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병연행록 1 정훈식, 2012 1판 1쇄 인쇄 2012년 03월 10일 1판 1쇄 발행 2012년 03월 20일 지은이 홍 대 용 옮긴이 정 훈 식 펴낸이 양 정 섭 펴낸곳 _ 도서출판 경진 등 록_제2010-000004호 주 소_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1272번지 우림필유 101-212 블로그 _ http://kyungjinmunhwa.tistory.com 이메일 _ wekorea@paran.com 공급처 _ (주)글로벌콘텐츠출판그룹 대 표_홍정표 기획 마케팅 _ 노경민 경영지원 _ 최정임 주 소_서울특별시 강동구 길동 349-6 정일빌딩 401호 전 화_02-488-3280 팩 스_02-488-3281 홈페이지 _ http://www.gcbook.co.kr 값_27,000원 ISBN _ 978-89-5996-145-0 94810 978-89-5996-144-3 94810(전 2권) 이 책은 본사와 저자의 허락 없이는 내용의 일부 또는 전체를 무단 복제, 복사, 전재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책은 바꾸어 드립니다. 이 도서는 부산문화재단 <2011 학예진흥을 위한 회원활동 지원사업>의 일부를 지원받았습니다. 본문에 수록된 사진은 대부분 옮긴이가 답사를 하며 확보한 자료이며, 위키피디아 등에 있는 자료를 일부 활용하였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도판 중 미처 저작권 협의를 거치지 않은 것은 연락이 닿는 대로 절차를 밟고 허가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옮긴이 서문 을병연행록, 또 다른 조선의 진로를 모색하다 을병연행록 은 홍대용(1731~1783)이 남긴 연행록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연행록은 조선시대 북경에 사행을 다녀와서 남긴 작품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사행은 본질적으로 외교적 업무였다. 특히 한중관 계에서의 사행은 동아시아의 책봉조공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정례화 된 행사로, 그 규칙과 범례도 사뭇 자세하고 까다로웠다. 곧 사행은 당시 조선이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대외적 생존전략의 하나였던 것이 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오가는 사신들은 그 임무의 막중함이 한량없 었다. 아, 여행의 고단함이여! 그럼에도 이 사행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중국을 한 번 가 보고자 간절히 꿈꾸던 선비들이었다. 그들은 대개 친인척이 삼 사신으로 중국을 갈 때 자제군관이란 직책을 달고 사행을 따라갔는데 이 직책은 별다른 소임이 없어 유람에 특별한 구애가 없었다. 말이 통 할 만큼의 중국어 실력이나 필담을 나눌 만큼의 필력을 갖추고, 유람 이나 사귐에 필요한 선물로 청심환과 부채 등을 마련해 가져갈 수 있 다면 그만이었다. 홍대용도 자제군관의 직책으로 1765년 겨울과 1766년 봄에 걸쳐 계부 홍억을 따라 북경에 다녀왔다. 때는 바야흐로 건륭시대로 중국 4 을병연행록 1
역사상 최고의 성세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의 조야에 서는 청나라의 이렇듯 눈부신 성장은 외면한 채 반청사상만이 만연해 있었다. 이 와중에 중국의 규모와 실상을 살필 뜻을 품은 이들이 바로 북학파 홍대용을 비롯한 일군의 선비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북경을 다녀온 뒤 그 견문을 기록한 연행록을 남겼는데, 담헌 또한 국문본 을 병연행록 과 한문본 연기, 간정동필담 이라는 연행록을 남겼다.김 경선(1788~1853, 1851년 연행 후 연원직지 를 남김)은 담헌의 연기 와 함 께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 (1712), 박지원의 열하일기 (1780)를 이 른바 연행록삼가 燕 行 錄 三 家 로 일컬었는데 오늘날에도 이 평가는 크게 그릇되지 않다. 이로 보면 중국을 간 숱한 인물들 가운데 자제군관 출 신들이 특별하게 뛰어난 연행록을 남긴 셈이다. 기실 이 세 작품은 중 국이라는 사유의 공간을 횡단하는 그 폭과 깊이에서 남다른 바가 있 기에 다른 연행록보다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 가운 데에서도 특히 반청사상과 그 논리적 기반인 화이론을 정면에서 문제 삼고 이를 혁파하려고 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홍대용은 앞서 말한 대로 국문본 을병연행록 외에 두 편의 연행 록을 더 엮었는데, 한문본 연기 는 중국 견문을 항복별로 저술한 것 이고 간정동필담 은 중국 지식인과의 필담과 편지를 엮어 놓은 것이 다. 이를테면 담헌의 연행체험 3부작이라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중국 여행을 여러 편으로 나누어 저술한 사례는 전에 없던 방식이었다. 그 는 왜 이렇게 단 한 번의 여행체험을 여러 편으로 나누어 저술했을 까? 그것은 홍대용이 자신의 연행체험을 성격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 누었기 때문이다. 곧 담헌은 항주에서 올라온 중국 지식인과의 교유 와 나머지 것으로 그의 연행체험을 구분하였는데, 연기 와 간정동 필담 은 이 둘을 나누어 별도의 책으로 저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 실 그 내용과 규모에서 보더라도 간정동에서의 필담이 상당한 분량을 옮긴이 서문: 을병연행록, 또 다른 조선의 진로를 모색하다 5
차지한다. 이것이 곧 독립적인 텍스트로 엮게 된 기초적 배경이다. 그 러나 홍대용이 이를 나눈 것은 분량의 문제 때문만 아니라, 항주 선비 와의 교유를 기타 연행체험과 구분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 다는 점에 있다. 학계에서도 이를 한 중 지식인 교류사에서 특별한 의의를 지닌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요컨대 홍대용은 북경 간정동 에서 항주의 세 선비와 나눈 필담을 매우 특별하게 여겨 별도의 책으 로 엮었다. 한편 을병연행록 은 출발에서 도착까지의 여정을 일기체 형식으 로 저술한 것이다. 흔히들 이 작품이 지닌 의의로 국문 저술을 언급한 다. 이 시기 국문으로 된 연행록 또는 통신사행록이 저술되었다는 사 실은 바로 한문 식자층의 전유물이던 사행록이 국문독자의 교양물로 확산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을병연행록 은 이에 서 나아가 국문 기행문학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특별한 의의가 있다. 을병연행록 은 국문의 특성을 잘 살 려 저술한 기록으로, 한문본과 내용은 대동소이하지만 견문의 세밀한 묘사와 생동감 있는 인물 형상화는 한문본에서 볼 수 없는 이 작품의 독자적인 면모이다. 특히 노정의 전체 경로와 견문을 모두 아울러서 여행의 온전한 과정을 총체적으로 재현한 점이 주목된다. 작품의 이 런 특징은 저술 과정에서 대다수 한문기록에서 보이는 간략하면서 건 조한 문체와 달리 흥미성과 실용성을 추구한 결과이다. 이는 연행록 의 역사에서 매우 특별한 성취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을병연행 록 은 조선시대의 뛰어난 국문 기행문학 가운데 하나이다. 담헌의 연행록은 후대 연행록의 저술에 영향을 미쳤는데, 그 중 열 하일기 와 북학의 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특히 열하일기 에는 홍대용의 생각이 그대로 담긴 대목은 물론 견문기록도 거의 동일한 곳이 많다. 이처럼 홍대용의 연행록은 열하일기 와 반드시 병행해서 읽어야 할 텍스트라 할 만하다. 그럼에도 담헌의 연행록이 열하일기 6 을병연행록 1
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중적 관심이 덜하였다. 이는 무엇보다 국문본 을병연행록 의 현대어 번역작업이 더뎌 대중적으로 접하기 어려웠 던 상황에 기인한다. 다행히 최근 을병연행록 의 주해본이 간행되 고, 일부가 현대어로 간행되어 대중적 관심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 나 작품의 온전한 내용을 누구나 접할 수 있도록 모두 현대 우리말로 옮겨놓은 책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 옮긴이로 하여금 완역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하였다. 막상 마음먹은 일을 벌이고 나니 어려운 일이 곳곳에서 발생하였 다. 제일 힘든 문제가 바로 옮길 때의 기본 방향을 설정하는 일이었 다. 원저는 18세기 국문기록으로, 당연히 현재 우리말과는 차이가 있 다. 뜻이 달라진 낱말, 지금은 쓰이지 않는 낱말과 당시에 통용되던 외국어, 외래어의 처리 방향이 일차적 난제였다. 이러한 낱말이 쓰인 시대적 상황을 무시하고 완전히 현대어로 옮긴다면 텍스트에 담겨 있 는 시공간의 기억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옛 책을 옮 기는 큰 목적은 오늘날 독자들이 쉽게 읽도록 하는 것이기에, 가독성 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기본원칙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다만 당대의 역사적, 문화적 상황을 온축해 놓은 낱말이나 구절은 주석을 달고 그 대로 쓰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절충안으로, 그 자체가 어느 쪽도 온전히 충족할 수 없는 불완전한 것이듯 이 책 또한 어느 한쪽도 온전치 못한 엉성한 결과물이 되지 않았을까 우려된다. 옮길 때의 오 류와 매끄럽지 못한 점 등은 오로지 이러한 방향을 정할 수밖에 없었 던 옮긴이의 책임이다. 이 책의 간행작업 중 한 방송매체에서 홍대용에 관한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옮긴이는 그 중 국제천문학회에서 새로 발견된 소행성에 홍대용이란 이름을 부여했다는 대목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는 담헌 이 천문학에서 이룬 탁월한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리라. 그는 평생 옮긴이 서문: 을병연행록, 또 다른 조선의 진로를 모색하다 7
성리학에 몰두했던 당시 일반적인 양반 식자층과는 달리 천문관측시 설인 농수각을 짓고 천문관측기기인 혼천의 등을 제작한 것은 물론 천문학 이론 방면에서 일찍이 없었던 새로운 견해인 지전설 을 제출 하였다. 조선의 학자 담헌이 천문학 등 자연과학 방면에서 이룬 성취는 오 늘날 우리 학문을 깊이 성찰할 계기를 마련해 준다. 근 250여 년이란 시간이 흐른 작금 한국의 지식계에서는 통섭, 혹은 학제 간 융합이라 는 말이 홍수처럼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과거에 학문의 융합, 통섭을 이루었던 지식인이 있었음에 크게 주목하지 않고 있다. 이 땅에 근대적 분과학문체계가 이식되기 전의 학문은 사실상 통합 지향적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한 풍토 속의 대다수 식자층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통섭 학문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이 른바 학문의 융합을 가장 잘 체현한 지식인을 꼽으라면 바로 홍대용 이다. 그는 당시로서는 흔치 않게 천문과 수학에 조예가 깊은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그가 남긴 여러 저술에서 확인 할 수 있음은 물론, 혼천의를 직접 제작하였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분 명히 알 수 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평이 그가 단지 인 문과 자연에 걸쳐 두루 조예가 깊었다는 말을 두고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홍대용은 다방면의 해박한 지식을 모두 아울러 새로운 시대 를 위한 사상을 치열하게 모색하였다는 점에서 진정한 학문의 융합을 체현한 자이다. 오늘 이 땅에는 여전히 중세 화이론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은연중에 이를 다시 대국을 지향하는 중국 탓으로 돌리고 있 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우리 마음 속 중국에 대한 막연한 반감 또는 두려움이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담헌이 말한바 중국은 하나의 잣대 로는 파악할 수 없는 규모는 크고 심법은 세밀한 나라 이다. 이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도로에는 아직도 말이 끄는 달구지가 지나다니지만 8 을병연행록 1
지구 밖으로 유인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집권 중국공산당은 거의 자 본주의에 가까운 이른바 사회주의 시장경제 를 운영하고 있으며, 모 택동과 공자가 공존하고 있는 나라가 중국이다. 이처럼 온갖 이질적 인 것들이 뒤섞인 채 중국은 굴러간다. 우리나라는 이 나라와 이웃하 고 역사 이래 수없이 얽히고설키며 공존해 왔다. 해서 그 어느 나라보 다 우리는 중국을 잘 알고 있으며, 또 호불호의 감정을 넘어서 그 본 질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한다. 바야흐로 다시 중국이라는 복잡한 텍스 트를 명확히 해독해야 하는 절실한 시간이 다가왔다. 바로 이 시점에 서 중국에 대한 의미 있는 독법을 제시한 텍스트가 바로 홍대용과 북 학파의 연행록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담헌의 의산문답 은 그의 이 러한 필생의 사상적 과업이 응축된 창조적 역작으로 함께 읽어볼 만 하다. 홍대용은 얼핏 보기에 흥미를 끌만 한 문제적 인물로 보이지 않는 다. 아마도 이는 그의 단정한 생애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담헌은 조선시대 그 누구보다 문제적 인물이었다. 더구나 그 문제적 성격이 이론 없는 광기와 대안 없는 저항에 근거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꼿꼿하게 선비의 올곧은 모습을 지니면서도 과거제를 거부 하는 방식으로 조선의 사회정치적 전횡에 가장 첨예하게 대항했으며, 또한 누구보다 정교하게 조선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인 화이론을 흔들 었던 인물이다. 담헌의 이론과 실천은 질곡으로 작용한 조선의 핵심 적인 문제와 시종일관 대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곧 이는 조선의 진로 를 바꾸려고 했던 원대하고 혁신적인 실천이다. 체제와 사상 그리고 삶의 방식까지 모두 바꾸려고 했던 홍대용의 혁신적 삶의 자취가 오 롯이 그의 중국여행에 담겨 있다. 그럼에도 홍대용의 문제적 생애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대신 그의 사상과 북경 여행에 대한 부분적 인 관심을 기울였을 뿐이었다. 이제 홍대용의 삶과 실천을 우리시대 에 비추어 재조명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옮긴이 서문: 을병연행록, 또 다른 조선의 진로를 모색하다 9
이 책을 간행하는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중국에 머물 수 있었던 것 이 무엇보다 가장 큰 행운이었다. 홍대용 연행록을 대상으로 하여 학 위 논문을 준비하던 때에는 마침 2003년 여름부터 1년간 단동에 머물 며 연행 노정을 답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며, 이 책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2009년 9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낙양에 머물면서 을병연 행록 을 현대어로 옮기는 작업에 몰두하며 틈나는 대로 연행노정을 다시 답사할 기회를 얻었다. 이때 미처 찾아보지 못했던 북경의 간정 동 골목을 직접 가본 것이 가장 뜻 깊었다. 지금 그 거리는 낡고 허물 어져 홍대용이 항주선비들과 천애지기를 맺었던 현장인 천승점 이란 곳은 찾을 길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한 중 교류의 아름다운 전통을 만들었던 이곳에 단지 그 사적을 기억할 만한 조그만 표지라도 세웠 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홀로 이 골목을 한동안 오가며 서성거 렸다. 그러다보니 더욱 빨리 마무리 해야겠다는 조급함이 생겨 귀국 후 서둘러 이 책을 출간할 준비를 하던 중, 때마침 부산문화재단의 지 원을 받는 행운을 얻었다. 이렇듯 숱한 행운 속에서도 천성이 느려 일은 더디기만 했으니, 스 승과 동학 선후배의 격려와 도움이 아니었다면 하염없이 지체되기만 했을 것이다. 한태문 선생님은 옮긴이의 사행록 연구를 직접 지도해 주신 은사로서,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연구 방향은 내 공부의 기본 토대가 되었다. 이헌홍 선생님은 옮긴이가 석사과정 재학시절 연행록 에 관심을 갖도록 이끌어 주셨으며, 지금도 애정 어린 관심을 기울여 주신다. 조태흠 선생님, 강남주 선생님, 남송우 선생님, 그리고 정석영 이사님은 옮긴이가 중국에 머물 수 있는 학교를 주선해 주셨다. 무엇 보다 옮긴이가 학위논문을 쓰고 이 책의 간행을 준비하는 동안에 처 한 어려운 시기를 넘길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도움을 주신 고순희 선 생님의 배려를 잊을 수 없다. 이순욱 선생님은 평소 나의 인생과 공부 에 특별히 깊은 관심을 가져주시는 선배로, 이 책을 내는 동안에도 자 10 을병연행록 1
신의 일처럼 함께 해 주셨다. 성근 원고를 읽고 꼼꼼하게 지적해준 김 문기 선생, 이재영 선생, 최정윤 선생, 조동흠 선생께도 깊이 고마움 을 전한다. 이 책의 간행은 오로지 여러분의 이런 따뜻한 마음 덕분에 가능했다. 중국에 머무는 동안에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의 도 움을 받았다. 단동에 있을 당시 전금희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 낙양에 있을 때 장광군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의 배려로 탈 없 이 편히 지낼 수 있었다. 심양의 한 서점에서 책을 뒤적이던 나를 집 으로 데려가 숙식을 제공하시던 조선족 어르신, 만주의 외진 곳에서 비를 맞으며 오갈 데를 모를 때 직접 나를 위해 숙소를 잡아주시던 아 저씨, 그리고 무엇보다 중국에 있으면서 된장찌개와 김치를 거의 매 일 먹게 해 준 금순불고기식당 식구들을 잊을 수 없다. 이 책의 출간을 흔쾌히 맡아준 도서출판 경진의 양정섭 대표님과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좋은 책을 만들어 주신 편집실 여러분에게도 고 마운 마음을 전한다. 끝으로 이 책을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김쾌덕 선생님의 영전에 바 친다. 2012년 2월 한 중 수교 20주년을 기념하며 정 훈 식 옮긴이 서문: 을병연행록, 또 다른 조선의 진로를 모색하다 11
차 례 옮긴이 서문: 을병연행록, 또 다른 조선의 진로를 모색하다 4 서울을 출발하다 을유년(1765) 11월 초2일 서울에서 출발하여 고양에 이르러 묵다 20 11월 초3일 고양에서 출발하여 초10일 평양에 이르다 28 11월 11일과 12일 평양서 묵다 31 11월 13일 평양에서 출발하여 20일 의주에 이르다 38 11월 20일부터 26일에 이르러 의주에 머물다 42 압록강을 건너 심양에 이르다 11월 27일 강을 건너 구련성 한데서 밤을 지새우다 48 11월 28일 구련성을 출발하여 29일 책문에 들다 53 11월 30일 봉황에서 자다 62 12월 초1일 솔참에 자다 72 12월 초2일 솔참에서 출발하여 초4일 감수참에 이르다 79 12월 초5일 낭자산에서 자다 88 12월 초6일 신요동에서 자다 94 12월 초7일 신요동을 떠나 초8일 심양에 이르다 102 12월 초9일 심양에서 묵다 113 12 을병연행록 1
산해관을 들어가 북경에 이르다 12월 초10일 심양에서 출발하여 소흑산에 이르다 130 12월 13일 소흑산에서 출발하여 14일 십삼산에 이르다 138 12월 15일 십삼산에서 출발하여 16일 영원에 이르다 149 12월 17일 영원에서 출발하여 18일 양수하에 이르다 157 12월 19일 양수하에서 출발하여 20일 유관에서 자다 167 12월 21일 유관에서 출발하여 22일 사하역에서 자다 182 12월 23일 사하역에서 출발하여 24일 옥전현에서 자다 195 12월 25일 옥전현에서 출발하여 26일 연교포에 이르다 208 12월 27일 북경에 들어가다 219 12월 28일 예부에 자문을 바치는 데 따라가다 233 12월 29일 홍려시 연의에 가다 242 북경에서 새해를 맞이하다 병술년(1766) 정월 초1일 조참에 따라가다 248 정월 초2일 관에 머물다 264 정월 초3일 관에 머물다 268 정월 초4일 정양문 밖으로 가서 희자 공연을 보다 277 정월 초5일 태학 부학 문승상묘 옹화궁 네 곳을 보다 294 정월 초6일 관에 머물다 316 정월 초7일 관에 머물다 321 정월 초8일 관에 머무르며 환술을 보다 331 정월 초9일 천주당을 보다 341 정월 초10일 진가의 푸자에 다녀오다 360 정월 11일 유리창에 가다 375 정월 12일 옹화궁과 태학에 가다 387 정월 13일 천주당과 유리창에 가다 399 차 례 13
정월 14일 법장사에 가다 404 정월 15일 관중에 머무르다 413 황성을 두루 유람하다 정월 16일 밤에 등불을 구경하다 416 정월 17일 오룡정과 홍인사를 보다 423 정월 18일 유리창에 가다 441 정월 19일 천주당에 가다 445 정월 20일 팽 한림 집에 가다 455 정월 21일 관에 머물다 475 정월 22일 유리창에 가다 480 정월 23일 서길사청에 가 두 한림과 수작하다 486 정월 24일 몽고관과 동천주당에 가다 494 정월 25일 북성 밖에 가다 504 정월 26일 유리창에 가서 세 선비와 수작하다 516 정월 27일 관에 머물다 525 정월 28일 관에 머물다 529 정월 29일 융복사 장을 구경하다 535 정월 30일 유리창에 가다 541 찾아보기 549 14 을병연행록 1
차 례 간정동에서 항주 선비를 만나다 2월 초1일 관에 머물다 2월 초2일 천주당에 가다 2월 초3일 간정동에 가다 2월 초4일 관에 머물다 2월 초5일 관에 머물다 2월 초6일 태화전을 보고 유리창에 가다 2월 초7일 관에 머물다 2월 초8일 간정동에 가다 2월 초9일 관에 머물다 2월 초10일 관에 머물다 서산을 유람하다 2월 11일 서산에 가다 2월 12일 간정동에 가다 2월 13일 관에 머물다 2월 14일 관에 머물다 2월 15일 관에 머물다 2월 16일 관에 머물다 2월 17일 간정동에 가다 차 례 15
천애지기를 맺다 2월 18일 관에 머물다 2월 19일 관에 머물다 2월 20일 관에 머물다 2월 21일 관에 머물다 2월 22일 관에 머물다 2월 23일 간정동에 가다 2월 24일 관에 머물다 2월 25일 관에 머물다 2월 26일 간정동에 가다 2월 27일 관에 머물다 2월 28일 관에 머물다 2월 29일 관에 머물다 북경을 출발하다 3월 초1일 북경에서 출발하여 통주에서 자다 3월 초2일 연교포에서 아침을 먹고 삼하에서 자다 3월 초3일 방균점에서 점심을 먹고 반산을 보고 계주에서 자다 3월 초4일 송가성을 보고 봉산점에서 점심을 먹고 옥전현에서 자다 3월 초5일 옥전현서 출발하여 초7일 영평부에 이르다 서울에 돌아오다 3월 초8일 영평부에서 출발하여 초9일 팔리포에 이르다 3월 초10일 팔리포에서 출발하여 14일 소릉하에 이르다 16 을병연행록 1
3월 15일 소릉하에서 출발하여 17일 소흑산에 이르다 3월 18일 소흑산에서 출발하여 22일 심양에 이르다 3월 23일 심양에서 출발하여 29일 송참에 이르다 3월 30일 삼차하에서 점심을 먹고 책문에서 자다 4월 초1일로부터 초7일에 이르러 책문에 머물다 4월 8일 책문을 나와 12일 의주에 이르고 27일 서울에 이르다 차 례 17
일러두기 1. 이 책은 홍대용의 북경여행기인 을병연 록 (장서각본)을 저본으로 삼아 현대 우리 말로 옮긴 것이다. 숭실대본 을병연행록 을 교감본으로 삼았으며, 장서각본을 영인 한 을병연 록 (명지대출판부)과 연행록전집 (임기중 편, 동국대출판부)에 수록된 을병연 록, 주해 을병연행록 (소재영 조규익 장경남 최인황, 태학사, 1997)과 산 해관 잠긴 문을 한손으로 밀치도다 (김태준 박성순 옮김, 돌베개, 2001) 등을 참조하 였다. 2. 저본은 20권 20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차례는 날짜순으로 되어 있으나, 이 책에서 는 적절한 곳에 제목을 붙여 장을 나누었다. 3. 현행 어문 규정에 맞게 옮겼으나, 될 수 있는 대로 당대 국문체의 예스러운 모습이 드러나도록 하였다. 4. 한자어는 한글로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순화할 수 있는 낱말은 우리말로 바 꾸어 표기하였다. 다만 인명, 지명, 관직명과 같은 고유명사, 전고가 있는 한자어,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옛 한자어 등은 한자를 병기하여 그대로 쓰고 필요한 경우 주 해를 덧붙였다. 5. 당시 언문생활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낱말(우리말, 외래어, 외국어 등)과 구절은 표기법만 어문 규정에 맞게 고치고, 원문 그대로 표기한 뒤 필요할 경우 주 해를 덧붙였다. 예) 갈범(줄무늬가 있는 범. 칡범), 가께수리(왜궤인 가께스즈리 懸 掛 硯 를 뜻하는 외래어), 푸자 舖 子 (점포의 중국어) 6. 뜻풀이가 어려운 낱말이나 구절은 각주로 표시하였다. 7. 주해는 간단한 경우 간주 間 注 를, 긴 내용일 경우 각주를 달았다. 8. 이 책에 수록된 한시의 원문은 연기 燕 記 (홍대용 지음), 연항시독 燕 杭 詩 牘 (후지츠 카 치카시 藤 塚 鄰 엮음, 하버드 옌칭 도서관), 철교전집 鐵 橋 全 集 (엄성 지음, 서울대 도서관) 등을 참조하여 추가하였다. 18 을병연행록 1
서울을 출발하다 금석산. 이 산은 단동 교외에 있는 산으로 의주에서도 보인다고 한다. 제 비록 더러운 오랑캐이나 중국을 차지하여 100여 년 태평을 누리니, 그 규모와 기상이 어찌 한 번 보암직하지 않겠는가.
을유년(1765) 11월 초2일 서울에서 출발하여 고양에 이르러 묵다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보지 못하니 남아의 의기 쟁영함을 저버렸도다. 미호 한 굽이에 고기 낚는 배가 작으니 홀로 도롱이를 입고 이 인생을 웃노라. 未 見 秦 皇 萬 里 城 男 兒 意 氣 負 崢 嶸 渼 湖 一 曲 漁 舟 小 獨 束 簑 衣 笑 此 生 이 네 구절 시는 김농암 1 선생이 연행하는 사람에게 주어 보내신 글이다. 대저 사람이 작은 일을 즐기고 큰일을 모르는 것은 그 마음에 크고 뛰어난 뜻이 적은 까닭이요, 좁은 곳을 평안히 여겨 너른 곳을 생각지 않는 것은 그 도량 度 量 에 원대한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고 로 장주가 말하기를, 여름 버러지와 더불어 얼음을 말하지 못할 것이 1 조선 중기의 학자인 김창협 金 昌 協 (1651~1708)을 말한다. 농암 農 巖 은 그의 호이다. 문집으로 농암집 農 巖 集 이 있다. 20 을병연행록 1
요, 편벽된 선비와는 족히 더불어 큰 도를 의논치 못하리라 夏 蟲 不 可 以 語 於 氷 者 篤 於 時 也 曲 士 不 可 以 語 於 道 者 束 於 敎 也 2 라 하였다. 우리나라의 예악문물이 비록 작은 중화로 일컬어지나, 터가 백 리를 열린 들이 없고 천 리를 흐르는 강이 없으니, 땅이 좁고 산천이 막혀 중국의 한 고을도 당하지 못한다. 사람이 그 가운데 있어 눈을 부릅뜨고 구구한 영리를 도모하며, 팔을 걷어붙이고 소소한 득실을 다툰다. 그 스스로 넉넉하다 여기는 마음씨와 악착스런 언론 3 이 세상 밖에 큰 일이 있고 천하에 큰 땅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니, 어찌 가련치 아니한가. 중국은 천하의 종국 宗 國 이요, 교화의 근본이다. 의관제도와 시서문헌 이 사방의 기준이 되는 곳이로되, 삼대 三 代 이후로 성왕이 일어나지 않 아 풍속이 날로 쇠약해지고 예악이 날로 사라졌다. 이때 변방 오랑캐 가 군사의 강함을 믿고 중국이 어지러운 틈을 타 침범하여 오랑캐의 말이 완락 宛 洛 (완읍과 낙양, 곧 서울)의 물을 마시니, 조정이 몽고와의 화 친을 강론하여 백성이 창끝과 살촉에 걸리고 왕풍 王 風 이 형극 荊 棘 의 고 통 속에 버려졌다. 그로부터 대개 천여 년이 지나지 않아 원나라가 중 국을 차지하니, 신주 神 州 (중국)에 액운이 극진하였다. 그러더니 대명이 일어나 척검 斥 劍 을 이끌어 오랑캐를 소탕하고 남경과 북경의 천험 天 險 에 웅거하여, 예악의관의 옛 제도를 하루아침에 회복하였으니, 북원 北 苑 (황실 원림)의 너름과 문치 文 治 의 높음이 가히 한당 漢 唐 보다 낫고 삼대 三 代 에 비길 만하였다. 이때 우리 동국이 또한 고려의 쇠란함을 이어 청명한 정교와 어질 고 후덕한 풍속이 중화의 제도를 숭상하며, 동이의 고루한 습속을 씻 어 성신 聖 臣 이 위로 이으시고 명현 明 賢 이 아래로 일어났다. 중국이 또한 예의지방으로 허하여 불쌍히 여기고 은혜를 베풂이 내복 內 服 (천자 직할 2 장자 외편에 전하는 구절이다. 3 조선시대에 양반층의 여론을 반영하여 정사나 관리의 처신 등에 대해 잘잘못을 가리고 의 견을 제시하는 일을 말한다. 서울을 출발하다 21
지역)과 다름이 없었으니, 사신과 벼슬아치가 사행길에서 서로 만나고, 황화 皇 華 (중국)의 시가 우리나라의 이목을 흔들어대었다. 슬프다! 사람이 불행하여 이같이 융성한 때를 만나 한관 漢 官 의 위의 를 보지 못하고, 천계 天 啓 (명나라 희종 때의 연호, 1620~1627) 이후 간신이 조정을 흐리고 유적 流 賊 이 천하를 어지럽혀, 만여 리 금수산하를 하루 아침에 건로 建 虜 (건주여진, 곧 청나라)의 기물 器 物 로 만들어 삼대의 남은 백 성과 성현이 끼친 자손이 다 머리털을 자르고 호복을 입어 예악문물 에 다시 상고할 만한 곳이 없으니, 이러하므로 지사와 호걸이 중국 백 성을 위하여 잠깐의 아픔을 참고 마음을 삭일 뿐이다. 그러나 문물이 비록 다르나 산천은 의구하고, 의관이 비록 변하나 인물은 고금이 없으니, 어찌 한 번 몸을 일으켜 천하의 큼을 보고 천 하의 선비를 만나 천하의 일을 의논할 뜻이 없겠는가? 또 제 비록 더 러운 오랑캐이나 중국을 차지하여 100여 년 태평을 누리니, 그 규모 와 기상이 어찌 한 번 보암직하지 않겠는가. 만일 오랑캐의 땅은 군자 가 밟을 바가 아니요, 오랑캐 옷을 입은 인물과는 족히 더불어 말을 못하리라 하면 이것은 편벽한 소견이요, 어진 자의 마음이 아니다. 이러하므로 내 평생에 한 번 보기를 원하여 매일 근력을 기르고 정 도 程 度 (능력이나 수준)를 계량하며, 역관을 만나면 중국말을 배워 기회를 만나 한 번 쓰고자 생각하였다. 그런데 을유년(1765) 6월 도정 4 都 政 에서 계부 5 季 父 를 서장관 書 狀 官 으로 임명하시니, 이는 뜻있는 자의 일이 마침 내 이루진 것이다. 계부께서 또한 행색이 고단함을 염려하시어 데려 가고자 하시고, 양친의 연세 독로지경 篤 老 之 境 (일흔 살)에 이르지 아니하 셨으니, 이 기회를 잃기 어려워 이런 뜻을 아뢰어 가기를 청하니, 양 친 또한 평생의 고심 苦 心 이 있는 줄을 아시고는 쾌히 허락하시고 어렵 4 도정은 백관을 차출하는 회의인 도목정사의 줄임말이다. 5 홍대용의 계부는 홍억 洪 檍 (1722~1809)으로 자는 유직 幼 直 이며, 호조참판 숙 璛 의 손자이자, 충청도 관찰사 용조 龍 祚 의 아들이다. 22 을병연행록 1
게 여기는 기색이 없으셨다. 드디어 행계 6 行 啓 를 내정하고 10월 12일 수촌 7 壽 村 을 떠나서 15일 경 성에 들어와 다음 달 2일 사신이 배표 8 拜 表 하고 출발했다. 상사께서는 나를 서장관의 자벽군관 自 辟 軍 官 9 으로 아뢰어 청하셨으니, 이에 호조 戶 曹 에서 군관으로 치장하라고 명주 두 필과 쌀 두 섬을 주었는데 여기에 10 보태어 약간의 의복을 만들었다. 세전양청 勢 典 兩 廳 에서는 여행 경비로 주는 여러 물건이 있어, 더러는 나누어 주고 남은 것으로 청심환 한 제를 지었다. 11 아침을 먹은 뒤 가친을 모시고 홍제원 弘 濟 院 에 이르니, 송별하는 사 람이 상하 수십 명이 나와 있었다. 오후에 계부께서 배표 拜 表 를 마치고 먼저 나오셨다. 임금께 하직인사를 할 때에 나라에서 어필 御 筆 로 열여 섯 자를 써 내리셔서 길을 보내셨다. 시종 신하로서 저문 해에 연경으로 떠나니 특별히 불러 음식을 주나, 내 마음은 창연하도다. 以 侍 從 臣 暮 年 赴 燕 特 召 饋 饌 余 心 悵 然 이는 흔치 않은 은혜였다. 날이 저물어 가친께 하직하고 화중과 함 께 먼저 고양 高 陽 으로 향했다. 성번 盛 蕃 과 차충 次 忠 은 뒤떨어져 행차를 모 6 왕태후 王 太 后, 왕후 王 后, 왕세자 王 世 子 등이 출입하는 일, 또는 그 출입을 말한다. 7 수촌은 홍대용의 고향인 충청도 청원군 수신면 장산리를 말한다. 8 배표는 임금이 내린 표문을 받은 사신이 절을 하고 천자에게 올리는 표문을 봉하는 예를 말한다. 9 자벽군관은 사신의 자제나 근친으로 따라가는 자제군관으로 사신이 임명하여 조정의 승인 을 받는다. 10 세전양청은 세폐색 歲 幣 色 과 전객사 典 客 司 를 이른다. 전자는 사신의 세시 폐물을 공급하고, 후 자는 외국 사신의 영접, 조공, 설연 등을 맡았다. 11 홍제원은 조선시대에 설치했던 국영여관이다. 원명은 홍제원 洪 濟 院 이라고 했으며, 지금의 서대문구 홍제동에 있었다. 이 여관은 중국의 사신들이 서울 성안에 들어오기 전에 임시 로 묵던 공관으로, 1895년(고종 32)까지 건물이 남아 있었다. 서울을 출발하다 23
시고 세주 世 柱 는 병이 있으므로 함께 먼저 떠나 초경(저녁 7~9시) 후에 고양에 이르러 잤다. 별장시문 別 章 詩 文 이 약간 있으나 다 기록하지 못하 고, 다만 가친께서 주신 글 일곱 수만 기록한다. 1 슬프다! 아들의 행역이여. 어찌하여 연경 길인가. 남아의 사방 뜻이 오랫동안 품은 바 있구나. 쉬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붙으니 멀리 여행하는 것이 때인즉 좋도다. 떠나서는 다시 염려치 말라. 내 나이 늙지 아니하였노라. 磋 爾 子 行 役 胡 爲 燕 京 道 男 兒 四 方 志 宿 昔 有 所 抱 蒼 蠅 驥 附 尾 遠 游 時 則 好 行 宜 勿 復 念 吾 年 未 耄 老 2 괴이타! 네가 유자의 무리로되 도리어 호반의 의복으로 종사하는구나. 막료 12 는 진실로 천한 것이 아니요, 선비는 하물며 친히 극진하도다. 붙들어 호위할 땐 반드시 정성을 다할 것이요, 돕고 기움은 또한 옳은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충성과 공경을 힘써 데려가는 뜻을 저버리지 말라. 12 막료는 조선시대에 사신을 따라다니며 돕는 무관을 말한다. 24 을병연행록 1
怪 爾 儒 門 徒 靺 韋 反 從 仕 幕 僚 良 非 賤 儒 夫 況 親 摯 扶 護 必 殫 誠 裨 補 亦 有 義 努 力 勉 忠 敬 無 孤 帶 去 意 3 너를 성문 밖에 나가 보내니 때는 오직 중동절 仲 冬 節 이로다. 막막히 산천이 가로 끼고 묘연히 소식이 끊어지는구나. 찬바람이 겹갖옷을 뚫으니 요동들판에 사나운 눈이 날리도다. 만일 중도에 병듦이 없으면 어찌 해 지나는 이별을 아끼리오. 送 爾 白 門 外 時 維 仲 冬 節 漠 漠 山 川 間 杳 杳 音 信 絶 寒 風 透 重 裘 遼 野 飛 惡 雪 如 無 中 途 病 何 惜 隔 年 別 4 네 시전 읽은 것을 보았으니 응당 하천시 13 를 외우리라. 황조가 오랑캐 굴혈에 빠졌으니 열사가 깊은 슬픔을 품었도다. 높은 대보단 14 이요, 13 하천 下 泉 은 시경 詩 經 조풍 曹 風 에 있는 시로, 주나라의 조나라가 마치 곡식과 풀을 적 셔주는 시냇물과 같은 은덕을 베풀어 준 주나라의 덕이 쇠해진 것을 탄식하는 내용이다. 14 대보단은 숙종 31년(1704)에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준 중국 명나라의 태조, 신 종, 의종을 제사지내던 사당으로, 창덕궁 금원 옆에 설치되었으나 지금은 헐어지고 없다. 서울을 출발하다 25
거룩한 만동사 15 이로다. 이 의리가 점점 사라지니 슬프다! 이를 아는 사람이 드물구나. 見 爾 讀 葩 經 應 誦 下 泉 詩 皇 朝 淪 胡 窟 烈 士 抱 深 悲 峨 峨 大 報 壇 穆 穆 萬 東 祠 斯 義 漸 泯 沒 痛 矣 人 鮮 知 5 너를 경계하노니 연경과 계주 길에 은근히 기특한 선비를 찾으라. 이름을 장 醬 파는 집에 감추고 자취를 개 다니는 저자에 숨겼노라. 끼친 풍속이 오히려 강개하니 응당 머리 깎인 부끄러움을 품었을 것이다. 오랑캐와 한인이 비록 서로 섞였으나 어찌 좋은 마음을 품은 사람이 없으리오. 勉 爾 燕 薊 路 慇 懃 訪 士 奇 藏 名 賣 醬 家 混 迹 屠 絿 市 遺 風 尙 慷 慨 應 懷 被 髮 恥 胡 漢 雖 相 雜 豈 無 好 膓 者 6 너를 경계하노니 방탕치 말라. 내 몸을 스스로 침착하게 할 것이다. 마음을 풀어 버리면 혹 지킨 것을 잃을 것이니 15 만동사는 명나라 숭정제 崇 禎 帝 를 향사 享 祀 하는 사당이다. 1704년에 충북 청주 화양동에 세 워졌다. 26 을병연행록 1
놀기를 탐하다가 험한 데를 지나기 쉬우리라. 어찌 홀로 네 아비의 근심뿐이리오. 유식한 사람의 폄론함이 될까 저어하노라. 평생의 욕심을 이기던 공부를 거의 오늘날 징험할 것이로다. 戒 爾 勿 放 蕩 吾 身 宜 自 儉 弛 心 或 失 守 耽 遊 易 涉 險 奚 獨 乃 父 憂 恐 爲 識 者 貶 平 生 克 己 功 庶 幾 今 日 驗 7 너를 생각하니 본래 병이 많은지라 이것이 내 근심을 펴지 못하노라. 길에 있으매 반찬을 더하고 관에 머물매 기거를 조심하여라. 어찌 험한 산에 오름을 수고로이 하리오. 모름지기 머무는 곳에 의지함을 위로하라. 돌아올 기약에 스스로 한정이 있으니 오직 평안한 편지를 기다리노라. 念 爾 素 多 病 是 吾 憂 未 舒 在 道 加 飯 餐 留 館 愼 起 居 何 勞 陟 岐 岵 須 慰 倚 門 閭 歸 期 自 有 限 惟 待 平 安 書 서울을 출발하다 27
11월 초3일 고양에서 출발하여 초10일 평양에 이르다 서울서부터 역마를 타고 가며 뒤에 마두 한 명이 따랐다. 하속들이 16 나으리 라 일컫고, 제 있는 곳을 비장청 裨 將 廳 이라 하며 진지 陣 地 와 행 차, 거취를 물으니 매우 우스웠으나 하릴없었다. 부사 副 使 의 얼육촌 孼 六 寸 (서얼 출신의 육촌 형제) 김재행 金 在 行 은 자 字 가 평 중 平 仲 인데, 아침에 와서 잠깐 보고 갔다. 화중은 여기서 떨어지고, 식 후에 행차를 따라 파주 坡 州 에 이르렀다. 고양에서부터 참 站 에 들면 차 담 茶 啖 한상을 먼저 주는데 군관과 함께하고, 혹 자제군관이라 하여 곁 상으로 주는 곳도 있었다. 먼 길에 밥을 잘 먹어야 폐단이 없을 것이 요, 반찬으로 고기를 많이 먹으면 비위가 쉽게 상할 듯하여 차담으로 국수 국물을 마셔 잠시 추위를 다스릴 따름이었다. 반찬은 채소를 주 로 먹으니 이로 인하여 길에서 음식 탈이 나지 않고 반찬이 어려운 줄 을 모르고 왕래하였다. 16 비장청은 조선시대 감사 監 司, 병사 兵 使, 유수 留 守, 수사 水 使 등을 수행하던 막료를 가리키는 비장들이 업무를 보던 곳을 말한다. 28 을병연행록 1
초5일 송도 松 都 에서 묵고 금천 金 川 에서 점심을 먹으니 이날은 이상하 게 따뜻했다. 역관들이 말하기를, 전부터 동지사행 冬 至 使 行 이 대동강을 배로 건넌 적이 없었는데, 이번 은 날씨가 이러하여 강이 얼어붙을 리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출발할 때 홀연 구름이 끼고 비를 뿌리더니 어느새 큰 눈이 오고 오후에야 그쳤는데, 이어 큰 바람이 일어나 매우 추워졌다. 저녁에 평산 平 山 에 이르니 풍한이 점점 심해지고, 초6일 총수의 중화참 에 이르니 추위가 더욱 심하였다. 상하 모두 안색이 좋지 않으니 역관 들이 말하기를, 북경 추위가 여기보다 심합니다. 라 하였다. 초7일 봉산 鳳 山 에 숙소를 정하였다. 부사 府 使 이응혁은 젊은 호반 虎 班 인데 밤에 나와서 나를 보고, 스물셋에 서장군관으로 북경에 들어가 구경하던 말을 대강 전하기를, 그때는 사은사 謝 恩 使 길로 여름이라 여행의 고역이 더욱 심했으나, 오룡정 五 龍 亭 에 연꽃이 만발하여 그 향기가 십 리에 풍기니 사행에서 흔히 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라 하고, 또 이르기를, 책문 柵 門 을 든 후에는 중국말을 못하면 곳곳에서 남의 입을 빌려야 하니 답답한 구석이 많고, 구경도 잘할 길이 없으니 부디 미리 알아두 어야 할 것입니다. 길을 가며 온갖 물건의 이름을 묻고 약간 아는 말 로 수작하면 자연히 익혀지니, 나는 돌아올 때 역관의 신세를 지지 않 았습니다. 하면서, 중국어로 여러 말을 하였다. 초8일 황주 黃 州 에 숙소를 정하였는데 추위가 많이 누그러졌다. 초9 일에는 머물러 사대 査 對 하였다. 사대란 북경 가는 나라 표문 表 文 에 혹 그릇됨이 있을까 하여 황주, 평양 平 壤, 안주 安 州, 의주 義 州 네 곳에서 자세 서울을 출발하다 29
히 살피는 것이다. 식후에 일행 중 두어 사람과 함께 월파루 月 波 樓 에 올 랐다. 누각은 남쪽 성 위에 지어졌는데, 크기가 20여 칸으로 제도가 웅장하며 단청이 영롱하였다. 성 밑으로 큰 내를 굽어보니 눈 속에 작 은 배가 하나 있어, 여름이면 물이 많은 줄을 알 수 있었다. 서남쪽으 로 수십 리 들이 열렸으니, 이때 쌓인 눈이 땅을 덮고 아침 햇빛이 빛 나니 설경의 장엄함이 평생에 처음이로되, 눈이 부셔 뜨지 못했다. 찬 바람이 살을 베는 듯하여 오래 머물지 못하고 즉시 숙소로 돌아왔다. 초10일 평양에 이르니 10여 리를 못 미처 수유나무 수풀이 길 좌우 를 끼고 강가에 이르렀는데, 얼음이 육지 같이 언 지 여러 날이 되었 다. 분첩 粉 堞 (성 위에 낮게 쌓아 석회를 바른 담)이 강에 닿아 있고, 연광정 練 光 亭 과 대동문 大 同 門 등 아득한 누각이 즐비한 여염 밖으로 나는 듯 서 17 있으니 경물이 장려하였다. 신유년(1741) 11살 때 조부 祖 父 의 행차를 모시고 이곳에 와 연광정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때는 비록 겨울과 여름의 다름이 있으나 옛 모습이 여전한지라 옛일을 생각하니 창감함 을 이길 수 없었다. 숙소에 이르니 고을에 아는 사람이 여럿이 와서 보고 별장 別 章 을 주는 이도 서넛 있었다. 17 홍대용의 조부는 홍용조 洪 龍 祚 (1686~1741)로, 평안도 용강군 삼화부사 三 和 府 使 를 지낸 바 있다. 30 을병연행록 1
11월 11일과 12일 평양서 묵다 평양은 옛 기자 箕 子 의 도읍이다. 은 殷 나라가 망한 후에 기자가 주 周 나 라의 신하가 되지 않으려 하니, 무왕 武 王 이 그 뜻을 굽히지 않아 동으 로 조선에 봉하였다. 기자가 옛 백성 2천여 명을 데리고 예악문물을 갖추어 평양에 도읍하여, 여덟 가지 가르침을 베푸시니 풍속이 크게 변하였고, 문물제도가 성하고 빛나 실로 우리 동방 풍교의 근본이 되 었다. 이런 고로 이곳이 다만 강산이 장려하고 풍악이 번성할 뿐만 아 니라, 기이한 고적이 나라 안에서 으뜸이 되니 가히 보지 않을 수 없 <평양도>, 서울대박물관 소장 서울을 출발하다 31
일제강점기 엽서에 담긴 애련당 다. 허나 연이어 매서운 추위를 무 릅쓰고 말을 몰아 몸이 편치 못하 여 문을 닫고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런데 예로부터 사행이 사대 査 對 를 끝낸 후에는 연광정에서 감사와 도 사를 모아 풍악을 베풀었는데, 오후 에 상사께서 사람을 보내 함께 놀 기를 청하거늘 마지못해 말을 타고 갔다. 길가의 애련당 愛 蓮 堂 을 찾아 먼저 들어가니, 물 가운데 정자와 널로 놓은 다리가 옛날 보던 모양이 변치 않았다. 문 밖에서 말을 내려 다 리를 건너 정자에 앉으니 못의 얼음에 눈이 덮여 원래 모양이 없었다. 그러나 정자를 육각으로 지어 가운데 방을 들여놓고 방 밖으로 돌아 가며 마루를 18 놓아, 마루 밖에 분합 分 閤 과 난간을 맑고 깨끗이 만들어 단청이 영롱하였으며, 여섯 면에 풍경을 달아 바람이 불면 소리가 쟁 쟁 錚 錚 하여 서로 응하였다. 처한 곳은 비록 성시 가운데 있으나 아름다 운 풍치와 맑고 깨끗한 기상이 저잣거리의 어지러움을 잊을 만한 곳 이다. 이때 바람이 매우 차 오래 머물지 못하고 즉시 문을 나와 연광정으 로 향하니, 사대를 아직 파하지 못하였다. 뒷문으로 들어 대청 뒤에 한 누에 올라 앉았는데 이름이 운영루 雲 影 樓 라 하였다. 누각 아래 위에 남녀가 어지럽게 뒤섞여 요란함을 견디지 못할 듯해 누각 서쪽 난간 가에 자리를 얻어 이윽히 19 앉아 있었다. 사대를 마치자 감사는 중복 20 重 服 이 있어 먼저 영 營 으로 돌아가고, 상사께서 내가 온 것을 듣고 사 18 분합은 한옥의 대청 앞쪽 전체에 드리는 긴 창살문을 말한다. 19 이윽하다 는 밤이 꽤 깊다, 지난 시간이 얼마간 오래다 라는 뜻인 이슥하다 의 평안 방언 이다. 20 중복은 상례 喪 禮 중 상복을 규정한 제도인 5복 五 服 제도 가운데서 대공 大 功 이상의 상복 喪 服 32 을병연행록 1
람을 보내어 들어오라 해서 즉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마루 삼면에 발을 드리우고 뜸(비바람을 막는 물건)을 둘러 비록 엄동 嚴 冬 이지만 추위 를 잊을 수 있었다. 좌우에 오륙십 명의 분바른 기생을 벌여 비단 의 상에 눈이 부시고, 풍류 악기는 채색이 선명하여 다른 데서 보지 못하 던 것인데, 이는 감사가 새로 고치고 더 넣은 것이다. 삼현 三 絃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을 타는 공인 工 人 (악공)은 다 관대를 입고 머리에 그림을 그린 복두를 썼으니, 이는 서울 악공을 모방한 것이다. 그 호화스런 기구며 화려한 거동이 온 나라에 유명한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풍류를 채 보지 못하고 숙소 21 로 돌아왔다. 12일 찬바람이 불어 매우 어려우나 내일은 길을 떠날 것이요 돌아 올 때의 일을 예측하지 못하여, 드디어 아침밥을 재촉하여 먹고 평양 구경에 나섰다. 황진사 염조는 외성에서 사는 사람으로 이곳 고적을 익히 알아 함께 갔다. 동북쪽 장경문 長 慶 門 으로 나가니, 이 문은 연광정 북쪽으로 수백 보 떨어진 곳이다. 문 밖의 벼랑길이 겨우 두어 보 너비이며, 길 동쪽은 강이고 서쪽은 100척 창벽 蒼 壁 이 강을 임하여 4~5리를 깎은 듯이 둘러 져 있었다. 성은 그 위의 지형을 따라 성가퀴가 웅장하니, 이 벽 이름 을 청류벽 淸 流 壁 이라 하였다. 벽을 의지하여 4~5리를 행하여 부벽루 浮 壁 樓 에 이르니, 평양성 북쪽으로 모란봉이라는 높은 봉이 있어 오르니 성 안을 굽어볼 수 있었다. 이러므로 북쪽에 따로 성을 쌓아 모란봉 위로부터 강가를 둘러 본성 本 城 에 이었고, 영명사 永 明 寺 라는 절을 그 가 을 말한다. 여기서 오복은 참최 斬 衰, 자최 齊 衰, 대공, 소공 小 功, 시마 緦 麻 순으로 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대공복은 숙포 熟 布 (표백한 삼베)로 만들며, 복상기간은 9개월이다. 상이 났을 때 대공복을 입는 범위의 친족을 대공친이라고 한다. 대공친의 범위는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경국대전 에는 대체로 주자가례 를 따라 시조부모, 아들, 손자, 백숙부모, 조카며느리, 4촌 형제자매를 대공친으로 정하였다. 결혼하지 않은 16~19세의 미성년자 형제와 자매, 고모, 조카와 조카며느리의 상에도 대공복을 입었다. 21 원문은 하처 下 處 로, 웃어른이나 점잖은 손님이 길을 가다가 묵는 집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이하 모두 숙소 로 옮긴다. 서울을 출발하다 33
평양성지도(해동지도)의 일부분. 앞으로 대동강과 능라도 를 마주하고 부벽루가 위치하고 있다. 운데 두고 총섭 總 攝 (승군을 통솔하는 승려 직책)으로 하여금 승군을 거느려 지키 게 하였다. 부벽루는 그 성 동쪽에 강을 굽어보 고 지은 집으로, 제도는 매우 거칠고 엉성하여 볼품없고 안에 벽돌을 깔았 을 뿐이나, 안계의 광활함은 연광정과 다름이 없었다. 앞으로 능라도 綾 羅 島 라 는 섬이 물 가운데 비꼈으니, 수목이 줄을 지어 벌여 섰고 약간의 인가 人 家 가 있으니, 이는 연광정에 없는 경치이다. 또 성시 城 市 를 멀리하고 경계가 매우 푸 르니 청탈 淸 脫 한 기상과 아득한 경치는 연광정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 누각 북쪽에 조그만 정자가 있으니 이름을 함벽정 涵 碧 亭 이라 하였고, 절 앞 영명사와 부벽루 으로 큰 누각이 있어 이름을 득월루 得 月 樓 라 하였다. 서남쪽으로 성 구비에 높 고 사면이 네모반듯한 곳이 있어 이름 을 을밀대 乙 密 臺 라 하니,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표연히 반공에 솟아 나 있어 보기에 기이하였다. 절 뒤에 돌로 쌓은 우물이 있으니 이름이 기린굴 麒 麟 窟 이다. 전하여 이르기를, 고구려 때 동명왕이라는 임금이 병 란을 만나 피할 곳이 없었는데 용마를 타고 이 굴로 들어가 난을 면하 였다 하니, 그 말이 극히 허황하다. 조그만 우물에 깊은 구멍을 보지 못하였으니 후대에 메워서 막힌 것이 아닌가 싶었다. 서쪽 문을 나오니 온 산에 솔이 하늘과 해를 가리고, 눈이 길을 덮 어 말을 타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에 말에서 내려 간신히 걸어가 기자 34 을병연행록 1
묘에 이르니, 분형 墳 形 이 네모나며 사면 에 낮은 분장 粉 牆 을 두르고 앞에 석인 石 人 과 석양 石 羊 을 각 한 쌍씩 세웠다. 가 운데 작은 비를 세워 기자묘라 썼고 그 뒤에 옛 비를 세웠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도적이 깨뜨려 상한 것을 조각을 합 하고 박철 縛 鐵 로 묶은 것이다. 계절 階 節 (무덤 앞에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땅) 앞으 칠성문의 옛 모습 로 대를 쌓아 한 길(2.4~3m)이나 되고, 대 아래 정자를 짓고 그 안에 상탁 床 卓 을 놓아두었는데, 문이 잠겨 들어가 보지 못하였다. 말을 타고 서남쪽으로 내려가 칠성문 七 星 門 으로 들어가니, 이 문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 李 如 松 이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왜적 을 물리친 곳이다. 감영 監 營 서쪽 담 밖으로 행하여 장대 將 臺 에 오르니, 장대라는 것은 난리를 당하여 성을 지킬 때 대장이 올라앉아 깃발과 북으로 사면의 성을 지키는 군사를 호령하는 곳이다. 성중에 가장 높 은 곳을 가려 대를 세우고 그 위에 집을 지었으니, 오르면 사방이 내 려다보여 번성한 여염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고, 동강 북쪽의 넓은 들 과 점점한 산이 다 연광정의 경치를 가졌으니, 또한 볼 만한 곳이다. 서쪽으로 내려 숭령전 崇 靈 殿 에 이르니, 이곳은 단군과 동명왕의 위판 을 봉안한 묘당이다. 단군은 동방에 처음으로 나온 임금이라 참봉 參 奉 (왕릉을 관리하는 종9품의 관직)이 여기서 지킨다고 하였다. 서쪽으로 숭 인전 崇 仁 殿 에 이르니 이는 기자의 위판을 봉안한 곳이었다. 화상 畵 像 세 벌을 걸었는데, 의관은 전에 보지 못하던 제도였으니 필연 은나라의 의관인가 싶었다. 22 서문 안 무열사 武 烈 祠 에 이르니, 이는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 石 星 의 22 석성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준 명나라 벼슬아치로, 홍순언 일화에 관련 이 서울을 출발하다 35
평양 숭령전 위판을 봉안하고, 제독 提 督 이여송과 양 23 원 楊 元 이여백 李 如 栢 장세작 張 世 爵 등 여 러 장수를 배향한 곳이다. 석상서는 임 진왜란 때 우리나라가 구병을 청하자 군사를 징발할 의론을 힘써 아뢰어 전 후의 나라를 구호한 일이 많았으나, 마 침내 참소 讒 訴 에 걸려 우리나라 일로 화 를 면치 못하였으니, 그 은혜를 생각하 여 사당을 세워 봄가을로 제사를 받들게 했다. 석상서와 이여백은 화 상이 있었다. 숭령전과 숭인전은 왕의 사당이라 감히 참배하지 못하 였는데, 이곳은 참배를 허락하여 두 번 절하고 나왔다. 서문으로 나가 1~2리를 가서 충무사 忠 武 祠 에 이르니, 이곳은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의 사당이다. 수나라 때 양제 煬 帝 가 천하 병력을 다하여 수백만 군사로 친히 고구려를 치려 할 때 고구려 정승 을지문덕이 수 천 군을 거느리고 살수에서 맞아 두어 번 싸워 수나라 군사를 크게 물 리치니, 수나라 군사는 겨우 천여 명이 살아남아 돌아갔다. 이로써 고 구려는 망하지 않았는데, 평양은 그때 도읍이었다. 이러하므로 뒷사 람이 이를 기려 사당을 세웠다. 이곳을 지나 인현서원 仁 賢 書 院 에 이르니, 이는 이 고을 사람들이 서원 을 지어 기자 위판을 봉인하고 선비를 모아 글을 읽은 곳이다. 사우문 祠 宇 門 을 열고 참배하니 또 한 화상이 있었다. 밖으로 나와 강당에 앉았 는데, 현판에 홍범당 洪 範 堂 이라 하였다. 서원 하인이, 효종대왕이 친히 쓰신 글입니다. 하고, 소반에 책 한 권을 받들어 내어다 보이기에 공경히 열어 보았더 야기가 전해 온다. 23 강세작을 이르는 듯하다. 강세작은 명나라 장수로 명 청교체기에 난을 피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았다. 36 을병연행록 1
니 정축년(1637)에 심양에 들어가실 적에 서원에 참배하시고 심원록 尋 源 錄 에 이름을 올리신 것인데, 봉림대군 鳳 林 大 君 네 자를 쓰셨다. 남으로 외성 外 城 을 향하여 중성을 나가니 옛 성의 터만 남아 있었다. 이 바깥의 길이 넓고 좁은 것이 다 법도가 있는 듯하고, 거리마다 돌 을 세워 표하였다. 큰길 사이에 작은 길을 가로로 베어서 조금도 빗나 간 곳이 없었고, 네 길 사이에 있는 밭의 형상이 정정방방하여 큰 들 에 다 같은 제양 制 樣 이었으니, 이는 기자가 정전법 井 田 法 을 시행한 곳이 다. 비록 햇수가 오래되었으나 오히려 정대한 제도가 이러하였으니, 성인의 정사 政 事 가 어찌 이상하지 않겠는가? 길가에 조그만 단이 하나 있는데, 이는 기자께서 계시던 대궐 터였다. 단 위에 작은 비를 세웠 는데 구주단 九 疇 壇 세 자가 씌어져 있었다. 이 앞으로 남쪽을 향하니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이는 기자정 箕 子 井 이라 하며 깊이가 8~9장 丈 (1 장은 약 3.33m)이고, 위에 둥근 구멍을 뚫어 벽돌로 덮었다. 말을 돌려 중성에 들어가 일영지 日 影 池 라는 못을 보니 사방이 열 걸 음 남짓 되었다. 가운데 조그만 섬이 있고 섬 위에 조그만 정자를 세 웠으니, 이는 기자께서 해 그림자를 살피시던 곳이라 전한다. 못 북쪽 에 한 서재가 있어 글 읽는 소리가 있었지만 날이 저물어 가 보지 못 하고 남문으로 들어가 숙소로 돌아왔다. 서울을 출발하다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