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제에 관한 일고( 一 考 ) 1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제에 관한 일고( 一 考 ) 김관원 /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Ⅰ. 머리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일 간 현안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공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 등이 일본에서 희생자 보상청구 소송을 제 기한 1991년부터다. 이때 일본 정부는 일본군이 위안부 동원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음을 인정하고 사과와 반성을 표명한 고노 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아시아여성기금 을 만들어 피해자들에게 보상 함으로써 해결하려 고 하였다. 그러나 아시아여성기금은 일본 정부가 피해 여성들에게 사죄와 배 상을 해야 했음에도 민간모금 형태로 조성된 위로금으로 인도적 책임을 지겠 다는 것이었으므로 피해 할머니들에게 거부당해 실패하였다. 2005년 8월 한국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구제와 관련해서 한일청 투고: 2015년 8월 10일, 심사 완료: 2015년 11월 6일, 게재 확정: 2015년 11월 23일 * 이 글은 2015년 9월 18일 도쿄가쿠게이대학[ 東 京 学 芸 大 学 ]에서 개최된 한일정상화 5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심사를 하여주 신 심사위원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 동북아역사논총 50호 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 는 일본 정부의 주장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 본 정부 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이므로 한일청구권협정 에 의해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다 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또한 2011년 8월 헌 법재판소는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청구권협정 제3조의 절차에 따라 해결하지 아니하고 있는 한국 정부의 부작위는 위헌 이라고 판결하였다. 이 결정은 한국 정부에 부담으로 작용했으며, 일본 정부에 위안부 문제 해 결을 강력히 촉구하지 않을 수 없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2012년 4월 일본 정부 는 절충안을 제시했으나 양국 정부 간 견해 차이와 일본의 정권이 갑자기 교체 되는 시기와 맞물려 실패하고 말았다. 2014년 4월 이후부터 한일 양국은 위안 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국장급 회의를 개최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 는 상태다. 이와 같이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고, 또 일본 정부 또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이에 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일본 정부와 일본인은 물론 한국 국민 중에도, 왜 한국 정부는 일본 정 부에 해결을 요구하는지, 왜 일본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에게 국가 책임을 인 정하고 법적사죄와 배상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실은 한 일 양국의 미래지향적인 상호이해 관계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한국 정부의 해결요구에 정당성이 있으며, 또한 일본 정부에도 이에 응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양국 국민에게 알려, 이해를 구하고 오해의 소지를 사전에 해소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 책임이 일본 정부에 있음을 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사안을 제시하고 분석한다. 즉 일본에서 있었 던 피해자 구제 소송을 통해 일본의 법원이 인정한 국제법상 일본의 국가 책임 은 무엇인지, 관련자를 처벌해 피해자 구제의 근거로 삼아야 했던 극동국제군 사재판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는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이미 해결되었다고 하는데 청구권협정은 어떤 성격을 가지며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견해는 어떤 것인지 알아본다. 이어서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대해 해결을 요구하는 데 직접적인 계기가 된 헌법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제에 관한 일고( 一 考 ) 3 원과 후속조치 등에 관해 분석한다. Ⅱ. 일본의 국가 책임과 위안부 소송 1_위안소 제도와 일본의 국가 책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중국 대륙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각지 에 위안소를 설치하였다. 일본군 위안소가 본격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된 이후인데, 일본이 전쟁 지역을 확대해 가자 그 설치 지역도 점차 확대되어 갔다. 일본군 위안부 로 동원되는 여성들도 일본 여성들 보다는 식민지였던 조선과 타이완의 여성들이 강제로 동원되는 사례가 늘어나 기 시작하였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의 강제 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는 1) 위안부의 모집 은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맡았으나, 그 경우에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았고,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했던 경우도 있었으며, 또 한국은 일본의 통치하에 있어 그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이루어졌다 고 하였다. 일본군 위안부 가 강제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일본 정부도 인정하 고 있는 것으로, 여기에는 국가의 법적 책임이 따른다. 2) 1) 慰 安 婦 関 係 調 査 結 果 発 表 に 関 する 河 野 内 閣 官 房 長 官 談 (1993. 8. 4)이 정식 명칭 이다. 2) 고노 담화에서 인정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은 인도에 반하는 범죄이며, 여성에 대한 모독이자 인류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적 국제법적 국가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노 담화를 검증하여 흠집을 내고, 궁극적으로는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은 없었다고 하는 것이 목적이다.
4 동북아역사논총 50호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동원의 강제성을 부인하고 있으며 위안소의 설치, 운영 등 위안소 제도에 대해서도 민간업자의 소행이라고 하며, 국가의 가해 행 위와 책임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들은 그 의사에 반해서 일 본 국내외로 끌려와, 3) 전지에서는 항상 일본군의 관리하에 있었으며 군과 행 동을 함께하면서 위안소에서 강제로 성노예 생활을 하였다. 4)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은 사람들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비참한 생활을 했으며, 5) 노 예상태와 같은 중대한 인권침해를 받았다. 6) 위안소 제도는 철저한 여성차별 민족차별 사상의 표현이며 여성 인격의 존엄을 근저에서부터 침해하고 민족의 긍지를 유린한 전쟁범죄다. 7) 당시의 강제노동조약, 부녀자매매금지조약(추업 조약) 및 인도에 반하는 죄 등 국제법을 위반했으므로 국가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 8) 유엔인권위원회 보고서도 일본의 국가 책임을 지적하고 있다. 쿠마라스와 미 보고서(Coomaraswamy Report) 9) 는 제2차 대전 당시 강제연행된 일본군 위안부 에 대한 일본국의 인권침해는 명확히 국제법 위반임을 인정하고 법적 3)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 소송 2심 판결( 東 京 高 裁, 2003. 7. 22), 判 例 時 報 1843호. 4) 송신도 소송 1심 판결( 東 京 地 裁, 1999. 10. 1), 訟 務 月 報 48권 3호; 송신도 소송 2 심 판결( 東 京 高 裁, 2000. 11. 30), 判 例 時 報 1741호;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 소송 1심 판결, http://www.zephyr.dti.ne.jp/~kj8899/ izokukai_hanketsu.html. 5) 송신도 소송 1심 판결, 위의 책 참조. 6)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 소송 2심 판결, 위의 책 참조. 7) 부산 일본군 위안부 여자정신대 공식사죄청구 소송 1심 판결( 山 口 地 裁 下 関 支 部, 1998. 4. 27), 判 例 タイムズ 1081호 참조. 8) 송신도 소송 2심 판결, 위의 책 참조;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 소 송 2심 판결, 위의 책 참조. 이러한 조약 등을 근거로 항소인 등 개인이 피항소인에 대해 손해배상청구 내지 보상청구가 가능하다고 하는 국제관습법이 성립되어 있다 고는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9) 1996년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채택된 라디카 쿠마라스와미 여성에 대한 특별보고자 의 여성에 대한 폭력과 그 원인 및 결과에 관한 보고서 를 말한다. 정식 명칭은 Report on the mission to the Democratic People s Republic of Korea, the Republic of Korea and Japan on the issue of military sexual slavery in wartime(1996)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제에 관한 일고( 一 考 ) 5 책임을 지라고 하였다. 맥두걸 보고서(McDougall Report) 10) 도 일본군의 요청 으로 위안소를 경영한 것과 이익을 얻은 민간인이 한 행위로 위안부가 받은 피 해를 방지하지 못하고 가해자를 처벌하지 못한 것에 일본 정부에 국가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 이들 보고서는 강제적인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유엔의 공 식입장으로 간주되어 앞으로 일본 정부에 큰 압력이 될 것이 분명하다. 다음은 상술한 바와 같이, 한국인 관련 3건의 위안부 소송에서 11) 일본의 법 원이 일본 국가나 군인 등이 위반했다고 인정한 국제법규에 관해 아베 교수의 견해를 중심으로 간단히 정리하였다. 12) 1) 노예제 및 노예매매 금지에 관한 조약 1926년 체결된 노예금지조약은 조약상의 의무만이 아니라 국제관습법으로 정 착되어 있는 개념으로서 모든 국가를 구속한다고 생각되므로 이 조약의 체약 국이 아닌 일본도 구속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아무런 권리가 없는 상 10) 1998년 8월 유엔인권위원회 차별방지 소수자보호소위원회에서 채택된 게이 맥두 걸 전시성노예제특별보고자의 무력분쟁하의 조직적 강간 성노예제 및 노예제 유 사 관행에 관한 최종보고서 를 말한다. 정식 명칭은 Contemporary Forms of Slavery Systematic rape, sexual slavery and slavery like practices during armed conflict(1998)이다. 일본군 위안부 를 다룬 부속문서는 일본군 위안소에 대 해 성노예 제도로서 여성의 인권을 현저히 침해한 전쟁범죄라고 했으며, 책임자의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였다. 11) 한국인 위안부 소송의 최대 장애는 국가무답책과 시효 제척기간의 문제였다. 이 것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 국내의 민법규정을 사용하지 않고 청구를 가능하게 하는 국제법에 의한 전쟁피해의 배상규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1912년 일본이 비준한 육전의 법 및 관습에 관한 헤이그협약 부속규칙에 여성은 전시에 강간 및 강제매 음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전쟁 지역 이 아닌 한국의 경우에는 헤이그협약을 적용할 수 없다는 논란이 있어 한국인 위 안부 소송에서 이 규정은 주장하지 않았다. 藍 谷 邦 雄, 2014, 韓 国 人 慰 安 婦 を 振 り 返 って, 瑞 慶 山, 法 廷 で 裁 かれる 日 本 の 戦 争 責 任 : 日 本 とアジア 和 解 と 恒 久 平 和 のために, 高 文 研, 41쪽. 12) 阿 部 浩 己, 1993, 軍 隊 慰 安 婦 問 題 の 法 的 責 任, 法 學 セミナー 10호, 64~66쪽.
6 동북아역사논총 50호 태에 있었으며, 군의 소유물로서 성적 폭력의 대상이었다. 위안소 생활은 하나 의 인격체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지배의 대상이 되어 계속적으로 성적 폭력을 겪었다. 일본국의 이와 같은 행위는 노예제를 금하는 관습법규에 위배된다. 2) 강제노동에 관한 조약 일본 정부도 1932년에 이미 비준한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제29호인 강제노 동조약에서의 강제노동 처벌 위협 아래 강요된 일체의 노동을 말한다. 일본군 위안부 의 성노예 생활을 노무로 본다면, 위안부 피해자가 일본군에 의해 강 요된 노무 는 강제노동에 해당하며 이 조약을 위반한 것이 된다. 3) 부녀자 매매금지 조약 1925년 일본이 비준한 이 조약은 추행을 목적으로 미성년인 여성을 권유 유괴 한 자 및 사기 폭행 등 모든 강제수단을 동원해 성년의 여성을 권유 유괴한 자에 대한 처벌을 체약국에 의무로서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여성에게 추행을 강요한 자를 처벌해야 하는 국제적 의무를 일본은 전시 중에도 명확히 지고 있 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동원한 자를 처벌하지 않았으므로 부녀자 매매금지 조약을 위반하고 있었다. 4) 인도에 반하는 죄 전쟁 전 또는 전쟁 중에 민간인에 대한 살해, 절멸, 노예적 혹사, 추방 기타 비 인도적 행위 또는 범행 지역 국내법 위반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어떤 범죄의 수행과 관련되었거나, 그와 관련하여 행해진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 이유에 근거한 박해행위이다. 성적학대 등 추악한 행위를 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인도 에 반하는 죄를 근거로 그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유엔에서도 1968년 유엔 결의 제2391에서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하는 범죄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것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제에 관한 일고( 一 考 ) 7 확인하고 있으므로, 일본군 위안부 범죄 행위 등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추궁해 야 한다. 13) 2_ 위안부 소송과 일본 법원의 판단 일본에서의 한국인 위안부 소송은 1991년 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소송, 1992년 부산 일본군 위안부 여자정신대 공식사죄 청구 소송, 1993년 재일동 포 송신도( 宋 神 道 ) 소송 등 3건이다. 결과적으로 3건 모두 원고인 일본군 위안 부 피해자가 패소하였다. 다음에서는 위안소 제도의 범죄성에 대해 일본의 법 원은 어떤 판단을 했는지 소송이 끝난 순서로 분석한다. 1) 부산 일본군 위안부 여자정신대 공식사죄 청구 소송 1998년 4월 27일 1심 판결에서 14) 기본적인 인권에 대한 침해가 중대하고 구제 필요성이 크다고 인정되어 국회가 입법의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면서 방치하 고 있는 경우에는 입법부작위에 의한 국가배상을 인정할 수가 있다 고 판단했 다. 또 일본군 위안소 제도에 대해 철저한 여성차별 민족차별 사상의 표현이 며 여성 인격의 존엄을 근저에서부터 침해하고 민족의 긍지를 유린하는 것 이 라며, 배상입법을 해야 할 의무를 게을리 한 데 따른 정신적 손해배상금 각 30만엔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하였다. 이 판결은 전시의 위안부 에 대하여 성적 강제를 한 행위 자체를 위법행위 로서 손해배상의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15) 전후 피해회복 의무를 다하지 13) 지난 2015년 7월 위안부 피해자 2명이 아베 신조[ 安 倍 晋 三 ] 총리 등을 상대로 각 각 200만 달러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는 집단 소송을 미국 샌프란시스코 연방법 원에 제기하였다. 14) 부산 일본군 위안부 여자정신대 공식사죄 청구 소송 1심 판결, 앞의 책 참조. 15) 재판소가 이와 같은 직접 전시의 행위를 위법으로 해 손해배상의 대상으로 하지 않 고 에둘러 말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위안부 소송에 한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 쟁 중의 군의 행위는 그것이 위법한 것이라도 손해배상을 의무화한 법률이 아니었
8 동북아역사논총 50호 않으므로 생긴 손해를 인정한 획기적인 판결로서, 16) 세계 곳곳에서 소송을 제 기하고 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2심은 1심판결을 취소하고 원고 측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2심 판결 은 17) 일한 양국은 일한협정에서 자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 청구 권 에 관한 외교적 보호권을 상호 포기함에 따라 소위 전쟁손해 보상 배상 등 의 문제에 대해 국제법상 양 국가 간에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 이 된다 는 것을 확인한 것 이 었으며, 개인이 타국의 가해 행위에 의해 피해 를 받은 경우에 당해 피해자 개인이 가해국의 국내법에 따라 실체적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국제법상 외교적 보호권의 존부에 관계없이 허용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고 하였다. 또한 전후보상을 위한 입법행위는 종합적인 정책판단에 따라 하는 것으로 사법에 의한 규제는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헌법의 해석상 전 위안부 등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위한 입법의무의 존재가 명백하다고 말할 수 없으므 로 입법부작위는 위법하다고 할 수 없다 고 하였다. 다. 전후에는 국가배상법이라는 법률이 만들어져 국가가 지방자치단체의 행위가 위법이라면 손해배상을 하도록 되어 있으나 이 법률은 전전에 소급해서 적용할 수 없다 고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다. 여기에서 위법을 해 타인에게 손해를 끼친 경우 에는 배상을 하도록 하고 있는 민법의 불법 행위라는 규정에 의해 군의 행위 즉, 국 가에 배상 책임을 요구한 것이 이 재판의 근거였다. 또 전전에는 국가가 한 행위는 위법이라도 손해배상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 라는 법적 이론이 엄연히 있었다. 이 것을 국가무답책 이라고 한다. 재판소는 이 이론을 회피하기 위해 전후에 피해 회 복을 하지 않은 것에 국가의 책임과 위법성의 근거를 찾아내어 배상을 인정했던 것 이다. 매우 정치한 법이론이었으나 이런 판결을 한 것은 위안부 의 피해가 인륜에 반한다고 하는 강렬한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藍 谷 邦 雄, 2014, 韓 国 人 慰 安 婦 を 振 り 返 って, 瑞 慶 山 茂 責 任 編 集, 法 廷 で 裁 かれる 日 本 の 戦 争 責 任 : 日 本 とアジア 和 解 と 恒 久 平 和 のために, 39쪽. 16) 한편 급료를 받지 못하고 강제 노동을 당한 정시대원의 청구는 기각됐다. 17) 부산 일본군 위안부 여자정신대 공식사죄청구 소송 2심 판결( 広 島 高 裁, 2001. 3. 29), 判 例 時 報 1759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제에 관한 일고( 一 考 ) 9 2) 재일동포 송신도 소송 1999년 10월 1일 1심 판결은 18) 원고는 각지의 위안소에서 자신의 뜻에 반한 상태로 종군위안부로서 군인을 상대하도록 강요받았다 고 인정했으나 개인이 직접 국가에 손해배상 등을 요구하는 국제관습법이 당시는 존재하지 않았으 며, 20년의 민법상 청구권도 이미 소멸했다 고 하였다. 또 국제법은 국가 간의 권리의무를 정한 것이다 라고 하며, 노예를 금지 한 국제관습법과 강제노동에 관한 조약 등의 국제법에 위반한다 고 한 원고 측 의 주장을 부정하였다. 보상입법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위안 부 생활을 강요받은 사람들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비참한 생활을 했 다고 추측되며 국가가 어떠한 구제수단을 만드는 것은 국회 입법재량의 하나 의 선택지 라고 하면서도 헌법상 입법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2000년 11월 30일 2심 판결은 19) 위안소의 설치, 운영에 대해서 당 시 강제노동조약, 추업조약에 대한 위반 행위가 있는 경우도 있다 고 국제법상 의 국가책임을 인정했으나 개인에 대한 배상의무는 부정하였다. 또 송신도 씨 는 일상적으로 장기간 일본군에게 강제로 성적으로 상대하도록 강요받았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개개의 성적 강제 행위는 군이 직접 지시한 것이 아니므 로 국가의 직접적인 위법 행위라고는 볼 수 없으나 업자를 감독하고 위안소의 실질적 관리를 하고 있었던 것은 군이었으므로 군은 업자의 사용자로서 관리 를 게을리 한 책임이 있다. 그 결과로 군과 국가는 위안부 의 피해를 배상할 책 임이 있다 고 하였다. 이는 법 이론을 구사한 판결로서 위안부 에 대한 심정적 이해를 드러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20) 이 판결은 군의 사용자 책임을 물 음으로써 앞에서 언급한 국가무답책의 법리 를 회피한 것이 특징이나 시효 제 척기간이라고 하는 이유를 들어 청구를 기각하였다. 18) 송신도 소송 1심 판결, 앞의 책 참조. 19) 송신도 소송 2심 판결, 앞의 책 참조. 20) 藍 谷 邦 雄, 2014, 앞의 글, 39~40쪽.
10 동북아역사논총 50호 3)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 소송 이 소송은 1991년 12월 6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 한 최초의 소송으로 이후 다수의 소송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21) 2001년 3 월 26일 1심 판결은 22) 동종의 전후보상 소송에서 보여준 사법 판단을 답습하고 헌법과 국제법에 근거한 보상, 민법상 손해배상 등의 청구권 존재를 부정하였 다. 판결은 위안부 피해자와 관련해서 전지에서는 항상 일본군 관리하에 있어 군과 행동을 함께하면서 위안소에서 강제로 성을 접대한 사실은 인정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에는 인도상 죄가 있다 는 원고의 주장에 대해서는 인도에 반하는 죄는 국가에 대해 개인을 국제재판소의 처벌에 복종하게 하는 의무를 지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국가에 민사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라 고 하였다. 2003년 7월 22일 2심 판결은 23) 사실 인정을 상세히 다루었으며 위안부 문 제 해결을 위해 입법의 필요성을 명시하고, 일본 국가의 가해 행위와 책임을 인정하였다. 일본군 위안부 실태에 대해 노예상태와 같은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가 있 었다고 추인할 수가 있다 고 인정했으며, 항소인 등은 미성년 시기 조선에서 그 의사에 반해서 일본 국내외로 끌려와 그 곳에서 매일 다수의 군인 군속 과 성행위를 강요받았으므로 추업조약의 적용대상이 되는 추업을 강제당했다 고 인정할 수가 있다 고 했으나 개인보상 의무는 없으므로 피해자에게 손해배 상청구권을 인정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국제법 및 국제관습법에 의한 청구에 대해서는 헤이그육전조약 및 헤이그 육전규칙,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 조례 6조 등 및 극동군사재판소 조례 5 조, 노예조약, 강제노동조약, 카이로선언 및 포츠담선언 그리고 국제법상의 평 21)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외에도 군인, 군속 등이 원고로 되어 있으며, 이후 필리핀, 중국, 네덜란드 등의 원고가 10여 건의 소송을 제기하였다. 22) http://www.zephyr.dti.ne.jp/~kj8899/izokukai_hanketsu.html. 23)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 소송 2심 판결, 앞의 책 참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제에 관한 일고( 一 考 ) 11 등원칙에 의해 항소인 등 각 개인이 피항소인에 대해 손해배상청구권 내지 보 상청구권이 취득되는 것은 아니다. 또 이러한 조약 등을 근거로 항소인 등 개 인이 피항소인에 대해 손해배상청구 내지 보상청구가 가능하다고 하는 국제관 습법이 성립되어 있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 고 하였다. 인도에 반하는 죄에 대 해서도 그 국제관습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피해자에게 보상청구권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강제노동조약 및 추업조약에 위반했을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으므 로 피항소인에게는 이런 조약상의 의무위반에 따른 국제법상 국가 책임의 해 제 방법으로서 일본 국내의 보상입법을 하는 것도 가능한 하나의 시책이었다 고 할 수 있겠다 고 하면서도 국회의 재량에 속하는 입법정책적 판단에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민법의 불법 행위에 의한 청구에 대해 군대위안부 관계의 항소인 등 군대 위안부를 고용한 고용주와 이것을 관리감독하고 있었던 구일본군인의 개개의 행위 중에는 군대위안부 관계의 항소인 등이 군대위안 행위를 강제함에 있어 불법 행위를 구성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고 추인되어, 그런 사례에 대해서 는 피항소인은 민법 715조 2항에 의해 불법 행위 책임을 질 여지가 있다. 결국에는 국가배상법 시행 전의 공권력 행사의 책임은 물을 수 없다는 국 가무답책의 법리는 부정했지만, 제척기간의 경과와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개 인청구권이 포기되었으므로 청구를 기각한다고 하였다. 이들 소송을 통해 당시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던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실 태가 많은 부분 알려졌으며, 피해 사실의 심각성과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피 해 실태가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또한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국제법을 위반 한 일본 정부에 국가 책임이 있다고 법원은 인정하였다. 그러나 국제법의 기본 문제에 관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법의 학설 등을 참조하지 않고 독자적인 판단을 내린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최근 국제사 회는 중대한 국제인권법 국제인도법 위반에 의해 손해를 입은 피해자 개인에 게는 구제받을 권리가 있고, 가해자는 소추되어 손해배상을 해야 할 의무가 있 다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지금까지 국가 간의 이해를 조절해 왔던 국제법
12 동북아역사논총 50호 규범은 지금은 개인 차원으로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24) 유엔총회도 2005 년 12월 16일 채택한 중대한 국제인권법, 국제인도법 위반의 피해자가 구제 및 보상을 받을 권리에 관한 기본원칙 및 가이드라인 을 통해, 적어도 1907년의 헤이그육전조약 이후 국제인도법 위반의 피해자는 구제받을 권리가 있음을 확 인하고 있다. 25) 따라서 일본 정부는 법원이 국제법상 피해자가 구제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다고 판단하더라도, 국가적 책임을 인정하는 입법정책적 해결방안을 모색해 원고의 불신과 울분을 누그러뜨려 가해자와 화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Ⅲ. 극동국제군사재판과 위안부 문제 1_인도에 반하는 죄의 성립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5년 8월 미영프소 연합국은 런던에서 조인된 유럽 추 축국 주요 전쟁범죄인 추궁 및 처벌에 관한 협정과 그에 부속하는 국제군사재 판소 헌장을 채택하는데, 여기에 인도에 반하는 죄의 개념이 정식으로 성립된 다. 인도에 반하는 죄 는 평화에 반하는 죄, 통례의 전쟁범죄 와 함께 헌장 제 6조에 의해 국제군사재판소 관할에 속하는 범죄 행위로 인정됐다. 인도에 반하는 죄 는 국제군사재판에서 유대인 대학살 죄를 심판하기 위해 신설한 범죄로, 민간인에 대한 살인, 절멸 등의 비인도적 행위, 또는 정치적, 인종적 내지 종교적 이유의 박해 행위를 말한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에 대한 살인, 절멸, 학대 등 비인도적인 정책은 제도적, 계획적인 체제 범죄이며 전쟁 24) 五 十 嵐 正 博, 2007, 最 高 裁 は 国 際 法 の 発 展 に 寄 与 できるか, 世 界 4호, 72쪽. 25) 五 十 嵐 正 博, 2007, 위의 글, 71쪽.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제에 관한 일고( 一 考 ) 13 지역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다든가 전쟁수행을 위해 위법임을 알면서 범죄를 저지르는 전쟁 범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26) 다시 말하면 인도에 반하는 죄 는 유대인 학살을 비롯한 전쟁 전, 전쟁 중 의 나치 범죄를 표적으로 한 것으로 나치에 의한 독일 국내에서의 독일인에 대 한 폭력범죄 도 연합국의 국제군사재판에서 심판하려 한 점에서, 이전의 전쟁 범죄 범주에는 들어있지 않은 새로운 범죄 개념이었다. 27) 즉 인도에 반하는 죄 는 전시만이 아니라 전쟁 전의 행위, 자국 및 타국의 민간인에 대한 가해도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본래의 전쟁범죄와는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본래의 전 쟁범죄 행위는 인도에 반하는 죄의 일부분을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도 재판소 자신의 법적 권한은 평화 에 반하는 죄, 전쟁범죄의 실행 혹은 그와 관련해서 행해진 범죄에 한정하며, 전쟁 개시 이전에 나치가 독일 국내에서 시행한 인도범죄는 재판소의 관할 밖 이라고 하였다. 28) 또 이러한 범죄의 대부분이 용서할 수 없는 잔학한 범죄라고 할지라도 침략전쟁 혹은 전쟁범죄와 관련해서 실행된 것이라고 입증하기 곤란 하므로 처벌할 수 없다고 하였다. 29) 이에 대해 국제재판의 권한을 연합국 각 26) 이미 전쟁 전부터 국내의 유대인에 대해서 단계적으로 박해해 왔으며 결국에는 국 가로서 유대인을 유럽에서 절멸하는 정책을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木 佐 芳 男, 2001, 戰 爭 責 任 とは 何 か, 120쪽. 27) 清 水 正 義, 1998, ニュルンベルク 裁 判 の 成 立 と 人 道 に 対 する 罪, 現 代 史 研 究 44호, 1쪽. 28) 芝 健 介, 2002, ホロコーストとニュルンベルク 裁 判, 史 論 55, 27쪽. 판결은 인도에 반하는 죄 에 관해서만 본다면, 대전 발발 이전의 행위에 대해서도 국제군 사재판소의 관할인 점은 승인하였으나 이러한 행위가 평화에 반하는 죄 등과 관련 해서 행해진 것으로는 인정하지 않고, 결국 1939년 이전의 행위에 대해서는 모두 무죄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전쟁 발발 이후에 대해서는 인도에 반하는 죄 는 동시 에 전쟁범죄 로서도 단죄되었으며, 어떤 행위와 관련해서 그것이 인도에 반하는 죄 로서 유죄를 선고받았는지, 전쟁범죄 로서 선고받았는지 확실치 않다. 판결은 인도에 반하는 죄 가 본래 표적의 대상으로 하고 있었던 전전의 독일인에 의한 독 일인에 대한 폭력범죄 를 사실상 국제군사재판소로서는 심판하지 않을 것임을 표 명했는데, 이는 한계 중 하나였다. 清 水 正 義, 1998, 위의 글, 15쪽. 29) 芝 健 介, 1988, ニュルンベルク 裁 判 小 考, 國 學 院 雜 誌 89(4)호, 29~30쪽; 1944년 9월 30일자 연합국전쟁범죄위원회(UNWCC)의 연합국법정안 이래 나치
14 동북아역사논총 50호 점령국에 위임하기로 한 연합국 대독일 관리이사회 법률 제10호는 인도에 반 하는 죄 항에서 희생자의 국적과 관계없이 또 전쟁 중임을 한정하지 않고 처벌 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30) 점령 미군 정부에 의한 몇몇의 뉘른베르크 계속재판 에서는 침략전쟁 내지는 전쟁범죄와의 관련성을 인정하지 않은 인도에 반하는 죄도 처벌할 수 있다고 해석하였다. 계속재판은 이 법에 의거해 시행됐다. 31) 이리하여 인도에 반하는 죄를 사후에 심판하는 일이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 는 초석이 놓여졌을 뿐만 아니라 인도적 개입의 원칙 자체를 주장함으로써 중 대한 인권 침해국에서도 주권은 중시되어야 한다는 지금까지의 국가주권론에 제한을 가했다고 할 수 있다. 32) 인도에 반하는 죄 가 평화에 반하는 죄와 달리 보편적 관할권의 승인을 얻 은 것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중요한 유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사실 은 인도에 반하는 죄의 중시화라고 하는 현대의 경향 그 자체로서, 많은 비판 을 받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것은 이 죄의 개념이 그렇게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벌의 근거로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쉬 운 것이 되었을 것이다. 33) 인도에 반하는 죄 에 의해 처음으로 심판을 받은 나치의 반인도적 범죄는 주요 범죄를 헤이그조약에 담겨있는 인도의 법칙 에 위배하는 국제범죄로서 심판 하려는 자세는 재판 추진론자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清 水 正 義, 1998, 위의 글, 14쪽. 30) 인도에 반하는 죄 의 개념은 일부 변경되어 평화에 반하는 죄 전쟁범죄와의 관련 을 요건으로 하지 않게 됐다. 즉 국제군사재판소 헌장의 인도에 반하는 죄 가 전쟁 중의 범죄 행위와의 관련을 요건으로 한 것인데 반해, 본 법률은 그 요건을 제거해, 나치의 비인도적 행위를 인도에 반하는 죄 로서 심판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木 佐 芳 男, 2001, 앞의 글, 120쪽. 31) 芝 健 介, 1988, 앞의 글, 29~30쪽. 32) 芝 健 介, 2002, 앞의 글, 27쪽. 33) 清 水 正 義, 2005, ニュルンベルク 裁 判 成 立 史 研 究 の 動 向, 白 鴎 法 学 25호, 200~203쪽; 1946년에 개최된 제1회 유엔총회가 뉘른베르크재판소 조례에 의해 인정된 국제법의 제원칙 을 확인하는 결의를 전원일치로 채택하고 그 후 제노사이 드조약, 제네바 제조약, 제네바조약 관련 2개의 추가의정서, 전쟁범죄 및 인도에 반하는 죄에 대한 시효부적용조약(1968)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林 博 史, 1998, 裁 かれた 戦 争 犯 罪 : イギリスの 対 日 戦 犯 裁 判, 300쪽.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제에 관한 일고( 一 考 ) 15 처벌로는 해소될 수 없는 인간의 조건 자체에 대한 범죄라는 특이한 것으로 전 쟁과는 기본적으로 관계가 없다. 따라서 통례의 전쟁범죄 와 구별되어야 하며 그보다도 훨씬 무거운 죄악이라는 인식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2_극동국제군사재판과 일본군 위안부 극동에서의 중대 전쟁범죄인의 공정하고 신속한 심리 및 처벌을 위해 34) 도쿄 에 국제군사재판소를 설립하였다. 이 재판소 설립 근거가 되는 극동국제군사 재판소 헌장의 제5조에는 국제군사재판소 헌장 제6조와 같은 평화에 반하는 죄, 통례의 전쟁범죄, 인도에 반하는 죄 등 3가지의 죄가 규정되어 있다. 이 중 인도에 반하는 죄 의 정의도 국제군사재판소의 것과 거의 비슷하다. 다만, 국제군사재판소에서는 반인도적 행위의 대상이 민간인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 이 다를 뿐이다. 그렇다고 극동국제군사재판소 헌장이 제시한 반인도적 행위의 대상에 당 시 일본 국적을 갖고 있었던 한국 출신 민간인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 다. 35) 인도에 반하는 죄의 규정은 연합국 영역에서 또는 연합국 국민에 대한 위반 행위에 한정하지 않고 추축국 영역에서 연합국 국적을 갖고 있지 않은 사 람들에 대한 반인도적 행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36)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 전 후에 실체화되는 인도에 반하는 죄의 큰 특징은 자국민에 대한 것도 포함해 민간인에 대한 반인도적 행위도 전쟁범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37) 따라서 일본 이 당시 조선은 일본의 일부이고 조선인은 일본인이므로 자국민에 대한 전시 34) 극동국제군사재판소 헌장 제1조. 35) 김명기 교수는 국제군사재판소 헌장은 자국민에 대해서도 인도에 반하는 죄 를 범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으나 극동국제군사재판소 헌장은 그러하지 않다. 김명기, 2001, 국제인도법상 여자정신대에 대한 일본의 비인도적 행위와 국가책임의 성 립, 인도법논총 21호, 12쪽. 36) 岡 田 泉, 1995, 人 道 に 対 する 罪 処 罰 の 今 日 的 展 開, 世 界 法 年 報 15호, 51쪽. 37) 荒 井 信 一, 1995, 戰 爭 責 任 論, 岩 波 書 店, 165~166쪽.
16 동북아역사논총 50호 의 동원은 문제될 수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고 하겠다. 38) 뉘른베르크재판에서 유죄를 받은 많은 범죄자가 인도에 반하는 죄 에 의한 것이었으나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인도에 반하는 죄 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물론 인도에 반하는 죄 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으며, 39) 그 어떠한 인도에 반하는 죄 의 대상이 되는 범죄도 심리 대상이 되지 않았다. 40) 이렇게 소극적으로 대응한 데에는 당시 미국이 일본 점령정책을 냉전정책과 동조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일본 제국주의의 구 지도자를 부활시켜 국내 정치 를 보수적으로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41) 또 미국의 아시아 패권전략의 일 환으로 일본의 공산화를 막고 경제부흥을 이룩하기 위해 개인배상의 법리를 제공해주는 통례의 전쟁범죄 및 인도에 반하는 죄 에 대해서는 심판하지 않았 기 때문이다. 42) 극동국제군사재판은 뉘른베르크재판과 거의 같은 법리에 의해 제정된 인 도에 반하는 죄 가 일체 무시된 형태로 진행되어, 43) 일본 제국주의가 나치 독일 38) 李 載 坤, 1992, 일본의 종군위안부이용에 대한 국제법적 책임, 법학연구 제3권 1호, 8쪽. 39) 1943년 10월 20일 런던연합국전쟁범죄위원회(UNWCC)에서의 논의를 보면 나중 에 인도에 반하는 죄 로서 정식화되는 잔학 행위는 유대인에 대한 범죄만을 심판하 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일본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林 博 史, 2004, 連 合 国 戦 争 犯 罪 政 策 の 形 成 連 合 国 戦 争 犯 罪 委 員 会 と 英 米 ( 上 ), ( 下 ) 自 然 人 間 社 会, 関 東 学 院 大 学 経 済 学 部 総 合 学 術 論 叢 36~37호, 73쪽. 단,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 (Batavia) 네덜란드 전범재판에서는 35명의 네덜란드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 로 강 제 동원한 일본군을 심판하였다. 40) 아라이 신이치[ 荒 井 信 一 ]는 인도에 반하는 죄 를 심판하지 않은 점 외에 재판기간 이 짧은 점, 식민지종주국 출신의 판사가 주를 이루어서인지 아시아의 현지 민중에 가해진 피해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은 점 등을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荒 井 信 一, 1995, 앞의 책, 164~166쪽. 41) 荒 井 信 一, 1995, 위의 책, 170쪽. 42) 이장희, 2009, 도쿄국제군사재판과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대한 국제법적 비교연구, 동북아역사논총 25호, 224쪽. 43) 뉘른베르크재판은 새로운 폭력범죄의 유형인 나치 폭력범죄를 심판하는 근거로 인도에 반하는 죄 를 적용함으로써, 역사적 대규모 폭력범죄의 단죄라는 20세기적 과제를 선구적으로 완수했다는 점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清 水 正 義, 2005, 앞의 글, 200~203쪽.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제에 관한 일고( 一 考 ) 17 보다 인종주의적인 측면에서 철저했음에도, 44) 반인도적 범죄를 심판하지 않았 다. 이처럼 일본의 전쟁지도자가 인도에 반하는 죄 에 의해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반인도적 범죄 행위로 인식하지 않 고 청구권협정에 의해 모두 해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극동국제군사재판 에서 인도에 반하는 죄 에 의해 관련자를 처벌했다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 한 일본 정부의 태도는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이제라도 일본 정부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심판한 평화에 반하는 죄, 인도에 반하는 죄 등의 법리를 규정한 극동국제군사법정 및 연합국군사법정의 재판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제11조 에 따라 일본이 받아들였으므로 인도에 반하는 죄 에 해당되는 위안소 제도의 피해자들에 대해 공식사죄 및 배상과 미래세대에 대한 역사교육 등의 구제의 길을 열어 놓아야 한다. Ⅳ. 한일청구권협정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1_청구권협정과 개인청구권 한국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하 대일평화조약)과 관련해 최종적으로 연합 국으로부터 배제됨으로써, 한일 양국은 피해보상 교섭을 14조에 의한 배상 요 구로서가 아니라 제4조에 따른 1951년부터 1965년까지 재산 및 청구권 의 처 리 문제로서 교섭하였다. 그 결과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이하 청구권협정)을 체결하고 국교 를 정상화하였다. 그러나 올해로 50년이 되었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 한 여러 과거사 문제는 아직도 한일 양국의 무거운 현안으로 남아 있다. 44) 芝 健 介, 2002, 앞의 글, 22쪽.
18 동북아역사논총 50호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된 재산 및 청구권 의 범위와 동 협정에 의해 외교적 보호권만이 포기된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우선 해결된 범위에 관하여 논한다. 대일평화조약 제14조(a)에는 일본과 교전상태에 있었던 연합국 측에 대한 배상 규정이 있다. 한편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한국과 재산 및 청구권 처리의 근거가 되는 이 조약 제4조(a)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청산에 대해서는 어떠한 규정이나 언급도 없다. 마찬가지 로 이 조항에 근거해 체결된 청구권협정의 교섭 과정에서도 식민지 지배의 청 산을 상정한 교섭은 한 번도 없었다. 45) 따라서 대일평화조약 제4조(a)의 재산 및 청구권 이나 청구권협정 제2조 1항에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 이라고 한 재산 및 청구권 은 식민지 지배와 관련된 일본의 반인도적 불법 행위 책임과는 무관한 것이다. 청구권협정은 한반도가 일본으로부터 분리 분 할됨으로써 발생한 한일 양국 간 재정적 민사적 채권 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해결된 범위도 한국 측이 제시한 대일청구 8항목에 한정된 것일 뿐이다. 46)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청구권협정으로 한일 간의 보상 문제는 모두 해결 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청구권협정 제2조 1항에 따라 한국 및 한국인이 일본에 대해 갖는 재산 및 청구권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 으로 소멸되었다 는 것이 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 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고, 일본 정부도 식민지 지배의 법적 책임을 45) 太 田 修, 2006, 日 韓 財 産 請 求 權 問 題 の 再 考 脫 植 民 地 主 義 の 視 角 から, 文 學 部 論 集 第 90 号, 6~7쪽. 46) 吉 澤 文 寿, 2012, 日 韓 請 求 權 協 定 と 戦 後 補 償 問 題 の 現 在 第 2 条 条 文 化 過 程 の 検 証 を 通 して, 平 和 研 究 38 号, 50쪽; 전쟁배상 포기에 관한 규정인 평화조약 제14조는 법률적으로 전혀 다른 성질의 문제 인 국가의 분리 분할에 따른 재산처 리를 위한 교섭이었던 한일교섭 및 그 결과 체결된 청구권협정과는 무관하다. 따라 서 가령 한일교섭에서 일부 손해배상적인 성격의 권리 취급에 관해 논의되었다고 하더라도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한국과 일본은 전쟁상태 가 아니었던 이상, 어떠 한 점에 있어서도 전쟁배상 포기가 전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五 十 嵐 正 博, 2008, 不 二 越 勤 労 挺 身 対 損 害 賠 償 等 請 求 控 訴 事 件 意 見 書 ( 平 成 19 年 (ネ) 第 150 號 ) 참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제에 관한 일고( 一 考 ) 19 부인하고 있음에도, 식민지 지배와 직결된 불법 행위 를 원인으로 하는 일본의 책임도 청구권협정으로 인하여 해결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47) 다음으로 청구권협정에 의해 포기된 것이 외교적 보호권만인지, 아니면 개 인청구권까지도 포기된 것인지에 관해 확인한다. 일본 정부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포기된 것은 양국이 국가로서 갖고 있는 외교적 보호권만이라고 하였다. 1991년 8월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당시의 야나이 순지[ 柳 井 俊 二 ] 조약국장이 청구권협정에 의해 소멸된 것은 국가 간의 외교보호권이지 개인의 청구권 자 체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답변하는 등 일본 정부의 견해는 1990년대 초까지 외 교적 보호권만이 소멸된 것이며 개인의 청구권 자체는 소멸되지 않았다고 48) 편의적으로 해석해 오면서 개인청구권은 남아있다는 입장이 확립되어 있었 다. 49) 그러나 국가의 책임을 부정하는 근거로 적용해 온 제척기간 시효 및 공 권력무책임원칙의 적용이 거부되자 2001년쯤부터 일본 정부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개인청구권도 소멸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안이하게 책 임을 회피하는 조약교섭에 의해 보상청구권을 포기하게 한 것을 추인하는 법 원의 입장에는 비판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50) 그렇다면 과연 국가는 평화조약 등을 체결할 때 무제한으로 국민의 권리를 47) 김창록, 2015, 한일 청구권협정 에 의해 해결 된 권리 일제 강제동원 피해 관 련 대법원 판결을 소재로, 법학논고 49집, 815쪽; 일본 정부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즉 1965년 11월 25일의 일본 참의원 일한조약 등 특별위원회 에서 청구권협 정에 대해 1959년 5월에 체결된 일본국과 베트남공화국과의 배상협정 과 청구권협 정과의 차이점에 대한 기우치 시로[ 木 內 四 郞 ] 참의원 의원의 질문에 대해, 후지사 키 마사토[ 藤 崎 萬 里 ] 외무성 조약국장은 배상과 청구권의 문제는 법률적으로 성 질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배상은 평화조약에 근거해 패전국으로서 전승국에 지 불되어야 하는 것입니다만, 청구권의 경우는 서로의 재산청구권 관계의 정리라고 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라고 답변하였다. 第 50 会 国 会 参 議 院 日 韓 条 約 等 特 別 委 員 会 会 議 録 第 4 号. 48) 김창록, 2009, 일본군 위안부 헌법소원, 法 學 論 攷 제31집, 351~353쪽. 49) 小 畑 郁, 2006, 請 求 権 放 棄 条 項 の 解 釈 の 変 遷, 芹 田 健 太 郎, 棟 居 快 行, 薬 師 寺 公 夫, 坂 元 茂 樹 編 集 代 表, 国 際 人 権 法 と 憲 法, 378쪽. 50) 吉 田 邦 彦, 2007, 戦 後 補 償 の 民 法 的 諸 問 題 ( 下 ) 補 償 理 論 及 び 掘 り 起 こし 被 害 者 の 視 点 からの 再 検 討, 判 例 時 報 1977호, 35쪽.
20 동북아역사논총 50호 처분하는 권리를 갖고 있는가? 이에 대해 오바타 가오루[ 小 畑 郁 ]는 적어도 대 일평화조약의 청구권 포기 조항에 관해서는 사인의 권리자체 포기 설이 동 규 정의 해석으로서는 타당할 것이다. 그런 해석을 한다고 하더라도 예를 들어, 인도에 반하는 죄에 해당하는 중대한 손해에 대한 보상의무를 일본 국가의 의 사에 의해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라고 하였다. 51) 게다가 제네바 4조약의 공통규정에 의거해 국제인도법의 중대한 위반 행위에 대해서는 대일평화조약 등에 의해 청구권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해석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했으며, 최 근에는 인도에 반하는 죄의 개념 자체가 피해자의 배상청구권도 포함하는 것 으로 발전해 왔다 고 하였다. 52) 이제 국제관계의 처리에서 국민의 개인적 권리 를 자유롭게 처분할 수 없다는 논리가 증가하고 있으며, 더반선언이나 마우마 우 소송이 보여주듯이 식민지 지배 전쟁에 의한 반인도적 범죄 행위의 책임도 면제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추세다. 53) 2_청구권협정과 위안부 문제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청구권협정에 의해 청구권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하지만 동 협정문으로는 해결되었다고 하는 청구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이 청구권협정으로 위안부 문제 도 해결되었다고 주장한다. 한일외교문서를 심층적으로 분석한 장박진도 5차 한일회담에서 한국 정부 는 대일청구 8항목 요구가 재한일본인 재산의 취득으로 인해 영향을 받지 않 는다는 논리를 지키기 위해 그 재산을 교전관계에 따른 배상으로서가 아니라 reparation 으로서 받았다는 해석을 천명했 기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 를 포함 한 식민지 지배에서 연유하는 모든 피해가 청산되었다는 결론을 도출할 가능 51) 小 畑 郁, 2006, 앞의 글, 381쪽. 52) 小 畑 郁, 2006, 위의 글, 381쪽. 53) 太 田 修, 2013. 10, もはや 日 韓 請 求 權 協 定 で 解 決 済 み ではすまされない, 世 界, 194~195쪽.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제에 관한 일고( 一 考 ) 21 성을 열었으며, 이는 자기 스스로 식민지 피해에 대한 보상 문제가 이미 끝난 문제라고 인정한 셈이었다 고 한다. 54) 그러나 한일회담 과정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의 전쟁범죄에 의한 피해 에 대해서는 상정되지 않아 55) 문제로 삼지 않은 것을 해결되었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무리가 있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의 존재를 처음으로 인정한 것은 빨라야 1992년 위안소 설치나 운영 감독 등에 일본 정부가 관여했다 고 인정 한 가토 담화를 낼 때다. 따라서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 위안부 는 사실로 서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문제조차 되지 않았으므로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해결 되었다고 볼 수 없다. 56) 또 장박진은 개인의 청구권과 관련해서도 기본적으로 국가는 국제법상 개 인의 권리를 없앨 수 없다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었음 에도, 각 개인에게 가해 진 피해에 기초한 개인청구권 문제는 그것을 해결시켰다고 하는 막판 제2조 기초 교섭에서도 한 번도 명시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채, 사실상 해결 범위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고 하였다. 57)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개인과 관련 된 모든 문제가 바로 법적으로 해결되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은 일본 정부가 전후처리 문제를 모두 한일회담에서 매듭지으려는 의도로 제시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 으로 한다는 데 합의를 해준 한국 정부에 그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 58)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4년 간의 회담에서 단 한 번도 의제로서 따로 논 의가 된 적이 없으나 회담 과정에서 일본군 위안부 와 관련된 내용이 전혀 언 급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일 양측의 한일회담 외교문서에는 대일청구권 항목으로 전쟁 지역에 남기고 온 예금 및 재산의 미수금 이라는 내용이 기술 54) 장박진, 2015, 미완의 청산, 역사공간, 562~563쪽. 55) 吉 澤 文 寿, 2012, 앞의 글, 48~49쪽. 56) 慰 安 婦 問 題 の 解 決 とは 何 か, 世 界, 2015년 7월호 좌담회에서 김창록 교수, 164~165쪽. 57) 장박진, 2015, 한일 청구권협정 제2조의 형성 과정(1965. 3~6) 분석 개인청구권 문제를 중심으로, 동북아역사논총 48, 337~338쪽. 58) 장박진, 2015, 위의 책, 780쪽.
22 동북아역사논총 50호 되어 있다. 59) 또 1953년 4월 15일 개시된 2차 한일회담에서 한국은 기탁금과 관련된 논의에서 돈이나 재산을 남기고 귀국한 일본군 위안부 가 있다고 언급 하였다. 60) 이 내용만 본다면 일본군 위안부 와 관련된 언급 내용은 피해자가 남긴 채 권의 미수금 문제 등 기탁금 반환 문제에 한정한 것이지, 반인도적이고 불법적 인 범죄 행위 차원의 새로운 범주를 연 것은 아니었다. 61) 다시 말해 한일회담 초기부터 확실히 그 존재가 감지되었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여성의 존엄 침 해에 대한 책임 추궁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62) 경제협력 방식에 따라 청구권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협의하는 과정에서 한 국 정부가 일본의 한국에 대한 경제협력은 청구권 해결을 위한 수단이라고 강 조했으나 일본 정부는 배상이나 청구권과는 관계가 없는 경제협력이라고 주장 한 것을 보면, 일본이 위안부 피해자 구제나 식민지 지배 책임을 완수하려 했 다고는 볼 수 없다. 유엔인권소위원회의 맥두걸 보고서도 63) 한일협정 체결 당시 위안소 설치 에 대한 일본군의 직접적 관여가 드러나지 않은 채 은폐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청구권협정은 한국과 일본 간의 경제조약이지 일본의 인권법 위반 행위를 다 루는 조약은 아니었다고 지적하였다. 즉, 일본군 위안부, 강간, 성노예 등 어떤 언급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한일협정 체결 당시 일본이 한국에 지불한 금액에는 일본의 잔학 행위 피해자에 대한 개인배상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 이다. 따라서 일본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 개인에 대한 정부 차원의 배 상을 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2005년 8월 26일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합동 59) 조윤수, 2014,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한일관계: 1990년대 한국과 일본의 대응을 중심으로,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36집 1호, 73~75쪽. 60) 장박진, 2015, 앞의 책, 434쪽. 61) 장박진, 2015, 위의 책, 434~435쪽. 62) 장박진, 2015, 위의 책, 334쪽. 63) 부속문서는 일본군 위안소에 대해 성노예 제도로서 여성의 인권을 다루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제에 관한 일고( 一 考 ) 23 위원회에서 회담문서 등을 토대로 검토해 온 청구권협정의 법적 효력 범위 등 에 대해, 한일청구권협정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샌프란시스코조약 제4조에 근거해 한일 양국 간 재정적 민사적 채권 채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 이었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 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청구 권협정에 의해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 고 하였다. 64) 이와 같이 판단한 것은 반인도적 범죄 행위에 의한 문제로서 한 일회담의 의제였던 대일청구 8항목의 범위에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써 이 판단 이전까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개인적 청구 권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판단 이후에는 외교적 보호권도 존재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65) 또한 후속 조치로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일본 정부에 대해 법 적 책임 인정 등 지속적인 책임 추궁을 하는 한편, 유엔인권위 등 국제기구를 통해 이 문제를 계속 제기하는 등 외교적 대응방안을 지속적으로 강구해 나가 기로 했다고 밝혔다. 66) 한국 정부가 이와 같이 결정한 것은 일본군 위안부 문 제가 한일회담 진행 당시의 의제였던 대일 8항목 요구 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 인 것으로 판단된다. 67) 이것은 2006년 7월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64) 국무조정실 보도자료, 2005. 8. 26. 협상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 의 법적 배상 보상을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고통 받은 역사적 피해 사실 에 근 거, 정치적 차원에서 보상을 요구한 것이며, 무상 3억 달러는 개인재산권(보험, 예 금), 조선총독부의 대일채권, 한국 정부가 국가로서 갖는 청구권, 강제동원 피해보 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되어 있다고 판단하였다. 65) 김창록, 2009, 앞의 글, 354쪽. 66) 국무조정실 보도자료, 2005. 8. 26. 67) 장박진, 2015, 앞의 책, 777쪽.
24 동북아역사논총 50호 Ⅴ. 헌법재판소 결정과 양국 정부의 대응 1_헌법재판소 결정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1965년 청구권 협정 체결 이후에도 한국 정부에는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작위의 무가 있음에도, 한국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국의 외교적 보호권 이 청구권협정에 의해 포기되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68)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들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잇따라 패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2005년 8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구제와 관련해 일본 에 법적 책임이 있다 고 한 한국 정부의 견해를 근거로 2006년 7월 한국인 일 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쟁점은 일본국에 대해 가지는 일본군 위안부 로서의 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 제2조 제1항에 의해 소멸되었는지 여부에 관한 한일 양국 간 해석상의 분쟁을 청구권 협정 제3조가 정한 절차에 따라 해결하지 아니하고 있는 정부의 부작위가 위 헌인지 여부를 가리는 것이었다. 69) 일본 정부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일본군 위안부 로서의 배상청구권이 모두 소멸했다고 주장하며 청구인들에 대한 배상을 거부하고 있고, 이에 반해 한국 정부는 2005년 8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정부 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 한 반인도적 불법 행위 이므로 청구권협정 제2조 제1항에 의해 일본의 법적 책 임이 소멸하지 않고 남아 있다고 하였다. 또한 한국 정부는 후속 조치로서 위 안부 문제가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일본 정부에 대해 법적 책임 인정 등 지속적인 책임 추궁을 하는 한편, 유엔인권위 등 국제기구를 통 68) 김창록, 2009, 앞의 글, 350~351쪽. 69) 헌재 2011.8.30. 2006헌마788 결정(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 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3조 부작위 위헌 확인 사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제에 관한 일고( 一 考 ) 25 해 이 문제를 계속 제기하는 등 외교적 대응방안을 지속적으로 강구해 나가기 로 했다고 밝혔다. 70) 따라서 한일 양국 간에는 일본군 위안부 의 배상청구권에 관한 해석상의 분쟁이 존재하기 때문에 한국 정부에는 청구권협정 제3조에 따 라 해결을 위한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피청구인인 한국 정부는 외교적 보호권은 국가의 고유한 권한으로 서 그 귀속 주체는 국가이고 국가의 광범위한 재량권이 인정되기 때문에 개인 이 자국 정부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권리는 아니며 국가도 구체적인 외교적 조치를 취해야 할 법적 의무가 없다고 하였다. 71) 2011년 8월 헌법재판소는 청구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재산 권 등 기본권의 중대한 침해 가능성, 구제의 절박성과 가능성 등을 널리 고려 할 때, 피청구인에게 이러한 작위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재량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고 하였다. 72) 결국 헌법재판소는 청구인들이 일본국에 대하여 갖는 일본 군 위안부 로서의 배상청구권이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 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2조 제1항에 의하여 소멸되었는지 여부에 관한 한 일 양국 간 해석상의 분쟁을 위 협정 제3조가 정한 절차에 따 라 해결하지 아니하고 있는 피청구인의 부작위는 위헌임을 확인한다 는 판결 을 내렸다. 73) 즉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반인권적 범죄를 행하고도 법적 책 임을 지지 않는 일본 정부에 대해 한국 정부가 적극적인 교섭을 하는 등 외교 적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헌법에 반한다는 것이다. 위헌 결정이 내려진 이후에도 한일 정부의 협상이 답보상태인 것이 배경으 로 작용해, 2013년 8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2명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 배상청구소송을 청구하기에 앞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민사조정 신청서를 제 출하였다. 74)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법원에 소송을 낸 적은 있지만 국내 법 70) 한일회담문서공개등대책기획단, 국무조정실 보도자료(2005. 8. 26) 참조. 71) 헌재 2011. 8. 30. 2006헌마788 결정. 72) 헌재 2011. 8. 30. 2006헌마788 결정. 73) 헌재 2011. 8. 30. 2006헌마788 결정 주문. 74) 연합뉴스, 2013. 8. 13. 일본 정부가 조정에 응하지 않을 경우, 재판부는 민사조
26 동북아역사논총 50호 원에 소송을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_한일 양국 정부의 대응 한국 정부는 2005년 8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구제와 관련해서 청구권협 정에 의해 해결되지 않았으며 일본에 법적 책임이 남아있으므로 일본 정부에 대해 법적 책임 인정 등 지속적인 책임 추궁을 하겠다 는 공식 입장을 밝혔으면 서도 일본 정부에 대해 어떠한 적극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75) 또 2011년 8 월 헌법재판소가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작위의무의 위반이라고 했음에도, 정부는 일본 정부에 청구권 협정 제3조 1항에 따른 외교협의를 정식 요청했으나 일본 정부는 청구권협정으로 이미 해결된 문제라고 하며 협의에 응하지 않았다. 2011년 11월 이명박 대통령은 위헌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한일정상회담에 서 일본의 노다 요시히코[ 野 田 佳 彦 ] 총리에게 위안부 문제 해결을 강력히 촉 구하였다. 2012년 4월 노다 정부에서는 사이토 쓰요시[ 斎 藤 勁 ] 관방부장관이 청와대를 방문해 일본 정부의 해결책이 담겨 있는 노다 총리의 친서를 전달하 는 등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76) 이때 일본 정부가 제 시한 안이 일본 총리의 사죄편지를 주한일본대사가 직접 피해자들에게 전달하 고, 일본 정부 예산으로 인도적 조치를 위한 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하 고 있는 이른바 사사에 안 77) 이다. 그러나 노다 정부의 뒤를 이은 아베 정부는 정법에 따라 강제조정 결정을 내릴 수 있고 이의 신청이 들어오면 소송 절차로 넘 어갈 수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배상 결정을 받더라도 일본 법원에 집행을 위한 소송을 별도로 제기해야 한다. 75) 김창록, 2009, 앞의 글, 358~359쪽. 76) 노다 총리는 지난 2012년 8월 27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하고 사죄 반성한 1993년의 고노 담화와 관련해 강제연행을 했 다는 사실이 문서로 확인되지 않았고, 일본 측 증언도 없었다 고 답변하였다. 77) 2012년 사사에 겐이치로[ 佐 佐 江 賢 一 郞 ] 당시 외무성 사무차관이 방한해 제시한 안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제에 관한 일고( 一 考 ) 27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은커녕 과거 일본 정부의 노력마저도 노골적으로 헛되게 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2007년 3월 총리 재임 중, 미국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채택되기 전에 고노 담화를 부정하는 발언을 하였다. 78) 아베 총리는 자신의 발 언이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비판을 받게 되자, 4월 미국 방문 도중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하면서도 일본군 위안부 의 강제성은 부정하였다.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14년에도 아베 총리는 고노 담화 자체는 계승한다고 하면서, 당시 주 변국들을 배려하여 강제 동원의 증거가 명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변국과 의 외교적 측면을 고려해 강제동원을 인정했다 는 검증결과 보고서를 국회에 제출해 또다시 고노 담화를 흔들더니, 2015년 3월 미국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는 인신매매의 희생자이지 강제로 동원된 것이 아니라는 발언을 하였다. 그런 와중에 2014년 4월부터 현재까지 한일 양국은 국장급 회의를 열 차례 개최하는 등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5 년 11월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정상회담을 갖고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안 에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의를 가속화하기로 합의하였다. 79) 그러나 두 정상은 각각 피해자의 수용 및 국민의 납득 과 미래지향 을 강조하 고 있어 아직도 인식의 차이가 여전함을 알 수 있다. 78) 강제성에 대해서는 종래로부터 논의가 있어 왔다. 당초 정의되어진 강제성을 뒷받 침하는 것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 아닌가 (3.1 기자단 질문에 답변), 미국 하원이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하더라도 사죄할 의향은 없다, 협의의 강제성과 관련 근거 있는 증언은 없다 (3.5 參 議 院 豫 算 委 員 會 ). 79) 조선일보, 2015. 11. 3.
28 동북아역사논총 50호 Ⅵ. 맺음말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구제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는 지에 관해 논하였다. 이를 위해, 일본에서 있었던 피해자구제 소송을 분석하고 위안부 제도의 국제법 위반으로 성립된 일본의 국가 책임은 무엇인지, 관련자 를 처벌해 피해자 구제의 근거로 삼아야 했던 극동국제군사재판, 이미 해결했 어야 함에도 해결할 기회를 놓쳐버린 한일청구권협정을 재조명하고 한국 정부 가 일본 정부에 대해 해결을 요청하는 데 직접적인 계기가 된 위안부 피해 여 성들의 헌법소원과 후속조치 등에 관해서도 고찰하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 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 행위에 의한 것으로 그 유례를 발견할 수 없는 특수한 인권침해의 문제이기 때 문에 명백히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포괄적인 구제조치를 취해야 한다. 80) 지금 이라도 일본 정부는 일제강점기 구 일본 정부와 군대에 의한 위안부 강제동원 과 위안소 설치 운영 등의 국제법 위반과 이에 따른 국가 책임을 인정하고 일 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 법적사죄와 배상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현 상황은 만 만치 않다. 일본 정부가 국가 책임을 인정하면, 일본이 범죄국가가 되고 법적 배상도 해야 하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와의 해결을 위해 협상을 시작할 때부터 위안부 피 해 할머니들과 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 이 기준이라고 강조해왔듯이, 설 령 한일 양국이 외교적으로 합의한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한 피해자 할머니들 과 국민의 공감대가 필요하다. 최선의 방법은 일본 정부가 국가 책임을 인정하 고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공식사죄 및 배상과 미래세대에 대한 역사교육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들에 의해 역사의 아픔을 겪은 한국 중국 등 이웃 나라들과 공존 공유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 믿는다. 80) 김창록, 2009, 앞의 글, 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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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제에 관한 일고( 一 考 ) 31 [국문 초록]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제에 관한 일고( 一 考 ) 김관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일 간 주요현안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일본군 위 안부 피해를 공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에 서 희생자 보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1991년부터다. 이때 일본 정부는 위안부 동원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음을 인정하고 사과와 반성을 표명한 고 노 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아시아여성기금을 만들어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 보상 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시아여성기금은 일본 정부가 피해 여성들에게 사죄와 배상을 해야 했음에도 위로금으로 인도 적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었으므로 피해 할머니들에게 거절당해 실패하였다. 2011년 8월 헌법재판소는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청구권협 정 제3조가 정한 절차에 따라 해결하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정부의 부 작위는 위헌 이라고 하였다. 이 판결에 따라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2012년 4월 일본 정부도 절충안을 제시했으 나 해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2014년 4월 이후부터 현재까지 한일 양국은 국 장급 회의를 개최하는 등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왜 일본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에게 법적사죄 와 배상 을 해 야 하는지, 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해결을 요구해야 하는지, 한국인은 물 론 일본인들도 알아야 한다. 그러면 한국 정부의 조치에 정당성이 있다는 것을 양국 국민은 이해할수 있을 것이며 오해도 해소될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 책임은 일본 정부에 있음을 논
32 동북아역사논총 50호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사안을 제시하고 분석한다. 주제어 일본군 위안부, 극동국제군사재판, 한일청구권협정, 일본의 국가 책임, 헌법 소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제에 관한 일고( 一 考 ) 33 [ABSTRACT] The Consideration of the Resolution for the Japanese Military Comfort Women Issue Kim Gwanwon The issue of the Comfort Women who suffered from the Japanese military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has been magnified between South Korea and Japan, and recently has become pressing since comfort women demanded an official apology and compensation from the Japanese government in 1991. At that time, the Japanese government acknowledged that the Japanese military had been directly and indirectly involved in compulsory mobilization of comfort women and issued the Kono Statement as an apology for the Japanese military s involvement in the use of women as sex slaves. In addition to this, the Japanese government created the Asian Women s Fund and tried to resolve the issue through compensation for the victims. However, even though the Japanese government had to apologize and provide compensate officially for the women, the Asian Women s Fund only tried to take moral responsibility toward the comfort women from a humanitarian standpoint. Therefore, it was rejected by the victims and failed. In August 2005, the South Korean government announced its official position: It was not involved in the text of the 1965 Agreement between Korea and Japan of relevance to the relief of comfort women. And the government requested an apology from Japan and compensation at the
34 동북아역사논총 50호 government level. In August 2011, the South Korean court arrived at a decision that it was unconstitutional that the South Korean government did not make proper efforts regarding the issue of comfort women. In accordance with this decision, the Korean government strongly urged Japan to settle the issue. In April 2012, the Japanese government also made a compromise plan, but a settlement was not reached. Both South Korea and Japan have tried diplomatic efforts for the comfort women by holding meetings at the director level since April 2014. Japanese as well as Koreans should know why the Japanese government must apologize and compensate legally, and why the South Korean government must call for a resolution on the basis of this issue. Then the two nations will understand that the South Korean government took appropriate measures, and the misunderstandings between the two nations will be solved to some extent. The purpose of this paper thus is to explain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bears the responsibility for settling the comfort women issue. For this, I review th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 the 1965 Agreement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Japan, Japan s national responsibility, and the South Korean court s decision, and analyze them in relation to the comfort women. Keywords Japanese Military Comfort Women,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 1965 Agreement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Japan, Japan s national responsibility, constitutional compla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