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학보 제18권 제1호 The Korean Journal of Economics Vol. 18, No. 1(Spring 2011)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 吳 鎭 錫 ** 요 약 본고는 1940년대 전반 전력국가관리의 수립을 대상으로 정책 결정의 주체 에 주목하여 정책의 원안이 등장하여 최종안에 이르는 변천과정을 면밀하 게 분석한 글이다. 일본정부는 1930년대 말 電 氣 廳 의 발족과 日 本 發 送 電 의 설립과 함께 전력국가관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한편, 엔블록 전체의 전력국가관리체제 형성을 위해 조선총독부에 일원적 통제를 강력하게 요구 하였다. 그러나 총독부 체신국 관료들은 기존 전력통제정책의 성과를 들어 이를 회피하였다. 그 배경에는 체신국 관료들의 낙하산인사[ 天 降 ] 를 통해 형성된 관료-자본 유착관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국가관리 시행요구가 거세지면서 총독부로서도 더 이상 이를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총독부는 주무부서를 식산국으로 이관 하여 식산국장의 주도 아래 전력국가관리를 입안하도록 하였다. 한편, 전력 업자는 전력국가관리의 실시가 현실로 다가오자 되도록 국가적 통제를 회 피하면서도 독점적 지위를 유지 강화하고자 했다. 이에 총독부는 朝 鮮 臨 時 電 力 調 査 會 를 개최해 업계의 의견을 수렴하였고, 이를 반영해 1943년에 朝 鮮 電 力 管 理 令 이 공포되고 발송전 통합을 맡을 국책회사로서 朝 鮮 電 業 이 설립되었다. 그런데 신설된 조선전업의 소유와 경영은 사실상 日 本 窒 素 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국책회사의 재벌 위탁은 재벌과 국가권력의 결 합을 이르는 官 財 抱 合 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주제분류:B030106 핵심 주제어:전력국가관리체제, 전력통제정책, 조선임시전력조사회, 조선 전력관리령, 朝 鮮 電 業 * 본 논문은 2009학년도 배재대학교 교내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수행되었음. ** 배재대학교 공공행정학과 조교수, e-mail: jamesoh@pcu.ac.kr
104 吳 鎭 錫 Ⅰ. 序 言 일제강점기 한국의 전력산업은 두 번의 계기를 맞아 획기적으로 변모하 였다. 1) 첫 번째는 1930년대 초에 수립된 電 力 統 制 政 策 이었다. 당시 조선 총독부는 많은 비용이 투입되어야 하는 대규모 발전(특히 수력발전)과 장 거리 고압송전을 민간에 의존하면 난개발과 중복투자로 인한 비효율이 발 생할 것을 우려해 사전에 개발계획을 세워 통제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송전간선은 국영으로 하고 발전 배전 송전지선은 민영에 맡기기로 하는 원칙을 세웠으며, 각 지역에 난립한 민영 배전회사들은 5개 지역별로 나누 어 통합하고자 하였다. 이후 원래의 정책 의도대로 전개되지는 않았지만, 북부지역에는 대규모 수력발전소가 속속 등장하면서 각지의 소규모 화력발 전소는 폐지되었고, 서부와 남부지역의 주요 소비지까지 전기를 보낼 장거 리 고압송전선이 대거 설치되었으며, 각지의 배전회사는 지역별로 합병되 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력산업은 1940년대에 들어서 다시 획기적으로 변화하였다. 그 계기는 일본에서 시작된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이었다. 당시 일본은 전 력기근에 대처하기 위해 국책회사 설립을 통한 발송전 통제와 함께 지역별 배전회사 통합을 시작했으며, 그러한 정책을 한국에도 강력히 요구하기 시 작했던 것이다. 당시 한국의 전력산업은 애초 제기된 송전간선 국영 원칙 이 지켜지지 않았고, 각지의 수력 개발을 위해 발송전회사들이 난립하고 있던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이에 따라 전력국영론이 강하게 대두되어 제2 차 電 力 統 制 政 策 즉 전력국가관리가 시작되었다. 조선총독부는 발송전 통 합을 위해 朝 鮮 水 電, 朝 鮮 送 電, 富 寧 水 電 3개사를 모체로 朝 鮮 電 業 을 창립 하였고, 이후 이 회사에 나머지 발송전회사 6개사를 매각 혹은 합병시켜 통합을 완료하였으며, 각 지역별로 통합이 진행되던 배전회사도 최종적으 1) 堀 和 生, 植 民 地 朝 鮮 の 電 力 業 と 統 制 政 策 1930 年 以 後 を 中 心 に, 日 本 史 硏 究 9265, 1984( 堀 和 生, 朝 鮮 工 業 化 の 史 的 分 析, 有 斐 閣, 1995에 재수록); 金 景 林, 1930 년대 植 民 地 朝 鮮 의 電 氣 事 業, 史 學 硏 究 942, 한국사학회, 1990; 김경림, 식 민지시기 독점적 전기사업체제의 형성, 梨 大 史 苑 932, 1999; 김경림, 식민지 시기 조선의 독점적 전기 수급구조와 공업구조의 기형화, 梨 花 史 學 硏 究 928, 2001; 張 基 鉉, 植 民 地 期 電 力 事 業 과 工 業 化 의 展 開, 성균관대 석사학위논문, 1997; 오선실,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전력시스템 전환-기업용 대형 수력 발전소의 등장과 전력망 체계의 구축, 한국과학사학회지 930-1, 2008.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05 로 京 城 電 氣, 南 鮮 電 氣, 西 鮮 電 氣, 北 鮮 電 氣 의 4개 회사로 통합을 완료하 였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하 한국의 전력산업 동향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1930 년대 초에 수립된 전력통제정책과 함께 1940년대에 형성된 전력국가관리 체제의 형성에 대한 이해가 필수이다. 그러나 기존 연구에서는 1930년대 초에 수립된 전력통제정책과 그 후 전력산업의 구조 변화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성과를 축적해 왔지만, 2) 1940년대 전력국가관리체제의 형성과 전력 산업의 구조 변화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3) 기존 연구에서는 당시 조선총독부가 일본정부의 요구에 의하여 발송전통 합을 추진하기 위해 朝 鮮 電 業 을 설립한 과정을 밝히고, 이 회사의 소유와 경영을 거의 전적으로 日 本 窒 素 에 맡겼던 사실을 지적했다. 국가와 독점자 본의 유착이라는 시각에서 이 시기 전력국가관리의 특징을 규명했던 것이 다. 그러나 기존 연구는 전력국가관리체제의 성립을 1930년대 초의 전력통 제정책 연장선 위에서 간단하게 살피어 국영론이 등장한 배경과 제2차 전 력통제정책 즉 전력국가관리가 조선전업의 설립으로 귀결되는 과정에 대해 서는 소상히 밝히지 못했다. 말하자면 정책 결정의 주체에 주목하여 정책 형성의 과정을 면밀히 살피는 입체적인 분석에 이르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만약 정책의 성립 과정을 자세히 규명하지 않으면 자칫 전력국가관리체 제가 일본정부의 요구에 의해 단기간에 간단히 성립된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일본에서 1939년에 電 氣 廳 발족과 日 本 發 送 電 의 설립 과 함께 제1차 전력국가관리 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941년에는 일본발 송전의 강화와 배전회사 강제통합 등의 제2차 전력국가관리 로 이어지는 가운데에서도, 한국에서는 1943년에 朝 鮮 電 力 管 理 令 이 공포되기 전까지 전력국가관리체제 수립이 지연되고 있었다. 그간의 연구는 그 과정과 이유 를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 따라서 필자는 정책의 원안에서 최종안에 이르 는 변천과정을 면밀하게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전력국가관리체제의 수립이 일본에 비해 상당한 시차(time lag)가 발생한 이유를 밝히는 데에 본고의 2) 각주 1)의 논문 참조. 3) 전력국가관리에 대한 기존 연구로는 堀 和 生, 植 民 地 朝 鮮 の 電 力 業 と 統 制 政 策 -1930 年 以 後 を 中 心 に-, 日 本 史 硏 究 9265, 1984( 堀 和 生, 朝 鮮 工 業 化 の 史 的 分 析, 有 斐 閣, 1995에 재수록); 김경림, 日 帝 末 戰 時 下 朝 鮮 의 電 力 統 制 政 策, 國 史 館 論 叢 }66, 1996; 朝 鮮 電 氣 事 業 史, 中 央 日 韓 協 會, 1981, 제4편 제10장 참조.
106 吳 鎭 錫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이에 본고에서는 우선 정책 수립과정에서 정책을 입안하고 실무를 맡았 던 총독부 관료의 역할에 주목하고자 한다. 4) 일단 총독부 관료들의 원래 구상을 확인한 뒤에 이해관계자들과의 조정 과정에 의하여 원안이 어떻게 변모해 갔는지를 검토하려는 것이다. 특히 당시 한국의 전력국가관리체제 수립과정에는 일본정부-조선총독부-전력업계 삼자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조정하는 과정이 필요하였다. 당시 일본정부 는 엔블록 전체를 염두에 둔 전력국가관리를 위해 조선총독부에 일원적 통 제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었지만, 총독부 관료는 병참기지정책을 내세 워 블록 내에서의 위치 강화를 모색하는 가운데, 낙하산인사[ 天 降 ] 를 통 해 성립한 관료-자본 유착관계, 이른바 관치주의 시스템 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자치통제 를 유지하고자 했다. 5) 그리고 전력업자는 되도록 국가적 통제를 회피하면서도 독점적 지위를 유지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한국에서 수립된 전력국가관리체제는 이러한 이해관계 조정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틀 속에서 정책 형성과정을 면밀하게 분석하지 않으면 안된 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일본의 전력국가관리 수립과정을 시야에 넣어 분석에 임해야 한다. 이는 일본과의 비교를 통해서 일제하 한국의 전력국 가관리체제의 특성을 보다 명확히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Ⅱ. 전력국영론의 등장과 통제정책의 강화 모색 1937년 中 日 戰 爭 발발 이후 일제는 정치, 경제, 사회 체제를 總 動 員 體 制 로 전환하였다. 臨 時 資 金 調 整 法 (1937.9), 國 家 總 動 員 法 (1938.5) 등을 기반으로 자금, 물자, 인력을 끌어 모아 전쟁수행을 뒷받침할 군수산업에 4) 조선총독부 관료에 대해서는 木 村 健 二, 朝 鮮 總 督 府 經 濟 官 僚 の 人 事 と 政 策, 近 代 日 本 の 經 濟 官 僚, 日 本 經 濟 評 論 社, 2000; 岡 本 眞 希 子, 植 民 地 官 僚 の 政 治 史, 三 元 社, 2008, 8장; 방기중, 1940년 전후 조선총독부의 신체제 인식과 병참기지 강화정책-총독부 경제지배시스템의 특질과 관련하여, 東 方 學 志 9138, 2007; 松 田 利 彦 やまだあつし, 日 本 の 朝 鮮 臺 灣 支 配 と 植 民 地 官 僚, 思 文 閣 出 版, 2009; 이형식, 야마나시총독시대의 조선총독부, 동아시아 속의 한일관계사(하), 제이 앤씨, 2010 참조. 5) 방기중, 앞의 글, 2007.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07 집중 배분하는 경제재편성이 추진되었고, 금융, 생산, 분배, 소비, 가격, 노무 등 경제의 모든 면에서 국가의 전면적 개입을 통한 강력한 통제가 시 작되었다. 6) 이른바 戰 時 統 制 經 濟 體 制 의 구축이었다. 새로운 경제체제의 성격은 단순히 산업별 개별자본의 사적 통제에 의한 부분적, 소극적 經 濟 統 制 가 아니라 국가의 전면적, 적극적, 직접 통제를 통한 高 度 國 防 國 家 의 창출, 經 濟 新 體 制 로의 질적 전환을 의미했다. 장기전하 日 滿 支 블록 건설을 목표로 했던 일제는 한국경제의 재편성을 요구했고, 조선총독부는 병참기 지, 대륙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을 부각하면서 이에 호응했다. 인력 동원을 위한 皇 國 臣 民 化, 內 鮮 一 體 이데올로기가 극단적으로 강요되는 가운데, 군 수산업을 지원 육성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電 力 動 員 이 필요해졌고, 기간 산업인 전력산업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었다. 전력통제의 강화 주장이 등 장한 이유였다. 그런데 전력통제정책은 원래 1930년대 초 宇 垣 一 成 총독시기에 정무총 감 今 井 田 淸 德 과 전기과장 今 井 賴 次 郞 의 주도로 처음 성립된 정책이었다. 당시 관민합동의 朝 鮮 電 氣 事 業 調 査 會 (1931.10)의 심의를 거쳐 주요 수력 발전소의 개발에 따라 한반도 전역의 수요지에 전기를 보내는 송전망을 구 축할 발전 및 송전망 계획 (1932.3)이 확정되었고, 朝 鮮 電 氣 事 業 令 의 제 정(1932.2)을 비롯한 일련의 법안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개발의 주요 원칙 도 확정되었다. 발송전을 분리하여 송전간선은 국영으로 하고 발전 및 배 전, 송전지선은 민영에 맡기기로 하였고, 향후 배전사업은 전국을 5개 구 역( 南 鮮, 湖 南, 中 鮮, 西 鮮, 北 鮮 )으로 나누어 통합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총독부는 전력개발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민간 자본을 유치해 개발에 착수 하는 가운데 전원개발을 맡은 기업에 대한 종합적인 지원 시스템을 구축하 6) 小 林 英 夫, 總 力 戰 體 制 와 植 民 地, 日 帝 末 期 파시즘과 韓 國 社 會, 청아출판사, 1988; 金 仁 鎬, 太 平 洋 戰 爭 期 (1940~1945) 日 帝 의 조선 공업통제와 생산력 확 충, 韓 國 史 硏 究 9 90, 1995; 김인호, 太 平 洋 戰 爭 期 朝 鮮 工 業 硏 究, 新 書 苑, 1998; 김인호, 식민지 조선경제의 종말, 신서원, 2000; 裵 城 浚, 전시체제기 (1937~45) 纖 維 工 業 의 통제와 工 業 組 合, 韓 國 民 族 運 動 史 硏 究, 于 松 趙 東 杰 先 生 停 年 紀 念 論 叢 刊 行 委 員 會, 1997; 裵 城 浚, 일제말기 통제경제법과 기업통제, 韓 國 文 化 927, 2001; 방기중, 1930년대 조선 농공병진정책과 경제통제, 일 제 파시즘 지배정책과 민중생활, 혜안, 2004; 방기중, 조선 지식인의 경제통제 론과 신체제 인식, 일제하 지식인의 파시즘체제 인식과 대응, 혜안, 2005; 방 기중, 1940년 전후 조선총독부의 신체제 인식과 병참기지강화정책-총독부 경제 지배시스템의 특질과 관련하여, 東 方 學 志 }138, 2007 참조.
108 吳 鎭 錫 였다. 표 1 전력통제정책에 의한 배전회사의 통합 과정 北 鮮 合 同 電 氣 西 鮮 合 同 電 氣 京 城 電 氣 南 鮮 合 同 電 氣 1939.11.* 합병 1938.4. 14 3사 합동 朝 鮮 電 氣 會 寧 電 氣 雄 基 電 氣 咸 南 合 同 電 氣 1934.4.30 양수 : 城 津 電 氣, 1937.3.1 합병 : 茂 山 電 氣 元 山 水 力 電 氣 (상호변경) 1935.11.1 합병 : 北 靑 電 燈, 咸 南 電 氣, 北 鮮 電 力, 1936.10.1 양수 : 大 興 電 氣 咸 興 支 店 ( 咸 興 電 氣 ), 1937.11.1 합병 : 惠 山 鎭 電 氣 朝 鮮 電 氣 興 業 (상호변경) 1933.12.6 합병 : 鎭 南 浦 電 氣, 沙 里 院 電 氣 ( 沙 里 院 面 營 ), 西 鮮 電 氣 ( 海 州 電 氣 ), 朝 鮮 送 電 ( 安 州 電 氣 ), 1936.11.1 합병 : 開 城 電 氣, 1936.11.1 양수 : 江 界 電 氣, 1937.1.1 합병 : 新 義 州 電 氣 ( 鮮 滿 殖 産, 定 州 電 氣, 宣 川 電 氣 ), 1937.4.* 합병 : 長 淵 電 氣, 1938.1.1 양수 : 平 壤 府 營 電 氣 日 韓 瓦 斯 電 氣 (상호변경 : 漢 城 電 氣, 韓 美 電 氣 ) 1912.7.10 매수 : 仁 川 電 氣, 1928.9.24 매수 : 水 原 電 氣 1939.4.1 매수 : 春 川 電 氣, 1942.1.1 합병 : 金 剛 山 電 氣 鐵 道 1937.4. 10 6사 합동 朝 鮮 瓦 斯 電 氣 大 興 電 氣 南 朝 鮮 電 氣 天 安 電 燈 木 浦 電 燈 韓 國 瓦 斯 電 氣 (상호변경, 釜 山 軌 道, 釜 山 電 燈 ) 1927.1.17 양수 : 密 陽 電 氣, 1930.8.16 양수 : 晉 州 電 氣 ( 三 千 浦 電 氣, 泗 川 電 氣 ), 1935.3.8 양수 : 咸 安 電 氣, 1935.10.22 양수 : 京 城 電 氣 鎭 海 支 店, 京 城 電 氣 馬 山 支 店 大 邱 電 氣 (상호변경) 1918.8.4 합병 : 咸 興 電 氣, 1920.7.7 합병 : 光 州 電 氣, 1920.10.22 합병 : 浦 項 電 氣, 1926.6.2 합병 : 統 營 電 氣, 1928.1.30 합병 : 全 南 電 氣, 1932.10.21 합병 : 靈 光 電 氣, 南 原 電 氣, 1936.4.15 합병 : 固 城 電 氣, 安 東 電 氣, 1936.2.26 : 慶 州 電 氣, 1936.10.1 합병 : 九 龍 浦 電 氣, 甘 浦 電 氣, 河 東 電 氣, 蔚 山 電 氣 ( 蔚 山 本 府 電 氣 ), 盈 德 電 氣, 巨 濟 電 氣, 麗 水 電 氣, 濟 州 電 氣, 順 天 電 氣, 筏 橋 電 氣 1927.8.30 합병 상호변경 : 群 山 電 氣, 全 北 電 氣 [ 中 外 電 氣 全 州 支 店 ( 全 州 電 氣 )], 1927.10.24 합병 : 井 邑 電 氣, 1929.4.6 합병 : 江 景 電 氣 1936.11.1 합병 : 溫 陽 電 氣, 平 澤 電 氣, 忠 南 電 氣, 瑞 山 電 氣, 大 川 電 氣 1936.10.1 합병 : 昭 和 電 氣, 寶 城 電 氣, 莞 島 電 氣, 1936.11.1 합병 : 長 興 電 氣 1919.4.11 양수 : 淸 州 電 氣, 1929.5.20 합병 : 忠 州 電 大 田 電 氣 氣, 1936.10.1 합병 : 公 州 電 氣, 利 長 電 氣 1938.9.7 합병 : 城 南 電 氣, 1939.8.* 합병 : 江 陵 電 氣 자료: 條 木 敬 雄, 躍 進 途 上 にある 朝 鮮 電 氣 事 業 の 槪 觀, 朝 鮮 電 氣 協 會, 1937, 45~54쪽; 朝 鮮 電 氣 要 覽, 각년도판. 비고: ( )안은 합병, 양수 혹은 개편한 회사.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09 1930년대 전력산업은 크게 보아 이 원칙에 따라 개편되고 있었다. 7) 우 선 배전회사들은 원래 5개 구역으로 나누어 통합하기로 했으나 통합과정에 서 4개 구역( 南 鮮, 中 鮮, 西 鮮, 北 鮮 )으로 변경되어 부단한 합병을 추진하 고 있었다. 먼저 북부지방에서는 1933년 12월 朝 鮮 電 氣 興 業 과 鎭 南 浦 電 氣, 沙 里 院 電 氣, 西 鮮 電 氣, 朝 鮮 送 電 의 합병으로 西 鮮 合 同 電 氣 (이하 西 電 ) 가 등장한 이래, 1935년 11월 元 山 水 力 電 氣 와 北 靑 電 燈, 咸 南 電 氣, 北 鮮 電 力 의 합병으로 咸 南 合 同 電 氣, 1938년 4월 朝 鮮 電 氣, 會 寧 電 氣, 雄 基 電 氣 의 합병으로 北 鮮 合 同 電 氣 (이하 北 電 ) 같은 거대 배전업체가 등장하였 고, 남부지방에서는 朝 鮮 瓦 斯 電 氣, 大 興 電 氣, 南 朝 鮮 電 氣, 天 安 電 燈, 木 浦 電 燈, 大 田 電 氣 등을 중심으로 인근의 군소전기회사들을 합병하다가 1937 년 4월 大 興 電 氣 를 중심으로 6개 회사가 합병해 南 鮮 合 同 電 氣 (이하 南 電 ) 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1939년 4월에는 京 城 電 氣 (이하 京 電 )가 춘천전기 를 매수하고 1939년 11월에는 북전이 咸 南 合 同 電 氣 를 합병해, 중부지역 의 金 剛 山 電 氣 鐵 道 를 제외하면, 북전, 서전, 경전, 남전 등 4개사 중심의 배전통합이 일차 완성되었다(표 1). 배전회사들의 통합에 따라 각 지역의 소규모 화력발전소들은 폐지되었고, 배전회사들은 대규모 수력 화력발전 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전국적인 송전망에 따라 배급받아 최종 소비자들에 게 전달하는 전력소매회사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한편, 발전 및 송전망 계획에 따라 대규모 수력 화력발전소의 개발이 속속 이어졌다. 1920년대 후반에 허가된 부전강발전소의 성공에 따라 총 독부의 인정을 받고 있었던 日 本 窒 素 (이하 日 窒 )가 늘어나는 자사 공장의 전력수요에 충당할 새로운 전원개발을 희구하자, 1933년 4월 총독부는 원 래 三 菱 에게 부여했던 장진강 개발권을 회수해 생산전력의 1/2을 공공용 으로 공급하도록 조건을 붙여 일질에게 허가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일질에 서는 그해 5월 長 津 江 水 力 電 氣 (후에 朝 鮮 水 力 電 氣 로 개칭함)를 설립해 즉 7) 今 井 賴 次 郞, 電 氣 事 業, 朝 鮮 鐵 道 協 會 會 誌 915-3, 1936.3, 2~6쪽; 安 達 遂, 朝 鮮 に 於 ける 發 送 電 網 の 現 狀 及 其 の 對 策,9 朝 鮮 遞 信 9 216~217,9 1936.6~ 1936.7; 統 制 される 朝 鮮 の 電 氣 事 業, 朝 鮮 公 論 924-12, 1936.12, 13~15쪽; 條 木 敬 雄, 躍 進 途 上 にある 朝 鮮 電 氣 事 業 の 槪 觀, 朝 鮮 電 氣 協 會, 1937; 今 井 賴 次 郞, 朝 鮮 に 於 ける 電 氣 事 業 一 斑 (1)~(2), 朝 鮮 鐵 道 協 會 會 誌 916-10~16-11, 1937.10~11; 朝 鮮 電 氣 事 業 の 現 段 階, 朝 鮮 公 論 925-12, 1937.12, 42~44 쪽; 電 氣 事 業 統 制 の 成 果 を 觀 る, 朝 鮮 公 論 925-12, 1937.12, 45~47쪽; 岸 謙, 朝 鮮 に 於 ける 電 氣 事 業, 京 電 }3-2, 1939.6, 23~57쪽.
110 吳 鎭 錫 각 전원개발에 착수했다. 8) 그리고 남쪽에서는 총독부가 日 本 電 力 聯 盟 을 유치해 동척, 배전회사들과의 합동으로 영월탄광을 이용한 화력발전소 건 립을 추진케 했다. 1935년 7월에는 이를 담당할 朝 鮮 電 力 이 설립되었다. 북쪽의 장진강수력발전소와 남쪽의 영월화력발전소를 축으로 시작된 전원 개발은 이후 급속도로 전개되었다. 1936년 3월에 장진강수전이 허천강개 발권을 획득해 발생전력량의 1/3을 자가용으로 확보하였고, 1937년 9월 에 일질은 만주국, 동척과 합동으로 압록강의 수풍, 의주, 운봉의 대규모 수력발전소 건설을 목적으로 한 朝 鮮 鴨 綠 江 水 力 電 氣 를 설립하고 발생전력 의 1/6을 자가용으로 확보했다. 한편, 국책회사의 전력업 진출도 이어졌다. 1936년 8월에는 東 洋 拓 殖 (이하 東 拓 )이 두만강 개발을 위해 富 寧 水 力 電 氣 를 설립하였고, 1938년 1 월에는 동척이 昭 和 電 工 과 합자로 장진강 하류를 개발하는 江 界 水 力 電 氣 를 설립하였으며, 1940년 3월에는 역시 동척이 조선전력과 합동으로 섬진강, 금강을 개발하려는 南 鮮 水 力 電 氣 를 설립하였다. 한편, 朝 鮮 殖 産 銀 行 (이하 殖 銀 )도 자회사인 日 本 高 周 波 重 工 業 의 전력수요에 충당하기 위해 화천과 청평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할 목적으로 1939년 2월에 漢 江 水 力 電 氣 를 창립 하였다(표 2). 뒤늦게 동척과 식은을 비롯한 국책회사가 발전회사를 설립하기는 했지 만, 대부분 물자부족 때문에 발전소를 제때 완공하지 못했다. 따라서 완공 된 발전소의 대부분은 일질 소유였기 때문에 한국내 전력업계에서 일질의 위치는 막강했다. 1942년경 일질은 기설 수력발전력의 94.5%(공사중인 것은 77.2%)를 점유했고 실제발전량의 90%, 사용전력량의 61.7%를 차 지할 정도였다. 9) 거대한 수력 화력발전소의 건설에 따라 발전소와 수요지를 연결할 장거 리 고압송전망의 구축도 진행되었다. 10) 우선 장진강발전소의 전력을 서선 지역과 경성에 공급하기 위한 송전망을 건설할 목적으로 朝 鮮 送 電 이 설립 되었다. 이 회사는 1935년 11월에 장진강-평양을 연결하는 154kV급 송 8) 일질의 전원개발에 대해서는 姜 在 彦 編, 朝 鮮 における 日 窒 コンツェルン, 不 二 出 版, 1985, 제3장 참조. 9) 朝 鮮 電 力 事 業 の 責 務 加 重 と 統 制 强 化, 朝 鮮 産 業 の 決 戰 再 編 成, 東 洋 經 濟 新 報 社, 1943, 36~38쪽. 10) 韓 國 電 氣 百 年 史 上, 韓 國 電 力 公 社, 1989, 315~322쪽.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11 표 2 주요 발송전회사의 영업상태(1942년) 회사명 설립일 자본금 주요 발송전설비 자본구성 특이사항 朝 鮮 水 力 電 氣 1933.5.11 30,000만원 (30,000만원) 朝 鮮 送 電 1934.5.16 3,000만원 (30,000만원) 朝 鮮 電 力 1935.7.1 富 寧 水 力 電 氣 朝 鮮 鴨 綠 江 水 力 電 氣 江 界 水 力 電 氣 漢 江 水 力 電 氣 南 鮮 水 力 電 氣 北 鮮 水 力 電 氣 3,000만원 (2,250만원) 1936.8.17 1,000만원 (500만원) 1937.9.7 10,000만원 1938.1.25 10,000만원 (7,000만원) 1939.2.1 2,500만원 (1,250만원) 1940.3.30 2,000만원 (2,000만원) 1942.8.21 10,000만원 (2,500만원) 長 津 江 (326,500kW) 虛 川 江 (171,100kW) 220kV급 365.4km 110kV급 511.1km 下 岐 川 - 平 壤 (199.9km) 평양-경성(187.5km) 寧 越 火 力 (107.000kW) 영월-대구(169.8km) 상주-대전( 64.7km) 대구-진영( 66.1km)** 富 寧 川 (28,000kW) 水 豊 (700,000kW) 義 州 (200,000kW) 雲 峰 (500,000kW) 기타(584,000kW) 장진강하류 (305,400kW) 화천(81,000kW) 청평(39,600kW) 섬진강(27,700kW) 금강(40,720kW) 豆 滿 江 지류 西 頭 水 (312,000kW) 600만주, 대주주 日 本 窒 素 肥 料 1941.7 상호변 경( 元 長 津 江 水 電 ) 60만주 중 朝 鮮 水 電 (263,600), 동척 (101,800), 서선합전(100,200), 일 1940.5 증자 본질소비료(47,600), 경성전기 (41,000)*, 북선합전(32,000) 60만주 중 동척(224,100), 남선합전 (345,600), 日 電 證 券 (17,300) 20만주 중 동척(199,400) 200만주 중 만주국(999,000), 조선 수전(400,000), 동척(400,000), 조 선송전(200,000), 永 井 四 郞 (1,000) 1939.2 日 本 電 力 聯 盟 탈퇴 발생전력을 朝 鮮 電 氣 冶 金 에 공급 200만주 중 동척(1,499,300), 소화 발생전력을 朝 전공(199,500), 남선합전 鮮 製 鐵, 신규경 (100,000),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금속공업용전원 (100,000), 발송전흥업(50,000), 에 충당 동경전등(49,900) 50만주 중 조선식산은행(80,000), 경춘철도(80,000), 일본고주파중공업 (80,000), 조선신탁(20,000), 조선 저축은행(20,000), 小 林 采 男 (20,000), 경성전기(10,000)* 40만주 중 동척(199,700), 조선전력 (199,200) 200만주 중 朝 鮮 水 電 (1,999,200) 경인지방에 송 전, 각종산업수 요에 충당 자료: 電 氣 事 業 槪 況, 朝 鮮 總 督 府, 1942.10; 朝 鮮 銀 行 會 社 組 合 要 錄, 東 洋 經 濟 新 報 社, 1942; 營 業 報 告 書 ; 朝 鮮 産 業 の 決 戰 再 編 成, 東 洋 經 濟 新 報 社, 1943; 第 30 回 電 氣 事 業 要 覽, 朝 鮮 總 督 府 殖 産 局, 1943. 비고: 자본금의 ( )안은 불입자본금. *는 원래 금강산전기철도 소유주식이었으나 1942년 1 월 합병에 따라 경성전기 소유주식이 되었음. **는 1942년 현재 공사중임. 전선 199.9km를 건설하였고, 1937년 12월에 평양-경성을 연결하는 154kV급 송전선 187.5km를 준공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남쪽에서는 朝 鮮 電 力 이 직접 송전망 건설에 착수해 영월에서 대구, 대전, 진영을 연결하 는 154kV급 송전선 300.6km를 건설하였다. 북선지방에서는 조선수전이 장진강발전소로부터 청진, 단천 등지를 연결하는 110kV급 송전선
112 吳 鎭 錫 511.1km와 허천강발전소로부터 청진, 흥남 등지를 연결하는 220kV급 송전선 365.4km를 부설했다. 요컨대, 대체로 북선과 남선에서는 조선수 전과 조선전력이 송전사업을 발전사업과 겸하고 있었고, 서선과 중선에서 는 민영회사인 조선송전이 송전사업을 맡고 있었다. 1930년대 초 전력통제정책의 수립 이후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던 한국의 전력산업은 통제정책의 실시 초기부터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우선 통제정책의 주요 원칙의 하나였던 송전간선 국영 원칙이 처음부터 지켜지 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총독부는 재정 부족을 이유로 들어 송전간선 국영 원칙을 유보하고, 그 대신 발전회사와 배전회사가 참여하는 민영회사인 조 선송전을 설립해 송전망 건설을 담당케 하였다. 총독부는 조선송전이 설립 에 참여한 발전회사와 배전회사의 상호 견제 하에 경영되므로 공익을 충분 히 관철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상 이 회사의 설립과 경영은 일질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때문에 유력한 수요처의 하나인 경성전기는 조선송전 설립과정에서 일질 주도에 불만을 품고 참여를 거부하는 일이 일어났다. 총독부의 의도가 손상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북선지방과 남선지방의 경우 에는 발전회사가 송전사업을 겸영함으로써 발송전 분리의 원칙마저 깨져 있었다. 송전선 부설을 민영에만 의존할 경우 총독부의 정책 목적에 부합한 송전 망 부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 문제점은 총독부도 인 지하고 있었다. 예컨대 이는 산금정책 추진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1930년 대 후반 총독부는 국제수지 적자와 정화 부족을 메우기 위한 일제의 금 수 요 증대에 따라 朝 鮮 産 金 令 과 産 金 5 個 年 計 劃 을 통해 금의 산출을 늘리고 수집을 강화하는 산금정책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11) 이에 따라 금 매 입가격 인상, 탐광 및 각종 설비투자에 대한 보조금 지급, 금산도로 개설, 자금대출 지원 등 여러 가지 지원책이 강구되었는데, 특히 광산 채굴과 정 련 작업에는 안정적인 전력공급이 긴요했다. 특히 광산 채굴과 정련 작업 에는 안정적인 전력공급이 긴요했다. 그러나 이를 위한 송전선 부설에는 다액의 자금이 소요되었고, 민간 전기회사들은 공사비 부담과 폐광에 따른 투자 손실을 우려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상태였다. 이에 총독부는 금 11) 朴 基 炷, 1930 年 代 朝 鮮 産 金 政 策 에 關 한 硏 究, 經 濟 史 學 912, 1988; 박현, 조 선총독부의 戰 時 經 濟 政 策, 1937~1945,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2009.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13 광까지 직접 송전선을 건설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른바 國 有 産 金 送 電 線 으로 1938년부터 1941년까지 4년간 도합 5,300여만원이 투입되어 66kV 급 송전선 2,077.6km와 22kV급 1,203.9km이 건설되어 동급 전체 송전 선의 각각 52.2%와 25.3%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12) 총독부는 늘어나 는 산금송전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1938년 4월에 山 金 係 를 신설하였고, 13) 1940년 3월에는 전기과를 전기제1과와 전기제2과로 분리해 전기제2과에 국유산금송전선의 건설 및 보수 업무를 맡겼다. 14) 그러나 막대한 비용을 투입해 건설한 국유산금송전선은 대개 광산지역까지의 송전지선이었지 송 전간선은 아니었다. 그리고 운용마저 민간회사에 위임해 당시로서는 이례 적인 國 有 民 營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한편, 조선전력의 영월화력발전소 운전이 여의치 않아 남부지역의 전력 공급이 불안정해지자, 총독부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수풍발전소로부터 전기를 끌어오기 위한 고압송전선 건설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부평-대전 간 154kV급 송전선 건설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15) 이른바 南 北 連 絡 送 電 幹 線 이었다. 이 노선은 1941년 3월에 착공되어 1941년 11월 1일에는 부 평-천안구간이 일단 준공되어 경전에서 운영하는 수색-부평선(66kV)과 남 전에서 담당한 천안-대전선(66kV)과 연결하여 임시 개통되었다. 16) 이렇 게 보면, 애초 전력통제정책의 수립시에 송전간선은 국영으로 하기로 원칙 을 정했지만, 실제 과정에서는 부평-대전 간의 남북연락송전간선만이 이 원칙에 따라 건설되었고 나머지는 민간회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총독부의 송전간선 국영 원칙은 처음부터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이후에도 별다른 개선의 의지를 보이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발전과 관련된 문제점도 발생하고 있었다. 그동안 개발된 발전지 점이 대부분 북쪽에 편재되어 있어서 남쪽은 저렴한 수력전기의 혜택을 입 지 못한 채 화력발전에 의존해 남쪽의 전기요금은 상대적으로 고액으로 유 12) 朝 鮮 電 氣 事 業 史, 中 央 日 韓 協 會, 1981, 199~217쪽. 13) 朝 鮮 商 工 新 聞 91938.3.29. 14) 朝 鮮 總 督 府 官 報 9제3948호, 1940.3.20; 每 日 新 報 91940.3.21. 15) 朝 鮮 電 氣 協 會 雜 誌 9 30-3,9 1941.3,9 54~55쪽;9 朝 鮮 電 氣 協 會 雜 誌 9 30-6, 1941.6, 52~53쪽; 朝 鮮 電 氣 協 會 雜 誌 9 30-8, 1941.8, 43~44쪽; 朝 鮮 電 氣 協 會 雜 誌 930-10, 1941.10, 38~39쪽. 16) 每 日 新 報 91941.10.23, 11.2, 11.5. 1943년 10월 4일에 부평-대전 구간은 조 선전업에 의해서 154kV급으로 승압되었다. 每 日 新 報 91943.10.8.
114 吳 鎭 錫 지되고 있었다. 또한 일질이 발전과 수요의 대부분을 장악함에 따라 일질 과 다른 산업자본들 간의 갈등도 발생하고 있었다. 일질은 어렵게 개발한 전력을 일부만 자가용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를 공공용으로 공급해야 하는 조건에 불만을 가졌고, 17) 다른 산업자본들은, 우량한 발전소를 장악한 일 질이 저렴한 전기를 자사의 전력 소비에 우선적으로 사용함에 따라, 자유 로이 전기를 사용할 수 없는 현실에 불만을 가졌다. 그러한 사정은 日 本 高 周 波 重 工 業 의 사례가 잘 보여준다. 18) 高 周 波 製 鍊 法 이라는 새로운 기술로 금속생산에 뛰어든 일본고주파중공업은 소요 전력량 확보를 둘러싸고 일질 계인 장진강수전과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독자적인 전원개발을 열망해 모 회사인 식은을 중심으로 계열사들을 동원해 漢 江 水 力 電 氣 의 설립에 나섰던 것이다. 표 3 제3차 수력조사에 의한 수력발전능력 조사 시점 구분 지점수 발전력(kW) 세분 지점수 발전력(kW) 1939년 6월말 1944년 7월말 발전 개시 17 550,850 기허가수력 37 2,041,350 공사시행중 공사미착수 20 1,490,500 미허가수력 108 2,521,850 미허가수력 108 2,521,850 합계 145 4,563,200 합계 145 4,563,200 기허가수력 51 2,828,610 발전 개시 31 1,285,990 공사시행중 11 1,119,400 공사미착수 9 423,220 조사 완료 39 1,264,860 미허가수력 109 2,158,610 조사 미완 70 903,320 합계 160 4,996,750 합계 160 4,996,750 자료: 朝 鮮 電 氣 統 制 ニ 關 スル 意 見 書, 遞 信 局 電 氣 課, 1939.9( 民 族 問 題 硏 究 所 編, 日 帝 下 戰 時 體 制 期 政 策 史 料 叢 書 第 82 卷, 한국학술정보(주), 2001에 수록); 第 86 回 帝 國 議 會 說 明 資 料, 日 帝 下 戰 時 體 制 期 政 策 史 料 叢 書 第 23 卷, 한국학술정보(주), 2001. 비고: 국경하천의 발전력은 1/2만 계산됨. 한편, 당시 일질 이외에 다른 발전회사들의 상당수는 공기 지연이나 경 영난에 빠져 있었다. 강계수전이나 한강수전, 남선수전은 자재 입수난과 17) 죽자고 공장용 전력을 위해 발전소를 만들면 고스란히 공공용으로 충당되어 버린 다. 그 구멍을 메우려고 발전소를 만들면, 다시. 久 保 田 豊, 財 閥 回 顧 錄 6, 大 韓 書 籍 公 社, 1983, 46쪽. 18) 林 茂 樹, 南 朝 鮮 最 大 の 電 源 開 發, 有 賀 さんの 事 蹟 と 思 い 出, 同 編 纂 會, 1955, 202~204쪽; 井 原 潤 次 郞, 高 周 波 と 私, 위의 책, 367~375쪽.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15 예상보다 많은 공사비 때문에 공기가 지연되었고, 19) 영월화력을 경영하던 조선전력은 석탄의 일본 적출을 중시하는 日 本 電 力 聯 盟 과 전력의 안정적 공급을 우선시하는 현지 배전회사측의 경영방침을 둘러싼 대립 때문에 갈 등을 겪고 있었다. 결국 양측은 갈등을 극복하지 못해 1939년 1월에 일본 전력연맹이 임원과 자본을 조선전력에서 철수하는 조치를 단행했고, 이후 조선전력은 무배당에 이를 정도로 경영이 악화되어 있었다. 셋째, 향후 개발 예정인 수력전원의 경제성이 점차 악화되고 있는 문제 였다. 1936년부터 한만국경의 압록강, 두만강을 비롯하여 각지의 하천을 대상으로 제3차 수력조사가 실시된 결과 제2차 수력조사 결과(294만kW) 에 비해 발전능력이 크게 늘었음이 확인되었다. 20) 1939년 6월말 현재 145개 지점에서 456만kW이나 조사되었고, 1944년 7월말에는 160개 지 점 500만kW에 달했다. 그러나 개발허가를 받지 못한 발전지점은 1939년 6월 말 현재 108개 지점 252만kW에 달했고, 1944년에도 여전히 216만 kw에 이르렀다. 이처럼 미허가수력이 크게 줄지 않은 이유는 경제성이 우 수한 전원이 이미 개발됨에 따라 향후 개발될 전원은 상대적으로 경제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는 전시통제경제가 진 행되는 가운데 자재, 기술, 노동력 확보가 어려워지고 전시인플레이션 하 에서 공사비도 급증하고 있었다. 경제성은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따 라서 공사중인 발전소가 개통되면 원가 상승에 따라 전기요금이 인상될 것 이라든지, 기존의 방식대로 민간 기업가에게 전원개발을 맡길 경우 이익을 고려하는 민간기업의 속성상 향후 적극적인 전원개발이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전시경제하 전력수요가 급증하는 상태 에서 경제성이 낮은 수력지점도 적극적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총독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 朝 鮮 電 氣 協 會 雜 誌 930-3, 1941.3, 54쪽. 20) 제3차 수력조사가 일단 종료된 이후 1940년부터 제4차 수력조사가 다시 시작되었 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河 合 和 男, 第 二 次 水 力 調 査 と 朝 鮮 總 督 府 官 僚 の 水 力 認 識, 日 本 の 朝 鮮 臺 灣 支 配 と 植 民 地 官 僚, 思 文 閣 出 版, 2009 참조. 그러나 여기에서는 원래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실시될 예정이었던 제3차 수력조사가 계획을 변경 하여 해방이전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았다. 1939년과 1944년의 조사 결과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사실로 보아도 수력조사가 별도로 진행되었다고 보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당시 전기과장도 한국의 수력전기 특성을 소개하면서 제3차 수력조사 결과를 제시하고 있었다. 角 永 淸, 朝 鮮 電 力 資 源 の 特 質 と 價 値, 朝 鮮 9352, 1944. 9, 66~71쪽.
116 吳 鎭 錫 넷째, 1930년대 후반에 배전회사들의 통합이 추진되고 있었지만, 원래 의 총독부 계획대로 원활히 진행되지 못하였다. 전술하였듯이 조선송전 설 립과정에서 경전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인해 총독부와 경전의 관계는 급속 히 냉각되었고, 이후 배전 통합 과정은 한때 한국 최대의 전기회사였던 경 전이 배제된 채 진행되고 있었다. 그 결과 원래 南 鮮, 湖 南, 中 鮮, 西 鮮, 北 鮮 등 5개 지역으로 통합하려던 계획은 南 鮮, 中 鮮, 西 鮮, 北 鮮 등 4개 지역으로 수정되었고, 경전은 1939년 4월 춘천전기를 매수할 때까지 단 한 곳의 전기회사도 통합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게다가 발 송 배전을 겸영하는 金 剛 山 電 氣 鐵 道 는 일찍부터 경전과의 합병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계획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양사의 합병은 경전과 총독부의 관계가 회복되고 나서야 1942년 1월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로써 배전회사들의 통합은 최종 완료되었다. 한편, 당시 일본의 전력국가관리 시행에 따른 외부적 요인도 전력통제정 책의 재검토를 요청하는 배경이 되었다. 만주사변과 금수출재금지를 계기 로 인플레이션 정책으로 전환한 일본경제는 공업생산이 급속도로 회복하는 한편 전쟁의 확대에 따라 군수산업의 생산력 확대가 필요하게 되었고, 생 산력 발전의 기반이 될 저렴한 전기의 풍부한 공급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 기되었다. 21) 이에 따라 군부와 혁신관료 사이에서는 전력산업에 대한 강 력한 통제를 기도하려는 전력국영론 이 제기되어 臨 時 電 力 調 査 會 (1937. 10)를 설치해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케 하였다. 결국 업계의 반대에도 불구 하고 발송전을 담당할 특수회사 설립 등을 골자로 하는 電 力 國 策 要 綱 이 최 종 결정되었고, 1938년 초 전력관리법을 비롯한 관련 법안을 정비한 뒤 그해 5월 국가관리의 시행기관으로 電 力 管 理 準 備 局 (1939년 4월 電 氣 廳 으 로 개편)이 발족되었으며, 1939년 4월 민간전기사업자들의 설비가 강제로 출자되어 日 本 發 送 電 株 式 會 社 가 설립되었다. 일본발송전은 업무수행상 필 요한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받았지만, 역원의 임명과 중요사항은 정부의 승인을 필요로 해 사실상 일본정부가 운영을 맡았다. 이른바 제1차 電 力 國 家 管 理 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일본발송전은 발송전 설비 전체를 장악하 21) 電 力 百 年 史, 政 經 社, 1980; 電 氣 事 業 講 座 編 輯 委 員 會 編 纂, 電 氣 事 業 發 達 史, 電 力 新 報 社, 1996; 梅 本 哲 世, 戰 前 日 本 資 本 主 義 と 電 力, 八 朔 社, 2000; 橘 川 武 郞, 日 本 電 力 業 發 展 のダイナミズム, 名 古 屋 大 學 出 版 會, 2004; 中 瀨 哲 史, 日 本 電 氣 事 業 經 營 史, 日 本 經 濟 評 論 社, 2005, 3장 참조.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17 지 못하고 기설수력발전설비를 제외한 채 화력발전설비와 고압송전선을 중 심으로 인수해 전 발전력의 약 40%를 점유하는 데에 그쳤고, 재정난 때문 에 배전사업은 종래대로 민영 또는 공영을 유지하되 구역별로 정리통합을 유도해 가기로 결정했다. 일본에서 전력국가관리가 성립하자 일본정부는 엔블록 내의 통제 강화를 위해서 조선총독부에 보다 강력한 전력통제정책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22) 당시 총독부 전기과에서 객관적 정세의 추이를 보아 종래의 전력정책에 재 비판, 재검토가 요청되는 시기에 도달했으며 종래 이상의 통제 강화가 필 요하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23) 그러나 총독부는 전력국가관리에 대 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완강히 견지했다. 24) 전력통제의 목적은 풍부하고 저렴한 전력을 원활하게 배급하는 데에 있는데, 현재까지 한국의 성과는 대체로 양호하므로 일본처럼 국책회사 설립을 통한 발송전 통제는 필요하 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한 송전사업의 국영화도 거부했다. 송전사업이 국 영이 되면 민간기업들은 향후 수력개발에 주저할 것이며 현재의 재정상태 로 보아도 국영은 무리라는 이유를 들었다. 다만 발송전사업 또는 배전사 업의 정리통합은 현재 법제상 근거 없이 행정운용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 므로 법령의 개정을 통해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한국은 일찍이 백 지상태에서 합리적 전력개발계획에 따라 전원을 개발하고 대송전망을 구축 해 왔으며, 현재의 민영 사업자들은 전력통제방책에 따라 설립된 準 國 策 會 社 로서 이미 한국의 발송전부문은 상호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고, 배전 통 제, 주파수 통일, 송전간선 국영 원칙 등에 따라 국가의 의사를 충분히 반 영할 토대를 구축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처럼 종래의 무통제로 인한 다수 사업자들의 난립, 상호 이해관계의 착종 문제를 국책회사 설립을 통 해 일거에 정리 통합하려는 것과는 사정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일 본정부의 전력국가관리 시행, 즉 일원적 통제 요구를 거부한 채 현체제의 연장을 고수했던 것이다. 22) 朝 鮮 商 工 新 聞 91937.12.11, 1938.1.7. 23) 朝 鮮 の 電 氣 事 業, 朝 鮮 總 督 府 遞 信 局 電 氣 課, 1938.8, 3 53쪽( 民 族 問 題 硏 究 所 編, 日 帝 下 戰 時 體 制 期 政 策 史 料 叢 書 第 82 卷, 한국학술정보(주), 2001에 수록). 24) 朝 鮮 の 電 氣 事 業, 朝 鮮 總 督 府 遞 信 局 電 氣 課, 1938.8( 民 族 問 題 硏 究 所 編, 日 帝 下 戰 時 體 制 期 政 策 史 料 叢 書 第 82 卷, 한국학술정보(주), 2001에 수록); 坂 上 滿 壽 雄, 電 力 統 制, 朝 鮮 遞 信 9246, 1938.11, 4~19쪽; 朝 鮮 商 工 新 聞 91938.1.27, 2.13.
118 吳 鎭 錫 총독부 관료들이 전력국가관리를 회피할 수 있었던 근거는 한국 내 수력 전기의 양적, 질적 우수성과 그간의 개발 성과에 있었다. 한국은 수차례에 걸친 수력조사 결과 양적인 면에서 굴지의 수력포장지구를 가지고 있는 것 으로 평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 개발된 수력발전소는 종래의 수로식이 아니라 광활한 저수지를 갖춘 堤 堰 式 이나 流 域 變 更 式 을 채택해 갈수기에도 정시전력을 유지할 수 있어 전력의 질에서도 우수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었 다. 25) 이는 강우량이 대체로 적고 대부분 하기에 집중되는 악조건 속에서, 일본에 비해 수력의 비중이 매우 높고 갈수기를 대비한 보급 화력이 근소 하면서도, 1939년 후반과 1940년 전반에 일본이 심각한 전력기근으로 고 통을 겪을 때에 한국에서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또 한 한국의 수력발전소는 개발에 필요한 양질의 노동자가 풍부하고 1개 지 점에서 거대한 발전력을 생산해 내는 대규모 발전인 탓에 투입되는 기술 자, 노동자의 절약이 가능해 발전력에 비해 공사비가 저렴하고 전력원가도 싸다는 점이 장점으로 부각되고 있었다. 한마디로 한국 수력전기의 우수성 은 한국과 일본은 사정이 다르다 고 주장할 수 있는 배경이었다. 이처럼 당시 체신국 전기과 내에서는 그간 한국의 전력산업은 성적이 좋 아 일본과 사정이 다르므로 전력국가관리 같은 급진적 인 방법은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대세를 이루었다. 1930년대 초 전력통제정책 수립의 주역 이었던 전기과장 今 井 賴 次 郞 (1929.12~1937.7)이나 그 밑에서 전기사업 조사회 간사를 지내며 전력통제정책의 수립을 보좌했고 今 井 의 뒤를 이어 전기과장에 취임했던 坂 上 滿 壽 雄 (1937.7~1938.9)이 대표적인 인물이었 다. 26) 이러한 생각이 전기과 관료들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원래 체신국 전기과 관료는 업무의 특성상 전기 관련 전문지식과 기술, 경험이 요구되었고, 이 때문에 고등문관시험을 통해 선발한 文 官 ( 書 記 - 副 事 務 官 - 事 務 官 ) 보다는 技 術 官 僚 ( 技 手 - 技 師 )에 의해 업무가 주도되고 있었 25) 한국 내 수력전기의 일반적인 특성은 特 色 を 有 する 半 島 の 發 電 水 力, 朝 鮮 公 論 924-12, 1936.12, 16쪽; 安 達 遂, 朝 鮮 に 於 ける 發 電 資 源 の 特 色, 朝 鮮 公 論 924-12, 1936.12, 26~29쪽; 坂 上 滿 壽 雄, 發 電 水 力 資 源, 朝 鮮 公 論 926-11, 1938.11, 12~17쪽; 玉 置 正 治, 朝 鮮 の 水 力 と 其 の 開 發 の 特 異 性, 朝 鮮 電 氣 雜 誌 930-11, 1941.11, 11~14쪽; 加 藤 韓 三, 躍 進 途 上 にある 朝 鮮 の 電 氣 事 業, 朝 鮮 電 氣 雜 誌 931-5, 1942.5, 21~31쪽; 安 達 遂, 朝 鮮 に 於 ける 發 電 水 力 の 展 望, 朝 鮮 電 氣 雜 誌 932-10, 1943.10, 2~12쪽 참조. 26) 이하 별다른 주가 없는 한 관료들의 임면일은 安 龍 植 編, 朝 鮮 總 督 府 下 日 本 人 官 僚 硏 究 Ⅲ, 延 世 大 學 校 社 會 科 學 硏 究 所, 2003 참조.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19 다. 27) 원래 문관은 중앙과 지방을 오가며 여러 부서들을 거치기 때문에 특성 부서의 전문지식을 갖추기 어려웠지만, 28) 기술관료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퇴임 때까지 동일한 부서에서 근무하며 전문성을 확보하기에 용이 했던 것이다. 이들은 업무의 전문성에 자부심을 가지며 강한 결속력을 유 지했던 것 같다. 그 중심인물이 바로 今 井 전기과장이었다. 29) 그는 동경 제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기술관료 출신으로서, 탁월한 업무 능력과 경험 을 바탕으로 1930년대 초 전력통제정책 수립을 주도해 今 井 田 정무총감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으며, 무려 7년여간 전기과장의 직책을 수행하며 부하 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획득하고 있었다. 게다가 문관 가운데에서도 비교 적 전기과에 오래 근무하면서 기술관료와 각별한 관계를 맺었던 자들이 상 당수 있었던 것 같다. 今 井 의 뒤를 이어 전기과장이 되었던 坂 上 滿 壽 雄 이 나 그와 함께 조선전기사업령 초안 작성의 실무를 맡았던 淺 原 貞 紀 가 그 대표적인 예였다. 30) 전기과 관료들 중 일부는 퇴임 후에 각급 전력회사로 자리를 옮겨 총독부와 업계를 연결해 주는 파이프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 다. 이른바 낙하산인사[ 天 降 ] 였다. 예를 들어 祁 答 院 規 矩 雄 기사는 퇴임 후 서선합동전기 기사장이 되었고, 高 橋 金 吾 기사는 한강수전의 전기부장 에 취임했다. 今 井 賴 次 郞 이 전기과장에 재직시에 부하 중에서 서선합동전 기와 북선합동전기에 자리를 잡은 사람만 5명이나 되었다. 今 井 賴 次 郞 도 퇴임 후에는 서선합동전기 사장과 조선송전 취체역에 취임했다. 今 井 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전기과 관료들은 대체로 전력국가관리에 부정적인 인식을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전력국가관 27) 이하 전기과 관료에 대해서는 별다른 주가 없는 한 安 達 遂, 回 想 記, 朝 鮮 半 島 電 氣 事 業 の 思 い 出, 景 福 電 友 會, 1983, 4~15쪽 참조. 1938년 4월 현재 체신국 전 기과는 과장 이하 통할자, 계장, 계원 등 77명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 중 문관은 17명에 불과했다. 계원(서기) 14명, 계장(서기) 1명, 통할자(부사무관) 1명, 과장 (사무관) 1명이었다. 반면 기술관료는 계원(기수) 44명, 계장(기사 혹은 기수) 8 명, 통할자(기사) 3명이었다. 당시 과장은 문관이었지만, 실무의 중심인 통할자나 계장은 거의 대부분 기술관료가 차지했던 것이다. 遞 信 局 電 氣 課 機 構 整 備, 朝 鮮 電 氣 雜 誌 927-1, 1938.4, 118~120쪽. 28) 岡 本 眞 希 子, 앞의 책, 550쪽. 29) 阿 部 薰, 朝 鮮 人 物 選 集, 民 衆 時 論 出 版 部, 1934, 855~857쪽; 嶋 元 勸, 朝 鮮 財 界 の 人 々, 京 城 日 報 社, 1941, 14~15쪽; 朝 鮮 電 氣 事 業 史, 中 央 日 韓 協 會, 1981, 578~582쪽; 朝 鮮 商 工 新 聞 91939.1.12. 30) 淺 原 フミ, 電 氣 事 業 令 と 主 人, 朝 鮮 半 島 電 氣 事 業 の 思 い 出, 景 福 電 友 會, 1983, 28~29쪽; 坂 上 梅 野, 電 氣 事 業 令 の 思 い 出, 위의 책, 78쪽.
120 吳 鎭 錫 리 요구는 더욱 거세졌고, 총독부 내에서도 殖 産 局 을 중심으로 이를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견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식산국과 체신국은 상호 대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中 小 金 山 의 자가발전 허가 문제를 둘러싸고 식산국 광산과장 石 田 千 太 郞 (1933.8~1938.8)과 체신국 전기과 장 今 井 賴 次 郞 이 대립한 적이 있었고, 일각에서 전기는 산업상 중요한 부 문이기 때문에 산업정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서는 전기과를 식산국으로 이관해야 한다는 電 氣 課 移 管 論 이 부상하기도 했다. 31) 이러한 가운데 1938년 9월 13일에 전기과장 坂 上 이 급서하는 일이 발생했다. 32) 후임은 전력국가관리 시행 여부와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총 독부는 무려 두 달 가까이 후임자를 물색하지 못하였다. 인선을 둘러싸고 얼마나 갈등이 치열했는지를 보여준다. 마침내 1938년 11월 10일 문관 白 石 光 治 郞 (1938.11~1940.3)이 전기과장에 되었다. 33) 白 石 은 1922년 동경제대 법과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경기도 지방과장, 강 원도 재무부장, 평북 재무부장, 총독부 경무국 사무관, 평북 경찰부장, 경 남 경찰부장, 평남 내무부장 등을 거친 정통 엘리트 관료였다. 34) 그의 경 력으로 보면 도지사 임명이 통상적인 승진 코스였는데 갑작스레 전기과장 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35) 전임 坂 上 에 비해서도 고참인 데다가 전기과 근 무 경력이 전혀 없는 그가 전기과장에 임명된 일은 매우 이례적인 인사였 다. 36) 이를 계기로 전기과 내에 전력국가관리 실시에 대해 변화의 조짐이 보이 기 시작했다. 白 石 은 전력국가관리에 부정적인 전기과 관료들을 제치고 앞 장서서 강력한 전력통제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37) 31) 鶴 岡 五 月, 重 責 の 新 電 氣 課 長, 朝 鮮 公 論 926-11, 1938.11, 80~82쪽. 32) 每 日 新 報 91938.9.14. 33) 朝 鮮 商 工 新 聞 91938.11.8. 34) 阿 部 薰, 朝 鮮 人 物 選 集, 民 衆 時 論 出 版 部, 1934, 35) 白 石 의 고등문관시험 임관동기인 石 田 千 太 郞 은 비슷한 때에 평안남도지사가 되었 다. 나중에 白 石 도 평안북도지사로 영전했다. 36) 白 石 이 평북 경찰부장을 할 때 坂 上 은 그 아래에서 약 8개월간 경무과장을 지낸 적도 있었다. 朝 鮮 電 氣 雜 誌 927-8, 1938.11, 73쪽. 37) 체신국 전기과장 白 石 光 治 郞, 年 頭 所 感, 朝 鮮 電 氣 雜 誌 928-1, 1939.1, 6~8 쪽; 白 石 光 治 郞, 電 氣 事 業 の 現 狀, 朝 鮮 遞 信 9248, 1939.1, 25~30쪽; 白 石 光 治 郞, 朝 鮮 電 氣 事 業 の 特 異 性, 朝 鮮 公 論 927-10, 1939.10, 11~14쪽; 白 石 光 治 郞, 時 局 下 に 於 ける 電 力, 朝 鮮 電 氣 雜 誌 929-1, 1940.1, 11~13쪽; 白 石 光 治 郞, 朝 鮮 の 電 力 資 源 と 電 力 政 策, 朝 鮮 9299, 1940.4, 1~6쪽; 朝 鮮 電 氣 統 制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21 그는 중요산업의 지원과 육성을 위해서는 전력자원의 적극적인 개발과 요 금정책의 재검토(원가주의의 시정, 산업별 정책요금제 이행 등)를 통해 전 면적으로 전력동원을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 아래 과거 송전사업의 통제방식이 과도한 편법에 의존해 왔던 사실을 인정 해 이를 속히 시정해야 하며, 향후 급격한 전력 수요 증가에 응하기 위해 서는 기개발된 발전소보다 경제적 가치가 떨어진 전원이라도 일정한 통제 아래 적극적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일본자본을 유치하여 전 원을 개발하고 일부 잉여전력을 일반에 공급하는 기존 시스템으로는 타 수 요에 대한 전기 분배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문제점을 고치기 어렵다는 의견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송전간선의 국유국영, 발송전사업을 담당할 민 영 특수회사의 설립, 송전간선과 보조발전을 담당할 민영 특수회사의 설립 과 수력발전회사에 대한 총독부의 통제명령권 확보 등 다양한 방안이 검토 되기 시작했다. Ⅲ. 朝 鮮 電 力 管 理 令 공포와 朝 鮮 電 業 의 설립 전기과장의 교체에 따라 전기과 일각에서 전력국가관리의 시행을 검토하 기 시작했지만, 아직 전기과 내에서는 통제강화론에 대한 반대가 대세를 이루었다. 38) 전기과 내 今 井 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기술관료 출신들이 반대세력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白 石 전기과장과 대립했던 것 같 다. 39) 그런데 白 石 의 상관인 체신국장 山 田 忠 次 는 기술관료들과 견해를 같이 했다. 원래 山 田 은 1930년대 초 전력통제정책 수립의 주역이었던 今 井 田 정무총감의 체신성 후배로서 그와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40) 체신성 관료 생활 내내 今 井 田 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총독부 체신 ニ 關 スル 意 見 書, 遞 信 局 電 氣 課, 1939.9( 民 族 問 題 硏 究 所 編, 日 帝 下 戰 時 體 制 期 政 策 史 料 叢 書 第 82 卷, 한국학술정보(주), 2001에 수록). 38) 朝 鮮 電 氣 雜 誌 929-10, 1940.10, 48쪽. 39) 기술관료 출신인 安 達 遂 는 훗날 白 石 에 대해서 볼만한 업적이 없었다 며 매우 부 정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安 達 遂, 앞의 글. 40) 山 田 忠 次, 今 井 田 さんの 思 ひ 出, 朝 鮮 遞 信 9266, 1940.7, 17~20쪽.
122 吳 鎭 錫 국장에 임명된 일도 그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山 田 은 사실상 今 井 田 노선에 입각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는 坂 上 전기과장이 급서했을 때 그의 후임에 기술관료를 임명하고자 했 을 정도로 기술관료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41) 체신국장 山 田 이 직접 나서 전력국가관리에 반대의견을 피력했던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42) 그는 제2차 전력통제 (전력국가관리)의 필요 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전원개발이 먼저며 통제는 나중의 일이라며 반박했고, 현재의 통제방식이 하등 부적합하지 않다고 옹호했다. 형태만 통제하는 일은 百 害 無 益 하며 민간업자의 왕성한 기업심을 국가목적에 합치 시켜 선도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민영에 국가의사를 반영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므로 국가관리나 특수회사 설립은 불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山 田 체신국장과 白 石 전기과장 사이에도 갈등이 심각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0년 3월 9일 白 石 이 갑작스레 전기과장에서 하 차하고 체신국 서무과장 淺 原 貞 紀 가 이를 겸직한 데에서 그렇게 생각된 다. 43) 淺 原 은 문관이지만 체신국 서무과, 전기과, 감리과 등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체신통 으로서 전기과 기술관료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게다가 1940년 3월 20일 전기과가 전기제1과와 전기제2과로 분리될 때 淺 原 은 제1과장, 기술관료인 기사 田 中 重 郞 이 제2과장에 임명되었다. 사실상 기술 관료를 과장에 임명하려던 山 田 의 구상이 일부 실현된 셈이었다. 그리고 1940년 9월 2일에는 임시로 전기제1과장 자리에 앉었던 淺 原 의 뒤를 이 어 문관 西 田 豊 彦 (1940.9.2~1942.9.30)이 임명되었다. 한편, 전력업계도 기업경영에 대한 통제 강화와 더불어 경영권 상실을 우려해 전력국가관리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졌다. 44) 앞서 언급했듯이 퇴임 한 체신국 관료들이 낙하산인사[ 天 降 ] 를 통해 대거 전력회사에 진출해 있 41) 朝 鮮 商 工 新 聞 91938.11.8. 白 石 전기과장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던 安 達 遂 도 山 田 에 대해서는 감사와 존경을 표하였다. 安 達 遂, 앞의 글. 42) 朝 鮮 商 工 新 聞 91938.3.31; 山 田 忠 次, 時 局 と 朝 鮮 の 遞 信 事 業, 朝 鮮 遞 信 9248, 1939.1, 2~9쪽; 朝 鮮 電 氣 雜 誌 930-1, 1941.1, 67쪽; 朝 鮮 電 氣 雜 誌 930-2, 1941.2, 73~74쪽. 43) 朝 鮮 總 督 府 官 報 9제3944호, 1940.3.15. 白 石 은 1940년 3월 12일 조선총독부 북경출장소장에 임명되었고, 1941년 11월 19일에 다시 돌아와 평북지사에 임명되 었다. 每 日 新 報 91940.3.14; 朝 鮮 總 督 府 官 報 9제452호, 1941.11.26. 44) 朝 鮮 商 工 新 聞 91937.12.22, 1938.1.29.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23 었기 때문에 업계와 체신국은 긴밀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체신국장을 지낸 山 本 犀 藏 (1928.1~1933.12)은 퇴임 후 서선합동 전기 사장과 조선송전 취체역에 취임했으며, 그 뒤를 이은 井 上 淸 (1933.12~1936.7) 역시 퇴임 후에 조선전력 전무로 자리를 옮겼다가 나중에는 남조선수력전기 사장과 강릉전기 취체역을 겸임하기에 이르렀다. 전기과장 今 井 도 山 本 犀 藏 의 뒤를 이어 서선합동전기 사장과 조선송전 취 체역에 취임했다. 또한 1939년 7월 이후에는 현직 체신국장이 전력회사들 로 구성된 조선전기협회의 회장직을 겸직하는 게 관행으로 정착되었을 정 도였다. 전력국가관리는 이러한 관료-자본 유착관계를 깰 수 있는 위험요 소였다. 체신국 관료들과 업계가 한목소리로 반대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 다. 그러나 외부의 사정은 통제강화의 필요성을 더욱 증폭하였다. 주지하듯 1941년 말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따라 전쟁은 확대일로를 달려 군수산업 생산력 확충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었고, 앞서 일본에서 실시한 제1 차 전력국가관리 가 시행되자마자 문제점을 노정해 다시 통제를 더욱 강화 한 제2차 電 力 國 家 管 理 로 이어졌던 것이다. 45) 일본에서는 1939년 후반 부터 이상갈수, 석탄부족, 탄질저하에 따라 심각한 전력기근 (전력부족 사 태)이 발생해 關 西 지방에 대정전 사태(1940.1)를 초래했을 정도로 큰 문 제를 일으켰다. 이에 일본정부는 國 家 總 動 員 法 에 근거해 1940년 2월 電 力 調 整 令 을 발동하기에 이르렀다. 46) 그리고 전력기근은 일본발송전의 업적 부진과 배전회사의 지지부진한 통합 때문이라며 통제정책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결국 1941년 초 관계법안이 정비되어 종래 출 자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기존의 수력발전설비와 기타 주요전력설비를 日 本 發 送 電 株 式 會 社 에 귀속시켜 발전설비의 대부분(수력 70%, 화력 60% 정 도)을 장악케 하였고, 1941년 8월에는 配 電 統 制 令 을 공포해 배전회사의 강제통합에 착수했다. 1942년 4월에 70개사를 기초로 지역별로 9개의 특 45) 內 地 に 於 ける 發 送 電 及 配 電 統 制 の 沿 革 と 現 狀, 朝 鮮 電 氣 雜 誌 9 32-8, 1943.8, 14~19쪽; 電 力 百 年 史, 政 經 社, 1980; 電 氣 事 業 講 座 編 輯 委 員 會 編 纂, 電 氣 事 業 發 達 史, 電 力 新 報 社, 1996; 橘 川 武 郞, 日 本 電 力 業 發 展 のダイナミズム, 名 古 屋 大 學 出 版 會, 2004; 中 瀨 哲 史, 日 本 電 氣 事 業 經 營 史, 日 本 經 濟 評 論 社, 2005, 4 장 참조. 46) 監 理 課, 內 地 に 於 ける 電 力 不 足 の 實 狀 と 電 力 調 整 令 の 趣 旨 及 解 說, 京 電 9 4-1, 1940.3, 34~52쪽.
124 吳 鎭 錫 수배전회사를 설립해 1943년까지 통합을 완료했다. 일본에서의 전력국가관리 강화 조치는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 서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해 전기의 수급조절을 목적으로 하는 電 力 調 整 令 이 시행되면서 1939년 10월 27일부터 한국에서도 동시에 실시되기에 이르렀 고, 47) 일본정부는 대동아공영권 전체에서 일관된 전력정책의 수립을 위해 전기청 내에 大 東 亞 電 力 調 査 室 을 특설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정부의 전력국가관리 실시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48) 기득권 유지를 위해 기존의 민영회사 체제와 자치통제 가 지속되기를 희 망했던 전기과 관료들이라도 이러한 흐름을 거스르기는 어려웠다. 이들은 일본의 전력국가관리 강화 동향을 예의주시하면서 이를 대세로 인식하고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체신국에서 1941년 9월 電 力 調 査 室 (실장 安 達 遂 )을 설치하고 49) 국책 안 마련에 착수해 電 力 國 家 統 制 案 要 綱 (이하 통제요강)을 작성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통제요강에는 고도국방국가체제의 정비 요청에 따라 전력자원 의 계획적 개발 및 배급의 합리화를 위해서는 전력산업의 국가통제가 필요 하다는 인식 아래 발송전을 담당할 朝 鮮 電 力 供 給 株 式 會 社 (가칭) 를 설립해 야 한다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 50) 기존 전력회사로부터 신규 수력발전설 비(기존 수력발전설비 제외)와 주요 화력발전설비, 그리고 주요 송전설비 (100kV 이상)를 현물로 출자케 해 자본금 1억5천만원의 특수회사를 설립 하고 특수회사에는 자금조달의 편의, 이익배당의 정부 보증(6%), 조세 감 면, 기타 업무수행상 필요한 특권을 부여하는 한편, 특수회사에 속하지 않 는 기설수력발전설비의 발생 전력을 특수회사에서 원칙적으로 일괄구입토 록 하였다. 배전회사는 종전대로 경영토록 하되 경영이념을 자유주의 영 47) 朝 鮮 總 督 府 官 報 9제3832호, 1939.10.27; 山 田 忠 次, 電 氣 調 整 令 の 施 行 に 就 い て, 朝 鮮 電 氣 雜 誌 928-11, 1939.11, 5~12쪽. 단. 한국에서는 전력사정이 양 호한 상태였기 때문에 별다른 후속 조치는 없었다. 48) 企 劃 院 調 査 官 加 藤 四 郞, 大 同 亞 國 土 計 劃 と 電 力, 大 同 亞 國 土 計 劃 を 語 る, 日 刊 工 業 新 聞 社, 1942, 110~139쪽. 49) 每 日 新 報 91941.9.18. 전력조사실의 차석은 木 村 三 郞 (기사)이 임명되었고, 구성 원은 中 村 長 一 郞 (기사), 江 口 信 平, 高 橋 敏 夫, 町 田 政 雄 (이상 서기), 坪 田 邁 (기수) 등이었다. 安 達 遂, 앞의 글. 50) 電 力 國 家 統 制 ニ 關 スル 諸 要 綱, 朝 鮮 總 督 府 遞 信 局 ( 民 族 問 題 硏 究 所 編, 日 帝 下 戰 時 體 制 期 政 策 史 料 叢 書 第 82 卷, 한국학술정보(주), 2001에 수록). 이 자료의 정 확한 작성연도는 미상이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뤄보아 1941년경이었던 것 같 다.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25 리주의에서 국가주의 공익주의로 전환하도록 유도한다는 복안이었다. 또 한 총독부는 전력수급, 발전 및 송전설비의 건설계획, 전기요금 등의 중요 사항을 결정하고 전력 배급에 관한 지령권을 획득하며 電 氣 局 을 설립해 전 력통제사무를 관장한다는 계획도 들어 있었다. 말하자면 일본의 제1차 전 력국가관리 정책과 전기청, 일본발송전주식회사를 그대로 모방해 통제요강 을 작성했던 것이다. 이처럼 전력통제정책의 강화, 즉 전력국가관리는 더 이상 거부할 수 없 는 대세가 되었지만, 아직도 체신국 일각에서는 한국의 특수사정을 내세워 반드시 일본을 답습할 필요는 없고 半 島 獨 自 의 統 制 를 해야 한다는 주장 이 이어졌다. 51) 한편, 殖 産 局 을 중심으로 군수산업의 지원을 위해서는 전 력동원이 필요하며 기존의 전력통제정책을 전력국가관리로 전환해야 한다 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어 체신국과 대립하였다. 양측의 갈등은 더욱 첨 예해졌다. 당시 병참기지정책을 통해 군수산업을 육성하고 이를 통해 엔블록 내에 서 한국의 위치를 강화하고자 했던 총독부로서는 이러한 부서간 대립과 갈 등을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총독부는 전력국가관리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1941년 11월 체신국 전기제1과와 전기제2과를 식산국에 이관하는 조치를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52) 이제 식산국장 上 瀧 基 (1941.11.19~ 1943.12.1)의 지휘 아래 전력산업 재편성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上 瀧 은 전력국가관리 추진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러나 전기과 조직을 장악하는 데에는 다소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 같다. 이에 자신의 생각과 다른 전기과 관료의 교체를 시도했다. 1942년 9월에 는 전기제1과장을 西 田 豊 彦 에서 角 永 淸 (1942.9.30~1945.3.28)으로 바 꾸고, 今 井 의 노선을 추종하는 기술관료 安 達 遂 를 電 力 調 査 室 長 에서 해임 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였던 것이다. 53) 그리고 전기제1과와 전기제2과 51) 每 日 新 報 91941.7.24; 朝 鮮 電 氣 雜 誌 930-7, 1941.7, 55~56 58쪽; 朝 鮮 電 氣 雜 誌 930-10, 1941.10, 39~40쪽. 52) 朝 鮮 電 氣 雜 誌 30-11, 1941.11, 39 41쪽; 김민철, 전시체제하(1937~1945) 식민지 행정기구의 변화, 韓 國 史 學 報 914, 2003. 53) 이 시기에 들어 安 達 遂 는 전력국가관리의 추진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 만, 今 井 田 노선에 입각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해임된 듯하다. 총독부기사 安 達 遂, 電 力 問 題 の 動 向, 朝 鮮 電 氣 雜 誌 931-10, 1942.10, 7~19쪽. 훗날 安 達 遂 는 자 신의 통제이념이 조선전력관리령 의 이념과 다르지 않았는데도 해임되었다며 강한 유감을 표명하였다.
126 吳 鎭 錫 과장을 비롯한 주요 관료들의 사무실을 기존의 체신국제2분관에서 총독부 내 식산국장실 옆방으로 옮기도록 해 장악력을 높였다. 54) 1943년 2월에 는 電 力 調 査 室 을 電 力 管 理 實 施 準 備 室 로 개편해 전력국가관리 준비에 가일 층 박차를 가했다. 55) 上 瀧 은 기존의 전력통제정책이 자유주의를 기조로 한 소극적 통제 에 머 물렀다고 비판하고, 高 度 國 防 國 家 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국방자원의 확보가 절실하며, 생산력 확충을 위해서는 전력의 증산과 합리적 배급이 긴요하다 고 주장했다. 56) 따라서 과거처럼 민간기업의 영리심에 기대어 전원개발을 출원한 기업에게 발생전력의 일부를 다른 사업에 개방하는 조건을 붙여 허 가하는 방식으로는 향후 경제성이 떨어지는 전원을 개발할 수 없으며, 전 시통제경제 하에 자재, 자금, 기술, 노무 등이 극도로 제약된 상태에서 전 력증산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전력통제정책이 강화되어 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의 의지에 따라 지정된 국방산업에 풍부한 전기 를 저렴하게 공급하는 일이 중요하므로 국책회사를 통해 이를 신속하게 수 행하고 국가적 대규모 종합경영에 기초하여 기술적,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 는 이른바 電 力 國 防 體 制 를 수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上 瀧 의 구상 아래 식산국 전기과에서는 발송전 통합과 이를 담당 할 특수회사의 설립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국책안 마련에 착수했다. 그러 나 전력국가관리는 사실상 기존 발송전 회사의 존폐와 연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전력업계의 반발이 우려되었다. 당시 전력산업에서 막강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일질은 수시로 총독부 수뇌부, 그리고 식산국장, 전기과장 과 회동하며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57) 일질은 전력통제의 강화 주장에 는 공감하면서도 통제를 위한 통제 를 해서는 곤란하다며 거부감을 드러내 고, 경영권 상실을 우려해 일본발송전의 통제방식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명 했다. 통제정책은 생산력확충에 즉응한 활발한 전원 개발과 송배전 합리화 에 중점을 두어 추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경영진 구성에 있어서도 공 고한 체제의 통합 을 주문했다. 사실상 일질 주도의 전원개발과 경영권 유 54) 每 日 新 報 91942.11.15. 55) 朝 鮮 電 氣 雜 誌 932-4, 1943.4, 47쪽. 56) 上 瀧 會 長 の 挨 拶 に 演 達, 朝 鮮 電 氣 雜 誌 931-5, 1942.5, 33~36쪽; 上 瀧 基, 戰 時 下 の 電 氣 事 業, 朝 鮮 電 氣 雜 誌 931-10, 1942.10, 2~6쪽. 57) 이하 별다른 주가 없는 한 每 日 新 報 91942.8.13, 8.15, 8.18, 9.4, 10.1, 10.3, 10.6, 10.8, 10.16.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27 지를 희망했던 것이다. 일본정부와 총독부는 이들의 반발을 무마하고 국가관리의 필요성을 설득 하기 위해 다각도의 방안을 마련했다. 우선 일본 정부는 대동아공영권 전 체 차원에서 일관된 전력정책을 수립 지원하기 위해 정책 수행 외곽단체로 서 大 東 亞 電 力 懇 談 會 를 조직하였다. 58) 여기에는 일본, 한국, 만주, 화북 등 각 지역의 유력한 전력회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다. 대동아전력간담 회는 이름은 간담회였지만, 일시적인 조직으로 구상된 것이 아니라 간사 장, 간사 등 임원진을 선발하고 사단법인으로의 전환과 주기적인 간담회 개최를 도모할 정도로 처음부터 상설 관변단체로 구상되고 있었다. 한편, 총독부는 전력국가관리 시행안을 마련하면서 업계의 의견을 수렴 하기 위해 관민합동의 조사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59) 이에 따라 총독부 는 1942년 9월 30일 칙령 제660호로 朝 鮮 臨 時 電 力 調 査 會 官 制 를 공포하 였고, 60) 정무총감을 위원장에 임명하고 총독부 관계국 과장과 각 발송전 회사와 배전회사의 대표, 재계의 대표, 그리고 일본의 전 電 氣 廳 장관 藤 井 崇 治 와 일본발송전 총재 池 尾 芳 藏 등을 위원에 임명해 조사회 구성을 마쳤 다(표 4). 61) 마침내 1942년 10월 20일부터 21일까지 이틀간 조선총독 부 제1회의실에서 朝 鮮 臨 時 電 力 調 査 會 가 열렸다. 62) 조사회는 먼저 실무관 료들이 작성한 發 電 及 送 電 豫 定 計 劃 要 綱 을 심의해 향후 5년간을 계획기간 으로 하는 발전계획 및 송전망계획과 모든 전력자원을 개발대상으로 하는 예정발전계획 및 예정송전망계획을 확정했다. 또한 향후 전력국가관리의 근간이 될 電 力 國 家 管 理 案 要 綱 의 초안을 놓고 검토에 착수했다. 조사회에 서는 20일 저녁에 식산국장 上 瀧 基 가 위원장이 되고 총독부관계자를 제외 한 나머지 위원들로 소위원회를 구성해 보다 상세한 심의에 착수했다. 위원회와 소위원회의 진행과정에서 업계 일각은 초안에 들어있던 감독 제도의 강화 항목에 문제를 제기했다. 총독부가 세밀하게 감독을 하려는 58) 每 日 新 報 91942.6.14, 7.17, 7.25, 7.29. 59) 每 日 新 報 91942.7.16, 8.6, 8.9. 60) 朝 鮮 總 督 府 官 報 9제4708호, 1942.10.7. 61) 每 日 新 報 91942.10.3. 62) 朝 鮮 臨 時 電 力 調 査 會 總 會 議 事 錄, 朝 鮮 總 督 府 殖 産 局, 1943; 殖 産 局 電 力 調 査 室, 朝 鮮 臨 時 電 力 調 査 會 第 1 回 委 員 會 の 跡 を 顧 みて, 朝 鮮 電 氣 雜 誌 9 31-11, 1942.11, 2~12쪽; 岸 謙, 朝 鮮 に 於 ける 電 力 統 制 の 新 展 開, 京 電 96-4, 1942.11, 2~7 쪽; 每 日 申 報 91942.10.21, 10.22; 京 城 日 報 91492.10.21, 10.22.
128 吳 鎭 錫 의도가 들어있는 것 아니냐고 따지고, 일본에서는 관청이 머리, 회사는 수 족에 불과하다는 평판이 있다 고 소개하며 이러한 폐해에 빠지지 않도록 해 달라고 초안의 수정을 요구했다. 전력국가관리체제 하에서 총독부의 역할 강화에 대해 업계에서 제동을 건 것이었다. 이에 대해 총독부는 자구의 수 정과 함께 이러한 폐해에 빠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63) 또한 서선합전 사 장 今 井 賴 次 郞 은 신설되는 국책회사의 경영자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 이나 임원을 통합대상회사의 임원들을 모아서 구성하는 폐단[ 寄 合 世 帶 ]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그간의 경험이나 기량을 고려하여 단일제로 해야 한 다고 주장하였다. 64) 이외에도 今 井 은 적극적인 공사비 지원을 통해 전력 요금을 낮출 것을 주문했으며, 종래의 업계 공로자에게는 충분한 보상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또한 조선수전 사장 久 保 田 豊 은 특수회사의 내 용과 성격, 출자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국가관리 이후 기존산업의 추진 력이 상실되어서는 안된다며 생산이 제일이고 전력은 수단일 뿐이라고 피 력했다. 65) < 電 力 國 家 管 理 案 要 綱 > 1. 관리의 범위 조선총독은 발전, 송전 및 배전을 관리함. 단, 자기의 專 用 에 供 하거나 또는 일 지방의 需 用 에 供 하는 전기의 발전, 송전 및 배전으로서 조선총 독이 지정하는 것은 이를 제외하기로 함. 2. 관리의 방법 (1) 조선총독은 새로이 특수회사를 설립하여 그 관리에 속하는 발전, 송전 및 배전 중 우선 주요한 발전 및 송전을 행하기로 함. (2) 조선총독은 그 관리에 속하는 주요한 발전 및 송전을 행하는 자에 대하여 특수회사에의 사업의 통합 또는 전력설비 및 그 부속설비의 출자를 명할 수 있도록 함. (3) 조선총독은 특수회사의 전력설비의 건설 또는 변경의 계획 및 전력 요금 기타 전력수급에 관한 중요사항을 결정하기로 함. (4) 조선총독은 그 관리에 속하는 발전, 송전 및 배전을 행하는 자에 63) 朝 鮮 臨 時 電 力 調 査 會 議 ノ 件 (1942.10.22), 朝 鮮 電 力 統 合 關 係 綴. 64) 朝 鮮 臨 時 電 力 調 査 會 議 ノ 件 (1942.10.22), 朝 鮮 電 力 統 合 關 係 綴 ; 朝 鮮 臨 時 電 力 調 査 會 總 會 議 事 錄, 朝 鮮 總 督 府 殖 産 局, 1943, 51~55쪽. 65) 朝 鮮 臨 時 電 力 調 査 會 總 會 議 事 錄, 朝 鮮 總 督 府 殖 産 局, 1943, 95~98쪽.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29 대하여 발전, 송전 및 배전에 관하여 관리상 필요한 명령을 할 수 있도록 함. (5) 배전사업은 우선 특수회사로서 이를 행하지 않지만 전항의 명령에 따라 특수회사의 사명달성에 협력시키도록 함. 3. 특수회사의 성질 (1) 사채발행한도의 확장, 사채의 정부보증 등 자금조달에 관하여 利 便 을 도모함과 동시에 정부소유주의 後 配, 배당보증, 조세의 감면, 기 타 업무상 필요한 특권을 부여하기로 함. (2) 조선총독은 회사의 역원을 命 免 하고 정관의 작성 또는 변경, 사채 의 모집, 이익금의 처분 기타 중요사항에 관하여 인가를 받아 회사 의 업무에 관하여는 감독상 필요한 명령을 하기로 함. (3) 조선총독은 국유의 전력설비 및 그 부속설비의 일부를 특수회사에 현물출자하기로 함. 4. 감독제도의 강화(초안) 조선총독은 전력의 국가관리의 적정을 기하기 위하여 감독기구를 정비 하고 감독력의 강화를 도모하기로 함. 4. 관리기구의 정비(최종안) 조선총독은 전력의 국가관리의 적정을 기하기 위하여 관리기구를 정 비하기로 함. 이러한 업계의 의견은 적극적으로 답신안에 반영되었다. 우선 電 力 國 家 管 理 案 要 綱 초안에 들어있던 감독제도의 강화 항목은 답신안에서는 뉘앙 스가 다소 약한 관리기구의 정비 로 바뀌고 감독기구의 정비나 감독력의 강화라는 문구는 아예 삭제되었다. 66) 한편, 답신에는 초안과 별도로 업계 의 요구가 <희망사항>이라는 항목으로 추가되었다. 특수회사의 운영은 민 간의 창의 및 경험을 활용하고, 중요산업과의 관계를 고려해 생산활동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발송전 통합을 진행하며, 향후 피통합회사의 자산 평가를 위해 평가위원회를 설치하고, 향후 발송전설비 건설시에 총독부가 건설비를 분담해 전력원가를 낮춘다는 내용이었다. 66) 朝 鮮 臨 時 電 力 調 査 會 總 會 議 事 錄, 朝 鮮 總 督 府 殖 産 局, 1943, 59~60 124~126 쪽.
130 吳 鎭 錫 표 4 전력국가관리 추진을 위한 각종 위원회의 인적 구성 朝 鮮 臨 時 電 力 調 査 會 (1942.10.20 ~10.21) 朝 鮮 電 業 設 立 委 員 會 (1943.7.9, 7.31) 朝 鮮 電 力 評 價 審 査 委 員 會 (1943.7.10, 9.17) 회장 田 中 武 雄 (정무총감) 위원 간사 위원 장 鈴 川 壽 男 (사정국장), 水 田 直 昌 (재무국장), 上 瀧 基 **(식산국장), 鹽 田 正 弘 (농림국장), 信 原 聖 (정보국 정보관), 奧 村 重 正 (재무국 사계과장), 角 永 淸 *(식산국 전기제1과장), 田 中 重 朗 *(식산국 전기제2과장), 池 尾 芳 藏 * (일본발송전 총재), 藤 井 崇 治 *(전 電 氣 廳 장관), 久 保 田 豊 *(조선수전 사 장), 小 倉 武 之 助 *(조선전력 남선합전 사장), 谷 多 喜 磨 *(한강수전 사 장), 池 邊 龍 一 *(강계수전 사장), 今 井 賴 次 郞 *(서선합전 사장), 武 者 鍊 三 * (경성전기 사장), 笹 川 恭 三 郞 *(북선합전 사장), 松 原 純 一 *(조선은행 총 재), 林 繁 藏 *(식은 두취) 鈴 木 高 麗 雄, 三 津 田 松 吉, 安 達 遂, 加 藤 韓 三, 高 橋 洋 次 郞, 中 村 長 一 郞, 木 村 三 郞 田 中 武 雄 (정무총감) 江 口 親 憲 (총무국장), 新 貝 肇 (사정국장), 水 田 直 昌 (재무국장), 上 瀧 基 (식 산국장), 早 田 福 藏 (법무국장), 丹 下 郁 太 郞 (경무국장), 兵 頭 儁 (총무국 기 획실장), 田 中 鐵 三 郞 (조선은행 총재), 穗 積 眞 六 郞 (조선상공회의소 회 두), 林 繁 藏 (식은 두취), 池 邊 龍 一 (동척 부총재), 谷 多 喜 磨 (한강수전 사 위원 장), 松 本 誠 ( 朝 金 聯 회장), 久 保 田 豊 (조선수전 취체역), 今 井 賴 次 郞 (조 선송전 취체역), 小 倉 武 之 助 (조선전력 사장), 白 石 宗 城 (일질 취체역), 望 月 伸 (부령수전 사장), 玉 置 正 治 (조선수전 취체역), 橫 地 靜 夫 (조선수전 취체역) 筒 井 竹 雄, 吉 良 喜 重, 磯 崎 廣 行, 山 地 靖 之, 奧 村 重 正, 角 永 淸, 山 名 酒 喜 위원 男, 木 野 藤 雄, 岡 村 峻, 辻 桂 五, 高 橋 英 夫, 渡 邊 隆 治, 加 納 富 夫, 三 津 田 松 보조 吉, 橫 井 增 治, 田 中 重 朗, 安 達 遂, 加 藤 韓 三, 高 橋 洋 次 郞, 木 村 三 郞, 회장 田 中 武 雄 (정무총감) 위원 간사 江 口 親 憲 (총무국장), 水 田 直 昌 (재무국장), 上 瀧 基 (식산국장), 信 原 聖 (정 보국 정보관), 兵 頭 儁 (총무국 기획실장), 關 口 聰 (경성세무감독국장), 田 中 鐵 三 郞 (조선은행 총재), 穗 積 眞 六 郞 (조선상공회의소 회두), 林 繁 藏 (식 은 두취), 人 見 次 郞 (조선무연탄 사장), 萩 原 彦 三 (조선광업진흥 사장), 伊 達 四 雄 (경성토목건축협회 회장), 鈴 木 武 雄 (경성제대 교수) 吉 良 喜 重, 山 地 靖 之, 奧 村 重 正, 角 永 淸, 山 名 酒 喜 男, 木 野 藤 雄, 岡 村 峻, 辻 桂 五, 高 橋 英 夫, 加 納 富 夫, 新 貝 肇, 三 津 田 松 吉, 上 田 新, 田 中 重 朗, 安 達 遂, 中 村 長 一 郞, 高 橋 洋 次 郞, 木 村 三 郞, 寺 脇 宗 男, 新 美 武, 江 口 信 平, 高 橋 敏 夫, 矢 野 誓 治, 中 野 人 士, 富 野 井 正 자료: 朝 鮮 電 氣 雜 誌 931-10, 1942.10, 40쪽; 朝 鮮 電 氣 雜 誌 932-8, 1943.8, 38쪽; 岸 謙, 朝 鮮 に 於 ける 電 力 統 制 の 新 展 開, 京 電 96-4, 1942.11, 2~7쪽. 비고: *는 소위원회 위원, **는 위원장임. 임시전력조사회의 심의를 거친 뒤 1942년 12월 31일에는 朝 鮮 電 力 國 家 管 理 實 施 要 綱 (이하 要 綱 )이 정식으로 각의에서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 전기회사의 합병과 사업 양수, 설비의 현물출자 등에 의해 발송전을 담당할 특수회사로 朝 鮮 電 氣 株 式 會 社 (가칭)를 설립해 전력국가관리체제를 확립하기로 최종 결정되었다. 67) 67) 每 日 新 報 91943.1.2.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31 < 朝 鮮 電 力 國 家 管 理 實 施 要 綱 > 제1 방침 대동아공영권내에서 조선에 부하된 생산력확충 특히 초미의 급무인 경 금속공업 기타 주요국방산업의 확충계획의 완수를 기하기 위하여 그 기 초산업인 전기사업에 대하여 전력자원의 합리적 개발을 촉진하고 전력 요금의 적정을 기함과 동시에 전력동원을 강력히 실시함은 각하의 급무 임에 비추어 이에 국가관리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조선에서 전기사업을 고도국방국가체제에 즉응시키도록 함. 제2 요령 1. 조선총독은 조선에서 발전, 송전 및 배전을 관리할 것. 단, 자가용 또는 지방적 수요로서 통제의 필요가 없는 것은 이를 제외할 것. 2. 조선총독은 전력설비의 건설계획, 전력요금 기타 전력수급에 관한 중요사항을 결정하거나 또는 전력관리상 필요한 명령을 할 수 있도 록 할 것. 전항 후단의 규정에 따라 하는 명령으로 인하여 발생한 손실은 정부 가 보상할 것. 3. 조선총독은 새로이 제령에 기초하여 특수회사인 朝 鮮 電 氣 株 式 會 社 (가칭)를 설립하고 우선 그 정한 발전 및 송전을 행할 것. 4. 조선전기주식회사는 조선에서 기존 전기회사의 통합, 사업의 양수 및 설비의 현물출자 등에 따라 이를 설립할 것. 전항의 경우에서 평가에 관해서는 평가위원회를 설치하고 이 공정 타당을 기할 것. 정부는 국유에 관계있는 주요전력설비 및 그 부속설비를 조선전기주 식회사에 현물출자할 것. 5. 조선압록강수력전기주식회사는 만주국과의 특수관계에 비추어 조선 전기주식회사에 통합하지 않음. 제령에 기초한 특수회사로 개조하여 이를 존치하고 압록강 및 도문강 본류에서 발전을 할 것. 6. 정부는 조선전기주식회사에 대하여 사채 및 배당의 보증, 조세의 감 면 기타 업무상 필요한 특권을 부여할 것. 7. 조선총독부는 조선전기주식회사의 업무에 관한 중요사항에 대하여 그 인가를 받아 기타 회사의 감독상 필요한 명령을 할 수 있도록 할 것. 8.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식회사에 대하여도 전2항에 준하여 조성 감독 을 할 것. 제3 조치
132 吳 鎭 錫 1. 조선총독은 본 요항을 실시하기 위하여 법령 및 예산상 필요한 조치 를 하기로 함. 2. 특수회사의 설립 및 운영에 대해서는 민간의 우수한 기술 및 경험을 중심으로 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함. 3. 전기사업의 통합에 당하여서는 중요산업과의 관련을 고려하여 전시 하에 생산활동에 지장 없도록 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의논하기 로 함. 4. 조선전기주식회사는 조선압록강수력발전주식회사의 주식의 반수를 소유하는 등의 조치에 따라 일원적으로 운영하기로 함. 68) 최종적으로 결정된 요강에는 조사회에서 제기된 업계의 요구와 희망사항 이 대부분 반영되었다. 우선 특수회사의 설립 및 운영에서 민간의 우수한 기술과 경험을 적극 활용하기로 하였고, 통합 양도되는 전기회사의 평가 는 평가위원회를 통해서 결정되도록 되었으며, 만약 전력설비의 건설, 전 력 요금이나 전력 수급과 관련한 총독부의 명령으로 손실이 발생할 때는 보상받는다는 조항이 삽입되었다. 또한 전기사업의 통합은 전시하 생산활 동에 지장이 없도록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조사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감독제도의 강화 나 관리기구의 정비 같은 조항은 아예 포함되지 않았다. 한편, 1943년 3월 30일에는 제령 5호로 電 力 管 理 令 이 발포되어 전력국 가관리의 범위와 방법, 그리고 특수회사로서 朝 鮮 電 業 株 式 會 社 (명칭 변경) 의 설립과 경영에 관한 중요사항이 확정되었고, 69) 4월 20일에는 조선총 독부령 제118호로 電 力 管 理 令 施 行 規 則, 1943년 4월 26일에는 칙령 제 397호로 조선전력평가심사위원회관제가 공포되어 전력국가관리를 실현할 법적 기초가 정비되었다. 70) 이른바 제2차 전력통제정책 곧 전력국가관리 의 시작을 의미했다. 전력관리령을 비롯한 일련의 법령들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71) 68) < 朝 鮮 電 力 國 家 管 理 實 施 要 綱 >, 公 文 類 聚 第 66 編. 69) 朝 鮮 總 督 府 官 報 9제4846호, 1943.3.30; 電 力 管 理 令 の 公 布 に 就 て, 小 磯 統 理 の 展 望 第 3 輯, 1944, 146~150쪽; 每 日 新 報 91943.3.30, 3.31. 70) 朝 鮮 總 督 府 官 報 9 제4863호, 1943.4.20; 朝 鮮 總 督 府 官 報 9 제4874호, 1943. 5.5; 每 日 新 報 91943.4.21. 71) 朝 鮮 電 力 管 理 令, 朝 鮮 電 氣 雜 誌 932-8, 1943.8, 48~54쪽; 朝 鮮 電 力 管 理 令 解 說, 朝 鮮 電 氣 雜 誌 932-8, 1943.8, 54~60쪽; 朝 鮮 電 力 管 理 令 施 行 規 則, 朝 鮮 電 氣 雜 誌 932-8, 1943.8, 61~69쪽; 朝 鮮 電 力 管 理 令 及 附 屬 法 規, 朝 鮮 總 督 府, 1943.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33 우선 국가관리의 범위는 발전, 송전, 배전 전체의 일원적 관리를 목표로 하되 당분간 지방적 수요 또는 자기 專 用 을 위한 발 송 배전은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향후 발송전에 이어 배전까지 통합할 계획을 염두에 두 고 있었던 것이지만, 끝내 실현하지는 못했다. 한편, 자가용을 제외한 발송 전회사를 통합해 국책대행기관인 朝 鮮 電 業 株 式 會 社 를 설립하기로 하였지 만, 만주국과 공동으로 개발에 착수한 朝 鮮 鴨 綠 江 水 電 은 여기서 제외하기 로 했다. 그러나 조선압록강수전에서 생산한 전기는 반드시 조선전업에 일 괄판매하도록 하고 조선압록강수전의 실질적 운영은 조선전업 중역진이 책 임져 발송전의 일원적 관리를 훼손하지 않도록 했다. 조선전업의 설립과정에서는 정황에 따라 합병, 사업양도, 출자 등 다양 한 방법을 모색할 수 있도록 했고, 통합대상회사의 합병조건, 양도가격, 출 자가격 등을 평가하기 위해 朝 鮮 電 力 評 價 審 査 委 員 會 를 구성하도록 했다. 조선전업은 특수회사에 걸맞게 정부의 배당보증(6%)과 사채의 발행한도 확장(불입금액의 3배), 정부의 원리불 보증(3억 한도), 10년간 소득세 및 영업세 면제 등 갖가지 특권도 부여받았다. 그러나 경영과정에서는 총독부 의 철저한 통제를 받아야 했다. 우선 사장, 부사장은 총독이 임명하고 이 사는 총독의 인가를 거쳐 주주총회에서 선임하도록 해 사실상 총독부가 중 역의 임명권을 장악했고, 전력설비 등의 건설 또는 변경 계획 및 전력요 금, 기타 전력 수급에 관한 중요사항은 총독이 결정하도록 했다. 총독부는 감독상, 공익상 필요할 경우 명령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조선전업은 총독 부의 명령을 수행할 의무를 졌으며, 이를 어길 경우를 대비해 갖가지 벌칙 조항도 구비해 두었다. 또한 회사의 업무를 감시할 회사감리관제도도 마련 했다. 전력국가관리를 위한 제반 법규 정비에 따라 국가관리의 주요 방책과 조 선전업의 설립과 경영에 관한 구체안도 마련되었다. 72) 조선압록강수전을 제외한 8개사(실제로는 9개사였음)를 통합해 朝 鮮 電 業 株 式 會 社 를 설립하 기로 하고, 먼저 조선수전을 중심으로 업적이 대체로 유사한 조선송전과 부령수전을 합병하고 총독부는 부평-대전간 국유남북연락선을 출자해 모태 72) 전력국가관리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田 中 重 朗, 朝 鮮 に 電 氣 事 業 の 統 制 に 就 て, 朝 鮮 電 氣 雜 誌 932-4, 1943.4, 13~23쪽; 角 永 淸, 第 2 次 電 力 統 制 に 就 て, 朝 鮮 9336, 1943.5, 4~16쪽( 朝 鮮 電 氣 雜 誌 932-4, 1943.4, 1~12쪽); 角 永 淸, 朝 鮮 の 電 氣 統 制 に 就 て, 朝 鮮 實 業 921-12, 1943.12, 18~30쪽 참조.
134 吳 鎭 錫 회사를 창립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머지 5개사는 전력관리령에 따라 양도 명령을 내려 모태회사에서 매수하기로 했다. 그 대신 양도회사에는 자산을 시가로 평가해 액면 4.2%의 사채를 지급하기로 했다. 향후 조선전업은 총 괄원가주의와 업종별 요금제에 의해 중요산업에 대해 저렴한 요금으로 공 급할 것을 모색하기로 했다. 그러나 조선전업은 기존에 체신국에서 작성한 통제요강에서 계획했던 특 수회사 朝 鮮 電 力 供 給 株 式 會 社 (가칭) 과는 그 성격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 다. 조선전력공급은 일본발송전을 그대로 모방해 기존 전력회사로부터 신 규 수력발전설비(기존 수력발전설비 제외)와 주요 화력발전설비, 그리고 주요 송전설비(100kV 이상)를 현물로 출자케 해 설립될 계획이었는데, 조선전업은 조선수전을 중심으로 모든 발송전회사(조선압록강수전 제외)를 통합하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전력공급의 예상자본금 은 1억5천만원에 불과했지만, 조선전업의 자본금은 약 3억4천여만원, 자 산은 7억수천만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총독부는 전력국가관리의 확정에 따라 조선전업의 설립을 급히 서둘렀 다. 73) 우선 총독부 관계관료들과 전력업계와 재계의 주요 인사들로 朝 鮮 電 業 設 立 委 員 會 를 구성했고(표 4), 1943년 7월 9일에는 조선총독부 제1 회의실에서 제1회 설립위원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조선수전, 조선송 전, 부령수전 3개사를 합병하고 총독부 소유의 남북연락송전간선을 현물 출자해 조선전업을 설립하기로 하고, 조선수전 600만주(50원 불입, 이하 동일), 조선송전 60만주, 부령수전 10만주 등 통합대상회사의 주식할당기 준을 정하고 남북연락송전간선은 673만원으로 평가해 총독부에 13만 4,600주를 배정하기로 해 자본금을 3억4,173만원으로 확정했으며, 신설 회사의 정관도 심의했다. 다음 날(7월 10일)에는 총독부 관료들과 재계 주요 인사들로 구성된 제1회 조선전력평가심사위원회를 같은 장소에서 소 73) 이하 조선전업의 설립과정에 대해서는 朝 鮮 電 業 の 創 立 迄, 朝 鮮 電 氣 雜 誌 932-8, 1943.8, 1~4쪽; 朝 鮮 電 業 の 將 來, 朝 鮮 電 氣 雜 誌 932-8, 1943.8, 5~8쪽; 第 1 回 朝 鮮 電 業 株 式 會 社 設 立 委 員 會, 朝 鮮 電 氣 雜 誌 932-8, 1943.8, 25~35쪽; 第 1 回 朝 鮮 電 力 評 價 審 査 委 員 會, 朝 鮮 電 氣 雜 誌 932-8, 1943.8, 36~38쪽; 第 2 回 朝 鮮 電 業 株 式 會 社 設 立 委 員 會, 朝 鮮 電 氣 雜 誌 932-8, 1943.8, 38~41쪽; 朝 鮮 電 業 株 式 會 社 創 立 總 會, 朝 鮮 電 氣 雜 誌 9 32-8, 1943.8, 42~47쪽; 每 日 新 報 91943.7.9, 7.10, 7.11, 8.1; 京 城 日 報 91943.7.10, 7.11, 8.1; 李 鴻 稙, 朝 鮮 電 業 株 式 會 社 十 年 史, 朝 鮮 電 業 株 式 會 社, 1955, 32~50쪽 참조.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35 집해 통합대상회사들의 주식 비율과 정부 출자에 대한 평가를 원안대로 확 정했다(표 4). 7월 31일 오전 10시에는 遞 信 事 業 會 館 會 議 室 에서 제2회 설립위원회를 열어 경과보고와 함께 기타 설립사무를 마치고, 설립위원회 가 끝나자마자 같은 날 오후 1시부터 같은 장소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해 조 선전업의 설립을 완성했다. 불과 한 달이 못 되는 기간에 설립사무를 모두 끝냈던 것이다. 총독부가 조선전업의 설립을 얼마나 급히 서둘렀는지를 보 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나머지 회사들에 대한 통합작업도 곧바로 이어졌다. 1943년 8월 31일에는 조선전업이 北 鮮 水 電 을 흡수합병했다. 74) 북선수전은 조선수전이 단독 출자해 설립한 자회사로서 조선전업의 설립과 함께 조선수전의 소유 주식이 조선전업에 귀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합병과정은 주식을 상각하고 자본금의 변동 없이 이루어졌다. 75) 또한 조선전업은 1943년 9월 20일에 는 강계수전, 한강수전, 남선수전, 조선전력 등 4개사의 사업일체를 자산 평가액에서 채무액을 제한 118,652,668원에 양수하고, 경성전기로부터 수색-부평 간 송전선 17.9km를 장부가격 888,732원에 양도받아 통합작 업을 일단락 지었다. 76) 대금은 현금이 아닌 연리 4.2%의 社 債 를 교부하 였다. 또한 1943년 11월 20일에는 전북지방에서 소규모수력발전소인 운 암발전소(5,120kW)를 운영하는 자본금 250만원(불입 112만5천원)의 南 朝 鮮 水 力 電 氣 를 합병해 통합작업을 최종 완료하였다. 77) 조선전업 설립과정에서 자산의 평가와 수뇌부의 구성은 최대 관심사항이 었다. 78) 당시 관료들은 설립과정에서 통합대상회사의 자산을 물타기[ 水 增 ]하거나 조선전업의 임원을 통합대상회사의 임원들을 모아서 구성[ 寄 合 世 帶 ]하는 폐해를 방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선 자산의 물타기는 향후 조선전업의 경영에 부담을 초래하고 전력원가 상승을 유발하는 요인이기 때문에 필히 막아야할 중대 문제였다. 총독부에서는 엄격한 자산평가를 공 74) 每 日 新 報 91943.8.27. 75) < 朝 鮮 電 業 株 式 會 社 臨 時 株 主 總 會 ノ 件 >(1943.8.23), 朝 鮮 電 力 統 合 關 係 綴. 76) 每 日 新 報 91943.9.19. 77) 李 鴻 稙, 朝 鮮 電 業 株 式 會 社 十 年 史, 朝 鮮 電 業 株 式 會 社, 1955, 50쪽. 78) 이하 별다른 주가 없는 한 大 澤 新 三 郞, 電 力 統 制 への 要 望 二 ケ 條, 朝 鮮 電 氣 雜 誌 931-11, 1942.11, 52쪽; 田 中 重 朗, 朝 鮮 に 電 氣 事 業 の 統 制 に 就 て, 朝 鮮 電 氣 雜 誌 932-4, 1943.4, 13~23쪽; 角 永 淸, 第 2 次 電 力 統 制 に 就 て, 朝 鮮 9336, 1943.5, 4~16쪽( 朝 鮮 電 氣 雜 誌 932-4, 1943.4, 1~12쪽); 角 永 淸, 朝 鮮 の 電 氣 統 制 に 就 て, 朝 鮮 實 業 921-12, 1943.12, 18~30쪽.
136 吳 鎭 錫 언했지만, 현실은 만만하지 않았다. 피통합회사들의 자산평가 과정에서 건 설기술의 빈곤에 기초한 무효투자액이 각각 강계수전 1,175,000원, 한강 수전 2,205,000원, 남선수전 227,000원에 달한다는 평가가 제출되었으 나 해당회사들의 강력한 반발에 밀려 결국 장부가격대로 인정하기로 했 고, 79) 조선전력에 대해서 불량자산 350만원, 그리고 강계수전에 대해서 공사지연으로 인한 금리증가액과 본사비증가액 330만원을 감액하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80) 결국 조선전업은 4개사 합계 자산총액 378,659,099원 에서 6,800,000원을 감액하고 부채 253,206,431원을 제한 나머지 118,652,668원을 사채로 교부해 매수작업을 매듭지었다. 기존 발전회사 들의 반발을 무마하고 통합을 서두르기 위해 일부 물타기를 묵인한 것이지 만, 결과적으로 조선전업이 피통합회사들의 경영부실을 고스란히 떠안은 셈이었다. 두 번째는 임원의 구성 문제였다. 기존회사들의 합병과 인수에 따른 통 합회사의 속성상 인적 구성은 복잡해지고 향후 경영과정에서 내분이 일어 날 가능성이 있었다. 총독부는 종래의 특수회사가 각 방면의 유능자들로 중역진을 구성해 국가적 관념을 관철하고자 했으나 책임소재가 불분명하고 비능률적이어서 업적이 좋지 않았다며 통합회사는 능률이 좋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중역진을 구성해 국책회사의 장점과 주식회사의 장점을 모두 살 리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에 근거해 그간 전원개발에 큰 성과를 보여 왔 던 일질계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중역을 구성했다. 조선전업의 사장에는 野 口 遵 의 강력한 후원을 바탕으로 일질의 조선내 전기사업을 총괄지휘했던 久 保 田 豊 이 임명되었고, 부사장에는 久 保 田 의 전기기술부문 보좌역격인 玉 置 正 治, 이사에는 久 保 田 의 토목부문 보좌역격인 橫 地 靜 夫 가 임명되었으 며, 81) 나머지 중역들도 경남지사를 역임하고 당시는 동척 취체역이었던 山 澤 和 三 郞 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질계로 채워져 單 一 色 으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82) 79) 金 谷 要 作, 漢 江 水 電 思 い 出 の 記, 有 賀 さんの 事 蹟 と 思 い 出, 同 編 纂 會, 1955, 204~208쪽. 80) 朝 鮮 電 氣 事 業 史, 中 央 日 韓 協 會, 1981, 320~324쪽. 81) 이들에 대해서는 大 自 然 を 制 壓 せる 電 業 巨 人 の 生 活 記 錄 (8), 朝 鮮 電 氣 雜 誌 930-12, 1941.12, 22~25쪽; 永 塚 利 一, 久 保 田 豊, 電 氣 情 報 社, 1966; 久 保 田 豊, 財 閥 回 顧 錄 6, 大 韓 書 籍 公 社, 1983; 朝 鮮 電 氣 事 業 史, 中 央 日 韓 協 會, 1981, 587~594쪽 참조.
일제말 電 力 國 家 管 理 體 制 의 수립 137 비록 총독부가 표면적으로 능률적인 회사 운영을 내세워 중역진을 일질 단일색 으로 구성했지만, 이는 실상 새로이 탄생한 조선전업의 성격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같은 시기 일본에서 발송전 통 합을 맡았던 일본발송전이 기존 전기회사들의 현물출자로 자본 구성을 이 루고 새로이 중역진을 임명해 전혀 새로운 성격의 국책회사로서 탄생되었 던 것과 달리 조선전업은 설립과정에서 일질계인 조선수전을 중심으로 자 본구성을 이루고 있었다. 전술했듯이 조선수전, 조선송전과 부령수전 3사 가 모체회사를 이루었는데 불입자본금을 기준으로 각각 조선전업의 주식 600만주, 60만주, 10만주를 할당받았다. 그런데 주지하듯 조선수전과 조 선송전은 일질에서 장악하고 있는 회사였다. 총독부 보유주식이 13만 4,600주(2.0%)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주식의 거의 대부분을 일질계 가 장악했던 셈이다. 나머지 회사들의 매수는 주식 대신 사채를 지급했으 므로 자본 구성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렇게 보면 총독부는 조 선전업의 모체회사를 일부러 일질계 중심으로 구성해 자본구성에서 일질의 장악력을 높여주었던 것이다. 전력국가관리는 명목상으로는 국영을 지향했 지만, 조선전업의 자본 구성과 중역진에서 보듯이 실질적으로는 일질 주도 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총독부는 일질 몰아주기 로 전력경영을 일질에 위 탁한 셈이었다. 이는 일질이 전시하에 경금속, 인조석유, 항공연료와 각종 유기합성제품의 군납 등 군수품의 생산과 공급에 적극 나섰던 것과 무관하 지 않았다. 83) 또한 조선수전 사장 久 保 田 豊 이 임시전력조사회의 석상에서 특수회사의 내용과 성격, 출자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국가관리 이후 기 존산업의 추진력이 상실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해 최종적으로 각의에서 통 과된 요강에 특수회사의 설립 및 운영은 민간의 우수한 기술과 경험을 적 극 활용하며 전기사업의 통합은 전시하 생산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한다는 내용이 포함될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당시 총독부 관료들은 종래 전원개발에 우수한 실적을 보인 자에게 전권 을 위탁해 충분히 능력을 발휘토록 하는 데에 제2차 전력통제정책 의 목표 가 있음을 자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질이 전원개발에서 다년간 축적한 82) 조선전업의 중역진은 사장 久 保 田 豊 (조선수전 전무), 부사장 玉 置 正 治 (조선수전 상 무), 이사 橫 地 靜 夫 (조선수전 상무), 佐 藤 時 彦 (조선수전 상무), 林 道 太 郞 (조선수전 취체역), 감사 大 島 英 吉 (조선수전 취체역), 山 澤 和 三 郞 (동척 취체역)이었다. 83) 堀 和 生, 朝 鮮 工 業 化 の 史 的 分 析, 有 斐 閣, 1995, 6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