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호천사' 한비야의 이라크에서 보낸 편지 "수돗물 5 일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학교엔 화장실 없어 아무데나 '볼일' "외국인 떠나라" 구호단체도 공격대상 오지 여행가로 유명한 한비야(45)씨는 6 월 16 일부터 이라크 모술에서 2 개월여 구호활동을 벌였다.바그다드 유엔 사무실 폭파사건에 이어 모술에서도 대규모 총격사태가 벌어지자 지난달 말 예정을 2 주일 여 앞당겨 철수했다. 이 글은 현지에서 작성해 인터넷으로 보내왔다. 현지 르포를 3 회로 나누어 싣는다. "앗 살람 알레이쿰.(당신에게 평화를)," "알레이쿰 앗 살람(당신에게도 평화 를)."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하루에도 수십번씩 평화를 빌어보지만 아직 이곳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전 종전을 선언한 지 1 백일. 그런데도 이곳의 긴장감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간 다. 미 군정에 불만을 품은 세력, 후세인 시절을 잊지 못하는 세력의 저항이 갈수록 조직적이고 치밀해지 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담 후세인의 두 아들이 피살된 곳도 이곳 모술이다. 인구 1 백 50 만명, 이라크 제 3 의 도시인 모술에 주둔해 있는 미군의 인명피해는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며 칠 전 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10 여대 앞서 가던 미군 정찰차에 폭탄이 날아드는 것을 봤다. 굉음이 일어나고 순식간에 화염이 치솟았다. 그 차 운전병은 분명 살아남지 못했을 거다. 문제는 미군뿐 아니라 외국인은 모두 미군 협력자라고 몰아세우며 유엔을 비롯한 인도적 구호단체까지 공격대상에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술의 유엔 보급창고는 벌써 세번이나 폭탄이 터져 큰 불이 났고, 창고 를 지키던 현지 직원은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모술에 상주하는 유일한 국제구호단체인 우리 월드비전도 예외가 아니다. "모술을 떠나라"는 괴 전단이 사무실로 끊임없이 날아들고, 현지 직원들에겐 "외국인을 도우면 가족들이 위험할 것"이라고 협박 한다. 지난 7 월 17 일, 후세인의 집권당인 바트당 창립일 직전에는 "사무실과 숙소.차량을 모두 폭파하겠다 "는 협박 편지가 날아들어 직원 모두 다른 곳으로 긴급히 피신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지역 종교지도자가 초대하는 저녁식사는 언제나 환영이다. 일과 후 저녁밥을 하지 않아 좋기도 하 지만 우리가 지역 종교지도자와 가깝다는 것을 주민들에게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후세인 통치 시절이나 지금이나 이 지역의 실세는 종교지도자들이다. 이들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 현지인들의 호감 을 사는 첩경이다. '코드 레드', 지금 모술은 빨간색, 전혀 안전하지 않다. 구호단체들은 사업지역의 위험상태를 녹색.노란 색.빨간색.까만색으로 표시한다. 녹색은 안전, 노란색은 경고, 빨간색은 위험, 까만색은 구호활동 불가능으로 사업장 철수를 뜻한다. 코드 레드 아래의 일상은 괴롭기 짝이 없다. 현장으로 갈 때는 반드시 쇳덩어리보다 무거운 방탄조끼를 입 어야 하고 사무실을 한발이라도 떠나면 들어올 때까지 수시로 위치와 상황을 무전기로 보고해야 한다.호출이 오면 즉각 응답해야 한다. 그걸 못하면 다음날 안전 브리핑 시간에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지뢰지 역 파악이나 불발탄 처리 등을 정기적으로 교육받지만 불발탄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에겐 한국말이 먼저 튀 어나온다. "빨리 내려놔아아아!!!, 내려놓으란 말이야." 요즘 이라크의 가장 절박한 문제는 식수다. 30 년 전만 하더라도 이라크의 상수도와 사회기반 시설은 이웃 나라의 부러움을 샀다. 특히 티그리스강이 흐르고 막대한 저수량의 댐을 끼고 있는 모술은 항상 물이 풍부 했다고 한다. 그러던 게 이란과의 8 년 전쟁, 1991 년 걸프전쟁, 그리고 이후 12 년간의 경제제재로 상수도 시설이 형편없이
2 파괴되고 수돗물 관리가 엉망이 됐다. 정부 통계로는 수돗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지역이 전국의 60%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송수관이 심하게 부식돼 시뻘건 녹물이 나오는 등 수질이 매우 낮다. 또 모술 등 북부지역은 쿠르드족과 아랍족이 끊임없이 대립하고 후세인 정권 때 혹독한 탄압을 받았기 때 문에 사정이 더욱 열악하다. 우리 숙소는 모술시내 부유한 동네에 자리잡고 있고, 집안에 커다란 물탱크가 있어 물부족을 직접 겪지는 않지만 나가보면 수돗물이라고는 5 일에 한번도 구경하기 힘든 곳이 태반이다.그래서 주민들은 물 탱크차가 파는 물을 사먹어야 한다. 물값이 1 천 l 에 약 3 천디나르(2 천 4 백원), 일용 노동 자의 일당의 반에 해당할 만큼 비싼 값이다. 상황이 이러니 한낮 기온이 50 도가 넘는 살인적인 더위에도 씻 기는커녕 마시는 물도 아껴야 할 형편이다. 게다가 이곳 풍습은 화장실 뒤처리를 휴지가 아니라 물로 하는데 물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제대로 씻지 못 한 더러운 손으로 눈을 만지거나 음식을 먹으니 탈이 날 수밖에 없다. 학교, 특히 시골학교의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수백명의 학생이 다니는 학교에 식수대는커녕 화장실도 없 다. 한 학교에 가서 "볼일이 급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선생님들은 바로 옆의 교장 사택으 로 달려가고, 학생들은 하루종일 참거나 급하면 아무데서나 일을 본단다. 그래서 여자 아이들은 학교에 오는 걸 아주 싫어한다. 이렇게 깨끗한 물이 부족하면 설사는 물론 위생이 불 결해 생기는 전염병이 창궐하게 마련이다. 이 지역 보건소 직원의 말에 따르면 지난주 환자가 2 백 46 명이었 는데 그중 69%가 설사와 눈병 등 더러운 물로 인한 질환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월드비전에서는 아이들이 학교에서만큼은 깨끗한 물을 실컷 마실 수 있고, 위생적인 화장실을 사용 할 수 있게 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각 학교에 식수대를 마련하고, 화장실에서 항상 물을 쓸 수 있도록 넉 넉한 크기의 물탱크를 배치하는 사업이다. 9 월 개학을 해 아이들이 학교에 왔을 때 깨끗한 물이 콸콸 나오는 식수대와 새로 생긴 화장실을 보고 얼마 나 놀라면서 좋아할까? 생각만 해도 뿌듯하다. 놀랍게도 모술에서 일하는 한국 사람은 내가 처음이 아니다. 한 건설회사가 1985 년부터 4 년간 대규모 펌 프장 공사를 했고 한국인 4 백여명이 있었다고 한다. 아야드라는 이름의 우리 팀 현지 엔지니어 한 사람이 그 들과 일했다. 늘 유쾌한 아야드는 아직도 '안녕하세요?' '빨리 빨리' '뭐라고?'라는 한국말을 또렷이 기억했고 이 세 단어 를 어찌나 엉뚱하게 섞어 쓰는지 매일 배꼽을 잡았다. 이 친구, 며칠 전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한국 사람 은 옛날에도 물 공급 공사를 하더니 이번에도 식수 관련 일을 한다면서 정중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 한국은 우리에게 물을 가져다주는 나라군요. 슈크란 제질란(정말 고마워요)." 그 말에 으쓱해진 내가 이 친구처럼 엉뚱한 말로 대답했다. "뭐라고?" [한비야씨가 맡은 활동은] 시골학교에 식수대 공급 월드비전은 이라크 북부 모술과 서부 알룻바에서 국내 난민 보호와 전후 어린이 보호, 초.중학교의 식수.위 생사업을 벌이고 있다. 나는 식수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한국.미국.호주가 지원하는 사업부문을 총괄한다. 총예산 약 40 억원으로 1 백 70 개 초.중학교 학교에 식수대를 설치하고 위생적인 화장실을 짓는 일이다. 한국이 지원하는 사업 규모는 14 억원으로 31 개의 초.중학생 1 만 5 천여명이 대상이다. 한국지원분에는 한국 국제협력단을 통한 정부 지원금 2 억 4 천만원도 들어있다. 월드비전한국은 또한 영원무역.이랜드 등이 기증 한 의류 14 만여벌(15 억원 상당)을 니느웨 및 알룻바 지역에 나누어주고 있다.
3 깨진 수도관을 연결하고, 수도가 없는 시골학교에는 우물을 파고 물탱크를 설치해 동네 주민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게 내가 맡은 일의 핵심이다. 그동안 전쟁으로 인한 폭격, 전쟁 이후의 방화와 약탈 등으로 대부분의 학교 시설이 파괴됐기 때문이다. 10 월부터 2 차 식수사업도 계획하고 있지만 규모와 실행 여부는 미지수다. 이라크에 대한 관심이 약해져 모금이 어려워지면 사업에 차질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월드비전 소속으로 일하는 사람은 모두 10 명이다. 사업운영본부장, 물자 운반 및 배분, 재정 및 인력 수급, 안전, 홍보, 물 전문요원, 그리고 나를 포함한 세 명의 프로젝트 매니저가 있다. 한국 월드비전 53 년 사상 처음으로 한국인이 프로젝트 매니저라는 중책을 맡았다. 사업 진행에 필요한 현지인 직원을 고용하고(엔지니어만 10 명, 일용직까지 합하면 1 백명도 넘는다) 미군 민간협력담당관.유엔기구 대표 및 다른 국제 NGO 들과 일이 중복되지 않게 조정하며 정부 관리 및 학교장 을 만나 협조를 구해야 한다. 또 일의 범위와 수위를 정하고 공사가 잘 진행되는지 관리.감독하는 한편 지역 내의 종교지도자 및 주민과의 관계를 돈독히 다져야 한다. 게다가 각 나라 정부와 후원자들에게 보내는 사업보고서를 작성하고 예산을 관리한다. 현장에서 생기는 모든 골치아픈 문제도 풀어야 한다. 전쟁 중 병영으로 쓰였던 학교에서는 심심치 않게 불발탄이 터져 인부들이 다친다. 학교장이 자기 집에도 물탱크를 설치해 달라고 막무가내로 조르는 일도 처리해야 하고, 설치해 놓은 모터 펌프를 누가 훔쳐갔는 지도 직접 조사해야 한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2 년 전 아프가니스탄 파견 때는 홍보담당이었 던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도대체 월드비전 국제본부에서 나의 무얼 믿고 이런 막중한 일을 맡겼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잘해내고 싶다. 50 만 기독교도 박해는 커녕 '대접' 나만 몰랐던 걸까. 놀랍게도 이라크에는 50 만명이 넘는 기독교인이 있단다. 특히 모술은 기독교 신자가 가 장 많은 곳이다. 도시 외곽 니느웨 지역은 구약성경에서 요나가 고기 뱃속에 갇혀 곤욕을 치른 후 찾아갔 던 바로 그 도읍이다. 여기에서는 모슬람의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와 교회 종소리를 함께 들을 수 있다. 소수의 기독교 신자들 은 박해는커녕 오히려 대접받고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차림새부터 자유롭다. 여자들은 머리를 가 리지 않는데 딱 붙는 청바지와 짧은 소매의 옷을 입고 다녀도 뭐라는 사람이 없다. 후세인 정권 때에도 기 독교 신자들의 상권은 철저히 보호됐다고 한다. 신자들은 근무 시간 중인 일요일 오전 미사나 예배를 보러 갈 수 있다. 우리도 일요일에 교회나 성당에 간다. 천년도 넘은 건물이 고색창연하기 그지없다. 예배는 예수님이 사용 했던 언어라는 아라메안으로 진행돼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나 찬송가는 정말 멋지다. 꼭 그레고 리안 성가와 아랍 전통음악을 합쳐 놓은 것 같다. 하여간 이슬람이 국교인 이라크에서 역사와 전통이 깃들 인 초기 교회 안에 앉아있다는 자체가 감격스럽다.
4 모술은 인도.페르시아 및 지중해를 잇는 교통의 요지이자 초강국 아시리아의 수도로서 약 2 백년간 문명세 계의 중심지였다. 그래서일까. 이곳에는 아주 다양한 종족과 종교가 섞여 산다. 아랍계(60%), 쿠르드족(30%), 아시리아인, 투르크만, 그리고 공작새가 상징인 토속종교 예지디 교인도 10 만명이 넘는다. 물론 각 집단이 늘 평화공존하는 건 아니다. 이곳 북부에는 4 백만명의 쿠르드족이 살고 있는데 독립국가 를 세우려는 쿠르드족과 이를 막으려는 아랍 정부가 항상 팽팽히 맞서고 있다. 후세인 정권 때는 혹독한 탄압 을 받았지만 세상이 바뀐 지금은 이라크 어느 곳보다 안전하고 풍요로운 지역이 됐다. 그러나 쿠르드족의 전후 득세가 바로 국내 난민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낳고 있다. 쿠르드족의 세력확장을 우려한 후세인 정권은 남쪽의 가난한 아랍인들에게 땅과 여러 가지 혜택을 준다 고 꾀어 쿠르드족이 사는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자 쿠르드족들이 이 아랍계 이주 민들을 몰아내고 있는 것이다. 모술 근방에는 그래서 생긴 국내 난민이 줄잡아 5 만 명 정도, 졸지에 오갈 데 없어진 아랍계 주민들은 사담 후세인궁, 이라크군 병영 등 공공건물에 대거 몰려 살고 있다. 내가 직접 가본 곳은 전쟁 전 죄수를 다 석방해 텅 빈 교도소였다. 조그맣고 깜깜한 감방에서 한 방에 한 가족씩 7 백가족 정도가 임시로 거처하고 있었다. 50 도가 넘는 무더위에 창문도 없는 곳에서 죄인 아닌 죄인으 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약 3 개월간 지내면서 어려웠던 점은 살인적인 더위다. 8 월 중순 모술의 최고기온은 54 도. 이런 건식 사우나 같은 곳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이곳 사람들의 삶의 속도는 라르고. 말 도 걸음도 일도 천천히 한다. 꼭 슬로 모션을 보는 것 같다. 나 같이 뭐든지 스타카토로 해야 하는 사람은 확실히 더 덥다. 나의 생존방법은 아침 시간을 최대로 이용하는 거다. 오후가 되면 작열하는 햇살이 불화살이 돼 사정없이 내리꽂힌다. 일과후 샤워를 하려고 찬물을 틀면 컵라면을 끓여먹어도 좋을 뜨거운 물이 나온다. 옥상 물탱 크가 하루종일 열을 받아서다. 숙소 벽도 온돌방보다 더 따끈따끈한데 설상가상으로 전기가 하루에 4~5 시 간밖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천장에 붙은 선풍기가 무용지물이다. 오후에 많이 돌아다닌 날은 밤에 자려 고 누우면 천장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린다. 더위를 먹은 탓이다. 그나마 입맛이 떨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빵이 주식일 줄 알았는데 매끼 밥도 같이 먹는다. 티그리스 강 에서 잡은 엄청나게 큰 생선을 매콤 달콤하게 요리한 것은 정말 맛있다. 밑반찬으로 올리브 절임, 오이 피클, 그리고 고추장아찌 비슷한 게 있어 아쉬운 대로 한국 음식에 대한 갈증을 달래준다. 나의 모술 생활은 일견 단조롭지만 실상은 매우 다채롭다. 같이 일하는 국제 직원 덕분이다. 경력 20 년 이 상인 두 사람을 포함해 우리 열 명의 현장 경력 합산이 1 백 1 년, 그야말로 백전노장팀이다. 이곳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사람들이 또 있다. 여기에서 사귄 친구들이다. 우리 팀 현지 직원들, 미군 민간 협력담당관, 도미니카 수녀님, 그리고 나만 보면 입이 턱에 걸리도록 좋아하는 열살짜리 배스마. 이 꼬마 친구는 우리가 식수 사업을 하고 있는 학교 수위의 딸. 내가 이 학교를 처음 찾아간 날, 나를 보더니 얼른 자기 집에 가서 물을 떠온 아이다. 내가 땡볕에서 일하는 게 제 딴에는 안쓰러워 보였나보다. 건네주는 물 을 마시는 나를 보며 좋아서 활짝 웃는 아이의 모습에 피곤이 싹 가시는 것 같았다. 더워 죽겠는데 내 옆에 딱 달라 붙어 있어도 귀찮기는커녕 무진장 살갑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 나는 이 꼬마가 보고 싶어 필요 이 상으로 자주 그 학교를 찾았다.
5 배스마는 지난 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전쟁 때문에 학교가 문을 닫아 속상했단다. 자기 언니랑 동 생은 밤에 폭탄이 떨어지면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며 울었지만 자기는 얼른 학교 옥상에 가서 구경했단다. 불 꽃놀이처럼 멋지다고 했다가 아버지한테 크게 혼났단다.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이 학교에 와서 마구 물건을 훔쳐가고 망가뜨리고 불을 질러 정말 미웠단다. 지금도 미군이 폭탄을 떨어뜨려 자기 식구를 죽이면 어 쩌나 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강 절도 대낮 활개, 외출 겁나요" 지난달 20 일 바그다드 유엔본부 폭발사건이 있던 날, 모술에서도 두 건의 대형사고가 있었다. 하나는 사담 후세인 정권의 제 2 인자인 라마단이 생포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숙소에서 50m 전방의 유엔 사무실과 경찰서가 집중 총격을 받아 현지인 세명이 숨진 사건이다. 라마단은 모술에서 잡히기 몇 시간 전까지 사담 후세인과 같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모술은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다. 미군 정찰차의 수가 두배로 늘어났고 도로 검문검색이 강화됐다. 유엔 사무실은 임시 폐쇄됐고 우리 국제직원들은 핵심인원만 남기고 쿠르드 자치지역의 아르빌로 피신 중이다. 좀처럼 놀라지 않는 현지 직원들의 얼굴에도 당황하는 빛이 역력하다. 치안부재. 이것이 이라크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다. 미.영 연합군은 이라크인에게 자유를 찾아주었다. 그러나 이라크인은 그 대신 안전을 잃었다고 말한다. 점령군인 미군은 이라크의 안전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관심도 없다는 게 이곳 외국인과 현지인의 공통된 의견이다. 설상가상으로 국내의 후세인 추종세력과 더불어 시리아.이란 등으로부터 외부세력이 유입되면서 공격이 점점 치밀해지고 있다. 일상에서 느끼는 불안감도 나날이 고조되고 있다. 며칠 전 우리 팀원 한명도 출근길에 칼을 들이댄 노상강도에게 지갑을 뺏기고는 사색이 되어서 왔다. 벌건 대낮에 가게로 도둑이 들어오고 차량을 도난당하고, 사람이 흉기에 찔려 죽는 일이 하루도 끊이지 않는다. 총기를 이용한 범죄도 급증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 재래시장에만 가도 1 달러에 수류탄을 네개나 살 수 있고 50 달러만 주면 어떤 총이라도 구할 수 있다. 이 같은 치안부재는 전쟁 직전 후세인이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 12 만여명 전원을 무조건 풀어준 것에 기인한다고 한다. 그중엔 정치범도 있지만 대부분은 일반 잡범으로, 지금 정부도 경찰도 없는 허술한 틈을 타서 온갖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인의 외국, 특히 미국에 대한 불신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뿌리가 깊어 보인다. 그동안 만난 남녀노소, 각계 각층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미국은 오직 우리의 석유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이라크인을 위한 경제재건이니, 민주주의 구축 같은 얘기엔 코웃음도 치지 않는다. 이라크인들은 유엔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지난 12 년간 유엔의 혹독한 경제제재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동안에는 철저하게 외면하다 이제 와서 이라크인의 인권을 위해 대단히 노력하는 것처럼 구는 게 미덥지 않다는 거다. 유엔은 미국의 꼭두각시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우리처럼 순수한 민간구호단체까지 색안경을 끼고 본다. 인도적 구호활동을 앞세우지만 저 외국인들도 분명 다른 속셈이 있을 거라는 의심이다. 그동안 그렇게 당했으니 이런 반응이 오히려 정상일지도 모른다. 어른들끼리 이렇게 서로 속고 속이고 의심하고 의심받고 있는 틈바구니에서도 아이들은 천진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마라하바."(안녕) "헬로, 헬로." 건물 밖으로 한발짝만 나가도 아이들이 벌떼처럼 따라붙는다. 나도 어렸을 때 동네에
6 미군이 나타나면 끝까지 따라다니며 '헬로, 헬로'했었는데. 사실 이곳 아이들은 외국인들을, 특히 모두 미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서양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한다. 얼마 전까지 미국을 무찌르자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는 첫 순간이 중요하다. 그 순간 손을 흔들며 웃음을 보내면 일초의 지체없이 아이들도 따라 웃는다. 어쩌나 보려고 가만히 있으면 아이들은 우물쭈물하며 아주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신이 나면 아이들은 목청을 돋우어 우리의 피를 바쳐, 영혼을 바쳐 사담을 지지한다는 연호를 외치며 불끈 쥔 주먹을 흔들면서 따라다닌다. 내용과 상관없이 아이들에게는 이게 놀이이고 반갑다는 표시다. 어른들은 당장 그만두라고 막 야단을 치지만 지난날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 사람은 누구던가. 9 월 개학을 맞는 교장선생님들은 벌써부터 걱정이다. 교과서 첫장에 있는 후세인 사진은 모두 떼어냈지만 책 속 내용까지 일일이 손을 쓸 수는 없다고 한다. 요즘은 개학 전까지 학교 담벽이나 교실에 그려진 후세인의 흔적을 지워내느라 정신이 없다. 한 교장선생님에게 "미군에 대해 어떻게 가르칠거냐"하고 물으니 "우리에게 자유를 주러 온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헛기침을 한다. 유엔본부 폭발사건 이후 많은 국제기구가 인원축소나 임시철수를 고려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입장을 취하든 나는 "이라크에는 희망이 없어"라고 말하는 국제직원들을 경멸한다. 그러면 그들은 왜 여기에 있는가? 그저 남의 고통을 기회 삼아 경험을 넓히고 돈을 벌고 있는 건 아닌가? 한국전쟁 때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은 도대체 희망이 없다고. 한국이 제대로 돌아가기를 바라느니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다리는 것이 더 빠르다고. 이라크는 석유매장량 세계 2 위로 잘 살던 나라였다. 그러나 세번의 전쟁과 경제제재로 사회기반이 무너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는 교육수준도 높고 일반국민의 평화에 대한 의지도 굳다. 이제 좋은 지도자를 만나 효율적인 정부를 꾸리기만 하면 짧은 시일 내에 풍성한 '장미꽃'을 피울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긴급구호팀은 이 나라 정부가 제대로 돌아갈 때까지, 적어도 2 년간 이라크의 보통사람들과 이 어려운 고비를 함께 넘을 작정이다. 3 개월 전까지 이라크는 그저 중동의 한 나라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내게 너무나 소중한 나라가 되었다. 그동안 안타까워서, 분하고 억울해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이라크 모술에서 흘린 나의 땀과 눈물이 헛되지 않으려면, 월드비전을 믿고 귀한 성금을 맡기신 우리 후원자 및 참여연대의 정성이 헛되지 않으려면, 그리고 한국국제협력단 지원금을 통한 한국 국민의 세금이 헛되지 않으려면 이라크가 하루빨리 안정을 되찾아 보란 듯이 국가재건에 성공해야 한다. 제발 그래야 한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이라크의 작별 인사말은 '마 살라마'(당신에게 평화를 두고 갑니다)다. 이라크에 나의 기도와 평화를 두고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