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규 : 저는 한영규라고 합니다. 성균관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 전 공은 한국 한문학이고 주로 19-20 세기의 한국 한문학자들을 연구하고 있습 니다. 오늘 발표에서는 한국인이 망자를 애도하는 전통을 개괄적으로 살펴보 고, 그 글쓰기가 언제까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33
第 3 部 연구발표 1 韓 國 漢 詩 의 傷 逝 傳 統 과 植 民 地 時 期 의 挽 詩 한 영규 2 1. 머리말 이 글은 한국의 傷 逝 전통을 주로 漢 詩 자료를 통해 개괄하면서, 전근대시 기 傷 逝 의 문학적 전통이 근대에 접어들어 어떠한 전변 양상을 보였는가 하는 점에 특히 주목하고자 한다. 중세의 보편주의에서 근대의 민족주의로 이행한 세계사적 시야에서 조명할 때, 한국문학 또한 동아시아 보편의 한문문학에서 言 文 一 致 의 근대문학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이 시기 글쓰기에 서의 문명적 전환은 외부적 요인의 개입이 거셌을 뿐 아니라 그 과정 또한 매 우 급격한 양상을 보였다고 평가된다. 그 결과 전근대 문학과 근대문학 사이 에는 깊은 단절의 골이 존재하게 되었다. 기존의 문학사 또한 이러한 단절적 인식을 당연시 하면서 서술되었다. 왜냐하면 金 台 俊, 趙 潤 濟 와 같은 제 1 세 대 국문학 연구자들은 모두 경성제국대학 출신으로서, 일본이 원용한 서구 근 대문학의 연구방법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시켰기 때문이다. 민족을 의식하면 서도 식민주의와 동일한 개념과 논리를 사용하였다. 그 결과 이 시기에 전근 대의 한문문학이 완벽하게 타자화되었으며, 또한 식민지시기에 이루어진 한 문글쓰기는 시대착오적 잔영으로 치부되었다. 요컨대 이것은 역사적 실상에 위배되는 것으로, 매우 폭력적인 裁 斷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근대한문 학 연구 성과에 의하면, 식민지시기 내내 한문글쓰기는 나름의 생명력을 지니 면서 근대문명에 대응하였고, 근대의 문제를 한문글쓰기에 반영하려는 시도 134
한 영규 韓 國 漢 詩 의 傷 逝 傳 統 과 植 民 地 時 期 의 挽 詩 도 적지 않았다. 요컨대 한문문학과 근대문학이 단절적으로 전환된 것이 아니 라 상호 交 隣, 拮 抗 한 지점이 존재했던 것이다. 식민지시기의 挽 詩 의 존재상을 확인하고 그 특성을 탐색하고자 하는 이 논 문의 시도 또한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동안 이 시기 만시는 구시대의 잔영이고 科 臼 로 치부되어 본격적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제 亡 者 를 애도하던 전통적 문화 양식이 식민지시기에서 어떠한 전변을 거쳤으며, 이전 시기와는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만시라는 작은 창을 통해, 전근대 문화와 근대 문화 사이에 가로 놓여 있던 단절적 의식을 다 시금 성찰해 보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死 生 觀 의 시대적 변천 과정을 확인할 수 있고, 아울러 3 죽음을 애도할 때의 한국적 특성 등도 다루게 됨으로써, 韓 國 死 生 學 의 기반 조성에 일정정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2. 한국의 傷 逝 전통과 만시 傷 逝 란 죽은 자를 떠나보내며 가슴아파하는 것이다. 魏 晉 시대의 世 說 新 語 제 17 편의 편명이 傷 逝 이기도 한데, 여기에 죽은 자를 전송하며 생 겨난 淸 談 십수 편이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의 경우, 한자가 도래하기 이전의 상서는 시신을 매장하러 가면서 부르는 노래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전변을 거쳤겠지만, 오늘날에도 상여를 메고 가며 부르는 상두소리가 남 아 전하고 있다. 한자가 전래된 초기, 즉 삼국 시대에는 한자에 吏 讀 를 표시한 鄕 札 로서 죽은 자를 애도하였는데, 新 羅 의 月 明 師 가 죽은 누이를 애도한 鄕 歌 祭 亡 妹 歌 가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동아시아 중세 보편문명이었던 한시 형식의 挽 詩 는 高 麗 時 代 에 접어들어 창 작되기 시작했다. 고려의 明 宗 이 內 嬖 明 春 을 잃고 지은 만시가 史 書 에 남아 있으며, 林 椿 李 奎 報 李 濟 賢 등 한시 창작에 능했던 士 大 夫 들이 師 友 의 죽 음을 애도하기 위해 만시를 지었다. 만시가 본격적으로 지어진 것은 朝 鮮 時 代 에 들어서였다. 朝 鮮 朝 에 만시가 활발하게 지어진 이유는 무엇보다 儒 敎 的 喪 禮 의 보편화와 관련이 깊다. 만시는 亡 者 의 상여를 따르던 輓 章 에 써넣던 것 135
第 3 部 연구발표 이다. 이 만장의 사용이 고려시대에는 귀족에게만 용인되었다가 조선조에 들 어서는 일반 사대부와 良 民 에게까지 확대되었다. 그에 따라 상례에 임해 만 시를 짓는 풍속이 전국적으로 유포되었다. 상여에 뒤따르는 만장의 숫자는 곧 망자나 그 집안의 위세를 상징하여, 경쟁적으로 만시를 짓고 또 주변의 지인 들에게 부탁하기도 하였다. 사회적 명망이 높은 관리나 문인의 경우, 사후 후 손들이 문집을 간행할 때 만시만을 따로 모아 부록으로 붙이는 관행처럼 통용 되었다. 만시의 대상은 위로 제왕, 공경으로부터 처자, 사우, 친구, 제자, 노비에 이르기까지 광범하였다. 일상 생활에서 대면하게 되는 2 인칭의 죽음에는 그 에 따른 만시가 지어졌다. 그러나 하나의 양식적 흐름을 형성한 것으로는 죽 은 아내를 읊는 悼 亡 詩, 자식을 위한 哭 子 詩, 형제를 위한 哭 兄 弟 詩, 친구를 애도하는 悼 朋 詩 를 들 수 있다 4. 이외에 만시의 특수한 형식으로 자신의 죽음 을 상상하며 짓는 자서전 형식의 自 挽 詩 가 있어, 조선전기 이래로 활발하게 창작되었다 5. 만시와 아울러 祭 文, 墓 碑 銘, 墓 誌 銘, 哀 詞, 誄 ( 誄 詞 ), 傳, 行 狀 등도 傷 逝 를 표현하는 문학양식이었다 6. 그러나 만시가 보편적인 양식으로서 가장 광범 하게 지어졌다. 대상 인물이 세상을 떠난 지 한참 뒤에 그를 그리워하며 짓는 추모시도 적지 않았다. 杜 甫 의 八 哀 詩 와 같은 전범을 모방해, 세상을 떠난 지인들을 묶어 七 哀 詩 十 哀 詩 라는 이름으로 추도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만시의 양이 폭증하여, 한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커졌다. 이에따라 개성적이면서도 문예적인 만시가 다수 산출되었다 7. 어딜 가나 어딜 가나 何 處 去, 何 處 去. 백발 양친, 다박머리 鶴 髮 親, 髫 齡 兒. 다 버리고 어딜 가나. 都 葉 了, 何 處 去. 언제 오나 언제 오나 何 時 來, 何 時 來. 칠흑 같은 긴긴 밤에 黑 漆 漆, 長 夜 中. 이제 가면 언제 오나. 今 日 去, 何 時 來. 136
한 영규 韓 國 漢 詩 의 傷 逝 傳 統 과 植 民 地 時 期 의 挽 詩 누가 알리 누가 알리 有 誰 知, 有 誰 知. 첩첩산중 황혼 달에 萬 疊 山, 黃 昏 月. 홀로 운들 누가 알리. 獨 啾 啾, 有 誰 知 8. 正 祖 연간에 활동한 李 亮 淵 (1771-1853) 이라는 문인이 친구의 죽음을 애 도한 시이다. 고려 조선시대 만시의 대다수는 近 體 詩 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이 시는 三 言 詩 의 형식에 구성진 음조를 담았다. 단순한 사설의 반복이 民 謠 의 상두소리를 연상시킨다. 이 시는 동시대의 문인에게 매우 슬프고 절실하 다 귀신도 울게 할 만하다 는 평을 받은 명작이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허야 디야! 하는 상두소리 [ 香 頭 歌 ] 를 들어본 한국인이라면, 이 시가 지 닌 민족의 노래로서의 호소력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걸작이 있었던 반면 상투적 만시도 다반사로 지어졌다. 사실에 부합 되지 않는 지나친 稱 揚 의 표현도 넘쳐났다. 이름난 문인이 궁벽한 곳으로 유 배를 가게 되면, 그 마을 사람들이 미사여구를 담은 부모 형제의 만시를 지어 달라고 앞을 다투었다. 그런 청탁에 응해야 하는 것이 유배 문인의 고역이라 는 토로도 연이었다. 18 세기의 실학자 丁 若 鏞 (1762-1836) 은 만시의 폐단 이 극에 달했다고 현실을 비판적으로 진단하고, 만시 창작은 경전과 예법에 서 유래한 게 아니므로, 靈 柩 앞뒤에 만장을 따르게 하는 것은 진정한 禮 가 아 니라고 단언하였다. 친한 사이라면 스스로 만시를 지어 靈 几 앞에 고하고 남 에게 보이지 않게 갈무리하는 차원에 그쳐야 옳다고 말하였다. 실질이 사라진 空 疎 한 虛 禮 의 풍속을 비판했던 것이다 9. 이러한 儀 禮 의 空 疎 化 는 17 세기 이후 조선조 사회가 가문 중심의 宗 法 질서 로 硬 化 되면서 나타난 폐단이었다. 그러나 18 세기 이후 실용을 중시하는 실 학적 사유가 개화하고 淸 과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조선사회의 경직성에 변화가 일기도 하였다. 특히 청을 통한 광범한 지식 정보의 수용, 개성 표현을 중시하는 性 靈 說 같은 문예사조의 영향으로 18, 19 세기의 조선문화가 매우 풍성해진 면도 있었다. 137
第 3 部 연구발표 어찌 하면 저승 月 姥 에게 애원하여 那 將 月 姥 訟 冥 司, 來 世 에는 夫 婦 의 처지 바꾸게 할까 來 世 夫 妻 易 地 爲. 천리 먼곳에서 나는 죽고 그대 살아있다면 我 死 君 生 千 里 外, 이 마음 이 비통함 그대가 알련마는. 使 君 知 我 此 心 悲 10. 이는 19 세기 전반의 학자 金 正 喜 (1786-1856) 가 아내의 죽음을 접하고 지 은 만시로, 조선후기 도망시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유배지 제주도에서 아내의 訃 告 를 전해 듣고, 자신이 대신 죽어 아내로 하여금 자신이 얼마나 비 통해 하고 있는지를 알게 하고 싶다고 하였다. 北 學 의 宗 匠 으로서의 위엄을 내려놓고, 감정을 핍진하고 절실하게 드러내어 읽는 이의 가슴을 울린다. 그런데 위와 같은 悼 亡 詩 명편 외에도, 부인의 죽음을 애도한 조선시대의 만시가 문집과 시선집에 다량으로 남아있다. 명청대에 비추어 조선조의 도망 시는 양적으로 매우 풍부하며, 문학적 성취도 빼어나다. 李 達, 柳 夢 寅, 權 韠, 尹 善 道, 申 緯, 李 建 昌, 金 炳 淵 등 한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이 도망시를 남 겼다 11. 그에 비해 명청의 漢 詩 總 集 인 明 詩 綜 과 晩 晴 簃 詩 匯 에 실린 도망 시는 통틀어도 10 수에 못 미친다. 실제 潘 岳 의 悼 亡 詩 (3 수 ) 가 文 選 에 실려 널리 알려졌지만, 명청대의 이름난 도망시는 많지 않다. 따라서 조선조 에서 문학성이 뛰어난 도망시가 다수 창작되었다는 사실은 동아시아의 상서 전통에서 매우 특기할 만한 현상인 듯하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조선에서 도망시가 이렇게 광범하게 창작되었던 것일까? 쉽게 말할 수 어려운 사안으로, 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도 시도된 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필자가 추론하기에, 조선조의 士 人 에게 부인과의 死 別 은 일생 일대의 이별로서, 오늘날의 死 別 보다 훨씬 심각한 정서적 상실감을 주었던 게 아닌가 한다. 조선조의 閨 房 은 移 動 의 필요가 발생하지 않는 自 足 的 閉 鎖 의 공간이었고, 따라서 남편은 혼인 이후 부인과의 生 離 別 을 경험하기 어려웠다. 妓 女 와의 만남과 이별은 존재했으나, 正 室 婦 人 과는 이별이성립되 기 어려웠다. 마치 낮과 밤처럼 사랑채와 안채에서 待 對 的 으로 생활했다. 외 지로 부임할 경우, 관청마다 관비가 있어 아내의 역할을 대리하는 방식이 법 제화되어 있었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아마도 장기간의 유배로 인한 이별이 138
한 영규 韓 國 漢 詩 의 傷 逝 傳 統 과 植 民 地 時 期 의 挽 詩 있었다. 앞서 예로든 김정희의 경우는 살아서 이별을 경험한 유배지에서 다 시 대면하게 되는 사별이었으므로, 그 비탄의 정조가 중첩되었을 것이다. 그 런데 추사의 경우, 1840 년 돌아올 기약없는 제주도로 떠나며 이별을 경험하 면서도 그 이별의 아픔을 시로 남긴 바 없다. 다른 문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 다. 師 友 를 먼 곳으로 떠나보내며 지은 시는 허다하지만, 부인과의 이별을 슬 퍼하는 시는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오직 부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야, 이별 의 슬픔을 펼칠 수 있었다. 이는 조선조의 아비투스 (habitus) 였다. 남편이 유 배에 처해지더라도 부인의 규방은 온존되는 경우가 많았고, 부모 공양과 자식 양육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므로 부인의 사별은 남편이 경험하게 되는 최 초의 심각한 이별 상황이었고, 그 비탄감이 도망시를 창작케 했던 것이다. 부 인의 규방 [ 內 地 陰 ] 이 온전하게 유지되어야만 남편 [ 外 天 陽 ] 도 존 립할 수 있다는 待 對 的 사유는 곧 性 理 學 에서 연원한 것이다. 한국의 도망시 는 고려말의 元 天 錫 (1330-?) 과 金 九 容 (1338-1384) 으로부터 시작된다. 즉 성리학의 전일화와 도망시의 창작이 그 시기에서 일치하는 것이다. 그 종말은 李 沂 (1848-1909) 와 李 建 昌 (1852-1898) 의 시대로 역시 성리학 체제의 종 말과도 조응된다. 근대 초기에 접어들면 계층, 연령, 성별을 초월하여 移 動 과 離 散 이 전면화되고 그로 인해 무수한 생이별이 발생하였다. 초기 근대시는 이 러한 생이별을 양식화하는 과정을 통해 그 형성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12. 요컨대 도망시는 성리학 체제의 이별이 낳은 서정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조는 명청사회에 비하여 보다 공고한 성리학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실학과 북 학이 발흥했지만 체제의 근간을 위협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일원적 성리학체 제에서 부인의 죽음은 士 人 에게 곧 땅이 꺼지는 아픔에 비견되었고, 그 상실 감을 경험한 이들이 대부분 도망시를 지었던 것이다. 요컨대 도망시의 번성은 조선성리학 체제의 공고성과 폐쇄성이 낳은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3. 식민지시기의 만시 성리학체제의 해체와 식민지 근대문명으로의 급격한 전환은 이 시기 식자 에게 죽음의 문제를 천착하게 하였다. 이전의 어떤 시대보다 죽음의 그림자가 139
第 3 部 연구발표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조선왕조의 멸망은 곧 閔 泳 煥 과 黃 玹 의 自 決 로 이어졌 다. 黃 玹 이 쓴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千 古 를 떠올리니, 세상에서 지식인 되기 어렵네 [ 秋 燈 掩 卷 懷 千 古, 難 作 人 間 識 字 人 ] 라는 絶 命 詩 는 이 시대 양 심적 식자를 대변하는 정서가 되었다. 그들은 망국의 유민으로서, 죽는 것이 옳고 살아있는 것은 구차하다는 의식을 공유하였다. 비장한 죽음을 찬미하기 도 하였다. 죽음은 슬퍼할 것이 아니라는 담론이 성행하였다. 식민지시기의 대표적 문장가 卞 榮 晩 이 죽음을 논한다 는 글을 지은 이러한 시대정신의 결 과였다. 이 몸은 芭 蕉 와 같아서 속에 힘입은 것이 없다. 우연히 大 氣 를 빌려 잠시 이 세상에 나왔다가 運 化 에 따라 사라진다. 그 허황한 것이 꿈과 같다. 그 러나 나의 자손이 대체로 잘 뻗어 이어 나가게 되면 참으로 파초의 새잎 이 돋는 것과 같다. 끊어지지 않는다면, 이로 인해 내가 변하여 나의 자손 이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자손을 꼭 끌어댈 것도 아니다. 내가 노래하 며 세상을 떠나면 그 韻 響 이 봄바람에 전해질 것이요, 내가 성내고 땅속 에 묻히면 그 남은 毒 氣 가 독수리의 발톱에 매어 있을 것이다. 산이 팔짱 을 끼듯 서있는 것은 내가 공손하고 말이 적은 모습이며, 바다가 물결치 고 휘파람 소리를 내는 것은 내가 날아 솟구치는 것이다. 별이 저녁 하늘 에 깜빡거림은 내가 사색하는 것이며, 아침 해가 솟아오름은 나의 덕 있 는 얼굴이 아니겠는가! 봄풀이 들에 나는 것은 나의 慈 悲 가 아직도 자취 가 있음이요, 서늘한 샘이 땅에서 솟음은 나의 문사가 여전히 마르지 않 음이라. 佛 家 의 뱀과 가축으로 輪 回 한다는 이치를 들먹이지 않아도, 나는 일찍이 잠시라도 사라진 적이 없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죽음이란 비통 해 할 것이 없다 13. 이 글은 본래 한일병합 즈음인 경술년 (1910) 음력 8 월에 쓴 것인데, 1923 년 東 明 誌 에도 다시 발표할 만큼 작자 스스로 득의작이라고 여긴 문장이다. 약관의 나이에 판사로 부임한 卞 榮 晩 (1889-1954) 은 일제 통감부가 사법권 을 강탈하자 이에 항의하여 자발적으로 사임하고 변호사로 개업중이었다. 얼 140
한 영규 韓 國 漢 詩 의 傷 逝 傳 統 과 植 民 地 時 期 의 挽 詩 마 뒤 安 重 根 이 伊 藤 博 文 을 저격한 사건이 터졌을 때, 朝 鮮 辯 護 士 會 에서는 그 를 안중근을 변론할 변호사로 선발하였으나, 당국은 바로 그의 출국을 금지 시켜 버렸다. 1910 년 3 월 26 일, 안중근은 여순 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 고, 대한제국이라는 나라 역시 그해 여름 역사에서 사라졌다. 어떤 이는 자결 하였고 혹자는 망명하였다. 산중에 은거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결한 자를 弔 喪 하고 사라진 왕조를 애도하는 분위기가 만연한 이면에, 누구나 저렇게 죽임 당하고 사라질 수 있다는 공포감에 떨고 있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초가 을, 22 살의 청년 변영만은 붓을 들어 죽음을 논한다 는 글을 지었다. 그는 먼저 서두에서 역사상의 성인과 영웅, 勇 士 와 謀 士 도 마침내 죽어 사 라졌으므로, 비통해 할 만하지 않느냐고 큰 전제를 내걸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유장하게 반론을 제시했다. 선배가 시들어 사라지면 후배가 다시 뒤를 잇게 되고, 지극한 道 는 죽은 적이 없으니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것과 같아, 죽음을 비통히 여길 것이 없다고 했다. 다섯 차례에 걸쳐, 다섯 종류의 예를 들어 설명한 뒤 마지막 문장에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죽음이란 비통해 할 것 이 없다. 는 말을 반복하였다. 위 예문은 그 네 번째 부분에 해당한다. 이 문 장은 식민지 아래 놓은 모두가 죽음을 체감하고 공포에 떠는 시대를 맞아, 죽 는 것이란 비통하게 여길 만한 것이 없으므로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계몽적 목 소리였다. 이는 식민지의 열혈 청년이 펼친 超 越 的 死 生 觀 이라고 할 수 있다. 변영만과 쌍벽을 이루었던 이 시기의 문장가 鄭 寅 普 (1893-1950) 는 이 글에 대해 이런 문장은 쇠미한 시대에는 얻을 수 없는 것으로, 사람들의 기백을 키 우게 한다 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14. 사실 이러한 초월적 사생관이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연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노장과 불가의 주장을 다시 변주해 놓은 것처럼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장에는 노장, 불가의 사생관과는 유사하면서도 명백 히 구분되는 지점이 존재한다. 삶과 죽음을 대등하게 인식하려는 노장, 불가 의 관점은 결국 삶의 현장에서 한 걸음 물러날 것을 주장하는 出 世 間 的 경향을 지닌다. 그러나 변명만의 사생관은 생과 사의 집착을 초월하려 한다는 점에는 동일하지만, 결국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어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入 世 間 的 성 향을 지녔다. 141
第 3 部 연구발표 변영만의 글은 時 宜 性 을 띠면서 뚜렷한 계몽 의도를 지녔다는 점에서 노장, 불교류의 사생론과 그 방향을 달리한다. 또한 18, 19 세기에 천주교의 사생관 을 비판하기 위해 작성된 鄭 宗 魯 의 鬼 神 論 과 朴 允 黙 의 死 生 論 과도 입장 이 다르다. 변영만의 原 死 가 韓 愈 의 原 士 양식을 채용하여 죽음의 문제 를 본격적으로 거론한 것 역시 드문 경우였다. 또한 문장 가운데 내가 성내고 땅속에 묻히면 그 남은 毒 氣 가 독수리의 발톱에 매어 있을 것이다. 와 같은 표현은 동아시아의 한문 전통에서 매우 낯선 言 辭 였다. 즉 익숙한 논리에 신 선한 표현을 구사하여 죽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환기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20 대 초반 변영만의 이러한 사생관은 그후 1936 년 신채호 만시에 이르기까 지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지사적 자세는 당시의 同 類 들에 비추어 극히 이상적인 경우에 해당하였다. 가장 첨예한 것이면서도 또 그만큼 예외적이기도 하였다. 그에 비하여 식민지 현실에 순응하거나 보다 온건한 입장을 지닌 식자들은 성리학적 사생관의 자장 아래에 머물며 죽음을 사유하고 만시를 지었다. 식민지시기의 신문 ` 잡지에 발표된 한시는 크게 한문을 제 1 의 文 語 로 한 인사의 시와 취미의 일환으로 발표한 현상한시 ( 또는 고선한시 ) 로 대별된다. 한문을 제 1 의 文 語 로 가진 인사가 발표한 한시는 대체로 자유투고의 형식으 로 신문 학예면에 부정기적으로 발표되었다. 이 한시는 述 懷 詩, 交 遊 詩 ( 送 別 詩 ), 祝 詩 ( 祝 壽 詩 ), 挽 詩 의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15. 식민지시기에 지어진 만시는 다른 세 유형에 비해 양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고유한 영 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한시라는 문화적 아비투스가 가장 오래까지 지속된 유 지된 분야가 祝 詩 ( 祝 壽 詩 ), 挽 詩 였다. 이제 현황 파악을 위해 식민지시기에 조선일보 동아일보 每 日 新 報 에 실 린 만시 목록을 인물 별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 韓 國 人 ] 嚴 台 永 (1912): 安 往 居, 李 喆 柱, 尹 商 鉉, 朴 準 弼, 崔 道 鉉, 李 載 龜 ( 以 上 每 ) / 李 太 王 (1919): 小 宮 三 保 松 ( 每 ) / 郭 鍾 錫 (1919): 崔 益 翰 ( 東 ) / 宋 雨 荷 (1921): 靑 吾 ( 朝 ) / 柳 瑾 (1921): 敬 菴 ( 朝 ) / 呂 圭 亭 (1921): 金 允 植, 鄭 萬 朝, 李 建 芳, 徐 相 勛 ( 以 上 朝 ) / 張 志 淵 (1921): 丁 142
한 영규 韓 國 漢 詩 의 傷 逝 傳 統 과 植 民 地 時 期 의 挽 詩 柱 燮, 沈 友 燮, 姜 信 昌, 黃 漢 性 ( 以 上 每 ) / 金 允 植 (1922): 韓 準 錫 ( 每 ) / 閔 永 達 (1924): 李 建 芳 ( 東 ) / 鄭 求 昌 (1924): 香 荃 ( 東 ), 恨 人 ( 東 ) / 尹 喜 求 (1929): 俞 鎭 贊 ( 以 上 每 ) / 安 往 居 (1929): 崔 誠 愚, 趙 一 琴, 金 演 培, 姜 斅 錫, 薛 泰 熙, 李 津 ( 以 上 東 ) / 李 鍾 浩 (1932): 薛 泰 熙 ( 東 ) / 崔 曙 海 (1932): 震 庵 生, 南 谷 生, 李 鍾 烈 ( 以 上 每 ) / 朴 硯 (1934): 薛 泰 熙 ( 東 ) / 鄭 萬 朝 (1936): 李 輔 相 ( 每 ) / 沈 熏 (1936): 李 輔 相 ( 每 ) / 金 宗 源 (1936): 文 一 平 ( 朝 ) / 李 建 芳 (1939): 崔 益 翰 ( 東 ) / 申 釆 浩 (1936): 金 昌 淑, 卞 榮 晩, 李 楨 ( 以 上 東 ) / 薛 泰 熙 (1940): 崔 益 翰 ( 東 ). [ 日 本 人 ] 槐 南 森 博 士 (1911): 李 完 用, 朴 齊 純, 趙 重 應, 任 善 準, 朴 箕 陽, 兪 吉 濬, 趙 民 熙, 金 有 濟, 久 芳 直 介, 李 在 正, 成 夏 國, 鄭 萬 朝, 呂 圭 亭 ( 以 上 每 ) / 又 石 陸 軍 大 將 (1912): 金 奭 準 ( 每 ) / 高 雨 亭 (1916): 呂 圭 亭 ( 每 ) / 池 上 總 監 (1929): 李 廷 葓 ( 每 ) / 寺 內 總 督 (1920): 李 完 用 ( 每 ), 李 雲 芳 ( 每 ) / 山 本 元 帥 (1943): 李 光 淑 ( 每 ), 金 尙 元 ( 每 ), 徐 仁 燮 ( 每 ). [ 中 國 人 ] 黃 興 (1916): 尹 相 鶴 ( 每 ) / 孔 小 霑 (1918): 安 往 居 ( 每 ) / 汪 精 衛 (1944): 金 山 ( 每 ), 金 ( 每 16 ).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시기 신문에 게재된 만시는 주로 사회적 명사를 대상으로 지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일반 개인의 죽음을 私 的 으로 애도한 경 우는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아내와 자식의 죽음을 애도한 시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지어졌으나, 신문 지면에는 매우 제한적으로 게재되었다 17. 신문미디어 가 지니는 사회적 성격, 민족 논리를 우선시 했던 식민지적 상황 등 중층적 이 유로 인해 아내 자식의 죽음은 지면에 발표되기 어려웠다. 만시의 작자와 대상은 한문을 제 1 의 문어로 삼은 한문지식인이 거의 대부 분이었다. 소설가 崔 曙 海 와 沈 熏 에 대한 만시가 매일신보에 실려 있으나, 매 우 예외적인 경우였다. 만시 작자의 경우 최익한, 설태희 등 여러 편을 발표한 인사도 있었는데, 특히 매일신보에 그런 경우가 많았다. 흥미로운 점은 신문 마다 만시의 대상 인물이 매우 뚜렷하게 구분되고, 서로 중복되는 경우가 거 의 없다는 점이다. 일본인, 중국인 명사에 대한 의례적 만시는 모두 매일신보 에 게재되었다. 동아일보가 민족주의적 지향을 지녔고, 조선일보가 다른 신문 143
第 3 部 연구발표 보다 사회주의적 성향이 농후했던 것은 익히 알려졌지만, 이러한 사상 경향으 로 만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보다 내밀한 역학이 존재했던 듯하다. 예컨대 呂 圭 亭 에 대한 만시는 조선일보에, 安 往 居 申 釆 浩 에 대한 만시는 동아일보에 만 실렸다. 사회장으로 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찬반이 극렬하게 대립한 金 允 植 만시의 경우, 두 민족지에는 실리지 않고 매일신보에만 실렸다. 1927 년, 72 개 사회 단체가 주관하여 최초의 사회장으로 李 商 在 의 장례가 성대하게 치 러졌지만 그에 대한 만시로 신문에 실린 것을 발견되지 않는다. 즉 신문 편집 자의 의사가 매우 뚜렷하게 관철되었다고 여겨진다. 4. 식민지시기 만시의 특성 이제 식민지시기의 만시 가운데 애도의 깊이와 정서의 진정성을 갖춘 시를 중심으로 그 유형을 분류하고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칭양을 주조로 하고 있는 의례적 만시에 대해서는 할애하기로 한다. 아래에서 논의할 설태희, 이 건방, 최익한의 만시는 모두 망자와 作 者 가 깊이 친분을 나누던 관계여서 그 敍 情 泄 哀 의 양상이 매우 심각한 경우이다. 1. 薛 泰 熙 의 悲 歎 설태희 (1875-1940) 는 함경도 출신의 개신유학자이다. 그는 양명학에 이 해가 깊었으면서도 양명학자로 자처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사유 체계 를 수립하려고 시도했던 유학자였다 18. 갑산과 영흥 지방의 군수를 역임하였고, 1920 년대에는 물산장려운동에 깊이 참여하였다. 1930 년대까지 신문잡지에 논설과 한시를 활발하게 발표하기도 하였다. 정인보 등 민족주의 성향의 인사 들과 교류가 많았다 19. 옛 도성에서 다시 만나 곧장 친해져 再 逢 舊 都 卽 相 憐, 술 마시고 시를 지은 지 14 년 飮 酒 歌 詩 十 四 年. 맑은 정신으로 장래 사업 말할 때 醒 吋 語 到 將 來 業, 포부를 의연히 후진 양성에 두었지. 抱 負 依 然 養 後 賢. 144
한 영규 韓 國 漢 詩 의 傷 逝 傳 統 과 植 民 地 時 期 의 挽 詩 오늘밤 내게 안 좋은 느낌 있더니 是 夜 余 因 感 祟 嬰, 訃 告 를 접하고 놀라 탄식하였네. 訃 書 初 到 叱 戱 驚. 얼마후 신문에 보도가 되었는데 少 頃 報 紙 傳 其 實, 半 도 못 읽고 절로 失 聲 하였네. 未 半 看 之 自 失 聲. 집 북쪽 참죽나무 높고 뜨락엔 梧 桐 작은데 堂 北 椿 高 庭 梧 少, 그대 어이해 홀연 不 歸 의 객 되었나. 君 胡 遽 作 不 歸 行. 병든 이 몸 棺 잡고 곡할 수 없어 病 軀 未 得 撫 棺 哭, 누운 채 지난날 누비던 關 河 떠올리네. 臥 憶 關 河 歷 歷 塲 20. 嗚 呼 十 咏 이란 제목으로 후배 李 鍾 浩 (1885-1932) 를 읊은 연작시의 일 부이다. 이종호는 함경도 출신으로, 韓 末 친러파의 거두 李 容 翊 (1854-1907) 의 손자이다. 조부를 이어 普 成 學 校 ( 高 麗 大 의 前 身 ) 를 운영하며 西 北 學 會 의 창립을 주도하는 등 교육문화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1910 년 일제의 탄압으 로 보성학교를 천도교에 인계하고, 중국 러시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918 년 서울로 돌아왔다. 보성학교를 인수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조부가 은행에 예치했던 천문학적 거금을 반환하고자 동경에 소송을 제기하고 십수년간 노력 했으나 되찾지 못한 채, 48 세의 나이로 죽었다 21. 이종호가 오랜 망명 생활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이래, 그가 죽을 때까지 14 년간을 설태희는 그와 각별하게 지냈다. 이종호의 일생의 목표는 조부의 막대한 재산을 되찾아 육영사업을 펼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목표를 이루지 못 하고 홀연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 시의 첫구절로 보아, 아버지와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떠난 억울한 죽음이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접한 설태희는 비탄 에 젖었다. 오랜 知 己 의 죽음에 병든 처지에서 哭 도 하지 못했고 발인에도 참 여하지 못했다 22. 만시를 지어 후배의 한맺힌 일생을 弔 慰 할 도리 밖에 없었다. 설태희의 상실감은 신문에 난 부고 기사를 반도 읽기 전에 失 聲 했다는 구절에 서 여실히 확인된다. 이종호라는 인물에 대한 칭양이나 없는 것은 아니나 비 탄의 정조가 주를 이룬다. 145
第 3 部 연구발표 朴 硯 의 만시에서도 이런 비탄이 드러나 있다. 朴 硯 은 선배이면서도 설태희 를 내 스승 이라 부를 만큼 서로 肝 膽 相 照 하던 사이였다. 설태희는 선배이자 知 己 를 잃은 애통함에 天 涯 에서 곡하며 어떻게 지내는지 묻습니다 라고 하 여 남겨진 자의 비애를 표현하였다 23. 安 往 居 을 애도한 만시에서는, 둘째 아들 이 멀리 있어 장례에 오지 못했는데 어찌 하관을 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눈 보라 휘몰아쳐 눈물이 두건을 적신다 고 서글퍼하였다 24. 요컨대 설태희의 세 만시는 모두 비탄의 정조가 주를 이루는 私 的 애도이다. 이러한 비탄은 망자들이 그 자신과 막역한 교분을 나누던 이들이었기 때문이 겠지만, 또한 망자가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것으로 눈을 돌리고 그로 인해 감 발되는 슬픔을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作 詩 방법에서도 기인하는 것이었다. 설 태희의 만시 3 제는 모두 감정이 진실하고 말이 사실에 부합하여 지기를 잃은 비탄의 심정이 잘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 私 的 애도시의 전형으로 손꼽 을 만하다. 이 시기 만시 가운데 한편의 문예적 시로서 성공한 경우 비탄의 정서를 기반 으로 한 것이 많았다. 李 鉉 軾 이 30 세에 요절한 변호사 鄭 求 昌 을 애도한 시 ( 哀 岐 堂 鄭 求 昌, 1924) 나 文 一 平 이 30 년간 우정을 지켜온 친구 金 宗 源 을 읊 은 시 ( 哭 仁 波 金 宗 源 君, 1936) 가 특히 그렇다. 朴 天 表 가 어린 자식을 잃 고 쓴 시에서도 깊은 비탄이 담겨있다 25. 이러한 비탄의 애도시는 주로 知 己 와 가족 등 2 인칭의 죽음을 읊은 것들인데 26, 망자가 사회적 명사가 아닌데도 신문 에 실린 것은 그것이 시로서의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2. 李 建 芳 의 論 定 的 稱 揚 이건방 (1861-1939) 은 식민지시기의 양명학자이자 문장가이다. 자는 春 世, 호는 蘭 谷 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문장으로 이름났던 李 建 昌 의 從 弟 이며, 정인보의 스승이다. 1885 년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강화학 파의 마지막 인물로 칭해지며, 문집으로 蘭 谷 存 藁 가 전한다 27. 이건방은 呂 圭 亨 (1849-1921) 과 閔 泳 達 (1854-1924) 에 대한 만시를 지 어 신문에 실었는데 28, 여규형 만시가 보다 문제적이다. 146
한 영규 韓 國 漢 詩 의 傷 逝 傳 統 과 植 民 地 時 期 의 挽 詩 우뚝한 성품에 五 千 卷 의 독서 磊 落 撑 膓 五 千 卷, 안목 환하여 光 芒 이 새어나왔네. 眼 中 閃 閃 露 光 芒. 어찌 짐작했으랴, 푸른 바다가 橫 流 하는 시대를 那 知 滄 海 橫 流 日, 홀로 經 典 껴안고 양식을 마련하였네. 獨 抱 遺 經 作 餱 糧. 寧 齋 도 노련한 荷 亭 의 글 두려워했고 寧 公 猶 畏 老 荷 筆, 붓에 江 河 가 있었으나 부유하지 못했네. 筆 有 江 河 不 可 富. 글씨는 蕭 條 하여 着 處 가 없었으니 模 寫 蕭 條 無 着 處, 일찍부터 수놓은 鴛 鴦 을 멀리하였네. 曾 計 閑 却 繡 鴛 鴦. 쓸쓸한 세상이라 알아주는 이 찾기 어렵고 寥 寥 天 壤 解 人 難, 사람들 거리로 흩어진 채 세월 저물었네. 客 散 街 頭 歲 已 闌. 만년의 自 家 撞 着 그 누가 있어서인가 晩 來 撞 着 阿 誰 在, 오직 저 山 이 보았을 터이니. 只 許 山 山 了 一 看 29. 荷 亭 呂 圭 亨 은 李 建 昌 金 允 植 鄭 萬 朝 와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한문문장 가이다. 1886 년 申 箕 善 의 逆 獄 에 訊 問 官 으로 참여하여, 신기선의 거침없는 답변을 민첩하고 조리있게 받아 적은 일이 계기가 되어 일약 文 名 을 얻었다. 관직에 오래 있었으나 放 達 不 羈 한 성격으로 말단직을 전전했고 高 宗 의 눈에 거슬려 세 차례나 유배되었다. 詩 文 에 뿐만 아니라 書 射 琴 棋 를 잘하 여 七 絶 이라 불렸지만, 평생 불안정하고 빈한하게 지냈다. 뒤에 第 一 高 普 에서 漢 文 을 가르치는 일로 생계를 이었다. 한일병합 이후 以 文 會 의 발기인으로 참 여하는 등 일제의 노선에 동조하였다. 이건방은 여규형의 인간됨과 평생 이력을 가장 잘 이해하는 입장이었다. 여 규형은 이건창과 외가 쪽으로 6 촌 형제였으므로 30, 이건방에게도 먼 친척이 되 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여규형의 일생을 서술하는 이건방의 필치는 조심스럽 고 섬세하다. 김윤식은 우뚝하게도 사면초가 속에서, 홀로 한문 깃발 붙잡고 잔영을 보존하였네 고 하여 31, 그다지 고심하지 않고 평이하게 기술하였다 32. 이 건방은 여규형이 뛰어난 식견과 안목에도 불구하고 푸른 바다가 횡류하는 시 147
第 3 部 연구발표 대 를 만나 경전을 안은 채 밥벌이하는 데 그쳤다고 애석해 하였다. 이건방 이 신문에 10 수의 만시를 발표하고 나서, 이중 5 수를 산삭하고 새로 2 수를 지었던 것은 이러한 고심의 흔적일 것이다. 이건방은 여규형의 행적을 아프게 껴안으려는 시선을 지니고 있었다. 여규 형이 만년에 보여준 자가당착적 모습은 그를 탓할 것만이 아니라고 변호하였 다. 이건방은 여규형이 친일이 생계를 잇기 위한 것이어서, 鄭 萬 朝 와 같은 자 발적 체제 영합과는 구분해서 보자는 의식을 지녔던 듯하다. 이건방의 여규형 만시는 論 定 的 稱 揚 이라고 할 수 있다. 망자의 행적을 史 家 와 같은 안목으로 재평가하여 세상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려 하였다. 그 결 과 이 시를 읽은 독자는 여규형의 일생을 새로운 지평에서 이해하게 되었을 것 이다. 3. 崔 益 翰 의 史 評 的 稱 揚 최익한 (1897-?) 은 경북 울진 출신의 사회주의자이며, 이 시기의 대표적 국학연구자의 한 사람이다. 1911 년부터 5 년간 곽종석의 문하에서 한문을 배 웠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금하다 체포 되어 4 년을 복역하였다. 출감 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가 검거되어 다시 6 년 동안 수감되었다. 만기 출소한 1935 년 이래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중심 으로 국학연구에 전념하였다. 1948 년 월북하여 김일성대학에서 강의하면서 국학 관련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그 뒤의 행적을 불분명하다. 저서로 실학파 와 정다산 등을 남겼다 33. 退 溪 南 冥 을 낳은 嶺 南 땅 陶 老 冥 翁 大 嶺 鄕, 高 風 의 정맥 나란히 아름다웠네. 高 風 正 脈 兩 芬 芳. 마음의 근원 다시 寒 溪 의 달을 따르며 心 源 更 溯 寒 溪 月, 위기의 道 세상의 狂 瀾 을 한 손으로 막았네. 幾 道 狂 瀾 隻 手 障. 三 代 의 순박한 풍상 땅 쓸듯 사라지고 三 古 淳 風 掃 地 無, 六 大 洲 엔 검은 피, 낮인데도 흐릿할 때 六 洲 玄 血 晝 糢 糊. 148
한 영규 韓 國 漢 詩 의 傷 逝 傳 統 과 植 民 地 時 期 의 挽 詩 春 王 의 한 의리를 감당하여 堪 憐 一 副 春 王 義, 홀로 빈산 바라보며 우리 儒 道 를 펼쳤네. 獨 向 空 山 殿 我 儒. 어찌하여 萬 國 에 청원서 보냈던가 何 來 萬 國 播 牲 書, 화난 누에 꿈틀거림 웅덩이 물고기 같았네. 奮 蠶 紛 騰 涸 轍 魚. 문장 하나로 存 楚 의 뜻 펴지 못하더니 다급한 宋 瑞 인양 수레에 올랐네 35. 一 紙 未 伸 存 楚 志 纓 冠 宋 瑞 已 登 車 34, 36. 이는 최익한이 스승인 俛 宇 郭 鍾 錫 (1846-1919) 의 죽음을 접하고 쓴 만시 이다. 10 수 가운데 5 수가 신문에 실렸고, 나머지는 산일되었다. 곽종석 (1846-1919) 은 경상도 출신의 한말 유학자이다. 젊은 시절부터 성 리학 공부에 전념하다 25 세 때 李 震 相 의 제자가 되어 主 理 에 입각한 理 氣 說 을 주장하였다. 고종 초기 蔭 補 로 출사하여 參 贊 을 역임하였다. 1905 년에는 을 사조약의 폐기를 외치면서 조약 체결에 참여한 매국노를 처형하라고 상소하였 다. 1910 년 이후 고향에서 은거하다 3 1 운동이 일어나자 전국 儒 林 들의 궐 기를 독려하고, 유림대표로서 137 인 명의로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독립호 소문을 발송했다 37. 이 사건으로 2 년형의 옥고를 치르고 병보석으로 출감하였 으나 그 여독으로 곧 세상을 떠났다. 최익한은 이 만시를 통해 곽종석의 일생을 집약시키고 品 藻 하였다. 칭양의 어조가 이면에 흐르지만, 스승의 만시에 보이기 쉬운 溢 美 로 나아가지 않았 다. 최익한은 면우가 퇴계와 남명의 두 정맥 사이에서 생장하고, 이기설에서 寒 溪 를 溯 求 하여, 위태로운 도를 부지하고 세상의 狂 瀾 을 막았다고 하였다. 寒 溪 란 寒 洲 李 震 相 과 大 溪 李 承 熙 로 면우의 이기설에 영향을 준 선배들이 다. 예문 세 번째 시의 春 王 의 의리를 감당하여, 홀로 빈산 바라보며 우리 儒 道 를 펼쳤네. 라는 시구는 면우의 일생에 대한 총괄적 斷 岸 이라고 할 수 있 다. 1939 년 이건방이 세상을 떠났을 때 최익한은 다시 만시 12 수를 지었다. 149
第 3 部 연구발표 梅 泉 의 오열 책 속에 묻혀 있고 梅 泉 嗚 咽 卷 中 人, 韶 濩 의 소리 淮 海 가에 잠겼네. 韶 濩 聲 沈 淮 海 濱. 오직 계곡의 난초 향기 품고 있다가 獨 有 谷 蘭 香 不 沫, 비바람치는 강산에서 남은 봄을 펼쳤네. 江 山 風 雨 殿 殘 春. 磻 溪 의 깊이, 星 湖 의 博 識, 茶 山 의 詳 密 磻 深 星 博 與 茶 詳, 우리나라 實 學 의 맥 유장도 하네. 實 學 吾 東 一 脉 長. 명문 經 世 遺 表 의 서문을 보건대 請 看 名 文 經 表 序, 평소 마음 詞 章 에 있지 않았네. 素 心 端 不 在 詞 章 38. 위의 시를 통해 최익한이 판단한 이건방의 문학적 학술적 위상을 쉽게 파악 할 수 있다. 蘭 谷 은 황현과 김택영이 없는 세상에서 남은 봄 을 펼쳤던 존재 였다. 즉 근대의 국문문학이 수립되는 현실에서 한문글쓰기의 명맥을 난곡이 부여잡고 있었다는 말이다. 또 난곡은 문장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 다. 명 문장으로 이름난 경세유표 서문을 보니 실학과 경세에도 관심을 기 울였다는 것이다. 서문이란 1914 년 朝 鮮 光 文 會 간행의 經 世 遺 表 에 실린 邦 禮 草 本 序 (1908) 를 가리킨다. 이 서문을 볼 때, 난곡은 실학자로서 柳 馨 遠, 李 瀷, 丁 若 鏞 을 계승한 면이 있다고 하였다. 최익한은 곽종석과 이건방의 일생을 기리며 칭양했다. 그런데 칭양에만 그 친 것이 아니라, 史 家 와 같은 안목으로 評 議 하고 칭양하였다. 이는 史 評 的 稱 揚 이라 할 수 있다. 4. 맺음말 만시란 歡 待 의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이에게 베푸는 산 자의 환대였 다. 喪 禮 의식의 일부였던 이 환대의 글쓰기는 성리학이 내면화되면서 유교적 글쓰기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그리하여 성리학이 지배 이념으로 자리잡은 고 려후기로부터 본격화되어, 식민지시기가 종결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6 세기 를 이어 내려오며 사회적 언어로서 소통되었다. 중국에서도 청대에 이르기까 지 만시가 지어졌지만, 조선조만큼의 번성을 보인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러므 150
한 영규 韓 國 漢 詩 의 傷 逝 傳 統 과 植 民 地 時 期 의 挽 詩 로 이러한 만시 전통은 죽은 자를 애도하는 매우 한국적인 관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도망시의 경우, 성리학적 체제와 조응되면서 조선조에서 대량으로 산출되었고, 문학적인 성취를 거두는 명편도 다수 산출되었다. 만시를 지은 이들은 대부분 유자였으므로 그들의 死 生 觀 은 고려후기부터 19 세기까지 질적인 변화가 없었다. 성리학적 사생관이 지배적이었다. 실학 의 발전, 서학의 유입 등으로 인해 사생관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그 근원이 흔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다 20 세기 초반 애국계몽기에 이르러 사생관에 변화 가 있었다. 국가의 멸망과 그에 뒤이은 자결로 인해, 성리학적 사생관이 흔들 리며 비장한 죽음을 찬미하거나 사생을 초월적으로 인식하려는 움직임이 있 었다. 근대문명이 내면화되면서 유교적 사생관이 해체되었으나, 식민지시기 만시 작가의 경우는 여전히 유교적 자장 안에서 사생의 문제를 사유했다. 적 어도 1940 년까지 만시는 사회적 ` 문화적으로 유효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 지만, 거시적 국면에서는 사멸하는 문예 장르였다. 따라서 한문 글쓰기의 사 멸 과정에 조응하며 만시의 전통도 사라졌다. 한국어로 지어진 근대의 자유 시는 한시의 애도 전통과는 아무런 연관을 지니지 않은 채, 다른 영역에서 근 대의 서정 장르로 성장하고 있었다. 근대의 자유시는 사별보다는 생이별에서 보다 근대적 서정을 포착하려 하였다. 그 결과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폐간되는 1940 년 무렵에 이르러 한국의 만시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傷 逝 의 문학적 표현은 오로지 자유시가 떠안게 되었던 것이다. 식민지시기의 만시에 표현된 정서는 크게 悲 歎 과 稱 揚 으로 구분된다. 비탄 은 현재에 중점을 두고 애도자의 슬픔을 표출하는 것이고, 칭양은 망자의 지 난 행적을 되새기며 좋은 방향으로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비탄의 정서 는 처자, 형제 등 情 誼 가 깊었던 인물의 죽음에서 주로 나타났다. 망자와의 관 계가 소원할수록 만시는 상투적 칭양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건 방 최익한의 예에서 보듯, 명사의 만시를 지을 경우 그 죽음은 사회적 역사 적 의미로 환기됨으로써 비탄으로 이어지지 않고 은미한 칭양의 정조를 띠었 다. 이 시기 가장 수준높은 만시를 창작한 최익한의 경우, 곽종석 이건방의 죽음을 시로 표현할 때 망자의 행적을 史 家 의 안목으로 새롭게 포착하고 거기 에 은미한 칭양의 정조를 띠게 하였다. 그리하여 망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 지 151
第 3 部 연구발표 평을 열어주는 史 評 型 의 만시를 산출할 수 있었다. [ 註 ] 1 이 論 文 은 2009 年 大 韓 民 國 政 府 ( 敎 育 科 學 技 術 部 ) 의 財 源 으로 韓 國 硏 究 財 團 의 支 援 을 받아 遂 行 된 硏 究 임 (NRF-2009-32A-A00111). 2 成 均 館 大 人 文 科 學 硏 究 所 首 席 硏 究 員 / hanyq@skku.edu 3 한국에서 死 生 또는 死 生 觀 이라는 말은 과거에 널리 쓰였고, 지금도 광범하게 쓰이 지만, 死 生 學 이라는 용어에는 한국인의 정서에 비추어 받아들이기 어려운 불편함이 있는 듯하다. 그 불편함의 원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한 국인에게는 生 을 死 보다 중시하는 유서 깊은 문화적 관습이 존재한다. 이는 중국에 서 生 死 學 이 우세한 이유와 같이, 유교의 사생관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 다. 그러나 한국인의 現 世 中 心 主 義 는 유교의 영향을 덜 받은 기층민에게도 강력하 게 뿌리박혀 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는 한국 속담이 이를 여실히 반 증하는 예가 아닐까 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러한 현세주의의 근원은 巫 敎 (shamanism) 에 기반을 두고 있다. 1886 년 來 韓 하여 한국에서 교육 운동을 펼쳤던 미국 선교사 헐버트 (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는 한국인은 사회적으로는 유 교도, 철학적으로 불교도, 고난을 당할 때에는 영혼숭배자이다. 한국인의 밑바탕 에 깔려있는 신앙은 원시적인 영혼숭배 사상이며, 그밖의 모든 문화는 그러한 신앙 위에 기초를 둔 상부구조에 불과하다 고 논파한 바 있다.( 대한제국 멸망사 (The Passing of Korea), 1909) 한국인의 심층심리에 무교의 現 世 主 義 가 자리하고 있다는 지적에는 한국의 인문학자들도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死 를 앞세우는 사생학 이라는 용어에 대다수의 한국인은 뭐라 꼭 표현하기 어려운 불편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한국인의 造 語 관습에 비추어도 死 生 學 은 낯선 점 이 있다. 死 生 觀 과 死 生 學 이라는 말 사이에는 큰 격차가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한 국에서 學 이란 용어가 사회적으로 공인되기 위해서는 이 긍정적이고 가치있는 것, 목표로 두는 것이라는 전제를 필요로 하는 듯하다. 따라서 죽음학 死 生 學 이라는 용어는 그 목표와 내용 여부를 떠나, 어감에서 한국인에게 낯설게 다가온다고 여겨진다. 4 崔 載 南, 韓 國 哀 悼 詩 硏 究, 慶 南 大 出 版 部, 1997, 337 면. 152
한 영규 韓 國 漢 詩 의 傷 逝 傳 統 과 植 民 地 時 期 의 挽 詩 5 조선시대 자만시에 대해서는 林 濬 哲 의 아래 연구가 참조된다. 自 挽 詩 의 詩 的 系 譜 와 朝 鮮 前 期 의 自 挽 詩, 古 典 文 學 硏 究 31, 韓 國 古 典 文 學 會, 2007. ; 朝 鮮 時 代 自 挽 詩 의 類 型 的 特 性, 語 文 硏 究 38 권 22 호, 語 文 敎 育 硏 究 會, 2010. 6 조선시대의 祭 文, 墓 誌 銘 가운데 名 篇 을 선발하여 번역해 놓은 것으로 李 勝 洙 의 玉 같은 너를 어이 묻으랴 ( 太 學 社, 2001) 가 있다. 7 安 大 會, 韓 國 漢 詩 와 죽음의 問 題 朝 鮮 後 期 輓 詩 의 藝 術 性 과 人 間 美, 韓 國 漢 詩 硏 究 3, 韓 國 漢 詩 學 會, 1995, 79 면. ; 全 松 烈, 옛사람의 눈물 : 朝 鮮 의 挽 詩 이야기, 글항아리, 2008. 8 李 亮 淵, 挽 溪 朋, 臨 淵 堂 別 集 장 29, 서울대 奎 章 閣 所 藏 本. 9 丁 若 鏞, 喪 禮 外 編, 與 猶 堂 全 書 제 3 집 18 권, 韓 國 古 典 飜 譯 院 韓 國 文 集 叢 刊 284, 397 면. 挽 詞 之 作, 不 由 經 禮. 而 近 世 不 揆 親 疎, 廣 請 力 求, 乃 有 素 不 相 善 者, 陰 爲 亡 者 玭 累 之 毀, 託 於 詩 句, 轉 相 仇 隙, 貽 笑 一 世, 挽 詩 之 敝 極 矣. 或 有 平 生 親 友, 不 請 而 自 製 者, 爲 之 展 告 於 靈 几 之 前, 而 收 之 篋 笥 焉, 可 矣. 其 建 于 柩 車 之 前, 則 非 禮 也. 10 金 正 喜, 悼 亡, 阮 堂 全 集 권 10, 韓 國 古 典 飜 譯 院 韓 國 文 集 叢 刊 301, 178 면. 11 한국 애도시 연구 에 부록으로 첨부한 哀 悼 詩 資 料 目 錄 에 정리되어 있다.( 崔 載 南, 위의 책, 1997, 256-266 면 ) 12 鄭 雨 澤, 近 代 的 抒 情 의 形 成 과 離 別 의 樣 相, 國 際 語 文 38, 國 際 語 文 學 會, 2006, 280 면. 13 卞 榮 晩, 原 死 ( 庚 戌 仲 秋 ), 卞 榮 晩 全 集 上, 成 均 館 大 大 東 文 化 硏 究 院, 2006, 90 면. 是 身 如 芭 蕉, 中 無 可 賴, 偶 藉 大 氣, 暫 生 此 世, 隨 化 泯 滅, 幻 同 一 夢. 而 我 之 子 孫, 類 能 綿 延, 正 如 蕉 之 子 孫, 未 嘗 斬 絶, 由 是 則 我 變 而 爲 我 子 孫 而 已. 顧 子 孫 不 必 稱 引 也. 我 歌 而 辭 世, 則 其 韻 響 傳 于 谷 風 矣. 我 怒 而 就 土, 則 其 餘 毒 繫 在 鷙 爪 矣. 山 拱 而 立, 我 之 恭 黙 也, 海 飜 而 嘯, 我 之 飛 騰 也. 星 瞬 夕 天, 我 之 思 索 歟. 朝 日 騰 翥, 我 之 德 容 歟. 春 草 生 于 野, 我 之 慈 惻, 尙 有 跡 焉. 凉 泉 噴 於 地, 我 之 文 詞, 仍 不 竭 焉, 卽 無 佛 氏 輪 回 蛇 畜 之 理, 我 未 曾 暫 滅 也. 如 是 觀 焉, 死 無 足 悲 矣. 14 변영만의 原 死 에 대한 鄭 寅 普 의 評, 東 明 38, 1923.5.20. 鄭 寅 普 曰 : 此 文 非 衰 季 所 可 得, 令 人 增 長 氣 魄. 15 李 熙 穆 韓 榮 奎 金 鎭 均 외, 植 民 地 時 期 漢 詩 資 料 集, 成 均 館 大 大 東 文 化 硏 究 院, 2009. 16 ( ) 안의 숫자는 만시 대상자가 죽은 해를 말한다. : 표시 뒤에 나오는 이름이 153
第 3 部 연구발표 만시를 지은 사람들이다. ( 東 ) 은 동아일보에 실렸다는 표시로, ( 朝 ) 는 조선일보 ( 每 ) 는 매일신보를 말한다. 悼 亡 悼 兒 와 같이 만시 대상자의 이름을 알 수 없거나 매우 개인적 인물일 경우 표시하지 않았다. 17 錦 堂 朴 天 表, 悼 兒 (2 수 ), 朝 鮮 日 報 1921.07.04. ; 鎭 南 浦 荷 潭 金 瑛, 亡 女 龜 蓮 追 悼 詞, 每 日 申 報 1920.12.24. ; 荷 潭 金 渶, 長 孫 昱 悼 亡 詩, 每 日 申 報 1921.07.27. ; 性 山 金 永 斗, 永 夜 不 眠 成 悼 亡 詩, 每 日 申 報 1923.05.03. 18 琴 章 泰, 日 帝 下 知 識 人 의 陽 明 學 理 解, 韓 國 陽 明 學 의 爭 點 서울 大 出 版 部, 2008, 238-243 면. 19 설태희에 대해서는 아래 논문 참조. 趙 亨 烈, 설태희의 협동조합주의와 문화운동 론, 한국사연구 130, 한국사연구회, 2005. 20 梧 村, 嗚 呼 十 咏 10 수 중 제 7 9 10, 東 亞 日 報 1932.04.06. 21 巴 人, 水 標 橋 畔 吟 : 哭 月 松 居 士, 三 千 里 4-5, 1932.05.1. ; 李 容 翊 씨 90 만원 사건 속에 맻히고 맻힌 桂 人 의 눈물, 故 李 鍾 浩 氏 未 亡 人 悲 史, 삼천리 4-7. 1932.05.12. ; 李 容 翊 의 百 萬 圓 이 사느냐 죽느냐, 今 3 月 에 결정되는 大 裁 判 의 결 과는?, 삼천리 8-4. 1936. ; 全 峯 寬, 이용익의 사라진 백만 원 예금 공금 인가 사재인가, 이용익의 천문학적 예금을 두고 벌인 음모와 암투, 럭키 京 城, 살림, 2007. 22 설태희, 위 시의 주석. 聞 李 鍾 浩 君 不 起 病, 不 奔 哭, 又 不 參 返 柩 發 靷, 有 感. 23 梧 村 薛 泰 熙, 追 悼 朴 硯 先 生 2 수 중 제 2, 東 亞 日 報 1934.05.12. 情 如 兄 叔 每 相 親, 祗 恨 住 居 不 得 隣. 論 政 指 吾 稱 我 師, 爲 君 任 自 處 良 臣. 而 今 有 孰 談 詩 禮, 從 此 微 人 學 典 倫. 遞 作 還 元 無 一 物, 天 涯 望 哭 問 何 伸. 24 反 求 室 主 人, 哭 安 之 亭, 東 亞 日 報 1930.01.08. 桂 泮 徃 來 隔 數 旬, 少 微 豈 意 忽 沈 淪. 奇 書 未 應 有 恨 [ 所 著 四 大 奇 書 有 之 ], 次 胤 遲 奔 奈 下 窀 [ 次 子 在 外 不 奔 ]. 琴 酒 風 流 緣 慨 世, 文 章 典 雅 見 超 倫. 山 陰 此 後 尋 無 處, 風 雪 迷 離 淚 滿 巾. 25 錦 堂 ( 朴 天 表 ), 悼 兒 (2 수 ), 朝 鮮 日 報 1921.07.04. 憐 渠 一 歲 穉, 來 焂 去 何 忙. 生 時 即 死 日, 彭 殤 俱 亡 羊. 埋 玉 靑 山 去, 我 懷 覺 悄 然. 事 到 無 奈 處, 不 如 付 諸 天. 26 2 인칭의 죽음 이란 말은 세리자와 슌스케의 표현을 따른 것이다. 시마조노 스스 무 다케우치 세이치 편, 정효운 역, 사생학이란 무엇인가, 한울, 2010, 195 면. 27 宋 錫 準, 난곡 이건방의 양명학과 실천정신, 양명학 17, 한국양명학회, 2007. 28 이건방, 悼 閔 綏 堂 (2 수 ), 동아일보 1924.09.22. 29 蘭 谷 李 建 芳, 輓 呂 荷 亭 10 수 중 제 5 8 9 수, 朝 鮮 日 報 1921.09.05. 154
한 영규 韓 國 漢 詩 의 傷 逝 傳 統 과 植 民 地 時 期 의 挽 詩 30 朴 暎 美, 하정 여규형 문학 일 고찰, 한문학논집 21, 근역한문학회, 2003. 31 雲 養 金 允 植, 輓 呂 荷 亭 居 士 圭 亨 3 수 중 제 1. 조선일보 1921.09.03. 金 閨 玉 筍 早 揚 名, 老 去 官 緣 在 塾 黌. 最 是 四 圍 楚 歌 裏, 獨 持 漢 幟 保 殘 營. 32 여규형에 대한 만시는 蘭 谷 存 稿 ( 靑 丘 文 化 社, 1971) 권 1 에 呂 荷 亭 圭 亨 靷 行 將 發 而 病 不 能 會 下 視 窆 感 念 存 沒 爲 賦 長 句 七 首 以 抒 懷 라는 제목으로 7 수가 실려 있다. 조선일보에 실린 10 수 가운데 제 3 4 5 6 7 수는 문집에 실려 있지 않다. 33 최익한의 생애 및 저술, 국학 연구에 관해서는 金 鎭 均 의 논문이 참조된다 ( 최익한 의 전통주의 비판과 전통 이해의 방식, 한문학과 근대 전환기, 다운샘, 2009, 205-242 면 ). 이밖에 역사학 분야에서 최익한을 다룬 논문으로 宋 贊 燮 ( 일제 해방 초기 최익한의 실학 연구, 韓 國 史 學 史 硏 究, 1997) 의 글이 참조된다. 34 存 楚 : 春 秋 시기 吳 나라가 楚 나라를 공격하였을 때 초의 申 包 胥 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秦 으로 갔다. 진나라 조정에서 7 일 밤낮을 통곡하자 드디어 진나라가 출병하 여 오나라를 무찌르고 초나라를 보존하게 되었다. 左 傳 定 公 4 년조에 그 기사가 보인다. 그리하여 存 楚 란 말은 뒤에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치는 것을 가리키게 되 었다. 35 宋 瑞 : 중국 송대의 문인 文 天 詳 의 字. 36 滄 海, 挽 俛 宇 先 師 十 絶 ( 十 首 選 五 ) 5 수 중 제 1 4 5, 동아일보, 1924. 9. 24. 37 巴 里 長 書 에 대해서는 林 京 錫 의 두 논문 참조. 파리 長 書 서명자 연구, 대동문 화연구 38,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01. ; 유교 지식인의 독립운동 : 1919 년 파리 長 書 의 작성 경위와 문안 변동, 대동문화연구 37, 2000. 38 崔 益 翰, 蘭 谷 李 建 芳 翁 翁 輓 12 수 중 제 5 7, 東 亞 日 報 1939. 7.12. 原 註 : 公 嘗 作 丁 茶 山 經 世 遺 表 序 文 ( 공은 일찍이 丁 茶 山 의 經 世 遺 表 에 서문을 지었다 ). [ 參 考 文 獻 ] 朝 鮮 日 報 東 亞 日 報 每 日 申 報 東 明 金 正 喜, 阮 堂 全 集, 韓 國 古 典 飜 譯 院 韓 國 文 集 叢 刊 301. 卞 榮 晩, 卞 榮 晩 全 集 上, 成 均 館 大 大 東 文 化 硏 究 院, 2006. 李 建 芳, 蘭 谷 存 稿, 靑 丘 文 化 社, 1971. 155
第 3 部 연구발표 李 亮 淵, 臨 淵 堂 別 集, 서울 大 奎 章 閣 所 藏 本. 李 熙 穆 韓 榮 奎 金 鎭 均 外, 植 民 地 時 期 漢 詩 資 料 集, 成 均 館 大 大 東 文 化 硏 究 院, 2009.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韓 國 古 典 飜 譯 院 韓 國 文 集 叢 刊 284. Hulbert, 大 韓 帝 國 滅 亡 史 (The Passing of Korea), 1909. 琴 章 泰, 韓 國 陽 明 學 의 爭 點, 서울 大 出 版 部, 2008. 金 鎭 均, 한문학과 근대 전환기, 다운샘, 2009. 朴 暎 美, 하정 여규형 문학 일 고찰, 한문학논집 21, 근역한문학회, 2003. 宋 錫 準, 난곡 이건방의 양명학과 실천정신, 양명학 17, 한국양명학회, 2007. 宋 贊 燮, 일제 해방 초기 최익한의 실학 연구, 韓 國 史 學 史 硏 究, 1997. 시마조노 스스무 다케우치 세이치 편, 정효운 역, 死 生 學 이란 무엇인가, 한울, 2010. 安 大 會, 韓 國 漢 詩 와 죽음의 問 題 朝 鮮 後 期 輓 詩 의 藝 術 性 과 人 間 美, 韓 國 漢 詩 硏 究 3, 韓 國 漢 詩 學 會, 1995. 李 勝 洙 의 玉 같은 너를 어이 묻으랴, 太 學 社, 2001. 林 京 錫. 유교 지식인의 독립운동 : 1919 년 파리 長 書 의 작성 경위와 문안 변동, 대 동문화연구 37, 2000. 林 京 錫. 파리 長 書 서명자 연구, 대동문화연구 38,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01. 林 濬 哲, 自 挽 詩 의 詩 的 系 譜 와 朝 鮮 前 期 의 自 挽 詩, 古 典 文 學 硏 究 31, 韓 國 古 典 文 學 會, 2007. 林 濬 哲, 朝 鮮 時 代 自 挽 詩 의 類 型 的 特 性, 語 文 硏 究 38 卷 22 號, 語 文 敎 育 硏 究 會, 2010. 全 峯 寬, 럭키 京 城, 살림, 2007. 全 松 烈, 옛사람의 눈물 : 朝 鮮 의 挽 詩 이야기, 글항아리, 2008. 鄭 雨 澤, 近 代 的 抒 情 의 形 成 과 離 別 의 樣 相, 國 際 語 文 38, 國 際 語 文 學 會, 2006. 趙 亨 烈, 설태희의 협동조합주의와 문화운동론, 한국사연구 130, 한국사연구회, 2005. 崔 載 南, 韓 國 哀 悼 詩 硏 究, 慶 南 大 出 版 部, 1997.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