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3EBB5BFC0DA20B4ABC0B8B7CE20BABB20C0CEB7F9BFAABBE728BDC5B1B9292E687770>



Similar documents
(120x8pt\306\355\301\375.hwp)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개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 hwp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진단, 표시・광고법 시행 1년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새만금세미나-1101-이양재.hwp

???? 1

DBPIA-NURIMEDIA

기사스크랩 (160504).hwp

3) 지은이가 4) ᄀ에 5) 위 어져야 하는 것이야. 5 동원 : 항상 성실한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해. 에는 민중의 소망과 언어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고,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 는

산림병해충 방제규정 4. 신문 방송의 보도내용 등 제6 조( 조사지역) 제5 조에 따른 발생조사는 다음 각 호의 지역으로 구분하여 조사한다. 1. 특정지역 : 명승지 유적지 관광지 공원 유원지 및 고속국도 일반국도 철로변 등 경관보호구역 2. 주요지역 : 병해충별 선단


김기중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인터넷 내용심의의 위헌 여부.hwp

5. 회 의내용 < 제 1호 안 : 2011학년도 법 안 회 제 철 산(안 )> 법인 사무국장의 성왼 보고에 이이 의장이 이사회 개회 용 선언하고 회계판려부장에 게 제 l 호 안인 학년도 입인 회계 결산(안)에 대한 성명융 지시함 회계판리부장이 2011 학년


untitled

래를 북한에서 영화의 주제곡으로 사용했다든지, 남한의 반체제세력이 애창한다 든지 등등 여타의 이유를 들어 그 가요의 기념곡 지정을 반대한다는 것은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는 반민주적인 행동이 될 것이다. 동시에 그 노래가 두 가지 필요조 건을 충족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 1. 법 제34조제1항제3호에 따른 노인전문병원 2. 국민건강보험법 제40조제1항의 규정에 의한 요양기관(약국을 제외한다) 3. 삭제< > 4. 의료급여법 제2조제2호의 규정에 의한 의료급여기관 제9조 (건강진단) 영 제20조제1항의 규

노인복지법 시행규칙

<B3EDBCFABDC7B7C2BDD7B1E22E687770>

PDF

<B9E9B3E2C5CDBFEFB4F5B5EBBEEE20B0A1C1A4B8AE20B1E6C0BB20B0C8B4C2B4D92E687770>

주지스님의 이 달의 법문 성철 큰스님 기념관 불사를 회향하면서 20여 년 전 성철 큰스님 사리탑을 건립하려고 중국 석굴답사 연구팀을 따라 중국 불교성지를 탐방하였습 니다. 대동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공의석굴, 맥적산석 굴, 대족석굴,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과 주변의 큰

2005년 6월 고1 전국연합학력평가

4) 이 이 6) 위 (가) 나는 소백산맥을 바라보다 문득 신라의 삼국 통 일을 못마땅해하던 당신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더 커지는 것이라는 당신의 말을 생각하면, 대동강 이북의 땅을 당나라에 내주기로 하고 이룩한 통 일은 더 작아진 것이라는 점에서,

인류의 가족, 인간의 동반자 영장류 기획 감수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대표 저자 장규태 이지사이언스 시리즈 19 인류의 가족, 인간의 동반자 영장류 2015년 3월 31일 초판 1쇄 인쇄 2015년 3월 31일 초판 1쇄 발행 저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기획 미래창조과학부 발간

<C3D6BFECBCF6BBF328BFEBB0ADB5BF29202D20C3D6C1BE2E687770>

교통사고합의금 도둑 안 맞기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상품 전단지

:::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2

DBPIA-NURIMEDIA

화이련(華以戀) hwp

ÆòÈ�´©¸® 94È£ ³»Áö_ÃÖÁ¾

歯1##01.PDF

<5BC1F8C7E0C1DF2D31B1C75D2DBCF6C1A4BABB2E687770>

120229(00)(1~3).indd

01Report_210-4.hwp

<C3D1BCB15FC0CCC8C45FBFECB8AE5FB1B3C0B0C0C75FB9E6C7E D352D32315FC5E4292E687770>



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시험지 출제 양식

177

제주어 교육자료(중등)-작업.hwp

¸é¸ñ¼Ò½ÄÁö 63È£_³»Áö ÃÖÁ¾

<C3D6C1BE5FBBF5B1B9BEEEBBFDC8B0B0DCBFEFC8A C3D6C1BEBABB292E687770>

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6±Ç¸ñÂ÷

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민주장정-노동운동(분권).indd

untitled

<C0CEBCE2BABB2D33C2F7BCF6C1A420B1B9BFAAC3D1BCAD203130B1C72E687770>


E1-정답및풀이(1~24)ok

<C1B6BCB1B4EBBCBCBDC3B1E2342DC3D6C1BE2E687770>

< BDC3BAB8C1A4B1D4C6C75BC8A3BFDC D2E687770>

최우석.hwp

교사용지도서_쓰기.hwp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cls46-06(심우영).hwp

0429bodo.hwp

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낙랑군

Print

사상체질의학회지

빈면

<C5F0B0E82D313132C8A328C0DBBEF7BFEB292E687770>

e01.PDF

-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진행과정 후쿠시마 제1원전(후쿠시마 후타바군에 소재)의 사고는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지방 을 강타한 규모 9.0의 대지진으로 인해 원자로 1~3호기의 전원이 멈추게 되면서 촉발되었다. 당시에 후쿠시마 제1원전의 총 6기의 원자로 가

zb 2) 짜내어 목민관을 살찌운다. 그러니 백성이 과연 목민관을 위해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목민관이 백성 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이정 - ( ᄀ ) - ( ᄂ ) - 국군 - 방백 - 황왕 (나) 옛날에야 백성이 있었을 뿐이지, 무슨 목민관이 있 었던

<C6EDC1FD20B0F8C1F7C0AFB0FCB4DCC3BC20BBE7B1D420B0B3BCB120BFF6C5A9BCF32E687770>

untitled

망되지만, 논란은 더욱 증폭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단 광주지역 민주화 운동 세력 은 5.18기념식을 국가기념일로 지정 받은 데 이어 이 노래까지 공식기념곡으로 만 들어 5.18을 장식하는 마지막 아우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걱정스러운 건 이런 움직임이 이른바 호남정서

루앙 의 공포 *주민들은 어두운 방 안에서 온갖 지혜와 힘이 도움이 되지 않는 천재지변이나 살인적인 대혼란이 가져다주는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와 같은 느낌은 기존의 질서가 뒤집 히거나, 더 이상 안전이 보장되지 않거나, 인간의 법이나 자연의 법칙이 보호해

09. 정덕배-중국생활체험기.hwp

<33C6E4C0CCC1F620C1A63139C8A320B8F1C2F72E687770>

2015년 2월 12일 사랑의 동삭교육 제 호 (2월) 년 2월 12일 사랑의 동삭교육 제 호 (2월) 6 겨울이 되면 1-4 박지예 겨울이 되면 난 참 좋아. 겨울이 되면 귀여운 눈사람도 만들고 겨울이 되면 신나는 눈싸움도 하고 겨울이

2 종편 시사토크 출연 `편향성 심각' 친여 64%, 친야 15% 채널A <뉴스스테이션 친여> 83% 본격 선거기간이 시작된 지난 1월 14일(선거 90일전)부터 2 월 13일(선거 60일전)까지 모니터 대상 프로그램에 출연해 정 치 이슈를 다룬 출연자들의 구성을 분석

남사고의 유토피아 2

640..

충남도보 제2072호

<5BC1F8C7E0C1DF2D32B1C75D2DBCF6C1A4BABB2E687770>

05.PDF

대표이사 K, L 4. 주식회사 동진여객 대표이사 M 피고보조참가인들 소송대리인 법무법인(유한) N 법무법인 O 제 1 심 판 결 부산지방법원 선고 2014구합20224 판결 변 론 종 결 판 결 선 고

제운의 블로그북

4. 역사, 신정일 교수님의 글모임4

지 생각하고, 재료를 준비하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이 작업을 3번 반복 하는 것만으로 하루가 다 간다. 그들이 제작진에게 투쟁하는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재료를 얻기 위해서다. 그 이상의 생각은 하고 싶어도 할 겨를이 없다. 이 땅은 헬조선이 아니다. 일단

握 t H I K 재적경제잉작과 귀하 본 보고서를 r 국제금융거래를 통한 자금세닥 유 형 및 대처방안 연구 에 관한 연구용역의 최종보고 서로 제출한니다 년 9 월 홈흩 를툴 E임 훌홈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34 정착부흥기 35 정착부흥기: 1884년 ~ 1940년 이 장에서는 인천 차이나타운에 1884년 청국조계지가 설정된 후로 유입 된 인천 화교들의 생활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기별로 정리하였다. 조사팀은 시기를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였다. 첫 번

<312E B3E2B5B520BBE7C8B8BAB9C1F6B0FC20BFEEBFB5B0FCB7C320BEF7B9ABC3B3B8AE20BEC8B3BB28B0E1C0E7BABB292DC6EDC1FD2E687770>

죄형법정주의2 20문 및 해설.hwp

194

삼외구사( 三 畏 九 思 ) 1981년 12월 28일 마산 상덕법단 마산백양진도학생회 회장 김무성 외 29명이 서울 중앙총본부를 방문하였을 때 내려주신 곤수곡인 스승님의 법어 내용입니다. 과거 성인께서 말씀하시길 道 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어울려야만 道 를 배울 수 있


3232 편집본(5.15).hwp

Transcription:

대학에서도 못 배우고 인류는 어떻게 평등사회로 발전해 왔는가?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싶고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으려고 하며 진실을 외면합니다. 역사와 정치 경제란 무엇인가?

서문 필자는 1956년 강원도 삼척군 장성읍에서 태어나 철암국민 학교를 다니다 1968년 부친을 여의고 이용소 머리감는 꼬마 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70년부터는 강원도 인제에서 이용소 머리감는 꼬마로 생활했으며 그 후 요리 집의 보이 ( 웨이터)생활도 하고 요리사노릇도 했으며 1978년 이용사면 허증을 취득했으나 이용업에 종사하지 않고 1979년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으로 내려가 결혼하면서 먹고 살기위해 석탄 광부생활을 시작합니다. 탄광에서 몇 차례 해고되고 해고투쟁을 전개해 복직되므로 이름이 알려져 1990년 탄광지역 총파업 때 한보탄광 비상대 책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가 구속되었으며 이후 석탄합리화 사업으로 탄광들이 폐광되었기 때문에 강원도 동해로 내려 가 시내버스 운전사가 됩니다. 시내버스운전사가 되어 노동조합대의원으로 활동하던 중 관 리자( 배차)에게 폭행을 당하고 오히려 해고가 되면서 해고무 효투쟁을 전개하던 중 부인이 당신은 노동운동에 미쳐 처 자식을 부양할 자격이 없으니 나가라. 면서 쫓아내므로 혼 자가 되어 서울에 올라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2004년 서울에서 시내버스운전사로 취직했으나 2006년 한건 의 사고가 발생되자 해고하므로 또다시 직장을 잃고 방황하 던 중 2007년 탄광에서 구속되었던 사건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고 2008 년 촛불집회가 벌어집니다. 촛불집회에서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직을 하지 않고 모든 사 람들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주의 활동을 한다는 사람들과 대화하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소위 사회주의 활동을 한다는 사람들과 대화 중 화폐도 노 동자들이 만들어 낸 생산물이므로 존치시켜야 한다, 고 주 장하는 말을 듣고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는데 불평등의 근원을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건설 한다면서 오히려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고심하다 집필을 결심했습니다.

인류가 평생 생산노동을 하고도 빈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 는 원인은 노력한 만큼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고 착취와 갈 취가 합법인 체제와 제도 때문으로 착취와 갈취가 형성되고 유지되는 근원을 분석하려고 노력해야 모든 착취와 갈취를 해체시킬 수 있게 되므로 필연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길을 가다가 돌에 맞았다면 맞은 사람이 건설 현장이나 낙 석위험 밑으로 지나가거나 아니면 누군가 돌을 던져 맞은 것이지 원인 없는 결과란 없습니다. 그런데도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고 결과만 놓고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기득권을 차지하고 근원을 은폐하려는 무리들 이 하는 주장이고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원인을 분 석하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 사람을 만나도 주거지( 거주지)나 직장이 같은 동 네에 있거나 왠지 걷고 싶어 그쪽으로 갔는데 상대방의 직 장이나 거주지가 거기 있다거나 아니면 회사일로 또는 무료 해서 그 장소를 갔다거나 원인이 있어 결과가 나타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먹을거리는 농민 어민이 수확 채취한 물질이지만 농민과 어민이 수확 채취하기 위해 사용하는 농기구과 어선 어구 등 모든 물질은 노동자들이 땀 흘려 생산한 물질이지 시장이나 화폐가 아닙니다. 인류역사는 실패를 경험하며 발전한다면서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냉철하게 분석하지 않고 실패한 경험만 강조하 는 것은 역사를 거스르려는 무리들이 피 착취자들에게 분노 만 표출하다 억압당하고 포기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주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왜 평등 한데 무엇 때문에 어떻게 통제당하고 억압받으며 불평등한 삶을 살게 됐는가를 분석해야 하며 지도와 지시가 함유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설명돼야 합니다. 인간이 평등하고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가 되려면 자유와 평 등을 부정하는 통제의 기틀이 무엇이고 어떻게 형성됐는지 를 고민해야 하고 억압과 통제의 근원을 깨트리려 노력할 때 모두가 평등하며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불평등은 자유를 부정하고 통제하고 지시하는 행위가 일어 나는 곳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통제하고 지시하는 행위들 을 거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드리도록 강요하는 것이 집단이나 조직이라는 명분들이 정해놓은 규칙( 법)들입니다. 그러므로 왜곡된 평등과 자유에 대한 주장들이 아니라 어떻 게 해야 모두가 평등하고 풍족하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 는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해법을 찾기 위 해 이글을 집필했습니다. 하지만 생활이 여의치 못해 글을 쓰지 못하다가 2010년 봄 에 집필을 시작했으나 얼마 쓰지 못하고 생활고 때문에 김 치공장에 들어가 노동을 시작했지만 공장에서 관리자( 반장) 라는 사람의 비인격적인 행위에 공장을 그만두고 집필에 열 중했습니다.

목 록 1. 인류의 탄생 1 ~ 5 2. 초기의 생활상 6 ~ 8 3. 집단생활의 시작 8 ~ 12 4. 원시종교의 출현 13 ~ 13 5. 농경의 출현 14 ~ 19 6. 문명의 발달 19 ~ 25 7. 노예시대의 시작 25 ~ 28 8. 법( 규칙) 의 출현 28 ~ 34 9. 모세의 탄생 35 ~ 38 10. 석가의 탄생 38 ~ 42 11. 로마제국의 출현 42 ~ 47 12. 로마공화정으로 발전 47 ~ 54 13. 스파르타쿠스 저항 54 ~ 58 14.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58 ~ 60 15. 예수의 탄생 60 ~ 65 16. 로마제정의 출발 65 ~ 71 17. 자유사상의 종교화 71 ~ 74 18. 로마제국의 분리 74 ~ 75 19. 무함마드( 영어 명: 마호메트) 의 탄생 75 ~ 83 20. 서로마제국소멸과 비잔티움 83 ~ 84 21. 봉건시대( 중세) 84 ~ 91 22. 백년전쟁과 농민혁명 91 ~ 94 23. 소작농의 출현 94 ~ 102 24.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102 ~ 107 25. 농민혁명과 수공업발전 107 ~ 117 26. 종교전쟁과 청교도 혁명 117 ~ 123 27. 식량생산의 대량화 123 ~ 128 28. 평등사상의 발전 129 ~ 135 29. 왕권계승과 학살전쟁 135 ~ 137

30. 자유를 위한 저항 137 ~ 147 31. 군부독재 출현 147 ~ 156 32. 노동자저항과 혁명 156 ~ 166 33. 유산자 위선자 민주주의 166 ~ 172 34. 다수결 선거선출주의 172 ~ 181 35. 전기의 발전 181 ~ 184 36. 모터의 발견 184 ~ 185 37. 자동차의 출현 185 ~ 187 38. 생산의 자동화 187 ~ 194 39 광산노동자들의 저항 194 ~ 199 40. 공황과 학살전쟁 199 ~ 205 41. 전쟁을 혁명으로 205 ~ 210 42. 공황으로 독재정권 발호 210 ~ 219 43. 스페인 내전 219 ~ 224 44. 엄청난 인명살상 2차 대전 224 ~ 230 45. 가톨릭과 개신교의 조선장악 230 ~ 234 46. 시장자유주의 확산 234 ~ 239 47. 신용카드와 대형마트 출현 239 ~ 242 48. 생산로봇의 출현 242 ~ 245 49. 체코혁명과 금융대공황 245 ~ 249 50. 평등한 사회 249 ~ 251 51. 생산과 분배 251 ~ 254 52. 남녀의 평등 254 ~ 258 53. 출판에 함께하신 분들 258 ~ 미정 본문은 하이퍼링크와 책갈피 기능을 사용하여 목록에서 언 제든지 페이지들을 찾아 읽어보고 목록으로 돌아 올 수 있 도록 만들었습니다.

인류의 탄생 현재까지 지구에서 발견된 화석으로 보아 약 500~100만 년 전 지금의 아프리카 지역에서 최초인류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원인( 猿 人 ) 류가 탄생(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 하빌리스) 해서 거주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원인에 속하는 화석표본에는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지만 모두 직립자세( 두 발로 걸음)를 취하고 있었다는 것과, 또 그 것은 골반의 형태나 두 개저( 頭 蓋 底 ) 에 있는 대후두공( 大 後 頭 孔 ) 의 위치와 크기로부터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약 500만 년 전 아프리카는 남북을 관통하는 산맥이 형성되 면서 동서는 왕래가 불가능해져 동, 서 양쪽에 서로 다른 진 화를 일으키게 하는 환경적 요인으로 작용했는데 산맥의 서 쪽은 풍부한 강수량으로 열대우림이 있었기 때문에 나무열 매 등 먹이가 풍부해서 두 다리로 걸어야만 하는 진화가 필 요 없으므로 계속 나무위에서 사는 동물로 남았다고 합니다. 반면 산맥의 동쪽은 구름으로 막혀 강수량이 줄어들면서 숲 이 차츰 사라졌고 초원이 나타났기 때문에, 원 인류는 먹이 를 구하기 위해 숲과 숲 사이의 초원을 걷게 된 것이며, 이 때 존재했던 원 인류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같 은 원 인류가 진화하여 현재의 인간이 됐다는 것입니다. 현생인류와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침팬지의 경우 아과( 亞 科 ) 인 호미니데(Hominidae)까지 현재의 인간과 흡사하며 고생물학적 연구결과 인간과 침팬지는 6백 5십만 년에서 7 백 4십만 년 전 사이에 갈라졌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으며 분자생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5백 4십만 년에서 6백 3십 만 년 전에 갈라졌을 것이라고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 두 그룹은 97에서 99.4% 까지 같은 DNA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일부 학자들은 침팬지를 호모(Homo)속( 屬 ) 에 넣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생 영장류를 분류하면 우선 반 원류( 半 猿 類 ) 와 원류( 猿 類 ) 로 나뉘고 원류는 유미원류( 有 尾 猿 類 ) 와 유인원으로, 유미원 류는 다시 구세계원( 舊 世 界 猿 ) 과 신세계원( 新 世 界 猿 ) 으로 나뉘 고 있습니다.

반 원류는 얼핏 보면 원숭이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가장 원 시적인 종류로서 안경원숭이 여우원숭이 등이 여기에 속하 며 유미원류는 원숭이나 비비( 狒 狒 ) 에 해당하고 신구 양 대 륙에 갈라져 있으며, 서식하는 방식에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는 것입니다. 꼬리가 있는 원숭이와 대비하여 꼬리가 없는 것이 곧 유인 원으로 오늘날 적도아프리카에 서식하는 고릴라와 침팬지, 동남아시아에 서식하는 오랑우탄과 긴팔원숭이 등이 이에 포함된다고 할 것이며 이들 각군( 各 群 ) 은 지금부터 약 6,000 만 년 전인 신생대초기에 존재한 조상에게서 점차 갈라져 나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신생대는 제3기와 제4기로 나뉘고 제3 기는 다시 팔레오세( 世 ) 에오세 올리고세 마이오세 플라이오세로 나누어지며 제4 기는 이른바 인류의 시대로 지금부터 약 200만년( 약 100만년 으로 추정하고 있었으나 최근의 새로운 연대측정법에 따라 늘어났 음) 전에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발견된 화석을 자료로 보면 신생대초기에 현생의 반 원류와 비슷한 종류가 살았고 에오세에 이르러 신세계원이 유미원 류로부터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며 구세계원 계통에서 유인원의 첫 조상은 올리고세에 서식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 습니다. 그 무렵에는 긴팔원숭이 계통에서 이미 갈라져 나왔고, 마이 오세에서 플라이오세 초기에 걸쳐 다른 세 종류로 변화( 진 화)된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생물학에서는 이른바 계통수에서 인류로 진화하는 과정이 언제 갈라지게 되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 여러 주장이 엇갈 리고 있습니다. 인류와 유인원의 근연관계를 강조하는 설의 경우에는 마이 오세말기 또는 플라이오세에 고릴라나 침팬지계통에서 갈라 졌다는 설과 그 반대로 마이오세초기 또는 올리고세까지 거 슬러 올라간다는 주장이 서로 대립하는 것입니다. 두 발로 걷고 도구를 사용하는 인류는 제4기가 되어서 나타 나는데 제4 기는 홍적세와 충적세로 나뉘고 있으며, 홍적세 - 2 -

는 다시 네 차례의 빙하기와 그 사이의 간빙기로 분류되며 약 l 만 년 전에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와 동식물상( 動 植 物 相 ) 이 오늘날과 거의 비슷해진 시대를 충적세로 분류합 니다. 화석을 통해 판단되는 홍적세에 나타난 인류로는 원인( 猿 人 ) 원인( 原 人 ) 구인( 舊 人 ) 신인( 新 人 ) 으로 분류되며 원인( 猿 人 ) 으로는 남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파란트로푸스, 동아프리카의 진잔트로푸스가 대표적이고 적어도 진잔트로 푸스는 제1빙기 이전인 200만 년 또는 100만 년 전에 살았 던 가장 원시적인 인류라고 간주되고 있습니다. 초기 원 인류는 직립 보행을 하기 위해 골반이 발달되면서 넓어졌으며 팔은 도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충분히 자유로워 야 하기 때문에 보행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발달( 진화)되었 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짐승을 물어죽이기 위해 있었던 송곳니는 발달하면서 음식을 씹기 편리한 치아로 진화하였고 하악관이 발달되면 서 머리도 커지고 뇌 용량도 커졌다고 합니다. 약 170~30만 년 전에는 원인( 原 人 )( 호모 에렉투스) 류가 거주 했으며 이들은 추운빙하기가 닥치자 아프리카에서 벗어나 아시아, 유럽 등으로 이주하게 되므로 분포하는 삶의 영역이 넓어졌으며 자바원인, 북경원인, 하이델베르크인 등이 이에 속한다고 보고 있으며 공식 학명으로 호모 에렉투스라고 명 명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석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약 240만 년 전 의 것으로 인류가 처음 사용한 석기를 일반적으로 올두바이 공작(OldowanIndustry) 이라 하며 이때 사용한 석기는 그때그 때 임시적으로 만든 것으로 판단되고 이보다 정제된 석기는 발달한 올두바이공작(Developed OldowanIndustry) 이라 하며 이후 매우 정제된 형태로 발견된 석기를 아리안공작 이라고 합니다. 아리안공작은 아프리카와 유럽 및 인도에 걸쳐 발견되는데 모든 곳에 분포된 것은 아니며 대표적인 석기는 주먹도끼를 비롯한 각종 양면가공석기(biface)로 이런 석기는 약 150만 년 가까이 호모에렉투스와 초기 호모사피엔스집단이 사용한 - 3 -

도구로 보이며, 석기제작에는 돌보다 강도가 약한 나무 사슴 뿔 등을 사용해서 원석을 때리는 방법과 간접타법을 응용해 보다 정제된 형태의 석기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호모에렉투스란( 똑바로 선사람) 뜻으로 원인에게 직립 인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500~200만 년 전 직립보행 한 오스트랄 로피테쿠스보다 화석이 먼저 발견됐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으로 이때부터 불을 사용하므로 원인들은 추운 혹한기가 발 생되는 온대지방까지 분포할 수 있게 됐다고 추정하는 것이 며 오랜 기간 동안 생각하는 생활을 하므로 두개골용량은 8 50 1200ml로 커지고 주먹도끼( 손도끼)라고 불리는 돌망치 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석기시대 중기인 약 20 만~35,000년 전에는 구인( 舊 人 )( 호모 사피엔스)이 나타나 생활한 흔적들이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 는데 이들은 몸에 동물의 가죽을 걸치거나 지붕과 옆면을 막고 움집을 지어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할 줄도 알았고 불 을 자유롭게 사용하므로 추운지역까지 삶의 범위를 넓힐 수 있었으며 머리도 커져 뇌의 크기가 1200~1600CC 까지 발 달하여 현생인류( 신인)와 비슷했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생활상은 시체를 매장하거나 시체에 채색을 하기도 했고 동굴에 거주했으며 석기제작 등의 기술이 발달하여 박 편석기( 원석을 보다 정교하게 만든 석기)를 사용했으며 돌칼, 돌송곳, 돌창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1859년 독일의 네안데르탈에서 발견된 화석은 지명의 이름 을 따 네안데르탈인이라고 부르는데 이때의 인류를 호모사 피엔스의 일종( 혹은 아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3만 년 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인류를 신인( 新 人 )(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이라 칭하며 상동인, 그리말디인(Grimaldi m an), 크로마뇽인(Cro Magnon man) 등 화석인류와 현대인을 통 털어 부르는 명칭으로 공식학명은 현대인의 학명과 똑같 이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라고 부릅니 다. 1868년 프랑스남부 크로마뇽지방에서 화석으로 발견된 ( 크 로마뇽인)은 오늘날 북부유럽인과 외모, 두뇌의 크기가 비슷 하여 뇌 크기는 1500~1600CC 정도며 타제석기를 사용했고 - 4 -

골각기( 작살), 활과 창 등을 사용하던 기록들이 라스코동굴에 벽화로 남아 있어 이때의 생활상 그리고 주술적의식과 예술 적 감각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인류의 조상이라며 아래에 적시한 종들이 600~70 0만 년 전부터 있었다는 학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으나 그 만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Sahelanthropus tchadensis (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 700 만~600 만년 전) Orrorin tugenensis ( 오로린 튜게넨시스, 600 만~580만년 전) Ardipithecus ramidus ( 아르디피데쿠스 라미두스, 440만년 전) Australopithecus anamensis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나멘시 스, 420 만~390 만년 전) Australopithecus afarensis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 스, 380 만~300 만년 전) Kenyanthropus platyops ( 케냔트로푸스 플라티옵스, 400만 년 전) Australopithecus africanus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 누스, 300 만~250 만년 전) Australopithecus garhi (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가르히, 250만 년 전) ( 파란트로푸스 속으로 분류되는 3 종이 있다고 함. 270 만~120 만년 전) Homo habilis ( 호모 하빌리스, 240 만~170 만년 전) Homo georgicus (190 만~180 만년 전) Homo erectus ( 호모 에렉투스, 180 만~10 만년 전) Homo ergaster ( 호모 에르가스터) Homo antecessor ( 호모 안테세소르) Homo heidelbergensis (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 하이델베 르크인), 60 만~20 만 년 전) Homo neanderthalensis (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 네안데르 탈인), 20~3 만 년 전) Homo floresiensis ( 호모 플로레시엔시스, 2 만~1 만 년 전) Homo sapiens ( 호모 사피엔스, 20 만~ 현재) - 5 -

초기의 생활상 문명사학자들은 대체로 신석기시대에서부터 청동기시대까지 를 모계중심사회로 보고 있으며 인류가 집단생활이 가능하 게 돼 초기농경사회를 이루었던 청동기시대가 도래하면서 부계중심사회로 바뀌게 됐고 그 후 고대부족국가로 발전했 다고 보고 있습니다.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초기 원 인류는 개인소유 없이 야생 동물과 같은 생활을 했으므로 눈비를 피하고 사나운 짐승으 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안전한 거주지와 먹을 수 있 는 먹을거리를 찾아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며 사냥도 하고 열매를 채집하며 따뜻한 기후로 변화되는 곳을 찾아 이동하 며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누구에게도 통제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연에서 자유롭게 동 물들을 사냥하고 열매를 채집하면서 살아가던 원 인류들은 나무막대기를 창처럼 찌르는 곳에 사용하거나 몽둥이처럼 휘두르고 주먹돌을 가지고 사냥을 하면서 손의 정교한 쓰임 새가 늘어나 손을 점점 더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진 화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화산폭발과 번개, 그리고 바람에 의해 나무들이 부대 끼면서 수백만 년 동안 수많은 화재가 발생했다는 사실들은 유추할 수 있고 불에 타죽은 동물들의 시체를 먹으면서 맛 있다는 사실을 안 원 인류는 손의 역할이 섬세해지면서 불 을 다룰 수 있게 되어 음식을 익혀 먹기 시작했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초기에는 화산폭발이나 자연발화로 발생된 불을 사용했을 것이나 돌을 무기나 칼로 사용하기위해 부딪쳐 깨다가 불통 이 튀어 마른풀잎에 불이 붙기도 했을 것이며 심한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에서 부대끼는 소리가 나는 것을 관찰하다 나 무는 마찰에 의해 불이 붙는 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싯돌과 나무를 비벼 불을 붙이는 방법을 사용하면서 불을 피우고 다룰 수 있게 됐다고 보는 것입니다. 원 인류가 불을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사나운 맹수로부터 자 신들을 보호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어두운 밤에도 생활할 수 있어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을 것이며 빙하기와 - 6 -

혹한기의 추운겨울에도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리라 봅 니다. 불은 사용하여 음식물을 익혀 먹는 습관을 가진 원 인류들 은 음식을 익히기 위한 그릇이 필요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단순하게 흙으로만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을 것이며 지금도 아프리카 일부 부족들이 사용하듯 돌을 불에 집어넣 고 뜨겁게 달궈서 달궈진 돌과 음식을 땅에 묻어 익히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이 반복하면서 흙이 불 위에서 오래 구워질수록 단단해 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흙으로 빚어 불에 구운 그 릇( 도기)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이며 돌을 불에 올리거나 받쳤다가 달궈진 돌이 녹으며 흘려내려 반짝이는 현상을 발 견하고 반짝이는 물질인 금과 은을 추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청동기와 철기도 발견하게 됐으리라 추정합니 다. 금이나 은은 녹는 온도가 약하기 때문에 빨리 발견됐지만 청동과 철기는 녹는 온도가 높을 뿐 아니라 연금술이 발달 돼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발견됐 을 것이고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녹일 수 있는 은과 금이 먼저 발견됐을 것입니다. 구석기시대에는 날카로운 돌을 주워 사냥한 동물들의 껍질 을 벗기기도 하면서 생활했을 것이고 날카로운 돌이 없으면 직접 돌을 깨트려 날카로운 면을 만들어 사용하거나 큰 몸 돌에 충격을 가하므로 날카로운 면을 떼어내 사용할 수 있 게 된 때를 뗀 석기시대라 부릅니다. 당시에는 모계사회라고 하는데 욕정이 발동된 수컷들은 암 컷을 보면 교접( 섹스)을 가지면서 생활했을 것이며 교접 후 수컷은 떠나고 또 다른 수컷들을 만나면 또 교접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암컷들의 생활이 반복되면서 잉태를 한 암컷들은 홀로 아이를 낳고 키워야했을 것입니다. 자연에서 먹을거리를 사냥하거나 채취하기 위해 떠돌아다니 는 생활을 수백만 년 동안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난교( 亂 攪 ) 로 인해 태어난 아이들은 부계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단지 자신을 낳고 키워준 모계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어서 자연 - 7 -

스럽게 모계사회를 형성하게 됐으리라 판단합니다. 동물 세계를 보면 하이에나는 암컷의 몸집이 더 크고 강해 무리를 이끌고 있으며 수컷들은 홀로 사냥할 수 있도록 성 장하면 무리에서 추방하거나 암컷에게 복종하며 살아가기도 하고 사자의 생활을 보면 암컷들이 사냥을 하고 새끼수컷들 이 사냥할 수 있게 성장하면 무리에서 추방당해 자유롭게 떠돌이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들소나 사슴 등 여타 동물들의 생활도 힘센 수컷이 우두머 리로 무리속의 모든 암컷들과 번식할 수 있는 교접권한을 가지며 생활은 평 동물이나 귀족동물이라는 구분 없이 우두 머리를 이긴 수컷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고 우두머리가 되 면 자기 유전자를 퍼트리는 교접을 위해 암컷들이 양육하는 새끼들을 물어죽이기도 합니다. 집단생활의 시작 백 만년 이상 이어졌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과 같은 생 활은 신분이나 계급이 있어 엄격히 통제하고 지시하는 복종 적 형태는 없었고 사나운 맹수에 대항해 집단을 지키고 먹 을거리를 채취하거나 사냥하기 위해 공동으로 아이를 양육 하는 상호도모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신분이나 계급제도가 없었다면 우두머리만 힘을 과시했을 것이고 후손이란 종족보전의 한 방편임과 동시에 사냥하는 힘의 원천이기에 집단이나 무리가 모두 협심하여 함께 공동 으로 양육했을 것이라는 것은 추론 가능하며 인류는 이렇게 수백만 년 동안 종족번식과 보전을 위해 살아왔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모계사회의 흔적들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 남아 있는데 대표 적인 예가 히말라야산맥 끝자락 중국 사천성 서부지방의 대 소금천지역의 강 하류에 위치한 여왕 곡으로 이곳은 빙하가 밀려오면서 만든 협곡이 워낙 험준해 외부와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도 다부일처( 多 夫 一 妻 ) 제의 모계사회를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부일처 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남성들 이 여성들 보다 월등하게 많이 태어나는 현상이 있어 성비 - 8 -

( 性 比 ) 가 맞지 않고 남성의 수효가 많기 때문에 일부일처제 를 하면 결혼하지 못하는 남성이 많이 생겨 분쟁이 끊임없 을 것이라는 명분도 한몫 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는 남자가 결혼하려면 여성의 부모에게 지참금을 지급하고 얼마든지 부인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남자는 결 혼지참금을 지급한 이후부터는 일을 하지 않고 놀아야 하며 남자가 돈을 벌면 돈을 벌어 후처를 얻으려고 한다며 부인 에게 폭행당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집단이 생계를 책임지지 않는 무리에서 생활해온 여성이나 또는 남성이 여성을 폭행할 수 있고 죽임까지 행사할 수 있 는 가부장적 집단 또는 무리에서 살아 온 여성일수록 정조 ( 貞 操 ) 관념이 강해져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을 스스로 제한하 며 억압된 생활을 합니다. 무리나 집단이 생계를 책임지며 많은 지식을 습득한 지역여 성들은 가족주의에 갇히지 않고 처녀( 處 女 ) 를 버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자유롭고 개방적인 생활을 하지만 많 은 지식을 습득하지 못하거나 억압된 틀에서 성장한 여성들 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정과 욕망을 억누르며 가족을 중시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집단이나 무리가 생계를 책임지지 않고 남성이 물질을 가져와야 살아갈 수 있는 가부장적 환경에 길들려졌 으며 결혼은 운명이라는 거짓에 세뇌됐기 때문에 생계를 위 해 폭력도 참아야 하고 아이는 늙었을 때 생계를 보장해주 는 보험이라고 판단해 제도와 체제에 순응하며 스스로를 억 압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와 이스라엘도 모계중심사회를 구성하고 있는데 유럽 의 많은 국가들 중에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농경을 중심으 로 구성됐던 부족들은 사냥을 하며 살았던 부족보다 농사를 짓거나 열매를 채취하는 등 노동을 할 수 있는 일손( 노동력) 을 많이 생산할 수 있는 여성이 우선시 될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 식물은 영양분을 섭취해야 살 수 있는데 인류는 영양분을 먹을거리로 충당하고 먹을거리는 동물을 사냥하거나 물고기를 잡고 아니면 자연에서 채취 또 - 9 -

는 수확한 곡물로 유지됩니다. 힘센 남성들은 주로 사냥을 했겠지만 실패할 확률도 높아 안정적이지 못한데 비해 수태기간 때문에 육체적 활동이 부 자유스러운 여성들이 덜 위험스러운 자연에서 과실과 곡식 은 채집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거나 열매를 거둬들이기 위해선 일손이 많이 필요 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일손을 생산할 수 있는 여성이 당연 히 우선되는 것이며 특히 아이를 많이 생산하는 여성을 우 대 하면서 자연스럽게 모계사회를 구성하게 됐다고 보고 있 습니다. 초기 원 인류는 모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무리가 공동으로 사냥하기 위해 사냥을 하자거나 어디에 사냥감이 있다거나 어느 방향으로 달아나고 있으니 포위하라거나 하 는 무리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신호의 표현은 필수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먹을거리인 동물을 사냥하기 위한 신호를 주고받는 생활을 수 백 만년 동안 하면서 서로가 알아들을 수 있으며 의사가 소통되고 표현할 수 있는 공동의 언어가 발달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원 인류들은 서로 의사를 전달하고 이해할 수 있는 습관이 몸에 배이면서 사나운 맹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먹을거 리를 공동으로 사냥하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할 필요를 느끼 고 집단과 무리를 지어 생활하며 진화했다고 분석하고 있습 니다. 오늘날 아주 오랜 선사시대 때 원 인류들이 살아가던 동굴 에서 벽화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러한 동굴벽화들은 의사 와 발성을 통일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육목적으로 그려진 것 이 아니었을까를 판단해 봐야 할 것입니다. 원 인류들이 후손에게 삶의 기록을 남기려 벽화를 그리지는 안았을 것이고 필요해서 벽화를 그렸을 것인데 벽화를 그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같은 의미로 표현하고 같은 소리를 내기 위해 동물과 물고기 그림을 그리고 사냥하는 모습을 그리며 어려서부터 같은 의미와 표현으로 이해하도록 훈련 했을 것이라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 10 -

처음에는 모래밭이나 땅에다 그림을 그리기도 했을 것이지 만 땅이나 모래위에 그리는 그림들은 자연현상에 의해 금방 지워져 버리므로 지워지지 않도록 암벽이나 동굴에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는 사실은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원 인류들은 열매가 많이 열리는 곳을 찾아 떠돌이 생활을 했을 것이며 채취했던 열매가 넘쳐 버리고 가는 일을 반복 하다 이듬해 가니 새로운 나무나 풀에서 열매가 맺혀있는 것도 발견하고 생포했던 동물들이 새끼를 낳아 번식한 것을 보면서부터 정착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생활을 시작 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농사와 목축으로 안전하게 먹을거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된 원 인류들은 정착해서 생활하게 됨으로 집단생활을 시작하 게 됐을 것이며 처음에는 모계로부터 내려오는 모계혈통의 사람들끼리 모여 집단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집단이 무리를 이루며 공동생활을 시작했지만 아이들 중 장 성한 수컷들은 사냥을 할 수 있는 힘이 되면 무리에서 벗어 나 다른 수컷들처럼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사냥하며 살아가 는 환경을 유지했다고 판단됩니다. 사냥이란 항상 성공할 수 없어 무리를 짓는 것이 사냥을 하 거나 생존하는데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원 인류의 수컷들도 무리를 짓기 시작했을 것이며 영역다툼과 사냥감 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도 수없이 많이 했을 것입니다. 무리를 짓고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진 원 인류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 아닌 다른 무리들의 집단을 발견하기도 했을 것이며 발정 난 수컷들은 암컷들과 교접하기 위해 어린 수 컷들을 살해하고 먹을 것을 강탈하기도 했으리라 보고 있습 니다. 또한 암컷이 없는 수컷 무리들끼리 싸움을 하게 되면 포로 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힘이 약한 무리의 수컷들은 모두 살 해했을 것이며 더러는 식육으로 먹기도 하는 식인생활도 나 타났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바다와 강가에 위치한 원 인류들은 조개나 물고기종류를 채 취하며 살았을 것이고 울창한 밀림이나 산악지역에서는 사 냥이나 열매와 식물을 채취하고 초원지역에서는 사냥과 야 - 11 -

생 조나 수수 같은 것을 채취하는 것이 생존하는 방식이었 기 때문에 거주하던 지역적 환경에 따라 사냥과 채취, 수렵 하는 방법들이 다양하고 서로 다르게 발달한 유적들이 발견 되고 있습니다. 원시시대 때 생활했던 유적이 발굴된 장소에는 옷이나 움집 을 꿰매기 위해 고기의 뼈에 나무껍질을 가늘게 찢어 묶어 서 사용했던 흔적들이 있으며 물고기를 잡기 위해 사용했던 그물추와 조개껍질이 쌓여 있는 것도 발견되는 것을 보면 원 인류는 오랜 기간 동안 물고기를 수렵했던 것으로 봅니 다. ( 오이도 패총( 貝 塚 ) : 경기도 시흥 오이도에 있으며 선사시대 때 채취해 먹은 조개껍데기가 쌓여 이루어진 퇴적층 유적.) 원시시대에 바닷가나 강가에서 오랫동안 생활했으며 석기시 대의 조개더미[ 貝 塚 ] 에서 돌 동물의 뼈, 뿔 조개껍데기 등으 로 만든 낚시 창 작살 등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어업은 인 류역사와 더불어 발전해 왔을 것이고 기원전 3,500 년(5,500 년 전)경 이집트에서는 칡덩굴 짚 등에 무거운 돌을 묶어 그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당시 생활했던 유적들은 현재까지 발굴된 사실로 확인하고 있음) 원 인류는 손놀림이 상당히 발달하고 미세한 물건도 잡을 수 있게 발전하면서 근대에 와서는 삼 무명실로 그물을 짜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로 작은 그물추에 가는 구멍 이 뚫려 있는 것이 발견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 다. 알라스카에서 발굴된 배 조각을 방사선으로 탄소 측정한 결 과 약 25,000년 전 배의 조각으로 판명되므로 인류는 오랜 기간 동안 물고기를 잡아 생활했다고 유추하는 것이며 초기 의 배는 뗏목을 이용한 통나무배와 카누모양의 배들이 인류 가 최초로 사용했던 배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 돌자구나 돌 낫등 유물의 발견) 한반도나 외국에서 발굴되는 유적으로 보아 6,000년 전부터 인류는 흙으로 빗은 토기를 사용한 흔적이 있으며 토기를 사용하여 음식을 담기도 하고 끓이기도 하는 생활을 하면서 오래 동안 불에 구워진 토기는 단단한 옹기가 된다는 사실 도 발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 부산 동삼동 유적 6000년전 빗 살무늬토기를 제작하여 사용한 흔적) - 12 -

원시종교의 출현 과학적 판단을 할 수 없었던 원 인류들은 잦은 화산폭발과 지진, 비바람과 천둥번개 그리고 추운겨울에 내리는 눈에 의 해 수많은 희생을 당하면서 이해할 수 없어 자연현상을 일 으키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판단했고 생존할 수 있는 것이 자연덕분이라고 생각해 숭배하는 마음으로 신을 만들기 시 작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계절을 이해하지 못하는 원 인류들은 사냥을 떠났다 갑자기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져 앞을 분간할 수 없거나 번개가 치 면서 수십억 년 동안 성장한 숲속에서 불이 붙거나 하는 현 상들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으니 두려움을 가졌을 것이며 겨울이 닥쳐 엄동설한의 추위와 눈보라가 내리는 현상도 이 해할 수 없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하늘과 태양, 달, 별 등을 보고 빌었을 것이며 바다 를 보고도 빌고 동물을 사냥해서 먹고 사는 종족은 동물들 에게도 빌었을 것이고 채집을 해서 먹고 사는 종족들은 꽃 과 나무에도 빌면서 신을 만들어냈을 것입니다. 주술사들은 사냥 중 부상을 당하거나 자연재해로 상처를 입 은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야생동물들 같이 온천에 몸을 담그게 하거나 항생제 성분이 있는 오미자 같은 것을 돌로 찌어 바르거나 삶아서 사용했을 것이며 이런 경험들이 지금 까지 전해져 민간요법과 한의학이 됐을 것이라고 판단됩니 다. 자연을 신으로 만들어 우상화하던 현상들은 세계 곳곳에 남 아있는데 태양신을 섬기고 바다용왕을 섬긴다거나 하는 행 위들은 원시시대 종교에서부터 비롯된 신앙들이 현재( 현재도 무당이나 목사들이 안수기도로 치료한다며 몽둥이로 환자를 때리 거나 굶겨죽이는 곳도 있음)까지 이어지는 원시종교였다고 봅 니다. 사냥을 나가지 않아 자연을 살필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한 주 술사들은 획득한 사냥감을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먼저 제를 지내야 한다며 안정적으로 먹을 것을 획득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제사장이라 는 위치도 만들었다고 판단됩니다. - 13 -

농경의 출현 인류는 약 1만 년 전 신석기시대 말기에 이르러( 지역적으로 차이가 있음) 비로소 식량을 인간의 손으로 직접 생산하기 시 작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구석기시대에 보리를 재배했던 흔적으로는 고대 이집트 피 라미드에서 나오는 유적으로 확인할 수 있고 1 만~1만 2천 년 전 원시민족인 호서인( 湖 棲 人 ) 의 유적에서도 인류가 작물 을 주식으로 섭취한 증거들이 나타나는 사실로 추정합니다. 신석기시대인 6,000~7,000( 기원전 5,000~4,000 년전)년경에는 밀 보리 조 아마 등의 작물을 재배했으며 중국에서는 4,700( 기원전 2,700 년경)년전인 신농시대( 神 農 時 代 ) 에 이미 5곡을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원시농업의 발상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8,00 0년( 기원전 6,000 년경)전 티그리스 및 유프라테스 강 연안에 서 최초로 시작된 농업이 전 세계로 전파됐다는 것이 하나 있으며, 동남아시아와 중국의 웨이허평원[ 渭 河 平 原 ], 티그리 스 및 유프라테스 강 연안, 인더스 강 연안, 나일 강 연안, 남부멕시코, 남아메리카 등 7개 지역이 고대부터 발달된 농 업을 이루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처음엔 팔레스티나 시리아 북메소포타미아에서 이란고원 일 부까지 걸친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 를 중심으 로 하는 서남아시아가 급격히 건조하자 사막의 오아시스에 인간과 동물이 모여들어 공존하면서 야생식물인 보리와 밀 을 재배하고 야생하던 산양 염소 소 등 유제류( 有 蹄 類 ) 동물 을 가축화하게 됐다고 생각했지만 농경문화의 시작은 사막 지방이 아니라 산록지대였음이 밝혀지면서 농경 목축이 산 악지대에서 발전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근동지방에서 시작된 코카서로이드(Cocasuloid)계 인종의 맥 류재배를 주체로 한 농경문화와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된 몽 골로이드(Mongoloid)계가 서류( 薯 類 ) 중심 농업을 이룬 농경 문화, 서아프리카의 니제르(Niger)강 상류에서 시작된 니그로 이드(Negroid)계 인종의 농경문화, 인디언계 인종의 서류와 잡곡을 중심으로 하는 신대륙에 기원한 농경문화 등 4개 지 역이 제시되기도 합니다. - 14 -

4 개 농경문화 발상지에 대해 살펴보면, 첫째, 지중해 농경문 화로서 8,000년( 기원전 6,000 년경)전 티그리스 및 유프라테스 강 연안에서 발생하여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파키스탄에 이 르는 지역은 맥류 유채 완두 잠두 순무 등을 주로 재배했으 며 소 면양 산양 말 등을 가축화하여 농사와 목축을 겸한 혼 합농업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발견된 유적을 연구한 발표에 의하면 중근동( 中 近 東 ) 의 티그리스 및 유프라테스 강 유역으로부터 이란 고원과 서아시아 및 아프리카 북부를 포함하는 이란 이라크 시리아 의 경계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 9,000년( 기원전 7,00 0 년경)전부터 비슷한 시기에 농경과 목축을 시작했다고 밝히 고 있습니다. 둘째는 동남아시아 기원의 근재농경문화( 根 栽 農 耕 文 化 ) 로 바 나나 얌(yarm) 타로(Taro) 사탕수수 등 영양번식작물이 초기 재배의 주종이었고 돼지나 닭 등의 가축도 사육했으며 바나 나는 5000년( 기원전 3,000 년경)전 말레이시아에서 재배했다 고 합니다. 셋째는 아프리카에서 아시아에 걸쳐 사바나(Savannah)를 잇 는 지대에서 발생한 사바나 농경문화로 7,000~5,000년( 기원 전 5,000~3,000 년경)전부터 피 기장 조 수수 등 잡곡류와 두 류 참깨 등을 재배했다는 주장입니다. 넷째는 신대륙 중남미로 카리브 해 연안에서는 카사바(cassa va)를 멕시코에서는 고구마, 그리고 안데스산맥의 높은 지대 에서는 감자를 재배하기 시작했으며 옥수수 두류 호박 등도 재배했다는 것입니다. 근동지방에서 농사를 짓게 되면서부터 부족으로 발전했으며 도시가 들어서게 된 것은 10,000년( 기원전 8,000 년경) 전에서 4,000년( 기원전 2,000 년경)전까지의 사이에 이루어 진 것으로 유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근동( 아나톨리아와 레반트, 메소포타미아 등 유럽과 가까 운 서아시아)지방이 발달하면서 서구문명이 시작하게 됐다고 보므로 근동지방이 현재 문명발전의 최초지역이라고 보는 것이며 초기 문명의 1 차 지역(pristine region)은 메소포타미 아, 인도, 중국, 중남미, 중앙안데스 지역이라고 합니다. - 15 -

농경의 시작은 버리고 간 곡식들이 자라는 것을 발견한 것 이 식물을 재배하게 된 근원으로 보고 있으며 계획적으로 씨앗을 뿌려 재배하기 시작한 초기 농경은 피를 비롯한 몇 가지 밭곡식을 재배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초기 농경 단계에서도 남자는 여전히 농사보다는 위험하고 힘든 사냥으로 살았을 것으로 판단되며 여자( 출산 양육 때문에 사냥을 할 수 없으며 어린자식을 데리고 식물을 채집, 재배하는 생활의 시작)들이 사냥보다 쉽고 안전하게 먹을거리를 확보할 수 있어 농경생활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냥으로 획득할 수 있는 먹을거리는 위험하고 불규칙적이 라 불안정하지만 씨앗을 뿌리고 수확기가 되면 몇 배의 먹 을거리를 확보하면서 농업이 점점 발전하고 밭을 갈아 씨를 뿌리는 갈이농사로 발전하자 힘센 남자가 필요하므로 남자 와 여자가 함께 농업에 종사하는 부계사회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보고 있습니다. 원시시대에는 나무와 짐승의 뼈 또는 돌도끼로 나무를 베어 야 하고 뿌리를 뽑고 잡초와 돌을 없애 땅을 고르고 흙을 부드럽게 해야 하는 힘든 노동을 통해 밭을 만들었다고 보 는 것입니다. 무리가 집단으로 정착하며 공동으로 생활하므로 사냥을 한 짐승이나 농경으로 채취한 수확물은 개인이나 모계가족 소 유가 아니라 공동체 무리를 위한 공동의 수확물로 인식했으 며 사냥은 먼저 공격해 위험하고 힘들게 사냥을 성공하거나 농사에서 힘든 일을 맡은 사람이 조금 더 분배받도록 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농경이 시작될 즈음 산짐승을 울타리에 가뒀는데 울타리에 가둔 짐승들이 해가 바뀌면서 새끼를 낳고 길들여져 고분고 분 순종하는 것을 보면서 가축을 사육하기 시작해서 가축만 전문적으로 키우는 유목집단이 나타났고 유목집단생활이 최 초로 공동체와 공동체사이에 분업을 발생시키는 계기가 됐 다는 것입니다. 사냥과 채취 수렵은 공동체 생활에서 힘센 수컷과 임신으 로 사냥에 참석할 수 없는 암컷간의 성별 분업을 가져왔다 고 할 수 있으며 집단으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생활 - 16 -

이 정착되면서 유목민들은 농사짓는 노동보다 힘들이지 않 고 가축을 키우며 살아가는 유목생활을 하다 농경을 이룬 공동체를 만나면 필요한 곡식과 고기를 교환했다고 보고 있 습니다. 유목생활을 하는 무리들은 초지가 풍부한 지역을 떠돌며 가 축을 길렀기 때문에 고기는 풍부했으나 곡식과 양념들이 부 족하므로 농사를 짓고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는 무리가 있 는 곳에 도착하면 가축과 곡식을 바꾸는 방식으로 먹을거리 를 획득할 수밖에 없는 생활을 했으므로 물물교환을 발생시 켰다는 것입니다. 농경사회 초기에는 삼림을 불태워 경작하는 화전 농업부터 시작했다가 점차적으로 동물의 사육( 목축)과 식물재배( 농경) 로 발전했다는 것이며 이로 인해 수렵채취시대에는 부족했 던 식량을 대량으로 수확하게 되면서 안전한 먹을거리를 확 보할 수 있게 된 원 인류는 인구를 증가시키며 노동력도 확 보했다고 봅니다. 삼림을 불태워 경작하는 농경방법은 지력을 감퇴시켜 매년 수확이 감소되고 수년 후에는 같은 식물이 자라지 않으므로 이동하게 됐으며 그래서 화전( 火 田 ) 농업을 일명 shifting culti vation( 이동 경작)이라 부르고 약탈농업이라 부르는 것은 토 지의 영양분을 약탈한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서양은 소규모 무리가 집단을 이룬 초기에 양을 사육하며 생활했다고 보며 가축을 먹이기 위해 좋은 목초를 찾아다니 는 유랑농업( 流 浪 農 業 ) 을 하면서 토지가 있으면 농작물의 종 자를 파종하고 길을 떠났다 파종한 농작물을 수확할 무렵 돌아와 작물을 획득하는 생활을 하고 지력이 소모되면 경작 장소를 옮기는 농사를 지었다는 주장입니다. ( 양이 인류최초로 사육한 가축이라 함) 인구가 늘면서 유랑농업을 할 수 있는 토지가 불충분해지자 정착의 필요성이 생겨 정착하는 약탈농업이 시작됐고 한곳 에서 여러 해 같은 작물을 심으면 수확이 안 되기 때문에 지력의 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토지의 일부분을 돌려가며 농 사를 짓는 삼포식( 三 圃 式 ) 농법이 발달하자 생산량이 증가해 개인이 먹는 것 이상의 먹을거리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 17 -

밭농사는 자연으로부터 오는 빗물로도 재배가 가능하나 벼 농사 같이 물이 많이 소요되는 농사들은 수량이 풍부하고 넓은 평야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인류는 강가에서 살기 시 작했으며 많은 집단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무리의 단위를 형성하게 됐다고 보고 있습니다. 무리끼리 부락을 형성하여 공동으로 노동하고 공동으로 분 배하면서 집단공동체를 이루어 모두가 농사를 지었기 때문 에 먹을 것이 풍부하여 수 천 년 동안 계급과 빈부 격차가 없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평화롭게 살았을 것입니다. 모계사회에서 함께 수 백 만년 동안 생활하던 습관대로 모 든 일은 무리끼리 모여 공동으로 논의하고 홍수로 피해를 입거나 사냥으로 부상을 입어 먹을 것이 부족한 무리와는 서로 나눠 먹으면서 홍수에 대처하기 위해 물길을 막는 제 방을 쌓는 등 집단이 함께 노동하는 공동체생활을 수천 년 동안 유지했다고 봅니다. 세계의 4대 문명( 중국황하 강,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인더스 강, 나일 강)은 큰 강 유역에서 발달했고 당시 자연환경은 오 늘날보다는 습윤( 濕 潤 ) 했으며 매년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는 일들이 많이 발생해서 강의 범람시기를 알기 위해 하늘을 살피다 천문학에 의한 태양력이 발달하고 이때 강이 범람했 던 기록을 성경에서 노아의 방주로 표현했다고 판단됩니다. 당시의 농사를 지었던 지역은 크게 3곳으로 분류하고 있는 데 중동 중심(near east center 이란 이락 시리아 터키) 지방은 1 만 년 전 밀을 재배한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며, 중남미 중심지역에서는(central/south America center 옥수수, 고추, sq uah, bean, guards)흔적이 있고, 멕시코 고원지대와 페루의 고원지대에서는 옥수수, 고추, 감자 등을 재배했으며, 극동 중심(far east center 벼, peas, bean)지역에서는 주로 벼 같은 논( 습지)에서 자라는 작물을 재배한 흔적들이 발견된 유적으 로 확인되고 있으나 습지는 유기물분해로 인해 고고학적으 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근동지방은 북쪽으로는 구릉과 산맥 그리고 남쪽으로는 반 건조지역과 사막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어 지리적으로 매우 다양하며 식물군( 식생, 植 生 ) 이 분포되어 있는 것을 분석하면 환경지대를 8 개소로 나눌 수 있는데 해안평야(coastal plain - 18 -

s), 충적평야(alluvial plains), 산록지대(piedmont), 반 건조고원지 대(semiarid highland), 구릉과 계곡(f oothills and intermon tane valleys), 산악지대(mountain ranges), 저지대(depressions), 그리 고 사막(deserts)으로 나눈다고 합니다. 문명의 발달 집단농경사회를 이룬 초기에도 모계사회를 유지했을 것이며 자연에서 자유롭게 사냥으로 생활하던 수컷 무리들은 모계 로 형성된 부락에는 항상 식량이 풍부하고 암컷들과 교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침략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인명을 살상하는 총 같은 것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힘이 센 자가 폭력을 행사해 먹을 것을 빼앗고 여자 를 겁간하는 생활이 수 없이 많은 세월동안 되풀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수없는 침략과 약탈로 피해를 입은 무리는 자신들이 고생해 서 생산한 물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집단을 이루어 함께 대항하려고 힘을 길러 무력으로 자신들이 생산한 먹을거리 와 생활터전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부락을 침략해 타인을 학살하고 약탈을 일삼으며 집단을 정 복한 무리들은 지배자가 돼 정착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이렇 게 무력으로 학살과 약탈을 일삼던 침략무리들이 저항을 억 압하기 위해 권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수컷들의 침략에 식량을 빼앗기던 암컷들은 힘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정복자가 된 수컷들 중에 힘이 센 수컷의 씨를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것이고 이런 과정 들이 부계사회를 만드는 동기가 됐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힘이 센 아이도 태어났을 것이 고 힘이 센 아이들이 성장해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부족을 장악하고 힘을 과시하므로 폭력이 횡횡하는 부족사회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성이나 양심은 없고 오직 힘이 센 자가 무리를 억압하고 복종시키는 환경이 오랜 기간 반복되면서 서열이라는 것이 만들어졌을 것이고 서열이 높은 자의 아이는 어려서부터 부 모의 비호를 받으며 안하무인으로 성장했다고 봅니다. - 19 -

노동을 하지 않고 무력으로 무리를 복종시키고 군림하는 힘 과 싸움기술만 배우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부모보다 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잔인한 성격을 갖게 됐을 것이고 힘만이 절대 권력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 지금은 돈 이 힘이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의 성장환경과 비교가능) 타인의 간섭이나 지시 통제를 받지 않고 자연에서 자신이 노력한 만큼 수확하며 자유롭게 생활하던 사람들을 침략자 들이 학살하고 포획해 강제노동을 시키며 도망가지 못하도 록 감시하면서 노예로 만들었고 저항하지 않고 순종하도록 길들이기 위해 제도와 법률을 만들었습니다. 처음 제도와 법률을 만들었을 때는 피지배계급들이 반발하 며 저항했을 것이나 세월이 흐르면서 지배계급이 지속적으 로 강조해서 세뇌되고 제도와 법률을 집행하며 먹고살도록 길들여진 무리( 관료)들이 권위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생존을 이어가는 수단으로 삼아 대중을 강제로 억압하면서 제도화 로 정착되는 것입니다. 많은 무리를 침략해 집단생활이 시작되면서 사냥을 하던 때 언어보다는 뜻이 전달되고 의미를 이해하는 공통언어가 필 요했으며 무리가 같은 의미와 뜻으로 해석하는 언어가 발달 하면서 인류의 실생활에 엄청난 발전을 가져오는 동기가 됐 습니다. 남겨진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는 최초의 문자는 5,000년( 기원 전 3,000 년경)전을 전후해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데 고대인 들은 음성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소리가 들릴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만 소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권력을 쥔 무리들이 명령을 하달하기 위해 멀리 있는 사람 에게도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은 없을까 궁리하면서 그림이 나 매듭을 이용해 어떤 사물이나 의사를 전달하던 것이 사 람들 사이에 일정한 약속이 되면서 문자로 발전했다는 것입 니다. 문자나 공식적인 기호는 집단의 생각이나 느낌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상징적인 체계가 있어야 하고 여러 사람들 사이에 서로 합의돼야 하므로 수 백 만년 동안 기호나 그림 또는 선화 등을 통해 간단히 소통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기 - 20 -

록하고 보전할 수 있는 문자가 생기므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 오게 됩니다. 문자의 기원으로는 이집트의 상형문자(Hieroglyph)와 중국의 갑골문자( 甲 骨 文 字 )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Cuneifor m script)를 들 수 있는데 초기 형태 문자들은 모두 그림으 로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며 7,000년( 기원전 5000 년경)전 구 석기 중기의 유적에 돌이나 뼈에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새 긴 조각에서 문자의 기원을 찾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자들이 점차 발전해 3,000년( 기원전 1,000 년경)전에는 선사인류문명이 사용하던 그림문자 흔적이 발견된 것이며 초기의 그림문자는 단지 기억을 보조해 주는 수단에 불과했 지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사용된 것은 인류문명이 크 게 발달한 중국,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마야 등의 문자라고 합니다. 약 3,500년 전 무렵에 그림문자를 더 간결하게 생략해서 만 든 상형문자가 이집트 유적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시기 별로 히에로글리프문자, 히에라티크문자, 데모티크문자, 멜 로에문자로 나누고 있습니다. 히에로글리프문자의 명칭은 성스럽게 조각한 문자라는 뜻에 서 성각문자( 聖 刻 文 字 ) 라고도 하며 히에로글리프문자는 처음 에 표의문자로 탄생하여 표음문자로 발전하게 되어 오늘날 이집트알파벳 24 자가 됐다는 것입니다. 현대문자의 시작은 표의문자와 표음문자가 모여 단어와 단 문이 되었다 발전하며 문장을 나타내게 됐고 히에라티크문 자는 이집트 성각문자의 약자라고 할 수 있는 히에로글리프 문자로 보고 있으며 4,650년( 기원전 2,650 년경)전부터 시작해 3,000년( 기원전 1,000 년경)전까지 사용했다고 봅니다. 2,700년( 기원전 700 년경)전부터 1,600년( 기원후 400 년경)전 까 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히에라티크문자를 흘려 쓴 초서 체라고 할 수 있는 데모티크문자는 사물( 事 物 ) 을 그려 그것 과 관련 있는 의미를 나타낸 문자라 할 수 있는 상형문자로 중국의 초기 한자( 漢 字 ) 와 고대이집트문자인데 고대 4대문명 을 이룩한 무리들은 모두 독자적인 상형문자를 발전시켰으 며 비교적 오래된 것은 메소포타미아지방의 수메르 또는 엘 - 21 -

람인의 문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 발견된 상형문자는 750개정도의 표현을 기본적인 체계 로 만들었으며 오랜 기간 동안 어떤 변형도 겪지 않고 사용 됐다는 사실은 마지막 신전이었던 필레 사원이 폐쇄될 때까 지 똑같은 상형문자를 사용한 것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이 문자들의 독창성과 복잡성은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기호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대상이나 사물을 나타내는 " 그림문자" 로 이 문자들을 겹쳐 사용하면 추상적인 개념도 표현할 수 있는데 풍뎅이나 말똥풍이 또는 태양 같은 상형문자가 그런 것이며 표의문자 나 그림문자의 다른 단어에서 자음근이 생길지라도 표음문 자를 변형시켜 간단히 음으로 나타낼 수 있도록 했으며, 둘째는 " 표음문자" 로 같거나 다른 형태의 소리를 표기하기 위해 사용했으며 어떤 물체를 묘사하지 않고 하나의 자음이 나 보다 더 많은 자음을 나타낸다는 것으로 표음문자는 표 의문자보다 늦게 생겨난 것으로 보며 글자마다 일정한 음가 를 가지고 있어 발음을 규칙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고, 셋째는 " 한정부호" 로 문맥 속에서 한 기호가 구체적으로 어 떤 대상이나 사물을 지적하는 것인지 알려주는 부호로 많은 고대이집트 단어들은 같은 기호를 가지고 있었으나 완전히 다른 의미를 표현할 수 있었는데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단어의 마지막에 " 한정사" 라고 부르는 것을 사용하면서 단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 중기이집트" 또는" 고전기 이집트어" 는 중 왕국시대의 언어를 가리키는 말로 문법학자들이 주로 연구하는 언어와 이집트 학의 계기가 된 상형문자도 이 시기에 속해 있으며 유명한 [ 시누혜 이야기]도 중 왕국시대에 쓰여 졌다고 합니다. 1799년 나폴레옹 군의 한 장교에 의해 나일강 서쪽델타지역 리시드라는 마을에서 2,200년( 기원전 196 년)전 열두 살인 프 톨레마이오스 5세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멤피스에 모인 사제들이 그리스어로 왕을 기리는 칙령을 만들어 돌에다 새 긴 높이 약 117Cm, 너비 약 74Cm인 로제타석이 발견돼 고 대에 사용하던 상용 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 다. ( 그리스어로 썼지만 민중문자와 상형문자로 된 번역이 함께 새 - 22 -

겨져 있다함.) 문자의 발달은 단순한 그림문자인 상형문자에서 설형문자( 楔 形 文 字 쐐기문자cuneiform script) 로 발전하고 설형문자는 그이 전의 그림문자와 달리 구체적 사물뿐 아니라 동작이나 추상 적인 개념까지 표현할 수 있도록 예를 들면 발( 脚 ) 이란 단어 는 발뿐 아니라 서다와 간다. 또는 온다는 뜻을 갖고 있으며 화살이란 말은 산다( 生 ) 와 ' 생명' 을 함께 표현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대상이나 목적격개념이 없기 때문에 완벽 한 문장이 되지는 못했지만 마귀를 쫓는 주문( 呪 文 ) 과 집권 자들이 권력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을 신격화하면서 신과 신 전을 찬양하는 글, 도시와 도시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서술하 기도 하고 사회질서를 위한 칙령이나 법전 등을 나타낼 수 있었으며 ' 대홍수 이야기' 와 ' 길가메시서사시'' 우르남무 법전' 등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수메르의 설형문자는 아카드인으로 이어지고 다시 바빌로니 아인, 아시리아인들에게 전해져 고대오리엔트전역에 퍼지게 됐으며 인도유럽어계통인 히타이트어와 페르시아어에도 전 해져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약 3천 년간 서아시아 지역의 공용어로 사용했고 알 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을 원정할 때 크게 위축됐다가 약 1,900년( 서기 74 년)전 완전히 사라졌으나 19세기 중엽 유럽언 어학자들에 의해 해독되면서 인류의 과거역사를 알 수 있게 됐다고 합니다. 기록과 유적을 살펴보면 설형문자는 바빌로니아나 아시리아 등 셈계의 여러 민족들과 비( 非 ) 셈계인 후르리 히타이트 페 르시아에서도 사용한 기록이 있으며( 마리문서 아마르나문서)페 르시아의 설형문자부터 자획( 字 畵 ) 이 줄어들고 자수도 37자 로 정리되었다가 시리아의 라스 샤므라에서 발견된 우가리 트왕국의 설형문자시대에는 글자가 30자로 줄었다가 현재의 완전한 알파벳으로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고대이집트 글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3,300년( 기 원전 13 세기)전 19왕조 시대에 상형문자로 쓴 ( 사자( 死 者 ) 의 서( 書 ) Book of the Dead) 라는 글이 있으며 예언이나 마법 또 는 의술이나 약전( 藥 典 ) 그리고 요리, 천문, 시간의 측정 등 - 23 -

을 다룬 지리에 대한 글들도 기록으로 남아있고 달의 움직 임을 기준으로 만든 달력으로 1년은 365일과 1/4일으로 변 화한다는 사실들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현재 서양에서 사용하고 있는 알파벳의 체계를 이룰 수 있 는 표현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자음만 표기할 수 있게 만들 어 사용하던 페니키아인들 문자로 이것이 그리스로 전해져 자음문자의 몇 가지 글자와 모음문자( α, ε, η, ι, ο) 를 만들고 여기에 ν( 입실론)과 ω( 오메가)를 추가하여 24자를 사용하다 후에 로마인들이 라틴계의 여러 언어로 표기하면서 문자의 기초가 됐으며 로마시대 라틴문자는 23자였으나 중세에 I에 서 J가 분리되고 Y에서 U와 W가 분화하여 현재의 26자가 됐다고 합니다. 라틴어계통 여러 언어의 대부분은 라틴문자알파벳을 다소 수정하고 보충한 것( 이탈리아어는 21 자, 에스파냐어는 28 자)을 사용하고 있으며 자형( 字 形 ) 은 중세에 이르러 그전에 사용하 던 글자의 대문자에 소문자를 추가하였고 16세기에 인쇄술 의 발명과 함께 현재 사용되고 있는 알파벳의 안정된 원형 을 갖췄다는 것입니다. ( 인류역사는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시기를 역사시대라 하고 기록을 남길 수 없는 시대는 선사시대로 나누고 있으며 선사시대는 다시 구석기시대, 중석기시대, 신석기시대로 나누고 구석기시대는 다시 전기와 중기, 후기로 구분합니다.) 모두가 공동으로 알아듣고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탄생되도 록 오랜 세월동안 인류는 점차적으로 발전했으며 무력으로 부족을 침략하고 권력을 형성한 무리들은 무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자기를 나타낼 방법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나타내고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전쟁을 일으키므로 타인을 강제로 굴 복시키려고 합니다. ( 이런 현상은 야생동물의 세계에서 잘 나타나 고 있음) 침략자인 부족장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힘자랑 하는 자들 끼리 싸우는 일이 비일비재했을 것이기에 무리가 살아가는 공동체는 평화를 잃어버리고 폭력이 난무하는 혼란을 겪었 을 것으로 판단되며 누구나 부족장의 자리를 지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모두가 평등하게 논의하는 공동체 구조로 발 전했다고 봅니다. 강요된 전쟁 때문에 죽기도 하고 부상을 당하는 등 피해를 - 24 -

입은 부족민들이 거부하는 현상도 있었을 것이고 혼자서 무 리를 무력으로 강제로 복종시키려다가 무리를 지어 반발하 는 세력들에 의해 쫓겨나기도 하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겪으 면서 서로가 논의하는 공동체로 발전했을 것입니다. 당시는 전쟁에 동원된 병사들이 현대의 군인이나 경찰처럼 혈세로 지배자에게 월급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농사를 짓고 살았기 때문에 침략자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할 의 무도 없었고 폭력을 거부하며 반항하는 자들도 있었다고 봐 야 하므로 직접적으로 죽이고 죽는 전쟁에서도 명령체계와 복종이란 있을 수 없었다고 봅니다. 공동체라도 힘이 있는 자들은 전쟁을 하면서 패배한부족의 남자들을 포로로 삼아 농사일과 침략에 대비한 성을 짓거나 향락과 안락한 생활을 위한 궁전을 짓고 지배자에게 복종하 는 사상으로 길들이는 신전을 짓는 노동에 강제 동원하며 혹사했을 것이고 여자들은 전쟁에 참가했던 병사들의 교접 대상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노예시대의 시작 문자가 발달하고 지배권을 가진 자들은 권력을 뺏기지 않기 위해 힘을 과시하면서 수천 년 동안 이웃부락을 침략해 곡 식을 강탈하고 부녀를 강간하며 남자들을 노예로 삼아 물질 을 대신 생산하도록 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부족 중 지배자 들은 노동을 하지 않고 노예의 노동을 착취하며 살기 시작 했습니다. 이때 까지도 가족이란 개념 없이 남자가 여자를 보면 무력 으로 제압하며 강제로 성관계를 하며 지냈을 것이나 수천 년 동안 반복되면서 남자들은 폭력과 저항 없이 마음대로 성관계를 가지며 여성의 섬세한 노동을 이용할 수 있다고 판단해 가족이라는 제도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힘 있는 자의 필요에 의해 가족제도를 만들었을 것이며 귀 족이나 힘이 있는 남성들은 혼인관계를 따지지 않고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으면 언제든지 마음에 드는 여성과 관계를 맺고 피지배자들만 일부일처제를 지켰다고 보며 이런 일들 은 한반도 왕들의 역사에도 확인되고 오늘날 생활 형태로도 나타납니다. - 25 -

이런 과정을 거쳐 무리나 또는 집단이 종족 번식과 보존을 위해 공동으로 아이들을 양육하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소그 룹인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먹는 것을 책임지고 생산하는 씨 족 공동체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봅니다. 힘이 약한 부족을 공격하면 언제든지 수족처럼 부릴 수 있 는 노예가 생기기 때문에 도망가지 못하게 울타리에 가둬놓 고 강제노동을 시켰으며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모든 먹을 것을 생산하고 주인이 호화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도 록 성과 저택을 지었지만 노예는 가축우리에 갇혀 먹는 것 까지 제한 당했다고 합니다. 무력으로 침략해 점령한 부족민들을 노예로 부리고 감시 통제하면서 노예들이 생산하는 물질로 편안하게 호의호식하 고 향락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자 힘이 생긴 사람들은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힘이 없는 부족을 침략하 게 됐고 이런 침략전쟁은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되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약탈하거나 방어하려면 집단의 힘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훈련된 병사들을 필요로 했을 것이며 노예들을 잡아 올 수 있는 병사들이 훈련받을 시설은 노예들의 강제노동으 로 만들고 지배자가 노예 전부를 관리할 수 없자 통제하는 사람이 필요해서 귀족과 평민이라는 사회적 계급을 형성하 게 됐다고 봅니다. 전쟁을 통해 힘을 과시하고 권력을 만들어 군림하며 편안하 게 누릴 수 있으니 수많은 부족을 침략했을 것이며 넓은 지 역을 차지하고 많은 노예를 확보했지만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아 전쟁에 참여했던 병사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강제로 통 제하고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규칙이라며 법을 만들기 시 작했을 것입니다. 자유롭게 살던 부족민들이 하루아침에 침략을 받아 살해되 기도 하고 붙잡혀와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혹독한 노예노동 을 시키니 몰래 도망가기도 했을 것이고 힘이 있는 사람들 은 저항하면서 내부에서 싸움을 일으키기도 하는 일들이 수 도 없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침략자들은 자연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던 사람들을 노예로 - 26 -

부리면서 자신들은 신의 자손인양 우월성을 강조했고 먼저 잡힌 노예와 숙련된 노예는 태어나면서부터 특별한 능력이 있는 듯이 차별대우하면서 먼저 온 노예가 늦게 온 노예를 멸시하도록 하므로 노예끼리 뭉쳐서 저항하지 못하도록 분 열시키기 위해 우월성을 조장합니다. 6천 년 전 충적평야 주변에서 노예들을 동원해 소규모 관개 농업( 인공적으로 물 관리시설을 만들어 물을 공급 이용하는 농업 방식)을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농사를 짓는데 쟁기를 사용했 고 또 바퀴가 달린 짐수레가 만들어지자 노예들을 가혹하게 혹사시키면서 무거운 돌을 날라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성을 쌓았습니다. ( 수메르와 마야, 황허문명, 아즈택, 잉카, 인더 스, 메소포타니아, 이집트문명 등) 바퀴의 발달은 집을 짓기 위해 나무를 다듬다가 밟아 미끄 러지고 넘어지는 과정을 되풀이 하면서 둥근 것은 굴러가는 속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며 이런 경험을 통해 무 거운 물건을 운반할 때 물건 아래 둥근 나무들을 받치면 쉽 게 이동할 수 있다는 원리를 발견하고 수레바퀴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바퀴는 청동기 시대인 5,200년( 기원전 3200 년경)전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족이 처음으로 발명해 마차 의 바퀴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A depiction of onager-drawn carts on the Sumerian "bat tle standard of Ur" (circa 3200 BC) 농사를 짓기 위해 수리시설을 고안하고 노예를 동원해 물을 끌어올 수 있는 수로공사로 수세식화장실을 만들고 목욕탕 을 지었으며 먹을 것이 풍부하니 귀족들은 호화생활을 누리 지만 침략전쟁에 참여하고 피해까지 입은 병사들은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없어 반발하다 불만이 쌓여 폭발해 내란을 일 으켰을 것입니다. 문명 초기 침략전쟁에 승리한 부족들은 전리품을 부족의 공 동소유로 공정하게 나누어 불만이 없었을 것이나 훈련된 병 사조직이 생기면서 병사들을 관리하기 위해 명령하는 사람 과 명령받는 사람으로 계급이 형성되고 귀족과 평민으로 나 누면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전쟁승리의 전리품을 독식하 므로 이에 불만은 표현하는 병사들이 늘어났을 것은 자명합 - 27 -

니다. 신분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전리품을 독식하는 귀족들의 행 위에 반발해 병사들은 자신이 잡은 포로는 자신의 노예라면 서 몰래 붙잡아가기도 했을 것이고 자신이 강탈한 물건인데 왜 귀족이 차지 하냐며 물건을 내 놓으라고 요구해서 내부 분란이 끊임없이 일어났기 때문에 편안하게 호화생활을 누 리던 귀족들이 더 이상 질서를 유지할 수 없자 규칙( 법률)을 만들었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침략자는 반드시 엄청난 괴력과 흉악한 성격으로 무력을 행 사하는 후손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약한 후손과 무 력을 거부하고 이성과 양심을 찾으려는 후손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침략으로 왕족이나 귀족을 칭하던 무리들은 자신의 신변을 보장할 수 없어 대를 이어 혈통을 보전하며 영구히 신변을 보장받기 위해 규칙을 만들었다고 봅니다. 법( 규칙) 의 출현 지금까지 발견된 사실로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만들어진 법 전은 4,000여년( 기원전 2100 년~ 기원전 2050 년 사이)전 점토판 에 새겨진 우르남무법전( 法 典, Code of Ur-Nam mu) 으로 최 초에 니푸르에서 두 조각이 발견돼 1952년 샤무엘 크레이머 에 의해 번역됐으며 추가로 우르에서 점토판이 발견돼 1965 년에 번역했다고 합니다. 내용은 고아는 부유한 이에게 보내지 않으며 과부는 힘센 이에게 보내지 않고 재산이 1쉐켈의 사람은 1미나의 사람에 게 보내지 않았다. 는 등의 내용과 살인을 저지른 사람과 절도한 사람은 사형돼야 한다. 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런 규 정에서도 노예와 주인간의 차별을 두고 있으며 귀족들이 신 분이 높다는 이유로 병사들로부터 강탈한 재산을 지킬 수 있는 조항들이 있을 뿐 공정하게 지켜야 한다거나 평등을 위한 규칙들이 아닙니다. 법률적 강제규칙들은 프랑스 모르강(De Morgan)과 함께 190 1 년 수사(Susa)에서 페르시아 탐험대가 발견하기도 했는데 300년 후인 3,700년( 기원전 1,690 년경)전 바빌로니아 왕국 함무라비 왕( 기원전 1724~1682 년 재위)이 즉위 38년에 높이 2.5m, 둘레 1.8m의 상부에 함무라비 왕이 태양신으로부터 - 28 -

법전을 받는 장면을 부조한 탑이 발견된 것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초의 성문법이라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은 총 3,000행으로 282조의 설형문자로 기록됐는데 특징은 사람의 권리를 3계 급( 귀족 평민 노예)으로 나누어 신분에 따라 형벌을 결정하도 록 규정했습니다. 단순한 사고에 의한 살인도 사형에 처하고 아들이 아버지의 뺨을 때리면 손을 자르도록 했으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 이 알려졌지만 실상은 공공의 안녕을 위해 모두에게 평등하 게 적용되는 규칙을 정한 것이 아니라 자유인과 천민 그리 고 노예의 차이를 분명하게 규정하므로 귀족이 자유롭게 돌 아다니며 갈취할 권리를 확보하고 권력을 행사하며 신체와 재산을 지키는 내용으로 구성된 것입니다. 내용은 자유인의 눈을 뺀 자는 그 눈을 빼고 자유인의 뼈 를 부러뜨린 자는 그 뼈를 부러뜨리며 천민의 눈을 빼거나 뼈를 부러뜨린 자는 은1마누의 형에 처하고 노예가 자유민 의 뺨을 치면 그 귀를 자른다. 고 하는 규정들이 있습니다. 영주가 자유인이나 노예에게 땅의 경작을 명했는데 농사를 짓지 않아 땅이 못쓰게 되면 은으로 보상해야 한다. 는 내용 이 있어 노예나 자유인은 귀족이 마음대로 노동을 시킬 수 있었고 이를 거부하면 은으로 배상해야 한다고 강제하는 등 무력으로 침략하여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의 수탈행위를 정 당화하는 규정들입니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4,500( 기원전 2,500 년)년전 역사시대에 밀 재배면적의 6배나 많은 보리를 재배했으나 역사시대 후기로 오면서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토양 비옥도가 낮아져 밀은 완 전히 자취를 감췄으며 대추야자( 메소포타미아), 무화과( 고원지 대), 올리브( 레반트 지역)등 과수재배를 시작했고 대추야자는 넓은 경작면적이 필요하지 않고 염류농도에 상당한 내성이 있어 전 지역으로 급속하게 퍼졌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년 전 기원전 년경 나일강 유역에 5,000 ( 3,000 ) 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긴밀히 상호작용하는 수메르와 아카드에 도시부족과 도시연맹체가 존재했으며 이때부터 강 력한 힘을 가진 군사통치자가 지배하는 왕국이 탄생되기 시 - 29 -

작했다는 것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초기 농경에서 도시로 발전하는데 4천년이 나 걸렸지만 이집트의 문명발달은 약 2,50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집트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걸었던 길 과는 다소 다른 방법으로 발전했는데 농경촌락들을 부락단 위로 편성시키면서 성공적으로 농업기반을 마련하므로 신속 하게 안정을 찾게 됐으며 교역과 관개공사를 한 것들이 발 전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기록돼 있다고 합니다. 왕국을 건설한 무리들은 가뭄과 폭풍우 그리고 지진이나 화 산폭발 같은 것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신의 노여움을 사서 그렇다는 거짓말로 백성들을 복종시키고 다 스리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신들을 탄생시켰으며 스스로를 무소불위의 신이나 신의 아들로 자처하며 수많은 우상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약탈을 목적으로 침략해서 자유롭게 살던 사람들을 학살하 며 부족을 점령하고 왕국을 건설한 무리들은 부족민들이 자 신들의 지배 통치를 인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 며 저항하므로 복종심을 심어 통제하기 위해 신을 만들고 자신은 신의 아들이라 자처했으며 노예노동으로 복종을 위 한 신전을 짓고 권력을 행사하는 궁전과 안전을 지키는 성 을 지었습니다. 포로로 잡힌 노예들은 병사들의 감시와 통제 속에 지배자들 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길렀고 무거운 바위 돌을 날랐으며 제대로 먹지 못하고 힘든 노동을 하다 쓰러지면 가차 없이 채찍질을 당했고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거나 반항하면 맞아 죽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먹지 못하고 밤낮으로 강제노역을 하다 영양실조로 쓰러지 는 노예들이 속출하자 노예들의 원기를 북돋운다며 마늘과 고추를 먹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 고추와 마늘을 먹인 기록은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건설 때 기록되어 있음) 이렇게 건설돼 발달한 제국이 이집트와 마야문명으로 마야 인들은 5,000년전( 기원전 3,000 년경) 멕시코남부 치아빠스주 고원지방에 살았고 3,500년( 기원전 1500 년경)전부터 농사를 - 30 -

짓기 시작했으며 2,800년( 기원전8 세기경)전에는 멕시코의 남 부지방과 과테말라를 중심으로 하는 중미의 여러 지역에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2,500년전( 기원전 5 세기)에 띠깔과 와학뚠을 중심으로 번성하 기 시작해 1,700년 전( 기원후 300 년경)까지 엄청난 문화발전 을 이루었고 중심도시는 과테말라북부에 있는 엘뻬뗀으로 과테말라고원지방족인 끼체 족과 더불어 살았다는 것입니다. 5,200년( 기원전 3,200 년)전 이집트 보다 통일국가 발전이 약 60년 늦은 메소포타미아문명이 출현했는데 수메르인들은 각 지에 신전을 중심으로 한 도시부족을 세우기 시작해 정치나 생활은 신전을 중심으로 했으며 도시부족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던 초기인 4,350년( 기원전 2350 년경)전에 셈족의 사르곤 1 세가 통일하면서 아카드왕조를 탄생시켰다고 합니다. 사르곤 1세는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병사들의 무 력으로 도시부족들을 침략하며 정복을 시작했고 정복한 도 시부족들에 관료들을 임명하므로 집권의 틀을 갖추고 자신 을 스스로 키시(Kish)의 왕, 사계( 四 界 ) 의 왕, 수메르 아카드 의 왕 이라 칭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칭호가 후일 메소포타미아지배자의 명칭이 됐으며 아 카드인은 수메르도시부족이 습득하고 있던 문자를 비롯해 신화( 神 話 ) 문학 기술 예술 등 수메르적 요소를 폭넓게 흡수 하고 오랜 기간 동안 함께 생활하므로 인종적으로 양자가 점점 융합하여 바빌로니아세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수메르인은 4,050년( 기원전 2050 년경)전 막강해서 우르 제3 왕조를 세웠으나 5왕조 107년 만에 엘람인에 의해 멸망했고 그 후 이신 라르사 마리 바빌론 등 여러 부족들이 패권을 다 투다가 아무루계( 系 ) 바빌론 제1왕조의 6대왕 함무라비가 3, 700년( 기원전 1700 년경)전 이집트에 맞설 강력한 병사로 힘 을 갖게 되므로 제국을 건설하고 함무라비 법전을 선포했다 는 것입니다. 함무라비는 각 부족들이 우상화하던 신들의 계보를 통합해 바빌로니아문명을 부흥시켰지만 이 무렵 이란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산악지대에서 목축으로 살던 히타이트 후르리 카시트 - 31 -

등의 부족들이 말이나 전차( 戰 車 ) 를 이용해 농경지대를 침략 하며 약탈하고 도발을 일삼아 강력했던 바빌론 제1왕조는 3,600년( 기원전 16 세기 후반)전 히타이트인에 의해 멸망했다고 합니다. 4,000년( 기원전 2000 년경)전 이집트는 제12대 왕조를 세우고 병사들의 무력을 바탕으로 통치하며 노예들을 착취하여 번 영을 누리기 시작했으나 3,700년( 기원전 1700 년경)전부터 셈 계( 系 ) 의 유목민인 힉소스인이 서( 西 ) 아시아로부터 침입하므 로 오리엔트는 혼란스러웠다는 것입니다. 3,500~3,400년( 기원전 15~14 세기)전 이집트 왕인 아멘호테 프3 세, 아나크톤4세는 아시아 각국 왕 들과 군사동맹을 맺 고 히타이트 후르리( 미탄니) 아시리아 카시트( 카시)와 힉소스 족을 추방하므로 권력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 나일강 중류의 텔 엘 아마르나에서 발견된 360통의 아카드어로 기록된 설형문자 점토판문서( 아마르나 문서) 는 이집트 왕인 아멘호테프 3 세, 아나 크톤 4 세와 아시아 각국 왕 사이에 교환된 공식서간( 公 式 書 簡 ) 으 로 확인) 평화롭던 부족들을 침략해 정복자가 된 무리들은 제국을 건 설하고 왕이라 칭했으며 왕은 태양신의 아들로 자처했으므 로 달의 공전과 지구의 자전에 의해 별자리가 이동하고 변 화하는 시기를 알아야 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별자리의 이동을 기록하고 분석하다가 나일 강이 범람할 때는 일정한 위치에 시리우스( 큰개자리 α 별)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태양력( 태양 공전주기인 3 65.2422일을 12 달로 나눈 것)을 만들게 되는 등 천문지리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태양력과는 달리 태음력을 사 용하기도 하는데 태음력은 달의 운행만을 기준으로 삼아 달 이 29.53059일 만에 보름달이 되었다가 그믐달이 되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1개월의 기준으로 삼아 활용하고 있으며 현 재의 음력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수메르인들이 번성했던 3,700년( 기원전 1,700 전경)전 나일강 변에 큰비가 내리는 대홍수가 발생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비옥했던 농토들이 침수됐으며 농사를 지어 수확한 많은 곡 - 32 -

식들이 떠내려가자 왕들은 신이 노해 저주가 내렸으니 신에 게 제물을 받치고 제사를 지내야 한다며 사람의 심장을 제 물로 받치는 죽음의 제로 대중에게 공포심을 주며 내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복종시켰습니다. 많은 부족을 정복하여 제국으로 발전한 침략자들은 점령당 한 부족에게 자신들이 믿는 신을 모시는 신전( 페르시아전쟁의 승리를 기념해 2,447 년( 기원전 447~432 년) 전 익티노스의 설계로 세워진 그리스의 파르테논신전( 아테네라는 여신을 위한신전) 도 노 예노동으로 만든 것임)을 짓도록 하고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제를 지내게 함으로 복종하는 사상으로 길들이고 통치한 것 입니다. ( 이런 현상들은 오늘날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부족을 침략으로 정복한 무리들은 패배한 종족의 기 득권들에게 공물을 바치는 식민지로 예속될 것을 강요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학살하고 남은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으며 자신들이 저지른 흉악한 악행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순종시 키기 위해 신을 자처하며 자신들은 죽어도 다시 부활한다고 세뇌하며 통제했습니다. 평화롭게 살던 부족들을 점령한 무리들이 점령부족민을 복 종시키기 위해 신을 만든 것이며 자신들의 악독한 수탈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억압하며 통제 지배하기 위한 방법으로 부활을 주장하고 부활할 장소라며 노예들을 혹독하게 억압 하고 수천 년간 신전과 자신들의 무덤인 피라미드를 만들어 권력을 유지한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문명을 이루었다는 이집트는 구석기시 대 신석기시대 금석병용시대를 경유해 역사시대( 왕조시대)로 이행됐다는 것이며 구석기시대에는 자연경관( 自 然 景 觀 ) 이 왕 조시대와 달랐는데 유럽 빙하기( 氷 河 期 ) 의 영향으로 우기( 雨 期 ) 와 건기( 乾 期 ) 현상이 주기적으로 나타났으며 당시 인류가 거주했던 지역은 하곡지대가 아니라 서쪽방면의 대지( 臺 地 ) 였다고 합니다. 아슈르기( 期 ) 무스티에기 솔뤼트레기 등에 속하는 구석기시대 의 유물은 나일 강에 형성된 단구( 段 丘 ) 위나 파이윰호수( 湖 ) 하르가 등의 오아시스주변 높은 지점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중기까지의 문화는 이집트 전토( 全 土 ) 에 걸쳐 동일한데 비해 후기에는 지방마다 다르게 특색을 띄고 있다는 것입니다. - 33 -

파이윰 지방은 에피르발루아 문화, 하르가 오아시스의 아테 리안 문화 등이 발굴됐기 때문에 당시 북아프리카는 다우습 윤( 多 雨 濕 潤 ) 에서 건조( 乾 燥 ) 로의 이행기( 移 行 期 ) 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약 7,000( 기원전 5000 년경)전 건조화가 진전되면서 나일 강 수위( 水 位 ) 가 내려가 자연환경이 현재와 비슷하게 됐을 때부 터 사람들은 나일 강 하곡에 정착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으 로 보고 있으며 사람들은 점차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던 시기에서 이웃부족을 침략해 노예 로 삼고 공물을 강탈하는 왕조시대가 형성됐다고 합니다. 신석기 후기 유적으론 카이로 서남 80km에 있는 파이윰문 화와 중부 이집트동안( 東 岸 ) 의 델 타사유적이 많이 발굴됐는 데 이때까지도 사람들은 떠돌아다니는 수렵생활을 한 흔적 들이 나타나지만 한편으로는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른 흔적 들도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집트 상 하는 각각 다르 게 발전된 것으로 보이며 발굴된 유물로는 토기와 석기 그 리고 골각아기( 骨 角 牙 器 ) 바구니세공[ 籠 細 工 ] 직물과 피혁제품 팔레트( 화장접시) 꾸미개[ 裝 身 具 ] 등이 있습니다. 유물로 보면 인류는 아주 오랜 세월동안 자신들에게 필요한 생활필수품인 옷이나 신발 같은 물질들을 만들어 사용한 것 으로 보이며 침략자들이 왕조를 만들고 각 지역에서 수공업 작업에 익숙한 사람들을 포획해 노예로 삼고 야금( 冶 金 ) 이나 무기제조 또는 피혁이나 도기( 陶 器 ) 그리고 약기와 약품 등 을 생산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남자노예들은 자신들을 혹독하게 감시 통제하는 감독관과 지배자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고기를 잡고 생필품인 주택과 신발 그리고 가구 또는 귀족 들이 타고 다닐 마차와 귀족들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금 광에서 목숨 걸고 생산노동을 했다고 합니다. 노예들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받고 게으름을 피우면 채 찍을 맞으며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질을 만들어 낸 것이고 여자노예들은 음식을 만들고 귀족들이 입고 생활할 옷을 만 들었으며 집안을 청소하고 식물을 채취하기도 했지만 성욕 과 유흥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 34 -

금석병용기( 金 石 倂 用 期 ) 시대에는 상( 上 ) 이집트엔 바다리 유 적, 하( 下 ) 이집트엔 메림데 유적이 발굴되는데, 바다리 유적 은 고타( 敲 打 ) 에 의한 것으로 주조한 방법에 대해서는 밝혀 지지 않고 있으나 최초의 구리제품과 현저히 발달된 토기가 발굴됐으며 시나이 누비아산( 産 ) 공작석( 孔 雀 石 ) 이나 홍해산( 紅 海 産 ) 조개, 시리아산의 삼목재 등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는 엄청나게 넓은 지역을 침략해 정복하고 공물을 받거 나 강탈해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의 탄생 3,300년( 기원전 1,200 년경)전 이집트왕국은 많은 종족들을 정 복해 살았는데 특정종족들의 자손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자 왕족( 기원전 1290 1223 년경) 들은 숫자가 많은 종족은 전쟁이 나면 내란으로 권력을 찬탈할 수 있다고 우려하며 태어나는 남자 어린아이들을 살해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유아들을 살해하므로 종족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막으 면서 권력을 유지했는데 특정종족의 아이로 태어나 학살을 피해 강가에 숨겨졌던 모세( 본명 요김' 야훼께서 세우신 자' 라는 의미였으나' 모세' 라는 이름은 이집트 공주가 지었다 함)라는 사람 이 이집트공주에 의해 구출됐다고 합니다. 그가 40세가 되던 해 같은 종족이 학대받는 것을 보고 분개 해 이집트인 감독관을 살해한 후 동족들에게 함께 저항하자 고 호소했으나 동조하는 사람들이 없어 혼자 외롭게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게 됐고 도망간 곳에서 유목민으로 생활하던 미디안족( 族 ) 사제( 司 祭 ) 이드로( 르의엘)의 딸 시뽀라와 결혼 했다는 것입니다. 사제의 딸과 결혼하고 자연에서 누구에게 간섭받거나 통제 되지 않고 자유롭게 생활하며 장인이 신께 제사지내는 행위 로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것을 보고 깨달은 모세는 80세 되 던 해 이집트로 돌아와 똑같은 인간임에도 침략자들에 의해 자유를 박탈당하고 억압과 통제 속에 혹사당하는 사람들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권력을 잡은 무리들이 사람들의 자유를 부정하고 억 압하기 위해 신격화하고 칭송하는 태양신과 헤라 신을 부정 하며 자신은 하느님( 야훼)을 섬기고 있다고 설파했다고 합니 - 35 -

다. 그는 하느님의 율법엔 모든 사람은 자연에서 자유롭게 살 아야 하는데 침략자( 권력자)들에 의해 법률과 규칙에 얽매여 숫자를 받고 지시와 통제 속에 살아가는 것은 노예의 삶을 사는 것이므로 모든 관습과 법률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 고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 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감시와 통제 속에 혹독한 채찍질을 당하며 지배자들 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질을 생산하던 노예들과 전쟁에 참 여하고도 강탈한 물질을 차지하지 못해 불만이 생긴 병사들, 그리고 평민이라는 이유로 귀족들의 권위에 억눌려 굽실거 리며 착취당하던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됐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모세는 이들과 함께 세력을 규합해서 힘을 기르고 형 아론의 협조를 얻어 파라오에 대항해 싸워 이기므로 자신의 종족을 노예에서 해방시켰다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종족을 해방시킨 모세는 여러 종족이 모 여 살며 권력쟁탈과 지배 통제의 틀에 갇힌 이집트를 벗어 나 자신의 종족끼리 평화롭고 자유롭게 거주할 비옥한 땅을 찾아 유랑생활을 시작했으며 평소 자신이 주장했던 평등사 상과 철학에 따라 힘( 권력)을 가졌지만 권위를 내세우거나 무력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신망을 받은 모세는 거짓을 섬기는 제단을 만들지 말 것과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어 평등하므로 법률이라는 핑계로 착취나 갈취를 하기 위해 지 배 통제하거나 사람이나 살아있는 짐승을 잡아 제물로 바치 는 거짓 신앙인 제를 지내지 말라는 언약들을 구약과 율법 으로 남겼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부족들을 침략해 힘으로 왕국을 건설한 제국의 왕들 은 힘( 권력)을 믿고 독선적 독재만 행사했지 조직을 관리할 두뇌나 행정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내부에서 폭정에 저항하 는 사람들과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권력을 잡으려는 무리 들도 있어 수많은 분열을 일으키면서 호시탐탐 권력을 찬탈 할 기회를 노렸습니다. 하지만 왕국을 건설하고 귀족생활에 젖어 안락하게 살아온 무리들은 다른 부족을 침략하고 물질을 약탈하려고 노력할 - 36 -

때는 강성한 힘이 있었지만 편안한 귀족생활로 향락에 젖은 생활을 즐기면서 힘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힘은 점점 약해지 고 무기력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이 있거나 덩치가 큰 사람들은 성장하면서부터 약자를 괴 롭히거나 물건을 강탈할 수 있기 때문에 생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단순하고 미련한 경우( 남의 물건을 강탈하기 위한 머리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가 많지만 힘이 약하거나 덩치 가 작아 항상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폭력 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괴롭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을 고심하며 살아가므로 두뇌회전이 빠른 경우가 많은 것입 니다. 당시엔 거친 들판과 산야에서 목축을 하며 유랑생활을 하던 종족들은 사나운 맹수들을 사냥하기도 하고 가축들을 지키 기 위해 맹수들과 싸우면서 단련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 습니다. 이렇게 단련된 종족들은 무기와 기마병으로 무장하고 왕족 들이 지배하지만 군사력은 없고 양식은 풍부한 변방을 수시 로 침략해 약탈과 부녀를 납치하는 수탈전쟁을 수없이 되풀 이 하며 왕국을 점령하기도 했기 때문에 힘으로 건설된 왕 국들은 소멸했다 탄생되기를 반복하며 발전해 왔습니다. 마야제국은 1,700 년전~1,200년( 기원후 300-800 년)까지를 구 마야제국이라 하고 1,2 00년 전부터 500년 전(800-1500 년) 까지를 신 마야제국으로 부르고 있으며 신 마야제국의 중심 지는 유까딴 반도로 멕시코북부지역의 똘떼까 문화권과 교 류하며 번성했습니다. 기원후 5세기 전후에 번성했던 구 마야제국은 9세기 후기 북부지방에서 내려온 이짜족과 도시연맹을 결성했지만 560 년(1450 년경)전 마야족과 이짜족 간에 전쟁이 발생해 마야빤 은 파괴되고 1563년에 스페인이 이 지역을 정복했을 때 마 야제국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야인은 농경에 의지하는 도시였음에도 엄격한 사회신분제 도를 두고 차별했는데 사제의 신전이나 귀족의 궁전들을 높 은 구릉 위에 요새같이 구축하고 이 구릉을 평민들이 사는 이엉으로 지붕을 얹은 다닥다닥 붙은 오두막이 도시를 뺑 - 37 -

둘러싸고 있으며 중간계층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극히 소수지배자와 다수의 피지배자들로 나뉘고 귀족들은 권위적이며 폐쇄적으로 생활했고 사제직을 맡았으며 스스로 를 알메헤노브라 불렀는데 그 의미는" 아비와 어미를 가진 자" 즉 혈통을 지니고 있는 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 이런 기 록으로 보아 이때까지도 난교생활을 했고 가족은 침략으로 지배자 가 돼 권력을 행사한 무리들만 형성 했을 것으로 추측됨) 마야나 잉카제국은 병사들의 힘( 무력)으로 통치했으며 태양 을 신으로 섬겼고 왕은 스스로 태양의 아들이라 칭하며 노 예에게 신전과 제단을 짓도록 했으며 귀족, 평민, 노예로 철 저하게 신분을 나누고 태양신에게는 사람의 심장을 제물로 받치는 의식을 치렀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왕이 지명하는 사람을 제단위에 눕 히고 마야는 살아있는 남자가슴에 잉카는 여자가슴에 칼을 꽂아 살해하고 심장을 꺼내는 의식을 치르므로 대중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며 무력으로 권력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 이 러한 사실들은 당시 새긴 그림문자와 조각의 유물들로 확인되고 있음) 무력으로 왕국을 건설한 무리들의 통치수단인 종교의식 때 문에 제물로 받쳐질 사람들이 필요했으므로 제물을 마련하 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노예를 확보했으며 확보된 노예들의 노동으로 먹을 것을 생산하고 신전들과 귀족들이 누리고 살 아갈 건물들을 지었으며 신전의 제물로 받쳐졌다는 것입니 다. 석가의 탄생 2,500년( 기원전 563~483 년경)전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 국 경부근인 히말라야산( 山 ) 기슭에 카필라성(Kapilavastu: 迦 毘 羅 城 )을 중심으로 샤키야족( 釋 迦 族 ) 이라는 작은 부족국가의 왕 슈 도다나(Śuddhodāna: 淨 飯 王 ) 와 부인 마야(Māyā: 摩 耶 ) 사이에 싯 다르타(Siddhārtha: 悉 達 多 ) 고타마(Gautama: 瞿 曇 ) 라는 왕자가 태어났으나 생후 7일 만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이모에 의해 양육되면서 왕족의 교양에 필요한 학문과 기예를 배우며 성 장했다고 합니다. 당시 풍속이 결혼한 여성은 친정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남편 - 38 -

에게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마야부인이 고향으로 가던 중 룸비니 동산에서 싯다르타 고타마를 낳았다는 것이며 이러 한 사실은 아소카( 阿 育 王 ) 라는 왕이 석가모니의 성지를 순례 하면서 석가모니가 탄생한 자리를 기억할 수 있도록 석주( 石 柱 ) 를 세웠는데 이것을 1896년에 발견해 해독하므로 확인됐 다는 것입니다. 인도역사는 50만 년 전 호모에렉투스가 생활하던 시기부터 유적이 발견되고 있으며 인류라고 할 수 있는 호모사피엔스 는 7만5천 년 전 타밀나두지방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것으로 발굴됐고 5,300년( 기원전 약 3300 년경)전 무렵부터 3,300년 ( 기원전 1300 년경)전까지 고대 인더스문명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인더스문명은 3,900년( 기원전 1900 년경)전 까지 이어진 청동 기시대 하라파시기와 이후 철기 시대인 베다시대로 구분하 고 있는데 베다시대에 들어 힌두스탄평원에는 십육대국으로 불리는 고대도시국가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십육대국의 하나인 마가다에는 2,600년( 기원전 6~5 세기)전 베다종교( 다양한 신)와 브라만교( 힌두교의 원조)만 있던 인도에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마하비라와 불교의 창시자인 싯다르타 고타마와 같은 사람들이 새로운 사문((samana, 沙 門 ) 이란 노력 하는 사람 이라는 정도의 뜻)을 구성하고 후일 무함마드에 의 해 이슬람( 순종이란 뜻)교가 생겼습니다. 아리안 족들은 강력한 군사력과 재빠른 기마병을 갖추고 있 었으며 글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힘이 약한 부족을 침략해 식민지를 넓혔으며 이들이 정복한 부족에게는 베다종교를 믿게 하면서 4개로 구성되는 계급의 신분제도를 만들어 통 치했습니다. 인도의 신분제도를 카스트( 혈통을 뜻하는 포르투칼어 카스타(ca sta) 에서 유래한말)제도라고 하는데 힌두교의 윤회사상을 근 간으로 하고 있으며 사람은 죽어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부 모로부터 혈육을 물려받아 태어나면 부모의 계급과 신분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카스트제도는 아리안 족이 원주민을 억압하고 통치하는 수 단으로 사용했던 4계급제도를 신앙의 기원으로 하여 변화시 - 39 -

킨 사상으로 현재까지도 통치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 니다. 카스트는 1. 신분과 직업을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으며 2. 태어 나면서부터 지위를 세습하고( 태어날 때 부모가 가지고 있던 신 분의 세습) 3. 타고난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수 없도록 할 뿐 아니라 4. 다른 신분과는 결혼을 금지하며 같 은 계급끼리 결혼하도록 강제하고 일상생활도 같은 신분끼 리 어울리도록 규정됐습니다. 카스트의 계급구성과 특징을 살펴보면 최고신분은 성직자인 브라만이라는 신분으로 제사의식을 독점하고 학문을 연구하 는 것이며, 둘째계급은 귀족과 무사들로 정치와 병사를 지휘 해 백성들을 통치하고 다스린다는 크샤트리아라 불리는 신 분이며, 셋째는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생산에 종사하는 농민과 상인계급으로 바이샤라는 신분이고, 마지막인 넷째 수드라계급은 노예로 위의 세 신분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의 무를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는다고 합니다. 왕이 절대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의 지휘를 받아 통치해야 하는 정치체제를 갖춘 환경 속에서 성장한 싯다르타 고타마는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나 당시 풍 습에 따라 16 세에 부인인 야쇼다라( 耶 輸 陀 羅 ) 와 결혼했으며 아들라훌라( 羅 睺 羅 ) 를 낳고 행복한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생후 7일 만에 모친이 죽은 사실과 새가 벌레를 잡 아먹는 것 등 인생의 철학에 직면해 고뇌하다 29세 때 처자 와 왕자의 지위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생로병사와 고뇌가 생 기는 근원을 파악하고자 고행의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처음엔 출가자의 풍습에 따라 육체를 학대하는 고행( 苦 行 ) 에 전념해 신체가 해골처럼 됐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남쪽 으로 내려가 갠지스강( 江 ) 을 건너 마가다국( 國 ) 왕사성( 王 舍 城 :Rājagha)에서 알라라칼라마와 우다카 라마푸타라는 스승들 을 차례로 찾아 무소유처정( 無 所 有 處 定 ) 비상비비상처정( 非 想 非 非 想 處 定 ) 이라는 선정( 禪 定 ) 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방법으로는 생사의 괴로움을 해탈할 수 없다고 생각 해 부다가야 부근의 산림으로 들어가 6년간 고행했으며 다 시 보리수( 菩 提 樹 :Bodhi-tree) 아래에 자리 잡고 깊은 사색에 - 40 -

빠졌다가 정각( 正 覺 :abhisambodhi) 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깨달음의 내용<아함경( 阿 含 經 )> 은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으 나 사제( 四 諦 : 苦 集 滅 道 의 4 가지 진리, 즉 현상계의 괴로움과 그 원인 및 열반과 그에 이르는 길) 십이인연( 十 二 因 緣 ) 사선삼명( 四 禪 三 明 ) 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기본적으로는 선정에 의해 자 연의 이치 즉 법( 法 :dharma) 칙을 깨달고 집필했는데 선정은 강렬한 마음의 집중이며 공포도 고통도 나아가 애욕도 산란 이 발생되지 않는 부동( 不 動 ) 의 마음( 내공)을 이루는 것을 깨 달으면 번뇌와 속박에서 해방되고 여기에서 생긴 지혜는 신 비적 직관( 直 觀 ) 이 아니라 자유로운 여실지견( 如 實 知 見 : 사물을 있는 그대로 옳게 봄)이라고 설파하여 성인으로 추앙받게 됐 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고 모든 사람들에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하며 신이나 계급으로 구분 짓고 자유를 억압당하는 것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니자 하급신분으로 태어나 억압받고 노예로 생활하던 많은 사람 들이 설법을 듣기 위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고 합니다. 군중들이 열망하므로 불교로 된 것이며 불교에 많은 신도가 모여 강성해지자 카스트제도가 부정되면서 성직자들의 권위 가 약화되니 권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 성직자들이 최고 권 력인 성직을 회복하기 위해 종교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입니 다. 이 전쟁에서 불교가 패하고 설법을 펼치던 승려들이 카스트 를 신봉하는 성직자들의 무력에 학살당하므로 불교는 인도 에서 사멸되고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성직자들이 권력을 잡 아 신분제도를 부활시켰다고 합니다. 석가모니( 釋 迦 牟 尼 )( 석가는 샤카( 샤키야,Sākya) 라는 민족의 명칭 을 한자로 발음한 것이고 모니(muni) 는 성인이라는 의미라 함)는 석가문( 釋 迦 文 ) 등으로도 음사하며 능인적묵( 能 仁 寂 默 ) 또는 보 통 석존( 釋 尊 ) 부처님이라고도 하기도 하며 석가모니란 본래 는 ' 석가족( 族 ) 또는 샤카족 출신의 성자' 라는 뜻으로 불교를 창시한 인도의 성자( 聖 者 ) 로 부처님, 부처, 석가모니, 석가세 존, 석존, 세존, 석가, 능인적묵, 여래, 불타, 붓다, 불( 佛 )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 41 -

초기불교는 예배대상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굽타왕조 이후부 터 권력을 잡은 기득권들이 불탑과 불상을 만들고 민간신앙 인 힌두교( 잡교와 밀교)와 같은 형태로 변질시켜 석가 정신이 훼손되면서 지금의 종교형태가 됐다고 합니다. 이슬람병사는 8세기 이후 북서인도까지 진출했다 11세기에 다시 몇 왕조가 북부인도에 들어와 아프가니스칸, 간다라, 캐시미르 등지에서 불교사상을 억압하고 12세기 말엽-1 3 세기에 걸쳐 불교사원을 침공해 불태우며 파괴하고 승려들 을 살해하거나 추방하므로 인도에서 불교는 사멸했다는 것 입니다. 로마제국의 출현 고대 로마( 라틴어: Roma antiqua)역사가들은 2,800년( 기원전 8 세기경)전 이탈리아의 대다수가 상대적으로 미개한 상태일 때 에트루리아인들이 라티움에서 테베레 강을 건너와 정착 해 살았으며 이탈리아남부와 시칠리아( 마그나 그라이키아)지 방에도 그리스 인들이 넘어와 정착하고 살면서 집단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이들이 정착해 살던 팔라티누스 언덕을 비롯한 로마의 여러 언덕에 농촌 촌락들이 형성됐는데 이들 산지 촌락들은 저마 다 독특한 방언과 관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700년( 기원전 7 세기 무렵)전 비옥한 땅에서 농경사회를 이 루고 자유로우며 풍족하게 살던 티베리스 강( 현재의 테베레 강)하류 라티움이라는 지역을 인도 유럽계 고대 이탈리아인 에 속하는 라틴인과 사비누스인 일부가 무력을 행사하며 침 략해 사람들을 학살하고 점령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라티움을 점령하고 비옥한 땅에서 생산한 곡물을 강탈하므 로 먹을 것과 재물이 풍족한 침략자들은 사람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병사를 훈련시키고 무력을 바탕으로 이탈리아를 통일하기 시작했는데 침략무리를 이끌던 로물루스( 버려져 늑 대에 의해 자랐다는 전설을 가진 Romulus와 Remus 쌍둥이 형제) 라는 사람이 2,700년( 기원전 753 년 즉위)전 왕이라 칭하면서 로마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힘으로 강탈해 빼앗은 재물로 더 많은 병사를 끌어 모아 이 탈리아를 통일한 무리들은 정복한 지역을 통제하고 관리하 - 42 -

기 위해 법( 규칙)을 만들고( 라틴어: IusRomanum) 로마의 고대 법( 古 代 法 ) 은 민족적 색채가 짙은 형식주의이며 관습 위주( 主 ) 로 하다가 2,400 년( 기원전 449 년) 전 12 표법( 表 法 ) 을 축( 軸 ) 으로 하였 다.)계급으로 나누는 신분제도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병사를 보유했으며 초기부터 침략에 참여해 지휘능력을 발 휘한 사람들은 자칭 신의 자손이라는 3개의 귀족( 파트리키) 계급들로 나누고 최 고위직인 집정관( 콘술), 침략지역을 통치 하는 총독( 사트라프), 고급관리인인 감찰관( 켄소르)이라는 직 책으로 나누어 권력을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침략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은 귀족에 소속됐으며 침략 중 저 항할 수 없도록 잔인하게 학살한 병사들을 칭송하며 진급시 키고 전리품으로 침략한부족의 여자들을 마음대로 겁간하고 재물을 강탈하며 포로를 노예로 소유할 수 있게 하므로 평 민들은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신분상승의 기회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병사를 많이 보유한 무리들은 수많은 부족을 침략해 사람을 학살하거나 포로로 포획했으며 붙잡힌 부족민은 침략자와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도록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먹을 거리( 농사와 목축, 어로)와 생필품( 관제수공업) 그리고 신전이 나 귀족들이 거주할 궁전 또는 저택을 짓는 노예노동을 하 면서 갇혀서 감시받는 비참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먹을 것과 생필품 등 모든 물질 을 만들어내면서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도구, 말을 알아듣고 할 줄 아는 도구로 분류해 혹독한 감시와 통 제 속에 가축처럼 취급됐으며 노예주는 노예의 생명을 뺏거 나 양도 매매할 수 있어 노예는 주인이 소유한 재산이었다 는 것입니다. 고대 로마 노예는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부분적으로 재산을 모으면 자유를 살 수 있었다는 일부주장이 있는데 노예가 벌면 주인 소유가 돼 노예재산이란 없고 미국 남북전쟁까지 도 흑인노예가 자유를 매수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기 때문 에 억압에서 벗어나려면 뭉쳐서 통제에 저항해 싸우든가 도 망치거나 죽는 것뿐이었습니다. 자유롭게 살다 침략당해 땅과 가족을 잃어버린 노예도 아니 - 43 -

고 정주민도 아닌 도시가 형성돼 있으므로 살기 위해 스스 로 도시로 찾아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외국인이 라고 불렸으며 생활은 노예보다 자유로웠지만 소속이 명확 하지 않아 언제든지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포획될 수 있었다 고 합니다. 이들은 사람이 살지 않은 땅에 화전을 일구며 살았을 것이 라는 사실은 추측 가능하며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귀 족들이 차지하고 자기 땅이라며 유흥을 즐기기 위해 사냥을 나오면 쫓겨 다니며 살았을 것이고 생산하는 물질이 부족했 기 때문에 물물교환을 할 수 있는 시장을 형성하기도 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당시 재산을 많이 보유했다는 표현이 있다고 해서 화폐를 사용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화폐가 유통되는 시장이 존재하 려면 생산되는 물질이 풍족해야 하고 힘든 노동으로 생산한 물질을 화폐로 언제든지 교환할 수 있는 시장이 존재해야하 고 대중이 보편적으로 믿을 수 있도록 합의한 체제와 화폐 를 제작하고 관리할 수 있는 기관이 있어야 합니다. 한참 뒤까지 그리스에서 병사와 관리( 관료)들에게 소금을 봉 급으로 지불하고 소금으로 노예를 사고 물질을 교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화폐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물물교 환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추정되는 것입니다. 병사들의 무력으로 평화롭게 살던 부족을 침략해 정복하고 질서유지라며 모든 사람들을 통제하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 지배직책을 모두 장악한 무리들은 자신들이 거느린 병사를 동원해 더 많은 부족들을 침략하고 물질을 약탈하며 포로를 붙잡아 노예로 부리면서 더욱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거듭되는 전쟁으로 사망자가 늘어 병사가 부족해지 자 전공을 세우면 노예에서 해방시키고 일정한 직책을 준다 며 노예를 병사로 동원했는데 도망가는 노예들과 명령에 따 르지 않는 병사들이 늘어나 재산을 불리거나 다중을 지배하 고 통제할 수 있는 무력이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침략에 성공한 귀족의 재산 붙잡혀온 노예와 강탈한 재물 ( )은 풍족한 반면 전쟁에 참여하지 못해 상대적으로 빈곤해진 귀 - 44 -

족들은 전쟁에 참여할 권리를 갖거나 재물을 분배받는 제도 를 만들려고 해 이력다툼이 치열했으며 병사들이 침략전쟁 으로 도시를 비운사이 주변 부족들의 침략까지 받으면서 로 마는 점점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몰락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왕만이 붉은색 옷과 신발을 사 용할 수 있었고 색깔옷감을 만드는 곳에 노예노동을 사용했 으며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호화스럽고 웅장하게 꾸민 거대 한 마차를 타고 수많은 신하들과 생산노동은 하지 않고 왕 의 시중만 드는 노예를 거느리고 거리를 행차하는 것을 즐 겨 생산이 줄었습니다. 또한 권위를 내세우며 과시하기를 좋아했고 주지육림에 빠 져 향락과 쾌락을 즐겼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하고도 갖은 세금( 곡물과 생필품 등)이라는 명분으로 수탈당해 비참하게 살아가던 병사들이 불평등과 빈곤에 불만을 가지고 귀족에 대항해 암살하기도 하는 등 끝없이 내란을 일으켜 쇠퇴하게 됩니다. 귀족을 자처한 사람들은 수많은 신을 만들고 자신들의 신을 믿을 것을 강요하며 대중들을 통제했으나 석가모니( 불교 창 시자)와 모세( 성경속 인물)가 주장했던 평등사상과 2,500년( 기 원전 469~470 년경)전 소크라테스( Σωκράτης) 와 그 이전 철 학자들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등하며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사실을 깨우쳐 억압과 수탈을 목적으로 한 그들의 신을 부정하며 복종을 거부했다고 봅니다. 철학자들이 과거로부터 전해온 것들을 부정하며 새로운 지 식을 축적하고 만물은 어디에서 유래하며 무엇으로 탄생되 는지에 대한 의구심, 자연에서 발견되는 사물들의 다수성과 자연은 수학적으로 어떻게 기술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봉 착해 끝없이 고뇌하면서 발전시켜온 역할로 평민들은 침략 자들의 지배논리인 거짓신화에 현혹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족으로 뭉친 평민들이 수없이 반란을 일으키며 저항하자 귀족들은 로마에 살고 있는 종족들 중 숫자가 많아 뭉치면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30개의 부족대표에게 권리를 줄 수 밖에 없게 됐으며 이들에게 투표에 참여해 표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쿠리아회(Comitia Curia ta)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 45 -

선출된 부족대표들은 평민들을 위해 귀족들의 폭정과 횡포 를 막아내는 역할을 목적으로 선출됐으나 대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자 귀족들처럼 누리고 살려고 공물을 늘려 징수해서 가로채므로 평민들의 생활이 나아지거나 권 리가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놀고먹는 착취자들만 늘어나 더 욱 빈곤하게 됐습니다. 지배자들은 평민들이 귀족들의 향락과 부유한 생활에 불만 을 갖는 저항정신을 희석시키기 위해 경기장을 만들어 흥미 위주의 공연과 맹수사냥을 보여주는 한편 스포츠와 도박을 만들고 병사들의 체력과 전투기술( 사람을 죽이는 일)을 발전 시키는 격투를 벌이는 검투사경기를 만들어 대중의 관심을 돌리려 했습니다. 그런다고 평민들의 삶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경기장을 만 든다며 수탈해 더욱 궁핍해진 평민들의 내란이 끊이지 않았 으며 권력을 탐하는 귀족들이 호시탐탐 권좌를 노리므로 왕 권은 상실되고 귀족들의 의견을 수렵할 수밖에 없어 300명 으로 구성된 원로원을 만들고 2대( 누마)왕( 기원전 715~673 년) 부터는 투표로 선출했다고 합니다. 투표로 왕을 선출해도 귀족들끼리의 권력다툼이고 선출된 왕(Rex)은 군사지휘권과 공동체 문제에 전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재판관의 권한을 가졌으며 종교의식을 집행하고 전 시에는 귀족이라도 왕권(imperium)으로 신하의 생명을 마음 대로 처단할 수 있는 권력을 행사했다는 것입니다.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 귀족 사이에 권력쟁탈을 위 한 음모가 끊이지 않았는데 평민들이 저항하므로 귀족들에 게만 인정하던 시민권을 재물을 가진 평민들까지 권리를 행 사할 수 있도록 시민회(PopulusRomanus)를 만들 수밖에 없 게 됐습니다. 시민회는 행정관의 임명이나 전쟁과 평화에 대해 추인하거 나 거부할 권한이 있었지만 시민회 결정사항은 300명의 귀 족으로 구성된 원로원(Senatus)에 의해 거부됐기 때문에 명 분뿐이었다고 합니다. 다수의 불만을 저지하고 안정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만든 이 런 정책은 놀고먹으며 누리고 사는 무리가 확장되면서 세금 - 46 -

이 늘어 평민들의 삶만 더욱 궁핍해 졌고 권력이 여러 종족 으로 분산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빈부격차는 줄어들지 않 았습니다. 그래서 타 부족을 침략해 재물을 약탈하고 토지를 점령해 귀족들에게 나눠주므로 만족을 주고 평민들을 억압하며 불 만을 억누르기 위해 더욱 수많은 부족을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키며 영토를 확장하고 노예를 포획했습니다. 로마공화정으로 발전 이후 왕권은 3대왕 툴루스-호스틸리우스( 기원전 673~641 년), 4대왕 안쿠스-마르티우스( 기원전 641~616 년), 양자로 왕이 됐으나 선왕의 친아들에게 살해당한 5대왕 타르퀴니우스-프 리스쿠스( 기원전 615~579 년), 선거 없이 원로원승인으로 왕 이 됐다 딸과 사위에게 살해당한 6대왕 세르비우스-툴리우 스( 기원전 579~534 년), 장인을 살해하고 민회선거나 원로원 승인 없이 왕이 된 7대왕 타르퀴니우스( 기원전 534~509 년)까 지 왕정이었으며 침략전쟁을 거듭하며 무한하게 지역을 넓 혔습니다. 침략으로 토지가 무한이 늘어나고 강탈한 물질이 넘쳐 귀족 들 생활은 호화스러웠지만 전쟁에 참여하느라 농사를 짓지 못해 궁핍해진 평민들이 내란을 일으켜 200년이 넘도록 권 좌를 누리던 로마 왕권 정치는 2,500년( 기원전 5 세기경)전 권 력을 차지하려는 귀족들이 평민들과 합세해 전쟁에서 돌아 오는 에트루리아계왕을 축출하므로 왕정은 사라지고 과두공 화정(Res Public Roman)으로 넘어오게 됐다는 것입니다. 공화정을 수립하자 원로원이 실권을 행사하는 정치기구로 귀족들의 권한은 증대됐지만 평민들의 권한은 없었으며 귀 족계급에서 선출한 집정관(consul) 2명이 1년의 임기동안 최 고권인 군사 사법 종교 등의 국가권력을 1개월씩 돌아가며 집행할 수 있게 분산시키고 중임할 수 없게 했습니다. 선출된 집정관 두 사람에게 동등한 권한을 주고 상호 견제 하도록 했으며 국가전쟁 시에는 한사람의 독재관(dictator) 에 게 6개월간 절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위임하는 제도를 만 들었다고 합니다. 귀족들의 영토 확장과 이탈리아 내 다른 종족과 전쟁으로 - 47 -

평민들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침략전쟁에 동원돼 노동을 하지 못하거나 농사를 짓고도 납세로 빈곤해진 평민 들은 정치적 사회적 불평등에 불만을 품고 무력봉기를 일으 키므로 평민에게도 점차적으로 평등한 권한을 줄 수밖에 없 게 됐다는 것입니다. 공화제를 수립하면서 공포한 발레리우스(Valerius) 法 으로 평 민이 사형언도를 받으면 백인회에 상소할 수 있도록 보장했 으나 2,500년( 기원전 494 년경)전 대외전쟁을 위해 출정한 병 사들이 전쟁을 거부하고 성산에 모여 권리를 주장하며 내전 을 준비하고 농성을 벌이므로 귀족들은 평민들의 요구를 받 아들여 평민회(Concilium Plebis)를 창립하게 됐다고 합니다. 평민회에서 선출한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누구 나 재판 없이 사형에 처할 수 있고 행정관들의 어떤 행위든 금지시키는 거부권(veto)을 행사할 수 있도록 신분을 절대 보장하는 2 명의 호민관(tribunus)을 평민에서 평민들에 의해 선출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하므로 평민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든 것입니다. 그 후 호민관수는 4명으로 증가하고 10명까지 늘었지만 호 민관은 행정적기능이나 군사적 권한 없이 매우 소극적으로 제한된 민권(potestas)만 행사할 수 있었고 평민회는 호민관 을 선출하고 입법권을 가졌지만 평민회에서 선출된 호민관 이 뇌물을 받고 귀족의 권리를 대변하는 법을 표결(plebiscit a)해 평민의 권리를 오히려 제약했다고 합니다. 2,400년(5 세기 후반( 기원전 417 년))전 평민의 권리를 확대하고 보장한다면서 푸블리우스(Publilius) 法 으로 호민관이나 집정관 에 의해 소집하고 관리할 수 있는 부족회(Comitia Tributa)를 만들었고 후일 법무관직이 부활하면서 집정관의 직무 중 일 부를 부족회에서 행사할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부족회의 권한은 입법권은 없으나 백인회 및 원로원에서 인 준된 법안의 가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권한이 확대됐다가 후일 쿠리아회는 종교적 기능으로 축소되고 백인회의 권한 도 점차 부족회로 이관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했습니다.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병사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민들로 구성됐고 병사들이 내란을 일으키면서 - 48 -

권리를 주장하므로 귀족들의 권익을 위주로 만들었던 관습 법은 점차 사라지고 5세기 중기에 이른 2,400년( 기원전 449 년)전 최초의 성문법인 12표 법을 만들게 됐지만 귀족들의 계급적 배타성과 우월감은 12표 법에도 그대로 방영됐다고 합니다. 제10표 및 11 표에는 귀족 평민간의 통혼이 금지되는 조항들 을 존치시키고 있어 평민들이 계속 저항하자 2,300년( 기원전 367 년)전 리키니우스- 섹티우스法 을 공포하면서 법적으로 권 리를 보장하고 평민에도 권력직인 집정관 1명을 선출할 수 있게 바뀌었으며 귀족들의 토지독점을 금지하고 평민도 토 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만들어진 법률에도 각 시민의 토지소유는 500 유게라(jugera)로 한정한다고 규정했기 때문에 평민들이 계속 불만을 나타내며 저항하므로 2,300년( 기원전 300 년)전 마침내 오굴니아 법이 만들어지면서 평민에게도 신관직( 제사 장)과 동시에 공직취임권도 개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 다. 2,300년( 기원전 287 년)전 호르텐시우스 법(LexHortensia)에 의 해 부족회의에서 결의한 법안들이 원로원의 인준 없이도 발 효할 수 있게 되므로 평민들의 국정참여는 법적으로 최대한 인정됐지만 평민의 참여는 법적 관념상에 불과했고 사실상 귀족들과 재산을 많이 가진 무리들의 공직점유 현상은 해소 되지 않았습니다. 원로원은 재산이 없는 평민들은 관직에 오를 수 없도록 방 해하려고 관직을 무보수 명예직으로 만들어 재산을 보유한 자들이 매점매석하며 권력을 강화했고 관직에 당선된 평민 들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동경의 대상인 귀족들처럼 생활하기 위해 재산을 모으는 곳에 권력을 사용하면서 부정 부패가 만연해 졌다고 합니다. 기득권이 된 무리들은 열주( 列 柱 ) 정원과 식당 침실 도서실 휴 게실 주방이 붙은 대저택을 짓고 수많은 은기( 銀 器 ) 를 사용 하면서 매일 호화로운 연회를 열고 동방에서 들여온 조상( 彫 象 ) 회화( 繪 畵 ) 등 많은 미술품들로 장식해서 뽐내며 노예들 에게 문지기를 시키고 전차경기나 노예끼리 서로 죽이는 검 투사(gladiator) 경기를 즐기며 쾌락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 49 -

한편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속주나 총독 그 밖의 관직에 당선되려면 평민들의 환심을 사야 했기 때문에 표를 얻기 위해 평민에게 무료배급을 하기도 했다고 기록돼있습니다. 귀족들은 소수 노예관리자만 부려도 엄청난 재화가 불어나 여가와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방법만 연구했고 옷을 갈아입거나 밥을 먹는 것도 노예에게 수발들게 했으며 매 끼니마다 온갖 산해진미를 차리고 자신들이 먹다 남긴 음식 을 미천한 것들이 먹으면 안 된다며 버리게 했다고 합니다. 사인교와 팔인교라는 가마를 만들어 노예들이 매고 다니도 록 했고 자신의 발로 땅을 밟는 것조차 수치로 알며 누렸지 만 병사로 전쟁에 참여하고도 빈곤해진 평민들은 작은 1 室 家 (atriun)저택에서 생활을 했으므로 자연스럽게 불만이 쌓이 고 불만을 표출할 방법이란 단체로 무력을 형성하고 저항하 는 내란밖에 없었습니다. 귀족들은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강탈해도 나누면 부자가 될 수 없고 모두가 풍족하면 특권을 내세울 수 없기 때문에 자 신들만 재산을 불리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 며 철저하게 권력을 지키고 재산을 불릴 수 있는 방안들을 연구했고 평민들이 권리를 요구하면 병사들의 무력을 동원 해 잔인하게 진압했다고 합니다. 귀족들은 재물과 권력을 지키려고 평민들의 요구를 잔혹하 게 억압하다 살해되기도 했고 평민들 중 소수가 권리를 요 구하면 귀족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사들의 무력으로 억압하 고 학살하므로 부족끼리 집단으로 뭉쳐 권리를 주장하게 되 면서 집단저항을 시작한 것입니다. 관직단계는 집정관직을 거쳐야 원로원에 들어갈 자격이 주 어졌고 총독은 침략당해 공물을 바치는 점령국의 속주들을 수탈해 부유해졌지만 소농출신 병사들은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있어서 오래 동안 자신의 땅을 지키지 못해 포에니전쟁 ( 기원전3세기-2 세기 중엽)( 로마와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침탈하 여 차지하려는 전쟁)을 치르며 빈부격차는 극에 달했다고 합 니다. 귀족들은 잡혀온 노예와 점령한 부족의 땅을 차지하며 재산 이 늘자 대농장을 만들어 누렸고 병사를 지휘하는 계급은 - 50 -

강탈한 재물로 재산은 늘릴 수 있었지만 원로원이 병사계급 의 정치 발언권 확대를 방해하려고 정쟁을 일삼으며 토지개 혁을 거부하므로 개정된 클라우디우스 법(lex Claudia)에 의 해서도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원로원으로 진출할 수 없었 습니다. 전쟁으로 점령국이 늘어난 로마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분배 불균등으로 빈부격차가 발생된 것인데 포에니전쟁을 치르며 논밭을 짓밟아 농지가 황폐해진 중소농이 몰락하자 귀족들 이 토지를 차지했고 시실리 섬 병합 후 속주들에게 공납으 로 곡물을 바치게 하면서 반도 내 농민들에게는 곡물보다 과수재배를 권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량된 농경법을 만들었으며 많은 포로의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귀족들은 1,800년(200년전) 까지 대농장(L atifundia)을 만들면서 로마 초기사회의 핵심을 이루던 자유 신분의 중 소농은 사라지고 토지도 없으며 부채에 허덕이는 빈민층이 생겨나고 평민들은 소작인(colonus)이나 노예로 몰 락했다는 것입니다. 침략을 성공하면서 계속 노예가 늘어나 노동력이 풍부해지 고 침략한 부족들의 비옥한 토지를 점령한 귀족들은 대농장 을 만들어 노예가 노예를 감시하고 통제 관리하도록 노예관 리자를 두기 시작했으며 노예관리자들이 수확량을 기록할 수 있게 글을 가르치고 노예를 혹독하게 부리도록 강요했다 고 합니다. 글을 알게 된 노예관리자들은 자신이 동족을 억압하며 무자 비하게 탄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유를 찾아 달아나 기도 했으며 혹독한 착취노동행위에 저항하는 노예들에 의 해 귀족대신 살해당하기도 하면서 무력으로 참혹하게 노예 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노예관리자들이 탄생했습니다. 빈부격차가 극심해 불만을 품은 병사들이 끝없이 내란을 일 으키자 2,100년( 기원전133 121 년) 전 재무관( 기원전133)과 호 민관( 기원전137)을 역임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Grac chus, 기원전163 133 년) 가 개혁을 추진했으며 반대하는 동료 호민관 옥타비우스(Marcus Octavius)를 물러나게 하고 부족 회를 통해 강경하게 개혁안을 통과시켰다는 것입니다. - 51 -

그라쿠스가 만든 개혁법은 페르가몬 왕 아탈로스 3세의 유 토( 遺 土 ) 와 귀족이 점유한 일정량 이상의 공지( 公 地 ) 를 로마 에 반환하도록 하고 토지 없는 농민과 시민들에게 분배하도 록 했습니다. 그러자 개혁을 거부하는 원로원이 반대하면서 원로원결의의 권한으로 시민들의 권리를 일시 정지시키고 동조하는 평민 3,250명 이상을 학살했으며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당하면 병사들을 동원해 평민들의 권리를 무력으로 억압한다는 본 보기를 보였다고 합니다. 저항의 내란으로 평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는 늘었지만 여전히 선출될 수 있는 평민은 소수에 불과했고 소수는 관직에 올라 귀족들이 나누어 갖던 재물 중 일부를 나누는 위치에 올랐으나 기왕에 물려받은 토지와 재산을 보 유한 귀족들에 비하면 보잘것없었습니다. 선출된 사람들은 귀족들이 누리는 호화롭고 쾌락적인 생활 을 동경해 재물을 긁어모으려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평 민들 위에 군림하며 수탈하고 폭력을 휘둘러도 임기가 보장 돼 임기동안은 관직에서 쫓아 낼 수 없었고 평민들은 투표 하고 선출할 수 있는 권리만 있을 뿐 관직에 선출된 사람들 을 제재하거나 횡포를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내란이 끝 없이 반복됐습니다. 초기 원로원은 임금에게 정책적 조언을 ' 권고' 하는 직책이었 으나 한니발이 침공한 제2차 포에니전쟁( 기원전 218 년~202 년)때 공화정의 의사결정 구조로는 긴급히 발생된 전쟁에 신 속하게 대응할 수 없어 원로원에게 임시적으로 원로원 비상 결의를 사용할 수 있게 했는데 각종 조치들을 재빠르게 취 해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몰아내면서 원로원이 최고 의 권력이 됐다는 것입니다. 원로원 비상결의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지만 가이우스그라쿠스(Gaius Gracchus, 기원전153 121) 는 원로원 을 배제하고 형보다 더 과격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티베리우 스 토지 법안을 다시 부활시키고 토지분할위원회에 사법권 까지 행사하도록 했다가 두 형제 모두 원로원에 의해 살해 당했다고 합니다. - 52 -

원로원은 정적들끼리 도시 룸펜출신 폭력배를 동원해 평민 들을 협박하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권력을 잡기위해 온 갖 거짓으로 모함하고 음모를 꾸미며 폭력을 행사해 권력은 부유층과 귀족계급들에게 장악됐습니다. 2100년( 기원전 110~105 년)전 동맹국들에게 로마시민권을 부 여하라는 요구가 거부되자 아프리카의 누미디아, 프랑스의 갈리아, 그리고 소아시아에서 계속 내란이 발생하던 중 210 0년( 기원전 91~88 년)전 폰투스(Pontus)왕이 로마총독의 악정 과 징세청부업자들의 횡포로 감정이 악화된 민심을 이용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평민들은 반발하고 접경 부족들이 침략하므로 내란을 잠재 우고 침략을 막기 위해 시민권한을 확대할 수밖에 없게 되 므로 국가권력 대부분을 원로원에서 부족회로 이양하고 라 틴족과 이탈리아 족에게까지 시민권을 인정하게 됐다고 합 니다. 그러자 귀족들은 내란과 침략을 힘( 무력)으로 제압하려면 1 인이 강력하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 하며 공화정을 해체시키고 일인지배의 절대 권력을 행사하 는 독재 관을 선출할 수 있는 제도로 바꿉니다. 마리우스(Gaius Marius, 기원전157 86) 는 집정관으로 선출된 ( 기원전107)후 토지 없는 시민을 의용병으로 정규군에 편입 하고 제대하면 군 지휘관이 토지를 분배해주면서 소유할 수 있도록 군제개혁을 실시했습니다. 병사들은 군 지휘관에게 재물이나 토지의 분배를 기대하고 복종하므로 군 지휘관의 권한이 막강해지자 훈련된 병사들 의 무력을 바탕으로 북아프리카 및 게르마니아의 반란을 진 압했다는 것입니다.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마리우스가 권력을 잡자 원로원은 귀족 편에서 병사를 지휘하던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기 원전138 78) 에게 동방원정을 명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는 데 부족회가 마리우스를 지휘관으로 추천하고 제지하므로 두 기관이 서로 최고 권력을 주장하며 충돌해 로마가 동서 로 갈라지는 시발점이 됐다고 합니다. 이 결과 첫 번째 내란은 술라가 거느리고 있는 귀족 편 병 - 53 -

사가 승리해 술라는 원로원에 의해 무기한의 독재 관으로 임명됐고( 기원전82) 귀족들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원로원 수를 600명으로 증가시켜 권한을 증대하는 반면 호민관과 부족회의 권한을 크게 삭감했습니다. 이렇게 조치를 취한 술라는 자신의 업적이 항구적으로 수립 됐다면서 정계에서 은퇴( 기원전79)하자 권력을 차지하려는 귀족들이 파벌싸움을 일으켜 反 술라 폭동이 전 이탈리아 반 도에 파급되며 정국이 다시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때 폼페이우스(Gaeus Pompeius, Magnus, 기원전 106 48) 는 노예들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를 주장하며 평민에게 접근해 크라수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 기원전70 년)됐는데 선출되 자 평민을 기망하고 귀족입장을 옹호했다고 합니다. 스파르타쿠스 저항 폼페이우스가 진압했다는 반란은 유명한 노예반란으로 트라 키아에서 출생한 스파르타쿠스는 모든 사람은 자유로운데 법률과 관습으로 통제되거나 억압당하며 얽매여 사는 것은 노예의 삶을 사는 것이다 라고 주장했던 모세의 평등사상이 담긴 율법서를 읽고 율법학자나 철학자들의 설법을 들으며 자유롭게 살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자유롭게 살던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가 카르타고를 정복하기 위해 벌인 포에니전쟁에 참여하라고 명령하자 침략을 거부 하고 자기부족 병사들과 반대편으로 갔는데 전쟁에 패한 로 마군병사들이 스파르타쿠스 탓에 패했다며 트라키아를 침공 해 부족민들을 학살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노예로 삼을 때 잡힌 사람입니다. 노예는(Statius)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그 의미는 ' 서서 기다리 는 자' 로서 하루 종일 주인의 명령을 기다린다 해서 아리스 토텔레스는 ' 살아있는 도구' 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비참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노예는 광산에서 노동을 하다 목숨을 잃거나 농장에서 채찍 질을 당하며 농사와 가축을 기르고 각종 신발과 옷 등 생활 용품을 만드는 노예와 저택에서 정원사, 가정부, 유모로 또 는 평민들의 오락과 도박을 위한 검투노예로 주인들의 부를 축적시켜주고 안락한 생활을 위한 심부름을 하며 성욕을 채 - 54 -

워주는 대상이었습니다. 인류는 침략으로 힘없는 사람을 살해하며 물질을 강탈한 무 리들은 점령지에서 기득권이 되고 피해자들은 정복자들에게 억압받고 수탈당하며 지배받기 때문에 용맹하고 강력한 사 람을 추앙하는데 적들에게 가족과 부족민을 살해당하고 잡 혀온 스파르타쿠스는 분노가 넘쳐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젊고 병사들을 지휘한 경험이 있는 스파르타쿠스는 미항 나 폴리 북쪽 2마일 지점 카푸아에 살던 렌툴루스 바티아테스 라는 사람의 검투노예가 돼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경기에서 동료를 살해하거나 맹수들과 싸웠다고 합니다. 저녁이면 안주인들의 성적노리개로 주인이 던져주는 더러운 음식을 먹으며 생활하는 비참한 생활을 견디지 못해 동료노 예 70명과 탈출( 기원전 73 년)해 베수비우스 화산근처에 거점 을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검투사노예들이 탈출해 거점을 마련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도망노예들과 빈민들이 모여들었고 마리우스가 포로로 잡아 왔던 킴브리아 족과 튜톤족, 쓰라키아인 등 고도의 검투사훈 련을 받은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출신병사들도 합류했다고 합 니다. 많은 숫자가 모이니 로마군대를 물리치고 남부이탈리아의 대부분을 점령하면서 갈리아에 인접한 포강근처까지 장악했 다는 것입니다. 스파르타쿠스의 목적은 노예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침략자들처럼 신분에 차별을 두거 나 억압과 착취를 위한 특권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생활했다고 합니다. 로마병사들이 계속 침입하므로 로마군을 피해 시칠리아 섬 으로 건너가려고 항구까지 갔으나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출신 병사들은 친족들이 모두 살해당한 고향으로 가는 것을 거부 하고 흩어지지 말고 로마에서 살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고도로 훈련받은 검투사들로 뭉친 이들은 추격자 정무관 클 로디우스, 바리누스와 후일 집정관이 된 렌툴루스가 이끄는 로마병사들을 세 차례나 연패시키며 다시 남부이탈리아로 - 55 -

돌아가기로 했다고 합니다. 남부이탈리라도 돌아가다 레기움에서 추적대와 부딪쳐 크라 수스와 폼페이우스가 지휘한 병사들에 의해 루카니아에서 스파르타쿠스가 전사( 기원전 71 년)하고 6,000여명은 체포돼 아피아가도에서 십자가형으로 공개처형 됐다는 것입니다. 크라수스가 스파르타쿠스가 누구냐 고 묻자 6,000명이 모 두 내가 스파르타쿠스다 라고 주장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 도로 존경하는 경외의 대상이었으며 이 사건 후 기득권들은 노예 한명이 주인을 살해하면 그 가정에 있는 노예가 수백 명일지라도 전원 사형에 처한다는 법을 선포했습니다. 법이란 모두가 필요해서 만드는 규칙이 아니라 침략과 학살 로 기득권을 차지한 무리들이 자신들의 지배 통제 착취와 권위적인 명령 등 폭정에 저항하지 못하게 길들이며 억압하 는 질서를 유지하고 부와 신변을 보장받으려 기득권끼리 만 들어 기득권이 판결하고 혈세로 사는 병사들을 동원해 집행 시키는 것입니다. 술라시대의 제도를 개정해 민권을 확대하고 지중해의 해적 을 학살하며 소아시아를 정복해서 파르타아를 통치한 크라 수스가 전사하고( 기원전53) 마리우스의 조카인 카이사르(Juliu s Caesar, 기원전 102 44) 가 평민들과 합세해서 서방 및 갈리 아지방을 장악하고 라인 강 근처와 브리타니아( 켈트족이 사는 영국)까지 로마세력으로 확장한 경험을 갈리아 戰 記 (De Bello Gallico)라는 책에 기록했다고 합니다.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 지금의 영국)를 점령하기 위해 기원전 55년과 54년 거대한 전함을 타고 노예들 발목에 쇠사슬을 채워 노를 젓게 하는 잔인한 방법으로 막강한 해상력을 행 사하며 로마병사들을 이끌고 브리타니아를 정복했습니다. 카이사르가 세력을 확장하고 원로원권력을 축소하자 동방 및 이집트를 세력으로 둔 폼페이우스는 원로원과 결탁하고 카이사르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시기해 암살하려하다가 실 패해서 로마가 양분되는 이유가 됐으며 카이사르는 평민들 로 구성된 민의회지지 아래 제1차 삼두정치 시대를 열었다 고 합니다. 당시 로마는 전쟁에 참여한 장군들이 승리하고 돌아와서 무 - 56 -

력으로 권력을 찬탈하는 일이 많아 귀족들은 언제 누가 자 신들의 재산과 권력을 뺏을지 몰라 불안하므로 전쟁이 끝나 면 병사들을 로마밖에 주둔시키거나 해체하고 장군 혼자 로 마로 입성하도록 했습니다. 병사를 지휘하는 전쟁밖에 몰랐던 카이사르는 혼자 입성하 면 귀족들의 시기와 음모로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 라며 병사들과 진군해 권력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잡자 수탈로 평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으면서 자신을 죽이려한 원로원을 배척하고 동방과 서방에 있는 2명의 장 군들과 로마에서 병사를 지휘하며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신 이렇게 3명이 권력을 행사하는 삼두 정치를 시작했다 고 합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정복은 로마문화가 유럽화가 되는 계기가 됐고 갈리아를 통치한 기간이 종결( 기원전50)되자 귀족의 권 력을 위해 무력을 행사하는 폼페이우스에 맞서 2,150년( 기원 전 49 년) 루비콘(Rubincon)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며 로마 공화정 말기 두 번째 내란을 일으키니 폼페이우스는 에피루 스(Epirus)로 도망했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에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자 왕실 피가 다른 피 와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라지드법에 의해 남동생과 혼인하고 함께 권력을 잡은 클레오파트라가 있었으며 폼페 이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정치적 후견인이라서 이집트로 도 망갔는데 카이사르의 군대가 쫓아온다는 사실을 안 프톨레 마이오스왕가는 폼페이우스를 알렉산드리아에서 암살했다고 합니다. 폼페이우스를 잡으러간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프톨 레마이오스 15세와 클레오파트라를 여왕으로 옹립해서 이집 트를 로마세력아래 굴복시키고 클레오파트라와 사이에서 낳 은 카이사리온(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뜻)과 개선하여 10년 임 기의 독재관(dictator) 에 취임( 기원전45)됐습니다. 그 후 최고제사장(pontifex maximus)을 겸하는 종신집정관이 되므로 전 로마군의 지휘권 국고처리권을 장악하며 임페라 토르(imperator)란 칭호를 얻고 금화에 얼굴을 새겼다는 것입 - 57 -

니다. 독재관은 투표로 선출하는 직책이고 임기는 6개월로 규정됐 으나 병사들의 무력으로 권력은 잡은 자들은 종신독재관의 지위를 가질 수 있었으며 금화가 발행되고 얼굴이 새겨졌다 고 해서 현재처럼 물질을 교환하는 시장이 존재하고 유통됐 을 것이라 곡해하기도 하는데 당시 귀족들은 번쩍이는 귀금 속을 즐겨 착용했습니다. 금화의 용도는 시장에서 물질을 교환하는 화폐가 아니라 권 력과 가까운 귀족이라는 신분을 표시하는 징표였으며 귀족 들 사이에 누가 더 많은 재화를 차지하고 있느냐는 부의 척 도를 과시하며 노예와 토지를 사고팔 수 있었을 뿐 화폐로 물질을 사고팔거나 교환할 수 있는 시장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는 어려서부터 방대한 양의 책을 읽어 상당한 지식을 갖췄고 수많은 나라언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천부적 인 말솜씨가 있었는데 카이사르가 로마에서 권력을 행사하 는 지배자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지혜와 미모를 이용해 유혹하려고 양탄자에 자신의 나신을 돌돌 말아 방에 들어가 바닥에 펼치게 했다는 것입니다. 어려서 결혼한 남편이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성장하자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어 도망 했던 클레오파트라( 당시 21 세)는 폼페이우스를 암살한 프톨 레마이오스왕가를 카이사르( 당시 52 세)가 옹호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집트독립을 보장받는 한편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남동생을 무찌를 병사도 지원받으려고 유혹해 왕좌를 차지 했다고 합니다. 로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소국이던 이집트여왕( 기원전 51-3 0) 클레오파트라는 연인인 카이사르가 닦아 놓은 발판을 딛 고 아들 카이사리온을 로마의 황제로 만들고 이집트와 로마 전체를 통치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의해 암살당한 후 자신과 아들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고 로마권력은 안토니우스파와 옥타비아누 스파로 양분돼 싸움이 벌어지자 카이사르를 따라다니며 강 - 58 -

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던 안토니우스를 이집트로 불러들여 유혹했다고 합니다. 카이사르를 경험으로 영웅의 정부는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 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정식 결혼을 요구하고 태어날 아이들의 후계권을 보장받자 로마 에 선전포고( 기원전 32 년)를 해 전쟁이 벌어집니다. 악티움(Actium)해전( 기원전 31 년)에서 이집트 군이 아그리파 에게 패하자 안토니우스는 배안에서 자살하고 클레오파트라 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름다운 옷과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후 꽃 속에 누워 독뱀을 풀고 가슴을 물려 자살( 기원전 30년 8월10 일)했다고 기록됐습니다. 카이사르는 귀족들의 수탈과 억압을 금지하기 위해 원로원 으로 집중된 권력에 대항해 막강한 독재체제를 구축했는데 공화제의 전통을 수호하려 맹렬히 반대하는 공화론 자들에 맞서다 2,050년( 기원전 44년 3월15 일) 폼페이우스극장 안에서 브루투스(Brutus)와 카시우스(Cassius)가 지휘하는 암살범들 에게 살해( 이것이 시저의 " 브루투스 너마져도" 라는 유명한 연극 임)됐다는 것입니다. 카이사르의 암살로 로마공화제의 전통이 유지되는 듯 했지 만 포에니전쟁( 기원전 264 년~146 년, 118 년간의 전쟁)이후 만 연된 로마사회의 부정부패와 빈부격차는 해소되지 못했고 대외적으로도 영토팽창은 정지됐으며 귀족들 간 정치권력투 쟁과 평민들의 내란이 끊이지 않아 공화정이 붕괴되고 제정 ( 帝 政 ) 으로 전환하게 됐다고 합니다. 카이사르 암살 후 평민들이 내란을 일으켜 공화주의자들 세 력이 약화되자 귀족들이 질서유지라는 핑계로 제2차 삼두정 치 기틀이 되는 국가질서재건위원회( 기원전 43 년)를 구성하고 5년 임기로 3인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개정한 후 카이 사르의 조카이자 양자인 안토니우스와 장군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레피두스 간을 선출하지만 평민들의 권리와 재산은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제2차 3두 정치로 전환해도 내란은 끊이지 않았으며 7차례 의 내전을 무력으로 진압한 옥타비아누스는 2,030년( 기원전 29 년)전 원로원의 제1인자가 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제 - 59 -

정으로 회귀( 기원전27 년)시켰습니다. 그러자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 존엄한 자)라는 존칭을 부여하 며 호민관직권, 프로콘술명령권 등 관직에 부수하는 여러 권 한 권능을 한 몸에 집중시키고 종신토록 행사하도록 했으며 총독의 권한이던 속주( 屬 州 ) 의 통치권까지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로 불리며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일리리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나 바루스의 게르만원정(8 년)때 라인 강에서 엘베 강으로 진격도중 역습을 당해 2만의 정예군단 을 잃고 패퇴하므로 로마북국경이 확정됐으며 이시기 로마 는 고대에서 고전시대로 변화하게 됐다고 합니다. 이때를 원수정치( 元 首 政 治 ) 라하며 아우구스투스가 종신토록 독재 권력을 행사하면서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자 수탈로 빈 곤해진 평민들이 정치참여권과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며 내 란을 일으켜 어쩔 수 없이 노예와 아녀자를 제외한 각 부족 민들에게 투표권을 보장하고 투표인수를 확인하기 위해 호 구조사를 실시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탄생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부터 인구조사가 실시됐는데 이때 베들 레헴에서 인지 나사렛에서 인지 호적을 등록하러 갔다 마구 간에서 마리아와 약혼자인 목수 요셉 사이에 예수라는 사람 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당시 시리아지방총독은 퀴리누스( 퀴리뇨,Quirinus)였다고 성경 ( 루카2장1~7 절)에 기록됐는데 퀴리누스는 서기 6년에서 서기 9년까지 총독이었고 인구조사는 그의 부임 초기( 서기6 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예수의 탄생시기와 장소는 기독교내에서 도 정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4명의 동방박사가 찾아왔다는 설이나 천사가 목자들 앞에 나타나 예수의 탄생을 고하며" 하늘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라고 하나 님을 찬양( 누가 2:4)했다는 복음서의 내용은 성경비평 학이 등장하면서 종교를 필요로 하는 무리들의 주장과 해석이라 고 평가합니다. ( 예수가 태어난 곳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복음 서로 누가 복음서와 마태 복음서에 베들레헴이라고 돼있고 마가복 - 60 -

음서와 요한복음서에서는 나자렛 출신이라고 돼있음.) 가톨릭이나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복음서는 예수와 함께 활 동했던 사람들이 당시 행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몇 세대 가 흘러 구전을 통해 전해오는 내용이라는 것이며 표현도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마태오 복음서(2장1~16 절)에는 예수가 태어난 해에 하늘에 동방의 별 이 나타나고 헤롯왕이 2세미만의 갓난아이들을 살해하도록 명을 내려 그 가족이 이집트로 피신했다 고 기 록돼 있으나 루카 복음서(2장1~2 절)에는 아우구스투스가 호 적을 명해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을 찾았다 고 다르게 기록됐다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에는 예수가 너희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 는 질문에 주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입니다. 라 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네 믿음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라며 크게 칭찬했다고 썼는데 예수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는 메시아 비밀사상을 갖고 있 던 복음사가 마르코는 주님은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아무에게도 이를 말하지 말라 로 기록돼 있다 고 합니다. 신학자인 존 도미니크 로산은 역사적 예수 에서 예수의 친 구들에 의한 예수의 매장부터 완전한 허구이자 비역사적 이라며 자연기적과 예수의 부활을 다루는 신약성서의 주된 내용은 부활 그 자체가 아닌 매우 정치적인 것으로 초기기 독교공동체들의 권력과 권위에 대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 여주는 이야기일 뿐 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영국 BBC 방송국 기자 세 사람은 1982년 성혈과 성배 (Th e Holy Blood And The Holy Grail/ 미카엘 베이전트, 리처드 레 이, 헨리 링컨 공저)라는 책을 통해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자녀까지 뒀으며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로마 의 유대 총독 빌라도와 짜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 같이 부활 연극을 한 다음 로마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프랑스로 망명 해 살았다고 주장했습니다. 프랑스 골(gaul) 지방에 정착한 예수는 아내 막달라 마리아와 사이에 자녀를 두고 은둔 생활을 하며 80세 넘게 살다 프랑 - 61 -

스남부 마을 렌느르샤토에서 수 킬로 떨어진 야산 몽 카르 두에 묻혔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렌느르샤토에 교회를 세워 교구장으로 지내다 프랑스의 액생 프로방스 생봄에서 죽었 고, 예수의 제자 나사로는 마르세이유에서 주교관구 겔트교 회를 세워 주교로 있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친척 징표를 가진 예수후손들이 현재도 프랑스와 영 국을 비롯한 유럽에 살고 있으며 이런 사실은 예수가의 비 밀을 지키는 성당기사단( 聖 堂 騎 士 團, 1118년 예루살렘 순례자 보호를 위해 조직된 교회군대)과 시온의 小 수도원이라는 비밀 조직이 은폐하며 보호해왔다는 사실들이 영국재판정에 판결 로 남아있게 됐다고 합니다. 판결내용은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프랑스로 망명해 84 살까지 살다 죽었으며, 예수는 로마병사 판델라의 아들이었다. 고 판결한 것이며 예수의 후손들은 4세기 후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 왕조에 협조하며 카롤링거 왕조의 비 지코트가등 8개의 가문을 이루다가 기독교가 번성하자 겉으 로 예수의 혈통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은 예수의 27대 후손이라는 피에르 플랭타르씨 와 그의 아들이 법정에서 진술했고 이 진술과 판결을 지켜 보던 신부, 수녀, 목사들은 방청석에서 옷을 찢으며 통곡하 고 기독교인이 목매 자살했으며 교회가 문을 닫는 일이 영 국전역에서 발생하자 영국정부는 전 세계로 혼란이 확대된 다며 판결문의 공개 및 해외유출을 금지시키고 언론보도를 통제했다고 합니다. 예수는 부모에 순종하며 살았고( 누가 2:51) 12살에 아버지를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 갔다 학자들과 성서( 구약)에 관한 토 론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굉장히 뛰어난 두뇌 와 재능을 겸비하고 논쟁을 즐겼으며 모든 인간을 자유롭 기 때문에 법과 규칙 또는 관습에 얽매여 억압받고 사는 사 람들은 노예 라며 평등하게 살 것을 설파한 모세의 가르침 을 성실하게 지키려 노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귀족들이 지배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산 재물을 바치며 공포 심을 유발하고 강제로 우상을 떠받들던 수많은 신전과 신앙 을 부정하면서 모든 사람들은 자유롭게 살아야한다고 설파 하기 위해 자신은 야훼( 하나님)를 믿는다고 주장했다고 보면 - 62 -

종족을 해방시킨 모세의 사상을 따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먹을거리와 주택, 의류, 신발 등 모든 물질을 생산하면서 법과 관습에 갇혀 억눌려 사는 노 예와 불평등한 계급으로 억압 받아 헐벗고 굶주린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했다는 내용들이 성경 속에 많은 것을 보면 고난을 겪으며 평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생활 한 것으로 보입니다. 공생활에서 최초의 유월절( 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순례 하고 성전 안의 장사꾼들을 몰아냈다(27년 4 월)는 내용이 있 는 것을 보면 자신이 생산하지 않고 타인의 노동을 갈취하 는 사람들은 배척한 것으로 보이며 사람들을 설득해 자유롭 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설파하려고 야훼( 여호와)만이 유 일한 신이라고 강조했다고 봅니다. 기득권인 귀족들의 신앙을 근거로 생활하거나 평민계급 중 조금 여유 있게 살며 자신도 부를 축적하고 침략전쟁에 참 여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환상을 쫓던 사람들 을 예수를 음해했을 것입니다. 노예와 평민들을 갈취해서 쾌락적이고 호화롭게 누리던 기 득권들은 대중들이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할 믿음( 종 교)이 있어야 하는데 자신들의 신을 부정하고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예수를 좋게 보지 않았을 것은 자명합니다. 귀족들은 예수의 활동을 모함하고 방해했겠지만 예수는 세 금이라며 수탈당하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내면 병사들을 고 용해 당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니 세금을 내 지 말아야 평등하게 사는 세상이 된다. 고 강조하기 위해 자 신은 야훼( 여호와)의 메시지를 전달하려온 유대 왕( 요한19:19) 이라고 칭했으리라 봅니다. 30세경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는( 마태 4:1) 자신의 고향 갈릴리나사렛에서 예배드리며 이사야예언서를 인용해 자신 이 고난 받는 민중들과 함께하는 메시아로서 살아갈 것을 설파하자 고향사람들이 지혜에는 감탄했지만 저 사람은 목 수( 요셉)아들 아닌가. 라며 예수가 변변치 않은 직업을 가진 사람임을 지적한( 누가복음서 4:16-22)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 63 -

누가는 유년시절을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고 ( 누가복음서 2,52)기록하고 있으며 유월절 후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유대교회로 나갔으나 사람들이 평 등만 주장하는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을 알고 세례요한처럼 회개의 필요성을 깨달아 회개를 강조하기 시작했다고 기록 됐습니다. 예수가 회개를 강조하자 설교를 들으려는 사람이 요한보다 많아졌는데 사람은 물질적 가치보다 평등한 사상으로 각성 하고 죄지은 사람들이 잘못을 회개하고 되풀이되는 죄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전파해야 하므로 갈릴리 땅에 전도사가 없 어 유대전도를 그만두고 갈릴리로 갔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구속돼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데 길목에 예수를 맞으려는 사람들이 나와 겉옷을 벗어 길에 펴는가하면 유대종교권력의 횡포로 소작농으로 전락한 이들이 억압받으며 재배하던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길에 깔고 환대하며 갈릴리바다 동북쪽연안 광야지방까지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예수가 출생한 년도와 활동을 그친 정확한 년도는 알 수 없 고 단지 성경에 과월절 전날인 목요일 밤 최후의 만찬을 들 고 이튿날 아침 2명의 강도들과 함께 신을 모독한 죄명으로 로마 총독인 빌라도가 보는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 다 부활했다고 기록된 내용과 죽은 기록이 없는 성경만 있 다는 것입니다. 당시 황제를 지낸 사람으론 14-37 년은(Tiberius)티베리우스 였으며 37-41 년까지(Gaius/Caligula)가이우스-칼리귤라 인데 110년경에 역사가 타키투스가 쓴[ 연대기](Annalia) 15권 44장 2절에는 64년 7월 19일 네로 황제(54-68 년)가 로마 시내에 화재가 나자 그리스도 ( 유대종족을 칭하는 것으로 추정)인들을 방화범으로 지목하고 박해했다고 기록됐습니다. 타키투스 연대기에 그리스도인 ( 타키투스는 라틴어:Chrestiani 라 기록하여 예수를 칭하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음)이 티베리 우스황제 치세 때 행정관 폰티우스 필라투스 ( 본티오 빌라도 를 총독이라고 하는데 팔레스타인은 총독이 아닌 행정관이 다스린 속령)에 의해 처형된 자가 외치던 이 사악한 미신 은 계속 번져나가고 있다 고 기술되어 있다는데 이는 후일에 조작된 - 64 -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로마제국 속주 비티니아에서 총독으로 지낸 소 플리니우스 는 112년경 트라야누스황제(98-117 년)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티니아 지방 그리스도인들이 성가를 부르며 그리스도를 신처럼 여긴다. 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억압받는 민 중들은 모세와 요한 그리고 예수의 영향으로 자유를 깨우쳐 평등한 권리를 갈망하며 회합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기 작가 수에토니우스는 120년경[ 황제들의 생애](De vitaca esarum)를 저술했는데<클라우디우스의 생애>편에서 클라우디 우스황제(41-54 년)가 49년에 크레스투스의 사주로 분란을 일으키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크레스투스가 예수를 뜻하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고 합 니다. 수에토니우스가 서술한 이야기는 사도행전에도 있는데 루가 에서 클라우디우스황제의 유대인추방령으로 고린토로 이주 한 유대인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자신들처럼 천막제작 을 한 바울과 같이 일했다는 기록이 있고, 갈릴리지방 유대 인 독립군사령관으로 있다 패전을 앞두고 로마군에 투항한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DebelloJudaico)에서 예수의 형제 야 고보를 돌로 치는 형벌을 가했다고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제정의 출발 로마공화정시절엔 노예나 여자 그리고 빈곤층에겐 투표권이 없었지만 권력의 독주를 제한하기 위해 평민들이 선출했는 데 제정초기에는 공화정형태라고 속이기 위해 로마황제를 제1시민(priceps, 프린켑스)이라 칭했고 원로원이 과거 민회가 보유하던 입법권과 모든 법적권한을 가진 듯이 가장하고 황 제가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원로원의원을 임명했음으로 허 수아비였다고 합니다. 원로원이 국정을 운영하던 공화정을 해제하고 대내외에 상 징적으로는 원로원이 국가를 통치한다는 명목을 유지하면서 옥타비아누스의 뒤를 이은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Julio-Cla udian)왕조는 스스로를 프린켑스 세나투스(Princeps Senatus, 원로원의 제1 의원)라 표현했으며 이는 4현제 시대까지 이어졌 다는 것입니다. - 65 -

프린켑스(Princeps)가 가진 권한은 1개 선출직 원로원의원들 은 감히 범접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막강했으며 권력이 대 부분 친족에게 물려졌지만 혈연관계가 없어도 프린켑스가 생전에 지명한 후계자에게 이어지면서 국가 최고 권력자로 아욱토리타스(Auctoritas 권위)를 확대하고 통치한 시기를 원수 정(Principate)이라 칭하며 제정 전기로마로 분류한다고 합니 다. 칼리굴라(37 41 년) 는 광적인 성격의 인물로 대형목욕탕을 만들어 귀족들이 나신으로 참석하는 연회를 즐겼고 노예와 평민 중 빼어난 미모의 여성들을 선발해 마음에 들면 누구 든 특정 없이 농락하도록 하는 등 쾌락적인 생활을 하다 국 고가 바닥나자 시민의 재산을 몰수했고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해 황제예배( 皇 帝 禮 拜 ) 를 집도하는 등 폭정을 하다 근위군 장교에게 암살당했다고 기록됐습니다. 검투사출신 클라우디우스(41-54 년)아내 메살리나는 노예를 위시한 많은 남자들과 성관계를 갖는 생활을 하다 처형당했 다고 하며 메살리나가 죽고 황비의 자리가 비자 아들( 네로) 을 데리고 홀로 살던 황제의 질녀 아그리피나는 황비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황제의 노예이자 심사위원인 팔라스를 자신 의 침실로 끌어들여 아름다운 육체를 제공하며 유혹해 황비 가 됐다고 합니다. 당시 귀족들은 대형목욕탕에서 수많은 여자들을 농락하며 유흥을 즐겼지만 저택에 있는 부인들은 남편과 생활이 만족 스럽지 못해 힘센 노예나 건장한 병사들을 대상으로 욕정을 해소했는데 아이가 생기면 귀족부인에게서 나면 귀족신분을 갖고 노예여자에게서 태어나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노예가 된 것입니다. 아그리피나는 14살에 오빠 칼리큘라 황제(37-41 년)와 첫 관 계를 맺었고 15살에 결혼했다 사별했으며 명문귀족과 재혼 해 아들( 네로)을 출산하고 이혼했으며, 칼리큘라의 동성애상 대자와 관계를 맺으며 황제를 암살하려다 발각돼 추방당했 으나 칼리큘라가 암살되니 로마로 돌아왔고 메살리나가 처 형되자 심사위원인 팔라스에게 육체를 제공하므로 황비가 된 탕녀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요염하고 농후한 아그리피나의 육체적 매력에 빠진 클라우 - 66 -

디우스(57 세)가 근친상간이라는 비난을 무시하고 아그리피나 (32 세)를 정식 황후자리에 앉히자 아그리피나는 전 남편아들 네로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클라우디우스의 장남 브리타니 쿠스를 제치고 친딸인 옥타비아와 네로를 결혼시켜 네로가 로마황제의 후계자로 인정받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황제후계자 자리를 굳힌 아그리피나는 네로의 성인식을 거 대하게 열고 클라우디우스가 좋아하는 버섯요리에 독을 타 식사를 마친 클라우디우스(54년 10월 23 일)가 복통을 호소하 며 쓰러지자 크게 놀라는 척하며 매수해 놓은 의사를 불렀 고 의사는 황제가 먹은 것을 토하게 하고 목 속에 독을 집 어넣어 숨지게 했다고 합니다. 클라우디우스가 숨을 거두자 재물로 매수한 근위대 도움으 로 네로를 로마황제자리에 오르게 했으나 황제가 된 네로는 어머니 말을 듣지 않고 황제의 친딸인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새로운 연인과 결혼하려 했는데 아그리피나는 네로의 행위 를 반대하면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전 황제아들인 브 리타니쿠스를 옹립하겠다고 협박했다는 것입니다. 네로가 황제가 된 후 아그리피나는 사사건건 정책에 간섭하 며 섭정을 폈고 자신의 초상이 든 금화를 발행해 " 위대한 어머니" 라는 칭호를 쓰며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했고 그녀의 애인 팔라스도 각종 이권에 개입해 청탁을 받는 등 권력을 남발하므로 팔라스를 멀리 추방했는데 이런 처분에 화가 난 아그리피나는 네로를 굴복시키려했다고 합니다. 네로는 아그리피나가 자신을 죽이고 브리타니쿠스를 황제자 리에 앉히지 않을까 불안해하다 자신의 어머니가 황제를 독 살한 것처럼 브리타니쿠스의 식사에 독을 넣어 살해했고 네 로의 이런 행동을 본 아그리피나는 생명에 위협을 느껴 네 로를 회유하기 위해 아름답고 농후하며 능숙한 자신의 육체 를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아그리피나는 권력의 속성을 잘 알아 자신이 네로에게 죽임 을 당하지 않고 권력을 행사하려면 아들이라도 육체로 유혹 하면 된다고 판단해 연회자리에서 네로에게 음란한 애무를 퍼부었으며 술에 취해 혼미해진 네로는 친어머니라는 사실 도 망각하고 본능적인 음욕에 빠져 육체관계를 맺었다고 합 니다. - 67 -

육체관계를 맺었어도 네로는 아그리피나가 권력에 간섭하는 것을 배척했는데 권력을 유지하려면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야 하므로 재산을 불려주고 즐기려 세금을 과징해 호화스럽 고 방탕한 연회를 여니 수탈당해 굶주린 민중들의 원성이 높아졌습니다. 원성이 높아지자 네로는 수탈과 폭정이 아니라 근친상간 때 문에 여론이 나빠 자신을 거부한다며 아그리피나를 바다에 수장시키려고 배에 태웠다 실패하자 병사들에게 끝까지 쫓 아가 살해하라고 명령했다는 것입니다. 아들은 황제가 되고 자신은 선 황후로 권력을 마음껏 휘두 르려던 욕심이 아들을 후대에 길이 남을 폭군으로 만들었으 며 병사들이 가슴에 칼을 들이대자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잠 옷을 걷어 아랫배를 내밀고 " 여기를 찔러라! 네로는 여기서 태어났으니까!" 하며 소리치다 병사들의 칼날에 처참하게 난 자당해 죽었습니다. 64년 로마시내에 7일간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하자 네로는 불난 자리에 황금궁전을 짓는다며 대규모 건설 건축을 시작 해 재정이 바닥나니 항상 재물이 풍족한 신전을 털어 충당 했는데 그래도 모자라자 기득권인 지주들과 부유한 사람들 에게 죽으면 재산을 왕국( 황제의 정치자금)에 헌납한다는 유 언을 쓰라고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독선에 불만을 가진 원로원과 군인 등 재물을 강탈해 귀족행세를 하던 사람들이 황제를 새로 옹립하자며 반발하 자 정보를 입수한 네로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체포해 자살하도록 명령하거나 추방하고 예술이라며 음악과 연극배 우역할을 즐겼으며 나체로 돌아다니는 광적인 생활을 했다 고 합니다. 왕족으로 태어나 권력에 집착했던 아그리피나는 신분을 위 력으로 타인을 복종시키기 위해 고압적으로 도도하게 명령 하는 모습만 보며 성장한 네로는 권위주의와 우월주의 속에 성장했다고 보면 아그리피나의 양육환경이 오히려 네로를 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성격으로 만들었다고 봅니다. 귀족들의 호화방탕하고 쾌락적인 삶을 위해 세금을 높여 징 세하므로 극심한 수탈에 헐벗고 굶주린 평민들이 빈곤을 견 - 68 -

디지 못하고 평등을 요구하며 저항하는 일들이 반복되던 중 로마 시가 갑자기 7주야 동안 불에 타는 화재가 발생하자 로마를 싫어하는 네로가 불을 냈다는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네로가 황금궁전을 짓기 위해 불을 냈다고 소문나면서 민심 이 흉흉해 황제를 폐위하자는 원성이 높아지자 여론을 잠재 우기 위해 병사들을 동원해 불만을 표출하는 평민들을 체포 하거나 폭행하고 살해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이 불을 질렀다는 거짓 소문을 퍼트려 자유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학살하고 추 방했다는 것입니다. 가혹한 징세로 평민들을 수탈해 헐벗고 굶주린 민중들이 저 항하던 중 68년 갈리아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네로는 원로원 을 소집해 진압하려 했지만 원로원과 근위대까지 네로의 재 물수탈과 폭정에 반대하며 평민들과 합세하므로 도망자 신 세가 됐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네로가 쫓겨 난 후 4명의 왕이 권력을 행사하던 69년을 지 나 귀족들의 권력암투와 굶주린 평민들의 저항이 높을 때 대중들이 정치에 불만을 갖는 정신적 여유가 있으면 안 된 다면서 베스파시아누스황제(72 년)가 네로가 지은 황금궁전( 도무스아우레스)인 인공호수를 메우고 거기에 대형경기장을 짓도록 명령했다는 것입니다. 콜로세움의 정식명칭은 플라비우스이며 콜로세움이란 ' 거대 하다' 라는 뜻을 가진 Col ossale( 콜로사레) 또는 경기장 옆에 네로가 높이 30미터의 거대한 금도금상 콜로소를 세웠기 때 문에 콜로세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됐다는 설이 있는데 8년 동안 공사해 베스파시아누스황제 아들 티투스황제 때인 80 년에 완공됐다고 합니다.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로 높이 57m, 둘레 500m 경기장 내부는 길이는 최대 188 m, 최소 16m로 1층은 높이 10.5 m 의 도리아식 반원주, 2층은 높이 11.85m의 이오니아식 기 둥, 3층은 11.6m의 코린트식 기둥으로 돼 있으며 4층은 관 중들이 작열하는 햇빛을 가리는 벨라리움이라는 천막을 고 정시키는 벽이 있고 이외에도 계단과 독립 공간이 있으며 내부는 약 5 만 명을 수용하는 계단식 관람석이 방사상( 放 射 狀 ) 으로 설치돼 있었습니다. - 69 -

티투스는 등극하기 전인 70년에 수탈을 견디지 못한 유대지 역 사람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내란을 일으키자 병사들의 무 력으로 이들을 살육하고 10만 명을 잡아 노예로 부렸는데 그 중 4만 명을 동원해 콜로세움을 건축했다는 전설이 있습 니다. 노예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농사짓는 노예는 목에 건물을 짓 는 노예들과 배를 젓는 노예들은 발목에 쇠사슬을 채워 노 동을 시켰는데 건물을 짓다 높은 곳에서 수많은 노예들이 떨어져 죽거나 무거운 돌을 나르다 바위에 눌려 압사하기도 했으며 힘이 빠져 지치면 가차 없이 채찍을 맞는 등 노예들 의 피와 땀으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건설된 경기장을 바닥은 모래로 덮고 사냥터분위기 를 위해 나무와 구릉을 설치했으며 바닥 밑에는 노예들과 맹수들을 가둘 수 있는 우리 시설을 만들고 글라디아토르( 劍 鬪 士 ) 시합과 맹수연기( 猛 獸 演 技 ) 등 평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 하면서 정권의 수탈행위에 저항을 생각할 시간을 뺏었으며 승자를 예측하고 재물을 거는 도박을 조장했다고 합니다. 수만 명이 들어가는 대형경기장을 기득권들은 자신들의 재 산과 신변을 지키려 만든 법을 어기거나 모세의 사상에 영 향을 받아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 혹사노동에 저항하는 노 예들을 처형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에 반기를 들지 못하게 억 누르고 통제했으며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려고 화합 을 강조하는 정치의 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처참하고 참혹한 억압과 살육이 자행되던 콜로세움은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가 검투경기를 금지시킨 후 지진으로 무너 지기도 했고 중세에 군사적 요새로 이용하다가 성당이나 궁 전 등 건축에 사용될 자제로 제공되면서 황폐하게 무너진 것을 18세기경 교황의 명에 따라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수난당한 현장으로 복구됐다고 합니다. 로마는 평민들의 끝없는 저항과 권력을 탈취한 무리들이 더 많은 재물과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권력투쟁으로 내분이 끊 이지 않아 네로(54-68년까지 집권 Nero)와 콘스탄티누스 1세 (306-337 Constantine I)까지를 기득권을 지키려는 귀족들과 평민의 권리를 대변한다는 선거선출 귀족 그리고 평민들과 대립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 70 -

대중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만든 귀족의 신을 부정하고 자유 를 주장하는 사상이 번지며 내란이 끊이지 않자 284년 디오 클레티안황제는 로마제국을 4등분하고 권력을 각각 부황들 에게 분산시켜 안정을 도모해 로마는 다시 평화를 찾는 듯 했는데 부황들이 황제가 되려고 전쟁을 시작해 통제가 불가 능해졌습니다. 자유사상의 종교화 자신의 힘으로 농사지으며 자유롭게 사는 민중들이 가혹한 세금징수( 수탈)를 거부하고 귀족계급의 강압적인 통제를 부 정하며 자유를 주장해 착취질서를 유지할 수 없자 서방의 콘스탄티누스1세와 동방의 리키니우스가 313년 2월 밀라노 에서 협의하고 그리스도를 종교로 인정한다는 칙령을 발표 하며 조직을 확장하도록 후원했다는 것입니다. 혼란스러운 로마를 통일시킨 콘스탄티누스가 330년 5월 11 일 대제로 등극해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하며 로마제국의 새 수도를 건설했지만 모두가 자유를 주장하며 통제를 거부하자 모든 침략자들이 신을 빙자해 복종을 강요 한 것처럼 기록이라며 성경을 만들고 평등사상을 신격화해 서 통치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억압과 탄압을 받으며 숨어서 모세와 석가모니 그리고 요한 과 예수가 모든 사람은 지배자들에게 통제 지시당하지 않 고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던 평등사상을 종교로 변질시켜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게 만들고 사제들에게 권 한을 주자 사제들이 자유와 평등사상을 신의 행위로 변질시 켜 통제합니다. 그 후 이글니스황제(392-394년 Eugenius)를 마지막으로 395 년 로마제국은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각각 두 공동 황제와 부제( 副 帝 ) 가 지배하는 사두체제를 도입했다고 기록돼 있습 니다. 콘스탄티누스황제가 325년 니케아공의회를 주최하며 수도사 들을 소집하자 이때 참석한 에우세비우스 주교는 " 황제가 공의회개막식에 입장하는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하느님의 천사가 내려오는 것 같았다. (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3권10 장)" 고 아부하며 권력에 복종하므로 사제가 제사장까지 오를 수 - 71 -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 사후 아들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재위337~ 361)가 제위를 이어 종교를 이용해 안정을 도모했고 게르만 족이 갈리아를 침공해 거듭 패한 콘스탄티우스는 권력다툼 중에 죽인 사촌의 아들로 전투경험은 전혀 없고 철학공부만 한 율리아누스를 사령관에 임명하자 율리아누스가 능력을 발휘해 쉽게 게르만족을 격퇴했다고 합니다. 게르만족을 격퇴한 율리아누스는 승전한 병사들과 수도로 진군해 황제가 됐으며 자신은 제우스신을 종교로 가졌지만 그리스도교를 이용해 통치하기 위해 자신도 모든 사람은 평 등하다고 인정한다는 믿음을 주려고 궁중의 미용사, 요리사, 환관 등을 추방하는 정책을 펼쳤으나 363년 페르시아를 정 복하기 위한 전쟁에 원정 갔다 전사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발렌티아누스 1 세(Valentianus, 364~375)와 발렌스(Vale ns, 364~378) 두 형제가 지배했으며 이때 로마병사들은 게 르만족이 주축이었는데 375 년 훈(Hun)족이 볼가 강을 건너 동고트(Ostrogoth)족을 침략하자 6 만의 서고트(Vishgoth)족이 로마영내로 피난했는데 지나친 수탈에 시달린 서고트족들이 식량문제로 권력과 갈등이 발생해 폭동을 일으킵니다. 구습의 통제만으론 지배질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 테오도 시우스1세는 칙령(391 년)으로 달이나 꽃, 그리고 곡물과 태 양 등에 신성한 혼(genius)이 있다며 자연을 두려워하고 섬 기던 풍속신앙들을 금지하고 그리스도교만이 종교라며 국교 로 선포하므로 사제들이 원로원까지 진출하면서 최고 권력 이 됩니다. 사제단(Collegium Pontificum)은 제례의 제문을 보관하고 의식 을 감독하는 직책이었지만 국교로 인정되면서 가장 높은 수 도사는 최고제사장(pontifex maximus)으로 황제가 주관하던 신전에서 여러 신의 의식을 치르고 예배를 집도할 수 있자 다중을 통제하며 최고 권력을 행사했고 복점관(augur)은 미 래를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예언인양 점을 쳐주며 권력을 행사한 것입니다. 수도사라는 신분이 제사장이 되고 최고 권력을 행사하는 기 득권이 되자 예배를 관장하던 수도사들은 자유와 평등을 갈 - 72 -

망하는 사람들에게 만사를 신에게 감사하라며 참을 것과 복 종을 강요하므로 특정 능력 때문에 인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조장하여 진실과 정의는 은폐되고 온갖 거짓과 위선이 난무 하게 됐습니다. 사람이 존재하기 위해 먹거나 사용하는 모든 물질은 사람들 의 땀 흘린 노동으로 창출되는 것임에도 풍년이 된 것은 하 느님이 햇살을 주신 덕이니 감사하라거나 화산폭발이나 자 연재해가 발생되면 하느님이 실험하는 것이니 참으라고 강 요하는 등 본능에 따라 양심껏 행동해야하는 저항을 잠재우 고 신에게 의지하는 의타심과 복종심을 세뇌하며 통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종교에 세뇌된 신자들은 옆에 있는 물건은 자신이 손으로 잡고 사용해야 함에도 기도하면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듯이 착각하는 의타심을 갖게 됐으며 과학적 사고는 상실되고 복 종하며 참고 사랑으로 살아야 된다고 세뇌되어 자신의 권리 를 침해당해도 온정을 바라고 신에게 기도만하면서 불의에 순종하게 됐습니다. 권력을 잡은 수도사들은 사람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신의 심 부름꾼임을 주장하고 부활로 보복을 암시하며 다중을 착취 해 누리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운명론이나 창조론 또는 천국과 지옥을 강조하고 사후를 대비하라며 죄를 지어도 회 계로 사함 받는다는 거짓말로 많은 재물을 헌납할 것을 요 구하며 본질을 드러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간섭( 지배 통제) 을 받지 않고 자신의 지식과 육체적 노력만큼 수확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음에도 거짓 운명론을 퍼트려 평생을 노동하고도 착취와 갈취 수탈로 빈곤해지고 부부라는 명분으로 일생을 고통 속에 사는 것이 운명이라고 세뇌하므로 사람들이 지배질서 의 틀에 갇혀 억눌려 삽니다. 과학이 부족해 수도사들의 거짓말에 담긴 의미를 모르는 신 자들은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가 있고 교리나 경전들은 창조 주의 절대명령이기 때문에 성실하게 수행하면 천국에 간다 는 거짓에 속아 수도사들이 힘든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 통 제하면서 헌금과 십일조로 호의호식하며 누리고 사는 본질 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 73 -

378년 8월 9일 발렌스 황제는 8만 로마군을 지휘하며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가까운 아드리아노플에서 고트족과 전쟁 하다가 중장보병으로 이루어진 로마군보다는 기병으로 무장 한 고트족의 기동력에 밀려 로마병사들이 패하고 발렌스 황 제도 전사하므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379~395)가 황제 를 승계합니다. 원시시대는 돌칼이나 나무칼 동물의 뼈 등을 무기로 사용하 는 종족보다는 철을 발견하고 강력한 철로 먼저 무기를 만 들어 사용하는 종족이 승리했고 고대 전쟁은 누가 더 신속 하고 용맹하며 폭력을 능숙하게 행사할 수 있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고 전쟁에 승리한 종족이 권력을 차지했습니다. 황제가 됐으나 고트족의 침략이 끊이지 않아 전 평민을 병 사로 동원했는데 병사가 된 평민들이 노동을 못해 생산되는 물질이 부족해도 귀족들의 호화로운 생활과 전쟁 물자를 위 해 가혹하게 징세하니 굶주린 병사들이 명령을 거부하므로 침략자들을 격퇴할 수 없게 된 테오도시우스는 어쩔 수없이 고트족에게 제국 내 정주를 허락하고 굴복합니다. 힘으로 로마를 굴복시킨 고트족들 대부분이 다뉴브 강 이남 을 장악하고 반달(Vanda l)족은 판도니아 지방을 프랑크족은 라인 강 이남에 정착하게 됐으며 이들은 독자적인 법과 왕 을 두고 로마의 징세를 거부하므로 사실상 로마제국 안에 새로운 부족국가들이 건설된 것과 같은 형태로 세력을 형성 한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분리 테오도시우스는 로마제국을 동서로 나누고 두 명의 아들을 부황제로 임명해 통제했는데 395년 그가 사망하자 장남인 아르카디우스(Arcadius)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로 마황제가 되고 차남인 호노리우스(Honorius)는 서로마황제가 되면서 로마는 동과 서로 완전히 분리됐습니다. 호노리우스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됐지만 권력은 게르만 족 무장( 武 將 ) 인 스틸리코가 장악하고 무력을 행사해 한때 평화로운 듯이 보였는데 스틸리코를 처형하자 권력을 차지 하기 위해 황제를 호칭하는 자들이 늘어나 혼란스러워졌을 때 많은 병사를 보유한 서고트족 알라리크 왕이 410년에 로 - 74 -

마시를 점령했다는 것입니다. 그 뒤 서고트족은 에스파냐로 이동했고 게르만인인 반달족 은 아프리카로 진출했으며 부르군트족과 프랑크족도 갈리아 로 진출하고, 색슨족은 브리튼섬으로 건너가 각각 왕국을 세 우자 로마 장군 아이티우스가 서고트족과 프랑크의 힘을 빌 려 아틸라가 이끄는 흉노족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격퇴하 므로(451 년) 권력을 차지했다가 45 5년 반달족에게 로마시 가 또 다시 점령당했다고 합니다. 서로마 황제는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 강력한 병사를 보유 한 게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장군이 권력을 행사했는데 가혹한 징세와 억압에 굶주린 평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모 든 책임을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탓으로 돌리고 황제를 폐위(476)시키므로 서로마제국은 막을 내렸다는 것입 니다. 서로마제국이 사라지고 그 지역은 프랑크 족이 무리( 영주의 등장)를 이루고 살았으나 샤를마뉴대제( 종교 황제)때 통일해 서로마제국영토와 비슷할 정도로 점령하고 국가를 구성하므 로 동로마와 서로마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완전히 분리됐으 며, 샤를마뉴대제가 죽고 왕국이 다시 3개로 분열돼( 동/ 중/ 서 프랑크) 후일 지금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가 됐습니다. 지금 독일이 된 동 프랑크를 마자르족이 침략했을 때 오토1 세가 막아내므로 교황이 오토1세를 황제로 임명했지만 이름 만 황제일 뿐 아무런 권한이 없어 중앙집권체제를 만들려고 했는데 대농장제로 물질이 풍족하고 많은 병사를 소유한 영 주들이 왕권을 부정하면서 반대해 이후 프로이센과 오스트 리아가 됐다는 것입니다. 무함마드( 영어 명: 마호메트) 의 탄생 아버지 압둘라( 압달라 Abdallah)가 죽고 어머니 아미나(Amina bint Wahb)에 의해 570년 4월 22일 태어났으나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사망해 고아가 된 무함마드는 할아버지 압둘 무탈 리브( 압둘 무딸립 Abdul Muttalib)에게 맡겨졌다가 8살 때 할 아버지가 사망하므로 하심 가문의 새로운 가장이 된 숙부 아브 탈리브( 아부 딸립 Abu Talib)의 보호아래 성장했다고 합 니다. - 75 -

삼촌 아브 탈리브는 딸린 식구가 많은데 가난해 어려서부터 삼촌직업인 무역을 따라다니다 12세에 삼촌과 시리아로 갔 는데 그곳에서 유대인들과 생활하면서 바히라라는 그리스도 교수도사를 만나 모세와 예수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입니 다. 그 후 무함마드는 알라 하나님께서는 양치기 목동이 아닌 자를 예언자로 보내신 적이 없다. 모세도 목동이었고, 다윗 도 그랬으니 나 또한 야즈야드에서 내 가축들에게 풀을 먹 이며 예언자 직을 맡게 됐다. 고 목동시절을 하칼스에게 말 했다고 합니다. 영민한 무함마드는 목동시절 자연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낮에는 광활한 하늘과 밤에는 반짝이는 별을 보며 깊이 사 색하고 수도자들의 덕목인 청빈과 고뇌생활을 깨달아 배고 프지 않으면 먹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을 때는 배불리 먹지 않았고 부와 명예보다는 진리와 진실을 찾으려 노력했을 것 입니다. 어린 시절 양치기로 평범하게 성장한 무함마드는 청년이 된 뒤 시리아를 왕래하는 무역상( 한쪽지역에서는 많이 생산돼 흔 한 곡물이나 물질( 원료), 그리고 문화를 습득하여 생산되지 않는 지역을 찾아 많이 생산되는 물질을 교환하여 이익을 남기고 문화 를 전파하는)으로 생활하다 삼촌의 소개로 부자며 과부였던 카디자(Khadijah)의 대상( 大 商 ) 에 고용( 취직)됐다고 합니다. 당시 대상이던 카디자는 젊지만 정직하고 성실한 무함마드 의 성품과 두뇌회전이 빨라 많은 이익을 남기는 상술에 감 동해 구혼하므로 무함마드는 595년 25세의 나이로 40세의 미망인에게 새끼낙타 20마리를 선물로 결혼했다는 것입니 다. 둘 사이에 2남 4녀가 태어났는데 무함마드의 두 아들은 유 년기에 사망했고 딸들 중 파티마( 파띠마 Fatima)를 제외하고 는 모두 무함마드보다 먼저 사망했다는데 당시 사회는 건장 한 남자가 대상무역을 하는 것이 영웅시 되던 시절이라 아 들들이 어려서 사망한 무함마드는 많이 고민했다고 합니다. 모든 가문이 건장한 사내아이를 선호했는데 아들이 없는 무 함마드는 사회적으로나 종족번식에 큰 결함이 됐을 뿐 아니 - 76 -

라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 했지만 그 당시 큰 수치라 고민이 깊었으리라 봅니다. 무함마드가 얼마나 영민한가하면 낡은 카바 신전을 헐고 새 로 지으려면 당시 신성하다고 믿은 흑석을 옮겨야 했는데 공사에 참여한 부족간에 그 흑석을 누가 옮겨 놓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분쟁이 생겨 자칫하면 부족간 전쟁이 촉발되려 고 할 때 그들은 신전 문을 제일 먼저 지나가는 사람을 중 재자로 삼기로 했다고 합니다. 당시 믿음이 가는 자로 소문난 무함마드가 그 문을 처음 지 나가자 인부들이 중재를 부탁하자 무함마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긴 옷을 가져와 땅에 펼치게 하고 자신이 흑석을 들어 그 옷에 올려놓고 부족 대표들이 옷의 귀퉁이를 잡고 같이 옮기게 하므로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지혜로 해결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부자인 카디자와 결혼하고 대상으로 활동하며 생활에는 문 제가 없었지만 아들이 없어 고민하던 무함마드는 넓은 사막 과 산을 찾아 사색을 즐겼고 히라산 동굴에서 금식하며 진 리를 찾으려 명상에 잠겼다 40세(610 년)때 깨달음을 얻어 자 신은 알라( 하느님)신의 말을 전하려온 메시아( 예언자)라고 주 장했다고 합니다. 4년 동안 깊은 사색에 잠겨 고민하던 무함마드는 614년부터 자신의 깨달음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알라( 하느님)만이 유 인한 신이며 "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 하다" 는 사상을 가지고 철학과 행동이 일치할 수 있도록 사 람이 지켜야 할 의무와 믿음과 행동이라는 내용으로 설교하 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무함마드가 하루는 사파라는 작은 언덕에 혈연관계 사람들 을 모아놓고 나는 한 명의 경고하는 사람으로 우리가 무서 운 벌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십 시오. 알라께서 내게 명하길 나의 가장 가까운 친지인 여러 분들에게 경고하되 나 자신은 현세와 내세에서 여러분들에 게 아무런 이로움도 가져다 줄 수 없음을 알리라 하셨습니 다. 라고 말하자 이 말을 듣고 삼촌인 아부라합이 너는 없 어져야 해 라고 소리 지르고 군중들은 미치광이라 놀리며 등을 돌렸다고 합니다. - 77 -

당시 카바 안팎에는 360여 가지의 우상들이 세워져 있었고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과 인간사이의 중재자 라 주장하며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모세와 예수의 추종자들 까지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잊어버리고 서로 자 신의 이익을 쫓아 여러 종파와 파벌로 나눠져 있어 상당히 혼란스러웠다는 것입니다. 악습과 관습에 젖어 우상을 섬기는 종교를 가진 메카 사람 들은 그를 미치광이로 취급했으나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는 그의 말을 귀 기울려 듣고 점점 이 해하게 되면서 따르기 시작했는데 619년 하심가의 가장이자 숙부인 아부 딸림이 사망하자 하심가는 더 이상 무함마드를 보호해 주지 못했으며 사랑하는 아내도 죽자 같은 피를 나 눈 부족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합니다. 메카에서는 사람들이 거짓말 장이며 미치광이라고 놀려 생 활할 수 없게 된 무함마드는 동쪽에 있는 다이프로가 자신 은 알라신의 메시아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왔다고 하 자 다른 종교를 믿던 다이프 시민들은 무함마드에게 돌을 던지며 쫓아내므로 돌팔매질을 피해 포도밭에 엎드린 무함 마드는 깊은 밤에 자신에게 힘이 없음을 한탄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시하고 놀리며 폭행했지만 굴하지 않고 신의 말 씀을 들으라며 신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기 때문에 법이나 규칙 또는 관습에 매달려 누구에게 구속되거나 착취 당하지 않고 평등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라고 설교하자 노동하고도 세금으로 수탈당해 가난한 사람들과 노예로 모 든 물질을 생산하고도 감시 속에 억압받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으려 모였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예수처럼 여러분이 세금을 내면 생산노동을 하지 않 고 그 세금으로 먹고 살면서 여러분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병사들만 더 많이 만들어 내기 때문에 세금을 내지 말라야 합니다. 라고 강조하기도 하고 지식을 추구하는 길을 따르는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가는 길을 쉽게 인도 해 주실 것입니다. 라면서 진실을 추구하고 믿을 것을 호소 하며 다녔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함마드의 말을 믿고 따르자 신의 아들을 - 78 -

자처하며 부족민들을 통제하면서 누리고 살던 무리들이 모 함하기 시작했으며 이슬람교도가 된 아비시니아인 흑인노예 빌랄은 주인이 뜨거운 모래 위에 눕혀놓고 가슴에 크고 무 거운 바위로 짓누르는 고문을 하며 이제 너의 하나님은 어 디에 계시는가? 라면서 무함마드를 따르지 못하게 괴롭혔 다는 것입니다. 고문을 하고 괴롭혀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다 는 사상을 신앙으로 선택한 사람들의 정신을 바꿀 수 없자 족장들은 무함마드와 추종자들을 제한된 구역 내에서만 살도록 강제하고 식량공급을 중단했는데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몰래 식량을 전해 더 이상 억압수단이 될 수 없자 식량금지령을 폐지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은 언제나 지혜가 넘쳐 아라비아 부족사회의 관습과 인습을 바꿨으며 당신의 형제가 나쁜 일을 저지르고 있던 지 나쁜 일을 당하고 있던지 그를 도우십시오. 라고 말하자 어떤 사람이 저는 그가 나쁜 일을 당할 때는 도울 수 있습 니다. 그러나 나쁜 일을 저지르고 있다면 어떻게 그를 도울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그가 나쁜 일을 하지 못 하도록 막는 것이 그를 돕는 길입니다 라고 대답했답니다. 또한 하나님과 최후의 심판을 믿는 사람은 손님을 정성스 럽게 접대해야하며 이웃을 영예롭게 하고 진실하고 선한 것 만 말하며 만일 사악한 것이라면 말하지 말고 침묵을 지켜 야합니다. 라고하기도 하고 가장 완성된 사람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이 좋건 나쁘건 가리는 일없 이 모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라며 설파하 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어떤 남자가 무함마드를 찾아와 양 몇 마리를 달라 고 구걸하자 두 언덕 사이를 오가며 풀을 뜯는 많은 양들을 전부 가지라며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을 도우며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고 불운하며 버림받은 사람들 을 도우라 했습니다. 라고 말하자 그 남자가 마을로 내려와 사람들에게 이슬람을 받아들이시오. 무함마드는 가난을 두려 워하지도 않습니다. 라며 소문을 냈다고 합니다. 재물과 명예에 집착하지 않고 억압받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 께하자 620년 6명의 순례자가 제자 되기를 자청했고 다음 - 79 -

해에는 6명 중에 5명이 7명의 제자를 데려와 12명의 제자 가 돼 무함마드의 사상을 전파하니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됐고 권력을 가진 무리들은 자신들의 논리로는 대중을 지배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무함마드를 따르는 사람들을 잡아 고 문하고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권력자들에 의해 무함마드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극심한 시기에 부족 간 전쟁과 약탈로 혼란스러운 메디나에 서 집을 제공한다며 와서 질서를 유지해 달라고 초청하므로 622년 7월 16일 250마일 거리에 있는 야스랍이라는 도시로 이주하게 됐는데 이것을 헤즈라 라고하며 야스랍은 예언자 의 도시 메디나-툰-나비라고 불리게 됐으며 이때부터 이슬 람력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무력으로 타인을 노예로 부리며 노동력을 착취해서 부를 축 적하고 누리던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정의를 선택하는 것 이 자비요, 짐을 진자의 보따리를 들어주는 것이 자비요, 질 문하는 이에게 다정하게 대답하는 것이 자비요, 통행에 불편 한 것을 제거해 주는 것이 자비요, 형제에게 미소를 지어 보 이는 것이 자비입니다. 라고 설교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 앞에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므로 어 떤 차별이나 특권이 있을 수 없으므로 여러분이 가졌다고 착각한 기득권을 버리고 서로가 존중해야 할 사람임을 인정 하고 자유를 보장하십시오, 이것만이 진실이고 정의요 지식 이므로 인간이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덕목입니다. 이렇게 설 교하기도 했을 것이라 봅니다. 무함마드는 자신의 철학과 신념인 평등사상을 전파하기 위 해선 강력한 힘이 있어야 한다며 공동체인 ' 움마(Ummah)' 의 모체를 만들어 병사들을 육성했으며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병사가 되자 624 년, 해마다 메디나를 공격해 침략 과 약탈을 일삼는 메카 군을 메디나 남서에서 격파함으로 메디나의 최고 수장이 됐습니다. 무함마드는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 을 들고 전투했 다는 설도 있는데 624년 바르트전투에서 이슬람군의 두 배 가 넘는 쿠라이시부족의 대군을 격파해 대승을 거두자 많은 아랍인들이 알라신을 믿게 됐으며 메카의 대상( 隊 商 ) 을 습격 하고 신의 계시라며 예배방향을 예루살렘에서 메카로 향하 - 80 -

게 하므로 메카 정복 의지를 나타냈다고 합니다. 무함마드는 병사들의 무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법과 규칙 또는 관습이라는 핑계로 권위주의를 내세우며 무력으로 억 압하는 행위에 굴종하면 할수록 폭력이 습관화된 자들에 의 해 이웃까지 혹독하게 박해당하니 평등을 부정하고 권위를 내세우며 억압하는 행위에 저항하는 것이 신의 뜻입니다. 라 고도 했을 것입니다. 우흐드 족과 전투에서 승리했고 다음 해에 꾸레이쉬 족들이 메디나를 총공격해 왔으나 막아 냈으며 베두인들과 유태인 그리고 메디나 안에서 권력을 잡으려는 무리들이 음모를 꾸 미고 627년 만 명도 넘는 병사들로 진격해온다는 정보를 준 페르시아인 살만의 충고로 무함마드는 병사들과 함께 도시 주변에 큰 도랑( 한다크)을 파서 막았다고 합니다. 한 달이 넘도록 메디나를 공격했지만 방어막을 뚫지 못한 침략자들은 원조를 받지 못해 식량이 부족했고 연합 족 병 사들 사이에 서로 힘자랑으로 싸움이 벌어져 불만이 고조됐 는데 기상상태까지 악화되면서 견디지 못하게 된 침략자들 은 스스로 병사들을 철수하고 난 이후부터 메디나는 침략당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함마드는 5주 6 신( 五 柱 六 信 ) 1. 믿음의 선언( 샤하다)( 알라 외 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임을 증언합니다. 고 외치는 일) 2. 예배( 솰라)( 코란 1 장을 외우며 하루 다섯번 절할 의무.) 3. 구빈세( 쟈카트)( 수입 중 생활을 영위하는 최소 금액( 최저생계비) 을 제외한 금액 2.5% 를 가난한 사람에게 희사할 의무, 가난한 사 람은 내지 않아도 됨) 4. 단식( 쏴움)( 매년 9 월( 라마단 달) 에 매일 새벽 예배부터 저녁 예배까지 단식하고 절약된 곡식이나 비용은 단식이 끝난 다음 날' 이둘피트르' 축제일에 ' 자카아툴피트리' 라 해 서 주변 가난한자 또는 성원에 나눠주는 일) 5. 성지순례( 핫즈)( 평 생에 한번은 12월 둘-힛자에 정해진 순례 기간에 메카를 순례해 야하며 만인이 평등하게 이흐람이라는 바느질이 없는 두개의 무명 천으로 몸을 감싸 입고 정해진 코스를 돌며 그 비용은 본인이 순 수하게 노동한 대가로 벌어들인 돈으로 해야 됨.)와 1. 하나님( 알 라) 2. 천사들 3. 경전( 코란과 이전 경전) 4. 사도와 예언자들 5. 정명 6. 최후 심판을 믿고 실천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628년에 메카인들과 메디나인들 사이에 후다베야 라는 휴전 - 81 -

협정을 맺었는데 2년 동안 꾸레이쉬족이 공격하므로 630년 만 명의 병사와 진군해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메카를 정복 한 무함마드는 진리가 와서 허위는 망해 없어졌다 라고 말 하며 카바 신전의 모든 우상을 파괴하고 시민에게 자유를 보장하고 평등하게 대하므로 알라신을 믿는 사람이 늘어났 습니다. 메카를 점령한 무함마드는 정복을 계속해 아라비아반도 대 부분을 통일했을 뿐 아니라 당시 두 강대국인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을 포함한 많은 황제와 군주들에게 이슬람으로 초대한다는 서신을 보내 화해와 정복을 꿈꾸고 알라신의 메 시아라며 평등사상을 세계로 전파하는 원정 계획을 세우던 중 병사했다는 것입니다. 아라파트 평원에서 무함마드는 이곳에서 해가 바뀌면 여러 분들을 다시 만나지 못할지 모릅니다. 백성들이여, 신전을 짓거나 우상을 섬기지 말고 예배라는 핑계로 통제하며 평등 을 부정하고 권위주의를 내세워 타인의 노력을 갈취해 누리 고 사는 허상을 타파하십시오. 모세와 다윗 그리고 예수는 신이 아니라 나와 같은 인간으로 여러분에게 신의 메시지를 전하려 왔을 뿐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무함마드는 과부들과 여러 번 결혼(11 번)했으나 50세 때 당 시 9살인 아부바크르의 딸 아이샤와 결혼한 것이 마지막으 로 지금도 중동사회의 모델이 돼 어린여아가 40~50살 남성 들과 결혼하는 것이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632년 6월 8일( 이슬람력 11년 3월 13 일) 63세 나이로 애처 아이샤의 무 릎을 베고 누웠다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메디나시대 이슬람을 지배한 무장( 武 將 ) 무함마드는 메카정 복 이후 아라비아와 주변국을 점령했으니 신의 사도라는 핑 계로 대중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존재나 절대군주가 될 수도 있었지만 왕관을 쓰지 않았으며 옥좌 없이 마룻바닥에 앉아 논의했고 인간은 평등하므로 누가 누구를 대신해 노동하는 것은 자유를 억압당하는 노예라며 스스로 옷과 신발을 고쳐 입으며 겸손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무함마드는 아라비아와 주변국까지 점령했음에도 사후 약간 의 소지품만 남았을 뿐 재산이 없고 자유와 평등을 주장했 을 뿐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으며 성전을 짓거나 자신을 위 - 82 -

한 예배를 드리지 말라고 했다는데 그가 썼다는 코란의 원 본은 없으며 그의 삶을 칭송하고 갈망하는 후세들이 700년 대에 이븐 히샴의 채록( 採 錄 ) 과 그 외의 많은 구술( 하디스)에 의해 코란으로 정리해 지금의 이슬람교가 됐다는 것입니다. 서로마제국소멸과 비잔티움 서로마 제국은 자취를 감췄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현재의 이 스탄불)에 수도를 건설한 동로마제국은 무력으로 권력을 장 악하고 귀족행세 하던 게르만족을 추방하고 로마를 지배했 던 왕과 귀족가문이 다시 권력을 차지했는데 이때를 16-19 세기 역사가들은 비잔티움(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ων Ρωμαίων) 제국이라 명명하고 있습니다. 561년은 유스티니안이 집권해 강력한 무력으로 귀족과 평민 들을 통제하고 복지정책과 유화정책을 펼치며 번성했고 7세 기경 동방문화의 영향을 받은 헤라클레이오스 황제가 그리 스어를 공용어로 삼았으며 8세기경 이슬람이 침략해 시리아 와 이집트를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위협했다고 합 니다. 비잔티움은 페르시아와 이슬람의 침략을 막아내므로 유럽과 그리스도교를 보호하는 방파제역할을 했으며 9세기 초 강력 한 군사력을 갖추자 무슬림에 정복당한 땅의 반환을 요구하 며 다시 전쟁을 벌려 1000년에는 바실레이오스 2세가 불가 리아와 아르메니아를 재정복하고 제국의 면모를 갖췄다는 것입니다. 동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이어져온 그리스도교 는 동방정교( 그리스, 러시아정교)로 칭하면서 서로마에 남아있 던 그리스도교와 분리됐으며 서로마는 일찍 소멸했기 때문 에 로마교황이 그리스도교의 수장이 됐지만 동로마는 황제 가 있어 황제가 동방정교의 수장이었다고 합니다. 침략전쟁을 계속하던 비잔티움은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 서 패했으며 귀족들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위한 혹독한 수탈 때문에 굶주린 평민들이 저항하고 귀족들이 권력을 차지하 려는 암투로 혼란스러워 질서를 유지할 수 없을 때 터키와 베네치아가 침입하자 1095년 콤네노스 왕조는 서방에 도움 을 요청했다고 기록됐습니다. - 83 -

비잔티움제국이 도움을 요청하자 서유럽은 종교병사인 십자 군을 파병해 지원하므로 질서와 권력을 유지했는데 제4차 십자군이 들어와서는 약탈을 시작해 혼란스러워 지면서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완전히 정복되자 몇몇 후계 국 가들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다가 마지막에 니카 이아 제국이 점령했다는 것입니다. 니카이아 제국군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했지만 동로 마를 전체적으로 지배할 수 없어 서로마와 같은 절차를 거 쳐 부락단위에 영주가 권력을 행사하는 지역으로 분열하기 시작하면서 에게해 해안에 국한된 그리스국가만 남았다가 이것마저 1453년 5월 29일 메메드 2세에게 함락당하므로 로마제국은 완전히 소멸됐다고 합니다. 봉건시대( 중세) 로마제국이 사라지고 각 지역에서 많은 물질을 생산할 수 있는 넓은 토지를 장악해 권력을 행사하던 무리들이 스스로 를 영주라 칭하면서 같은 지역에서 같은 혈통을 타고난 부 족민들끼리 모여 사는 부족국가가 됐는데 이때부터 로마시 대 귀족과 종교가 권력을 행사하는 사회로 변모하게 된 것 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이후부터 귀족이 되고 권력을 행사하게 된 그리스도수도사들이 스스로 주교나 교황이 됐고 십자군 병사를 만들고 침략전쟁을 시작하므로 권력을 유지할 수 없 는 영주들이 그리스도를 종교로 받아들이면서 종교권력이 강화됐습니다. 종교가 권력을 행사하자 그리스도를 우상이라며 믿지 않거 나 복종을 거부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이단이나 마녀 또는 악마로 몰아 악랄하게 살해하기 시작했고 무함마드를 추앙 하는 알라신을 믿는 이슬람교도들은 700년경부터 우상( 예수 성모상)을 파괴해야 한다며 침략전쟁을 시작해 1600년대 까 지 종교전쟁이 벌어집니다. 751년 피핀이 교황의 지원으로 프랑크황제( 카롤링거 왕조의 시작)가 되며 기증한 중부이탈리아가 훗날 교황령(1929년 2 월 11 일 바티칸시국)이 되고 피핀의 아들 카롤루스( 프랑스어 샤를마뉴)대제가 도나우 강변까지 점령해 " 오스트마르크(Ostmr - 84 -

ak)"를 설치하고 오스트리아의 변방지대에 점령영역인" 마르크 (Mark)"를 설치한 후 로마교황( 교황 레오3 세)으로부터 " 로마인 의 황제" 란 칭호를 받습니다. 이것은 로마교황이 비잔티움제국의 동방 그리스도교와의 갈 등 속에 든든한 후원자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지원한 것으 로 카롤루스가 이때 정복한 작센은 뒤에 독일 국가 초기형 성에 기여했고 카롤루스 사후 프랑크왕국이 3등분되면서 서 프랑크는 지금의 프랑스, 중 프랑크는 이탈리아, 동 프랑크 는 독일이 됩니다. 726년 레옹3세는 그리스도교를 믿고 있었으나 황제가 된 후 굶주린 평민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수도사들이 하는 일없이 기도할때마다 재물을 걷고 헌납 받으며 많은 부를 축적해 대중들의 삶이 황폐해 졌다면서 돌로 우상을 만들어 대중을 속이고 갈취하는 성상제작을 금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843년 베르됭조약으로 프랑크왕국이 삼분되고 919년에 작 센의 하인리히공작이 독일국왕으로 선출되면서 헝가리를 침 략해 영토를 확장했으며 928 929년에 슬라브( 폴란드)를 정 복하고 헝가리에게 곡물을 받치지 말고 수공예품( 신발 의류 직물류 등 필요한 생필품)을 받치라 했는데 그 아들이 962년 등극한 오토대제입니다. 오토대제는 자신의 영토를 되찾겠다며 침입한 헝가리 군을 물리치고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국가종교제도를 도입해 주 교와 수도원에 토지를 기증하고 수도사들에게 봉건영주의 작위를 수여하면서 주교 령으로 왕을 보호한다고 발표하도 록 하므로 영주들의 명분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강화를 가 져왔다고 합니다. 오토는 북 이탈리아를 침략해 정복하므로( 이후 북이탈리아)교 황으로부터 황제( 신성로마제국)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황제의 병사들을 사용해 로마교회의 권력을 강화시키고 보호해주는 대신 교황은 황제가 점령한 이탈리아 내의 영토를 인정한다 는 약속을 받고 신성로마제국이라고 칭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이 슬라브족( 오스트리아도 Ostmark라는 변방의 한 주였음)의 땅을 정복하면 점령지역(Mark 라 칭함)에 공작들을 파견해 다스리게 했는데 슬라브족은 영토를 점령당하면 반 - 85 -

란을 일으켜 독립하고 다시 프랑크가 이들을 점령하는 악순 환을 되풀이하다 브란덴부르크는 훗날 프로이센이 되고 뮌 헨주변은 오스트리아가 됐다는 것입니다. 교황은 스스로 신의 대리자라 칭하고 주교임명권한과 황제 를 인정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고 황제는 국가를 통치하고 교황도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에 부속된 국민의 한 사람이므로 주교도 황제가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해 프랑크 제국내의 주교들에 대한 서임권 행사를 놓고 권력다툼이 치 열했다고 합니다. 종교가 수탈하는 행위가 혹독해 민중들은 절대 권력을 행사 하는 황제 하인리히4세를 지지했으나 황제권력을 노리던 귀 족들이 교황( 그레고리7 세)과 결탁해 서임권을 주지 않으면 황 제에서 퇴위시키겠다고 협박하므로 1077년 카사노 성에서 황제가 굴복했고 이때부터 프랑크는 교황이 서임권을 행사 하게 됐습니다. 서임권은 실질적으로 종교권력을 행사하는 주교들을 임명하 는 권한으로 대중의 여론을 조장해 황제지위를 보장받는 권 력의 밑받침이기 때문에 당연히 황제가 행사해야 한다고 주 장하고 황제를 종교아래 굴복시키려는 교황은 주교는 종교 관할이기 때문에 교황이 행사해야 한다면서 서로 권력다툼 을 한 것입니다. 종교와 정권 간에 권력암투가 격화되면서 종교전쟁이 벌어 지고 종교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를 중세라 하며 이때까지도 노예제도가 사라진 것은 아니고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적 인 먹을거리와 생활필수품들은 노예나 평민들이 생산합니다. 종교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가장 악랄하게 사람들을 학살했 는데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신이 노했다거나 부정이타서 그 렇다며 종교와 자신들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을 이단이라며 화형 했고 주로 혼자 사는 여성들은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애완동물을 많이 길렀는데 반려동물을 기르는 행위를 마녀 라며 처형하기도 했습니다. 중세에 대한 기록 중에 반려동물을 기르는 유럽귀족들과 성 직자에 대한 말이 있는데 그리스도교는 애완동물소유를 못 마땅해 했으며 동물에게 먹일 음식이 있으면 차라리 가난한 - 86 -

자들에게 주라며 비판하고 동물과 친밀한 관계는 우상숭배 와 관계있다며 모함했는데 애완동물에 대한 편견은 종교재 판 때 극에 달했다고 합니다.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은 이교도라는 증거라고 했으며 애완 동물을 키운다는 이유만으로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고 동물 과 친한 것을 간악한 마녀의 행위로 몰아갔는데 마녀로 고 소됐던 여자 중 많은 사람이 나이가 많고 사회적으로 동떨 어진 생활을 하거나 혼자 사는 힘없는 여인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신이 있다고 속이는 자들이 얼마나 비과학적이고 어리석으 며 비양심적이고 편협하냐면 하느님이 땅을 창조했으며 지 구는 평편하고 끝에 가면 끝없는 낭떠러지가 있다고 강조했 는데 우주를 관찰했던 코페르니쿠스와 브루너가 지구는 평 평하지 않고 둥글고 태양주의를 자전하며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하자 화형 했다는 것입니다. 종교에서 달 위는 천상계고 신의 영역이기 때문에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된다며 연구를 금지했는데 갈릴레오 갈릴레이 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주장했다 이단으로 몰려 종교재판 (1633 년)을 받았으며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지동설을 철회하고 설파하지 말도록 강요받고 화형당할 뻔했다가 마지막 생애 를 가택에 갇혀 지냈습니다. 이런 행위를 하는 자들은 침략전쟁으로 선량한사람을 학살 하고 재물을 강탈했던 무리들이 신의 아들이라며 사람들을 억압했던 것처럼 자신들이 신의 대리자라고 세뇌하므로 노 동을 하지 않고 타인의 노동생산물을 착취하면서 누리고 살 기위한 수단일 뿐 신이 있다면 사람으로선 할 수 없는 행위 입니다.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저주하고 학살하는 행위가 비인간적인 짓임에도 신이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해 악마와 귀신 그리고 뱀파이어와 흡혈귀를 만들어 내고 사람들에게 헛소문을 퍼 트려 공포를 느끼게 하므로 대중들이 맹목적으로 자신들의 종교에 매달리게 정신을 조종해서 재물을 갈취하는 것입니 다. 종교가 권력을 잡고 성직자들이 황제처럼 누리고 살기위해 - 87 -

십일조와 강제헌금을 강요해서 서민들의 삶은 궁핍하기 짝 이 없는데 황제까지 굴복해 종교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 불신이 팽배하자 교황 우르바노2세는 1095 년 그리스 도인이 순례 갔다 피살됐다 는 거짓을 퍼트리며 무력으로 억압하려고 십자군전쟁을 일으킵니다. 이슬람은 성지순례를 용인했음에도 동로마제국의 힘이 약화 되자 프랑크족들은 내부의 불평등 때문에 발생되는 불만을 억압하고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1074년 약탈전쟁을 시작 했다가 패하자 교황에게 도움을 청했고 교황은 동방정교를 로마가톨릭 교황권 아래 두려는 목적으로 성지회복이란 명 분으로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교황은 신께서 그들을 이끄시고 그들의 일을 도우신다. 신을 위해 일을 행하다 죽는 자는 어떤 죄를 지어도 구원받을 것 이다. 가난한자 구원받지 못할 죄를 지은 자들은 그곳( 예루 살렘)에 가면 행복해지고 부유해질 것이다. 주저하지 말라 내년여름에 진군하라. 신께서 원하신다! 라며 대중과 신도들 을 선동했다고 합니다. 십자군을 모으기 위해 성직자들은 아무리 악독한 악행을 저 지른 죄인도 전쟁에 참여하면 죄를 사함 받는다는 거짓말을 퍼트려 비양심적으로 온갖 흉악범죄를 저지른 심성이 악독 한 범죄자들을 병사로 동원했습니다. 교황은 은자 피에르라는 광신도를 이용해 전쟁을 선동했고 피에르는 교황의 말을 듣고 기사들을 동원해 노략질을 시작 했는데 처음엔 유대인을 학살하며 약탈하고 베오그라드에서 도 약탈하다 헝가리왕국 기병대반격으로 군사를 잃었으며 베오그라드의 중장보병대에 대패해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 탄티노폴리스로 도망갔습니다. 동로마제국황제 알렉시오스1세는 그들을 배에 태워 이슬람 영토에 데려다 주었으나 피에르는 거기서도 약탈을 일삼다 셀주크 투르크군을 만나 제리고르돈 요새와 키보토스 요새 에서 전멸하고 기사 레이날도는 항복했으며 은자 피에르는 알렉시오스1세에 의해 목숨을 구해 달아난 것이 군중십자군 이었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차지한 무리들은 재물을 - 88 -

축적하기 위해 가혹하게 수탈하므로 빈곤해진 민중들이 불 만을 표출하고 정책에 반대하거나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면 서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부정하면 기득권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대중들을 참혹하게 살육하는 전쟁도 벌이는 것입니 다. 전쟁을 벌이더라도 자신들은 전장에 참여하지 않아 죽지 않 을 뿐 아니라 자유를 요구하는 대중들을 전시라는 핑계로 강압적으로 명령에 복종하도록 길들이거나 학살하고 평민들 이 병사로 출정해 농사를 짓지 못하거나 전쟁으로 짓밟아 황폐해진 토지를 싸게 거둬 재물까지 늘릴 수 있기 때문에 전쟁을 조장합니다. 대부분 유럽 왕들은 동쪽왕국의 힘을 알고 있어 전쟁을 달 갑지 않게 생각했으며 주변왕국과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십자군에게 자신들의 병사와 기사들을 내주면 권력을 찬탈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거느리는 지방영주들에게 그들의 기사와 병사들을 십자군전쟁에 동원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침략전쟁을 거부하면 이교도로 몰아 공격받았는데 제1차 십 자군원정이 승리하자 영주들은 자신을 왕이라 칭하며 예루 살렘주변을 자신의 영지로 삼고 통치하기 위해 노예나 죄인 신분으로 참가한 병사들에게도 기사작위를 봉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2차 십자군전쟁부터는 수많은 영주나 기사 또는 병 사들이 예루살렘을 침공했습니다. 왕보다는 재물이 부족해 병사들의 절대적 충성과 복종을 강 요하지 못하던 가난했던 귀족들과 지방영주들은 물질이 풍 족한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영토를 새롭게 확장할 야심에 병 사들을 동원했지만 십자군이 계속 이슬람 군에 패하므로 기 사와 병사를 잃어버린 영주들의 힘이 쇠약해져 왕들에게 종 속되는 계기가 됩니다. 십자군전쟁은 제1차 십자군원정(1096 년~1099 년)을 시작으로 제2차 십자군원정(1147 년~1148 년) 등 총 10차례의 전쟁을 치렀으나 대패하고 종국에는 청소년십자군이라고 해서 소년 소녀 3만 여명이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떠났 다 일부 상인들의 농간으로 노예로 팔려갔다고 합니다. - 89 -

초창기십자군은 이슬람세계가 정치적으로 분열돼 있어 승리 를 거뒀으나 이슬람이 단결하고 아마드 앗딘 장기( 장기라 불 림)나 살라흐 엣 딘( 살라딘으로 불림)같은 무장이 등장해 세력 을 결집하고 반격하므로 십자군은 계속 대패해 그리스도교 가 실제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은 총 전쟁 중 일부 기간밖에 없습니다. 무지와 광신적인 믿음으로 편협성을 버리지 못한 십자군은 강간과 약탈을 일삼았으며 당시 성지백성들과 같은 그리스 도교였던 동방정교회신자들에 대한 학살과 약탈, 하기아 소 피아성당에서의 무례로 비잔티움제국국교인 동방정교회와 로마가톨릭 간의 대립이 더 심해져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 의 분열을 고착화시켰습니다. 전쟁말기에 화승총이 사용되므로 육체적인 힘과 칼과 창 등 무기로 수많은 사람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재물을 강탈해 입신출세 했던 기사계급들의 힘이 소멸되므로 직업군( 상비 군)에 들어가거나 거리의 부랑자 또는 상인이 됐으며 장교들 은 대토지를 차지하고 귀족이 되거나 장교단을 형성해 융커 라 불리게 됩니다. 대토지를 차지하고 장원을 만들어 영주 직을 획득해 귀족이 되거나 장교단을 형성해 정치적 입지를 굳히지 못한 기사들 은 상인과 공업 인으로 변신해 노동자와 농민들을 잔혹하게 억압하고 착취하며 부를 축적하므로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 는 대장원이나 정치적입지로 기득권을 차지한 기사들과 같 은 위치로 상승하려 합니다. 십자군전쟁의 패배로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병사를 동원했 던 교황권이 크게 실추되면서 그리스도적 중세적 통합성이 허물어졌으며 전쟁 물자를 공급하던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는 무역확장을 통해 동방과의 무역을 독점하게 되고 유럽시 장들에 철, 모피 등 동방의 물품들을 공급하므로 부를 축적 하는 기반이 됐습니다. 서유럽은 십자군전쟁 중 이슬람과 비잔티움에서 약탈한 물 질로 경제가 발전했으며 특히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경 제적 정치적으로 가장 이득을 봤지만 십자군은 가톨릭이 아 닌 종교에 대한 증오를 불러 유대인대학살의 동기가 됐으며 우호적이던 가톨릭과 이슬람이 적대적으로 원수가 되는 계 - 90 -

기를 만든 것입니다. 백년전쟁과 농민혁명 중세는 결혼하면 여자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남자에 게 지참금으로 받쳤는데 병사의 무력으로 침략해 부족의 영 토를 빼앗고 대중위에 군림하던 프랑스 왕과 봉신인 영국 왕들은 영토를 차지하려고 전략적으로 결혼했으며 카페왕조 ( 프랑스왕조)의 샤를4세가 아들 없이 죽어 4촌 형제 필리프6 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샤를4세 누이의 아들인 영국 왕 에드워드3세는 자신의 엄마 는 왕위를 계승하지 못해도 자신은 남자기 때문에 프랑스왕 위 계승자라면서 땅을 달라고 주장하자 필리프6세는 봉신이 자신을 능가하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것도 못마땅한데 땅 까지 내 놓으라니 봉토를 몰수하고 자신의 재산과 권력을 늘리려고 1340년 6 월 영국과 프랑스 간에 전쟁을 벌입니다. 필리프6세는 1337년에 영국 왕의 봉토였던 아키텐 령에 병 사들을 파병해 무력으로 점령하고 몰수를 선언했으며 노르 망디 해안에 함대를 보내 영국을 위협하자 에드워드3세는 공식적인 도전장을 띄우고 자체 군사력을 준비하면서 혈족 으로 형성된 왕가인 신성로마제국황제와 라인 강 및 네덜란 드제후 등과<황제대관>으로 절충하여 공수동맹을 성립시키 고 전쟁을 시작합니다. 전쟁의 핵심은 유럽 최대 모직물이 생산되고 있는 공업지대 로 원료인 양모 공급국인 플랑드르공국과 포도주 최대 생산 지인 아키텐 령에 속한 가스코뉴공국으로 프랑스왕의 종주 권 아래에 속했는데 영국이 관리하고 있어 이 두 지방을 차 지하기 위해 왕위 계승이라는 명분으로 전쟁을 벌인 것입니 다. 왕족으로 살아가는 무리들이 부와 권력을 위해 116년간 동 안 벌인 전쟁으로 수많은 병사와 양민들이 학살됐으며 농지 는 황폐해지고 병사로 동원된 농민과 노예들이 노동을 못해 먹을거리가 없어 굶주릴 때 영국군이 들어와 약탈과 강간이 극심한데 귀족의 병사들까지 약탈에 앞장서자 1358년 농민 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귀족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수많은 양민들은 학살과 약탈 그 - 91 -

리고 강간에 노출될 뿐 아니라 병사들이 적군의 포로가 되 면 병사를 석방하는 대속 금까지 부담해야 했으므로 분노한 농민들은 참을 수 없어 북프랑스의 보베이지 지방에서 자크 리( 당시 농민 호칭이었던 자크의 집합명사)의 난이 일어난 것입 니다. 권력을 유지하고 부를 늘리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던 왕족들 은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을 회군시켜 농민들을 잔혹하게 학 살하므로 농민들의 자크리 난은 진압했지만 전장에서 병사 들을 철수시키므로 포로가 된 장2세의 석방보상금으로 300 만 크라운을 지불하고 아키텐지방과 칼레시( 市 ) 라는 영토는 영국에게 빼앗깁니다. 1364년 프랑스에서 장2세가 죽고 샤를5세가 즉위하자 전쟁 을 하기 위한 재정( 財 政 ) 을 비축하고 늘렸으며 아키텐귀족들 을 선동해 영국식민지에서 벗어나 자유공국이 되라고 선동 해서 아키텐귀족들이 영국에 반항하며 영국이 내란으로 어 수선해지자 다시 전쟁을 재개했습니다. 1369년 흑태자의 동생 존 오브고트가 이끈 영국군이 프랑스 를 침입했다 패배하고 영국해군은 카스티야해군과 동맹을 맺은 프랑스해군에게 잇달아 패배하므로 브레티니-칼레조약 으로 영국에 빼앗겼던 아키텐지방과 칼레시 영토의 대부분 을 프랑스가 점령하고 1375년 부르지에서 휴전협정을 맺게 됩니다. 오랜 전쟁으로 평민들은 헐벗고 굶어죽는데 귀족과 성직자 들은 호의호식하며 호화롭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한 영 국의 성직자 존 볼은 성속귀족( 聖 俗 貴 族 ) 을 비판하고 아담이 경작하고 이브가 길쌈할 때 귀족은 어디 있고 평민이 어디 있었습니까? 라면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니 신분으로 구분해 서 억압받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고 설교하며 다녔습 니다. 교황과 황제는 귀족을 인정하지 않고 평등사상을 주장하는 존 볼을 몇 번이나 투옥시켰으나 자신의 양심과 진리를 속 일 수 없어 귀족도 먹어야 사는데 모든 먹을 것과 생활하 는데 필요한 물질들은 노동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모두 가 균등하게 노동하고 공정하게 분배 받아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 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 92 -

존 볼은 1366년 교회로부터 파문당하고도 사람들에게 진리 를 외치자 귀족들은 그를 켄트의 미치광이 성직자라고 폄하 하고 모함하며 놀렸으나 그래도 꺾이지 않고 방랑설교를 계 속하다 1381년 옥중에 갇혔을 때 타일러의 난이 일어나므로 각지의 농민에게 은유( 隱 喩 ) 로 된 회장( 回 章 ) 을 보내 농민봉 기군을 조직했습니다. 전쟁 때문에 농토는 황폐화되고 노동을 하지 못해 생산되는 물질이 부족해져 굶주려 삶이 피폐해진 민중들에게 전쟁비 용을 모은다며 15 세 이상의 사람들에게 인두세( 人 頭 稅 ) 를 징 수하고 왕명으로 노동자규제법(1. 건강한 남녀는 신분을 막론하 고 1346 년 이전의 품삯으로 일해야 한다. 2. 노동자, 농민의 도망 을 금지한다. 3. 물가는 1346 년 이전의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4. 위반자는 엄벌에 처한다.)을 발표합니다. 그러자 1381년 5월 영국 에섹스 지방에서 와트 타일러의 지휘아래 농민군을 결성하고 반발하기 시작했으며 켄트 에 식스 이스트 앵글리아 지방까지 확대돼 잉글랜드왕국의 절 반이상 지역에서 농민봉기가 발생되면서 런던으로 진군해 하느님을 핑계로 민중을 가혹하게 수탈하던 수녀원과 수도 원을 불태우며 전진했습니다. 런던에 도착한 농민군은 감옥을 파괴해 존 볼을 구출했으며 런던시민들이 합류하자 도시를 점령하고 혹독하게 이윤을 남기던 플랑드르상인들을 징벌했고 왕의 삼촌이자 원성의 대상이던 랭커스터공작 곤트 존의 저택을 파괴하고 대법관 서드베리와 재무장관 로버트 헤일스 경을 처형한 후 국왕에 게 요구사항을 전달합니다. 농민군의 요구는 하느님을 핑계로 십일조와 헌금을 혹독하 게 갈취해 자신의 배를 채우는 (1. 켄터베리 대주교를 처형할 것. 2. 인두세의 부활 및 금지. 3. 농민의 사냥 권을 보장할 것. 4. 농노제를 폐지할 것. 5. 농지세금을 1에이커당 4 펜스로 고정할 것. 6. 곤트의 존과 간신배들의 처형할 것. 7. 매매의 자유를 보장할 것) 등을 요구했습니다. 전쟁의 폐해로 국고가 바닥나 용병을 고용할 수 없는 국왕 리처드2세(1377~1399 년)는 어쩔 수 없이 농민군에 굴복해 농노제를 폐지하고 상거래의 자유를 보장하며 토지세는 4펜 스로 고정한다는 해방 장에 서명하자 대부분의 농민들은 만 - 93 -

족하고 귀향했지만 와트 타일러의 지휘아래 켄트, 웨섹스, 런던 시민들은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니 농노제를 완전히 폐 기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거부합니다. 농민과 도시민이 결합한 민병대들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 는 법령을 폐지할 것과 하느님을 핑계로 종교가 수탈한 토 지를 몰수해 농민들에게 분배 해줄 것. 농민들의 노예화를 금지하고 자유화 를 요구하며 저항했으나 6월 15일 국왕과 협상 장소에 참석했던 런던시장 월리엄 월워스가 휘두른 칼 날에 타일러가 목을 다쳐 병원으로 실려 갑니다. 와트 타일러가 암살로 부상을 입고 세인트 바솔로뮤 병원으 로 옮겨지자 민병대는 왕을 향해 화살을 발사하려 했지만 국왕의 신변을 보호하던 용병인 기사들이 막아서면서 국왕 은 도피하고 지휘관을 잃어버린 민병대가 우왕좌왕하며 엉 거주춤할 때 피신한 국왕은 나는 그대들의 지도자요 그대들 의 왕 이니라!! 가만히 있지 못할까!! 라는 말 한마디에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민병대가 해산하자 런던시장은 병원을 찾아가 와트 타일러 를 살해하고 나중에 월리엄 경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국왕 은 민병대가 자진해산하고 흩어지자 용병들을 동원해 농민 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7월에 존 볼을 체포해 교수 척 장분지형으로 살해하므로 농민들의 봉기는 끝났지만 국왕이 서명한 해방 장에 의해 농노제와 인두세는 사라지게 됩니다. 십자군전쟁으로 부을 축적한 이탈리아에서는 재물은 많이 가졌으나 사회적 신분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어 귀족들의 착취에 시달리던 상공인들이 피렌체에서 억압받는 노동자들 을 선동해 치옴피의 폭동(1378 1382) 을 일으키며 신분상승 을 꾀합니다. 성직자들의 수탈과 전쟁비용을 노동자와 농민의 세금을 징 수해 치르면서도 승리하면 전리품으로 귀족들만 배불리는데 민중들에게 전쟁비용을 부담시켜 죽도록 노동을 하고도 헐 벗고 굶주리며 고통 받는다고 민중들을 선동해서 2년 이상 의 세월동안 피렌체를 점령하고 귀족들의 항복을 받아내 신 분이 상승하게 됩니다. 소작농의 출현 - 94 -

무력으로 넓은 땅과 그 땅에서 거주하는 무리들을 통제하는 영주들은 노예노동으로 농사와 가축을 기르며 바다의 생선 을 포획시켜 호의호식했지만 노예들은 오랜 세월 대를 이어 노동해도 자신들의 재물은 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유마저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고 농사짓는 일을 기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주들은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무력을 사 용해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으며 노예노동으로 큰 성을 짓거 나 대저택을 짓고 그곳에서 병사들과 함께 살며 자신의 영 토에 있는 산짐승들도 전부 자기 것이라 주장하고 농민이 배가고파 산짐승을 잡아먹으면 그 사람을 참혹하게 처형하 기도 했답니다. 악랄하게 사람을 학살하도록 강요하는 영주만 처형하면 많 은 사람들이 억압당하지 않겠지만 영주의 병사로 있는 무리 들은 영주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누리고 살 려는 무리들이기 때문에 영주를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주 를 위해 목숨까지 받치며 노예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며 갈취 하는 것입니다. 노예들이 노동을 기피하자 일을 시키기 위해 노예관리자를 뒀으나 노예관리자들이 노예들에게 살해당하는 일들이 발생 해 소수의 노예관리자로는 관리할 수 없게 되니 10명당 1명 의 노예관리자를 뒀는데 이것이 훗날 산업사회로 발전하면 서 생산 공장이나 건설현장 관리자( 반장) 시조가 됐을 것으 로 봅니다. 노예관리자들이 혹독하게 감시 감독하며 노예들을 무력으로 억압하므로 초기에는 농사를 지어 많이 생산할 수 있었지만 노예관리자와 노예들이 결탁해 영주를 살해하고 토지를 점 령하거나 도망가기도 했으며 노예관리자들에게 많은 물질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영주들이 호화롭게 살며 재산을 늘릴 수 없었습니다. 영주들은 어쩔 수 없이 노예들이 생산노동에 전념할 수 있 게 하기 위해 약간의 토지를 나눠주며 일정 시간은 영주의 영지에서 의무적으로 농사를 짓고 남은 시간에 노예에게 나 누어준 토지에서 자신을 위한 농사를 짓도록 허락했다고 합 니다. - 95 -

자신의 땅을 갖게 된 노예들은 처음엔 영주의 영지에서 열 심히 농사를 짓고 남은 시간에 자신의 땅에 농사를 지었으 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노예의 후손들이 태어나자 가난과 굶주림에 지친 노예들은 영주의 영지에서는 대충 대충 농사 를 짓고 자신의 땅에 정성을 쏟으면서 생산을 늘렸습니다. 넓은 토지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생산물이 없어 부가 축적되 지 않자 영주들은 토지를 회수하고 종교를 이용해 억압하며 노동을 강요했지만 자신에게 아무런 대가가 생기지 않고 희 망도 없는 노동을 거부하자 일정범위의 농지를 사용하는 대 신 그 땅에서 생산되는 소출에서 일정량을 영주에게 받치라 며 소작을 시작한 것입니다. 소작을 하게 된 농노들 중 극소수는 넓은 토지를 소작 받아 다시 소작을 주면서 재물을 축적할 수 있자 노예를 사드리 며 땅을 소유하려 하므로 영주들은 농노들이 더 이상 재물 을 축적할 수 없게 하기 위해 추수된 곡물에서 많은 양의 소작료를 징수하므로 노예들의 삶은 더욱 황폐해 졌습니다. 농지가 없는 도시 숙련노예들은 관제수공업으로 신발과 의 류 그리고 식기와 가구 등 사람이 살아가면서 실생활에 절 대적으로 필요한 물질과 귀족 행세하는 무리가 권위를 내세 우며 재물을 뽐내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각종 보석들의 세 공과 장신구들을 만들고 귀족의 재산을 관리해주기도 했습 니다. 노예에서 탈출하거나 해방된 숙련노예들은 신발과 옷을 만 들거나 또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어 낼 수 있 는 기술만 갖고 있을 뿐 땅이 없어 먹을 것을 생산할 수 없 으므로 자신이 만들어낸 물건들과 먹을 것을 교환해 생존했 을 것이며 그들이 물건을 생산하고 기술을 교환하기 위해 같이 모여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 술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있어 그곳에 가면 언제든지 먹을 것을 가져가면 필요한 물질을 교환할 수 있 다고 소문이 나면서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장을 생성하게 됐다고 봅니다. 노예들의 땀 흘린 노동을 갈취해서 누리고 살던 무리들은 - 96 -

숙련노예들에게는 곡물이 없어 빼앗아 갈 수 없으므로 농작 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세금을 내야 한다며 생산하는 물질의 량에 따라 곡물을 징수하거나 만들 어낸 물질을 강제 징수해서 부를 축적했을 것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이런 생활이 되풀이 되면서 재물을 많이 차 지한 사람도 생겨났을 것이며 재물을 많이 축적하고 창고에 쌓아 놨는데 과학이 발달되지 않아 보관시설이 미흡하니 썩 어 못쓰게 되기도 했을 것이고 빈곤한 사람들은 재물이 풍 족한 사람에게 재물을 빌리기도 했다고 봅니다. 처음엔 재물을 빌려주고 차용증 같은 것을 교환했을 것이나 차용증은 재물을 빌려간 사람이 죽거나 도망가면 다시 회수 할 수 없고 재물은 쌓아두면 썩기 때문에 안전하게 재물을 늘리고 재산을 축적하기 위해 차용증대신 언제든지 물질교 환이 가능한 화폐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을 것으로 판단됩니 다. 화폐로 물질을 교환할 수 있고 재산축적수단이 되도 노예는 자유가 없어 생필품이나 농사를 짓는 노동을 해야 했고 노 동은 노예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기피하던 도시룸펜과 부랑 자들이 화폐를 취득하기 위해 노예들이 만들어낸 물건을 가 져다 부락을 돌며 판매해 이윤을 남기며 화폐를 유통하는 상업이 시작됐을 것입니다. 화폐가 생기기 전에는 무력이나 종교라는 거짓을 행사하는 무리가 권력을 행사하며 노동력을 착취하려고 타인의 자유 를 부정하고 감시 통제하며 억압했으나 화폐가 만들어지자 화폐가 권력이 되면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며 땀 흘려 가 꾼 토지를 강탈( 경매 징수 또는 매매) 하거나 노동력을 착취( 임 금노예)하며 감시 통제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게으름을 피울 권리와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깨어날 권리가 있음에도 화폐가 권력이 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기 득권을 행사하는 자들의 명령에 따라 주어진 시간 안에 업 무를 마쳐야 하는 돈의 노예로 자유를 박탈당하게 됐습니다. 화폐가 권력이 되자 수단 방법가리지 않고 온갖 비양심적 악행으로 타인의 자유를 부정하고 노동을 착취하고 억압하 - 97 -

려는 자들이 넘치고 노동은 하기 싫고 화폐는 쓰고픈 남 여들이 유흥업체( 노래방 술집 집장촌) 를 떠돌면서 온갖 도적질 로 부를 차지한 자들을 추앙하고 화폐가 경제인양 왜곡하며 체제를 옹호합니다. 유럽에서 인쇄술의 창시자로 불리는 요하네스구텐베르크는 1397년이나 1398년 독일마인츠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 의 아버지가 금화를 찍어내는 일을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금화를 찍는 모습을 보고 자라면서 금형을 이해했으며 그것 을 응용해 1434년 인쇄연구를 시작하고 1448년에 인쇄소를 열었습니다. 이런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면 이 당시 사람들이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긴 것이 금이었으므로 금의 무게를 단위로 한 금 화가 만들어 졌을 것으로 보이며 당시는 많은 사람들이 금 화를 제조했기 때문에 후일 기득권들이 통제하고 통합하기 위해 은행을 만듭니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는 영국중앙은행은 1694년 W.페터슨의 제안에 따라 설립된 최초의 주식회사 형태 은행 으로 당시에는 다른 사적 금융업자들이 화폐를 발행하고 있 었으므로 독점적인 발권은행( 發 券 銀 行 ) 은 아니고 잉글랜드가 프랑스와 전쟁을 하면서 재정난 해소를 목적으로 설립했다 고 합니다. 1833 년 잉글랜드 은행권이 법화( 法 貨 ) 로 지정됐고 1844년 잉글랜드 은행조례( 필 은행조례)에 의해 새로운 발권은행설립 이 금지됐으며 1854년 많은 은행에서 보유하고 있는 예금계 정을 대체해 상호간 결제를 실시하게 됐다는 기록이 있으므 로 인류역사에서 화폐와 상인의 생성은 오래되지 않았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화폐를 만들지만 화폐가 유통되지 않으면 가치가 없으므로 화폐에 가치를 두기위해 땀 흘려 생산한 물질과 교환되는 시장을 형성했을 것이며 화폐만 노리는 도적과 강도 그리고 사기꾼 도박 매춘 등 힘들이지 않고 화폐를 편안하게 갈취하 려는 각종 범죄가 나타났다고 봅니다. 화폐만으로는 어떤 물질도 생산되지 않으므로 화폐를 가치 있는 물질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유통되는 시장이 반드시 있 - 98 -

어야 하기 때문에 물질이 교환되는 시장이라는 제도와 체제 가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시장에서 생활에 필요한 물질을 교환하게 되면서 화폐만 발 행하거나 빌려주는 고리대금업이 생겨났고 화폐를 빌렸다며 이자라는 핑계로 원금의 몇 배에 달하는 땀 흘려 생산한 물 질을 합법적으로 강탈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자 화폐만능주의에 빠져 화폐를 차지하려는 도박이 판 을 치고 도박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노동은 천한 노예들이 나 하는 것이라고 업신여기는 사상을 전파하며 사기와 도박 을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무리들은 도박자금을 마련하기 위 해 사람을 살해하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화폐를 빌리면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죽도록 노동을 해야 하 고 노동임금으로 갚을 수 없으면 사기나 도박 등 범죄를 저 지게 되는 것이고 범죄를 저지르다 구속되면 교도행정에 교 화되면서 체제옹호자가 됩니다. 바둑이나 장기 또는 그림이나 음악, 연예인이나 스포츠선수 그리고 글쓰기나 도박, 방송과 행정, 감시통제 등의 행위는 인류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그 어떤 물질도 생산하지 않음에 도 풍족하게 생활하는 것은 임금노예들이 노동생산만이 경 제라는 진실을 깨달을 시간을 갖지 못하도록 정신을 빼앗는 대가로 누리고삽니다. 예술이나 문화라는 직업이 지성을 갖춘 양심인양 행동하지 만 억압과 갈취 속에 빈곤하게 생활하는 민중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저항하는 정신을 갖지 못하게 시간을 빼앗고 감성을 자극하므로 저항정신을 감소시키는 것입니다. 처음 상인들은 부락과 도시를 돌며 물건을 판매하려갔다 주 인 없는 한적한 주택에서 귀중품들을 가져오기도 했을 것이 며 부녀자들이 혼자 있는 것을 보면 패악 질을 저지르기도 하므로 부락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 이웃을 믿지 못하는 불 신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것으로 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재물을 모은 사람들이 생기니 노동은 하 기 싫고 돈은 갖고 싶어 너도 나도 장사를 시작했고 재물을 모은 상인과 장인은 안전하게 재물을 지키려 토지를 구입하 고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모여 커다란 부락을 이루니 - 99 -

귀족들은 이들이 세력을 넓히지 못하도록 특정지역에서만 거주하도록 강제했을 것입니다. 많은 재물을 모았지만 특정지역에 갇혀 살아야하는 사람들 은 그 지역을 벗어나려 했지만 권력의 감시와 통제로 벗어 날 수 없자 힘을 합쳐 저항했으며 이런 과정을 거쳐 재물을 차지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가둬놓은 지역을 벗어날 수 있게 되고 대표를 뽑아 자신들을 가둬놓는 권력자들과 협상도 할 수 있게 됐다고 봅니다. 이들이 처음에는 자신들이 갇혀 지내는 지역 안에 사는 사 람들끼리 뭉치기 시작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며 점점 분화 되고 같은 물질을 생산하는 사람들끼리 뭉치기 시작하니 상 인들도 자신들의 연합체를 만들어 이들과 함께 권리를 요구 하며 저항하므로 영주들은 물론이고 황제도 위협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뭉치므로 힘이 생기자 이들은 자신들이 소속된 연합체를 상 징하며 자신들을 억압하는 병사들과 전투가 벌어지면 함께 보고 모일 수 있게 깃발을 만들어 사용했는데 1 430년 지기 스문트 황제가 도시의 깃발을 벗어난 개별적인 깃발을 가 져서는 안 된다 고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위력적으로 저항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연합체는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모세와 예수 그리고 석가 와 무함마드가 주장했던 것처럼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참여하고 동등하게 발언하며 대표를 선출해도 전권을 행사 하는 것이 아니라 현안 문제를 구성원들과 함께 논의하고 결정되면 스스로 결의하고 대항하는 시스템을 갖췄기 때문 에 강했을 것입니다. 생산노동 없이 상술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물건을 판매하 려 다니면서 대중들이 특정물질을 많이 필요로 한다는 것을 파악했을 것이며 처음에는 숙련노예들에게 필요한 물질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해 가지고 다니며 팔고 물건을 잘 모르 는 사람들에겐 불량품을 속여 팔아 이윤을 남겼다고 봅니다. 상인들은 숙련된 노예나 농민들이 땀 흘려 생산한 물질을 판매해 이익을 남기고 사는 사람들로 물건을 살 사람인지 구경만 할 사람인지를 판단해야 했고 눈치를 살펴 반드시 - 100 -

물건이 필요한 사람이면 감언이설로 꼬드겨 비싸게 팔아 부 를 축적합니다. 상품을 가져오면 단계별로 나눠 상품과 중품 그리고 하품으 로 분리하고 상품을 비싼 가격에 판매하므로 많은 이익을 남기는 것이며 눈속임해서라도 판매해 이윤만 남기면 되기 때문에 겉으로는 똑같은 양으로 보이게 하거나 싱싱하게 보 이도록 속임수를 써서 이익을 취하는 것입니다. 상인들은 물질을 판매만 하고 숙련노예들이 물건을 생산하 는 양식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직접 만들어 판매 해야 이익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상인들이 노동자를 고 용해 생산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당시까지만 해도 물건을 만 들어 내기 위한 도구나 기계들은 숙련노예들이 소지하고 있 었다고 봅니다. 욕심이 생긴 상인들은 노예들이 상품을 만들던 도구나 기계 들을 구입하고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고용해 임금을 지불 하며 물건을 만들어 내기도 했을 것이고 물건을 만들어 내 는 과정도 처음에는 한곳에서 한 개의 물건을 만들었겠지만 물건을 만들어내는 속도가 느려 더 빨리 생산하기 위해 분 업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한사람이 한자리에서 냄비의 손잡이와 냄비를 만들고 뚜껑 을 만들며 뚜껑손잡이를 만들어 조립해 완성시키던 것을 한 사람은 냄비만 만들고 다른 곳에서 손잡이를 만들며 또 다 른 곳에서 뚜껑을 만들고 다시 뚜껑손잡이를 만드는 분업을 통해 한곳에서 집중적으로 조립해 빨리 생산하는 방법을 사 용하게 됐습니다. 상인들은 물건에 가격을 늘려 판매해 부를 축적하는 것도 모자라 물건을 구입하기위해 화폐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힘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자를 받지 못하거나 저리이자를 받고 힘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고리이자를 적용 해서 많이 갚을 것을 요구하고 돈을 갚지 못하면 가족까지 빼앗으며 부를 늘립니다. 노예의 노동력을 영주가 보유한 병사의 무력으로 억압하다 수많은 저항에 부딪쳤던 무리들과 달리 화폐가 권력이 되자 먹을 것과 필요한 물질을 교환할 수 있는 화폐를 통제무기 - 101 -

로 삼아 임금노예들에게 잠자는 시간외에는 쉴 시간도 없이 노동하도록 강제했습니다. 임금노예노동은 어른이나 어린아이를 가리지 않았으며 탄광 이나 금광 그리고 철광과 금속 광을 가리지 않고 곡물을 생 산하는 농촌과 가축을 기르는 목축업, 직물을 직조하는 가내 수공업과 공장에서 부려먹어 먹을 것과 잠이 부족한 상태로 노동을 하니 노예들의 수명이 짧아져 일찍 죽었다고 합니다. 종교가 다중을 통제하며 통치할 때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는 데 요한12세는 10 代 에 교황으로 선출돼 유부녀 침실에서 죽 었으며, 교황은 아들과 사냥을 다니는 것을 자랑했고 교황의 사생아아들이 교회정책을 좌지우지했으며 자신들의 종교를 믿지 않으면 이단으로 몰아 처단하는 공포정치로 권력을 유 지했습니다.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자유와 평등사상을 종교로 변질시켜 기득권이 된 무리들이 우월성을 과시하고 위화감을 조성하며 다중을 복종시키기 위해 거대한 성전을 짓고 더 많은 부를 축적해 권위를 내세 우려고 아무리 많은 죄를 지은 사람도 면죄부를 사면 죄를 사함 받는다는 거짓말을 퍼트리며 면죄부를 판매해 부를 축 적하기 시작했습니다. 비양심적이고 악독한 행위로 부를 축적한 무리들에게 면죄 부는 신에게 미리 들어놓는 보험처럼 받아들여져 엄청 많이 팔렸는데 1402년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는 교회가 인덜 전스( 면죄부)를 판매하는 행위는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고 비판했다 이단으로 몰려 1415 년 처형됐다고 합니다. 루터는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 을 통해 독일교 회 안에서 개혁해야 할 폐단 27종류를 열거했는데 이것은 모두 로마 교황청의 수탈과 관련된 것으로 대표적으로 폐해 가 큰 첫 수입세, 팔리움, 보류권, 사라센세 등 각종 공물 제도에 관한 것들이며 조달비, 공석금, 기부금, 십자군자금 등도 비판했습니다. 교황청은 십일조와 헌금을 강요하면서 미켈란젤로에게 엄청 나게 큰 시스티나 성당 천장그림을 그리게 하고 로마 교황 청의 베드로 대성전 같은 것을 짓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면 - 102 -

죄부를 판매했는데 이러한 행위는 신이라는 핑계로 개인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흡입행위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배교, 우상숭배, 살인, 간통 등의 죄를 지으 면 성만찬에 참여할 수 없도록 추방했는데 쫓겨난 신자들이 배교를 하는 일이 늘어나자 교회에서는 공개적으로 죄를 고 백하고 부과하는 형벌을 받으면 다시 교회로 받아준다고 하 므로 이때부터 고해성사가 실시됐다고 합니다. 중세교회에서는 개인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죄 를 부끄러워하면 사제가 죄의 용서를 선언하고 기도, 금식, 자선, 교회에 대한 기부 등 일정한 벌을 주는 보속(Satisfacio )을 하도록 하며 개인고해를 받았는데 이후 보속을 덜해주는 대사를 두고 나중에는 돈으로 거래하기도 했습니다. 중세 일부교회는 대사의 효력은 보속의 경감뿐 아니라 모든 죄를 용서받고 심지어 연옥에 있던 영혼도 하늘나라에 간다 고 선전했으며 도미니코 수도회 출신 요한 테첼(Johann Tetz el)이라는 부흥사는 성서를 인용해 대사를 사면 부모의 영 혼도 하늘나라에 간다. 라는 설교로 신자들에게 면죄부를 사 라고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성직자들이 교회에 돈을 기부하면 죄를 사함 받는다는 거짓 말을 퍼트리자 온갖 비양심적인 악행으로 재산을 축적한 무 리들이 갈취한 재산 중 약간을 희사( 강탈)하면서 양심의 가 책을 덜고 또 다시 악행을 저지르며 인민들을 갈취( 착취 수 탈)하므로 빈부격차가 극심해져 선량한 대중들은 굶주리고 사회는 혼란스러워집니다. 1517년 가을 마르틴 루터는 재정을 늘려 교회를 짓는다는 핑계로 자유와 평등을 주장했던 모세와 예수의 사상을 부정 하고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며 혹독하게 갈취하기 위해 면 죄부란 거짓을 파는 행위와 주교와 교황이 금지시키고 있는 결혼문제 등에 대해 95 개 조항으로 반박했습니다. 당시 마인츠에는 1455년 구텐베르크에 의해 발명된 인쇄기 가 가동되고 있었기 때문에 루터가 작성한 95개 반박문은 인쇄해 빠르게 배포됐으며 그 내용이 대중들에게 널리 확산 되고 알려지자 종교개혁 문제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마 르틴 루터는 순식간에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됩니다. - 103 -

신부며 신학자인 루터는 1525년 카타리나 폰 보라라는 수녀 와 결혼해 6자녀를 뒀는데 종교를 불신하고 불만을 나타내 는 사람이 늘어 종교가 대중장악력을 잃자 신부가 신으로부 터 사명을 받고 살아가는 엄청난 사도인양 포장하기위해 결 혼을 금지시키고 성직자라 부르는 것은 비양심적으로 만드 는 위선이라며 비판했습니다. 교황 레오10세가 루터에게 95개 조항을 철회하지 않으면 파 문하겠다는 교서를 보내 협박하자 루터는 교황의 편지를 공 개적으로 불태웠으며 교황이 1521년 루터를 파문하자 루터 는 공정한 청문회도 없이 파문됐다고 이의를 제기하므로 로 마 황제인 카를 5세가 보름스에서 열리는 제국의회에 출두 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교황의 편지를 태우면서 예수는 걸어 다녔는데 교황은 가마를 타고, 예수는 제자의 발을 씻어줬는데 교황은 자신의 발에 입 맞추라 하며,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 했는데 교황은 예수의 종들을 이단이라고 화형에 처했기 때문에 그는 가증스러운 적그리 스도며 교황이 나를 이단자라 파문하면 나는 교황을 그리스도의 진리로 파문하리라. 교황은 그리스도의 목자가 아니라 악마의 사 도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1521년 4월 루터가 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텐베르크 에서 보름스까지 15일에 걸친 대장정의 길을 가는데 종교의 억압과 수탈에 지친 대중들이 따라다녀 어디를 가나 사람이 넘쳤으며 교회와 제국의 관심이 집중되자 제국의회는 보름 스칙령으로 루터의 법익( 法 益 ) 을 박탈하고 모든 저술의 출판 을 금지한다고 판결했습니다. 교회에서 교황에게 신부라는 직분을 잃고 황제가 법익을 박 탈해 죽임을 눈앞에 둔 위험에 처한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오는 길에 작센의 프리드리히가 납치를 위장해서 구출 하고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옮겨 융커 게오르크라고 불리는 기사로 신분을 위장해줘 그곳에서 성경번역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작센 프리드리히는 영주로 왕권에 저항하는 권력을 목적으 로 루터를 구출했는데 루터는 10개월 동안 바르트부르크 성 에서 황제와 교황을 피한 도망자신분으로 에라스무스의 그 리스어성경( 신약)을 독일어로 번역했지만 자신의 이름을 쓸 - 104 -

수 없어 '9 월 성경' 이라 명명하고 1522년 9월에 출판했다 는 것입니다. 번역한 성서가격은 1권이 가정부 1년 급료에 해당하는 비싼 가격이었음에도 9 월 성경 의 내용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 이 넘쳐 12개월 동안 2쇄에 걸쳐 6000부가 인쇄됐으며 153 4년 무렵 루터는 히브리어 성경( 구약)을 번역해 출판하므로 일반인들도 모세와 예수가 주장했던 평등과 자유에 대한사 상을 깨달았다고 봅니다. 루터는 번역방법에 대해 집 안에 있는 어머니와 거리에 있 는 아이들 시장에 있는 보통남자와 이야기해 봐야 한다. 그 리고 그들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잘 관찰하고 그들이 말하는 방식과 요구에 맞춰 번역해야 한다. 라고 말하므로 성경을 원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현실에 맞게 번역됐음 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의 수탈 때문에 헐벗고 굶주리는 대중들의 원성이 극에 달해 종교개혁바람이 불고 있는 와중에 콜럼버스라는 사람 이 13세기 이탈리아탐험가인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고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1484년부터 후원자를 찾았으 나 아무도 없자 아들 디에고와 함께 포르투갈을 떠났다고 합니다. 포르투갈과 프랑스 등 여러 나라를 오가며 후원자를 찾다 에스파냐의 이사벨여왕을 만나 지원을 받고 의사, 목수, 은 세공사, 에스파냐 황실사절, 아랍어 통역사 등 모두 90명의 인원과 항해를 했는데 1492년10월12일 핀타호의 선원 로드 리고 데 트리아나 가 육지가 보인다. 라고 외치므로 아메리 카대륙에 도착했다는 것입니다. 콜럼버스가 도착한 곳은 신대륙이 아니라 원주민들이 사는 땅이었는데 그들은 작은 창 말고는 무기도 없고 태도도 호 의적이다. 내가 칼을 보여주자 한 남자가 칼날을 잡는 바람 에 손을 베였다. 나는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호감을 갖도록 하고 싶다. 무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개종시키고 싶다. 라고 회상했을 정도로 평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칼도 모르고 평화롭게 사는 사람들에게 평등과 자유를 전파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론과 유일신을 세뇌해 대중을 굴복시 - 105 -

켜 통제하며 갈취하는 사상을 전파하려고 39명의 선원에게 통치하라며 남겨두고 에스파냐왕실에는 신대륙에 향료와 금 광이 많다는 거짓 보고를 하고 돌아와 대대적인 환영을 받 았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에 현혹된 에스파냐왕국의 지원을 받아 17척의 선박 과 1200여명의 선원을 모아 두 번째 도착한 아메리카에는 남겨두고 떠났던 39명의 선원들이 황제인양 군림하며 약탈 과 강간을 저지르는 등 악행을 저지르다 원주민들에게 몰살 당한 후라서 콜럼버스는 보복하기 위해 원주민을 학살하고 노예로 팔려고 사냥했습니다. 콜럼버스는 1495년 초 타이노족 5백 명을 4척의 선박에 실 어 유럽에 노예로 팔았으며 이렇게 팔려온 원주민들은 머나 먼 바다를 건너 갈 수도 없어 이국에서 엄청난 박해를 받으 며 노예생활( 킨타쿤테 만딩고) 을 해야 했고 아메리카에서는 14 세 이상의 원주민남자들에게 석 달에 한 번씩 금을 바치라 며 갈취했다는 것입니다. 원주민들이 평화롭게 살던 곳에 이방인들이 들어오면서 유 럽 질병인 천연두와 같은 바이러스가 퍼져 50년 동안 수십 만 명에 달하는 원주민들이 사망했음에도 자신의 야망을 위 해 4번째로 페르난도와 이사벨이 지원한 작은 배 4척을 타 고 1502년 5월 항해를 갔다 돌아와 1506년 5월 21일 54세 로 숨졌다고 합니다. 교회가 타락해 우상을 섬기고 대중들을 착취해 재물을 모아 부를 축적하고 흥청거리며 산다고 반발하던 종교개혁가 츠 빙글리(Ulrich Zwingli)는 1522년 세 자녀를 둔 과부와 동거생 활을 했는데 아내를 가진 10명의 사제들과 함께 주교에게 성직자의 결혼을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들을 제출했다는 것 입니다. 7월에 시 당국이 기획한 토론회에서 67 제안( 提 案 ) 을 발표하 고 설득하므로 종교개혁에 호응하도록 했으며 제2회 토론에 서는 성 화상( 聖 畵 像 ) 폐지에서부터 십자가와 제단 그리고 오 르간으로 예배하는 것과 성직자의 결혼은 금지시키는 것은 성경에 어긋나고 오히려 성직자들을 비양심적으로 타락시키 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 106 -

교회가 십자군이라는 용병으로 사람을 학살하는 전쟁을 수 행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라고 비판했으며 성직자의 결혼금 지는 믿음지상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인간의 자연적 본능인 성적욕구를 제어하고 의무화하는 것으로 모든 기독교인들에 게 영적자유를 허락한 신의 뜻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라 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끄러운 얘기지만 우리는 불타는 정욕 때문에 그 동안 많은 흉측한 짓들을 해왔다. 고 실토하며 마음을 상하 게 할 정도로 자주 그리고 결렬하게 타오르는 욕망의 불길 만으로도 결혼의 명백하고 충분한 이유가 된다. 했으며 음 탕하고 뻔뻔스런 개 로 여겨지는 자신들이 일반인에게 복음 을 가르치는 모순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카를슈타트는 성직자에게 강요된 독신생활은 은밀한 동거뿐 아니라 간음, 동성연애, 자위행위를 조장해 음란의 나락에 빠뜨리고 억압된 성적욕구는 성직수행을 해친다고 했으며 츠빙글리는 67제안 49에서 교회가 결혼을 금지시키면서 내 연의 처를 거느리라고 돈을 지급하는 것은 스캔들이다. 라 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독단적인 횡포로부터 모세와 예수가 살아갔던 사상 들로 되돌리기 위해 개혁가들이 활동한 것을 프로테스탄트 라고 칭하는 것이며 1525년 취리히에서 최초로 교회성직자 의 결혼을 허용하는 법이 만들어지자 신성로마제국과 영국 에서도 성직자의 결혼을 법적으로 승인하게 됐습니다. 농민혁명과 수공업 발전 성직자가 혹독하게 수탈하고 착취하는 행위와 황제가 세금 을 징수해 부리는 병사를 동원해 무력으로 억압하며 복종을 강조하는 행위에 짓눌렸던 소 영주 후텐과 지킹겐은 루터가 교황과 황제에게 굴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독립적인 권력 을 잡기하기 위해 1522년 제국기사들과 반란을 일으켰다 연 방 군주들에 의해 진압됩니다. 1524년 6월 슈바르츠발트지방 스튈링겐 백작이 농번기에 백작부인이 실을 감는데 사용할 달팽이껍질을 모아오라고 명령하고 자신의 초야권( 노예나 소작농들은 결혼하면 반드시 첫 - 107 -

날밤을 신부가 영주와 동침해야 됨)을 반납하는 대신 현금을 내 놓으라고 요구했으며 농사를 짓는 농기구를 빌려주고 엄 청난 사용권을 요구하는 고리대금업 횡포에 반발해 농민들 이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농사도 지었지만 모직물의 발달로 많은 가난한 농민 들이 자유롭게 미개간지 공유지 등 공동이용이 가능한 토지 에 양을 길러 양모를 생산했는데 영주와 일부 요먼(Yeoman) 들이 농민들이 농사짓던 토지에 울타리를 둘러치고 자신의 영토라면서 농민들이 사용할 수 없도록 하고 사용료를 받아 챙겼습니다. ( 인클로져) 요먼(Yeoman)이란 영국에서 장원제가 해체되면서 지주소작 제가 시작되자 농민들은 서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암투 가 벌어지면서 분열했는데 40 실링 이상의 자유보유지( 自 由 保 有 地 )를 사면 독립된 자영농민이 될 수 있을 때 토지를 사드려 농민 중 상층부를 이룬 사람들을 칭합니다. 당시는 농사도 지었지만 공업이 발달하던 시기라 도시공장 에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지만 공장에서 감시와 통제받으 며 휴식시간도 없이 노동을 하는 것보다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이 낫다며 농민들은 농사짓기를 원했는데 노 동자가 필요한 상공인들과 귀족의 결탁으로 울타리를 장려 해 횡포가 극에 달했습니다. 영주들과 요먼들이 농민들 땅에 울타리를 치고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는 행위로 자신의 노동으로 먹을 것을 생산하며 자유롭게 살던 농촌에서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된 많은 농민 들은 쫓겨나 도시로 나가 노동자가 되거나 예비노동자인 도 시 영세민이 돼 빈곤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농사를 지을 때는 남자는 논에서 여자는 밭에서 일하면 먹 고 살 수 있어 여자가 남자를 단속하지 않았지만 도시에서 월급 받는 노동자가 되자 남자가 벌어주는 수입으로 여자와 가족이 먹고 살아야 하므로 여자와 가족들의 생계를 남자에 의존해 살면서 남자를 단속하고 묶어두는 일부일처제가 강 화됩니다. 여성들 스스로가 먹고 살길이 없어 선택한 일부일처제 강화 는 여성들이 육아와 가사노동에 속박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 108 -

먹을 것을 벌어온다는 이유만으로 가정에서 폭력행위도 참 아야 하고 한 사람과 한번 결혼이라는 굴레를 쓰면서 성생 활이 만족하지 못해도 참고 살면서 인간본능을 억압하는 결 과를 가져왔습니다. 남성의 지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남성우월주의나 칠거지악 또는 모성본능이라는 거짓에 세뇌돼 한번 성관계 를 가지면 평생 그 남성만 기다리며 살아야 하고 남성이 사 회적 능력이 부족하거나 노동을 회피하면 여성이 자기 몸을 희생해서라도 그 남성의 씨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강제착취 를 낳았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존재가치는 부정 되고 며느리 또는 누구 엄마로 칭하게 됐으며 같은 여성이 시어머니라는 명분으로 며느리인 같은 여성을 억압하며 탄 압하고 자신이 낳았지만 자신의 성씨와는 무관한 결혼한 남 편집안 성씨를 따르는 종족을 유지하고 번창시키기 위해 억 압당하게 된 것입니다. 남성노동자에게는 가족을 먹여 살리고 부양해야 한다는 책 임감과 의무가 주어져 노동현장에서 인간이하의 비인간적인 욕설과 기계취급을 받아도 저항하지 못하고 참아야 하는 족 쇄가 됐으며 자녀에게 들어가는 학비와 양육비용을 벌기 위 해 평생을 감시와 통제 속에 생산하는 노예의 굴레를 벗어 날 수 없게 됐습니다. 산업의 발달은 계층 간 삶의 질도 변화시키는데 농사를 짓 고 살 때는 누구나 논밭에 나가 자신이 노동한 만큼 농작물 을 수확해서 큰 차이가 없었으나 도시로 쫓겨나 공장노동을 하면서 모두에게 균등하게 노동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 니라 상공인들에 의해 노동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수입 이 없어 더 빈곤해 집니다.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해 물질을 생산하며 이윤을 남기는 상공인들은 모든 사람의 일자리를 보장할 수 없으니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채용하지 않고 자신의 권리와 노 동력만큼의 임금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해고하며 절대복종을 강요해 저임금으로 채용하기 위해 예비노동자인 실업자를 양산합니다. - 109 -

물질문명의 발달은 생산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숙련공과 비 숙련공, 제조업과 비제조업 철강업과 화학업종, 관리직과 비 관리직, 사무직과 생산직 등등으로 나뉘어 계층 간에 반목대 립하게 하므로 단결할 수 없도록 분열을 조장하고 착취계층 인 상공인들의 이윤을 위해 헌신하도록 강요하는 것입니다. 대 농장제인 장원제도가 무너졌음에도 영주계급이 부역을 부활하고 농민의 생산을 제한하며 착취하자 통제 억압당하 던 농민들이 봉기하게 됐으며 당시에 농민 단에는 용병출신 한스뮬러가 있었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병사들은 이탈리아 를 침공 중이었기 때문에 영주를 지원할 수 없어 굴복했습 니다. 농민 단들은 부근 소도시에서 종교적 압박을 받던 시민들과 손잡고 신앙의 자유와 봉건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며 저항했고 영주는 황제병사들의 지원을 받지 못하니 농민들 을 진압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굴복하고 교섭에 응하자 농민들은 승리했다며 10 월에 자진해산합니다. 자신들이 땀 흘려 노동해도 항상 굶주리며 사는데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정치 관료들은 노동한번 하지 않고도 자신들 보다 호화롭게 살아가는 불평등한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 고 판단한 농민들은 한스뮬러와 함께 겨울 동안 조직을 더 강화했고 1525년 봄에는 남독일 전역에 독자적인 농민 단을 결성했습니다. 농민 단은 주교와 교황이 마음대로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을 금지하고 지역주민들이 성직자를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를 요구했으며 농노제와 세금을 폐지할 것, 그리고 부역지대 조세를 경감하고 공유지를 해방시키라고 요구하며 생산노동 없이 농민을 억압해서 착취와 갈취로 누리고 사는 수도원과 성채를 불태웠습니다. 농민들이 평등과 자유를 요구하는 저항이 벌어지자 마르틴 루터는 영주와 황제를 찾아가 하느님의 종들이 권력을 가 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고 주장하며 권력에 저항하는 농민들은 미친개를 때려잡듯이 누구든 할 수 있는 사람은 찌르고, 치고, 죽이게 하라 라고 아첨해 법익을 회복 합니다. - 110 -

루터는 평등사상을 외면하고 성직자들이 대중을 통제하고 다스리며 기득권으로 누리기 위해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은 성전 안에서만 있는 것이지 성전을 벗어난 사회생활에 서는 평등하지 않다. 고 강변하면서 억압과 착취에 견디지 못해 폭발한 농민들의 분노를 무력으로 억압할 것을 요구했 습니다.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권력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 이라는 수장령(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면서 평 등을 부정했고 양민을 학살하며 억압으로 권력을 누리는 무 리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므로 종교를 권력에 종속시키고 모 든 사람들이 권력의 억압을 자연스럽게 받아드리도록 강요 한 것입니다. 루터의 선동으로 학살당하던 농민들이 성직자를 불신할 때 종교개혁가 이자 신부인 토마스 뮌처는 루터가 농부와 수 공업자의 현실을 배반하고 있다 면서 거짓말 박사 혹은 비 텐베르크의 정신 나간 나약한 인물 이라고 비난하고 가난 한 사람들을 곤궁에서 구제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야말로 이 땅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일이다. 라면서 억압받 는 사람들은 저항하라고 외칩니다. 뮌처는 모든 고리대금업자, 도둑, 강도 중 국왕과 지배자들 은 최악이다. 그들은 가난한 농부들과 수공업자들을 억압하 고 착취해 누리고 산다. 가난한 사람들은 사소한 법률을 하 나만 어겨도 그 대가를 치르지만 영주나 성직자들은 법을 어겨도 처벌받지 않는다. 면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자유 롭게 살 권리가 있으므로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뮌처는 빈부의 격차가 없는 사회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 라며 사람들을 설득하자 1524년 만스펠트와 그 근처 광부 농민이 저항을 시작해 튀링겐과 하르쯔를 지나 14일 만에 40여 개의 수도원과 수녀원을 점령하고 파괴하면서 점 점 들불처럼 빠르게 번지기 시작해 1525년 초봄에는 남쪽 바이에른과 중부독일의 헤센지방을 뺀 신성로마제국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루터는 농민혁명의 책임이 통치권을 행사하는 제후에게 있 다며 혁명적 개혁자 등장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면서도 독일 의 제후들에겐 옛 자치단체 규범과 관습으로 돌아가라 하고 - 111 -

저항하는 농민들을 병사의 무력으로 때려잡으라고 선동하면 서 농민들의 무장봉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며 저항을 폄하하고 굶주림으로 생기는 혼란은 기독교인이 고난 받는 것이라며 교인들의 합류를 막았습니다. 농민과 광부 그리고 도시민들은 1성직자를 교구민이 뽑을 권 리 2성직자가 누리고 살기위해 십일조와 헌금을 강요하는 행위금 지 3농노제의 폐지 4사냥과 고기잡이는 필요한 사람이 자유롭게 하도록 보장 5연료와 목재로 사용하는 벌목의 자유보장 6가혹하 게 세금을 늘리는 증세금지 7부역증대 거부 8농사도 짓지 않는 자들이 징수하는 토지세반대 9영주가 농민이나 서민을 처벌하는 행위금지 10목초지를 영주가 통제하는 행위를 금하고 공동으로 사 용 11사람이 죽으면 돈을 받는 사망세폐지 12위 조항에 대해 자유 롭게 토론할 수 있도록 보장 하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뮌처는 그리스도께서 말하길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 러 왔다 그대들은 이 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하 나님의 계시를 거스르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해야 한다. 모세의 다섯 번째 경전 7장에 말하길 너희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동정치 말고 그들의 제단을 부수고 그들의 우상을 파괴하고 불 질러 나의 분노가 너희에게 미치지 않도록 하 라고 하셨다 라면서 무장저항은 주장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농민군은 5월 2일 쉬톨베르크로 진격해 공작 보도 3세에게 농민군의 요구에 따르겠다는 서명을 받아냈으 나 5월 14일 프랑켄하우젠에서 화승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에 의해 학살당하며 패배하자 보도 3세는 농민군을 무자비하게 도륙했으며 뮐하우젠에서 사로잡힌 뮌처는 온갖 고문을 당 하다 5월 27일 36살의 나이로 법이라는 명분으로 살해당했 습니다. 뮌처가 구상한 천년왕국은 고문당하며 진술한 기록밖에 없 는데 농민군에 함께한 목표는 모든 기독교인을 평등하게 하는 것과 복음을 거부하는 군주 및 지주들을 죽여 없애는 것이며 모든 물질은 공유하고 쓸 일이 생긴 사람에게 필요 에 따라 나누며( 분배) 이를 거부하는 군주, 공작, 지주들은 처음에는 경고를 받고 그 다음에는 참수한다. 는 내용이 있 습니다. 이 농민전쟁으로 절대적 권한으로 대중을 지배했던 교황청 - 112 -

과 주교들이 억압하고 착취하던 통치행위가 막을 내렸으며 노동을 하지 않고 창조론이라는 거짓과 유일신이라는 허위 를 팔아 편하게 먹고 살려는 자들이 교황청의 지배를 받지 않는 교회를 만들어 내므로 그리스도교는 개신교와 가톨릭 으로 나눠진 것입니다. 힘들게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 헌금과 십일조만 걷어도 평생 편안하게 먹고 살 수 있다고 판단한 신학대학 졸업생들이 교회를 짓고 목회자라면서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서 준동하 기 시작하자 이들을 통제하고 숫자를 제한하기 위해 교회중 앙조직인 장로회와 영국국교회( 성공회), 예수회 등을 만들었 습니다. 종교가 신교와 구교로 나눠지자 신교와 구교 사이에 끝없는 전쟁이 벌어졌는데 신교는 사람에겐 자유가 있기 때문에 성 경을 쫓아 올바로 해석하고 따르려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 라고 요구했고 구교는 지금까지 이어왔던 구 지배질서를 유 지하면서 교황을 섬기는 것이 성경에 충실한 것이라며 신교 를 배척했습니다. 로마가톨릭 성직자들의 착취와 갈취를 부정하고 새로운 신 교를 만든 성직자들로 구성된 신교에 로마가톨릭구교의 강 제헌금과 수탈을 거부하는 상공인들과 몰락한 귀족들이 모 이므로 많은 신자를 확보하며 빠르게 성장해 종교적 영역을 넘어 정치권력까지 행사할 수 있게 되니 기득권이 됩니다. 구교를 고수하고 있는 성직자들 중 일부는 영주라는 칭호를 받고 봉토를 받아 노동자와 노예노동을 착취하며 누리고 살 지만 교회만 가지고 십일조와 헌금만으로 생활하던 성직자 들은 신자 수가 줄어들수록 정치적 권한도 약화됐을 뿐 아 니라 수입이 줄어 생활이 어려워졌습니다. 성직자들이 누리고 살기 위해 수효가 줄어든 신자들에게 더 많은 헌금과 수입보다 넘치는 십일조를 징수하므로 신자들 이 빈곤해지자 그 모든 어려움이 성직자가 누리고 살기위한 수탈로 빈곤해진 것이 아니라 이단이고 악마 교인 신교에 있다고 설교하며 세뇌시켜 적대감을 품고 신교를 억압하며 탄압한 것입니다. 종교가 갈라져 싸움을 벌이자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 113 -

불구가 됐으며 권력을 행사하던 귀족들은 종교가 내란에 휩 싸여 통치 질서를 유지할 수 없자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에 서 종교의 자유를 평민이 아닌 영주들에게 맡긴다며 화의를 종용하므로 일단락 됐습니다. ( 아우구스부르크의 화의) 농민들의 저항이 병사들의 무력으로 진압 당하자 농민군이 준동하지 않았던 남쪽 바이에른과 중부독일의 헤센 지역 영 주들은 현재의 회사사장들이 사규( 社 規 ) 를 만들듯 자기 영토 안에서 자신이 마음대로 법을 만들어 농민을 억압하는 규칙 을 정하고 과중한 벌금을 징수하며 착취한 행위를 재판농노 제라 합니다. 법이란 모든 사람이 공정하게 지키기 위해 존재하거나 만들 어 지는 것이 아니라 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리 있는 자( 선 출직 국회의원도 당선되면 귀족이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법을 만들지 일반국민이 법을 만들지 못함)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 해관계 있는 대중들을 굴복시키고 착취와 통제를 합리화 하 기위해 만듭니다. 도로교통법 같은 것도 모두가 지켜야 할 질서 규범 같지만 국민의 혈세로 먹고 살면서 법을 집행할 권한 있는 무리들 은 법을 지키지 않을 뿐 아니라 법이라는 핑계로 대중들의 자유를 부정하고 통제하면서 자연스럽게 억압에 순종하도록 길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고 범칙금이라며 수탈을 합리 화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성경을 번역하므로 평등사상을 깨우친 사람 들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누구나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 다고 외치다 토마스 뮌처까지 처형당하고 장 칼뱅이 루터와 츠빙글리의 사상을 요약했다며 그리스도교 강요 (Institutes o f the Christi an Religion)라는 책을 발행하고 두각을 나타내 기 시작합니다. 칼뱅이 예정설과 근면 금욕 그리고 자기직업에 대한 충실을 강조하며 모든 사람들이 소유한 사유재산을 인정해야 한다 고 주장하자 몰락하던 봉건귀족과 노동착취와 양민갈취로 부를 축적한 상공인들은 세금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매매와 이자획득의 자유라며 지지하므로 이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출발했습니다. - 114 -

칼뱅이 구교로부터 상공인신도를 빼앗고 귀족들로부터 억압 받는 상공인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소유한 재산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므로 임금지급이란 명분으로 노동력 을 착취하는 시장자유가 인정되면서 착취와 갈취가 합법화 됩니다. 칼뱅은 국교회에서 행하는 로마가톨릭의 제도 의식( 儀 式 ) 을 배척하면서도 도덕과 주일( 主 日 : 일요일) 의 신성화 그리고 향 락제한을 주창하므로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고 철저하게 종 교를 앞세워 교회가 공중도덕과 위생 및 화재 예방 같은 모 든 문제에 관해 통제하도록 종교법을 강화하고 신권통치를 주장한 것입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학살하고 억압하며 대중들이 종 교를 믿도록 강요하므로 자연스럽게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 고 억압해도 순종하도록 길들이는 제도를 만들고 개인의 재 산을 인정하므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동자를 착취하 고 양민들을 갈취하는 행위, 고리대금을 합리화해 빈부격차 를 당연시 하도록 했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든 규칙과 규정을 인정하는 계층에게는 착취를 보장하고 범죄를 합법화하며 존중했지만 반공법( 국가보안법)처럼 억압과 착취를 거부하고 양심을 쫓는 사람들은 고문하고 학살하므로 진실을 은폐하 는 기구로 종교를 사용한 것입니다. 종교가 말하듯 기도로 모든 것이 이뤄지고 성직이 신의 종 이라면 성직자는 농민이나 어민들이 재배 수확하거나 채취 또는 포획한 음식을 먹지 말고 존재해야 하며 노동자들이 감시와 통제 속에 시간 맞춰 출 퇴근하며 새벽잠 밤잠못자고 지옥 같은 노동으로 생산한 물질을 사용하지 말고 존재해야 합니다. 성직자들이 평등을 주장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물질을 생산 하는 노동은 하지 않고 권위를 내세우며 자녀들을 해외여행 을 보내 호화롭게 살도록 보장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 기 위해 신자들은 결속해야한다며 신자들끼리 상인들의 물 건도 사고팔도록 하고 조직을 폐쇄적으로 통제 관리하면서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 115 -

신을 팔아 누리는 무리들은 신자들이 과학이 부족해 착취당 한다는 사실을 판단할 수 없도록 하느님은 모든 사실을 다 알 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양심에 어긋난 범죄를 저질러도 용서를 구 하고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용서받는다. 고 거짓말하 는 것이며 신자들은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양심에 위안이 돼 종교에 의지합니다. 칼뱅이 제네바에 도입한 교회법으로 4년도 안돼서 58명이 처형되고 76명이 추방됐으며 16세기말까지 대략 150명이 화형 당했는데 춤추는 것이나 카드놀이도 집정관에 의해 처 벌 하므로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거나 또는 신학적으 로 칼뱅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가혹하게 억압했습니 다. 기록에는 예를 들어 한 미용사가 신부의 머리를 단정치 못 한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이틀간의 구류 처분을 받았 고 머리를 만지는데 함께 한 그 어머니는 여자 친구 두 명 과 함께 그 일을 도왔다는 이유로 같은 벌을 받았다 는 기 록이 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을 통제하고 복종시키려고 어떻 게 억압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농민들이 저항할 때 상공인들이 물질을 판매할 권한의 자유 ( 갈취의 자유)를 요구하고 칼뱅이 주장한 재산소유( 생산수단의 소유자유)의 권리를 위해 또 자신들이 몰락한 귀족( 침략학살자 의 후손들)보다 재물이 풍요로움에도 사회적 지휘와 권한이 낮은 것에 반발하니 사회가 혼란스러워집니다. 네덜란드는 중세 이후 모직물공업이 발달해 중계무역을 하 고 광범한 자치권을 행사하며 한창 번창했는데 종교개혁 이 후 북부 여러 주에 칼뱅파( 派 ) 의 신교도가 급증하며 착취와 갈취의 자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1556년에 에스 파냐 왕이 된 펠리페2세는 가톨릭교회 수호자라 칭하며 신 교도들을 탄압했습니다. 도시에 대해 중세( 重 稅 ) 를 부과하고 상업을 제한했으며 자치 권을 박탈하고 본국으로 보내는 공물을 늘리고 자신의 입지 를 굳히기 위해 수탈을 늘리자 1566년부터 북부는 물론 남 부 여러 주에서 가톨릭교를 믿는 시민까지 봉건 귀족이었던 에그몬트백작과 호른백작의 지도 아래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 116 -

1567년 네덜란드총독으로 부임한 알바공은 정예병 1만 명 을 끌고 와 일명 " 혈( 血 ) 의 평의회( 評 議 會 )" 라는 심문소( 審 問 所 )를 개설하고 지도자인 에그몬트와 호른 등을 비롯한 8,000 명 이상을 종교재판( 宗 敎 裁 判 ) 으로 처단하면서 독재공포정치 로 갈취의 자유를 요구하는 프로테스탄트( 신교도)들을 잔악 하게 학살했습니다. 학살에 그친 것이 아니라 알바공은 상류귀족과 부유한 시민 계급의 재산을 몰수하고 무역에 중세를 부과함으로 상업 활 동이 마비되고 매뉴팩처 기능이 정지되므로 실업자가 증가 하자 먹고 살기 위한 일자리와 착취의 자유를 찾아 시민들 은 영국, 독일 등으로 10 만 명 이상이 망명하게 됩니다. 공포정치로 억압하며 수탈하자 1572년부터 에스파냐의 지배 층에게 고이젠( 거지들)이라 불린 신교도( 칼뱅파)를 중심으로 해상에서 에스파냐 은선단( 銀 船 團 ) 을 습격했으며 오라내공 빌렘을 지도자로 선출하고 다수의 귀족과 상 공업자 그리고 농민들이 합세해 독립전쟁으로 발전했습니다. 1576년에는 남북 여러 주가 브뤼셀에 모여 동맹을 맺음으로 독립전쟁이 본격화되지만 종교적으로 분열되고 경제적으로 도 이해관계가 다른 남 북의 불일치( 不 一 致 ) 가 해소되지 않아 대립할 때 새로 부임해 온 총독 파르마공( 公 ) 의 종교 이간책 에 넘어가 1578 년 남부는 에스파냐에 굴복하게 됩니다. 홀란드 등 북부 7주는 1579년 위트레흐트동맹을 결성하고 항전하면서 1581년 7월 독립을 선언했으며 윌리엄을 초대 총독으로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임을 선포하고 자체적으로 제 도와 체제를 만들어 공물의 상납을 거부하며 스스로 자치국 권한을 행사하던 중 1584년 윌리엄이 로마가톨릭교도에게 암살당합니다. 1588년 에스파냐 무적함대가 격파되고 오랜 전쟁과 내전으 로 재정적으로 궁핍했는데 펠리페2 세가 사망하자(1598) 펠리 페 3세가 즉위하면서 1609년에 에스파냐와 12년간의 휴전 조약( 休 戰 條 約 ) 을 체결했으며 휴전이 만료돼 계속 전쟁을 벌 이다가 1648 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에스파냐속령( 屬 領 ) 이던 네덜란드는 독립국이 됐습니다. 종교전쟁과 청교도 혁명 - 117 -

종교가 기득권이 되기 위해 분열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땀을 착취하거나 양민갈취가 합법화되면서 부를 축적한 상공인들 은 늘어났지만 귀족들의 권위는 무너져 재물을 늘릴 수 없 으니 구교와 신교 간에 30 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전쟁[ 三 十 年 戰 爭, Thirty Years' War] 을 일으킵니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구교( 로마가톨릭)를 믿었는데 30년 전 쟁의 발단은 남부를 중심으로 구교를 부정하며 루터와 칼뱅 의 사상을 받아들여 개신교를 만들고 노동자와 양민을 갈취 해서 부를 축적하며 누리고 사는 사람들을 위그노(Huguenot) 라 불렀는데 이들을 구교가 학살해서 벌어진 것이 위그노전 쟁입니다. 1562년 구교를 믿는 기즈 공작이 예배 올리던 신교도들을 기습 공격해 시작된 전쟁은 3차전 후 합의를 이뤘지만 귀족 들과 구교는 신교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1572년 8월 24일 성바르톨로메오(St. Bartholomew) 의 축제일( 카트린의 딸과 나 바르 왕의 결혼식)에 참석한 신교신자들을 기즈 공작이 대량 학살(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하자 격분한 신교도들이 전국에서 일어났습니다. 신교도들을 학살해서 벌어진 위그노 전쟁은 36년이라는 오 랜 기간 동안 종교 간 기득권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피 를 흘렸고 내전으로 번져 통치가 불가능 해지자 국왕으로 등극한 앙리4세가 화해시키기 위해 1592년 가톨릭으로 개 종하고 1598 년 낭트칙령(The Edict of Nantes)을 발표함으로 일단락됐습니다. 낭트칙령의 주된 내용은 1. 로마가톨릭 이외의 믿음을 탄압한다 는 조항 삭제, 2. 개신교의 예배는 기정사실로 인정된 지역에서 허 용하고 파리시에서는 금한다. 3. 개신교신자의 재산상속, 대학교입 학, 관리취임을 허용, 4. 개신교신자가 장악한 요새를 종교의 자유 를 위한 안전지대로 인정. 5. 파리 고등법원 내에 개신교와 로마가 톨릭간의 분쟁기구 설치( 개신교 6 명, 로마 가톨릭 10 명) 지방고등 법원에서의 분쟁기구는 개신교와 로마가톨릭의 수를 같게 함. 등 으로 구교에 유리한 내용입니다. 성직자들의 기득권과 신자간의 이권 때문에 발생한 종교분 쟁은 화의나 칙령을 발표한다고 근본적인 원인인 구교 성직 자들과 신도들의 생활이 나아지지 않으므로 항상 불씨를 안 - 118 -

고 있었고 권력을 차지한 왕들이 신교를 믿느냐 구교를 믿 느냐에 따라 또한 재물을 축적할 욕망에 따라 재현될 수밖 에 없었습니다. 1617년 가톨릭교도인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왕위에 올라 구 교의 절대 신앙을 강요하자 1618 1620년 독일의 신교( 프로 테스탄트)와 구교( 가톨릭) 제후( 諸 侯 ) 들이 각기 신교연합과 로 마가톨릭교연맹을 결성해 대립할 때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 개신교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또다시 30년 종교전쟁이 시작됩니다. 1619년 페르디난트2세가 황제가 되자 보헤미아 인들은 팔 츠선제후( 選 帝 侯 ) 프리드리히5세를 국왕으로 추대하고 대항 하므로 전쟁이 발생했는데 1620년 바이서베르크 싸움에서 패배한 프리드리히5세가 네덜란드로 망명하자 보헤미아 인 들로 구성된 신교도들을 극심하게 탄압했습니다. 권력과 구교들의 탄압에 견디지 못한 청교도들은 아메리카 버지니아(' 처녀' 라는 뜻) 에 가면 농토가 풍부하고 자신이 하 루 종일 걸어 다니며 표시한 만큼 엄청나게 넓은 땅을 차지 할 수 있다고 꼬드기는 말에 1620년 102 명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도착하면서 미국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 땅은 버지니아도 아니고 엘리자베스1세 때 영국이 식민 지로 삼아 1585년에 남자 89명과 여자 17명을 버지니아지 방에 데려가 살게 하면서 점령했던 것인데 1589년에 영국배 가 다시 찾아가니 왕실에서 보냈던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 단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원주민만 있었습니다. 영국왕실로는 엄청나게 넓은 영지가 있음에도 아무도 머나 먼 땅에는 가려하지 않아 공물을 받지 못했는데 구교가 신 교를 억압하고 왕실도 구교방식으로 통치하며 대중들을 억 압해야 쉽게 수탈하고 부를 축적할 수 있으므로 신교도들을 추방도 하며 식민지로 삼을 욕심에 퍼트린 말에 신교도들이 현혹된 것입니다. 처음 청교도들이 미국 땅에 도착했을 때는 엄청나게 넓은 대지에 원주민들은 사냥과 유랑생활을 하며 평화롭게 살았 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곳 인줄 알고 자신이 경작하지 못할 정도로 넓은 땅들을 차지했지만 돌아온 원주민들은 자신의 - 119 -

영토에 이방인들이 침입한 것을 보고 쫓아내려 했습니다. 자기영토라지만 나무창과 나무활로 무장한 원주민부족이 언 어도 통하지 않고 화력( 총)으로 무장한 이주민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부족이 멸종하게 되면서 초기 청교도들이 정착하자 이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농사지을 농장과 목장을 만들기 위해 많은 땅을 차지하며 원주민 여러 부족과 전쟁을 벌입 니다. 자신이나 가족의 힘으로 경작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땅을 차지한 청교도들은 원주민을 사냥해 노예로 삼기 시작했으 며 자유롭게 살다 붙잡혀온 원주민들이 혹독한 노동에 시달 리다 도망가자 이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발목과 목에 쇠사슬 을 묶어 목화밭과 옥수수 또는 밀밭에서 강제노동을 시키며 부를 축적했습니다. 당시는 직물산업이 발달하던 시기라 많은 사람들이 옷감을 만들 수 있는 목화를 재배했으며 다른 농사도 마찬가지지만 기계가 발달되지 못했던 시절엔 목화와 사탕수수를 재배하 는 것은 사람의 손이 절대적으로 많이 필요한 작업이고 식 물의 표면이 거칠어 잘못 스치기만 해도 상처가 생기는 매 우 험한 작업입니다.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4세는 독일영토를 노리다 신교와 구교 간의 전쟁을 빌미로 영국과 네덜란드로부터 군자금을 얻어 1625년 독일을 침공했다가 황제 군에게 패배하고 1629년 뤼베크조약으로 화해했으며 황제가 배상령( 賠 償 令 ) 으로 종교 제후( 宗 敎 諸 侯 ) 의 영지( 領 地 ) 를 회복시키자 신교를 인정한다고 선포하게 됩니다. 구교를 옹호한다는 명분으로 스웨덴 왕 구스타브2세가 프랑 스의 후원으로 독일을 침공해 라이프치히전투에서 황제 군 을 격파했으나 1632년 뤼첸전투에서 패배했으며 계속 패배 를 거듭하던 스웨덴 군은 1634년 황제군 사령관 발렌슈타인 이 암살되자 1635년 황제와 그리스도교군의 작센선제후는 프라하에서 화의를 맺습니다. 독일영토를 탐낸 프랑스가 1635년 스웨덴과 연합하고 독일 과 에스파냐에 선전포고하며 전쟁에 참여하자 황제 페르디 난트3세는 제후들과의 오랜 내전으로 전세가 불리해 1641-120 -

년 종전을 제의했고 1644년부터 시작된 강화회의는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이 성립되면서 독일인구 1/3을 죽음으로 몰 고 간 30 년간의 종교전쟁이 끝납니다.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스위스와 네덜란드는 독립국이 됐으며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차지했고 확장된 영토를 배경으로 제후국이 된 프로이센은 18세기 초에 왕국이 됐으며 브레멘 과 베르뎅은 스웨덴이 점령했고 프랑스와 스웨덴은 독일제 국의회에 선거권을 가지므로 독일의 내정을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집니다. 연방군주와 성직자들이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해 3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종교전쟁이 막을 내리므로 독일 제 후국 내의 루터파와 칼뱅파는 구교와 같은 동등한 지위를 획득했지만 전비를 부담하느라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했으며 특히 노동자들의 노동착취는 극에 달했습니다. 임금을 지급한다지만 전시라는 핑계로 상공인들은 노동현장 에 명령체계를 갖추고 식사 값도 되지 않는 저임금을 지불 하면서 강압적으로 하루 종일 생산노동을 강요했으며 노동 자들은 힘든 노동을 하면서 휴식과 수면도 취할 수 없는 환 경에서 생산하다 죽어갔습니다. 반항할 힘과 판단력이 없다는 이유로 어린아이들을 노동현 장에 선호했는데 넓은 굴을 팔 수 없는 광산에선 체구가 작 은 어린아이들을 광부로 채용해 혹독하고 위험한 생산을 강 요했으며 여성들의 세심한 노동을 요구하는 방직공장은 어 린소녀들을 고용해 하루 15 시간 이상씩 노동시킨 것입니다. 러시아에서는 1662년 억압과 착취를 거부하고 자유와 평등 을 주장하며 모스크바 민중반란이 발생했다 진압됐으며 177 0년대의 스텐카 라진 대반란을 일으키며 절대왕정을 부정했 지만 실패하므로 차리즘(Tsarism)이 강화되고 전국회의( 全 國 會 議, Zemc kii Sobor, 젬스키 소보르) 가 소멸하면서 중앙 행정 기구가 재편성됩니다. 독일과 유럽이 종교전쟁으로 분열하고 있을 때 영국에서도 신구교간의 분쟁이 일어났는데 찰스1세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의회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세금을 징수하면서 폭정을 정당화하고 반발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구교로 복귀하며 신 - 121 -

교도인 청교도들을 탄압하자 결국 청교도혁명(1642년- 1653 년)이 일어났습니다. 찰스1세는 황태자시절에 에스파냐공주에게 청혼했다 퇴자를 맞자 앙심을 품고 에스파냐를 정복하려 했으며 전쟁을 벌이 기 위한 군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걷으려고 의회를 소집했지만 의회가 찰스1세의 제의를 거부하자 의회를 해산 했다 1628년에 3 차로 회의를 소집합니다. 3차로 의회가 열리자 하원의원 에드워드코크는 권리청원( 의 회 동의 없이는 세금을 걷지 못하며, 법에 의하지 않고는 누구도 구속할 수 없다. 는 것으로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내용)을 제출 했고 돈이 급했던 찰스1세는 권리청원에 서명을 하고 돈만 챙긴 다음 의회를 또 해산 시켜버리는 폭정을 저질러 왕당 파와 의회파가 대립했는데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가 승리 하게 됩니다. 왕당파들은 왕권을 강화하고 왕이 절대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케임브리지를 중심으로 하는 국왕파고 의회 파는 런던과 옥스퍼드를 중심으로 권력은 선출자의 뜻에 따라 의 회를 중심으로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의회파가 권리 청원을 제출하자 찰스1세는 병사들의 무력으로 의회 파를 없애려고 군대를 모았습니다. 의회 파는 5만 명에 달하는 철기 군을 조직하고 대항하므로 왕당파가 패했으며 승리한 의회파가 찰스1세를 처형하고 입 헌군주제를 실시하려고 했지만 젠트리 출신 신교도 크롬웰 은 스스로 호국경이라고 칭하고 종교적으로 국민을 통제하 기위해 풍기단속법을 만들어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고 도박 을 금했습니다. 또한 일요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며 극장을 없애버리는 등 금욕적으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독재정치를 실시해 국민 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다가 죽자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시 민들이 그의 목을 치고 1688년 다시 권리장전( 인권선언)을 제출해 의회가 승인하고 입헌군주제를 실시하니 이를 명예 혁명이라 합니다. 1689년에 의회를 통과한 인권선언의 내용은 [1. 의회의 동의 를 거치지 않고 법률의 적용, 면제, 집행, 정지를 금지한다. 2. 의 - 122 -

회의 동의 없는 과세, 평시의 상비군을 금지한다. 3. 선거의 자유, 의회 발언의 자유, 국민청원권을 보장한다. 4. 의회를 소집한다. 5. 국민의 청원권, 의회의원의 면책특권, 신체의 자유에 관한 제반규 정 6. 왕위계승자에서 로마가톨릭 교도를 배제한다.] 라고 명시됐 습니다. 크롬웰이 죽고 찰스2세가 즉위하자 영국국민들은 입헌군주 제의 실현을 갈망했으나 왕당파가 다시 세력을 구축하기 시 작하고 새로운 선거에서 당선된 의원들은 거의 왕당파가 독 차지하므로 기사당의회가 됐고 찰스2세는 이를 배경으로 철 저한 전제 정치를 펼쳐 구교와 절대군주제에 위협이 되는 청교도들을 억압합니다. 1670년 프랑스의 루이14세에게서 20만 파운드의 연금을 받 고 반란이 일어나면 영국과 군사적으로 원조한다는 밀약을 맺으며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에스파냐 및 네덜란드에 대한 전쟁에 협력할 것을 약속하며 로마가톨릭세력을 복귀시키자 신흥지주들의 힘이 약화됐고 기사당의회도 불안해하며 반발 세력이 생깁니다. 젠트리(Gentry)는 영국에서 귀족의 지위는 없으나 가문의 휘 장을 사용할 수 있고 요먼 이상 귀족이하의 토지소유자를 뜻하는 말로 부유한 지주와 법률가 성직자 등 전문적인 직 업을 가진 사람 및 부유한 상인 등을 핵심으로 이루었던 계 급으로 후일 신사를 뜻하는 영단어인 젠틀맨(Gentleman)은 여기서 유래됩니다. 식량생산의 대량화 청교도들이 바다를 건너가 원주민들을 붙잡아 노예로 부리 며 부를 축적할 때 영국에서는 런던 대흑사병(1665년 1666 년)이 발생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으며 흑사병으 로 농노와 노동자들이 죽어 생산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없자 노동자와 농민들의 지위가 상승하게 됩니다. 성직자와 상인 그리고 귀족과 예술인들은 생산노동은 감시 와 통제 지시를 받는 노예들이나 하는 비천한 행위라고 거부 해서 흑사병으로 많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사망하니 먹을 것 과 사용할 수 있는 물질이 부족해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가 하던 혹독한 억압과 차별을 금지하고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 - 123 -

켜야 했습니다. 흑사병의 원인균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는 토양 속에 서식 하며 간혹 설치류와 인간의 체내에 들어와 병을 일으키는데 미셀 드란코르가 정립한 바에 의하면 야생화 된 개를 대상 으로 한 연구에서 개들은 벼룩에 의해 감염되거나 썩은 시 체를 먹은 개의 피를 벼룩이 빨고 설치류나 인간에게 전파 하면 흑사병이 발병된다고 합니다. 농민의 감소는 농사방법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오는데 지 력( 地 力 ) 의 쇠퇴와 토지노화를 방지한다며 권력이 경지이용 을 제약해 생산성은 낮추고 농업발전을 방해하면서 강제로 시행하던 휴한제( 休 閑 制 ) 를 폐지해서 경작면적이 늘어났고 순무와 클로버 같은 사료작물을 윤작하므로 가축들의 겨울 사료가 확보됩니다. 목초를 재배하며 가축사료가 늘어나 가축의 증대를 가져왔 고 토양의 지력을 위해 비료가 사용되면서 곡물생산이 늘어 났으며 곡물생산을 늘리기 위해 우마( 牛 馬 ) 가 끄는 목재쟁기 로 10Cm 정도깊이로 논밭을 뒤엎던 것을 철재쟁기가 개발 되면서 더 깊게 갈 수 있고 뒤집게 되므로 식량생산이 늘었 습니다. 후일 손으로 파종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1730년대 J. 털(Jethr o Tull)에 의해 조잡한 파종기가 출현함( 直 線 條 播 法 ) 으로 경작 용( 쟁기, 가래), 곡물수확용( 낫, 기계), 곡물처리용( 탈곡기)등 용 도별로 농기계를 만드는 기계공업이 시작됐으며 1785년 쿡 이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파종기를 발명했습니다. 식량난이 해소돼 사람들의 생활이 나아져야 하는데 귀족인 영주들과 상공인들의 수탈과 착취로 빈부격차가 극심해 대 중들의 원성이 높으니 영국국왕인 월리엄 3세는 전쟁을 빌 미로 절대군주제로 회귀해서 왕권을 강화하고 국민을 무력 으로 짓밟으며 억압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전쟁비용을 만들 려 혈안이 됩니다. 독재를 강화하고 땅을 뺏어 부를 축적하며 국민을 억압할 핑계로 벌이는 전쟁비용과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1694년 잉글랜드은행을 설립했으며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에 의해 인쇄술은 발전했어도 동력이 개발되지 못했기 때문에 - 124 -

사람들이 수동으로 화폐를 찍어내는 노동자가 생겨났습니다. 인간은 혼자의 노동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질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힘든 노 동으로 생산한 물질을 필요한 물건과 물물교환을 하며 어울 려 살았으나 화폐를 사용하면서 시장이 형성되고 생산노동 을 하지 않고 화폐만 취급하며 살아가는 부류가 나타납니다. 아무린 물질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화폐만 관리하며 빌려주 고 이자라며 착취하는 은행원들이 생겨났고 화폐가 경제인 양 왜곡되면서 생산노동자들의 노동력과 물질을 합법적으로 착취 수탈할 수 있으면서 각종 고리대금업이 기승을 부립니 다. 화폐를 유통시키는 시장이 형성되자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 노동자 농민 어민이 땀 흘려 생산한 물질에 가격을 올려 판매 해 먹고사는 상인계층이 늘어나 이들까지 먹여 살리려니 생 산에 종사하는 인민들은 삶은 더욱 황폐하고 혹독해집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해 누구나 자신이 자유롭게 판단하고 선택할 권리가 있음에도 부모가 어떤 위치에서 얼 마만큼의 부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태어날 때부터 교육을 받을 권리도 박탈당하고 선택할 직업도 한정됩니다. 성직자와 귀족 그리고 정치인과 관료들의 먹을 것과 사용할 물질까지 생산하던 노동자 농민 어민들이 화폐만 취급하는 금 융업 종사자들과 물질을 판매하면서 먹고사는 상인들까지 먹고 사용할 물질을 생산해야 하기 때문에 죽도록 노동하지 만 생활은 궁핍해지는 것입니다. 착취와 갈취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 하거나 다중들을 갈취해 풍족해지지만 생산노동을 하면서도 안정적인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아 수입이 없는 다수가 늘어 나 소비가 되지 않는 현상을 공황이라 합니다. 공황의 근본 원인은 모두에게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하고 노 동한 만큼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아 빈부격차가 발생하면서 대다수인 인민들이 수입이 없어 물질을 구입하지 못하므로 상인들은 상품을 팔지 못해 폐업하고 남은 상인들은 조금 팔아서라도 생존해야 하기 때문에 물가가 폭등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 125 -

기득권들은 시장이 멈추면 마음대로 화폐를 찍어 공사판을 늘리고 복지라며 나눠주고 소비를 부추기지만 고정적인 수 입이 보장되지 않는 다수는 앞으로 굶주릴 것이 두려워 저 축하기 때문에 경제( 소비)는 살아나지 못하고 가치 없는 화 폐가 넘쳐 인플레이션만 강화됩니다. 분배불균등 때문에 발생되는 공황을 해소하려면 공정한 분 배체제를 만들어야 하는데 온갖 비양심적인 악행으로 부를 축적하고 기득권이 된 무리들은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며 언 제든지 저희들끼리 뭉쳐 권력을 찬탈하기 때문에 기득권을 지키고 부를 보장해주기 위해 전쟁도 불사합니다. 선량한 다수 인민들은 억압 착취 학살당해도 권력을 노리지 않지만 추악한 기득권들은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기 때문에 수많은 인민들이야 죽건 말건 전쟁으로 인민을 억압하며 생 산된 물질과 공장을 때려 부수고 건설하는 재건과정으로 일 자리와 임금을 보장해서 다중의 불만을 달래는 방법으로 기 득권을 보호해줍니다.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War of the League of Augsburg)혹 은 팔츠 계승전쟁(War of the Palatine Succession)은 1688-9 7 년까지 있었던 전쟁으로 잉글랜드 계승전쟁(War of the Eng lish Succession)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프랑스의 루이14세 가 1685 년 낭트칙령(Edict of Nantes)을 폐기하면서 주변국과 공국들이 연합했습니다. 낭트칙령을 폐기하자 남 서 프랑스에 살던 신교도 약 100만 이 동요를 일으키며 반발했고 생산노동은 하지 않고 재산을 모아 중산층으로 살던 약 40 만 명의 상인 기사 공예인 군인 등이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등으로 망명하므로 프랑스로서 는 그 만큼의 부가 빠져나가는 손실이 발생합니다. 노동자와 농 어민이 땀 흘린 노동으로 생산한 물질로 형성된 재화들이 프랑스를 빠져나간다고 귀족들 생활에 영향을 미 치는 것도 아니며 전쟁을 일으켜 전장에 참여한 수많은 병 사들이 죽는다고 귀족들의 삶에 어떤 손해도 없고 오히려 전쟁을 핑계로 강제적으로 국민들을 억압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기 때문에 서로가 존중해야 평화로운 세상이 되는데 타인을 학살하고 재물을 강탈했으며 타인의 - 126 -

재능을 훔치고 지시하고 통제하며 착취해 부를 축적한 사람 들과 그 후손들이 권력을 차지하고 인류를 학살하는 전쟁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지금까지 권력을 누리고 있습니 다.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며 저항하면 할수록 착취하고 억압하는 무리들이 소멸되지만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저항하지 않고 복종하면 할 수록 복종하는 사람들 때문에 함께 살아가면서 저항하는 사 람들까지 통제와 감시 속에 고통 받으며 살게 되는 것입니 다. 루이14 세는 알사스 북부 팔츠지방 공가( 公 家 ) 가 권력을 이을 남계( 男 系 ) 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동생 오를레앙공( 公 ) 의 부 인( 妃 ) 이 팔츠가( 家 ) 출신임을 이유로 영토를 요구했고 독일 황제와 바이에른 작센선제후 그리고 에스파냐 네덜란드 스웨 덴 왕들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독주 를 견제할 준비를 합니다. 전쟁은 프랑스의 팔츠침공으로 개시되는데 전투는 유럽에서 뿐 아니라 아메리카 식민지로도 확대됐으며 루이( 태양왕)의 야망을 막기 위한 동맹은 잉글랜드-네덜란드 총독-왕 윌리 엄3 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1 세, 스페인의 카를로스 2 세, 사보이 공국의 빅토르 아마데우스 등 전 유럽이 연합 하도록 했습니다. 프랑스의 루이는 전쟁을 치르는 병사들은 돈으로 움직이는 용병을 사용하기 때문에 지나친 군사비 지출로 1696년 프랑 스 국민들을 경제적 위기로 빠트렸으며 전쟁에 참여한 모든 국가들이 생산 장비가 파괴되고 농지가 황폐화 되면서 국가 들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1696년 사보이가 동맹에서 이탈합 니다. 사보이공국이 동맹에서 이탈하면서 동맹군이 약화되자 모든 동맹국들은 재빨리 협상을 맺어 안정을 취하고자 1697년 9 월 레이스웨이크에서 조약을 맺고 서명하므로 전쟁참가 국 들은 어떤 성과도 없이 수많은 병사들을 동원해 민간인과 병사들을 학살하던 9년 전쟁은 끝났지만 노동자들과 농민들 의 삶은 피폐해 졌습니다. - 127 -

병사들은 침략한 지역의 사람들을 학살하고 재물은 강탈할 수 있었지만 자신들이 사용하는 총과 총알, 군복과 전쟁 중 먹는 모든 물질들은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어민들이 땀 흘 린 노동으로 수확하거나 채취 또는 생산한 것으로 과학적인 생산력이 발전하지 못한 시기 수공업노동은 말로 할 수 없 이 혹독했습니다. 노동자 농민 어민들은 병사들뿐 아니라 상인 성직자 귀족 정치 인 법관 공무원 교육자 의사 음악 미술가 예술가와 도박사 강 절 도범 거리의 룸펜과 거지 등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 한 먹을 것과 사용할 물질을 생산해야 하기 때문에 가혹했 지만 상공인들은 노동자들이 생산한 전쟁 물자를 판매해 더 욱 많은 부를 축적합니다. 노동을 업신여기며 기피하는 계층 때문에 노동자들은 더욱 혹독하게 노동력을 착취당했는데 어민들이 사용하는 어망과 그물 그리고 어선 등 모든 어구들을 노동자들이 만들어야 했고 농민들이 사용하는 쟁기와 낫 파종기 등 모든 농기구 를 생산하면서도 노동자는 겨우 끼니를 이어갈 뿐 부를 축 적할 수 없습니다. 귀족들이 권력을 늘리려 인류를 학살하는 전쟁이 한창일 때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망명했던 물리학자 드니 파펭은 1695 년에 증기압축으로 실린더가 작동되는 엔진을 만드는 실험 에는 성공했지만 세상을 떠나고 토머스 세이버리가 1698년 세이버리기관을 발명하고 국왕 앞에서 실험에 성공하며 특 허를 받았습니다. 그 후 영국의 발명가이자 기업가인 토머스 뉴커먼은 파펭이 나 세이버리보다 개선된 방식인 증기에 냉수를 부어 식히면 서 증기가 액화돼 생기는 진공 감압으로 피스톤을 움직이게 하는 배수용 증기기관을 제작해 1712년부터 콘월의 구리광 산에서 분출되는 지하수를 배출하는 펌프로 사용했습니다. 영국에서는 방적기계 직물기계 등이 급속히 발달하며 공업 이 활성화 됐으며 1764년 글래스고 대학수리소에서 일하던 와트는 뉴커먼기관의 수리요청을 받고 개량에 착수해 1769 년 1월 5 일 화력기관에서 증기와 연료의 소모를 줄이는 새 롭게 고안한 방법 이란 특허를 취득하고 비약적인 산업기계 발전을 가져옵니다. - 128 -

평등사상의 발전 1737년 독일지방에 괴팅겐대학이 설립되면서 종교가 일방적 으로 복종과 순종만 강요하며 창조론이라는 허상만 가르치 던 관념적 종교교육에서 벗어나 과학이 연구되고 임마누엘, 칸트와 헤르더 등이 활약하면서 질풍노도의 시대(Sturmund Drang) 라는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 며 대중의 의식이 발전합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대중들의 정신을 깨우는 철학도 함께 발 전하는데 1754 년 장자크 루소는 디종 학술원에서 무엇이 인간 불평등의 근원인가 라는 서문을 학술연구 공모전에 제 출해 소유권 제도와 사회조직의 발전으로 생긴 불평등과 비 참함 그리고 자연 상태의 행복과 평등을 분석한 글을 발표 합니다. 1755년 계몽기에 주장했던 내용은 학문적 가치보다 혁명원 리[ 인간 불평등 기원론]로 자연 상태나 사회계약을 역사적 사 실로 인정했으며 1762년에 저술한[ 사회계약론]에서 자유와 평등은 자연권으로 국가가 제약하면 사회계약에 의해 국가 행위는 제한될 수 있으며 권력은 주권을 보장하면서 집행돼 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권력행사가 정당화되기 위한 조건으로 국민의 전체 의사와 상위한 항상 정당한 일반 의사에 따라 집행하되 그것은 집 행 후라도 다수결( 多 數 決 ) 에 의해 반드시 확인돼야 한다는 다수결 민주주의 원리를 주장하므로 권력집행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면서 인간평등과 자유를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자연종교이론과 그 폐해가 발 생되는 원인을 분석해 발표하자 가톨릭교회는 성직자를 공 격한다는 이유로 체포 장을 발부하므로 1762년 스위스로 도 피했다가 1770년 파리로 돌아와 1772년부터 1776년까지[ 루 소가 장 자크를 판단한다.]외의 글을 발표하면서 대중의 자유 주의정신을 일깨웁니다. 루소는 모든 사회악과 사회갈등의 근원이 경제 불평등 에 있 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문명이 발달하고 지배와 피지배가 강 화될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사회문제가 만연해지는 것을 보고 이를 일반의지론 으로 풀었으며 사상 최초로 인간평등 - 129 -

문제를 실천적으로 파고들어 해석하면서 철저하게 자유와 평등을 주장했습니다. 모든 종교, 이슬람교는 카스트, 그리스도교는 부활과 가족, 불교는 윤회를 주장하며 설파하는 것은 왕권과 기득권이 혈 통으로 세습되고 대물림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드리도록 강요하며 무력을 사용해 다중을 억압하고 갈취해 권력을 행 사하는 무리들을 보호하기 위해 부활과 상속을 강조하며 보 복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가족과 혈육( 혈통)의 강조는 상속( 세습)을 뜻하므로 신분세습 을 세뇌하는 것이며 부활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약자의 재물을 강탈해 누리고 사는 무리들이 다중을 억압하고 갈취 하는 행위를 자신이 죽임을 당해도 부활해 보복한다거나 자 손이 보복한다고 강조하므로 저항하지 못하게 억압하는 수 단입니다. 혈통주의는 제3신분 사람들이 관직이나 기사계급으로 진입 할 수 없게 족쇄로 작용했으며 혈통을 중시하는 상속제도는 같은 혈육끼리도 적자( 赤 子 ) 와 서자( 庶 子 ) 라는 신분상 차별을 둬 조선시대에 유명한 홍길동전에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다. 라고 표현했듯 평등을 부정합니다. 루소는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므로 자손이 생 존방식을 자연에서 성장하며 집단에서 습득하고 배워야 함 에도 부모가 양육하며 자손의 행동과 사상을 강요하는 것은 부모라는 핑계로 혈육의 삶을 통제하는 것으로 평등과 존중 을 부정하는 행위라며 자연으로 돌아가라 는 명언을 남깁니 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사회 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 고 주장하므로 문명사회의 부조 리와 모순을 밝혔으며 자연은 인간을 선량 자유 행복하게 만들었는데 사회가 인간을 사악 노예 불행으로 몰아넣었다 라며 억압을 벗어난 인간 평등과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건설 을 강조했습니다. 자연(natura) 은 서구어로 본성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인 간의 천부적 자연권인 자유와 평등의 보장을 주장했으며 루 - 130 -

소는 문명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자연을 강조하므로 자연의 낭만성과 야성이 아닌 원시공산사회의 평화롭고 자유로우며 평등한 사회의 원형으로 돌아갈 것을 다중에게 설명했다고 봅니다. 9년 전쟁이 종전되고 3년만인 1700년 러시아는 표트르대제 가 즉위하면서 이전에 상실한 영토를 회복하고 발트 해 지 방을 탈환하겠다면서 덴마크와 작센을 연합국으로 북방동맹 을 맺고 스웨덴을 침공했으나 덴마크와 작센 군이 각개 격 파당하고 각각 패배하여 대북방전쟁의 1 차전이 끝납니다. 스웨덴은 1560년부터 1658 년까지 핀란드만( 灣 ) 을 중심으로 카렐리아(Karelia), 잉그리아(Ingria), 에스토니아(EstonIa), 리 보니아를 통일했으며 30년 전쟁 중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 공해 외레순 해협(1645년과 1658 년 점령)의 북부와 독일의 포 메라니아 서부 비스마르(Wismar), 브레멘공국과 베르덴(Verd en)을 점령하고 국가가 됐습니다. 외레순 해협은 덴마크의 셸란섬과 스웨덴의 스코네반도 사 이에 있는 해협으로 현재 덴마크와 스웨덴을 오갈 수 있는 철로와 다리가 놓여 가장 붐비는 뱃길로 1859년까지 덴마크 가 양쪽 해안을 장악하고 해협을 지나는 모든 선박들로부터 해협세( 海 峽 稅 : 통행료) 를 징수했으며 바이킹시대에는 북유럽 국가들 사이의 해전무대였습니다. 연속적으로 패하던 러시아는 1709년에 잉글랜드(1707년에 영국), 하노버, 네덜란드, 프로이센, 폴란드- 리투아니아(1701 년-1706 년, 1709 년까지)와 동맹을 맺었으며 스웨덴은 폴란드 -리투아니아(1704년-1709 년)와 오스만제국 그리고 우크라이 나가 동맹을 맺고 전쟁을 한 것입니다. ( 전쟁이 길어져 동맹국 가가 바뀌기도 함.) 인력과 물자가 부족해 21년이라는 장기간의 전쟁을 수행하 면서 병사( 용병 외인부대) 들의 봉급과 전쟁 물자를 국가재정으 로 지불할 수 없게 된 스웨덴이 결국 패배하므로 뉘스타드 조약과 스톡홀름조약으로 1721년 종결되면서 러시아는 발트 해의 지배자가 되고 유럽에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게 됐습 니다. 이 전쟁으로 약 10만 명에 달하는 각국의 무고한 양민들이 - 131 -

기아와 질병 그리고 전쟁의 포화로 사망했으며 스웨덴병사 약 25,000명과 시민 등 175,000명이 전쟁으로 전사하고 러 시아군은 약 75,000 명, 폴란드군은 14,000-20,000 명, 작센 군은 약 8,000명 덴마크군 약 60,000명이 학살당한 것입니 다. 러시아와 스웨덴이 발트 해를 놓고 전쟁을 하는 사이 어릴 적부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약해 후계자가 없을 것이 라 우려했던 스페인의 카를로스2세가 1700년 사망하면서 그의 모든 영토와 권한을 루이14세 손자 앙주공작에게 승계 되면서 필리프는 스페인의 펠리페5 세(Philip V of Spain)왕이 됩니다. 그러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1 세(Leopold I of Habsbu rg)는 스페인왕위는 합스부르크가문의 권리라며 계승권을 주 장해서 전쟁이 벌어졌는데 루이14세가 공세를 강화하자 다 른 유럽국가( 영국 주도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공화국)들이 프랑 스의 영토 확장을 제어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 측에 가담했 습니다. 혈육으로 보면 루이14 세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앤(Anne of A ustria)이 카를로스2세의 선왕 펠리페4세 딸이며 루이14세의 아내 마리아 테레사와 카를로스2세는 사촌이므로 카를로스2 세의 이복누나인 스페인공주 마리아 테레사(Maria Theresa)의 유일한 아들인 프랑스왕세자 루이(Louis, le Grand Dauphin) 가 됩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조의 레오 폴트1세는 스페인왕의 사촌으로 그의 어머니는 펠리페4세의 다른 여자형제이며 카를로스2세의 아버지 펠리페4세는 왕명 으로 자신에게 오스트리아계승권을 물려줬던 적이 있어서 자신에게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앙주가 죽으면 스페인영토를 프랑스왕세자가 계승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주변 유럽국들은 프랑스가 강대국이 돼 자 신들을 침략하면 영토를 지킬 수 없다는 위기감과 전쟁에 참여하면 새로운 영토를 확보할 수도 있다는 기대로 프랑스 와 스페인에 대항하는 연합군을 결성하고 전쟁에 참여한 것 이 스페인왕위계승전쟁입니다. - 132 -

같은 시기에 앤여왕전쟁과 동시에 벌어져 유럽뿐 아니라 영 국식민지주민, 프랑스식민지주민(corsairs)과 스페인령인 남 미북안(Spanish Main)에 거점을 둔 사략선, 해적선과 싸웠으 며 북아메리카까지 번져 약 400,000명에 달하는 사람들과 병사들이 사망하고 1713년 위트레흐트조약체결로 끝났습니 다. 처음 조약은 프랑스와 스페인왕위가 한 사람( 가문)에게 물려 지지 않도록 보장하자는 내용이 있어 1712년 7월 10일까지 체결되지 않다가 펠리페5세가 스페인과 프랑스의 왕위가 한 사람에게 양위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합의하므로 영국과 프 랑스가 휴전에 동의하면서 1713년 4월 11 일 체결됩니다. 이 전쟁 결과로 루이14세의 손자 앙주는 펠리페5세로 스페 인왕으로 인정되고 필립과 그 후손인 베리공작( 루이14세의 가장 어린손자)과 오를레앙공작( 루이14 세 조카)은 같은 프랑스 공작들에게까지 프랑스의 왕위계승권을 포기하도록 강요받 고 스페인의 왕권에 대한 주장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스페인영토인 시칠리아 섬과 밀라노공국일부는 사보이아에 양도하며 신성로마제국황제이자 오스트리아대공인 카를6세 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나폴리왕국, 사르데냐 그리고 밀라 노공국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있는 아마존과 오야포크(Oyapock)강 사이에 있는 영토의 영유권 을 인정받았습니다. 스페인은 지브롤터와 미노르카 그리고 세인트키츠 섬의 거 의 대부분 지역과 이익이 많이 낫던 노예무역계약독점권인 아시엔토를 그레이트브리튼에 빼앗겼으며 프랑스는 북아메 리카에 있던 루퍼츠랜드와 아카디아, 뉴펀들랜드에 대한 권 한을 영국에 양도하게 된 것입니다. 프랑스는 이때 이로쿼이족에 대한 그레이트브리튼 종주권과 먼 지역 인디언에게 그 어떤 나라와도 무역할 수 있도록 인 정하므로 일레생장( 현재 프린스에드워드 섬)과 후일 루이스버 그 요새가 세워지게 되는 일레 로얄레( 현재 카페브레톤 섬)를 포함한 북아메리카 식민지영토들을 유지하게 됩니다. 위트레흐트조약이 체결된 후에도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과 1714년까지도 전쟁을 계속했으며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신성 - 133 -

로마제국과 스페인사이에 1720년까지 평화조약을 체결되지 않아 1750년 마드리드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서로 공식적 으로는 전쟁상태로 있었습니다. 침략전쟁으로 사람을 학살하며 재물을 강탈해 부를 축적하 거나 노동자를 착취하고 다중을 속여 기득권이 된 무리들은 자신의 부만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아도 될 것 같지만 권력은 힘의 약화되는 순간 상대방에게 먹히기 때문에 힘을 키우려고 혈안이 돼 전쟁이 끝이지 않는 것입니다. 힘든 일을 마치고 가족에게 돌아가 함께 따뜻한 밥이나 먹 는 것을 행복으로 느끼며 살고 싶은 민초들의 바람은 꿈일 뿐 사람위에 군림하려고 권력을 장악하는 무리들을 없애지 못하면 억압자들은 피억압자들을 분열시키고 피억압자들끼 리 갈등을 조장해서 싸우도록 조장하기 때문에 평화나 행복 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스페인왕위계승전쟁이 끝나자 영토의 일부를 상실한 제국들 은 1740년부터 신성로마제국 카를6세가 여성에게는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도록 한 살리카 법(Saliclaw)을 고쳐 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로 오스트리아왕위를 계승한 것을 이유로 또다 시 전쟁을 시작해 1748년 엑스라샤펠조약에 의해 종결됩니 다. 권력을 계승하기 위한 전쟁으로 또다시 수많은 병사와 양민 들을 학살하며 조약에 따라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왕위가 인 정됐는데 오스트리아는 영토의 일부인 슐레지엔을 프로이센 에게 양도하는 대가로 전쟁이전의 상태로 왕권은 유지됐지 만 양민들의 피해와 죽음은 회복되지 않습니다. 전쟁은 종료됐지만 지하광물이 풍부하고 비옥해 생산의 근 거지였던 슐레지엔을 빼앗긴 오스트리아국민들은 왕위를 이 어가기 위해 곡식과 석탄이 생산되는 요지를 빼앗겨 생활이 어려워졌다며 원성이 높아지자 영토를 되찾으려 프로이센과 대립하다 다시 7 년 전쟁(1756 1763) 을 벌입니다. 프랑스의 모렐리는 년 자연법전 1755 (Code de la nature, oude véritable esprit de ses lois, de tout temps négligé ou méconnu)을 통해 인류는 최초 단계가 자연적질서의 평화인 데 침략자들이 사유재산을 주장하면서 봉건제도와 사회 불 - 134 -

평등이 발생했다며 사유재산을 폐지해야 평등한 세상이 된 다고 발표합니다. 왕권계승과 학살전쟁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쟁이 발생된 원인은 카를이 법을 바꿔 자신을 왕위에 앉힌 사실과 자신은 헝가리와 보헤미아여왕 이자 오스트리아 여 공비 그리고 파르마 여 공작이 돼 합스 부르크왕가영토를 계승하고 남편 로트링겐공작 프란츠1세 (FrancisI, Duke of Lorraine)를 신성로마제국황제로 만들려한 탐욕에 있었음을 숨겼습니다. 프로이센은 30년 전쟁이 끝난 후 독일북부지역에 위치해 전 쟁에 휘말리지 않고 부를 축적한 브란덴부르크를 중심으로 1701년 1월 18일 프리드리히1세가 프로이센공국에 등극하 면서 중앙집권화를 추진해 관료제를 정비하고 군대를 강화 하며 프로이센 형( 型 ) 절대주의체제를 확립하므로 형성됐습 니다. 프로이센은 전쟁에 용병을 사용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들이 는 것은 생산하는 노동자와 농민에게 피해가 될 뿐 아니라 귀족들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며 자체 국력을 강조하고 민족주의를 주장하며 젊은이들을 징병해 정규군을 창설하고 병사들을 훈련시켜 강대해졌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세금을 늘려 군비를 증강하고 적대관계 에 있던 프랑스 왕과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를 혼인시켜 제휴하며 러시아 스웨덴 작센 기타 독일의 제국들과도 동맹 을 맺으며 프로이센을 포위하자 영국과 동맹한 프로이센 프 리드리히2세는 1756년 8월 기선을 제압하려고 작센을 침입 하므로 전쟁이 발발됩니다. 기습작전으로 프로이센이 초기에는 승리했으나 1759년 8월 오스트리아 러시아연합군이 반격하므로 대패해서 잠시 베를 린까지 점령당하고 영국의 대( 大 ) 피트마저 실각하므로 원조 가 끊겨 고전하다가 1762 년 러시아 엘리자베타 여제( 女 帝 ) 가 죽고 표트르3세가 즉위해 자신을 지지하므로 승기를 잡았습 니다. 1763년 2월 15 일, 라이프치히에서 약 30km 떨어진 후베르 투스부르크 성( 城 ) 에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작센 3국이 슐 - 135 -

레지엔은 프로이센의 영토로 한다는 조약을 맺고 유럽에서 강국이 됐으며 해외식민지를 둘러싼 영국 프랑스양국의 오 랜 싸움도 영국이 승리해 대 식민제국이 됩니다. 엘리자베타 여제는 33세에 쿠데타로 아버지를 몰아내며 왕 권을 찬탈했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수많은 남자와 염 문을 뿌렸지만 결혼을 하지 않아 후사가 없기 때문에 사망 후 혈육인 조카 카를 울리히가 러시아황제와 스웨덴국왕양 쪽을 계승했는데 카를은 어릴 때 자신이 자란 프로이센을 동경했습니다. 카를 울리히( 표트르3 세)는 안할트체르프스트라는 작은 공국 공주인 예카테리나와 결혼했는데 신경질적이고 반항적인데 다 완고한 카를은 전략결혼을 좋게 생각하지 않아 예카테리 나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술로 세월을 보내면서 폐인이 돼 부부관계도 원만하지 않았으며 불행한 결혼기간을 보냈 습니다. 명목상 황태자와 황태자비인 두 사람은 18년간 각자 정부를 두고 살았는데 예카테리나는 세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가 각각 아버지가 다른 정부소생이며 카를은 황제에 올랐지 만 정치에는 관심 없고 러시아를 증오하면서 황실에 자신의 고향인 프로이센세력을 끌어들이자 예카테리나는 모반을 준 비합니다. 그녀는 러시아정교로 개종하고 유럽의 계몽 사상가들과 교 류하며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정책을 발표하므로 러시아 군대와 인민들의 지지를 받게 됐으며 정부 중 한명인 오를 로프는 그녀가 지시를 내리면 바로 동원할 수 있는 여러 연 대병사들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둔시키고 있었습니다. 궁정인물들과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식인 그리고 일반대중의 지지를 얻은 예카테리나는 1762년 7월 군대를 이끌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쿠데타를 일으키자 놀란 표트 르3세가 예카테리나에 맞설 군대를 모았지만 병사가 적어 표트르3세는 6 개월 만에 아내에게 왕권을 강탈당했습니다. 8일 후 카를은 예카테리나의 정부 손에 암살됐으며 1762년 9월 모스크바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치르고 예카테리나2세로 러시아 차르가 되자 약속을 지킨다며 모든 인민은 자유롭고 - 136 -

평등하므로 지배층의 피지배층에 대한 착취를 금지한다는 대민정책을 발표하지만 실행하진 않습니다. 예카테리나2세 명령으로 만들어진 러시아헌법은 유럽의 계 몽주의사상가들도 놀랄만한 내용이지만 공표만 했을 뿐 실 현하지 않았으며 귀족들의 지지로 차르에 오른 그녀는 왕권 을 유지하기 위해 귀족들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권한을 주 므로 러시아농노들을 더욱 혹독하고 가혹하게 착취당합니다. 1773년 돈카자흐 출신으로 프로이센과 7 년 전쟁, 폴란드전 쟁, 러시아 터키전쟁 등 유럽의 전장을 돌아다니며 평등과 자유에 대한 사상을 습득한 푸가초프는 러시아각지를 방랑 하다 농노들의 참혹한 삶과 비참한 현실을 보고 스스로 죽 은 표트르3세라 칭하며 농노제를 반대하는 세력을 규합했습 니다.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푸가초프에 의해 발생된 반란은 우 랄에서 시작해 순식간에 카잔 펜자 사라토프 등 도시를 점령 하고 러시아전역으로 퍼졌으며 각지에서 지주를 붙잡아 재 판하고 재산이나 토지를 몰수해 농민에게 나눠줬지만 예카 테리나2세의 병사들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고 실패로 끝났 습니다. 자유를 위한 저항 1760년 조지3세가 국왕이 되기 전까지 1세기 이상 아메리 카는 각각 식민지의회를 개최하며 자치적으로 운영하고 있 었으므로 아메리카영국인은 본국의 영국인과 거의 동등한 권리를 행사했는데 조지3세가 등극하고 가혹하게 세금을 징 세하므로 식민지인들은 권리 자유 특권을 쟁취하기 위해 저 항합니다. 영국은 북아메리카동부해안에 13개의 식민지를 건설하고 북 부에는 상공업과 자영농업, 남부에는 노예를 사용하는 농장 을 경영했으며 해외식민지경쟁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제국체제를 새롭게 개편하려던 영국은 조지3 세 즉위(1760 년) 후 인지세와 차세부과 등 중상주의적인 식민정책을 채택 했습니다. 1763년 7년 전쟁의 책임으로 프랑스미국식민지가 파리강화 회담으로 소멸하자 영국은 식민지들을 장악하고 설탕 법, 당 - 137 -

밀법 등으로 당밀, 설탕, 철, 소금 등 수입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할 뿐 아니라 신문, 일간지, 트럼프카드 등 미국식민지 에서 출판되는 모든 출판물에도 세금을 부과한다고 발표합 니다. 영국의 이런 결정은 큰 반발을 불러 식민지인들은 No taxa tion without represent ation( 대표 없이는 과세 없다) 는 구호 를 내걸고 영국의회에 대표를 보낸 적이 없으니 본국이 일 방적으로 만든 법을 인정할 수 없다며 조세법에 반발하자 인지세법이 간접세라는 조세원칙에 맞지 않아 인지세법을 철폐하게 됩니다. 1766 년 인지조례는 철폐됐으나 타운센드제법( 諸 法 ) 을 제정하 므로 식민지인들은 본국의 모든 과세를 거부하게 되고 1765 년에 군대숙영법( 軍 隊 宿 營 法 ) 을 제정하자 식민지인의 반감이 누적됐는데 70년 식민지인들이 보스턴에서 항의 시가행진을 하던 중 영국군과 충돌해 시민 5 명이 사망합니다. 미국식민지엔 억압을 거부하고 자유를 누리려면 저항해야 한다며 독립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왕권을 인정하 고 순종해야 한다는 왕당파들이 왕에게 청원하자고 해서 청 원을 시작했는데 1772년 청원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 달은 식민지인들은 통신위원회를 만들어 연락하며 비합법저 항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미국독립전쟁의 또 다른 원인은 프랑스-인디언전쟁에서 미 국은 프랑스와 전쟁하는 영국을 지원해 승리하자 비옥한 중 서부지역으로 진출하려는데 영국정부가 식민지를 보호한다 며 인디언보호구역 을 설정하고 이동을 금지시켰으며 병참 법을 제정하고 영국군대주둔비용 일부를 식민지민에 부과합 니다. 이때 영국본토에서는 이발사이자 가발공인 리처드아크라이 트(Richard Arkwright)라는 사람이 1767년 하그리브스가 발명 한 다축방적기를 개량하고 와트의 증기기관과 연결해 1771 년 수력을 동력으로 소수 노동자가 대량의 실을 뽑아 낼 수 있는 수력방적기(water frame)를 발명해 대량으로 직물을 생 산하게 됩니다. 1773년 영국은 미국식민지 상인들의 차에 대한 밀무역을 금 - 138 -

지시키고 동인도회사가 독점권을 행사하는 관세법을 통과시 키자 식민지자치를 무시한다며 분노한 보스턴시민들이 인디 언으로 분장하고 항구에 정박 중인 동인도회사 선박2척을 급습해 342개의 차 상자를 깨뜨리고 차를 모조리 바다로 던 져버립니다. 영국정부는 1774 년 보스턴 항( 港 ) 을 봉쇄하고 군대를 주둔 시켜 억압하며 배상을 요구하고 매사추세츠식민지의 자치권 을 정지시키는 등 징벌적인 여러 법을 제정하며 징세를 늘 리자 미국 식민지인들은 그것을 참을 수 없는 법( 法 ) 으로 규정하고 버지니아식민지 제의로 제1회 대륙회의가 소집됐 습니다. 1774년 제1 차 대륙회의 폐회연설에서 패트릭 헨리가 " 자유 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고 말 했다는데 헨리는 개개인의 권 리보다 왕당파에 가까운 사람이라 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 다는 설도 있으며 결과는 평화의 청원 문 작성과 자치적으 로 민병대를 조직해 훈련시키고 군수물자를 비축하자는데 합의합니다. 1775년 제2 차 대륙회의에서 벤저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로저 셔먼, 로버트 리빙스턴, 토머스제퍼슨 등 다섯 사람이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로 하고 대륙 군을 창설했으며 조지워싱턴장군을 대륙 군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각 주에 군사와 물자지원을 요청하므로 사실상의 연방의회가 됐고 미국독립전쟁이 준비됩니다. 1775년 영국군과 대륙군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해 전쟁이 벌어지자 T. 페인이 공화제 독립( 共 和 制 獨 立 ) 을 호소하는 정치 팜플렛[커먼센스 common sense]을 발행하고 버지니아 대표 R.H. 리의 독립결의( 決 議 ) 제안으로 T. 제퍼슨이 기초하고 B. 프랭클린과 J. 애덤스가 가필한 독립선언문이 대륙회의에서 76년 7월 4 일 만장일치로 가결됐습니다. 이 선언문에는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천부의 권리가 있 음과 권리를 위해 정부를 조직하며 정부의 정당성은 피치자 ( 被 治 者 ) 의 동의( 同 意 ) 라며 정부가 기본인권을 침범하면 국민 은 그 정부를 전복할 권리가 있다 는 혁명권( 革 命 權 ) 을 명시 하고 국왕의 폭정을 열거하며 독립전쟁의 정당성을 설명해 국민의 권리와 외국의 군사적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내용으 - 139 -

로 채워졌습니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으로 무력으로 약한 부족을 침략해 사람 들을 학살하고 기득권을 차지한 무리가 왕국을 만들고 왕이 병사의 무력으로 다중을 억압하며 통치하던 왕조가 아니라 다중이 선출로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가 생기고 국가의 책임 과 의무를 규정하는 기초가 된 것입니다. 아메리카와 영국이 식민지를 둘러싼 독립전쟁이 한창일 때 유럽의 프로이센에서는 노동자와 시민들을 갈취해 부를 축 적한 상공인들과 귀족 사이에 권력을 차지하려는 암투가 계 속 일어났으며 1770년대 말부터 군국주의전통아래 국가의 검열에도 불구하고 계몽주의 책 생산이 증가하므로 신흥독 서층이 형성됐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천부( 생존권, 평등권, 자유권 등 불가침 의권리)의 권리를 칼뱅의 영향을 받은 상공인들은 노동자의 노동력착취와 다중을 갈취하는 물질 판매의 자유라고 왜곡 했으며 성직의 혹독한 착취가 허상이라고 깨달은 대중들이 종교를 배척하자 성직자들은 초기종교로 돌아가자는 목소리 를 높입니다. 유럽은 자유에 대한 사상이 퍼지면서 억압받는 민중들이 깨 달을 때 미국식민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식민지제국( 帝 國 ) 부활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다 미국에게 영국에 맞서 독립 하라며 부추겼는데 영국의회는 퀘벡조례를 제정하고 캐나다 서쪽지역까지 로마가톨릭교를 승인합니다. 1778 년 사라토가전투(Battle of Saratoga)에서 대륙군이 승리 하자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것을 명분으로 프랑스에 참전을 요청하고 프랑스가 참여하자 1781년 요크타운전투에서 프랑 스군과 대륙군 연합부대가 영국군 주력부대를 격파하므로 1783년 파리조약으로 영국정부는 미국의 독립을 공식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대륙회의는 1777년 11월 미합중국 초기헌법이라 할 수 있 는 연합규약( 聯 合 規 約 ) 을 기초로 1787 년 서북( 西 北 ) 토지법 등 을 제정했고 81 년 이후 연합의회( 聯 合 議 會 ) 로 개칭해 독립전 쟁을 지휘하며 독립을 쟁취하고 89년 연방헌법제정으로 조 지워싱턴을 초대대통령으로 하는 신정부를 수립한 후 해체 - 140 -

합니다. 1780년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망하고 권좌에 오른 요제프2 세는 계몽주의에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로 모든 사람은 자 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며 농노해방, 사형과 고 문폐지, 교육권의 확대 등 많은 개혁을 구상하지만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해 누리고 사는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쳐 대부분 실패했습니다. 요제프는 전인구의 1/4에 불과한 독일인을 중심으로 중앙집 권화를 시행하는 정책을 펼치려했지만 기득권과 타민족들의 방해로 실패하고 스스로 자신의 묘비명에 가장 훌륭한 의 도를 가졌으나 하려고 한 모든 일에 성공하지 못한 요제프2 세가 잠들다. 라고 새겨 넣었는데 오늘날 계몽전제군주( 啓 蒙 專 制 君 主 ) 라 불립니다. 유럽열강의 경쟁관계를 이용해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의 지지를 받으며 독립에 성공한 미국혁명을 프랑스가 지원을 하기 위해 해군과 육군을 파병하며 너무 많은 물질을 제공 해 심각한 재정위기가 닥쳤으며 전쟁비용을 부담하느라 헐 벗게 된 프랑스 인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혁명이 발발합 니다. 영국에서는 1779 년 방사( 紡 絲 ) 방적공( 紡 績 工 ) 이던 제임스하 그리브스[James Hargreave]가 한명의 노동자가 여러 개 방 추( 紡 錘 ) 를 동시에 작동시켜 생산할 수 있게 발명한 복식수 동( 複 式 手 動 ) 방적기를 개량해 1825년 R. 로버츠가 완전자동화 된 뮬(mule: 잡종)방적기를 발명하므로 엄청난 생산발전을 가 져옵니다. 노동자들이 좀 더 쉬운 방법으로 물질을 생산하기 위해 만 들어 낸 기계발달로 숙련노동자가 하던 일을 기계가 대신할 수 있게 되자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부를 축적한 상 공인들은 노동자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고 삶의 질을 높이 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높은 숙련노동자를 해고하며 더 많 은 이윤을 남깁니다. 경력이 많고 숙련된 노동자들은 임금이 높다고 해고하며 기 계를 작동시킬 수 있도록 글 읽는 교육을 받고 가족이 딸리 지 않은 젊은 노동자들을 싼 임금으로 고용해 더 많은 이윤 - 141 -

을 남기고 상대기업보다 싼 가격에 판매하므로 재산이 부족 한 소기업들을 도태시키며 부를 축적합니다. 프랑스혁명의 근본원인은 봉건적신분제인 성직자( 제1 신분), 귀족( 제2 신분), 재산 있는 평민( 제3 신분)에 입각한 앙시앵레짐 ( 구제도)을 타파하고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해 재 산을 축적한 행위를 철폐하며 자유, 평등, 우애의 이념으로 구체제와 왕정을 타도하고 봉건적 억압에서 벗어나 민주주 의를 발전시키게 됩니다. 제3 신분에 속하는 상인, 제조업자와 법률가, 의사, 문필가 등 생산노동을 하지 않는 자유 직업인으로 이루어진 신흥계 급은 칼뱅의 종교개혁 후 재력이 성장했음에도 귀족과 정권 으로부터 멸시받았으며 길드와 같은 봉건적제도로 불이익을 당했고 농민과 노동자는 봉건적 의무와 세금이라는 명분의 수탈로 피폐해졌습니다. 구제도 아래 제 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은 면세특 권과 봉건특권을 누리고 제3신분인 평민만이 모든 재정 부 담을 안았는데 부르봉왕조의 사치스러운 궁정생활과 루소 같은 계몽 사상가들의 혁명사상이 시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칠 때 미국의 독립혁명 소식은 큰 동요를 가져왔습니다. 영국에서는 1733년 J. 케이가 기계적인 위입장치인 플라잉셔 틀 수직기를 발명해 제직능률이 향상되고 1785년 영국의 E. 카트라이트가 증기의 원동력을 이용한 역직기를 발명해 자 동방적기 및 역직기의 대대적인 보급으로 근대적공업의 기 초가 확립되자 맨체스터를 중심으로 면방직공업이 비약적으 로 발달합니다. 프랑스에선 다중은 빈곤하므로 특권계급에게 과세하고 왕실 경비를 삭감해 재정위기를 극복하려던 루이16세가 귀족과 왕실의 반발로 실패하자 1789년 5월 그 동안 소집되지 않 았던 신분제의회인 3부회를 소집했는데 표결방식을 둘러싸 고 신분 간 충돌이 벌어져 제3신분 대표들은 별도로 국민의 회를 열었습니다. 왕이 제3신분 회의실을 폐쇄하라고 명령해 쫓겨난 의회는 6 월 21일 실내 테니스코트에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말자고 결의하고( 테니스코트의 서약)저항하자 부분 - 142 -

적인 양보안을 내고 회의를 신분별로 하라고 명령했는데 제 3신분이 거부하자 어쩔 수 없이 귀족대표에게 국민의회의 합류를 지시합니다. 국민의회는 7월 7일 헌법위원회를 창설하고 9일에는 헌법제 정국민의회로 명칭을 개칭하며 조직적으로 저항하자 성직자 및 귀족 등 동조자들이 합세했으며 이들은 국민주권을 내세 워 입법의회가 권력을 행사하는 헌법을 재정하라고 요구하 자 왕은 병력이 동원될 때 까지 참다 무력탄압을 시도했습 니다.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 다중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국 민의회는 봉건제( 무상) 폐지선언 및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발표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다고 명시한 자연권주권재민의 원리와 억압에 대한 저항권을 함 께 포함하여 혁명이 지향하는 기본적인사회 방향을 제시합 니다. 선언의 내용을 간추리면 [ 제1조 인간의 권리는 자유롭고 평등 하다. 제2 조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자유, 재산, 안전, 그리고 압제에 저항권. 제3 조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어떤 단체나 개인도 국민이 명시하지 않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제4조 자유 는 타인에게 해롭지 않는 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제5조 법은 사 회에 유해한 행위가 아니면 금지할 권리가 없다. 제6조 법은 일반 시민의 의사표명이다. 제7조 누구도 법의 규정과 정하는 형식에 의하지 않고는 소추, 체포 또는 구금될 수 없다. 제8조 범죄 이전 에 제정 공포되고 합법적으로 적용된 법률 아니면 처벌될 수 없 다. 제9조 모든 사람은 범죄자로 선고되기까지 무죄로 추정되므로 체포하더라도 신병을 확보하는데 불가결하지 않은 모든 강제조치 는 법에 의해 준엄하게 제압된다. 제10조 누구도 그 의사에 있어 종교상의 것일지라도 그 표명이 법에 의해 설정된 공공질서를 교 란하지 않는 한 방해될 수 없다. 제11조 모든 시민은 자유로이 발 언하고 기술하고 인쇄 출판하며 평등하게 교육받고 사상과 의견을 자유롭게 소통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귀중한 권리의 하나이다. 자 유의 남용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한다. 제12조 인간과 시민의 제 권리보장은 공공무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는 모든 사람의 이 익을 위해 설치되는 것으로 그것이 위탁되는 사람들의 특수이익을 위해 설치되지 아니한다. 제13조 공공무력과 행정비용을 위한 조 세는 능력에 따라 평등하게 배분돼야 한다. 제14조 모든 시민은 스스로 또는 대표자를 통해 공공조세의 필요성을 검토하며 용도를 추급하고 액수, 기준, 징수, 그리고 존속기간을 설정할 권리를 가 - 143 -

진다. 제15조 사회는 모든 공직자로부터 그 행정에 관한보고를 요 구할 권리를 가진다. 제16조 권리의 보장이 확보되지 않고 권력의 분립이 확정되지 아니한 사회는 헌법을 갖고 있지 아니한다. 제17 조 불가침 적이고 신성한 권리인 소유권은 합법적으로 확인된 공 공필요성이 명백하고 또 정당하며 사전의 보상조건하가 아니면 침 탈될 수 없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왕이 군대를 국경에서 베르사유주변으로 이동시키며 파리 시민에게 극도의 불안과 분노, 공포를 조장했고 7월 11일 국민이 신망하던 삼부회 최고책임자 네케르를 파면하자 분 노한 시민들이 일어나 7월 13일 무장하고 다음날 바스티유 감옥을 포위하니 관료인 교도소지휘자 베르나르-레네 드 뢰 네는 80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총을 쏘며 저항하다 사살 당 했습니다. 바스티유감옥을 파옥하고 점령한 1000명의 무장시민군은 파 리시내로 들어가 시장관사와 주교 청을 점령하고 시장을 사 살했으며 사살한 시장 플레제이유의 머리를 창에 꽂아 파리 시내를 누비며 무력을 과시하고 헌법과 입법의회를 구성해 봉건제억압을 금지하고 징세를 철회하라 고 외치며 다녔다 고 합니다. 시민군의 무력에 힘입은 국민의회는 8월 4일 의회에 봉건 제 영주제 폐지의 안건을 결의하고 9월 26일 인권선언을 채 택해 행정 사법개혁에 착수하므로 정치적 민주주의를 확립 하고 정교( 政 敎 ) 분리와 교회재산의 국유화로 전쟁으로 부족 해진 재정을 충당하고 다음해 성직자세속 법을 제정했습니 다. 파리민중의 지지를 확보한 국민의회는 길드와 동업조합 그 리고 내국관세와 통행세를 폐기해 생산 판매자의 권리를 확 장했으며 신분제구분으로 복잡했던 사법구역과 행정구역을 정리하고 귀족계급이 권력을 행사하며 법이란 핑계로 다중 을 억압하고 수탈하던 기구인 고등법원을 폐지합니다. 최초의 헌법기초( 起 草 ) 에 착수해 1791년 9월 프랑스사회를 권력분립에 입각한 단원제 입헌군주제와 유산계급이 지배 통제할 수 있는 헌법을 완성하고 9월 30일 해체했으며 새로 들어선 입법의회는 왕당파지롱드당의 미라보, 라파예트 등이 장악하고 입헌왕정 정체를 수립하므로 착취가 만연한 사회 - 144 -

로 정착됩니다. 1791년 소집된 입법의회의 미온적 태도로 왕권으로 회귀하 려 반혁명움직임을 보이던 루이16세가 도망가다 잡히는 바 렌느 사건이 발생하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프랑스혁명 의 자국전파를 우려해 왕을 해치면 전쟁을 하겠다며 협박해 서 파리 시민들이 1792년 4월 왕궁을 습격해 국왕과 왕비 를 가두자 전쟁이 벌어집니다. 시민들이 국왕과 왕비를 체포해 왕권을 정지시키고 유산자 입법의회를 부정하니 1792년 9월 국민공회가 소집됐으며 국민공회는 개회와 함께 공화정을 선포하고 의용군을 소집 하기 위해 민중들에게 애국심을 호소하며 혁명의 열기를 높 여 대중들이 의용군으로 나서기를 자원하며 혁명전쟁이 준 비됐습니다. 인간이 자유로울 권리와 평등을 부정하고 침략전쟁으로 학 살하며 재산을 강탈하고 비양심적인 갈취와 착취행위로 권 력을 차지한 무리들이 자신들과 같은 부류 일개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무고한 수십만의 병사들을 희생시키는 전쟁 도 불사한다는데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국민공회에는 성직과 귀족을 대표하는 지롱드당과 신흥중산 층과 상공인을 대표하는 자코뱅( 산악당)당이 대립했는데 혁 명전쟁승리와 민중세력을 배경으로 자코뱅 당이 주도권을 잡자 1793년 6 월 보통선거권, 노동권과 생존권, 공공지원을 보장하는 헌법과 봉건제를 무상폐지하고 유산자민주주의 기 틀을 만듭니다. 국민공회는 총 749 명 의원 중 지롱드 당( 黨 ) 이 약160 명, 자 코뱅을 중심으로 산악파( 山 嶽 ) 약200 명, 평원파( 平 原 派 ) 라는 중간파가 약400명이었는데 루이가 무죄라며 비호하는 지롱 드당과 처형을 주장하는 산악파가 대립하다 혁명을 거부하 는 지롱드당은 상퀼로트( 파리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해 산악 파가 권력을 장악합니다. 혁명을 주장하는 자코뱅 당이 방토즈법을 공표하며 국민공 회를 장악하자 국왕 루이16세를 단두대에서 공개처형하고 1793년 10월부터 의용군의 무력을 바탕으로 공안위원회강 화, 국민총동원령, 최고가격제( 물건 값 상승을 제한)등 무력으 - 145 -

로 반발세력을 억압하던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고 정권을 지롱드세력들이 차지합니다. 방토즈법은 프랑스혁명 중 1793년 2월 26 일, 3월 5일 국민 공회( 國 民 公 會 ) 가 선포한 법령으로 공화국 적( 왕당파)들의 재 산을 몰수하고 그 재산을 분배받을 애국자의 리스트( 명단)를 작성하기로 한 것으로 로베스피에르파( 派 ) 가 정권을 장악할 미끼로 공표했으나 이듬해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자 7월 27 일 완전히 폐기됐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공안 보안위원회를 강화하고 전 국민에게 군사봉사의 의무를 강조하며 전쟁수행기간 동안은 비상사태 에 대처하는 뜻에서 혁명정부 성립을 선언했고 반혁명분자 라며 지방에 은신했던 지롱드파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그 리고 롤랑부인 등 1년 동안 약 1만 명 이상을 기요틴( 단두 대)으로 처형합니다. 공안위원회의 총력전체제는 1793년 말까지 무력으로 국민을 억압하기 위해 대외전쟁으로 여론을 돌렸으나 산악파내부의 당쟁과 자코뱅의 에베르파와 왕당파의 당통파, 로베스피에르 파 등 3파로 분열한 상태에서 에베르파가 1794년 3월 식량 사정악화를 빌미로 시민을 충동해 봉기를 일으켰다 체포돼 기요틴에서 처형됩니다. 혁명정부는 4월에 당통파를 숙청해 로베스피에르파가 권력 을 독점하고 대( 對 ) 유럽전쟁수행으로 불가피하다며 최고가격 제와 물자통제를 강화하고 무료배급을 실시하며 반대자를 처형하던 혁명정부는 상퀼로트를 수탈해 지지를 받지 못하 다 독재자 로베스피에르가 1794년 7 월 처형됨으로 테르미도 르의 반동 은 종료됩니다. 1794년 봄 이후 도시와 농촌의 독립적인 소생산자가 자유롭 고 평등한 덕의 공화국 을 이상으로 외치던 로베스피에르는 당내에서 분파적 움직임을 보인 왕당파의 당통 등과 과격파 에베르 등을 처단하며 권력을 강화하다 파리민중( 상- 뀌로뜨) 의 지지를 잃자 1794년 7월 테르미도르가 반발해 로베스피 에르를 단두대로 보냈습니다. 테르미도르는 산악파가 내분과 독선으로 약화되자 귀족 지 롱드당의 중간층과 산악파 보수층이 연합해서 만든 중도주 - 146 -

의 정치집단으로 국민들이 혁명에 대한 방향을 결정하지 못 하는 사이 권력을 장악한 집단입니다. 1795년 입헌공화정과 유산자까지 투표할 수 있는 헌법을 만 들고 5인의 총재가 협의해 국가정책을 결정하는 연립총재정 부를 출범시켰지만 5인의 연방 총재정부는 선출된 자들끼리 이권을 위해 분열되고 권력을 잡은 무리들이 자신의 이익 챙기기에만 혈안이 돼 부정 부패로 프랑스국민들을 실망하게 만듭니다. 군부독재 출현 5인의 연방총재 정부대표들이 왕당파와 공화파로 분열돼 재 산 늘리기에 급급한 모습에 실망한 국민들이 불평등한 제도 와 체제 때문에 굶주리니 평등한세상을 만들자고 요구하며 혼란스러울 때 병사를 지휘하던 나폴레옹이 병사들의 무력 으로 총재정부를 무너트리고 정권을 찬탈합니다. 프랑수아 바뵈프는 인권선언만으론 굶주림을 달랠 수 없다. 며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공화정치를 하려면 생활혁명을 해 야 한다며 호민관( 護 民 官 ) 지( 誌 ) 를 발행하고 법( 法 ) 과 신분 의 평등, 교육과 취직기회균등, 사유토지금지, 생산물의 배 당과 분배는 국가가 공정하게 배급해야 평등한 사회가 된다 고 주장했습니다. 바뵈프는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비밀리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결사조직을 만들고 착취가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변화시킬 계획으로 구( 舊 ) 자코뱅당원 에 베르파( 派 ) 혁명군장병 소시민 노동자들과 연결시켜 무장봉기 를 준비하다 발각돼 1796년 5월 체포됐으며 1년 만에 처형 됩니다. 나폴레옹은 1784년 파리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졸업 후 지 방연대 포병소위로 임명됐으며 1789년 프랑스혁명 때 코르 시카로 귀향해 파올리 장군휘하에서 코르시카국민군 부사령 에 취임한 이력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육군으로부터 군대 이탈 3회와 2 중 군적이 문제돼 휴직 당했습니다. 1793년 가을 툴롱항구 왕당파반란을 토벌하는 여단부관으로 복귀해 처음 무훈을 세우고 F. 로베스피에르의 동생과 우정 을 맺어 이탈리아국경 군 지휘를 맡았으나 왕당파 테르미도 - 147 -

르(Thermidor)반동쿠데타 때 독재자 로베스피에르파( 派 ) 로 몰 려 체포됐다 석방됩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자 1795년 10월 5일 왕당파들은 혁 명정부가 실시했던 모든 정책을 백지화해서 상류층과 상인 들이 방데미에르 달(10 월을 말함) 13일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 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자 수세에 몰린 국민공회( 國 民 公 會 ) 가 구원을 요청하니 나폴레옹은 무차별적 포격으로 반란을 진 압합니다. 반란을 재빠르게 진압한 공로로 재기의 기회를 잡은 나폴레 옹은 1796년 3 월 신분이 높은 바라스의 정부( 情 婦 ) 이자 사 교계에서 이름 높은 조세핀과 재혼하므로 총재정부로부터 이탈리아 원정군사령관으로 임명됐으며 이탈리아에서 오스 트리아군을 격파하고 1797년 2월 만토바를 점령하므로 신 망을 얻게 됩니다. 알프스를 넘어 사르데냐를 정복하고 북이탈리아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권력의 야심을 드러내고 점령지역 국민들의 환 심을 사기위해 자신은 점령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평등 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왔다며 프랑스혁명 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인민공화국들을 건설하므로 인민 의 지지를 받습니다. 이런 소식이 프랑스로 전해져 생산노동을 하면서 불평등한 신분차별과 착취로 굶주리고 고통 받는 인민들의 환영을 받 았으며 나폴레옹이 니스와 사보이를 침략하고 빈으로 진격 하자 오스트리아가 화의를 요청해와 10월에 캄포포르미오에 서 네덜란드( 현재 벨기에)와 이오니아제도를 점령하는 조약을 체결하면서 지지를 굳힙니다. 1798년 5월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를 침략해 카 이로에 입성했지만 나폴레옹이 지휘하던 해군이 7월 아부키 르만( 灣 ) 전투에서 영국함대에 패하고 본국과 연락이 두절되 자 홀로된 나폴레옹은 5만여 명의 병사들을 버리고 혼자 이 집트를 탈출해 10 월에 프랑스로 귀국했습니다. 영국은 증기기관 발명으로 생산기계가 발전해 생산되는 물 질은 넘쳤지만 오랜 전쟁으로 인민들의 삶은 빈곤했으며 노 동자들은 하루 15시간 이상씩 노동했고 비위생적이고 위험 - 148 -

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던 여성과 연소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죽는 것을 견디지 못해 뭉쳐서 계속 파업을 일으키자 1799 년 단결금지법을 발표합니다. 프랑스로 귀국한 나폴레옹은 5명의 총재가 논의해 정책을 집행하는 총재정부를 무너트리고 왕권으로 회귀를 갈망하던 셰이에스 탈레랑 등과 손잡고 1799년 11월 9일( 브뤼메르 쿠 데타)군을 동원해 요인들을 감금해서 총재정부를 무력화시키 고 자신을 통령으로 추대하도록 강요하며 권력을 장악합니 다. 국민들을 무력으로 통제하지 못하면 권력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나폴레옹은 국민들이 정권찬탈행위에 반발하지 못하도록 억압하기 위해 혁명초기 원성이 높아 해체시키고 국립민간방위대가 담당했던 치안유지 권을 박탈하고 파리경 찰청을 복원 창설해 다시 경찰무력으로 국민을 억압 통제했습 니다. 권력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1800년 국내자본의 안정을 위한 다면서 민간이 마음대로 은행을 만들어 찍고 잉글랜드은행 이 찍어 유통하던 화폐발행을 금지시키고 자신의 사적주식 회사로 프랑스은행을 설립해 1803년부터 정부가 임명하는 총재가 프랑스은행을 통제 관리하도록 하는 발권은행을 만들 었습니다. 경찰무력으로 국민을 억압한 나폴레옹은 1802년 대중들의 불만을 달래고 질서를 유지한다며 제1 편 시민의 권리, 인격 보호, 주거, 후견인, 보호자, 부모와 자식, 결혼, 혼인의 취 소( 이혼)등 제2 편 소유권 사용권 재산권의 존중 등, 제3편 상 속 기부 부부재산계약 채무 등을 명시한 민법전을 만든 것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인간존중이 아니라 착취하고 갈취한 사유재산을 인정한다는 법률을 발표하자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해 부를 축적하는 공업인들과 노동자 농민 어민들이 땀 흘려 생산한 물질을 갈 취해 부를 축적한 상인들, 그리고 생산은 하지 않고 갈취로 누리고 사는 성직자와 자유직업인 등이 지지해 권력이 안정 됩니다. 사람은 노동자 농민 어민이 땀 흘려 생산한 물질로 존재함에 - 149 -

도 노동력 착취수단인 화폐를 발행하고 다중논의 구조인 지 방자치를 폐지해 중앙집권체제를 만들었으며 사법권과 행정 직을 만들어 소수관료가 국민집단을 통제 관리하며 수탈하는 틀을 만들고 절대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로마가톨릭교회를 부활시킵니다. 공직이란 직책을 많이 만들면 만들수록 공직자들이 받는 봉 급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많이 부과하므로 인민들은 굶주 리고 피폐해지며 생산직들은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것이고 공직자들이 자신의 직책에 충실할수록 국민들은 가혹하게 억압당하고 수탈당하게 됩니다. 사법이나 행정을 집행하는 무리들은 국민이 선출하거나 임 명하지 않았음에도 혈세로 먹고 살며 국민을 억압 통제하고 세금이나 벌금이란 명분으로 수탈하는 것이며 상명하복의 명령체계에 따라 상사가 자신의 위법을 은폐하기 위해 지시 해도 이성과 양심도 없이 그 명령을 완수해야 합니다. 관료들이 자신의 임무라면서 국민의 자유를 부정하고 억압 하며 통제하고 수탈 할수록 자신의 이성이나 양심도 박탈당 하고 자율성과 자유도 통제당하며 상사의 지시에 따라야 하 는 체제의 틀에 갇힌 로봇이 됩니다. 혈세로 먹고 사는 관료란 승진이나 좋은 보직을 배정할 권 한이 상사에게 있고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면 무능력자로 분 류돼 도태되기 때문에 이성과 양심을 버리고라도 반드시 상 사의 명령을 완수해야하며 상사에게 아부하기 위해 상납하 므로 부정부패를 조장하는 체제를 위한 조직입니다. 공공업무를 집행하는 무리들은 스스로 다수 인민들을 통제 하고 관리할 수 있는 규칙( 법률)을 만들거나 임금노예면서 노예관리자가 돼 각종 징수란 명분으로 수탈하며 인민들이 반발하지 못하도록 통제 관리하는 업무에 충실할수록 인민들 의 반발은 강화되고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면 유혈충돌로 발 전합니다. 1800년 지방민이 추천해서 사법관과 지방관리를 선출하던 선거를 폐지했으며 각 지방 도지사도 통령이 임명하고 정권 이 임명한 사람에게 유산자가 투표만하도록 했으며 양원제 입법부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대의제와 입법부권한을 통령정 - 150 -

부가 행사하며 법률발의권마저 행정부만 행사하도록 했습니 다. 중앙집권체제로 정비한 나폴레옹은 1802년 인민투표로 선출 직통령이 되자 1804년 봄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며 절대 권 력을 장악했고 상공인들의 착취와 임명직공직자들의 수탈이 극심해 기계발달로 노동자들이 생산한 물질은 넘치지만 농 업은 피폐해지고 분배불균등으로 일자리 없는 다수인민들은 굶주림에 허덕입니다. 굶주린 인민대중을 무력으로 통제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혁 명정신인 평등과 자유 그리고 박애라는 핑계로 전쟁을 일으 켜 오스트리아를 침략하고 유럽대륙을 점령했는데 영국을 굴복시키지 못하자 1808년 베를린칙령으로 대륙과 섬나라인 영국의 통상을 금지시키는 대륙봉쇄령으로 경제력을 압박합 니다. 대륙봉쇄령은 지하자원과 물자를 자급자족할 수 없는 유럽 지역 각 국가들에게 반 나폴레옹 감정을 일으켰으며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러시아를 본보기로 응징할 수 있는 군 사력을 강화하려면 권력층의 지지를 확보해야 하므로 1809 년 조세핀과 이혼하고 이듬해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 와 재혼했습니다. 프랑스가 대륙봉쇄령을 내리자 영국도 프랑스를 압박하기 위해 해상봉쇄정책으로 맞섰는데 1812년 프랑스로 향하던 미국상선을 영국이 나포하자 미국의 통상활동이 방해받았으 니 상업상의 자유를 확보해야 한다며 영국에 전쟁을 선포해 제2 의 독립전쟁이라고 부르는 미 영 전쟁이 발생합니다. 영국 육 해군은 체서피크 만( 灣 ) 해안을 초토화시켰고 블레이 던즈버그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은 미국의 워싱턴D.C 공공건 물들을 불태워 지금의 대통령궁도 그때 불탄 것을 하얀 페 인트로 칠해 화이트하우스로 불리게 됐으며 미국은 총 23,7 65명의 사상자를 영국은 총 8,618명의 사상자를 내고 성과 없이 끝납니다. 1812년 모스크바만 점령하면 러시아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 라고 믿었던 나폴레옹은 혹독한 추위와 기상변화를 파악하 지 못해 의욕을 상실한 병사들과 함께 침략전쟁에 패했으며 - 151 -

1814년 3 월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파 리를 점령당하고 전쟁의 책임을 물어 엘바 섬으로 유배됐습 니다. 1811 년 영국에서는 중부 북부의 직물공업지대에서 노동자들 을 하루 15시간 이상씩 노동시키면서 가족부양은 고사하고 빵 한개도 못 사 본인조차 생활할 수 없도록 임금을 지급하 면서 엄청난 이윤을 챙긴 상공인들이 자동수직기와 뮬방적 기로 생산시스템을 바꾸고 노동자를 해고하는 일들이 발생 합니다. 영국정부의 단결금지법으로 파업이나 공장점거 등 집단저항 을 할 수 없게 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해고된 원인이 상대 보다 싸게 생산하고 싸게 판매해야 유지되는 경쟁으로 모두 에게 일자리를 보장할 수 없는 체제모순 때문에 발생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기계 탓이라며 기계파괴 운동을 벌입 니다. 노팅엄셔 요크셔 랭커셔를 중심으로 정체불명의 N. 러드라는 인물의 지도아래 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됐다고 해서 러다 이트라 불렀는데 비밀결사( 秘 密 結 社 ) 형식을 취하고 야간에 복 면을 쓰고 기계를 파괴했기 때문에 치안당국도 실태를 파악 하지 못했고 일반인들에겐 신비집단으로 알려졌습니다. 나폴레옹이 유배되자 국외로 망명해 독일코블렌츠에서 반( 反 )혁명 해방군의 수령이 되고 이탈리아 영국 등지를 유랑하던 루이16세 동생 프로방스백작이 프랑스로 돌아와 입헌군주제 를 약속하고 노동자나 농민 등 억압받는 민중들의 권리와 혁명의 자유도 인정한다는 헌법을 공포하고 루이18세로 등 극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엘바 섬에 유배됐다 탈출한 나폴레옹이 이듬해 1815년 3월 파리로 돌아오자 루이18 세는 벨기에의 젠트(Jent) 로 도망가 나폴레옹이 다시 황제( 백일천하)에 올랐으나 영국과 전쟁에 나선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하고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 배되자 루이 18세는 다시 파리로 돌아와 7월 8일 왕위를 차 지합니다. 루이18 세는 입법권과 사법권의 독립, 법 앞에 만인 평등, 개 인 재산권의 불가침, 기본적국민의 인권을 규정한 헌법을 공 - 152 -

표하고 1815년 8월 초 입헌군주제의 약속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서 왕당파가 압승을 하자 로마가톨릭 추기경인 리셜 리외공을 총리로 등용해 혁명사상인 자유와 평등주의정신을 억압했습니다. 인민들의 반발로 1816년 의회를 해산시키고 실시한 선거에 서 입헌군주파가 다수가 되자 구( 舊 ) 귀족과 재산을 축적한 상공인들의 옹호를 받다가 1821년 왕당파의 J.B. 빌렐 백작 이 수상이 되자 다시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억압하며 혁명정신을 말살하고 절대왕정복귀의 기틀을 만들다 1824년 사망합니다. 1790년 새뮤얼 크럼프턴이 뮬방적기를 발명해 면사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됐고 증기기관을 발전시킨 볼턴 앤드 와트 가 설계도를 제공하고 업자들이 부품을 만들어 1814년 석탄 을 실어 나르는 기관차가 더럼광산에서 항구까지 운행됐으 며 1825년 세계 최초의 철도용기관차 로코모션호가 만들어 졌습니다. 1819년 영국에서는 전쟁으로 생활고에 고통 받던 랭커셔 주 직물공업지대에서부터 대중들이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가 시 작돼 8월 16일 맨체스터의 세인트피터광장에서 직조공을 중 심으로 약 6만 명이 의회개혁과 선거권확대를 요구하자 기 병대가 습격해 11명이 사망하고 400명이 부상당하는 피털 루학살이 벌어집니다. 정권은 1819년 다중들이 굶주리는 것은 상인들과 영주들이 은행을 설립하고 마음대로 화폐를 찍어 땀 흘려 생산한 물 질과 교환되지 않는 불환화폐가 넘쳐난 탓이라며 화폐를 찍 을 때는 찍는 양만큼의 금을 예치하고 금의 양에 맞춰 화폐 를 발행하라며 금본위제화폐를 실시했습니다. 1821년 그리스는 1814 년 해방을 목표로 조직된 친우회(Φιλ ική Εταιρεία)를 중심으로 자유가 보장되는 헌법을 채택하 고 3월 6일 혁명주의자들이 오스만제국에 대항하며 도나우 공국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혁명전쟁을 일으켜 유럽열강 들의 지원을 받으며 1829년 독립되고 그리스왕국을 건설합 니다. 한편 스페인왕실은 1812년 성립된 평등을 보장하는 자유주 - 153 -

의헌법을 실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왕이 절대 권력을 행 사하며 폭압적인정치로 억압하고 수탈하므로 빈곤에 견디지 못한 인민들의 분노가 폭발해 혁명이 발생했으며 카디스에 서 일어난 군사반란으로 왕실은 전복되고 페르디난도7세는 포로가 됩니다. 러시아는 스페인의 자유주의운동을 탄압하자는 명분으로 5 국 공동개입을 주장했는데 영국은 자유주의 운동이 국경을 넘 어 유럽공동체에 현실적인 위협을 주는 경우에만 간섭이 정당화된 다. 라는 명분을 들어 반대하면서 러시아가 스페인반란에 개입하는 것을 빌미로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할 것을 우 려해 반대합니다. 스페인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이 1822년 10월 베로나에서 회의를 열었으나 러시아는 개입해야 한다고 주 장하고 영국은 개입할 수 없다고 주장하므로 합의에 이르지 못하다가 12월 오스트리아제국의 나폴리왕국이 단독으로 개 입하려고 하자 프랑스가 스페인으로 진군해 혁명을 진압했 습니다. 루이18세가 죽자 1824년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동생 샤를 10세는 부활한 가톨릭교회의 옹호를 받으며 왕권신수설원칙 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헌법에 선거의 평등권이 있 음에도 세금을 많이 낸 사람에 대해서만 선거권을 허용한다 며 1830년 의회를 해산하고 7월에 새로운 선거를 실시합니 다. 이렇게 치러진 선거결과에도 의회군주파가 승리하자 샤를은 7월 26일 칙령으로 선거권을 제한하고 출판의 자유까지 금 지시키면서 선출된 의회를 해산한다고 공포하므로 파리 시 민들이 27일부터 29일까지( 영광의 3 일) 시가전을 벌이며 반 발했고 당황한 샤를은 총리 폴리냐크 공을 파면하면서 무마 하려다 쫓겨납니다. 26일 자유주의저널리즘이 독재 권력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 자 27 일 소( 小 ) 상공인 기능공 노동자 학생 등 파리 시민들이 바리케이드를 치면서 군과 충돌했는데 병사들이 알제리에 파견돼 있었기 때문에 병력과 탄약이 부족하고 자유를 갈망 하는 병사들이 무력진압을 거부하므로 정부 측이 밀립니다. - 154 -

28일엔 참여하는 시민들과 바리케이드수가 늘었고 금지했던 삼색기( 三 色 旗 ) 가 나부꼈으며 시가전에서 군이 패하고 29일 시민들이 왕궁을 장악하자 샤를은 7월 칙령의 철회 및 내각 교체를 협상카드로 내고 타협을 시도하다 거절당하니 8월 2 일 손자 보르도공( 公 ) 에게 양위하고 영국으로 도망갔습니다. 의회군주를 요구하는 시민들은 왕권을 부정하는데 양위한다 고 보르도공의 권력이 인정되는 것도 아니고 국민이 추천하 기로 했지만 함께 싸웠던 시민들 중 입헌왕정파와 재산을 축적한 상공인들은 개혁을 거부하며 오를레앙가( 家 ) 의 아들 루이필리프를 추대해 다시 왕가가 권력을 잡습니다. 침략전쟁으로 인명을 살상하고 재물을 강탈하며 권력을 만 든 무리들은 자신들의 혈육이 대를 이어 권력을 누리기 위 해 혈통과 가족주의를 강조하는 것이며 자신의 위치에서 자 신의 할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노동자는 대를 이어 노동하고 정치가는 대를 이어 정치를 한다는 이 데올로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유럽은 나폴레옹의 침략전쟁이 끝나고 평등과 자유를 요구 하는 인민들의 요구가 거세져 1830년 벨기에에서 독립혁명 이 일어나고 미국에서는 1831년 8월 21일 흑인노예 냇 터 너(Nat Turner/Nathaniel Turner)가 중심이 돼 사우스햄턴에서 노예들을 억압 갈취하는 백인농장주들을 살해합니다. 저항은 이틀 만에 진압되고 몇 개월 동안 숨어 다니던 냇 터너는 10월 30일 체포돼 11월 5일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11월 11일에 교수형으로 죽자 공포에 떨었던 남부백인사회 는 이 사건을 반란으로 규정하고 노예의 교육과 이동 그리 고 집회를 금지하는 억압적인 법률을 제정합니다. 러시아에서는 알렉산드르1세가 죽자 3주 동안 후계계승논쟁 으로 혼란스러웠는데 1825년 12월 14일 수도 상트페테르부 르크의 일부 청년장교들이 차르( 군주에 대한 호칭)왕조를 잇 는 니콜라이1세에게 충성을 거부하고 입헌군주제와 농노제 폐지 등 서부유럽같이 평등과 자유주의사회를 건설하자며 봉기를 계획했습니다. 봉기는 준비결의와 조직이 충분하지 못한데다 실행직전에 북부결사의 지도자인 파벨페스텔이 체포돼 니콜라이1세에게 - 155 -

계획이 알려져 사전에 진압됐으며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새 로운 사회를 통치하기로 한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 공작이 도망치고 봉기를 일으켰던 체르니고프연대까지 진압되면서 실패합니다. 니콜라이1세가 이 사건에 직접 참여하여 광범위하게 조사한 결과 121명의 데카브리스트가 재판을 받았고 그 가운데 파 벨 페스텔, 릴리예프, 카홉스키,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페스 트체프 류민 등 5명은 1826년 7월 25일에 처형당했으며 31 명이 감옥에 갇히고 나머지 푸시킨을 포함한 사람들은 시베 리아로 유배됐습니다. 데카브리스트( 러시아 말로 12 월이라는 말)의 난 혹은 12월 혁 명당원이란 나폴레옹침략전쟁 당시 유럽의 자유와 평등사상 에 영향을 받은 젊은 청년장교들이 1825년12월 충성을 거 부하고 입헌군주제의 실현을 목표로 일으킨 사건을 말하는 것이며 이를 진압한 니콜라이1세는 자유에 위협을 느껴 전 제정치를 더욱 강화합니다. 노동자저항과 혁명 프랑스는 샤를을 몰아해고 하원이 공위( 空 位 ) 를 선언하자 입 헌왕정파와 재산을 축적한 상공인들이 오를레앙공의 아들 루이필리프를 추대하고 새로운 헌장을 지킬 것을 맹세하면 서 다시 왕가가 권력을 잡았지만 이를 선거로 선출했다고 국민의 왕 또는 바리케이드 왕이라고 칭했습니다. 1830년 7월 혁명은 선거로 루이필리프1세를 선출하면서 보 수적인 입헌왕정( 立 憲 王 政 ) 을 시장자유주의로 바꿨을 뿐 귀족 과 왕족, 부를 축적한 소수가 다중인민을 억압하는 지배체제 를 만들어 분배나 신분과 빈부격차가 해소될 수 없었는데도 벨기에독립과 빈체제 국제자유주의운동에 기폭제가 됩니다. 왕족이 권좌에 앉았지만 절대 권력을 행사할 권한은 상실했 으며 온갖 착취와 갈취로 재산을 축적한 상공인과 그들의 후원과 사주를 받는 하수인들이 의회에 진출해 있어서 언제 라도 능력이 없다는 핑계로 의회를 통해 왕족을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부자들이 권력을 행사합니다. 국민공회는 겨우 입법부에 법률을 제출할 권리를 인정받았 고 재산을 축적한 사람에게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져 - 156 -

유산자권력을 강화했을 뿐 노동자와 재산 없는 농민들은 자 신이 땀 흘린 노동 결과물을 자신이 취급하거나 처분할 권 리 또는 선거권이나 피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확 보하지 못했습니다. 혁명이후 권력을 잡은 부자들은 귀족들과 연대해 영국에서 들여온 자동생산기계로 공장을 바꾸고 노동자들에게 생계 할 수없는 최저임금을 주며 엄청난 이윤을 남겨 부를 축적 했고 상인들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생산한 물질을 헐값에 거 둬 비싼 가격에 파는 갈취로 부를 축적합니다. 모두에게 균등하게 일자리와 재물을 분배할 수 없어 발생한 1830년 공황은 빈부격차가 점점 더 벌어져 실업으로 굶주린 인민들 불만이 높아지자 일자리를 위해 철도공사를 시작한 프랑스는 1837년 파리에서 생제르맹앙레 간에 철도를 개통 했으며 도시재건축과 철도연장 공사를 시작합니다. 정권의 이런 조치는 공정한 분배가 될 수 없어 임시방편일 뿐 노동자들은 죽도록 노동해도 정해진 저임금을 받으며 산 업재해로 불구가 되고 공사대금은 건설업자들 주머니에 들 어가 빈부격차만 점점 더 벌어지며 공황만 깊어집니다. 폴란드에서는 1832년 폴란드생산자동맹을 만들어 강령으로 [ 공유재산, 사회적집산주의, 무계급사회, 민중- 민족의 지배]를 주 장했으며 1836 년 폴란드인민 회로 발전해 강령으로[ 폴란드 인민과 연대, 평등한 민주주의, 국제연대, 농민대중과 함께 사유재 산의 폐지와 사회적 소유]를 주장하다 1863년 1월 봉기합니 다. 바르샤바 젊은이들이 Poland, Lithuania, Rusia인들에게 아 시아의 봉건제와 유럽의 착취제도를 깨트리려면 목숨 건 투 쟁을 해야 한다며 무기를 들자고 호소했고 모든 시민의 자 유와 평등을 강조하며 경작농지는 농민이 소유해야 한다며 토지가 없는 농민에게 왕령지의 땅을 분배하자고 했습니다. 대신 왕족이 아닌 지주들에겐 배상하고 루테니아인( 오늘날 우크라이나인과, 벨로루시인)과 유대인에 대해서는 어떠한 차 별도 폐지해야 한다면서 형제적 사랑을 호소하자 초기에는 노동자, 대학생만 참여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농민과 빈 민들이 호응하므로 재산을 몰수당할까 두려워한 지주들이 - 157 -

봉기에 앞장섭니다. 봉기는 성공했지만 명망 있는 자들이 임시정부 권력을 차지 하고 무산자에 대한 토지분배를 거부하며 열강개입을 호소 하자 프랑스가 군을 파병해 월등한 화력으로 혁명군을 학살 하므로 평등을 주장한 사람들이 수세에 몰려 산속에 숨어 저항했고 러시아에서는 1864년 3월 2일 차르가 농노해방령 을 내리게 됩니다. 프랑스에서 발생된 1830년 7월 혁명은 1789 년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이념이 전파돼 있던 유럽에 들불처럼 번졌으며 남 부네덜란드에서 7월 혁명 이후 한 달 만에 브뤼셀에서 혁명 이 발생되고 같은 해 10월 벨기에는 독립을 선언했으며 런 던조약을 통해 폴란드는 국제적으로 독립국가로 승인받게 됩니다. 영국에서는 노동력을 착취해 부를 축적한 상공인들이 생산 기계 자동화로 10명의 노동자가 만들던 물질을 1명이 생산 해도 더 많은 물질이 만들어지자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했으 며 해고된 노동자들이 수입이 없어 소비를 못하니 소상인들 이 폐업하는 공황이 발생돼 노동자들과 서민의 빈곤은 극에 달했습니다. 실직한 노동자와 도시서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 자신들의 노 동력과 재물을 갈취해 부자가 된 무리들이 먹다버린 쓰레기 통을 뒤져 썩은 음식을 먹고 병을 앓기도 했으며 병들어 신 음하는 도시빈민을 부자들이 더럽고 재수 없다며 폭행하고 쫓아내니 이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 저항하게 됩니다. 공황은 이윤이 남지 않아 생산을 중단하거나 환경재앙으로 농사가 않되 모자라는 물질부족공황이 있고, 자동생산기계의 발달로 다 팔지 못한 정도로 많이 생산하는 과잉생산공황과 분배불균등으로 빈부격차가 발생해 수입 없는 다수가 소비 를 못해 공장에서 물질을 생산해도 팔지 못하는 금융공황이 있습니다. 공황이 발생되면 노동자와 서민을 갈취해 먹고살던 룸펜들 이 궁핍해져 사기 절도 강도 등 각종 범죄가 기승을 부리며 생산한 물질이 넘쳐 가격이 하락하지만 100을 팔던 상인이 60을 팔아서도 먹고살아야 하니 상품가격이 폭등하는 현상 - 158 -

이 발생됩니다. 잠자는 시간도 없이 생산노동을 하고도 빈곤에 허덕이는 노 동자들은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 운동도 하고 공장을 점 거하는 파업도 했지만 권력이 단결금지법을 만들어 저항하 지 못하게 강제하고 1832년 법률을 개정했음에도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자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선거권을 요구하기 시 작합니다. 1836년 런던에서 W. 오언을 고문으로 W. 러벗을 노동자대표 로 런던 노동자협회를 결성했으며 버밍엄에서는 은행가 T. 애트우드가 노동자들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버밍엄정치동맹 을 만들고 북부와 서부에서는 F.E. 오코너가 노던스타 지를 발간해 노동자들이 저항을 시작한 것을 차티스트운동이라 부릅니다. 1837년 공장 법을 개정했지만 선거권은 없자 1838년 5월 런던의 윌리엄 러벳은 재산이 없는 사람도 자유롭고 평등하 게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며 남성의 보통선거권, 균등한선거 구설정, 비밀투표, 매년선거, 의원의 보수지급, 의원출마자의 재산자격제한폐지 등 6 개 조항을 명시한 인민헌장(People's Charter)을 전국에 배포했습니다. 헌장을 실현시키는 전국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각지를 순회 하며 집회를 열고 1839년 2월에는 런던에서 5월에는 버밍 엄에서 통일대회를 열었으며 국민청원 서명운동을 추진하다 가 오코너지지파와 러벗 지지파가 대립해 결말을 짓지 못하 고 6월 120 만 명이 서명한 청원서를 하원에 제출합니다. 무력이 없는 청원은 지배계급에게 피해가 없어 거부됐으며 오히려 러벗 등 청원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관헌들에게 체포 되자 런던대회가 무산됐고 노동자들의 파업결의도 취소되는 등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며 관헌들의 여론조작과 조직을 와 해시키려는 탄압으로 9 월에 해산됐습니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생산기계 발명으로 노동이 단순화돼 성 년남성들의 숙련된 노동가치가 감소했는데 공장 법으로 힘 이 약한 여성과 나이어린 노동자를 고용해 저임금을 지급하 며 장시간으로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자 노동환경이 비위생 적이고 위험한 상태로 방치되면서 노동자들 생명이 짧아졌 - 159 -

습니다. 생산노동이 없으면 인간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물질이 만들 어지지 않는데도 노동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상공인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1802년 처음 만든 것이 공장법입니다. 공장 법으로 여성과 연소노동자들에게 장시간노동을 시킬 수 있고 저임금으로 노동자의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므로 노동자들의 삶은 참혹해졌는데 기업은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할 권리와 상인은 대중을 갈취할 자유를 침해 한다며 거부해 기업과 상인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상공인에게 유리한 공장 법임에도 상공인들은 지키지 않고 노동자를 착취해 잠도 못자고 먹을 것도 부족한 상태에서 죽도록 생산하던 노동자들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됐는데 이 모든 원인이 권력을 귀족과 유산자들만 행사하는 선거에 있 다며 파업을 일으키니 1837년 임시방편으로 다시 개정한 것 입니다. 프랑스에서 프루동은 1840년 대학의 현상논문에서 소유란 무엇인가 라는 저서를 내고 재산이란 도둑질한 물건이다. 라고 정의하고 농부가 자신이 일할 토지와 장인이 생산도구 나 작업장을 소유할 권리는 본질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했 습니다. 1842년 소유자에 대한경고 (Avertissementaux proprietaires) 라 는 저서를 발행하고 권력의 미움을 받아 체포됐으나 그의 깊은 학문적 이해가 부족한 판사들이 내용을 이해할 수 없 다고 양심적으로 판결함으로 석방됐으며 1843년 자신의 인 쇄소를 팔고 수상운수회사에 사무책임자로 취업합니다. 거기서 직조공으로 조직된 비밀결사회원과 접촉하다 프로이 센의 마르크스와 러시아의 바쿠닌을 만났으며 이들이 노동 자가 공장의 주인이 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고 하자 프 루동은 권력은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되므로 노동자집단독 재는 국가권력의 비대화를 가져와 다중인민에게 더 가혹한 착취와 억압을 안겨주므로 누구에게나 자유가 보장되는 사 회를 건설해야 한다. 고 주장했습니다. 프루동은 소유는 권력= 착취= 지배로 통하는 수단으로 국가권 - 160 -

력기구가 생기고 통제라는 틀을 갖추면 개인의 자유를 억압 하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되기 때문에 평등을 부정하는 결과가 발생되므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집단주의를 주 장하는 것은 평등과 자유를 부정하고 집단지배질서를 만들 뿐이라는 것입니다. 1848년 혁명이 일어난 해 국회의원에 선출됐으나[ 민중 Lepe uple]지에 나폴레옹3세를 비판하는 글과 경제적 모순 또는 빈곤의 철학 이라는 저서를 발행하고 3년의 징역과 3,000프 랑의 벌금을 선고받아 벨기에로 피신했다 파리로 돌아와 체 포됐으며 생트펠라지 감옥에서 생활하다 1852년 석방됐습니 다. 저서는 화폐와 이자를 사회악의 근원으로 보고 자신의 이론 대로 교환은행을 제안하면서 노동에 의해 취득한 재산만 인 정하기 위해 생산노동에 기여한 노동량을 표기하는 증권을 발행하고 교환하는 증권은행설립을 주장했지만 노동력을 교 환하는 시장이나 증권은행은 노동생산물을 착취하는 질서가 되는 것입니다. 1852 년 에프라지 피에가르드(Euphrasie Piegard)와 결혼하고 혁명가의 고백 민중의 목소리 를 발행했다 기소돼 감옥 생활을 했으며 1858년 혁명과 교회의 정의론 을 발행하고 다시 3년의 징역형과 4,000프랑의 벌금을 선고받고 브뤼셀 로 피신해 레프톨스토이를 만납니다. 1862년 파리로 돌아와 노동계급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 를 쓰는 등 소유제도의 근거를 법적, 심리적, 경제적으로 나누 어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그 어떤 이유에 의해서도 사유재산 은 정당화될 수 없으니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안은 직접생산노동자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라던 프루동은 1865 년 갑작스럽게 사망했습니다. 영국의 차티스트운동은 1840년 오코너가 맨체스터에서 전국 헌장협회를 설립해 1842년에 325만 명이 서명한 청원서를 제출했고 같은 해 버밍엄에서 정치동맹 대신 완전선거권동 맹을 조직하며 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거부되자 동맹이 깨져 러벗이 물러났으며 북부에 번졌던 파업운동은 무력으 로 진압됩니다. - 161 -

오코너는 노던 스타 및 전국헌장협회를 통해 계속 저항했 으나 성과 없이 물러나고 G.J. 하니가 대표로 선출돼 마르크 스 엥겔스와 협력하며 1845 년 설립한 우애( 友 愛 ) 민주주의협 회를 기반으로 노동자조직을 호소하면서 570만 명의 청원서 명을 모아 4 월 런던에서 대 청원시위운동을 시도합니다. 시위는 경찰과 군의 무력에 대항하지 못하고 진압됐으며 청 원서는 하원의원에 전달됐지만 이것 역시 부결되었을 뿐 아 니라 기득권들이 1847년 노동자들을 보호한다면서 10시간 노동법 등 보호입법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저항을 달래므로 노동자투쟁이 다소 무력화됩니다. 노동자저항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기득권들은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을 법질서라는 명분으로 체포하고 투옥시키는 등 탄 압이 극심해져 전국헌장협회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차티스트 운동은 1858 년의 대회 후 소멸됐습니다. 마르크스는1844년 경제학 철학초고( 草 稿 ) 와 법철학비판서설 ( 法 哲 學 批 判 序 說 ) 을 발표하고 1842년 처음 만났던 F. 엥겔스 와 1845년에 파리에서 재회해 공동으로 신성가족 과 독일 이데올로기 라는 책을 집필했으며 1859년 경제학이론에 대 한 최초의 저서< 경제학비판> 의 서언( 序 言 ) 에 유명한 유물사 관에 대한 공식을 실으므로 새로운 철학의 장을 정립 설명 합니다. 1835년 졸업논문< 직업 선택에 관한 한 젊은이의 성찰>에 사 람은 노예 같은 도구로 일하기보다 자기 영역에서 독립하고 인류에 봉사할 수 있는 분야를 가져야 한다. ( 중략) 우리는 소 명이라 믿는 직업을 마음먹은 대로 차지할 수 없다. 미처 그 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사회적관계가 어느 정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1847년에 P.J. 프루동(1809 1865) 이 발표한 빈곤의 철학 을 관념적이라 비판하고 과학적으로 분석했다면서 철학의 빈 곤 을 썼으며 그해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이 결성되자 엥 겔스와 함께 런던으로 건너가 공산주의자동맹강령인 공산당 선언 을 공동명의로 집필하고 이 선언문을 2월에 발표합니 다. 이 선언은 ( 전략..)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 162 -

투쟁의 역사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장인과 직인, 한 마디로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항상 서로 대립하면서 때로는 숨겨진 때로는 공공연한 싸움을 벌였다. ( 중략..)모든 지배계급을 공산주의혁명 앞에 떨게 하라, 프롤 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 세 상이다. 전 세계노동자여 단결하라! 란 내용입니다. 마르크스가 전반적으로 주장한 내용은 인류는 원시시대와 노예제시대를 거쳐 산업사회로 발전했으며 산업사회는 생산 수단의 사적소유 때문에 생산하는 노동자와 농민들이 노동 할수록 노동으로 이익을 남기는 공장주나 토지소유주는 많 은 부를 축적하지만 물질을 직접 생산하는 사람들은 더욱 빈곤해 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은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 발전하는 것이 며, 물질생산의 3 요소로 첫 번째는 노동대상이 있어야 하고, 두 번째는 노동할 도구가 있어야 하며, 세 번째는 생산할 노 동력이 있으면 생산이 이루어진다고 하므로 인류가 생존하 는데 필요한 모든 물질은 노동으로 창출된다는 것을 밝혔습 니다. 산업사회는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없 으며 생산수단을 소유한 유산자중심의 분배와 생산경쟁 때 문에 분배불균등이 발생하고 빈부격차가 커지면 수입 없는 다수가 소비를 못하는 공황이 발생되므로 모두에게 일자리 를 보장하고 공정하게 분배하는 사회로 발전하지 못하면 해 소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산업사회는 재산을 소유하고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유 산자와 재산이 없어 몸으로 노동하며 착취당하는 무산자로 나뉘고 착취는 잉여노동에서 생기므로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생산을 멈추면 착취할 수 없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가 착취 당하는 노동을 중단하고 단결해서 저항해야 한다는 것입니 다. 모든 사람이 착취노동을 멈추고 단결하고 저항해 생산수단 의 사적소유를 철폐해야 억압과 착취가 없는 평등한사회가 될 수 있으며 과학이 발달해서 모든 사람이 풍족하게 사용 할 수 있는 물질이 생산되는 단계가 되면 능력껏 일하고 필 요한 만큼 물질을 분배받는 공산주의사회가 된다고 했습니 - 163 -

다. 모두가 공정하게 노동하고 분배받는 공산주의사회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산자들이 단결하고 뭉쳐서 집단 적으로 무력을 행사하며 착취와 억압체제인 구질서와 제도 를 깨트려야 평등한 사회가 건설된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사망(1883 년)한 때는 전기와 모터가 발전되던 시 기로 사후 TV와 생산로봇까지 출현해 산업사회가 아니라 물 건을 파는 상업사회가 되고 기득권이 생산노동계층의 저항 을 무력화하기 위해 각종 관리직과 관료, 서비스, 예술, 연 예, 잡기, 스포츠, 판매직 등 생산노동보다 비생산노동( 임금 노예)계층을 더 많이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치 못했습니다. 종교는 사랑과 평화 가족관계 등 기득권을 위한 관념적 사 고를 설교하며 다중을 세뇌시키면서 무산자들이 과학적 분 석을 할 수 없도록 방해하고 은혜와 온정주의를 강조해 억 압과 착취당하면서도 투쟁하지 않고 순종하게 만드는 역할 을 하는 마약이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평화란 힘이라거나 권한 또는 모든 것이 균형을 이 루고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할 때 이루어 질 수 있음에도 어느 한쪽이 억압받거나 착취당하면서 불평등 에 저항하지 않고 계속평화가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굴종과 복종이 오래 동안 유지됐다는 것을 뜻합니다. 1846년 폴란드에서는 2월 22일 공화국농민들이 민족정부를 선언하고 봉기를 일으키는데 크라쿠프( 폴란드의 전통 민속)정 신을 바탕으로 농민들이 토지의 소유자가 되며 소작과 부 역이 사라지는 사회체제를 건설할 것 이라면서 봉기지도부 를 포함한 모든 슐라흐타의 장원을 습격하고 영주와 그 가 족들을 살해했습니다. 농민들은 기득권의 착취와 수탈을 거부하며 저항했는데 지 도부는 농민들의 분노를 애국으로 몰기위해 슐라흐타에게 향하도록 하자 다른 지역은 폴란드왕령 경작지였지만 산악 지대농민들은 오스트리아가 경작지를 매각하므로 생계터전 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지도를 부정하고 오스트리아제국주의 타도를 주장한 것입니다. 1832년부터 시작한 폴란드의 크라쿠프봉기는 런던의 폴란드 - 164 -

생산자동맹 강령으로 인민의 연대, 공유재산, 사회적 집산 주의, 무계급사회, 민중- 민족의 지배 를 강조했었으나 1836 년에 폴란드 인민의 강령 으로 폴란드 인민과의 적극적 연대, 혁명적민주주의, 국제연대, 사유재산의 폐지와 사회적 소유 를 내세웁니다.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폴란드크라쿠프봉기는 의견이 합쳐지 지 못했으며 지도를 자청하는 귀족들과 독립을 주장하는 왕 족간의 권력다툼이 되면서 저항하던 농민들을 오스트리아군 대가 부다페스트로 진입해 무력으로 무자비하기 학살하며 강제 진압하므로 수천 명의 망명자를 낳고 실패합니다. 프랑스는 루소를 존경하는 프루동, 바쿠닌 등의 자유주의사 상에 영향을 받아 1847년 초부터 개혁운동이 전개됐는데 루 이필리프와 권력을 행사하는 무리들이 공개적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를 금지한다고 발표하자 연회 라는 편법을 사용 해 유산자들과 억압받는 세력이 모여 집회했습니다. 1848년 프랑스는 1830년 혁명으로 왕조통치를 종식했음에 도 유산자 민주주의를 만들고 옹립한 루이필리프 권력에 의 해 중도주의군주제 형태로 시장자유주의를 고수하면서 노동 자와 농민들을 수탈해 생산하는 사람들이 노력할수록 빈부 격차가 극심해져 굶주리던 인민들은 다시 저항한 것입니다. 1789년에 제정된 헌법( 제1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 가 자유롭고 권리도 평등하다. 제2조 모든 정치적 결합목적은 인 간의 자연권과 양도할 수 없는 권리에 있다. 제3 조 모든 주권( 권 력) 의 원리는 인민 속에 있다. 제4조 모든 사람의 자유는 존중돼 야 하며 타인에게 피해가 되지 않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을 준수하라고 요구했습니다. 1848년 2월 22일 파리에서 열린 공개토론회가 정치적시위 로 발전하자 혈세로 먹고살며 통제 억압역할을 하는 경찰 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 2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이에 분노한 민중들이 더욱 거세게 저항하면서 24일에 왕궁 까지 위협하자 루이필리프는 퇴위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망 명하므로 임시정부를 구성합니다. 시청에 설치한 임시정부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성년남자 여성 ( 제외)의 보통 선거제를 선언하는 동시에 실업자를 구제하기 - 165 -

위한 기관으로 국립작업장을 설립했는데 4월 23일의 선거에 서 유산자와 기회주의자들이 압승하자 새로 선출된 의회가 국립작업장을 폐쇄하므로 노동자들이 6 월에 저항(6.23~26) 하다가 군에 의해 진압됩니다.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노동자와 농민 모두가 평등하게 참여 해 투표로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제가 되자 노동자의 노동력 을 착취하고 농민이나 다수대중을 수탈 또는 갈취해 부를 축적한 은행가 대지주 산업자본가들이 질서당( 秩 序 黨 ) 을 결 성하고 공화주의파와 자유로운 사회를 주장하는 루이블랑 등이 대립합니다. 다수결에 의한 대의제는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조건이 타 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해 부를 축적하고 선거자금 을 사용하는 유산자나 다중을 속이는 위선으로 이름을 날린 명망가들이 선거를 통해 소수가 다수를 지배 통제하는 거짓 민주주의일 뿐 만인이 평등한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유산자 위선자 민주주의 다중이 투표해도 선출되면 세비로 생계걱정 없으며 각종 법 률이나 정책을 만들 때 이익 관련자들이 뇌물을 바쳐 자연 스럽게 재산이 축적되고 후일 연금이라며 생계가 보장되기 때문에 선출된 무리들은 평등을 바라지 않고 특권을 누리는 기득권이 되고 투표자는 선출하는 거수기로 전략합니다. 다수결선출 대의주의는 다수에겐 선출할 권리만 있을 뿐 선 출된 소수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고 임기가 보장되기 때문 에 다중을 갈취하며 피해를 입히는 법률이나 정책을 만들어 도 막을 수 없고 자신에게 피해가 되는 법률을 입안해도 다 수는 관여할 수 없게 권리만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다수결이 민주주의라는 왜곡으로 온갖 권모술수와 조작, 음 모와 계략이 횡횡하고 특정인이나 특정사상을 지지 받으려 면 다수를 확보해야 하므로 편 가르기로 집단이나 조직이 분열되고 다수가 소수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하다 고 세뇌해 집단무리 중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수단이 됩니다. 모든 집단이나 조직원은 다수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강요 하면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다수폭력이 합법인양 강제 - 166 -

하고 아무리 정당하고 합리적이라도 불합리를 찬동하는 다 수에 의해 소수의 정의롭고 진솔한 사상들이 불이익을 당하 면서 불평등에 저항하지 못하게 족쇄를 채우는 것입니다. 권력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다중논의 구조는 대중선거라는 절차를 거쳐 선출된 소수가 의회에서 자기들 끼리 논의하고 결정하면서 소수가 다중을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는 다수결선거선출주의로 정착됐습니다. 1848년 4월 말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선거를 실시하자 재산을 축적한 무리들과 기회주의로 명망을 얻은 무리들 그 리고 나폴레옹의 영광을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보나파르트가 재현해 줄 것이라고 믿은 사람들에 의해 12월 루이 나폴레 옹보나파르트가 당선돼 제2 공화정이 출범합니다. 급진파와 왕권으로 회귀하려는 왕당파, 자유를 주장하는 공 화주의파가 대립했으나 정치의식이 낮고 종교의 인정주의에 세뇌된 농민층은 급진파가 기득권들을 척살하고 재산을 몰 수한다는 의미를 몰라 부정적으로 봤으며 중산층은 자신들 의 재산을 뺏기는데 반대해 보나파르트가 당선됐습니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투표권을 행사했을 뿐 아무런 경제적 정 치적 권리도 얻지 못했으며 보나파르트는 헌법을 개정해 연 임하려다가 의회가 거부할 것을 알고 1851년 12월 2일 명 망있는 정치가들을 체포해 구금하고 국민투표로 새로운 헌 법을 통과시켜 연임되자 1852년 12월 황제라 칭하고 나폴 레옹3 세가 됩니다. 프랑스혁명은 주변국으로 번지기 시작해 1848년의 봄이라 명명했는데 헝가리는 혁명을 일으켜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자치와 자율권을 인정받았고, 체코는 시민적 권리와 언어의 권리를 보장하는 교서를 받았으며, 슬로베니아는 민족적/ 정 치적 요구보다 사회적불만을 해소하는 근간이 됐습니다. 크로아티아는 1848년 3월 25일 자그레브의 집회를 통해 코 슈트의 제안과 오스만터키제국 승인으로 일시적으로 마쟈르 족에 통합됐으며,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는 농민들이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정치의식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고 많은 국가들에 민족주의가 자리 잡 게 됩니다. - 167 -

지금의 독일지역에서는 오스트리아를 포함해 독일의 모든 공국 내 자유주의지도자들 제창으로 1848년 3월부터 통일 독일을 건설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지역에서 국민의 회(Frankfurter National versammlung)를 개최해 예비의회(Vorparlament)를 만들고 국민의회선거를 준비하기 위해 50인 임 시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선거는 예정대로 진행돼 5월 18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장 크트파울 교회에서 국민의회가 개최됐으며 선거에서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 다수가 의원에 당선되자 4월 서남 부에서 자유를 부정하는 무리들이 봉기한 것을 진압했기 때 문에 통일독일을 위한 헌법이 탄생할 수 있으리라고 봤습니 다. 국민의회는 통일된 독일에서 보장돼야 할 기본원칙과 기본 인권에 관해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토론했으며 그밖에도 행정부의 성격, 독일의 영토범위 등과 같은 문제도 결정해야 했기 때문에 빅토리아여왕 이복동생이며 라이닝겐대공인 카 를의 주재로 임시정부를 구성합니다. 국민의회가 임명한 행정부는 슐레스비히공국과 홀슈타인공 국 문제로 덴마크와 전쟁을 시도했으나 의회를 무시하던 프 로이센이 갑자기 8월에 전쟁을 중단하므로 라이닝겐대공은 1848년 9월 5일 사임했으며 후임으로 오스트리아출신 자유 주의자인 안톤 폰 슈메를링이 12월까지 이어가다 하인리히 폰 가게른으로 교체됩니다. 프로이센의 빌헬름4세는 자유주의를 혐오하면서 갈수록 대 중을 무력으로 억압하며 통제해야 질서를 유지하고 갈취해 야 누릴 수 있다는 보수파 조언자들과 지내며 무력을 행사 했고 오스트리아에서는 페르디난트황제가 조카인 프란츠요 제프에게 권좌를 물려주자 그도 보수주의 장관들에 의존합 니다. 독일의 두 강대공국에 자유와 평등을 기피하는 보수정권이 들어서자 독일주권의 성격과 영토범위에 대해 다시 열띤 논 쟁을 불러 1848년 말 국민의회는 중앙정부인물이나 성격은 결정내리지 못한 채 독일헌법에 포함될 기본권에 관한 토론 을 종결하고 1849년 1월 헌법초안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 해 각국에 전달했습니다. - 168 -

독일의 영토범위는 3월 4일 오스트리아헌법에서 제국은 하 나의 단일체로 간주되고 제국전체가 새로운 독일에 가입하 지 않으면 소국이 개별로 가입할 수 없다고 선포하므로 오 스트리아의 독일계영토를 포함시켜 대독일 (Grossdeutsch)을 꿈꾸던 남부독일과 오스트리아자유주의에 타격을 주며 프로 이센이 통일의 중심이 되는 소독일 (Kleindeutsch)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주도권이 넘어갑니다. 3월27일자로 중앙 행정권은 세습 황제 손에 있다는 내용의 헌법이 채택됐지만 왕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무마하기 위 해 보통선거의 시행을 약속하고 3월28일 국민의회에서 신임 황제에 대한 투표를 실시한 결과 290표는 프로이센의 프리 드리히 빌헬름4세에게 찬성하고 248 표는 기권합니다. 4월 3일 의회의장 두아르트짐손이 프리드리히 빌헬름4세에 게 황제 위를 제의하러갔으나 보수적이고 우월주의자인 그 는 독일제후들 이외 다른 사람들에게 독일황제 위를 받는 것을 거부하고 헌법초안도 거부하므로 프로이센이나 오스트 리아의 지원을 받지 못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게 됩니다. 5월경 가게른 내각이 붕괴됐으며 대다수의 대의원들은 자국 정부의 소환명령을 받아 돌아갈 수밖에 없자 잔류의원들은 슈투트가르트로 옮겨갔지만 6월 18일 뷔르템베르크군대와 경찰의 무력에 의해 해산되면서 통일독일을 만들려던 프랑 크푸르트의회와 그 의회를 성립시켰던 활동들은 끝났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억압과 통제를 거부하는 자유주의통일운동 이 활발해졌으며 마치니 등의 청년이탈리아당이 1848년 11 월 로마공화국을 건설했으며 북이탈리아에서는 사르디니아 의 통일운동으로 베네치아공화국이 성립되고 폴란드 헝가리 뵈멘 덴마크에서도 독립운동이 광범하게 전개되면서 다수결 선출 대의제가 정착됩니다. 힘으로 다중을 학살하는 침략으로 재물을 강탈해 권력을 누 리던 왕조시대는 대부분 막을 내리고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 하거나 갈취해 부를 축적한 유산자와 다중을 속이는 사기술 로 명망을 얻은 위선자들이 사회구성원의 선거를 통해 소수 지배자를 선출하는 계약에 의한 국가라는 명칭을 사용합니 다. - 169 -

1803년부터 1848 년까지는 미국의 서부개척시대 라고 하는 데 개척민들이 담배농사에 필요한 농토를 찾아 서부로 이동 하면서 세 차례에 걸쳐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인디언원주 민 약 300만 명을 학살하고 점령했으며 미국정부는 인디언 을 보호구역에 강제수용(1830 년)하고 1850년 도망노예단속 법을 만듭니다. 1823년 12월 2일 군사력이 발전하지 못한 시기 미국대통령 제임스먼로는 임기 7년째 되는 해 의회일반교서 연설에서 미국은 전쟁에( 유럽전쟁이든 식민지전쟁이든 간) 참여하지 않는 대신 유럽강국들이 미국이나 멕시코 등 미 대륙에 있는 주 권국가들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침략하는 전쟁도 거부한다며 중립을 선언합니다. 드레드스콧(Dred Scott)은 세인트루이스출신의 미 육군군의 관으로 복무하던 존 에머슨(John Emerson)이 소유한 미주리 주 노예였지만 에머슨이 자신이 근무하는 군적에 따라 일리 노이로, 위스콘신준주로 옮겨 다녔으며 새로운 부임지로 옮 겨갈 때마다 스콧을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부인소유가 아니 었습니다. 1846년에 에머슨이 죽고 스콧은 세인트루이스로 돌아왔는데 자청해서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겠다고 유혹하는 노예제폐지 론을 주장하는 변호사들의 요청으로 에머슨의 미망인을 당 사자로 자신은 연방법에 의해 노예제가 금지된 일리노이와 불법인 위스콘신준주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노예가 아니 라 고 주장했습니다. 1857년 미국연방대법원은 드레드스콧이 자신은 에머슨부인 소유의 노예가 아니라고 주장했음에도 북부출신판사들은 미국의회가 미국영토내의 노예제도를 금지할 권리가 없으 며 노예는 미국시민이 아니므로 미국헌법 아래 보호되지 않 고 소송권도 없다 고 판결하므로 남북전쟁의 기초가 마련됩 니다. 미국은 북부와 남부의 생활이 달라 북부는 산업 공업 어업을 유지했고 토지가 비옥한 남부는 농업, 플랜테이션 등으로 살 았기 때문에 북부는 노동자가 필요했고 남부는 자신들을 대 신해 농사지을 노예를 필요로 했는데 노동자가 필요한 북부 는 인간에겐 자유가 있다는 원칙을 주장하며 노예제폐지를 - 170 -

요구해 전쟁을 벌입니다. 60년에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돼 시작한 남북전쟁은 1861년 4월 남부동맹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항의 샘터요 새를 포격하는 것으로 시작해 1865년까지 4년 동안 수많은 인민들이 전사하거나 질병으로 사망하고 북부 군이 승리하 자 해방흑인 국을 설치했으며 헌법 13조를 수정해 노예제를 폐지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공업을 지향한 북부가 승리해 산업이 발전하게 됐으며 전쟁과정에 병사들을 나르거나 노동자가 생산한 물 질을 운반하려고 1869년 최초로 대륙횡단 철도를 건설했고 열차가 운행되자 노동자들은 노동기사단을 결성했으며 선거 권이 없던 여성들이 권리를 찾기 위해 전국여성참정권협회 를 만듭니다. 전쟁에 승리하고 흑인노예금지 법이 만들어졌지만 태어나면 서부터 억압받고 예속된 노예로 길들여진 흑인들 중 일부는 내가 밖에 나가도 생산하는 임금노예로 살아야 하는데 거 주할 주택도 없고 직업도 보장되지 않으니 예전대로 노예로 살면서 월급을 받겠다. 며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신이 태어나 생활하며 자란환경에 영향을 받는데 어려서부터 통제당하고 지시받는 생활에 익숙하게 길들여진 아이들은 아무리 자유를 보장해도 자유를 이해할 수 없어 누군가의 명령을 받으려 기다리는 노예가 됩니다. 인간이 모두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려면 어려서부터 존중은 망각하고 부모형제의 지시를 받거나 유아시절부터 학교라는 조직에 갇혀 지시받고 군대라거나 직장에서 통제 와 감시 속에 살면서 사회에서까지 법률( 규칙)에 통제되고 지시받는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훈 련돼야 합니다. 자신의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부모라는 핑계로 자녀를 마음 대로 억압하고 통제하다 생활이 어렵다고 자녀를 살해하고 자살하는 행위는 폐륜을 넘어 악행을 저지르는 망종이며 형 제나 부부 또는 상사라고 해서 상대방의 자유와 행동을 통 제하고 감시하며 간섭하는 것은 보호나 존중이 아니라 부당 한 통제와 억압입니다. - 171 -

자유라는 것은 서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위하는 마음이 있을 때 생성되고 지켜질 수 있는 것이지 누가누구를 착취하거나 법이나 규칙 또는 관습이나 조직 그리고 혈육이나 가족 등 이란 이유로 상대방의 자유와 사상을 부정하고 생각이나 행 동을 통제하거나 억압하려는 사람은 절대 평등한 세상을 만 들 수 없습니다. 상호존중이란 서로 간에 신뢰가 있어야 하며 신뢰란 상호간 에 숨김과 가식이 없이 진솔하고 솔직하게 대화하고 행동해 야 생길 수 있으며 자신은 좋다고 표현해도 상대방이 귀찮 게 느끼거나 치근댄다고 거절해도 부담을 주며 불편하게 스 트레스를 유발하는 것은 존중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다수결 선거선출주의 프랑스 보나파르트정권은 착취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시장 자유주의 보수정치를 펼치면서 생산노동을 하는 다수 노동 자와 농민들의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해 힘들게 노동해도 수 입이 적어 생계를 잇지 못하고 빈곤해 소비를 못하니 공장 에서 아무리 좋은 물질을 생산해도 팔리지 않는 공황이 계 속이어 집니다. 노동자들에게 일자리와 수입을 보장하며 소비를 조장하기 위해 좁은 도시를 허물어 도로를 확장하고 철도건설과 재건 축 사업을 하므로 수입이 생긴 다중이 소비할 수 있게 되자 산업생산이 배로 늘고 대외무역은 3배로 증가했지만 빈부격 차만 더 커졌습니다. 1854년 3월 28일 러시아제국과 오스만제국 간에 전쟁이 발 생하자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왕국, 오스만제국이 연합전선 을 형성했는데 사르데냐왕국은 이탈리아를 통일시키고 싶은 욕망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으려고 참전했으며 전 쟁이 대부분 흑해에 위치한 크림반도에서 벌어져 크림전쟁 이라 합니다. 이 전쟁은 4번의 전투에서 러시아가 완패하고 끝나 1856년 파리조약으로 러시아제국은 헌법을 수정해야 했으며, 다뉴브 하구 및 흑해인근의 영향력을 잃고 흑해는 모든 국가의 군 함통과를 보장해야 하므로 무장이 제한되는 중립지역이 됐 고 오스만제국은 탄지마트라는 개혁을 추진해야 했습니다. - 172 -

1856년 3월 30일 체결된 조약으로 러시아출신 핀란드공작 의 소유인 발트 해의 올란드제도는 모든 군 관련 함선의 항 해를 보장하려면 무장을 할 수 없어 인근의 투르크영토는 중립국지위를 얻게 됐으며 오스만에 복속됐던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지방은 통합돼 독립헌법을 제정하고 남쪽 베사라 비아영토를 양도받습니다. 1854년에 인도에서 발생된 세포이항쟁 또는 세포이반란 ( 영 어: Indian Rebellion of 1857)은 세포이용병들을 중심으로 영 국의 식민지정책을 반대하며 일으킨 저항이 인도전역으로 확산된 사건으로 영국은 세포이의 반란 이라 부르고 인도 에서는 제1 차 독립전쟁 (First War of Independence)이라고 칭합니다. 당시 인도를 점령하고 있던 동인도주식회사는 인도대중들을 통제하기 위해 군을 사용했으나 본국군인들이 부족해 대부 분 용병을 채용했는데 영국군의 90% 이상이 세포이용병들이 었기에 가능했으며 이들은 무굴제국의 복권을 선언하고 식 민지를 거부하며 옛 지배층과 규합해 여러 지역에 거점을 만들어 저항했습니다. 영국은 19세기 중엽까지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해 다종교 사회인 인도에 시크교국, 마라타동맹, 마이소르왕국의 내분 을 조장하는 방법으로 인도전역을 점령하면서 지배하기 시 작해서 인도의 정치, 경제, 조세제도를 무너뜨린 후 자국의 면제품을 인도에 값싸게 공급하자 인도 최대산업이던 면직 물산업이 몰락하게 됩니다. 카스트제도와 많은 악습이 존재하는 인도는 시급히 유럽의 문물을 전파하며 개혁을 시도하려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영 국은 날이 갈수록 더욱 많은 양의 자원을 인도로부터 수탈 해갔는데 영국동인도회사 용병인 세포이용병들이 영국군장 교들의 차별, 빈곤, 민족주의적 행위에 자존심이 폭발해 항 쟁으로 번진 것입니다. 용병들은 영국의 수탈 때문에 자신의 민족이 빈곤해진다며 감정이 좋지 않았는데 인도용병들에게 지급하는 신식무기인 엔-필드 소총탄약통에 힌두교도가 신성시하는 소의 기름과 이슬람교가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기름이 발라져있다는 소문 이 돌면서 탄약통수령을 거부하므로 대대적인 항쟁의 근원 - 173 -

이 됐습니다. 1854년 5월 인도델리근교 소도시메루트에서 처음 봉기한 세포이들에게 항명죄로 10년의 중노동형이 선고되자 동료세 포이들이 분노해 대규모 무력봉기를 일으켰으며 영국의 식 민지정책으로 착취와 수탈을 당해 빈곤에 허덕이던 민중들 의 분노도 함께 폭발해 델리를 장악하고 영국군이 통제할 수 없도록 1859 년까지 지속됩니다. 영국군은 본국의 증원 군과 네팔용병인 구르카, 시크교도들 을 투입하고 월등한 화력을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하는데 저 항군의 지도자역할을 했던 옛 봉건세력들은 이권다툼과 이 해타산만 따지면서 저항의 정당성을 확립하지 못해 봉기군 들은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하다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 하고 실패합니다. 영국군의 진압과 보복은 무자비해 붙잡힌 세포이들을 대포 에 묶고 인간탄환으로 처형하거나 도륙하기도 했으며 항쟁 의 실패로 무굴제국 황제가 폐위되면서 무굴제국의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영국동인도회사의 인도지배가 끝나고 대영제국이 인도에 대한 직접적인통치가 시작돼 인도제국이 됩니다. 영국은 이 항쟁으로 인도의 문화를 허용하고 구제도와 관습 을 존중하면서 지배층의 착취와 갈취, 억압과 통제를 인정하 고 식민 질서를 유지한다고 합의하므로 인종, 종교, 카스트 의 구별 없이 광범위한 계층이 규합해 영국의 식민정책을 반대했던 항쟁은 무산되고 인도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로 남습니다. 1856년에 종전한 크림전쟁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협력체제는 부활했지만 빈부격차 때문에 발생된 경제침체는 계속 이어 졌으며 빈곤에 허덕이는 대중들이 분노하고 이윤을 남기지 못한 상공인들이 반발해 체제를 유지할 수 없자 1859년 나 폴레옹3세는 일부 측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도를 정비 하려했습니다. 1861년 서유럽이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고 저항하는 것을 보 면서 충격을 받은 러시아는 나로드니키( 인민주의자( 人 民 主 義 者 ) 라는 뜻의 러시아어) 라는 조직이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꿈 - 174 -

꾸며 후진성으로 유지되는 농촌공동체를 바꿔내고 농노를 해방하기 위해 토지와 자유파 를 만들어 활약하기 시작합니 다. 농노소유자로부터의 인신해방( 人 身 解 放 ) 과 차르제의 봉건성 ( 封 建 性 ) 타도를 외치며 A.I. 게르첸과 N.G. 체르니솁스키는 비밀결사를 결성하고 농민에 대한 계몽운동을 벌였으나 187 4년 경찰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대립이 생겨 1879 년 인민의 의지파(Narodnayavolya) 와 흑토( 黑 土 ) 재분할파(Chyornyiperedel ) 로 분열됩니다. 1867년 스웨덴의 물리학자 알프레드 노벨은 실수로 니트로 글리세린을 쏟아 규토와 혼합해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 특허를 따므로 1313년 슈바르츠가 질산칼륨과 황을 혼합해 그리스의 불( 황 로진 생석회 석유의 혼합물)로 불리던 흑색화약 의 수십 배의 폭발력을 갖는 물질이 되면서 살상무기도 진 화합니다. 1868년 스페인에서 혁명이 일어나 폭정을 일삼던 부르봉왕 가가 쫓겨나자 혁명지도자들은 프로이센 빌헬름1세 국왕의 사촌 레오폴드 공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제안했으나 레오폴 드 공은 이를 거절했는데 비스마르크는 빌헬름1세의 반대에 도 불구하고 스페인에 특사를 파견하고 1870년 6월 21일 수락을 발표했습니다. 통일독일을 꿈꾸던 프로이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덴마 크(1864)와 오스트리아(1866)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여전히 프 랑스의 영향력이 더 강한 남부독일을 합병하지 못하다가 무 력으로 통일하려 했는데 러시아와 영국이 반대하므로 어쩔 수 없이 단 4개의 연방만을 독일로 편입시킨 후 영토를 늘 리려 했습니다. 프랑스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합병을 꾀하자 비스마르크 는 런던회의에서 룩셈부르크를 중립국가로 만들어 프랑스의 룩셈부르크합병을 좌절시키고 프랑스는 이에 항의해 프로이 센 인이 스페인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철회 하라는 문서를 보내므로 스페인은 1871년 혁명가 아마데오 1 세를 왕으로 선출합니다. 영국은 프랑스를 견제하려면 프로이센의 협력이 필요한데 - 175 -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이중왕국을 선포해 헝가리의 자치를 인정해야 하는 등 어수선했으며 러시아는 비스마르크로부터 흑해조약을 풀겠다는 약속을 받고 친 프로이센경향을 보였 는데 보나파르트는 엠스전보사건으로 7월 19일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엠스전보사건이란 1870년 7월 7일 프랑스의 베네딕트대사 가 빌헬름1세의 휴양지 엠스를 찾아가 스페인왕위 계승 같 은 건의 재발방지를 보장하라고 요구하지만 빌헬름1세는 관 심 없다며 거절했으며 나폴레옹3세는 프로이센이 항복할 것 을 바라면서 사실상의 " 철회 보장" 만 요구한 것입니다. 그라 몽은 서면보장을 요구하면서 협상기한을 7월 12일로 최후통첩하고 빌헬름1세는 레오폴드의 스페인왕위 수락을 동시에 취소했는데 다음 날인 7월 13일 베네딕트와 빌헬름1 세가 회동한 내용이 변경돼 영국신문에 발표되자 이를 본 나폴레옹3세가 분노를 일으키며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했 습니다. 인민들이야 전쟁으로 죽거나 말거나 자신의 명예와 통일독 일을 저지하려는 욕심 때문에 벌어진 이 전쟁은 9월 2일 스 당전투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프로이센군의 포격으로 전사하 면서도 포위망을 뚫지 못하자 나폴레옹보나파르트가 항복하 고 포로가 되면서 끝납니다. 보나파르트를 포로로 잡은 프로이센군이 파리를 포위하자 파리에서 국가방위를 위한 임시공화제정부를 수립한 기득권 들은 프랑스국민에게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완강하게 저항할 것은 요구했지만 9 월 말에 스트라스부르, 10월 말에는 메츠 요새가 함락됐으며 1871년 1월 28일 마침내 파리까지 점령 당합니다.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파리개성( 開 城 ) 직전인 1월 18일 베르사유궁전의 거울 방에서 독일제국( 도이칠란드(Deutschlan d))을 선포하고 빌헬름1세를 황제로 추대하자 이에 굴욕을 느낀 프랑스국민들의 반감을 초래했고 러시아는 전쟁이 끝 나기도 전에 크림전쟁의 패배로 흑해해협에 관해 맺었던 협 정파기를 선언했습니다. 1871년 1월 28일 휴전조약을 제안하고 논의했지만 보나파 - 176 -

르트가 황제로 왕권정치를 했기 때문에 정식강화조약을 체 결할 권한 있는 대표가 없어 2월13일 보르도에서 개회한 새 로운 의회에서 나폴레옹외교정책의 비판자인 오를레앙파의 아돌프 티에르를 공화국행정수반으로 선택합니다. 이렇게 1인이 권력을 행사하는 집행체제는 지휘하는 1인이 제거되면 다중은 결정권이 없어 결과를 도출할 수 없으므로 소수가 결정하는 구조가 아니라 다중이 논의해서 다중이 결 의하고 계획이 수립되면 자신이 결의한 것을 집행하고 스스 로 책임을 지는 자발적 다중논의 결의구조가 최상이라 봅니 다. 3월 1일 프랑크푸르트 강화조약은 프랑스는 동부프랑스 지 역 프로이센군 주둔비와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물고 알자스 와 로렌의 절반을 양도한다는 조건으로 체결되자 국민들은 황제가 전쟁을 일으키다 패했고 유산자들이 일방적으로 정 한 조약을 이행해야 할 의무가 없다며 프로이센군에게 적의 를 나타냅니다. 3월 1일 프로이센군이 파리에 입성하자 시민들은 침묵하면 서도 적의를 비치며 저항하고 소극적인 반발도 계속 일어나 며 상황이 악화되자 현지상황을 보고받은 오토 폰 비스마르 크는 통일독일이 목적이었으므로 민심을 동요해선 안 된다 며 철수를 명령해 3월 4일 프로이센군이 파리에서 철수했습 니다. 파리 시민들은 3월 3일 프로이센군과 왕조 그리고 기득권을 행사하는 유산자정부를 부정하고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국민방위대를 결성했으며 저항의 정당성을 인정 받기 위해 중앙위원회결성을 제안하고 유산자들끼리 구성한 티에르정부에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구체제의 연장선에 있는 유산자의회 티에르정부는 파리 시 민의 고통과 저항에는 무관심하면서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 해 3월 18일 농성중인 시민들이 사용하려고 국민방위대가 준비한 대포 227문을 압수하라고 정규군에게 명령하자 군인 들은 명령에 불복종하며 명령을 내리는 르콩트와 토마장군 을 사살했습니다. 그러자 유산자들로 구성된 의회는 베르사유로 도망했고 시 - 177 -

민들 사이에 숨어든 프락치와 생명을 중시한다는 종교주의 자들이 반발해 논쟁이 벌어졌는데 시민들은 국가는 국민이 안전하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도록 권리를 보장 해야 하 는데 정권과 의회는 기득권이 착취 갈취하는 행위를 보호 하려고 국민을 수탈하며 억압만 했으므로 국가가 아니다 고 결론 냅니다. 타인의 자유를 부정하고 감시 통제하며 노동력을 착취 또는 갈취해 부를 축적한 무리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면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 혈안인데 종교의 온정주의에 세뇌 돼 억압과 착취 갈취에 복종하는 사람들은 수탈질서를 유지 하기 위해 자신들을 통제 지배한 무리와 체제를 옹호하는 것입니다. 정규군과 국민방위군이 협의해 19일 양자대표가 시청을 점 거하고 중앙위원회 를 결성했으며 중앙위원회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코뮌( 인민의회)은 남녀차별 없이 모두 투표할 권리 가 있고 선출된 의원들은 임기 없이 언제든지 소수인민이라 도 자격을 박탈할 수 있으며 중앙위원회는 그 때까지 잠정 기관이라고 선언합니다. 26일 절반정도가 참여하고 선거를 실시해 85명의 의원이 선 출되자 1871년 3월 28일 코뮌성립을 선포하고 노동자들은 10 시간 노동, 제빵공의 야근철폐, 종교와 정치의 분리 등을 선포하고 야간에는 권리를 학습하며 여성권익을 위한 탁아 소를 설치해 여성을 육아와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자치적으로 운영했습니다. 파리코뮌은 프랑스를 인민들에 의한 자유로운 지방정부로 만들기 위해 풍성에 호소문을 매달아 날리자 마르세이유, 리 옹, 생테티엔, 툴루즈, 나르본, 그레노블, 리모쥬 등의 지방 에서도 파리와 같은 코뮌결성을 선언했는데 자치방위군을 결성하지 못해 혈세로 살며 학살교육만 받은 정규군의 무력 에 진압됩니다. 코뮌은 짧은 기간에 징병제와 상비군을 폐지하고 인민에 의 한 자치국민군설치, 주거보장, 관리봉급의 최고액결정, 종교 와 사유재산국유화, 공장은 노동자가 관리하고 부채를 탕감 하며 이자를 폐기하고 노동자의 노동시간과 최저생활을 보 장하며 아동의 야간노동을 금지시키고 여성참정권과 탁아소 - 178 -

를 설치하는 등 여러 가지 정책과 법령을 발표 했습니다. 파리코뮌이 널리 알려지자 기득권을 누리던 각국 정권들은 자신들의 영토로 파리코뮌사상이 전파될 것을 두려워해 티 에르정권에 조속한 진압을 주문했으며 프랑스정부군을 지원 하기 위해 독일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 벨기에, 대영 제국이 진압군을 파병합니다. 1871년 5월 21 일 시민들이 튈르리 궁전정원에서 코뮈나르( 코뮌 지지자) 전사자가족을 지원하기 위한 대규모 음악회를 개최하는 사이 미리 숨어있던 간첩으로부터 생클루 문 근처 에 국민방위군이 없다는 하얀 손수건신호를 받은 연합군이 베르사유군 맥마흔(Mac-Mahon)장군의 지휘 하에 파리로 진 입했습니다. 긴박한소식이 코뮌의회에 알려지자 의원들은 방위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코뮌군사위원회 대표 샤를 들레클뤼즈는 금 술의 군복과 금빛으로 장식한 군 장교는 싫다, 민중에게 자 리를 양보하라, 혁명의 종소리는 울렸다. < 중략..>시민여러분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싸우고 함께 죽을 것입니다. 라는 호 소문을 발표합니다. 밤이 되면서 시내로 들어온 정부군본대 2만 명과 연합군은 시민들이 비무장임에도 눈에 띄면 무차별적으로 발포하며 사살했고 파리시내교차로마다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치 열한 시가전이 벌어지면서 파리코뮌의 마지막 " 피의 일주일" 이라는 학살만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혈세로 살며 살인만 훈련한 군의 만행으로 죽은 사람의 수 는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 지만 적게는 3만 명부터 많게는 5만 명이라는 주장이 있으 며 코뮌이 점령되자 기득권들은 코뮌사상이 알려질 것이 두 려워 시민 10만여 명을 체포하고 4만여 명을 군사재판에 회 부했습니다. 코뮌에 참여했던 7,500명의 인사들은 프랑스식민지인 누벨 칼레도니로 종신 유배되기도 했고 파리코뮌의 평등과 자유 주의사상에 놀란 미국보수언론들과 개신교목사들은 파리코 뮌 같은 자유주의운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평등과 분배를 주장하는 것은 빨갱이 사상이라며 노동운동을 탄압해야 한 - 179 -

다고 선동합니다. 파리코뮌이 무너지자 유산자의회는 티에르를 대통령으로 인 정하고 제 3공화국을 출범시켰는데 1873년 빈부격차로 발 생된 공황으로 민중들이 반발하자 티에르는 자신을 지지한 왕당파를 버리고 공화주의에 동조하므로 왕당파가 그를 해 임하고 5 월 군사령관 맥마흔으로 교체했습니다. 미하일 바쿠닌은 1848년 프라하의 봉기와 1849년 드레스덴 봉기에 참가했다 체포돼 1857년 러시아정부로부터 시베리아 에 유형 됐지만 1861년 탈출하고 1863년 폴란드의 무장봉 기와 1864 1868년 이탈리아혁명에 참석했던 자신의 경험 들을 정리한 사상을 1871년 신과 국가 에 발표합니다. 1868 년 스위스로 이주해 비밀혁명전위대인 사회민주주의동 맹 을 설립하고, 착취주의사회를 범세계적인 자유주의연방으 로 통합시키는 목적으로 설립한 유럽노동자당 연합체인 제1 인터내셔널(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했으나 1872년 마르크스가 헤이그대회에서 다수란 명분으로 바쿠닌과 동료들을 축출해 쫓겨납니다. 이때부터 사상논쟁은 조직주의로 분열하고 숫자를 내세운 힘겨루기 다툼으로 변질되는데 바쿠닌이 저술한 압제의 제 국독일과 사회혁명 L'Empire Knouto-germaniqueetla révolution sociale (1871) 및 무정부주의 사회 Staaten anarchie (1873) 는 마르크스와의 사상논쟁을 다룬 것이라고 합니다. 바쿠닌은 완전한 자유주의혁명은 폭력을 통한 기존질서의 파괴라며 무장투쟁을 역설하므로 에스파냐 이탈리아 러시아 에 영향을 미치지만 권력을 부정하며 인민들을 정치적 통제, 집단독재, 권위주의로 복종시키려고 새로운 지배조직을 만드 는 것은 평등한 사회가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바쿠닌은 공산주의정당을 만들고 프롤레타리아 집단독재를 통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공산주의로 가는 단계라는 마르 크스의 주장을 관료주의 집단독재라고 반박했으며 생산에 있어서는 모두가 함께 참가하고 그 재산을 공동분배해도 개인에게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 는 주장으로 러시아의 니 힐리즘에 영향을 줬다고 평합니다. 혁명적 독재와 평등주의의 차이점은 겉모습일 뿐이고 그 둘 - 180 -

은 소수의 지성 과 다수의 어리석음 을 가정하는 다수에 대 한 소수의 지배라는 동일한 원리로 그 둘은 머지않아 통제 지배하는 소수의 정치적, 경제적 특권으로 대다수민중의 정 치적 경제적 종속을 유지하는 점에서 지배논리가 됩니다. 1875년 독일고타에서는 F. 라살이 이끌던 전 독일노동자동맹 과 A. 베벨 및 W. 리프크네히트가 당수로 있던 정당들이 통합 되면서 독일사회 민주노동당이라고 했는데 18 78년 독일의 비스마르크정부에 의해 불법정당으로 제재 받고 유명세를 타고 번창해져 1889년 제2 인터내셔널의 창설을 돕습니다. 1882년 6월 일본에서 은행조례가 공포되고 10월에 일본은 행이 만들어지면서 초대총재로 요시하라 시게토시[ 吉 原 重 俊 ] 가 업무를 시작했고 1885년에 일본은행권을 은 본위 태환은 화를 발행하며 발권을 시작해 1899년 12월에 기존 국립은 행 및 정부지폐통용( 유통)을 금지하고 일본은행권으로 일원 화시킵니다. 전기의 발전 기원전 550년경 고대그리스 철학자탈레스는 보석인 호박( 고 대는 귀한 보석)을 깨끗하게 닦기 위해 베 조각으로 문지르다 호박주위에 있던 먼지와 실 새털 천조각 등 가벼운 물질들이 호박에 붙는 것을 보고 연구를 거듭해 마찰전기의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전기에 대해 몰랐던 고대그리스 사람들은 마찰전기에 의해 호박이 물질을 끓어 당기는 것을 보고 호박 속에 신( 神 ) 이 있다고 믿으며 호박을 호신용부적으로 달고 다녔으며 철학 자들 사이에는 마법의 돌로 불렸고 탈레스는 흡인력이 우주 를 지배하는 새로운 요소로 알았으며 이때부터 호박을 전자 (electron)로 불렀다고 합니다. 1600년 영국의 의학자길버트는 양의 전기와 음의 전기가 끌 어당기는 마찰전기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하고 저서 DeMag nete ( 전자기론) 에서 Electrica 로 명명했는데 1646년 영국 의 브라운이 저서 Pseudodoxia Epidemica ( 유행하는 외견상 의 도수관)에서 전기(Electricity)라는 단어를 사용하므로 전기 로 불리게 됩니다. 길버트가 발표한 가설에 자극을 받은 당시 학자들은 여러 - 181 -

가지 물질에 대해 같은 실험을 반복하다 마찰전기에 의해 불꽃방전이 생기는 것도 발견했으며 불꽃방전 때 생기는 발 광을 모을 수 없을까 궁리하다 1746년 네덜란드 라이덴대학 의 뮈센브뢰크가 유리용기에 물을 넣고 전기를 모으는데 성 공했다고 합니다. 1747 년 미국의 프랭클린은 ' 일류체설'( 一 流 體 說 ) 을 발표하면 서 전기유체( 電 氣 流 體 ) 는 그것에 여분으로 있으면 (+) 전기가 되고 부족하면 (-) 전기가 되는데 유리전기 쪽을 (+) 전기, 수지전기 쪽을 (-) 전기 라고 칭하므로 오늘날 전기를 사용 하는데 플러스극과 마이너스 극이라고 이름 붙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1752년 미국의 프랭클린은 당시 많은 사람들과 같이 자연에 서 발생하는 번개현상을 실험실에서 생기는 불꽃방전과 같 은 전기로 보고 연을 날리는 실험을 통해 번개는 불꽃방전 과 같은 전기라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전기를 모으는 장치인 축전지의 이름을 대학이름을 따 라이덴병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전기를 모아놓은 라이덴병이라 부르던 축전지를 사람이 손 으로 만지면 전기에 의해 강력한 충격을 받자 이 현상을 충 격놀이라 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는데 1776년 일본의 에도 ( 江 戶 ) 시대 후기 히라가( 平 賀 源 內 ) 가 충격놀이를 즐기다 마찰 전기를 발생시키는 기전기를 발명했다고 합니다. 1777년 독일의 리히텐베르크는 절연물의 표면상에서 불꽃방 전을 일으키는 실험을 하다 황의 착색분물이 절연물의 표면 상에서 방전을 진전하는 과정이 색도형으로 기록됐는데 음 의 전하를 띤 황백색의 황 분말이 한쪽에만 부착돼 있는 사 실을 발견하고 불꽃방전을 일으키면 양극성의 전하가 남는 현상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1785년 프랑스 쿨롱이라는 사람이 양전기와 음전기가 끌어 당기는 현상을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은 현상 으로 보고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발견한 것이 쿨롱의 법칙 이며 마찰전기를 이론적으로 통일했는데 모든 전기현상은 전하가 시간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조건으로 한 것을 정전기 ( 靜 電 氣 ) 현상이라 정의됐습니다. - 182 -

1791년 이탈리아의 의학자갈바니는 개구리를 해부하던 중 주변에서 불꽃방전이 발생하면 그 불꽃발생과 동시에 죽은 개구리다리가 움직이는 현상을 발견하고 개구리체내의 신경 에 전류가 닫으면 신경이 반응하게 되므로 전류가 흐른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이때부터 전류가 흐르는 현상을 갈바니 전기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1799년 이탈리아물리학자인 볼타는 현재 전지와 같은 원리 로 작동하는 전기발생장치를 발견해 전류를 연속으로 발생 시킬 수 있게 되므로 동전기시대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으 며 1873년 영국맥스웰의 가설로 흡인작용과 반발작용으로 동작되는 정전기현상과 전류에 동작하는 동전기현상을 통칭 해서 전기라고 합니다. 1868 년 에디슨은 전기투표기록기( 投 票 記 錄 機 ) 를 발명해 최초 로 특허를 받았으며 1869 년에는 주식상장표시기( 株 式 上 場 表 示 機 ) 를 발명해 생긴 돈으로 뉴저지 주의 뉴어크에 공장을 세우고 1871 년에 인자전신기( 印 字 電 信 機 ), 1872년에 이중전 신기, 1876 년에 탄소전화기를 발명했습니다. 1876년 연구소를 멘로파크로 옮기고 1877 년에 축음기, 187 9년에 백열전등을 발명하고 1887년에 다시 연구소를 웨스 트오렌지로 옮겨 1891 년에 영화촬영기 영사기 1891~190 0 년에 자기선광법( 磁 氣 選 鑛 法 ) 과 에디슨축전기 등을 발명하므 로 오늘날 까지 사용되고 있는 전기와 영상기록장치가 발전 하게 된 것입니다. 1879년 영국의 물리학자 J.J. 톰슨은 여러 가지 연구를 하면 서 전기는 아주 미세한 입자로 구성돼 있다는 것을 발견했 으며 이 작은 입자의 호칭을 전자라 불렀고 전기는 이 전자 들의 이동에 의해 발생되는 현상임을 처음으로 밝혀내면서 전기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됩니다. 에디슨은 모든 사람들이 전기를 안전하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소켓 스위치 안전퓨즈 적산전력계( 積 算 電 力 計 ) 배전 방식 등을 고안하고 효율이 높은 발전기와 배전반( 配 電 盤 ) 의 설계와 배전 충전 발전에 이르기까지의 전 기기체계( 機 器 體 系 ) 를 만들고 1882년에 세계 최초로 중앙발전소와 에디슨 전등회사를 건설합니다. - 183 -

에디슨은 대학 강의를 경멸하고 보통교육에 대해서도 현재 의 시스템은 두뇌를 하나의 틀에 맞추기 때문에 독창적인사 고를 길러내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만들어지고 있는 가의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다. 라고 비판하면서 천재란 99 % 가 땀이며 나머지 1% 가 영감이다 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 겼습니다. 학자라는 직업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을 연구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를 인정하는 틀 속에 자신이 습득한 지식을 인정받아야 학자로 임명 될 수 있으며 교육내용은 자신이 습득한 내용을 체제와 제도 안에 서 살아남거나 성공하라며 기득권이 되는 방법을 가르칠 뿐 평등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모터의 발견 모터를 전동기( 電 動 機 ) 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회전력( 回 轉 力 ) 을 발생시키는 기계로 전기적 에너지를 역학적 에너지로 바꾸 는 장치로 공장이나 가정에서 널리 쓰이며 자동차, 냉장고, 드라이어, 배수펌프, 에어컨, 보일러, 컴퓨터 등 부착되지 않 은 곳이 없어 가전제품의 90% 이상이 모터의 힘을 사용합 니다. 1873년 빈에서 세계박람회가 열렸을 때 전시했던 여러 대의 발전기는 증기기관을 구동시켜 발생되는 동력으로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생산했는데 조수 한사람이 발전중인 발전기와 정지중인 발전기를 실수로 접속시키자 증기기관이 연결되지 않아 돌지 않으리라 판단했던 발전기가 갑자기 돌기 시작했 습니다. 깜짝 놀란 담당자들이 여기서 생각하게 된 것이 증기기관이 구동시키는 축을 연결하지 않고 발전기에서 생산되는 전기 만으로도 회전하는 기관( 모터)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 을 알게 됐으며 모터나 전동기의 구조는 발전기와 같은 원 리로 만들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후 플레밍은 전기연구에서 왼손의 가운데손가락, 집게손 가락, 엄지손가락을 서로 직각이 되게 벌리고, 가운데손가락 을 전류의 방향으로, 집게손가락을 자계의 방향으로 하면 힘 의 방향은 엄지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아주 편리한 법칙을 발견해 모터의 회전방향을 정할 때 사용하게 - 184 -

됐습니다. 오늘날 사용하는 모터를 발명한사람 이라고 하면 영국의 물 리학자 마이켈 패러데이(Michael Faraday:1791~1867)와 미국 의 전기 물리학자 조셉 헨리(Joseph Henry:1798 ~1878)로 알 려졌으며 패러데이의 위대한 발견[ 전자기유도]이란 논문에서 출발해 변압기와 발전기를 만들었고 그 후 모터원형이 만들 어 졌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조셉 헨리(Joseph Henry)는 패러데이와 거의 같은 무 렵에 전자기모터의 원형을 만들었는데 단지 연구발표가 늦 었을 뿐 헨리가 패러데이보다 빨리 전자기유도를 발견했고 모터발명도 헨리가 최초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 디까지나 주장일 뿐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패러데이가 발견한 이론입니다. 자동차의 출현 르네상스시대의 대예술가이며 과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 치는 1482년 봄 어느 날 성당에 걸린 벽시계의 태엽을 감다 실수해 태엽 감는 키가 튕겨져 나오면서 이마를 맞아 크게 다쳤는데 그 태엽이 풀리는 힘을 이용하면 바퀴를 굴러가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안해 태엽자동차를 구상했다고 합니 다. 이렇게 만든 자동차는 멀리 갈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실용성 이 없었고 그 후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다 1600년경 네덜란 드의 시몬 스테빈이 돛단배에 바퀴를 달아 풍력으로 움직이 는 자동차를 고안했으나 이 역시 바람이 불어야 움직일 수 있고 조향타( 요즈음 말로 핸들)가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 용할 수 없었습니다. 1765년 제임스와트가 증기엔진을 완성하자 1769년 프랑스 군인인 니콜라 죠셉 퀴노(Nichoolas Joseph Cugnot)는 증기 엔진의 힘으로 대포를 옮길 수도 있다고 생각해 1 771년 포 차 견인용 증기삼륜차를 만들었는데 퀴노가 발명한 증기차 는 무거운 보일러와 2개의 실린더가 앞바퀴에 얹혀 방향이 틀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후 움직이는 운반체를 연구하다 1780년에 알레산드로 볼 타라는 사람이 전기방전에 의해 수소를 연소하며 움직이는 - 185 -

장난감을 만들었고 1806년 스위스의 프랑수아 이삭 리바츠 가 수소와 산소를 이용하는 내연기관을 개발했으며 1823년 엔 사무엘 브라운이 레오나르도 행정 이라 부르는 압축행정 없는 내연기관을 특허로 등록합니다. 1824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니콜라스 레오나드 사디 카르노 가 온도 차를 가져오는 압축행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 했으며 1826 년 사무엘모레이가 압축공정이 없는 기체 및 증 기기관 의 특허를 받았고 1838년 영국의 윌리엄 바르넷이 최초로 실린더가 작동하는 방식의 내연기관을 개발해 특허 를 냈습니다. 1839 년 영국의 앤더슨(Anderson)이 전기자동차를 제작했고 1873년 프랑스의 가스통플랑테가 축전지를 발명해 전기자동 차를 만들었으나 충전할 수 없어 사라졌으며 1899년 프랑스 의 제나찌(Camille Jenatgy)가 100km/h가 넘게 달릴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들었지만 1회 충전으로 주행거리가 길지 않고 멀리 갔다 전기가 없으면 돌아 올 수 없기 때문에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1854년 이탈리아의 에우게니오 바르상티와 펠리스 마테우치 가 런던에서 내연기관 특허를 획득하고 1856 년에 폰드리아 데 피그노네 가 바르상티-마테우치가 특허 낸 엔진을 개량 해 5마력의 가벼운 엔진으로 제작한 것이 더욱 개량돼 두개 의 실린더를 이용하는 엔진으로 발전했습니다. 1860년 벨기에의 에티에네 르느와르는 실린더와 피스톤 그 리고 주 연봉으로 구성해 내연기관에 휘발유를 발화시켜 사 용할 수 있는 내연기관을 만들었으며 1862년 독일의 니콜라 우스오토가 라겐의 도움을 받아 합작으로 등유를 이용한 내 연기관을 발명하면서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기초를 만들었 습니다. 1876 년 니콜라스 어거스트 오토(Nikolaus August Otto)가 4행 정 사이클 내연기관을 완성했지만 엔진의 부피가 크고 무거 워 실용되지 못하다가 1870년 오스트리아 빈의 지크프리트 마르쿠스가 가솔린엔진을 손수레에 장착하고 움직이게 하므 로 최초로 움직이는 운송기구가 탄생하게 됩니다. 내연기관이 발전해 오면서 1884년 독일의 다임러벤츠사의 - 186 -

엔지니어가 길이는 길지만 오토보다 높은 출력을 내는 가벼 운 엔진을 개발하고 보조바퀴가 장착된 모터사이클을 만들 어 움직이게 하므로 세계 최초로 가솔린기관엔진을 부착한 자동차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내연기관[ 內 燃 機 關, internal combustion engine] 은 연료가 기 관의 내부에서 에너지를 연소시키면서 생긴 열에너지인 연 소가스로 피스톤 또는 실린더 내에서 터빈블레이드( 깃) 등이 움직이게 하는 열에너지를 기계적인 힘으로 바꾸는 기관을 말하며 가스터빈 제트기관 로켓 등도 내연기관이라고 부릅니 다. 내연기관은 사용되는 연료에 따라 가스기관 가솔린기관 석유 기관 디젤기관 등으로 분류하는데 석유 가스 가솔린기관은 점화플러그( 점화전)에 의해 전기불꽃으로 발화할 수 있지만 디젤기관은 연료를 고온 고압의 공기 속에 압축했다가 분사 하면서 자연발화 시키는 것입니다. 내연기관은 1. 흡입 2. 압축 3. 폭발 4. 배기 과정을 반복하는 것을 4행정이라 하는데 1. 흡입은 연료와 산화제( 공기)를 기 관 안으로 빨아들이고 2. 압축은 기관안의 연료가 타면서 열 을 발산해 기관 안이 팽창되는 것이며 3. 폭발은 압축된 공 기가 피스톤을 밀어내고 4. 배기는 산화된 기체를 밖으로 내 보내며 움직이는 힘을 만들어냅니다. 1894년 독일의 엔지니어 루돌프디젤은 불꽃이 있어야 시동 을 걸 수 있는 휘발유엔진은 언제든지 불꽃에 의해 위험해 질 수 있다고 판단해 보다 안전한 엔진을 만들기 위해 노력 하다 엔진기관 안에서 공기를 매우 압축시켜 얻은 높은 열 로 기름을 태워 폭발시키는 압축착화기관인 디젤엔진을 발 명했습니다. 디젤엔진은 에너지비용이 저렴하며 효율이 높고 안전해서 경제적이라고 알려지면서 유럽과 미국사업가들이 몰려 광산, 공장, 선박, 기차, 건설장비, 트랙터, 경운기 등에 사용되는 데 엔진과 전기, 모터가 발명되자 이를 접목해서 자동생산기 계로 발전시키므로 인류는 비약적인 생산력발전을 가져옵니 다. 생산의 자동화 - 187 -

유럽이 분배불균등으로 발생된 빈부격차를 해소할 수 없어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며 요동칠 때 엔진과 모터, 전기의 발 전은 생산기계를 자동화시켜 소수의 노동만으로도 엄청나게 많은 물질을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물질을 생산하는 산업 사회가 아니라 물질을 판매하기 위한 상업사회로 발전합니 다. 상업사회가 되자 생산노동 없이 화폐로 이자놀이만 하며 타 인을 갈취해 부를 축적하는 금융업자들과 타인의 노동생산 물에 이윤을 남기고 판매해 부를 축적하는 계층들은 늘지만 남보다 싸게 만들고 남보다 싸게 팔아야 살아남는 경쟁 때 문에 모두에게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하니 생산하는 노동자 들은 빈곤해지고 굶주립니다. 소수의 생산노동만으로 물질이 풍부하게 생산되자 기득권들 은 수입 없는 다수 인민들이 저항하지 못하게 통제하기 위 해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도 생산자보다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는 각종 관료( 임금노예며 노예관리자)들을 만들어 안정적인 급료를 지급하면서 위계질서를 형성하고 충성을 강요합니다. 상명하복의 계급체계는 말잘 듣는 철 밥통들을 만들어 각종 세금과 범칙금, 과태료 등의 명분으로 인민들을 수탈하고 징 수하기 위해 통제하며 억압할 수 있는 각종 법률을 입안하 면서 모든 인민들이 착취와 갈취당하는 체제와 제도에 자연 스럽게 통제당해도 복종하도록 길들이는 도구가 돼 철저한 계급사회를 만듭니다. 관료들을 기득권을 차지한 무리들의 명령에 복종하고 충실 히 수행하는 기계로 세뇌시키기 위해 국가를 강조하며 충성 은 대단히 위대한 사람만 할 수 있는 행위인양 부추기면서 충성경쟁을 강요하는데 훈련이 잘됐다는 것은 인간성을 상 실하고 명령에 복종하는 로봇이 됐다는 의미입니다. 관료를 늘리는 것은 다중 인민들을 억압하고 관리하며 통제 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 수입 없 이 무위도식하던 사람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므로 소비를 유 도해 공장에서 물질을 생산하는 기업주와 판매하는 상인들 에게 이윤을 보장하면서 기득권들이 부를 늘리고 체제를 유 지하는데 이용합니다. - 188 -

한편으론 거짓학술과 문화 예술 광대놀음과 도박 잡기 스포츠 등을 퍼트려 다중이 진실은 파악할 수 없도록 시간을 빼앗 고 다수 인민들의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하고 노동력만 착취 하는 체제와 제도로 분배불균등이 생기고 분배불균등으로 빈부격차가 발생되며 공황이 온다는 사실을 은폐하려 혈안 입니다. 임금노예들이 새벽잠 저녁잠 못자고 감시 통제 속에 죽도록 노동해도 생활이 어려운 것은 아무리 부지런히 일해도 공장 을 개인이 소유하고 노동자를 임금노예로 부리며 착취하고 해고하는 제도 때문에 빈곤해지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개 인이 게으르거나 무능해서 가난해 진다는 거짓을 퍼트립니 다. 생산수단은 유산자나 후일 빼앗길 사기꾼만 소유할 수 있고 부가 축적되는 것은 생산자가 땀 흘려 창출한 물질에 이윤 을 포함해서 넘기는 공장( 기업)주들과 물질에 가격을 올려 판매라는 갈취로 부를 축적하는 상인들이고 임금노예들은 소비자일 뿐 부를 축적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은폐합니다. 공장주의 지나친 부의 축적을 저지하려 가격을 낮추면 생산 노예를 해고해 임금을 줄이고 더 강한 노동을 강요하는 노 동력착취로 자신의 이윤을 남기기 때문에 절대로 공장주나 상인들은 가난해지지 않으며 죽도록 노동하는 생산자들만 지옥 같은 노동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빈곤에 허덕이며 가 난해집니다. 노동이 인정되려면 8시간 노동으로 생산한 물질을 8시간분 의 임금으로 취득할 수 있어야 하지만 관료들을 위해 생산 제품에 세금을 부과하며, 노동자를 혹독하게 관리하고 감시 하는 관리자, 물질을 판매하는 상인들과 운송업종사자, 기업 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12시간 혹은 15시간의 노동력을 지불해야 취득할 수 있게 됩니다. 생산노동으로 거지 사기꾼 종교인 도둑 등 전체 모든 인류가 살아갈 수 있음에도 물질을 생산하는 생산노동종사자들은 저임금과 실업으로 빈곤해지고 건설노동자들은 새벽잠과 저 녁잠을 못자며 생명에 위협을 받고 무거운 물질을 취급하며 고공노동으로 주택을 건설해도 정작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주택은 소유하지 못합니다. - 189 -

관료들은 다중이 채용하거나 선출하지 않았음에도 혈세로 월급 받고 혈세로 교육과 훈련을 받으며 혈세로 마련한 장 비로 수단방법가리지 않고 국민의 생각할 시간을 뺏을 방법 을 연구하고 법과 세금이란 명분으로 다중들을 억압하며 수 탈하려 혈안이 돼 뇌물을 받고 향연을 요구하며 체제유지를 위해 소비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혈세로 다중을 억압 통제하며 소비를 조장하는 관료들을 많 이 고용해 다수가 소비를 못해 상품을 팔지 못하고 인류가 멸망하는 공황이 발생될 때 이성과 양심도 없이 폭력 로봇 이 돼 굶주린 노동자들의 저항을 무력으로 억압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1873년 발생된 공황은 생산기계가 자동화되면서 주기가 빨 라져 소비하는 관료를 만들어도 소비할 수 없을 만큼 생산 되자 서비스직과 예술 문학 스포츠 광대 등 소비하는 계층을 만들고 수입을 보장하면서 억압받는 생산자들과 동조하지 못하게 분열시켜 생산노예들은 통제와 억압 속에 노동력 착 취만 극심해졌습니다. 1886년 미국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부를 축적한 기 업주들과 상인들은 백 달러짜리 종이돈으로 담배를 말아 피 울 때 1주일 내내 노동하고도 1달러 75센트 밖에 받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리다 참지 못한 노동자들이 시카고를 중심으 로 자신들도 인간이라고 인간으로 살 권리가 있다며 단결하 고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감시와 통제 속에 굶주림과 저임금으로 생활하던 노동자들 의 저항소식이 전국으로 퍼지자 1886년 5월 1 일을 기해 8 시간 노동 을 요구하며 총파업에 돌입했는데 경찰이 파업농 성을 하던 노동자들을 향해 경고도 없이 무자별적으로 총을 발포하므로 어린소녀를 포함한 노동자 6명이 사망하는 사건 이 발생했습니다. 분노한 노동자 시민들이 5월4 일 노동기사단 주도로 헤이마 켓광장 에 모여 경찰의 살인 만행을 규탄하는 평화집회 를 여는데 경찰이 강제로 해산할 것을 명령한 직후 폭발물이 터지며 경찰 66명이 부상하고 7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 나자 경찰은 즉각 시위대에 총기를 발사해 수많은 시민과 노동자가 사살당하고 해산됩니다. - 190 -

경찰과 기득권들은 노동자와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던 무정 부주의자 등 앞에 나섰던 사람 8명을 폭탄테러범으로 체포 하고 판사들은 8명중 5 명은 사형, 3명에게는 금고형을 선고 했는데 이 폭탄테러사건은 훗날 노동자들의 저항을 진압하 기 위해 기업주와 경찰이 짜고 조작한 사건이었음이 밝혀졌 습니다. 이렇게 혈세 내는 국민의 자유를 억압 통제하며 이성과 양심 도 없이 폭력로봇이 돼 상명하복의 명령을 수행하며 법이라 는 핑계로 국민을 수탈하도록 길들여진 사법권을 행사하는 무리들은 착취와 갈취로 빈곤해져 굶주린 인민들이 저항하 면 조직 안에서 반골인 사람들을 학살하며 무력을 사용할 명분을 조작합니다. 실상을 알 수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현장 파업지도자인 엘 버트 파슨즈가 형장에서 숨을 거두며 민중의 소리를 들으 라. 는 말을 남기고 산화했으며 1889년 파리에서 열린 제2 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이날을 기념해 5월 1일을 만국 노 동자들의 날( 메이데이)로 정하고 8시간 노동을 목표로 투쟁 한 것입니다. 1887년 11월 13일 발생된 과잉생산공황으로 평생 죽도록 노동을 하고도 굶주리던 영국 노동자들은 런던 트라팔가 광 장에 모여 평화롭게 시위를 하는데 노동자들의 시위가 확산 될 것을 두려워한 군경이 폭력적으로 진압해 2명이 사망하 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것을 피의 일요일사건(Bloody Sund ay)이라 합니다. 1892년 미국의 거부가 된 카네기는 1872년 미국최대 규모 인 홈스테드 철강소를 세우고 4,000여명의 비숙련 노동자를 고용해 하루 12시간씩 노동을 강요하며 주당 9달러의 임금 을 지급하던 것을 자동생산기계를 도입하고 임금을 더 삭감 하겠다고 하자 800여명의 조합원과 3,000여명의 비숙련공노 동자들이 파업했습니다. 자신들은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를 말아 피우면서 노동자 에게는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임금을 지급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더욱 삭감하겠다고 하자 분노한 노동자들은 임 금삭감을 반대하고 1일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협상하지 않으면 파업하겠다고 선언합니다. - 191 -

카네기를 대신해 공장을 관리하던 헨리클레이 프릭은 기능 공이 없어도 자동화시스템으로 물품을 생산할 수 있고 실업 자가 넘쳐 노동자들은 쉽게 고용할 수 있어 노동자들의 요 구를 묵살하고 오히려 공장주변 3마일에 가시철조망을 치고 탐조등을 설치하며 핑커튼 흥신소에서 무장한 사설경비대 300 명을 고용했습니다. 분노한 노동자들이 더욱 많이 집결해 공장과 경비원들까지 포위하며 협상을 요구하자 카네기는 노동자와 협상하지 않 고 정부의 주지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주지사는 주정부연 방군을 파견해 무력으로 진압하므로 무장하지 않은 노동자 들은 4개월 만에 주정부군 총탄에 10명이 죽고 60명이 부 상하며 진압 당합니다. 당시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던 알렉산더버크만과 엠마 골드 만 등은 무력학살과 진압에 분노해 자신의 동료들과 홈스테 드 제강사건의 핵심에서 있던 프릭을 암살하려다 부상만 입 히고 체포됐으며 카네기는 노동자에게 저임금과 12시간 맞 교대로 근무하도록 강요해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며 부를 축적해 거부가 됩니다. 1892년 러시아 크로폿킨은[ 빵의 정복 LaConquêtedu pain] 18 99년엔[ 어느 혁명가의 추억 Memoirs of arevolutionist] 1902년 엔[ 상호부조론 MutualAid, afactor of Evolution]등 저서를 발표 하는데 실업자는 증가하고 임금은 삭감됐으며 지가가 폭등 하자 굶주리고 억압받던 노동자들은 반정부운동을 유산자들 은 입헌운동을 벌입니다. 1894년 조선에서는 탐관오리들의 수탈과 신분차별로 죽도록 일하고도 굶주리던 소작농들과 노비들이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가혹하게 노동력만 착취하는 악독한 양반들을 살해 하는 살상( 殺 傷 契 ) 계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했던 것이 수탈 에 굶주리다 동학농민전쟁으로 확대됩니다. 사람취급을 못 받고 억압당하던 노비와 머슴, 소작농들의 저 항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조선 군병만으로 민중들을 통제 할 수 없게 된 조선기득권( 양반과 왕조)들은 타국의 무력으로 농민군을 억압하기 위해 병사를 요청해서 조선통치권을 놓 고 청 일간 전쟁이 벌어졌는데 승리한 일본이 1904년 조선 에 병사를 주둔시킵니다. - 192 -

러시아에서는 나로드니키[ 人 民 主 義 ] 의 전통을 이어받은 농민 들이 활동하면서 알렉산드르2세를 암살하는 등의 성과를 올 리며 지하에서 암약하다 1901년 말 지도자로 V.M. 체르노프, A.F. 케렌스키, B.V. 사빈코프 등을 선출하고 기득권요인들을 암살하고 무장투쟁하자며 러시아 사회혁명당[ 社 會 革 命 黨, 농 민정당]을 창당했습니다. 1903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자 러시 아가 1904년 일본과 전쟁을 시작했다 패하고 1905년 러시 아에서는 14만의 굶주린 노동자들이 1월9일 상트페테르부르 크에서 차르 니콜라이2 세 초상화와 기독교 성화상(icon) 그 리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적은 청원서를 들고 시위했습니다. 사회개혁론자이자 러시아정교회사제인 가폰(Georgy Gapon) 신부의 인솔아래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를 요구하며 왕궁을 향해 평화적으로 행진하는데 군경의 발포 로 500 600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이 부상하는 대형유혈사 태가 발생해 차르를 하느님처럼 떠받들던 러시아민중들이 반발하기 시작합니다. 일요일에 벌어진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시작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수도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들어가면서 전국으로 확산 됐고 5월에는 각지에서 군과 무력충돌이 발생했으며 6월 말 에는 포테톰킨호( 號 ) 의 반란이 일어나고 10월에는 모스크바 철도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벌이자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발 전하며 혁명전선이 됩니다. 니콜라이 2세는 10 월 국민에게 신교( 信 敎 )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와 입법권을 갖는 제헌의회를 창설할 것을 약속하는 선 언을 발표하지만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불평등과 억압에 시 달리는 노동자편에선 병사들은 계속 저항하다가 12월 하순 엔 모스크바노동자들이 10 일간 무장봉기를 일으킵니다. 입헌정부를 요구하며 혁명을 외치던 유산자와 기회주의자들 은 차르의 10월 선언에 만족하고 더 이상 저항은 의미 없다 며 멈출 것을 강조해 찬반을 둘러싸고 저항했던 주체가 분 열되면서 1906년 5월 최초로 간접선거에 의한 민선의회인 두마(Duma)가 구성되고 러시아혁명은 실패로 끝납니다. 1904년 8월 22일 조선에 병사들을 파병하고 무력으로 조선 - 193 -

을 장악한 일본은 강압적으로 재정( 財 政 ) 과 외교( 外 交 ) 부문 에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 顧 問 ) 을 둔다는 내용의 외국인용빙 협정( 外 國 人 傭 聘 協 定, 제1 차 한일협약) 을 체결하고 1905년 11 월 17일 대한제국( 大 韓 帝 國, 이하 한국) 과 한일협상조약( 韓 日 協 商 條 約 ) 을 체결합니다. 을사( 乙 巳 ) 라는 명칭은 1905 년이 육십갑자의 간지( 干 支 ) 에 해 당돼 칭하는 것으로 명목상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 保 護 國 ) 이 돼 을사보호조약( 乙 巳 保 護 條 約 ) 이라고 칭했었으나 보호국이 라는 명칭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植 民 地 ) 한 것을 미화하 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발하므로 을사조약 이라는 명칭 으로 바뀝니다. 을사오조약( 乙 巳 五 條 約 ) 혹은 을사늑약( 乙 巳 勒 約 ) 이라 하는데 5 개 항목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금지하고 통감부( 統 監 府 ) 와 이사청( 理 事 廳 ) 을 둔다는 내용으로 개항장과 13개 주요도시 에 이사청을 두고 11 개 도시에 지청( 支 廳 ) 을 설치하면서 통 감부는 병력동원 권과 시정감독권을 장악하므로 최고 권력 으로 식민통치가 시작됩니다. 미국에서는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부를 축적한 계층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자신들이 마음대로 은행을 설립하고 화 폐를 발행하던 것을 중단시키고 국가가 관리하기 위해 1913 년 발효된 연방 준비은행법에 의해 12개 산하연방 준비은행 과 연방공개시장위원회, 연방자문회의 등을 구성하고 연방 준비은행을 설립합니다. 연방 준비제도이사회는 법정 한도 내에서 12개 산하연방 준 비은행 회원은행들의 준비금 요구사항과 할인율을 검토 결정 하고 이사회 회원은행의 예산을 심의하며 12개 연방 준비은 행은 공익을 위해 설립된 민간 기업으로 9명의 이사회가 운 영하며 이사 중 6명은 회원은행들이 3명은 연방 준비제도이 사회에 의해 임명됩니다. 광산노동자들의 저항 미국의 콜로라도 주 트리니다드 북서쪽 19Km에 위치한 루 드로 광산에서 석탄을 생산하던 광부들은 다른 탄광보다 20% 나 적은임금(1일 1달러68 센트)을 지급하며 채굴한 석탄 톤수를 속이고 무임금노동을 강요하며 회사가 제공한 집과 - 194 -

상점에서 비싼 가격으로 물건을 구입해야하는 억압 통제 속 에 빈곤하게 생활합니다. 당시 광산은 록펠러가문소유의 콜로라도 퓨얼 & 아이언 컴 퍼니(Colorado Fuel & Iro n Company, CF&I)과 로키마운틴 퓨 얼 컴퍼니(Rocky Mountain Fuel Company, RMF), 그리고 빅터 - 아메리칸 퓨얼 컴퍼니(Victor-American Fuel Company, VAF) 라는 세 개가 가장 큰 탄광으로 서로 많은 이익을 내기 위 해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각 광산들은 광부들이 뭉치지 않아야 쉽게 통제하고 사망재 해가 발생해도 큰 보상 없이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기 때문 에 주로 동유럽, 남유럽, 멕시코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을 광 부로 고용했는데 여러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을 섞어 의사소 통을 힘들게 하므로 노동자들이 뭉쳐 저항하지 못하도록 관 리한 것입니다. 이렇게 노무관리시스템을 구성한 광산주들은 광부들의 안전 을 위한다는 핑계로 회사 내에 광부들이 채굴한 석탄 이익 금으로 급여를 지급받는 안전 관리자들과 자체보안대를 설 치해서 통제 착취하면서 광부들에게 생명을 건 위험한 노동 과 무임금노동을 강요하며 부를 축적해 거부가 됩니다. 먹을 것도 못 먹고 잠잘 시간도 없어 깡마른 광부들은 하루 12시간 이상씩 노동하며 1달러 68센트의 임금을 받고 회사 가 지정한 사택에 비싼 주거비를 지불하고 회사가 설립한 상점에서 강제로 비싼 가격의 물건을 구입하며 회사가 지정 한 의사에게만 진료를 받아야 하는 규정에 묶여 통제당하고 착취당한 것입니다. 광산주들은 광부도 사람이라는 생각을 깨우치지 못하게 하 기 위해 매일 매일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노동력을 착취했고 복종하는 비조합원들은 배려하지만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조합원들은 일상에서 실수가 발생되도록 조장하고 사소한 실수가 발생하면 사고로 몰아 정신적 복종까지 강요하며 통 제합니다. 광부들은 채굴한 석탄 톤수만 임금을 받고 석탄운반을 위해 부설하는 철로와 갱을 지지하는 지주작업은 무보수로 작업 해야 했으며 안전을 무시해 갱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면 - 195 -

안전대책 없이 짧게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 전부 였으므로 1884년과 1912년 사이 1,700명 이상의 광부들이 탄광에서 사망했습니다. 1913년 9월 매일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위험을 무릅쓰고 똑같은 노동을 하며 착취당하는 생산기계로 살던 광부들은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생산기계에서 벗어나고자 1. 노 조인정, 2. 채탄가격인상( 임금 10% 인상효과) 3. 일 8시간 노동 법준수, 4." 무임금노동" ( 철로 부설, 갱지주 작업, 불순물 제거 등)에 임금지급, 5. 채탄무게 측정 때 노조선출인원입회, ( 사측 의 속임을 방지) 6. 회사가 지정하지 않은 상점과 주택, 의사 를 이용하고 선택할 권리, 7. 콜로라도 주 법의 엄격한 준수 ( 광산안전법규, 전표의 폐지 등)와 강압적이고 위협적인 회사보 안대폐지를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합니다. 극악한 생존환경 속에서 광부들은 콜로라도 주 석탄 채굴회 사연합에 걸 맞는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스스로 미국광부노 조(United Mine Workers of America, UMWA) 를 결성하고 노동조합주도로 파업을 시작하자 곧바로 탄광에서 해고되고 사택에서도 쫓겨나 탄광부근에 천막을 짓고 생활하면서 거 대한 천막촌을 이뤘습니다. 광부들은 회사와 협상을 빨리 끝내고 자신이 거주하던 사택 으로 돌아가 생활한다고 생각했으나 광부들의 채탄수입금으 로 생계와 부를 축적하는 관리자와 광산주들은 고분고분해 야 할 광부들이 저항하는 정신을 뿌리 뽑는다며 볼드윈-펠 츠 탐정사무소를 고용해 광부들을 무참히 짓밟습니다. 석탄생산은 숙련도는 떨어지고 언어가 통하지 않지만 죽어 도 큰 부담이나 말썽 없이 굽실거리며 생산하는 이주노동자 들이 많아 파업노동자와 딱지 (Scab, 파업 비참가노동자를 경 멸하는 호칭) 로 분류해 딱지들은 광산보안대와 탐정사무소 무장경비들이 보호하면서 파업노동자에겐 조소를 보내고 위 협하며 도발합니다. 파업을 조속히 마무리해야 명성을 날리며 많은 이익을 내는 탐정사무소에서는 끝없이 파업노동자들을 자극하며 갖은 방 법으로 위협하고 도발을 시도했으며 차량을 개조해 장갑차 를 만들고 주변을 정찰한다며 한밤중에 천막촌에 탐조등을 환히 비추거나 무작위로 사격을 가해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 - 196 -

을 입기도 했습니다. 광산주들은 파업을 빨리 마무리해야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광부들의 동요도 막을 수 있고 자신들의 규정대로 착취하며 부를 축적할 수 있기 때문에 탐정사무소를 압박하고 푸에블 로 CF&I 공장에서 커다란 투어링 세단에 강철방호재와 기관 총을 장착한 장갑차를 만들어 지원하면서 파업노동자를 탄 압한 것입니다. 파업노동자들은 밤낮없이 천막촌에 굉음을 일으키며 돌아다 니다가 한밤중에는 무차별적인 사격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부상 입히는 이 차량을 데스 스페셜 이라 불렀는데 장갑차 량의 빈번한 사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자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천막아래 땅굴을 파고 두더지처럼 생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장갑차와 회사보안대, 탐정사무소용역깡패들의 무작위적인 총기난사와 폭력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광부 아내들은 파업이 끝날 때 까지 자신들이 먹고 생활해야 할 곡식들과 사용하던 일용품들을 자루에 담고 시장으로 가져 가 자신들의 목숨을 지킬 유일한 무기인 총기와 바꿔야 했 습니다. 10월 28 일, 파업과 관계된 폭력행의가 도마에 오르자 주지 사 일라이어스 M. 아몬스가 콜로라도 주 방위군을 출동시켰 는데 주방위군 지휘관 존 체이스는 크리플 크릭에서 노동자 들이 파업할 때 노동자들을 폭행해 사람을 학살하는 로봇으 로 악명을 떨쳤는데 광산촌 루드로에 노동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파견한 것입니다. 1914년 3월 10 일, 천막촌 포브스거주자들이 몇 일전 용역깡 패들의 총격으로 죽은 아이장례식에 간 사이 주방위군 지휘 관 체이스는 대체 노동자시신이 포브스근처 철로위에서 발 견됐다는 핑계로 포브스천막촌을 철거하라며 공격해 광부들 과 어린아이 그리고 아녀자 등 수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 습니다. 콜로라도 주지사는 혈세로 유지되는 방위군을 지원할 자금 이 바닥나 주 방위군을 소환하게 되자 방위군 두 부대를 콜 로라도남부에 남겨두는 대신 탄광회사들에게 무력으로 파업 - 197 -

광부들을 억압할 수 있도록 주방위군 제복을 입힌 민병대를 조직하도록 하므로 용역깡패와 보안대가 합법이란 명분으로 무장합니다. 4월 20 일 아침, 그리스이민자가 부활절을 지낸 다음날 세 명의 보안요원이 한 남자가 파업노동자 측에 붙잡혔다고 억 지를 쓰며 석방을 요구해 천막촌 지도자인 루이스 티카스에 게 알려지자 티카스는 천막촌에서 반마일(0.8 km) 정도 떨어 진 루드로 마을 열차 역에서 민병대지휘관과 만나기로 했습 니다. 만남이 진행되는 동안 민병대2개 중대가 천막촌근처 루드로 남쪽반마일 철도를 따라 능선에 기관총을 설치하는 것을 본 티카스는 급히 천막촌으로 돌아와 알려 광부들은 민병대 측 면에 자리를 잡자 총격전이 벌어졌으며 지나가던 화물열차 가 보안대가 기관총을 놓은 곳에 멈춰 막아 주므로 광부와 그 가족들은 블랙 힐 이라 부르는 동쪽언덕으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오후 7:00 민병대는 천막촌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기 시작하 면서 천막촌을 사수하던 루이스 티카스와 다른 두 사람이 민병대에 잡혔는데 민병대지휘관 중 하나인 칼 린더펠트 중 위가 티카스와 다른 두 남자를 죽이고 시신은 지나다니는 열차가 보이게 전시해 놓고 지역철도노조에게 시신을 가져 가 매장하라고 강요합니다. 싸움이 벌어질 동안 4명의 여자와 11명의 어린이가 천막 밑 에 파놓은 대피호 속에 숨어있었는데 민병대가 천막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불길에 갇혀 2명의 여자와 어린이 모두가 질 식사하므로 광산노조측은 무장봉기를 촉구하고 콜로라도 주 노동조합지도자들도 모든 조합원의 무장봉기를 촉구하면서 열흘간 게릴라전이 벌어집니다. 콜로라도 주 트리니다드에서는 광산노조가 조합본부에서 파 업노동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무기와 탄약을 나눠줬으며 여자 와 아이들이 민병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학살 됐다는 사실 에 분노한 700~1000명의 노동자들이 잇따라 광산들을 습격 해서 보안대를 쫓아내거나 죽이고 건물에 불을 질렀습니다. 광부들이 보안대에 맞서 싸운 10일 동안 루드로 천막촌 희 - 198 -

생자를 포함해 119명이 사망하자 대통령 우드로윌슨이 연방 군을 보내 양측을 무장해제 시킨 후 400명이 넘는 노동자를 구속하고 332명을 살인혐의로 기소했으나 파업을 주도한 존 로슨만은 살인죄가 선고됐다 콜로라도 주대법원에서 파기됩 니다. 루드로에서 천막촌에 불을 지르고 약탈과 학살을 일삼던 민 병대와 주 방위군의 장교 10명을 포함해 22명의 군인들이 군사법원에 회부됐지만 학살만행을 저지른 자들을 기소한 것은 형식적인 행위였을 뿐 루이스 티카스를 폭행한 혐의로 린더펠트 중위만 가벼운 징계를 받고 모두 무죄가 됐습니다. 록펠러재단은 권력의 비호를 받고 총기로 무장한 후 폭력으 로 노동자들을 학살하고 억압하면서 노동력을 착취해 미국 의 거부가 됐는데 후일 록펠러후손들이 진상을 알고 가문이 수치스럽다며 부를 챙겨 떠나기도 했으며 록펠러는 이때의 살상만행을 회계한다며 그 유명한 록펠러자선재단을 설립하 게된 것입니다. 체제 때문에 분배불균등에 의한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면서 다중의 수입이 줄고 굶주리는 인민들이 늘어 공장에서 생산 한 물건을 팔지 못하는 공황을 타개할 수 없는 기득권은 타 국을 침략해 시장식민지로 삼으려고 전쟁을 벌입니다. 공황과 학살전쟁 1914년 독일은 영국을 앞질러 세계경제를 주도했으며 해운 업 역시 다른 나라들을 주도하는데 프랑스는 독일과 함께 경제를 이끄는 경쟁자로 모로코에서 광산자원과 무역시장을 두고 대립하다가 프랑스는 풍부한 철광산지인 로렌이 망하 면서 독일 산업만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오스트리아는 이스탄불과 오스만제국을 침략할 야욕을 가지 고 있었고 독일은 굶주리는 인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침략전쟁이 불가피 했지만 보스포러스(Bospor us)에서 바그 다드까지 철로를 놓으면 바그다드에서 페르시아 만으로 이 어져 인도까지 연결되는 철도노선공사로 실업을 해소하려 했습니다. 이 철도를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 은행가들과 공동으로 투자 하려했으나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거절당하고 풍부 - 199 -

한 경제를 바탕으로 노동자들의 수입을 보장하며 소비를 촉 진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375 마일( 약 604 킬로미터) 에 달하는 철도선건설을 강행하면서 국제적으로 반목과 질시를 받게 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190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자 대 세르비아 계는 합스부르크가에 대항하고 오스 트리아내의 슬라브족이 같은 민족이라며 단결을 강조하자 세르비아인들도 상대를 적대시하며 뭉치려는 활동으로 대 ( 大 ) 세르비아계와 범 게르만계로 나눠지면서 민족( 지역)으로 대립합니다.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오전 11시경 사라예보를 친선 방 문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호엔베르크 소피아황태자비가 샛길로 차 를 잘못 몰고 들어갔다 세르비아왕국 출신청년 가브릴로 프 린치프(1894 년~1918 년)에 의해 암살당한 것이 사라예보사건 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참모총장 프란츠콘라트 폰 회첸 도르 프는 이것은 광신자 1 인 범죄가 아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우리제국은 남부슬라브인, 체코인, 러시아인, 루마니아인, 이 탈리아인들의 야망폭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정치적인 이 유 때문에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은 전쟁을 해야만 한다. 면서 전쟁을 강조합니다. 도르프는 세르비아왕국에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을 왜 저 질렀나? 라며 1. 반 오스트리아 교육금지, 2. 반 오스트리아 단체해산, 3. 반 오스트리아 관리파면, 4. 반 오스트리아 관련 출판물몰수, 소각, 5. 사라예보사건재판에 오스트리아관리참 여, 6. 무기의 국외반출금지, 7.48 시간 이내 회답 등 10가지 를 요구했습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와 대립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 - 트리아와 동맹인 독일과 마찰을 바라지 않으므로 세르비아 에 상기 조항을 받아들일 것을 권고하고 세르비아는 모든 조항을 무조건 수용하며 재판참여 역시 협상이후에 받아들 일 생각이 있다고 했지만 오스트리아는 즉각 세르비아와의 외교단절을 선언합니다. - 200 -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914년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 고를 하고 베오그라드를 향해 포격명령을 내리자 7월 29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군의 포탄이 세르비아수도 베오그라 드에 떨어지므로 빈과 페테르부르크정부는 즉각 총동원령을 내려 인류역사상 엄청난 인명을 살상하는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은 대영제국, 프랑스제3 공화정, 러시아 등이 주요 연 합국으로 참천했고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요동 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돼 싸웠으며 약 900만 명이 전사 하고 1918년 독일제국에서 혁명이 발생해 빌헬름2세는 퇴 위하고 공화국정부가 수립되면서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 로 끝나게 됩니다. 1918년 9월 말 참모본부가 패전을 인정하며 조속한 휴전의 필요를 주장해 10월 3일 독일에서 처음으로 막스 폰 바덴이 라는 의원제 내각이 탄생했고 내각에 의해 휴전교섭을 진행 했지만 초대 의원제 내각이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자 유를 주장하는 저항이 확산되면서 황제퇴위를 요구합니다. 1918년 11월 3일 킬 군항에서 해군수뇌부의 독선적이고 독 자적인 전투계획에 반대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킬의 노동자들도 이 반란에 합류해 노동자-병사평의회가 구성됐 으며 노동자-병사평의회가 킬 시의 실권을 장악했다는 소식 이 전해지자 독일북부에서 서부 및 남부로 급속하게 혁명이 확대됐습니다. 11월 9일에는 베를린에서도 혁명이 발생하자 독일황제 빌헬 름2세를 강제로 폐위시켰으며 사회민주당 당수인 에베르트 가 임시대통령으로 지명돼 임시정권을 세우고 11월 10일에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회민주당과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 들 단체인 독립사회민주당이 연합해 연립정권을 구성합니다. 12월 말부터 이듬해 1월 중순에 평등과 자유를 요구하는 사 람들이 유산자끼리 선출되고 권력을 행사하는 의회제를 반 대하며 저항을 시작했으나 군부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의 지 원병부대에 의해 진압되고 1919년 1월 19일 실시한 총선거 에서 민주공화파는 사회민주당 163 석, 민주당 75 석, 중앙당 91 석을 차지했습니다. - 201 -

이와 반대로 자유를 주장한 독일인민당은 19 석, 독일국가인 민당은 44 석, 독립사회민주당은 22석을 얻으므로 민주공화 파가 승리했고 2월 6일 에베르트가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 출되면서 샤이데만을 총리로 하는 민주공화파 3당의 연립정 부가 만들어지며 공식적으로 바이마르공화국이 탄생합니다. 새로운 정권은 6월 28일 베르사유조약에 서명하고 8월 14 일에는 민주공화헌법이라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바이마르공 화국헌법이 발효됐지만 바이마르체제는 주요 정치세력들 사 이의 타협이어서 군대-관료-사법제도 등 억압과 착취세력을 발본색원해 정리하지 못해 역사발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선출 자들에 대한 불신은 직접선거로 광범한 권한을 지닌 대통령제를 채택해 권력을 집중시키므로 장래에 불안을 남 기며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세력 및 국민들 사이에 여전히 제정( 帝 政 ) 에 대한 충성을 지닌 사람들도 있어 혁명이후 가 장 큰 현실적 과제였던 경제 분배와 자유보장에 대해 실효 성 있는 정책을 내놓지 못합니다. 1919년 8월 11일 제정된 독일 바이마르공화국헌법( 독일어:Di e VerfassungdesDeuts chen Reiches)은 국민주권주의로 보통 평등 직접 비밀 비례대표의 원리에 의한 선거로 의원내각제 를 채택하고 국가대통령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하며 국 가하원은 3분의 2 찬성으로 대통령탄핵을 국민투표에 부의 할 수 있습니다. 국가내각은 총리가 추천하는 장관들로 구성하고 총리와 장 관들은 대통령이 임명하며 내각은 수평적 조직형태의 권한 으로 각 장관은 자기 임무를 총리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독 자적으로 집행하고 장관들은 법안이나 중요한 안건을 내각 내에서 사전 조정해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내각 내에서 다 수결로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내각은 하원에 법안제출권과 상원에 발안권이 있으며 국가 하원과 국가 대통령은 국민들이 직접선출하고 국민의 권리 는 국민발의와 국민투표로 입법에 참여할 수 있으며 제국을 구성하는 모든 주는 독자적인 자유헌법을 가져야 하고 모든 권력은 21세 이상 성인남녀의 선거에 의한 비례대표로 이루 어진다고 규정됐습니다. - 202 -

하원은 입법권과 정부감사 권을 가지며 불신임투표권을 행 사할 수 있고 하원이 신임을 철회할 경우 총리와 장관들은 즉각 사임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바이마르헌법으로 경제 분 배에 대한 내용과 국민의 권리에 대한 내용 그리고 국가라 는 집단이 국민에게 보장해야 할 복지방향과 내용까지 자세 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142조에서 교육과 병자의 치료는 무료로 규정하고 제145 조에서 8년 동안의 교육은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며 교육과 학습에 필요한 모든 자원은 무료로 제공한다고 규정하고 있 으므로 교육비용이 없어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는 교육받 을 수 있도록 정부가 식생활과 주거, 교통 교육비를 지원합 니다. 제150 조는 풍치법이라고 해서 예술, 역사, 자연이나 풍경, 기념물은 보호 및 치료해야 한다고 규정하므로 정치권력이 나 기업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마음대로 자연을 훼손하는 것을 금지하고 국토는 개인 것이 아니라 그 국토에 살아가 는 모든 국민의 공동소유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국가가 관 리하도록 했습니다. 제114조는 국민 개개인의 자유는 신성불가침으로 모든 국민 의 동의와 합의로 만든 법률에 규정된 범죄행위가 없는 한 어떤 이유로도 억압할 수 없으며 개인적인 자유의 박탈은 법률에 근거해서 허용하되 법률이 정한 순서로 진행하며 반 대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119조부터는 생활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데 남녀의 결혼은 평등에 근거하고 가족생활의 보전은 헌법으로 특별히 보호 하도록 했으며, 제121 조에는 어린이들에게 정신적, 신체적, 사회적 개발을 위한 동일한 기회를 갖도록 규정하고, 제122 조에는 청년은 정신적 도덕적 착취에 맞서 저항할 권리가 있 다고 했습니다. 제155조에서는 생산( 기업)의 독점이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토지를 사용하고 남는 이윤을 정부가 통제하며 주거 및 농 가의 농토사용도 법률에 근거해서 사용해야 하고 직장이나 개인재산의 지출 없이 활용할 수 있지만 경제적 가치를 가 지는 모든 광물 자원 및 자연의 이용은 국가가 감독하고 감 - 203 -

시하도록 규정한 것입니다. 제159조는 노동과 경제조건의 결사로 모든 사람과 모든 직 종에 대한 계약을 보장하지만 노동자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 은 불법으로 취급하므로 노동자의 해고를 금지했으며, 제 161조는 국가가 노동권을 보장하지 못해 수입이 없으면 건 강과 업무능력 그리고 나이를 고려해 국가가 실업수당을 지 급하도록 했습니다. 제165조는 노동자의 임금 및 노동조건과 규제는 고용주와 노동조합이 동등하게 참여하고 동등하게 합의하도록 했으며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지구노동자평의회가 자유롭게 참여해 결정하도록 하므로 사회적 약자인 동시에 경제주체인 노동 자들의 권리를 국가가 철저하게 보장한 것입니다. 바이마르공화국에서는 상인이란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 노동 자 농민 어민의 땀 흘린 노동생산물을 가져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윤을 포함시켜 판매하므로 가격을 상승시키고 기업 주도 생산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노동자의 노동생산물로 부 를 축적해 누린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착취와 갈취 권한을 제한했습니다. 경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관리 감독하는 공무원이 권한을 박탈당하지 않고 양심껏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신분을 보장하기 위해 제104 조는 법원판사들의 신분을, 제129조는 일반 공무원의 신분을 보장하고 곳곳에 양심을 강조하므로 정권이 마음대로 자격을 박탈할 수 없도록 보장한 것입니다. 이 헌법은 히틀러에 의해 폐기됐으며 현재 독일은 국민건강 과 관련된 의료는 국가가 책임지며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 을 찾을 수 없는 사람은 택시비를 지급하고 환자의 집으로 왕진을 가며 아이들의 교육은 무상으로 실시하고 학비가 없 는 학생들은 학업 할 수 있도록 주거비와 교통비 그리고 식 비를 정부가 지급합니다. 복지정책을 실시하기 위해 모든 기업은 이윤의 70% 를 세금 으로 징수하며 모두가 공정하게 지켜야 할 법률의 범칙금을 일률고정으로 책정하면 재산정도에 따라 불이익이 되기 때 문에 소유한 재산에 비례해 %( 프로테지)로 범칙금을 부과하 므로 모든 사람들이 공정하게 부담을 느껴 지키도록 하고 - 204 -

있습니다. 전쟁을 혁명으로 독일이 전쟁을 치르며 구제도를 무너트리고 공화국을 만드 는 사이 러시아에서는 분배불균등으로 굶주린 인민들의 저 항에 부딪치자 니콜라이 2세는 불만을 잠재우려고 민족주의 와 애국주의를 강조하며 병사들을 선동해 제1차 세계대전에 무려 1,500 만 명을 동원해 참전합니다. 러시아는 공업이 도입됐지만 농업 국가였는데 전쟁을 수행 하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병사로 전장에 참여했기 때문 에 노동력이 줄어 생산되는 물질도 부족한데 인민의 생계에 사용돼야 할 국가예산 마저 전쟁에 쓰면서 민중들의 생활은 당장 먹을 빵과 우유가 없을 정도로 어려워집니다.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대패해 사기가 저하되자 니콜라이 2세 는 국정을 황후에게 맡기고 1915년부터 직접전투에 지휘자 로 참전했으나 페트로그라드민중들이 먹을 밀가루가 절반으 로 줄면서 어린이들에게 먹일 우유도 모자라 빵과 우유를 구입하기 위해 시민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줄을 서야 했습니 다. 3월 7일( 러시아력 2 월) 국제 여성의 날 페트로그라드여성들은 빵과 우유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같은 처지에 놓인 노 동자 8만 명이 시위에 가담하며 파업으로 이어지자 황후는 군을 동원해 군중들을 제압하라고 명령하니 기병대가 군중 들을 거칠게 해산시키다 물러서면서 2열 횡대의 근위병들이 일제히 총을 발사합니다. 노동자들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혁명가를 부르며 자유를, 시민의 행복을, 조국 러시아의 부흥을 이라고 외치며 저항하 자 니콜라이는 수도방위사령관 하발로프에게 병사로 진압하 라고 명령했는데 2월 27일( 러시아력) 진압을 거부한 일부사 병들이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소비에트 를 구성하면서 혁 명으로 발전했습니다. 러시아력으로 3월 2일 니콜라이 2세가 동생 미하일에게 정 권을 넘겼으나 폐위됐으며 루소와 프루동사상에 기초한 자 유주의자, 마르크스사상에 기초한 노동자집단주의자, 종교의 프로테스탄트를 기초로 억압과 착취의 시장자유주의자 그룹 - 205 -

들이 연합해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탄생시킵니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임시정부는 인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진 원인이 생산노동을 해야 할 젊은이들이 전쟁에 동원돼 생산 되는 물질이 부족하며 군비로 막대한 물질이 빠져나가고 분 배불균등 때문에 다수가 굶주리는 현실을 외면하고 정권안 정에 급급해 생활이 어려운 민중들의 지지를 잃습니다. 9월로 들어서자 노동자집단주의를 주장하는 볼셰비키가 전 국적인 지지를 받자 191 7년 11월 7일( 러시아 구력 10월 25 일) 오전 10시 볼셰비키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트로츠키)가 1, 000명의 적위대를 동원하고 러시아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급습해 케렌스키임시정부 몰아내고 소비에트정권이 수립됐 음을 선언합니다. 소비에트대회 명으로 평화에 관한 포고 와 토지에 관한 포 고 를 선포하며 인민위원회를 구성해 레닌을 의장으로 추대 하고 1918년 1월 23일 개최된 제3차 러시아 소비에트대회 에서 노 농 소비에트대회와 농민소비에트대회를 공동위원회 로 결의하며 근로피착취인민의 권리선언 을 채택함으로 혁 명이 전국으로 확대됩니다. 소비에트부의장으로 지주와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해 미적거 리다 11월 혁명( 구력 10 월)이 발생하자 여자로 변장하고 동 궁을 탈출한 케렌스키는 지주와 기득권들의 돈을 지원받아 백군을 소집하고 전선에 배치해 있던 카자흐부대와 수도탈 환을 꾀하는 내전을 일으켰다 실패하자 프랑스로 망명합니 다. 1당 정치체제를 구축한 레닌은 다중이 권력자를 직접 선출 하는 선거가 아니라 인민들은 대표권을 행사하는 대의원만 선출하고 대의원들이 전당( 전국대회)대회에서 의장을 선출하 는 권력체계를 구축하므로 선거선출제도의 폐해를 이중으로 사용하면서 다중의 의사를 봉쇄하고 집단독재를 만듭니다. 집단독재 권력이 완성되자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라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해 부를 축적하고 기득권이 돼 인 민을 억압하며 갈취해 부를 축적한 무리들이 소유한 토지와 공업생산기계( 공장)는 공동생산에 의한 공동분배를 실시하기 위해 몰수한다고 선포합니다. - 206 -

러시아인민들은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생산하고 받은 임금으 로 시장에서 비싼 비용으로 물질을 구입하며 갈취 당하던 체제에서 모두에게 일자리가 보장되는 집단농장에서 공동으 로 노동하고 공동으로 배급받으면서 착취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해 열심히 노동한 결과 공업이 급 발전하고 농촌지역에 서 생산이 증가됩니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투표권과 정치참여를 보장하며 여성 을 남성의 억압과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탁아소를 설치하고 남녀평등을 선포하자 외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90% 가 넘었고 봉건제에서 남성에게 억압받으며 순종만 강요당했던 여성들이 이혼을 요구해 알코올중독자가 급증합니다. 소비에트의 조치는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국 가 기득권들에게 충격이 돼 생산수단의 개인소유금지와 공 동생산에 의한 공동분배사상이 자국에 전파되는 것이 두려 워 미국개신교목사들부터 시작해 공산주의는 독재정권이고 빨갱이사상이니 타도해야 한다며 반공법이 기승을 부립니다. 전 세계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무리들은 공정한 분배나 평등 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빨갱이라며 탄 압하기 시작했고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누리고 살던 러시 아기득권들은 백군을 만들어 저항합니다. 기득권을 누리던 무리들은 축적한 화폐로 반혁명백군을 고 용하므로 소비에트에서는 화폐를 개혁하고 공동배급을 실시 했지만 모든 혁명이 그러듯 특정 조직을 광범위하게 준비하 고 혁명하려면 기득권이 탄압하고 억압해 조직이 유지될 수 없으며 혁명조직소수로는 전국적 행정력을 장악하지 못합니 다. 인류역사에서 혁명이란 무장된 병사의 무력을 앞세워 쿠데 타로 권력을 장악한 행위가 아니라면 소수특정 조직이나 단 체의 선전선동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죽도록 노동하고 도 기득권의 착취와 지배 통제에 억눌리고 굶주린 다수 다중 들의 분노가 활화산처럼 폭발하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레닌은 다수를 차지하는 중 소농의 지지를 얻기 위해 중 소농 의 토지는 허용하므로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생산수단의 개 - 207 -

인소유금지는 실현되지 않았으며 혁명에 앞장섰던 무리들은 소비에트인민위원회 고위관료나 생산하는 노동자와 농민을 지휘 통제하는 관료가 됩니다. 모든 인민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가 되려면 모든 사람은 자유가 있다는 사상과 경제는 땀 흘린 노동생산물일 뿐이라 는 사실들을 알려내고 다수결로 선출하는 선거제도는 다중 에겐 선출할 권리만 있을 뿐 선출된 소수가 권력을 행사하 므로 다수는 권리를 박탈당하는 제도라는 사실을 알려야 했 습니다. 관료란 생산노동에 기생하면서 다수의 자유를 부정하고 법 이나 규칙이란 명분으로 다중을 억압 통제하므로 노동대중이 추천하고 소수라도 언제든지 자격을 박탈할 수 있게 하므로 생산자를 지배하는 권한이나 특권을 행사할 수 없게 했어야 합니다. 관료를 임명하기 위한 조건으로 당원이 되려면 출신성분과 사상을 따지며 제한했기 때문에 당원이 된 사람들은 특수한 출신성분이라는 이유로 신분이 보장되며 특권을 지니고 권 한을 행사했습니다. 러시아혁명으로 기득권을 차지한 무리들은 농민들이 글자를 모르는 문맹이라는 핑계로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다 는 사상을 전파하지 않았고 지도라는 명분으로 인민들을 통 제하는 권력을 행사했으며 내전과 전쟁이 발생했다는 핑계 로 도시노동자를 위한다며 농민들의 생산물을 강제 공출한 것입니다. 레닌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했던 연속혁명론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성장전화( 成 長 轉 化 ) 라는 산업이 고도로 발달해 분배불균등이 생기면 인민들의 피 흘린 혁명으로 모두가 평 등한 공산주의사회가 된다는 2단계 혁명론을 주장하면서 자 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수병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독재를 강조했습니다. 트로츠키는 연속혁명론 우리의 이익과 임무는 다소라도 재산을 < 소유한 계급의 지배적 지위를 폐기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권 력을 장악하고 전 세계에서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진행됨으로 경쟁 이 그치고 생산력이 프롤레타리아의 손에 집중될 때까지 혁명을 - 208 -

영속시키는 일이다>는 마르크스이론을 주장하며 레닌과 대립 하기도 합니다. 전시경제라면서 네프경제를 실시하므로 러시아에서 화폐와 시장이 부활했으며 임금을 지급받아 필요한 생필품을 시장 에서 구입해야하는 노동자들은 다른 제국주의와 다름없이 자신들도 임금노예일 뿐이라는 사실들을 자각하고 생산노동 을 기피하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의 생산력은 급격히 저하됩 니다. 기업을 운영하면서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기업인은 없어도 지시 통제하는 관료들은 존재했으며 화폐를 발행하고 시장을 인정하므로 타인의 노동생산물을 판매하고 이윤을 남겨 화폐를 축적하는 상인들이 늘어나 부를 축적한 상인들 이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면서 권력을 행사하기에 이릅니다. 관료들은 기득권을 지키고 조직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보 수교육이라며 특권의식을 받고 세뇌돼 자신들이 행사하는 권력이 잘못됐다고 따지는 사람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니 말이 많으면 빨갱이라고 억압하며 자신이 가진 공권 력이라는 우월적 지위를 남용해 무력을 행사합니다. 구소련 관료들의 행위 때문에 피착취계급들은 자신들이 억 압 통제 속에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항해봐 야 새로운 기득권을 만들 뿐 모두가 평등한 사회는 될 수 없다는 피해의식에 젖어 분열하고 자신의 가족과 안주하기 위해 저항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공황은 세계 1차 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만 발생한 것이 아 니라 인류역사에 많은 발전을 가져왔는데 바이마르공화국과 구소련의 영향으로 남성들은 전쟁터에 동원되고 생산을 담 당한 여성들이 자신들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자 미국은 19 20년 영국은 1928년부터 여성들에게도 참정권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전쟁동안 일하는 여성의 권리를 위해 생리대가 만들어지고 인명을 살상하는 무기와 함께 과학이 발달했는데 영국에서 는 탄환을 연속으로 발사하는 기관총을 만들었으며 독일에 서는 독가스와 잠수함을 영국은 탱크를 프랑스는 전투기를 오스트리아에서는 곡사포를 이탈리아는 세계 최초로 기관단 - 209 -

총을 개발합니다. 세계 1차 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하자 패전국을 차지하려고 오스만제국에 진입했는데 1919년 5월 19일부터 민족주의자 들이 아나톨리아에서 무장하고 저항하며 터키대국민의회를 발족해 그리스- 터키전쟁, 터키- 아르메니아전쟁, 프랑스-터 키전쟁을 거쳐 반발하다가 1923년 7월 연합국과 로잔조약 을 맺음으로 스미르나, 콘스탄티노플, 동부 트라키아지방을 회복하고 터키공화국으로 독립됩니다. 1919년 일본제국의 침략으로 식민지로 전략한 조선에서 독 립을 요구하며 3.1만세운동이 발생하자 조선인민들의 민족 정신을 말살하고 황국식민으로 세뇌시키기 위해 1920년 5 월 27 일 지진제( 地 鎭 祭 ) 라는 기공식행사를 하고 남산 한양공 원에 조선신사를 건립해 참배를 강요하며 천황제 신화를 주입하기 시작합니다. 1925년 6월 27일 일본제국은 내각고시를 공표해 신사의 격 을 높이고 신사의 명칭을 조선신사에서 조선신궁으로 개칭 했으며 신사에 둘 3 종신기( 三 種 神 器 ) 라는 상징물들을 일본에 서 가져오는 형식을 취하고 10월 15 일 진좌제( 鎭 座 祭 ) 라는 행사를 진행하며 조선인민들에게도 참배할 것을 강요하고 식민정신으로 세뇌했던 것입니다. 무력으로 타인의 평화로운 터전을 점령한 무리들은 로마제 국이 건립되기 이전부터 자신은 태양신의 아들이라거나 신 의 대리자라며 신에게 인간은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허구를 강제로 주입시키고 인민들이 순종하며 복종하도록 세뇌시키 고 피억압자들이 착취와 갈취에 저항하지 못하게 통제했습 니다. 공황으로 독재정권 발호 이탈리아에서는 1908년 2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통치 하던 트렌토 사회주의당 당원이며 노동당서기로 지역 정치 신문 라보니레 델 라보라토레 ( 이탈리아어: L 'Avve nire del Lavoratore, 노동자의 미래)의 편집진으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자로 명망을 얻은 베니토 무솔리니가 부각하기 시작합니다. 무솔리니는 급진잡지 라 보체 ( 이탈리아어: La Voce, 목소리) 에 사회주의자의 시각으로 본 트렌토 ( 이탈리아어: Il Trentino - 210 -

veduto daun Socialista)을 기고하고 반기독교운동을 내세운 소설 추기경의 애인 을 상티 코르바야와 함께 집필해 1910 년 일 트렌토 발표하며 사회주의자임을 강조해 명망을 얻 습니다. 1919년 3월 23일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 200여명으로 구성 된 최초의 파쇼< 일 파르시 이탈리아니 디 콤바티멘토>( 이탈리아 어: Il Fasci Italianidi Combattimento, 파쇼 이탈리아 전투분대)를 설립하고 1922년 10월 27일에서부터 29일까지 로마진군이 라 명명한 쿠데타로 루이기 파크타 총리를 실각시키고 총리 가 됩니다. 총리가 된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국가주의자, 우익뿐 아니라 가톨릭신자며 이탈리아 인민당소속 장관 두 명을 포함시킨 연정내각을 구성하고 그의 동생 아말도를 파시스트당기관지 < 일 포폴로>편집장에 앉혀 자신을 지속적으로 선전하도록 하 므로 이탈리아헌법에서 규정한 독재자지위를 합법적으로 획 득합니다. 최고의 권력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다중의 굶주림을 해소하 고 소비를 촉진해야 기득권과 착취당하는 다수의 지지를 획 득할 수 있으므로 기득권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국유지 불하, 임대법의 완화, 노동조합해산과 같은 일련의 법안들을 통과시켜 부유한 상공업자와 지주들의 이익을 보장하면서 지지를 받습니다. 피착취계층들의 지지를 위해 대규모공공토목사업과 국가주 도공업화를 진행해 고용을 높이며 실업률을 낮췄고 " 곡물전 투" 라며 5 천여 농장을 건립하고 토지전투 라며 폰티네 습 지를 개간해 다섯 곳에 " 새마을" 을 건립하면서 건설노동자들 의 수입을 보장해 소비를 촉진하면서 대중에게도 신임을 얻 습니다. 다중의 지지를 획득한 무솔리니는 1923년 6월 전국을 단일 선거구로 하고 총선에서 25% 이상 지지를 획득한 정당에게 의회의석의 3분의 2를 배분하는 아체르보 법을 통과시키고 1924년 4월 6 일 검은셔츠단을 동원, 폭력을 행사하며 첫 총 선을 실시해 파시스트당을 중심인 " 국가동맹" 이 64% 를 획득 합니다. - 211 -

1925년 크리스마스이브에 통과시킨 법에 따라 무솔리니는 공식적으로" 행정수반" 이자" 국가원수" 가 되면서 의회동의 없 이 국왕을 끌어내릴 수 있는 권력을 장악하고 지방자치를 폐지했으며 상원을 해산시켰고 자신이 권력을 휘두르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헌법조항들을 폐기하며 경찰독재통제국가 로 만듭니다. 1928년 파시스트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 활동을 금지시키고 이탈리아의회를 해산했으며 의회를 대신해 5년 전 자신이 조직한 파시즘대의회가 그 자리를 대신하도록 해 파시즘대 의회가 무솔리니의 업무를 정지시키고 탄핵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속였는데 파시즘대의회를 소집할 권한은 무솔리니에 게만 있었습니다. 절대 권력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범죄와 전쟁한다며 체사레 모리를 팔레르모의 지사로 임명해 모리가 마을들을 포위하 고 여성과 아이들을 잡아 고문하며 자백을 강요하는 잔인함 으로 " 강철지사" 란 별명을 얻다가 1927년 마피아와 결탁한 것이 드러나 1929년 해임됐는데 무솔리니는 마피아를 근절 시켰다며 의원으로 임명합니다. 무한 권력을 차지한 무솔리니는 총선은 불법이므로 무효라 고 주장하는 기아코모 마테오티를 검은셔츠단( 파쇼 이탈리아 전투분대)소속 아메리고 두미니를 사주해 살해하고 마테오티 의 시신을 집 밖에 세워둔 마테오티의 자동차로 옮기며 사 건을 은폐하려다 실패합니다. 마테오티를 살해한 두미니는 잡혀 이틀간 구류만 됐을 뿐 처벌을 받지 않았으며 15년간 파시스트로부터 금전지원을 받으며 호화롭고 편안하게 살았고 초기에 연정내각에 동참 했다 야당이 된 무리들은 국왕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무솔리니의 독재행위를 불신임하기 바라며 의회등원을 거부 했습니다. 여기에 동참한 야권연대는 공산당의 안토니오 그람시, 사회 당의 피에트로 네니, 자유당의 피에로 고베티와 지오바니 아 멘돌라 등이 주도하면서 대중적인 반파쇼 운동으로 발전했 지만 국왕은 검은셔츠단의 폭력공포에 떨었고 내란으로 발 생될까 불안해하면서 무솔리니가 집무실을 떠나지 못하게 붙들어 두는 역할만 합니다. - 212 -

농민들에게 과다한 보조금을 지급해 국가부채가 증가하는데 생산기계발달로 공장과 건설현장에 장비와 기계가 도입되면 서 소수가 생산해도 팔지 못한 물질이 쌓이고 다수인민들에 게 안정적인 일자리와 수입을 보장하지 못해 발생되는 빈부 격차로 굶주리는 다수대중이 늘어나면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언론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폰티네 습지의 개간과 간척사업 으로 새마을을 건설한 것과 새마을로 실업률을 개선한 것을 자신의 성과로 선전했지만 이를 위해 최소 1만 명 이상 농 민들이 강제이주 당한 것을 은폐했고 1940 년 " 곡물전투" 와 " 토지전투" 정책이 폐기돼 폰티네 습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다시 늪이 됐습니다. 공황으로 경기가 후퇴하자 무솔리니는 " 조국의 금" 운동을 개시하면서 목걸이나 반지 등에 사용된 금과 보석을 국가에 헌납하면 " 조국의 금" 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철제 팔찌를 나 눠주면서 다중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모인 금을 금괴로 만들 어 국가경쟁력을 상승시킨다면서 국립은행에 비축합니다. 1935년 무솔리니는 분배불균등으로 발생된 빈부격차를 해소 할 방법은 다중에게 일자리와 수입을 보장해야 하므로 기업 을 국유화한다며 자신이 보유한 외국기업 주식을 국가에 납 부하는 것으로 시작해 모든 은행을 포함한 이탈리아 내 기 업 4분의 3을 국유화시키고 1938년부터는 정부가 가격통제 를 실시했습니다. 파시스트 1인 독재체제를 유지하면서 독일을 제외한 모든 외국과 무역을 단절하고 이탈리아를 자급자족 경제체계로 만들지만 분배불균등으로 빈부격차가 생겨 발생된 공황을 해소할 방법이 없는 무솔리니는 약소국들을 침략해 약탈하 고 식민지시장을 넓히기 위해 전쟁을 준비합니다. 이탈리아가 파시즘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사이 독일도 나치 독재가 발호되는데 1차 대전의 책임으로 연합국이 1,32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요구하고 배상금지불이 늦다는 이유로 1 923년 1월 프랑스가 루르지방을 점령하자 독일이 빚을 갚는 다는 명분으로 화폐를 무한정 찍어내 물가가 폭등하고 가치 없는 불환화폐가 넘칩니다. - 213 -

외국화폐를 인정하는 것은 화폐를 제시하고 그 국가에서 만 든 노동생산물을 가져와 비축되면서 자국에 이익이 돼야 하 는데 독일이 지불한 배상금으론 독일에서 생산된 물질을 가 져 올 수 없기 때문에 배상금지불이 늦다는 구실로 독일을 점령한 것이 화폐가 경제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킵니다. 화폐가 가치를 가지지 못하자 물가는 걷잡을 수 없이 폭등 하고 혈세로 살다 경찰생활을 마치고 연금으로 생활하던 연 금생활자들과 도시서민들 그리고 노동으로 물질을 생산하면 서 임금을 지불받고 그 임금으로 자신이 생산한 물질을 다 시 시장에서 구입해 사용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생활은 빈곤 해져 큰 타격을 받습니다. 슈트레제만 총리는 1923년 독일의 공업과 농업자원을 담보 로 렌텐마르크화를 발행해 불환지폐를 회수하고 이듬해 이 를 다시 마르크화로 교환함으로 다소 경기를 부양시키고 경 제안정을 위해 연합국에 배상지불을 연장하는 도스안( 案 ) 을 제시했지만 거절당해 로카르노조약을 맺으면서 알자스로렌 을 포기합니다. 독일이 서부국경을 침공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는 로카르노조 약을 맺음으로 연합군이 라인란트에서 철군하고 독일의 국 제연맹가입이 성사되자 연합군은 군사관리위원회를 해체하 고 미국대표 영을 의장으로 하는 배상조정위원회를 구성하 므로 국내의 노동생산인력들이 노력하면서 경제가 회생되기 시작했습니다. 1929년 초 독일의 복지시스템과는 달리 미국은 개신교정신 에 입각한 시장자유주의체제로 극소수는 엄청난 부를 축적 했지만 분배불균등으로 일자리가 없어 수입 없는 다중이 물 건을 구입할 수 없으니 팔지 못해 넘쳐나는 자동차와 공업 용품이 증시를 폭락시키는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정체됩니다. 세계경제는 생산기계의 자동화로 생산된 물질이 넘쳐 팔지 못하고 쌓아둔 물질과 공장을 전쟁으로 파괴하고 재생산하 기 위해 생산노동자를 고용하고 임금을 지급하면서 소비를 유발해 발전하기 시작했고 전후 피해를 복구하면서 생산되 는 물질을 사용하며 노동자들의 소비까지 촉진해 급속도로 발전했습니다. - 214 -

미국은 1차 대전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신흥공업과 생산 기술발달, 산업전반에 걸친 기계화, 기업조직의 거대화, 새 로운 노무관리방식을 도입하고 자동차, 화학, 전기, 토목, 석 유 등 산업에서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며 비약적으로 발전해 라디오와 영화가 보급되고 집집마다 라디오와 자동 차를 보유합니다. 모두에게 일자리와 수입을 보장하지 못하는 시장자유주의는 과실이 기업가와 일부부유층에게만 돌아가 빈부격차가 커지 고 노동자들은 단순작업을 되풀이하는 기계에서 자동화기계 에 밀려 실업자가 되면서 수입이 없어 구매력이 감소해 대 량생산으로 물건은 넘치지만 소비할 사람은 줄었습니다. 전쟁 전에는 유럽 각국들에 물질을 판매했지만 유럽의 소수 부유층 말고는 상품을 구매해야 할 대중들은 자국의 상품을 소비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외국과의 무역거래가 침체되면서 생산된 물질과 실업자가 넘치고 쌓이는데 상인 들은 조금 팔아도 먹고살아야 하니 가격이 폭등하는 현상이 발생됩니다. 경제가 정체되면서 투자( 갈취)할 곳을 찾지 못한 화폐가 대 출을 종용하고 증권 등 투기시장으로 몰리면서 과도한 여유 화폐로 주가가 기업체의 실질가치 이상으로 높아지는 주식 시장 거품현상을 유발해 1929년 10월 24일 주식가격이 폭 락하는 이른바 ' 암흑의 목요일' 이 발생하자 기업들이 연쇄파 산하며 붕괴합니다. 인류가 발전시킨 과학은 농작물을 생산하는 농기구가 발전 하고 생산기계가 자동화되면서 전세계인구가 먹고 넘칠 만 큼 농산물과 물질이 풍족하게 생산되지만 다수는 굶주리고 타인을 억압 통제하며 착취하고 갈취하는 극소수만 풍요를 누립니다.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공황은 공업으로 물질을 생산하던 유 럽 승전국들과 일본에서도 나타나며 대 공황으로 발전해 세 계 곳곳에서 굶주린 인민들이 착취와 갈취가 합법인 체제와 제도 때문에 분배불균등과 경쟁으로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 해 굶주린다며 체제를 폐지하자는 요구가 높아집니다. 1930년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댐과 - 215 -

사회간접자본인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토목공사를 실시해 실 업률을 줄이고 수입을 보장하므로 소비를 유도해서 회생하 려 노력했지만 빈부격차는 해소되지 않고 국민세금이 건설 업자들 호주머니로 들어가면서 더욱 커졌습니다. 1930년 3월 세계 공황의 여파는 독일에 가장 큰 타격을 줘 거듭되는 혼란이 가중되자 복지예산안 처리를 놓고 진통을 앓던 브뤼닝 내각이 헌법에 규정된 긴급권을 발동해 난국을 수습하려다 실패하면서 공화국의회는 해산되고 새로 실시한 총선에서 폭력과 선동이 난무하는 속에 공산당과 독일노동 당이 부상합니다. 정치권들은 자신들이 집권하면 모두가 잘살 수 있다고 다중 들을 속이며 선거를 실시해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장악하자 출범한 브뤼닝 내각은 공황을 해소하지 못하고 대 은행들이 연속 도산하며 1931년 초 실업자 수가 600 만 명이 됩니다. 실업자가 넘치는 혼란 중에 대통령임기가 만료돼 선거했는 데 86세의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1,935만 표를 얻어 히틀러 (1,341 만표) 를 누르고 당선되며 출범한 파펜내각은 로잔회 담에서 유럽 부흥기금으로 30억 마르크를 지불하는 조건으 로 세계 1차 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으로 배상해야 했던 의무 를 완전히 해소합니다. 1932년 선거에서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NSDAP, 일명 나 치)이 230석을 차지하자 히틀러가 9월 내각 불신임의결을 주장하며 정권을 엎으려해 파펜내각은 의회를 해산하고 긴 급권을 발동하며 비상정국을 선언했지만 파펜과 함께 통치 책임을 분담했던 슐라이허가 중도파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 해 정국이 혼란스러워집니다. 파펜내각은 11명의 장관 중 독일노동당 소속 장관은 3명뿐 이기 때문에 히틀러와 정권을 나눠도 큰 문제가 발생되지 않고 오히려 히틀러의 행동을 제한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독일노동당에 접근해 연립내각을 제안하자 히틀러가 흔쾌히 승낙하므로 총리가 됩니다. 1933년 의사당에 화재가 발생하자 히틀러는 공산당이 정권 을 찬탈하기 위해 방화했다고 여론을 조장하면서 헌법에 보 장된 긴급권을 부여받고 돌격대의 폭력과 게슈타포와 경찰 - 216 -

이 통제하고 감시하며 공포선거를 진행했음에도 나치당이 과반수 의석을 얻지 못하자 긴급권을 남용해 ' 수권법'( 授 權 法 )을 통과시킵니다. 히틀러는 시장경제를 살리려고 사회간접자산인 아우토반을 건설하며 건설노동으로 일자리와 수입을 보장하고 소비를 촉진시키려 노력했으며 그래도 넘치는 실업자들은 자신을 옹호하는 경찰이나 자신이 만든 나치부대친위대로 고용하고 돌격대를 구성하며 군비확충으로 실업을 해소합니다. 무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국가재건 법을 비롯한 일련의 법규 제정에 착수, 주 의회를 폐지하고 지방권력을 중앙으로 집중 시켰으며 노동조합을 폐지하고 나치당 이외의 정당을 탄압 하다 불인정하는 국방군과 나치돌격대사이에 분쟁이 발생하 자 돌격대장 에른스트 룀을 처형하며 국방군을 달래고 독재 권력을 강화시킵니다. 대통령인 힌덴부르크가 서거하자 히틀러는 선거 없이 대통 령직과 총리직을 겸하면서 최고사령관직까지 차지해서 총통 에 오르고 게슈타포 친위대 돌격대 등의 테러조직을 동원, 독일( 제3 제국)을 전체주의 경찰독재국가로 통치하기 시작했 으며 교육 예술 보도매체 등과 주요 국가기관들을 나치당이 엄격히 통제했습니다. 히틀러는 무너진 경제를 되살리고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잃어버린 조국 땅을 되찾은 후 유럽을 포함한 러시아까지 강력한 군대의 무력으로 합병시킨다. 는 유겐트이념을 강조 하면서 경찰과 게슈타포를 동원해 선전하기 시작하자 이 사 상이 젊은이들에게 교조적으로 주입되면서 시장자유주의 역 시 핍박대상이 됩니다. 타인보다 조금 뛰어난 분석력이 있을지 몰라도 자신이 특출 하다는 우월주의에 정신병적으로 집착하는 자들이 기득권이 되고 권력을 잡으면 타인을 자유를 무시하면서 독선적인 독 재정치를 하고 기업을 차리면 노동자를 인간이하로 취급하 면서 인간평등을 부정하고 생명을 경시하며 노동력을 착취 해 부를 축적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자유를 부정하고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억압 통제 하며 유지되는 시장자유주의는 필연적으로 공황이 발생하고 - 217 -

빈부격차를 해소할 수 없는 체제는 말잘 듣는 로봇으로 훈 련시킨 병사들의 무력으로 학살전쟁을 일으켜 과잉 생산된 물질을 파괴하고 재건하며 기득권을 유지합니다. 러시아는 노동자집단독재, 유럽은 파시스트와 나치 1인 독 재가 권력을 장악해 인민들을 억압하고 있을 때 영국에서는 발명가이자 전기공학자인 베어드(John Logie Baird)가 1922 년부터 연구해 1926년에 공개실험을 마친 텔레비전을 발명 해 1929 년 처음으로 비비씨(BBC) 방송국에서 방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텔레비전은 1939년 최초로 뉴욕세계박람회에 공개적으로 선 보이면서 1940년 영국 CBS가 처음 컬러TV 시험방송을 했 으며 1946년에 상용방송국이 방송을 개시하면서 미국 내에 2000-3000대의 TV가 보급됐고 1950년대 초 FCC의 검토를 거쳐 1953년 NTSC표준으로 채택되면서 지금의 칼라 TV로 발전합니다. 1934년 미국의 대공황과 독일의 무한정 화폐발행으로 금본 위제화폐제도는 정지되고 안방에서도 영상으로 정치나 사법 권을 행사하는 권력들의 비리가 알려지면서 여론을 형성하 자 언론이 권력이 되고 언론이 기득권이 되자 온갖 거짓을 유포하며 다중들을 속이고 세뇌시키는 바보상자 첨병이 됩 니다. 언론이 기득권들의 부정부패와 불평등한 원인을 보도하면서 다중들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자 기득권들은 양심 있는 언론 인을 탄압하고 언론계종사자들이 고액의 임금을 받으며 생 활하는 근거인 광고수수료로 압박해 언론종사자들을 굴복시 켜 기득권의 나팔수로 만듭니다. 이렇게 굴복해 기득권이 된 언론은 진실을 알리거나 권력을 감시하지 않고 경제원칙이나 인간평등과 본질적인 자유에 대한 내용을 은폐하고 착취와 갈취로 유지되는 기득질서를 지키려고 3S( 스포츠 스크린 섹스) 정치와 시장과 화폐를 선전하 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다중을 세뇌합니다. 아무런 물질도 생산되지 않는 화폐가 경제인양 왜곡하고 돈 을 빌리면 이자라는 명분으로 땀 흘린 노동결실을 착취당함 에도 상품과 대출만 선전하고 어떤 물질도 생산할 수 없는 - 218 -

스포츠나 드라마에 많은 개런티를 지급하면서 허영의식을 불어넣어 국민들이 진실을 볼 수 없게 시간과 정신을 빼앗 습니다. 텔레비전이 방송되기 전엔 연극이나 예능이 노동을 기피하 거나 토지가 없는 사람끼리 광대나 사당패라는 무리를 만들 고 전국을 떠돌며 연극과 소리를 공연하며 양반과 잠자리해 서 수입을 얻어 생활하면서 민중들에게 양반들의 횡포를 연 극으로 알려 저항심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누구나 즐기는 연극이나 예능, 음악과 영화, 드라마 또는 쇼 에 출연하는 연예인에게 거액의 출연료를 지급하면서 착취 와 갈취로 억압받는 대중들이 현실을 판단할 수 없도록 시 간을 빼앗고 연예인들의 호화생활을 공개하면서 허영심을 부추겨 국민을 우민으로 세뇌하는 것이 목적이 됩니다. TV 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스포츠, 예능, 노래나 춤, 그 무엇 이든 단 한 가지도 인류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어떤 물질도 생산되지 않는데도 생산 노동하는 사람들보다 몇 배 호화롭 게 살도록 수입을 보장하고 허영심으로 살아가는 생활을 공 개하며 선전 선동하므로 경제의 실체를 왜곡하는 용병으로 활용합니다. TV가 발명되기 이전 피지배계급들이 착취와 갈취 그리고 억 압과 통제에 견디지 못해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며 저항했던 역사와 지배계급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폭력 을 행사하고 수많은 인류를 학살하는 전쟁을 벌인 잔혹한 진실들은 은폐하거나 단편적인 흥밋거리로 전락시켜 왜곡하 는 것입니다. 스페인 내전 1930년 1 월 스페인은 군주제에서 억압 통제당하며 착취 갈취 로 곤궁해진 인민들이 공황으로 발생된 빈곤과 굶주림을 견 디지 못하고 불만이 폭발하면서 학생과 노동자들이 적기와 공화국 기를 들고 시위를 벌이는데 5월 마드리드에서 경찰 들이 무자비하게 진압하자 시위대도 무장하고 전투를 벌입 니다. 12월 군 장교들이 군주제에 반대하며 내란을 준비하다 주동 자들이 처형되고 1931 년 자치선거에서 자유주의(FAI)와 통합 - 219 -

사회당(PSUC), 스페인공산당(PCE)이 도시지역을 휩쓸며 당 선되니 임금 알폰소13 세가 도주해 사회주의노동자당(PSOE) 과 결합한 연합정권을 결성하고 스페인이 공화국이 됐음을 선포했습니다. 제2 공화국은 헌법에 지방자치와 평화주의, 교회와 국가의 분리,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고 토지를 몰수하는 내용으로 제정됐으나 초대대통령 알칼라 사모라는 사유재산을 인정하 는 가톨릭신도로 스페인의 소수 지배계급이었던 지주와 로 마가톨릭교회입장을 옹호했는데도 부자들이 저항합니다. 대지주들과 가톨릭교회의 저항을 진압하지 못하는 사이 미 국의 대공황 여파로 양극화가 가중되면서 굶주린 노동자와 농민들은 바쿠닌의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는 집단, 트로츠키 와 스탈린의 노동자집단주의, 독일과 이태리의 지원을 받는 사회주의노동자당이란 파시즘나치 극단집단으로 나뉘며 극 도로 불안정해집니다. 교회가 평등과 분배를 주장하는 것은 빨갱이 사상이라는 선 전에 세뇌된 군부가 노동자집단주의나 자유로운 사회로의 발전을 거부하고 토지몰수를 반대하는 편에서 정권을 지원 하자 제2공화국 총리 아나샤가 토지개혁을 미루면서 노동자 들에게 비난받고 공황의 위기로 기득권에게도 비난받습니다. 1933년 1 월 스페인 카사스 비에자스(Casas Viejas)에서 농민 들이 노동도 하지 않는 무리가 생산물을 갈취하는 토지의 개인소유를 몰수하고 농사짓는 사람이 토지를 사용하는 사 회로 바꾸자며 시위하자 연립정권이 군을 동원해 잔혹하게 진압하므로 사회당내부에서 비난하는 여론이 높아져 분열되 면서 선거가 새로 실시됩니다. 새로운 선거가 시작되자 공화-사회주의정권의 농민진압보복 차원으로 전국노동연맹( CNT)은 조직원들에게 기권할 것을 촉구했고 대중들도 여론에 동참하면서 압도적으로 투표하지 않았음에도 선거는 성립되고 기득권을 누리고 사는 성직자 와 군주제주의자들만 당선됩니다. 당선된 성직자와 왕당파, 군부독재 지지자들이 내각에 합류 하도록 초청받자 1934년 10월 스페인전역에서 총파업이 발 생하고 사회주의노동자당원이 많은 광산노동자노동조합이 - 220 -

중심인 아수트리아스노동자들이 경찰막사들을 공격하면서 봉기로 발전해 노동자들이 군수공장까지 장악하고 무기를 획득합니다. 무기를 획득한 노동자들은 파업을 선언하고 동참하는 노동 자들에게 기관총과 소총을 분배했으며 무장한 노동자들은 수도세비야와 스페인의 거의 모든 지역을 장악하고 우리는 독일노동자들이 실패한 경험을 반복하지 말자 면서 착취와 억압 없이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자고 결의 합니다. 정치꾼들은 인민들을 다수결 선거선출주의가 민주주의라고 세뇌하며 사회주의노동자당(PSOE) 통합 마르크스주의 노동 자당(POUM) 스페인공산당(PCE) 통합사회당(PSUC) 전국노동 연맹(CNT) 이베리안 무정부주의자 연맹(FAI) 중도주의 노동 자와 농민연합 [Workers and Peasants Bloc](BOC)을 만들며 분열시킵니다. 이런 상황에 노동자 농민은 제1공화국시기 바쿠닌의 영향을 받아 모든 억압과 착취를 부정하고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는 집단, 서로자기 세력이 많다며 양분돼 노동자권력을 강조하 는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집단, 독일과 이태리의 지원을 받는 사회주의노동자당이란 파시즘집단으로 갈라져 분열됩니다. 1936년 2 월 총선에서 스페인사회주의노동자당, 사회주의공 화당, 스페인공산당 등이 연합한 인민전선이 승리해 473석 중 289석으로 의회를 장악하면서 토지개혁을 포함한 정책들 을 실시하자 지주 상공인 교회성직자들이 불만을 품고 1936 년 7월 17일 모로코에 머물고 있던 군을 매수하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군부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영향을 받아 상공인들이 축적한 재산도 보호받아야 하며 평등과 분배보다는 인민들의 자유 를 억압하고 착취와 갈취가 합법인 시장자유주의를 해야 한 다며 온갖 비양심적인 행위로 기득권을 차지한 부를 축적한 집단들이 지원하는 폭력자금( 화폐)으로 무기를 구입하고 반 대한 것입니다. 선거로 정권을 획득한 공화파정부는 쿠데타의 징후를 사전 - 221 -

에 포착하고도 초동진압을 하지 않아 반란군이 무력으로 우 위를 점하게 됐으며 군이 역할을 못하자 시민들이 자체방위 군을 결성하고 반란군에 맞서 싸웠으며 많은 희생을 치르면 서 몬타나 요새를 빼앗기고 마드리드를 지켜냅니다. 바르셀로나에는 시민자치방위군이 조직돼 반란군과 결전을 치러 승리하고 발레아레스제도에서 진군한 요피스를 체포해 처형했으나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는 프랑코군이 아 라곤과 카탈리나 전역을 점령하므로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가 고립당해 2년 동안 코뮌을 구성하고 자치로 운영하게 됩 니다. 반란이 일어나자 스페인공화국정권은 반란군을 저지할 생각 은 없었고 노동자와 시민들이 무장하고 반란군에 맞서자 반 란군보다는 시민군을 더 두려워하면서 항구에 정부군함이 있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무장한 노동자군 대가 반란군에게 밀리자 정권을 반란군에게 넘깁니다. 공화파는 소련, 멕시코, 국제사회주의 운동가들로 구성된 국 제여단으로부터 무기와 병력을 지원받았으며 중심세력은 노 동자, 소작농, 도시서민, 인텔리겐치아 등이었으나, 공산주의 나 아나키즘혁명을 지지하는 일부 기업인들도 있었으며 정 부군은 스스로 " 충성파", " 인민전선", " 공화파", " 정부파" 등 으로 불렀습니다. 반란군에 찬동한 세력은 카를리즘 정통주의와 왕당파, 로마 가톨릭 및 보수주의자와 착취를 갈망하는 시장자유주의로 가톨릭성직자, 지주, 기업가, 유산자, 파시스트군대에 병력을 제공한 바스크지방 외곽지역의 가톨릭신자들 등 인간존중을 부정하는 반공주의를 공통분모로 재산을 축적한 집단들입니 다. 1인 독재체제를 갖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 그리고 포르투갈은 반란군을 지원했으며 소련과 국제코민테 른은 공화파를 지원하고 미국은 정부군과 반란군에 비행기 와 가솔린연료 등을 팔면서 양쪽에서 이익을 챙겼고 프랑스 와 영국은 불간섭 조약을 지킨다며 스페인정부를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평등과 정의 또는 진리와 양심은 없고 노동자와 농 - 222 -

민들을 착취해 재물을 모았으나 봉건영주들과 가톨릭사제들 로부터 갈취 당하던 무리들로 온갖 비양심적 행위로 부자가 됐어도 개인의 재산은 보호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개신교정 신으로 무장된 착취와 갈취의 자유를 주장하는 집단입니다. 스페인내전은 50만 명이상의 반란군과 시민군이 사상당하고 1939년 4월1일 공화파정권이 마드리드에서 반란군에게 항 복해 끝났으며 반란에 앞장섰던 프랑코는 성직자와 상공인, 지주의 지원으로 1975년까지 독재자로서 권력을 행사하며 인민전선을 색출 학살합니다. 분배불균등 때문에 생기는 공황은 유럽의 전쟁승전국들에도 발생해 프랑스에서도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면서 실업자가 늘 어나고 상품들이 길거리에 적치되는 현상이 발생됩니다. 공황이 발생하면 기득권은 소비를 유도하기 위해 재건축 재 개발이라며 멀쩡한 도시를 부수고 자연을 훼손하는 각종 토 목공사, 혈세로 월급 받는 군인으로 일자리를 만들어 군부무 력을 강화하며 소비를 조장했지만 공사에 참여한 극소수만 먹고 살지 혈세가 소수 건설업자 호주머니에 들어가면서 빈 부격차만 커졌습니다. 기득권들은 상품을 생산해도 팔리지 않아 이윤이 남지 않으 니 생산을 중단하고 노동자들을 해고하며 기업을 보존하고 노동으로 먹고살아야 하는 노동자들이 저항( 파업)하면 폭동 으로 몰며 자신들의 나팔수인 언론을 동원해 경제어려움이 노동자 탓 인양 여론을 조장합니다. 진행기에 기득권들은 갈취대상이 많아 다중의 노동력과 재 산을 착취했지만 공황이 닥치면 갈취와 착취대상이 줄어 기 득권끼리 서로 뜯어 먹으며 분열되고 뺐긴 자나 뺐어도 이 익을 남기지 못하는 기득권들은 부가 축적되지 않으니 기득 권을 유지할 수 있는 체제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벌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벌이는 전쟁에 원흉 인 기득권들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고 잔혹하게 피 흘리는 전쟁을 치루는 것은 갈취와 착취로 억압받으며 헐벗고 굶주 린 다중 인민들이 서로 죽이는 전쟁을 치릅니다. 사법권을 행사하는 무리들은 타인의 자유를 억압 통제하며 착취와 갈취가 합법이고 소수가 권력을 행사하는 체제를 지 - 223 -

키기 위해 자신들이 먹고 살도록 혈세 내는 민중들을 학살 하고 억압하는 행위가 국가를 위한 충성인양 강조하면서 자 유를 갈망하는 사상을 탄압하고 역사발전을 가로막습니다. 기득권들은 전쟁분위기를 조성하려고 주체성과 자주성은 상 실하고 소액의 생활비를 지원받으며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이기적인 관제( 官 制 ) 보수를 이용해 여론을 조작하고 먹고살 겠다는 노동자와 민중들의 저항을 혈세로 먹고사는 경찰무 력으로 억압해도 동조하지 않도록 여론을 만들고 파시즘독 재로 전쟁분위기를 강화합니다. 유럽은 1936년 일자리를 나눈다며 주 40시간 노동제를 실 시했지만 빈부격차가 해소될 수 없어 전쟁을 일으킵니다. 엄청난 인명살상 2차 대전 1933년 10월 히틀러는 제네바 군축회의 결과를 빌미로 불 만을 표현하면서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1935년 3월 재군비 를 선언하며 군력을 증강하고 1936년 3월 로카르노조약을 파기하고 라인란트 비무장지대를 점령했으며 병사를 늘려 실업률을 해소하며 군부를 확장했습니다. 1937년 11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합병을 결의한 히틀러는 1938년 2월 측근을 요직에 앉혀 나치체제를 강화 했으며 3월에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군사력을 바탕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이 자치를 요구하자 무솔리니와 연합해 체코슬로바키아를 포위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로 하여금 승인하도록 압박합니다. 히틀러와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1938년 9월 뮌헨회담 후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 거주 독일인의 민족자결허용 을 권고했고 프랑스도 이에 동의하므로 독일은 동부 중부 유럽진출을 위한 전략적 지위를 확보했으며 국제연맹을 탈 퇴해버리므로 다른 국가들이 더 이상 독일을 제재할 수 없 게 됩니다. 1937년 7월 7일 일본제국이 중화민국을 침략하고 1939년 6 월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공한 것을 빌미로 1939년 8월말 독일은 소련과 독소불가침조약을 맺고 9월 1일 폴란드의 서 쪽국경을 침공하자 이에 동조한 소비에트연방군이 1939년 9월 17일 폴란드의 동쪽국경을 침공하면서 세계 2차 대전으 - 224 -

로 발전합니다.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침공에 항의하며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돌입하지만 폴란 드는 동서 양쪽에서 준비하고 쳐들어온 독일과 소련에 쉽게 점령당했으며 히틀러는 곧 덴마크, 노르웨이 등 군이 약한 국가들을 공격해 쉽게 점령하고 영국, 프랑스와 대치하며 대 학살극을 벌입니다. 독일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를 침공하고 대서양연안까지 진출해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차단하자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잇달아 항복한 것에 힘입은 이탈리아가 전쟁을 선포하고 참 전했으며 히틀러는 자신이 주장했던 유겐트사상에 따라 1941년 6월 22일 약 300만의 병력과 기갑사단을 앞세워 소 련을 침공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중화민국의 장개석을 지지하던 미국은 일 본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자 ABCD 포위망을 구축하고 일본에 대한 석유금수조치와 철광의 수출을 제한하며 고립 시키기 시작하므로 일본은 항공모함을 동원해 미국 태평양 함대 본거지인 하와이진주만을 기습폭격하고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합니다. 세계 2차 대전은 독일 유태인수용소와 일본 731군부대에서 사람에게 온갖 고문과 사지를 절단해 약품을 실험하는 도구 로 사용하는 참혹한 살상을 거치며 의학을 발전시키고 과잉 생산으로 넘쳐나던 물질과 공장을 때려 부수고 약소국을 식 민지시장으로 확장하며 끝났습니다. 인류가 발전하면서 수많은 침략과 약탈전쟁을 거쳐도 여성 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으나 히틀러가 유태인을 학살하며 게르만민족우월주의를 주장해 민족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독 일여성들은 소련군이 들어와 강간당하면 순수혈통을 낳지 못한다는 웃지 못 할 거짓에 세뇌되어 도망 다니다 많이 자 살합니다. 인류가 발전하는 과정에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침략과 약탈전쟁을 거치며 각종 인종들이 강간을 자행해 순수혈통 을 가진 민족이란 존재할 수 없고 현실에서도 인류들이 여 행이나 이민으로 서로 교류하기 때문에 순수민족이란 기득 - 225 -

권자들이 애국심과 충성을 요구하는 수단일 뿐 있을 수 없 습니다. 1943년이 되자 이탈리아는 바티칸과 런던의 라디오를 들으 며 무솔리니가 주장하는 선전술은 거짓이라는 것을 간파했 으며 3월이 되자 이탈리아 북부공업도시에서 최대파업이 시 작됐으며 밀라노와 토리노는 공습을 피해 노동자들이 생산 을 멈추며 독일을 묵인하는 무솔리니를 반대했습니다. 7월 24 일 전쟁을 시작한 후 최초로 파시스트대회에서 " 두체 "를 소환하고 그란디가 무솔리니의 불신임을 요청해 대의회 가 19대 7로 가결하자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대의회는 자문 기관일 뿐 어떤 결정도 무효라며 다음날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했는데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무솔리니의 해 임을 통고합니다. 무솔리니를 해임한 국왕은 후임자로 피에트로 바돌리오원수 를 내정하고 왕궁을 나서는 무솔리니를 근위대가 체포했지 만 대중의 불신을 받아 반발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이탈리아 는 독일이 무솔리니의 행방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아브루초 주의 산악지대인 캄포 임페라토레에 구금했습니다. 새로 출범한 바돌리오총리는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독 일군을 의식해 이탈리아는 여전히 독일의 우방 이라는 성 명을 발표하고 속이려 했지만 출범 이틀 만에 국가 파시스 트당을 해산시키며 1943년 9월 3일 연합국과 휴전조약을 체결하자 이탈리아 전역이 분노하며 들끓어 총리와 국왕은 로마를 떠나 피신합니다. 총리와 국왕이 없는 이탈리아는 무정부 상태로 자체적인 질 서유지를 준비하는데 10월 13일 바돌리오총리가 몰타에서 나치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발표하면서 권력은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했지만 상당수 이탈리아군은 여전히 파시스트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대중이 인정하지 않는 총리명령은 이행 되지 않았습니다. 수 천 명의 병사들만 지지하는 바돌리오정부는 이탈리아파 르티잔과 연대해 독일에 맞서고 캄포 그란사소 호텔에 연금 됐던 무솔리니를 나치독일공수부대와 무장친위대가 구출하 고 이탈리아로 진군한 독일군은 왕가와 내각인사를 체포하 - 226 -

며 무솔리니의 권력을 회복시키려고 했으나 다중이 인정하 지 않아 실패합니다. 무솔리니는 1943년 9월 23일 살로에서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수립을 선포하고 정부수반이 되지만 이 망명정부는 실재적인 정부로서의 권한은 없었고 나치독일이 이탈리아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명분으로 세운 괴뢰정부였음에도 정 권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자신을 배반했다며 파시스트대의회 의 요인들을 처형했습니다. 1945년 4월 전쟁의 패색이 짙자 무솔리니는 연인인 클라라 페타치와 독일장교로 변장하고 독일군으로 위장한 병사들과 함께 탈출, 스위스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던 길에 4월 27일 공산주의계열파르티잔에게 발각돼 코모 호 인근 동고마을에 서 체포됩니다. 무솔리니와 페타치는 메체그라로 이송돼 처형됐으며 1945년 4월 29 일 무솔리니와 페타치, 그리고 함께 처형된 파시스트 들의 시체가 일전에 파시스트당에 의해 반파쇼 운동을 한 사람들을 처형하던 밀라노의 피아차 로레토에 위치한 주유 소에 버려지자 분노한 민중들이 시체를 짓밟다가 지붕에 거 꾸로 매달았습니다. 같은 날 한때 무솔리니가 신이다 라고 칭송하며 1인 독재를 찬동하고 아첨해 자신의 이익만 챙기던 파시스트 왕당파 아 실레 스타라체가 붙잡혀 피아차 로레토로 이송됐고 파르티 잔들은 곳곳에서 저항하거나 숨어있는 파시스트들을 붙잡아 처형하고 그 시체들은 주유소지붕에 거꾸로 매달았다고 합 니다. 1945년 8월 8일 패전한 히틀러가 베를린에서 자살하자 독 인은 항복했으며 1945년 9월 2일 일본은 전권대사 외상 시 게미쓰 마모루와 미국 측 맥아더원수가 요코하마 근해에 정 박한 미 해군 미주리호 선상에서 무조건 항복 문서에 조인 하면서 참혹했던 세계 2 차 대전은 막을 내립니다. 소수 기득권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인류를 학살 하는 전쟁을 벌려놓고 학살행위를 은폐하려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을 구국영웅인양 애도하며 다중을 세뇌하고 절대복종 과 충성을 강요하기 위해 반공을 주장하며 내부를 분열시키 - 227 -

고 통치도구로 삼습니다. 세계 2차 대전은 2천만 명의 병사들과 3천 5백만 명의 민간 인을 학살했으며 전쟁이 끝나고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린 것 은 1차 대전과 2차 대전에 크게 참전하지 않고 무기와 물자 만 팔면서 부를 축적한 미국과 독일과 연합하고 전쟁을 시 작한 소련에게로 돌아갔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히틀러의 직속부관이었던 히믈러가 체포 돼 세계전범재판에 회부됐을 때 세계전범재판관들이 히믈러 에게 너는 육백만이라는 유태인을 학살하였으므로 사형이 다. 라고 선고하자 히믈러는 나는 독일제국이 건설한 법을 집행했을 뿐 죄인이 아니다. 라며 자기변론을 했습니다. 그러자 당시 독일에서 가장 유명했던 법 철학자이자 형법 학자였던 라드브르흐는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부터 천부권( 생존권, 자유권, 평등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너는 법이라는 핑계로 육백만을 학살했으므로 사형이다. 라 고 선고했습니다. ( 서울대법대 최종고교수님의 법학통고에서 발 췌) 이렇게 법이란 모두가 공정하게 지켜져야 할 규범이 아니라 온갖 비양심적이고 파렴치한 행위로 기득권을 차지한 무리 들이 피억압자들이 저항하지 못하게 통제하고 억압하면서 다중들로부터 착취하거나 갈취한 재물을 지키고 이익을 보 장받는 질서를 위해 기득권끼리 만드는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세계 2차 대전 종전 후 국민들이 광부나 간호사 등 위험하거나 힘들고 더러운 작업들을 기피해 외국노동력 을 수입할 수밖에 없게 됐으며 여성들이 가사노동과 육아양 육노동에서 해방돼 몸매를 유지한다며 출산을 거부하므로 인구가 줄자 국가를 존치시키려 이민을 받습니다. 타 민족이라도 자국 내에서 자녀를 출산하면 자국민으로 인 정하고 양육비와 교육비까지 지불하니 세 명의 자녀만 출산 하면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기업주만큼 생활이 보장되므로 자녀만 낳는 사람도 있으나 이런 행위는 자녀를 인간으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자신의 삶 수단으로 악용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1945년 8월 16일 오후 조선에 설치한 조선신궁에서 - 228 -

승신식( 昇 神 式 ) 이라는 폐쇄행사를 갖고 9월 7일부터 해체작 업에 들어가 10월 6일 철거를 마치자 이튿날 나머지를 소각 하고 철수했으며 미국태평양지역총사령관 맥아더는 9월 9일 미군은 조선의 점령군임을 선포하는 포고령1호를 발표합니 다. 조선 인민에게 포고함 태평양 미군 육군부대 총사령관으로서 나는 이에 다음과 같이 포 고한다. 일본국 정부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은 우리 편 여러 나라 군대의 오래 계속되어 온 무력투쟁을 끝마쳤다. 일본 천황의 명령 에 따라서 그를 대표하여 정부와 대본영이 서명한 항복 문서의 조 항에 의하여 본관이 지휘하는 전승군은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지역을 점령했다. 본관은 조선 인민이 오랫동안 노예처럼 지내온 사실과 적당한 시 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려는 연합국의 결정을 명심하고 있다. 조선인은 우리가 조선인을 점령하는 목적이 항복 문서를 이행하고 조선인의 인권 및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함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에 나는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인 나에게 부여된 권한에 의하여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조선 주민에 대하여 군 사적 관리를 하고자 다음과 같은 점령조건을 발표한다. ( 제1 조)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 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한다. ( 제2 조) 정부 등 모든 공공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유급 무급직원과 고용인, 그리고 기타 중요한 제반 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상 기능과 업무를 수행할 것이며, 모든 기록 및 재산을 보호 보존하여야 한다. ( 제3 조)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으로 발포한 명령에 즉각 복 종하여야 한다. 점령군에 대하여 반항행동을 하거나 질서보안을 교란하는 행위를 하는 자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 ( 제4 조) 주민의 재산권은 이를 존중한다. 주민은 본관의 별도 명 령이 있을 때까지 일상적인 직무에 종사하라. ( 제5 조) 군정 기간 동안 영어를 모든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고용 어로 한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또는 일본어 원문 사이에 해석 또 는 정의에 관하야 어떤 애매한 점이 있거나 부동( 不 同 ) 한 점이 있 을 때에는 영어 원문이 적용된다. ( 제6 조) 새로운 포고, 포고규정 공고, 지령 및 법령은 나 또는 나 의 권한 아래 나올 것으로, 제군에 대하여 요구하는 바를 지정할 것이다. 출처 : 시사연구소, < 광복 30 년사> - 229 -

일본이 자신들의 사상으로 세뇌하기 위해 설치했던 조선신 궁이 사라지고 정의나 양심과 진리는 없고 온갖 수단과 방 법을 가리지 않고 착취와 갈취로 재물만 축적하면 기득권이 되는 시장자유주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가톨릭과 개신교 가 물밀듯이 들어와 산골짝까지 점령하기 시작합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조선장악 조선에 미리 들어와 있었으며 미군과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선교사와 목사들은 국민들을 지배하고 통치한 경험이 있다 며 친일파를 추천하자 맥아더는 매국행위를 묵인하고 조선 의 질서를 유지한다며 매국노들을 요직에 앉히고 지배질서 를 강화했습니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조선을 장악하자 협동하던 공동체사상은 말살되고 노동착취와 갈취가 합법인 시장자유주의와 소수가 다수를 지배 통제하는 선거선출제도, 관료주의계급사회로 정 착되면서 수단 방법가리지 않고 돈만 차지하면 된다는 개인 이기주의로 세뇌시켜 철저한 우민으로 길들려집니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전국으로 전파되자 진실과 진리, 정의는 사라지고 거짓과 허구가 활개 치며 재물을 차지하기 위해 사기와 절도 도박 강도 살인 등 온갖 범죄가 늘어나고 협동심 이 사라졌으며 의심과 권모술수가 자리하게 됩니다. 과학이 모자라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신이라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속일 수 없다 고 강조해 양심의 정곡을 찌르며 어떤 죄든 회계하고 기도하면 용서받는다는 거짓말 로 헌금을 강요하는데 선량한 사람들은 단지 회계하는 기도 만으로도 자신의 양심에 위안을 얻는 듯해 종교에 빠집니다. 사람들은 양심을 속이는 위선과 착취 갈취로 유지되는 사회 에 살면서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할 수밖에 없고 이런 사실을 간파하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은 양심을 이용해 종교를 믿게 하고 헌금을 강요합니다. 사기와 위선, 거짓으로 유지되는 체제에서 직장을 놓치지 않 거나 살아남으려면 타인을 속이고 경쟁에서 이겨야하므로 항상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언이설로 꾀 어 편안한 듯 착각하도록 현혹해서 갈취하는 것입니다. - 230 -

타인의 노동생산물을 상 중 하로 분리해 이윤을 남기고 손님 의 분실물까지 주워 부를 축적하는 상인들과 직장에서 상사 라며 아랫사람의 재능이나 노력을 가로채 자신의 성과인양 내세우며 관리자직책을 유지하는 무리들은 매일같이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임금을 지급한다는 명분으로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누리 고 사는 기업인이나 혈세로 살며 혈세 내는 국민을 억압하 는 무리들과 다중을 속이며 지지를 획득해 기득권을 누리는 정치꾼들은 인민들에게 진실을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종 교를 동원해 신비주의까지 만들어 냅니다. 집단이나 무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집단이나 무리가 책임 져야 함에도 가톨릭이나 개신교는 전 세계에서 거둬들이는 십일조와 헌금, 기득권들의 후원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극 소액을 불우한 이웃을 위한 자선기금이라며 내 놓는 행 위로 집단이나 무리의 책임을 개인 탓으로 변질시킵니다. 종교의 자선행위로 열심히 일하고도 빈곤하거나 장애를 가 지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가게 되는 것을 개인문제로 치부하고 마치 종교만이 구원자인양 자신의 노동력과 시간 을 희생하면서 자원 봉사활동으로 자신도 모르게 집단의 책 임에 면죄부를 줍니다. 봉사나 자선사업이 선행으로 선전되면서 노숙자나 거지를 돕는 것이 선행인양 착각해 동전 몇 푼 동냥하며 마음의 위 안을 삼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집단이나 무리가 책임져 야 할 복지를 개인 탓으로 왜곡하며 기득권들의 착취와 갈 취행위로 빈부격차가 발생되는 원인은 은폐되는 것입니다. 왼쪽 뺨을 때리면 오른쪽 뺨을 내밀라면서 온갖 착취와 갈 취 그리고 부당한 폭력행위에 저항하거나 대항하지 말고 참 아야 한다면서 불평등한 기득권에 순종할 것을 강요하며 기 득질서를 유지하는 사상 선봉대노릇을 합니다.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판단부족 때문에 종교에 매달 린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종교인들은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 어 더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고 매달리도록 하기 위해 전 쟁을 조장하거나 있지도 않는 악마나 사탄 또는 종말론 같 은 괴 소문으로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 231 -

종교 때문에 악행을 저질러도 교회 가서 회계하고 기도하면 사함 받는다는 거짓말에 속은 신자들은 오히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비양심적이고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착 취와 갈취를 일삼고 타인을 속여 사회혼란을 가중시키며 인 간을 존중해야 하는 가장기본적인 진리를 파괴합니다. 가족을 강조해 자녀는 부모가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착각한 사람들은 자녀의 장래를 위한다며 자녀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녀의 재능이나 기호와 동떨어진 특정 교육을 강조하면서 자주성을 박탈하고 재산을 축적하지 못한 가정의 자녀들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어도 교육받을 기회마저 박탈당 하는 것입니다. 종교와 기득권을 차지한 무리들이 주장하는 가족주의 혈육 ( 혈통)주의 때문에 자신이 축적한 재물이나 획득한 지식을 자신의 자녀에게 물려주려고 하므로 발전이 방해되고 가난 한 사람의 자녀들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이 있어도 양심을 속이는 범죄 말고는 재산을 축적하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의 자녀들은 부모의 고혈을 짜내면서 기를 쓰고 공부해 대학까지 나와도 모두에게 균등하게 일자리를 보장 할 수 없는 체제에서 고학력실업자가 되거나 대출한 학자금 을 갚을 길 없어 졸업과 동시에 신용불량자가 될 뿐 절대로 기득권이 될 수 없습니다. 명령에 복종하며 통제받고 지배에 익숙하게 길들여지는 것 은 자유의 권한이 없는 노예나 생산기계 또는 로봇이나 애 완용으로 기르는 짐승들에게 강요하는 것이지 자신의 의사 를 가지고 판단력과 결정권을 행사하며 평등하게 살아갈 권 리가 있는 인간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가 이웃과 가족을 사랑하라고 강조하면서 정의와 진실 은 사라지고 잘못이 있어도 무조건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인양 왜곡되면서 진리는 은폐 되고 가족단위로 분열을 조장하는 편 가르기가 시작돼 사람 을 많이 모은 사람이 권력자가 됩니다. 사람들은 종교를 믿던 안 믿던 선량하고 순박하게 살면 복 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면서 온갖 위선자들에게 속아 착 취당하고 갈취당하면서도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세뇌돼 위 - 232 -

선자들과 갈취자 착취자들에게 저항해야 할 권리를 억누르며 기득권을 유지시킵니다. 종교에 세뇌된 사람들은 신의 뜻이라면 전쟁에 참여해 타인 을 학살하고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에도 죄의식을 느 끼지 않으며 전쟁에서 기도나 부적만 붙이면 보호받는다는 거짓에 속아 목숨을 잃기도 하고 평생노동으로 마련한 주택 도 사후에 천국 가는데 방해가 된다며 교회에 헌납하라면 헌금으로 내 놓습니다. 교회를 지은 장로들은 교회재산은 교회에 귀속되고 장로들 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목사들은 자신이 설교로 신도 들이 교회에 재산을 헌납했으므로 목회자 공로라면서 재물 강탈의 권리를 주장해 교회목사와 장로들 간 재산분쟁이 끊 이지 않고 발생되는 것입니다.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을 존중하기 때문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임에도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누 리고 사는 신부나 목사들은 진실을 깨달고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며 정당한 분배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매도 하고 타인을 학살하며 재물을 강탈한다고 거짓을 세뇌시키 며 악선전하고 있습니다. 우월의식에 젖은 자들이 기득권이 되면 타인을 통제하고 군 림하기 위해 상명하복의 명령계통 계급을 만들어 인간평등 을 부정하고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므로 지배질서를 만들어 피 착취자들이 단결해서 저항하지 못하도록 분열시키고 모 든 인간은 평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진실과 진리를 은폐 하는 것입니다. 평등과 자유에 대한 혁명이 많았던 프랑스는 공항천정에 대 형흡입기를 만들어 공항에서 담배를 피워도 타인에게 피해 가 가지 않도록 흡연자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인간평등을 부 정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통제하는 국가들은 타인들의 제재 와 통제를 당연하게 받아드리도록 길들이기 위해 단속규정 을 만듭니다. 인간은 먹고 마시면 자연스럽게 배설현상이 발생하므로 배 설할 수 있도록 시설을 만들어야 하지만 평등과 자유를 부 정하고 통제와 억압하는 틀을 유지하는 무리들은 배설할 권 - 233 -

리를 박탈하고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기도 하고 노상방뇨라 는 단속법을 만들어 통제를 길들이고 범칙금이라며 수탈까 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성을 가진 환경의 동물이라는 점을 이용해 어려서 부터 부모로부터 통제당하는 환경으로 길들이고 교육이라며 학교에서 통제당하고 학교를 졸업하면 국방의 의무라면서 군에서 통제당하고 기초적인 통제를 벗어나면 수입을 위해 회사에서 통제당하고 혈세로 사는 경찰에게 법이라는 핑계 로 통제당합니다. 철저하게 평등과 자율을 부정하고 통제하는 행위를 받아들 이도록 길들이기 위해 가정을 강조하므로 인간존중을 상실 한 사람들은 재산을 차지하려고 부모를 살해하거나 제대로 양육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부모를 살해하기도 하고 분배불 균등이라는 체제모순 때문에 빈곤해지면 자녀를 살해하고 자살하고 있습니다. 시장자유주의 확산 세계 1~2차 대전에서 전쟁 물자를 팔아 이익만 챙긴 미국 은 1929년 전 세계를 빈곤으로 내몰아 전쟁을 유발한 사실 을 은폐하고 노동자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하면서 노동 력을 착취하는 시장자유를 고수하다 농산물과 전쟁물자가 넘치게 생산돼 경제가 정지됩니다. 1947년 생산물이 넘쳐 팔리지 않자 농민들의 수입을 보장하 기 위해 농산물을 정부가 수매해 태평양바다에 버리다 유럽 부흥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이라며 시장자유 주의를 채택한 국가들에 한해 식량이 부족하면 농산물과 공 업생산물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마셜플랜이라고 불리는 이 선언은 노동력착취로 생산한 물 질을 굶주리는 국민에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자유 를 억압하며 노동자를 착취 통제하는 국가들을 지원하므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탄 압하며 이념갈등의 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기득권들은 인간은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갖기 위해 집중 하고 노력한다는 점을 악용해 노동자가 배부르면 생산노동 을 하지 않는다는 이데올로기로 다중을 세뇌해 노동자들이 - 234 -

빈곤에 견디지 못하고 분배를 요구하면 공권력이 노동자를 무자비하게 짓밟아도 분노하지 않고 외면합니다. 1947년 3월 미국대통령트루먼은 의회에서 미국외교정책에 관한 원칙이라며 트루먼 독트린( 영어: Truman Doctrine)을 선 언하는데 그 내용은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사상을 억압하 고 착취와 갈취가 합법인 나라에만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며 그리스와 터키 등 반공을 강조하는 정부들을 원 조했습니다. 1950년 2월 9일 유산자의회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는 공화 당여성들과 간담모임에서 연설도중 종이를 흔들며 내손에는 국무부의 정책을 입안하는 국가공무원 205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이 있다 며 공정한 일자리 보장과 평등이나 자유 그리 고 평화와 분배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나 빨갱이 로 몰아 억압한 것입니다. 이렇게 발생된 매카시즘은 수많은 국가에서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며 분배불균등에 저항하는 양심 있는 사람들과 평화 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마녀처럼 사냥해 감옥에 가두거나 직 장에서 해고했으며 벌금이란 핑계로 재산을 빼앗기도 하는 등 경제적 사회적 활동을 제약했습니다. 이런 억압으로 평등과 자유를 깨달은 사람들의 사회적 활동 을 차단하자 생활과 시간에 다소 여유 있는 체제옹호자들이 기존질서 속의 경제적 우월성을 내세우며 억압으로 빈곤해 지고 고통 받는 경험 많은 사람들의 활동을 폄하하고 방해 하며 마치 자신들이 지도자인양 모든 조직들을 장악하고 체 제를 지키려 소비를 유도하며 역사발전을 방해하고 있습니 다. 관료들이 훈련이 잘됐다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원숭이나 개 등 애완동물처럼 명령에 복종하도록 잘 길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교육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인간성을 상실하는 체 제에서 양심도 없이 자신이 생존할 수 있게 길들여지는 세 뇌를 많이 당한 것이지 학문이나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혈세로 살며 사법권을 행사하는 무리들은 혈세 내는 국민에 감사하고 봉사할 줄 모르고 지배자인양 국민을 통제하며 기 - 235 -

득권을 차지한 무리들이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해도 제재할 방법이 없다며 비호하지만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 면 노예로 길들이기 위해 업무방해라며 벌금과 구속( 억압 통 제)을 남발합니다. 관료들은 눈이오나 비가 오나 시간 맞춰 출근해야 하고 상 사가 내리는 명령이 아무리 부당해도 지시에 복종하며 자신 의 자유와 이성 양심도 없이 근무시간 안에 맡은 업무를 처 리해야 하는 임금노예이면서 노예관리자로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 착취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다중을 억압 통제하며 충성 하는 로봇입니다. 미국은 군사력증강에 노력하기 때문에 군수산업이 발달했으 나 모든 생산은 과잉 생산되면 쌓이고 쌓이면 생산계층이 실업자가 되면서 수입이 없어 소비를 못하면 기업이 아무리 물질을 생산해도 팔지 못해 주변 기업까지 망칩니다. 무기의 과잉생산을 가져온 미국은 소비하기 위해 약소국들 을 침입하거나 내분을 일으켜 전쟁을 하도록 부추기고 무기 소비시장을 만들어 자국의 과잉생산을 해소할 뿐 아니라 전 쟁으로 폐허된 국가를 돕는다며 건설이나 의료 또는 공산품 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침투해서 자연스럽게 산업을 장악 합니다. 종교를 전파하는 선교사나 성직자들은 사랑의 실천이라며 타국에 침투해 의료라거나 자국에서 버려야 할 정도로 넘치 는 공산품, 곡물 등을 지원하면서 시장자유주의를 세뇌하는 것입니다. 1950년 혈육을 학살하는 동족상쟁이 발생되자 신을 빙자하 며 종교를 내세워 특권을 누리는 목회자와 성직자들은 착취 와 갈취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개인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노동한 만큼의 분배와 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빨갱이사상이 라고 세뇌해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낙후된 정신세계를 가지게 됩니다. 교육이란 나타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의구심이나 탐구심 을 가진 객체가 창의성을 발휘하며 주체적으로 연구( 탐구)하 고 경험한 결과를 논의하며 발전시켜 생활( 생존)속에 실천( 적 용)하는 것으로 누구나 평등한 관계 속에 자유롭게 활동할 - 236 -

수 있게 보장해야 가능하므로 서로가 존중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일본의 장기 식민지배계획인 억압과 통제만 배 운 매국노들이 권력분야와 교육계까지 장악하고 개인의 자 율적 주체성과 창의성, 그리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사상을 말 살하는 목적을 가진 내용의 교과서를 강압적으로 주입하고 누가 잘 외우냐 로 점수를 매기며 경쟁시켜 공동체정신을 말살하고 우민화했습니다. 교사라는 우월적지위로 강제규율을 정해놓고 규칙이라며 통 제하는 것은 학생이라는 이유로 자율성을 말살하고 정해놓 은 사상을 강제로 주입하는 것으로 거부감을 나타내며 반항 하거나 순종하는 로봇을 강요해 어려서부터 반골인가 아닌 가를 파악하고 분류해 도태시키려는 목적으로 봐야합니다. 진리 없는 교육을 받고 학벌이 높다는 것은 주체성을 상실 하고 체제에서 살아남거나 출세하기 위해 타인을 속이고 지 배 통제하며 복종시키는 능력을 얼마나 배우고 비양심적이 됐는가의 척도를 나타내는 것이지 진리와 학문을 많이 깨달 은 것이 아닙니다. 기득권은 자신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나 체 제의 모순을 파악하는 학문이 탄생하면 자신들이 기득권을 누릴 수 없기 때문에 기존 질서를 외우도록 강요하고 창의 성과 창조성 그리고 자율성을 말살시키는 것입니다. 체제를 지키는 전쟁을 치르면서 타인을 학살한 사람들 중 일부는 폭력에 중독돼 무력으로 타인을 억압하는 행위가 국 가를 위한 충성인양 왜곡하면서 자칭 우익이라고 주장하기 도 하고 일부는 타인을 학살했다는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평생을 고뇌하면서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착취와 갈취를 위한 통제와 구소련의 집단독재를 겪고 다수 를 위해 소수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다중 폭력주의가 자리 하면서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사상은 망각되고 자신이나 무리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억압하고 폭력을 휘두 르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억압에 길들여졌습니다. 혼자 잘살면 된다며 친일행각으로 민족을 수탈했던 무리들 이 미 제국주의 비호아래 권력을 장악하고 혈세로 유지되는 - 237 -

공권력을 사용하면서 자신들의 반민족행위와 체제모순을 알 고 있는 깨어난 지식인들을 빨갱이라고 누명 씌워 법이란 핑계로 학살( 인혁당, 보도연맹, 아랍회 등등)하고 반공을 강조 하며 권력을 유지합니다. 사법권을 행사하며 혈세로 사는 무리들은 체제모순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구금하고 고문으로 간첩을 만 들거나 불응하면 살해하고 암매장하는 것이 구국인양 왜곡 하며 권한을 악용해 선량한 국민을 영원히 감옥에 가둘 수 있다며 면회까지 금지하는 억압으로 권력과 체제를 유지하 고 있습니다. 종교가 반공과 개인이기주의로 세뇌시키며 대중들을 분열시 키자 국가가 국민의 전체노동( 세금)으로 운영하며 필수적으 로 보장해야 할 전기, 가스, 수도, 의료, 교육 등에 시장자유 주의논리를 적용해 적자란 명분으로 사유화를 강요하면서 대중의 저항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장악합니다. 필수공익사업을 장악하면 기관 산업인 철도와 공항, 고속도 로 등을 적자라는 명분으로 사유화하도록 강제하면서 인민 들이 수탈당하는 식민지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없도록 은폐 하기 위해 반공을 강조하며 평등한 공동체나 자유와 분배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나 간첩으로 몰아 학살했습니다. 착취와 갈취 때문에 모두에게 공정하게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해 분배가 불공정해지며 빈부격차가 발생하자 저항세력을 분열시키고 기득권을 옹호하는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 자의 고혈을 빨아먹고 살도록 알선소와 소개소를 만들어 수 입을 보장하며 노동자를 관리 통제하는 여론선봉대로 활용합 니다. 미국은 세계전쟁으로 강대국이 됐지만 공황이 발생하자 닉 슨대통령은 군사력과 생산력을 바탕으로 1971년 금본위제를 폐기하고 달러본위로 바꾸며 약소국에게 시장개방을 요구합 니다. 이렇게 시작된 신자유주의는 전 세계를 모두에게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하고 착취와 갈취로 유지되는 시장자유주의국가 들로 만들고 노동생산물이 경제가 아니라 화폐와 시장이 경 제인양 왜곡하기 위해 화폐를 취득하는 관광이 인류가 생존 - 238 -

하는데 필요한 물질이 생산되는 산업인양 선전했습니다. 환율이 1달러 1000원이라면 1000달러짜리 물질을 수입할 때 100만원이지만 환율을 조작해 수입할 때 1달러를 1100 원으로 하면 110만원을 지불해야 하고 반대로 수출할 때 1 달러에 900원이 된다면 100만원 받던 것을 90만원에 팔아 야 하기 때문에 많은 물량을 거래할수록 엄청난 노동력을 갈취당하는 것입니다. 신용카드와 대형마트 출현 미국의 시카고사업가 ' 프랭크 맥나마라(Frank McNamara) ' 는 1949년 저녁식사를 위해 최초로 만들었던 신용카드를 발행 하고 실업자들을 카드회사직원으로 채용해 직업을 주고 수 입 없는 다수는 신용이라는 외상으로 물건을 소비하며 먹고 살게 합니다. 신용카드는 최초에 ' 다이너스카드(Diners card) ' 라 불렀는데 프랭크 맥나마라가 뉴욕에 출장 갔다 호텔방에 지갑을 두고 나와 저녁을 먹고 식대를 지불하지 못하는 곤경에 처했는데 자신과 같은 경험이 많을 거라는 사실에 착안해 친구인 변 호사 ' 랄프 슈나이더 (Ralph Schneider) ' 와 함께 카드를 만듭 니다.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다이너스신용카드 회원은 자신들의 친구들로 구성해 2 백 명이었으며 의미는 'Diners club card' 라는 글자 그대로 디너(Dinner)에서 유래된 'Diner ' 와 친구 또는 멤버십을 의미해 ' 클럽(Club)'이라 칭했으며 초기에 다 이너스카드를 받아준 식당은 14개에 불과했던 것이 신용카 드의 원조입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모든 국가들은 파괴된 주택과 공장을 건 설하고 수많은 노동자와 노동자를 관리하는 노동자들을 만 들어 임금을 지불하므로 소비가 활성화되고 과학발달로 가 전제품을 만드는 중소기업들이 생겨나면서 창출되는 재화가 넘쳐 분배되므로 다중은 주택도 구입하며 행복한 생활을 만 끽했습니다. 그것도 잠시 분배불균등으로 발생하는 빈부격차가 해소될 수 없어 다시 심화되자 1962년 미국 로저스에서 샘월튼이 월마트라는 대형매장을 만들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물건 - 239 -

을 파는 상인이 아니라 임금 받고 물건을 판매하는 노동자 가 생기면서 고용은 늘렸지만 대형마트출현으로 소형 상점 들은 몰락합니다. 대형마트가 출현하면서 소형 상점들만 몰락시키는 것이 아 니라 대중들은 경제원칙이 노동자 농민 어민이 땀 흘려 생산 한 물질이 아니라 상품을 판매하는 시장인양 곡해해 물건을 판매하는 창업열풍이 불었으며 노동자라는 개념이 물질을 생산하는 노동뿐 아니라 임금을 지급받으면 노동자라며 저 항을 시작했습니다. 1천명이 사는 마을에 10개의 소형 상점이 100명씩에게 물 건을 판매하며 생계를 이어가는데 대형슈퍼마켓( 대기업)이 납 품업체에 상품의 대량구입을 이유로 납품단가를 낮추라고 요구하며 여러 가지를 구색 갖춰 진열하고 소형 상점보다 싸게 판매하면 주변의 소형 상점은 망하게 돼있습니다. 작은 점포들을 삼키며 성장하고 존치되는 경쟁 때문에 유통 분야 대기업이 많은 물질을 구입한다는 구실로 가격을 낮추 면 원재료를 공급하기 위해 생산하는 공장이나 농촌노동자 들의 생산노동은 더욱 혹독해지면서 임금은 낮아지고 중간 기득권( 중산층)도 축소됩니다. 지구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 것이고 국토란 그 국가에 살아가는 모든 국민 것으로 유럽은 국가가 토지를 관리하지만 시장자유주의를 강조하는 체제에서는 개인소유 를 인정하므로 주택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주거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으로 획득한 재물을 강탈당하는 부동산투기가 넘칩니다. 기업들은 한 번에 튼튼한 제품을 만들면 다시는 팔수 없고 팔지 못하면 노동자를 고용할 수 없어 기업의 이윤을 확대 할 수 없어 고장이 잦은 상품들을 만들며 아까운 지구자원 을 고갈시키고 부동산의 개인소유를 인정해 착취와 갈취로 재물을 차지한 소수가 개발이라며 지구를 파괴하고 환경을 망치는 것입니다. 건설사들의 이익과 부동산투기를 위해 재개발이나 재건축이 라는 명분으로 주택을 부수면 자연에서 채취한 물자가 허비 되고 재건축의 폐자재들이 지구환경을 오염시키면서 환경을 - 240 -

파괴해 지구에 존재하는 전체 생명체 공동소유인 지구를 망 치면서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건설사들이 존재해야 하고 생산계통에 종사하는 다중에게 소득을 보장하며 소비를 유도해야 체제가 유지되기 때문에 주택비율이 거주민의 120% 가 넘어도 건물은 계속 지어야 하고 분배불균등으로 극소수는 몇 백 채, 천 채가 넘는 주택 을 보유하지만 정작 건설한 노동자들은 소유하지 못합니다. 상품가격이란 공장건설비용과 원재료 그리고 상품을 만들어 낸 노동자의 인건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업주와 노동 자를 관리하는 관리자, 상품을 디자인한 디자이너, 상품을 운송한 운수노동자와 상품을 선전하는 모델, 그리고 물품을 진열하고 보관하는 가계소유주와 판매자들이 먹고 살 수 있 도록 결정되는 것입니다. 기업이 넓은 토지에 공장을 짓고 원재료를 쌓아놔도 원재료 를 가지고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노동자가 없으면 기계는 녹 슬고 원재료는 썩어 악취를 풍길 뿐 아무런 이윤이 창출되 지 않지만 원재료를 가지고 기계를 가동시키며 상품으로 만 들어내는 노동자가 있으면 상품이 생산되고 이윤이 생깁니 다. 운수업이란 회사를 만들어 넓은 부지를 확보하고 많은 차량 을 보유해도 운전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차량들은 녹슬어 고 철이 되고 아무런 이윤이 창출되지 않음에도 기업관리 자들 은 자신들이 회사를 설립하고 운전자를 고용해 일자리가 창 출됐으므로 자신들에게 고마워하라고 왜곡합니다. 상품을 판매하는 유통업이란 점포주혼자 물품을 판매 관리할 수 없어 종업원을 채용하는 것으로 고용원이 이윤을 남기는 노동을 제공하면서 유지되는 것이지 이윤을 남기지 못한다 면 점포를 유지할 수 없어 노동자를 해고하고 자신이 먹고 살지 적자를 보면서 고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현 체제에서는 임금 받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에 충실할수록 갈취 착취자들은 부유해지고 노동한 만큼 분배를 받지 못하는 노동계층은 빈곤해지며 빈부격차가 커지고 노 동생산에 기생해 혈세로 사는 임금노예이자 노예관리자들이 충실할수록 갈취당하거나 생산노동을 하는 민중은 억압 통제 - 241 -

당합니다. 생산노예나, 임금노예이자 노예관리자인 관료나, 생산을 감 독하는 관리자들이 충실하지 않으면 해고되기 때문에 열심 히 노동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일에 충실할수록 빈부격차와 억압 갈취는 강화되는 모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생산로봇의 출현 1934 년 샌프란시스코 뉴욕에서 개최된 국제박람회에서 웨스 팅하우스사가 걷고, 말하고, 윙크하며 색깔을 식별하는[ 윌 리]라는 로봇을 출품하고 세계 2차 대전을 치르면서 곡사포 의 명중률을 위해 연구한 컴퓨터와 1960년대에 기계를 제어 할 수 있는 집적회로(IC)가 개발되면서 인류는 로봇을 만들 어 냅니다. 생산기계의 자동화로 노동자를 대신해 생산하는 로봇( 팔이 상하 전후 좌우로 곧게 움직이는 직교좌표형 로봇, 팔 전체가 기둥 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원통좌표형 로봇, 받침점으로 하여 치켜 올 리거나 내리며 용접하는 극좌표형 로봇 등)이 도입되면서 공장 에서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줄어 수입 없는 다수가 늘어납니 다. 중소기업이 자신이 개발한 물질을 생산하며 이익을 내면 대 기업이 대량구매라며 원가를 낮추고 생산 공정의 자동기계 화와 비인격적인 노무관리로 노동자를 생산기계취급하고 노 동력을 착취하며 대량으로 생산해 싸게 판매하면 중소기업 은 상품을 개발하고 생산했어도 팔지 못해 망합니다. 경쟁에서 이기고 재물을 많이 축적해야 기득권이 유지되기 때문에 끝없이 소기업을 삼키며 대기업으로 성장하니 분배 가 이루어지지 못해 자연히 재물은 한쪽으로 쌓여 다중이 빈곤해지자 대중의 저항을 희석시키기 위해 복권과 경마 카 지노 등 도박을 조장하면서 일확천금에 정신을 빼앗기도록 합니다. 타인을 학살하고 재물을 강탈해 기득권을 차지한 무리나 그 들에게 아부하며 타인위에 군림하려는 기회주의자들이 노동 자를 고용하거나 상사 또는 관리자로 통제받는 사람들의 아 이디어를 마치 자신이 창의적으로 개발한 것처럼 가로채고 부하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한 것이 능력인양 강조하며 기 - 242 -

득권이 유지됩니다. IC가 개발되면서 시장자유주의에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컴퓨터를 생산하고 컴퓨터가 개인에게 보급되면서 인터넷이 발전하여 개인들은 종이나 구전으로 전달되는 정보를 흡수 하는 것이 아니라 빛처럼 빠른 전파로 고급정보들을 취득할 수 있게 되자 정신과 시간을 뺏기 위해 흥미위주의 각종 게 임을 만듭니다. 기득권을 차지한 소수가 정보를 독점하고 특권을 행사했지 만 정보가 공유되면서 특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므로 다중 들이 접속해도 정보에 신경 쓰지 않고 흥미위주의 게임에 몰두시키기 위해 개발자의 수입을 보장하면서 체제를 유지 하는 소비를 촉진하는 1석 2조를 위해 각종 도박 사이트와 게임을 개발시킵니다. 기득권들은 인류가 생존하는데 필요한 의 식 주를 해소할 수 있는 그 어떤 물질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컴퓨터게임이 인류 가 생존하는데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물질을 만들어 내는 양 일확천금을 제공하고 IT산업이라며 컴퓨터게임 개발에 정신 을 빼앗기도록 하므로 불평등의 본질을 은폐하는 것입니다. 숙련노동 없이 소수 노동으로도 물질을 생산할 수 있게 되 자 기득권은 노동자가 공정한 분배를 요구하거나 저항하면 노동자를 해고하거나 공장을 옮기고 굶주린 실업자와 노점 상( 노동예비군)들을 고용해 물질을 생산하므로 소수 노동자만 의 저항으로는 변혁이 요원합니다. 인류는 노동자 농민 어민의 땀 흘린 노동생산물로 살아갈 수 있음에도 생산노동자를 감시하고 통제하며 저항을 억압 하기 위해 관료들과 스포츠 잡기 연예 서비스업 등 비생산 계층을 만들지만 만들면 만들수록 이들이 생존하면서 사용 해야할 물질을 생산하는 노동계층의 삶은 더욱 혹독하고 가 혹해집니다. 현 체제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어 저항해도 기득권을 차지한 무리들이 인민을 관리하면서 노동조합은 빨갱이라고 악선전 해 조직률이 저조할 뿐 아니라 소수만으로도 생산이 가능하 므로 조합원 모두가 무장하고 저항하면 피 착취자들끼리 피 흘리고 싸우며 분열될 뿐 모두가 평등한 사회는 건설되지 - 243 -

않습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분배불균등으로 발생되는 빈부격차가 극심해지고 모두에게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해 수입 없는 다 수가 늘어나면서 소비를 못하자 화폐가 유통되지 않는 공황 이 발생됩니다. 일본은 화폐가 극소수에게 집중돼 유통되지 않자 다수에게 화폐를 나눠주며 소비를 유도하며 내수를 살리려했는데 수 입 없는 다수는 미래가 불안하니 쓰지 않고 은행에 예치해 소비가 살아나지 않자 패전국임에도 미제국과 손잡고 해외 시장을 개척하며 군국주의를 복원하려 자위대를 강화한 것 입니다. 모두에게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해 수입 없는 다수가 소비를 못하게 빈곤해져 화폐가 유통되지 않는 공황은 상품을 팔지 못해 상인이 존재할 수 없고 기업이 물질을 생산해도 팔 수 없어 결국 모든 인류가 굶주리면 저항이 극심해지기 때문에 기득권을 유지하는 시장을 살리려고 대출을 시작합니다. 시장을 살리기 위해 주택을 보유하거나 구입할 사람들에게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라는 명분으로 장기 저리로 화폐를 대출하자 부동산투기가 기승을 부리니 토지소유주가 가격을 올려 공장건설을 방해하고 화폐가 통용되면서 소비가 살아 났지만 변제기를 맞아 대공황이 발생합니다. 일자리도 없고 이윤을 낼 수 없는 다수가 대출받은 모기지 변제기가 도래했는데 변제할 수 없으니 대출해준 은행들이 도산했으며 은행들의 도산을 저지하기 위해 담보 잡은 주택 을 공매하고 건설사가 살기위해 주택을 지으니 주택가격이 하락하면서 부동산버블이라는 주택가격 폭락사태까지 옵니 다. 신용카드남발로 자신의 수입보다 많이 소비해 카드회사 직 원들을 먹여 살리며 외상으로 먹고살던 카드생활자들이 여 러 장의 카드를 사용하며 돌려막기로 간신히 유지했지만 돌 려막는 카드는 일확천금이 생기지 않으면 유지할 수 없어 증권투기나 각종 도박이 흥행하면서 신용불량자가 늘어 은 행도산을 가중시킵니다. 신자본주의라면서 약소국을 침략해 전 세계를 시장으로 만 - 244 -

들고 소비회생을 위해 각종 특혜와 감세정책으로 화폐를 대 출할수록 생산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혹독해지고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극소수는 지구를 덮을 만큼 화폐를 보유하지만 수 입 없는 다수가 빈곤에 허덕이는 공황은 더욱 깊어집니다. 극소수는 화폐를 무한정 보유해 1개월에 1억씩 소비해도 1 년이면 12 억, 10년이면 120 억, 100년이면 1,200 억, 1,000 년이면 1조2,000 억, 10,000년이면 12조로 몇 백대를 누리 고 살아도 착취할 생산수단과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어 재산 이 줄지 않지만 수입 없는 다수는 노동력만 착취당하며 빈 곤에 허덕이다 굶어 죽습니다. 그러자 기계문명이 인류를 파멸로 이끈다며 컴퓨터 텔레비 전 전자제품 등 현대생활에 필수적인 전자제품들을 사용하 지 않고 문명을 거부한 채 외진 곳으로 은둔하거나 출퇴근 때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고 자전거를 이용하며 산업 화의 산물인 패스트푸드를 먹지 않고 슬로푸드를 먹는 사람 들도 늘어납니다. 첨단 기계문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소극적 레오 러다이트 족( 族 ) 이라 하는데 미국의 카진스키(T.J. Kaczynski)는 1978년 부터 18 년 동안 유나보머(Una Bomber)라는 가명으로 모든 공장은 파괴돼야 하고, 모든 기술서적은 불태워져야 한다. 고 선동했으며 실제로 우편물 폭탄테러를 시도하다 체포됐 습니다. 체코혁명과 금융대공황 1989년 11월 17일 금요일 혈세로 먹고사는 경찰무력으로 통제하며 1당 독재로 인민들의 자유를 억압하던 체코슬로바 키아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권한을 행사하고 착취 없이 노력 한 만큼 분배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라며 학생들이 평화롭게 시위하는데 경찰이 폭력을 행사하며 강제해산시킵니다. 이래서 시작된 체코의 벨벳혁명( 체코어: sametová revoluce) 또는 신사혁명( 체코어: nežná revolúcia)은 11월 19일 20만이 참석하는 대중시위로 발전했고, 11월 20일에는 50만여 명으 로 늘어났으며, 11월 27일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모든 시민 이 참여하고 노동자들이 2 시간 총파업을 결행했습니다. 시위에 참석하는 국민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11월 28일 체코 - 245 -

슬로바키아 공산당은 1당제도의 권력을 포기하고 다당제를 선언했으며 12 월초 오스트리아, 서독과 체코슬로바키아 국 경에 설치했던 철조망과 여타 장애물을 철거하고 12월 10일 구스타프 후사크 대통령이 사임하고 다당제에서 새로운 선 거를 실시합니다.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하면서 권력을 장악한 사 람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다중을 학살하는 무력행사도 서슴지 않지만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살아갈 권 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권력을 고집하지 않고 다중 이 거부하면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인류역사는 이렇게 학살과 착취 등 온갖 비양심적인 행위로 기득권을 차지한 무리들이 만든 규칙인 법과 관습에 억압 통 제당하며 짓눌려 헐벗고 굶주리게 된 다중들의 분노가 폭발 해 기존규칙과 제도들을 깨트리며 평등한사회로 발전했습니 다. 불평등한 규칙과 제도들은 청원으로 소멸되지 않고 기득권 을 지키고 유지하려는 무리들의 폭력을 다중이 더 큰 무력 이나 위력으로 굴복시켜야 규율과 규제라는 억압과 통제의 틀을 깨트리고 평등한 사회로 발전합니다. 우월주의를 내세우며 타인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무리들은 체코는 타인을 지배하는 능력이 부족해 통제능력을 상실했 기 때문에 권력을 뺏겼다고 해석하겠지만 조직을 구성하면 종파를 형성하고 새로운 권력을 만들게 되므로 모두가 평등 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회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타인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을 카리스마라며 찬동하는 사 람들은 모두가 평등하게 논의하는 공동체를 부정하고 소수 만이 특출한 능력을 타고나는 양 허구를 강조하며 극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선전 세뇌하는 것입니다. 빈부격차는 개개인의 능력부족이 아니라 모두에게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하고 타인을 통제 지배하며 노동력을 착취하거 나 갈취해 재물을 축적해야 기득권이 되는 시장자유주의라 는 체제와 제도 때문에 발생된다는 것을 깨달지 못한 인민 들은 굶주리거나 부채를 견디지 못하면 죄 없는 자녀까지 살해하고 자살합니다. - 246 -

일자리와 수입이 없어 굶주린 남성과 여성들은 자신의 성 ( 性 ) 을 매개로 생존하기 위해 매춘을 선전하기도 하고 허황 된 환상에 사로잡힌 여성들까지 일확천금을 꿈꾸며 가세하 므로 수단과 방법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한 무리들이 노예상 인처럼 돈으로 사람을 사고파는 것입니다. 가난한 서민의 아들 딸들은 해외로 부인들은 노래방이나 유 흥가를 맴돌며 먹고 살기위해 발버둥 칠수록 가정은 파탄나 면서 가족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기득권들은 국가와 민족은 상관없이 자신의 재산( 기업)을 해 외로 확장하며 국적 없이 재산을 늘리고 소비하며 결혼이란 굴레에 갇히지 않고 자유로운데 피 착취자들은 국가와 민족 을 강조하고 정조와 가족( 혈육)주의를 고집하므로 자신도 모 르게 착취체제를 옹호합니다. 기득권들은 공황의 원인이 노동자의 임금 탓이라며 구조조 정이나 정리해고로 쫓아내고 다수 굶주린 인민들의 여론을 무기로 노동자들의 저항을 짓밟으며 무력을 강화하지만 해 고로 수입이 없어진 노동자들이 자영업이나 노점상을 해서 라도 먹고살려고 하기 때문에 시장질서 붕괴를 가속화시킵 니다. 저항하는 노동자를 해고해 노동자의 철학( 착취와 억압 통제에 저항)을 상인의 사상( 시장자유주의)으로 변질시키며 저항력을 해체하지만 이런 행위는 수입 없는 다수를 가중시키고 상인 수를 늘려 시장기능이 마비되므로 물건을 못 파는 상인들의 폐업만 급증합니다. 실업자 양산은 상인의 폐업뿐 아니라 물건을 팔지 못하는 상인들은 100% 팔던 걸 60% 팔고도 똑같이 살려고 하니 상품가격이 폭등하고 기업이 아무리 좋은 물질을 생산해 저 렴한 가격에 내놔도 수입 없는 다수가 소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기업도 망하는 산업사회 인류의 종말을 가져옵 니다. 처음엔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인 직업 없는 빈곤층부터 굶어 죽고 실업자가 된 노동자들이 굶어죽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확대돼 기득권을 누리던 중 소기업인 그리고 전문지식으로 누리고 살던 지식인들이 굶어죽고 끝내는 모든 상공업분야 - 247 -

로 살아가는 인류가 멸망하는 것입니다. 공황은 유럽에서 의료와 교육 그리고 주택을 무상으로 공급 하며 실업수당까지 지급하는 복지국가나 모든 인민들에게 일자리와 수입을 보장하지 못하고 착취와 갈취로 재물을 축 적하면 기득권이 되는 시장자유주의를 선택한 국가나 가리 지 않고 빈부격차가 존재하는 모든 나라에 해당됩니다. 기득정권은 공황이 되면 복지를 축소하고 기득권에게 특혜 를 주기위해 감세정책과 무한정화폐를 찍고 국채를 발행해 토목공사란 명분으로 기업주 소수의 부를 축적시키고 국민 전체의 빚을 늘려 혈세로 사는 공무원을 감원해도 부채를 갚을 수 없게 만들어 국가를 파산시키고 전쟁을 일으키려 독재를 강화합니다. 금융공황은 인류가 공정한 노동보장과 분배체제를 가지고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생존할 것이냐 착취와 갈취 속에 억압 통제당하는 시장자유주의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인류를 학살 하는 끔찍한 전쟁을 되풀이 하면서 조금 더 유지시켜 줄 것 이냐는 기로에 서있습니다. 과학문명발달로 엄청난 생산력을 보유한 인류는 파시즘과 나치독재로 인류를 학살하는 전쟁을 치러도 기계가 발달해 세계 2차 대전 당시처럼 복구기간이 오래 걸리지 않고 화폐 를 유통시킬 수 있는 시장을 확보할 약소국도 없습니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 국민과 소통을 거부하는 정권에 맞서 촛불집회가 발생하고 2009년 유럽과 캐나다에서 그리고 20 10년에는 구소련의 키르기스스탄에서 민중혁명이 발생해 의 회와 행정부를 장악하니 정권이 물러났으며, 2011년 독재자 튀니지 대통령은 성난 민중들이 의회와 행정부를 장악하자 야반도주했습니다. 2011년 시리아에서 발생된 혁명은 장기집권 독재자 카다피 가 혈세로 보안군을 고용하고 저항하는 인민들에게 총격을 가하자 민중들도 무장하는 내전으로 발전했으며 터키 그리 고 아랍을 넘어 유럽까지 공황으로 발생된 민중들의 저항은 전 세계에서 끝없이 일어나고 7월엔 독일에서 자본주의철폐 를 외칩니다. 2008년에 발생된 촛불집회는 빈부격차와 빈곤의 발생원인과 - 248 -

불평등을 깨트리면 새로운 질서는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에 대해 논의한적 없는 사람들이 자치적으로 해방구를 만들고 논의하며 자리를 잡아갈 때 기회주의적으로 명망을 얻으려 는 무리들이 대책위라며 나타나 광우병으로 협소화시키고 통제하므로 분열됐습니다. 거기에 혈세로 먹고 살며 지배자인양 기득권의 주구( 走 狗 ) 면 서 법질서라는 명분으로 국민위에 군림하며 통제하는 무리 들이 폭력을 행사하며 구속하고 벌금을 남발하며 억압했으 며 명망 있는 정치꾼들이 나타났다 쫓겨나니 언론이 광우병 으로 축소 왜곡 보도하므로 확산되지 못했습니다. 인류는 온갖 착취와 갈취로 재물을 축적한 사람들이 선거자 금으로 기득권이 되는 유산자민주주의, 명망 얻은 사람들이 기득권이 되는 위선자민주주의, 다수결에 의해 선출된 소수 가 다수를 지배 통제하거나 구소련이 왕조를 무너트리고 새 로운 지배질서를 만들어 관료독재가 다중을 지배했던 거짓 평등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혈세로 살아가는 무리들이 사법권( 질서)행사라며 국민의 자유를 억압 통제해 육신과 정신을 속 박당하며 살아왔던 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평등하게 권한을 행사하고 해고걱정 없이 능력껏 노동하고 노력한 만큼 물질 을 분배받아 빈곤걱정 없이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원합니다. 타인을 학살하며 온갖 비양심적행위인 갈취 착취 사기로 재물 을 축적하고 통제와 억압으로 기득권이 유지되는 모든 압제 에서 벗어나 모두에게 일자리가 보장되고 평등하게 권한을 행사하며 어떤 이유로도 억압 통제당하거나 착취 또는 갈취 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야 평화로 운 세상이 됩니다. 평등한 사회 인류는 원시시대를 넘어 침략자들에 의해 짐승이하로 취급 받던 노예제에서 봉건제를 거쳤으며 봉건제에서 타인의 노 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해 소수가 누리고 사는 산업사회, 화 폐가 권력인 시장자유주의와 노동자전체주의를 경험하고 이 제 모두가 평등한 사회로 발전할 것이냐 멸망할 것이냐 선 - 249 -

택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새로운 사회는 온갖 거짓이 난무하며 진실과 진리, 정의와 인간존중은 은폐되고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며 노동력을 착 취하거나 갈취하기 위해 통제하며 소수가 기득권을 누리고 사는 사회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평등하며 누구나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누구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 회를 건설하려면 거짓의 허물을 벗어던지고 솔직하고 진솔 해지며 진실과 진리가 통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으며, 화폐나 시장으로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 땀 흘린 노동생 산물로 살아가고, 관료란 다중을 통제 억압하며 수탈하는 집 단이며, 선거선출제도란 소수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다수는 권한만 박탈당하는 거짓 민주주의라는 사실을 각성해야합니 다. 새로운 사회는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하며 기득 권을 유지하기 위해 유통했던 화폐나 부동산과 생산수단의 개인소유, 평등과 자유를 부정하고 통제하며 억압하기 위해 만든 모든 법률과 기구들을 폐기하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과 자유가 보장되는 갈취 통제금지법 같은 것이 만들어져야 합 니다. 타인을 억압하거나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규칙( 법)을 만들 면 만들수록 법을 만든 사람도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박탈당 하는 족쇄가 되므로 최대한 간단하면서도 명쾌해서 모두가 공정하게 지킬 수 있도록 가장 엄밀한 사항만 명시하면 됩 니다. 규칙들이 만들어지면 집행은 평소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 중 집행력이나 행정력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추천하고 다중 이 인정하면 생산노동을 하지 않는 대신 자신의 적성에 맞 는 행정역할을 맡아 즐거운 마음으로 능력을 발휘하면서 업 무를 집행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간을 보장하며 권한을 부여하면 권한을 이용해 관료가 되 므로 선출이나 시험 없이 평소 생활하는 모습을 아는 사람 - 250 -

들이 적성에 맞도록 추천해서 임무를 맡기므로 특권이 주어 질 수 없게 하며 기간 있는 선출과 달리 추천을 취소하면 자격을 박탈할 수 있도록 해 특권이 형성될 수 없어야 합니 다. 다수 인민들이 직접추천으로 행정이나 사법, 전체를 위한 의 회업무를 집행하게 하고 업무규칙은 계급 없이 모두가 평등 하게 논의하고 스스로 결의하며 결의한 것을 책임지고 집행 하도록 하면 보다 적극적이 될 수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집행한다고 타인의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며 억 압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결정했으므로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 있게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을 말하며 신분보 장 없이 언제든지 자격을 박탈할 수 있기 때문에 권한을 남 용하는 특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추천이나 자격을 박탈하는 특정기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을회관이나 공장휴게실에 인터넷을 연결한 대형멀티스크 린을 설치하고 원터치형식으로 누구나 쉽게 어느 지역에서 어떤 직에 대해 충원을 요구했고 무엇 때문에 자격이 박탈 됐는가를 알 수 있도록 공개하므로 모든 정보를 공유하면 됩니다. 또한 생산노동에 소요되는 인력과 수량파악, 노동을 보조하 는 행정요원이 몇 명씩 배치되는 가도 확인가능하며 누가 얼마의 노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기 때문에 특정인 들이 특정하게 많이 노동을 강요당하는지 모두가 평등하게 노동권한을 행사하고 있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 평등한 사회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중앙 집중 시스템은 모든 정보만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 신이 생산하는 물질이 전국에서 요구하는 량이 얼마고 자신 들과 동종의 생산지에서 생산하는 물질의 량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사전주문식 생산이 이루어 질수 있어 아까운 지구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과잉 생산되는 물질도 없어집니 다. 노동생산물의 유통은 물질을 나누어 공급하는 노동자를 만 들어 양심 있는 분배노동으로 공급하도록 해야 합니다. 생산과 분배 - 251 -

모두가 평등하다면 누구도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 취할 권한이 없으므로 모두가 노동을 해야 하며 인류가 존 재할 수 있는 것은 땀 흘린 노동 생산물이라고 확인된 이상 필수노동의 범위를 명쾌하게 규정해야 합니다. 인류가 생존하면서 섭취해야 할 음식물을 생산 포획 채집하는 농어업, 신발 의류 등 필요물품을 생산하는 산 공업, 건설노 동, 생산된 물질을 운반하는 운수노동, 물품을 나눠주는 공 급노동,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는 교육노 동과 건강과 질병을 책임지는 의료노동은 당연히 필수노동 입니다. 모두가 노동에 종사하면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며 무위도식 으로 누리고 살던 무리가 없어지고 소수노동으로 생산하던 물질을 다수가 생산하므로 노동 강도와 노동시간도 줄어들 며 모두에게 일자리가 보장되므로 분배불균등이 발생하지 않고 노력한 만큼 분배받아 일하는 사람 모두가 주인 되는 세상이 됩니다. 노동한 만큼의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려면 모든 물질 의 가치단위를 시간으로 바꾸고 물질을 소유할 수 있는 권 한은 출 퇴근카드와 신용카드를 사용하듯이 자신이 노동한 시간을 출 퇴근카드 같이 체크해 시간을 축적하고 필요한 물 질을 취득하면 물질만큼 시간을 공제하는 것입니다. 물질의 시간단위는 공장에서 몇 명이 몇 시간을 노동했는데 얼마만큼의 물질이 생산됐는가를 기준으로 가령 1명이 기계 를 가동시켜 5시간 동안 10만개의 종이컵을 만들어 냈다면 10 만개 5 시간(18,000 초)=5.55초가 되는데 여기에 운반노 동 시간과 분배노동 시간을 포함시켜 물질의 가치시간을 산 출하면 됩니다. 노동시간은 똑같은 시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위 험하거나 고도의 숙련이 필요한 노동은 많은 노동시간을 인 정하고 손쉽게 가정에서 분배노동을 하는 구멍가계 같은 곳 은 시간을 가감하므로 실제로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노력한 만큼 물질을 소유할 권한을 더 갖도록 해야 합니다. 노동시간과 노동 강도 측정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논의해 서 결정하고 게으름피우며 노동을 기피하거나 잡담으로 시 - 252 -

간만 보내는 사람들의 노동시간을 삭감하고 힘들게 열심히 노동하는 사람의 노동시간은 늘리므로 지시하거나 통제함이 없이 모두가 평등하며 자유의사로 즐겁게 노동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물질의 단위를 시간으로 분류해서 노동에 복무한 시간으로 취득할 수 있게 되면 도시에서는 노동을 할 수 없으므로 노 동할 수 있는 지역을 찾아 자연스럽게 전국토가 골고루 아 름답게 발전하고 향락도시는 사라지며 공업지대, 농업지대, 산업지대 등으로 바뀌게 됩니다. 논과 밭, 하우스단지 등 농지는 다중이 자동생산에 필요한 모든 기계 기구를 사용해 공동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정리 하고 농산물 생산에 필요한 모든 농기구와 필요품들은 필요 품의 생산지대로부터 필요량을 공급받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므로 농업지대와 공업지대간의 격차를 없애야 합니다. 모든 인민에게 자신의 취향과 성격에 맞는 생산노동을 찾아 노동할 권리가 있고 노동의 권리는 그 어떤 이유로도 박탈 할 수 없으며, 생산노동에 종사할 공장이 없으면 자신들이 하고 싶고 원하는 노동과 생산방식을 원터치 스크린에 입력 하고 많은 경험자들의 조언을 듣고 함께하겠다는 동료를 모 아 공장을 지으면 됩니다. 기존에는 화폐가 공장을 짓는다고 속였지만 자연에 맺힌 열 매하나도 노동으로 채취하듯 화폐로 구입할 수 있는 모든 물질이 노동으로 창출된 것이므로 원터치 스크린에 입력하 고 생산 공장에서 필요한 물질들을 만들면 만들어진 물질을 운수노동으로 옮겨 공장을 짓고 필요한 원료도 가져와 생산 하면 되는 것입니다. 공동으로 생산하는 사회가 되면 모든 물질을 공동으로 생산 하고 공동으로 분배받기 때문에 개인의 기호는 사라지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는데 모든 물질을 공유하는 것 이 아니라 자신이 선호하는 카메라나 자동차 등의 물질은 개인소유지 공유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물질을 생산하면 상품을 팔아 이익을 챙기고 다시 판매하기 위해 지구자원을 낭비하면서 견고하지 못한 상품 을 만들던 시기에서 고장 없이 자신이 계속 사용할 튼튼한 - 253 -

물건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지구자원도 아낄 수 있으며 자 신의 취향에 맞고 선호하는 물건을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 게 됩니다. 사회시스템이 바뀌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온갖 범법행위와 불량식품을 만들어 타인에게 피해를 주던 돌로 만든 고추 가루나 사람들이 섭취하면 해로운 항생제를 사료로 사용해 닭이나 계란을 생산하는 행위 또는 광우병 위험이 있는 소 를 키우는 행위도 사라지고 사람 사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필수노동인 물질운송과 대중을 수송하는 차량을 정비하는 정비사와 생산 활동은 아니고 위험성과 육체적인 무리가 없 지만 기술을 필요로 하는 필수서비스를 제공하는 이 미용사 들과 과학자들이 연구한 발명품에 대한 노동시간을 어느 정 도 인정하고 책정할 것인가는 다중이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 다. 음악 소설 연극 촬영 등 여가활동에 필요한 예술분야는 먹고 살아야 하는 경제적 사정 때문에 재능이 있어도 표현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노동시간이 짧고 여가시간이 늘어나면 우후죽순처럼 늘어날 수 있으므로 노동시간을 인 정할지 한다면 언제까지 얼마나 인정할지도 논의돼야 할 것 입니다. 자신의 적성에 맞고 생산에 적합한 장소가 정해지면 자신이 거주할 주택을 공급받으면 되고 마땅한 주거지가 없으면 건 설노동을 통해 새롭게 주택을 건설하며 실생활에 필요한 전 기와 가스, 수도와 인터넷 그리고 의료와 대중교통( 버스와 기 차)은 숨 쉬는 공기처럼 집단이 책임지고 무료로 공급해야 합니다. 남녀의 평등 여성이나 남성이 동등하려면 여성에게도 노동할 권리가 있 으며 가사노동은 당연히 남성과 공동으로 분담하고 부엌노 동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경우는 공동급식소( 밥 공장)를 설 치해 일자리를 늘려도 될 것이고 부부가 공동으로 취사하며 같이 즐거움을 향유할 수도 있도록 보장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양육노동에서 벗어나고 자녀는 인간으로서의 자유로 운 권리를 위해 공동탁아소를 설치하고 어려서부터 공동탁 - 254 -

아소에서 집단으로 생활하면서 자신의 재능과 소질을 발견 하고 개발시켜 인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교 육은 자신이 원할 때 까지 무리가 의무적으로 보장해야 합 니다. 남성( 부계) 우월주의를 강조하면서 혈육으로 계승되는 상속제 를 폐지하고 남녀의 평등을 보장하려면 일부일처제라거나 결혼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누구나 자유롭게 결혼하고 자유롭게 이혼할 수 있도록 하므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받던 모든 규정과 족쇄를 없애야 됩니 다. 잘못 세뇌되고 길들여진 가족제와 정조관념 때문에 여성은 남성과 혹은 남성이 여성과 한 번 육체관계를 했다고 상대 방이 자신의 소유물인양 족쇄로 묶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 서 평생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고에서 벗어나 서로 마음이 맞으면 성욕을 억제당하지 않고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사랑 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여성이 출산으로 노동할 수 없는 기간은 종족번식과 사회노 동력의 생산이기 때문에 여성이 원하는 시간만큼 당연히 영 아의 육아시간으로 인정해야 하며 일정기간 시간이 지나면 탁아소에서 양육할 것인지 자신이 양육할 것인지는 여성이 판단하는 것입니다. 여성이나 남성이 자녀를 위해 또는 남성이 여성을 위해 타 인과 다르게 많은 시간을 노동하면서 상대를 보호하겠다고 하는 것은 현 체제에서는 정상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지 몰 라도 새로운 사회에서는 상대가 평등하게 노동할 권리를 우 월주의에 빠져 박탈하면서 상대의 자율성을 훼손하며 예속 하려는 행위가 됩니다. 모든 인류가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면 현 체제 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두르다 타인을 살해하는 교통사 고도 사라지고 멀리 있는 지인을 만나 여흥을 즐기다 늦어 지면 악착같이 주거지로 귀가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준비 된 휴게시설( 모텔)에서 쉬어가면 되므로 시간에 쫓기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도 인류를 학살하고 재물과 토지를 강탈해 권력을 차지 - 255 -

하고 군주 행세하는 국가가 유럽엔 영국 네덜란드 등 10개 국 아프리카엔 모로코 등 3개국 중동엔 사우디아라비아 등 6 개국 아시아엔 일본 타이 등 5개국 있는데 이들 국가의 군 주들이 기득권을 지키려 전쟁을 도발한다면 국방의무를 규 정하면 됩니다. 국방의무라고 해서 지금의 군 체계처럼 계급을 형성하고 상 명하복의 명령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치를 위해 결 성됐던 시민군처럼 장교와 졸병이라는 개념이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토론하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맡아야 할 부분들을 스스로 결정하고 결의해서 집행하도록 자율을 보장해야 합니다. 특정 기간( 나이)은 국방을 위한 의무를 할 것인가 아니면 직 업군인 식으로 국방을 담당하도록 할 것인가는 추후논의의 대상일 것이며 군이라고 해서 무한적으로 살상을 위한 훈련 만하지 않고 자신들이 먹고 살아야 하는 생산노동 분야를 공동으로 수행하기 위해 농업군대, 산업군대, 공업 군대 등 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민이 생산노동을 하면 극소수가 1일 8시간 혹은 12 시간씩 산업재해로 불구가 되거나 사망하면서 다람쥐 쳇바 퀴 돌듯 생산하는 기계처럼 사는 사회가 아니라 1주일에 1 일 혹은 1주일에 4시간이나 2시간만 노동해도 누구나 풍족 하게 살아갈 수 있는 물질이 만들어집니다. 지금까지 타인의 노동력과 재물을 착취하고 갈취하면서 기 득권을 누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모든 조직과 특권을 깨트 려야 평등한 사회가 되므로 노동조합이라거나 시의회, 국회 의원 등 지배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모든 기득권들을 폐기하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가 건설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흔히 착각하는 것이 혁명가의 교리니 뭐니 하며 이상한 말 을 많이 하는데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인식하며 행동하는 사람은 인류의 진보를 인정하는 합리적인 사람이고 착취와 갈취로 유지되는 틀 속에서 기득권을 획득했다며 자신의 권 리만 고집하는 사람은 평등을 부정하는 위선자입니다. 직장에서 혹은 지역에서 친밀한 사람끼리 단풍계모임 같은 - 256 -

것을 하면서 계주를 지명하는 것은 계주가 모든 계원들의 의견을 제대로 파악하고 수렴해서 올바른 모임으로 만들어 가자는 것이지 계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계주가 마음대로 전횡을 저지르며 특권과 독선을 행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현 체제에서는 모임을 만들고 회원이 많으면 큰 이권이 생 기기 때문에 자신의 이권( 권력이나 재물 등)을 지키거나 아니 면 자신이 저지른 비리를 은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대표 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다중을 억압하는 폭력을 행사하면서 모임의 조직원들을 분열시키고 권력을 행사하려 합니다. 가장 소단위라는 가정에서 남성이나 여성이 상대보다 힘이 세다고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 억압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며 지배하고 통제한다면 그것은 복종하는 노예를 소유하려는 것으로 가족이라는 조직형태를 깨트리는 행위지 어떠한 이 유로도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평등한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은 자신의 조직을 만들어 편으 로 끼리끼리 분열하고 정의와 진실은 간곳없이 무조건 자기 편이면 지지하고 자기편이 아니면 아무리 바른 말을 해도 반대하고 비방하는 거짓 활동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서로 타인을 존중하며 진리가 인정되는 기본적인 사회 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과학이 점점 더 발달해 인간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모든 물 질을 로봇이 생산한다면 노동자와 수많은 인민들은 생존수 단을 잃어버리게 되고 로봇의 무력으로 사람까지 통제할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고민해 봐야 합니다. 기득권을 누리는 무리는 착취와 갈취가 합법인 체제를 유지 하려고 전쟁을 일으키고 타인을 학살하는 전쟁에 참여한 사 람들을 국가를 구한 영웅인양 칭송하며 폭력과 분열을 조장 하는데 그나마 이성이 있는 제복 입은 임금노예가 아니라 명령대로 움직이는 로봇을 조종한다고 생각하면 끔찍스러운 결과가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자유를 누리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 회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억압과 통제 속에 착 취당하고 핍박받는 모든 피 착취자들이 프랑스나 독일 러시 아처럼 억눌린 분노가 화산처럼 일시에 폭발하는 저항으로 - 257 -

쟁취하는 것이지 저절로 건설되지 않습니다. 인류가 평등과 자유를 요구하며 저항하는데 혈세로 살면서 무력으로 통제하고 억압하는 무리들은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인간의 권리를 상실한자들이므로 인간으로 볼 수 없 어 소멸시켜야 하며 자신의 권리인 투쟁을 하지 않고 기피 하는 사람들은 평등과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으므로 처벌받 아야 합니다. 긍정이란 무엇일까요? 긍정이란 수긍한다는 것으로 수긍하 기 위해서는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만이 긍정적 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남이 하는 말이 뻔히 거짓말로 규명되는데도 무조건 긍정적 으로 받아드려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은 나는 거짓말로 당신을 속이고 이익을 취하기 위해 사기 칠 테니 당신은 무 조건 믿고 따르라는 것이지 올바른 판단을 하라는 것이 아 닙니다. 정리자가 이 책을 준비하자 지인들 중에는 과거에 언제 그 런 나라나 정치체계가 있었느냐고 반문하기도 하고 더러는 꿈을 꾸는 것이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했습니다. 정리자는 인류가 경험칙만 놓고 따지면 지금의 문명사회로 발전하지 못하고 아직도 원시시대를 살고 있어야 하며 인류 가 꿈을 꾸지 않았다면 현재같이 문명이 발전한 사회를 만 들어 내지 못했다고 답변했습니다. 우리 모두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모두가 존중받으 며 자유롭고 평등하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 드는 방법을 고민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치겠습니 다. 끝으로 이글을 완성하기 까지 오랜 시간을 토론하며 많은 시간을 항상 함께 해준 두 분과 주변에서 생활에 도움을 주 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을 책으로 출판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시는 분들은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 258 -

우리은행 : 1002-943-082987 하나은행 : 356-910065660-07 이 정리본이 인쇄될 비용이 모아지면 진보넷 속보게시판에 1개월 전부터 소식을 게재한 후 신국판으로 인쇄하여 출판 회를 열고 무료배부 합니다. 이글의 출판에 함께 해 주신 분들( 명의는 통장 입금 순) 우리은행 하나은행 입금자명 금 액 입금자명 금 액 - 25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