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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婦 女 新 聞 을 통해서 본 근대 일본의 중국 표상과 젠더 * 1) 李 宣 坭 (서울여대) Ⅰ. 序 言 Ⅱ. 臺 灣 : 황국의 백성 Ⅲ. 滿 州 : 동양 문명화 구현의 장 Ⅳ. 支 那 : 야만성 그러나 노제국 Ⅴ. 유교: 가족주의와 혁명 Ⅵ. 맺음말 Ⅰ.머리말 본 논문은 근대 일본의 대표적 여성언론매체 중 하나였던 婦 女 新 聞 의 중국 관련 담론을 분석하고자 하였다. 婦 女 新 聞 의 중국 관련 담론 분석은 근대 일본의 중국 인식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영향과 극복, 그리고 그 안에서 아시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일이기도 하다. 婦 女 新 聞 은 당 시 일본의 여성 언론 매체들의 아시아에 관한 관심의 빈약성에 비한다 면 상대적으로 아시아에 관한 풍부한 담론을 엿볼 수 있는 매체이다. 婦 女 新 聞 은 1900년 5월 10일에 창간되어 43년간 매주 한차례씩 발 간되었으며 주필은 후쿠시마 시로( 福 島 四 良 )이다. 후쿠시마는 존경했던 누나가 불행한 결혼 생활 끝에 21살의 젊은 나이로 숨진 일과 이를 슬 퍼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본 경험 때문에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 *이 논문은 2011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 아 연구되었음(KRF-2011-1-A00005)

278 中 國 史 硏 究 第 81 輯 (2012.12) 었다. 그 후 부인문제에 생애를 바칠 결의 로 婦 女 新 聞 을 창간하였 다. 婦 女 新 聞 은 주간지이며 유일한 여성신문 으로 창간호는 1만부 정도를 발행했지만, 10호에 이르면 1200부까지 감소한다. 하지만 창간 으로부터 6개월 후 여성계의 힘 있는 인사들이 1) 연명하여 권유장을 보내 독자수를 2배로 늘려 그 후 발행부수는 7,000부에서 1만부를 유 지했다고 한다. 婦 女 新 聞 은 경영에 곤란을 겪으면서도 1942년 자진 해서 폐간하기까지 43년간 지속적으로 발행되었는데, 이는 여성계의 힘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독자층은 여학생, 여성교원, 처녀회, 부 인회 등 지역의 중심 멤버인 지식인 여성들이었다. 주필 후쿠시마는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不 逞 鮮 人 (=불순분자 조선인) 에 관한 유언 비어를 강력히 비판하는 민주적인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기본 적으로 황실숭배의식이 강한 애국주의자 였던 것으로 보아 婦 女 新 聞 은 체제 내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지향한 매체라고 할 수 있 다. 본 논문에서 婦 女 新 聞 을 분석 대상으로 삼은 것은 신문이라는 성격상 시사성이 강하고, 주로 중류층 여성의 계발을 목적으로 간행된 신문이기 때문이다. 이 신문은 중류층 여성들 중에 열렬한 독자가 많 아, 중류층에 미친 영향은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지도적인 입장 에 있던 여성들이 대부분 서민 여성을 지도했다고 한다면 사회에 대한 영향력도 경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상당히 장기간 다채로 운 지면 구성으로 여성계발을 위한 글을 편성한 여성저널로 타의 추종 을 불허한다. 본 논문과 관련해 선행연구를 살펴보면 강상중은 일본안의 오리엔 탈리즘에 대해 비판하면서, 기존의 지역질서를 붕괴시키고 동아시아세 계를 재편해야 했던 일본은 지역 내에서 헤게모니적 힘을 행사하기 위 해서 상당히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일본은 트라우마가 되어버 린 서구의 지리적 폭력에서 벗어나면서 동시에 아시아 각국에 대해 오 1) 당시 여성계의 힘있는 인사들로서는 하토야마 하루코( 鳩 山 春 子 ), 하마오 사쿠 코( 浜 尾 作 子 ), 시모다 우타코( 下 田 歌 子 ), 미와타 마사코( 三 輪 田 真 佐 子 ), 우시오 다 치세코( 潮 田 千 勢 子 ) 등이 있다.

婦 女 新 聞 을 통해서 본 근대 일본의 중국 표상과 젠더 ( 李 宣 坭 ) 279 리엔탈리즘의 헤게모니적 힘을 행사하기 위해 동양 을 발견하였다. 이 를 위해 아시아의 지정학적인 지식을 학술적, 경제학적, 사회학적, 역 사적, 민족학적 등 다방면에 걸쳐 精 緻 化 해 갔다. 이로써 아시아와 관 계된 제 현상은 이데올로기적으로 하나의 양태를 지닌 언설로서 다양 한 제도, 어휘, 학식, 형상, 신조로 생산적 인 지와 권력의 편성형태를 만들어 왔다고 한다. 2) 야마무로 신이치는 동아시아를 일본의 국민국가 형성에 자극받은 인접한 정치사회들이 이를 강하게 의식하면서 서로 대립하고 경합하는 반응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본다. 3) 이는 권역 내에 서 그것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동아시아 혹은 동양 관련 사유 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연구라고도 할 수 있다. 쑨커는 후쿠자와 유끼치, 오카쿠라 텐신, 쑨원 등의 아시아 인식에 대해서 논하고 일본 에서 지속되어 온 탈아와 흥아의 이중변주가 은폐되어 왔다고 말한다. 탈아와 흥아의 이중변주는 결국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태도에 주체적 책임의식의 결여와 더불어 일본의 자기 정체성인식 문제가 있다고 하 면서 일본이 아시아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주체성을 건립하기가 충분 하지 못한데, 이것은 일본이 줄곧 아시아 문제를 자기 정체성을 인식 하는 계기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4) 아시아 여성관련 연구는 일본에서 근대초기를 살았던 조선이나 중국의 여성들에 대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山 崎 朋 子 가 몽고, 조선, 중국과 일본인여 성의 교류에 대한 분석을 하면서 1907년에 창간해서 1909년에 폐간된 世 界 婦 人 의 아시아관에 대해 간략하게 논하고 있다. 5) 그러나 편집자 후쿠다 에이코의 아시아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잘 드러나고 있다는 정 도의 간략한 내용에 그치고 있다. 또한 본 연구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연구로 永 原 和 子 의 연구가 있는데, 그는 아시아 여성과의 차이 속에 서 일본 여성의 규범을 만들어 낸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広 瀬 玲 子 는 2) 강상중(이경덕 임성모 역),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이산, 1997). 3) 야마무로 신이치(임성모 역), 여럿이며 하나인 아시아 (창비, 2003). 4) 쑨꺼(유준필 외역), 아시아라는 사유공간 (창비, 2003). 5) 山 崎 朋 子, 女 性 交 流 史 ( 筑 摩 書 房, 1995).

280 中 國 史 硏 究 第 81 輯 (2012.12) 婦 女 新 聞 의 만주인식을 분석하여 식민지 지배와 젠더에 대한 고찰을 시도하였다. 6) 본 논문은 이와 같은 선행연구에 많은 시사를 받고 있다. 특히 서구 와의 조우 속에서 만들어진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아시아에 오리 엔탈리즘적 지적 지배를 행사하고자 하였다는 강상중의 주장에서 일본 의 중국관련 담론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데, 이러한 문 제의식을 시야에 넣고 일본이 중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에 대 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야기 한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이 일본의 중국관련 담론에서는 어떻게 변용되 는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婦 女 新 聞 의 중국 담론 분석을 통 해서 일본의 민족/아시아 정체성, 부녀정체성의 확립과정에 중국관련 담론이 어떻게 활용되는가도 살펴볼 수 있다. 종래 근대일본의 중국에 대한 인식에 관해서는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으나 여성매체를 통 한 중국관련 표상 분석은 거의 없다는 점에서 본 연구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본 연구에서는 중국관련 담론에 젠더적 분석 을 더함으로서 중국인식과 그를 통한 일본의 정체성 확립에 젠더가 어 떻게 관계하는가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Ⅱ. 타이완: 황국의 백성 먼저 일본이 일찍이 식민화한 타이완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 논하 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타이완에 대한 관심은 주로 타이완 원주민 ( 蕃 人 )에 대한 기록이며, 이미 황국 백성으로 서술하고 있다. 하천에서 개구리가 뛰고 전면의 경치는 내지(일본-인용자)와 다르지 않다. 이곳에서도 볼 수 있는 대나무 이파리, 물소를 쫓고 있는 것은 토 6) 広 瀬 玲 子, 婦 女 新 聞 に 見 る 満 州 認 識 - 戦 争 とジェンダ- ( 北 海 道 情 報 大 学 紀 要 15-2, 2004).

婦 女 新 聞 을 통해서 본 근대 일본의 중국 표상과 젠더 ( 李 宣 坭 ) 281 인의 아이이다. 그 소리 너무도 사랑스럽고 그들도 지금은 이미 황국의 백성이다. 그 주변에 일청전쟁 전몰자의 묘가 있어, 이름도 모르는 주변의 꽃 몇 송이를 올린다. 7) 타이완을 방문했던 편집자 후쿠시마는 渡 臺 日 記 를 昭 和 2 年 (1927 년) 8 月 10 日 부터 매주 8회 연재하여 7월 27일부터 9월 2일까지 일정별 로 매일 매일의 행선지, 만난사람, 풍경 등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유람자의 입장에서 자연 풍광에 대한 감 상을 서술하고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후쿠시마는 이어서 春 浦 라는 필 명으로 台 湾 こゝかしこ 를 3차례, 福 島 四 良 라는 풀네임으로 台 湾 蕃 人 の 話 ( 上, 下 ) 를 게재하고 있다. 8) 다음은 후쿠시마가 타이완으로 가는 것을 환송하는 글이다. 우리 후쿠시마 춘포 군은 이 더위에 자진해서 무더운 타이완에 들어가 왕성하게 그곳을 여행 중이다. 문화적 요소를 관망하여 그 발전을 설명하고자 한다. 군은 작년 조선 만주를 유력한 적이 있다. 발 가벗겨진 13도와 황망한 동아의 평원에 우리 신동포가 신음하고 있는 것 을 보고 적지 않은 감흥을 받았던 것 같다. 지금 또 남단의 신천지를 주 유하는데 식민지에서 부인문제, 여자교육문제, 사회문제 등에 대해서 군의 혜안을 하루 빨리 비추어 誌 上 에 광채를 더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군은 타이난부터 까오숑의 일정이기 때문에 우리 제국의 최남 단에 있는 것이다. 9) 식민화로 획득한 타이완을 신천지, 우리제국의 최남단 등으로 묘사 하여 새로이 획득한 영토의 범위를 그려내어 심상지리를 형성시키고 있다. 후쿠시마의 관심은 대체로 타이완 원주민에게 집중되어 있는데 그 는 전타이완을 계통적으로 소개하여 내지 부인에게 본섬에 대한 지식 7) 台 北 しのぶ, 台 湾 の 凉 風 ( 婦 女 新 聞 1913 年 8 月 22 日, 692 號 ). 8) 春 浦, 台 湾 こゝかしこ ( 婦 女 新 聞 1927 年 11 月 20 日, 1432 號 ); 春 浦, 台 湾 こゝかしこ ( 婦 女 新 聞 1927 年 11 月 27 日, 1433 號 ); 春 浦, 台 湾 こゝかしこ ( 婦 女 新 聞 1927 年 12 月 4 日, 1434 號 ); 福 島 四 良, 台 湾 蕃 人 の 話 ( 上 下 ) ( 婦 女 新 聞 1927 年 12 月 11 日, 1435 號 ; 昭 和 2 年 12 月 18 日, 1436 號 ). 9) みやこ, 福 島 社 長 におくる ( 婦 女 新 聞 1927 年 8 月 28 日, 1420 號 ).

282 中 國 史 硏 究 第 81 輯 (2012.12) 재료를 제공하고 싶다 고 하였다. 그러나 전체를 보지 않는 조급함이 잘못된 것을 낳을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은 여기에서 우선 진귀하게 느낀 부분적 견물기 를 쓰는 정도에 머물 것이라고 하였다. 10) 나는 이번 여름 한 달 정도 타이완을 여행하였습니다. 정말 유람으로 아무런 연구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평 같은 것은 할 수 없습니다. 단지 본 것, 들은 것, 총독부의 조사에 따른 인쇄물에 의해서 타이완의 명물 같이 생각되는 蕃 人 이 어떠한 종족이며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떠한 생활 을 하고 있는가를 개괄적으로 이야기해보자 합니다. 11) 그 후 우선 타이완 전체 개관, 형태, 기후, 지형, 인구구성 등에 대한 자세한 소개와 번인 사회가 한족화 되지 않은 원인, 그리고 그들의 저 항 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12) Ⅲ. 滿 州 : 동양 문명화 구현의 장 강상중은 유럽의 역사를 본 뜬 듯 일본적 오리엔탈리즘의 지적 지 배는 아시아를 자국 본위의 규율=훈련질서의 분류체계 속에 가두어 넣으려고 했다 고 하면서 그 가운데 일본이 아시아라는 장의 일부 라 는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동양 과 그 속의 조선ㆍ만주( 만선 ) 및 지 나 의 심상지리와 역사를 만들어내었다고 한다. 이때 조선의 식민지화 는 제국의 심상지리로서의 아시아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13) 일본은 서양문화와 조우한 이래 동양의 문명화 를 책임질 아시아의 10) 春 浦, 渡 臺 の 尼 寺 を 見 る - 新 竹 街 淨 業 院 の 別 世 界 (1927 年 8 月 21 日, 1419 號 ). 11) 福 島 四 良, 台 湾 蕃 人 の 話 ( 上 ) ( 婦 女 新 聞 1927 年 12 月 11 日, 1435 號 ). 12) 후쿠시마 외에도 원주민 폭동을 다룬 기사가 있다. 一 記 者, 台 湾 霧 社 蕃 人 の 暴 動 ( 婦 女 新 聞 1930 年 11 月 2 日, 1586 號 ). 13) 강상중(이경덕 임성모역),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이산, 1997). 일본의 조 선인 인식 등에 관해서는 拙 稿, 近 代 中 國 과 日 本 의 언론매체에서 보이는 朝 鮮 女 性 表 象 硏 究 ( 東 洋 史 學 硏 究 116, 2011)를 참조.

婦 女 新 聞 을 통해서 본 근대 일본의 중국 표상과 젠더 ( 李 宣 坭 ) 283 선구자로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여기에는 나아가 시야를 넓혀 동아( 東 亞 )의 형세를 살펴보면 지나라는 노쇠한 대제국은 빈사의 상태 에 놓여있고, 구미 각국의 해군은 모두 이곳에 힘을 모아 한번 연기 오르면 우리나라(=일본)는 강 건너 불구경일 수 없는 위치에 있다 14) 는 위기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자신들이 하루 빨리 거듭나서 동 양의 패권을 쥐어야 한다는 각오로 이어진다. 후쿠자와( 福 沢 )는 우리 일본도 언젠가 한번은 일본의 국위를 떨쳐 인도나 지나인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도록 영국인을 모방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영국인들도 꾸짖어 동양의 실권을 우리 손에 쥐어야 할 것 이다. ( 時 事 新 報 1882년 12월 11일) 15) 라고 비교적 노골적으로 표현했 다. 후쿠자와가 이야기한 동양의 실권 을 획득하기 위한 식민화는 문 명, 계몽, 문화, 교육 등으로 전환된다. 婦 女 新 聞 에 우리 국가의 사명을 돌아봐라 라는 글이 실려 있는데 이 글을 통해 당시 일본이 아 시아에서 자신들에게 부여한 역할이 무엇이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지금 일본은 식자들이 주창하듯이 청한( 淸 韓 ) 양국을 시작으로 아세아 제국에 대해서 하나의 특별한 사명을 담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아 세아 제국의 문화는 결국 우리 일본의 손에 의해서 개척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과거 15년간 우리나라는 청국과 싸우고, 러시아와 싸우고 공전의 대승리를 얻었지만 여전히 금후 일대 전쟁을 눈앞에 두고 있음을 깨달아 야 한다. 이것은 실로 아시아 제국의 모든 무지몽매와 싸워야 하는 전쟁 이다. 이에 대항하는 무기는 용맹이 아니라 지식일 뿐이다. 우리나 라에 부여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전사인 국민에 대한 교육을 완전하 게 행할 수 있도록 일치 협력해야 한다. 16) 동양의 문명화 라는 사명은 조선의 식민지화, 만주영유, 중국 본토 침략을 포함한 일본의 식민정책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담론이라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서구와의 조우로 아시아로 위치 지 어진 가운데 재차 아시아를 극복 한 자기정체성 확립을 위한 동양의 14) 海 國 の 婦 人, ( 婦 女 新 聞 1902 年 1 月 27 日, 90 號 ). 15) 福 沢 諭 吉 全 集 第 8 巻 ( 岩 波 書 店, 1960), p.36. 16) 岡 浅 子, 我 が 国 家 の 使 命 を 鑑 みよ ( 婦 女 新 聞 1909 年 9 月 3 日, 486 號 ).

284 中 國 史 硏 究 第 81 輯 (2012.12) 문명화 라는 사명을 구현하는 장으로서 만주가 있었음을 婦 女 新 聞 에 서의 만주를 둘러싼 논의에서 읽을 수 있다. 婦 女 新 聞 에서는 1904년 이후로 만주와 몽고에 대한 기사가 등장하 는데, 이는 러일전쟁으로 만주(요녕, 길림, 흑룡강, 내몽고 동부지역)진 출의 교두보를 마련하면서 이들 지역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婦 女 新 聞 에서 만주와 몽고는 지나 에서 분리되어 단독으로 논해지거나 만주와 조선을 함께 만선( 滿 鮮 ), 혹은 만주와 몽고를 함께 만몽( 滿 蒙 )으로 다루고 있다. 17) 婦 女 新 聞 은 각국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많이 다루고 있는데, 몽고 여성은 여자는 일하고 남자는 논다 18) 라고 묘사되고 있는 반면 만주 여성에 대한 글에서는 상반된 이야기가 보인다. 남편의 친절: 남편이 나무하고 물 긷고 있는데 아내는 팔 괴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남편은 능숙하게 힘든 표정도 짓지 않아 그 친절함에 놀랐다. 부인의 절조: 이는 아주 엄격한 것으로 미 혼 부인은 더욱 각별하여 결코 남자와 동석하여 이야기하지 않으며 별 다른 교육이 행해지지 않기 때문에 글자를 아는 이도 지극히 적지만, 재봉은 아주 능숙해 양말을 깁거나 자수도 하는데 대단히 실력이 좋다. 그러나 상류사회의 부인들도 공중의 장에서 거리낌 없이 양반다리를 하 고 긴 담뱃대로 담배를 피우고 남편은 근면하게 일하는데 아무렇지도 않 게 아편을 피우면서 누워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 만주에 대한 관심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인해 일본이 만주로의 침략 17) 1921년 7월에 독립하는 몽고를 明 治 시기에 줄곧 독자적으로 논하고 있는 글 들이 아래와 같이 실려 있다. 아래의 글들은 몽고의 위치, 기후, 풍습, 물산, 몽 고왕족과 북경정부와의 관계 등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河 原 操 子, 内 蒙 古 喀 刺 泌 王 府 內, 全 蒙 古 について ( 婦 女 新 聞 1904 年 5 月 16 日, 210 號 ); 河 原 操 子, 内 蒙 古 喀 刺 泌 王 府 內, 全 蒙 古 について ( 婦 女 新 聞 1904 年 5 月 23 日, 211 號 ); 河 原 操 子 內 蒙 古 喀 喇 泌 王 府 內, 內 蒙 古 ( 婦 女 新 聞 1904 年 7 月 25 日, 220 號 ); 蒙 古 女 學 校 の 慰 問 品 ( 婦 女 新 聞 1906 年 1 月 22 日, 298 號 ); 河 原 操 子 女 史 談 話, 蒙 古 みやげ ( 婦 女 新 聞 1906 年 2 月 19 日, 302 號 ); 蒙 古 女 学 生 の 手 紙 ( 婦 女 新 聞 1906 年 7 月 16 日, 323 號 ). 18) 鳥 居 竜 蔵, 蒙 古 の 風 俗 ( 婦 女 新 聞 1915 年 5 月 28 日, 784 號 ). 19) 野 田 行 団 氏 通 信, 満 州 の 婦 人 ( 婦 女 新 聞 1904 年 12 月 5 日, 239 號 ).

婦 女 新 聞 을 통해서 본 근대 일본의 중국 표상과 젠더 ( 李 宣 坭 ) 285 이 시작되면서 고양되기 시작하지만, 만주사변이 본격화되는 1931년 이전 시기까지는 그다지 관련기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 중 만주 관 련 기사로 주목할 만한 기사는 婦 女 新 聞 의 주필 후쿠시마 시로( 福 島 四 良 )가 춘보( 春 甫 )라는 필명으로 연재한 鮮 満 旅 行 記 와 鮮 満 トラン ク 가 있다. 후쿠시마는 1921년11월 13일부터 약 50일간 조선과 만주 각지를 여행한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은 만주지역과 하나의 범주로 간주되어 여행코스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일본 정부도 만주와 조선으로의 해외관광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고 한다. 청일전쟁과 러 일전쟁 이후 만주와 한국은 전쟁승리라는 역사적 기억이 묻혀있는 땅 이고 앞으로 제국일본의 위세를 확대해 가야할 땅이 되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의 관광은 일본국민이라는 의식을 확고히 하여 제국의식을 심기에 적절한 이벤트였다고 할 수 있다. 20) 다음은 후쿠시마의 만선여 행 환송사의 일부인데 조선과 만주에 대한 당시의 인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선만( 鮮 満 )의 신천지는 우리 동포가 활약하는 무대로 더해져 자연과 인사가 내지와 취향이 다른 점이 많아서 취미가 끓고 논의가 일어난다. 21) 그런데 후쿠시마의 기술은 만주보다는 식민지로 획득한 조선에 대 20) 하세봉, 근대, 관광을 시작하다 -관광의 동아시아적 回 路 ( 근대, 관광을 시작하다, 민속원, 2010), p.196. 만선역사지리 조사부의 白 鳥 庫 吉 는 동양사학 의 구축을 통해 과학적 식민과 만선에 대한 지리적 폭력의 확대를 떠받드는 유력한 학문적 언설을 준비 했다. 동양사학이라는 학문적 언설은 일본의 제국 제도나 식민지 제도에 보이는 정치권력과의 다양한 교환과정 속에서 산출되어 반복 발전해 왔다. 게다가 중국사에서 조선사로 방향을 바꾼 稲 葉 岩 吉 는 満 鮮 史 를 주창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침략대상인 만주 와 조선에 걸쳐 발생한 역사 적 사상을 제시하는 것으로 양 지역의 불가분성 을 강조함과 동시에, 일반에게 그러한 사상의 보급을 꾀하여, 조선 민족의 발전 과 鮮 人 愛 撫 라는 논리에 의 해서 일본의 대륙침략을 정당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滝 沢 規 起, 稲 葉 岩 吉 와 滿 鮮 史 ( 韓 日 關 係 史 硏 究 19, 2003), p.63. 이로써 조선은 滿 鮮 이라는 지정문화적 이데올로기 속에 봉합되어 조선이 국민적 형태를 결락한 단순한 지리적 영역으로만 존속하게 된다. 21) みやこ, 福 島 社 長 の 鮮 満 行 を 送 る ( 婦 女 新 聞 1921 年 10 月 16 日, 302 號 ).

286 中 國 史 硏 究 第 81 輯 (2012.12) 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부분은 게으른 조선인 에 대한 대비로서 근면하게 노동하는 만주의 지나인 이라는 구 절이다. 게으른 조선인을 본 눈으로 만주의 지나인들이 일을 잘하는 것을 보면 이상하게 보인다. 실제 지나인은 선천적으로 노동자로 태어났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렇게 거친 식사로도 괜찮은 지나인의 기풍은 그들 개 인으로서는 최대의 강점으로 이 때문에 그들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노동 계를 점령하였다. 상업에서도 구미인이나 일본인은 도저히 경쟁할 수가 없다. 미국, 캐나다의 배일은 일본인 노동자의 임금이 싸기 때문이지만 일본인 생활비의 7, 8분의 1로 생활할 수 있는 지나인은 어떤 의미에서 세계 최강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근면하고 거친 음식에도 만족하는 지나인의 나라가 왜 발전하지 못하고 오늘날처럼 비참한 상태 에 놓여있는가 하면 그들에게는 국가 관념이 없고 단결심이 없어서 철저 하게 개인주의적 국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2) 위의 글에서는 만주의 중국인은 근면함에도 불구하고 국가 관념이 부재하여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논하고 있어 일본인의 애국심을 고양시키기 위한 논의로 귀결되고 있다. 만주와 관련된 기사들이 증폭되는 것은 만주사변을 전후한 시점이 다. 일본은 러일전쟁과 1915년 21개조 요구로 滿 蒙 에서의 특수 권 익 23) 을 획득한다. 따라서 만주와 몽고는 일본의 이해에 따라 각각 따 로 논해지기도 하지만 한 덩어리로 묶여서 논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 다. 국방은 무엇이며, 만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나는 국토의 방위 이며, 또 하나는 국민생존의 보장 입니다. 직업상의 불 안과 인구증가에다 우리나라는 풍부한 자원이 있는가 하면 의식주 모두 부족합니다. 국외에 우리 국민이 생활할 길을 개척하는 것 외에는 없 습니다. 이는 누가 합니까. 정치가입니까. 국민입니까. 아니 이는 모두 국 민자신이 자각하여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자각이 국민의 마 22) 春 浦, 鮮 満 トランク( 一 ) ( 婦 女 新 聞 1922 年 1 月 15 日 ). 23) 주요 내용을 보면, 관동주 조차권, 만철과 부속지 획득, 만몽에 5개 철도건설, 주둔권, 남만 상조권, 남만 잡거권, 광산채굴권, 내몽고 합병경영권 등이 있다.

婦 女 新 聞 을 통해서 본 근대 일본의 중국 표상과 젠더 ( 李 宣 坭 ) 287 음에 강하게 불타오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에 국토 보전, 국민생존의 보증이라는 진정한 국방 의 중대한 요소가 있습니다. 만몽문제 이들 기득권익은 결코 우리나라가 거저 얻은 것이 아니고 또한 지나로 부터 강탈한 것도 아닙니다. 이는 일러전쟁에서 20억의 돈과 10만의 희생 이 지불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에서는 이 국제간 의무를 다하겠다 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것을 실행하지 않습니다. 아니 지나는 그것이 불가 능합니다. 게다가 지나 측의 일본인에 대한 생명재산의 보증이 아주 불안한 현상에서 연맹이라는 것은 실로 엉망진창입니다. 또한 이번 사변에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뇌물을 주지 않았다고 무고한 제국신민 인 조선인 240명이 불법적으로 길림 형무소에 오랫동안 구치되어 있습니 다. 종래 모든 사변에는 조선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자원은 만몽 지역에 풍부합니다. 우리 일본인은 동양인종으로서 게다가 동양의 맹주로서 장래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도 이 폭압적인 지나를 응징 하고 정상적인 발달을 이끌어 황색인종의 평화를 결실 맺어야 합니다. 24) 이글의 필자 호리는 만몽관련 담론을 일본인=동양인, 일본=동양의 맹주로 동양의 평화를 실현시키는 주체로 확립시키기 위한 하나의 기 제로 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과거의 동아시아의 맹주였던 중 국을 폭압적인 존재화하여 장래 동양 평화를 실현시킬 주체로서의 가 능성을 봉쇄하고 있다. 다음 글은 호리와 마찬가지 인식위에서 만몽을 논하면서 동시에 만몽이 국방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자 중국으로부터 분리하여 이해하고자 한다. 만몽은 역사적 지리적으로 볼 때 만주인 몽고인의 토지입니다. 단언하 건데 한족의 토지가 아닌 것입니다. 나아가 1905년 9월 5일 포츠머드조약 이래 일본이 만몽에서 우월권을 존속시키면서, 그리고 어디까지나 지지하 는 것이 동양을 위해, 지나를 위해, 일본을 위해 나아가 태평양의 평화를 위해, 일본의 의도이며, 나아가 영국으로서도 이를 거부해야할 하등의 이 유가 없는 것은 세계 각국이 인식하고 이의가 없었던 바입니다. 만 몽은 실로 일본의 생명선입니다. 지나의 불법적인 배일이나 또는 참을 수 없는 侮 日 의 여러 가지 우리 군은 어디까지나 만몽에서 기득권익 옹 호의 입장에 의해 나아가 정의를 위해 인류애를 위해 중대한 사명을 양 어깨에 짊어진 것입니다. 25) 24) 陸 軍 少 将 堀 吉 彦 述, 満 蒙 と 国 防 ( 婦 女 新 聞 1931 年 11 月 1 日, 1638 號 ). 25) 滿 洲 四 平 街 聯 合 婦 人 會, 母 国 の 諸 姉 へ ( 婦 女 新 聞 1932 年 1 月 12 日 ).

288 中 國 史 硏 究 第 81 輯 (2012.12) 만주와 몽고의 독립 문제에 관하여 논하며, 만주사변을 계기로 지 금 만몽 4성이 중화민국으로부터 분리 새롭게 독립국을 세우고자 준비 중이며, 세계의 이목이 이곳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 만몽이란 어떤 곳이며, 왜 독립계획이 생겨났는가를 비교적 자 세하게 논하면서 일본은 그러한 움직임에 대해 일본의 권익을 존중하 는 정부라면, 어떤 지나인 정부가 조직되든 상관없다 26) 고 하는 기사 가 실리고 있다. 이러한 글들은 만주사변이 발발한 1931년경에 집중되 고 있다. 일본제국주의가 중국침략을 본격화한 전쟁의 시기에 만주와 몽고를 하나로 묶어 독립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은 일본 정국과의 연계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또한 이러한 정국을 뒷받침하 기 위해 중국으로부터 분리 독립시킨 지역으로 재구성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로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문) 지나가 문화국 자격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입니까? 답) 지나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돌연 공격 배일과 배일화로 인한 위협 일본인과 거래하는 중국인을 감옥에 넣고 공중 앞에 본보 기로 보이고 문명인이 참을 수 없는 잔인한 제재를 가한다. 정부는 성의 있게 이를 단속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지나가 문화국 자격이 없다는 증거이다. 27) 위의 글은 1931년의 만주사변은 지나 가 문화국 내지는 국가인격 자 로서 자격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하여 만주사변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이와 같이 중국의 자격 결핍 이 만주 사변의 간접적 원인임을 주장하는 글들이 다수 게재된다. 28) 그렇기 때 문에 일본이 앞의 글에서와 같이 동양의 평화를 실현시키는 주체로 거 듭날 수 있는 것이다. 26) 時 事 解 説 満 蒙 独 立 計 画 の 話 ( 婦 女 新 聞 1931 年 10 月 4 日, 1634 號 ). 27) 時 事 問 答 煮 え 切 らぬ 満 州 事 件 ( 婦 女 新 聞 1931 年 11 月 22 日, 1641 號 ). 28) 満 州 の 領 土 と 我 國 ( 婦 女 新 聞 1931 年 12 月 5 日, 1643 號 ); 時 事 問 答 満 州 事 変 の 真 因 ( 婦 女 新 聞 1931 年 10 月 25 日, 1637 號 ).

婦 女 新 聞 을 통해서 본 근대 일본의 중국 표상과 젠더 ( 李 宣 坭 ) 289 이처럼 婦 女 新 聞 의 만주사변 발발 후 만주 관련 논조는 다른 일 반 매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주사변을 둘러 싼 국가의 이해가 그동안에 부녀 를 평화를 실현시키는 주체로 보아왔 던 婦 女 新 聞 의 입장과 상충하면서 갈등의 소지가 생겨날 수 있음을 충분히 인지한 듯 다음과 같은 글이 실린다. 크게 말하면 국가를 위해 직접적으로는 우리 재주자를 지켜주는 신으 로서 목숨을 걸고 일하신 전사자 부상병을 보니 단지 감사의 눈물뿐입니 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들 병사의 부모들의 마음을 생각하니 전쟁이라는 것이 없다면, 여성의 입장에서 不 戰 의 이상, 평화의 실현을 희구하지 않 을 수 없습니다. 단지 지나라는 특수한 나라를 상대해야만 하는 우리나라 는 실로 어려운 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8년 전 많은 분의 희생 으로 획득한 滿 蒙 에서의 우리 특수 권익을 옹호하고 잃지 않아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는 연약한 부녀자들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강한 국민의 지 지로 전국민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도록 외교 교섭이 잘 진척되어 하루라 도 빨리 평화가 실현되기를 빌어봅니다. 29) 나아가 다음 글은 평화라는 미명하에 국론의 일치를 방해하는 언 동은 삼가야 한다고 구체적인 요구를 제시하고 있다. 세계 평화의 인류애에 눈떠 국제주의, 공존공영의 신 이상을 발견하여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한발씩 다가가고자 하는 부인 이러한 목적을 위해 조직된 부인평화협회는 아직 그다지 큰 단체가 되지 않았지만, 협회 의 취지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대체로 부인이 공명하는 바로, 이 평화사 상은 전 일본 부인 사이에 상당히 퍼져있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충돌 입니다. 잘못은 그들에게 있으며 어쩔 수 없는 자위수단이기 때문 에 국제연맹의 규약에도 반하지 않으며, 또한 일본 부인으로서는 이유 여 하에 관계없이 국가와 운명을 함께해야 하기 때문에 이상에 잘못된 것이 없다고 느껴도 그 때문에 국론의 일치를 방해하는 언동은 삼가야 합니 다. 30) 위의 글들은 평화실현의 주체인 부녀들의 이상도 중국이라는 특수 한 국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예외적인 것이며 그리고 그 이상 역시도 29) 福 井 むめ, 満 州 四 平 街 から ( 婦 女 新 聞 1931 年 10 月 18 日, 1636 號 ). 30) 理 想 と 現 実 の 衝 突 - 満 州 事 変 に 直 面 した 婦 人 ( 婦 女 新 聞 1931 年 10 月 18 日, 1636 號 )

290 中 國 史 硏 究 第 81 輯 (2012.12) 국가의 이해 틀 거리 안에 있어야 한다고 논하고 있다. 다음은 만주사변 이후 국제연맹과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조 사단을 파견하는 등 국제사회의 움직임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국제사회의 의구심을 받고 있지만 일본은 만주 거주 일본인의 생명, 일본의 재산의 안전과 특수권익을 옹호하고자 할 뿐 이며 영토적 야심은 없다 주장하였다. 우리는 지금 만주 점령을 일본의 정당한 행위라고 주장할 정도로 대담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는 신의의 나라이다. 31) 옛날이라면 우리나라가 점령하여 생각하는 대로 정치를 펼칠 수 있지 만, 현재는 이미 그런 제국주의적인 일은 불가능합니다. 만주 주민에 의한 신독립국을 건설시키는 방법 밖에 없어 준비가 지금까지 진행 중이 었습니다만, 이번에 張 學 良 의 錦 州 정부가 괴멸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주 저하고 있던 주민 중에서 선각자도 드디어 결심을 굳히고 신정권 확립에 착수한 듯합니다. 32) 만주사변이후 1932년 만주국 건국이 선언되고, 9월에는 日 滿 議 定 書 조인, 1934년 3월 帝 制 만주국이 성립하는 식으로 만주영유계획은 독 립국 건국 방향으로 움직이는데, 33)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독립국은 궁극적으로 동양의 평화 를 실현하 고자 하며 이를 위해 유교이데올로기가 동원되어 만주국의 존립을 합 법화시킨다. 만일 일본이 만몽에 대해서 영토적 야심을 갖고 있다고 하는 천박한 논을 전개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상술한바와 같은 실제의 만몽을 모르는 자이며 또한 지나 민중의 심리를 알지 못하는 소위 인식 부족의 무리입 니다. 한시라도 빨리 만몽의 천지에 평화의 이상향이 건설되기를 모 국의 여러분들과 함께 기원할 뿐입니다. 34) 31) 満 州 の 領 土 と 我 國 ( 婦 女 新 聞 1931 年 12 月 5 日,1643 號 ) 32) 時 事 問 答 満 州 事 変 の 其 後 ( 婦 女 新 聞 1931 年 12 月 13 日, 1644 號 ). 33) 야마무로 신이치(윤대석역), 키메라 만주국의 초상 (소명출판, 2009). 34) 滿 洲 四 平 街 聯 合 婦 人 會, 母 国 の 諸 姉 へ ( 婦 女 新 聞 1932 年 1 月 12 日 ).

婦 女 新 聞 을 통해서 본 근대 일본의 중국 표상과 젠더 ( 李 宣 坭 ) 291 평화의 이상향 의 건립은 왕도정치의 실현 을 통해서 라고 다음과 같이 논한다. 지나 본토는 오늘날 군벌이 서로 패권을 다투어 왕도정치 같은 것은 흔적도 없습니다만 만주국에서는 그 폐해에 비추어 유교를 이상으로 하 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35) 다음은 帝 制 만주국의 출현은 동양의 평화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 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이는 만주의 민중들이 기뻐한다는 주장이다. 만주 건국 공작이 완성되어 3천만 민중이 환호하는 바일뿐 아니라 우 리나라로서는 서로 함께 동양의 평화를 확보할 협력국의 기초를 다진다 는 의미에서 처음부터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며 동양의 평화를 영 원히 확보하기 위해서 이것이 최상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 리나라가 제국주의적 야심을 충족하고자 했다면 만주국은 오늘날과 같은 발달을 보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표방하고 있는 일본이 동 양 혼란을 기도한 것으로 중외에 신뢰를 잃어 폭탄을 안고 방황하는 것 같은 위험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36) 그런데 이러한 왕도 와 동양평화의 실현 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일본 의 여성에게 요구된 역할이 있다. 동양평화 의 실현과 만주국에서 왕 도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여성은 일만융화를 위한 역할을 위임받는 다. 그 일환으로 1931년 全 滿 婦 人 團 體 聯 合 會 가 조직된다. 전만부인연 합단체의 全 滿 隣 保 事 業 이야말로 일본에 대한 세계의 오해를 일소하는 수단이다. 이는 사회사업임과 동시에 국가사업이다. 모든 부인이 일치 해서 도와야 한다. 37) 여기서 인보사업이란 병사의 주택 건설과 조선 인과 만주인의 지식계발과 생활향상을 위한 원조를 의미하였다. 이 사업(=인보사업)은 만주국을 이상의 낙원으로 만드는 기초적, 문화 적, 인도적 시설로 게다가 부인의 손에 의하지 않으면 완전히 목적을 달 성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 두 사업이 정비되지 않으면 우리 군부의 35) 時 事 問 答 王 道 主 義 とは? ( 婦 女 新 聞 1932 年 4 月 10 日 ). 36) 待 た々る 満 州 帝 国 ( 婦 女 新 聞 1934 年 1 月 28 日 ). 37) 是 々 非 々 ( 婦 女 新 聞 1932 年 4 月 24 日 ).

292 中 國 史 硏 究 第 81 輯 (2012.12) 대활약도 지속되기 어렵고, 만주국의 왕도주의도 실현불가능하다. 38) 그런데 일만융화를 위해서 계발되고 향상되어야 하는 것은 만주 여 성인데, 이들 만주여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대체로 만주부인은 일본인의 아내로서는 낙제입니다. 대체로 만주의 가정에서는 女 中 이라는 것은 없고, 일본에서는 부인이 하는 일을 모두 남 자가 하고 있습니다. 만주 부인은 대부분이 밤에도 늦고 아침에도 늦기 때문에 여중은 아이가 학교에 가는 준비를 도와주기위해 고용되는 실정 입니다. 그래서 청소는 물론 요리하는 일도 모두 남자가 합니다. 부인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면, 대부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고 놀고 있습니다. 이렇다 할 가정 일을 돕거나 자신이 솔선해서 하는 일이 없습 니다. 이래서는 도저히 일본인의 가정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일본의 부 인이 자진해서 만주로 들어가 일본류의 가정교육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진정한 일만융화의 목적은 달성할 수 없을 것입니다. 39) 실제, 가사와 육아에 불성실한 만주 여성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만주 국 적십자사 가정보건부 양성소가 개설되어 만주여성을 모집하여 3개 월간 이 양성소에서 일본어, 요리, 청소, 세탁, 작법을 가르치고, 1년간 각 가정에서 실습시켜 근면하게 이행한 사람에게 졸업증서를 주었다. 이 교육에 참가했던 교육자 일본인 여성은 다음과 같이 만주여성에 대 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틈만 나면 드러누워 자고 있는 여자아이들을 맡아 앉는 습관을 가르치 는 것이 가장 곤란했다. 만주인은 가정에서는 남자가 일하고 여자는 놀고 있기 때문에 일하는 것을 가르치는 일로 고생했다. 노동을 비하하는 사 상, 습관을 타파하는 것이 아주 어렵다. 40) 그런데 이 교육에 참여한 만주인 여성은 다음과 같은 소감을 피력 38) 滿 洲 國 と 日 本 婦 人 ( 婦 女 新 聞 1932 年 5 月 15 日 ). 39) 日 満 永 遠 の 結 合 には 日 本 婦 人 の 努 力 による 満 州 婦 人 の 訓 育 が 必 要 ( 戸 田 貞 三 講 演 から) ( 婦 女 新 聞 1933 年 7 月 9 日 ); 小 原 国 芳, 私 の 見 た 満 州 婦 人 ( 婦 女 新 聞 1935 年 1 月 1 日 ). 40) 高 橋 千 代 子, 満 州 視 察 記 1" 狭 い 日 本 は 嫌 いです" 濱 江 省 緩 化 県 鉄 道 自 警 村 を 視 る ( 婦 女 新 聞 1933 年 12 月 3 日 ).

婦 女 新 聞 을 통해서 본 근대 일본의 중국 표상과 젠더 ( 李 宣 坭 ) 293 하고 있는데, 이 내용을 보면 그다지 성공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가정보건부는 가정에 유익하기 때문에 들어왔다. 입소 후 청소에 대해 서 정말 잔소리가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죽는데 이런 시끄러 운 일 하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 때때로 생각하지만 일본 주부는 엄 청 바쁘지만 남자는 조금도 일하지 않습니다. 41) 위의 글은 만주 여성의 입장에서 일본의 정책에 대해 느끼는 소감 인데, 그것을 시끄러운 일 이라고 폄하하거나 가사일 부담이 지나치게 일본 주부 에게 과중되는 것에 대한 문제점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어 흥미롭다. 만주 식민화의 정당성을 위해서 왕도가 실현되는 제제로 만 들고 이곳을 문화국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집에서 빈둥거리는 만 주 여성이 일하도록 만드는 것, 가사 노동의 주역으로 만들어 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즉 일본 여성이 가사 일을 잘하지 않는 만주 여성을 교화시키는 것, 그것을 통해서 왕도가 실현된다는 주장인데, 유교와 젠 더의 절묘한 결합을 엿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청일전쟁 의 승리로 고양된 국가의식이 부국강병을 위해 가정과 육아의 중요성 을 일깨우면서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가정 이라는 역할 분담이 확립 되었다. 이 역할 분담은 天 分 에 맞는 것 즉 우열이 아니라 남녀 역할 이 동등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생각되면서 양처현모사상을 폭넓게 받 아들이게 하였다. 42) 婦 女 新 聞 은 성별 역할 분업에 입각하여 국가에 공헌하는 양처현모사상을 주창하고 그것을 체현 하고 있는 일본여성을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보고 있었다. 이러한 주장은 만주와 조선여성들 에게 마찬가지로 주창되었다. 43) 41) 高 橋 千 代 子, 満 州 視 察 記 2 働 く 満 州 娘 の 声 赤 十 字 社 家 庭 保 健 婦 養 成 所 生 徒 座 談 会 ( 婦 女 新 聞 1933 年 12 月 10 日 ). 42) 가와모토 아야, 일본: 양처현모 사상과 부인개방론 ( 역사비평 52, 2000); 小 山 静 子, 良 妻 賢 母 という 規 範 ( 勁 草 書 房, 1991). 43) 小 薗 崇 明, 1900 年 代 の 婦 女 新 聞 にみる< 朝 鮮 >の 女 性 - 構 成 される 他 者 /< 良 妻 > 論 を 背 景 に ( 専 修 史 学 44, 2008).

294 中 國 史 硏 究 第 81 輯 (2012.12) Ⅳ. 支 那 : 야만성 그러나 노제국 婦 女 新 聞 에서는 중국을 지나 혹은 청 으로 명명한다. 지나는 일 본의 메이지시대에 청제국의 명칭으로 사용된 청국보다 더 넓은 의미 를 지닌 명칭으로서 대중화되었다. 婦 女 新 聞 에서 지나와 청으로 나 뉘어 쓰였을 때도 여기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은 용법이었던 것으로 보 인다. 44) 다음은 지나라는 용어에 대해서 당시 의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문) 지나에서는 또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왜 이러한 전쟁이 끊 이지 않는 것인가요? 또한 현재 누구와 누가 싸우고, 어느 쪽이 유리한가 요? 답) 지나라고 하면 화냅니다. 얼마 전 중화민국외교부에서는 우리 국호 는 중화민국인데 지나라는 구명칭을 지금도 사용하는 것은 좋지 않다. 이 후 공문서에 지나라고 쓰면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러나 우리 일본인끼리는 지리적으로 지나라고 부르는 쪽이 알기 쉬우니 까 기자도 여기서 지나라고 쓰지만, 이는 중화민국을 지리적으로 부르는 것으로 민국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선 이야기해두고자 합니 다. 45) 여기서 지나 라는 호명에 대한 중국 측의 대응과 중국이 지나라는 호칭에 내재된 의미에 예민하게 반응하였다는 사실을 인지한 가운데에 44) 지나 는 20세기 전반기에 일본에서 중국을 부르던 가장 일반적 명칭이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중국의 명칭은 메이지유신(1868) 이전의 일반적 명칭이었던 중국 으로 복원되었다. 근대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기간에 다양한 집단들이 이 질성을 강조하기 위해 지나 를 사용했다. 예컨대 국학자들은 중국 이라는 용어 에 담긴 야만, 문명, 혹은 내부, 외부라는 의미에서 일본을 분리하기 위해 지 나 를 사용했다. 20세기 초 중국 혁명가들은 자신들을 청 왕조의 만주족과 구 별하기 위해 그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20세기 초 일본에서 지나 는 근대 아시아 국가인 일본과 대비하여 과거에 빠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국을 가리키는 말로 출현했다. 스테판 다나카(박영재외 역), 일본 동양학의 구조 (문학과 지성사, 2004), p18. 45) 時 事 問 答 支 那 の 南 北 戦 ( 婦 女 新 聞 1930 年 6 月 8 日, 1565 號 ).

婦 女 新 聞 을 통해서 본 근대 일본의 중국 표상과 젠더 ( 李 宣 坭 ) 295 서도 지나를 고집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롭다. 와세다 대학의 쓰다 소키치( 津 田 左 右 吉 : 1873-1961)는 지나 가 19세 기 말과 20세기에 역사적으로 재생했으며 동양 으로 대변되는 일본의 새로운 [광의의] 이념적 공간 속의 한 대상으로 변형되었다고 지적했 다. 다시 말해서 동양 은 지나 와 다른 아시아적 존재들을 포괄하고 위치지우는 문화유형학과 더불어 특정지역에 대한 권리 주장을 위한 개념적 장( 場 )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46) 동양 이라는 장에서 지나 는 단 지 현재의 일본을 규정하기 위해 만들어져 새로이 호명된 객체였다. 그런데 이러한 호명에 응대함으로써 지나 는 주체로 거듭 난다. 47) 다음은 구체적으로 지나를 어떠한 방식으로 논하고 있는가에 대해 서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은 야만적 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데, 혼인제도와 전족 등 여성들의 지위를 통해 중국의 야만성이 주로 논해진다. 청국에 체재할 때 대가의 혼례에 초대받아 갔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혼례를 위해 향응실을 새로이 세우기 때문에 1년에 걸쳐 준비한다고 합 니다. 당일이 되면 사위가 말을 타고 와서 신부를 데리고 갑니다. 부 모나 형제, 혹은 가족 중에서 한 사람도 따라 오지 않고 정말로 신부 혼 자서 갑니다. 그로부터 상당히 기습적인 것은 우선 혼례 다음날 가장 먼저 공자 그리고 천신 지신 앞에서 삼궤구고두를 하고 조상신에게 예를 올립니다. 이 피로연은 신부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로 볼 수 있는데, 예부터의 관습이라고 해도 실로 참혹하기 짝이 없는 야만적 풍습 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부는 피로연이 끝날 때까지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정말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48) 일부다처제도로 첩, 여자들 간의 갈등도 극심합니다. 어쨌든 지나 부인에 대해 실로 동정의 마음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49) 46) 스테판 다나카(박영재외 역), 일본 동양학의 구조 (문학과 지성사, 2004), p20. 47) 이점에 대해서는 중국의 언론매체 분석을 통하여 앞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살 펴보고자 한다. 48) 東 洋 婦 人 会 主 事 清 藤 秋 子 氏 談 話, 支 那 の 風 俗 ( 一 ) ( 婦 女 新 聞 1906 年 2 月 26 日, 303 號 ).

296 中 國 史 硏 究 第 81 輯 (2012.12) 지나의 부인은 모두 아름답습니다. 특히 아이들은 흰 분과 립스틱을 바르고 마치 인형과 같습니다, 그러나 교육 수준은 아주 낮아서 단지 누 군가 밥을 먹여주기만 하면 만족하는 식입니다. 결혼도 인격적 결합이라 고 전혀 생각하지 않고 결혼이란 돈으로 여자를 사는 일입니다. 돈 이 있는 남자는 몇 명의 여자라도 삽니다. 그러나 여자는 원래 돈으로 팔 렸기 때문에 남편이 몇 명의 아내를 가져도 조금도 불평을 하지 못합니 다. 그 중에는 지극히 적은 소수의 자각한 부인도 전혀 없지 않지만, 대 다수는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50) 위의 세 개의 인용문은 중국의 혼례제도자체의 폭압성, 그리고 야만 적인 매매혼과 다첩제를 문제삼지 못하는 중국의 부녀들에 대한 서술 이다. 다음은 중국 전족에 대한 서술인데, 당시 전족에 대한 오리엔탈 리즘적 시각이 그대로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일반 부인은 물론 모두 전족을 하고 있습니다. 지나인은 모두 피부를 노출하는 것을 그 이상 없는 치욕으로 생각하여 팔목, 발목까지 감싸고 있었습니다. 전족의 내부 등 결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지만 나는 특별히 부탁하여 볼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싫 은 것으로 발가락은 모두 발밑에 밀착하여 주먹 진 것처럼 됩니다. 교실 에서도 발가락 사이에서는 끊임없이 농이 흘러 두 번 다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얀 가루를 그 곳에 산포한다고 하였지만 무슨 인과 로 그런 괴로운 짓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너무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 었습니다. 다소 상류 부인은 학교 참관에 와서도 이 전족 때문에 교내를 일순 할 뿐 보행이 어려워 교실에서도 복도에서도 걸터앉을 수 있는 곳이 있으면 곧 걸치고 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녀처럼 항상 일하는 것이 익숙한 사 람은 전족에도 아주 익숙하여 나의 방에 있는 하녀는 우리들도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의 높은 건조대까지 한손으로 세탁물을 들고 계단을 올라갑 니다. 그 하녀가 항상 선생님은 발이 커서 부럽습니다 라고 하였습니 다. 51) 49) 東 洋 婦 人 会 主 事 清 藤 秋 子 氏 談 話, 支 那 の 風 俗 ( 二 ) ( 婦 女 新 聞 1906 年 3 月 5 日, 304 號 ). 50) 勝 泉 古 屋 信 子 氏 談 片, 北 京 土 産 話 ( 婦 女 新 聞 1928 年 7 月 1 日, 1464 號 ). 51) 歸 朝 者 春 山 雪 子 女 史 談 話, 淸 國 長 沙 みやげ( 上 ) ( 婦 女 新 聞 1906 年 8 月 13 日, 327 號 ).

婦 女 新 聞 을 통해서 본 근대 일본의 중국 표상과 젠더 ( 李 宣 坭 ) 297 전족은 주로 남방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어서 북경에서는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얼마간 있습니다. 체조 등을 시키려고 하면 다른 사람들 과 마찬가지로 걸을 수 없어 불쌍하지만 관계없이 함께 하도록 하고 있 습니다. 전족은 점차로 줄어들어 현재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항 상 전족을 없애고자 한다면 체조를 시키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합니다. 52) 즉, 일부다첩제, 혼례제도의 야만성, 전족, 낮은 교육 수준 등 여성지 위의 열악함을 특징으로 지나를 묘사하여 문화적 야만성을 지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나는 노제국으로 묘사되어 과거 속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 다고 논하고 있는데, 그러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지녔던 영향을 무시 할 수 없는 존재로 보고 있어 옷, 음식, 문학 등을 소개하는 글들도 다 수 볼 수 있다. 53) 지나는 세계의 舊 國 으로 4천년의 文 華 가 그 극에 달하여 정월의 의식은 얼마간의 변천을 겪었다고 해도 반드시 의미 심원한 것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54) 북경성은 어떻게 보아도 동양의 伏 魔 殿 이다. 오래되어 낡은 커다란 성 벽에 둘러싸인 이 도시, 벗겨진 금박이 빛나고 있는 마을 그 중에는 피 같은 색의 벽과 백골 같은 돌난간으로 만들어진 어전이 있다. 거대한 괴 물저택과 같다. 이곳의 주인공 서태후는 흰 분을 짙게 바르고 요염한 젊은 모습을 만들어, 그것이 음모의 중심에서 여러 가지 인간세계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그림이다. 지금 이 복마전적 북경을 탁월한 화공에게 라도 그 리게 하여 후대의 기념으로 남기면 어떨까. 이것도 동양인의 명물 중 하 나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55) 일본은 메이지유신의 대개혁을 행한지 41년이 되어, 문무에서 서양문 52) 服 部 博 士 夫 人 談 話, 北 京 の 女 子 敎 育 ( 婦 女 新 聞 1906 年 9 月 17 日, 332 號 ). 53) 松 宮 しん 子, 季 節 向 支 那 料 理 - 材 料 五 人 前 ( 婦 女 新 聞 1931 年 7 月 26 日, 1624 號 ); 花 崎 禎 子, 支 那 女 流 文 学 者 列 伝 ( 一 - 十 ) ( 婦 女 新 聞 1931 年 9 月 6 日, 1630 號 -1931 年 11 月 15 日, 1640 號 ). 54) 早 稲 田 大 学 教 授 中 桐 確 太 郎, 一 風 変 わった 支 那 の 正 月 ( 婦 女 新 聞 1916 年 1 月 1 日, 815 號 ). 55) 北 京 より ( 婦 女 新 聞 1916 年 6 月 30 日, 841 號 ).

298 中 國 史 硏 究 第 81 輯 (2012.12) 명의 정수를 빼내어 장점을 취하여 국가의 진운을 꾀한 결과 일청, 일 러의 대전역에서 이겨 최후의 승리를 차지하고 당당하게 세계 1등국의 대열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를 본 이웃의 노제국도 처음으로 긴 잠을 깨고자 분발해야한다고 느끼게 되었다. 56) 지나인은 교활하다고 하지만 곳곳에 貧 民 借 本 所 라는 곳이 있는데, 이 는 환전소 조합 등이 만든 사회사업으로 빈민에게 10, 5원정도의 장사밑 천을 무이자, 무저당으로 빌려주는 곳이다. [빌린 사람]모두가 거의 갚는 다고 하는데, 빌려주는 쪽이 신용 있는 자를 구별하는 눈이 발달했다고 할 수 있으며 잘 단속하는 곳이 있는 듯하다. 재미있는 인종이다. 신경이 한없이 굵고 우아하여 서양인들이 모두 실성하고, 조선인이 말라 비뚤어 지고, 일본인이 신경쇠약이 되면 [지나인이]조금씩 날개를 펴지 않을까. 점점 쇄락해가고 그것이 명백한 노대국임에도 그러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57) 지나인은 뭔가 모두 낡고 허름하게 보여도 윤택하여 어딘가 생을 즐기 고 있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멍하게 기선을 바라보며 홀려있어도 저래서 저녁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조선인이라고 한다면 지나인 이라면 동전 몇 개라도 가지고 있을 것 같고, 가지고 있다면 그것으로 김 이 모락모락 나는 속이 가득 찬 만두 또는 기름이 줄줄 흐르는 무엇인가 를 먹고 있을 것 같다. 가지고 있지 않으면 하루정도 먹지 않아도 태연하 게 내일 힘써 일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 2,3일 먹지 못하고 쪼들리면 모두 아시아의 태풍 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58) 연경대학 지나 건축의 일부 형태와 색채를 취하고(건축의 배치나 근본양식은 취하지 않고), 콘크리트로 만들었으며 지붕의 사람과 소와 말 의 장식, 빨간 기둥, 난간의 오채색 일본에서는 건축에서 國 粹 를 이러 한 형태로 응용하지 못해 부럽다. 연경대학에서 양장을 잘 입은 여 사가 안내해 주셨다. 영어도 달변이다. 일부다처도 받아들이는 무리 지만, 같은 피를 나누고 같은 풍토에서 자란 지나 부인도 자유지위를 주 고 일광에 익숙하게 하고 이런 생생한 미인이 된다고 실제 견본을 보여 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59) 56) 時 事 解 說 一 記 者, 清 國 の 維 新 ( 婦 女 新 聞 1908 月 10 日, 431 號 ). 57) 市 河 晴 子, 支 那 から - 外 遊 見 聞 記 ( 婦 女 新 聞 1931 年 7 月 19 日, 1623 號 ). 58) 市 川 晴 子, 支 那 から - 外 遊 見 聞 記 ( 婦 女 新 聞 1931 年 6 月 21 日, 1618 號 ). 59) 市 河 晴 子, 支 那 から - 外 遊 見 聞 記 ( 婦 女 新 聞 1931 年 8 月 2 日, 1625 號 ).

婦 女 新 聞 을 통해서 본 근대 일본의 중국 표상과 젠더 ( 李 宣 坭 ) 299 인용한 글들 중 앞의 4개의 글들에서는 중국 을 세계의 舊 國, 동양 의 복마전, 이웃의 노제국 등 이미 위엄이 사라진 과거의 존재로 묘 사하면서 후대의 기념 이 될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그 후의 글들에서는 재미있는 인종, 아시아의 태풍, 국수의 응용, 활기찬 지나 부인 등 조선에 대한 묘사처럼 60) 완전히 존재를 비 하하여 서술하지는 않는다. 또한 오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광대 한 지나 문단 등 중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글들도 적지 않게 실리고 있다. Ⅴ. 유교: 가족주의와 혁명 지나 문명 의 세례를 받고 이룩한 현재의 일본 문화의 특질에서 유 교의 가족주의(제도)를 계승하면서 혁명을 지양하는 논의가 상당부분 을 차지하고 있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아래는 유교의 가족제도와 혁명에 대한 양의적 논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婦 女 新 聞 에서 아시아관련 논의는 문명 대 야만의 구도 속에서 주 로 논하고 있으며, 또한 같은 유교문화권에 속한다고 생각되는 중국과 조선에 대한 묘사에서는 딜레마를 읽어낼 수가 있다. 다음은 조선 여 성의 지위 저하가 유교로 인해서 생겨났다고 논한 기사이다. 고려시대에는 男 卑 女 尊 의 풍속이 있어, 혼인 시 남자는 여자의 집으로 장가가는 습관도 있고 일가의 재산은 여자가 관리하였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에 대해 위세를 떨 수 없는 약점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유교가 점차 한국에 침투함에 따라서 여자는 남자에게 시집가는 습속이 생기고 남녀 의 지위가 일변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그 시대에 여자의 재혼을 금하는 법령이 새롭게 시행되어 부녀는 어떠한 학대를 받아도 남편의 집을 떠날 60) 조선인에 대해서는 상당히 무기력하게 담뱃대를 물고 단지 시간을 보내는 남 자,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무의미한 빨래를 하고 있는 여성들로 표상한다. 拙 稿, 近 代 中 國 과 日 本 의 언론매체에서 보이는 朝 鮮 女 性 表 象 硏 究 ( 東 洋 史 學 硏 究 116, 2011) 참조.

300 中 國 史 硏 究 第 81 輯 (2012.12) 수 없는 경우에 빠졌다. 오늘날 조선의 부녀자는 감옥 같은 주거에서 거 처하며 최근 조선에서 돌아온 자들에 따르면 지금도 여전히 일생동안 내 방의 어둡고 깊은 곳에 거주한다고 한다. 모르는 손님은 물론 지인일지라 도 남자인 경우에는 나와 응대하는 일은 전혀 없으며 손님이 오면 부인 은 홀연히 귀신이라도 만난 듯이 낮도깨비처럼 내방에 숨어서 손님의 시 선을 피한다. 게다가 손님을 병풍 틈으로 훔쳐본다. 소위 내방은 치외 법 권 아래 있으며 유교주의의 가르침은 남녀 7세가 되면 동석하지 않 으며 이후 혼인 때까지 여자의 눈에 비치는 남자는 오로지 아버지와 형 제만이며, 일단 혼인이 성립되면 부인은 한 남편이외 이 세계에서 남자라 는 이름이 붙는 사람을 볼 수 없으며, 외출 시에는 반드시 밀봉한 가마를 타고 바깥세상을 볼 수 없다. 게다가 가마에 타고도 외출하는 일은 지극 히 드물며, 단지 일 년에 한번은 관례처럼 외출하는 것이 허락된다. 그러 나 번화가를 산보해서는 안 되며 인적이 드문 산등성이에 올라가 사람들 이 개미처럼 보이는 정도에서 멀리 하계를 내려다본다. 이조차도 엄숙한 감독자가 따라오며 한국 부인의 경우 또한 불쌍하다. 61) 이 글은 고려시대는 남비여존 이었으나 유교가 전래되면서 남존여 비 로 역전되었다고 하여 조선여성의 열악한 상황의 근저에는 유교가 있다고 본다. 이는 당시 일본에서 청나라와 조선의 열악함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자주 유교의 폐해 가 거론되었던 흐름 속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유교는 위의 흐름과는 상이한 차원 에서 호명된 측면이 있다. 일본은 근대 이후 자신만의 차별성을 유지 하면서도 이질적인 서구의 것들을 자신에 맞게 개작해 사회를 쇄신하 고자 할 때, 즉 서구 자본주의에 의해 길러진 개인주의와 경쟁심에 대 한 해독제로 사용하기 위해 과거의 유교를 적극적으로 끌어 들인다. 따라서 조선이나 중국을 비난하는 데에 유교를 인용하면서 동시에 일 본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화하기 위해 유교의 윤리체계에 의존하는 모 순을 내정한다. 또한 동양의 일본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보루 로서 유교를, 그리고 그것의 담지자로서 일본 여성(부녀)의 부덕을 이 야기 한다. 이는 앞장에서 보았듯이 만주관련 담론에서와 아주 유사하 61) 扶 桑 生, 韓 国 の 婦 女 子 ( 婦 女 新 聞 1901 年 9 月 23 日, 72 號 ).

婦 女 新 聞 을 통해서 본 근대 일본의 중국 표상과 젠더 ( 李 宣 坭 ) 301 다고 할 수 있다. 만약에 우리나라 사람의 손에 의해 배운 청국 여자가 여권 운운하면서 급격하게 수천 년 동안의 풍습을 타파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실패로 끝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청국에서 여자교육에 종사하는 우리 부인들이 결코 문명의 바람을 불어넣지 않고 착실하고 진지하게 그리고 주의해서 유교를 기초로 이를 활용하고 교묘하게 이용하여 시세에 적응 하는 여자를 양성할 것을 간절히 바란다. 사람들은 유교라는 이름을 듣고 즉각 부인의 적과 같이 생각하지만 그 字 句 에 구애받지 않고 정신을 길 러 변통활용하면 20세기에 적응할 여자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게다가 유교의 실천적 세력에 이르면 서양도덕보다도 오히려 훨씬 뛰어 나다. 청나라의 여자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은 세심한 주의와 각오가 필요 하다. 62) 이글은 청국 여성을 교육해야할 주체로 일본 부인을 상정하면서 그 교육의 내용은 여권 이 아니라 유교에 입각한 교육이어야 한다고 설파 하는 글로 상당히 흥미롭다. 구체적으로 교육내용을 명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유교의 원류인 중국 여성을 유교의 정신으로 교육시킨다는 것 은 앞에서 간략하게 언급했듯이 유교를 근대 국민국가에 적합하도록 재구성한 양처현모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교육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한때 유교문화의 영향아래서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일본을 망 국하였거나 그런 위기에 처해있는 아시아 각국과 차별화하기 위해 역 사를 인용한다. 즉 본래(=고대)의 일본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天 照 大 神 ) 여신을 선조로 두고 있었던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전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중세이후에 유교에 오염되었 지만 메이지 유신이후 서양문명과 우리 황후폐하의 장려 로 고대의 지 위를 되찾게 되었다는 주장이 행해진다. 이러한 아시아관에서는 오리 엔탈리즘의 지적 지배하에 놓여, 호미바바가 이야기했던 모방 63) 을 엿 볼 수 있지만 거기에는 서양에 대한 트라우마의 극복이 아시아를 매개 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2) 社 說, 淸 國 の 女 子 敎 育 ( 婦 女 新 聞 1906 年 9 月 10 日, 331 號 ). 63) 호미바바(나병철 역), 문화의 위치 (소명, 2012).

302 中 國 史 硏 究 第 81 輯 (2012.12) 도덕 풍속 습관에 의해서 아내의 순종을 요구한다고 해서 지금 구미 도덕가가 상상하는 것 같은 열등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는 없으며, 新 渡 戸 박사가 부인을 멸시하는 유교 불교의 대대적인 세력 도 일본 부인을 열등한 지위로 타락시키지는 못한 것은 일종의 불가사의 한 현상이다 라고 하였으며 또한 일본의 무사도는 일본 고유의 것으로 약한 자는 돕는다고 하는 무사의 의협심과 양친을 존경한다고 하는 것에 서 모든 부인을 현재와 장래 어머니로 신성시하는 바이며, 岡 倉 씨도 일 본에서 부녀자는 다른 동양제국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존경을 받으며 구주 제국의 자매가 갖는 모든 권리를 지니는 것도 그들은 이야기하지 않을 뿐 일본부인은 가정을 자기의 활동구역으로 생각하여 사회를 도외 시 한다 라고 하였다. 64) 新 渡 戸 와 岡 倉 두 사람 모두 근대 일본 이라는 것의 내용을 채웠던 사상가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서구 대 동양, 동양안의 유교 불 교 대 무사도처럼 서구와의 차이 속 동양, 동양 안에서의 차이를 통한 우월성 확립을 통한 자기 형성을 꾀하는 구도를 엿 볼 수 있다. 이 때 비서구 식민지 사회에서 여성은 전통과 근대, 낡은 것과 새로운 것, 민 족적인 것과 외래의 것이라는 대립을 둘러싼 논쟁의 장으로 사용되어 왔다. 여기서 아시아 여성과 일본 여성에게 막대한 영향을 준 유교는 같은 유교라는 틀로 묶을 수 있지만 질적으로 다른 차이를 지니고 있 다고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서구의 충격 이라는 변수로 인해 서 어떠한 형태로든 변화를 강제 당한 일본 사회에서 서구가 규정한 아시아에 대한 저항의 담론으로 단지 아시아 여성에 대한 사실 논의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일본에서 아시아 [여성]담론이 생성되는 데에는 고유한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이 관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 64) 村 田 生, 外 人 の 眼 に 映 じたる 我 國 の 婦 人 および 結 婚 ( 三 ) ( 婦 女 新 聞 1906 年 2 月 26 日, 303 號 ). 이 글에서 등장하는 新 渡 戸 稲 造 (1862-1933)는 농학자, 교육자, 윤리철학자로 국제연맹사무차장을 거쳤으며, 유려한 영문으로 쓴 Bushido: The Soul of Japan ( 武 士 道 )는 오랫동안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서로 읽혀지 고 있으며, 예전 일본은행권 5천엔권의 초상으로 유명하다. 東 京 女 子 大 学 初 代 学 長 이기도 하다. 岡 倉 天 心 (1863-1913)은 사상가, 문인, 철학자이다. 근대 일본 의 미학연구의 개척자이며, 東 京 美 術 学 校 (현재 東 京 藝 術 大 学 )설립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日 本 美 術 院 을 세웠다. 미술잡지 国 華 를 창간하였다.

婦 女 新 聞 을 통해서 본 근대 일본의 중국 표상과 젠더 ( 李 宣 坭 ) 303 다. 부부는 일심동체 나쁜 성질을 가진 남편이 그렇지 못하게 하여 아 주 평화로운 가정을 만들어 동양부인의 미덕은 이런 경우에 유감없이 발휘되는 것에 아주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부부는 일심동체 이는 세 계 어느 때 어느 인류를 막론하고 여전히 부부도덕의 이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를 실현하고 실행하는 것이 누구에게도 쉬운 일 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우리는 서양의 부부관계에서 거의 불가능함을 볼 때 홀로 동양의 부인이 잘 인내하고 잘 참고 일심동체로서 부부 상 호의 최고 이상을 실현함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의 부부는 단지 서로 허용한 개인과 개인의 계약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결혼 후 라고 해도 한편의 이해를 위해서 합의 이혼을 행 하는 것을 조금도 괴이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대해서 철두철미하게 개인 본위이다. 동양에서 가족제도를 취한 결과 가정의 기초는 완전한 부부 이며 개 인으로서 남편 또는 아내가 아니다. 이에 완전한 부부를 실현하기 위해서 일심동체 의 부부도덕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동양의 옥토에서 자라고 성장한 동양의 도덕종교는 서양문명의 비료에 의해 더욱 발달 진보하여야한다. 동양의 가족제도가 근저부터 개조되지 않는 한 동양의 부덕이 더욱 광채를 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65) 위의 글에서는 동양의 부인, 즉 열악한 지위에도 잘 견뎌내고 순종 하는 존재가 개인주의에 바탕한 서양의 부부관계 보다 우월하다고 주 장한다. 이는 일본의 근대 초기 봉건제의 유물, 유교에 의해 배양된 의 식형태를 뿌리부터 제거하고자 하여 엄격한 비판대상이 되었던 문명 개화운동 시기를 거쳐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체제 내 개혁기에서 시 작되는 유교의 여성관 부정은 이를 대신할 새로운 여성모델을 창출하 는 담론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유교의 부덕은 일본 에서 새로운 여성상의 규범에 재편되어 계속해서 존속한다. 66) 이는 앞 의 만주의 경우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의 여성정책과 왕도정치가 65) 狹 布 生, 東 西 の 夫 婦 道 德 ( 婦 女 新 聞 1911 年 12 月 1 日, 601 號 ). 66) 하야카와 노리요 외(이은주 역), 동아시아의 국민국가 형성과 젠더 여성표상 을 중심으로 (소명출판, 2009); 佐 藤 貢 悦,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의 유교의 演 變 - 유교르네상스 에의 시각 ( 한국학논집 27).

304 中 國 史 硏 究 第 81 輯 (2012.12) 중첩되는 곳에서는 일본의 부덕이 강조된다. 위의 글은 婦 女 新 聞 도 그러한 일본의 정책을 반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 다. 아래는 유교 婦 德 =동양의 부덕이며 그것을 체현(대표)하고 있는 것 은 일본의 부덕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식으로 담론이 구성된 예를 볼 수 있다. 서양문명이 수입된 이래 장점을 취해 우리 단점을 보완한 것이 적지 않습니다만, 그것이 지나자 일본 고유의 장점까지 버려서 완전히 서양풍 으로 되고자 한다면 실로 국가의 기초를 위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일러전 쟁에서 세계 강국으로 알려져 있던 러시아에 대해 당시 미개국이라고 생 각된 일본이 승리를 얻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원인을 찾고자하여 전쟁 후 외국인 중 일본을 연구하는 자가 많아지고, 종종 그 연구 결과를 발표하 고 있습니다만, 일본에 오래 있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한 외국인은 이를 일본 고유의 가족제도에 있다고 논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합 니다. 우리나라의 가족제도에는 자신을 희생하여 가족을 위해 꾀한다 는 미풍이 있습니다. 이것이 다른 나라와 다른 점으로 자신은 전사해도 나중에 남겨진 가족이 훗날 명예롭게 죽은 유가족이라고 존경받을 수 있 어 기쁘게 전지를 향합니다. 충군의 사상도 있습니다. 그 사상을 길러내 는 것도 가족제도입니다. 남편이 출정해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강한 마음은 정숙한 일본 고유의 여덕으로 둘러싸였기 때문에 귀한 것으로 단 지 강한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습니다. 67) 위의 글에서는 가족주의나 충군이 유교이데올로기에서 일본 고유의 이데올로기로 전환되었다면서 일본에서 유교사상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 동양과의 관계설정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나아가 혁명을 둘러싼 논의에서도 동양 안에서 일본의 고유성, 구별 짓기가 행해진다. 즉 유교사상 중에서 통치자가 백성들을 자비롭게 통 치해야 하는 책무를 지키지 않으면 타도할 수 있다는 유교의 혁명 가 능성을 가리키는 천명( 天 命 ) 사상을 부정 68) 하는 것이다. 당시 婦 女 新 67) 日 本 固 有 の 女 德 ( 婦 女 新 聞 1911 年 12 月 8 日,603 號 ). 68) 스테판 다나카(박영재 외역), 일본 동양학의 구조 (문학과 지성사, 2004), p.195.

婦 女 新 聞 을 통해서 본 근대 일본의 중국 표상과 젠더 ( 李 宣 坭 ) 305 聞 은 지나의 혁명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그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이 를 이끈 사람은 누구인가. 어떤 역사를 거쳐 오늘의 성공에 이르렀는 가. 그리고 지나의 변화 가 일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등으로 상당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69) 이를 보여주듯이 신해혁명과 북벌 그리고 통일의 과정에 대해서 아주 자세한 보도 70) 를 행하고 있 다. 다음은 중국의 정세에 대해서 논하면서 일본 국체의 우위를 어떤 식으로 논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외국문명 중에서 가장 일찍 우리나라에 수입된 것은 지나 문명입니다. 이는 최초에는 조선반도 각국을 매개로 간접적으로 수입되었습니다. 후에 는 지나와의 국교가 열려 직접 그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지나에 서 특히 여기서는 유교와 한학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유교에서 이야기 하 69) 婦 女 新 聞 에 실린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다. 時 事 解 説, 支 那 革 命 の 話 - 国 民 党 の 三 民 主 義 と 五 権 憲 法 (1928 年 6 月 24 日, 1463 號 ); 勝 泉 古 屋 信 子 氏 談 片, 北 京 土 産 話 (1928 年 7 月 1 日, 1464 號 ); 時 事 問 答, 対 支 問 題 (1912 年 1 月 20 日, 1493 號 ); 時 事 問 答, 支 那 又 も 戦 争 - 蒋 介 石 と 馮 玉 祥 (1912 年 5 月 26 日, 1511 號 ): 內 外 時 事, 國 民 政 府 正 式 承 認 (1929 年 6 月 9 日, 1513 號 ); 時 事 問 答, 東 支 鐵 道 (1929 年 7 月 28 日, 1520 號 ); 內 外 時 事, 露 支 国 境 に 兵 を 集 めて 対 置 - 我 が 國 仲 介 に 起 たん (1929 年 7 月 28 日, 1520 號 ); 時 事 問 答, 支 那 の 南 北 戦 (1930 年 6 月 8 日, 1565 號 ); 時 事 問 答, 日 支 条 約 問 題 (1929 年 6 月 2 日, 1512 號 ); 時 事 問 答, 支 那 の 共 産 軍 (1930 年 8 月 3 日, 1573 號 ); 時 事 問 答, 支 那 北 方 政 府 -いよいよ 近 々 成 立, (1930 年 9 月 7 日, 1578 號 ); 時 事 問 答, 支 那 政 局 の 急 轉 - 張 学 良 氏 の 武 力 調 停 北 方 政 府 北 平 を 去 る (1930 年 9 月 28 日, 1581 號 ). 70) 婦 女 新 聞 에 실린 관련 기사들은 다음과 같다. 時 事 解 說, 淸 國 動 亂 の 由 來 (1911 年 10 月 20 日, 596 號 ); 淸 國 大 動 亂 (1911 年 10 月 20 日, 596 號 ); 淸 國 大 動 亂 と 我 が 居 留 民 (1911 年 10 月 20 日, 596 號 ); 淸 國 革 命 戰 亂 (1911 年 10 月 27 日, 597 號 ); 淸 國 革 命 亂 (1911 年 11 月 3 日, 598 號 ); 時 事 解 說 昨 今 の 淸 國 (1911 年 11 月 10 日, 599 號 ); 淸 國 革 命 亂 (1911 年 11 月 10 日, 599 號 ); 淸 國 革 命 亂 問 答 (2) (1911 年 11 月 10 日, 599 號 ); 淸 國 革 命 亂 續 報 淸 國 革 命 亂 問 答 (3) (1911 年 11 月 17 日, 600 號 ); 淸 國 革 命 亂 續 報 (1911 年 11 月 17 日, 600 號 ); 革 命 亂 中 の 淸 國 (1911 年 12 月 8 日, 603 號 ); 社 說 淸 朝 の 最 後 (1912 年 2 月 16 日, 613 號 ); 時 事 問 答, 支 那 の 戦 況 (1926 年 4 月 18 日, 1346 號 ); 時 事 問 答, 上 海 の 混 亂 (1927 年 2 月 27 日, 1394 號 ); 時 事 問 答, 支 那 動 乱 の 眞 相 - 附 国 民 党 の 三 民 主 義 (1927 年 4 月 10 日, 1400 號 ); 時 事 問 答, 支 那 問 題 ( 再 び) (1927 年 4 月 17 日, 1401 號 ); 時 事 問 答, 最 近 の 支 那 (1927 年 5 月 15 日, 1405 號 ); 時 事 問 答, 北 支 の 危 急 (1927 年 5 月 29 日, 1407 號 ); 時 事 問 答, 支 那 問 題 (1927 年 7 月 31 日, 1416 號 ).

306 中 國 史 硏 究 第 81 輯 (2012.12) 는 것은 인간 일상의 실천 도덕으로 특히 인의충효를 중시하였습니다. 따 라서 우리나라 고유의 도덕사상에 잘 부합하였습니다. 그러나 단지 지 나의 국가 성격이 혁명의 나라로, 유교에도 그 사상이 포함되어 있습니 다. 이는 우리국체와 아주 다르지만 그래도 우리 국민은 그 폐해가 있는 것을 버리고 그 장점만을 취하여 우리나라에 유용하게 하였습니다. 71) 당시 유교를 국가정책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동시에 유교가 포 함하고 있는 광범위한 의미 가운데서 선별적으로 채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인의충효 사상은 적극적으로 재구성해내고, 혁명사상은 배 제해야할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혁명이란 무슨 뜻인가. 천명을 새로이 한다는 의미입니다. 혁명은 어떤 나라에서 일어납니까? 지나는 예부터 100년, 200년, 300년 마다 반 드시 혁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도 한번이라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역사를 가진 국가는 없습니다. 세계에서 건국 이래 한 번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나라는 유일하게 일본뿐입니다. 이점은 우리나라의 존귀한 점으로 만세일계 황통의 감사한 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영원히 지켜가 는 것이 우리 국민의 최대임무입니다. 72)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만세일계의 황통 을 지닌 일본에 대한 자부심 을 고취하고 이를 지켜나가는 것은 국민의 최대임무 임을 강조하고 있 는데 이것이 당시 일본의 국체를 지지하는 것임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 도 될 것 같다. 1911년 중국에서 일어난 신해혁명을 보도하는 기사를 통해서 일본 체제의 우위를 강조하여 혁명의 여파가 미치지 않도록 하면서, 충을 강조하는 효과를 꾀하고 있음을 다음의 글들에서 알 수 있다. 건강한 사람이 건강의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고, 부가의 자제가 재산의 진가를 모르는 것처럼, 3천년이래의 무결한 국체를 유지하고 왕위의 융성 과 함께 궁극적인 것이 없다고 믿고 있는 우리 국민은 이 국체의 감사함 을, 이 국가의 진가를 너무 가볍게 간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웃 71) 東 京 女 子 高 師 文 科 4 学 年 石 川 ふさえ, 我 國 における 外 国 文 明 の 同 化 ( 婦 女 新 聞 1912 年 7 月 5 日, 633 號 ). 72) 淸 國 革 命 亂 問 答 ( 婦 女 新 聞 1911 年 11 月 3 日, 598 號 ).

婦 女 新 聞 을 통해서 본 근대 일본의 중국 표상과 젠더 ( 李 宣 坭 ) 307 나라의 이러한 현상을 눈앞에 보면서 우리 국민은 3천년 동안 변하지 않 고 문을 열어 전 점원이 일치 협력하여 총명한 젊은 주인을 도와 가운이 더욱 번성해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나인은 자국의 부 진과 혼란을 우리나라 때문이라고 보아 이전부터 원망하는 것 같은데 스 스로 반성하지 않고 남을 원망하는 그 마음이 지나를 오늘날로 이끈 최 대 원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을 때 우리국민도 또한 반성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73) 그리고 아래의 글은 혁명으로 천자 가 사라져 지배의 실체를 잃게 된 혼란과 입헌제의 강건함과 체제 우위성을 비교하여 논하고 있다. 267년 동안 청조에 의해 유지되어온 지나는 혁명 이라는 한바탕 연극 으로 무너져 청조는 광서황제(선통제의 오기-인용자)로 종언을 고하고 무 대는 공화정체로 바뀌었다. 지나 역대 혁명사를 보면 한번 그 조정을 무 너뜨리면 어제까지는 하늘처럼 받들던 황제도 갑자기 그 지위에서 떨어 져 단지 일개 평민이 되고 심하게는 산적을 주살하는 6척 높은 나무의 하늘에 목을 잘라 재차 통치자가 될 수 없다는 경계로 삼는다는 것을 혁 명사가 이야기하고 있다. (연구 자료로 삼기 위해 고관 정치인이나 시정의 사람들에게 지나의 장래에 대해서 물으니) 지금까지는 4억 백성의 사상을 통합하는 중심점이 있었지만 혁명으로 그것이 하루아침에 근본부터 파괴되어 버려 지금은 그 때문에 기댈 곳이 없어졌습니다. 때문 에 전도를 비관합니다. 라고 하였다. 그럼 중심점은 도대체 무엇인가? 물으니 다름 아닌 천자입니다. 천자를 중심점으로 사상을 집중하고 있었 습니다만, 지금은 천자가 권좌에서 내려와 그 대신에 주어진 것이 공화 두자입니다. 이 공화 두자를 우리 앞에 내놓고 사상을 이 앞에 통일하라 고 강요해도 우리는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천자는 구체적입니다. 따라서 무지한 하층인민은 천자님 으로 하느님처럼 이를 받듭니다. 영국도 여황폐하로 헌법이 구체화되어 있습니다. 일본도 메이지천황 폐하가 자신이 앞서서 헌법을 흠정하고 헌법 발포식을 행하셨는데, 우리 국민은 이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천자님은 실로 감사하다. 이번에 우리에게 비단 법의를 입혀주셨다 라고 합니다. 74) 즉, 중국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정치체제의 중심이었던 천자가 사라 73) 日 本 国 民 たる 喜 び - 支 那 の 現 状 に 対 比 して ( 婦 女 新 聞 1931 年 9 月 27 日, 1634 號 ). 74) 早 稲 田 大 学 教 授 青 柳 篤 恒, 欧 州 戦 乱 と 支 那 ( 上 ): 戊 申 婦 人 グラブ 講 演 一 節 ( 婦 女 新 聞 1914 年 11 5 月 20 日, 757 號 ).

308 中 國 史 硏 究 第 81 輯 (2012.12) 지고 공화정체 가 되었지만, 백성들은 중심축인 천자가 사라짐으로써 전례없는 혼란에 휩싸였다고 한다. 이에 반해 일본은 입헌군구제로 중 심축인 천황이 건재함으로써 정체가 흔들림 없음을 대비해서 강조하고 있다. 婦 女 新 聞 은 또한 200명의 여자가 군사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손씨 미망인(송경령-인용자)이 가을 일본에 올 것 약속하였다. 고하면서 熊 希 齡, 朱 其, 何 香 凝 등의 중국의 혁명가들이 일본 부인에 비해서 얼 마간 수양이 부족한 감이 있지만 남북 부인 모두 아시아민족의 단결은 우선 부인의 힘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자각이 있다. 75) 고 서술하고 있 다. 그리고 중국의 혁명을 제대로 이해하여 교육해야 할 책임의 주체 로 일본 부녀들을 언급한다. 청국황제가 드디어 퇴위 상유를 발하였다. 종래 동양에서 가장 因 循 守 舊 로 보였던 청국민은 고래부터 동양에 유례가 없던 공화국을 등장시켰 다. 이는 실로 세계를 놀라게 하고 특히 건국 이래 혁명의 쓴맛을 본 바 가 없는 우리 국민이 가장 크게 놀랐다. 청조의 말로에 충군열사가 없 는 것은 그 건국의 역사가 덕에 있지 않고 무력으로 성립된 까닭이 다. 이를 생각하고 그들을 보아 우리는 지금처럼 우리 국체의 존엄과 우리 신민의 충절이 우연이 아님을 알고 이 나라에 태어난 것에 감사해 야 한다. 청조의 멸망은 우리나라에는 무엇보다도 반면교사이이며 이 커 다란 사건을 어머니인 부인 제군이 충분히 이해하고 해석해서 다음 세대 의 국민인 그 자녀를 교육할 때에 참고로 삼아야한다. 신문지를 매일 손 에 들고 소설과 살인사건의 기사만 읽어서는 안 된다. 청조의 멸망에 깨 닫지 못하는 부인은 어머니로서의 자격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국민으로 서의 자격도 없다. 76) 이글을 보면 당시 제국 일본은 중국의 혁명에 대단히 놀라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청조를 위하여 목숨을 거는 사람이 부재하다며, 이는 공화제와 직접적 연관이 없이 일본의 신민의 충절과 대비시켜 체제적 우위로 설명하여, 우월한 체제를 공고히 하자는 주장 으로 연결된다. 이는 한편으로 생각하면 중국의 공화혁명의 여파가 일 75) 南 方 支 那 婦 人 の 活 躍 ( 婦 女 新 聞 1927 年 3 月 6 日, 1395 號 ). 76) 社 說 淸 朝 の 最 後 ( 婦 女 新 聞 1912 年 2 月 16 日, 613 號 ).

婦 女 新 聞 을 통해서 본 근대 일본의 중국 표상과 젠더 ( 李 宣 坭 ) 309 본으로 넘어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도 읽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 보다도 이 글에서 다음 세대의 국민을 교육하는 주체로 부인들을 상정 하면서 중국의 혁명을 제대로 전달해야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어머니 로서의 자격과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가늠하는 잣대라고 하고 있는 것 이다. Ⅵ. 맺음말 婦 女 新 聞 에서 다루고 있는 중국 관련 담론은 지역적으로는 타이 완, 만주, 지나로 카테고리화 하여 논하고 있고 그 외 중국의 영향으로 유교, 그 중에서도 가족제도와 혁명에 관해 다루고 있다. 이들 중국 지 역, 문화와 관련된 묘사는 당시 일본의 동양에 대한 지식체계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근대 일본의 여성 언론 매체인 婦 女 新 聞 은 아시아( 東 洋, 亞 東, 東 西 )와 아시아 각국에 대해 적지 않은 담 론을 생산해내었다.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면 서구의 오리엔탈리즘과는 다른 자기 인식과 아시아 여성에 대한 담론을 만들어 내었음을 엿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과 관련한 담론이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적 지적 지배의 한 양태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은 주로 국가 관념의 부재, 문화국 자격의 결락, 게으른 지 나 여성, 야만적 혼인제도, 전족, 등으로 표상되며, 만주 영유를 구체화 하는 과정 속에서 일본을 동양평화의 구현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형성 해 가거나 노회한 제국 지나를 대신한 동양의 맹주, 그러한 존재로서 충분한 자기 인식을 형성하기 위해서 유교를 편의적으로 차용하는 모 습들을 엿 볼 수 있다. 그리고 또한 그러한 자기 인식의 형성에 젠더 가 아주 절묘하게 결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나의 야만성을 보여주고 있는 실례로서 들고 있는 것이 전족과 야만적 혼인으로 표상 되는 여성지위의 열악이며, 만주국 여성의 문명화 와 동양평화 를 구

310 中 國 史 硏 究 第 81 輯 (2012.12) 현하기 위해서 유교의 가족주의를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일본여성들 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문명화의 기준은 일본의 양 처현모 이데올로기 이다. 이처럼 중국에 대한 묘사는 일정한 오리엔탈리즘적 문법을 모방하 고 있었기 때문에 서구와 조우한 일본이 서구에 의한 타자화에 대한 거부가 동양(중국)을 매개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婦 女 新 聞 을 통해서 본 근대 일본의 중국 표상과 젠더 ( 李 宣 坭 ) 311 ( 中 文 抄 錄 ) 從 婦 女 新 聞 論 析 日 本 的 中 國 表 像 及 其 社 會 性 李 宣 坭 婦 女 新 聞 曾 為 日 本 最 具 影 響 力 的 女 性 輿 論 媒 體 之 一. 本 文 通 過 解 讀 婦 女 新 聞 論 析 其 有 關 中 國 的 議 論. 婦 女 新 聞 涉 及 中 國 的 議 論, 以 地 域 來 劃 分, 大 可 分 為 台 灣, 滿 洲, 支 那 等 地. 此 外, 婦 女 新 聞 還 涉 及 在 中 國 社 會 有 著 深 遠 影 響 的 儒 教 文 化 中 的 家 族 制 度 和 革 命. 這 些 關 於 中 國 地 域 與 文 化 的 描 述, 鮮 明 地 反 映 了 當 時 日 本 對 東 亞 的 認 知, 認 為 其 是 瞭 解 日 本 對 東 亞 知 識 體 系 的 重 要 材 料. 但 是 日 本 女 性 輿 論 媒 體 之 一 的 婦 女 新 聞, 製 造 了 不 少 關 於 亞 洲 及 其 國 家 的 議 論. 分 析 這 些 內 容, 隱 約 發 現 它 有 別 於 西 歐 所 說 的 東 方 主 義, 而 創 立 了 對 於 亞 洲 女 性 的 自 我 認 識. 但 是 想 要 否 定 關 於 中 國 的 議 論 不 是 日 本 式 東 方 主 義 的 一 種 形 態, 也 有 些 困 難. 如 上 所 述, 中 國 主 要 以 缺 乏 國 家 意 識, 不 稱 文 明 國 度, 懶 惰 的 支 那 女 性, 野 蠻 的 婚 姻 制 度, 纏 足 等 來 表 像, 而 且 日 本 在 滿 洲 日 本 化 的 進 程 中, 把 自 己 偽 裝 成 實 現 東 亞 和 平 的 救 世 主, 以 及 取 代 日 漸 衰 落 的 中 國 成 為 東 亞 的 新 霸 主. 在 這 過 程 中, 爲 了 充 分 形 成 自 我 認 識, 隱 隱 能 看 到 日 本 選 擇 性 的 借 用 儒 教, 以 及 這 種 自 我 認 識 的 形 成 非 常 巧 妙 地 與 其 社 會 性 相 結 合. 反 映 支 那 野 蠻 性 的 實 例, 如 纏 足 和 野 蠻 性 婚 姻 來 體 現 的 女 性 地 位 的 卑 賤, 以 及 爲 了 體 現 滿 洲 國 女 性 的 文 明 化 與 實 現 東 亞 和 平, 主 張 把 貫 徹 儒 教 家 庭 主 義 的 日 本 女 性 為 主 體. 這 時 文 明 化 的 衡 量 標 准 是 日 本 式 賢 妻 良 母 的 意 識 形 態. 주제어: 부녀신문, 근대일본, 중국인식, 오리엔탈리즘, 젠더 關 鍵 詞 : 婦 女 新 聞, 現 代 日 本, 中 國 認 識, 東 方 主 義, 社 會 性 別

312 中 國 史 硏 究 第 81 輯 (2012.12) Keywords: Huzo-xinbun, modern Japanese, Chinese representation, gender (원고접수: 2012년 10월 31일, 심사완료: 12월 10일, 심사결과 통보: 12월 15일, 수 정원고 접수: 12월 21일, 게재 확정: 12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