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 곡 학 회 논 문 집 율곡사상연구 제17집 율곡의 주자학적 진리의 擔 持 와 實 心 의 철학 곽 신 환 (숭실대) 한글 요약 朱 子 (1130-1200)는 理 學 을 集 大 成 했다. 그는 유학의 이념적 향방을 확정했고, 理 學 개 념 체계의 정합성을 이루어냈다. 栗 谷 (1536-1584)은 朱 子 學 者 이다. 그는 朱 子 보다 406년 뒤에 태어났고, 中 國 이 아닌 朝 鮮 에서 활동했다. 栗 谷 은 이미 確 立 되어 있는 朱 子 學 을 祖 述 하는 일, 바로 이해하는데 주력했다. 그리고 그 理 念 과 志 向 을 조선의 現 實 상황에 政 治 와 敎 育 을 통하여 구현하는데 노력했다. 氣 發 理 乘 一 途, 理 通 氣 局 등이 理 와 氣 에 관한 논쟁에서 율곡이 취한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자는 70평생 鄕 村 에서 學 問 에 從 事 했다. 南 康 軍 知 事 와 浙 東 提 擧 등의 高 位 職 에 잠 시 나간 적이 있으나 거의 대부분의 생애를 한갓 名 譽 職 인, 그러나 家 計 에는 큰 도움이 되는 祠 祿 官 으로 있으면서 同 僚 門 人 들과 學 問 에 종사했다. 율곡은 일생 주로 朝 廷 의 큰 정치에 從 事 했다. 一 國 정치의 득실이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크게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말과 같이 나아가서 조정에서는 行 道 에 전념했고, 물러서 향리에서는 垂 敎 에 間 斷 이 없었다. 그는 그것이 眞 儒 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朱 子 와 栗 谷 은 두 사람은 모두 일생 聖 人 을 목표로 學 問 을 하였다. 두 사람은 이제 匹 夫 와 골목( 閭 巷 )에서조차 끊어져 버린 聖 統 을 이어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充 溢 한 삶 을 살았다. 이러한 匹 夫 聖 人 論 은 곧 萬 人 聖 人 論 으로 확산되었다. 궁극적으로 두 사람의 학문은 毋 欺 의 철학, 實 理 와 實 心 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추구한 성인의 학문은 이를 바탕에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자는 일생 固 窮 했다. 窮 乏 한 삶이 그의 뜻을 바꾸 지 않았다. 그는 祠 祿 官 이라는 제도를 지혜롭게 활용하여 生 計 를 위한 苦 心 에서 벗어나 학문에 종사할 수 있었다. 이른바 窮 居 不 損 이 주자의 모습이었다. 율곡 또한 朝 廷 의 大 官 을 歷 任 할 때나 외직의 목민관을 담당할 때에도 또 물러나 향리에서 학문에 종사할 때도 평소의 모습과 뜻을 상실하지 않았다. 이른바 大 行 不 加 의 삶이 율곡의 경우이다. 朱 子 는 중국에서 聖 統 을 확립하여 유학의 向 方 과 正 體 性 을 다듬었다. 율곡 역시 伏 羲 에서 朱 子 에까지 이르는 道 統 을 밝히는 일면, 한국에서 箕 子 以 來 의 道 統 을 밝혀 조선 학자들에게 푯대를 제시했다. 그것은 유학의 본령이라고 본 修 己 治 人 에 충실한 것이요, 사회와 정치적 현실에 道 學 의 理 念 을 구현하는 향방이었다. 주제어 : 기발이승일도( 氣 發 理 乘 一 途 ), 이통기국( 理 通 氣 局 ), 진유( 眞 儒 ), 필부성인론( 匹 夫 聖 人 論 ), 실리( 實 理 )와 실심( 實 心 )
6 곽 신 환 1. 진리 사회의 擔 持 16세기 초중반에 조선의 사대부 가문에 태어난 이들은 현실에 대한 꿈을 접는 경우가 아닌 한 표면적으로는 주자학 이외의 길에서 安 心 立 命 과 立 身 揚 名 의 길을 찾을 수 없었다. 퇴계 이황(1501-1570)과 율곡 이이(1536-1584)도 그러했다. 이들은 선후배 또는 시각에 따라서 사제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양자는 서로를 존중하고 아꼈다. 그러나 이들의 후학들은 서로 상당한 대립 각을 세우며 자기 집단의 학문적 정통성과 학계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부 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론과 학문적 지향이 다소 다르기도 했지만 그보다 는 현실의 정치적 利 害 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파의 이론적 정합성을 구축하는 작업이기도 했고, 그 이론과 지향이 주자의 그것과 접맥 여부 문제 이기도 했다. 그들은 주자의 학문관련 문헌의 일자 隻 句 도 소홀히 하지 않고 철저히 연구하였다. 1) 斯 文 亂 賊 의 파동에서도 주자학과의 정합성 또는 공자학과의 부합 여부를 따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퇴계이론과 일치하냐 율곡의 지향과 부합하냐의 여부가 그 판단의 기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退 門 亂 賊 栗 門 亂 賊 이 보다 실상 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집안 단속이라 할 수 있는 차원에서 후인 들의 학설에 대한 통제와 그들 문집에 대한 교감이 엄정하게 진행되었다. 2) 근래에도 이러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예컨대 율곡학은 주자의 학문이 * 이 논문은 2008년도 숭실대학교 교비학술연구비의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2008년 4 월 15일 사천성 성도에서 열린 율곡학국제학술대회 에서 초고를 발표하고, 이어 수 정보완하였음. 1) 이들은 주자학을 正 學 으로 규정하고 그 정치적 학문적 권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와 政 敵 의 위치에 있는 학자집단의 공격을 방어하려는 의도, 그리고 자파 내에서 分 岐 한 이른바 人 物 性 同 異 논쟁과 같은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한 필요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송시열에게서 시작된 朱 子 大 全 箚 疑 나 朱 子 言 論 同 異 攷 이의철에게서 완성된 朱 子 語 類 考 文 解 義 같은 저서가 이런 유형에 속한다. 한편 퇴계학파 내에서도 종주로 받드는 퇴계의 이론과 위상을 지키기 위해 주자를 연구하고 율곡의 이론을 비판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한 예로 김경호는 尊 退 攘 栗 -퇴계학의 첨병으로서의 이구 라는 논문을 통하여 이러한 사정을 잘 드러내었다. 율곡사상연구 14집 2007년 69-96쪽 참고 2) 정권을 담당한 서인 집단에서는 상대적으로 학문적 관용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어 떤 경우에도 주자에 대한 도전은 용납하지 않았다. 한편 퇴계학파 내에서 퇴계의 이론 과 노선에 어긋나는 학자에게는 여러 형태의 압력이 가중되었다. 학파 내부의 결속을 통하여 어려운 국면에 있는 당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목적이기도 하였다.
㥾ἷ㦮G 㭒㧦䞯㩗G 㰚Ⰲ㦮G 縶覀㢖G 葒葖㦮G 㻶䞯 7 아니라는 주장도 나오고 퇴계학만이 주자의 학문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율 곡 후학들은 오직 율곡만을 따랐지 주자를 따른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 다.3) 어쨌든 조선에서의 주자철학 연구는 이들 퇴계 율곡 그리고 그들의 후 학에 의하여 선도되었다고 해도, 또한 이들에 의하여 한국사회에 주자학적 진리가 담지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4) 대체로 주자의 학문이 끼친 공헌은 대략 세 가지를 꼽는다. 신유가 철학을 완성하고 발전시킨 것, 신유학의 도통을 건립한 것, 사서집주를 완성하고 그 체계를 수립한 것이 그것이다. 주자가 신유학의 체계를 수립하고 완성 발전 시킨 것으로 신유가의 방향 확정, 이와 기의 관계 정리, 태극 관념의 발전, 인 관념의 발전을 든다.5) 공자를 배우려면 주자로부터 출발해야 하고 주자를 배우려면 율곡을 배 워야 한다 는 것이 조선조 17세기 이후 기호지역 일단의 사대부 가문의 학 자들에게 있어서 당연시되는 지침이었다. 율곡은 자신이 주자 뒤에 태어나 학문에 어긋남이 없게 된 것을 천행으로 여긴다고 했다.6) 그만큼 율곡은 주 자를 尊信하였다. 한 때 불교와 노장의 가르침에 관심을 갖고 出入을 하였지 만 그가 활동할 수 있는 현실세계는 그의 관심과 활동을 제약하였다. 금강산 입산 경력이 그의 정치적 위상을 오랫동안 심각하게 흔들었던 것에서, 또한 그의 저작 뺷醇言뺸이 오랫동안 드러나지 못했던 것에서 이런 사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과거에서의 좋 은 성적은 자신의 정치적 학문적 위상을 우월하게 확보하는 방법이었고, 실 제로 그러했다. 또한 당시 조선사회를 진리의 사회로 끌고 갈 수 있는 화두 는 주자의 명제들이라고 보았다. 3) 학계의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홍원식이 율곡학과 퇴계학 이라는 제목으로 정리하고 있다. 뺷율곡학과 한국유학뺸G 충남대 유학연구소 편 예문서원 2007년 4) 이러한 점은 뺷16세기 성리학파의 역사의식에 관한 연구뺸로 1975년 이동준 교수가 정리 하여 비교한 바 있다. 이 논문은 근래에 뺷16세기 한국성리학파의 철학사상과 역사의 식뺸이란 제목으로 도서출판 심산 에서 출간되었다. 2007년 11월. 이 논문의 결론에서 이동준은 퇴계학을 수교적 정향의 도학적 내면화, 율곡학을 진리와 현실의 연계와 구 체적 대응으로 대비하고 있다. 5) 陳榮捷 뺷朱學論集뺸G 朱熹集新儒學之大成 1-23쪽 참조 6) 율곡은 내가 원하는 바는 주자를 배우는 것이다 라고 했다. 뺷栗谷全書뺸G 2권, 시, 하, 고산구곡가 高山九曲潭. 世人未曾知. 姝茅來卜居. 朋友皆會之. 武夷仍想像. 所願學朱 子 고산구곡가는 율곡이 한글로 쓴 시이나 우암송시열이 한문으로 옮긴 것이다.
8 곽 신 환 2. 주자학에 대한 율곡의 持 守 와 變 通 주자와 율곡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율곡은 주자의 학문 가운데 무엇을 持 守 했고 무엇을 變 通 하였는가? 가. 匹 夫 聖 人 論 율곡은 도통이 옛날에는 성인에서 성인으로 전해졌으나 시대가 내려오면 서 전승되지 못했고 마침내 도통이 골목의 보통사람 곧 匹 夫 에게 돌아갔다 고 하였다. 그는 공자를 필부의 처지에서 세상을 구하려 한 인물로 묘사하 고, 7) 도통이 군주와 재상에게 있지 않은 것은 참으로 큰 불행이라고 하였으 며, 8) 이제 도통이 골목길에서마저 끊어졌고 아득한 길고 깊은 밤이 되었다 고 탄식하고 있다. 9) 통상 필부와 성인은 대립되는 개념인데 율곡은 이 두 개 념을 연결시킨 것이다. 이는 사상사적으로 매우 심대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10) 도통이 황궁에 사는 황제에게서가 아니라 골목에 사는 필부에 의하여 이 7) 栗 谷 全 書 6권 소차 應 旨 論 事 疏 昔 者 春 秋 之 時, 世 衰 道 微,, 諸 侯 擅 制, 大 夫 專 政, 天 下 淆 亂 極 矣. 而 孔 子 以 匹 夫 之 力, 猶 且 欲 救 一 世, 轍 環 四 國, 而 其 言 曰, 天 下 有 道, 丘 不 與 易 也. 蓋 聖 人 之 心, 不 以 無 道 必 天 下 而 棄 之 也. 今 日 世 道 之 降, 雖 下 於 春 秋 之 時, 無 列 國 戰 爭 之 患, 而 殿 下 居 得 治 之 位, 非 孔 子 匹 夫 之 比, 欲 治 則 可 治 矣. 殿 下 豈 可 以 無 道 必 一 國 而 棄 之 耶 8) 栗 谷 全 書 聖 學 輯 要 聖 賢 道 統 여기서 율곡은 道 統 이 君 子 나 宰 相 에게 있지 않은 것 이 큰 불행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바른 통치와 세상의 안전이라고 하는 면에서 적절한 지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편 이 聖 學 輯 要 를 제작하여 바치게 된 일차적 대상이 군주였던 만큼 군주가 도통을 이으라는 권유의 의미가 담긴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성현도통 마지막 부분에서 율곡은 반드시 우리 도를 크게 밝혀서 크게 행하여 도통 의 전승에 닿는다면 영원히 크게 다행일 것이다 라고 하였다. 9) 栗 谷 全 書 聖 學 輯 要 聖 賢 道 統 10) 물론 길거리의 사람도 모두 요순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거나 만인이 모두 성인이라는 명제가 일찍부터 등장했지만 이들 명제를 지식인사회에 다시 환기시키고 그 의미를 체계적으로 되새김하여 사회변화에 기여한 공을 평가해야 한다. 다른 한편 도의 전수 책무가 골목의 선비에게도 주어졌다고 하는 것은 세속 왕권과 달리 또 하나의 권위체 계가 형성되는 것의 의미가 있다.
㥾ἷ㦮G 㭒㧦䞯㩗G 㰚Ⰲ㦮G 縶覀㢖G 葒葖㦮G 㻶䞯 9 어졌다는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이는 실상 주자의 생각이기도 하다.11) 주자 는 뺷중용장구뺸G 서문에서 공자가 군주나 재상의 지위를 얻지 못했으나 도통 을 이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주자 때에 이미 공자는 거리의 학자라는 위상을 넘어 神聖의 위치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율곡의 표현과 같이 필부 의 힘으로 일세를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12) 사실 공자 이후의 진리의 담지자 는 士類라 불리는 집단이었다.13) 주자는 일개 학자도 도를 전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미 성인은 타 고 나거나 하늘이 특별히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구나 다 배워서 성취할 수 있는 존재로 그 개념이 바뀌었다.14) 주자는 세상 사람들이 성인은 너무 고원하고 자기는 낮다고 여겨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 성향이 있음을 지적하 고, 안연이 순은 누구며 나는 누구냐 라고 하였는데 노력하는 사람은 또한 이와 같다고 하였다. 15) 11) 주자 뺷중용장구집주뺸G 서문 若成湯文武之為君, 臯陶伊傅周召之為臣, 既皆以此, 而接夫 道統之傳, 若吾夫子, 則雖不得其位, 而所以繼往聖開來學, 其功反有賢於堯舜者, 然當是 時, 見而知之者, 惟顔氏曾氏之傳得其宗, 及曾氏之再傳, 而復得夫子之孫子思, 則去聖鐵 而異端起矣 12) 뺷栗谷全書뺸G 26권 聖學輯要 於是, 在下之賢聖, 不能自立於朝, 深藏不售, 蘊寶終身, 而棄義趨利者, 相排競進, 上下交征, 道統之傳, 始歸於閭巷之匹夫. 道統之不在君相, 誠 天下之不幸也. 是故, 道統在於君相, 則道行於一時, 澤流於後世, 道統在於匹夫, 則道不 能行於一世, 而只傳於後學, 若道統失傳, 竝與匹夫而不作, 則天下貿貿. 不知所從矣, 周 公歿, 百世無善治, 孟軻死, 千載無眞儒, 此之謂也 13) 주자는 여동래와 함께 편집한 뺷近思錄뺸의 제 14권에서 맹자에서 끊어진 도통을 잇는 인물로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 등을 꼽는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군주도 재상도 아닌, 사대부 신분들이다. 도통이 사대부에게 이어지고 있다는 선언인 것이다. 섭채는 이장 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此卷論聖賢相傳之統, 而諸子附焉. 斷自唐虞堯舜 禹湯文武周公道統相傳至於孔子, 孔子傳之顔曽, 曽子傳之子思, 子思傳之孟子, 遂無傳焉. 於是楚有荀卿, 漢有毛萇董仲舒揚雄諸葛亮, 隋有王通, 唐有韓愈, 雖未能傳斯道之統, 然 其立言立事有補於世教, 皆所當攷也. 迨於宋朝, 人文再闢, 則周子唱之, 二程子張子推廣 之, 而聖學復明, 道統復續, 故備著之 14) 주돈이 뺷通書뺸G 聖可學 맥락은 다르나 서양 중세 말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萬人司 祭說 을 들고 나온 것과 주자 등에게서 도통이 선비에게 있다는 선언은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15) 율곡은 이와 관련된 내용을 모아 뺷聖學輯要뺸G 수기 장에 편집하였다. 뺷栗谷全書뺸G 20 권 뺷聖學輯要뺸G 수기 2 상 孟子道性善, 言必稱堯舜. 孟子.下同. 朱子曰. 道, 言也. 性 者, 人所稟於天以生之理也. 渾然至善, 未嘗有惡. 人與堯舜, 初無少異. 但衆人, 汩於私欲 而失之, 堯舜則無私欲之蔽, 而能充其性爾. 故孟子道性善而必稱堯舜以實之. 欲其知仁義 不假外求, 聖人可學而至, 而不懈於用力也. 又曰. 凡人須以聖賢爲己任. 世人多以聖賢
10 곽신환 이는 성인 개념의 변화이기도 하고, 도통의식의 변천이기도 하다. 한편 이 는 유교사회 안에서 이제 가치의 체계가 분화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비록 이념적으로 內聖外王이라고 하고 內外가 일치해야한다는 것을 표방하지만 실제로 內聖의 길과 外王의 길이 분화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는 사대부가 성인이라는 가치를 얻을 수 있는 길을 활짝 열 어놓은 것이 된다. 匹夫가 聖人이 될 수 있고 道를 전할 수 있게 된다는 주장은 물론 율곡에 게서 처음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선명한 필치와 개념으로 이를 부각시킨다. 율곡은 20세경 쓴 자경문 에서 스스로를 격려하여 성인을 기 약하였다. 털끝만큼의 부족함이 있다면 자기의 일은 끝나지 않은 것이라고 다짐하였다.16) 이런 생각은 자기만의 다짐과 계획으로 멈춘 것이 아니고 모 든 배우는 사람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뺷학교모범뺸에 서도 모름지기 배우는 사람의 입지를 강조하고 또 그 기약의 목표를 성인으 로 선명히 제시했던 것이다.17) 뺷대학뺸의 궁극목표가 치국 평천하라면 이는 帝王이나 賢相과 같은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이지 일반 필부로서는 무관 한 것 아닌가 하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 필부에게 무관하다면 修己 등이 목 적이 분명해지지 않는다. 이에 대해 주자는 뺷大學或問뺸에서 치국 평천하는 천자와 제후의 일이므로 경대부 이하의 사람들과는 무관한 것이 아니냐고 하는 물음을 던지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군자의 마음은 탁 트여 寬大하고 公平하다. 세상의 어떤 물건도 내 마음이 마 땅히 사랑해야 할 것 아님이 없고 어떤 일도 내 직무에서 하지 않을 일이 없다. 혹 형세가 匹夫와 같은 미천한 지위에 있다고 하여도 그 군주를 요순처럼 그 백성 들을 요순시대 백성처럼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자신의 분한에 부응하는 일이다. 배우는 자가 세상의 일을 자기 일처럼 한다면 군사 재정 제사와 같은 낮은 직무 爲高, 而自視爲卑, 故不肯進, 抑不知稟性與常人一同, 安得不以聖賢爲己任. 顏淵曰ૡ舜 何人也ૡ予何人也ૡ有爲者亦若是ૡ 16) 뺷栗谷全書뺸G 14권 잡저 自警文 先須大其志, 以聖人爲準則, 一毫不及聖人, 則吾事未 了 17) 뺷栗谷全書뺸G 15권, 학교모범 一曰立志, 謂學者先須立志, 以道自任, 道非高遠, 人自不 行. 萬善備我, 不待他求, 莫更遲疑等待, 莫更畏難醡趄, 直以爲天地立心, 爲生民立極, 爲 往聖繼絶學, 爲萬世開太平爲標的. 退託自畫之念, 姑息自恕之習, 不可毫髮萌於胸次, 至 於毀譽榮辱利害禍福, 一切不動其心, 奮發策勵, 必要作聖人而後已
㥾ἷ㦮G 㭒㧦䞯㩗G 㰚Ⰲ㦮G 縶覀㢖G 葒葖㦮G 㻶䞯 11 를 맡는다고 해도 모두 위기지학이 되는 것이다 18) 윗글에서 주자는 세상을 구제할 담당자로서의 군자는 경대부와 같은 신분 개념을 넘어서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즉 군자는 필부와 같은 미천한 지위에 있을 수도 있고 요순같은 제왕의 신분에 있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크게 일할 수도 있고 낮은 위치에서 작게 일할 수도 있지만 모두 자기를 위하는 것이 될 수 있고 세상의 어떤 물건도 마음이 사 랑하고 어떤 일도 내 직분이 담당하는 일로 삼는 것임을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이 부분에 상응하는 내용을 율곡에게서 찾을 수 있다. 율곡은 뺷중용뺸의 머릿장에 나오는 中과 和를 극진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육성 된다(致中和 天地位 萬物育) 을 해석하는 가운데 中 和의 공효에는 넓고 좁 음의 차이가 있음을 말하고 그 공효가 한 집에 미치면 한 집의 하늘과 땅이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하고 한 집안의 만물이 번창한다고 하였다.19) 곧 중화를 이루는 노력이 한 집 안에 머물면 곧 한 집 안의 하늘과 땅이 제자 리를 잡고 만물이 생육하여 밝은 덕이 한 집 안에서 밝을 것이고 한 나라에 머물 면 한 나라의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생육하여 밝은 덕이 한 나라에 밝아질 것이며 온 세상에 미치면 온 세상의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생 육하여 밝은 덕이 온 세상에 밝아질 것입니다. 고대 중국의 삼대 이후에 한 집안 이 제자리를 잡고 번성한 경우는 세상에 간혹 있었지만 한 나라와 온 세상이 제자 리 잡고 번성했다는 것은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20) 18) 주자 뺷대학혹문뺸G 君子之心豁然大公, 其視天下無一物而非吾心之所當愛, 無一事而非吾 職之所當爲 雖或勢在匹夫之賤, 而所以堯舜其君堯舜其民者 亦未嘗不在其分內也. 大 抵 以學者而視天下之事, 以爲己事之所當然而爲之, 則雖甲兵錢穀籩豆有司之司, 皆爲 己也 19) 뺷栗谷全書뺸G 19권 聖學輯要 통설1, 臣按. 聖賢之學. 不過修己治人而已. 今輯中庸大學首 章之說. 實相表裏. 而修己治人之道. 無不該盡. 蓋天命之性, 明德之所具也, 率性之道, 明 德之所行也, 修道之敎, 新民之法度也. 戒懼者, 靜存而正心之屬也, 愼獨者, 動察而誠意 之屬也. 致中和而位育者, 明德新民, 止於至善, 而明明德於天下之謂也. 但所及有衆寡, 而功效有廣狹, 致中和之功, 止於一家, 則一家之天地位萬物育, 而明德明於一家, 一家豈 別有天地萬物乎? 只是父子夫婦兄弟, 各正其分, 是天地位氣象, 慈孝友恭唱隨, 各盡其情, 是萬物育氣象, 止於一國, 則一國之天地位萬物育, 而明德明於一國, 及於天下, 則天下之 天地位萬物育, 而明德明於天下矣. 三代之後, 一家之位育者, 世或閒出, 而一國天下之位 育者, 寂寥無聞, 以是深有望於殿下焉
12 곽 신 환 주자는 치 평의 문제로 율곡은 중 화의 문제로 접근하였으나 두 사람의 지향과 문제의식은 같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 개인의 중화의 공효로 어떻 게 천지만물에서 그 공효가 나타나는가에 대한 물음을 예상하고 내놓은 예 상 답변이기도 하고 또 처음부터 그것이 너무 높고 멀며 실천하기 힘든( 高 遠 難 行 ) 것이라는 지레짐작으로 포기 하려는 것을 막기 위한 동기에서 나온 기 술이다. 21) 그런데 이는 천지만물이라는 개념에 대한 탄력적 해석이기도 하 지만 통상 천지만물에 대한 과제는 제왕 군주 제후의 몫이었지만 이제는 이 것에 대한 해석이 탄력을 받음으로 하여 일개 사대부, 필부의 中 和 도 하 늘과 땅이 제자리 잡고 만물의 번창하는 효과와 관련을 갖는 해석이 가능하 게 된 것이고 이 가르침이 필부에게도 적용되는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이미 율곡은 聖 學 輯 要 가 聖 人 帝 王 만의 학문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제왕 이라면 천지 만물의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지만 사대부라면 일가의 수준에 서 논의해도 무방하다는 뜻이 배려된 해석이다. 22) 그가 학생들에게 立 志 를 강조하면서 반드시 聖 人 을 기약해야 한다고 강조 20) 율곡은 자신의 주석에서 한 집 안에 어찌 따로 하늘과 땅 만물이 있겠습니까? 다만 부모와 자녀 부부 형제가 각각 자기 분수를 바르게 하는 것이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잡는 기상이고 자애와 효도 우애와 공경 이끌고 따르는 것이 저마다 그 실상대로 움 직이면 이것이 바로 만물이 생육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21) 栗 谷 全 書 19권, 聖 學 輯 要, 통설 朱 子 曰, 致, 推 而 極 之 也. 位 者, 安 其 所 也, 育 者, 遂 其 生 也, 自 戒 懼 而 約 之, 以 至 於 至 靜 之 中, 無 所 偏 倚, 而 其 守 不 失, 則 極 其 中 而 天 地 位 矣. 自 愼 獨 而 精 之, 以 至 於 應 物 之 處, 無 少 差 謬,, 而 無 適 不 然, 則 極 其 和 而 萬 物 育 矣. 蓋 天 地 萬 物, 本 吾 一 體, 吾 之 心 正, 則 天 地 之 心, 亦 正 矣. 吾 之 氣 順, 則 天 地 之 氣, 亦 順 矣. 故 其 效 驗 至 於 如 此, 此 學 問 之 極 功, 聖 人 之 能 事, 初 非 有 待 於 外, 而 修 道 之 敎, 亦 在 其 中 矣 22) 이런 해석은 물론 聖 學 輯 要 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誠 策 에서도 나타난다. 栗 谷 全 書 拾 遺 6권 誠 策 其 所 以 致 中 和, 位 天 地, 育 萬 物 者, 雖 有 莫 測 之 用, 莫 大 之 效, 而 用 功 之 始, 則 必 本 於 謹 獨. 故 朱 子 曰, 自 戒 懼 而 約 之, 則 極 其 中 而 天 地 位 矣. 自 謹 獨 而 精 之, 則 極 其 和 而 萬 物 育 矣. 若 聖 人 則 不 勉 而 中, 不 思 而 德, 其 所 以 參 天 地, 贊 化 育 者, 乃 至 誠 之 所 致 也. 安 有 著 力 於 其 間 哉. 聖 人 則 不 可 尙 已. 試 以 賢 者 之 得 感 應 之 效 者 言 之. 劉 昆 守 江 陵. 而 向 火 扣 頭. 以 致 反 風 之 效, 則 其 誠 一 於 救 民 而 已. 孟 宗 爲 病 母 而 泣 于 竹 林, 以 致 荀 生 之 效 則 其 誠, 一 於 養 病 而 已, 陽 公 之 誠, 切 於 回 日, 則 臨 陣 揮 戈, 而 我 誠 可 以 感 乎 天 矣. 王 祥 之 誠, 切 於 得 魚, 則 臨 河 扣 氷, 而 我 誠 可 以 感 乎 物 矣. 數 子 之 誠, 可 謂 格 天 地 動 鬼 神 之 一 驗 也. 然 而 不 得 全 體 之 誠, 而 只 有 一 端 之 誠, 則 滅 火 而 回 日 者, 只 是 一 時 之 效 耳. 其 安 能 極 其 中 而 位 天 地 乎. 筍 生 而 魚 躍 者, 只 是 一 事 之 應 耳. 其 安 能 極 其 和 而 育 萬 物 乎? 蓋 揮 戈 扣 頭 之 誠, 未 若 聖 人 與 天 地 合 其 德 之 誠 也. 泣 竹 扣 氷 之 誠, 未 若 聖 人 俾 萬 物 得 其 所 之 誠 也. 其 與 誠 明 之 誠, 位 育 之 盛, 不 可 同 日 而 語 矣
㥾ἷ㦮G 㭒㧦䞯㩗G 㰚Ⰲ㦮G 縶覀㢖G 葒葖㦮G 㻶䞯 13 한 것은 이 匹夫聖人論과 연결되어 있다. 조정에서 큰 정치를 담당하면서 율곡이 주장한 필부성인론은 학교교육 등 구체적 시행을 통하여 조선의 士 類들에게 體化되어 갔다. 나. 道統論 주자의 공헌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것이 도통의 확정이다. 이는 이론적으 로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이 이를 수용하고 본보기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 공적을 높이 평가한다. 도통의 확립은 학술의 정체성 확립에 있어서 또 집단의 결속력 강화의 차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앞서 살핀 대로 주자에 의해 확정된 도통론을 율곡은 조선유학에 그대로 수용한다. 즉 도통이 제왕과 재상에게 있으면 도가 한 때 행하여지고 그 은 택이 후세에 전하여지며, 도통이 필부에게 있으면 도가 한 세상에 행하여 질 수 없고 다만 후학들에게 전해질 따름이며, 도통이 전해지지 않고 필부들도 일어나지 않으면 천하는 막막하여 쫓을 곳이 없게 된다고 하고 주공이 죽고 나자 세상에 오랫동안 선한 치세가 없었으며, 맹가가 죽고 나자 천년동안 眞 儒가 나오지 못한 것이 이를 말한다고 한다.23) 율곡은 그 나름의 진유론을 펼쳐서 나아가면 한 때 도를 행하고 그 백성으로 하여금 희고의 즐거움을 노래하게 하고 물러서게 되면 만세에 가르침을 드리워서 후학들로 하여금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해야 하며, 나아가서 도를 행한 것도 없고 물러서서 가르침을 드리운 것도 없다면 남들이 아무리 眞儒라고 해도 믿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런 시각에서 그는 조선 유학의 道統과 儒者論을 전개한다. 조선유학에서는 도통을 확정함에 있어서 여러 견해가 있었지만 포은 정몽 주를 이학의 조종으로, 정암 조광조를 도학의 태두로 받드는데 학파 사이에 큰 이견이 없다. 그리고 실제로 이는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율곡은 조선 理 學의 조종 위치에 포은 정몽주를 두지만 그는 사직을 지킨 신하일 뿐이라고 다소 폄하한다. 대신 정암 조광조를 道學의 泰斗 위치에 두고 表章한다. 이 는 그가 보는 眞儒論과 관련을 갖는다. 그리고 그 후학들에게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를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이후 조선유학에서 문묘종 23) 뺷栗谷全書뺸G 26권 聖學輯要 是故, 道統在於君相, 則道行於一時, 澤流於後世, 道統在 於匹夫, 則道不能行於一世, 而只傳於後學, 若道統失傳, 竝與匹夫而不作, 則天下貿貿. 不知所從矣, 周公歿, 百世無善治, 孟軻死, 千載無眞儒, 此之謂也
14 곽 신 환 사를 논의하고 결정함에 魯 齋 許 衡 을 黜 享 한다거나 양명학계통을 배제하는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율곡에 의하여 강화된 조선의 도통은 조선유학의 성 격을 이루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율곡은 중국 유학의 도통을 논함에 있어서 다소 특이한 견해를 드러낸다. 즉 소강절을 내성외왕이 갖추어진 학자로 평가하며 도통에 닿아있다고 평가 하는 것이다. 24) 또 그가 조선의 유학자이기 때문이지만 箕 子 에 관한 관심을 높이 갖고 그를 평가하였으며 25) 기자실기 를 편찬하기도 했다. 26) 다. 毋 欺 의 철학- 實 理 와 實 心 율곡의 철학은 마음의 진실성을 기초로 한다. 이는 학문이 지향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가 實 理 의 추구로 나타나야 하며, 한갓 세상의 耳 目 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無 欺 人 ) 실제로 세상을 변혁시키고 유익한 것을 창출해내야 한 다는 의미에서도 진실의 철학이지만 그의 마음을 속임 없는 상태로 유지한 다는 점에서도 이른바 無 自 欺 의 철학이다. 율곡은 역대의 성인들이 추구하고 도달한 경지를 實 理 라고 한다. 그리고 경전에서 가르치는 것 역시 실리라고 한다. 특히 그는 주역 의 뜻을 實 理 로 24) 栗 谷 全 書 26권, 성현도통 臣 按. 康 節 邵 氏, 內 聖 外 王 之 學, 安 且 成 矣, 而 先 賢 未 嘗 以 道 統 正 脈 許 之. 故 不 敢 載 于 此. 程 門 弟 子, 羽 翼 斯 道 者 亦 多, 而 能 荷 傳 道 之 任 者, 亦 不 可 見. 故 程 張 之 後, 繼 之 以 朱 子 焉. 但 龜 山 受 學 於 程 子, 豫 章 受 學 於 龜 山, 延 平 受 學 於 豫 章, 斯 三 先 生, 業 雖 不 廣, 是 朱 子 源 流 之 所 自 25) 栗 谷 全 書 4권, 代 白 參 贊 論 時 事 疏 我 國 邈 在 海 隅, 文 獻 無 徵, 箕 子 以 後, 寥 寥 千 載, 不 聞 儒 者 之 作, 麗 末, 鄭 夢 周 始 倡 理 學, 而 猶 未 大 著, 我 朝 金 宏 弼 遠 紹 其 緖, 爲 士 子 矜 式, 而 未 克 達 施, 無 事 業 可 攷, 惟 光 祖 奮 乎 衰 世, 馨 德 夙 播, 譬 如 靑 天 白 日, 有 目 者 莫 不 識 其 淸 明, 聞 風 振 起 者, 景 仰 山 斗, 其 丕 闡 絶 學 之 功, 優 於 夢 周, 宏 弼 也. 伏 願 殿 下 力 扶 道 脈, 追 念 賢 臣, 使 得 從 祀 文 廟, 則 多 士 悅 服, 作 成 可 期 矣. 嗚 呼, 眞 儒 之 作, 歷 代 所 罕, 況 我 東 方 人 物 眇 然 26) 栗 谷 全 書 14권, 箕 子 實 記 檀 君 首 出, 文 獻 罔 稽, 恭 惟 箕 子, 誕 莅 朝 鮮, 不 鄙 夷 其 民, 養 之 厚 而 敎 之 勤, 變 魋 結 之 俗, 成 齊 魯 之 邦, 民 到 于 今, 受 其 賜, 禮 變 之 習, 濟 濟 不 替, 至 於 夫 子, 有 浮 海 欲 居 之 志, 則 微 禹 之 嘆, 沒 世 愈 深 矣. 大 哉 箕 子, 旣 陳 洪 範 於 武 王, 道 明 于 華 夏, 推 其 緖 餘, 化 洽 于 三, 韓, 子 孫 傳 祚 千 有 餘 年, 後 辟 景 仰, 若 揭 日 月, 崇 德 報 功, 世 篤 其 典. 苟 非 元 聖, 烏 能 致 此, 嗚 呼 盛 矣 哉. 齊 人 只 知 有 管, 晏, 此 固 不 免 坐 井, 至 於 洙 泗 之 儒, 深 繹 夫 子 微 言, 洛 閩 之 士, 偏 傳 程 朱 遺 敎, 亦 其 理 宜 也. 我 東 受 箕 子 罔 極 之 恩, 其 於 實 迹, 宜 家 誦 而 人 熟 也. 然 今 之 土, 被 人 猝 問, 鮮 能 條 答, 蓋 由 羣 書 散 漫, 學 之 不 博 也. 栗 谷 全 書 年 譜 庚 辰 八 年, 先 生 四 十 五 歲, 五 月, 撰 箕 子 實 記.
㥾ἷ㦮G 㭒㧦䞯㩗G 㰚Ⰲ㦮G 縶覀㢖G 葒葖㦮G 㻶䞯 15 파악하고, 진실의 이치는 휴식이 없으니 하늘이 세 성인을 내지 않을 수 없 고 세 성인은 역을 확대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하였다.27) 그는 하늘에는 實 理가 있고 사람에게는 實心이 있다 고 한다. 實理이기에 氣化가 유행하여 멈추지 않고 實心이기에 공부가 밝아 쉬지 않는다 고도 말하고, 만일 사람으 로서 실심이 없다면 천리에 어긋난다고도 하였다.28) 그는 실심이 없는 경우 의 현상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진 이를 보면 마땅히 좋아해야 하는데 색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옮겨가고 사 악한 것을 보면 마땅히 미워해야하는데 사사로이 아부하는 것을 좋아하며 벼슬하 는 사람은 염치와 정의를 말하면서도 일을 처리할 때는 의롭지도 않고 청렴하지도 않으며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입으로는 기른다 가르친다 하면서도 막상 행정에는 기르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또 혹 억지로 인을 행하고 의에 힘써서 겉으로 는 볼만한 것이 있지만 中心에 즐기는 것은 仁義에 있지 않고, 거짓을 고치는 일 이 오래가지 못하고, 처음에는 날카로우나 나중에는 나태하다. 이 같은 것들이 모 두 실심이 없는 까닭이다. 29) 율곡은 천지의 리를 實理로 이해하고 인과 물이 모두 실리에 의존하지 않 음이 없으며 실리 이외의 설에 대해서는 군자가 믿을 바가 못 된다고 하였 다. 특히 그는 장생불로 久視恢劫과 같은 것은 지도자가 백성을 속이는 사설 이며 근거 없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30) 이러한 생각은 그의 초년 27) 뺷栗谷全書뺸G 易數策 夫聖人, 德合天地, 明竝日月, 與四時合其序, 與鬼神合其吉凶, 求 之於心術之動, 得之於精神之運, 非聖人, 烏能知易之微意乎. 大易之義, 實理而已. 眞實 之理, 不容休息, 則上天安得不生三聖, 三聖安得不衍大易哉. 若六十四卦, 則伏羲已畫其 象, 不待三聖然後乃成也 28) 뺷栗谷全書뺸G 21권, 聖學輯要 修己 2. 臣按, 天有實理, 故氣化流行而不息, 人有實心, 故 工夫緝熙而無閒. 人無實心, 則悖乎天理矣. 29) 뺷栗谷全書뺸G 21권, 聖學輯要 修己 2. 有親者ૡ莫不知當孝ૡ而孝者鮮ૡ有兄者ૡ莫不 知當弟ૡ而弟者寡ૡ口談夫婦相敬ૡ而齊家之效蔑聞ૡ長幼朋友ૡ亦莫不然ૡ至於見賢 知其當好ૡ而心移於好色ૡ見邪知其當惡ૡ而私愛其納媚ૡ居官者ૡ說廉說義ૡ而做事 不廉不義ૡ莅民者ૡ曰養曰敎ૡ而爲政不養不敎ૡ又或强仁勉義ૡ外似可觀ૡ而中心所 樂ૡ不在仁義ૡ矯僞難久ૡ始銳終怠ૡ如是之類ૡ皆無實心故也ૡ一心不實ૡ萬事皆 假ૡ何往而可行ૡ一心苟實ૡ萬事皆眞ૡ何爲而不成ૡ故周子曰ૡ誠者ૡ聖人之本ૡ願 留睿念焉 30) 뺷栗谷全書뺸G 拾遺 5, 잡저 神仙策 對. 天地之理, 實理而已. 人物之生, 莫不依乎實 理, 則理外之說, 非格物君子之所可信也.
16 곽 신 환 을 지배하던 생각이다. 31) 그가 말하는 실리는 천지의 조화가 쉬임 없이 이루 어짐과 관련된 발언이고 실심이란 이러한 천지의 조화와 서로 감통하여 나 타나는 효과를 의식하여 하는 발언이다. 그러나 실리니 실심이니 하는 것은 결국 성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맹자 에서도 중용 에서도 誠 者 와 思 誠 者 또는 誠 之 者 로 天 과 人 을 구별했다. 32) 율곡은 誠 에 주의한다. 誠 은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모두에서 언급 하고 있는데, 33) 나누어서 말하면 그 뜻이 각각 있지만 이를 합쳐서 말하면 천도와 인도일 따름이라고 한다. 저절로 그래서 그런 것은 천도이고 힘써 행 하여 그런 것은 인도이다. 진실무망한 것은 천도이고 진실무망하려고 하는 것은 인도이다. 천도는 실리이고 인도는 실심이다. 34) 實 理 의 誠 은 聖 人 은 기품이 청명하고 천리가 혼연한데 이것을 체득하여 태어나 면서부터 알고 편안하게 실천하는 것이 自 誠 明 이다. 맹자가 말하는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 萬 物 皆 備 於 我 ) 가 이것이다. 그러니 중용 의 誠 者 가 어찌 實 理 의 誠 이 아니겠는가? 實 心 의 誠 은 大 賢 이하의 기품이 아직 완전히 청명하지 못하고 천리가 혼전하지 못하며 性 情 이 혹 인욕에 얽매여 모든 행위가 다 참되지 는 못하므로 선을 밝히려 하고 그 마음을 진실하게하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이 自 明 誠 者 이며 중용 의 이른바 誠 身 이다. 그러하니 大 學 의 誠 其 意 와 논어 의 忠 31) 醫 藥 策 이라는 글에서도 이와 같은 주장을 펼친다. 栗 谷 全 書 拾 遺 6 의약책 天 地 之 間, 實 理 而 已. 理 外 之 說, 不 攻 自 破 矣. 愚 也 足 不 踐 扁 鵲 之 門, 目 不 睹 越 人 之 經, 所 學 者, 孔 子 之 道, 所 蘊 者, 經 濟 之 術, 其 於 醫 病 之 方, 固 所 面 牆 矣. 32) 栗 谷 全 書 拾 遺 6, 誠 策 對. 天 以 實 理 而 有 化 育 之 功, 人 以 實 心 而 致 感 通 之 效. 所 謂 實 理 實 心 者, 不 過 曰 誠 而 已 矣. 純 乎 天 理 而 得, 誠 之 全 者, 聖 人 也. 實 其 一 端 而 得 誠 之 偏 者, 賢 者 也. 其 體 甚 微, 而 其 用 甚 顯, 故 天 地 而 以 格, 鬼 神 可 以 動, 人 心 可 以 服 矣. 然 而 或 有 不 能 格, 不 能 動, 不 能 服 者, 因 其 理 數 之 變 耳, 非 誠 之 未 至 也 33) 율곡은 대학 에서는 誠 其 意 라했고, 중용 에서는 誠 者 天 之 道 라 했으며, 맹자 에 서는 反 身 而 誠 이라 했다. 논어 에서는 성을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忠 信 을 주장하라 고 했는데, 忠 이 망령됨이 없음이고 信 이 남을 속이지 않음이어서 誠 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34) 栗 谷 全 書 拾 遺 6권, 四 子 言 誠 義 誠 者, 眞 實 無 妄 之 謂, 而 有 實 理 之 誠, 有 實 其 心 之 誠, 知 乎 此 則 可 以 論 乎 誠 矣. 嘗 讀 大 學, 曰, 誠 其 意, 中 庸 曰, 誠 者, 天 之 道, 誠 之 者, 人 之 道, 未 知 誠 意 之 誠. 與 天 道 人 道 之 誠, 各 有 淺 深 歟. 孟 子 言 反 身 而 誠, 論 語 只 言 忠 信, 所 謂 忠 信 與 誠 意, 有 異 同 歟. 請 申 論 之, 盡 己 之 謂 忠, 以 實 之 謂 信, 忠 者 無 妄, 信 者 不 欺, 則 論 語 所 謂 忠 信. 與 誠 其 意 何 異 哉. 愚 未 見 論 語 之 獨 不 言 誠 也. 分 而 言 之, 則 庸 學 語 孟, 各 有 其 旨, 合 而 言 之, 則 不 過 天 道 人 道 而 已. 自 然 而 然 者, 天 道 也. 有 爲 而 然 者, 人 道 也. 眞 實 無 妄 者, 天 道 也. 欲 其 眞 實 無 妄 者, 人 道 也.
㥾ἷ㦮G 㭒㧦䞯㩗G 㰚Ⰲ㦮G 縶覀㢖G 葒葖㦮G 㻶䞯 17 信과 뺷맹자뺸의 몸에 돌이켜 진실되면 과 뺷中庸뺸의 誠之者가 어느 것이 實心의 誠 이 아니겠는가?35) 주자는 뺷대학뺸의 스스로 속인다(自欺) 는 말에 대하여 의리를 알지 못하 면서 나는 의리를 안다 라고 말하는 것, 또 절반은 알고 절반은 모르는 것 이 자기를 속이는 것 이라고도 하였다.36) 뜻을 성실하게 하는 것 이 자기를 속이지 않는 것이라는 말에 대하여 한 덩어리의 물건에서 한 쪽은 은인데 다른 한 쪽은 쇠인 것이 자기를 속이는 것이며, 표리가 일치하는 것이 자기 를 속이지 않음 이라고도 하였다.37) 이는 다시 이른바 스스로를 속인다는 것은 이 사람이 본래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 나 다만 이런 생각이 일어남에 따라 항상 한 생각이 속에서 막아서 표리가 하나가 되게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스스로를 속임이다 38)라고도 설명한다. 다만 털끝만큼의 불쾌한 마음이 있으면 이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라고 했다.39) 주자는 또 自慊에 대해서 사람이 선을 행함에 모름지기 100% 진실 하게 선을 행하여야 하는데 만약 6-70%만 선을 행하고 2-30%는 악한 생각이 있으면 표리가 서로 견제하게 되는데 이것은 自慊이 아니라고 했다.40) 또한 35) 뺷栗谷全書拾遺뺸G 6권, 四子言誠義 天道卽實理ૡ而人道卽實心也ૡ實理之誠則聖人氣 稟淸明ૡ道理渾然ૡ體此而生知安行ૡ此乃自誠明者ૡ而孟子所謂萬物皆備於我ૡ是 也ૡ然則中庸之誠者ૡ豈非實理之誠乎ૡ實心之誠則大賢以下ૡ氣稟未純乎淸明ૡ而不 能渾全其天理ૡ性情或牽於人欲ૡ而不能百行之皆實ૡ故明善而實其心ૡ此乃自明誠 者ૡ而中庸所謂誠身ૡ是也ૡ然則大學之誠其意ૡ論語之忠信ૡ孟子之反身而誠ૡ與夫 中庸之誠之者ૡ何莫非實心之誠乎ૡ 뺷朱子語類뺸G 21권 18조목 忠信, 實理也. 뺷朱子語類 뺸G 21권 19조목 忠信, 以人言之. 蓋忠信以理言, 只是一箇實理; 以人言之, 則是忠信. 蓋不 因人做出來, 不見得這道理. 端蒙(50이후). 36) 뺷朱子語類뺸G 16권 71조목 問劉棟: 看大學自欺之說如何? 曰: 不知義理, 卻道我知義理, 是自欺. 先生曰: 自欺是箇半知半不知底人. 知道善我所當爲, 卻又不十分去爲善; 知道 惡不可作, 卻又是自家所愛, 舍他不得, 這便是自欺. 不知不識, 只喚欺, 不知不識卻不喚 做 自欺. 道夫(60이후). 37) 뺷朱子語類뺸G 16권 72조목 或問 誠其意者毋自欺. 曰: 譬如一塊物, 外面是銀, 裏面是鐵, 便是自欺. 須是表裏如一, 便是不自欺. 然所以不自欺, 須是見得分曉. 譬如今人見烏喙之 不可食, 知水火之不可蹈, 則自不食不蹈. 如寒之欲衣, 飢之欲食, 則自是不能已. 今人果 見得分曉, 如烏喙之不可食, 水火之不可蹈, 見善如飢之欲食, 寒之欲衣, 則此意自實矣. 祖道(68세). 38) 뺷朱子語類뺸16권 75조목 所謂自欺者, 非爲此人本不欲爲善去惡. 但此意隨發, 常有一念 在內阻隔住, 不放敎表裏如一, 便是自欺 39) 뺷朱子語類뺸G 16권 76조목 只今有一毫不快於心, 便是自欺也.
18 곽 신 환 자기를 속이는 것과 남을 속이는 것에 대한 물음에서 남을 속이는 것이 바 로 자기를 속이는 것이라고 했다. 41) 이처럼 자신과 남을 속임이 없는 마음과 이치로 일생을 깨끗하게 살아간 것이 주자이고 율곡이다. 라. 固 窮 의 眞 儒 주자의 시대는 남송, 즉 송조가 이미 쇠망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금과의 전쟁이 있어 항시 위기의식이 억누르던 상황이었다. 또한 새로 학문을 일으 키는 艱 苦 한 상황이었다. 주자에게는 논적도 많았고 스스로 가다듬고 정리 하고 선택하고 정합성을 찾아 체계를 세워야 하는 엄청난 노력과 재능이 요 구되었다. 율곡의 경우는 이미 체계화되어 있고 국교화되어 있는 주자학을 연구하기만 하면 되어 사상적 방황의 여지가 별로 없고, 학문적 논적도 별로 없었다. 그가 퇴계에 대하여 다소 비판적 견해를 피력했고 우계 성혼과도 논 전을 펼쳤지만 그것은 주자학체계 안의 제한된 문제였다. 율곡에게는 李 侗 陸 九 淵 陳 亮 같은 논적이나 스승이 없었다. 成 渾 이 張 栻 같은 위치에 있었고 宋 翼 弼 이 呂 祖 謙 같은 역할을 하였다. 율곡은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이래 이미 20대 초반에 과거에 합격하여 이름을 드러냈다. 29세 이후 호조좌랑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 등 청직 요직에 부임하여 두각을 드러내다가 40세 이전에 이미 승지, 대사간, 황해도 관찰사 등 중앙 조정의 요직을 두루 역임한다. 40대에 들어서서도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호조 이조 형조 병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다가 49세 정월 병으로 서 거 하였다. 30대까지는 학자출신 관료들에게 주어진 月 課 등의 의무를 다하 기 위한 동호문답 만언봉사 등을 저술했다. 이는 유가의 정치사상과 관 련을 갖는 저술이다. 40대에 들어서 그는 자진하여 학술적 저술들을 써냈다. 40) 朱 子 語 類 16권 81조목 問 自 慊. 曰. 人 之 爲 善, 須 是 十 分 眞 實 爲 善, 方 是 自 慊. 若 有 六 七 分 爲 善, 又 有 兩 三 分 爲 惡 底 意 思 在 裏 面 相 牽, 便 不 是 自 慊. 須 是 如 惡 惡 臭, 如 好 好 色 方 是. 41) 朱 子 語 類 8권 125조목 因 說 自 欺 欺 人, 曰. 欺 人 亦 是 自 欺, 此 又 是 自 欺 之 甚 者. 便 敎 盡 大 地 只 有 自 家 一 人, 也 只 是 自 欺, 如 此 者 多 矣. 到 得 那 欺 人 時, 大 故 郎 當. 若 論 自 欺 細 處 : 且 如 爲 善, 自 家 也 知 得 是 合 當 爲, 也 勉 强 去 做, 只 是 心 裏 又 有 些 便 不 消 如 此 做 也 不 妨 底 意 思 ; 如 不 爲 不 善, 心 裏 也 知 得 不 當 爲 而 不 爲, 雖 是 不 爲, 然 心 中 也 又 有 些 便 爲 也 不 妨 底 意 思. 此 便 是 自 欺, 便 是 好 善 不 如 好 好 色, 惡 惡 不 如 惡 惡 臭. 便 做 九 分 九 釐 九 毫 要 爲 善, 只 那 一 毫 不 要 爲 底, 便 是 自 欺, 便 是 意 不 實 矣. 或 問 中 說 得 極 分 曉.
㥾ἷ㦮G 㭒㧦䞯㩗G 㰚Ⰲ㦮G 縶覀㢖G 葒葖㦮G 㻶䞯 19 뺷聖學輯要뺸는 당초 왕명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었으나 관직을 물러난 시간에 완성하여 왕에게 올린 것이고, 뺷격몽요결뺸G 뺷소학집주뺸G 뺷인심도심설뺸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특히 편지를 통하여 이루어진 우계 성혼과의 학 술 담론이 이 시기에 주로 이루어졌다. 물론 이때는 관직생활에서도 가장 왕 성한 때이기도 했다. 특히 47세 때는 한 해 동안에 이조 형조 병조판서를 역 임하다 이듬해 다시 이조판서를 역임하는 드문 일도 있었다. 이처럼 율곡의 일생을 일별하여 보면 그는 타고난 특별한 재능과 성실성 그리고 왕의 특별한 예우를 얻어 조정에 서는 날이 많았고 또 이와 관련 저 술도 많다. 그러나 관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에는 유교이념의 구현을 위하여 힘썼으니 향약 등의 제정과 사창법의 실시 등이 그것이고 또 동료 학우 등 과 더불어 성리학적 개념에 대한 이해와 설명에 많은 공력을 들였다. 주자는 일생 관직생활보다는 학문에 종사했다고 할 수 있다. 주자는 전후 10여년 관직에 있었고 조정에 선 것은 불과 40일 남짓이었다. 지방관직은 南 康軍 知事나 浙東提擧 등이 돋보이지만 일생 대부분의 시간을 家居로 보냈 고, 명예직이나 다름없는 祠錄官42)으로 생계를 돌본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사록관 생활은 전후 22년 7개월에 이른다. 이처럼 오래 사록관 생활을 한 사 람은 송대에 주자 이외 달리 없다. 진영첩은 주자가 사록관에 있은 것은 현 대의 정부의 연구비나 재단의 장학금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를 얻어 일생 연구에 전문적으로 종사했다는 것이다. 그가 사록관에 매달리다시피 한 것은 그가 몹시 빈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聖學에 대한 의지가 독실하여 관직생활보다는 공부 학문에 전념하고자 했고 생활의 방편상 그리고 안심하 고 교학생활을 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록관을 희망하여 얻었다는 것이다.43) 실제로 그는 벼슬이 제수되었음에도 이를 사양하고 사록관을 원했을 정도이 다.44) 주자의 학문적 대성은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그 중의 하나는 사록관제 도의 힘을 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계를 위한 일에 그의 시간과 힘을 사용했다면 그의 학문적 집대성은 어려웠을 것이다. 주자는 71세에 죽었다. 42) 祠錄官 제도는 당나라 때 시작되었는데 송대에 성행했고 이후에는 별로 보이지 않는 다. 이는 도교의 궁관을 돌보게 하고 녹봉을 주는 것으로서 道敎의 숭봉과 겸하여 賢 老에 대한 예우의 성격을 갖는 제도였다. 43) 진영첩 뺷주학논집뺸G 朱子固窮 207쪽 44) 49세 때 남강군 지사에 임명되었는데 주자는 이를 사양하고 사록관을 청했다. 그러나 나중 지사에 부임했다.
20 곽 신 환 이로 보면 주자의 50세전까지는 주로 이학의 향방을 정하는데 결정적인 학문적 성취가 이미 이루어졌다. 그것은 창조적이면서 동시에 선유의 학설 을 조술하는 것이었다. 태극도설 통서 서명 의 해의를 저술한 것, 그 리고 근사록 의 편찬은 구체적으로 선유의 학설을 승계하고 발전시킨 것이 며, 여타 사서와 관련된 것은 향후 그의 학문이 글자 그대로 신유학이 될 수 있는 결정적 토대를 제공한 것이 된다. 주자의 50대 이후 약 20년간의 저 술 45) 을 보면 그 관심이 四 書 중심에서 주역 초사 의례 한문 등 오경 과 문학 등으로 확대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주자의 理 學 분야에서의 학문적 성취는 이미 50세 이전에 거의 완성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 시기에는 탄핵도 있었고 僞 學 으로 지목되어 핍박도 받는 등 그의 신변에 번 거로운 일이 많아졌기에 학문에 전념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주자는 진영첩이 적절히 지적한 것과 같이 참으로 궁핍함을 견딜 줄 아는 ( 固 窮 ) 학자였다. 주자만큼 참으로 곤궁 46) 한 학자가 중국 역사상 드물다고 하였다. 47) 주자는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그가 아직 기반을 잡지 45) 50세 태극도설 통서 재차 교정, 57세 역학계몽 완성, 58세 육상산과 무극태극논 쟁, 59세 태극도설해 서명해 간행, 60세 대학장구서 중용장구서 씀 중용집략 완성, 61세 주역본의 완성, 65세 의례경전통해 완성, 68세 한문고이 주역참동 계고이 완성, 70세 초사집주 후어 변증 완성 46) 논어 에 君 子 固 窮 이라는 구절이 있다. 衛 靈 公 衛 靈 公 問 陳 於 孔 子, 孔 子 對 曰. 俎 豆 之 事, 則 嘗 聞 之 矣. 軍 旅 之 事, 未 之 學 也. 明 日 遂 行, 在 陳 絶 糧, 從 者 病, 莫 能 興. 子 路 慍 見 曰. 君 子 亦 有 窮 乎? 子 曰. 君 子 固 窮, 小 人 窮 斯 濫 矣 여기서 固 窮 이라는 말은 궁핍 한 상황에 의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자는 固 窮 을 군자는 궁핍함을 固 守 한다로 풀이 한다. 47) 진영첩 朱 學 論 集 朱 子 固 窮 205쪽 참조 진영첩은 이 논문에서 주자의 세가, 봉사, 봉록, 가난, 인무, 주고 받음 등의 항목으로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진영첩은 朱 子 固 窮 이라는 논문에서 주자의 이 문제를 다루는 까닭을 두 가지로 두고 있다. 하나는 그 의 상소문이나 편지글에 자주 궁핍함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종래의 중국철학자들에게 서는 없는 현상이다. 그는 궁핍함을 말하고 궁핍함에 신음한다고는 하지 않았는데 이 는 주자가 궁핍함에 어떤 원망을 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황간의 행장이나 대 선의 실기 송사의 본전 王 懋 竑 의 연보 등에서 이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 진짜로 주자의 빈궁한 상황이 어느 정도였는지 무엇이 곤궁했는지 알 수가 없고 일본이나 한 국의 학자들 가운데도 이를 다룬 글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곤궁한 처지가 그의 품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출처에 또는 학풍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소홀히 할 수없는 문제이다. 둘째는 중국문인들이 지주라는 주장들이 있는데 주자가 지난 800 년 동안 중국에서 최대의 영향력을 행사한 문인이지만 과연 그가 지주계급에 속하는 지 분별해야만 한다.
㥾ἷ㦮G 㭒㧦䞯㩗G 㰚Ⰲ㦮G 縶覀㢖G 葒葖㦮G 㻶䞯 21 못했을 때 죽었다. 그런데 주자는 관직에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다. 사록관 이라는 명예직 성격의 도교사당 관리인을 오랜 기간 신청하여 누렸는데 이 는 그가 생계를 도모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당시 사록관은 진영첩의 해석에 따르면 현대의 국가 장학금 또는 재단의 후원금 성격에 해당하는 학자에 대 한 재정 지원책이었다. 이 제도를 주자는 지혜롭게 이용했다. 너무 오랫동안 이제도에 매달리자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주자는 남강군지사를 제수받았을 때 이를 사양하면서 사록관을 청하기도 했을 만큼 사록관을 중 시했다. 사록관은 특별히 행정적 부담을 주지 않았다. 그러니 주자는 가거생 활을 하면서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가 그렇게 많은 문인을 거느렸고 또 많은 사람과 만나 학술담론을 즐길 수 있었던 것도 이 사록관 제도의 덕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자가 관직에 있었을 때 한 때 상당히 혹독한 탄핵을 가하여 상대를 곤궁에 처하게 한 일이 있고 이로 인하여 훗날 주자의 흠결 로 지적되곤 한다. 이는 그의 성격 탓도 있지만 행정관으로서 세련되지 못함 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 학문과 덕으로 드러난 명성에 걸맞지 않는 미숙한 행정의 한 사례이기도 하다. 이율곡 역시 곤궁했던 사람이다. 그 또한 사대부 가문에 태어났지만 가세 는 넉넉하지 못했다. 그가 혼인했을 때 일가의 곤궁함으로 인하여 장인으로 부터 얻은 집도 유지하지 못하고 이를 팔아서 도와주어야만 했을 정도로 곤 궁했다. 그는 자주 道友라고 할 수 있는 성혼으로부터 왜 과거에 자꾸 응시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마다 그는 家計를 돕기 위해서라고 궁색하게 변명한다. 성혼은 당시 율곡에 비교하면 명문가의 후손이다. 그리고 의리를 존중하는 가풍을 지닌 품격 높은 집안 출신이다. 어느 면에서 성혼은 율곡의 빈번한 과거시험 응시가 유자의 품격을 손상하는 것으로 보았던 듯하다.48) 당시 조선은 율곡의 변명이 있기는 하나 시각에 따라서는 유학자가 적극적 으로 조정에 나서는 것이 그리 당당한 명분이 되지 못할 수도 있는 정황이 었다. 그럼에도 율곡은 일찍부터 과거를 통하여 재능을 드러냈고 조정에 나 아갔다. 비교적 일찍부터 상당한 정도의 성리학적 식견이 갖추어진 것은 그 의 천재성 못지 않게 과거를 통한 입신에 대한 그의 집념과 노력 때문일 것 이다. 48) 율곡과 우계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황의동의 율곡성리학과 우계성리학 뺷율곡학과 한국유학뺸G 137-170쪽 참조 예문서원 2007년
22 곽 신 환 그러나 율곡은 비록 조정의 大 官 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이를 통하여 치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요 관직을 맡을수록 그 역할수행에 혼신의 노력을 기 울였고 그로이하여 병이 가중되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면 그는 직분을 수행 하다가 순직했다고 할 수 있다. 풍설로 전하는 해주 관아 기녀와의 이야기 는 그가 어떤 처신을 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는 이른바 大 行 不 加 의 삶으로 일관했고, 비록 궁핍한 처지로 내몰려도 窮 居 不 損 으로 그가 지닌 평소의 뜻을 바꾸지 않았다. 나아가서는 도를 행하려 했고 물러서서는 수교에 전념하였다. 항시 무거운 책무를 지고 있는 그리하여 그자신이 규정 한 바와 같이 眞 儒 의 길을 걸었다. 주자는 말년 僞 學 으로 지목되어 제약받았다. 여기에는 학문적인 것 외에 인격적 비난도 더해졌다. 주자는 초년에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유면지를 스 승으로 섬겼는데 유면지는 그를 사위로 삼았다. 그런데 비난하는 무리는 유 공의 딸을 취하여 그가 죽었을 때 거만금의 재산을 가로챘다 거나 비구니 둘을 꼬여서 첩으로 삼고 관직에 나갈 때마다 동반했다 거나 문도를 받을 때 반드시 부귀한 집 자제를 받아 들였고 束 脩 의 많고 적음을 따졌다 49) 고 공박했다. 그러나 劉 勉 之 의 가문이 부유했던 것은 사실이나 비난자들이 거 론한 유공은 유자우의 아들로서 면지가 아니다. 심계조의 비난은 정치 공세 의 일환으로 한 번 웃고 말 가치도 없다는 것이 진영첩의 판단이다. 율곡 역시 중앙의 대관직을 수행할 때 정적들로부터 초년 입산과 불교에 의 출입의 일로 오랫동안 혹독한 정치적 공세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런 경우 에도 그는 오롯한 처신, 危 行 言 遜 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3. 맺는 말 栗 谷 은 이미 確 立 되어 있는 朱 子 學 을 祖 述 하는 일, 바로 이해하는데 주 력했다. 그리고 그 理 念 과 志 向 을 조선의 現 實 상황에 政 治 와 敎 育 을 통하여 구현하는데 노력했다. 그는 일생 주로 朝 廷 의 큰 정치에 從 事 했다. 一 國 정 치의 득실이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크게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였 49) 沈 繼 祖 가 논핵한 주자의 여섯 가지 罪. 그러나 심계조가 말한 珙 은 勉 之 가 아니라 羽 之 이다.
㥾ἷ㦮G 㭒㧦䞯㩗G 㰚Ⰲ㦮G 縶覀㢖G 葒葖㦮G 㻶䞯 23 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말과 같이 나아가서 조정에서는 行道에 전념했고, 물러서 향리에서는 垂敎에 間斷이 없었다. 그는 그것이 眞儒의 길이라고 생 각했다. 주자와 율곡 두 사람은 모두 일생 聖人을 목표로 學問을 하였다. 두 사람 은 이제 匹夫와 골목(閭巷)에서조차 끊어져 버린 聖統을 이어가야 한다는 사 명감으로 充溢한 삶을 살았다. 이러한 匹夫聖人論은 곧 萬人聖人論으로 확 산되었다. 궁극적으로 두 사람의 학문은 毋欺의 철학, 實理와 實心을 지향하 는 것이었다. 그들이 추구한 성인의 학문은 이를 바탕에 두는 것이기 때문이 다. 주자는 일생 固窮했다. 窮乏한 삶이 그의 뜻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祠祿 官이라는 제도를 지혜롭게 활용하여 生計를 위한 苦心에서 벗어나 학문에 종사할 수 있었다. 이른바 窮居不損 이 주자의 모습이었다. 영달 또한 주자 의 기상을 바꾸지 못했다. 율곡 또한 朝廷의 大官을 歷任할 때나 외직의 목 민관을 담당할 때에도 또 물러나 향리에서 학문에 종사할 때도 평소의 모습 과 뜻을 상실하지 않았다. 이른바 大行不加 의 삶이 율곡의 경우이다. 朱子는 중국에서 聖統을 확립하여 유학학의 向方과 正體性을 다듬었다. 율곡 역시 伏羲에서 朱子에까지 이르는 道統을 밝히는 일면, 한국에서 箕子 以來의 道統을 밝혀 조선 학자들의 푯대를 제시했다. 그것은 유학의 본령이 라고 본 修己治人에 충실한 것이요, 사회와 정치적 현실에 道學의 理念을 구 현하는 향방이었다. 참고문헌 뺷栗谷全書뺸 뺷朱熹集뺸 뺷朱子語類뺸 뺷中庸或問뺸 뺷大學或問뺸 뺷論語集註뺸 뺷孟子集註뺸 이동준 뺷16세기 성리학파의 역사의식에 관한 연구뺸G 1975년 성균관대 박사학
24 곽 신 환 위논문 16세기 한국성리학파의 철학사상과 역사의식 심산 2007년 11월. 陳 榮 捷 朱 學 論 集 朱 熹 集 新 儒 學 之 大 成 朱 子 固 窮 유승국 율곡철학의 근본정신 유교학논총 동교민태식박사고희기념논총간행 위원회 1972년 황의동 율곡성리학과 우계성리학 율곡학과 한국유학 예문서원 2007년 김경호 尊 退 攘 栗 -퇴계학의 첨병으로서의 이구 율곡사상연구 14집 2007년 69-96쪽 참고 홍원식 율곡학과 퇴계학 율곡학과 한국유학 충남대 유학연구소 편 예문 서원 2007년 장숙필 율곡의 務 實 적 修 己 론 율곡사상연구 제3집 율곡학회 1997년 김경호 誠 敬 에 근거한 율곡의 수양공부론 한국사상사학 제18집 한국사상 사학회 2002년 유명종 퇴계와 율곡 퇴계학보 45 퇴계학연구원 1985 곽신환 이율곡의 策 文 연구 유교사상연구7 한국유교학회 1994년
25 [ 摘 要 ] 栗 谷 學 與 朱 子 學 郭 信 煥 ( 崇 實 大 學 校 哲 學 系 ) 内 容 摘 要 朱 子 ( 熹, 晦 菴 1130-1200) 是 理 学 的 集 大 成 者 他 定 了 儒 学 的 理 念 方 向, 并 实 现 了 理 学 概 念 系 的 整 合 李 栗 谷 ( 珥, 1536-1584) 是 一 位 朱 子 学 者, 他 比 朱 子 晚 出 生 406 年 他 不 是 在 中 国, 而 是 在 时 的 朝 鲜 进 行 了 活 动 栗 谷 致 力 于 传 授 已 立 的 朱 子 理 学, 即 对 朱 子 理 学 的 解 读 并 且, 他 为 了 使 那 些 理 念 和 志 向 通 过 政 治 和 教 育 来 现 在 时 朝 鲜 的 现 实 情 上 而 进 行 了 努 力 发 理 乘 一 途 理 通 局 等 提 法 就 现 了 栗 谷 在 关 于 理 的 论 争 中 所 持 的 观 点 朱 子 平 生 70 年, 都 在 乡 村 从 事 学 问 活 动 虽 然 短 暂 出 任 过 南 康 军 知 事 浙 东 提 擧 等 高 职 位, 但 乎 大 部 分 生 涯 都 是 作 为 只 是 名 誉 任 职, 但 却 对 维 持 家 计 有 大 助 的 祠 禄 官 来 和 同 僚 及 门 人 等 从 事 学 问 栗 谷 一 生 主 要 从 事 朝 廷 的 国 家 大 政 说 整 国 家 政 治 的 得 失 都 掌 握 在 他 的 手 上 也 不 算 过 分 但 是 他 连 同 自 己 的 言 论 在 朝 廷 的 时 候 专 心 实 行 自 己 的 政 治 主 张, 退 职 在 乡 村 时 也 从 未 间 断 过 传 授 他 认 为 这 是 真 儒 所 必 走 的 道 路 朱 子 和 栗 谷 两 人 都 是 以 作 人 为 人 生 目 标 从 事 学 问 的 这 两 人 把 传 承 发 扬 连 在 一 般 小 市 民 中 和 弄 巷 之 间 都 已 经 近 消 失 的 论 作 为 自 己 的 使 命 从 而 度 过 了 自 己 的 一 生 这 样 的 匹 夫 人 论 快 扩 散 为 万 人 人 论 终 归 来 说, 这 两 人 的 学 问 是 毋 欺 的 哲 学, 是 志 向 实 理 实 心 的 他 们 追 求 的 人 的 学 问 也 是 因 为 以 此 为 基 建 立 的 朱 子 一 生 穷 困, 但 是 穷 困 的 生 活 并 未 改 变 他 的 理 想 他 聪 明 地 利 用 了 祠 禄 官 这 样 的 制 度, 不 必 为 了 生 计 而 费 心, 从 而 能 从 事 学 问 所 谓 穷 居 不 损 就 是 朱 子 的 形 象 荣 华 也 未 能 改 变 他 的 概 栗 谷 也 是 不 论 是 任 朝 廷 大 官 还 是 在 外 地 偏 僻 地 区 作 牧 民 官, 或 退 职 在 乡 村 从 事 学 问 都 从 未 丧 失 自 己 平 时 的 形 象 和 理 念 所 谓 大 行 不 加 的 一 生 就 是 说 的 栗 谷 的 情 形 朱 子 在 中 国 立 了 统, 并 修 整 了 儒 学 的 方 向 和 正 性 栗 谷 也 是 一 面 阐 明 了 从 伏 羲 到 朱 子 发 展 来 的 道 统, 一 面 阐 明 了 韩 国 箕 子 以 来 的 道 统, 从 而 树 起 了 朝 鲜 学 者 们 的 标 杆 这 充 实 了 被 作 儒 学 根 本 的 修 己 治 人 的 理 念, 反 映 了 在 社 会 及 政 治 现 实 中 现 道 学 理 念 的 方 向 关 键 词 发 理 乘 一 途, 理 通 局, 真 儒, 匹 夫 人 论, 实 理, 实 心 논문접수일: 2008년 11월 15일, 심사완료일: 12월 15일, 게재확정일: 12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