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책 CONTENTS 기획특집 국내 레지던스의 현주소를 묻다(3)대안공간-창작공간의 딜레마 순천-영화연구:예고편 극장간판을 그리셨던 분들과의 이야기작가 S, L, K editorial 쉬 오지 않는 봄 리뷰 (1) 닻올림픽글로 위에 리뷰 (2) A. typist글박혜강 대담무쌍 3 영화-관객-지속적인 교류를 위하여대담자김현수+변재규+돈키호테 묘책 3호 2013. 4. 5 발행 : 예술공간 돈키호테 주소 : 전남 순천시 금곡길 33 (2층) 홈페이지 : http://www.art8013.net 발행인 & 에디터 : 박혜강hyeeyaa@hotmail.com 디자인 : 돈키호테mhoon33@daum.net 순천영화연구예고편 순천에서 극장 간판을 그리셨던 분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2012년 6월 28일 2012년 6월 29일 @ 작가 S의 작업실(방문) @ 예술 공간 돈키호테(초청) 작가 S+작가 S의 친구+돈키호테 작가 S+작가 L+작가 K+이행준+돈키호테 녹취정리윤은별+김미루+돈키호테 편집자 주 : 이 양일간의 인터뷰는 2012년 돈키호테 레지던스의 초청작가로 참여한 이행준의 <꿈의 장치>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이행준은 순천에 오래된 사진관, 극장건물이나 간판 등을 촬영하고 있던 중이었다. 돈키호테가 만난 세 분은 현재 지역 화단의 작가로 활동하고 계신다. 실명거론을 원치 않으셔서 이니셜로 대신한다. 그리고 양일간의 인터뷰를 종합해서 공통된 이야기 별로 묶어 편집을 하였음을 밝힌다. 괄호 안은 의미에 맞게 보충을 하거나 정정을 하였고, 좀 더 긴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주석으로 대신했다. 자꾸 질문을 비켜가는 그 분들의 포복 졸도할 애드립을 생생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게 무척 아쉽지만, 언젠가 여러분과 함께 오디오로 들어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이 지면을 빌어 이분들과의 만남을 주선해 준 순천미협 지부장 나안수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올해 돈키호테는 <순천-영화 연구>를 시작한다. 1974년, 1978년 순천에서 촬영된 두 편의 영화를 통해 당시 순천의 모습과 기억을 발굴해 내고, 주요 촬영 장소였던 둑실 마을의 주민들과 영화를 함께 볼 예정이다. 또한 작가 변재규와 이행준이 이 영화를 매개로 개별적인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돈키호테는 두 편의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감독, 작가, 배 우 등)과의 인터뷰를 계획 중에 있고, 순천 극장의 역사와 관련된 분들을 찾아 구술 작업을 계속할 예정이다. 이 과정을 <묘책>을 통해서 계속 공유해 나갈 계획이다. 순천 드라마 세트장에 있는 순양극장 세트순천시 조례동에 위치한 드라마세트장은 2006년 SBS드라마 <사랑과 야망>의 세트장으로 세워져 그 동안 영화 <그해 여름>, <마파도 2>, <님은 먼 곳에>, <전라의 시>, <젓가락>과 드라마 <에덴의 동쪽>, <자이언트>, <제빵왕김탁구> 등의 작품이 촬영됐다. 순양극장은 가상의 도시순양을 대표하는 극장이다. 아무도 살지않는, 외지 관광객들이 활보하는 순양은 마치 순천출신 소설가 김승옥의 60년대 단편 소설 무진기행 의 무진읍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상상도 해본다. 기획특집 국내 레지던스의 현주소를 묻다(3) 대안공간-창작공간의 딜레마 L: 그러니까 전체적인 컨셉이 뭐예요, 하면 상업미술이지만 그게 또 (작업할 때) 전체적인 컨셉이. 혼신의 힘을 다해요. 거기서 만족감을 S: 친절하게 물어보라니까. 얻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있는 표현을 K: 아니, 편안하게 물어보라니까. 우리가 그대로 한다지만, 거기에 예술성이 가미되면 도움이 될랑 가 모르겄네. 물론 더 좋겠지만, (간판그림에는) 자기 의도가 포함이 되죠. 상업적인 예술이라고 # 돈키호테는 201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역협력형 사업으로 전남문화예술재단의 레지던스 프로그램 공모에 선정되어 지난 5월부터 12월까지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전국적으로 많은 수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소위 레지던스의 전국시대 라 할 수 있는 지금, 현재까지 국내에서 진행되었거나 진행되고 있는 레지던스 사업을 되짚어 보면서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 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어려웠던 시절) 순수미술 하는 사람 들이 상업미술로 많이 간 거야 봐야겠지만. 잘 그려놓으면 기분이 참 좋고. K: (지금은) 모두 전업 작가로 활발히 활동을 사람하고는 친구 못해, 하고 싶어도. 많이 하고 계시지만 어찌 생각하면 그늘을 못 그리니까. 자기네들이 유화그림 하다가 좀 피하고 싶은 면도 없지 않아 있단 말이야. (간판미술을 보면 자기들이랑) 그림이 (상업미술 경력을) 자랑할 수도 있지만 같거든. (그런데 그 사람들이) 와서 (그려놓은 것을) 딱 보면 못 그려. 못 그리고, L: 아니, 그 당시에 순수미술 하는 잘 드러나고 있다.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어간 규모를 갖춘 떳떳하게 내놓기엔 그렇고 또한 이날 포럼의 4개의 라운드 테이블의 주 창작스튜디오와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L: 난 생각이 좀 다릅니다. 그때 당시는 안 되니까 극장에서 쓸 수가 없지. 그때는 제들-(1)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있어서 지역적 상당부분 작가들을 지역 으로 끌어당겼다고 다 어려운 시대거든. 그리고 그때는 (주1) 극장 마네킹 을 그린다고 하면 상당 네트워크 포럼 으로 잡고 전국에 흩어져 컨텍스트의 문제, (2) 어떻게 레지던시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순수미술을 하면 밥을 굶어요. 그러니까 수입이 되니까 어쨌든 간에 그 쪽으로 있는 창작스튜디오 관계자들을 불러 모았다. 예술가를 프로모션할 수 있는가? (3) 다양한 순수미술 하는 사람들이 상업미술로 많이 사람이 밀린단 말이야. (하지만 순수미술 특히 초대자 가운데는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 예술실험과의 만남 국제교류 네트워크, 주제로 두 번째 기조발제자로 나선 전주대 간 거야. 그때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 하는 사람은) 그림이 안 돼, 그림이 안 되니까 고 있는 다양한 이름의 대안공간들과 그 관계 (4) 학제적+크로스 장르적 실험을 위한 이영욱 교수의 발제도 그런 맥락에서 못하는 거야. 자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에 앞 지원이다. 거의 모든 토론의 주제가 과거부터 이해될 수 있다. 즉 그동안 대안공간들이 사람들이 그랬겠어. 그리고 지금 순천뿐만 대안공간이 핵심적으로 다뤘던 주제들로 대안적 미술운동으로 제시해왔던 새로운 아니라 서울이고 어디고 그런 분들이 K: 배우려는 사람들도 상당했어. 서 열린 두 번째 경기문화포럼에서 경기도내 공공미술-커뮤니티 아트가 창작스튜디오와 L: 보통 유화는 계속 덧칠할 수가 있잖아. 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섯 개의 대안공간 ; 대안공간과 창작공간(레지던스)와 긴밀한(?) 화단에 상당히 많아요. 물론 상업적으로 스톤앤워터(안양), 소나무(안성), 아트포럼리 연관성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레지던시 프로그램 가운데 지역연계 하신 분들이 있으시지만. (상업미술을) 그리고 잘 안 마르잖아. 근데 이것(페인트)은 프로그램의 주된 레퍼토리로 정착되면서 지역 했느니 어쨌느니 그러는데, 극장 간판 금방 마르는 거야. 그러니까 (유화처럼) 레지던시가 상당부분 대안공간의 역할이나 같은 건 순수미술 하는 사람들은 할 수가 시간을 두고 그릴 수가 없어.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상당한 테크닉이지. 대안공간에서 창작공간으로? 2010년 8월 경기창작센터는 세 번째 경기문화포럼 (주1) 의 주제를 창작스튜디오 (부천), 눈(수원), 리트머스(안산), 공(의정부)의 (주3) 기조 발제자로 초청된 한성대 정헌이 <새로운 공공미술과 지역 레지던시>를 운영자를 초대하여 이야기를 나눈 것까지를 교수는 90년대 후반 한국의 대안공간 합쳐 볼 때(주2) 대안공간이 여전히 미술계의 운동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변화해 왔는지 과제를 이어 받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없어. 아무나 할 수가 없는 거야. 주요 담론의 생산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찰하고 대안공간의 지역적 확산과 더불어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창작스튜디오(창작공 (상업미술이) 창의성은 없지만 오히려 그 K: 고도의 기술이었어. 지금 생각해봐도 (상 업미술은) 또한 대안공간을 먼저 다루고 창작스튜디오 논의되고 있는 창작스튜디오 및 아트 간)를 대안공간의 대안 또는 포스트 -대안 당시에 순수미술 하던 사람들보다 재능이나 (창작공간)를 그 다음으로 다루고 있는 포럼 레지던시들의 양산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공간 으로 이해해도 좋을까? 기능은 훨씬 더 앞섰지. 대게 보면 그대로 표현한다는 것 뿐인데 의 순서는 최근 국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있을지, 또 지역 문화에 어떻게 기여할 수 순수미술 하는 사람들이 배가 고프니까 L: 아니, (간판 미술에) 창의성이 없어서 그 예술공간의 변화 추세를 따른 것으로, 있는지를 중심으로 논의해 달라 는 주최 (극장에) 찾아 가는데, 막상 (제시하는) 렇지. 대안공간에서 창작공간으로의 비평적, 측의 요청에 대해 2000년대 10년을 휩쓴 담론적 이행이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한국의 대안공간의 역사를 간략하게 대한 두 발제자의 우려 또한 만만치 않다. 못쓰지. 있다. 이는 포럼의 기조발제의 주제 <창작지원 정리하면서, 결과적으로 자본이나 제도권력 대표적으로 정헌이 교수는 이제 작가들은 의 문제를 피해가지는 못한 대안공간에 우리시대의 새로운 유목민, 노마드가 K: 그때 당시에 재미가 있었던 건 뭐냐 의 패러다임의 변화>를 통해서 비해 작가 레지던시는 자본이 투입되어야 되었지만 그 어떤 레지던시도 그들에게 하는 만큼 국공립 기관들이나 지자체 등 영원한 오아시스를 약속하지 않는다 고 제도 기관들이 주도할 수밖에 없었고, 말한다. 그녀는 특히 레지던시 기간의 문제를 따라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규모도 지적하면서 지역의 문화를 진심으로 상대적으로 커지고, 더욱 체계화된 것 같다. 이해하고 소화해서 뭔가 작품까지 고 진단했다. 90년대의 대안공간들이 생산하면서 참여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만난 모임에서 불가능하다고 본다. 또한 이전에 비해 젊은 시작되어 차차 시행착오를 거치며 체제를 작가들에게 많은 기회들이 생겼다는 것은 정비해갔던 만큼 그 규모도 제한적일 수밖에 일견 다행스럽고 좋은 일이지만 애초에 없었지만 200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창동과 예술이란 것이 제도 권력의 경계를 거스르며 고양에 창작스튜디오를 만들어 내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이기 때문에 작가에 대한 지 원 이란 참으로 애매한 지점이 있다 고 지적하고 레지던시가 잘 정착하면 할수록,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레지던시 자체는 (주3) 포럼의 내용은 자료집 창작스튜디오 네트워크 포 럼 : 창작지원의 패러다임의 변화 를 참조할 것. 제도 기관으로 권력화 할 것 이라고 보면서 우리는 비영리(non-profit)라는 정당화에 2면에서 계속 포스터 보면 못 그리니까, 그 업체 쪽에서는 3면에서 계속 (주1) 의류를 광고하기 위해 옷을 입혀 놓는 사람 모형의 마네킹(mannequin)을 빌어서 당시 극장 간판 그리는 일을 마네킹을 그린다 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예술공간 돈키호테가 발행하는 비(정기 독 ) 립저널 묘 <책 은 > 소량의 종이인쇄물과 PDF 파일 두 가지 형태로 발행됩니다. 인쇄물은 일부를 전국의 예술공간 및 문화예술 기관을 대상으로 우편 발송하며 나머지 일부는 돈키호테를 거 점으로 다음의 공간에서 무료로 배포되고 있습니다. 묘책 배부처 서울 더북소사이어티 닻올림 문지원사이 인천 스페이스빔 부산 모퉁이극장 오 픈스 페이스배 안양 스톤앤워터 안 산 커 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제 주 갤 러리하루 광주 미테우그로 의재미술관 순천 상 신영갤러리 순 상문화발전소 1839 천갤러리 (주2) 이들 6개 대안공간이 모여 2010년 3월 <경기대안 공간네트워크>를 발족시켰다. 경기신문의 권은희 기자의 기 사에 따르면 (경기도내) 대안공간이 제도권에 들어서려 는 것이 아니냐의 우려의 목소리와 정책적인 지원책을 끌어 내기 위한 자구책이 아니냐는 의문도 있었다 고 밝히면서 경기대안공간네트워크는 별도의 사업을 도모하지 않으면 서, 강제적인 품앗이도 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또 대안 공간의 경제적 어려움을 긍정적 방안의 모색을 통해 해결의 통로를 마련하는 데 힘을 모으기로 했다. 앞으로 공식적인 운영은 대안공간의 공동체 예술 관련 대표사업 발표 등을 주제로 한 세미나를 펼치는 정도로 이뤄질 예정 이라고 보 도했다. (경기신문, 2010년 6월 15일자, 전자신문 31면) 지역 레지던스 프로그램이나 창작스튜디오에 파일은 돈키호테 메일링으로 서비스되 PDF 를통 며 공간 홈페이지 www.art8013.net 해서 다운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묘 > 실린 원고에 대한 의견 또는 문 <책 에 의하실 점이 있으시면 이메일 mhoon33@ 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daum.net (주1) 2010년 경기문화포럼은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미술 관, 경기창작센터가 공동으로 개최한 포럼으로 약 70여 명 의 다양한 전문가들의 만남과 논의의 장이라고 소개하고 있 다. 세 번의 포럼은 7월 21일 경기도미술관, 8월 14일, 8월 15일 경기창작센터에서 연속포럼의 형식으로 개최됐다. 창작공간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예술공간 돈키호테 독립저널 <묘책> 제 3호 2페이지 1면에서 연결 기대어 대안의 미학을 추구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의 활동하는 예술, 연구 하는 예술, 커뮤니티에 참여하는 예술 이 내세운 지역 이라는 새로운 문제 의식은 어떤 의미에서든 세계화된 자본 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과 고찰을 요 구하는 것 으로 문제는 더 이상 비영리라는 핑계 속에 숨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오히려 어떤 종류의 영리(profit)인가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지도 모른다 고 밝히고 있다. 이는 그동안 비영리를 추구해온 대안공간이나 윤리의 문제를 내세워 온 작가들이 깊게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비영리성(공공성)과 윤리(태도)의 문제는 소위 한국의 진보적, 대안적 미술진영이 구사해온 레토릭의 정신적 근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대안공간의 활성화와 공공미술의 개혁에 앞장서 온 이영욱 교수는 거의 모두가 지역문화 혹은 지역 주민들과 연계된 예술 작업이나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는 지역 레지던스의 지역연계 프로그램에 대해 대체로 일시적, 우연적인 듯하며 체계적인 구상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고 진단하면서 지역과의 에피소딕한 만남의 경험 제공 의 수준에서 지자체는 레지던시와 관련하여 지역(문화) 마케팅 효과 이외의 기능에 크게 주목하지 않고 있다 고 꼬집는다. 이러한 (제도권력의) 문제로 인해 그는 빠른 시일 내에 창작스튜디오들이 지역문화와 연계된 미술실험의 거점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현재 별로 크지 않아 보인다 고 현재의 지역을 거점으로 설정하고 있는 창작스튜디오를 평가한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대안공간에서 창작공간으로, 대안적 담론과 실천의 이행이 이미 이루어졌고, 진행 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시간을 더 두고 기다려 볼 것인가? 창작공간의 비영리성(공공성)을 내세우는 지원 과 그 달콤한 지원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행정 시스템의 문제는 여전히 풀기 어려운 숙제가 아닐 수 없다. 과연 이 숙제는 풀릴 것인가? 풀릴 수 있는 문제일까? 숙고와 성찰이 필요하다. 오늘날 작가들은 도처에서 쏟아지는 각종 지원제도를 잘 이용하면서 제도권과 제도를 거스르는 도발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정규군이 아니라 치고 빠지는 게릴라처럼, 레지스탕스처럼, 혹은 이중간첩처럼 처세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헌이 교수가 말했듯이, 무엇보다 비영리함보다 더욱 영리해져야 할지도 모른다. 싸워야하는 적의 개념이 흐릿해져버린 오늘날, 전위(아방가르드)는 본대가 안전하게 나아 가야 할, 앞으로의 경로를 정찰하고 탐색하는 척후병이 아니라 어쩌면 본대 내부에서, 제도권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탐색하고 고급 정보를 선취하여 보다 빠르게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아내 는 활동에 열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결코 중력을 벗어나 저 먼 우주에로 의 비행이 아니라 대기권 안에서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는, 곡예비행을 멋지 게 수행해야 하는 그런 모습일 수도 있다. 결코 가시권에서 벗어나 버리지 않는 우리의 갑을 관계?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대안공간도 쌈지스페이스 (1999~2008) (주4) 이후로 점차적으로 늘어나 있다. 대안공간의 레지던스 운 영은 특히 2007년부터 시작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국제레지던스 프로그램 지원사업 (주5) 과 2009년부터 시작된 지역협력형 사업 중 레지던스 지원사업 (주6) 으로 인해 증가했다. 2008년 12월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발행한 <국내 의 국제레지던스 운영 활성화 방안 연구>에서는 비영리전시공간(대안공간) 사업이나 다원예술매개공간 지원사업과 창작스튜디오 공간과의 연관성을 지적하면서, 특히 대안공간이 자체 운영하고 있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예컨대 오픈스페이스 배(부산)를 비롯 해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안양), 스페이스빔(인천), 리트머스(안산), 미테우 그로(광주)의 국제 레지던스 프로그램과 함께 인사미술공간의 신진작가수첩, 레지던스워크숍, 뮤지움 에즈 허브, 욘복 프로덕션 등의 프로그램에서 레지던스 프로그램과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주7) 그러나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기 어려운 대안공간의 레지던스는 거주시설 중심보다는 프로젝트 기획 중심의 레지던스로 가변적이고, 일시적이고, 단기적인 프로젝트형 레지던스의 유형이 많다(프로젝트형 레지던스의 사업성과와 그 평가의 쟁점에 대해서는 이후에 다루기로 한다). 작업을 할 수 있는 스튜디오와 비평, 전시, 세미나 등 다양한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서비스하는 창작공간들의 등장은 그 이전에 대안공간에 몰렸던 젊은 작가의 관심을 창작공간으로 이동하게끔 만들었다. 자신의 작업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찾는 작가들에게는 2008년 이후로 힘을 잃어버린 대안공간보다는 국가와 지자체가 지원하는 국공립 창작스튜디오 (주8) 가 더욱 트랜디해 보이고 좀 더 권위가 있어 보일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국공립 레지 던스가 갑 의 위치에서 주류 미술계로 진입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루트가 될 수 있다는 기대심리를 크게 작동시켰다고 생각된다. 만약 이렇듯 창작지원의 패러다임이 변화한 것이라면, 그 변화가 과연 오늘날의 작가들에게 어떤 영향 을 끼치는가를 살펴보는 일도 흥미로울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정헌이 교수의 발제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는데, 우리가 생각해 볼 이야기 다. 이러한 성찰들 속에서 각자의 윤리가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 다.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호기심이 일지만 한편 너무나 두렵기도 하다. 나 역 시 지금은 그렇다고 해야 할까. 굳이 작가의 윤리 문제가 아니라 갑 과 을 의 관계로 풀어내보고 싶은 호기심이 일지만 말이다. 창작 과 대안 의 관계 문제가 아니라 공간 간의 갑을 관계가 조심스럽게 형성되어가고 있다는 느낌 을 떨쳐내 버리기가 어렵다. 1999, 대안공간을 다시 생각하다 잠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98년부터 한국 사회는 갑작스레 IMF -외환 금융위기를 맞이했다. 대량해고와 부도사태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변변치 못했던 예술가들의 창작환경은 더욱 암울해진 것 같았다. 당시 대부분의 화랑, 갤러리들이 대관전시로 채워지던 시절에 궁핍해진 작가들은 더욱 전시기회를 얻기도, 만들어내기도 힘들어졌다. 대관수입으로 호황을 누렸던 화랑, 갤러리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 경제 호황과 비례해 미술작품 거래가 이뤄졌던 미술시장도 꽁꽁 얼어버렸다. 그러나 총체적인 난국과 위기감이 팽배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미술계의 기득권이나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은 이렇다 할 대응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땡! 하고 건들어 주기를 기다리는 얼음! 의 상태. 위기 앞에 스스로 얼음! 을 외쳐버린 한국 미술계. 해동이 되려면 상당 시간을 기다려하는 얼음의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환경의 급변화에 따른 위기의식 속에서도 돌파구를 찾고자 했던 작가와 큐레이터, 비평가들이 있었다. 이 가운데는 금융위기로 외국 유학생활을 성급히 마무리 지어야 했거나, 중도에 포기해야 했거나 하는 유학파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이들은 IMF 체제 아래의 한국 미술계를 새롭게 움직일 수 있는 기획을, 그러한 활동과 모임이 가능한 거점공간을 거의 동시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 대안공간 으로 묶어서 부르고 있는 대안적 공간들이 줄이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99년 한 해에만 대안공간 풀, 대안공간 루프, 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 쌈지 스페이스, 대안공간 반디 (주9) 5개의 대안공간이 줄이어 등장했다. (주10) 1990년대 후반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대안공간은 크게는 제도 미술계가 수용하기 어려운, 수용하지 않았던 실험적인 예술작업을 하는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데 주안점을 둬왔다. 이는 미술대전과 같이 아카데믹한 미학과 수상의 권위를 내세워 온 기성 미술계의 작가 발굴 시스템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대안공간들은 전시 지원을 내세워 작가 포트폴리오를 공모하고 큐레이터, 비평가 등이 참여한 심사과정을 거치는 등 유능한 작가 개인 또는 그룹을 발굴해 나갔다. 전시 방식도 장르별 입상자의 작품을 한 전시공간에서 집단적으로 펼쳐 보여줬던 미술대전의 그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냈다. 이렇듯 대안공간은 기성의 미술제도와 내용이나 형식면에 서 차별성을 추구해 나갔다. 대안공간들은 당시 상업적인 미술공간들과 다르게 비상업적, 비영리 전시 공간을 표방하면서 단순 대관전시가 아닌 주제를 가진 기획전시를 시도했 고, (주11) 기획전들은 언론과 비평가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큐레이터쉽이 전무했던 상업 화랑들의 대관전시 중심의 활동방식과는 달리 대안공간들은 비영리 와 기획 을 내세우면서 전문적인 작가 비평, 전시리뷰 를 포함하여 동시대 미술 담론을 주도해 나갔다. 이러한 주도권의 변화는 젊은 작가들이나 지역의 작가들에게도 상당부분 어필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2000년에는 정부가 총대를 메고 대안공간을 표방한 인사미술공간(인미공)을 설립했고 민간 대안공간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2002년 4회 광주비엔날레에서는 성완경 예술감독이 대안공간을 동시대 미술의 최전선으로 전면 부각시켰으며, 이를 계기로 국내 대안공간들 의 존재감이 높아지기도 했다. 동시에 인천, 안양, 수원, 안성, 안산, 광주, 부산 등 지역에서도 대안적 성격의 미술공간들이 하나 둘 등장했다. 2002년 이후로 대안공간은 지역으로 지속적으로 확산됐을 뿐만 아니라 대 안공간을 거쳐 간 작가들이 미술계에서 점차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술시 장에서도 소위 대안공간 작가 에 프리미엄이 생겨날 정도였다. 대안공간이 유능한 작가의 발굴과 함께 미술담론을 이끌어가는 분위기는 미술대학에서 배출된 많은 신진 작가들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재능있는 작가들에게도 신선한 자극체가 되었다. 이들은 대안공간의 작가 발굴과 전시지원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대시했다. 전국 범위로 확산된 대안공간들을 창작 네트워크로 삼아 이곳저곳의 대안공간만을 옮겨 다니는 작가들도 생겨났고, 실험적인 작업을 들고 대안공간으로 신진 작가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대안공간은 2000년부터 2007년 참여 정부에 이르기까지 예술지원의 최전선이라고 부를 만 했다. 대안공간에 대한 정부 지원은 곧 대안공간과 연결된 많은 작가들과 큐레이터, 비평가에게까지 그 지원이 전파되는 것으로 그 파급효과는 대단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그 오르막의 정점이 언제쯤이었을 까 생각해보면, 아마도 2005년 무렵에 상승 곡선의 정점을 찍은 듯 보였다. 2005년은 공무원이 꽉 잡고 있었던 문예진흥원이 민간 전문가 중심의 위원회로 전환된 해였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의 새 판 짜기 과정에서 대안공간은 제도에 안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전문성과 기획력을 인정받은 대안공간은 제도권 깊이 점차적으로 파고들었다. 더 이상 대안공간 은 비제도권, 제야의 반골세력으로 보기 어려워졌다. 이제는 주변부가 아닌 권력의 중심부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 말은 기득권을 향해 비판적으 로 문제제기를 하면서 소위 대안 을 내놓았던 이전의 상황과는 달리, 이제는 반대로 방어적인 태도로 자기변론을 해야 하는 위치에 놓였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역전된 상황 에 대해 대안공간은 그렇지 않다! 라고 반론할 수도 있 으나 나의 분석은 그렇지 않다! 2013, 대안공간은 창작공간의 미래? 당시 대안공간의 주도적 담론들은 (이제는) 국내보다는 국제적 네트워크와 국내무대가 아닌 국제무대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작가의 발굴과 그 지원책에 대해 여러 궁리를 하고 있었지만, 대안공간에 대한 미술계의 비판적인 여론이나 곱지 않은 시선도 만만치 않았다. 나쁘게 말하면 정경유착 이니, 정언유착 이니 하는 말처럼 대안공간도 정치와 제도에 상당부분 유착-안착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새로운 대안적 미술로 공공미술 을 전면에 내세우는 과정에서도 대안공간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새로운 공공미술을 혁신적으로 바꿔 제도화시키고자 했던 시도는 기득권으로부터 많은 저항과 반발에 부딪혀야 했다. 대안공간이 전국적으로 그 개체수가 증가함에 따라 대안공간 내부 네트워크 (주12) 의 소통문제도 적지 않은 걸림돌이 되었다고 본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주목하여 다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서울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안공간과 다양한 지역에 분포해 있던 지역 대안공간간의 소통의 문제가 분명히 심각하게 있었다. 서울지역 대안공간들이 다소 국제교류에 몰입했다면, 지역의 대안공간들은 지역적 문제에 집중했다(물론 지역의 대안공간 가운데 국제교류에 관심과 열정을 쏟은 대안공간도 존재한다. 그러나 지역의 국제교류 사업은 서울 대안공간의 대표-주력 사업에 가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지역 대안공간은 서울 대안공간들이 지역 공간들이 각자 안고 있었던 지역적 문제들에 대해 별 관심이 없거나 지역의 특수성과 각 공간의 다양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고, 반면 서울 대안공간들은 국제미술의 흐름과 변화에 대응하는데 있어 지역 대안공간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일에 확신이 없었고 대단히 소극적이었다. 2008년 혁신 과 분권 과 참여 를 강조했던 진보적인 정부에서 성장 과 선진화 를 앞 세운 보수적인 정부로 교체되면서 대안공간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심하게 위축되었다. 소위 코드 가 맞지 않았다. 그 사이 대안공간의 권력화 에 대한 끊임없는 시비와 비판이 있었고, 2004년 무렵부터는 일부 상업 화랑도 대안공간의 신진작가발굴 시스템과 프로그램을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대안공간 무용론 까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었지만, 대안공간은 크게 위축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2008년 정권 교체는 정부의 지원이 중요했던 대안공간 네트워크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의 수장이었던 김정헌 위원장에 대한 압박해임으로 대표되는 진보적 문화예술 인사들에 대한 줄 퇴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대안공간의 성격으로 독립적으로 운영해 왔던 인사미술공간 에 대한 재구성, 진보적 성향의 문화예술단체에 대한 표적감사는 그동안 잃어버린 10년 이라고 말해왔던 이명박 정부의 또 다른 새판 짜기 의 서막이었다. 과연 대안공간은 2008년 이후, 지난 10년-잃어버린 10년이라는 정치적 시 간에서의 자신들의 활동을 제대로 성찰하고 대안을 모색했을까? 만약 대안공간이 정부의 지원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 정치권력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자립해 왔다면 어땠을까? 느슨했던 대안공간 네트워크가 보다 치열하게 네트워크의 장기적인 효용성을 공감하고 새로운 대안 에 대한 의제를 발굴하고 공유해갔다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대안공간 네트워크가 지금처럼 무기력하게 흐트러져 버리지는 않았을까? 2012년 4월 (사)비영리전시공간네트워크(대안공간네트워크)는 전국의 대안공간과 창작스튜디오(레지던스)를 묶어 대안적 아트페어를 내세우면서 <AR Festival> (주13) 을 개최했다. 또한 대안공간 루프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사업의 일환으로 8월에서 10월 사이에 <아시아창작공간네트워크> (주14) 를 진행하기도 했다. 10월에는 소위 창작공간 2.0 의 기수라 불리우는 서울 금천예술공장이 <전국창작공간네트워크 전시 : 그 거리의 창의적인 자세>를 개최해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대안공간이 창작공간을 이끌기도 하고, 반대로 창작공간이 대안공간을 업기도 한다. 양자는 유망한 작가발굴과 담론의 최전선을 자처하면서 서로 경쟁하면서 혹은 동행하면서 네트워크를 엮어 가고 있다. 과연 양자간의 네트워크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주15) 는 말 속에는 어떤 위기감이 내포되어 있다. 그 위기감을 하나로 압축하자면, 이들 모두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 이라는 제도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데서 오는 위기감이다. 지원은 하되 간섭을 하지 않는다 고 하는 팔길이 원칙 이 무시되면서, 공간의 자율성, 독립성이 심각하게 위협-간섭받고 있는 상황이다. 공간의 설립과 설계의 과정에서 예술(공간)의 비영리성 과 공공성 을 최대한 부각시켰던 것이 결국 자기 발목을 잡게 만든 것이다. 우리는 과연 예술의 공공성 을 통해 어떤 장기적 비전을 공유하고 있는가? 나는 없어져도 된다! 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생각으로 공간 을 운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런 생각으로 예술을 하고 기획을 하는 것. 그것은 책임을 따지는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정헌이 교수가 얘기한 윤리 의 문제일 수도 있다. 태도 의 문제일 수도 있다. 우리는 오늘날 예술과 그 예술 을 둘러싼 제도와의 관계맺기에 있어서 갑-을 관계 로 고착화 되는 것을 심 각하게 고민하고 그 대응책을 만들어 내야 하는 상황에 와 있다. 더이상 비영리 나 공공성 을 내세운 어용을 방관하지 말도록 하자. 더이상 대안공간이나 창작공간을 관변 단체나 기관으로 전락시키지 않도록 하자. 글돈키호테 (주4) 쌈지는 1998년 서울 강동구 암사동 쌈지 구 사옥을 창작스튜디오로 사용하다 2000년 홍대 근 처로 옮겼다. 한편 같은 해 대유문화재단이 경기도 광주에 경안창작스튜디오(현 영은창작스튜디오)를 개관해 주목을 받았다. (주5)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내의 국제레지던스 운영 활성화 방안 연구>(2008)를 참고 (주6) 지역협력형 사업에 대해서는 김지선, <우리나라 문화행정의 분권화 양상에 관한 연구-정부 간 관계모형을 활용한 광역문화재단의 지역협력형 사업운영추세 분석>, <<2013 문화정책논총 제 27집 1 호>>(한국문화관광연구원, 2013)을 참고. 레지던스 프로그램 지원은 그간 국고로 추진해온 예술창작 스튜디오 조성, 예술창작공간조성 지원사업이 지방으로 이양된 것이다. 기존의 프로그램이 작가에게 단순히 공간을 제공하는 차원에 머무르고 있음에 반해, 레지던스 프로그램의 창작-소통-향유 시스템 에 대한 지원으로 지역 예술가의 창작 활성화 및 예술교류의 활동 증진과 지역주민 연계 예술교육 프 로그램을 통한 지역문화예술 향유권 신장 및 커뮤니티 활성화를 목적으로 하는 2010년 정책형 신규 사업의 연장이다. - 김지선, 위의 논문 중에서 (주7)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의 연구(2008), 139쪽~143쪽 참고. (주8)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창작스튜디오는 1995년 광주비엔날레의 개최를 계기로 지역작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광주시립미술관이 설립한 팔각정 창작스튜디오이다. 민간 차원에서는 1995년 경기 파 주시 하제마을, 충북 청원군 창원마동 창작마을, 전북 임실군 오궁리 미술촌을 거론 할 수 있다. 1997 년에는 문예진흥원이 논산과 강화에 방치된 폐교를 활용하여 미술창작실로 리모델링하여 운영한 바 있다. 이 두 곳의 미술창작실은 1999년 지역에 이관됐다. 1998년에는 문화관광부가 각 시도별로 2~3 개의 창작스튜디오를 건립하겠다는 <창작스튜디오 확충 기본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주9) 대안공간 반디는 부산 지역을 대표하는 동시에 서울대안공간과 지역대안공간이라는 프레임에 서는 지역을 대표할 만한 대안공간으로 1999년 대안공간 섬 에서 시작했다. 반디는 2012년에 문을 닫았다. (주10) 이들 5개의 민간 설립 대안공간과 2000년에 정부가 설립한 인사미술공간을 묶어 1세대 대 안공간 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90년대 미술계를 엄밀히 살펴보면 이들 1세대 대안공간 의 등장 이전, 90년대 초부터 한국 미술계에서도 대안공간 에 대한 필요성과 담론이 등장하기 시작했 음을 알 수 있다. 1993년 갤러리 나무와 1994년 21세기 화랑은 99년에 등장한 소위 1세대 대안공 간 의 선배 또는 진정한 의미에서는 한국 1세대 대안공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1998 년에서 2000년 사이에 등장한 대안공간은 1.5세대 정도가 되지 않을까? (주11) 대안공간 풀의 경우 초기에 기획전 외에도 대관전시도 함께 운영했는데 대관에 대해 시비가 붙었다. 풀은 상업 화랑들의 단순대관과 같은 것이 아니라 기획대관, 즉 선별적인 대관으로 차별성을 부여했으나 비영리를 추구한다는 대안공간이 대관수익사업을 한다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외부의 비 판적인 시비로 인해 결국 풀은 대관사업을 포기해야 했다. 결국 이러한 결정은 별다른 운영수입이 없 었던 비영리 전시공간에게 운영난을 가중시킨 결과가 되었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정부의 지원을 이끌 어 내야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민간 비영리의 대안공간은 쉽게 제도권으로 흡수되는 모양새를 보 여주었고, 2000년부터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 낸 대안공간은 주변으로부터 권력화 에 대한 새로운 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기획대관의 개념의 출현에 대해서는 1995년 6월 15일자 한겨레 <기획대관, 새 로운 예술운동> 기사를 참조할 만하다. 기사는 21세기화랑(최민화 대표)의 작가-화랑 공동부담하는 기 획대관을 새로운 운동으로 소개하고 있다. (주12) 대안공간네트워크 (사)비영리전시공간 협의회는 2005년 11월에 설립되었다. 2007년 홍보 소책자에는 대안공간루프, 쌈지스페이스, 아트스페이스휴,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인사미술 공간, 대안공간 풀, 브레인팩토리, 갤러리 정미소, 스페이스빔, 스톤앤워터, 대안공간 반디, 오픈스페이 스 배 이상 12개 공간을 소개하고 있다. (주13) <AR Festival>에는 서울의 대안공간 루프, 브레인 팩토리 등을 비롯해 파주의 아트스페이스 휴, 갤러리 박영, 메이크샵아트스페이스, 안성의 대안공간 소나무, 안양의 스톤앤워터, 부산의 오픈 스 페이스 배 등 전국의 대안전시공간과 국립현대미술관이 운영하는 창작스튜디오, 서울시립미술관이 운 영하는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9개의 서울시창작공간, 인천문화재단이 운영 하는 인천아트플랫폼, 경기도미술관에서 운영하는 경기창작센터 등 모두 42개의 비영리전시공간과 창 작스튜디오가 참여했다. (주14) 국내 참여 기관에는 경기창작센터, 아시아예술창작스튜디오, 광주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 관 창동창작스튜디오, 금천예술공장, 김달진 미술연구소,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대안공간 루프, 미테 우그로,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복합문화공간 에무, 아트스페이스 풀, 아트스페이스 휴, 오픈스페이 스 배, 인사미술공간, 인천아트플랫폼이 참여했으며, 해외 참여 기관으로는 대만 VT아트살롱, 말레이 지아 12 아트 스페이스, 베트남 디아/ 프로젝트, 싱가포르 ICAS, 인도네시아 루앙루파, 일본 뱅크아트 1929, 중국 CAFE 아트뮤지움, 태국 짐 톰슨 아트센터, 필리핀 바르가스 뮤지움, 홍콩 파라/사이트 아 트스페이스, 홍콩 비디오타지 총 10개국이 참여했다. (주15) 예술경영지원센터 웹진, 창작공간의 문제를 다룬 오세형, 김규원, 김희영, 이부록, 최관호 다섯 사람의 대담 타이틀은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였다.
예술공간 돈키호테 독립저널 <묘책> 제 3호 3페이지 1면 <순천-영화 연구>에서 연결 간판 그림은 자기 주관적인 게 개입이 돼요 L: (그림이) 몇 천 호 되잖아요. 크기가 극장 앞을 전부 다 덮으니까. K: 그게 한 300~250 정도 됐을까? 한 2000호 정도 될 거에요. L: 일단 포스터가 있고, 영화의 스틸 사진이 (영화사에서) 나와요. K: 영화 내용, 좋은 장면만 딱딱 찍어서 보내는 데, 사진이 이삼십 장 씩 와요. 그게 일단 간판실로 와. L: 그걸 보고 어떤 주인공을 그릴 것인가. (그림 크기가) 몇 천호 되니까. 예를 들어서 구도 같은 거 잡아야 하니까. 그걸 잘못 해버리면 엉망이 되어 버리지. S: 그때는 가꾸목(각목)에다가 광목천을 막 입혀. 우리가 캔버스 싸듯이. 그 다음에 니스를 한 번 칠하지. 공업용 아교 있잖아. 옛날에는 건축원들이 그런 거 많이 쓰고 그랬잖아. 그래야 천이 탱탱하게 펴지니까. 탄력성이 없으니까 그걸 바르고 페인트를 발라. 화이트를 발라서 거기에다가 대나무 끝에다 연필, 초크를 조여 메서 데생을 해. 주로 배우들 얼굴 그리잖아. 영화의 그 하이라이트 장면을 조그만 소품으로 한 커트씩 넣고. 그 다음에 제목 쓰고 주연 쓰고. 동그라미 해가지고 날짜 몇 일부터 몇 일까지 이렇게. 그렇게 하면서 파레트(pallet)가 없으니까 요만한 유리를 잘라 와서 그 밑에다 양쪽으로 페인트 통을 쫙~ 놔서 유리 밑에다가 하얀 종이를 깔면 색상이 다 보이잖아. 훤~해. 지금 내가 살색을 만들려면 그것이 다 보이니까. 간판은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지. K: 자기 주관적인 게 개입이 돼요. 또 당연히 그래야 되고. 작가들-말하자면 그림쟁이들도, 화가들마다 자기 개성이 있어요. 그림들이 다 달라. 사람 얼굴을 얼마나 크게 그려. 이~만하게 그리잖아. 서서 다룰 수 없으니까 사다리 놓고 위에서도 그려야 되고. 아무래도 연마가 돼야 좋은 그림이 나오지. S: 그래서, 흑백포스터가 내려와도 칼라로 그리는 건 간단해불지. L: (안 그러면) 그림을 담질 못해뿌러. (간판 일을) 배울 사람들이 뭐부터 배우느냐 하면, 간판 글씨 쓰는 것부터 배우지. (주2) S: 지금 세트장 같은 데도 가보면 그런 생각이 참 많이 나더만. 거리나 간판. 간판의 발전사도, 그때는 양철이었다가 사이즈를 재서 페인트 칠해가지고 썼거든. 외지 가서 배워온 사람들이 입체를 쓰더라고. 글자에다 가 또 입체로 넣는 거야. 요즘에야 그런 게 흔하지만. L: (극장 간판 그릴 때) 홍보문구도 다 직접 했지. K: 아니, 하기 전에 포스터에 대략 내용들이 다 나와 있고 큰 대작이나 명절 같은 때에는 미리 자료를 싹 보내주고 이렇게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 사전에 (주문을 해요). S: 특히 쇼 공연이 들어올 때는 모자이크를 아기자기하게 해서 간판을 그려야 돼. 공연단이 들어오면 이틀 이상은 안 하잖아. 장기공연 안 되니까 딴 데로 옮기고, 유랑극단이니까. 미리 예고편 간판을 한 쪽에 딱 그려 넣잖아. 예를 들어 보름 후의 예고 프로 간판 공간이 딱 있어, 좌측에. 본(원래) 영화(포스터 자리)는 기도 (주3) (를 통과해) 들어가면 입구에 쫘악~ 이렇게 장식하고 그랬지. K: (간판이) 얼굴 역할을 했죠. 지금 생각하면 나로서는 그 때가 황금기, 청춘, 젊었을 땐데. 그때 당시로는 나름대로 만족감이 있었어. 왜냐면 대우가 웬만한 공무원 보다 나았어. (주4)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괜찮다 싶으면 딴 데서 스카우트 해가는 상황이었거든. 서울 같은 데서 오라고 하는 경우도 상당히 있었고. 광주 중앙극장이 지금은 없어졌지만 거기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그려주고, 한창 때는 그랬었는데 L: 사진 안 찍어 놨소? K: 사진이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라 L: 아니지! 영광스럽지. 온 시민들이 와! 똑같네, 똑같아. 어찌 저리 그렸스까? 지역에 문화 공간, 문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극장 밖에 없었어. S: 그때 당시 60년대나 70년대 보면, 이 지역에 문화공간, 문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극장 밖에 (주2) 여기서는 극장 간판 그림에 들어가는 글씨를 말한다. 또한 (작가 S의 구술에 따르면) 당시에 간판 그림 작가들에게 일반 상가(특히 미용실) 주인들 이 입간판 등의 글씨를 많이 부탁했다고 한다. (주3) 극장 입구에서 검표관리를 하는 사람을 말한다. (작가 L의 구술에 따 르면) 주로 지역에서 주먹깨나 쓰는 사람이 맡았다고 한다. 몰려드는 관객 들과 표를 구입하지 않고 입장하려는 관객들을 겁주기 위해 입구에는 항상 기도 가 버티고 있었다. (주4) 그러나 급수가 나눠져 있었고 보조격의 사람들은 적은 액수에 월급이 밀리기도 했고, 악덕 극장주를 만나면 정당한 보수를 요구하는 시위도 했다 고 한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으로 교체가 될 뿐 보수 문제가 개선되지는 않 았다(작가 S의 구술에 따른다). 그때 당시 60년대나 70년대 보면, 이 지역에 문화공간, 문화라고 말할 수 있 는 것이 극장 밖에 없었어. 그리고 그때 예총 (한국예술인총연합회)이란 말을 안 하고, 그때 뭐라 그랬더라? 문화원! 지역마다 문화원이 다 있었어. 지금은 시 단위, 군 단위에도 문화원이 다 있잖아. 그것이 (초기에는) 미문화원(미국문화원) 으로, 처음엔 황금백화점 자리에 있었어. 그때 학생들이 문예잡지 발표하고, 국 악, 판소리 같은 거, 그런 것들이 주류를 이뤘지. 없었어. 그리고 그때 예총 (한국예술인총연합회)이란 말을 안 하고, 그때 뭐라 그랬더라? 문화원! 지역마다 문화원이 다 있었어. 지금은 시 단위, 군 단위에도 문화원이 다 있잖아. 그것이 (초기에는) 미문화원 (미국문화원) (주5) 으로, 처음엔 황금백화점 (주6) 자리에 있었어. 그때 학생들이 문예잡지 발표하고, 국악, 판소리 같은 거, 그런 것들이 주류를 이뤘지. 그러다가 우리나라 최초의 미문화원에서 우리나라가 암울했던 시대에 시민의식이라든지 국민들의 의식을 깨치기 위해서 그걸 자꾸 했잖아. 소식 같은 것도 전해주고, 외국에서 영화 상영 했던 것도 한 프레임, 작은 영상으로 막 보여주고 그런 시대였지, 60년대는. 그게 지금의 문화원으로 발전을 했지. 지금 순천 문화원은 4년간 잠자고 있지만 L: 극장문화는 어떤 면에서는 잊혀져 가잖아? 그때만 해도 정스러웠지. 예를 들어서 TV도 없고, 뭣도 없고 그러니까 (영화) 하나 들어오면 거기에 모여드는 거지. 영화 하나 보면 그게 큰 문화적 경험이었지. K: 그때 딱히 문화라는 것이 다양성이 있던 것이 아니고 딱 극장, 그 하나에요. 그러니까 영화 하나가 괜찮다 싶으면 줄 서서 들어오지, 이해가 안 되겠지만, 밀고 들어오면 밀쳐내 가면서 그렇게 입장을 시키고. 그리고 영화가 좀 괜찮다 싶으면 시골 천지(읍, 면 단위에서도) 에서도 (순천으로) 와요. 설날, 추석 이럴 때는 연속으로 상영하니까, 그 때도 (갈 곳이) 극장 밖에 없어요. 그거 아니면 순천에 죽도봉 공원에 올라가는 정도? 그땐 순천에 공원 같은 것도 전혀 없었어. 문화 시설은 진짜 없었어. 오죽하면 추석에 시장에서 난장 이라 그래가지고 씨름판도 만들고 풍물꾼도 불러서 (판을 만들었고), 거기서 옛날말로 야바위 가 공공연하게 성행했었지. L: 그리고 가설을 했어, 가설극장. 시골 같은 데는 극장이 없으니까, 필름을 가지고 흥행사들이 쇼 같은 데 가서 천막 같은 거 치고. 천막을 쳐 놓으면 완전~ 막 무너지지. K: 그것도 재미있어. 우린 그런 거 못 가봤네. L: 간판 같은 건 없고 완전 선전으로 해. 마이크 선전. K: 주암 (주7) 이나, 이렇게 가까운데 가는 게 아니면 시내 못 나오니까. 천막 쳐놓고 와서 보라고 놔두는 거야. 거기로 사람들이 많이 간다 이 말이야. 그 정도로 문화혜택이 없었지. L: 없었지, 오로지 시청각으로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지. (순천에) 극장이 네 개가 있어도, 네 개가 다 잘 된 게 아니라 (주8) L: 그러니까 순천극장이 제일 오래됐고 그 다음에 중앙극장, 시민극장(이 차례로 문을 열었고), 맘모스극장 이 최신식으로 지었지. 순천극장이 국도극장으로 이름이 바뀐 게 한 73년도? (주9) K: 그때만 해도 문화의 요람이었지. 딱 한 관 있었으니까. S: 국도극장으로 개정(개칭)하면서 고흥 군청에 총무과에 있던 사람인데, 뭘 해가지고 돈을 벌어서 국도극장을 (주5) 각 시.군 단위에 설립되어 있는 지금의 문화원은 그 시초가 1950년대 초 미국공보원(USIS) 산하에서 활동하던 공보관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사 설기관으로, 한국에서는 최초로 대전과 밀양 지역이 자발적으로(?) 미문화 원을 설립하면서 전국으로 확대된다. - 전국문화원 (전국문화원연합회, 1996) 참고 (주6) 순천 원도심 중앙동에 위치한 순천 최초의 백화점. 1987년 7월 22일 자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당시 황금백화점의 매장 규모는 전국 1위였다고 한다. 90년대 초 지하 2층 지상 9층 높이의 건물을 새로 지어 기존의 백화점 기능 외에 영화관(황금극장), 사우나 등의 서비스 시설을 갖추었으나, 현재는 운영이 중단된 채로 남아있다. (주7) 주암면은 순천의 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순천 시내와의 거리가 꽤 멀다. 주암댐의 영향으로 주암호가 형성되어 있으며, 송광사와 조계산이 있 는 송광면과 면해 있다. (주8) 인터뷰에서는 주로 각 극장주들의 개인사를 많이 언급하셔서 부득이 하게 편집을 하였다. 당시 순천에서 극장사업에 손을 댔던 대부분의 운영자 들이 돈은 많았지만 그다지 평판이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순천 극장사에 대한 대략의 내용은 위경혜, 호남의 극장 문화사 (다할미디어, 2007) 의 3장 <순천시>편을 참고하기 바란다. 순천의 극장사는 <묘책> 5호에서 다시 소개할 계획이다. (주9) 순천 최초의 극장은 1914년에 일본인에 의해 세워진 황금연예관이 다.(이에 대해서는 2012년 12월 5일자 광주일보를 참고할 것) 각종 공연 외 에 흑백무성영화를 주로 상영했던 황금연예관은 이후 순천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78년부터는 국도극장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한편 서울 국 도극장 역시 1913년 황금연예관이란 이름으로 개관해 1948년 국도극장이 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다가 1999년 철거되었다. 50년대 후반에 순천극장에 이어 중앙극장과 시민극장이 차례로 문을 열었 다. 이 후 64년에 맘모스극장이 건물을 새로 지어 더 큰 규모로 문을 연다. 국도극장은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2004년 개봉)를 끝으로 운영이 중단되 었고 2009년 11월 철거되었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극장은 맘모스극 장이라 할 수 있는데, 맘모스극장은 신축 후 프리머스로 운영 되다가 지금은 CGV로 운영되고 있다. 건물 외벽에 맘모스극장 표지판이 작게 달려 있다. - 위경혜, 호남의 극장 문화사 (다할미디어, 2007) 참조. 산거야. 한 80년도나 됐으까? 그렇게 국도극장을 인수해 가지고 뭘 했냐면, 돈 놀이도 좀 하고 그랬어. 그래서 사장 죽고 난 후에 극장까지 소송에 붙고 그랬어. 딴 사람한테 넘어가 버렸지. 그래서 그걸 어떻게 했는지 잘 모르겠네, 상가로 만들어 버렸잖아. 다 뜯어버리고. 중앙극장은 최병수 씨 라고, 그 분이 곡창에 살았거든, 누룩 만드는 공장. 지금 어디에 있냐. 북부 매곡동 성당 건너편 보면 공장이 있었어. 지금 보해마트 자리가 그 자리야. (거기) 창고에서 중앙극장 간판 그렸지. K: (순천에) 극장이 네 개가 있어도, 네 개가 다 잘 된 게 아니라. 좋은 프로가 들어오면 그 쪽으로 몰려요. 한쪽으로 쏠리는 상황이 있었고. 맘모스가 나중에 지었기 때문에 그 때 당시로는 제일 컸었고, 보편적으로 그쪽에 손님이 좀 더 많지 않았나. (맘모스)극장 직원은 얼마 안 돼. 영사기 돌리는 사람 둘, 셋이 있고, 사무실 직원이 몇 있고. 포스터 붙이는 애들, 그러니까 선전하는 애들. 청소하는 애들 있고. 그 때 당시에는 인건비도 크게 많이 안 나가고. 순수하게 현금만 항상 만지는 그때는 사업이 다 현금이었지만, 상당히 잘된 걸로 알고 있어요. S: 큰 돈 벌었지. K: 70년대 넘으면서 칼라티비 들어오면서 점차 사양길에 들고. 그러다가 소극장 붐이 또 일었어. 소극장도 2~3년 했나? (주10) S: 한창 유행했지. K: 맘모스극장. 그리고 그때 한창 흥행이 될 때, 그때가 <동백아가씨>(1964, 김기)라는 영화를 하는데. 지금 같으면 큰일나지. 극장 입구에다가 아치형이라 그러지? 디귿자 모양으로 크게 해 가지고 동백나무를, 동백꽃 달 린 걸 몽땅 꺾어다가(아치를 만들었지). 그 때 생각하면 어릴 적에 (한 일이지만), S: 자연훼손을 했구만. K: 지금 같으면 큰일 나지만 그런 걸 공공연히 K: 그러잖아요. 우리 어렸을 때 보면 6. 25(기념행사)니 뭐니, 시내 큰 행사하잖아요. 아치를 그때 했었어. 그래서 거기다가 뭘 했느냐면 소나무 몽땅 꺾어다가. 그거 생각 안나? K: 소나무 꺾어다가 그렇게 했었어. 아,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 소나무(웃음). 그것도 다 어렸을 때 거든. 어렸을 땐데 다 사장 맘이야. 사장하고 흥행사하고 둘이서 알 아서 하는 거야. K: 그리고 당시에 직접 (현장에서) 촬영하는 건 잘 모르지만, 영화 보따리 장수 라고 그래요. (주11) 영화 만드는데 제작비가 적어. (그러면) 각 지방 영화 극장한테 손을 미리 벌려야 돼. (주12) 선도금(전도금, 계약금) 받는 것처럼. 그래가지고 영화를 많이 제작했어. 극장 데뷔도 많이 했었고. 그 때 당시 배우들 보면 겹치기 출연이 참 많았어요. 배우 하나가 세 가지, 네 가지 영화에 겹치기 출연을 해서 만드니까 영화의 질, 내용이 얼마나 좋게 나오겠어요? 다작으로 해 가지고 상영은 며칠이면 다 끝나고, 그래서 어쩌다 하나 히트 하 면 제대로 크게 돼 버리고 그렇지 않으면. 또 상영도 제 대로 못해보고 빛도 제대로 못 본 영화들도 더러 있었잖아? S: 그때는 일주일 단위로 상영을 하는데, 영화가 안 좋거나 지금 상영하는 영화 프로그램보다 더 대작이 기다리고 있을 때는 날짜를 잡아 놨다 하더라도 줄여버리더라고. 그러니까, 다 사장 맘이야. 사장하고 흥 행사하고 둘이서 알아서 하는 거야. (주13) 상영기간 그런 거. 사장들은 잘 모르는데 흥행사들은 여기저기 (주10) 1980년대 극장 영업 허가제가 시행되면서 순천시내에 <황금극장>, <코리아극장>, <명보극장>, <아카데미극장> 등 8~9개의 소극장들이 생겨났 고, 대형 극장만 필름을 제대로 제공 받을 수 있었던 90년대부터 점차 문을 닫는다. - 위경혜, 위의 책 p 203~204 (주11) 내용상 군소 흥행사 또는 배급사를 그렇게 부른 것 같다. 4면에서 계속 (주12) 1950년대 중-후반 영화관련 사업이 돈벌이로 인식되면서 제작사 와 배급사의 과다설립은 경쟁으로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배급사가 제작사 에 미리 선금을 맡기는 입도선매식의 제작 자본 형성이 이루어졌다. 이 상황 에서 소자본을 가진 배급사들이 지방의 극장주들을 찾아다니며 빠른 배정 을 조건으로 선금을 반강제하는 일들이 횡횡했다고 한다. - 위경혜, 위의 책 p.100 참고. (주13) 미리 계약금을 주고 영화를 배정 받기로 한 극장주는, 영화의 흥행여 부에 따라 흥행사와 상영날짜, 시간들을 임의로 조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editorial 쉬 오지 않는 봄 늦어도 작년 12월에는 나와야 했을 <묘책>3호가 해를 넘겨 나와야 했 던 이유는 너무도 많다. 하지만 이유가 많을수록 뚜렷한 이유가 확인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비정기 간행물이라는 단서가 내부적으로도 유 효한건 아니기 때문에 몇 달간은 신경질적인 시간을 보냈다는 알리바 이 밖에는. 그 사이, 묘책을 통해 소개되었던 작가들의 레지던스 작업발표가 있었 고, 사업정산과 비공개 평가가 있었고, 사업평가 결과를 알 수 없는 상 황에서 또 다시 레지던스 공모에 지원을 했다가 탈락! 적지 않은 혼란 속에 긴장을 풀어버린 것도 없지 않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작년에 처음으로 진행한 돈키호테 레지던스에 대한 평가가 엇갈렸던 것 같다. 엇갈렸다는 것은 좋게 받아들이면 논쟁적 이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공유되지 못하고 당사자가 알지 못 하는, 소위 밀실 속에서 그랬거니 하는 정황만이 전해지는 소란을 굳 이 논쟁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그것을 무엇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술현장의 고민이 무엇인지 다 안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관 료주의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예술행정에 대해 기대할 게 뭐가 있을까? 이것을 두고 지원은 하되 간섭을 하지 않는다 는 팔길이 원칙 이 철저하게(?) 지켜졌다고 평가한다면 그 팔을 확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다. 9년간 동굴 속에서 면벽수행을 하고 있는 인도승 달마대 사를 찾아간 중국인 혜가는 달마의 수제자가 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 에 자신의 진정성을 보여준답시고 자신의 한 쪽 팔인가 손목인가를 싹 뚝! 잘라내 보여주었다고 한다. 스스로 제 팔을 자르지 못한다면 누군 가 잘라버리는 것도 쌈빡 할지 모르겠다. 우리가 얻은 수확은 여기 까지. 묘책 3호는 분명 중간 기록의 과정을 훌쩍 훌쩍 뛰어 넘어 불친절한 편집이 돼 버렸다. 순천에서 극장간판을 그리셨던 작가 분들과의 인터 뷰가 6월의 시점이라면, 세 번째 대담무쌍은 11월의 일이다. 또 작년 11월에 도착한 <닻올림픽> 리뷰를 이제야 싣게 되었다. 필자나 인터뷰 에 응해주신 분들에게 송구함을 감출 수 없다. 로 위에의 리뷰는 3일 간의 닻올림픽을 다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쓰고 있다. 엄밀히 둘의 차이가 뭐냐고 묻겠지만, 흔히 다시 보기(리뷰) 를 평 소에 우리가 어떻게 기대하고 소비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조금은 감이 올 것이다. 공연을 보지 않고도 정보 를 얻을 수 있거나, 가치 판단을 하게 하는 다시 보기 는 이제 좀 줄어들 때가 되었다. 로 위 에의 글은 3일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킨 다. 기억과 증명 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진행했던 레지던스 참여 작 가들에 대한 돈키호테의 연구작업과 외부 비평원고도 파일에 저장된 채 다음 호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호가 너무 기다려져요~언제 나와요? 라는 말은 삼가자. 당 분간 묘책은 계속 불친절하게 불쑥불쑥 등장할지도 모른다. 창작스튜디오, 창작공간, 레지던스, 레지던스 프로그램 등 우리에게는 낯설다면 낯선, 그렇지 않고 신선하다면 신선한 기획들이 쏟아져 나오 고 있다. 다시금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예술창작 환경과 그러한 환경 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예술지원정책의 구상들을 살펴보면서 과연 우 리는 어떤 성찰을 동시적으로 수행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 은 마치 대안공간이 갑작스레 미술계의 담론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발생된 여러 가지 오해와 부작용, 그 후유증과 닮아있다. 예술가는 예나 지금이나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러나 레지던스는 독립된 작업공간의 제공 외에도 작가들에게 많은 과제들을 제공하고 있다. 제공자의 입장에서는 특별서비스겠지만 제 공받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과도한 배려, 지나친 친절함이 주는 불편함 으로 표현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특히 창작스튜디오나 레지 던스의 설립 주체가 국가나 지자체인 경우 자칫 그 목적이 순수한 예 술지원과 문화교류의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 성과를 얻어내려는 목적 에 의해 본래의 취지를 벗어나는 경향도 발견된다. 이 과정에서 예술 의 공공성 이나 지역 의 담론들이 다분히 문화정치의 논리 일변도 로 흐르고 있지 않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문화, 창조라는 말이 넘치고 있다. 지금의 이 시대를 미래의 우리는 과 연 어떻게 평가하게 될까? 과연 지금을 문화의 시대, 창조의 시대였다 고, 아니면 그 시대의 출발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쯤되면 반문화 적, 파괴적 상상력도 생각해 볼만하다. 2013.4월어느 휘모리 바람 거센 날돈키호테
예술공간 돈키호테 독립저널 <묘책> 제 3호 4페이지 3면에서 연결 다니고 보니까 그런 것을 알잖아. L: 그런데 흥행사가 있었어요. 영화사가 광주 구월 영화사 (주14) 같이 영화사가 있단 말이야. 거기서 필름을 가져와. 그 사람들이 필름을 가지고 와서 계약을 하는 거야. 사실 극장을 빌려준 거야. 극장 빌려주고 (흥행사 는) 광고하고. 그 사람들이 앉아서 극장주랑 둘이 (계약을) 해서 (수익을) 나누지. K: 영화가 좋으면 영화사가 70프로 가져가고, 영화가 좀 나쁜 것 같으면 한 40프로나 그렇게. (주15) 극장을 (빌려) 주고 (수익에 있어서) 그런 차등을 두지. 당연히 그래야지. 영화가 좋으면 극장이 미어 터지니까. K: 옛날이라고 해도 우리한테 수익이 나름대로 다 돌아 갔어. L: 탈세도 엄청나고. 옛날에는 (관객이) 들어오면 표에 세금이 다 붙어있어. 그럼 그대로 (표를) 받아서 (세금을) 해야 하는데, 흥행사가 극장 앞에 있다가 표 딱 오면 받았다가 다시 매표소에 갖다 주고. K: 그 때 탈세 많이 했지. 그러다 보니까 세무서에서 (표 되돌리는 것을) 잡기 위해서 입구에다가 돌아가면서 틱틱 찍는 거 있잖아요. 그때 당시 있었어. 그래 가지고 한 사람 들어가면 찰카닥 찰카닥 돌아, 티켓이. 그런데 그걸 어느 정도 하다가 또 없어져 버렸어. 그게 아마 극장에서 반발이 많았을 거야. 밥 못 먹는다 어쩐다 그랬을 거야. 잠깐 그런 적이 있었어. L: 그런 일도 있고 또, 영사기 돌리잖아요? 필름을 한 극장만 쓰는 게 아니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전국을 돌아다녀. (주16) 그러니까 늦게 오는, 개봉작이 아니고 그런 건 돌다가 끊어져. 영화 돌다가 짝 끊어져가지고 난리지. K: 휘파람 불면서 L: 관중석에서. K: 파다했지. 그렇게 되면 영사기사들이 상당히 애를 먹었어. 필름이 오래되고 그러면 잘 떨어지거든. 떨어지면 2초 간, 푸욱~ 하면서 2초, 3초간 (영화가 중단)되고 막 그랬잖아. L: 비온다 그러지. 비 와! 필름에 막 비가 와, 줄줄줄. S: 돈 내놔라~! 막 악을 쓰고 난리야. 그때 외화프로그램이라는 걸 흥행사들이 가지고 와. S: 연장 시간에도 극장에 서서 보는 사람도 많이 있었고, 옛날에 기억에 <5인의 해병>(1961, 김기덕)이라 고, 박노식, 황해 나왔던 <5인의 해병>. 크~ 그 영화는 진짜 흥행에 대성공한 영화야. S의 친구: 우리가 67년도에 <쿼바디스>(1951, Mervyn LeRoy)를 봤는데, 아마 순천시내의 전 중학생들이 다 봤을 거야. S: 그때 외화프로그램이라는 걸 흥행사들이 가지고 와. 요건 값이 틀려. 갖고 와도 단가도 높고. 그 때는 서부 활극이 주로 유행을 했잖아. 아주 많았잖아.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도 나오고 버트 랭캐스터(Burt Langcaster)도 나오고. 이후에 마카로니 서부극 (주17) 이라고, 서부활극이 우리나라에서 완전히 히트치고 그랬잖아.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K: 인텔리한 분들은 의도적으로 외화를 찾고 조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있었달까. 외국 것을 좋아하는 사조도 있었고. 외국영화, 좋은 영화 같은 경우에는 상당히 손님들이 많았어. <벤허>(1959, William Wyler)같은 것. 나도 봤지만. <벤허> 한 두 번 봤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Victor Fleming) 같은, 우리 태어나기 전에 만들어진 영화들. S: 내가 순천극장에서 영화 처음 본 게 <청년 이승만> (주18) 이라는 영화를 봤어. (웃음) 그때는 어려서 보고 (내용이) 진짜인 줄 알았어. 완전 촌놈이지. 일본말로 마찌바리 라고, 트럭에다 마이크 달 고 무조건 동네 돌아다녔어. S: 그림 그리는 사람이 그림만 하는 게 아니라, 요즘 말로 홍보 효과를 다 책임을 진 거야. 다 해야 돼. 그리고 우리 순천극장(국도극장)이나 중앙극장 같은 (주14) 광주에 중앙극장 소유자 이월금이 1954년에 만든 영화배급사. 광 주 호남권역의 대표적인 지역 배급사였다. 순천에 맘모스극장이 대표적으 로 이 영화사에서 필름을 제공받았다. 1970년대 대흥영화사 로 이름을 바꾼다. - 위경혜, 위의 책 p99, p197 참고 (주15) 배급사와 상영관의 판권 부율(분배 비율)은 통상 5:5제였지만, 대작 이나 흥행의 기대가 좋으면 6:4제로 했다고 한다. - 위경혜, 위의 책, p.96 참고. (주16) 호남 지역 필름의 상영순서는 광주, 전주, 목포, 제주, 여수, 순천, 군 산, 이리(현 익산) 등 지방 대도시에서 먼저 상영된 다음 군, 읍, 면 단위 순 서로 돌았다. - 위경혜, 위의 책, p.97 (주17) 마카로니 서부극 마카로니 웨스턴 또는 스파게티 웨스턴 이라고 부른다. 1960년대 들어 주로 멕시코를 배경으로 한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서부 영화를 말한다. 대표작으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황야의 무법자>(1966) 시리즈가 있다. (주18)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1959, 신상옥), 이승만의 청년기 애국운 동사를 다룬 작품 순천 드라마세트장 순양극장을 촬영하고 있는 작가 이행준 경우에는 뭐가 있느냐면, 포스터! 60년대, 50년대 말 그 암울했던 시대에 이상한, 칼라도 좋지 못한 포스터 막 붙이러 댕기고 그랬잖아. 그것만 해서는 선전이 안 되니까, 무엇을 하느냐면 일본말로 마찌바리 (주19) 라고, 쉽게 말해서 요즘 나이트에서 차로 다니면서 음악 울리고 하는 거, 그런 것을 했지. 그때는 그런 차가 없으니까. 구루마 끌고 다니면서, 구루마에 베니어 판넬을 세워가지고 포스터를 붙여. 빠떼리하고 앰프도 앞에다 달아. 그 안에 사람이 있는 거야, 말하는 사람이. 그걸로 몇 시부터 몇 시 상영이라고 온 시내에 끌고 다니면서 그랬거든. 광주는 차로 했다면, 순천은 구루마로 한 거야. (주20) L: 그 당시에 뭐냐, 아주 슬픈 영화 이런 게 들어오면 온 극장에 그냥 엉엉엉. K: 눈물의 여왕 전옥 씨. 그리고 슬픈 영화가 또 아주 히트를 쳤어. S: 전옥 씨 딸이 최민수? K: 강영실(강효실)이지. 강영실(강효실)이 죽었지 아마? S: 다~ 축 사망들 했지. L: 그러니까 그런 슬픈 영화가 들어오면 최대한 선전을 슬프게 해. 또 막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막 마찌바리 하면서. K: 아, 그러고 트럭에다 마이크 달고 무조건 동네 돌아 다녔어. 연사가 아니라, (극장) 직원이지. 막 흉내를 내는데, 그러면 꼬마들 차 따라다니고, 삐라라고 광고지가 있어, 그런 거 막 뿌려주고 그런 게 눈에 선하네. 기도는 대게 어깨들이 많이 했어 L: 기도는 대게 그 지방의 건달들, 그래야 공짜로 못 들어오지. S: 주먹쟁이들 L: 어깨들이 많이 했어. K: 그건 당연지사지. 극장에서 기도는 당연히 힘이 있는, 그 지역에서 통하는 (사람으로 쓰지). 왜 그러냐면 이것(티켓)도 없기 때문에 무리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L: 엄청 많았지. K: 딱 서서, 가다(かた, 어깨)가 딱 서 가지고.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야. 위엄 있게 이러고 있어. 어서 오세요 그런 인사가 아니라. L: 나는 무료로 좀 보려고, 조금 이렇게 껄렁껄렁해서 들어가. 그런데 그 딱 상징적인 사람이 있으면 못 들어 가지. S: 순천극장이나 중앙극장은 그래 가지고 돈 없으면 못 들어가니까, 젊은 애들, 간 큰 애들 화장실 밑으로 깨서 무대 뒤로 해서 K: 그런 일이 많았지. 작업실로 들어와서 살짝이 넣어 주라 그러고. 그런 애들이 그때 당시에 보면 다 요만 했는데, 나중에 보면 다 건달들이 되어 가지고. 쇼 같은 건 순천에서 제일 많이 했어. K: 그 때는 오로지 극장, 지금은 좀 달라졌지만 옛날에 쇼라고 있어. 가수들 와서 보통 하루씩 하는데, 거짓말 같겠지만 관람객이 미어터져. L: 터지지, 터져. S: 그런 쇼 같은 건 순천에서 제일 많이 했어. <낭낭 쑈>, <서울 쑈>. 그 옛날 여성국극단이라고 있잖아. 순천극장 (국 (주19) 일본어 まちばり는 시침 바느질에 쓰는 바늘을 의미한다. 당시 길 거리 선전 을 왜 이렇게 불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주20) 목포와 광주에서는 흥행성이 높은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서울 한국 일보사에서 빌려온 헬기로 공중에서 찌라시(전단지)를 살포하기도 했다. - 위경혜, 위의 책, p.98 그림 그리는 사람이 그림만 하는 게 아니라, 요즘 말로 홍보 효과를 다 책임을 진 거야. 다 해 야 돼. 그리고 우리 순천극장(국도극장)이나 중앙극장 같은 경우에는 뭐가 있느냐면, 포스터! 60년대, 50년대 말 그 암울했던 시대에 이상한, 칼라도 좋지 못한 포스터 막 붙이러 댕기고 그 랬잖아. 그것만 해서는 선전이 안 되니까, 무엇을 하느냐면 일본말로 마찌바리 라고, 쉽게 말해서 요즘 나이트에서 차로 다니면서 음악 울리고 하는 거, 그런 것을 했지. 그때는 그런 차가 없으니까. 구루마 끌고 다니면서, 도극장)이 주로 많이 했지. (주21) 그 천막 쇼단에서. 다 쇼단 출신이라고. 뭐 송해 씨로부터 뭐 옛날 배우들 주역 배우들, 다 거기 출신들이 많지. L: 혜은이가 이름이 김승주거든. 옛날에 <낭낭 쑈> 라고 있었단 말이야. 제일 후진 쇼야, 그게. 시골 같은 데 다 니면서 하는 쇼인데, K: 급수가 있지 그것도 L: 그 당시 혜은이 아버지가 <낭낭 쑈> 단장이야. <낭낭 쑈>는 보통 열악한 쇼가 아니야. S: 비싼 가수들도 못 데리고 오고. L: 근데 혜은이가, 김승주가 춤을 참 잘 췄어. K: 그때 당시로는 대단한 스타야. 배우나 가수 얼굴 본다는 것이 (일단 중요했지). 지금같이 TV가 없었기 때문에. S: 쇼는 봄이라든지 가을이라든지 그럴 때 많이 오지. 쇼가 들어오면 나는 (일을) 째야지, 해룡 칠성목 (주22) 바닷간데, 이제 막 친구들 몇을 동원을 허제. 걸어서 순천까지 와 부러. 삼십 리야 삼십 리. K: 걸어 왔던가? S: 걸어왔어. 쇼 보고 갈 때는 순천역에서 기차타고 승산역(?)에서 뛰 내리는 거야, 한 놈씩. 뛰 내려가지고. 겨울에 추우니까 논에 나락들, 지푸라기들 불 질러서 막 뛰어 댕기고. 그때 연애도 허고 막. 하하하 K: 그것이 생활이었어, 그때 우리는. S: 쇼를 못 보러 가믄, 막 병이 나뿌러~ 그랬던 것이었던, 것이다! L: 전에는 무성영화가 있었잖아. 변사들이 있어가지고. 우리는 그것도 본 기억이 나는데, 변사가 와 가지고 K: 뒤(유성영화가 도입된 이후에)에 끼워 맞춰 하는 것만 봤지, 우리는 직접은 못 봤지. 나이로 봐서는. L: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뭐냐 하면 (스크린에) 무성영화 비춰가지고, (주23) S: 그것은 (쇼에서) 재미로 K: 하나의 쇼 보듯이 했지. 실질적으로. 왜 그러냐면 그건 해방 전 후에 성행했던 걸로 아는데? L: <검사와 이선생>(1948, 윤대룡)이랄지 그런 거 뒤에 이렇게, 해가지고. 변사가 와 가지고, 그런 걸 (했었지). K: 흉내를 냈었지. 쇼 같이. 그거 생각 안나? 무대 쇼 하는 데서도 그랬고. 어떤 영화도 그런 거 삽입해가지고. S: 그때는 말소리를 녹음을 못했으니까, 동시녹음 이런 게 없으니까, 그런 기술이 발달 안 되니까 변사가 대본 보면서 막 읽고 그랬지. L: 그랬던 것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전부 직접 녹음을 하지만 옛날에는 성우들이 하잖아, 전부 이렇게. 그러니까 신성일이 목소리 낸 김창완(안창환)이 그 사람하고 고은정이죠, 형님? 여자(배우)들은 고은정이가 (목소리를 냈지). 그러니까 영화관 가면 똑같아, 목소리가. 주인공은 김창완(안창환) 목소리. 여자 주인공은 고은정 목소리. 전부 똑같아, 두 분 목소리는. 그러니까 더빙 한다 그러지? 일단은 영화를 찍어놓고 성우들이 더빙해서 맞추고 이런 거잖아요. 신성일이 목소리가 참 좋았지. 그게 김창완(안창환) 목소린데. 이후에는 신성일이 직접 녹음을 했어. 근데 그건 진짜 못 보겠더만. 그러니까 목소리가 연기하는데 한 몫 차지 하더만. K: 크게 공헌을 한 것이지. L: 신성일은 목소리가 별로더만. 최무룡이는 자기 목소리로 했고, K: 남성다운 목소리로. S: 최민수 아버지 알지? 최무룡 씨. (주21) 1960년대 까지는 국도극장에서 쇼를 많이 했지만, 70년대~80년대 에는 맘모스극장이 많게는 한 달에 두세 번의 쇼를 열었다고 한다. - 위경 혜, 위의 책, p.199 참고. (주22) 해룡면은 순천의 동남쪽에 위치한 순천시 행정구역이다. (주23) 작가 L의 경험이 정말 쇼 에서 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실 재 유성영화임에도 변사가 등장(해야)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1950년대 말까지 순회상영을 하던 가설극장 일행이 소유한 16mm 필름 영사기는 사 운드 증폭이 불가능한 것 들이었다. 그래서 부득이 하게 변사를 등장시키거 나, 그도 없을 경우 영사기사가 직접 변사역할을 하기도 했다. - 위경혜, 위 의 책,, p.83 시골이지만 개봉관이 있고 재개봉관이 있고 K: 그러다가 TV 연속극 <여로>(1972, KBS제작) 같은 것 나오면서, 그 뒤에 칼라가 되면서 (극장 산업이) 사양이 되다가(사양길로 가다가), 싫증날 무렵에 소극장이 상당히 번창을 하다가 S: 황금백화점에 황금극장도 있었지. K: (순천에 소극장들이 생겨난 게) 80년대 초나 그럴 거 야, 아마. 80년대 초나 70년대 후반? L: 아니, 중반. K: 한 5년 남짓 바짝 했을 거야. L: 되게 소극장 안 됐어. 초반에 흥행이 안 돼. 왜 그러냐 하면 우리들도 화면을 (전화가 걸려옴) K: 동시상영 얘기가 나왔는데. 그것도 여기가 시골이지 만 개봉관이 있고 재개봉관이 있고, (주24) (두 극장 간에) 특별한 차등은 아니지만 은연중에 그런 게 있어서. 동시상영이라고 해서 손님들 끌고 L: (통화를 끝내고 바로) 대개 동시상영인데 개봉영화가 아니고 지나간 프로 두 개를 묶어가지고 한 것이 동시상영이지. 개봉영화를 동시상영 하는 곳도 있어. 여수하고 순천이랑, 이쪽에서 필름을 돌려서 끝내고 나면 바로 여수로 내려가서 주고, 또 가지고 와서. 그걸 모치꼬미 (주25) 라고 그러지. S: 택시로 막 싣고 가고 서로 막 교환해가지고 L: 필름 하나를 양쪽에서 (상영)하는 거야. 이쪽에서 끝나면 딱 돌려다가 주고. 하나 딱 해놓고는 돌려서 주고. K: 그 때 다 그랬다고. S: 시간을 써 놓거든, (영화 상영이) 몇 시부터 몇 시, 여수는 이거(상영) 끝나고 내려가는 시간에 (상영을 하지). (2시간여의 이야기가 끝나간다) S: 얼른 뭐 물어보쇼. 돈키호테 : 선생님들도 영화를 다운 받아서 보시나요? K: 나는 아니지만은 S: 아니, 그게 L: 재밌더만, 뭘 S: 우리는 역시, 영화라는 것이 티비 화면으로 보는 것하고 극장에서 크~은 스펙타클하게 보는 것하고 차원이 틀려버려. 그러니까 극장 영화 보는 사람은 꼭 극장 영화만 봐. 역시 틀려버려. 화면이 클 때 느끼는 것이. 나도 티비에 쿡티비에서 영화 얼마든지 골라서 볼 수 있지만, 그런 영화는 볼 수가 없어. 극장에서 봐야지. 그런 일반 티비에서 나오는 건, 이건 아무 감흥이 없어. 극장에서 딱~ 큰~ 화면으로 그냥. 요즘에 3G라고 하나? 돈키호테 : 네? 3D 영화. S: (화면이 눈) 앞에서 놀잖아, 막. 거기서 막 그러더만, 이렇게. 그러니까 내용은 그럴지라도(같을 지라도) 느끼는 감동이 틀리잖아. 극장에서 봐야 돼, 영화는 큰~ 화면으로. L: 그라제! S: 오늘은 여기서 종료를 하지? 다음에 또 얘기를 하도록 하고. (주24) 열악한 중소규모의 극장들은 투기성이 강한 배급사들에 피해를 입 기도 했고, 자연히 배급의 순위에서 밀려나 재개봉관으로 갈 수 밖에 없었 던 것으로 보인다. (주25) もちこみ, 반입함, 가져오는 것을 뜻함. 필름의 재반입을 이렇게 불 렀던 것 같다.
예술공간 돈키호테 독립저널 <묘책> 제 3호 5페이지 리뷰1 만지고서, 리뷰2 닻올림픽 255로 교환하려구요. A. Typist dotolimpic 2012 검은 끈도 가지고 오셨나요? 201211.17 201210.19 ~ 10.21... @ 예술공간 돈키호테 @ 문래예술공장 글 글 검은 운동화에는 원래 검은 끈이 맞다. 박혜강 로 위에 검은 끈은 이미 잊었다. 발톱을 깎을 때가 되었다. 1. 다음부터 매장 아저씨는 운동화는 자신의 발 싸이즈보다 한 치수 큰 걸 신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손은 내 발꿈치를 잡고 있었다. 손님은 250이니까 다음부터는 255를 신는 게 좋아요. 그는 신고간 구두를 종이 가방에 넣어 주었다. 왜, 다음부터죠? 묻지 않았다. 대신, 혹시 모르니까 검은 끈도 달라고 말했다. 하얀 끈의 검은 운동화. 왼쪽 발가락이 아파온다. 종아리가 찌릿하고 발목 근육이 땅긴다. 찾는다, 운동화를 벗을 수 있는 곳. 다음은 운동화를 벗은 기억이다. 귀를 팔 수 없다면 신발을 벗어라, 어린 시절 어머니의 말씀이다. 그 다음은 운동화를 신었다 벗은 기억이다. 발은 마룻바닥에 기대어 있다. 엉덩이는 의자 끝에 매달려 있다. 귀는 희미한 소리에 숨막혀 있다. 면봉이 다 떨어졌다. 귀를 팔 수 없으니 발톱을 깎아야지. 손톱깎이는 때로 발톱깎이가 된다. 손톱깎이는 자주 발톱깎이가 된다. 손톱깎이는 항상 발톱깎이가 된다. 손톱깎이는 발톱깎이이다. 두 발을 가지런히 모아도 마찬가지다. 눕거나 구르거나 뒹굴어도 그렇다. 그들이, 그녀 혹은 그녀들과 함께,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 나를 부르는 소리는 아니지만, 그 누구도 듣지 못한다. 운동화를 신거나 벗은 채 발뒤꿈치를 들고 출입구로 향한다. 마룻바닥은 소리가 나니까, 목소리를 지워버리니까. 다시 찾은 운동화 매장, 아저씨는 이미 그 곳에 없다. 어디서 누구 발목을 발톱은 이미 다 깎았다. 2. 2.1 천천히 브레이커 태생 드럼 기적 작동 주요 이후 소리 오스트리아 연극 불길한 앰프 개념적 그룹 과정 라디오 의문 오픈 설치 처음 총 밴드 함께 무용가 연령 녹음 있다. 한계 재질 분야 아시아 발표 밟고 있다. 집중 추후 탐구 시작 유사 보여준다. 전략 증폭 노출 퍼포먼스 고유 결성 몰두 조직 기획 라디오 오픈 바탕 씬 움직임 활용 기계적 기적 기획 바탕 색소폰 실패 독특한 결성 듣기 시작 인천 뉴욕 독창적 밀고 열린 노출 다신교 지금까지 전통 초대 비엔나 어쿠스틱 디자인 무용 출신 낭뜨 메인 시디 오픈 팝 저음 주로 조직 필드 컴퓨터 미디어 빛 2.2 년 월에 된 은 의 를 이 과 로 이후 를 습니다. 을 으로 을 부터 까지 의 을 을 를 니다. 이 을 으로 은 의 은 물론이 고, 의 를 을 하여 의 을 하고, 의 을 할 것입니다. 3. 이제부터 사흘 내내 책을 골랐다. 다섯 권을 고르고 두 권을 골라 다시 꽂고 다시 세 권을 고르고 네 권을 골라 다시 꽂고 다시 한 권을 고르고, 이제부터 버리기만 하면 된다. 2012.11. *로 위에(lo wie)는 비디오 작업을 위한 각본과 텍스트를 쓰며, 현재 글쓰기를 통해 사운드를 만드는 방식에 관심을 두고 2011년 결성된 프로젝트그룹 <A. Typist>의 맴버로 활동하고 있다. *<닻올림픽>은 2012년 10월 19일부터 21일까지 3일간 국내외 즉흥음악가들을 초대해서 서울 문래동 문래예술공장에서 그 첫 회를 시작한 즉흥음악페스티벌이다. 서울 상수동에 위치한 즉흥음악연주공간 <닻올림>의 운영자이자 즉흥음악가 진상태의 기획으로 총 20명의 국내외 뮤지션과 문래 레조넌스2-워크샵 참가자들이 공연을 펼쳤다. http://www.dotolim.com/dotolimpic 이 문장이 마지막에서 두 번째 음악이다. - 줄리 한신 음악 이전의 책 세 개의 테이블이 비스듬하게 붙어 있다. 각 테이블에 세 사람이 앉아 있고, 그 들 앞에는 각각 타자기 한 대가 놓여 있다. 두 사람 앞에 놓여 있는 타자기에는 A4 용지가 끼워져 있고, 한 사람 앞에 타자기에는 10cm 폭 정도의 약간 두꺼운 누런 재생용지가 끼워져서 테이블을 지나 관객이 앉아 있는 바닥을 길게 가로질러 출입문 입구에서 롤로 말려 있다. 그리고 A4용지가 끼워져 있는 타자기 하나에는 가는 전선 몇 가닥이 옆으로 나와 있는데 끝에는 뭔가 금속성의 작은 장치들이 달려 있다. 각각의 보면대에는 무언가 적혀 있는 것도 같은 종이와 책이 놓여 있다. 작은 캠코더 한대가 테이블 위에서 A4용지가 끼워져 있고 아무런 장치가 되어 있지 않은 타자기의 일부분을 라이브로 촬영하고 있고, 세 사람이 앉아 있는 뒤 벽면에 비스듬하게 왜곡 되어 실시간 영사 되고 있다. 주변은 어둡다. 붙어 있는 세 개의 테이블과 마주 보고 앉은 세 사람의 얼굴을 비추는 스탠드 조명만 밝혀져 있다. 로 위에, 김태용, 류한길 세 사람은 이미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약간의 분주함과 긴장이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숨겨져 있었다. 사실 이러한 세팅의 모양새라면 극히 사적인 일을 치루는 것으로 보이는데도, 그들은 주변 사물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장치를 점검하는가 하면 낮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뭔가를 모의하는 듯 보였다. 벌써 눈치 없는 관객들이 미리 자리를 잡고 그 세 사람을 숨죽이고 바라 보고 앉아 있다. 원래 이 자리는 세 사람만의 아주 사적인 회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관람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나는 자유즉흥연주를 관람할 때 늘 이런 느낌이 들곤 한다. 아주 사적인 장소에 침입자들 이 뻔뻔하게 앉아 있는 것 같은데 그 대치상황이 묘하게 좋다. 어쩌면 이것은 소규모 공연들에서 느끼는 독특함일지 모른다.) 미리 짜여진 모든 공연도 이 순간만은 즉흥적이다. 누군가는 기다리고 무엇인가는 아직 일어나고 있지 않은. 가장 무질서한 순간에 관객과 공연자는 갑자기 급 합의를 해 버린다. 그렇게 갑자기 의자가 앞으로 당겨지는 소리와 함께 짧은 기침소리. 타자기에 끼워져 있던 종이를 시이익 시이익 풀어서 빼는 소리. 새로운 종이가 끼워지고 조여 당겨지며 스르르륵 스르르륵 끌려가는 소리. 똑 띡 띡 띡 하는 기계 반복음. 드디어 김태용이 몸을 앞으로 당겨 타자기를 친다. 타자기를 친다? 내리친다? 내동댕이친다? 여기서 잠깐 류한길의 음반시디가 포함된 책 <다른 것들을 위한 서술법>에 쓰여진 도입부를 읽어 내려가면 관람에 방해가 될까? 종이 늦추개를 당기고 종이를 나르개에 끼운다. 종이 늦추개를 밀면 종이는 누름틀에 의해 고정된다. 둥글대 손잡이를 돌리면 누름틀에 고정된 종이가 말리면서 가늠쇠 방향으로 위치한다. 둥글대 손잡이를 돌려 종이가 종이 눌림대자 안쪽으로 걸리도록 한다. 여백 맞추개를 좌우에서 당겨 종이 위에 여백을 맞춘다. 나르개를 오른쪽 끝까지 밀어서 오른쪽 끝에 걸리도록 한다. 글쇠를 누르면 글쇠와 활자대 집에 연결된 활자가 움직이고 먹끈 걸개가 위로 향하면서 종이 위에 인쇄한다. 이때 나르개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고 글쇠에서 손을 떼면 활자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윗 글자쇠를 누르면 활자와 활자대 집이 아래로 이동하... 김태용은 타자기를 친다. 타자기 소리 맞다. 타자기를 사용해 본 적은 없지만 주로 영화 속에서 혹은 오래된 드라마 속에서 한 번쯤 들어 봤던 그 소리다. 그리고 저것은 분명히 타자기니까. 나이와 직업에 따라 극히 제한된 경험의 도구이고, 이제는 인테리어소품(골동품) 정도로 인식되고는 있지만, 타자기가 뭐에 쓰는 물건인지 정도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기억으로서 인지되는 소리나, 어떤 사물에서 예상 되는 소리를 들려 주기 위해 혹은 잘 작동되고 있다는 걸 확인시키기 위해 타자기를 등장시킨 것일까? 로 위에는 타자기의 한 부분(나르개?)을 밀었다 당겼다 하거나 글쇠를 가볍게 튕겨보는 정도지 활발하게 뭔가를 쓰지는 않는다. 그러다 김태용이 쓴 글이 인쇄된 롤 종이를 찢어 그것을 쓱 보고 다시 타자기로 치거나 몇 개로 찢어 놓는다. 로 위에는 다른 두 사람과는 다르게 뭔가 생각에 골똘해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주변 장치나 사물들과의 관계가 느슨하고 여유롭다. 그는 마치 타자기를 앞에 두고 이러저러한 구상을 하고 있는 배우를 섬세하게 재현해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로 위에의 행위의 소소함이 이 공연에서 가장 일상적인 소리를 들려주고 있었다. 류한길의 타자기엔 뭔가 다른 장치가 숨어 있는 듯, 타자기를 치면 옆으로 연결된 작은 장치들이 드르륵 파닥 거리며 타자기 소리를 뒤따른다. 류한길은 이 장치를 세심하게 살피거나 가끔 보면대를 보거나 반복되는 몇 개의 변박자-기계음을 바꾼다. 간간이 류한길이 (심어놓은?) 장치는 리드미컬한 테이블 드러밍을 혼자서 구사하는데, 리듬을 따라 몇 번 몸을 흔들게 만들었다. 류한길이 (글쓰기와 음악 사이에서) 자꾸 교란작전을 펼치며 가장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는 반면, 김태용은 가끔 보면대를 보는 것 외에 거의 고개를 들지 않고 계속 타자기를 친다. 롤 용지를 사용한 건 지면의 한계를 없애 버리겠다는 의도였을까? 난 사실 그 좁고 긴 롤 용지가 글쓰기 보다는 소리에 대한 기대였다고 확신한다. 관객들 사이를 가로질러 바닥을 긁고 타자기로 흘러들어가는 (기이한 모양새와) 소리는 촉각과도 같았다. 또한, 앞에서만 들려오던 소리가 뒤에서 옆을 지나 앞으로 갈 때 소리의 방향성이 바뀌는 걸 감지하게 된다. 물론, 쓰지 않으면 소리도 없었다. 어쨌든 세 사람 모두 뭔가를 친다/쓴다. 그러나 관객은 그들이 무엇을 읽고 무엇을 쓰는지를 전혀 파악할 수가 없다. 뒤 벽면에 영사된 타자기 일부분은 인쇄되고 있는 글을 읽을 수 없게 왜곡 되어 있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없고 아무런 신호도 보내지 않는다. 읽으려고 하면 할수록 읽으려고 해 봤자가 돼 버린다. 감춰진 글쓰기와 평범하게 노출되어 있는 소리 가운데에서 관객이 붙잡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일까. 타자기 앞에 세 사람은 읽으면서 쓰고 있는 걸까, 들으면서 읽고 있는 걸까, 쓰면서 듣고 있는 걸까, 읽으면서 듣고 있는 걸까. 소리가 문자로 기록되는 순간 소리의 실체는 사라지고 이미지만 남는다. 문자는 소리의 이미지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가. 복종할 수밖에 없다. 소리 이미지에 대한 끝없는 구애만이 문자의 죽음을 지연시킬 수 있다. 죽음에 다가가기만 할 뿐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는 문자. 소리 이전의 소리 이후의 문자. 망각의 저편에서 들리기를, 읽히기를 기다리는. 이 문자의 이미지를 ( )은 어떤 소리로 기록할 것인가. ( )이 기록할 수 없도록. 기록하다 지쳐 미루어 짐작으로 서둘러 마무리할 수 있도록. 시간의 나사가 회전을 멈추기 직전까지만 허용되는 허구의 소리들. 헛된. 터진. 소리의 이미지. 이미지의 문자. 소리의 문자. 문자의 소리. 소리이미지의 문자화. 문자 이미지의 소리화. 화 되기 전의 것. 이것은. 것이 아닐지라도. - 김태용 <숨김없이 남김없이> 중에서 타자기로 친 글은 김태용에서 로 위에로, 로 위에서 류한길로 전달된다. 최종적으로 도달한 글은 류한길의 장치들에 의해 소리로 변환된다. 이런 구조를 세 사람이 미리 약속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즉흥협연이라는 약속 안에서 공동협업의 과정을 노출시키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흥미로웠다. 그 협업의 결과물은 (다행히도) 소리로 흩어져 버린다. 녹음된 소리가 남겠지만, 어차피 그건 선택적이고 반복적인 행위를 다시 동반해야 할 뿐이다. 타자기를 작동시키는 전 과정을 상세하게 글로 기록한 류한길의 <다른 것들을 위한 서술법>은 문자기록장치로 서의 타자기에게 역으로 문자를 되돌려 주고 있는 것 같다. 종이 늦추개, 나르개, 누름틀, 둥글대 손잡이, 종이 눌림대자, 활자대 같은 타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부속장치들의 이름이 불려지고, 이 낯선 이름들이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오른쪽 왼쪽 위 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상상하면 기존의 타자기라는 단순한 이미지(도구, 기능)가 복잡하게 얽혀버린다. 실체를 확인 했을 때 더 낯설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가 굳이 개별 장치들의 이름을 다 알아야 하고 이들이 순차적으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인지해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타자기를 가지고 결과를 예상할 수 없는 음악 을 한다는 것과 대면해 있을 뿐이다. 늘 타자기였던 타자기는 되돌려진(혹은 어떤 인간이 갑자기 던진) 문자를 가지고 이제 스스로 뭔가를 하겠지. 우리는 의미가 어디에서 왔는지 묻지만 소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묻지 않는다. 소리는 돌아갈 고향이 없으므로. 휘발되어 형체가 사라진 의미에 대해서는, 그것의 고향에 대한 이야기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때 소리는, 간헐적으로 뭉쳐지고 덩어리가 되어 다시 새로운 언어가 된다. 그것뿐이다. (2012. 12. 25. 서울행 비행기에서 로 위에) A. Typist는 뮤지션 류한길과 작가 로 위에, 김태용이 2011년에 결성한 프로젝트 예술그룹으로서 이들은 글쓰기라는 행위와 그 행위에 의해 생성되지만 결과를 예상할 수 없는 음악, 그리고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 함께 생성되는 문장을 통해 다각도의 시도들을 전개하고 있다. 그들은 첫 공동 작업을 <베케트의 타이피스트>, <옆모습> 및 <다른 것을 위한 서술법>이라는 세 개의 CD+Book 세트로 2011년 출시하였다.
예술공간 돈키호테 독립저널 <묘책> 제 3호 6페이지 대담무쌍 3 영화-관객-지속적인 교류에 대하여, 그리고 대담 201211.11sun @ 모퉁이극장 (부산 중구 중앙동) 김현수(모퉁이극장)+변재규(작가) +돈키호테 <묘책> 세 번째 대담을 위해 부산에서 대안상영공간 모퉁이극장을 운영하고 있는 김현수 씨를 방문해 이야기를 나눴다. 모퉁이극장은 작년 10월 변재규 작가의 개인전이 부산 중앙동에서 오픈 했을 때 마침 참석한 김현수 씨를 처음 만나 알게 되었고, 곧 오픈을 앞둔 모퉁이극장의 운영과 고민들을 들어보고자 한달 후 다시 부산을 찾았다. 혜강: 부산의 전체적인 지형도라든지 현 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을 다 종합하기 보 다는 모퉁이극장(이하 모퉁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돈키호테의 경우 우리가 주목하는 작가들의 작업의 형식들 이 상시적으로 기획되는 공간이 많이 없습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모퉁이는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또 저희의 고민도 같이 이야기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찾아 뵙게 됐어요. 2012년 돈키호테 레지던스에 참여했던 실험영상작가 이행준 씨는 순천에서 시청각에 기반한 매체와 장소들이 어떻게 기억되고 남아 있는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진행하는 작업을 했어요. 그래서 돈키호테는 과거에 영화 극장이었던 건물들, 사진관, 음악카페 등을 맵핑하게 됐는데요. 예전에는 원도심에 13개가 넘는 크고 작은 극장이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유일하게 최근까지 남아 있던 극장도 CGV, 멀티플렉스로 바뀌었죠. 그리고 예전에 간판 그림을 그리셨던 분들을 섭외해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당시 극장 문화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자체적으로 추가 기록작업을 진행할 계획이에요. 지역 극장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대동소이한 것 같아요. 현수: (혜강 씨의 이야기와) 연결될 수 있는 게 극장의 문화인 것 같고요. 실재로 저도 90년대 중반까지 순천에 있으면서 가봤던 극장들이 기억 나는데, 그 때 많이 다녔던 극장이 국도극장과 맘모스극장 이었어요. 최근에 가봤더니 정말 멀티플렉스, 맘모스-CGV로 바뀌었더라고요. 혜강: 최근에 순천의 오래된 단관 극장 중 시민극장 건물이 헐렸어요. 이행준 씨가 방치된 그 건물 외관을 촬영하고 얼마 안 된 때였죠. 김현수 동의대 신방과를 중퇴. <금방 질려하는 것들에 대한 반성>(2003), <007: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2006)외 몇 편의 중, 단편영화를 연출하였다. 인문연대 금시정의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며 좋은 관객들 이란 이름의 관객운동을 4년 동안 이끌어 왔다. 현재 부산에서 문화응원기업 모퉁이극장을 설립하여 독립/실험영화상영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관객중심의 영상문화잡지 <영화의 관객들: Citizen of Cinema> 발간을 기획중이다. 현수: 아, 그랬군요. 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제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대중 문화였어요. 대중 문화를 통해서 영화나 다른 매체를 접했다고 할 수 있고, 20대 때 영화 연출 작업을 했죠. 돌이켜보면 관객 문화에 관한 거에요. 쉽게 말하면 팬덤(fandom)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영화 애호가일 수도 있고, 생활 속에서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에 관한 것일 수도 있죠. 왜 그런 관심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창작자가 있다면 다른 한 켠에서는 관객이 있으니 문화생태적인 면에서 창작자와 관객이 지속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문화 공동체 같은 형태를 계속 고민해 왔던 거죠. 20대에 영화를 찍고 현장 활동을 하면서 동료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부산에 한 인문학 모임에서 4년간 운영진으로 활동을 했는데, 그 모임에서 한두 명의 회원들에게 정기적으로 영화를 소개하는 메일을 보냈어요. 그 메일이 주변으로 전달 되다가 나중에는 100여 명 정도의 수신자들이 생겼어요. 그 분들 중 두 분은 영화 에세이를 펴내기도 했죠. 지금 생각해 보 면 영화 문화를 통한 일종의 관객 운동이었 어요. 그때 좋은 관객들 이라는 이름으로 메일링을 했거든요. 아마도 그것이 계기가 돼서 지금의 모퉁이극장을 만들게 된 것 같아요. 모퉁이는 우선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모여 영화를 찍는 것이 목표이고, 두 번째 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관객 문화의 형성이에요. 극장 문화는 영화를 보기 전부터 보고 난 후까지의 전 과정으로 의미 가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기존의 극장 문화에 대해 영화의 전당이나 부산국제영화제 등을 통해 모니터를 해보는 거죠. 수영구에 있던 시네마테크는 여기보다 약간 큰 소극장 규모였을 때 사람들이 훨씬 친근한 장소 감 을 느꼈다면, 지금은 너무 커져버려서 가던 사람들도 발길을 끊기도 하죠. 또 다른 예로 남포동에서 부산국제영화제 를 했을 때와 지금 해운대 쪽에서 할 때를 극장 문화적인 측면으로 볼 수 있죠. 해외 영화 관계자들이 부산에 와서 놀라는 것은 영화가 끝나고 포장마차에서 같이 소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었는 데 지금은 그게 안되죠. 단지 영화만 보는 것이 아니라 관람 전후의 문화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의 고민 속에 모퉁이극장이 있는 것 같아요. 혜강: 대부분 멀티플렉스로 바뀌면서 거기서 상영되는 영화들이 한정적일 수 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관객들 입장에서 어떤 편향적이고 한정적인 문화를 누리고 있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만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것과 다른 상영의 조건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보고요. 단순히 상업 영화관과 예술 영화관을 나누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모퉁이의 목적이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작품의 발굴도 중요할 것 같아요. 일단 모퉁이의 주된 커뮤니티가 젊은 영화 감독들인데 이들이 영화를 찍을 때 꼭 관객을 고려해서 만들지는 않잖아요. 작품에 대한 발굴이 상영관의 특징과 성격을 만들기도 할 텐데요. 현수: 맞아요,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프랑수아 트뤼포(François Truffaut)가 예술 영화와 잘 만든 상업 영화 두 편을 언급하면서, 한 편은 재미있는 상업 영화고 한 편은 진지한 예술 영화지만 어느 영화에 우열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말을 했어요. 제가 그 말에서 얻은 모티브는 다양한 영상 매체들의 교류였어요. 제 출신은 정통 영화지만 동시대 예술이 서로 간섭하고 영향을 주고 받는 것에 주목해 왔고, 새로운 프로그램에 대한 고민을 계속 해왔어요. 10년 간 작은 상영회를 진행했는데요, 영화 안에서 발굴되지 않다가 최근 복원된 무성영화나 여덟 시간이 넘는 길이의 슬로우 시네마 (Slow Cinema) 같이 일반 관객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영화들을 상영하기도 했거든요. 현재 제가 영화의 관객들(Citizen of Cinema) 이라는 제목의 잡지 발간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다양한 스펙트럼으로서 관객의 의미에 집중하고 있어요. 트뤼포가 모든 영화는 태어나면 영화라는 가상의 영토가 있어서 자기만의 시민권을 가지고, 누구에게는 가치가 없을 수 있지만 누구에게는 중요할 수 있다라고 했듯이, 실험영화를 하는 변재규 씨에게는 네러티브-영화가 조금 안 맞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어떤 분한테는 또 실험영화가 안 맞을 수도 있어요. 취향의 문제도 있지만, 어쨌든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는 거죠. 그런 고민 속에서 잡지의 형식을 페스티벌, 그러니까 영화의 글쓰기 페스티벌 로 설정을 했어요. 일종의 부산국제영화제를 떠올려 보면 되죠. 영화제에서 월드시네마 섹션에는 주로 거장들의 신작이, 새롭게 편성된 아시아 영화의 창 섹션에는 로컬리티한 영화들이 소개되죠. 독립영화와 실험영화 섹션도 있어요. 그런 것처럼 영화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다양한 글쓰기가 있을 수 있죠. 혜강: 돈키호테는 장르 특정적인 작업보다는 실험적이고 과정적인 작업에 관심을 두다 보니까 다양한 형식의 작업들과 예술가들이 기획에 참여하게 되는데요. 순천 같은 소도시에서는 관객들이 다소 어려워하거나 쟤네들 잘난 척 한다 는 시선이 적지 않아요. 그런 와중에 드는 질문은 이것이 과연 지역만의 문제냐는 건데요. 예술계 내부에서 어떤 논쟁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서 지속적으로 얘기되지도 않고, 자기 방법론을 꾸준히 구축해 가는 사례도 많이 없는데, 쪽수와 규모의 문제를 제외 한다면 대도시와 소도시의 차이가 얼마나 있겠느냐는 거죠. 막연한 다양성과 관객과의 소통 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설정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거에요. 최근에 돈키호테는 각 행사 별로 대상 관객을 잡기로 했어요. 연령과 직업에 상관 없이 모든 관객이 모든 행사에 올 수 있다, 혹은 모든 형식의 작업에 접근할 수 있다는 기대는 다소 엄밀하지 못하다는,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저희는 확장, 소통, 다양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관련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커뮤니티 활동이 중요하다고 봐요. 사실 예술계 내에서 서로의 다양성을 존중해 가고 뜻을 같이 하거나 존중하는 태도와 인식이 많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에요. 현수: 저도 다른 영역과의 교류를 통해서 만들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어요. 산발적으로 이것 저것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를 중심으로 프로그램의 특징을 잡아나가고, 무엇보다 공간의 철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걸 고민하고 있는 시기죠. 관객이 이 논의에서는 좀 애매할 수도 있지만 저는 어쨌든 배포의 방식, 소통의 방식, 향유의 방식에 관심이 많이 있는 거죠. 엄밀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관객과 교류하며 문화를 만들어 가고 싶거든요. 혜강: 그럼 모퉁이는 상영회와 잡지 외에도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다른 프로그램을 생각하고 있는 게 있나요? 현수: 일단 변재규 씨처럼 제가 잘 모르는 실험영화 영역과 계속 교류를 하면서 모퉁이를 만들어가고 싶고요. 지금 잡지를 준비하는데, 이 잡지도 저한테는 영상이거든요. 잡지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몽타주라고 생각해요.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는 영화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위해 수십 명의 카메라 기사들에게 러시아의 각 도시를 찍어오게 하고 나중에 편집만 했어요. 잡지에 매력을 느끼는 것도 비슷해요. 성공 할 지 실패할 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해보고 싶어요. 혜강: (부산에는) 서로 다른 성격의 영화협회가 여러 개 있나요? 현수: 부산영상위원회, 부산독립영화협회 (이하 부독협)가 있죠. 재규: 영화포럼도 있어요.
예술공간 돈키호테 독립저널 <묘책> 제 3호 7페이지 대담무쌍 제가 부족한 부분을 보안해 줄 수 있는 커뮤니티간의 교류가 중요한 거죠. 최근 부독협(부산독립영화협회)에서 대안공간들의 허브기능을 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어요. 하지만 부독협에서 매번 대안공간들에 맞는 영화들을 맞춤형으로 프로그램해 줄 수 없기에 대안공간들 스스로 부독협이라는 창구를 활용할 수 있는 기획이 필요하다고 봐요. 사실 그런 부분이 열악하다는 거죠. 그래서 모퉁이극장은 조금씩 다양한 영역의 사람들과 교류를 하면서 어떤 기획을 할 수 있을 지 준비해 나가는 중이에요. 현수: 네, 맞아요. 영화제 산하에 있는 영화포럼이 있죠. 명훈: 그럼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중복되어 걸쳐 있는 건가요? 아니면 그 만큼의 인원이 다 있다는 건가요? 현수: 제가 알기로는 중복되지는 않는 것 같고요. 하지만 비슷한 층들이 일을 하고 있죠. 예를 들어 부산 경성대 영화학과 교수로 있는 양영철 씨가 부산 국제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을 하고 있고. 혜강: 부산의 독립 영화 쪽 활동들은 타 지역과 비교해서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현수: 확실히 부산은 타 지역에 비해서 영화를 찍기에 어렵지 않은 풍토가 된 것 같아요. 보통은 영화과 학생들이 영화를 찍었다면, 지금은 시청자 미디어센터가 있어서 장비 지원을 하고, 시민 워크숍을 열죠. 그리고 영화의 전당 산하에 있는 시네마테크에서 프로그램으로 시민 워크숍과 다큐 워크숍이 있어서 기존의 다큐 감독들이 강사로 활동을 하고요. 또 최근에는 영화의 전당 특별프로그램으 로 <키아로스타미의 영화학교>처럼 외부 거장 감독들을 초대해서 워크숍을 가지기도 했고요. 제가 지금 <메이드인부 산독립영화제> 리뷰단을 꾸리고 있어요. 본선 경쟁작이 26편이라고 하면 그 중에 몇몇 작품은 시네마테크에서 만든 워크숍을 통해 나온 작품이거든요. 따라서 영화과 학생들의 작품만이 아니라 이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수업을 통한 작품들도 발굴되고 있죠. 명훈: 그러면 배급과 상영에 관련된 부분은요? 현수: 영화의 전당 전용관에서 독립영화 정기상영회가 열리고 있고, 부산 지역의 대안영상공간이 있어요. 예를 들어 모퉁이나 <공간초록> 등 서너 개의 공간이 있죠. 독립영화나 이런 규모를 다룰 수 있는 곳을 몇 곳 소개하자면, 부산대 쪽에 <카페 헤세이티>, 그리고 인문학 북카페 <백년어 서원>에서도 최근에 독립영화 상영회를 했어요. 아! 그리고 본격적인 영화공간으로 김희진 감독이 운영하는 영화공간 <보기드문>이 있어요. 혜강: 그런 공간들이 기획 프로그램을 서로 교환을 하는 등 교류를 하는 편인가요? 현수: 제가 봤을 때는 활발하지 않는 것 같아요. 혜강: 왜 그럴까요? 현수: 우선 각 공간마다 독립영화에 대한 전문 프로그래머가 없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섭외를 할 수도 없고, 부독협에서 추천받은 작품들을 그냥 수렴하는 정도죠. 명훈: 상영 이전에 배급 단계나 프로그램을 만드는 단계에서 전문 그룹이 아직은 약한 건가요? 현수: 영상 쪽은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영상을 전문으로 하는 대안공간이 영상공간 <보기드문> 외에는 없고, 모퉁이도 이제 모색을 하고 있으니 앞으로 검증이 필요하죠. 최근에 독립영화 감독 몇 사람이 모퉁이에 와서 어떻게 프로그램을 이끌어 가느냐에 따라서 우후죽순으로 생기는 대안공간 속에서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거라고 조언을 했었죠. 명훈: 인디음악 씬도 처한 상황은 다 비슷한 것 같아요. 주류로 나가기 위해서 인디의 과정을 거치는 사람들이 있고, 태도로서, 주류를 거부하면서 활동을 중시하는 움직임이 있고요. 그런데 음악의 경우 최근의 경향을 보면 공연 중심이었다가 다양한 온라인 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면서 그것이 대중들에게 노출되고, 예전에는 공연장 중심이었다가 이제는 시위 현장이나 작은 문화제를 통해 부각이 되고, 거기서 이를 테면 스타들이 나온다는 거죠. 주류에서의 스타가 아니라 비주류에서도 스타들이 나온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다면 부산 지역에서도 독립영화나 저예산 영화를 작업하는 감독들이 있고, 이제는 큰 극장이 아니라 이런 소규모의 커뮤니티 공간들을 돌면서 발표가 되고 관객들을 만나는 건데, 이런 과정에서 탄생되는, 주목 받는, 혹은 인기 있는 감독이나 작품이 발굴되는 경우가 있습니까? 그게 또 중요한 관객의 피드백인 거잖아요? 현수: 아직 거기까지는 아닌 것 같아요. 한 작품에 대해서 관객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 부산 지역에서 어떤 작품이 발굴되거나 재발굴 되는 일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고요. 실재로 부독협에서 주관하는 상영회를 할 때 대안영상들도 상영을 해요.부산 지하철 공사와도 협력해서 상영회를 하는데, 오는 관객들이 일반 관객들이고 작가에게 뭔가 피드백이 되는 게 아니라 그냥 문화행사가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혜강: 저는 그게 다분히 기획의 문제라고 봐요. 전문 프로그래머가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해외의 유수한 감독들의 작품을 셀렉트 할 수 있는 프로그래머의 역할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역 내에서 어떤 작가의 작업이 나왔을 때 그런 작업을 풀어내는 방식도 중요하고, 위치 지우는 방식도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조금 전에 사례를 드셨는데, (그런 방식이 없을 경우) 어떤 작가의 작품이 맥락 없이 놓인다는 거에요. 재규: 맥락이 있을 수 없죠. 참 이런 촌스러운 문화 현상을 옆에서 접하면서 그런 부분들이 눈에 보이게 확실한 거는, 그 횟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거에요. 양은 늘어나고 있는데 질적인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애니메이션이 먼저 나왔고 영화는 그 이후인데, 마치 애니메이션이 영화의 한 부분인 것처럼 얘기를 한다든가. 이런 문제에 대해 영화 초기사에서 비판이 없지 않았죠. 영화가 발전하면서 분업화가 만들어지고 소위 록펠러, 카네기 같은 재단의 예술품 구입, 할리우드로 넘어가면서 영화에 소설을 모티브로 한 연극적인 요소들이 많아지면서 관객 흥행 몰이를 하고, 그러면서 대형영화들이 제작되는 겁니다. 그러다 1960년대 들어오면서 구조영화와 확장영화가 출연하죠. 확장영화는 지금 없어졌지만, 물론 없어졌다기 보다는 확장영화의 역할이 이제는 미디어아트나 공연 퍼포먼스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구조영화는 제 생각엔 확실히 없어졌습니다. 구조영화는 정말 엄밀하고 금욕적인 영화거든요. 근데 지금 부산에 영화를 공부하는 친구들 보면 구조영화를 하려는 친구들이 있거든요. 4년 전만 해도 그런 움직임이 없었는데, 확실히 학생들이 그런 부분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최근에 그런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한 거죠. 일단 저는 부산에 김지곤 감독과 서호빈 감 독을 주목 하는데요. 김지곤 감독은 미술영상 작업도 하고, 부산의 삼성극장에 서 전시도 했더라고요. 현수: 극장에서 나온 잔해들을 가지고 전시를 했어요. 재규: 양적으로 대안 공간이 늘어나고는 있고 어려움을 무릅쓰고 운영을 하고 있지만, 전문적이고 구체적이지는 않아요. 많은 작가들이 조건을 갖추고 상영을 하고 싶어하지만, 대부분 부득이하게 포기를 하죠. 재규: 맞아요, 공간적인 특색이 많지 않죠. 현수: 우스개 소리를 하자면, 모퉁이극장이 고작 스피커 두 개랑 상영에 필요한 기자재 몇 가지 뿐인데, 어떤 감독이 그러더라고요. 여기가 영사시설이 제일 좋다. 그 정도로 여타 소규모 상영을 하는 공간들이 아주 기본적인 것도 갖추지 않고 있다는 거죠. 재규: 그런데 문제는 동시상영관 자체가 굉장히 에로틱한 공간이고 필름 영화가 많이 상영되었는데, 김지곤 감독이 찍은 영화는(<낯선 꿈들>,2008) 디지털 영화거 든요. 어머니 격인 필름의 공간을 아들 격인 디지털이 계속 훑어 보는 듯한, 나중 에는 어머니가 사라진 거에요. 그러면서 장송곡이 나오는 거에요. 자기 어머니를 죽여버린 듯한 느낌이 없지 않았죠. 그래서 감독에게 좀 심하게 말하기도 했지만. 하하하. 재규: 잘못하면 관객들이 달아날 거에요. 처음 접한 관객들이 제대로 접근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정성이 필요한데, 잘못 받아들이게 한다는 거에요. 그거 하나도 만만치 않은 일이에요. 그래서 시간과 공력이 필요하죠. 명훈: 발굴에 대해 다시 얘기하자면, 이런 시도를 해서 감독들이 발견됐는데 그들이 결국 서울을 향해 가버린다면? 혜강: 아주 기초적인 부분이 안되고 있다는 건 상호간에 협력과 조언이 부재하다는 건데요. 서울이든 지방이든 공통적으로 가장 취약한 게 공간 간에 혹은, 기획 간에 협력이 잘 안 된다는 점이에요. 각자의 공간에서만 그냥 열심히 하고 있죠. 성격이 비슷한 공간은 서로 프로그램 교환에서부터 공동 기획도 가능하죠. 그렇게하면 예산, 인력, 홍보의 낭비를 줄일 수 있고, 주제 연구와 발굴의 깊이와 지속이 가능해지지 않을까요? 양쪽의 협력 홍보는 당연히 관객의 다양성을 만들 수 있고요. 그리고 어떤 공간이 오래가기 위해서는 그 냥 다양성 젊은, 작가발굴, 새로운 같 은 막연함 보다는 (구체적으로) 그 공간이 주목하는 가치와 성격을 설정해야 한다고 봐요. 서울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소위 1세대 대안공간 들은 이러한 혐의를 피해갈 수 없어요. 현수: 모퉁이도 결국은 발굴을 해나가는 게 최종적인 목표인데요. 제가 부족한 부분을 보안해 줄 수 있는 커뮤니티간의 교류가 중요한 거죠. 최근 부독협에서 대안공간들의 허브기능을 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어요. 하지만 부독협에서 매번 대안공간들에 맞는 영화들을 맞춤형으로 프로그램해 줄 수 없기에 대안공간들 스스로 부독협이라는 창구를 활용할 수 있는 기획이 필요하다고 봐요. 사실 그런 부분이 열악하다는 거죠. 그래서 모퉁이는 조금씩 다양한 영역의 사람들과 교류를 하면서 어떤 기획을 할 수 있을 지 준비해 나가는 중이에요. 혜강: 재규씨의 작품들은 사실 영화와 미술을 오가는 경계에 있는데요. 현수: 저도 계속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이에요. 그래서 다른 곳에서 진행되는 관심 있는 프로그램은 제가 직접 할 수 없다면 초대를 하고 싶어요. 그 과정에서 제가 더 풍부해질 수 있겠죠. 녹취정리돈키호테+김미루 현수: 저도 상영의 조건을 갖추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더불어 상영 후에 관객과의 대화나 자료집 발간을 하는 과정이 중요한 거죠. 재규: 한국에 오니까 그렇게 되더라고요. 사실 일본에 있을 때는 제가 미술을 한들, 영화를 한들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죠. 물론 학교 안에만 있었습니다만. 일본은 1980년대에 예술 공학에 대한 교육이 있었어요. 오히려 지금은 하향 길에 접어들었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최근에 첨단 디지털 공학이니 융복합이니 하는 게 대세거든요. 이렇게 빠른 스타일의 나라에서는 발굴할 게 없는 거에요. 빨리 가야 하니까. 존재가 사라져 버리고, 세계에서 노동 시간이 두 번째로 많은 나라에서 과연 관객들이 영화를 찾아 볼 시간이 있는가. 명훈: 그 경계에 대한 느낌은 어떠세요? 모퉁이극장은 재규: 주변에서 자꾸 경계라는 얘기를 하는데,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하하하. 신경이 쓰이긴 쓰이죠. 에른스트 루비치의 <모퉁이 가게>에서 이름을 빌려온 모퉁이극장은 무성영화를 함께 보는 작은 영화모임에서 출발했다. 영화사 모퉁이극장은 2012년 문화응원기업 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영화와 관객간의 우정을 응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혜강: 주변의 조건들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그 스트레스가 또 다른 방법론을 만들어내기도 하죠. 부산에 대안 공간이나 갤러리에서 상영회나 영상 설치를 하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그 첫 번째 프로젝트로 영화팬들을 위한 영상문화잡지 <영화의 관객들: Citizen of Cinema> 발간을 준비 중이다. http://www.facebook.com/thecornertheater
1974년 조문진 감독 <황홀>, 1978년 조문진 감독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순천에서 촬영된 두 편의 한국 영화, 영화를 통해 순천을 보다, 순천을 통해 영화를 다시 보다! 2013 예술공간 돈키호테의 순천-영화 연구 www.art8013.net 뒷동산에 올라가서는 정거장을 한참 내려다보았으나 기차는 안지나갔습니다. 나는 풀잎 을 쭉쭉 뽑아보기도 하고 땅에 누운 아저씨의 다리를 꼬집어보고 하면서 놀았습니다. 한참 후에 아저씨가 손목을 잡고 내려오는데 유치원 동무들을 만났습니다. 옥희가 아빠하구 어디 갔다 온다 응. 하고 동무가 말하였습니다. 그 아이는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줄을 모르는 아이였습니다. 나는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그때 나는 얼마나 이 아저씨가 정말 우리 아버지였더라면 하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나는 정말로 한번만이라고, 아빠! 하고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그러고 그날 그렇게 아저씨하고 손목을 잡고 골목골목을 지나오는 것이 어찌도 재미가 좋았는지요. 나는 대문까지 와서, 난 아저씨가 우리 아빠래문 좋겠다. 하고 불쑥 말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아저씨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빠개져서 나를 몹시 흔들면서, 그런 소리 하문 못써. 하고 말하는데, 그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나는 아저씨가 몹시 성이 난 것처럼 보여서 아무 말도 못하고 안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 주요섭 사랑손님과 어머니 중에서 주요섭(1902~1972)은 1935년에 단편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 를 발표했다. 1961년 신상옥 감독은 이 소설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했다. 그리고 1978년 조문진 감독은 이를 다시 영화로 제작했다. 61년 수원을 배경으로 찍은 신상옥 감독의 영화는 다시 볼 수 있으나, 78년 순천을 배경으로 찍은 조문진의 작품은 다시 보기 어렵다. 버스 안의 좌석들은 많이 비어 있었다. 그 시찰원들의 대화에 의하면 농번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여행을 할 틈이 없어서라는 것이다. 무진엔 명산물이... 뭐 별로 없지요? 그들은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별게 없지요. 그러면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건 좀 이상스럽거든요. 바다가 가까이 있으니 항구로 발전할 수 있었을 텐데요? 가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럴 조건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심이 얕은 데다가 그런 얕은 바다를 몇 백 리나 밖으로 나가야만 비로소 수평선이 보이는 진짜 바다다운 바다가 나오는 곳이니까요. 그럼 역시 농촌이군요. 그렇지만 이렇다할 평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그 오륙만이 되는 인구가 어떻게들 살아가나요? 그러니깐 그럭저럭이란 말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점잖게 소리내어 웃었다. 원, 아무리 그렇지만 한 고장에 명산물 하나쯤은 있어야지. 웃음 끝에 한 사람이 말하고 있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도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 김승옥 무진기행 중에서 60년대를 대표했던 소설사 김승옥은 순천 출신으로 64년 무진기행 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1967년 김수용 감독에 의해 <안개>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됐다. 그리고 1974년 조문진 감 독에 의해 <황홀>이란 제목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안개>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던 윤정희가 다시 여주인공을 맡았고 남자배우는 신성일에서 남궁원으로 바뀌었다. <황홀>은 순천에서 올로케이션 으로 촬영/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