장 중심이 되는 세력은 泰 寧 衛 로 이들의 위치를 명사 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高 皇 帝 가 泰 寧 朶 顔 福 餘 등의 3 衛 를 설치했다. 우량카이 땅으로 흑룡강 남쪽, 漁 陽 塞 북 쪽에 있다. 漢 代 의 선비, 唐 代 의 토욕혼과 宋 代 의 거란 등이 모두 그 땅이었다. 원대 大 寧 路 의 북쪽 경계가 된다. 洪 武 22년 泰 寧 朶 顔 福 餘 3 衛 指 揮 使 司 를 설치하고 그 두목에게 각자 무리를 통령케 해 29) 명사 권328, 열전 216, 외국 9, 泰 寧 朶 顔 福 餘. 30) 達 力 扎 布, 有 關 明 代 兀 良 哈 三 衛 的 幾 個 問 題, 明 淸 蒙 古 史 論 稿, 民 族 出 版 社, 2003, pp.203-204. 31) 節 選, 盧 龍 塞 略, 明 代 蒙 古 漢 籍 史 料 匯 編, 內 蒙 古 大 學 出 版 社, 2006, pp.375-380. 32) 明 憲 宗 實 錄 권4. 成 化 元 年 12월조. - 38 -

우량카이 3위의 활동과 15세기 滿 洲 서로 성원케 했다. 大 寧 에서부터 앞으로 나가 喜 峰 口 에 이르고, 宣 府 가까이 이르기까지를 朶 顔 이라 하고, 錦 義 부터 廣 寧 을 거쳐 요하에 이르기까지를 泰 寧 이라 하며, 黃 泥 窪 로부터 심양 철령을 넘어 개원에 이르기까지를 福 餘 라고 했다. 33) 옷치긴 왕가의 나얀 반란이 실패로 끝난 후, 왕가의 실권을 장악한 톡타가 중심 오르 두를 동쪽으로 옮겨 泰 寧 路 (현 吉 林 省 洮 南 縣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부터 泰 寧 일대가 옷치긴 왕가의 통치중심이 되었다. 34) 이 시기 요양성의 泰 州 를 泰 寧 府 로 고쳤으 며 35) 1317년에는 泰 寧 府 를 泰 寧 路 로 승격시키고 泰 寧 縣 을 설치해 왕가의 통치를 공고 히 했다. 36) 우량카이 3위의 태령위 역시 옷치긴 왕가의 통치 중심인 태령을 중심으로 형 성되어 있다. 성립 초기 우량카이 3위는 대체로 흥안령의 동쪽, 송화강의 서쪽, 쿨룬 湖 의 남쪽과 시라무렌의 북쪽 일대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영락 원년(1403) 까지 필요에 따라 남하하기는 했으나 명조와는 大 寧 (현 내몽골 조오드 盟 寧 城 縣 일대)을 경계로 하 고 있었다. 북만주 일대에서 거주하던 우량카이 3위가 점차 요동일대로 남하하게 된 것은 靖 難 의 변 이후이다. 이 때 우량카이 3위의 군사력은 燕 王 의 군대가 大 寧 을 공격하고 寧 王 을 생포함은 물론이고 이후 정변을 일으키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영락제가 行 都 司 를 하북성의 保 定 으로 옮기면서 大 寧 일대를 모두 우량카이 3위에게 주었다. 37) 이 때부터 남하를 시작해 1428년 9월에 이르면 이미 大 寧 으로 들어가 會 州 (현 하북성 平 泉 )를 경유해 寬 河 (현 하북성 희봉구)까지 도달했다. 당시 우량카이는 이 미 옛 세력을 회복하고 명의 변경 밖에서 유목하면서 영락제가 약속한 大 寧 일대를 자 신들에게 줄 것을 요구할 정도로 역량을 크게 강화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명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암묵적으로 대령 일대에 대한 우량카이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 었다. 38) 이후에 계속 남하를 시도한 우량카이 3위는 1537년에 이르면 두얀은 山 海 關 의 서쪽, 古 北 口 의 동쪽, 薊 州 밖으로 이주했다. 태령은 廣 寧 일대에 있었고, 복여는 開 原 밖에서 유목하고 있었다. 39) 우량카이 3위가 대령 경내로 들어오게 되면서 우량카이는 몽골리아로 이어지는 교통로뿐만 아니라 요동과 요서로 연결되는 교통로 까지 장악하 면서 만주 일대의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명 조정은 우량카이가 33) 명사 권328, 열전 216, 외국 9. 34) 원사 권26, 仁 宗 本 紀,인종4년 8월조. 35) 원사 권25, 인종본기, 인종4년 8월조. 改 遼 陽 省 泰 州 爲 泰 寧 府. 36) 원사 권26, 인종본기, 인종6년 2월조 癸 亥, 陞 泰 寧 府 為 泰 寧 路, 仍 置 泰 寧 縣. 37) 명사 권328, 열전 216, 외국 9. 38) 李 健 才, 1986, pp.136-139. 39) 명세종실록 권370, 嘉 靖 30년 2월조. - 39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京 師 의 背 後 가 되었다 40) 라고 하며 경계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우량카이 3위가 남하해 요서와 요동 일대를 장악할 수 있었던 배경을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우선 우량카이의 남하는 명조 북방정책의 변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 지고 있다고 본다. 영락제의 15년간 5차례에 걸친 몽골 親 征 이 과도한 군사 동원과 재 정 지출에 비해 그 효과가 미비했던 점은 향후 명의 북방 진출이 수세적인 방어로 변화 하게 된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익숙한 지형지물을 이용해 공격과 도주를 반복하는 몽 골의 유목 전법에 익숙하지 못했던 영락제의 군대는 苦 戰 을 면치 못하며 몽골리아를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의 목적했던 權 臣 아룩타이의 토벌은 달성하기 힘든 목표가 되었고 오히려 출정 때마다 미곡 2,30만석, 보급물자 수송을 위한 30만대의 수레가 들 어갔으므로 재정 압박해 심해져 갔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병사들은 지칭대로 지쳐 있어 서 도망병이 속출했다. 더욱이 퇴각 도중에 楡 木 川 (내몽골 돌론 縣 )에서 영락제가 사망 함으로서 긴 원정이 종결되었던 점은 향후 명의 북방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국 가의 총력을 기울여 감행한 대원정사업은 그 이름에 비해 초라한 결과만을 얻었을 뿐 이었다. 영락제의 원정 후 명조의 북방정책은 적이 오면 토벌하지만 가면 추격하지 않는 다 41) 는 피동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즉 명이 먼저 선제공격하는 일은 더 이상 발 생하지 않았고 단지 몽골세력이 침범했을 경우 방어에 주력하고 이들이 약탈 후 귀환 하면 추격하지 않음으로서 향후 계속되는 남하를 방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선덕연간 (1426-1435)으로부터 홍치연간(1488-1505)에 이르기 까지 명의 북방정책이 실제적인 공 격이 아니라 城 堡 의 수축과 방어망 형성에 집중되었다. 42) 그런데 이러한 성보의 수축이 몽골을 방어하기 위해 나름의 견고함을 갖추고 있기는 했으나 요동 방어선인 遼 東 邊 墻 의 경우 나무와 돌을 섞어서 벽을 만드는 정도에 불과했다. 비교적 견고한 성보가 예상 침입로에 설치되기는 했으나 이것 역시 벽돌과 함께 돌을 쌓아 놓는 정도의 허술한 상 황이었다. 몽골 방어에 주력했던 명조로서는 요동변장에 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부족했 다. 43) 따라서 명의 요동변장은 우량카이의 남하를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고 선덕 말년 에 이르면 우량카이는 동으로 요동에서 서로는 獨 石 口 까지 남하해 왔다. 반면 명이 수세적인 방어를 위한 장성을 축조했던 이 시기 우량카이 3위는 공격적으 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1429년 3월에는 永 平 과 山 海 사이 지역을 침범해 약탈했고, 1432 40) 讀 史 方 輿 紀 要 권18, 北 直 九. 41) 明 宣 宗 實 錄 선덕 10년 3월조. 42) 남의현, 2011, p.166. 43) 남의현, 明 代 遼 東 防 禦 線 의 形 成 背 景 에 관하여, 東 洋 史 學 硏 究 100, 동양사학회, 2007, pp.128-130. - 40 -

우량카이 3위의 활동과 15세기 滿 洲 년에 3위의 指 揮 千 戶 의 가속들이 虹 螺 山 (현 赤 峰 市 翁 牛 特 旗 )에 와서 유목하고 수렵하 기도 했다. 정통연간에는 요동 대동 延 安 지역을 침범해 왔는데, 초기에 두얀위는 대동, 연안, 수덕 등지로 들어갔고 1437년 11월에 섬서 북쪽 유림 등지를 침탈했고 1438년에 복여위 등이 섬서 북쪽으로부터 황하를 건너 들어가 위력을 떨쳤다. 1441년에 복여위가 宣 府 (현 하북성 宣 化 )에 이르러 人 馬 를 포획했고 우량카이 3위가 산해관 서북쪽, 영평, 광령 등지에 이르렀다. 다시 이들은 1442년에는 건주 여진 세력들과 연합해 廣 寧 前 屯 을 공격하였다. 1447년과 1449년에는 오이라트의 에선과 함께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명 으로 쳐들어 왔고, 1452년에는 우량카이가 무리들이 변경 근처에서 거주하고 있다. 146 2년에는 동몽골의 볼로르와 함께 명의 변경을 약탈하였다. 1465년에는 다르칸 등이 볼 로르와 함께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요하 일대를 침범했고 다시 해서여진과 연합해 그 해에 여러 차례 명의 북부 변경을 침범했다. 1473년과 1474년에는 개원 일대를 침범 해 들어왔고 1499년에는 빈번하게 고북 개원 지역을 공격하고 광녕과 영원 일대를 침구 하는 등 계속해서 남하를 계속했다. 이에 대한 명조의 정책은 3위의 수령을 불러 연회 를 베풀고 그들의 경제적 요구를 수용하는 정도의 수동적인 자세에 머물고 있다. 44) 이 러한 명의 수세적인 태도는 우량카이 3위의 남하를 가속화시켰고 결국 16세기에 이르 면 그들이 山 海 關 의 서쪽으로부터 古 北 口 의 동쪽, 薊 州 廣 寧 일대 등지를 차지하게 되 었다. 우량카이는 명조의 요동변장 부근에서 유목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45) 우량카이 3위의 남하의 두 번째 이유는 경제적 필요에서다. 영락제 사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우량카이 3위의 침범은 명조에게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계속된 이들의 남하로 京 師 의 背 後 가 되었다 46) 라고 할 정도로 명조가 이들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이들에 대한 명조의 정책은 對 몽골정책과 맞물러 경제적 회유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明 朝 280여 년의 통치 기간 동안 明 에게 가장 위협적인 세력을 들자면 단연 몽골이라고 할 수 있다. 명의 변경은 始 終 몽골의 크고 작은 공격과 약탈들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고, 뿐만 아니 라 초원과 만주에서 비교적 가까운 수도 北 京 은 수차례 몽골에 의해 포위되는 어려움 을 겪기도 하였다. 따라서 명은 비교적 자신들로부터 가까이 존재하는 우량카이 3위를 활용해 몽골의 정세 변동과 관련된 정보를 확보하기 원했다. 우량카이 3위가 耳 目 이 되 어 전달해주는 정보들의 그 정확성 여부와 관계없이 명에게는 몽골의 동정을 파악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되었다. 예를 들면 정통연간에 태령위 수장 주치의 행동을 문제 삼 아 명이 호시를 폐쇄했다가 오이라트 에센의 군사 동향을 파악하는데 실패했다. 이에 44) 명사 권328, 열전 216, 외국 9, 泰 寧 朶 顔 福 餘. 45) 明 憲 宗 實 錄 성화5년 9월조. 46) 讀 史 方 輿 紀 要 권18, 北 直 九. - 41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우량카이로부터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1478년에 호시를 1개 더 늘려 3개를 개시하고 우량카이의 통상 요구를 수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실적 필요로 명조는 우량카이 3 위에게 각종 경제적 혜택을 제공했다. 명이 우량카이 3위에게 준 가장 큰 경제적 혜택 은 통공무역의 형태인 朝 貢 과 互 市 였다. 3위는 매년 2차례 명에 조공했고, 매회 300명 을 북경에 보내기로 합의하였다. 47) 이것은 주변의 海 西 女 眞 과 建 州 女 眞 이 매년 一 貢 한 것과 비교해 보면 우량카이 3위가 상대적으로 높은 혜택을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준 다. 48) 그럼에도 3위는 여러 가지 이유를 만들어 빈번히 명조에 입조해 賞 賜 와 回 賜 를 획득하였다. 경제적 부담이 가중된 명이 입공시기를 엄격히 규제하려 했지만 태녕위 도 독 울란 테무르의 경우는 1년 6개월 동안 총 7차례 입공하기도 하였다. 또한 1507년에 는 한 번에 600명이 수도 북경에 들어오기도 했다. 49) 명조가 우량카이의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여지없이 이들은 침범과 약탈 을 통해 자신들의 필요를 충당하려 했다. 대체적인 우량카이 3위의 침범이 약탈로 귀결 됨도 이와 유관하다. 명조의 대몽골정책의 결과 상대적으로 많은 혜택을 향유한 우량카 이 3위는 자신들의 입조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또는 동 서 몽골이 명조를 공격할 경우 嚮 導 로서 명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명에 대한 공격 후에는 명조에게 입조를 요 청하면 명은 우량카이를 회유하기 위해 요구를 수용하였다. 약탈 후에 우량카이 3위가 사죄를 명목으로 명조에 입조하면 명은 그들을 예전처럼 안무하고 효유한 뒤에 각종 賞 賜 와 回 賜 를 시행하였다. 50) 이러한 명조정의 회유방법은 우량카이가 계속해서 침범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심지어 우량카이 3위는 오이라트의 에센과 명이 전쟁 을 하는 중에도 오이라트에 가담해 전쟁에 동참하고 있으면서도 명에 내조해 조공하기 도 했다. 즉 명목만 있으면 무조건 입조해 상사와 회사를 획득하려 했기 때문에 우량카 이 3위의 남하는 경제적 필요를 충당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우량카이 3위의 성립과 남하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15세기 만주의 실체에 접근해 보았다. 이상의 논의에서 도출된 결론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47) 魏 煥, 九 邊 考, 明 代 蒙 古 漢 籍 史 料 匯 編, 內 蒙 古 大 學 出 版 社, 2006, p.255. 48) 大 明 會 典 권107, 禮 部 65. 49) 明 武 宗 實 錄 권33, 正 德 2년 12월조. 50) 명사 권328, 열전 216, 외국 9, 泰 寧 朶 顔 福 餘. - 42 -

우량카이 3위의 활동과 15세기 滿 洲 첫째, 나가추 투항이래 만주에서 고립되었던 옷치긴 왕가로 대표된 동방왕가들은 몽 골리아에서 오이라트의 지지를 받아 이수데르가 대칸에 즉위하자, 명으로부터 독립적 인 울루스 경영을 보장받고자 명에 투항했다. 朱 元 璋 은 이들 지역에 1389년 5월에 우량 카이 3 衛 를 설치했지만, 우량카이 3위라는 명칭은 한적 사료에만 한정된 것이고, 몽골 에서는 이들을 우르 투멘( 山 陽 萬 戶 ) 이라고 했다. 우르는 동방3왕가가 칭기스칸으로부 터 분봉 받은 이래 분봉지를 확대해 거주했던 대흥안령 산맥의 남사면을 가리키는 말 로 대흥안령 남쪽의 만호 집단이라는 의미이다. 둘째, 영락제의 원정이 별다른 성과없이 종결된 후 명조의 북방정책은 城 堡 의 수축이 라는 수세적인 방어로 변경되었다. 또한 침범한 세력이 약탈 후 돌아가면 별다른 조치 를 취하지 않는 명조의 피동적인 태도는 우량카이의 남하를 방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들 세력은 1428년을 전후로 본격적인 남하를 시작해 결국 山 海 關 의 서쪽으로부터 古 北 口 의 동쪽, 薊 州 廣 寧 등지를 차지하며 만주 일대에서 유력한 세력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셋째 명조의 對 몽골정책은 우량카이를 이용해 몽골의 정보를 파악하고 그들로 완충 지대로 삼아 몽골의 직접적인 침입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명은 우량카이에게 상당한 賞 賜 와 回 賜 를 주었지만 날로 이들의 경제적 요구가 가중되었다. 명이 갖가지 명목으로 입조하려는 우량카이를 제한하거나 호시를 폐쇄하면 그들은 빈 번히 약탈과 남하를 시도했다. 약탈 후 사죄를 명목으로 명에 입조하면 명은 현실적 필 요에서 예전과 같은 혜택을 주었고, 이런 일이 반복되었던 점이 우량카이의 남하를 조 장한 측면이 있다. - 43 -

遼 陽 東 寧 衛 에 대한 재고찰 南 義 鉉 (강원대) Ⅰ. 서론 Ⅱ. 건국초기 明 의 인구확보와 東 寧 衛 설치 Ⅲ. 東 寧 衛 의 인구구성과 생활 Ⅳ. 동녕위를 통해 본 유동성과 불안정성 Ⅴ. 결론 Ⅰ. 서론 명나라는 초기 요동으로 진출하면서 요동도사를 설치하였다. 요동도사는 넓은 요동 지역 중 동으로는 연산관, 서로는 산해관, 남으로는 여순구, 북으로는 개원을 그 기본적 인 관할지역으로 삼으며 25개의 衛 를 통해 이 지역을 방어하며 대외팽창을 모색하였다. 25위가 모두 형성되기 이전 본고에서 주목할 만한 위는 東 寧 衛, 三 萬 衛, 鐵 嶺 衛 으로 이들 위는 3 衛 는 모두 초설지에 장기간 유치되지 못하고 요동도사 치소인 요양과 요동 북부를 방어하기 위해 요동도사 내지로 이전되었다. 3위가 초설지에 설치되지 못하고 내지로 옮겨진 원인과 과정 그리고 그 의미를 탐구해 보는 것은 명의 대외팽창력의 한 계, 여진지역의 성격 등 명왕조의 요동인식과 한계 등 명대 요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 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 중 특히 東 寧 衛 는 압록강과 길림 지역의 일부, 그리고 두만강 등을 명의 영향력 하에 두려고 설치하였지만 결국 遼 東 都 司 의 중심인 遼 陽 으로 옮겨와 흡수 통합되었다. 三 萬 衛 는 두만강 유역의 斡 朵 里 지역에 처음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곧 식량부족과 교통 의 불편 등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에 직면해 遼 東 都 司 북부의 重 鎭 인 開 原 으로 옮겨졌 다. 두만강과 여진지역에 설치하려한 삼만위의 설치시도 지역은 두만강 유역으로 이후 설치되지 못하고 요동도사로 내천한 것은 두만강 유역과 여진지역에 대한 관할권 포기 를 의미한다. 결국 명초 삼만위의 설치 시도와 좌절은 명 후기까지 여진지역이 명의 강 역이 될 수 없었다는 명확한 경계인식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鐵 嶺 衛 는 최근 철령위를 처음 설치하려했던 위치가 압록강 중류인 輯 安 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됨으로써 鐵 嶺 衛 는 두만강 유역에 설치하려한 三 萬 衛 와 더불어 압록강 - 45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유역을 명의 판도로 삼고 이 강을 명과 조선의 경계로, 그리고 압록강 유역의 여진을 경계선으로 삼으려는 시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이상 3위의 설치를 보면 그 공통점으로 초기에는 모두 요동도사의 외곽지역에 설치 되어 요동도사가 팽창하고, 외부의 여진이나 조선인들을 흡수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군사역량의 부족, 교통의 불편, 식량의 부족 등의 원인으로 요동도사 내지로 이전할 수 밖에 없었다. 명나라가 변경 위소에 해당하는 3위 설치 시 도와 좌절은 길림, 흑룡강, 압록강, 두만강 등을 명이 여진지역을 관할할 능력을 상실했 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의 연구성과들은 명의 요동도사 체제가 안정된 이후 조선과 명나라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여진지역은 모두 명의 지배를 받는 강역이 된 것으로 주장하고 있으 나 3개위의 설치와 이전의 과정으로 보면 중국의 주장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학계에서는 원말 명초 鐵 嶺 衛 와 관련된 단편적인 논문이 몇 편 나왔을 뿐 鐵 嶺 衛 이외에 압록강과 두만강을 연결시켜 조선을 견제하고 여진을 흡수하려고 시도 한 압록강 중류의 東 寧 衛, 두만강 유역의 三 萬 衛 등 3 衛 를 경계의 인식과 시각 에서 종합적이고 유기적으로 고찰한 논문은 찾아볼 수 없다. 본 논문은 3개의 위 중 명대 東 寧 衛 를 살펴보고자 한 논문이다. 명대 東 寧 衛 의 문제 는 크게 보면 고려 중기 북계에 설치한 동녕부를 1290년에 철폐하면서 압록강 북쪽으 로 옮겨 東 寧 路 로 재편하였는가. 東 寧 路 의 넓은 지역이 왜 東 寧 衛 로 축소되었는가, 나 아가 동녕은 지금의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가 라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요양 을 방어하는 東 寧 衛 로 축소되면서 東 寧 衛 의 중요한 역할은 무엇이었는가에 그 초점을 맞출 수 있다. 東 寧 衛 가 이처럼 다양한 주제를 풀어나가는데 매우 중요한 위치임에도 필자의 연구 력 부족으로 원대 東 寧 府 와 東 寧 路, 그리고 명대 東 寧 衛 를 연관시키지는 못하였다. 이 때문에 본고에서는 명대 東 寧 衛 에 대한 역할과 성격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는데 연구의 초점을 두고자 하였다. Ⅱ. 명초 명의 인구확보와 東 寧 衛 설치 요동은 명대 이전에 요,금, 원 등 북방민족들이 차지한 지역이자 다수의 고려인들이 살던 지역이기도 하였다. 인구 중에 華 人 十 七, 高 麗 土 着 歸 附 女 直 野 人 十 三 1) 이라고 - 46 -

遼 陽 東 寧 衛 에 대한 재고찰 할 정도로 많은 이민족이 모여 살던 지역이었다. 명초 요동은 이처럼 이민족이 사는 지 역이었기 때문에 명의 입장에서 보면 통치가 용이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요동은 산해관으로 통하는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명으로서 는 반드시 차지하고 방어해야하는 지역이었다. 요동을 차지하기 위해 명나라는 초기부터 몽골족을 축출하기 시작하였다. 명 태조는 홍무 9년(1376) 산동을 출발해 요동해 상륙하면서 금주와 개주 일대에 몽골군을 축출하면 서 점차 요동반도 북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명의 장수 周 鶚 은 군대를 거느리고 동 녕으로 가서 몽골군을 축출하고 1900 여인을 노획하거나 참살하였다. 그리고 1300여의 우마를 노획하였다. 그리고 지휘였던 東 寧 按 撫 使 등을 공략하여 두목을 사로잡고 1090여 명을 역시 포로로 잡았다. 葉 旺 역시 春 臺 등처를 초무하여 다수의 인구와 우마를 노획 하였다. 그리고 압록강과 황성 등을 다시 공략하여 인구와 우마를 노획하였다. 명의 군대 는 동녕 이외에 나단부, 가주 등으로 진출해 안무사 고활출, 부사 유현을 사로잡고, 두목 과 인민 등 4550명, 우마 270마리, 금은패, 동인, 호문 등을 노획하였다. 2) 요동에서 몽골족을 축출하는 과정은 명의 위소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명 나라는 원대에 설치한 행성제도를 점차 혁파하고 요동에서 路, 府, 州, 縣 을 폐지하면 서 衛 所 制 度 로 대체해 나갔다. 위소제도를 통해 요동의 인구를 군호로 편입하고 위소는 요동도사가 관할하였다. 또한 요동은 산해관 관문을 지키는 변방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鎭 守 와 總 兵 官, 都 御 使 巡 撫, 提 督 등 필요시 황제의 특명으로 관리를 파견하는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3) 이처럼 요동도사체제가 완료되면서 요동도사의 인구는 점차 증가 하였다. 4)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요동도사 25위에는 한족 이외의 조선인들이 상당수 살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명나라가 위소정책으로 위소를 편제해나가는 과정에서 東 寧 衛 에 소속시켰다. 명후기까지도 東 寧 衛 는 조선인들로 이들은 조선어를 쓰며 공동체를 형성 해 나갔다. 5) 명나라는 혼강 유역으로도 진출해 원래 원의 요양행성에 예속되어있던 인구들을 흡 수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압록강과 혼강 유역에 분포하던 인구들은 대부분 고려인과 여진인들이었다. 1) 遼 東 志 卷 1 地 理 志 風 俗. 2) 遼 東 志 卷 5 官 師 志 名 宦 周 鶚. 3) 遼 東 志 卷 2. 建 置 志 4) 遼 東 志 卷 3, 兵 食 志 武 備. 5) 趙 翊, 皇 華 日 記, 萬 曆 27 年 9 月 17 日. - 47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홍무 13년(1380) 명나라는 5개 천호소를 설치하고 이에 해당하는 동녕, 여직, 남경, 해양, 초하 등의 인구를 흡수하고자 하였다. 6) 東 寧 은 원래 원조시기 고려의 西 京 에 설치한 路 의 명칭, 東 寧 路 이다. 원말 東 寧 路 가 존치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며 세조 지원 27년(1290)에 東 寧 府 가 혁파된 이후 두만강 상류의 고려와 여진인들이 사는 지역에 다시 東 寧 府 를 설치하였다. 5개의 천호소에 해 당하는 것 중의 하나인 남경은 지금의 길림성 연길일대로 추정되고 있다. 몽고칸국이 동하국을 멸망시킨 이후 남경은 길림일대에 설치된 개원로를 통해 여진인을 관할하는 역할을 하였다. 초하는 봉황성 동북쪽의 초하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해양은 조선 함경 북도 길주로 추정하고 있다. 7) 이 곳 역시 고려인과 여진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이로 써 5개 천호소의 관할 하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고려인과 여진인임을 알 수 있다. 東 寧 衛 는 요동도사와 외곽에 있던 5개의 천호소를 내부로 옮겨 요동도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재조직되었다. 5천호소 건립 후 동녕과 초하 천호소의 고려인과 여진인들은 홍무 15년(1382) 몽골 合 羅 城 萬 戶 府 의 군사와 압록강 유역의 유민 3,686명을 초유하여 요양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8) 이것은 홍무연간 요양 등지로 귀부한 고려 여진인들을 요 양으로 이주시키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홍무 26년(1393) 고려왕조는 이미 조선 왕조로 교체되었고 遼 東 志 요동지역의 고려인은 조선왕조의 건립으로 고려인 혹은 조선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인들이 요양으로 옮겨지면서 홍무 19년(1386) 東 寧 衛 가 설치되었다. 치소는 지 금의 요양시에 설치되었다. 요동도사로 내지로 東 寧 衛 가 설치되면서 설치된 기존의 5 천호소 곧 해양, 초하, 남경, 여직, 동녕은 좌군도독 耿 忠 之 의 건의에 의해 東 寧 衛 로 통 합되었고 東 寧 衛 를 비롯한 좌, 우, 중, 전, 후의 5개의 천호소로 개편되면서 요양을 방 어하는 중추가 되었다. 9) 東 寧 衛 가 관할하던 5개의 천호소는 定 遼 前 衛 의 지휘 아래에서 중천호소를 제외한 4개의 천호소는 조선인과 여진인으로 구성되었다. 중천호소는 漢 人 군호에 의해 지휘되었다. 영락 7년(1409) 명조는 이민족 집단인 自 在 州 역시 요양으로 이전시켰다. 즉 명초기 는 요동도사의 치소인 요양의 인구가 부족하여 東 寧 衛 나 海 州 衛, 瀋 陽 衛 등에서 귀부한 여진인들을 받아들이는 등 인구의 부족을 채웠나갔는데, 東 寧 衛 의 경우는 조선인과 여 진인, 일부 한인들로 구성하여 위를 운영해 나갔던 것이다. 6) 遼 東 志 權 1 地 理 志 沿 革 東 寧 衛. 7) 蔣 秀 松, 東 北 民 族 史 硏 究 中 州 古 籍 出 版 社, 1994, p.199. 8) 明 實 錄 洪 武 15 年 4 月 辛 丑. 9) 明 實 錄 洪 武 19 年 7 月 戊 午. - 48 -

遼 陽 東 寧 衛 에 대한 재고찰 Ⅲ. 東 寧 衛 의 인구구성과 생활 遼 東 志 를 살펴보면 東 寧 衛 는 호구가 15,634로 나타나고 있다. 만약 매호를 5명으 로 계산한다면 대략 78000여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들은 주로 조선인, 여진인, 한인 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것은 명 후기까지 지속되면서 명과 조선의 관계가 더욱 필요하였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가장 많은 인적구성을 했고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朝 鮮 王 朝 實 錄 에는 東 寧 衛 소속 고려인들이 홍무연간 3만 여명, 영락연간 만산군인이 4만여 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숫자가 비록 과장되었다고 하더라도 명조 전기에 東 寧 衛 를 구성하고 있는 조선인의 숫자가 최 소 3만에 육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 만산군인은 요동정세가 불안하거나 정난의 변 과 같은 전쟁을 피해 상당수의 조선으로 넘어왔는데, 만산군인이 조선으로 넘어올 경우 명조의 입장에서 보면 요동의 인구와 군사력이 약화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이 때문에 명나라는 고려에 요동천호를 보내 조선으로 도망한 만산군인들을 모두 요동 으로 돌려보내라는 칙서를 보낼 정도였다. 11) 실제로 영락연간 조선으로부터 다시 요동으로 돌아온 東 寧 衛 인구가 1만 여명에 이 르기도 하였다. 명초 요동은 명과 몽골이 여전히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요동사 람들이 고려로 피난갈 수밖에 없었다. 영락제는 정권초기 이러한 만산군인을 적극적으 로 회유하기 위해 지금은 천하가 태평하여졌고, 내가 태조 황제의 법도에 의거하여 너희들을 편안하게 기 르니, 모두 돌아와서 東 寧 衛 안에 거주하여, 벼슬하던 사람은 벼슬하고, 군인노릇 하던 사 람은 군인노릇 하고, 백성은 백성노릇 하여, 사냥하고 농사지어 생업에 종사하되 편할 대 로 하고, 두려워하고 놀래고 의심하지 말라. 만일 끝내 고집하고 흩어져 도망하여 돌아오 지 않으면, 오랜 뒤에 뉘우쳐도 때는 늦을 것이다. 그러므로 칙유( 勅 諭 )한다. 고 하며 東 寧 衛 에서 도망한 인구를 다시 확보하기 위해 칙서를 보내기도 했던 것이 다. 12) 이러한 명의 요구로 朝 鮮 王 朝 實 錄 에는 토군( 土 軍 ) 1만 7백 55명이 모두 동녕 등위( 東 寧 等 衛 )로 돌아와서 생업( 生 業 )을 회복하 여 둔종( 屯 種 )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 아직 돌아오지 아니하고 남아 있는 자가 전자수( 全 者 遂 ) 등 4천 9백 40명이온데, 본국( 本 國 )의 풍해( 豊 海 ) 등 도( 道 )에 있습니다 10) 陣 尙 勝, 登 州 港 與 中 韓 交 流, 國 際 學 術 討 論 會 論 文 集, 山 東 大 學 出 版 社, 2005, pp.397~405. 11) 朝 鮮 王 朝 實 錄 卷 5, 太 宗 3 年 1 月 辛 卯. 12) 朝 鮮 王 朝 實 錄 卷 5, 太 宗 3 年 1 月 辛 卯. - 49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라고 기록할 정도로 상당수의 만산군민들이 다시 요동으로 돌아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3) 실제로 실록을 보면 東 寧 衛 소속의 조선인이 조선으로 넘어와 연왕( 燕 王 )이 곧 돌아 와서 군사를 일으켜 황제 곁의 악한 사람을 모조리 추방하겠다고 하는 정난의 변과 관 련된 중요한 소식을 전해주는 등 東 寧 衛 는 명과 조선 사이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정보와 외교창구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4) 가정 7년(1528)에는 東 寧 衛 조선인 崔 林 등이 그 가족을 거느리고 탕참 부근의 臨 江 에, 그리고 그의 손자와 東 寧 衛 천호 최당 등 50여명은 탕참에, 동족인 최해 등은 40여 인은 신도 등으로 들어와 살았다. 이러한 것은 당시 명으로 들어가는 책문이 봉황성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책문과 압록강 사이 즉 조선과 명의 국경완충지대와 도서 등에도 많은 東 寧 衛 소속이 여진인들이 넘어와 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15) 또한 압록강 하류의 크고 작은 도서에도 東 寧 衛 의 사람들과 조선 사람들이 혼거하고 있었다. 16) 홍치 11년(1 498) 海 浪 島 ( 海 洋 島, 지금의 요령성 庄 河 縣 南 海 洋 島 )에서도 조선에서 도망해 들어가 살고있는 조선인을 역시 발견하였다. 이들은 명에서 넘어 온 명나라 국적의 조선 사람 들과 혼인해 거주한 지가 상당히 오래되었다. 17) 이외에도 소장산도(요녕성 신금 동남쪽 에 위치) 등 압록강 하류의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에도 東 寧 衛 소속의 조선인, 조선에서 넘어간 조선인들이 혼거하며 살고 있었다. 18) 압록강에서 요양에 이르는 지역에는 요동정세가 안정기에 들어가면서 조선인들이 상 당수 살고 있었다. 특히 명나라가 여진을 방어한다는 이유로 압록강 유역으로 점차 성 보를 쌓아 내려올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평안도, 나아가 황해도 사람까지 부역을 피해 압록강을 건너 월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19) 가정 16년(1537) 간행된 遼 東 志 에는 東 寧 衛 의 인구가 대략 15,634로 전체 요동인 구 275,155의 5.68%를, 가정 44년(1565)에 간행된 전료지의 통계에 따르면 東 寧 衛 가 349 4호에 19,352명으로 요동인구 381,496의 5.07%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東 寧 衛 의 인구 가 대략 1만-2만 사이를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기타 위소에 편입되거나 통계에 나타나지 않는 조선인을 추축해 보면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전 조선의 양성지가 보고한 조선인 수자는 홍무연간 조선인 3만 여인, 영락연간 만산군인 4만여 인인데, 이 13) 朝 鮮 王 朝 實 錄 卷 9, 太 宗 5 年 3 月 壬 子. 14) 朝 鮮 王 朝 實 錄 卷 1, 正 宗 1 年 3 月 壬 申. 15) 朝 鮮 王 朝 實 錄 卷 62, 中 宗 23 年 8 月 癸 亥. 16) 朝 鮮 王 朝 實 錄 卷 62, 中 宗 23 年 8 月 甲 子. 17) 燕 山 君 日 記 卷 29, 燕 山 君 4 年 4 月 丙 戌. 18) 朝 鮮 王 朝 實 錄 卷 62, 中 宗 23 年 7 月 己 亥, 10 月 乙 巳. 19) 朝 鮮 王 朝 實 錄 卷 6, 睿 宗 1 年 6 月 庚 申. - 50 -

遼 陽 東 寧 衛 에 대한 재고찰 를 통해 보면 1443년에 편찬된 遼 東 志 에는 대략 7만 여명의 조선인이 기록되어 있 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현재 1443년에 편찬된 遼 東 志 는 잔존하지 않아 그 진위를 확인할 길은 없다. 더구나 이 가운데 여진인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하면 그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3만 여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동녕위, 동팔참, 도서 등지에 널리 분포하며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東 寧 衛 의 관부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업무를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한자에 익숙하여 한자와 한문에 능숙한 자가 많았고, 집에서는 조선어를 사용했다. Ⅳ. 東 寧 衛 를 통해 본 유동성과 불안정성 요동팔참 지역은 요동 동부 지역으로 本 溪, 鳳 城, 丹 東 에 이르는 지역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조선에서 넘어간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여진을 방어한다는 명분으로 명 나라가 성보를 축조하기 시작하면서 東 寧 衛 소속 사람들이 많이 배치되어 조선인으로 넘쳐나는 곳이 되었다. 정통 원년(1436)부터 조선은 요동팔참 지역이 여진의 위협을 받 고 있으므로 사행로의 노선을 변경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는 요동팔 참로에 성보를 수축해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통해 조선의 사신이 와도 안 전에 큰 문제가 없다고 통보해왔다. 결국 요동팔참로 중 봉황성에 성보를 수축하였고 조선에는 사행의 큰 위협을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요동팔참로에 성보를 수축한다는 것은 이 지역으로 인구가 이주해야 함을 의미 하였고 조선으로 통하는 사행로였기 때문에 요양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던 東 寧 衛 5 천호소의 사람들이 동팔참로의 성보를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봉황성 등 동팔참로에 조선인들이 더욱 많이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고 이 는 조선과의 정보가 소통되어 부역이 과중한 평안도 등지의 사람들이 압록강을 넘어가 조선 변경의 인구를 감소시킬 위험도 가지고 있었다. 사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평안도 관찰사 成 俔 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요동( 遼 東 )으로부터 남쪽 해주( 海 州 ) 개주( 蓋 州 )의 동쪽으로 봉황산( 鳳 凰 山 ) 기슭까지 그 땅이 넓고 멀어서 수백 리에 밑돌지 않는데, 인가가 즐비하고 곡식이 들을 덮어 인구가 점점 번성합니다. 사람들은 다 중국말을 모르고 오로지 우리나라 말을 쓰며, 우리나라 사람을 보면 앞을 다투어 고향을 물어 그 족속에게 인도하는데, 땅이 기름지고 세를 거두는 것이 매우 적 으며 요동에는 또 동녕위( 東 寧 衛 )를 두어 편안하게 위안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신의 망령된 - 51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생각으로는, 본도에서 신역( 身 役 )을 도피한 백성이 저곳으로 들어가지 않을는지 어찌 알겠으 며, 압록강( 鴨 綠 江 )에 얼음이 얼어 의주( 義 州 )에서 바로 들어갈 수 있을 때가 되면 길게 노래 하며 강을 건너더라도 누가 막는 자가 있겠습니까? 대저 영안도( 永 安 道 )는 본도처럼 부역이 많지 않으며 모련위( 毛 憐 衛 )가 또한 사납고 순종하지 않으나, 지난해에 온 집안이 도망하여 들어간 백성이 있는데, 더구나 본도의 피곤한 백성으로서 또한 편안하게 위안해 주는 곳이 있 는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염려하는 까닭입니다. 20) 또한 성절사( 聖 節 使 ) 蔡 壽 가 북경으로부터 돌아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신이 동팔참( 東 八 站 )의 땅을 보니, 우리 나라 평안도( 平 安 道 )보다 크고 토지가 비옥하여 평안도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전에는 비워두고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은 여진( 女 眞 )과 서 로 접해 있는데다 큰 관방( 關 防 )도 없어서 언제든지 도둑들이 침입하여 약탈하고 죽이므 로, 중국 사람들이 이를 두려워하여 살지 아니하였고, 우리나라 사람도 또한 두려워하여 몰래 의탁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북경( 北 京 )으로 갈 때 요동( 遼 東 ) 사람들이 끊임없이 와서 이르기를, 봉황산( 鳳 凰 山 ) 동쪽에 성( 城 )을 쌓는다. 고 하였었는데, 돌아올 때에는 사 람들의 말로는 성의 공사를 이미 마치고 1천 명으로써 지킨다 하고, 또 금년 안에 금주( 金 州 ) 개주( 蓋 州 ) 동녕( 東 寧 ) 등의 위( 衛 )에 4천 호( 戶 )를 옮겨 살게 한다고 합니다. 봉황산은 의주( 義 州 )와의 상거가 겨우 하룻길이며, 요해지( 要 害 地 )에 처하여 있어, 이제부터 영원히 여진( 女 眞 )의 우환이 없게 된다면 중국 사람들이 모두 즐겨 옮겨 살 것이며, 우리 나라 사 람도 또한 몰래 의탁할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오니, 심히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또 신이 동팔참( 東 八 站 ) 사람들을 보니, 모두 우리 나라 말을 잘 알아서 평안도 사람과 다름이 없 었으며, 신 등의 하숙( 下 宿 )하고 있는 곳에 혹 와서는 무릎꿇고 절을 하며 영공( 令 公 )이라 칭( 稱 )하기에 그 온 줄기를 물어 보았더니 모두 평안도 사람이라 하였고 혹은 조부( 祖 父 ) 때부터 혹은 증조( 曾 祖 )부터 와서 살았다 하였지만 그 실은 어느 대( 代 )에 와서 살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으며, 짐작컨대, 모두 요사이 내투( 來 投 )한 자였습니다. 또 의주( 義 州 )의 마중나와 만난 사람들도 모두 서로 사귀여서 이제 봉황산에 성( 城 )이 있으면 평안도 사람 들이 반드시 모두 기꺼이 투입( 投 入 )해 갈 것이니, 심히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신의 생각 으로는 국가에서 다방면으로 포치( 布 置 )하여 조속히 막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21) 즉 조선 성종시기에 조선인들이 요동팔참지역으로 넘어가는 일이 많았고 조선의 군 신들은 이렇게 될 경우 명의 요동 사람과 조선인들이 섞여 살면서 변경의 문제와 조선 변경민이 이탈이 심화될까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특히 명조가 東 寧 衛 의 군호들을 봉황 성으로 이동시키려는 계획을 세우면서 조선인의 이탈은 결국 명 東 寧 衛 의 역량을 강화 시켜주고 결국 이는 조선의 변경을 위협하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염려 20) 朝 鮮 王 朝 實 錄 卷 196, 成 宗 17 年 10 月 己 卯. 21) 朝 鮮 王 朝 實 錄 卷 219, 成 宗 19 年 8 月 乙 卯. - 52 -

遼 陽 東 寧 衛 에 대한 재고찰 도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명이 이처럼 요동팔참 지역에 東 寧 衛 의 사람들을 대거 투입하려했던 이유는 무엇이 었을까. 우선 내부적으로는 조선과의 효과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변경을 관리하기 위해 조선인을 하나의 위로 묶어 조선을 견제하고 외교를 원활하게 하려는 목적이 작 용했을 것이다. 東 寧 衛 를 구성했던 조선인들은 조선과 서로 언어와 풍속 등 모든 것이 전통을 유지 하고 상호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명은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동팔참을 경영하려 고 하였던 것이다. 조선에서 요동으로 넘어가는 사람들 역시 명의 東 寧 衛 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수 조선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1480년데 이전에는 명으로 들 어가는 책문이 요양에서 가까운 연산관에 설치되어 연산관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 은 양국의 행정력이 미치고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명의 성보수축 동진 정책으로 東 寧 衛 의 사람들이 사민되기 이전에도 요동팔참 지역에 몰래 월경한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 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에서 압록강을 넘어 건너간 사람들은 쉽게 동팔참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과 접할 수 있었으며 문화적 괴리감이나 언어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즉 요동팔참 지역은 1480년 이전은 봉황성에서 북쪽에 위치한 연산관이 국경이었고, 연산 관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에는 여전히 조선인들이 산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여진의 동팔참 위협이 커지고 조선의 사신이 명으로 올 경우 동팔참을 경유해 야 했으므로 명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지역에 조선인으로 구성된 東 寧 衛 사람들을 이 주시켜, 통역, 물자제공, 군사방어, 교류 등 다양한 역할을 원활하게 수행해야 하는 것 은 외교적으로도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 사행록을 분석해 보면 사신들이 요동을 경유할 때 사신들은 요동팔참의 조선인 들의 숙소에서 머물며 그들의 고향 등을 물으며 서로 동류의식을 느끼기도 하였다. 이 러한 동류의식으로 조선인들은 사신들에게 최선을 다해 필요한 부분을 제공하였고 사 신단이 병이 나거나 기타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도 몸소 뛰어다니며 약재를 구하는 등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은 東 寧 衛 에 소속된 조선인들이 요동팔참 의 위소에 배치된 것과 많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압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동류의식은 오히려 조선인이 비옥한 요동 으로 넘어가는 것을 가속화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신이 연전에 북경( 北 京 )에 갈 때에 東 八 站 에 사는 사람을 보고서 부세( 賦 稅 )와 力 役 의 경중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경작하는 바가 아무리 많더라도 1년에 납세가 단지 쌀 서 말 이고 家 口 가 아무리 많더라도 한 사람이 출역( 出 役 )하면 나머지는 모두 역( 役 )이 없다. 고 - 53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하였습니다. 그 세( 稅 )와 역( 役 )의 너그러움이 이와 같고 또 토지가 기름지니, 참으로 이른 바 낙토( 樂 土 )입니다. 상시로 북경( 北 京 ) 가는 행차에 일체 따라가는 사람들이 갔다가 돌 아오는 즈음에 말이 혹시 병이 나면 동팔참 연도( 沿 道 )의 사람 집에 맡겨 두고 양식이 혹 시 부족하면 꾸어 주기도 한다는데, 그 사람은 본시 우리나라 사람으로 말소리가 서로 같 고 우리 나라 사람을 대접하는 데 친척과 다름이 없으니 변경 백성이 가서 머물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누가 구태여 거절하겠습니까? 만약 생활이 곤궁하고 인하여 恒 産 이 없으면 어찌 저 낙토로 가려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22) 명의 東 寧 衛 에서 요동팔참으로 파견된 사람들은 실제로는 호적은 명나라 사람이었지 만 피는 조선인이었으므로 여전히 조선인과 혈연 지역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교류 를 하고 있었다. 특히 요동에서 조선으로 도망해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경우 조선 조정은 다시 그들을 요동으로 돌려보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명의 호적에 기록된 명나라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로 세종연간 金 沙 安 金 乃 巨 등 남녀 5명이 요동에서 도망쳐서 돌아왔다. 이 들은 본시 우리 나라 江 界 사람으로서, 도망쳐서 요동에 들어가 東 寧 衛 의 군대를 편입 되었다가, 다시 고향이 그리워서 도망하여 온 것이다. 임금은 이들이 비록 우리나라 사 람이지만, 이미 중국의 군적에 이름이 들어 있는 군인이므로, 判 承 文 院 事 曹 崇 德 을 보 내어 그들을 요동에 호송하라고 명하였다. 23) 그러나 이와 반대로 조선인이 요동으로 도망했을 겨우 오히려 명은 그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내려 하지 않았다. 당시 요동은 몽골과 여진의 공격으로 많은 인구가 필요하였 다. 요동으로 넘어간 조선인들은 명의 東 寧 衛 에 편입되었고 조선에서 대우하는 것보다 좋은 대우를 받은 조건으로 그들을 회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변경의 인구가 증가하고 양국의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상대국으로 넘어가 혼재하는 문제는 외교적인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요동정세가 안정되었 을 경우 東 寧 衛 의 사람들은 조선의 변경민에 비해 경제적으로 좀 더 낳은 풍요로운 혜 택을 받으며 조선으로 돌아갈 생각을 포기했을 것이다. 또한 조선에서 넘어간 사람들은 처벌이 무서워 돌아갈 생각이 없었고 경제적으로 요동이 풍족할 경우 더욱 그러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성화 22년(1486) 조선사신이 東 寧 衛 의 조선인들에게 조선으로 돌아갈 생각이 있냐고 물었을 때 조선은 부역이 과중하여 버티지 못하고 도망하여 왔 으니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답하는 것을 보면 요동의 안정기에는 상당수 조선인들이 요동으로 넘어오거나 동팔참의 조선인들이 조선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음을 알 수 있 22) 朝 鮮 王 朝 實 錄 卷 229. 成 宗 20 年 6 月 丙 辰. 23) 朝 鮮 王 朝 實 錄 卷 32, 太 宗 16 年 7 月 甲 午. - 54 -

遼 陽 東 寧 衛 에 대한 재고찰 다. 다음과 같은 사료는 조선 부역의 과중함을 말해주는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시독관( 侍 讀 官 ) 조지서( 趙 之 瑞 )가 아뢰기를 네가 무슨 일로 인하여 여기에 왔으며, 지금 도로 돌아갈 수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중국 법에는 한 집에 장정이 식구가 비 록 많더라도 가장( 家 長 )만 부역을 시키는데, 본국에서는 집에 숨은 장정이 없고 모두 군적 ( 軍 籍 )에 편입시키므로 그 노고를 견디지 못하여 역사를 도피하여 왔으니, 어찌 반드시 되 돌아가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지금 국가에서 장차 장성( 長 城 )을 쌓을 것인데, 신은 아마 도 어리석은 백성이 원대한 계획을 알지 못하고 큰 역사가 장차 일어나서 노고를 견딜 수 없을 것이라 하여 서로 거느리고 저 지경으로 도망하여 들어간다면 참으로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 사람이 이르기를, 오랑캐 말[ 胡 馬 ]은 북풍( 北 風 )을 의지하고, 월( 越 )나라 새는 남 쪽 가지에 깃든다. 하였는데, 내 땅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이 어찌 본심이겠는가? 이것은 반드시 요역( 傜 役 )이 번거롭고 과중하여 노고를 이기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장성 을 쌓는 것은 부득이한 것이니 급히 글을 보내어 백성들을 효유( 曉 諭 )하는 것이 좋겠고, 북경에 갈 때에 짐을 싣는 폐단 같은 것은 책임이 사신에게 있으니 엄하게 금하는 것이 옳 다. 24) 그러나 상황이 변화되어 요동이 전쟁에 휩싸이거나 불안할 경우 동팔참을 비롯한 東 寧 衛 의 사람들은 조선으로 넘어갈 생각이 있었다. 이빈이 또 아뢰기를, 함영언이 요동으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길에서 본국 사람 유인 백( 劉 仁 伯 )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동녕위 천호( 東 寧 衛 千 戶 )임팔라실리( 林 八 剌 失 里 ) 가 3천여 호( 戶 )를 거느리고 배반하니, 하 지휘( 河 指 揮 ) 요 천호( 姚 千 戶 ) 등이 1천 5백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다가 모두 팔라실리에게 죽음을 당하여 길거리에 효수( 梟 首 )되 었다. 고 하옵고, 또 심양( 瀋 陽 ) 개원( 開 原 ) 두 위( 衛 )의 군마( 軍 馬 )를 많이 죽이고 포주강 ( 鋪 州 江 )을 건너와 말하기를, 조선에 귀부( 歸 附 )하려고 하는데 만약 입국을 허가하지 않 는다면 이곳에서 농사나 지으면서 살겠다. 고 하였다. 합니다. 임금이 묻기를, 팔라실리 등의 무리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영언이 말하기를, 만여 명은 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25) 이처럼 東 寧 衛 를 비롯한 조선인들은 중국의 호적에 편입되었지만, 변경에 근무한다 는 호적의 불안정성, 생명의 위험성, 2개의 국가관, 혈연과 지연사이의 고민 등 항상 유 동적이고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26) 24) 朝 鮮 王 朝 實 錄 卷 187. 成 宗 17 年 1 月 庚 戌. 25) 朝 鮮 王 朝 實 錄 卷 3, 太 宗 2 年 4 月 丁 巳. - 55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東 寧 衛 는 대부분 조선인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녕위 지휘 등은 조선인으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락 6년(1408) 東 寧 衛 지휘 高 海 帖 木 兒, 정통 3년(1438) 東 寧 衛 지휘 李 俊 등은 모두 명에 귀부한 조선인이었다. 이외에도 東 寧 衛 내부의 크고 작은 관원들 역시 상당 수 조선인으로 임명하였다. 예를 들면 東 寧 衛 천호 金 聲, 백호 金 用 貴 등도 조선인 들이었다. 이들 조선인 관리들은 조선 언어와 풍속 등 다양한 정보에 익숙 했기 때문에 명의 사신이 조선에 파견될 때 통역을 담당하는 들 같이 파견되곤 하였 다. 27) 이처럼 東 寧 衛 는 대조선과의 관계, 요동도사의 유지와 방어, 사행단의 보조, 통역, 여진방어, 조선으로의 정보전달 등 명의 요동정책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사적 위치에 있었다. Ⅴ. 결론 명초 명나라는 요동으로 진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다. 여전히 몽골 세력이 명을 각지에서 위혐하고 있었고 특히 몽골초원과 연결된 요동은 몽골세력의 새로운 근거지 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명의 요동진출은 불가피하였다. 명이 요동진출을 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많은 인구를 확보해야했으며, 한족과 언 어와 풍속이 다른 요동의 인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한족과는 다른 새로운 정책이 필 요했다. 이것은 요동을 군사적 위소편제로 묶는 동시에 조선인, 여진인, 몽골인 등을 적 절히 흡수하여 그들의 역량을 최대한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그들로 구성된 위 소를 구성해야 효과적이고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요동에는 귀부한 몽골인들, 여진인, 조선인 등이 개원과 철령, 그리고 여진지역, 동팔참 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었다. 그 중 원대 설치된 東 寧 府 와 東 寧 路 에는 고려 조선인들이 상당수 분포하고 있었으며, 명나 라는 이들을 통해 원이 차지했던 요양행성의 요지를 차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명초 요동정세는 몽골의 위협이 심각하고 요동도사 25위 체제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으 로 요동북부와 요동도사의 치소인 요양의 방어가 가장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였다. 이로 써 東 寧 衛 를 구성하는 5개의 천호소인 동녕, 해양, 초하, 남경, 여직 등은 모두 요동도사 내지로 이치되었고 요동도사의 방어와 운영의 핵심이 되었다. 東 寧 衛 는 대부분 조선인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조선과의 외교에서 통역과 정보교 26) 叢 佩 遠, 中 國 東 北 史 3 卷, 吉 林 文 史 出 版 社, 1988, pp.767~775. 27) 遼 東 志 卷 6 人 物 志 通 事. - 56 -

遼 陽 東 寧 衛 에 대한 재고찰 류와 전달 등 조명관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또한 명이 봉황성으로 성보를 수 축하면서 상당수의 東 寧 衛 사람들이 사민되었는데 이로서 사행단의 안전과 숙식제공 등 사행단에게 있어서도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나아가 東 寧 衛 사람들이 과중한 부역을 피해 압록강을 넘어 온 사람들과 빈번히 접촉하면서 조선사람들의 월경을 촉진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여진을 방어하고 조선의 사신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봉 황성을 포함하는 동팔참 지역으로 명이 성보를 수축하면서 이 지역은 인구가 점차 늘 고 살기 좋은 곳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명나라는 평안도 등으로부터 과중한 부역을 견디지 못하고 압록강을 건너 월경하는 조선인들은 東 寧 衛 로 편입시켜 그들을 동팔참 지역, 나아가 토지가 비옥한 요하 하류의 海 州 와 盖 州 등지에 살도록 하였다. 이러한 東 寧 衛 사람들과 조선에서 넘어간 사람들이 혼거하는 상황은 요동 내지 이외에도 도서 등에도 수많은 양국의 사람들이 모여 혼거하게되는 상황을 연출하며 외교적 문제로 발 전하기도 하였다. 명 후기에도 東 寧 衛 에 소속된 사람은 토관, 안락, 자재주에 포함된 여진인을 달관으 로 불릴 정도로 東 寧 衛 는 명후기로 갈수록 조선인으로 구성된 군사위가 되어 그 역할 을 다하였다. 결국 東 寧 衛 는 해양, 남경, 초하 등 넓은 지역을 방어하는 5개의 천호소로 시작하였으 나 결국 요동도사의 치소인 요양의 방어가 급선무였으므로 명초 동녕을 중심으로 5개 의 천호소를 구성하여 요양방어와 조선외교, 조선 사신과의 교류 등 중요한 역할을 수 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기타 고려해 보아야할 문제가 있다. 東 寧 衛 의 위치에 관한 문제이다. 명대 東 寧 衛 는 원대 東 寧 府, 東 寧 路 와 관련된 문제로, 원대 東 寧 府 의 위치가 평양이라는 관점 에서만 연구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東 寧 府 가 東 寧 路 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그 위치 는 압록강 북쪽으로 위치가 변화될 수밖에 없다. 고려말의 東 寧 府 공략에는 초기 東 寧 府 가 설치된 북한 평양이 아니라 압록강 북쪽의 요양과 환인이 주 공략대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동녕은 요양과 환인이라는 요동을 그 위치로 추축할 수밖에 없다. 이외에 도 元 史 地 理 志 에도 東 寧 路 는 원래 고구려 평양성으로 장안성이라고도 말한다. 한나라가 조선을 멸하고 낙 랑, 현도군을 두었는데 이는 낙랑의 땅이다. 晉 義 熙 후 왕 高 璉 이 비로소 처음으로 평양성 에 거하였다. 당나라가 고려를 정벌할 때 평양을 공격하자 그 나라가 동쪽으로 옮겨갔는데 압록강 동쪽 1000 여리에 있었는데 옛 평양이 아니다. - 57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라고 기록함으로써 동녕을 옛 평양성으로 고증하는가 하면 崔 溥 역시 漂 海 錄 에서 5 월 24일 조 요양에 머무르면서 요양은 원래 고구려의 도읍인데 중국에 빼앗긴지 천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우리 고구려 의 풍속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아서 高 麗 祠 를 세워 근본으로 삼고 공경하게 제사지내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니 근본을 잊지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5월 28일 조에서도 요동은 예날 우리 고구려의 도읍이었는데 당 고종에게 멸망을 당하여 중원에 예속되었 습니다. 성 서쪽의 승평교에서 고려시 사이는 민가가 번창하다고 할만하니 강남으로 가늠한다면 가흥부와 겨룰만하였습니다. 성 동쪽에는 동녕위성을 별도로 쌓았는데 首 山, 千 山, 木 場 山, 駱 駝 山, 태자산, 杏 花 山 등 여러 산들이 성 서쪽, 남쪽, 동쪽을 빙둘러 있었 으며 그 북쪽은 평평하고 특 트여서 끝이 없는 벌판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록과 원사 지리지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요양은 동녕위의 중심이었고, 고 대 고구려 수도 평양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한국 고대사학계에서 고구려의 수도 평양이 북한 이외에 만주에 있었다는 것이 쟁점이 되고 있는 만큼 원, 명, 청 사료에 나오는 동녕위와 평양의 문제 역시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서 도 앞으로 동녕부의 위치, 東 寧 府 와 東 寧 路 와 관계, 철령위와의 관계, 동녕과 평양의 연 관성 등 여러 가지 새로운 문제들이 심도있게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 58 -

满 文 及 满 文 文 献 赵 令 志 ( 中 央 民 族 大 学 ) 一 满 文 创 制 与 改 进 二 满 文 的 作 用 三 满 文 之 文 献 近 几 年 来, 由 于 国 外 学 界 日 益 重 视 满 文, 尤 其 受 美 国 新 清 史 的 影 响, 中 国 国 内 学 界 亦 逐 渐 注 重 非 汉 文 文 献 的 研 究 和 利 用, 研 究 清 史 的 学 者 们, 认 识 到 了 满 文 文 献 蒙 古 文 献 藏 文 文 献 等 文 献 的 重 要 性 在 此 环 境 下, 近 十 年 左 右, 国 内 外 兴 起 了 学 习 满 文 热 潮, 目 前 有 许 多 本 科 生 硕 士 生 博 士 生, 为 了 将 来 从 事 满 学 或 者 是 清 史 研 究, 都 在 学 习 满 文 另 外, 有 许 多 满 族 聚 居 地 方, 为 了 挖 掘 满 族 文 化, 甚 至 在 部 分 小 学 里 开 设 满 文 课 程 就 研 究 满 学 和 清 史 而 言, 我 觉 得 学 习 满 文 是 有 必 要 的, 因 为 有 清 一 代 它 是 国 语, 因 而 留 下 大 量 满 文 文 献 满 文 在 清 代 称 作 清 文 或 清 语 国 语, 所 以 我 们 在 检 索 清 实 录 或 大 清 会 典 中 有 关 满 文 资 料 时, 若 输 如 满 文 的 话, 是 找 不 到 的, 必 须 检 索 清 文 清 语 或 国 语 类 条 目, 才 会 检 索 到 相 关 内 容 一 满 文 创 制 与 改 进 我 们 知 道, 金 代 的 女 真 人 创 立 了 女 真 文, 有 大 字 小 字 之 分 这 种 文 字 当 时 是 根 据 汉 语 的 偏 旁 部 首 来 创 制 的, 所 以 存 在 缺 陷, 不 能 很 完 整 地 拼 写 阿 尔 泰 语 系 的 粘 着 语 语 言, 必 须 分 开 写, 对 女 真 语 存 在 的 词 头 词 中 词 尾 变 化 问 题, 难 以 完 整 标 识 因 文 字 与 语 言 脱 节, 给 学 习 和 利 用 过 程 中 带 来 诸 多 困 难, 故 该 文 字 在 应 用 一 段 时 间 后, 尤 其 金 朝 迁 都 北 京 以 后, 这 种 文 字 应 用 范 围 愈 来 愈 小, 逐 渐 地 被 汉 文 取 代 了 到 元 明 时 期, 东 北 的 女 真 人 中 懂 女 真 文 者 已 极 为 稀 少 明 朝 从 洪 武 年 间 开 始 招 抚 女 真 人, 到 永 乐 年 间 进 入 一 个 高 潮 期, 对 前 来 归 附 的 女 真 各 部, 明 朝 分 别 设 立 卫 所, 对 其 头 领 分 别 授 与 都 督 都 指 挥 使 指 挥 使 指 挥 同 知 等 官 职, 要 其 统 辖 所 部, 定 期 朝 贡 身 为 明 朝 的 官, 必 须 与 明 朝 交 往, 他 们 又 不 懂 汉 语, 所 以 在 有 事 奏 报 时, 奏 报 的 文 字 就 成 了 问 题, 各 部 所 用 文 字 不 一, 表 述 亦 有 问 题 所 以 在 1444-59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年, 女 真 部 的 一 些 首 领 就 向 明 朝 建 议, 申 请 以 后 具 折 上 奏 的 时 候, 请 用 鞑 靼 字, 即 用 回 鹘 体 蒙 古 文, 得 到 明 廷 准 许 从 此 以 后, 女 真 地 区 的 来 文, 都 是 蒙 古 文, 里 边 亦 有 些 是 用 蒙 古 字 母 拼 写 个 别 女 真 语 的 情 况 明 朝 设 立 了 四 夷 馆, 专 职 翻 译 和 处 理 对 边 疆 民 族 的 文 书 往 来, 其 中 即 有 女 真 馆, 女 真 馆 来 文 实 际 是 蒙 古 文 据 此 可 以 推 断, 在 明 代 中 叶 以 后, 女 真 地 区 有 许 多 精 通 蒙 古 文 的 女 真 人 或 蒙 古 人 到 努 尔 哈 齐 时 期, 实 际 上 在 东 北 的 女 真 各 部, 通 行 的 仍 然 是 蒙 古 文 努 尔 哈 齐 起 兵 以 后, 归 附 的 人 越 来 越 多, 对 文 字 的 需 要 也 越 来 越 明 显, 所 以 他 令 额 尔 德 尼 和 噶 盖 创 制 文 字 额 尔 德 尼 等 不 知 如 何 创 制, 努 尔 哈 齐 告 知, 以 蒙 古 字 母 阿 字 下 合 一 玛 字, 此 非 阿 玛 乎 ; 额 字 下 合 一 默 字, 此 非 额 默 乎 吾 意 决 矣, 尔 等 试 写 可 也 于 是 自 将 蒙 古 字 编 成 国 语 颁 行, 创 制 满 洲 文 字 自 太 祖 始 ( 满 洲 实 录 卷 3), 即 按 回 鹘 体 蒙 古 文 的 字 母, 创 立 了 满 文 在 所 有 的 民 族 历 史 文 献 中, 都 有 一 个 民 族 英 雄 或 民 族 首 领 事 迹 的 成 分 满 文 文 献 中, 如 满 文 原 档 等 里 面 记 载 努 尔 哈 齐 之 事 迹 颇 多, 其 实 并 非 皆 为 其 个 人 所 为 上 述 满 洲 实 录 之 记 载, 好 像 是 说 努 尔 哈 赤 让 额 尔 德 尼 等 根 据 蒙 古 字 母 如 何 拼 写 女 真 语 的, 实 际 蒙 古 文 在 女 真 地 区 已 经 通 行 了 一 百 五 六 十 年 了 从 女 真 馆 来 文 可 以 发 现, 在 努 尔 哈 齐 没 有 下 令 创 制 满 文 前, 有 的 人 就 用 蒙 古 文 字 母 在 拼 女 真 语 了 我 觉 得 利 用 蒙 古 文 字 母 拼 写 女 真 语, 绝 非 努 尔 哈 齐 首 创, 应 该 说, 经 过 额 尔 德 尼 等 改 进, 是 将 拼 写 字 母 规 范 化 了, 进 而 形 成 了 一 套 规 范 的 满 文 字 母, 女 真 社 会 复 有 了 一 套 系 统 的 文 字, 此 乃 1599 年 创 制 的 满 文, 即 老 满 文 老 满 文 创 制 以 后, 应 用 很 广, 用 于 记 载 各 种 档 案 等 但 在 应 用 过 程 中, 就 又 发 现 问 题, 即 许 多 音 在 文 字 中 难 以 区 分, 如 ta da te de, ga ka ge ke 等, 所 以 出 现 dergi 与 derhi, aha 与 aga 之 类 词 汇 混 淆 的 问 题 此 问 题 在 蒙 古 文 中 既 长 期 存 在, 所 以 不 懂 蒙 古 语 的 人, 学 蒙 古 文 很 费 力 而 会 蒙 古 语 的 人, 学 习 蒙 古 文 要 相 对 简 单 些 所 以 在 1632 年 皇 太 极 让 巴 克 什 达 海 改 进 满 文 史 料 里 记 载 是 达 海, 实 际 还 有 库 尔 缠 等 许 多 人 他 们 将 老 满 文 加 上 了 圈 点 以 区 别 读 音, 这 样 就 形 成 了 新 的 满 文 并 且 增 加 了 十 几 个 特 殊 的 字 母, 用 来 拼 写 外 来 语 的 音, 如 此 加 上 了 圈 点, 又 增 加 了 一 些 特 殊 字 母, 所 以 满 文 就 非 常 完 善 了, 此 乃 新 满 文 有 了 圈 点 以 后, 就 能 完 整 地 标 识 满 语 的 读 音, 便 于 学 习 利 用, 并 能 拼 写 任 何 语 言, 因 而 新 满 文 是 一 套 非 常 成 熟 的 文 字 最 近, 我 见 到 了 许 多 舆 图, 其 中 有 清 代 蒙 古 各 部 游 牧 图, 是 蒙 古 文 的, 但 其 中 有 许 多 地 名, 是 用 满 文 拼 写 的 据 许 多 蒙 古 学 者 研 究, 用 满 文 拼 写, 比 蒙 古 文 准 确 我 在 进 行 满 文 文 献 调 查 时, 在 内 蒙 古 发 现 许 多 蒙 古 文 的 翻 译 著 作, 如 西 游 记 等, 其 中 的 满 文 地 名 人 名 都 用 满 文 写, 其 原 因 有 二, 其 一 可 能 底 本 为 满 文 本, 其 二 即 满 文 拼 写 更 为 准 确 从 中 可 以 证 明 新 满 文 的 字 母 非 常 完 备 在 清 代, 用 满 文 拼 写 俄 文 英 文, 其 准 确 度 远 胜 于 汉 文 - 60 -

满 文 及 满 文 文 献 1648 年, 和 硕 特 蒙 古 高 僧 咱 雅 班 第 达 为 翻 译 经 书 和 便 于 学 习 利 用 蒙 古 文, 改 进 回 鹘 体 蒙 古 文, 亦 加 圈 点, 创 制 托 忒 文, 通 行 于 额 鲁 特 各 部 此 前 10 余 年, 额 鲁 特 各 部 遣 使 到 沈 阳 北 京 者 达 40 余 次, 使 团 成 员 抑 或 从 沈 阳 或 北 京 带 回 满 文 文 献 到 额 鲁 特, 且 咱 雅 班 第 达 亦 与 清 朝 有 文 书 往 来, 可 知 其 曾 见 过 满 文 但 咱 雅 班 第 达 创 制 托 忒 文 时, 在 加 圈 点 方 面 是 否 受 新 满 文 之 启 发 问 题, 因 无 史 料 记 载, 难 以 稽 考, 可 作 存 疑 备 考 到 乾 隆 年 间, 入 关 一 百 二 十 多 年 以 后, 显 露 出 一 个 明 显 的 问 题 就 是 满 语 日 益 衰 微 在 京 城 内 城 由 八 旗 分 方 位 驻 守 京 城 之 旗 人 即 有 满 洲, 亦 有 蒙 古 汉 军 及 大 量 内 务 府 旗 人, 汉 人 等 购 产 入 内 城 居 住 者, 明 显 增 多 居 住 人 群 的 变 化, 导 致 满 洲 人 的 满 语 日 渐 衰 落, 为 稳 固 八 旗 根 本, 保 护 民 族 文 化, 乾 隆 帝 欲 振 兴 国 语 骑 射 国 语 当 然 就 是 指 满 语 当 时 乾 隆 皇 帝 认 为 导 致 满 语 衰 落 的 原 因 之 一, 是 满 语 里 边 的 汉 语 成 分 越 来 越 多 了 女 真 族 本 属 于 渔 猎 民 族, 其 固 有 语 言 里 渔 猎 经 济 文 化 之 词 汇 特 别 丰 富, 伴 随 其 逐 渐 进 入 农 业 地 带, 其 本 不 存 在 的 政 治 类 经 济 类 方 面 的 语 言, 便 出 现 许 多 汉 语 词 汇, 并 将 其 满 语 话 这 类 词 汇, 在 满 语 内 占 有 相 当 的 比 例, 如 laba defu puseli hesari puselembi maimailembi 等, 既 有 名 词, 亦 有 以 汉 语 为 词 根 的 动 词 乾 隆 皇 帝 意 识 到 这 类 词 汇 对 满 语 文 弱 化 的 影 响, 因 而 在 修 订 刊 刻 御 制 增 订 清 文 鉴 时, 对 御 制 清 文 鉴 的 一 些 词 汇 进 行 修 订, 弱 化 或 消 除 满 语 文 内 的 汉 语 成 分, 或 挖 掘 女 真 语 内 固 有 词 汇, 或 创 立 许 多 新 的 词 汇, 比 如 仓, 原 来 就 拼 ts ang, 乃 汉 语 仓 音, 对 此 专 门 创 一 个 词 calu, 便 没 有 汉 语 痕 迹 了 如 此 挖 掘 创 立 而 修 改 的 词 汇 和 修 订 的 语 句, 按 御 制 增 订 清 文 鉴 序 中 所 言 : 新 定 国 语 五 千 余 句, 即 增 订 达 5000 余 处, 可 以 说, 这 次 变 更 的 词 汇 和 常 用 句 子 的 数 量 非 常 大 我 们 现 在 翻 译 满 文 档 案, 我 有 个 体 会, 即 满 语 的 基 本 词 汇 能 掌 握 2500 左 右, 就 可 以 了 因 为 其 中 有 些 词 汇 是 可 以 变 化 的, 尤 其 是 名 词 动 词 化, 动 词 时 态 式 的 变 化 等, 可 以 使 2500 左 右 个 词 汇, 大 约 变 成 6000 多 个 单 词, 再 掌 握 满 语 文 的 语 法, 就 可 以 翻 译 利 用 满 文 档 案 了 此 次 改 进 词 汇 等 达 5000 多 处, 应 该 说 在 词 汇 方 面 变 化 是 非 常 大 的 我 个 人 认 为, 应 该 把 此 次 修 撰 御 制 增 订 清 文 鉴 视 为 满 语 文 的 又 一 次 革 新 我 们 现 在 注 重 这 个 的 问 题 人 还 不 太 多, 所 以 在 座 的 诸 位, 可 以 对 此 问 题, 即 将 御 制 清 文 鉴 与 御 制 增 订 清 文 鉴 的 词 汇 等 变 化, 进 行 对 比 研 究, 会 作 成 一 篇 非 常 出 色 的 博 士 学 位 论 文 但 要 有 心 理 准 备, 这 是 个 事 倍 功 半 的 工 作, 比 较 艰 难 谈 到 这 里, 大 家 肯 定 会 联 想 到 乾 隆 三 十 三 年 刊 刻 旧 清 语, 因 这 些 词 汇 基 本 从 前 三 朝 实 录 内 摘 出 的, 所 以 又 被 翻 译 为 实 录 内 摘 出 旧 清 语, 其 满 文 书 名 为 fe manju gisun i bithe, 翻 译 为 旧 清 语 即 可 关 于 此 书, 赵 志 强 先 生 已 出 版 专 著, 进 行 详 细 研 究, 不 在 此 赘 述 了 大 家 需 要 知 道 的 是, 旧 清 语 的 整 理 刊 刻, 是 挖 掘 整 理 入 关 前 的 女 真 语, 而 不 是 将 满 语 去 汉 语 化 两 者 之 间 或 有 联 系, 但 有 很 大 区 别 我 要 强 调 的 是 赵 志 强 先 生 能 将 800 个 旧 清 语 词 汇 研 - 61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究 出 一 部 67 万 余 字 的 著 作, 所 以, 我 所 说 的 研 究 乾 隆 时 期 更 定 词 汇 的 课 题, 是 可 行 的, 若 太 大, 可 以 分 批 来 作 以 上 讲 了 满 文 的 创 制 和 改 进 问 题, 有 的 问 题 是 我 自 己 的 体 会, 尚 未 有 专 论, 可 能 不 成 熟, 只 是 抛 砖 引 玉, 希 望 引 起 关 注 另 外, 满 语 文 的 改 进, 是 一 个 渐 进 的 过 程, 如 清 高 宗 实 录 内 记 载 乾 隆 五 十 二 年 对 风 俗 一 词 的 上 谕, 就 说 明 此 问 题 与 满 文 相 关 的 另 一 个 问 题, 是 满 文 的 字 体 满 文 楷 行 草 篆 等 几 种 字 体 楷 书 一 般 用 在 刊 刻, 许 多 精 写 本 也 用 楷 书 行 书, 乃 平 时 之 书 写 体, 一 些 档 案 等 皆 为 行 书 草 书, 有 些 书 信 或 者 有 些 地 方 的 档 案, 还 有 皇 帝 的 朱 批, 有 很 多 草 体 草 体 字 迹 潦 草, 没 有 一 定 的 词 汇 量 并 掌 握 草 书 的 规 律, 很 难 看 懂 另 外 还 有 篆 体, 满 文 的 篆 体 是 乾 隆 十 三 年 才 创 制, 创 了 三 十 二 种 篆 体 感 兴 趣 的 话, 大 家 可 看 看 盛 京 赋 或 者 御 制 盛 京 赋, 系 用 各 种 篆 体 分 别 书 写 的 第 一 历 史 档 案 馆 的 安 双 成 先 生 正 在 研 究 满 文 的 篆 体, 安 老 先 生 对 满 文 篆 体 颇 有 心 得, 有 这 方 面 的 问 题, 可 以 向 他 请 教 我 的 两 个 学 生, 准 备 编 写 满 文 篆 书 辞 典, 让 我 给 否 了, 原 因 是 学 术 价 值 不 高 满 文 的 篆 体 基 本 应 用 在 玉 玺 和 官 印 上, 当 然 是 乾 隆 十 三 年 以 后 的 玺 印, 但 亦 有 非 篆 体 者 此 外, 还 有 匾 额 体, 专 门 题 写 额 匾 关 于 满 文 匾 额 问 题, 故 宫 博 物 院 的 春 花 有 专 论 研 究, 可 以 参 考 满 文 还 有 许 多 碑 刻, 有 人 将 其 成 为 碑 刻 体 清 代 满 文 的 碑, 多 为 合 璧 碑, 受 汉 文 有 碑 刻 体 之 影 响, 所 以 亦 有 满 文 碑 刻 体 之 说, 我 看 其 与 楷 体 无 疑, 不 知 是 否 准 确 ( 近 来 发 现 的 满 文 造 假 问 题 ) 二 满 文 的 作 用 清 代 的 满 文 作 为 国 文, 它 的 应 用 范 围 非 常 广 泛 首 先 它 要 体 现 国 文 的 作 用, 那 就 是 国 家 颁 布 许 多 典 政 朝 纲 的 政 书 以 及 敕 书 条 约 等, 都 要 用 满 文 清 代 大 清 会 典 实 录 圣 训 及 各 部 则 例 等 政 书 官 书, 首 先 都 有 满 文 本 有 的 同 时 有 汉 文 本, 有 的 没 有, 但 是 满 文 本 是 必 须 有 的 另 外 向 属 国 颁 发 敕 书, 必 须 有 满 文 的, 另 附 其 他 国 家 或 民 族 的 文 字 与 外 国 签 订 条 约, 在 清 中 前 期 基 本 都 用 满 文, 如 尼 布 楚 条 约, 恰 克 图 条 约 等, 清 朝 方 面 使 用 满 文 签 署 在 文 移 往 来 方 面, 清 代 规 定 办 理 宗 人 府 事 务 内 务 府 事 务 八 旗 事 务, 军 政 事 务 边 疆 事 务 民 族 事 务, 还 有 陵 寝 事 务 的 官 员, 必 须 用 满 文 折 奏 若 满 文 达 不 到 折 奏 的 水 平, 就 不 能 做 这 个 官, 侧 面 促 进 了 满 文 的 学 习 和 应 用 因 而 清 代 留 下 了 大 量 的 满 文 文 献, - 62 -

满 文 及 满 文 文 献 尤 其 是 这 些 上 述 事 务 相 关 的 满 文 文 献 非 常 多 如 宗 人 府 事 务 的 文 书, 在 道 光 二 十 二 年 之 前, 所 有 的 宗 人 府 堂 稿 全 是 满 文 的, 以 后 的 有 满 文 有 汉 文 的 了 还 有 担 任 边 疆 事 务 民 族 事 务 的 大 臣, 他 必 须 用 满 文 来 写 奏 折, 有 关 这 些 事 务 的 档 案 基 本 是 满 文 的, 因 此, 研 究 清 代 边 疆 史 民 族 史, 不 看 这 些 满 文 档 案, 有 些 问 题 难 以 深 入 这 也 是 国 内 外 学 者 赞 成 新 清 史 学 者 提 倡 用 非 汉 文 文 献 研 究 清 史 的 原 因 之 一 因 满 文 是 国 文, 所 以 在 官 方 的 应 用 上 比 较 突 出, 留 下 的 文 献 也 比 较 多, 而 在 民 间 除 应 用 外, 留 下 的 文 献 特 别 少 目 前 在 民 间 留 下 来 的 满 文 文 献, 多 在 达 斡 尔 族 锡 伯 族 居 住 的 地 区, 侧 面 反 映 出 满 语 文 在 这 些 地 区 的 作 用 鄂 温 克 人 和 达 斡 尔 人 在 雍 正 年 间 就 编 入 到 布 特 哈 八 旗, 后 来 有 一 部 分 被 拨 入 呼 伦 贝 尔 八 旗 他 们 在 清 代 应 用 的 文 字 就 是 满 文 到 清 末, 有 几 位 达 斡 尔 学 者, 他 们 像 努 尔 哈 赤 让 额 尔 德 尼 和 噶 盖 创 满 文 的 时 候 那 个 样, 依 据 满 文 的 字 母, 创 立 一 套 拼 写 达 斡 尔 语 的 文 字, 被 称 为 达 呼 尔 文 因 而, 到 莫 力 达 瓦 等 地 调 查 文 献, 会 发 现 其 中 满 文 文 献 读 不 懂, 其 实 是 达 呼 尔 文 文 献 因 其 与 满 文 文 献 差 距 不 大, 且 数 量 有 限 因 而 没 有 引 起 注 意 在 达 斡 尔 族 地 区 保 留 下 来 的 文 献, 其 实 多 为 满 文 文 献, 种 类 有 小 说 历 书 萨 满 神 本 等, 多 为 满 文 抄 本 另 莫 力 达 瓦 图 书 馆 档 案 馆 所 藏 的 清 代 档 案, 也 是 满 文 的 2011 年 国 家 古 籍 保 护 中 心 搞 了 一 次 满 文 文 献 的 调 研, 东 北 由 中 国 历 史 第 一 档 案 馆 满 文 处 处 长 吴 元 丰 先 生 负 责, 他 在 莫 力 达 瓦 见 到 了 一 份 1967 年 的 遗 书, 是 用 满 文 写 的, 可 以 证 明 在 1967 年 在 这 个 地 方 还 在 应 用 满 文 满 文 在 这 个 地 区 使 用 到 文 革 前, 其 实 很 正 常 呼 伦 贝 尔 地 区 进 入 民 国 以 后, 仍 沿 用 呼 伦 贝 尔 副 都 统 统 辖 现 在 留 下 两 部 满 文 呼 伦 贝 尔 副 都 统 衙 门 ( 衙 署 ) 档 案, 一 部 保 存 在 内 蒙 古 自 治 区 档 案 馆, 是 清 代 的 副 都 统 衙 门 档 案 另 一 部 保 存 在 呼 伦 贝 尔 市 档 案 馆, 是 民 国 时 期 呼 伦 贝 尔 副 都 统 衙 署 档, 这 批 满 文 档 案 截 止 时 间 为 1931 年, 即 建 伪 满 洲 国, 在 该 地 设 县, 取 消 副 都 统 衙 署 后 从 档 案 文 书 可 见, 该 地 区 在 1931 年 之 前, 应 用 的 文 字 是 满 文 30 余 年 后, 到 1967 年, 民 间 仍 有 利 用 满 文 的 情 况, 便 不 足 为 奇 了 此 乃 满 文 在 达 斡 尔 族 民 间 应 用 的 情 况 另 一 个 在 民 间 应 用 的 特 例, 当 属 新 疆 锡 伯 族 对 满 文 的 利 用 问 题 乾 隆 中 叶, 从 盛 京 驻 防 内 选 一 千 丁 锡 伯 人, 计 三 千 余 人 到 新 疆 伊 犁 去 驻 防, 这 批 人 到 驻 地 以 后, 过 着 纯 军 事 化 的 生 活, 对 外 相 对 封 闭, 所 以 保 留 了 乾 隆 年 间 的 满 语, 并 且 保 留 了 大 量 的 满 文 文 献 文 献 多 是 抄 写 的 小 说 和 历 书, 如 列 国 志 三 国 演 义 等, 甚 至 有 专 门 从 事 抄 写 之 人 我 见 到 许 多 毛 笔 的 抄 本, 满 文 写 得 非 常 漂 亮, 不 次 于 清 代 笔 帖 式 所 写 1947 年 有 几 位 锡 伯 学 者, 根 据 满 文, 修 改 了 几 个 满 文 字 母, 创 制 了 锡 伯 文 实 际 上 其 中 百 分 之 九 十 以 上 仍 然 是 满 文 字 母, 但 锡 伯 族 基 本 都 说 遗 留 下 来 的 文 献, 为 锡 伯 文 文 献 我 觉 得 应 以 1947 年 为 界 限, 1947 年 之 前 的, 应 该 为 满 文 文 献, 1947 年 创 制 锡 伯 文 后, 其 中 利 用 了 锡 伯 文 字 母 者, 方 可 称 为 锡 伯 文 献 其 实 此 问 题 没 有 争 论 的 必 要, 无 论 怎 么 说, 新 疆 的 锡 伯 族 - 63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保 留 了 满 语, 留 下 了 大 量 满 文 文 献, 甚 至 今 天 能 够 真 正 研 究 满 文 和 满 文 文 献 的 学 者, 锡 伯 族 居 多, 且 水 平 较 高, 因 而 在 利 用 满 语 文 保 护 满 语 文 方 面, 新 疆 的 锡 伯 族 功 不 可 没 此 外, 满 语 文 对 东 部 的 蒙 古 语 有 一 定 影 响, 在 科 尔 沁 昭 乌 达 的 蒙 语 里 边 有 好 多 满 语, 此 乃 受 满 蒙 通 婚 的 影 响 这 些 部 落 在 清 代 有 很 多 公 主 郡 主 嫁 到 那 里 嫁 过 来 的 时 候, 带 来 许 多 陪 嫁 人 到 蒙 古 地 区 后, 他 们 仍 用 满 语 交 流, 所 以 有 些 满 语 词 汇 就 融 到 蒙 语 之 中, 如 在 科 尔 沁, 他 把 孙 子 就 叫 omolo, 这 是 满 语 而 蒙 语 里 头 有 固 有 的 孙 子 这 个 词, 他 们 这 一 带 却 不 用 了, 而 在 西 部 却 仍 然 用 固 有 的 蒙 语 词 汇 此 类 词 汇 有 很 多, 抑 或 可 视 为 体 现 满 语 文 应 用 之 内 容 三 满 文 之 文 献 满 文 的 文 献, 大 体 可 分 为 书 籍 档 案 舆 图 谱 牒 碑 刻 木 牌 钱 币 等 类 的 文 献, 其 中 档 案 量 最 大, 书 籍 次 之, 其 余 存 量 比 较 小 目 前, 对 满 文 文 献 的 分 类 尚 未 统 一, 有 按 四 部 分 类 法 分 的, 也 有 按 种 类 分 的, 我 觉 得 目 录 为 对 文 献 整 理 和 利 用 的 工 具, 哪 种 方 法 都 可 以, 只 要 能 够 完 整 地 反 映 该 文 献 的 特 点 即 可 我 给 此 讲 坛 交 了 一 份 满 文 文 献 的 目 录, 是 按 我 编 写 的 中 国 民 族 历 史 文 献 学 的 四 部 编 排 方 法 作 的 但 从 我 多 年 讲 授 历 史 文 献 学 的 经 验 来 看, 四 库 全 书 的 经 史 子 集 的 分 类 法, 撰 写 书 籍 比 较 方 便, 且 分 类 清 晰, 而 要 用 此 法 讲 课, 因 全 是 书 目, 便 太 枯 燥 了 因 此, 今 天 我 们 以 种 类 分 类 法, 来 谈 满 文 文 献 问 题 1 满 文 书 籍 如 前 所 述, 满 文 因 为 是 清 代 的 国 语, 因 而 清 代 许 多 重 要 文 献, 都 有 满 文 本 此 类 满 文 文 献 既 有 刊 刻 本, 也 有 抄 本 和 写 本 ; 既 有 纯 满 文 的, 还 有 许 多 是 合 璧 的 或 者 是 多 种 文 字 混 合 的 ; 既 有 官 修 的, 也 有 私 撰 的 ; 既 有 用 满 文 原 创 的, 也 有 翻 译 的 可 谓 种 类 繁 多 内 容 广 泛 用 满 文 官 修 类 的 书 籍, 主 要 是 圣 训 实 录 政 书 方 略 等 类 的 书 籍 先 谈 实 录 : 中 国 封 建 王 朝 历 来 有 修 实 录 之 传 统, 可 惜 许 多 实 录 都 遗 失 了, 现 在 我 们 见 得 比 较 早 的 是 梁 武 帝 实 录 残 本 但 明 实 录 清 实 录 被 完 整 地 保 存 下 来 了, 成 为 研 究 明 清 史 的 重 要 史 料 修 实 录 之 传 统 为, 新 皇 继 位 以 后, 便 成 立 实 录 馆, 编 修 前 朝 圣 训 实 录 圣 训 乃 前 朝 皇 帝 对 某 些 问 题 的 训 谕, 实 录 馆 臣 现 将 所 有 圣 训 辑 录 起 来, 择 选 其 中 哪 些 内 容 可 以 入 实 录, 因 而 实 录 是 以 圣 训 为 纲 时 间 为 目 编 排 的 满 文 实 录 为 yargiyan kooli, 乃 实 实 - 64 -

满 文 及 满 文 文 献 在 在 的, 确 确 实 实 的 例 的 意 思, 这 才 是 实 录 的 真 正 含 义, 因 而, 修 实 录 实 际 是 在 修 例, 修 撰 完 毕 皇 帝 钦 定 后, 并 不 公 诸 于 世, 而 是 储 于 皇 史 宬, 留 作 后 世 子 孙 执 政 参 考 所 以 大 家 要 注 意, 修 实 录 不 是 修 史, 而 是 在 修 例 但 在 某 个 王 朝 灭 亡 后, 其 实 录 或 被 焚 毁, 或 被 流 传 之 坊 间, 后 世 之 人 因 其 史 料 价 值 颇 高, 便 将 其 作 为 史 书 了 在 目 录 分 类 上 亦 不 将 其 列 入 史 部 政 书 类, 而 是 列 入 编 年 类 清 代 的 实 录 用 满 蒙 汉 三 种 文 字 抄 写, 因 而 各 有 满 文 本 汉 文 本 和 蒙 文 本 到 目 前 为 止, 三 种 文 字 的 文 本 如 何 成 书 的 问 题, 尚 有 争 论 或 言 先 修 了 满 文 本, 再 把 它 译 成 汉 文 本, 亦 有 言 先 修 汉 文 本 再 译 满 文 本 者, 没 有 争 议 的 是 蒙 文 本 肯 定 是 从 满 文 本 翻 译 的 我 个 人 的 意 见 是, 从 实 录 馆 臣 组 成 和 所 引 用 的 满 文 汉 文 资 料 来 看, 满 文 本 汉 文 本 是 同 时 修 纂 的, 负 责 满 文 本 和 汉 文 本 的 馆 臣, 都 在 实 录 馆 总 纂 领 导 下, 他 们 在 利 用 满 文 汉 文 资 料 时, 是 彼 此 沟 通 及 时 翻 译 并 确 定 选 用 的 从 内 容 上 看, 前 三 朝 的 实 录, 可 能 倚 重 满 文 资 料 更 多, 汉 文 实 录 内 保 有 满 文 文 献 的 痕 迹 更 多 些 而 已 顺 便 说 一 句, 这 也 是 一 个 很 好 的 博 士 论 文 题 目, 可 以 将 满 汉 文 本 对 照, 来 研 究 实 录 的 内 容 及 其 编 纂 问 题, 不 过 这 个 题 目 更 难, 因 为 必 须 要 找 到 前 三 朝 实 录 的 初 编 本, 不 能 用 乾 隆 年 间 的 修 订 本, 即 我 们 现 在 常 见 的 版 本, 另 外 还 要 以 原 始 档 案 为 辅 助 资 料 即 需 要 有 历 史 功 底, 还 要 具 备 满 文 汉 文 的 校 勘 学 功 底 不 知 将 来 有 哪 位 学 人, 知 难 而 上 另 外 会 典 还 有 各 种 则 例, 都 是 规 定 国 家 典 政 朝 纲 及 各 部 办 事 章 程, 无 疑 都 要 用 国 语 来 书 写, 因 而 都 有 满 文 本, 但 会 典 则 例, 基 本 都 有 汉 文 本, 概 因 实 施 者 和 实 施 对 象 多 为 汉 人 所 致 也 有 几 部 是 纯 满 文 的, 而 没 有 汉 文 的, 如 我 们 翻 译 的 钦 定 拣 放 佐 领 则 例, 藏 于 国 家 图 书 馆, 是 一 个 孤 本, 纯 满 文 的, 内 容 是 补 放 勋 旧 佐 领 和 世 管 佐 领, 解 决 这 些 佐 领 承 袭 问 题 的 其 内 容 不 涉 及 八 旗 蒙 古, 也 不 涉 及 八 旗 汉 军, 仅 涉 及 满 洲 内 的 部 分 佐 领, 因 而 没 有 必 要 翻 译 成 汉 文 或 蒙 古 文, 有 满 文 本 即 足 可 应 用 了 满 文 书 籍 除 官 修 者 外, 亦 有 一 部 分 为 私 撰 的, 如 随 军 纪 行 官 便 漫 游 录 异 域 录 百 二 老 人 语 录 闲 窗 录 梦 等, 数 量 不 多, 但 都 很 珍 贵 异 域 录 的 汉 文 本 很 通 行, 但 它 肯 定 是 先 有 满 文 刊 本, 后 来 才 很 快 就 有 了 汉 文 本 满 文 本 很 少, 现 在 能 见 到 的 仅 在 北 大 图 书 馆 有 一 部 刻 本, 刻 得 很 漂 亮 名 称 不 叫 异 域 录, 满 文 的 意 思 是 出 使 各 国 记 该 书 在 二 战 之 前, 日 本 学 者 今 西 春 秋 介 绍 过, 说 在 北 京 大 学 图 书 馆 藏 有 此 书, 后 来 一 直 没 找 着, 前 两 年 才 找 到 并 确 认 台 湾 故 宫 博 物 院 庄 吉 发 先 生 是 根 据 北 大 的 版 本, 作 了 异 域 录 的 译 注, 使 我 们 大 家 今 天 都 能 够 见 到 该 书 了 前 几 年, 中 国 第 一 历 史 档 案 馆 的 郭 美 兰 研 究 员 发 现 了 此 次 出 使 后, 正 使 殷 扎 纳 上 了 一 个 奏 折, 就 是 汇 报 该 次 出 使 的 折 子, 这 个 折 子 非 常 长, 全 是 满 文 的, 内 容 占 异 域 录 ( 出 使 各 国 记 ) 的 一 半 左 右, 和 异 域 录 对 比, 发 现 主 要 的 事 和 这 个 异 域 录 记 - 65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载 一 样, 其 中 的 许 多 琐 事 被 删 节 了, 因 此 可 以 说 殷 扎 拉 的 奏 折 与 异 域 录 密 切 相 关, 其 先 有 满 文 本 便 毫 无 疑 问 了 将 殷 扎 拉 奏 折 和 异 域 录 作 比 较 研 究, 也 是 一 个 非 常 好 的 课 题 百 二 老 人 语 录 是 乾 嘉 时 期 的 重 臣 松 筠 写 的 满 文 著 作, 其 以 讲 故 事 的 方 式 书 写, 但 其 中 体 现 出 了 旗 人 社 会 生 活 和 思 想 文 化 等 深 层 次 的 东 西 比 较 多, 目 前 在 日 本 对 此 书 颇 为 重 视, 中 见 立 夫 教 授 也 作 了 许 多 相 关 研 究, 但 仍 有 研 究 的 余 地 该 书 与 嘉 庆 年 间 由 松 筠 同 旗 的 富 俊 译 成 了 汉 文 所 以 我 们 见 到 的 既 有 满 文 本, 又 有 满 汉 合 璧 本, 但 该 书 原 本 为 满 文 本 因 该 书 既 有 满 文 本, 又 有 满 汉 合 璧 本, 又 以 讲 故 事 的 方 式 书 写, 容 易 理 解, 且 单 词 量 比 较 大, 所 以 我 让 学 生 们 学 习 满 文 时, 就 读 该 书 还 有 闲 窗 录 梦, 该 书 是 一 部 满 文 日 记 孤 本, 现 在 藏 于 日 本 大 阪 大 学 箕 面 图 书 馆, 我 们 将 该 书 整 理 翻 译 出 版 了 该 书 的 作 者 一 直 被 认 为 是 大 学 士 松 筠, 但 我 们 在 翻 译 时 发 现 作 者 的 生 活, 与 大 学 生 松 筠 的 生 活 毫 不 相 干, 里 边 记 载 的 全 是 老 北 京 的 普 通 生 活, 所 以 否 定 其 为 大 学 生 松 筠 日 记, 而 是 号 为 松 筠 的 六 品 包 衣 达 穆 齐 贤 的 日 记 其 所 记 值 班 会 友 喝 茶 聊 天 购 物 饮 食 及 处 理 婚 丧 嫁 娶 等 内 容, 对 研 究 清 代 北 京 社 会 史 和 老 北 京 的 生 活 风 俗 等, 价 值 很 高, 因 而 引 起 研 究 北 京 社 会 史 的 许 多 学 者 的 关 注 因 时 间 关 系, 就 不 对 其 他 书 籍 做 一 一 介 绍 了 下 面 简 单 介 绍 一 下 在 满 文 文 献 中 占 多 数 的 翻 译 文 献 翻 译 类 文 献 主 要 是 从 汉 文 藏 文 西 文 等 翻 译 过 来 的 文 献 从 汉 文 翻 译 过 来 的 文 献, 多 为 经 学 史 学 文 学 及 兵 书 医 书 历 书 等 类 的 书 籍 清 代 对 四 书 五 经 及 相 关 经 书 的 翻 译, 非 常 精 准, 可 以 作 考 据 校 勘 的 依 据 尤 其 在 经 意 的 解 释 方 面, 因 为 满 文 没 有 文 言 文, 比 较 容 易 理 解, 所 以 西 方 比 较 早 研 究 满 文 的 是 德 国 人 我 们 知 道, 德 国 的 哲 学 很 发 达, 他 们 比 较 注 重 理 性 思 维 的 民 族, 对 其 他 民 族 的 哲 学 著 作 具 有 兴 趣 但 他 们 得 到 四 书 五 经 后, 因 汉 文 深 奥, 难 以 释 解, 当 发 现 满 文 本 的 特 点 后, 就 开 始 研 究 满 文, 以 求 甚 解 当 时 的 满 文 译 本, 最 能 体 现 清 代 的 文 字 训 诂 水 平, 对 经 意 的 解 释 最 为 精 到, 因 而 满 文 本 的 四 书 五 经 在 释 读 经 意 方 面 亦 具 有 重 要 价 值 另 外 满 文 大 藏 经 的 译 本, 也 是 从 汉 文 大 藏 经 翻 译 过 来 的 这 个 问 题 知 之 者 甚 少, 都 认 为 翻 译 满 文 大 藏 经 时, 蒙 文 大 藏 经 已 经 早 就 刊 印, 蒙 文 满 文 相 似 处 多, 应 该 底 本 为 蒙 文 本 而 实 际 上, 乾 隆 认 为 蒙 文 本 中 问 题 太 多, 翻 译 不 精, 经 意 翻 译 不 及 汉 文 本, 故 让 三 世 章 嘉 呼 图 克 图 主 持 翻 译 满 文 大 藏 经 时, 根 据 汉 文 本 翻 译 当 然, 翻 译 者 多 精 通 蒙 古 文 或 藏 文, 翻 译 时 可 能 参 考 了 蒙 文 本 或 藏 文 本, 但 底 本 是 汉 文 本 对 史 学 著 作 的 翻 译 比 较 早, 入 关 前, 就 翻 译 金 史 和 辽 史, 顺 治 三 年 分 别 刊 刻, 刻 本 非 常 大 气, 漂 亮 入 关 后, 翻 译 的 史 学 著 作 更 多, 如 资 治 通 鉴 通 鉴 通 鉴 纲 目 等 这 些 满 文 本 的 史 书, 注 意 其 原 刻 本 和 翻 刻 本 - 66 -

满 文 及 满 文 文 献 文 学 类 的 著 作 也 在 入 关 前 就 开 始 翻 译, 如 三 国 演 义 等, 入 关 后 翻 译 的 小 说 更 多, 如 列 国 传 西 汉 演 义 隋 唐 演 义 封 神 演 义 西 游 记 水 浒 传 金 瓶 梅 西 厢 记 等 近 百 种 我 们 在 新 疆 察 布 查 尔 调 查 的 时 候, 发 现 许 多 锡 伯 族 家 里 都 保 存 着 祖 上 传 下 来 的 抄 写 的 小 说 他 们 祖 上 过 着 军 营 生 活, 到 晚 上, 许 多 家 人 或 者 邻 居 们 聚 在 一 起 来 听 书, 即 是 娱 乐, 亦 寓 教 化 子 弟 忠 义 礼 智 信 的 思 想 于 其 中 念 书 的 人 连 说 带 唱, 这 是 秉 承 北 方 游 牧 民 族 和 渔 猎 民 族 的 说 唱 艺 术, 所 以 许 多 人 家 都 抄 写 三 国 演 义 等 小 说, 有 的 抄 得 非 常 漂 亮 甚 至 有 人 专 门 以 抄 书 为 业 我 们 调 查 其 中 一 户, 发 现 他 家 的 列 国 志 的 抄 本 非 常 好 主 人 告 诉 我 们 说, 这 是 他 爷 爷 给 抄 书 人 做 了 一 套 车 换 来 的, 可 见 普 通 人 家 亦 设 法 抄 书, 因 此 在 察 布 查 尔 锡 伯 自 治 县 等 地, 虽 然 文 革 中 烧 毁 很 多, 但 至 今 保 留 着 大 量 满 文 本 的 古 典 小 说 翻 译 的 满 文 本 兵 书 主 要 有 孙 子 兵 法 孙 吴 子 兵 法 黄 石 公 素 书 六 韬 三 略 武 侯 心 书 射 的 说 等 医 书 主 要 为 难 经 脉 论 药 性 赋 天 花 探 源 妇 科 疗 法 热 疹 治 疗 等 另 外 还 有 一 些 从 西 文 翻 译 的 著 作, 如 新 约 圣 书 基 督 生 平 教 义 问 答 及 骼 体 全 录 几 何 原 本 等 另 外 一 类 不 能 忽 略 的 书 籍 是 满 文 的 字 辞 书, 其 种 类 繁 多, 涵 盖 字 辞 书 的 各 个 方 面, 数 量 在 满 文 书 籍 的 五 分 之 一 左 右, 且 不 仅 仅 为 两 种 文 字 之 互 释, 尚 有 三 种 四 种 五 种 文 字 互 解 者, 在 世 界 字 辞 书 中 亦 属 罕 见 现 在 一 些 学 者 对 满 文 字 辞 书 进 行 研 究, 如 江 桥 对 御 制 清 文 鉴 和 满 蒙 汉 三 体 清 文 鉴 的 研 究, 春 花 所 著 清 代 满 蒙 文 辞 典 研 究, 及 季 永 海 和 希 格 塔 依 尔 江 等 人 的 研 究 成 果 另 外 日 本 韩 国 对 满 文 字 辞 书 的 研 究 也 值 得 注 意, 他 们 主 要 利 用 电 脑 设 备, 对 满 文 字 辞 书 进 行 信 息 化 处 理 编 程 并 制 作 全 文 检 索 平 台 总 体 来 说, 我 们 对 满 文 字 辞 书 的 整 理 利 用 的 还 不 够 深 入 全 面, 近 百 年 来, 国 内 外 编 纂 了 一 些 新 的 满 文 辞 典, 利 于 应 用, 其 内 容 基 本 都 是 依 据 清 代 的 部 分 相 关 字 辞 书 编 写 的, 内 容 仅 涉 及 满 汉 汉 满 互 释, 远 不 如 清 代 字 辞 书 种 类 多 我 不 是 说 现 代 编 的 辞 典 不 好, 但 还 是 劝 大 家 接 触 一 些 清 代 编 订 的 字 辞 书, 会 更 开 眼 界 关 于 满 文 书 籍, 最 后 要 说 一 说 多 种 文 字 合 璧 文 献 的 划 分 问 题 现 在 民 族 文 献 划 分 比 较 混 乱, 没 有 一 个 具 体 规 定, 所 以 多 种 文 字 的 民 族 文 献, 便 会 在 不 同 语 种 内 重 复 编 目, 如 御 制 满 蒙 文 鉴, 即 属 于 满 文 文 献 亦 被 列 入 蒙 文 文 献 之 中 但 也 有 的 地 区, 把 满 蒙 文 合 璧 的 文 献, 仅 列 入 蒙 古 文 文 献 中 清 代 的 合 璧 文 献 非 常 多, 满 汉 蒙 藏 维 托 忒 文 合 璧 的 字 辞 书 多, 其 中 一 般 - 67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书 籍 中 夹 杂 满 文 者 也 不 少, 如 蒙 文 中 夹 杂 着 满 文 甚 至 汉 文 书 籍 内 满 文 夹 杂 满 文 的 也 有 我 觉 得 这 类 书 籍, 应 该 各 种 文 字 的 文 献 内 分 别 著 录, 才 能 体 现 此 文 献 的 特 征, 若 仅 著 录 其 一, 便 与 其 他 书 籍 没 有 区 别 了 举 个 例 子, 我 在 中 国 科 学 院 图 书 馆, 见 到 一 部 满 文 文 献, 名 为 赫 舍 里 氏 家 祭 条 规, 但 里 边 只 有 一 个 满 文 词 萨 满 (saman), 还 少 一 个 牙 儿, 写 成 sama 了 他 们 将 其 列 为 满 文 文 献, 我 觉 得 可 以, 虽 然 有 一 个 满 文 词, 还 写 错 了, 但 能 体 现 该 文 献 的 满 族 内 容 2 满 文 档 案 清 代 及 民 国 留 下 来 的 满 文 档 案 数 量 较 大, 现 在 尚 未 完 全 整 理 著 录, 所 以 估 计 约 有 一 千 多 万 件, 分 为 内 阁 军 机 处 内 务 府 宗 人 府 宫 中 盛 京 内 务 府 八 旗 都 统 衙 门 黑 龙 江 将 军 衙 门 宁 古 塔 副 都 统 衙 门 三 姓 副 都 统 衙 门 呼 伦 贝 尔 总 管 衙 门 归 化 城 副 都 统 衙 门 阿 拉 善 旗 扎 萨 克 衙 门 等 全 宗, 主 要 由 皇 帝 颁 发 的 制 诏 诰 敕 谕 旨 寄 信, 臣 工 进 呈 的 题 本 奏 折 揭 帖 表 笺 启, 各 衙 门 间 往 来 之 咨 文 移 会 照 会 札 付 交 片 牌 文 咨 呈 呈 文 申 文 关 文 详 文 原 件 或 录 副 等 组 成, 除 藏 于 中 国 第 一 历 史 档 案 馆 者 外, 主 要 藏 于 北 京 辽 宁 黑 龙 江 内 蒙 古 吉 林 西 藏 新 疆 台 湾 等 地 的 档 案 馆 和 图 书 馆 博 物 馆, 以 及 国 外 的 部 分 图 书 馆 等 满 文 档 案 除 上 述 文 种 之 原 件 外, 另 按 种 类 编 成 各 类 档 册, 如 内 阁 之 黄 册 史 书 秘 本 档 清 折 档 票 签 档 秘 书 院 档 国 史 院 档 蒙 古 堂 档 等 ; 军 机 处 之 月 折 档 月 折 包 上 谕 档 议 覆 档 准 噶 尔 档 夷 使 档 熬 茶 档 北 路 军 务 档 土 尔 扈 特 档 西 藏 档 巴 布 勒 档 廓 尔 喀 档 金 川 档 俄 罗 斯 档 班 禅 事 件 档 年 班 进 京 回 番 档 等, 内 务 府 之 奏 销 档 上 传 档 行 文 档 来 文 档 红 本 档 消 费 档 钱 粮 册 等 专 档, 分 别 成 册, 记 录 专 题, 是 研 究 各 类 专 题 的 重 要 档 案 资 料 目 前, 利 用 奏 折 题 本 谕 旨 寄 信 等 者 较 多, 而 利 用 档 薄 者 少, 应 该 注 意 这 部 分 特 殊 的 档 案 因 时 间 有 限, 所 以 对 满 文 档 案 的 分 类 和 整 理 等 问 题, 我 就 不 在 此 细 讲 了 中 国 第 一 历 史 档 案 馆 的 吴 元 丰 先 生 对 这 个 问 题 比 较 熟 悉, 将 来 请 他 来 作 讲 座, 他 会 给 大 家 细 讲 关 于 满 文 档 案 的 价 值, 现 在 大 家 日 益 发 现 其 在 研 究 清 史 民 族 史 方 面 的 重 要 性 前 面 提 到 的 满 文 书 籍, 许 多 有 汉 文 本, 所 以 我 们 现 在 所 说 研 究 清 史 要 利 用 满 文 资 料, 实 际 多 指 要 利 用 满 文 档 案 能 够 翻 译 利 用 满 文 档 案, 你 就 不 会 为 没 有 论 题 缺 少 资 料 发 愁, 而 且 对 一 些 问 题 的 认 识, 也 会 有 所 创 新 3 满 文 舆 图 舆 图 包 括 天 文 舆 地 江 海 河 道 武 功 巡 幸 名 胜 寺 庙 山 陵 风 水 等 类 - 68 -

满 文 及 满 文 文 献 之 图, 故 舆 图 种 类 很 多, 非 仅 为 今 天 的 地 图 清 代 很 注 重 舆 图, 所 以 清 代 的 舆 图 发 展 可 以 说 在 古 代 达 到 鼎 盛 期 尤 其 是 康 熙 皇 帝, 他 很 注 重 西 方 的 算 学, 向 传 教 士 学 习 算 学 和 测 量 学 康 熙 走 到 哪 儿, 他 自 己 都 要 测 当 地 子 午 线, 并 开 始 尝 试 以 经 度 纬 度 来 制 作 舆 图, 和 原 来 凭 着 奏 报 所 画 的 示 意 形 势 图 不 同, 清 代 的 舆 图 更 为 精 确 了 在 中 国 第 一 历 史 档 案 馆 藏 着 一 幅 大 明 混 一 图, 是 满 文 的, 大 家 会 奇 怪, 大 明 朝 的 图, 怎 么 会 是 满 文 的 呢? 因 为 清 朝 人 很 注 重 这 幅 舆 图, 所 以 把 明 朝 留 下 这 张 图 的 汉 文 地 名, 都 用 满 文 的 字 签 贴 上, 所 以 这 幅 舆 图 便 成 了 满 文 地 图 这 幅 图 很 知 名, 一 直 画 到 非 洲, 所 以 许 多 非 洲 国 家 领 导 人 来 了 后, 许 多 人 都 要 看 看 这 幅 图, 因 为 在 他 们 的 那 个 历 史 时 期, 尚 没 有 自 己 的 舆 图 但 这 幅 图 是 一 幅 示 意 性 的 概 念 图, 方 位 尚 准, 面 积 偏 差 过 大, 海 南 岛 的 面 积 是 台 湾 岛 的 两 三 倍 大, 可 见 其 不 够 准 确, 连 细 谷 良 夫 先 生 家 里 藏 的 大 明 地 理 图 都 不 如 更 难 以 和 清 代 的 舆 图 相 比 清 代 所 绘 的 舆 图, 长 城 以 外 的 地 名, 基 本 都 是 用 满 文 标 注 的, 一 幅 图 中, 南 部 用 汉 文, 北 部 用 满 文, 这 也 是 清 代 舆 图 的 特 色 但 北 部 的 局 部 图, 都 是 用 满 文 标 注 的, 即 满 文 舆 图, 这 类 图 非 常 多, 现 在 主 要 藏 于 第 一 历 史 档 案 馆 国 家 图 书 馆 及 台 湾 故 宫 博 物 院 等 处, 可 惜 我 们 国 内 的 舆 图, 密 不 示 人, 难 以 利 用, 因 此, 我 们 国 内 的 满 文 舆 图 研 究 成 果 非 常 少 近 年 来, 在 日 本 的 承 志 先 生 在 研 究 满 文 舆 图, 写 了 几 篇 好 论 文, 他 的 研 究 方 法 值 得 借 鉴 另 外 如 热 河 行 宫 图 班 禅 行 帐 图 等, 均 以 满 文 签 注, 可 谓 另 类 满 文 图, 这 类 行 帐 图 现 在 也 留 存 许 多 4 满 文 谱 牒 满 洲 人 注 重 家 谱 同 汉 族 一 样, 与 敬 祖 有 关, 亦 与 各 家 世 袭 继 承 披 甲, 领 取 钱 粮, 明 确 继 承 资 格 相 连, 此 为 该 族 家 谱 之 特 殊 之 处 满 族 的 家 谱 现 在 留 存 很 多, 既 有 宗 谱, 亦 有 支 谱 ; 既 有 谱 书, 亦 有 谱 单, 既 有 满 文 的, 亦 有 满 汉 合 璧 或 汉 文 的 因 文 革 破 四 旧 的 影 响, 现 存 于 家 族 内 满 文 的 家 谱 较 少, 多 是 最 近 以 汉 文 编 修 的, 但 亦 有 一 些 满 文 的 谱 单, 在 民 间 得 到 很 好 的 保 存 满 文 家 谱 多 收 藏 于 国 内 外 的 图 书 馆 博 物 馆 内, 或 大 学 研 究 所 内, 如 吉 林 师 范 大 学 之 八 旗 谱 牒 馆 等 收 藏 于 个 别 学 者 手 中 者, 也 有 一 定 数 量, 但 满 文 者 不 多, 且 多 为 复 制 本 现 在 保 存 最 好 的 满 族 家 谱, 当 属 宗 人 府 修 的 玉 牒, 有 满 文 的, 也 有 汉 文 的, 乃 爱 新 觉 罗 家 族 的 之 谱 书 玉 牒 隔 九 年 修 一 次, 清 代 总 共 修 了 二 十 八 次, 每 次 缮 写 大 小 各 三 部, 分 藏 于 皇 史 宬 宗 人 府 和 礼 部 ( 乾 隆 八 年 规 定 存 礼 部 者 送 盛 京 敬 典 阁 ), 现 在 藏 于 第 一 历 史 档 案 馆 和 辽 宁 省 档 案 馆, 乃 研 究 清 皇 族 的 重 要 资 料, 杜 家 骥 赖 慧 敏 郭 松 义 鞠 德 源 等 先 生 据 此 作 了 许 多 相 关 研 究, 可 以 借 鉴 另 嘉 庆 二 十 二 年 后 缮 写 星 源 集 庆, 乃 宗 人 府 进 呈 的 黄 册 红 册 汇 编, 可 视 作 另 一 种 皇 家 谱 书 - 69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清 代 乾 隆 年 间, 曾 修 佐 领 家 谱, 于 我 前 面 提 到 的 钦 定 拣 放 佐 领 则 例 有 关, 乃 为 勋 旧 世 管 佐 领 承 袭 相 关, 故 此 佐 领 家 谱 亦 称 世 袭 谱 除 这 两 类 谱 书 为 官 修 者 外, 满 族 的 谱 书 都 由 各 家 族 编 修 汉 族 有 隔 六 十 年 续 修 谱 书 龙 虎 年 修 谱 单 之 俗, 满 族 也 有 于 龙 虎 年 修 谱 的 习 惯 但 从 现 存 谱 书 谱 单 来 看, 亦 非 皆 为 龙 虎 年 编 修 者, 所 以, 满 族 并 非 谨 遵 龙 虎 年 修 谱 之 俗 关 于 家 谱 的 史 料 价 值, 近 年 来 愈 来 愈 为 史 家 倚 重 其 乃 研 究 家 族 史 人 口 史 经 济 史 社 会 史 移 民 史 等 的 重 要 资 料 我 们 国 内 有 几 篇 研 究 满 文 家 谱 的 论 文, 但 总 体 来 看, 利 用 满 文 家 谱 研 究 满 族 史, 尚 嫌 不 足, 可 以 进 一 步 发 掘 利 用 最 近 美 国 的 清 史 学 者 开 发 出 了 谱 牒 册 籍 分 析 软 件, 输 入 部 分 类 似 的 家 谱, 就 可 以 分 析 出 各 方 面 的 数 据, 我 觉 得 家 谱 中 心 具 备 利 用 这 种 软 件 研 究 的 前 提 条 件 5 满 文 碑 刻 满 文 碑 刻 和 拓 片 非 常 多, 但 纯 满 文 的 不 多 多 数 都 是 满 汉 合 璧 满 蒙 合 璧 的, 或 者 满 蒙 汉 藏 等 合 璧 的, 甚 至 有 满 蒙 汉 藏 托 忒 维 吾 尔 文 合 璧 的 下 马 碑 文 清 代 留 下 来 满 文 碑 刻, 多 是 记 功 碑 功 德 碑 谕 祭 碑 下 马 碑 等, 其 中 满 族 大 臣 之 功 德 碑 谕 祭 碑 等 于 清 代 赐 谥 丧 葬 制 度 有 关 最 近 辽 宁 民 族 出 版 社 准 备 出 版 李 林 先 生 收 集 的 满 族 碑 石 刻, 应 该 是 搜 集 满 文 碑 刻 较 全 的 书 6 满 文 木 牌 最 后 简 单 介 绍 一 下 满 文 的 木 牌 女 真 人 有 记 档 传 统, 但 因 缺 少 纸 张, 故 多 写 于 木 牌 之 上 直 至 皇 太 极 时 期, 虽 有 纸 张 但 为 便 于 传 递, 仍 有 于 木 牌 上 记 事 之 情 况, 至 顺 治 二 年, 方 降 谕 停 木 牌 记 事 木 牌 乃 随 时 削 木 而 成, 不 加 涂 饰, 形 式 各 异, 有 的 削 制 成 薄 片, 两 面 记 事 ; 有 的 削 制 成 长 方 体, 四 面 记 事 长 短 宽 窄 亦 不 尽 相 同, 大 者 长 约 30 厘 米, 宽 约 4 厘 米 ; 小 者 长 约 17 厘 米, 宽 约 2 厘 米 木 牌 一 端 有 一 小 孔, 用 以 编 缀 成 册, 便 于 传 递 与 保 存 清 杨 宾 著 柳 边 纪 略 记 载 : 边 外 文 字 多 书 于 木, 往 来 传 递 者 曰 牌 子, 以 削 木 若 牌 故 也, 存 贮 年 久 者 曰 档 子, 以 积 累 多 贯 皮 条 挂 壁 若 档 故 也 然 今 文 字 之 书 于 纸 者, 亦 呼 为 牌 子 档 子 矣, 据 此 可 以 明 确 满 文 dangse 之 来 源 现 存 于 中 国 第 一 历 史 档 案 馆 的 满 文 木 牌 共 28 支 其 中 26 支 为 原 北 平 故 宫 博 物 院 文 献 馆 于 1935 年 整 理 清 内 阁 大 库 档 案 时 所 发 现, 另 2 支 是 1979 年 北 京 故 宫 博 物 院 明 清 档 案 部 ( 即 今 中 国 第 一 历 史 档 案 馆 ) 清 理 内 阁 杂 档 时 发 现 的 这 些 满 文 木 牌 乃 清 武 英 郡 王 阿 济 格 军 中 遗 物, 用 新 老 满 文 交 替 阶 段 的 满 文 记 事, 记 载 了 阿 济 格 于 崇 德 元 年 (1636 年 ) 率 八 - 70 -

满文及满文文献 旗兵进入关内, 在北京周围各地与明兵作战, 攻克城堡和俘获什物数目, 以及统兵之王 贝勒下达的命令等 7 满文钱币 入关前有满文abkai fulingga han jiha(天命汗钱)和sūre han ni jiha(天聪汗钱)1), 入关 后, 不再用满文年号, 仅在背面用满文标注鼓铸之处, 如boo ciowan(宝泉) boo yuwan(宝 源) guwang(广) gui(桂) yuwan(原) tai(台) dung(东)等 概钱币通行全国, 经济发 达之汉地识满文者有限, 故采取此既不误通行, 有可体现国语之标注方法 8 满文印信 满文作为国文, 当然要体现于象征国家 地方军政大权的印信之中 清代之印, 有 玺 印 关防 图记 条记 钤记等类, 以形状 质地 印纽等区分, 级别各有不同 印文有单为满文者, 亦多合璧者 乾隆十三年发明满文篆体之后, 印信之满文多为篆体, 亦有非篆体者 9 满文额匾 在皇宫 园苑 坛庙及藏传佛教寺院的匾额, 基本有满文, 多为合璧者, 或满汉合 璧 或满蒙合璧 或满蒙藏合璧等 许多匾额, 在民国年间被更换, 如故宫前殿之匾额, 均为汉文者, 而后宫之匾额仍为满汉合璧者, 后者乃因溥仪仍居之, 而未得换也 以上拉拉杂杂对满文创制与改进 满文的作用 满文的文献方面进行了简单的介 绍 满文文献存量较大, 且涉及社会政治 经济 文化 军事等各个方面, 难免挂一漏 万, 惟希望各界注意加强对满文文献的整理和保护, 既嘉惠学人, 亦可使这类珍贵文献得 到完善保存 1) 崇德年间本无铸钱记载, 然近来东北出现满汉文 崇德通宝, 其满文不能释读, 系伪造无疑 - 71 -

対外政策に関する言説のあり方に見る清朝中期の 国家秩序観 村上信明 MURAKAMI, Nobuaki(創価大学) はじめに 1. 乾隆期の漢文檔案 満文檔案に見られる 叙述の特徴 2. 文書を介さない政治的コミュニケーション 3. 政治的言説が文書に残ることの意味 熱河日記 の記述から おわりに はじめに 清朝は, 北東アジアに住むツングース系の満洲人により建国され, 17世紀中葉からマ ンチュリア(現在の中国東北部) 中国内地 モンゴル 青海 チベット 東トルキスタ ン(新疆)へと勢力を拡大し, 20世紀初頭までこれらの地域を支配した王朝である 清朝 の皇帝は, 満洲人(旗人)社会の長(ハン), 儒教的徳治を体現する中華皇帝(天子), モンゴ ル遊牧社会のリーダー兼チベット仏教の守護者(文殊師利菩薩)としての性質を兼ね備え た存在であり 岡2003: 52-53, それぞれの社会に応じて異なる秩序体系を構築して いった その秩序体系を理解しようとするうえで筆者が注目するのが, 満文と漢文の檔 案(公文書)中に見える政治的言説のあり方である 清朝中期の檔案は主に満文と漢文で書かれ, ト 青海 新疆)に関する案件で, 前者は八旗及び藩部(モンゴル チベッ 後者は中華世界に関する案件で使用されることが多 かった 両言語の公文書の間には, 書かれる内容やその中に包含されている価値観にか なりの違いが見られる また清朝では, 文書を介さない, 口頭での政治的コミュニケー ションも行われた 皇帝が官僚と直接面会して下す 面諭 はその一例である 公文書の記述には, 往々にして国家の公的立場や価値観が反映され, その作成過程で は様々な作為がほどこされる 清朝の満文 漢文檔案も一定の規範や秩序観に基づいて 書かれており, その作成過程において事実の隠蔽や歪曲が行われた 本稿では, 乾隆期 の対外政策(外藩 外国に対する政策)に関する満文 漢文檔案の内容を分析し, その中 に見える政治的言説のあり方と, その背後にある当時の清朝の国家秩序観を考察する - 73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1. 乾隆期の漢文檔案 満文檔案に見られる叙述の特徴 1-1. 漢文檔案の事例 先行研究では, 乾隆期の対外政策に関する檔案に関して, 清朝と関係を取り結ぶ諸勢 力の側の原文文書と清朝側の檔案の記載内容に大きな相違があったことが指摘されて いる 増田 1995 は, 1780年代に清朝とタイ(シャム)との間で交わされた表文の内容 を比較し, タイ側の表文(金葉表文)ではタイ国王が清朝皇帝と友好のよしみを結びたい と記されているのに対し, その漢訳と見られる清朝側の漢文表文ではタイ国王が臣下の 礼をとって朝貢使節を送り, 皇帝の恩を請う内容になっていたと述べている タイ国王 の表文は, 広州で漢文に翻訳されたと考えられるが, その際に清朝側は文意にも大幅に 変更を加えたのである また小沼 2014: 164-174 は, 18世紀中葉の清朝とカザフが, 満文檔案やトド文字(オイラート モンゴル語)の史料からは遊牧民社会に由来する属人 主義的関係, すなわち皇帝とカザフ首長層は エジェン(主人) と アルバト(兵役 貢賦 の負担者) の関係(エジェン アルバト関係)にあったことが読み取れるが, 漢文の明発 上諭ではカザフが 安南 琉球 暹羅の諸国 と同様に 羈縻 すべき対象として記され, 儒教的世界観に基づく宗藩関係が成立していたように見えると指摘する さらに坂野 正高によれば, 乾隆58年(1793)のイギリス使節マカートニー来訪時において乾隆帝がイ ギリス国王(ジョージ3世)に下した勅諭(漢文 満文 ラテン文)も, イギリス間の文書に 関しても, 漢文は華夷思想に基づいた内容であるのに対し, ラテン文訳は中華思想的表 現を和らげた内容になっていた 1) このほか対チベット政策に関しても, 乾隆45年(1780)の乾隆帝の七旬万寿節(70歳の誕 生日)に熱河(承徳)を訪れたパンチェンラマ3世が皇帝に準ずる存在として異例の厚遇を 受けたことがチベット文史料や満文檔案から見て取れるが 石濱2001: 334-350, 漢文 檔案からは読み取れず, むしろパンチェンラマを特別扱い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上諭ま で出されている 村上2006: 128-132 これらの事例が示すように, 乾隆期の漢文檔案 は華夷思想に基づいた世界秩序が成立しているという体裁で叙述されることになって おり, その逸脱は許されなかった 1) ジョージ マカートニー(坂野正高訳) 中国訪問使節日記 平凡社, 1975年, 328頁, 参照 - 74 -

対外政策に関する言説のあり方に見る清朝中期の国家秩序観 1-2. 満文檔案の事例 前節で挙げた事例はすべて漢文檔案に関するものであるが, それでは満文檔案はど うであったのだろうか 以下, その事例として清朝 チベット関係に関する満文檔案 と, 清朝 ロシア間で交わされた満文外交文書を取りあげ, その内容を検討していく 1-2-1. 清朝 チベット関係の満文檔案 清朝は ダライラマを頂点とするチベット政府と チベット仏教の論理に基づく関 係を結んでいたとされる 鈴木 1962: 30-35 は 清朝皇帝がチベットでは 文殊菩薩 の化身 と見なされ 清朝皇帝とダライラマが 施主 と 応供僧 という仏教的な対等の 関係にあったと述べている また石濱 2001: 353-355 は 17 18世紀には清朝がチ ベット モンゴルとチベット仏教の世界観 王権思想を共有し チベット仏教の論 理 価値観に基づく チベット仏教世界 を形成していたとしている こうした両者の関係がよく表れているのが, 前述のパンチェンラマ3世の熱河来訪時 における清朝の対応である 石濱 2001: 337-338 は, 乾隆帝がパンチェンに対して異 例ともいえる厚遇ぶりを示したことを指摘し, その一例として乾隆帝に対して一度も叩 頭を行なっていない(すなわち臣下の礼をとる必要がないと見なされていた)ことを挙げ ている この指摘は, パンチェンが跪こうとすると清朝の官僚がすぐに 助けて立たせ た(wakiyameilibuha) という記述が2)件の満文檔案の中に見出せることに依拠している が, この文言が満文檔案に記されるようになったのは, パンチェンが上諭を受け取る際 には跪く必要はなく, 応接担当の官僚はパンチェンを跪かせてはいけないという乾隆帝 の指示によるものであった 皇帝への謝恩は, 朝貢使節は無論のこと, 王公や大官で あっても跪いて行なう必要があったことを考えれば, この儀礼を免除されたパンチェン の破格の優遇ぶりが分かる この指示が出されて以降, 清朝側の官僚はパンチェンと 会ったことを報告する奏摺において, 跪こうとするパンチェンを立たせた様子について 記すようになった 乾隆45年(1780)7月16日, パンチェンに果物を届けた伍彌泰(Umitai)は, 満文奏摺に 主(皇帝)がパンチェンエルデニに賞賜する茘枝 西瓜 桃を, パンチェンエルデニの宿所 に持っていき賞賜するときに, パンチェンエルデニは座から降りて跪きたいというのに対 し, 奴才らは助けて立たせると, パンチェンエルデニは 合掌して受け取り 3) 2) 六世班禅朝觐檔案選編 92頁 乾隆44年8月26日 留保住への寄信上諭 参照 - 75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と記している この記載からは, 上述した石濱の指摘のように, パンチェンが皇帝に 準ずる存在として厚遇されていた様子が見て取れる しかし, このとき伍彌泰に同行し た庫使の智新(Jysin)は, 軍機大臣の福隆安(Fulunggan)に 自身は十五日にメイレン溝とい う駅站に到達し, 茘枝等の品を伍彌泰らに渡し, 伍彌泰らが自分をともなってパンチェ ンエルデニに叩見したとき4) と語っている かつて筆者が論じたように, 清朝の官僚 はポタラ宮でダライラマと会う際にチベット仏教の礼儀に基づいて叩頭を行なうこと になっており 村上2011a: 48-51, 伍彌泰がパンチェンと会う際にもチベット仏教の 礼儀に基づいて叩頭をしたと考えるのが妥当である したがって前掲の伍彌泰の奏摺 も, 実際の会見の様子を記したものではないと見なすべきである これと同様のことは, 同時期の駐蔵大臣の満文奏摺からも見て取れる 村上2011b: 6 35-636 乾隆40 50年代において, 駐蔵大臣はダライラマ パンチェンラマと会った 際の様子について次のように報告している 奴才博清額(Beqingge) 伊嚕勒図(Ilultu)は, 九月初七日に前蔵に到着し, 奴才恒瑞 (Hengrui) 奴才保泰(Bootai)とともにダライラマのもとに行き, ダライラマは座から下り て立ったまま, 奴才らは 主の諭旨をみなの前で下すよう読みました 金の曼荼羅 茶入 れ 緞子等の賞賜品を賞賜し, ダライラマは立ったままで合掌して受け取り, 告げたことに は 5) 奴才(慶麟)はただちに旨 カターを献げてタシルンポ寺に行き, 転世(フビルガン)(パン チェンラマ4世)に会い, カターを賞賜しにいくと, 転世は立ったまま笑顔で受け取りまし た 6) 3) 満文録副 2837-28(マイクロフィルム番号119-700)乾隆45年7月16日 伍彌泰奏 ahasi jai inenggi erde uthai ejen bancen erdeni de šangnara mase muyari dungga toro be bancen erdeni i tataha bade genefi šangname bure de bancen erdeni tehe baci wasifi niyakūraki serede ahasi wahiyame ilibufi giogin arame alime gaifi 4) 班禅檔 1740-39 乾隆45年7月17日 福隆安等奏 村上2011b: 632 ini beye tofohonde meiren geo sere dedun de isinafi mase muyari i jergi jaka be umitai sede bufi umitai se imbe gaifi bancen erdeni de hengkilehede. 5) 満文録副 2890-41(122-2596)乾隆46年9月12日 博清額奏 村上2011a: 54 aha becingge irultu uyun biyai ice nadan de julergi dzang de isinjifi. aha hengšui. aha bootai i sasa dalai lama i jakade genefi dalai lama teku ci wasifi ilihai ejen i hesei bithe be geren i juleri wasibume hūlafi šangnara aisin i manda dongmo suje jergi jaka be šangnafi dalai lama ilihai giogin arame alarangge. 6) 満文録副 3065-16(134-58) 乾隆50年3月初5日 慶麟奏 村上2011a: 49-50 aha uthai hese šufa be tukiyeme jasi lumbu juktehen de genefi hubilgan be acafi šufa šangnaha de genefi hubilgan ilihai injemeliyan i alime gaiha. - 76 -

対 外 政 策 に 関 する 言 説 のあり 方 に 見 る 清 朝 中 期 の 国 家 秩 序 観 これらの 満 文 奏 摺 には, いずれもダライラマ パンチェンラマが 立 ったまま 合 掌 して 乾 隆 帝 の 上 諭 賞 賜 品 を 受 け 取 ったと 記 されている これを 文 面 どおりに 解 釈 すれば, 清 朝 がダライラマ パンチェンラマに 対 しては 華 夷 秩 序 に 基 づく 儀 礼 を 強 制 せず, 上 諭 賞 賜 品 を 受 け 取 る 際 の 叩 頭 を 免 除 し, 皇 帝 に 準 ずる 存 在 として 優 遇 した, ということになる だろう しかし 嘉 慶 19 年 (1814) 閏 2 月, 乾 隆 58 年 (1793)から 嘉 慶 5 年 まで 駐 蔵 大 臣 をつとめ た 和 寧 は, 乾 隆 58 年 以 前 には 駐 蔵 大 臣 との 会 見 時 にダライラマが 座 から 下 りることは 決 し てなかったと 述 べている[ 村 上 2011b: 635-636] チベット 仏 教 の 高 僧 が 清 朝 の 官 僚 と 会 う 際 に 坐 ったままで 立 ち 上 がらないのが 通 例 であったことは, ポズドネエフが モンゴル とモンゴル 人 の 中 で, 1878 年 までモンゴルのジェブツンダンバホトクトが 庫 倫 辦 事 大 臣 と 会 見 する 際 に 高 座 から 離 れて 立 ち 上 がったことはない, と 記 していることからも 窺 い 知 れる[ 村 上 2011b: 636] しかし 上 述 した 駐 蔵 大 臣 の 満 文 奏 摺 には, いずれもダライラ マ パンチェンラマが 立 ったまま 上 諭 賞 賜 品 を 受 け 取 ったと 記 されている 皇 帝 の 代 理 である 駐 蔵 大 臣 が 立 っているなかでダライラマらが 坐 ったままとなれば, 皇 帝 よりも ダライラマのほうが 高 い 地 位 にあるということになってしまう そこで 駐 蔵 大 臣 は, ダラ イラマが( 実 際 には 坐 ったままであったにも 関 わらず) 立 ったまま 自 らを 迎 え, 上 諭 賞 賜 品 を 受 け 取 ったと 記 さ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ある 以 上 の 事 例 から, 乾 隆 期 の 清 朝 は, 当 時 の 清 朝 チベット 間 の 仏 教 的 関 係 が 窺 える 事 項 については, 漢 文 檔 案 は 無 論 のこと, 満 文 檔 案 にも 記 さないようにしていたことが 見 て 取 れよう チベット 仏 教 の 論 理 に 基 づく 関 係 では, 皇 帝 である 乾 隆 帝 の 側 がダライラ マ パンチェンラマに 敬 意 を 表 し, へりくだった 態 度 をとっていたが, こうした 記 録 が 残 ると 皇 帝 の 権 威 が 損 なわれることになってしまう そこで 満 文 檔 案 では, ダライラ マ パンチェンラマを 皇 帝 に 準 ずる( 同 格 の 立 場 にある) 存 在 として 扱 うにとどめ, しか もこうした 待 遇 は 皇 帝 からの 特 別 の 恩 恵 であり, 彼 らはそれに 深 く 感 謝 して 皇 帝 の 意 思 に 従 うと 描 写 することを 通 じて, 皇 帝 の 権 威 こそが 至 高 であると 見 えるような 叙 述 のか たちをとったのである 文 書 形 式 においても, 満 文 檔 案 で dalai lama(ダライラマ) b anchan erdeni(パンチェンラマ) の 語 が 擡 頭 されるようなことはなく, 至 高 の 権 威 者 であ る 皇 帝 と 彼 らの 地 位 との 違 いを 明 確 に 書 き 表 している 1-2-2. 清 朝 ロシア 間 で 交 わされた 満 文 外 交 文 書 次 に, 清 朝 ロシア 間 で 交 わされた 満 文 外 交 文 書 を 見 てみたい 清 朝 とロシアの 交 渉 に 関 して 吉 田 [1974: 89-100, 135-148]は, 1689 年 のネルチンスク 条 約 締 結 以 来, 両 国 - 77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間 の 外 交 文 書 が 満 文 ロシア 文 ラテン 文 で 作 成 され, その 中 で 両 国 は 対 等 な 二 国 間 に よる 友 好 関 係 にあるという 形 がとられたが, その 漢 訳 文 では 朝 貢 制 度 の 枠 組 みの 中 で 清 朝 がロシアよりも 上 位 にあるように 記 されたことを 指 摘 し, これをJ. K. フェアバンク のいう いかに 現 実 はきびしくても, 中 国 の 朝 廷 は 朝 貢 制 度 の 術 語 を 用 いて 巧 みに 記 録 を 修 正 し, 記 録 の 上 ではあくまで 中 国 優 越 の 伝 統 を 守 り 続 けた という 例 の 中 に 入 るだ ろうと 述 べている このことは 上 述 の 漢 文 檔 案 の 事 例 からも 裏 付 けられるが, ここで 問 題 としたいのは 満 文 文 書 の 内 容 である 吉 田 [1984: 285-294]は, 満 文 の 聖 祖 実 録 や 理 藩 院 則 例 の 条 文 も, 中 国 優 越 を 装 うような 叙 述 になっていたと 指 摘 している また 吉 田 [1974: 1 79-181]は, 1792 年 ( 乾 隆 57 年 )に 調 印 されたキャフタ 交 易 に 関 する 議 定 書 の 満 文 のロシ ア 語 訳 が, やはり 中 国 優 位 の 形 式 になっているとし, この 段 階 になると 清 国 はロシアに 対 して 完 全 に 優 位 に 立 ち, 文 字 通 り 天 朝 が 外 藩 に 与 える 形 の 議 定 書 を 作 ることができる ようになったから, 今 やこの 議 定 書 を 国 内 向 けに 書 きかえたりする 必 要 はなくなった 華 夷 思 想 に 基 (もとづ)く 大 国 意 識 は 乾 隆 末 年 に 至 ってその 絶 頂 に 達 したと 言 えるであろ う と 論 じている この 見 解 を 参 考 に, 筆 者 は 中 国 第 一 歴 史 檔 案 館 で 乾 隆 56-57 年 の 清 朝 とロシアの 交 渉 で 交 わされた 満 文 文 書 の 調 査 を 行 なった その 結 果, 以 下 のことが 分 かった 図 1~3は, すべて1792 年 2 月 にロシアが 清 朝 に 送 った 文 書 で, 図 1はロシア 側 が 作 成 した 満 文 文 書 7)の 原 件 である 図 2はロシア 語 文 書 の, 図 3はラテン 語 文 書 の 満 文 訳 で, とも に 軍 機 処 に 保 存 された 写 し( 録 副 )であるが, その 叙 述 形 式 は 正 式 な 文 書 と 大 きな 違 いは ないと 考 えられる これらの 中 で, 清 朝 とロシアの 関 係 については hūwaliyasun sain gu cudoro( 和 平 友 好 の 道 ) juwe gurun i ishunde hūwaliyasun doro be ( 二 国 がお 互 いに 和 平 の 道 を ) ( 図 1), adaki gurun i emgi damu hūwaliyasun saing ucui doro be ( 隣 国 同 士 の 和 平 友 好 の 道 を ) ( 図 2), adaki gurun i emgi hūwaliyasun be taksibuki( 隣 国 同 士 の 和 平 を 保 持 したい) ( 図 3)と 記 されており, いずれも 両 国 が 対 等 かつ 友 好 的 な 隣 国 関 係 にあるという 書 き 方 をしている これはネルチンスク 条 約 の 締 結 時 から 一 貫 し て 用 いられている 表 現 で, 清 朝 の 外 交 が 華 夷 秩 序 に 縛 られてはいなかったことの 証 左 と されている[ 吉 田 1974: 94-100] 自 らと 対 等 の 存 在 についての 言 及 を 容 認 するという 7) 当 時,ロシアは 北 京 に 聖 職 者 や 学 生 を 送 り 込 み, 情 報 収 集 や 満 洲 語 の 学 習 などを 行 なわせており, 外 交 文 書 を 満 文 に 翻 訳 する 人 材 も 抱 えていた また1768 年 の 露 清 交 渉 の 際 には, 交 渉 や 文 書 のやり 取 りはほ とんど 満 洲 語 で 行 なわれていた このため 柳 澤 は,この 時 にロシアと 清 朝 の 間 で 交 わされた 文 書 の 正 文 は 満 文 であると 一 応 は 見 なすことができると 述 べている[ 柳 澤 2003: 28-31(573-570)] - 78 -

対 外 政 策 に 関 する 言 説 のあり 方 に 見 る 清 朝 中 期 の 国 家 秩 序 観 姿 勢 は, 前 述 した 清 朝 チベット 関 係 に 関 する 満 文 檔 案 とほぼ 同 様 のものであると 見 る こともできるだろう しかし, 文 書 上 において 序 列 を 明 示 する 擡 頭 のあり 方 に 注 目 すると, 図 1と 図 2 3で は 明 確 な 違 いがある 図 1では, amba enduringge ejen( 清 朝 皇 帝 ) と amba imperaterits a ejen(ロシア 皇 帝 ) oros gurun(ロシア 国 ) が 同 じ 高 さに 擡 頭 されている これに 対 し て 図 2 図 3では, amba daiqing gurun( 清 朝 ) amba bokda han;amba ejen;amba han (すべて 清 朝 皇 帝 を 指 す) の 語 だけが 擡 頭 され, oros gurun(ロシア 国 ), imperaterits a ejen;katun han(すべて ロシア 皇 帝 を 指 す は 擡 頭 どころか 平 出 闕 字 が 行 われた 形 跡 もない(しかも imperaterits a ejen(ロシア 皇 帝 ) の 前 にあった 大 を 意 味 する amba の 語 が 削 除 されている) これはつまり, ロシア 側 が 作 成 した 満 文 文 書 では 清 朝 とロシア, 清 朝 皇 帝 とロシア 皇 帝 が 対 等 の 存 在 として 記 しているのに 対 し, ロシア 側 作 成 のロシア 語 ラテン 語 文 書 を 清 朝 側 で 満 文 に 翻 訳 したものでは 清 朝 清 朝 皇 帝 が 至 高 の 存 在 と され, ロシア ロシア 皇 帝 は 格 下 の 存 在 と 位 置 づけられているのである 実 は, この 問 題 については1768 年 の 清 朝 ロシア 間 の 交 渉 で 激 しい 議 論 が 交 わされて いた この 時, ロシア 側 は 清 朝 に 対 してロシア 皇 帝 に 清 朝 皇 帝 と 同 等 の 敬 意 を 払 い, ロ シア 皇 帝 をimperaterits a ejenと 書 くことを 要 求 したが, はじめ 清 朝 側 はこれを 拒 絶 した [ 柳 澤 2003:16-17(585-584)] また 清 朝 側 は, ロシア 側 が 持 参 した 文 案 の 冒 頭 でロシア 側 が 清 朝 側 よりも 前 に 書 いてあり, dulimbai gurun( 中 国 ), kiyan cing men( 乾 清 門 ) 等 の 語 が 擡 頭 されていなかったことに 対 して 強 い 調 子 で 修 正 を 求 めた[ 柳 澤 2003: 19(58 2)] こうした 紛 糾 の 末, 清 朝 は, ロシア 側 の 文 書 において amba ejen( 清 朝 皇 帝 ) dul imbai gurun( 中 国 ) gocika( 御 前 ) など 清 朝 側 で 擡 頭 すべきとされていた 語 とともに, katun han( 女 帝 =ロシア 皇 帝 ) oros gurun(ロシア 国 ) の 語 が 擡 頭 して 書 かれることを 容 認 し, その 一 方 で 清 朝 側 が 作 成 した 文 書 では 前 者 のみを 擡 頭 して 書 くという 方 針 を とった[ 柳 澤 2003: 24-25(577-578)] 図 1と 図 2 3の 文 書 形 式 の 違 いは, この 時 の 決 定 を 如 実 に 反 映 したものであったといえる こうした 清 朝 の 姿 勢 について, 柳 澤 [2003:2 6(575)]は 清 側 としては, あくまで 自 方 が 作 成 した 條 文 こそが 正 式 のものであるとい う 立 場 をとり, ロシア 側 作 成 の 條 文 は, 秘 蔵 してしまえば 一 般 の 目 には 触 れないのだか ら, 影 響 ないと 考 えたのであろうが, たとえそうであったとしても, 清 側 の 全 般 的 な 強 硬 姿 勢 から 見 れば, 一 定 の 譲 歩 であったことは 疑 いない という 見 解 を 示 しており, 筆 者 もその 通 りであろうと 考 えている - 79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2. 文書を介さない政治的コミュニケーション 前章で述べたように, 乾隆期の清朝では, 漢文檔案 満文檔案それぞれに書いてよい 情報に厳しい制限があり, その文章スタイルに一定の規律があった このことに関し て, 1793年に乾隆帝に謁見したイギリス使節マカートニーは, 興味深いエピソードを伝 えている マカートニーは, イギリス国王の代理として貿易拡大等の要求を伝えるため に清朝を訪れたが, 清朝皇帝からイギリス国王に宛てた書簡の中では 大使(マカート ニー)の十月三日の書面でなされた要求は, 国王からではなく, むしろ大使自身の発意に よるものであると思われるが8) という一節があり, これに対してマカートニーは苦情 を言った それに対し, 清朝の書記官は次のように弁解したという これは政治上の一種の言葉のあやか判じもののようなもので, 聞き入れるわけにはいかな い要求をかわすために宮廷で用いる方便であるという というのは, 中国の礼儀として, 一国 の君主が拒まれる可能性のあることを他国の君主に求めることがありうるという仮定を認め ないのである したがって, その要求はけっしてなされなかったのだということにされるが, さもなくば, 要求がなされたのは使節がメッセージを伝える時に失策をして, 主君が考えもし なかったことを自分の発意で要求したためであるということにされるのである 9) According to the explanation given me it is a sort of political conundrum, a Court artifice to elude an ungrantable demand, for Chinese urbanity does not admit a supposition that one sovereign can desire for another what is possible to be refused. It is, therefore, concluded that the request has never been made, or if made that the Ambassa dor has been guilty of an error in the delivery of his message, and to have asked from his own head what had never entered into that of his master.10) すなわち清朝側は, マカートニーの書面による要求がイギリス国王からのものであるこ とは承知していたが, 中国の礼儀として, 一国の君主が拒まれる可能性のあることを他 国の君主に求めることがありうるという仮定を認めない というに考えに基づき, その要 求をなかったこととするか, 使節による間違いであったとして処理しようとしたのであ る 清朝にとって あってはならないこと (帝国の秩序を乱したり国家の体面を失うよう なことなど)は, 文書上にも存在させない, というのが当時の清朝の方針であった 8) マカートニー(坂野正高訳) 中国訪問使節日記 1793年10月21日条(153頁) 9) マカートニー(坂野正高訳) 中国訪問使節日記 1793年10月21日条(153頁) 10) Macartney, G. An Embassy to China, Being the Journal Kept by Lord Macartney During His Embassy to the Emperor Chien-Lung 1793-1794, p.166. - 80 -

対 外 政 策 に 関 する 言 説 のあり 方 に 見 る 清 朝 中 期 の 国 家 秩 序 観 このような 方 針 は, 乾 隆 初 期 から 見 られた 乾 隆 元 年 (1736), 清 朝 の 宮 廷 に 仕 えるイ エズス 会 宣 教 師 らは, 苛 烈 さを 増 していたキリスト 教 徒 への 弾 圧 を 停 止 してほしいとの 要 望 書 を, 画 家 のカスティリオーネを 通 じて 乾 隆 帝 に 直 接 上 呈 した 乾 隆 帝 はこれを 受 け 取 ったものの, その 後 大 学 士 の 海 望 (Haiwang)は 宣 教 師 らに 対 して 文 書 をもってする ことはいけない これはもう 完 結 した 件 である と 言 い, 彼 らの 要 望 が 受 け 入 れられな いことを 伝 えた[ 矢 沢 1972: 38-39, 69] また 乾 隆 42 年 (1777), タシケント 攻 略 のため に 清 朝 から 援 軍 を 得 ようとしたカザフが, 使 者 を 派 遣 してその 要 求 を 記 した 書 簡 を 乾 隆 帝 に 直 接 上 呈 しようとし, 乾 隆 帝 の 不 信 を 買 った[ 小 沼 2014: 217-219] これらの 行 為 が 許 されなかったのは, 彼 らの 要 求 を 受 け 入 れてしまうと 皇 帝 の 公 平 性 ( 一 視 同 仁 の 理 念 )の 観 点 から 他 の 人 々の 要 求 も 受 け 入 れなければ 面 目 が 立 たなくなり, 一 方 で 要 求 を 拒 絶 すれば 皇 帝 の 慈 悲 深 さという 美 徳 に 傷 がつくことになり, どちらにしても 皇 帝 の 体 面 が 損 なわれることにつながると 清 朝 側 が 考 えたからだろう 清 朝 の 対 外 政 策 は, 広 州 では 両 広 総 督 や 広 東 巡 撫 粤 海 関 監 督 が, 対 ロシア 関 係 ではモンゴル 王 公 や 理 藩 院 庫 倫 辦 事 大 臣 が, 外 藩 王 公 (モンゴル チベット ウイグルの 王 公 カザフ 王 公 もこれ に 準 ずる 存 在 )やチベット 仏 教 勢 力 との 関 係 では 理 藩 院 や 現 地 の 駐 防 官, 親 清 派 の 外 藩 王 公 チベット 仏 教 僧 が 窓 口 となり, 皇 帝 の 意 向 をうかがいつつ 政 策 判 断 を 行 なうとい う 建 前 であった こうすることで, 対 外 関 係 上 の 問 題 が 発 生 したとしても, その 責 任 の 所 在 は 皇 帝 自 身 ではなく 窓 口 となった 人 々にあるとして, 皇 帝 の 体 面 が 損 なわれずに すむようにしていたのだろう ともあれ, 外 国 の 君 主 や 外 藩 首 長 が 皇 帝 に 直 接 何 かしら の 要 求 をすること, とりわけそれを 文 書 という 目 に 見 える 形 によって 行 なうことは, 当 時 の 清 朝 においては あってはならない ことであり, それを 行 なうこと 自 体 が 誤 りとさ れたのである あってはならない ことを 文 書 中 に 記 してはならないのは, 清 朝 の 官 僚 も 同 様 で あった 乾 隆 44 年 11 月, 陝 甘 総 督 の 勒 爾 瑾 (Lerkin)が 奏 摺 でパンチェンラマ3 世 に 叩 拝 したと 報 告 したのに 対 し, 乾 隆 帝 はこのことを 檔 案 中 に 記 してはならないとして 厳 しい 叱 責 を 加 えた[ 村 上 2011a: 51-55] 清 朝 の 官 僚 がパンチェンに 叩 頭 して 礼 拝 するのは チベット 仏 教 世 界 の 価 値 観 に 基 づく 当 然 の 礼 儀 であり, 勒 爾 瑾 が 叩 拝 を 行 なったこと 自 体 は 正 しい 行 為 であったが, このことを 文 書 に 明 記 したことが 誤 りとされたのであっ た 乾 隆 帝 は, パンチェンの 応 接 のあり 方 について 事 前 に 勒 爾 瑾 と 直 接 対 面 し, 口 頭 で 命 令 を 伝 えていた また 勒 爾 瑾 を 叱 責 した 上 諭 において, パンチェンへの 叩 頭 に 関 する 指 示 は 口 頭 で 伝 えるにとどめ, その 指 示 を 受 けた 官 員 も 返 答 の 上 奏 を 行 なう 必 要 がない - 81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と述べている 乾隆帝は, 檔案の叙述のあり方に厳しい制限 規律を設ける一方で, そ の範疇内で伝えられない指示や情報は, 文書が残らない方法(口頭での伝達など)により 伝えるようにしていたのである このような方針は, イギリス使節マカートニーへの対応からも垣間見える 乾隆58 年9月, 乾隆帝は北京から杭州までのマカートニーの随行役に任じた松筠(Sungyūn)に対 し, 次のような上諭を下している 11) このこと(マカートニーへの対応)は松筠が軍機処行走であった時に面と向かって諭旨を 下し, その顛末を熟知している 松筠が出発する時に朕は再び詳しく面諭し, 長麟 吉 慶と面会し, 松筠は朕が面と向かって指示したことを詳しく告げて知らせ, 彼らと三人で一 緒に相談して処理すれば, 自然と諸事は適切なものになろう (中略) もし該貢使(イギ リス使節)が口実を設けて逗留することがあれば, 想うに松筠らは面会して上諭を理解させ, 言葉を厳しく正すことができるはずで, すぐに出帆するよう命じれば, 該貢使も自ずから謹 んで遵守するはずである この中で乾隆帝は, 関して松筠に直接対面して指示を出し, それをまた長麟 吉慶(と もに清朝の高官)に直接面会して伝え, その指示どおりに3人が行動すれば, マカート ニーへの対応は適切なものとなるだろうと述べている またマカートニーへの上諭も, やはり直接面会して伝えるよう促している 戴廷傑 1996: 113 は, マカートニーが松 筠を礼儀正しく, 柔和で親しみを感じ, 臨機応変で仕事もよくできる人物と評価する一 方で, 清朝側檔案からはそうした様子が見いだせないとして, 彼(松筠)はその優れた能 力を十分に発揮した外交家だが, 中国文献中の官界言語の規律は, 彼が何度も示した優 れた能力を余すところなく破壊し, 消し去っている と述べ, 清朝の檔案が 官界の言語 (官場言語)に縛られていたと指摘しており, 筆者も基本的には同意見である ただ, イ ギリス側史料に見られるような松筠の柔軟かつ臨機応変な行動の背景には, 乾隆帝の口 頭の指示にそれを促す内容があった可能性についても考える必要がある 12) 11) 乾隆朝上諭檔 第17冊 565頁 乾隆58年9月17日 欽差戸部侍郎松筠等への寄信上諭 此事松筠在軍機処行走面聆諭旨 其顛末係所深悉 松筠起身時朕復詳加面諭 与長麟 吉慶会晤 松筠将朕面為指示之処詳悉告知 伊等三人公同商辦 自然諸事合宜 倘該貢使尚有藉詞逗遛之処 想松筠等定能面為暁諭 詞厳義正 飭令即行開船 該貢使自必凜遵也 12) 柳澤 2003: 23-24(578-577) も 1768年の対ロシア交渉においても 清朝が基本的には高圧的な姿勢をと りつつ 文書に残らない実際の交渉の場ではある程度柔軟な対応をとっていたことを指摘している - 82 -

対外政策に関する言説のあり方に見る清朝中期の国家秩序観 3. 政治的言説が文書に残ることの意味 熱河日記 の記述から 乾隆期の清朝における対外関係に関する言説がどのような形で文書記録として残る のか(残らないのか)を知るうえで興味深いエピソードを伝えているのが, 朴趾源が著し た 熱河日記 である 朴趾源は, 乾隆帝の七旬万寿節に参加する朝鮮使節一行に加わ り, その道中での見聞を 熱河日記 に記した その中には, 時を同じくして熱河を訪 れたパンチェンラマ3世について清朝側の知識人 官員がどのような認識を持っていた のかについての記述がある これを見ると, 彼らの実際の認識と清朝側に残る文書の内 容に大きな開きがあったことが窺い知れる 熱河日記 巻3, 黄教問答条には, 熱河で出会った漢人官僚(山東都司)の郝成13)が 次のように語ったことが記されている 佛(パンチェン)に礼拝する者は脱帽して叩頭し, 活佛は自ら手で摩頂し, 和碩親王 和碩額駙は常々参拝して叩頭し, 14) ここで郝成は, パンチェンに礼拝する者が脱帽して叩頭すること, 和碩親王 和碩額 駙など清朝の皇族 姻戚がパンチェンを参拝して叩頭を行なっていると述べている 郝成本人はパンチェンを参拝していない15)にもかかわらず, 高貴な身分の者を含めて参 拝者が叩頭を行なっていたことを知っていた 前述のように, このことは清朝側の檔案 に記されてはならないことになっていたが, 少なくとも熱河にいる中級(都司は正四品 官)の漢人官僚であれば十分に知りうる情報だったのであり, 厳重に管理されるような 秘密事項ではなかったと見てよい ただ, 朴趾源との対話のさなかに戸を引く音が響いた際, 郝成は急いで筆談用の紙を 隠している 16) これは, 朴趾源に伝えたパンチェン関連の情報や自らの認識を文書に記 したことが他人に知られるのを怖れての行動であろう チベット仏教への崇敬の念を 隠さない郝成の話の内容は, 中華世界の官員 知識人としての常識的認識とは大きくか 13) 朴趾源 熱河日記 巻3 傾蓋録に 郝成 歙(安徽省南部の県)の人 字は志亭 號は長城 現在は山 東都司の任にある(郝成 歙人也 字志亭 號長城 見任山東都司) とある 14) 朴趾源 熱河日記 巻3 黄教問答条(166頁) 拝佛者脱帽叩頭 活佛親手摩頂 和碩親王 和碩額駙常常朝拝叩頭 15) 郝成自身はパンチェンと会えるような立場になかったため パンチェンに会う機会を得た朴趾源に対し その様子がどうであったかを尋ねた 朴趾源 熱河日記 巻3 黄教問答条(166頁) 参照 16) 朴趾源 熱河日記 巻3 黄教問答条(167頁)に 突然戸を引く音が響き 志亭は急いで紙をこすり手の中 に握った(忽有引戸響 志亭急擦紙在握中) とある - 83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け離れていたが, これが朴趾源に伝わること自体は特に問題がなかった しかし, これ を文書に記したことが周囲に知られるのは避けるべきこととされていた様子が, 郝成の 振る舞いから見て取れる こうした清朝の言説環境について, 朴趾源は次のように慨嘆 している 人の文字を観れば, 通常の数行の札でも, 必ず列朝の功徳を誇張し, 当世の恩沢に感激す るとあるのは, みな漢人の文である 自らを中国の遺民であるとし, いつも苦しみ 憂いが 懐にあり, 嫌疑がかからないように, 口を開けば(皇帝を)称揚し, 筆を持てば媚びへつらい の言葉を書き, 益々自らを当世の外の人間だと見なす 漢人の心も苦しいのだ 人と話す際 に, 通常は質問に答えるが, 話し終わった後には紙を燃やして残さないようにする これは 漢人だけがこのようなのではなく, 満洲人についてはさらに甚だしい 満洲人はみな職場や 住居が近いので, 法令が益々厳しい これは漢人の苦しみというだけではなく, 天下の法禁 の苦しみである 17) 清朝の人々が 質問に答えるが, 話し終わった後には紙を燃やして残さないように し ていた背景には, 当時の厳しい言論統制策 激しい 文字の獄 に代表される が あったと考えられる 石橋 2011: 228-229 は, 乾隆期(特に後半期)の清朝は厳しい言 論 思想統制下にあり, とりわけ 夷 への批判を許さなかった18)ことを指摘するが, 同 時に公的な立場にある者が清朝の国家秩序を逸脱するような情報や認識 チベット 仏教の論理に基づく清朝 チベット間の儀礼やチベット仏教を崇拝する姿勢 心情な ど を文書に記すことも厳しく制限されていたと見てよいだろう おわりに 乾隆期の対外政策に関する檔案の記述には, 厳しい制限 規律が存在した 漢文檔案 は, 華夷思想に基づいた世界秩序が成立しているという体裁で叙述されなければなら 17) 朴趾源 熱河日記 巻3 黄教問答条(165頁) 観人文字 雖尋常数行之札 必鋪張列朝之功徳 感激当世之恩沢者 皆漢人之文也 葢自以中国之遺 民 常懐疢疾之憂 不勝嫌疑之戒 以開口称頌 挙筆諛佞 益見其自外於当世也 漢人之為心 亦已 苦矣 与人語雖尋常酬答之事 語後即焚 不留片紙 此非但漢人如是 満人為尤甚 満人皆職居近 密 故益知憲令厳苛 然則非但漢人之心苦矣 天下法禁之心苦矣 18) 石濱 2001: 340-341 も パンチェンラマ3世の熱河来訪の際 チベットの高僧に対して厚遇をしすぎる 土木工事が多すぎる等の条項を上書した山西省の士人が 乾隆帝の逆鱗に触れ死刑になったことを紹介し ている - 84 -

対外政策に関する言説のあり方に見る清朝中期の国家秩序観 ず, そこからの逸脱は許されなかった また満文檔案では, 清朝(皇帝)に準ずる国家 首長が存在することまでは記されたが, あくまでも清朝(皇帝)の権威こそが至高である と見えるような体裁をとることにこだわった 乾隆期の清朝では, 皇帝 官僚がダライ ラマ パンチェンラマに対して叩頭を行ない, へりくだった態度をとっていたが, その 様子が満文檔案に記されることはほとんどなかった 19) 満文檔案には, 清朝の皇帝 官 僚とダライラマらの間におけるチベット仏教の論理に基づいた儀礼や言説が記される ことは(原則的には)なく, チベット仏教への優遇はあくまで清朝側の特別の計らいによ るもので, ダライラマらはそのことに深く感謝して皇帝の意思に従っている, という内 容が描かれた またロシアとの外交文書に関しても, 清朝はロシア側が作成した満文文 書において清朝とロシア, 清朝皇帝とロシア皇帝がともに敬意を払われるべき対等の存 在として描写されることは容認したが, ロシア側作成のロシア語 ラテン語文書を清朝 側で満文に翻訳したものでは両国が対等な友好関係にあると記しつつも, あくまで清朝 (皇帝)こそが至高の存在であり, ロシア(皇帝)は格下の存在であるとされた 漢文檔案 の記述が華夷秩序の観念に強く縛られていたことは従来から知られていたが, 満文檔案 にも本稿で論じたような記述上の規律 制限があったことは, これまでほとんど指摘さ れてこなかったと思われるので, ここで改めて注意を喚起したい こうした規律 制限によって檔案に記すことができない情報や認識は, 口頭での(文 書を残さない形での)意思伝達によって共有がはかられた 文書に残らないのであれば, 華夷秩序や皇帝の至高性を揺るがすような行為を行うこと(チベット仏教の論理に基づ く儀礼や柔軟な外交交渉を行なうことなど)も認められた 対チベット政策では, 文書 に記録を残さないようにしながらチベット仏教の論理に基づいて行動すべきとされて いたほどである 乾隆期の対外政策の進め方を詳細に検討すると, 重要な事項は文書を 介さない意思伝達により議論 決定されていたことが見えてくる 檔案に記された内 容は, いわば建前であり, 皇帝 官僚の実際の認識や行動とはかけ離れている場合も少 なくなかったと考えるのが妥当であろう こうした清朝の政治手法は, 柔軟とも言える し, 欺瞞的ともいえるが, いずれにせよ檔案を史料として利用する際にはこのことを念 頭に置いておく必要がある 以上のような檔案の記述に関する厳しい規律 制限の存在は, 乾隆期における言論 統制策の一貫であると見ることもできる 文字の獄 に見られるような清朝の, とりわ 19) 例外的に パンチェンラマ3世の熱河来訪時(乾隆45年)と 乾隆48年から同53年の間にのみ 清朝の官 僚がパンチェンラマやダライラマに叩頭したことが満文奏摺により報告された 村上2011a: 55-61 - 85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け 乾 隆 帝 の 文 字 に 対 する 過 剰 なまでの 敏 感 さが, 檔 案 中 の 言 説 のあり 方 にも 大 きく 影 響 した 可 能 性 が 高 い 筆 者 は 現 在, 禁 書 政 策 や 四 庫 全 書 の 編 纂 事 業 などを 含 め, 乾 隆 期 が 文 字 化 された 言 説 をどのような 目 的 方 法 により 統 制 しようとしたのかとい う 点 に 興 味 を 抱 いており, 今 後 この 課 題 の 解 決 に 取 り 組 んでいくつもりである 檔 案 は, 清 朝 史 の 研 究 にとって 最 も 重 要 といえる 一 次 史 料 であるが, その 記 述 内 容 に は 相 当 の 作 為 ( 隠 蔽 や 歪 曲 )があり, その 分 析 には 細 心 の 注 意 が 必 要 である 同 時 に, 乾 隆 期 における 清 朝 の 対 外 政 策 上 の 重 要 事 項 が, 文 書 を 介 さない 政 治 的 コミュニケーショ ンによって 伝 達 実 施 され, 檔 案 など 清 朝 側 の 文 書 記 録 からは 知 り 得 ないケースが 多 く あることにも 留 意 する 必 要 がある 清 朝 側 の 記 録 に 残 されていない 事 項 を 知 る 際 には, マカートニーの 日 記 や 朴 趾 源 熱 河 日 記 のような 外 国 人 の 著 述 や, 満 文 漢 文 檔 案 の 規 範 制 限 に 縛 られないチベット 語 などの 他 言 語 の 文 書 を 検 討 することが 有 効 とな る この 作 業 は 決 して 容 易 ではないが, 多 くの 国 地 域 の 研 究 者 が 協 力 することで 少 し ずつ 進 展 させていけると 筆 者 は 考 えている - 86 -

対外政策に関する言説のあり方に見る清朝中期の国家秩序観 史料 満文録副 ( 軍機処満文録副奏摺 )中国第一歴史檔案館所蔵マイクロフィルム 漢文録副 ( 軍機処漢文録副奏摺 )中国第一歴史檔案館所蔵マイクルフィルム 班禅檔 (軍機処満文班禅檔)中国第一歴史檔案館所蔵 乾隆朝上諭檔 中国第一歴史檔案館編, 檔案出版社, 1991年 六世班禅朝覲檔案選編 中国第一歴史檔案館 中国蔵学研究中心合編, 中国蔵学出版社, 1996年 朴趾源 熱河日記 上海書店出版社, 1997年 ジョージ マカートニー(坂野正高訳) 中国訪問使節日記 平凡社, 1975年 Macartney, G. An Embassy to China, Being the Journal Kept by Lord Macartney During His Embassy to the Emperor Chien-Lung 1793-1794, ed. Cranmer-Byng, Hong Kong: University of Hong Kong, 1961-87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参考文献 石橋崇雄2011. 大清帝国への道 講談社 石濱裕美子2001. チベット仏教世界の歴史的研究 東方書店 岡洋樹2003. 東北アジア地域史と清朝の帝国統治 歴史評論 642: 50-59 小沼孝博2014. 清朝と中央アジア草原 遊牧民の世界から帝国の辺境へ 東京大学出版会 鈴木中正1962. チベットをめぐる中印関係史 十八世紀中頃から十九世紀中頃まで 一橋 書房 増田えりか1995. ラーマ1世の対清外交 東南アジア 歴史と文化 No.24: 24-47 村上信明2011a. 駐蔵大臣の 瞻礼 問題にみる18世紀後半の清朝 チベット関係 アジア ア フリカ言語文化研究 81: 45-69 村上信明2011b. 試論清朝満 漢文档案在有関記載的特征及其規範 以有関乾隆時期清朝官員 与蔵伝仏教大活仏的会見礼儀档案為例 中国社会科学院近代史研究所政治史研究室 編 清代満漢関係研究 社会科学文献出版社, 626-637 矢沢利彦(編訳)1972. イエズス会士中国書簡集 3<乾隆編>平凡社 柳澤明2003. 一七六八年の キャフタ條約追加條項 をめぐる清とロシアの交渉について 東 洋史研究 62-3:1-33 吉田金一1974. 近代露清関係史 近藤出版社 吉田金一1984. ロシアの東方進出とネルチンスク条約 近代中国研究センター 戴廷傑(Pierre-Henri Durand)1996. 兼聴則明 馬戞爾尼使華再探 中国第一歴史檔案館編 英 使馬戞爾尼訪華檔案史料滙編 国際文化出版公司, 89-150 - 88 -

対外政策に関する言説のあり方に見る清朝中期の国家秩序観 図1 満文録副 3416-024(microfilm 155-1044) - 89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図 2 満 文 録 副 3416-020(155-1027) - 90 -

対 外 政 策 に 関 する 言 説 のあり 方 に 見 る 清 朝 中 期 の 国 家 秩 序 観 図 3 満 文 録 副 3416-022(155-1036) - 91 -

번역 (요약문) 대외정책에관한언설에서보는청조중기의국가질서관 村 上 信 明 MURAKAMI, Nobuaki( 創 価 大 学 ) 서론 1. 건륭기의 漢 文 檔 案 満 文 檔 案 에 보이는 서술의 특징 2. 문서를 사용하지 않은 정치적 커뮤니케이션 결론 서론 만주인에 의해 건국된 청조는 17세기부터 만주, 중국내지,몽골,청해,티베트,동투르키 스탄(신강)으로 그 세력을 확대해 갔다. 청조황제는 만주인사회의 장(한), 유교적 덕치 를 체현하는 중화황제(천자), 몽골유목사회의 리더 겸 티베트불교의 수호자(문수사리보 살)로써의 성격을 가지고 각각의 사회에 다른 질서체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질서체계를 이해하는데 있어 필자가 주목한 것은 만문과 한문(공문서)당안 안에 보이는 정치적 언 설의 형태이다. 청조중기 당안의 대부분은 만문과 한문으로 쓰여져 있으며, 주로 전자는 팔기 및 번부 (몽골, 티베트, 청해, 신강)에 관한 안건이고, 후자는 중화세계에 관한 안건에 사용되었 다. 두 종류의 당안에는 쓰여진 내용와 그 안에 포함된 가치관에 상당한 차이가 보인다. 일반적으로 국가의 공문서 기술에는 국가의 공적입장이나 가치관이 반영되는 것으 로 그 작성과정에서 여러가지 작위가 행해진다고 하겠다. 청조의 만문, 한문당안도 일 정한 규범과 질서관에 의거해서 작성된 것으로 그 작성과정에 있어 사실의 은폐, 왜곡 등이 행해졌다. 본 발표에서는 건륭기의 대외정책(외번 외국에 대한정책)에 관한 만 문 한문당안의 내용을 분석해서, 그 안에 보이는 정치적 언설의 형태와 그 배후에 있 는 당시 청조의 국가질서관을 고찰하고자 한다. - 92 -

[번역]대외정책에관한언설에서보는청조중기의국가질서관 1. 건륭기의 漢 文 檔 案 満 文 檔 案 에 보이는 서술의 특징 선행연구에서는 건륭기의 대외정책에 관한 당안에 관해, 청조측의 당안에 기재된 내 용과 교섭상대국의 문서내용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이 지적되었다. 増 田 [199 5]씨는, 1780년대 타이(샴)와의 교섭에 관해 타이측( 金 葉 表 文 )국왕이 청조황제와 우호 관계를 맺고 싶다고 기술한 반면 한문 번역문에는 타이국왕이 신하의 예를 행하여 조 공사절을 보내 황제의 은혜를 청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고 지적했다. 타이국왕의 表 文 은 한문으로 번역될 때 중화사상에 근거한 문장으로 변경된 것이다. 이와 같이 건 륭기의 한문당안은 중화사상에 근거해서 세계질서가 성립한다고 하는 체재로 서술되 는 것으로 그것으로부터의 일탈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만문당안은 어떠하였을까. 이하, 청조와 티베트에 관한 만문당안과, 청조와 러시아간에 교환된 만문외교문서를 예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1-2-1. 청조 티베트 관계에 관한 만문당안 청조는 달라이라마를 정점으로 하는 티베트정부와 티베트불교 논리에 근거한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양자의 관계가 잘 나타나 있는 것이, 건륭45년(1780)의 판첸라마 3세의 열하방문에 대한 청조의 반응이다. 石 濱 [2001: 337-338]씨는, 건륭제가 판첸라마에 대해 이례적으로 융숭한 대우를 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 예로써 건륭제에 대해 한번 도 叩 頭 를 행하지 않았다(즉 신하로써의 예를 취할 필요가 없다고 인식되었다)점을 들 었다. 이 지적은 판첸라마가 무릎을 꿇으려고 하자 청조 관료가 바로 도와서 세웠다(w akiyameilibuha) 라는 기술이 2건의 만문당안에 있는 것을 근거로 한 것인데, 이러한 관 료의 행동은 건륭제의 지시에 근거한 것이었다. 황제에 대한 사은은, 조공사절은 물론, 왕공이나 대관들에 있어서도 무릎을 꿇고 행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의례를 면제한 것은 판첸라마에 대한 융숭한 대우라고 하겠다. 이러한 지적이 있고 나서, 청조측의 관료들은 판첸라마와 만난 것을 보고하는 奏 摺 에, 무릎을 꿇으려고 하는 판첸라마를 세운 모습을 기술하게 됐다. 예를 들어 건륭45년(178 0) 7월 16일 판첸라마에게 과일을 선사한 伍 彌 泰 (Umitai)는 史 料 1 의 만문주접을 上 奏 했는데, 그 내용으로부터 상술한 石 濱 씨의 지적과 같이 판첸라마가 황제에 준하는 존 재로써 융숭한 대우를 받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때 伍 彌 泰 와 동행한 庫 使 의 智 新 (Jysin)는, 군기대신 福 隆 安 (Fulunggan)에게 史 料 2 와 같이 보고하였다. 일찍이 필자가 지적하였듯이, 청조 관료들은 뽀타라 궁전에서 달라이라마를 접견할 때 티베트 - 93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불교 의례에 근거해서 叩 頭 를 행하였으므로 [ 村 上 2011a], 伍 彌 泰 가 판첸라마를 접견할 때에도 티베트불교 의례에 근거해서 고두를 행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전게의 伍 彌 泰 의 奏 摺 도 실제 회견의 모습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예는 같은 시기의 주장대신의 만문 奏 摺 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이미 [ 村 上 2011b: 635-636]에서 논한 적이 있지만, 건륭40 50년대에 주장대신이 달라이라마와 판 첸라마를 접견하는 모습에 관해 史 料 3 史 料 4 와 같이 보고하였다. 이러한 만문 奏 摺 에는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가 서서 合 掌 하고 건륭제의 上 諭 와 하사품을 받았 다고 적혀있다. 이를 문면 그대로 해석하자면, 청조가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에 대해서 는 중화사상에 근거한 의례를 강요하지 않았고 上 諭 와 하사품을 전달받을 경우에 행하 는 고두를 면제하였으며, 황제에 준하는 존재로써 우대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가 경19년(1814) 閏 2월, 건륭58년(1793)에서 가경5년까지 주장대신을 역임한 和 寧 은 史 料 5 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건륭58년 이전, 티베트 불교의 고승이 청조 관료와 만날 때에는 앉은 채로 일어서지 않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상술한 만문 奏 摺 에서는 모두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가 선 채로 上 諭 와 하사품을 전달받은 것으로 쓰여져 있다. 황 제의 대리인 주장대신이 서 있는데 달라이라마가 앉은 채로 있었다면, 황제보다도 달라 이라마가 지위가 높아진다고 하겠다. 이에 주장대신은 달라이라마가 선 채로 자신들 을 맞이해 上 諭 하사품을 받았다고 기술하게 되었다. 이상의 사례로부터, 건륭기의 청조는 당시의 청조 티베트간의 불교적 관계가 보여 지는 일들에 관해서는 한문당안은 물론 만문당안에도 기술하지 않도록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티베트불교의 논리에 근거한 관계에서는 황제인 건륭제가 달라아리마 판 첸라마에 경의를 표하고 자기를 낮추는 태도를 취했지만, 이러한 모습이 기록에 남으면 황제의 권위를 손상시킬 수 있다. 이에 만문당안에서는 달라이라마 판첸라마를 황제 에 준하는(동격의 입장에 있는)존재로써 대하는데 머물고, 이러한 대우는 황제의 특별 한 은혜이며, 그들은 이에 깊이 감사하고 황제의 의사에 따르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황제 권위의 지고성을 표현한 것이다. 1-2-2. 청조 러시아간에 교환된 만문외교문서 다음으로, 청조 러시아간에 교환된 만문외교문서를 보겠다. 청조와 러시아의 교섭 에 관해 吉 田 [1974: 89-100, 135-148]씨는,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체결이래, 양국간의 외교문서가 만문 러시아어 라틴어로 작성되어, 양국은 대등한 국가간의 우호관계라 는 형태가 채택되었는데, 한역문에서는 조공제도의 틀안에서 청조가 러시아보다 상위 - 94 -

[번역]대외정책에관한언설에서보는청조중기의국가질서관 에 있는 것처럼 기록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또한 만문문서에 관해서도 1792년(건륭 57년)에 조인된 캬흐타교역에 관한 의정서의 만문의 러시아역본이 역시 중국우위의 형 식으로 되어있다고 했다.[ 吉 田 1974: 179-181] 이 견해을 참고로, 필자는 中 国 第 一 歴 史 檔 案 館 에서 乾 隆 56-57 年 의 청조와 러시아의 교섭에서 교환된 만문문서에 관한 조사를 통 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図 1은 러시아측이 작성한 만문문서 1) 의 원안이다. 図 2 図 3는 각각 러시아측이 작성 한 러시아어문서 라틴어문서를 청조측에서 만문으로 번역한 것으로 둘 다 군기처에 보존되어 있는 필사본( 録 副 )이다. 이 가운데에서 청조와 러시아와의 관계에 관해서는 hūwaliyasun sain gucu doro(화평 우호의 길) juwe gurun i ishunde hūwaliyasun doro be (양국이 서로 화평의 길을 ) ( 図 1), adaki gurun i emgi damu hūwaliyasun sain gu cui doro be (인국이 서로 화평 우호의 길을 ) ( 図 2), adaki gurun i emgi hūwaliy asun be taksibuki(인국이 서로 화평을 유지하고 싶다) ( 図 3)로 쓰여 있어, 양국이 대등하 고 우호적인 인국관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네르친스크조약 체결 이래 일관 되게 사용된 표현으로 청조 외교가 화이질서에 의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자신과 대등한 존재에 관한 언급을 용인하는 자세는 전술한 청조 티베 트관계에 관한 만문당안과 거의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문서상에 있어 서열을 표시하는 擡 頭 에 주목하면, 図 1과 図 2 3에서 명확 한 차이가 있다. 図 1에서는 amba enduringge ejen( 清 朝 皇 帝 ) 와 amba imperaterits a ejen (러시아황제) oros gurun(러시아 国 ) 가 같은 높이로 擡 頭 되어 있는 반면, 図 2 図 3에 서는 amba daiqing gurun( 清 朝 ) amba bokda han;amba ejen;amba han(모두 清 朝 皇 帝 를 지칭) 만 擡 頭 되고, oros gurun(러시아 国 ), imperaterits a ejen;katun han(모두 러시아 皇 帝 를 지칭)은 擡 頭 되어 있지 않다. 더욱이 imperaterits a ejen(러시아 皇 帝 ) 의 앞에 붙이는 大 를 의미하는 amba 라는 단어가 삭제되어 있다. 즉 러시아측이 작 성한 만문문서에는 청조와 러시아, 청조황제와 러시아 황제가 대등한 존재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러시아측이 작성한 러시아어 라틴어문서를 청조측에서 만문으로 번역한 것에서는 청조 청조황제가 지고한 존재이고, 러시아 러시아황제는 격이 낮은 존재로 위치 지어져 있다. 실은 이 문제에 관해 1768 年 청조 러시아간의 교섭에서 격렬한 논의가 이루어졌었 다. 그 때 러시아측은 청조에 대해 러시아황제에 대해 청조황제와 동등한 경의를 표하 1) 1768 年 의 露 清 교섭에 있어, 교섭과 문서의 교환은 거의 만주어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柳 澤 씨는, 이 시기에 러시아와 청조간에 교환된 문서의 정본은 만문이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柳 澤 2003: 28-31(573-570)] - 95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는 의미에서 러시아황제는 imperaterits aejen으로 쓸 것을 요구하였지만, 처음에 청조는 이를 거부했다.[ 柳 澤 2003:16-17(585-584)] 또한 청조측은, dulimbaigurun( 中 国 ), kiyanci ng men( 乾 清 門 ) 등의 단어가 擡 頭 되지 않은 것에 대해 강한 어조로 수정을 요구했다 [ 柳 澤 2003: 19(582)]. 이러한 분규 끝에 청조는 러시아측의 문서에 있어서는 ambaeje n( 清 朝 皇 帝 ) dulimbaigurun( 中 国 ) gocika( 御 前 ) 등 청조측에서 擡 頭 해야 한다는 단어들과 함께 katunhan( 女 帝 =러시아 皇 帝 ) orosgurun(러시아 国 ) 등의 단어가 擡 頭 해서 쓰여지는 것을 용인했다. 한편 청조측이 작성한 문서에서는 전자만을 擡 頭 해서 쓴다는 방침을 취했다.[ 柳 澤 2003: 24-25(577-578)] 図 1과 図 2 3의 문서형식에 있어서의 차이는 이 당시의 결정을 여실히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이상과 같이 청조는 러시아측이 작성한 만문문서에 있어서는 청조와 러시아, 청조 황제와 러시아황제가 같이 경의를 표하는 대등한 존재로 쓰여지는 것을 용인했다. 그러 나 러시아측이 작성한 러시아어 라틴어문서를 청조에서 만문으로 번역한 것에서는 양국이 대등한 우호관계로 기록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청조( 皇 帝 )야 말로 지고한 존재이 고 러시아( 皇 帝 )는 격이 낮은 존재라는 형식을 취했다. 2. 문서를 사용하지 않은 정치적 커뮤니케이션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건륭기의 청조에서는 한문당안 만문당안에 각각 써도 좋은 정보에 엄격한 제한이 있고, 문장스타일에 일정한 규율이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1793 年 에 건륭제를 알현한 영국사절 매카트니는 흥미깊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매카트니는 청조황제로부터 영국국왕에 보내는 서간안에 영국측의 요구는 국왕에 의한 것이 아니 라 대사(매카트니)의 발의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는 구절이 있는 것에 항의했다. 그에 대해 청조측은 매카트니의 서면에 의한 요구가 영국국왕으로부터 인 것을 알고 있지만, 中 国 의 예의에 한 나라의 군주가 거부할 가능성이 있는 것을 다른 나라의 군주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을 용인하지 않는다 라는 생각에 근거해서 그 요구 를 없었던 것으로 하거나, 사절에 의한 실수로 처리하려고 했다( 史 料 6 ). 청조에게 있어 있어서는 안될 일 (제국의 질서를 혼란시키거나,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 등)은 문서에도 남기지 않는다 라는 것이 당시의 방침이었다. 있어서는 안된다 라는 것을 문서상에 남겨서는 안된다는 것은 청조의 관료도 같았 다. 乾 隆 44 年 11 月, 陝 甘 総 督 勒 爾 瑾 (Lerkin)가 奏 摺 에서 판첸라마 3세에게 叩 拝 했다라 - 96 -

[번역]대외정책에관한언설에서보는청조중기의국가질서관 는 것을 보고하자, 건륭제는 이를 당안에 기록해서는 안된다고 엄하게 질책했다 史 料 7 [ 村 上 2011a: 51-55]. 청조의 관료가 판첸라마에게 叩 頭 하고 절하는 것은 티베트 불교세계의 가치관에 근거한 당연한 예의이고 勒 爾 瑾 가 叩 拝 을 한 것 자체는 올바른 행동이지만, 그 것을 문서에 명기한 것이 잘못이었던 것이다. 건륭제는 판첸라마의 접 대에 관해 사전에 勒 爾 瑾 과 직접 대면하고 구두로 명령을 전달했다. 또한 勒 爾 瑾 을 질 책한 상유에 있어서 판첸라마에 대한 叩 頭 에 관한 지시는 구두로 전했으며, 그 지시를 받은 관원도 응답의 上 奏 를 올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건륭제는 당안의 서술에 관해 엄 격한 제한 규율을 설정하고, 그 범주내에서 전할 수 없는 지시나 정보는 문서에 남기 지 않는 방법(구두에 의한 전달 등)으로 전하도록 했던 것이다. 결론 건륭기 대외정책에 관한 당안의 기술에는 엄격한 제한 규율이 존재하였다. 한문당 안은 화이질서에 근거해서 세계질서가 성립한다는 체재안에서 서술해야 했고, 그것으 로부터의 일탈을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만문당안에서는 청조( 皇 帝 )에 준하는 국가 수 장이 존재하는 것까지는 기록되었지만, 어디까지나청조( 皇 帝 )의 권위야말로 지고하다 고 보이는 체제에 집착했다. 한문당안의 기술이 화이질서의 관념에 강하게 속박되어 있 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만문당안에도 본고에서 논한 기술상의 규율 제한이 있 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지적된 적이 거의 없었다고 생각되며, 여기에서 다시한번 주의를 환기하고자 한다. 이러한 규율 제한에 의해 당안에 기록되지 못한 정보와 인식은 구두에서의(문서를 남기지 않는 형식으로) 의사전달에 의해 공유되었다. 문서에 남기지 않는 것이라면, 화 이질서나 황제의 지고함을 흔들 수 있는 행위(유연한 외교적 교섭이나 티베트불교의 논이에 근거한 의례를 행하는 것 등)도 인정되었다. 건륭기 대외정책의 진행방식을 자 세히 검토하면, 중요한 사항은 문서를 사용하지 않는 의사전달에 의해 논의 결정된 것 을 알 수 있다. 당안에 기록된 내용은 이른바 형식적으로 보이는 것에 불구하고 황제 관료의 실제 인식이나 행동과 동떨어진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고 하겠다. 이러한 청조의 정치수법은 유연하다고 할 수도 있고 기만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당안을 사료로써 이용할 때에는 이 점을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 당안은 청조사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1차사료이지만, 그 작성과정에서는 사실의 - 97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은폐나 왜곡이 행해졌으므로 그 내용을 분석하는데 있어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하 겠다. 그와 동시에 건륭기 청조의 대외정책상의 중요한 사항이 문서를 사용하지 않은 정치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전달 실시되어 당안 등 청조의 문서기록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청조측의 기록에 남겨져 있지 않은 사항을 알기 위해서는 외국인의 저술과 티베트어문서 등의 다른 언어의 사료를 검토하 는 것이 유효하다. 이러한 작업은 결코 쉽지 않지만, 많은 나라 지역의 연구자들이 협 력하는 것으로 조금씩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 98 -

[번역]대외정책에관한언설에서보는청조중기의국가질서관 史 料 1 満 文 録 副 2837-28(マイクロフィルム 番 号 119-700) 乾 隆 45 年 7 月 16 日, 伍 彌 泰 奏 ahasi jai inenggi erde uthai ejen bancen erdeni de šangnara mase muyari dungga toro be bancen erdeni i tataha bade genefi šangname bure de bancen erdeni tehe baci wasifi niyakūraki serede ahasi wahiyame ilibufi giogin arame alime gaifi 奴 才 らは 次 の 日 の 早 朝, 主 ( 皇 帝 )がパンチェンエルデニに 賞 賜 する 茘 枝 西 瓜 桃 を, パンチェ ンエルデニの 宿 所 に 持 っていき 賞 賜 するときに, パンチェンエルデニは 座 から 降 りて 跪 きたい というのに 対 し, 奴 才 らは 助 けて 立 たせると, パンチェンエルデニは 合 掌 して 受 け 取 り 奴 才 等 于 次 日 ( 十 五 日 ) 早 即 将 主 子 赏 赐 班 禅 额 尔 德 尼 之 荔 枝 西 瓜 桃 前 去 班 禅 额 尔 德 尼 住 处 赏 给 时, 班 禅 额 尔 德 尼 从 其 座 位 上 下 来 欲 要 下 跪, 奴 才 等 将 其 扶 起, ( 班 禅 ) 合 掌 接 受 史 料 2 班 禅 檔 1740-39[ 村 上 2011b: 632] 乾 隆 45 年 7 月 17 日, 福 隆 安 等 の 奏 摺 中 に 記 された 庫 使 智 新 の 報 告 ini beye tofohonde meiren geo sere dedun de isinafi mase muyari i jergi jaka be umitai sede bufi umitai se imbe gaifi bancen erdeni de hengkilehede. 自 身 は 十 五 日 にメイレン 溝 という 駅 站 に 到 達 し, 茘 枝 等 の 品 を 伍 彌 泰 らに 渡 し, 伍 彌 泰 ら が 自 分 をともなってパンチェンエルデニに 叩 見 したとき, 彼 于 十 五 日 行 抵 梅 棱 沟 站, 将 荔 枝 等 物 交 付 于 伍 弥 泰 等 伍 弥 泰 等 率 彼 叩 谒 班 禅 额 尔 德 尼 时 史 料 3 満 文 録 副 2890-41(122-2596)[ 村 上 2011a: 54] 乾 隆 46 年 9 月 12 日, 博 清 額 奏 aha becingge irultu uyun biyai ice nadan de julergi dzang de isinjifi. aha hengšui. aha bootai i sasa dalai lama i jakade genefi dalai lama teku ci wasifi ilihai ejen i hesei bithe be geren i juleri wasibume hūlafi šangnara aisin i manda dongmo suje jergi jaka be šangnafi dalai lama ilihai giogin arame alarangge. 奴 才 博 清 額 伊 嚕 勒 図 は, 九 月 初 七 日 に 前 蔵 に 到 着 し, 奴 才 恒 瑞 奴 才 保 泰 とともにダ ライラマのもとに 行 き, ダライラマは 座 から 下 りて 立 ったまま, 奴 才 らは 主 の 諭 旨 を みなの 前 で 下 すよう 読 みました 金 の 曼 荼 羅 茶 入 れ 緞 子 等 の 賞 賜 品 を 賞 賜 し, ダライ ラマは 立 ったままで 合 掌 して 受 け 取 り, 告 げたことには 奴 才 博 清 额 伊 噜 勒 图 于 九 月 初 七 日 抵 达 前 藏 与 奴 才 保 泰 一 同 行 抵 达 赖 喇 嘛 处, 达 赖 喇 嘛 离 席 立 地, ( 奴 才 ) 在 众 人 前 宣 谕 旨, 赏 赐 金 制 曼 陀 茶 桶 缎 子 等, 达 赖 喇 嘛 立 地 合 掌 告 称 - 99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史 料 4 満 文 録 副 3065-16(134-58)[ 村 上 2011a: 49-50] 乾 隆 50 年 3 月 初 5 日, 慶 麟 奏 aha uthai hese šufa be tukiyeme jasi lumbu juktehen de genefi hubilgan be acafi šufa šangnaha de genefi hubilgan ilihai injemeliyan i alime gaiha. 奴 才 ( 慶 麟 )はただちに 旨 カ 当 ーを 献 げて 当 シルンポ 寺 に 行 き, 転 世 (フビルガン, パ ンチェンラマ4 世 )に 会 い, カ 当 ーを 賞 賜 しにいくと, 転 世 は 立 ったまま 笑 顔 で 受 け 取 り ました 奴 才 ( 庆 麟 ) 即 捧 谕 旨 哈 达 前 往 扎 什 伦 布 寺, 会 见 呼 毕 勒 罕 ( 七 世 班 禅 ), 赏 赐 哈 达 时 呼 毕 勒 罕 立 地 含 笑 接 受 史 料 5 漢 文 録 副 165-8005-2[ 村 上 2011b: 635-636] 嘉 慶 19 年 閏 2 月 初 6 日, 和 寧 奏 ( 漢 文 ) 唐 古 特 俗, 平 等 相 见, 彼 此 手 持 哈 达, 互 相 问 慰 西 藏 因 達 达 赖 喇 嘛 掌 天 下 黄 教, 最 为 番 众 所 信 崇, 是 以 从 前 相 沿 旧 习, 駐 藏 大 臣 见 达 赖 喇 嘛 亦 以 佛 法 瞻 礼, 达 赖 喇 嘛 并 不 下 座 自 乾 隆 五 十 八 年 钦 奉 上 谕, 钦 差 駐 藏 大 臣 与 达 赖 喇 嘛 系 属 平 等, 不 必 瞻 礼, 以 宾 主 礼 相 接 唐 古 特 の 俗 は, 対 等 に 会 見 するのに 互 いにカ 当 ーを 手 に 持 ち, 相 互 にご 機 嫌 を 問 います 西 蔵 では, ダライラマは 天 下 の 黄 教 を 掌 り, 最 も 番 衆 に 信 じられ 崇 拝 されているので, 従 前 は 旧 習 にしたがい, 駐 蔵 大 臣 がダライラマに 会 うときもまた 仏 法 によって 瞻 礼 し, ダライラマ は 決 して 座 から 下 りませんでした 乾 隆 五 十 八 年 につつしんで 上 諭 を 奉 じてより, 欽 差 駐 蔵 大 臣 とダライラマは 対 等 であり, 瞻 礼 する 必 要 はなく, 賓 主 礼 によって 相 接 します 史 料 6 Macartney, G. An Embassy to China, Being the Journal Kept by Lord Macartney During His Embassy to the Emperor Chien-Lung 1793-1794, p.166 According to the explanation given me it is a sort of political conundrum, a Court artifice to elude an ungrantable demand, for Chinese urbanity does not admit a supposition that one sovereign can desire for another what is possible to be refused. It is, therefore, concluded that the request has never been made, or if made that the Ambassador has been guilty of an error in the delivery of his message, and to have asked from his own head what had never entered into that of his master. これは 政 治 上 の 一 種 の 言 葉 のあやか 判 じもののようなもので, 聞 き 入 れるわけにはいかな い 要 求 をかわすために 宮 廷 で 用 いる 方 便 であるという というのは, 中 国 の 礼 儀 として, 一 国 の 君 主 が 拒 まれる 可 能 性 のあることを 他 国 の 君 主 に 求 めることがありうるという 仮 定 を 認 めないのである したがって, その 要 求 はけっしてなされなかったのだということ にされるが, さもなくば, 要 求 がなされたのは 使 節 がメッセージを 伝 える 時 に 失 策 をして, 主 君 が 考 えもしなかったことを 自 分 の 発 意 で 要 求 したためであるということにされるの - 100 -

[번역]대외정책에관한언설에서보는청조중기의국가질서관 である 2) 这是朝廷对不能予以满足的要求采取回避态度的一种技巧 根据中国的礼貌, 不能让外夷国 君遭到拒绝 在这种情况下, 就认为从来没有提出过这个要求, 或者贡使犯了主动提出这个 要求的错误 3) 史料⑦ 乾隆朝上諭檔 第9冊 859頁 乾隆44年11月3日 陝甘総督勒爾謹への寄信上諭(漢文) 今日勒尔谨奏班禅額尔德尼入境一折 据称, 在甘肃交界之东科尔寺叩见, 等语 此语甚属 非是 今年曾两次令勒尔谨入觐与军机大臣等商办一切, 並当面详晰谕知该督 以班禅額尔 德尼过境时, 不但督抚及道府大员不宜叩拜, 即下至文武杂佐微员亦不可跪迎 并于召见 时谆谕及之, 令其转传各督抚, 一体遵照 所降谕旨甚明, 勒尔谨豈尚未明悉, 何得复有叩见 之语, 形之章奏, 实属糊涂 并令军机大臣寄与书信, 不应以叩头等语入于章奏 至 明年班禅額尔德尼过境时, 该省大小文武各员, 只可排立迎俟 即微末员弁, 亦不得令其望尘 叩谒 但其事不便形之纸笔, 止可逐一口传, 不得转为札谕 其原折及此谕, 倶不存档案 也 所有经过之陝西 山西 直隶各督抚, 並著一併传谕知之, 均不必复奏 勒爾謹が 述べることによれば 甘粛交界の東科爾寺で叩見しました 等の語あり こ の語は甚だ誤りである 今年かつて二度勒爾謹を入覲させて軍機大臣等と一切を相談さ せ, また直接面会して詳細に該当(パンチェンの応接担当の)総督に諭した パンチェンエ ルデニが境界を通過するとき, ただ督撫および道府の大員は叩頭して礼拝すべきでないだ けでなく, 下は文武の雑多な下級役人もまた跪いて迎えるべきではない 召見の時, 丁 寧にこのことを諭し, それを各督撫に伝えて一緒に従うようにさせた 下した諭旨の内容 は非常にはっきりしている 勒爾謹はどうしていまだはっきりわかっていないのか ど うして再び 叩見 の語があるのか これを章奏にあらわすことは, じつに愚かなことであ る 明年, パンチェンエルデニが境界を過ぎるときには, 該省の大小文武各員は, ただ 立って迎えて待つように 下級の員弁も, また叩頭させ拝謁させる必要はない ただ, こ のことを紙筆にあらわすのは都合が悪い 逐一口頭によって伝えるだけにして, 札によっ て伝えてはならない その原摺とこの諭旨は, ともに檔案中に保存しない パンチェンが 通過する陝西 山西 直隷の各督撫にもあわせて諭旨を伝え このことを知らせるが 均しく返信の上奏を行なう必要はない 2) マカートニー(坂野正高訳) 中国訪問使節日記 1793年10月21日条(153頁) 3) 兰 佩雷菲特 停滞的帝国 北京三联出版社 1993年(本稿用于2008年北京第6次印刷版) 第286页 - 101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史 料 満 文 録 副 ( 軍 機 処 満 文 録 副 奏 摺 ) 中 国 第 一 歴 史 檔 案 館 所 蔵 マイクロフ 強 ルム. 漢 文 録 副 ( 軍 機 処 漢 文 録 副 奏 摺 ) 中 国 第 一 歴 史 檔 案 館 所 蔵 マイクルフ 強 ルム. 班 禅 檔 ( 軍 機 処 満 文 班 禅 檔 ) 中 国 第 一 歴 史 檔 案 館 所 蔵. 乾 隆 朝 上 諭 檔 中 国 第 一 歴 史 檔 案 館 編, 檔 案 出 版 社, 1991 年. 六 世 班 禅 朝 覲 檔 案 選 編 中 国 第 一 歴 史 檔 案 館 中 国 蔵 学 研 究 中 心 合 編, 中 国 蔵 学 出 版 社, 1996 年. 朴 趾 源 熱 河 日 記 上 海 書 店 出 版 社, 1997 年. ジョージ マカートニー( 坂 野 正 高 訳 ) 中 国 訪 問 使 節 日 記 平 凡 社, 1975 年. Macartney, G. An Embassy to China, Being the Journal Kept by Lord Macartney During His Embassy to the Emperor Chien-Lung 1793-1794, ed. Cranmer-Byng, Hong Kong: University of Hong Kong, 1961 参 考 文 献 石 濱 裕 美 子 2001. チベット 仏 教 世 界 の 歴 史 的 研 究 東 方 書 店. 岡 洋 樹 2003. 東 北 アジア 地 域 史 と 清 朝 の 帝 国 統 治 歴 史 評 論 642: 50-59. 鈴 木 中 正 1962. チベットをめぐる 中 印 関 係 史 十 八 世 紀 中 頃 から 十 九 世 紀 中 頃 まで 一 橋 書 房. 増 田 えりか1995. ラーマ1 世 の 対 清 外 交 東 南 アジア 歴 史 と 文 化 No.24: 24-47. 村 上 信 明 2011a. 駐 蔵 大 臣 の 瞻 礼 問 題 にみる18 世 紀 後 半 の 清 朝 チベット 関 係 アジ ア アフリカ 言 語 文 化 研 究 81: 45-69. 村 上 信 明 2011b. 試 論 清 朝 満 漢 文 档 案 在 有 関 記 載 的 特 征 及 其 規 範 以 有 関 乾 隆 時 期 清 朝 官 員 与 蔵 伝 仏 教 大 活 仏 的 会 見 礼 儀 档 案 為 例 中 国 社 会 科 学 院 近 代 史 研 究 所 政 治 史 研 究 室 編 清 代 満 漢 関 係 研 究 社 会 科 学 文 献 出 版 社, 626-637. 矢 沢 利 彦 ( 編 訳 )1972. イエズス 会 士 中 国 書 簡 集 3< 乾 隆 編 > 平 凡 社. 柳 澤 明 2003. 一 七 六 八 年 の キャフ 当 條 約 追 加 條 項 をめぐる 清 とロシアの 交 渉 について 東 洋 史 研 究 62-3:1-33. 吉 田 金 一 1974. 近 代 露 清 関 係 史 近 藤 出 版 社. 吉 田 金 一 1984. ロシアの 東 方 進 出 とネルチンスク 条 約 近 代 中 国 研 究 セン 当 ー. 阿 兰 佩 雷 菲 特 1993. 停 滞 的 帝 国 北 京 三 聯 出 版 社, 1993 年 ( 本 稿 では2008 年 北 京 第 6 次 印 刷 版 を 用 いた) - 102 -

[번역]대외정책에관한언설에서보는청조중기의국가질서관 図1 満文録副 3416-024(microfilm 155-1044) - 103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図 2 満 文 録 副 3416-020(155-1027) - 104 -

[번역]대외정책에관한언설에서보는청조중기의국가질서관 図3 満文録副 3416-022(155-1036) 1768年의 露清교섭에 있어, 교섭과 문서의 교환은 거의 만주어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柳澤씨는, 이 시기에 러시아와 청조 간에 교환된 문서의 정본은 만문이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柳澤2003: 28-31(573-570) マカートニー(坂野正高訳) 中国訪問使節日記 1793年10月21日条(153頁) 阿兰 佩雷菲特 停滞的帝国, 北京三联出版社, 1993年(本稿用于2008年北京第6次印刷版), 第286页 - 105 -

淸 초기 理 藩 院 의 위상과 인적구성 李 善 愛 (고려대) 서론 1. 淸 初 理 藩 院 의 위상 2. 이번원의 인적구성 결론 서론 청대 외번 통치 전담 기구인 理 藩 院 은 軍 機 處 와 함께 청조 고유의 중앙기구로 평가 되어왔다. 이번원의 전신인 몽고아문(monggo jurgan)은 후금의 몽고 관련 업무를 전담 하기 위해 설치되었고 내몽고 장악을 계기로 tulergi golo(외번) 의 개념이 형성될 무렵 인 숭덕3년(1638)에 이번원(tulergi golo be dasara jurgan)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강희 중엽 할하가 외번에 편입됨에 따라 이번원의 조직과 역할도 변화했다. 게다가 이번원 관원은 일부 하위 관원을 제외하고 모두 만주와 몽고인으로만 구성되었다. 이번원은 內 閣 이나 六 部 와 달리 만한병용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아 한인의 참여가 배제된 기구였다. 이와 같이 이번원은 설립 배경부터 몽고와의 관계가 중요했던 후금 정권의 특징을 담 고 있으며 청조의 외번이 확대됨에 따라 이번원의 조직체계와 역할도 변화했다. 또한 관원도 만주와 몽고기인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이번원은 청조의 특징 즉 지배층이 만주족이며 다민족 제국이라는 성격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중앙기구라고 할 수 있 다. 요컨대 이번원은 청 초기 만몽관계와 외번의 확대과정을 반영하며 청조의 내륙아시 아적 특징이 체현된 기구이다. 이번원 설립의 목적은 후금의 만몽연합적 성격에서 비롯되었다. 누르하치 치세부터 내몽고 부족들과 후금의 관계는 친선과 갈등, 연합과 대립을 반복했다. 홍타이지는 명 과 차하르부 릭단 칸에 대한 전쟁을 진행하면서 내몽고 부족에 대한 우세를 점하게 되 었다. 그는 만주족 정권의 체제를 완비해나가는 과정에서 내몽고 부족을 전담 관리할 부서를 설립해 군사 동원 때의 임시적 성격이 아닌 상시적이고 체계화된 행정관리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일반적으로 홍타이지의 개혁에 대해 명의 제도를 모방해 관제를 세우고 한인 관료를 등용해 권력집중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홍타 - 107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이지가 코르친부와의 혼인관계를 강화하고 내몽고에 대한 영향력을 심화시켜간 일련 의 정책들도 그가 大 칸으로서의 권위를 세우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한 몽고아문은 몽고와의 관계가 정권의 안녕과 직결된 당시 만주족 정권의 특징을 반영한다. 이번원 설립 시기 및 초기 조직구성의 세부적인 측면은 명확하지 않다. 몽고아문을 이번원으로 개칭한 시기는 사료를 통해 명확하게 파악되지만 몽고아문이 설립된 시기 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존재한다. 기존에는 淸 史 稿 職 官 志 理 藩 院 條 의 숭덕 원 년에 몽고아문을 설립하고 승정과 참정을 두었다 는 기록을 근거로 한 숭덕 원년 설립 설이 유력했다. 1) 그러나 만문사료인 內 國 史 院 檔 과 淸 太 宗 實 錄 천총8년(1634) 5월 條 에 몽고아문의 관리 가 언급된 기록을 근거로 숭덕 원년보다 이전, 적어도 천총8년 경에는 이미 몽고아문이 설립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2) 이와 같이 몽고아문 설립 시기를 두고 이견이 있는 것은 몽고아문 설립 직후 활동에 관한 사료가 충분하기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대 이번원의 역할과 특징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설립 시기의 特 定 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이번원이 설립된 배경과 만주족 정권 내에서 몽고아문-이번원이 차지한 위치와 성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 논문에서는 청 초기에 발생한 이번원의 지위 변화가 청 조정 내부의 만 한 제도 의 대립을 반영하며 이는 청 조정 내부에서도 이번원을 만주족의 기구로 명확하게 인 식했음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규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숭덕 연간부터 강희 중엽까지 이 번원 인적구성의 변화를 추적해 이번원이 청조의 핵심 권력층을 형성한 만주 몽고 기 인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이는 청조의 통치체제에서 외번이 갖는 의미와도 관계가 있음 을 논하고자 한다. 1. 淸 初 이번원의 위상 滿 文 老 檔 에 숭덕 원년 10월 16일에 외번 몽고 버일러들과 대신들에게 백성의 절 1) 淸 史 稿 卷 115 志 90 職 官 二 理 藩 院. 初, 崇 德 元 年, 設 蒙 古 衙 門, 置 承 政, 參 政 各 官. 2) Ning Chia, The institutional innovation and Renovation of the Manchu dynasty Lifanyuan and Libu in the Qing Empire building, Workshop Administrative and Colonial Practices in Qing Ruled China: Lifanyuan and Libu Revisited, Max Planck Institute for Social Anthropology, April 7-8, 2011; 包 文 漢, 淸 代 藩 部 一 詞 考 釋, 淸 史 硏 究 2000 年 第 4 期, p.100; 達 力 扎 布, 淸 代 內 扎 薩 克 六 盟 和 蒙 古 衙 門 設 立 時 間 蠡 測, 明 淸 蒙 古 史 論 稿 ; 片 岡 一 忠, 淸 朝 新 彊 統 治 硏 究, 雄 山 閣 出 版, 1991; 村 上 信 明, 淸 朝 前 期 における 理 藩 院 の 人 員 構 成, 滿 族 史 硏 究 4, 2005. - 108 -

淸 초기 理 藩 院 의 위상과 인적구성 도와 혼란함에 대해 논하고자 법도의 글을 내리고 회맹에 참가하러 차하르, 할하의 버 일러들에게 도찰원 승정 아시다르한 낙추, 몽고아문 승정 다야치 타부낭, 코르친의 버 일러들에게 홍문원 대학사 히퍼, 몽고아문 승정 니칸을 보냈다 는 기록이 있다. 3) 이를 통해 이 시기 몽고아문의 상급 관원으로 승정과 참정을 두었고 승정은 1명 이상이었다 는 점을 알 수 있다. 숭덕3년(1638) 6월에 몽고아문을 이번원으로 개칭한 데 이어 7월에 部 院 의 관제를 개혁해 각 부원에 만주 승정 1명과 좌 우 참정 각 1명씩 두도록 규정하 면서 이번원도 이 원칙에 따르게 되었다. 이때 버이서( 貝 子 ) 볼로[Bolo, 博 洛 / 波 洛 ]가 승 정으로 임명되었고 이전에 몽고아문 승정이었던 니칸은 이번원 우참정으로 옮겨졌다. 이 외에 실무 처리 관원으로 만 몽결의 副 理 事 官 8명과 啓 心 郞 1명을 두었다. 4) 이번원 승정과 참정의 지위는 육부와 동일했고 이번원은 육부, 도찰원, 內 三 院 과 함께 소위 三 院 八 衙 門 체제를 구성했다. 숭덕8년(1643) 7월 홍타이지가 내삼원 아문을 이번원 밖으로 옮기고 이번원을 내삼원 자리로 이전하려했다가 좌절된 일이 있었다. 도찰원 승정 祖 可 法 과 張 存 仁 등은 홍타이 지가 이번원을 내삼원 자리로 이전하고자 내린 명에 대해 내삼원과 도찰원은 원래부터 가까이 위치해 政 事 를 의논했고 내삼원은 조정의 近 臣 임으로 멀리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내삼원 이전을 반대했다. 결국 홍타이지는 도찰원과 내삼원 관원들의 뜻을 받 아들여 내삼원을 다시 이번원 자리로 복귀시키고 이번원은 예부 아문 옆에 별도로 건 립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5) 내삼원은 內 國 史 院 (suduri ejere yamun, 역사를 기록하는 아문), 內 弘 文 院 (kooli selgiyere bithei yamun, 例 를 선포하는 문서의 아문), 內 秘 書 院 (narh ūn bithei yamun, 비밀 문서의 아문)을 통칭하는 것으로 기존의 文 館 (bithei yamun)을 기 반으로 설립된 세 아문(ilan yamun, 三 館 / 三 院 ) 이다. 내삼원은 1636년에 황제의 직속 기 구로 설립된 이후 홍타이지가 황권을 강화하고 국가 제도를 정비하는 데 중추적인 기 구로 기능했다. 내삼원은 홍타이지 시기에 건설된 심양 고궁의 中 路 건축군 중에서 가 3) 滿 文 老 檔 太 宗 崇 德 31, 崇 德 元 年 10 月, p.1335. 4) 淸 太 宗 實 錄 崇 德 3 年 7 月 丙 戌. 先 是, 六 部 都 察 院 理 藩 院 滿 洲 蒙 古 漢 人 承 政 每 衙 門 各 三 四 員, 其 餘 皆 爲 參 政 官 止 二 等. 至 是 范 文 程, 希 福, 剛 林 等 奏 淸, 每 衙 門 止 宜 設 滿 洲 承 政 一 員, 以 下 酌 量 設 左 右 承 政, 理 事, 副 理 事, 主 事 等 官, 共 爲 五 等. 上 可 其 奏. 于 是 命 吏 部 和 碩 睿 親 王 更 定 八 衙 門 官 制, 以 貝 子 博 洛 爲 理 藩 院 承 政, 塞 冷 爲 左 參 政, 尼 堪 爲 右 參 政. 副 理 事 官 八 員, 諾 木 圖, 希 福, 胡 什 格, 扈 什 布, 羅 畢, 阿 布 達 理, 艾 松 古, 羅 多. 啓 心 郞 多 惠. 5) 淸 太 宗 實 錄 崇 德 8 年 7 月 己 未 條. 都 察 院 參 政 祖 可 法, 張 存 仁, 理 事 官 雷 興 等 奏 言. 皇 上 膺 圖 御 宇, 撫 馭 臣 民. 凡 禮 樂 制 度, 昭 萬 歲 之 成 規. 前 旨 命 設 內 三 院 及 臣 等 衙 門, 相 隣 不 遠, 立 朝 侍 班, 諮 商 政 事, 皆 聖 心 之 所 載 定 也. 考 諸 古 制, 甚 爲 合 宜. 近 聞 將 內 三 院 衙 門 移 於 理 藩 院 之 外. 臣 等 思 內 三 院 理 合 仍 近 臣 院, 宜 將 理 藩 院 外 移. 蓋 三 院 系 朝 廷 近 臣, 豈 可 遠 居. 臣 等 身 任 言 路, 凡 立 衙 門 定 規 度 等 事, 或 有 未 協, 理 應 陳 奏, 伏 冀 聖 監, 疏 入. 上 是 之, 命 部 臣 改 理 藩 院 衙 門 爲 內 三 院, 另 建 理 藩 院, 近 禮 部 衙 門. - 109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장 중요한 崇 政 殿 의 동남측에 건설되어 황제의 집무실과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6) 내삼원과 이번원의 위치를 바꾸고자 했던 홍타이지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심양고궁의 아문 전각들이 정치적인 중요도를 고려해 배치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 문 위치의 이동은 단순한 자리바꿈의 의미를 넘어선다고 볼 수 있다. 7) Chia Ning은 이 것이 청 조정 내에서 이번원의 역할과 지위가 높아졌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즉 홍타이 지 정권에서 이번원이 관할하던 몽고 관련 업무가 중요해졌고 이에 따라 이번원의 지 위도 격상되었다는 것이다. 8) 한편 이 문제는 홍타이지 정권의 내부 상황과 도찰원과 내삼원 그리고 이번원이라는 중앙기구들이 갖는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홍타이지에게 내삼원의 이전을 강력히 반대했던 도찰원 관원들은 承 政 祖 可 法, 張 存 仁, 都 察 院 理 事 官 인 雷 興 등이다. 조가법은 후금에 투항한 명의 총병 祖 大 壽 의 양자로 조대수와 함께 후금에 투항했으며 장존인은 요양 출신으로 寧 遠 城 副 將 이었다가 大 凌 河 전투 때 조대수와 함께 후금에 항복한 인물이다. 뢰흥은 요동 출신 한인으로 누르하 치 시기에 直 文 官 이 되었고 천총 연간에 내삼원의 하나인 秘 書 院 의 副 理 事 官 을 거쳐 숭덕 연간에 도찰원이사관으로 승진했다. 조가법과 장존인, 뢰흥은 한인이라는 공통점 을 갖는다. 홍타이지 시기 중앙기구와 제도를 정비하면서 명대의 제도를 참고했고 이에 따라 중앙기구 관원으로 한인들이 대거 기용되었다. 특히 명대 관제와 관련이 깊은 내 삼원과 도찰원에는 한인 관원들이 대거 포진해있었다. 예컨대 내삼원 설립 직후인 숭덕 연간 초기에 내국사원 대학사에 가린[Garin, 剛 林 ], 학사에 羅 繡 錦 과 로쇼[Lošo, 羅 碩 ], 거인 생원에 梁 正 大 楊 方 興 宜 成 格 張 應 魁 가 임명되었다. 내홍문원 대학사로 히퍼[Hife, 希 福 ], 학사에 후키오[Hūkio, 胡 丘 혹은 胡 球 ] 와 王 文 奎, 거인 생원에 齊 國 儒 馬 國 柱 王 鐸 이 임명되었다. 내비서원 대학사는 鮑 6) 欒 嘩, 李 理, 從 沈 陽 故 宮 宮 殿 建 築 看 滿 漢 文 化 的 交 融, 沈 陽 建 築 大 學 學 報, 第 12 卷 第 2 期, p.168. 심양 고궁의 건축군은 누르하치 시기에 大 政 殿 과 十 王 亭 이 지어진 東 路 와 홍타이지 시기에 지어진 中 路, 건륭기에 증건된 행궁의 일부인 西 路 로 나뉜다. 누르하치 시기에는 大 政 殿 을 중앙에 두고 좌우로 여덟 버일러들의 집무실이 배열되어 있어 칸과 버일러들의 공동통치의 특징을 보인다. 이에 비해 홍타이지는 中 路 의 중앙에 大 殿 인 崇 政 殿 을 중심으로 동 서로 각 아문의 전각인 朝 樓 朝 房 을 건 립해 동로의 십왕정을 대체했다. 이는 八 旗 旗 主 버일러들의 지위를 약화시키고 황권을 강화시키려 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7)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시기 심양고궁의 건축이 갖는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 井 曉 光, 淸 初 宮 廷 建 築 淺 議 - 兼 談 皇 太 極 的 皇 權 思 想, 淸 史 硏 究, 1995 年 第 4 期 ; 謝 慧 君, 淸 代 盛 京 城 六 部 建 置 及 坐 落 位 置, 滿 族 硏 究, 2005 年 第 4 期. 8) Chia Ning, The institutional innovation and Renovation of the Manchu dynasty Lifanyuan and Libu in the Qing Empire building, Workshop Administrative and Colonial Practices in Qing ruled China: Lifanyuan and Libu revisited, Max Planck Institute for Social Anthropology, April 7-8, 2011, p.4. 이 글 에서 Chia Ning은 이 기록의 날짜를 1638년 8월 17일로 오기했다. 이는 崇 德 8년(1643) 7월 己 未 일의 일이다. - 110 -

淸 초기 理 藩 院 의 위상과 인적구성 承 先 과 范 文 程, 학사는 잠바[Jamba, 詹 巴 혹은 詹 覇 ], 거인 생원은 엉거더(Enggede), 뢰 흥, 李 棲 鳳, 赫 德 이 임명되었다. 9) 가린과 히퍼, 로쇼, 잠바, 엉거더 등은 한문에 능한 만 주족이었고 나머지 나수금, 양정대, 제국유, 뢰흥, 의성격, 이서봉, 혁덕 등은 한인이었 다. 도찰원이 상주를 올린 숭덕8년 당시 도찰원에는 승정인 宗 室 만다하이[Mandahai, 滿 達 海 혹은 滿 打 亥 ], 참정인 차하르부 출신 도르지 다르한[Dorji darhan, 多 爾 濟 達 爾 漢 ], 만주족 쿠르찬[Kurcan] 등과 함께 조가법, 장존인, 뢰흥 등의 한인 관원들이 병용되었다. 조가법과 장존인은 도찰원이 설립된 숭덕 원년(1636) 도찰원 승정에 제수되었다가 숭덕 3년(1638)에 팔아문의 관제를 개혁해 도찰원 승정을 만주인 한 명으로 규정하면서 右 參 政 이 되었다. 이후로 도찰원 승정은 國 舅 아시다르한, 버이서 로토[Loto, 洛 託 ], 만다하 이 등 만주 종실과 관련된 인물들이 맡았고 참정과 부이사관 등은 만 한 몽결로 분 배되었지만 실질적인 업무는 장존인 조가법 마국주 뇌흥 등의 한인관료들이 담당 했다. 10) 내삼원과 도찰원 그리고 육부는 명의 제도를 연용해 설립되었고 업무의 성격이나 만 주족과 함께 한인을 고위직에 임명했다는 점에서 몽고관련 업무를 전담하고 관원도 만 몽결만 있는 이번원과는 다른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도찰원 관원들은 상주 문에서 옛 제도를 살펴보아도 내삼원과 도찰원은 함께 정사를 의논해야 함이 마땅하 고 내삼원은 조정의 近 臣 이므로 멀리할 수 없다 는 이유를 들어 내삼원이 아니라 이번 원을 밖으로 이전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 내용에서 도찰원 관원들이 내삼원과의 관계 를 동질적 혹은 협업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이번원에 대해서는 도찰원 내삼원과는 다른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이 간취된다. 따라서 이번원 과 내삼원 아문의 이전을 둘러싼 논의는 한인관료들이 명의 제도를 모방한 중국적 중 앙기구와 후금-청의 만몽연합적 특성에서 만들어진 이번원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고 이번원을 내삼원 보다 가까이 두려는 홍타이지의 의도에 위기감을 느꼈다는 것을 의미 한다. 이번원의 조직구성은 순치 연간에 관제를 정비하면서 보다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순 치원년(1644)에 관직 명칭을 개정해 이번원 승정을 尙 書 로, 참정을 侍 郞 으로, 부이사관 을 員 外 郞 으로 바꾸었다. 또 啓 心 郞 3명(만주 1명, 한군 2명), 堂 主 事 2명, 司 務 2명, 漢 副 使 1명을 두었다. 11) 순치5년(1648) 2월에는 漢 院 判, 知 事 를 1명씩 증설했고 12) 하급 실 9) 劉 小 萌, 滿 族 從 部 落 到 國 家 的 發 展, 中 國 社 會 科 學 院 出 版 社, 2007( 이훈 김선민 이선애 옮김, 여 진부락에서 만주국가로, 푸른역사, 2013, pp. 412-416). 10) 淸 史 列 傳 卷 78 貳 臣 傳 甲 張 存 仁 pp.6431-6434, 祖 可 法 pp.6435-6438; 劉 玉 杰, 淸 關 外 時 期 都 察 院 初 探, 齊 齊 哈 爾 工 程 學 院 學 報, 2013 年 第 1 期, p.82. - 111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무관으로 漢 缺 이 생기긴 했지만 육부 상서에 적용된 만한병용의 제도가 이번원에 적용 된 것은 아니었다. 이번원의 경우 몇몇 하위직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관직은 모두 만주인과 몽고인이 담당했으며 이러한 원칙은 청말까지 유지되었다. 순치14년(1657)에 唐 古 忒 學 敎 習 1명을 이번원의 속관으로 설치했는데 이는 청 조정 이 티베트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한 것과 관련이 있다. 청 조정이 티베트와 접촉을 시도한 것은 홍타이지가 대청 황제로 즉위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숭덕2년(1637) 8월 할하의 세첸 칸과 투시예투 칸이 홍타이지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들은 달라이 라마를 심양으로 초청하려는 홍타이지의 뜻을 알고 있으며 자신들과 오이라트 4부도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고자 하니 함께 동행하자고 제안했다. 13) 이 서신을 통해 이 시기에 이미 홍타이지가 달라이 라마 초청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숭덕2년 11 월과 숭덕4년 10월에도 홍타이지는 티베트 측에 사절을 보내 천하 중생에게 불교를 전 파할 수 있는 현능한 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결국 홍타이지 시기 달라이 라 마의 심양 방문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순치제가 등극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달라이 라마 의 초청을 추진했다. 차이가 있다면 홍타이지 시기에는 주로 청에서 티베트로 사신을 파견했지만 순치제가 등극한 이후에는 티베트 측에서 청으로 사신을 파견하는 일이 많 아졌다는 점이다. 청이 입관하고 중원을 장악하자 티베트도 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실리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14) 이렇게 양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게 되 면서 숭덕 연간부터 추진해왔던 달라이 라마의 초청이 순치9년(1652) 12월에 성사되었 다. 15) 순치5년부터 추진되어 순치9년 말에 결실을 맺은 달라이 라마와 순치제의 회견은 청 과 티베트 그리고 티베트의 군정을 장악한 오이라트 호쇼트부 구시 칸 사이의 우호관 계가 성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순치제가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는 데 공을 들인 이유는 개인의 종교적 동기도 있겠지만 티베트가 서북부 몽고 세력과 갖는 정치 종교 군사 적 관계가 매우 밀접하기 때문이다. 입관 직후 체제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청이 서 북부의 안정을 확보하는 것은 정권의 안녕과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서북부 몽고 각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티베트의 종교 정치적 지도자들과의 관계설정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될 수밖에 없었다. 티베트 측에서도 강력한 후원자의 확보는 달라이 라마가 속한 11) 淸 史 稿 卷 115 志 90 職 官 二 理 藩 院. 12) 淸 世 祖 實 錄 順 治 5 年 2 月 丙 寅 條. 13) 淸 太 宗 實 錄 崇 德 2 年 8 月 辛 丑 條 에 外 할하의 마하사마디 세첸칸의 서신이, 庚 戌 條 에는 투시예투 칸의 서신이 기록되어있다. 두 서신의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14) 李 保 文, 順 治 皇 帝 邀 請 第 五 世 達 賴 喇 嘛 考, 西 藏 硏 究, 2006 年 第 1 期, p.21. 15) 淸 世 祖 實 錄 順 治 9 年 12 月, 癸 丑 條. - 112 -

淸 초기 理 藩 院 의 위상과 인적구성 겔룩파 교단과 호쇼트부 구시 칸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순치 연간에 티베트와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티베트문으로 쓰여진 경전을 해석하고 티베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력이 필요해졌다. 이에 따라 순치14년에 唐 古 忒 敎 習 을 이 번원 소속 관원으로 설치하고 경사와 성경 및 내몽고 지역의 티베트 불교 거점 지역에 라마승들을 관리하기 위한 자사크라마[ 扎 薩 克 喇 嘛 ]제도를 확립했다. 16) 티베트 불교 고 승에게 자사크라마와 首 領 라마라는 직위를 부여해 경성에는 자사크라마를 성경 시레 투 쿠레[ 西 勒 圖 庫 倫 ] 17) 후흐호트[ 歸 化 城 ]에는 수령라마를 두어 경사를 정점으로 한 독자적인 티베트 불교계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다. 자사크라마와 수령라마로 임명된 인 물들은 티베트 암도 후흐호트 등지 출신의 학식이 높은 고승들로 5세 달라이 라마의 초청과 방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 자사크라마와 수령라마는 각 거점 지역에 서 라마승과 속민, 사원에 대한 관리를 담당했으며 이들에 대한 관리는 이번원이 총괄 했다. 이와 같이 티베트와의 교류가 빈번해지고 할하와도 비교적 안정적인 조공관계가 이어지면서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이번원의 업무도 증대되었다. 그러나 순치 말년과 강 희 초기에 이번원 관제에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순치16년(1659) 이번원 상서를 禮 部 尙 書 銜 掌 理 藩 院 事 로, 이번원 좌 우시랑을 禮 部 侍 郞 銜 協 理 理 藩 院 事 로 개칭하고 이번원을 예부에 예속시켰다. 19) 그러나 2년 후인 순치 18년(1661) 순치제가 사망하고 강희제가 즉위한 후 이번원을 예부에 예속시킨 것이 舊 制 와 맞지 않다고 하여 兼 銜 을 중지하고 다시 독립시켰다. 20) 이번원을 다시 독립시키면 서 錄 勳 淸 吏 司 (hafan sindaha bolgobure fiyenten, 관원을 임명하는 淸 吏 司 ) 賓 客 淸 吏 司 (a ntaha be tuwašatara bolgobure fiyenten, 빈객을 돌보는 淸 吏 司 ) 柔 遠 淸 吏 司 (goroki be bilu 16) 康 熙 朝 大 淸 會 典 卷 144, 理 藩 院 3, 柔 遠 淸 吏 司, 喇 嘛 條. 17) 만문으로는 siretu kuren이라고 한다. 쿠레 란 가축과 속민을 동반한 이동식 사원을 의미하는데 이 이동식 사원이 고착되어 지역화하기도 했다. 한자로는 庫 倫, 몽문으로는 küriy-e, 만문으로는 kuren으 로 표기한다. 시레투 쿠레는 홍타이지가 아샨 만주시리 호톡토 라마에게 1632년 성경 변외의 法 庫 지역에 영지를 내리면서 시작되었다. 현재 내몽고자치구 通 遼 市 庫 倫 旗 지역이다. 이후에 남부 몽 고 지역의 티베트 불교 거점으로 역할을 했다. 아샨 만주시리 호톡토와 시레투 쿠레에 대해서는 池 尻 陽 子, 淸 朝 前 期 のチベット 佛 敎 政 策 - 扎 薩 克 喇 嘛 制 度 の 成 立 と 展 開, 汲 古 書 院, 2013, pp.44-50 참조. 18) 池 尻 陽 子, 앞의 책, pp.65-70. 19) 淸 世 祖 實 錄 卷 125, 順 治 16 年 閏 3 月 辛 酉 朔. 更 定 在 京 各 衙 門 滿 漢 官 銜 品 級 六 部 滿 漢 尚 書, 侍 郎, 郎 中, 員 外 郎, 主 事, 司 務 等 官, 稱 謂 品 級 俱 仍 舊. 兵 部 督 捕 侍 郎, 稱 謂 品 級 仍 舊. 左 右 理 事 官 俱 改 爲 太 僕 寺 少 卿, 仍 協 理 兵 部 督 捕 堂 上 事 務, 正 四 品. 理 藩 院 尚 書, 稱 禮 部 尚 書, 掌 理 藩 院 事, 正 二 品. 左 右 侍 郎, 稱 禮 部 左 右 侍 郎, 協 理 理 藩 院 事, 正 三 品. 副 理 事 官, 從 五 品. 院 判 仍 正 六 品. 知 事, 副 使, 稱 謂 品 級 如 舊. 20) 淸 聖 祖 實 錄 卷 2 順 治 18 年 3 月 戊 寅 條. 諭 吏 部, 禮 部, 太 宗 皇 帝 時, 蒙 古 各 部 落 盡 來 歸 附, 設 立 理 藩 院 專 管 外 藩 事 務, 責 任 重 大. 今 作 禮 部 所 屬, 于 舊 制 未 合. 嗣 後, 不 必 兼 禮 部 銜, 仍 稱 理 藩 院 尙 書, 侍 郞, 其 印 文 亦 著 改 正 鑄 給. - 113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re bolgobure fiyenten, 먼 곳을 慰 撫 하는 淸 吏 司 ) 理 刑 淸 吏 司 (weile beidere bolgobure fiye nten, 죄를 審 理 하는 淸 吏 司 ) 4개의 淸 吏 司 를 설치해 六 部 에 준하는 체제를 만들고 낭중 과 원외랑을 증원했다. 아울러 육부상서의 예에 따라 이번원도 의정에 참여하도록 했으 며 工 部 의 다음 반열에 들게 했다. 21) 순치 말년에 이번원이 예부에 편입되었다가 다시 독립하게 된 과정은 순치 시기의 정치적 상황과 순치제의 친정 후 추진된 정치개혁의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 르곤의 섭정 시기에 청은 북경에 입성하긴 했지만 復 明 세력과 이자성 장헌충의 잔존 세력, 동남 연해 일대의 정성공 세력 등을 진압해야하는 상황에 있었다. 장성 부근의 몽고 부족들도 청이 중원에서 고전하는 틈을 노려 변경을 침범하는 등 불안정한 요소 를 제공했고 청에 항복한 명의 장수들도 혼란을 틈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22) 그리고 홍타이지 사후 황위계승권을 둘러싼 분쟁에서 시작된 분열 양상은 도르곤의 섭정 시기 에 당파 간 분쟁으로 이어져 입관 후 청 조정의 정치적 안정을 위협했다. 반청 세력을 진압하는 문제는 순치7년(1650) 12월 도르곤이 죽기 전에 어느 정도 해 결되었지만 조정 내부의 당파 분쟁은 도르곤의 사후에 심화되었다. 순치제는 친정을 시 작하면서 한인관료를 기용해 정치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이런 문제들을 타개하고자 했 다. 23) 순치제가 친정을 한 지 2년째 되는 해인 순치9년(1652)에 諸 王 버일러 버이서 21) 淸 聖 祖 實 錄 卷 3, 順 治 18 年 秋 7 月 乙 卯 條. 設 立 理 藩 院 四 司 名 目, 爲 錄 勳 淸 吏 司, 賓 客 淸 吏 司, 柔 遠 淸 吏 司, 理 刑 淸 吏 司, 給 印 信. ; 卷 4, 8 月 戊 申 條. 諭 吏 部, 理 藩 院, 職 司 外 藩 王, 貝 勒, 公 主 等 事 務 及 禮 儀 刑 名 各 項, 責 任 重 大, 非 明 朝 可 比. 凡 官 制 體 統, 應 與 六 部 相 同. 理 藩 院 尙 書, 照 六 部 尙 書 入 議 政 之 列. 該 衙 門 向 無 郎 中, 今 著 照 六 部, 設 郎 中 官. 爾 部 議 奏. 尋 議 復, 理 藩 院 見 設 錄 勳, 賓 客, 柔 遠, 理 刑 四 司, 今 應 增 設 各 司 郎 中 共 十 一 員, 員 外 郞 共 二 十 一 員. 得 旨, 依 議. 理 藩 院 尙 書 銜 名, 著 列 于 工 部 之 後. 22) 할하의 타이지인 에르케 추후르가 사냥을 핑계로 청과의 변계지역 즉 장성까지 접근했다. 도르곤 은 왕 대신들을 모아 의논하고 아지거 볼로 쇼사이 등을 파견해 大 同 을 수비하도록 했다. 그러 나 아지거 등이 대동에 도착했을 때 大 同 總 督 등 관리들이 성을 나온 사이 大 同 總 兵 官 姜 瓖 이 문 을 닫아걸고 반란을 선언했다. 강양은 청에 투항한 명의 장수로 宣 化 와 대동총병관을 역임한 인물 이다. 강양의 반란에 호응해 대동 부근의 11개 성이 반란을 일으켰고 아지거 등이 이끄는 청군은 대동성을 포위공격하면서 변경의 몽고를 경계해야하는 상황에 처했다. 淸 世 祖 實 錄 順 治 5 年 11 月 癸 未 條. 攝 政 王 獵 至 蹇 家 莊, 會 報 喀 爾 喀 部 落 二 楚 虎 爾 行 獵, 向 我 邊 界. 于 是 集 諸 王 大 臣 議, 遣 和 碩 英 親 王 阿 濟 格, 多 羅 端 重 郡 王 博 洛, 多 羅 承 澤 郡 王 碩 塞, 固 山 貝 子 拜 尹 圖, 公 傅 勒 赫, 岳 樂, 護 軍 統 領 鰲 拜 巴 圖 魯 等 統 兵 戍 守 大 同 ; 淸 世 祖 實 錄 順 治 5 年 12 月 戌 戊 條. 和 碩 英 親 王 阿 濟 格 等 奏 十 二 月 初 三 日, 大 同 總 督, 司 道, 餉 司, 知 府 各 官, 出 城 驗 草. 大 同 總 兵 官 姜 瓖 閉 門 叛. 其 收 驗 糧 草 之 鍾 古 等, 俱 被 陷. 總 督 奔 入 陽 和 臣 隨 統 兵 星 夜 前 往. 於 初 四 日 圍 其 城 請 發 紅 衣 炮, 以 爲 攻 城 之 用. ; 12 月 丙 午 條. 和 碩 英 親 王 阿 濟 格 奏 報, 我 軍 已 圍 大 同, 而 蒙 古 之 警 適 至. 若 遂 徹 軍 親 往 則 攻 圍 大 同 無 兵, 且 恐 蒙 古 遁 回, 追 逐 又 復 不 及. 必 待 至 我 邊 界, 方 可 追 勦. 臣 等 與 諸 王 大 臣 會 議. 欲 分 兵 一 半 馳 赴 隨 又 二 次 遣 人 偵 探 實 信. 因 叛 者 不 止 大 同 其 附 近 十 一 城 皆 叛 故 必 待 實 信, 方 敢 啟 行 也. 23) 순치 시기 정치적 상황과 개혁에 관한 내용은 Jerry Dennerline, The Shun-Chih Reign, Denis Twitchett and John K. Fairbank ed.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9 Part 1 The Ch ing Dynasty to 180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pp.73-119 참조. - 114 -

淸 초기 理 藩 院 의 위상과 인적구성 의 部 院 업무 관리를 중지시켜 황실 버일러들의 정무 전담을 견제하는 등 議 政 王 大 臣 會 議 의 권력을 약화시키고자했다. 24) 순치15년(1658)에는 內 三 院 秘 書 弘 文 國 史 大 學 士 를 殿 閣 大 學 士 로 개칭하여 내삼원을 내각으로 전환하는 한편 전각대학사가 육부 尙 書 를 겸하게 하여 내각과 육부의 연계를 강화하고 한림원을 별도로 설치해 기존에 내 삼원이 맡았던 문사를 담당하게 했다. 25) 이로써 내삼원 즉 내각은 주요 정무를 처리하 는 중앙기구의 중추로 자리 잡았다. 내삼원을 내각으로 개칭하고 내각대학사가 육부 상 서를 겸하도록 관제를 바꾼 다음 해에 이번원을 예부에 예속시킨 것은 육부를 관할하 게 된 내각의 권한과 업무를 집중 강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분석할 수 있다. 내각과 육 부, 도찰원을 강화하고 한인 관료를 기용한 순치제의 정책은 이전 명대의 정치체제를 모방한 측면이 다분했다. 어린 강희제가 즉위한 후 청 조정을 장악한 숙사하[Suksaha, 蘇 克 薩 哈 ], 어빌룬[Ebilun, 遏 必 隆 ], 소니[Soni, 索 尼 ], 오보이[Oboi, 鰲 拜 ]로 구성된 輔 政 大 臣 들은 순치제가 추진했 던 일련의 정책을 부정했다. 26) 순치제가 설립한 十 三 衙 門 을 폐지하고 내무부를 부활시 켰으며 내각을 다시 내삼원으로 바꾸고 한림원을 내삼원으로 병합시켰다. 또 도찰원을 약화시키고 의정왕대신회의의 권한을 강화했다. 십삼아문은 순치제가 친정 이후에 황 궁 내의 업무가 번다하다는 이유로 명조의 환관들을 기용해 설립한 기구이다. 27) 입관 전 청은 환관을 두지 않고 황제에게 직속된 보오이 니루[booi niru, 包 衣 牛 彔 ]로 구성된 內 務 府 가 궁내의 잡무를 담당했다. 청 조정은 명대 환관의 전횡으로 인한 폐해를 교훈 삼아 북경에 입성한 후에도 환관의 정치 간섭을 극도로 제한했다. 명조에 복무한 太 監 을 황궁에 남겨두긴 했지만 도르곤은 이들의 정치참여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르 곤이 사망하자 순치제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환관을 중용하여 十 三 衙 門 을 설 립했다. 순치제는 십삼아문의 설립을 명하며 내린 諭 에서 환관을 임용하는 것은 경계해야하 24) 淸 世 祖 實 錄 卷 63, 順 治 9 年 3 月 丙 戌 條. 25) 淸 世 祖 實 錄 卷 119, 順 治 15 年 7 月 戊 午 條 ; 王 亞 英, 論 淸 初 順 治 帝 的 改 革, 北 京 林 業 大 學 學 報, 1988 年 增 刊, p.1. 26) Robert Oxnam은 오보이 섭정 시기에 대한 연구에서 순치 연간부터 강희 연간에 지속되었던 한화 와 만주족 지배체제의 갈등관계를 강조했다. Robert B. Oxnam, Ruling From Horseback: Manchu Politics in the Oboi Regency 1661-1669,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5. 27) 순치10년 6월 상유를 내려 설립을 명했을 당시에 乾 淸 宮 執 事 官 司 禮 監 御 用 監 內 官 監 司 設 監 尙 膳 監 尙 衣 監 尙 寶 監 御 馬 監 惜 薪 司 鐘 鼓 司 直 殿 局 兵 仗 局 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몇 차례 조정을 거쳐 순치17년(1660)에 司 吏 院 宣 徽 院 禮 儀 院 尙 方 院 御 用 監 御 馬 監 尙 衣 監 尙 膳 監 尙 寶 司 惜 薪 司 司 設 局 兵 仗 局 文 書 館 으로 정리되었다. 순치11년부터 17년까지 존속기 간은 비교적 짧았지만 관제는 여러 번 바뀌었다. - 115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는 일이지만 內 府 의 일은 어쩔 수 없이 환관들이 맡아야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십삼아문은 寺 人 은 4 品 을 넘지 못하고 差 遣 이 아니면 황성을 함부로 나갈 수 없고 직분 이외에 어떤 일에도 간섭할 수 없으며 外 人 을 불러들이거나 外 官 과 결친할 수 없으며 친인척 명의로 부동산을 매매하는 행위를 금했다. 官 府 를 좌지우지하거나 민인을 괴롭 히지 못하도록 규정하는 등 환관의 횡포를 방지하는 규정들을 제시했다. 또 십삼아문에 滿 洲 近 臣 과 寺 人 을 겸용함을 강조했다. 28) 이와 같이 순치제가 십삼아문 설립의 당위성 과 만주족 관원의 겸용을 강조하고 환관 기용의 폐단 방지책을 제시한 것은 당시 십삼 아문의 설립을 두고 조정 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십삼아문의 설립은 만주족 관료뿐 아니라 한인관료들의 반발을 초래했고 순치제가 황권 강화를 위 해 환관을 이용했다는 측면에서 십삼아문의 설립과 폐지 과정은 황권과 신권의 대립구 도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입관 전 만주족이 국가를 형성한 이후에도 환관제도는 없었고 내무부의 기원이 만주족 특유의 팔기제 체제에서 上 三 旗 旗 主 인 황제와 보오이 의 사적 예속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내무부와 십삼아문의 설립과 폐지 과정은 滿 漢 간 정치문화 대립의 산물로 봐야한다. 29) 예부에 예속됐던 이번원을 다시 독립시키고 예부와 동급의 기구로서 의정에 참여하 도록 한 것도 순치제의 유교적 정책을 폐기하고 만주족 관료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조치의 결과였다. 30) 보정대신들이 도찰원, 내삼원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이번원을 예부 에서 독립시킨 것은 만주족 관료들이 이번원을 만주족 고유의 기구로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원의 체계를 육부와 동일하게 하도록 명할 때 이번원의 직무는 외번 왕 버일러 공주 등과 관계된 사무와 禮 儀 刑 名 등을 담당하여 책임이 막중함이 明 朝 와 비할 수 없다 고 한 언급은 청대 이번원의 직무와 책임이 명대의 예부가 담당했던 역할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31) 홍타이지가 내삼원과 이번원 아문을 맞바꾸 려하자 내삼원과 도찰원의 한인관료들이 반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만주족 관료들도 이번원을 명대 제도를 연용 해 설립한 기구들과는 다른 만주족 고유의 기구로 인식했 으며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이번원의 지위를 격상시켰다. 28) 淸 世 祖 實 錄 卷 76 順 治 10 年 6 月 癸 亥 條. 李 鴻 彬, 簡 論 淸 初 十 三 衙 門, 史 學 集 刊, 1990 年 第 2 期 ; 祁 美 琴, 淸 初 內 務 府 及 其 與 十 三 衙 門 的 關 係, 淸 史 硏 究, 1997 年 1 期 참조. 29) 청대 보오이 조직과 내무부에 대한 연구로는 祁 美 琴, 淸 代 內 務 府, 遼 寧 民 族 出 版 社, 2009 참조. 30) Jonathan D. Spence, The K ang-hsi Reign, Denis Twitchett and John K. Fairbank ed.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9 Part 1 The Ch ing Dynasty to 1800, p.126. 31) 淸 聖 祖 實 錄 卷 4, 8 月 戊 申 條. 諭 吏 部, 理 藩 院, 職 司 外 藩 王, 貝 勒, 公 主 等 事 務 及 禮 儀 刑 名 各 項, 責 任 重 大, 非 明 朝 可 比. 凡 官 制 體 統, 應 與 六 部 相 同. 理 藩 院 尙 書, 照 六 部 尙 書 入 議 政 之 列. 該 衙 門 向 無 郎 中, 今 著 照 六 部, 設 郎 中 官. 爾 部 議 奏. 尋 議 復, 理 藩 院 見 設 錄 勳, 賓 客, 柔 遠, 理 刑 四 司, 今 應 增 設 各 司 郎 中 共 十 一 員, 員 外 郞 共 二 十 一 員. 得 旨, 依 議. 理 藩 院 尙 書 銜 名, 著 列 于 工 部 之 後. - 116 -

淸 초기 理 藩 院 의 위상과 인적구성 강희8년(1669) 강희제가 오보이를 숙청하고 실질적으로 친정을 시작한 이후에 내삼 원을 다시 내각으로 바꾸고 한림원을 다시 설치하는 등 보정대신들의 섭정 기간에 폐 기했던 순치제의 정책을 부활시켜 만 한 간의 갈등을 완화하고 조정을 일신하는 개혁 이 추진되었다. 32) 그러나 육부와 동등해진 이번원의 지위에는 변함이 없었고 外 할하 오이라트 및 러시아와의 관계가 복잡하게 진행됨에 따라 역할과 체계가 확대되었다. 그 리고 강희38년(1699)에는 순치 연간에 설치한 漢 副 使 漢 院 判 漢 知 事 등 한인을 임용 하는 漢 缺 을 모두 없애어 이번원의 堂 官 부터 하급직인 主 事 筆 帖 式 에 이르는 모든 관 원이 만주족과 몽고족으로 채워졌다. 33) 이후 이번원 산하 漢 檔 房 에 漢 軍 주사1명과 한 군 필첩식 6명을 두긴 했지만 이들은 팔기한군이었으므로 협의의 의미로 한인이라고 볼 수는 없으며 한인을 임용하는 漢 缺 과 다르다. 34) 이들을 제외하고는 청 말까지 이번 원 상서 시랑 등 고위직은 물론이고 하위직에도 한인이 임용된 사례는 없었다. 이러한 조치가 몽고와 관계된 사무에 한인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는 실용적인 이유에서 취해 진 것일 수도 있지만 청대 部 院 의 관원 임용에서 만 몽 한 중 어느 한쪽을 완전히 배제하는 일은 없었다는 점에서 이번원의 경우는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이번원 관원에 한인을 배제한 것은 청조의 안녕과 직결된 서북변의 업무를 전담하는 이번원의 특성 상 권력의 핵심에 있는 만주족과 몽고 출신 관료들이 고위 관직을 맡는 것이 업무의 효율성이나 보안유지 면에서 유리하다는 판단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강 희제가 친정 직후 직면한 위기인 삼번의 난의 여파는 중국 중남부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삼번의 난과 동시에 차하르부의 부르니[ 布 爾 尼 ]가 반란을 일으켜 청은 자칫 양 쪽으로 적을 상대해야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또 오삼계가 달라이 라마에게 지원을 요청하고자 접촉했던 사실은 강희제가 티베트의 동향을 주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강희25-26년(1686-1687) 무렵 본격화된 할하 투시예투 칸과 자삭투 칸의 갈등 그 리고 준가르의 군사개입으로 인해 서북 몽고 일대가 전란에 휩싸이면서 많은 유민들이 청의 변경을 침범했다. 준가르 군에게 패배한 투시예투 칸과 세첸 칸은 청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강희제는 이를 기회로 할하를 청에 복속시켰다. 준가르는 청에게 서북 변경의 위협이 되었지만 한편 할하를 청에 복속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와 같이 할하 준가 르 티베트의 복잡한 역학관계가 誘 因 이 되어 청이 군사력을 동원해 개입하면서 청의 32) 淸 聖 祖 實 錄 卷 33, 康 熙 9 年 8 月 乙 未 條. 命 改 內 三 院 爲 內 閣, 其 大 學 士 學 士 官 銜, 及 設 立 翰 林 院 衙 門 等 官, 見 著 察 順 治 十 五 年 例 議 奏. 33) 淸 聖 祖 實 錄 卷 194, 康 熙 38 年 秋 7 月, 乙 酉 條. 裁 宗 人 府 滿 員 外 郞 二 員, 漢 經 歷 一 員, 內 閣 滿 侍 讀 三 員, 理 藩 院 漢 院 判 一 員, 漢 知 事 一 員, 漢 副 使 一 員, 滿 司 務 一 員, 蒙 古 司 務 一 員, 34) 呂 士 朋, 淸 代 的 理 藩 院 - 兼 論 淸 代 對 蒙 藏 回 諸 族 的 統 治 -, 東 海 大 學 歷 史 學 報, 第 1 期, 1977 年 4 月, p.64. - 117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서북 변경은 전시상황에 돌입했다. 갈단이 사망해 사태는 일단락되었지만 준가르는 여 전히 건재했고 티베트 청해 지역의 불안정한 상황도 청이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요인 이었다. 청이 고비사막 너머 할하와 준가르, 티베트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이 지 역 업무를 전담하는 이번원의 인적구성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2. 이번원의 인적구성 1) 숭덕-순치 연간 이번원의 인적구성 이번원의 가장 큰 특징은 상서 시랑에 한인 임용을 배제해 중앙기관에 적용한 만한 병용제가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몽고 관련 사무를 전담하는 기구인 만큼 몽고 사 정과 언어에 능통한 사람들이 기용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원의 전신인 몽고아 문이 설립되기 전부터 후금의 몽고 관련 업무를 담당한 사람들은 몽고 출신이거나 몽 고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해서 여진 출신이었다. 특히 해서 여진과 몽고 출신 박시[baks i, 巴 克 什 ]들은 만문과 몽문, 한문에 능통해 후금 조정에서 문사를 담당했으며 몽고와 관련된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했다. 35) 숭덕 연간부터 순치 연간까지 이번원의 주요 관원 은 대부분 해서 여진과 몽고 출신으로 이들은 소위 몽고 관련 전문가 그룹을 형성했다. 홍타이지 치세에 몽고 관계 업무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여허 귀족 출신의 아시 다르한이다. 그는 홍타이지의 생모인 孝 慈 高 皇 后 의 族 弟 였기 때문에 아시다르한 낙추 [nakcu, 삼촌] 즉 國 舅 라고 불렸다. 그는 같은 일족인 릭단 칸의 황후 수타이 태후에게 항복을 권유하고 데려오는 임무도 수행했다. 해서여진과 내몽고 부족들은 정치 문화 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수장층들은 혼인을 통한 인척관계를 형성하 고 있었다. 따라서 아시다르한과 같은 해서여진의 수장계층 출신들이 후금의 對 몽고 정 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허의 왕족 출신인 수나[ 蘇 納 ]도 천총5년(1631) 육부 설립 때 병부의 몽고승정으로, 천총9년 팔기몽고 설립 시에는 양백기몽고 도통으로 임명되 는 등 몽고 관련 주요 지위를 역임했다. 36) 35) 達 力 扎 布, 明 代 漠 南 蒙 古 歷 史 硏 究, 內 蒙 古 文 化 出 版 社, 1998, p.263; 村 上 信 明, 淸 朝 前 期 における 理 藩 院 の 人 員 構 成, 滿 族 史 硏 究 4, 2005, p.143. 몽고 사무에 관여했던 박시들로 초기 사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르더니, 쇼서[šose, 碩 色 ], 히퍼[hife, 希 福 ], 소닌[sonin, 索 尼 ], 쿠르찬[kūrcan, 庫 爾 纏 ], 니칸 [nikan, 尼 勘 ], 우너거[unege, 武 納 格 ] 등이 있다. 어르더니, 쇼서, 히퍼, 소닌, 쿠르찬은 해서 여진 출 신이고 우너거는 몽고 수장층인 보르지기트 씨족이어서 이들 모두 만 몽 한어에 능통했다. 36) 村 上 信 明, 清 朝 前 期 における 理 藩 院 の 人 員 構 成, 滿 族 史 硏 究 4 號, 2005, p.143; 淸 史 稿 列 傳 卷 230. - 118 -

淸 초기 理 藩 院 의 위상과 인적구성 아시다르한은 숭덕 원년 6월까지 몽고아문의 승정을 맡았고 그를 이어 니칸이 몽고 아문 승정을 역임했다. 니칸은 홍타이지 치세와 순치 초기에 걸쳐 이번원의 상서(승정) 와 시랑을 역임하며 청 초기 대몽 정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해서여진 울라부 출신으로 누르하치가 울라를 병합한 뒤 양황기에 편입되었다. 그는 숭덕 원년에 몽고아 문 승정이 되었다가 2년 후 카라친부의 유목지 분쟁에 연루되어 파면되었다. 그러나 곧 이번원 참정에 임명되었고 홍타이지의 시위로서 보필했다. 청의 對 明 전쟁 기간 중 니 칸은 내몽고 각 부의 군사를 동원해 명조의 하남 지역을 공격한 바 있으며 순치3년(164 6) 수니트부 텡기스의 도주사건이 발생하자 곧 그를 추격하는데 파견되었다. 그리고 순 치4년(1647)부터 순치10년(1653) 퇴임할 때까지 이번원 상서를 역임해 청조의 몽고 전 문가로 활약했다. 37) 숭덕2년(1637) 7월에는 서렁[sereng, 塞 冷 ]이 다야치 타부낭의 뒤를 이어 몽고아문 승 정으로 취임했다. 서렁은 차하르부의 타이지로 릭단 칸이 청해로 갔을 때 청조에 귀순 한 인물이다. 38) 그는 숭덕3년(1638)에 몽고아문이 이번원으로 개칭된 후 이번원 승정이 되었다. 무라카미 노부아키( 村 上 信 明 )는 홍타이지가 서렁을 이번원에 기용한 이유에 그 가 차하르의 왕공 출신이라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39) 서렁이 이번원 승정 이 된 시기는 릭단 칸이 사망하고 그의 황후와 아들을 비롯한 차하르부의 잔존세력이 청에 편입된 무렵이었다. 따라서 홍타이지가 이들을 초무하고 관할하기 위해 차하르부 출신인 서렁을 이번원 책임자로 임명했을 가능성이 크다. 숭덕3년(1638) 7월 몽고아문이 이번원으로 개칭되면서 인원구성도 좀 더 체계화되었 다. 이전에 복수로 임명되던 승정이 한 명으로 고정되고 그 아래 參 政 2명, 副 理 事 官 8명, 啓 心 郞 1명을 설치했다. 이때 승정에 종실인 볼로[bolo, 博 洛 ]를, 참정에는 서렁과 니칸을 임명했다. 40) 볼로는 누르하치의 일곱 번째 아들 아바타이의 셋째 아들로 천총 연간부터 對 明 전투에서 공을 세워 숭덕2년(1637) 議 政 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이번 원 상서에 임명된 지 석 달 만에 영원성 전투에 종군했으므로 그가 실제로 이번원의 37) Arthur W. Hummel, Eminent Chinese of the Ch ing Period(1644-1912), p.591. 38) 淸 太 宗 實 錄 ( 康 熙 本 ) 卷 51, 崇 德 5 年 4 月 丙 子 條, 授 塞 冷, 尼 堪, 阿 魯 哈 世 職. 塞 冷 原 系 蒙 古 察 哈 爾 汗 之 族, 後 察 哈 爾 汗 出 奔 湯 古 忒 國 時, 獨 身 來 歸, 及 爲 理 藩 院 參 政, 不 負 任 使, 勤 勞 王 事, 授 塞 冷 爲 三 等 甲 喇 章 京. 이 외에 淸 史 稿 列 傳 卷 230, 阿 什 達 爾 漢 편에 서렁이 차하르부의 타이지였다는 언급이 있 다. ( 天 聰 八 年 ) 五 月, 上 自 將 伐 察 哈 爾 林 丹 汗, 命 徵 兵 科 爾 沁 部, 會 於 宣 府 左 衛. 林 丹 汗 西 遁, 道 死. 所 屬 額 爾 德 尼 囊 蘇 等 以 其 衆 降. 上 命 阿 什 達 爾 漢 及 吳 拜 等 挾 額 爾 德 尼 囊 蘇 詗 林 丹 汗 子 額 哲 所 在. 九 月, 率 來 降 台 吉 塞 冷 等 還, 並 報 復 有 祁 他 特 等 率 千 人 而 來 者, 踵 相 接 也. 淸 史 列 傳 卷 4 大 臣 畫 一 傳 檔 正 編 一 阿 什 達 爾 漢 편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수록되었다. 39) 村 上 信 明, 앞의 글, p.144. 40) 淸 太 宗 實 錄 卷 42, 崇 德 3 年 7 月 丙 戌 條. - 119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업무를 주관했을 가능성은 적다. 41) 이번원의 실무는 예전부터 몽고 관련 업무를 담당해 온 서렁과 니칸이 주도적으로 처리했다. 볼로의 뒤를 이어 이번원 참정 니칸이 순치4년(1647) 6월에 이번원 상서로 승격되었 고 니칸의 후임 참정에 샤지다라[šajidara, 沙 濟 達 喇 ]가 임명되었다. 샤지다라가 이번원 관원으로 임명되기 전 그의 출신과 경력에 대한 기록은 산재해 있다. 42) 八 旗 通 志 初 集 에 샤지다라로 추정되는 沙 機 達 喇 가 鑲 黃 旗 蒙 古 世 職 부분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샤지 다라의 출신은 양황기몽고로 추정된다. 43) 또한 숭덕3년 12월 홍타이지가 라마들의 亂 行 을 질책하고자 차간 라마, 다이칭 낭수 등의 라마승과 이번원 참정 니칸, 內 一 等 侍 衛 (dorgi uju jergi hiya) 샤지다라 등을 파견해 시레투 초르지에게 상유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44) 따라서 샤지다라는 몽고 출신으로 홍타이지의 일등시위를 역임했으며 이번원 관원으로 임명되기 전부터 몽고 관련 업무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순치10년 이 번원 우시랑을 거쳐 순치12년(1655) 정월부터 순치13년(1656) 2월까지 이번원 상서를 맡아 내몽고와 라마 관련 업무를 주관했다. 그가 사망하자 순치제는 그에게 正 直 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45) 순치13년 5월, 샤지다라의 후임으로 코르친부 출신 정백기몽고 소속의 밍안다리[min ggandari, 明 安 達 禮 ]가 이번원 상서로 임명됐다. 그는 숭덕 연간에 예부참정, 순치 3년(1 646) 이래 병부시랑과 병부상서를 역임했다. 밍안다리는 숭덕 연간 對 明 전투와 입관 후 이자성 군대를 추격하는 데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수니트부 텡기스를 진압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양황기몽고 도통에 임명되었고 순치7년(1650) 병부 상서에 임명되었다. 46) 淸 朝 前 期 理 藩 院 滿 蒙 文 題 本 의 제본 작성자 명단에 의하면 밍안 다리는 순치10년에서 11년까지 이번원 상서를 대리했다. 이 기간에 샤지다라가 이번원 41) 淸 史 列 傳 卷 2, 宗 室 王 公 傳 二 和 碩 端 重 親 王 博 洛. 42) 샤지다라의 경력에 대해서는 村 上 信 明, 앞의 글, p.145 참조. 43) 八 旗 通 志 初 集 卷 9, 世 職 表 17, 鑲 黃 旗 蒙 古 世 職. 44) 內 國 史 院 滿 文 檔 案 譯 注, 崇 德 3 年 12 月 29 日. orin uyun de, dergi hese i lama se be facuhūn yabumbi seme,, cagan lama,, daicing nangsu, tulergi golo be dasara jurgan i ashan i amban nikan, dorgi uju jergi hiya obot, sajidara se be takūrafi,, siretu corji be wasimbuha hese, ; 淸 太 宗 實 錄 崇 德 3 年 12 月 丁 巳 條. 上 聞 喇 嘛 等 不 遵 戒 律, 遣 察 漢 喇 嘛, 戴 靑 囊 蘇, 理 藩 院 參 政 尼 堪, 一 等 侍 衛 俄 博 特, 沙 濟 達 喇 等 諭 席 勒 圖 綽 爾 濟 曰,. 45) 淸 世 祖 實 錄 卷 101, 順 治 5 月 戊 辰 條. 予 故 理 藩 院 尙 書 一 等 阿 達 哈 哈 番 沙 濟 達 喇 諡 曰 正 直, 戶 部 侍 郞 一 等 阿 達 哈 哈 番 兼 一 拖 沙 喇 哈 番 庫 禮 諡 曰 僖 恪. 이 기록에서 사망한 이번원 상서 一 等 阿 達 哈 哈 番 [adaha hafan, 輕 車 都 尉 ] 샤지다라에게 正 直 이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했다. 아다하 하판은 輕 車 都 尉 로 한역되는데 정3품의 직급이다. 46) 밍안다리에 대해서는 淸 史 列 傳 卷 5, 大 臣 畫 一 傳 檔 正 編 二, 明 安 達 禮 ; Arthur W. Hummel, Eminent Chinese of the Ch ing Period, p.576 참조. - 120 -

淸 초기 理 藩 院 의 위상과 인적구성 시랑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순치12년에 샤지다라가 이번원 상서가 되었다가 다시 순치 13년에 밍안다리가 이번원 상서를 맡게 된 것이다. 순치제는 밍안다리의 戰 功 과 육부와 이번원에서의 근무 경력을 높이 평가해 그를 이번원 상서로 임명했다. 47) 샤지다라와 밍안다리는 몽고 출신으로서 이번원 상서와 시랑을 교대로 역임한 일종의 전문 인력이 었다. 그의 아래에서 시랑직을 맡은 인물은 아시다르한의 아들 시다리[sidari, 席 達 禮 ]이 다. 그는 이미 순치4년(1647)에 이번원 시랑에 임명된 후 순치16년까지 이번원 좌시랑 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순치13년 5월 이번원좌시랑 시다리의 임기가 다되어 羊 酒 를 하 사하고 아들 한 명을 음서로 국자감에서 독서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48) 그는 임기 가 다한 순치13년 이후로도 이번원 좌시랑으로서 밍안다리와 함께 내몽고, 라마승 관련 업무와 할하의 조공 업무 등을 담당했다. 淸 朝 前 期 理 藩 院 滿 蒙 文 題 本 에 의하면 시다리는 순치13년부터 순치16년(1659) 5월 까지 이번원좌시랑의 직함으로, 순치16년 7월부터는 兼 管 理 藩 院 事 務 禮 部 左 侍 郞 의 직 함으로 상주했다. 이는 순치16년(1659) 윤3월에 이번원이 예부에 예속되어 이번원 상서 와 시랑의 관함이 겸관이번원사무예부상서와 시랑으로 변동된 상황을 반영한다. 그런 데 순치13년에 이번원 상서가 된 밍안다리는 순치15년(1658) 2월 安 南 將 軍 에 임명되어 정성공 토벌을 위해 貴 州 와 荊 州 에 부임했다. 그리고 북경에 돌아온 순치17년(1660)에 병부상서에 임명되었다. 밍안다리가 공식적으로 이번원 상서직을 맡은 임기는 순치13 년부터 18년까지이므로 그는 이번원 상서직을 유지한 채 귀주에 부임했다가 병부상서 로 임명된 것이다. 즉 이번원이 예부로 예속되기 전후 순치15년 중반부터 순치17년 시 기에 밍안다리는 이번원 상서로서의 직무를 거의 이행하지 않은 셈이다. 淸 朝 前 期 理 藩 院 滿 蒙 文 題 本 에서도 순치15년 8월 이후 이번원의 상주는 모두 이번원좌시랑 시다 리의 명의로 올려졌다. 淸 世 祖 實 錄 의 기록에서도 외번 왕공의 봉호와 승습, 관원의 선발, 법령 등과 관련된 몽고 관련 주요 업무를 모두 이번원좌시랑 시다리가 주관하고 있다. 49) 이와 같이 이번원이 정식으로 예부에 예속되기 한 해 전부터 이번원 상서는 공석으 로 남겨두고 실질적인 업무는 시랑인 시다리가 처리했다. 한편 이번원이 예부에 예속되 긴 했지만 몽고 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이번원의 성격에는 변함이 없었고 직함만 바뀌 었을 뿐 계속해서 시다리가 이번원의 실질적 최고 관원으로서 이번원 업무를 관할했다. 47) 淸 世 祖 實 錄 卷 101, 順 治 13 年 5 月 己 亥 條. 又 諭 固 山 額 眞 明 安 達 禮 在 部 日 久, 練 達 政 務, 著 則 補 授 理 藩 院 尙 書. 48) 淸 世 祖 實 錄 卷 101, 順 治 13 年 5 月 壬 午 條. 理 藩 院 左 侍 郞 席 達 禮 考 滿, 賜 羊 酒, 蔭 一 子 入 監 讀 書. 49) 淸 世 祖 實 錄 卷 132, 順 治 17 年 2 月 乙 巳 條 ; 卷 133, 順 治 17 年 3 月 丙 辰 朔 ; 丙 寅 條. - 121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관제상 예부 상서가 이번원을 관할하게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업무에 관여하는 일은 거 의 없었다. 따라서 이번원의 예부로의 예속이 이번원의 역할과 중요도가 저하된 결과라 고 볼 수 없다. 앞에서도 검토했듯이 순치제는 도르곤 사후 친정을 시작하면서 조정 내 당파 분쟁을 종식시키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명의 제도를 모방한 일련의 제도 개혁 을 추진했다. 청조의 만몽 연합 정권적 성격을 상징하는 이번원을 예부에 예속시킨 것 도 이러한 정치적 고려에 의해 취해진 조치였다. 그러나 청조에게 몽고와의 관계는 정 치적 안녕과 직결된 중요한 문제였고 티베트, 할하와의 관계가 진전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원의 역할이 축소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순치제가 붕어한 직후 이번원은 다시 예 부에서 독립해 육부와 동등한 지위를 회복했다. 이러한 이번원의 실질적 역할과 지위의 일단을 이번원 시랑에서 겸관이번원사무예부시랑이 된 시다리의 역할을 통해서도 살 펴볼 수 있다. 50) 2) 강희 연간 이번원의 인적구성 순치18년(1661) 3월부터 8월에 걸쳐 청 조정은 이번원을 예부에서 독립시켜 육부와 동일하게 청리사를 설치하고 낭중 11명, 원외랑 21명을 두기로 결정했다. 51) 이번원 상 서 겸 병부상서인 밍안다리가 다시 병부상서로 임명되자 內 大 臣 볼로 서렁[ 博 羅 色 冷 ]이 이번원 상서에 임명되었다. 그는 정백기몽고 출신으로 추정되는데 순치18년 9월 내대 신 볼로 서렁을 이번원 상서로 임명했다는 실록 의 기록으로 보아 내대신을 역임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52) 볼로 서렁이 이번원 상서에 임명된 이후 강희 연간 이번원 상서와 시랑에는 대부분 팔기에 속한 몽고인들이 임명되었다. 볼로 서렁의 뒤를 이어 이번원 상서가 된 카란투[karantu, 哈 蘭 圖 ]는 보르지기트 氏 몽 고인으로 만문 상주문에서 내대신이자 이번원 상서 (dorgi amban bime, tulergi golo be dasara jurgan i aliha amban)로 자신의 직함을 표현했다. 53) 카란투는 내대신과 이번원 상 50) 무라카미 노부아키는 순치제가 이번원 상서를 실질상 공석으로 해 예부상서가 이번원을 직접 관리 하는 체제를 구축했다고 주장했다. 村 上 信 明, 앞의 글, p.146. 그러나 그도 지적했듯이 실질적으로 예부상서가 이번원 사무를 관할하지 않았고 순치 초기부터 이번원 시랑으로서 계속해서 이번원 업 무를 담당한 시다리가 이번원 업무를 주관했으므로 예부상서의 이번원에 대한 관여는 제한적이었 다고 봐야 한다. 51) 淸 聖 祖 實 錄 卷 2, 順 治 18 年 3 月 戊 寅 條 ; 卷 3, 順 治 18 年 7 月 乙 卯 條 ; 卷 4, 8 月 戊 申 條. 52) 淸 聖 祖 實 錄 卷 4, 順 治 18 年 9 月 庚 子 條. 볼로 서렁에 관한 자세한 사료는 찾을 수 없다. 다만 張 永 江 과 包 桂 芹 은 그를 정백기몽고 출신이라고 단정했는데 이는 錢 實 甫 의 淸 代 職 官 年 表 에서 그 를 몽고인으로 표시한 것에 근거한 듯하다. 錢 實 甫, 淸 代 職 官 年 表, 部 院 大 臣 年 表, 中 華 書 局, 1980, p.170; 張 永 江, 八 旗 蒙 古 任 官 初 探, 蒙 古 史 硏 究 第 3 輯, 1989; 包 桂 芹, 淸 代 蒙 古 官 吏 傳, 民 族 出 版 社, 1995, p.85. - 122 -

淸 초기 理 藩 院 의 위상과 인적구성 서를 겸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란투는 숭덕 연간에 일등시위가 되었고 순치 초에 二 等 아다하 하판( 輕 車 都 尉 )의 世 職 을 받았다. 그는 원래 몽고정황기였는데 순치제가 친정을 시작한 후 그의 충직을 높이 사 만주정황기로 擡 旗 시켰다. 54) 시다리를 이어 이번원 좌 시랑이 된 촉토[cokto, 綽 克 圖 ]와 강희23(1684)년부터 29년(1690)까지 이번원 상서를 맡 은 아라니[arani, 阿 喇 尼 ]도 몽고 수장층인 보르지기트씨 가문 출신이다. 55) 아라니는 할 하와 갈단의 분쟁이 심화되던 때에 청측 사신으로 분쟁을 조정하고자 파견되었고 갈단 과의 최초 교전을 벌인 인물이다. 이 외에 강희30년(1691)부터 39년(1700) 9월까지 이번 원 상서를 역임한 반디는 골로스씨로 차하르부에서 청조로 내귀한 우이 자이상[ 衛 寨 桑 ] 의 아들이다. 그는 천총 연간에 후금에 내귀해 양황기로 편입되었다. 56) 무라카미 노부아키( 村 上 信 明 )는 강희 초기에는 이번원 상서와 시랑에 侍 衛 와 內 大 臣 을 역임한 인물들이 많았고 강희 20년부터는 주로 內 閣 學 士 와 內 閣 侍 讀 學 士 출신이 임 명되었다고 분석했다. 57) 청대 시위의 연원은 입관 전 누르하치 시기부터 형성된 히야[h iya, 蝦 ]라는 칭호를 가진 세력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히야의 주요 구성원은 건주여진에 투항한 여진 각부의 수장계층 자제들로 汗 의 측근에서 호종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이들 중 일부는 어릴 때 궁중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전투와 학문에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히 야에 발탁되기도 했다. 즉 히야들은 후금 정권의 인재 공급원으로서의 역할도 했다. 특 히 누르하치 직속 양황기 소속 시위들이 한의 최측근 집단으로 부상했는데 입관 후에 도 황제 직속 上 三 旗 소속 시위들이 황제의 근신으로서 권력의 핵심층을 구성했다. 58) 홍타이지 시기에는 이 시위 그룹에 청에 복속한 몽고 각부의 수장층 자제들이 편입되 었다. 이는 누르하치가 여진 부족을 병합하고 수장층 자제를 히야로 편입해 일종의 주 종관계를 성립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시위를 역임한 만주 몽고기인들은 청 황제의 측 근세력이자 청 조정의 고급 관료층을 형성했다. 샤지다라, 촉토, 아무후랑[ 阿 穆 胡 朗 ] 59), 53) 淸 朝 前 期 理 藩 院 滿 蒙 文 題 本 卷 1, 康 熙 2 年 3 月 11 日, p.265. 理 藩 院 尙 書 喀 蘭 圖 等 題 准 烏 喇 特 楚 充 客 公 屬 下 額 莫 根 等 應 封 四 等 台 吉 本. 이 외에도 카란투가 상주한 글에는 내학사이자 이번원상서 의 직 함이 사용되었다. 54) 包 桂 芹, 淸 代 蒙 古 官 吏 傳, p.85. 擡 旗 는 원래의 旗 籍 을 상위의 다른 旗 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55) 촉토에 대해서는 八 旗 滿 洲 氏 族 通 譜 ( 遼 沈 書 社, 1989년) 卷 66, 附 載 滿 洲 旗 分 內 之 蒙 古 姓 氏, 扎 魯 特 地 方 博 爾 濟 吉 特 氏, 巴 克 貝 勒 條, p.722 참조. 아라니에 대해서는 卷 66, 附 載 滿 洲 旗 分 內 之 蒙 古 姓 氏, 扎 魯 特 地 方 博 爾 濟 吉 特 氏, 喀 喇 巴 拝 條, p.723 참조. 56) 村 上 信 明, 앞의 글, p.147. 반디의 부친 우이 자이상에 대해서는 八 旗 滿 洲 氏 族 通 譜 卷 67, 附 載 滿 洲 旗 分 內 之 蒙 古 姓 氏, 郭 爾 羅 斯 氏, 衛 寨 桑 條, p.738 참조. 57) 村 上 信 明, 앞의 글, pp.146-153. 58) 杉 山 靑 彦, ヌルハチ 時 代 のヒヤ 制 - 淸 初 侍 衛 考 序 說 -, 東 洋 史 硏 究 62 卷 1 號, 2003. 59) 아무후랑은 정백기몽고 소속으로 일등시위를 역임했다. 무라카미 노부아키는 八 旗 通 志 初 集 卷 11, 旗 分 志 11에 正 白 旗 蒙 古 都 統 左 參 領 所 屬 14 니루 중 제2 니루의 초기 편성 때(강희7) 상서 아무후 - 123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아라니 등이 일등시위 출신으로 이번원 시랑을 거쳐 이번원 상서로 승격되었다. 내대신은 領 侍 衛 內 大 臣 다음의 從 1 品 관직으로 上 三 旗 의 각 기에서 2명씩 선발해 임 명했다. 60) 영시위내대신과 함께 시위들을 관할하는 수장이었으므로 황제의 신임을 받 는 유력 인물들이 일등시위를 거쳐 내대신에 임명된 경우가 많았다. 강희제의 보정대신 이었던 오보이[oboi, 吳 拜 ], 강희제의 숙부 佟 國 綱 과 佟 國 惟,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때 청측 대표로 협상에 임한 송고투[ 索 額 圖 ] 등 출신가문이 높고 공적이 있는 중신들이 내 대신을 역임했다. 이번원 상서 중에서는 몽고인인 볼로 서렁, 카란투, 반디 등이 내대신 출신이다. 이와 같이 강희 초반기에는 시위, 내대신을 역임한 몽고 출신들이 이번원에 기용되어 청조의 對 몽고 정책을 주관했다. 할하의 내분과 준가르 부장 갈단의 무력개입으로 촉발된 할하 일대의 전란은 이 지 역에 대한 청조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할하의 전란이 심화되고 할하 유민이 대거 내몽고 지역으로 유입되면서 청조의 몽고 관련 업무도 더욱 번다해졌고 준가르와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이 지역 업무는 국가의 안녕과 직결되었다. 이는 이번원 의 조직과 인원구성에 변화를 초래했는데 특히 강희 중엽 세 번에 걸친 갈단 원정이 끝난 후에는 이번원 상서에 몽고 출신자 대신 만주인들이 임명되기 시작했다. 61) 갈단 원정이 마무리 된 이후인 강희39년(1700) 카야르투[ 哈 雅 爾 圖 ]가 몽고 출신인 반 디의 뒤를 이어 이번원 상서가 되었다. 그는 정황기 만주인으로 여허 수장층의 후손이 다. 62) 그의 뒤를 이어 강희44년(1705) 정월 常 舒 가 이번원 상서로 취임했는데 1년도 못 되어 아링가[ 阿 靈 阿 ]로 교체되었다. 아링가는 강희 초기 보정대신이었던 一 等 公 어빌룬 [ebilun, 遏 必 隆 ]의 아들로 일등시위, 내대신, 영시위내대신 등을 역임했다. 63) 그의 가문 은 만주 八 大 姓 氏 중 하나인 뇨후루[ 鈕 祜 祿 ]씨로 양황기만주에 속했다. 아링가의 부친 어빌룬은 누르하치의 충신이었던 어이두[eidu, 額 亦 都 ]와 호쇼이 공주( 和 碩 公 主 ) 사이에 서 태어난 아들이다. 64) 따라서 아링가는 청조 최고의 명문가 출신으로 관직도 일등시위 랑이 좌령직을 맡게 되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그가 정백기몽고 소속이었음을 밝혔다. 村 上 信 明, 앞 의 글, p.147 주31 참조. 60) 淸 史 稿 卷 117 志 92, 職 官 四, 侍 衛 處. 61) 村 上 信 明, 앞의 글, pp.155-156 참조. 62) 八 旗 滿 洲 氏 族 通 譜 卷 22, 葉 赫 地 方 納 喇 氏, 哈 爾 松 阿, p.284 참조. 63) 淸 史 列 傳 卷 12, 大 臣 畫 一 傳 檔 正 編 九, 阿 靈 阿. pp.874-875. 64) 호쇼이 공주 즉 和 碩 公 主 (hošoi gungju)는 황실 공주 중 구룬공주[gurun i gungju, 固 倫 公 主 ] 다음의 서열로 皇 妃 소생 공주에게 붙인 칭호이다. 어이두는 피용돈[fiyongdon, 費 英 東 ], 호호리[hohori, 何 和 禮 ], 암바 피양구[amba( 大 )fiyanggu, 安 費 揚 古 ], 후르간[hūrgan, 扈 爾 漢 ]과 함께 청 開 國 五 大 臣 으로 일컬어진다. 어이두와 어빌룬에 대해서는 淸 史 列 傳 卷 4 大 臣 畫 一 傳 檔 正 編 一, 額 亦 都, pp.174-176; 卷 6, 大 臣 畫 一 傳 檔 正 編 三, 遏 必 隆, pp. 363-365 참조. - 124 -

淸 초기 理 藩 院 의 위상과 인적구성 에서 출발해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강희56년(1717)부터 58년(1719)까지 상서를 역 임한 赫 壽 는 정황기만주 舒 穆 祿 氏 출신으로 내각시독학사와 내각학사를 거쳐 예부우 시랑, 호부좌시랑, 이부좌시랑, 양광총독 등을 역임했다. 65) 롱코도[ 隆 科 多 ]도 청조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다. 롱코도의 부친인 一 等 公 佟 國 惟 의 누이가 강희제의 생모인 孝 康 章 皇 后 이었으며 롱코도의 누이는 강희제의 황후인 孝 懿 仁 皇 后 이다. 佟 圖 賴 의 아들인 佟 國 綱, 동국유 형제는 강희제의 외척으로 청조의 중신을 역임했으며 동국강은 강희29년(1690) 7월 撫 遠 大 將 軍 裕 親 王 福 全 과 함께 갈단 원정에 참여했다가 8월 울란 부퉁 전투에서 전사했다. 66) 이들의 집안은 원래 양황기한군에 속 했다. 강희27년(1688) 동국강은 조상이 원래 만주인인데 無 順 에 거주해 한인들을 이끌 고 후금에 내귀했기 때문에 한군에 속하게 되었다며 만주기로 회복시켜 달라고 상주했 다. 강희제는 동씨를 가진 다른 관원들은 그대로 두고 동국강의 일족만 만주기로 바꾸 도록 조치했다. 67) 원래 소속된 기에서 상위의 기로 옮기는 擡 旗 (gūsa doobumbi) 조치는 극소수의 황실 보오이와 황제의 측근 가문에 부여된 영예였다. 동국강이 자신의 선조가 원래 만주족이 었다는 점을 대기의 명목으로 삼은 것은 민족이란 요소가 정체성을 결정하는 데 결정 적 작용을 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마크 엘리엇도 지적했듯이 동국강의 집안이 황실의 척족이었기 때문에 이런 대기 조치가 가능했다. 68) 다른 동씨성을 가진 문무관원들은 대기 대상에서 제외된 것도 이때의 조치가 동국강, 동국유 형제 집안만이 누린 특혜였 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강희제가 특별히 旗 籍 을 옮겨 줄 만큼 롱코도가 속한 동씨 집 65) 淸 史 列 傳 卷 10, 大 臣 畫 一 傳 檔 正 編 七, 赫 壽, pp.764-767. 66) 동국강에 대해서는 淸 史 列 傳 卷 10, 大 臣 畫 一 傳 檔 正 編 七, pp.728-729; Eminent Chinese of the Ch ing Period, pp.794-795 참조. 동국유에 대해서는 淸 史 列 傳 卷 11, 大 臣 畫 一 傳 檔 正 編 八, pp.767-769; Eminent Chinese of the Ch ing Period, pp.795-796 참조. 67) 淸 聖 祖 實 錄 卷 135, 康 熙 27 年 4 月 甲 辰 條. 戶 部 議 覆, 一 等 公 內 大 臣 舅 舅 佟 國 綱 疏 言, 臣 族 本 係 滿 洲, 請 改 爲 滿 洲 旗 下. 應 如 所 請, 將 舅 舅 佟 國 綱 等, 改 入 滿 洲 冊 籍. 但 鑲 黃 旗 舅 舅 佟 國 綱 等 一 佐 領, 及 正 藍 旗 同 族 之 十 二 佐 領, 鑲 紅 旗 同 族 之 三 佐 領 下, 所 有 文 武 官 員 及 監 生 壯 丁, 爲 數 甚 衆, 不 便 一 竝 更 改, 仍 留 漢 軍 旗 下, 從 之. ; 淸 史 列 傳 卷 10, 大 臣 畫 一 傳 檔 正 編 七, p.728. 二 十 七 年, 疏 言, 臣 先 世 人 在 無 順, 倡 率 明 人 來 歸, 故 隸 漢 軍. 其 初 實 係 滿 洲, 曾 蒙 太 祖 高 皇 帝 諭 令 與 佟 佳 氏 之 巴 都 哩, 蒙 阿 圖 諸 大 臣 考 訂 支 派, 敍 明 族 譜. 今 請 仍 歸 滿 洲. 事 下 部 議, 以 佟 姓 官 職 衆 多, 應 仍 留 漢 軍. 現 任 國 綱 本 支 准 改 入 滿 洲. 68) Mark C. Elliot, The Manchu Way: The Eight Banners and Ethnic Identity in Late Imperial Chin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1, pp.85-88( 이훈 김선민 옮김, 만주족의 청제국, 푸른역사, 2009, pp.150-153). 동국강의 예처럼 팔기몽고와 팔기한군에 속한 자가 만주기 특히 상삼기로 재등록된 조치가 민족 구분 원칙을 수정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마크 엘리엇은 이것이 민족 구분 원칙과 팔기만주 일원에게 주어지는 특권을 인식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의도적인 타협이었다고 분석했다. 그는 대기를 팔기 사이에 민족적 범주가 없었다거나 허점투성이였다는 증거로 볼 것이 아니라, 청대 민족 정체성 이면에 놓여 있던 중재역할 의 증거였다고 주장했다. - 125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안은 청대 대표적 명문가였다. 할하가 청에 복속한 이후 이번원 상서에 만주 명문가의 인물들이 발탁된 원인에 대 해 무라카미 노부아키( 村 上 信 明 )는 이번원 최고자리에 만주인을 앉혀 몽고의 안녕이 만주의 지배에 의해 얻어진 것임을 천하에 널리 보이고자 한 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했 다. 아울러 왕공 신분을 가진 외번몽고를 통할하기 위해 이번원의 장관인 상서도 높은 신분과 작위를 가진 인물을 임용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69) 강희제는 즉위 초기부터 이번원 상서와 시랑에 몽고 출신으로 일등시위와 내대신을 역임한 인물을 기 용해 몽고 관련 업무의 효율을 높였다. 삼번의 난과 갈단과의 전투 등 전시에 동원할 몽고병사를 징발하는 일은 이번원 관원이 담당한 중요한 업무였다. 그리고 이번원 관원 들은 할하와 준가르, 티베트 사이를 오가며 분쟁을 조정하는 사신으로 역할 했다. 따라 서 이 시기 이번원 상서에 몽고 출신 기인을 중용한 데에는 이들이 직접 현지에서 몽고 인들과 접촉해 처리해야할 일이 많았던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할하가 청에 복속하고 갈단 원정이 마무리 된 시점에서는 이번원 상서에 황제 최측근의 고위 만주인을 임명 해 만주를 정점으로 하는 외번 지배 체제의 상징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실무를 관장하 는 시랑에 몽고 출신 내각의 관료들을 임명해 업무의 효율성을 보장했다. 할하가 청에 복속한 후 준가르, 티베트, 청해 일대의 정세가 청조에 극히 민감한 사안 으로 대두되었다는 측면에서도 이번원 상서 인적구성이 변화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갈단은 제거되었지만 체왕 랍탄이 지배하는 준가르는 청과의 조공무역을 통해 부를 축 적하고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티베트와 청해와의 政 敎 的 관계도 여전히 밀접해 이 지역 정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상게 갸초와 그가 세운 달라이 라마6세 그리고 청해 라짱 칸의 권력구도도 불안정한 상태였다. 따라서 강희제는 황제 직속의 상삼기 출신으로 시위를 거쳐 고위직에 오른 최측근 만주인들을 이번원 상서에 임용해 기밀을 유지하고 외번 관리를 더욱 철저하게 하고자 했다. 게다가 강희제는 기존 이번원 관원 들의 행태에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강희37년(1698) 12월 이번원에서 몽고 왕공들에게 지급하는 물품비용을 줄여야 한다고 상주하자 강희제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황제가 대학사들에게 諭 를 내리길, 맘피의 의견은 용렬해 의논한 바가 심히 불합리하 다. 무릇 자사크에는 모두 도통 부도통 등의 관직을 설치하고 그 제왕들에게는 長 史 護 衛 典 儀 및 각종 雜 職 이 있다. 그 品 秩 에 따라 食 物 을 하사하는 것을 두고 낭비라고 할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지급하는 물품을 어찌 일괄적으로 줄이겠다고 논할 수 있는가. 마 땅히 조사해야할 바는 실제로 직관을 받은 자 외에 멋대로 자이상[ 寨 桑 ] 두목 및 부하 수 69) 村 上 信 明, 앞의 글, pp.155-156. - 126 -

淸 초기 理 藩 院 의 위상과 인적구성 백인을 설치하고 지명해서 함부로 供 給 을 취하는 행태이다. 줄여야한다고 의논해야할 것 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논의한 바를 보니 필시 이번원 관원이 몽고와 공모해 허 명을 날조하고 몫을 나눠 자신을 살찌운 것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짐이 조사하는 것을 원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짐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예전의 비리를 고치지 않고 결국 감축했다가 몽고가 하소연하기를 기다려 예전대로 다시 준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할 하는 예전에 우리 조정에 귀부하지 않아 사사로이 자이상, 두목의 명목을 두었지만 지금 모두 來 降 해 이미 자사크를 설치하고 護 衛 職 官 을 수여했는데 또 어찌 자이상의 칭호를 얻겠는가. 만일 현재 수여받은 秩 銜 대로 食 物 을 하사한다면 그들도 중국 官 爵 의 존엄함을 알게 되어 效 力 하고 관원이 되기를 원할 것이다. 맘피의 사람됨은 짐이 본래 알고 있다. 그 재능은 비록 취할 만하나 품행이 심히 단정치 못하다. 너희들은 그를 불러 질책하라. 70) 이번원 시랑 맘피는 재정상의 이유로 외번몽고 왕공 및 관원들에게 품급에 따라 지 급하는 물품을 줄이자고 상주했다가 강희제의 질책을 받았다. 강희제는 이번원 관원과 몽고 왕공이 공모해 관직 수를 허위로 늘려 청으로부터 지급받는 물품 비용을 부풀렸 다는 의심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이 강희제는 이번원 관원들의 비리 행위를 주시하고 있었으며 특히 이번원 관원들과 몽고 왕공들의 공모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따라서 이 무렵 황제의 최측근인 만주인을 기용한 데에는 이번원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비리의 주체는 이번원 당관보다는 실무를 담당하는 사관들일 가능성이 크지만 이번원 최고 수장인 상서를 통해 내부 규찰을 강화하려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갈단 원정이 끝난 후 이번원 상서에 몽고인 대신 만주인을 기용하는 경향이 나타났 지만 이후로 이번원 상서에 만주인만 임명된 것은 아니다. 이는 원정 직후의 대외적 상 황과 내부적 기강 문제로 인한 조치였을 뿐 옹정 건륭 연간의 전반적 상황을 보면 결 국 몽고의 언어와 사정에 밝은 실무능력을 갖춘 인물들이 이번원 상서와 시랑에 임명 되었다. 옹정제가 즉위한 후 異 母 弟 인 胤 禩 를 잠시 이번원 상서에 임명한 외에 건륭기 까지 외번 관리 경험이 풍부한 만주와 몽고인들이 이번원 상서에 임명되었다. 여기에서 이번원 관원에 임명된 몽고인 혹은 몽고 출신이란 대부분 팔기몽고인을 의미한다. 공식 70) 淸 聖 祖 實 錄 卷 191, 康 熙 37 年 12 月 辛 亥 條. 上 諭 大 學 士 等 曰, 滿 丕 意 見 庸 劣, 所 議 殊 屬 不 合. 凡 扎 薩 克, 皆 有 額 設 都 統, 副 都 統 等 官, 其 諸 王 則 有 長 史, 護 衛, 典 儀 及 各 項 雜 職, 非 謂 按 其 品 秩, 賜 以 食 物, 爲 妄 費 也. 伊 等 供 給, 豈 可 槪 議 裁 汰, 所 宜 覈 査 者, 實 授 職 官 之 外, 又 妄 開 寨 桑 頭 目 及 部 下 數 百 人, 指 名 冒 取 供 給, 議 裁 蓋 謂 此 耳. 觀 其 所 議, 必 理 藩 院 官 員 通 同 蒙 古 捏 造 虛 名, 瓜 分 肥 己, 是 以 不 愿 朕 之 硏 究. 此 等 情 事, 朕 洞 知 之. 伊 等 不 卽 改 前 非, 竟 議 裁 減, 俟 蒙 古 叩 閽 之 時, 仍 復 欲 准 行 耳. 至 喀 爾 喀 前 者 未 附 我 朝, 故 私 設 有 寨 桑 頭 目 之 名, 今 俱 來 降, 已 設 扎 薩 克, 授 以 護 衛 職 官, 又 安 得 有 寨 桑 之 稱 號. 若 按 其 見 授 秩 銜 賜 之 食 物, 彼 亦 知 中 國 官 爵 之 尊, 愿 效 力 而 服 官 矣. 滿 丕 爲 人, 朕 素 知 之, 其 材 力 雖 有 可 取, 品 行 則 甚 不 端 也, 爾 等 其 召 而 責 之. - 127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적으로 외번몽고의 왕공들이 임명될 수 있는 자리는 이번원 액외시랑 뿐이었다. 예외가 있다면 건륭 중엽(건륭32-건륭33)에 이번원 상서를 맡은 섭텅 발주르[ 色 布 縢 巴 勒 珠 爾 ] 이다. 그는 코르친 좌익 中 旗 輔 國 公 이자 구룬 공주와 혼인한 구룬 어푸로서 定 邊 左 副 將 軍 과 參 贊 大 臣 을 역임한 인물이다. 71) 그는 외번왕공으로서 청조의 외번관리 조직의 요직을 담당했다. 그러나 섭텅 발주르가 이번원 상서에 임명된 이유는 외번몽고 수장으 로서가 아니라 청 황제의 사위로서 청조 권력구조 깊숙이 편입되어 몽고 관련 업무를 담당해온 경력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를 제외하고 이번원 상서와 시랑에 외번 몽고 왕공이 임명된 경우는 없었다. 張 永 江 은 청대 팔기몽고인들의 임관 상황을 통해 청조에서의 팔기몽고인들의 지위와 역할을 분석한 바 있다. 72) 그도 청대 외번 관리 업무에서 팔기몽고인들의 역할에 주목 했는데 이번원의 경우 상서와 좌 우시랑에 임명된 팔기몽고인은 각각 14명과 17명, 22 명이다. 이 수치는 錢 實 甫 의 淸 代 職 官 年 表 에 근거한 것으로 전실보는 기적이 만주인 경우 만주 로 표시해 몽고인과 만주인을 구분하지 않았다. 따라서 몽고 출신 이번원 관원은 이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청대 이번원 상서를 맡은 인물은 90여명에 달하므로 몽고인 상서 비중이 그리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는 가경 연간 이후로 만주 인, 특히 청 말에 종실 비율이 늘어난 탓도 있다. 순치 연간부터 건륭 연간까지 이번원 에는 꾸준히 몽고 출신 기인이 기용되었고 낭중, 원외랑, 주사 등의 실무직에는 그 비율 이 훨씬 높다. 73) 이는 이번원 관원 임용 규정과도 관련이 있다. 이번원 상서와 시랑에 대해 乾 隆 朝 大 淸 會 典 과 皇 朝 文 獻 通 考, 淸 史 稿 등에서 는 모두 이번원 상서 1인, 좌우시랑 각1인(모두 만주, 몽고를 구분하지 않고 補 授 한다 ), 상서, 좌 우시랑 모두 각기 만주 1인(간혹 몽고인이 맡기도 한다) 고 규정했다. 74) 嘉 慶 朝 大 淸 會 典 에서는 이번원 상서 만주 1인, 좌 우시랑 각기 만주 1인씩이라고 규 정해 마치 이번원 상서와 좌 우시랑에 모두 만주인을 임용한 것처럼 기록했다. 75) 여기 71) 包 桂 芹, 淸 代 蒙 古 官 吏 傳, 色 布 騰 巴 勒 珠 爾, p.89, p.268. 섭텅 발주르는 홍타이지 시기부터 청 황 실과 공고한 혼인관계를 구축한 코르친 좌익 만주시리의 후손이다. 그의 부친 롭장 굼부도 호쇼이 공주와 혼인한 호쇼이 어푸였으며 섭텅 발주르는 그의 셋째 아들로 코르친 좌익중기 자사크 다르 한[ 達 爾 汗 ] 친왕의 작위를 승습했다. 72) 張 永 江, 앞의 글, pp.170-181. 73) 張 永 江 의 분석에 의하면 이번원 전체 사관 중에서 낭중은 모두 12 缺, 원외랑 36 缺, 주사 16 缺 인데 이 중 몽고결이 점하는 비율은 67.2%에 달한다. 張 永 江, 앞의 글, p.172. 74) 乾 隆 朝 大 淸 會 典 卷 79, 理 藩 院, 尙 書 一 人, 左 右 侍 郞 各 一 人 均 滿 洲, 或 以 蒙 古 補 授, 額 外 侍 郞 一 人 特 簡 蒙 古 貝 勒, 貝 子 之 賢 能 者 任 之. ; 皇 朝 文 獻 通 考 卷 82, 職 官 考 六, 理 藩 院, 尙 書 一 人, 左 右 侍 郞 各 一 人 俱 不 分 滿 洲 蒙 古 補 授, 額 外 侍 郞 一 人, 以 蒙 古 貝 勒 貝 子 之 賢 者 任 之. ; 淸 史 稿 卷 115, 志 90, 職 官 二, 理 藩 院, 管 理 院 務 大 臣, 滿 洲 一 人. 特 簡 大 學 士 爲 之. 尙 書, 左 右 侍 郞, 俱 各 滿 洲 一 人. 間 亦 有 蒙 古 人 爲 之. 額 外 侍 郞 一 人. 以 蒙 古 貝 勒 貝 子 之 賢 能 者 任 之. - 128 -

淸 초기 理 藩 院 의 위상과 인적구성 에서의 만주는 滿 缺 을 의미하는데 만결에는 만주인뿐만 아니라 만주 기적에 소속된 몽고기인까지 포함한다. 요컨대 이번원 상서와 좌우시랑의 官 缺 에 대한 규정은 명확하 지 않고 만주와 몽고인이 모두 임용될 수 있는 자리라고 명시되었다. 이에 비해 각 청리 사의 낭중, 원외랑, 주사와 필첩식에 대해서는 만주, 몽고, 한군에게 배정된 관결이 제 시되어 있다. 한군의 경우에는 漢 檔 房 과 필첩식 일부 자리만 임용 가능했고 나머지는 모두 만주와 몽고인의 관결로 규정되었는데 특히 몽고인의 비율이 높다. 이에 대한 乾 隆 朝 大 淸 會 典 과 嘉 慶 朝 大 淸 會 典 의 기록에 조금 차이가 있다. 전자의 경우 旗 籍 淸 吏 司 의 郎 中 과 員 外 郞, 主 事 에 만주는 5인(낭중2, 원외랑3), 몽고 는 6인(낭중1, 원외랑4, 주사1)의 관결이 배정되었다. 王 會 淸 吏 司 의 낭중, 원외랑, 주사 에 만주는 5인(낭중1, 원외랑3, 주사1), 몽고는 4인(낭중1, 원외랑2, 주사1)이 배정되었 다. 典 屬 淸 吏 司 의 낭중, 원외랑, 주사에 만주는 7인(낭중1, 원외랑5, 주사1), 몽고는 6인 (낭중1, 원외랑4, 주사1)이 규정되었다. 柔 遠 淸 吏 司 의 낭중, 원외랑, 주사에는 만주 3인 (낭중1, 원외랑2), 몽고 4인(원외랑3, 주사1), 徠 遠 淸 吏 司 에는 만주 3인(원외랑2, 주사1), 몽고4인(낭중1, 원외랑2, 주사1), 理 刑 淸 吏 司 의 낭중, 원외랑, 주사에는 만주 5인(낭중1, 원외랑3, 주사1), 몽고 4인(낭중1, 원이랑3)이 배정되었다. 각 청리사의 낭중, 원외랑, 주 사에 만결과 몽결이 각각 28인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필첩식의 비중은 만주 36인, 몽고 55인, 한군 6인으로 몽결 비중이 월등히 많다. 가경조 대청회전 의 규정에는 기적청리사의 낭중, 원외랑, 주사는 만주3인(낭중1, 원외랑1, 주사1), 종실 1인(원외랑1), 몽고 4인(낭중2, 원외랑2)이 배정되었다. 왕회청리 사에는 만주 3인(낭중1, 원외랑2), 몽고 7인(낭중2, 원외랑3, 주사2)이 규정되었다. 전속 청리사에는 만주 4인(낭중1, 원외랑2, 주사1), 몽고 8인(낭중1, 원외랑6, 몽고1)이, 유원 청리사에는 종실 1인(낭중), 만주 2인(원외랑2), 몽고 6인(원외랑5, 주사1)이 배정되었다. 내원청리사에는 만주 2인(원외랑2), 몽고 5인(낭중1, 원외랑3, 주사1)이 규정되었고 이 형사에는 만주 2인(원외랑2), 몽고6인(낭중1, 원외랑4, 주사1)이 배정되었다. 각 청리사 의 낭중, 원외랑, 주사에 종실 2인, 만결은 16인, 몽고 36인으로 건륭조 대청회전 의 규정보다 각 청리사의 속관에서 몽결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높아졌다. 따라서 건륭 중엽 이후로 이번원 司 官 에서 몽고의 비중이 지속적으로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번원의 낭중, 원외랑, 주사 등의 사관의 몽고인 비중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경향 과 관련해 강희 중엽 이번원 속관에 대한 일련의 조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康 熙 朝 75) 嘉 慶 朝 大 淸 會 典 卷 49, 理 藩 院, 尙 書 滿 洲 一 人, 左 侍 郞 滿 洲 一 人, 右 侍 郞 滿 洲 一 人, 額 外 侍 郞 蒙 古 一 人 額 外 侍 郞, 以 蒙 古 貝 勒, 貝 子 之 賢 能 者 任 之. - 129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大 淸 會 典 卷 7, 吏 部 五, 蒙 古 缺 陞 補 除 授 에서의 규정을 보면 이번원 낭중에는 만주와 몽고 기인을 구별하지 않고 임용하게 되어 있다. 또 원외랑에는 舊 例 에서는 직무가 있 는 몽고 관원을 우선 임명하고 적임자가 없으면 몽고어를 할 수 있는 만주를 임용하도 록 했다. 또 적임자가 없으면 몽고인 內 閣 撰 文 中 書 혹은 六 品 筆 帖 式 을 임용한다고 해 몽고인이 우선적으로 임용되었다. 이 외에 堂 主 事, 司 主 事, 司 務 등에 대해서도 몽고인 을 임용하게 정했다. 강희조 대청회전 은 강희25년까지의 기사를 수록했으므로 이미 강희 초부터 이번원 낭중, 원외랑 등 속관들은 기본적으로 몽고인을 임용하도록 규정했 음을 알 수 있다. 강희27년(1681) 3월에는 이번원 낭중 후보자에 이번원 원외랑 외에 각부 아문의 몽고원외랑, 내각몽고시독까지 포함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76) 이전에는 이 번원 낭중을 임명할 때 이번원 원외랑 중에서 후보를 정해 선발했지만 강희27년을 기 점으로 각부 아문의 몽고원외랑과 내각시독을 포함해 후보의 범위가 넓어졌다. 이는 당 시 할하와 준가르의 분쟁으로 이 지역에 대한 업무가 증대해 실무자의 수요가 급증했 기 때문으로 보인다. 강희제는 할하 및 준가르, 티베트의 정세가 급박해진 상황에서 이 번원 업무에 적합한 인재를 구하는데 난항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각 몽고 기의 세작을 가진 인물과 시위 중에서 몽고어에 능통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선발하게 했다. 원래 이 번원 관원은 이번원 내부나 내각, 육부 관원 중에서 보임되었던 관례를 벗어나 몽고 기 의 관원들에게까지 임용 기회를 넓혀준 것이다. 77) 갈단 원정이 종료된 이후 강희38년(1699) 7월에 있었던 종인부, 내각, 육부, 이번원, 도찰원 등 중앙부서의 인원 감축 조치에서 이번원의 漢 缺 이 철폐되었듯 육부의 몽고결 이 대거 없어졌다. 78) 그 뒤 11월에는 각 부의 몽고 사관을 모두 없애고 후보 이번원 員 缺 로 하라는 명을 내려 육부의 몽고결을 모두 철폐하고 이번원에서 결원이 나올 때 보충 인원으로 삼았다. 79)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강희 중엽 이후 이번원 사관에서 몽고 인 비중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상서와 시랑을 비롯해 낭중 등의 사관까지 이 번원의 관직은 기본적으로 청조 내부의 몽고인들에게 우선적 기회를 주었다. 청조는 팔 기몽고인들이 몽고의 언어와 관습, 문화, 종교에 친숙한 이점을 살려 외번몽고를 관할 76) 淸 聖 祖 實 錄 卷 134, 康 熙 27 年 3 月 更 子 條. 吏 部 議 覆, 理 藩 院 郎 中 員 缺, 舊 例 將 本 衙 門 員 外 郞 咨 送 題 補, 與 各 部 院 事 例 不 一. 嗣 後 應 停 其 咨 送, 與 各 部 衙 門 蒙 古 員 外 郞, 內 閣 蒙 古 侍 讀, 論 俸 陞 補. 其 理 藩 院 員 外, 亦 照 各 部 員 外, 一 體 論 俸 升 轉. 從 之. 77) 村 上 信 明, 앞의 글, pp.154-155 참조. 淸 聖 祖 實 錄 卷 142, 康 熙 28 年 9 月 甲 辰 條. 諭 大 學 士 等, 理 藩 院 事 務, 所 關 最 要. 官 員 缺 出, 應 用 之 人 甚 少. 蒙 古 旗 分 阿 達 哈 哈 番, 拜 他 喇 布 勒 哈 番, 拖 沙 喇 哈 番 及 侍 衛, 可 令 各 旗 都 統 奏 聞 引 見, 此 中 有 通 習 文 字 者 選 用. 78) 淸 聖 祖 實 錄 卷 194, 康 熙 38 年 7 月 乙 酉 條. 79) 淸 聖 祖 實 錄 卷 196, 康 熙 38 年 11 月 壬 寅 條. 又 諭 曰, 各 部 院 設 蒙 古 司 官, 幷 無 所 辦 之 事, 俱 箸 解 任, 候 補 理 藩 院 員 缺. - 130 -

淸 초기 理 藩 院 의 위상과 인적구성 하는 요직에 임명했다. 이번원 관원에 여허나 몽고 출신이 임용된 것은 입관 전부터의 일이지만 강희 중엽에 들어서 이번원 관원에 몽고기인의 임용이 현격하게 증가했고 이 런 경향은 건륭기까지 유지되었다. 건륭 연간 군기대신과 이번원 상서를 역임한 정람기 몽고 출신의 나얀타이[ 納 延 泰 ], 정백기몽고 출신 留 保 住 등 능력 있는 팔기몽고인들이 이번원의 요직을 맡았다. 팔기몽고인들의 정체성 문제는 만주인보다 복잡했다. 이들의 선조는 몽고인이었으므 로 변외의 외번몽고와 일종의 동류의식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 신들을 청의 旗 人 으로 생각했다. 80) 입관 전 만주정권에 귀속해 팔기의 일부가 된 몽고 기인들은 내몽고나 할하와도 다른 부류였다. 청조로서도 충실한 기인이자 몽고의 언어 와 관습을 이해하는 몽고기인들을 외번몽고를 포함한 번부의 통치, 관리 업무에 가장 적합한 인재로 인식했다. 따라서 이번원 관직 임용의 기회는 기본적으로 몽고기인에게 더 넓게 열려있었다. 그러나 이번원의 최고위직인 상서 보다는 차관급인 시랑과 실무를 담당하는 사관에 몽고기인의 비율이 더 높다는 사실은 청조의 지배층은 만주라는 점을 새삼 상기시킨다. 결론 청대 외번 통치 기구인 이번원은 청조 고유의 기구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번원은 청조에 다문화 다민족적 특징을 부여한 非 한족지역 즉 외번 지역을 관리했으므로 존 재 자체가 청조의 특징을 반영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청 조정 내에서 이번원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어떠한 위치를 가졌는지도 이번원의 특징을 뒷받침하는데 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문제이다. 홍타이지가 이번원을 설립한 후 내삼원과 이번원의 부서 위치 를 바꾸려 했을 때 도찰원과 내삼원의 한인관료들이 반발한 일화는 당시 이번원에 대 한 만주 한인관료의 입장 차이를 대변한다. 조정 내 만 한 관료들의 입장 차이, 나아 가 만 한 정치문화의 차이는 순치 연간 이번원을 禮 部 의 산하에 두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순치제가 친정을 시작한 후 한인관료를 기용하고 명의 제도를 수용해 황권을 강화하 기 위한 정치개혁을 추진하면서 이번원은 예부 산하의 기구가 되었다. 그러나 순치제가 80) 청조 몽고기인의 역할과 滿 洲 化 문제에 대해서는 村 上 信 明, 淸 朝 の 蒙 古 旗 人 -その 實 狀 と 帝 國 統 治 における 役 割, 風 響 社, 2007 참조. - 131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사망하고 만주인 輔 政 大 臣 들이 어린 강희제를 보필하자 이번원은 다시 육부와 동등한 지위로 회복되었다. 이러한 조직체계상의 변화는 이번원의 중요도가 저하되거나 높아 진 차원이 아니라 청 조정 내부의 만 한 제도의 충돌 과정에서 초래된 결과로 봐야한 다. 순치 연간 이번원은 내몽고 각부에 대한 관리와 할하 등 몽고 세력의 조공 업무, 티베트 불교와 관련된 제반 업무를 담당했다. 게다가 순치제가 추진한 달라이 라마 5세 의 북경 방문은 청 조정이 총력을 기울인 국가적 차원의 大 事 였다. 이번원은 달라이 라 마의 북경 방문에 관한 제반 업무를 담당했으며 순치 연간에 성립된 청조의 티베트 불 교 정책인 자사크라마 제도를 총괄했다. 또한 이 시기에 할하와의 긴장관계가 고조되면 서 청 조정은 내몽고 각부에 대한 관리와 통제에 주의해야했다. 따라서 이번원을 예부 의 산하에 둔 것은 이번원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순치제의 황권 강 화를 위한 정치개혁과 순치제 사후 그의 개혁정책을 둘러싼 만 한 정치문화의 충돌이 라는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홍타이지가 내삼원과 이번원 아문을 맞바꾸려하자 내삼 원과 도찰원의 한인관료들이 반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순치 연간 만주 관원들도 이번 원을 명대 제도를 모방해 설립한 기구들과는 다른 만주족 고유의 기구로 인식했다. 이 에 순치제가 사망한 후 만주 대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이번 원의 지위를 격상시켰던 것이다. 청대 중앙관서에 적용된 만한병용의 원칙이 이번원에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번원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漢 檔 房 의 관원과 筆 帖 式 등 일부 하위 관리를 제외하 고는 이번원의 당관에는 모두 만주인과 몽고인만이 임용되었으며 이와 같은 원칙은 청 말까지 유지되었다. 몽고아문이 설립된 숭덕 연간에는 주로 여허 귀족 출신 인물들이 기용되었다. 당시 여허의 선조는 몽고인이라고 알려질 만큼 여허부는 정치적으로 몽고 부족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몽고의 언어 문화에 익숙했다. 따라서 홍타이지는 여 허 출신을 기용해 내몽고 각부에 대한 업무를 맡겼다. 입관 후에는 몽고 출신 旗 人 들이 이번원 관원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몽고 수장층인 보르지기트 氏 가문 이거나 시위와 내대신 등을 역임한 신분이 비교적 높은 만주 몽고기인들이었다. 시위 와 그들을 관할하는 내대신은 주로 황제 직속의 上 三 旗 (양황 정황 정백) 출신의 기 인들이었다. 이들은 황제의 측근으로서 조정의 핵심 권력층을 형성했다. 이번원 고위 관원에 황제의 측근 세력이 포진한 것은 청조의 몽고 관계와 번부 통치가 청 정권의 안녕과 발전에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강희 중엽 할하가 청에 복속한 이후 이번원 상서에는 주로 만주기인 중에서도 청조 최고의 명문가 출신들이 임명되었다. 이번원 상서에 명문가 출신을 기용한 데에는 칭기 - 132 -

淸 초기 理 藩 院 의 위상과 인적구성 스칸의 후예라는 정통성과 자부심을 갖고 있는 할하 왕공들을 상대하고 관리하기 위해 그에 걸맞는 지위를 갖춘 인물이 필요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할하가 청에 복속한 후 준가르, 티베트, 청해 일대의 정세가 청조에 극히 민감한 사안으로 대두되었다는 측면 에서도 이번원 상서의 인적구성이 변화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강희제는 외번 관련 업 무의 기밀을 유지하고 외번에 대한 관리를 더욱 철저하게 하고자 황제 직속의 상삼기 출신으로 시위를 거쳐 고위직에 오른 최측근 만주인들을 이번원 상서에 임용했다. 게다 가 강희제는 이번원 관원들이 몽고 왕공들과 공모해 하사품을 늘리는 등의 비리를 저 지르고 있다는 의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 무렵 황제의 최측근인 만주인을 기용한 데에는 이번원의 기강을 바로잡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비리의 주체는 이번원 당관보다는 실무를 담당하는 司 官 들일 가능성이 크지만 이번원 최고 수장인 상 서를 통해 내부 규찰을 강화하려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강희 중엽부터 이번원 상서에 만주기인을 중용한 한편 상서 밑에서 실무를 총괄하는 시랑과 기타 관원들에 몽고기인들이 임명되는 비중이 증가했다. 몽고기인은 청대 만몽 관계와 청조의 다문화 다민족적 특징을 체현한 존재이다. 몽고기인과 이번원은 입관 전 만주정권의 만몽 연합적 성격에 의해 탄생되었다. 몽고기인은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가 세력을 강화해 가는 과정에서 팔기제 내로 흡수되어 청의 세력 확장에 기여했다. 그 리고 이번원의 전신인 몽고아문은 홍타이지가 주변 몽고 세력에 영향력을 강화해 가는 과정에서 설립되어 이후 청조의 외번 확대 과정에 따라 이번원의 조직과 역할도 확대 되었다. 이와 같이 청조의 권력구조에서 몽고기인과 이번원이 갖는 지위는 청대 외번의 형성 및 발전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이번원의 조직과 인원구성의 변화가 청 대 권력구조와 외번통치의 특징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이 문제를 단순한 제도사적 분석 에서 벗어나 보다 다각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 133 -

简 论 满 洲 人 对 漠 南 蒙 古 各 部 统 治 的 确 立 额 尔 敦 巴 特 尔 ( 内 蒙 古 大 学 ) 绪 言 一 15-16 世 纪 的 东 西 蒙 古 二 达 延 汗 统 一 东 蒙 古 三 蒙 古 的 衰 退 和 满 洲 爱 新 国 的 兴 起 结 语 绪 言 1368 年, 元 朝 在 全 中 国 的 统 治 崩 溃, 元 朝 皇 帝 退 回 蒙 古 高 原 直 到 1635 年 被 女 真 - 满 洲 人 所 征 服, 蒙 古 汗 廷 始 终 打 着 大 元 旗 号, 继 续 保 持 着 政 权, 这 是 大 蒙 古 国 - 元 朝 的 延 续, 人 们 称 之 为 北 元 这 个 政 权 统 治 蒙 古 高 原 及 周 围 地 区 长 达 260 余 年 1634 年, 蒙 古 末 代 大 汗 林 丹 病 死 于 青 海 大 草 滩, 林 丹 汗 之 子 额 哲 被 爱 新 国 军 俘 获 至 此, 以 林 丹 汗 为 代 表 的 成 吉 思 汗 黄 金 家 族 对 蒙 古 的 统 治 宣 告 结 束 近 二 十 多 年 来, 内 蒙 古 大 学 的 蒙 古 史 研 究 有 了 长 足 的 进 步 尤 其, 在 明 清 时 期 的 蒙 古 史 研 究 方 面, 进 一 步 发 掘 整 理 蒙 文 和 满 文 史 料 ( 档 案 ), 并 与 汉 文 史 书 进 行 认 真 地 堪 比, 对 蒙 古 史 的 一 些 问 题 进 行 了 较 为 深 入 地 研 究, 发 表 和 出 版 了 不 少 研 究 成 果 1) 本 文 主 要 利 用 这 些 的 研 究 成 果, 对 元 朝 对 全 中 国 的 统 治 的 崩 溃 到 达 延 汗 统 一 东 蒙 古, 分 封 其 诸 子, 东 蒙 古 各 部 最 终 归 附 清 朝 的 历 史 做 一 简 略 地 评 述 一 15-16 世 纪 的 东 西 蒙 古 1370 年, 元 惠 宗 在 明 军 西 征 北 进 时 死 于 应 昌 ( 今 内 蒙 古 克 什 克 腾 旗 境 内 ), 子 爱 猷 识 理 达 腊 (Ayuširidara, 1371-1378 年 在 位 ) 即 位, 年 号 宣 光 他 依 靠 扩 阔 帖 木 儿, 在 漠 北 击 败 明 军 1379 年, 脱 古 思 帖 木 儿 (Töhustemür, 1379-1388 年 在 位 ) 即 位, 年 号 天 元 元 朝 灭 亡 三 十 余 年 后, 由 于 北 元 政 权 的 衰 弱, 蒙 古 分 裂 成 两 大 对 立 的 政 治 集 团 蒙 古 与 瓦 剌 其 一 是 以 北 元 大 汗 脱 古 思 帖 木 儿 属 民 为 核 心 形 成 的 部 落 集 团, 该 集 团 被 视 为 蒙 1) 齐 木 德 道 尔 吉 : 17 世 纪 上 半 叶 满 蒙 汉 档 案 在 蒙 古 史 研 究 中 的 应 用 : 以 内 蒙 古 大 学 清 初 蒙 古 史 研 究 为 例, 中 国 蒙 古 史 学 会 编 : 蒙 古 史 研 究 第 十 一 辑, 科 学 出 版 社, 2013 年, 第 21-44 - 135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古 正 统, 自 称 野 克 莽 官 儿 (Yeke Monghol, 即 大 蒙 古, 汉 译 大 虏 大 鞑 子 ), 这 一 集 团 的 政 治 代 表 是 历 届 北 元 大 汗 在 以 后 的 历 史 中 以 蒙 元 时 期 成 吉 思 汗 诸 弟 属 民 为 核 心 形 成 的 包 括 兀 良 哈 等 三 卫 在 内 的 往 流 诸 部 一 直 受 北 元 大 汗 的 统 治, 所 以 他 们 也 属 于 这 个 集 团 另 一 个 是 以 昔 日 阿 里 不 哥 属 民 为 核 心 形 成 的 部 落 集 团 他 们 被 称 为 Oyirad, 明 代 汉 译 为 瓦 剌 1260 年, 阿 里 不 哥 在 于 其 兄 忽 必 烈 争 夺 蒙 古 大 汗 之 位 的 斗 争 中 失 败 从 此, 忽 必 烈 家 族 与 阿 里 不 哥 家 族 埋 下 了 不 和 的 种 子 元 初, 作 为 西 北 诸 王 一 支 的 阿 里 不 哥 家 族 长 期 与 元 朝 敌 对 1276 年 ( 至 元 十 三 年 ), 以 药 木 忽 儿 为 首 的 阿 里 不 哥 诸 子 联 合 蒙 哥 汗 之 子 昔 里 吉 等 人 曾 响 应 海 都 叛 乱 昔 里 吉 失 败 后, 药 木 忽 儿 等 人 又 长 期 依 附 海 都 与 元 朝 为 敌 元 朝 强 盛 时 期 曾 采 取 一 些 列 措 施 削 弱 阿 里 不 哥 家 族 的 势 力, 如 1266 年 ( 至 元 七 年 ) 在 阿 里 不 哥 封 地 吉 尔 吉 思 谦 谦 州 等 处 设 立 由 元 朝 直 接 管 辖 的 五 部 断 事 官 ;1293 年, 元 朝 军 队 攻 占 吉 尔 吉 思 等 地 后 又 将 那 里 属 于 阿 里 不 哥 的 部 分 吉 尔 吉 思 谦 谦 州 部 民 迁 往 蒙 古 高 原 东 部 但 是 根 据 成 吉 思 汗 的 大 扎 撒, 元 朝 皇 帝 不 能 彻 底 剥 夺 阿 里 不 哥 家 族 对 其 封 地 和 属 民 的 统 治 权 随 着 元 朝 的 衰 落, 西 北 诸 王 势 力 再 次 抬 头 1360 年 ( 后 至 元 二 十 年 ) 当 元 朝 统 治 处 于 风 雨 飘 摇 之 际, 封 地 在 按 台 山 也 儿 的 石 河 一 带 的 窝 阔 台 后 裔 翟 王 阿 鲁 辉 帖 木 儿 拥 兵 数 万 叛 乱, 指 责 元 惠 宗 失 掉 了 祖 宗 江 山, 声 言 要 替 他 掌 管 天 下 2) 这 表 明, 西 北 诸 王 势 力 再 度 壮 大 以 阿 里 不 哥 后 裔 为 代 表 的 瓦 剌 集 团 也 是 在 这 种 形 势 下 强 大 起 来 的 但 是, 黄 金 家 族 内 部 的 矛 盾 和 斗 争 只 是 导 致 蒙 古 分 裂 的 潜 在 因 素, 是 一 种 可 能 性 这 种 可 能 性 是 在 元 朝 在 中 原 的 统 治 崩 溃 后, 明 朝 与 北 元 南 北 对 峙 的 特 殊 情 况 下 才 变 成 现 实 的 质 言 之, 蒙 古 分 裂 的 直 接 原 因 是 北 元 政 权 遭 明 朝 致 命 打 击 而 衰 落 的 结 果 在 元 末 明 初, 阿 里 不 哥 后 裔 是 瓦 剌 集 团 的 政 治 代 表 蒙 古 分 裂 后 这 一 地 位 被 绰 罗 斯 家 族 所 取 代 当 时 的 东 蒙 古 人, 自 称 为 蒙 古, 称 西 蒙 古 为 卫 拉 特 在 地 域 上 讲, 蒙 古 占 据 蒙 古 高 原 东 部, 瓦 剌 占 据 蒙 古 高 原 西 部 蒙 古 的 分 裂 和 东 西 两 大 集 团 之 间 为 争 夺 蒙 古 高 原 霸 权 的 斗 争, 是 15 世 纪 -17 世 纪 蒙 古 政 治 史 上 的 主 要 内 容, 对 以 后 的 蒙 古 历 史 影 响 极 大 3) 明 朝 作 为 蒙 古 外 部 的 重 要 政 治 因 素, 不 断 影 响 蒙 古 政 局, 其 主 要 表 现 为 明 朝 对 蒙 古 采 取 打 击 和 削 弱 政 策 自 明 太 祖 朱 元 璋 派 兵 北 伐 至 明 太 宗 永 乐 帝 ( 明 成 祖 朱 棣 ) 五 次 北 征, 蒙 古 势 力 遭 到 严 重 削 弱 明 朝 的 卷 入 大 大 地 影 响 了 蒙 古 的 政 局 北 元 的 初 期 是 在 无 休 止 的 战 乱 中 度 过 的 蒙 古 可 汗 瓦 剌 和 明 王 朝 三 股 势 力 互 相 争 斗 最 后, 明 朝 失 去 了 控 制 内 蒙 古 地 区 的 能 力, 蒙 古 贵 族 恢 复 了 对 漠 南 蒙 古 的 统 治 这 个 战 乱 可 以 分 为 四 个 阶 段 第 一 阶 段, 从 1388 年, 脱 古 思 帖 木 儿 汗 遇 害, 至 1408 年 鬼 力 赤 被 杀, 大 约 20 年 这 一 阶 段, 下 层 诸 爱 马 纷 纷 割 据 自 雄 社 会 大 混 乱, 是 这 20 年 的 突 出 2) 元 史 卷 45, 顺 帝 本 纪, 卷 206, 阿 鲁 辉 帖 木 儿 传 3) 宝 音 德 力 根 : 十 五 世 纪 前 后 蒙 古 政 局 部 落 诸 问 题 研 究, 内 蒙 古 大 学 蒙 古 史 研 究 所 博 士 学 位 论 文, 1997 年, 第 17-20 页 - 136 -

简 论 满 洲 人 对 漠 南 蒙 古 各 部 统 治 的 确 立 特 点 第 二 阶 段, 从 1408 年 ( 永 乐 六 年 ) 阿 鲁 台 等 拥 立 本 雅 失 里 为 汗, 至 1438 年 ( 正 统 三 年 ), 脱 脱 不 花 汗 捕 杀 阿 台 汗, 大 约 30 年, 比 起 第 一 阶 段 来, 混 战 略 见 好 转, 分 裂 却 更 加 深 刻 二 十 年 混 战 的 结 果, 形 成 了 东 蒙 古 和 西 蒙 古 两 大 政 治 势 力, 他 们 争 夺 霸 权 ; 黄 金 家 族 则 进 一 步 衰 微, 大 汗 沦 为 异 姓 大 贵 族 的 傀 儡 第 三 阶 段, 从 1439 年 ( 正 统 四 年 ) 脱 脱 不 花 汗 成 为 蒙 古 唯 一 大 汗, 至 1454 年 ( 景 泰 五 年 ) 也 先 汗 被 杀, 约 15 年 瓦 剌 暂 时 控 制 全 蒙 古 第 四 阶 段, 从 1454 年 至 1479 年 ( 成 化 十 五 年 ) 达 延 汗 即 位, 约 25 年 蒙 古 本 部 复 兴, 黄 金 家 族 重 新 崛 起 4) 1388 年, 明 军 在 捕 鱼 儿 海 ( 今 贝 尔 湖 ) 突 袭 脱 古 思 帖 木 儿 汗, 脱 古 思 帖 木 儿 汗 大 败, 逃 跑 途 中 被 忽 必 烈 汗 之 弟 阿 里 不 哥 后 裔 也 速 迭 儿 杀 死 也 速 迭 儿 自 己 当 上 了 蒙 古 大 汗, 称 卓 里 克 图 汗 一 百 多 年 后 阿 里 不 哥 的 子 孙 也 速 迭 儿 杀 死 了 忽 必 烈 汗 的 后 代 并 作 了 大 汗, 这 在 蒙 古 汗 统 上 是 一 件 大 事 因 为 在 此 之 前, 无 论 蒙 古 统 治 阶 级 内 部 的 政 治 斗 争 如 何 激 烈, 忽 必 烈 家 族 的 汗 权 从 来 没 有 动 摇 过 阿 里 不 哥 后 裔 夺 取 蒙 古 汗 权 一 事 标 志 着 统 治 阶 级 内 部 的 斗 争 更 加 激 化, 由 此 蒙 古 陷 于 长 期 的 割 据 纷 争 状 态 也 速 迭 儿 不 久 死 去, 其 后 即 汗 位 的 相 继 有 恩 克 额 勒 伯 克 坤 帖 木 儿 坤 帖 木 儿 死 于 1402 年 也 就 是 说, 在 短 短 十 四 年 间, 就 有 四 位 可 汗 走 马 灯 般 地 上 台 又 死 掉 1402 年, 鬼 力 赤 在 漠 北 称 汗 (1402~ 1407) 其 属 下 有 太 师 右 丞 相 马 儿 哈 咱, 太 傅 左 丞 相 也 孙 台, 太 保 枢 密 院 知 院 阿 鲁 台 等 人 1407 年 五 月, 鬼 力 赤 被 阿 鲁 台 等 人 废 黜, 十 月, 阿 鲁 台 另 立 本 雅 失 里 为 汗 ( 尊 号 为 完 者 秃, 1408~1410) 完 者 秃 汗 是 从 撒 马 儿 罕 经 别 失 八 里 ( 即 东 察 合 台 汗 国 ) 东 来 的 元 朝 后 裔 此 前 控 制 中 亚 的 跛 子 帖 木 儿 汗 扣 留 明 朝 使 臣, 曾 试 图 东 侵 明 朝, 因 此, 完 者 秃 汗 的 即 位 引 起 明 廷 高 度 重 视 明 廷 为 孤 立 完 者 秃 汗, 遣 使 往 谕 西 部 的 瓦 剌 三 王, 并 赐 物, 预 防 其 归 附 新 汗 第 二 年, 完 者 秃 汗 遣 使 招 抚 兀 良 哈 三 卫, 三 卫 归 附 在 大 臣 阿 鲁 台 的 扶 持 下, 完 者 秃 汗 建 庭 于 克 鲁 伦 河 下 游 一 带, 大 有 统 一 漠 北 之 势 完 者 秃 汗 与 阿 鲁 台 几 次 征 伐 瓦 剌, 互 有 胜 负 六 月, 明 廷 得 知 完 者 秃 汗 和 阿 鲁 台 与 瓦 剌 战 不 利, 退 回 克 鲁 伦 河, 便 以 蒙 古 杀 死 明 使 为 由 遣 兵 出 征 蒙 古 汗 廷, 欲 乘 机 加 以 消 灭 1409 年 七 月, 明 成 祖 派 遣 大 将 军 丘 福 率 领 精 骑 10 万, 奔 袭 东 部 的 蒙 古 汗 廷 丘 福 轻 敌 中 计, 在 克 鲁 伦 河 中 下 游 一 带 全 军 覆 没 次 年 春, 明 成 祖 亲 自 率 军 北 征, 大 军 号 称 50 万 在 明 军 进 攻 面 前, 完 者 秃 汗 和 阿 鲁 台 意 见 不 和, 完 者 秃 汗 率 一 部 分 人 北 避 鄂 嫩 河 一 带, 由 此 再 西 走 明 军 至 克 鲁 伦 河 后 向 北 追 击 完 者 秃 汗 未 果, 返 回 克 鲁 伦 河 向 东, 至 阔 连 海 子 一 带 与 阿 鲁 台 军 相 遇 双 方 交 战 后 阿 鲁 台 率 众 北 走, 明 军 没 有 追 击, 分 两 路 班 师, 战 果 不 大 完 者 秃 汗 西 奔 避 敌, 不 久 被 瓦 剌 杀 死 瓦 剌 贵 族 另 立 答 里 巴 为 汗 (1411~1415), 4) 曹 永 年 : 蒙 古 民 族 通 史, 第 三 卷, 内 蒙 古 大 学 出 版 社, 2002 年, 第 84-100 页 - 137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号 令 全 蒙 古, 势 力 渐 盛 阿 鲁 台 开 始 处 于 劣 势, 故 遣 使 与 明 朝 通 好 明 廷 转 而 扶 持 阿 鲁 台, 封 其 为 和 宁 王, 允 许 与 明 朝 通 贡 贸 易, 把 打 击 的 重 点 转 移 到 瓦 剌 1414 年 三 月, 明 成 祖 率 军 亲 征 瓦 剌, 在 忽 兰 忽 失 温 之 地 大 败 瓦 剌 明 军 征 伐 瓦 剌, 给 了 东 部 的 阿 鲁 台 再 度 强 盛 的 机 会 瓦 剌 贵 族 立 答 里 巴 汗 不 久, 阿 鲁 台 另 立 阿 台 汗 (1413~ 1438) 与 其 分 庭 抗 礼 1416 年 1419 年, 阿 鲁 台 两 次 击 败 瓦 剌, 并 臣 服 了 兀 良 哈 三 卫 1417 年, 瓦 剌 顺 宁 王 马 哈 木 死, 其 子 脱 欢 太 师 袭 位 明 朝 为 扼 制 阿 鲁 台 势 力 的 增 长, 于 1417 年 遣 使 瓦 剌, 与 瓦 剌 重 新 和 好 阿 鲁 台 强 盛 瓦 剌 出 于 劣 势 的 局 面 由 于 1422 年 1423 年 明 军 北 征 而 发 生 变 化 1422 年, 明 成 祖 亲 征 阿 鲁 台 明 军 自 北 京 出 发, 沿 大 兴 安 岭 北 麓 至 今 呼 伦 贝 尔 一 带 阿 鲁 台 虽 未 与 明 军 真 面 交 锋, 但 听 命 于 阿 鲁 台 的 朵 颜 等 三 卫 却 遭 到 明 军 重 创 1423 年, 明 成 祖 再 次 亲 征 阿 鲁 台, 兵 至 宣 府, 获 悉 阿 鲁 台 已 被 瓦 剌 击 败, 率 部 远 逃 阿 鲁 台 属 下 的 也 先 土 干 南 来 投 降 明 朝, 明 成 祖 封 其 为 忠 勇 王, 明 朝 大 军 未 出 境 而 返 1424 年 五 月, 明 成 祖 第 四 次 亲 征 阿 鲁 台, 至 哈 拉 哈 河 上 游 答 阑 捏 木 儿 河, 阿 鲁 台 已 闻 讯 移 牧 北 方, 无 所 获 明 成 祖 在 返 回 途 中 病 死 在 明 朝 连 年 出 征 阿 台 汗 和 阿 鲁 台 之 际, 西 部 蒙 古 势 力 迅 速 发 展, 瓦 剌 顺 宁 王 马 哈 木 之 子 脱 欢 (Tohon) 兼 并 贤 义 王 太 平 安 乐 王 把 秃 孛 罗 等 部, 统 一 了 瓦 剌 1430 年, 还 乘 阿 鲁 台 被 明 朝 削 弱 之 际, 出 击 打 败 阿 鲁 台, 阿 鲁 台 与 其 部 众 分 散 逃 至 漠 南 1433 年, 脱 欢 立 元 裔 脱 脱 不 花 为 汗 (1433~1452), 尊 号 岱 总 汗, 自 任 太 师 淮 王 右 丞 相, 实 掌 大 权 次 年 七 月, 脱 欢 太 师 在 今 包 头 附 近 阴 山 一 带 袭 杀 阿 鲁 台 及 其 子 1438 年, 脱 脱 不 花 汗 杀 死 了 阿 台 汗 脱 欢 太 师 统 一 漠 北 诸 部 之 后, 让 脱 脱 不 花 汗 统 领 阿 鲁 台 原 部 属, 仍 居 漠 北 东 部 地 区 1439 年, 脱 欢 太 师 死, 其 子 也 先 (Esen) 袭 位, 称 太 师 淮 王, 右 丞 相 他 率 部 打 败 东 察 合 台 汗 国, 臣 服 吐 鲁 番 哈 密 等 地, 势 力 西 达 楚 河 塔 拉 斯 河 一 带, 一 度 达 锡 尔 河, 控 制 了 中 亚 广 大 地 区 1443 年, 又 征 服 沙 州 赤 斤 等 卫, 在 沙 州 一 带 设 立 甘 肃 行 省 复 向 东 南 出 征 兀 良 哈 三 卫, 迫 使 其 臣 服 脱 脱 不 花 汗 向 东 经 略 女 真 地 区, 海 西 女 真 投 降, 建 州 女 真 远 逃 朝 鲜 近 边 脱 脱 不 花 汗 以 海 西 女 真 人 为 使 臣, 自 称 元 朝 皇 帝, 诏 谕 朝 鲜 国 王, 使 朝 鲜 国 王 为 之 震 惊 也 先 太 师 和 脱 脱 不 花 汗 时 期, 不 仅 控 制 着 整 个 蒙 古 地 区, 其 势 力 西 至 中 亚, 东 达 朝 鲜 边 境 脱 脱 不 花 汗 被 拥 立 为 蒙 古 大 汗, 是 东 西 蒙 古 封 建 贵 族 妥 协 联 盟 的 结 果 从 表 面 上 看, 脱 脱 不 花 汗 与 也 先 的 矛 盾 是 君 臣 矛 盾, 是 黄 金 家 族 出 身 的 蒙 古 大 汗 与 异 姓 贵 族 权 臣 的 斗 争 即 位 之 初, 脱 脱 不 花 处 于 傀 儡 地 位, 实 权 由 瓦 剌 贵 族 脱 欢 把 持 但 是, 脱 欢 死 后, 脱 脱 不 花 汗 不 愿 做 傀 儡, 于 是 他 试 图 摆 脱 傀 儡 地 位, 他 不 立 与 也 先 姐 所 生 的 儿 子 为 太 子, 另 立 他 子, 与 也 先 发 生 矛 盾 也 先 则 拉 拢 汗 弟 阿 巴 噶 尔 济 济 农, 许 诺 打 败 脱 脱 不 花 汗 后 让 - 138 -

简 论 满 洲 人 对 漠 南 蒙 古 各 部 统 治 的 确 立 其 即 位, 邀 其 共 击 脱 脱 不 花 汗 脱 脱 不 花 汗 率 先 出 兵 征 讨 也 先, 结 果 被 也 先 和 阿 巴 噶 尔 济 济 农 击 败, 逃 至 兀 良 哈, 被 其 岳 父 彻 卜 登 擒 杀 也 先 随 后 诱 杀 阿 巴 噶 尔 济 济 农, 于 1453 年 自 称 大 元 田 盛 ( 天 圣 ) 大 可 汗, 建 年 号 添 元 ( 天 元 ), 蒙 古 文 史 籍 中 称 作 也 先 汗 (1453~ 1454) 也 先 遣 使 向 明 廷 告 知 自 己 已 经 称 汗, 得 大 元 皇 帝 之 位 明 廷 拒 不 承 认 其 为 大 元 汗, 回 书 中 称 作 瓦 剌 汗 也 先 本 非 元 裔, 因 此 也 得 不 到 各 地 蒙 古 贵 族 的 承 认 第 二 年, 瓦 剌 贵 族 发 生 内 讧, 也 先 被 阿 剌 知 院 杀 死 也 先 汗 死 后, 瓦 剌 贵 族 势 力 迅 速 衰 落, 东 部 蒙 古 贵 族 的 势 力 逐 渐 恢 复, 瓦 剌 贵 族 为 首 的 西 部 蒙 古 在 东 部 蒙 古 贵 族 势 力 的 不 断 打 击 下 开 始 向 西 迁 移 东 部 蒙 古 势 力 逐 渐 占 据 大 漠 南 北 地 区, 瓦 剌 与 中 原 的 关 系 也 逐 渐 被 阻 断 15 世 纪 中 叶, 异 姓 贵 族 出 身 的 也 先 杀 死 元 裔 大 汗 脱 脱 不 花, 登 上 蒙 古 大 汗 的 宝 座, 蒙 古 历 史 上 的 重 大 变 故, 它 给 蒙 古 民 族 的 历 史 打 上 了 深 刻 的 烙 印 但 是, 这 是 第 一 次 也 是 唯 一 一 次 以 异 姓 贵 族 身 份 登 上 了 蒙 古 大 汗 的 宝 座 但 是, 在 传 统 势 力 的 反 对 下, 也 先 很 快 就 失 败 了 1454 年, 也 先 死 后, 东 蒙 古 部 众 拥 立 脱 脱 不 花 汗 幼 子 马 儿 苦 儿 吉 思 为 可 汗 ( 尊 号 乌 珂 图 汗, 1455~1465 在 位 ), 与 瓦 剌 分 裂 随 后, 在 1454 年 和 1455 年 底, 东 蒙 古 两 次 打 败 瓦 剌, 东 蒙 古 政 权 逐 步 稳 定 下 来 1465 年, 孛 来 太 师 与 大 汗 发 生 矛 盾, 杀 死 了 马 儿 苦 儿 吉 思 汗 成 吉 思 汗 弟 别 里 古 台 后 裔 毛 里 孩 王 又 杀 孛 来 太 师, 另 立 马 儿 苦 儿 吉 思 汗 之 兄 摩 伦 为 汗 (1466~1467), 不 久 毛 里 孩 王 又 杀 摩 伦 汗 摩 伦 汗 死 后, 汗 位 虚 悬 八 年 之 久 在 此 期 间, 脱 脱 不 花 汗 幼 弟 满 都 鲁 崭 露 头 角, 他 和 巴 延 蒙 克 斡 罗 出 合 兵 一 处, 兴 师 诛 杀 毛 里 孩, 为 摩 伦 汗 复 了 仇 1475 年, 永 谢 布 部 首 领 癿 加 思 兰 (Begersen) 立 脱 脱 不 花 汗 幼 弟 满 都 鲁 (Manduhul) 为 汗 (1475~1479), 自 称 太 师, 亦 在 黄 河 河 套 往 来 驻 牧 满 都 鲁 汗 封 巴 颜 孟 克 为 孛 罗 忽 济 农, 统 领 一 部 分 部 众 满 都 鲁 汗 与 孛 罗 忽 济 农 等 出 征 毛 里 孩 王, 杀 死 了 毛 里 孩 不 久, 癿 加 思 兰 族 弟 亦 思 马 因 杀 癿 加 思 兰, 继 任 太 师, 更 加 专 横 跋 扈, 满 都 鲁 汗 空 名 其 上, 1479 年 死 去 二 达 延 汗 统 一 东 蒙 古 达 延 汗 (Dayan qahan, 意 为 大 元 可 汗 ), 本 名 巴 图 猛 克 (Batu mongke, 一 译 把 秃 猛 可 ), 成 吉 思 汗 十 五 世 孙 1479 年 ( 成 化 十 五 年 ) 即 汗 位, 明 人 因 其 年 幼 而 称 为 小 王 子 达 延 汗 被 称 作 蒙 古 中 兴 之 主 达 延 汗 对 蒙 古 封 建 制 度 所 作 的 调 整, 对 以 后 蒙 古 历 史 的 发 展 及 对 整 个 蒙 古 民 族 命 运 都 产 生 了 深 远 的 影 响 1479 年 满 都 鲁 病 逝, 没 有 留 下 男 性 后 代 年 仅 7 岁 的 巴 图 孟 克 继 承 了 蒙 古 大 汗 之 位, - 139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达 延 汗 出 生 在 1473 年, 是 孛 罗 忽 济 农 之 子, 是 当 时 忽 必 烈 元 惠 宗 后 裔 中 仅 剩 下 他 一 人 1476 年 其 父 被 满 都 鲁 杀 死, 当 时 达 延 汗 正 寄 养 于 鄂 尔 多 斯 ( 明 人 作 阿 儿 秃 斯 ) 万 户 达 延 汗 是 在 手 握 大 权 的 太 师 亦 思 马 因 (Isman) 和 第 一 知 院 脱 罗 干 以 及 满 都 鲁 汗 的 遗 孀 满 都 海 夫 人 扶 持 下 即 位 的 亦 思 马 因 是 癿 加 思 兰 的 族 弟 癿 加 思 兰 被 杀 后, 亦 思 马 因 取 代 其 位, 升 任 东 蒙 古 太 师 到 了 孛 罗 忽 被 杀, 他 又 娶 其 妻, 成 为 达 延 汗 的 继 父 第 一 知 院 脱 罗 干 是 满 官 嗔 土 默 特 部 首 领, 地 位 与 亦 思 马 因 不 相 上 下 脱 罗 干 子 火 筛 是 满 都 鲁 汗 与 满 都 海 夫 人 之 婿, 而 满 都 海 就 来 自 脱 罗 干 统 治 下 的 满 官 嗔 土 默 特 部 之 汪 古 鄂 托 克 按 照 蒙 古 传 统, 达 延 汗 继 承 了 满 都 鲁 汗 的 遗 孀, 这 样 年 已 33 岁 的 满 都 海 夫 人 就 成 了 年 幼 的 达 延 汗 的 皇 后 和 监 护 人 达 延 汗 一 生 事 业 成 就 了 两 件 密 切 相 关 的 大 事, 一 是 与 异 姓 贵 族 进 行 了 长 期 的 斗 争, 结 束 了 东 蒙 古 历 史 上 异 姓 贵 族 把 持 朝 政 的 局 面, 在 剥 夺 异 姓 贵 族 对 各 部 的 世 袭 统 治 权 的 同 时, 取 消 了 异 姓 贵 族 拥 有 的 元 朝 官 衔 二 是 将 自 己 的 子 孙 分 封 到 大 汗 直 属 部 众, 在 东 蒙 古 确 立 了 孛 儿 只 斤 黄 金 家 族 的 直 接 统 治 两 件 大 事 有 因 果 关 系 达 延 汗 对 蒙 古 统 治 秩 序 所 作 的 调 整, 对 以 后 蒙 古 历 史 的 发 展 和 整 个 蒙 古 民 族 命 运 都 产 生 了 深 远 的 影 响 据 朝 鲜 方 面 的 传 闻, 小 王 子 达 延 汗 为 人 贤 智 卓 越 ( 李 朝 实 录 成 宗 十 六 年 二 月 庚 辰 ) 拥 有 这 样 的 实 力 且 从 很 小 就 表 现 出 超 群 的 慧 智 和 才 能 的 达 延 汗, 不 可 能 长 期 受 制 于 亦 思 马 因 达 延 汗 即 位 后, 继 续 征 讨 瓦 剌, 迫 使 他 们 投 降 和 向 西 方 退 却 随 后 他 联 合 兀 良 哈 三 卫 打 败 权 臣 亦 思 马 因, 又 遣 兵 将 其 杀 害 最 后 他 发 动 了 征 服 右 翼 蒙 古 的 斗 争 按 照 蒙 古 惯 例, 蒙 古 本 部 分 为 左 翼 和 右 翼 两 大 部 分, 达 延 汗 直 接 统 治 左 翼, 但 右 翼 仍 在 大 大 小 小 的 异 姓 封 建 主 的 控 制 之 下, 各 霸 一 方, 不 听 大 汗 管 束 亦 思 马 因 即 为 右 翼 的 一 个 大 封 建 主, 达 延 汗 将 其 击 败 之 后, 派 次 子 五 路 士 台 吉 去 右 翼 担 任 吉 囊, 但 被 右 翼 封 建 主 们 杀 死, 于 是 达 延 汗 在 1510 年 起 兵 征 讨 右 翼 经 过 反 复 征 战, 右 翼 大 封 建 主 亦 不 剌 满 都 赉 阿 古 勒 呼 等 败 逃 青 海, 右 翼 被 征 服 达 延 汗 将 他 直 接 统 治 的 区 域 划 分 为 六 个 万 户, 并 按 传 统 习 惯 分 成 左 翼 三 万 户 和 右 翼 三 万 户 左 翼 三 万 户 : 察 哈 尔 万 户 (Caqar tümen), 在 今 内 蒙 古 锡 林 郭 勒 盟 境 内 察 哈 尔 一 词 来 自 波 斯 语, 意 为 战 士 ; 喀 尔 喀 万 户 (Qalqa tümen), 在 察 哈 尔 万 户 之 北 今 哈 拉 哈 河 流 域 这 个 万 户 因 河 而 得 名 兀 良 哈 万 户 (Uriyangqan tümen), 在 今 内 蒙 古 中 部 地 区 以 北 及 蒙 古 国 境 内 因 为 历 史 上 兀 良 哈 人 主 要 以 狩 猎 为 生, 所 以 又 被 称 作 林 木 中 百 姓 右 翼 三 万 户 : 袄 儿 都 司 万 户 (Ordos tümen), 在 今 内 蒙 古 鄂 尔 多 斯 市 地 区 Ordos 是 斡 耳 朵 (Ordo) 的 复 数 形 式, 因 祭 祀 成 吉 思 汗 的 八 百 室 设 在 这 里 而 得 名 - 140 -

简 论 满 洲 人 对 漠 南 蒙 古 各 部 统 治 的 确 立 土 默 特 万 户 (Tümed tümen), 在 今 内 蒙 古 呼 和 浩 特 市 巴 彦 淖 尔 市 和 乌 兰 察 布 市 地 区 土 默 特 一 称, 可 能 源 于 蒙 元 时 期 的 部 落 秃 马 惕 应 绍 不 万 户 (Yungšiyebü tümen), 在 今 河 北 张 家 口 以 北 地 区 应 绍 不 一 称, 应 当 来 源 于 元 代 上 都 附 近 的 一 个 行 政 建 置 云 需 府 在 六 万 户 之 外 的 蒙 古 各 部 还 有 西 北 地 区 的 瓦 剌 今 内 蒙 古 呼 伦 贝 尔 和 蒙 古 国 东 部 地 区 的 好 儿 趁 ( 科 尔 沁 ) 等 部 辽 西 地 区 的 兀 良 哈 三 卫, 这 些 部 不 在 达 延 汗 的 直 接 范 围 内 而 兀 良 哈 万 户 因 为 主 要 职 责 是 看 守 成 吉 思 汗 在 漠 北 的 陵 地, 与 其 他 万 户 的 政 治 经 济 联 系 不 密 切, 所 以 达 延 汗 在 分 封 时, 没 有 派 遣 自 己 的 子 孙 到 这 个 万 户 中 去 达 延 汗 共 有 十 一 个 儿 子 他 向 兀 良 哈 万 户 之 外 的 五 万 户 及 其 下 面 的 鄂 托 克 分 封 了 自 己 的 子 孙 察 哈 尔 万 户 是 大 汗 的 直 属 领 地, 达 延 汗 及 其 长 子 铁 力 摆 户 一 系 驻 牧 在 这 里, 统 辖 左 翼 三 万 户 次 子 乌 鲁 斯 博 罗 特 实 际 上 是 达 延 汗 真 正 的 长 子, 因 此 是 蒙 古 大 汗 的 继 承 人 可 是 早 在 1508 年 乌 鲁 斯 博 罗 特 就 被 亦 不 剌 等 杀 害, 因 此 所 遗 孤 儿 博 迪 就 成 为 达 延 汗 的 继 承 人, 按 照 蒙 古 大 汗 直 接 统 治 察 哈 尔 万 户 的 传 统, 博 迪 和 他 的 弟 弟 也 密 力 一 同 统 治 察 哈 尔 万 户 此 外 被 封 到 察 哈 尔 万 户 的 还 有 达 延 汗 五 子 鄂 齐 尔 博 罗 特, 他 和 他 的 子 孙 世 代 统 治 察 哈 尔 的 克 什 克 腾 鄂 托 克 喀 尔 喀 万 户 被 分 封 给 达 延 汗 的 两 个 儿 子 阿 尔 楚 博 罗 特 和 格 哷 森 扎 平 分 了 喀 尔 喀 万 户, 前 者 统 治 左 翼, 即 后 来 的 内 喀 尔 喀 五 鄂 托 克, 后 者 统 治 右 翼, 即 后 来 的 外 喀 尔 喀 七 鄂 托 克 鄂 尔 多 斯 万 户 被 分 封 给 达 延 汗 三 子 巴 尔 斯 博 罗 特, 他 们 同 时 担 任 济 农, 管 理 成 吉 思 汗 诸 斡 耳 朵 土 默 特 万 户 被 分 封 给 达 延 汗 达 延 汗 四 子 阿 尔 斯 博 罗 特 应 绍 不 万 户 被 分 封 为 达 延 汗 第 七 子 那 尔 博 罗 特 达 延 汗 十 子 乌 巴 伞 察 达 延 汗 第 七 子 那 尔 博 罗 特 身 份 较 为 特 殊, 他 是 达 延 汗 与 满 都 海 所 生 幼 子, 是 真 正 意 义 上 的 达 延 汗 幼 子 按 照 蒙 古 分 析 家 产, 大 都 长 子 及 幼 子 的 传 统, 他 分 得 了 人 口 众 多 应 绍 不 万 户 的 大 多 数 同 时 被 分 封 到 应 绍 不 万 户 的 还 有 达 延 汗 十 子 乌 巴 伞 察, 他 分 得 应 绍 不 万 户 巴 儿 虎 鄂 托 克 巴 儿 虎 部 是 乌 巴 伞 察 舅 家 达 延 汗 第 八 子 革 罗 博 罗 特 及 其 子 孙 世 代 领 有 兀 鲁 鄂 托 克 兀 鲁 部 本 是 革 罗 博 罗 特 舅 家, 原 是 应 绍 不 万 户 的 塔 不 乃 麻 ( 五 投 下 ) 鄂 托 克 但 是 到 了 16 世 纪 后 期, 革 罗 博 罗 特 后 代 统 治 下 的 兀 鲁 部 却 属 察 哈 尔 万 户 的 左 翼 5) 达 延 汗 结 束 了 蒙 古 历 史 上 异 姓 贵 族 把 持 朝 政 的 局 面, 剥 夺 了 异 姓 贵 族 对 蒙 古 各 部 的 世 袭 统 治 权, 在 蒙 古 社 会 重 新 确 立 了 孛 儿 只 斤 黄 金 家 族 的 统 治 达 延 汗 对 蒙 古 封 建 制 度 5) 乌 兰 : 蒙 古 源 流 研 究, 辽 宁 民 族 出 版 社, 2000 年, 第 358-363 页 - 141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的 调 整, 对 以 后 蒙 古 历 史 的 发 展 及 对 整 个 蒙 古 民 族 命 运 都 产 生 了 深 远 的 影 响 三 蒙 古 的 衰 退 和 满 洲 爱 新 国 的 兴 起 如 上 所 述, 达 延 汗 在 大 汗 直 属 部 众 中 建 立 了 成 吉 思 汗 家 族 直 接 统 治 但 是, 达 延 汗 未 能 完 成 蒙 古 的 统 一 分 封 造 成 割 据, 带 来 日 益 增 大 的 离 心 倾 向 在 达 延 汗 儿 孙 时 代 东 蒙 古 就 很 快 就 陷 入 了 新 割 据 状 态, 达 延 汗 的 左 右 翼 首 先 开 始 分 裂 藐 视 大 汗 权 威 割 据 一 方 的 不 再 是 异 姓 贵 族, 而 是 俺 答 等 达 延 汗 后 裔 了 1517 年, 达 延 汗 去 世, 左 右 翼 之 间 的 矛 盾 即 开 始 显 露 右 翼 三 万 户 在 达 延 汗 去 世 后, 势 力 日 益 强 盛, 割 据 独 立 倾 向 更 加 明 显 达 延 汗 第 三 子 赛 那 剌 (Sain alaq) 以 右 翼 吉 囊 身 份 非 法 篡 夺 了 汗 位, 虽 然 汗 位 很 快 被 达 延 汗 长 孙 夺 回, 但 未 能 阻 止 右 翼 对 左 翼 的 进 一 步 挤 压 到 了 打 来 孙 汗 (Daraisun, 1548-1557) 即 汗 位 后, 因 不 堪 右 翼 的 侵 凌, 不 得 不 率 部 从 宣 府 大 同 以 北 的 驻 地 东 迁 至 兴 安 路 以 东 的 西 拉 木 伦 河 流 域 土 蛮 汗 (Tümen qahan, 1558-1603) 即 位 后, 曾 企 图 重 新 树 立 大 汗 的 权 威, 任 命 各 部 首 领 为 五 执 政, 共 治 大 国 统 治 太 平, 但 没 有 收 到 明 显 的 效 果 到 卜 言 台 周 (Buyan taiji,1593-1603) 即 位 时, 汗 权 更 加 衰 微, 大 汗 虽 称 全 蒙 古 的 共 主, 其 所 能 真 正 统 辖 的 只 有 领 地 察 哈 尔 而 已 赛 那 剌 长 子 麦 力 艮 (Mergen) 继 任 吉 囊 后, 右 翼 势 力 日 益 强 盛, 1542 年, 麦 力 艮 死, 其 弟 俺 答 汗 (Altan qahan, 1508-1582) 成 为 右 翼 三 万 户 的 手 握 实 权 的 统 治 者, 政 治 中 心 由 袄 儿 都 司 万 户 转 至 土 默 特 万 户 据 蒙 古 源 流 卷 六 载, 打 来 孙 汗 时, 俺 答 向 大 汗 索 要 了 小 汗 称 号 司 徒 汗 6) 野 心 勃 勃 的 俺 答 汗 需 要 为 自 己 找 一 个 统 治 全 蒙 古 的 精 神 支 柱 与 舆 论 口 实 嘉 靖 初 年, 俺 答 汗 曾 与 衮 必 里 克 墨 尔 根 济 农 多 次 出 征 叛 逃 青 海 的 右 翼 首 领 亦 卜 剌 在 西 征 过 程 中 接 触 到 了 藏 传 佛 教, 特 别 是 15 世 纪 宗 喀 巴 (1357~1419) 建 立 的 格 鲁 派 ( 意 为 善 规 派, 俗 称 黄 教 ), 俺 答 还 请 来 了 格 鲁 派 阿 兴 喇 嘛 前 来 讲 经, 坚 定 了 皈 依 佛 教 的 信 念 1578 年 五 月, 俺 答 汗 西 来 青 海, 在 仰 华 寺 与 索 南 嘉 措 会 面 索 南 嘉 措 认 为 俺 答 汗 和 他 二 人 是 忽 必 烈 与 八 思 巴 的 转 世 俺 答 汗 赠 予 索 南 嘉 措 圣 识 一 切 瓦 齐 尔 达 喇 达 赖 喇 嘛 尊 号 圣 意 为 超 凡 入 圣 ; 识 一 切 是 藏 传 佛 教 对 在 显 宗 方 面 取 得 最 高 成 就 的 僧 人 的 尊 称 ; 瓦 齐 尔 达 喇 梵 文, 汉 译 执 金 刚, 是 藏 传 佛 教 对 在 密 宗 方 面 取 得 最 高 成 就 僧 人 的 尊 称 识 一 切 与 瓦 齐 尔 达 喇 结 合 起 来, 表 示 索 南 嘉 措 无 论 在 显 宗 密 宗 方 面 都 达 到 了 最 高 成 就 达 赖 蒙 古 语 大 海, 喇 嘛 藏 语 上 师 索 南 嘉 措 的 藏 文 名 为 福 海 之 意, 故 蒙 古 语 达 赖 对 应 藏 语 嘉 措 后 来 格 鲁 派 寺 院 集 团 将 索 南 嘉 措 定 为 第 三 世 达 赖 喇 嘛, 从 此 确 立 了 达 赖 6) 乌 兰 蒙 古 源 流 研 究, 第 360 页 - 142 -

简 论 满 洲 人 对 漠 南 蒙 古 各 部 统 治 的 确 立 喇 嘛 活 佛 转 世 系 统 及 其 在 西 藏 的 重 要 地 位 索 南 嘉 措 也 给 俺 答 赠 与 了 咱 克 喇 瓦 尔 第 彻 辰 汗 称 号 咱 克 喇 瓦 尔 第 梵 文, 意 为 转 轮 王, 彻 辰 汗, 即 忽 必 烈 的 蒙 古 汗 号, 蒙 语 意 为 聪 明 睿 智 之 汗 7) 这 对 俺 答 来 说 是 任 何 玉 玺 不 能 代 替 的 神 圣 灵 光 俺 答 汗 等 蒙 古 贵 族 引 入 黄 教 的 目 的 是 很 清 楚 的, 就 是 靠 神 权 来 扩 大 自 己 的 势 力 十 六 世 纪 中 期, 属 于 左 翼 三 万 户 的 内 喀 尔 喀 首 先 南 下 占 据 了 泰 宁 福 余 原 住 牧 地 地 区 内 喀 尔 喀 首 先 南 下 后, 十 分 活 跃, 势 力 也 很 强 大, 经 常 与 察 哈 尔 大 汗 联 合 进 攻 明 朝 边 境, 要 求 进 行 朝 贡 贸 易 和 开 设 市 场 在 明 末, 内 喀 尔 喀 处 在 新 兴 的 后 金 政 权 察 哈 尔 大 汗 明 朝 等 几 股 势 力 的 包 围 下, 逐 渐 衰 落 此 时, 达 延 汗 六 万 户 之 外 的 科 尔 沁 部 也 发 生 了 很 多 变 化 科 尔 沁 部 是 以 成 吉 思 汗 长 弟 哈 撒 儿 的 封 地 及 其 后 裔 的 后 裔 为 统 治 核 心 而 形 成 的, 最 初 驻 牧 在 今 额 尔 古 纳 河 及 鄂 嫩 河 中 下 游 流 域, 在 十 五 世 纪 二 十 年 代, 科 尔 沁 部 的 一 支 越 过 兴 安 岭 迁 徙 到 嫩 江 流 域, 称 嫩 科 尔 沁 留 居 原 地 的 部 分 则 分 成 阿 鲁 科 尔 沁, 茂 明 安 四 子 乌 拉 特 等 部, 这 些 部 连 同 成 吉 思 汗 幼 弟 斡 赤 斤 后 裔 统 治 下 的 翁 牛 特 成 吉 思 汗 异 母 弟 别 里 古 台 后 裔 统 领 下 的 阿 巴 嘎 和 阿 巴 哈 纳 尔 等, 统 称 阿 鲁 蒙 古 ( 阿 鲁, 意 为 阴 面, 北 面, 指 大 兴 安 岭 以 北 ) 十 六 世 纪 中 叶, 随 着 察 哈 尔 东 迁 和 内 喀 尔 喀 南 下, 嫩 江 流 域 的 科 尔 沁 也 向 南 扩 展 势 力, 活 跃 在 明 朝 的 开 原 铁 岭 边 外 科 尔 沁 继 续 南 下 受 到 已 先 行 占 据 福 余 泰 宁 旧 地 的 内 喀 尔 喀 诸 部 的 阻 碍, 于 是 再 向 东 扩 展 势 力, 与 松 花 江 流 域 的 女 真 各 部 发 生 关 系, 并 且 最 早 与 后 金 接 触 在 此 期 间, 科 尔 沁 与 察 哈 尔 大 汗 的 关 系 是, 时 而 联 合 进 攻 明 朝 边 境, 时 而 相 互 攻 伐, 总 体 上 处 于 各 自 为 政 状 态 在 内 喀 尔 喀 和 嫩 科 尔 沁 趁 南 下 的 时 候, 外 喀 尔 喀 则 沿 着 另 外 的 方 向 向 西 方 扩 展 势 力 如 前 所 述, 外 喀 尔 喀 是 达 延 汗 之 子 格 列 山 只 的 封 地, 位 置 与 内 喀 尔 喀 同 在 喀 尔 喀 河 流 域 1538 年, 蒙 古 诸 万 户 联 合 消 灭 了 兀 良 哈 万 户, 随 后 以 俺 答 汗 为 首 的 右 翼 蒙 古 又 数 次 击 败 漠 北 漠 西 的 瓦 剌, 外 喀 尔 喀 便 乘 机 向 兀 良 哈 和 瓦 剌 住 地 发 展, 到 十 七 世 纪 初, 其 西 部 边 界 已 达 到 今 蒙 古 国 乌 布 萨 湖 吉 尔 吉 斯 湖 一 线, 并 且 与 瓦 剌 发 生 频 繁 的 土 地 之 争 1604 年, 林 丹 汗 13 岁 即 蒙 古 大 汗 位, 称 林 丹 呼 图 克 图 汗 (Ligdan qutuhtu qahan, 1604~ 1634 在 位 ) 他 曾 采 取 了 一 系 列 措 施 强 化 汗 权, 但 是 蒙 古 各 部 贵 族 各 自 为 政 的 局 面 没 有 明 显 的 改 观 长 期 的 割 据 助 长 了 蒙 古 各 部 贵 族 的 离 心 倾 向, 各 部 贵 族 纷 纷 称 汗, 可 汗 大 权 衰 落 蒙 古 封 建 主 在 内 部 争 斗 中 相 互 削 弱 势 力 的 时 候, 东 北 的 女 真 满 洲 和 西 北 地 区 的 卫 拉 特 蒙 古 开 始 兴 起 在 努 尔 哈 赤 的 经 营 下, 女 真 实 力 壮 大, 1616 年 建 立 爱 新 国 ( 意 为 金 国, 为 了 和 历 史 上 的 女 真 金 朝 相 区 别, 俗 称 后 金 ) 1619 年, 爱 新 国 取 得 反 击 明 朝 的 萨 尔 浒 大 7) 乌 兰 : 蒙 古 源 流 研 究, 第 430 页 - 143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捷 1621 年 攻 陷 辽 阳 沈 阳, 连 下 明 辽 东 70 余 城 与 此 同 时 爱 新 国 千 方 百 计 与 林 丹 汗 争 夺 嫩 科 尔 沁 和 内 喀 尔 喀 五 部, 甚 至 向 察 哈 尔 左 翼 属 部 渗 透, 利 用 各 部 与 林 丹 汗 的 矛 盾, 积 极 与 之 联 姻 结 盟, 孤 立 林 丹 汗 蒙 古 各 部 中, 嫩 科 尔 沁 部 首 先 与 爱 新 国 发 生 关 系 16 世 纪 30 年 代, 嫩 科 尔 沁 迁 居 嫩 江 流 域, 成 为 女 真 最 强 大 的 近 邻 16 世 纪 末, 努 尔 哈 赤 统 一 建 州 女 真 五 部, 开 始 向 东 海 三 部 以 及 扈 伦 四 部 用 兵 女 真 诸 部, 西 南 北 三 面 毗 邻 蒙 古 各 部 之 地, 与 蒙 古 族 有 着 久 远 的 历 史 关 系 尤 其 哈 达 辉 发 乌 喇 部 的 祖 先, 与 蒙 古 有 血 缘 亲 属 关 系 所 以, 努 尔 哈 赤 统 一 女 真 诸 部 的 行 动, 引 起 了 游 牧 于 嫩 江 流 域 的 嫩 科 尔 沁 首 领 翁 果 岱 莽 古 思 明 安 等 人 的 强 烈 不 满 当 努 尔 哈 赤 征 伐 海 西 女 真 诸 部 时, 蒙 古 诸 部 与 建 州 女 真 的 武 装 冲 突 便 于 1593 年 开 始 了 在 女 真 诸 部 中, 海 西 女 真 叶 赫 部 的 实 力 也 比 较 雄 厚, 难 以 容 忍 努 尔 哈 赤 统 一 女 真 诸 部 的 活 动 为 了 一 举 荡 平 建 州 女 真 努 尔 哈 赤 部, 以 叶 赫 部 首 领 布 寨 为 首 的 扈 伦 四 部 与 蒙 古 科 尔 沁 等 诸 部 结 成 九 部 联 军, 于 1593 年 九 月 主 动 向 以 努 尔 哈 赤 为 首 的 建 州 女 真 部 发 起 攻 击 当 时, 联 军 3 万 人, 分 3 路 进 军, 企 图 彻 底 消 灭 努 尔 哈 赤 努 尔 哈 赤 英 勇 果 断, 亲 督 大 军, 迎 敌 于 浑 河 岸 古 埒 山 结 果, 古 埒 山 一 战, 努 尔 哈 赤 打 败 九 部 联 军, 建 立 了 对 女 真 诸 部 的 霸 权 此 役, 联 军 方 面 的 科 尔 沁 部 翁 果 岱 明 安 莽 古 斯 等 诸 首 领, 率 1 万 兵 来 会 战, 战 败 逃 归 这 样, 在 努 尔 哈 赤 时 期 蒙 古 与 爱 新 国 第 一 次 武 力 较 量, 便 以 蒙 古 的 惨 败 而 告 终 内 喀 尔 喀 五 部 中, 巴 林 和 乌 济 叶 特 二 部 为 右 翼, 牧 地 靠 近 西 边 的 察 哈 尔 左 翼, 与 明 朝 同 在 广 宁 镇 互 市 扎 鲁 特 弘 吉 喇 特 和 巴 约 特 三 部 为 左 翼, 牧 地 在 东 边, 与 女 真 各 部 往 来 频 繁 1605 年, 巴 约 特 部 首 领 恩 格 德 尔 和 建 州 女 真 建 立 贸 易 关 系, 次 年 又 引 喀 尔 喀 五 部 使 臣 去 建 州 贸 易, 还 给 努 尔 哈 赤 上 昆 都 伦 汗 号 在 击 败 科 尔 沁 攻 击 的 同 时, 努 尔 哈 赤 充 分 利 用 蒙 古 与 女 真 地 理 毗 邻 风 俗 文 化 相 近 等 特 点, 以 和 亲 等 手 段 拉 拢 内 喀 尔 喀 与 科 尔 沁 诸 台 吉 古 埒 山 之 战 后 的 第 二 年, 即 1594 年 正 月, 蒙 古 科 尔 沁 部 明 安 及 巴 约 特 部 老 萨 始 遣 使 努 尔 哈 赤 通 好, 于 是 蒙 古 各 部 长 遣 使 往 来 不 绝 为 了 借 助 成 吉 思 汗 黄 金 家 族 的 血 统 提 高 在 女 真 各 部 的 威 望, 亦 为 建 立 女 真 族 与 蒙 古 的 亲 善 关 系, 努 尔 哈 赤 首 先 向 科 尔 沁 提 出 聘 女 为 妃, 结 为 姻 戚 1612 年, 科 尔 沁 部 明 安 将 女 儿 嫁 给 努 尔 哈 赤 为 妻 ;1614 年, 努 尔 哈 赤 之 子 皇 太 极 娶 科 尔 沁 部 莽 古 思 之 女 为 妻 随 后, 1615 年, 科 尔 沁 部 孔 果 尔 送 女 与 努 尔 哈 赤 为 妻 同 年, 喀 尔 喀 扎 鲁 特 部 贝 勒 钟 嫩 以 女 妻 努 尔 哈 赤 子 大 贝 勒 代 善, 不 久, 该 部 内 齐 汗 以 妹 妻 莽 古 尔 泰 贝 勒 1617 年, 努 尔 哈 赤 又 以 侄 女 妻 喀 尔 喀 巴 约 特 部 台 吉 恩 格 德 尔 至 此, 内 喀 尔 喀 五 部 中 的 二 部 首 领 都 与 努 尔 哈 赤 缔 结 了 姻 亲 通 婚 之 频 繁 由 此 可 知 婚 礼 仪 式 也 很 隆 重, 每 有 婚 娶, 娶 亲 的 女 真 贵 族 一 方 必 以 礼 亲 迎, 大 宴 成 婚, 其 仪 式 规 则 与 女 真 同 族 间 所 行 完 全 相 同 可 见, 努 - 144 -

简 论 满 洲 人 对 漠 南 蒙 古 各 部 统 治 的 确 立 尔 哈 赤 把 笼 络 娶 嫁 的 重 点 放 在 科 尔 沁 内 喀 尔 喀 五 部 等 邻 近 的 蒙 古 部 落 上 1622 年, 爱 新 国 攻 占 察 哈 尔 与 明 朝 间 通 商 关 口 广 宁, 乘 此 大 捷, 继 续 加 强 对 科 尔 沁 和 内 喀 尔 喀 的 威 胁 与 利 诱, 甚 至 与 察 哈 尔 属 部 敖 汉 奈 曼 二 部 暗 中 交 往 8) 爱 新 国 和 东 部 蒙 古 诸 部 的 交 往, 对 林 丹 汗 构 成 了 直 接 的 威 胁 1623 年 正 月, 林 丹 汗 走 上 了 用 兵 科 尔 沁 部 的 道 路 此 时, 科 尔 沁 部 被 夹 在 两 大 强 敌 之 间, 处 于 自 身 难 保 的 境 地 如 何 对 付 察 哈 尔 林 丹 汗 的 讨 伐, 是 科 尔 沁 部 首 领 奥 巴 面 临 的 最 大 问 题 他 不 得 已 向 爱 新 国 遣 使 求 购 弓 箭 努 尔 哈 赤 借 此 机 会 派 使 者 去 科 尔 沁 部, 提 出 了 建 立 反 察 哈 尔 联 盟 的 建 议 同 年 五 月, 奥 巴 致 书 努 尔 哈 赤, 表 示 愿 意 建 立 联 盟 努 尔 哈 赤 便 于 1624 年 二 月 派 遣 榜 式 希 福 库 尔 缠 二 人 到 科 尔 沁 部, 与 科 尔 沁 奥 巴 阿 都 齐 达 尔 汉 台 吉 戴 青 蒙 果 台 吉 等 会 盟 双 方 刑 乌 牛 白 马, 向 天 地 发 誓 结 盟 参 加 会 盟 的 科 尔 沁 三 首 领 都 是 博 第 达 喇 之 孙, 是 嫩 科 尔 沁 部 的 实 力 人 物 爱 新 国 方 面 的 希 福 库 尔 缠 二 人, 具 有 榜 式 称 号, 也 都 是 地 位 显 赫 的 人 物 1625 年 三 月, 努 尔 哈 赤 和 奥 巴 约 定, 六 月 在 开 原 相 会 面, 正 式 盟 誓 但 是, 察 哈 尔 始 终 没 有 出 兵 科 尔 沁, 奥 巴 暂 时 不 再 需 要 女 真 的 保 护, 所 以, 当 努 尔 哈 赤 率 领 诸 贝 勒 赴 约 时, 奥 巴 却 单 方 面 终 止 了 会 盟 对 爱 新 国 来 说, 拉 拢 和 争 取 科 尔 沁, 极 大 限 度 地 孤 立 林 丹 汗, 各 个 击 破 蒙 古 各 部, 乃 是 既 定 政 策 所 以, 努 尔 哈 赤 委 曲 求 全, 一 直 耐 心 对 待 奥 巴 等 科 尔 沁 贵 族 1625 年 八 月, 亲 近 科 尔 沁 的 内 喀 尔 喀 乌 济 叶 特 部 首 领 炒 花 向 奥 巴 通 风 报 信, 说 察 哈 尔 将 攻 打 科 尔 沁 科 尔 沁 内 部 人 心 惶 惶, 阿 都 齐 达 尔 汉 台 吉 等 头 目 仓 皇 逃 跑, 奥 巴 图 美 和 布 达 齐 三 兄 弟 准 备 背 水 一 战 同 时, 要 求 爱 新 国 出 兵 救 援 努 尔 哈 赤 遣 莽 古 尔 泰 皇 太 极 率 精 兵 5 千 开 赴 科 尔 沁 此 时, 林 丹 汗 不 克 科 尔 沁, 又 听 到 爱 新 国 援 军 已 到, 随 即 撤 回 科 尔 沁 转 危 为 安 努 尔 哈 赤 利 用 这 次 机 会, 巩 固 了 同 奥 巴 的 联 盟 1626 年 六 月 六 日, 奥 巴 在 爱 新 国 都 城 的 南 河 岸 上, 和 努 尔 哈 赤 一 道, 刑 乌 牛 白 马, 向 天 地 发 誓, 宣 读 双 方 永 世 反 察 哈 尔 反 喀 尔 喀 的 誓 言, 随 后 将 誓 书 当 众 焚 毁, 以 视 让 苍 天 作 证 次 日, 努 尔 哈 赤 授 奥 巴 以 土 谢 图 汗 名 号 双 方 以 反 察 哈 尔 为 前 提, 建 立 了 联 盟, 互 相 没 有 隶 属 关 系 同 时, 奥 巴 还 娶 努 尔 哈 赤 养 女 ( 原 为 努 尔 哈 赤 弟 舒 尔 哈 赤 之 女 ) 为 妻, 与 爱 新 国 汗 室 建 立 了 姻 亲 关 系 由 于 林 丹 汗 的 东 征, 使 几 近 终 止 的 奥 巴 与 爱 新 国 的 联 盟 关 系 有 了 新 的 转 机, 是 林 丹 汗 最 终 让 奥 巴 倒 向 努 尔 哈 赤 一 边 努 尔 哈 赤 乘 人 之 危, 和 奥 巴 建 立 了 明 确 的 反 察 哈 尔 联 盟, 为 日 后 合 并 科 尔 沁 打 下 了 坚 实 的 基 础 科 尔 沁 和 爱 新 国 关 系 并 非 从 此 就 一 帆 风 顺, 奥 巴 对 爱 新 国 始 终 没 有 诚 心 1626 八 月, 努 尔 哈 赤 死, 奥 巴 只 遣 一 个 小 班 第, 牵 一 匹 老 马, 敷 衍 爱 新 国 的 国 丧 此 后, 皇 太 极 送 奥 8) 杜 家 骥 : 清 朝 满 蒙 联 姻 研 究, 人 民 出 版 社, 2003 年, 第 6-69 页 - 145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巴 所 娶 舒 儿 哈 赤 之 女 到 科 尔 沁, 奥 巴 仅 以 八 匹 有 鼻 疽 之 马 作 回 礼 1627 年, 林 丹 汗 率 部 西 迁, 不 再 成 为 科 尔 沁 等 左 翼 蒙 古 诸 部 的 威 胁 于 是, 奥 巴 更 加 疏 远 爱 新 国, 甚 至 与 皇 太 极 争 夺 对 内 喀 尔 喀 逃 民 的 支 配 权 奥 巴 还 拒 绝 与 皇 太 极 一 道 远 征 察 哈 尔 1628 年 九 月, 皇 太 极 亲 率 爱 新 国 军 队 远 征 察 哈 尔 奥 巴 声 言 自 为 一 路 往 征 察 哈 尔, 不 与 爱 新 国 会 师 由 于 奥 巴 所 属 科 尔 沁 的 缺 阵, 皇 太 极 感 觉 势 单 力 孤, 已 进 军 到 兴 安 岭 的 这 次 军 事 行 动 只 好 半 途 而 废 恼 羞 成 怒 的 皇 太 极 于 1628 年 底 遣 使 至 科 尔 沁, 谴 责 奥 巴 对 爱 新 国 的 种 种 背 信 弃 义 行 为, 罗 列 十 条 罪 状 当 时, 由 于 察 哈 尔 西 迁 和 内 喀 尔 喀 的 溃 散, 爱 新 国 再 也 没 有 必 要 姑 息 和 牵 就 奥 巴, 奥 巴 深 感 来 自 爱 新 国 的 强 大 压 力 1629 年 正 月, 没 有 退 路 的 奥 巴 只 好 亲 至 爱 新 国 认 罪, 修 复 双 边 关 系 同 年 十 月, 奥 巴 不 敢 违 背 皇 太 极 指 令, 率 部 首 次 参 加 爱 新 国 对 明 朝 战 争, 开 始 负 担 反 察 哈 尔 联 盟 以 外 的 义 务 从 此, 科 尔 沁 与 爱 新 国 的 关 系 发 生 了 实 质 性 的 变 化, 科 尔 沁 不 再 是 爱 新 国 的 平 等 盟 友, 而 是 其 臣 民 了 1630 年, 林 丹 汗 用 兵 大 兴 安 岭 北, 征 讨 阿 鲁 蒙 古 ( 阿 鲁 蒙 古 指 住 牧 于 大 兴 安 岭 北 的 成 吉 思 汗 三 个 弟 弟 合 撒 儿 哈 赤 温 别 里 古 台 后 裔 统 治 下 的 诸 游 牧 集 团 ), 皇 太 极 下 令 科 尔 沁 部 从 嫩 江 流 域 南 迁, 就 牧 洮 儿 河 西 喇 木 伦 河 奥 巴 在 爱 新 国 与 察 哈 尔 对 立 的 局 势 下, 采 取 了 灵 活 多 变 的 策 略, 保 住 了 科 尔 沁 部 的 势 力 1627 年 至 1628 年, 林 丹 汗 率 部 进 入 蒙 古 右 翼 地 区, 击 溃 哈 喇 嗔 土 默 特 诸 部, 占 据 归 化 城, 此 后 又 与 朵 颜 卫 应 绍 不 土 默 特 部 作 战, 取 得 胜 利, 再 进 入 袄 儿 都 司 部 和 外 喀 尔 喀 部, 同 时 入 侵 明 宣 大 延 绥 诸 边 林 丹 汗 虽 然 在 军 事 上 取 得 了 不 少 成 功, 但 在 政 治 上 却 遭 受 极 大 的 损 失, 被 征 服 的 右 翼 诸 部 纷 纷 离 他 而 去, 多 数 降 附 了 后 金, 林 丹 汗 的 统 一 大 业 注 定 不 可 能 成 功 其 中, 喀 喇 沁 万 户 与 爱 新 国 的 关 系 值 得 注 意 喀 喇 沁 万 户 形 成 于 16 世 纪 末, 以 原 应 邵 不 万 户 的 喀 喇 沁 阿 速 等 部 和 满 官 嗔 土 默 特 万 户 的 一 部 分 以 及 被 他 们 征 服 的 部 分 山 阳 万 户 属 民 组 成, 经 历 了 较 为 复 杂 的 分 化 组 合 过 程 其 核 心 部 分 又 被 称 作 山 阳 诸 诺 颜 与 塔 布 囊 9) 喀 喇 沁 万 户 与 爱 新 国 交 往, 时 间 较 晚, 是 在 1627 年 林 丹 汗 西 征 时 是 年 十 月, 林 丹 汗 攻 打 喀 喇 沁 万 户 左 翼, 喀 喇 沁 汗 剌 思 乞 卜 和 洪 台 吉 布 延 阿 海 等 大 败, 部 众 离 散, 察 哈 尔 西 攻 土 默 特, 占 领 呼 和 浩 特 大 致 十 一 月 末 十 二 月 初, 喀 喇 沁 和 一 些 右 翼 蒙 古 部 落 联 合 发 动 了 对 察 哈 尔 的 一 次 反 扑, 即 所 谓 的 赵 城 之 战 赵 城, 即 昭 城 ( 意 为 有 庙 宇 的 城 ), 也 就 是 呼 和 浩 特 喀 喇 沁 联 军 先 胜 后 败 喀 喇 沁 汗 等 往 其 塔 布 囊 处 退 却, 很 快 从 那 里 派 出 使 臣, 邀 爱 新 国 共 同 讨 伐 察 哈 尔 1628 年 初, 喀 喇 沁 台 吉 和 塔 布 囊 的 使 臣 抵 达 沈 阳, 谎 称 喀 喇 沁 和 右 翼 蒙 古 联 军 在 呼 和 浩 特 消 灭 了 察 哈 尔 4 万 军 队, 约 爱 新 国 天 聪 汗 与 他 们 一 起 乘 胜 出 兵, 攻 打 察 哈 尔 林 丹 汗 天 聪 汗 得 到 喀 喇 沁 方 面 具 有 诱 惑 力 的 战 报 后, 得 出 了 察 9) 乌 云 毕 力 格 : 喀 喇 沁 万 户 研 究, 内 蒙 古 人 民 出 版 社, 呼 和 浩 特, 2005 年, 第 27-62 - 146 -

简 论 满 洲 人 对 漠 南 蒙 古 各 部 统 治 的 确 立 哈 尔 汗 之 根 本 已 动 摇 的 结 论, 决 定 在 这 年 夏 末 同 嫩 科 尔 沁 喀 喇 沁 一 起 出 兵 察 哈 尔 部 由 于 住 牧 在 敖 木 林 ( 大 凌 河 ) 一 带 的 察 哈 尔 左 翼 鄂 托 克 阻 碍 了 爱 新 国 和 喀 喇 沁 的 交 通, 天 聪 汗 在 1628 年 二 月 和 五 月 两 次 用 兵 敖 木 林 第 二 次 敖 木 林 战 役 刚 一 结 束, 爱 新 国 立 即 派 使 者 带 誓 词 ( 即 盟 约 条 款 ) 到 喀 喇 沁 喀 喇 沁 方 面 修 改 了 誓 词 的 某 些 内 容, 在 保 留 他 们 领 受 明 朝 市 赏 权 利 的 基 础 上, 与 爱 新 国 联 盟 七 月 中 旬, 喀 喇 沁 500 人 的 庞 大 使 团 抵 沈 阳, 受 到 爱 新 国 的 隆 重 欢 迎 和 盛 情 款 待 八 月 三 日, 双 方 进 行 庄 重 的 盟 誓, 正 式 建 立 了 联 盟 根 据 盟 约, 喀 喇 沁 不 得 私 通 察 哈 尔, 不 得 私 通 明 朝, 不 得 和 满 洲 反 目 ; 爱 新 国 不 得 和 喀 喇 沁 反 目, 不 得 迫 害 喀 喇 沁 总 之, 这 是 一 个 反 察 哈 尔 反 明 朝 的 政 治 和 军 事 联 盟 联 盟 成 立 后, 喀 喇 沁 部 实 际 上 失 去 了 独 立 自 主 的 地 位, 成 为 爱 新 国 的 附 庸 从 1628 年 秋 天 起, 喀 喇 沁 军 队 听 从 天 聪 汗 的 号 令, 和 爱 新 国 军 队 一 道 东 征 西 战, 多 次 参 加 对 察 哈 尔 和 对 明 朝 的 远 征 最 后 到 1635 年, 喀 喇 沁 黄 金 家 族 及 其 部 众 编 入 八 旗 蒙 古, 其 所 属 塔 布 囊 另 编 立 为 内 扎 萨 克 旗 10) 由 于 东 土 默 特 部 地 处 喀 喇 沁 部 之 南, 和 爱 新 国 距 离 遥 远, 直 到 1629 年 双 方 并 无 使 节 来 往 1629 年 四 月, 爱 新 国 初 次 派 遣 使 者 到 东 土 默 特 部 首 领 鄂 木 布 楚 库 尔 ( 又 作 敖 目, 俺 答 汗 玄 孙 噶 尔 图 之 子 ) 和 其 他 执 政 塔 布 囊 处, 劝 他 们 和 爱 新 国 盟 誓 天 聪 汗 严 厉 指 责 鄂 木 布 楚 库 尔 没 有 与 喀 喇 沁 一 起 参 加 1628 年 对 察 哈 尔 的 远 征, 威 逼 他 们 限 期 给 爱 新 国 送 去 有 关 察 哈 尔 的 谍 报 六 月, 鄂 木 布 楚 库 尔 派 遣 以 堂 弟 桌 尔 毕 泰 台 吉 为 首 的 使 团 到 爱 新 国, 上 书 天 聪 汗, 内 称 : 虽 然 我 左 右 翼 宗 亲 投 奔 各 处, 惟 独 我 紧 随 天 聪 汗, 纳 贡 称 臣 之 心 诚 然 即 使 那 些 听 从 你 律 令 的 台 吉 塔 布 囊 和 庶 民 怀 有 向 内 投 奔 汉 地 向 外 投 奔 察 哈 尔 之 心, 我 也 绝 无 背 叛 之 心 上 奏 我 诚 挚 专 一 之 意 这 份 奏 书 标 志 着 东 土 默 特 部 归 附 了 爱 新 国 至 此, 喀 喇 沁 万 户 土 崩 瓦 解, 喀 喇 沁 东 土 默 特 和 兀 良 哈 各 部 分 辖 于 爱 新 国 1635 年, 东 土 默 特 台 吉 与 塔 布 囊 被 编 立 为 扎 萨 克 旗 应 邵 不 与 阿 速 特 在 1628 年 秋 抗 击 林 丹 汗 的 艾 不 哈 河 之 战 中 被 击 溃 应 邵 不 的 大 部 分 逃 到 外 喀 尔 喀, 其 余 融 入 察 哈 尔 土 默 特 等 其 他 蒙 古 部 落 中 阿 速 特 战 败 后 欲 南 下 投 奔 其 在 大 兴 安 岭 南 的 塔 布 囊 部 属, 但 中 途 遭 阿 巴 噶 部 袭 击, 只 有 少 数 台 吉 逃 到 喀 喇 沁, 从 那 里 投 附 爱 新 国 后 来, 阿 速 特 部 众 被 编 入 满 洲 八 旗 正 因 如 此, 入 清 以 后, 曾 经 十 分 强 大 的 应 邵 不 阿 速 特 两 部 在 内 蒙 古 历 史 舞 台 上 完 全 销 声 匿 迹 了 1632 年 四 月, 后 金 的 天 聪 汗 发 动 了 对 察 哈 尔 的 远 征 女 真 军 队 和 已 降 附 蒙 古 各 部 军 队 组 成 联 军, 从 西 拉 木 沦 河 向 西 北 挺 进 林 丹 汗 得 报 后, 仓 促 撤 退, 渡 黄 河 而 西 逃 爱 新 国 军 队 一 路 尾 追, 但 除 俘 获 零 星 溃 散 部 众 外, 一 无 所 见 于 是 爱 新 国 军 队 回 师 攻 克 呼 和 浩 特 城, 收 取 察 哈 尔 余 众 不 久 察 哈 尔 属 部 克 什 克 腾 投 归 爱 新 国 1634 年, 林 丹 汗 得 知 10) 乌 云 毕 力 格 : 喀 喇 沁 万 户 研 究, 第 78-128 页 - 147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爱 新 国 和 蒙 古 各 部 联 军 又 要 出 征, 率 部 向 青 海 转 移, 途 中 病 死 于 甘 肃 大 草 滩 ( 今 甘 肃 天 祝 藏 族 自 治 县 境 内 ) 其 妻 苏 泰 太 后 子 额 哲 额 尔 克 孔 果 尔 率 部 降 附 后 金 至 此, 以 林 丹 汗 为 代 表 的 成 吉 思 汗 黄 金 家 族 对 蒙 古 的 统 治 宣 告 结 束 1636 年 四 月, 天 聪 汗 在 盛 京 ( 今 沈 阳 ) 召 开 大 会, 漠 南 蒙 古 16 部 的 49 名 封 建 主 参 加 盛 典, 为 天 聪 汗 上 博 格 达 彻 辰 汗 (Boqda secen qahan, 意 为 圣 睿 汗 相 应 汉 文 尊 号 为 宽 温 仁 圣 皇 帝 ) 尊 号, 承 认 他 是 蒙 古 最 高 统 治 者 天 聪 汗 在 这 次 盛 会 上 建 汉 文 国 号 大 清, 改 元 崇 德 清 朝 的 建 立 和 它 对 漠 南 蒙 古 的 征 服, 标 志 着 蒙 古 历 史 进 入 了 一 个 新 的 阶 段 乌 云 毕 力 格 教 授 撰 写 的 喀 喇 沁 万 户 研 究 一 书, 是 17 世 纪 上 半 叶 满 蒙 关 系 研 究 的 力 作 他 在 本 书 中 对 达 延 汗 以 后 蒙 古 史 及 漠 南 蒙 古 归 附 满 洲 的 原 因 做 了 如 下 非 常 精 彩 的 评 论 : 达 延 汗 诸 子 分 封 对 蒙 古 社 会 的 影 响 十 分 深 远, 从 此 以 后, 原 蒙 古 六 万 户 的 大 小 统 治 者 变 成 了 清 一 色 的 黄 金 家 族 的 诺 颜 ( 台 吉 ), 且 均 属 达 延 汗 子 孙 异 姓 贵 族 被 迫 退 出 了 最 高 统 治 阶 层 蒙 古 社 会 统 治 阶 层 的 这 一 变 化, 不 仅 没 有 像 达 延 汗 希 望 的 那 样 使 蒙 古 各 部 亲 日 一 家, 恰 恰 相 反, 那 些 各 具 达 延 汗 高 贵 血 统 的 大 小 贵 族 互 不 统 属, 各 自 为 政, 各 行 其 事, 严 重 削 弱 了 中 央 集 权 的 凝 聚 力, 破 坏 了 蒙 古 的 统 一 在 达 延 汗 以 后 的 蒙 古 社 会, 形 成 了 名 目 繁 多 的 大 小 汗 王, 终 使 蒙 古 分 裂 成 许 多 独 立 或 半 独 立 的 政 治 社 会 集 团 蒙 古 人 的 统 一 集 权 游 牧 国 家 概 念 已 经 被 削 弱, 在 人 们 特 别 是 统 治 阶 层 意 识 中 变 得 淡 漠 只 知 有 万 户 ( 如 喀 喇 沁 科 尔 沁 鄂 尔 多 斯 喀 尔 喀 等 等 ), 不 知 有 大 蒙 古 国 只 有 蒙 古 大 汗 自 己 在 不 断 地 强 调 着 四 十 万 蒙 古 大 兀 鲁 思 的 概 念, 统 一 蒙 古 国 家 的 政 治 传 统 似 乎 只 留 在 了 蒙 古 皇 室, 直 到 林 丹 汗 之 孙 布 尔 尼 为 止 (1675 年 ) 所 以, 当 林 丹 汗 试 图 加 强 大 汗 权 威 并 诉 诸 武 力 时, 满 洲 人 却 向 蒙 古 封 建 割 据 势 力 伸 出 了 橄 榄 枝, 于 是 蒙 古 各 部 纷 纷 与 之 结 成 反 察 哈 尔 反 明 朝 的 联 盟 那 种 认 为 17 世 纪 前 期 蒙 古 各 万 户 各 鄂 托 克 的 首 领 应 该 在 林 丹 汗 和 努 尔 哈 赤 之 间 进 行 民 族 选 择 的 想 法, 反 映 了 深 受 近 代 民 族 国 家 理 论 影 响 的 现 代 人 的 要 求 满 洲 人 对 东 蒙 古 各 部 统 治 的 确 立, 并 不 是 某 些 学 者 一 向 所 说 的 那 样, 仅 用 征 服 一 词 就 能 够 概 括 的 满 洲 人 对 蒙 古 的 经 营, 其 主 要 形 式 并 非 军 事 征 服, 而 是 建 立 政 治 军 事 联 盟 而 逐 步 向 其 政 治 军 事 领 域 渗 透, 威 逼 与 怀 柔 并 用 以 政 治 军 事 联 盟 形 式 使 之 归 附 的 依 次 是 : 内 喀 尔 喀 科 尔 沁 喀 喇 沁 阿 鲁 蒙 古 只 有 对 察 哈 尔, 满 洲 人 则 采 取 了 坚 决 武 力 征 服 手 段 但 是, 林 丹 汗 并 未 经 过 一 次 像 样 的 战 斗, 便 含 恨 而 死 了 剩 下 的 右 翼 蒙 古 各 集 团, 很 快 被 满 洲 人 和 平 统 一 了 那 么, 满 洲 人 和 蒙 古 各 万 户 得 以 建 立 联 盟 的 基 础 是 什 么 呢? 这 个 基 础 不 是 别 的, 恰 恰 是 这 些 万 户 与 察 哈 尔 的 矛 盾, 或 者 说 察 哈 尔 对 他 们 的 政 治 压 迫 和 军 事 威 胁 在 17 世 纪 前 半 期 的 当 时, 蒙 古 人 选 择 异 族 满 洲 汗 为 盟 主, 没 有 不 可 思 议 之 处 这 类 事 情 在 中 央 亚 细 亚 各 民 族 历 史 上 发 生 过 多 次, 并 不 是 满 蒙 关 系 的 特 殊 现 象 如 果 说, 作 为 蒙 古 帝 国 汗 统 的 代 表, 林 丹 汗 意 欲 统 一 蒙 古 - 148 -

简 论 满 洲 人 对 漠 南 蒙 古 各 部 统 治 的 确 立 各 部 的 行 动 无 可 非 议 的 话, 同 样, 并 自 认 为 是 蒙 古 大 汗 的 臣 民 也 不 视 满 洲 人 是 真 正 异 类 的 蒙 古 各 游 牧 万 户, 与 满 洲 建 立 联 盟, 抵 抗 察 哈 尔 的 吞 并, 也 是 情 理 之 中 的 事 但 是, 在 入 清 以 后, 蒙 古 人 的 民 族 意 识 被 唤 醒 了 当 满 洲 统 治 者 把 来 自 不 同 集 团 和 万 户 的 他 们 视 为 同 类, 采 取 一 视 同 仁 的 民 族 政 策 以 后, 他 们 加 深 了 民 族 认 同, 并 且 开 始 寻 求 和 发 现 共 同 的 民 族 记 忆 11) 结 语 1368 年, 蒙 古 皇 帝 被 赶 出 中 原, 到 1636 年 东 蒙 古 归 附 后 金 的 260 多 年 历 史 可 分 为 如 下 两 个 时 期, 第 一 时 期 : 自 从 1368 年 到 达 延 汗 重 新 统 一 东 蒙 古 的 一 百 多 年 间, 在 东 蒙 古, 自 成 吉 思 汗 分 封 子 弟 贵 戚 勋 贵 形 成 的 封 建 秩 序 依 旧 成 吉 思 汗 几 个 弟 弟 及 贵 戚 勋 臣 后 代 世 代 统 治 着 其 祖 先 的 封 民 异 姓 贵 族 权 力 很 大, 自 元 末 以 来 形 成 的 朝 政 由 太 师 把 持 这 一 弊 病 进 一 步 加 重 由 于 大 汗 权 力 式 微, 东 西 两 大 政 治 集 团 及 东 蒙 古 内 部 各 种 政 治 势 力 为 争 夺 把 持 朝 政 的 大 权 进 行 了 长 期 的 混 战 第 二 个 时 期 为 达 延 汗 统 一 东 蒙 古 至 漠 南 蒙 古 归 附 清 朝 时 期 达 延 汗 的 诸 子 分 封 改 变 了 自 成 吉 思 汗 以 来 异 姓 勋 戚 功 臣 世 代 领 有 其 千 户 爱 马 属 民 的 历 史, 确 立 黄 金 家 族 对 北 元 可 汗 直 属 各 部 的 绝 对 统 治 权 但 是, 达 延 汗 建 立 的 黄 金 家 族 的 分 封 统 治, 本 身 具 有 不 可 克 服 的 矛 盾 : 无 限 的 封 建 分 割 有 限 的 土 地 人 口 分 封 造 成 割 据, 带 来 日 益 增 大 的 离 心 倾 向 这 对 新 兴 的 女 真 族 提 供 了 绝 好 的 机 会, 努 尔 哈 赤 及 其 继 承 者, 用 一 个 多 世 纪 的 时 间, 对 蒙 古 各 部 采 用 武 力 征 服 和 政 治 招 抚 等 手 段, 臣 服 内 外 蒙 古, 征 服 卫 拉 特, 在 蒙 古 地 区 建 立 了 一 整 套 统 治 新 秩 序 11) 乌 云 毕 力 格 著 : 喀 喇 沁 万 户 研 究, 内 蒙 古 人 民 出 版 社, 呼 和 浩 特, 第 171-172 页 - 149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参 考 文 献 宋 濂 等 : 元 史, 中 华 书 局 标 点 本, 1976 年 宝 音 德 力 根 : 十 五 世 纪 前 后 蒙 古 政 局 部 落 诸 问 题 研 究, 内 蒙 古 大 学 蒙 古 史 研 究 所 博 士 学 位 论 文, 1997 年 乌 兰 : 蒙 古 源 流 研 究, 辽 宁 民 族 出 版 社, 2000 年 亦 邻 真 : 藏 传 佛 教 与 蒙 古 史 学, 亦 邻 真 蒙 古 学 文 集, 内 蒙 古 人 民 出 版 社, 2001 年 曹 永 年 : 蒙 古 民 族 通 史, 第 三 卷, 内 蒙 古 大 学 出 版 社, 2002 年 杜 家 骥 : 清 朝 满 蒙 联 姻 研 究, 人 民 出 版 社, 2003 年 乌 云 毕 力 格 著 : 喀 喇 沁 万 户 研 究, 内 蒙 古 人 民 出 版 社, 呼 和 浩 特, 2005 年 中 国 蒙 古 史 学 会 编 : 蒙 古 史 研 究 第 十 一 辑, 科 学 出 版 社, 2013 年 森 川 哲 雄 著, 白 羽 双 译 : 蒙 古 诸 部 族 与 蒙 古 文 文 献 研 究, 内 蒙 古 出 版 集 团 内 蒙 古 人 民 出 版, 2013 年 - 150 -

명청교체기와 티베트 柳 靜 我 (일본돗토리대학) 서론 1. 옹정5년 티베트수상의 암살사건과 청조의 대응 2. 주장대신의 역할 결론 서론 만주족 왕조인 청조는 티베트문제에 있어 명조와는 다른 좀더 적극적인 군사적 정 치적 개입을 행했다. 그러면서, 티베트불교를 신봉하는 티베트 몽골지역에 있어 황제 는 중화세계의 천자가 아닌 티베트불교의 수호자로써의 면모를 가지고 통치에 임했다. 그리고 중국왕조의 종래의 대외관계에 있어 제도적인 틀인 조공국과 호시국과는 다른 번부라는 새로운 제도적 틀을 만들었다. 중화세계질서에 있어 중국과 조공국간의 대외 관계는 조공 책봉을 행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조공국의 내정과 외교에 직접 적인 간섭을 하지 않는 것을 그 특징으로 보았다. 한편 번부통치는 관료를 파견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점에서 조공국보다 좀 더 지배의 강도가 강했던 것으로 인식되었 다. 필자는 청조의 다원적 통치구조와 실질 정치세계와 어떠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고, 청 조가 다원적 통치구조의 모순 충돌을 어떻게 해결해 나갔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옹정 기의 티베트정책에 주목하고자 한다. 본 발표에서는 옹정5년에 티베트에서 발생한 정 변과 그에 대한 청조의 대응을 통해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해답의 하나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1. 옹정5년 티베트수상의 암살사건과 청조의 대응 옹정4년 청조는 總 理 西 藏 事 務 貝 子 康 濟 鼐 印 을 당시 수상인 칸첸네에게 頒 給 하였 다. 그러나 책봉사절이 도착하기 직전 칸첸네가 티베트 정부내에 반대파에 의해 살행당 - 151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실록 의 기록에는 이 사건과 달라이라마와의 관계에 관해 아 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나 만문사료에는 달라이라마7세와 그 부친, 그리고 암살세력들 이 칸첸네암살에 관해 황제에게 직접 보고서를 올린 내용이 있다. 그 내용은 칸첸네암 살의 이유로 달라이라마7세에 대한 무례, 겔룩파에 대한 무시, 몽골 준갈이부와의 내통 을 들고 청조에게 새로운 정부수립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한편 親 칸첸 네파인 뽀라네는 청조황제에게 만주어와 티베트어로 된 상주문을 올렸는데 그 가운데 이 달라이라마(달라이라마7세)는 겔룩파와 중생에게 무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貝 子 칸첸네와 함께 쨩( 後 藏 )제부락 아리제부락을 이끌고 종전에 준갈이와 적대하고 안부와 손득을 고려하지 않고 폐하를 존경하고 폐하를 따르는 것 외에는 다른 마음을 없습니다. 판첸라마와 티베트중생을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주장하며 청 조의 지지를 요청했다. 즉 티베트에서는 청조의 책봉을 티베트불교세계의 논리안에서 인식하고 있고, 칸첸 네 암살사건은 명확하게 청조황제와 달라이라마의 권위가 충돌된 사태이지만,이를 표 면화시키지 않으려는 의도가 보여진다. 이에 옹정제는 칸첸네 암살사건에 대한 달라이라마7세와 그 부친의 관여를 알고 있 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비밀에 부치고 티베트개입을 결정하게 된다. 이는 칸첸네 지 지세력인 뽀라네가 군사적으로 암살세력을 압도하기 시작했다는 보고에 따른 것이었 다. 당시 청조는 라싸에 파견된 주장대신과 川 陝 總 督 의 파견한 밀사, 뽀라네의 사신을 통해 현지정보를 입수하고 분석, 대응책을 세웠다. 이는 한문 만문 奏 摺 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옹정제는 청조가 뽀라네를 지지하는 것이 티베트국내에 알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뽀라네와의 교섭에 있어서는 문서가 아닌 구두를 통해 지시를 내리 는 방법을 취했다. 옹정7년 티베트내전에 군사력을 동원해 개입하고 암살세력을 처벌 하고 달라이라마7세와 그 부친의 관여를 불문에 부치고 내지에서 가까운 리탕으로 이 주시켰다. 이러한 청조의 개입에 대해 실록 에서는 조정이 貝 子 總 理 事 務 로 勅 封 한 康 濟 鼐 를 마음대로 살해하고 頗 羅 鼐 에 해를 입히려고 했다 라는 책봉의 논리로 설명하고 개입후 에 (뽀라네)를 貝 子 로 봉함으로써 義 勇 을 표창하고 國 憲 을 밝힌다 라고 하여 역시 책 봉의 논리를 가지고 정당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티베트불교를 신봉하는 몽골 에 대해, 起 居 注 冊 에 따르면옹정제는 짐은 서역의 敎 (티베트불교)를 버리고 다른 가 르침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제부쥰담빠와 창양후토쿠토의 전세는 다 달라이라마의 제자이다. 짐의 뜻은 달라이라마와 빤첸라마의 가르침을 선양하는 것외에는 없다 라고 - 152 -

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만주에 대한 청나라의 정책 군사행동의 정당성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달라이라마7세전 에는 달라이라마의 리탕 이주에 대해 티베트사신을 통해 전해진 청조황제의 諭 旨 의 내용이 나는 전보다 더욱 (달라이라마7세)를 숭상하고 있고 리탕에 오시기 되서 잘됐다고 생각한다. 내지에는 천 연두가 발생할 우려가 있어 초대할 수 없지만, 외지에 갈 때 시간을 맞춰 뵙고자 한다. 리탕 부근에 거주지로 삼을 새로운 사원을 건립할 예정이다. 앞으로 뽀탈라궁전에 돌아 가고 싶으시면 지시대로 하겠다 라고 전해졌다. 즉 옹정제는 중화세계(책봉)의 지배질 서와 티베트 불교세계의 지배질서가 충돌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문서 가 보여지는 세계에 따라 각각의 논리를 의거해서 청조황제의 권위와 행동을 설명했다 고 하겠다. 2. 주장대신의 역할 청조가 티베트에 대신을 파견한 것은 강희48년 侍 郞 赫 壽 가 처음이다. 그러나 1년뒤 혁수가 귀국하고 나서 대신의 파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후 옹정5년 실록 에 內 閣 學 士 僧 格, 副 都 統 馬 喇 를 달라이라마가 있는 곳에 파견하고, 각각에게 은 천냥을 상으 로 내린다 라는 기사가 있고 이후 청조의 대신들이 티베트에 머무르게 되면서,옹정5년 에 청대 라싸에 주장대신이 상설되었다는 것이 정설이 되었다. 사실 이 사료에는 두사람을 달라이라마가 있는 곳에 파견한다고만 되어 있지 주장대 신 으로 파견한다는 내용도 없고 그 재류기간에 대한 기술도 없다.그렇다면 옹정제의 주장대신 파견은 어떠한 의도에 의한 것일까. 이는 옹정제와 川 陝 總 督 岳 鐘 琪 사이에 奏 摺 과 硃 批 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를 통해2명의 대신은 칸첸네와 반대파의 대립을 완화 하고 달라이라마7세의 관여를 저지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러나 두사람이 라싸에 도 착했을 때는 칸첸네는 살해당한 후였고 이러한 상황의 변화에 대해 청조측은 주장대 신의 존재가 청조의 앞으로의 대응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철수시킬 생각을 했다. 그 후 뽀라네가 군사적으로 우위에 서면서 군사적 개입을 현실적 대응책으로 중 시하게 되면서 옹정제와 악종기는 달라이라마측과 뽀라네와 이중교섭을 하는데 주장 대신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재류를 용인하기로 했다. 옹정7년 군사개입 후 청조 는 주장대신의 역활에 관해 논의가 이루어지는데, 당시 옹정제는 주장대신의 라싸에 계 속해서 두지만달라이라마사무에는 개입하지 않도록 엄격하게 주의를 주었다. 즉 주장대신은 현지에서 청조황제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청조정책에 관해 - 153 -

동북아 국제관계사의 재조명 -만주지역과 북방민족 연구의 방법과 과제- 티베트정부의 동의와 달라이라마의 지지를 획득하는 역할이 기대되었다고 하겠다. 이 는 중화세계와 티베트불교세계의 지배질서의 모순(청조와 티베트의 이해관계)이 표면 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북경이 아닌 라싸에서 주장대신을 통해 조정을 하고자 하 는 의도라고 하겠다. 결론 옹정기 청조는 중화세계의 지배질서인 책봉을 통해 티베트와의 관계를 콘트롤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책봉체제를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티베트 불교세계의 지 배 질서와의 표리관계를 가지고 모순이 표면화되지 않도록 신중하게 주의를 기울이면 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언어(한문 만문 티베트어)를 통해 각각의 세계에 다른 지배논리로 모순없이 청조의 행동을 설명했다. 한편 주장대신은 청조의 행동(정책)이 티베트 불교세계의 논리에 의해 부정되는 사태 를 표면화시키지 않도록 현지에서 교섭을 하는 역할이 기대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티베트 내정에 관한 주장대신의 지나친 관여는 오히려 청조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옹정기 청조의 지배정책의 특징을 이해하면, 건륭기 주 장 대신의 티베트 내정에 관여가 강화되는 것을 청조의 일방적인 티베트 지배의 강화 라는 문맥으로 해석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 154 -

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과 만주에 대한 청나라의 정책 史 料 満 文 録 副 ( 軍 機 処 満 文 録 副 奏 摺 ) 中 国 第 一 歴 史 檔 案 館 所 蔵 マイクロフ 強 ルム. 漢 文 録 副 ( 軍 機 処 漢 文 録 副 奏 摺 ) 中 国 第 一 歴 史 檔 案 館 所 蔵 マイクルフ 強 ルム. 宮 中 全 宗 雍 正 朝 滿 文 硃 批 奏 摺 中 国 第 一 歴 史 檔 案 館 雍 正 朝 漢 文 硃 批 奏 摺 彙 編 中 国 第 一 歴 史 檔 案 館 編, 江 蘇 古 籍 出 版 社, 1989~1991년 雍 正 朝 起 居 注 冊 中 国 第 一 歴 史 檔 案 館 編, 中 華 書 局, 1993년 Lcangskyarolpa irdorjes, dpagbsamrinpoche isnye ma,서장인민출판사, 1990년 參 考 文 獻 柳 静 我 2004. 駐 蔵 大 臣 派 遣 前 夜 における 清 朝 の 対 チベット 政 策 1720~1727 年 を 中 心 に 史 学 雑 誌 113-2. 柳 静 我 2012. 1727 年 のチベット 政 変 と 清 朝 の 介 入 史 学 雑 誌 121-9. 片 岡 一 忠 1998. 朝 賀 規 定 からみた 清 朝 と 外 藩 朝 貢 国 の 関 係 駒 沢 史 学 52. 石 濱 裕 美 子 2001. チベット 仏 教 世 界 の 歴 史 的 研 究 東 方 書 店. 岡 洋 樹 2003. 東 北 アジア 地 域 史 と 清 朝 の 帝 国 統 治 歴 史 評 論 642. 石 碩 1994. 西 藏 文 明 東 向 發 展 史 民 族 出 版 社 L.Petech, China and Tibet in the Early 18th Century: History of the Establishment of Chinese Protectorate in Tibet, Leiden: E.J.Brill, 1950-155 -

참가자 명단 성명 소속 전공 메일주소 尹 榮 寅 영산대 자유전공학부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bayantemur@ysu.ac.kr 康 鹏 KangPeng 캉펑 中 国 社 会 科 学 院 历 史 研 究 所 Song Liao and Jin History Khitan Language and Script kangpeng@cass.org.cn 尹 銀 淑 강원대 교양과정부 몽골사 tongalak@hanmail.net 南 義 鉉 강원대 사학과 명청사 occident1@kangwon.ac.kr 발 표 자 赵 令 志 ZhaoLigZhi 쟈오링즈 村 上 信 明 Murakami Nobuaki 무라카미 노부아키 中 国 中 央 民 族 大 学 历 史 学 院 청대사 zhalingzhi@sina.com 日 本 創 價 大 學 청대사 nmuraka@soka.ac.jp 李 善 愛 고려대 만주학센터 청대사 shanai7@hanmail.net 额 尔 敦 巴 特 尔 EERDUNBATEER 에르덴 바타르 中 国 内 蒙 古 大 学 몽골사 bbaatur@163.com 柳 靜 我 日 本 鳥 取 大 学 地 域 文 化 学 科 청대사 jeungah@hotmail.com 韓 成 周 강원대 사학과 조선시대사 hsj0714@hanmail.net 사 회 金 大 起 강원대 사학과 송원사 newcosmosold@hanmail.net 盧 基 植 동북아역사재단 명청사 nohks@korea.ac.kr 徐 正 欽 안동대 사학과 청대사 jhsuh528@hanmail.net

성명 소속 전공 메일주소 陸 貞 任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송대사 jiy@naver.com 유빛나 Ryu Vit Na 전북대 사학과 조교 거란사 gmm253@nate.com 崔 允 精 경북대 역사교육과 원대사 choiyj@knu.ac.kr 토 론 林 常 薰 원광대 한중역사문화연구소 명대사 mc819@hanmail.net 洪 性 鳩 경북대 명청사 chinahsk@knu.ac.kr 金 宣 旼 고려대 만주학센터 명청사 seonmin@gmail.com 方 京 一 Fang Jingyi 한국학중앙연구원 청대사 fangjy@hanmail.net 權 容 徹 고려대 박사과정 몽원사 kycgandhi@hanmail.net 沈 赫 周 한림대 HK연구교수 티베트사 tibet007@hanmail.net 任 城 模 만주학회장 연세대 사학과 일본근대사 diaspora@yonsei.ac.kr 金 南 演 강원대인문과학연구소장 강원대 불문학과 불문학 kimnyhee@kangwon.ac.kr 金 宣 旼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만주학센터장 명청사 seonmi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