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나 장마에 상관없이 매년 7 8월이면 모든 교회들이 상반기동안 정성스레 준비한 여름 수련회 및 여름 성경학교를 실행한다. <새문안> 지는 7 8월호 특집 으로 잊을 수 없는 여름 성경학교와 수련회 추억 을 보내드린다. 아울러 여름 수련 회와 성경학교의 내실있는 발전을 위한 방향 제시를 한다.(편집자 주)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 목적과 새 방향 참가자들을 섬기는 일꾼 으로 바로 세우기 위해 지도자의 영성이 우선되어야 김용수 목사(교육2부) 매년 여름이면 어느 교회를 막론하고 여름성경학교 그러기 위하여는 많은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 와 수련회를 갖는다. 교회학교 부감과 부장을 하던 시 해 적절하게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불가피 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에도 지금과 같 하다. 여기에 수련회 진행의 책임을 맡은 사람은 누구나 은 형태의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를 진행했으니 수련회 빠질 수밖에 없는 딜레마가 있다. 이러한 딜레마를 통과 의 역사가 만만치 않은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매년 다 해 얼마만큼 적당한 즐거움과 함께 복음의 능력을 체험 가오는 여름철 행사로서 과연 그 행사에 투입되는 예산 하게 할 것인가가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의 성패를 가 과 인력ㆍ장비 등에 걸맞는 효과를 거두고 있는가 생각 늠하는 관건이다. 학생들은 어설프게 재미있는 프로그램 해 볼 때,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안타까움 보다는 차라리 힘들어도 확실하게 공부하고 나머지 시간 이 있다. 에 재미있게 노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면 바람직한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 진행을 위 해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일까? 그렇지만 청년들이 참여하는 수련회는 이와는 성격 이 달라야 한다. 청년들은 넘치는 에너지와 비전으로 무 우선 지도자의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제 아무리 좋은 언가를 추구해 가는 세대이다. 이들에게는 안일함을 부 시설에서 엄청난 비용을 들여 수련회를 연다 해도, 그 추기는 적당히 즐기는 프로그램보다는 좀 힘들고 어렵 수련회를 이끌어 가는 교역자와 교사들이 자신이 맡고 지만 도전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봉사나 전도 있는 학생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없다 프로그램이 어울린다. 그래서 많은 교회가 하계봉사활 면, 그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동이나 선교여행 등을 진행해 오고 있으며, 우리 교회 여름성경학교나 수련회의 목적이 흥미유발이나 정보 수집 등이라면, 굳이 교회에서 그 일을 나서서 할 필요 역시 금년에도 청년부와 대학부는 하계수련회를 선교활 동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는 없다. 요즘 수많은 단체가 캠핑과 연예인과 함께 하 특히, 7월 20일 유아1부로부터 시작한 여름성경학교 는 놀이행사, 그리고 래프팅, 해외 어학연수 여행까지 추 및 수련회는 8월 15일 속초새문교회에서 펼쳐질 청년부 진하고 있어 즐거움이나 지적인 만족을 위해서라면, 얼 수련회로 마무리 된다. 대학부는 7월 28일부터 8월 2일 마든지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까지 충북 보은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열심히 준 이런 점에서 우리 교회가 학생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비하고 있으며, 청년부는 해외선교와 국내선교팀으로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 나뉘어 진행하는데, 러시아팀은 8월 2일부터 10일까지, 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하나님의 사 중국팀은 8월 3일부터 10일까지, 인도네시아팀은 7월 27 람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힘써 일하는 일 일부터 8월 3일까지, 그리고 강원도 속초 새문교회팀은 꾼,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일꾼으로 세우는 일이다. 8월 11일부터 14일까지 진행할 예정이다. 8ꋯ
청년들은 모두 자비량으로 선교에 임하고, 직장에 서 휴가를 내 동참해야 하기에 상대적으로 적지 않은 헌신이 요구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금년에도 대학 부 100여명,청년부70여명의청년들이자신들의 돈과 시간과 정성을 들여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헌 신하기로 다짐하고 준비하는 모습을 볼 때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지금까지 한번도 전도를 해보지 않은 청년들이 적지 않은데, 이들이 국내의 한 지역 혹은 외국에 나가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모습은 상상 만 해도 감개가 무량하다. 우리 청년들이 금년 여름에 받게 될 선교훈련이 그들 의 인생에 있어서 결코 적지 않은 디딤돌로 작용하리라 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예수를 위해 단돈 1원도 안 써 본 사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땀 한 방울도 흘려보지 않 은사람이어떻게하나님나라와그의를위해일할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런 사람이 이 교회와 나라를 책임질 수 있겠는가! 오늘날 한국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물론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달라진 시대에 따른 자연적인 흐름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함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 분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 가서내가너희에게분부한모든것을가르쳐지키 게 하라. 모쪼록 금번 여름 성경학교와 수련회가 우리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무더운 여름의 얼음냉수가 되 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고궁과 다락원에서 가진 여름수련회 나무로 불을 지펴 국수를 끓여먹던 추억 윤석현 집사 (초등5 6부 부장) 여름성경학교는 예나 지금이나 어린청소년들에게는 꿈과 낭만을, 그리고 많은 추억을 안겨주는 멋있고 유익 한 프로그램이다. 더욱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조금은 침 체되었던 우리 교회학교가 놀라운 발전과 변모를 거듭 하여 청소년들에게 은혜가 있는 말씀 중심의 교육을 효 과있고흥미롭게하고있음은우리모두가감사해야할 일이다. 내가 주일학교 반사(교사)로 봉사하던 시절 (1960~1970년)은 국가적으로 경제개발 유신 새마을운 동 등으로 격동의 시대여서 방학이 되어도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없었으며, 교회에서 마련한 여름성경 학교가 유일한 그들의 관심사였다. 그 당시 서울은 4대 문을 중심으로 교통수단으로는 전차가 주된 교통수단이 라 멀리 이동하기가 쉽지 않아 교회 주변학교 학생들과 교인자녀들이 교회에 출석하여 학교 간이나 선ㆍ후배 간에 서로 상부상조하는 가족적인 분위기여서 학교가 끝나면 자주 교회당에 모여 여러 가지 다양한 행사들을 갖곤 했 다. 교회학교와 여름성경학교도 그들이 주류를 이루었 다. 그 당시 주일학교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유년 부와 중 고등학생을 묶어 중 고등부 2개 뿐으로, 여름성 경학교도 유년부는 교회에서, 중 고등부는 일영 마석 광 나루, 의정부 인근 YMCA 다락원(도봉동 소재) 등지에 ꋯ9
서 4 5일 간 열렸고, 마지막 날에는 고궁이나 세검정ㆍ 통해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을 경험하게 하고 온전한 제 한강 유원지 등지로 야외행사를 가곤 했다. 여름성경학 자로 훈련시켜 교회와 사회를 바르게 섬기는 일꾼들로 교는 교회행사 중 가장 큰 행사로 온 교우들이 적극적인 성장케 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은 지금이나 다를 바 없 협력과 정성을 기울여 교회어른들께서 수시로 찾아오셔 었다. 그때 주일학교 학생들이 지금은 목사님으로, 당회 원으로, 안수집사로, 또한 사회 여러 분야에서 자신의 역 할을 다하고 있고, 그들의 자녀가 부모의 뒤를 이어가고 있는 모습은 새문안만이 갖고 있는 전통이자 자랑이다. 그때 그 시절과는 확 바뀌어버린 시대상황으로 교회주 변에 주택들과 명문학교들이 강남 등지로 자리를 옮겨 갔어도 오늘도 변함없이 원근 각처에서 많은 어린이 청 소년들이 주일학교에 출석하고 있다. 중 고등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린 초등학생들마저도 학교와 학원에 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그나마 여가에는 컴퓨터에 1964년 8월 종로5가 소재 종묘에 교회학교 어린이와 교사들이 여름성경학교를 위해 모였다. 매달리는 요즈음 성경을 들고 교회를 찾아오는 청소년 들을 볼 때는 저절로 팔이 내밀어진다. 이들이 진정 우리 서 참외ㆍ수박 등 간식으로 교사들과 학생들을 격려하 의 희망이요 미래상이기에 그들을 얼싸 안아주고 싶은 셨고, 같이 예배드리며 흐뭇해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 마음에 생하다. 어느 해인가 종묘(종로5가)에서 야외활동을 했 서다. 평생을 새문안교회와 일선학교 교육에 봉사해온 는데, 교회에서부터 땔감 솥 등을 리어카에 싣고 종로4 사람으로서 그들을 통해서 장로교의 전통과 보수신앙에 가까지 끌고 가 고궁에다 간이식당을 차려놓고 땀을 뻘 기초하면서도 현실문제를 도외시하지 않는 교회로, 화 뻘 흘리며 나무로 불을 지펴 국수를 끓여 모두가 옹기종 합과 일치를 중시하고 모든 사람을 감싸안는 교회로, 세 기 둘러앉아 점심을 먹던 일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대 할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 나 지역 신분에 치우치지 않는 영원한 이 땅의 어머니교 서도 우리들은 아무런 불평도 없이 학생과 교사들이 혼 회로서의 새문안의 모습을 이어가도록 우리 모두가 교 연일체가 되어 천로역정, 캠프파이어, 밤 촛불의식 등을 회학교 교육에 더욱 정성을 모아 주기바라는 간절한 마 성경공부를 하며 구호물자를 나눠주던 수련회 황용성 명예집사 음으로 오늘도 기도드린다. 1940년대, 주일예배 드릴 때는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예배당에 가서 함께 합동예배로 드렸다(그 당시는 교회 10ꋯ 라는 말보다 예배당에 간다고 했다). 지금처럼 여름성경학교 모임이 활발치는 못했고, 그
당시만 해도 남녀 구별이 있어서 각각 예배를 드렸고, 니는 군복 스타일을, 여자 어린이들은 세일러 복을 입 고 다니기도 했으나, 대개는 한복으로, 남자어린이는 홑 잠뱅이 식으로, 양쪽에 조끼 주머니가 있는 웃옷에다 속 옷 없이 바지만 입고 다녔다. 물론 여자 어린이들도 마 찬가지로 한복을 입고 다녔다. 여름성경학교는 명목상 이어서 별로 큰 행사는 못되고 그저 모여서 찬송과 성경 공부를 하였다. 설교는 동화처럼 하나님과 예수님, 사도 들의 말씀을 이야기 해주셨고, 예배 후 교회 마당에서 여자어린이들은 줄넘기와 공기, 숨바꼭질을, 남자어린 이는 말타기ㆍ자치기ㆍ돌던져 맞히기 등의 놀이를 했 다. 여름성경학교는 전도사님과 부장님, 책임 맡은 교사 집사님들이 준비하였으며, 지금처럼 자유분방한 어린이 들이 아닌, 대개는 얌전히 앉아서 교사들의 말씀에 눈을 맞추고, 말똥말똥하게 들었다. 하품하는 아이들도 있었 지만, 대개는 떠들지 않았고, 눈을 껌벅껌벅 고개를 끄 덕이며, 찬송을 부를 때는 열심히 찬송을 불렀었다. 그 때는 교재가 부족하여, 한지(창호지)에다 찬송가를 직 접 써서 만든 챠트를 걸어 놓고 지휘선생님의 지도로 찬 송 가를 따라 부르곤 했다. 특히 많이 부른 찬송가는 <예수 사랑하심은>, <예수 권세 많도다>였다. 교회 올 때는 혼자 오는 어린이들도 있었으나, 대개는 부모님들과 같 이 왔다. 유년부에서 졸업과 동시에 중등부로 가면, 일 옷을 입어도 남자어린이들은 일본 사람이 흔히 입고 다 만들어 부르곤 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소절이 있다. 와 래라와 새문안, 오오시꾸하게만(우리들은 새문안, 열심 히 매진하자) 라는 구절이다. 이렇게 일제시대 말기에 와서는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말까지 말살하려는 탄압이 있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아 새로운 희망과 교회 선교운 동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중등부는 여름 하계수련회로 인해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했고, 더욱이 해방 후 어려운 시기라 의 식 주 문제가 곤란한 변두리교회, 당시 경기도 양평 등의 교회에 구호물자를 가지고 가 수련회를 겸해 방학 동안 어린이들을 모아 성경공부를 하며 구호물자 를 나눠준 일도 있었다. 여름수련회가 지금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1950년대엔 부산으로 피란갔던 교회가 돌아온 후 청년 면려회가 다시 활동하게 되어 교회에 청 년들이 모여 구호활동과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지방 변두리교회를 순례하면서 여름성경학교도 하고, 그 지 방 교사들과 체육대회를 가졌으며, 상호 유대관계를 맺 기도 했다. 지금의 여름수련회는 참 많이 발전한 것이 다. 우리 교회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수련회를 갖기 위 해먼저성경말씀으로무장하여자신의믿음과행동과 선교에 도움이 되는 일을 위해 말씀을 배워 열심히 봉사 해야 하겠다. 끝으로 금년 여름수련회도 내실을 굳게 하 기 위한 수련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지금도 나를 가끔 미소짓게 하는 하계수련회 기타반주에 맞춰 파트너와 포크댄스를 하던 기억 이기옥 집사 (새교우부) 본어를 써야 하는 일이 생겼다. 강제로 일본어를 사용하 라고 해서, 교회에서도 분반공부 시 찬송가도 일본어로 그동안 많은 수련회에 참석했지만, 하기수련회 하면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난 으레 대학부 하기수련회가 생각난다. ꋯ11
대학부 하기수련회를 말하기 전에 잠깐 당시의 대학 생회를 소개하고자 한다. 새문안대학생회 는 청년 대학생회에서 1967년 봄, 정식으로 분리, 발족되었으 며, 젊음이 넘치는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정말 많은 일 을 해냈다. 매주 100여 명이라는 놀랄만한 수의 회원이 출석했는데, 이는 위치상 교통의 중심지인 광화문이라 는 이점도 있었고, 나중에 문제시되었던 기독학생회 활 동에도 이유가 있었겠으나,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의 활 동을 적극 장려하고 지원했던 고(故)강신명 목사님의 앞 서가는 목회철학과 당회의 열린 자세 때문이었다고 생 각한다. 주일예배 외에 성경공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한 신 앙훈련을 받았다고 기억된다. 언더우드 학술강좌를 비 다들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수련회 때는 이성 파 트너와 함께 포크댄스를 추기도 했다. 롯하여 수시로 저명한 교수나 신학자들을 초빙하여 강 의를 듣고 토론회와 좌담회를 함으로써 신앙과 지식을 높이는 데 힘썼다. 또한 반독재 민주화투쟁과 인권운동 에 앞장서면서도 사명감을 가지고 낙후된 농촌을 위해 농촌계몽 및 봉사활동에도 힘썼다. 또 수련회를 통하여 영성훈련을 갖기도 했다. 틈틈이 연세대나 숭실대를 빌 려 체육대회를 열거나, 탁구대회 등반대회를 갖는 등 체 력 단련과 친교를 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또한 각자 받은 달란트나 여건에 따라 활동을 하였는데, 자체적으 로 디딤, 농촌 지를 창간하기도 했으며, 도시 속 에서 소외된 이웃인 연희동 판자촌을 찾아 야학을 하던 일도 잊을 수 없다. 지금처럼 따로 우리 수양관이 없던 때라 주로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나 신학대학 등에서 하기수련회를 가졌 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중 60년대 말 여름, 3박 4일 동안의 광나루 장로회신학대학에서의 수련회가 가장 생 각난다.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대학부 예산이 별로 없었 던 관계로 무슨 행사만 있으면 장로님들을 찾아 나섰는 당시 지도 교역자와 대학부 부원들의 모습. 는데, 매일 여러 차례 한 주제를 가지고 분임토의를 하 고 발표하는 등 빽빽한 강행군을 해서 새내기 학생들을 애먹게 했던 일, 또 한여름 시설이 미비한 기숙사 좁은 식당에서 배식을 하느라 땀 흘리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모처럼 집을 떠나 친구들과 기숙사에서 합숙하며 꿈을 펼쳤으며 서원석 장로의 기타반주에 맞춰 포크댄스를 데 그때도 조를 짜서 장로님들을 만나 조르던 일, 필요 한 물건들을 사느라고 동대문시장을 헤매던 기억이 난 다. 당시 홍성현 목사님(당시는 전도사)이 지도교역자 로 계셨으며 서경석 목사와 최선옥 집사가 회장단이었 12ꋯ 하며 자연스레 이성의 손을 잡아보기도 했다. 그래도 뭐 니뭐니해도 재미 있었던 것은 그때만 해도 획기적인 파 트너 정하기가 아니었나 싶다. 짝이 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남녀학생이 각기 써냈는데 한 남학생에 4명의
여학생이 이름을 써내 전도사님과 회장단을 몹시 난감 하게 했었다는 후일담이 전해져 가끔 그때 일로 인해 미 소를 짓곤 한다. 격세지감을 느끼지만, 지금과는 다른 낭만과 멋스러움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새문안에서 자라난 씨앗들이 곳곳에서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 해외에서, 국내에서 교역자가 된 동 문들의 소식이 들려온다. 또한 평신도로서 처해진 곳곳 잊지못할 대학생회, 보고싶은 친구들.. 서경석 목사 (서울조선족교회 담임) 에서 믿음의 자녀로서의 역할들을 다 하고 있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진다. 또한 각 부서에서 봉사하며 새문안 지 체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있는 새문안 지킴이들도 많이 있다. 30여 년 전 사진속의 그리운 얼굴들을 보며, 오늘의 새문안교회는 내가 젊음을 바쳤던 곳이다. 새문안교회 를 빼놓고 나의 성장과정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새문안대학생회 활동은 젊은 시절 나의 모든 혼을 불어넣었던 활동이었다. 새문안대학생회 는 67년에 처음 생겼는데, 초대 회장은 이일영 장로님이 었다. 부회장 서원석 장로, 서기 김용담 집사, 회계 이숭 리권사,그리고나는총무를맡았다. 68년에나는대학 생회 회장이 되었다. 그렇지만 68년에는 대학생회가 약 해서 여름 특별활동을 하지 못했고, 69년에 가서야 서원 석 장로님이 회장이 되면서 원당 농촌봉사활동을 떠날 수 있었다. 70년 여름, 대학생회는 소사 YWCA 수양관에 서 은준관 목사님을 모시고 여름수련회를 가졌다. 7~80 명의 젊은이들이 처음 3박4일간 가진 수련회였는데, 기 독교의 사회참여가 프로그램의 내용이었다. 이미 당시 새문안대학생회는 학생운동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기독 학생으로서 어떻게 학생운동의 영향을 수용할 것인가가 주된 관심사였다. 당시 강사였던 은준관 목사님은 새문 안대학생회의 수준 높음에 크게 놀라셨다. 그만큼 당시 대학생들은 진지했고, 또 전통적인 기독교에 대해 비판 새문안 대학생들을 떠올린다. 우선적으로 성경을 열 심히 공부하여 믿음을 굳건히 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 야만 세상 속에 나가 어떠한 경우에 처하더라도 흔들리 지 않으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주의 자녀들이 되 리라 믿는다. 적이었다. 70년 여름 수련회이후, 새문안대학생회는 기 독교의 사회참여에 앞장서는 이념적인 대학생회가 되었 다. 당시 대학생부 부장님이신 김병옥 장로님이 교육관 지하실을 단장하여 대학생부가 따로 예배를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대학생회의 숫자는 120명까지 늘어났다. 여름 수련회에서 사회참여의 방향으로 목표를 잡은 대학생회 는 11월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 직후, 대학생회 회원 80 명이 전격적으로 교육관 4층을 점거하고 전태일사건과 관련해서 참회와 호소의 금식기도회 를 개최하였다. 강 신명 목사님의 적극적인 보호로 구속된 학생은 없었지만, 이 사건은 그 후 진보적인 기독학생운동의 효시를 이룬 사건으로 한국기독학생운동사에 기록되었다. 그 후 매 년 여름이면 대학생회는 수련회를 가졌고, 선배들이 남 아 후배를 지도하면서 대학생회의 전통을 이어 나가고자 애를 썼다. 홀딱 벗고 으스러지게 껴안자 가 매년 열리 는 수련회의 슬로건이었다. 물론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 지만, 그만큼 학생들은 서로 진지하게 한 덩어리가 되려 고 애썼다. 그리하여 새문안대학생회는 독재정권에 저항 하는 민주화운동의 거점이자 기독학생운동의 훈련장이 ꋯ13
되었다. 74년 4월 민청학련사건으로 나를 포함하여 6명 의 대학생회 출신 및 회원이 구속된 이후 우리나라가 민 주화될 때까지 백명이 넘는 대학생회 회원들이 줄줄이 감옥을 갔다.한 교회에서 십몇년동안계속해서 이렇게 많은 대학생들이 감옥에 간 예가 세계 다른 나라에도 있 을까? 당회에서는 대학생회가 항상 말썽거리였고, 나는 항상 대표적인 문제아였다. 당시 감옥에 갔던 학생들 중 열명 가량이 그 후 목사가 되었다. 당시 뜨겁게 서로 사랑 했던 젊은이들, 감옥 간 친구를 생각하며 눈물 흘렸던 젊 은이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고 싶다. 12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