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 1일(금) 제141호 Monthly Newsletter from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Republic of Korea 발행인:대한민국학술원 회장 / 우 137-044 서울 서초구 반포4동 산94-4 / http://www.nas.go.kr / XXXXX / F XXXXX / 편집:학술진흥과 第 76 次 大 韓 民 國 學 術 院 臨 時 總 會 (2005. 3. 11) 이달의 주요기사 News 학술원 소식 進 化 心 理 學 車 載 浩 會 員 5면 舊 韓 末 의 産 業 -토지조사사업부터 어음 등- 崔 泰 永 會 員 7면 會 員 寄 稿 學 術 院 創 立 당시의 有 力 誌 論 調 金 屬 工 作 機 械 精 密 度 향상을 위한 小 考 第 5 次 아시아 學 術 會 議 (SCA) 準 備 會 議 參 加 記 李 賢 宰 會 員 11면 康 明 順 會 員 14면 金 炳 洙 會 員 16면 書 評 敦 煌 詞 文 學 論 考 車 柱 環 著 宋 龍 準 서울 大 敎 授 18면
제141호 2005년 4월 1일(금) 學 術 院 소식 3월 임원회 개최 사위원회는 학술원 회원과 교수 등 관련 3월 임원회가 3월 4일(금) 오후 2시 학술 분야 전문가로 구성하여 4월 11일(월) 오 원 중회의실에서 임원 15명 전원이 참석한 후 2시에 제1차 심사위원회를 개최할 예 가운데 개최되었다. 정이다. 이번 임원회에서는 2005년도 전반기 임기만료 회원후보자 자격심사 및 예선 김진표 교육부총리 학술원 방문 결과 보고 등 5건에 대한 보고와 2005 - 학술발전과 후학양성에 대해 논의 - 년도 신규회원 선출예정 인원의 전공분 김진표 부총리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은 야 및 추천학술단체 지정안, 2005년 지난 3월 10일 대한민국학술원을 방문하여 도 하반기 임기만료 회원 선출계획 김태길 회장, 주진순 부회장, 정명환 인 안, 제50회 대한민국학술원상 부문별 문 사회과학부회장, 문국진 자연과학부회 심사위원회 구성안, 인문 사회6분과 장, 황적인 인문 사회4분과회장, 권이혁, 연구과제 확정 및 연구비 지급안 을 이현재, 이호왕 전임회장 등 학술원 전 현 심의하였다. 심의안건 중 2005년도 신임회원선출계 직 임원들과 학술발전 및 후학 양성에 관 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획 예정인원의 전공분야 및 추천단체 지 이 자리에서 김진표 교육부총리는 학 정안을 보면 선출예정인원 16명(인문 사 술 각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의 어른이신 회과학부 8명, 자연과학부 8명)의 신규회 학술원 회원들의 빛나는 연구업적이 우리 원을 선출하기로 하고 신규회원의 전공 나라 발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면서 그간 분야 및 추천단체 지정안은 원안대로 의 의 학술발전에 이바지한데 대해 감사의 결하였다. 뜻을 표했다. 또한 하반기 임기만료 회원 선출계획안 을 보면 임기만료 회원은 7명(인문 사회 과학부 : 김규영, 조성식, 문홍주 회원, 자 연과학부 : 장세헌, 강명순, 이우주, 오봉국 회원)으로 3월 16일부터 4월 30일까지 추 천서를 접수 받아 5월 23일부터 5월 27일 까지 회원심사위원회 심사를 거쳐 7월 15 일(금) 개최되는 부회 및 총회에서 선출할 계획이다. 그리고 제50회 대한민국학술원상 부문별 김진표 교육부총리 학술원 방문 심사위원회 구성안에 대해서는 지난 2월 분과회에서 수상후보자 심사대상자 총 47 명(인문 사회과학부 16명, 자연과학부 21 명) 중 19명(인문 사회과학부 9명, 자연과 학부 10명)이 예비심사를 통과하여 부문별 심사위원회에 회부되었으며 각 부문별 심 제32회 국제학술대회 조직위원회 개최 제32회 국제학술대회조직위원회 2차 회의 가 지난 3월 3일(목) 인문 사회5분과회의 실에서 개최되어 주제발표자 및 토론자 등 을 다음과 같이 선정하였다. - 2 -
2005년 4월 1일(금) 제141호 1) 대주제 : 국제질서와 동북아의 미래 2) 주제발표자 선정 구 분 주 제 명 발 표 자 소속 / 직위 비고 기조연설 국제질서와 동북아 차 기 벽 학술원 회원 제1주제 미국과 동북아 Robert Scalapino 미국학술원 회원 제2주제 일본과 중국 Yan Xuetung 중국 청화대학 교수 후보자 제3주제 한반도의 미래 안 병 준 학술원 회원 3) 좌장, 토론자 등 선정 - 좌장 및 총정리 : 홍승직 회원 - 토론자 구 분 주 제 명 토론자 소속 / 직위 비고 제1주제 미국과 동북아 김 우 상 연세대 교수 제2주제 일본과 중국 김 효 섭 중앙대 교수 제3주제 한반도의 미래 현 인 택 고려대 교수 제76차 부회 및 임시총회 개최 학술원 제76차 부회 및 임시총회가 지난 3월 11일(금) 오후 2시에 개최되었다. 이번 제76차 임시총회에서는 2005년도 전반기 임기만료 회원 32명(인문 사회과학부 : 류승국, 김태길, 차주환, 여석기, 전해종, 남흥우, 김홍규, 김성희, 이만갑, 차기벽, 정수영, 변형윤, 김동기, 윤기중, 곽수일 회 원, 자연과학부 : 김태린, 안세희, 노재식, 박세희, 정창희, 김창환, 이승원, 우형주, 노오현, 이장락, 김낙두, 심종섭, 이춘녕, 김문협, 고재군, 박영호, 전세규 회원)과 학 술원 명예회원후보자 5명에 대한 선출을 각각 승인하고 폐회되었다. 이번에 선출된 명예회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명예회원 명단 후 보 자 분과별 성 명 연령 전 공 학 위 현 직 국적 상훈 연구업적 임 기 인문 사회 4 Itoh, Masami ( 伊 藤 正 己 ) 86 Law Ph.D., 일본 Univ. of Tokyo Emeritus Professor, University of Tokyo - Grand Cordon of the Order of the Rising Sun 1993 - Order of Culture 1999 2005.3.11 ~ 2009.3.10 자연 1 Noyori, Ryoji ( 野 依 良 治 ) 67 Organometallic 일본 chemistry Ph.D., Kyoto Univ. President, RIKEN - Nobel Prize in Chemistry 2001-3 -
제141호 2005년 4월 1일(금) 자연 1 Nagakura, Saburo ( 長 倉 三 郞 ) 85 Dynamics, Electronic structure 일본 D.Sc., Univ. of Tokyo President, The Japan Academy - The Japan Academy Prize 1978 - The Order of Cultural Merit 1990 2005.3.11 ~ 2009.3.10 자연 Gajdusek, 82 Medicine California Member of - Nobel Prize in 4 Daniel Inst. of National Physiology or Carleton 미국 Tech. Academy of Sciences Medicine 1976 자연 Jan (Eric) 70 Human Ph.D. in President of the - One of the 4 Lindsten cytogene- Medical Royal founders tics Genetics at Swedish of human 스웨덴 Karolinska Academy of cytogenetics Institutet Sciences 국제과학연맹이사회 한국위원회 개최 국 제 과 학 연 맹 이 사 회 ( I n t e r n a t i o n a l Council of Scientific Unions) 한국위원회 가 지난 3월 17일 (목) 자연1분과 회의실 에서 개최되어 제1차 아시아 태평양지역 회의 참석자로 김수진 회원을 선정하였다. 제1차 아시아 태평양지역회의는 4월 25 일부터 27일까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 르에서 개최된다. 그리고 제28차 국제과학연맹이사회 총 회 참석자로 권숙일 회원과 김수진 회원 이 선정되었으며, 제28차 국제과학연맹이 사회는 10월 17일부터 21일까지 중국 소 주 및 상해에서 개최된다. 2005년도 기초학문분야 우수학술도서 선정 지원 사업계획 공고 기초학문분야의 우수학술도서를 선정하 여 대학, 연구소, 공공도서관 등에 보급함으 로써 기초학문발전과 출판 및 저술활동의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한 2005년도 기초학 문분야 우수학술도서 선정 지원 사업계획 을 4월 1일(금) 중앙일간지 및 학술원 홈 페이지에 공고할 예정이다. 사업계획을 보면 선정분야는 인문학, 사회과학, 한국학, 기초과학 등 4개 분야 이고 선정대상 도서는 2003. 1. 1~2004. 12. 31 기간 중 국내에서 초판간행된 학 술도서이다. 또한 추진일정은 4. 11(월)~4. 30(토) 까지 신청도서 접수를 받아 7월까지 심 사를 완료하고 8월에 선정결과를 발표하 여 11월에 도서구입 하여 대학도서관, 공 공도서관, 연구기관 등에 보급을 할 계획 이다. 學 術 院 事 務 局 人 事 轉 入 魯 日 塾 학술원사무국장(2005. 3. 15) 前 강원대학교 사무국장 轉 出 黃 寅 哲 前 학술원사무국장 서울특별시교육청 기획관리실장으로 전출(2005. 3. 15) - 4 -
2005년 4월 1일(금) 제141호 進 化 心 理 學 進 化 心 理 學 의 대두 進 化 心 理 學 (evolutionary psychology)란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말이 다. 1989년에 Evolutioary psychology란 표현이 논문제 목으로 등장한 것을 필두로 90년대 중반에 들어와서 신 체적 매력의 진화심리학 과 같은 의 진화심리학 이란 제목을 단 논문들이 나타났 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을 새 로운 심리학의 한 영역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David M. Buss가 1999년에 내놓은 Evolutionary Psychology: The New Science of M ind란 교 과 서 이 다. 그 는 1995년에 Evolutionary psychology: A new paradigm for psychological science 란 논문을 통해 진화심리학의 가능성을 주장한 바 있었다. 그러나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진 화심리학은 존재했었다. Buss 에 의하면 실제로 인간의 진화심리학을 처음 다룬 책은 Don Symons가 쓴 The Evolution of Human Sexuality(1979)이라는 것이 다. Buss 자신은 캘리포니아 대-버클리에서 대학원생으로 있을 때부터 인간행동의 진 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 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1981년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하바드의 심리학과 조교 車 載 浩 會 員 ( 心 理 學 ) 수로 초빙되면서 진화론적 관 점 에 선 심 리 학 을 강 의 했다. 이때 대학원생 Leda Cosmides와 그의 남편 John Tooby를 만났다. 이 둘은 심 리학적 문제를 진화론적 관점에서 분석하는데 남다른 열정과 재주를 가지고 있 어 선생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Buss는 그 후 캐리 포니아 팔로알토(Palo Alto) 에 있는 the Center for Advanced Study in the Behavioral Sciences에 객원 연구원으로 2년간 들어가 게 되면서 Foundations of Evolutionary Psychology 란 프로젝트를 수행했는데, 이 프로젝트에 Buss, Cosmides, Tooby, Daly, 그리고 Margo Wilson이 합류했다. 이 팀의 작업이 진화심리학의 실질 적인 산실이 된 것이다. 進 化 心 理 學 의 學 問 的 背 景 진화심리학에는 생물학적 배 경과 심리학적 배경이 있다. 생물학 쪽에서는 당연히 진화 론의 창시장인 Charles Darwin - 5 - 의 영향이 가장 중요하다. 진 화론은 유전인자의 유정에서 의 역할이 알려지면서 30년 대와 40년대에 다윈의 진화 에 대한 여러 잘못된 인식이 교정되는 소위 현대적 종합 (modern synthesis) 을 경험 했고 1960년에는 William D. Hamilton(1969)에 의해 일대 수정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 수정작업에서 사회행동 의 진화의 문제를 다루었음으로 진화심리학의 기틀을 마련하 는데도 일조를 했다. 1966년 에는 George C. Williams가 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이란 책을 펴냈는 데, 이 책은 Hamilton의 이 론(the theory of inclusive fitness)을 세상에서 이해하 기 쉽게 소개하는 한편 진화 론에서 중요한 개념인 적응 (adaptation)의 개념의 올바 른 사용법을 지시해 주었다. 생물학 쪽에서 진화심리학 발생의 배경이 된 또하나 의 분야는 行 態 學 (ethology) 이다. 이 학문분야는 1950년 대초에 유럽에서 시작된 것 이지만 Lorenz(1965)의 오리 새끼에서의 刻 印 (imprinting) 현상 연구로 세상에 널리 알 려지게 되었다. 이 분야의 창 시자의 한 사람인 Tinbergen 은 이 학문이 (1) 행동의 직 접적 원인(현재 상황에서 무 엇이 그 행동을 일으켰나), (2) 행동의 발달적 원인(그
제141호 2005년 4월 1일(금) 행동이 개체의 성장과정에서 어떻게 변해왔는가), (3) 행 동의 기능(그 행동은 무슨 역할 또는 구실을 하는가), 그리고 (4) 행동의 진화적 기 원(그 행동은 어떻게 진화되 어왔는가)에 대한 답을 추구 한다고 말한 바 있다. Darwin의 진화론과 행태 학은 각각 심리학에 흘러들 어와 진화적 관점을 심었다. 고전적인 진화론은 1910년대 에 미국에서 機 能 主 義 心 理 學 (functional psychology)이 란 학파를 만들어냈는데, 이 를 시작한 사람은 William James이다. 이 학파는 역사 적으로 미국의 심리학의 시 원을 이루었다. 이 심리학은 사람의 마음이나 행동을 그 것이 하는 기능(function)이 란 각도에서 파악하고 분석 하려 했다. 이 심리학은 適 應 (adaptation)을 중요한 위치 로 끌어올렸다. 미국의 심리 학은 1920년대에 곧 行 動 主 義 (behaviorism)의 무대가 되 는데, 그 결과 기능주의가 표 방하던 적응에 관한 관심은 전면에서 후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을 동물과 구별 되는 존재가 아니라 동물세 계의 일부로 보는 시각으로 남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동 물심리학이나 생리(생물)심리 학이 설 자리가 마련되었다. 동물심리학은 19세기말 생 길 때부터 행동의 진화에 초 점을 맞추었다. 생물학에서 알 려져 있는 진화론은 주로 생 물의 신체적 구조(예: 골격)의 진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Darwin 자신은 생전 에 심리적인 진화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60년대에 행 태학이 영국을 통해서 미국의 동물심리학에 유입되면서 심 리학 안의 진화론적인 흐름이 한층 강화되었다. 1950년대 이후에 심리학의 가장 거센 흐림이 된 Skinner 의 소위 급진적 행동주의 (radical behaviorism)란 심리 학은 동물이나 인간의 학습을 행동의 도태 과정으로 파악했 다. 상황에 맞는 행동만이 남 고(강화되고) 그렇지 못한 행 동은 도태(약화)된다는 것이 Skinner의 입장이다. 기능주의 가 사람을 적응적인 존재로 본 데 대해서 Skinner류의 행동 주의는 행동의 도태(selection) 란 형태로 진화론의 생각을 빌려왔다. 그러나 극단적인 환경주의 입장을 취하여 인 간에게는 날 때부터 본성이 란 것이 있다는 것을 부정까 지는 않았더라도 강조하지 않았고, 특히 행동의 진화적 기원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 었다는 점에서 진화심리학의 주요한 배경으로 꼽을 수는 없겠다. 進 化 心 理 學 의 전망 오늘의 진화심리학은 고전 - 6 - 적 진화론에 입각한 것이 아 니라 Hamilton의 진화론 혁 명 등 새로운 발전을 반영하 는 진화론에 입각해 있다. 진 화심리학은 하나의 새로운 심리학적 접근을 제공한다. 진화심리학은 심리적 현상의 진화적 기원에 관심이 있다. 個 體 發 生 的 인 관심은 발달심 리학에 이미 있었던 것이지 만 系 統 發 生 的 인 관심은 動 物 心 理 學 을 제외하면 새로 운 것이다. 진화심리학은 동 물만이 아니고 사람에게까지 진화론적 관심을 확대시킨다. 진화심리학은 진화론에서 이 끌어낸 가설을 검증하기 위 해 연구를 할 수 있으며, 또 확인된 현상을 설명하기 위 해 진화론적인 지식을 동원 하기도 한다. 진화심리학은 심리학의 거 의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다. 실제로 Buss는 認 知 心 理 學, 社 會 心 理 學, 發 達 心 理 學, 性 格 心 理 學, 臨 床 心 理 學, 그리고 文 化 心 理 學 안에 진 화적 접근이 가능하다고 본 다. 그렇게 보면 진화심리학 은 하나의 특이한 심리학의 접근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접근을 쓰는 연구 들을 끌어모아 하나의 독립 된 심리학 분야로 만들 수도 있다. 그것이 Buss의 희망일 것이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은 심리학 안의 한 접근으로 남 을 가능성이 높다.
2005년 4월 1일(금) 제141호 舊 韓 末 의 産 業 - 토지조사사업부터 어음 등 - 나는 대한제국 4년(서기 1900년) 봄에 황해도 구월산 북쪽의 장련( 長 連 )에서 태어 났다. 이 해에 처음으로 서울 종로에 전등이 켜지고 우리 나라가 만국우편연맹에 가입 하고 신식병대와 군악대가 설치되었다. 한강철교와 경인 철도도 개통됐다. 그 전에 이 미 여러 외국과의 조약이 체 결되고 청일전쟁과 개화당의 갑신정변, 독립협회 운동이 일어난 뒤이며 신식교육이 시작된 때였다. 1904년의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오조약부터는 내 기억을 더듬을 수 있게 되는데, 1910 년 일제강점이 시작되면서 조 선 토지조사사업이 펼쳐졌다. 일제가 오조약이래 계획해온 식민통치의 기초작업으로, 수 탈을 위해 세원을 확실히 하 고 일본인의 정착지 마련과 구질서를 허물려는 등의 목적 으로 행해진 것이다. 여러 양상 중에 내가 기억 하는 것은 나무말뚝의 사방 을 깎고 먹글씨로 동서남북 방향에 동쪽은 아무개땅 서 쪽은 아무개땅 써서 논 밭 산 경계에 박아놓는 것이었 다. 10여세 난 내가 깎은 나 무기둥을 메고 할아버지와 같이 가던 생각이 난다. 그렇 게 박은 수십개의 말뚝 사면 에 소유자를 밝혀 토지신고 한 것이었다. 그러면 토지조사국에서 양 崔 泰 永 會 員 ( 法 哲 學 ) 성한 측량기사가 다니며 삼각 측량한 것 그림 그려서 면적 을 내고 누구네 땅이다 정했 다. 측량기사는 제등 분수 기 하같은 수학교육과 근대식 측 량기법을 얼마동안 배우고 나 서 그 일을 했다. 금테두른 모자를 쓰고 논두렁에서 뻐기 며 사무를 보았기에 논두렁 판임관 이라고 불렀다. 이때 말뚝에 자기 소유 표 지해서 땅에 박지 않았거나 미처 토지신고 안된 사람네 땅은 다 몰수되어 동양척식 소유 일본 국유지가 되었다. 난데없는 토지조사나 측량 한다는게 무슨 소린지 몰라 가만있다가 졸지에 땅을 뺏 긴 사람들이 장련에도 많았 다. 그러니 전국각지에 얼마 나 많이 있었는지 모른다. 일제는 이런 조선 사람이 많 이 나오기를 속셈으로 바라 마지 않았다. 이렇게 뺏긴 땅이 조선 토지의 40%가 되 었다. 이때 몰수된 땅에 궁땅도 있었다. 조선왕실 소유의 땅 을 흔히 궁땅이라고 불렀는데 - 7 - 장련군에는 이도면에 궁땅 이 많았다. 거기서 소출된 쌀은 서울 대궐로 갔었다. 궁땅을 관리하는 서울사람 들이 와 살아서 서울할머니 집이라고 놀러 가면 쪽찌고 두루마기 입고 서울말씨 쓰 는 할머니가 있었다. 이런 집안사람들이 나중에 면장 도 되었다. 궁땅이 전국적으 로 어느 정도나 됐는지 나 는 정확히 모른다. 왕실 종 친 한사람의 말로는 20%가 된다고 했었다. 일제에 몰수된 땅은 동양척 식회사가 관리하면서 일본 이 민에게 정착지원금을 대주고 실제가격의 20%라는 개값으 로 차지하게 했다. 이런 헐값 으로 조선 농민들로부터 땅을 많이 사들이기도 했다. 조선 의 토지제도를 개량 한다며 뺏을 수 있는 만큼 뺏어다 수 많은 일본 이민을 불러내 정 착시키는 동양척식 땅이 된 것이었다. 그전까지 논밭을 사고 팔면 온동네 사람 다 들여서 잔치 를 해 먹였다. 그것이 등기였 다. 이 잔치에서 먹는 국수를 성애국수 라고 했다. 등기국 수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토지세금은 전체 면적에 대한 총액만 맞춰 결 제했는데 담당관리가 그 한도 안에서 임의로 세금을 매겼 다. 땅주인이 세도가라면 관
제141호 2005년 4월 1일(금) 리와 짜고 자기 땅에는 세금 을 적게 매기고 그대신 남의 땅에 세금을 많이 매기기도 하여 부패여지가 있었다. 토지조사 하고나서 땅에 번 지수가 매겨지고 지목도 논 밭 묘지 산 등으로 정해졌다. 재무서가 각처에 생기고 일본 정부에 의한 세금 징수가 이 루어졌다. 일본이 조선을 근 대화 시켰다 고 자랑하는 새 제도는 조선 사람을 착취해 일본 정부의 재원을 충당하는 것이었다. 세금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나는 쌀 등 모든 곡식, 소고 기, 닭, 달걀까지 포함한 육 류 등 모든 농산물이 아주 싼값으로 일본에 팔려 수출 되었다. 무까지 일본인이 가 져다가 무말랭이를 만들어 되팔았다. 강점전후해서부터 일본인은 비누 사탕 성냥같 은 밑천 안드는 잡화장사 몇 년에 조선에서 돈을 벌고 사 기꾼 행상이 나타나 조선 사 람 푼돈까지 뺏어갔다. 조선 사람에게 육류가 너 무도 귀했다. 꿩을 사냥해 잡으면 귀한 고기로 생각했 다. 암거래 되는 돼지고기를 사려면 밀도살한 돼지고기 를 조끼처럼 입고 나온 사 람에게서 몰래 사가는 것이 다. 거래하다 들킬것 같으면 처벌이 무서워 도로 입고 갔다. 의식이 넉넉한 사람은 제한돼 있었고 기름 짜고난 콩깻묵을 허기진 조선 사람 이 먹었다. 처참한 시절이었 다. 식민지로 떨어지면서 그 런 정도로 일본에게 착취당 했다. 그런데 강점기간중 일본이 별걸 다 갖다 우리한테 팔았 지만 양말과 구두 만드는 업 종만큼은 우리를 못 쫓아왔 다. 일본의 시골은 우리보다 더 형편없었다. 조선 토지조사사업으로 단 하나 조선이 얻은 수확이라면 조선에 수학 교육이 일게 된 것 정도다. 측량을 맡아한 측 량기사들은 토지조사가 끝나 자 다 학교 선생이 되어 산수 를 가르쳤다. 내가 배운 장련 의 사립 광진학교에도 토지조 사국 출신 이명온 선생이 와 서 가르쳤다. 그렇게 일본인이 차지한 땅 으로 장련과 검복이 나루 중간 에 있던 삼화농장은 쌀농사도 하고 소금도 구웠다. 이들은 부자가 되고 장련의 오래된 탑 과 문루같은 것을 자기네 농장 에다 옮겨놓기까지 했다. 내가 서울 있으면서는 서 울 신촌근처 땅을 다 차지하 고 참외농사하던 일본 이민 들이 어떻게 살고 있나 친구 김원벽과 같이 보러 가기도 했다. 김막가 참외라는 주먹 만한 노랑참외가 비싸게 팔 리던 때였다. 김막가 참외는 일본에도 없었다. 일본 참외 는 조선땅에서 나는 참외처 럼 달지 않고 맛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메이지대학을 마치고 귀국해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 8 - 있을 때 장련서 경찰서장하 던 하나다 라는 일인이 동척 간부로 있으면서 사람을 보 내 날 만나자고 했지만 내가 피했다. 일본 관리는 조선말 을 잘하면 월급에 더 많은 가봉을 해 주니까 우리말 열 심히 하던 일인이 많았는데 하나다도 그중 하나였다. 이때 하나다를 만났더라면 아마 도지사 나가라는 권유 를 들었을 것이다. 말을 들 을 수는 없고 안 듣는다면 나는 요시찰 인물이 될 것이 니 아예 만나지 않는게 최상 이었다. 조선에 땅이 귀해 소작짓기 도 어려웠다. 내가 본걸 다 말하려면 창창하지만 그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장가 못가 는 총각이 여자를 예장주고 사간다고 하면 어린 딸을 파 는 것이다. 조그만 애가 병이 나고 생활은 참혹하였다. 간도로 이민가는 조선 사람 들이 생겼다. 간도는 그 전까 지 조선 땅이니 우리나라 땅 으로 알고 가는 것이다. 조선 국에서 간도에 파견된 관리가 있어서 내 눈으로 분명히 보 았다. 장련에서 나귀 등에 성경책 을 싣고 다니면서 팔던 사람 이 살 턱이 없어 간도로 떠나 던 날 동네사람들 틈에서 나 도 배웅했다. 볍씨 한짐을 소 중히 지니고 바가지 몇짝과 밥상을 가지고 떠났다. 아이 는 짐짝 위에 올려놓았고 바 가지는 대롱대롱 매달렸다.
2005년 4월 1일(금) 제141호 나루에서 고향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잘가오 소리쳤다. 잘있소 - 어서 들어가쇼 떠 나는 이들이 아련히 답했다. 간도는 조선인 개척자의 땅 이면서 애국의 땅, 신교육의 땅이었다. 신흥무관학교(경희 대학으로 변신했다)와 이상설 의 서전서숙같은 학교가 섰 다. 간도를 우리나라 땅이라 고 찾아가고 거기서 뿌리를 내렸는데 일본이 철도부설권 과 바꾼다며 중국에 제 맘대 로 베어줬으니 반드시 되찾아 야 한다. 보성전문학교 교수하다 간 도에 가서 省 長 이 된 윤 교 수는 순한 사람이었다. 학생 들이 수업 그만하자고 조르 면 마지못해 빨리 놔주면서 도 자기는 시간 끝까지 교실 에 남아 있곤 했다. 독일어 를 잘하니까 해방 후에는 또 중국인들이 놔주지를 않아서 그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 다. 그 따님이 서울서 1950 년대에 큰 다방을 하여 굉장 한 명사들이 출입했다. 분명한 것은 일본 덕에 우 리가 근대화된 것이 결코 아 니라 일본이 우리나라를 착취 한 것이고, 일본 때문에 우리 가 망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해방 후 이 땅에서 쫓겨 가면 서도 담벼락에 10년 후, 20년 후 다시보자 하고 써놓고 간 사람들이다. 얼마전 책으로 나온 윤치 호의 일기 를 읽었다. 3 1운 동을 반대하고 친일로 추종한 논리를 반박한다. 소위 문명 국 지도를 받는 식민지가 돼서 일찍 깨느냐, 우리가 자유국권을 가지고 우리의 교육 방침을 세워서 빨리 깨 느냐는 문제로 갈릴 수 있 다. 그가 일기에서 주장한 것처럼 남이 만들어 주는 것 가지고는 빨리 안 깬다는 것 이 내 의견이다. 남의 식민지 되면 부려먹 기 위해 그 국민을 무식하게 만드니까 우리가 독립국이 되려면 자력으로 깨울 방침 을 세워 처음부터 자주적으 로 될 소질을 가꿔 출발해야 되는 것이다. 일본 숭배자가 돼서, 중국 숭배자가 돼서 그 들이 시키는 대로 해서야 어 떻게 독립국이 되는가. 자력 이 없을수록 남의 간섭을 덜 받고 자기 힘으로 찾아야 된 다. 우리는 지금 군사용 무기 만드는 것을 금지 당해서 이 렇게 약하다. 교육으로 우리 민족을 빨 리 깰 수 있는 방법이 있었 다. 1894년 청일전쟁은 각성 의 기폭제였다. 신교육에 대 한 열이 불붙었던 구한말 몇 해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이 깼는지 모른다. 이준이나 한 국군 장교 이동휘 같은 사람 은 3천리에 1리마다 학교 하 나씩 세우자고 하던 사람이 었다. 많은 애국지사들이 학 교를 세웠다. 한동안만 더 우리가 자력으 - 9 - 로 깨치던 기간이 지속됐다면 교육 체제가 자율적으로 정비 되고 합방을 피할 수도 있었 을 것이다. 합방되면서 수많 은 사립학교가 다 일제 교육 령으로 폐교됐으니 우리는 망 하는 길로 들어서고 일본어와 일본 역사를 배우는 일본식 공교육이 시작됐다. 이 당시 내가 직접 겪었던 산업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장련에는 만석꾼 부자가 몇 있었다. 김구를 장련에 데려 와 신교육을 열은 오인형 진 사가 그 중 하나였다. 오진 사네가 연평도 조기잡이에 투자했다. 배를 많이 가지고 뱃사람 많이 태우고 몇 날씩 바다에 나가 하는 것인데 일 이 안되면 집안 망하는 대 투자였다. 뱃사람들은 조기잡이 나가 기 전에 배에 바퀴 달아서 뭍 에서 타고 다니며 몇날 며칠 잘먹고 야단하고 노래했다. 연평바다에 돈 벌러 가잔 다 에헤에헤 에헤야 오진사네 대봉죽 질렀다(풍작이란 뜻) 에헤 에헤야 그렇게 논 다음 배에 독을 많이 싣고 바다로 떠났다. 장 련 앞바다에선 조기가 안 잡 히니까 연평바다 내려가 10 일도 있고 그 이상도 있다 오는데 만선이 되어 돌아오 면 부자가 하나 새로 생겼다. 그러나 조기떼가 어디로 간 다 과학적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내가 알기론 망한 사람이 많았다. 오진사
제141호 2005년 4월 1일(금) 네가 망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중국 가 서 장사하면서 신문명을 보 고 산수책 등을 가져온 사람 이었다. 1897년 산 몇개를 깎아 바다를 메워 진남포 항 구가 개항된 다음 할아버지 는 진남포 항장과 동업하여 진남포 - 장련간 뱃길을 개 발, 배 운송회사를 운영했다. 대단한 이권이었다. 이미 진 남포 - 평양간 뱃길은 일본 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석유모터를 쓰는 똑딱선과 목선이 다녔는데 일기예보가 없을 때니 일일이 천세력을 보고 조수간만시간을 계산해 배를 띄우는 것이었다. 겨울 에는 큰 덩어리 얼음산이 바 다로 떠내려 오는 것을 산위 에서 내려다보면서 뱃길을 지 시하였다. 돈이 많이 나온대서 일본인 의 나루는 억량틀이라 했고 우리 할아버지 나루는 천량틀 이라 했다. 평양까지 가는 일 본인의 억량틀이는 천량틀이 와는 비교도 안되게 큰 규모 였고 똑딱선만 있었다. 배의 선장은 조선 사람이었다. 진남포 항구의 번화한 상점 거리에는 일본인, 중국인 가 게가 들어와 있었으며 조선 사람들이 재봉침을 많이 놓고 달달달 소리내면서 옷 만들어 주는 데가 있어 이용했다. 장련 바닷가 피아골에 가있 으면 진남포의 환한 전등불과 공장굴뚝 연기가 마주 보였 다. 진남포제련소가 있고 상 업은행이 있어 거래했다. 오조약 후 할아버지는 나루 를 팔고 대규모 과수원을 하 면서 선교사를 통해 포도 수 밀도 등 외국의 신품종을 들 여오고 산의 나무를 키워 평 양의 땔감과 돛대 전봇대 등 목재로 팔았다. 오진사네 땅 을 할아버지가 샀는데 이때 어음수표로 결제했다. 할아버지가 큰 현금을 어 디다 두고 썼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할아버지는 서울 큰 기관에 돈을 갖다 두고 어음 발행해 가며 쓴 것이다. 서 울에서 5백리 떨어진 곳에서 그렇게 개명한 사람들도 있 었다. 그때문에 내가 일찍 어음 을 알았다. 어음 종이 한가 운데를 생선 지느러미처럼 지그재그로 베어 두 장의 서 류로 만들어 나중에 서로 맞 춰보고 돈을 지불하는 것이 다. 지금의 보증수표 같은 것이다. 돈 줄 사람과 받을 사람이 한장씩 가졌다가 맞 춰보는데 서로 지느러미를 맞춰보고 주기 때문에 어음 ( 魚 驗 )이라고 했다. 일본은 手 型, 데가다라고 했다. 인주 를 묻혀 손을 통째로 찍는 것이었다. 내가 동경서 뉴욕 유가증권 법을 배워온 뒤 보성전문학교 랑 여러 대학에서 가르쳤다. 뉴욕유가증권법이 세계통일법 이 되었다. 이를 정리해 1953 년 현행 어음 수표법 책을 펴 - 10 - 냈다. 이때 어음이라는 우리 말을 살려냈다. 그 책을 내가 일찍 쓰지 않았으면 수형이란 일본말에 밀려 어음이란 우리 말을 못 찾았을 것 같아 안도 감을 느낀다. 할아버지는 算 木 과 주판도 썼다. 산목은 세모꼴로 곱게 깎은 막대기를 눕혀놓고 세워 놓고 하여 십진법 단위로 계 산해 내는 것이다. 나는 산목 을 가지고 놀며 일찍 계산법 을 익히고 계산에 활용했다. 황해도의 사업가로 만석꾼 김홍량과 김용진이 있어 황 해도 재령일대에 대규모 간 척지를 만들었다. 구월산의 물줄기를 바다밑으로 끌어다 재령 신천 안악 일대의 갈밭 을 논으로 간척하는 것이었 다. 일본인 재벌이 계획한 것 을 미리 알고 직접 나서서 모든 것을 걸고 투자한 사업 이었다. 바다밑의 물파이프가 자 꾸만 떠올라 3년 동안 실패 하고 벼종자만도 만석이 들 었다. 이후 대판의 간척회사 기술진을 불러다 성공했다. 기계를 위한 발전소가 농장 안에 있었다. 김홍량과 김용 진은 이 농장의 상답에서 나는 소출을 교육사업에 투 자했는데 일본인에게 세 번 씩이나 학교를 빼앗겼다. 1930년대 나는 황해도에 광 산을 출원했다. 일본인 광산 과 덕대, 광산운영은 또다른 이야기거리다.
2005년 4월 1일(금) 제141호 學 術 院 創 立 당시의 有 力 誌 論 調 작년 大 韓 民 國 學 術 院 은 創 立 50 周 年 이라는 半 世 紀 의 歷 史 를 기념하였습니다. 마침 최근에 本 會 員 이 所 藏 하고 있는 雜 誌 중 學 術 院 創 立 과 관련된 寄 稿 文 들이 실려 있는 舊 號 두 권 을 찾게 되었습니다. 學 術 院 이 創 立 되었던 해인 1954 年 에 발 행된 思 想 界 誌 第 2 卷 第 7 號 ( 同 年 10 月 號 )와 第 2 卷 第 8 號 ( 同 年 11 月 號 )에 연이어 게재 된 寄 稿 文 들을 소개합니다. 이 글들은 당시 學 術 院 에 대한 學 界 의 期 待 와 學 界 雰 圍 氣 의 일 단을 짐작케 해주기도 합니다. 먼저 同 誌 第 2 卷 第 7 號 에 게재되었던 尹 日 善 初 代 會 長 의 寄 稿 學 術 院 의 使 命 全 文 을 原 文 그대로 소개합니다. 學 術 院 의 使 命 學 術 院 會 長 尹 日 善 文 化 保 護 法 을 보면 다음과 같다. 第 一 條 本 法 은 學 問 과 藝 術 의 自 由 를 保 障 하고 科 學 者 와 藝 術 家 의 地 位 를 向 上 시킴으 로써 民 族 文 化 의 創 造 發 展 에 貢 獻 함을 目 的 으로 한다. 第 三 條 學 問 의 向 上 發 展 을 圖 謀 하고 科 學 者 를 優 待 하기 위하여 學 術 院 을 設 置 한다. 第 四 條 學 術 院 은 國 內 外 에 對 한 科 學 者 의 代 表 機 關 으로 서 科 學 의 發 展 또는 그 活 用 에 關 한 重 要 事 項 을 審 議 하고 科 學 硏 究 의 振 興 助 成 에 關 하 여 政 府 의 諮 問 에 應 하고 또는 李 賢 宰 會 員 ( 經 濟 學 ) 政 府 에 建 議 한다. 以 上 文 化 保 護 法 에 規 程 되여 있는대로 學 術 院 의 使 命 은 明 白 하다. 卽 第 三 條 에 있는 것 과 如 히 어디까지나 學 問 과 學 者 에 關 한 것으로 되어있다. 人 文 科 學 이나 自 然 科 學 이나 莫 論 하고 學 問 을 發 展 시키며 또 그의 關 한 事 項 을 審 議 하고 政 府 에 建 議 또는 諮 問 에 對 應 하고 그러한 學 者 를 優 遇 하 는데 그 使 命 이 있다 보겠다. 이에 있어서는 豫 算 의 措 置 와 職 制 에 關 한 法 令 이 나오게 되 여야 完 遂 하게 될 것이다. 學 術 院 은 人 文 科 學 部 와 自 然 科 學 部 로 나누고 또 이것이 各 各 各 分 科 들로 나눠 있어서 學 問 의 各 分 野 에 있어서 그 使 命 을 擔 當 하게 되여있고 그 것은 總 會 에 있어서 綜 合 的 으 로 統 一 하게 되고 決 議 하게 되여있다. 學 者 는 勿 論 各 各 自 己 專 門 에 있어서 學 問 의 硏 究 하는 것을 그 本 分 으로 한 것이다. 그 知 識 을 가지고 祖 國 文 化 의 發 展 과 學 術 의 振 興 을 圖 謀 하는 것이 그의 使 命 이라 하겠다. - 11 - 그러므로 學 術 院 에서는 學 者 를 優 待 하는 것은 勿 論 이나 振 興 시키기 爲 하여 每 年 文 學 賞 과 科 學 賞 의 表 彰 이 있어서 國 內 에서의 學 者 의 功 勞 를 表 彰 하고 一 般 에게 그것을 宣 揚 하는데 必 要 할 것이다. 또 學 問 의 硏 究 費 의 補 助 와 著 作 의 出 版 의 援 助 로서 學 問 硏 究 의 推 進 을 圖 謀 하여 硏 究 의 出 現 을 協 助 하여야 할 것이다. 또 國 內 의 硏 究 發 表 를 期 하 여 定 期 或 은 不 定 期 의 發 刊 物 을 내어 이를 널리 알게하 며 또 優 秀 한 硏 究 成 績 과 發 表 物 을 外 國 文 으로 原 著 로 또 는 抄 錄 으로 國 外 에 發 表 하게 할 것이 重 要 하다고 보겠다. 다음은 同 誌 第 2 卷 第 8 號 에 게 재되었던, 創 立 당초부터 學 術 院 會 員 을 歷 任 하신 金 斗 憲 박 사( 倫 理 學, 1954. 4. 6~1981. 10. 22 作 故 때까지 會 員 在 任 ) 와 李 崇 寧 박사( 國 語 學, 1954. 4. 6~1994. 2. 2 作 故 때까지 會 員 在 任 ) 두 분의 寄 稿 內 容 역시 全 文 을 轉 載 합니다. 民 族 固 有 文 化 向 上 에 앞장을 서라 金 斗 憲 會 員 學 術 院 과 藝 術 院 의 發 足 을 본 것은 우리나라 文 化 向 上 에 巨 大 한 貢 獻 이 있을 것을 期 待 하는 바이거니와 특히 民 族 文 化 向 上 을 爲 한 提 言 을 要 求 한다면 이러한 卑 見 을 나는
제141호 2005년 4월 1일(금) 가지고 있다. 近 代 유럽의 學 問 이 프란시 스 베이컨 以 來 로 方 法 論 에 依 하여 크게 發 展 된 것은 너무 나 著 名 한 일이다. 實 上 모든 學 問 은 그 方 法 論 에 따라서 그 成 果 가 左 右 된것이라 하여도 無 妨 할 것이다. 그런대 東 洋 固 有 의 學 問 은 現 代 에 이르기까지 그 方 法 論 에 있어서 뒤떠러져있 다는 것을 누구나 否 認 할 수 없 을 것이다. 그러므로 東 洋 固 有 한 文 化 財 內 至 學 問 에 對 하여 유럽에서 이루어낸 方 法 論 을 가 지고 새로히 檢 討 할때에 그 眞 價 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여기에 두고 우리나라 文 化 의 遺 産 을 發 展 시키고자 할 때 새로운 方 法 論 을 가지고 나 선다면 그 寶 庫 를 開 拓 할 만한 것이 아주 많은 것이다. 이를테 면 考 古 學 的 方 法 에 依 하여 古 代 朝 鮮 의 文 化 的 産 物 을 解 明 할수 있을것이요 社 會 學 의 基 礎 的 方 法 에 依 하여 數 千 年 來 의 社 會 相 을 새로운 學 問 의 빛에서 뚜렷 이 볼수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不 拘 하고 유럽의 文 化 가 傳 來 한 以 來 로 우리나라 固 有 한 文 化 財 에 關 하여서는 거의 不 問 에 부 치고 말게된 傾 向 이 없지않 다. 이를테면 哲 學 을 硏 究 하는 學 者 들이 칸트 헤겔 의 哲 學 은 큰 關 心 을 가지고 제법 잘 배워 알건만 退 溪 栗 谷 의 哲 學 은 거의 모르고 있는일이 許 多 하고 西 洋 의 音 樂 은 讚 揚 하면서 우리나라 固 有 한 音 樂 은 全 然 賤 視 해버린 音 樂 家 가 不 少 하다. 여기에 있어서 學 術 院 과 藝 術 院 은 새로운 길을 開 拓 할만 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特 히 自 然 科 學 分 野 에 있어서 西 洋 醫 學 과 藥 學 을 硏 究 한 學 者 中 에서 우리나라 傳 來 의 醫 藥 을 科 學 的 方 法 에 비추어 그 眞 僞 를 밝힐필요가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韓 方 醫 藥 을 韓 方 으로 만 두고볼것이 아니라 西 洋 醫 藥 方 에 비추어서 科 學 的 매스를 내린다는 것은 必 要 한 일이다. 덮어놓고 漢 醫 藥 을 非 科 學 的 이 라하여 度 外 視 하고 말것이아니 라 科 學 的 으로 分 析 檢 討 하여 그 眞 僞 를 解 明 하여야한다는 말이다. 陶 磁 器 에 關 하여서도 우리나라의 優 秀 한 高 麗 磁 器 면 李 朝 磁 器 의 成 分 을 解 明 하여 본다면 우리나라 特 有 한 土 質 로써만 이루어진 무엇이 있었 다는 것을 밝힐수 있을 것이 다. 人 文 社 會 科 學 의 分 野 에 있 어서도 마찬가지일이 많다. 藝 術 分 野 에 있어서 筆 者 는 門 外 漢 이지만 亦 是 우리나라 固 有 한 雅 樂 이나 樂 器 를 時 代 的 方 式 으로 改 作 發 展 시키는 길 을 열어야 할줄로 생각한다. 筆 者 가 萬 若 音 樂 에 素 養 이 있다 면 우리나라 固 有 한 樂 器 를 總 動 員 하여 現 代 的 方 式 으로 改 作 洗 練 하여서 五 六 十 名 으로 된 一 大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編 成 하여 보고도 싶으고 또 이를 活 用 한 歌 劇 團 을 大 規 模 로 組 織 하여 파리의 오페라하우스나 뉴욕의 래디오 시티홀에서 現 代 的 인 春 香 傳 을 한번 한다면 미상불 世 界 의 名 物 이 되기에 足 할것이다. 要 는 音 樂 의 樂 理 를 基 礎 的 으로 解 得 한 音 樂 家 가 우리나라 音 樂 을 賤 視 해버 - 12 - 린 것이 아니라 이를 現 代 化 하 고 純 化 大 淨 化 하고 組 織 化 하는 일은 緊 要 한일인가한다. 이러한 생각은 或 時 無 理 한 要 求 라거 나 너무나 平 凡 한 일이라고 할 는지 모른다. 그러나 眞 正 한 民 族 文 化 를 發 展 向 上 시키자면 이 러한 點 을 無 規 해서는 안될 것 이다. 世 界 的 名 作 괴테의 파우 스트는 元 來 獨 逸 서 傳 來 한 한 개의 傳 說 을 學 藝 化 한것이오 西 洋 醫 의 쓰는 藥 品 이란 것은 그 大 部 分 이 民 間 에서 傳 來 한 것을 科 學 化 하여 淨 濟 한것이라 는 것을 銘 記 해야 한다. 무릇 文 化 의 樣 式 은 特 殊 的 인것에 그 存 在 意 義 가 있다. 말하자면 어떤 民 族 特 有 의 文 化 인 點 에서 文 化 的 價 値 가 있 다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民 族 文 化 라 할지라도 다른 民 族 文 化 의 影 響 없이는 새로운 發 展 을 이룰수 없다는 것은 人 類 文 化 史 上 에 뚜렷한 일이다. 이 點 에 있어서 文 化 는 또한 普 遍 的 인 性 格 을 가지고 있다. 저 로마 文 化 가 그리이스 文 化 의 影 響 이 없이는 發 展 될 수 없고 近 代 歐 洲 文 化 가 그리이스 로마 文 化 의 影 響 이 至 大 하였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아는 일 이다. 우리나라 民 族 文 化 는 中 國 文 化 와 印 度 文 化 의 影 響 이 歷 史 上 으로 至 極 히컸었다. 그 리고 現 代 에 와서는 歐 美 文 化 의 傳 來 로 因 하여 躍 進 의 길을 걷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固 有 한 民 族 文 化 의 發 展 向 上 을 期 하여 이런 見 地 위에서 歐 美 文 化 를 輸 入 해야 할 것이다. 萬 若 歐 美 文 化 一 色 으로 되어
2005년 4월 1일(금) 제141호 버린다면 大 韓 民 族 의 民 族 的 生 命 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 點 에 關 하여 우리 學 術 院 과 藝 術 院 은 큰 使 命 이 있다는 것을 銘 記 해야 할 것이다. 健 全 한 發 展 을 向 하여 李 崇 寧 會 員 一. 學 術 院 藝 術 院 의 選 擧 가 끝난지 벌써 半 年 이 經 過 해도 이렇다한 施 策 도 없으니 이대 로 가다가는 有 名 無 實 한 機 關 이 되지나않을가 疑 아가 적지 않다. 여기에 이르른 原 因 으 로 法 制 處 의 快 한 協 助 가 없는 양 新 聞 은 報 道 하지만 確 固 하 고 具 體 的 인 構 想 이 없는 以 上 兩 院 의 發 達 은 期 待 하기 어려 운 것이며 會 員 에게 年 金 을 주 었다고 活 潑 한 進 展 이 있을상 싶지않다. 여기에서 實 質 的 이 고 現 實 에 立 脚 한 法 文 以 外 의 構 想 이 었어야한다. 그러면 어 찌 運 營 되어야 할것이냐를 다 음에 提 案 하여보려한다. 二. 于 先 學 術 院 에 對 하여 一 言 하겠다. 學 界 의 後 進 性 에서 하루바삐 水 準 向 上 을 爲 하여 各 會 員 에게 活 躍 을 促 進 시키 기 爲 하여 다음과 같은 職 能 을 負 課 시켜야 함이 좋을 듯하다. 1 會 員 은 一 年 에 硏 究 實 驗 學 術 調 査 의 業 績 을 一 個 식 提 出 케 할 것. 그리하여 이것을 審 査 後 出 版 하여 學 術 院 刊 行 의 硏 究 書 報 告 書 等 을 學 界 와 一 般 에게 또는 外 國 에 公 表 할 것 그리하 여 各 分 科 에서 頻 繁 한 業 績 이 連 이어 發 表 되므로 學 術 院 은 生 動 하는 機 關 이 될 것이다. 2 學 術 院 은 많은 豫 算 을 計 上 하여 硏 究 費, 調 査 出 版 費, 實 驗 機 關 의 設 置 等 을 考 慮 할 것을 主 張 한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 런 實 質 的 發 展 이 없을 것이 다. 實 驗 室 없는 科 學 者 가 - 科 에 따라 다를 것이지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3 學 術 院 會 員 은 學 校 이면 一 校 에 限 하여 勤 務 할 수 있 게하고 行 政 官 吏 이면 또는 硏 究 와 距 離 가 먼 機 關 에 就 職 하였거든 辭 職 을 要 求 할 것 그리하여 硏 究 에 熱 中 하도록 內 規 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 고 또한 政 黨 과는 絶 緣 토록 하여야 한다. 4 그 代 身 會 員 에게는 國 家 로 서 精 神 的 面 이고 實 質 的 인 優 待 에 絶 對 努 力 하여야한다. 그 러면 이것이 어떠한 優 待 냐하 면 于 先 다음과같을 것이다. (a) 生 活 保 障 (b) 警 察 과 官 憲 의 取 調 審 問 干 涉 의 禁 止 (c) 硏 究 旅 行 에 있어서 地 域 官 廳 의 絶 對 的 便 宜 提 供 (d) 外 國 과 學 的 去 來 의 斡 旋 (e) 國 會 議 員 以 上 의 諸 般 優 待 5 文 化 賞 學 術 賞 文 化 勳 章 制 度 의 設 置 6 學 術 院 會 館 의 大 大 的 建 設. 圖 書 館 硏 究 室 實 驗 室 講 堂 ( 大 中 小 各 種 ) 社 交 場 食 堂 印 刷 所 等 을 包 含 한 것 7 文 化 政 策 의 硏 究 調 査 에 있어서 그 結 論 을 政 府 는 絶 對 尊 重 할 것 8 政 治 的 壓 力, 政 治 的 呼 應 의 絶 對 排 除 要 컨대 學 術 院 을 實 質 的 으로 生 動 하는 機 關 을 만들어 야 하고 養 老 院 的 名 譽 職 的 所 - 13 - 謂 감투 的 機 關 이어서는 아니된 다. 同 時 에 學 術 院 會 員 은 國 民 의 師 表 가되고 眞 理 의 使 徒 가 되기 爲 하여 勤 實 한 硏 究 人, 道 義 面 의 非 難 을 받지않을 人 格 의 所 持 者 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後 進 社 會 의 아카데미로서 가져 야할 特 異 性 이라고 하겠다. 三. 藝 術 院 에 대하여는 專 門 人 이 아니기 言 及 할 資 格 이 없지마는 學 術 院 의 境 遇 와 大 同 小 異 할것이라 믿는다. 四. 政 府 는 이미 發 足 한 機 關 이기 多 額 의 豫 算 을 計 上 하여 所 期 의 使 命 을 다하도록 會 員 을 活 躍 시키고 滿 足 시켜서 大 韓 民 國 이 文 化 國 이란 이름에 相 符 하도록 運 營 하기 바란다. 外 國 의 아카데미 會 員 을 생각하 고 또는 親 히보고 그 아카데미 刊 行 物 을 읽은 知 識 과 想 像 을 가지고 거리에서 兩 院 會 員 을 보면 個 中 에는 寒 心 할 狀 態 에 있다. 生 活 에 허덕이어 東 西 奔 走 하고 또는 疲 勞 하고 書 齊 를 못가졌기 茶 房 에서 消 日 하 는 듯이도 보이고, 또는 雜 務 를 몸에 계우도록 질머지고 또 는 벅찬 職 業 人 노릇을 하니 이것이 다 韓 國 現 實 의 所 産 일 지 모르나 外 國 의 아카데미 會 員 이라하는 우리의 經 驗 과 理 想 과는 너무도 距 離 가 먼 듯하 다. 政 府 는 이러한 現 實 을 考 慮 하여 後 進 社 會 와 後 進 國 家 의 아카데미를 어찌 운영할 것인 가에 적절한 構 想 있기를 바란 다. 오늘 이 現 狀 대로 나가면 兩 院 存 在 의 價 値 란 감투 的 意 味 를 除 去 하고는 거의 零 에가 까운 것이라 하겠다.
제141호 2005년 4월 1일(금) 金 屬 工 作 機 械 精 密 度 향상을 위한 小 考 工 作 機 械 는 기계제작을 위 한 기계 중의 母 機 械 (mother machine)라고도 일컬으며 이 것은 기계공업에서 매우 중요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공작기계공업은 1970년대로부터 정부의 적극 적인 지원과 관련기술분야의 노력으로 생산과 기술면에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고 數 値 制 御 (numerical control) 工 作 機 械 생산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것은 대기업이 공작기계 생산에 참여함으로써 높은 성과를 나타내고 있으며 앞 으로의 전망은 매우 밝게 보 인다. 2004년 국내 공작기계 생산은 2 兆 5 千 억 원, 수출은 9억 달러로 전년에 비하여 각각 8.4%와 33.7%로 성장 하였다. 한편 수입은 15.5억 달러에 달하고 있으며 수출 액의 1.7배가 된다. 이것은 공작기계의 設 計 能 力 이 미흡 하고, 精 密 部 品 을 비롯하여 大 型, 高 精 密, 高 速 工 作 機 械, 半 導 體 加 工 設 備, 特 殊 工 作 機 械 등은 국내생산이 어려운 실정에 있어 수입에 의존하 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 으며, 국내생산을 위하여 製 作 技 術 水 準 을 높이는 노력이 절실히 요망된다. 공작기계의 진보발전은 공 작기계의 使 用 者 와 生 産 者 사 이의 긴밀한 의사의 교환이 중요하며, 또한 공작기계 제 康 明 順 會 員 ( 機 械 工 學 ) 작자는 고도의 지식과 제작 환경을 숙지하고 있는 기술 자와 현장에서의 시행착오 등 경험이 많고 숙련된 기능 자들 양자의 일체감이 성능 을 보장하는 공작기계제작기 술을 육성하는 기본조건이라 고 생각한다. 최근 電 子 시스 템을 공작기계에 적용함으로 써 自 動 化 가 고도로 발전하 고 있으나 여기에는 인간적 인 판단이 필요하다. 즉, 인 간이 기계와 시스템이 調 和 하도록 지배하는 것이 근본 임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최근 일반 공작기계를 대 표하는 NC 旋 盤, machining center 등은 그 信 賴 性, 精 密 度, 作 業 能 率, 運 轉 操 作 등은 급속하게 향상되고 切 削 工 具, 計 測 機 器 의 진보 발달에 힘입어 그 가공 정밀도는 눈 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따라 서 정밀도가 높은 가공기계 를 제작하고 가공품의 정밀 도를 정확히 측정 평가하기 위한 계측기술의 확립이 요 - 14 - 망된다. 精 密 加 工 을 위한 附 加 價 値 가 높은 새로운 공작기계를 개발하고 제작하기 위하여 요구되는 조건은 이루 다 말 할 수가 없으나 그 중에서도 設 計 能 力, 要 素 部 品 의 素 材 선 택 과 精 密 加 工, 自 動 制 御 裝 置, 主 軸 베어링, 移 送 볼 스크루(ball screw), 油 壓 機 器, 서보 모터(servo motor) 등 관련기기의 정밀도에 크 게 의존하게 된다. 또한 공 작기계의 베드, 프레임 등 기계 본체의 剛 性 을 높이 기 위한 설계도 중요한 조건 의 하나이다. 따라서 정밀공 작기계를 제작하는 데에는 기계요소부품 설계를 비롯하 여 금속재료공학, 유압공학, 전기 전자공학, 정밀측정학, 기계역학 등 종합적인 연구 가 필요하다. 정밀가공, 정밀계측에는 환 경과 측정기기설비, 그리고 기능의 조화가 이루어 져야 한다. 특히 정밀가공공장, 정밀측정실의 恒 溫 維 持 (20± 1 ), 恒 濕 施 設, 기계 본체의 熱 變 形 에 대한 대책, 기계 회전체의 振 動 과 외부로부 터 공작기계에 미치는 振 動 을 차단할 수 있는 장치는 정밀도를 높이기 위한 중요 한 요소들이다. 이에 앞서 공작기계를 구성하는 부품
2005년 4월 1일(금) 제141호 은 정밀도를 높게 가공할 수 있고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형상으로 설계하는 것 이 중요하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문 제 해결의 조건 중에서 현재 까지 큰 주력을 경주하지 못 한 내용이 공작기계의 熱 變 形 문제와 構 造 物 의 剛 性 計 算 을 들 수 있다. 열변형의 補 正 과 防 止 策 으 로 고려할 내용은 공작기계 내부에서 발생하는 열량을 감 소시키는 일이다. 구체적으로 공작기계 내부 또는 회전체와 베어링을 空 冷 또는 油 冷 하는 방법과 主 軸 臺 를 냉각시키는 방법이 이용된다. 특히 주축 대의 메인 베어링의 熱 影 響 이 매우 중요하다. 다음은 공작기계의 構 造 物 剛 性 의 自 動 計 算 과 自 動 製 圖 라고 생각한다. 이 방법은 구 조물을 단순 보 모양의 요소 로 구성되는 모델, 혹은 집중 질량을 보로 연결하는 모델로 구성하고 이 수학적 모델을 사용하여 구조물의 고유진동 수와 그때의 진동 상태를 컴 퓨터로 산출하고 있다. 이와 같은 모델화 과정이 매우 중요하며 간단한 수학 적 모델로 나타내는 기법이 이 방법의 유효성을 지배하 게 될 것이다. 실제 구조물에 가까운 모델을 사용하여 강 성을 계산하는 방법이 주류 를 이루고 있으며, 장차 이와 같은 방법으로 공작기계의 정적, 동적, 열적 특성의 정 량평가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여기에 국산 공작기계의 정밀도와 성능향상을 위한 방안을 건의하면 예로서 한 국기계연구원을 중심으로 (1) 외국 일류 공작기계 각 부분에 대한 分 析 事 業 을 들 수가 있다. 선진국의 유명 汎 用 工 作 機 械 를 여러 종류를 입수하여 필요한 정밀측정기 를 동원하여 정적, 동적 정 밀도, 가공정밀도, 내구력, 각 운동 부위의 마멸상태, 진동, 재질 등을 철저히 분 석하고 그 결과를 관련 업체 에 전달하여 제품의 성능을 향상시켜 질을 높이도록 한 다. 아울러 (2) 基 礎 技 術 의 共 同 硏 究 機 構 를 설치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기 에는 산업기술시험원, 대학, 학회, 기업체의 R&D부서 등 연구기관과 관련업체의 협력 과 재정적 후원으로 각종 국 산공작기계의 구조, 기계요 소재료, 내구성, 정밀도 등을 해석하는 産 學 硏 協 力 體 制 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도록 한 다. 한걸음 나아가서, (3) 특 수 공작기계의 작동을 이론 - 15 - 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바람 직하다. 우리나라 공작기계산업의 역사는 50년에 불과하며 주 로 모방설계에 의한 제작이 었으나 제작기술의 잠재력은 축적되었다고 평가한다. 따라 서 더욱 이 산업을 육성하는 데에는 정부정책의 강화와 아울러 지금까지도 시행하고 있는 기술제휴를 한 업체는 그 업체 내지는 관련업체에 기술자 해외 internship을 적 극적으로 장려하며, 인적 교 류, 부품소재산업을 육성함으 로써 공작기계산업 발전에 더욱 효과적인 결과를 기대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금에 대기업은 NC공작기계, 로봇기술의 발전으로 工 場 自 動 化 (factory automation), 工 場 無 人 化 (flexible manufacturing system)로 전환하는 업체가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부응 할 수 있는 공작기계 자체와 제어기구는 모두 높은 기술 수준의 것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많은 기술적 문제점을 점차적으로 해결 하였을 때 금속가공 공작기 계 제조기술에 변혁을 기대 할 수 있으며, 이 기술이 정착될 때 공작기계의 국제 경쟁력이 향상되리라고 믿 는다.
제141호 2005년 4월 1일(금) 第 5 次 아시아 學 術 會 議 (SCA) 準 備 會 議 參 加 記 大 韓 民 國 學 術 院 창립50주년을 맞이해서 성대한 기념행사와 동 시에 제4차 Science Council of Asia(SCA) Conference를 성 공적으로 개최한지도 어언 1 년이 된다. 學 術 院 창립기념행사 준비를 위해서도 여러번 위원회 모임 이 있었지만 SCA Conference 준비위원회도 12차례나 모였던 기억이 새로워진다. 李 鎬 汪 前 會 長 과 會 長 團 과 金 東 基 준비위원장을 비 롯한 여러 위원들이 철저히 준비한 것은 사실 이었으나 가장 중요한 학술회의의 성 공은 學 術 院 會 員 님 전원이 전공분야를 가리지 않고 참 석해주시고 외부의 전문가 들의 호응도 좋아서 대성황 을 이루었던 것이다. 第 5 次 SCA Conference 준비회의가 지난 2월 25일 日 本 學 術 會 議 본부에서 개 최되어 제5차 아시아학술대 회 개최국인 베트남, SCA 본부임원, 日 本 學 術 會 議 운 영진 등 40여명이 참석하여 자세한 논의가 있었다. 學 術 院 에서는 제4차 SCA Conference 대회장이신 李 鎬 汪 前 會 長 님과 金 東 基 조 직위원장을 수행해서 필자 가 준비회의에 초청받아 참 가하였다. 준비회의에 참석한 일본측 위원들과 다음 개최국은 물론 金 炳 洙 會 員 ( 腫 瘍 學 ) 국제관계회의 대표들은 우리 나라가 개최한 제4차 SCA Conference가 역대 학술회의 중 제일 잘 조직되어 있고 내 용도 충실하며 성공적이었 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앞으로 개최하는 회원국가 모두가 한국의 대회 개최의 모든 점을 bench marking 해 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SCA 사무총장이 이야기했다. SCA 사무총장을 맡아서 수고하는 SCJ Kurokawa 회장이 신장 학을 전공한 醫 學 者 이기 때문 에 李 鎬 汪 前 會 長 님에 대해 특별한 예우를 해 주었다. 특별히 제4차 SCA Conference 조직위원장인 金 東 基 회원 이 학술대회 준비과정과 연 사초빙, 재정문제 등 제반사 항을 영상과 서류로 설명하 여 다음 개최국인 베트남 정부 관계자에게 많은 도움 을 주었고 모든 차기 개최 국에게 참고서류로 남게 되 었다. 아시아학술회의(SCA)는 日 本 學 術 會 議 가 거의 7년 - 16 - 이상 준비기간을 거치고 여 러 차례 논의하 여 일본 정 부의 예산지원으로 아시아 지역의 학술발전과 상호교 류를 통한 지역발전과 세계 와 연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창립되어 상설 사무국인 일 본에 두고 SCJ의 예산으로 운영되고 학술대회는 각국 에서 순회 개최되며 학술대 회 개최를 위해 SCA에서 $15,000을 지원한다. 우리나라는 경제규모가 커 SCA 지원금은 대회 개최 비용 중 15% 정도이고 나머 지 예산과 기념품 등 모든 경비는 李 鎬 汪 前 會 長 님과 金 東 基 위원장의 노력으로 재원이 조달된 것을 우리 모 두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제5차 SCA Conference 준비회의에서 결정한 것을 말씀드림으로써 앞으로 大 韓 民 國 學 術 院 의 位 相 에 맞 는 대외활동 방침을 발전시 켜 나가야 할 것으로 제안 드리고 싶다. 제5차 SCA Conference 개최국인 베트남은 학술회 의를 정부차원의 행사로 준 비하고 있었다. 베트남 과학 기술부 관계국장, 보사부 부 국장 등이 대표로 또 대회 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학 술회의를 계기로 국가의 과 학기술 발전의 방향을 논하 는 회의로 준비하고 있다.
2005년 4월 1일(금) 제141호 제1주제 토론도 농업, 환 경을 주제로 한 내용이고, 제2주제는 보건, 주로 예방 의학 방향에 관한 내용이다. 여기에 겸해서 베트남 정부 에서 Canada-Vietnam 생명 과학발전 세미나도 개최하 는 안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회의에서 人 文 社 會 계 통의 학술내용이 없다고 李 鎬 汪 前 會 長 이 이의를 제기 하고, 예로 人 權 문제, 북한에 서 탈출한 주민의 보호문제 등도 논의함으로써 실제적으 로 가시적 효과가 있는 내용 을 논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 SCA 사무총장인 Kurokawa SCJ회장의 보고서에서도 앞 으로 여러 국제기구와의 협 조를 통해서 SCA 활성화가 대단히 긴요하다는 보고도 있었다. 제2주제인 Bioscience for Health에서 朴 相 大 會 員 이 좌장으로 회의를 주재하게 되었고, SCA Joint Project (Symposium Ⅲ)에서 우리나 라의 International Vaccine Institute(IVI)에서 일본뇌염 퇴치백신에 대해 보고하기로 했다. SCA 준비 단계부터 계속 理 事 로 수고하여 오신 李 鎬 汪 前 會 長 이 SCA 운영위원 회 理 事 로 선출이 결정 되 었다. 會 員 님들이 잘 아시는대로 日 本 은 日 本 學 士 院 (The Japan Academy) 이 제일 권위있는 기관으로 120년의 오랜 전통 을 가지고 있고 회원이 150 명 정원이며 7개 分 科 로 나 누어져 있고 문부과학성 산 하 특수기관으로서 정부예산 으로 운영된다. 주 활동은 學 術 賞 시상(일 본천황상 포함), 정기간행물 로 세계수준의 논문이 포함 되는 Proceeding 발행, 외국 學 術 院 과 정기교류, 연구 활 동지원, 국민을 위한 공개강 좌( 年 2회) 등 최고 원로학 자의 구성을 가지고 비교적 제한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學 士 院 과 다른 조직인 日 本 學 術 會 議 (The Science Council of Japan)는 1949년도에 일 본수상의 자문기구로 창설되 었으며 210명의 정회원이 7 개 分 科 에 소속되어 있고 全 學 問 分 野 學 硏 究 에 관계하 는 760,000명을 대표해서 모 든 학문발전, 특히 과학기술 발전의 정책 결정과 신학문 분야 개척사업 등에 있어 정 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학술기관 상호간의 협조, 대국민 홍보활동, 국제 관계 여러기구와의 협조와 회의 개최 등 실무적 차원의 일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일 - 17 - 본 정부의 중요 정책은 이 기관의 건의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大 韓 民 國 學 術 院 은 日 本 學 士 院 과 日 本 學 術 會 議 와 같 은 두 기관의 역할을 같이 맡아야 할 우리나라 최고 學 術 기관으로 국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통한 對 政 府 정책자문 역할이나 각 학문분야의 발 전에 각계원로 회원들의 경 험과 지도력이 접목되는 영 향력 증대가 긴요하다고 생 각했다. 우리나라 학문발전뿐 아 니라 대외적으로도 學 術 院 회원들의 전문성을 이용해 서 국제관계학술회의, 정책 개발회의, 세계 인류의 복 지증진을 위한 대책회의(예 로 Tsunami 대책회의) 등 에 반드시 회원을 참가시켜 서 활동함으로써 우리나라 의 위상을 높이고 세계의 어려운 나라를 돕는 자세도 우리가 생각해 볼 때가 되 었다. 大 韓 民 國 學 術 院 의 국내외 적인 位 相 과 맡은 역할의 증대에 대해 더욱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가게 되길 간절 히 바라는 마음이다.
제141호 2005년 4월 1일(금) 敦 煌 詞 文 學 論 考, 車 柱 環 著, 서울대학교출판부 刊, 423 面 이 책은 한국 중국문학계의 원로 車 柱 環 선생님께서 1984 년에 발표한 < 雲 謠 集 硏 究 > ( 學 術 院 論 文 集 人 文 社 會 科 學 篇 제23집)를 필두로 최근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동안 진 행해온 敦 煌 詞 와 관련된 연구 작업을 정리하여 펴낸 것이 다. 선생님께서는 이 책에서 먼저 돈황사에 대해 原 文 校 釋, 詞 調 의 고찰, 定 格 聯 章, 聯 章 歌 詞, 題 材 와 內 容 등을 포괄적으로 검토하고, 隻 曲 의 정리 연구를 통해 돈황사의 詞 調 名 과 詞 調 를 討 究 하고, 인생 백년을 사는 계제를 반 영시킨 百 歲 篇 을 비롯하여 十 二 時 五 更 轉 같은 定 格 聯 章 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敦 煌 詞 文 學 의 大 體 를 상밀하 게 고찰하셨다. 돈황사는 中 國 甘 肅 省 敦 煌 의 莫 高 窟 藏 經 洞 에 천여 년 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감추어 져 있다가 淸 光 緖 26년(1900) 에 발견된 방대한 분량의 사 본 속에 들어 있던 唐 五 代 詞 를 가리킨다. 詞 는 대체적으 로 盛 唐 시기에 민간에 의해 잉태되었고, 다시 中 晩 唐 의 몇몇 저명한 시인들의 노력을 거쳐 차츰차츰 성숙되고 틀이 정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데 바로 돈황사 속에 작자를 알 수 있는 소량의 文 人 詞 와 다량의 初 期 民 間 詞 가 들어있 어 그것이 詞 의 기원과 발생 및 발전과정의 연구에 획기적 인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 후 중국학자들을 중심으로 많 은 학자들이 돈황사의 정리, 교감 및 考 釋 작업에 힘써 적 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아직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있 거나 학자들 간에 견해의 차 이를 보이고 있는 것들이 많 다. 일례로 차 선생님께서는 당시 臺 灣 文 化 大 學 의 潘 重 規 교수가 1977년에 발표한 敦 煌 雲 謠 集 雜 曲 子 新 書 에 대해 그가 새로이 해명한 부분이 적 지 않기는 하나 校 勘 과 箋 釋 에 문제점이 여전히 남아있어서 1985년 臺 灣 의 幼 獅 學 誌 (제18권 제4기)에 중국어로 쓴 < 雲 謠 集 考 釋 >을 발표하여 潘 교수의 주장과 견해 중에 문제 되는 점을 지적하면서 雲 謠 集 에 대한 詳 密 한 校 語 를 제 시하였다. 그 후 潘 교수는 차 선생님의 논문에 대해 < 讀 [ 雲 謠 集 考 釋 ]>이라는 장문의 비 평문을 敦 煌 學 ( 敦 煌 學 會 會 誌 제11집, 1986)에 발표하 였고, 이에 대해 차 선생님께 서는 다시 중국어로 < 雲 謠 集 的 性 格 問 題 >( 第 二 屆 敦 煌 學 國 - 18 - 宋 龍 準 (서울 大 中 語 中 文 科 敎 授 ) 際 硏 討 會 論 文 集, 1991)를 발표 하여 潘 교수의 비판에 대한 해명을 시도하였다. 이처럼 돈 황사 문제는 지금에 이르러서 도 국내외 학계의 뜨거운 관 심사가 되고 있다. 이제 이 책 의 학문적 가치와 성과에 대 해 이야기해 보겠다. 첫째, 돈황사 원문의 校 釋 에 설득력 있는 의견을 새롭 게 제시한 것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雲 謠 集 속의 < 鳳 歸 雲 >(4) 後 段 끝 3 句 妾 身 如 松 栢, 守 志 强 過, 曾 父 堅 貞. 의 曾 父 에 대해 諸 家 의 의견이 분분하여, 朱 祖 謀 가 況 周 頤 의 설에 따라 曾 女 로 校 正 한 후 唐 圭 璋, 冒 廣 生, 任 二 北 등이 그에 따 랐고, 任 二 北 은 다시 韓 朋 之 妻 貞 夫 의 貞 夫 가 아닌가 하였다가 또 魯 秋 胡 妻 를 가리키는 魯 女 일지도 모르 겠다고 하였고 敦 煌 歌 辭 總 編 에 와서는 魯 女 로 굳혀 버렸다. 이에 대해 차 선생님 께서는 韓 非 子 < 外 儲 說 > 의 曾 父 烹 彘 故 事 와 晉 書 < 皇 甫 謐 傳 >의 昔 孟 母 三 徙 以 成 仁, 曾 父 烹 豕 以 存 敎 용례를 통해볼 때 원본대로 曾 父 로 함이 옳다는 의견을 제시하여 여러 학자들이 이 를 받아들였고 필자도 차 선 생님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 한다. 또한 < 破 陳 子 >(13)의 前 段 風 送 征 軒 迢 遞, 參 差
2005년 4월 1일(금) 제141호 千 里 餘. 目 斷 粧 樓 相 憶 苦, 魚 雁 百 水 鱗 跡 疎. 和 愁 封 去 書. 의 제4구가 諸 家 의 校 釋 에 異 見 이 많았다. 跡 은 원문에 積 으로 되어 있으나 蹟 의 誤 字 임 이 분 명 하 여 足 跡 의 跡 자로 고친 것이다. 朱 祖 謀 校 本 은 龍 沐 勛 의 설 에 따 라 제 4구 를 鴻 雁 南 來 鱗 跡 疏 로 고쳐 원문의 글자 를 3자나 바꾸어놓았고, 冒 廣 生 本 은 이를 魚 雁 由 來 鱗 翼 疏 로 고쳤고, 任 二 北 의 敦 煌 歌 辭 總 編 은 魚 雁 山 川 鱗 跡 疏 로 고쳤다. 이밖에도 몇 가지 異 說 이 더 있다. 이상 의 校 釋 을 통해 알 수 있듯 이 주로 문제가 된 것은 百 水 와 鱗 跡 이다. 이에 대해 차 선생님께서는 百 水 는 千 山 百 水 의 百 水 로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가 먼 것을 나타내는 말이고 鱗 跡 은 魚 鱗 雁 跡 으로 소식 내지 서 신을 나타내는 말임을 밝혀 내어 이 제4구는 떠나간 사 나이가 멀리 가버린 후에 소 식이 없음을 시적으로 표현 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원문 대로 자연스럽게 보려고 하 지 않고 무리한 풀이를 함에 따라 원 문 에 지 나 친 손 질 을 가 한 諸 家 의 校 釋 을 비 판했다. 둘째, 돈황사의 詞 調, 句 法, 韻 法 등에 관한 고찰이 상세 하고 정밀하며 前 人 의 잘못 을 바로잡아 놓은 것이 적지 않다. 한 가지 예를 들면 任 二 北 은 敦 煌 歌 辭 總 編 에 서 雲 謠 集 의 < 喜 秋 天 >을 單 調 4 首 로 나누었는데, 차 선 생님께서는 이것이 雙 調 2 首 라고 판정하고 定 格 聯 章 < 五 更 轉 >(S.1497)의 제목이 曲 子 喜 秋 天 으로 되어 있는 까 닭은 바로 그것이 雲 謠 集 < 喜 秋 天 > 調 의 첫 句 에 更 數 2자를 첨가하여 5 言 句 가 7 言 句 로 된 것만 달라졌기 때문 이라고 설명했는데, 조리가 정 연하여 설득력 있는 바로잡음 이다. 셋째, 돈황사 원문의 우리말 번역이 정확하고 설명이 상세 하면서도 친절하다. 돈황사는 오래된 필사본에서 나온 것인 지라 誤 脫 字 가 많고 난해한 구절이 적지 않아 우리말 번 역이 쉽지 않다. 예를 들면 이 책 264쪽에 < 五 更 轉 > 2 首 가 소개되어 있는데, 제 1수의 頭 風 腦 轉 手 專 遇 구를 머리 에는 바람이 일고 골 속은 빙 빙 돌아 손으로만 오로지 상 대를 한다 라고 번역하고 手 專 遇 는 풀이하기가 쉽지 않 으나 遇 를 만난다는 뜻에서 상대한다고 풀이하여 말은 하지 못하고 손만을 휘젓는 등하여 간신히 의사표시를 하는 데 그침을 나타낸 말로 봄이 좋을 듯하다 라고 설명 했는데, 수긍이 가는 좋은 풀 이이다. 넷째, 雲 謠 集 이라는 書 - 19 - 名 의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그동안 雲 謠 集 에 대한 연구결과가 많이 나오긴 했 지만 서명의 고찰을 시도한 것이 없었는데, 차 선생님께 서 그것이 唐 代 의 황제를 중 심으로 한 궁중의 宴 樂 에서 사용하던 雜 曲 子 를 모은 것 임을 밝혀내셨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돈황사 연구 방면에서 적지 않은 진척을 일구어내 어 국내외 중국문학계에 크 게 공헌한 것이다. 차 선생님 께서는 우리나라에서 詞 文 學 연구가 전혀 행해지지 않고 있을 때 이 분야의 연구에 힘 써 한국 중국문학계의 사문 학 연구를 개척하고 이끌어 나가며 그 성과를 발표하시 어 일찍이 1976년에 高 麗 의 詞 文 學 을 연구한 唐 樂 硏 究 가 나왔고(이 책은 1983 년에 同 和 出 版 公 社 에서 高 麗 唐 樂 의 硏 究 라는 제목으 로 개정판을 냈다), 1982년에 는 그 동안 발표한 사문학 관 계 논문을 묶은 中 國 詞 文 學 論 考 (서울대학교출판부) 가 나왔다. 이 敦 煌 詞 文 學 論 考 는 차 선생님이 사문 학 연구방면에서 낸 세 번째 저서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학계에의 공헌도가 높아 우 리나라 중국문학계의 위상을 한 단계 높여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제141호 2005년 4월 1일(금) 임원회 會 議 案 內 - 일시 및 장소 : 2005. 4. 8(금), 14:00 학술원 중회의실(3층) 분과회 인 문 사 회 과 학 부 분 과 회 의 일 시 분 과 회 의 일 시 자 제1분과 4월 29일(금) 11:00 제1분과 4월 28일(목) 11:00 제2분과 4월 29일(금) 11:00 연 제2분과 4월 26일(화) 14:30 제3분과 4월 29일(금) 15:00 과 제3분과 4월 28일(목) 11:00 제4분과 4월 29일(금) 11:00 학 제5분과 4월 28일(목) 11:00 제4분과 4월 29일(금) 16:00 부 제6분과 4월 26일(화) 11:00 제5분과 4월 27일(수) 14:00 寄 稿 文 國 鎭 會 員 ( 自 然 4 分 科 ) 인류 최초의 살인과 살인미수 Medical doctor Journal 2005. 2월호 學 術 講 演 柳 承 國 會 員 ( 人 文 社 會 1 分 科 )은 지난 2 月 25 日 翰 林 大 율곡학연구소 국제학술 대회 율곡이 21세기 삶의 길을 말한 다 에서 협력하는 세계공동체 창조 란 主 題 로 講 演 을 하였다. 停 年 退 任 盧 五 鉉 會 員 ( 自 然 3 分 科 )과 金 顯 旭 會 員 ( 自 然 5 分 科 )은 지난 2 月 28 日 서울 大 學 校 에서 停 年 退 任 을 하였다. 會 員 動 靜 生 들에게 英 語 로 Global Marketing을 講 義 하게 된다. 국제백신연구소 會 長 理 事 長 選 任 社 團 法 人 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 는 지난 3 月 19 日 임시총회에서 李 鎬 汪 會 員 ( 自 然 4 分 科 )을 會 長 으로, 金 炳 洙 會 員 ( 自 然 4 分 科 )을 理 事 長 으로 選 任 하였다. 자랑스러운 敎 授 賞 受 賞 郭 秀 一 會 員 ( 人 文 社 會 6 分 科 )은 지난 3 月 14 日 신라호텔에서 서울대학교 最 高 經 營 者 科 程 總 同 窓 會 에서 選 定 한 第 5 回 서울대학교 AMP( 最 高 經 營 者 科 程 ) 자랑 스러운 교수상 을 受 賞 하였다. 出 版 記 念 會 李 佑 成 會 員 ( 人 文 社 會 3 分 科 )은 지난 3 月 1 日 세종문화회관에서 80 回 生 辰 을 계기 로 門 下 生 들이 未 刊 의 글을 수집하여 두 권 碧 史 官 文 存, 高 陽 慢 錄 의 책을 上 梓 하였다. 碩 座 敎 授 選 任 金 東 基 會 員 ( 人 文 社 會 6 分 科 )은 지난 3 月 1 日 高 麗 大 國 際 大 學 院 碩 座 敎 授 로 選 任 되었다. 앞으로 內 國 人 및 外 國 人 學 著 書 發 刊 禹 亨 疇 會 員 ( 自 然 3 分 科 ) 전기자기학 文 蓮 堂 刊, 544 面 圖 書 寄 贈 李 賢 宰 會 員 ( 人 文 社 會 6 分 科 ) 1. 思 想 界, 第 2 卷 第 7 號, 1954. 10. 思 想 界 社 2. 思 想 界, 第 2 卷 第 8 號, 1954. 11. 思 想 界 社 - 위 두 권의 雜 誌 에는 學 術 院 創 立 과 關 聯 된 寄 稿 文 들이 揭 載 되어 있음 - 3. 韓 國 의 宗 敎 文 化 와 藝 術, 1991, 文 化 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