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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영화 첼르부르외 우산 은 빗소리 같이 7r슴을 적시는 첫사량의 진한 of픔을 람람하게 담고있다. -본문중에서 - 명화와 고활흘 찾아서 크라운판.252먼 / 값 10, 000원 이 동 걸 지음 11 신지서원 이 책의 특정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점보다 는 가능하면 발로 뛰며 발굴하는 식의 살아 m m 있는 글과 사진어 l 더 큰 비증을 두었다는 것 01 풍 컬 지용 i 이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사진 중심의 책이 되었는데 이것은 또한 영상 시대의 시각적인 효과를 살리는 시대의 추세를 따른 하나의 장점이 될 수도 있다고 기대한다. 심지서원 이 책은 한국언론재단의 언론인 연구 저술활동 지원으로 출판되었다. 이책의 져깎 아동걸은 부산댐학교를 졸업학고 춘추샤(부산, 댐전, 팡주, 강원일보, 매일신문 등 5J)1.q) 공동특팍원으로 팍리엔 주재학였으며 면XJI 부산일보 논설위원O(며 영략획 부잔X(구 회원이다.

2.001 명락효 I i훌명폭훌l (1) 영략이념의 정협 맺 ~좁 (2) 자우조적의 창설 맺 확대 (3) 채쟁내실의 확충 맺 강화 (4) 래외샤업의 개빨 맺 τ1 원 영락회 사무처 www.younglak.org

폭 *t (시론) 영락회 발전을 위한 제언 (조영섭)...... 4 (특집) 고구려 및 광개토대왕 유적 답사기...... 9 광개토대왕의 얼을 찾아서 (김영조)... 10 광개토대왕의 기상을 다시 꿈꾸며 (지우효)...... 37 만주벌판을 달리고 싶은 젊은 영락의 꿈 (성윤수)... 55 (논문) 한반도에 氣 가 모이고 있다 (홍성태)...... 87 (논문) 퇴계 선생의 건강 장수론 (김춘식)... 117 영 락회 알림 글............ 135

총4웰 영락회발전을위한제언 I 조영 섭( 曺 永 變 ) 영락회 사무처장 조영섭 띠부과의원장, 의학박사, 피부과전문의 (E-mail: wonlan@chollian.net) 2001년 2 월! 새로운 천년, 새로운 한 세기인 21세기가 사실상 시작되는 시점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 우리 배달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은 어디 인가? 또 이후 세상은 어떻게 변화할 것이며 세계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연초부터 우리의 우방이자 초강대국인 미국은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면서 더욱 강한 군사력 으로 세계의 중심에서 세계질서를 주도하겠다고 선언하였으며 또 우리의 주변국이며 21세기 강대국을 지향하는 우리의 영원한 역사적 라이벌인 중국은 21세기는 위대한 중화민족 부홍의 세기 라고 세계를 향하여 외쳐대고 있다. 이들이 우리의 우방이며 이들과의 우호관계가 앞으로도 계속 유지되리라 예상되지만, 우리는 이들로부터 두려웅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민족 앞에는 그 갚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가로막고 있다. 우리는 IMF 의 암울한 기간동안 미래에 대한 명쾌한 대안이나 비전도 없이 임기응변식으로 처방하여, 오히 려 직업간의 갈등과 계층 지역 세대간의 갈등만을 한층 심화시켜 놓았다. 또한, 급변하는 세계화와 정보화의 와중에서 우리 배달민족의 가치관이 혼돈에 빠지고, 주체 성마저 상실되어 가고 있다.

시론 I 5 이러한 상횡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어려움이 지속된다면 우리민족의 모든 활동영역은 더욱 좁 아질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 강대국들은 21세기에는 세계화와 정보화 등으로 국가간의 국 경이나 영토의 개념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고 있고 심지어 우리의 식자층 일부에서 조차 이러 한 논리에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강대국들이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커고자 하는 논리에 불과하다. 이들은 이와 같은 논리로 이들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에 의해 불분명해진 우리민족의 영역만큼 자신들의 국경과 영토를 넓혀 가는 것이다. 그러나 되돌아 보면 우리 민족사에서 우려 배달민족에게도 거대한 영광을 안겨준 시대가 있었 다. 그것은 고구려 국민의 끈질긴 노력과 더불어 위대한 지도자를 만났던 광개토대왕의 시대였 다. 광개토대왕의 시대에는 고구려인의 다물정신을 기반으로 고토의 회복은 물론 광활한 영토 를 확보하였으며, 이로서 고구려가 세계의 중심이 되면서 독창성이 벚나는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이러한 문회는 중국의 북조 문화와 서역의 돈황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일본에도 고 구려의 앞선 문화를 전파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민족의 이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하여, 광개토대왕의 시대에서처 럼 우리에게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지도자와 민족의 주체성(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즉 영락이 념인 자주 자조 자강정신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절실히 요구된다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하여 영락회는 영락이념을 국민 혹은 민족정신으로 승화시켜, 새로운 영광의 시 대가우리민족에게 다시 도래하도록끊임없이 노력하여야한다. 2 영락회 사무처는 영락회 발전을 위하여 올해 본회의 운영 목표를 (1) 영락이념의 정립 및 보급 (2) 지구조직의 창설 및 확대 (3) 재정내실의 확충 및 강화 (4) 대외사업의 개발 및 지원 등의 4 가지로 설정하고, 이 4대 지표의 구체적인 사업들을 지속적이고도 강력하게 집행하고 반드시 달성할것이다.

6 /영락이데아 첫째, 영락이념의 정립 및 보급을 위한 실천사업으로, 1) 청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락이념의 보급에 주력한다. * 각종 홍보물이나 웹사이트의 활용 및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청년학생들에게 영 락 이념을 보급하고, 특히 대학생들에게는 국가의 동량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영락동아 리 창립을지원토록한다. 2) 본회의 사업에 대한 회원들의 관심과 참여를 확대한다. * 각 지구별로 정기적 집회를 개최하며 전 회원이 참석하여 소속 연대의식을 고취하고 영 락이념의 학습 및 대외봉사활동 등 본회 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한다. 3) 정기적인 회원세미나 및 수련회를 개최하고 이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한다. * 본회회원 및 청년학생들을 상대로 매년 일회이상 세미나 또는 수련회를 개최하고, 이 를 통해 영락이념을 고취하며 회원상호간의 유대를 강화한다. 4) 영락연구소에서 발행되고 있는 영락이데아는 년 2 회 발행될 수 있도록 재정적 학술적 지원에총력을다한다. 둘째 지구조직의 창설 및 확대를 위한 실천사업으로 1) 설립 중에 있는 지구설립에 박차를 가하고 전국적 규모로 지구조직을 완성한다. * 설립 중에 있는 동해지구 등의 창설에 많은 회원들이 성원하도록 하며, 주요 시, 도 및 해외지역에 지구조직을 창설함과 동시에 다 OJ=한 직업을 가진 회원을 제한 없이 영입하 여 명설공히 전국적 규모를 갖춘다. 2) 영락회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를 증진시킨다. * 각 지구별로 본회의 활동 및 홍보자료를 작성하여 언론기관과 정기적으로 접촉하고, 이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영락회 및 영락이념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킨다. 셋째, 재정내실의 확충 및 강호}를 위한 실천사업으로, 1) 회칙 및 제 규정을 엄중히 적용하여 회원들의 성실하고도 자발적인 회비납부를 유도한다. * 본회의 운영에 필요한 경비로 회비의 충실한 징수와 대외사업 등에 필요한 특별기금을

시론 / 7 후원금 형식으로 조성한다. 2) 영락홈페이지를 더욱 확충하여 정보교환을 활성화한다. * 지식정보화에 부응하여, 광개토대왕에 대한 자료를 데이타 베이스화하고, 회원뿐만 아 니라 일반인과의 의견 및 정보교환을 위해서 홈페이지를 더욱 확충하고, 회원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영락회보를 정기적으로 발행한다. 넷째 대외사업의 개발 및 지원을 위한 실천사업으로, 1) 자매결연을 맺은 조선족학교에 대한 장학사업을 실행하고 만주지역에 대한 교육사업을 확대해나간다. 2) 전년도에 처음으로 실행한 중국집안의 광개토대왕릉 및 고구려 유적답사를 매년 정례화 한다. 3) 각 지구별로 1개 이상의 중요 지역봉사사업을 계획하고 실천하며, 특히 환경보전운동에 솔선수범한다.

광개토대왕릉바 기획시리즈@) 특 칩 : 고구려 뭘 굉t'l H를, th펑i 유적답샤rJ l 본 특집은 영락회 기획사업으로 지난 2000년 8월 12 일부터 16일까지 4박5 일 간 중국 집안( 集 安 )시를 중심으로 실시된 고구려 및 광개토대왕 유적답새 에 관 한 3편의 기행문으로 구성하였다 영락연구소- 폭 차 광개토대왕의 얼을 찾아서...... 10 - 김영조(영진전문대학 교수) 광개토대왕의 기상을 다시 꿈꾸며...... 37 - 지우효(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만주벌판을 달리고 싶은 젊은 영락의 꿈... 55 - 성윤수 (일산 백석고등학교 2 학년)

10 / 영락이데아 광개토대왕의 열을 찾아서 김영조( 金 永 祚 ) 영락회 의장 겸 중앙운영위원장 영진전문대학 교수, 법학박사 프롤로그 지식정보화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창의성과 개척정신이 우리 의 필수적인 생존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이때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 감과 용기를 가지고 무한한 가능성에 도전하여 세계초일류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국가적 과제이다. 좁은 국토에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로서는 우수한 인적 자원을 양성하고 활용하여 지식정보화라는 거대한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며 또한 시대적 소명이다. 그러한 목표에 대한 사실적 정신적 토대로서의 광개토대왕이라는 위대한 인물과 그 가 추구하고 이룩한 이념과 정신은 진정 한국인이 본받아야 할 표상이며 지금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이다. 특히 젊은 청소년과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워 줌으로써 앞으로 이들이 세계를 경영하고 세계를 지도해 나갈 수 있는 우수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국민적 관심과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계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는 교육열이 매우 높고, 개인의 창의력과 지적 수준이 우수한 것으 로 정명이 나있다. 따라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21기 지식정보화시대는 우리나라에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가 세계 제일의 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는 생각이 든다. 다만 이러한 목표는 우리들이 가만히 앉아 기다려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 리 스스로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부단히 노력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우리 청소 년 및 학생들이 학창 시절의 높은 이상과 피끓는 정열로 학업에 전념한다면 이러한 목표는 보다

광개토대왕의 얼을 찾아서 /11 빨리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러한 돗으로 광개토대왕의 위대한 업적과 정신을 직접 체험하고 그가 품었던 웅지를 되새 겨보기 위하여 23명의 영락 전사들은 2000년 8월 12 일부터 8월 16일까지 4박 5 일간 고구려 및 광개토대왕의 유적지를 답사하였다. 이 유적 답사 프로그램은 영락회의 기획 사업으로서 오래 전부터 회원들 사이에 강력하게 요청이 있었던 것을 지난 2000년 7월 29 일 대구에서 열린 중앙 운영위원회에서 최종확정하여 추진하게 된 것이다. 프로그램 일정과 진행은 대한항공 안동지점장으로 있는 이한용 회원이 직접 챙겨 주었다. 특 히 이한용 회원은 이번 답사 여행에 함께 참가하여 우리 일행이 안전하고 편안하며, 재미있고 유익한 일정이 되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고 인솔책임을 맡아 주었다. 답사를 위한 홍보 및 회원 모집 업무는 사무처장인 조영섭 원장이 맡아 주었다. 병원 업무와 의약분업 때문에 바쁜 가운데 에도 직접 참여하여 진행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특별한 회원으로서 안동대학교 인문대학 사학 과에 재직하고 있는 이윤화 교수는 학회 관계로 미리 중국에 가 있다가 심양에서 우리 일행과 합류하여 함께 답사를 하게 되었다. 중국통으로 불려질 정도로 중국의 역사와 문물에 대한 해박 한 지식을 가지고 유적 및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상세하면서도 재미있게 설명해주었다. 능통한 중국어 실력과 달변을 발휘하여 우리를 안내하여 주었기 때문에 이번 답사는 더욱 알차고 유익 한 여행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답사 여행에는 영락회 정회원 이외에 광개토대왕 및 고구 려에 관심 있는 분틀이 함께 참여하여 더욱 다채로운 행사가 될 수 있었으며, 젊은 영락 회원 들도 많이 참여하여 앞으로 영락회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현재 성균관 대학 교 경영학부 4학년에 재학중인 지우효군은 아버지인 지용광 회원(울진중앙병원장)으로부터 이 미 영락회 및 영락이념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교육받아 역사인식이 뚜렷하여 젊은 영락 의 대 장격으로서 충분한 자질을 갖춘 것으로 인정되었으며 4 명 전 가족이 참여할 정도로 열성을 보 인 서울지부 성기석 회원(한국이엠에스주식회사=지멘스의 이사)의 장녀인 성윤수양은 고교생으 로서 메모지를 들고 다니면서 유적을 일일이 기록하는 등 진지한 자세로 역사탐구를 하는 모습 이 대견스러웠고, 우리의 역사유물이 중국인들에 의해 훼손되고 방치된 데 대하여 안타까움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렬 정도로 역사 의식이 투철하게 정립되어 있었다.

12 / 영락이데아 8월 12 일(토) - 심양으로 가다 - 서울에서 중국 심양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가 김포공항 활주로를 힘차게 질주하여 푸른 창 공을 날아오를 때 마음속에는 어느 새 말을 탄 옛 고구려 병사들이 푸른 초원의 만주대륙을 질 주하던 때의 기분으로 돌아갔다. 눈 아래 광활하게 펼쳐지고 구름은 마치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 진다. 비행시간은 약 1시간 40분이 걸렸다. 우리보다 1시간의 시차가 있다. 시계를 1시간 뒤로 돌려야 했다. 우리보다 1시간 늦은 걸 보니 동경 120도를 기준으로 시간을 정한 것 같다(우리나 라는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함). 심양 공항에서의 입국절차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우리나라 시골 역 대합실 정도의 허름한 시설과 느리게 진행되는 수속업무 과정을 보면서 과연 이곳이 국 제공항인지 의문이 갈 정도였다. 서울 김포공항과 비교했을 때 자본주의체제의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비교우위의 한 단면을 보는 듯 했다. 모든 공항 분위기가 작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 톡에 갔을 때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곳이 다 사회주의국가 체제의 한계 상 경제발전이 더디고 의식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탓인 것 같았다. 저무는 석양의 아름다운 도시 로 불려지는 심양은 약 680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북경, 상 해, 천진 다음 중국 4번째 큰 도시이다. 청태조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워 처음 수도로 정한 곳이 다. 그 후 태종이 후금에서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겼다. 이후 심양은 봉천으 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알려진 도시이다.2, 000의 역사를 가진 도시이며, 한때는 고구려의 영토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는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일찍이 요녕 성의 성도로서 1900년 이후 제국주의의 침략이 시작되지 일본에게 짓밟히기 시작했고, 1931년 에는 만주 사변의 기지가 되었다. 이후 일본의 중국 침략이 근거지가 되었고,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심양이라는 이름으로 해방되었다. 깡마르고 왜소한 체구의 조선족 젊은 남자 가이드가 우리 여행의 전체일정에 대한 안내를 해 주었다. 지역적 인접성으로 인해 북한 말투를 쓰고 있었으나 같은 한국인(조선족)이라는 말에 친근감과 동정심을 느낄 수 있었다. 가이드의 얘기로는 중국 국민은 매우 게으르다고 한다. 아

광개토대왕의 열을 찾아서 / 13 침 출근은 거북이처럼(천천히) 저녁 퇴근은 토끼처럼(빨리) 하고 있으며, 아침에 출근해서도 신문을 보거나 차를 마시면 업무를 천천히 시작하고 퇴근 시간에는 정식 퇴근시간 이전에 미리 퇴근 준비를 해놓고 시계를 본다는 얘기이다. 중국 원래의 국민성이 그런 점도 있지만 사회주의 국가체제의 한계성으로 인한 점도 있을 것이다. 빨리빨리 문화에 젖어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볼 때는 매우 답답할 일이다. 심양에 내려 제일 먼저 본계수동굴( 本 漢 水 洞 )을보러 갔다. 심양에서 40km거리에 위치에 있 는 큰 동굴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5만년 전에 형성된 대형 석회암 동굴이다. 전체길이는 약 3km 이며, 세계적으로 가장 긴 석회암동굴이다. 일반 동굴로서 세계에서 가장 긴 것은 미국에 있는 것으로서 555km나 된다고 한다. 제주도 만징낼이 세계에서 가장 긴 것이라고 알고 었던 우리들에게는 엄청난 놀라움이 아닐 수 없었다. 본계수동굴은 동굴 안으로 강물이 흐를 정도로 규모가 크다. 수심은 평균 2m이고 가장 깊은 곳은 7m 이다. 한여름인데도 내부가 추워서 무료 로 벌려주는 조끼를 걸쳐 입어야 했다. 1시간 정도 배로 유람하면서 동굴내부를 구경하였다. 내 부에는 형형색색의 대형 종유석 석순들이 장관을 이루고 었다. 우리나라 울진 석류굴이나 강원 도 환성동굴과는 규모에 있어서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저녁에 까르푸 쇼핑센터에 들렀다. 앞 광장에는 많은 대중이 운집한 가운데 노래자랑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타고 온 자전거가 건물 앞에 빽빽하게 들어서 었다. 사람들이 매우 복잡하게 분 비고 있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각종의 다OJ=한 상품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었으니 중국인인 들 얼마나 사고싶어 하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쇼핑용 비닐 봉지에 물건들을 사들고 나가는 수 많은 사람들의 모습들에서 자본주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중국도 이제 서서히 자본주의화 되어 가고 있고, 국민들이 의식이 바뀌어가고 있는 상태에서 더 이상 사회주의체제를 고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늦게 집안( 集 安 )으로 가기 위하여 통화( 通 化 )행 야간열차를 탔다. 새벽까지 잠을 자면서 달려가야 한다. 열차 내 좌석을 2층 내지 3층으로 개조하여 침실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다. 우리나라 열차의 좌우 양쪽 좌석을 한 쪽으로 합쳐 놓은 다음, 앞 뒤 좌석을 마주보게 하여, 1실 4 인 내지 6인의 이른바 열차호텔이다. 차창 밖으로 휘영청 밝은 달이 보이고 별빛이 반짝인

14 / 영락이데아 다. 새로운 정취를 맛본다. 달리는 기차가 마치 옛 우리 조상들이 말을 타고 만주 별판을 달리던 때의 모습으로 오벼랩 되면서 야간 완행열차를 타고 여행하던 때의 옛 추억이 반추되어 옹다. 낭만적순간이다. 8월 13 일(일) - 집안에서 (5호분묘, 장군총, 집안박물관, 광개토대왕릉비, 압록강) - 새벽에 교통요충지인 통화역에 도착하였다. 열차에서 내려 다시 버스로 고구려 유적지인 집안 으로 가야 했다. 통화에서 집안까지는 버스로 약 4시간 정도 걸렸다. 집안( 集 安 )은 중국 강서성 ( 江 西 省 ) 중서부에 있는 도시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학교가 많이 있는 학문의 중심지로 송대 와 명대에 뛰어난 학자들을 많이 배출했다고 한다. 집안은 우리의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지녔던 고구려 도읍지가 번성했던 지역이다. 집안은 고분 천국이다. 도시 곳곳에 무덤이 있다. 동북아시아 민족 중에서 무덤의 범위가 가장 크고 많으며 다양하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왕릉 크기에서부터 이름 모를 조그만 무덤 크기까지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그래서 집안 지역 은 분지앓 地 )임과 동시에 분지( 鐵 뼈 라고도 불린다. 처음에는 1만 2천여기의 무덤이 있었으 나 지금은 7천여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고 한다. 다만 무덤의 피장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 고, 많은 무덤이 관리 소홀로 파헤쳐지고 자연 훼손되어 가고 있는 현상이 안타까웠다. 이곳에서의 주요교통수단으로서 자전거 인력거 오토바이 삼륜차 미니버스 등이 눈에 보인 다. 우리가 묵을 호벨에 짐을 내려두고 5호분묘(퉁고우분묘), 장군총, 박물관, 광개토대왕릉비 등을답사하였다. 먼저 5호분묘를 찾았다. 집안에 있는 20여기의 벽화고분 중 유일하게 일반관람이 허용된 곳 이다. 분묘 안에는 백열구를 희미하게 켜놓았다. 입구에 들어서자 서늘한 공기가 몽에 와 닿는 다. 외부와의 온도차로 인한 결로 현상이 가장 뚜렷이 나타나는 고분이다.5호묘란 일렬로 나란 히 서 있는 5개의 봉토분 중 5번째에 해당하는 분묘라는 뭇이다. 묘실 천장은 삼각형 받침돌로 네 벽면의 모서리를차츰좁혀 나간 모줄임천장식 ( 말각조정식 이라고도함)이다. 현실 바닥

광개토대왕의 열을 찾아서 / 15 에는 피장자와 부인, 첩의 관대가 3개 놓여 었다. 묘실 4면 벽에는 사신도 벽화가 그려져 있었 다. 입구 남쪽 면에는 2마리 주작이 서로 대칭된 모습으로 힘찬 날갯짓을 하고 있는 주작도가 그려져 있고, 북쪽에는 거북과 뱀이 엉겨져 있는 현무도가 있다. 서쪽에는 백호도가 자리잡고 있고, 동쪽에 청룡도가 그려져 있었다. 천장받침돌에는 일월신 벽화가 그려져 있다. 보리수나무를 중심으로 흰옷 입은 두 신이 각각 해와 달을 머리에 이고 있다. 또 해는 세 발 달린 까마귀인 삼족오( 三 足 烏 : 고구려에서는 이를 영물로 취급하였다)를, 달은 두꺼비를 각각 달고 있다. 심한 결로 현상으로 인해 흰옷에 줄무늬 가 생겼다. 천장과 벽면에는 당시의 채색과 그림형상이 1, 5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남아있어, 어떻게 생생하게 이리 오래도록존속할수 있을까감탄을금치 못했다. 집안의 12, 000여 고구려 고분 중 유일하게 일반에게 고분 벽화를 공개하는 5호묘는 고구려 후기시대의 고분으로서 초기 중기의 고분벽화와는 달리 사신도를 통해 고구려인의 신앙과 정 신세계를 표현했다. 이 고분벽화를 통해 고구려인들의 기질과 풍습, 생활관, 종교와 사상, 우주 관, 예절, 남녀의 복식과 관모, 꾸멈새와 화장법, 각종 기술과 발달 정도 등 수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구려 고분벽화는 문화적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생 각을해본다. 이어 5호분묘 멀지 않은 곳에 장군총을 찾았다. 장군총은 화강암을 사용해 7층으로 계단을 만 들어 쌓아올리는 독특한 분묘의 형식을 띠고 있어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리고 있다. 즉 장군총은 계단식 피라빗형 돌무덤으로서, 서기 413-490년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장군총에 사 용된 돌은 모두 화강암으로서 돌의 전체 무게는 1만 9천 t이상이 될 것이라 한다.4t트럭 약 4천 750대 분량이다. 톨 외에도 흙과 자갈이 1만 2천 500t 가량 들어갔다. 집안 박물관측은 연인원 7만명이 넘는 인력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잘 다듬은 화강석재로 7단의 방단( 方 劃 을 계단형으로 쌓았고, 분구의 정상은 절두방추형을 이루었다. 제 1방단은 4단이고, 제 2방단에서부 터 윗 부분은 3단으로 되어었다. 전체 높이는 약 12.4m이다. 제 1방단의 한 변은 약 32m, 제일 위의 제 7방단의 한 변은 약 15m이고 각 변은 각각 방위선상( 方 位 *없)에 놓여었다. 제 1방단의 각 변에는 돌이 무너져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각기 긴 자연석의 버팀돌이 기대어 세워져

16 / 영락이데아 있다. 가장 큰 벼팀돌의 너비가 약 2.7m 길이가 4.5m나 된다. 그런데 네 변 중 한 변에는 버팀 돌이 없어졌고, 없어진 변에 쌓아놓은 돌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장군총의 정면은 국내성을 바라보며 네 귀는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석 실 안 석관의 머리 방향이 53도로 북동쪽에 있는 백두산 천지를 향하고 있다고 한다. 즉 고구려 의 근본이 백두산 천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군총을 둘러싼 12 개의 자연석의 호석( 護 石 )과 주변에 배총( 暗 劇 이라 하여 이집트 피라미드의 스핑크스처럼 이 장군총을 지켜주는 수호자가 있었다. 호석은 십이지신상의 기원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배총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분명한 학설이 제기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배총은 훼손되고 1기만 남아 있었으나, 그것도 거의 다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돌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핑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중국 당국이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적을 경시하는 처사에 분통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그 내부 주체인 횡혈식 석실은 저113방단의 윗면이 현실 바닥이고 제 5방단의 서남 면에 연도가 달려있으며 평면은 정방형, 한 변의 길이는 약 5.5m이고, 높이도 약 5.5m라 한다. 현실의 네 벽은 다듬은 화강암을 사용하여 6단으로 쌓아올리고 네 벽의 윗 부분에는 벽면과 평행으로 1단 의 방주형( 方 柱 形 ) 평행 굉돌을 놓고 그 위에 커다란 판석 한 장을 덮어 구축한 평천장이다. 그 라고 벽면, 천장에는 석회를 바르고 현실 입구에는 2장의 돌문이 있었으나 파괴되었다. 연도의 길이는 약 5.45m, 너비 2.6m, 높이 약 2.6m라고 한다. 장군총은 한때 광개토대왕의 무텀( 廣 開 士 王 劇 으로 여겨졌으나 광개토대왕의 비석에서 불과 500m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적석총에서 꽤왕릉이 산처럼 굳건하고 평안하가를 바란다 願 太 王 I 埈 安 如 山 固 如 폼) 라는 의미의 명문( 銘 文 ) 벽돌아 출토되고, 무덤의 크기도 이 장군총에 비하여 4배나 큰 것이 발견되어 이것을 오히려 광개토대왕의 무덤( 太 王 團 으로 여기고 있다. 반면 이 장군총은 광개토대왕의 비석으로부터 1km나 떨어져 있어 장수왕의 무덤이라 추정하는 학자도 있지만 아직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집안박물관에도 여러 가지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1958년에 개관했으며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틀을 3관으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입구에는 고구려 역대 왕들의 초상화가 있었으며, 제 1관은 고구려 고분과 성에 관련된 자료실, 제 2관은 광개토 대왕 비문 자료실, 제 3

광개토대왕의 얼을 찾아서 / 17 관은 고구려 유물자료실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자료설명이 모두 중국 한자로 되어 있 었고 사진촬영을 금지하는 바람에 생생한 자료를 가져올 수 없었다. 더구나 이번 답사를 통하여 광개토대왕 때 사용되던 우물 정( 井 ) 모양의 문양이 새겨진 기와를 확인하려 박물관 내부를 일 일이 찾아보았으나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작은 돌로 만든 능비 모조품과 광개토대왕의 영정 사진을 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어 광개토대왕릉비를 답사하였다i 능비는 집안현의 현청 소재지인 통구성으로부터 동북쪽 약 4.5km지점인 태왕향 대비가( 太 王 觀 大 6 解 삼)에 서있다. 너비 1. 35~2.0m. 높이 6.39m 에, 무게가 무려 37톤이나 나가는 동양 최대의 크기이다. 능비의 재료에 대해서 종래에는 응회암으 로 보았으나 최근에는 현무암질 화산암으로 보고 있다. 하나의 돌에 약간의 인공을 가한 것으로 서, 蓋 石 이 없는 고구려 석비 특유의 형태로 되어 있다. 서체는 전한( 前 i횡의 예서( 慧 書 )체로 되 어었다. 능비에 대한 기록으로서는 조선시대의 용비어천가에 태조 이성계가 고려말에 동녕부를 원정 갔을 때 비석을 본 것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호 峰 類 調 에는 16세기 전반기에 명안도 강계 만포진 일대 국경지방을 시찰한 섬언광( 沈 彦 光 )이 압록강 너머로 능비를 보고 지은 시가 있으나. 이것은 능비를 금의 황제비로 잘못 본 것으로 되어 었다. 그 후 17세기 에 들어와서 청이 전 중국을 지배하면서부터 능비가 있는 집안지방을 비롯한 그 주위 일대를 만 주족의 발상지로 간주하여 이곳에 사람들이 살지 못하게 하는 이른바 봉금( 封 禁 ) 제도를 실시하 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접근이 불가능하여 황폐화되었다. 그러다가 1875년(고종 12 년)에 봉천 유수( 留 守 ) 숭실(뿔 實 )이 통구 지방의 민정을 선포하던 때에 다시 발견된 것으로 되어 있다. 능비는 고구려 제 19대 왕인 광개토대왕의 엽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웠다. 사면석비( 四 面 石 E뽕)로서 글자수가 1. 775자로 되어 었다. 제 1면 11행, 제 2 면 10행, 제 3 면 14 행, 제 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 1면만 39자)로 되어 있다.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 내성 동쪽 국강상(지명)에 대왕의 능과 함께 세워졌다가 이곳으로 옮겨졌다. 묘호( 願 號 )인 국강 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國 剛 上 廣 開 土 境 平 安 好 太 王 )의 마지막 세 글자로 약칭하여 일명 호태왕 비 라고도 한다. 비석의 내용은 고구려의 건국과 광개토대왕의 즉위 대외진출업적 능묘의 관

18 / 영락이데아 리문제등 세 부분으로 요약되며 고구려인의 자존적 국가의식과 진취성을 배경으로 한 영토확장 부분이 서술되어 있다.1889년 일본군 참모본부가 밀정 λ까와 중위를 보내 비문 문자를 변조, 왜가 신라와 백제를 지배하였다 는 임나일본부설 등 일제의 한국통치 합리화 일원의 근거로 활 용하였다. 서체나 비석의 규모만으로도 굉장한 작품임에 틀림없으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비문의 내용이다. 특히 비문에 나오는 辛 매 年 기사에 대한 해석은 각양각색이다. 즉 비문 중 rf 委 以 辛 ~p 年 來 禮 海 破 百 殘 000 羅 以 寫 民 民 의 구절은 고구려 남진정책의 주정복대상인 백제와 신라 및 왜에 대한 관계를 모두 밝히고 있어 정복기사의 구성과 성격 이해에 매우 중요한 기능을 갖는 한편 일본임나일본부의 존재 여부에 대한 주요한 역사적 자료가 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 석을 둘러싸고 한일간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었다. 사료에 따르면 신묘년 기사에 대한 해석 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3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지고 있다고 한다. 첫째는, 문장 전체 주어를 왜로 보아 r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 oo( 임나),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橫 井 忠 植 管 政 友 등). 이 해석에 따르면 4세기 후반 왜의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배가 기정사실화 되며, 임나일본부설의 유력한 논거가 된다. 둘째는, 앞부분의 주어는 왜로, 뒷부분의 주어는 고구려로 보아 r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고 구려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또는 왜)를 격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라고 해석한다( 金 錫 亨 등). 능비의 주체가 고구려 및 광개토대왕임을 고려할 때 비문 내용의 주어를 당연히 고구려로 보는 이 견해가 타당한 해석으로 보인다. 셋째는, 신묘년 기사 자체가 과장된 기록으로 외부의 압력으로 인하여 왜곡이 많이 되어 전면 적 수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특히 1972년 재일교포 사학자 이진희( 李 進 熙 )씨는 광개토대 왕비문의 변조설을 주장하여 학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여러 탁본, 사진, 해독문을 대조해 보고, 당시의 정황들을 조사한 결과,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전후 3회에 걸쳐 비석에 석회 칠을 하고 비문을 가공하여 일본역사에 유리한 내용이 되도록 변조하였으며, 특히 신묘년 기사 에는 상당히 조작이 가해졌다고 결론지었다. 그 후 牌 文 變 造 說 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는데, 1984년 중국 길림성 문물고고연

광개토대왕의 얼을 찾아서 I 19 구소장인 왕건군( 王 建 群 )씨는 牌 文 變 造 說 과 任 那 日 本 府 說 을 모두 비판하여 논쟁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다. 그는 현지 조사결과 牌 文 變 造 說 은 사실과 거리가 번 것으로 나타나며, 오히려 任 那 日 本 府 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전성기의 웅대한 민족의 기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를 대표하는 웅장하고 당당한 비석으로 전 세계에 자랑할 만한 기념물이다. 다행히 비석 에 벼를 맞지 않도록 보호각을 세워 놓았다. 그러나 옆으로는 여전히 비바람을 맞을 수밖에 없 어 이대로 놔두면 비석이 훼손될 것으로 보여 안타까웠다. 비석 모습을 홈페이지에 싣기 위하여 디지털 카메라에 담으려고 하였으나 디지털 카메라를 비디오 카메라로 착각한 무식한 여자 관 리자와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무식자의 고집 때문에 일반카메라로 찍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문화유적을, 이곳 멀리까지 찾아와서 사진을 찍겠다는데 왜 저들이 저렇게까지 못하도록 막는 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광개토대왕의 왕릉이라고 추정되는 무덤을 보려 했으나 볼 수 없다는 관리자의 얘기를 듣고 아쉬운 마음 그지없었다. 그러나 버스로 지나면서 보는 것은 관계없다고 하였다. 다행히 지나는 길에 멀리서나마 왕릉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내일 아침에 몰래 찾아보기로 생각하면서 아쉬운 발길을돌렸다. 저녁에 압록강으로 갔다. 강 건너 바로 지척의 거리에 있는 곳이 바로 평안도 만포이다. 강 하 나가 국경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강폭은 흔히 시골에서 볼 수 있는 정도로 좁다. 상류에는 한 발자국 거리 정도의 강폭도 있다고 한다. 강은 조용히 펑회롭게 흘러간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 고 우리가 갈 수 없는 저곳이 바로 북한 땅이라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북한 지역에서 트럭 몇 대가 지나가고 있고, 풀베는 사람의 모습이 가끔 보인다. 산은 대부분 민둥산이다. 밸감으로 쓸려고 나무를 베었거나 화전으로 가꾸기 위하여 벤 듯하다. 중국인 한 사람이 자유롭게 강을 건너갔다 왔다 한다. 초소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나 건널 듯하다. 그런데 건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보이지 않지만 비밀초소가 설치되어 있다든지 이쪽에서 공안원이 상주하고 지걱보고 었 다든지 하는 얘기도 나누었다. 저 건너 우리의 산하를 거쳐 이곳까지 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멀리 중국 심 OJ-을 거쳐 이곳으로 올 필요가 있었느냐 하는 의문을 가져 본다. 그리고 강 건

20 / 영락이데아 너 저기에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잃은 채 굶주린 생활을 하고 있는 곳이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 을 정도로 강온 말없이 흘러간다.6.15 정상회담 이후로 급속도로 진전하고 있는 남북간의 화 해와 협조의 무드 속에 빨리 통일이 되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원해 본다. 오후 늦은 거리 곳곳에는 사람들이 모여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모두 마 작을 즐기고 있다. 특히 여자들이 많다. 간판에는 몇 가지 특이한 사항이 보인다. 반점 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곳은 식당이 아니고 주로 여관이나 호텔을 의미한다. 이곳에서 기차 란 우리나 라에서의 버스를 의미한다. 그 대신 우리나라에서의 기차는 화차 라고 부른다. 이곳 사람들은 같은 글자를 중복하여 쓰는 것을 즐긴다. 보석상 이름을 金 (금흠)이라고 하거나 식당 이름을 林 森 (임삼) 또는 火 웠 (화염염)이라고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곳 중국 음식은 이상한 향신내 때 문에 우리들의 구미에는 영 맞지 않는다. 한국의 밥맛이 최고라는 것을 절실히 느껄 수 있다. 컵 과 그릇에 이빨이 나간 것을 그대로 사용한다. 이곳 사람들은 그릇이 깨어져 못 쓸 때까지 사용 한다고 한다. 절약 차원에서는 좋다고 생각되나 우리들 사고에는 맞지 않는다. 8월 14 일(일) - 광개토대왕릉, 태왕향 소학교, 국내성, 환도산성, 적석묘 - 광개토대왕릉에 기습적으로 잠입하여 사진을 찍기로 마음먹고 새벽 일찍 조선인이 운전하는 인력거(오토바이와 리어카가 합체된 것)를 타고 왕릉으로 향하였다. 일단 운전사에게는 왕릉과 인접해 있는 태왕향 소학교에 볼일이 있는 것처럼 얘기하고 길을 재촉하였다. 저들이 저렇게 알 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정도로 답사를 금지시키는 것을 보면 운전사가 혹시 함께 가는 것을 꺼려 하거나밀고하지나않을까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원래 거사(?)란조그마한실수 때문에 일을그 르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조심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운전사를 안심시키 기 위하여 먼저 학교 전경 사진을 한 커트 찍었다. 왕릉은 학교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사잇문에는 자물쇠가 잠겨져 있었고 안내 표지에는 통구고분묘 밑에 대왕묘 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묘라는 의미이다. 운전사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린 후 사진을 찍으려고 하

광개토대왕의 얼을 찾아서 / 21 는데 결국 실패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급히 나오는 바람에 디지털 카메라의 맛데리를 충 전시키기 위하여 호텔에 그냥 두고 온 것이다. 거기다가 일반카메라 마저 펼름이 막 끝나고 만 것이다. 결국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보기에 매우 큰 무덤이었다. 운전사의 얘기 로는 이것이 장군총보다 더 크다고 한다. 장군총은 돌기단이 7층으로 되어 있는데 비해 이것은 16층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무텀 윗 부분은 대부분 무너지고 밑 부분만 약간 남아 있을 뿐이었 다. 도굴과 중국 정부의 무관심으로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적이 훼손된 것을 보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더욱이 그것이 광개토대왕의 무덤이라고 하였을 때는 그들의 처사에 비분강개하지 않을 수없었다. 이러한 비분강개도 잠시, 내가 몰래 왕릉을 다녀온 얘기를 듣고 우리 일행 중 7명이 아침을 먹 고 왕릉을 보러갔다 왔다. 그들은 태왕향소학교 선생님( 集 安 市 太 王 劉 朝 蘇 族 小 學 校 金 英 }I면 先 生 님)을 만나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왕릉을 관리하는 할아버지를 불러 내 열쇠를 열고 직접 왕릉에 올라갔다 왔다고 한다. 더구나 학교 교장 선생님과 얘기하여 우리 영락회와 자매결 연의 길을 마련하고 온 것이다. 대단히 큰 성과를 거두고 돌아온 것이다. 미리 겁을 내고 몰래 행동한 나의 생각과 처신이 기우에 그쳤다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조선족 학생 약 50명이 다니고 있는 학교라고 한다. 교장선생님의 얘기로는 조금만 도와주면 학교에 큰 보탬이 될 것이 라고 한다. 어느 목사 한 분이 중국 돈 4천원(우리나라 돈으로 약 50만원)을 도와주어 학교 지붕 을 모두 수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에 조영섭 영락회 사무처장이 고무되어(사실은 매우 흥분 하여) 지금 당장 자매결연을 맺고 우리가 도와주면 어떠냐고 얘기한다. 일단 주소와 연락처를 메모해가니 돌아가서 방안을 연구해보자고 하여 겨우 말렸다. 그러나 집안을 떠나는 버스 속에 서 다시 돌아가서 자매결연을 맺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내놓고 싶다며 못내 아쉬워하 는눈치이다. 아침에 국내성과 환도산성으로 향하였다. 국내성은 시내 아파트 밀집지역에 우리나라 시골 돌 담처럼 겨우 그 흔적만 남아있을 뿐 모두 허물어지고 없었다. 성터 위에는 채소밭, 놀이터가 들 어서 있고, 성터 앞에는 큰 도로가 나있는 등 성터로 잘 구분되지 않는 상태였다. 이것이 강력한 고구려왕국의 수도였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고, 세월의 아픔과 회한을 여실히 느

22 / 영락이데아 껴볼 수 있었다. 중국 당국이 이러한 우리의 귀중한 유적지에 대한 대책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아파트단지로 난개발하고 있는 것이 매우 불쾌하였다. 사실 국내성이 있는 집안은 처음에는 한자로 輯 安 으로 썼다가 1965년 중국 당국이 발음(지안)이 같은 集 安 으로 바꿨다. 장수왕 15년 (427 년) 평양으로 다시 도읍을 옮길 때까지 424년 동안 수도였는데 중국 당국이 마음대로 지명 을바꿔 버린것이다. 고구려의 성은 거의 대부분 산성인데 비해 국내성은 드물게 평지성이다. 국내성은 당초 토성 으로 이미 성의 형태가 갖춰져 있던 것을 유리왕이 도읍을 옮긴 후 석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었 다. 고구려 당시에는 동벽 555m, 서벽 665m, 남벽 750, 북벽 715 정도였단다. 방어시 설인 치 적대 등도 7개가 있었으나 현재는 집안 황금가공공장이 있는 자리 서벽에 하나만 남아 있 다. 서쪽으로는 통구하( 洞 句 河 )가 압록강으로 흘러들고 나머지 3면은 해자( 埈 子 )를 파서 적의 접 근을 막았다. 국내성에서 현재 성벽이 가장 잘 보존되고 있는 부분은 북쪽 성벽. 300m 정도가 남아 성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낮은 곳은 4단 높은 곳은 8~9단 정도 돌들이 쌓여 었다. 그 러나 하루가 다르게 훼손되고 있는 상황이다. 100m 정도 구간은 성 바깥 부분이 완전히 허물어 새로 쌓았는데 고구려 시대 때부터 보존돼 오는 부분과 비교하면 조잡하기 이를 데 없다. 동쪽 과 남쪽 성벽은 모두 없어져 버렸고 서벽은 구간 구간 일부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주택들이 뒷 담으로 사용하고 있어 외부에서는 쉽게 관찰되지 않는다. 이름 있는 고구려 유적이 대부분 국보 급인 데 반하여 국내성은 성( 省 )에서 관리하는 문화재로 그 격이 낮춰져 있다. 중국이 국내성을 보는 시각이 어떠한지를 잘 나타내준다. 국내성을 뒤로하고 산 속으로 한참 올라가니 환도산성이 나타났다. 산성이 나타났다기보다 숨 어있었다 하는 표현이 나을 정도로 천연의 요새에 자리잡고 있었다. 앞에는 강이 흐르고 뒤에는 협곡과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었다. 전쟁 중심의 고구려에서 방어를 위한 가장 전형적인 산성이 라고 한다. 위나암성(템 那 岩 뼈으로도 불리며 국내성 북쪽 2.5km의 환도산 위에 있는데 유리명 왕이 도읍을 옮기며 지은 것으로 고구려 10대왕 산상왕( 山 上 王 )때 크게 재건하였다고 한다. 환 도산성은 원래 국내성의 군사 수비성으로 평소에는 양식과 무기를 비축해 놓다가 전시에는 입 성을 막는 역할을 했다. 중국은 1982년 환도산성을 중국의 중요문물 보호구역으로 공포하였다.

광개토대왕의 얼을 찾아셔 / 23 환도산성은 밖으로 절벽이 있고 산세를 충분히 이용하였으며 일정 크기의 벽돌로 견고한 성벽 을 쌓았다. 성 둘레는 6, 951m이고 담장의 높이는 5m 전후로 위쪽에는 여장( 女 瓚 ; 성가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몸을 숨겨 적을 치는 곳)이 있고 성문은 전부 6개이다. 옹성(효 城 ; 튼튼 한 성) 북쪽에는 돌로 쌓은 높은 대가 있는데 속칭 점장대 點 將 臺 )로 불리우며 설제로 경계를 하 기 위한 전망대로 쓰였다고 한다. 산성 안에는 말을 먹이던 음마지( 散 馬 池 ) 또는 음마만( 飯 馬 灣 ) 이라는 연못 일부가 남아 있다. 이 연못에 대한 다음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 고구려에 현명한 신하가 한 사람 있었다. 적군과 오랜 씨움에서 양쪽의 군사력이 거의 다 소진되고, 먹을 양식도 다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약간의 소강상태에서 서로 담판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 이 현명한 신하가 음마지에 있는 물고기를 잡아 적군에게 보여주었다. 그 러자 적군이 고구려에는 아직 먹을 양식이 풍부하다고 생각하고 급히 도망쳤다.J 이어 환도산성 아래에 있는 적석묘를 답사하였다. 무덤을 돌로 쌓은 것은 고구려 무덤의 특정 이다. 크기가 매우 큰 것으로 보아 높은 관직에 았던 사람의 무덤으로 보인다. 규모가 적은 것은 흙으로 덮어있고, 적석묘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의 묘로 보인다. 이렇게 강건하고 웅장한 고구려가 하루 갑자기 하향곡선을 그으면서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 었던 것은 민심이반과 지도층분열로 보아야 한다. 지도층이 백성의 고통을 아랑곳 않고 자신의 배불리기에만 신경 쓰고 지도층내부에서도 권력다툼으로 서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중국과도 대 적했던 고구려는 결국 망하고 만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며, 그 영향은 앞으 로도 오랫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영토를 잃어버렸고, 문화를 잃어버렸고, 민족정신을 잃어 버린 것이다. 회한의 역사를 슬퍼하는 것인지 아니면 애절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한 것인지 하 늘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오후에 집안을 출발하여 다시 통화로 가다. 멀리 장군총 모습이 보인다. 이윤화교수가 그냥 떠나기가 못내 아쉬운 듯 잠시 버스를 세워 사진을 찍는다. 주위 산에는 인삼을 재배하고 있다. 이곳 남자들이 웃통을 벗고 다니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이곳 중국 남^r들은 우리나라 여 ^l들이 하는 일을 예사로 한다고 한다. 남자들이 예사로 밥하고 설젖이하고 빨래한다고 한다. 같이 간 여자분들의 부러워하는 모습이다. 반대로 조선족 남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우리와 똑같은

24 / 영락이데아 방식으로 생활한다고 한다. 집도 벽돌집이 많다. 간판이나 지붕 색깔이 빨간 색이 많다. 밭에는 옥수수와 벼를 심고 있다. 수박은 우리나라 수박과 달리 줄무늬가 없고 호박처럼 민자이다. 옛 날식 저울로 달아 파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8월 15 일(화) - 이도백하, 백두산(천지, 장백폭포), 용정(일송정, 해란강, 용정중학교, 운동주시1::11), 언길, 자흐- 0'-'- 통화에서 저녁 10시경에 호텔식 열차를 타고 이도백하( 二 道 터 河 )로 출발하다. 새벽 5시경에 이도백하에 도착하여 백두산 방향으로 향하였다. 열차 내리는 곳에 많은 사람들이 광고지 비슷 한 종이를 들고 손을 내밀기에 받아들었더니 지도와 손수건을 파는 것이라 한다. 안 산다고 하 여도 끝까지 따라오는 것을 겨우 뿌리쳤다. 한국에서 올 때 함부로 사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던 그대로였다. 공기가 맑고 산림이 울창하게 퍼져있다. 아침 식사를 하고 버스를 타고, 다시 지프 차를 갈아타고 백두산에 올랐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지프차는 숨이 가쁘게 올라간다. 곳곳에 이 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다. 저 멀리 내려다보니 숲과 나무로 뒤덮인 산하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어 산 정상 문턱에서 하차하여 빨리 천지를 보겠노라고 가쁜 숨을 쉬면서 뛰다시피 올라갔건 만 천지는 그 요염한 자태를 보이려 하지 않는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온 천지를 뒤덮고 있다. 모 여든 모든 사람들이 실망과 갈망 속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니 웬일일까 천지가 살짝 그 자태를 드 러내주고 있었다. 수천년의 전설과 신비를 안고 있는 천지가 그 일부를 보여준 것이다. 모두가 감탄과 찬사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다. 20~30초도 안되어 다시 천지는 그 자태를 숨기고 말았다. 그것이 더욱 신비스라움을 더해주었다. 아쉽지만 그래도 다행이라 생 각하고 하산해야만 했다. 마침 오늘이 광복절이라 백두산 등정이 매우 의미가 깊은 날이라 생각되었다. 원래 오늘은 남 북이 백두산에서 공동으로 방송을 하는 날이다. 이곳이 우리나라 땅이었더라면 우리의 이번 답 사와 등정에 대한 의미를 메시지로 담아 벨레비전 방송을 통하여 전달하고 싶었다.

광개토대왕의 얼을 찾아서 / 25 광개토대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하고 우리나라를 세계 중심국가로 건설 하기 위하여 노력하신 임금입니다. 광개토대왕의 위대한 엽적과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 국민 모 두가 항상 꿈과 희망, 용기와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면 세계 제 1의 국가로 도약할 수 있 다고 자신합니다. 이러한 광개토대왕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남북간 화 해와 협력의 정신을 더욱 발전시켜 나간다면 우리가 바라는 통일을 이룰 수 있고, 나아가 우리 나라와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 각합니다. 양쪽 정상들의 각별한 관심과 노력이 있기를 온 국민은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J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곳은 중국 땅이었다. 산 이름도 장백산이라 한다. 내려오면서 장백폭포를 구경하였다. 휘몰아쳐 내리 뻗는 물줄기가 매우 사나와 보인다. 어디 서 저런 물이 생겨나서 저토록 시리고 힘찬 물줄기를 만들었을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백두산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물줄기를 모아 계란을 삶아 파는 모습이 보이고, 밑에는 온천장 까지 생겨났다. 중국인과 조선족이 각각 1개씩을 운영한다고 한다. 조선족이 운영하는 온천장으 로 갔다. 우리나라 사우나 시설과 매우 흡사하다. 비싼 요금 (1인당 10달러)에 비해 물은 뜨겁지 않았다. 백두산 등정을 마치고 오후에 연길로 향하였다. 가는 길에 용정에 들러 윤동주시비를 보기로 하였다. 지난번에 왔을 때 너무나도 많은 눈물을 흘렸노라고 강조하는 이한용회원의 그 노스텔 저한 감정을 함께 느껴보리라 작정하고 발길을 용정으로 재촉하였다. 그러나 좁은 도로 곳곳에 도로공사로 길이 막히기도 하여 재촉하는 발길을 막는다. 급기야는 버스 바퀴에 펑크가 나는 사 태가 나고야 말았다. 우리 일행이 함께 도와준 덕택에 겨우 바퀴를 바꿔 달고 용정으로 길을 달 렸다 용정은 길렴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소속되어 있는 도시로서 동남쪽은 북한과 두만강을 사이 에 두고 있다. 거주언구는 약 27만명이며 그 중 조선족 인구가 약 68.2%로서 중국에서 가장 많 이 거주하고 있다. 중국조선족 문화의 발상지이며 항일투쟁의 중심지로서 민족 역사의 축도로 유서 갚은 도시이다. 또한 용정에는 명나라 때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청태조 누르하지가 지었다는 한왕산성(규 王 山 빼이 유명하다. 한왕산성은 여진인들의 발상지로 숭상하고 있는 곳

26 / 영락이데아 으로서,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먼 옛날 한왕산과 오지바위 사이의 양지바른 언덕에 아담한 외딴 초가집 한 채가 있어, 여기 에는 늙은 부부와 무남독녀인 딸 등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딸아이의 배가 아무 런 이유 없이 갑자기 불러오기 시작하였다. 부모들이 놀라 자초지종을 물으니, 딸은 몇 달 전부 터 한밤중에 비몽사몽간에 이름 모를 총각이 뒤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정을 나누고는 사라진다 고 고백하였다. 부모들은 총각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하여 명주실 꾸러미를 딸에게 주면서 총각 이 나타나거든 다리에 묶도록 시켰다. 다음 날 부모들은 명주실을 따라 가보니 명주실은 오지바 위에 이르러 소용돌이치는 두만강 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모들은 정체도 알 수 없는 괴물 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며 탄식을 하였다. 얼마 후 딸이 아이를 낳게 되고 성도 모르는 채 아이 이름만 바위 이름을 따 오지라고 지어 정성으로 커웠다.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아이가 자라게 되 면서 아이는 두만강 물 속으로 들어가 노는 것이었다. 모두가 걱정을 태산같이 하고 있는 어느 날 아이의 외할아버지 꿈에 신선이 나타나 저 오지바위 굽 깊은 물 속에 물소 한 마리가 있는 데, 그 물소의 뿔에 조상의 뼈를 결되, 오른쪽 뿔에 걸면 그 후손이 왕이 되고, 왼쪽 뿔에 걸면 재상이 된다 고 하였다. 그래서 아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명주실을 따라 물속의 아버지의 뼈를 찾아보라고 하였다. 아이가 들어가 보니 거기에는 도룡농이 있었다. 자기가 도룡농의 자손 이라는 것을 알게 된 아이는 외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뼈를 물소 오른쪽 뿔에 걸고 나왔다. 그 리하여 그 후손이 누르하치라고 한다.J 이도백하에서 용정으로 가는 차창 밖으로 굽이굽이 강이 흐르고 있다. 해란강 줄기라 한다. 가이드 아가씨가 설명하는 해란강의 전설이 기막히다. 원래 해란강안 양쪽에 두 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한 마을에는 해 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고, 다른 한 마을에는 란 이라는 처녀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이 강에 아홉개의 머리가 달린 괴물이 나타나 마을에 흉년이 들게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이 괴물을 물리치려고 하 였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해 라는 청년이 용기를 내어 칼을 들고 괴물을 물리치기로 마 음먹었다. 괴물을 찾아 차례로 머리를 베었으나 이내 머리가 다시 몸에 붙고 하여 도저히 죽일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란 이라는 처녀가 머리를 써서 칼로 벤 머리부분에 석탄가루를 뿌리니

광개토대왕의 얼을 찾아서 / 27 더 이상 괴물이 살아날 수 없었다. 이로써 마을에 풍년이 들기 시작하였고, 이때부터 이 강을 해 란강이라고 불랐다J. 과연 우리가 본 해란강은 아직도 그 전설을 말해주듯 많은 양의 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고, 강을 따라 넓은 전답이 펼쳐져 있었으며, 곳곳에 산들이 이를 에워싸고 있었다. 일제하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터전을 삼을 만한 자연적 조건이 되어 있었다. 가는 길목에 일송정이 멸리서 보인다. 일송정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고 한다. 용정 서쪽 약 3km 지점에 비암산이 있고 이 비암산 허리 지점에 10m쯤 되는 깎아지른 듯 한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억세게 자란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 소나무는 흡사 돌기둥에 청 기와를 없은 정자와 비슷하다 하여 사람들은 이를 일송정( 一 松 停 )이라 불렀다 한다. 일찍부터 용정사람들은 이 고색찬연한 일송정을 길상물( 吉 햄 物 )로 삼고 우러러보았으며 여인들은 일송정 의 바위를 기자석( 析 子 石 : 아들을 낳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삼았고 농부들은 기우제를 지내는 명암으로 이용하였다. 분만 아니라 1028년 연변에서 처음으로 중국 공산당 용정촌 지부가 건립 된 후 이 비암산은 혁명투사들과 항일투사들의 비밀활동장소로 되었다. 그리고 용정의 각 학교 사생들이 진달래가 피는 봄날과 단풍이 물드는 가을이면 일송정으로 원족을 가곤 하였다. 애국 적 학생들은 이 일송정 아래에서 일제를 규탄하는 시 낭송도 하고 반일가도 높이 부르는 한편 일송정을 일제의 통치 밑에서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싸우는 애국지사들의 성스러운 형 상으로 찬미하였다. 이를 가시처럼 여긴 일제는 간악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우선 그들은 1930년대 초에 용정에 든 수재는 일송정 귀신 탓이다 는 유언비어를 산포하는 한편 일본 총영 사관의 군경들은 고의적으로 비암산 부근에서 사격연습을 하면서 일송정을 과녁으로 삼았다. 그러나 일송정은 여전히 푸르고 싱싱하게 자랐으므로 일제는 악에 바쳐 밤중에 군경들을 파견 하여 나무에 구멍을 뚫은 후 후추 가루를 가득 채워놓고 쇠못을 박아 죽어버리도록 하였다. 이 후로부터 우리 민족이 그토록 숭상하고 찬미하였던 일송정 푸른 솔은 서서히 시들기 시작하더 니 1938년에 이르러 영영 말라죽었다. 이후 1991년에 소나무 한 그루를 옮겨다 원 일송정자리 에 심었으나 살려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용정 사람들은 이에 닥심하지 않고 그 이듬해인 3월에 또다시 깊이 언 땅을 파헤치고 재차 모양이 고운 소나무를 옮겨다 심었더니 푸르고 싱싱하게 자 라나기 시작하였다. 뒤이어 일송정이라는 기념비까지 세워 오늘도 해내외의 관광객들의 이목을

28 / 영락이데아 끄는 유람지로 되고 있다.J 그 핍박받던 고난과 역경의 시절에 우리의 선조들은 어떠한 애국충정심으로 일제에 항거하고, 어떠한 마음으로 현실을 한탄하며 시름을 달밸 수 있었는지 당시 상황을 내 자신의 마음속에 반추시키며 감정이입을 해보려 했으나 쉽게 되지 않는다. 안타까운 마음 달렐 길 없어 마음속으 로 선구자 노래 가사를 되뇌어 본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드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뭇갚은 용문교에 달빛오이 비춘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갚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갚이 새걱두었네 조곡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의 이 노래의 제목은 처음에는 용정의 노래 라고 하였다. 일송정, 해란강, 용드레 우물, 용문교, 용주사, 비암산 등 가사에 나오는 이름이 모두 용정에 있었기 때 문이다. 그러다가 광복 후 조두남선생이 노래제목을 다시 선구자 로 바꾸었다. 이 노래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에 의하여 나라를 빼앗겼던 암혹한 시절에 조국광복을 위해 피흘리며 싸우다

광개토대왕의 얼을 찾아서 / 29 죽어간 수많은 이름 모를 독립투사들에게 바치는 마음을 담아 창작된 것으로서, 오늘도 민족의 넋을 일깨우고 독립투사를 기리는 마음으로 시대와 세월을 초월하여 애창되고 있다. 특히 한줄 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라는 부분에서는 우리 선조들이 기약 없는 앞날을 얼마나 애절하 고 안타깝게 생각하였겠으며, 그래도 오로지 조국을 찾으려는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자신을 희 생하였겠는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용정중학교에 들러 민족교육 역사자료실과 윤동주 시비를 보았다. 워래 용정에는 동흥, 대성, 은진, 명신, 영신, 근화 등 6개의 중학교가 있었으나, 1946년 이들을 통합하여 성립( 省 立 ) 용정 중학교로만들었다. 고고하고 외로운 저항시인은 1917년에 북간도에서 태어나 소학교때부터 조선 역사와 민족주 의 및 독립사상 교육을 받고 자랐다. 용정의 은진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일본 동지사( 同 志 벼대학 영문과에 유학 중 일제에 의해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2년 선고를 받은 후 후꾸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차디찬 이국 땅 감옥소에서 1945년 2 월, 광복 몇 개월을 앞 두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를 하고 말았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시를 통하여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을 표출하려던 작은 영웅은 이 름 없이 죽어간 것이다. 비문에는 그가 지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의 서시( 序 詩 )가 그 아픔을 달래려는 듯 말없이 서 있다. 비문 앞에 한참 우두커니 서서 위대한 시인의 영혼을 상상 하면서 그의 애절한 노래를 옳어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이는바람에도 나는괴로워했다. 별을노래하는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태 주어진 길을

30 I 영락이데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용정을 뒤로하고 연길로 갔다. 오후 8시 비행기로 연길에서 심양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갑자기 가이드가 일어나 성명서를 발표하듯 심각한 어조로 말을 꺼낸다. 심양 가는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했으니, 일단 연길에서 장춘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 다시 장춘에서 버스로 심양까지 3시간 정도 가야한다는 것이다. 약간의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오늘 하루 버스 탄 시간만 하더라도 수시간은 되는데 또 3시간(말로 3시간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4~5시간은 걸릴 것이라 고 각오하면서)을 버스로 가야하다니. 그러나 이곳은 외국이고 특히 사회주의 국가체제라는 것 을 생각하면서 동요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현실에 따르기로 하였다. 새벽 4시가 되어서야 호텔 에들었다. 8월 16 일(수) -심양고궁을보다- 부족한 잠을 깨워 식사 후 곧바로 심양 고궁을 방문하였다. 고궁은 청 태조 누루하치와 제 2대 태종 때의 황능으로 1636년 완공되었으며 만주족의 문화 예술과 건축 풍경을 집대성한 궁궐이 다. 중국의 현존하는 황궁 가운데 북경의 고궁 다음으로 큰 궁전이다. 만주족, 한족, 몽고족 등 세 종족의 건축문화가 혼합되어 있는 것이 북경 고궁과는 다른 특색여 있다. 즉 지붕색깔을 노 랑바탕에 파란 색깔(파란 색깔은 초원과 유목민을 상징함)로 한 것은 만주족 문화이고, 건물에 용 그림을 넣은 것은 한족(중국) 문화를 의미하며 지붕형태를 빠오 라고 부르는 천막 모양으 로 한 것은 몽고족 문화에 속한다. 특히 심양 고궁은 여러 색깔을 사용하기를 좋아하는 만주족 의 습성이 반영되어 북경의 고궁과는 달리 청색 등의 다양한 색이 사용되었다. 궁전은 숭정전 (뿔 政 關 과 대정전( 大 政 關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청태조가 지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청태종이 지은 것이라 한다. 대정전 앞 플에는 10개의 작은 건물이 양쪽으로 다섯 개씩 늘어져 었다. 이

광개토대왕의 얼을 찾아서 / 31 중 8개는 청나라가 자랑하는 8기 0χ 廣 )의 우두머리들이 머무르던 곳이고, 나머지 2개는 그 중의 대표들이 머무르던 곳이라 한다. 당시 청나라의 위용을 알 수 있다. 숭정전 뒷문으로 바로 왕비 와 후궁이 거처하는 곳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임금이 집무를 보다 기력이 빠지면 잠시 내실로 들어가서 재충전을 하고 온다는 농담에 함께 웃었다. 마당 한 쪽에 가느다란 나무를 높게 세워 놓은 것이 하나 서 있었는데, 동물의 내장을 메달아 까마귀에게 주기 위한 것이라 한다. 만주족 은 개고기를 먹지 않고, 까마귀를 숭상한다고 한다. 이런 전설에서 연유한다고 한다.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건설하기 전에 적군과 싸우다가 패하게 되었다. 잠시 산 속으로 피신하 여 쓰러져 있을 때 갑자기 산불이 나서 그만 타 죽을 고비에 접하게 되었다. 이 때 개 한 마리가 나타나서 누르하치의 몸 주위를 물로 적셔 주어 누르하치는 겨우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누르 하치가 다시 적군에게 쫓기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수백 마리의 까마귀가 나타나서 누르하치의 몸을 에워싸서 덮었다. 원래 까마귀는 죽은 시체를 먹는 습성이 었으므로 적군은 누르하치가 죽 은 것으로 알고 돌아갔다. 이로 인하여 누르하치는 살아날 수 있었고 훗날 청나라를 건설할 수 있었다 :J 그래서 이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고 까마귀를 숭상한다는 것이다. 만주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당시로서는 매우 미개한 민족인 만주족(보통 누르하치가 통일 하기 전까지는 여진족, 통일 후에는 만주족으로 부른다)이 어떻게 거대한 중국대륙을 평정하여 청이라는 대제국을 세우고 그것도 300여년이란 오랜기간 동안 단일왕조를 지탱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민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원래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 던 반농반목의 작은 부족국가에서 청이라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는 생각을 하니 고구려의 멸망 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고구려가 광개토대왕의 유업을 잘 이어받았더라면 우리민족이 저 들과 같은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고 저들로부터 약소국의 차별적 대우를 받지 않았을 것이라 는 생각을 하니 고구려 누대( 累 代 )의 위정자들이 한없이 개탄스럽고 역사의 아이러니가 안타깝 기만 하다. 당시 고구려의 위정자들 01 개인의 권력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백성과 나라를 생각했 더라면 고구려가 그렇게 쉽게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수왕이 평양천도와 납하정책을 펴지 않고 오히려 만주 이북으로의 북진정책을 계속하였더라면 연개소문이 보다 남생 남건 같은 못난 아들을 두지 않고 보다 똑똑하고 훌륭한 아들을 두었더라면 신라가 나당 연합하지 않고

32 / 영락이데아 또한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수하지 않고 오히려 고구려가 통일을 하였더라면, 고려와 조선시대 에 들어와서도 부국강병하여 북진정책을 강화하였더라면, 하는 등등의 역사적 가정을 해본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부질없는 일이다. 과거의 역사는 가정이 아니다. 역사는 현실이고 사실일 뿐이다. 다만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현재를 재인식하고 반성함으로써 내일의 역사를 새 롭게 다듬어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아직도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정쟁이나 일삼고 개인의 권력욕과 재산욕에 사로잡혀있는 우리나라 위정자들과 지도층인사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의 현실은 아직도 암담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 빨리 광개토대왕의 얼과 정신으로 돌아가서 국력 배양과 실력향상에 매진하여야 할 것이다. 역에서 고궁으로 가는 길에 중산공원( 中 山 公 園 )이 보인다. 지금은 시민의 휴식처로서, 공원 안에는 동물의 곡예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조선조 인조 때 청태종의 침입으로 병자호란이 일어 나 오달제, 윤집, 홍익한 등 삼학사가 꿀려와 참형을 당한 곳이라 한다. 끝까지 청에 굴복하지 않고 척화를 외치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의연히 죽음을 맞은 것이다. 각각 28세, 31세, 41세의 나이였으니 얼마나 고국과 가족을 그리다가 죽음을 맞았을까 생각하니 슬픈 마음 그지없다. 또 한 최명길의 주화파에 반대하여 척화를 강력하게 주장하던 김상헌도 이 곳까지 끌려와 3년간 갖 은 고초를 겪었으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굳은 절개에 청나라도 어쩔 수 없이 돌려보냈다고 한 다. 그가 이곳으로 잡혀오면서 지은 시조를 되새겨보면서 우리의 현실을 당시의 입장에서 재음 미해보았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애국충정으로 목숨을 마다 않는 그들에 비해 지금 우리들 특히 젊은 청소년들은 너무나 나약 하다는 생각이 든다. 보다 뚜렷하고 투철한 국가관과 목표의식과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자기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진정 아름다운 모습일 것인데 지금 우리들에게는 그러한 점이 부

광개토대왕의 열을 찾아서 / 33 족한 것 같다. 이를 바로 잡아나가는 것이 바로 영락회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결코 목숨 걸고 애국하라는 뭇은 아니다. 각자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최고가 될 수 있도록 노 력하라는 뭇이다. 이렇게 각자 노력할 때 우리의 국력은 저절로 강해지고, 우리 민족의 능력과 저력으로 보아 분명히 세계 최고의 국가 이른바 미국과 같은 세계초일류국가가 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에필로그 이번 4박 5 일간의 고구려 및 광개토대왕의 유적 답사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 역사와 문화, 우리 민족의 우수함과 강인함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함께 참여한 젊 은 영락 에게는 공부와 인생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번 답사 여행을 통하여 특 별히 기억에 남는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구려의 유적이 크게 훼손되고 있는데 대한 안타까움이다. 우리의 수많은 수한 문화유 산이 만주지역에 많이 남아 있음에도불구하고 이를우리 손으로 직접 보존하지 못하고또한중 국정부에 대해서 보존 요청을 하지 못한 채 유적이 계속 방치되거나 훼손되어 가고 있다는 점 이. 정부차원에서 문화재 보호 내지 보존을 위한 특별한 지원책을 강구하여야 하며, 중국과의 사이에 문화재 보호를 위한 협조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와 동시에 학술단체 내지 민간단 체차원에서도 문화재에 대한 연구와 보존을 위한 노력이 더욱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태왕향 소학교와의 자매결연 체결 필요성이다. 집안에 있는 조선족 태왕향 소학교는 비 록 조그마한 소학교에 불과하지만 광개토대왕릉과 바로 인접해있고 또 왕릉 주로 관리하고 있 기 때문에 우리 영락회로서는 매우 중요한 학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릉은 이미 많이 허물어져 있고, 또한 왕릉의 다른 방향의 바로 옆에는 공장에서 시커먼 연기를 뿜고 있을 정도로 중국정 부에서 보존을 소홀히 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 소학교가 보존에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영락회 입장에서 이 소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어 우리의 문화유적을 다소라도 보존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34 / 영락이데아 셋째, 용정시내의 유적지를 독립정신 고취를 위한 배움의 산 현장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용 정은 일제강점하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활동하고 그 엽적이 남 아있는 곳이며, 지금도 많은 우리 동포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이곳을 독립정신 고 취를 위한 산 현장으로 삼아 정부 차원에서 지원방안을 마련할 펼요가 었고, 청소년 및 학생들 에게 고구려유적과 함께 이곳을 직접 답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의 개발이 필요하다. 넷째, 남북의 조속한 화해와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이곳 만주지역은 심 OJ=-을 거치지 않고 바 로 북한을 경유하여 오게 되면 적은 경비로 짧은 시간에 답시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단절된 남북관계 때문에 복잡한 심양 공항의 입국절차와 통화 및 이도백하까지의 긴 열차여정을 거쳐야 한다. 남북통일은 교통소통과 강은 직접적 가시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여 우리의 주장을 크게 강화뺨 등 간접적 효과도 많다. 이 경우 중국에 있는 우리의 문화유적도 지금보다 훨씬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섯째, 만주 및 간도지방 회복 필요성이다. 백두산의 위용과 천지의 아름다웅, 장백폭포의 웅장함은 우리들에게 웅지와 자부심을 섬어주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들 중 일부는 중국령으로 되어 있었다. 사실 백두산과 천지, 장백폭포는 물론이려니와 그 외 만주지방, 특히 간도지방은 우리의 옛 조상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아 누천년간 살아온 지역이다. 이곳을 청의 위 세와 일제의 농간에 의해 송두리째 빼앗겨버리고 지금의 한반도로 우리의 영토가 축소 고착된 것은 안타까운 정도가 아니라 비분강개 그 자체이다. 하루빨리 우리의 국력을 키우고, 우리의 지혜를 모아 이를 해결해야 할 때이다. 우리의 청년학생들을 유능한 인재로 양성하는 데 보다 많은투자와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전 영락회원들이 함께 고생하고 대화하면서 여행하는 과정에 인간적 유대와 우의를 더 욱 굳건히 할 수 있었던 점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실이었다. 이러한 유대관계를 이번 행사만 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이를 지속적으로 발전시걱나가는 방안을 연구하고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 프로그램의 계속적 운영은 물론 새로운 프로그램의 개발도 검토해야 할 것으로 본다. 해외뿐 만 아니라 국내에서의 연수나 캠프 설치를 통하여 영락이념을 확산하고 실천하는 방안도 하나

광개토대왕의 열을 찾아서 / 35 의 방안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프로그램에는 영락회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답사를 통하여 우리 조상의 위대함과 우리문화의 우수힘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으며, 우리의 문화 유산을 소중히 보존하고 국력을 배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 영락회는 이러한 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할 것으 로 보인다. 함께 답사를 한 모든 영락인들에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답사일정표 * ( )안은 단순한 경유지를 표시함 일자 장소 일 정 비고 비행기로 심양공항 도착 8/12(토) (서울)-심양-(통화) 본계수동굴관람 열차로 통화행 출발(열차내 숙박).5호분묘, 장군총, 박물관, 호태왕비, 8/13( 일) (통화)-집안 호태왕릉,압록강관람 호텔숙박 태왕향조선족소 학교교장접견 8/14(월) 8/15(화) 8/16(수) 집 안-(통화)-(이도백 하) (이도백하)-백두산- 용정 -(연길)-(장춘)- 심양 (장춘)-심양-(서울) 국내성, 환도산성, 적석묘 관람 압록강유람선승선 열차로 이도백하행 출발(열차내 숙박) 백두산등정 천지 및 장백폭포 관람, 온천욕 일송정, 용정학교, 윤동주시비 견학 호텔숙박 고궁관람 비행기로서울도착

36 / 영락이데아 탐방 참가자 명단(총 23 명) * 가나다 순(이 밖에 많은 회원들이 참가하기를 희망하고 또 신청까지 했으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참가하지 못하였음) 회원명(참가인원) 김영조 (3) 서영훈(1) 성기석 (4) 손성도 (4) 손종태 (3) 이윤화 (2) 이한용 (1) 조영섭(1) 지용광 (4) 참가자 본인, 부인, 자녀 1명 자녀 1명 본인, 부인, 자녀 2 명 부인,장모,친구부부 본인, 장인, 학교 동료 1 명 본인,부인 본인 본인 자녀 2 명, 조카 2 명 비고 탐방기 작성(김영조) 탐방소감문 작성(성윤수) 탐방소감문 작성(지우효) 유적 답사개념도 댄휩(출발) 비 행 기 댐힘(본계수동굴) 야간열차 똥헬 전세버스 엽효] (5호분묘/장군총/박물관/태왕비/태왕릉/국내성터/환도산성/적석묘 /압록강/태왕향소학교/조중철도) 전세버스 훔힘 야간열차 덴팩펠 전세버스 짚차 팬탤 (천지/장백폭포) 짚 차 전세버스 먼로펠랜 전세버스 훔켈 (일송정/용정중학교/뽑주시비) 전세버스 댄켈 비행기 찮휠 전세버스 댐휩 (고궁) 비 행 기 댄휠 (도착및해산)

광개토대왕의 기상을 다시 꿈꾸며 / 37 광개토대왕의 기상을 다시 꿈꾸며 지우효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지용광 회원(울진중앙병원장) 장남 이 글은 이번 답사를 통히어 열정과 용기를 가진 젊은 지식인으로서 광개토대왕의 기상을 다시 살려야 아는 당위성을 재획언하고 광개토대왕의 기%에 미래 역사 발전과 국가발전의 근죠떼 되 어야 힐 것이라는 확선을 대학생 입E때 l서 쓴 글임. 집안의 유전인자 중에 내가 아버지로부터 대물렴한 것이라고 절실히 믿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소공포( 高 所 /댐 布 ) 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상하게도 비행기를 안타도 될 곳이면 으레 버스나 기차를 이용하기 마련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이번의 중국여행도 서울에서 신의주를 지나 만주를 직행하는 기차를 이용했으면 얼마나 수월한 여행이 되었을까 아쉬운 맘이 든다. 각설하고 이런 나의 고소공포증으로 인해 발생한 또 다른 버릇이 있는데, 이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비행기를 타면 신문을 펼친다는 것이다. 물론 평소에도 신문을 즐겨 읽기는 하지만, 이때 의 신문 읽기는 나에게는 사회적인 간접체험의 도구가 아니다. 분명코 비행기 안에서 보는 신문 은고소공포증을떨쳐 버리기 위한가장좋은탈출구가되기 때문이다. 8월 15 일, 정오 서울행 비행기에 올라서도 똑같은 행위로 고소공포증을 떨치기 위해서 신문을 짚어들고 좌석에 앉았다. 이번 닷새동안의 여행을 정리하기에는 비행기의 두려웅이 너무 컸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5 일 동안의 고구려 여행의 여운을 다스리기도 전에 나는 신문의 1면 기사를 보며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반세기만에 맞은 모자( 母 子 )간의 상봉을 타이틀로 한 남 북한 상호 이산가족 상봉 이라는 머릿기사였다. 이제는 머리에 허떻게 서리가 내린 당시의 젓먹이 아들과 이를 부둥켜 마지막 힘을 다해 그동안의 사랑을 전하고 있는 팔순의 어머니...

38 / 영락이데아 보지 않아도 지금 서울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로 그득하리라 생각하면서 다시금 내 고향 대한민 국으로의 무사귀환에 대해 감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행기 속에서의 시간이 얼마만큼 흐르고 다소 고소공포로부터 벗어났음을 느꼈을 때 나의 생각은 다른 곳에 미치고 있었다. 이내 자신에게 내린 결론은 이번 중국여행과 이산가 족의 만남이라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었다. 아주 우연의 일치였을 태지만, 나는 한민족의 맥을 되새겨 보고자 고구려의 영토를 되돌아보는 중요한 여행을 떠난 것이었고, 남 북의 화해 분위기는 이에 맞추어 보아도 나에게는 아주 의미있는 이야기 거리였다. 비록 역사 적인 사건의 순간에 그곳에 있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스스로에게 대견함을 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1. 여행을가기 전에... 나와 나의 가족을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으레 내가 부모님의 소개를 할 때 잃 지 않는 한마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자식을 크게 키우신다는 것이다. 이는 이십대 중 반에 이른 나에게 가정의 교육이 아직도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하게 하는 가장 큰 대목이다. 어떠한 진로의 갈등 앞에서 항상 나는 자신의 능력과 믿음을 최우선으로 하는 교육을 받아왔다. 아마도 스스로 가끔씩 대견한 결정을 내릴 때 느껴지는 흐뭇함이란 진정 그것이 편협하지 않은 교육을 받아온 가정에서 연유한 것이라 굳게 믿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아버지께서 이러한 교육의 일환으로 당신의 자식에게 늘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영락 의 기상 이었다. 더불어 가끔씩 약주를 거나하게 드신 날이면 영락회원분들의 성함들을 한분 한분 되뇌 이시면서 아주 자랑스러워 하시곤 하는데 중학교때부터 나는 어린 나이에도 영락회의 회원 못 지않은 세뇌(?)와 훈련 η)을 받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내 자신도 모르게 영락 회라는 이름이 이제는 낯설지 않고 한번은 콕 아버지의 말씀대로 영락회원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겠노라고 다짐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여름이 한창 고조에 올랐을 무렵 아버지께로부터 한가지 반가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는데 바

광개토대왕의 기상을 다시 꿈꾸며 / 39 로 영락회 에서 고구려 탐방 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부터 나는 내가 받은 세뇌 와 훈련으로 인해 나는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의무감까지 지니면서 8월 12 일을 학수고대( 聽 首 苦 待 )하게 되었다. 아주 즐겁고 유쾌한 여행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과연 어떤 분들이 오실 까. 여행중에 나는 무엇을 느끼고 보고 와야 할까. 여러 가지 복잡한 질문들과 더불어 여행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2. 고구려 탐방 첫째 날 (8월 12 일) : 섬양 12 일 김포공항의 구내는 휴가철의 인파와 더불어 매우 북쩍이고 있었다. 올해 해외여행객의 수가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는 실정이니 조금의 불편은 이미 예상된 상황이리라. 그러나 아쉬운 것은 더불어 함께 오고 싶어하시던 부모님께서는 정작 이번 여행에 참석을 못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막내동생과 외사촌동생들은 나를 담임 선생님으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처럼 마냥 즐거워들 하고 있었다. 아마도 부모님 곁을 떠나 잠시동안의 자유를 만끽하는 것 이 그들에게는 한없는 기쁨인 듯하다. 세명의 동생을 포함한 우리 일행은 처음 법는 영락회원분들과의 첫대면을 하고는 서울발 중국 심양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제 그럴싸한 24명의 여행단이 구성된 것이다. 서울에서 중국의 심양은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대략 90분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우리는 어딘지 모를 너무나 생소한 느낌의 중국이라는 땅에 도착하게 되었다. 심양은 2천여 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고도( 古 都 )이며 1625년 청태조 누르하치( 努 爾 哈 ~)가 서울을 료양( 選 陽 )에서 심양 으로 옮겼으며 1634년에 청태종 황태극( 皇 太 빼이 심양을 성경 盛 京 )이라 칭하고 청왕조의 국도 로 정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심양은 상해 북경 천진 광주 다음가는 중국의 제 5대 도시이며 최대의 공업도시로서, 동북아 지역의 경제와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물론 큼직한 도로들이나 시원한 지평선은 앞으로 이루어갈 패권세력 중국의 저력을 충분히 말 해주고도 남음이 있지만, 이내 그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거리의 건물이나 주민들의 옷차림에 서는 아직도 우리나라 어느 중소도시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고위도 지방이지만 대륙성 기후

40 / 영락이데아 를 지니고 있어 무더운 여름에는 중국남성들은 대부분 윗도리를 벗고 다니고 있었고, 시원하게 뚫린 도로에는 자동차보다는 자전거나 우마차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번 여행이 중국을 관 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니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양은 적어도 비쥬얼한 유흥을 즐기는 지금의 한국 청년들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곳이 못 되는 듯 했다. 조선족 교포 3세라는 가이드의 대략적인 중국과 심양의 소개를 받으면서 우리 일행은 늦은 조 금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예정된 식당을 찾았다. 식당에 들어가니 흔히들 말하는 중국산 고량주의 냄새가 진동을 한다. 알지는 못하지만 시큼한 냄새가 중국요리의 향료 냄새인 듯도 하 다. 이상하게도 심양 공항에서부터 이곳까지 일하는 사람들의 미소를 볼 기회가 적었다. 식당의 분위기는 종업원들의 상냥함과 실내의 청결함에 있다는데 도무지 어느 곳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띄워 줄 만한 매개체를 찾을 수가 없다. 더구나 기름이 거의 그릇의 반이 담겨져 요리는 몇 술 떠니 이내 포만감을 느끼는 듯하다. 역시 중국에서 차( 茶 ) 문화가 발전될 수밖에 없음을 절실히 느끼면서도, 특유의 식성으로 거몬히 회전탁자에 놓여 있는 이름 모를 음식들을 말끔히 비운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고구려 유적을 탐방하기에 앞서 중국의 수동굴 중 제일 길다는 본계석 회암동굴을 향했다. 혼자생각이지만 이곳은 심양 사람들에게는 연인의 데이트코스나 가족들의 놀이동산과 같은 역할을 하는 듯했다. 동굴은 갚이가 매우 갚어서 보트를 타고도 대략 왕복 40 여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아마도 한국사람의 상술이 이곳에 투여된다면 좀 더 인위적이지만, 오히려 더욱 자연적인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었을 댄데... 그렇지만둔탁한중국 특유의 거친 자 연미도 그리 나쁘지 않다. 조금 손을 본다면 동굴 주변에 안전시설이나 위락시설을 더 구비할 펼요가 었다는 정도였지만 자연과의 조화로운 동굴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내 저녁 무렵이 되고 중국에 도착한 첫날의 여행이 저물어갈 무렵 버스는 다시 심양 시내 의 한복판을 달리고 있었다. 한눈에 들어오는 도시의 낡은 간판들 밝고 순진해 보이는 시민들 의 웃음들 속에 심양의 도시 기운을 가득채우고 있는 도시의 매연은 앞으로 다가올 중국의 힘을 암시라도 하듯이 조용하지만 탁하게 전해져 오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가이드의 소개로 저녁식사를 하기 전에 조금의 중국문화도 익힐 겸, 미리 여행선 물도 준비할 겸 소위 중국의 백화점이라는 곳을 들렀다. 마치 여의도에서 중소기업박람회를 할

광개토대왕의 기상을 다시 꿈꾸며 / 41 때가 연상될 법한 넓은 실내, 그러나 손님이 드문드문한 것을 보니 여간 어색하지가 않다. 점원 들은 모두 우리 일행을 오늘의 처음이자 마지막 손님인 듯이 한가지 질문에도 많은 친절을 베풀 어주고, 끝내 고개를 흔드는 모습에 크게 실망하는 표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같은 값어치의 보다 나은 물건을 구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논리라 생각하고, 이내 그들의 실망에 무관심해져 버린다. 그렇게 한시간 여의 시간에도 나는 어느 것 하나 손에 넣을 수 없었으니, 지 니고 간 경비의 부족함도 있겠지만 일단은 어느 것도 마음에 와 닿지가 않았다. 보자. 안내서를 보니까 오늘은 심양에 도착하여 통화지방으로 가는 침대칸이 있는 심야기차를 탄다. 전부터 이번 여행을 고대하면서 설례였던 것이 바로 중국 대륙을 기차로 여행한다는 것이 었는데, 첫날부터 여행의 진미를 느껄 수 있을 것같다. 조금은 고생스럽겠지만, 침대칸이 마련 되어 있으니 열차내에서 잠을 청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우리 일행은 미리 잡혀진 일정대로 차곡차곡 순조로운 여행을 하고 있었다. 저녁에는 한식을 먹으면서 일행의 소개가 이어졌고 기차시간을 맞춰 조금의 시간을 이용해서 심양의 번화가에 있는 쇼핑몰도 둘러보았다. 조금씩 여행에 중국의 문회에 익숙해져 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번 여행의 목적은 고구려 문화 유적을 되돌아보면서 다시금 당시 선조의 기상을 가슴에 새기 는 것이었으니, 조금의 태만은 인정할 수 있어도 그렇게 쉬운 여행은 아니었다. 아마도 진짜 여 행은 내일부터라 생각하며 발걸음을 심양내 기차역으로 향했다. 여행을 다녀본 사람들은 모두들 느끼겠지만 마음대로 일정이 순조롭게 되는 것만으로도 큰 부담을 더는 일이다. 아마도 이번 여행은 순간순간의 에드립에서 나오는 즐거웅과 긴장은 렬 할 듯하다. 이미 짜여진 일정은 차곡차곡 일기장에 적을 수 있는 명백한 단어들로 구성되어가고, 그러한 명백함이 오히려 권태롭다는 생각을 문득 들게 하였다. 그러나 하는 수 없는 일이지. 시 간은 제한되어 있고, 언어는 통하지 않는 곳에서 특별한 여행의 묘미를 기대한다는 것은 오히려 과욕일듯싶다. 잠시의 망상을 하면서, 심양발 통화행 기차에 올랐다. 한국에서는 오히려 고속버스나 자가용 의 이용이 증가하여, 철도교통이 많이 뒤쳐진다고들 하는데 이곳은 전혀 반대인 듯하다. 칸칸마 다 사람들이 그득하다. 마치 예전 어느 영화에서 본 듯한 장면이다. 피난길에 오르는 사람들이

42 / 영락이데아 빼곡이 열차에 박혀져 있는 모습. 순간 참 인상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기적인 본능에 의 해 나만의 객석에는 깔끔하고 안락한 자리가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하고 있었다. 열차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침대간은 비좁고 그리 쾌적한 편이 아니었다. 보편화되어 있는 에어컨 시설은 고사하고 i 승객이 사용할 세면대조차 제대로 기능을 하지 않고 있었다. 문제는 연세가 지긋하신 어른들과의 여행에서 느끼는 책임감이라고 할까? 나이가 젊은 나로서는 문제 가 될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어르신들의 불편을 생각하니 오히려 자신이 죄송스렵다. 그러나 능숙한 승무원의 통제는 이내 잠시의 혼잡을 정리하였고 저녁 10시 반 이후에는 불꺼진 창 밖 으로 띄엄띄엄 보이는 거리를 알 수 없는 별들과 달빛을 머금은 들녘의 그림자가 중국이 아닌 고구려 옛 땅으로의 귀환을 환영하는 듯했다. 열차의 벽면에 붙어있는 회전식 선풍기는 여자의 마음을 조금도 몰라주는 무텀덤한 남자처럼 여독과 감성이 뒤섞여 있는 나의 복합적인 감정을 추스려 주지 못하고 하염없이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고 있다. 좁다란 침대칸의 인상은 여행을 다 녀와서도 계속 되었는데 한동안 침대라는 것을 멀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제 잠이 든지도 모르는 사이에 열차는 이내 새벽무렵 통화에 도착했다. 3. 고구려 탐방 둘째 날 (8월 13 일) : 집안 이제는 아주 중국의 생활방식에 익축해진 듯, 중국식으로 차려진 조식( 朝 食 )을 한번에 비워버 린다. 오늘은 통화를 지나 버스를 타고 집안으로 향해야 한다. 집안에 하루 머무르면서 고구려 박물관과 당시 왕들의 무덤을 여러 곳 답사하는 일정이 잡혀져 있었는데, 아마도 오늘부터가 여 행의 진미를 느낄 수 있을 법하다. 중국의 노령산맥을 넘어서는 버스는 지도에서 보기에도 멀어 보이는 집안셔를 향해서 4시간 남짓한 거리를 헤치고 있다. 전체적인 중국 외곽 도시들의 윤곽을 알 수 있을 법하다. 한족과 조선족의 문화가 뒤섞여 또 다른 중국문화를 이루는 곳, 이곳이 바로 집안이라는 중국의 도시이다. 집안은 고구려의 옛 수 도였던 국내성의 현재 지명으로 길림성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집안시의 남동쪽은 합록강 건 너 북한의 자성군, 초산군, 만포시와 마주보고 었으며, 서남쪽으로는 동북 3성의 하나인 요녕성

광개토대왕의 기상을 다시 꿈꾸며 / 43 과 인접하고 있다. 유구한 역사가 말해 주듯이 압록강과 훈강 수로의 교통, 내륙과 연결되는 육 로 및 북한과 이어지는 철도 등이 잘 발달되어 있으며 유서 갚은 역사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 다. 집안은 외적을 무리치고 방비하기에 알맞은 곳이어서 고구려 2대 유리왕부터 20대 장수왕 까지 고구려의 중심지로 번영하였다고 한다. 집안시에는 우리가 둘러 볼 광개토대왕 비, 장군 총, 환도산성 등 고구려의 많은 문화 유산이 산재하고 있어 융성했던 시대의 발자취를 대변해 주는곳이기도하다. 중국과 고구려의 역사에 대하여 교수님들과 가이드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내 모습이 목 그 예전 고구려인이 된 듯하다. 아마도 민족의 개괄적 중흥을 따진다면 문화적으로나 영토적으로 그 렇게 창대한 시기가 있었는가 하는 알 수 없는 고구려 예찬론자가 되어 가는 듯도 하다. 지나치는 이야기지만, 요즘 한글 브랜드가 유행하면서 술집이나 옷의 상표에 고구려라든가, 고구령이라는 단어를 자주 볼 수 었다. 물론 그들이 예전 선조들의 기상을 따른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요즘 들어 고구려라는 이미지가 그만큼 국민의 인지도를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나 또한 고구 려라고 한다면 삼국의 화려한 역사보다 알지는 못하지만 무언가 가슴에 뿌듯함이 남는다. 정오 무렵이 되어서야 우리는 집안시의 어느 중류급 호텔을 잡고 본격적인 고구려 탐방을 나 설 수 있었다. 첫 방문지로 정해진 고구려 박물관 회색빛 시멘트 벽들에 색이 바랜 지붕 아래로 조그땅게 문이 몇 개 있었고 그 문으로 들어간 우리 일행은 고구려 역대 왕들의 초상화와 건국 전후의 생활도구와 병기 및 석기, 옥기, 금기, 금 도금기, 동기, 철기, 도자기류 등의 생활용품을 볼 수 있었다. 특히 동쪽 전시장에는 고구려시대의 고분 형태와 화려한 벽화가 전시되어 었으 며, 가운데 전시장은광개토대왕의 비문탁본과사진 및 국제 연구논문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웃하여 함께 하고 있는 일행중의 고등학생 아이는 사진이 금지된 그곳에서 그 나마의 해결책으 로 연습장에 탁본을 새기듯 정성스레 유물들의 모습을 스케치한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저물어 가던 저 위인들은 지금 그들의 모습을 예측하고 있었을까? 저마다 한시대를 풍미할 만한 호걸로 그려져 었다. 고구려 박물관을 지나 5호분묘에 도착한다.5호묘는 1962년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발굴 정 리되었기에 국내에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높이는 8m 무덤 둘레가 악 180m, 벽화의

44 / 영락이데아 내용은 7세기의 전형적인 벽화 양식에 따라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가 네 벽에 그려져 있 었고, 각종 문양들 또한 짜임새 있게 새겨져 있었다. 또한 가이드에 의하면 벽화의 내용은 문명 발달에 기여한 신들을 형상화하여 풍부한 설화적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돌 위에 직접 광 물의 염료를 사용하여 그렸기 때문에 1300 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채취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는데, 집안의 20 여 개의 고분 벽화 중에서 유일하게 일반인에게 관람이 허용되는 곳이었다. 눈에 띠는 것은 동물과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낸 사실이다. 용을 탄 신선이나, 학을 탄 선인 등이 보여주는 다분히 주술적인 느낌 그것은 태고적 기복신앙이나 농업을 주업으로 삼았던 당시의 생활모습에서 연유한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쉬운 것은 해가 거듭할수록 훼손되어져 가 는 옛것의 소멸이었다. 왜 인간의 발길이 닿는 곳은 발전이라는 단어보다는 소멸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것일까? 아쉬운 일이다. 냉정한 관리인의 눈빛을 뒤로 한 채 그리 멀지 않은 곳의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호태왕 비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곳은 대략 장군총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호태왕비는 서 기 414년에 고구려 제 20대 장수왕이 그의 아버지인 19대 광개토대왕의 치적을 기러기 위해 세 운 기념비이다. 그의 호를 따서 영락 태왕비, 호태왕비라고도 불린다고 하는데, 실재로는 높이 6.39m, 무게 37톤, 각면의 너비가1. 5m 가량의 큰규모로 4변에 44 행, 1802자의 명문이 새겨 져 있다. 그러나 체감하는 크기는 오히려 더 큰 것이었다. 거침없이 새겨져 있는 특유의 글씨체 며, 거칠게 다듬어진 고구려 특유의 웅장함이 그대로 베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우리에게 는 광개토왕비야말로 그 당시의 국력과 영토를 규명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인 듯 하다. 그러나 이 비문의 일부 내용이 현재 한일간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몇 해전 작가 최인호씨의 잃어 버린 왕국 이라는 소설을 기반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었다. 호태왕비를 둘러싸고 일어나 는 일련의 의문점들을 추리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던 6부작의 이 프로그램에서 나는 아직도 비 오는 새벽 호태왕비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서 글씨를 수정하고 탁본을 새기는 모습의 일본인 을 기억에서 지워 버릴 수가 없다. 물론 중국인에 의해서 비문의 글씨가 변형되었다는 주장도 있기는 하나, 어느 측의 주장이든지 우리의 입장에서는 가슴이 저리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거대 한 돌비석은 동물원의 코끼리처럼 오늘도 무표정하게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지만, 그 비석이 지

광개토대왕의 기상을 다시 꿈꾸며 / 45 내온 시간들 속에 얼마나 많은 표정들이 숨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일행중의 몇몇 분들은 아침 일찍 광개토대왕묘를 다녀 오겠다고 벌써부터 벼르고 계셨고, 나 는이내 더 이상의 아쉬웅이 싫어 그만두겠다는마음을굳힌다. 정말슬픈일이다. 이제는타국 이 되어버린 만주 벌판, 과연 지금에 와서 고구려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또다시 원론적인 질문 을 거듭하면서 저물어 가는 시간 속에 부끄러움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도를 보면 우리는 서울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 있지 않았다. 단지 아직은 북한과의 직항로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 돌아용 것 뿐 아마도 서울에서 제주도 정도의 거리를 와 있는 것이었다. 집 안에서 교외 쪽으로 10여분 정도를 지나니 압록강이 펼쳐졌다. 솔직히 펼쳐졌다는 표현보다는 졸졸 흐르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 정도로 예상보다 강의 너비가 그리 크지 않았다. 멀리는 산림 보호 라는 북한 특유의 붉은 글씨가 보이고, 쉽호흡 한번 크게하고 강물을 가로질러 잠수하면, 북한으로 바로 닿을 듯한 거리에 중국이 있었다. 집안은 거의 한국의 70년대를 보는 듯하다. 강 변에는 어선을 개조하여 만든 수상 음식점이 있었고 몇 척의 보트는 여행객만의 전유물인 듯 제 3자로서의 기능을 충실하게 완수하고 있었다. 도무지 이곳의 분위기를 알 수가 없다. 강 밑에는 중국 아낙네들이 넉살좋게 앉아서 능숙하게 빨래를 하고 있었고, 철부지 아이들은 캉을 훤히 들여다보듯이 얄은 곳을 골라서 수영놀이를 즐 기고 있었다. 옆에서는 몇 개의 상점들이 한국간판으로 장사를 하고 있었고, 한국인들은 큰 버 스를 몇대씩 부리고 와서는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모든 것이 산만하다. 압록강을 건 너 중국으로 도피하던 꽃제비들의 모습이 환상처럼 스치고 멀리 지게를 젊어지고 가고 있는 북 한 사람의 모습은 이만큼에서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까. 이내 또다시 내일 압록강을 오리라는 기대를 하면서 아쉬움의 하루를 마감한다. 4. 고구려 탐방 셋째 날 (8월 14 일) : 집안 전날의 새벽기차로 인해서인지 아침부터 몸이 개운치가 않았다. 조금씩 폼의 피로는 누적되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부끄러운 생각이었다. 아침에 피곤한 기색을 하기도 전에 어른들은 먼저

46/ 영락이데아 세면을 하시고, 식사를 하고 계셨다. 젊음이라는 것은 나이로 결정하는 것이 아나라, 그가 지닌 열정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는 여야기가 맞음직도 하다. 아직도 나에게는 역사를 생각하는 인 식이 부족한 것인가를 스스로 반성하면서 아침 식사를 한다. 오늘은 오전에는 어제의 압록강을 다시금 찾아가 그야말로 관광을 한다. 이곳에서 기대하고 즐기는 최고의 것은 무엇인가를 타는 것이라는 생각을 어제 갖게 되었는데, 오토바이를 개조한 삼륜차를 타는 것이라든가 자건거를 타는 것.. 그리고 오늘처럼 합록강에서 보트를 타는 것은 아마도 집안시에서 내세우는 최고의 놀이시설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관광이 끝나면 우리는 고 구려 도읍지 국내성을 둘러 볼 것이다. 그리고 환도산성을 가서 옛 유적지들을 다시금 마옴에 담아 오면 오늘의 일정은 끝나는 것이다. 압록강의 보트 놀이는 생각보다 즐거운 것이었다. 어져l 압록강을 보면서 느낀 서글픔이 이제 는 유흥으로 변질된 것 같아서 내 자신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보트는 놀이로서 뿐만아니라 건너 편 북녘의 땅에 한발짝 더 우리를 데려다주는 역할을 해주었기에 너무나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북쪽에서 미역을 감는 두명의 청년이 보인다. 아침무렵이라 활기찬 듯하지 만, 모두들 이곳을 한번도 응시하지 않는다. 우리가 손을 흔들며 시션을 모으려해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듯하다. 아마도 그것은 반가움의 또 다른 표현이라 애써 생각하려하지만, 아무래도 마 음이 편하지가 않다. 그러나 압록강의 바람은 산골짜기와 만나는 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무척이나 시원하다. 이 마음처럼 우리의 통일도 시원하게 되었으면 하는 바랩을 나는 압록강이 라는 훗말 앞에서 찍은 사진 한 장으로 대신해야 했다. 다음 일정은 순서대로 국내성 옛터였다. 역사적으로 보면(심국사기)에 유리왕 22년(서 713 년) 겨울 10월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다 는 기록이 있어 국내성은 졸본성에 이어 고 구려의 제 2 수도였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것은 마치 북에서 오는 적을 막는 기다 란 성곽같이 생겼다고 한다. 어림짐작으로 생각해보아도 주변에는 산자락을 품고 있고, 앞으로 는 압록강이 흐르고 있으니 천연요새로서의 구실을 확실히 했음을 알 수 있겠다. 역사적 사실을 조금 더 들추어보면 졸본촌에 도읍한 지 40년, 그 사이 고구려는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제압하 고 그 세력이 강해져 있었지만 고구려 주변에 웅거하면서 고구려가 강대해지는 것을 꺼려하는

광개토대왕의 기상을 다시 꿈꾸며 / 47 한나라를 비롯해 부여와 선비 등 강대국 서l 력과 부족들의 침입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 려가 마침내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 이유는 바로 이러한 강력한 주변세력들의 침략이 미 치기 어려운 내지로 피할 뿐 만 아니라 자원이 풍부하여 생업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찾음으로써 경제력과 군사력을 커우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또 높은 산들은 자연스럽게 북에서 불어오는 삭풍을 막아줌으로써 아늑하고 양지바른 기후조건을 마련해주었으며 땅까지 비옥하여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군사 경제적 여건으로 말미암아 국내성 지역은 장 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장장 425년간이나 고구려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중 심지로 세상에 그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지금은 옛터전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져 버렸 지만, 국내성 성벽은 고구려 성벽의 한 형식으로 조선시대 말기까지도 그 축조수법이 전해져 내 려왔다. 현재 중국 정부에서도 국내성을 성급 보호 문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고 하니 그나 마의 위안이었다. 현재 관광객이 볼 수 있는 성벽은 북쪽 뿐인데 이것도 아파트 건물 사이에 4~5단 정도 남아 있을 뿐이어서 빈약한 상태였다. 현지 주민들에 의하면 이러한 성벽들은 광복 때까지만 해도 7 ~8미터의 높이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훗날 주위의 주민들이 가옥을 지으면서 하나 둘 가져가 윗부분은 아예 없어지고 말았다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정말 제대로 갖춰져 있는 유물이 없다는 것은 어쩌면 약소국으로서의 한국의 한 (~JV 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타국에 위치한 옛 유물에 대해서는 또다른 대책이 반드시 논의되어야 할 터인데도,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것이 아쉬운순간이었다. 환도산성은 주위가 병풍을 두른 듯한 험준한 산과 절벽으로 둘러싸이고, 앞으로는 큰 하천이 흐르고 있어 적의 침입을 막아주는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은 유리왕때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건설된 곳으로 원래 국내성의 방어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평소에는 양식과 무 기를 비축해 놓다가 전시에는 적들의 입성을 막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서 우 리는 그 지형의 미묘함에 감탄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대략적인 구도가 병풍을 쳐놓은 듯했다. 더욱이 선조들의 지혜가 열보이는 측면은 요새의 구실을 하면서도 일정구역의 농사가 가능하 도록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과학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사고력은 한층 좁아진다고틀 말하는

48/ 영락이데아 데 아마도 선조들의 유물들을 보면서 불가사의한 작품인 양 볼 수밖에 없음은 이러한 현상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지금까지 여러 고구려의 유적들을 답사하면서 느끼는 것은 현재의 내가,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내가 지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구나 하는 자괴감이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내가 고구려 유적을 기억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은 부서진 기와조각 몇 개를줍는 일이나 돌조각 몇 개를수집해 오는 것밖에는 없었으니... 환도산성을 내려오는 길에 곳곳에 흩어져 있는 적석 고분군을 볼 수 있었다. 이제는 어린 아 이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린 우리의 유산이여... 현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아주 묘한 분위기다. 육안으로 확인되는 것만으로도 197H 정도의 고분군을 볼 수 있었는데, 누구의 묘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당시 귀족이나 전쟁에서 승리한 돌아온 장군들의 묘로 추정된다고 한다. 어제 본 장 군총과 비슷했지만 규모면이나 돌의 크기에서 한참 뒤지는 듯했다. 그러나 평원에 펼쳐진 군 ( 都 )을 이루는 무덤들을 보고 있자니 숙연한 마음이 들어 다시금 하늘을 한번 쳐다보게 된다. 저녁을 기다리면서 지난 3 일의 시간을 되돌아 본다. 과거의 시간에 서 있는 것은 과거를 보기 위함이 아니다. 명쾌하게 지난 삼일간의 일정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미 내 견문의 너비가 많이 넓어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분명코 미래에 대한자신감이었다. 무언가조금씩 이번 여행의 의미를몽소 느껴가는듯하다. 이제는 통화를 다시 내려가서 내일이면 장백산을 오르는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이틀 전에 탔 던 새벽기차를 다시금 타고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 우리 일행을 벌써 지치게 하는 듯하지만, 별 다른 방도가 없는 현실에서 가장 좋은 것은 적응이 아닐는지.. 집안의 철도역 주변에서 대기시 간을 한시간 가량 보내고, 또 다시 통화를 지나 장백산을 오르는 내인생의 새로운 역사적 준비 를해야한다. 5. 고구려 탐방 넷째 날 (8월 15 일) : 장백산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열차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탔다. 이곳 통화에서 버스로 대략 4시간정 도를 가야 장백산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광개토대왕의 기상을 다시 꿈꾸며 / 49 한국은 외세에 의해 국토가 양단된 지도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우리 민족은 광복 의 기쁨을 씨줄 삼고, 분단의 아픔을 날줄 삼아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현대사의 반 세기를 교직( 交 織 해 왔다. 그렇기에 우리는 민족의 영산 屬 山 ) 백두산을 더욱 그리워하고, 더불 어 고구려의 옛 조상들이 용장( 勇 뻐한 기상을 드날리던 만주 벌판을 찾아가고 싶어한 것이 아 닐까. 버스는 끝없이 펼쳐진 수림가도( 樹 林 街 道 ) 사이를 힘차게 달린다. 콘크리트가 아직 공사중인 도로는 먼지를 수북 일으킨다. 간간이 따라붙은 승용차와 지프들이 요란하게 경음기를 울리며 정신없이 추월해댄다. 언제 백두산 정상이 보일는지 초조한 마음으로 밖을 내다본다. 백두산 천 지를 보기 위해 정말 먼길을 돌아왔고 아직도 남아있는 먼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드디 어 백두산 입구에 도착한다. 관리사무소에서 입장료 (100 元, 한국 14, 000원)를 내고 장백 산( 長 빔 山 )이라고 적힌 관문을 지나 25Km를 더 들어가니 천지 행 지프들이 대기 중인 주차장 에 도착하고, 곧바로 바꿔 탄 지프는 관경대와 흑풍구를 경유하는 왼쪽 오름 코스를 통해 20여 분 달려 기상대 지나 천문봉 바로 아래의 개활지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오후 1가 무렵이었을 것 이다. 전날의 비는 걷혔지만 천문봉 (2.670m) 주위를 덮은 짙은 구름 때문에 천지가 전혀 보이지 않 는다.20여분을 기다렸지만 좀처럼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우선 장백산에 올랐음 을 확인하는 비석 앞에 서서 사진 찍기에 바쁘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백두산 날씨가 변덕스 러운 것은 러시아 한류와 태평양 난류가 천지주위에서 교차하기 때문이며, 시간이 제한된 관광 객들은 통상적으로 열 번 중 잘해야 두세 번 볼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천문봉에서 팔패암 근처로 내려올 즈음 구름의 일부가 걷히며 가파른 능선 사이로 푸른 수면 이 스치듯 나타나기 시작했다. 천지가 보인다 1" 외치자 모두 천지 쪽으로 모여든다. 극적인 순 간이었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던가.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주위에서는 셔터소리 가 정신없이 터진다. 그러나 천지의 일부 모습조차 잠시일 뿐 다시 구름이 덮이며 천지는 좀처 럼 얼굴을 들어내지 않는다. 다시 천지관광을 포기하고 하산을 시작하려 했으나 변덕스런 구름 은 마치 약올리기나 하려는 듯 살짝 구름 치마를 들치며 발길을 막는다. 단 20 여 초에 동안의

50 I 영락이데아 시간에 우리는 천지의 전모를 느껄 수 있었다. 천지의 수려한 광경이란 정말 나에겐 일생의 처음 맞이하는 장엄함이었다. 전날의 비로 이번 주에는 오늘이 천지를 보는 첫날이라고 하니 더욱 그럴 수밖에... 더 이상의 행운이 있을까... 깎 아지른 절벽 아래로 펼쳐진 천지의 장엄함이란 실로 말로 형 언할 수 없는 것이 었다. 천지의 장엄함에 취해 감탄을 금치 못할 무렵 우리는 또 하나의 그림을 맞이한다. 장백폭포 다. 천지를 20여분 짚차로 내려와 바로 옆의 길로 접어드니 멀리서도 그 물줄기의 세기가 붐으 로 느껴지는 장백폭포가 보인다. 슬로우 모션처럼 폭포의 물줄기는 느리게, 그렇지만 아주 무겁 게 떨어지고 있었다. 이미 나는 대열에서 선두를 유지하면서 마치 돌이 갓 지난 아기가 눈앞의 장난감을 잡으러 넋을 잃고 기어가듯 폭포의 능선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걷는다. 머지 않은 곳 에 온천수와 아주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폭포의 모습이 펼쳐진다. 장백폭포는 높이가 60여미터에 이르는 웅장한 폭포로 200미터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폭 포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크게 두 갈래의 물줄기로 나눠져 있고 떨어진 물은 송화강( 松 花 江 )으로 유입된다. 중국 북방의 폭포들은 모두 겨울에는 얼어서 그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오로 지 장백폭포 만은 일년 내내 멋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마치 용이 날아가는 모습과 같다고 해 서 비룡폭포( 飛 龍 爆 布 )"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장백폭포의 묘미는 폭포에서 흐르는 물줄기를 타고 송화강으로 이어지는 계곡 이른바 흑풍구의 경치와 어울어져 더욱 빛을 발한다. 정말이지 이 젊은 나이에 이렇게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자연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크나큰 행운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일행은 가이드의 재촉에 발길을 옮긴다. 이후 용암대지에서 흐르는 옹천수의 기쁨을 만끽하고는 우리는 저녁의 비행기 시간에 맞추어 일정을 조금 변경했다. 이것은 모두의 찬성을 동반한 여행의 또다른 즐거웅이었는데, 바로 일제 시대 독립의 초석이 되었던 용청촌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두만강에서 가까운 용정 市 는 북간도의 수도로서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사는 곳으로 알려져 었 다. 더불어 독립을 위한 저항의 자리가 되었기에, 아직도 강한 우리 민족성도 남아있다고 하였 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용정시 입구에 있는 수수밭 농장은 길이가 60리에 해당하며, 조선족 이 경영하는 농장 중 2번째로 큰 규모라고 한다. 용정시에는 선구자 노래가사에 나오는 한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