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古 代 韓 日 關 係 의 成 立 도 松 菊 里 文 化 의 영향이 확실하게 확인되고 있으며 청동기의 경우 細 形 銅 劍 즉, 한국식 동검으로도 불리는 한반도 중심의 청동문화가 일본열도에 전해졌음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될 필요가 있다고 파악된다. 2. 일본 선사고고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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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古代 韓日關係의 成立 彌生文化 主體問題에 대한 檢討 조법종(趙法鍾) 序論 제1장 韓日 農耕文化의 交流 제1절 稻作農耕文化의 傳播 1. 韓日 稻作農耕文化의 起源과 開始 2. 韓半島 稻作農耕文化와 無文土器文化 3. 日本列島 稻作農耕文化의 展開 제2절 彌生土器文化의 成立과 韓日文化交流 1. 彌生文化 開始年代와 系統 2. 韓半島 無文土器 및 日本列島 彌生土 器文化의 交流 제2장 韓日 金屬文化의 交流 제1절 靑銅器 鐵器文化의 交流 1. 韓半島 靑銅器文化의 日本列島 傳播 2. 鐵器文化의 交流 제2절 靑銅器 鐵器時代 遺物의 交流와 墓 制의 樣相 1. 靑銅器, 鐵器遺物의 交流樣相 2. 墓制의 樣相 제3장 古朝鮮 三韓 三國 初期 倭와의 交流 제1절 古朝鮮時期 日本列島와의 交流 1. 古朝鮮時期 倭와의 關係 2. 衛滿朝鮮時期 對外交流 3. 衛滿朝鮮時期 倭와의 交流 제2절 三韓과 三國 初期 倭와의 交流 1. 東夷지역에서의 重譯外交 2. 三韓과 倭와의 交流 문헌검토 3. 三韓과 倭와의 交流 고고학적 검토 4. 三國 初期(西紀 3世紀까지) 倭와의 交流 結論 國文抄錄 1. 한일 선사문화의 교류에 대한 한국, 일본학계의 연구 성과를 정리해 볼때 일본 彌 生(야요이)文化 성립의 중요 요소인 水田稻作, 청동기, 철기 등 금속문화의 전래 양상에 대해 종래 일본학계 및 개설서에서는 그 전래 주체와 지역에 대해 모호하게 대륙 이라 고만 표현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런데 이번 연구 활동을 통해 관련 연구 성과에서는 구체적인 내용이 확인되고 있어 이를 명시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稻作文化의 경우 한반

6 古 代 韓 日 關 係 의 成 立 도 松 菊 里 文 化 의 영향이 확실하게 확인되고 있으며 청동기의 경우 細 形 銅 劍 즉, 한국식 동검으로도 불리는 한반도 중심의 청동문화가 일본열도에 전해졌음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될 필요가 있다고 파악된다. 2. 일본 선사고고학계가 최근 진행한 AMS(이온빔가속기질량분석법) 측정에 의한 새로 운 연대관을 근거로 彌 生 時 代 개시 시점이 기원전 930년까지 소급되어야 한다는 기원전 10세기설 주장은 전제조건으로서 彌 生 文 化 의 기원지인 한반도의 농경 및 청동기문화 연 대도 함께 상승해야하는 상황이 필수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학계의 입장이 정립 되지 않고 있으며 전반적인 연구내용은 이 같은 연대 상승에 회의적인 측면이 강하다. 3. 일본의 대외 교류에 대한 최초의 역사기록인 山 海 經 과 漢 書 地 理 志 기록 의 내용에 대해 일본학계에서는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류의 출발과 근거로 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번 연구를 통해 볼 때 古 朝 鮮, 蓋 國 등과 倭 사이에 존재하였던 교류와 긴밀한 관계를 설명한 내용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衛 滿 朝 鮮 이후 성립된 낙랑, 대방 등 군현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衛 滿 朝 鮮 과 倭 와의 사이에서 존재한 교류 관계가 전제 되었다는 점에서 고조선과 왜와의 관계가 확인된다. 종래 이 같은 이해가 양국의 개설서 나 연구에서 부각되지 않아 이에 대한 사실과 의미 부각이 필요하다고 본다. 4. 이번 연구에서 고조선 및 삼한을 포괄한 왜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로서 重 譯 外 交 가 확인되었다. 즉, 東 夷 世 界 가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함에 있어 重 譯 을 해주는 重 譯 국가와 被 重 譯 국가나 종족 사이에 附 庸 國 적 성격의 관계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三 韓 이 倭 를 郡 縣 과 연결하는 데 중역을 해주었다는 기록에서 이 관계가 계속 유 지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고대 중역외교에 의한 삼한-왜의 관계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5. 선사, 고대의 한일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향후 양국의 고고학적 성과를 체계화 하고 통합할 수 있는 연구가 요청된다. 주제어 : 彌 生 文 化 (야요이문화), 稻 作 文 化, 細 形 銅 劍, 衛 滿 朝 鮮, 重 譯 外 交

序論 7 序 論 先史 및 古代 한일관계의 형성과 전개는 신석기시대 이래 현해탄을 중심으로 한 물적, 인적 교류를 토대로 韓半島의 無文土器, 水田稻作, 靑銅器 鐵器文化가 日本列島에 전해 져 수전도작 및 금속문화로 상징되는 彌生文化를 형성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또한 이 후 고조선, 삼한 및 삼국 초기단계의 기록에서 이 같은 문화적 교류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선사이래 고대사 초기에 전개된 한반도와 일본열도 와의 교류에 대해서는 한일 양국 학계가 여러 방면에 걸친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특히, 彌生文化 성립과 관련하여서는 교과서 및 양국의 개설서에서 심도있게 소개되었다. 본 연구는 이 시기에 대한 한일 양국 학계에서 이룩한 성과를 정리하고 각 분야의 의 견을 검토하여 한일 양국 교과서 및 관련 자료집필자들에게 연구개요 및 쟁점을 소개하 기 위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의 목적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연구내용은 韓日 農耕文化의 交流양상을 파악하기 위해 稻作農耕文化의 傳播과정을 검토하고 韓日 稻作農耕文化의 起源과 開始의 實狀을 파악하고자 한다. 그리고 韓半島 稻作農耕文化와 無文土器文化의 구체적 내용을 정립하고 日本列島의 稻作農耕文化의 展 開 양상을 상호 연결지어 파악함으로써 한일 농경문화 교류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반도의 선사시기 수전도작문화가 일본열도에 人間의 移動에 依한 技術과 文化傳播를 통해 성립되었음을 파악하고자 한다. 한편, 彌生文化의 成立과 관련된 韓日 文化交流를 검토하고 최근 일본 선사고고학계 에서 AMS측정법에 의해 새롭게 제기된 彌生時代 기원전 10세기 開始說에 대한 검토를 진행하고자 한다. 특히, 彌生文化성립의 實際時期와 새로운 年代觀에 나타난 문제와 향 후 연구방향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일본열도지역의 彌生문화 개시 연대의 상승은 유물의 단순 연대상승에 의해 나타날 수 없고 滿洲 및 韓半島의 청동기 및 철기 문화의 연대에 연동된 것으로 동아시아 청동기, 철기문화 연대관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 토속에서 가능한 문제임을 확인하고자 한다. 또한 韓日 金屬文化의 交流양상을 靑銅器, 鐵器遺物의 交流와 墓制 등 물적, 인적 교류의 구체적 상황을 정리, 검토하고자 한다. 이 를 통해 결국 청동기, 철기문화의 교류 또한 기술을 보유한 人間集團의 移住에 의해 나 타난 사실임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와 함께 역사시기의 교류내용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古朝鮮 三韓 三國初期

8 古代 韓日關係의 成立 倭와의 交流를 각각 나누어 古朝鮮時期 日本列島와의 交流에서는 고조선의 對外關係와 衛滿朝鮮時期 對外交流 그리고 衛滿朝鮮時期 倭와의 交流를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또한 三韓과 三國初期 倭와의 交流의 실상 파악을 위해 東夷지역에서 의 重譯外交의 구체적 내용을 검토하고 三韓과 倭와의 교류에 대한 文獻檢討와 考古學 的 資料檢討를 연결지어 파악하여 重譯外交의 中心에 고조선, 삼한이 존재하였음을 밝히 고자 한다. 제1장 韓日 農耕文化의 交流 제1절 稻作農耕文化의 傳播 1. 韓日 稻作農耕文化의 起源과 開始 東아시아의 稻作과 관련된 論議는 栽培稻의 起源과 稻作農法 특히, 水田稻作의 傳播過 程에 대한 논의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고 있다. 현존 稻는 크게 長粒形의 Indica와 短粒形 의 Japonica로 나뉘는 데 이들의 起源에 대해 크게 中國南部에 分布하는 多年生과 南아시 아에 分布하는 一年生 普通野生稻에서 그 기원을 찾고 있다.1) 이들의 연계성에 대해 1990년대부터 DNA분석을 통해 栽培稻의 두 生態型인 Indica와 Japonica가 각각 일년생과 다년생 普通野生稻에서 기원하였다는 二元說이 제기되었다.2) 이 같은 견해에 대해 中國 學界는 이 두 품종이 모두 中國에서 起源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3) 그러나 중국 현지 야생도에 대한 核 DNA分析4) 및 葉綠體 및 핵의 DNA配列變異에 대한 분석 등에서 1) 安承模, 1999 아시아 栽培稻의 起源과 分化 (學硏文化社) 2) 佐藤洋一郞, 1996 DNAが語る稻作文明 起源と展開 (NHK Books) ; 1999 DNA 考古學 (東洋書店) 3) Sun. C. et al. 2002, Genetic differentiation for nuclear, mitochondrial and chloroplast genomes in common wild rice (Oryza rufipogon Griff) and cultivated rice (Oryza sativa L.), Theoretic and Applied Genetics 104(8) 안승모, 2006 <재배도의 기원과 韓半島로의 전래 도자료를 중심으로 > 일한교류전 稻の來 た道 70~71 인용 이 논의의 핵심은 벼 葉綠體의 DNA고리에서 일년생과 Indica는 缺失이 존재한 반면 다년생과 Japonica는 결실이 없는 데 중국의 野生稻에 이 같은 현상이 모두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 한 입장차이에서 나타났다.

제1장 韓日 農耕文化의 交流 9 Japonica는 中國 南部의 多年生 野生稻, Indica는 南아시아 東部와 東南亞 西部를 포함한 히말라야 이남의 一年生 野生稻에서 기원한 것으로 분석되었고, 古代米의 DNA분석에서 도 中國 古代米는 모두 Japonica로 파악됨에 따라5) 二元起源說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韓半島의 稻와 日本列島 稻의 起源地가 中國 南部와 直接的으로 連結되어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韓國의 水田稻作文化 傳來 系統과 年代문제와 관련하여 중국의 稻作文化관련 資料로 서 가장 오래된 것은 長江유역의 新石器早期(紀元前10000~5000년)유적의 彭頭山遺蹟의 炭化米와 플랜트오팔(植物硅酸體)6)과 新石器晩期(紀元前5000~3000년경) 河姆渡文化期 의 炭化米7)와 馬家浜문화기(紀元前5000~4000) 江蘇省 草鞋山유적의 水田遺蹟이 확인되 고 있다. 또한 韓半島 稻作전래와 직접적 관련이 높은 지역인 山東半島의 烟台市 楊家圈 유적(紀元前2500~2000)과 遼東半島 大連市 大嘴子유적(紀元前1900~1300)에서 炭化米가 확인되고 있다.8) 이같은 中國 農耕文化 및 稻作의 韓半島 傳來는 紀元前 4000년경의 新 石器文化段階로서 黃海道 鳳山郡 智塔里, 鳳山郡 馬山里, 平壤 南京유적 등에서 피, 조등 이 출토되어 雜穀 田作農業이 확인되고9) 京畿道 高陽 및 金浦, 一山 등지의 新石器 後期 炭化米 등을 통해 陸稻作이 확인되고 있다. 한편, 10000여년 이전의 양상인 淸原 小魯里의 13000~15000년BP 土炭層의 稻籾 예 를 제외하면 韓半島 栽培稻의 年代는 5千年前頃 출현하고 있다. 京畿 高陽市 大化里 土 炭 稻籾의 연대가 4070±80BP로서 2880~2450BC 연대를 보여준다.10) 그런데 紀元前 3000년경 韓半島 서해안의 稻作은 중국의 稻作地域과 연결지어 살펴야 하는 데 현존 中國 山東地域 稻作은 紀元前 2500년경 龍山時代부터 출현하며 紀元前 3000년경 이전의 稻作 北限은 淮河유역이란 점에서 이 시기의 稻作의 존재 등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이다. 따라서 韓半島에서의 農耕사회로의 전환과 水稻作의 본격화 문제는 新石器時代 식물 재배 양상이 존재하고 忠北 沃川 大川里遺蹟에서 벼 재배가 확인은 되지만11) 대부분 지 4) Cheng, Chaoyang et al. 2003, Polyphyletic Origin of Cultivated Rice:Based on the interspersion Pattern of SINEs. Mol Biol Evol 20. 5) 佐藤洋一郞, 1999 DNA 考古學 (東洋書店) 6) 裵安平, 1989 <彭頭山文化的稻作遺傳與中國史前稻作農業> 農業考古 1989-2 7) 浙江省博物館, 1981 <河姆渡遺蹟動植物遺存的硏究> 浙江省文物考古學刊 1 8) 許明綱, 劉俊勇, 1991 <大嘴子靑銅器時代遺址發掘記略> 遼海文物學刊 1991-1 9) 변사성, 고영남, 1989 <마산리유적의 신석기시대 집자리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4 10) 安承模, 2007 <栽培稻의 起源과 韓半島로의 傳來 稻資料를 中心으로 > 日韓交流展 稻の來た道 73 11) 한창균 외, 2002 <옥천 대천리유적의 신석기時代 집자리연구> 한국신석기연구회 학술발표집 ;

10 古代 韓日關係의 成立 역에서 논, 밭 유구가 확인되지 않고 住居地 등에서 裁培植物遺體의 확인이 어렵다는 사 실과 栽培關聯 道具의 未備性에 입각해 대부분 이 시기를 農耕사회로 파악하지 않고 있 다.12) 따라서 農耕民은 기후의 寒冷化에 따른 移動13)과 狩獵採集民의 人口增加에 따른 農耕의 採擇14) 등이 진행되면서 無文土器단계에 본격적인 農耕社會로의 전환이 진행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2. 韓半島 稻作農耕文化와 無文土器文化 韓半島 稻作農耕은 無文土器文化의 전개양상과 연결되어 無文土器時代15)로 통칭되고 있으며 靑銅器時代로 표현하고 있다.16) 1980년대까지 韓半島 農耕에 대한 論議는 벼농사 의 起源과 傳播문제가 중심 연구주제로 진행되었고 1990년대 이후 大單位 聚落發掘, 裁培 植物遺體와 耕作遺構 發見 등을 통해 農耕社會에 대한 다각도의 접근이 진행되고 있다. 특 히, 農耕사회 전개의 핵심은 水稻作의 본격화로서 기술력과 노동조직이 기반된 사회전반 의 변화를 수반한 생산방식의 변화를 전제한 것이다. 韓半島 無文土器時代 水稻作의 본격화시점에 대해서는 松菊里土器文化 以前과 以後로 보는 두 견해로 나뉘고 있다. 以前說의 경우 울산 야음동 논유구17)와 밀양 금천리 可樂 洞식 주거유적과 관개시설18)을 근거로 제기되고 있다. 以後說은 水田이 발견된 論山 마 12) 13) 14) 15) 16) 17) 구자진, 2003 <옥천 대천리의 신석기집자리에 대한연구> (한남대 석사학위논문) 이진민, 2007 <남한지역 農耕사회의 성립과 전개> 요시노가리 일본속의 고대한국 296 안재호, 2000, <한국 農耕사회의 성립> 한국고고학보 43, 51 ; 김재윤, 2003, <한반도 刻目 突帶文土器의 편년과 계보> (부산대 석사학위논문) 85 이준정, 2001 <수렵채집경제에서 농경으로의 전이과정에 대한 이론적 고찰> 영남고고학 28, 20 靑銅器時代와 無文土器時代라는 개념은 無文土器의 사용, 靑銅器의 사용과 생산, 農耕사회의 성 립, 마제석검, 석촉 등 무기류와 마제석부, 반월형석도 등 마제석기류의 제작, 支石墓로 대표되는 집단적 분묘축조의 時代를 설명하는 용어로서 사용되고 있다. 靑銅器時代란 표현은 동북아시아 지역을 총괄하는 관점의 용어라면 無文土器時代는 韓半島에 한정된 표현이란 점에서 논자에 따라 사용하는 의미가 다르다. 특히, 靑銅器는 前期후반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無文土器와 시점상 낙차 를 갖고 있는 특징이 반영된 개념이다. 배진성, 2007 無文土器文化의 成立과 階層社會 (서경문화사) 22~23 최몽룡, 1997 <청동기시대> 한국사 3 (국사편찬위원회) ; 최몽룡, 2008 <동북아시아적 관점 에서 본 한국 청동기, 철기시대의 연구방향> 한국 청동기, 철기시대와 고대사회의 복원 (주 류성출판사) 곽종철, 이진주, 2003 <우리나라의 논유구 집성> 한국의 農耕문화 6 (경기대학교박물관)

제1장 韓日 農耕文化의 交流 11 전리, 보령 관창리, 부여 구봉리유적의 炭化米, 대규모 취락 등을 근거로 송국리식 土器 단계에 水稻作의 본격화를 상정하고 있다.19) 사회 전반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후자 의 입장에 비중이 실리고 있다. 韓半島 南部地域의 無文土器 展開樣相은 土器相을 根據로 前期(驛三洞文化:孔列土器, 可樂洞式:二重口緣單斜線文土器, 欣岩里式土器), 中期(松菊里式土器:外反口緣土器), 後期 (粘土帶土器)로 파악하는 3시기 구분 입장에서 早期로서의 刻目突帶文土器가 설정되고 粘土帶土器를 鐵器時代로 파악하는 立場이 개진되면서 학계의 연구양상은 粘土帶土器를 포함한 4段階說20)과 포함치 않은 早期 前期 中期 後期의 4분기설로 정착되고 있 다.21) 그런데 후자의 경우 前期와 中期時代에 해당하는 土器들의 다양한 출토 양상은 時 期的 樣相이기보다는 地域的 系統性 差異일 가능성 등이 있고 특정 양식을 단순하게 적 용키 어려운 점도 있어 早期 前期 後期로 설정하기도 한다.22) 그러나 粘土帶土器文化 는 鐵器時代로 時代성격이 구분되어 설명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파악되어 早期 前期 松菊里文化段階로 설명한 時代槪念이 사용되고 있다.23) 韓半島 無文土器 早期로 編年되는 刻目突帶文土器文化24)는 石上圍石式 爐址를 갖춘 無柱孔의 方形, 長方形 住居址와 深鉢形의 刻目突帶文土器, 兩刃의 半月形石刀를 특징으 로 서울 미사리유적, 남강댐 수몰지구의 진주 대평 어은1지구, 정선 아우라지, 금릉 송죽 리, 순창 원촌유적 등에서 나타나 남한지역에 등장한 最初의 農耕社會로 파악되고 있 다.25) 이 文化의 起源地는 豆滿江流域,26) 鴨綠江中上流流域27) 등이 제시되고 있으며 특 18) 이상길, 김미영, 2003 <밀양금천리유적> 고구려고고학의 제문제 제27회 한국고고학전국대 회 19) 고려대학교 고고환경연구소편, 2005 송국리문화를 통해 본 농경사회의 문화체계 (서경문화 사) 20) 이 경우는 앞서 3시기구분에 早期로서 刻目突帶文土器단계가 추가된다. 21) 粘土帶土器문화를 포함하지 않는 경우의 남한지역 無文土器문화의 時代편년은 다음과 같은 4분 기로 구분된다. 早期(刻目突帶文土器) 前期(可樂洞, 驛三洞식 土器) 中期(欣岩里식土器) 後期(松菊里式土器) 裵眞晟, 2007 無文土器文化의 成立과 階層社會 (서경문화사) 15 22) 安在晧, 2006 靑銅器時代 聚落硏究 釜山大學校 博士學位論文 23) 김장석, 2007 <靑銅器時代> 한국고고학강의 (한국고고학회) 75 24) 안재호, 2000 <한국 農耕사회의 성립> 한국고고학보 43 刻目突帶文土器문화는 미사리유적 발굴 이후 진주 남강댐 수몰지구에서 확인되면서 한 時代로 설 정되기 시작하였다. 25) 이진민, 2007 <남한지역 農耕사회의 성립과 전개> 요시노가리 일본속의 고대한국 299 26) 김재윤, 2003 한반도 刻目突帶文土器의 편년과 계보 (부산대 석사학위논문) 27) 천선행, 2005 <한반도 돌대문土器의 형성과 전개> 한국고고학보 57

12 古代 韓日關係의 成立 히, 鴨綠江의 公貴里, 深貴里 遺蹟과의 類似性이 지적되고 있다. 이 土器는 新石器末期의 土器와 공존하고 있는데28) 平底鉢 위주의 土器, 半月形石刀, 石斧, 대팻날로 이루어진 석 기조성, 長方形住居地, 海洋資源을 이용치 않는 양상 등은 후속 驛三洞 可樂洞 土器文化 와 같은 양상을 보여주어 在地文化의 變化가 아닌 새로운 集團의 移住로써 설명된다. 최 근 이 문화는 靑銅器時代 上限年代의 지표로서 紀元前 2000~1500年頃이 제시되고 있 다.29) 紀元前 2000년기 말부터 시작하는 無文土器時代 前期에는 韓半島 대부분 지역에서 稻 作이 진행된다. 稻作이 실시된 前期文化로 西北地方은 팽이형土器文化, 中部와 南部는 孔 列文土器가 중심을 이루는 驛三洞 欣岩里類型30)과 二重口緣土器系統의 可樂洞類型이 존 재하고 있다. 驛三洞文化는 孔列土器, 단지형 赤色磨硏土器, 無施設式 爐址를 갖춘 長方形, 細長方形 住居地를 특징으로 남한 전역에 분포한다. 石器는 魚形, 舟形石刀, 二段柄式 石劍, 三角 灣入 二段莖钃, 圓筒形 蛤刃石斧 등이 나타난다. 이 문화의 기원지는 東北韓, 西北韓說 등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외부문화의 在地的 受容說도 제시되고 있다.31) 可樂洞문화 는 二重口緣單斜線文土器, 圍石式 爐址를 갖춘 方形, 長方形의 住居地를 특징으로 錦江 流域에 분포하는데 기원지로서 鴨綠江下流, 淸川江 大同江流域의 팽이형土器문화와 연 결되고 있다.32) 두 문화는 주거지 배치 및 석기 조성 양상에서 공통점이 많으며 생계방 식도 같은 것으로 파악된다. 즉 벼, 보리, 조, 기장 등의 裁培植物遺體, 耕作遺構, 收穫具 인 半月形石刀, 伐木具인 磨製石斧, 여러 세대 공동주거를 반영한 住居地의 細長化, 群集 化는 農耕이 生業全般을 規制한 社會임을 보여준다.33) 無文土器時代 稻作관련 유물인 炭化米는 팽이형土器문화에서는 平壤 南京 36호 주거 지, 刻目突帶文土器文化인 美沙里 유형에서는 진주 대평리 어은1지구 104호 주거지, 可 樂洞과 欣岩里유형에서는 강릉 교동 1호 주거지와 驪州 欣岩里 12호에서 출토되었다. 따 28) 국립김해박물관, 2004 韓國圓形粘土帶土器文化資料集 29) 최몽룡, 2008 한국 청동기 철기시대와 고대사회의 복원 (주류성출판사) 87 30) 欣岩里유형은 驛三洞식의 공열과 可樂洞식의 이중구연, 단사선문이 한 土器 또는 동일유구에서 공반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서북계와 동북계의 복합유적으로 이해되었다(이백규, 1974 <경 기도출토 無文土器 마제석기> 고고학 3). 최근에는 이 문화는 驛三洞문화의 범주에 포함되어 파악되고 있다. 31) 김장석, 2001 <흔암리유형재고> 영남고고학 28 32) 이형원, 2001 <앞 논문> 33) 이진민, 2007 <남한지역 農耕사회의 성립과 전개> 요시노가리 일본속의 고대한국 302~303

제1장 韓日 農耕文化의 交流 13 라서 無文土器時代 전 지역 및 문화내용에서 고르게 稻作農耕이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韓半島 無文土器 前期時代의 稻作은 新石器 稻作의 連續이거나 遼東에서 다른 靑銅器文 化要素와 더불어 傳來되었을 가능성 중 후자의 입장에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이 전래 루트는 遼東에서 鴨綠江, 淸川江을 거쳐 江原道 東海岸으로 넘어가 다시 南韓지역으로 확대된 루트와 遼東에서 西海岸으로 넘어온 루트가 상정되고 있다.34) 松菊里類型의 文化는 無文土器 中期 또는 後期時代로 편년되는데, 韓半島에서 水田稻 作文化가 본격적으로 展開되어 灌漑를 隨伴한 水稻作이 完成된 시기이다. 이 문화의 발 생지는 충남 서해안 금강 중하류유역으로서 문화 기원에 대해 자생설과 외래설이 병존 하는 데35) 논산 마전리, 울산 옥현 등지에서 방형의 소구획 水田이 발견되었으며 밭과 계단식 水田은 前期부터 존재한다. 이 문화의 특징적 양상은 중앙에 橢圓形 구덩이를 갖 춘 圓形住居地, 外反口緣土器, 三角形石刀, 有溝石斧를 세트로 충청, 호남, 영남지역에 분 포한 문화양상으로 주거지의 경우 爐址가 잘 발견되지 않고 貯藏竪穴이 別途로 마련되 었으며 주거지 규모가 세대별로 분리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木材加工을 위한 單 刃石斧의 발달과 논유구의 증대, 삼각형석도의 존재는 본격적인 水稻作農耕과 人口의 增 加를 보여주고 있다.36) 한편, 無文土器時代 경작형태는 충적지의 밭농사, 山地의 火田, 丘陵의 水田으로 대별 되는 데 화전과 밭농사는 前期부터, 水稻作은 中期부터 시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37) 한편 韓半島의 稻作은 처음부터 水稻作의 형태로 들어왔으며 육도는 밭유구에서 도의 plant opal이 다량 검출된 광주 신창동유적을 근거로 紀元前 1세기 이후에야 시작된 것으 로 보기도 한다.38) 韓半島의 稻作은 장강유역의 稻作이 산동, 요동반도의 발해만을 따라 전래되면서 水稻作, 陸稻作이 같이 들어왔을 것으로 파악해 유적의 입지에 따라 밭농사, 天水畓, 灌漑水田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 것으로 보는 것이39) 적절하다고 이해된다. 한편, 無文土器時代 석기는 석검, 석촉, 반월형석도, 유구석부에 대한 검토가 중심을 이루었다. 석검 특히, 有柄式石劍은 韓半島에서 특히 발달되었음이 강조되었고 石鏃의 경 우 無莖式에서 有莖式으로 변화되는 양상에 대한 검토가 중심이 되었다. 특히, 석제 공구 34) 35) 36) 37) 38) 39) 안승모, 이건무, 이홍종, 안재호, 조현종, 안승모, 앞 책 75 <송국리형 주거분류시론> 택와 허선도선생 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송국리문화의 문화접촉과 문화변동> 한국상고사학보 48 <靑銅器時代취락연구> (부산대학교 고고학과 박사학위논문) <우리나라 도작농경의 기원과 도작유형> 농업사학회지 3(2) <韓國と日本の初期稻作 未解決の諸問題 > 朝鮮半島と日本の相互交涉に關する 綜合學術調査 ; 2006 <앞 논문> 2007 1992 2005 2006 2004 2002

14 古代 韓日關係의 成立 류는 벌채석부(합인석부), 유구석부, 편평편인석부, 석착 등 4종류의 공구류가 중심이 되 어 나타나고 있는 데 이는 발달된 農耕기술에 필수적인 木製農耕具製作과 긴밀히 연결된 것으로 農耕문화양상을 설명하는 핵심적 요소이다.40) 특히, 이는 요령지역 신석기-靑銅器 전환시점에서 요서에서는 목축과 農耕을 병용하는 형태였지만 요동지역은 가축의 사육화 가 보이지 않는 農耕주체의 사회였다는 이해41)와 연결된 생계양식과 결부된다. 한편, 有溝石斧는 韓半島 無文土器의 독특한 요소로서 목제도구 생산력을 향상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송국리문화권에서만 사용되었던 交刃의 三角形石刀는 東北아시아에 서 韓半島만의 特徵이자 考案品으로 파악되고 있다.42) 3. 日本列島 稻作農耕文化의 展開 韓半島의 稻作農耕은 無文土器時代 中期에 해당하는 松菊里文化시기에 본격적으로 일 본열도로 전해져 북부 九州지역을 중심으로 정착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북부 九 州 玄海灘 沿岸平野의 佐賀縣 唐津市 菜畑, 宇木汲田, 福岡縣 二丈町 曲り田, 福岡市 有田, 板付 등 초기 稻作유적의 분포를 통해 알 수 있다.43) 특히, 板付遺蹟, 野多目遺蹟의 논유 적은 한국의 蔚山 옥현유적이나 論山 마전리유적처럼 소구획 水田으로 동일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稻作農耕은 특히 벼농사 기술뿐만 아니라 稻作農耕을 수행한 사회체제 의 이동에 의한 것으로 홍도, 삼각형석도, 유구석부, 마제석검, 석촉 등 韓半島 靑銅器문 화양상과 궤를 같이하며 環濠集落과 松菊里型 住居地, 支石墓를 특징으로 하는 집단에 의해 農耕문화가 전파되었음을 보여준다. 竪穴住居와 貯藏穴의 別途配置 등 새로운 住居 形式 및 石棺墓로 대표되는 松菊里文化의 영향은 또한 북부 九州 내해인 有明海 沿岸 佐 賀平野의 吉野ケ里유적과 久保泉丸山유적에서도 거의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44) 이는 송 국리문화가 일본 彌生문화 형성에 가장 직접적인 문화임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열도지역으로의 稻作傳來루트에 대한 일본학계의 입장은 종래 다음과 같은 5가지 입장이 제시되어 있었다. 즉, 1)중국 북부 韓半島 북부 九州, 2)산동반도 요동반도 40) 41) 42) 43) 44) 배진성, 2005 <무문土器시대 석기의 지역색과 조성변화> 사람과 돌 (국립대구박물관) 千葉基次, 1996 <遼東靑銅器時代開始期> 東北アジアの考古學 (깊은샘) 배진성, 2007 앞 책 18 조현종, 2000 <일본의 도작농경연구 미생시대水田을 중심으로> 호남고고학보 11 深澤芳樹, 2005 <彌生時代槪說> 日本考古學 (小學館)

제1장 韓日 農耕文化의 交流 15 韓半島-북부 九州 3)중국 북부 韓半島 중서부 북부 九州 4)중국 장강하류 九州(직접 도래설) 5)沖繩諸島 九州(남쪽 도래설) 등 견해가 제시되었는 데 4)의 직접도래설의 경 우 農耕관련 유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는 점과 5)의 남쪽 도래설의 경우 관련 米의 연대가 紀元後 7~8세기를 넘지 못하는 현상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45) 따라서 일본 초기稻作이 韓半島에서 전래되었다는 입장에 대해서는 한일 양국 학계의 입장은 동일하다. 즉, 水稻作과 灌漑農耕技術, 農耕道具, 米의 粒形, 作物組成 및 문화요 소 전반에 있어 彌生早期의 稻作은 松菊里文化 要素와 함께 韓半島 남부지역에서 전래 된 것에 동의하고 있다.46) 한편, 일본학계에서는 繩文시기 稻作을 열대형 Japonica의 畑作으로 파악하여 조엽수 림형의 전작이 남로를 통해 일본열도로 유입되었다는 화남직접 도래설이 제기되었다.47) 그러나 남로에서는 작물고고학적 자료가 결여된 반면 韓半島와 九州는 즐문土器時代와 無文土器前期의 활발한 교류와 韓半島에도 열대형 Japonica에 가까운 粒型이 존재하는 사실에 의해 繩文稻作 또한 韓半島에서 전래된 것으로 파악된다.48) 이 같은 양상은 日本列島의 農耕地域의 분포를 통해 확인된다. 즉, 일본 九州 북부지 역의 稻作 관련 유적의 분포는 현해탄지역과 연한 佐賀縣 唐津市 菜畑유적, 福岡縣 二丈 町 江辻遺蹟, 曲り田, 福岡市 板付遺蹟, 那珂遺蹟 등에서 繩文晩期의 農業聚落, 環濠聚落 및 水田遺蹟이 밝혀져 이 지역 중심으로 韓半島의 無文土器文化가 유입된 것으로 이해 되었다. 즉, 초기稻作과 韓半島 선진문화가 玄海灘 沿岸의 佐賀縣 唐津平野에 전파되고 이후 福岡縣 絲島平野, 福岡平野로 확산되어 廣義의 筑紫平野로 擴散된 것으로 이해되었 다.49) 그런데 佐賀縣 佐賀市 久保泉丸山유적의 野臼式土器의 볍씨흔적, 吉野ケ里 環濠의 繩文晩期 벼플랜트오팔 등은 거의 동일한 시기에 有明海沿岸의 佐賀平野로 전해졌음을 보여주어,50) 韓半島로부터의 農耕文化關聯 渡來集團의 規模가 大規模였음을 확인시켜준 다. 이 같은 사실은 이 일대 支石墓의 분포양상에서도 확인된다. 일부에서는 稻作전래 루트를 중국 長江 및 淮河관련 경로를 제기하기도51) 하지만 北部 九州 初期稻作農耕 石 45) 46) 47) 48) 49) 50) 佐原眞, 2007 <稻,鐵器,靑銅器> 日本の考古學 上 (學生社) 273~274 深澤芳樹, 2005 <彌生時代槪說> 日本考古學 (小學館) 森貞次郞, 1985 繩文農耕 안승모, 2006, <앞 논문> 76 片岡宏二, 2006 彌生時代 渡來人から倭人社會へ (雄山閣) 七田忠昭, 2007 <吉野ヶ里遺跡 佐賀平野に花開いた韓半島の文化> 한일문화교류 韓半島와 일본규슈 98 51) 和佐野喜久生, 1998 <江南行 日本稻のル-ツを求めて> 虹を見た (海援社)

16 古代 韓日關係의 成立 製 및 木製農耕具가 韓半島系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時間 및 地域差에 의한 逐次的 傳 播樣相으로 이해된다.52) 그런데 水稻作은 조직화된 농업생산형태를 반영하고 있다. 즉, 水田경작을 위한 육모 및 수량조절, 제초, 시비 등 農耕과정에 대한 지식과 통제가 필요하며 목제 가래 및 괭이 등 목공구와 이를 제작하기 위한 돌도끼, 돌자귀, 돌대팻날, 돌끌 등 목제 가공도구와 수확용구로서의 반달돌칼, 돌낫 등 다양한 공구류의 제작 및 활용이 수반된다. 또한 水 稻作을 위한 주거의 고착화, 경작지 토지소유 및 세습, 농업용수의 통제와 조정, 노동의 조직화, 잉여생산의 통제 등 정치권력의 형성을 이룬다는 점에서 韓半島와 일본열도에 서의 稻作문제는 사회와 문화변화의 출발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또한 彌生문화의 요소 는 水田稻作과 함께 저장용 호형 土器, 마제석부, 수적구, 석검, 석촉, 支石墓, 돼지의 사 육 등으로서 韓半島 無文土器문화와 공통의 양상을 보여준다.53) 한편, 일본 초기 農耕문화에서는 가축사육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파악54)되었으나 彌 生집락에서 발견된 멧돼지뼈에 대한 분석을 통해 稻作農耕과 함께 新種의 돼지가 수입 되었다고 파악하였고55) 彌生時代에서 고대에 걸쳐 家畜飼育이 진행되었음이 주장되었 다.56) 이는 彌生時代 水稻作 개시에 의한 변화가 생계양식의 변화와 함께 담당 종족의 변화 등 전면적이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韓半島에서 靑銅器유적에서 보고된 개와 돼 지뼈에 대한 보고와 연결되고 있다.57) 또한 신석기시대 韓半島에서 繩文時代 九州에 전 해진 結合式釣針과 組合銛의 전통을 이은 逆T字形釣針은 산동반도 요동반도 韓半島 남부연안 서북 九州에 분포하고 있어58) 요동반도 稻作栽培文化와 韓半島로 연결되는 漁撈活動文化의 연결성도 확인된다. 일본학계에서는 종래 繩文人에서 彌生人으로의 변화에 대해 繩文人이 進化해 彌生人 이 되었다는 小進化說59)과 九州의 山口縣 土井ケ浜遺蹟 人骨이 繩文人과 현격히 다르다 52) 53) 54) 55) 56) 57) 58) 59) 2007 <위 논문> 2007 <彌生時代槪觀> 日本の考古學 上 (學生社) 山崎純男, 1984 彌生時代の知識 (東京美術) 1993 <彌生時代ブタの形質について> 國立歷史民俗博物館硏究報告 50 한편, 멧돼지에 대한 DNA검사를 통해 韓半島로부터 반입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小澤智生, 2000 <繩文彌生時代に豚は飼われていたか> 季刊考古學 73). 佐原眞, 1996 食の考古學 (東京大學出版會) 김신규, 1970 <우리나라 원시유적에서 나온 포유동물상> 고고민속론문집 2 甲元眞之, 1999 <環東中國海の先史漁撈文化> 熊本大學文學部論叢 65 Suzuki.H, 1969 Microevolutionaly changes in the Japanese Population from the prehistoric age to the present-day, J.Fac.Sci.Univ. Tokyo.Section v3 七田忠昭, 春成秀爾, 甲元眞之, 西本豊弘,

제1장 韓日 農耕文化의 交流 17 는 것에 근거한 韓半島 渡來說60)로 입장이 나뉘어 있었다. 종래 일본학계에서는 문화변 용을 중시한 전자의 입장이 강조되었으나 고인골 연구 및 유전학적 분석을 통해 현재는 도래설이 유력한 견해로 지지받고 있다. 이는 低顔, 低身長의 繩文人에 비해 北部 九州 彌生人의 高顔 高身長化 현상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61) 특히, 彌生人 齒牙의 大型化는 유전적 진화의 역행현상으로 韓半島로부터의 인간이동을 설명하는 주요 근거로 활용되 며 韓半島 남쪽 金海 禮安里 人骨 등과 北部 九州, 山口地域 彌生人 人骨이 매우 흡사한 상황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62) 그런데 최근 福岡市 糸島半島의 新町遺蹟 支石墓 出土人骨이 繩文人의 특징을 보여준 다는 점을 부각하여 繩文으로부터 彌生으로의 변혁은 繩文系 土着集團이 주도하였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63) 그러나 韓半島 남부지방의 禮安里나 勒島유적의 人骨 身長이 반 드시 크지 않았다는 점64) 등에 의해 이 같은 논리의 문제가 지적되었다. 따라서 彌生中 期 이후의 압도적인 彌生인골의 점유양상은 韓半島로부터의 이주한 도래인의 규모가 대 규모인가 소규모 집단이 도래하여 높은 인구증가율에 의해 점유비율이 높아졌다는가65) 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있지만 이 같은 추론을 수용키 어려우며 渡來人集團의 지속적인 확대를 통해 사회변화와 水稻農耕이 진행되었다고 이해되고 있다.66) 제2절 彌生土器文化의 成立과 韓日文化交流 1. 彌生文化 開始年代와 系統 日本 彌生時代의 年代觀은 1960年代까지 紀元前 3世紀~紀元後 3世紀까지의 기간으로 파악하던 時代觀에 대해67) 1970년대 岡崎敬이 宇木汲田 貝塚의 C14年代를 근거로 繩文 60) 金關丈夫, 1976 日本民族の起源 (法政大學出版局) 61) 오세연, 2000 <稻作農耕사회의 형성> 겨레와 함께한 쌀 (국립중앙박물관) 44 62) 金鎭晶, 小片丘彦, 峰和治, 竹中正巳, 佐熊政史, 除レイ男, 1993 <金海禮安里古墳出土人骨> 釜 山大學校博物館遺蹟調査報告 15 63) 金關恕, 大阪府立彌生文化博物館編, 1995 彌生文化の成立 大變革の主體は繩文人だった (角 川書店) 64) 春成秀彌, 1989 <朝鮮半島における戰亂と人ケの移動> 彌生時代の始まり(考古學叢書 11) (東京大學 出版會) 65) 中橋孝博, 2005 日本人の起源 (講談社) 66) 中橋孝博, 2007 <繩文時代から彌生時代へ> 日本の考古學 上 (學生社) 253~255.

18 古代 韓日關係의 成立 晩期의 夜臼式土器를 紀元前 5~4世紀, 彌生前期前半 板付Ⅰ式土器를 紀元前 4~3世紀로 比定하고 中期後半은 紀元前 1世紀로 파악하여 紀元後 3世紀까지 존속한 문화로 파악하 였고68), 橋口達也가 北部 九州 甕棺에 부장된 漢鏡 年代 등을 검토하여 板付 Ⅰ式 土器 上限을 紀元前 300年 前後로 본이래 板付Ⅰ式 土器를 彌生時代의 개시와 연결지어 파악 하였다. 1978년 北部 九州에서의 水田稻作 開始年代를 繩文晩期로 편년되었던 刻目突帶 文土器 즉, 夜臼式土器, 山ノ寺式土器의 성립단계 즉, 水田農耕의 시작을 彌生時代의 개 시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확립되어 彌生時代 早期를 紀元前 5~4세기, 前期를 紀元前 3세기로 조정하였다.69) 따라서 2003年 以前까지는 稻作農耕을 수반한 문화가 北部 九州地域을 중심으로 등장 하는 시점으로서 紀元前 450年頃으로 비정되어 繩文晩期, 彌生早期(紀元前 5~4世紀)~ 彌生前期(紀元前 3~2世紀初)~彌生中期(紀元前 2世紀初~紀元前 1世紀 내지 紀元後 1世 紀初)~彌生後期(紀元後 1~3世紀中葉)로 時期區分되어70)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2003年 日本 東京歷史民俗博物館팀(以下 歷博 으로 略稱)이 土器에 대한 AMS (이온빔가속기질량분석법)測定에 의한 새로운 年代觀을 근거로 彌生時代 開始時點이 紀 元前 930年까지 遡及되어야 한다는 紀元前 10世紀說 主張이 提起되면서 開始期 年代에 상당한 混亂이 나타나고 있다.71) 우선 彌生時代의 編年을 歷博 의 입장이 제기된 이후 AMS編年에 의할 때 早期(先Ⅰ期 紀元前 10~9世紀),前期(Ⅰ期, 紀元前8~4世紀), 中期 (Ⅱ~Ⅳ期, 紀元前 4~紀元後1世紀), 後期(Ⅴ, Ⅵ期 紀元後 1~3世紀)로 제시된다.72) 이 견해에 대해 日本學界는 贊反으로 立場이 나뉘었는 데 수반된 前提는 贊成의 경우 韓國의 靑銅器文化 年代遡及73)으로, 反對의 경우 年代測定 過信의 문제74) 및 變動可能性 67) 小林行雄, 1951 日本考古學槪說 創元選書 218 (創元社) 162~163 이때의 근거는 北部 九州의 甕棺墓에 부장된 前漢鏡 年代를 기준으로 彌生中期 上限을 紀元前 1世紀로 잡고 中期의 下限은 王莽의 貨泉으로 紀元後 1世紀 前半以後로 잡았다. 彌生前期는 紀元 前 1세기앞에 200년을 더하여 紀元前 2, 3세기에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68) 岡崎 敬, 1971 <日本考古學の方法> 古代の日本 9 (角川書店) 30~53 69) 鄭漢德, 2002 日本의 考古學 (學硏文化社) 140 70) 鄭漢德, 위 책 154 71) 이에 따르면 彌生 早期는 紀元前 930년경, 前期는 紀元前 810년경, 中期는 紀元前 350년경, 後期 는 紀元前후로 실연대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기존 연대관보다 500년 이상 소급된 내용으로 많은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春成秀爾, 藤尾愼一郞, 今村峯雄, 坂本 稔, 2003 <彌生時代の開始年代 C14 年代の測定結果について > 日本考古學協會第69會總會硏究發表要旨 65~68 ; 藤尾愼一郞, 2004 <韓國,九州四國の實年 代> 彌生時代の實年代 (學生社) 72) 春成秀爾, 2007 <彌生時代槪觀> 日本の考古學 上 (學生社) 268

제1장 韓日 農耕文化의 交流 19 을 提起하고75) 韓半島 관련유물의 年代觀과의 不一致를 제기하였다. 특히, 새로운 연대 관에 의할 때 문제가 되는 점은 彌生早期, 前期遺蹟에서 出土된 鐵器의 年代問題가 발생 한다. 日本學界는 彌生時代의 鐵器를 戰國 燕과 連結지어 韓半島를 통해 傳來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데76) 이 경우 紀元前 4世紀를 넘어갈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대해 歷博 팀은 기존의 관련 유물들이 모두 出土가 不分明하거나 再堆積된 것, 誤認된 것 등으로 파악하고 이들을 彌生鐵器遺物로서 인정하지 않고 있다.77) 그러나 기존의 彌 生遺蹟에서 출토된 遺物들 모두를 否定하는 것은 쉽게 동의할 수 없으며 연대를 맞추기 위한 강변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이 같은 贊反입장과 함께 年代上限 引上을 韓國, 中國 遺蹟에 대한 年代再檢討 를 통해 進行하는 입장도 있다. 즉, 彌生 開始年代를 松菊里 石棺墓의 琵琶形銅劍年代를 春秋中期(紀元前 7~6세기)의 유물과 연결지어 연대를 紀元前 6세기 중엽으로 보거나78) 湖西地域 遼寧式銅劍과 韓國式銅劍 연대를 재검토하여 飛來洞銅劍=西周後期 小黑石溝 M8501 이후 松菊里1호 禮山東西里=鄭家窪子6512호로 편년하여 彌生開始年代를 紀 元前 8세기 중엽~7세기 중엽으로 비정하는 입장도 제기되고 있다.79) 또 遼西의 小黑石 73) 宮本一夫는 歷博說을 지지하면서 韓半島 遼寧式銅劍 年代를 紀元前 9세기로 소급하였다. 宮本一 夫, 2004 <靑銅器と彌生時代の曆年代> 彌生時代の實年代 炭素14年代をめぐって (學生社) 岡內三眞은 歷博발표 이후 韓半島 琵琶形銅劍 開始年代를 紀元前 6~5세기에서 紀元前 9세기로, 韓國式銅劍 연대를 紀元前 4세기에서 紀元前 5세기로 상향조정하였다. 岡內三眞, 2004 <東北式銅 劍の成立と朝鮮半島への傳播> 彌生時代の實年代 炭素14年代をめぐって (學生社) 74) 高倉洋彰은 방사성탄소연대측정치에 대한 불신을 관련 유물 연대가 실연대와 맞지 않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高倉洋彰, 2003 <彌生時代開始の新たな年代觀をめぐって> 考古學ジャナル 510 橋口達也는 福岡 曲り田遺蹟에서 鐵器가 공반된 사실과 北部九州 甕棺 年代觀 등을 감안할 때 새 로운 연대관 수용이 불가함을 강조하였다. 橋口達也, 2003 <炭素14年代測定法による彌生時代の年代 觀に關聯して> 日本考古學 16 柳田康熊은 磨製石劍의 祖形을 琵琶形銅劍과 桃氏劍으로 보고 연대상한을 부정하고 있다. 西谷正 은 彌生時代 시작시기를 戰國竝行期로 보아 새로운 연대관을 수용할 수 없다고 보았다. 柳田康熊, 2004 <朝鮮半島の中國式銅劍と實年代論> 九州歷史館資料論集 29 (九州歷史資料館) 75) 大貫靜夫, 2005 <最近の彌生時代年代論について> Anthropological Science (Japanese Series) 113-2, 106 大貫靜夫는 年代測定値의 變動可能性을 근거로 彌生時代의 開始年代를 紀元前 8世紀, 中期는 紀 元前 300년쯤으로 설정하고 있다. 76) 村上恭通, 2003 <中國, 朝鮮半島における鐵器の普及と彌生時代の實年代> 考古學ジャーナル 510 ; 朴淳發, 1993 <우리나라 初期鐵器文化의 展開過程에 대한 약간의 考察> 考古美術史論 3 (忠 北大考古美術史學科) 77) 春成秀爾, 2008 <靑銅器と彌生時代の年代> 東アジア靑銅器の系譜 新彌生時代のはじまり 3 (雄山閣) 4 78) 武末純一, 2004 <彌生時代の年代> 西川壽勝, 河野一隆 編, 考古學と實年代 (ミネルヴァ書房)

20 古代 韓日關係의 成立 遺蹟의 靑銅禮器 銘文분석을 통해 小黑石의 銅劍을 頂點으로 하는 比來洞 銅劍, 欣岩里 式土器 黑川式土器를 연결지어 彌生開始의 始作을 紀元前 7世紀로 보기도 한다.80) 한 편, 日本 彌生文化 成立의 근간이 韓半島의 松菊里文化임을 강조하면서 松菊里文化의 年 代를 紀元前 900年頃으로 보고 彌生時代의 성립연대를 紀元前 850~800년 사이로 파악 하는 입장도 제기되고 있다.81) 이 같은 論議에서 확인되는 것은 日本列島의 最初 農耕文 化인 彌生文化의 개시 연대가 상한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彌生文化의 起源地인 韓半島의 農耕 및 靑銅器文化 年代도 함께 上昇하는 것이 필수적인 前提條件임을 보여준다. 그러 나 한국학계에서는 이 같은 일본학계의 논의에 아직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일본학계는 彌生文化의 系譜와 관련하여 繩文文化의 傳統繼承과 韓半島 등 大陸 文化에서 그 出自를 구하는 내용을 설정하여 彌生문화 가운데 日本列島 獨自의 側面을 부각하고자 하였다.82) 이런 이해의 연장선에서 繩文文化의 전통은 女性의 역할과 관련 된 부분의 비중이 높고 大陸文化로 指稱된 문화현상은 男性의 역할과 관련된 부분이 많 음이 강조되었고83) 이를 男性이 中心이 된 韓半島로부터의 渡來人과 繩文人과의 混血로 서 설명하는 내용84)과 연결지어 파악하고 있다.85) 또한 稻作栽培와 관련하여 彌生時代 의 대표적 工具인 大形蛤刃石斧가 繩文時代 磨製石斧의 系譜와 연결된다고 보고 繩文文 化의 전통을 강조하였다.86) 그러나 彌生文化 이전의 繩文文化의 경우 北部 九州를 중심으로 韓半島와의 文化交流 가 頻繁하였음이 繩文期의 경우 結合式 釣針, 石製銛頭에 의한 새로운 漁法의 등장, 中期 의 動物解體 및 骨角器 製作에 편리한 石刃技法의 수용 등에 의해 지속적인 관계가 파악 되며87) 이같은 전통 속에 彌生時代 특유의 扁平片刃石斧가 등장하고 있음88)이 지적되어 韓半島에서의 문화수용이 확인되고 있다. 79) 庄田愼矢, 2005 <湖西地域出土 琵琶形銅劍과 彌生時代 開始年代> 湖西考古學 12 (湖西考 古學會) 80) 甲元眞之, 2006 東北アジアの靑銅器文化と社會 (同成社) 149~153 81) 이홍종, 2000 <無文土器와 彌生土器의 實年代> 한국고고학보 60 (한국고고학회) 82) 佐原眞, 1975 <彌生文化の三要素> 古代史發掘 2 (講談社) 83) 甲元眞之, 1978 <彌生文化の系譜> 歷史公論 4-3 84) 金關丈夫, 1973 <人類學からみた古代九州人> 古代アジアと九州 (平凡社) 85) 甲元眞之, 2004 日本の初期農耕文化と社會 (同成社) 86) 下條信行, 1975 <北九州における彌生時代の石器生産> 考古學硏究 22-1 87) 李相均, 1998 新石器時代의 韓日文化交流 (學硏文化社) 88) 甲元眞之, 2004 日本の初期農耕文化と社會 (同成社)

제1장 韓日 農耕文化의 交流 21 한편, 彌生時代의 石器는 韓半島系 磨製石器계통인 半月形石刀, 石鎌, 有溝石斧, 蛤刃 石斧, 자귀, 石鑿 등 工具類와 一段柄式石劍, 有莖式石劍, 有莖式石钃 등의 武器로 구성되 는 데 낚시바늘과 黑曜石製 화살촉, 돌송곳 등으로 구성된 繩文時代의 石器組合과는 구 분되어 水田稻作, 支石墓, 靑銅器와 함께 韓半島에서 전래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彌生土器문화는 繩文末期의 淺鉢과 深鉢형태에서 貯藏用 壺, 炊事用 甕, 取食用 豆, 鉢 등이 제작되어 농업생산에 따른 생업경제변화의 상황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특히, 韓 半島 無文土器 영향을 받아 제작된 貯藏用 壺 사용이 주목된다.89) 2. 韓半島 無文土器 및 日本列島 彌生土器文化의 交流 日本列島 특히, 九州地域에서 출토되는 韓半島系의 土器文化 樣相은 刻目突帶文土器, 孔列文土器, 丹塗磨硏土器, 松菊里式土器, 粘土帶土器 등이 있다. 彌生早期 土器인 夜臼 式土器(刻目突帶文土器)의 始原에 대해서 日本學界에서는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뉜다. 먼 저 福岡平野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水田과 刻目突帶文土器가 共伴된다는 점을 들어 北 部 九州地域을 登場地域으로 보는 견해90)와 繩文晩期 中半에 近畿地域에서 發生한 후, 北部 九州地域에로 波及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91) 北部 九州說의 경우, 刻目突帶文 土器의 登場 背景과 관련된 系譜에 대해서는 韓半島의 刻目突帶文土器에서 그 系譜를 구 하고 있다.92) 후자인 繩文繼承說은 土器 自體의 變化相을 고찰한 것으로서 서로 다른 土 器圈의 交流를 통해 여러 要素가 結合되면서 近畿地域에서 먼저 刻目突帶文土器가 탄생 한 후, 九州地域으로 파급되면서 偶然히 水田農耕과 結合된 것으로 보았다. 또한, 土器文 化의 主體는 繩文集團에 의해 성립된 것으로 보고 이들 繩文集團이 능동적으로 水田農 耕文化를 받아들일 力量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는 학설을 뒷받침 하는 근간이 되고 있 다.93) 그러나 彌生文化와 繩文文化와의 差別性을 고려할 때, 外來集團의 關與가 不可避 했을 것이라는 解釋을 提示하고 있어94) 결국 外來文化의 受容이 大前提가 될 수 밖에 89) 국립중앙박물관, 2007 요시노가리 일본속의 고대한국 30 90) 山崎純男, 1989 <彌生文化成立期における土器の編年的硏究> 鏡山猛先生古稀記念古文化論攷 91) 泉拓良, 1990 <西日本突帶紋土器の編年> 文化財學報 8 (奈良大學文學部文化財學科) ; 家根 祥多, 1993 <遠賀川式土器の成立をめぐって 西日本における農耕社會の成立 > 論苑考古學 92) 李弘鐘, 2000 <無文土器가 彌生土器 成立에 끼친 影響> 先史와 古代 14 93) 田中良之, 1984 <繩文土器と彌生土器, 彌生文化の硏究 3 : 彌生土器Ⅰ> (雄山閣) 94) 家根祥多, 1997 <朝鮮無文土器から彌生土器へ> 立命館大學考古學論集Ⅰ

22 古代 韓日關係의 成立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日本列島의 刻目突帶文土器의 出現에 대해서는 韓半島 南部地域의 影向이 제기되 었고95) 本村里遺蹟 3호 住居地 출토 刻目突帶文土器와 菜畑遺跡 출토 夜臼式土器의 절 대연대가 거의 같다는 것으로부터 일본 刻目突帶文土器의 出現을 韓半島 南部地域에서 구했다.96) 한편, 일본학계의 일부에서는 韓日 양지역 刻目突帶文土器의 문화전체를 고려 할 때, 韓半島는 田作형태인데 비해 日本列島는 水田형태이며 아울러 石器의 組合도 다 르다는 점을 들어 한국 남부지역에서 水田農耕文化와 함께 刻目突帶文土器가 등장하였 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97) 이처럼 彌生早期 土器인 刻目突帶文土器의 출현문제 에 대해서는 한일 학자 간에 이견이 있지만, 水田農耕을 기반으로 한 文化體系인 松菊里 文化가 韓半島로부터 日本列島로 건너가면서 彌生文化가 탄생하였다는 사실은 대부분 동의하는 점이다. 그런데 그 문화의 주체는 松菊里式土器를 직접 사용했던 집단이라기 보다는 夜臼式土器의 母胎가 된 韓半島 南部의 刻目突帶文土器系와 驛三洞系라는 점이 주목된다.98) 이러한 사실은 彌生 開始期에 나타나는 住居形이 變形 松菊里形 住居地이고 土器 또한 松菊里式土器가 아닌 刻目突帶文土器와 直立口緣土器라는 점에서 확인된다. 이는 刻目突帶文土器 집단이 南部地域에 居住하면서 松菊里文化를 採用한 다음 日本地 域으로 移住했을 가능성과 이들 집단이 일본열도로 먼저 이주한 후 남부지역의 驛三洞 系와 交流하면서 松菊里文化를 採用하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같은 입장에서 볼 때 일본열도의 彌生文化 탄생은 한반도에서 松菊里文化를 채용했던 남부지역의 刻目 突帶文土器系와 驛三洞系 집단에 의해 주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이해된다.99) 한편 韓半島지역의 初期 鐵器時代의 대표적 문화양상인 粘土帶土器文化의 출현은 遼 東地域에서 燕將 秦開의 古朝鮮 侵攻時點에 등장하였다는 燕 昭王代說100)이 제기되었으 며, 이와는 달리 春秋末 戰國初 遼河中流域 靑銅器, 土器文化가 韓半島 북부지역을 거치 지 않고 中西部地方으로 들어와 韓半島 粘土帶土器文化와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다는 95) 이홍종, 2000 <無文土器가 彌生土器성립에 끼친 영향> 선사와 고대 14 96) 安在晧, 2004 <中西部地域 無文土器時代 中期聚落의 一樣相> 韓國上古史學報 43 (韓國上 古史學會) 97) 藤尾愼一郞 외, 2006 <彌生時代の開始年代 AMS 炭素14年代測定による高精度年代體系の構 築> 彌生時代の新年代 (雄山閣) 98) 이홍종, 2006 <무문토기와 彌生토기의 실연대> 한국고고학보 60 99) 이홍종, 2007 한일문화교류 韓半島와 일본규슈 30~31 100) 박순발, 2004 <遼寧粘土帶土器文化의 韓半島定着過程> 錦江考古 (창간호, 충청문화재연구 원)

제1장 韓日 農耕文化의 交流 23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101) 이 같이 粘土帶土器文化는 古朝鮮과 깊은 연관이 있는 遼西遼東지역의 住民移住로 韓半島에 등장한 문화로서 紀元前 6세기 말, 5세기 초로 설정되 고 있다.102) 韓半島 특히, 嶺南地域에서 출토되는 日本列島의 遺物은 彌生中期의 壺와 甕 등이 있 다. 즉, 彌生土器는 嶺南海岸地方을 中心으로 發見되고 있는 데 특히, 慶南 泗川의 勒島 遺蹟의 경우 彌生前期末頃의 土器가 유일하게 출토되고 있으며 金海, 釜山, 蔚山 등지에 서 彌生 中期 이후의 城ノ越式, 須玖式土器가 확인되고 있다.103) 즉, 金海 會峴洞 貝塚, 金海 大成洞 小城遺蹟, 釜山 池內洞遺蹟에서 彌生 中期(紀元前 2세기~紀元後 1세기)土器 가 출도되고 있는데 이들은 日本製作品, 日本人이 건너와 制作한 것, 無文土器人이 模倣 制作한 것 등으로 나뉘는데, 대부분 粘土帶土器와 함께 출토되고 있다.104) 한편, 일본지역에서 출토된 粘土帶土器는 北部 九州地域인 福岡, 小郡에서는 圓形粘土 帶土器가 彌生前期 중엽의 板付Ⅱ式段階土器 등과 같이 나타나고 있고 長崎지역에서는 三角形粘土帶土器가 須玖式土器와 함께 나타나 시기적 선후관계를 보여주고 있다.105) 日本列島의 彌生時代를 대표하는 集落形態는 環濠集落이 존재한다. 현재 鹿兒島에서 群馬縣까지 약 5000여 유적이 확인되고 있는데,106) 日本列島에 존재하고 있는 環濠集落 의 系譜에 대해 일본학계에서는 韓半島 南部로부터의 系列과 長江流域에 系譜를 두는 루트를 제시하고 있다.107) 그러나 북부 九州 초기 農耕集落의 근거로 파악되는 韓半島의 慶南 蔚山 檢丹里遺蹟과 忠南 松菊里유적에서 環濠集落이 발견되고 있고 稻의 傳播루트 와 연결된다는 점에서108) 북부 九州의 초기 農耕집락은 韓半島의 環濠集落에 그 系譜를 두고 있다고 파악된다. 특히, 북부 九州 지역의 突帶紋土器로부터 彌生前期 단계 집락의 양상은 水田, 排水路使用, 斷面 Ⅴ字形의 外濠와 內濠, 區劃區, 竪穴住居, 掘立柱 建物, 大 101) 이건무, 2003 한국식동검문화의 연구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102) 박진일, 2007 <粘土帶土器로 바라본 初期鐵器, 彌生時代曆年代考> 한일문화교류, 韓半島와 일본 규슈 (국립중앙박물관) 103) 안재호, 홍보식, 1998 <삼한時代 영남지방과 북구주지방의 교섭사연구> 한국민족문화 12 (부 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 井上主稅, 2006 嶺南地方出土 倭系遺物로 본 韓日交涉 (경 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04) 국립중앙박물관, 2007 요시노가리 일본속의 고대한국 256 105) 박진일, 2007 <앞 논문> 157~158 106) 中村愼一 編, 2001 東アジアの圍壁, 環濠集落 (平成12年度文部科學省科學硏究費補助金 特定 硏究(A1) 考古學資料集 25) 107) 寺澤薰, 1999 <環濠集落の系譜> 古代學硏究 146 108) 藤田三郞, 2003 <日本の農耕集落> 東アジアと日本の考古學Ⅴ 集落と都市 (同成社) 84

24 古代 韓日關係의 成立 型建物, 貯藏穴, 墓地 등이 광범위한 지역에 計劃的으로 造成되었다는 점에서109) 韓半島 로부터 이주한 農耕집단에 의한 정착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제2장 韓日 金屬文化의 交流 제1절 靑銅器 鐵器文化의 交流 1. 韓半島 靑銅器文化의 日本列島 傳播 韓半島와 日本列島 間의 金屬文化 交流에 있어 韓半島에는 琵琶形銅劍과 銅矛로 구성 되는 순수 靑銅器時代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일본에서는 지금까지의 조사와 연구 성과 로 보는 한 그러한 단계가 뚜렷하지 않다. 따라서 철기시대 이후 靑銅器와 鐵器가 거의 同時에 韓半島에서 日本列島로 流入되고 있다.110) 또한 일본열도에서의 彌生時代 金屬器 사용의 특징은 利器는 鐵器가 祭器는 靑銅器가 사용되었고 이들이 製作은 되었지만 素 材는 韓半島로부터 入手하였음이 지적되고 있다.111) 日本學界는 彌生靑銅器文化의 形成 에 나타난 韓半島 靑銅器文化의 收容과 定着 양상을 遼寧式銅劍(琵琶形銅劍)과 磨製石劍, 石钃을 부장하는 支石墓 등의 墓制로 대표되는 遼寧靑銅器文化複合 을 수용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112) 그런데 이 문화는 中國 中原의 靑銅器文化와 뚜렷한 差別性을 보이며 遼東半島, 韓半島 및 滿洲地域을 중심으로 琵琶形銅劍과 銅矛, 支石墓로 구성되는 靑銅 器문화의 내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韓半島를 中心으로 한 靑銅器文化로 파악되고 있 다.113) 한편, 日本列島에서 가장 오래된 靑銅器유물은 彌生前期(板付Ⅰ式 土器時期)의 유 물로서 福岡의 今川遺蹟에서 출토된 兩翼形 銅鏃과 銅鑿의 경우로서 銅鏃은 寶城 德峙里 의 예처럼 遼寧式 銅劍이나 銅矛를 가공해서 만든 것이며 銅鑿은 扶餘 松菊里 1號 石棺 墓 出土例가 있어 今川遺蹟은 松菊里文化의 영향하에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109) 110) 111) 112) 113) 藤田三郞, 2003 <위 논문> 86~87 鄭漢德, 2002 日本의 考古學 (學硏文化社) 202 奈良文化財硏究所監修, 2005 日本の考古學 111 近澤喬一, 2000 <彌生時代> 山口縣史 資料編 考古 1 (山口縣) 박진욱, 강인숙, 황기덕, 1987 비파형단검문화에 관한 연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 이영문, 1997 <한국비파형동검문화에 대한 고찰> 한국고고학보 38

제2장 韓日 金屬文化의 交流 25 송국리문화의 시기 문제이다. 국립역사민속박물관팀의 AMS에 의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에 의한 연대상한 조정에 대한 대안으로 中國紀年銘 遺物을 활용한 較差年代法이 제시되었고, 이를 琵琶形銅劍과 연결시켜 편년하는 방법이 제시되어 기원전 8~6세 기114) 또는 기원전 6세기 후반~5세기 전반으로 파악하기도115) 하였지만, 土器와 石器 등의 韓日較差編年을 감안하여 紀元前 4世紀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116) 따라서 이 문제 는 송국리문화의 연대에 대한 정립에 따라 그 시기와 성격이 변동되며 아직까지는 한국, 일본학계의 통일된 입장이 없다는 점에서 시기확정은 곤란하다. 이 같이 日本列島의 靑銅器文化는 韓半島로부터 각종 靑銅器類가 전래된 것에 의해 시작되었다. 北部 九州를 시작으로 西日本으로 확대되어 靑銅武器의 경우 유입단계의 靑 銅器는 韓半島製가 舶載되어 수입되었고 北部 九州에 地域王權이 확립되는 中期後半에 日本列島에서 靑銅器가 生産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한편, 日本學界에서 최근에는 靑銅器 의 列島化 時期를 彌生時代中期前半(汲田式甕棺時期)으로 올려보고 韓半島 靑銅器의 輸 入樣相에서 일종의 選擇을 강조하고 있다.117) 그런데 靑銅器 鑄型의 양상을 보면 韓半島 에서는 石製品이 중심이 되고 일부 儀器제작을 위해 土製品을 사용한 양상이 日本 北九 州의 佐賀縣 佐賀平野를 중심으로 吉野ヶ里, 鍋島本寸 유적에서도 同一樣相으로 나타나 고 있어 그 계통과 내용의 연결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118) 또한 細形銅劍은 北部 九州의 金海式 甕棺期(彌生時代前期末) 이후 유입되어 墓의 副葬品으로 사용되고 있는 양상은 韓半島와 동일한 배경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119) 2. 鐵器文化의 交流 彌生時代의 鐵器文化는 北九州지역을 중심으로 九州南部, 瀨戶內, 山陰연안으로 확대 되어 중기 후엽 近畿지역으로 확대되고 후기에는 關東,甲信지역까지 확대된 것으로 보 114) 大貫靜夫, 2003 <松菊里石棺墓出土の銅劍を考えるための10の覺え書き> 第15回東アジア古代史考古學 硏究會交流會豫稿集 (東北亞細亞考古學硏究會) 115) 庄田愼矢, 2005 <日本 先史考古學의 時代區分과 年代問題> 先史와 古代 22, 66 116) 武末純一, 2004 <彌生時代前半期の曆年代> 福岡大學考古學論集 小田富士雄先生退職記 念 ; 박진일 2007, <粘土帶土器로 바라본 初期鐵器,彌生時代曆年代考> 한일문화교류, 韓半島와 일본 규슈 (국립중앙박물관) 162 117) 宮井善朗, 2003 <朝鮮半島と日本列島の靑銅器の比較> 東アジアと日本の考古學 Ⅲ (同成社) 118) 後藤直, 2000 <日韓の靑銅器> 李弘鍾編, 韓國古代文化의 變遷과 交涉 (書景文化社) 119) 宮井善朗, 2003 위 책 63

26 古代 韓日關係의 成立 고 있다.120) 그런데 이는 모두 舶載鐵製品, 즉 한반도에서 직접 전래된 것이란 점이 강 조되고 있다.121) 彌生시대 鐵器文化 전개과정의 특징은 前期에 磨製石器를 대신하여 鐵 製 工具類가 먼저 유입되고 자체 생산이 가능해지며 鐵鏃에 이어서 中期 단계에 鐵製 武器類(劍, 刀, 鉾 등)가 사용되기 시작하는데, 이에 비해 鐵製 農具類는 그 출현시기가 상대적으로 늦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한반도에서 전래된 大陸系 磨製石器 인 蛤 刃石斧, 片刃石斧, 有溝石斧, 半月形石刀 등이 生産道具의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舶載되 어 들어온 일부 鐵製 工具가 사용되기 시작하는 彌生時代 前期 段階는 물론 이후 독자적 형태를 갖는 鐵製 工具가 자체적으로 제조되기 시작하는 단계인 北九州에서의 前期 末~中期 前半, 畿內에서의 中期 前半頃에도 鐵素材는 日本列島內에서 生産하지 못하고 全的으로 韓半島로부터의 流入品에 의존하고 있었다.122) 이 같은 사실은 당시 韓日 양국 사이의 교류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에 대 한 집중적 연구가 부족함이 지적되며 특히, 鐵器 製作과 鐵素材生産은 별도의 단계로서 파악되어야 함이 강조되고 있다.123) 彌生時代에 鐵生産이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는 일본학계에서는 일찍부터 있었다. 이는 구체적인 製鍊遺蹟을 실증적인 자료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鐵器와 鍛冶遺蹟 등의 양상을 고려한 정황적 판단으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廣島縣 三原市의 小丸유적 SF1호 製鍊爐를 확실한 彌生時代 後期의 鐵生産爐로 제시하였으나,124) 추가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彌生時代 鐵生産說은 미약한 상태이다. 한편, 金屬學的 分析을 통해 제시된 5세기 이후 古墳時代 鐵生産說이125) 보다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이 시기 철기생산 유적인 鍛 冶遺蹟이나 鐵滓 관련자료들이 九州地域을 중심으로 岡山, 廣島, 大坂 등 서일본 일부지 역에서도 관련유적이 파악되고 있어 彌生時代의 後期以後에는 日本內에서 自體的으로 鐵器를 제조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126) 120) 野島 永, 2000 <彌生時代の鐵流通試論> 製鐵史論文集 121) 川越哲志, 1993 彌生時代の鐵器文化 (雄山閣) 122) 李南珪, 2002 <日本 古代 鐵器文化의 形成 彌生時代를 中心으로 > 강좌 한국고대사 9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23) 李南珪, 2002 <앞 논문> 221~223 124) 松井和幸, 1986 <鐵生産の問題> 論爭學說日本の考古學 4 (雄山閣) 125) 大澤正己, 1984 <金屬學見地からみた古代製鐵> 古代を考える 36 ; 1997 <彌生時代の鐵器の 動向 金屬學的見地からのアプローチ> 東日本における鐵器文化の收容と展開 第4回鐵器文化 硏究集會 126) 村上恭通, 1998 倭人と鐵の考古學 (靑木書店) 91~95

제2장 韓日 金屬文化의 交流 27 따라서 三國志 魏書東夷傳 弁辰條의 國出鐵, 韓濊倭皆縱取之 란 記事와 최근 고고학자료를 감안할 때 彌生時代 後期까지 韓半島로부터 倭 지역에 계속 공급된 鐵素材에 주로 의존하면서 일부 자체적인 생산도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고고학적으로 이 당시 交易되던 鐵素材와 관련하여 이를 板狀鐵製品127)이나 板狀鐵斧128)로 보거나, 中國製의 鑄鐵脫炭鋼이나 炒鋼製 鐵板으로 보는 說129) 및 鐵器나 素材가 中國으로부터 流入되었다는 說130) 등이 제기되었다. 이는 이 시기 鐵素材를 생산 하는 製鍊遺蹟이 韓半島에서 확인이 안되었던 상황에서의 논의였다. 그런데 최근 泗川 勒島유적에서 출토된 鐵滓들의 분석 결과 鎔解爐의 slag임이 밝혀졌고131) 華城 旗安里유 적에서 抄鋼의 생산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어132) 중국 및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의 鐵素材 유입이 함께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다. 제2절 靑銅器 鐵器時代 遺物의 交流와 墓制의 樣相 1. 靑銅器 鐵器遺物의 交流樣相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靑銅器는 초기에는 무덤의 副葬遺物로서 대부분 출토되고 있다. 이들 유물은 지역별 시기별로 양상을 달리하는 데 일본의 경우 이 시기 最高 支配層무 덤으로 인정되는 九州 佐賀縣 宇木汲田 12號, 積石木棺墓로서 吉武高木 3號 유적으로 銅 鏡, 銅劍, 銅矛 등이 출토되며 韓半島의 次上級墓의 例와 같은 遺物相으로 분류된다.133) 특히, 吉武高木 3號는 日本 土着 甕棺墓가 아닌 韓國系 積石木棺墓로서134) 이 유적을 남 127) 岡崎敬, 1951 <日本における初期鐵製品問題> 考古學雜誌 42-1 128) 東潮, 1995 <弁辰과 加耶의 鐵> 加耶諸國의 鐵(加耶硏究學術叢書1) (仁濟大學校 加耶文化 硏究所) 129) 大澤正己, 1997 <彌生時代の鐵器の動向 金屬學的見地からのアプローチ> 東日本における鐵器 文化の收容と展開 (第4回鐵器文化硏究集會) 130) 李京華, 1992 <試談日本九州早期鐵器來源問題> 華夏考古 第4期 131) 慶南考古學硏究所, 2006 勒島 貝塚Ⅴ 考察編 132) 畿甸文化財硏究院, 2003 <華城 發安里 마을유적 旗安里 製鐵遺蹟 現場說明會資料> 133) 이청규, 2007 <한일 靑銅器와 요시노가리 유적> 국립중앙박물관, 한일문화교류, 한반도와 일 본 규수 78~79 134) 福岡市敎育委員會, 1986 吉武高木 彌生時代埋藏遺跡の調査槪要(福岡市埋藏文化財調査報告 書 143)

28 古代 韓日關係의 成立 긴 집단은 韓國系 靑銅器를 제작한 日本 初期 鎔范과 南韓系 無文土器가 같은 유적에서 공반되는 사실을 볼 때 靑銅器 製作集團을 동반한 韓半島 南部地域 移住民集團임을 보 여준다.135) 한편, 韓半島 靑銅器는 주로 무덤의 副葬品으로서 日本列島에서는 초기 副葬品形式에 서 점차 埋納된 祭器로서 대부분 발견되어 副葬과 埋納이란 양상의 변화가 나타나지만 同一한 系統에서 變化되어가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器種과 形式을 중심으로 검토되었다.136) 武器의 경우 銅劍, 銅矛, 銅戈가 가장 대표적인데 劍은 자루가 별도 장착되는 別鑄式 으로 검몸에 등대가 있으며 한국에서는 琵琶形 中間形 細形 變形으로 변하고 일본 에서는 中細形 中廣形 平形으로 변한다. 이같은 형식은 銅矛와 銅戈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 韓半島에서 일본열도로 이동하면서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점차 大型化, 非實用化되 어 武器形祭器化되는 현상이 강하게 나타난다.137) 특히, 韓半島 남부지역 출토 琵琶形銅 劍은 등대를 磨硏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實用具가 아닌 儀器로 파악하고 있으며,138) 그 형태가 遼西지역과 유사함이 지적되고 있다.139)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공통으로 출토되는 鐵器文化段階의 대표적 武器는 細形銅劍, 細形銅矛, 細形銅戈 등이다. 특히, 細形銅劍은 韓國式 銅劍이라고도 부르는데 관련문화 가140)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분포하여 한일 간의 문화교류양상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열도에서의 細形銅劍文化 관련 유적은 40개 정도로 九州의 北部地域을 중심으로 列 島의 西部에 분포하고 있으며141) 백수십 점의 細形銅劍과 細形銅矛, 細形銅戈 각 30여점 그리고 鑄型도 출토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142) 이들 무기형 청동기들의 일본열도에서 이청규, 2007 요시노가리 일본속의 고대한국 80 이청규, 2003 <한일靑銅器의 비교> 한국문화사상대계 4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이청규, 2008 <앞 논문> 이양수, 2007 <요시노가리로 가는길> 요시노가리 일본속의 고대한국 272 국립김해박물관, 2003 弁辰韓의 黎明 점토대토기의 등장 세형동검은 독특한 유물조합상을 보여준다. 즉 동모 동과 삼각형 석촉의 무기류와 동부 동착 동 사와 같은 공구류, 방패형동기 검파형동기 나팔형동기의 이형동기, 조문경 정문경의 다뉴경, 팔 주령 쌍두령 조합식 쌍두령 간두령 등의 의기류, 곡옥 관옥의 옥류, 점토대토기 흑도로 대표되 는 토기가 특징적인 현상을 보여준다. 趙鎭先, 2005 細形銅劍文化의 硏究 (學硏文化社) 13 141) 趙鎭先, 2005 細形銅劍文化의 硏究 (學硏文化社) 74~79 細形銅劍 關聯遺蹟의 分布는 北部 九州의 福岡縣, 佐賀縣에 집중되고 瀨戶內海를 따라 山口, 廣 島, 岡山, 愛媛, 高知, 德島를 거쳐 畿內地域에 이르며 동쪽의 名古屋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142) 吉田廣, 2001 彌生時代の武器形靑銅器 (國立歷史民俗博物館 春成硏究室) 135) 136) 137) 138) 139) 140)

제2장 韓日 金屬文化의 交流 29 의 鑄造時點은 3種 모두 彌生中期 前半에 시작되고 있으며 有明海 沿岸地域에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다.143) 또 武器形이외의, 銅鐸 등도 같은 시기에 주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 같은 武器類와 精文鏡, 銅鉈, 石製曲玉, 管玉, 小玉 등이 공반되고 있는데, 일본열도의 細形銅劍文化는 鐵器를 공반하지 않은 채 특징적인 中細形化 過程이 진행되 어 中廣形, 廣形으로 儀器化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紀元 전후에는 金海地域을 중심으 로 발전한 변형세형동검문화가 유입되고 있다. 일본열도의 細形銅劍은 檢身길이 18~36cm로 26~32cm인 것이 80%이상을 차지하여 韓半島의 양상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일본열도 細形銅劍은 15개 형식이 설정되는 데 韓 半島와 공통된 형식은 6가지로서 일본열도에서의 독자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144) 이 는 細形銅劍의 儀器化 現狀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韓日 靑銅文化의 發展의 特性을 보여 주는 내용이다. 한편 儀器로서 韓半島에서 나타난 것은 多鈕鏡, 銅鈴, 異形銅器, 銅鐸 등으로서 이중 銅鏡과 銅鐸이 韓半島와 日本列島에서 儀器로서 공통적인 기능을 하였다. 靑銅器를 祭祀 行爲를 통해 埋納하는 儀禮와 관련된 遺蹟은 韓半島에서도 가능성이 타진되고 있으 나145) 일본지역에서는 紀元前 1세기경부터 상당한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이 시기는 일 본에서 靑銅器가 본격적으로 製作되는 時點으로 中細形段階로서 大形化된 銅矛, 銅戈의 埋納이 시작된 시점이다. 또한 埋納의 양상을 보면 辟邪的 意味의 武器形 祭器와146) 招 神的 意味의 銅鐸이 儀器用으로 제작되어 매납되고 있다. 특히, 銅鐸의 경우 馬韓社會에 존재하였던 蘇塗의 大木에 鼓와 鈴을 달았던 의식행위와 연결되는 양상으로 주목된다. 또한 일본열도에서는 지역적으로 畿內지역을 중심으로 한 銅鐸文化圈과 九州를 중심 으로 한 銅矛, 銅劍文化圈으로 대별되어 설명되고 있다.147) 한편, 두 문화의 重複地로서 中國지방과 四國지방이 존재하며 특히, 九州系 武器形祭器와 近畿系 銅鐸形 祭器가 공반 143) 吉田廣, 2008 <日本列島における武器形靑銅器の鑄造開始年代> 東アジア靑銅器の系譜(新彌生時 代のはじまり 第3卷) (雄山閣) 46~47 144) 조진선, 2005 위 책 131 145) 이상길, 2000 <靑銅器 埋納의 性格과 意味 馬山 加浦洞遺蹟 報告를 겸하여 > 한국고고학보 42 비파형동검단계의 청도 禮田洞, 성주 草田面, 개성 海坪里 등지와 세형동검단계의 마산 加浦洞, 산청 白雲里, 사천 馬島洞, 영암 新燕里, 남해 小草島, 대구 晩村洞유적 등이 이 같은 성격으로 파악되고 있다. 146) 吉田廣 編, 2001 彌生時代の武器形靑銅器(考古學資料集21) 147) 金關恕, 佐原眞, 1986 <道具と技術> 彌生文化の硏究 6 (雄出閣)

30 古代 韓日關係의 成立 되는 지역으로 廣島, 島根縣이 확인되고 있다.148) 특히, 近畿지방 彌生시대의 祭器를 대표하는 銅鐸의 原型은 韓國의 小銅鐸 즉, 銅鈴에 서 찾고 있는 데 家畜用 鈴으로부터 대한해협을 건너며 祭祀用의 鐘과 같은 기능으로 변화한 것으로 이해하였다.149) 그런데 전래시점에 한반도에서 牛馬飼育이 발달치 않은 점을 근거로 韓國의 小銅鐸이 祭祀用具였고 이것이 일본열도에 전해진 것으로 재조정되 었다.150) 또 일본 銅鐸과 관련된 銅鈴은 2개 1조로 충남지역에서 銅劍, 多鈕鏡과 함께 세트를 이루어 나타나 샤먼과 관련된 祭具로 파악되고 있다.151) 이는 銅鐸이 일본열도에 서 農耕祭具에서 政治的 祭祀象徵으로 변화하는 양상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한반도지역에서의 彌生系 靑銅儀器의 출현은 金海 良洞古墳群, 金海 內德里유적, 大邱 晩村洞유적, 比山洞유적과 固城 東外洞 貝塚 등으로서 中廣形銅矛, 中廣形銅戈, 倣 製鏡 등 九州地域 靑銅器가 발견되고 있다. 이는 주로 葬禮儀禮用으로 輸入된 것으로 파 악되고 있다.152) 일본 彌生時代 鐵器의 양상은 斧, 刀子, 鑿 등 공구류와 劍, 戈, 矛, 刀, 鏃 등 무기류로 대별된다.153) 이들 유물은 한반도와 인접한 북부 九州의 福岡縣 曲リ田 유적의 板狀鐵斧, 福岡縣 今川유적의 鐵鏃, 熊本縣 齊藤山의 鐵斧, 北九州市 長行유적의 鑄造鐵斧 등이 대 표적이다.154) 그런데 일본학계는 鐵器가 중국 戰國時代 燕에서 생산된 鐵器가 舶載되어 왔다는 입장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그 시기적 상한은 기원전 4세기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어 彌生早期의 上限年代로 인식되었었다.155) 그러나 최근의 연대상한 논의에서는 이들 유적의 유물들이 再堆積되었거나 出土가 不分明하다는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그 鐵器의 존재시기를 彌生文化 開始始點이 아닌 中期以後로 설정하고있다.156) 148) 島根縣敎育委員會, 1986 銅鐸,銅矛出土地(荒神谷遺跡發掘調査槪報2) 149) 佐原眞, 1979 銅鐸(日本の原始美術 7) 48~49 150) 佐原眞, 1987 <家畜のベルから祭りのベルへ> 古代出雲荒神谷の謎に挑む (角川書店) 249~ 253 151) 春成秀爾, 2008 <銅鐸の系譜> 東アジア靑銅器の系譜 (雄山閣) 68 152) 岩永省三, 2002 <靑銅武器儀器化の比較硏究> 西谷正 編, 朝鮮半島考古學論叢 (すずさわ書店) ; 이상길, 2000 靑銅器時代의례에 관한 고고학적 연구 (대구효성카톨릭대학 박사학위논문) 153) 이남규, 2002 <日本 古代 鐵器文化의 形成 彌生時代를 中心으로 > 강좌 한국고대사 문화 의 수용과 전파 9, 197~215 154) 정한덕, 2002 앞 책 204 155) 橋口達也, 1979 <甕棺副葬品からみた彌生時代實年代論> 九州自動車道關係埋藏文化財調査報 告 xxxi 中卷 (福岡縣敎育委員會) 156) 春成秀爾, 2008 <靑銅器と彌生時代の年代> 東アジア靑銅器の系譜 (雄山閣) 4

제2장 韓日 金屬文化의 交流 31 이들 유적에서 발견된 철기의 시기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한국학계에서 지적이 있었는 바 그 의미는 철기사용시점의 상한을 올리는 인식의 문제점을 제기하였던 것이다.157) 2. 墓制의 樣相 靑銅器를 부장한 무덤은 紀元前 10세기경부터 紀元後 1세기까지 中國 東北地域, 韓半 島, 日本列島 西部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무덤의 형식은 琵琶形銅劍段階에 積石墓, 石棺 墓, 石槨墓, 支石墓가 있고 細形銅劍段階에는 積石木棺墓, 木棺墓, 木槨墓, 甕棺墓 등이 있다.158) 靑銅器副葬 양상은 中國 東北地方은 紀元前 8~4세기 琵琶形銅劍段階, 韓半島에서는 紀元前 3세기~紀元後 1세기경 細形銅劍段階, 日本列島에서는 紀元前 2세기부터 紀元後 1세기경에 집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런데 琵琶形銅劍단계의 무덤양식은 石槨墓 와 木槨墓인데 비해 細形銅劍段階에는 積石木槨墓임이 주목된다. 이 같은 墓制의 내용에서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墓制 가운데 日本 의 支石墓는 그 계보가 韓半島에 있으며 韓半島의 支石墓 가운데 碁盤式 支石墓를 주체 로 하며 蓋石式 支石墓도 존재하는 점이 공통의 입장으로 제시되고 있다.159) 日本 支石 墓는 彌生時代 早期에서 中期時代로 편년되는 유적으로서 일본열도 가운데 九州지역에 만 한정되어 나타나 주로 서북지역인 福岡縣, 佐賀縣, 長崎縣, 熊本縣에 집중되어 있다. 특징은 우선 분포양상에서 韓半島로부터 전래되었음에도 對馬島 壹岐島에서는 확인되 지 않으며 일본 彌生時代의 중심지인 福岡平野에서도 초기 支石墓가 나타나지 않는 특 징을 보여준다. 그러나 福岡平野 주변지역인 佐賀縣이나 長崎縣에 다수 支石墓가 분포하 고 支石墓 하부양상도 다른 경우가 많다는 특징을 보여준다.160) 이 같은 상황에 의해 支 石墓의 계보는 韓半島 남부이고 첫 出現地域을 玄海灘 沿岸으로 보거나161) 기원지를 전 라남도로 보고 출현지역을 長崎縣 중심의 西北九州로 보는 견해162) 등으로 나뉘고 있다. 이남규, 2002 <위 논문> 191~194 이청규, 2007 <한일 청동기와 요시노가리 유적> 요시노가리 일본속의 고대한국 78~79 森貞次郞, 1969 <日本における初期の支石墓> 金載元博士回甲記念論叢 吉門雅高, 2003 <古代日本の支石墓> 晉州南江遺蹟과 古代日本 259 森貞次郞, 1969 위 책 ; 甲元眞之, 1978 <西北九州支石墓の一考察> 熊本大學法文論叢 41 162) 西谷正, 1997 東アジアにおける支石墓の綜合的硏究 (九州大學文學部考古學硏究室) 157) 158) 159) 160) 161)

32 古代 韓日關係의 成立 그런데 일본학계는 支石墓 수용단계에서 하부구조의 길이가 짧은 형태로 나타난 것과 支石墓 내부 주체가 土壙이나 木棺, 石棺, 甕棺 등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 점을 들어 일본 토착인 즉 繩文人이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변용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163) 또한 支石墓 발견 人骨의 성격이 繩文人 또는 그 계보를 갖는 존재라는 점을 들어 이 같은 입장을 더욱 강조하였다.164) 그러나 韓半島 支石墓 중 하부구조의 길이가 짧은 것이 여러 형태 가 존재하고 있어 이를 기준으로 日本的 變容을165) 말할 수 없으며 韓半島人의 形質的 特性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支石墓人骨의 성격을 단순히 繩文人으로만 특정할 수 없다는 지적을166) 감안할 때 일본학계의 이 같은 解釋은 신중함이 요청된다. 오히려 이 문제는 支石墓가 農耕社會의 紀念物로서 聚落, 生産施設 및 耕作地 등과 함께 일정한 空 間的 單位를 점유한 의미가 부각되어야 한다.167) 즉, 支石墓는 장기적인 儀禮 遂行이 반 복되어 血緣의 紐帶와 일정 耕作地와 領域에서의 日常生活, 紀念物을 중심으로 한 儀禮 遂行의 求心點이란 점에서168) 이는 農耕社會를 새롭게 日本列島에 전래한 集團의 象徵 物로서 파악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북부 九州의 彌生時代 墓制로서 彌生時代 전기 후반~후기 전반까지 대형토기를 사용한 甕棺墓, 土壙墓, 石棺墓 등의 墓制가 성행하였다. 이들 분묘에서 출토된 인골의 경우 북부 九州의 북부지역(사가평야, 후쿠오카평야)의 옹관묘 출토 인골은 도래계 彌生 人으로 파악되었고, 西北 九州(가라쓰평야, 나가사키현) 해안가의 토광묘, 석관묘에서 출 토된 인골은 短身으로 한반도문화를 수용한 繩文系 彌生人으로 파악되었다.169) 또한 요 시노가리 유적의 甕棺 등에서 출토된 300인의 인골들에 대한 분석에서 高身長, 高顔의 渡來系 人骨 특성이 지적되었다.170) 또한 이들 유적과 떨어진 해안선지역의 다른 유적에 서는 長身의 도래계 인골과 短身의 繩文人骨이 혼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지역별 편차를 보여주어 佐賀평야를 중심으로 有名海 연안북부로 한반도의 도래인이 집중된 것 으로 파악되고 있다.171) 한편, 甕棺墓의 경우 무문토기시대 중기~후기의 옹관묘에는 合 163) 本間元樹, 1991 <支石墓と渡來人> 兒嶋隆人先生喜壽記念論集 古文化論叢 164) 橋口達也, 1995 <墓制の變化(一) 北部九州 支石墓と大形甕棺の登場 > 彌生文化の成立 (角川 書店) 165) 春成秀爾, 1991 彌生時代の始まり (東京大學出版會) 166) 인제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편, 2003 <綜合討論> 晉州 南江遺蹟과 古代日本 374~376 167) 李相吉, 2000 靑銅器時代 儀禮에 관한 考古學的 硏究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68) 李盛周, 2007 靑銅器 鐵器時代 社會變動論 (學硏文化社) 100 169) 內藤芳篤, 1971 <西北九州出土の彌生時代人骨> 人類學雜誌 79 170) 松下孝幸, 1994 日本人と彌生人 (祥傳社) 171) 七田忠昭, 2008 <요시노가리유적吉野ケ里遺跡> 한일문화교류, 한반도와 일본 규슈 (국립

제3장 古朝鮮 三韓 三國 初期 倭와의 交流 33 口式도 있지만 成人用에 적합한 크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九州의 성인용 옹관 묘가 한반도 옹관묘 계보이지만 북부 九州에서 자체 발전한 葬法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172) 제3장 古朝鮮 三韓 三國 初期 倭와의 交流 제1절 古朝鮮時期 日本列島와의 交流 1. 古朝鮮時期 倭와의 關係 中國文獻 중 가장 먼저 朝鮮 이 등장한 기록은 기원전 7세기경 기록인 管子 에 나타나고 있는 齊나라와의 교역관련 내용이다.173) A-1. 桓公問 管子曰 吾聞海內玉弊有七筴 可得而聞乎 管子對曰 燕之玆山白金一筴也 發朝鮮之 文皮一筴也( 管子 23, 揆道) 상기 A-1 사료에 나타나고 있듯이 고조선과 중원세력과의 기록에 나타난 교류양상은 춘추시기로 파악된다.174) 또한 후속된 사료에 의하면 戰國時代 燕과의 인접성이 부각되 고 있다. A-2.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山海經 海內北經) 중앙박물관) 110 172) 七田忠昭, 2008 <위 논문> 111 173) 管子 는 春秋時代 관중의 저술로 전해지지만 戰國時代 때 편찬된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管子 輕重篇은 더 후대의 기록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 내용은 전국시대 이전부터의 전승이 전 국시대에 정리된 것으로 이해된다. 胡家聰, 1994 <再論 管子 輕重 不作于漢代而作于戰國 兼論考證的類比法之或然性> 社 會科學戰線 1994年 3期, 139~143 ; 송호정, 2003, 한국고대사속의 고조선사 (푸른역사) 45~46 174) 管子 24, 輕重甲 桓公曰 四夷不服 恐其逆政 游於天下 而傷寡人 發朝鮮不朝 請文皮태服 而以爲幣乎 一豹之皮容金而金也 然後八千里之發朝鮮可得而朝也 관자 기록의 연대성에 대해서는 일부 논란이 있으나 우선 춘추시대적 인식의 계승으로 이해된다.

34 古代 韓日關係의 成立 A-3. 蘇秦 說燕文侯曰 燕東有朝鮮遼東( 戰國策 燕策) 상기 사료에서는 燕文侯(기원전 361~333) 시기 燕의 동쪽에 존재한 조선이 언급되고 있다. 이 같이 조선과 燕의 지리적 인접성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으면서 遼東 이 바로 함 께 존재한 지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先秦 문헌에 나타나고 있는 조선의 역사적 존재에 대한 인식은 적어도 기원전 7세기경 春秋時代의 중국과 교역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戰國時代 문헌에서는 보다 구체 적으로 燕나라와의 지역적 인접성이 강조되면서 관련지명으로서 列陽, 遼東 등이 나 타나고 있다. 한편, 이 시기 古朝鮮과 倭와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료는 확인되고 있지 않 지만 이 시기관계를 추정할 수있는 다음과 같은 사료가 주목된다. A-4. 朝鮮在列陽東海北山南列陽屬燕 蓋國在鉅燕南倭北 倭屬燕( 山海經 12, 海內北經 蓋國) 상기 A-4 사료는 倭에 대한 中國史書의 최초기록으로 倭와 주변에 대한 地理的 情況 을 소개하고 있다. 종래 일본학계에서는 이들 사료 및 중국 古典에 나타난 倭, 倭人 관련 기록을 근거로 왜인의 분포를 日本列島뿐 아니라 韓半島 및 中國沿岸 地域 등으로 확대 시켜 해석하기도 하였다.175) 이에 대해서는 倭와 관련된 표현들이 대부분 交流 관련 표 현을 확대 해석하였거나176) 史料의 誤傳에 따른 解釋의 誤解임이 지적되었다.177) 그런데 이들 사료에 나타난 지리적 정황은 古朝鮮과 倭와의 교류가 전제된 상황에서 전해진 지 식에 근거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먼저 鉅燕이란 표현은 戰國時代 燕의 전성기를 표현 한 것으로 기원전 3세기 중반 燕 昭王代의 강성기로서178) 기원전 4세기경 燕과 古朝鮮 의 전쟁과정에서 고조선에 대한 공략을 통해 요동반도의 천산산맥을 계선으로 하는 영 175) 江上波夫, 1984 <東アジアにおける倭人の起源と活動> 江上波夫著作集 8 (平凡社) ; 井上秀雄, 1975 <中國古典の朝鮮と倭> 國分直一 編, 倭と倭人の世界 (每日新聞社) ; 國分直一, 1980 <倭と倭種の世界> 東ジナ海の道 倭と倭種の世界 (法政大學出版部) 富田仁 編, 1992 事 典外國人の見た日本 176) 山尾幸久, 1979 <日本書紀の中の朝鮮> 共同硏究 日本と朝鮮の古代史 (三省堂) ; 1982 <朝鮮 の兩漢の郡縣と倭人> 立命館文學 439~441 177) 沈仁安 著, 藤田友治 藤田美代子 譯, 2003 中國からみた日本の古代 (ミネルヴァ書房) 56~63 특히, 檀石槐와 관련된 倭人기록은 三國志 의 汗國기록의 왜곡임을 확인하여 倭人의 北方存 在說을 부정하고 있다. 178) 조법종, 2006 고조선고구려사연구 (신서원) 230~232

제3장 古朝鮮 三韓 三國 初期 倭와의 交流 35 역을 확보한 상황179)에서 고조선이 倭와의 교류를 통해 유지하고 있었던 倭에 대한 지 리정보를 확보하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蓋國의 지리적 관계를 설명하면서 鉅燕의 南에 蓋國이 그리고 倭의 北에 蓋國이 존재하며 倭가 燕에 속한다는 내용은 倭의 位置가 구체적으로 蓋國의 南에 위치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蓋國은 청대의 학자인 郝懿行이 山海經箋疏 에서 三國 志 高句麗傳에 나오는 蓋馬와 연결하여180) 파악한 이래 이를 따르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燕 古朝鮮 蓋國 倭로 연결되는 교류체계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기원전 4~3세기경 燕 昭王代에 燕은 古朝鮮과의 전쟁을 통해 상당한 영역을 확보 하였고 그 과정에서 古朝鮮과 蓋國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면서 이미 고조선, 개국과 연결 되고 있는 倭에 대한 지리정보 등을 확보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이때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山海經 에서 倭를 倭屬燕 이란 표현으로 나타낸 점이다. 여기서 屬 이란 표현은 政治的 隸屬이나 地理的 連屬이 아닌 往來와 交易을 표현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181) 그러나 燕, 秦시기 고조선을 공략하고 양국 상황을 표현한 屬 이란 표현의 내용을 보면 첫째, 일부 영역을 침범하여 자신의 領域化 하였거나(사료 B-1) 政治的 服屬을 약속했으나 직접 入朝하지 않았던 상황(사료 B-2,3)을 표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B-1. 自始全燕時嘗略屬眞番 朝鮮爲置吏 築鄣塞 ( 史記 115, 列傳55 朝鮮列傳)182) B-2. 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 時朝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屬秦 不肯朝會 ( 史記 115, 列 傳55 朝鮮列傳) B-3. 歷至孝文卽位 將軍陳武等議曰南越 朝鮮自全秦時內屬爲臣子 後且擁兵阻驪 選蠕觀望 ( 史記 25, 律書3) 따라서 倭屬燕 이란 표현은 燕에 의해 誇張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記錄이지만, 倭가 古朝鮮에 어느 정도 포용되어 있던 정치세력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古朝鮮을 略屬했다 179) 서영수, 2007 <고조선의 발전과정과 강역의 변동> 고조선의 역사를 찾아서 (학연문화사) 42~44 180) 三國志 魏志 東夷傳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 後漢書 東夷傳. 同 ; 李賢注云 蓋 馬, 縣名, 屬玄菟郡 <今案蓋馬疑本蓋國地> 181) 沈仁安 著, 藤田友治 藤田美代子 譯, 2003 中國からみた日本の古代 (ミネルヴァ書房) 56~57 182) 연에 의한 고조선 공략의 내용을 보여주는 사료를 보면 영역을 확보하였음을 보여준다. 三國志 韓傳 引用 魏略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鹽鐵論 8 伐攻篇 燕襲走東胡 僻地千里度遼東而攻朝鮮

36 古代 韓日關係의 成立 고 표현한 燕이 古朝鮮에 屬한 存在로 認識된 倭 를 연결지어 倭屬燕 이란 상징적 표현 이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倭와 中國과의 최초 交流 記事로 언급되는 山海經 기사의 내용은 사실 은 古朝鮮, 蓋國과 倭 사이에 유지되었던 政治的 隸屬認識 및 文化的 交流에 근거한 傳 聞이나 관련 知識과 物品의 交流 등을 근거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 사이 에 교류가 존재했다면 古朝鮮 및 蓋國을 통한 교류로서 이들의 中繼的 役割이 존재하였 음을 확인시켜준다. 이같은 내용은 위만조선 시기의 사료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2. 衛滿朝鮮時期 對外交流 衛滿朝鮮과 관련된 고고학적 자료는 細形銅劍文化로 특징지워진다.183) 위만조선시기 인 기원전 2세기경 韓半島에서 日本列島의 壹岐를 거쳐 北九州지역까지 위만조선 계통 의 細形銅劍文化와 한반도 남부지역의 無文土器文化가 전래되었다.184) 이 같은 상황은 앞서 검토한 유물의 전래양상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하였기 때문에 본 절에서는 상황을 확인시켜주는 사료자료의 검토를 진행하고자 한다. 위만조선시기 衛滿은 漢과의 관계속에서 발달된 무기와 기술 등을 확보하고 주변세력 을 장악하였다. C-1. 會孝惠 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 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眞番 臨屯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 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 史記 115, 朝 鮮列傳 55) 사료에서 주목되는 것은 위만조선은 漢과 주변 蠻夷로 표현된 세력과의 中繼的 役割 을 수행하면서185) 이를 統制한 점이다. 특히, 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이라 는 표현에서 보이듯이 위만조선은 단순히 주변세력들이 漢과 交流하는 것을 中繼한 것 183) 이청규, 2007 <청동기를 통해 본 고조선과 주변사회> 고조선의 역사를 찾아서 (고조선사 연구회, 동북아역사재단) 105~108 184) 武末純一, 2002 <일본 구주 및 근기지역의 한국계 유물> 古代 東亞細亞와 三韓, 三國의 交涉 (복천박물관) 123~126 ; 이재석, 2007 <고대 구주 해안도서와 동아시아의 교류> 구주 해안 도서와 동아시아 158~159 185) 崔夢龍, 1985 <古代國家成長과 貿易 衛滿朝鮮의 例> 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역사학회)

제3장 古朝鮮 三韓 三國 初期 倭와의 交流 37 이 아닌 統制하고 調整하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 시기 이전부터 주변세력 특히, 辰國으로 표현된 남쪽의 정치세력과는 海路 및 陸路를 통해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D-1. 初 朝鮮王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爲韓王 準後滅絶 馬韓人 復自立爲辰王 ( 後漢書 89, 東夷列傳75 三韓) D-2. 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其後絶滅 今韓人 猶有奉其祭祀者 漢時屬樂浪郡 四時朝謁 ( 三國志 卷30, 魏書30 東夷 韓) D-3. 魏略曰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 三國志 卷30, 魏書30 東 夷 韓) D-4. 魏略曰 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 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 亦與朝 鮮貢蕃不相往來 ( 三國志 卷30, 魏書30 東夷 韓) 사료 D-1 2에 의하면 衛滿이 準王을 공격하자 準王은 左右宮人(餘衆數千人)을 이끌고 海路를 통해 韓(馬韓)지역으로 피신해 그 지역의 王을 自任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D-3 사 료에서는 준왕이 海中에 있으면서 朝鮮과 往來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특기되고 있다. 이 사실은 고조선시기 이미 매우 활발한 海上交流가 韓지역과 진행되고 있었으며 그 규모가 수천 명이 동시에 이동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準王의 피난지역이 이러한 海上交流의 중간거점으로 古朝鮮과의 교류를 중계하고 통제할 수 있는 지역거점임을 보 여준다. 이는 고조선시기 蓋國과 연결된 倭와의 실제적 교류양상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준 다. 또한 사료 D-4는 陸路를 통해 위만조선 이전 및 초기부터 이미 辰國으로 상징되는 세력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록에 나타난 辰國으로 간 朝鮮相 歷谿卿 이 朝鮮과 貢蕃을 不相往來하였다 는 상황은 이미 그 전부터 유지되었던 교류관계를 이 용하여 歷谿卿이 辰國으로 정치적으로 망명하였고 그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음을 언급한 것이다. 3. 衛滿朝鮮時期 倭와의 交流 왜와 중국과의 공식적인 접촉은 漢武帝의 衛滿朝鮮 攻略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음이 다음 E사료에서 확인되고 있다. E-1. 玄菟樂浪 武帝時置 皆朝鮮濊貉句驪蠻夷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 ( 漢

38 古代 韓日關係의 成立 書 卷28下, 地理志8下) E-2. 秦幷六國 其淮泗夷皆散爲民戶 陳涉起兵 天下崩潰 燕人衛滿避地朝鮮 因王其國 百有餘歲 武帝 滅之 於是東夷始通上京 王莽篡位 貊人寇邊 建武(25-55)之初 復來朝貢( 後漢書 卷85 東夷 列傳75 倭 E-3. 時遼東太守祭肜威讋北方 聲行海表 於是濊貊倭韓萬里朝獻 故章和已後 使聘流通 ( 後漢書 卷85, 東夷列傳75 倭) E-4.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依山島爲國邑 舊百餘國 漢時有朝見者 今使譯所通三十國 ( 三國志 卷34, 魏書30 東夷 倭) E-5. 倭在韓東南大海中 依山嶋爲居 凡百餘國 自武帝滅朝鮮 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 ( 後漢書 卷 85, 東夷列傳75 倭) 상기 E-1 사료는 倭에 대한 구체적 상황이 중국기록에 나타난 첫 기록이다. 그런데 倭 가 중국사회에 구체적으로 소개된 것은 사료 E-2에 나타난 것처럼 前漢 武帝의 衛滿朝鮮 攻略 이후 倭의 存在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漢書 에 나타나고 있듯이 樂浪海 中有倭人 分爲百餘國, 以歲時來獻見云 이라는 표현은 앞서 낙랑과 현토에 대한 언급 이후 왜에 대한 이해가 바로 존재하게 되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이는 앞서 검토되었듯 이 衛滿朝鮮 이전부터 倭와의 관계가 존재하였음을 확인케 한다. 이는 漢 倭의 교류가 旣存 交流網에 대한 선지식과 네트워크 구축없이 이뤄질 수 없는 양상이란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특히, 樂浪海中이란 표현은 D-4의 準王海中이란 표현과 연결되는 것으로 고조선과 바 다로 연결된 왜와의 관련성이 이전의 상황을 계승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파악된다. 한편, E-4 5에 나타나고 있듯이 武帝滅朝鮮 이란 역사적 사건이 있은 후에 漢時有朝 見者 가 존재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古朝鮮 以來의 倭와의 交流體系와 내용은 衛滿朝鮮의 崩壞로 교류를 대신 통제하게 된 樂浪 등 郡縣勢力이 旣存의 交流網을 活用 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련 政治勢力의 도움과 協助를 통해 교류를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사실은 앞 장에서 검토한 勒島, 金海 등 南海岸 일대의 산재한 中國系 遺物이 발견되는 유적지에서 왜계 유물이 함께 반출되는 상황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교 류의 중계과정에서 기왕에 중시되지 않은 내용이 重譯 으로 표현된 교류의 중계 및 조정 역할자의 존재이다. 이에 대해서는 삼한시기 왜와의 교류내용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제3장 古朝鮮 三韓 三國 初期 倭와의 交流 39 제2절 三韓과 三國 初期 倭와의 交流 1. 東夷지역에서의 重譯外交 고조선 및 위만조선시기 이래 유지되었던 주변 세력, 특히 왜와의 교류는 한군현의 개입 이후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되고 있다. 먼저 중국세력과 삼한세력과의 관계는 후한시기 낙랑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유수 광무제의 後漢 수립(25년) 이후 중국을 재통일하고(36년) 안정을 회복하자 주변세력과의 일련의 외교관계를 재확립하였다.186) 이 가운데 後漢이 倭奴國王에게 金印을 하사한 것에 대해 이를 後漢이 倭奴國과 힘을 합쳐 韓세력을 통제하려했다는 遠交近攻策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으나187) 이는 당시 상 황과 후한의 정책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점에서 부정되고 있다.188) 오히려 왜와 중국과의 교류양상을 보면 교류를 중계한 韓의 역할과 仲裁的 機能이 주목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 된다. 즉, 倭의 中國과의 交流는 중간정보 및 교류의 仲裁役을 맡은 韓으로 상징되는 세 력과의 관계가 필수적임을 파악케 된다. 중국은 주변세력과의 관계에서 먼 遠邦 등 언어가 소통되지 않는 지역과의 교류는 언 어를 통역해 주는 존재가 전제되어 교역이 진행되었다. 이 같은 양상은 史記 를 집 필한 사마천의 자서에서 이들과의 교류가 重譯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며 東夷사회 가 그러한 대상 중의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F-1. 太史公曰 漢興以來 至明天子 獲符瑞 封禪 改正朔 易服色 受命於穆淸 澤流罔極 海外殊俗 重譯款塞 請來獻見者 不可勝道 ( 史記 列傳130, 太史公自序70) F-2. 書稱 漸于海 西被于流沙 其九服之制 可得而言也 然荒域之外 重譯而至 非足跡車軌所及 未有 知其國俗殊方者也 ( 三國志 卷30, 魏書30 東夷) 重譯이란 표현은 史記正義 에서 更譯其言 이라 표현하였듯이189) 거듭된 통역 186) 즉, 고구려는 32년 고구려견사봉공, 47년 낙랑귀부하고 44년 한국인이 낙랑에 귀복, 49년 오환대 인 내조, 부여왕 공헌, 남흉노 칭신, 52년 북흉노견사봉헌, 54년 선비대인귀복, 57년 왜노국왕 견 사봉헌 등으로 진행되었다. 187) 井上光貞, 1963 日本歷史 1ー神話から歷史へ (中央公論社) ; 王金林, 1986 古代の日本 邪 馬臺國を中心として 188) 沈仁安 著, 藤田友治 藤田美代子 譯, 2003 中國からみた日本の古代 (ミネルヴァ書房) 84~86

40 古代 韓日關係의 成立 즉, 중국(A)과 이미 교류체계가 갖춰지고 언어소통체계를 갖춘 국가나 종족(B1)에 의해 그 국가(B2)와 교류를 맺고 있었던 다른 국가나 종족(C)이 이들의 언어통역 등의 도움을 통해 중국과의 교류가 진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A B1 B2 C) 그런데 이 같은 重譯國家 間의 樣相(B2 C)이 어떠하였는지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東 夷地域에서 中國과의 重譯을 擔當했던 高句麗, 百濟와 주변 국가들의 관계에서 상황이 유추된다. 먼저, 肅愼이 高句麗에 의한 重譯을 통해 중국과 교류하고 있는 양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F-3. 景元三年(262 中川王15) 夏四月 遼東郡言肅愼國遣使重譯入貢 獻其國弓三十張 長三尺五寸 楛 矢長一尺八寸 石弩三百枚 皮骨鐵雜鎧二十領 貂皮四百枚 ( 三國志 卷4, 魏書43 少帝 陳留 王奐) F-4. 三年(459, 長壽王47) 十一月己巳 高麗國遣使獻方物 肅愼國重譯獻楛矢石砮 西域獻舞馬 ( 宋 書 本紀6, 孝武帝) F-5. 孝武帝大明三年(459, 長壽王47)十一月己巳 肅愼氏獻楛矢石砮 高麗國譯而至 ( 宋書 29, 志 19 符瑞下) 사료 F-4,5에 보이는 것처럼 肅愼이 中國과 교류하기 위해서는 重譯의 절차가 필요했 으며 이 重譯을 위해서는 중간역할을 해주는 세력인 高句麗의 존재가 부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F-4 사료에서는 高句麗가 宋에 사신을 보낼 때 바로 연이어 肅愼國이 重譯을 통해 이르렀음을 보이고 있지만 고구려의 重譯역할이 명확히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F-5 사료에 肅愼의 內朝가 高麗國譯而至 라고 나타나고 있듯이 고구려의 重譯역 할이 명확히 확인되고 있다. 또한 F-3에서 肅愼이 遼東郡과 중역을 통해 연결된 상황도 후술사료를 감안할 때 고구려에 의한 重譯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고구려의 中原王朝 高句麗 肅愼 간에 유지된 重譯外交에서 고구려가 숙신을 중국에 연결지워준 이유가 기왕에 유지되었던 高句麗와 肅愼 간의 정치적 관계에서 확 인된다. 즉, 太祖王 69년(121) 肅愼의 來獻,190) 西川王 11년(280) 肅愼을 공략해 高句麗가 肅愼을 附庸으로 삼은 기록191)과 廣開土王碑에 나오는 息愼 즉, 肅愼이192) 高句麗에 朝 189) 史記正義 重譯 更譯其言也 190) 삼국사기 15, 고구려본기3 太祖大王六十九年, 冬十月 王幸扶餘 祀太后廟 存問百姓窮困 者 賜物有差 肅愼使來 獻紫狐裘及白鷹 白馬 王宴勞以遣之 191) 삼국사기 17, 고구려본기5 西川王十一年, 冬十月 肅愼來侵 王於是 遣達賈往伐之 達賈 出奇掩擊 拔檀盧城 殺酋長 遷六百餘家於扶餘南烏川 降部落六七所 以爲附庸 王大悅拜達賈爲安

제3장 古朝鮮 三韓 三國 初期 倭와의 交流 41 貢한 사실 등을 보면 重譯을 맡은 國家는 被重譯勢力에 대해 政治的으로 上下隸屬的 關 係였음을 보여준다. 즉, F-4,5가 보여주는 重譯國家의 위상과 역할이 상하 朝貢 및 附 庸193) 관계하에서 형성된 교류관계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肅愼이 高句麗의 도움을 통해 重譯이란 외교절차를 거쳐 중 국과 교류한 사실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기존 국가인 고구려가 전제되고 이 고구려와 숙신과의 朝貢 및 附庸관계라는 차등적 교류관계가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高 句麗가 肅愼을 中原王朝에 연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 같은 사실은 百濟가 주변 小國을 中國과의 외교관계에서 重譯을 통해 같은 양상으로 연결시켜주고 있음에서도 재차 확인된다. G-1. 百濟舊來夷 馬韓之屬 普通二年 其王餘隆遣使奉表云 旁小國有叛波卓多羅前羅新羅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等附之 ( 梁職貢圖 ) G-2. 其俗呼城曰健牟羅 其邑在內曰啄評 在外曰邑勒 亦中國之言郡縣也 語言待百濟而後通焉 ( 梁書 54, 列傳48 東夷 新羅) 사료 G-1,2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梁과 新羅의 외교적 교류는 百濟를 통하여 진행되 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G-2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외교적 연결 상황이 백제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사실은 외교관계를 유지할 수있는 역량과 양국 간의 상하 정치적 위상 등에 의해 나타난 중역적 성격의 내용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新羅가 百濟의 附 庸的 存在임을 보이고 있는 다음 사료를 통해 확인된다. G-3. 新羅者 其國在百濟東南五千餘里 其地東濱大海 南北與句驪 百濟接 魏時曰新盧 宋時曰新 羅 或曰斯羅 其國小 不能自通使聘 普通二年 王姓募名秦 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 梁書 54, 列傳48 東夷 新羅) 상기 사료에 나타난 것처럼 신라는 나라가 작아 스스로 사신을 보내 교빙할 수 없었 國君 知內外兵馬事 兼統梁貊肅愼諸部落 192) 盧泰敦, 1992 <廣開土王陵碑> 譯註韓國古代金石文 1 (韓國古代社會硏究所編) 26 193) 附庸은 중국의 작제와 연결된 토지면적 중 소규모를 지칭한 표현이었는 데 점차 정치적 신속관 계를 의미하는 내용으로 사용되었다. 晉書 卷40, 志4 地理上 總, 王者之制爵祿 公侯伯子男凡五等 天子之田方千里 公侯田方百里 伯七十里 子男五十里 不能五十里者 不達於天子 附於諸侯 曰附庸 北史 本紀9, 周本紀上9 太祖文帝宇文泰, 辛亥 剋其城 戕梁元帝 虜其百官士庶以歸 沒爲奴 婢者十餘萬 免者二百餘家 立蕭 爲梁主 居江陵 爲魏附庸

42 古代 韓日關係의 成立 던 상황이었고(其國小, 不能自通使聘) 따라서 백제를 따라 양나라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 내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 확인되었듯이 高句麗 肅愼, 百濟 新羅의 例에서 확인되었듯이 重譯에 의 해 中國과의 외교관계를 형성한 국가나 세력들의 양상은 중역 담당국가와 피중역국가 및 세력 간에는 부용 관계 등 정치적 상하관계가 존재한 상황에서 중국과의 외교관계가 형성되었다. 2. 三韓과 倭와의 交流 문헌검토 三韓과 中國과의 교류에 대한 한국학계의 연구는 朝貢의 형식을 빌린 교역활동으로 교역 담당자는 富의 축적과 정치권력을 성장시켰다고 파악하였고,194) 교역형태와 교역 품 및 교역의 추이 등 삼한의 대외교역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195)가 진행되었다. 한편, 위만조선 붕괴 후 中國과 韓과의 교류는 앞서 衛滿朝鮮이 郡縣에 의해 대치되어 진행되었다. 또한, 韓과 倭와의 교류양상은 韓과 倭와의 자체적 교류와 함께 中國 郡縣 과의 交流를 韓이 中繼하는 重譯的 性格의 交流가 진행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韓과 倭 교류의 핵심은 다음 사료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철을 중심으로 銅 과 織物 등이 교류되었다.196) H-1. 弁辰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巿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 三國志 卷30, 魏書30 東夷 韓) H-2. 國出鐵, 濊倭馬韓並從巿之. 凡諸貿易, 皆以鐵爲貨 ( 後漢書 卷85, 東夷列傳75 三韓) 상기 사료에 나타난 것처럼 弁辰의 鐵은 韓, 濊, 倭 및 樂浪, 帶方의 二郡에까지 공급 되고 있음이 강조되고 있다. 이 같은 철기교역 및 철기를 활용한 貿易은 활발한 교류양 194) 李鍾旭, 1986 <韓 倭의 政治勢力과 樂浪郡 帶方郡의 關係> 韓日古代文化의 諸問題 (韓日 文化交流基金) 1~33 ; 1994 韓日古代文化의 連繫 (서울프레스) 215~237 195) 李賢惠, 1994 <三韓의 對外交易體系> 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刊行委員會編, 李基 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 上 (一潮閣) 35~57 ; 1998 韓國古代의 생산과 교역 (一潮 閣) 264~290 196) 菅谷文則, 1988 <古代の日本列島から輸出品と東アジアの交易> 橿原考古學硏究所論集 10 (吉 川弘文館) 307~316 ; 駒井和愛, 1972 樂浪 漢文化の殘像 (中央公論社) 118 삼한지역과 왜에서 함께 생산되는 縑布가 중요한 교역대상일 가능성이 높다.

제3장 古朝鮮 三韓 三國 初期 倭와의 交流 43 상을 전개하였으며 특히, 왜와 郡縣이 연결되는 과정에 있었던 서남해안의 여러 韓國 특히, 狗邪韓國이 이 같은 중계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倭와 中國 郡縣과 의 교류는 사료에 나타난 것처럼 대동강유역에서 서해안, 남해안을 거쳐 낙동강유역에 이르는 루트로서197) 郡縣과 三韓, 三韓과 倭와의 鐵交易網을 통한 교류에 근거한 것이다. H-3.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依山島爲國邑 舊百餘國 漢時有朝見者 今使譯所通三十國 從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 七千餘里 始度一海 千餘里至對馬國 ( 三國 志 卷30, 魏書30 東夷 倭) 사료 H-3에 나타나고 있는 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이란 기록에서 나타난 使驛通 이란 표현에서 중역외교관계의 상황이 보이고 있다. 여기서 驛은 譯人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198) 이것에서 알 수 있듯이 漢과 倭의 연결은 이 양자를 연결해주는 譯人의 존재로서 이뤄진 중역외교를 진행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앞서 高句麗가 肅愼을, 百濟가 新羅를 중국에 연결하여 주었듯이 倭도 中間 重譯國家를 통해 중국과 교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즉, 漢語를 할 줄 알고 倭語를 할 줄 아는 韓의 譯人들에 의한 重譯에 의해 이들의 교류가 이뤄졌음이 유추된다. 이 같은 중역의 양상은 이후 한, 후한 이후 계속되는 중국 의 역대왕조와 왜와의 교류상황에서 상당기간 진행된 상황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 이라는 사료에 보이듯이 100여 개의 나라 가운데 30여 국이 이 같은 중역외교를 통해 연결될 수 있었던 존재로서 이미 韓과의 교류망으로 연결되어 있 었던 존재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된다. 여기서 중국세력과의 교류에 관여된 譯人의 존재와 중요성을 알려주는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H-4. 魏略曰 至王莽地皇時(20-22) 廉斯鑡爲辰韓右渠帥 其邑落 見田中驅雀男子一人 其語非 韓人 問之 男子曰 <我等漢人 名戶來 我等輩千五百人伐材木 爲韓所擊得 皆斷髮爲奴 積三年 矣>鑡曰 <我當降漢樂浪 汝欲去不>戶來曰 <可>鑡因將戶來出詣含資縣 縣言郡 郡卽以鑡 爲譯 從芩中乘大船入辰韓 逆取戶來 降伴輩尙得千人 其五百人已死 鑡時曉謂辰韓 <汝還五百 人 若不者 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辰韓曰 <五百人已死 我當出贖直耳>乃出辰韓萬五千人 弁韓布萬五千匹 鑡收取直還 郡表鑡功義 賜冠幘田宅 子孫數世 ( 三國志 卷30, 魏書30 東 夷 韓) 197) 노중국, 2002 <진변한의 정치사회구조와 그 운영> 진변한사연구 273~274 198) 後漢書 標點校勘記 案, 干誤謂驛當作譯 使譯 使則使者 譯則譯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