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계 통일준비 네트워크 형성에 관한 연구 :종교연합기구(KCRP)를 중심으로 윤창원 도산통일연구소 정책실장 제1장 서 론 3 제2장 북한의 종교정책 변화 9 제3장 통일의 종교적 당위성 15 제4장 남북한 종교교류의 성찰 21 제5장 한반도 평화에 있어 종교계의 역할 25 제6장 남북종교교류의 평가와 전망 34 제7장 결론-종교계 통일준비네트워크 정책 제안을 중심으로 46 [참고 문헌] 49
요 약 문 남북 종교교류의 역사는 짧지만, 그 성과와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갈 수록 그 현실적 의미와 결실이 증대하고 있다. 정치ㆍ경제ㆍ문화ㆍ학술ㆍ예술ㆍ종교 분 야 등에서 다양하게 남북한간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분야에서의 교 류와 협력 가운데, 이 글에서는 종교분야를 중심으로 살펴보지만 그간 개별종교기관을 중심으로 교류를 하면서 느끼는 한계를 살펴보고 향후 통일준비과정과 통일이후 종교계 가 공동으로 통일준비를 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 지 살펴보고자 한다. 남한에는 개신교, 대종교, 불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천주교, 통일교, 한국민족종교 협의회 등 다양한 종교가 활동하고 있다. 남한내의 개신교, 기독교, 불교의 경우, 북한내 종교관계자와의 직접적인 교류가 불가능하였을 때, 오랜 동안 국제적인 채널을 통해 제 3국을 통해 북한과 교류해 왔으며 최근에는 직접적인 남북한 종교교류의 주된 역할을 하 고 있다. 반면, 남북한 종교교류에 있어서 한국 자생종교의 경우, 역사가 깊은 천도교를 중심으로 종단별 직접적인 교류가 시도되고 있지만, 국제적인 종교교류가 결핍되어 있으 며 아직 초보적 교류의 단계를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각 종단 관계자들이 대북 지원과 관련한 모니터링 등의 명목 으로 북한을 방문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고, 대북 지원의 패턴이 단순 물자 지원에서 종교적 특성을 가미한 직접적인 지원의 형태로 확대되면서 종교교류의 양상 역시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게 된다. 특히 90년대에 들어오면서 불교가 미국 LA에서 최초의 남북접촉을 갖기 시작하면서 천도교, 대종교, 원불교 등으로 접촉의 폭이 더욱 넓어졌다. 1995년에 북한 지 역에 대규모 수해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북한이 외부세계의 지원을 받아들이기 시작함에 따라 남한 종교계의 대북 지원과 접촉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80년대 초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거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변화가 아닐 수 없으며, 2000년 남북 정 상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토대가 되었다. 남북교류가 2009년 18만 명을 상회하다가 정점으로 하향하여 2009년 12만 명, 2010년 6 월까지 6만 명 선으로 점차 줄어든 현황과 더불어 남북한 인적 물적 왕래가 감소한 것을 2009-2010년 통일백서 통계자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NGO와 종 교단체 등 다양한 민간기구와 국제기구의 대북 접촉은 나름의 남북간 긴장 가운데 화해 를 위한 오아시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민간단체의 활동은 미래 통일민족을 위한 초석을 놓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 통일한국을 실 현시키기 위한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좋은 씨앗 뿌리기 방법론으로 비록 남북한 간 의 돌발 사태로 정책적인 교류의 단절이 있더라도 민간단체와 국제기구가 지속적인 협력 을 통해 북한 민간단체와의 대화 창구를 열어놓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남북종교교류 전개과정을 보면, 각 종단마다 독특한 특성을 지니면서도 전반적으로는 일정한 범위와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남북종교교류가 진행될 수록 초기에 -1-
우려되었던 북한의 통일전선전략에 이용 가능성은 불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북종교교류 는 접촉이 거듭될수록 북한체제의 속성과 여기에 속한 종교인들의 위상을 보다 정확히 알 게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남북 종교인 사이의 교류가 대부분 제3국이나 국제종교단체에 의해 주선된 간접교류에 머물렀고, 만남의 장소도 제3국에서 주로 이루어져 간접적인 교류 형태에 의존하는 현실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그동안의 남북한간의 종교교류에 나타난 몇 가지 문제점을 아래와 같이 들고 있다. 첫째, 종교교류가 순수한 종교적 만남과 교류로 진행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둘째, 남북한 종교인들의 만남이 동상이몽의 상태였다는 것이다. 북한은 통일을 내세운 대남 전략적 효과를 기대한 만남에 주력했고 남한은 북한 선교나 포교의 발판을 만들기 위한 포석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계의 효율적인 대북접촉이나 지 원사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셋째, 남북한의 체제차이를 염두에 두지 못한 채 교류를 시도함으로써 지속적인 접촉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울러 남한내 개별종교기관의 접촉이 단일화된 북한종교 기관들의 이용대상이 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종교계의 남북한 교류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종교계가 가진 통일준비 역량 에 비해 북한의 체제유지를 위한 단체인 북한 종교단체들에 이용되었다는 비판도 있는 상황이다. 이에 종교계 내부의 통일준비 역량을 모아 북한교류에도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고 나아 가 통일준비와 통일이후 사회문화적 갈등을 해소해 나가는 정책방향을 세워나가야 할 것 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 사업을 실현할수 있는 종교계 통일준비 네트워크와 같은 기구 설립과 연구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각 종교 단체의 통일, 선교, 포교와 관련된 내용을 정리해 각 종단에서 합의할수 있는 느슨한 정도의 북한교류협력에 대한 이념적 방향을 제시해야할 것이다. 이는 북한 과의 교류협력에 있어 기준이 되기도 하지만 향후 통일이후 북한사회에 개별종교기관들 이 선교나 포교를 하는데 있어서 방향이 될 수 있다. 둘째, 인도주의적 대북지원 사업에만 치중해 왔던 종교계가 남남 갈등의 조정과 중장기적 인 통일 준비과정에서 주요 역할자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소극적이고 비체계적인 준 비 자세에서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준비자세로의 전환이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선교/포교 만을 목적으로 삼는 종교 내부적 이해관계를 넘어 한반도가 평화 경제 민족공동체 로 진 전해나가는데 종교계가 기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준비가 요청되는데 필요한 종교계 통일준 비 네트워크 형성이 필요하다. 셋째, 통일 관련 급변 사태 내지 통일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 가칭 종교계 통일준비네트 워크와 같은 기구를 통해 정치와 제도상의 통일 이후 실질적 사회 통합을 위해 종교 계가 취할 자세와 방법은 무엇인지, 그리고 실질적으로 이러한 목적에 기여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취할 수 있는 통일된 방향과 정책은 무엇인지를 찾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넷째, 종교계 통일준비 네트워크 구성을 위해서는 이번 연구에서 미진한 각 종교별 통 일자원역량 파악과 종교계 통일준비를 지속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2-
1. 서론 2007년 12월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에 기존의 보수주의를 탈피한 중도실용주 의 를 중심으로 대북정책이 이루어졌다. 북한에 대한 실용적 접근은 한 미동맹강화와 중 일 대외정책에 대한 안정적 관계를 우선시하는 목표였다. 중도실용주의 노선은 남북한의 관계를 보다 더 견실한 관계를 만들기 위한 정책적 결 정이었지만, 2009년에 들어오면서 북한의 로켓시험발사(2009. 4.5), 제2차 핵실험(2009. 5.25)에 UN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1874호(2009. 6. 12), '대량살상무기(WMD) 확산방지구상 (PSI)'에 적극 참여 등으로 1) 인해 남북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2010년에는 더욱 공격 적인 북한의 태도가 천안함 침몰사건(2010. 3. 26)과 연평도 포격사건(2010. 11. 23)으로 대북관계에 중대한 전환점을 가져오게 되었다. 남북관계의 위기감이 극도에 이르고 양 측의 비방은 강도가 증가되면서 2011년 금강산 제재와 5.24 조치로 지난 남북한 정부가 일궈온 모든 성과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은 남북간 사회문화교류 가 급격하게 감소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후 박근혜 정부도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원칙속에 대북정책을 펼치고 있다. 2012년에 는 제한적이긴 하지만 종교 분야에서 종단별 형평성과 대표성 등을 고려하면서 순수 종 교 교류 차원의 방북을 허용하였다. 정부가 2012년 3월과 9월 중국 베이징, 선양에서 이 루어진 남북 종교인 사이의 접촉을 허용함에 따라 20개 단체가 실무협의를 진행하였다. 실무협의 결과를 바탕으로 10월 이후에 남북 공동행사가 개최되었다. 불교계에서는 2012년 10월 13일 조계종이 신계사에서 신계사 낙성 5주년 합동법회 를, 11월 15일에는 천태종이 영통사에서 대각국사 다례제 및영통사 낙성 7주년 합동법 회 를 개최하였다.한편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가 2012년 11월 13일에서 17일까지 신 천군청계동 생가, 남흥중학교(전 삼흥학교) 등 안중근의사 유적지를 방문하고 평양 장충 성당에서 미사를 열었다. 대북지원사업자인 (사)평화3000 은 11월 17일에서 21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장충성당에서 통일기원 합동미사 를 가졌다. 2) 남북의 정치적 군사적 대립구도가 대화를 단절시키고 서로 위협적인 상태로 치달아가 는 상황에서 남북관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남북문제는 정 부 당국자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 문제로서 한반도 평화를 이루기 위한 민 중의 주체적 자각과 운동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자칫 또 다른 비극이 될 수도 있는 한반도의 분단상황에서 이념적 갈등을 상생( 相 生 )의 철학으로 풀어 가는 작 업이 중요하다. 1) '대량살상무기(WMD) 확산방지구상(PSI)'은 2003년 6월 미국 조지 W 부시 정부의 주도로 이루어진 정책으로 가입국들은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WMD)를 수송하는 항공기나 선박 정보를 교환하 고, 해당 선박을 가입국 영해에서 검색할 수 있게 한다. 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노무현 참여정부 는 2006년 북한 핵실험이후에도 남북 무력 충돌 가능성을 우려하여 PSI 전체 8개항 중 5개항에만 참여 하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북한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PSI 전면 참여를 2009년 5월 26일자로 공식선언하였다.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09/05/26/) 2) 통일부, 2013년 통일백서, pp.341-342. -3-
남북 종교교류의 역사는 짧지만, 그 성과와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갈 수록 그 현실적 의미와 결실이 증대하고 있다. 정치ㆍ경제ㆍ문화ㆍ학술ㆍ예술ㆍ종교 분 야 등에서 다양하게 남북한간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분야에서의 교 류와 협력 가운데, 이 글에서는 종교분야를 중심으로 살펴보지만 그간 개별종교기관을 중심으로 교류를 하면서 느끼는 한계를 살펴보고 향후 통일준비과정과 통일이후 종교계 가 공동으로 통일준비를 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 지 살펴보고자 한다. 남한에는 개신교, 대종교, 불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천주교, 통일교, 한국민족종교 협의회 등 다양한 종교가 활동하고 있다. 남한내의 개신교, 기독교, 불교의 경우, 북한내 종교관계자와의 직접적인 교류가 불가능하였을 때, 오랜 동안 국제적인 채널을 통해 제 3국을 통해 북한과 교류해 왔으며 최근에는 직접적인 남북한 종교교류의 주된 역할을 하 고 있다. 반면, 남북한 종교교류에 있어서 한국 자생종교의 경우, 역사가 깊은 천도교를 중심으로 종단별 직접적인 교류가 시도되고 있지만, 국제적인 종교교류가 결핍되어 있으 며 아직 초보적 교류의 단계를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 당국은 대북 지원 확보를 위해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조선불교도련맹, 조선천도 교 중앙지도위원회, 조선카톨릭교협회 4개 종단과 2006년 활동을 시작한 러시아정교회가 있다. 3) 종교협의체기구로서는 남한에 한국종교인평화회의(Korean Conference on Religion and Peace)와 종교지도자협의회에는 6대 종단(개신교, 불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천주 교)과 민족종교협의회가 함께 참여하고 있다. 4) 한국종교협의회에는 6대종단과 통일교가 참가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발생한 민족종교들의 협의체인 한국민족종교협의회 등의 종 교연합체가 활동하고 있다. 반면, 북한에는 조선종교인협의회(Korean Council of Religions) 5) 에 개신교, 불교, 천도교, 천주교 등 4대 종단의 협의체가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조선종교인협의회 등을 통해 한국 내 관련 종단 및 기관을 접촉, 대북 지원을 이 끌어냈다. 이에 대해 남한의 주요 종단들은 인도적 차원의 대북 지원을 통해 북한을 방 문하는 기회를 확보하고, 방북 기회를 통해 북한 내 종단 사정을 살펴보면서 선교 및 포 교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등 다각적인 접근노력을 계속해 오고 있다. 남북한 종교교류는 한반도의 정치상황과 주변국가들의 변화와 깊은 연관성을 지니면서 이루어졌다. 1945년 8 15광복 후 동서냉전체제의 상황에서 미국의 한국에 대한 통치전략은 남북한 분단상황을 기정사실화하여 친미 반공이데올로기를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노길명 은 미군정의 통치전략에 의한 종교 정책을 친미 반공이데올로기의 관철과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하거나 그것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종교들은 지원하고 그에 반대하거나 저 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종교들은 억제하는 것 이었다고 본다. 6) 남한의 정부가 종교를 정 3) 북한에는 현재 조선불교도련맹, 조선기독교도련맹, 조선천도교 중앙지도위원회, 조선천주교인협회가 대 표적인 종교단체이고, 그 외 조선유교련맹, 러시아정교회 등이 있다고 알려졌다. (주 3 : 내외통신, 제 627호, p.26; 신법타, 북한불교연구, 민족사, 2000, pp.95~96 재인용) 그러나, 실제로 조선유교련 맹의 활약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4)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에는 개신교중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가 참여하고 있고, 종교지도자 협의회에는 개신교중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참여하고 있다. 5) 조선종교인협의회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조선카톨릭교협회, 조선불교도련맹, 조선천도교 중앙지도위원 회 등 4대 종단의 연합기구로 1989년에 출범하여 1991년 네팔 카투만두에서 개최된 아시아종교인평화 회의(ACRP) 총회에 참가, 회원으로 가입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내 6대종단 협의체인 KCRP 와의 접촉을 갖게 된다. -4-
책적으로 이용한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정교분리의 원칙을 바탕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 된 반면, 북한의 종교정책은 종교 또한 철저한 국가의 통제하에 제한된 자유가 보장된 경우 라 볼 수 있다. 1950년대 및 60년대에, 한반도 전쟁이후 휴전선을 사이로 남북은 완전히 갈라졌으며, 정치, 경제, 외교 등의 전반적인 부분에 있어서 대치와 분리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남북 어느 쪽에서도 정치, 경제 및 종교 분야에서 전혀 접촉이나 교류를 제안하지 않고 약 20여 년 동안 적대적 관계를 197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를 북한 연구소의 북한총람 에서는 종교 탄압시기 종교말살시기 로 보는 반면, 고태우는 종교의 제거기 종교부재의 갈등기 로 보았고, 법성은 혁명발전단계에서의 종교 계속혁 명단계에서의 종교(58~현재) 로 보았으며, 윤이흠은 해체기 (53-70)로 보았다. 반면, 김흥수ㆍ유대영은 사회주의 속에서의 생존 모색기 (53-72) 로 설정하고 있다. 7) 이것은 송두율의 내재적 (immanent) 사회주의 분석방법에 의한 북한체제 입장에서 본 시기설정 이라 여겨진다. 이 시기는 사회주의화 정책 정립과정에서 사회체제 재정비와 종교의 재정 리과정에서 나타난 기존종교의 해체 및 말살시기(1954-72)로 볼 수 있다. 1970년대에 들면서 남북간의 대화는 한반도의 정치적인 역학관계와 주변국가의 냉전체 제가 화해의 방향으로 전환하면서 이루어졌다.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 국가들이 책임져 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닉슨 독트린 이 발표되고 8) 1972년 2월 미국 대통령 닉슨은 중국의 모택동(마오쩌뚱) 등을 만나는 일을 성사시킴으로써 미국과 중국의 수교, 일본과 중 국의 수교, 10여 년 간 지속되었던 월남전의 종식 등제 2차세계대전 이후에 지속된 세계의 냉전체제는 해빙의 물결을 타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 8월 15일 평화통일구상선 언 을 발표하였으며, 9) 북측은 1971년 4월 12일 허담 외상의 최고인민회의 제4기 제5차 회 의 보고를 통하여 8개 항목의 평화통일방안 을 제의함으로써 남북한간의 정치적 협상이 이루어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10) 1971년 1월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이산가족 서신 교환을 제의하면서 남북대화는 적십자사를 통해 진행되었다. 11) 11월부터는 정치적 대화를 위한 비밀접촉이 판문점에서 진행되었으며, 1972년 5월 남한의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과 북한의 당시 제1부수상 박성철이 각각 평양과 서울을 비밀리에 교차 방문함으로써, 7월 4일에 역사적인 7ㆍ4 남북공동성명 을 발표하는 성과를 가져왔다. 그동안 드러나지 않 았던 북한의 종교활동 또한 대내외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조선기독교도 련맹,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 조선천도교회중앙지도위원회 등이 생긴 것도 이 시기이 6) 노길명, 한국신흥종교 연구 (경세원, 1996) pp. 3-4. 7) 김흥수 류대영, 북한종교의 새로운 이해 (다산글방, 2002), p. 60. 8) 1969년에 발표된 닉슨 독트린 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Nam(1986)의 글 참조. 9) 국토통일원 1982, 300~303. 10) 허담이 제안한 8개항은 1 미군철수, 2 10만 이하로 감군, 3 한미방위조약 등 민족의 이익에 배치되 는 조약의 폐기, 4 남북총선거, 5 각 정당 사회단체의 활동 보장, 6 과도적 조치로서 남북연방제의 실 시, 7 광범위한 교류의 실시, 8 이상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남북정치협상회의 개최 등이었다. 최성철, 판문점을 통한 남북한 교류, 접경지역중심-남북교류방안 (통일부, 2002) 11) 이와 관련하여, 1971년 최두선 대한 적십자사 총재가 남북간 가족찾기운동을 북한측에 제의했고, 북한 측의 손성필 위원장이 화답함으로서 당해 8월부터 공식적인 접촉이 이루어졌다. 조한범(통일연구원 연구 위원), 남북한의 자주적 교류협력 강화와 교회의 역할, (KNCC 2002평화통일정책협의회발제문) (KNCC Homepage 자료) -5-
다. 12) 1980년대 개신교, 천주교, 불교 관계자들은 제 3국을 통해 국제적인 회의와 협의체를 통해 남북한 종교인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북한은 1972년 남북대화 시작과 더불어 외부 환 경의 조성을 위해 종교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종교인들의 활동을 대외적으로 선전하면서,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종교단체의 활동도 활발하다고 주장하였다. 북한 의 사회주의 이념적 변화와 종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일어나면서 북한의 대외적 종교활 동도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대외적으로는 북한은 국제적인 네트웍을 형성하고 있는 개신 교를 중심으로 해외동포와의 접촉을 시작되었다. 1981년 11월 3일부터 11월 6일까지 4일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의 대화 가 이루어졌 고, 1982년 11월 3일부터 11월 5일까지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남북한 종교 인간의 교류가 다시금 재개되었다. 개신교인은 국제종교기구인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였고, 천주교는 바티칸 교황청과 접촉하여 상호방문의 성과를 이루었고, 불교도는 세 계불교도우의회(WFB)에 가입하였으며 공산권국가의 불교가 중심으로 구성한 아시아불교평 화회의(ABPC)에도 참여하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국내 정치상황이 급변하면서 천주교가 바티칸을 매개로 하여 평양을 공식 방문하고, 북한에서도 80년대 중반 이후 종교정책의 과감한 전환을 가져 왔다. 종교를 본격적으로 대외에 알리기 위한 노력과 함께 기독교의 경우, 1988년 11월에 평양에 처음으로 봉수교회가 세워졌고, 칠골교회가 1992년 12월에 준공되었다. 천주교의 경우는 장충성당이 1988년 9월에 세워져 소수 천주교인들이 미사를 보고 있는 것이 확인되 었다. 불교의 경우, 문화재 보호와 주체건축으로서 사찰 복원과 전문관리자로 승려를 임명 하였다. 13) 조선기독교도련맹(조선그리스도교도련맹이 옛 명칭)은 1983년에 신약성서를 발 간하고, 1984년에 구약성서도 발간했으며 또한 1990년에는 신 구약 합본 성경과 음표가 있 는 찬송가를 1만권씩 인쇄하기도 했다. 천주교의 경우 1989년 6월 30일에 조선천주교인협 회가 설립되어 대외적인 창구 역할을 하기 시작하고, 1991년에는 교리서와 가톨릭기도서를 발간하였다. 불교의 경우 60여 개의 사찰이 복원되어 이곳에서 법회와 석탄절 행사 등이 이 루어지고 있으며, 1988년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에서는 전 25권의 팔만대장경 해제본 을 간행하였다. 천도교 북조선 종무원도 1989년에 천도교리대요, 천도교약사, 천 도교 청우당론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의전해설 을 간행하였다. 1990년 1학기에 김일성 대학 역사학부 안에 종교학과가 개설되었으며, 해외교포 성직자의 방북초청과 해외교포 이 산가족 방문을 허용하면서 재미교포인 홍동근 목사가 여기서 기독교학을 강의하기에까지 이르렀다. 14) 이러한 북한의 움직임은 1980년대 말 이후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은 12) 김흥수 류대영, 앞의 책, pp. 123-125. 13) 북한총람, p. 1228 등 참조. 14) 종교에 대한 관심의 증가와 재평가 작업은 종교에 대한 학문적 탐구를 요청했다. 1988년 김일성 종 합대학에 종교학과가 설립되었고 이듬해에는 학과 내에 기독교 강좌가 신설되었다.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는 개교 때부터 역사학부에서 불교, 천도교, 회교 등을 가르쳐왔는데, 종교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연구가 필요해지면서 이것을 단독 학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기독교가 전공으로 추가된 데에는 문익환 목사 등 의 방문이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신설된 종교학과에는 미국 장로교 소속의 목사 홍동근이 교단 선교사 자격으로 파견되어 교수들을 상대로 기독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1990년 1월부터 평 양 신학원에서도 가르치기 시작했다. (강위조ᆞ홍근수(엮음), 민족 통일의 비전: 통일의 선구자 선우 학원 박사 팔순 기념문집 (서울: 푸른기획, 1997), pp. 162-88.) 옵서버 지 1991년 4월과 5월 호 -6-
개혁 개방의 변화를 적극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체제의 급격한 변화와 붕괴 현상이 일어난 것과 상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5) 종교를 정치적으로 역이용했다고 비판적으 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북한내 사회주의 체제의 종교 재편을 통한 사회주의적 종교단체 의 재등장 과 종교단체의 부활시기 로 볼 수 있다. 특히 1989년의 독일 통일을 계기로 동구 공산권이 붕괴되고, 계속해서 구 소련이 붕괴 하는 등 본격적으로 냉전구조가 해체되고,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이 이루어지는 등 우리 사회 내에서도 냉전적 사고를 극복하고 민족화해를 모색하는 새로운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북한에 대한 인식은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의 변화를 가져온 다. 이로 인해 북한의 종교에 대해서도 이념적 굴레로 인해 수세적이고 소극적이었던 태도 를 벗어나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지니게 되어 북한 사회체제 속의 종교를 보다 객관적으로 인식하면서 이에 대처하려는 노력을 나타내게 된다. 더구나 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각 종단 관계자들이 대북 지원과 관련한 모니터링 등 의 명목으로 북한을 방문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고, 대북 지원의 패턴이 단순 물자 지원에서 종교적 특성을 가미한 직접적인 지원의 형태로 확대되면서 종교교류의 양상 역시 북한 사 회의 현실을 직접 대하는 가운데 그 필요성을 점검해 나가는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게 된 다. 특히 90년대에 들어오면서 불교가 미국 LA에서 최초의 남북접촉을 갖기 시작하면서 천도교, 대종교, 원불교 등으로 접촉의 폭이 더욱 넓어지기에 이르렀으며, 1995년에 북한 지 역에 대규모 수해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북한이 외부세계의 지원을 받아들이기 시작함에 따라 남한 종교계의 대북 지원과 접촉은 순조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80년대 초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거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남북 종교교류에 있어 80년대 초반부터 90년대 초까지 진전을 이루어 가던 북한의 대남공세적 접근은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이후 급변하게 된 남북관계와 핵위기 발생 등으 로 단절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 정부는 남북 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1990년 8월 1일)을 제정하였고, 북한 지역에는 1994년부터 심각한 자연재해가 잇달았 다. 16) 1994년의 김일성 사망과 더불어 북한의 식량위기가 절정에 달하였으며, 대규모 수 에 연재된 김일성대학 종교학 초빙교수 홍동근의 북한체류기 에는 1990-91년 겨울에 행했던 모든 강의개요가 실려 있다. (김흥수 류대영, 앞의 책, p. 176~177.) 원불교의 경우, 1991년 11월에는 주체 사상연구소의 박승덕이 사회과학원 안에 원불교 연구생(대학원생)을 둘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을 일본에 서 만난 원불교 관계자에게 하였으며, 2명이 연구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이후의 진척 상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박광수,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원불교, 한국신종교연구 4집(2000) 참조; 박 광수, 2000 추계 정기학술대회 자료집: 평화통일과 신종교의 역할 (한국신종교학회, 2000년 12월 16일). p. 51.) 15) 정해구, 최성철 등은 탈냉전으로 인해 국제관계는 정치 군사적 대립과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의미가 약 화되고 경제적 측면에서의 경쟁과 협력의 중요성이 더욱 증대되는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고 본 다. 결과적으로, 남북한관계 또한 탈냉전 구도로 변화를 시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노태우 정권의 남북관계 개선과 사회주의권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 선언 (이하 7. 7 특별선언 )에서 나타난 6개항의 원칙에서 그 방향성을 볼 수 있다. (1 남북 동포 간의 상호 교류, 2 이산가족 접촉, 3 남북교역 문호 개방, 4 우방국들의 비군사적 물자의 대북교역 허 용, 5 국제무대에서의 남북 협력, 6 미일과 북한의 관계개선 협조 및 한국의 사회주의권 국가들과의 관 계개선 의지 표명) 정해구 1999, 5~6; 박순성 외 1993, 131~133; 최성철, 판문점을 통한 남북한 교류, 접경지역중심-남북교류방안, 2002 (통일부), p. 76 참조) 16) 김흥수 류대영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북 종교간 접촉을 촉진시키는 두 가지 요인을 남한의 법률 제정과 북한의 자연재해라고 보았으며,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994년 우박 피해는 식량난을 가중시켰다. 북한정부는 이 때까지만 해도 국제사회에 경제적 지원을 요청 -7-
해가 발생하자 국제사회에 구호의 손길을 요청하였다. 이와 더불어 북한은 당국간 접촉 을 회피하면서 남한 종교계의 도움을 구하게 되어 대북 지원 확보를 위한 수세적 접 근 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제 3국을 통한 극히 제한적인 남북종교인간의 교류는 1995년과 96년의 북한의 홍수 (큰물) 및 자연재해를 극복하기 위한 인도주의적 대북지원사업을 시도 남북한간의 공동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종교인뿐만 아니라 민간인의 교류에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하 였다. 17) 1995년부터 잇달아 닥쳐온 북한의 자연재해 이후에, 북한 동포 돕기 운동의 고 난의 긴 역경을 넘어서면서부터 종교계 인사와 민간단체 인사들의 북한과의 직접적인 교 류가 활성화되었다. 1995년도 이후에 종교 연합체형성과 국제적 연대가 이루어졌고 북 한의 조선종교인협의회 의 위상도 따라서 증폭되었다. 남한의 종교 협의체기구는 한 국종교인평화회의를 중심으로 1995년 10월에 범종단 북한수재민 돕기 추진위원회 를 구성하고, 각 종단에서 모금된 성금으로 구입한 밀가루를 한국적십자를 통해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종교계의 노력은 1997년에 우리 민족 서로돕기운동본부 가 출범 하면서 종교계와 사회단체가 연합하여 지원하는 형태로 본격화하게 된다. 북측은 대북 지원을 주도하는 민간단체의 원동력이 종교단체라는 점을 간파하고 각 개별 종단 차원의 접근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가게 된다. 그러나 북측은 대북 지원을 수용하는 과정상의 문제와 북한 사회 내부로의 파장을 염려하여 제한된 형태로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대남공세적 접근 행태와는 판이하게 수세 적 접근 행태를 나타내게 되었다. 남한 정부 또한, 남측 인사들의 북한 방문을 법률적으 로 뒷받침하면서도, 소극적으로 북한 방문을 허가해 주었다. 북한 주민접촉에 대하여, 1989년도까지 신청 36건(70명)에 21(22명)건을 승인하였으나 실제로는 1건도 성사되지 않 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신청자수가 235건(687명)으로 늘어났으며, 남한 정부의 승인 과 북한주민 접촉의 성사 비율이 지속적으로 늘어났으며, 민간단체 및 종교단체의 인도 적 대북지원 또한 급증하였다. 현재, 남북한의 종교인과 민간인의 상호 만남은 늘 정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제약을 안고 있지만, 남북한간의 활발한 교류와 함께 종교인 과 사회민간단체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재해는 1995년 7월과 8월 두 차례의 홍수로 이어졌고, 그 후에도 홍수, 해일 등이 계속되었다. 1995년 7월과 8월에 발생한 심각한 수해로 그 해 8월 뉴욕시의 북한 유엔대표부는 유 엔 인도지원국(UNDHA)에 긴급구호를 요청하였고, 세계보건기구에 의료진 파견을 요청하면서 유엔기구 의 본격적인 대북지원 사업이 시작되었다. 조선기독교도련맹도 두 달 동안 쏟아진 비로 북한지역의 2/3 가 침수되었다면서 1995년 9월 세계교회협의회에 긴급구호를 요청하였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세계교회협 의회와 루터교세계련맹의 긴급구호 기구인 교회공동행동기구(Action by Churches Together, ACT)를 통해 즉시 구호활동에 나섰다. 남한 종교계는 북한의 경제사정이 어려운 1990년대 전반기에도 인도적 차원에서 사랑의 쌀 보내기(1990), 사랑의 의약품 보내기 운동(1991)을 전개한 바 있었다. 그러나 유엔 기구의 인도적 대북 지원은 남한에서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활동을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995 년 남한 종교계는 통일운동을 전개하면서도 국제사회의 대북지원활동에 영향을 받아 북한지원 활동을 적 극적으로 전개하였고, 이것은 시민단체의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김흥수 류대영, 앞의 책, pp. 269-270.) 17) 경제계의 교류가 주류를 이루어 정주영 현대그룹회장(1989년), 김우중 대우그룹회장(1992년) 등 대 기업총수들의 방북이 이어졌다. 정주영 일행은 경제인으로서는 최초로 판문점을 통해 소 5백 마리와 함 께 1998년 6월 16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을 방문하였다.(중앙일보 1998. 6. 17). 그의 잇따 른 판문점을 통한 남북 왕래는 민간교류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마침내 금강산 관광을 위한 뱃길이 (1998년) 열렸다. 금강산 육로 관광도 가능케 하고 있다. -8-
조선종교인협의회((Korean Council of Religions, KCR)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조선카 톨릭교협회, 조선불교도련맹 등 3대 종단의 연합기구로 1989년에 출범하여, 1991년 네팔 카투만두에서 개최된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Asian Conference on Religion and Peace, ACRP) 총회에 조선종교인협회장을 맡고 있는 정신혁 천도교 교령과 천주교인협회 중앙 위원인 한인철 토머스를 참석하였으며, ACRP 회원국가로 가입하였다. 이 때, 당시 6대 종단 협의체인 한국종교인평화회의(Korean Conference on Religion and Peace, KCRP)와 의 접촉을 갖게 되었으며, 천도교, 유교 및 원불교는 분단이후 처음으로 회합을 가지는 등 여러 종단의 지도자들이 함께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 ACRP에는 대표단을 보내지 않다가 2002년 6월 인도네시아의 고대도시인 아유타야에서 열린 제 6차 총회에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인 장재언 등 대표단을 파견하여 종교인 남북공동으로 회담을 열 기도 하였다. 1980년대와 1990년대는 국제종교연합체의 공식적인 모임에 적극 참여함으 로써 종교활동을 국제적으로 확대시켜나가는 노력을 기울인 시기이다. 이러한 북한 종교의 대외적 활동은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누구든지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데 이용할 수 없다 (68조)라고 사회주의헌법을 1992년에 개정하면 서 명문화함으로써 종교의식의 거행 및 이를 행할 수 있는 장소 확보라는 현실적 가능성 의 길을 열어 놓았다. 물론 이러한 조치가 1988년도에 건립된 교회와 성당의 존재를 합 리화하기 위한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으나 북한 사회의 변화를 분명히 드러내 보여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김일성 사후 김정일 시대의 개막을 본격화하기 위해 헌법을 대폭 수정하는 가운데 종교의 자유와 관련된 제68조의 조항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누구든지 라는 단서 조항을 삭제하여 보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법 조항으로써 종교의 자유 인정을 공고히 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남북종교교류는 다른 분야에 앞서 이미 1980년대 이후 꾸준히 직 간접적인 접 촉을 모색해 오던 종교계의 역할이 빛을 발하면서 민간 차원의 교류를 뒷받침하는 계기 를 만들었고 남북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본 종교계 통일준비 네트워크 형성에 관한 연구는 남북한 종교교류의 과정과 실태에 대한 역사적 조명과 반성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종교의 역할에 대해 살펴보고 북한의 종교정책에 대해 통일준비와 관련해 종교계가 주요 역할자로 기능하기 위한 정책 적 대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2. 북한의 종교정책 변화 북한 종교에 대한 기본적 이해는 북한 사회주의 체제하의 종교 현실을 객관적으로 이 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북한의 종교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북한 사회주의 체제와 종교정책 변화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종교 관련 자료는 제한적이지만, 체제자 -9-
다. 19) 중국 사회과학원 연구원인 리우펑( 劉 澎 )은 중국 정교관계의 특징과 발전 이라는 논 료, 정보자료, 방문자료 등을 통해 북한 종교에 대한 대체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18) 북한의 종교정책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북한 당국의 종 교에 대한 태도와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 문에서 정교관계의 유형을 정교일치형, 정교분리형, 국교형, 국가가 종교를 지배하는 형 등 4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20) 리우펑은 중국에서의 정교관계를 국가지배형 으로 분류하고 있다. 북한의 경우, 시기별로 그 형태를 달리하고 있지만, 80년대 이후의 북한은 중국과 마 찬가지로 국가지배형 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주체사상에 바탕한 종 교관을 보여주며, 국가의 이념을 실현하는 하부 구조로서 종교기구가 조직되어 있다. 김일성은 1972년 12월 25일부터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5기 1차 회의에서 사회주의헌 법을 채택하고 그에 기초하여 국가지도기관을 새로이 구성하는 전환점을 마련하면서 사회주의헌법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선포 했다. 21) 그 이후 북한은 1980년대와 1990년대 국제종교연합체의 공식적인 모임에 적극 참여함으 로써 종교활동을 국제적으로 확대시켜나가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러한 북한 종교의 대외적 활동은 사회주의헌법을 1992년에 개정하면서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누구든지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데 이용할 수 없다 22) 라고 명문화하였다. 이를 토 대로 종교의식의 거행하고 종교활동을 할 수 있는 장소 확보라는 현실적 가능성의 길을 열어 놓았다. 제한적으로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데 리용 할 수 없다. 는 규제를 명시하였으나, 종교와 신앙의 자유에 대한 규제 및 통제에서 폭 넓은 자유를 부여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물론 이러한 조치가 1988년도에 건립된 교회와 성당의 존재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으나 북한 사회의 변화를 분명히 드러내 보여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 시대의 개막을 본격화하기 위해 헌법을 대폭 수정하였다. 1998년 18) 윤이흠, 한국종교연구 권3: 종교사 사상 북한종교 (서울: 집문당,1991), 176 78; 김흥수 류대영, 북한종교의 새로운 이해 (서울: 다산글방, 2002), pp. 17-21; 송두율, 북한 사회를 어떻게 볼 것 인가, 사회와 사상 (1998년 12월): 104 116; 김흥수 류대영, 북한종교의 새로운 이해 (서울: 다산글방, 2002), p. 23; 노길명, 광복이후 한국 종교와 정치간의 관계 - 해방공간부터 유신시기까지 를 중심으로-, 종교연구 27집 (2002년 여름), pp. 1-2; 박광수, 원불교 입장에서 본 정치와 종 교교육, 종교교육학회 15집(2002) 참조. 종교와 정치의 관계 설정은 남ᆞ북한 종교의 차이점을 이해 하는 데 중요하다. 남ᆞ북한의 정치와 종교의 역학관계에 대한 접근의 차이로 인한 신앙의 자유 와 신앙의 억압 문제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수 있다. 19) 류성민, 북한 주민의 종교 생활 (서울: 공보처), 1994; 고태우, 북한 종교의 이해 (한국 종교 사 회 연구소), 1993; 강성민 외, 북한 사회의 이해 (서울: 집문당, 1996); 문화 체육부, 북한 지역 종교 자료집 (서울: 계문사, 1994.) 20) 리우펑, 중국 정교관계의 특징과 발전, 중국교회와 선교 제2호, 중국복음선교회 중국교회와 선 교연구소 (서울: 도서출판 재단법인 중화기독교유지재단, 1997), pp. 39-54. 21) 국토통일원, 북한 최고인민회의 자료집 제3집, p. 500. 2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68조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8.) 북한은 1992년 4 월 개정된 사회주의헌법에서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 같 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누구든지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 사회 질서를 해치는데 이용할 수 없다 고 기술함. (조선중앙통신사, 조선중앙년감 (평양 : 조선중앙통신사, 1993), p. 143; 현대조선말사전 (평양: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 -10-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 회의에서 개정된 헌법에서는 주석제 폐지와 최고인민 회의 상임위원회를 신설하여 권력구조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북한이 헌 법에서 명문화하고 있는 종교에 대한 조항은 제 5장 공민의 기본권리와 의무 중 제 66조의 17살 이상의 모든 공민은 성별, 민족별, 직업, 거주기간, 재산과 지식정도, 당별, 정견, 신앙에 관계없이 선거할 권리와 선거받을 권리를 가진다 는 조항과 제67조의 공민은 언론, 출판, 집회, 시위와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국가는 민주주의적 정당, 사회 단체의 자유로운 활동조건을 보장한다. 에서 포괄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제68조 조항 가운데 누구든지 라는 단서 조항을 삭제하여, 보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법 조항으로써 종교의 자유 인정을 공고히 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신설된 제75조의 공민은 거주, 려행의 자유를 가진다 에서 많은 변화를 볼 수 있다. 23) 이러한 사회주의 헌법의 변화와 함께, 북한사회 전반에 걸쳐 종교에 대한 긍정적, 객관 적 사실을 바탕한 새로운 표현들이 나타났다. 북한의 종교 해석이 어떻게 표출되고 또 그 양상이 어떤 변화를 보이고 있는지 사전적 정의( 辭 典 的 定 義 )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류성민은 1992년 8월에 펴낸 첫번째 보고서인 북한종교연구 I 에서 북한의 철학사 전 24) 과 력사사전 25) 에 나타난 종교이해의 행태를 분석하고, 92년 12월에 발표한 북한종교연구 II 에서는 북한의 현대조선말사전 26) 과 1992년에 새로 발간된 조선말 대사전 27) 을 비교하여 종교관련 용어의 변화상을 분석하였다. 현대조선말사전 (1981 년판)과 조선말대사전 (1992년판, 2007년 증판)의 종교관련 항목 비교 분석 결과를 보 면, 조선말대사전 에서는 종교에 관한 부정적 기술이나 평가를 없애고 사실적인 기술 이 추가되었으며, 특히 종교와 미신이 동일시되던 과거의 입장을 탈피하여 양자를 분명 히 구별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변화를 보여준다. 28) 현대조선말사전 은 종교를 반동적인 세계관 을 표명하고 있는 것으로 종교는 인민대중의 혁명의식을 마비시키고 착취와 억압에 무조건 굴종하는, 무저항주의를 고취하 는 아편 이라고 부정적으로 규정하였다. 조선말대사전 은 종교에 대해 이를 초자연 적이고 초인간적인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 또는 믿음을 설교하는 교리에 기초하고 있 는 세계관 으로 객관적인 서술을 하고 있으며, 반면에 미신에 대해서는 이를 과학적세 계관을 가지지 못하고 문화적으로 깨여나지 못한 사람들이 자연과 사회의 사물현상을 어떤 초자연적인 힘과 그것에 의한 것이라고 맹목적으로 믿는 것 이라고 하여 뚜렷이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조선말대사전 은 종교의 역할에 대해서도 이를 억압, 착취하 는 도구 나 침략하는 사상적 도구 그리고 혁명의식을 마비시키는 아편 등의 부정 적 평가를 모두 삭제하고, 종교의 종류에 대해서도 원시종교로부터 시작하여 불교, 기독 2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75조. 24) 사회과학원, 철학사전 (평양: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1981.) 25) 사회과학원, 력사사전 (평양: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1971.) 26) 사회과학원, 현대조선말사전 (평양: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1981.) 27) 사회과학원, 조선말대사전 1-2권 (평양: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1992; 사회과학원, 조선말대 사전, (평양: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2007), 1-3권, 28) 현대조선말사전 (1981), 조선말대사전 (1992)에 나타난 용어들에 대해 류성민, 신법타, 김흥 수, 류대영의 연구 및 통일부 자료에서 그 차이점을 정리하고 있다. 특히, 이 분야에는 류성민의 연구보 고서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류성민, 북한종교연구 I -연구보고서 92-5 (현대사회연구소, 1992); 류성민, 북한종교연구 (서울: 현대사회연구소, 1993.) -11-
교, 회교 등 수많은 종교와 크고 작은 류파들이 있다. 라고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 있 다. 북한의 종교인식에 대한 변화를 유교, 불교, 기독교 및 민족종교인 천도교를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1) 유교의 봉건체제 비판과 인식변화 북한의 사회주의헌법 에서 제국주의의 문화와 복고주의적 문화에 대한 반대를 분명 히 한 것은 중국이나 소련의 초기 사회주의운동에서 나타난 반전통적인 경향과 일맥상통한 다. 중국 공산당은 가부장적 권위와 위계질서를 비판하였고, 전통적으로 존중되던 가족 주의 를 타도하고, 기존의 전통적 가치를 파괴하는 과격한 문화혁명 을 이루었다. 또 한, 소련도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던 초기에는 반가족주의적인 정책을 펴 기존의 문화전 통과 단절하고 새로운 사회주의 이념을 정립하려는 노력을 시도하였다고 보고 있다. 29) 북 한의 경우도, 봉건주의적 유교의 도덕규범과 사상, 그리고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가족주의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부각되었다. 유교는 북한에서 종교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유교에 관련한 종교단체가 따로 활동하고 있지 않다. 30) 봉건유교사상과 유교를 분리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정치적 사상의 범주안에 규정하고 있다. 유교를 중국 봉건사회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존속된 정치 윤리 학설 이라 규정하고 한국의 사회 정치 문화 도덕 풍습 등에 커다란 영향 을 미쳤음을 밝 히고 있다. 반면, 유교의 부정적인 부분을 봉건유교사상 으로 규정하고 봉건통치배들 의 보수적이며 반동적인 사상. 주로 관념론적 세계관과 봉건유교도덕, 봉건적 사회정치사 상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봉건군주에 대한 절대적 복종과 우상화, 엄격한 계급 적, 신분적 차별과 근로대중에 대한 멸시 및 노동에 대한 천시, 봉건적 가부장제와 여성에 대한 학대, 안일, 해이와 보수주의, 소극성 등을 봉건유교사상의 본질적 특성으로 보고 있 다. 유교는 도덕규범인 삼강오륜( 三 綱 五 倫 )을 바탕으로 가족을 중심으로 제도화되고 사회 질서의 기반을 이루어 가족주의와 문중을 강하게 형성하게 되었다. 문중을 중심으로 한 유 교적 인간관계는 신분에 따른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 가 규범화 되게 하고 친 족집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적 폐쇄(social closure)를 형성 하게 만든다. 31) 강대기는 이 러한 집단폐쇄주의가 이상사회 실현을 위한 국가차원의 공동체 실현에 커다란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고 보았다. 32) 국가차원의 새로운 사회주의 공동체 실현을 위해 유교의 가족주의 와 문중을 해체시킨 것은 북한의 사회주의 운동이다. 북한은 현대조선말사전 과 조 선말대사전 은 삼강 과 오륜 을 봉건유교사상의 도덕규범으로 보고 모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33) 29) 이우영, 북한 정치사회화에서 전통문화의 역할 - 북한영화분석을 중심으로- (민족통일연구원, 1993), pp. 13-14. 30) 전국유교련맹이 1950년대 중반까지 활동하다가 그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31) 강대기, 현대사회에서 공동체는 가능한가 (대우학술총서 508: 아카넷, 2001), pp. 147-151. 32) 강대기, 앞의 책, p. 169.. 33) 사회과학원, 조선말대사전, 1-2권 (평양: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1992); 조선말대사전, 1-3 권 (평양: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2007); 철학사전 (평양: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1981); 현대 조선말사전, (평양: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1981.) -12-
반면, 북한 사회에 아직 향교가 여러 곳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향교가 지역사회에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북한사회 또한 가족의 중요성 을 강조하고 부모와 자녀의 윤리, 친구와 친구의 윤리, 국가와 개인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 여기는 것은 유교에 있어서, 사회주의와 부합되는 도덕규범을 수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 일성의 어록에서 우리나라 력사와 고전문학, 고전예술에 대하여 옳은 인식 에 대해 조선인민의 유구하고 찬란한 민족문화를 부흥시키고 우리 나라 말과 문자를 발전시키 며..., 민족문화유산을 잘 보존하여 옳게 계승 발전시키는 것은 인민들에게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높여주고 그들을 애국주의정신으로 교양하며 새민주 조선의 새문화를 건설하는데 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집니다. 라고 강조하고 있다. 34) 북한은 전통문화에 대해 대체적 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민족의 문화유산을 발전시키려한 노력도 강하게 나타난다. 2) 불교에 대한 비판인식의 변화 불교에 대한 관점의 변화도 상당한 진전이 있다. 35) 북한의 철학사전에서는 불교를 종 교로서보다는 일종의 철학 또는 종교철학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그 교리 내용에 대한 설 명은 비과학적 이며 미신적 인 황당한 논리라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불교와 관련된 승려를 비롯한 사상가들은 대부분 관념론자로 단정하고 있고, 관념론 자체 를 종교를 철학적으로 각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고 보고 있다. 현대조선말사전의 관점에서 92년판 조선말대사전 (2007년 증판)의 불교 내지 종교 전반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시정되어 중립적이고, 객관적 입장에서 정의하려고 노력한 것 을 철학사전의 기술 내용과 비교를 통하여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극락세계에 대한 설명에서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곳으로 죽은 뒤에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극락정토 라고 하여 불교의 교리적 설명을 충실하게 하고 있다. 36) 전반적으로 불교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 를 바꾸어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유물론적이거나 정치적 견해를 제거한 조선말대 사전 의 표현 내용은 크게 긍정적으로 변화하였다. 3) 기독교에 대한 비판인식의 변화 북한의 기독교 관련 용어에 대하여 객관적 긍정적 표현으로 변화하였다. 현대조선말 사전 에서는 기독교에 비판적 시각이 강하다.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 역할을 하 는 해악적 종교로 보고 있다. 구세주 는 착취사회에서 지배계급과 그 대변자들이 근로대중의 계급적 각성을 무디게 하며 저들에게 순종하게 만들 목적 밑에 꾸며 낸 허황된 존재 로 보았고, 신 34) 이우영, 앞의 글, pp. 27-28. 35) 정태혁ᆞ신법타, 북한의 절과 불교 (서울: 민족사, 1990); 정토회, 남북한 주민의 통일 의식 동 시 비교 조사 (서울: 좋은 벗들, 2000.) 36) 사회과학원, 조선말대사전 (1992), 조선말대사전 (2007), 철학사전 (1981), 현대조선말사전 (1981) 참조. -13-
교 (개신교)는 자본가들의 착취를 정당화하며 제국주의자들의 착취와 약탈 및 남의 나라 에 대한 사상문화적 침투에 적극 복무하고 있다 고 정의하였다. 반면, 조선말대사전 은 구세주 를 세상을 구제하는 주인이라는 뜻으로 기독교에서는 예수. 불교에서는 석 가모니를 이르는 말 이라 하였고, 신교 는 16세기 종교개혁 때 새로운 교리와 계율 을 주장하면서 로마 카톨릭교에서 갈라져 나온 기독교의 교파이다 라고 정의하여 객관적 으로 표현하였다. 신부 에 대해서는 미제의 앞잡이로 부정하다가 종교를 전문적으로 연구, 선교하는 자로 정의하고 있으며, 장로, 교회, 복음서, 십자가, 선교사 등에 대해 미제를 대표 지칭하여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라는 입장을 견지하였으나, 종교적인 내용과 역할을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비록 전반적인 변화는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인식의 변 화를 보여주고 있다. 37) 특히 공산주의의 기본인 계급투쟁과 혁명의식을 마비시키는 부정 적 시각에서 계급적 관점에서 종교 성직자와 그 행위를 규정하고 있다. 4) 천도교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수용 현대조선말사전 은 봉건사회 말기 우리나라에 발생한 종교의 하나. 사람이 곧 하늘이다 라는 것을 기본교리로 내세우고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 는 표방 밑 에 지상에 천국을 건설한다 고 하면서 사회를 구원하는 길은 모든 사람들이 천도교를 믿고 자기를 수양하여 도덕적으로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고 밝혀 천도교에 대해 교 리, 사회구원의 목적 등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깨 지 못한 농민들을 우매화하고 투쟁의식을 마비시키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는 것을 지적하 고 있다. 조선말대사전 은 우리 나라 종교의 하나인 동학 을 갑오농민전쟁 이후에 고쳐 이름지은 것, 교조는 최제우이다. 사람이 곧 하늘 이라는 것을 기본교리로 내세우고 보국안민 의 지향 및 지상천국 을 건설할 것을 주장한다 라고 하여, 부정적 표현이 있는 부분은 삭제하였다. 북한의 학자인 정창학은 동학이 농민대중을 기본으로 한 피압 박 피착취대중의 요구와 지향을 반영했기 때문에 북한 정권이 추구하는 바와 근본적으로 다를 것 없다 라고 하여 다른 종교에 비해 상당히 긍정적 평가를 하고 있다. 38) 북한은 전반적으로 종교에 대해 강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으나, 민족종교인 천도교에 대해서는 다른 어떠한 기성종교에 비해, 사람이 곧 하늘이다 는 사상을 토대로 계급 을 타파하고 민중을 위한 종교운동이었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의 민족종교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한국 신종교의 인권평등사상과 해원상생 사상 등 전통적 세계관을 수용할 수 있는 토대를 어느 정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2007년에 새로이 증편된 북한의 조선말대사전 에서도 종교에 대한 비난과 비 판이 거의 없으며, 최근의 문헌이나 언론에서도 종교 자체를 비판하지 않고 있다. 이런 변 37) 앞의 책 참조. 38) 정창학, 동학의 계급적 기초, 철학연구 4(2001), p. 36; 김흥수 류대영, 앞의 책, pp. 202-220 에서 재인용. -14-
화를 보면서, 해방 직후와 같이 북한 정권을 지지하는 한, 종교를 용인하는 것으로 보는 견 해도 있으나, 아직은 속단하기 어렵다. 북한의 종교단체들이나 종교인들의 활동을 보면, 주 로 북한의 정책이나 입장을 지지하고 대남 비방의 성명서를 발표하는 데 그치고 있으며, 순 수한 종교활동은 아직 별로 없기 때문이다. 윤이흠은 종교의 자유가 얼마나 보장되는가 하 는 문제는 종교교육의 실상에 근거한 판단을 중요시 여기고 있다. 종교의 자유는 당연히 종단내의 신앙활동의 일환인 종단교육에 대한 자율적 활동이 보장되었을 때만 인정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북한의 기독교나 불교가 자율적 종단교육을 보장받고 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는 실정이어서 북한에서의 종교자유는 구조적으로 제약을 받고 있는 실정 이라 고 39) 보는 입장이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3. 통일의 종교적 당위성 한국 종교계를 대표하는 통일 관련 연구 논문, 보고서, 선언문 등에서는 한결같이 남북 통일의 당위성을 전제하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종교인이나 단체의 이름으로 발표된 수 백 편 이상의 글치고 통일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개인의 성향에 따 라 통일 논의에 관심이 없을 수도 있고, 통일 비용을 우려해 반통일적 자세를 견지할 수 도 있으나, 연구자 수준의 종교인은 대부분 통일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주장한다. 물론 이 때의 통일이란 평화적 통일을 의미한다. 힘에 의한 무력적 통일이 아니다. 기 독교 신학적으로나 불교 교학적으로 평화적 통일 은 논의의 여지없는 당위에 가깝다. 일반 종교인이라면 그러한 통일의 이유로 민족적이거나 실리적인 이유를 들 수 있겠으 나, 역시 전문 연구자의 글 속에서의 통일은 사랑 혹은 자비를 근본 가치로 여기는 종교 들의 필연적 결론이자 목표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생전 발언(1994)을 들어보자.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평화통일은 말할 것도 없이 자유 민주주의를 전제로 한 통일입니다. 즉 신앙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고 개인 의 사유 재산권, 기업 활동의 자유 등이 보장되는 민주적인 나라, 한 마디로 참으로 모든 사람의 인권이 존중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 모두가 서로 위하고 사랑하 며 살아가는 그런 사회를 실현시키는 통일을 말합니다. 40) 대단히 이상적이어서 현실성이 있겠는가 의구심도 들지만, 신실하고 영향력있는 종교 지도자로서 말할 수 있는 전형적인 제안이라고 할만 하다. 물론 김수환 추기경은 이를 39) 윤이흠, 한국종교연구 권3: 종교사 사상 북한종교 (서울: 집문당, 1991), pp. 186-187. 윤이흠은 종교교육을 2가지로 구분하여, 종교 단체 내 에서 성직자의 양성을 포함한 각종 신앙교육을 하는 이른바 宗 團 敎 育 과, 종합적인 문화현상으로서의 종교에 대한 일반적 교육을 하는 이른바 宗 敎 文 化 敎 育 설명하고 있다. 40) 김수환 추기경이 연세대학교 동서문화연구원 초청으로 했던 통일로 가는 길 강연문(1994.11.24). 천주교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자료집 (2011), PP47-48 쪽. -15-
위한 구체적 방안도 다음과 같이 전한 바 있다. 남과 북은 우선 서로의 이념과 체제를 존중하면서 평화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고, 그 다음으로 교류와 협력을 - 특히 경제 면에 있어서 - 찾아가야 할 것 같 습니다...북쪽이 점진적으로나마 개방되고 남쪽의 경제 협력의 손길을 받아들여 함께 경제난을 극복하고 경제적으로 보다 더 잘 살게 될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나라가 남 의 나라이며 북쪽의 혈맹국인 중국을 비교적 자유롭게 방문하고 그곳에서 기업 활동 도 할 수 있듯이, 북쪽도 중국의 실용주의를 따름으로써 그렇게 통행, 통신, 통상의 문 이 열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북쪽이 사회주의를 견지하더라도 참된 민주주의로 변화되어 나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41) 물론 북쪽이 사회주의를 견지하더라도 참된 민주주의로 변화되어 나가기를 바라는 것 은 김수환 추기경만의 바람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참된 민주주의 는 남쪽 정치 의 희망이기도 할 정도로 간단치 않은 이상적 목표인데다가, 북쪽이 남쪽 경제 협력의 손길을 받아들이게 하는 명분과 세부 장치 등 구체적 현안으로 들어가면 복잡한 현실적 문제들과 부닥친다. 물론 이와 관련한 정치적 결정과 행정 정책 등은 종교인의 몫이 아 니다. 그런 점에서 통일 방법론이나 시기, 정책적 대안 등과 관련해서는 종교인들이라도 입장이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이런 희망적 발언 자체는 대다수 종교인들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종교계가 통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참여를 해왔는지, 그 요지와 대강( 大 綱 )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일반 종교 인의 입장이라기보다는 통일에 대한 관심을 기울였던 전문 연구자들의 연구 보고서를 주 로 살펴보는 식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특정 종단의 통일관만 살펴보는 작업만도 벅찬데, 전체 종교계의 흐름까지 다루려니 역 량의 한계가 더 느껴진다. 그렇더라도 전체 흐름을 한 지면 안에 담는 작업 역시 의미있 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향후 다양한 연구 논문 및 보고서들을 종합적으로 반영하 여 완성된 종교계 통일 연구의 흐름과 전망을 내놓는 것으로 하고, 여기서는 일단 시안 수준에서 요점만을 중심으로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1) 개신교의 경우 갈라진 유대인과 그리스도인간 일치를 이룬 뒤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하나됨을 성취하 려는 것이 신약성서의 세계관이다. 42) 동일한 성서를 신앙의 근간으로 하는 가톨릭과 개 41) 천주교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자료집 (2011), 48쪽. 42)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셨습니다...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에페소서 2,14-15) -16-
신교 모두 이 점에서 동의한다. 나아가 인류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귀한 피조물이 며, 이 말씀으로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요한복음 1,3)는 구절 등은 인류가 불화와 분열 보다는 조화와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의 또 다른 기독교적 근거이다. 성서 및 성서를 기반으로 하는 교회 전통 속에서 통일을 추구해야 하는 신학적 이유들은 다양 하게 제시되고 있다. 다소 진보적이면서 한국 개신교회 연합기관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한국교회협의 회 (NCCK, 1924)에서 마련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선언 (1988)에 서는 평화통일 이야말로 "하나님의 명령"이자 선교적 사명 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종 (엡 2:13-19)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분단과 갈등 과 억압의 역사 속에서 평화와 화해와 해방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눅 4:18, 요 14:27)... 우리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도로 부터 부름을 받았음(골 3:15)을 믿으며, 같은 피를 나눈 한 겨레가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대립하고 있는 오늘의 이 현실을 극복하여 통일과 평화를 이루는 일이 한국 교회에 내리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우리가 감당해야 할 선교적 사명(마 5:23-24)임 을 믿는다... 이 일을 감당하는 것이 곧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이룩하는 데 있으 므로 우리는 통일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바로 신앙의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43) 보수적 교회연합단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 (1989)에서도 통일을 당위적으로 생각하 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가령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통일 및 북한 선교를 위한 결의 문 (1994)에서는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는 통일과 남북교회 협력 및 북한 교회 재건이 이 시대에 있어서 우리를 향 한 하나님의 뜻이며, 이것이 한국교회가 이루어야 할 지상과제임을 믿는다. 44) 2) 가톨릭의 경우 가톨릭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가령 한국 천주교 200주년(1984년)을 기념해 마련한 사목지침서 에서는 이렇게 선언한다: 교회는 평화적 통일을 기도하며, 또한 인간의 존엄이 지켜지고 확인되는 방향으 로, 즉 민주주의적 통일을 희망한다...교회는 민족통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들에게 주신 사랑을 토대로 능동적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희망의 원천이 되어야 43) 한국교회협의회,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인용은 허호익, 통일을 위한 기 독교 신학의 모색: 남남 및 남북갈등과 통합적 통일신학, 도서출판 동연, 2010 부록에 실린 선언문 404쪽에서 인용했다.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선언 은 민간 차원에서 발표한 최초의 통일 정책 선언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44) 김명혁, 시대의 방향을 제시한 한국복음주의협의회성명서 모음집 기독교문서선교회, 1998, 제18장. -17-
한다. 45) 민족의 통일과 번영은 자연법의 요청이고 사명이며 화해와 일치의 노력은 우리 모두의 과제이다. 1) 통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2) 화해와 일치는 우리 모두의 의무이며 사명이다... 3) 민족의 화해와 일치는 모두가 함께 해야 될 일이 다. 46) 통일을 이루기 위한 평화, 화해 등은 진보 개신교나 보수 개신교는 물론 가톨릭에서도 전반적으로 동의하는 긍정적 가치들이다. 평화와 화해 속에서 통일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에서 확정한 <사목헌장>(92항)에서는 이렇게 규정한다: 아무도 대화의 대상에서 제외하지 않는다. 인간 정신의 고귀한 가치를 존중하지 만 그 원천인 창조주를 인정치 않는 사람이나 또는 교회를 반대하고 여러 가지 모 양으로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들까지도 제외하지 않는다. 하느님 아버지는 모든 사 람들의 근원이시며 목적이시므로 우리는 모두 형제되기 위해 불리었다. 따라서 우 리는 같은 인간으로서 같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니, 폭력도 기만도 없이 참된 평화 속에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협력할 수 있고 또 협력해야 겠다. 3) 불교의 경우 살아있는 모든 중생에는 불성이 있다 ( 一 切 衆 生 悉 有 佛 性 )고 보는 불교 역시 인간을 차별하기보다는 일치의 차원에서 포용해야 한다고 보는 것은 지당하다. 남북 구성원들 간에 대립이 아니라 일치로 나아가는 것은 불교적 이념의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한국의 대표적 불교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 통일종책연구원 연구보고서에서는 이렇게 말한 다: 우리는 지금 분단의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우리 민족은 왕검 조선의 건국 이래 크게 사국의 분단, 후삼국의 분단, 남북의 분단까지 세 차례의 단절을 경험해오고 있다. 이와 함께 신라의 삼국통일, 고려의 후삼국통일, 일연의 한민족 의식의 통일 까지 세 차례의 통합을 체험해왔다. 이제 우리는 물리적 통일과 화학적 통합을 제1 의 화두로 삼고 있다... 한민족의 웅비와 미래를 위해 민족통일은 반드시 이뤄내야 할 국시( 國 是 )일 수밖 45) 200주년기념 사목회의 의안 46) 천주교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자료집 (2011), 67-70 쪽. -18-
에 없다... 불교사상과 불교세력은 종래 세 차례의 통일 과정에서 이념과 주체로 서 공고히 자리매김하였다. 당시 불교인들은 불교세계관에 근거하여 불국정토 실현 과 청정교단 구현의 기치를 내걸었다... 불교 교단은 민족 통일 이념과 방향 및 실천과제의 제시를 주요 임무로 삼아야 할 것이다. 47) 4) 원불교의 경우 원불교도 마찬가지이다. 원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만유가 한 체성( 體 性 )을 하고 있 다 고 본다. 모든 종교는 같은 뿌리를 가졌고( 同 源 道 理 ), 모든 이가 같은 기운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同 氣 連 契 ), 모두가 일원세계를 지향하는 동일한 개척 사업을 벌이자 ( 同 拓 事 業 ) 는 것이 이른바 원불교의 삼동윤리( 三 同 倫 理 ) 이다. 이런 입장에서 북한을 다름 이나 틀림 아닌 근원적인 차원에서 남한과 같음 ( 同 )으로 보는 것은 자연 스럽다. 북한에는 원불교 교단이 구성되어 있지 않기에 다른 종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통 일 논의가 늦었지만, 통일에 대한 기본 시각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가령 원불교 의 최고 지도자들은 통일에 관해 이런 입장을 견지한다: 우리는 가까운 장래에 이 나라의 통일을 반드시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는 남과 북을 둘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다같이 단군의 자손으로서 7천만 동포가 한 핏줄 한 겨레임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통일을 이루려면 정신적으로나 경제적 으로나 우리가 그들을 모두 먹여 살릴 수 있도록 되어야 하며 정신적으로도 그들을 지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럴 때에 자동적으로 통일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 다. 몇 년 전 어느 종단의 지도자가 본교를 방문하여 반공( 反 共 ), 승공( 勝 共 ), 멸공 ( 滅 共 )이라고 말을 하여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반공도 좋고 승공도 좋고 멸 공도 좋지만 화공( 和 共 )을 해야 합니다. 이북의 동포도 다 우리 형제이며 단군의 자 손으로서 서로 화합해야 합니다. 여야가 있지만 서로 화합하여야하고 남북이 있지 만 서로 화합하여야 하고 동서가 있지만 서로 화합하여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북 동포를 구공하여야 합니다. 48) 과거에는 멸공, 반공, 승공통일을 외쳤지만 진정한 평화에 이르려면 한쪽이 이기 고 한족이 지는 싸움이 아니라 상대와 조화하고 어려운 쪽을 구해내는 화공, 구공 통일로 나아가야 합니다. 49) 화공( 和 共 ), 즉 공산주의와의 조화를 통해 결국은 구공( 求 共 ), 즉 공산주의를 구 47) 고영섭, 불교의 통합 사상, 대한불교조계종 통일종책연구위원회, 민족통일과 불교통합:남북불교 의 교류와 협력방안 (2009), 11쪽 및 36-37쪽, 48) 원광, 통권205호, 1991, 9월호,.22쪽. 49) 2007년 10월 17일 중앙일보 기사.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가진 기자간담회 내용. -19-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을 인정하고 북한과의 조화를 통해 북한을 화합고 일치의 대열 로 이끌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5) 천도교의 경우 통일에 대한 기대와 열망에 관한 한, 교세에 비해 천도교가 열정적이다. 1894년 동학혁 명 이후 한국 민족운동사의 한 복판에 있어 왔고, 천도교청우당 활동 등을 통해 종교 와 정치의 쌍방적 조화 즉 교정쌍전( 敎 政 雙 全 ) 를 추구했던 천도교에서는 남북통일 을 지상과제로 다룬다. 인간은 모두 하늘을 모시고 있고( 侍 天 主 ), 남녀노소 빈부귀천 없이 사람이 곧 하늘( 人 乃 天 ) 이니, 한울님 안에서 모두 한 몸을 이루는( 同 歸 一 體 ) 일은 통일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천도교적 교리이다. 천도교청우당의 사상적 후신이라 할 수 있을 동학민족통일회 에서는 오랜 논의 끝에 확정 반포한 <민족자주통일방안> 에서는 남북통일의 당위성을 이렇게 규정한다: 통일은 우리 민족의 지상 과제이다. 왜 통일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지금 남북으 로 갈라져 있지만 한 핏줄 한 형제로서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문화의 전 통을 이어나가는, 헤어질 수 없는 단일민족이다. 혈통이 같고 언어와 문자가 같고 풍속이 같고 어느 모로 보든지 운명을 같이 해야 할 한 동포 한 형제이다...하루 속히 통일이 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통일은 민족사적 요청이 아닐 수 없 다. 또한 우리나라의 분단과 긴장으로 인한 동북아의 불안이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통일은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다고도 할 수 있다... 진정한 후천개벽의 이상사회 건설의 길을 열어나가야 한다. 조국의 평화 통일은 7천만 겨레의 간절한 소원이요 역사적 요청이요 천명이 아닐 수 없다. 반세기가 넘도록 통일을 이루지 못하는 이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어떻게 씻을 수 있을까. 특히 우리 민족과 운명을 같이 하면서 인류를 건져나가야 할 종교 인으로서는 더욱 무거운 책임감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동민회(동학민족통일회) 가 그동안 민족 앞에 뚜렷한 통일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개탄하면서 감 히 민족 자주 동귀일체( 同 歸 一 體 ) 통일방안 을 내 놓는 바이다. 50) 50) 동학민족통일회, 민족자주통일방안, 동학민족통일회 엮음, 민족통일 운동의 역사와 사상 (서울: 모시는사람들, 2005), PP.384-86 P.463쪽. 위 문장은 동학민족통일회 에서 1996년 작성한 뒤, 1999년 수정보완을 거쳐 기본안으로 확정되었고, 다시 2002년 최종 확정된, 천도교의 공식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20-
4. 남ㆍ북한 종교교류의 성찰 남ㆍ북한 종교교류는 한반도의 정치상황과 주변국가들의 변화와 깊은 연관성을 지니면 서 이루어졌다. 1945년 8 15광복 후 동서냉전체제의 상황에서 미국의 한국에 대한 통치 전략은 남ㆍ북한 분단상황을 기정사실화하여 친미 반공이데올로기를 관철시키는 것이었 다. 노길명은 미군정의 통치전략에 의한 종교 정책을 친미 반공이데올로기의 관철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거나 그것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종교들은 지원하고 그 에 반대하거나 저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종교들은 억제하는 것 이었다고 본다. 51) 남한 의 정부가 종교를 정책적으로 이용한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정교분리의 원칙을 바탕으 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반면, 북한의 종교정책은 종교 또한 철저한 국가의 통제하에 제한된 자유가 보장된 경우라 볼 수 있다. 1950년대 및 60년대에, 한반도 전쟁이후 휴전선을 사이로 남북은 완전히 갈라졌으며, 정치, 경제, 외교 등의 전반적인 부분에 있어서 대치와 분리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남북 어느 쪽에서도 정치, 경제 및 종교 분야에서 전혀 접촉이나 교류를 제안하지 않고 약 20여 년 동안 적대적 관계를 197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를 북한 연구소의 북한총람 에서는 종교 탄압시기 종교말살시기 로 보는 반면, 52) 고태우는 종교 의 제거기 종교부재의 갈등기 로 보았고, 법성은 혁명발전단계에서의 종교 계 속혁명단계에서의 종교(58~현재) 로 보았으며, 윤이흠은 해체기 (53-70)로 보았다. 반 면, 김흥수ㆍ유대영은 사회주의 속에서의 생존 모색기 (53-72) 로 설정하고 있다. 53) 이 것은 송두율의 내재적 (immanent) 사회주의 분석방법에 의한 북한체제 입장에서 본 시 기설정이라 여겨진다. 이 시기는 사회주의화 정책 정립과정에서 사회체제 재정비와 종교 의 재정리과정에서 나타난 기존종교의 해체 및 말살시기(1954-72)로 볼 수 있다. 54) 1970년대에 들면서 남북간의 대화는 한반도의 정치적인 역학관계와 주변국가의 냉전체 제가 화해의 방향으로 전환하면서 이루어졌다.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 국가들이 책임져 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닉슨 독트린 이 발표되었고, 1972년 2월 미국 대통령 닉슨 은 중국의 모택동(마오쩌뚱) 등을 만나는 일을 성사시킴으로써 미국과 중국의 수교, 일본과 중국의 수교, 10여 년 간 지속되었던 월남전의 종식 등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지속된 세 계의 냉전체제는 해빙의 물결을 타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 8월 15일 평화통일 구상선언 을 발표하였으며, 북측은 1971년 4월 12일 허담 외상의 최고인민회의 제4기 제5 차 회의 보고를 통하여 8개 항목의 평화통일방안 을 제의함으로써 남ㆍ북한간의 정치적 협상이 이루어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55) 1971년 1월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이산가 51) 노길명, 한국신흥종교 연구 (서울: 경세원, 1996), pp. 3-4. 52) 북한연구소편, 북한총람 (서울, 북한연구소, 1983.) 53) 김흥수ᆞ류대영, 앞의 책, p. 60. 54) 법성, 북한의 종교, 북한의 인식 4: 북한의 사회 (서울: 을유문화사, 1990), pp. 282-93; 류성 민, 앞의 책 (1992), pp. 8-17; 강인철, 현대 북한 종교사의 재인식, 김흥수 편 해방후 북한교회 사, pp. 149-221;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북한교회사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pp. 376-516. 55) 허담이 제안한 8개항은 1 미군철수, 2 10만 이하로 감군, 3 한미방위조약 등 민족의 이익에 배치되 는 조약의 폐기, 4 남북총선거, 5 각 정당 사회단체의 활동 보장, 6 과도적 조치로서 남북연방제의 실 -21-
족 서신 교환을 제의하면서 남북대화는 적십자사를 통해 진행되었다. 56) 11월부터는 정치 적 대화를 위한 비밀접촉이 판문점에서 진행되었으며, 1972년 5월 남한의 당시 중앙정보부 장 이후락과 북한의 당시 제1부수상 박성철이 각각 평양과 서울을 비밀리에 교차 방문함으 로써, 7월 4일에 역사적인 7ㆍ4 남북공동성명 을 발표하는 성과를 가져왔다. 그동안 드 러나지 않았던 북한의 종교활동 또한 대내외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조 선기독교도련맹, 조선불교도련맹 중앙위원회, 조선천도교회중앙지도위원회 등이 생긴 것도 이 시기이다. 57) 1980년대 개신교, 천주교, 불교 관계자들은 제 3국을 통해 국제적인 회의와 협의체를 통해 남ㆍ북한 종교인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북한은 1972년 남북대화 시작과 더불어 외부 환경의 조성을 위해 종교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종교인들의 활동을 대외적으로 선전하면 서,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종교단체의 활동도 활발하다고 주장하였다. 북 한의 사회주의 이념적 변화와 종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일어나면서 북한의 대외적 종교 활동도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대외적으로는 북한은 국제적인 네트웍을 형성하고 있는 개 신교를 중심으로 해외동포와의 접촉을 시작되었다. 1981년 11월 3일부터 11월 6일까지 4일 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의 대화 가 이루어 졌고, 1982년 11월 3일부터 11월 5일까지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남ㆍ북한 종교인간의 교류가 다시금 재개되었다. 개신교인은 국제종교기구인 세계교회협의회(WCC) 에 가입하였고, 천주교는 바티칸 교황청과 접촉하여 상호방문의 성과를 이루었고, 불교도는 세계불교도우의회(WFB)에 가입하였으며 공산권국가의 불교가 중심으로 구성한 아시아불교 평화회의(ABPC)에도 참여하였다. 북한의 대외적 활동은 북한의 종교정책의 변화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북한 종교정책 의 변화를 처음으로 실감케 하는 것은 1985년 11월에 WCC 국제문제위원회가 최초로 북 한을 방문하였을 때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선임연구원인 김영철과의 대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58) 김영철은 WCC 대표단에 북한의 모든 정책들이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주체사상과 종교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59) 김영철의 말을 인용한 WCC 대표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종교와 주체사상은 약간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 은 둘 다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한다는 점이다. 종교는 가난한 사람을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하기 위해 생겨났으며 바로 이 때문에 북한에서는 많은 종교인들이 주체사상을 지지 한다는 것이다. 종교가 사회변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해방신학이라는 새로운 흐 름은 주체사상에 접근함에도 불구하고 주체사상은 배타적으로 인간의 노력에만 의존한다 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시, 7 광범위한 교류의 실시, 8 이상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남북정치협상회의 개최 등이었다. 최성철, 판문점을 통한 남ᆞ북한 교류, 접경지역중심-남북교류방안 (통일부, 2002.) 56) 이와 관련하여, 1971년 최두선 대한 적십자사 총재가 남북간 가족찾기운동을 북한측에 제의했고, 북한 측의 손성필 위원장이 화답함으로서 당해 8월부터 공식적인 접촉이 이루어졌다. 조한범(통일연구원 연구 위원), 남ᆞ북한의 자주적 교류협력 강화와 교회의 역할, (KNCC 2002평화통일정책협의회발제문) (KNCC Homepage 자료) 57) 김흥수 류대영, 앞의 책, pp. 123-125. 58)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교회 통일문제 주요 자료집 (통일문제연구원, 1988), pp. 39-40. 59)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북한교회사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376-516. -22-
북한정책 변화의 배경을 쉽게 알 수는 없지만, 다행히 북한의 관련 인사들이 직접 주체 사상과 종교와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하여 설명하는 자료들을 접할 수 있으므로 어느 정 도 파악이 가능하다. 강인철은 북한이 사회주의 완전승리가 목전 에 있다고 설정한 때가 1986년이며, 1987년부터 제3차 7개년 경제 계획이 실행된 사실을 중요시 여겨, 북한 정책의 중요한 변화의 시기로 보고 있다. 60) 한편, 1988년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주체사상에 대한 학술심포지엄에서 북한 사회과학원 주체사상연구소장 박승덕은 주체사상의 종교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목할 만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61) 첫째, 주체사상은 종교를 다루는 방법론에 있어 마르크스주의적 방법론 과는 달리 시대적 이해와 요구에 따라 달리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여 평가하고 있다. 둘째, 종교가 지배계급과 야합하여 인민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관점만 을 고수해온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현대의 종교와 신학들이 그 나름의 발전의 내적 법칙 성을 지니는 사회적 의식의 독자적인 한 형태라는 점을 인정한다. 셋째, 이러한 평가에 근거하여 주체사상은 종교가 계급지배의 수단이므로 당장 역사에서 사라질 것을 요구하 는 입장에서 벗어나 앞으로 지배계급을 반대하고 지배계급으로부터 억압받는 민중을 해 방하는 데 이바지하기를 바라고 있다. 넷째, 진보적인 종교사상, 신학에 대한 평가를 바 탕으로 이를 추종하는 종교인들과 공동의 과제를 갖고 협력하는 것은 긴요하다. 이는 종 교인들이 통일전선의 대상이 되면 되었지 결코 배척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박승덕의 견해는 북한의 대남방송인 한민전 방송을 통해 보다 상세히 공개되기도 하였다. 변진흥은 1988년 7월 31일과 8월 1일에 걸쳐 두 차례 방송된 종교인들과 단 결 협력하는 것은 한민전의 일관된 정책 내용을 분석하여 주체사상이 종교 자체를 부 정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종교 사상을 덮어놓고 배제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주체사상은 종교에도 긍정적인 주장과 사상이 있다고 인정하고 그 가치를 공명정대하게 여긴다고 평가하고 있다. 62)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국내 정치상황이 급변하면서 천주교가 바티칸을 매개로 하여 평양을 공식 방문하고, 북한에서도 80년대 중반 이후 종교정책의 과감한 전환을 가져 왔다. 종교를 본격적으로 대외에 알리기 위한 노력과 함께 기독교의 경우, 1988년 11월에 평양에 처음으로 봉수교회가 세워졌고, 칠골교회가 1992년 12월에 준공되었다. 천주교는 장충성당을 1988년 9월에 세워 소수 천주교인들이 미사를 보고 있는 것을 확인되었다. 불 교의 경우, 문화재 보호와 주체건축으로서 사찰 복원과 전문관리자로 승려를 임명하였다. 63) 북한의 종교 서적 발간사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조선기독교도련맹은 1983년에 신 약성서를 발간하고, 1984년에 구약성서도 발간했으며 또한 1990년에는 신 구약 합본 성경과 음표가 있는 찬송가를 1만권씩 인쇄하기도 했다. 천주교의 경우, 1989년 6월 30일에 조선 천주교인협회를 설립되어 대외적인 창구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1991년에는 교리서와 가톨릭기도서를 발간하였다. 불교의 경우, 60여 개의 사찰이 복원되어 이곳에서 법회와 석 60) 강인철, 앞의 논문, pp. 143-45. 61) 강인철, 앞의 논문, pp. 216-217. 62) 변진흥, 민족복음화와 북한의 이데올로기, 가톨릭 신학과 사상 제6호 (서울: 가톨릭대학 출판 부, 1991), pp. 104-105. 63) 북한총람, p. 1228 등 참조. -23-
탄절 행사 등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1988년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에서는 전 25권의 팔만대장경 해제본을 간행하였다. 천도교 북조선 종무원도 1989년에 천도교리대요, 천도교약사, 천도교 청우당론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의전해설 을 간행하였다. 64) 1990년 1학기에 김일성대학 역사학부 안에 종교학과가 개설되었으며, 해외교포 성직자의 방북초청과 해외교포 이산가족 방문을 허용하면서 재미교포인 홍동근 목사가 여기서 기독 교학을 강의하기에까지 이르렀다. 65) 북한의 이러한 움직임은 1980년대 말 이후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은 개혁 개방 의 변화를 적극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체제의 급격한 변화와 붕괴 현상이 일어난 것 과 상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66) 종교를 정치적으로 역이용했다고 비판적으로 보는 경 우도 있지만, 북한내 사회주의 체제의 종교 재편을 통한 사회주의적 종교단체의 재등 장 과 종교단체의 부활시기 로 볼 수 있다. 1989년의 독일 통일을 계기로 동구 공산권 이 붕괴되고, 계속해서 구 소련이 붕괴하는 등 본격적으로 냉전구조가 해체되고, 남ㆍ북한 의 유엔 동시가입이 이루어지는 등 우리 사회 내에서도 냉전적 사고를 극복하고 민족화해 를 모색하는 새로운 인식이 확산되었으며 북한에 대한 인식은 급진적으로 변화하였다. 북 한은 종교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수용의 자세를 가져 객관적으로 인식하면서 이에 대처하 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된다. 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각 종단 관계자들이 대북 지원과 관련한 모니터링 등의 명목 으로 북한을 방문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고, 대북 지원의 패턴이 단순 물자 지원에서 종교적 특성을 가미한 직접적인 지원의 형태로 확대되면서 종교교류의 양상 역시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게 된다. 특히 90년대에 들어오면서 불교가 미국 LA에서 최초의 남북접촉을 갖기 시작하면서 천도교, 대종교, 원불교 등으로 접촉의 폭이 더욱 넓어졌다. 1995년에 북한 지 역에 대규모 수해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북한이 외부세계의 지원을 받아들이기 시작함에 따라 남한 종교계의 대북 지원과 접촉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80년대 초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거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변화가 아닐 수 없으며, 2000년 남북 정 상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토대가 되었다. 남북교류가 2009년 18만 명을 상회하다가 정점으로 하향하여 2009년 12만 명, 2010년 6 월까지 6만 명 선으로 점차 줄어든 현황과 더불어 남북한 인적 물적 왕래가 감소한 것을 2009-2010년 통일백서 통계자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NGO와 종 교단체 등 다양한 민간기구와 국제기구의 대북 접촉은 나름의 남북간 긴장 가운데 화해 64) 천도교의 경우, 종교적 차원에서 볼 때 북한은 외래종교 보다는 민족종교인 천도교에 더욱 큰 호감을 나타내고 있으며, 천도교와 관련한 동학혁명을 우리 나라 근대역사에서의 대표적인 반봉건투쟁으로 평가 하고 이를 천도교의 민족적 특성으로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런 면에서, 천도교는 김일성ᆞ김정일에 이어지는 북한 정권과 깊은 연대를 하여 왔으며, 사회주의 이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북한에서 의 천도교 활동은 조선천도교회중앙지도위원회(현 위원장:류미영)를 1946년 2월에 천도교북조선종무 원으로 발족하면서 조직화되었다. 1974년에 현 명칭으로 개명하여 활동을 해왔다. 현재, 북한은 천도 교인 수는 1만 3천 5백여 명, 청우당원 수는 1만 4천여 명인 것으로 밝히고 있다. 조선천도교회 중앙지 도위원회는 평양 문수리에 있는 4층 건물에 위치해 있으며, 약 100석 규모의 중앙교당이 위치해 있다. 65) 강위조ᆞ홍근수(엮음), 민족 통일의 비전: 통일의 선구자 선우학원 박사 팔순 기념문집 (서울: 푸른 기획, 1997), pp. 162-88; 박광수,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원불교, 한국신종교연구 4집(2000) 참 조. 66) 최성철, 판문점을 통한 남ᆞ북한 교류, 접경지역중심-남북교류방안 (통일부, 2002), p. 76. -24-
를 위한 오아시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민간단체의 활동은 미래 통일민족을 위한 초석을 놓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 통일한국을 실 현시키기 위한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좋은 씨앗 뿌리기 방법론으로 비록 남북한 간 의 돌발 사태로 정책적인 교류의 단절이 있더라도 민간단체와 국제기구가 지속적인 협력 을 통해 북한 민간단체와의 대화 창구를 열어놓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5. 한반도평화에 있어 종교계의 역할 북한과의 냉전체제를 청산하고 남ㆍ북한 관계 개선을 위한 실천 방안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남ㆍ북한의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때에 식량과 의료시설이 부족한 북한 주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남북한의 통일문제는 정상회담의 계기로 정부 주도하에 수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 동안 남북정상회담이 2차례(2000, 2007) 개최되었지만, 그것이 단순히 남북한 정부의 노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남북한 간에 통일민족을 이루기 위한 민 간단체들의 부단한 숨은 노력의 공로가 크다 하겠다. 67) 공적부문을 대표하는 국가(State), 사적부문을 대표하는 시장(Market)에 이어 시민사회 (Civil Society)를 대표하는 NGOs(비정부 민간기구 (NGOs, Non-Government Organizations) 는 한국을 비롯한 지구촌 곳곳에서 중요한 행위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국가나 시장이 하기 어려운 일들을 중립적인 차원에서 또는 이들의 역할을 보완하는 관계에서 종교계와 NGOs들의 역할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남북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정부가 통 일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정책 수행이 어려울 때, 또는 북한의 내부 사정이 어려운 경우 에 정부는 공식적인 국가의 입장이나 각종 절차상 등으로 정책 변화를 탄력적으로 수행 하기가 쉽지 않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계 및 시민사회 NGOs들은 인도적 차원, 또는 민족적 차원에서 용이한 대북 사업을 지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68) 다양한 남북간의 회합이 현재의 정치논의 구조형태에 영향을 받지 않는 민간차원의 다 양한 교류가 활성화되도록 협상구조의 변화가 근본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남ㆍ북한 종교인의 교류, 학술교류, NGOs 들의 인도적 대북지원은 한반도의 긴장상황을 완화시키고 상호간의 신뢰를 회복하여 평화를 정착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69) 67) 이러한 민간단체들을 비정부기관(Non-Governmental Organizations: NGO)이라고 하는데 이들의 전 바위( 全 方 位 ) 역할이 통일민족을 이루는데 초석에 큰 힘이 되고 있다. 그러한 NGO 단체를 예를 들면 우리민족 서로돕기운동본부, 경실련 통일협회, 월드비전, JTS 등과 같은 비정치적 단체 도 있지만 친정부적인 NGO들도 있다. 68) 김영래, 남북화해시대와 NGO의 역할, p.16. 69) 김영호, 민간 통일운동의 변천과정과 현황 연구: 통일NGO들의 성장과정과 특징 분석을 중심으로, 민간차원에서 추진되는 통일운동의 주체는 말 그대로 통일관련 민간단체로 구성된다. 흔히 이런 단체 를 최근에는 흔히 비정부조직(non-governmental organization, NGO)이라고 부른다. 어원적으로 따져 볼 때 NGO라는 말은 UN 헌장 제71조에서 유래된 표현이다. 대표적 정부간 조직(international governmental organization, IGO)인 UN의 창설에 기여한 NGO의 공로를 인정하고, 향후 UN활동에의 -25-
1) 남북종교 교류를 통한 남북화해 남북종교 교류를 통한 남북화해를 위한 모색이 이루어져야 한다. 국내의 가장 큰 종단 인 불교, 개신교, 천주교 등은 가장 활발하게 남ㆍ북한 종교교류를 전개하고 있다. 민족 종교 가운데 천도교와 대종교의 북한 종교인간의 공동행사가 연례적으로 이루어져 왔으 며, 최근 원불교의 인도적 대북지원과 공동행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남한에는 북한과 교류를 하고 있는 다양한 정부기구, 민간인기구(NGOs), 70) 그리 고 종교기구들이 있다. 종교계로는 개신교에 남북나눔(기독교 북한동포후원 연합회), 대 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월드비전, 기독교대한감리회서부연회 등의 기구가 있다. 불교에는 조 국평화통일불교협회,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한국제이티에스(JTS) 등의 기구가 있다. 천주교 에는 천주교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및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등의 기 구가 있으며, 원불교는 교단자체가 대북지원 사업자로 등록되어 있다. 개별 종단차원에서 종교협의회 관련하여, 조선종교인협의회(Korean Council of Religions, KCR)는 조선천도교 중앙지도위원회(위원장 류미영),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조선 카톨릭교협회, 조선불교도련맹 등 4대 종단의 연합기구로 1989년에 출범하여, 최근 러시 아와의 관계 강화 차원에서 출범한 조선정교회(위원장 허일진) 등 5개 종교단체가 있다. 1991년 네팔 카투만두에서 개최된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Asian Conference on Religion and Peace, ACRP) 총회에 조선종교인협회장을 맡고 있는 정신혁 천도교 교령과 천주교 인협회 중앙위원인 한인철 토머스를 참석하였으며,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 회원국가로 가 입하였다. 이 때, 당시 6대 종단 협의체인 한국종교인평화회의(Korean Conference on Religion and Peace, KCRP)와의 접촉을 갖게 되었으며, 천도교, 유교 및 원불교는 분단이 후 처음으로 회합을 가지는 등 여러 종단의 지도자들이 함께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제 3국을 통한 극히 제한적인 남북종교인간의 교류는 1995년과 96년의 북한의 홍수(큰 물) 및 자연재해를 극복하기 위한 인도주의적 대북지원사업을 시도하면서 종교인뿐만 아 니라 민간인의 교류에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하였다. 71) 1995년도 이후에 종교 연합체형성 과 국제적 연대가 이루어졌고 북한의 조선종교인협의회 의 위상도 따라서 증폭되었 다. 남한의 종교 협의체기구는 한국종교인평화회의를 중심으로 1995년 10월에 범종단 북한수재민 돕기 추진위원회 를 구성하고, 각 종단에서 모금된 성금으로 구입한 밀가루 를 한국적십자를 통해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종교계의 노력은 1997년에 우리 지속적인 공헌을 명시하는 뜻에서 UN헌장에 제시된 개념인 것이다. 그 후 UN 경제사회이사회의 보다 효과적이고 성공적인 정책결정과 집행에 대한 NGO들의 기여를 인정하고 기대하면서 NGO들의 협의적 지위를 세 가지로 구분한 내용의 결의안 제288조를 채택하면서 국제사회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최 근에 와서 우리사회에서도 영어 원어의 약어 그대로인 NGO란 표현이 널리 통용되고 있다. 70) 남한 정부의 인가를 받고 있는 대북지원 사업자 중, NGOs 기구로는 2009년 초까지 국제라이온스협 회 한국연합회, 굿네이버스, 남북강원도협력협회, 남북농업발전협력민간연대, 남북어린이어깨동무, 남북협 력제주도민운동본부, 새마을운동중앙회, 선한사람들,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유진 벨재단, 평화의 숲, 한국건강관리협회,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한국복지재단, 한민족복지재단, 21세기통일 봉사단 등의 조직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71) 경제계의 교류가 주류를 이루어 정주영 현대그룹회장(1989년), 김우중 대우그룹회장(1992년) 등 대 기업총수들의 방북이 이어졌다. 정주영 일행은 경제인으로서는 최초로 판문점을 통해 소 5백 마리와 함 께 1998년 6월 16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을 방문하였다.(중앙일보 1998. 6. 17). 그의 잇따 른 판문점을 통한 남북 왕래는 민간교류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마침내 금강산 관광을 위한 뱃길이 (1998년) 열렸다. 금강산 육로 관광 및 개성공단의 설립도 가능케 하였다. -26-
민족 서로돕기운동본부 가 출범하면서 종교계와 사회단체가 연합하여 지원하는 형태로 본격화하게 된다. 북측은 대북 지원을 주도하는 민간단체의 원동력이 종교단체라는 점을 간파하고 각 개별 종단 차원의 접근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가게 된다. 한국종교인평화회의는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와 공동으로 1997년 5월 28일에서 6월 1일 까지 북경에서 북한종교인협의회 대표들과 만나 종교교류를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 을 협의하였다. 이후 한국종교인평화회의는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와 공동으로 북한 수 재민 실태에 대한 세미나 및 기자회견이 1998년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일본 동경에서 열었다. 72) 북한 수재민 실태 및 인도주의적 원조에 대한 국제적 공동협력 방안 7개항을 5월 25일 동경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하였다.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 및 세계종교인평화회의 종교지도자들은 북한사람들을 돕기위해 식량과 의약품을 보낼 수 있도록 의견을 나누었으며, 국제기구들인 WFP, FAO, CARITAS, AMERICARES 등의 북한 에 대한 인도주의적 식량과 의약품 원조에 대한 감사표시와 함께 북한의 현재 식량위기 를 해결하고 동북아시아에 평화, 화해, 그리고 안전을 불러오기 위한 한국종교인평화회 의ㆍ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 동경 선언 을 합의하였다. 73) 그러나, 북측은 대북 지원을 수용하는 과정상의 문제와 북한 사회 내부로의 파장을 염 려하여 제한된 형태로 조심스럽게 접근하였으며, 대남공세적 접근 행태와는 판이하게 수 세적 접근 행태를 나타내게 되었다. 남한 정부 또한, 남측 인사들의 북한 방문을 법률적 으로 뒷받침하면서도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북한 주민접촉에 대하여, 1989년도까지 신청 36건(70명)에 21(22명)건을 승인하였으나 실제로는 1건도 성사되지 않았다. 1990년 대에 들어서서 신청자수가 235건(687명)으로 늘어났으며, 남한 정부의 승인과 북한주민 접촉의 성사 비율이 지속적으로 늘어났으며, 민간단체 및 종교단체의 인도적 대북지원 또한 급증하였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후, 2001년도 주요 접촉사례로는 조선그리스도 련맹과의 종교교류 협의(3.2), 부활절 연합예배 개최 협의(3.12), 금강산 평화모임 협의 (3.26), 남북불교교류 협의(4.23), 개천절 공동행사 협의(4.30), 금강산 노동절행사(5월), 6.15 통일토론회, 남북 기독교 교류협의(6.25), 평양에서 열린 8.15 남북공동행사(8.15) 등을 들 수 있다. 74) 한국종교인평화회의는 국제 종교협력기구와 연대하여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지속적으 로 추진하고 있으며, 2002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 총회와 2006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종교인평화회의(WCRP) 총회에 북한 종교계 대표들이 참석하여 남ㆍ 북한 종교 교류와 인도적 대북지원의 성과를 세계 종교인들에게 알리는 중요한 역할들을 담당하였다. 통일백서 2008 의 자료에 의하면, 2007년 남북 종교분야는 기존 종교시설 복원사업 들이 추진된 가운데 남북 종교인들간의 개별접촉 차원을 넘어 한반도 평화와 통일문제를 72) 김몽은 신부를 비롯하여, 원불교의 전팔근(ACRP 의장, 국제담당교령), 천도교의 김철(종무원장), 개신 교의 정영문 목사(부산KCRP 회장), 불교의 일화스님(조계종), 법륜스님과 정안숙(우리민족서로돕기 불 교운동본부), KCRP사무처에서 변진흥(KCRP 사무총장), 박광수(KCRP 사무차장) 등이 참석하였으며, 한국대표로는 법륜과 박광수가 발표하였다. 73) 한국정부의 인도적 북한지원, 군비축소와 동북아시아 평화 구축, 북한에 대한 경제제제 조치 등 일곱가 지 사항을 제안하였다. 74) 통일부, 통일백서 2002, 2002. -27-
위한 종교단체 연합기구간의 연대와 교류협력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종 교분야 왕래인원이 2007년 한 해에만 4,899명에 달해 2006년까지 종교분야 왕래 인원수 인 3,376명보다 45%가 증가하였다. 75) 남한의 7대 종단 연합기구인 한국종교인평화회의 대표단 41명은 북한 조선종교인협의 회의 초청으로 양 단체간 교류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07년 5월 5일부터 8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평양을 공식 방문하였다. 한국종교인평화회의 방북단은 공동 기념행사 및 북한 내 각 종단 시설 방문하였으며, 그 동안 개별 종단차원에서 이루어지던 부정기적인 교류사업을 정례화하여 민간교류차원에서 상호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현재, 남ㆍ북한의 종교인과 민간인의 상호 만남은 늘 정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제약을 안고 있지만, 남ㆍ북한간의 활발한 교류와 함께 종교인과 사회민간단체의 역할이 증대되 었다. 2009년도와 2010년도 종교분야 교류는 대규모 행사 위주에서 실무차원의 사업협의가 주로 이루어졌으며, 새로운 사업추진보다는 기존사업의 내실화를 다지는 정도로 사업이 추진되었다. 76) 기독교계는 개성, 평양, 중국 등에서 실무협의 위주로 교류가 진행되었으 며, 불교계는 조계종이 2009년 10월 금강산 신계사에서 신계사 낙성 2주년 기념 남북 공동법회 를 개최하였으며, 2010년에는 중장기적 남북불교 교류에 대한 협의를 이루어 냈다. 천주교의 경우, 북한 조선가톨릭협회와 사목권 (교황청의 천주교 관련 입법, 사 법, 행정에 관한 제반 권리)에 대한 협의를 하였으나,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원불교의 경우, 평양에 빵공장을 설립해 지속적으로 밀가루를 지원해 주면서 남북종교인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있다. 최근, 불교계는 2011년 9월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의 두 차례에 걸친 평양 방북과 불교계 민족공동체추진본부(본부장 지홍스님)가 수해로 피해를 입은 북한 어린이 돕기에 나서남북불교간 협력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11월초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NCCK)는 평양을 방문하여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과 함께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 회를 가졌으며, 향후 협력과 교류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77) 북측 조선종교인협의회(KCR.회장 장재언)가 7대 종단 종교협의체인 한국종교인평화회의 (KCRP)를 초청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7대 종단 대표들의 북한 방문이 9월에 성사되었 다. 78) 7대 종단 대표와 실무자 등 총 24명으로 구성된 방북단은 9월 21일 중국 선양을 거쳐 평양에 들어가 24일까지 머물며 평양과 백두산 등에서 남북 종교인 공동모임 및 공 동기도회 등을 개최했으며, 북한의 김영남(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하여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리종혁 부위원장,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 장 겸 6 15 공동위원회 북측위원회 명예대표를 만나 남북 경색 국면을 풀고자 하는 노 력들을 확인하였다. 첨예한 남북의 정치적 대립국면을 종교인들의 대화 협력 교류를 통 75) 통일부, 통일백서 2008, pp. 192-195. 76) 통일부, 통일백서 2010, pp. 82-84 77) <국민일보> 쿠키뉴스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cul&arcid=0005512261&cp=du) 78) 7대 종단 대표는 김희중 천주교 대주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인 김영주 목사, 자승 조 계종 총무원장, 김주원 원불교 교정원장, 최근덕 성균관장, 임운길 천도교 교령, 한양원 한국민족종교협의 회 회장 등이다. (http://news.donga.com/3/all/20110919/40426112/1) -28-
해 화해의 장으로 전환시켰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러한 성과들을 바탕으로 종교계가 공동으로 북한과의 접촉을 할수 있는 통로를 만들 어 낸다면 실질적으로 통일부를 통한 지원과 협력을 효과적으로 이루어 낼 수 있을것으 로 보인다. 2) 인도적 대북지원을 통한 남북화해 인도적 대북지원을 통한 남북화해의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정치적, 군사적 힘에 의한 외교적 압박은 평화를 이루는 수단이 아니라, 남북 또는 북미간의 관계를 대립구도로 몰 고 갈 것이며, 남북간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교류 와 NGOs 기구들의 교류를 통한 남ㆍ북한 대화와 협력은 평화의 불꽃을 살리는 촉진제가 되어야 한다. 북한이 일련의 자연재해로 인한 고통을 겪을 때, 남한의 종교계와 NGOs 기구들은 조건 없이 북한을 도와주었다. 현대의 정주영을 선두로 경제계에 있어서도, 북 한을 인도적 차원에서 도왔다. 이러한 민간인 차원의 도움이 북한의 문호를 개방하고 남ㆍ북한간의 긴장을 해소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현재, 북한의 식량부족상태는 심각하며, 어린아이를 비롯한 노약자와 여성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세계식량기구(WFP)는 북한의 식량난 상황을 여러 차례 긴 급하게 다루었고, 국제사회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79)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도 북한에 대한 식량 지원이 악화된 상황임을 보도하였다. 80) 그러나, 인도적 대북지원에 대한 반대도 만만치 않다. 경제적 지원이 군사적 목적으로 새고 있으며, 오히려 남한에 군사적 위협이 높아진다고 보고 있다. 남한 내지 국제기구 에서 북한에 지원한 물자가 로케트 또는 미사일 만드는 데로 유용되는 것이 아닌가, 오 히려 남한을 향해 무기를 만드는 데 쓰이지 않는가라는 의구심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 다. 물론, 모니터링의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특정한 지역과 특정한 대상을 남측 에서 선택하여 대북지원을 할 수 있기에 이러한 문제를 불식시킬 수 있으리라 본다. 인도적 대북 지원을 위한 파트너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대북지원에 대한 모니 터링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협의하고 협정을 맺음으로써 경제적 대북지원이 인도적 지원 이라 하더라도, 현금의 지원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도록 할 수 있다. 북한의 어린아이, 79) Published on 05 April 2009 Straits Times / AFP (http://www.wfp.org/content/nkoreans-go-hungry): Following successive poor harvests, the UN's World Food Programme (WFP) expects up to 40 per cent of North Korea's population - an estimated 8.7 million people - will urgently need food aid in the coming months. 'We hope the international community will continue to remember the food crisis in the DPRK (North Korea). 2009년 4월 5일자로 북한의 식량위기를 북한은 수백만 명이 심각한 식량난으로 인해 기아상 태의 곤경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그 심각성을 경고하고 있다. 북한의 부족한 식량수확은 지속되어, 북 한 전인구의 40%에 해당하는 8백 70만명이 수개월내에 긴급하게 식량이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2008년 9월,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기 위해 전 세계에 5억 4백만 달러의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목표의 11%만을 지원받아 180만명에게 지원할 수 있는 식량을 제공하였을 뿐이다. 노약자, 어린이, 임산부, 환 자들에게 식량을 모두 제공하길 원했으나, 북한사람들이 필요한 전체 양의 15%에 불과하였다. 80) WFP Does What Little It Can For North Koreans" (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09/03/05/ar2009030503613.html?wprs s=rss_business) Published on 05 March 2009, Washington Post. 2009년도 긴급지원 5억 4백만 달러 중 4.5%에 해당하는 2200만 달러의 지원을 받았을 뿐이라는 보도.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