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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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삶 나의 낙서 융이

2 소개글 살며 느끼는 생각들

3 목차 1 이재명 성남시장의 슬픈 가족사.. '형수 쌍욕'의 진실 5 2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 10 3 암울한 꼼수의 나라, 비겁한 대한민국 19 4 대한민국 지도층의 슬픈 자화상 21 5 한국어 '하류 언어' 취급, 언어에 남은 식민권력 결국 이 나라는 부패와 시기와 이간질로 망한다 국정원, 경력법관 면접..신원조사 넘어서 사상 검증? 31 8 외교부가 '위안부의 날' 반대.. 한심 33 9 정부, 근절 외쳤지만, 전관예우 앞에 무너진 '관피아법' 나랏돈은 먼저 챙기는놈이 임자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 뉴욕 타임스 한국의 국정 역사 교과서에 대해 SB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권력 4~5부 SB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권력 1,2,3부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숫자의 의미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부음기사로 쓴 인물평 '여장부' 문명자 기자 현직 부장판사 정치편향 댓글 상습작성 논란 어느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 -문신 친일파를 위한 변명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日 낭인들은 얼마나 잔인하게 명성황후를 시해했나 '두 이름의 신격호' 특혜로 탄생한 롯데 공무원 때문에 자살 생각까지... 식당주인의 사연은? 나라가 망할 21가지 전조증상 7. 자살의 시대 187

4 26 대한민국을 진정한 민주국가를 만들기위해선 여고생 미인대회에 출전한 일본 전역 48개의 각 학교 대표 엄마 김동길 교수의 강연 대의 아픔 이 나라 제대로 맹그러 주실분 나라 살리는 길은 정신들 챙기세요 아니꼬우면 출세를 해 유월의 통곡 229

5 이재명 성남시장의 슬픈 가족사.. '형수' 쌍욕'의 진실 :00 내 하늘 어머니... 사랑합니다... 경북 안동 영양 봉화 접경인 심심산골, 안동군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을이 내가 태어난 곳입니다. 7남매를 데리고 산전을 일궈 살던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집을 나가시고, 어머니 혼자 7남매를 키우셨지요. 어머니는 남의 밭일 대신해주고 겉보리 한 되 좁쌀 한 됫박씩 얻어먹으며, 사람이 굴러내릴 정도의 급경사 산비탈을 일군 산밭에서 키운 감 자로 어린 자식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자식들과 살아남기 위해 어머니는 감시원 눈을 피해 막걸리를 빚어 농사일이 끝난 밤에 술장사를 하셨고, 가끔 장에 나가 진통제 가스명수 같은 간단한 의약품을 떼어다 파는 약장사까지 하셨습니다. 젊은 나이에 홀 몸이 되어 많은 자식을 거느리고 힘겨운 삶을 사시면서, 늦은 밤 방구석이나 새벽의 부엌에서 텃밭에 쭈그리고 앉아 우시던 어머니 모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방안의 물그릇이 꽁꽁 어는 소개집 에서 자식들 추울까봐 새벽에 일어나 군불을 때주시던 어머니가 어느 날부터인가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담배까지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일찍부터 흰머리가 나신 어머니의 점점 희어져가는 머리카락만큼이나 쭈그러져만 가는 어머니.. 감기몸살이 나면 어머니는 약을 아끼려고 내게 객귀물리기 를 시키셨지요. 어머니가 몸져 누우면 나는 으레 숫돌에 식칼을 간 후, 칼끝을 어머니 앞니 사이에 세우고 숫물을 칼날에 흘려 넣으며 어머니가 시킨 대로 객귀야 물렀거라 를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숫물을 여러 번 마신 어머니는 희한하게도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이재명 성남시장의 슬픈 가족사.. '형수 쌍욕'의 진실 5

6 어린 나이였지만, 못쓰게 된 칫솔로 어머니 흰머리를 염색해드리고, 감자를 깎고, 어머니를 따라 돌이 굴러 내리는 깊고 깊은 산골짜기 밭에 가 비지땀 흘리며 콩밭 잡초를 뽑고 감자를 캐면서도 오직 어머니와 함께 다니는 게 즐겁기만 했습니다. 자식들을 위해 모든 걸 버리는 어머니가 애처롭고 불쌍하고 고맙고, 어머니 없는 세상이 무서워 어머니 돌아가시면 나도 따라 죽겠노라 마음 속으로 맹세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나의 전부였습니다. 1976년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성남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반 지하 단칸방에 9식구가 오글거리며, 다시 결합한 아버지는 상대원시장 청소부로 일하시고, 어머니는 초등학생인 여동생을 데리고 시장화 장실을 지키며 10원 20원 이용료를 받아 생활했습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화장실 앞에 앉아 남자손님에게 돈받는 걸 정말로 싫어하셨지만 그야말로 목구멍이 포도청이었습니다. 온 가족이 진학을 포기하고 전부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살기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많은 세월이 지난 후 아버님은 청소부로 일하다 얻은 병으로 55세 짧은 생을 마감하셨고, 큰형님은 건설노동자로 일하다 한 쪽 다리가 잘리 는 산재사고를 당했으며, 누님은 여전히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둘째 형님은 청소회사 직원으로, 동생 둘은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데 기가 막 히게도 여동생은 2년 전 새벽청소를 나갔다가 과로로 화장실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분당에서 야구르트 아줌마 이던 여동생은 딴 일을 하고 싶어하면서도 오빠가 시장 당선되었다고 좋은데 가느냐 는 말 듣기 싫다며 야 쿠르트 배달을 계속하다, 내가 재선된 후에야 그나마 좋은 직장이라고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월에 저보다 먼저 저세상으 로 가고 말았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최종학력이 제일 높은 사람이 중졸이었습니다. 대부분 초등학교를 겨우 마쳤고 나 역시 초등학교 졸업후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어머니는 학교 대신 공장을 가는 어린 내가 불쌍하다고 한손에는 도시락을 들고 한손은 내 손을 잡아 공장까지 바래주시곤 했습니다. 저를 공장까지 바래주고 돌아가시는 길에 눈에 미끄러져 낙상을 입어 고생하시던 어머니.. 소년공으로 공장을 다니며 산재사고로 팔이 비틀어지고 후각을 잃는 장애인이 되었지만 군복을 입고 군기 잡는다며 출퇴근때마다 빳다 를 치는 관리자가 부럽고 맞기싫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사춘기 장애소년으로 아침마다, 교복입고 학교 가는 학생대열을 거슬러 기름때 묻은 작업복에 공장으로 향하는 내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겼습니다. 두 번의 자살시도가 실패한 후 죽을힘으로 살자며 목숨 걸고 공부해 장학금에 생활보조비까지 받으며 대학을 갔습니다. 가장 커트라인 높은 학과를 선택했고, 그래서 사법시험을 공부했고, 그후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의 길을 걸어 마침내 여기까지 왔습니다. 대학에서 받는 공장노동자 월급의 몇배에 이르는 생활보조비로 집에 생활비를 보태면서 정비공으로 일하던 셋째 이재선형님에게 공부를 권유 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내 장학금으로 공부한 형님도 좋은 성적으로 생활비를 받으며 대학을 갔고 공인회계사도 합격했습니다. 그때까지는 모두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셋째 형님이 결혼후 서서히 가족들과 발길을 줄이고, 명절은 물론 어머니 생신 아버님 제사까지 불참하며 남이 되어갔습니다. 이 형님부부는 저에 대한 시기질투심, 열등감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이게 지나쳐 병적증상으로 변하더니 '내가 부처 예수보다 위대하다'며 이 상행동을 시작했고, 형수는 이를 제지하지 않은 채 오히려 시댁과 형님 간의 갈등을 부추기기에 바빴습니다. 결국 셋째 형님부부는 용서할 수 없는 패륜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성남시장후보직 양보를 바라던 이 형님은 불법문자메시지를 대량발송하는 등 내 선거를 방해하다 2010년 내가 시장선거에 당 선되자 취임식장에 청바지에 잠바를 입고 나타나 '가족특별석'을 만들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하더니 취임직후부터 이권에 개입한다는 소문 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녹지를 훼손해 노인요양시설을 짓는 이권사업에 셋째 형님이 돈을 받고 밀어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업신청이 네 곳이나 들어왔습니다. 큰 일이다 싶어 이를 모두 불허하고 규정을 정비해 원천봉쇄했습니다. 이재명 성남시장의 슬픈 가족사.. '형수 쌍욕'의 진실 6

7 그러자 이번에는 그 형님이 '시장친형'을 내세우며 공무원들에게 직접 업무지시를 하고 불응하면 폭언을 퍼붓고 직접 백화점 불법영업 단속 에 나서는가 하면, 감사관과 비서실장을 통해 공무원 승진과 징계 등 인사청탁을 하고, 관내대학에 교수자리를 마련해 달라는 이권청탁을 했 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이를 모두 묵살하고 공무원들에겐 통화와 접촉을 하지 말도록 지시했습니다. 여기에 국정원 김과장이라는 자가 이재명이 간첩이라 곧 구속된다 며 부추기고(통진당 사건으로 추측), 새누리당 고위간부가 시의원비례 대표공천 언질을 주자 형님부부는 종북시장 퇴진운동을 본격 시작했습니다. 새누리당 의총장 난입, 은행 난동, 백화점 영업방해 등을 벌이던 형님은 급기야 어머니까지 폭행하고 입에 담을 수 없는 패륜행위를 저지르 고 말았습니다. 100억 부자라고 자랑하는 형님은 어머니가 가진 노후자금 5천만원을 빌려?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어머니에게 '그 돈 갖고 뒈져라. 뒈져도 상가 집 안간다'는 등 패륜적 폭언을 퍼붓고 완전히 인연을 끊었는데, 2012년 시장면담을 요구하며 비서관과 싸우고 기자들을 대동한 채 시 장실앞에서 농성을 하는등 물의를 일으키다가, 근 10년 만에 어머니 집에 쳐들어가 '이재명에게 전화를 해서 바꿔달라'고 했는데 어머니가 거절하자 팔순의 늙은 홀어머니에게 'X할년 개X 같은 년'이라며 '집에 불을 질러 죽인다' '다니는 교회에 불 지른다'고 협박했습니다. 이재명 성남시장의 슬픈 가족사.. '형수 쌍욕'의 진실 7

8 겁에 질린 어머니가 내게 전화를 연결해 줘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이재명 성남시장의 슬픈 가족사.. '형수 쌍욕'의 진실 8

9 내 아내에게 형님은 내가 나온 어머니 XX구멍을 칼로 쑤셔죽인다'고 하였고 동석한 형수는 이걸 고도의 철학적 표현 이라 극찬하며 시 집식구들을 능욕했습니다. 형님부부를 피하시던 어머니가 주일에 교회에 가자 형님은 교회에 불지르겠다고 해 경찰이 어머니를 집에 모셔 보호하다 저녁에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어머니 집에 난입해 기물을 때려 부수고 어머니를 폭행해 입원시키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어머니 신고로 잡힌 셋째형님 부부가 경찰조사를 받고 나오던 중 이 끔찍한 패륜현장에 도착한 나는 도저히 이 부부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 다. 형님과 통화를 시도했으니 형수가 중간에 빼앗아 그 정도 가지고 경찰에 신고하느냐 어머니를 무고죄로 고소하겠다 고 하는가 하면 시 어머니 XX구멍을 찢어 죽인다는 건 철학적 비유 라며 약을 올려 심한 말다툼을 했습니다. 당신 아들이 당신에게 XX를 찢겠다고 하면 당신은 어떤 심정이겠느냐, 당신 오빠가 당신 친정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철학적 표현이라 고 편들 수 있겠느냐 등의 말다툼이 수차례 있었습니다. 이 패륜의 현장에서 오간 수많은 통화중 일부가 왜곡 조작되어 2012년에 한번, 2014년에 다시 한번, 그리고 2016년 오늘 세번째 시중에 나돌 고 있습니다. 다른 건 다 용서해도, 이제 병들고 늙은 내 가여운 어머니를 욕하고 능멸하고 때리는 건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날 그들 부부가 내 눈앞에 있었다면 폭언이 아니라 살인을 했을 겁니다. 당시 함께 있던 둘째형님과 동생들이 오히려 내 정치적 미래를 걱 정하며 말렸지만 내 정치적 미래가 어머니에 대한 패륜을 참아 넘길 정도로 중요치 않았습니다. 내게 어머니는 하늘이었고 어머니를 범한 그 짐승들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어머니에 대한 흉포한 패륜현장을 직면한다면 인내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형님은 결국 정신병증이 심해져 약 6주간 형수와 딸에 의해 경남 창령의 국립부곡정신병원에 강제입원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형님부부는 이재명이 시장권력을 이용해 멀쩡한 형님을 정신병자로 몰아 강제입원 시키려 한다 고 거짓말을 퍼트리고 형수 박 인복의 거짓기자회견 동영상을 만들어 인터넷에 올린 후 지금도 같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폭행과 협박, 어머니 접근금지, 음성파일유포금지도 사실인데 부인하니 벌금판결, 접근금지명령서, 음성유포금지명령서를 공개합니다. 어머니를 둘러 싼 패륜과 가족간다툼, 정신질환자를 이용해 정치적 공격을 사주하고 부추기는 국정원, 이 패륜을 사주하고서 오히려 나를 패륜으로 모는 패륜 새누리당에 언젠가 꼭 책임을 묻겠습니다. 혈연이라 어쩌지도 못하는 이 고통..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원만하게 형님부부의 요구를 들어주었다면 이런 사단은 피했겠지만, 형님부부는 친인척비리범이 되어 저 를 더 괴롭혔을 겁니다. 오늘도 모 시장실이 동생비리로 압수수색 당했다는 보도를 보며 가족문제로 인한 고통이 친인척비리보다는 낫다는 위안을 삼아봅니다. 공개되지 말아야할 가족문제가 공개되어 세인들이 눈 흘기는 사이 돌멩이는 커지고 또 단단해지고 있습니다. 회피할 수도 있는 이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바로 불공평과 불공정을 시정하고 기회균등한 나라를 만들 어 내 가족 내 이웃 나아가 대한민국 90%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100만 도시 성남시장 가족으로 가능할 수도 있는 혜택이나 이익을 바라지 않고 가난한 서민으로 묵묵히 살아가는 다른 형제자매들과 가족들 에게 무한한 사랑과 감사를 표합니다. 어머니.. 주신 사랑과 희생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게, 꼭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주십시오. 내 하늘 어머니..사랑합니다... 이재명 성남시장의 슬픈 가족사.. '형수 쌍욕'의 진실 9

10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 : /04/19 09:07 공무원, 그 안에 잠든 거인을 깨우자 1부. 공직사회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나라 공직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부 관료제가 갖고 있는 병폐부터 짚어볼 필 요가 있다. 정부 관료제에서 문제로 나 타나는 행태들은 공공부문 조직이 갖고 있는 제도적 병리요인 이 관료의 사고체계와 조직의 관행, 문화에 깊숙이 포진되어 발생하는 현상이 다. 그에 따라 공직사회 의 대표적인 문제를 공무원의 전문성 부족, 신나게 일할 수 있는 제도와 여건의 부재, 후진적인 행정 관행과 문화, 부정과 부패, 공무원의 자기개발 여건의 불비 등으로 나누어 원인과 현상을 검증, 분석 함으로써 공직사회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정책 마련의 기초 자료로 활용코자 한다. 공무원의 전문성 부족과 자질 시비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공무원이 현 제도와 여건 아래 모든 사회적 문제를 항상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추기는 쉽지 않다. 또 한 우리나라 관료제가 가지는 계급제적 특성, 즉 연공서열 방 식의 승진과 순환보직 시스템은 급변하는 사회에서 공무원에게 요구되는 전문 성을 길러주지 못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결국 공공부문의 전문성 부족은 공무원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 부족이라기보다 사 회적 변화의 속도 증대, 사회적 문제의 난이도 상승, 전문성을 기르기 어려운 인사시스템에 기인한다. 공공부문 관료의 문제점은 시대 변화에 느리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물론 공무원들도 급속한 사회 변 화에 보조를 같이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공감한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그 폭도 넓다 면 이에 동조하려는 의지가 꺾이기 쉽다. 개혁과 혁신은 관료들의 가치체계에 많 은 변화를 가져오는 동시에 상당한 기회비용을 요구한다. 시대 변화에 대한 공무원의 적응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 이면 에 공무원 개개인이 지불해야 할 막대한 비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공무원은 시키는 일은 잘 하지만 스스로 해야 하는 일에는 미숙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수험 지식의 반복적인 암기에 입각한 선발 시험체제, 문제의 근원적 해법을 모색하기보다 주어진 법과 제 도를 기계적으로 답습하는 보수적인 공직사회 문화, 무사안일한 공무원은 승 진하고 스스로 문제를 찾 아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은 감사만 받는 공직 평가체계, 공직자 개인의 역량을 개발해 주지도, 창의 적인 문제해결 능력을 길러주지도 못하는 교육 시스템과 인센티브 부족 등에 기인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관료제의 변화와 진보를 가로막는 원천적인 요인이다. 우리나라 공무원은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유효기간이 짧은 대안을 자주 만들어낸다. 대표적인 경우가 부동산 정책이다. 우리나라 주택 정책이 누더기가 된 것도 단편적이고 반복적인 정책 실패 때 문이다. 우리 공무원들은 급변하는 환경에서 외적으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균적 노력과 에너지를 투입한다. 하지만 평균적인 노력만으로는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현재 우리 사 회의 문제들은 평 균적인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공무원이 근본적인 문 제 해결보다 단기적인 대안을 양산하는 데 몰두하면 정책 의 실패는 점차 악화되고 장기화되어 치유불 가능한 상태가 된다.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 10

11 신나게 일할 수 있는 제도와 여건의 부재 지금까지는 정부 관료제의 안정성을 보장하고 공무원이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정책의 실패에 대한 직접적 책임은 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 은 정책의 장기적인 효과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문제를 야 기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책 실명제는 관료제의 무책임성에 경종을 울릴 제도 라고 생각된다. 정책을 발의하고 추진하는 관료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정책을 운용한다면 해당 정책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책임감 있게 추 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정책관리 시스템에서 정책 실명제는 아직 정 착되지 못했으며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지도 않다. 공무원은 자기 보존 또는 세력 확장을 위해 업무량과는 상관없이 기구와 인력을 증가시키고, 권한 행 사 영역을 확장하는 경향이 있다. 파킨 슨은 관료들이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서 로 관할권 다툼을 벌이는 것을 "상승하는 피라미드의 법칙"이라고 불렀다. 예 를 들면 농업정책 담당 부서는 잎담배를 재배하는 농민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반면 국민보건 담당 부처는 담배 광고 금지 를 위한 정책을 입안한다. 이처럼 한 정부 안에서도 부처들 사이에 이해가 상충하여 갈등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공공관료제의 특기는 문서 생산이다. 그러나 문서 만들기에 몰두하다 보면 실효 없는 행정이 되기 십 상이다. 형식주의적인 행정이 되는 것 이다. 예를 들면 어선의 수를 실제로 확인하지도 않은 채 외국 과의 어업협상에 나서고, 몇 년 전 자료를 이용해 보고서를 기안하는 등 형식 주의적 문서 만들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형식주의와 절차주의의 만연은 공공조직의 구조적 경직성과 과다한 법 규정에 기 인한다. 그것이 혁신과 발전에 대한 저항과, 고객과 환경의 요청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관료적 행태를 만들었다. 결국 형식주의는 형식, 절차, 선례에 지 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변화에 저항하고, 불 필요한 예산의 낭비를 초래하며, 외형을 중시하여 실제 내용을 과장하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후진적인 행정관행과 문화 공무원들이 일할 수 있는 충분한 제도적 여건이 마련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실행 및 관리 단계에서 좌절되어 정책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관료제의 관행과 문화가 변화의 추동력을 막고 혁신적 아이디어가 산출되는 토양을 잠식해 버리기 때 문이다. 궁극적인 정부 혁신은 공공부문에서 형성된 불합리한 문화를 개선하는 데 있다. 그러나 문화는 그 속성상 쉽게 변하 지 않는다. 특히 조직 외적인 충격요법이나 피하주사와 같은 주입식 개혁은 공무원 행태의 단기적인 전환조차 이루어내기 힘들다. 오히려 공무원의 저항과 복 지부동을 초래할 뿐이다. 공무원 개인 능력의 한계로 인해 초래되는 미봉책보다 더 큰 문제는 관료제에 넓게 퍼져 있는 한건주 의, 한탕주의 문화이다. 이러한 문화는 특히 고위공무원 계층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고위공무원 이 될수록 생존을 위해 정치세력과 연결되어야 하는 인사구조 하에서는 현실 성 없는 정치구호와 공약 을 가장 바람직한 정책상품으로 포장하여 내보여야 한다. 정치인들 입장에서는 이러한 공무원이 훌륭 한 공직자이 다. 그러나 그들은 국가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부담거리이다. 정부개혁이 자체적으로 달성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공무원이 자발적으로 수술대에 올라서 악성 종양 부위를 자기가 직접 잘라내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이 경우 수술의 대상과 주체가 같다. 그리고 수 술의 고통도 혼자 감수해야 한다. 이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공공부문 개혁을 스스 로 해 나가야 하는 존재가 바로 공무원이다. 변화는 비용을 수반한다. 특히 공공부문 개혁이 공무원에게 요구하는 비용을 따져보면 그들의 저항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또한 개혁이 가져올 새로운 상황에 심리적 불안감을 느낄 때나 공직자로서 자존심이 손상될 때에도 저항하게 된다. 더군다나 성과 없이 연례행사처럼 주 기적으로 치러지는 진부한 개혁은 공무원들에게 피로감과 거부감을 더해줌으로써 개혁의 동력을 잃어 버리고 현상 유지에 집착하는 행태를 더욱 강화한다. 이 밖에도 후진적인 공직문화와 관행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공무원의 권위주의: 공무원이 자신의 지위에 근거하여 일반 시민의 의지나 공익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욕 구를 갖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2 무사안일과 복지부동: 이것은 공직자가 나태한 태도로 근무하며 업무성과를 내기 위한 노력을 최소한으로 하는 행태를 의미한다. 3 비밀주의: 정부 관료제에서는 외 부세력의 의존 도를 높이기 위해 독자적으로 얻은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려는 문화가 있다. 4 온정주 의와 연고주의: 공직사회에서는 객관적인 인사시스템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 11

12 을 통한 효율적이고 공평한 인사보다 인맥과 학 맥을 이용한 부적절한 인사가 자주 이루어진다. 그 결과 정부조직의 구성원들은 영향력 있는 사람에 게 청탁을 하게 되고, 속칭 줄을 대고 줄을 타는 비공식적, 비합리적 인사가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2부. 그동안 정부는 어떤 노력을 해왔는가 역대 정권이 시행하였던 공직 사회의 제도개선 사례를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 기류가 있다. 첫째, 인 사행정 개혁을 펼치기 위해 조직 및 기 구 개편이 이루어졌다. 둘째, 시대의 변화상에 발맞추어 권한 의 위임 및 인사 관련 각종 규제 개혁이 급격히 늘어났다. 마지막으로 관료제의 태동 시기부터 끝없 이 제기된 문제의 하나인 성과관리 제도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은 모두 그 근저에 공무 원과 공직의 전문 성을 강화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공직분류 문제, 고등고시제도 개편문제, 채용 문제, 전보제도와 능력발전문제 등 모든 과제들이 공직의 전문성 강화를 지향한다. 앞에서 언급한 관료제의 문제점별로 어떤 제도개선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첫째, 공무원의 전문성 부족 문제. 공무원의 시대환경 부적응 문제 를 개선하고자 하는 인사제도에는 특채제도와 개방형 임용제도, 공무원 역량을 강화하는 교육훈련 제도 등이 있다. 또한 관료제의 폐쇄적 임 용과 연공서열 문제를 해 소하기 위해 중앙인사위원회의 설치와 근무평정제도 개선, 직무성과계약제와 MBOㆍBSC 등의 성과관 리제도, 고 위공무원단 제도 등이 도입되었다. 공무원의 창의성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로는 고등고시제도 개선과 특채제도 등이 있다. 둘째, 신나게 일할 수 있는 제도와 여건의 부재 문제. 우선 정책실명제의 부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무성과 계약제와 성과관리 제도를 도 입했다. 개인과 조직의 목표가 불일치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성 과관리제도와 성과급제도가 이를 완화하는 장치로 도입되었다. 한편 정책 조 정의 문제 해결에는 팀제 와 고위공무원단 제도가 일정 부분 기여한다. 마지막으로 형식주의와 절차 중심주의는 각 부처의 인 사 운영권을 강화하고 팀제를 운영하는 것과 연계성을 갖는다. 셋째, 후진적인 행정관행과 문화. 우선 한건주의 문화를 개선하는 데는 근무평정제도와 인사평정제도, 직무성과 계약제 같은 성과관리체계, 다면평가 등이 기여할 것이다. 권위주의 같은 문제의 해결은 다 면평가제도, 팀제, 고위공무원단 제도와 같이 조직 내 서열 중심적 체계를 완 화하는 제도적 장치와 연결되어 있다. 성과평가에 대한 저항 문제의 해결은 근무평정제도, 직무성과계약제, 다면평가제 등과 밀접하게 연계되 어 있다. 변화에 저항하는 문화의 해소는 특채제도와 개방형 임용제도, 팀제, 근무평 정 제도의 개선, 직무성과 계약제 같은 성과평가 제도 등과 연계성을 갖는다. 무사안일의 문화 해소 는 신분보장제도의 직권면직과 직위해제 제도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온정주의와 연고주 의 문제의 해결은 성과평가, 인사평가제도, 성과급제의 도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인사제도 개혁사례 : 개방형 직위제도 개방형 직위제도는 공직사회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 전문성이 특히 요구되거나 효율적인 정책 수립 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직위에 공 개경쟁을 거쳐 직무수행 요건을 갖춘 자 중 최적격자를 임용 하는 제도이다. 정부는 1999년부터 중앙부처 실ㆍ국장급 직위 일부에 개방형임 용제도를 도입하기 시 작하였다. 도입 당시 38개 부처 129개 직위였던 개방형 직위는 2006년 4월 기준으로 45개 부처 158 개 직위로 확대 운 영되었다. 개방형 임용제도의 절정은 책임운영기관의 장을 개방형으로 하고, 2006년부터 시행된 고위공무원단 제도에 개방형을 필수요소로 한 것이다. 핵심 고위직의 정책 결정 업무 분야에 개방형 임용제를 광범 위하게 도입함으로써 개방형 제도가 외부 전문가를 공무원으로 임용하는 강력한 제도로 자리 잡게 한 것이다. 폐쇄적으로 운영해 오던 공직에 개방형직위제도를 도입한 이후, 공직사회에는 경쟁과 변화의 물결이 확산되어 각 부처에서 성과 중심의 운영체제 도입을 경쟁적으로 추진하였다. 이처럼 개방형 직위제도는 우리나라 행정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 12

13 3부. 미래형 공직인사, 어떻게 할 것인가 공직분류 체계 개편 방안 : 직무군ㆍ직무렬 제도 지식기반 사회에서 성공하는 정부를 만들려면 공무원의 전문성을 확보하고 능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공직분류 체계를 현재의 직 군, 직렬체제에서 직무군, 직무렬 체제로 변환시켜야 한다. 직 군, 직렬식 분류체제는 계급제 기반 위에서 공무원을 선발하고 충원하기 위한 계열 구분과 인사관리 상의 편의성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반면 직무군, 직무렬 분류체계는 사회 발전과 분화 추세에 맞추 어 공직을 전문화 하고 공무원을 전문가로 육성하기 위한 것이다. 새로운 공직분류 체계는 다음 다섯 가지 기준에 근거해야 한다. 첫째, 공무원의 전문성 확보. 전문성 부족은 제도적 원인에 기인한다. 전문지식을 공직에서 유지, 발 전시킬 기회가 없고 보직경로도 적성과 전문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체계에서 는 공무원이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직위에 보직되도록 하고 해당 직 무군, 직무렬 내에서만 순환보직하게 함으로써, 공직 전체의 전문성을 높일 수 있다. 둘째, 미래 행정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공직 적합성 확보. 많은 국가가 공무원의 적응력 제고를 위해 인력감축, 아웃소싱 등 신공공관리 (New public management)적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정부를 운영해 왔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행정능률성을 확보할 수 없고 퇴행적 능 률성을 제고할 뿐이다. 대안은 공무원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전문성을 높여 변화된 행정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공무원을 육성하는 체 제를 만 드는 것이다. 셋째, 적재적소 직무 배치를 위한 제도 설계. 현 제도에서는 직위와 직군, 직렬이 상호 연결되지 못한 다. 상급자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인사 가 이루어지며, 연공서열에 의해 직위가 결정되는 폐단이 나타 난다. 따라서 직위와 직군, 직렬이 범부처적으로 상호 연결되는 새로운 분류체 계를 마련해야 한다. 넷째, 공정한 성과평가를 위한 기준 마련. 공정한 성과평가가 이루어지려면 비교 가능한 유사 업무에 대해 상대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 서 부처별로 혼재되어 있는 해당 직무군의 담당자들을 범부처 적으로 종합하여 비교 평가하는 인사 시스템이 도입되어야 한다. 다섯째, 승진, 전보 등 인사운영 분야에서 분야간 형평성 확보. 직군ㆍ직렬간(예: 행정직, 기술직) 또 는 부처간(예: 인기부처, 비인기부처) 승 진 격차는 공무원 사기저하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 에,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직위, 직렬간 형평성 있는 승진체계를 마련해야 한 다. 새로운 직무군, 직무렬 분류체제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부 조직을 유연하게 관리할 수 있다. 공무원이 특정 부처에 소속되지 않고 자신의 직무 분야와 관련된 직무군, 직무렬에 속하기 때문에 전 문성을 확보할 수 있고, 부처 이기주의를 없앨 수 있다. 둘째, 정부조직 구조 의 유연성을 높인다. 자 신이 속한 부처가 통폐합된다고 해도 새로운 부처에서 보직경로를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부처 통폐합에 대한 반발 및 회의감을 없앨 수 있다. Y형 경력발전 제도 Y형 경력발전제도의 기본 골격은 급변하는 시대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고급 공직자의 공직발전 경로를 부처 내에서 순환하는 중견간부 (사무관급)와 직무군 내에서 범부처적으로 순환하는 고위관료 (서기관 급 이상)로 구분하는 것이다. 즉 중견간부가 고위관료로 진입하는 단계 에서 정밀한 이모작 교 육훈련을 통해 직무군 내에서 부처를 초월하여 넓게 순환하는 정책관료와 직무렬 내에서 부처를 초월 하여 비교적 좁 게 순환하는 전문관료로 양분하는 것이다. 첫째, 정책관료란 "직무군으로 전문화된 범위 내에서 정책을 분석ㆍ평가할 수 있는 능력과 더불어 거 시적 시각에서 범부처적 관련 정책을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 13

14 기획ㆍ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관료"를 말한다. 현재는 고 급공무원이 사무관으로 입직한 후 해당 부처 각 부서를 순환 보직하는 Z형 보 직경로를 택하고 있다. 반면 Y형 경력개발제도는 입직 후 일정 기간 소속부처 내에서 자신의 직무군 또는 직무렬에서 근무하 다가 서기관 승 진을 전후하여 정책관료를 지원한 공직자에 한 해 별도 교육훈련과 선발과정을 거친 다. 인사위원회의 심사 과정을 거쳐 선발된 정책관료 후보자는 직무군 내에서 직무렬을 넘어서 범부처를 순환하는 인턴 기간을 거치게 한다. 이 기간 동안 현직 정책관료의 보좌관으로 근무하며 업무를 파악 하고 현장 경험을 쌓게 한다. 이러한 직무교육을 직무군 내에서 범부처적으로 거친 후, 정부산하연구 기관에서 핵심 정책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기간 중 후보자는 자신의 정책 분야에 대한 비전과 역량 을 길러야 한다. 교육기간(인턴+연구)은 약 3년 정도를 할애한다. 교육 후에는 정책적 비전과 실천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정책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산하연구기관 연수가 끝나면 직무군별 인사위원회 심 사를 거쳐 정책관료로서 재임용된다. 탈락한 자는 1회에 걸쳐 재교육을 받을 수 있으나, 이후에도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공직에서 면직한 다. 둘째, 전문관료는 "직무군 내 해당 직무렬에서 오랜 기간 근무하며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가지게 되 는 관료"를 말한다. 전문관료는 공직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적성과 능력에 맞는 경력개발을 해야 한다. 전문관료는 직무렬 내에서는 각 부처를 순환보직할 수 있 지만, 정책관료와는 달리 보직 및 전보의 범위가 제한적이다. 대신 신분보장을 바탕으로 장기간에 걸쳐 해당 분야의 전문 성을 높이고, 해당 분야 박사 취득 및 전문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을 받는다. 전문관료 후보자는 정책관료와 마찬가지로 10년 차 이상 사무관을 대상으로 모집한다. 인사위원회 선 발을 거친 후보자는 소정의 전문교육 과정을 이수한다. 전문교육은 연합대학원(정부출연연구기관이 참여하는 연합대학원 형태의 공직 전문교육기관)에서 교육 과정을 이수하거나, 일반 대학원 과정을 통해 해당 분야의 학위 및 전문성을 갖도록 교육된다. 교육기간은 3년 정도 할애한다. 전문관료의 최 종 선발은 별도의 인사위원회 심사를 거쳐 임용하고, 탈락자의 경우도 정책관료와 같은 과정을 거친 다. 최종선발자는 대상자의 전문성을 고려하여 해당 직무 렬의 전문 관료로 임용한다. 정책관료제도와 전문관료제도는 자신의 직무렬을 중심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확 보하고 근무경력을 우선적으로 반영할 수 있다. 따라서 정책관료제도와 전문관료제도는 현행 고위공 무원단 제도의 도입 취지는 충분히 살리되 공직사회에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실천가능하고 실효성 있는 대안이다. 해당 직위에 적임인 공무원을 제도적으로 육성함과 동시에 대상 직위는 범부처적으로 확대하는 제도라 고 할 수 있다. 정책조정 메커니즘의 도입: 조정실장제도 조정실장제도는 국무총리 밑에 부처를 초월해 직무군별로 고위관료에 대한 인사심사권과 정책조정권 을 행사하는 장관급 조정실장을 두는 제 도이다. 수직적인 계층제질서 위에서 각 부처를 지휘 감독하 는 장관과 달리 조정실장은 해당 직무군에 대한 횡적인 기능 통제를 통해 정책 조정과 인사심사를 담 당하는 제도적 장치이다. 조정실장의 업무와 권한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책조정권. 정책갈등의 대상자인 각 부처가 자율적으 로 원활한 합의나 조정을 할 수 없는 사 안에 대해서만 조정실장이 개입한다. 둘째, 정책관료와 전문 관료에 대한 인사심사권. 조정실장은 해당 직무군별로 정책관료와 전문관료의 근 무성적을 평정할 때 2차 평정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각 장관이 부여한 인사고과를 바탕으로 승진 후보자를 심사하여 제청 한다. 셋째, 정책실명제에 근거한 공무원 성과평가. 조정실장은 장기적인 정책평가 업무를 통해 공직 인사심 사에 대한 책임성과 전문성을 향상시 키기 위해 정책관료와 전문관료의 성과평가 기능을 담당한다. 성 과평가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위해 정책실명제와 직무성과 계약제를 결합한 형식으로 이루어진 다. 넷째, 정부업무평가와 정책영향평가의 결합. 새 제도는 기존 국무조정실에서 담당하던 정부평가업 무를 각 직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 14

15 무군별 조정실장에게 이관하고, 조정실장이 정부업무평가와 함께 장기적인 정책영향평가를 담당하는 것이다. 다섯째, 국정과제 위원회 기능 이양. 대부분의 국정과제 위원회 기능은 직무군과 성 격이 유사한 조정실장에게 이양하고, 여러 직무군과 연계된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국정과제 위원 회는 관련 기능을 재분류하여 각 조정실장에게 분장시킬 수 있다. 공직사회 한계를 극복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조정실장제도가 가지는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범정부 적 정책 조정. 국무조정실의 직무군별 확대 개편을 통해 지식기반사회에 걸맞는 전문관료제도에 의한 효과적 정책 조정이 가능해진다. 둘째, 국정의 균형과 효율적인 추진. 대통 령-국무총리-장관으로 이 어지는 상명하복식 정책기획 및 집행조직과 대통령-국무총리-조정실장으로 이어지는 직무군별 정책 조정 및 인사 기능을 담당하는 조직을 통해 국정추진체계의 균형을 이룸으로써 업무의 책임성을 높이 고 전문화를 추구할 수 있다. 셋째, 전문적인 인적자원관리와 책임행정의 구현. 새 제도 하에서 각 부처의 유사 업무 담당자는 소 속은 비록 다르지만 실질적으로 같은 직 무군에 속하는 공무원들이기 때문에 극한 대립이나 반목을 피 할 수 있다. 그리고 해당 공무원들에게 전문성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 되어 전문행정을 기할 수 있게 된다. 넷째, 장ㆍ단기 평가의 조화와 기록의 지적 자원화. 우선 정책실명제를 직무성과계약제 와 결합하여 정 책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성을 확보하여 책임행정을 구현할 수 있다. 또한 공무원이 하 나의 직위에서 습득한 지식과 정부를 조직의 공유자원 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다섯째, 국정과제위 원회의 기능 흡수. 조정실장제도는 13개 국정과제 위원회의 기능을 이관 받음으로써 대통령 프로젝트 의 수행을 별도 조직이 아닌 정통관료조직이 추진토록 한다. 조정실장에 의한 국정과제의 수행은 우 선순위를 결정할 때 전문성과 현실성의 조화를 가져온다. 결론적으로 조정실장제도는 공직사회의 전통적인 문제인 부처간, 조직간 집단이기주의를 극복하고 나 아가 범정부적 차원에서 국정 전반에 대한 합리적, 전문적인 정책 조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제도적 장 치로서 의미를 지닌다. 교육훈련제도의 확충: 정부출연연구기관 활용 고위공무원 교육은 정부가 맞춤 교육을 해야 한다. 학문적 목적의 국내외 위탁 교육은 다양한 행정수 요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력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직무군, 직무렬에 따른 맞춤형 전문 교육은 행정서 비스의 다양화를 가져와 교육의 적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 역할을 할 것이다. 공무원 교육운영 체계 개선을 위해서는 여러 기관에 분산, 산재되어 있는 교육 제도를 한 군데로 집 중한 연합교육원 형태의 교육으로 전환 해야 할 것이다. 연합대학원의 편제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우 수 연구원이 그 성격에 맞춰 하나의 학과 또는 전공을 담당하되, 기본 소양교 육과 인프라는 중앙공무 원 교육원이 맡아서 운영한다. 또한 각 직무군별 조정실장이 이사회의 구성원이 되며, 정부출연 연구 기관의 장이 학과장 내지 전공 주임교수를 맡을 수 있도록 한다. 기타 교육은 정부출연 기관 연구원 에 의한 단기 수시 교육을 실시한다. 교육훈련은 보 직관리와 경력발전과 연계될 때 효과가 발생하고 지속적으로 유지된다. 공직교육은 이모작 집중교육과 단기 수시 교육 두 가지로 요약해야 한다. 새로운 교육훈련제도의 기대효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식기반 사회를 위한 고위 공직자 양성. 새로 운 교육훈련제도를 통한 이모작 교육을 하면 정책관료와 전문관료를 육성할 수 있다. Y형 경력 발전 제도에 따른 교육을 할 수 있어 고위 공직자에게 필요한 전문지식을 함양하고, 전문성 축적을 가능하 게 할 수 있다. 또한 공급자 중심, 일반 소양교육 중심에서 탈피하여 수요자 중심, 정책전문교육으로 의 전환을 가능하 게 해 준다. 둘째, 공직자와 연구원의 사기 앙양. 학위 취득만을 위한 부실교육에서 실효성 있는 전문교육으로의 전환은 직무 만족도를 높이고, 퇴직 후 학계, 연구계, 산업계로의 진출을 가능하게 해 준다. 또한 정 부출연연구기관 연구원들의 사기도 높일 수 있다. 셋째, 21세기 공직교육의 역할 모델 제시. 정부출연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한 연합대학원의 집중교육과 단기 수시 교육의 병행은 급격한 환경변화라는 지 식기반 사회의 거 대한 물결에 편승하여 전문성과 국제 경쟁력을 갖춘 공직자를 양성하는 국제적인 모 범 사례를 제시할 것이다.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 15

16 미래형 공직 인사개혁이 가져올 선진적 변화 21세기 지식기반사회의 공직 인사개혁을 위한 새로운 제도들이 우리나라 공직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 는데 어떤 기여를 하는지 살펴보자. 첫째, 공무원의 전문성 부족과 자질 시비 극복. 환경변화에 대한 공무원의 적응력을 향상시키는 제도 로 '직무군의 재분류', '국정과제위원회 에서 조정실장으로의 기능 이관', '정책관료', '전문관료', '고위 공무원을 위한 전문교육'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제도들의 도입은 공무원들이 시대 환경 변화에 능동적 이고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게 한다. 또한 부처의 벽을 넘어서는 넓은 시야와 먼 미래를 바라보는 비 전을 가지게 해 준다. 특히 전문 관료 제도를 통해 창의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 한 가지 전문 업무를 장기간 담당함으로써 노하우를 습득하고, 실험적 사 고력을 배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신나게 일할 수 있는 여건 조성. 공무원들이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책임감이 결여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으로 지적되는 정책 실명 제의 부재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제도로는 '조정실장에 의한 정 책실명제', '정책영향 평가', '인사 심사'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정부 내 정책 혼선의 원인으로 작용하 는 부처 및 조직간 집단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제도로는 '직무군의 재분류', '조정실장에 의한 정책 조정', '조정실장 에 의한 인사심사', '정책관료제' 등을 들 수 있다. 조정실장에 의한 정책 조정은 해당 직무군별로 신설되는 조정실장이 범부처적으로 전문성 에 바탕을 둔 정책 조정을 수행하기 때문에 갈 등 당사자들의 조정 결과 승복을 용이하게 해준다. 셋째, 후진적인 행정관행과 문화 극복. 단기성과와 이벤트 중심의 행정이 초래하는 근본적인 뿌리로 지적되는 한건주의를 해결하는 제도로는 조정실장에 의한 정책영향평가, 정책실명제, 전문관료제를 들 수 있다. 관료제 병리현상으로 오랫동안 지적되어 온 변화에 대한 저항은 직무 군의 재분류, 정책관료 제의 도입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 그리고 공무원이 자신의 권위에 근거하여 공익과는 상관없이 자신 의 의사를 관철 시키고자 행동하던 권위주의는 직무군의 재분류, 전문관료제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 넷째, 안정적인 자기개발 여건 제공. 현행 Z형 보직경로는 공무원 경력개발제도의 부재를 의미한다. 공직의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한 경력개발 제도의 필요성이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제도적으로 추 진되지 못한 것은 직무군의 재분류, 정책관료제도와 전문관료제도를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직 무군의 재분류는 공무원이 해당 직무군내의 전 부처를 대상으로 순환하면서 부처의 이동성을 보장받 게 할 것이다. 또한 해당 직무군에 대한 전문성을 배양하여 퇴직 후 제2의 직업생활을 하는 데 있어 경쟁력 있는 인적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공무원, 그 안에 잠든 거인을 깨우자 국가발전과 국민복리 증진에 큰 피해를 입힌 수많은 정책 실패를 돌이켜 볼 때, 이를 미연에 방지하 거나 적절하게 대응 못한 근본 원인은 잘못된 공무원 인사제도로부터 초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잘 못을 고치지 못한 이유는 기존의 정부개혁이 공무원의 숫자나 부처 조직의 크 기 같은 양적 하드웨어 개편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정부와 공직사회의 현실에 대한 깊은 고뇌와 성찰 없이 서구 선진국 제 도를 맹목적으로 이식하려 했던 이벤트성 개혁이었기 때문이다. 미래 지향적 정부혁신 방안은 공무원 인사제도를 개혁함으로써 공무원을 개혁하고, 바뀐 공무원이 정 부를 개혁하게 하는 것이다. 소프트웨 어 개혁을 통한 하드웨어 개혁이다. 이는 겉모습만 바꾸는 미봉 책이 아니라 새로운 인사제도를 통해 정부 유전자를 바꾸는 근본적 개혁이 다. 유전자는 네 가지 염기성 화합물질로 구성된다. 이들 네 가지 염기의 조합에 따라 생명체의 형태와 기능이 결정된다. 정부 능력을 결정하는 유전자의 네 가지 염기가 바로 공무원의 소속, 경력발전경로, 평가 및 인사, 교육훈련이다. 공무원의 소속을 부처에서 직무로 바꾸는 직무군 ㆍ직무렬 제도, Z형 무 차별 순환보직에서 Y형 경력발전제도로의 변경, 조정실장에 의한 객관적 평가와 인사추천, 그리고 '중견 실무관료를 고위 정책관료 및 전문 관료로 거듭나게 하는 공직 이모작 교육훈련', 이상이 바로 정부의 유전자 치료이다. 공무원 인사제도의 이러한 근본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 16

17 변화는 복지부동하는 무능한 철밥통을 대한 민국의 선진국 도약을 선도하는 유능하고 충실한 국민의 공복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한국관료제의 복지부동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 삼성경제연구소/2009년 1월/429쪽/20,000원 저자 김태유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학위(1980)를, 콜 로라도 대학(Colorado School of Mines)에서 자원경제학 박사학위(1983)를 받았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후 과정(Post. Doc.)을 거쳐 아이오나(IONA) 대학 경영시 스템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1987년부터 서울대학교 산업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이며 한국자원경제학회 회장, 외교통상부 에너지 자원 대외직명대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초 대 대통령정보과학기술보좌관으로 <신성장동력산업 의 지정과 육성>, <이공계 공직진출과 공직 및 고시제도 개편>, <과학기술부총리 제도와 기술혁신본부의 신설> 등의 정책을 기획하고 추진하 였으며, 정부조직과 공직인사 제도를 연구하게 되었다. 에너지 자원경제학, 기술경제학, 정보통신정책, 산업정책 등의 분야에 많은 논문과 저 서가 있으며, 현재 국가발전론과 미래학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신문주 성균관대학교 법률학과를 나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석사학위(1986)를 받았으며, 영국 버밍엄대 공공정책대학원에서 공공경영 학 석사과정(1997)을 수료하였다. 행정고시 합격(1980) 후, 행 정자치부에서 교육과장, 행정능률과장, 과학기술자문회의 국정과제국장, 교육원 교수, 연수원 혁신센 터소장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한국정책분석평가협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공무원교육원 등 주로 공 공분야에서 전문강 사로 활동 중이다. 다양한 전공과 폭 넓은 근무경험을 접목시켜 정책기획, 정책설 계, 정책품질, 정책평가 및 경영평가, 공공 서비스 마케팅 등의 영역에서 업무현장에 적합한 실전 강 의를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신 공공부문 행정서비스 마케팅, 정책기획연습 등이 있다. 짧은 요약(Short Summary) 이 책은 정부혁신의 성공 여부가 정부의 규모가 아니라 정부의 효율성에 달려 있음을 상기시키며 근 본적으로 정부를 변화시키기 위해 무엇 부터 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정부의 능력은 곧 공무원에 의 해 가름되며, 공무원이 바뀌어야만 선진국으로의 도약이 가능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공직 사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공무원 개인보다는 시대에 뒤떨어진 공직인사제도에 기인하고 있다고 분 석하면서 공직 인사제도의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은 정부의 능력을 결정하는 유전자의 네 가지 염기로 공무원의 '소속', '경력발전경로', '평가 및 인사', '교육훈련'을 꼽는다. 그리고 유전 자 치료를 통해 불치의 병을 미연에 방지하고 보다 탁월한 능 력을 유도하듯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위한 유전자 치료로 '공무원의 소속을 부 처에서 직무로 바꾸는 직무군ㆍ직무렬 제도의 도입', '무차별 순환보직에서 Y형 경력발전제도로의 변경', '조정실장제도를 통 한 객관적 평가 와 인사 추천', '중견 실무관료를 고위 정책관료 및 전문관료로 거듭나게 하는 공직 이 모작 교육훈련' 등의 해법을 제안한다. 필자가 제안하 는 미래 지향적 정부혁신 방안은 공무원 인사제 도를 개혁함으로써 공무원을 개혁하고, 바뀐 공무원이 정부를 개혁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정부의 겉 모습만 바꾸는 미봉책이 아니라 정부의 유전자를 바꾸는 근본적인 개혁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 고 무엇보다 누차에 걸쳐 반 복과 실패를 거듭해온 정부개혁의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차례 프롤로그_ '작은 정부 만들기'는 왜 실패했는가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 17

18 1부. 공직사회, 무엇이 문제인가 01 이제는 변화해야 한다 02 정부관료제의 문제점과 유형 03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관료를 원한다 2부. 그동안 정부는 어떤 노력을 해왔는가 01 정부개혁의 핵심, 인사정책 02 인사제도 개혁사례 분석 03 새로운 처방을 위한 종합평가 3부. 미래형 공직인사, 어떻게 할 것인가 01 새로운 제도적 처방을 내놓으며 02 공직분류체계 개편 방안: 직무군 직무렬제도 03 Y형 경력발전제도: 정책관료와 전문관료 04 정책조정 메커니즘의 도입: 조정실장제도 05 교육훈련제도의 확충: 정부출연연구기관 활용 06 미래형 공직 인사개혁이 가져올 선진적 변화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 18

19 암울한 꼼수의 나라, 비겁한 대한민국 : /12/14 11:05 꼼수. 어감부터 좋지 않다. 뜻 역시 떳떳하지 않다. 쩨쩨한 수단이나 방법 을 뜻한다. 이런 비루한 언어가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다. 시대의 특징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된 듯하다. 국내 유일 가카 헌정방송 이라는 나는 꼼수다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꼼수가 정치와 경제, 여의 도와 관가에 난무하는 탓이다. 류순열 경제부장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 비서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디도스(DDoS 분산서비스거부) 공격은 메가톤급 꼼수 였다 서울시 장 보궐선거에서 젊은 층의 투표를 방해하려는 목적이었다니 민주주의에 대한 테러 나 다름없다. 그런 무도한 짓을 감행한 20대 9급 비서 의 용기가 놀랍다. 배후가 의심되지만 경찰 발표대로 단독범행이라 해도 달라질 건 없다. 민주주의 테러라는 사건의 본질은 그대로다. 정부 정책 곳곳에도 꼼수는 숨어 있다. 대표적인 게 물가 다. 정부는 입으로 물가를 잡기 시작한 지 오래다. 업계를 돌며 구두 압력을 넣 는 방식이다. 효과는 직방이다. 며칠 전 오비맥주는 가격 인상 계획을 3일 만에 철회했다. 주류업계 명줄을 쥐고 있는 국세청의 작품 이었 다. 이 회사 임원을 불러 닦달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물가가 그런 식으로 잡히지 않는다는 건 그들 스스로 잘 안다. 관가 수십년의 경험칙이다. 정부가 압력을 넣으면 가격을 내리는 시 늉은 하지요. 그러나 함량을 줄이든, 질을 낮추든 요리조리 다 빠져나갑니다. 옛날에 다 해본 겁니다.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두어 달 전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입으로 물가잡기 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이를 뻔히 알면서 되풀이하는 것은 정책 이 아니라 꼼수 다. 물가 잡으려 이렇게 애쓴다 는 걸 알리려는 대국민 퍼포먼스일 뿐이 다. 그러는 사이 공공요금은 잘만 올랐다. 한국전력은 전기요금을 올해 사상 처음 두 차례나 올렸고 앞으로 또 올릴 계획이라고 한다. 물가관리에서 꼼수는 꼬리를 문다. 입으로 안되니 물가 산정 기준을 한 달 앞당겨 바꿨다. 11월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4%대인데 새로 추 암울한 꼼수의 나라, 비겁한 대한민국 19

20 가된 품목 43개의 상승률은 1.5%에 불과했다. 물가 상승률 목표치 4.0%에 맞춰 보려는 꼼수였음이 확연해진다. 변명거리는 있다. 실패한 통화정책이다. 금리 라는 정당한 정책 수단으로 물가를 다스려야 하는데 그 기능은 1년 넘도록 마비상태다. 그러 니 입으로라도 닦달하고, 그마저도 안되니 분식회계 를 시도할밖에. 지난해 그나마 경기가 괜찮았을 때 선제적 금리 인상 필요성은 엄연했다. 뛰기 시작하는 물가, 불어나는 가계빚을 잡으려면 그래야 했다. 그 러나 한국은행은 미적거렸다. 김중수 총재의 의중이 컸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 첫 경제수석인 그는 한은 총재가 되어서도 성장 프레임 에 갇힌 모습이었다. 결과는 금리인상 실기 물가관리 실패 였다. 이제 시장은 공공연히 한은의 직무유기 를 거론한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마저 이제라도 한은이 지난날의 잘못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성하고 물가관리 의지를 보여야 한다 는 고언이 나온다. 그러나 김 총재는 묵묵부답이다. 대신 며칠 전 공개석상에서 물가안정이 금융안정의 충분조건이 아니고 금융안정이 물가안정에 기여하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고 말했다고 한다. 물가관리 실패 책임에 대한 방어심리가 느껴진다. 물가관리는 한국은행의 존재 이유다. 한국은행법 제1조는 물가안정을 도모함으로써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한다 고 적시하고 있다. 정부의 복권사업에도 꼼수가 숨어 있다. 불황기에 나홀로 호황인 사행산업 은 이율배반적이다. 절대다수의 서민 호주머니에서 돈을 거둬 극소수의 서민에게 몰아주는 거대 투전판이 복권사업이다. 정부는 서민에게 인생역전의 꿈을 팔고 고통 없는 세금 을 챙긴다. 손쉽게 서 민 호주머니에서 재정을 해결하는 꼼수인 셈이다. 서민을 위한다는 부동산 정책에도 늘 꼼수는 숨어 있다. 한정된 지면에 모두 소개하기엔 꼼수들이 차고 넘친다. 꼼수가 널린 사회, 참 비겁한 세상이다. 류순열 경제부장 /Segye.com /세계타워 2011년 12월 14일 암울한 꼼수의 나라, 비겁한 대한민국 20

21 대한민국 지도층의 슬픈 자화상 :26 검증대 앞에만 서면 쏟아지는 투기 탈세 탈세 위장전입 정권마다 청문회 통과할 청렴후보 못 찾아 곤혹 "부와 권력 중 하나 택해야" 청백리. 관직을 수행할 뛰어난 능력과 함께 청렴과 근검, 도덕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이상적 관료를 뜻한다. 이황과 이원익 이항복 맹사성 등 이 대표적 청백리로 꼽힌다. 대한민국 고위공직자 후보에 오른 이들은 국민의 0.1%에 속하는 인재다. 전문성과 경력을 두루 갖춘 이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검증대 앞에만 서면 부동산투기와 증여세 탈루, 위장전입 따위의 추악한 과거가 쏟아진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고민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청백리까지는 아니더라도 평범한 국민 수준의 도덕성만 갖추면 발탁할텐데, 그 기준을 맞출 공직 후보자를 찾기 힘든 것이다. 박 당선인측 관계자는 "검증 망을 통과할 후보가 많지 않은 현실이 대한민국의 비애"라며 고개를 저었다. 2000년 이후 쏟아지는 낙마 = 김용준 총리후보가 낙마했다. 당초 김 후보는 야당의 공세를 피할 수 있는 유력한 카드로 꼽혔다. 장애인이 대한민국 지도층의 슬픈 자화상 21

22 었지만 최연소 판사와 첫 장애인 대법관이라는 인간승리의 산증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명 닷새 만에 두 아들의 병역면제와 수십억원대 부동산투기 의혹이 쏟아지면서 백기를 들었다. 이런 장면은 2000년 인사청문회법이 도입된 이후 매년 반복되고 있다. 5년 전 이명박 당선인이 지명한 남주홍 통일부, 박은경 환경부, 이춘호 여성부장관 후보자도 같은 운명이었다. 이들은 부동산투기와 위장전입, 편법증여, 자녀 이중국적, 자녀교육비 이중공제, 재산 축소신고 등 추 문에 휩싸여 낙마했다. 2009년 검찰총장에 지명된 천성관 후보는 오랜 기간 스폰서로부터 이득을 봤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사퇴했다. 언론인 출신으로 2010년 문화 부장관에 지명된 신재민 후보는 부동산투기와 차량 스폰, 위장전입 등 의혹에 휩쓸려 중도탈락했다. 김대중정부 시절 잇따라 낙마한 총리후보(장 상, 장대환)도 부동산투기와 위장전입이 문제가 됐다. 청문회 통과에 목매는 박 당선인 = 박 당선인도 총리후보로 능력과 도덕성을 겸비한 인물을 찾는 데 나름 애를 쓴 것으로 전해진다. 법조 인과 교수, 시민운동가, 언론인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 중에 능력을 갖춘 이들로 후보군을 압축해 검증에 들어가려 했지만, 본인들이 손사래치 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 인사청문회 낙마자들의 학습효과 때문에 적지 않은 인사들이 "나는 적임자가 아니다"라며 자진포기했다고 한다. 박 당선인측 인사는 "상당수 인사가 검증과정에서 걸러지거나 스스로 포기했다"며 "일부인사는 부모로부터 편법증여를 받은 사실 때문에 검 증동의서 제출마저 포기하더라"고 전했다.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고 살다가 검증요청이 들어오니 포기한 것이다. 현재 고위공직자 후보군이 될 만한 연령대인 40 70대 사회지도층 상당수는 년대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평균적 도덕수준에도 미 달하는 삶을 산 셈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그들에겐 먼 나라 얘기일 뿐이었다. 도덕과 청렴보다 편법과 술수를 더 가까이 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30일 "사회지도층들은 개발시대식 사고에 젖어 결과만 중시할 뿐 수단과 방법을 가볍게 여겼고, 대접받고 혜택 누리는 데 익숙할 뿐 져야 할 도덕적 책임은 외면하기 일쑤였다"고 비판했다. 김 전 의장은 "사회지도층은 부과 권력을 함께 가지려는 욕심을 애당 초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엄경용 기자/naeil.com 대한민국 지도층의 슬픈 자화상 22

23 한국어 '하류 언어' 취급, 언어에 남은 식민권력 :17 위정자들은 지금도 우리 말과 글을 천시하고 있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여 노예통치를 하면서 학살을 일삼고 수탈을 함에 있어 조선인들의 눈과 귀를 막기 위해 일본글과 말, 그리고 외 국 언어들을 동원하여 우리글을 사용치 못하게 하여 모든 법률 등의 합리적 수단을 내세우기 위한 통치 수단으로 활용해 오고 있었 다.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기획 - 우리는 과연 해방됐는가 일본어에서 영어로 옮겨간 ' 언어 식민주의 '.. 한국어 ' 하류 언어' 취급 일제 때 ' 국어= 일본어' 제국주의 인식 그대로 한국어 ' 국어' 로 불러 초 중 고 교과서도 1970년에야 한글로 바뀌어 신문 공문서 한글 사용은 1980년대 후반에야 확산 가장 과학적 언어라면서 일상에서는 열등 언어 취급 "우리말로 새로운 말 만들기 포기하지 말아야" 우리는 한글을 '국어'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럽다. 우리말과 글을 배우는 정식 교과목 이름도 '국어'다. 그러나 자신이 쓰는 언어를 '국어'라고 부르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등 몇 곳뿐이다. 언어와 국가를 등치시키는 '국어'라는 표현에서부터 일제 강점기에 이식된 제국주의적 인식이 숨 어 있다. '국어'라는 말은 1911년 발표된 일제의 제1차 조선교육령에서 처음 등장한다. 물론 여기서 국어는 일본어를 뜻한다. 이때부터 조선어는 '한국 어'로 격하된다. 교과목도 '조선어 및 한문 독본'으로 한문과 통합됐다. 식민 치하 내내 '국어'는 일본어였다. 1945년 해방 이후 '국어'는 일본 어 대신 한글을 가리키게 됐지만 그 명칭은 그대로 이어져 왔다. 일본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게 된 것은 서양식 근대화 개념이 일제를 거쳐 우리에게 무비판적으로 이식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어 '하류 언어' 취급, 언어에 남은 식민권력. 23

24 1940년 일제강점기 영암서공립심상소학교 교실 수업 장면. 1938년 일제 3차 조선교육령이 시행되면서 학교에서 우리말을 쓰는 게 사실상 금 지됐다. 독자 제공 토익 토플 하면 떠오르는 서울 종로 2가 영어학원 골목길을 지나는 젊은이들. 일제시대 일본어가 출세의 관문이었다면 해방 70년이 지난 현 재 취업 준비생들에게는 영어가 반드시 넘어서야 할 필수 과목이 됐다. 경향신문 자료사진고려대 일어일문과 이한섭 명예교수(65)는 지난 해 <일본에서 온 우리말 사전>을 통해 1880년대 개화기 이후 일본에서 우리말에 들어 온 어휘 3624개를 찾아 정리했다. 이 교수는 "학술 용 어, 정부와 사법부, 검찰에 관계되는 법률 용어 중 대다수는 일본어 어휘"라며 "일본어에서 유래한 한자어는 사실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만 큼 많다"고 했다. '대통령', '민주주의', '과학', '철학', '시민' 등 익숙한 서양 근대식 용어 대부분이 일본어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정부 차원의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 근대식 용어를 스스로 만들어낸 반면 우리는 일본이 만든 용어나 개념을 번역해 쓰는 데 급급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 교수는 "일본에서 온 말 중 일부가 한국인의 정신세계나 사고방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을 것이라 본다"며 "일본 제국주의 시절 황국신민화 교육이나 일본식 법률이 일상에 뿌리내린 것은 결국 언어를 통해서였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전쟁, 군사 관련 용어는 우리 일상에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남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언론에서 정신대로 끌려 갔던 피해자를 '위안부'로 부르고 있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남성에게 성적으로 위안을 준다'는 의미는 일본 입장에서 만든 언어인데 무비판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일제 통치 시대의 모습이 언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됐고, 이후 우리가 곧바로 전쟁을 겪은 만큼 이 같은 용어를 쭉 이어 쓰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어 '하류 언어' 취급, 언어에 남은 식민권력. 24

25 소위 '삐라'도 영어의 'bill'을 일본 사람들이 부르는 말이다. 일상언어에서도 오랫동안 쓰이던 말이지만 일본어에서 왔다고 해서 '전단( 傳 單 )'으로 고쳤다. 그러나 전단 또한 1920년대 중국 군벌 시대 때 만들어진 전쟁 용어로 적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심리전에 쓰인 선전물을 부 르는 말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종이 쪽지'로 순화하자고 하지만 언론에서 쓰지 않으면서 일상어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미 익숙하게 쓰고 있는 언어를 식민통치시절 들어 왔다는 이유로 쓰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해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 전문가들은 습관화된 우리의 '언어 식민주의'를 되돌아볼 필요는 있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한다. 해방 후 곧바로 국어 정책이 제대로 수립되지 못한 건 당시 정치적 환경과 연관된다. 8월15일 일제가 항복 선언을 했지만 미군정 당국은 조 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에게 자리를 이탈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때부터 친일 인사들이 1948년 한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미군정이 만 든 조선교육심의회에서 한글 정책을 맡게 됐다. 미군정 초기 행정 권한이 일본인에서 친일파 조선인들로 이양된 셈이니 제대로 된 한글 정책 이 만들어질 리 만무했다. 해방 후 제대로 된 한글 교과서가 만들어지는 데도 오랜 시일이 걸렸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일제 치하에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되기도 했던 외솔 최현배가 한글 정책을 맡게 됐지만 한계가 있었다. 정책의 핵심은 예를 들어 동사를 '움직씨', 형용사를 '그림씨'라는 식으로 한자어를 한글로 바꾸는 식이었다. 언어에서 일제의 정신적 잔재를 없애는 것과는 결이 조금 다른 작업이었다. 학계에서도 일본어나 한자어로 된 말을 쓰지 않는 데 동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 니 '한글 한자 병행 교과서', '한글전용 교과서'가 학교마다 다르게 보급됐다. 이 교수는 해방 후 언어 속 식민권력이 철저하게 청산되지 못한 것은 당시 조선인들의 의식수준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가 크게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일제치하 모든 사람들이 독립을 바라고 새로운 세계를 갈구하던 차에 해방이 됐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해방 전후 모습을 다룬 문헌들에는 1945년 광복일 당시 일왕이 항복방송을 할 때 조선총독부 사무실 앞에서 조선인들이 슬퍼하며 무릎 꿇고 눈물을 흘렸다는 장면이 나온다. 일제시대 권력과 직결되는 다리였던 일본어는 해방 후에도 여전히 출세를 지향하는 이들이나 식자층에게 유용한 언어일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한글 한자 혼용과 한글 전용 사이에는 격렬한 논쟁이 여러 차례 일었다. 1970년 초 중 고 교과서가 한글 전용으로 바뀌고 1980년 대 후반부터 신문과 공문서에서도 한글이 주를 이루게 됐다. 그러나 정부나 학계에서도 일본어에서 유래한 한자어, 일본말로 받아들인 서양 의 개념을 우리 식대로 다시 논의해야 한다는 문제 의식은 두드러지지 못했다. 우리가 일본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큰 문제는 우리 사회가 새로운 개념을 우리 식으로 받아들이는 데 무능해졌다는 것이다. 한글문화 연대 이건범 대표(51)는 "새로 들어온 개념을 우리말로 만들면 어색하게 여긴다"며 "한자나 영어 아니면 제대로 된 개념어를 만들어낼 수 없 다는 편견이 강하게 자리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제시대 언어를 그대로 썼듯이 외래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고 우리말로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는 능력은 현저하게 퇴화해온 셈"이라고 덧붙였다. 이미 이어져온 말은 어쩔 수 없더라도, 쏟아져 들어오는 새로운 말도 한자식이나 영어로 조어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휩싸인 게 현재 우리 '어문생활'의 현주소라는 것이다. 한글에 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이는 이중적 태도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적으로 드물게 과학적인 언어라는 자긍심을 갖고 살지 만 동시에 중요한 개념을 표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일상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윤대석 명지대 국문과 교수는 논문 <1940년을 전후한 조선의 언어 상황과 문학자>에서 "일제식민 시절 공용어였던 일본어의 특권은 '일본어= 근대 문명, 조선어=전근대 야만이라는 담론'을 생산하고 유통시켰다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어 '하류 언어' 취급, 언어에 남은 식민권력. 25

26 식민지 시절 일본어가 누리던 이 같은 특권은 해방 후에도 지금까지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고급언어'로서 일본어가 차지했던 자리가 '영 어'나 '일본에서 온 한자어'로 채워진 채 여전히 한글은 '열등 언어'로 인식되고 있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한수영 연세대 국문과 교수는 <식민지 경험으로 인해 식민화된 주체가 겪어야 할 혼란과 내상들>에 관한 연구를 통해 지식인들의 '트라우 마'를 색다른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독백'을 통해 드러내 보였다. "나는 일본의 식민주의에 의해 식민화된 주체이면서, 해방 이후에는 그러한 주체임을 부정해야 하는 '민족주의의 당위' 앞에 억압당하고 (연 이어) 영어로 구축된 새로운 식민주의의 광풍 앞에 무력하게 노출되어 있다." "일본어의 세계에서 영어의 세계로 옮겨가는 것은 너무나도 간단하고 손쉬운 이행이다. 그 '이행'의 과정에 작동하는 기제는 망각과 반복되는 식민주의적 모방의 욕망이다." (한수영 <전후소설에서의 식민화된 주체와 언어적 타자> 중) 해방 이후 식민화에 대한 기억과 경험이 공론의 장으로 나오기보다 없던 일처럼 위장되면서 언어에 남아 있는 일제 식민잔재의 청산은 더욱 힘든 과제가 됐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회적으로 고민하고 만들려고 애써 본 적 없는 언어가 우리 학계와 경제 정치 사법의 바탕이 되고 우리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언어 식민주의'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대표는 "우리말로 개념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 찾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며 "그것이 우리 생활과 학술의 수준을 높이 고 언어 민주주의를 통해 '알 권리'를 보장하는 데 훨씬 유용하다"고 밝혔다. 한국어 '하류 언어' 취급, 언어에 남은 식민권력. 26

27 최근의 언어 식민주의는 소위 '영어 식민주의'로도 부를 수 있다. 각 사회의 정보 공유와 알 권리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 니다. 이런 상황에 가장 적극적으로 자국어를 보호하고 있는 나라는 프랑스다. 프랑스 문화공보부 '프랑스어와 프랑스어 언어들 총국' 책임자 베네딕트 마디니에는 2013년 한글날을 앞두고 한글문화연대 주최로 열린 국제회의에 참가했다. 그는 '유럽 각 대학에서도 영어를 써야만 과학자들끼리 소통이 가능하고 국제적 최신 성과도 접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기초 학문은 더 이상 자국어로 가르치지 않는다'고 고발했다. 그는 "별도의 매개 수단 없이 과학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 일반 대중들의 지식 접근을 차단하는 결과 를 낳을 것"이라며 "결국 개별 언어는 기능성을 잃고, 오늘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언어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 했다. 해방 70년이 지난 현재 일본어와 영어 패권주의에 둘러싸인 한국의 위기 상황을 있는 그대로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한국어 '하류 언어' 취급, 언어에 남은 식민권력. 27

28 /경향신문 김여란 기자 한국어 '하류 언어' 취급, 언어에 남은 식민권력. 28

29 결국 이 나라는 부패와 시기와 이간질로 망한다 :26 나라를 위해 무었을 해야 하고 이웃을 위해 무었을 해야 하며, 내 가족을 위해 무었을 해야 할지를 모르며 가정, 이웃, 직장, 정치 모든 조직에서 뛰어난 사람을 평가절하하게 하고 서로를 믿지 못하게 하고 서로 불신을 초래하게 하여 내가 무었을 해야 옳은 일인지도 모르는 결국 이 나라는 욕심과 부패와 시기와 이간질로 망한다. 결국 이 나라는 부패와 시기와 이간질로 망한다. 29

30 결국 이 나라는 부패와 시기와 이간질로 망한다. 30

31 국정원, 경력법관 면접....신원조사 넘어서 사상 검증? : /06/12 05:40 앵커 국가정보원이 법관 임용예정자를, 그것도 합격 여부가 판가름나기 전에 면접조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른바 신원조사라는건데요. 그런 데 국정원이 일부 경력법관 임용예정자들에게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 등을 물었다고 합니다. 신원조사가 아닌 사상 검증, 더 나가 정치성향 조사가 아니냐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에 왜 세월호 참사가 질문으로 등장하는지는 모르 겠습니다만, 국정원과 대법원은 근거규정이 있다고 해명했습니다. 논란은 커지고 있습니다. 백종훈 기자입니다. 기자 작년에 법관 임용시험에 지원한 한 임용예정자는 갑작스럽게 한 국정원 직원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직원은 "임용과 관련해 조사할게 있다며 시내의 한 카페로 나와달라"고 말했습니다. 이 국정원 직원은 30여분간 최근 정치상황을 어떻게 보느냐, 배우자는 무엇을 하느냐 등 민감한 사항을 물었습니다. 국정원, 경력법관 면접..신원조사 넘어서 사상 검증? 31

32 다른 법관 임용예정자도 국정원 직원의 대면조사에서 세월호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등의 질문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단순한 신원조사를 넘어 '사상검증'이란 지적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해당 임용예정자의 지인 : (국정원이) 면접하는 것처럼 사전에 거르겠다는 건데 직접 면접한 것은 너무 표현이 거칠었다고 (들었습니다.) 국정원과 대법원은 해당 조사는 대법원의 의뢰로 보안업무규정에 따라 실시된 것이라고 시인했습니다. 하지만 정보기관이 법관 임용예정자를 상대로 면접조사를 하는 것은 부당한 영향력 행사가 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또 사상검증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2005년 권고해 국정원 신 원조회에서 할 수 없도록 돼 있어 논란이 커지고 있습니다. 국정원은 이념적 대립이 있는 현안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고 있다고 해명했습니다. 그러나 대면조사를 받은 임용예정자들이 "국정원의 압박 을 느꼈다"고 밝히면서 진상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JTBC 백종훈 국정원, 경력법관 면접..신원조사 넘어서 사상 검증? 32

33 외교부가 '위안부의 날' 반대.. 한심 : /06/20 06:32 심재권 의원 '호통' 국회 대정부질문서 윤병세 외교부장관 정면 비판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야당 간사인 심재권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19일 외교부가 '위안부 추모의 날' 지정을 반대하는 것과 관련 "한심하기 짝 이 없다"며 정면 비판했다. 심 의원은 이날 오전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윤병세 외교부 장관에게 "유엔에서 위안부 추모의 날을 지정하려 하는데 왜 우리 외교부가 나서 서 반대하는가"라고 질문했다. 윤 장관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외교부는 확고한 입장을 갖고 있으며 과거 20년 동안의 어느 장관보다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위안부의 날 제정 취지에는 공감하고 있으며 여가위의 논의를 거치고 합리적인 결론이 나올 것"이라고 답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심재권 의원이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국무위원들에게 질의하고 있다. 그러나 심 의원은 "외통위와 여가위에 외교부가 반대 입장을 표명해왔다. 왜 반대하는지 국민들 앞에서 분명히 말씀하시라"고 목소리를 높였 다. 윤 장관은 "반대라기보다는 여러 측면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것"이라며 "일제강점하에 피해를 입으신 단체가 많은데 형평성 문제가 외교부가 '위안부의 날' 반대.. 한심 33

34 있지 않냐는 고민이다. 특정 기념일을 지정할 때 여러 고려사항이 있을 텐데 형평성을 비롯해 몇 가지 짚어볼 문제를 이야기한 것"이라고 해 명했다. 그럼에도 심 의원은 호통을 치며 "회피를 말고 외교부의 반대 이유를 밝히시라. 일본의 심기를 거스르는 게 그렇게 마음쓰이시는가"라고 비 판했고, 윤 장관은 "한 번도 그런 적 없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심 의원은 이외에도 외교부가 주일한국대사관 홈페이지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했다고 표기돼있었음을 지적했다. 윤 장관은 "누적된 정보를 업데이트하다가 적절치 못한 표현이 있었는데, 보완할 예정이다"라고 해명했다. 심 의원은 '그런 마음자세로 어떻게 대한민국 외교를 해나가고 있냐"며 "외교부의 영혼 없는 행태에 대해 장관으로서 책임지고 사퇴할 것을 요청한다"고 거듭 비판했다. 한편 지난 17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는 심 의원 등 의원 3명이 각각 대표발의한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이 심사됐으나 불발된 바 있다. 이날 정부와 여당은 외교적 마찰이 우려되고 한일 양국간 협의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위안부의 날' 지정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이 법안을 반대한 것으로 전해졌다. /머니투데이 박소연 기자 외교부가 '위안부의 날' 반대.. 한심 34

35 정부, 근절 외쳤지만, 전관예우 앞에 무너진 '관피아법' : /06/20 13:53 손석희"세월호참사에서 교훈을 얻어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만든게 관피아 방지법.하지만 실제 현장은 (전관예우)달라 진게 없었다" [앵커] 세월호 참사에서 교훈을 얻어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만든게 '관피아 방지법'입니다. 하지만 지금 보신 것처럼 실제 현 장은 달라진게 없었습니다. 이어서 최규진 기자입니다. [기자] [대국민 담화 (2014년 2월 25일) : '원 스트라이크 아웃제'를 도입하고, 공공기관 퇴직 임직원이 임원으로 취직한 업체와는 2년간 수의계약을 금지할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2월, 대국민 담화를 통해 국민에게 공공부문 개혁을 약속했습니다.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고, 대한민국에 뿌리깊게 내린 관피아 문제가 대두됐습니다. 이후 퇴직자의 취업제한 기간을 3년으로 늘리는 등의 내용을 담은 '관피아 금지법'이 제정됐습니다. 지난해 5월 기획재정부는 '퇴직자가 속한 업체와의 수의계약을 금지'하는 계약사무규칙을 입법예고했습니다. 공기업의 비정상적인 계약관행을 고치겠다는 취지였지만 도로공사는 이를 무시한 겁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 : 지금 저희 쪽으로 어떤 내용이 파악된 거는 현재로썬 없기는 합니다. 그런 내용이 있으시면 저희 쪽에 말씀해주시면 알 아보든지 할 텐데요. 아시는 게 있으신건가요?] 한국도로공사는 26일에 바뀐 규칙이 시행되는 것을 전혀 몰랐고, 우연의 일치라는 입장입니다. [한국도로공사 관계자 : (규칙 시행이) 된다는 건 아는데 정확하게 언제 시행이 되는건지는 그 당시에는 몰랐죠. 며칠에 되는 것까지는 저희 가 알기가 힘든 거죠.] 하지만 기재부는 입법예고를 했고, 대부분 정해진 절차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에 모르기는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한국도로공사 ' 관피아 우대' 논란 입력 ㅣ 최종 수정 관련 VOD 이어보기 정부, 근절 외쳤지만, 전관예우 앞에 무너진 '관피아법' 35

36 동영상 도로공사, '관피아 방지법' 시행 전 2천억대 수의계약 동영상 정부, 근절 외쳤지만 전관예우 앞에 무너진 '관피아법' 동영상 도로공사, 퇴직자 영업소에 계약연장 관피아 우대 논란 동영상 감사원 지적에도 도로공사, 수의계약 버젓이 이뤄져 동영상 정부가 세월호 이후 강력하게 추진해온 관피아 근절.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공직사회는 정부 정책을 비웃기라도 하듯 버젓이 법망을 피해 가고 있습니다. /JTBC 정부, 근절 외쳤지만, 전관예우 앞에 무너진 '관피아법' 36

37 정부, 근절 외쳤지만, 전관예우 앞에 무너진 '관피아법' 37

38 나랏돈은 먼저 챙기는놈이 임자 : /06/20 14:14 감사원 보고서 정밀 분석 재외공관 부정 비리 지능화로 국민 혈세 줄줄이 새나가 국민세금 방만한 예산운용 환치기 수법까지 등장 일방적 고시환율 적용에 3만여달러 부당이익 챙겨 문화원장 부인 인턴직원 채용 6개월동안 급료지불 외교원 교수진, 무허가 외부 강의 30여만달러 꿀꺽 재외공관 공금은 먼저 챙기는 놈이 임자? 솜 방망이 징계조치로 재발방지커녕 지능화 수법 주미대사관은 전직 직원이 차린 회사에 수의계약 상파울로 총영사관 이민 50주년 사업비까지 전용 재미동포단체 교류 활성 지원금 20% 타목적 사용 나랏돈은 먼저 챙기는놈이 임자 38

39 재외공관들의 공직기강 해이와 공금 횡령사건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에도 계속되고 있다. 공관들의 부정행위는 날이 갈수록 지능화되고 심각해지는데 일반사회에서 볼 수 있는 범위를 넘어 심각성이 더해가고 있다. 문제는 이같은 비리가 매년 계속되어도 재발방지 시스템이 가동치 않아 그 유형만 다를 뿐 범죄는 계속되어 국민의 세금이 낭비될 뿐이다. 최근에는 주미대 사관(대사 안호영)에서 공관의 전직 직원이 차린 회사와 짜고 공관 건물 보수비 (본보 978호, 2015년 5월17일자)를 낭비해 이상야릇한 전관예 우 비리가 문제가 되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공관에서 환치기 까지 등장했다. 또한 해외에 소재한 문화원의 원장이 자신의 부인을 인턴직 원 으로 만들어 국고를 빼먹는 사례도 발생 했다. 브라질 상파울루총영사관(총영사 홍영종)에서 한인 이민 50주년 기념사업 보조금 5천여만원(미화 약 5만 달러)을 부적절하게 사용해 환수조 치가 내려졌다. 그런가하면 재외동포 재단에서 동포사회 단체들에게 지원하는 기금의 20% 이상이 애초 목적과는 다르게 사용한 것이 밝혀져 문제가 되고 있다. 그중 미주총연(회장 이정순)도 기금사용에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정부 돈 못 먹으면 병신 이란 소리가 나오는 것도 문제다. 한편 미주 동포 정치력 신장을 위해 올해 정부에서 새로 기금을 책정했는데, 이를 두고 일부 공관에서 편파적으로 사용해 현재 내사 가 진행 중이다. 문제는 감사원이 감사를 통해 이같은 부정사례를 적발해도 그 징계조치가 부실해 실제적 재발방지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 성진 취재부 기자> 한국의 재외공관은 2014년 8월 현재 대사관 113개, 총영사관 43개, 대표부 5개 등 총 161개이며, 인력은 외교관, 주재관, 파견관 등 1,417명이 다. 또, 재외공관의 2014년 예산은 4,961억원(미화 약 49,610만 달러)으로 외교부 총 예산 1조 9,924억원*미화 약 10억9천9백만 달러)의 24.9% 이다. 그리고 한국문화원은 24개국에 28개 문화원 예산은 396억원(미화 약 3,960만 달러), 한국교육원 은 17개국 39개에 47억원(미화 약 470 만 달러)이다. 특히 재외공관의 2014년도 계상된 인건비 2,082억 원을 계산할 때 재외공관 직원(외교관, 주재관, 파견관) 1인당 무려 평균 1억 4천 7백만원 (미화 약 14만 달러)이 지출된다는 계산이다. 공관원 1인당 1년에 평균 14만 달러가 소요된 공관원들이 부정부패를 가속화 시키고 있는 것 이다. 나랏돈은 먼저 챙기는놈이 임자 39

40 공직기강 갈수록 해이 특별감사 감사원은 지난 5월7일 보고서를 공개하면서, 재외공관 및 공공기관 해외사무소의 운영, 재외 국민보호실태 및 외교부 본부의 재외공관에 대 한 지도 감독 업무를 점검, 개선방안을 마련함으로써 기관운영의 비효율과 예산낭비를 방지하고 외교역량 강화에 기여하고자 이번 감사를 실 시했다고 설명했다. 또 감사원은 매년 감사를 실시해도 내부통제 부실 및 공직기강해이가 계속해서 공금횡령 등이 발생과 재외교민 안전사고 발생해 감사원의 감 사의 필요성이 생겨 이번 특별감사를 실시했다고 밝혔다. 특히 이번 감사에서 주 00대사관에서 A모 참사관이 지난해 6월 전지휴양 항공료 지급 청구에서 임의로 고시환율을 적용해 정당금액 258 달 러 보다 무려 1,542 달러가 많은 1,800 달러를 지급 했다. 이같은 사례는 비단 A참사관만이 아니라, 다른 10여명 공관원들에 대해 적용해 총 3만 627 달러 국고 수입을 낭비시켰다. 공관내에서 환치기 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에 대해 감사원 보고서는 해당 금액에 대한 환수 조치, 공관의 예산집행을 엄수할 것, 관련자에게 주의 촉구로 끝났다. 이외 외교부 소관으로 감사원이 지적한 사안은 대사관 소속직원에 대한 환율 부당 적용에 따른 소요경비 과다지급 대수선사업 시행 냉 난방관리용역 시행 부적정(주미국대사관) 브라질 한인 이민50주년 기념사업 보조금 정산 부적정(관계기관: 주상파울루총영사관, 5천여만원 환수방안 마련 요구) 주재관의 자녀학비보조수당 부당수령(주태국대사관) 국제기구 자발적 사업분담금 지원계획 수립 및 운영 부적정(외 교부) 자녀학비보조수당 미환수(주필리핀대사관) 한글학교 운영비 등 정산 부적정(주스페인대사관) 출납공무원 부당 운용 등 회계관리 부적정 (주투르크메니스탄대사관) 행정직원 고용계약서 작성업무 등 처리 부적정(주선양총영사관) 입국불허자에 대한 사증발급 심사업무 부적정(주선양총영사관) 한인회관 등 건립지원사업 관리 부적정(외교부) 영사수입금 관리 부적정(주선양총영사관) 우리기업 브라질 진 출 지원센터 운영 부적정(외교부) 퇴직 공무원에 대한 취업심사 등 관리 감독 부적정(외교부) 등이 보고됐다. 외교부 이외 기관 소관으로는 주상파울로 문화원(원장 서상면)은 지난 2013년 9월 원장이 자신의 부인을 인턴직원으로 채용시켜 6차례에 걸 처 급료 510만원(미화 약 5,100 달러) 을 부당 지급했을 뿐만 아니라 세종학당 수입금을 임의로 사용했다 적발됐다. 프랑스 문화원도 강사 수강료, 수강 캠프 등에 부적절하게 기금을 사용했다. 이외에도 감사원이 지적한 보고서에 브라질한국학교 지도 감독 부적정(교육부) 주상파울루 문화원 예산집행 지도 감독 부적정(문체 부) 재외한국문화원 수입금 사용지도 감독 부적정 (문체부) 민간단체 지원금 집행 지도 감독 부적정(문체부) 태국문화원 건물 임대 차 계약업무 처리 부적정(문체부) 월드챔프육성사업 사후관리 부적정(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본사) 등이 있었다. 감사원은 7일 공개한 재외공관 및 외교부 본부 운영실태 감사결과 보고서에서 외교부의 국제기구 자발적 사업분담금 관리에 허점이 많았 다고 지적했다. 분담금은 2010년까지만 해도 264억원 규모였으나 2013년에는 1,666억원으로 급증한 상태다. 상상 초월한 각양각색 비리 부조리 나랏돈은 먼저 챙기는놈이 임자 40

41 한편 미국 내 한인단체들이 정부 지원금을 재외동포재단을 통해서 받아 사 용하면서 애초 목적대로 사용치않거나 영수증 처리 등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경우가 전체 지원금 중 20%에 상당한 것으로 나타나 문제가 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 재외동포 교류활성화를 위해 주미국대사관과 협의를 통해 미국 내 동포단체에 교부한 지원금 중 20%(5만6,000달러)에 상당하 는 금액이 집행 및 정산 과정에서 재단 이사장의 사전승인을 받지 아니하고 사업목적과 다르게 집행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감사원이 주미국대사관 등 18개 공관과 공공기관의 해외사무소 및 외교부 본부 등 관련기관을 대상으로 실시한 재외공관 및 외교부 본부 운영실태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2012~2013년도 주미국대사관 소관 재외동포재단 지원금은 81개 단체에 총 28만 7,400달러가 교부됐다. 현지 단체는 당초 2013년도 사업계획에 반영된 이민 110주년 기념행사 가 무산되자, 재단 이사장 의 사전승인을 받지 않고 예산 2만달러 를 자체사업에 포함 집행했다. 이어 2014년 이를 적정한 것으로 정산 처리하는 등 그간 18개 단체에서 지원금 5만6,000달러를 사전승인을 받지 않고 목적 과 다르게 집행했음에도 동포재단은 이를 방치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같은 병폐가 지난 수년동안 계속되어 왔으나, 감사원은 매년 재발 방지 조치 운운으로 솜방망이 징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재외동포재단(이사장 조규형)은 지난달 18일 LA한국교육원에서 실시한 설명회에서 특별히 지원금 사업 관리시스템에 관한 설 명했다. 이날 e-한민족사업부의 장홍종 부장은 재단 지원금에 대하여 일부 단체들은 기금을 사용하고, 결과보고를 잘 하지 못해 불이익을 당 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일부 단체들이 애초 신청한 기금 목적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한 경우도 있다며, 이는 사전 인가 없이는 허가될 수 없는 사항이라고 주의 를 환기시켰다. 또한 기금 신청에서 그 단체가 타 단체를 위한 기부금, 찬조금으로 사용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 금사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결과보고서이라고 강조한 장 부장은 이는 국가재정감사의 일환으로 잘못 영수증이 발행되면 국정감 사에도 지적되는 사항이라고 주의를 당부했다. 만약 영수증 처리를 잘못할 경우 해당 단체는 수년간 기금을 수혜 받지 못하는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재외동포재단 재단 지원금 교부지침 제7조의 규정에 따르면 지원금을 교부받은 한인 단체 등은 예산에 책정된 이외의 목적에 자금을 전 용할 수 없으나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의 사전 승인을 얻은 때에는 예외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재미동포단체 지원금의 25%가 이사 장의 사전 승인 없이 목적과 다르게 집행돼 국가 예산의 낭비로 이어졌다는 데에 있다. 감사원은 재미동포단체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부적정 예산집행으로 지적한 항목들을 보면 지원금 집행결과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별도 의 지출내역과 증빙 없이 제출 한 경우가 많았다. 또, 친목목적으로 골프장 사용료로 사용하는 사업목적 (이민110주년사업 여성지위향상 장학금 지급 3.1절기념행사 견학프로그램 이산가족상봉 등)과 달리 다른 용도로 전용된 경우와 회계증빙 자료가 미비된 경우가 다수 를 차지했다. 나랏돈은 먼저 챙기는놈이 임자 41

42 이에 따라 감사원은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은 앞으로 미국 내 재외동포에 대한 지원금이 사전 승인 없이 목적 외로 집행되는 일이 없도록 지 원금 집행 및 정산 업무를 철저히 하길 바란다 고 주의 조치했다. 반복되는 비리 양상에 속수무책 외교통상부 업무는 크게 3가지 분야, 즉 정무외교, 경제 통상외교, 영사업무로 나눌 수 있다. 재외공관의 예산운용이 방만하다는 점은 여러 차례 지적된 바 있지만, 최근 감사원 감사결과가 발표되면서 다시 한 번 문제점이 종합적으로 드러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점은 2014년 도만이 아니라 이미 지난 수십 년 동안 계속되어 왔다. 한 예로 4년 전인 지난 2010년 7월 감사원이 외교부 본부 및 156개 재외공관 중 1/10인 16개 재외공관 운영실태에 대한 감사결과에서 드러난 재외공관 운영실태의 문제점을 살펴보면, 첫째 계속해서 발생하는 회계비리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내부통제 시스템이 결여되어 있고, 둘째 경제 통상환경 및 영사업무 등을 고려할 때 재외공관 조직 인력운용 등 외교역량의 불균형과 미흡함이 나타나고, 셋째 예산이 당초 목적과 맞지 않게 집행되거나 해당 업무에 적절한 대응 및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으며, 넷째 부당한 사증 발급과 재외국민 사 건 사고 처리시스템 관리 미흡 등 영사업무 관련 제도 개선이 필요하며, 다섯째 비효율적인 재외공관 국유화 추진에 의해 예산이 방만하게 집행되고 있는 점 등이 지적됐다. 이같은 지적은 올해 감사를 끝내고 사례만 다를 뿐 똑같은 패턴으로 부조리가 진행됐음을 볼 수가 있다. 지난 2013년 감사를 보면 외교네트워크 구축비 예산집행과 관련, 샌프란시스코총영사관(총영사 한동만)도 해당 예산으로 편성된 2,336.28달 러(원화 252만원 상당)를 6차례에 걸쳐 직원 식대 및 회식비로 집행하고 증빙서류는 미국 상무부 관계자와의 업무 협의 등으로 사실과 다르게 기재 했다. 또, 개인별 외교네트워크 구축비 집행에 있어, 2010년 11월부터 2012년 10월 사이에 공관 원 개인별 한도액 범위 내에서 집행한 총 479건(집행금액: 3만 6,587달러) 모두 총영사의 사전 결재 없이 집행했고, 그 중 법인카드는 3건(758달러)에 불과하며 4건(1,105달 러)은 업무추진비 사용제한 업종인 골프장에서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감사원은 주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에 대한 시정 주의요구 사항으로 주샌프란시스코 총영사 는 청사 개 보수공사 계약업무 처리 과정 에서 낙찰 됐음에도 계약을 체결하지 아니한 낙찰자 (OO컨스트럭션)로부터 입찰보증금 6만 7,500달러를 징수 조치할 것을 주문했다. 감사원이 공개한, 2010년 7월부터 2012년 2월 사이 코스타리카대사관에서 집행한 외교네트 워크 구축비 사용 내역을 보면 해당공관 전임 대사와 배우자가 6,138달러(원화 664만원 상당)를 골프장 경비(월회비 포함) 또는 휴가지에서의 여행경비 등 사적 용도로 부당 사용했다. /성 진 기자 미주한인사호의 대표 언론지 선데이저널 id=18830&utm_content=buffer41496&utm_medium=social&utm_source=twitter.com&utm_campaign=buffer 나랏돈은 먼저 챙기는놈이 임자 42

43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 : /04/19 09:07 공무원, 그 안에 잠든 거인을 깨우자 1부. 공직사회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나라 공직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부 관료제가 갖고 있는 병폐부터 짚어볼 필 요가 있다. 정부 관료제에서 문제로 나 타나는 행태들은 공공부문 조직이 갖고 있는 제도적 병리요인 이 관료의 사고체계와 조직의 관행, 문화에 깊숙이 포진되어 발생하는 현상이 다. 그에 따라 공직사회 의 대표적인 문제를 공무원의 전문성 부족, 신나게 일할 수 있는 제도와 여건의 부재, 후진적인 행정 관행과 문화, 부정과 부패, 공무원의 자기개발 여건의 불비 등으로 나누어 원인과 현상을 검증, 분석 함으로써 공직사회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정책 마련의 기초 자료로 활용코자 한다. 공무원의 전문성 부족과 자질 시비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공무원이 현 제도와 여건 아래 모든 사회적 문제를 항상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추기는 쉽지 않다. 또 한 우리나라 관료제가 가지는 계급제적 특성, 즉 연공서열 방 식의 승진과 순환보직 시스템은 급변하는 사회에서 공무원에게 요구되는 전문 성을 길러주지 못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결국 공공부문의 전문성 부족은 공무원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 부족이라기보다 사 회적 변화의 속도 증대, 사회적 문제의 난이도 상승, 전문성을 기르기 어려운 인사시스템에 기인한다. 공공부문 관료의 문제점은 시대 변화에 느리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물론 공무원들도 급속한 사회 변 화에 보조를 같이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공감한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그 폭도 넓다 면 이에 동조하려는 의지가 꺾이기 쉽다. 개혁과 혁신은 관료들의 가치체계에 많 은 변화를 가져오는 동시에 상당한 기회비용을 요구한다. 시대 변화에 대한 공무원의 적응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 이면 에 공무원 개개인이 지불해야 할 막대한 비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공무원은 시키는 일은 잘 하지만 스스로 해야 하는 일에는 미숙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수험 지식의 반복적인 암기에 입각한 선발 시험체제, 문제의 근원적 해법을 모색하기보다 주어진 법과 제 도를 기계적으로 답습하는 보수적인 공직사회 문화, 무사안일한 공무원은 승 진하고 스스로 문제를 찾 아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은 감사만 받는 공직 평가체계, 공직자 개인의 역량을 개발해 주지도, 창의 적인 문제해결 능력을 길러주지도 못하는 교육 시스템과 인센티브 부족 등에 기인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관료제의 변화와 진보를 가로막는 원천적인 요인이다. 우리나라 공무원은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유효기간이 짧은 대안을 자주 만들어낸다. 대표적인 경우가 부동산 정책이다. 우리나라 주택 정책이 누더기가 된 것도 단편적이고 반복적인 정책 실패 때 문이다. 우리 공무원들은 급변하는 환경에서 외적으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균적 노력과 에너지를 투입한다. 하지만 평균적인 노력만으로는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현재 우리 사 회의 문제들은 평 균적인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공무원이 근본적인 문 제 해결보다 단기적인 대안을 양산하는 데 몰두하면 정책 의 실패는 점차 악화되고 장기화되어 치유불 가능한 상태가 된다. 신나게 일할 수 있는 제도와 여건의 부재 지금까지는 정부 관료제의 안정성을 보장하고 공무원이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정책의 실패에 대한 직접적 책임은 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 은 정책의 장기적인 효과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문제를 야 기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책 실명제는 관료제의 무책임성에 경종을 울릴 제도 라고 생각된다. 정책을 발의하고 추진하는 관료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정책을 운용한다면 해당 정책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책임감 있게 추 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정책관리 시스템에서 정책 실명제는 아직 정 착되지 못했으며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지도 않다. 공무원은 자기 보존 또는 세력 확장을 위해 업무량과는 상관없이 기구와 인력을 증가시키고, 권한 행 사 영역을 확장하는 경향이 있다. 파킨 슨은 관료들이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서 로 관할권 다툼을 벌이는 것을 "상승하는 피라미드의 법칙"이라고 불렀다. 예 를 들면 농업정책 담당 부서는 잎담배를 재배하는 농민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반면 국민보건 담당 부처는 담배 광고 금지 를 위한 정책을 입안한다. 이처럼 한 정부 안에서도 부처들 사이에 이해가 상충하여 갈등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공공관료제의 특기는 문서 생산이다. 그러나 문서 만들기에 몰두하다 보면 실효 없는 행정이 되기 십 상이다. 형식주의적인 행정이 되는 것 이다. 예를 들면 어선의 수를 실제로 확인하지도 않은 채 외국 과의 어업협상에 나서고, 몇 년 전 자료를 이용해 보고서를 기안하는 등 형식 주의적 문서 만들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형식주의와 절차주의의 만연은 공공조직의 구조적 경직성과 과다한 법 규정에 기 인한다. 그것이 혁신과 발전에 대한 저항과, 고객과 환경의 요청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관료적 행태를 만들었다. 결국 형식주의는 형식, 절차, 선례에 지 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변화에 저항하고, 불 필요한 예산의 낭비를 초래하며, 외형을 중시하여 실제 내용을 과장하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 43

44 후진적인 행정관행과 문화 공무원들이 일할 수 있는 충분한 제도적 여건이 마련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실행 및 관리 단계에서 좌절되어 정책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관료제의 관행과 문화가 변화의 추동력을 막고 혁신적 아이디어가 산출되는 토양을 잠식해 버리기 때 문이다. 궁극적인 정부 혁신은 공공부문에서 형성된 불합리한 문화를 개선하는 데 있다. 그러나 문화는 그 속성상 쉽게 변하 지 않는다. 특히 조직 외적인 충격요법이나 피하주사와 같은 주입식 개혁은 공무원 행태의 단기적인 전환조차 이루어내기 힘들다. 오히려 공무원의 저항과 복 지부동을 초래할 뿐이다. 공무원 개인 능력의 한계로 인해 초래되는 미봉책보다 더 큰 문제는 관료제에 넓게 퍼져 있는 한건주 의, 한탕주의 문화이다. 이러한 문화는 특히 고위공무원 계층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고위공무원 이 될수록 생존을 위해 정치세력과 연결되어야 하는 인사구조 하에서는 현실 성 없는 정치구호와 공약 을 가장 바람직한 정책상품으로 포장하여 내보여야 한다. 정치인들 입장에서는 이러한 공무원이 훌륭 한 공직자이 다. 그러나 그들은 국가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부담거리이다. 정부개혁이 자체적으로 달성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공무원이 자발적으로 수술대에 올라서 악성 종양 부위를 자기가 직접 잘라내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이 경우 수술의 대상과 주체가 같다. 그리고 수 술의 고통도 혼자 감수해야 한다. 이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공공부문 개혁을 스스 로 해 나가야 하는 존재가 바로 공무원이다. 변화는 비용을 수반한다. 특히 공공부문 개혁이 공무원에게 요구하는 비용을 따져보면 그들의 저항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또한 개혁이 가져올 새로운 상황에 심리적 불안감을 느낄 때나 공직자로서 자존심이 손상될 때에도 저항하게 된다. 더군다나 성과 없이 연례행사처럼 주 기적으로 치러지는 진부한 개혁은 공무원들에게 피로감과 거부감을 더해줌으로써 개혁의 동력을 잃어 버리고 현상 유지에 집착하는 행태를 더욱 강화한다. 이 밖에도 후진적인 공직문화와 관행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공무원의 권위주의: 공무원이 자신의 지위에 근거하여 일반 시민의 의지나 공익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욕 구를 갖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2 무사안일과 복지부동: 이것은 공직자가 나태한 태도로 근무하며 업무성과를 내기 위한 노력을 최소한으로 하는 행태를 의미한다. 3 비밀주의: 정부 관료제에서는 외 부세력의 의존 도를 높이기 위해 독자적으로 얻은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려는 문화가 있다. 4 온정주 의와 연고주의: 공직사회에서는 객관적인 인사시스템 을 통한 효율적이고 공평한 인사보다 인맥과 학 맥을 이용한 부적절한 인사가 자주 이루어진다. 그 결과 정부조직의 구성원들은 영향력 있는 사람에 게 청탁을 하게 되고, 속칭 줄을 대고 줄을 타는 비공식적, 비합리적 인사가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2부. 그동안 정부는 어떤 노력을 해왔는가 역대 정권이 시행하였던 공직 사회의 제도개선 사례를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 기류가 있다. 첫째, 인 사행정 개혁을 펼치기 위해 조직 및 기 구 개편이 이루어졌다. 둘째, 시대의 변화상에 발맞추어 권한 의 위임 및 인사 관련 각종 규제 개혁이 급격히 늘어났다. 마지막으로 관료제의 태동 시기부터 끝없 이 제기된 문제의 하나인 성과관리 제도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은 모두 그 근저에 공무 원과 공직의 전문 성을 강화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공직분류 문제, 고등고시제도 개편문제, 채용 문제, 전보제도와 능력발전문제 등 모든 과제들이 공직의 전문성 강화를 지향한다. 앞에서 언급한 관료제의 문제점별로 어떤 제도개선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첫째, 공무원의 전문성 부족 문제. 공무원의 시대환경 부적응 문제 를 개선하고자 하는 인사제도에는 특채제도와 개방형 임용제도, 공무원 역량을 강화하는 교육훈련 제도 등이 있다. 또한 관료제의 폐쇄적 임 용과 연공서열 문제를 해 소하기 위해 중앙인사위원회의 설치와 근무평정제도 개선, 직무성과계약제와 MBOㆍBSC 등의 성과관 리제도, 고 위공무원단 제도 등이 도입되었다. 공무원의 창의성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로는 고등고시제도 개선과 특채제도 등이 있다. 둘째, 신나게 일할 수 있는 제도와 여건의 부재 문제. 우선 정책실명제의 부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무성과 계약제와 성과관리 제도를 도 입했다. 개인과 조직의 목표가 불일치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성 과관리제도와 성과급제도가 이를 완화하는 장치로 도입되었다. 한편 정책 조 정의 문제 해결에는 팀제 와 고위공무원단 제도가 일정 부분 기여한다. 마지막으로 형식주의와 절차 중심주의는 각 부처의 인 사 운영권을 강화하고 팀제를 운영하는 것과 연계성을 갖는다. 셋째, 후진적인 행정관행과 문화. 우선 한건주의 문화를 개선하는 데는 근무평정제도와 인사평정제도, 직무성과 계약제 같은 성과관리체계, 다면평가 등이 기여할 것이다. 권위주의 같은 문제의 해결은 다 면평가제도, 팀제, 고위공무원단 제도와 같이 조직 내 서열 중심적 체계를 완 화하는 제도적 장치와 연결되어 있다. 성과평가에 대한 저항 문제의 해결은 근무평정제도, 직무성과계약제, 다면평가제 등과 밀접하게 연계되 어 있다. 변화에 저항하는 문화의 해소는 특채제도와 개방형 임용제도, 팀제, 근무평 정 제도의 개선, 직무성과 계약제 같은 성과평가 제도 등과 연계성을 갖는다. 무사안일의 문화 해소 는 신분보장제도의 직권면직과 직위해제 제도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온정주의와 연고주 의 문제의 해결은 성과평가, 인사평가제도, 성과급제의 도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인사제도 개혁사례 : 개방형 직위제도 개방형 직위제도는 공직사회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 전문성이 특히 요구되거나 효율적인 정책 수립 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직위에 공 개경쟁을 거쳐 직무수행 요건을 갖춘 자 중 최적격자를 임용 하는 제도이다. 정부는 1999년부터 중앙부처 실ㆍ국장급 직위 일부에 개방형임 용제도를 도입하기 시 작하였다. 도입 당시 38개 부처 129개 직위였던 개방형 직위는 2006년 4월 기준으로 45개 부처 158 개 직위로 확대 운 영되었다. 개방형 임용제도의 절정은 책임운영기관의 장을 개방형으로 하고, 2006년부터 시행된 고위공무원단 제도에 개방형을 필수요소로 한 것이다. 핵심 고위직의 정책 결정 업무 분야에 개방형 임용제를 광범 위하게 도입함으로써 개방형 제도가 외부 전문가를 공무원으로 임용하는 강력한 제도로 자리 잡게 한 것이다. 폐쇄적으로 운영해 오던 공직에 개방형직위제도를 도입한 이후, 공직사회에는 경쟁과 변화의 물결이 확산되어 각 부처에서 성과 중심의 운영체제 도입을 경쟁적으로 추진하였다. 이처럼 개방형 직위제도는 우리나라 행정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촉매제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 44

45 역할을 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3부. 미래형 공직인사, 어떻게 할 것인가 공직분류 체계 개편 방안 : 직무군ㆍ직무렬 제도 지식기반 사회에서 성공하는 정부를 만들려면 공무원의 전문성을 확보하고 능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공직분류 체계를 현재의 직 군, 직렬체제에서 직무군, 직무렬 체제로 변환시켜야 한다. 직 군, 직렬식 분류체제는 계급제 기반 위에서 공무원을 선발하고 충원하기 위한 계열 구분과 인사관리 상의 편의성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반면 직무군, 직무렬 분류체계는 사회 발전과 분화 추세에 맞추 어 공직을 전문화 하고 공무원을 전문가로 육성하기 위한 것이다. 새로운 공직분류 체계는 다음 다섯 가지 기준에 근거해야 한다. 첫째, 공무원의 전문성 확보. 전문성 부족은 제도적 원인에 기인한다. 전문지식을 공직에서 유지, 발 전시킬 기회가 없고 보직경로도 적성과 전문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체계에서 는 공무원이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직위에 보직되도록 하고 해당 직 무군, 직무렬 내에서만 순환보직하게 함으로써, 공직 전체의 전문성을 높일 수 있다. 둘째, 미래 행정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공직 적합성 확보. 많은 국가가 공무원의 적응력 제고를 위해 인력감축, 아웃소싱 등 신공공관리 (New public management)적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정부를 운영해 왔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행정능률성을 확보할 수 없고 퇴행적 능 률성을 제고할 뿐이다. 대안은 공무원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전문성을 높여 변화된 행정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공무원을 육성하는 체 제를 만 드는 것이다. 셋째, 적재적소 직무 배치를 위한 제도 설계. 현 제도에서는 직위와 직군, 직렬이 상호 연결되지 못한 다. 상급자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인사 가 이루어지며, 연공서열에 의해 직위가 결정되는 폐단이 나타 난다. 따라서 직위와 직군, 직렬이 범부처적으로 상호 연결되는 새로운 분류체 계를 마련해야 한다. 넷째, 공정한 성과평가를 위한 기준 마련. 공정한 성과평가가 이루어지려면 비교 가능한 유사 업무에 대해 상대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 서 부처별로 혼재되어 있는 해당 직무군의 담당자들을 범부처 적으로 종합하여 비교 평가하는 인사 시스템이 도입되어야 한다. 다섯째, 승진, 전보 등 인사운영 분야에서 분야간 형평성 확보. 직군ㆍ직렬간(예: 행정직, 기술직) 또 는 부처간(예: 인기부처, 비인기부처) 승 진 격차는 공무원 사기저하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 에,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직위, 직렬간 형평성 있는 승진체계를 마련해야 한 다. 새로운 직무군, 직무렬 분류체제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부 조직을 유연하게 관리할 수 있다. 공무원이 특정 부처에 소속되지 않고 자신의 직무 분야와 관련된 직무군, 직무렬에 속하기 때문에 전 문성을 확보할 수 있고, 부처 이기주의를 없앨 수 있다. 둘째, 정부조직 구조 의 유연성을 높인다. 자 신이 속한 부처가 통폐합된다고 해도 새로운 부처에서 보직경로를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부처 통폐합에 대한 반발 및 회의감을 없앨 수 있다. Y형 경력발전 제도 Y형 경력발전제도의 기본 골격은 급변하는 시대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고급 공직자의 공직발전 경로를 부처 내에서 순환하는 중견간부 (사무관급)와 직무군 내에서 범부처적으로 순환하는 고위관료 (서기관 급 이상)로 구분하는 것이다. 즉 중견간부가 고위관료로 진입하는 단계 에서 정밀한 이모작 교 육훈련을 통해 직무군 내에서 부처를 초월하여 넓게 순환하는 정책관료와 직무렬 내에서 부처를 초월 하여 비교적 좁 게 순환하는 전문관료로 양분하는 것이다. 첫째, 정책관료란 "직무군으로 전문화된 범위 내에서 정책을 분석ㆍ평가할 수 있는 능력과 더불어 거 시적 시각에서 범부처적 관련 정책을 기획ㆍ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관료"를 말한다. 현재는 고 급공무원이 사무관으로 입직한 후 해당 부처 각 부서를 순환 보직하는 Z형 보 직경로를 택하고 있다. 반면 Y형 경력개발제도는 입직 후 일정 기간 소속부처 내에서 자신의 직무군 또는 직무렬에서 근무하 다가 서기관 승 진을 전후하여 정책관료를 지원한 공직자에 한 해 별도 교육훈련과 선발과정을 거친 다. 인사위원회의 심사 과정을 거쳐 선발된 정책관료 후보자는 직무군 내에서 직무렬을 넘어서 범부처를 순환하는 인턴 기간을 거치게 한다. 이 기간 동안 현직 정책관료의 보좌관으로 근무하며 업무를 파악 하고 현장 경험을 쌓게 한다. 이러한 직무교육을 직무군 내에서 범부처적으로 거친 후, 정부산하연구 기관에서 핵심 정책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기간 중 후보자는 자신의 정책 분야에 대한 비전과 역량 을 길러야 한다. 교육기간(인턴+연구)은 약 3년 정도를 할애한다. 교육 후에는 정책적 비전과 실천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정책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산하연구기관 연수가 끝나면 직무군별 인사위원회 심 사를 거쳐 정책관료로서 재임용된다. 탈락한 자는 1회에 걸쳐 재교육을 받을 수 있으나, 이후에도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공직에서 면직한 다. 둘째, 전문관료는 "직무군 내 해당 직무렬에서 오랜 기간 근무하며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가지게 되 는 관료"를 말한다. 전문관료는 공직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적성과 능력에 맞는 경력개발을 해야 한다. 전문관료는 직무렬 내에서는 각 부처를 순환보직할 수 있 지만, 정책관료와는 달리 보직 및 전보의 범위가 제한적이다. 대신 신분보장을 바탕으로 장기간에 걸쳐 해당 분야의 전문 성을 높이고, 해당 분야 박사 취득 및 전문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을 받는다. 전문관료 후보자는 정책관료와 마찬가지로 10년 차 이상 사무관을 대상으로 모집한다. 인사위원회 선 발을 거친 후보자는 소정의 전문교육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 45

46 과정을 이수한다. 전문교육은 연합대학원(정부출연연구기관이 참여하는 연합대학원 형태의 공직 전문교육기관)에서 교육 과정을 이수하거나, 일반 대학원 과정을 통해 해당 분야의 학위 및 전문성을 갖도록 교육된다. 교육기간은 3년 정도 할애한다. 전문관료의 최 종 선발은 별도의 인사위원회 심사를 거쳐 임용하고, 탈락자의 경우도 정책관료와 같은 과정을 거친 다. 최종선발자는 대상자의 전문성을 고려하여 해당 직무 렬의 전문 관료로 임용한다. 정책관료제도와 전문관료제도는 자신의 직무렬을 중심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확 보하고 근무경력을 우선적으로 반영할 수 있다. 따라서 정책관료제도와 전문관료제도는 현행 고위공 무원단 제도의 도입 취지는 충분히 살리되 공직사회에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실천가능하고 실효성 있는 대안이다. 해당 직위에 적임인 공무원을 제도적으로 육성함과 동시에 대상 직위는 범부처적으로 확대하는 제도라 고 할 수 있다. 정책조정 메커니즘의 도입: 조정실장제도 조정실장제도는 국무총리 밑에 부처를 초월해 직무군별로 고위관료에 대한 인사심사권과 정책조정권 을 행사하는 장관급 조정실장을 두는 제 도이다. 수직적인 계층제질서 위에서 각 부처를 지휘 감독하 는 장관과 달리 조정실장은 해당 직무군에 대한 횡적인 기능 통제를 통해 정책 조정과 인사심사를 담 당하는 제도적 장치이다. 조정실장의 업무와 권한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책조정권. 정책갈등의 대상자인 각 부처가 자율적으 로 원활한 합의나 조정을 할 수 없는 사 안에 대해서만 조정실장이 개입한다. 둘째, 정책관료와 전문 관료에 대한 인사심사권. 조정실장은 해당 직무군별로 정책관료와 전문관료의 근 무성적을 평정할 때 2차 평정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각 장관이 부여한 인사고과를 바탕으로 승진 후보자를 심사하여 제청 한다. 셋째, 정책실명제에 근거한 공무원 성과평가. 조정실장은 장기적인 정책평가 업무를 통해 공직 인사심 사에 대한 책임성과 전문성을 향상시 키기 위해 정책관료와 전문관료의 성과평가 기능을 담당한다. 성 과평가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위해 정책실명제와 직무성과 계약제를 결합한 형식으로 이루어진 다. 넷째, 정부업무평가와 정책영향평가의 결합. 새 제도는 기존 국무조정실에서 담당하던 정부평가업 무를 각 직 무군별 조정실장에게 이관하고, 조정실장이 정부업무평가와 함께 장기적인 정책영향평가를 담당하는 것이다. 다섯째, 국정과제 위원회 기능 이양. 대부분의 국정과제 위원회 기능은 직무군과 성 격이 유사한 조정실장에게 이양하고, 여러 직무군과 연계된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국정과제 위원 회는 관련 기능을 재분류하여 각 조정실장에게 분장시킬 수 있다. 공직사회 한계를 극복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조정실장제도가 가지는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범정부 적 정책 조정. 국무조정실의 직무군별 확대 개편을 통해 지식기반사회에 걸맞는 전문관료제도에 의한 효과적 정책 조정이 가능해진다. 둘째, 국정의 균형과 효율적인 추진. 대통 령-국무총리-장관으로 이 어지는 상명하복식 정책기획 및 집행조직과 대통령-국무총리-조정실장으로 이어지는 직무군별 정책 조정 및 인사 기능을 담당하는 조직을 통해 국정추진체계의 균형을 이룸으로써 업무의 책임성을 높이 고 전문화를 추구할 수 있다. 셋째, 전문적인 인적자원관리와 책임행정의 구현. 새 제도 하에서 각 부처의 유사 업무 담당자는 소 속은 비록 다르지만 실질적으로 같은 직 무군에 속하는 공무원들이기 때문에 극한 대립이나 반목을 피 할 수 있다. 그리고 해당 공무원들에게 전문성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 되어 전문행정을 기할 수 있게 된다. 넷째, 장ㆍ단기 평가의 조화와 기록의 지적 자원화. 우선 정책실명제를 직무성과계약제 와 결합하여 정 책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성을 확보하여 책임행정을 구현할 수 있다. 또한 공무원이 하 나의 직위에서 습득한 지식과 정부를 조직의 공유자원 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다섯째, 국정과제위 원회의 기능 흡수. 조정실장제도는 13개 국정과제 위원회의 기능을 이관 받음으로써 대통령 프로젝트 의 수행을 별도 조직이 아닌 정통관료조직이 추진토록 한다. 조정실장에 의한 국정과제의 수행은 우 선순위를 결정할 때 전문성과 현실성의 조화를 가져온다. 결론적으로 조정실장제도는 공직사회의 전통적인 문제인 부처간, 조직간 집단이기주의를 극복하고 나 아가 범정부적 차원에서 국정 전반에 대한 합리적, 전문적인 정책 조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제도적 장 치로서 의미를 지닌다. 교육훈련제도의 확충: 정부출연연구기관 활용 고위공무원 교육은 정부가 맞춤 교육을 해야 한다. 학문적 목적의 국내외 위탁 교육은 다양한 행정수 요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력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직무군, 직무렬에 따른 맞춤형 전문 교육은 행정서 비스의 다양화를 가져와 교육의 적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 역할을 할 것이다. 공무원 교육운영 체계 개선을 위해서는 여러 기관에 분산, 산재되어 있는 교육 제도를 한 군데로 집 중한 연합교육원 형태의 교육으로 전환 해야 할 것이다. 연합대학원의 편제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우 수 연구원이 그 성격에 맞춰 하나의 학과 또는 전공을 담당하되, 기본 소양교 육과 인프라는 중앙공무 원 교육원이 맡아서 운영한다. 또한 각 직무군별 조정실장이 이사회의 구성원이 되며, 정부출연 연구 기관의 장이 학과장 내지 전공 주임교수를 맡을 수 있도록 한다. 기타 교육은 정부출연 기관 연구원 에 의한 단기 수시 교육을 실시한다. 교육훈련은 보 직관리와 경력발전과 연계될 때 효과가 발생하고 지속적으로 유지된다. 공직교육은 이모작 집중교육과 단기 수시 교육 두 가지로 요약해야 한다. 새로운 교육훈련제도의 기대효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식기반 사회를 위한 고위 공직자 양성. 새로 운 교육훈련제도를 통한 이모작 교육을 하면 정책관료와 전문관료를 육성할 수 있다. Y형 경력 발전 제도에 따른 교육을 할 수 있어 고위 공직자에게 필요한 전문지식을 함양하고, 전문성 축적을 가능하 게 할 수 있다. 또한 공급자 중심, 일반 소양교육 중심에서 탈피하여 수요자 중심, 정책전문교육으로 의 전환을 가능하 게 해 준다. 둘째, 공직자와 연구원의 사기 앙양. 학위 취득만을 위한 부실교육에서 실효성 있는 전문교육으로의 전환은 직무 만족도를 높이고, 퇴직 후 학계, 연구계, 산업계로의 진출을 가능하게 해 준다. 또한 정 부출연연구기관 연구원들의 사기도 높일 수 있다. 셋째, 21세기 공직교육의 역할 모델 제시. 정부출연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한 연합대학원의 집중교육과 단기 수시 교육의 병행은 급격한 환경변화라는 지 식기반 사회의 거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 46

47 대한 물결에 편승하여 전문성과 국제 경쟁력을 갖춘 공직자를 양성하는 국제적인 모 범 사례를 제시할 것이다. 미래형 공직 인사개혁이 가져올 선진적 변화 21세기 지식기반사회의 공직 인사개혁을 위한 새로운 제도들이 우리나라 공직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 는데 어떤 기여를 하는지 살펴보자. 첫째, 공무원의 전문성 부족과 자질 시비 극복. 환경변화에 대한 공무원의 적응력을 향상시키는 제도 로 '직무군의 재분류', '국정과제위원회 에서 조정실장으로의 기능 이관', '정책관료', '전문관료', '고위 공무원을 위한 전문교육'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제도들의 도입은 공무원들이 시대 환경 변화에 능동적 이고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게 한다. 또한 부처의 벽을 넘어서는 넓은 시야와 먼 미래를 바라보는 비 전을 가지게 해 준다. 특히 전문 관료 제도를 통해 창의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 한 가지 전문 업무를 장기간 담당함으로써 노하우를 습득하고, 실험적 사 고력을 배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신나게 일할 수 있는 여건 조성. 공무원들이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책임감이 결여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으로 지적되는 정책 실명 제의 부재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제도로는 '조정실장에 의한 정 책실명제', '정책영향 평가', '인사 심사'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정부 내 정책 혼선의 원인으로 작용하 는 부처 및 조직간 집단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제도로는 '직무군의 재분류', '조정실장에 의한 정책 조정', '조정실장 에 의한 인사심사', '정책관료제' 등을 들 수 있다. 조정실장에 의한 정책 조정은 해당 직무군별로 신설되는 조정실장이 범부처적으로 전문성 에 바탕을 둔 정책 조정을 수행하기 때문에 갈 등 당사자들의 조정 결과 승복을 용이하게 해준다. 셋째, 후진적인 행정관행과 문화 극복. 단기성과와 이벤트 중심의 행정이 초래하는 근본적인 뿌리로 지적되는 한건주의를 해결하는 제도로는 조정실장에 의한 정책영향평가, 정책실명제, 전문관료제를 들 수 있다. 관료제 병리현상으로 오랫동안 지적되어 온 변화에 대한 저항은 직무 군의 재분류, 정책관료 제의 도입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 그리고 공무원이 자신의 권위에 근거하여 공익과는 상관없이 자신 의 의사를 관철 시키고자 행동하던 권위주의는 직무군의 재분류, 전문관료제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 넷째, 안정적인 자기개발 여건 제공. 현행 Z형 보직경로는 공무원 경력개발제도의 부재를 의미한다. 공직의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한 경력개발 제도의 필요성이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제도적으로 추 진되지 못한 것은 직무군의 재분류, 정책관료제도와 전문관료제도를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직 무군의 재분류는 공무원이 해당 직무군내의 전 부처를 대상으로 순환하면서 부처의 이동성을 보장받 게 할 것이다. 또한 해당 직무군에 대한 전문성을 배양하여 퇴직 후 제2의 직업생활을 하는 데 있어 경쟁력 있는 인적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공무원, 그 안에 잠든 거인을 깨우자 국가발전과 국민복리 증진에 큰 피해를 입힌 수많은 정책 실패를 돌이켜 볼 때, 이를 미연에 방지하 거나 적절하게 대응 못한 근본 원인은 잘못된 공무원 인사제도로부터 초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잘 못을 고치지 못한 이유는 기존의 정부개혁이 공무원의 숫자나 부처 조직의 크 기 같은 양적 하드웨어 개편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정부와 공직사회의 현실에 대한 깊은 고뇌와 성찰 없이 서구 선진국 제 도를 맹목적으로 이식하려 했던 이벤트성 개혁이었기 때문이다. 미래 지향적 정부혁신 방안은 공무원 인사제도를 개혁함으로써 공무원을 개혁하고, 바뀐 공무원이 정 부를 개혁하게 하는 것이다. 소프트웨 어 개혁을 통한 하드웨어 개혁이다. 이는 겉모습만 바꾸는 미봉 책이 아니라 새로운 인사제도를 통해 정부 유전자를 바꾸는 근본적 개혁이 다. 유전자는 네 가지 염기성 화합물질로 구성된다. 이들 네 가지 염기의 조합에 따라 생명체의 형태와 기능이 결정된다. 정부 능력을 결정하는 유전자의 네 가지 염기가 바로 공무원의 소속, 경력발전경로, 평가 및 인사, 교육훈련이다. 공무원의 소속을 부처에서 직무로 바꾸는 직무군 ㆍ직무렬 제도, Z형 무 차별 순환보직에서 Y형 경력발전제도로의 변경, 조정실장에 의한 객관적 평가와 인사추천, 그리고 '중견 실무관료를 고위 정책관료 및 전문 관료로 거듭나게 하는 공직 이모작 교육훈련', 이상이 바로 정부의 유전자 치료이다. 공무원 인사제도의 이러한 근본 변화는 복지부동하는 무능한 철밥통을 대한 민국의 선진국 도약을 선도하는 유능하고 충실한 국민의 공복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한국관료제의 복지부동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 삼성경제연구소/2009년 1월/429쪽/20,000원 저자 김태유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학위(1980)를, 콜 로라도 대학(Colorado School of Mines)에서 자원경제학 박사학위(1983)를 받았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후 과정(Post. Doc.)을 거쳐 아이오나(IONA) 대학 경영시 스템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1987년부터 서울대학교 산업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이며 한국자원경제학회 회장, 외교통상부 에너지 자원 대외직명대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초 대 대통령정보과학기술보좌관으로 <신성장동력산업 의 지정과 육성>, <이공계 공직진출과 공직 및 고시제도 개편>, <과학기술부총리 제도와 기술혁신본부의 신설> 등의 정책을 기획하고 추진하 였으며, 정부조직과 공직인사 제도를 연구하게 되었다. 에너지 자원경제학, 기술경제학, 정보통신정책, 산업정책 등의 분야에 많은 논문과 저 서가 있으며, 현재 국가발전론과 미래학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신문주 성균관대학교 법률학과를 나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석사학위(1986)를 받았으며, 영국 버밍엄대 공공정책대학원에서 공공경영 학 석사과정(1997)을 수료하였다. 행정고시 합격(1980) 후, 행 정자치부에서 교육과장, 행정능률과장, 과학기술자문회의 국정과제국장, 교육원 교수, 연수원 혁신센 터소장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한국정책분석평가협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공무원교육원 등 주로 공 공분야에서 전문강 사로 활동 중이다. 다양한 전공과 폭 넓은 근무경험을 접목시켜 정책기획, 정책설 계, 정책품질, 정책평가 및 경영평가, 공공 서비스 마케팅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 47

48 등의 영역에서 업무현장에 적합한 실전 강 의를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신 공공부문 행정서비스 마케팅, 정책기획연습 등이 있다. 짧은 요약(Short Summary) 이 책은 정부혁신의 성공 여부가 정부의 규모가 아니라 정부의 효율성에 달려 있음을 상기시키며 근 본적으로 정부를 변화시키기 위해 무엇 부터 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정부의 능력은 곧 공무원에 의 해 가름되며, 공무원이 바뀌어야만 선진국으로의 도약이 가능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공직 사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공무원 개인보다는 시대에 뒤떨어진 공직인사제도에 기인하고 있다고 분 석하면서 공직 인사제도의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은 정부의 능력을 결정하는 유전자의 네 가지 염기로 공무원의 '소속', '경력발전경로', '평가 및 인사', '교육훈련'을 꼽는다. 그리고 유전 자 치료를 통해 불치의 병을 미연에 방지하고 보다 탁월한 능 력을 유도하듯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위한 유전자 치료로 '공무원의 소속을 부 처에서 직무로 바꾸는 직무군ㆍ직무렬 제도의 도입', '무차별 순환보직에서 Y형 경력발전제도로의 변경', '조정실장제도를 통 한 객관적 평가 와 인사 추천', '중견 실무관료를 고위 정책관료 및 전문관료로 거듭나게 하는 공직 이 모작 교육훈련' 등의 해법을 제안한다. 필자가 제안하 는 미래 지향적 정부혁신 방안은 공무원 인사제 도를 개혁함으로써 공무원을 개혁하고, 바뀐 공무원이 정부를 개혁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정부의 겉 모습만 바꾸는 미봉책이 아니라 정부의 유전자를 바꾸는 근본적인 개혁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 고 무엇보다 누차에 걸쳐 반 복과 실패를 거듭해온 정부개혁의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차례 프롤로그_ '작은 정부 만들기'는 왜 실패했는가 1부. 공직사회, 무엇이 문제인가 01 이제는 변화해야 한다 02 정부관료제의 문제점과 유형 03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관료를 원한다 2부. 그동안 정부는 어떤 노력을 해왔는가 01 정부개혁의 핵심, 인사정책 02 인사제도 개혁사례 분석 03 새로운 처방을 위한 종합평가 3부. 미래형 공직인사, 어떻게 할 것인가 01 새로운 제도적 처방을 내놓으며 02 공직분류체계 개편 방안: 직무군 직무렬제도 03 Y형 경력발전제도: 정책관료와 전문관료 04 정책조정 메커니즘의 도입: 조정실장제도 05 교육훈련제도의 확충: 정부출연연구기관 활용 06 미래형 공직 인사개혁이 가져올 선진적 변화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 48

49 뉴욕 타임스 한국의 국정 역사 교과서에 대해 :26 The Opinion Pages Editorial Politicians and Textbooks By THE EDITORIAL BOARDJAN. 13, 2014 Both Prime Minister Shinzo Abe of Japan and President Park Geun-hye of South Korea are pushing to have high school history textbooks in their countries rewritten to reflect their political views. 일본 총리 아베 신조( 安 倍 晋 三 )와 한국의 대통령 박근혜는 모두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반영하기 위해 다시 자신의 국가에서 고등학교 역 사 교과서를 가지고 추진하고있다. Mr. Abe has instructed the Education Ministry to approve only textbooks that promote patriotism. He is primarily concerned about the World War II era, and wants to shift the focus away from disgraceful chapters in that history. For example, he wants the Korean comfort women issue taken out of textbooks, and he wants to downplay the mass killings committed by Japanese troops in Nanking. His critics say he is trying to foster dangerous nationalism by sanitizing Japan s wartime aggression. 아베 총리는 애국심을 촉진하기 위한 교과서를 교육부 승인 지시했다. 그는 세계 대전 시대에 대해 주로 관심을, 그리고 그 역사에 수치스러 운 장에서 멀리 포커스를 이동하려고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교과서에서 한국의 "위안부"문제를 원하고, 그는 난징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대 량 학살을 경시하고 싶어. 그의 비판은 그가 일본의 침략 전쟁을 지우기 위하여 위험한 민족주의를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고있다 말한다. Ms. Park is concerned about the portrayal of Japanese colonialism and the postcolonial South Korean dictatorships in history books. She wants to downplay Korean collaboration with the Japanese colonial authorities and last summer pushed the South Korean Education Ministry to approve a new textbook that says those who worked with the Japanese did so under coercion. (A majority of professionals and elite civil servants today come from families that worked with the Japanese colonizers.) Academics, trade unions and teachers have accused Ms. Park of distorting history. 박근혜 대통령은 일본 식민주의의 묘사와 역사 책에서 탈식민 한국의 독재 정권에 대해 우려하고있다. 그녀는 일본과 협력하는 사람들은 강 제에 따라 그렇게 했다라는 새로운 교과서를 승인하기 위해 한국 교육부를 밀어 식민지 당국과 지난 여름 일본의 한국인 협력을 경시하고 싶 어. (전문가와 엘리트 공무원의 대다수 오늘은 일본의 식민지 개척자와 함께 일 가족에서 온다.) 학계, 노동조합과 교사가 역사 왜곡을 한 박 을 비난했다. Mr. Abe and Ms. Park both have personal family histories that make them sensitive to the war and collaboration. After Japan s defeat in the war, the Allied powers arrested Mr. Abe s grandfather, Nobusuke Kishi, as a suspected class A war criminal. Ms. Park s father, Park Chung-hee, was an Imperial Japanese Army officer during the colonial era and South Korea s military dictator from 1962 to In both countries, these dangerous efforts to revise textbooks threaten to thwart the lessons of history. 아베 총리와 박 대표는 모두 전쟁과 협력에 민감하게 개인 가족의 역사를 가지고있다. 전쟁에서 일본의 패배 후, 연합국은 의심 클래스 전쟁 범죄로, 아베 총리의 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를 체포했다. 박씨의 아버지, 박정희는, 식민지 시대와 양국에서 1979 년 1962에서 한국의 군사 독재자 동안 일본 제국 육군 장교, 교과서 개정이 위험한 노력은 역사의 교훈을 방해하는 위협. 뉴욕 타임스 한국의 국정 역사 교과서에 대해... 49

50 SB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권력 4~5부 : /12/17 06:19 최후의 권력 4부 - 금권천하 돈과 권력의 결탁 최후의 권력 4부 - 금권천하 미국은 어째서 오늘날 공공보험이 없는가 최후의 권력 4부 - 금권천하 미국, 아직도 동경의 나라입니까? 최후의 권력 4부 - 금권천하 돈과 정치는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을까 최후의 권력 4부 - 금권천하 공립학교의 예산 삭감, 열악한 교육 환경 최후의 권력 5부 중국, 전례 없는 빈부격차 촉발 최후의 권력 5부 - 우리 시대 바람직한 권력 모색 SB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권력 4~5부 50

51 최후의 권력 5부 - 산마리노, 자유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 최후의 권력 5부 - 권력의 주인이 된 당찬 할머니들 최후의 권력 5부 - 광장 민주주의, 란츠게마인데 SB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권력 4~5부 51

52 SB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권력 1,2,3부 : /12/16 08:18 우리 시대가 원하는 권력을 찾아나선 권력 대 탐사 프로젝트! 우리 시대의 정치와 권력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권력이란 과연 무엇이며, 누 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이념도, 성향도, 세대도 다른 7명의 정치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동, 서양 문명의 교차 로,... "현실적이고 정치 사회적 문제에 대한 탐구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2013년 초 전 세계적으로 정권의 이동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도 대체 '이게 정치냐?'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왜 저 모양일까' 불만을 토로합니다. '최후의 권력'은 바람직한 권력의 모습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고 기획하게 된 프로그램입니다."(박기홍 CP) SBS TV 다큐멘터리 '최후의 권력'은 권력의 탄생에서부터 21세기 현대권력에 이르는 인류 권력의 역사에서 바람직한 권력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기 위해 기획됐다. 1, 2부에서는 '7인의 빅맨'이라는 주제로 정치인 7명의 권력 체험을 전한다. 정봉주(53) 전 민주당 의원, 박형준(53) 전 청와대 정무수석, 천호선(51) 정의당 대표, 안철수 의원 공보담당 금태섭(46) 변호사, 차명진(54) 전 새누리당 의원, 정은혜(30) 민주당 전 부대변인, 손수조(28) 새누리당 중앙미래세대위원장이 7박8일 동안 코가서스 산악 지역인 조지아(그 루지야) 스바네티를 횡단한다. 각기 소속이 다른 7인의 정치인은 매일 '권력 원정대'를 이끌 리더인 '빅맨'을 선출하게 된다. 빅맨은 리더십을 발휘해 그날 주어진 과제를 완 수하고 대원들의 안전을 지킨다. 정 전 의원은 13일 "갈등, 대립, 충돌의 정치를 해왔던 내가 첫날밤을 보내고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사회도 충분히 교집합을 찾을 수 있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 내 정치적 상황으로 봤을 때는 교집합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 다른 입장에서도 뚱뚱한 교집합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내 팬카페 회원이 20만 명이다. 외지를 갔다 온 후 차명진과 손수조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했다가 박살이 났다"며 웃었다. "충돌과 갈등을 통 해 권력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합의로 서로 이해하면서 이끌어가면 새로운 큰 틀의 정치가 탄생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정이 쉽지는 않았다. 천 대표는 횡단 도중 발톱이 세 개나 빠졌다. "고생을 많이 했다. 목숨이 위험했던 상황도 있었다. 정치인들이 갈등을 유발하려고 하는 느낌이 강한데 반대로 잘 봉합도 됐다. 본질적인 역할은 갈등을 해소하는 사람이었다. 또 7명의 정치인 모두 갈등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개인의 기질과 태도의 문제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시스템적인 문제도 한 요인인 걸 깨달았다"고 털어놓았다. 차 전 의원은 "사람은 누구나 권력의지가 있다. 다른 사람을 내가 뜻하는대로 시키기 위해 공동체에서 갈등이 조장된다. 그 강도는 차이가 있 지만, 정봉주는 특히 세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서도 "제작진과의 갈등도 컸다. 이틀째 되는 날은 촬영을 중단하려고 했다. 제작진이 우 리에게 출연료를 주니까 마음대로 하려는 경향이 있었다"고 농반진반하기도 했다. 정 전 부대변인은 "이 프로그램을 하며 손수조 위원장과 친해졌다. 수조가 없었으면 견딜 수 없었을 것 같다. 처음에는 같은 또래고 내가 묻 SB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권력 1,2,3부 52

53 힐까 봐 걱정했지만, 같이 텐트에서 자고 힘든 것을 얘기하면서 가까워졌다. 생존의 법칙을 깨달았다"고 의미를 뒀다. "정치인들은 뉴스에서 많이 보게 된다. 국민들이 봤을 때 우리는 매일 싸우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보니 우리도 한 사람이다. 옳은 일을 하기 위해 토론하고 긍정적인 갈등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손 위원장은 "민주당 의원님들이 날 미워할까 봐 걱정을 많이 했다. 솔직히 정봉주 의원님과 천호선 대표님을 처음 봤을 때 냉랭한 기운도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우리 당 사람들보다 더 가까워졌다. 재미있는 경험이었다"며 만족스러워했다. 박 전 수석은 "처음 섭외전화를 받았을때 많이 망설였다"고 운을 뗐다. "정봉주 의원과 굉장히 악연이 있다. 다른 정치적인 성향을 가지고 선 봉에서 싸웠던 사람이라 불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다녀와서 느낀 것은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민낯으로 벌거벗고 만나본 적이 정말 없었다는 것이다. 현실 정치도 대립과 분열을 하고 있지만, 민낯으로 마주하면 통하는 길이 있다. 그러면서 새로운 권력이 나오는 것 같다"고 고백했 다. 금 변호사는 "안철수 의원에게서 고생했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 나보다는 다 정치 선배님들이라 왕따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면서 "하도 '간 본다' '망설인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과감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나중에 나를 인정해주는 걸 보면 잘 통한 것 같다"고 눙쳤다. 이미지 정치에 대한 지적도 있었다. 정 전 의원은 "개인적으로는 정치인들이 더 많이 노출됐으면 좋겠다. 완전히 노출돼 민낯으로 국민과 가 까이하려는 순간 권력도 두려운 게 아니라고 느낀다. 정치인이 자신을 깨려고 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본다. 이미지 정치가 나쁜 게 아니다. 국 회에서 싸우는 모습뿐 아니라 실질적인 생활의 모습이 언론에 노출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박 CP는 "이분들을 모시고 적나라한 얘기를 듣고자 하는 기획의도에 충실하려고 했다. 정치인들은 늘 갈등의 생산자, 분쟁의 생산자로 봐왔 다. '저 인간들은 왜 세금을 축내면서 싸우기만 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전에 정치인들도 말하고 싶은게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얘기를 들어 보고 앞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고민의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을까 생각할 기회가 됐으면 한다." '최후의 권력-7인의 빅맨'은 배우 이병헌이 내레이션을 맡았다. '올드보이', '건축학개론'의 이지수 음악감독이 음악을 책임진다. /newsis.com ========================================================================================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1부( (1) 7인의7 빅맨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1부( (2) 7인의7 빅맨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1부( (3) 7인의7 빅맨 SB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권력 1,2,3부 53

54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1부( (4) 7인의7 빅맨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1부( (5) 7인의7 빅맨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1부( (6) 7인의7 빅맨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1부( (7) 7인의7 빅맨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1부( (8) 7인의7 빅맨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1부( (9) 7인의7 빅맨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1부( (10) 7인의7 빅맨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1부( (11) 7인의7 빅맨 SB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권력 1,2,3부 54

55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2부( (1) 7인의7 빅맨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2부( (2) 7인의7 빅맨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2부( (3) 7인의7 빅맨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2부( (4) 7인의7 빅맨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2부( (5) 7인의7 빅맨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2부( (6) 7인의7 빅맨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2부( (7) 7인의7 빅맨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2부( (8) 7인의7 빅맨 SB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권력 1,2,3부 55

56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2부( (9) 7인의7 빅맨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2부( (10) 7인의7 빅맨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2부( (11) 7인의7 빅맨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3부(1) 왕과 나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3부(2) 왕과 나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3부(3) 왕과 나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3부(4) 왕과 나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3부(5) 왕과 나 SB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권력 1,2,3부 56

57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3부(6) 왕과 나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3부(7) 왕과 나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3부(8) 왕과 나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3부(9) 왕과 나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3부(10) 왕과 나 S B 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 권력 3부(11) 왕과 나 SBS 창사특집 대기획 최후의권력 1,2,3부 57

58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숫자의 의미 : /02/05 03:21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숫자의 의미 나를 나타내는 고유 번호인 주민등록 번호. 보통 앞자리 6자리는 자신이 태어난 출생연도와 월, 일을 나타내고 있으니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지만 뒷자리 7자리는 제일 첫 자리가 성별을 나타낸다는 것 이외에는 모르는 사람이 많죠. 그래서 찾아본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숫자의 의미 ABCDEFG 주민 번호는 위와같이 13자리 숫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일 먼저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숫자의 의미 58

59 A : 성별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 1899 년에 태어난 남성 : 9 여성 : ~ 1999 년에 태어난 남성 : 1 여성 : ~ 2099 년에 태어난 남성 : 3 여성 : ~ 1999 년에 태어난 외국인 남성 : 5 여성 : ~ 2099 년에 태어난 외국인 남성 : 7 여성 : 8 5,6,7,8 이 사용된다는 것은 처음 알았네요. BC : 출생 지역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숫자의 의미 59

60 00 ~ 08 : 서울 09 ~ 12 : 부산 13 ~ 15 : 인천 16 ~ 18 : 경기도 주요 도시 19 ~ 25 : 경기도 비 주요 도시 26 ~ 34 : 강원도 35 ~ 39 : 충청북도 40 ~ 47 : 충청남도 48 ~ 54 : 전라북도 55 ~ 66 : 전라남도 67 ~ 90 : 경상남.북도 DE : 출생을 한 동.읍.면사무소 고유번호 F : 출생 당일 출생 순서 번호 G : 주민등록 번호가 맞는 번호인지 확인하기 위한 숫자 (위변조 방지용) XXXXXX-ABCDEF 를 가지고 계산식에 넣어 답이 G 가 나와야 정확한 주민번호로 인정됨.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지는 주민등록 번호이고 같으면 안되는 번호이지만 특이하게 똑같은 주민등록 번호가 나오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같은 지역의 같은 동에서 아이가 하루에 11명 태어나면 같아지겠죠?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숫자의 의미 60

61 주민등록번호라는 것이 인권침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편리한 개인인증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생년월일 출생지역이 들어있지 않은 무작위의 번호라면 좋을 것 같은데요. 정부에서 주민번호는 따로 관리하고 주민등록 번호와 1:1 매칭이 되는 번호를 출생시에 주는거죠. 그러면 국가가 털리기 전에 내 신상정보가 새어 나갈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요즘은 하도 개인정보 노출이 많아져 사고도 같이 많아지니 어디서 주민번호 유출 되었다고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네요. 이렇게 무뎌지면 안되는데 말이죠... 이상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숫자의 의미에 대한 글 이였습니다. /ETC 2013/07/27 ================================================== 주민등록번호 가짜 구별, 끝번호로 알 수 있죠 뒷자리 첫 번째는 남녀 성별 구별,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출생지역, 번호마지막 자리는 오류검증 번호예요. 앞 번호에 특정한 계산법 거치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려낼 수 있죠. 엄마,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저와 거의 같은 친구를 만났어요! 학교에서 돌아온 현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엄마께 달려왔어요. 오, 그래? 같은 주민센터에서 출생신고를 했나 보구나. 그것도 특별한 인연이니 친하게 지내렴. 예?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거의 같으면, 출생신고를 한 장소가 같을 것이라고요? 엄마는 어떻게 아셨어요? 그럼 주민등록번호가 완전히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숫자의 의미 61

62 같을 수도 있나요? 하하! 주민등록번호 13자리가 전부 같은 사람은 없지. 국민의 고유번호로 신분을 확인하는 데 쓰이니까 번호가 같은 사람이 생기면 안 되 겠지? 이해가 잘 안 돼요. 저와 생일이 같은 친구가 출생신고도 같은 장소에서 했다면 제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것 아닌가요? 네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 그런데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에는 출생신고를 한 장소에 대한 정보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번호가 모 두 같을 확률은 없단다. 주민등록번호 앞 6자리는 태어난 생년월일인 것은 알지? 그 뒤의 7자리 숫자 중 처음 숫자는 성별을 의미한단다. 그래서 아빠는 1로 시작하 고 엄마는 2로 시작하지. /그림=이창우 어? 그런데 왜 저는 남자인데 3이에요? 그것은 2000년이 시작되면서 생년월일 앞자리가 00이 되자 1900년에 태어난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 2000년에 태어난 사람부터는 남자를 3 으로, 여자를 4로 나타낸 거야. 아하, 그렇군요. 그럼 2100년이 되면 남자는 5, 여자는 6이 되나요? 5와 6은 이미 쓰이고 있단다. 1900~1999년에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외국인 남성의 주민번호에 5, 외국인 여성에게는 6을 쓰고 있지. 2100년이 되면 그렇게 남녀를 구별할 번호가 더 이상 없겠네요? 아마 그때쯤이면 주민등록번호가 새롭게 개편될 거야. 지금의 주민등록번호 체계는 1968년에 마련된 것이라고 해. 이제 주민등록번호 뒷자 리 7자리 중 둘째와 셋째에 있는 번호를 볼까? 첫째 자리는 남녀를 구분하는 것이고, 둘째와 셋째 숫자는 출생신고를 한 지역을 뜻한단다. 서울, 경기도 등의 시 도를 말하지. 그다음 넷째와 다섯째 숫자는 등록을 한 주민센터의 고유번호야. 이제 문제 하나 낼게. 주민등록번호 은 어떤 지역에서 출생신고를 한 것인지 알아맞혀 보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숫자의 의미 62

63 음. 표를 보니까 18은 경기도 주요 도시를 뜻하는 숫자네요. 83년에 태어났으니 우리 나이로 31세, 생년월일 다음의 숫자가 1이니 남성이 고요. 이게 누구 주민등록번호인가요? 경기도 부천의 명예시민이 된 둘리의 주민등록번호란다. 부천시는 경기도의 주요 도시란다. 와, 만화 캐릭터도 주민등록번호가 있다니 놀랍네요. 주민등록번호만 봐도 출생신고한 지역을 알 수 있다니 신기해요. 그다음 숫자는 무엇 을 의미하나요? 출생신고를 한 순서를 뜻한다고 해. 생일이 같고 출생신고한 주민센터가 같아도 접수 순서가 같을 순 없기에 이 숫자가 다르지. 쌍둥이도 주민등록번호가 앞자리부터 11자리까지 같지만 나머지 두 자리는 다를 수밖에 없단다. 마지막 자리가 무엇을 뜻하기에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요? 마지막 자리는 오류 검증 번호야. 그래서 마지막 자리에 들어가는 수는 앞의 번호들에 따라 결정되지. 우선 앞에서부터 각각의 숫자에 2, 3, 4, 5, 6, 7, 8, 9, 2, 3, 4, 5를 차례대로 곱한 뒤 그 값을 전부 더한단다. 둘리의 주민등록번호 을 예로 들면, (8 2)+(3 3)+(0 4)+(4 5)+(2 6)+(2 7)+(1 8)+(1 9)+(8 2)+(5 3)+(6 4)+(0 5)를 계산하면 133이 나와. 이것을 11로 나누면 몫 이 12, 나머지가 1이지. 끝으로 11에서 방금 구한 나머지 1을 빼면 10이 나오지. 이 값에서 끝자리에 있는 숫자 0이 주민등록번호 맨 마지막 번호가 된단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나머지가 9가 나온다면, 11에서 9를 뺀 2가 주민번호 맨 마지막 번호가 되는 것이지. 우와, 제 주민등록번호도 그렇게 계산해 보니 맨 끝자리 숫자는 11에서 나머지를 뺀 값과 같네요. 정말 신기해요. 이렇게 주민번호 마지막 숫자는 앞의 숫자들과 관련 있기에 잘못 기록하거나 엉터리로 만든 가짜 주민등록번호를 찾아낼 수 있단다. 저는 주민등록번호에 이렇게 수학 원리가 숨어 있는 줄 몰랐어요. 주민등록번호는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나타낼 뿐만 아니라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번호이니 소중하게 여길 필요가 있단다. [관련 교과] 6학년 2학기 경우의 수와 확률 [함께 풀어봐요] 예를 들어 ( ) 이라는 주민등록번호가 있다면, 마지막 자리인 괄호 안에 들어갈 숫자는 무엇일까요? 답: 앞에서부터 각 자리의 숫자에 순서대로 를 곱하면, (0 2)+(0 3)+(1 4)+(0 5)+(0 6)+(1 7)+(4 8)+(3 9)+(4 2)+(5 3)+(6 4)+(7 5) 이니 합이 152가 나와요. 152를 11로 나누면 나머지는 9가 나오지요. 11에서 나머지(9)를 뺀 수가 마지막 자리이니 답은 2랍니다. /blog.donga.com beseto 多 文 化 硏 究 所 마당재님 :44 ===================================================== " 국민 97%, 주민등록번호 공개 거부감 "... 다른 나라 신분증은?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숫자의 의미 63

64 [앵커] 카드사 개인정보유출 사태로 주민번호를 과도하게 요구하는 실태에 대해 비난 여론이 높아졌죠. 개인정보 보호위원회 조사 결과 우리나라 국민 100명 가운데 97명 이상은 주민등록번호 공개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주민등록번호만 알면 다 알 수 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 주민번호에는 개인정보가 많이 담겨 있습니다. 13자리 번호, 어떤 정보를 담고 있을까요? 앞 6자리는 생년월일이죠. 나이를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뒤의 첫 자리는 성별을 나타내죠. 1900년대 출생한 남자일 경우 1, 여자는 2, 2000년대 출생한 남자는 3, 여자는 4가 됩니다. 그 뒤 네 자리는 출생지역의 조합번호입니다. 본적지를 나타내, 고향을 유추할 수 있고요. 뒷자리 6번째는 출생 일련번호로 해당 지역 동사무소에 접수된 순서, 마지막 끝번호는 주민등록번호가 진짜인지 검증하는 오류검증 번호입니 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요? 미국도 주민번호와 비슷한 사회보장번호가 9자리로 구성돼 있지만 민감한 개인정보는 전혀 담기지 않습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숫자의 의미 64

65 영국도 알파벳과 숫자가 조합된 국민보험번호가 있지만 역시 개인정보가 들어있지 않고, 호주 사회보장번호도 생년월일 정도의 정보밖에 없 습니다. 국민 97%가 공개하는데 거부감을 느끼는 주민등록번호, 신분 확인 방식에 대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ytn ========================================================== 시민단체 " 주민등록번호 폐지" 인권위 진정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 사용행태 규제 한계" 주민등록번호 과잉요구하는 사회 문제의식 필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진보네트워크센터, 함께하는시민행동 등이 29일 오전 서울 중구 무교로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정보인권 침 해하는 주민등록번호제도 진정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News1 정회성 기자 (서울=뉴스1) 박응진 기자 = 시민사회단체들은 최근 발생한 카드사 개인정보유출 사고와 관련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내고 주민등록번 호 제도 폐지를 권고해줄 것을 요청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과 진보네트워크센터, 함께하는시민행동 등 3개 시민단체는 29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인권위 앞에서 기자회견 을 연 뒤 진정서를 접수했다. 이들 단체는 진정서에서 "주민등록번호의 인권침해적 요소를 그대로 둔채 그 사용행태를 규제하는 방식으로는 주민등록번호 제도가 가진 근 본적 문제를 해결하기에 역부족"이라고 지적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숫자의 의미 65

66 이어 "현재 정부는 유출된 주민등록번호를 바탕으로 한 대체수단 도입 등을 논의하고 있다"며 "근본적인 해결책인 주민등록번호 변경, 일반 적 개인식별변호체계 변경 등에 대한 논의가 없다"고 비판했다. 또 "온라인에서 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주민등록번호를 파기하도록 해야 다양한 데이터베이스의 연동을 위한 만 능열쇠로서 주민등록번호의 수요를 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들은 본인 확인 방법으로 공공 민간부문에서 주민등록번호를 과잉요구하는 사회환경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된 상황에서 아이핀(I-PIN), 휴대전화 인증 등 대체수단은 또 다른 유출을 조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인권위가 고유식별, 다목적번호 등으로서 주민등록번호 폐지를 권고할 필요가 있다"며 "전반적으로 신분확인 관행과 현재 정부에서 제시한 대책의 한계점에 대해 진지하고 장기적인 성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들 단체에 따르면 최근 발생한 카드사 유출사고를 포함해 2009~2013년 발생한 개인정보 유출은 1억3752만건이다. 기관별로는 금융사 이동통신사 등 기업에서 1억3313만건, 관공서 공기업 등 공공기관에서 439만건 등이 유출돼 명의도용, 보이스피싱(전화 대출사기) 등 2차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앞서 인권위는 지난 28일 성명을 내고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사고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정보인권 보호를 위한 제도 개선을 촉구한 바 있 다. 인권위는 성명서에서 "실명제 기반의 개인정보 처리 관행 개선, 주민등록번호의 임의번호 변경 및 변경 허용 절차 마련 등 관련법제의 재정 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과도한 개인정보 수집과 기업의 강제적 동의 관행 개선, 개인정보 수집 유통 관리에 대한 철저한 조사 등 구조적 개선이 이뤄져 야 한다"고 덧붙였다. /(서울=뉴스1) 박응진 기자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숫자의 의미 66

67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 /11/29 06:14 황광우, 비아북, 2009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의지가 없는 정부는 정부의 자격이 없다. "자유와 안전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정부의 존립 이유이며, 정부가 이를 지키지 못하면 국민은 정부를 전복시킬 권리가 있다"고 혁명권 사실을 가르친 이는 영국의 존 로크였다. 중3 여학생들에게 죄가 있다면 학교 에서 배운 교과서의 가르침대로 길거리에 나선 죄밖에 없다. 촛불 시위의 배후 교사자는 다름 아닌 존 로크였다.[5위대한 생각들]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나는 믿는다. 사상이 없으면 세계를 볼 수 없고, 사상이 없 으면 세계를 만들 수 없다. 오늘의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 청춘의 특권이자 사명이라면 젊은이는 세계를 만들어온 사상들 을 외면하고 살 수 없다.[9위대한 생각들] 이처럼 장기간에 걸쳐 진행된 경제적 변화는 신분 구조에도 변화를 초래했다. 한 나라의 중심을 이루는 지배계급은 왕을 중심으로 한 귀 족과 성직자였다. 그런데 새로운 경제활동을 담당하는 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이들을 '시민계급' 또는 '부르조아'라고 부른다. '부르그 bourg'란 당시에 새롭게 생긴 상공업 도시를 뜻하는 말이고, '부르주아bourgeois'는 그곳에 사는 상공인들을 의미했다. 새로이 형성된 부르 주아의 성격은 우리가 자주 쓰는 '더치 페이'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말의 원뜻은 '네델란드인의 방식대로 한다'인데 지금은 '비용을 각 자 부담한다'는 의미로 쓴다. 당시 네덜란드는 무역과 상공업이 발달했고,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한 시민계급이 상당히 많았다. 이 무렵 네덜란 드를 방문했던 프랑스 '촌놈'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암스테르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나 외에는 자사를 하지 않는 주님이 한 사람도 없고, 모두 다 돈벌이를 하러 밖에 나가 있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사람이란 단 한 명도 만나 지 않고 평생을 살아가야 할 것 같다."[17위대한 생각들]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67

68 그러나 시민계급은 달랐다. 그들은 상공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고, 경제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경제적 지위가 높아진다 해 도 그들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소외된 지위에 머물러야 했다. 성직자, 귀족 다음의 '제3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마음 놓고 장 사를 할 자유조차 얻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부르주아는 점점 더 왕권의 간섭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하고 싶어 했다. 그들 은 자신들이 정치적, 사회적 지위에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시민계급은 새로운 정치체계를 바라게 되었고,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체계를 체계 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정치사상을 원했다. 이 같은 시민계급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 사상'이다.[19위대한 생각들] 살아서는 신의 교리에 따르고, 죽어서는 신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삶의 최고 목표였다. 사회생활면에서는 봉건 제후의 영토인 장원이라 는 '공동체'가 있었다. 그속에서 개인은 없었다. 단지 '우리'만이 있었을 뿐이다. 문예부흥은 이것을 역전시켰다. '신'이 아니라 '인간'을 찾고, '내세'가 아니라 '현세'의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한 예로 문예부흥기에는 전과 달리 개인의 초상화가 등장한다. 본격적으로 '개인'이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또 다른 예로 문예부흥기의 이탈리아에서 자유를 의미하는 '리베르타(liberta, liberty)란 단어를 들을 수 있다. 이 말의 뜻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갖고 싶은 선물'이다. 이 시대 사람들의 가 장 커다란 소망은 자유를 갖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유란 개인이 공동체의 관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목적'에 따라 살 때만 누릴 수 있는 것이 다.[20위대한 생각들] 자유주의는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 사상에서 가장 힘주어 주장한 재산의 자유, 종교의 자 유,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은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 요구할 수 있는 '개인적인' 자유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자유의 개념은 '개인'의 발견 없이는 탄생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문예부흥과 종교개혁, 그리고 과학혁명은 인류 정신사에서 '개인'을 찾게 해 준 역사적 사건들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자유주의 사상을 등장시킨 사상적 토대였다.[22위대한 생각들] 나라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16세기로부터 18세기에 걸친 시기를 유럽 역사에서는 절대왕정Absolute Monarchy 또는 절대 주의Absolutism시대라고 부른다. 중세에는 봉건 영주가 정치의 중심이었다. 왕은 있었으나 전국을 통치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절대 주의 시대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왕은 상비군과 관료제를 기반으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여 전국을 통일하고, 행정 사법 군사제도를 정 비해 나갔다. 왕권신수설을 비판하기 위해 신흥 계급들이 들고 나온 무기가 '사회계약설'이었다.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는 리바이어던The Leviathan (1651년)에서, 존 로크John Locke는 정부론Two Treaties of Government (1689년)에서, 장 자크 루소Jean Jaques Rousseau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 (1762년)에서 각각 사회계약이론을 전개했다.[26위대한 생각들] 반면 로크는 자연 상태에서도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자율적이라고 했다. 자연 상태에서 모든 인간은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는 기본 권리인 '자연권'을 갖는다. 자유롭게 살 권리, 안전하게 살 권리,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 이 세 가지 자연권을 보장하는 것이 정부의 목 적인데, 만일 정부가 이 목적을 실현하지 못하면 국민은 정부를 교체할 권리, 즉 저항권을 갖는다고 로크는 보았다. 한편, 루소는 로크의 주장에서 더 나아가 국가의 주권은 민중에게 있다는 '주권재민설( 主 權 在 民 說 )을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국가와 군주의 권력이 근본적으로 민중에게 있다는 주장이 확립되었고 왕권신수설은 빛을 잃게 되었다.[27위대한 생각들] 스미스는 먼저 모든 가치의 근원은 '노동'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생산품이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은 인간의 노동이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것 이다. 이 주장은 근대 시민계급에게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모든 생산물의 가치가 노동의 산물이라면 재산 역시 노동의 산물이다. 노동 한 사람이 그의 재산을 소유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 된다. 따라서 각 개인이 소유하는 재산권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이다. 이 로써 각 개인의 재산은 이론적으로 정당화되고 사람들은 떳떳이 부를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29위대한 생각들]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68

69 그런데 일반의지란 사람들 사이에 경제적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형성될 수 없는 것이다. 빈부의 격차가 심한 사회에서 일반의지라는 것이 만들어 질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는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 외에 경제적 평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루 소는 이 문제에 대해 유명한 말을 남겼다. "국민은 다른 사람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서도 안 되면, 자신을 팔아야 할 정도로 가난해서도 안된다."[35위대한 생각들] 대동( 大 同 )은 공자가 돌아가 싶어 했던 동아시아 고대인들의 유토피아Utopia이다. 천하는 왕이나 제후, 대부들의 사유물이 아니라 공동체 의 공동재이다. 이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는 사적 관계나 신분에 따라 선발하지 않고, 오직 재능에 따라 선발한다. 가족주의적 편협함은 없다. 다른 사람의 자식들도 내 자식처럼 돌보고, 다른 사람의 부모도 내 부모처럼 봉양한다. 환과고독, 홀로 사는 과부나 홀아비, 고아와 독 거 노인의 불우한 삶을 공동체가 보살핀다. 재산을 소유하는 것을 부끄러워했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것이 '대 동'이라 불리는 공자의 유토피아이다. 고대인들의 공동체적 삶이 아직도 남아 있는 역사의 유물이 바로 가족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공동체의 관계가 아직도 가족 안에서는 자연스럽다. 가족적 질서, 그것의 확대판이 공자의 대동이었던 것 같다.[40위대한 생각 들] "친구는 모든 것을 공유한다."는 플라톤의 사회주의는 아마도 선배 철인 피타고라스Pythagoras에서 빌려온 경구인 듯 싶다. 피타고라스 는 이탈리아의 크론섬에서 자신의 사상을 따르는 제자들로 공동체를 꾸렸다. 요즘의 맥락으로 풀이하면 학문 공동체이기도 하고, 수도 공동 체이기도 하다. 이 공동체는 개개인의 사유재신을 완전하게 공유했다. 신과 만나는 정신적 수련생활에서 사유재산을 걸림돌일뿐, 아무런 의미 가 없었을 것이다. 피타고라스 공동체는 매우 엄격한 규율을 구성원들에게 요구했다. 채식을 장려했고 콩류의 음식을 금기했으며 묵언을 기 본으로 했다. 공동체의 규율을 어기면 추방된다. 추방되면 공동체에 관한 일체의 정보를 비밀로 해야 한다. 만일 이를 어기면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단, 처음 입회할 때 내 놓은 재산의 두 배를 공동체는 개인에게 돌려 준다.[41위대한 생각들] 마르크스는 분명 현대 공산주의의 원조이지만 정작 마르크스가 생각한 공산주의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에 대해서 기술한 문건은 거의 없 다. 노동자계급의 성경이라 불리는 자본론Das Kapital 을 다 뒤져도 장차 오게 될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없다. 자본 론 은 미래에 대한 예언서가 아니라 현실을 움직이는 자본의 성격에 대한 비판서였다. 나아가 마르크시즘Marxism이란 미래에 대한 부푼 희망을 약속하는 공상적 교리가 아니라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냉정한 비판 이론이다.[45위대한 생각들]...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일하지 못하고 타자의 강제에 의해 일을 하는, 이른바 노동 과정에서의 소외가 진행되면, 또 노동의 결과물을 자신이 전유하지 못하고 타자에게 수탈당하면 노동자는 노동의 소외에 처하게 된다. 노동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는 노동이 아 니라 타인에 의해 강제되는 고역이 된다. 인간이라고 하는 호모사피엔스는 본질적으로 노동을 통해 자연과 소통하고, 노동을 통해 사회와 소 통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노동의 소외는 곧 인간성의 소외로 이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의 혁명적 전복을 기도하는 마르크스의 기획은 이처럼 노동의 소외에 기초한다. 노동의 소외가 인간성의 소외를 초래하기에 마르크스는 노동 해방을 인간 해방의 필수전제로 파악했던 것이다.[46위 대한 생각들] 그런데 중국은 소련과 달랐다. 스탈린은 권력투쟁 과정에서 부하린을 위시한 모든 볼셰비키 혁명가들을 도살장으로 보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치르고 난 후 스탈린 옆에는 복지부동하는 일단의 공무원들만 남았다.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혁명가는 한 명도 없었다.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을 죽이지 않았다. 인민속으로 하방( 下 放 )을 보냈다. 그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의 잘못을 바로 잡는다. 그것이 바로 '흑묘백 묘론',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덩샤오피의 실용주의는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애햐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으로부터 중국 공산당을 해방시켜주기 위한 구호였다. 이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밥이 중요하다. 인민들은 굶어 죽는데, 무슨 공산주의 타령인가? 이 것이 덩샤오핑의 현실 인식이었다. 이후 덩샤오핑의 지도하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걸아간 개혁, 개방의 길은 레닌이 유시한 국가자본주의 길, 그것이었다.[55위대한 생각들] 소크라테스는 말을 이어갔다.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69

70 "나는 여러분의 명령보다 신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내게 생명과 힘이 있는 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설교하고 권면하는 철학의 임무 를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내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지혜와 진리에 무관심하고 영혼의 발전에 무관심한 태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나를 죽이면 앞으로 나와 같은 사람을 쉽게 다시 찾지는 못할 것입니다. 익살스러운 표현을 쓰며 나는 한결같이 여러분을 붙잡고, 설득하고, 비난함으로써 여러분을 돕는 일, 신이 보낸 쇠파리(성가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단잠에서 깨어난 사람같이 화를 벌컥 내면서 나를 죽이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죽이면 여러분은 평생을 깨어 있지 못하고 잠자면서 보내게 될 것입니다.[70위대한 생각 들] 지금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정치 이념은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이다. 한국 정치사에서 이 이념은 많은 왜곡과 굴절을 겪으 면서도 꾸준히 발전해 왔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가 처음부터 단일한 정치 이념이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먼저 민주주 의는 꽤 역사가 오래된 사상이다. 민주주의가 처음 역사에 등장한 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였으니 2,500살도 넘은 사상인 것이다. 그러나 자유 주의는 신참이다. 자유주의는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여러 우여곡절과 시민혁명을 겪으며 탄생한 사상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는 탄생한 시기가 다르고 내용도 달랐다. 자유민주주의는 이 두 사상의 합작품이다.[73위대한 생각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열렬히 주장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전까지는 절대왕정과 봉건적 신분제 때문에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 사실 상 없었다. 그러나 상공업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시민계급은 개인의 자유를 외쳤다. "우리에게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달 라!" "우리의 재산은 우리 노동의 산물이며 정당한 것이니 건드리지 말라" 이런 시민의 기본권과 재산권은 이후 자유민주주의 원리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가 되었다. 자유주의는 주권재민의 원칙을 주장했다. 왕권신수설에 따르면 왕권은 신이 부여한 것이다. 이 때문에 왕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권 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자유주의사상가들은 '사회계약설'을 주장했다. 그들은 조목 조목 따졌다. 왕권을 비롯한 모든 권력은 사회 구성원들의 자발적 합의에 근거한다는 것, 따라서 주권은 민주에게 있다는 것 등 왕권신수설의 오류를 파헤쳤다. 또 그들은 시민혁명을 통해 그것을 제도화시켰다. 법 앞의 평등, 법에 의한 통치(입헌주의), 국민이 선출한 의회와 그것에 의한 입법(의회제도),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의 분리(삼권분립)등이 그 과정에서 구체화되었다. 자유주의는 시장의 원리와 자유방임 원칙을 주장했다. "경제활동은 시장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수요와 공급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연스럽게 조절되고, 경제는 원활히 운영된다. 따라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할 여지는 없고, 모든 것을 개인들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이다."[74 위대한 생각들] 자유주의자들이 가졌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재산은 개인의 노동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고, 가난한 것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나 사회는 가난에 대해 전혀 책임질 필요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는 빈곤과 실업의 원인이 몽땅 개인의 태만, 무절제, 협잡 등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사회구조와 제도가 빚어내는 빈곤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러나 실제로 빈곤의 문제, 빈부의 문제 등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문제는 그냥 놓아둘 경우 더욱 심화되어 결국에는 사회적으로 곪아 터진다. 따라서 사회와 국가는 당연히 이 문제에 적극 개입하여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자유주의는 이를 완전히 방기해 버렸다. 이것이 자유주의의 한계였다.[78위대한 생각들] 자유주의는 이처럼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포기되든지 개선되어야 했다. 자유주의에 민주주의가 더해진 것이 다. 동시에 고전적 자유주의는 수정되었다.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자연스럽게 결합된 것은 결코 아니다. 민주주의가 자유주의를 싫어했다기 보다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강제결혼이었다고 할 수 있다.[78위대한 생각들] 루즈벨트의 이런 정책들은 자유방임주의 경제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국가는 이제 국민 생활의 전 분야에 깊이 개입하게 되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70

71 었다. 국가가 밤에 도둑을 지키는 '방망이든 경찰'에서 어떤 일이든지 처리하는 '거대한 거인'으로 바뀐 것이다. 우리는 이 거대한 거인을 복 지국가( 福 祉 國 家, Welfare State)라고 부른다. 복지 정책의 구체적 내용은 국민의료보험제도, 국민연금제도, 무상의무교육제도, 실업보험제 도, 상해보험제도 등이었다. 이렇게 해서 자유민주주의가 탄생했고,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이를 통치 이념으로 채택했다.[82위대한 생각들] 이렇듯 '네이션'은 그리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 못하다. 국가, 국민, 민족이라는 개념은 서구에서 중세 이후, 곧 근대로 넘어오면서 생긴 것이다. 비록 '우리는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진 인간 집단들이 오랫동안 지속되어왔을지라도 말이다. 잔 다르크 이야기에 나오는 "프랑스를 구하라"는 말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 시기의 사람들 사이에는 영국과 구별되는 '프랑스 민족'이라는 의식이 형성되어 갔음을 명확 히 보여주기 때문이다.[92위대한 생각들] 언어와 문학에서도 국민적 통일의 경향이 나타났다. 중세 유럽에서는 라틴어가 지식인들의 언어였다. 영국 사람이든 이탈리아 사람이든 책을 낼 때는 라틴어를 쓰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중세 말기가 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민족언어로 책을 쓰기 시 작했다. 예를 들어 14세기에 단테는 이탈리아어로 신곡 La Divina Commedi 을 썼고, 초서Geoffery Chaucer는 영어로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 를 썼다. 그 후 민족어 또는 민족국가의 국어가 점차 문화적 표현수단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루터는 신약성 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했다. 셰익스피어는 영어로 수많은 작품을 씀으로써 영국인에데 정신적 양식을 제공했다.[94위대한 생각들] 영국과 프랑스는 이런 민족주의 과제를 시민혁명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서서히 달성해 나갔다. 그런데 유럽 전체를 놓고 볼 때 특히 중 요한 것은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다. 먼저 프랑스 대혁명은 영국의 청교도혁명이나 명예혁명에 비해 더욱 철저히 봉건제도를 파괴 했다. 나폴레옹전쟁은 양면적이었다. 한편으로 나폴레옹 전쟁은 점령국들에 나폴레옹 헌법을 선포함으로써 혁명 이념을 그 나라 국민들 사이 에 확산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다른 한편으로 나폴레옹은 점령국 국민들 사이에 민족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역할을 했다. 침략을 받 은 나라의 국민들은 힘을 합해 침략자를 물리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치단결했고, 그 과정에서 전에 없던 민족 감정이 싹튼 것이다.[97위대 한 생각들] 신생독립국가를 중심으로 한 제3기의 민족주의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민족'이 없는 민족주의를 추구 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겨졌다. 아프리카의 지도를 한 번 보자. 이들의 국경선은 일직선으로 쭉쭉 뻗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제국주의국 가가 식민지 지배에 편리하도록 그어놓은 경계선을 그대로 국경선으로 삼아 독립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이 때문에 국가의 경계가 민족 의 경계와 일치하지 않는 일이 많았다.[99위대한 생각들] 파스즘을 하나의 정치사상과 운동으로 정립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정치가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였다. 이탈리아어인 파쇼Fascio는 많은 사람들의 의사를 하나로 묶어 다발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맨 처음 19세기 말에 남부 이탈리아에서 오로지 소요를 일삼는 주 민들의 문장으로 사용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선전문구로 채택되기도 했다. "이탈리아 국민이여, 단결하라!" 호소하 기 위해 파쇼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113위대한 생각들] 같은 시기에 다른 나라에서도 유사한 독재체제가 출현했다. 독일에서 나치 정권이 등장했고, 천황( 天 皇 )이라는 정신적 지주를 바탕으로 일본에서는 군국주의( 軍 國 主 義 )가 나타났다. 그 명칭과 특성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들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세 나라의 독재 체제를 한데 묶어 '파시즘'이라고 불렀다. 이는 넓은 의미의 파시즘인 것이다. 지금도 파시스트(Fascist, 영어), 또는 파쇼 (Fascio, 이탈리아어)는 독재, 독재자라는 의미로 통한다.[114위대한 생각들] "베토벤, 괴테, 칸트를 낳은 독일 민족이 왜 이 같은 히틀러의 광란을 묵인하고 추종했는지, 그것이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 다."[116위대한 생각들] 한 미국인이 독일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 전에 손님은 음식값을 이미 달러로 치렀다. 음식이 나와 맛있게 먹고 식사를 막 끝 내려 할 때 식당 종업원이 음식을 또 가져 오는 것이었다. 손님은 음식이 이미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종업원이 대답했다. "알아요.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71

72 식사하시는 동안 또 독일 마르크화의 가치가 떨어졌거든요. 하지만 달러의 가치는 변화가 없으니 결국 손님은 음식 값을 더 낸 셈이죠. 그래 서 다시 음식을 가져온 것입니다.[120위대한 생각들]... 그래서 사람들은 성냥 대신 지폐에 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며 오늘 절약했다고 웃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10조 마르크짜리 지폐도 등장했다. 물론 그 이후에 경제 상황은 좀 호전되었다. 하지만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은 다시 독일 경제를 심각 하게 악화시켰다. 실제로 나치의 경제 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33년 2월 히틀러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앞으로 4년 안에 완전고용을 실현하겠다고 약속했 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한 그 약속을 히틀러는 지켰다. 1936년 미국의 실업률이 20%였던 데 반해 독일에서는 완전고용을 넘 어 일부 분야에서는 노동력 부족현상까지 나타났다. 물론 그 같은 국가 주도의 경제 정책은 결국 나치가 제2차 세계 대전을 도발하는 원인이 되었지만, 극심한 불황과 실업에 시달리던 당시 독일인들에게는 긴 가뭄 끝의 단비가 아닐 수 없었다.[121위대한 생각들] 인류를 가장 경악하게 한 것은 나치의 반유태주의 운동이었다. 그 잔혹성은 대규모 유태인 학살을 통해 드러났다. 히틀러 치하에서 유태 인들은 모든 전문직에서 쫓겨났고, 자신이 유태인임을 밝히는 증명서를 소지하고 다녀야 했으며, 몇 가지 특정한 이름만 사용해야 했다. 그들 은 극장이나 수영장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독일의 유태인들은 모든 법적 권리를 박탈당한 것이다. 이런저런 명분으로 유태인을 학살하고, 그 들의 기업과 재산을 빼앗고, 유태교 교회를 불태우던 나치는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해서는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히틀러는 1939년 국회 연설 에서 이미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유태인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123위대한 생각들] 학자 우대는 여러 면에서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먼저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거의 완벽하게 보장되었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연구하여 발표할 수 있었고, 그 생각이 충분히 깊고 현실적이면 일약 재상으로 임명될 수도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학문의 흥성과 발전을 가져왔다. 다음으로 학자 우대는 신분제의 교란을 더욱 촉진시켰다. 노예 출신이든 장사꾼 출신이든 학문에 조예가 깊으면 누구나 대접을 받고 출세할 수 있었다. 귀족들만 잘 나가던 시절은 이제 "아! 옛날이여"가 되어 버렸다.[143위대한 생각들] 사마천( 司 馬 遷 )의 사기 史 記 에 따르면 공자의 제자는 3,000여 명이었고, 그 가운데 학문에 능통한 사람만도 72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런 제자들 가운데 귀족의 자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상인, 빈민, 농민 등 평민 출신이었다. 공자에게 이렇게 많은 제자가 모여 든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로 공자가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평민들도 제자로 받아 주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때문에 공자는 배우려는 학생들에게 아주 적은 수업료만 요구했다. 당시에 학문이란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면 학문 을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런데 공자는 생각이 달랐다. 공자는 일찍이 이런 말을 했다. "속수(지금으로 치면 명태 열두마라로, 가르침을 청하는 데 쓰는 가장 적은 예물)의 예 이상을 치른 사람을 내가 가르쳐 주지 않은 적이 없 다." - 논어 옹야 편[144위대한 생각들] 공자는 예의정치가 실현된 세상,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대도( 大 道, 큰 진리)가 행해지면 천하에 공의( 公 義, 사회정의)가 구현된다. 현명한이를 지도자로 뽑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관직을 주며, 신의 와 화목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어버이만 어버이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자식만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노인으로 하여금 편안 한 여생을 보내게 하고, 장년은 일할 여건이 보장되며, 어린이는 길러 주는 사람이 있고, 의지할 곳 없는 과부와 홀아비를 돌보며, 병든 자도 모두 부양 받는다. 남자는 남자의 일이 있고, 여자는 여자의 일이 있다. 재화가 땅에 버려지는 것을 싫어하지만 반드시 사적으로 저장할 필요 가 없다. 스스로 노동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지만 반드시 자기만을 위해서 일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남을 헤치려는 음모가 생기지 않고, 도 적이나 난적( 亂 賊 )도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집집마다 바깥문을 닫을 필요가 없다. 이런 사회를 '대동( 大 同 )'이라고 한다. - 예기 禮 記 예운 禮 運 편[152위대한 생각들]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72

73 공자의 사상을 정통으로 이은 사람은 공자보다 약 100년 뒤에 살았던 맹자이다. 공자와 달리 맹자의 일생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매우 적다. 맹자에 대한 많은 이야기 가운데 가장 신빙성 높은 것은 그가 기원전 372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289년에 죽었다는 것이다. 맹자의 이름 은 가( 軻 )이고, 이름 대신 부르는 일종의 별명인 자( 字 )는 거( 車 )였다. 거는 수레이다. 맹자는 평생 수레를 타고 천하는 돌아다녔다. 전국시대 라는 난세에 태어난 맹자는 공자와 같이 세상을 바로 잡겠다는 뜻을 세우고 그 뜻을 펴기 위해 중국 전역의 왕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뜻을 들어주는 권력자가 없어 공자처럼 제자들을 교육하고 학문을 탐구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그 결과물이 바로 맹자 이다.[152 위대한 생각들]... 맹자의 사상에는 혁명을 인정하는 주장이 있다. 혁명을 뜻하는 영어 '레볼루션Revolution'은 사회를 한 바뀌 돌리는 것을 뜻한다. 사회 전체의 위아래를 뒤바꿔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한자어 혁명( 革 命 )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 '혁'은 바꾼다는말이도, '명'은 천명( 天 命 )을 뜻 한다. 본래 천자는 하늘의 아들로서 하늘의 명령, 곧 천명을 받아 천하( 天 下 )를 다스린다. 그런데 혁명이란 천명을 바꾸는 것, 곧 왕을 바꾸는 것을 가르킨다. 그럼 언제 왕을 바꾸는가? 맹자는 왕이 어질지 못하고 백성을 사랑하지 않아 민심을 잃었을 때 혁명을 한다고 했다. 물론 맹 자는 서구에서 말하는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도 공자처럼 벼슬을 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 학자였을 뿐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 같은 혁명론을 주장했을까? 그건 한마디로 "잘못하면 갈아 치울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오."라고 왕에게 경고한 것이었다. 맹자의 말을 들어 보 자. "백성들이 가장 존귀하고 사직( 社 稷 )은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벼운 존재이다. 이런 까닭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면 천자가 되고, 천자의 마 음을 얻으면 제후가 되며, 제후의 마음을 얻으면 대부가 되는 것이다. 제후가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다른 사람으로 갈아 치운다. 좋은 제물을 준비하여 때를 어기지 않고 제사를 올렸는데도 가뭄이나 홍수가 나면 사직도 갈아 치운다.[155위대한 생각들] 맹자의 왕도정치가 실현된 세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맹자가 대략적으로 그린 모습은 이렇다. "일정하 생업이 없으면서도 일정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선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백성에게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일정한 마음을 가질 수 없고, 일정한 마음이 없으면 멋대로 행동하여 나쁜 짓을 저지르기 쉽다.... 그러므로 훌륭한임금은 백성의 생업을 만들어 주어 위 로는 부모를 섬길 수 있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부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또한 풍년에는 종신토록 배부르게 먹고, 흉년에는 죽음을 면할 수 있어야 한다.... 다섯 이랑의 집 둘레에 뽕나무를 심으면 쉰 살 된 사람이 비단 옷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닭, 돼지, 개 등의 가축을 번 식시킬 시기를 놓치지 않는다면 일흔 살 된 사람이 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전쟁 등을 일으켜) 백 이랑의 밭에 농사지을 시기를 빼앗 지 않는다면 여덟 식구의 갖고이 굶주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학교 교육을 근엄하게 실시해 효성과 우애의 뜻을 되풀이해 가르친다면 백발 노인이 무거운 것을 이고 지고 다니지 않아도 될 것이다.[156위대한 생각들]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 사상가들은 '자유'를 추구했다.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절대 자유, 그 누구나 깨닫기만 하면 도달할 수 있는 자유를 추구했다. 그들의 사상은 한마디로 '절대 자유를 추구한 사상'이다. 또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현실도피사상', '은둔의 사상'이 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도가는 유가와 뚜렷이 대비된다.[170위대한 생각들]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사상을 우리는 도가라고 부른다. 그들의 사상이 '도( 道 )'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가 무엇인지 를 이해하면 도가 사상의 절반은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라는 개념은 알쏭달쏭해서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도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것은 무엇'이라고 범위를 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다 '나무' '빵' 같은 이름을 붙이면 우리는 곧 지칭하는 것을 떠올린다. '여름에는 푸르고 얼기설기 가지가 있고', '배고플 때 먹으면 좋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곧 범위를 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는 범위를 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 仁 )이나 의( 義 ) 같은 것은 도가 아니다. 그래서 노자는 어쩔 수 없 이 이름을 붙일 경우에 '도'라고 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 道 德 經 을 직접 읽어 보자.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참된 도가 아니고, 이름을 지어 명명할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 無 名 )은 천지의 시초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73

74 이고,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노자는 도를 무( 無 )라고 표현한다. 원래는 무는 유( 有 )의 대립어이기 때문에 소유를 부정하는 말로 쓰이기는 했어도 존재를 부정하는 개념으 로 쓰이지는 않았다. 따라서 노자가 말하는 무는 일체를 부정하는 개념이 아니다. 다만 상대적인 성격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를 나타낸 것일 따름이다. 상대적이라는 것은 절대적이라는 말이고, 또 무한정의 힘을 갖는다는 의미이다.[173위대한 생각들] 우리는 보통 약한 것보다는 강한 것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싶어서 힘을 키우기도 한다. 노자는 이런 생각에 반대한 다. 다른 사람을 '힘'으로 이기는 것을 '강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은 약하다. 그러나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 물을 능가하는 것은 없 다. 예를 들어 떨어지는 물방울은 바위를 뚫고 철을 뚫는다. 따라서 겉으로 보기에 부드럽고 약한 물이 진짜 강한 것이다. 그래서 노자가 말 한다. "가장 선( 善 )한 것은 물과 같다." "약한 것은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은 강한 것을 이긴다." 우리는 보통 텅 빈 것보다는 꽉 찬 것을 좋아한다. 집 안을 가구와 가전제품으로 채우고 머릿속을 지식으로 채우고 싶어 한다. 그러나 노자 는 빈 곳을 중요시한다. 집에 사람이 살 수 있으려면 빈 곳(공간)이 있어야 하고 물 잔이 쓸모 있는 이유는 물을 담을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또 수레바퀴에서 중요한 곳은 바퀴살들이 아니라 그 바퀴살이 만들어 놓은 공간이다. 이 공간으로 인해 바퀴가 자기 역할을 하여 수레가 굴 러 갈 수 있는 것이다.[175위대한 생각들] 노자는 깊은 덕을 가진 사람을 들어 그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마음에 덕을 깊이 간직한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다. 벌, 전갈, 독사도 쏘지 못하고 맹수도 덤벼 들지 못하며 사나운 새도 할퀴지 못한다. 뼈 는 연약하고 근육은 부드러우나 손아귀의 힘은 강하다.... (중략)... 하루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것은 음양의 조화가 완전히 이루 어졌기 때문이다.[181위대한 생각들] 이 같은 무간섭의 정치야말로 노자가 생각하는 최선의 그리고 최고의 정치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의 정치란 발버둥친다고 해서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통치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백성에게 해가 될 따름이다. 마치 수렁에 빠진 소처럼 스스로 허우적거리면 허우적거릴수록 백성은 더욱 깊은 고통에 빠지고, 세상일은 엉망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백성들이 왕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 르도록 하는 것이 최고의 왕노릇이다. 이처럼 지배자가 백성의 삶에 전혀 참여하지 않으면서, 인위적으로 통치하지 않으면서 다스리는 것이 '무위( 無 爲 )의 정치'라고 한다. 이 주장 은 사실 당시의 지배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지배자들은 군비경쟁과 전쟁으로 세월을 보내고, 백성은 굶주림과 헐벗음 속에서 세월을 보내는 것이 당시의 정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위의 정치를 주장한 것은 전쟁의 폭력을 일삼는 왕을 비판한 것이고, 그들 의 입맛을 씁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무위의 정치론은 유가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와 개혁에 대한 비판이었다.[183위대한 생각들] 공자가 대동세계( 大 同 世 界 )를 꿈꾸었던 것처럼 노자도 자신의 사상이 제대로 구현된 세상을 꿈꾸었다. 노자의 이상향은 '작은 나라'이다. 인구가 적고 서로 왕래도 거의 없는 소박한 나라. "작은 국가에 얼마 안 되는 백성, 이것이 우리들의 이상향이다. 백성들에게 무기가 있더라도 그것을 사용할 기회가 없도록 하고, 또 백성들에 게 생명을 중히 여기게 하고 먼 곳으로 이주해가지 않도록 한다. 그러면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고 나가는 사람이 없고, 크고 작은 갑옷과 투 구가 있더라도 그것을 입고 전쟁을 하는 사람도 없게 된다. 백성들로 하여금 원시로 되돌아가 문자 대신 새끼를 꼬아서 뜻을 전달하게 한다. 백성들은 스스로 만든 요리를 맛있어하면서 입맛을 다시고, 스스로 짠 옷을 자신 있게 껴 입고, 내집에 살면서 편안하다고 생각하고, 옛날부터 해온 것들에 만족한다. 손을 이마 위에 얹으면 코 앞에 보 이는 이웃 나라의 닭이 시간을 알리는 소리,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있는데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는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74

75 일이 없다."[184위대한 생각들] 노자와 장자의 도가 사상은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도입되어 정착하는 데 다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불교는 중국인들에게 매우 낯선 사상 이었다. 그런데 도가가 그 생경함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반야심경 般 若 心 經 의 핵심개념인 '공( 空 )'을 노자의 장자의 '무'를 통해 이해한 것이다. 이처럼 도가는 불교가 막 수입되던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도가 사상은 오늘날 더욱 주목받고 있다. 도가 사상에 들어 있는 문명 비판과 생태주의, 여성주의는 극단으로 치닫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치 유할 대안 사상의 씨앗으로 조명되기도 한다. 도가는 삶에 찌들어 지친 사람들에게 잠시 쉴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고, 늘 다른 사람과 경 쟁하며 바쁘게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자신을 되돌아 볼 기회를 제공한다. 또 세상의 경쟁에서 밀려 울고 있는 약자와 패배자에게 따스 한 위로의 말을 전해 준다. 나아가 사회의 주류 사상이나 질서를 거부하고 자신의 가치관대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삶의 철학 이 되어주기도 한다.[189위대한 생각들] 기원전 2세기 말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이 낯선 사상을 받아들여서 자신들의 생각과 문화가 묻어 있는 새로운 사상으로 재창조했다. 인도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정착하기까지는 거의 1,000년이 걸렸다. 인도불교는 크게 세 단 계를 거치면서 중국의 불교로 재창조되었다. 그 세 단계를 의탁 불교, 격의 불교, 본의 불교라고 부른다. 초기인 의탁 불교시대에는 중국 도교의 한 파로 이해되던 시기이다. 이 때 불교는 도교의 양생호흡법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격의 불교 시대에는 불교의 핵심 개념인 '공'사상을 받아들였는데, 이때에도 도가의 개념을 빌려서 '공'을 이해하는 한계가 있었다. '연기( 緣 起 )'와 동일한 '공'을 노자의 ''무'나 장자의 '소요'와 비슷한 의미로 잘못 이해한 것이다. 본의 불교 시대에 와서야 중국인들은 비로소 불교를 본격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공을 연기의 개념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처럼 천 태( 天 台 ), 화엄( 華 嚴 ), 선불교( 仙 佛 敎 )등 우리에게 전해진 중국 불교는 1,000년의 시행착오를 거쳐 새롭게 창조된 중국의 불교이고 그 과정에 서 도가 사상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발전했다.[194위대한 생각들] 한비자는 맹자처럼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느니, 순자처럼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느니 하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그런 논의는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설사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 해도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느냐 이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돈을 중심으로 뱅뱅 돌고 있다. '돈' 때문에 사람이 많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생기고, '돈' 때문에 모두가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본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단지 그들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 그들이 처한 사회적 조건 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202위대한 생각들] 법가의 주장은 냉정하다. 사람들은 이 진실 때문에 법가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을 좀 꺼림칙해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너 무 노골적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 앞에 서면 왠지 알몸이된 기분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법가의 주장을 싫어한다. 유가 는 법가를 '아비어미도 몰라보는 불한당'이라고 욕했고, 도가는 법가를 '권력의 화신'이라며 공격했다.[203위대한 생각들] 한비자는 이런 것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하늘의 뜻이니, 점이니 하는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세상의 일은 모두 인간이 하는 것이고, 모든 일의 결과는 인간의 행동에 달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법가는 일체의 미신을 배격한 합리주의 사상이었다.[205위 대한 생각들]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모르는 자는 반드시 옛법을 변경하거나 관습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성군( 聖 君 )은 변경할 만한 일이라면 변경해도 좋다. 그렇지 않은 일이라면 영구히 옛것을 지키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변경하고 변경하지 않은 것에 구애를 받지 말아야 한다. 단지 나라를 다스려서 백성이 행복하게 되는 일이라면 옛 관습을 그래도 따르고, 새로운 관습을 기르는 것이 좋다면 새 사업을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75

76 일으키는 것이다. 요컨대 군주는 백성의 행복이 될 만한 것을 중심으로 해야 하므로 반드시 옛것을 그리워할 것도 없고, 꼭 새 사업을 일으켜야 하는 것도 아 니다. 옛것 가운데 변경해서도 안되는 것이 있고, 오랫동안 내려온 관습 가운데도 변경해야 할 것이 있으므로 그 결과를 잘 생각해 결정하면 좋을 것이다."[206위대한 생각들] 마키아벨리의 말을 들어 보자. "그러나 나의 의도는 독자에게 유익한 것을 쓰려는 것이다. 쓸데 없는 사변을 노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사실 을 추구하는 것이 훨씬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공화체제나 군주 체제를 고안해 냈다. 그러나 상상이 대 체 무엇에 소용된다는 말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명제와 실제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전혀 다른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명제 때문에 인간이 실제로 살고 있는 현실을 놓친다면 이는 자기 보존을 하는 것이 아니라 파멸에 빠트리는 것이다." 군 주론 [207위대한 생각들] "법을 실행할 때는 신분이 귀하다고 해서 아첨하지 않는다. 비록 신분이 높은 자라 할지라도 법을 위반하면 즉시 제재를 가한다. 이것은 마치 먹줄을 쓸 때 굽은 곳이 있다고 해서 거기에 맞추어 먹줄을 굽힐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지혜가 있는 자도 법의 적용에서 벗어날 수 없다. 법에 위배된 일은 아무리 변명하더라도 정당화되지 않으므로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 법 앞에서는 동등한 것이다. 또 용감한 자가 그 용기를 믿고 다투어보아도 결코 법을 굽힐 수는 없다. 한비자 [212위대한 생각들] 한비자의 입을 통해 우리는 법가에서 주장한 정치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공자와 맹자가 주장한 정치는 '예의 정치'이고 노자 가 주장한 정치는 '무위의 정치'이다. 이에 비해 한비자나 상앙이 주장한 정치는 '법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한비자, 상앙, 이사 같은 사상가 들을 법가라고 부르는 것도 그들의 핵심사상이 '법'이기 때문이다. 노자, 장자의 핵심 사상이 '도'이기 때문에 그들을 '도가'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212위대한 생각들] "군주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고 싶다든지 이런 것을 좋아한다는 마음을 신하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 만 약 군주가 바라는 것을 드러내고 좋고 싫은 것을 밝히면 신하는 마음에 그대로 말하지 않고 군주의 마음에 영합하도록 꾸미게 된다. 또 군주 는 자기의 의사를 말해서는 안 된다. 처음에는 여러 의견을 귀담아 듣도록 한다. 만약 군주가 의견을 말해 버리면 신하는 군주의 뜻에 반대 하는 것이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해서 그 뜻에 영합한 것만 보여주게 된다. 월나라 왕이 용맹을 좋아하자 백성들 가운데 서로 죽겠다고 나서는 자가 많았고, 초나라 영왕이 허리가는 미인을 좋아하자 나라 안의 여자들 이 영왕의 마음에 들고자 다투어 밥을 굶었다. 제나라 환공은 질투심이 강하고 여색을 좋아했다. 그러자 수조라는 자가 스스로 거세해 내시 가 되었다.(이자는 훗날 반란을 일으켰다.) 환공은 맛있는 음식을 좋아했는데 역아라는 자가(환공이 아직 못 먹어본 고기를 맛보게 하려고) 자기의 장남을 삶아서 바쳤다.(이자도 역시 후에 반란을 일으켰다.) 한비자 [213위대한 생각들] 군주가 신하를 부리는 데는 일곱 가지 술책이 있고, 신하의 간사함을 살피는 데는 여섯 가지 기미가 있다. 첫째, 여러 신하의 말을 서로 비교 검토할 것, 둘째, 죄 지은 자는 반드시 처벌해 군주의 권위를 밝힐 것, 셋째, 공이 있는 자는 반드시 포상해 그들의 능력을 다하게 할 것, 넷째, 신하의 제안을 밝고 정확하게 결정하고, 일일이 그 실적을 확인해 문책할 것, 다섯째, 때로는 의심스러운 명령을 내려 신하를 시험 하되 그 실력을 측량할 것, 여섯째, 군주 스스로 충분히 알고 있어도 모르는 척하며 신하에게 물어 볼 것, 일곱째, 일부러 말을 거꾸로 하고 일을 반대로 해서 신하를 시험할 것, 이상 일곱 가지는 군주가 반드시 사용해야 할 방법이다. 한비자 [215위대한 생각들] 엄정하던 신분제도는 춘추전국시대라는 혼란기를 거치면서 무너져 내렸다. 이제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위 공직에 임명되었다. 노예 출신이건 농부건 상관없었다. 귀족과 일반 백성을 구분하는 것은 전처럼 큰 의미가 없었다. 또한 법이 전면적으로 시행되었다는 것은 왕권이 전보다 훨씬 강화되었다는 뜻이다. 사회적으로 힘이 약화된 귀족들을 왕이 힘으로 제압하기에 이른 것이다.[217위대한 생각들]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76

77 법가 사상을 기반으로 중국이 통일된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공자가 그리워했던 주나라 시대의 봉건제도로는 광대한 중국 전 역을 단일하게 통치할 수 없었다. 통치의 합리적인 기준(법)을 설정하고, 일사분란하고 엄정하게 법을 집행하며, 정책 집행 결과에 대해 엄격 하게 통제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런데 당시 중국에서 전국을 통치하는 기술, 방법, 철학을 제공할 수 있는 사상은 법가 밖에 없었다.[217위대 한 생각들] 또한 법가 사상은 세상을 파악하는데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어쩌면 세상이란 이기심으로 가득 찬 인간들이 무한 경쟁을 벌이는 냉 혹한 곳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살이에는 사랑, 정, 믿음 같은 도덕이 큰 역할을 한다. 그러 나 법가는 이를 무시한다. 더욱 큰 문제는 법가 사상에는 냉혹한 세상을 훈훈하게 바꿔보려는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현실이란 냉혹하니까 그것을 철저히 인정하고 활용하자는 생각밖에 없다. 그러나 정치란 그런 것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주된 기능은 현실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국민을 이끄는 것이다. 유가와 다르게 법가의 사상에는 이것이 없 다. 그냥 현실을 인정하고 안주할 뿐이다. 우리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냉철하게 보려는 것도 사실은 그 극복 방법을 찾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법가에서는 그것이 없다. 다만 군주의 편에 서서 그것을 철저히 이용하려 할 뿐이었다.[220위대한 생각들] 한비자는 다양한 학파의 사상을 깊이 연구하고 각각의 장점을 취해 자신만의 사상체계를 구축했다. 스승 순자로부터는 냉철하고 객관적인 현실 인식,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정신, 예의정치 사상 등을 받아 들였고 신불해와 상앙 등으로부터 부국강볍의 정치술, 노자와 장자로부터 무 위의 정치술과 우민정치사상 등을 섭취했다. 이 같은 한비자의 사상은 한비자 에 온전히 담겨져 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한비자 는 20권 55편으로 이루어져 있다.[222위대한 생각들] 다산( 茶 山 ) 정약용( 丁 若 鏞 )이 전라남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큰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내가 귀양이 풀려서 돌아가느냐, 못 돌아가느냐 하는 일은 참으로 큰 일이나, 죽고 사는 일에 비하면 극히 작은 일이다. 사람이란 때로 물고 기를 버리고 웅장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만 귀양이 풀려 집에 돌아가느냐, 못돌아가느냐 하는 작은 일에 잽싸게 다른 사람에게 꼬리 흔들며 애걸하고 산다면, 만약 나라에 외침이 있어 난리가 터질 때 임금을 배반하고 적군에 투항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229위대한 생각 들] 다산 정약용, 그는 지금부터 약 240여 년전에 태어난 조선의 대학자요, 사상가요, 걸출한 시인이다. 일찍이 정인보( 鄭 寅 普 ) 선생은 정약용 을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라고 평했다. 정약용은 약 10여년의 벼슬 생활과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통해 503권의 책 과 2,500여편의 시를 남겼다. 그가 연구한 분야는 방대하기가 그지 없다. 역사와 철학, 법률과 정치는 기본이고 천문과 지리, 언어와 시, 건축 과 기계, 의학과 음악 등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분야 가운데 빼놓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방대한 분야를 연구하고 저술할 수 있을까?" 혀를 내두르게 한다. 조선의 실학( 實 學 )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되는 정약용, 그는 유학자이다. 그의 사상은 유 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정약용을 통해 우리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형성된 유가 사상이 조선 후기에 들어 얼마나 민주적이고 사회개혁적인 사상으로 발전했는지를 살펴 볼 수 있다.[230위대한 생각들] 그 시대에는 세 가지 정책( 三 政 ), 곧 전정( 田 政 ), 군정( 軍 政 ), 환정( 還 政 )이 농민 수탈의 대명사였다. 전정은 백성들에게 거둬들이는 토지 세이고, 군정은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 양민에게서 거둬들이는 국방세였다. 조선 시대의 법에는 양반과 노예를 제외한 일반 백성은 일정 기간 군복무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생업에 종사하다 보니 실제로 그럴 수 없어서 대신 세금을 낸 것이다. 환정은 봄에 가난한 백성 들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국가는 이 세가지 정책을 통해 재정의 대부분을 충당했다. 삼정은 국가재정의 골간 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삼정의 집행이 제멋대로였다는 것이다. 돈과 인맥을 통해 관직을 얻은 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재산을 모으는 것이었고, 이들은 바로 삼정을 이용해 부당하게 재산을 축적했다.[236위대한 생각들] 통치자가 민중을 위해 있는가? 민중이 통치자를 위해 있는가? 민중은 곡물과 옷감을 내어 통치자를 섬기고, 수레와 종들을 내어 통치자 를 맞이하고 보내며, 자신들의 고혈과 골수를 짜서 통치자를 살찌워주니 민중이 통치자를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다. 통치자가 민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77

78 중을 위해 있는 것이다. 먼 옛날에는 민중뿐이었지 어찌 통치자가 있었겠는가? 민중은 순박하고 평화롭게이여 살았는데 어떤 사람이 이웃과 다투다 결정을 짓지 못 했다. 마을에 공정한 말을 잘하는 어른이 한 명 있어서 그들은 그 어른에게 가서 판결을 받았다. 그 후 온 마을 사람들이 그 어른에게 복종 하여 그를 이정( 里 正 )이라고 불렀다. 여러 마을의 민중이 서로 분쟁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들 가운데 한 어른이 준수하고 지식이 많았기에 그들은 그 어른에게 가서 판결을 받았 다. 여러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 어른에게 복종하여 그를 당정이라고 불렀다. 여러 지역의 민중이 지역간의 분쟁을 결정짓지 못했다. 그런데 어떤 어른이 현명하고 덕이 있기에 그들은 그 어른에게 가서 판결을 받았다. 여러 지역 사람들이 모두 복종해 그를 주장이라고 불렀다. 이상과 같은 사정과 절차에 의해 여러 주의 대표들이 한 사람을 따르고 존경해 대표로 삼고 제후라고 불렀고, 여러 국의 대표들이 한 사람을 따르고 존경해 대표로 삼고 방백이라고 불렀으며, 사방의 방들은 한 사람을 따르고 존경해 으뜸으로 삼아 황제라고 불렀다. 통치자론 [242위대한 생각들] 정약용이 유배 생활중에 읊은 시이다. "어렸을 때는 성인을 배울 생각을 했고 중년에 들며 점차로 현인이라도 바랐어라. 늙어가며 우하( 愚 下 )도 달게 여겼지만 근심에 싸여서 잠들 수 없어라. 한 알의 야광주가 장삿배가 실렸다가 바다 복판서 바람 만나 가라앉으니 만고에 그 빛을 낼 수 없어라. 취해 북산에 올라 통곡하니 울음소리 푸른 하늘 끝까지 닿았네. 옆 사람들 내 뜻을 알지 못하고 내 한 몸 궁박해서 운다고 하네. 술 취해 정신 없는 사람들 속에 몸가짐 단정한 선비가 있네. 모두들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이 사람만 미쳤다고 몰아세운다네. 근심에 싸 여 [247위대한 생각들] 당시에 논의되었던 토지제도 개혁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정전제( 井 田 制 )와 균전제( 均 田 制 )이다. 첫 번째로 정전제의 '우물 정( 井 )'자는 정전제의 내용을 잘 보여준다. 정사각형인 토지를 우물 정자 모양으로 나누어 보자. 분할된 토지는 모 두 아홉 조각이 된다. 정전제는 이것을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그 속에서 세금 문제를 해결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아홉 조각 가운데 여덟 조각 은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가운데 한 조각은 공전으로 한다. 농민들은 각자 자기에게 분재된 땅을 경작하는 동시에 서로 힘을 합해 가운데 있 는 공전을 경작한다. 그리고 공전에서 나오는 생산물로 세금을 충당한다. 정전제로 중국 주나라 때 실시된 적이 있는 토지제도이다. 유가에서 는 이를 가장 이상적인 토지제도로 보았기 때문에 토지제도 개혁 문제만 나오면 항상 정전제가 거론되었다. 두 번째로 균전제는 정약용이 스승으로 모신 성호 이익이 제안한 제도이다. 균전제는 말 그대로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자'는 것인데 이렇게 해서 토지 소유의 집중을 해소하자는 것이다. 그 방법은 이렇다. 국가가 한 가구에서 소유할 수 있는 토지의 기준을 작성한다. 모든 가구는 그 제한된 토지, 곧 영업전을 소유할 수 있다. 이 영업전은 모슨 일이 있어도 타인에게 팔 수 없지만 그 외의 토지는 마음대로 사고 팔수 있 다. 이렇게 하면 모든 농민이 균등하게 토지를 가실 수 있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토지개혁론 에서 위의 주장들을 하나하나 비판하며 자신 의 토지개혁론인 '여전제'를 주장한다. "농사짓는 사람이 토지를 갖게 하고 농사짓지 않는 사람이 토지를 갖지 못하게 하려면 여전제를 시해행해야만 한다. 여전이란 무엇을 말하는 가? 산골짜기 냇가의 지형을 따라 경계를 긋고 그 경계의 안을 여( 閭 )라 한다. 세 개의 여를 이라 하고, 다섯 개의 이를 방, 다섯 개의 방을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78

79 읍이라 한다. 여에는 대표인 여장을 둔다. 한 여의 토지는 거기에 속한 사람들이 함께 경작하며, 이 구역이니 저 경계니 하는 것 없이 오직 여장의 명령만 듣게 한다. 여장은 사람들이 하루 하루 일한 내용을 장부에 기록해 둔다. 가을에 추수를 마치면 곡식을 여장의 강당으로 실어 나른 후, 먼저 국가에 세금을 바치고 여장 의 노임을 준다. 그리고 나머지 곡식을 가지고 날마다 일한 것을 기록한 장부와 대조해서 사람들에게 분배한다. 토지개혁론 [250위대한 생각들] 정약용은 이 같은 토지제도를 근거로 몇 가지 다른 제도 개선책을 주장했다. 무엇보다 그는 놀고 먹는 선비(양반)들이야말로 사회의 큰 병폐이며,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비들도 농사를 짓거나 상업, 수공업등 생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글을 언제 읽 느냐는 항변에 정약용은 일을 마치고 밤에 집에 들어와 읽으면 된다고 대답한다.[251위대한 생각들] 정약용은 개혁적이고 실천적인 유가였다. 부단히 자신을 채찍질하며 학문과 저술에 몰입한 최고의 학자였지만 그의 학문은 학문을 위한 학문이나 공허한 이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부지런히 학문을 닦아 현실을 개혁하고 백성의 삶을 개선하는데 적극 참여한다는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조선 후기에 가장 온전하게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정약용이다.[258위대한 생각들] 정치부패, 사회 기강의 문란, 민중의 소요는 양심 있는 양반들 사이에 새로운 각성을 촉구했다. 조선의 정치와 사회를 개혁하려는 움직임 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 흐름을 이끈 사람들은 주로 권력에서 밀려난 양반이나 몰락한 양반들이었다. 그런 흐름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실학 이다. 실학은 실사구시학의 준말로 본래 뜻은 '실제적인 사물에서 그 진리를 탐구하다.'는 것이다. 이는 청나라 고증학의 학풍을 뜻하는 것인 데 조선에서는 여기에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학문이라는 의미가 더해졌다. 그래서 실학을 목표로 삼고 학문을 한 사람들은 농업, 상업, 수공업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연구하고 실천했다. 그 대표적인 학자들이 유형원, 이익, 홍대용, 박제가, 박지원, 김정희 등이다.[263위대 한 생각들] 전봉준은 법관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나의 적이요, 나는 너의 적이라. 내 너희를 쳐 없애고 나랏일을 바로 잡으려다가 도리어 너 의 손에 잡혔으니 너희는 나를 죽일 뿐이요. 다른 말은 묻지 마라. 내 적의 손에 죽기는 할지언정 적의 벌을 받지는 아니하리라.[269위대한 생각들] 전봉준을 사형을 담당했던 한 관리가 감동하여 후에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전봉준이 처음 잡혀 오던 날부터 끝내 형을 받던 날까지 그의 전후 행동을 잘 살펴 보았다. 그는 과연 풍문으로 듣던 말보다 훨씬 돋 보였다. 그는 외모로부터 뛰어난 인물이었다. 청수한 얼굴과 빛나는 눈을 가졌고, 엄정한 기상과 강한 심지는 세상을 한 번 놀라게 할 만한 큰 위인, 큰 영걸이었다. 과연 그는 평지돌출로 일어서서 조선의 민중운동을 대규모로 만든 자이니 그는 죽을 때까지도 뜻을 굽히지 아니하 고 본심 그대로 태연히 간 자이다.[270위대한 생각들] 정감록 의 내용은 조선의 운명을 예언한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나라가 바뀌고 조선은 다시 300년에서 500년 뒤에 멸망하여 이어 서 정씨 왕조가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여 들어선다는 줄거리이다. 백성들 사이에는 삼국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미륵 신앙도 널리 퍼져 있었다. 미륵 신앙에서 '미륵'은 현재 도솔천에 살고 있으나 약 56억 7 천만년 뒤에 지상 세계로 내려와 현재의 석가모니불을 대신하여 중생을 구원한다는 미래불이다. 미륵은 염부제 (중생이 살고 있는 지상 세 계)에 내려와 용화수 아래에서 세 번에 걸쳐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설법을 행하는데 이 때 일반인들도 이 설법에 참가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 는 것이다. 19세기에 백성들 사이에 새롭게 퍼져 나간 사상으로 '후천개벽'사상을 들 수 있다. 이는 오전과 오후가 번갈아 오듯 우주의 시간도 선천과 후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79

80 천이 있어 서로 순환한다는 사상이다. 그런데 지금의 운수는 선천 시대가 막을 내리고 후천 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가진 자의 탐욕과 부 패, 수탈과 착취, 약한 자의 설움과 분노는 선천 시대와 함께 막을 내리고, 새로 열리는 후천시대는 사랑, 평등, 평화의 세상이다. 후천이 열 리면 질병도, 관리의 수탈도, 여성에 대한 억압도 사라져 모두가 신선처럼 살 수 있는데 바로 지금 그 하늘이 열리고 있다는 것이 이 사상의 요지이다.[276위대한 생각들] 동학사상 가운데서 백성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다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하늘과 사람은 하나'라는 평등사상이다. 동학은 사람 이라면 누구나 하늘과 같아질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이미 하늘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하늘의 마음은 곧 사람의 마음이다.( 天 心 卽 人 心 ) 1대 교주 최제우 하늘과 사람은 똑 같다.( 天 人 如 一 ) 2대 교주 최시형 사람이 곧 하늘이다.( 人 乃 天 ) 3대 교주 손병희 이런 평등 사상은 당시 민중들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었고, 농민들의 봉기를 지지해 주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지배층에게는 이 같 은 동학이 사회질서, 곧 신분제를 무너뜨리는 사악한 주장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교조 최제우는 결국 '혹세무민( 惑 世 誣 民 )한 죄로 체포되어 사형당하고 동학은 불법이 되었다.[279위대한 생각들] 농민군이 형성되자 이들의 행동을 통일해야 했다. 어제는 흙 파먹고 사는 농투성이였지만, 오늘은 국가를 보위하여 백성을 보살필 신성한 의무를 띤 '의병'이므로 규율이 필요했다. 농민군의 행동을 엄격히 할 '농민군 4대 행동강령'이 발표되었다. 1.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 먹지 마라. 2.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 3.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는다. 4.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귀( 權 貴, 권세 있는 관료)들을 모두 없앤다.[286위대한 생각들]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80

81 부음기사로 쓴 인물평 '여장부' 문명자 기자 : /07/28 17:33 정운현 '여장부' 문명자 기자의 부음을 접하고서 부음기사로 쓴 인물평 '여장부' 문명자 기자 81

82 재미언론인 고 문명자 여사(99년 촬영, 서울신문 사진부 제공) 엊그제 신문에서 한 원로 언론인이 타계했다는 부음기사를 접했다. 재미 언론인 문명자(미국명 줄리 문) 여사가 향년 78세로 지난 21일 심장 마비로 별세했다고 한다. 문 여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러하겠지만, 나는 문 여사를 생각하면 여장부 라는 단어가 곧바로 연상된 다. 결코 크지 않은 키, 그리고 마치 남장을 한 것 같은 차림새는 그렇다고 쳐도 그 보무당당한 태도와 처신은 내게 그런 기억으로 남아 있 부음기사로 쓴 인물평 '여장부' 문명자 기자 82

83 다. 먼저 일화 하나로 시작해보자. 내가 문 여사를 알게 된 것은 지난 99년 중반, 당시 <월간 말>의 신준영 기자를 통해 소개를 받고서였다. 당 시 문 여사는 고희를 앞두고 회고록(<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워싱턴에서 벌어진 일들>)(월간 말) 출간 차 더러 한국을 찾곤 했었다. 당시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문화부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문 여사의 회고록에 세인들의 화제가 될 만한 내용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고 책 출 간에 앞서 <대한매일>에 이를 요약해 연재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회사측과 문 여사 양측에 제안했다. 다행히 양측 모두 흔쾌히 동의하여 대 략 15회 정도 연재(최종적으로는 10회 연재함)하기로 하고 편집국에서 이 업무를 내가 맡았다. 2, 3일에 걸쳐 회고록 초고를 읽고 기초취재를 마친 후 초기 몇 회분을 출고하자 사내에서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한마디로 말하면 너무 놀 랍고, 또 재미있다는 것이었다. 첫 회 분의 경우, 박정희 시절 중앙정보부장 출신으로 파리에서 행방불명된 김형욱이 서울 근교 한 폐차장에 서 깔려죽었다는 증언이었는데, 당시로서는 가히 충격적인 내용이라 할만 했다. <대한매일>에 첫 회분이 실리기도 전에 자매지인 <스포츠서 울>에서 어떻게 이 소식을 들었는지 편집국장이 동시연재를 해달라고 나에게 요청이 들어왔다. 결국 사내 경영진의 판단 끝에 당초 계약에도 없던 동시연재 를 하게 됐는데, 1~3회분이 연재되는 동안 <스포츠서울> 가판이 평소보다 10% 이상 더 팔렸다는 얘기를 당시 <스포츠서울 > 편집책임자에게 들은 기억이 난다. 결국 당초 본지에 한 회당 20만원씩 원고료를 지불하기로 했으나 두 매체에 동시연재를 한 데다 반응도 좋아 문 여사에게 두 곱의 원고료를 지급하게 되었다. 이제 문 여사 얘기로 들어가 보자. 앞에서 99년에 신준영 기자를 통해 문 여사를 처음 소개받았다고 했는데, 84년에 신문사에 입사한 나도 그 때까지는 문명자 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만 해도 문 여사는 반한인사 로 낙인 찍혀 입국이 불허된 데다 73년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어서 국내에서는 문 여사의 활동상이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보니 적어도 나보다 10여년 이상은 연조가 앞선 선배들이나 문 여사를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 지난 99년 11월 22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문 여사의 회고록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대한매일>에 회고록을 요약, 연재한 인연으로 이날 행사의 사회를 내가 맡았다. 그날 축사를 맡은 원로 언론인 김중배 선생은 문 여사를 이렇게 평했다. 나이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이제는 문명자 선생님 쯤으로 불려 마땅한 그 분은, 그러나 여전히 문 선배 의 호칭이 더 어울리고 더 친숙해 보인다. 사실 그 분은 독보적 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한 한국산 국제기자이다. 한 동안 그 분의 이름이 문명자 특파 원 으로 통칭되었던 것도 다른 연유에서가 아닐 것이다 부음기사로 쓴 인물평 '여장부' 문명자 기자 83

84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에 회고록을 연재할 무렵 차일석 대한매일 사장을 만나 기념촬영한 문명자 여사(99년 촬영, 서울신문 사진부 제공) 문 여사는 1930년 대구에서 출생했다. 숙명여고를 졸업한 후 1950년 연세대 영문과에 진학했으나 이 해 한국전쟁 발발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 다.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던 그는 학업을 지속하기 위해 51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메이지( 明 治 )대학 경제학부를 거쳐 와세다대학 국 제법 대학원을 마쳤다. 와세대 대학원 재학중이던 1956년 당시 한국 최대의 여성지 <여원>의 도쿄지국장으로 활동하며 언론계와 첫 인연을 맺었다. 1961년 <여원> 특파원 자격으로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을 취재하러 갔다가 미국 현지에서 남편 최동현씨를 만났다.(최동현씨는 <동양 통신> 출신으로, 그는 5.16 쿠데타 이후 정치망명을 한 한국 최초의 기자다. 최씨 역시 수 년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라고 들었다) 1961년 <조선일보> 초대 워싱턴 특파원(정식 특파원 이 아니라 통신원 신분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생활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언 론활동을 시작한 문 여사는 이후 <동아일보>, <경향신문>, 문화방송(MBC) 등의 특파원을 지냈다. 문 여사가 여러 매체를 옮겨 다닌 데는 당 시의 시국상황과 관련이 있다. 당시 한국의 정치상황을 비판적으로 다룬 문 여사의 미국발 기사는 당국의 압력을 받아 기사화되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서울 본사와 불화를 빚곤 했다. 이로 인해 문 여사는 여러 매체를 전전할 수 밖에 없었고,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문화방송이었 다. 그러나 이곳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1973년 8월 당시 거물 야당정치인 김대중이 일본에서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국내 매체들은 한국정부의 요청으로 이를 전연 보도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 여사는 미국 소식을 전하면서 뉴스 말미에 각 부음기사로 쓴 인물평 '여장부' 문명자 기자 84

85 본에 없던 이 소식을 돌발적으로 보도하고 말았다. 당시 생방송 뉴스여서 서울 본사에서도 이를 미처 제지할 겨를이 없는 틈을 타서 보도했 다고 문 여사는 생전에 내게 비화를 들려준 바 있다. 이 사건 이후로 문 여사는 본사로부터 귀국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응하지 않았다. 귀국 하면 즉시 공항에서 중앙정보부로 연행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귀국 대신 미국정부에 정치망명을 신청했는데, 그의 망명소식은 주요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타전돼 큰 화제가 됐었다. 지난 99년 문 여사의 방한은 그로부터 무려 26년만의 귀향 이었던 셈이다. 문 여사가 김대중 납치사건 을 보도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박정희-육영수 부부와 더러 왕래를 하면서 친교를 가진 사이이기도 했다. 문 여사는 더러 청와대 만찬에 초청돼 육 여사가 차려준 밥상을 세 사람이 같이 나누기도 했으며, 또 박 대통령과 함께 대통령 전용기를 동승하 기도 했다. 언젠가 문 여사는 필자에게 청와대 만찬에 초대돼 식사를 했던 얘기를 들려주면서 박 대통령이 비름나물을 좋아해 밥상에 비름나 물이 올라왔더라는 얘기도 들려줬다. 박 대통령은 어린 시절 집안이 가난해 모친이 밥알 몇 톨에 비름나물을 무쳐 더러 끼니를 때우곤 했는 데, 그 때 든 입맛 때문에 청와대에 들어와서도 가끔 육 여사에게 비름나물을 해 달라고 해서 즐겨 먹는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런 친분 관 계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납치사건 보도 이후 문 여사는 반한인사 로 낙인찍혀 박정희 사후인 1980년 언니와 형부의 사망소식을 전해 듣고도 비자를 받지 못해 한국에 오지 못했다. 문 여사가 한국 땅을 밟은 것은 그와 정치적 동지 관계였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지 2년 뒤 였다. 99년 방한하여 김대중 대통령과 환담하는 문 여사 한편 미국에 정착한 문 여사는 미국인 동료들과 함께 동북아 뉴스전문 통신사인 유에스아시안뉴스 서비스 (US Asian News Service) 를 설립, 국제정치 담당 주필로 활약했다. 60년대 초 위싱턴 특파원 시절부터 백악관을 출입하면서 미국기자 사회에서 친분과 명성을 쌓아 미국여기자협회 회장, 미국기자협회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1980년 미국 여성기자단 단장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한 문 여사는 당시 중국 실 력자 덩사오핑을 인터뷰 했다. 또 북핵 위기가 국제적으로 초미의 관심사였던 1992년 4월에는 한국인 기자로는 최초로 북한에 들어가 당시 김일성 주석을 단독 인터뷰해 세 부음기사로 쓴 인물평 '여장부' 문명자 기자 85

86 계 언론계를 놀라게 했다. 2년 뒤인 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당시 서방기자로는 유일하게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 주석의 장례 전 과정을 취재하기도 했다. 또 2000년 6월 김대중-김정일 남북정상회담 직후 서방언론인으로는 처음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단독인터뷰를 해 이를 <월간 말> 8월호에 실었다. 비록 언론인 신분이지만 북한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그를 두고 남한 정보당국의 눈초리가 고울 리 없다. 그 에 대해 문 여사가 한 마디 남겼다. 유신정권 때인 70년대까지는 반한인사 로 불렸는데, 80년대 말 남북고위급회담이 본격화된 후 북한 취재에 나사면서 친북인사 로 호 칭이 바뀌었다. 반한인사 친북인사 란 중앙정보부가 만들어낸 용어로, 전혀 타당하지 않다. 굳이 말하자면 반( 反 )박정희인사 나 반( 反 )유신인사 라고 해야 옳다. 친북 도 그렇다. 남북은 같은 민족이다. 서로가 친북 도 하고 친남 도 해야 한다... 끝으로 문 여사가 고희를 맞아 쓴 회고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대해 한 마디 언급해두고 싶다. 이 회고록은 부제 워싱턴에서 벌 어진 일들 처럼 당시 국내에서는 알 수 없는, 다시 말해 미국에서 목격한 박정희 정권의 이면사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책에 는 박 정권 말기의 갖가지 의혹사건, 예를 들어 김형욱 실종사건 정인숙 사건 등에 대한 비사가 자세히 소개돼 있다. 특히 이 책에 등장하는 증언자가 예사롭지 않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문 여사가 한미 정계, 언론계, 문화계 등 각 분야에 폭넓은 인맥을 구축하고 있었던 덕분이었는데, 한 예로, 김형욱 실종사건 의 증언자는 박 정권 당시 제2인자로 불릴만한 정일권 전 국무총리였다. 더 놀라운 점은 문 여사는 회고록에서 매 사건마다 해당인물들을 에둘러 표현하거나 익명처리 하지 않고 과감히 실명비판 을 했다는 점이 다. 학연, 혈연, 지연 등으로 얽혀 실명비판은 감히 엄두도 못내던 시절에 문 여사의 이런 시도는 가히 혁명적인 도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회고록에는 두려울 것도, 거리낄 것도 없는, 문 여사 특유의 배짱과 문체가 고스란히 담겼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회고록 이 비록 김대중 정부 시절에 출간되었지만, <대한매일>에서 그 요약본을 연재하면서 신문사 상층부가 부담을 느껴 당초 예정(15회)보다 연재 횟수를 5회나 줄이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수 년 전 문 여사 내외분이 건강이 좋지 않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문 여사를 잘 아는 지인 몇 사람이 미국 문 여사 댁을 한번 방문하는 것 이 어떻겠느냐는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돌아가시기 전에 문병도 하고, 또 다른 목적 하나는 그의 자택에 비장된 자료 들을 한번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국에 오셔서 힐튼호텔에 며칠 머무르실 때 숙소에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눈 적이 있는데 그 때 집에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려주신 적이 있다. 구체적으로 그 자료들이 어떤 내용들인지,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 도 우리 현대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일생을 기자로 살면서 그 대부분을 이국땅에서 외롭게 살다간 고인을 생 각하면 여장부 라는 인상기 같은 표현은 그리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극단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고인은 금기와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았 고, 기자로서 사실의 기록 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고인의 타계를 깊이 애도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부음기사로 쓴 인물평 '여장부' 문명자 기자 86

87 현직 부장판사 정치편향 댓글 상습작성 논란 :24 현직 부장판사가 인터넷에서 정치적으로 편향적인 익명 댓글을 상습 작성한 것으로 확인돼 논란이 예상된다. 11일 법조계에 따르면 수도권 지방법원 A 부장판사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어묵으로 비하한 혐의로 구속된 김모(20)씨 사건 기사에 대해 현직 부장판사 정치편향 댓글 상습작성 논란 87

88 "모욕죄 수사로 구속된 전 세계 최초 사례"라는 댓글을 작성해 김씨를 두둔했다. A 부장판사는 지난 9일 공직선거법 위반 등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에 대해 종북 세력을 수사하느 라 고생했는데 안타깝다는 댓글을 쓰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A 부장판사는 최근까지 사회적으로 관심이 집중된 형사 사건을 심리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 관계자는 "A 부장판사 본인이 여러 개의 아이디로 수차례에 걸쳐 문제성 댓글을 작성한 사실을 시인했다"며 "작성 경위 등을 파악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한지훈 기자 현직 부장판사 " 野 지지자들은 종북" 댓글 논란 [앵커] 저희가 이 사건은 어떻게 접근해야 될지 난감합니다. 도대체 이런 판사가 존재한다는 게 이해가 안 가는데요. 현직 부장판사의 막말 댓글 논 란입니다. 성희롱적인 발언도 했고 지역비하까지 하는데. 2008년부터 지금까지 올린 댓글 건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면 익명 으로 올렸습니다. 익명으로 올리고 지역감정 조장하고 혐오성 막말을 일삼았습니다. 또 자신의 신분을 속이기 위해서 서로 다른 아이디, 닉네임을 번갈아가면서 썼습니다. 특히 지역편향적인 발언도 많고요. 전북 정읍출신다운 판결이다, 전라도 시민의 상식은 새누리 혐오다, 이렇게 지역 감정을 조장하고 있고 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투신의 제왕이다. 촛불집회 참 가자들은 도끼로 어디어디를 쪼개버려야 한다, 정말 모르는 사람도 쉽게 하기 힘든 말을 현직 부장판사가 했습니다. 도를 넘은 게 아니라 정 신적으로 문제 있는 것 아닐까요? [인터뷰] 정신적인 문제로 판단하기는 쉽지 않겠습니다마는 그런 발언 자체만 놓고 본다면 현직 부장판사가 아닌 일반인이 그런 글을 올렸다고 하더라 도 도덕적인 비난을 피할 수 없을 정도 수준의 말인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판사가 했다는 것 때문에 좀더 문제가 커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법관윤리강령이라는 게 있습니다. 거기에 법관들이 지켜야 할 강령이 들어 있는데 들어가 있는데 먼저 품위유지가 있고요. 명예를 유 지하고 품위를 유지하다 거기에 위반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공정성, 청렴성 등등 해서 여러 가지 편견을 가지거나 차별하지 아니한다, 이것도 어긋난 것 같고. 또 정치적인 중립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 아요. 그렇다고 본다면 실제로 어느 정도 진지하게 썼는지는 좀더 지켜봐야겠습니다마는 어느 정도 비난을 아주 면할 수준의 발언은 아닌 것 같아요. [앵커] 품위유지도 말씀을 하시고 댓글을 다는 것과 부장판사로서는 다를 수도 있다라고 상당히 완곡하게 말씀을 하셨는데 특정지역을 상당히 비하 를 하고 있습니다. 현직 부장판사 정치편향 댓글 상습작성 논란 88

89 그리고 저속한 표현도 쓰고 촛불집회 참가한 사람들은 그때 다 죽였어야 된다라는 과격한 발언을 했는데. 저런 판사가 아주 공명정대한 판결 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인터뷰] 감히 저는 인격장애도 의심해 봐야 될 것 같고. 당장 판사직에서 물러나서 법복 벗으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법관은 국민의 신체나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이 있는 분이시고 성직자에 준하는 어떤 고도의 윤리성과 도덕성을 갖추셔야 되는 분인데 이분이 심지어 어떤 댓 글도 썼냐면 물고문하던 전두환 시절이 좋다, 이런 식의 글이 있습니다. 국내 국민의 자유와 인권의 수호자가 될 판사님이 이런 글을 썼다는 것은 잘못됐다고 보고요. 저는 심지어 너무 극도의 극우적인 성향을 보이는 분들, 특히 공무원들은 정치적 중립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야 되는 분들인데. 정말 판사 로서의 자질이 0%도 없는 분이다, 이런 분들에게 국민이 판결을 받는 것이 과연 내용과 상관없이 납득을 할 수 있겠느냐. 대법원에서 이번에 어떻게 징계를 할지 유심히 봐야 할 것 같고요. 정말 저도 변호사로서 제가 들어간 재판부의 판사가 저렇다고 한다면 정말 기피신청을 하고 도 남을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앵커] 그러니까 우리가 판사에 대해서 존중의 표시로 존경의 표시로 재판장에 판사가 들어오면 모두가 기립을 하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 판 사가 누구인지 만약에 알려진다면 어떤 구속된 사람이나 감옥에 간 사람들, 징역을 사는 사람들은 내가 혹시 그쪽 사람이라서 아니면 내 정 치적 성향이라서 오히려 과도하게 징역을 선고한 것이 아니냐, 이렇게 반발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인터뷰] 우리가 판사라고 할 때 영어로 저스티스라고 표현을 하지 않습니까? 정의라고 얘기를 하고 특권 중 하나가 제출된 증거에 대해서 그야말로 자유로운 심증으로 결정할 수 있는, 그야말로 양심에 입각한 판결을 하는 것으로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인데. 지금 소위 말해서 익명성에 숨어 서 본인의 생각들을 표현한 거란 말이죠. 그렇다고 본다면 저분이 했던 판결에 있어서 공평한 것인지 아니면 상당히 편향적인 것인지. 나중에 재판력에 있어서 확정력과 이런 것에 후 폭풍이 클 가능성이 크지 않나 생각합니다. [앵커] 이동형 평론가 마지막으로 정리해 주시죠. [인터뷰] 일각에서는 댓글 다는 것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그런데 그 내용이 문제거든요. 이건 수준이하고 상식이하입니다. 어떻게 현직 부장판사가 이런 댓글을 달았는지 이해할 수 없고요. 거기 댓글을 보면 편견으로 가득찬 사람이거든요. 정치적 편견, 남녀편견, 지역편견. 이런 사람이 그동안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재 판에서 판결을 내렸을까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ytn 현직 부장판사 정치편향 댓글 상습작성 논란 89

90 현직 부장판사 정치편향 댓글 상습작성 논란 90

91 어느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 -문신 :52 어느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 만화로 보는 역사( 경향) 어느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 -문신 91

92 어느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 -문신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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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일본군에 의해 희생된 꽃같은 조선의 소녀들에게 이 만화를 바칩니다. 어린 딸을 둔 아버지의 마음으로 친일파들이 만든 교학사역사교과서를 반대합니다. 교학사교과서 "위안부가 일본군따라다녔다 기술" 아고라 서명 문신- 영문번역판 제국의 아침 1부- 가면 제국의 아침 2부-부활- 어느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 -문신 107

108 제국의 아침 3부 -환향 출처 : 어느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 -문신 108

109 친일파를 위한 변명 :40 이 글을 쓴 작가를 바로 알아야 주장하는 의미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어 위키백과를 빌려 소개합니다. 프랑스에서 태어났다면 교수형이 아니라 그보다 더 잔인한 형벌이라도 받았을 이런 자들이 있기에 일본의 아베가 어리석은 국가라 조롱하며 한반도 재침략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친일파를 위한 변명 109

110 김완섭 ( 金 完 燮 ) 바로알기 연구대상 출생 : 1963년 대한민국 대한민국 광주광역시 친일파를 위한 변명 110

111 직업 : 사회운동가, 소설가, 기자, 작가, 평론가, 번역가, 언론인, 방송인 국적 : 대한민국 대한민국 장르 : 언론, 소설, 문학, 시사평론 배우자 : 1993년 이혼 자녀 : 없음 생애 초기 출생과 초기 활동 김완섭은 1963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누이 동생 두 명이 있다.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서울로 상경하여 1982년 3월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이과 계열에 입학하여 천문학을 전공하다 1989년 서울대를 중퇴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 참가 이 부분의 본문은 5 18 광주 민주화 운동입니다.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가했다. 당시 정부 계엄군은 김완섭이 나이가 어리고 계엄군에게 적극적으로 대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총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서울대 재학 및 중퇴 이후 1982년 살레시오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82년 3월 서울대학교 이학계열 82학번으로 입학하였다. 이학계열은 뒤에 물리학과와 천문학과로 나뉘었다. 전공인 물리학과 천문학 외에 그는 서울대에서 역사학과 정치경제학도 공부하였다. 그는 PC통신 서울대 동호회에서 좌파 민족 해방계열 대학생들의 편향된 시각에 반하는 글을 주로 썼다. 우루과이라운드를 막을 게 아니라 빨리 도입해서 국내 산업을 글로벌화해야 한다는 개방론을 주장했다. 우파나 신자유주의자가 아닌 그가 개방을 주장하는 글을 올리자, 일부 악플러들로부터 죽창으로 찔러 죽이겠다는 협박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집으로는 협박 전화가 걸려 왔다. 1985년 방위병으로 군에 입대, 14개월을 복무하였다. 1987년 만기 전역하였고, 서울대학교를 중퇴했다. 서울대 중퇴 후 김완섭은 컴퓨터 관련 잡지사 3곳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1987년 서울 구로구청 농성사건으로 수감 되었다가 풀려났다. 언론, 문학 활동 언론 활동 1989년부터 컴퓨터 분야의 전문 기자로 데뷔하여 하이테크 정보 기자, 소프트 월드 기자 등 잡지, 언론사 기자 등을 역임하다가 뒤 에 소설가 겸 작가 문학 평론가 인터넷 칼럼니스트 등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한국 사회 내부의 전체주의적, 파시즘적 요소를 비판하는 책을 출간하였다가 송사와 비판을 받았다. 그는 곧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1980 년대 후반부터 PC통신에서 논객으로 활동했다. 이는 1995년 대한민국에 인터넷이 보급된 이후 인터넷 논객으로 자리잡았다. 친일파를 위한 변명 111

112 사회운동과 인터넷 논객 PC통신 논객으로 활동할 때부터 페미니즘 논객, 민족해방파 논객들과 논쟁을 벌였으며, 학생운동가 출신이면서도 반( 反 ) 페미니즘적인 시각 과 주체사상파, 민족해방파에 대한 비판으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케텔이나 엠팔, 하이텔 등 PC통신망에서 주로 컴퓨터와 관련한 정보를 올리면서 네티즌들과 사귀게 되었다. 80년대 후반 당시 모 PC통신 동호회가 하이테크 상품에 대한 리뷰나 공동구매 등의 형식을 통해 컴퓨터 업계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 모 PC통신 동호회는 집행부 선거 때 온갖 부정으로 말이 많았는데 이를 폭로하자 동호회인들로부터 협박, 사이버 폭력을 당하였다. 김완섭에 의하면 당시 '온라인 권력과 싸움을 벌이면서 오프라인에서는 한 사람이 수십명과 싸울 수 없지만 온라인에서는 수만명과 대적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회 고하였다. 1995년 인터넷 피씨 통신에서 발표한 창녀론 이 화제가 되며 작가가 되었다. 창녀론 은 보수주의 언론과 사회의 비판을 받았으며, 남 성우월주의 시각 논란으로 일부 페미니스트들로부터도 비판을 받았고, 화제가 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의 지속적인 공격에 대해 그는 이렇게 해명하였다. 남녀 성기를 우리말로 쓰는게 부끄러운 게 아니다. 난 여성들이 섹스를 무기로 남자를 잡아 자신과 새끼들의 목숨을 부지한다고 믿는다. 그 게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내 이 생각을 담은 창녀론은 인류를 이해하는 굉장한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여성해방의 근본 원인을 명쾌하 게 해석했지만 아직 학문적으로 평가는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우리 사회는 숫놈의 폭력성과 공격성이 억제되고 암놈의 성질이 드러나야만 발전할 수 있다. 내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과 이야기 하고 싶다. 다들 피상적(간접적)으로 접하고 나를 공격하는데 제발 책 좀 제대로 읽은 뒤 공격해달라. 그러나 이후 김완섭은 수시로 협박전화와 투서에 시달림을 당했고, 그의 가족들에게도 협박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작가 활동 1990년에 결혼하였으나 결혼 3년만인 1993년에 별거하다, 1996년에 공식 이혼했다. 전처와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다. 이후 PC통신에서 본격적 으로 논객으로 활동하며 페미니즘과 쇼비니즘을 공격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94년 컴퓨터 운영체제로 윈도가 보급되고 인터넷이 보편화 되면서 그는 카페, 소규모 모임에서 인터넷 논객으로 활동무대를 확장했다. 그는 한국 사회의 애국주의, 쇼비니즘을 꾸준히 비판해왔고, 인터넷에서는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층과 비난하는 층으로 나뉘게 되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화제 인물로 등장한 이후에는 일본, 미국 등 외국 언론의 방문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1992년 이후에 그는 프리랜서로 번역 저술 등의 일을 했다. 그러나 계속된 협박전화와 투서에 시달리기도 했다. 1996년 출국, 오스트레일리아 로 이주했다가 1998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코스닥신문사의 창간에 참여하였으며, 코스닥신문사 편집주간이 되었다. 2001년 일본을 존경하는 마음 이라는 이름의 인터넷 카페를 개설해 일본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칼럼을 기고했으나, 곧 폐쇄되었다. 2000년대 이후의 논란들 2002년 가을부터 2003년 여름까지 일본의 격주간지 사피오 에 총 20회 연재글을 쓰기도 했다. 2002년 한일 강점 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각으로 쓴 친일파를 위한 변명 과 새 친일파를 위한 변명 을 썼다. 이 책은 대한민국에서는 역사적 사실 왜곡 등을 이유로 2002년 4 친일파를 위한 변명 112

113 월 8일 청소년유해매체물(간행물)로 지정되었지만, 일본에서는 4개월 동안에 35만 부가 팔렸다. 한편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제 강점기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시각을 드러내면서 일부 민족해방파 및 인터넷 네티즌들로부터 다시 공격과 악플에 시달려야 했다. 2002년초 김완섭은 '친일파를 위한 변명 1'을 내고 목숨이 위태롭다고 생각해 여동생들을 호주로 이민 보냈다. 광주에 계신 노부모는 그냥 그곳에 살고 있었다. 2003년 일본의 자유식민사관주의자 스기모토 미키오의 일제 식민 통치를 미화한 저작물인 식민지 조선의 연구 를 자신이 세운 출판사인 춘추사를 통해 발간하였으나 인터넷 단체인 "우리 황실 사랑회"( )에 의해 간행물 윤리위원회에 신고되어 2006년 청소 년 유해 매체물(간행물)로 지정되었다. 당시 유해매체라는 비판과 표현의 자유 존중이라는 찬반 양론이 갈렸으나 한국 법원은 황실 사랑회의 손을 들어주었다. 2004년 10월에는 박기서를 우연히 만났다가 독립운동가에 대한 비판을 이유로 구타당하여, 부상당하기도 했다. 2006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주체사상파를 비난했다. '당시 주사파들이 북한과 직접 연결돼 있었다. 우리 친구들이 평양에도 몇번씩 다녀온 걸 로 알고 있다. 실제로 수천명의 대학생 간첩들이 무기고 털어 관악산 빨치산하겠다고도 했다. 이젠 오히려 정부기관에서 이런 사실을 폭로해 도 아무도 안믿는 세태다.'라는 것이다. 그는 또 '지금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령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정권을 쥐고 있다.'며 노무현 정부를 비난하기도 했다. 국민일보와의 2006년 인터뷰에서는 안중근 의사를 민족의 원수라고 하는 이유에 대해, 조선을 개혁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은 즉 의사가 아닌 폭도이며, 이토는 평화주의자인데다 조선의 병합을 바라지 않았는데 이토가 죽어서 일본 정부에 군부 득세를 가져왔고 이는 결 국 조선에 대한 핍박으로 이어졌으니 안중근은 민족의 원수라는 주장을 하였다. 또한 자신은 한국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진실을 알려주고 싶 을 뿐인데 한국인들은 수준이 낮아 내 주장이 담긴 책도 읽지 않고 욕부터 한다고도 답변하였다. 이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 측에서는 명예훼 손은 직계후손만 가능하여 미국에 있는 안웅호의 연로 등 한국에 귀국할 수 없는 상황이라 고소는 불가능 상황이라고 한다. 2008년 3월 28일, 서울고등법원은 새 친일파를 위한 변명 의 내용 중 "유관순은 여자 깡패", "김구는 조선의 충견"이라는 표현을 하여 독립 운동가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벌금 750만 원을 선고 받았다. 2003년에도 사자 명예 훼손 혐의로 고소를 당해 2006년 벌금형과 배상 선고 를 받은 적이 있다. 논란 1992년 논객활동을 시작한 이래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비난하였고, 유관순을 깡패로 비난하여 물의가 되기도 했다. 김좌진을 깡패로 비난하 였다가 손녀인 김을동에게 피소당하기도 했고,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비난했다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밖에 그의 집과 주변 인물, 가족 등에게도 수시로 익명의 협박 전화와 협박 편지가 전달되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그의 독립운동가 비난 과 친일파에 대한 옹호를 놓고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해지고 있고 몇몇 발언에 대해서는 실정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 기도 하였다. 명성황후 비판 논란 1988년 무렵부터 명성황후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조성되었다. 그러자 그는 2001년 7월 그는 명성황후를 순교자로 미화하는 학계, 언론의 시 각을 비판했다. 친일파를 위한 변명 113

114 미친 불여우 민비를 한국인들은 무슨 자주독립의 순교자라도 되는 줄 착각하고 있다. 이런 나쁜 을 조용히 없애버린 일본의 처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욕설이 문제시됐다. 비판 과정에서 '이런 나쁜 을 조용히 없애버린 일본의 처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다'라는 내용이 문제가 되어 2002년 8월까지 1년 이상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명성황후의 후손인 민씨 종친회는 2002년 초 그를 검찰에 고소했다. 8월 14일 서울지검 형사9부(신남규 辛 南 奎 부장검사)는 지난달 인터넷 사이트에 일본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를 옹호하고 명성황후를 비방한 혐의(사자에 대한 명예훼손)로 그를 불구속 기소했다. 2003년 2월 명성 황후( 明 成 皇 后 )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벌금 700만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사건은 확대되어 그가 2002년에 펴낸 책 친일파를 위한 변명 과 인터넷 컬럼 등에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왜곡 저술해 명예를 훼손당 했다 며 고종황제의 손자 이석, 일본군 종군위안부 박두리(82)외 6명, 징용자 유족 5명, 의병대장 민종식의 손자, 명성황후의 종증손뻘 되는 민병호, 충정공 민영환의 손자 민병덕 등에게 피소되었다. 그러나 저서 친일파를 위한 변명 과 관련된 소송에는 피소 후, 한번도 법정에 출석하지 않았다. 2005년 9월 서울중앙지법 민사81단독 김창보 판사는 1일 책 친일파를 위한 변명 과 인터넷 컬럼 등에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왜곡 저술해 명예를 훼손당했다 며 이석 등이 그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했다. 김 판사는 2003년 소송이 제기된 후 피고는 재판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며 당사자가 변론기일에 출석하지 않을 때 상대방이 주장하는 사실을 자백한 것으로 본다는 민사소송법에 따라 원고 승소 판결했다 고 밝혔다. 김창보 판사는 박두리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6명에게 각 600만원, 징용자 유족 5명과 의병대장 민종식의 손자에게 각 500만원, 이석씨 와 명성황후 유족 민병호씨, 충정공 민영환의 손자 민병덕씨에게 각 1,000만원씩 모두 9,600만원을 배상하라 고 선고했다. 소송 이후 그의 저서 친일파를 위한 변명 일본어판을 발행해 일본에서 40여만부가 팔렸다. 이 변호사는 손해배상을 받아내기 위해 일본 출판사로부터 김씨가 받고 있는 인세를 압류하는 것을 검토 중 이라고 밝혔다. 김완섭과 명예훼손죄 고소 논란 2005년 3월초 김완섭은 인터넷 게시판과 카페에 김완섭에게 욕설 및 비난하는 글을 쓴 피고소인들을, 김완섭이 명예훼손죄로 고소한 사건이 있었다. 3 1운동은 기독교의 종교 폭동이라고 했다가 비난글이 빗발쳤다. 김완섭은 2005년 3월 16일 보도한 친일파 김완섭 독도 일본에 돌려줘 라 망언 이라는 기사에 달린 악플 (악의적 댓글)까지 수집, 고소하기로 했다. 자신의 글에 악플을 단 네티즌들을 고소하기로 하고, 최 근 해당 네티즌들에게 메일 통지문을 발송했다. 논객 진중권은 그를 비판하였으며, 변호사 출신인 한나라당의 원희룡은 김완섭에게 고소당한 4000명의 변호인을 자처하고 나섰다. 원희룡은 자신이 네티즌의 벙커가 되어 지키겠다고 선언했고, 이후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을 비롯한 한 나라당 변호인단은 김완섭에 맞서 피고소인들을 변호하였다. 소송 기간 중 원희룡 등은 고소당한 네티즌들의 무료 변호를 자청하였다. 그를 비판하며 반대편에 섰던 국회의원 원희룡은 서울대학교 동문이자 같은 학번이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좌진 비판 논란 또한 2006년 2월 김완섭은 독립운동가 김좌진을 산적떼 두목이라고 모욕한 혐의로 국회의원 김을동으로부터 명예 훼손으로 불구속 기소되었 고, 아울러 김을동은 부친, 조부의 사자 명예 훼손 부분 관련해서도 추가 고소할 것을 밝혔다. 본 고소에 대해 검찰은 "사회 상규에 위배되지 친일파를 위한 변명 114

115 않는 행위는 처벌하지 않는다 는 형법 20조 정당 행위 규정에 따라 위법성이 조각된다"며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이것에 대하여 법원은 김좌진을 산적 떼 두목으로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피고인의 표현이 개인적 의견표현의 성격이 강하며, 당시 김좌진 을 중심으로 한 광복단이 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강제력을 행사한 사실이 국사편찬위에 의하여 인정되므로 완전한 허위 사실 적시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그건에 한하여 일부 무죄 판결했다고 해명하였다. 이는 개인적인 의견표명은 명예훼손이 아니라 모욕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 기 때문이며 산적떼 두목이란 표현은 충분히 모욕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할만한 언사이지만, 대한민국 형법상 사자 명예훼손죄는 있으나 사자 모욕죄는 없기 때문에 무죄판결이 내려지게 되었다. 애국심 비판 논란 그는 한국 사회에 팽배한 맹목적인 애국심을 비판하였다. 그 중 2002년 8월 한일합방 당시 자살한 양반과 지식인층을 비난하여 논란이 되었 다. 한일합병을 반대해 자결하거나 일제에 저항하다 죽어간 사람들은 지킬 가치가 없는 것들을 지키려다 개죽음을 당한 것이다. 또한 '독립의병은 양반들이 돈으로 모집한 깡패와 도둑' 이라는 발언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구한 말의 의병과 일제 강점기의 독 립군이 독립군 자금을 모금한다는 이유로 부자는 물론 일반 민간인의 가옥까지 침입, 재물을 약탈한 것을 비판한 것이었다. 김구 비판 논란 2003년 11월 말 김완섭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방문, 국회 과거사진상규명특위 공청회에서 김구 선생은 민비 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한 뒤 중국으로 도피한 조선 왕조의 충견( 忠 犬 ) 이라는 내용의 문건을 배포하였다. 또한 그는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 을 살해했다"는 내용의 인쇄물도 배부하였다. 문건을 받아 본 일부 국회의원과 시민들은 즉석에서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고, 일부는 이를 근거 로 검찰에 들고가 그를 고소했다.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쓰치다 조스케를 일본 군인이라고 기술하였으나, 계속 민간인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2004년 7월 검찰은 공소장에서 김구 선생이 1896년 10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항에서 살해한 쓰치다 는 당시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군 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김구 선생이 쓰치다를 처단한 뒤 체포돼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가 1919년 중국으로 망명했는데도 도주한 것처럼 허위 사실을 적시했다 고 밝혔다. 이어 그는 서울고검으로부터 불구속 기소 처분을 받았다. 서울고검 정현태( 鄭 現 太 ) 검사는 7월 27일 그를 백범 김구( 金 九 ) 선생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소설 친일파를 위한 변명 의 작가 김완섭씨를 불구속 기소했다고 언론에 밝혔다. 또한 서울고검은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한 문건을 배포한 친일작가 김완섭씨를 허위사실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직권 기소 한 바 있다. 서울고검의 검사 정현태는 김완섭에 대한 기소는 국사편찬위원회와 보훈처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고 나서 내린 결정이었다고 밝 혔다. 그러나 김완섭의 주장은 이미 사실로 확인된 것이었다. 1987년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이 찾아낸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쓰치다 조스케 는 계림장업단 소속 상인 으로 밝혀졌다. 오마이뉴스의 김완섭 관련 보도 논란 뉴라이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친일파를 위한 변명 115

116 2008년부터는 그가 뉴라이트 회원이라는 루머가 인터넷에 유포됐다. 2009년 오마이뉴스가 "김구가 무고한 일본 상인을 죽였다"는 뉴라이트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김완섭이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한 문건을 배포해 발생한 명예훼손 사건에서 재판 중 일본군 중 위를 살해 한 것이 맞다고 드러났다는 사례를 제시했다. 이를 근거로 "김완섭은 뉴라이트" 라는 설이 유포되고, 각종 촛불단체에서도 뉴라이 트를 친일파라고 비난하면서 김완섭을 뉴라이트 단체 회원으로 명시[출처 필요]하였으나, 김완섭은 뉴라이트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로 밝 혀졌다. 또한 김완섭이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시민군으로 참여하였고, 5.18 당시 계엄군에 맞서 도청을 사수한 자로 정식등록된 5.18 광주민주유공자 로 장해등급 판정까지 받은 사실이 보도되고 조선일보 출신 조갑제 등과는 적대적인 관계라는 것이 밝혀졌다. 반영남 지역감정 논란 지역감정을 강하게 가지고 있으며 경상도를 매우 싫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완섭은 자신의 저서 창녀론 에서 "한국 사회의 모든 병폐의 근원이 경상도 남성들에게서 비롯된다"는 발언을 했다. 단적으로 신종플루때는 '하느님 경상도 놈들이 한 5백만만 죽게 해주세요'라는 말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고라 글 - 사망자가 전부다 경상도네염 이러한 측면은 그의 친일 행적과 더불어 진보세력에게서조차 외면받게 되 는 이유가 되었다. 사상과 신념 학생운동가이면서도 반페미니즘, 반주체사상, 국가 혐오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비주류로 겉돌거나 악플, 비난에 시달렸으며 논 란의 여지가 존재하고 있다. 일본의 일방적 침략설 비판 그는 1990년대 중반, 일제 식민지 당시 일본으로부터 일방적인 침략만을 당했는가 하는 비판을 제기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03년 1월에는 일본 쇼쿤과의 인터뷰 내용이 국내에 보도되어 논란이 되었다. 나는 "일한 역사인식의 공유가 가능한가"라고 묻는다면 "예스"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한일간의 역사인식은 적어도 소위 "한일합병"기에는 이미 공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태평양 전쟁 시 우리 한국인들(조선인들)은 '일본인'으로서 함께 싸우지 않았는가? 쇼쿤 2003년 1월과의 인터뷰 중 반일감정 조장과 역사왜곡 강제 징용 비판 김완섭은 징용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여 한때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2000년대 중반, 일제 식민지 당시 일본으로부터 일방적인 침 략만을 당했는가 하는 비판을 제기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03년 1월에는 일본 쇼쿤과의 인터뷰 내용이 국내에 보도되어 논란이 되었다. 김완섭은 한일간의 갈등을 한국 측에서 의도적으로 조장한다 는 색다른 비판을 내놓기도 했다. 그는 '현재 한일간의 역사갈등의 원인은 일본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왜곡이라고 규정한다.' 한국인들에게 있 는 반일감정은 한국 정부의 의도적인 역사왜곡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는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국제사회의 일반적 견해이기도 하다라고 규정 하였다. 친일파를 위한 변명 116

117 그는 또한 일제 강점기 당시 일방적인 강제 징용만 있었는가 하는 주장을 학계에 제기하여 한국 국사학계로부터 비난이 빗발치기도 했다. 2003년 1월 일본 잡지 쇼군 과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같은 주장을 펼쳤다. 한일합방 시대에 일본군에서의 조선 출신 지원병의 응모상황에 대한 자료를 봅시다. (이하 생략) 실로 30만 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쇄도한 것 입니다. '일본 군인' 한 사람을 뽑는 데, '조선인' 50명 이 지원한 것입니다. 이러한 높은 경쟁률은 당시 사법시험이나 현재의 유명대학의 경쟁 률에 비하여도 상당히 높은 것입니다. 쇼큔 2003년 1월과의 인터뷰 중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 도중 일제 강점기 당시 일부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징용에 지원했다는 김완섭의 발언이 대한민국 국내에 알려지면서 한때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명성황후 비판 그는 명성황후를 애국자로 미화하는 것을 비난하였다. 2001년 7월 그는 민비를 한국인들은 무슨 자주독립의 순교자라도 되는 줄 착각하고 있 다. 고 주장했다. 김완섭은 그에 대한 근거 자료를 제시했지만 한국 국내에서는 그에 대한 인신공격성 비방이 난무하였다. 김구의 양민 암살설 2004년 그는 김구가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하여 논란이 되었다. 2003년 11월 그는 시민들에게 배포한 문건을 통해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그는 독립운동가 김구를 모독했다 는 네티즌들의 비판을 받았으나, 1987년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이 찾아낸 일본 외무성 자료를 인용해 김구가 치하포에서 타살한 쓰치다 조 스케는 계림장업단 소속 상인 이라고 밝혀졌던 내용이었다. 저서와 역서 저서 : 창녀론, 김완섭, 1995년, 춘추사 ISBN (개정 증보판) 윈도우 3 친일파를 위한 변명, 김완섭, 2002년 2월 20일, 춘추사 새 친일파를 위한 변명, 김완섭, , 춘추사, ISBN 친일파를 위한 변명 2 - 영웅의 허상, 김완섭, 2004, 후쇼사 번역서 : 물리학의 진화 (아인슈타인 역서) <보디랭귀지> 공저 : 일한대토론, 김완섭 니시오 칸지 공저, 2003년 기타 : 2002년 펴낸 그의 저서 친일파를 위한 변명 은 일본어판을 발행, 일본에서 40여 만부가 팔렸다. 그가 이 친일파를 위한 변명 으 로 소송을 당하면서 일본 내에서는 화제의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 김완섭 : 제2부 오렌지 밭에서 사과를 찾다 (세부연구용) 친일파를 위한 변명 117

118 [2-1] 오렌지 밭에서 사과를 찾다 p159 일찍이 위대한 마르크스는 인류역사가 원시공동체사회에서 노예사회와 봉건사회를 거쳐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해 왔으며, 그 이후에는 과도기 인 사회주의 사회를 거쳐 모든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이 모든 역사 발전을 추동 하는 원동력은 생산력의 발전이며, 이는 사회의 토대(하부경제구조)와 상부구조(정치와 문화)가 상호 변화 적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실제로 봉건사회의 전통을 지닌 유럽과 일본은 순조롭게 자본주의로 이행, 산업혁명과 급속한 생산력의 발전을 경험했다. 이 과정에 서 새로운 생산구조에 맞는 정치 사회구조가 도입되어 근대시민사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예사회에서 봉건사회로의 발전조차 이룩하 지 못한 나머지 대부분의 세계에서는 자생적인 자본주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이들 지역은 자본주의 제국의 식민지로 편입 되어 여러 가지 형태로 왜곡된 사회발전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같은 제3세계 지역의 정체성에 대해 아시아적 생산양식이 라는 개념을 마련해 설명해보고자 시도했으나 그 원인을 뚜렷하게 밝혀내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마르크스의 시대에는 제3세계의 정 체성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으니 문제의식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봉건사회의 전통을 경험하지 못했던 대만과 조선도 기타세계에 속해 있었으나 이들 지역은 일본의 통치로 말미암아 시민혁명을 이룩하고 근 대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일찍이 20세기 초반 조선과 일본 사회의 발전 수준에 있어서 커다란 격차가 존재 함을 인식하고 스스로 조선의 문명개화를 선도하는 산파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일본에서 한국사회의 정체성을 처음 주장한 것은 후쿠다( 福 田 德 三 )로 알려져 있다. 그는 유럽의 경제학을 일본에 소개한 선구적인 경제학자 로서, 19세기 말 유럽으로 건너가 독일의 라이프찌히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유학하였다. 그는 귀국하여 1904년 [대한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 단위] 라는 논문을 발표, 최초로 조선 사회의 정체성 이론을 주장하였다. 이 논문은 근대적인 경제사학의 방법론으로 조선의 경제사를 연구한 최초의 학술논문이다. 후쿠다는 재화의 교환 유통에 입각하여 경제가 발전해 가는 단계를 자족경제, 도부경제, 국민경제의 3 단계로 구분하였다. 그는 자족경제를 봉건제도가 출현하기 이전의 시기로, 도부경제는 봉건제도에 대응하는 시기로, 그리고 국민경제는 근대국가에 대응하는 시기로 보았다. 그의 연구는 20세기 초 조선의 사회경제 상태가 아무런 도부경제의 징후가 보이지 않는 자족경제의 단계에 속해 있으며, 봉건제도가 형성되기 이 전의 변태적인 양태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었다. 이 단계는 일본의 9세기말에서 12세기 초에 해당하고 유럽과 비교해도 9세기 초에서 12세기 초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는 20세기 초 조선의 사회경제 상태가 일본과 유럽에 비해 천년 이상 뒤떨어져 있다는 결론이며, 근대국가의 국민경제가 형성될 수 있는 불가결의 선행 필수조건 이 바로 봉건제도이므로 조선은 자본주의는커녕 봉건제도의 단계에도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후쿠다의 이론을 정체성이론, 혹은 봉건제 결여론이라 한다. 바로 이웃해 교류하던 두 나라의 경제발전이 천년 이상 차이가 난다는 주장은 쉽사리 납득하기 힘든 것이긴 하나 일본이 오랜 세월동안 외부세계와 거의 교류 없이 발전해왔다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불가능한 일도 친일파를 위한 변명 118

119 아닌 듯하다. 어쨌건 후쿠다의 연구는 당시의 학문 수준으로는 상당히 독창적이고 참신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정체된 조선의 경제가 근대화를 이루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외부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청나라는 거의 망해가고 있었으므로 조선에 이웃하고 있는 외부의 존재는 곧 러시아와 일본인데, 러시아의 경우 조선과 마찬가지로 경제가 저급하여 그 협력으로 발전의 전기를 얻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에 결국 조선의 발전은 일본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즉, 자력으로 근 대화할 수 없는 조선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일본에 동화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사회가 자본주의 단계로 발전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봉건제도란 무엇인가. 봉건제도란 일종의 정치적 사회적 현상 이다. 그것은 인간의 사회적 지위와 기능이 토지의 소유관계를 중심으로 결정되는 제도로서, 이 같은 질서에서는 개인의 재산뿐 아니라 사회 적인 지위나 권력이 개인의 능력과 관계없이 세습된다. 또한 봉건사회의 정치권력은 봉토라는 이름의 영지를 부하에게 나누어줌으로서 생겨 나는 충성과 군신관계에 의해 유지된다. 이러한 사회, 정치제도는 중세유럽에서 번영하였는데, 가령 프랑스에서는 12세기 무렵에 그 정점에 달했다. 유럽 이외에 이와 유사한 사회 정 치적 제도가 일찌기 존재했던 다른 지역은 전 세계에서 일본뿐이다. 무로마치 시대 후기, 즉 오닌의 난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출현한 시기까 지 일본의 봉건제도는 전성기 유럽 봉건제도와 아주 비슷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에도 막부시대에 들어오게 되면서 일본의 봉건제도는 큰 변화를 겪었다. 에도 시대의 일본에서 볼 수 있는 안정되고 고도로 조직화된 중앙집권적인 봉건제도는 지형상 고립된 일본의 독특한 산물이다. 유럽에는 지역에 따라 이 같은 중앙집권적 봉건제도가 출현하지 않았거나 출현했더라도 매우 짧은 기간동안만 존속할 수 있었는데, 이는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던 유럽은 일본의 경우보다 더 격렬한 경쟁을 할 수밖 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로 유럽의 후기 봉건제도는 재빨리 일본식 통일봉건제도의 단계를 거쳐 더욱 중앙집권적인 민족국가로 성 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봉건제도는 인류 역사상 전 세계의 두 지역에서만 나타났던 매우 드문 현상이다. 그렇다면 왜 일본과 유럽에만 봉건제도가 생겼는가. 일본의 학설에 의하면, 봉건제도는 이질적인 사회 정치적 요소가 특수한 형태로 서로 융 합한 것이라고 한다. 즉 봉건제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각 지역마다 토지와 조세에 관한 강력하고 발달된 법령 체계와 이를 집행할 수 있는 정치조직이 존재해야 하고, 이를 보다 큰 범위에서 통합할 수 있는 중앙집권 정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 가운데 한두 가지라도 부족하거나 너무 강하게 되면 그 사회는 원시적인 부족사회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왕이 모든 권 력을 가지는 전제왕조의 형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봉건제도가 희귀했던 것은 이 '균형상태'라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작은 지역을 포 괄하는 발전된 법과 정치조직은 중세유럽의 경우 독일의 부족국가 전사단에서 시작되었고 일본은 고대 씨족제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 다. 육조시대의 중국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사회가 발달하여 봉건제도에의 계기가 되었으나 끝내 성숙되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이런 경우는 이 들 지방권력과 중앙권력이라는 두 요소 사이에 적당한 균형이 유지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중국은 중앙 정부의 힘이 너무 강했던 경우이고 또 다른 나라에서는 부족국가의 경향이 압도적으로 강해 중앙정부가 발전하지 못한 사례도 찾아볼 수 있다. 그 결과 유럽과 일본을 제외한 지역 에서는 고대 씨족사회나 부족사회 가운데 한두 개가 강성해지거나 연합하여 주변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봉건사회의 단계 없이 곧바로 대규모 의 전제왕조로 발전하였다. 그렇다면 봉건제도는 왜 근대화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는가. 세계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나타났던 전제제도에 비하면 봉건제도 아래에서는 각 경제주체들의 법률적인 의무와 권리가 중시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근대의 법치주의라는 개념에 적응할 수 있는 사회의 발달이 진행되 었기 때문이다. 또한 봉건영주는 정복이나 영토의 확장보다는 토지의 소유와 토지세의 징수에 전념하였기 때문에, 영주의 통치를 받는 상인 과 제조업자는 전제 국가에 속한 것보다 더 폭넓은 활동범위를 가질 수 있었다. 이처럼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앞서 기술한 법률관계의 발달이 서로 상승작용을 하여 생산력을 향상시켰고 그 결과 근대적인 형태의 상업사회 친일파를 위한 변명 119

120 가 태동하게 된 것이다. 봉건 사회에서 경제 주체들에 주어진 활동의 자유는 실용적인 윤리관을 길러주었고 분권과 자치라는 정치제도는 지 도자에게 강한 의무감과 책임감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활발하고 진취적인 도전정신과 기업가 정신이 생겨났는데, 이는 근대유럽과 일본의 큰 특징을 이루는 것이다. 한국(대한제국)에 있어서 경제단위의 발전은 자발적인 것일 수는 없고, 전래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전래적이란 어떤 발전된 경제조직 을 갖는 다른 문화에 동화되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토지를 개척 경작하여 서서히 이를 자본화할 수 있게끔 그 가치를 높이는 방법을 아는 자가 아니면 안 된다. 그렇다면 한국에 있어서 많은 경제적 설비를 베풀고 수천 년 간 교통을 해온 결과 얻어낸 양해와 동정으로써 한인을 사역함에 익숙하고, 또 한인의 토지를 사실상 사유로 삼아 서서히 농사경영을 시도하였으며, 더구나 그 생산품인 쌀과 콩(대두)에 대하여 최 대의 고객인 우리 일본인은 이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자가 아닌가! 하물며 그 봉건적 교육은 세계 역사에서 가장 완전한 것 중의 하나에 속하며, 토지에 대해서는 가장 집중적인 농업자요, 인간에 대해서는 한 인에게 가장 결핍된 용감한 무사적 정신의 대표자인 우리들 일본 민족은, 아무런 봉건적 교육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경제단위의 발전을 이룩 하지 못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하여, 그 부패쇠망의 극치에 달한 민족적 특성을 근저에서 소멸시켜 자기에 동화시킬 자연적 명운과 의무를 갖 는 유력우수한 문화의 중대한 사명에 임하는 자가 아닐까! 후쿠다가 이 논문을 발표한 당시는 이미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 기정사실로 굳어지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어느 정도 일본을 미화하고 조선 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성과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기본적인 사실은 부인하기 힘든 내용을 담고 있 다. 이후 후쿠다의 정체성 이론은 흑정암, 삼곡, 사방박등 주로 일본의 다른 경제사학자들에게 계승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은 후쿠 다의 사상을 이어받아 조선은 발전하기 힘든 정체된 사회였다고 규정하고, 조선이 근대화된 것은 일본 자본의 영양과 혈맥에 의해서였다고 갈파하였다. 사방박은 세계 역사를 보면 자본주의가 성립하는 방법은 그 첫째가 자기 사회의 진통을 통해서 이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연히 외래 자본주의의 자극에 강요되어 부득이하게 자본주의 단계로 진입하는 것인데, 전자는 서구와 일본의 경우이고 한국은 후자의 경우 에 속한다고 하였다. 사방박( 四 方 博 )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의 자본주의화는 일본의 자본과 일본인의 기술능력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 개항 당시 조선에 는 아무런 자생적인 자본의 축적도 없었고 기업 정신도 없었으며, 자본주의의 형성을 희망하는 사정과 그것을 필연케 하는 조건이 모두 결여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일본이 개항 이후 활발한 조선 진출을 통해 자본주의 질서를 전파해 주었으며 합병 이후에도 근대적인 산업과 사회간접자본, 학교와 각종 시설을 건설하여 조선사회의 근대화, 문명화를 주도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종전 후 북한을 중심으로 정체성 이론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 뒤이어 남한의 학계에서도 같은 연구가 이루어져 점차 남북한의 주류 이론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이것이 소위 '자생적 근대화 이론', 혹은 '자본주의 맹아론'이라고 불리는 이론이다. 이 같은 이론 은 기실 '이론'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저열한 억지주장들로서, 세계의 학자들로부터 '오렌지 밭에서 사과를 찾는 무리한 시도'라고 평가되며 비 웃음의 대상이 되어 왔다. 자본주의 맹아론의 선구는 역사학계였다. 북한에서는 1950년대 말부터 최병무, 김석형, 홍희유 등이 조선조 후기 한국에서 자본주의적 관계나 요소가 자생적으로 나타나고 있었음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는 맑스의 이른바 역사발전 법칙에 따라 한반도의 역사도 원시공동체사회에서 노예제사회로, 그리고 봉건제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주의로 각 단계를 거치며 발전해왔음을 입증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 터 북한 사학계에서는 맹아론 연구가 급속히 소멸하게 되는데, 이는 북한에서 김일성에 의한 독재체제가 완비되고 주체사상에 입각한 역사관 이 대두하면서 맑스-레닌주의 자체를 폐기했기 때문이다. 이후 북한에서 중단한 연구를 남한의 학자들이 계속 이어나가면서 자생적 근대화이론을 발전시켰다. 남한의 자본주의 맹아론에 따르면, 17세 친일파를 위한 변명 120

121 기부터 18세기에 이르러 조선 사회에서도 농업 수공업 상업 신분제의 측면에서 큰 변화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자생적인 근대화의 싹(맹아)이 었으며 일본의 침략은 순조로이 이루어지고 있던 근대화의 싹을 잘라버리고 산업 교육 사회 전반에 걸쳐 왜곡된 사회구조를 이식했다는 것이 다. 이들은 일본이 없이도 조선에서 스스로 자본주의의 싹이 자라나 산업혁명이 발생했을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가 스스로 근대화를 시작한 기점이 어디인가를 찾기 위해 18세기 후반, 19세기 중엽, 개항기, 갑오개혁기로 나누어 수색작업을 시작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다 1990년대가 되자 이 네 가지 가운데 18세기 후반 기점론은 폐기한 뒤 1860년대 설, 개항설, 갑오개혁기 설로 구분해 수색작 업을 계속하였다. 1860년은 고종이 즉위해 대원군의 통치가 시작된 해이다. 따라서 1860년대 기점설은 이 때에 이르러 제국주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이에 맞서 반침략, 반제국주의 운동이 시작되어 조선의 민족주체 형성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중시한다. 1876년 개항설은 개항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세 계자본주의 시장체제에 종속됨으로써 불가피하게 자본주의로 이행하게 되었음을 강조하는 시각이다. 이 이론은 한국 중세사회의 내재적 발전 의 성과로서 근대의 기점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외세의 침략이라는 타율적 계기를 근대의 기점으로 삼고 있다는 약점을 안고 있다. 즉 이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민족정기를 세우고 반일책동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만들어진 맹아론의 목적에는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다. 갑오개혁기 설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 비로소 근대적인 제도와 사상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하였으며, 중세적 국가가 근대적인 국가체제로 전환 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다는 점을 중시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이 자본주의 맹아 이론과 기점 수색작업은 한국 역사학자들의 수준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실로 한심한 사건이 아 닐 수 없다. 실제로 이런 맹아라는 것이 있었다면 분명 민족적 자부심을 가질 만한 좋은 일이겠지만, 이들은 '있어야만 하며 반드시 있을 것 이다'는 신념 아래 결과를 먼저 설정해놓고 거기에 역사를 꿰맞추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과연 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인지조차 의심스럽다. 이처럼 한심하고도 허무맹랑한 이론이 한국에서는 어느새 정론으로 자리잡아 아직도 일선학교에서 교육되고 있으며 일본의 침략성을 비난하 는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그래도 이들로서는 버릴 수 없는 이론인 것이, 만약에 이것이 실패하게 되면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 항일독립운 동의 전통을 이어받는 '민족정기'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기 때문인 것이다. 답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쨌든 4지선다형에서 지금은 3지선다 형으로 줄어든 맹아 수색작업에 성과가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최근 신용하 강만길 등 현대 한국의 관변학자들은 자생적 근대화 이론의 연장선상에서, 일제 식민지배 정책의 기본이 민족 자본가의 성장을 막고 민족자본의 축적을 저지하는 데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강만길에 따르면 가령 토지정책의 경우,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문호개방 이 후 성장해 오고 있던 자작농 상층부를 제거하고 농민의 대부분을 영세소작인으로 만드는 한편 친일 지주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 된 것이고, 그 결과 20세기 전반기 한국에서는 농업사적으로 자본주의적 영농이 발달해야 할 시기였지만 일본의 식민통치로 그것이 저지되고 오히려 지주제가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본주의적 영농이 발달해야 할 시기'라는 대목에서 우리는 할말을 잃게 된다. 그런 식이라면 1910년대는 (스스로 발전했을 경우) 중화학공업이 발달해야 마땅한 시기라든가, 첨단 우주산업이 발달해야 할 시기였는데 일본에 의해 저지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는 과연 토지대장 같은 것 하나 정비되어 있지도 않았고 등기제도라든지 재판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당시 조선사회가, 일본에 의해 이룩된 체제정비와 토지조사사업 같은 성과 없이도 어디선가 자생적인 농업 자본가가 출현하여 소농들의 토지를 매입하여 대규모의 자 본주의적 영농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인가. 어쨌든 이 같은 '내재적 근대화론'은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들에게는 이미 영향력을 잃고 있을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미국의 팔레와 커밍스는 물론이고 에커트와 맥나마라 등 대부분의 권위 있는 한국학자들에게 비웃음을 사고 있다. 국내에서도 최근 들어 안병직, 이영훈, 전상인등 몇 몇 양심 있는 학자들이 이 같은 꿰맞추기 식 연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의 교단과 학계에서는 주류 이론으로 남아 사 친일파를 위한 변명 121

122 랑 받고 있는 것이다 [2-2] 2] 조선총독부는 강도였나 p169 한국에서 출판된 각종 교과서와 공무원 시험서, 교재, 역사서적 등에 묘사된 토지조사사업 항목을 보면 한국 사회가 일제시대에 대해 얼마나 악의적인 사실왜곡을 일삼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다음은 한일합병 직후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에 대해 한 공무원 시험서가 기술하고 있는 내 용이다. <토지 조사 사업>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일본이 우리나라 토지 소유권의 확립을 구실로 하여 펼친 대대적인 조사 사업으로서 식민지 정책 수행을 위하여 토지 소유 관계를 정리하고 개편한 사업이다. 이 사업의 결과 농민들은 당연히 그들의 소유가 되어야 할 농토를 빼앗겼고, 門 中 소유 또는 촌락 공유의 토지는 총독부의 소유가 되고 말았다. 일제는 여러 가지 악랄한 방법으로 우리의 토지를 빼앗은 결과 1930년대 통 계에 따르면 전 국토의 40%에 해당하는 논밭과 임야가 총독부의 소유로 나타났다. 1. 일제의 실시명분: 근대적 토지소유권제도 확립 2. 실제목적: 토지약탈 3. 방법: 기한부신고제 4. 결과: 1)전 농토의 40%가 조선총독부 소유가 되어 일본인에게 불하됨 2)우리 농민은 소유권이나 영구 경작권을 잃고 기한부 계약의 소작 농으로 전락, 생계유지를 위해 화전민이 되거나 만주, 연해주, 일본 등지로 이주함 다른 종류의 책에서도 대체로 비슷한 묘사를 전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첫째, 조선총독부가 조사사업을 통해 전 국토의 40%, 혹은 어떤 책에서는 50%라고도 하는데 어쨌든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토지를 조선인민으로부터 강탈해갔다는 것이다. 또한 둘째, 조사 사업의 결과 대부분의 농민이 소작농으로 전락해 삶의 터전을 잃고 거지처럼 국내외 각지를 떠돌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 글에서는 조사사업 을 둘러싼 이 두 가지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하나씩 논의해 보기로 한다. 그 이전에 2002년부터 새로이 도입된 한국의 국정교과서에 나타난 조사사업에 관련된 부분을 인용하기로 한다. 2002년판 국정교과서는 일제 시대에 대해 약간 진전되어 조사사업에 있어서 문제의 40% 라는 숫자를 삭제하였다. 이는 과거 교과서의 어처구니없는 조작을 스스 로 인정한 셈이지만 그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의 왜곡과 조작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국권 피탈 후 일제는 우리 경제를 식민지 경제 체제로 개편하였다.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농업 부문에서 강행된 토지조사사업이었다. 토지조사사업에서는 우리 농민이 토지 소유에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지정된 기간 안에 신고해야만 소유권을 인정받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토지 신고제가 농민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며, 신고 기간도 짧고 절차가 복잡하여 신고의 기회를 놓친 사람이 많았다. 일제가 이와 같이 까다로운 신고 절차를 택한 것은 한국인의 토지를 빼앗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일제는 미신고 토지는 물론 공공기관에 속해있던 토지, 마 을이나 문중 소유의 토지와 산림, 초원, 황무지 등도 모두 조선 총독부 소유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탈취한 토지를 동양 拓 植 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의 토지 회사나 개인에 헐값으로 불하하였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우리 농민은 많은 토지를 빼앗기고 기한부 계약에 의한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1918년에는 겨우 3%의 지주가 경작지의 50% 이상을 소유하였으며 소작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농가가 77%나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전의 소작권은 인정되지 않고 지주의 소유권만 인정되어 지주제가 강화되었다. 따라서 소작농은 50%-70%에 이르는 고율의 소작료를 내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 國 史, p360) 지난 2001년 5월 한국 정부는 일본 역사교과서에서 예를 들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바다를 넘는다 거나 조선반도에 진출했다 라는 사 소한 용어 사용까지도 일일이 트집을 잡아 35개항의 수정을 요구한 바 있는데, 만약 일본 정부에서 마찬가지 수준으로 한국의 국정교과서에 친일파를 위한 변명 122

123 대응한다면 위에 인용한 부분에서만 35개항 정도는 충분히 수정 요구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국정 교과서에서는 1876년 개항 이후 1945년까지 70년 동안 일본에 관련된 기술이 통째로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아마 필자가 일본 외무성의 교과서 왜곡문제 담당자라 하더라도 특정 부분을 지적해 수정을 요구할 엄두를 내기 힘든 상황이다. 이것은 온몸이 망가져 어느 특정 부위를 손보는 것으로는 소생하기 힘든 환 자와 마찬가지 상태라고 생각된다. 토지조사사업은 통치 초기 대표적인 치적이라 할만한 총독부의 업적이다. 그런데도 그 역사적인 의미와 공헌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고 마치 일제가 농민의 토지를 강탈하기 위한 작업이었던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즉 한국의 교과서 집필자들은 善 意 로 실시된 일본의 조선 통치에 대해 기본적으로 총독부는 강도 라는 조잡한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이같은 문장이 나타나는 것이다. 1. 일제는 과연 조선의 토지를 강탈했는가 한일합병 이후 8년 동안에 걸쳐 이루어졌던 토지일제조사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로 근대적인 토지소유 관계를 정립한 기본조사사업이었 다. 이 사업이 성공함으로 인해 비로소 토지 소유권이 법의 보호를 받아 현대적인 소유권 제도가 정착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토지의 생산 성이 향상되고 자유로운 토지매매가 가능해졌던 것이다. 즉 조사사업은 미개한 조선에 자본주의적 경제구조 를 이식하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였으며, 이 사업의 성공으로 인해 조선은 비로소 원시적인 자본주의 경제질서가 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자체를 착취구조로 보는 사람에게는 양반계급의 착취나 原 始 資 本 主 義 에서 기업영농을 하는 지주의 착취나 마찬가지다라고 주 장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는 자본주의는 보다 발달된 착취구조로서 인민에게 보다 나은 삶을 가져다준 경제질서라고 말하고 싶다. 封 建 사회조차도 경험하지 못한 미개한 조선경제를 단기간에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로 전환시킨 기적과도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이 헌신적이고 체계적인 토지조사사업에 따른 성과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토지에 관한 한 '소유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분명하였다. 조선에서 모든 토지는 기본적으로 국가소유였으며 민간의 토지 소유 는 사실상 국가에 의한 임대권으로만 존재했다. 조선왕조는 수 백년 동안 전국규모의 토지조사사업을 한번도 실시하지 않았다. 워낙 비용과 인력이 많이 들고 복잡한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토지조사를 量 田 사업 이라 불렀는데, 이는 토지의 성격과 위치 등을 측량해 서류에 기록하는 사업이었다. 이는 총독부의 토지 조사사업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부정확한 작업이었으며, 그나마 전국 규모의 양전은 1719년( 肅 宗 45)에 실시된 것을 마지 막으로 200년 동안 중단되어 있었다. 그런 탓에 조선의 토지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원소유자 사망, 이주, 개간, 산불 등으로 토지의 성격과 소유자(경작자)가 바뀌었음에도 정부는 실태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1898년 대한제국 정부는 이같은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전국규모의 양전사업( 光 武 量 田 )을 시작했으나,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이 사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고, 이등박문이 이끄는 통감부는 보다 체계적이고 근본적인 재정혁신과 일 제조사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 계획에 따라 동양척식회사가 설립되고 토지조사사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즉,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은 한국 일각에서 주장하는 바 광무양전으로 시작된 자주적인 조사사업을 저지한 뒤 이를 총독부가 토지 강탈사업으로 변질시킨 것이 아니라, 광무양 전을 계승해 훨씬 근본적이고 체계적인 조사사업으로 대체한 것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이씨왕조를 대신해 대한제국의 새로운 통치자가 된 조선총독부는 대단히 미개하고 저개발 상태인 조선 경제 전반에 대해 장 기적인 개발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재정혁신과 안정적인 세금징수를 위해 토지와 인구, 산업 등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사업을 실시했다. 이는 당시 모든 현대국가에 불가피한 일이었으며, 일본은 이미 1895년 일본영토로 편입된 대만에서도 같은 성격의 國 勢 調 査 를 실시한 적이 있다.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 국가에서는 토지의 정확한 위치와 성격, 소유관계가 정확히 밝혀져야만 그에 기반해서 정책이 수립되고 세금을 거둘 수가 있으며 또한 매매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친일파를 위한 변명 123

124 여러 가지 면에서 조선 현대화의 초석을 닦은 이 거대한 사업에 대해서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에 의해 최초로 체계적인 연구서가 출판 된 바 있다. 토지조사사업은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각종 제도 정비 사업 가운데 가장 먼저 착수했고 8년이나 걸려 시행한 큰 사업이 었다. 그러나 그 중요성에 비해 이 사업 에 대한 실증적 연구의 역사는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난 1997년 민음사에서 출판된 <조선토지조사사업>은 564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연구서로서 대한제국의 광무양전지계사업 ( 光 武 量 田 地 契 事 業 )과 이를 계승한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을 체계적으로 연구분석한 최초의 실증적인 연구성과이다. 또한 이 책의 저자들 - 金 鴻 植 미 야지마 宮 嶋 博 史 李 榮 薰 朴 錫 斗 趙 錫 坤 金 載 昊 등은 일제 식민통치 시기에 대해 기존 경제학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참신한 시각을 지닌 그 룹이라는 점에서도 이 작업의 의미는 크다 할 것이다. 기존 연구에 대해 매우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 책의 저자들은 사업 을 둘러싼 기존 학설에서 극복되어야 할 세가지 신화로서 1 일제가 조사사업을 통해 조선의 토지를 강탈해갔다는 이론, 2 일제시대 조선의 사회구성체는 植 民 地 半 封 建 사회였다는 이론, 3 광무양전이 근대적 토지개혁이었다는 이론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가운데 저자들이 특히 일제의 토지강탈 신화에 대해 중점적으로 비판하여 이를 성공적으로 극복하였다고 자부한다. 지난 1990년대 대우그룹은 상업성이 없는 학술서적 출판을 지원하기위해 대우재단 주도로 대우학술총서 사업을 전개했는데, 이 책도 그 총서 시리즈로 발간되었다. 이 책은 그러나 최근 석연 찮은 이유로 절판된 상태인데, 아마도 저자들의 용 기있는 주장과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 는 출판계 및 학계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여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연구서로 인해 그간 반일 책동의 주된 수단으로 악용되어 온 일제의 토지 강탈이론은 비로소 완전히 극복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책에서 강조된 저자들의 주장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 다. 첫째, '사업'의 과정에서 토지의 강탈은 없었다. 사업의 과정에서 국유지(토지) 약탈은 전혀 없었고(이영훈, 539면), 사업 기간에 쌀값 ( 米 價 )이 4배나 올라 농민의 입장에서 지세의 실질부담은 오히려 절반 정도로 줄었다. 박문규( 朴 文 圭 )이래 인정식( 印 貞 植 ) 이재무( 李 在 茂 )신용하( 愼 鏞 廈 )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관변학자들에 의해 토지 강탈에 대한 억측이 확산되어온 것은 조선민족의 집단 심성구조가 이를 수용했기 때문이다(김홍식, 22면). 조사사업이 시작되기 이전 조선에는 소유관계가 불분명한 토지가 엄청나게 많았지만 그런 과정에서도 토지가 총독부 소유로 되는 일은 드물 었던 것이다. 사업 을 영구병합의 꿈을 가진 침입자가 조선의 말단모리배와 결탁해 벌인 한탕의 토지사기극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 민족 이 봉착한 총체적 위기의 본질을 호도하고 왜소화시키는 무책임한 작태이다(김홍식, 31~33면). 또한 토지 경계나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지 처 리에서 민족별 편기( 偏 奇 )도 없었고 총독부는 전반적으로 민유처분에 관대했던 것으로 밝혀졌다(이영훈, 조석곤) 둘째, '사업'은 근대적 개혁이었다. 이 사업을 통해 조선 총독부는 전국적 범위에서 인민의 사적 소유를 근대적 규정에 따라 법인화하고 증명 제도를 구비하여 근대적 소유제도 및 지세제도를 확립했다. 사업 은 토지의 경계와 성격을 파악하고 규정하는 측면에서는 이미 이같은 조 사가 상당히 철저하게 이루어진 광무양전과 계승관계에 있지만, 소유자 파악의 측면에서는 광무양전이 불철저했고 사업 을 통해 비로소 완결될 수 있었다(미야지마 조석곤 이영훈). 셋째, 농촌주민 또는 일반인민은 '사업'의 성과를 환영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대해 한국 농민들은 대체로 즐거워하고 협조를 제공하는 분위기였으며, 8년에 걸친 사업기간 동안 농촌 주민이 이에 물리적으로 저항한 사건은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총독부는 조사사업을 위해 임시토지조사국 이라는 기관을 설치 운영했는데, 이 작업을 수행한 총독부의 관료들은 실지조사 實 地 調 査 나 분쟁지 처리에서 엄정한 공정 성에 입각해 깨끗하고 강력하며 효율적으로 임했다. 저자들은 이같은 강력한 관료집단이야말로 근대국가에 꼭 필요한 본질적 구성요소였을 것이라고 하며 총독부 관료들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당시 조선총독부의 관료들은 100년이 지난 현대 한국의 공 무원들보다도 훌륭한, 수준 높고 청렴한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친일파를 위한 변명 124

125 넷째, 신고주의는 효율적인 사업방식이었다. 특히 조사사업과 관련해서 한국의 국정교과서와 관변학자들이 비판하고 있는 신고주의에 대해서 저자들은 조선 후기에 이미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뒷받침해주는 제도와 관행이 충분히 발달되어 있어서 신고주의는 그에 조응한 효율적 인 소유자 파악방식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유씨가( 柳 氏 家 ) 사례를 보면 신고주의에 대한 대응도 대한제국기의 양전이나 과세지 조사 때와 크게 달랐다(박석두). 즉 조사사업에서 먼저 일정한 기간동안 정해진 양식에 따라 토지의 물목과 소유자로부터 신고를 받은 뒤, 분쟁이 발생한 토지에 대해서만 총 독부가 개입해 소유자를 확정해주는 방식은 일제가 조선 인민의 무지를 악용해 토지를 강탈하기 위한 계책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선의 방법 이었고 이에 대해 조선인민들은 자발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에 비추어볼 때 한국의 국정교과서가 기술하고 있는 바, 토지조사사업에서는 우리 농민이 토지 소유에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지정된 기간 안에 신고해야만 소유권을 인정받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토지 신고제가 농민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며, 신고 기간도 짧고 절차가 복잡하여 신고의 기회를 놓친 사람이 많았다. 일제가 이와 같이 까다로운 신고 절차를 택한 것은 한국인의 토지를 빼앗기 위한 것이 었다. 그 결과 일제는 미신고 토지는 물론 공공기관에 속해있던 토지, 마을이나 문중 소유의 토지와 산림, 초원, 황무지 등도 모두 조선 총독 부 소유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탈취한 토지를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의 토지 회사나 개인에 헐값으로 불하하였다. 라는 기술이 역사에 대한 악의적인 조작 왜곡인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국정교과서는 그 자체로 총독부의 통치를 모독하고 국민에게 반일감정을 조장하기 위한 흉기 로 기능하고 있다. 특히 토지신고 과정에서는 불법적인 소유권 이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한국의 교과서와 일부 역사서에서 주장하는 바 50%가 넘는 식민지 국가의 광대한 국유지가 창출되었다는 주장은 악의적인 왜곡이다. 당시 조선을 영구 병합한 일본은 한국에서 한 탕의 토지사기극을 연출한 것이 아니라 일본과 동일한 근대적 토지소유제도를 조선에 이식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근본적인 발전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이 토지조사사업 을 계기로 하여 종래 조선사회를 지배하던 전근대적 수취관계가 사라지고 대신하여 자본주의 논리에 따른 새로운 수취관계가 발생했으며, 이 는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됨으로 인해 비로소 조선의 자본주의 발전이 시작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김홍식, 같은 책) 우선 국정교과서에 의하면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결과 조선총독부는 조선 땅의 40%를 차지한 최대 지주가 되어 있었다 고 기술하고 있 다. 그러나 이는 40%라는 정체불명의 수치가 나타난 배경을 전혀 설명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업결과 창출된 국유지는 전체 대상면적 490만여 정보의 2.6%에 불과한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왜곡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왜곡된 사실을 떠나서, 왜 이 사업이 한국근대화와 연관되는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에는 첫째, 토지소유와 관련된 신분적 제약은 없었지만, 국가의 수조권적 토지지배는 잔존하고 있었다. 둘째, 또한 토지로부터의 수 익이 소유자에게 전유되기 위해서는 토지생산성이 안정화된다는 조건 하에서 토지의 수익에 대한 여러 형태의 자의적인 수탈이 철폐되어야 한다. 조선후기 생산력의 발전은 집약적 소농경영의 자립화를 향한 가능성을 열어놓았지만, 국가의 수취체제는 자의적 운영의 소지를 내포하 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후기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근대적 토지소유는 성립될 수 있다. 국가적 규정의 철폐는 결국 국-민유의 구분을 포함한 소유권 사정과 소유권 공시제도의 완비에 의해서, 토지에 대한 자의적 수취는 수익지가에 근거한 비례세제의 도입으로 해소될 수 있 다. 필자가 사업 에 의해 근대적 토지소유가 확립되었다고 보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사업 에 의해 근대적 토지소유가 확립되었다는 것은 이제 사업 을 계기로 자본관계가 농촌에 본격적으로 침투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래 조선사회를 지배하던 전근대적인 수취관계를 대신하여 자본주의의 논리가 새로운 수취관계로 나타났다. 이는 사업 이 자본주의의 발전에 기여했음을 뜻하는데, 그것은 수취관계의 변화를 의미할 뿐 일부 독자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미화론 과는 전혀 무관하다. (같은 책) 친일파를 위한 변명 125

126 이처럼 토지조사사업은 1894년 경복궁 쿠데타 이후 일본의 주도 아래 일관되게 추진되어 온 조선 維 新 사업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으며, 이 사업이 마무리됨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근대화를 위한 법적 제도적인 정비가 완료되어 순조롭게 자본주의 경제로 이전하게 된다. 1910년대 일본의 조선 통치는 주로 농업 생산성의 향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으며, 이 기간동안 방대한 토지조사사업과 농업시설에 대한 막대한 투 자가 이루어짐으로서 1920년대의 산미증식 운동이 시작될 수 있었고 조선의 농업생산력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조사사업으로 인해 농민은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돌이가 되었는가 일제시대 초기에 이루어진 토지조사사업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이전 조선시대의 토지제도가 어떻게 정립되고 운용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의 토지제도는 세조 시절 정립된 과전법을 기초로 운영되었다. 토지는 기본적으로 국가 소유였으며 민간인의 토지 소유는 금지되어 있었다. 사실 조선 시대 대부분의 기간동안에는 민간이 토지를 소유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나라는 곧 땅과 백성이며 이는 모두 왕의 소유로 여겨졌다. 토지의 소유권과 매매에 대한 개념과 관행이 정착된 것은 조선 말기였다. 조선 사회에서 왕의 대리인인 관료와 지방수령들은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에서 생산된 모든 토지수확물에 대해 일정한 세금을 거둬 중앙으로 보냈다. 이 가운데 科 田 에 대해서만은 개인의 소유권이 인정되었다. 과전의 소유자는 자신의 토지에서 발생하는 생산물에 대해 농민에게 일 정량의 조세를 거둘 수 있었고, 또한 소유권을 매매할 수도 있었다. 과전은 관료에게 지급되는 땅이며, 급료로서의 성격을 가진 토지를 말한 다. 이처럼 과전으로 인해 소유권이 민간에게 이양되어 국가의 租 (토지에 붙는 세금)를 면제받은 토지를 私 田 이라 하였다. 즉 과전 체제란 국 가가 관료에게 급여 대신 토지의 수조권을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전은 세습이 금지되었고 경기 지방에 한정되었는데, 이는 과전(사전)이 지나치게 늘어나면 국가의 수입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이 토지제도가 바로 조선사회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근간을 이루었다. 조선이 서유럽이나 일본과 같은 봉건사회였다면 경기 지방은 왕이 직 접 세금을 거둬들이는 영토였을 것이고, 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신하들은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등에 일정한 봉토를 부여받아 군주로서 독 자적인 통치권과 조세징수권을 행사했을 것이다. 중세 조선이나 중국 같은 절대왕조 사회가 봉건사회에 비해 경제발전에서 뒤쳐진 것은 지나 친 중앙집권이 관료들의 부패를 가져오고 그 결과 토지의 생산성이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농민은 경작권을 가지고 있었다. 경작권이란 조를 납부하고 토지를 경작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국가는 모든 토지에 대해 收 租 權 (세금을 받는 권리)을 보유하고 있었고, 농민은 경작권만을 가지고 있었다. 농민은 조를 제외한 생산물을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었고, 경 작권을 다른 사람에게 매매할 수도 있었다. 즉 조선시대에 토지의 매매란 경작권을 매매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토지를 매수한 경우에도 매수자가 토지를 직접 경작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노비를 통해 경작하거나 농민에게 소작을 주는 경우가 많았 다. 이 때 소작농은 생산물의 절반 정도를 지주에게 납부하였다. 즉 조선시대의 농민은 자신이 경작권을 가진 땅에 대해서는 국가에 조를 납 부하였으며, 타인의 땅을 소작하는 경우에는 소작농이 지주에게 세를 납부하고 지주는 여기에서 국가에 조를 납부한 뒤 나머지를 자신의 소 유로 하였다. 조선의 토지 정책에 있어서 가장 큰 우선순위는 안정적인 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조는 왕실 재정과 국가를 유지하는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는 과전이 늘어나 조가 줄어들자 이를 폐지하고 국가가 관리들에게 직접 녹봉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조선 정부는 조세의 납부자 를 확실히 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토지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이 때 토지를 측량하고 조사하는 작업을 양전이라 하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문서를 양안이라 불렀다. 양안에는 토지의 등급, 지형, 위치, 결수, 수조권자와 소유자(경작권자)를 표시하였다. 전국 규모의 양전 사업은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 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조선 시대를 통틀어 단 4회만 이루어졌으며, 그나마도 이 가운데 3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란기에 집중되어 있 었다. 전란으로 인해 많은 문서와 토지대장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전국적인 규모의 양전이 이처럼 힘들었기 때문에 대개는 일정 지역에 한 해 간헐적인 양전 사업이 진행되었다. 어쨌거나 그 규모를 막론하고 근본적으로 양전은 힘든 사업이었기 때문에 조선은 토지의 소유권(경작 친일파를 위한 변명 126

127 권) 변동을 막기 위해 농민의 토지 매매를 금지하였고, 과전의 소유자가 죽거나 토지가 황폐화되어 수확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이를 국가 소 유로 회수하였다. 그러나 토지의 경작권에 대해서는 농민들이 농사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강력히 보호해줬기 때문에 누구도 농민의 경작지를 마음대로 빼앗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토지 매매는 이루어졌으며, 경작권을 소유한 개인들은 다양한 이유로 자신의 토지를 매매하였다. 그러나 수백 년에 한 번씩 이루어지는 양전 사업으로는 이같은 소유권의 변동을 확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보완책을 마련하 여 비교적 토지매매가 자유롭게 되었고, 국가에 조세를 납부하기만 하면 누구나 토지에 대한 소유권(경작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조선 왕조는 다양한 방법으로 조의 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교통수단과 농업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탓에 조선의 토지 생산 성은 크게 증가할 수 없었다. 즉 토지의 생산성이 증가하기 위해서는 미곡의 유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짐으로서 농산물이 상품으로서의 매력을 지닐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지만, 조선 사회에서는 이같은 전제가 충족되지 못한 탓에 토지는 재산으로서 그리 큰 매력을 가지 지 못했다. 특히 18세기부터는 권력보다는 경제력(토지매매를 통한)에 의한 토지소유가 진행되어 갔다. 조선의 토지사유권은 적어도 15세기부터는 확립 되기 시작하여 조선왕조 말기에는 토지의 사적 매매가 자유롭게 성행하고 있었다. 한편, 토지소유권의 증명과 매매, 상속 등의 관계에 있어서는 文 記 가 사용되어 왔다. 문기는 관민이 함께 그 효력을 인정하였으며, 분실시에 는 군수에게 가서 입지( 立 旨 ) 또는 완문( 完 文 )이라는 증명을 받아서 토지소유권을 입증하였다. 특히 개인간의 토지 거래는 국가에 등록되어 공증 받는 제도가 없어 땅문서( 文 記 )를 주고받는 것으로 끝났기 때문에 문서를 강탈당하면 땅도 강탈당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이로 인하여 토지의 매매는 위축되어 지역 시장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지역 관료와 양반들에 의한 토지 강탈과 생산물에 대한 수탈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져 농민의 생활이 피폐해졌다. 이처럼 조선 사회의 원시적인 토지소유 구조는 대규모 기업농의 출현과 농업의 기계화를 저해함으로 인 해 자본주의적 경제질서가 태동할 수 있는 길을 가로막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일합병 이후 역사적인 토지조사사업이 이루어졌다. 그로 인해 조선에는 일본의 현대적인 등기제도가 그대로 도입되어 모 든 토지에 대해 등급, 종류, 지형, 위치, 크기, 소유자 등이 공공성을 가지고 확정될 수 있었으며, 토지에 대한 자유로운 매매가 시작되고 그 결과 생산성이 크게 향상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조선에서는 토지의 소유규모가 점차 확대되어 소작농의 비율이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농민들은 점차 땅에서 해방되어 스스로 소작농이 되거나 도시로 나가 임금노동자가 되고 상업에 종사하는 등 자유로이 직업을 선택 하면서 자본주의 경제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같은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봉건사회가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에는 크게 세 가지 변화가 필요하다. 독립자영농민이 점차 땅의 소 유규모를 키워 지주로 성장해야 하고 수공업자나 기술자들은 점차 사업의 규모를 키워 공장을 소유한 자본가로 성장해야 한다. 또한 유통과 시장이 발달해 사람들은 소비를 위한 생산에서 점차 시장을 겨냥한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경제주체로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봉건사 회였던 서유럽과 일본에서는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에 이 세가지 변화가 모두 나타났다. 하지만 아무런 봉건사회의 경험을 갖지 못했던 조선에서 이같은 변화가 자연스럽게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백년하청과 같은 일이었으므로 조선의 자본주의 이행은 조선총독부의 강력한 일본식 관료제도와 인력이 투입되어 강력하고도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이것이 유일하고도 최선 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같은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촉진한 가장 큰 변화는 역시 토지조사사업이었다. 이같은 기반 조성이 마무리된 뒤 조선 은 순조롭게 자본주의 체제로 이행하기 시작했는데, 농업부문에서 전통적인 자영소농 위주의 생산체제가 지주와 소작농 체제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이는 매우 바람직하고도 자연스런 변화이며 조선의 자본주의 이행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발전된 지주-소작농 체제에 대해 한국의 국정교과서는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우리 농민은 많은 토 지를 빼앗기고 기한부 계약에 의한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1918년에는 겨우 3%의 지주가 경작지의 50% 이상을 소유하 였으며 소작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농가가 77%나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전의 소작권은 인정되지 않고 지주의 소유권만 인정되어 지주 친일파를 위한 변명 127

128 제가 강화되었다. 따라서 소작농은 50%-70%에 이르는 고율의 소작료를 내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 國 史, p360) 그리고 이 교과서에는 친절하게도 다음과 같은 표가 제시되어 있다. 농가 호수 구성비 연도 지주 自 作 自 小 作 小 作 출처: 조선총독부 <조선소작연보> 1집 이같은 기술은 역사적인 사실을 완전히 거꾸로 해석한 모략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한국 정부는 학생들에게 이런 거짓말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인지, 모든 문장이 모략과 조작이어서 어디서부터 비판해야 할지 모를 정도이다. 표를 보면 지주와 자작농을 제외하고 자소작농과 소작농을 합치면 교과서 문장에 나타난 77%라는 숫자가 된다. 이 77%가 조선시대에 비해 증가한 것인지는 줄어든 것인지는 알 수가 없는데, 조선시대에는 이같은 통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런 통계 숫자가 드러날 수 있었던 것도 조사사업이 완결되고 총독부에서 해마다 통계숫자를 발표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소작농이 77%라는 것이 잘된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는 제쳐두고라도 혹시 바람직하지 않은 변화라 할지라도 조선시대에 비해 악화되었는지 약화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소작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농가가 77%나 되었다 라고 말하여 마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농민 대다수가 소작농으로 전락 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대단히 유치한 중상모략이 아닐 수 없다. 겨우 3%의 지주가 경작지의 50% 이상을 소유하였으며 라는 부분도 마치 3%의 지주가 경작지의 절반을 소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데 그렇다면 모든 농민이 땅을 골고루 나눠 가지거나 혹은 모두 국가의 소유로 만들고 농민은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사회주의식 방식이 옳다는 것인가. 어쨌거나 이같은 문장에서 나는 이 교과서를 집필한 고교 교사들의 무지와 독선, 그리고 일본 에 대한 맹목적인 적대감만을 찾을 수 있을 뿐 역사를 기술하는 자세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정도 수준의 저급한 교사들에게 단 하나뿐인 국정교과서의 집필을 맡기는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수준이라는 말인가. 소작료에 대해서도 50% 내지 70%를 지주에게 제공하는 것이 착취인 것처럼 되어 있는데 역시 이 소작료라는 것도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게 되면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니 50%가 높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은 없다. 조선시대에는 아마 소작농이나 자영농이 양반들에게 빼 앗기는 비율이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앞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에는 대규모 기업농의 출현과 수공업자의 자본가로의 변화, 그리고 시장경제체제의 발전이 필수적이라고 했다. 영농이 대규모화되고 기계화되면 자연히 농민들은 농업에서 이탈하여 도시로 몰려들고 이같은 잉여 인력으로 인해 공장이 돌아가고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다. 이것이 소위 자본주의식 수탈 의 구조인데 자본주의의 정당성에 관한 논의는 접어두더라도 자본주의 체제가 적어도 조 선 노예사회나 일본의 봉건사회에 비해서는 한층 발전된 체제라는 점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갑자기 자본주의 이행기에 접어든 조선의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어 새로운 직업을 찾거나 혹은 만주나 연해주를 개척 하기 위해 이주하는 변화는 당연한 것이며 이같은 변화와 갈등을 겪지 않고는 새로운 사회가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바람직하고도 당연한 사회변동을 두고 마치 일제가 우리 민족에 앙심을 품고 괴롭혔다는 증거로 언급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닌가. 구시대 적 농업시스템의 해체 는 조선총독부의 업적이 될 수는 있어도 그것을 가지고 총독부의 통치를 비판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지금까지 토지조사사업을 둘러싸고 한국정부가 교과서를 통해 주장하는 두 가지 거짓말에 대해 살펴보았다. 조선총독부는 조사사업을 통해 친일파를 위한 변명 128

129 전 국토의 절반을 강탈한 일도 없고, 조사사업으로 인해 농촌이 해체된 것도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변화일 뿐 비난할 일이 아니라는 점을 살 펴보았다. 이처럼 정부가 역사를 완전히 거꾸로 가르치고 있는데도 지금까지 학계에서 어떠한 비판의 목소리도 없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한국 인을 제외한 독자들은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이 글에서 비판한 두 가지 거짓말도 겨우 국정교과서에서는 한 페이지도 못 되는 분량이다. 국사 에서 1876년부터 1945년까지를 다룬 분량은 약 50페이지에 달하는데 그 대부분이 이런 식의 거짓말로 채워져 있다. 그나마 2002년판이라 많이 나아졌다는 것이 이 정도인데, 교과서 이외에 각종 참고서와 교재, 고시서적, 공무원 수험서 등의 기술은 교과서보 다 훨씬 더 황당하고 어이없는 거짓말들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2-3] 일제시대는 우리에게 축복이었다 p186 그동안 일제시대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예 눈을 가리고 살았던 한국인들이 그나마 이 시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대두한 식민지근대화 이론이 계기가 되었다 할 것이다. 그 이전에 남북한의 역사학자들은 일본이 없었더라도 조선사회는 자연스 럽게 자본주의로 발전해 근대화되었을 것이라는 자본주의 맹아론을 창작해내는 등 일본 통치의 긍정적인 부분을 부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 력해왔다.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이는 기회주의 지식인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미리 준비된 결론에 역사를 꿰맞추는 곡학아세의 전 형이었다. 1987년 교토대학 나까무라( 中 村 哲 ) 교수의 제안에 따라 안병직 등 한일연구자 16명이 참가한 한국근대경제사연구회가 생겨나 식민지근대화 이론의 산실이 되었다. 안병직은 1980년대 남한 주사파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이라는 이론을 제기한 바 있는데, 이는 1980년대의 한국사회가 아직 자본주의 단계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미국의 착취를 받는 반봉건사회이므로 노동자 계급을 앞세운 정통 사회주 의 혁명보다는 반식민지 민족해방혁명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를 토대로 1980년대 초 서울대에서는 김영환 함운경 등을 중심으로 자생 주체사상파들이 생겨나 이후 삼민투 전대협 한총련 등으로 이어지면서 학생운동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 동유럽 사회주의가 몰락하는 것을 목격한 안병직은 식민지근대화 이론으로 급선회, 일본이 침략을 위한 목적이긴 했 지만 그것을 계기로 조선사회의 자본주의와 근대화가 시작될 수 있었다는, 식민지근대화 이론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는 기존 한국 사학계의 주류였던 수탈이론이나 자본주의 맹아이론에 비하면 한층 진일보한 입장으로서, 일본을 옹호하는 어떠한 이론도 백안시되었던 국내 학문 풍 토를 감안하면 대단히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수탈이론이란 비록 일제시대에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과 근대화가 있긴 했지만 이는 전적으로 일본의 한반도 수탈을 위해 생겨난 것이고 또한 일제시대에는 엄청난 자원과 인력, 생산물 등의 수탈이 자행되어 조선인의 삶은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는 수준이었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자 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제시대의 많은 통계 자료를 조작하였다.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전국토의 50%가 조선총독부 의 소유가 되었다는 둥, 일제시대에 조선 지역 총생산의 80%가 일본으로 빠져나갔다는 등의 무리한 수치를 만들어낸 뒤 자신들의 이론을 뒷 받침하는 근거자료로 삼았던 것이다. 이는 한국 정부에 의한 반일 책동의 근거가 되었고 이 허무맹랑한 수탈이론은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교 과서에 그대로 반영되어 일선 학교에서 교육되어지고 있다. 이들의 주장을 보면 먼저 자금 유출입과 관련, 일제가 패전 때까지 조선에 투여한 자금이 60억 내지 70억 엔인데 비하여 유출된 자금은 가시 적으로 드러난 통계에 의해서만 보더라도 302억 엔이고 물자 유출분 140억 엔을 합하면 440억 엔이 넘어 유입자금의 7배에 이르렀으며, 이렇 게 식민지 전 기간의 추정 GDP 550억 엔의 80%이상이 유출 또는 파괴됨으로 당시의 조선인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 것이다. (정태헌 일제의 경제정책과 조선사회 - 조세정책을 중심으로 p.61 서울: 역사비평사 1996 ) 식민지 근대화를 비판하는 논자들은 식민지 전 기간 동안의 추정 국내총생산액 550억 엔의 80% 이상이 일제로 유출 내지 파괴되었다고 주장 하나, 일제시대 연평균 3.7%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한국에서 이와 같은 사실이 발생했다는 점은 수긍하기 어렵다. 경제학적으로 볼 때 이것은 하나의 마술 같은 이야기이다. (조석곤 수탈론과 근대화론을 넘어서 p.358 ) 친일파를 위한 변명 129

130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잉여가치를 남김없이 착취한다고 했던 맑스도 착취율을 50% 정도로 보았는데, 만약 일제의 착취율이 80% 이상이었다 면 조선 사람들 모두는 벌써 굶주려 멸종했을 것이다. (안병직 식민지 시대 연구, 단견 버려라 시사저널 ) 일제시대 초기 토지조사 사업에 대해서도 서울대의 신용하 등은 이 사업으로 인해 전국토의 약 절반 이상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약탈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1918년 주인을 확인할 수 없어서 조선총독부 소유가 된 토지는 전체 국토의 4%에 불과했으며, 1920년대 들어 총독부는 본토의 일본인에 대해 적극적으로 조선이주정책을 취하면서 조사사업으로 획득한 국유 토지를 유무상으로 불하해주 었지만 이 또한 전체 토지의 10%를 넘어서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권태억 등 한국의 주류 학자들은 식민지 시대의 1인당 쌀 소비량이 1910년에는 약 0.71석이었다가 1919년에는 0.62석, 1929년에는 0.44 석, 그리고 1944년에는 0.56석으로 감소했다는 통계 수치를 들먹이면서 일제시대 조선인들의 식량사정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상인등 다른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일제시대의 쌀 소비량은 평균 0.58석 수준을 비교적 일관되게 유지했으며 일제시대 후반기에 는 오히려 소비량이 약간 증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중은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에게 자신의 판단을 위임하게 마련이므로 역사학이나 경제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나름대로의 근거를 들어 같은 사실에 대해 상반된 주장을 하게 되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같은 주장을 펼치는 학자들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늠하면서 글을 읽게 되면 어느 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쉽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건 1990년대 들어 시작된 식민지근대화 이론은 일제시대에 대한 이전의 평가에서 한 걸음 발전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들은 일제시대 에 이룩된 산업화라는 것이 당시 한반도에서 가능했던 유일하고도 최선의 발전과정이었다는 사실을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이들은 당시 조선 이 '서유럽이 장기간의 이행과정에서 성취한 근대 자본주의를 순전히 외래적인 형태로, 그러나 역설적으로는 가장 선진적인 형태로 발전시켰 다.'(이영훈)고 말한다. 12이영훈, 1996,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로의 이행과 특질 경제사학 21, p. 95. 식민지 초기에 일제는 근대적 관료국가를 구축함으로써 위로부터의 산업화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고, 토지조사사업의 실시를 통해 근대적 소유관계를 확립하였다. 또한 교육제도나 재정, 금융제도 및 교통, 통신시설과 같은 각종 사회간접자본도 적극적으로 육성되었다. 물 론 이와 같은 조처들은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 과정에서 일제가 식민지에 자본주의를 이식시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일제는 한국을 비롯하여 자신이 통치하던 식민제국 전부를 함께 동원하고 근대화시키는 발전전략을 수립하였기 때 문이다. (전상인) 식민지 시대 일본은 스스로의 자본주의 발전이 불충분하였고 또한 서구가 지배하는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 불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일국적(national) 산업화 전략이 아니라 일본과 인근 식민지들, 특히 조선을 포함하는 지역적(regional) 산업화 전략을 선택하였다. 곧, 일본의 '위로부터의 근대화' 방식은 일본에만 해당되는 모델이 아니라 일본 식민지에도 동시에 해당되는 것이다. (서용석) Yong Sug Suh, 1991, Class and Colonial Path to Modernity in Korea, ,? PhD Dissertation, Department of Socio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참조.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한국의 보호국이 되었던 20세기 초반의 상황에서 생각해볼 때, 일본은 당시로선 감당하기 벅찬 러시아와 무리한 전쟁 을 수행한 뒤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다. 대개 이런 경우에는 승전국이 패전국으로부터 전쟁배상금을 받아 경제회복에 투입하는 것인데, 일본 은 10억엔의 전비와 40만 이상의 인명피해를 감수하면서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러시아로부터 한 푼의 전쟁배상금도 받지 못한 채 대신 조 선과 사할린, 쿠릴열도 등 몇몇 영토를 넘겨받았을 뿐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이들 새로운 영토를 잘 활용하여 손해를 만회해야만 하는 입장 이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이미 대만을 10년 간 통치하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였기 때문에 저개발 상태의 식민지를 키워 뭔가 빼먹는 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친일파를 위한 변명 130

131 대만의 경우, 통치 첫해인 1896년에만 일본 정부는 정부 예산의 11%라는 막대한 돈을 대만에 쏟아 부어야만 했다. 그 뒤 대만에 지급하는 보 조금은 조금씩 줄어들긴 했지만 대만 경영은 계속 적자였고 1905년에 와서야 대만 식민지 정부는 자립경제를 달성할 수 있었다. 대만 통치 초기 일본은 대만에서 사탕수수 농업을 발전시켜 외화를 얻어내는 데 주력했는데, 1920년대 일본에 쌀이 모자라게 되어 쌀값이 오르자 대만 의 농민들은 사탕수수 대신 쌀 농사를 지어 일본에 수출,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 이로 인해 일본의 농업은 몰락했을 뿐 아니라 대만의 사탕 수수 생산량도 줄어들게 되었다. 이후 일본 정부는 대만의 쌀 생산을 줄이고 설탕 생산을 장려하는 정책을 취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반도는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로서는 전혀 매력이 없는 땅이었다. 변변한 지하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후가 따뜻해 플랜테이션 농업을 할 수 있는 지역도 아닌 척박한 땅이다. 일본은 대만에서 따뜻한 기후를 이용해 외화획득용 사탕수수 농업이라도 육성할 수 있었지만 조선의 경우엔 이것조차 불가능했다. 일본도 당시 산업혁명 초기의 농업 국가였기 때문에 조선의 지주들은 쌀과 콩을 생산해 비싼 값으로 일본에 수 출해 수익을 올렸지만 이는 일본의 농업경쟁력을 떨어뜨려 경제발전에 바람직하지 못한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에 있어서 조선의 가치란 대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얻었다는 점 이외에는 특별한 이점이 없었고, 이 때문에 일본으로서 는 조선 경제를 신속하게 발전시켜 일본경제와 통합함으로써 시장규모를 확대하고 장기적으로 일본과 연계된 규모의 경제를 이룩하는 일종의 '장기투자'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즉 당시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획득하려 했던 이유는 지하자원이나 설탕 고무 같은 원료를 획득하려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는데 자원 기후 문화면에서 일본과 닮은꼴이었던 조선은 식민지로서는 최악의 지역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조선을 기초부터 착실히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경제정책은 통치 초기인 1910년대에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난잡한 토지소유관계를 근대적인 방식으로 재편하는 일이었 고, 1920년대에는 그 성과를 기반으로 산미증산운동 등 토지의 생산성 향상에 힘을 기울였다. 이 같은 단계를 통해 조선에 기초적인 자본주 의 경제가 정착하게 되자 1930년대에부터 일본으로부터 대규모의 자본이 투자되어 본격적인 공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공장수 안병직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의 식민지 경제는 1911년부터 1938년까지 연평균 3.7%의 성장을 보였는데, 이는 당시 세계 경제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매우 장기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었다. 1918년부터 1944년까지 진행된 산업구조의 변화를 보면, 농수산업의 생산 비중이 80%에 서 43%로 하락하고 대신 공업생산의 비중이 18%에서 41%로 성장하였다. 공장이 많이 세워짐에 따라 노동자의 숫자도 1943년 175만여 명으 로 늘어나 1940년대 초 식민지 조선의 경제발전은 선진제국이 근대 경제성장으로 진입한 초기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친일파를 위한 변명 131

132 1930년대 후반 이후 일제는 일본 전체 공업시설의 25%를 한국에 배치하였고, 특히 전시체제에 돌입한 이후에는 중화학공업까지 유치하였는 데 이는 식민지 지배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한국학자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일본의 조선 경영은 현지에서 오히려 산업화를 역행해 농업사회로 퇴보시켰던 영국의 인도 경영과 비교해볼 때 매우 대조적인 일이다.(브루스 커밍 스, The Lagacy of Japanese Colonialism in Korea) 식민통치 전 기간에 걸쳐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 및 문화면에서도 단일한 단위로 묶였다. 일본은 꿈에라도 나중 에 한반도가 독립할 것이라고는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반도에 엄청난 물량의 산업시설을 건설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930년대부터 한 반도에 들어선 흥남의 질소비료공장, 수풍의 수력발전소, 진남포의 공업단지 등은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첨단 중화학 산업이었을 뿐만 아니 라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의 시설이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이 조선의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해 투자한 관개사업이나 농촌개발사업 역시 다른 식민지의 경우에는 절대 찾아 볼 수 없는 매우 적극적인 식민지 경영의 모습이었다.(브루스 커밍스, 같은 책) 공립초등학교2_학교수&학급수 그 외 교육면에서는 6년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대한제국 말 2.5%에 불과하던 것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 193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78%가 국민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았고, 전체의 17%가 12년 이상의 교육을 받았다. (석탄통계연보) 이 같은 교육이 근대화의 토대가 되었고 한국전쟁 후 남한에서 본격적인 산업화의 토대가 되었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국인들이 역사를 해석하면서 종종 착각하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과거 대륙을 통일한 여러 왕조들이 조선을 직접 통치하지 않고 조공을 받으면서 군신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우리 민족이 자주정신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곳이 별로 점령할 가치가 없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기 후가 좋은 것도 아니고 토지가 비옥한 것도 아니요, 자원이 풍부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구태여 정복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19세기 말 얼지 않는 항구에 한이 맺힌 러시아나 대륙진출에 한이 맺힌 일본 정도가 군사적인 이유로 조선을 원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우여곡절 끝에 식민지로서는 최악의 조건을 갖춘 조선을 인수받은 일본은 초기부터 막대한 돈을 투자해 철도를 놓고 신작로를 만들고 토지조사사업을 벌이고 근대적인 관료 제도를 이식했으며, 학교를 세워 조선인들을 교육했던 것이다. 식민지로서 최악의 조건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세 가지 측면을 지적할 수 있는데, 첫째로 당시 조선이 기후가 따뜻하지도 않고 별다른 천연자원도 없었으며, 둘째 정치경제 문화적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미개한 지역이었던 데다, 셋째로 그나마 동양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유교근본주의가 뿌리박 힌 사회로서 이를 타파하고 자본주의 경제에 맞는 신사상을 보급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기 때문이다. 친일파를 위한 변명 132

133 철도 화물수송 청일전쟁 이후 대만을 통치한 일본이 최초 10년 동안 해마다 일본 예산의 10%가 넘는 엄청난 자금을 대만의 기반정비를 위해 쏟아 부었던 것을 생각할 때, 지정학적인 중요도를 제외하고도 조선은 영토나 인구 면에서 대만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덩치가 컸기 때문에 매년 일본 정 부 예산에서 엄청난 자금이 조선총독부에 대한 국고보조금으로 투입되었다. 일본정부가 조선에 투입한 보조금은 많을 때에는 2천만 엔이 넘 기도 했는데, 이는 일본 전체 예산의 20%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렇게 조선에 투입된 자금은 관공서와 학교를 신축하고 교사와 공무원에게 봉급을 지급하며 도로와 철도 항만 전력 시설 등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런 이례적인 투자는 조선을 키워 잡아먹으려는 웅대한 계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제는 한반도가 우리 땅이다, 즉 이제는 여 기도 일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제는 조선을 통치하면서 특히 교육에 많은 투자를 했는데, 이 시기 여러 가지 인센티 브를 제공하면서 본토에서 가장 우수한 교사들을 대거 조선으로 초빙하여 일선 학교에 투입하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사범학교 체제에 따라 교사를 양성했는데,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범학교에는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처럼 우 수한 엘리트 교사들이 정부의 명령에 따라 대거 한반도로 부임하여 조선인들의 문명개화를 위해 헌신했던 것이다. 1906년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여 조선 근대화의 기반을 닦은 이토 히로부미는 교육사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1895년 갑오 개혁으로 인해 근대교육 제도가 시작되었지만 이토가 부임한 1906년까지 11년이 지나도록 전국의 소학교는 40개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었 다. 이 같은 사정을 파악한 이토는 부임하자마자 정부 관료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그동안 도대체 당신들은 무엇을 했는가 하면서 질책한 뒤 학교 건설 사업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개혁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000개가 넘는 각종 학교가 들어서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또한 이토는 해마다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조선을 일본의 엔 통화권으로 통합하고 역사상 최초로 지폐를 만들어 사용하도록 함으로 써 이후 조선의 물가는 안정되고 현대적인 화폐경제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일제시대 힘들게 구축된 조선의 경제기반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부분 파손되어 한반도는 다시 원시시대로 회귀하고 말았다. 특히 해 방 전 조선에 있던 일본인 60만 명이 모두 일본으로 귀국한 것이 남북한의 발전에 있어서는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 되었다. 하지만 한 사회가 발전하는 데에는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요소들이 훨씬 더 중요한 법이다. 교육과 제도, 이념과 관습, 법률, 경험과 기술 같은 것들은 결코 전쟁으로도 파괴되지 않는다. 2차 대전 이후 전 국토가 잿더미로 변하고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야 했던 독일과 일본 경제가 그토록 신속하게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신이 기적을 베풀어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이전에 선진공업국이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 친일파를 위한 변명 133

134 이다. 고도의 문명을 이루어 향유한 경험이 있는 사회는 일시적인 참화로 물질 기반이 모두 파괴되어버린다 해도 다시 신속하게 일어설 능력을 갖 추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근대화란 보이지 않는 기반과 경험의 축적, 그리고 이 같은 요소들을 지니고 있는 인간 자원이 훨씬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일본이 한국사회에 기여한 것들을 높이 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한반도에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고 공장을 짓고 사람들을 개화 시켰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입헌 군주국가를 만들어 근대화를 시도했을 경우 오랜 세월이 걸려도 깨어지지 않았을 완고한 문 화유산과 사회제도, 이념 같은 정신적인 장치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무려 5백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만들어지고 갈고 다듬어진 정교 한 체제였으므로 어지간한 변화와 충격에는 깨어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단지 일본이라는 이민족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그토록 짧은 기간 에 전근대적인 요소들을 완전하고 철저하게 파괴하고, 그 위에 새로운 사회가 이식될 수 있었던 것이다. =============================================================================================== [2-4] 이완용 - 고독했던 애국의 길 p198 조선말 정치가인 이완용은 1858년 경기도 광주군에서 몰락한 선비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6살 때 부친으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해 몇 달 만에 마치고 동몽선습을 익혔다고 한다. 7살에는 효경, 8살에는 소학을 완성해 마을에서 신동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 터 총명한데다 글 읽기를 좋아해 밤을 새워 고전을 학습했다고 전해진다. 곧 우봉 이씨 가문에서 영특한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문이 퍼져나갔 다. 그런 덕에 이완용은 10살 되던 해 한양의 명문대가 이호준의 양자로 입양되어 가문의 대를 이을 장손으로 발탁되었다. 이호준은 당시 우봉 이씨 가운데 가장 성공한 인물로서 고종과 민비 등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완용을 양자로 삼 아 가문을 물려주려 한 것이다. 이호준의 후광과 타고난 재주를 바탕으로 이완용은 한말 난세에도 별다른 불행 없이 순탄한 관직생활을 영위 할 수 있었다. 이완용은 1882년 임오군란 진압을 기념해 실시된 특별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규장각 대교, 시강원 사서 등 하급관리로 정치역정을 시작했다. 1886년에는 정부에서 설립한 신식 귀족학교인 육영공원에 들어가 영어와 지리 역사 등 신학문을 익혔다. 1886년은 조선에서 최초로 근대식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학생을 모집한 역사적인 해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학교인 이화학당을 비롯해 배재학당, 육영공원 등 3개의 학교가 만들어졌다.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은 미국에서 온 선교사 등 민간인들이 설립해 어려운 환경에서 운영되었다. 하지만 육영공원은 처음부터 고 종의 적극적인 관심과 후원 아래 정부에서 설립 운영했던 교육기관으로서, 미국에서 초빙한 정식 교사와 학교시설을 갖추고 출발하는 등 다 른 학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육영공원은 좌원과 우원으로 나누어 학생을 모집했는데, 좌원은 현직관리, 우원은 고관들의 자제나 친척 가운데 선발된 영재들에게 입학자격 이 주어졌다. 제 1기 학생은 좌원 14명 우원 21명 등 모두 35명이었으며 강의는 미국에서 초빙된 교사 3명에 의해 영어로 진행되었다. 즉 이 완용은 조선에서 최초로 서양교육을 받고 영어 구사 능력을 갖추게 된 관리였다.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익힌 덕에 이완용은 1887년부터 1890년까지 3년 정도의 기간을 미국공사관에서 외교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당 시 조선은 미국 현지에 교민도 없고 미국과 교역하는 것도 없었으므로 조선 외교관들은 아무 할 일도 없이 소일하는 것이 전부였다. 씻지 않 아 몸에서는 악취가 진동하고 말도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상한 복장을 고집하던 당시 조선 외교관 일행이 지나갈 때마다 미국의 아이들은 돌을 던졌다고 한다. 또한 다른 나라의 외교관들은 이들이 왜 미국 땅에 머무르면서 비싼 국고를 탕진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저 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에는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혁명가 서재필과 서광범 등 2명의 조선인이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조선정부 친일파를 위한 변명 134

135 에 의해 역적으로 규정되어 있던 인물들이어서 공사관측과는 아무런 접촉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1890년 미국공사관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이완용은 성균관, 형조, 이조, 공조 등에서 참판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하다가 1895년에는 오늘 날의 교육부장관에 해당하는 학부대신이 되었다. 1896년에는 아관파천 때 고종의 경복궁 탈출을 도운 공으로 외부대신 겸 농상공부 대신의 벼슬을 얻었고, 이후 독립협회 활동으로 좌천되었으나 나중에 일본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이토 히로부미의 신임을 얻어 1905년 다시 학부대신 이 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지지, 솔선하여 서명함으로써 을사5적의 한 사람으로 지탄을 받았다. 이후 이완용은 을사조약 을 성사시킨 공신으로서 1905년 12월에 의정대신 서리 겸 외부대신 서리,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에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정부는 고종의 을사조약 위반에 분개, 조선에 선전포고를 하여 무력으로 점령하겠다는 뜻을 이완용 에게 통고하게 된다. 이에 이완용은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여 왕위에서 물러나도록 한 뒤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로 인해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집이 불태워지고 1909년 12월22일에는 명동성당 앞에서 자객 이재명으로부터 습격당해 허파를 칼에 찔리고 온몸이 난자당하는 중상을 입었으나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이 되어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 그 공으로 일본 천황에 의해 백작의 작위를 받고 조선귀 족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거쳐 1911년 조선 귀족원 회원을 역임했고, 1920년에는 후작의 반열에 올랐다. 글씨를 잘 써 동양 최 고의 명필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1927년 69세에 이르러 이재명으로부터 얻은 상처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사망하였다. 당시 이완용의 왼쪽 허파는 습격 때 입은 자상으로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고 오른쪽 허파마저 폐렴으로 인해 기능을 하지 못하자 더 이상 생 명을 유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완용이 사망하자 당시 조선총독 사이토는 '이완용 후작은 동양 일류의 정치가로서 손색이 없었고 그 인 격은 뭇 사람들로부터 흠모할 바가 많았으니 그의 죽음은 국가의 큰 손실이다'라고 추모했으며, 그의 장례식은 고종 국장 이래 최대의 추모 인파가 몰린 행사였다. 이완용은 한국의 교과서 등에서 일본의 조선 점령에 협력한 친일파의 상징으로서 나라를 팔아먹은 만고의 역적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한국에 서는 항상 이름 앞에 '매국노'라는 호칭을 붙여 대개 매국노 이완용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에 대해서는 며느리를 겁탈하여 아들이 죽은 뒤 데리고 살았다느니, 고종을 칼로 위협하여 왕위에서 물러나도록 하였다느니 하는 근거 없는 거짓말들이 국사학자들에 의해 당당히 언급되 는가 하면, 그의 묘에 대해서는 유교에서 가장 큰 모욕으로 여겨지는 부관참시(죽은 사람의 묘를 파헤쳐 다시 죽이는 일)가 행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완용의 일생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면 그가 이처럼 큰 모욕과 비난을 받을만한 인물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친일파로 알려져 있지만 평생 일본어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일본인들과 대화할 때에도 영어를 사용하는 등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으 며, 동양 최고의 명필로 알려져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일본 천황은 몸소 그의 글씨를 청하고 답례를 했다고 한다.(윤덕한, 이완용 평전) 또한 이완용은 고매한 학식과 인품으로 조선과 일본의 정치인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도 존경을 받았으며 그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 었다. 그가 일본 통치에 협력한 것은 무능한 조선 왕실이 끝내 거부한 문명개화의 과제를 일본의 힘을 빌어 이룩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결 코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비난을 들을만한 일은 아닌 듯하다. 관직에 입문한 이후 이완용은 대부분의 기간을 정동파로서 일본 및 청나라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활동하였다. 정동파는 주로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서양 열강의 외교관과 선교사, 조선 정치가 등으로 구성된 클럽으로서 대부분의 기간동안 조선 정치에는 그리 큰 이해관계가 없는 중립적인 그룹이었다. 이완용은 1896년 오랜 미국 망명세월을 마감하고 귀국한 서재필을 정동파 모임에서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그와 함께 독립협회를 결성, 자주독립 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게 된다. 당시 독립협회의 이완용 대신에 대한 평가를 보면 그의 인물됨을 짐작할 수 있다. [ 독립신문 1897년 1월 23일자 ] 친일파를 위한 변명 135

136 지금 외부대신 리완용 씨가 일년 동안에 한 고생을 외부 사람들은 알 수가 없으나 이 때에 외부대신 지위가 그렇게 샘낼 자리가 아닌 것이 리완용씨는 다만 조선 사람들만 가지고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외국과 상관이 많이 있는 까닭에 조선 같은 나라에서 외국과 탈 없고 모 양 상하지 않도록 교제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리씨가 일년 동안에 한 일을 보게 되면 자기 힘껏 자기 재주껏 평화토록 조선에 큰 해 없도록 일을 조치하여 갔으니 만일 리씨가 갈리게 되면 리씨보다 나은 이가 또 있을는지 모르겠더라. 이 시기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숨어 지내던 시절이다. 독립협회는 고종 환궁운동을 펼치고 있었으나 러시아에 빌붙어 있는 정부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독립협회파는 정부에서 수세에 몰려 있었고, 곧 개각이 이루어져 문부대신과 외부대신이 이완용에서 친러파로 교체될 것이라는 설이 무성하던 시기였다. 당시 이완용이 신념과 용기를 갖춘 애국자임은 서재 필이 독립신문 논설에서 [대한의 몇째 안가는 재상]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자 ] 학문 있는 정치가가 몇이 없으나 그 중에 마음이 발라 나라를 자기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혹시 있는 것을 알리라. 몇 달 전에 리완 용씨가 외부대신으로 있을 때에 어떤 외국 사신 하나가 대한 정부에 대하여 무슨 권리를 자기 나라 사람에게 주라고 하였다. 그때 내각에 있 던 대신 중에도 그 권리를 대한 사람에게 주지 말고 외국 사람에게 주자는 의론이 매우 있었으나 리완용씨는 혼자 대한 인민을 위하여 못 주 겠다고 정정당당히 말하였다. 정부에서 이같이 말한 까닭에 그 외국 공사가 리완용 씨를 좋아 아니하여 매우 불편한 일이 많았으나 리완용 씨는 죽는 것을 무서워 아니하고 자기 생각에 나라를 위하여 옳은 일을 기어이 할 양으로 그 외국 공사의 책망과 한 정부안에 있는 대신들의 성냄을 받아가면서도 굽히지 않았다. 필경 일은 그의 뜻대로 아니 되었으나 대체 리씨가 자기 나라 임금과 인민을 대하여 자기 직분을 하였 는지라. 그 까닭에 우리가 리씨를 대한의 몇 째 아니 가는 재상으로 알고 년은 아버지인 대원군이 무서워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갔던 고종이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온 시기이다. 3국 간섭에 굴복한 일본은 조선에 서 힘을 잃었고 대신 러시아 공사 웨베르가 조선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시절이었다. 위의 인용 글에 나타나는 외국 공사는 바로 러시아공사 웨베르를 지칭한 것으로서 당시 조선의 관리가 그의 요청을 거절하는 일은 실제로 생명을 걸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는 러 시아만이 조선 영토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을 뿐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은 조선에 대한 영토적 야심은 없었고 다만 여러 가지 이권을 챙기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열강이 조선에서 차지하고자 했던 이권은 광산 채굴권, 삼림 벌채권, 철도 부설권 등 크게 세 가지였다. 고종은 이 같은 여러 이권들을 서양에 넘겨주면서 막대한 뇌물을 받아 챙겼다. 하지만 제아무리 고종이 군주라 할지라도 담당 대신(지금의 장관)의 결재 없이는 이권을 쉽 게 넘겨줄 수 없었으니, 학부대신이자 외부대신이었던 이완용은 20년 동안 압록강 및 두만강과 울릉도의 삼림을 베어갈 수 있는 권리를 러시 아에 팔아넘기는 조약에 대해 서명을 거부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완용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한제국 최대의 이권이었던 이 사업은 러 시아에게 넘어갔지만, 제국주의 강대국의 부당한 압력에 목숨을 걸고 대항하였던 일은 이완용의 강직한 사람됨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 다. 이처럼 아관파천 기간과 고종이 환궁한 이후에 줄곧 러시아에 맞서 국익을 수호하던 이완용은 1897년 말 결국 친러파에 의해 실각, 평안남도 관찰사로 좌천되어 쫓겨나게 되었다. 1898년 이완용은 고종의 명을 받아 잠시 서울로 복귀했으나 여전히 중앙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고 다시 전라북도 관찰사가 되어 수도 서울을 떠나야 했다. 이 시기의 독립신문은 이완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독립신문 1897년 9월1일자 ] 학부대신 리완용 씨는 평일에 애국 애민하는 마음만 가지고 나라를 아무쪼륵 붙잡고 백성을 구완하며 나라 권리를 외국에 뺏기지 않도록 하 려고 애를 쓰다가 미워하는 사람을 많이 장만하여 필경 주야로 사랑하던 자기 대군주 폐하를 떠나 평안남도로 관찰사가 되어 가게 되었다. 관찰사의 직무도 또한 대단히 중한 직무요 임금과 백성을 사랑하여 일하는 데서도 정부에 있는 사람만은 못하나 또한 중임은 중임이라. 이 대신이 정부에서 나가는 것에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 대군주 폐하께 충성 있는 사람들은 다 섭섭히 여기더라. 친일파를 위한 변명 136

137 [ 1898년 3월 29일 독립신문 ] 삼월 이십 사일 독립협회 회중에서 임시회를 열고 회원 리건호 홍긍섭 최경식 삼씨를 총대 위원으로 특별히 정하여 전라북도 관찰사 리완용 씨를 전별하면서 회중에서 리완용 씨에게 편지하기를, 각하가 본래 맑은 덕과 중한 물망으로 좋은 벼슬도 많이 하고 일찍 대신도 하였고 또 본회 부회장의 직임을 겸하여 열심히 일한지가 이미 삼년을 지났다. 그 뒤 여러 사람이 한가지 소리로 천거하여 회장이 되어 하늘을 가리켜 함께 맹세하고 기어이 황상 폐하를 보호하여 우리나라 자주독립의 권리를 튼튼케 하였다. 칙명을 받아 오늘 길을 떠나는지라 본 회원들이 수 레를 붙들어 창연하고 결연함은 어찌 그 다하리요. 엎드려 원컨대 각하는 더욱 가다듬어 진무하고 순찰하여 천하의 뜻을 맑게 하기를 구구히 바라노라고 하였다. 이 글을 보면 이완용이 독립협회의 회장으로서 고매한 인격과 덕으로 임무를 수행함으로서 독립협회의 정신적인 구심점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 일하던 시절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의무교육을 실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은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지위로 올리려고 하였다. 우선 공식적인 칭호에서 전하를 폐하로 높여 불렀으며, 명령을 칙, 국왕 자신의 호칭을 짐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중단되었으나,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 러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고 1896년 1월부터 연호를 건양으로 고쳐 부름으로써 실현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중단되었다. 1897년 2월 고종이 환궁한 후 독립협회는 다시 칭제건원을 추진, 8월에 조선의 연호를 광무로 고쳤으며, 1897년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올 림으로써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 제국이 성립한 뒤 독립협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떠 입헌군주제로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고종과 수구 파는 전제군주제를 유지하려 했다. 독립협회와 수구파의 이러한 대립은 1898년 부산 영도를 러시아에 임대하는 문제로 폭발하였다. 러시아의 영도 점유는 침략의 첫 단계라고 판단한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종로에서 1만여 명이 참가한 만민공동 회를 개최하였다. 만민공동회에서는 영도조차( 租 借, 빌려줌) 반대, 일본의 국내 석탄고 기지 철수, 한로은행 철거 등을 요구하고 대한제국의 자주독립 강화를 결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의 영도조차 요구가 철회되고 일본도 국내의 석탄고 기지를 되돌려주었으며, 러시아와 일본 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니시-로젠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세력 균형이 이루어짐으로써 조선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자주독립국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실낱같은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역사상 최초의 정치 시위였던 만민공동회의 성공 이후 이완용이 이끄는 독립협회는 다시 입헌군주제를 추진하였다. 그 성과로 1898년 11월 2일에 이르러 대한제국에는 오늘날의 국회 역할을 하는 중추원신관제가 성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에 대해 황국협회를 중심으로 뭉친 수구파들은 강력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독립협회가 의회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한 공화국을 수립하려 한다는 전단을 뿌렸던 것이다. 이에 놀란 고종은 경무청과 친위대를 동원하여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고 개혁파 정부를 무너뜨려 버렸다. 그리고 이후 조병식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어 고종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 회를 강제 해산함으로써 자주독립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완용은 서재필과 함께 이 같은 구한말 자주독립 운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하였으며 실제로 내각의 중심에서 실천에 옮긴 인물로서, 후 세에 애국자라는 평가를 받을 수는 있어도 매국노라고 부르기는 힘든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의 입헌군주제를 둘러싸고 1898년 과 1899년에 걸쳐 벌어졌던 치열한 정치투쟁은 결국 고종과 수구파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과 문명개화를 추진했던 혁명세력은 모두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북관찰사로 일하던 이 완용도 입헌군주제 투쟁이 실패로 끝난 뒤 황국협회 및 황성신문 등 수구파들의 모략을 받아 결국 관찰사에서 면직 당하게 된다. 이후 정치 에 환멸을 느낀 이완용은 고종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모든 관직을 고사한 채 고향에 내려가 은둔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04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다시 조선의 개혁이 시작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자 왕실의 일을 담당하는 궁내부 특진관 친일파를 위한 변명 137

138 직을 받아들여 중앙정계에 복귀하였던 것이다. 이후 동학과 독립협회파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혁명 세력은 일진회를 결성하여 수구파에 대한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일본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 문명개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혁명세력의 노선은 궁극적으로 일본과 합병함으로써 신속하게 조선의 근대화를 이룩한다는 것이었다. 이완용은 이 같은 새로운 정세에 따라 기존의 자주독립 노선을 포기하고 일본과의 합병 노 선을 추진하게 된다. 이완용은 이후 을사보호조약, 고종의 양위, 한일합병 등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중재 역할을 자임함으로써 수구파들의 첫 번째 테러대상이 되었다. 이는 이완용이 당시 조선 정계에서 고종과 일본, 일진회 등 3대 세력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매우 자연스러 운 일이었다. 이 같은 중심 역할은 이완용의 고매한 인품과 정치역량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그는 선선히 자신의 소임 을 받아들여 행동에 옮겼다. 당시 조선 반도의 통치자를 낡은 이씨 왕조에서 일본으로 교체하는 역사적인 작업은 악역을 자처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 에서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왕조를 유지하고 전통관습을 지키는 것이 선이라고 믿는 무지몽매한 군중들에게 살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완 용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 펼쳐진 새로운 국제 정세에서는 일본과 스스로 병합하는 것만이 유일한 애국의 길이었던 것이 다. 그리고 1905년 일본의 통감 통치가 시작된 이후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에 의해서 이 땅에는 비로소 문명개화를 위한 작업들이 속속 추 진되기 시작되었다. 개항이래 개화당의 선구자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조선의 유신이 일본과의 합작을 이룬 뒤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1919년 삼일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이완용은 가장 먼저 민족대표로서 추천되었으나 운동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악명이 해가 될 것이라는 이유 로 고사하였다. 이후 3개월 동안 계속된 독립운동이 수그러들지 않고 일본 정규군의 투입이 목전에 다가오자 이완용은 신문을 통해 3차례에 걸쳐 조선 민중들에게 독립운동을 중지할 것을 간곡하게 호소하였다. 이완용은 마지막으로 발표한 3차 경고문에서 조선 민중을 향해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본인이 다시 한마디 하고자하는 것은 독립지설이 허망함을 우리들로 하여금 확실히 깨닫게 하여 우리 조선 민족의 장래 행복을 기도함에 있 다. 오늘날과 같이 국제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우리가 이 삼천리에 불과한 강토와 모든 정도가 부족한 천여백만의 인구로 독립을 고창함이 어 찌 허망타 아니하리요. 병합 이해 근 십년 동안 총독정치의 성적을 보건대 인민이 누린 복지가 막대함은 내외국이 공인하는 바이다. 지방자 치, 참정권, 집회와 언론 문제 등은 조선 사람들의 생활과 지식 정도에 따라 정당한 방법으로 요구한다면 동정도 가히 얻을 수 있다. 지금 우 리에게 가장 급한 것은 독립이 아니라 실력을 양성하는 일이다. 이완용은 당시 세계 정세로 보아 조선이 자주독립국이 되는 것보다는 일본의 통치를 받으면서 실익을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노선이라고 판단 했다. 당시 이완용은 일부에서 욕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조선인들에게 아직도 막대한 영향력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 고 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이완용의 호소로 인해 1919년 3.1운동은 6월초 군대에 의한 유혈진압 없이 평화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이완용의 사상은 이후 이광수 최남선 등 젊은 지식인들에게 전파되어 민족개조론과 실력양성론으로 발전 하였다. 이후 이완용은 새로이 부임한 사이토 총독을 설득하여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멸시와 차별을 없애도록 하고 각 도마다 조선인으로 구성된 의 회를 구성하여 조선인의 참정권을 보장하도록 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문화정치의 시대가 열렸고 일본과 비슷한 시기에 문예부흥이 시작되 어 수많은 시인, 작가, 예술인들이 생겨날 수 있었다. 1927년 고종의 국장 이래 가장 성대하게 치러진 이완용의 장례식에서는 위대한 개화혁명가 박영효가 장례부위원장을 맡아 생전에 이룩한 업 적과 활동을 추모하는 조사를 낭독했으며, 국내외에서 수많은 추모객이 참석해 위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의 운구 행렬은 서울의 옥이동에 서 광화문에 이르기까지 10리에 걸쳐 이어졌으며, 장지인 전북 익산군에 운구가 도착한 뒤에는 현지의 추모객들에 의해 10리가 넘는 장례행 렬이 이어졌다. 친일파를 위한 변명 138

139 친일파를 위한 변명 139

140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9 사이토 총독의 조선 민족운동에 대한 대책문 핵심적 친일 인물을 골라 그 인물로 하여금 귀족, 양반, 유림, 부호, 교육가, 종교가에 침투하여 계급과 사정을 참작하여 각종 친일 단체를 조직하게 한다. 각종 종교 단체도 중앙 집권화해서 그 최고 지도자에 친일파를 앉히고 고문을 붙여 어용화한다. 조선 문제 해결의 성공 여부는 친일 인물을 많이 얻는 데에 있으므로 친일 민간인에게 편의와 원조를 주어 수재 교육의 이름 아래 많은 친일 지식인을 긴 안목으로 키운다. 양반 유생 가운데 직업이 없는 자에게 생활 방도를 주는 대가로 이들을 온갖 선전과 민정 염탐에 이용한다. 조선인 부호 자본가에 대해 일 선 자본가 연계를 추진한다. 농민들을 통제 조정하기 위해 민간 유지가 이끄는 친일 단체인 교풍회( 矯 風 會 ), 진흥회( 振 興 會 )를 두게 하고, 이들에게 국유림의 일 부를 불하해 주고 입회권을 주어 회유, 이용한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 - 대한총독의 국민권리찾기 운동에 대한 대책문 핵심적 친총독부 인물을 골라 그 인물로 하여금 귀족, 양반, 유림, 부호, 교육가, 종교가에 침투하여 계급과 사정을 참작하여 각종 친총독부 단체를 조직하게 한다. 각종 단체도 중앙 집권화해서 그 최고 지도자에 친총독부파를 앉히고 고문을 붙여 어용화한다. 국민 권리찾기 운동 문제 해결의 성공 여부는 친총독부 인물을 많이 얻는 데에 있으므로 친총독부 민간인에게 편의와 원조를 주어 수 재 교육의 이름 아래 많은 친총독부 지식인을 긴 안목으로 키운다. 일반 국민들 가운데 직업이 없는 자에게 생활 방도를 주는 대가로 이들을 온갖 선전과 민정 염탐에 이용한다. 부호 자본가에 대해 연계를 추진한다. 국민들을 통제 조정하기 위해 민간 유지가 이끄는 친총독부 단체인 원로회, 똥별회를 두게 하고, 이들에게 국유림의 일부를 불하해 주고 입회권 연금 등 각종 특혜를 주어 회유, 이용한다. 대한총독부 -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40

141 조선을 침략한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통치수단 방법으로 제정한 식민통치 법률이다. 대한민국은 이 법을 기조로 헌법을 수정 보완하여 법통, 법제, 법복 등을 1세기가 지나도록 제 민족 제국민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게하고 권력자들의 통치수단으로 이용해 왔다. 일제시절이나 현재에 이르러서도 권력자들에게 아부하고 복종해야만 살아 남을수 있고 출세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만든 즉, 한국민을 노예화, 아부근성, 반목, 불신, 왕따문화 창조를 유발시킨 합법을 가장하여 한민족 문화와 전통을 말살시키려는 법률적 제도이다.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41

142 일본군에 징용되었던 한국인들은 일본법에 의해 신상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조선총독부법에의해 식민지 참전군인의 노예대접밖에 받지 못하 는 전례처럼 현 대한민국은 제 조국에 목숨을 바쳤던 6.25참전용사들이나 월남참전용사들을 홀대하는 세계 유일의 나라이다. 조선총독부 법제 정책 은 조선민사령 의 제정과 개정 과정을 중심으로 일제의 식민지 법 정책을 분석한 제품입니다. 근대 일본에서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중요한 사항, 즉 입법사항에 관해서는 법률로 구체적으로 정하도록 하였으며 그에 따라 민법, 상법, 중의원선거 법, 호적법 등 다양한 사향을 법률로 제정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의 입법 정책 분석을 통해 종전 한국사학계에서 사용해온 동화 정책의 개념 을 역사적, 시대적 환경에 따라 제한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라는 점을 제안하며 일제의 식민지 법 정책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조선총독부법 1962년 일부 개정 사용하고 있는 일제의 조선총독부 법령 조선총독부(구자체: 朝 鮮 總 督 府, 신자체: 朝 鮮 総 督 府 )는 일본 제국의 행정기관으로, 1910년 10월 1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일부터 1945년 9월 2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미,소 양 군이 주둔하기 전까지 한반도에 대한 식민 통치를 위해 설치한 기관이었다. 소재지는 당 시 경기도 경성부(현재 서울특별시)에 있었다. 1905년(광무 8년) 설치된 한국통감부( 韓 國 統 監 府 )를 전신으로 하여 1910년에 설치되었으며 초대 조선총독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寺 內 正 毅 ) 가 취임하였다. 1914년 3월 1일에 조선총독부령 제111호(1913년 12월 29일 공포)를 통하여 지방 행정 조직을 개편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전( ) 이후에도 5일간 조선을 공식 통치하였고, 해방 이후에도 9월 2일까지 주둔, 1945년 9월 3일부로 38선 이남 지역을 미군정에게 인계할 때까지 한반도를 통치한 후 해체되었다 년 10월 1일 제정 년 8월 20일 개정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42

143 역대 조선총독( 朝 鮮 總 督 )은 육군 해군 대장 중에서 임명되었다. 일본 천황에 직속되어 일본 내각의 통제를 받지 않고 한반도 내에서 행정권 사법권 군사권 등의 모든 권한을 가졌다. 1913년 칙령 제134호(고등관 관등봉급령)에 따르면, 조선 총독 연봉은 8,000원이었다고 한다. 사 이토 마코토가 취임한 1919년에 형식적으로 무관 총독 임용제를 폐지하였으나 1945년에 폐지될 때까지 문관 출신의 총독은 단 한 명도 임명 되지 않았다. 조선총독을 역임하고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거나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고 조선총독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제1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寺 内 正 毅 ) 1910년 10월 1일 1916년 10월 14일 육군대장, 원수, 수상 제2대 하세가와 요시미치( 長 谷 川 好 道 ) 1916년 10월 14일 1919년 8월 12일 육군대장, 원수 제3대 사이토 마코토( 齋 藤 實 ) 1919년 8월 13일 1927년 12월 10일 해군대장, 수상 임시대리 우가키 가즈시게( 宇 垣 一 成 ) 1927년 4월 15일 1927년 10월 1일 육군대장 제4대 야마나시 한조( 山 梨 半 造 ) 1927년 12월 10일 1929년 8월 17일 육군대장 제5대 사이토 마코토( 齋 藤 實 ) 1929년 8월 17일 1931년 6월 17일 해군대장, 수상 제6대 우가키 가즈시게( 宇 垣 一 成 ) 1931년 6월 17일 1936년 8월 5일 육군대장 제7대 미나미 지로( 南 次 郎 ) 1936년 8월 5일 1942년 5월 29일 육군대장 제8대 고이소 구니아키( 小 磯 國 昭 ) 1942년 5월 29일 1944년 7월 21일 육군대장, 수상 제9대 아베 노부유키( 阿 部 信 行 ) 1944년 7월 24일 1945년 9월 28일 육군대장, 수상 조직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43

144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44

145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45

146 조선총독부는 1910년 10월 2일부로 조선 16도의 관찰사를 도장관으로 명칭을 바꿨다가 1912년부터 도지사로 바꾸었다. 또한 도지사 아래 부 지사를 두어 도지사의 업무를 보좌하게 했고, 이방, 호방, 예방 등 각 방을 근대식 각 국과 과로 나누었다. 또한 규모가 큰 부에는 국장급을, 작은 부에는 과장급만을 두어 예하 행정체계를 구성하게 했다. 행정기관은 면리제와 동제, 오가작통법에 의한 통반제였던 것을 도시지역은 동( 洞 ) 대신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인 정( 町 )을 쓰게 하였다. 또한 부 중에서도 규모가 큰 부는 다시 몇개의 동을 묶어 한개의 구( 區 )로 나누 었다.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46

147 관료의 채용은 향리가 세습하던 것을 폐지하고 공개채용 시험과 고등관 시험, 판임관 시험 등의 채용시험으로 전환하였다. 관료들의 직위는 군속, 면속으로 칭하고, 기수(서기), 기사, 주사, 사무관, 서기관 등의 직위를 적용하고 차등으로 월급을 지급하였다. 또한 헌병과 경찰의 수 사, 검열 등의 편의를 위해 조선인 출신의 순사보조원과 헌병보조원 등의 사무보조원을 채용해서 썼다. 조선인 귀족원 의원 선출 과정일본 제국 국회의 상원 격이었던 귀족원에 조선인 출신 의원이 선출된 배경은 조선인들의 참정권 요구가 받아 들여진 결과였다. 징병제가 일본 본국의 일방적인 요구에 의해 실시되었던 것에 비해, 참정권 문제의 해결으느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원안대 로 관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귀족원 의원의 칙선의원 7명은 1945년 4월 3일에 선임되었는데 김명준( 金 明 濬 ), 박상준( 朴 相 駿 ), 박 중양, 송종헌( 宋 鍾 憲 ), 윤치호( 尹 致 昊 ), 이진용( 李 珍 鎔 ), 한상룡( 韓 相 龍 ) 등이었다. 한편 조선인 몫의 하원격인 중의원 의원 23명은 의회가 만 기되면 선거에 의해서 선출될 예정이었다. 조선인에 대한 참정권의 부여가 법률로써 실현된 것은 1945년 1월의 일본 의회를 통과한 법률 제34호 '중의원 선거법 중 개정법 율안'과 칙 령 제193호 '귀족원령 중 개정안'에 의해서였고, 참정권 부여는 조선과 대만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를 두고 사학자 김유리는 참정권 문제 해결이 늦어졌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참정권 문제의 해결은 조선에 대한 징병 실시가 발표되었던 1942년의 시점에 이루어졌어야 할 것이 다. 그러나 징병제 발표 시기에도 아무런 언급조차 없었고, 오히려 징병제와는 '별도로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주장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징병제와는 '별도로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주장되고 있었던 문제가 2,3년의 잠복기간을 거친 후 조선인들의 강한 요구라는 구실을 빌어 해 결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고 비판한다. 원래 귀족원 의원의 피선거권은 일본은 '제국신민인 남자로서 연령 30세 이상인 사람'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들에게 부여된 참정권도 일부 제한이 있는 것이었다. 머저 귀족원 의원의 경우는 조선과 대만에 거주하는 만 30세 이상의 남자 로서 명망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칙임된 사람 10명 이내를 참가시키며, 7년 임기로 하였다.[7] 이 10명의 귀족원 의원 가운데 몇 명씩을 배당 할 것인가에 대한 명문 규정은 없었으나, 7명을 조선에, 나머지 3명을 대만에 할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귀족원 의원들은 1945년 4월에 鈴 木 내각이 성립한 직후의 임시의회에 참가하고 있다. 원래 일본 출신 일본 귀족원 의원의 임기는 종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대만 출신 의원의 임기를 7년으로 한 것은 또 다른 차별을 만든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시간이 지나면 하원격인 중의원에도 조선인을 참가시킬 계획이었다. 중의원에 있어서는 공선(선거)에 의해야 한다는 원칙에 입 각해 있는 만큼 선거의 방법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대해 일본 본국과 조선총독부 모두 보통선거는 피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었고, 때문에 선거 방법은 제한선거에 의할 것으로 결정되었다. 즉 선거권을 제한하는데 있 어 기준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일제는 직접 국세 15원 이상을 납부하는사람을 선거권자로 결정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제가 이미 실시 하고 있었던 지방자치 단체 의원 선거의 경우 보다도 그 자격 기준이 훨씬 더 강화된 것인데, 당시 도회, 부회, 읍회, 면협의회 선거의 선거 권도 그 자격 기준이 국세 5원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 중의원은 일본 제국 귀족원과 중의원에 안건이 계류중에 있던 8월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되면서 전면 백지화된다. 연표 1909년 12월 4일 - 한국 일진회에서 "한일 합방을 요구하는 성명서" 상주문이 제출되었다. 1910년 3월 14일 - 토지 조사 사업 시작 1910년 6월 30일 - 헌병 경찰 제도 발족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47

148 1910년 8월 22일 - 한일합방 조약 체결 1910년 10월 1일 - 조선총독부 설치 (전날인 9월 30일 총독부 및 소속관제에 대한 관제 공포) 1911년 8월 23일 - 제 1차 조선 교육령. 국어를 일본어로 한다. 1912년 1월 1일 - 표준시 UTC 8시 30분에서 UTC 9시로 변경 1912년 4월 - 보통 학교용 언문 철자법 확정 1912년 9월 9일 - 고종의 형 흥친왕 사망 1914년 3월 1일 - 행정 구역 개정 (부에서 군면 제도) 1917년 3월 22일 - 이준용 사망 1919년 1월 21일 - 고종황제 붕어( 崩 御 ) 1919년 3월 1일 - 삼일 만세 운동 시작( 년 5월) 1919년 8월 12일 - 사이토 마코토, 제3대 총독으로 취임 1919년 8월 20일 - 헌병 경찰 제도 폐지 1919년 10월 5일 - 김성수, 경성방직주식회사 설립 1920년 3월 5일 - 조선일보 창간 1920년 4월 1일 - 동아일보 창간 1920년 12월 27일 - 총독부, 산미 증산 계획 1925년 11월 22일 - 제1차 조선공산당 조직 미수 사건 1926년 4월 1일 - 경성제국대학 개설 1926년 4월 25일 - 순종황제( 崩 御 ), 인산 후 영친왕이 이왕직 세습 1926년 6월 10일 만세운동 1926년 6월 -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1927년 2월 16일 - 사단법인 경성 방송국, 라디오 방송 시작 1927년 5월 2일 - 조선질소주식회사 설립 1927년 8월 -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 1928년 8월 -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 1929년 11월 3일 - 광주학생사건 (- 1930년 3월) 1930년 5월 30일 - 간도 5.30 사건 1930년 - 언문 철자법 제정 1931년 7월 2일 - 만보산 사건 1931년 9월 18일 - 만주사변 발발 1931년 1월 8일 - 애국단원 이봉창, 도쿄에서 천황 암살 미수 사건 1931년 4월 29일 - 애국단원 윤봉길, 상하이 폭탄 테러 사건 1936년 8월 9일 -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1937년 6월 1일 - 김일성, 보천보 전투를 일으켰다. 1937년 7월 7일 - 중일전쟁 발발 1937년 10월 2일 - "황국신민의 서사" 제정. 1938년 2월 26일 - 육군 특별 지원자 법령 공포 1938년 3월 4일 - 조선 교육령 개정으로 한국어 수업을 필수에서 제외함. 1940년 2월 11일 - 창씨개명 실시 1941년 3월 31일 - 국민학교 규정 개정, 한국어 수업 폐지 1941년 12월 8일 - 태평양전쟁 발발 1942년 10월 1일 - 조선어학회 사건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48

149 1944년 4월 1일 - 제1회 징병 검사 시작 1944년 8월 23일 - 여자 정신대 근로령 공포 1945년 8월 9일 - 소련 대일본 참전, 두만강을 넘는다. 1945년 8월 15일 - 일본 정부, 포츠담 선언 수락. 여운형,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 결성 1945년 8월 21일 - 소련군, 평양 진주 1945년 8월 25일 - 미군, 인천 상륙 1945년 9월 6일 - 여운형 등은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 1945년 9월 7일 - 미국 극동 군사령부, 조선의 군정 선언 (즉시 독립 부인) 1945년 9월 9일 - 총독부, 항복 문서에 조인 3 1 운동의 불씨가 남아있던 1922년 순사직 경쟁률은 약 2.1대 1 수준에 불과했으나 문화정치가 본격화한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그 경쟁 률이 10대 1을 웃돌았다. 1926년에는 856명 모집에 9천193명이 지원, 약 10.7대 1의 경쟁률을 보였으며 1932년에는 854명 모집에 1만6천193명 이 지원해 19대 1로 경쟁률이 수직 상승했다.[9] 순사 등에 대한 19.6대 1로 정점을 찍은 1935년 이후 순사에 대한 선호는 1936년 14.1대 1, 1937년 10.9대 1로 내리막길을 걸었으나 1920년대 중반부터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경쟁률이 10 20대 1에 이를 정도로 순사직이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9] 이를 두고 연세대학교의 장신은 "순사는 조선인 사회에서의 좋지 못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법률로 보장된 권한 탓에 해마다 높은 지원율을 보였다"고 지적하면서 "관리의 최말단인 까닭에 지원자의 학력 수준은 보통학교 졸업자가 80% 정도를 차지했다"고 분석했다. 법례를조선에시행하는건 근거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과 동시에 일본 천황은 칙령으로 조선에시행해야할법령에관한건 (칙령 제324호)을 공포하고, 다음 해인 1911년 3월 25일 동일한 내용을 법률의 형식으로 제정한 조선에시행하는법률에관한법률 (법률 제30호)을 공포하였다. 법례를조선에시행하는 건 은 이 법률 제4조에 근거하여 1912년 3월 28일 공포된 일본 천황의 칙령 제21호이다. 배경 법례 는 외국인과 일본인의 법률관계에 있어서 법규충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본의 국내법으로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합병한 후 우 리나라와의 법규충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법례를조선에시행하는건 을 공포하였다. 내용 법례를조선에시행하는건 은 법례 를 조선에 시행한다 라고 하고, 부칙으로 본령은 명치 45년 4월 1일( )부터 이를 시행 한다 라고 하는 아주 간단한 내용의 칙령이다. 여기서 법례 란 1898년 6월 21일 (명치31년) 법률 제10호로 공포된 일본법률을 말한다. 법례 는 오늘날의 국제사법( 國 際 私 法 ) 을 일컫는 말이다. 법례 는 전문 30조로 이루어진 법률이다. 법례 에서는 사람의 행위능력, 법률행위, 동산과 부동산, 사무관리, 부당이득, 불법행위, 혼인 및 이혼, 입양 및 친자관계, 상속과 유언 등에 관하여 정하고 있다. 주요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행위능력에 대하여는 본국법에 의하도록 규정하고(제3조), 금치산자(제4조), 준금치산자(제5조), 실종선고(제6조)에 대한 규정을 두고 있다.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49

150 법률행위의 성립 및 효력에 대해서는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준거법을 정함을 원칙으로 하고 당사자의 의사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에는 행위 지법에 의하도록 하였다(제7조). 법률행위의 방식은 그 행위의 효력을 정하는 법률에 의하도록 하고, 물권이나 등기를 요하는 경우에는 예외로 하였다(제8조). 의사표시에 관해서는 통지를 발한 곳을 행위지로 간주하고, 계약의 성립 및 효력에 대해서는 청약을 발한 곳을 행위지로 간주하도록 하였 다(제9조). 동산 및 부동산에 관한 물권 기타 등기해야 하는 권리는 목적물의 소재지법에 의하도록 하였다(제10조). 사무관리, 부당이득, 불법행위에 의하여 발생하는 채권의 성립 및 효력은 원인사실이 발생한 곳의 법률에 의하도록 하고, 불법행위가 외국 에서 발생한 경우 일본 법률에 의할 때는 불법을 구성하지 않으면 적용하지 않는 것으로 하였다(제11조). 혼인의 성립요건은 각 당사자의 본국법에 의하도록 하고(제13조), 혼인의 효력은 부( 夫 )의 본국법에 의하도록 규정하였다(제14조). 이혼은 원인사실이 발생한 때의 부( 夫 )의 본국법이 적용되도록 하였다(제16조). 자의 적출( 嫡 出 )여부는 출생 당시 모( 母 )의 부( 夫 )가 속하는 국가의 법률에 의하도록 하고(제17조), 인지의 요건은 부모에 관해서는 부모가 속하는 국가의 법률에 의하고 자에 관해서는 자가 속하는 국가의 법률에 의하도록 하였다(제18조). 후견은 피후견인의 본국법에 의하도록 하였다(제23조). 상속은 피상속인의 본국법에 의하도록 하고(제25조), 유언의 성립과 효력은 유언 성립당시의 유언자의 본국법에 의하도록 하였다(제26조). 당사자의 본국법에 의해야 하는 경우 당사자가 2 이상의 국적을 가질 때는 최후에 취득한 국적을 기준으로 하고, 그 중 하나가 일본의 국 적인 경우에는 일본법에 의하도록 하였다(제27조). 또한 당사자의 본국법에 의하여야 하는 경우 그 국가의 법률에 따라 일본법에 의해야 하 는 경우에는 일본법을 적용하도록 규정하였다(제29조). 외국법에 의해야 할 경우에 그 규정이 공공의 질서 또는 선량한 풍속에 반할 때에는 적용하지 않도록 하였다(제30조). 법례 는 외국인과 일본인의 법률관계에 있어서 법규충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본의 국내법이다. 1910년 8월 29일 한국이 일본에 의하여 강제 합병되고 난 이후 일본은 1912년 3월 28일 법례를조선에시행하는건 을 일본 천황의 칙령 제21호로 공포하여 법례 를 한국에 그대로 시행하였다. 조선총독부 통치방법에 대한 평가와 비난 3 1운동의 발발 원인에 대한 각지의 비난이 빗발치면서 지난 9년여 동안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행한 총독 정치의 여러 가지 잘못된 정책들 도 함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정책을 비난하는 각계의 반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외국인들의 평가와 비난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50

151 1) 와이루스 박사 조선총독부의 통치방법과 그 정책을 비판하는 와이루스 박사의 의견은 다음과 같은 글이 참고된다. 일본은 조선을 합병한 이래로 오로지 토민 土 民 (조선인)의 교화에 힘씀으로서 완전한 동화를 이루려 하고 있다. 조선은 일본에서 보면 복부에 겨누어진 단도와 같은 존재로서 대륙으로부터의 일본에 영향을 주는 외환은 계림 8도에서 많이 도래할 가능성이 있는 때문에 일본이 적극적 으로 조선 통제에 힘쓰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일본은 이미 이 때문에 청일전쟁, 노일전쟁의 두 전쟁도 불사하였다. 현재 조선총독부는 소학교에서 조선인 아동의 생활상의 준비가 아니라 애국심의 함양을 위해 교육을 시키고 있다. 또 일본 정부는 한쪽에서는 이와 같은 교육의 보급을 서두르고 있는 동시에 한쪽으로는 내지인을 이주시켜서 일본, 조선 양국 국민의 합동을 시도하고 있으나 그러한 정책은 실패할 것으로 본다. 현재 도시를 제외하고 조선에 있는 내지인의 인구는 극히 근소하다. 통계표에 의하면 내지인의 수는 30만 명이며, 토민의 인구는 1천 7백만 명으로 숫자상으로 보아 원만한 혼합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장래에도 내지인의 수는 크게 높아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인의 노 동 임금은 내지의 노동 임금에 비해 대단히 저렴하며 더욱이 내지의 농부들은 이주를 꺼리는 풍토가 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50년 후의 조 선은 지금과 별로 다름없는 주민을 보유할 것이다. 일본이 진실로 조선을 일본화 시키려고 원한다면 토민의 아동에게 일본의 국체의 정화 精 華 인 황실의 존엄을 가르친다든지 혹은 소수의 이주민을 보낸다든가 하는 일 만으로는 성공이 불가능할 것이다. 일본 정부가 취할 유일한 현명한 정책은 올바른 시정정책으로 토민에 임하고 조선으로 하여금 인류가 살만한 장소가 되도록 함에 있다. 일본 이 무기로 삼을 것은 생산적 문명과 그들이 갖는 독특한 시정정책상의 능력이 아니면 안 된다. 또 조선을 합병한 이래 행해진 일본의 시설 가운데는 볼만한 것이 많다. 도로의 개선, 운수의 편리 등이 있으나 특히 유의할 만한 점은 일본 의 통치가 토민으로 하여금 평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조처한 것이다. 합병 전 저들 토민은 항상 약탈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오늘 날 일본의 법률하에 보호되어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현명한 시정정책 및 그것에서 유발된 번영이 토민으로 하여금 충심으로 일본에게 충성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현재 토민은 근대 경제 조직의 초기를 통과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장래 저들은 보다 더 큰 기회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조선의 토민이 진보 발달함에 따라 경제적 또는 정치적 기회를 요구하기에 이를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 때 일본 정부는 과연 어떠한 태도로 나가겠는가. 일본 정부는 유연하게 저들의 새로운 요구를 받아들여 보다 큰 자유를 부여하고 언론의 자유를 허용할 것인가 또는 이와는 정반 대로 무력으로써 그 요구를 물리칠 것인가 과거의 일본 통치 행태로 추측하건대 장래 일본 정부는 무력으로 토민에게 임할 것이라 생각된다. 현재에도 일본에는 언론의 자유가 없고 대단히 준엄하다. 정부는 매년 조선 통치의 경과를 보고하고 있으나 우리들은 그 공보물을 신뢰할 수 없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는 같은 반도에서의 일본 군벌정치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조선에서의 일본의 시정정책은 제국주의적 색체를 강하게 띈 군사적 경제적 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하여 과 연 일본은 장래 조선의 국민성을 근본에서부터 파괴하여 새로운 일본화를 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자 마땅히 옛날 유태 페르시아 영국 아일랜드 알사스 및 폴란드의 역사를 더듬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 여러 나라에서도 처음에는 지금 조선반도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과 같은 국민적 일대 활극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정부의 정책이 성취되어 일본인 조선인 모두 동일한 국민적 감정을 소유하고 황실을 우러러 보게 될까 의심하는 자는 우선 다음의 질문 에 대한 정확한 회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어떠한 국가가 주도면밀하고 날마다 번식하는 인구를 가진 타국민의 언어, 문명 및 전설을 압 도함이 가능할 것이냐? 이 질문의 답변 여하에 따라 장래 조선의 운명은 결정된다 할 것이다.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51

152 지금부터 30년 후는 조선 인구는 약 2배가 되어 일본 정부가 교육시키지 못할 정도로 많은 아동이 출생할 것이다. 물론 정부는 많은 소학교 를 건립하여 이에 대처할 것이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아동들은 조선어를 사용하고 있음으로 그 언어는 의연히 존속할 것이다. 만약 조선반도가 일본에 있어 외적에 대한 방어물이라고 한다면 일본은 그 국민으로 하여금 일본에 대하여 더 욱 충성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발달, 국민성의 자각과 더불어 만약에 일본이 무력으로써 저들의 언론을 억압하고 동화를 강요하면 조선은 오히려 일본에 대하여 위험을 초래하게 될지도 모른다. 2) 외국인 선교사 1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전제적 정부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총독정치는 짜르의 압제정치에 비교된다. 인민은 동경의 의회에 대하여서도 폐 하에 대하여서도 하등 호소할 길이 없다. 군국주의는 조선인의 발언의 자유를 금하고 있으며 조선인의 권리는 전부 부인되고 있다. 2 조선에서의 일본 정부의 정치는 폭력 그것이다. 지금까지 한 푼의 애정조차 표시당한 적이 없다. 조선인은 잔혹하게 총살당하고 사소한 범죄에 대하여서도 즉시 장기의 중형에 처해 졌다. 실로 무자비한 폭력 정치이다. 3 정부는 조선인에게 청원권을 부여하지 않고 청원을 제기하고 이를 소송코자 하면 곧 반역죄로서 문죄를 당했다. 4 조선인은 고유한 민족으로서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문물 및 역사는 수천 년의 배경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은 저들에게 고유의 언 어를 그 학교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일본과 조선 간의 과거 투쟁에 관한 부분은 이를 조선역사에서 삭제하려고 하며 또 다수의 반일본적 문학을 금지하였다. 일본당국이 기도하고 있는 것은 청년 조선인으로 하여금 일본어를 말하고 일본제 조선사를 읽으며 일본문학만 읽고 배우 도록 함에 있다. 즉 일본은 한쪽에서는 그 국어로써 조선을 동화시키고자 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쪽에서는 두 민족을 자연스럽게 결합시키 는데 필요한 진실한 애정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 5 일본인은 말하기를 조선인에 대해 하등 차별 대우를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나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일한 학교에 입학 불가능하다는 한 가지 사실만을 가지고도 이를 반증할 수 있다. 즉 일본인과 조선인은 학교가 상이하며 조선인 소학교 졸업생은 일본인 중학교에 들어갈 수 없고 또 조선인 중학교 졸업생은 일본인 고등학교에 들어 갈 수 없다. 6 조선인은 모든 관직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 소수의 조선인 가운데 중요한 직에 있는 자도 있지만 실권은 그 하위자인 일본인의 수중 에 있다. 조선에는 조선인의 대표자 회의가 없고 조선은 단지 총독을 통하여서만 제국회의에 교섭할 수 있으나 총독은 자기에게 유리한 보고 만 할 뿐임으로 사실상 조선인은 하등 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 7 토지에 관하여서도 큰 부정이 행하여지고 있다. 8 조선인은 또 많은 경우 외국은행의 특권을 부인당하고 있으며 해외여행권은 그 목적의 여하에 불구하고 거의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2. 일본 언론의 평가와 비난 1) 동경조일신문 동경조일신문 동경조일신문 은 조선총독부 정책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4월 5일자 기사에서 원래 조선민족은 문치에 젖은 국민이다. 우리 일본이 수백 년의 봉건적 무단적 역사를 가지고 있음과는 근본적으로 차이 가 있다. 따라서 현재와 같이 정치적 조작에까지 군인이 나서서 강압하는 제도로서는 비록 표면으로는 이에 복종한다고 하나 진심으로는 우 리에게 감복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무릇 군인 정치가는 도저히 식민지 통치의 기미를 이해할 수 없으며 단지 조선인들이 겉으로 복종하는 체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52

153 하는 것을 보고서 그것에 만족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에 향후 총동정치의 혁신책을 살펴본다. 1 총독 군인 정치와 군사 지휘권은 확실히 구분할 것, 2 헌병제도의 경찰을 폐지하고 통상의 경 찰관으로 하여금 이를 담당하도록 할 것, 3 문관 임용을 광범위하게 하고 조선인도 적극적으로 폭넓게 채용하여 담당업무에 종사하도록 할 것, 4 폭넓게 조선인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적절한 자문기관을 설치할 것 註 18) 등이었다. 2) 독매신문 독매신문 독매신문 讀 賣 新 聞 은 3월 28일 기사에서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3월 28일자 기사에서 조선의 병합은 우리 제국의 존립을 확보하는 필요상 행하여졌음을 저들에게 철저히 이해시켜야 할 것이며 저의 병합이 단지 조선인의 이익을 위함이라고 교시하는 등은 오히려 유해할 것이다. 단 그 통치 방법에 있어서는 적절히 인정의 기미를 깊이 관찰하여 되도록 저들의 생활을 안정되도록 하여 주어 이 정도까지 하여주면 더 할 말이 없다고 할 만큼 되도록 감복시켜야 할 것이다. 그런데 병합 이래 거의 9년이 된 지금 무단 정치는 형식상으로도 우리 위력을 과시함이 지나쳐 그에 대한 비분의 감정을 도발케 한 바가 없 지 않다. 예컨대 크고 작은 관리에서부터 의사 및 보통학교의 훈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장검을 빗겨차고 거리를 활보하는 등은 가령 그들이 바보같은 고지식함이 있다 하여도 어찌 불쾌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통치의 요체는 속히 무단통치를 폐하고 문치를 실시함에 있다고 할 것이다. 즉 무력 장비 등은 되도록 이목에서 멀리하여 불행을 추구할 여지를 주지 않도록 하고 주로 그 생활을 안정되게 하여 일본의 신민이 되는 것도 그다지 불쾌하지 않다고 느끼도록 함에 있다. 총독 정치에서 개혁할 요점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문관 총독제를 채용할 것, 2 헌병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성적 불량한 보조 헌 병들을 폐지할 것, 3 관리 임용을 식민지 인민을 위하여 개방할 것 등이었다. 즉 조선은 일본의 부속지라는 관념으로 하지 말고 오로지 조 선 위주로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3) 국민신문 국민신문 국민신문 國 民 新 聞 도 3월 27일, 4월 5일, 4월 6일자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금일의 요체는 내선인 內 鮮 人 상호의 이해, 교감, 동화에 근거하며 국민같이 일어서 저들의 오해를 풀고 저들의 생활, 사상, 감정을 안정시킴 에 있다. 그리고 식민정책상 가장 필요한 일은 언론의 자유를 확대함에 있다. 무릇 언론이 자유롭지 못하면 아무리 제도, 기관이 완전하다하 여도 도저히 조선인의 만족을 얻기 어려운 까닭이다. 대체로 병합 당시는 외골수의 무단적 선정 善 政 으로 이를 위압하고 이를 선도함에 유감이 없었다고 하나 저들이 여러 가지로 물질적 및 신지 식을 얻게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미 단순히 위압으로써는 저들을 정신적으로 만족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이후의 방침은 저들로 하여금 앞날 에 한 가닥 광명을 인정케 하여 제국의 정치에 불평을 품는 일이 없도록 함에 있다. 4) 중국민보 중국민보 중국민보 中 國 民 報 도 4월 10일자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번의 소요는 근본적으로 통치정책의 오류에 의한 것이고 조선인의 개화에 따라 변화되지 못함에 의한 것이다. 조선인을 개발코자 교육하면 서 스스로는 하등의 진전을 하고 있지 않는데 연유한다. 필경 조선인의 인격을 부인하여 최초부터 이를 열등시하고 이치에 맞지 않게 동정치 않음에 연유한다. 따라서 이번 사건에 대한 수습책으로서는 단연 무단 방침을 바꾸고 조선인의 인격을 인식하여 우리 일본인들이 향유하는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53

154 것같이 허용하여주는 방침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치를 구체적으로 거론하자면 저들을 문화적으로 지도하는 데 있다. 註 19) 3. 일본인들의 평가와 비난 강목익 江 木 翼 은 금반의 조선 폭동사건의 원인 여부는 자연 사실문제로써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고 했으며, 그 원인은 종래의 통치방침이 그릇 됨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중요한 요인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첫째로 소위 동화주의라는 것은 그 근저에서부터 잘못되었다. 원래 3천년이나 되는 문명을 가진 국민을 동화시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에 속한다. 이러한 동화주의는 일찍이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등에서 실패한 역사도 있으며 영국도 한 차례 이 일을 시도하다가 던져 버린 바 있다. 어쨌든 그 결과는 역사상 분명하다. 더욱이 교육에서 이러한 동화정책에 기초하여 전적으로 교육 칙어의 취지에만 의함을 위시하여 혹은 강제적으로 국어 보급에 힘쓰고 또 일방에서는 관리의 대부분은 물론 순사, 우체국 직원 등의 하급에 있는 자에 이르기까지 거의 조선 어를 익히지 못하도록 하여 일본과 같은 형태의 정치로서 이를 내지화 內 地 化 한다는 방침은 역시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다. 현재의 영국 식민정책의 근본 방침은 정복하여 분할된 식민지에서는 그 식민지의 언어 습관 풍습을 존중하여 본국과 같은 형태의 통치를 하지 않음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둘째로 식민지를 본국의 부속물이라고 사고함은 전연 잘못이다. 무릇 식민지라 할지라도 독립된 문화를 보유하고 있으며 독립된 경제 단위를 보유하고 있는 까닭이다. 셋째로 식민지의 주민을 피통치자 계급이라 하여 일단 하급으로 취급하는 것도 역시 잘못된 일이다. 요컨대 우리 당국자는 식민정책을 왜 하 는가를 이해치 않고 지난 20년 이래 아주 가볍게 생각하여 왔음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 원래 식민정책의 근본 뜻은 식민지 인민에 대하여 문 명의 선전, 즉 문명의 보급에 있는 것인데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런 근본적 뜻을 존중치 않은 결과 종종 여러 가지 실수를 하는 때문에 위압 무단 정치로 되어 일시적 진압책을 강구함에 그치는 일 등은 매우 유감스러운 것이다. 註 20) 회전영길 懷 田 榮 吉 은 정부 및 국민 전체는 조선인에 대하여 만족과 희망을 주는 데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즉 조선인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적 당한 기회에 참정권의 일부를 점차 부여할 필요가 있으며 또 사회적으로도 실업 방면에 민심의 융화 소통을 도모할 것을 근본 취지로 하여 우리를 신뢰하도록 하여야 한다. 길야작조 吉 野 作 造 는 다양한 견해를 열거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일시 一 視 동화정책을 철저히 할 것. 모든 방면에서 일본과 조선인의 구별을 철폐하고 특히 교육상의 현실 문제인 문호 개방은 최우선적으 로 처리할 문제다. 그리고 이런 정신은 비단 통제상에서만 이를 철저히 할 뿐 아니라 또 재류 내지인과 조선인과의 사회적 관계에서도 꼭 철 저함을 필요로 한다. 2 조선인에게 몇 가지 자치를 인정할 것. 그 방법과 범위와 시기에 대하여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나 그 방침으로는 관리 만능의 정치를 없 애고 조선인으로서 적어도 재류 내지인과 공동으로 통치의 감독에 임하게 한다. 관리의 채용에 있어서도 피차의 구별을 두지 말 것은 물론이 요, 오직 그 범위나 방법에서는 신중한 고려를 해야 한다. 이러한 조선인을 위한 조선 원칙에는 방임하여서는 안 되며 또 어느 정도까지 일 본인의 입장도 참작하여야 한다. 3 민간에 일본 조선 공동의 소통기관을 창설할 것. 이는 비록 이번의 소요 진상을 분명히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통치에 대한 기탄없는 비평을 들을 수 있음으로써 오해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법제의 역사 개화 이전한국의 법( 法 )은 다른 한국의 문물제도처럼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의 문물제도는 일찍부터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법제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54

155 ( 法 制 )도 상고( 上 古 )에는 우리 고유의 것이 극히 원시적이었으나마 없지 않았으나, 삼국 시대 중엽부터 중국의 문물이 수입됨에 따라 중국 법 제를 계수( 繼 受 )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비로소 국가 체제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남북국 시대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에 이르는 동안 당( 唐 ) 송( 宋 ) 원( 元 ) 및 명( 明 ) 등 역대 왕조가 발달시킨 중국 법전에 규정한 여 러 제도를 순차적으로 수입함으로써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중국 법전에 못지않은 법전을 편찬하게끔 되었다. 따라서 조선 시대까지 한국은 중국 법제 지역에 속하였고, 한국법은 중국법의 발달과 규( 規 )를 같이 하였다. 그러나 한말에 이르러 한반도에도 개화의 물결이 밀려와 갑신정변을 기점으로 하여 서구의 대륙법을 계수하기 시작,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 복 후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에는 영미법의 원리까지도 가미하여 현재에는 구미법을 계수하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 법제사는 중국법 계수 시대와 구미법 계수 시대의 두 시대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중국법은 전제 왕권과 유교 윤리를 기반으로 하고 그 유지를 위하여 규정된 것인 데 대해, 근세 구미법은 멀리 로마의 고대 시민 사회에 거점을 두고 근세의 민주주의 사상과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 두 법은 서로 이질적이었다. 따라서 한국은 한말의 개화기를 구획으로 하여 원리와 체계가 다른 법의 교체 가 있었다. 관제사( 官 制 史 )한국의 관제는 시대별로 다음과 같이 변천하였고 볼 수 있다. ] 신라의 관제신라는 6부연맹( 六 部 聯 盟 )의 부족국가로 출발하여 차차로 국력이 강대해짐에 따라서 인근을 병합 또는 정복함으로써 국가가 팽 창하여 갔다. 이에 따라 국무가 폭주( 輻 輳 ) 복잡해져서 종래의 대소 족장회의( 族 長 會 議 )[1]에서 국무의 의결을 거치는 것이 불가능해지므로 국무의 결정 집행을 국왕에게 일임하고 중대사에 관하여서만 화백회의의 의결을 거치도록 보류하게 되었다. 따라서 중앙집권이 강화되어 국 왕은 국무의 집행부를 정비하게 됨으로써 전제왕국으로 그 변모를 변하여 갔다. 그 후 남북국 시대에 이르러 당( 唐 )과의 왕래가 빈번해져서 당의 관제를 수입 절충하여 관제를 대폭 개혁하였다. 그러나 관제가 완전히 중 국화된 것은 아니었으며, 관서( 官 署 ) 관직( 官 職 )을 신라 고유의 것과 당의 것으로 혼합하고 그 명칭도 신라 고유어와 한어( 漢 語 )를 혼용하여 관제의 체계가 잡히지 못함으로써 후일의 왕조의 관제에 불완전한 모형을 예시함에 불과하였다. 또한 신라는 전제왕국 체제를 갖추기는 하였 으나 부족사회의 잔재를 끝까지 불식하지 못하여 씨족의 계급인 골품( 骨 品 )에 따라 관원의 임용이 결정되고, 당의 과거제를 들여와서 씨족의 고하에 관계 없이 인재등용을 하기 위한 삼품과( 三 品 科 )를 창설하였으나 끝내 활용되지 못하였으며 또 남당( 南 堂 )이 잔존하여 국가의 중대사 를 족장(화백)회의에서 의결하는 등 이러한 일들을 감안할 때 신라에서는 전제왕국이 완성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고려의 관제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조는 처음부터 부족사회를 탈피하고 전제왕국으로 등장한 최초의 왕조이다. 건국 초에는 관제의 정비를 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신라와 태봉( 泰 封 )의 관제을 절충하여 미봉책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성종( 成 宗 )은 수성( 守 成 )의 현군( 賢 君 )으로서 유신( 儒 臣 ) 최승로( 崔 承 老 )의 보필을 받아 당제( 唐 制 ) 송제( 宋 制 )를 절충하여 관제의 기틀을 잡았다. 그 기구는 당 송제를 모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서와 관직의 명칭까지도 그대로 답습함으로써 고려의 관제는 완전히 중국화 되었다. 그 조직은 삼성( 三 省 )[2] 6부( 六 部 )[3], 제각관시( 諸 閣 館 寺 )[4]를 행정 기구의 주축으로 하고 있다. 그 외각에 3사( 三 司 )[5] 밀직사( 密 直 司 )[6] 및 사헌부( 司 憲 府 )[7] 등으로 중앙관제가 편성되었는데, 대개 당시의 당 송관제의 답습이었다. 그 후 고려가 원( 元 )에 신복( 臣 服 )한 이후에는 외번( 外 蕃 )으로서 천자국( 天 子 國 )의 관제를 습용( 襲 用 )하였으므로 축소하라는 원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관서의 폐합과 아울러 일부 몽고제( 蒙 古 制 )를 가미하여 신제( 新 制 )를 마련함으로써 비위를 맞추다가, 원의 쇠망으로 공민왕( 恭 愍 王 ) 때에 다시 성종 시대의 구제( 舊 制 )로 환원하는 등의 변천이 있었다.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55

156 지방관제와 고려의 특유한 도평의사사( 都 評 議 使 司 ) 등에 대하여는 조선 관제에서 비교 설명하기로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고려조는 완전히 부족 사회가 붕괴된 후 전제왕국으로 출발하였으므로 씨족의 고하에 관계없이 능력에 의한 인재의 등 용을 위하여 과거제를 채용하여 원활히 활용하였으나, 관료 조직의 강화는 관인( 官 人 ) 계급을 형성하게 함으로써 관인 계급의 횡포가 일어났 다. 조선의 관제조선조는 역성( 易 姓 ) 혁명에 의한 왕조의 교체일 뿐 사회구조에 변혁이 있었던 것은 아니므로, 관제도 대체로 고려조의 것을 모 형으로 하여 실정에 맞게 수정을 가함으로써 관제의 토착화를 꾀하였을 따름이다. 세종 때에 조선조 관제의 대개의 윤곽이 확정되었고, 그 관제는 상술한 바와 같이 법전의 편찬으로 관서 관직 및 그 정원, 관장사무의 분류, 사무처리의 규정, 그리고 인사제도에 이르기까지 세밀하 게 법률규정으로 정한 것은 앞서의 두 왕조에 비하여 특기할 만한 일이다. 조선의 관제를 개관하면, 고려조의 삼성을 폐지하고 의정부( 議 政 府 )[8]를 정점으로 하여 그 밑에 이 호 예 병 형 공의 6조를 기축으로 하여, 그 아래 많은 실무관서인 제각( 諸 閣 ) 관( 館 ) 시( 寺 ) 서( 署 ) 및 창( 倉 )을 예속시킨 것이 중앙관제의 골격이었으며, 그 외의 외각관서 로서는 종부시( 宗 簿 寺 : 宗 親 府 ) 돈령부( 敦 寧 府 ) 및 충훈부( 忠 勳 府 ) 등의 명예관서와 의금부( 義 禁 府 ) 사간원( 司 諫 院 ) 및 사헌부( 司 憲 府 ) 등 의 국왕에게 직속된 감찰기관 등이 있었다. 또 지방관제로 군현제도( 郡 縣 制 度 )가 완성된 것은 조선 시대가 처음이다. 신라때에도 지방을 주( 州 ) 군 ( 郡 ) 현( 縣 ) 등으로 나누어 도독( 都 督 ) 태수( 太 守 ) 또는 현령( 縣 令 ) 등을 주재시켜 지방행정을 시행하였으나, 주 군 및 현은 중앙에서 직할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부( 府 ) 주 군 또는 현 등으로 나누어 도호부사( 都 護 府 ) 지사( 知 事 ) 또는 현령을 두어 지방행정을 관장하게 하고 때로는 안 찰사( 按 察 使 )를 순회시켜 지방관의 치적을 등제( 等 第 )[9]하여 포폄을 담당하게 하였으나, 지방장관을 상주시켜 수령( 守 令 )을 총괄하지 않았으 므로 신라는 물론이고 고려조에서도 군현제도가 완성되었다고 는 볼 수 없다. 여기에 반해 조선조는 전국을 8도로 구분하여 관찰사( 觀 察 使 )를 지방장관으로 상주시켜 도내의 부윤( 府 尹 ) 대도호부사( 大 都 護 府 使 ) 목사( 牧 使 ) 군수( 郡 守 ) 현령 및 현감( 縣 監 ) 등의 관하 고을의 수령을 감독하며 도정( 道 政 )을 총괄하게 하였으므로 비로소 군현제도가 완성되었다고 하겠다. 형정사( ( 刑 政 史 ) 신라와 고려조의 형정에 관하여는 문헌이 없으므로 상세하지 않으나, 조선의 형정은 이 두 왕조보다는 발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의 형정도 조선의 형정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으리라 추측된다. 조선의 형정을 현대의 형정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들 수 있 다. (1) 동서제국의 전근세( 前 近 世 )에서와 같이 조선조에서도 삼권분립이 없으므로 행정관이 범죄의 수사와 재판을 겸임하였다. (2) 수사기술이 미숙하여 범죄의 수사는 규문주의( 糾 問 主 義 )에 따라 고문으로 자백을 받게 됨으로써 자백은 증거의 왕이다 라는 원칙이 적용되었다. (3) 조선조는 계급사회였으므로 양반과 사족( 士 族 )은 의금부에서 재판하고, 서민은 지방관이나 형조에서 재판하여 양반 재판소와 상민( 常 民 ) 재판소의 분류가 있게 되었다. (4)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이 적용되어 형률( 刑 律 )[10]에 규정이 없으면 형벌할 수 없으나 斷 罪 無 正 條 (단죄무정조) 引 律 比 律 應 加 應 滅 (인율비 율응가응멸)죄를 처단함에 바른 조례가 없으므로, 법을 끌어 어떤 법에 비하여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한다. 에 따라 법조의 유추해석이 허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56

157 용되어 남형( 濫 刑 )의 여지가 있었다. (5) 단죄의신송률( 斷 罪 依 新 訟 律 ) 에 따라 형법불소급의 원칙이 배제되었다. (6) 조선조는 1 전제왕국인 한편 관료국가이고, 2 가부장제( 家 父 長 制 ) 사회였으며, 3 양반 사족을 지배계급으로 하고 서민과 천민( 賤 民 ) 을 피지배계급으로 하는 계급사회이므로, 이러한 사회구조를 반영하여 범죄도 왕권 침해에 대한 범죄[11] 관원의 관기( 官 紀 ) 침해에 대한 범죄[12] 가부장제의 침해에 관한 범죄[13] 및 사회계급의 교란 및 침해에 관한 죄[14] 등 네 부류의 범죄가 중시되어 중벌 ( 重 罰 )되고, 구타 상해 또는 재산법 등 일련의 자연법은 경시되었다. (7) 형벌은 5형제( 五 刑 制 )로 사( 死 ) 유( 流 ) 도( 徒 ) 장( 杖 ) 및 태( 苔 ) 등의 5종이 있다. 또한 도형( 徒 刑 )[15]과 같은 자유형( 自 由 刑 )이 동양 에서는 일찍부터[16] 발달되었는바, 이는 자신( 自 新 )[17]하여 사회복귀의 기회를 주는 목적형( 目 的 刑 ) 또는 교육형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또 유럽에서 최초로 암스테르담에 징치장( 懲 治 場 )이 설치되어 징역형을 과하게 된 것이 18세기경이니, 동양이 서양보다 12~13세기나 앞섰다고 하겠다. (8) 유교의 영향으로 형불상대부( 刑 不 上 大 夫 )[18] 라는 유가의 법률관에 따라 중신 또는 종친이 사죄( 死 罪 )에 해당하면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사약을 내려 자진( 自 盡 )을 권한 것은 그 한 특징이다. 또 한국에는 일찍부터 압슬( 壓 膝 ) 자자( 刺 字 ) 또는 낙형( 烙 刑 ) 등의 육형( 肉 刑 ) 이 있었으나, 조선조에 이르러 숙종 영조의 엄금으로 이를 폐지하였다. 조선의 법전 편찬 약사조선은 동양의 전통적 법전 편찬의 형식인 6전식( 六 典 式 ) 법전을 완비한 한국 최초의 왕조이며, 또한 역대의 국왕은 법전 편찬에 노력하여 많은 법전이 간행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태조가 유훈( 遺 訓 )으로 조종( 祖 宗 )의 성헌( 成 憲 )인 6전에 따라 치정할 것을 명 하였으므로 법치사상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 이와 같이 법전 편찬에 힘을 기울이고 법치를 강조한 것은 다음과 같은 내력에서였다. 즉 고려 말기는 왕권이 쇠미하여 문신과 무신이 서로 다투어 권력자의 교체가 무상하였다. 권력자로서 등장한 자는 국가의 의장( 儀 章 ) 법제 등의 모든 준칙을 방자하게 유린하며, 임의대로 치정함으로써 사당( 私 黨 )이 일어나고 모함이 자행되어 정사가 문란하여졌을 뿐만 아니라 민 심도 매우 혼란하였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무력으로 조선왕조를 창업한 태조는 난세를 광구( 匡 救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법의 확립과 그 준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즉위하자 조준( 趙 俊 )에게 법의 제정을 명하여 경제육전( 經 濟 六 典 )[19] 을 간포하였다. 제2대 정종( 定 宗 )은 부왕을 따라 즉위교지( 卽 位 敎 旨 )로서 백관( 百 官 )에게 경제육전 을 준수하여 치정할 것을 교시하는 한편 법전을 정비 하기 위하여 조례상정도감( 條 例 詳 定 都 監 ) 을 설치하였다. 제3대 태종( 太 宗 )은 경제육전 이 개국 초의 황망한 중에 찬수( 撰 修 )된 것이므 로 이어( 俚 語 [20]가 섞여 조잡을 면치 못하였다 하여 이를 법문( 法 文 )[21]으로 개정하는 한편 경제육전 편찬 후의 수교( 受 敎 )[22] 조례 ( 條 例 )[23] 및 기타 탈락된 법규를 집록( 輯 錄 )하여 속대전( 續 大 典 ) 을 편찬하였다. 제4대 세종( 世 宗 ) 또한 그 후의 법규를 집록하여 경 제육전 등록( 謄 錄 ) 을 편찬하였으며, 제7대 세조( 世 祖 )는 찬위( 簒 位 )로 인하여 법이 해이해지고 준법이 되지 않음을 규지( 窺 知 )하여 다시 법 도( 法 度 )를 갖추고 기강을 단속하기 위해 그간의 모든 법전의 수교 조례를 검토하여 영세부동( 永 世 不 動 )의 법으로 할 법전을 집대성하려는 의도 하에 법전 편찬에 착수, 경국대전( 經 國 大 典 ) 을 간행하여 그 중 우선 호전( 戶 典 ) 과 형전( 刑 典 ) 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완전하지 못하다는 의론이 있어 그 나머지의 4권과 더불어 수차 수정을 가하여 완성한 경국대전 을사본( 乙 巳 本 )[24] 을 간포하기에 이르 렀는 바 이는 조선 왕조 법전의 대종( 大 宗 )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전자의 경제육전 은 창업주( 創 業 主 )인 태조의 치정의 기본 유훈을 골자로 하여 편찬된 것이므로 경제대전 은 경제육전 중 의 국기( 國 基 )가 되는 규정은 조종( 祖 宗 )의 성헌( 成 憲 )이라 하여 이를 변경 없이 계수하였고, 이러한 입법의 태도는 조선조 역대의 국왕을 통 하여 견지된 원칙이었다. 경제대전 의 편찬 이후에도 사화( 士 禍 ) 변방사단( 邊 方 事 端 ) 붕당( 朋 黨 ) 또는 외적의 침구( 侵 寇 )가 있을 때마다 위험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하여 또는 권력의 쟁탈 유지를 위하여 수교 조례가 속출 남발하였으며, 그와 같은 법은 때로는 성헌을 유린하고 정국을 혼미하게 하였 다. 그러므로 소강( 小 康 )을 얻을 때마다 역대왕은 그러한 법의 정리를 위하여 대전속록( 大 典 續 錄 )[25] 대전후속록( 大 典 後 續 錄 )[26] 수교집록( 受 敎 輯 錄 )[27] 전록통고( 典 錄 通 考 )[28] 등을 편찬하는 등 법의 정비에 힘썼다.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57

158 그러한 중에도 숙종( 肅 宗 )과 영조( 英 祖 ) 때에는 붕당이 심하여 성헌이 공문화( 功 文 化 )하는 망발된 법이 남발하여 법의 위신이 극도로 추락하 였다. 이에 영조는 숙고 끝에 그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경국대전 과 같은 영세( 永 世 ) 준수의 법전을 편찬하여 법을 해명함으로써 분규를 방지할 목적으로 속대전( 續 大 典 )[29] 을 간포하고, 그간의 모든 법은 폐기하였다. 따라서 경국대전 과 속대전 의 두 법전만이 병용 시행되었으나 매우 불편하였으므로 정조( 正 祖 )는 그 두 법전의 전( 全 )조문 및 그 후의 수교 조례를 선택하여 동일 성질의 조문을 분류 정리함으로써 한 법전으로 편찬한 대전통편( 大 典 通 編 )[30] 을 간포하였다. 그 후 조선조 말엽에 고종이 등극하자 섭정( 攝 政 )인 흥선 대원 군( 大 院 君 ) 이하응( 李 昰 應 )이 다시 대전통편 이후의 수교 조례 등을 증보하여 대전회통( 大 典 會 通 )[31] 을 간포하니 이것이 한국 최후 의 동양식 법전이다. 이와 같이 조선의 법전 편찬사업은 왕성하였다 하겠으나 그 중에서도 경제육전 경국대전 대전통편 및 대전회통 의 넷이 가 장 획기적인 4대 법전임을 알 수 있다. 상술한 바와 같이 경제육전 은 창업주 태조의 치정대본( 治 定 大 本 )의 유훈을 담은 것이고, 경국대 전 은 그것을 변경없이 답습하여 입법 지침을 견지하였다. 대전통편 은 경국대전 과 속대전 의 합편에 불과하고, 대전회통 은 대전통편 이후의 법을 선택 중보한 것으로서 경국대전 대전통편 중의 속대전 대전통편 이후 증보된 규정 등을 두루 재록하고 있으므로 금일의 법령집이 현행 법령만을 수록한 것과는 달리 대전회통 만을 일람하면 고종때의 현행 법규뿐 아니라 법규가 개 정된 연혁을 역력히 알 수 있어, 그를 통하여 조선의 제반 제도의 변천까지도 엿볼 수 있다. 또한 대원군이 서둘러 대전회통 을 편찬한 것은 조선 중엽 이후로 외척세도로 인하여 왕권이 쇠미하였으므로 전제 왕권을 법제로 재확인하고 선언하려는 데에 그 동기가 있었다. 동법 전이 간포된 해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달성, 근대화에 성과를 얻은 때였는데 우리 한국은 전제왕국의 구각( 舊 殼 )을 더욱 교착시키려 하고 급변하는 국제정세에는 눈을 돌릴 틈도 없었음을 볼 때, 후일에 한국이 국제경쟁에서 비운을 당하게 됨도 당연한 경로라 하겠다. 조선의 역대 법전의 내용과 성격조선의 역대 법전은 동양의 전통적 법전 편찬 형식인 이( 吏 ) 호( 戶 ) 예( 禮 ) 병( 兵 ) 형( 刑 ) 및 공( 工 )의 편별( 編 別 )로 된 6전식( 六 典 式 )이다. 이와 같은 편찬 형식은 중국의 당조( 唐 朝 )에서 비롯한 중국 역대왕조의 법전 편찬 형식으로서 그것은 멀 리 중국 상고의 주( 周 )관제에 연원을 둔 것이다. 중국에서는 관제( 官 制 )를 천지4계( 天 地 四 界 )에 비겨 행정기관을 나누었는데, 한국에서도 고려조 이후 이를 모방하여 중앙관제를 천관( 天 官 )[32] 지관( 地 官 )[33] 춘관( 春 官 )[34] 하관( 夏 官 )[35] 추관( 秋 官 )[36] 및 동관( 冬 官 )[37] 등의 6조( 六 曹 )로 나누어 행정 각부를 삼아 정 무를 관장하게 하고, 각 조가 관장하는 정무에 속하는 것은 국왕이 그 조에 수교를 내리거나 또는 각 조는 해당 정무에 관한 것을 입안하여 국왕의 하비( 下 批 )[38]를 얻어 조례로 제정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각 조는 각각 그 수교와 조례를 법규로 집록하여 정무의 규준 ( 規 準 )으로 삼으며, 각 조가 집록한 것을 통합하여 한 법전을 꾸미면 당연히 6전식 편별 이 되었다. 6전에 실린 규정들을 보면, 국왕의 시정 보고기관인 관료기구의 조직, 그 관장 사무의 분류 및 관원의 감독 등에 관한 행정법적 규정 국민을 관리 지배하기 위한 형법적 규정 유교입국( 儒 敎 立 國 )을 표방한 조선인 만큼 유가의 법률관인 제률( 制 律 )은 예( 禮 )의 보( 輔 )이 다 에 따라 유교 윤리의 실행을 강제하기 위한 예의 법제화 규정 등의 셋으로 대별할 수 있다. 또한 조선의 법전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체 제에서는 중국의 6전식에 의거하였고, 선진의 전제왕국인 중국의 역대왕조가 어신제민( 御 臣 制 民 )과 유교 윤리의 법제화의 원리에 따라 오랜 동안 탁마( 琢 磨 )한 여러 법전을 검토하여 절충 계수한 것이므로 동양법전으로서는 상당히 정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육전식 편별의 내용6전식 편별( 編 別 )은 다음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전( 吏 典 ) 이조( 吏 曹 )의 소관인 문반( 文 班 )의 관직 품계( 品 階 ) 관원( 官 員 )의 임면( 任 免 )절차, 관원의 고과( 考 課 )[39], 관원이 포폄( 褒 貶 )[40] 등 문반의 관제와 관원의 근무에 관한 관원법[41]을 포함한다. 호전( 戶 典 ) 호조( 戶 曹 )의 소관인 경비( 經 費 )[42] 회계( 會 計 )[43] 호적 양전( 量 田 )[44] 제전( 諸 田 )[45] 전제( 田 制 ) 요역( 賦 役 ) 무농 ( 務 農 ) 비황( 備 荒 )[46] 및 해유( 解 由 )[47] 등 재정 경제에 관한 규정을 포함한다. 예전( 禮 典 ) 예조( 禮 曺 )의 소관인 제향( 祭 享 ) 과거( 科 擧 ) 취재( 取 才 ) 등의 고시 시행규칙, 교육 종교 외교의전( 外 交 儀 典 ), 새보( 璽 寶 )[48] 관인( 官 印 ), 사령서( 辭 令 書 )형식 및 관혼상제 등 외교공문서, 교육 국가고시 및 예교( 禮 敎 )에 관한 규정을 포함한다.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58

159 병전( 兵 典 ) 병조( 兵 曹 )의 소관인 무반( 武 班 )의 관직. 군관의 근무규칙, 군기( 軍 器 ), 우체역로( 郵 遞 驛 路 ), 경성( 京 城 ) 궁궐의 경비 등 관제 병역 군무 우체 및 교통 등의 규정을 포함한다. 형전( 刑 典 ) 형조( 刑 曹 )의 소관인 소송 형벌 수사 및 노예에 관한 규정을 포함한다. 공전( 工 典 ) 공조( 工 曹 )의 소관인 교량( 橋 梁 ) 영선( 營 繕 ) 공장( 工 匠 ) 도량형( 度 量 衡 ) 주차( 舟 車 ) 산림( 山 林 ) 도요공( 陶 窯 工 ) 및 야금 ( 冶 金 ) 등 건축 식림 및 공업 따위에 관한 규정을 포함한다. 개화 이후갑오개혁(1894년)을 기점으로 하여 전통적 바탕 위에 일본을 통한 법제의 서구적 근대화가 급속히 추진되었다. 이미 국권의 주체성 이 상실된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의 제반 법령은 거의 일본인 고문관의 주도( 主 導 )하에 입법되었으나, 형식적으로는 근대적 법치 국가로서의 면목을 갖춘 셈이다. 당시의 방대한 근대식 법령은 법규류편( 法 規 類 編 )[49] 현행대한법규류찬( 現 行 大 韓 法 規 類 簒 )[50] 현대한국법전( 現 代 韓 國 法 典 )[51]등 법령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형사 입법은 다른 분야에 비해서 역사적 현실적 특수성을 참작하여 비교적 서서히 개혁되었 으며, 조선 왕조 최후의 형법전인 형법대전( 刑 法 大 全 )[52]은 대전회통( 大 典 會 通 ) 대명률( 大 明 律 )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1910년 8월 이후의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 총독의 명령인 제령( 制 令 )에 따라 통치하게 되고 당분간은 대한제국 시대의 법령의 효력을 인정했 으나, 1912년의 조선민사령( 朝 鮮 民 事 令 )과 조선형사령( 朝 鮮 刑 事 令 )에 따라 대부분 일본의 법령이 의용( 依 用 )되었으며, 전통적 색채가 짙은 친 족 상속법 분야는 관습법에 따르도록 했으나, 1920년대부터는 그것도 거의 일본 구민법이 의용되었다. 즉 모든 분야가 대륙법을 계수하여 제정된 일본 법제하에 대륙법권으로 들어간 것이다. 사법 분야( 私 法 分 野 )에서는 식민지적 차별이 심하지 않았으나 공법 분야( 公 法 分 野 )에서는 가지가지의 차별법과 탄압법으로 묶어 자유 평등 의 법치주의는 바랄 수도 없었다. 1945년의 민족 해방 후에 잠시 미군정하에 있는 동안은 일제 강점기의 법이 그대로 시행되었으나 종래에 민족적 차별과 탄압의 도구이었던 법령을 모두 폐지하였으며, 공법 분야와 형법 분야에는 영미법( 英 美 法 )이 서서히 계수되기 시작했다. 1948년 대한민국의 수립에 따라 주권 국가로서 국민 주권과 민주주의 이념에 입각한 헌법의 제정(1948년)에 기해서 형법(1953년) 형사 소송 법(1954년) 민법(1958년) 민사 소송법(1960년) 상법(1962년) 등 기본법이 제정 실시되었으며, 대륙법을 근간으로 하여 영미법적 제도 법 기술 법사고를 받아들여 오늘날은 현대국가로서 명실을 갖춘 한국적 법체계의 수립을 위하여 전진하고 있다. 개화기 형법대전형법대전( 刑 法 大 全 )은 1905년(광무 9년) 4월 29일 법률 2호로 공포 실시된 대한제국의 일반형법전이며 근대적 형식을 갖춘 최초의 형법전이다. 일본의 형법전을 계수하지 않고 이전의 대전회통 대명률과 갑오개혁 이후의 형사법령을 참고하여 제정되었으며 처음에는 680개 조문이었는데 2차에 걸친 개정으로 417개 조문만 남게 되었다. 편장절( 編 章 節 )로 나누고 조문의 형식에 따라 국한문을 혼용함으로써 내용을 간략 평이하게 표현하고 체계화한 것이며 과거부터 내려저 온 동양의 객관주의적인 형법사상에 입각하였다. 형법대전에서는 동아시아 최초로 고문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형사령조선형사령( 朝 鮮 刑 事 令 )은 일정하에서 조선인에게 적용되었던 형사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형사기본법이며, 1912년에 제령( 制 令 ) 11 호로 공포 실시되어 10여차의 개정을 거쳐 해방 후에도 군정법령 제21호에 의거하여 효력이 있었고, 대한민국 수립 후에도 개정 전의 헌법 100조에 의거하여 그 효력이 지속되었으며, 1953년에 현행 형법의 실시와 동시에 효력을 상실했다. 일정 당시에는 이 형사령에 의거하여 일본의 형법과 형사 소송법을 비롯한 각종 형벌법( 刑 罰 法 )이 우리나라에 시행되었었다.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59

160 조선민사령조선민사령( 朝 鮮 民 事 令 )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에게 적용되었던 민사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기본법이다. 조선을 강점한 일본 제국 은 '조선민사령'을 제정(조선통감부제령 제7호 )하고 1912년 4월 1일부터 이를 통해 일본 민법을 의용( 依 用 )하였다(조선민사령 제1 조).[53] 공포된 후에 17차례의 개정이 있었다. 조선민사령에 의거하여 일본 민법 상법 민사소송법을 비롯한 각종 민사관계법령이 조선에서 시행되었다. 시행 초기에는 조선인 상호간의 법률행위에 대해서 공공의 질서에 관한 것이 아닌 관습이 있는 경우에는 그 관습에 의하고(조선 민사령 제10조), 조선인의 친족 상속에 관해서는 원칙적으로 조선의 관습을 따르도록 하였다(제11조).[53] 그러나, 개정을 거듭하면서 점차 일본 민법의 친족 상속편이 대부분 적용되었다. 조선민사령은 1945년 광복 후에도 미군정법령 제21호에 따라 효력이 유지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제헌헌법 100조에 따라 헌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유효하였다.[53] 1960년 1월 1일, 대한민국 민법과 호적법의 제정 시행과 기타 여러 법률들의 제정으로 사문 화 되었고, 나머지 규정들도 '구법령 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1962년 1월 20일에 효력을 잃었다.[53] 구민법( 일본 민법) 구민법( 舊 民 法 )은 1898년 7월 16일부터 시행된 일본 민법으로서 일제강점기인 1912년부터 조선민사령에 따라 의용( 依 用 )되어 1960년 1월 1일 에 현행 민법이 시행되기 전까지 대한민국에서도 시행되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明 治 維 新 ) 당시 프랑스의 법학자이며 정부법률고문인 보아 소나드를 중심으로 프랑스 민법을 본따서 만든 민법안을 1890년에 공포하였으나 시행하지 못했으며, 다시 독일 민법 제1초안을 모범으로 민 법을 만들어 총칙 물권채권편은 1896년에, 친족편 상속편은 1898년에 각각 공포하여 모두 1898년부터 시행하였다. 이 중 친족 상속편은 일제강점기 조선에는 단계적으로 의용되었으므로 조선민사령 시행 초기에는 조선의 관습법 관례법의 적용범위가 넓었다. 미군정기 군정법1945년 8월 15일의 해방 이후 미군정이 개시되어 포고령 1호로 38도선 이남 지역은 군정장관이 공포하는 포고( 布 告 :Proclamations) 법령( 法 令 :Ordinances) 규약( 規 約 :Regulations) 고시( 告 示 :Divections) 및 조례(enaments)의 적용을 받게 되었 으며, 군정법령 제11호에 의거하여 일제 강점기의 법령 중 치안유지법 정치범죄처벌령 조선보호감찰령 출판법 등을 비롯한 차별 압박 법 령이 폐지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의 대부분의 법령은 군정법령 제21호에 의거하여 그대로 효력이 있었다. 따라서 군정시대는 군정법령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부분적으로는 미국의 법제도가 계수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1공화국 제2공화국 제3공화국 5 16 군사 쿠데타 두달 후인 1961년 7월 15일, 박정희 군부는 법률 제659호로 '구법령 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고 법령 정리위원회를 설치하여 1948년 7월 16일 이전에 시행된 구한국법령, 일제강점기의 법령, 미군정법령으로서 제헌헌법 제100조에 따라 효력이 존속하고 있는 것들을 정리하고, 이를 대체할 법령을 제정하도록 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법률에 의해 1961년 12월 31일까지 정리대치( 整 理 代 置 )되지 않은 구법령( 이전 법령)은 1962년 1월 20일 폐지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지배기구와 경성 일제강점기[ [ 日 帝 强 占 期 ] 정의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식민통치를 당한 35년간( ). 서 설유구한 역사에서 우리 민족이 가장 크고 아픈 상처를 입은 한국사의 특수한 시기였다. 이 시기의 한국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60

161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을 강점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정책의 기본적 특징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한 다음 서구열강의 식민지정책과도 다른 그들의 독특한 식민지정책을 한국에 실시하였다. 일본제국주 의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정책의 특징은 1 한국민족 말살정책과 2 식민지 수탈정책의 융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제2차세계대전 종료 이전까지의 열강의 식민지정책은 나라에 따라 각각 유형적 특징이 있었다. 영국형은 사회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하 여 간접지배 를 원칙으로 하였다. 이 때문에 식민지의 행정관리는 토착인을 고용하면서 독립운동을 막기 위하여 토착인에 대한 분할과 지 배(divide and rule)의 정책을 채택하였다. 또한, 식민지 관리를 충원하기 위하여 토착인에 대한 어느 정도의 고등교육을 실시할 필요가 있었으며, 토착인의 민족보존운동이나 민족문화 운동에 대해서는 대체로 방관적 정책을 취하였다. 프랑스형 역시 사회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영국과는 달리 직접지배 를 원 칙으로 하였다. 따라서, 식민지 행정관리는 대부분 프랑스인을 고용하였다. 프랑스형은 토착인의 민족보존운동에는 방관적이었으나 민족문화운동에 대해서는 이를 교육을 통하여 통제하고, 프랑스식 생활양식과 카톨릭 교를 보급하여 프랑스식 문화체계를 이식시키려 하였다. 한편, 네덜란드형 역시 사회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하여 직접지배 를 원칙으 로 하고, 식민지 관리도 대부분 네덜란드인을 고용하였다. 그러나 프랑스형과 다른 점은 토착인의 민족보존은 물론이요 민족구성이나 민족관습, 또는 민족문화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이를 침해하지 않 고 그대로 보존시켜 독립운동의 저항을 줄이면서 사회 경제적 수탈을 극대화하려는 정책을 취하였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정책은 프 랑스형을 모방하여 직접지배의 원칙을 채택하였으나, 프랑스형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이른바 동화정책( 同 化 政 策 ) 이라는 이름 밑에 한 국민족 말살정책을 강행한 데 있었다. 즉,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을 강점하여 사회 경제적 수탈의 극대화와 함께 한국민족을 지구 위에서 소멸시키려 한 것이었다. 이 점이 서구 제 국주의의 식민지정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은 간접지배이든 직접지배이든 간에 사회 경제적 수탈을 기본목적으로 하고, 피지배민족의 민족보존은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였으며, 민족문화운동에 대해서는 그것이 직접적인 정치 적 독립운동이 아닌 한 방관적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은 사회 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한국민족을 말살, 소멸시켜서 일본제국내의 공식 비공식적으로 차별받 는 종속 천민신분층으로 만들 것을 목적으로 한국민족 말살정책을 강행하는 악랄한 정책을 집행하였다. 각종의 간악한 제국주의 식민지정책 중에서도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정책은 가장 폭압적이고 무단적이었으며 가장 악랄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의 한국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이 전세계 약소민족의 모범이 될 만큼 완강하고 줄기차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일본제국주의의 한국민족 말살정책은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하였으며, 사회 경제적 수탈정책도 많은 부분에서 그들이 원한 바 대로 되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한국민족은 그들의 식민지정책으로부터 자기민족을 보위하고 일제를 몰아내어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쟁취하려고 영웅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한국민족의 독립운동과 연합국의 승전으로 마침내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에서 쫓겨가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이 한국역사에 끼친 해독은 참으로 심대한 것이었다. 일본제국주의는 한말까지 꾸준히 전개되던 한국의 자주 근대화를 저지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강점기간 동안에 한국사회를 정체시키고 온갖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였으며, 결국은 일제강점의 소산으로 남북 분단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민족이 타의에 의하여 남북으로 분단되어 고통을 받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일본제국주의의 한국강점으로 말 미암은 결과이다.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61

162 - 1910년대의 한국사회와 독립운동 - (1) 일본제국주의의 군사강점과 식민지 무단통치체제 1 조선총독부의 설치와 헌병경찰제도 : 일본제국주의는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강탈하여 식민지로 강점하자 한국에 대 한 식민지통치기구로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그 지휘자로 총독을 두어 식민지통치를 담당하게 하였다. 조선총독은 행정권뿐만 아니라 입 법 사법 및 군대(이른바 조선군 )통수권까지 가진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일제는 조선총독을 반드시 일본의 육군 해군 대장으로 임명하도록 함으로써 실질적으로 한국을 일본군부의 지배하에 두고, 군사방식에 의한 무단통치를 자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한국에 대한 식민지통치에 있어서 법률 이 필요한 부문도 총독의 명령 으로 행하도록 하였으며, 이것은 동서고금에 없는 특별권한이므로 총독의 법률효과를 가진 명령에 특별히 제령( 制 令 )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제는 조선총독에게 한국인의 모든 생사여탈을 자의로 결정할 수 있는 특별권한을 주어 한국인의 독립운동 등 저항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탄 압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의 한국은 설령 명목상의 법률이 부분적으로 있었다고 할지라도 실질적으로는 법률에 의하여 통치된 법치지역이 아니었다. 그것은 군왕보다도 전제적인 조선총독의 명령(제령)에 의하여 전제 파쇼적으로 지배되고, 자의적으로 탄압된 특수지역 이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부서로서 처음에는 6부를 두고, 그 밑에 6국 6과를 두었다가 이를 대폭증설하고, 지방행정조직을 개편하였다. 1911년 3 월 조선총독부의 관리수는 11만5115명이었다. 이 관리 중 한국인은 극소수로 대부분 일본인이었으며, 특히 고급관리는 그러하였다. 그것은 일제가 프랑스의 직접지배원칙을 채택하여 <조 선총독부관제 조선인관계규칙>에서 한국인의 관리임용을 극도로 제한한 정책과 관련된 것이었다. 즉, 일제는 한국인에 대하여 생사여탈권을 쥔 조선총독 밑에 1만5000여명의 일본인 관리들을 거미줄같이 늘어놓아 식민지통치의 행정조직을 편성한 것이었다. 또한 무단통치 라 하여 1910년 9월 10일 헌병경찰제도를 창설하였다. 헌병경찰제도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제도로서 헌병으로 하여금 일 반국민에 대한 경찰행정을 담당하게 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에 의하여 일본헌병은 한국의 민간인에 대한 경찰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일반경찰도 헌병제도와 결합하여 한국의 민간인을 군사적 방식으로 사찰하게 되었다. 이 헌병경찰제도에 의하여 일본 헌병사령관이 중 앙의 경무총감이 되고, 각도의 헌병대장이 해당 도의 경무부장이 되었으며, 위관( 尉 官 )이 경시( 警 視 ), 하사관이 경부( 警 部 ), 사병이 순사( 巡 査 )의 지위와 역할을 수행하였다. 물론 일제의 헌병경찰제도에 의하여 종래의 경찰제도가 없어진 것은 아니고, 경찰제도는 그대로 남아서 군사적으로 지휘 관리되는 위에 다시 일제의 헌병대가 일반경찰직무를 수행하도록 개편된 것이었다. 1911년 일제의 헌병기관수는 935개소에 7,749명이었다. 한편, 1911년 일반 경 찰관서는 667개소였으며, 일반경찰수는 6,222명이었다. 즉, 일제강점 후인 1911년의 헌병경찰관서수는 모두 1,602개소였으며 헌병경찰의 총수는 1만3971명에 달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헌병경찰관서 와 헌병경찰을 전국 각지에 조선총독부 행정조직과 함께 거미줄같이 늘어놓아 한국인을 탄압하는 무력조직을 편성한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이러한 헌병경찰제도에 의거하여 조선총독부의 행정관리에게도 그에 준하는 제복을 착용시키고 무기로 대검( 帶 劍 )하게 하였으 며, 심지어 학교 교원들에게까지 제복과 함께 대검을 착용하게 하여 한국인을 처음부터 무력과 폭력으로 탄압하였다. 2 일본정규군의 무력배치 : 일제는 한국에 대한 식민지 무단통치를 조선총독부와 헌병경찰에만 의존하는 것이 불안하여 다시 이를 무력으로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62

163 뒷받침하기 위해서 일본정규군을 배치하였다. 일제는 일본 육군제19사단을 나남에 주둔시켜 북부조선 일대를 지역별로 구획하여 배치하였으 며, 제20사단을 용산에 주둔시켜 중부와 남부조선을 지역별로 구획하여 각지에 배치하였다. 일제는 이를 합하여 조선군( 朝 鮮 軍 )이라고 부르고 조선군 사령부를 용산에 두었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의 한국은 전국이 거미줄 같은 일본정 규군의 배치망하에 중첩되어 들어가게 되었다. 일제는 또한 경상남도 진해와 함경남도 영흥만에 일본 해군요새사령부를 설치하고, 해군과 중포병대대를 주둔시켰다. 1911년 한국에 주둔시 킨 일본정규군의 병력은 약 2만3000여명에 달하였다. 일제강점기 초기의 식민통치의 무력은 1911년을 기준으로 보아도 1 헌병경찰 1만3971명, 2 조선주둔일본정규군 약 2만3000여명, 3 조선총 독부 행정요원 1만5115명으로 합계 약 5만2086명에 달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5만여명의 무력조직을 전국에 거미줄같이 배치하여 한국에 대한 식민지 무단폭압통치체제를 만들었다. 3 한국인의 완전무장해제 : 일제는 이상과 같이 그들 자신은 완전무장한 반면에 한국인들은 일제의 식민지 무단통치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완전무장해제하였다. 일제가 한국인의 무장을 본격적으로 해제하기 시작한 것은 1907년 8월 1일의 대한제국 구군대의 해산과, 뒤이어 그해 9 월 3일 일제 통감부가 의병전쟁 탄압책으로 <총포급 화약류단속법>을 공포하여 한국민족이 무기를 가질 수 없도록 규제하였을 때부터였다. 일제는 1910년 강점 이후에는 이 단속법을 더욱 강화하여 집행하고, 이를 위반하는 경우에는 투옥 등 가혹한 형벌을 가하였다. 특히, 일제는 매년 이른봄에 정기적으로 총포소지를 단속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밀고제를 설정하여 한국인의 무기소지자를 색출하여서 엄벌에 처하였다. 민간인에게 총기소유를 허가한 경우는 한국에 이주한 일본인 유력자들과 한국인으로서는 친일지주들에게 극소량의 수렵용 엽총을 허가한 것 뿐이었다. 3 1운동 직전인 1918년 말의 민간인 소유 총기류는 모두 2만5634정인데, 그 중에서 일본 민간인이 소유한 총기가 2만3894정으로 총민간인 소유 총기의 93.2%였으며, 한국인 친일지주 소유의 엽총은 1,741정으로 6.8%에 불과하였다. 일본인 소유의 총기 중 군용총이 1,975정이나 되었는데 한국인 친일지주의경우 군용총은 1정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교활한 일제는 친일분자 친일지주들의엽총도 그들이 한국인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경찰관서에 보관하도록 하고, 일제가 지정한 짧은 수렵허용기간에만 단기간 반출 하였다가 즉시 경찰관서에 보관하게 하였다. 일반 한국인은 엽총소유도 엄금하여 위반자는 가혹하게 처벌하고 투옥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국내의 한국인들은 완전무장해제당하였으며, 문자 그대로 무기가 될만한 것은 촌철( 寸 鐵 )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일제의 한국 민족에 대한 완전무장해제정책은 일제식민지 무단통치에 대한 한국인의 무력저항과 독립운동의 능력을 완전히 박탈하기 위한 것이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4 헌병경찰의 특권과 태형제도( 笞 刑 制 度 ) : 일제는 한국을 강점하여 헌병경찰제를 만들고 무단탄압체제를 구축하고, 한국인을 완전무장해제 시킨 다음 한국인의 모든 생활을 철저히 탄압하고 규제하기 위하여 헌병경찰에게 일정한 사법관의 특권을 부여하고 태형제도를 제정, 공포하 였다. 일제는 1910년 12월 3일 총독의 제령 제10호로 <범죄즉결례>라는 것을 제정, 공포하였다. 그 내용은 경찰서장 또는 각 지방 헌병대장은 1 징역 3개월 이하, 2 벌금 100원 이하에 해당하는 처벌은 재판소의 재판 없이 판정하여 즉 결로 집행한다는 것이었다. 그 처벌대상은 87개 조항이었는데 유언비어나 허보를 말하는 자로부터 전신주 부근에서 연을 날리는 자, 타인의 밭을 가로질러 건너는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상생활에 걸친 것이어서 해석에 따라 어떠한 언행이라도 헌병경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에 는 한국인을 불러다가 3개월까지의 징역이나 100원까지의 벌금을 재판 없이 즉결할 수 있었다. 1912년 3월에는 제령 제13호로서 이른바 <조선태형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그 내용은 3개월 이하 징역이나 구류에 처할 자와 100원 이하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63

164 의 벌금에 처할 자는 헌병경찰이 필요에 의하여 형1일 또는 벌금 1원을 태1개로 환산하여 이를 집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일제가 <조선태형령>과 함께 제정한 <조선태형령 집행심득>에 의하면 1 태는 소의 음경( 陰 莖 )을 사용하여 만들 것, 2 기절하는 경 우에 대비하여 음수( 飮 水 )를 설비할 것, 3 수형자가 울고 부르짖을 경우에 대비하여 물에 적신 포( 布 )를 입에 물릴 것, 4 사망자의 경우에 는 그의 본적지 면장에게 통고할 것 등을 규정하고, 수형자를 형판에 엎드리게 한 뒤 두 팔과 두 다리를 형틀에 묶고 볼기를 벗겨 매질을 하 도록 하였으며, 태의 끝에는 연( 鉛 )을 붙여 맞으면 살이 터지도록 하였다. 일제는 이 야만적 제도를 만들면서 조선의 옛 제도를 부활하는 것이라고 뒤집어씌웠다. 조선왕조의 태형은 중범( 重 犯 )에 대한 것이었는데도 야만적 형벌이라고 하여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하였는데, 일제는 경범( 輕 犯 )과 일상생활에 관한 모든 것에 이를 즉결하는 새로운 야수적 탄압제도를 만든 것이었다. 일제는 한국인으로서 독립사상을 가졌거나 일본인에게 공손하지 않거나 헌병경찰의 기분에 거슬리기만 하여도 한국인을 연행하여 재판 없이 3개월까지 감옥에 처넣거나 하루에 80대까지의 야수적 태형을 예사로 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잔혹한 태형으로 말미암아 아무 죄도 없는 한국 인 중에 사망자와 불구자가 속출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농민들은 일제의 태형을 다른 어떠한 형벌보다도 싫어하고 무서워하였다. 왜냐하면, 극히 적은 수의 태형으로도 막심한 고통이 따 를 뿐 아니라 귀가한 뒤에도 상처를 수개월간 치료해야 하므로 농삿일을 못하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태형을 당하면 생명을 잃거나 평생불구가 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물론 징역 3개월을 원하였으나 이것도 수형자가 선택하지 못하고 헌병경찰이 결정하였다. 일제의 헌병경찰은 검사의 직 무까지 대행하고 나아가서는 판사의 직무, 즉 사법부의 직무까지 대행하였으며, 그 집행방법까지 그들의 자의적 판단에 의하여 태형으로 집 행함으로써 죄도 없이 인신의 사망과 불구를 만들 수 있게 되었으며, 한국은 일제의 헌병경찰에 의한 공포의 도가니로 화하였다. 일제강점기의 한국인은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떠한 트집을 잡혀 헌병경찰에 끌려가서 태형당하고 처벌을 당할 것인지 항상 불안에 떨었다. "순 사 온다."는 말이 어린애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공포용어로 사용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일제강점기의 한국사회는 일본군과 헌병경찰이 한 손 에는 총검을, 다른 한 손에는 채찍(태)을 들어 한국인을 탄압, 학살, 착취하는 하나의 커다란 감옥이었다. (2)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탄압 1 의병운동에 대한 탄압 : 일제는 이러한 식민지 무단통치체제를 만들어 놓고 한국인의 국권회복운동 독립운동에 대한 잔혹하기 짝이 없는 탄압을 자행하였다. 그 중에서 1905년 이래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년에 절정을 이루며 치열하게 전개되던 의병전쟁에 대하여서는 이미 한말에 조 선주차군 이라고 부르던 일본군을 투입하여 잔혹하게 탄압하였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비록 숫자는 크게 줄어들었으나 1910년 일제강점 이후에도 부분적으로 1914년까지 줄기차게 의병전쟁을 전 개하였다. 일제는 의병운동에 참가한 병은 물론이요 그 가족과 그들에게 식량 물자를 제공한 한국인까지 처참하게 학살하고, 가옥에 방화하 는 등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탄압과 학살을 자행하였다. 2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탄압 : 일제는 또한 애국계몽운동을 전면적으로 탄압하고 그 영향을 배제하려 하였다. 1910년 8월 이후에 일제는 우 선 대한협회( 大 韓 協 會 ) 서북학회( 西 北 學 會 ) 기호흥학회( 畿 湖 興 學 會 ) 관동학회( 關 東 學 會 ) 교남교육회( 嶠 南 敎 育 會 ) 호남학회( 湖 南 學 會 )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64

165 대한흥학회( 大 韓 興 學 會 ) 흥사단( 興 士 團 ) 등 모든 애국계몽운동단체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또한 일제는 황성신문 皇 城 新 聞 대한매일신보 大 韓 每 日 申 報 제국신문 帝 國 新 聞 만세보 萬 歲 報 대한민보 大 韓 民 報 를 비롯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던 모든 신문들을 강제 폐간시켰다. 뿐만 아니라 소년 少 年 을 비롯하여 모든 잡지들과 각 학회의 기관잡 지들을 모두 강제 폐간시켰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每 日 申 報 와 그 영문판인 서울 프레스 Seoul Press, 일본인거류민들의 경성일보 京 城 日 報 만을 남겨 일제의 통치를 선전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그들의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집행에 종래의 애국계몽운동의 영향이 크게 방해된다고 보고, 애국계몽운동의 영향을 조직적으로 배제하려 하였다. 한말에 한국인이 저술한 각급 학교용 교과서들을 모두 몰수하여 사용금지시켰고, 이때에 간행된 모든 애국계몽서적들을 금서( 禁 書 ) 라고 하여 모두 몰수하고 판매금지시켰으며, 이들을 읽는 한국인은 가혹하게 처벌하였다. 그리고 학교교과서는 일본인 저작의 교과서로 대체시켰 다. 또한, 일제는 한국인의 정치집회는 물론이요 교양강연회와 연설회도 금지시켰으며, 종교집회까지도 반드시 사전에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도 록 하였다. 한국인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철저하게 박탈당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무단탄압조처에 의하여 한국인의 입과 행동은 완전히 봉쇄당하였으며, 일제의 사슬에 묶여 입이 있어도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완전히 무력한 상태에 묶이게 되었다. 한국사회는 완전히 암흑천지가 되고, 오직 조선총독부와 일본의 기관지들만이 일제의 식민지통치하에서 한국인이 행복에 가득 차 있으며 크 게 발전하고 있다고 전세계에 거짓 선전을 하고 있었다. 3 신민회( 新 民 會 )에 대한 탄압과 105인사건 : 일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국내의 독립운동세력이나 민족자주세력을 뿌리부터 뽑아버리 려고 획책하였다. 일제가 가장 주목하여 탄압하려고 노린 것이 1907년에 비밀결사로 조직되어 일제강점 후까지 활동하고 있던 신민회와 그 회원들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전국의 지도적 애국자들이 거의 모두 신민회에 가입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신민회를 해체시키고 그 회원을 탄압하기 위하여 데라우치( 寺 內 正 毅 )총독 암살음모사건 을 조작하였다. 신민회 회원들이 초대총독 데라우치를 암살하려고 음모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신민회는 이러한 암살음모를 한 일이 없었고, 이것은 일제가 조작해낸 각본이었다. 일제는 1911년 8월에 총독암살음모혐의로 전국에서 약 800명의 신민회 회원들을 체포하였다. 이 사건은 일제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날조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일제는 기소요건을 만들 수가 없 어서 검거된 회원에 대한 전대미문의 잔혹한 고문을 가하였다. 일제는 이 기회에 한국인들에게 독립운동을 탄압할 결의를 보이고, 만일 독립운동에 가담할 경우에 당해야 할 잔혹한 개인적 고통을 보이기 위해서 다수의 체포된 신민회 회원들을 고문 도중에 학살하고 수많은 애국자들을 불구자로 만들었다. 이 중에서 122명을 기소하여 그 중 105명에게는 징역 5년에서 10년까지의 실형을 선고하였다. 105인사건의 조작과 지도적 애국자들에 대한 고문 학살 탄압은 일제가 사소한 독립운동의 가능성에 대해서조차 정치적 날조극을 만들면서까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탄압과 학살을 야만적으로 자행하는 야수적 강도들이었음을 한국인들에게 증명하여 보여주었다. 4 기타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 : 일제는 그밖에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들을 찾아내어 수많은 애국자들을 학살하고 투옥하였으며, 독립사 상을 가진 개인들에 대해서도 독립운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체포하여 고문하고 투옥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65

166 (3) 토지조사사업과 토지약탈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자 토지약탈과 식민지착취를 목적으로 년간에 걸쳐 이른바 토지조사사업 을 실시하였다. 일제는 토지소유권을 재조사하고 토지가격과 지형을 조사한다고 하면서 신고주의의 약탈적 방법으로, 1 임야 및 민간인 공유지 약 1369만여 정보와 미간지개간지 약 102만정보, 농경지 13만정보의 토지를 약탈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국토면적 약 2225만여정보의 약 62%에 해당하는 실로 방대한 것이었다. 신고를 하지 않거나 신고에 필요한 증빙서류를 다 갖추지 못한 한국농민의 토지는 모두 조선총독부 소유로 약탈당하였다. 또한, 일제는 토지 조사사업을 통하여 농민의 권리인 1 관습상의 경작권, 2 도지권, 3 개간권, 4 입회권 등을 소멸하였다. 예컨대, 조선왕조 말기까지에는 공유 미간지를 개간하는 경우에 그 토지는 개간한 농민의 사유토지가 되어 자작농이 되었는데, 토지조사사업 의 결과로 그 이후에는 공유 미간지를 개간하는 경우에도 조선총독부의 소작농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반봉건적 지 주소작제도를 강화해주어서 일반농민과 소작농의 처지는 더욱 열악하게 되었다. (4) 민족말살을 위한 식민지교육 일제는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민족말살과 식민지교육을 위한 첫 조처를 자행하였다. <조선교육령>의 기본내용은 1 조선인에 대한 교육은 일본제국에 충량( 忠 良 )한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로 하며, 2 일본어를 보급하고, 3 조선에는 대학을 설치하지 않도록 하고, 필요하면 실업기능교육만 시킨다는 것이었다. 일제는 이 목적달성을 위하여 공립학교뿐만 아니라 사립학교의 교원과 교과과정, 교과서를 총독부의 지시에 따르도록 제도화하였다. 한편, 한국어시간을 줄이고 일본어시간을 대폭 증가시켰다. 날조과장된 일본역사를 강제로 학습시켜 일본숭배사상을 주입시키고, 한국사를 왜 곡하고 날조하여 한국민족은 고대부터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받아온 타율적이고 정체적인 민족이며, 오늘날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역사적 필연적 귀결이라는 의식을 주입시켰다. 또한, 자부심이 강하고 독립심과 단결성이 강한 한국민족에 대하여 일제는 한국민족의 민족성은 본래 사대성과 당파성이 강한 결점을 가지고 있다고 교육하여 패배의식을 주입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민족말살을 위한 식민지 노예교육에 철저히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가차없이 이를 탄압하고, 사립학교는 폐쇄하였다. 함경북도의 사립 온천학교( 溫 川 學 校 )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조선어읽기를 강조한 일이 있다고 하여 폐쇄당하였다. 일제는 또한 한국민족의 찬란한 민족문화와 슬기롭고 유구한 민족사를 알지 못하도록 하면서 민족말살정책을 지원하기 위하여 우리의 민족문 화유산을 대대적으로 약탈하고 파괴하였다. 1910년 총독부 안에 고적조사반 을 만들어서 서울 개성 평양 부여 공주 경주 등지의 수많은 고분과 산성, 고적을 파괴하고 수많은 출토품들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실어갔다. 총독부의 고급관리들이 일본인 골동품상과 결탁하여 헌병경찰의 호위를 받으면서 관제도굴단을 조직하여 경주 공주 부여와 전국 각지의 고 적들을 도굴해서 수많은 금관들, 금 은 옥의 부장품들과 불상 등의 미술품들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실어갔다.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66

167 또한, 1910년 11월부터 헌병경찰을 동원하여 전국의 서점 향교 서원은 물론이요 서적을 다수 보관하고 있는 개인집까지 수색하여 우리의 고전들을 약탈하였으며, 그 가운데 약 20만여책을 불태워버리고 일부는 일본으로 실어갔다. 일제강점기에 침략자들이 파괴하고 약탈해간 민 족문화 유산들은 도저히 그 품목을 낱낱이 들 수 없을 정도로 대량이었다. (5) 회사령과 민족산업의 파괴 일제는 한국을 일본공업발전을 위한 원료공급지와 독점 상품시장으로 착취하기 위하여 1910년 12월 29일 이른바 <회사령>을 제정, 공포하 였다. 그 내용은 1 한국내에서의 회사설립은 반드시 조선총독의 사전 허가를 받도록 하고, 2 허가 없이 회사를 설립한 경우에는 투옥하며, 3 허 가를 받고 설립한 회사일지라도 일제의 눈에 거슬리면 언제든지 회사를 정지, 폐쇄, 해산시킬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한말부터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실업률이 점차 높아졌으나, <회사령>체제하에서 한국인은 회사설립허가를 얻지 못하여 민족산업은 심하게 탄압을 받았다. 1918년까지 일제는 일본인에게는 289개 회사설립을 허가해주면서 한국인에게는 일본인보다 훨씬 많은 설립신청을 하였는데도 63개 회사밖에 허가해주지 않았다. 일제의 탄압으로 한국의 민족산업은 발흥할 수가 없었다. 또한 일제는 1915년 12월 24일에 <조선광업령>을 제정, 공포하여 <회사령>과 동일한 총독의 허가제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전국이 무연탄 흑연 동광 아연광 텅스텐광 몰리브덴광은 완전히 일본재벌이 독점하였으며, 금광과 은광도 대부분이 일본인의 소유로 되었다. 1918년 일본인 소유의 광산액은 한국인 소유의 300배에 달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방식으로 광산자원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실어갔다. 심지어 어업부문에서도 일본어민을 이주시켜 회사를 조직하게 하여 한국의 황금어장을 독점하였다. 일본의 어획고가 한때 세계 제2위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도 한국의 주요어장을 독점하여 약탈하였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와같이 극소수 친일분자들의 회사를 제외하고는 한국인의 민족산업은 탄압당하고 파괴되어 산업진흥을 이룰 수 없었을 뿐 더러 심하게 약탈당하고 착취당하였다. (6) 1910년대의 독립운동 1 국내의 항일비밀결사의 독립운동 : 일제가 식민지 무단통치체제를 만들어 아무리 살인적이고 야수적인 탄압을 가해도 한국민족은 불굴의 투지로 암흑천지 속에서도 줄기차게 비밀결사를 조직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105인사건 이후에 발각된 비밀결사만 하여도 독립의군부( 獨 立 義 軍 府 )(1913) 광복단( 光 復 團 )(1913) 광복회( 光 復 會 )(1913) 기성 볼단(1914) 선명단( 鮮 命 團 )(1915) 조선국권회복단( 朝 鮮 國 權 回 復 團 )(1915) 영주 대동상점( 大 同 商 店 )사건(1915) 한영서원( 韓 英 書 院 ) 창가집 사건(1916) 자립단( 自 立 團 )(1916) 홍천 학교창가집사건(1916) 이증연( 李 增 淵 )비밀결사(1917) 조선산직 장려계(1917) 조선국민회( 朝 鮮 國 民 會 )(1918) 민단조합( 民 團 組 合 )(1918) 자진회( 自 進 會 )(1918) 청림교( 靑 林 敎 )사건(1918) 등이 있었다. 이 밖에 대동청년단( 大 東 靑 年 團 )을 비롯하여 일제에 발각되지 않은 다수의 소규모 비밀결사들과 여러 이름의 계( 契 )들이 조직되어 민족독립 을 되찾기 위한 광범위한 지하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67

168 2 국외의 독립군기지 창건운동 : 한편, 해외에 망명한 애국자들과 국민들은 국외에서 독립군기지 창건운동과 외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신민회는 만주 노령 일대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근거지를 건설하며, 독립군을 창건하여 적절한 기회에 국내와 호응, 국내에 진공하 여 독립전쟁을 감행함으로써 독립을 쟁취한다는 독립전쟁전략 을 채택하고, 만주국경 부근에 1911년 신흥무관학교( 新 興 武 官 學 校 ), 1913년 에는 동림무관학교( 東 林 武 官 學 校 )와 밀산무관학교( 密 山 武 官 學 校 )를 설립해서 독립군 근거지를 창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무관학교는 청년학생들을 모집하여 사관교육을 철저히 시키고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였다. 무관학교 졸업생은 독립군을 편성하여 본격 적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또한 미국의 클레어몬트와 하와이에서도 한인소년병학교( 韓 人 少 年 兵 學 校 )가 설립되어 무장투쟁을 준비하였으며, 심지어 멕시코에 이민간 동 포들도 자제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독립전쟁에 대비하였다. 한편, 만주에서는 광복회, 노령에서는 권업회( 勸 業 會 ), 상해에서는 동제사( 同 濟 社 )와 신한청년당( 新 韓 靑 年 黨 ), 미주에서는 대한인국민회 신한 협회 등의 단체가 조직되어 독립을 위한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7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만국사회당대회( 萬 國 社 會 黨 大 會 )가 열리자 한국민족은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을 결의하였으며, 같은 해 뉴욕에 서 열린 세계약소민족회의에도 대표를 파견하여 국제적 연대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1910년대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의 결정을 이룬 것은 바로 3 1운동이었다 운동 - (1) 3 1운동의 봉기 국내외에서 애국자들과 한국민족이 대규모 독립운동을 일으킬 절호의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 1918년 11월 제1차세계대전이 종결된 이듬해인 1919년 1월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승전국인 미국대통령 윌슨이 이 강화회의의 회담원칙으로 14개 조항을 발표한 속에는 패전 국의 식민지 처리에 민족자결원칙이 적용된다는 항목이 있었다.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신한청년당은 기민하게 이것을 기회로 포착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대표 겸 한국민족대표 김규식( 金 奎 植 )을 파견하고, 국내의 애국자들과 노령 만주의 망명 독립운동가 및 일본에 있는 유학생들에게도 오랫동안 기다리던 대규모 독립운동을 일으킬 기회임을 알렸다.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인 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단( 朝 鮮 靑 年 獨 立 團 )을 조직하고, 1919년 2월 8일에는 남녀 유학생 400여명이 동경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2 8독립선언 이다. 2 8독립선언은 국내에서 대규모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인사 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국내에서는 그 이전부터 독립운동의 기회를 노리던 애국자들이 해외에서의 이러한 움직임에 큰 자극을 받고, 천도교 기독교 불교 학생단 등이 민족대연합전선을 결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그들은 천도교의 손병희( 孫 秉 熙 ), 기독교의 이승훈( 李 昇 薰 ), 불교의 한용운( 韓 龍 雲 ) 등 33인이 민족대표 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 고,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학생과 시민들은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 독립만세시위에 들어감으로써 3 1운동이 폭발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68

169 (2) 3 1운동의 전개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학생들과 서울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서울시내를 누비면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 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같은날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의 여러 곳에서 거의 동시에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남으로써 3 1운동은 초기조직단계에서 민중운동단계로 비약하게 되었다. 3월 2일에는 함흥 해주 수안 황주 중화 강서 대동 등지에서 독립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으며, 뒤이어 민족독립을 요구하는 시위운동은 함경북도 북단에서 제주도 남단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민중들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퍼져나갔다. 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3월 6일에는 서간도 환인현( 桓 仁 縣 )에서, 3월 13일에는 북간도 용정( 龍 井 )에서 한국인 동포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대 규모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뒤이어 만주 각 지방 상해 노령 연해주와 미주 등 해외 각지에서도 한국인이 사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국내의 3 1운동에 호응하여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1일부터 5월말까지 3개월간 50명 이상의 독립만세시위 집회수가 1, 542회, 참가 인원수가 202만3098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50명 이상 규모의 집회와 참가자수를 조사한 것이기 때문에 저평가된 것이며, 농촌에서의 무수한 소규모집회까지 포함하면 3 1운동의 실제 참가자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전대미문의 전민족적 대규모 독립시위운동이었으며, 당시 1700만명의 총인구에 대한 비율로 볼 때 약소민족 독립운 동사상 전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위운동이었다. 3 1운동은 비폭력방법에 의한 평화적 만세시위운동으로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헌병과 경찰뿐 아니라 육해군 정규군까지 동원하여 평화적 시위군중에게 총탄을 쏘아 살육하고, 민가 교회 학교 등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3 1운동 때 일제 관헌에 의하여 학살된 한국인이 7,509명, 부상자가 1만5961명, 피체포자수가 4만6948명에 달하였으며, 관헌에 의하여 불탄 민가가 715개소, 교회당이 47개소, 학교가 2개소에 달하였다. 수원 제암리에서와 같이 교회 안에 수십명을 감금하여 불을 질러 태워 죽이고, 탈출하는 사람은 총을 쏘아 죽인 만행도 비일비재하였다. (3) 3 1운동의 역사적 의의 3 1운동에서 한국민족은 많은 희생을 내었으나 그것이 쟁취한 성과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큰 것이었다. 우선 그 민족사적 의의를 보면 1 3 1운동으로 일제가 1910년부터 9년간 닦아놓은 식민지 무단통치와 한국민족 말살정책이 근본적으로 붕괴 되고, 잔혹한 식민지통치의 진상이 전세계에 폭로되었다 운동으로 어떠한 힘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독립운동 역량이 비약적으로 고 양되고 강화되어, 한국민족의 독립쟁취의 주체적 실력을 내부적으로 확고부동하게 세워서 독립을 스스로 튼튼히 보장하였다 운동으로 상해에 공화정체의 새로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됨으로써 9년간 단절되었던 민족정권을 계승하게 되었다 운동으 로 만주와 노령에서 독립군 부대들이 조직되고, 독립군의 무장투쟁이 비약적으로 고양되어 국경지방에서의 국내진입작전까지 감행하게 되었 다. 5 국내에서 일제의 잔혹한 탄압을 물리치고 극소부분이나마 언론 집회 결사의 부분적 자유를 쟁취하여, 민족문화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는 민족보존운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운동으로 국내에서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함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69

170 으로써 농민 노동자의 권익향상뿐만 아니라 민족독립운동에도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운동은 한국민족 스스로의 실력에 의하여 국제적으로 한국민족의 독립을 보장받아 냈다. 한국민족이 3 1운동의 전민족적 봉기로써 자주독립을 전세계에 선언하였기 때문에 일본이 승전국이었던 당시에는 당장 독립이 성취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언젠가 일본이 패전국이 되는 날에는 한국민족은 자동적으로 독립되는 것으로, 전세계로부터 공인받게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중에 일본 패전 후의 한국민족의 독립이 모든 국제회의에서 한국민족대표의 참석 없이도 당연한 것으로 논의된 것은 기본적으 로 3 1운동에 의한 것이었다. 3 1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민족사에 끝나지 않고 세계사적 의의가 컸다 운동은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승전국의 식민지 반식민지 약소민족이 위축된 상황에서 급전환하여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일으키 는 계기를 열어주었으며, 이때부터의 독립운동이 그뒤 제2차세계대전 종결 후의 독립에 귀결된 것이었다 운동에 고취되고 그 영향으로 중국에서는 5 4운동이 일어났다. 현대중국의 탄생의 전환점이라고 하는 5 4운동은 내부요인을 별도로 하고 외부요인을 보면, 세계사적으로는 3 1운동의 파급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운동의 파급과 영향으로 인도에서는 국민회의파의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고양되었다. 그들은 영국의 식민지 간접통치의 구조적 특징 을 활용하여 비폭력 투쟁방법까지 채택하여 급속도로 성장하여 드디어 1945년 이후에는 자기의 실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이르렀다. 인도 독립운동의 비약적 발전의 전환점을 이룬 간디의 지도하에 1919년 4월 5일부터 일어난 사타야그라하 사브하 운동은 내부요인을 별도로 하고 외부요인을 보면 3 1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었다 운동의 영향은 인도지나반도 제 민족과 필리핀과 이집트의 독립운동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들은 1919년 여름에 3 1운동을 거론하면서 대대적 독립시위운동을 벌였다.3 1운동의 의의는 민족사와 세계사에서 다같이 매우 큰 것이었다 운동 후 1920년대의 한국사회의 독립운동 - (1)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대응 일제는 한국민족의 전민족적 3 1운동에 의하여 큰 타격을 받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써 대책에 부심하였다. 3 1운동의 타격을 받고 일제의 식민지정책은 다음 세가지 방향의 변동을 보였다. 첫째는 이른바 문화정치 로의 전환을 표방하면서 회유와 가장된 유화정책을 통하여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전선을 이간하고 분열시키며, 가 혹한 식민지통치를 은폐하려는 것이었다. 일제의 문화정치의 내용은 종래 육해군 대장으로 조선총독을 임명하던 것을 고쳐 문관( 文 官 )도 그 자리에 임명할 수 있게 하고, 헌병경찰제 를 보통경찰제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언론통제를 완화하여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글신문의 간행을 허가하고, 필요하면 내정에 한해서 한국인에게 참정권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1945년 한국에서 쫓겨날 때까지 총독을 단 한번도 문관으로 임명한 적이 없었다. 또한, 1920년에 조선일보 (3월 5일), 동 아일보 (4월 1일), 시사신보 (친일신문, 4월 1일)의 창간을 허가하였으나 한국인의 언론을 분열시켜 통제하려는 교묘한 수단으로 취해진 조처였다. 그러므로 일제의 검열은 매우 심하였는데, 삭제 압수 과료처분 정간 폐간 등의 탄압이 극심하여 매월 평균 5, 6건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70

171 또한, 한국인에게 참정권을 허용할 것처럼 선전한 것도 친일파와 자치운동파를 육성하여 종래 완전독립 절대독립을 목표로 하던 독립운동을 약화시키고, 절대독립의 독립운동전선을 분열시키려는 책동에 불과한 것이었다. 둘째는 경찰관의 수를 대폭증가시키고 독립사상에 대한 사찰을 강화한 것이었다. 일제는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로 바꾸었으나 이 것은 제복과 제도만을 형식상 바꾼 것이고 여전히 헌병이 예비역으로 편입되어 보통경찰관이 되도록 하였으며, 경찰관서의 수는 1911년 1,602개소(헌병주재소 포함)에서 1920년에는 2,761개소로 격증하고, 경찰관의 수도 1911년 1만3971명(헌병 포함)에서 1920년에는 1만8400명으 로 격증하였다. 일제는 극악한 무단탄압 밑에서도 한국민족이 맨손으로도 3 1운동을 일으키는 것을 경험하고 한국민족을 내심으로 두려워하였으나, 기회만 있으면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학살만행을 자행하였다. 1920년 10 12월의 간도일대의 한국인 1만여명에 대한 학살(경신참변 또는 간도학살사 건)과 1923년 9월 일본 관동대지진 때 2만여명의 재일한국인에 대한 학살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독립운동가와 지식인 학생들에 대한 사찰이 더욱 강화되었다. 셋째는 식량수탈 등 사회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다. 일제는 일본공업 화에 소요되는 식량 등을 한국에서 수탈하기 위하여 1920년부터 조선산미증식계획 을 수립하여 집행하였다. 일제의 이 정책은 목표대로 성공하지 못하고 미곡생산량이 1920년 1270만석에서 1928년에는 1730만석으로 36.2%밖에 증가하지 않았으나, 일 본으로의 미곡의 수탈량은 1920년 185만석에서 1928년에는 742만석으로 301.1%나 격증하였다. 그 결과, 미곡의 한국인 국내소비량은 1920년 1085만석에서 1928년에는 988만석으로 10%나 감소되어 한국인은 더욱 부족한 식량을 만주로부 터 잡곡을 수입하여 충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른 부문에서도 일제의 사회 경제적 수탈은 1920년대에 더욱 강화되었다. 3 1운동 이후 한국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이 워낙 맹렬하였으므로 일제는 1920년대에 한국민족의 기세에 밀려 할 수없이 그들의 한국민족 말살 정책을 후퇴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반면에, 일제는 사회 경제적 수탈정책을 강화하기에 급급하였다. (2) 독립운동의 비약적 발전 1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3 1운동에 고취된 한국민족은 임시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하여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에서 한성정부, 노령에서 대한국민의회가 수립되었다. 이 3개의 임시정부는 1919년 9월 상해에서 하나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정체를 채택하여 의정원과 국무원을 두고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것은 9년간 단절되었던 민족정권을 계승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한 것만으로도 한국역사상 획기적인 것이 었다. 임시정부는 국내와의 비밀연락망으로 연통제( 聯 通 制 )를 조직하여 국내통치권을 일부 행사하고, 독립운동자금을 국내로부터 공급받았다. 연통제 실시 2년 만에 전국의 도군면에는 독판 군감 등의 비밀 행정조직이 만들어져서 국내독립운동을 지도하였으며, 국내인들이 군자금을 모집하여 전달하였다. 임시정부는 또한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에 파견되어 있는 김규식을 외교총장 겸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유럽에서의 외교활동과 미국에 구미위 원회를 두어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8월에 스위스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에도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결의하게 하는 등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국제연맹과 태평양회의에도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는 기관지로 독립신문 을 간행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71

172 하여 배포하고, 사료편찬소를 두어 한일관계사료집을 간행하여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는 만주의 독립군에게도 군자금을 지원하고 독립전쟁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2 독립군 무장투쟁의 발전:한국민족은 3 1운동 직후에 만주와 노령에서 3 1운동에서 폭발한 한국민족의 독립의지와 독립역량을 독립군의 무장투쟁으로 한차원 더 발전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하여, 독립군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1920년말경까지 자발적으로 조직된 독립군 단체들을 보면, 1 대한독립군, 2 군무도독부, 3 북로군정서, 4 국민회군, 5 의군부, 6 대한정 의군정사, 7 한민회군, 8 조선독립군, 9 의단, 10 대한독립군비단, 11 광복회군, 12 의민단, 13 흥업단, 14 신민단, 15 광정단, 야단, 혼춘군 무부, 국민의사부, 대진단, 백산무사단, 혈성단, 태극단, 노농회, 광영단 등(북간도지방)과, 서로군정서, 신흥학우단, 광한단, 대한독립의용단, 대한독립청년연합회, 광복군사령부, 광복군총영, 천마산대, 보합단, 의성단 등(서간도지방)과, 대한독립군결사대, 대한신민회, 대한독립군 등 (노령지방) 30여단체에 달하였다. 3 1운동 후에 급속히 성장한 독립군부대들은 무장을 강화하고 실력을 기르면서 군사통일을 추진함과 함께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시작하 였다. 홍범도( 洪 範 圖 )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은 선도적으로 년 8월에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남도 혜산진에 진입을 감행하여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해서 섬멸하고, 3 1운동 후 처음으로 국내진입작전을 단행하였으며, 년 9월에는 함경남도 갑산군에 진입하여 일제경찰관주재소 등 식민지 통치기관을 습격하였고, 년 10월에는 평안북도 강계군의 만포진에 진입하여 이를 점령하고, 자성군으로 진출하여 일본군 70여명을 살상시키고 일본군을 패주시켰다. 이에 크게 고무된 독립군부대들이 이듬해부터는 실력과 기회만 있으면 끊임없이 크고 작은 국내진입유격전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측의 보고에 의하면, 1920년 1월부터 3월까지의 3개월 동안에 독립군 부대들의 국내진입이 24회에 달하였다. 상해임시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1920년 3월 1일부터 6월초까지 독립군부대들의 국내진입유격전이 32회에 달하였으며, 일제관서와 경찰관주재 소를 파괴한 것이 34개소에 달하였다. 독립군부대들의 국내진입유격전에 여러 차례 패배한 일본군수비대는 1개중대를 두만강을 불법으로 월 강하게 하여 독립군에 대한 추격을 시도하였으나, 독립군은 1920년 6월 4일 삼둔자( 三 屯 子 )에서 매복하여 일본군을 기다리다가 이를 섬멸해 버렸다. 이것이 삼둔자전투이다. 일본군 제19사단은 이에 분개하여 1개대대를 월강시켜 봉오동( 鳳 梧 洞 )까지 추격해왔으나,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 국민회군은 연합하여 대 한북로독군부를 편성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1920년 6월 7일 봉오동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하여 157명을 사살하고, 200여명의 중상자와 100 여명의 경상자를 내게 하여 일본군을 섬멸해버렸다. 이것이 봉오동전투이다. 독립군의 급성장에 크게 당황한 일제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처음에는 중국에 외교적 군사적 압력을 가해서 중국군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토 벌하려 하였다. 독립군은 중국군과 협상하여 일본군의 이 대응을 근거지 이동으로 극복하였다. 독립군이 근거지를 이동하여 장기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자 일본군은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 이라는 토벌작전을 수립하고, 혼춘사건을 조 작하여 출병구실을 만든 다음 5개사단에서 차출한 2만5000명의 병력과 항공대까지 동원하여 1920년 10월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간도에 불법 침입하였다. 일본군은 이 토벌작전을 2단계로 나누어, 제1단계는 1개월 동안 간도일대의 독립군을 섬멸하여 한국민족의 무장투쟁 능력을 완전히 섬멸하 고, 제2단계는 다시 1개월 동안 촌락에 잠복한 독립운동자들을 색출해서 발본색원하여 한국민족의 비무장독립운동의 능력도 완전히 뿌리뽑겠 다고 선언하였다.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72

173 그러나 일본군은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와 이도구 어랑촌일대의 독립군을 포위하여 들어가다가 김좌진( 金 佐 鎭 )이 지휘하는 600명의 북로군정 서 독립군과 홍범도가 지휘하는 1,400명의 독립군연합부대의 공격을 받고는 도리어 참패를 당하였다. 2,000명의 독립군부대들은 1920년 10월 21일 아침부터 10월 26일 새벽까지 6일간 백운평전투 완루구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쉬구전투 천보산전투 고동하곡전투 등 10여개 전투에서 실로 영웅적 혈전을 전개하여 일본군 1, 200명을 사살하고 2,100명을 부상당하게 하는 등 일본군을 섬멸 하여 패주시켰다. 반면, 독립군의 전사자는 130명에 불과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청산리독립전쟁이다. 청산리독립전쟁의 대승리는 일본군의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 을 완전히 붕괴시켰으며, 일본군의 작전목표가 제2단계에 들어가기는커녕 제1단계에서 실력으로 분쇄해버려, 간도 노령일대의 독립운동을 보위하고 한국민족 독립운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독립군은 1920년 12월에 밀산( 密 山 )에 집결하여 대한독립군단이라는 군사통일을 실현한 다음 소련의 적군과 합작하기 위하여 자유시에 들어 갔다가 1920년 6월에 자유시사변을 겪었다. 그러나 독립군은 여기에 좌절하지 않고 산개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와서 참의부(1923) 신민부(1924) 정의부(1925)를 조직하였다가 국민부( 國 民 府 )(1929)로 통합,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재개하였다. 또한 3 1운동 후 1919년 11월에 만주에서 김원봉( 金 元 鳳 )을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의열단은 일제의 식민지통치기관들을 폭파하였다. 예컨대 1 조선총독부 파괴를 기도한 밀양폭탄사건(1920년 3월), 2 부산경찰서 투탄사건(1920년 9월), 3 밀양경찰서 투탄사건(1920년 12월), 4 조선총독부 투탄사건(1921년 9월), 5 일본군대장 다나카( 田 中 義 一 ) 총살저격사건 (1922년 3월), 6 종로경찰서 투탄사건(1923년 1월), 7 조선총독부 조선은행 경성우체국 경성전기회사 파괴 및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총살기도사건(1923년 3월), 8 일본정부대신 총살기도사건 (1923년 12월), 9 일본동경 천황궁성 이중교투탄사건(1924년 1월), 10 의열단 군자금사건(1925년 10월), 11 조선식산은행 및 동양척식주식회 사 투탄사건(1926년 12월) 등은 그 대표적 운동이었다. 3 국내의 민족문화운동과 실력양성운동:국내에서는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여 민족과 민족문화를 보존, 발전시키려는 운동이 전개되 었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 전신)가 조직되어 기관지 한글 을 간행하고,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시작함과 함께 민족어와 한글을 발전시키려는 투쟁이 전개되었다. 문학부문에서도 창조 (1919) 폐허 (1920) 백조 (1922) 조선문단 (1924) 조선문예 (1929) 조선시단 (1929) 문예공 론 (1929) 예술운동 (1929) 등의 문학지가 창간되고, 한글로 된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창작되어 민족어와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시조가 현대화되어 부흥되고 민족고전들이 간행되었다. 1920년대에는 프로문학도 형성되어 가난에 허덕이는 민중의 참상을 고발하였다. 국사연구에 있어서도 박은식( 朴 殷 植 )이 중국에서 한국통사 韓 國 痛 史 (1915)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 國 獨 立 運 動 之 血 史 (1920)를 저술하 여 근대사를 정립하고, 신채호( 申 采 浩 )가 일찍이 <독사신론 讀 史 新 論 >(1908)을 저술한 이래 망명한 뒤에도 조선사연구초 朝 鮮 史 硏 究 草 조선상고사 朝 鮮 上 古 史 조선상고문화사 朝 鮮 上 古 文 化 史 를 저술하여 민족주의사학을 확립시켰으며, 정인보( 鄭 寅 普 )가 국내에서 조선사연구 朝 鮮 史 硏 究 를 저술하였다. 이러한 국사연구들은 일제가 1925년에 조선사편수회( 朝 鮮 史 編 修 會 )를 조직하여 식민주의사관에 의거하여서 한국사를 왜곡하고 날조하는 것에 대항하여 학문적 투쟁을 전개하고,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73

174 또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서는 장기적으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야 한다고 판단하고, 전국에서 민족교육의 열기가 고양되었으며, 1922 년에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조직되어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에 놀란 일제는 할수없이 그 무마책과 회유책으로 1924년 경성제 국대학을 설립하였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민족실업이 육성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1923년에 조선물산장려회가 창립되어 전국 각지에 지부를 결성하면서 1930년대 까지 민족산업진흥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세운동:한국민족은 1926년 4월 조선왕조 마지막 국왕 순종이 죽자 그 장례일인 6월 10일 대규모 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3 1운동의 경험에 의하여 경계를 엄중히 하고 있던 일제군경에게 사전에 발각되어 일제는 수많은 인사들을 전국 적으로 일제히 검거하고, 인쇄된 격문을 압수하였다. 심지어는 장례에 참석하러 상경하는 것도 엄금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6월 10일 서울에서 대대적인 만세시위운동을 벌여 서울만은 3 1운동 때와 같이 철시와 시위운동이 전개 되었다. 이 시위로 200여명의 학생이 검거되었다. 5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의 발전:3 1운동 후 1920년대에는 농민운동도 크게 고양되었다. 농민들은 농민조합 농우회( 農 友 會 ) 소작인조합 등 의 농민단체를 조직하면서 주로 활발한 소작쟁의를 전개하였다. 1922년에는 소작쟁의가 24건에 참가인원수 2,539명이던 것이, 1925년에는 204건에 참가인원수 4,002명, 1930년에는 726건에 참가인원수 1만 3012명으로 급증하였다. 소작쟁의는 특히 일본인 지주의 대농장에서 많이 일어났다. 또한 노동운동도 1920년에 조선노동공제회( 朝 鮮 勞 動 共 濟 會 )가 조직되고, 이어 1922년에 조선노동연맹회가 결성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노동쟁의는 1921년에 36건에 참가인원수 3,403명, 1926년에는 81건에 5,984명, 1931년에는 205건에 2만1180명으로 급증하였다. 노동파업도 활 발히 전개되어, 1921년에 부산 부두노동자들의 파업, 1923년에 서울고무공장 여공들의 파업, 1929년의 원산노동자의 총파업 등은 그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이러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은 비단 노동자 농민들의 권익향상뿐만 아니라 일제 지주와 공장주에 대항한 민족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가진 것 이었다. 6 신간회운동과 민족협동전선운동:3 1운동 후 1920년대 초에는 민족독립운동에 두개의 큰 과제가 발생하였다. 그 하나는 일부 민족주의자 들이 일제의 기만적 문화정책 에 휘말려 완전독립 절대독립을 포기하고 일본제국내의 자치 를 주장하는 이른바 자치론 이 대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운동이 강력히 대두하여 민족주의독립운동과 사회주의독립운동 사이에 분열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 과제를 해 결하기 위하여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연합하여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으로서 신간회( 新 幹 會 )를 조직하였다. 신간회는 급속히 발전하여 전국에 141개 지회와 3만9410명의 회원을 가진 강력한 민족운동단체가 되었다. 신간회는 1 완전독립 절대독립옹 호, 2 자치론과 일제에의 타협주의 타도, 3 민족의 대동단결 결성, 4 한국인 착취기관철폐, 5 일본의 이민정책반대, 6 한국인 본위의 민 족교육실시, 7 한국어 교육의 실시, 8 과학사상 연구의 자유, 9 한국인에 대한 특수취체법의 철폐, 10 소작쟁의 지원, 11 노동쟁의 지원, 12 학생독립운동 지원 등의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당시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한국민족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신간회가 창립되자, 1927년 5월에는 여성자매단체인 근우회( 槿 友 會 )가 조직되어 여성독립운동의 단일전선이 결성되었다. 또한 해외에서도 그 해 11월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 韓 國 唯 一 獨 立 黨 促 成 會 )가 조직되어 민족주의독립운동과 사회주의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이 결성되었다. 이러한 민족운동전선의 통일은 한국민족의 독립쟁취에 대하여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이 사회주의자들에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74

175 게 신간회로부터의 탈퇴를 지시하고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이에 복종함으로써 신간회는 만주사변이 일어났던 1931년 5월에 해체되기에 이르렀 다. 7 광주학생독립운동: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한국학생과 일본학생이 충돌하여 일제경찰이 일방적으로 한국학생만 검거하자 광주의 학생들 이 총궐기하여 검거된 학생의 석방, 민족차별의 철폐, 약소민족의 해방, 제국주의 타도 등을 외치며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전국에 파급되어 학생시위독립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독립시위운동에 참가한 학교가 194개교, 학생은 5만 4000명에 달하였다. 이로 인하여 퇴학처분을 당한 학생이 582명, 무기정학을 당한 학생이 2,330명, 피검자가 1,642명에 달하였다. 신간회도 조사단을 파견하고 민중대회를 계획하는 등 학생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광주학생사건에서 비롯된 년의 학생독립운동은 3 1운동 이후 독립을 요구하는 최대의 시위운동이었다. 1920년대에는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이 막강하게 고양되어 일제는 수세에 몰려 전전긍 긍하였다 년대 이후의 한국사회와 독립운동 - (1)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식민지수탈정책의 강화 1 민족말살정책의 강화:일제는 1931년 9 18만주침략 이후부터 조선주둔 일본군을 2개사단에서 5개사단으로 증가시켜 탄압무력을 강화한 다 음 한국민족말살정책을 적극적으로 강화하였다. 일제는 한국어를 말살시키는 것이 한국민족말살의 모체라고 판단하고, 한국어 말살에 광분하였다. 일제는 1930년대에 들어오자 관청에서는 한국농민의 민원도 일본어를 사용할 경우에만 접수하도록 하여 한국어 사용을 엄금하고, 사립학교에서의 한국어 교육과 한국어 사용을 엄금 하였다. 또한 1935년부터는 한국문자를 농민들에게 가르치는 학생들의 하기계몽운동을 총독부령으로 엄금하고, 1937년 중국침략 때부터는 한국인들의 일상 사회생활에서의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여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명령하였다. 일제는 심지어 철모르는 국민학교 학생들이 부지불식간에 한국어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매질을 하고 벌칙을 적용하였다. 그리고 한국어로 간 행되는 신문과 잡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간 등 탄압을 가하다가, 1936년에는 신동아 를 폐간시켰으며, 1940년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모든 한국어 신문들을, 1941년에는 문장 인문평론 등 모든 한국어 잡지들을 폐간시켜버렸다. 1938년 한해에만도 전국에 3,660여개의 일본어 강습소를 만들어 한국농민들에게 강제로 일본어를 배우게 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였다. 일 제의 한국어말살과 일본어 전용정책이 한국인들의 저항으로 진전되지 않자 그 씨를 없애야 한다며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회원과 학자들까지 체포, 투옥하였다. 또한, 한국인의 성명을 말살하고 일본식 이름을 짓도록 하는 이른바 창씨개명 을 1937년부터 본격적으로 강행하였다. 1939년에는 <조선 민사령>을 개정하여 전한국인에게 강요하는 파쇼적 방법으로, 일제는 1940년까지 한국인의 성명말살과 창씨개명 을 강행하였다. 일제는 창씨개명 에 응하지 않은 한국인에 대해서는 자녀의 학교취학을 못하게 하고, 학생들에게 매질을 가하였으며, 직장에서 채용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심지어 우편물수송까지 금지시켰으며, 경찰관주재소로 호출하여 응할 때까지 무기한 구류해 두고 박해를 가하였으므로 이에 불응하고는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없었다.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75

176 일제는 또한 전부터 날조해오던 식민주의사관을 더욱 본격적으로 발전시켜 1932년부터 조선사 朝 鮮 史 를 간행하기 시작하여 1940년에는 전37권을 완간하였다. 그리하여 동조동근설( 同 祖 同 根 說 )을 날조하여 일본민족은 시조신( 始 祖 神 )인 아마테라쓰오미카미( 天 照 大 神 ) 의 적자 이고 한국민족은 그 서자로서 같은 기원과 뿌리에서 나왔으므로 한국민족은 당연히 한국민족됨을 버리고, 황국신민화 되어 천황에 무한한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설교하고 한국인에게 집집마다 가미타나( 神 棚 ) 라는 그 시조신이 들어 있다는 나무상자를 모셔 아침마다 경배를 드 리도록 강요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에게 관제미신인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1937년부터는 매일 일본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하여 최경례를 강제하는 이른바 동방요배( 東 方 遙 拜 ) 라는 것을 강요하였다. 또한, 일제는 한국인이 한국민족의 성원이 아니라 일본천황의 신민임을 맹세하고, 황국신민서사( 皇 國 臣 民 誓 詞 ) 라는 것을 날마다 외워 맹 세하도록 강제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한국민족을 말살하여 일본제국의 천민( 賤 民 )을 만들 수 있다고 망상하고 한국인에게 무한한 고통과 박해를 가한 것이었다. 2 인력의 강제수탈: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하여 인력부족이 격화되자 징용제도 징병제도 근로보국대제도 근로동원제도 여자정신 대제도를 만들어 한국인의 인력을 강제수탈하였다. 일제는 중일전쟁 이전까지는 모집 이라는 형식으로 일본의 광산이나 토목공사에 집단 동원하더니, 중일전쟁 이후인 1939년에 <국민징용 령>을 공포하여 한국인 청장년들을 강제 연행해다가 노동력을 수탈하였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이후 징용영장에 의한 징용이 잘 안되자 트럭을 농촌에 몰고 가서 들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강제로 실어다가 징용에 보내 는 만행을 예사로 자행하였다. 이렇게 해서 1945년 8월까지 146만명의 한국인 청장년을 징용하여 광산 토목공사 군수공장에 투입하여 무보 수 노예노동을 시켰다. 군사기밀에 관한 공사에 투입한 경우에는 기밀유지상 필요하다는 이유로 공사가 끝난 뒤에 징용당한 한국인 노무자들을 집단학살하는 만행을 수없이 자행하였다. 일제는 또한 1943년 학도지원병제도 를 실시하여 한국인 전문 대학생 4, 500명을 지원형식으로 전쟁에 강제로 내몰 더니, 1944년에는 징병제도 를 실시하여 패전 때까지 20만명의 한국청년들을 침략전에 대폿밥으로 강제동원하여 내몰았다. 일제는 중학생은 물론이고 국민학생까지 근로보국 이니 근로동원 이니 하여 날마다 군사시설공사에 강제로 동원하였다. 또한, 일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44년 <여자정신대근무령 女 子 挺 身 隊 勤 務 令 >을 제정, 공포하여, 12세부터 20세까지의 한국인 처녀 수십만명을 강제 징집하여 일본과 한국내의 군수공장에서 사역시키고, 중국과 남양지방의 전선에 군대위안부로 내모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하였다. 3 경제수탈의 강화:일제는 1931년 만주침략 이후부터는 그들의 대륙침략정책에 발맞추어 한국을 병참기지화한다면서 일본의 독점자본을 동 원하여 북한일대에 군수공장을 설치하고, 대대적인 광산자원 약탈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금 철 석탄 중석 마그네사이트 아연 망간 니켈 등을 대대적으로 채굴, 약탈하였다. 미곡수탈도 이 시기에 급속히 강화되어 1933년부터는 미곡 총생산량 중에서 일본으로 실어간 약탈량의 비율이 50%를 초과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의 미곡생산량은 1819만석이었는데 일본으로 약탈해간 미곡은 943만석으로 그 비율은 51.8%에 달하였으며, 이 이후는 항상 총생산량 에 대한 약탈량의 비율이 50%를 초과하여 점점 증가하였다. 식량약탈의 이러한 증가는 미곡이 남아서 약탈해간 것이 아니라 1933년부터 < 미곡통제법>과 <미곡자치관리법> 등을 실시하여 미곡은 일본으로 실어가고, 만주로부터 잡곡을 한국에 수입하여 한국인은 잡곡을 먹도록 하는 정책에 따라 나타난 것이었다.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76

177 1930년대부터는 미곡 이외에도 면화와 누에고치의 약탈이 격증되었고, 한국인에 대한 조세수탈도 격증되었다. 그 예의 하나가 1934년부터 개 정 실시한 일반소득세제도의 수탈이다. 이 제도에 의하여 1934년의 소득세 수탈은 그 전해인 1933년에 비하여 무려 3.5배나 증가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조세수탈만으로는 전비조달이 제대로 되지 않자, 1939년부터 <총동원물자사용수용령>을 공포하여 백주에 공공연히 물자를 약탈하는 공출제( 供 出 制 )를 시행하였다. 이 공출제는 처음에는 양곡부터 시작하더니, 1940년대에는 모든 일반 물자에 확대하여 송진기 름 아주까리기름, 심지어 놋그릇 숟가락까지 백주에 강탈해갔다. 한국인은 일제의 이러한 약탈정책하에서 광복의 날을 기약하며 초근목피 로 연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1930년대 이후의 독립운동 1 국내의 민족운동:일제의 한국민족말살정책과 식민지 수탈정책을 비롯한 온갖 탄압이 1930년대 이후에 더욱 강화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이 이 시기에 줄기차게 발전된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국내에서는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체된 아픔을 겪은 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의 급속한 강행 속에서도 1931년에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 로 발전하여 민족어와 민족문자를 보존 발전시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그 결실로 한글맞춤법통일안 표준말모음 등이 나왔 다. 우리말본 한글철자법일람표 우리말사전 등도 이때 나왔다. 문학 예술분야에서도 민족적 작품들이 나와서 국민들에게 애독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한국어 잡지들도 정간과 폐간을 되풀이 당하면 서도 민족과 민족문화의 보존 발전을 위하여 문화투쟁을 전개하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 언론기관과 잡지들 은 신채호 등의 민족주의사학을 국민들에게 교육하여 일제의 식민주의사관에 대항해서 투쟁하였다. 민족언론기관과 청년학생들은 한글보급과 함께 민중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민중 속으로! 라는 구호를 내걸고, 1931년부터 브 나로드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경성제국대학 학생들의 반제동맹( 反 帝 同 盟 )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단체들이 조직되어 완강하게 항일투쟁이 전개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1937년까지는 소작쟁의와 노동운동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시기의 소작쟁의와 농민운동은 물론이요 노동쟁의와 노동운동은 비단 농민 노동자층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것만이 아 니라, 1차로 일제의 식민지수탈의 강화에 대항하고 투쟁하여 민족운동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1940년대에 들어와서 일제의 폭압이 극악하여 표면상 모든 민족운동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던 시기에도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무수한 지하 서클들이 조직되어 완강하게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2 국외독립군의 무장투쟁:한편, 국외에서는 일제가 1931년 만주침략을 자행하여 만주괴뢰국을 세우고, 전만주를 장악하였음에도 한국민족은 굴복하지 않고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완강하게 전개하였다. 남만주의 국민부는 800명의 조선혁명군을 편성하여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서 한중연합군을 조직하고, 조선혁명군의 양세봉( 梁 世 奉 )이 총사령 이 되어 1932년에 일본군을 신빈( 新 賓 )에서 대파하였다. 조선혁명군은 1933년 흥경현의 일만연합군을 공격하여 흥경성( 興 京 城 )을 점령하였다. 한편, 북만주에서는 이청천( 李 靑 天 )이 지휘하는 한국독 립당독립군이 1931년에 중국 호로군( 護 路 軍 )과 연합하여 한중항일연합군을 편성하고, 1932년 7월에 쌍성보( 雙 城 堡 )에서 일본군 1개중대를 섬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77

178 멸하였으며, 12월에는 경박호( 鏡 泊 湖 )에서 2,000명의 일만연합군을 격파하였다. 한국독립당 연합군은 또한 중국군 제14사단과 연합하여 한중연합토일군을 결성하고, 1933년 4월에 사도하자( 四 道 河 子 )에서 일만연합군 1개사 단을 격파하였으며, 6월에는 대전자령( 大 甸 子 嶺 )에서 일본군을 대파하고, 7월에는 동경성( 東 京 城 )을 점령하였다. 한국독립군부대들은 1941년까지 중국군과 연합하여 만주에서 용감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에는 의열투쟁도 강화되었다. 큰 사건만을 들어도 1932년 1월 이봉창( 李 奉 昌 )의 일본천황 투탄, 1932년 4월 윤봉길( 尹 奉 吉 )의 상해 훙커우공원 투탄, 1933년 3월 백정기( 白 貞 基 )의 재중국일본공사 투탄, 1934년 3월 강명학의 상해 훙커우공원투탄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다수의 의열투쟁이 있었다. 1938년에는 김원봉 이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여 중국본토에서 항일전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3건국준비: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20년대에 한때 침체되었으나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공원투탄사건을 계기로 항일전선을 정비하고, 임시정 부의 독립군으로서 1940년 9월에 광복군( 光 復 軍 )을 창설하였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도 임시정부와 연합하여 광복군 제1지대가 되었다. 이범석( 李 範 奭 )의 제2지대와 김학규( 金 學 奎 )의 제3지대가 편성되어 임 시정부의 광복군은 이청천을 사령관으로, 김원봉을 부사령관으로 하여 3개지대가 주력이 되었다. 김구( 金 九 )를 주석으로 한 임시정부는 또한 일본의 패망을 전망하고 건국을 준비하여 1941년 11월 <대한민국건국강령>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광복군이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하여 연합 군과 함께 조국을 광복한 뒤 신국가를 수립하는 기본원칙을 공표한 것이었다. 1941년 12월 8일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자 임시정부는 12월 9일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뒤이어 대독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 광복군은 중 국의 각 전선에 투입되어 일본군에 대한 심리작전에 큰 성과를 올렸고, 이를 알게 된 영국군이 광복군의 인도 버마전선 투입을 요청하게 되 어 1943년 6월에 한영군사협정이 체결되고, 광복군 공작대가 인도 버마전선에 파견되어 버마탈환작전에 참가하였다. 또한, 광복군과 미국군과의 합동작전이 계획되어 미군 전략정보처(OSS)의 특수훈련이 실시되었다. 광복군은 1945년 4월 낙하산투하와 유격 전훈련을 받고 국내투입이 준비되었으나, 일본이 예측보다 빨리 무조건항복함으로써 광복군의 국내투입은 실현되지 않았다. 한편, 중국 연안에서는 조선독립동맹이 1942년 7월에 조선의용군을 편성하고 중국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전쟁에 참가하였다. 미주지역에서도 1942년에 한인국방경비대(일명 맹호군)가 편성되어 100명의 한인청년들이 국내투입의 특수훈련을 받다가 일본의 항복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1944년 8월에 여운형( 呂 運 亨 )을 중심으로 하여 비밀결사로서 건국동맹이 조직되어 건국을 준비하였다. 건국동맹은 임시정부와 조선독립동맹과 비밀연락을 시도하면서 조직을 확대하여, 1945년 8월에는 국내의 건국을 준비하는 강력한 단체가 되 었다. 한국민족은 이와 같이 1940년대에도 불굴의 투지로 민족의 광복과 독립을 위한 투쟁과 더불어 준비를 전개하면서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을 맞은 것이다. 대한민국 법률의 모태, 조선총독부법이란? 178

179 日 낭인들은 얼마나 잔인하게 명성황후를 시해했나 :05 일본 낭인들, ' 여우사냥' 명명된 명성황후 암살 작전에 동원돼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4. 명성황후 시해에 하버드 대학과 동경제대 출신의 일본 최고지식인들 참여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를 당했다. 이 사건은 일본 천황 직속 기관인 대본영의 야마가타 아리토모 육군대장과 조선 공 사와 외무대신을 지낸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지휘했다. 이들은 현 아베 총리의 정치적 본거지인 야마구치 현 출신으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대표적으로 조선 정벌을 주장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자기들 고향 야마구치 현 출신의 극우 거물인 육군 중장 출신의 자작 미우라 고로에게 친러 정책의 명성황후를 죽이라는 밀명을 주고 1895년 9월 조선공사로 부임시켰다. 미우라의 명성황후 암살 계획참모는 시바 시로란 자로 미국 명문 하버드 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최고지식인이었다. 미우라와 시바는 일본군대가 명성황후를 암살하면 비난받을 것 같아 민간인들 중심의 암살집단을 구성하였다. 명성황후 살해 실행 총책 미우라 공사와 이시즈카 에조의 암살 보고서. 명성황후 살해 실행 총책 미우라 공사와 이시즈카 에조의 암살 보고서.이 민간 암살집단에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출신 등 일본 최고의 젊은 지식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메이지 유신 추종 세력과 백제 유민 후손이 많은 규슈 구마모토 출신 낭인 30여 명과 한성 신 보의 주필, 편집 장, 기자들이 주도적으로 가담했다. 이는 후에 시해사건을 일본 공사관이 아니고 민간이 주도했다고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명성황후 암살 작전은 여우사냥 이라고 명명했으며 1895년 10월 8일 새벽 4시에 작전 개시했고 명성황후는 새벽 6시경에 시해 당했다. 이 작전에 흥선대원군, 개화파 유길준,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 등 조선인들 여럿이 가담하여 조력하였는데 황후 시해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5.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게 국부 검사와 성폭행 당했는가? 45세의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의 칼을 맞고 즉시 숨이 끊어졌는지 아니면 칼을 맞고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한 기록이 우리에게는 없 다. 위에 보이는 조선 정부의 일본인 고문관 이시즈카 에조 보고서를 근거로 황후가 사망 직전에 능욕을 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 기록과 주장이 진실이든 아니든 또 설사 황후가 성폭행을 당하고 죽었다고 해도 군사력이 없는 황후의 남편 고종은 통곡하는 길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조선 정부 고문관 이시즈카 에조는 낭인들은 왕비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힌 후 왕비를 발가벗기고 국부 검사를 한 후에 기름을 부어 소각시켰다 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해 일본에 보냈다(위키 백 과). 김진명씨의 소설 신황태자비 납치사건 의하면 이시즈카 에조는 낭인들은 훤히 드러난 조선 왕비의 가슴을 밟고 짓이기고 왕비 몸을 칼 로 상처를 낸 후 왕비를 완전히 발가벗겼다. 그리고 한 낭인이 발가벗겨진 왕비의 음부를~~(중략)~~ 꿈틀거리는 조선 왕비를 앞에 놓고 낭 日 낭인들은 얼마나 잔인하게 명성황후를 시해했나 179

180 인들은 대일본제국 만세를 불렀다 는 내용의 보고서를 일본의 법제국장에게 보냈다고 한다. 일본인들의 잔인성과 변태성으로 보아 명성황후 시해 주범자들은 일본 최고지식인들이지만 능히 명성황후의 음부를 검사하고 성폭행했을 것 이다. 731 부대에서 보듯이 일본인들은 의사와 과학자 등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무의식의 빈 깡통의 두뇌가 되어 상부조직의 프로그램대로 행 동하기 때문에 못할 짓은 아무것도 없었다. 명성황후 시해 모습(왼쪽). /명성황후 기념관, 명성황후 시해 행동대원들. /위키백과 6. 일본의 한국 재침략 대비해 경제력과 국방력 증강해야 명성황후 시해 주도자들이 시해 사건 후 아래 그림과 같이 출세한 것을 보면 명성황후 시해의 모든 것은 일본 정부의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자행된 것임이 확실하다. 일본 낭인들, '여우사냥' 명명된 명성황후 암살 작전에 동원돼 일본이 조상의 과거 범죄를 진정 사죄하고 참회한다면 몰라도 일본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서 인기 있던 삼성 갤럭시 휴대전화기가 삼성 로고를 떼어도 잘 안 팔리고 젊은이들에게 열풍같이 일었던 한류 바람도 시들해졌다. 한일관계가 경색되자 일본인들은 한국 것을 좋아하다가는 자칫 우파세력에 이지매를 당할까 두려운 것이다. 조선 정벌론을 마음 속에 품은 일본 우파세력은 기회만 포착되면 한국을 재침략할 것이다. 해방 직후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아베 총리와 혈연관계 없음)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말 나는 반드시 조선에 다시 온다 를 명심하여 일본 상품 구매를 자제하고 경제력과 국방력 증강에 최선을 다 해야 한다. /Chosun.com 日 낭인들은 얼마나 잔인하게 명성황후를 시해했나 180

181 '두 이름의 신격호' 특혜로 탄생한 롯데 :47 [롯데그룹 大 해부] ] [1] 한국 정부 국민이 키웠다 國 立 도서관 터엔 호텔, 산업은행 터엔 백화점 政 府 특혜로 큰 롯데 ' 한국이름 50%+ 일본이름 시게미쓰 50%' 투자 허용 外 資 기업 인정 받아 소득 법인세 면제 등 파격 혜택 - 韓 國 서 밀어주는데 日 지분이 99%인 호텔롯데, 매출의 84%인 4조원이 정부 허가 면세점서 발생 - 日 지주회사가 지배 일본롯데홀딩스 주총에서 어떤 결정 내리느냐에 따라 후계 경영권 향배 갈려 "신격호라는 한국 이름으로 50%, 시게미쓰 다케오( 重 光 武 雄 )라는 일본 이름으로 50%를 투자하도록 해줘서 탄생시킨 것이 오늘날의 롯데그룹 입니다." 한 전직 고위 관료는 롯데그룹이 처음 한국에 투자하던 1967년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신격호 회장이 투자한 돈을 이름만 달리해 절반은 한국인 투자, 나머지 절반은 일본인 투자로 인정해 준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외자( 外 資 ) 유치에 목을 매던 박정희 정부는 1966년 외자도입특례법을 제정해 외자 기업에 소득세 법인세 취득세 재산세를 최초 5년간 면제해 주는 등 파격적인 특혜를 제공했다. 일본 지주 투자 회사들의 한국 롯데 지배구조 일본 롯데(1948년 창립)보다 거의 20년 늦은 1967년 롯데제과로부터 시작된 한국 롯데는 반세기 동안 매년 평균 29%라는 놀라운 고속 성장 을 했다. 정부는 지금의 롯데호텔 롯데백화점 본점이 있는 서울 소공동의 알짜 부동산을 롯데가 매입할 수 있게 하는 등 특혜를 줬다. 이런 혜택 덕분에 한국 롯데는 1980년대 후반에 일본 롯데를 추월했고, 2013년에는 83조원의 매출을 올려 일본 롯데(4조5000억원)와의 격차를 20 배로 벌렸다. 하지만 이런 롯데를 지배하고 있는 곳은 자본금 2억원 남짓에 정체도 불분명한 일본 광윤사( 光 潤 社 )와 지분 구조가 공개돼 있지 않은 일본 롯데홀딩스이다. 한국에서 낸 실적의 상당 부분이 일본 회사로 가는 기형적 지배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다. 재계에서는 롯데가 일본 내 지주 회사들의 지분 구조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장기적으로는 기업 지배구조 개선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자본금 2억원 회사가 매출 83조원 회사를 지배 '두 이름의 신격호' 특혜로 탄생한 롯데 181

182 한국 롯데 지배구조의 정점에는 지분관리용 회사인 일본 광윤사가 있다. 이 광윤사가 32%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지주회사 롯데홀딩스, 그리 고 12개의 'L제 투자회사'들이 한국 내 지주회사 격인 호텔롯데를 통해 롯데그룹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한국 내 주요 계열사들의 지분을 골 고루 가지고 있는 호텔롯데의 지분 99%가 일본 회사 소유인 것이다. 그래픽 참조 지난해 롯데그룹은 광윤사 롯데홀딩스 L제 투자회사 등 일본에 있는 주주 회사들에 500억원 이상을 배당했다. 지난 5년간 일본으로 간 배 당금은 3000억원에 육박한다. 금액으로만 보면 그렇게 크지 않지만 광윤사가 직원 3명에 자본금 2000만엔(약 1억9000만원)에 불과한 '페이퍼 컴퍼니'(장부상 회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투자 성과를 거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금 2억원짜리 회사가 매출 83조원, 자산 93조 4000억원, 종업원 23만명을 둔 한국 재계 5위 롯데그룹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이다. 광윤사의 수익성은 계속 좋아지고 있다. 2012년 3월 결산한 당기순이익은 7000만엔 수준이었지만 2013년엔 9700만엔, 지난해엔 2억9500만엔 으로 크게 늘었다. 직원이 3명이고, 사업 목적에 적힌 '포장재 제조 판매' 매출은 미미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 롯데의 고속 성장이 광윤사 의 수익 향상으로 이어지고 있는 점을 알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일본 회사들의 주주나 지분구조는 베일에 싸여 있다는 점이다. 어떤 '꼬리'가 한국의 '몸통'을 흔드는지조차 알 수 없는 구조 이다.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과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일본 롯데홀딩스 장악을 위해 사활을 거는 모습을 보면서 국민은 짙은 배신감을 느꼈다. 한국 정부의 배려와 국민의 사랑 속에서 고속 성장한 기업을 누가 지배하는지조차 모르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경제연 구원 권태신 원장은 "글로벌 시대에 투자한 한국 회사에서 배당받은 돈이 일본으로 흘러간다고 해서 그 회사를 '일본 기업'이라고 배척해서는 안 될 일"이라면서도 "글로벌 시대에 적합한 투명한 경영 체제는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外 投 기업 대우받고 필요할 땐 토종 기업 한국 정부와 국민은 롯데에 전폭적인 혜택과 성원을 보냈다. 한 대기업 임원은 "롯데는 외투( 外 投 ) 기업으로서 혜택이 필요할 때에는 외투 기업 대우를, 토종 기업 이미지가 필요할 때에는 토종 기업으로 대접받았다"며 "그 같은 특혜와 국민의 사랑을 받은 기업이 일본 롯데홀딩스 의 주주총회에 따라 명운( 命 運 )이 좌우된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롯데는 주력 사업인 호텔 백화점을 지을 때마다 특혜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1973년 호텔을 짓기 위해 당시 반도호텔과 국립도서관 등을 매 입할 때도 그랬고, 1980년대 초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자리에 있던 산업은행을 사들일 때도 정부가 "산은( 産 銀 ) 건물을 보존하겠다"던 당초 방침을 바꿔 롯데를 밀어줬다는 시비가 있었다. 지분의 99%가 일본계 자본인 호텔롯데가 연 매출 4조7000억원 가운데 84%인 4조원을 면세점 사업에서 올리고 있는 것도 한국 기업이 아니 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외국 기업도 면세점 사업을 할 수는 있지만 면세점 사업이 정부 허가 사업이고, 엄청난 매출이 보장된다는 점을 감안 하면 외국 기업이 허가를 받기는 쉽지 않다. 현재 17개 시내 면세점 중 롯데호텔을 제외하면 외국계 기업은 하나도 없다. /Chosun.com 김덕한 기자 김태근 기자 도쿄=김수혜 특파원 ============================================================================ 신격호인가 시게미쓰 다케오 ( 重 光 武 雄 )인가) 인가? 한일 양국서 정체성 지적 받는 롯데 '두 이름의 신격호' 특혜로 탄생한 롯데 182

183 롯데 창업주 2세들의 경영권 쟁탈전을 다루는 기사에서는 유독 시게미쓰( 重 光 ) 라는 일본어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신격호 총괄회장의 일 본 성이 바로 시게미쓰다. 게다가 이번 경영권 분쟁의 핵심 열쇠를 지닌 신 총괄회장의 둘째 부인이자 신동주 동빈 형제의 어머니인 시게미 쓰 하쓰코 역시 신 총괄회장과 같은 성을 쓴다. 이 때문에 일본 언론에서는 롯데가 형제의 난을 시게미쓰 일족의 난( 亂 ) 이라고 표현한다. 신 총괄회장은 시게미쓰 다케오( 重 光 武 雄 ), 장 남 신동주는 시게미쓰 히로유키( 重 光 宏 之 ), 차남 신동빈은 시게미쓰 아키오( 重 光 昭 夫 )라는 일본 이름을 갖고 있다. 왜 신격호 총괄회장 일가는 시게미쓰라는 성을 사용하게 됐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신 총괄회장의 과거를 살펴봐야 한다. 신 총괄회장은 1922년 경상남도 울산에서 아버지인 영산신씨 신진수와 어머니 김필수 사이에서 5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국인 부모 를 둔 한국인이다. 그의 형제로는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3남), 신선호 일본 산사스 사장(4남), 신준호 푸르밀 회장(5남), 신정희 동화면세점 사장(5녀) 등이 있다. 그는 1941년 만 19살의 나이에 단돈 83엔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큰아버지를 비롯해 집안 어른 여러명이 돌림병으로 사망하자 고향에 서는 희망이 없다 고 생각하고 일본 조기유학을 가기로 결심한 것. 그의 부모님에게도 미리 말씀드리지 않은 사실상 무단가출이었다. 그는 일본에 건너가기 전 한국에서 노순화씨와 결혼하고 딸 신영자 롯데복지재단 이사장 사장을 낳는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서 자신이 세들 어 살던 저택 주인의 딸인 시게미쓰 하츠코씨와 또다시 결혼한다. 그녀의 결혼 전 이름은 다케모리 하쓰코( 竹 森 初 子 ). 신 총괄회장과 그의 둘째 아내가 시게미쓰라는 성을 갖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 번째는 그의 일가인 영산신씨 집안 모두가 창씨개명 당시 시게미쓰를 성으로 사용했다는 것. 즉 신 총괄회장이 먼저 창씨개명을 통해 성을 시게미쓰로 바꿨고, 그다음 둘째 아 내가 따라 바꿨다는 얘기다. 두 번째는 둘째 아내의 외삼촌으로 알려졌던 시게미쓰 마모루( 重 光 葵 )의 성을 신 총괄회장이 따랐다는 설이다. 두 번째 설의 경우 최근 롯데의 친일기업 이미지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면서 함께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일본인 정치인인 시게미쓰 마모루 는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A급 전범이다. 일제강점기 친일파를 처단하는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암 살 에서 절름발이 외교관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이번 사태로 신 총괄회장이 A급 전범 집안 과 연관됐으며 성까지 따라갔다는 이야기가 돌자 롯데 측은 최근 하쓰코 여사는 마모루씨와 친인척 관계가 아니며, 시게미쓰 성은 신 총괄회장과 결혼하고 나서 그의 일본식 성을 따른 것 이란 공식 입장을 밝혔다. 전범 집안과의 연 관성을 부인한 것이다. 이 시게미쓰 마모루 연관설의 근원은 언론인 출신 정순태씨가 쓴 책 신격호의 비밀 이다. 그는 이 책에서 하쓰코 여사의 어머니는 주중 일본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의 여동생 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신격호 회장의 측근들도 신 총괄회장이 일본에서 성공한 것에는 하쓰코 여사 의 친정인 다케모리 가문의 도움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고 말했다고 한다. 신격호의 비밀 은 1990년대 나온 책이다. 그 동안 롯데 측은 시게미쓰 마모루와 시게미쓰 하쓰코 여사 연관설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이번 사태 이후 전범 연관설이 계속 나오자 공식 입장을 내 놓은 것이다. 좌 신동빈 롯데 회장/우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 한편 롯데 일가의 국적의 경우 신격호 회장과 두 아들 모두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 신 회장은 창씨개명은 했으나 한국국적을 유지했다. 장 차남인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한일 이중국적을 유지하다가 마흔 무렵에 한국국적으로 옮겼다. 형제 모 두 한국 국적을 갖고 있긴 하나 군대는 가지 않았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재미교포 사업가의 딸인 조은주씨와 결혼했고, 차남인 신동빈 회장 '두 이름의 신격호' 특혜로 탄생한 롯데 183

184 은 일본인인 마나미( 眞 奈 美 )와 결혼했다. 마나미는 다이세이 건설 부회장을 지낸 오고 요시마사의 둘째딸로 일본 명문가 출신이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국적은 한국인이지만 한국말이 서툴다. 최근 국내 언론과 일본어로 인터뷰했다가 국적은 한국인이지만 정신은 일본인 이다 라는 비난을 받았다. 신 전 부회장이 공개한 아버지와의 대화 녹취록에서도 일본어로 대화를 나눴다. 대화속에서 차남 신동빈 회장은 아키오 라고 불렸고, 신 전 부회장은 신 총괄회장을 오또상(일본어로 아버지)이라고 불렀다. 롯데가 문화가 일본색이 짙다는 것을 보여주 는 예시다. 신동빈 회장은 한국어 의사소통에는 무리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는 지금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모두 지탄받는 처지다. 한국선 알고보니 일본기업 이라고 소비자들이 외면하기 시작했다. 또 신동빈 회장이 4일 입국 기자회견에서 롯데는 매출의 95%를 한국에서 올리는 한국기업 이라 말한 뒤 일본에선 반대로 한국 기업이었냐는 구박을 받고 있다. 일본 인터넷 사이트엔 롯데가 한국 기업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롯데 마린스도 한국 구단이냐 우리에게 모리나가(일 본의 과자회사 이름)가 있다 같은 글이 끊임 없이 올라오고 있다. / Chosun.com 정선미 기자 '두 이름의 신격호' 특혜로 탄생한 롯데 184

185 공무원 때문에 자살 생각까지... 식당주인의 사연은? :17 공무원 때문에 망한 식당 주인 공무원이 벼슬인가 '고향이 충청도인데 정말 부끄럽습니다. 썩을 대로 썩은 도 공무원들. 나도 공무원 할래요, 밥 값 모아 명품 하나 장만 할라구요. 그런 분들 이 도민을 위해 일합니까 ' 충북도청이 운영하는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올려 진 네티즌들의 댓글 내용이다. 30일 하루 동안 도청 공무원들을 비아냥하는 댓글 수백여건이 자유게시판에 올랐다. 국민들의 화난 비난 목소리는 현재진행형이다. 충북도청 공무원들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오래 전 충북도청 인근에서 음식점을 했던 한 주인의 충격적인 사연이 전해지면서다. 충북도청 주변에서 음식점을 경영했던 이모(53 여)씨. 그가 청주시 문화동 도청 앞에서 음식점을 연 것은 1998년이다. 조리솜씨도 좋고 몸에 밴 친절 덕분에 개업 초기 이씨의 음식점은 주변 업주 들이 시샘할 만큼 성업을 이뤘다. 이씨는 당시 장사가 잘되는 것에 비례해 예상치 못했던 고민도 커져갔다고 한다. 몇 달 사이에 거래를 튼 도청 실과가 20 30곳으로 늘었고 외상장부도 그 수만큼 불었다. 공무원 때문에 자살 생각까지... 식당주인의 사연은? 185

186 문제는 매달 외상값을 갚을 줄 알았던 도청이 차일피일 결제일을 미루면서 시작됐다. 실과별로 수백만원씩 외상값이 불어났지만, 결제되는 금액은 매월 20만 30만원에 불과했다. 그러는 사이 담배를 사오도록 시킨 뒤 소속 실과 외상장부에 밥을 먹은 것처럼 기록해놓는 직원도 생겼고, 20만원 대에 이르는 가족회식을 해놓고도 실과 외상장부에 직원회식을 한 것처럼 써놓는 고위간부도 있었다. 3천 4천원짜리 밥 한끼를 먹고 외상을 다는 직원들도 부지기수였다. 불편부당한 외상행위에 항의하고 싶었지만 돌아올 불이익을 걱정한 이 씨는 참고 또 참았다고 한다. 개점 이듬해 외상 규모가 1억원대에 이르자 이 씨는 도청을 찾아가 결제해달라는 하소연을 몇 차례 했다. 하지만 몇몇 실과 서무담당자들은 "부서 공통경비로 해결할 금액을 이미 넘었다. 조금씩 매달 갚아주겠다"며 외면하기 일쑤였다. 그나마 일부 직원은 "그 정도 외상은 기본 아 니냐"면서 오히려 면박을 주기도 했다. 결국 이 씨는 자금 회전을 위해 친척과 지인들에게 손을 벌렸다. '언젠가는 갚아주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외상은 계속해서 불기만 했고, 그만큼 빌린 돈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개업 3년째 되던 해. 한계점에 도달한 이 씨는 실과를 돌며 애걸했다. 하지만 해당 실과 공무원들은 "서무 담당자가 바뀌었다. 내 일이 아니다. 상사채권 소멸시효가 몇 년 인지 아느냐"는 식의 답변만을 쏟아냈 다. 낙심한 이 씨는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잘 정도로 심신이 피폐해졌다. 도청 옥상에 올라가 외상장부를 품고 투신하는 상상도 했었다고 한다. 이씨는 지인들의 제의에 따라 결국 지난 2001년에 음식점 문을 닫는다. 가게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지인들의 빚 독촉이 시작됐다. 이씨는 자신이 살던 아파트와 전답을 팔아 빚 2억원을 청산했다. 이씨는 그 후 수년 동안 칩거하다 얼마 전 도청과 멀리 떨어져 있는 시내에서 조그만 식당을 열었다. 이씨는 새로 문을 연 식당 출입구에 '도청 공무원 절대사절, 안받습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안내문을 내걸었다. 도청공무원들에 대한 불신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케 하고 있 다. 이 같은 사연이 매체를 통해 알려지자 국민들은 도청 홈페이지 등을 통해 비난의 목소리를 토해내고 있다. 충북도는 파장이 확산되자 30일 자체 감사에 착수했다. 도청 실과 서무담당자들에게 회계장부 점검을 지시했고, 외상거래 대상자 색출에 나 섰다. 도 관계자는 "우선 도청 주변 식당들을 대상으로 외상장부 거래현황 등을 조사하고 있다"면서 "조사결과 부당하게 외상을 져 업주들에게 피 해를 준 공무원이 적발되면 의법조치할 방침이다"고 말했다. 한 도청 공무원은 "외상으로 고통 받았던 식당 업주를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하다. 공직자들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면서 "당시 관련된 자가 대다수가 퇴임했다고 하지만 철저한 감사를 통해 후속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컷뉴스 공무원 때문에 자살 생각까지... 식당주인의 사연은? 186

187 나라가 망할 21가지 전조증상 7. 자살의 시대 :00 경남기업 성완종 회장의 자살로 대한민국이 시끄럽습니다. 박근혜 정권의 대통령 비서실장들이 차례로 연루된 뇌물 리스트가 폭로되어 정권 의 대선자금 비리의혹이 불거지는 상황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자신의 돈과 건강, 마음까지 다 바쳤던 성완종 회장입니다. 그러 나 그는 새누리당 배신정치의 냉혹함에 절망한 나머지 자살이란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배신한 정치모리배들을 모조리 폭로 하면서 말이죠. 1) 죄인부터 의인까지 가리지 않는 자살 경남기업 성완종 회장은 학연이 판치는 한국사회에서 초등중퇴의 학력으로 경남기업이라는 회사를 일구고 국회의원까지 지낸 인물이었습니 다. 그는 명실상부하게 자수성가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외관상으로만 본다면 청년들에게 성공의 희망을 심어주기에 모자람이 없는 성공의 표본이었다고 볼 수 있겠죠. 인생의 말년에 자서전이나 출간하며 여생을 보낼만했던 그였지만 결국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역시나 기업인의 성공뒷면에 정치권 로비와 비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희망의 코드가 절망이 되어버리는 순간입니다. 사회적 공인들의 자살은 성완종 회장과 달리 현대사에 큰 획을 그었던 의인들의 모습에서도 발견됩니다. 2009년 5월 23일에는 노무현 전 대 통령이 충격적인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비리 리스트를 폭로하고 자살한 성 회장과 달리, 노무현 대통령은 대다수 국민들이 눈물을 흘 나라가 망할 21가지 전조증상 7. 자살의 시대 187

188 리며 그를 추모하였습니다. 당시 서울시청광장에는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는 인파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지금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 하는 정서처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추모와 안타까움, 미안함의 감정이 당시 한국사회를 짓눌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산상고를 졸업한 학력으로 대한민국의 대통령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평생 권위주의와 지역주의에 맞서 싸웠던 그는 그야말로 청년들의 희망이자 개혁정치의 산 증인이었습니다. 2007년 방북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합의한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선언)>은 조국통일 역사에 영원히 빛날 커다란 업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도 퇴임 후 당시 이명박 정권의 모욕적인 수사를 견디다 못해 충격적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남북경제협력에 헌신적 으로 나섰던 현대아산 정몽헌 회장도 검찰수사 과정에서 검찰청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했습니다. 이들을 자살에 이르게 한 이들은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전직 대통령과 재벌 총수,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이들은 왜 자살이란 극단적 선택을 하였을까요? 첨예한 정치적 갈등과 싸움의 논리가, 이들이 평화롭게 숨 쉴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국사회가 극단적으로 남을 때리고, 짓밟고, 깔아뭉개다보니 선량한 사람은 분을 이기지 못해 죽게 되고 로비스트는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2) 대한민국 자살공화국 이제 한국사회에서 자살은, 우리 국민 모두의 문제로 되었습니다. 한국의 자살률은 세계 최고입니다. 2013년 자살자가 무려 1만 4427명, 하루 40여명이 자살로 소중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자살은 남녀노소를 불문합니다. 2013년 '서울시민의 건강과 주요 사망원인' 통계에 의하면 서울시 자살자는 총 2560명이었는데 10대부터 30대 젊은 층의 자살비율이 높았습니다. 10대 사망자의 35.1%(53명)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고 특히 20대는 사망자의 51.6%(285명)가, 30대 사망 자는 사망자의 39.7%(434명)가 자살을 선택하였습니다. 10대 청소년은 중간고사 성적이 떨어져 비관자살하고 20대 청년은 거듭되는 취업난에 절망해 자살합니다. 먹고 살만한 청춘들은 실연의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합니다. 장년과 노년층에서 자살의 비중이 높지 않다고 해서 이들이 행복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연령층이 올라갈수록 각종 질병이나 사고사로 인해 총 사망자가 증가해서 자살이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성세대들에게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자식들이 있습니다. 고통뿐인 삶 끝에 생을 포기하려다가도 자식들의 내일과 미래를 생각하면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것이 우리 기성세대들입니다. 쪽방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독거노인 분들은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자살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60대 노인들 3명 가운 데 1명이 자살을 생각해보았다는 자료가 보도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이 자살공화국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자살자의 20배로,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4월 27일자 <해럴드 포럼>에서 양두석 씨는 2013년 의 자살자 수가 1만 4427명이었으니 대략 30만명 가량이 자살을 시도한 셈이라며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5조원에 달한다고 우려하였습니 다. 저는 경제적 손실도 손실이지만 그 30만명의 절망감. 돈으로 헤아릴 수 없는 그 절망감은 막대한 사회적 손실로 귀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청년층에 절망감이 가중되면서 인터넷만남을 통한 "동반자살"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지난 4월 7일에는 경북의 한 농촌 마을 에서 4명의 남녀가 승용차 안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습니다.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만난 다음, 함께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KBS>는 보름 여 전에는 경남 진주에서, 일주일 전에는 제주에서 역시 4명의 남녀가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고 전했습니다. 이런 기사는 인터넷을 조금만 찾아보아도 어디서나 발견됩니다. 이제는 절망적 경제상황이 가중되면서 일가족이 함께 목숨을 끊는 참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식들을 위해 죽기로 일했던 부모님들이, 더 나라가 망할 21가지 전조증상 7. 자살의 시대 188

189 이상 삶의 희망을 찾지 못하자 자식들과 함께 죽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2014년 2월 송파구에 사는 세 모녀는 만성 질환을 앓고 있던 큰 딸과 어렵게 생활하던 어머니마저 실직하자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메모와 그들의 전 재산인 70만원을 남기고 동반자살해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낳았습니다. 이들이 자살이란 극단적 선택을 하기까지, 재기를 위해 얼마나 발버둥 쳤을 것이며 또 얼마나 많이 울었겠습니까. 2013년 3월에는 전북 익산에서 자식들과 함께 동반자살하려다 7세 아들을 숨지게 하고 1세 딸에 상해를 입힌 어머니가 체포되기도 하였습니 다. 4월 15일에는 사업실패를 비관한 모자가 번개탄을 피워 동반자살을 하였습니다. 4월 25일, 부인과 100일된 아기와 함께 자살하려던 30대 남성이 구조되었습니다. 이 힘든 세상을 물려줄 수 없다며 제 손으로 자기 자식을 죽이는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다보니 이제 자살은 드라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4월 6일, <매일신문>에서는 tvn 아침드라마'가족의 비밀'에서 카리스마 재벌총 수 진주란(차화연)이 자신의 딸 고태희(이일화)의 악행을 멈추게 하기 위해 동반자살을 제안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자신의 잘못된 태도로 딸이 악행을 거듭한다는데 책임을 통감한 어머니가 딸에게 동반자살을 제안한다는 것입니다. 자살이 생활 속의 소재가 되어 TV 드라마의 소재가 되는 모습은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대한민국은 정말로 자살공화국이 되어버렸습니다. 3) 자살은 절망감 때문 1년에 30만명이 자살을 시도한다는 충격적 결론을 어땋게 보아야 할까요? 지금 우리 국민들이 한 맺힌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것은 극도의 절망감 때문입니다. 10대는 원치않는 주입식 교육으로 숨쉴 자유가 없고, 20대는 끝없는 취업전쟁에서 승리할 자신이 없습니다. 30대는 또래 의 결혼과 출산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40, 50대는 자식 때문에 편안한 휴식을 꿈꿀 수도 없습니다. 자살의 원인으로 경제난을 꼽기에 앞서서 국민들의 절망감을 보아야 합니다. 그 힘들었던 일제강점기에도 우리 민족이 1년에 30만 명씩 자살을 시도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보릿고개로 극도로 궁핍했던 이승만 정권 시 기에도 1년에 30만 명씩 자살을 시도했을까요? 전 엄혹하였던 해방정국에는 힘들고 어렵지만 그럴수록 손을 맞잡고 고난을 함께 할 '이웃'이 큰 힘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콩 한쪽도 나눠먹는다'는 속담처럼, 우리에겐 이웃사촌이 있었습니다. 뭉치면 힘이 배가 되는 법이지요. 옛말에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국민들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언젠가부터 고민을 터놓고 아픔을 함께할 이웃사촌이 사라졌습니다. 먹고 살 길이 막막 해 머리를 쥐어뜯고 싶다가도 옆집 아저씨를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웃으며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지나치는 것이 보통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자본이 부식한 개인주의에 취해 극도의 고립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모두가 돈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합니다. 그걸 누가 모릅니까? 문제는 이 땅에서 돈 벌기가 뉘 집 강아지 이름짓기처럼 쉬운 일이 아니란 데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의 절망감은 사회적 모순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그것이 해결되지 않는데서 오는 절망감입니다. 북한과의 체제경쟁은 끝났다면서도 수 조원 미국무기를 구입하고, 이제 돈이 없다며 복지지출을 줄이는 정부를 누구도 제어하지 못합니다. 사장과 부장이 계약조건에도 없는 업 무를 맡기지만, 누구도 저항하지 못합니다. 사장님 대박난다고 해서 식당을 개업했지만, 손님은커녕 고지서만 쌓입니다. 범국가적 자살공포에 서 벗어나려면 근본적으로는 절망의 근원인 사회모순을 개혁해야 합니다. 거악을 척결해야 우리 국민들이 마음놓고 살아갈 세상이 열릴 수 있습니다. 4) 소통으로 재기를 나라가 망할 21가지 전조증상 7. 자살의 시대 189

190 하지만 거악을 척결한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1945년 8.15 해방은 거악이었던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냈지만, 조국은 이내 분단되었고 전쟁과 군부독재 등, 이 땅의 거악은 척결되지 않았습니다. 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를 쟁취했다고 하지만 반란수괴 전두환의 후예들은 아직까지 정권을 쥐고 있고 한미동맹의 신봉자들이 국가원로를 자처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사회모순이 척결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거악세력이 강한 것은 차지하더라도, 일단 급하게는 사회적으로 소통이 열려야 하지 않을까요? 소통이 있어야 단결이 되고 단결을 해야 국민의 힘이 커질 것입니다. 소통은 거창한 사회악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 개인의 생활에서도 매우 절실한 문제입니다. 당장 가족과, 동료들과 소통해보세요. 자살률이 이처럼 높겠습니까? 소통은 자기의 잘못을 먼저 인정하고 사과하는데서 출발합니다. 이 사회가 극단적으로 남을 짓밟는데 익숙해져 있기로서 니 우리가 밖에서 당한 설움을 가족을 짓밟으며 해소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감정이 오고가야 사회적 단결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야권연대도, 사회적 단결도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만큼 자신을 비하하는 것은 없습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자신을 학대하고 자기를 스스로 죽이는 것에 비해서는 훨씬 더 쉬운 일이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끝> / 우리사회연구소 / :02 나라가 망할 21가지 전조증상 7. 자살의 시대 190

191 대한민국을 진정한 민주국가를 만들기위해선 :48 국가 공무원들과 마주치다 보다 보면 그들은 국민이 우선이 아닌 정부 조직원으로서의 국민 경시 자세가 뚜렸함을 볼 수 있다. 마치 회사원이 고객을 대하 듯, 회사에 충성하듯... 하지만 공무원은 달라야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비록 정부 조직에 속해있지만 그들은 정부 조직원이기 전에 국민에게 감사하고 헌법과 법률에 충실해야 할 이유를 잊고 국민을 경시 하고 조직에만 충성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무원 취임부터 헌법을 수호하고 모든 국민의 봉사자로서 충실하겠다는 서약을 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이 국민 보 호를 외면하고 국가 안위를 해친다면 그들은 헌법 제1, 7, 10조, 국가공무원법 제55조 등을 위반하는 커다란 실수를 범하는 범죄자들이기 때 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을 벌 할 제도나 법률적 근거가 있다해도 그들에겐 통하지 않는다. 정부 조직들은 그들을 감싸고 그들에게 특혜를 부여한 듯 그들이 저지른 범죄행위를 범죄로 느끼지도 않고 유사법률 또는 판례, 사례 등을 들먹여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다. 백성의 눈 위치에서 보면 분명 법을 위반했음인데 그들은 그것들을 인정치 않으며 오히려 떳떳하게 거만떨며 책임지는 공직자는 없다. 철새에 지나지 않는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공무원의 눈치를 보며 그들에게 잘 보여야 하는 입장이다. 정치인은 수 년의 한시적 특혜만 주어지지기 때문에 그 기간동안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우를 범하게 마련이고 이 과정에서 많은 정보들을 그들에게 노출될 수 밖에 없는 위치이다 보니 그들 또한 퇴직 후 공무원들의 먹잇감이 된다. 하지만 공무원들은 모든 정보를 독식하고 모든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규제하며 자신들의 입맛에 맞추어 그들만의 세력을 확장하게 되고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조직을 운영하게 되는 역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또한 그들은 평생을 국민의 돈으로 호의호식하고 퇴직 이후엔 더 높은 자리가 기다리고 있으며 영웅의 칭호까지 받으며 영예를 안고 살아가 기도 한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의 노력의 일부를 인정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의 많은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범죄를 저질렀고 특히 국가 운영의 경험이 없어 그 기술이 필요했던 그로서는 조선총독부의 정신과 통치잔재들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나아가 친일파들을 대거 정부 요직에 입 각시킴으로써 제국주의의 일제잔재를 지금까지 이어오게 한 과오는 이 나라의 오늘의 모습을 보게하는 중대한 실수를 범한 것이다. 대한민국을 진정한 민주국가를 만들기위해선

192 법원이나 검찰 등, 국가 모든 기관은 국민보호를 위한 기본적인 민주적 기관이어야 하지만 그들은 국민보호보다는 자신들 조직을 우선하는 이기적인 선택을 하여 선서를 위반함은 물론 헌법과 국가공무원법 등을 위반하는 범죄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일제 제국주의적 사고를 배우고 자라 몸에 밴 이 나라 중추 요인들과 일부 국민들은, 민주주의의의 기본인 국민이 우선이 아닌 반 민주적인 국가의 목적을 우선으로 하는 총독부적 제국주의 사고와 사상을 버리지 못한다면 이 나라의 국민행복은 영원히 찾기 힘들것이 다. 이것이 대한민국 현실이다. 대한민국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진다. 이 나라를 국민의 나라로 만들어 갈 진정한 민주인사가 이 나라를 구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사람이 하루빨리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4.19가 아니라 정권 변환이 아니라 그 보다 근본적인 혁명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을 진정한 민주국가를 만들기위해선

193 여고생 미인대회에 출전한 일본 전역 48개의 각 학교 대표 :12 일본에서 해마다 개최되는 일본의 얼짱 女들 여고생 미인대회에 출전한 일본 전역 48개의 각 학교 대표 193

194 여고생 미인대회에 출전한 일본 전역 48개의 각 학교 대표 194

195 여고생 미인대회에 출전한 일본 전역 48개의 각 학교 대표 195

196 여고생 미인대회에 출전한 일본 전역 48개의 각 학교 대표 196

197 여고생 미인대회에 출전한 일본 전역 48개의 각 학교 대표 197

198 여고생 미인대회에 출전한 일본 전역 48개의 각 학교 대표 198

199 여고생 미인대회에 출전한 일본 전역 48개의 각 학교 대표 199

200 여고생 미인대회에 출전한 일본 전역 48개의 각 학교 대표 200

201 여고생 미인대회에 출전한 일본 전역 48개의 각 학교 대표 201

202 여고생 미인대회에 출전한 일본 전역 48개의 각 학교 대표 202

203 여고생 미인대회에 출전한 일본 전역 48개의 각 학교 대표 203

204 인물이 얼마나 없어서 수준이 이것 밖에 안되냐 kr.fun.yahoo.com/한발짝더 여고생 미인대회에 출전한 일본 전역 48개의 각 학교 대표 204

205 엄마 :27 고된 그 시절을 살아낸 어머니! 어머니 생각이 떠오르기만 해도 눈물이 솓아지는 나의 어머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그리고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어머니'란 이름으로 담을 수 있는 무한의미들 어머니는 역시 강하다. 그 옛날 힘들었던 시절 위대하신 우리들의 어머니 엄마 배고파.. 아직 멀었어...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장터도 마다않으시고 선잠 속에서도 자식생각... 농삿일은 일상이셨던 엄마... 아픈 다리 무릅쓰고 장을 봐 오시던 우리 엄마... 감자며 고구마며, 장에 나가 팔수 있는 과일이라도... 복술이 새끼면 어떻리 자식들이 굶는데... 뻥이요!!!... 무슨 일이던 못하랴... 애구 내새끼.. 나만 보시면 흐믓해 하시던 우리 엄마... 형과 나를 동시에 젖을 물리시던 우리 엄마... 아가야 많이 먹으렴... 엄마

206 자식에게도 먹이지 못한 고구마인데... 다치지 말고 몸성히 꼭 살아 돌아오라시던 우리 엄마... 위험해요.. 돌아가세요.. 오늘은 생선맛을 보겠구나... 가판데에서 고구마를 굽는 누나도... 아픈 몸 돌볼 기력도 없으셨던 우리 엄마.. 모자란 잠을 잠시... 아가 이거라도 많이 먹으렴... 엄마! 하늘나라에 잘 계시죠... 그곳에서도 저희들 걱정뿐이라구요??? 저도 벌써 60이 넘었네요... 그 모진 고생하시다가 일찍 가신 엄마보다 제가 더 많이 살았네요. 엄마! 이제 저희들 걱정 마시고 그곳에서 편안히 계세요.. 이제.. 저도 그곳으로 갈거니까요... 엄마

207 김동길 교수의 강연 :50 친북좌익세력의 척결 촉구와 북핵 폐기를 주장하는 조갑제 대표 법철스님 규탄사 김동길 교수의 강연 207

208 60.70대의 아픔 :28 어느 노병의 절규 편지... 우리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젊은이 들이여! 여러분들은 60.7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조국을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땀과 눈물을 흘렸는가?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는 풍요로움 뒤에는 지난 날 60.70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5.16혁명 직후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을 인정 한다면 아시아 또는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 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 때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 지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 빈 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 없는 눈물을 흘렸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한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방해를 무릅쓰고 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서독 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해 온 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들의 가족 친척들이 흘리는 눈물로 바다가 되어 있었다 대의 아픔 208

209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 간호사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았다. 하루종일 닦고 또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가 넘는 깊은 땅 속에서 그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 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 캐는 광부 일을 했다. 서독 방송.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여자 간호사와 남자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해서 부쳐진 별명이 '코리안 엔젤'이라고 불리었다. 몇 년 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 대통령이 방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에게 대통령 전용기는 상상할 수도 없어 미국의 노스웨스트 항공사와 전세기 계약을 체결했지만 쿠데타군에게 비행기를 빌려 줄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그 계약은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서독정부는 친절하게도 국빈용 항공기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을 거리에 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 코리안 광부 만세! 코리안 엔젤 만세!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박 대통령은 창 밖을 보며 감격에 겨워 땡큐! 땡큐! 만을 반복해서 외쳤다.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위로.격려하기 위해 탄광에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에 그들은 500 여명이 들어 갈 수 있는 강당에 모여들었다.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강당에 들어갔을 때 작업복 입은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에 앞서 우리나라 애국가가 흘러 나왔을 때 이들은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를 수조차 없었다. 대통령이 연설을 했다. 단지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땅속 1000 미터도 더 되는 곳에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려 가며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제 나라 광부들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대의 아픔 209

210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열심히 합시다!'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박 대통령은 계속 일하자는 이 말을 반복했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역만리 타국 땅 수 천 미터 지하에 내려가 힘들게 고생하는 남자 광부들과 굳어버린 이방인의 시체를 닦으 며 힘든 병원일 하고 있는 어린 여자 간호사들 그리고, 고국에서 배곯고 있는 가난한 내 나라 국민들이 생각나서 더 이상 참지 못해 대통령 은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이란 귀한 신분도 잊은 채 소리내어 눈물 흘리자 함께 자리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 모두 울면서 영부인 육 영수 여사 앞으로 몰려나 갔다. 어머니! 어머니! 하며 육 여사의 옷을 잡고 울었고 그분의 옷이 찢어 질 정도로 잡고 늘어졌다. 육 여사도 함께 울면서 내 자식같이 한 명 한 명 껴안아 주며 '조금만 참으세요'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광부들은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절을 하며 울면서 '고맙습니다.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 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 주세요. 우리 모두 열 심히 일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를 수없이 반복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강당에서 나오자 미쳐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여러 광부들이 떠나는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붙잡고 '우릴 두고 어디가세 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부모님이 보고싶어요.' 하며 떠나는 박대통령과 육 여사를 놓아 줄 줄을 몰랐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 탄 박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대통령은 손수건을 직접 주며 '우리가 도와 주겠습니다. 서독 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독 국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 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를 반복해서 말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 등... 이때, 한국은 76불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였다 대의 아픔 210

211 1964년 국민소득 100달러! 이 100달러를 위해 단군 할아버지로부터 무려 4,3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후 그대들이 말하는 이른바 우리 보수 수구세력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를 동원하여 '머리카락 파세요! 파세요!' 하며 길게 땋아 늘인 아낙네들의 머리카락을 모았다. 시골에 나이 드신 분들은 서울간 아들놈 학비 보태주려 머리카락을 잘랐고 먹고 살 쌀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래서 한국의 가발산업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곰 인형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전국에 쥐잡기 운동을 벌렸다. 쥐털로 일명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1965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세계가 놀랐다. '저 거지들이 1억 달러를 수출 해?' 하며 "한강의 기적"이라고 전 세계가 경이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조국근대화" 의 점화는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들이었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참전 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됐다.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가 우리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국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대들이 수구 보수세력으 로 폄훼 하는 그 때 그 광부와 간호사들 월남전 세대가 바로 모두 60.70대 할아버지 할머니 들이 아니 였던가 그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명심할 것은 그 때 이방인의 시신을 닦든 간호사와 수 천 미터 지하 탄광에서 땀흘리며 일한 우리의 광부, 목숨을 담보로 이국전선 에서 피를 흘리는 우리 국군장병... 작열하는 사막의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한 60,70대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그대들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60.70대의 아픔 211

212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반전과 평화 데모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와 교통질서를 마비시키는 그대들이 과연 그렇게 고생한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수구세력으로 폄훼 할 자격이 있는가? 입이 있고 양식이 있으면 말을 좀 해보시라오. 그대들이 그때 땀흘리며 일한 오늘의 6.70대들을 보수 수구세력으로 폄훼 하기에 앞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라. 국가 경영을 세계와 미래라는 큰 틀 전체로 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국내에서 월 6.7백 만원을 받는 근로자들이 노사분규나 일어키고 허구한날 종묘공원이다 대학로에 모여 반 정부 데모를하여 교통질서를 마비 시키는 일보다는 저 넓은 세계로 태평양 대서양 건너로 눈을 돌려야 한다. 200 여개국들과 싸워야한다. 우리 6.70대는 굶주린 배를 움켜지고 보다 나은 내일의 삶을 위해 서독에서 중동에서 월남에서정말 피눈물 나는 고통을 참고 견디어 왔다. 또다시 한번 오늘의 고통을 즐겨 참고 견뎌 국민소득 4만불대의 고지 달성 때까지는 앞만보고 달리는 자통차와 같이 우리들 신.구 세대는 한 덩어리가 되어 뭉쳐야 한다 폄훼할 시간이 없다 이번 "FTA" 협상을 보지 않았던가. 강대국들의 힁포... 이제 갈라져 반목하고 갈등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이제 우리 모두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며 같은 뿌리에 난 상생의 관계임을 확인하고 다시 한 번 뭉쳐야한다. 우리 모두 선배를 원로를,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며 우리 모두 후배들을 격려하고 베풀고 이해 해주면서 함께 가보자. 이제 우리들은 지난 날의 보리고개 일제 36년간의 서러움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上 敬 下 愛 [상경하애]의 마음가지고 전진 또 전진합시다. 우리 대한민국의 앞 날에 만년 2만년의..영원히 더욱 밝은 빛이 비추어 지리니!! 내 나이 66세 나는 광부로 못갖지만 내 친구는 그당시 독일에 광부로가서 독일 여자와 결혼하여 그곳에 살고잇다. 몇 번을 접했지만 언제 보아도 감동이 밀려오는 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풍요로움이 그 분들의 희생과 수고가 있었기에 가능하기에 돌아가신 나라님 박대통령님을 비롯한 60.70대! 그 분들께 고개숙여 감사함을 전합니다. 제나이 27세 1965년도 육군 중위로 채명신 사령관님을 모시고 최초 월남전투에 참가 "하루 3 불" 한달에 105불을 벌어 보겠다고 부모형제 처.자식 멀리두고 월남전쟁 참가 3년간을 싸웠습니다. 수당 105불중 10불만 쓰고 나머지는 모두 고국으로 "채명신"사령관님의 명에 의해 송금 되였습니다 대의 아픔 212

213 조국에 딸라가 있어야 조국을 건설한다는 사령관님의 그 애국심 그때 39세의 젊으신 육군 중장이신 사령관님께서도 세월을 이길수 없어 어드 듯 82세의 노인으로 그래 ~ 그래 정말 힘들었습니다 고국이 그리웠습니다. 전쟁 참으로 처참하고 비참 했습니다. 저는 전쟁에서 폐를 잃었습니다 우측폐 반이 없습니다. 정말 전쟁 몸서리 쳐집니다 병고의 통한의 고통 어찌 말로 표현하리요. 그러나 오늘날 이렇게라도 살고있으니 행복인줄 알고 살아갑니다. 상이군경 국가유공자 자랑 스럽습니다. 이제 70을 바라보는 황혼의 인생이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몸은 늙어 황혼이 되였으나 우리들의 고생으로 우리들의 아들 딸들 손자 손녀들이 우리들과 같은 고생하지 않고 마음놓고 사는 조국을 바라 볼때 苦 盡 甘 來 [고진감래]의 사자성어가 생각납니다. 우리 모두들 사랑하면서 정말 잘사는 조국 대한민국을 만들어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편 입니다.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우리님들 모두 오늘 보다 더 좋은 내일을 만듭시다. 오늘도 건강한 하루 되소서... 박만선 올림 상이군경 국가 유공자 최초 월남전투참가 경북.김천생 1938년생 60.70대의 아픔 213

214 이 나라 제대로 맹그러 주실분 :45 국가유공자... 자료:월남전과 한국 vietvet.co.kr 우리 어렸을 적 6.25 직후에 무지하게 살기들 힘들었드랬습니다. 그 시절에 동네 방네 목발 휘두르고 갈고리손 휘두르며 설치고 다니시는 6.25참전용사들 때문에 동네 어머님들이 무서워 쩔쩔 매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때 저는 왜 저들을 국가에서 저리 방치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었드랬습니다. 그러나 월남 전쟁에 참전하고 돌와와 이 나이가 되어서야 참전용사들이 나라에서 왜 대접 받을 수 없는지 현실을 깨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때는 6.25참전 선배님들이 제대로 국가에서 보상과 예우를 받아 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도 이와 같이 홀대를 받는 현실에 대해 선배님들을 원망도 했었습니다. 당시 참전자들 중에는 위선자들에 빌붙어 약싹 빠르게 처신하여 자신만의 영달을 꽤하고 힘없고 돈 없고 배운것 없는 참전자들의 눈을 가리 고 입을 막아 버리고 내 팽겨쳐지는 나라로 만들어 버리는데 일조를 하였습니다. 국가에서 아무런 보상과 혜택도 받지 못한 6.25 참전자들은 울분을 감추지 못하고 지팡이며 갈고리를 휘두르며 사회를 혼란케 하여 점점 국 민들에게서 멀어졌고 국민들에게서 냉대를 받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6.25 참전자들을 국민들에게서 멀어지게 했던 이 나라 위정자들의 보훈정책을 지금까지 지속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의 안위를 위해 전쟁을 치루려면 국민이 있어야 하고 치룬 후엔 다음 전쟁을 대비하고 준비하는 과정을 거치려면 참전자들에게 국가가 보상을 하고 보호를 해주어야 국민들은 국가를 믿고 하나로 똘똘 뭉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 서양은 물론 이념을 떠난 세계 모든 국가들이 국가형성의 가장 기본틀로서 참전자들을 국가유공자로 지정하여 국가가 보호 해 주 는 것입니다. 이 나라 제대로 맹그러 주실분

215 그러나 이 나라는 6.25를 치루는 후 위정자들이 바닥난 경제를 빌미로 저희들 앞가림만 챙기느라 참전용사들을 지금까지 방치 하여 온 것입 니다. 빽없고 힘없는 사람들은 어느 사회나 홀대를 받지요. 하지만 참전자들은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나라의 명을 받고 국민들 을 대신하여 목숨을 바친 참전용사들입니다. 당연히 국가가 보호해 주어야 하는 대상들인 것입니다. 힘이 없다고 배운것 없다고 무시당하는 일반인들과 차원이 다릅니다. 또한 배운것 많고 빽이 좋고 계급이 높은 사람들을 국가에서 보호해 주는 평시의 군들과도 분명 다르지요. 배웠던 못 배웠던 계급이 얕건 높건 목숨을 국가에 바친 사람들입니다. 모두 똑같은 예우를 해 주어야지요. 그런 국가가 제데로 된 국가 아 닙니까. 우리가 피흘리고 목숨 바쳐 벌어 들인 달러로 지금의 경제 대국을 만드는 종잣돈을 마련한 장본인들인데 왜 이렇게 홀대 받아 마땅한 대상들 이 되었는가 말입니다. 국가에선 왜? 참전자들이 혜택을 못 받는가에 대해 예산타령입니다. 6.25후 지금까지 말입니다. 지금 이 나라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라 자랑하고 가난한 나라에 원조도 하는 나라입니다. 정부 건물은 물론 지자체 및 산하 단체 기관들의 호화스런 건물들 보셨지요. 이것이 저희들 대신하여 목숨걸고 나라를 지켜준 분들에 대해 홀대하는 이유 입니까? 더 웃기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원조를 받는 그 못사는 나라들은 참전용사들에게 국가에서 연금을 주며 보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웃기는 것은 국가에서 승인한 단체로 뭉치라는 것입니다. 왜 국가에서 몇몇 지휘관들을 앞세워 지정한 단체에 들어가야만 합니까. 왜 그 들에게 회비를 납부하여야 하고 그들의 지시를 따라야 합니까. 왜 시위대 진압을 위해 정부 출동명령을 받아 국민들과 대치하게 하고 국민들 에게서 멀어지게 하는겁니까...(작년인가 어느 TV에서 방영) 그리고 불참자에겐 불이익을 주겠다고 으름장까지 쳐가며 말입니다. 환갑들이 지난 참전자들을 아직까지 봉으로 생각 하는 모양이더라구요... 우리들은 참으로 바보같은 국민으로서 군에 입대하여 대한민국 군인으로 국가의 명을 받아 영광스럽게 국가에 목숨을 내 놓고 싸우고 돌아와 이헣게 정부에다 위정자들에다 국민들에 하소연 하는 가련한 노인들이 되었습니다... 국가가 보호해 주어야 할 대상들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직무유기인 것입니다. 그런 나라에선 살 필요도 없고 군에 나갈 이유도 없고 전쟁에는 더더욱 참여하여 목숨을 바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군 병력 충원에도 지장을 초래하며 사회혼란이 야기되기 도 국민들을 혼동시키기도 합니다. 지금까지의 정권들이 대한민국 정부가 아니고 침략국 정부였습니까? 이 나라가 침략자들이 운영하는 국가입니까? 참전자들이 다른 나라 군 인들입니까? 일제시대 징집되어 일본군으로 참전한 것이 아니질 안습니까... 일본 통치시대가 아니질 안습니까. 대한민국의 정부에서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온 국민의 몸성히 이기고 돌아오라는 격려를 받으며 열사의 이국땅에 파병되어 목숨을 대한민국에 바쳤습니다... 이 나라 제대로 맹그러 주실분

216 왜 용병이며 양민학살자로 몰아 가는데도 침묵하였습니까? 아직도 국가가 가난하여 국가유공자로 지정하지 않는 것입니까? 분명 잘못 되어 있는 이 현실을 6.25참전 용사님들께 범하듯 예전과 같이 몇몇 지휘관들을 앞장세워 일부에게만 수익사업을 승인하여 이권을 주고 힘없고 빽없고 배운것 없는 나머지 참전자들은 너희 단체가 알아서 하라는 독재적 발상으로 국가는 뒷짐지고 국민을 기만하고 우롱하 고 있습니다. 어느 참전자님께선 이리 저리 모두 뒤적이다 보면 다 아는 관계이니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한데로 뭉쳐야 큰 힘을 내서 정부와 싸워야 하지 안겠느냐는 논리를 펴시는 전우들도 계십니다. 그 뜻 자체는 좋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아가는 판세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정부에서 시키는데로 국가유공자 "예우"라는 딱 지를 받아들이면 그것으로 또 50년은 흘러가니까 말입니다. 국가는 참전자들을 국가유공자로 지정하고 그 유공자단체를 만들어주는것이 순서인 것입니다. 지금 국가에서 단체 운운 하는 것은 그들이 지 정한 참전자 단체를 대표격으로 놓고 그들이 원하는데로 그들과 협의하여 너희들 대표들과 협의한 것이니 잔말 말고 하라는 데로 하라는 식 의 참전자들을 달래고 관리하려는 저의가 깔려있는 겁니다. 참전자님들께선 어느 단체에 속해있건 내 입장이 딱하다고 살기 힘들다고 또는 완장차고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으로 돈 몇 푼에 사탕발 림에 이용 당하여 전우들 가슴에 대못질이나 해대며 세월 보내다 후손들에게 원망 받아야 하겠습니까? 상대방이 만만해 보이지 않으면 따돌림이나 놓고 상대방의 의중은 해아리지 않고 상대방이 내 마음에 안 들면 공격 해대고 자신들 단체에 이 견을 제시하면 돌려세우고 싸우려 들고 헐뜻는 몰지각한 어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도 6.25참전자님들을 원망하였듯 우리도 후배들에게 원망받지 말자는 것입니다. "국가유공자예우"는 이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거절해야 하 는겁니다.... 이 나라가 조용할 날이 없는 것도 다 이런 국가의 기본틀을 무시 했기때문이란 말입니다. 대한민국을 호시탐탐 뒤집으려는 친북 세력에게 좋은 빌미를 주어 그들이 내세우는 주장이 국민들에 통하는 이유란 걸 왜 모른 척 하느냐 말 입니다. 이제 자식을 두고 손주 손녀까지 둔 나라의 어른들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었이고 우리 후배, 자식들, 후손들에게 무었을 물려주어야 할지 는 대다수 국민들도 잘 아실겁니다. 소문대로 "예우"라는 딱지로 결말이 난다면 그 결과를 만들어 낸 합의 단체와 당사자들은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기록 될 것입니다. 이 내용에 대해 우리 국민들은 그게 아니다라고 고개를 저으실 분이 얼마나 많을까요? 많더라도 저는 개의치 않겠습니다. 제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분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이 주장이 제일이라 주장하지도 않겠습니다. 이 나라 제대로 맹그러 주실분

217 또 강요 할 마음도 없습니다. 다만 몇 분이라도 공감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저는 그것으로 행복하겠습니다. 아울러 먼저 올렸던 글들중 울컥한 분개로 일부 지휘관님들에 대해 속어를 사용하여 마음 아프게 한 점 용서를 빕니다. 넓으신 아량으로 이 해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이 나라 제대로 맹그러 주실분

218 나라 살리는 길은 :35 우선 이 나라를 살리는 길은... 대한민국의 원칙은 이거다 허구 참전용사 국가유공자 인정허구 나라위해 목숨바친 모든 영혼들을 위해 각별한 예우를 허구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아 길거리에서 노인장 인민재판 없는 제대로 된 국가로 맹그는 것이 지름길인 고야... 그래야 국민덜이 고개를 끄떡이구 사람 사는 나라 행복한 국가 건설이 이루어 지는거라구... 나라위해 목숨 걸구 전쟁터에나가 천우신조루다 갠신히 살아 돌아왔더만 옆집 개보다도 몬한 취급을 해???...시블시키들이... 언넘이 전쟁터 나갈랴구 허구 나라에 충성할랴구 하겠냐 말이시... 나 같아두 다신 전쟁에 참전 안혀... 시붕시키들아 앞으루다간 전쟁터엔 느그들이 총들구 맨앞에 서서 총알받이 혀 바 바... 글구 장렬허게 뒤져뻐려... 다시는 이 땅에 영~ 영~ 돌아오지 말구... 글구 살아 돌아오믄 우리 같은 참전용사라구 동지하자구 하지마러... 니들 같은 넘들에게 참전용사 설움 바다 바 바... 머시라고라 고라... 느그덜 놀기 좋은 나라는 이 세상에서 요기밖에 없다구라 구라... 그렁께 허는 말인디 제발 이 나라 깨끗허게 맹글구 싶으니까 아주 멀리 꺼지라구... 아직두 내 말 몬 알아 들었어... 다음 아고라에 가 바 바라 거기서 노는 넘들은 위 아래두 엄꾸 안티 대한민국 애덜 지천으루 깔려있어 가지구 대한민국 못 말아 먹어 안달이 난 애덜 천지여... 나라 살리는 길은

219 몽땅 저만 잘나구 저만 제일이구 제 주장만 옳구 저만 똑똑혀대.. 지덜이 애국자레...ㅎㅎㅎㅎㅎ 제 글에 반론이라두 허믄 때거지루다 몰려 들어 무식헌 수구 꼴통이구 민족 반역자구 매국노래... 껀만 있으믄 시청앞 광장이구 어디구 촛불들구 발광하게 맹근는 집합 장소더구만... 근디 가만 생각혀 보니깐 두루... 아고라에 떼거지로 몰려 발광을 떨게 맹근 원인을 분석 해 본 결과 고것이 바루 이 나라를 운영한다는 떨거지들이 고로코럼 맹글었다 요거여... 고것이 다... 저만 잘났고 저만 똑똑허구 저만 먹어야 허구 저만 고귀허구 저만 제일이구 저만 품위있게 살아야 한다는 사고를 지닌 느그들헌티 배운겨 느그들 때문에 그 발광을 하는겨... 이것이 몽땅 느그들 헌티 배운 것이라구 갸들이 곧 느그덜 그라고 우리덜 자식들이야... 시붕시키들아... 그리구는 지들 잘못은 한개두 읍대지... 그렇게 반성두 몬하니깐두루 나라가 요 지경인 고야... 느들이 느들 발등을 발고 찟 이기구 있능겨... 느들이 느들 자식 사는 나라 몽창 맹겨트려 놓은걸 증말루 모르는겨??? 스방시키덜아~~~~ 내 조국 내 청춘 돌려 내놔...~~~ 지난 연평대전때먼 혀도 거기서 전사헌 장병들을 어떻게 대접했니... 오죽하믄 사랑스런 내 조국을 떠나 이민을 갔겠냐... 이 시불탱이덜아... 대중이 떨거지덜 보라구... 나라 살리는 길은

220 개덜 몽둥이 들구 낮들구 경찰 무기 뺏구 군버라덜에게 총질헌 개덜은 국가 유공자자나... 지금 갸들을 보라구... 목숨걸구 충성허구 있자나... 죽기 살기루다 충성 하자나... 이 시붕시키덜아... 느덜이 잘몬하니깐두루 여기조기서 내가 더 옳다구 벼라별 넘들이 나타나 시끄럽게 하구 있자녀 지금... 근본을 해결허구 원칙대로 나라 운영허구 대부분의 국민덜이 고개를 끄떡일 수 있는 나라로 국가를 운영하라는 야기여... 그것이 곧 민주주의구 합리적인 국가인겨...시붕탱이덜아... 장군이구 쫄병이구 몽땅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용사덜 이라구... 왜? 단체 주렁주렁 만들게 허구 몇몇 넘들만 주머니 채워주구 몇몇 똥장군 앞세워 입막음 허구 좌익애덜 촛불켜고 발광하믄 동원시켜 이용허구 니편 내편 갈라놓구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두 몬하는 천하구 무식헌 참전용사로 맹그느냔 말이시... 왜 참전용사 깔아뭉게고 니들만 차고 앉아 돌아가믄서 다 해 쳐먹느냐 말이시... 목숨이 머신지 알도 몬하는 것들이 생명을 중시허구 생명을 존중혀... 목숨은 파리목숨이나 모기 목숨이나 인간 목숨이나 매 한 가지여... 그러는 너그덜 왜 파리채 갖고 휘두르구 함부루다 파리 때려죽이니... 왜 모기약을 이방 저방 뒤꼍이구 뿌려대 모기들 잡아 죽이는 건데... 고걸 모르겠거덩 전쟁에 한 번 참전해 바바... 까불구덜 있어 진짜루... 느들... 나 조심혀... 나헌티 걸리믄... 나라 살리는 길은

221 기냥 아는체만 해 줄께...ㅎㅎㅎ 글구 나라 살리는 길은...

222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인생. 나는 앞으루다가... 느그들을 파리나 모기루다 환생시켜 인간들에게 당해보라구 할겨... 죽어서두 느그덜 지켜보구 힘이 된다믄 느그덜 몽창 쓸어 버릴꼬야...ㅎㅎㅎ 진짜 마지막으루... 이 글 읽구 이해 몬하고 반성 몬하는 넘은 바보 빙신 멍충이...ㅎㅎㅎㅎㅎ 나라 살리는 길은

223 정신들 챙기세요 :43 월남 참전용사 양민 학살자로 몰아 군에 안티주고 대한민국 젊은이들 군대 기피증 일으켜 바 바... 양심에 따라, 종교에 따라, 군대 몬간다구 배짱 부려... 경찰헌티 죽창 들구 얼굴 쑤시구, 경찰헌티 화염병 날리는 넘, 행패부리는 넘, 경찰이 연행하면 인권침해 한다구 악다구리 부리는 넘... 파출소 때려 부시구 경찰차 불질러 버리구,,, 경찰 무기고 탈취하여 경찰관 쏴 바 바... 근디 느네들... 영국이나 프랑스나 미국 다른 나라 가거덩 절대 절대로 그라진 마러... 거기는 인권이고 경제고 세계가 부러워 하는 나란디.. 거기서 그 발광 하다간 작살난다더만...ㅎㅎㅎ 다행히 너그덜 그 발광 하라고 훌륭하신 그 동안과 작금의 국가 어르신들께서 맹그러준 나라닝께 항상 감사 허야 쓰지 않겠냐구... 근디 어따대구 발광을 떠냐말이시... 글구 또 한 쪽 집구석을 볼라치믄... 나만 잘났고 나만 잘했고 나만 깨끗하고 내 주장만이 옳다구 발악을 해도 너그들이 생각하는 멍청한 국민들인줄 아느냐 말이시... 이기심과 욕심으로 가득 채운 너그들 마냥 애덜 어른덜 몽창 맹겨트려 놨자나... 글구... 본론으로 들어 갈라치믄... "참전유공자 예우 및 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법률안"??? 놀구들 있네...시봉들... 어느 똥별 출신이 6.25참전 전우들을 정신들 챙기세요

224 어려운 여건속에서 국가유공자 "예우"로 맹글어 놓았다구 자랑하더만... 또 어느 똥별들 앞세워 똥구녕 긁어 주고 입막음 시키려고 작난질이야... 그렇게들 헐 일들이 없니... 그렇게들 머리리가 안 돌아가니??? 그러니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맹그는고야 이 빙신들아... 이 시봉알 같은 꾼들아~~~~ 왜??? 참전용사들 가지고 장난치냔 말이시... 국가 유공자면 국가 유공자지 얼어죽을 "참전유공자 예우"가 모냐 말이시... 왜 참전똥별들 내세워 입막음 시키고 분열시키며 참전자들의 공로를 희석시키느냐 말이시... 선진국 들먹일거도 음따. 북한의 6.25 참전자들은 영웅칭호를 받고 국가에서 멀정하게 나름대로 좋은 대접받고 살아왔단다. 지금 월남을 가 바라 그 못사는 나라에서 조차 우리와 싸웠던 베트콩들이 국가에서 연금을 받고 있단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 참전용사 홀대하는 나라 있으면 대 바 바...시봉들아~~~~ 호주에선 이민간 우리 월남 참전용사들이 시민권만 따도 그 나라 유공자 대접을 받는 단다... 호주경제가 울나라보다 더 높으니???... 지금 울나라 경제가 아직도 그렇게 어렵니???? 각종 세금 뜯어 멀쩡한 보도블럭 년말만 되면 뜯어 재끼구 정치인들 빼먹고 공무원들 빼먹고 산하기관 임직원들 빼쳐먹고... 이게 돈이 없어 참전자들을 방치하는 이유니???? 시봉들아... 우리나라 경제가 세계11위니 어쩌니 하는데... 시봉 후 어려운 경제 속에 참전용사들에 못다한 미안한 마음 추호도 없고 60년대 옥수수가루 배급타서 가족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죽을 끓여먹던 시절 국가의 명을 영광스럽게 받아 목숨 걸고 충실히 수행한 우리 전우들을 이렇게 가지고 장난치니 나라가 이 모냥 아닌가 말이시... 이게 다 목숨걸고 전쟁에 참여 하여 나라를 지키구 정신들 챙기세요

225 참전 수당 마구마구 긇어모아 나라 갱제 부흥케한 6.25와 월남전쟁에 참여한 진정으로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내 가족 내 이웃을 지켜 반듯하게 맹근 꼬부랑탱이 할부지님들 덕분 아니겠어... 근디 이렇게 근본부터 흔들어 놓아도 기분 좋으냐 말이시... 근디 이거이 누구네 나라랴???? 애구구... 누가 나라를 요 모냥로 맹그러 놨데... 아마 내노라 하는 분덜... 남을 이해하고 남을 용서하고 이웃과 함께 하자시던 말씀을 주렁주렁 달고 댕기시는 분덜... 지도자라 자청하시는 분덜... 티비에 얼굴 많이 내 미는 분덜 같은 감은 드는디...ㅎㅎㅎ 정신들 바짝챙겨 빙신꾼들아... 뱃지 달고 공식적으로 나라 말아 먹고 정일이에게 바쳐지기전에... 정일이에게 가믄 빙신들은 개털되구 진짜루 빙신되는기여... 어느 것이 우선이고 무었이 나라를 위하는 건지... 가만 있으니까 넘 까불구덜 있어 진짜루... 내가 대통령되믄 니들 다 디졌어 기둘려 바 바...시봉 시키덜... 정신들 챙기세요

226 아니꼬우면 출세를 해 :56 아님 참전용사 해 보던지... 아님 철판 깔고 운동권에 뛰어 들어... 민족과 민주를 들먹이며 반미 반정부 운동 하고 아무 개념없이 정치한답시고 깃대들고 죽창들고 뛰어바... 주위에 노인네 얼신 거리면 멱살잡고 욕바가지 날려바.. 주위의 시뻘건 애들 몰려들어 인민재판 재밋거던 영웅 되거던...신문에 인터넷에 방방 뜨거덩... 대통령 한 번 해 바 바 민초들의 염원은 뒷전이고 각종 이권 개입하여 검은 돈 챙기고 통일 한번 시도한다고 정일이 한 번 만나 바 바 한민족 돕는다고 달러 마구 보내고 5조 보냇다구 허구 5천만 줘 바 바 나모지는 먼 나라 은행에 짱 막어 놓으면 그게 어디루 가겠어???ㅎㅎ 노동운동 한답시고 노동자들 운영비 빼쳐먹고 높은자리 꾀어 차고 앉아 제 가족 군 면제 받게 유학 보내 바 바... 미국 영주권 취득하여 군면제 받아 고국에 돌아와 재벌 노릇 시키 바 바...ㅎㅎ 자식들 정 시킬거 없으면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네팔에 보내. 거기서 의사면허 취득시켜 보훈병원에 보내 바 바 앞에 참전자들 쪼구리게 앉혀 놓구 큰고리 빵빵 치고 약올려 바 바 또 제약사에서 리베이트도 받거덩... 글구 젊은 의사넘이 아니꼽다구 악을 쓰면 개는 급수도 못받게 끋내버리거덩... 또 제몸 시원치 안으면 국가유공자로 만들어 버리고... 느그덜 총알이 빗발치고 포탄이 작렬하고 전우덜 푹푹 쓰러지는 전쟁터에서 총들고 싸워 봤니???? 전쟁에 참전도 해보지 못했다면 말을 하덜마~~~~우~~~씨... 아니꼬우면 출세를 해 226

227 예라 이 개가 뜯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썩은 이 시불탱이 넘들아 제대로 된 반듯한 국가건설엔 관심 없는 대책없는 인간들아~~~~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도 나라가 잘 살아도 어느 시블탱이 하나 정권 잡아도 잡으면 나 몰라야... 지들만 잘났고 지들 헌 일만 훌륭하데... 지가 받은 검은 돈은 저는 한 점 부끄럼이 읍데... 돈 없고 배운 것 없고 빽없던 젊은 영혼들이 군바리 끌려나가 월 40~50불을 받고 월남 전쟁에 참전하고 돈 벌러 전쟁에 참전했단 야유 받고 M1 소총으로 AK47을 상대하다 참전용사 5,000여명이 전사했고 양민들 틈에 숨어 우리들에 총질하는 베트콩 죽였다고 몸서리 쳐지는 양민 학살자라는 누명이나 쒸우고 고엽제 등 각종 전쟁후유증에 시달리는 참전용사 외면하고 작전 나가 꼬리뼈 다쳐 지금까지 오리궁뎅이로 살아가는 말뚝 첨병 분대장을... 국가에선 뒷짐 지고 정치인들 눈치나 살피다가 나 몰라라... 월남 참전 비용 이리 빼고 저리 빼서 경부고속도로, 포헝제철 지어 저희 정치 떨거지들 뜯어먹느라 빠쁘고... 돈 없고 배운 것 없고 빽없던 6.25나 월남 참전용사들만 봉인거야... 국민들만 봉인거야... 이게 지금 대한민국 현실이라면 너는 어쩌겠니??? 돈이 없어 애덜 유학도 몬 보낸다구... 애구구... 이 몬나나... 아니꼬우면 출세를 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한 번 해 바 바...ㅎㅎ 뭐좀 안다구 아는 체 하지덜덜 마시궁... 잔머리 굴려가며 완장 차려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돈 몇 푼에 전우들 가슴에 대못질 하는 그런 전우는 제발 되지맙시다... 아니꼬우면 출세를 해 227

228 유월의 통곡 :11 유월의 햇살은 따가웠지만 그 빛은 찬란했습니다. 관악산 기슭에 우뚝솟은 공작봉이 좌로 청룡을 거느리고 우로 백호를 거느렸으니 삼면을 병풍처럼 들러싸고 용머리가 고개를 길게빼어 아리수를 먹음은 신후지지( 身 後 之 地 )라 43만평 광활한 성역에는 은은한 천상낙음( 千 上 樂 音 )이 사시사철 가득했습니다. 유월의 통곡 228

229 조국을 위해 목슴을 초개같이 버렀습니다. 자유수호를 위해 장열히 산화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형제 처자식도 그들의 충절에는 곁전이였습니다. 오직 불타는 장부의 기개 그 하나로 지옥같은 불밭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유월의 통곡 229

230 혹자는 말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목슴바쳐 지켜준 이 조국이 당신에게 무엇으로 보답했느냐고? 유월의 통곡 230

231 저들 호국영령들은 답합니다. 우리는 다만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랬노라고... 그것이 이땅에 사나히로 태어난 의무라고 생각했을 뿐이라고... 그 무슨 댓가를 바라고 이 한몸 던지지를 않았노라고... 유월의 통곡 231

232 꽃한송이 술한병 사들고 열대의 나라 이국땅에서 한줌재로 사라진 전우들을 찾아 헤맵니다. 사십년의 맺히고 맺힌 한스러운 통곡을 그들과 함께 쏟아놓기 위해 여기기웃 저기기웃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다닙니다. 저이는 맹호인가? 저이는 백마인가? 저이는 청룡인가? 1969년 월남에서 전사... 딸랑 이 몇글자 옆에 왜 그들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모자에 어께에 부적처럼 달고 다니던 내 소속마크를 적어주지 않았단 말인가. 유월의 통곡 232

233 끝도없이 세워져 있는 비석들 사이로 간간히 흐느끼는 오열소리가 들립니다. 이제는 눈물도 매말랐겠지요. 철없는 아이들이 소풍온듯 뛰어 다니는 모습에 또한번 가슴에 검은피가 솟구칩니다. 이렇게 그들은 곧 잊혀져 가겠지요... 유월의 통곡 233

234 왕색극락을 비는 오색연등이 산사의 대웅전 앞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산다는것과 죽는다는 것. 영원히 풀수없는 이 화두속에 갇혀서 백팔번뇌의 끈을 놓지못하고 허덕이는 중생들의 삶 이라면 지금 반평도 않되는 돌무덤에 누워있는 전우들이나 아직은 살아있는 우리들이나 무어 그리 멀고 먼 간극일까요. 유월의 통곡 234

235 송곳처럼 내려 꽃히는 한낮의 따가움도 아랑곳 하지 않은채 백발의 할머니 한분이 아까부터 요지부동 망부석마냥 앉아 있습니다. 차가운 비석에는 <육군하사 이건열 >라는 이름석자가 선명합니다. 펄럭이는 촛불옆에 타고난 향재가 수북한걸 보니 아마도 아주 오래 그렇게 앉아 계신가 봅니다. 인사를 하고 잠시 비목을 향하여 읍한후 할머니와 얘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다음 얘기는 할머니께서 더듬더듬 하시는 사연을 정리해본 것입니다. 유월의 통곡 235

236 월남전이 한창이던 1967년 이건열 병장은 부모님께 장문의 편지를 썼다. 월남에 자원하여 1년간 복무하면 전투수당이 나오므로 제대후 그것으로 대학입학금을 마련 할수 있으며 또한 이 기회에 아버지를 죽게한 공산당에 대한 원수도 갚을수 있으니 너무 걱 정을 마시라는 내용이였다. 유월의 통곡 236

237 . 파병된 이건열 병장은 수색정찰임무를 맡았고 수시로 야간 매복작전에 투입되었다. 크고작은 작전에 수없이 참가하였으나 다행히 별 사고없이 복무하던 중 불행은 한창 우기 철인 9월경에 일어났다. 수색정찰을 나갔던 이건열 병장의 조가 베트공의 역매복에 걸려든 것이다.. 결국 이 전투에서 이건열 병장은 장열히 전사했고 가족에게 통보가 왔을때 그의 어머니는 평소 결혼을 약속했던 박인순 처녀와 근처 절에서 아들의 무운장구를 비는 백일치성을 드 리던 중이였다. 유월의 통곡 237

238 한줌의 싸늘한 재로 돌아온 아들의 주검앞에서 어머니는 혼절했다. 국립묘지에 안장되던 날도 울고 또 울다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아품이 자식을 가슴에 묻는 다는 것인데... 유월의 통곡 238

239 사랑하던 연인을 잃은 박인순 처녀는 그로부터 얼마후 돌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우연한 교통사고라 했지만 이건열 하사의 어머니는 자살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럼 저 사진은 언제 찍은겁니까?" 묘비앞에 세워져 있는 두 젊은이가 나란히 있는 사진을 보며 물었더니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둘다 처녀 총각이였으니 어찌 그냥 있겠어? 영혼결혼을 시켰지. 한풀이굿을 하는데 우리 아들과 저 처녀가 나타나서 고맙다며 저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겠으니 아무 걱정 말라고 하더라구...잘 살께야. 암 잘 살고 말고..." 유월의 통곡 239

240 40여년을 할머니는 한결같이 그 머나먼 광주에서 이곳 아들의 안장터까지 명절때마다 올라 오신다고 했습니다. 아침 새벽같이 출발하여 국립묘지에 도착해서 묘지앞에 앉아 있다가 막차를 타고 내려 가신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둘째아들이 데려다 주어서 그래도 한결 다니시기가 편하시 지만 그도 현충일 뿐. 다른 때는 아직도 불편한 거동을 이끌고 혼자서 아들의 묘를 찾는다고 합니다. 따가운 햇살에 짓무른 눈가가 너무 안타까워 좀 그늘에 가서 쉬시라고 해도 "우리 아들은 저렇게 햇볕에 있는데 위찌코럼 나만 그려. 갸는 내가 죽인거여. 내가 죽인거여...돈때문에 내가 죽인거여..." 유월의 통곡 240

241 슬픈고 애닮픈 사연들이 어찌 이 뿐이겠습니까. 멀리 마치 군대가 정열하듯 나란히 서있는 묘역들을 바라보며 그 하나하나에 맺혀있을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생각하니 또다시 가슴이 메어져 옵니다. 유월의 통곡 241

242 창자가 끊어지는 전쟁의 추억을 안고 살아남은 그때 그 전우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습니다. 누워있는 전우들의 영전에 한잔술 올릴적에 소리없이 통곡했겠지요. 유월의 통곡 242

243 . 살아 있어도 산것이 아닌 전쟁의 상흔. 이제 얼굴은 온통 주름지고 걷는 걸음은 비틀거리니 영락없는 상 늙은이들이지만 그들 눈에 흐르는 눈물만은 뜨거운 것ㅡ 바로 조국애 그것일 것입니다. 유월의 통곡 243

244 어쩌면 유월이 채 가기도 전에 사람들은 이곳을 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다음 다음 이날이 돌아오면 또 호들갑스럽게 검은 옷을 입고 향을 피우고 조총 을 쏘고 그렇게 눈에만 보이는 <행사>를 하겠지요. 그러나 이것만은 절대로 잊지 말아 줬으면 좋겠습니다. 저기 저곳에 줄마춰 서있는 비목아래, 진정한 대한민국의 사나히들이 잠들고 있음을... 현충일에 ㅡ (자료제공:베트벳 글: 심대흥) 유월의 통곡 244

245 나의 삶 나의 낙서 블로그 저자 ohmyweb 융이 발행일 :43:18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복제와 전재를 금합니다.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2007. 4.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개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2007. 4.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개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인 천 광 역 시 의 회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2007. 4.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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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2014 7 18.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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