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一 九 四 五 年 以 降 の 北 東 アジアと 教 会 : 日 本 国 憲 法 との 関 わ りから( 韓 国 語 ) Author(s) 松 本, 周 Citation 聖 学 院 大 学 総 合 研 究 所 紀 要, No.55 別 冊, 2013.3 : 55-70 URL http://serve.seigakuin-univ.ac.jp/reps/modules/xoonips/de tail.php?item_id=5009 Rights 聖 学 院 学 術 情 報 発 信 システム : SERVE SEigakuin Repository and academic archive
1945 년 이후의 북동아시아와 교회 일본국헌법과의 관계에서 마쯔모토 슈 1 서론 본강연의 시점과 목적 본 공동연구는 2010 년 합병 100 년 를 기하여 개시되어, 연구시기를 구분 한 3 년의 연구로서 계획되었다. 2010 년은 선행연구의 확인 및 1910 년이전 의 한일기독교회에 대해서, 작년 2011 년에는 3 1 독립운동과 민족자결주의 를 주제로 1910 년대의 한일교회에 대한 연구발표가 행해졌다. 그리고 금년도 1945년 이후 양국의 민주주의 헌법과 기독교회 를 주제로 하여 제2차세계대 전 이후의 현대사를 다루면서, 3 년의 계획은 종결된다. 작년, 장로회신학대학에서의 강연에서 Liberal Democracy 를 핵심어로, 1910 년대의 세계동향과 양국교회를 분석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본 공동연구 의 제안 취지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한일의 기독교사를 1910년을 기점 으로, 한일관계의 미래를 향해 전향적으로 재 파악한다. 북한, 중국을 시야에 넣어, 북동아시아의 기독교회의 교류와 협력의 기초를 다진다. 또한 연구의 기 초로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제정된 한일양국의 헌법연구를 둔다. 그래서 작 년의 강연에서는 양국헌법이 공유하는Liberal Democracy 의 이념이 어떠한 역 사적 동향을 통하여 1945 년 이후의 양국의 기초구조(Constitution) 에 채용되 었는가. Democratization의 역사 동향의 관계에서 1910 년대를 파악하였다. 그 리고 본년도는 시대적으로 1945 년 이후를 대상으로 하여, 헌법과 기독교회의 관계를, 신학적 관점에서 다루려고 한다. 1945 년 8 월 15 일은 북동아시아의 역사상 결정적인 날이었다. 그것은 천황 의 옥음방송 에 의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의 날이다. 동시에 한국과 또한 일 본의 제국지배를 받은 여러 국가에 있어서는 광복 의 날이었다. 여기서부 터, 그리고 이 날부터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Johann Wolfgang von 1945 년 이후의 북동아시아와 교회 55
Goethe) 1, 괴테의 이해와는 다른 의미로, 1945 년 8월15 일은 북동아시아의 역 사에 있어서 그 이전과 이후를 결정적으로 나눈,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날 이전의 일본은 종종 제국일본, 일제 라고 불려진다. 그러면 그 이 후에는 어떻게 불려져야 하는가, 일본 ( 국 ) 이다. 이 호칭 변경의 근거는 헌 법의 상이에 있다. 대일본제국헌법 에서 일본국헌법 으로, 그것이 1945 년 8월15 일 이전과 이후에 있어서 일본의 기초구조의 변화이다. 2 그러므로, 본 고에서는 1945 년 이후의 일본사회와 교회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일본국헌법에 착안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2 1945 년 8 월15 일 이후의 사회상황 문제는 기본적으로 신학적인 것 이라고,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 때, 연합 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는 연설하였다. 그가 무엇을 신학적 문 제로 파악했는지, 전후의 발언내용을 이하에 기재해 보고자 한다. 인류는 창세기이래 평화를 추구해 왔다. 국가간 분쟁을 예방하거나 해결하 기 위한 국제적인 기구를 모색하려고 장구한 세월 동안 여러 방법을 시도해 왔 다. 애초부터 시민 개개인 간에는 유효한 수단이 모색됐으나, 더욱 큰 국제적 인 규모로서의 기구는 한 번도 성공한 예가 없다. 군사동맹도, 세력균형도 그 리고 국제적인 연맹 조직도 모두 실패했으며, 전쟁이라는 참혹한 방법만을 남 겨두었다. 이 전쟁은 그러한 방법에 호소하는 마지막 기회였다. 보다 탁월하고 보다 공 정한 제도를 궁리해 내지 않으면, 우리는 아마겟돈(세계 최후의 대결전)에 치 달을 것이다.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신학적인 것이며, 우리들이 간직해온 과학, 예술, 문학등 유례없는 진보, 게다가 과거 2천년동안의 물질적 문화적 진보와 병행해서, 정신의 재 부흥과 인류의 성격 개선이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3 이 표현에서 명백히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세계평화달성의 제도화가 바로, 맥아 더의 신학적 문제의식이었다는 것이다. 그 의미로서는 본고도 역시 신학적 문제의식으로 일관되어 있다. 1945 년 이후의 북동아시아의 문제를 고찰할 경 우, 3 차 및 핵무기에 의한 세계대전을 초래하지 않기 위한 세계평화 의 희구 와, 헌법의 근본이념인 민주주의 의 심화를 위한 실천에 입각해야 한다. 그 리고 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본고 전체에서 언급하는 것과 같이, 신학 56
적 인 고찰이 요청된다. 1945 년 이후의 일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평화 와 민주주의 의 두 개의 핵심어에 주목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본현대사의 연구자 존 W다우어 4 도, 역사로서의 전후 일본을 뒤돌아 볼 경우, 이 두 단어가 상당히 시사하는 점이 많다 5 고 지적한다. 이 민주주의와 평화주의, 양자는 모두 일본국헌법 의 제정으로 일본에 전해졌다. 도입의 역사적 경위에 있어서 양자는 공통되나, 이 후의 논술에서 확인하듯이, 일본국헌법과 교회의 관계에서, 양자는 자주 복 잡하게 얽힌 양상을 드러내게 되었다. 다음 절 이하에서 구체적으로,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 관계를 고찰하는데 있어서, 당시의 일본사회에서의 정신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 점에서 주목해야 할 두 사상조류가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해 두고 싶다. 하나는 당시의 공산당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이고, 그것에 의한 마르크시즘 의 신장이다. 패전 직후에는, 이 옥중( )비전향 이라는 사실이 현재로 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존경받고 있었다. 왜냐하면, 위정자나 지식인의 대다수가 전쟁중 전쟁후에 전향을 반복하여, 많은 사람들이 전쟁중의 자신에 대해 뉘우침을 느끼고 있던 상황하에서, 이러한 공산당 간부만이 전쟁반대로 일관하고 있었던 것 6 이 배경이 되어, 공산주의사상이 심리적으로 일정한 평 가를 받고 있었다. 또 하나, 전쟁 직후의 일본사회에 있어서, 사회적 주목을 받은 집단은 기독 교 교회이었다. 이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점령국의 종교, 자유와 민주주의를 초래하는 종교로서 환영받았다. 이 점에 관해서, 패전후의 일본에 창설된 국제 기독교대학에 객원교수로 된 스위스의 신학자 에밀 브루너는 다음과 같이 말 했다. 미국헌법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자유로운 것으로 창조되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즉 평등 및 자유라는 두 단어가 있다. 이 미국 헌법이 바로 최초의 근대적, 민주주의적 헌법이었다, 역사의 흐름을 뒤 돌아 볼때,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추진력이란 것이 칼빈파 신교운동(프로테스탄티즘)에서 유 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역사가로서 일본에는 어떻게 하여 민주주의가 존재 하게 되었는가 라고 물어볼 때, 우리는 민주주의가 서양에서 수입되었다고 고 백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특히 현재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민주적 일본국 헌법에도 해당된다. 여러분 모두가 알고 있는 것 처럼 이 새로운 민주적인 헌 법은 점령하고 있던 미국의 영향을 받고 만들어 졌다. 7 브루너는 근대민주주 의 형성의 역사적 경위와 1945 년 이후의 일본의 관계를 헌법의 선으로 명시하 1945 년 이후의 북동아시아와 교회 57
였다. 패전후의 일본에서, 기독교는 서구문화의 정신적 기반으로 이해되어, 민 중들로 부터 호의를 받아, 그것으로 인해 기독교 붐 이 일어났다.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이 두가지가 1945년 이후에 인심을 사로잡은, 새로 운 정신적 조류였다. 그리고 양자를 절충하여 수용할려고 하는 시도도 보였으 며,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49 년의 아카이와 사카에의 일본공산당입당 결의 표명 문제 8 로서 나타났다. 이러한 언동을 하게 된 아카이와의 내적 윤리에 대해서, 크리스천 사회과학자인 스미야 미키오는 한쪽은 칼 바르트, 또 한쪽 은 칼 마르크스를 떼어 내어 자기 것으로 하여, 두 가지의 양립을 주장한 것이 다 신앙은 신앙, 신앙으로 재촉된 사회적인 실천은 사회적인 실천, 사회적 인 실천을 생각할 경우, 컴뮤니즘이 바로 과학적 진리이다, 과학적 진리와 복 음의 진리란 차원이 다르다, 그러니 차원이 다른 진리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다 진리로서 받아 들이면 되는것이 아닌가 9 라고 생각했다고 해설한다. 이러한 신앙과 사회윤리의 이원론적 사고법, 즉 내면적 신앙심은 기독교에 의거하면 서, 사회실천은 마르크시즘을 원용하는 자세는, 아카이와 개인에 그치지 않고, 많은 기독교인에게서 볼 수 있다. 이 점은 후에 고찰하는 것과 같이. 일본인 기 독교인의 헌법 이해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3 민주주의 헌법과 일본국헌법 9 조 다. 먼저, 본절의 논의에 관계되는 주된 역사사항에 대해서 연대순으로 기재한 1946년11 월3일 일본국헌법 공포 1947년5월3일 일본국헌법 시행 1948년 소련에 의한 베를린 봉쇄, 베를린 장벽 설치 1950년6월 한국전쟁 (6.25 전쟁 ) 발발 미국에 의한 일본재군비에 대한 정책 전환 시작 1951 년 경찰예비대가 발족 1951년9월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 (GHQ에 의한 일본점령이 종료) 세계정세하에서 냉전 대립 구조의 영향을 피하지 못하여, 자유주의 국가들 로만 평화조약 조인을 하게 되었다. 단지, 기독교와의 관련에서는, 동경대학 58
총장으로서 무교회 신자였던 난바라 시게루가 소련을 비롯하여 공산주의 국가 들을 포함한 전면 강화를 주장하여, 당시의 수상 요시다 시게루로 부터 난바 라 동대 총장이 미국에서 전면 강화를 외쳤으나, 이것은 국제문제를 모르는 곡 학아세( )의 무리로서 학자의 공론일 뿐이다 10 고 심하게 비난받았 다.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는 평화조약과 같이 미일안전보장조약이 체결 되어, 그것으로 인하여 미군 주류 및 일본에 의한 기지 제공 등이 점령종결후 에도 계속되도록 되었다. 이 조약은 냉전구조안에서 자유주의 진영의 안전보 장권내에 일본이 위치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1954년 ( 경찰 예비대, 보안대를 거쳐 ) 자위대개편 발족 1960년 미일안보조약 개정 반대 운동 국회주변의 시위 참가자와 경찰대의 충돌에 의한 사망자 1962 년 일본기독교단 헌법 옹호에 관한 성명 발표 1965년 2월 미국 공군에 의한 북 베트남 폭격 개시 6월 한일기본조약 조인 8월 한국국회, 베트남파병에 합의 1973년 1월 베트남평화협정 ( 파리협정 ) 조인 상기의 연표에서 관찰 되는 것 처럼, 제 2 차세계대전후에 표면화된 미국을 비롯한 자유주의국가진영과 소비에트연방에 대표되는 공산주의국가진영과의 냉전구조는 긴장격화의 일로를 치닫았다. 냉전이 아시아에서 두개의 뜨거운 전쟁을 일으켜, 그것을 배경으로 미국은 일본 재군비로 정책을 전환했다. 이 국제정세 하에서 일본 국내에는 헌법개정 논의가 부상하게 되었다. 그것은 사 회적 배경으로 헌법 9조를 둘러싼 논의에 초점이 맞춰졌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헌법 논의에 두 특징을 가져오게 된다. 첫째는 헌법 재검토 문제가 법률론이 아니라, 한국전쟁의 발발과 그것이 진전하는 과정이라는 현실의 움직임에 대 응하여, 일본의 방위문제에 대한 정치논의로 급부상 한 것이다 11 고 설명 되 도록, 헌법의 연원에 있는 사상이나 역사의 음미보다 개헌 호헌 양파의 태도 결정이 현실 정치에서의 태도 결정 내지 지지정당과 겹쳐 주장된 점이다. 둘째 는 일본국헌법의 평화조항, 구체적으로는 헌법 9 조에 논의의 초점이 맞춰지고, 헌법의 다른 조항에 대한 관심은 희석되거나 정치 동향에 이용되는 결과가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헌법 논의였던 만큼, 평화헌법 즉 헌법9조 개정 반대 1945 년 이후의 북동아시아와 교회 59
로서 일본국헌법 옹호론이 주장되었다. 그 배경에는 주변 아시아 국가에의 침 략에 대한 반성과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로 대표되는 전쟁 피해 의 인식이 존재하였고, 세계 평화에 대한 소원이 대부분의 일본국민에 의한 근 본적 주장이었다 12. 그리고 기독교인에 의한 헌법 옹호의 의견도 또한 성경에 입각하면서, 평화 희구를 중심 목표로 발언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우에무라 타마키 ( 일본 프로테스탄트교회 초대의 지도적 목사인 우에무라 마사히사의 딸 )의 발언에서 관찰할 수 있다. 우에무라는 일본의 역코스는 국민 생활의 각 방면에 폭로되어 왔다. 헌법, 민법의 개정이라든지, 천황 원수의 지위를 다시 주장하거나, 반동의 폭풍우가 사나워질 것 같다. 우리는 종전 이전의 일본의 정치적, 사회적, 가정적 모습의 재현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13 고 당시의 정치상황에서 헌법 개정 동향에 진지 한 우려를 표명하고있다. 그 동향에 대해 우에무라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평화 헌법 수호의 근거를 재군비의 문제에 대해서는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마26:52) 14 의 구절에서 찾았다. 이것은 복음서의 구절에서 절대평화주의를 도출하는 자세이며,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전쟁을 거부할 수 밖에 없다. 주 예수는 전쟁을 싫 어하시지 않았던가.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는 주께서 친히 포박 되었을 때의 말씀이 아니었던가. 15 우에무라는 이 지론을 국제정세 하 의 일본의 위치에도 전개하고 1962년의 내각헌법조사회 공청회에서 다음과 같 이 발언했다. 미 [ 미국 ], 소 [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은 입으로는 평화를 칭하 면서, 실은 핵전쟁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은 이 두 진영 사이에 서서 중재 역할을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는 믿습니다. 비무장 중립이야말로 현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안전보장인 것입니다. 16) 우에무라 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기독교사회윤리의 관점에서는 두 가지 문제가 지적되어 야 한다. 첫째로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의 구절과 비무장 평화주 의라는 현대 윤리가 직결된 것으로 인해, 일본국헌법 조항에 이르는 역사적 전 개에 대한 관점이 상실되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평화주의를 강조하면서, 그것을 민주주의 이념과 기본적 인권의 신학적 이해를 가지고 기초되어지지 않 았다. 두 번째 문제점은 헌법 9 조 옹호가 정치적 중립론으로 바꿔 주장된 점이다. 이 점은 일본사회 또한 정치 세력의 수단 으로의 호헌론에 교회도 빠질 방향 60
성을 이끌어 내어 버린다. 우에무라의 경우는 발언에 명료하게 나타나지 않아 도 일본교회의 영미와의 역사적 연속성을 실제체험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 에 이 점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 교회 전체의 경향으로서는 이 후 역사 추상적인 평화론으로 인해 교회의 사회 윤리적 자세가 혼란스럽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일본 교회에서의 당시의 헌법 옹호론은 일본국헌법 옹호 즉 헌 법 9조 중심, 나아가 비무장 평화주의의 주장으로 도식화 된 논조가 지배적이 었다. 그 언설이 가지는 문제점은 일본국헌법의 리버럴 데모크라시적 성격을 잃어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에 있었다. 이 문제는 그 후, 베트남 전 쟁에 일본 기독교회가 취할 태도를 놓고 논쟁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다음에 그 논의를 개관하기로 한다. 논쟁의 계기가 된 것은, 조직신학자인 오오키 히데오의 발언이었다. 그 주장 이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일본 교회의 반전평화운동의 자세에 대해서 재고 를 촉구하는 방법으로 발표됨에 따라 논란이 생겼다. 일본기독교단 월간지 신 토노도모 ( 신도의 친구 ) 1967 년 11 월호에서 오오키는 베트남 문제에 대한 시점 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의견을 표명했다. 저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 간에 결락된 시점을 다시 확실하게 끌어올려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바램이 있습니다. 결락된 시점이란, 일본이 세계에 공개적으로 그것이 일본의 방향이라고 발 표하고 있는 시점입니다. 그것은 헌법의 시점입니다. 일본의 대외적 대내적 행 동은 헌법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헌법의 중심 이념은 자유민주주 의이며, 그것이 일본의 국제적 위치를 규정하고 있으며, 또한 일본 특유의 것 으로 평화주의가 있습니다. 특히 민주주의는 일본의 국제 사회안에서의 시야의 좌표축이 되는 것입니다. 확실히 말하면, 일본은 금일 의 세계를 양분하는 가운데 소위 자유 진영에 속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 인식은 불쾌한 것일까요. (17) 이러한 주장에 대해 평화 지상주의에서는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반론이 제기 되었다. 그 반향이 컸던 까닭에 신도의 친구 1968 년 2 월호는 베트남 문제를 생각한다 특집 좌담회 18 를 개최하여, 기사로 게재하였다. 대담 형식이었기 때문에 논점이 불분명한 부분이 있지만, 오히려 논쟁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오오키와 대론자들의 발언을 열거하면, 시시도 유타카는 베트남 사람들에 게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생각 해야지, 그것은 미국식 자유와 민 1945 년 이후의 북동아시아와 교회 61
주주의가 되어 버립니다. 베트남에서는요, 호치민 밑에서 민족독립운동을 했 을 때는 민족이 독립하는 것이 자유의 획득입니다. 19 또한 다카쿠라 토오루 는 일본도 간접적이긴 하지만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에 협력하고 있습니다 (20) 라고, 그리고 시이나 린조우는 세계에서 보면 일본도 미국에 협력하고 있다고 보일 수 밖에 없다 (21) 고 말했다. 거기서는 증대한 군사력을 전개하는 미국에 대한 비판, 또한 일본의 재군비와 증강을 강요하는 것에 대한 반미적 자세가 평화지상주의의 입장에서 전개되어 있다. 부언하면, 이러한 평화주의 반미주의 사상의 존재가 그 후의 역사에 있어 서 일본 기독교단의 윤리적 태도 표명이 좌익 편향의 원인이 되었다고 해석된 다. 또한 교회와 사회와 이데올로기의 관계에 대해서, 일본의 이러한 상황과 비교하여 동시대의 한국은 어떠하였던가, 나중의 토론에서 상호 이해를 깊게 하고 싶다. 22 위의 비판에 대해 오오키는 논의가 평화라는 시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 은 맞습니다만, 헌법은 단지 평화 조항뿐만이 아닙니다. 또 다른 자유와 민주 주의 (영어로 리버럴, 데모크라시라고 하는게 더 정확하지만)라는 이념이 들 어가 있는 것입니다. 저희가 해외 문제를 생각할 때, 이 시점이 중요한 것입니 다 (23) 라고 반론한다. 덧붙여, 평화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 이해에 대해 미국 은 이 현실 세계 속에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군비 배경없이는 생각할 수 없 다는 게 상식입니다 24 라고 미국의 민주주의 정책과 군사력의 결합 인식을 언 급하여, 덧붙여 평화주의로 민주주의를 해내간다는 의미를 미국에 충분히 설 득해 가는 것이 일본인에게 주어진 헌법 옹호의 미국에 대한 외교정책이어야 한다 기독교회의 책임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25) 고 평화주 의 정책을 오히려 미국에 대해 주장해야 한다는 것을 제창했다. 다만, 평화주의로 민주주의를 해내간다는 의미 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명백하지 않다. 그 점이야 말로, 남겨진 과제로서 임하여야 한다. 평화 와 민 주주의 를 어떠한 관계에서 이해하고,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다음 논의의 논점 정리와 과제 공유를 위해, 양국 헌법의 관계 부분을 인용하고 싶 다. 대한민국헌법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 1 운 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 19 민주이념을 계 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 인도와 동 62
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 경 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 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 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 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 월 12 일에 제정되고 8 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1987 년 10월29 일 대한민국헌법 제 5 조 1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 쟁을 부인한다. 2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 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 26 일본국헌법 전문 일본 국민은 정당하게 선거된 국회의 대표자를 통해서 행 동하고, 우리와 우리의 자손을 위해 모든 국민과의 협화에 의한 성과와 우리나 라 전체에 걸쳐 자유가 가져오는 혜택을 확보하며, 정부의 행위에 의해 두 번 다시 전쟁의 참화가 초래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결의하고, 이에 주권이 국 민에게 있음을 선언하며 이 헌법을 확정한다. 본래 국정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 에 의한 것으로, 그 권위는 국민으로부터 유래하고,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 가 행사하며,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 이는 인류 보편의 원리이며, 이 헌법 은 이러한 원리에 기초한 것이다. 우리는 이에 반하는 일체의 헌법 법령 및 조칙을 배제한다. 일본 국민은 항구적인 평화를 염원하고, 인간 상호관계를 지 배하는 숭고한 이상을 깊이 자각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국민의 공정함과 신의를 신뢰하며, 우리의 안전과 생존을 유지할 것을 결의했다. 우리는 평화를 유지하고, 전제와 예속, 압박과 편협함을 지상으로부터 영원히 없애기 위해 노 력하고 있는 국제사회에서 명예로운 지위를 갖고자 한다. 우리는 전세계의 국 민이 다같이 공포와 결핍으로부터 벗어나, 평화 속에서 생존할 권리를 가진다 는 것을 확인한다. 우리는 어떠한 국가도 자국에만 전념하여 타국을 무시해서 는 안되며, 정치도덕의 법칙은 보편적인 것으로서, 이 법칙에 따르는 것은 자 국의 주권을 유지하며, 타국과 대등한 관계에 서고자 하는 각국의 책무라고 믿 는다. 일본 국민은 국가의 명예를 걸고, 전력을 다하여 이 숭고한 이상과 목적 을 달성할 것을 맹세한다. 일본국헌법 제9조 1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 1945 년 이후의 북동아시아와 교회 63
실히 희구하고, 국권발동으로서의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방기한다. 2전항의 목적 달성을 위해 육 해 공군 기타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리버럴 민주주의의 가치를 공유하는 한일 양국 헌법의 공통성은 양국 헌법의 전문에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양국 헌법에 현저한 차이가 발견되는 것은, 침략 전쟁의 부인 을 규정하는 대한민국 헌법 제 5 조와 일본국헌법 제 9 조, 특히 제 2 항이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국군에 관해 규정되어 있고, 일본 국헌법에는 군사력의 포기가 정해져 있다. 일본국헌법 9 조 규정의 특이성은 대 한민국 헌법5조와 비교하면 명백하다. 그러므로 한일 양국의 1945 년 이후를 민주주의 헌법의 가치 공유로서 인식 하고 덧붙여 동북아시아의 평화적인 장래 형성을 맞이하려고 하는 경우에 일본 국헌법9조를 어떻게 생각할지가 과제로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또한 양국 헌 법이 의존하는 리버럴 데모크라시의 이념의 역사적 원류가 17세기 영국의 청 교도 혁명 자유를 위해 국왕에게 저항하는 사상의 탄생에 있는 것을 확인한 다면, 특히 신학적 과제로 된다. 많은 일본인이, 그리고 기독교회도 1945 년 이전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반성 에 입각하여 일본국헌법 9 조를 중요시하며, 헌법개정에 반대하는 중요한 근거 로 해 왔다. 따라서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가지게 된다. 앞에서도 살펴 보았듯 이 일본국헌법9조의 무력 포기에서 도출되는 일본국헌법 옹호의 사상은 절대 평화주의 이며, 그것은 리버럴 데모크라시의 이념의 역사적 원류인 저항권 사상, 또한 거기에 입각하여 구축되는 개신교 교회의 사회 윤리와 모순되는 것 이 아닌가? 라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다만, 이 문제 제기에 대해, 개인의 저항권 과 국가의 자위권 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될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본고에서 상세하게 들어가지 않을 것이나, 단지 리버럴 데모 크라시 사회 체제의 국가는 국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을 지상의 목표로 하여 존립하고 있다는 이해를 제시해 두고자 한다. 리버럴 데모크라시의 역사적 연원에 거슬러 올라가면, 저항권 사상의 성립 이야말로 인권을 주장하고 옹호하기 위한 필수요건이었다. 다시 말해 저항권 을 인정하지 않고서,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는 것은 곤란하다. 기본적 인권은 생명 찬탈자인 절대 군주와 대치하는 태도로서, 생명의 자기 포기 자세에서 생 64
명의 자기 보존을 주장하는 저항권으로의 윤리적 변혁에 따라 출현한 권리의식 이다. 위정자에 대한 수동적 복종에서 생존권 주장으로의 전환은 국가 권력의 의미조차도 정반대로 전환시킨다. 즉 절대주의 국가의 권력 행사는 인민을 강 제로 복종시키는 목적이지만, 기본적 인권의 존중을 근본 기반으로 하는 민주 주의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기 위해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가 되 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가 경찰력을 유지하는 이유는 그 점에 있으며, 경 찰력은 불법자에 의한 인권 침해를 방지하기 위해 행사된다. 이 구조는 국내 관계에 그치지 않고, 국제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4. 결말 하나님의 나라 와의 관계에서의 교회와 헌법 앞절까지 논해 온 것처럼 기본적 인권과 저항권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다시 일본국 헌법9조2항을 고찰한다면, 그것을 단순한 절대 평화주의로 파악하기 는 어려워질 것이다.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 실히 희구하고, 국권발동으로서의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방기한다. 여기서 국제 평화는 국 제 간의 정의와 질서의 견지와 부즉불리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일본국헌법 옹호의 입장에서 주장되어야 하는 평화란, 불법자의 도량 발호를 간과하여 무저항과 생명포기를 자세로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다른 국 민의 생존권을 돌아보지 않는 침략자나 기본적 인권을 유린하는 독재자의 지 배하의 무 전투 상태로서의 평화도 아니다. 세계 보편적인 기본적 인권에 대한 박해와 침략에 대해서는 확고한 저항권을 발동하는 정의와 질서에 뒷받침된 평 화주의이어야 한다. 이 민주주의와 기본적 인권의 옹호가 현대 사회의 평화 형 성자인 교회의 윤리적 사명으로도 확립되어야 한다. 이상의 주장은 오늘날의 일본의 상황에서의 군사력 유지를 지지하고 정당화 하는 것을 의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점을 미리 확인한 다음에, 한일 양국 또한 동북아시아의 평화적인 장래를 형성하기 위해 다음의 사항에 대해 이후에 유익 한 토론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1945 년 이후의 아시아 역사에서 큰 전쟁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1950년6 월 25 일 1953 년 7 월27 일 ( 휴전 ) 의 6 25전쟁 ( 한국 전쟁), 또 하나는 베트남 전쟁(1960 1975년) 이었다. 게다가 두 전쟁에도 리버럴 데모크라시의 옹호 1945 년 이후의 북동아시아와 교회 65
가 관계되어 있었다. 그 때 일본국헌법 9 조의 존재에 의해 일본은 무력 행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전쟁을 배경으로, 일본은 경제적으로 발전했다. 이 현 실을 어떻게 생각 하는가. 일본국헌법 9조를 변경하여 일본도 군사력을 행사해야 하는가? 이를 긍정하 는 의견에 나는 앞서 언급했듯이 찬동할 수 없다.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의 발 언을 들으면, 군국주의의 재래를 깊이 우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국헌법 9 조를 유지하고 동북아시아를 보다 평화적인 관계에 이끄는 방안이 없을까 생각하여야 한다. 그 방도가 있다면, 일본에는 무엇이 필요하며, 한국을 비롯한 이웃 나라는 어떻게 생각 하는가. 이러한 물음은 궁극적인 의미로서는 현시점에서 정답을 찾을 수 없는 오픈퀘 스쳔에 머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유로 본고에서 답에 대한 아무런 방도를 나타재지 않는다면, 발제의 책무를 완수 한 것이 되지 않을 것 이다. 그래서 다음에 시론적이기는 하지만, 사견을 언급하고자 한다. 이 때 1945년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한일 양국의 헌법 변천사가 하나의 시 점을 제공한다. 그것은 양국 헌법의 개정 유무를 비교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 는 시점이다. 일본국헌법은 제정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개정이 이루 어지지 않았다. 또한 거기에는 개헌 반대, 헌법 옹호로서, 교회의 사회 윤리적 실천이 존재하였다. 그것에 비해 대한민국 헌법은 전문에 기록된 것 같이 개정 이 거듭되어왔다. 이번에 특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최근 1987 년에 행해진 개 정 (제6공화국 헌법 ) 이다. 왜냐하면 제9차 개헌은 국민의 민주주의의 열의 를 반영하여, 여야당 합의로 탄생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27 고 지적되는 것과 같이, 거기서 발견되는 것은 리버럴 데모크라시 헌법을 더욱 리버럴 데모 크라시적인 성격으로 하려는 개정의 동력, 자유와 민주주의를 희구하는 국민 정신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헌법을 더욱 리버럴 데모크라시 헌법으로 바꾸어 나갈 때까지의 민 력 ( ) 의 향상 이야말로 앞으로의 일본 기독교회가 지향해야 할 사회 윤 리적 자세가 아닐까. 그것은 다른 관점에서 파악하면, 1945년부터 현재까지의 일본의 모습이, 평화 헌법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인근 아시아 국 가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는가라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의 제국주의적 침략, 군 국주의 복고에 대한 우려를 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것은 현재의 일본국 헌법에 여전히1945년 이전의 잔재가 존재하는 것을 민감하게 감지되는 까닭이 아닐까. 이 점에서 기독교인으로 근현대 일본 사상의 연구자 인 다케다 키요코 66
의 천황관의 사상사적 연구에서 항복후의 일본에서 천황 의 지위, 즉 국체 가 장래에 어떻게 되는가라는 것이, 국민 의 운명보다 당시의 일본 정부의 최 대의 관심사였다는 것을, 우리 국민은 명기해 두어야 한다 (28) 고 천황제 유지 와 국민 주권의 사이에는 원리적으로 대립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지적되고 있 는 것을 주시하여야 한다 29. 그 상태에서는 헌법의 평화주의 조항도 또한 은연한 구체제를 온존하는 방패 역이라는 의심을 풀 수가 없게 된다. 일본이 더욱 공화국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방향으로서의 헌법 형성, 이를 통해서야말로 일본국헌법의 리버럴 데모크라시 성격과 평화주의의 일치가 진정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러기 위해서는 일본 안에서 현행 헌법의 근본정신을 리버럴 데모크라시의 이념 으로서 수용하는 에토스가 함양되어야 한다. 그것이 결여된 채 헌법개정에 돌 입하면, 반드시 역방향의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교회에는 위에서 말한 장래 형성을 지지하여 이끄는, 사회윤리적인 책무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존재이며, 동시 에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속에서 증명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애굽기20 장3절). 이 하나님의 첫째 계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교회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고 기도하면 서, 누구라도 사람 위에 서지 않는 사회를 달성하기 위해 봉사하는 책임을 진 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서야말로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 이사야2장4절) 는 진정한 평화 가 이루어질 것이다. ( ) 1 1792 년 9 월 20일 발미 전투에서, 프랑스의 승리에 대해 남긴 글. 2 일본국헌법의 공포는 1946 년 11 월 3 일, 시행은 1947 년 5 월 3 일이나, 사회체제의 근본적 번혁은, 1945 년 8 월 15 일로 보아도 지장은 없을 것이다. 대일본제국헌법 과 비교하여, 일본국헌법의 중요한 변경점은 민주주의의 제이념의 채용에 있으 며, 또한 기본적 인권의 존중, 국민주권 ( 주권재민 ), 평화주의 ( 전쟁의 포기 ) 의 삼대원리를 특징으로 한다. 특히 제 9 조에는 전쟁 및 무력보유의 포기가 규정되 1945 년 이후의 북동아시아와 교회 67
어, 세계사상 획기적인 조항으로 주목되었다 3 더글라스 맥아더 맥아 더 회상기 하 39 118 그런데, 오카자 키는 미국의 일본점령 안에서의 종교정책연구에서, 이 맥아더의 발언을 기독 교 신학의 승리로서, 서양문명의 찬미가 전제되어 있다 오카자키 마사후미 일본점령과 종교개혁 2012 30 로 평하지만, 그것은 연구자가 일본인으로서의 심성을 가지고 읽은 치우친 해석인 것 같다. 4 1945 년 패전후 일본을 연구대상으로 한, 화제작 패배를 껴안고 의 저자로서 알려져 있다. 5 W 2001 43 6 2002 183 7 에밀 브루너 사회 안에서 의 정의와 자유 브 루너저작집 제 6권 윤리사회논집 1996 174 175 8 이 문제의 경위와 개설에 대해서는, 3 1998 179 182 참조. 9 구야마 야스시 근대일본의 기독교 36 47 48 스미야의 발언. 10 문예춘추 50 전후 50 년 일본인의 발언 상 1995 205 11 1945 2000 2001 157 12 당시의 일본 국민이, 얼마나 헌법 9 조와 평화주의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었는 지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켄자부로의 다음과 같은 글에서도 취할 수 있다. 종전 직후의 아이들에게는 전쟁 포기 라는 말이 얼마나 눈부신 빛을 갖춘 헌법 문언이었는가. 일본은 전쟁을 포기한, 일종의 선택받은 국가이다. 이러하 여 전쟁 포기 는 나의 도덕적 가장 중요한 지주가 되었다. 동시에, 나 자신의 도 덕적 위험을 절실히 맛본 첫 번째 기회도 전쟁 포기 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신 제 고등학교에 들어간 해,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직후 경찰 예비대가 발족됐다. 나는 이 시기에 자신이 맛본 불안과 동요의 시큼한 맛을 잊을 수 없다. 거의 그 때부터,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경찰 예비대는 보안대로, 그리고 자 위대로, 하나씩 개구리 뛰음하면서 기정 사실을 다져 갔지만, 그 개구리 뛰음 때 마다 나는 자신의 도덕이 조롱되는 것처럼 느꼈다. 1991 171 이 문장 은 1964 년 29 세 때에 기 록되었다. 회상이긴 하지만 지방의 한 고등학생이 평화헌법을 여기까지 실존적으 68
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당시 대중의 정신 분위기를 담고 있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 을 것이다. 13 1954 2 1984 347 14 2 349 15 1958 2 383 16 1962 2 409 17 1967 11 33 18 1968 2 12 19 19 1968 2 14 20 1968 2 17 21 1968 2 17 22 2007 는 연구대상을 제 5 공화국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나, 이 문 제에 관해 참고가 된다. 일본인인 어떤 한국 연구자는, 다분히 너무 도식적인 경향이 있기는 하나, 한 반도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둘러싼 상황에 대해서 하나의 민족 X ( 조선 민족 ) 이 두 국가 XA ( 한국 ) 와 XB ( 북한 ) 로 나누어져, 그 하나의 국가 XA 가 또한 두 진 영 XAa (보수 )와 XAb (좌파 )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그중 하나 XAb는 적성 국 가 XB와 붙어 있다. 이러한 복잡한 분열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한반도이다 2012 8 라고 설명하나, 평화와 통일 문제에 대한 한국 교회와 사회의 관계는, 이러한 도식의 틀 안에서 설명될 수 있는가라는 점도 논자의 질문이다. 23 1968 2 12 또한 이 이해에서 헌법 문제를 생각할 때, 전쟁후 20 년, 일본에 어떻게 해서 민주주의를 토착시키 는가 라는 문제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중요한 역할을 가진다, 그런 각도에서 저는 이 헌법 체제를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라 든가 인권 사상이라든가, 종교의 자유라는 것을 일본에 깊게 뿌리내리게 하는 어 려움입니다. 소위 자유진영에 속한다는 것을 긍정하는 것은 이 과제의 수행과 미 묘하게 관계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조항만으 로 헌법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적 내용에 깊은 눈을 가지고 봐야 한다고 생 각합니다 1968 2 15 라고 리버럴 데모크라시진영에 입각하는 이유를 말한다. 24 1968 2 19 25 1968 2 19 26 2006 368 1945 년 이후의 북동아시아와 교회 69
27 20 15 28 1993 238 다만, 천황제에 내재하 는 반 민주주의적 성격을 종합적으로 인식할 때, 패전 직후의 교회 무교회의 지 도적 사람들의 천황제 존속을 위한 언동이 어떠한 판단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는 지는 충분히 검토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 연구의 진전을 막고 있는 것은, 공식적으로 확인 가능한 자료가 부족한 점이다. 거기에는 무교회 관계자의 카미 야 미에코의 저작집 편집에 있어서 황태자비 미치코님에 대해서는 너무 황송하 여 출판할 수 없습니다 라고 남편의 카미야 노부로가 말하여, 일기 서간수록시 에 그것에 대한 서술은 세심한 주의를 가지고 생략되었다 라는 케이스( 2001 20 21 )에 상징되 는, 자기 규제라고 불러야 할 일본인의 정신 태도 문제도 관계된다. 29 천황 과 민주주의 의 원리적 대립으로 간주되는 구체적 사례는 다음 두 가지 가 있다. 하나는 다케다의 저서에도 언급되어 있으나, 황실 등에 대한 불경죄( ) 형법 규정이 패전 후 2년 이상, 일본국헌법 시행 후에도 5개월 이상 존재 하였다는 사실이다. 천황에 관련된 반민주주의적 조항은 패전과 헌법 수정을 넘 어 일본에 남아 있었다. 거기에는 표면적 데모크라틱한 가면 아래에 있는 절대 주 의적 본질이 드러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두번째 사례는 현행 헌법 하에서 천황 의 책임을 다루는 방법이다. 학설상에서는 형사 책임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 이고, 섭정이 재임중 기소되지 않는 (황실 전범 21조)점에서 유추 해도, 천황에 는 형사 책임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 1945 2000 2000 274 )여기에는 간과되기 쉬운 중대 한 문제가 있다. 천황의 행위 전반에 대해, 특히 헌법 규정을 월권한 정치 개입이 거나 국민주권 침해이거나하는 경우에도 그것을 기소하고 처단 할 가능성이 막혀 있다. 즉 현행헌법 아래에서 천황과 황족만은 "기본적 인권 "의 범위 밖에 있는 존 재인 것이다. 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