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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309 냉전체제 형성기(1945~1948) 中 華 民 國 의 한국인식 - 국민당 언론의 한국 기사를 중심으로 - 이재령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부교수 Ⅰ. 머리말 戰 後 韓 國 은 美 蘇 에 의해 38도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됨으로써 민족과 국가 의 장래가 외세에 의해 결정되었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정치 이념과 통치체제를 이식시키는 동안 중국은 한국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음에 도 불구하고 國 共 內 戰 으로 전후처리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 결과 항 일전쟁과정에서 긴밀했던 한 중 관계는 점차 멀어졌고, 한국 독립과정에 중 국은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한 중 양국의 오랜 역사적 유대관계와 지리적 접근성으로 볼 때 전후 한국문제에 관한 중국인식은 그 이 후의 상호관계를 결정짓는 토대가 되었다. 현재 양국의 폭넓은 경제 문화 교 류에도 불구하고 정치 외교 군사 분야에서 명확한 한계를 안고 있다. 이것 은 전후 남북분단에 기인한 것으로, 한 중 관계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먼저 냉 전체제 형성기 중국의 對 韓 認 識 을 밝혀야 한다. 1) 투고일: 2010년 4월 14일, 심사일: 2010년 5월 11일, 게재확정일: 2010년 8월 27일.

310 동북아역사논총 29호 전후 한 중 양국의 상호 인식과 교류는 남한과 북한, 중국대륙과 타이완 으로 각각 분리된 공간에서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와 지배체제에 기초한 냉전 구도가 만들어짐으로써 경직되었다. 1978년 중국대륙이 개방되고, 1992년 한 중 수교가 이루어진 이후 비로소 폭넓은 교류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와 관련하여 기존 연구는 일제강점기 중국의 國 共 兩 黨 과 한국임시정부 및 독 립운동세력 간의 군사 교육 재정 지원을 통한 상호 협력과 연대활동에 관심 이 모아졌다. 2) 또한 1931년 7월 한 중 일 세 나라가 서로 얽힌 萬 寶 山 事 件 과 조선화교배척사건처럼 특정 사안을 중심으로 각국의 정파 및 언론의 현실 인식을 통해 서로를 어떻게 기억하고 바라보았는가를 규명하였다. 3) 근래에는 항일을 위한 무장투쟁과 상호 연대를 중심으로 1940년대의 한 중 관계가 집중 검토되었다. 4) 그렇지만 20세기 중반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시발점인 남북 분단 에 관한 중국의 인식 및 대응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미흡하였다. 미 소 군정기간은 한반도에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한 국제 논의와 내부의 민의수렴 및 통치 시스템의 구축과정이었다. 세부적으로는 미 소공동위원회 1) 일반적으로 한반도에서의 미 소 대립에 영향을 미친 냉전이 출현한 시기는 유럽에 서 냉전을 공식 선언한 트루먼 독트린이 선포된 1947년 3월 12일보다 앞선 1946년 초부터 출현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완범, 2007, 한국해방 3년사, 태학사, 163쪽. 이 글에서 냉전체제 형성기 는 종전 후 미 소 양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 고 자국의 영향력 아래 별개의 정부를 조직함으로써 분단이 고착화된 시기(1945. 8~1948. 9)를 의미한다. 2) 기존 연구는 한국독립운동사의 일부로 진행되었다. 石 源 華, 1995, 韓 國 獨 立 運 動 與 中 國 : 1919~1945, 上 海 人 民 出 版 社 ; 石 源 華, 1996, 韓 國 獨 立 運 動 血 史 新 論, 上 海 人 民 出 版 社. 3) 孫 乘 會, 2003, 萬 寶 山 事 件 과 中 國 共 産 黨, 東 洋 史 學 硏 究 第 83 輯, 東 洋 史 學 會 ; 李 在 鈴, 2004, 南 京 國 民 政 府 시기 中 國 의 韓 國 認 識 萬 寶 山 事 件 에 관한 여론 동향을 중심으로, 中 國 史 硏 究 第 31 輯, 中 國 史 學 會. 4) 장세윤, 1993, 解 放 日 報 에 보도된 華 北 朝 鮮 獨 立 同 盟 의 활동, 五 松 李 公 範 敎 授 停 年 紀 念 東 洋 史 論 叢, 지식산업사; 장세윤, 1995, 항일전쟁기 중국공산당의 한국 독립문제 인식과 대응, 한국독립운동사연구 9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지 훈, 2006, 중일전쟁시기 解 放 日 報 의 한국인식, 史 林 제25집, 수선사학회; 이 재령, 2007, 抗 戰 時 期 (1937~1945) 國 共 兩 黨 의 韓 國 觀 中 央 日 報 新 華 日 報 를 중심으로, 中 國 學 報 第 56 輯, 韓 國 中 國 學 會 등이 있다.

311 (이하 미 소공위로 약칭)와 유엔한국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남한에서 총선거 가 실시되었다. 이렇게 구성된 제헌의회에서는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한 헌법 과 각종 제도가 만들어졌으며, 집권을 위한 정치세력 간 실력다툼이 치열하였 다. 이 시기의 한 중 관계 연구는 종전 이후 중국에 남아 있던 임정세력과 독 립군의 처리 및 在 中 韓 人 의 귀환문제 등에 집중되었다. 5) 최근 대한민국의 정 부수립과 그 과정에 나타난 국내 정치세력의 갈등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新 中 國 건설의 반면교사로 삼으려 했던 중국의 對 韓 認 識 에 주목하고 있다. 6) 대체로 국가 간의 교류 접촉과 상호인식은 늘 우호관계를 전면에 내세우 지만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우월이나 차별의 위계의식이 깔려 있기 마련이 다. 이제껏 중국 학자들은 20세기 전반의 한 중 관계를 전통적 中 華 主 義 에 기초한 手 足, 脣 齒, 同 病 相 憐, 兄 弟 등으로 표현하며 뿌리 깊은 연대의식 을 강조하였다. 특히 일제침략기 중국 내의 한국 독립운동과 중일전쟁에서의 공동투쟁을 우호협력의 실질적 연대로 해석하였다. 7) 반면 우리 학계는 독립운 동과정에서 보여준 중국의 人 的 物 的 지원과 협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내 재된 중화의식의 지속과 변용을 지적하고 그로부터 발생된 문제점을 밝히고 있다. 8) 종전 이후 한 중 관계의 이해는 한국 독립을 둘러싼 국제 논의와 미 소 의 분할점령 및 군정실시, 신탁통치에 관한 국내 정치세력의 대립, 미 소공위 와 유엔한국위원회의 활동 및 한계, 남한 총선거와 대한민국 정부수립 등 정치 이슈를 중심으로 중국의 對 韓 認 識 을 포괄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 5) 염인호, 1996a, 해방후 한국독립당의 중국 관내지방에서의 광복군확군운동, 역 사문제연구 1, 역사문제연구소; 염인호, 1996b, 해방후 한국독립당의 중국동북지 방 진출과 재중한국독립당의 정책(45. 8~47. 2), 역사교육 60, 역사교육연구회; 정병준, 1998, 1945~48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중국내 조직과 활동, 사학연구 55 56합집(신재홍정년논문집), 한국사학회. 6) 임상범, 2008, 중국의 남한 정부수립에 대한 인식, 史 叢 제67집. 7) 胡 春 惠 著, 辛 勝 夏 譯, 1978, 中 國 안의 韓 國 獨 立 運 動, 단국대학교출판부; 石 源 華, 1995, 앞의 책; 石 源 華, 1996, 앞의 책; 崔 丞, 1992, 近 代 東 北 亞 國 際 關 係 史 硏 究, 東 北 師 範 大 學 出 版 社 ; 黃 定 天, 1999, 東 北 亞 國 際 關 係 史, 黑 龍 江 敎 育 出 版 社. 8) 박명희 외, 2008, 근현대 전환기 중화의식의 지속과 변용, 단국대학교출판부.

312 동북아역사논총 29호 으로나 현실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한반도에서 자신들이 배제된 채 분단으로 치닫는 과정을 지켜본 중국 언론의 시각을 통해 냉전체제에 관한 초기 인식을 확인해 보는 것이다. 9) 왜냐하면 미 소의 분할점령으로 시작된 남북한의 대결구도가 전후 동아시아 지역에서 갈등의 불씨로 작용하였고, 아 직까지도 한 중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기본구도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전후 한국 분단과 미군정에 관한 중화민국의 인식을 살펴봄으로써 냉전형성기 한 중 관계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10) 미군정 시기 남 한의 좌우분열과 독립방법을 둘러싼 관련기사를 통해 동시대 중국인들이 동아 시아의 냉전요인을 어디에서 찾고 있으며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 다. 이를 위해 당시 중국의 대표적 민영지로 天 津 에서 발행된 大 公 報 11) 와 민 영지이면서 국민당에 의해 上 海 에서 발행된 申 報, 12) 국민당 기관지로 중앙 정부의 관영지 성격을 띤 中 央 日 報 의 한국 관련 보도를 종합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요컨대 동시대 중화민국 언론을 대표한 中 央 日 報 申 報 大 公 報 에 실린 한국과 관련된 보도내용을 비교 검토하여 한반도의 분단과 해방정 국에 대한 중국 여론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13) 종전 직후 국민당의 영향력이 절 9) 이 시기 중국 언론의 한국관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면 국공 양당에 의해 발행된 신 문은 물론 민영 신문까지 비교 분석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戰 後 時 期 중화민국 정부 를 이끈 국민당 신문들을 먼저 분석하고, 人 民 日 報 解 放 日 報 群 衆 등의 공산당 언론은 지면관계상 별도의 글을 통해 비교 분석할 것이다. 10) 이와 관련된 선행연구로 李 在 鈴, 2010, 美 軍 政 時 期 (1945~1948) 中 國 國 民 黨 言 論 의 對 韓 認 識 申 報 를 中 心 으로, 東 洋 學 第 47 輯 참조. 11) 일본의 패망 이후 大 公 報 는 1945년 11월 1일 上 海 에서 復 刊 되었고, 한 달 뒤 본 래 근거지인 天 津 에서 신문이 재발행되어 1949년 1월 15일까지 계속되었다. 周 雨, 1993, 大 公 報 史, 江 蘇 古 籍 出 版 社, 54~60쪽. 12) 上 海 에서 발행된 申 報 는 1928년에 발행부수가 14만 부에 이르는 중국 최대의 민 영 일간지로, 1934년 社 主 인 史 量 才 가 反 蔣 성향의 民 權 保 障 同 盟 에서 활동하던 중 국민당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이후 申 報 는 친국민당 성격을 띠었으며, 중일 전쟁 동안에 漢 口 香 港 上 海 등지로 옮겨 다니며 停 刊 과 復 刊 을 반복했다. 1945년 말 國 民 黨 의 潘 公 展 과 陳 訓 愈 가 6개월간 관리한 후 1946년부터 정부 소유 로 바뀌었고, 1949년 5월 27일 申 報 는 紙 齡 第 25,599 號 를 마지막으로 終 刊 되었 다. 宋 軍, 1996, 申 報 的 興 衰, 上 海 社 會 科 學 院 出 版 社, 230~237쪽. 13) 中 央 日 報 는 국민당 중앙기관지로서 1945년 9월 10일 南 京 에서 공식 복간되었

313 대적이었던 만큼 中 央 日 報 와 申 報 의 시각은 중화민국의 입장을 대변했다 고 볼 수 있다. 또한 대표적 민영지로 申 報 와 더불어 오랜 역사와 많은 부수 로 영향력이 컸던 大 公 報 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이 시기의 보편적 韓 國 觀 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14) Ⅱ. 남북분단과 미 소공동위원회 일본의 패망 이후 한반도는 미 소에 의해 분할 점령되어 군정이 실시되었다. 중국에서는 국공 양당의 주도권 다툼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극심한 인플레이션 으로 국내경제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이 시기에 중화민국의 주요 언론들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연대관계를 맺어왔고 항일전쟁을 통해 긴밀한 협력관계 를 유지해 온 한반도의 미래를 예의주시하였다. 종전 후 중화민국 정부는 한국 에서 미 소의 지리적 분할지배를 반대하고 연합국 네 나라, 곧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공동협의를 거친 자유 독립 통일국가의 건설을 주장하였다. 전쟁기간 동안 연이은 카이로회담, 얄타회담, 포츠담회의에서 이미 합의된 전 후처리방안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회의가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모 스크바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는 미 영 소 세 나라의 외무장관이 참여하였 고, 중국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지지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고, 국민당 중앙선전부의 관리와 지도를 받았던 申 報 와 新 聞 報 는 1945년 11월 전후로 복간되었다. 方 漢 奇, 1996, 中 國 新 聞 事 業 通 史 第 2 卷, 中 國 人 民 大 學 出 版 社, 987~988쪽. 14) 方 漢 奇 等, 2004, 大 公 報 百 年 史, 中 國 人 民 大 學 出 版 社, 298~306쪽. 당시 중국 신문은 기사의 취재와 보도, 신문배포 등의 제반 언론활동이 국민당의 엄격한 통제 를 받았기 때문에 신문마다 기사내용에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특정사안의 보도 횟수와 신문지면의 편집방향, 사론 및 분석기사 등을 통해 개별 언론의 성격을 파 악할 수 있다.

314 동북아역사논총 29호 모스크바 3상회의는 미 소의 타협에 의해 신탁통치를 결정하였고, 중화 민국 정부는 신탁기간을 확실히 정하면 한국의 완전한 독립에 이로울 것 이라 면서 지지의사를 표명하였다. 15) 아울러 중국의 동북지역에 대한 주권보장과 평화통일을 강조하면서 한국의 5년간 신탁기간 동안에 미 소 두 나라가 독점 적으로 지배하는 데 반대하였다. 16) 종전 직후 중국이 군사 경제 등 대외역량 이 크게 부족한 상황에서 자국의 이익을 지키며 한국문제에 간여할 수 있는 방 법이란 託 治 國 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국 독립과정에 연합국과 함께 참여하는 신탁관리방안이 실현되면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17) 이 때문에 중화민국 정부는 전후 한국문제처리에 있어 서 자국까지 포함된 4개국 신탁통치방안을 찬성하면서도 미 소 양국의 분할 지배에 반대하는 이중 태도를 취하였다. 한국에서 반탁운동으로 인한 좌우갈등이 심각한 가운데 미 소는 신탁통 치방안을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국의 점령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꾀하였다. 18) 이때에 국민당 언론은 신탁통치의 수용여부를 둘러싸고 벌어진 한국 내의 좌우충돌에 대해 상세히 보도하였다. 19) 우선 申 報 는 반탁운동이 일부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한국 독립을 위해 모스크바의 결의를 의심하 지 말아야 한다면서 시위의 자제를 촉구하였다. 20) 남한에서 반탁운동을 주도 한 李 承 晩 과 金 九 의 정치노선은 처음부터 서로 달랐다. 이승만은 유엔과 미국 에 대한 직접 외교활동을 통해 한반도의 공산화 가능성을 경고하면서 민주적 절차에 의한 신속한 독립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21) 이를 위해 본인이 직접 15) 我 國 政 府 發 言 人 談 三 强 會 議 托 管 韓 國 實 有 助 于 獨 立, 申 報 (1945. 12. 30). 16) 韓 人 反 對 托 治 制 度, 申 報 (1945. 12. 30). 17) 이재령, 2006, 20세기 중반 韓 中 關 係 의 理 解 韓 國 獨 立 에 관한 中 華 意 識 의 二 重 性, 中 國 近 現 代 史 硏 究 제29집, 101~2쪽. 18) 美 擬 單 獨 進 行 建 朝 鮮 政 府, 申 報 (1946. 7. 7). 19) 韓 慶 祝 獨 立 紀 念 左 右 派 發 生 衝 突, 申 報 (1947. 3. 3). 20) 韓 國 人 群 情 憤 激 反 對 托 管 制 度, 申 報 (1945. 12. 31). 21) 李 承 晩 在 美 爲 韓 獨 立 呼 吁, 申 報 (1947. 3. 6).

315 미국으로 건너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후원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22) 한편 임정 출신의 인사들은 자주적이며 완전한 독립을 주장했는데, 임정 중심의 통일독립정부를 수립할 수 있도록 연합국의 지원을 희망하였다. 23) 중 국에 머물고 있던 임정대표단은 중 미 영 프 소 다섯 나라에 임정의 승 인, 미 소 점령군의 조기철수, 신탁통치안의 폐지, 4개국의 기술 및 건설 지 원 등을 요청하는 비망록을 보냈다. 24) 이처럼 남한정국의 향방은 임정의 자 주적 통일정부 수립과 이승만의 조기 단독정부 수립으로 크게 나뉘어졌다. 독립방안을 둘러싼 남한 내의 정파 간 갈등에 대해 국민당 언론은 한국의 내부 문제라기보다 미 소의 세력대결에 의한 국제문제로 인식하였다. 25) 訪 美 活 動 을 끝낸 이승만은 귀국길에 중국으로 건너가 蔣 介 石 을 비롯한 여 러 지도자들과 접촉하였다. 이즈음 국민당 신문들은 역사적으로 긴밀했던 한 중 관계를 새삼 강조하고, 앞으로 한국문제에 있어서 중국의 역할을 당연 시하였다. 중화민국 관영지 中 央 日 報 는 中 韓 양국이 영토를 서로 맞댄 형제의 나라로 지난날 중국의 국민혁명과 조선의 독립운동은 불가분의 관계였 으며, 서로 유사한 점이 많아 중국 운명과도 직결되어 있다 면서 중국이 한국의 미래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이유로 지리적 접근성과 현실적 영향력을 들었다. 26) 미 소 군정에 대해 비판적이던 申 報 는 한반도의 분할점령이 한국 민족 의 자주정신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한국을 분열시켜 통일독립을 무기한 연장 시키고 미 소 관계를 더욱 갈라놓을 것으로 보았다. 더욱이 남북한의 대결구 도가 중국 동북지역은 물론 동아시아의 평화까지도 저해할 것으로 예견하였 다. 27) 특히 신보 는 한 중 간의 밀접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북한 공산화의 영향이 곧바로 동북지역에 미칠 것으로 우려하였다. 이런 이유로 다른 국민당 22) 李 承 晩 主 張 韓 南 獨 實 行 武 裝, 申 報 (1947. 2. 26). 23) 閔 石 麟, 聲 援 李 承 晩 博 士 赴 美 呼 吁 韓 國 獨 立, 中 央 日 報 (1947. 1. 3). 24) 韓 向 五 强 致 備 忘 錄 呼 吁 擁 護 獨 立 權 利, 大 公 報 (1947. 3. 7). 25) 美 將 發 表 對 韓 政 策 聲 明, 中 央 日 報 (1947. 3. 23). 26) 馮 覃 燕, 祝 韓 國 前 途 光 明 迎 李 承 晩 先 生, 中 央 日 報 (1947. 4. 12). 27) 韓 國 必 須 獲 得 獨 立 歡 迎 李 承 晩 博 士 來 華 ( 社 論 ), 申 報 (1947. 4. 10).

316 동북아역사논총 29호 신문들도 남한의 미군정뿐만 아니라 북한지역의 군비증강과 공산당의 조직 활동, 경제상황 등을 상세히 보도하며 남북한의 정세변화에 촉각을 곤두세 웠다. 28) 미군정에 관하여 신보 는 전통적 한 중 관계를 근거로 중국 인민은 三 韓 의 인민들과 손발처럼 밀접한 관계 이고, 중국과 한국은 이와 입술의 관계 이기 때문에 한국의 통일독립이 하루 빨리 실현되기를 희망한다면서 전후 한 국문제처리를 주도한 미국의 對 韓 政 策 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며 방임적이라고 비판하였다. 29) 그 이유로는 남한 내에서 좌우분열이 격화되고, 북한이 조기에 공산화된 것은 전적으로 미국의 책임이 크다고 본 것이다. 대공보 도 미군정 의 對 韓 政 策 을 부정적으로 보았는데, 식민지 경제구조를 해체시키지 못한 결 과 남한의 경제부흥에 실패하였고, 정치적 재건 역시 중요한 과제였지만 실제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주된 근거로 미군정이 우익세력에게 만 식민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허용한 반면 진보적 민중조직과 운동을 철저히 탄압함으로써 남한 주민들의 거센 저항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30) 이처 럼 국민당 언론은 미군정의 소극적 혹은 편향적인 점령정책의 결과로 남한 내 정치적 경제적 갈등이 오히려 심화된 것으로 보았다. 본래 미국의 對 韓 政 策 은 한반도 남부를 동아시아의 防 蘇 기지로 묶어두려 는 것이 최초의 동기였다. 또 다른 목표는 한국에서 식민지 유산을 뿌리 뽑고 자유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 비춰진 미국의 점령 정책은 전자만 강하게 부각되었을 뿐 후자를 인식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따라 서 대공보 는 남한의 군정통치를 통해 미국이 아시아인들에게 민주주의와 평 화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이끌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아주 좋 은 기회였지만 이러한 기회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면서 미국의 민주적 위신을 28) 組 織 韓 國 政 府 麥 師 表 示 贊 助, 申 報 (1947. 4. 14); 陸 鏗, 韓 國 人 感 戴 蔣 主 席, 中 央 日 報 (1947. 3. 17). 29) 朝 鮮 國 勢 顯 露 陽 光 ( 社 論 ), 申 報 (1947. 4. 15). 30) 美 國 在 朝 鮮 的 成 績, 大 公 報 (1947. 3. 10).

317 재확립하려면 점령정책을 대대적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1) 이렇듯 국민당 언론은 미 소 양국의 독점적 한국 지배와 일방적인 군정통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아울러 미 소에 의탁한 한국의 정치세력이 신탁통치의 허용여부로 극심한 분열상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깊이 우려하였다. 이러한 비판적 對 韓 認 識 은 국공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중국 내부의 상황을 반영 한 것으로 남북한의 대결양상이 격화될수록 자신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1947년 초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기존의 공산주의에 대한 중립태도를 포 기하고 적극적인 반공노선으로 전환하였다. 32) 이로부터 한반도는 防 蘇 를 위한 미국의 전략적 요충지로 재인식되어 미 소 대립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미국 의 마셜 국무장관은 소련 외무장관에게 분할지역에서 경제 정치 문화의 발 전을 촉진하고 최후 목적은 興 隆 한 통일조선을 성립하는 것 이라고 미군정의 정책방향을 명확히 밝히었다. 33) 이를 위해 그는 가능한 한 빨리 미 소공위를 회복하려 했고, 전제조건으로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발표할 수 있도록 언론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4) 한반도에서 분단위기가 점차 고조되는 가운데 국민당 언론은 미국의 도의 상 책임을 거론하였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한국인들을 만족시키지 못한 미군 정의 점령정책과 소련과의 세력대결이 한국을 냉전의 첫 희생자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두고 대공보 는 한국만의 불행이 아닌 인류 전체의 불행 이며, 이를 해결하려면 미 소가 먼저 철수방법을 협의해야 하고, 4개국의 전 면 협상에 의해 완전한 통일독립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5) 중앙 31) 앞의 글, 大 公 報 (1947. 3. 10). 32) 미 소 냉전은 1947년 초 트루먼 독트린의 발표로 시작되었지만 실제 냉전의 개시 는 트루먼 대통령이 취임한 1945년 4월 중순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 견해이다. 이우 진, 1998, 미국의 대한반도정책(19451~94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한국현대사의 재인식 Ⅰ 해방정국과 미소군정, 오름, 42쪽. 33) 對 韓 國 問 題 我 國 將 有 表 示, 中 央 日 報 (1947. 4. 15). 34) 敦 促 美 蘇 恢 復 談 判 馬 歇 爾 致 函 蘇 外 長, 中 央 日 報 (1947. 4. 12). 35) 韓 國 獨 立 問 題 的 前 瞻, 大 公 報 (1947. 4. 19).

318 동북아역사논총 29호 일보 도 미 소 분할정책을 비난하면서 카이로선언을 이행하지 않은 것이 최 대 오류이고 앞으로 해결방안은 연합국 4개국의 전면 협상과 한국 내부의 단 결뿐임을 강조하였다. 36) 국민당 언론은 카이로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처음 약 속했던 미 영 중 3국이 도의적 책임을 함께 지고 있지만 중국은 역사적 지 리적 관계 때문에 한국의 운명을 결코 좌시할 수 없다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4 개국 협상에 의한 한국 독립 을 주장하였다. 마침내 1947년 4월 16일 중화민국 의 王 世 杰 외교부장이 미국의 마셜 국무장관에게 한국 독립에 관한 중화민국 정부의 기본입장을 전달하였다. 37) 중국의 제안은 열강들이 한국 독립의 권리 를 존중하여 신속히 군대를 철수시키고 내정 간섭을 하지 않으면 내란을 피할 수 있고, 완전한 평화방안이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전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합의에 따라 제1차 미 소공위가 1946년 3월 소집되었지만 시작과 동시에 협의대상이 될 한국의 정당 사회단체를 어떤 기 준으로 선정하느냐의 문제로 미 소의 견해차가 너무 컸다. 38) 그 후 1년여 만 인 1947년 6월 25일 미 소공위가 다시 재개되었지만 미 소는 여전히 종전 주장만 되풀이하여 미 소공위의 참여범위가 남한 정파의 주요 갈등요인으로 작용하였다. 39) 예컨대 남한의 정당대표로 안재홍 여운형 장덕수 박헌영 등이 참석했지만 실제 영향력이 큰 이승만과 김구는 불참하여 정치적 분열이 심하였다. 이러한 남한 내 정파의 갈등을 신보 는 미 소의 분할지배에 따른 폐해로 인식하였는데, 전후 유럽에서 시작된 미 소의 세력대결이 아시아에서 그대로 재현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40) 중앙일보 도 지금 세계는 두 종류의 사 상으로 쪼개어져 의견이 엇갈리는데, 이는 조선에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면서 한국의 이념대립을 국제문제로 인식하였다. 41) 36) 秉 直, 解 決 朝 鮮 問 題 的 關 鍵, 中 央 日 報 (1947. 5. 16). 37) 韓 國 獨 立 問 題 的 前 瞻, 大 公 報 (1947. 4. 19). 38) 김영명, 1998, 남한의 정치적 동태와 미군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한국현대사의 재인식 Ⅰ, 오름, 88~89쪽. 39) 商 談 韓 國 統 一 問 題 馬 歇 爾 函 詢 蘇 方 意 見, 中 央 日 報 (1947. 5. 4). 40) 南 韓 會 議 昨 揭 幕 四 百 政 黨 社 團 參 加 協 商, 申 報 (1947. 6. 26). 41) 韓 局 極 待 澄 淸 蘇 組 編 北 韓 軍 近 二 十 萬 人, 中 央 日 報 (1947. 7. 30).

319 한편 대공보 는 한국인에 대해서 약소국가가 독립을 원한다면 먼저 자강 의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강권정치에 의지하면 결국 소용돌이에 휩싸여 벗어 날 방법이 없다 면서 미 소에 의탁한 한국 정치세력의 분열을 지적하고, 건국 의 진통 중 최대 난관은 정치적 단결이라는 점을 새삼 강조하였다. 42) 이렇듯 국민당 언론은 한국의 정치적 갈등이 미 소의 이념대립에 따른 결과이지만 여기에 附 和 雷 同 하고 있는 국내 정치세력도 함께 비판함으로써 소련의 지원 아래 내전을 확대시키고 있는 공산당에 대한 여론공격을 강화하였다. 남한 내부에서 좌우갈등이 심각해지는 가운데 중국 동북지역의 위기도 고 조되어 소련군의 지원을 받은 북한과 중국공산당의 연계가 현실화되었다. 43) 중화민국 정부는 국공내전과 남북한 분단으로 표출된 동아시아의 이념대립이 사실상 소련과 연계된 국제문제로, 그 해결의 열쇠는 한반도에 조속히 통일정 부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44) 미 소의 세력팽창에 의한 남북한의 대립구도가 심화되는 가운데 중화민국은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 연계성을 배경으로 한국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사표시를 하면서 전통적 事 大 字 小 의 중화의식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이다. 예컨대 식민지에서 해방된 한국의 운 명은 미 소 점령군에게 좌우된다면서도 과거 중화질서에 의한 책봉관계를 부 각시켰고, 현재 중화민국의 역할은 孫 文 의 三 民 主 義 에 입각하여 해방과 자유 를 쟁취하려는 민족을 동정하고 협조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한국 독립에 적극 개입하려고 했다. 45) 그 방법은 외교적 후견인으로서 도의적 의무와 국제적 책 임을 내세우며 중화민국을 포함한 4개국의 전면 협상을 주장한 것이었다. 46) 처음부터 어려움이 예견된 미 소공위의 좌절로 국민당 언론은 미 소의 군정지배를 실패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또한 남북분단이 고착화되면서 분열의 42) 앞의 글, 大 公 報 (1947. 4. 19). 43) 蘇 聯 配 備 韓 軍 協 助 共 匪 叛 亂, 中 央 日 報 (1947. 7. 26); 韓 軍 六 萬 入 東 北, 大 公 報 (1947. 7. 26). 44) 王 璧 岑, 水 豊 電 權 與 中 韓 關 係, 中 央 日 報 (1947. 5. 19). 45) 紀 云, 美 蘇 分 治 下 的 朝 鮮, 中 央 日 報 (1947. 5. 30). 46) 王 世 杰 部 長 在 參 政 會 談 韓 國 問 題, 中 央 日 報 (1947. 5. 23).

320 동북아역사논총 29호 1차 책임이 4개국 연합국에 있지만 최종 책임은 미국과 소련에 있다면서 이제 라도 미 소 양국이 한국문제 해결에 성의를 보이려면 중국 영국과 함께 4개 국 회담을 적극 고려할 때라고 주장하였다. 47) 국민당 언론은 전후 한국문제처 리에 있어서 주권국가의 자주독립방식이 아닌 오랜 역사적 연고와 외교상 도 의적 책임 및 지리적 인접성을 이유로 중국까지 포함된 4개국 협상론을 제기 함으로써 자국의 이익을 담보하려고 했다. 이것은 한국 독립을 미 소의 독점 지배 아래 두지 않고 연합국의 다자간 협상에 맡김으로써 가능한 한 중국의 영 향력을 유지해 보려는 중화주의의 현실적 변용이었다. Ⅲ.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과 동시철수론 한국문제의 해결을 위한 미 소공위의 활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를 계기 로 중화민국이 주장한 4개국 협상론이 다시 부각되었다. 48) 미국 정부는 중국 영국 소련에 대해 워싱턴에서 한국의 통일정부 수립방안에 관하여 협의할 것 을 제의했고, 중화민국 정부는 즉각 찬성하였다. 49) 4개국 협상안에 대해 국민 당 언론은 대부분 지지하였다. 미 소 군정에 매우 비판적이던 대공보 는 한 국문제에서 이념대결을 가장 큰 걸림돌로 보았고, 한국 독립에 관한 국제합의 가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연합국 4개국이 한국 독립을 보증하여 5년간 신탁통치를 거친 후 선거를 통해 의회를 구성하고 임시통일정 부를 수립하는 방식이었다. 구체적으로 미 소가 이념대결을 포기하고 한국문 제의 해결을 위해 4개국이 공동으로 조선의 영구중립 을 보증하는 것으로, 여 47) 潘 世 憲 : 漢 城 會 議 展 望, 申 報 (1947. 8. 22). 48) 蘇 對 四 强 朝 鮮 會 議 事 尙 未 答 復, 中 央 日 報 (1947. 9. 6). 49) 四 强 會 商 韓 政 局 我 政 府 同 意 參 加, 申 報 (1947. 8. 31).

321 기에 소련의 동의가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50) 그러나 소련이 4개국 회의를 곧 바로 거절함으로써 이는 수포로 돌아갔고, 51) 미 소의 한국문제 담판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미국은 유엔의 간섭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52) 미국에 의한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은 이전부터 예상되고 있었다. 한국 독 립에 대한 미 소 간 양자 협의도 어려운데 4개국 협상이란 더욱 곤란한 문제 였던 것이다. 따라서 4개국 협상안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내심 결정한 미 국이 예비단계로 제시한 의례적 외교행위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53) 물 론 유엔에서 우월적 역량을 가진 미국의 위상도 대한정책의 수정을 가져온 주 요한 배경 중 하나였다. 이에 대해 소련은 유엔에서의 한국문제처리를 반대하 면서 자주적 해결과 미 소의 동시철군을 주장하고 나섰다. 54) 이미 내전상태 였던 중화민국은 미국의 경제 군사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미국도 전후 동아시아 지역의 질서재편과정에서 소련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 면 한반도의 공산화를 어떻게든 저지해야만 했다. 이처럼 미 소의 세력대결 이 구체화되면서 미국과 중화민국의 상호 협력은 더욱 절실해졌고, 한국 독립 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마침 미국이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제안하자, 중화민국 정부는 적극 옹호하면서 4개국 협의를 강조하였다. 미국의 제안은 유엔 내에 특별위원회를 조직한 후 한국 정세를 면밀히 조사하고, 유엔의 지 도 감독하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조직한 후 유엔과 미 소 군대의 철수시기를 결정하자는 내용이었다. 55) 유엔 중화민국 대표 顧 維 鈞 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에 즉각 동의하였다. 56) 아울러 그는 한국에서 일정기간 동안 신탁통치를 실시하자는 내용을 유엔 계 50) 四 强 眞 誠 要 合 作 論 朝 鮮 問 題, 大 公 報 (1947. 9. 2). 51) 解 決 韓 國 問 題 僵 局 美 國 務 院 正 在 硏 究, 中 央 日 報 (1947. 9. 12). 52) 美 將 要 求 聯 合 國 干 涉 韓 國 僵 局, 中 央 日 報 (1947. 9. 17). 53) 朝 鮮 問 題 我 決 參 加 討 論, 申 報 (1947. 9. 2). 54) 王 外 長 在 聯 大 記 者 招 待 會 上 談 朝 鮮 問 題, 蘇 拒 將 朝 鮮 問 題 提 交 聯 大, 中 央 日 報 (1947. 9. 20). 55) 美 國 將 朝 鮮 問 題 正 式 提 交 聯 大 會, 申 報 (1947. 9. 19). 56) 我 代 表 團 闡 述 贊 成 美 國 建 議 理 由 但 保 留 對 韓 獨 立 主 張, 申 報 (1947. 9. 23).

322 동북아역사논총 29호 획안에 포함시킬 것을 요청했지만 미국에 의해 거부되었다. 57) 이로써 연합국 4개국의 신탁통치에 의한 한국 독립을 줄곧 주장해 온 중화민국의 전후구상이 최종적으로 좌절되었다. 또 다른 연합국의 일원인 영국은 미국의 제안에 원칙 적으로 찬성한 반면, 소련은 이에 맞서 남북한 주둔군을 이듬해 봄까지 모두 철수시키자는 주장을 폈다. 58) 유엔에서 미 소의 한국 독립방안이 대립하는 동안 소련의 동시철수론 은 남한 내의 새로운 갈등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문제는 동시철군의 시기와 방법 으로, 남북한 정파들의 견해가 크게 달랐다. 이승만을 비롯한 극우파는 미군 철수에 절대 반대하였고, 중도파나 온건우파는 소련의 동시철군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통일론자들은 미 소 점령군이 통일의 장애요인이라는 관점에서 신속한 철수를 주장하였고, 59) 미국과 남한 극우파는 미군 철수 이후 북한군에 의해 한반도가 공산화될 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에 동시철군을 반대하였다. 이러한 동시철군 논란에 대해 대공보 는 미 소 양국이 임시정부를 통해 앞으로 수립될 정식정부까지 장악하려는 의도라고 보았다. 또한 한국인들이 독립자유를 쟁취하려면 스스로 먼저 분쟁을 멈춤으로써 미 소의 투쟁도구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 이 중요하다고 조언하였다. 그러므로 소련의 동시철군은 실제 결과가 어떠하든지 독립 쟁취를 위해 한국인들이 반대할 이유가 없고, 단 지 어떤 방법으로 주둔군을 내보낼 것인가로 고민해야 한다면서, 철군문제를 논쟁거리로 삼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60) 현실적으로 한반도의 군사동향에 가장 예민했던 중화민국 정부는 외교부 장 王 世 杰 의 성명을 통해 미 소 주둔군의 철수는 유엔과 모스크바협정에 참 여한 4개국이 결정할 문제라면서 소련의 제안에 원칙적으로 찬성하였다. 다만 57) 美 對 朝 鮮 問 題 新 建 議 中 英 表 示 原 則 贊 同, 申 報 (1947. 10. 13). 58) 聯 大 通 過 美 國 提 案 朝 鮮 問 題 列 入 議 程, 大 公 報 (1947. 9. 25); 對 撤 退 蘇 美 駐 軍 韓 人 反 響 不 一, 中 央 日 報 (1947. 9. 28); 促 成 韓 政 治 獨 立 應 由 聯 合 國 監 視, 申 報 (1947. 9. 29). 59) 蘇 駐 北 韓 軍 隊 傳 將 自 動 撤 離, 中 央 日 報 (1947. 10. 7). 60) 中 國 關 心 朝 鮮 問 題, 大 公 報 (1947. 10. 4).

323 군대철수 이후 한국에서 무정부상태나 내전이 발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므로 유엔에서는 한국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하려면 군대 철수의 시기와 조건을 함께 결정하고, 최종적으로는 연합국 4개국과 협의할 것을 주장하였다. 61) 내전에 휩싸인 중화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깨 뜨릴 수 있는 소련의 동시철군을 곧바로 수용하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이미 소련군에 의해 장악된 북한지역은 물론, 좌우대립으로 혼란스러운 남한에서 미군 철수란 곧 힘의 공백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전후 동북지역을 점령한 중국공산당이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점차 내전을 확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지역의 군사동향은 매우 중요하였다. 소련은 이 곳을 점령한 직후 줄곧 무장 세력을 키웠지만 미국은 남한의 군사력 증강에 소 홀하였다. 그 결과 남북한의 군사력 차이가 갈수록 커졌고, 중화민국 정부는 소련의 동시철군 제안을 의심하면서 한국이 독립된 이후에야 미군 철수가 가 능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이 때문에 유엔 중화민국 대표 顧 維 鈞 은 기회 있을 때마다 미 소 주둔군의 철수조치나 방법에 관한 중화민국의 발언권을 강조하 며 사전협의를 요구하였다. 62) 그는 미 소 군대가 동시 철수할 경우 한반도의 공산화 가능성이 매우 높고, 곧바로 중국의 동북지역까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하였다. 63) 이런 이유로 중화민국은 미 소 주둔군의 철수문제와 관련하여 양국의 일방적 조치가 아닌 4개국과의 충분한 협의를 거친 후 결정할 것을 주 장하였다. 중화민국 정부는 장차 한국에서 발생하게 될 어떤 사건이든지 국경을 접한 동북지역에 직접 영향을 미칠 것으로 내다보았고, 역사적으로도 우월한 지위 를 유지해 온 한국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간여하려는 의지가 강하였다. 이 때 문에 중화민국은 한국 독립에 관하여 카이로회담의 합의사항을 기본원칙으로 내세웠지만 스스로 실행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한 국제합의란 아무런 구속력이 61) 王 外 長 發 表 聲 明 韓 國 應 早 予 獨 立, 申 報 (1947. 10. 21); 對 解 決 韓 國 問 題 王 外 長 發 表 聲 明, 中 央 日 報 (1947. 10. 21). 62) 我 聲 名 對 韓 境 駐 軍 措 施 應 有 發 言 權, 申 報 (1947. 11. 6). 63) 聯 大 政 委 會 否 決 蘇 聯 關 于 朝 鮮 問 題 的 建 議, 中 央 日 報 (1947. 11. 6).

324 동북아역사논총 29호 없었다. 마찬가지로 미 소 군대의 철수시기, 방법, 사전조치 등에 관하여 중 화민국은 모스크바협정에 참여한 4개국과 협의하여 결정할 것을 주장했지만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다. 64) 미국이 제기한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이란 새로운 상황에서 중화민국의 역할은 4개국 신탁통치 를 대신하여 유엔한국위원회의 지도감독에 의한 한국 독립방안 을 제출하고 참여하는 것이었다. 65) 한국 독립문제가 마침내 미국의 주도로 유엔정치위원회에서 토의되었다. 유엔 내에 특별위원회를 조직하여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안과 미 소 주둔군의 동시철수 및 남북한 대표를 유엔에 출석시켜 직접 의견을 청취하 자는 소련안이 함께 상정되었다. 66) 유엔정치위원회는 이틀간 회의를 거쳐 41 대 0표로 미국의 제안을 통과시켰다. 67) 이어서 중국과 필리핀 및 인도가 수정 제의한 한국 독립방안을 확정지었다. 68) 그 후 유엔은 한국위원회를 조직하였 는데 중국 인도 시리아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프랑스 필리핀 엘살 바도르의 9개국 대표들로 구성되었고, 중국의 胡 世 澤 이 전체 대표로 뽑혔 다. 69) 유엔 총본부는 유엔한국위원회를 1월 2일 소집하였고, 1월 9일부터 한국 에서 활동을 개시하였다. 70) 그러나 유엔대표단의 한국 활동은 시작부터 벽에 부딪혔다. 소련군이 노골적으로 유엔대표단의 입북을 거부하였고, 71) 북위 38 도선 변경에서는 미 소 점령군 사이에 무력충돌이 빈번히 발생하였다. 72) 남 64) 韓 國 問 題 我 贊 同 美 蘇 同 時 撤 兵, 申 報 (1947. 11. 2). 65) 聯 大 政 委 會 通 過 韓 國 獨 立 計 劃, 中 央 日 報 (1947. 11. 7). 66) 聯 大 辯 論 韓 國 獨 立 問 題, 中 央 日 報 (1947. 10. 30); 聯 大 政 治 委 員 會 通 過 美 關 于 朝 鮮 問 題 的 建 議, 中 央 日 報 (1947. 11. 1). 67) 朝 鮮 問 題 聯 大 政 委 會 通 過 美 修 正 案 我 代 表 支 持 美 國 立 場, 申 報 (1947. 11. 1). 68) 朝 鮮 獨 立 案 全 文, 申 報 (1947. 11. 7); 聯 大 對 韓 國 獨 立 問 題 通 過 美 建 議, 中 央 日 報 (1947. 11. 16). 69) 聯 大 通 過 朝 鮮 獨 立 案 成 立 九 國 委 員 團, 申 報 (1947. 11. 16). 70) 聯 合 軍 朝 鮮 委 會 定 期 在 漢 城 會 議, 聯 合 國 朝 鮮 委 員 會 首 次 會 議 將 在 漢 城 擧 行 由 胡 世 澤 率 領 下 月 出 發, 中 央 日 報 (1947. 12. 12); 聯 合 國 朝 鮮 委 員 會 離 美 越 韓, 中 央 日 報 (1948. 1. 3). 71) 聯 合 國 赴 韓 代 表 團 昨 擧 行 首 次 會 議, 中 央 日 報 (1948. 1. 13); 聯 合 國 朝 鮮 委 員 會 致 函 蘇 方 要 求 准 入 北 韓 聯 合 作, 中 央 日 報 (1948. 1. 17). 72) 美 蘇 占 領 區 軍 警 時 有 衝 突, 中 央 日 報 (1948. 1. 20).

325 한에서도 총선거를 반대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아 수개월 동안 치안이 혼란스 러웠고 폭력사태도 빈번하였다. 73) 이런 이유로 국민당 언론은 한국을 전후 냉 전체제의 대표적 희생양으로 꼽았다. 74) 이때부터 국민당 언론의 관심사는 남북한의 정국을 누가, 혹은 어떤 세력 이 주도하고, 어떻게 정부를 수립할 것인가의 문제로 옮겨갔다. 당시 국민당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남한의 정치지도자는 극우파를 대표한 이승만과 온 건우파를 대표한 김구였다. 유엔대표단은 두 지도자와 면담을 가졌는데, 시국 대응에 관한 견해가 너무나 달랐다. 영어가 유창한 이승만은 유엔대표단의 활 동에 적극 협력하면서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하여 하루빨리 독립정부를 수 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75) 이에 대해 김구는 소련 점령지인 북한에도 주민 들이 있고, 강대한 우익세력의 지배 아래 있는 남한에서는 경찰의 우경화로 자 유로운 선거를 치를 수 없다면서 유엔대표단의 활동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76) 온건우파와 중간파를 비롯한 대다수 남한의 정치세력들도 단독정부 수립에 부 정적이었다. 유엔한국위원회는 남북한에서 동시선거를 실시하는 것이 본래 사명이었지 만 현실적으로 북한지역의 활동이 곤란한 상황에서 남한만의 총선거를 먼저 실시하는 방안을 중국 프랑스 필리핀의 지지로 수정 제의하였다. 77) 이 시기 에 남한에서도 유엔대표단의 활동을 반대하는 열차탈선사고, 총파업 등이 잇 달아 발생하여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웠지만 유엔 소위원회는 찬성 31, 반대 2, 기권 11표로 남한 총선거안을 통과시켰다. 78) 애당초 중화민국 정부는 한국 독립이 자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안전과 불가분관계라면서 유엔대표단의 활동 73) 蘇 聯 拒 絶 北 韓 代 表 團 進 退 維 谷, 蘇 聯 拒 絶 聯 合 國 朝 鮮 委 員 會 代 表 團 進 入 北 韓, 中 央 日 報 (1948. 1. 25). 74) 聯 合 國 朝 鮮 委 員 會 明 日 擧 行 會 議, 中 央 日 報 (1948. 1. 11). 75) 李 承 晩 請 聯 合 國 於 南 韓 單 獨 選 擧, 中 央 日 報 (1948. 1. 27). 76) 南 韓 單 獨 選 擧 金 九 表 反 對, 申 報 (1948. 1. 28). 77) 中 菲 法 三 國 贊 同 南 韓 立 卽 單 獨 選 擧, 中 央 日 報 (1948. 2. 5). 78) 小 型 大 會 通 過 決 議 案 南 韓 決 進 行 選 擧, 申 報 (1948. 2. 28).

326 동북아역사논총 29호 을 적극 지지하였다. 79) 특히 남한 총선거에 대해서 미국과 중국은 일종의 연대 감을 가졌는데 미국은 전후 남한의 점령국이었고, 중국은 인접국으로서 도의 적 책임감을 내세웠다. 80) 두 나라는 남한 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을 유엔결의 라는 국제 명분과 남한 인구의 우세라는 국내 조건을 내세워 정당화시켰다. 남한 단독선거를 결정한 유엔결의에 대해 남한 지도자들의 반응은 상이하 였다. 이승만은 즉각 환영담화를 발표하고 큰 만족감을 표시한 반면, 김구는 남북통일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반대의사를 표시하였다. 81) 남한 지도자들은 각 자의 정치위상과 지지세력에 따라 총선거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다. 하지만 이전의 반탁운동처럼 좌우파로 확연히 구분되어 서로 대립하기보다 반대여론 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남한 단독선거가 현실화되면서 38도선을 경계로 미 소 간 긴장이 더욱 고 조되었고 남한에서는 선거방해활동이 더욱 거세어졌다. 82) 북한에서는 김일성 의 주도로 남북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가 개최되어 남한 총선거를 조직적 으로 반대하였다. 83) 국민당 언론은 평양의 남북한 연석회의에 깊은 관심을 보 였는데, 남한 정당들의 참가 여부와 규모 및 남북한 정파의 협력 가능성에 촉 각을 곤두세웠다. 이 회의를 계기로 한국이 미 소의 분할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보았고, 그렇게 되려면 좌우연대가 무엇보다 절실했기 때문이다. 신보 는 남북한의 독자행보를 보면서 유엔한국위원회의 활동이 실패한 79) 外 部 時 司 長 發 表 談 話 違 反 協 定 所 建 政 府 我 不 予 考 慮, 申 報 (1948. 2. 19). 80) 美 要 求 小 型 聯 大 在 南 韓 進 行 選 擧, 大 公 報 (1948. 2. 25); 中 美 建 議 小 型 聯 大 令 赴 韓 代 表 團 促 成 總 選, 中 央 日 報 (1948. 2. 26). 81) 金 九 李 承 晩 反 響 不 一 致, 申 報 (1948. 2. 28). 82) 挖 掘 壕 溝 虛 置 砲 位 北 韓 蘇 軍 修 築 防 線, 中 央 日 報 (1948. 3. 30); 南 韓 選 擧 登 記 處 遭 暴 徒 惡 意 騷 擾, 中 央 日 報 (1948. 4. 6). 1948년 4월 초 한반도의 최남단 제주도에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자 미군정은 5 10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공산세 력의 불법폭동으로 규정하였다. 南 韓 發 生 暴 動 朝 鮮 人 十 七 人 遇 害, 中 央 日 報 (1948. 4. 8). 83) 金 九 金 奎 植 赴 北 韓 籌 開 會 議, 申 報 (1948. 4. 10); 南 北 韓 聯 席 會 進 行 中, 中 央 日 報 (1948. 4. 24).

327 것으로 판단하였고, 단독선거에 의한 정부수립방안도 실효성이 없다고 보았 다. 그 대신에 동아시아의 평화정착을 위해 남북통일은 반드시 필요하고, 그 방법은 자주적이며 평화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면서 미 소가 동아시아 전쟁 을 피하려면 마땅히 한반도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84) 신보 는 자 주적 평화적 통일독립정부의 수립이란 대원칙을 강조하고 절차상 미 소 군 대의 철수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한편 중앙일보 는 사실보도에 치중하였는 데, 평양의 남북한 연석회의에서 발표한 전국동포서, 85) 회의 결정사항 등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86) 특히 대공보 가 남북한 연석회의에 대해 조선 통일의 서광 이라면서 큰 기대를 걸었다. 그 이유는 남북한의 46단체 545명의 대표가 참가하여 전국적으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87) 유엔의 남한 총선 거 실시 결정으로 남북통일이 비관적인 상황에서 국민당 언론은 남북한 연석 회의를 새로운 돌파구로 받아들였고, 서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서도 자주 적 통일독립정부의 수립 가능성에 큰 기대를 걸었음을 알 수 있다. Ⅳ. 남한 총선거와 대한민국 정부수립 남한 총선거는 예정대로 5월 10일 막이 올랐다. 88) 신보 는 남한 선거를 서양 의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막후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고, 미군 84) 韓 國 南 北 分 合 的 關 頭 ( 社 論 ), 申 報 (1948. 4. 7). 85) 南 北 韓 聯 席 會 議 結 束 發 表 告 全 國 同 胞 書, 中 央 日 報 (1948. 4. 26). 86) 그 내용은 외국군대의 즉각 철수, 내전불허, 전조선정치회의에서 민주정부의 조직 및 헌법공포 등이었다. 平 壤 聯 席 會 議 發 表 公 報 反 對 南 韓 總 選 決 設 立 統 一 政 府, 中 央 日 報 (1948. 5. 6). 87) 朝 鮮 統 一 的 曙 光, 大 公 報 (1948. 4. 28). 88) 南 韓 總 選 候 選 人 近 千, 中 央 日 報 (1948. 4. 25).

328 동북아역사논총 29호 의 대한정책에 대해 신랄히 비판하였다. 89) 북한에서는 소련의 통제경제정책이 일정한 성과를 거둔 반면 남한에서 미군정의 자유경제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 시켰고, 특히 미국의 일본 부흥정책이나 남한에서 친일세력의 득세가 반미의 식을 불러일으켰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남한에서 폭동이 끊이지 않았는데, 남 한 총선거가 의외의 파장을 일으켜 동방의 화약고 를 폭발시킬 것으로 우려하 였다. 90) 대공보 도 미군정이 실패했다면서 그 이유를 친일세력의 비호에서 찾았고, 그에 따른 민심의 이반이 한국인을 반미로 내몰았다고 주장하였다. 91) 그렇지만 중앙일보 는 남한 총선거를 현실적으로 선택 가능한 최선책으 로 판단하였다. 또한 선거의 성격도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대결이 아닌 반공우익세력의 역량을 실험하는 계기로 이해하였다. 특히 중앙일보 는 우익 세력 내부의 주도권 다툼에 주목하였는데, 친미 반일 반공 성향의 이승만이 미국식 대통령중심제를 선호한 반면, 친일자본가 출신으로 반공을 내세운 김 성수는 프랑스식 분권형 대통령제를 옹호하여 양자 타협과 갈등 여부에 관심 이 높았다. 92) 한편 대공보 는 남한 총선거를 반민족적 반애국적 행위라고 비판하였다. 93) 남한에서 이승만과 일본 주구들을 제외한 모든 정당지도자와 절대 다수의 인민들이 결사적으로 남한 총선거를 반대한 사실을 이유로 들었 다. 따라서 미국이 강제적으로 남한 단독정부를 만들려고 하지만 그 수명은 오 래가지 못할 것으로 예측하였고, 김구 김규식 조소앙 홍명희 등의 남북협 상론을 지지하였다. 94) 온갖 우려와 기대가 교차한 가운데 남한의 5 10 총선거는 예상 밖으로 평 온하게 마무리되었다. 중앙일보 는 높은 투표율을 근거로 남한만의 단독선거 는 비록 몇 곳에서 소동이 발생했지만 전체적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평 89) 南 韓 選 擧 期 近 幕 後 競 爭 益 烈, 申 報 (1948. 5. 5). 90) 正 視 朝 鮮 的 危 局 ( 社 論 ), 申 報 (1948. 5. 7). 91) 朝 鮮 統 一 的 曙 光, 大 公 報 (1948. 4. 28). 92) 南 韓 大 選 今 擧 行, 中 央 日 報 (1948. 5. 10). 93) 韓 今 天 選 擧, 大 公 報 (1948. 5. 10). 94) 美 決 成 立 南 韓 政 府 不 愿 苏 方 撤 軍 准 備, 大 公 報 (1948. 5. 10).

329 가하였다. 95) 미군정과 유엔한국대표단은 전체 유권자 800만 명 중 85% 내외 가 투표에 참가하였으며 진행도 순조로워 투표결과를 낙관적으로 받아들였 다. 96) 그러나 남한 총선거 이후 전개될 한반도 정세에 관한 국민당 언론의 시 각은 각양각색이었다. 우선 신보 는 향후 남북한 정세를 비관적으로 보았는데, 외세에 의한 남 북분단이 冷 戰 에서 熱 戰 으로 변질될 것을 염려하였다. 무엇보다 남한 단독선 거로 별도 정부가 출현하게 된 것은 동아시아의 앞날에 대단히 위험한 상황으 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신보 는 앞으로 야기될 남북한의 대치상황에 대해 깊 은 우려를 표시하고 미 소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였다. 97) 남한 선거에 호의 적이던 중앙일보 는 이번 선거가 성공함으로써 어떤 사람들은 남북한의 분 열이 더욱 촉진될 것으로 보고, 조선을 제2의 그리스로 예상한다. 사실 남북한 의 분열을 이번 선거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 면서 남한 단독선거를 분단의 요 인으로 보지 않았다. 다만 남한 총선거를 공산당 및 극좌파 인사들이 완강히 반대한 점과 우파의 김구나 중간파의 김규식 등이 참여하지 않은 점을 유감스 럽게 생각하였다. 또한 미군정이 친일자본가의 이익을 대표하며 한국인들로부 터 일본의 주구 라고 비난받아 온 金 性 洙 의 경선 참가를 허용한 것은 이번 선 거의 한계라고 지적하였다. 98) 그러므로 중앙일보 는 남한 선거에 공산당 무 리들이 파괴의도를 가지고 여러 가지 공포수단을 동원하여 방해했지만 순리대 로 진행되었다. 2년 동안 한국은 불안한 정세가 계속되었지만 전체적으 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뛰어넘기 어려 운데 세상 사람들의 이상과 거리가 멀고 모든 한국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고 평가하면서 반쪽 성공으로 총선거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99) 95) 南 韓 選 擧 順 利 完 成, 中 央 日 報 (1948. 5. 11). 96) 위의 글, 中 央 日 報 (1948. 5. 11); 聯 合 國 代 表 稱 讚 南 韓 選 擧, 中 央 日 報 (1948. 5. 12). 97) 南 韓 普 選 以 後 的 朝 鮮 政 局, 申 報 (1948. 5. 19). 98) 南 韓 選 擧 順 利 完 成, 中 央 日 報 (1948. 5. 11). 99) 選 擧 前 後 的 韓 國 局 勢, 中 央 日 報 (1948. 5. 12).

330 동북아역사논총 29호 대공보 는 애초부터 남한 단독선거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선거란 民 意 를 존중하고 측정하는 것으로, 민주정치의 핵심인데, 이번 남한 선거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남한 선거의 입후보자 900여 명이 하나같이 우파로, 선거결과는 물어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이승만이 스스로 나는 조선을 대표한다. 나는 공산당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좌파와 중간파도 반대한다. 이런 사람들은 문제삼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라고 언급한 것에 대해 체통이 없다고 비판하였다. 선거과정도 미국의 민주정치가 사실상 남한에서 드러난 면모는 동아시아 및 세계에 교육적 의의가 크다. 남한 선거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전혀 없어 세계에 나쁜 사례를 열어놓았다 고 지적하였다. 100) 억압적인 선거분위기 와 우파 일색의 일방적 선거결과가 민주주의의 상징인 미국의 위신을 잃게 만 들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남한 단독선거의 영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 비 극을 만들어, 앞으로 더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동아시아 지역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 것으로 내다보았다. 대공보 는 남한 총선거의 승리자인 이승만과 김성수가 각각 대표적 친미, 친일성향으로 이번 선거에서 유일한 경쟁자이자 최악의 콤비였다고 비아냥거 렸다. 국내의 조직기반이 약한 이승만과 친일행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김성 수가 궁지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서로 돕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이 때문에 대공보 는 남한을 미국과 일본의 연합식민지로 인식하였고, 김구 김 규식 조소앙 등 독립운동가들은 미군정하에서 결코 환영받을 수 없으며, 어 떤 역할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101) 이런 상황은 전후 일본에서 천 황제를 존속시키고 경제부흥을 통해 안정적인 防 蘇 反 共 체제를 구축하려던 맥아더의 대아시아 정책과 관련된 것으로 남한의 극우파가 한 축으로 편입된 것이다. 남한 총선거가 끝난 후 국민당 언론의 한국 관련 보도는 궁극적 목표인 통 일독립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로 초점이 옮겨갔다. 중앙일보 100) 南 韓 的 選 擧, 大 公 報 (1948. 5. 17). 101) 위의 글, 大 公 報 (1948. 5. 17).

331 는 현재 정세로 볼 때 남북한 합작이 가능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 근거로 북한 정권의 합법성 문제, 한국 민주당파의 내부분열과 갈등, 북한 공산세력의 무장 등 세 가지 불리한 상황을 제시하였다. 그렇지만 한국 독립은 광범위한 국제성 을 띠고 있기 때문에 한국 자신의 존망뿐만 아니라 중국의 엄중한 문제이며, 아시아로부터 세계의 안전까지 직결된 문제라고 주장하였다. 102) 이러한 대외 인식을 토대로 중앙일보 는 남한 총선거 이후 한국 정세가 분명하게 정리되 기를 희망하였다. 또한 지속적인 한국 관련 보도를 통해 남북분단의 진상이나, 북한 공산화에 따른 심각성을 폭로하며 중국공산당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자 했다. 요컨대 전후 한반도에서 형성된 냉전구도를 내전 중인 자국의 반면교사 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남한의 총선거가 끝난 후 국민당 언론은 김구와 이승만의 상반된 근황을 집중 보도하였다. 중앙일보 는 서울특파원을 통해 한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높은 이승만과 단독 기자회견을 갖고 그의 미군철수 불가론 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103) 선거 이후 이승만은 왕성한 정치활동을 통해 미 군의 계속 주둔을 주장하고 나섰다. 104) 반면 김구는 모든 활동을 멈추고 마곡 사에 칩거하였는데, 105) 국민당 언론은 이승만의 최대 강적인 김구가 잠시 휴 식을 선포한 것으로, 남한에서 가장 역량 있는 정치인 중 한 사람을 잃는 것이 아니다 라고 보도함으로써 김구에 대한 기대감을 버리지 않았다. 106)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현실로 다가오자 국민당 신문들은 냉전체제 이후 동아시아 지역의 정세변화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신보 는 조선의 비극은 이 미 결정되었다. 조선의 분열은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극동 의 위기이며, 황해시대의 거대한 파도 라고 하여 동아시아 지역에서 이념대립 102) 選 擧 前 後 的 韓 國 局 勢, 中 央 日 報 (1948. 5. 12). 103) 李 承 晩 談 韓 局 現 狀, 中 央 日 報 (1948. 5. 19). 104) 李 承 晩 吁 請 美 軍 繼 續 留 駐, 申 報 (1948. 5. 21). 105) 盛 傳 金 九 暫 擬 退 隱, 申 報 (1948. 5. 20). 106) 金 九 退 休 養 疴, 中 央 日 報 (1948. 5. 21).

332 동북아역사논총 29호 을 우려하였다. 107) 미 소의 분할점령에 의해 남북한의 정치적 군사적 대결 구도가 단독정부의 수립으로 굳어졌고, 이러한 한반도 상황이 중국의 장래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본 것이다. 한국 분단의 근원에 대하여 신보 는 포츠담회담에서 38선을 경계삼아 미 소 양군이 남북으로 분할점령하고, 혼합점령방식을 취하지 않은 점이 결 정적 오류라고 지적하였다. 분할점령 이후 남한에서는 유엔과 미국의 지지 아 래 이승만 김성수의 친미보수정부가 탄생되었고,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親 蘇 공산정부가 세워져 분단이 굳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 정치구도에서 김구와 김규식 등 중도성향의 지도자들이 좌파로 기울게 된 것은 곧 미군정의 실패를 입증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08) 국민당 언론이 선거 이후 한반도 상황 을 비관적으로 파악한 것은 국공내전 중 궁지에 몰린 자신들의 위기감을 간접 적으로 보여 준다. 또한 한국 분단에 대한 미국의 소극적 대응을 비판한 것은 동아시아의 냉전구도에서 미국의 강력한 군사개입과 경제지원을 이끌어 내려 는 의도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중앙일보 는 남한 총선거가 새로운 세계질서의 구축과정에서 평화를 애 호하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고 평가하였다. 왜냐하면 일본의 항 복 이후 분할 점령된 한반도는 미군 점령지인 남한에서 모든 것이 자유로운 반 면, 소련 점령지인 북한에서는 공산당 이외의 정치활동을 허용하지 않았고 공 산주의 이외의 어떤 사상도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남한 총선거가 마무리되어 이승만과 합작한 우익세력이 다수의 지지를 얻은 사실에 주목하였다. 또한 한국 분단이 전후 미 소의 세력 대결에 따른 분할점령으로 시작되어 단독선거를 치르면서 더욱 굳어졌기 때문 에 냉전체제가 해소되기 전까지 통일은 불가능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109) 남북 한의 대치국면을 이승만과 김일성의 단순한 좌우대립이 아닌 민주주의와 공산 107) 强 權 政 治 與 韓 國 悲 劇 ( 社 論 ), 申 報 (1948. 7. 17). 108) 위의 글, 申 報 (1948. 7. 17). 109) 蔣 君 章, 朝 鮮 選 擧 問 題, 中 央 日 報 (1948. 5. 16).

333 주의의 이념대결로 인식한 것이다. 따라서 중화민국 정부는 정치 경제 사 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남한과 서로 비슷한 점을 들어 이승만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고 하루빨리 독립정부를 수립하여 양국 간 긴밀한 유대관계의 구 축을 희망하였다. 110) 이렇듯 중앙일보 는 한국 분단의 주요 원인을 남한 단독선거에서 찾지 않 고 전후 미 소의 이념갈등과 체제대결의 산물로 보았다. 또한 남한 총선거 이 후의 당면과제로 한반도의 완전한 통일독립보다 신속한 자유민주정부의 실현 에 큰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냉전체제를 기정사실로 보고 이를 전제로 한국문 제를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변화는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와 우호관 계를 적극 모색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중앙일보 는 앞으로 대한민국의 과제가 미국의 원조를 받아 경제건설을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조언하였다. 111) 여기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 미국의 대한정책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운 국민당의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친미반공을 내세운 이승만 정 부의 등장은 내전 중 궁지에 몰린 국민당의 새로운 기회로 인식되었다. 국민당 은 국공내전을 내부문제가 아닌 동아시아 지역의 냉전체제와 연계시킴으로써 그 해결책 역시 미국을 필두로 한 아시아의 반공연대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요컨대 전후 한반도를 중심으로 첨예하게 진행된 냉전구도에서 새로 운 동아시아 지역의 반공체제를 필요로 한 미국의 적극 대응을 기대하였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신보 를 비롯한 국민당 신문들은 곧장 축 하 메시지를 전하면서 지리적으로 인접한 한 중 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항일독립운동과 카이로선언에서 보여준 중국의 우호적 역할을 강조하였다. 112) 중앙일보 는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을 한국 독립운동의 권위자로 추 110) 李 果, 南 北 韓 的 對 台 戰, 中 央 日 報 (1948. 6. 11). 111) 朝 韓 行 憲 政 府 傳 說 月 底 可 成 立, 中 央 日 報 (1948. 7. 8). 112) 韓 國 獨 立 統 一 的 曙 光 慶 祝 李 承 晩 博 士 當 選 首 任 總 統 ( 社 論 ), 申 報 (1948. 7. 22). 앞으로 수립될 남한 정부의 정통성은 유엔의 관리감독과 민주평화방식에 의 해 보증될 것이라고 새삼 주장하였다. 社 論 韓 國 的 是 非, 中 央 日 報 (1948. 7. 14).

334 동북아역사논총 29호 켜세우며 두 독립혁명지도자들이 한국의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된 것은 중 한 양국의 우의교류와 합작을 굳건히 하는데 크게 공헌할 것 이라고 기대 감을 감추지 않았다. 동시에 소련이 주도한 코민테른의 위협 아래 신생국가의 주권과 국제 평등이 제대로 실현될 수 없다면서 공산당에 대한 경계심을 강조 하였다. 113) 대공보 는 한반도를 동유럽의 베를린에 비유하여 동방의 화약고 로 규정 하고, 한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당선되었지만 오히려 남북한 대립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보았다. 또한 제헌의원들을 이승만과 김성수의 주머니 안에 있는 인물 들이라면서 북한과 합작을 거절한 채, 다른 당파를 압 박하며 김구를 끝내 배척한 점을 비판하였다. 대공보 는 남북한 대립과 관련 하여 북한 공산세력의 책임도 지적하였다. 주로 유엔 합의에 따른 독립절차를 일방적으로 무시해버린 것이나, 남한에서 폭력적인 반정부활동을 조장한 점 등을 비판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일본, 그리고 남한이 공동전선을 결성 하고 있는데, 만약 전쟁의 불꽃이 점화된다면 한국이란 화약고는 순식간에 폭 발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예견하였다. 114) 대공보 는 남한에서 미국이 일제잔재를 청산하지 않은 채 친일세력을 군 정에 참여시킨 것이나 단독선거로 이승만과 김성수 등 친미 친일세력의 권력 을 합법화시켜 준 것은 남한 주민들의 열망을 외면한 것으로, 이 때문에 남한 정부의 정치적 정당성을 인정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남북한의 분 열은 미 소의 대립이란 외부요인도 작용했지만 지나치게 대외의존적인 우파 와 공산세력들 때문에 더욱 악화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한국의 남북분단과 좌 우대립에 대해 외부요인을 중시한 신보 중앙일보 와 달리 대공보 는 국 내정파의 지나친 외세의존과 내부분열, 그리고 남한 정치세력의 책임을 함께 지적한 것이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이윤영을 총리후보로 지명했는데, 국회비 113) 李 承 晩 當 選 韓 國 總 統, 中 央 日 報 (1948. 7. 22). 114) 朝 鮮 遠 東 的 火 藥 庫, 大 公 報 (1948. 7. 27).

335 준에 실패하였다. 115) 이승만은 곧바로 이범석을 초대 국무총리로 다시 지명했 고, 116) 국회는 110 대 84표로 첫 내각총리 임명동의안을 통과시켰다. 117) 국민당 언론은 무당파인 이범석의 총리 인선에 대해 현명한 처사라고 평가하였다. 그 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가해질 정치압력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 국 미국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인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118) 그만큼 국 민당 언론은 이범석 초대 총리에 대해 호의적이었고, 앞으로의 역할에도 큰 기 대를 걸었다. 이로부터 자주 독립 통일에 초점을 맞추었던 국민당 언론의 한국 관련 기사가 공산세력의 불법성과 폭력성을 폭로하고 민주역량의 승리를 알리는 쪽 으로 옮겨갔다. 전후 한국의 완전한 통일독립정부 수립이란 기본원칙이 미 소의 세력팽창과 체제대결이란 냉전 논리에 매몰된 것이다. 그 결과 중화민국 은 해방정국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한 親 中 정부의 구성을 기대했던 정책에서 탈피하였다. 119) 중화민국 외교부장 王 世 杰 이 8월 12일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 한다는 공식성명을 발표하였고, 劉 馭 万 을 주한 중국 대사로 파견할 것과 대통 령 취임식에 潘 朝 英 王 皓 明 두 사람이 참석할 예정임을 미리 통보하였다. 120) 이승만 대통령은 중앙통신사 기자와의 회견에서 중화민국이 가장 먼저 대한민 국 정부를 지지했다면서 蔣 介 石 총통과 王 世 杰 외교부장의 우호 표시에 깊이 감사한다고 밝혔다. 121) 1948년 8월 15일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국민당 언론은 한국 의 독립 축하와 더불어 앞으로의 발전을 기대하는 성명을 앞다투어 발표하였 115) 李 承 晩 首 遇 挫 折 李 允 榮 任 總 理 遭 否 決, 中 央 日 報 (1948. 7. 30). 116) 韓 首 任 總 理 人 選 決 再 提 出 李 範 奭, 中 央 日 報 (1948. 7. 30). 117) 韓 首 屆 內 閣 昨 組 成, 中 央 日 報 (1948. 8. 5). 118) 이범석은 중국의 雲 南 講 武 學 堂 제12기, 중경 중앙훈련단 제3기 졸업생으로 25년 이상을 중국에서 거주하였다. 李 範 奭 任 韓 國 總 理 組 閣 工 作 日 內 完 成, 中 央 日 報 (1948. 8. 3). 119) 李 承 晩 電 謝 朱 部 長 家 驊, 中 央 日 報 (1948. 8. 6). 120) 潘 朝 英 等 飛 赴 漢 城 觀 禮, 中 央 日 報 (1948. 8. 11); 我 承 認 韓 國 政 府 派 劉 馭 萬 氏 爲 外 交 代 表, 申 報 (1948. 8. 13). 121) 我 承 認 韓 國 照 會 昨 已 送 達 李 承 晩, 中 央 日 報 (1948. 8. 14).

336 동북아역사논총 29호 다. 중앙일보 는 전후 냉전체제의 희생양에서 온갖 곤란을 이겨내고 끝내 독 립정부를 수립한 대한민국은 이승만 김구 등 온건한 정치가들에 의해 지도 되고, 중 영 미 3개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신속히 동아시아의 새로운 역량으로 완성되기를 기원한다 라는 축하 메시지와 함께 중화민국의 희망을 전하였다. 122) 신보 는 중 한 양국이 전통적으로 手 足 과 같은 情 을 갖고 있 으며 이와 입술처럼 아주 밀접한 관계 라면서 역사적 연고성을 강조하였다. 또 한 신보 는 자국을 아시아의 맏이 로 위치짓고, 중국이 분발하여 강대해지고 창의를 앞세워 아시아의 신생국가들과 연합하여 평화와 번영을 옹호한다면 동 아시아의 밝은 미래가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23) 이러한 국민당 언론의 한국 독립 관련 보도는 전후 중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평화질서를 구축하려던 대외의식을 드러낸 것으로, 비관적 현실여건에도 불구하고 내재된 大 國 主 義 를 엿볼 수 있다. 그 후 중화민국 정부는 주중 한국 대표로 대한민국 정부에서 파견한 외교 대표를 정식 승인하였다. 외교부차장 葉 公 超 는 한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중국 정부는 어떤 한국 단체도 승인을 해 줄 수 없었고, 한국인을 그 대표로 보 았다 라고 밝혔다. 124) 이러한 언급은 그동안 중화민국 정부가 임정 대표를 주 중 한국 대표로 예우한 것과 다른 태도로, 종전직후 중화민국 정부의 대한정책 이 임정을 통한 주도권 확보였다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계기로 반공 친미 에 기초한 새로운 공식관계가 시작되어 질적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122) 大 韓 民 國 呱 呱 墜 地 ( 寄 稿 ), 中 央 日 報 (1948. 8. 20). 123) 東 亞 的 新 氣 象, 申 報 (1948. 8. 16). 124) 中 國 承 認 韓 正 式 代 表, 中 央 日 報 (1948. 9. 14).

337 Ⅴ. 맺음말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열강의 주목 을 받지 못하였다. 전후 미 소 양국의 세력대결이 본격화되면서 한국은 동아 시아의 전략요충지로 떠올랐고, 급기야 냉전 이데올로기의 각축장이 되었다. 소련 중국과 국경을 접한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일본 미국의 태평양으로 뻗 어나간 한반도의 지리적 조건은 미 소 양국에게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결 코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은 전후처리를 위한 국제회의에 서 빠짐없이 거론되며 열강의 대결무대로 탈바꿈하였고, 끊임없는 항일독립투 쟁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쟁취한 해방이 아닌 전승국의 점령지로서 장래 운명 이 타율에 의해 강제되었다. 종전과 함께 동아시아는 미 소 주도의 냉전체제로 급속히 재편되었고, 그 소용돌이에 중국과 한국은 점차 빠져들었다. 중국은 외형상 전승국이었지만 곧장 국공내전에 휩싸여 대외적으로 군사 외교 역량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 다. 그런 이유로 전후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재편과정에서 주체가 되지 못하 였다. 오히려 내전이 악화되면서 중화민국은 미국의 지원과 협력에 의해서만 생존이 가능할 만큼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결국 미 소에 의해 강제 분할 되어 분단국가로 전락해버린 한반도나 국공내전 끝에 둘로 쪼개진 중국대륙은 전후 동아시아 냉전구도의 두 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종전 후 한반도의 분단과정을 지켜본 국민당 언론의 시각과 인식은 주체적 이라기보다 미 소의 대외정책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국 관련 보도의 초점과 비중이 개별신문의 성향이나 현실 관심에 따라 약간 편차가 있었지만 대부분 정치와 군사문제에 집중되었고, 이념 대립의 시각으로 점차 고정되어 갔다. 이런 이유로 한국 관련 보도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 방안과 그에 따른 좌우분열 및 반탁운동, 미 소공위의 참여범위, 정부수립의 시기와 방법을 둘러싼 즉시독립론과 통일독립론의 갈등, 미 소 군대의 철수 시기와 방법, 공산당의 조직 확대와 폭력사태, 유엔한국위원회의 활동과 단독

338 동북아역사논총 29호 선거 실시, 각종 법제 제정 및 정부수립 등 정치 군사 인물에 관한 기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를 통해 국민당 언론은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의 효과적 인 수단과 국가 구성원 간 정치 경제의 갈등해소를 위한 학습효과를 기대하 였다. 당시 국민당 언론에 보도된 한국 기사는 대부분 중국의 현실 및 미래와 직 간접적으로 관련된 것들이었다. 예컨대 전후 한국의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위 한 국제논의 및 이행, 정부수립을 둘러싼 정파의 동향과 대응, 정치이념의 선 전과 통치체제의 구축, 국가현안에 관한 민의수렴방법 등이 주요 관심사였다. 또한 근대 국민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폭넓은 민의형성과 수렴, 실천을 위한 민주적 절차와 제도 및 실현방법 등도 자주 보도되었다. 이 밖에 한국 내 화교의 경제상황과 교육실태, 한 중 교역의 확대방안 등 경제문제도 다루어 졌지만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한반도의 전후처리과정에서 중화민국은 모스크바 3상회의와 미 소공위 등 미 소의 주도로 진행된 국제논의에 직접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단지 역사 적 현실적으로 긴밀한 연대관계와 대외적 후견인 역할을 담당해 온 도의적 책임론을 내세워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 독립문제에 관한 자국의사를 표시하 였다. 그러나 중화민국은 자기 역량이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대외적으로 미국 의 후원과 협력에 의해 제한된 역할만 가능하였다. 이 때문에 카이로회담에서 한국독립을 국제적으로 확인한 자국의 역할을 강조하며 그것을 실행에 옮긴 모스크바 3상회의의 4개국 협의에 의한 신탁통치 를 한국 독립방안으로 관철 시키려고 했다. 1947년 9월 17일 미국 정부가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하여 1943년 카이로 회담 이후 연합국 합의에 의한 통일독립정부의 수립 이란 기본원칙이 남한 총 선거를 통한 단독정부 수립 으로 전환됨으로써 미국의 영향력이 극대화되었 다. 중화민국의 입장에서 이것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지속된 우월지위가 무 너지고 한국문제에 직접 간여할 수 있는 명분과 통로가 제한되었음을 의미한 다. 이러한 냉전적 세계질서의 변화 속에서 자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구축을 모색한 중화민국의 전후구상은 虛 想 으로 끝났다. 그뿐만 아니라 중화민국 스

339 스로 미 소가 주도하는 냉전체제의 틀 속에 갇히게 되었다. 남북분단을 가져온 미 소 군정 3년의 평가와 관련하여 국민당 언론은 대 체로 부정적이다. 특히 종전직후 미 소 양국이 한국을 혼합점령하지 않고 38도 선을 경계로 나누어 점령한 것부터 잘못된 것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지리적 분할지배가 정치이념과 통치체제의 분리로 이어지고 결국 한반도의 영구분단 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럽에서의 세력대결로 악화된 미 소 관 계가 동아시아의 세력재편과정에서 또다시 재현되어 냉전체제로 굳어졌고, 한 국은 첫 희생물이 되었다. 국민당 언론은 해방정국에서 한국의 정치세력들이 신탁통치와 건국의 성 격 및 방식을 놓고 서로 대립한 것도 분단의 한 원인이라고 지적하였다. 하지 만 한국 분단의 1차 책임과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원인 제공자는 미국으로 보았 다. 전후 세계질서의 재편과정에서 공산당의 폭력성과 팽창주의가 충분히 예 견되었고 유럽에서는 이미 현실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동아시아에 서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이 실책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예로 식민지에서 해방 된 한국을 패전국 독일처럼 점령지 취급을 하고, 남한의 미군정 지배도 편의주 의로 일관하여 친미의 탈을 쓴 친일세력의 득세를 막지 못한 결과 해방정국이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국민당 언론은 미군정 3년 동안, 남한에서 건국을 위해 새로운 정치제도와 통치세력이 형성되었지만 한국인의 열망과 민의를 담은 정당성과 형평성이 전 혀 고려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러한 대외인식은 국공내전이란 엄혹한 현실 속에서 분단 한국에 대한 동정이자 자국의 앞날에 대한 깊은 우려와 자괴감의 표현이었다. 전후 한국과 중국은 항일시기의 우호, 협력을 토대로 새로운 연대 관계를 모색할 수 있었지만 자기역량의 부족으로 미 소에 의해 조성된 냉전 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한국은 南 北 으로, 중국은 兩 岸 으로 각각 분리된 채 20세기 중반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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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 동북아역사논총 29호 [ABSTRACT] China s Understanding toward Korea in the Formative Period (1945~1948) of the Cold War System: Focusing on Korea related Reports of Chinese Nationalist Party Mass Media Lee, Jaeryoung This study intends to understand the Korean Chinese relation of the early Cold War through the Korea related news by the Dagongbao, the Shenbao and the Zhongyang ribao, which were the main press of China after ending the war. After having had the 1945 Liberation, Korea was rapidly reorganized into the Cold War system the United States and the Soviet Union led. Despite being a victor nation, it was impossible for China to display its foreign ability and play a major part in rearranging order in East Asia because it was experiencing the Chinese Civil War. China, in the process of solving postbellum conditions in Korea, has no room for intervening in the international disputes which the U.S. and the U.S.S.R. were leading. It just tried to speak its intention carefully with historical relationship between both countries and moral responsibility toward Korea claiming. However, it could simply serve a restrictive duty to be feasible only by the help and the cooperation of the U.S. because of being lacking in its diplomatic competence. For this reason, Korean independence based on agreement of four countries and the pullout of the U.S. armed forces and the Soviet army, which were supported by China, could not be realized in the end.

343 Chinese newspapers generally held fast to its negative opinion about assessing the division of the Korean peninsula and the U.S. military government. They considered the division, especially, to bring separation of political ideology and system and also draw a conclusion, that is, permanent division of a territory. They thought discord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Soviet Union provoked by a power grab in Europe was reappeared in East Asia and then was continued the Cold War system. They also regarded it as the origin which made the first victim of Korea. Therefore, they finally treated America and Russia as the cause of Korean division. Chinese media had different views concerning several pending problems: the division of Korea into north and south, a political movement against trusteeship, a failure of a joint the U.S. the U.S.S.R. commission, the south only election, and so on. For all that, they arrived at the same understanding that the U.S. military government policy toward Korea failed in the end. They gave the main reason why it protected the pro Japanese party putting on a pro American mask, while it totally overrode the wishes for independence of the people and the activities of the Korean interim government. They also mentioned that it cruelly rode roughshod over the desire for independence and the right for the united nation. They said that it was necessary for North and South Korea to run into an extreme aspect of the Cold War and Korean leaders like Mr. Kim Gu and Mr. Kim Ku sik who were a middle of the roader could not help missing the last chance to win the confidence of the people in the end. Korea related reports by Chinese press took a converted line after May s single elections by South Korea in order to criticize Communism containing illegality and violence and to establish liberal democracy in

344 동북아역사논총 29호 Korea. In the extension line, China looked upon the Chinese Civil War as not an internal problem but a by product of the Cold War and sought to find a solution from a national union including the United States. Chinese government would like to find out a key to the victory of its civil war through military intervention by the U.S. as well as the Cold War system. The appearance of South Korea to advocate a pro American and anti Communist government urged China to alter its policy line. It was inevitable for Korea and China to be bound by a ideological or systematical confrontation between democracy and communism rather than the facing subject for independence and unity by themselves in the process the Cold War system was formed. In short, after the war, the ideological dispute and the struggle contest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United Soviet Union would take concrete shape soon into the division of Korean peninsula and the new cold war system in East Asia. China, in this way, could not choose but grope for its victory of the Chinese Civil War in this international situation and simultaneously take charge of a pivotal role in this new cold war order. Although both Korea and China in this period was able to seek the innovative development of their relationship, on the basis of close friendship and cooperation from an anti Japanese struggle, they failed to free themselves from restraints of the Cold War created by the U.S. and the U.S.S.R. Contrary to their expectations, Korea and China have no choice but to face with the middle of the 20th century with each country separated into China and Taiwan as well as North Korea and South Korea in the front of the Cold War in East Asia.

345 keywords The Cold War System, Dagongbao, Shenbao, Zhongyang ribao, Chinese Nationalist Party, U.S Military Government, The Korean Chinese Relationship, The Korean Independence, A joint the U.S. the U.S.S.R. com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