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김 호성 * Ⅰ. 序 論 Ⅱ. 總 論 的 觀 點 의 差 異 1. 분석적 이해의 차이 2. 내용적 평가의 차이 Ⅲ. 各 論 的 觀 點 의 差 異 1. 포기의 강조와 노동의 정당화 2. 二 諦 說 과 二 重 性 3. 物 我 一 如 와 카르마요가 4. avidyā, 祭 禮 / 無 明 과 多 元 性 5. vināṣa, 生 起 와 不 生 起 Ⅳ. 結 論 Ⅰ. 序 論 인도철학사는 베다 1) 라는 문헌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베다 * 金 浩 星 :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조교수. 1) 베다 라고 할 때 좁은 의미의 베다만 가리키는 경우와 넓은 의미의 베다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 전자는 베다 本 集 만을 가리키고, 후자는 베다 브라흐마나 우파니샤드에 이어지는 문헌 전체를 가리킨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베다라고 할 때는 後 者 의 범주를 가리킨다. 예컨대, 샹카라는 이샤 우파니샤드 브하샤 에서 베다 텍스트 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우파니샤드를 가리키고 있었다.
106 印 度 哲 學 제10집 는 단순한 하나의 문헌일 수만은 없었다.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 게 되었으니, 그 자체가 이미 진리판단의 준거가 될 수 있는 典 範 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베다에 설해진 언어/ 說 자체가 聖 言 量 (śabd a)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躍 如 하게 드러난다. 그러 니까, 설해질 수 있는 진리는 베다에 이미 다 밝혀졌다고 본다. 이 러한 관점을 갖는 사람들이 담당해야 할 철학사적 사명은 무엇일 까? 스스로 베다에 없는 이야기/학설/견해를 自 己 哲 學 으로서 제시 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것은 베다 속에 다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담당해야 할 일은 이미 설해진 베다의 의미를 보다 的 確 하 게 解 明 / 解 釋 하는 작업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인도철학사가 갖는 이 같은 특징을 우리는 解 釋 學 的 (hermeneutical) 2) 이라고 부를 수 있 으리라 본다. 이러한 인도철학의 해석학적 특징은 그 저술 형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에 대해서 元 義 範 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또 여러 가지 철학적 서적들은 하나 하나가 모두 독자적인 학설을 주장하는 그러한 특수한 책이기보다는 오히려 이미 있던 聖 典 이나 經 (sūtra) 따위에서 이야기된 것을 다시 補 長 助 短 하여 그것을 더 자세하 게 擴 充 시키든가 그렇지 않으면 더 간단하고 명료하게 요약하던가 하 는 이른바 論 (śāstra) 註 (ṭīkā) 疏 (bhāṣya) 讚 (stotra) 등의 성격을 지니게 도 된다. 이래서 인도철학에서 새로운 學 說 은 언제나 새로운 註 釋 的 方 法 에 의하여 이루어지기도 한다. 3) 2) 철학은 해석학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같은 특성은 근대적 해석학이 성립된 서양의 전통에서 보다는 인도 중국의 동양철학 속에서 더 잘 찾아질 수 있다. 왜냐하면, 서양철학사는 어떤 하나의 원전을 숭앙하면서 그에 대한 해석작업을 그들의 사명으로 삼지는 않았으나, 중국이나 인도에서는 원전에 대한 해석으로서 述 而 不 作 하려는 태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3) 元 義 範, 인도철학사상 (서울 : 집문당, 1981), p. 19. 또 인도철학의 해석학적 특성은 S. Radhakrishnan, The Philosophy of Spiritual Life (London : George Allen & Unwin ltd., 1960), p. 26. 참조.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107 이와 같은 인도철학사의 解 釋 學 的 / 註 釋 學 的 전통을 감안할 때, 오늘날 우리 인도철학사 연구자들에게도 하나의 주요한 과제가 부여된다. 그것은 과거의 인도철학자들이 동일한 텍스트에 대해서 어떻게 서로 다른 관점을 갖고 있었던가를 확인하는 일이다. 예컨 대 라다크리쉬난이 브라마 수트라 에 대한 베단타 학파 내의 해 석학적 관점의 차이를 정리 4) 한 것이 그 一 例 가 될 것이다. 논자는 우선 범위를 좁혀서 이 같은 과제의 하나를 풀어보고자 한다. 이 에 선택된 텍스트가 이샤 우파니샤드 이다. 이샤 우파니샤드 는 주요한 우파니샤드 중에서 가장 간명한 우파니샤드이지만, 내용적 으로는 여러 가지로 重 且 大 한 의미를 갖는 논의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주석서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논자의 寡 聞 탓이겠 지만 주석서가 그렇게 많이 저술된 것 같지 않다. 현재까지 논자 가 파악한 주석서/ 講 解 書 들은 다음과 같다. 1 Śaṅkara, Īśāvāsyopaniṣadbhāṣyam 5), Swami Gambhirananda tr., Eight Upaniṣads Ⅰ(Calcutta : Advaita Ashrama, 1977.), pp. 3-29. 2 Ānandagiri, ṭīkā, Īśāvāsyopaniṣad with Śaṅkara's bhāṣya and Ānandagiri's ṭīkā (Poona : ānandāśrama press, 1931). 3 Panta, Īśātattvam Īśāvāsyopaniṣad-ṭīkā (1832-1836), 中 村 元, ウパニシャッドの 思 想 ( 東 京 : 春 秋 社, 1995), pp. 523-534. 4 Sri Aurobindo, The Upanishads Ⅰ(Pondichery : Sri Aurobindo Ashram, 1994), pp. 19-24( 譯 註 ) ; pp. 19-97( 解 義 ). 6) 5 Vinoba Bhave, Īśāvāsyavṛtti (1924-1925), 칼린디 지음, 김문호 옮김, 비노바 바베 (서울 : 실천문학사, 2000), pp. 340-341. 4) 위의 책, p. 25. 참조. 5) 샹카라의 Īśopaniṣadbhāṣya는 그의 眞 作 으로 인정되고 있다. 위의 책, p. 3. 6) 이하, 샹카라의 브하샤 와 오로빈도의 譯 解 를 인용할 때에는 前 者 를 EU 로, 後 者 를 TU 로 약칭하고 그 페이지를 본문 속에서 [ ]를 하여 倂 記 하는 방식을 택한다.
108 印 度 哲 學 제10집 참조. 6 S. Radhakrishnan, The Principal Upanisads 이 중에서 논자가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1, 4, 그리고 6이 었으나 論 点 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6을 빼고, 1과 4만을 대조 키로 한다. 2, 3, 그리고 5의 자료는 全 文 을 입수하지 못한 자 료적 한계도 물론 존재하지만, 샹카라(Śaṅkara, 약 700-750) 7) 와 오로 빈도(Aurobindo, 1872-1950)의 사상이 가장 대조적이라 평가되었기 때 문이다.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주석 사이에는 오랜 시간적 차이가 존재하지만, 논자는 양자의 해석을 共 時 的 차원에 놓고 비교하고 자 하는 것이다.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의 해석과 오로 빈도의 해석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핌으로써, 이샤 우파니샤드 자 체에 대한 보다 적확한 이해 뿐만 아니라 공히 베단타 사상의 흐 름 속에 서있는 두 사상가가 각기 어떻게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 면서 變 奏 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이는 原 典 에 대한 숭앙의 念 과 그로부터의 구속성 속에서나마 어떻게 자기관 점의 제시를 통해서 哲 學 史 를 풍부하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事 例 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샤 우파니샤드 전체에 대한 두 사상가의 총론적 관점 의 차이를 살펴본 뒤 보다 세밀하게 각론적 관점의 차이를 천착 키로 한다. 7) 샹카라의 생몰연대에 대하여 AD.778-820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G. R. Pandey, 앞의 책, Śaṅkara's Interpretation of the Upaniṣads (Delhi : S. N. Publications, 1988), p. ⅴ. 참조.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109 Ⅱ. 總 論 的 觀 點 의 差 異 1. 분석적 이해의 차이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註 釋 에 나타난 총론적 관점의 차이를 살 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양자의 주석서[=브하샤와 譯 解 ]에 서 확인되는 형식적인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를 위 해 有 用 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이 전통적 불교학의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科 目 나누기 8) 이다. 샹카라의 브하샤 역시 分 科 하는 것이 가능한데, 논자는 다음과 같이 본다. 序 論 原 文 解 釋 註 解 結 論 : 末 後 의 問 答 이에 비하여 오로빈도의 譯 解 [= 譯 註 + 解 義 ]를 科 分 해보면 샹카 라의 그것과는 또 다름을 알 수 있게 된다. 科 目 나누기가 다른 까닭은 그 관점/사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다른 관점/사상이 서 로 다른 科 目 으로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오로빈도의 그것은 다음 과 같이 圖 解 되리라 본다. 8) 科 目 나누기가 갖는 해석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拙 稿, 전통적 불교학의 방법론에 나타난 현대적 성격, 가산학보 제7호 (서울: 가산학회, 1998), pp. 61-68. 참조.
110 印 度 哲 學 제10집 原 文 譯 註 序 論 : 우파니샤드의 계획 解 釋 科 分 解 釋 : 4차의 운동 結 論 과 要 約 : 9가지 대립들 이상의 科 目 나누기는 샹카라의 브하샤 와 오로빈도의 譯 解 에 대한 것이고, 그들 주석서에서 다루고 있는 이샤 우파니샤드 를 그들 兩 者 는 각기 어떻게 분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오로빈도와는 달리 샹카라 는 이러한 分 科 를 스스로 의식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명백하게 제시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샹카라가 그의 브하샤 에서 전체 18송에 대한 분석적 이해를 포 기한 것 같지는 않다. 나름으로 그 내용적 흐름/ 系 列 의 차이를 의 식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에 논자는 샹카라의 분 석적 이해를 다음 表 와 같은 科 目 으로 再 構 成 할 수 있으리라 추정 한다. 삶의 문제 지식의 길 體 : 1, 4~5, 8 相 /공덕 : 3, 6~7, 지식과 行 의 會 通 行 의 體 : 2. 會 通 論 ( 知 行 ) : 9~ 11, 12~14. 죽음의 문제 지식의 길 : 15~16. 지식과 行 의 會 通 ( 知 行 ) : 17~18. 물론, 이러한 科 目 에는 샹카라의 해석을 이해하는 논자의 관점 이 어느 정도 投 影 되어 있음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샹 카라의 이해방식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최대한 샹카라의 이해방식을 고려코자 하였다. 즉 샹카라는 이샤 우파니샤드 가 지식의 길 과 지식 중심으로 지식과 행의 兼 修 (jñāna-karma-samucca ya) 를 같이 설하고 있다고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자의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111 結 合 에서 어디까지나 중심은 知 에 놓여있다. 知 行 이다. 이에는 그의 철학이 투영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다른 성격을 갖는 偈 頌 이 등장하자 이를 結 合 / 會 通 하고자 한다. 이때에도 그는 끝내 知 를 중심으로 行 의 입장을 포섭하려는 主 知 從 行 의 태도를 버리지 않는 다. 그렇게 보아야 할 것이다. 지식의 길은 1송에서 그 大 綱 을 제시한 것으로 보았다고 생각 된다. 여기서 논자가 依 用 하는 體 와 相 / 功 德 의 개념은 모두 대승 기신론 의 體 相 用 三 大 의 개념과 유사하다. 體 는 根 本 / 本 然 /sv abhāva의 의미로서 나타나고, 相 /nimitta은 그 공덕을 의미한다. 9) 그러니까 샹카라는 이샤 우파니샤드 를 먼저 體 相 體 相 體 의 반복이라 보았던 것으로 논자는 평가한다. 그런데 그 것과 이질적인 9~14송을 만나자 그 나름의 해석/ 改 變 을 통해 그 의 사상체계에 편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각론적 관점의 차이 에서 다시 詳 述 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오로빈도는 어떻게 이샤 우파니샤드 전체 18송을 分 科 하고 있는가? 그는 샹카라와는 달리 스스로 다음과 같이 그 의 科 目 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9) 대승기신론 에서 體 大 는 모든 존재의 근본을 의미하고, 相 大 는 體 /근본이 갖는 공덕을 의미하며, 用 大 는 體 / 根 本 이 일으키는 작용을 의미한다.[T.1667. 32, p. 584b-c. 참조.] 다만, 불교에서의 體 개념은 空 을 기반으로 하지만, 우파니샤드의 體 /svabhāva는 實 在 라는 점에서 중대한 차이가 있다. 이 차이가 우파니샤드에 대한 해석학인 베단타와 대승기신론 에서 언급되는 여래장사상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體 라고 말한 것은 그 구조적 관계만을 참조하고자 한 것이다. 또 샹카라 사상에 대한 평가에서 대승기신론 의 三 大 중 用 이 결여되고 있다는 점은 일단 주의할만하다.
112 印 度 哲 學 제10집 첫번째 운동 기초 : 하나의 불변하는 정신(1송 1구) 神 的 生 活 에 대한 규칙 : 1송 2구 물질적 생활과 노동의 정당화 : 2송 一 者 의 현현에 대한 장애 : 3송 두번째 운동 一 梵 안에서 一 者 와 多 者 의 통일 : 4-5송 생활의 규칙의 기반과 성취 : 6-7송 세번째 운동 神 의 자기현현 : 8송 明 과 無 明, 생성과 非 생성의 일치 : 9-14송. 네번째 운동 지고의 진리와 불사의 관계 : 15-16송 이러한 삶/이승에서의 행위들 : 17송 죽음 이후의 상태 : 18송 오로빈도의 과목을 샹카라의 과목에 대비시켜 보았을 때 확인 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샹카라가 지식의 길과 행위의 길의 대립 과 그 會 通 의 텍스트로서 이샤 우파니샤드 를 이해하고 있음에 반하여, 오로빈도는 네 가지의 연속하는 사고의 운동 속에서 대 칭적으로 성취 [TU : 27]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 같은 특성은 意 識 의 進 化 를 중요시하는 그의 사상적 입장 속에서 이샤 우파니 샤드 를 이해하고 있음을 알게 하거니와, 실제 중요한 것은 그 역 시 會 通 / 統 一 로 이샤 우파니샤드 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회통의 텍스트로서 이샤 우파니샤드 를 보고 있는 점은 같다. 一 梵 안에 서 一 者 와 多 者 의 統 一 말이다. 샹카라와 다른 점은 知 와 行 의 대 립이 아니라 그것을 一 者 와 多 者 의 對 立 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節 을 바꾸어서 이샤 우파니샤드 전체에 대한 내용적 평 가를 그들이 각기 어떻게 내리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2. 내용적 평가의 차이 이샤 우파니샤드 의 전체 내용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113 총론적 평가가 어떠했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자료로서 우리는 본 론적 해석에 들어가기 전의 서론과 그 본론에서의 상세한 해석을 맺으면서 행한 결론 부분을 함께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의 하면, 샹카라나 오로빈도 모두 會 通 / 兼 修 의 입장에서 이샤 우파 니샤드 를 보고 있다는 점에서는 견해를 같이함을 알 수 있다. 그 러나, 그 세부적 전략에 있어서는 양자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 음이 사실이다. 먼저, 샹카라는 분명히 지식의 길/ 體 의 입장에 입각한 뒤 會 通 / 兼 修 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써 그의 브하샤 를 시작한다. īśāvāsyam으로 시작하는 베다의 만트라들은 카르마(제례 등)에서 이 용/활용되지 않아 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아의 진정한 본성을 드 러내는 데 기여하기 때문인데, 그 자아는 카르마에 부가된 것이 아니 다.[EU : 3] īśāvāsyam으로 시작하는 베다의 만트라 는 바로 이샤 우파니 샤드 를 말하는데, 그것은 자아의 진정한 본성/ 一 元 性 을 드러내는 것일 뿐, 결코 카르마와 결부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體 를 綱 令 으로서 제시[ 提 綱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렇기에 體 /지 식과 카르마의 상호관계 설정에 다시 골몰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샤 우파니샤드 원문이 體 /지식과 함께 카르 마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모순되지만 우파니샤드가 인간의 저술이 아니라 啓 示 書 임을 인정하면서도 우파니샤드 안에 서 모순이나 異 種 을 찾으려 하지 않았던 10) 샹카라로서는 둘 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는 미망사 학파의 非 作 者 性 (apa uruṣeyatvā) 개념에서 보듯이, 베다 텍스트의 근원적 진리성을 말하 고 있는 것이다. 텍스트는 문제 없다. 그런데, 실제로는 텍스트 속 에 여러 다양한 관점이 제시되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샹카라 10) G. R. Pandey, 앞의 책, p. 5 ; p. 12. 참조.
114 印 度 哲 學 제10집 가 會 通 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다. 그 텍스트 속의 모순 된 관점의 會 通 / 結 合 / 調 和 를 그의 과제/ 召 命 으로 自 任 하고 있는 것 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방법론을 통하여 이러한 일을 완수하 려 하는 것일까? 어디까지나 자아의 진정한 본성이라고 하는 體 의 입장에서 카 르마( 行, 또는 祭 禮, 또는 業 )의 문제를 包 容 / 會 通 코자 한다. 말하자면 主 知 從 行 이다. 知 의 길/계열1과 行 의 길/계열2는 각기 前 者 는 상근 기에게, 後 者 는 하근기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階 序 化 한다. 그리고 또 전자는 眞 諦 로, 후자는 俗 諦 로 보게 된다. 이른바 二 諦 說 的 根 機 論 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詳 論 은 후술할 것이지만, 여 기서는 바로 그 같은 점이 오로빈도의 비판을 초래하는 핵심이었 음만을 확인해 두기로 한다. 知 와 카르마의 會 通 문제를 논하는 샹 카라 주석에서의 末 後 의 問 答 을 우선 읽어보기로 하자. 의심 : 어떤 사람들은 지혜를 통해서는 不 死 를 얻고 무지를 통해서 는 죽음을 건넌다. (11송)와 미현현에 의해서 불사를 얻고, 해체에 의 해서 죽음을 건넌다. (14송) 는 말/텍스트를 듣고서는 의심으로 가득 찰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간 략히 (그 주제를) 토론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왜 의심이 일어나게 된 것인지 이유가 서술된다. 비드야라는 단어에 의해서 지고의 자아에 대 한 지식 그 자체가 이해되어서는 안 되는가? 그리고 또 불사가 (최초 의 의미/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취해져서는 안 되는가? 답: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고의 자아에 대한 앎과 까르마 사이의 대립에 의해서, 결합/조화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지 않 느냐?[EU : 27-28.] 여기서 의심 은 반론자(pūrvapakṣin)의 입장이고, 답(siddhānta) 이 샹카라의 입장이다. 물음의 요지는 11송에서 말해지는 지혜/vidyā 를 梵 知 /Brahma-vidyā와 같이 보면 안 되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샹카라의 대답은 안된다는 것이다. 知 와 無 知, 그 어느 것으 로부터도 넘어 서있는 梵 知 를 設 定 하는 것이다. 그러니 샹카라에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115 게 있어서 梵 知 知 無 知 의 三 階 가 형성되는 것이다. 11) 이러한 샹카라의 관점은 카르마=아비드야= 無 知 / 無 明 으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샤 우파니샤드 에서 말하고 있는 무지/avidya 의 적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各 論 에서 다시 詳 論 케 될 것이므로 여 기서는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총론적 평가의 分 岐 點 역시 무지/avi dyā 개념에 있다는 점만 확인해 두고자 한다. 다음 오로빈도는 과연 총체적으로는 이샤 우파니샤드 를 어떻 게 보고 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 총론적 관점 에 대해서도 오로빈도는 명확한 견해를 제시한다. 한마디로 우파 니샤드의 핵심은 근본적인 대립들의 일치와 조화 [TU : 27] 12) 라 고 본다. 그 역시 會 通 / 結 合 / 調 和 의 관점에서 우파니샤드 내지 이 샤 우파니샤드 를 보고 있는 것은 샹카라와 동일하다. 그러나, 그 같은 外 見 上 의 판단이 무색할 정도로 그의 회통론은 샹카라의 그 것과는 다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이샤 우파니샤드는 순수하고도 배타적인 일원론(monism)을 가르치 지 않는다. 그것은 多 를 부정함이 없이 一 을 선포하고 그 수단은 多 속에서 一 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vidyā와 avidyā의 동시적 타당성을 주장하고, 이 세상에서의 삶과 태어남에 일치하는 不 死 를 행위와 지식 의 대상으로서 견지한다. 그것은 모든 대상을 그 자체로서 우주로서 간주하고, 모든 영혼을 그 자체 神 的 인 푸루샤로서 본다. 이러한 생각 들의 앙상블은 환영주의적이거나 배타적인 일원론에 반대하는 것으로 서 종합적이고도 포괄적이다.[TU : 35]. 이 인용구에서 명시적으로 샹카라를 거명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 내용을 보면 오로빈도의 의식 속에서는 샹카라의 비판이 內 包 11) 샹카라의 會 通 은 梵 知 와 無 知 / 行 사이의 會 通 이 아니라 知 와 無 知 사이의 會 通 임을 주의해야 한다. 12) 오로빈도는 1송에 대한 주해에서도 조화(reconcilation)를 가르치는 우파니샤드의 전사상 이 뒤의 결론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아홉가지 대립들/이중성의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라 이해한다. TU : 19.
116 印 度 哲 學 제10집 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一 과 多 사이에, vidyā와 avidyā 사이에 階 序 를 인정하면서 一 /vidyā를 우위에 두고 多 /avidyā를 열위에 두는 샹카라의 관점/사상을 배타적 일원론 으로 보고 있는 것이 다. 더 나아가서 多 /avidyā를 열위로 보는 관점은 곧 幻 影 主 義 的 인 것이라 하여 비판해 마지 않는다. 과연 샹카라의 사상 전체에 대 한 평가에서 그의 입장이 배타적인가, 혹은 幻 影 主 義 的 인가 13) 하 는 점은 여기서 그다지 중요한 論 点 은 아니다. 오로빈도가 그렇게 보고서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고, 그러한 비판을 통해서 드 러내고자 하는 그의 立 脚 地 가 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 문이다. 그는 이샤 우파니샤드 에 나타난 一 과 多, vidyā와 avidy ā는 동시적으로 타당하다고 본다. 오로빈도에게 있어서 이샤 우 파니샤드 의 二 重 性 은 主 와 從, 本 과 末 로 나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不 二 一 元 이 되어서 從 은 主 속에, 末 은 本 속 에 包 攝 되어서 진정으로 자기존재를 확보하지 못한다고 본다. 오 로빈도에게 있어서 비드야/지혜와 아비드야/무지는 二 重 性 으로서 평등하게 존재하는 개념이다. 그러면서도 뒤에서 상론할 바와 같 이, puruṣottama가 二 元 을 통괄한다는 점에서 一 統 二 元 14)의 입장 이라 할만 하다. 샹카라가 多 /avidyā보다 一 /vidyā를 중심에 놓고 있음에 반하 여, 그는 양자의 二 重 性 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歸 一 이 아니라 13) 논자는 샹카라의 이샤 우파니샤드 브하샤 에 나타난 논리가 多 /avidya의 劣 位 를 인정하는 階 序 化 된 논리이므로, 幻 影 論 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본다. 그것을 곧바로 환영론이라 본 오로빈도의 관점이 내용적으로는 지나칠지 몰라도 구조적으로는 그렇게 볼 수 있음이 인정된다. 14) puruṣottama 속에 二 元 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一 中 二 元 이라 말하기보다는 一 統 二 元 이 보다 적확한 용어이다. 한편, 이 二 元 의 목록을 오로빈도는 다음 아홉가지로 제시한다. 1의식적 神 과 현상적 자연, 2포기와 향수, 3자연 속의 행동과 영혼 속의 자유, 4하나의 안정적인 梵 과 多 者 의 운동, 5존재와 생성, 6무구별적인 akshara Brahman과 활동적인 神, 7비드야와 아비드야, 8 非 生 과 生, 9지식과 행위. TU : 91-92.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117 存 二 이다. 15) 이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그가 의도하는 것은 무엇일 까? 그것은 정신적 實 用 主 義 (spritual pragmatism) 를 復 活 시키려는 것 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샤 우파니샤드 가 잘 지니고/지키고 있던 가치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정신적 실용주의는 미국의 實 用 主 義 와는 다른 의미임은 물론이다. 미국의 신실용주의자 로티(Richar d Rorty)는 형이상학과 실용주의를 가르면서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실용주의로 나아가자 16) 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샹카라는 물론 오 로빈도 역시 실용주의자가 아니라 여전히 형이상학에 머물고 있 는 것으로 비판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puruṣott ama와 같은 존재를 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17) 따라서 오로빈도 의 실용주의 개념은 오히려 행동주의 내지 實 行 主 義 라고 해야 할 것같다, 왜냐하면 그가 이샤 우파니샤드 를 평하여, 샹카라차리 야의 反 실용주의와 극도의 幻 影 主 義 에는 거의 극복하기 어려운 점 들을 제공했던 유일한 우파니샤드 [TU : 90]라고 보고 있다는 점 을 통해서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오로빈도의 정 신적 실용주의는 카르마요가와 一 脈 을 이루는 개념으로 평가된다. 물론, 이에는 근대 인도의 역사적 질곡과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 는 노력이 그 컨텍스트로서 투영되어 있음은 사실이리라. 15) 여기서 라다크리쉬난의 관점을 살펴보자. 그 주된 목적은 신과 세계, 존재와 생성의 필수적 통일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그 자체의 절대(parabrahman) 만큼이나 세계와 관련한 절대(paramesvara)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것은 세상에서의 삶과 신적인 영혼(Divine Spirit)안의 삶이 양립가능하다고 가르친다. [S. Radhakrishnan, The Principal Upanisads (London : George Allen & Unwin Ltd, 1968), p. 565.] 이러한 라다크리쉬난의 관점은 샹카라 보다는 오로빈도의 입장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16) 데들레프 호르스터 지음, 박여성 옮김, 로티 (서울 : 인간사랑, 2000), pp. 59-63. 참조. 17) 이런 점에서 無 記 說 을 통해서 형이상학과 다른 차원의 길을 제시하고, 四 聖 諦 를 통한 실천을 강조한 불교의 입장이 오히려 실용주의적이라 할 만하다.
118 印 度 哲 學 제10집 Ⅲ. 各 論 的 觀 點 의 差 異 1. 포기의 강조와 노동의 정당화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관점 차이를 각론적으로 탐구해 볼 때, 첫 번째 대립은 1송과 2송의 연관관계에 대한 평가에서 갈라진다. 먼 저 2송의 원문과 샹카라의 번역을 옮겨보자. kurvann eveha karmāṇi jijīviṣet śataṃ samāḥ/ evaṃ tvayi nānyatheto 'sti na karma lipyāte nare//2// 제례를 함으로써, 진실로 사람은 백 년 동안 여기서 살기를 원해야 한다. 범부로서, 그대에게는 이 [방법]외에 업이 그대에게 붙지 않을 다른 방법이 없다.[EU : 6] 원문에서 karma가 두 번 나오는데, 샹카라는 전자의 카르마를 祭 禮 (agnihotra 등)의 의미로 이해하고 후자의 카르마를 악업의 의미 로 이해한다.[EU : 6-7.] 그러므로 이 頌 의 의미는 제례 이외에는 악업이 붙지 않을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제사를 목적으로 한 행위 외에는 이 세상은 업에 묶여 있다. 18) 고 하는 바가바드 기타 의 견해를 생각하면, 제례가 업이 붙지 않을 행이 될 수 있 음은 인정된다. 제례의 실천에 대한 권유로서 읽힐 수 있는 것이 다. 따라서 업이 되지 않을 행위, 즉 제례를 하라는 2송의 傳 言 은 앞서 제시한 1송의 의미와는 분명 다른 것이다. 이제 1송을 샹카 라의 이해와 함께 보기로 하자. 18) yajñārthāt karmaṇo 'nyatra loko 'yaṃ karmabandhanaḥ. BG 3 : 9.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119 īśāvāsyam idaṁ sarvam yatkiñ ca jagatyāṁ jagat/ tena tyaktena bhuñjīthā, mā gṛdhaḥ kasyasvid dhanam//1// 땅 위에서 움직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이 모든 것은 이샤 神 에 의해서 덮여있다. 그러한 포기를 통하여 (그대의 자아를) 보호하라. 다른 누구의 재산도 탐내지 말고서. =탐내지 말라. 그 재산은 누구의 것이겠는가? [EU : 4] 1송에는 tyaktena와 bhuñjīthā의 대립이 담겨있다. 포기는 재산 과 같은 현실적 물질적 가치에 대해서 탐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 다. 즉 물질적 생활세계의 포기이다. 이를 통하여 의도하는 것은 bhuñjīthā이다. tyaktena가 因 이라면 bhuñjīthā는 果 이다. 이 bhuñj īthā에 대하여 샹카라는 보호하다 의 의미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사전적 정의를 넘어서는 샹카라 특유의 해석학적 誤 讀 / 創 見 의 一 例 가 된다. 보호하다 의 숨겨진 目 的 語 가 자아(ātman) 일 것은 물론 이리라. 이같은 특유의 해석은 논자에게는 샹카라가 제3송에서 등 장하는 자아를 죽이는 사람들 (ātmahanaḥ)을 염두에 둔 대응으로 생각되어서 나름대로 一 理 있다고 판단된다. 이렇게 포기를 통하여 자아를 보호하라는 1송의 의미가 지혜의 길(jñāna-yoga)/계열1이라 한다면, 2송의 의미는 그것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존재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즉 제례의 길/계열2 이다. 그렇다면, 1송에서 말하는 갸 냐요가와 2송에서 설하는 카르마요가 19) 가 서로 무관하게 混 在 하 19) 제례의 길과 카르마요가의 관계는 前 者 가 後 者 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混 在 를 피해볼 생각으로 논자는 바가바드기타 에서 말하는 무집착의 행위를 강조하면서 그것만을 카르마요가로부터 別 立 하여 야갸요가(yajña-yoga) 를 제언한 바 있다.[ 拙 稿, 바가바드기타와 究 羅 檀 頭 經 의 입장에서 본 조선불교유신론의 의례관, 불교학보 제36집 (서울 :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1999), p. 205. 참조.] 업이 붙지 않을 제사 라는 점에서, 우리는 샹카라가 말하는 바 제례의 길 역시 기타 에서 행해야 할 바로서 권유되는 제사라고 생각해야 옳을 것이다.
120 印 度 哲 學 제10집 는 것일까? 이에 대해 샹카라는 고민을 하고 나름의 해결책을 제 시한다. 2송은 語 句 의 註 解 뒤에 문답의 형식을 취한 詳 論 이 더해 지는데, 거기서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反 論 : 앞의 게송(1송 -- 인용자)에서는 포기자를 위하여 지식의 추 구를 가르치고, 두 번째 게송에서는 포기할 수 없는 자를 위하여 제례 (의 길)를 가르친다는 사실이 어떻게 알려지는가? 答 : 우주가 창조되고서부터 이들 두 길이 나타났다. 하나 는 더 일찍 존재한 제례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후자의 무집착의 길과 일치하여 (아들 등에 대한) 세 가지 종류의 욕망에 대한 내버림을 뜻하 는 포기의 길이다. 이들 중에 포기의 길이 더욱 뛰어나다. 그리고 타 이티리야 아란야카 에서는 진실로 포기가 뛰어나다 고 말해진다. [EU : 7] 샹카라가 생각하는 해결책은 1송과 2송을 차별적으로 階 序 化 하 는 것이었다. 행위를 포기하고 명상으로 나아가는 포기의 길 [=지 식의 길]을 행위[= 祭 禮 ]의 길 보다 뛰어난 것으로 샹카라는 보고 있다. 20) 2송보다 1송이 더욱 근본적이라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왜 1송만 설하지 않고 2송이 설해졌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 샹카라 는 대답해야 했다. 이른바 보통의 사람(= 凡 夫 )을 위해서 설해진 것 이라 이해하는 것 같다. 샹카라는 nare, for a man 을 스스로를 자신의 인간적 성품과 일치시키는 사람 [EU : 5]이라 했는데, 여 기서 인간적 성품(human personality) 이 아트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다. 오히려 그 반대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바로 그 앞의 evaṃ tvayi 에서 말하는 당신 의 의미를 그 스스로 삶/생 활을 憧 憬 하는 이러한 종류의 사람 [EU : 16]이라고 해서 포기보 다는 아직도 현세적 삶을 갈망하는 사람임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 이다. 이 같은 이해가 타당하다면, 1송에서 설하는 지식의 길 보 20) 8송에 대한 해석에서 샹카라는 그 경전적 근거로서 人 界 는 아들에 의해서, 祖 界 는 제례에 의해서, 神 界 는 지식에 의해서 얻어짐을 설하고 있는 브리하드 아란야카 우파니샤드 Ⅰ.ⅴ.16을 들고 있다.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121 다 2송에서 설하는 제례의 길은 보통 사람, 즉 포기/지식의 길을 가지 못하는 낮은 근기의 사람에게 施 設 된 것으로 샹카라는 말하 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21) 이상 논술한 바, 1송과 2송에 대한 샹카라의 이해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이 된다. 1송 갸냐요가 포기 자아보호 상근기 2송 카르마요가 삶에 대한 의욕 제례 하근기 그런데 이러한 샹카라의 이해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이 지적 될 수 있다. 첫 번째 문제점은 갸냐요가와 카르마요가를 主 와 從 의 관계로만 보아야 하는가? 갸냐요가를 기본적 전제/출발점이라 보고 카르마요가를 그 전개/확장으로 볼 수 없는가 하는 점이 다. 22) 논자 개인의 가치관은 그 같은 길을 지향하고 싶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근기론에 입각한 차별적 회통론이 아니라 평등적 회통론을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샹카라는 근 기론에 입각하고 있다. 두 번째 문제점은 근기론에 대한 懷 疑 에서 유래한다. 갸냐요가와 카르마요가를 각기 上 根 機 와 下 根 機 의 선택 사항으로 밖에 보지 못하는가 하는 점이다. 오로빈도는 바로 이 後 者 의 문제의식에서 샹카라를 비판하고 있다. 이제 오로빈도의 관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2송에 대한 오로빈도의 번역을 다 시 옮겨둔다. 21) 샹카라가 梵 知 와 知 사이에서 근기론적 입장을 적용하고 있음은 S. Radhakrishnan, The Philosophy of Spiritual Life, p. 36. 참조. 또 知 와 行 사이에서 근기론적 입장을 적용하고 있음은 p. 37. 참조. 22) 갸냐요가를 카르마요가의 전제를 본 것으로 拙 稿, 바가바드기타의 카르마요가에 대한 윤리적 조명, 인도철학 제2집 (서울 : 인도철학회, 1992), 참조. 선과 화엄의 보현행을 결합/회통하는 논리[ 禪 行 雙 修 頓 悟 漸 修 ] 에서는 양자 모두 동일인이 겸수해야 할 바로서 설하는 것이지, 근기에 따라서 그것들을 나누어서 행해야 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샹카라의 논리와는 서로 다르다.
122 印 度 哲 學 제10집 이 세상에서 잘 행위 함으로써 사람은 백년을 살도록 원해야 한다. 그리하여 당신에게 있어서도 그렇고, 이[행위]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면, 행위는 사람에게 달라붙지 않을 것이다.[TU : 19] 카르마를 오직 제례로만 보고 있는 샹카라와는 달리 오로빈도 는 행위 일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차이가 보여 주는 의미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샹카라가 카르마를 제례의 의미로 보았기 때문에 제례의 길이 지식/포기의 길보다도 낮은 근 기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파악했던 것이지만, 오로빈도는 보다 폭넓게 행위 라고 봄으로써 그 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 넓은 전망을 우리의 삶 속에서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물질적 세계 속의 일[=노동]이라는 관점 에서 그것을 긍정하는 것이다. 행위는 무행위 보다 낫다 23) 는 오 로빈도의 관점은 이 2송의 題 目 을 노동(works)의 정당화 라고 부치 고서, 물질적 세계 속에서 노동을 하는 것과 물질적 삶(physical lif e)이라는 관점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그 완전성의 부분이다 [TU : 32]고 말하는 데에서 躍 如 하게 드러난다. 한편, 포기를 통한 지식의 길을 지향하는 샹카라와 물질적 세계 속에서의 노동의 정당화를 주장하는 오로빈도의 관점은 동시에 몸에 대한 그들의 관점 차이와 軌 를 같이한다. 즉 샹카라의 베단 타 사상에서는 몸은 헛것이므로 참된 것이 아니게 된다. 이미 기 타 2 : 22에서도 나타나는 것처럼, 몸은 옷에 비유된다. 새 옷이 라 하더라도 헌옷이 되면 벗어 던져지는 것처럼, 옷/몸에는 어떤 恒 常 性 도 없다. 그러나, 헌옷을 벗어 던지고 새 옷을 갈아입는 육 신의 소유주는 영원히 살해될 수 없는 것 24) 으로서 恒 常 性 을 지닌 다. 자아/아트만 만이 참된 것이다. 그런즉 이 아트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 외의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탐욕을 부려서는 아 니 된다(mā gṛdhaḥ). 이러한 사고 속에서는 몸/육체가 정당하게 자 23) karma jyāyo hy akarmaṇaḥ, BG 3 : 8. 24) dehī nityam avadhyaḥ. BG 2 : 30.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123 기위상을 가질 수 없게 된다. 편의상 몸과 마음으로 二 分 해서 생각한다면, 梵 과 마음/ 眞 心 의 얻음/ 知 가 문제이지 몸이나 몸(또는 마음)이 행한 바 업력의 정화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베단타나 선불교의 입장을 몸에 대한 경시 라고 批 評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논자로 서도 물질과 육체에 대한 범부들의 뿌리깊은 집착을 생각할 때 그에 대한 先 포기를 요구하는 베단타나 禪 佛 敎 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포기가 먼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문 제는 그같은 사고의 부작용으로서 몸에 대한 輕 視 가 초래한 세속 에서의 노동/행위의 경시, 修 行 主 體 / 法 器 로서의 건강한 몸의 관리 를 부실하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몸과 자아/정신/영 혼의 同 價 的 닦음을 지향하는 패러다임(paradigm, 範 型 )의 전환을 고 려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이때 클로즈업(close up)되는 것이 요 가이고 그 철학적 배경이 되는 것이 상키야의 二 元 論 철학이다. 25) 물론 오로빈도에게 영향을 끼친 샹키야의 二 元 論 철학 역시 푸루 샤의 獨 存, 푸루샤에로의 歸 一 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트만 에의 歸 一 을 주장하는 샹카라의 베단타와 동일한 입장 26) 이라 볼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二 元 에서 하나를 幻 影 的 인 것으로 無 化 시키는 입장과 양자를 공히 實 在 로서 인정하는 입장이 갖는 차이 25) 오로빈도의 몸철학에 대해서는 이거룡, 인도철학에서 본 몸의 의미, 몸 또는 욕망의 사다리 (서울 : 한길사, 1999), p. 30. 주7 ; p. 53. 참조. 불교 안에서 선불교와는 반대로 몸 을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卽 身 成 佛 을 주장하는 密 敎 일 것이다. 푸루샤와 프라크리티 계열의 둘 아님을 주장하고, 프라크리티 계열의 둘 아님을 주장하고, 프라크리티 계열의 非 幻 影 性 을 말하는 오로빈도 사상이 탄트리즘과 同 軌 의 것임은 Dr. Kamalakar Mishra, Facets of the Tāntric Wisdom, Kala Acharya, Subhada Joshi ed., Śri Aurobindo and Vedic Interpretation (Bombay : Somaiya Publications, 1996), p. 108. 참조. 26) 鄭 承 碩 은 오로빈도의 관점, 즉 정신진화론에는 베단타의 일원론과 샹키야의 이원론의 전통이 통합적으로 적용되어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鄭 承 碩, 힌두사상의 정신진화론, 문화의 진보에 대한 철학적 성찰, pp. 191-192. 참조.
124 印 度 哲 學 제10집 가 무시될 수는 없으리라. 이렇게 카르마의 강조, 계열2의 고취를 추구하는 오로빈도의 입 장은 노동과 동시에 몸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공히 그것들을 否 定 하고 오직 자아의 보호만을 역설하는 샹카라의 不 二 一 元 論 베단 타와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2. 二 諦 說 과 二 重 性 2송 다음으로 샹카라와 오로빈도 사이에서 해석의 차이를 볼 수 있는 게송은 4송이다. 4송과 5송은 의미상 同 語 反 復 으로 볼 수 있는데, 논자가 추정한 샹카라의 科 目 에 따르면 지식의 길/계열1 의 體 /근본으로 평가된다. 한편, 오로빈도는 一 梵 안에서 一 者 와 多 者 의 統 一 로 보고 있다. 이러한 차이가 어떤 의미를 탄생시키는 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서는 4송을 중심으로 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4송은 샹카라에 의한 自 問 自 答 의 論 辯 이 붙어있는 중요한 게송이다. 우선, 그 원문과 샹카라의 번역을 다 시 옮겨 보기로 한다. anejad ekaṃ manaso javīyo nainad devā āpnuvan pūrvama rṣat/ tad dhāvato 'nyān atyeti tiṣṭhat tasminn apo mātariśvā dadhāti//4// 그것은 움직이지 않으며, 하나이고, 마음보다도 더 빠른 것이다. 감 각기관은 그것을 따라잡을 수 없으니, 그것이 앞서 달려갔기 때문이 다. 정지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모든 달리는 자들을 추월한다. 거기에 있으면서도 공기는 물[=모든 행동]들을 유지한다.[EU : 9] 主 語 인 그것 에 대한 서술어가 서로 모순된다. 서양논리의 모순 율에 따르면, 이는 타당하지 않은 잘못된 진술로 판단할 수도 있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125 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거기에서 바로 否 定 에 즐겨 의지 하는 동양논리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인가? 어떻게 해서 이러한 서로 相 反 되는 진술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이는 오늘 우리만의 의문은 아니다. 샹카라 스스로 제기한 反 論 속에서도 그 같은 문제의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직접 반론과 그에 대한 샹카라의 대답을 들어보기로 하자. 反 論 : 그것은 한결같으며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과 마음보다도 더 빠르다 라는 그렇게 모순적인 진술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답 : 불일치는 없다. 왜냐하면 이는 제한된 관점과 제한되지 않은 관점으로부터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그 자신의 제한되지 않 은 관점에서는 움직이지 않으며, 하나이다 라고 말해진다. 그리고 그 것에 따르는 제한적 첨가물, 마음, 의지와 의심에 의해서 특징지어지는 內 的 器 官 에 의하여 (그것은 變 形 에 종속하는 것으로 나타난다.)[EU : 9-10] 동일한 주어에 대한 상반되는 서술어가 서로 모순되지 않느냐 는 질문에 대하여 샹카라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불일치는 없다 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도대체 샹 카라는 어떠한 논리로서 이 난관을 뚫고자 하는 것일까? 샹카라 의 전략은 제한된 관점과 제한되지 않은 관점을 동시에 적용함으 로써 해결하고자 한다. 즉 제한되지 않은 관점을 취하게 되면 움 직이지 않으며, 하나이고, 마음보다도 더 빠르며, 감각기관 따위가 감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라 말해진다. 그렇지만 제한된 관점을 취하면, 정지하고 있으면서도 추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샹카 라의 설명을 좀더 들어보기로 하자. 비록 자아의 편재하는 실체는 그 진실한 무조건적 상태에서는 모든 세속적 속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변화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에 따르는 제한적 첨가물/mind에 의해서) 그것은 無 區 別 의 사람들의 눈에는 제한적 첨가물에 의해서 초래되는 모든 경험적 변형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나 고, 또 그것은 개인적인 신체들과 관련해서 다양하게 나타난다.[EU : 10]
126 印 度 哲 學 제10집 샹카라의 이러한 설명에 의하면, 자아는 두 차원 27) 을 통하여 이 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무조건적 상태에서는 속성이 없으며 불변이지만, 제한적 첨가물(upādhi)에 의해서 조건지워질 때는 모든 경험적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샹카라의 입장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不 動 무제한 하나 定 住 불변 제한되지 않은 측면 거기에 있으면서 動 제한 여럿 追 越 변화 제한적 첨가물 유지한다 여기서 샹카라는 스스로 이제설 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지는 않 고 있으나, 그 의미내용을 추적해 보면 불변의 자아와 변하는 자 아를 함께 설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반론자에 대하여 二 諦 說 的 思 惟 로서 會 通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형상이 있는 브라만을 有 속 성의 브라만 이라 보고, 형상이 없는 브라만을 無 속성의 브라만 으로 부르는 바, 곧 俗 諦 (vyāvaharika satya) 的 차원의 梵 과 眞 諦 (pāra mārthika satya) 的 차원의 梵 에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 제는 언제나 속제보다 우월한 것으로서 상근기에 해당하는 것으 로 평가된다. 이러한 이제설적 이해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 이 된다. 梵 知 眞 諦 무속성의 브라만 體 상근기 知 俗 諦 유속성의 브라만 중근기 祭 禮 俗 諦 하근기 여기서 쓰는 진제와 속제라는 술어는 베단타와 불교가 공히 쓰 27) 자아의 두 차원에 대해서는 브리하드아란야카 우파니샤드 Ⅱ.3.1에서 이미 진실로 형상이 있고 형상이 없으며, 죽음이 있고 죽음이 없는 [ ] 두가지 형태의 브라만이 있다. (dve vāva brhmaṇo rūpe, mūrtaṃ caivāmūrtaṃ ca, martyaṃ cāmṛtaṃ ca.)라고 말해지고 있다. 이제설의 始 源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127 고 있는 술어이지만, 그 의미는 같지 않다. 베단타에서는 양자간 에 차별이 있고 그것도 진제 속제 의 의미로 파악되었으나, 불교 에서는 진제와 속제가 둘이 아니라고 말해지는데 그 맥락을 살펴 보면 불교 二 諦 說 의 施 設 目 的 은 속제를 진제와 차별하기 위해서 가 아니라 세속을 진제로 받아들여서 인정하기 위해서이다. 28) 또 하나 양자의 차이는 베단타가 진제는 實 이며 29) 속제는 幻 影 / 虛 라 고 말함에 반하여, 불교의 경우에는 진제 역시 속제와 마찬가지로 空 / 虛 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對 比 는 샹카라의 근기론적 이제설이 차별적 회통론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라 평가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샹카라의 해석에 대하여 오로빈도는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일까? 우선, 오로빈도의 4송 번역문을 다시 옮겨서 읽어본다. 하나의 움직이지 않는 그것은 마음보다 더 빠르며, 신들도 그것에 이르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그것이 늘 앞에서 전진하기 때문이다. 서 있으면서, 그것은 달리는 다른 것들을 지나간다. 그것 안에서 삶의 주 인이 물들을 성취한다.[TU : 20] 번역만으로는 특별한 차이를 쉽게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 로빈도의 解 義 에 따르면 비록 양자가 동일하게 會 通 30)을 지향하 28) 세속에 대한 긍정은 言 說 에 의하지 않고서는 眞 諦 를 얻을 수 없다 (vyavahāram anāśritya paramartho na deśyate ; 若 不 依 俗 諦, 不 得 第 一 義.)고 말하는 中 論 24 : 10에서 이미 드러나고, 즈냐냐가르바(Jñānagarbha, 智 藏, 700-760)의 二 諦 分 別 論 17송에서도 세속이 진여인 것, 그것은 승의라고 (세존은) 인정하신다. (승의와 세속이) 둘이 아닌 까닭에 ---- 라고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李 泰 昇, 즈냐냐가르바의 二 諦 說 에 대하여, 인도철학 제6집(서울 : 인도철학회, 1996), p. 153. 각주 39. 재인용. 29) 우파니샤드의 절대는 부정적으로 언표해도 그것은 없는 것이 아니다(not a void). S. Radhakrishnan, 앞의 책, p. 571. 30) 샹카라가 지와 행의 회통을 모색해 오다가 梵 知 를 말하는 것이나, 오로빈도가 유속성의 브라흐만과 무속성의 브라흐만 위에 puruṣottama를 말하는 것은 모두 二 元 으로만 이야기되던 基 調 가 흔들린
128 印 度 哲 學 제10집 고 있으나 그 戰 略 이 다름을 알게 된다. 오로빈도의 전략은 둘이 다. 첫째, 샹카라의 이제설에 대한 비판이다. 이는 부정적/소극적 방법이라 할 수 있으리라. 오로빈도의 말을 들어보자. 일원성은 사물의 영원한 진리이고, 다원성은 일원성의 놀이이다. 일 원성의 의미는 그러므로 지식/비드야라고 부르고, 다원성의 의미는 無 知 /아비드야라고 (불리워져 왔다). 그러나 다원성은 그것이 그 진실하고 도 영원한 일원성으로부터 벗어난 때를 제외하고서는 거짓(false)이 아 니다.[TU : 35] 이러한 언급은 샹카라의 이제설적 회통론에 터하고 있는 가치 서열에 대해서 反 對 의 입장을 분명히 내보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 다. 不 動 의 측면을 一 元 性 으로, 動 의 측면을 多 元 性 으로 볼 수 있 음은 물론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오로빈도 역시 샹카라와 다르지 않다. 다만, 오로빈도는 그들 사이에서 가치를 서열화 하지 않는 다. 多 가 一 의 顯 現 이라고 한다면, 多 역시 一 처럼 眞 이어야지 어 떻게 一 이 眞 인데 그 一 에서 나온 多 가 假 / 幻 影 일 수 있겠는가 라 는 논리이다. 梵 만이 궁극적 실재가 아니라 세계 역시 그것의 顯 現 이고, 정신만이 궁극적 실재가 아니라 물질 역시 궁극적 실재이 다. 31) 이렇게 多 역시 眞 이라고 보게 될 때, 一 과 多 의 관계에서 一 / 梵 이 존재(Being)라고 한다면 多 / 世 界 는 生 成 (Becoming)이 되게 된다. 창조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 존재와 연관하여 그 형 태 속에서 일어나는 생성이다. [TU : 36]라고 오로빈도는 말한다. 이렇게 그에게 生 成 은 絶 對 의 생성이므로 多 /현상 역시 幻 影 이 것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두 사상가 공히 베단타 사상가로서의 공통성이 있는 셈이다. 다만 그 아래의 二 개념[ 二 ]과의 관계양상에서 不 二 一 元 과 一 統 二 元 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은 그 차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31) Jose Thachil, The Upaniṣads ; A Socio-Religious Appraisal (Delhi : Intercultural Publications, 1993), p. 142.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129 아니다. 動 / 變 의 측면에서 자연, 힘, 또는 세계원리(prakṛti, shakti, m aya) [TU : 38]를 긍정한다. 이 점이 전통적인 샹카라의 아드바이 타 베단타와 다른 점이다. 32) 그리고 그것은 탄트라 철학이나 상키 야 철학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진정한 生 成 論 은 상키야 철학의 프라크리티 轉 變 說 에서 확인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오로빈도의 4송 해석은 샹카라의 二 諦 說 과는 다 른 차원으로서 오히려 二 重 性 이라 해야 더 타당할 것이다. 不 二 一 元 / 歸 一 이 아니라 一 統 二 元 / 存 二 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샹카라의 二 諦 說 的 根 機 論 33)에 의한 會 通 論 이 包 括 主 義 的 한계에 머물고 있 어서 差 別 的 會 通 論 이라 한다면, 오로빈도의 二 重 性 에 의한 會 通 論 은 보다 진정한 의미의 多 元 主 義 34)로 진입한 平 等 的 會 通 論 이 32) 근대 인도사상가 중에서 드물게도 오로빈도는 불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불교 역시 幻 影 論 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샹카라가 불교의 幻 影 論 에 영향을 입었다고 본다. 그는 샹카라와 불교를 그 점에서는 같이 본다.[Robert N. Minor, 앞의 책, p. 72.] 샹카라의 幻 影 論 은 그 외면에서는 불교적인 것이라 고 말한 것은 베단타 사상가로는 또 Bhāskara가 있다. S. Radhakrishnan, The Philosophy of Spiritual Life, p. 39. 참조. 33) 교육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根 機 論 이 갖는 의미는 적지 않다. 근기에 따른 法 門 의 施 設 이 달라져야 한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학의 입장에서 보면 根 機 論 에 입각한 會 通 은 진정한 의미의 平 等 的 會 通 論 으로서 종교다원주의라고 보기는 어렵다. 34) 여기서 포괄주의 와 다원주의 는 종교학에서 쓰이는 개념이다. 他 종교의 존재의미를 부정하는 배타주의 에서는 진일보하였으나 여전히 타종교는 우리 종교보다는 미흡하다고 보고 우리 속으로 끌어다 넣어서 階 序 化 하는 입장을 포괄주의 라 말하고, 다원주의는 그같은 포괄주의적 태도마저 극복하면서 평등하게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대화하려는 입장을 말한다. 즉 여기서 논자가 쓰는 다원주의 개념은 종교다원주의 를 의미한다.[라이문도 파니카, 김승철 옮김, 종교간의 대화 (서울 : 서광사, 1992), pp. 21-37. 참조.] 여기서는 그같은 개념을 종교내적(intra-religious)으로 적용해 본 것이다. 과연 오로빈도 사상이 어느만큼 종교다원주의에 철저한 것인가 하는 점은 좀더 연구되어야 하겠으나, 적어도 이샤 우파니샤드 譯 解 에 나타난 그의 입장은 근기론에 입각한 포괄주의를 넘어서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130 印 度 哲 學 제10집 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無 속성의 브라만(akṣara Brahma)과 有 속성의 브라만(kṣara Br ahma)을 그 자체 내에서 眞 과 俗 으로 가치서열/ 階 序 를 설정함으로 써 차별적으로 會 通 하려는 샹카라와는 달리 kṣara Brahma와 akṣ ara Brahma의 二 元 을 포괄할 수 있는 上 位 의 一 을 하나 더 설정 한다. 이것이 곧 puruṣottama 개념인데, 이에 대해서는 바가바드 기타 15:16-18에서 그 힌트를 얻어온다. 세계에는 이 두 가지 정신이 있다. 멸하는 것과 불멸하는 것이니, 멸하는 것은 모든 존재들이며 불멸하는 것은 不 動 者 라 부른다. 그러나 최고아라 불리우는 또 다른 최고의 정신이 있으니, 그는 삼계를 침투 하며 유지하는 불변의 主 (Īśvāra)이다. 나는 멸하는 것을 초월하여 불 멸하는 것보다도 높기 때문에 세상과 베다에서 최고의 정신으로 선포 되고 있다. 35) 최고의 정신 (puruṣottama)은 두 차원의 푸루샤[=브라만]를 모두 포괄하면서도 그것들에 의하여 조건지어지거나 제한되지 않는다. [TU : 44] 곧 우주의 主 로서 이슈와라를 의미하는 것이니 36), 有 神 論 的 人 格 神 的 개념이다. 오로빈도는 이를 통하여 일원성과 다원 성을 會 通 코자 한 것이다. 샹카라가 知 와 無 知 위에 梵 知 를 내세움 으로써 知 의 길과 行 의 길을 知 의 우위 속에 會 通 하려는 것이었음 에 반하여, 오로빈도는 일원성과 다원성 위에 다시 푸루쇼타마라 35) dvāv imau puruṣau loke kṣaraś ca 'kṣara eva ca / kṣaraḥ sarvāṇi bhūtāni kūṭastho 'kṣara ucyate // uttamaḥ puruṣas tv anyaḥ paramātme 'ty udāhṛtaḥ / yo lokatrayam āviśya bibharaty avyaya īśvaraḥ // yasmāt kṣaram atīto 'ham akṣarād api co 'ttamaḥ / ato 'smi loke vede ca prathitaḥ puruṣottamaḥ // BG 15:16-18. 이 puruṣottama에 의한 二 元 의 包 括 은 오로빈도의 기타 해석의 중심원리이다. 다만, 기타 에서는 識 進 化 說 이 없다고 보았다. Robert N. Minor, Sri Aurobindo as a Gita-Yogin, Modern Indian Interpreters of the Bhagavadgita (Delhi : Sri Satguru Publications, 1991), p. 86. 36) S. Radhakrishnan, The Bhagavadgita, p. 332.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131 는 一 者 를 제시함으로써 양자를 회통코자 하였다. 언뜻 보면 샹카 라의 경우나 오로빈도의 경우 모두 세 차원/ 三 階 를 설정하는 듯 하다. 그렇지만, 오로빈도의 경우에는 그 양자를 통괄하는 一 統 二 元 의 입장으로서 샹카라와는 달리 二 元 사이에 어떤 차별성/계급 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3. 物 我 一 如 와 카르마요가 논자가 추정하여 재구성한 샹카라의 과목에 따르면 6~7송은 4 ~5송의 體 에 대하여 그 相 / 功 德 이라 파악하였다. 體, 즉 자아의 一 元 性 을 안 자에게 갖추어지는 공덕이 어떤가 하는 점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後 述 할 오로빈도와의 대비를 위하여, 여기서도 7송 의 원문과 샹카라의 이해를 옮기면서 논의의 실마리를 풀어가기 로 한다. yasmin sarvāṇi bhūtāny ātmaivābhūd vijānataḥ/ tatra ko mohaḥ kaḥ śokaḥ ekatvam anupaśyataḥ//7// 깨달음의 사람에게 모든 존재가 바로 자아가 되는 때에, 일원성을 본 자에게 무슨 미망이 있으며, 무슨 슬픔이 있겠는가?(자아 속에서, 모 든 존재가 자아가 된 깨달음의 사람에게, 일원성을 본 자에게 무슨 미혹이 있 으며 무슨 슬픔이 있겠는가?)[EU : 13] 여기서 말하는 깨달음의 사람(vijānataḥ) 에 대하여 6송이 보다 자세히 부연하고 있다. 우리는 6송에서 이샤 우파니샤드 에서 말 하는 깨달음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6송을 인용 해야 하는 이유이다. 샹카라와 오로빈도 사이에 번역 자체가 차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샹카라의 이해만 제시해 둔다.
132 印 度 哲 學 제10집 yastu sarvāṇi bhūtāny ātmany eva anupaśyati/ sarvabhūteṣu cātmānaṃ tato na vijugupsate//6// 바로 그 자아 속에서 모든 존재들을 (보는 자), 그리고 모든 존재들 속에서 자아를 보는 자는, 그러한 (깨달음) 덕택에 미움을 느끼지 않는 다.[EU : 12]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경지는 자아 속에서 모든 존 재들을 보며 모든 존재들 속에서 자아를 보는 物 我 一 如 의 體 得 / 體 認 을 의미한다. 그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아드바이타 베단 타에서 生 解 脫 (jīvanmukti)을 말하는 것도 이러한 깨달음은 이 몸이 있더라도, 몸과는 상관없이 얻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리라. 논 자는 초기 우파니샤드의 명상이 형이상학적 실체를 대상으로 하 는 형이상학적 명상임을 주장한 바 37) 있는데, 여기 物 我 一 如 에서 도 그같은 점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여전히 존재론적 不 二 一 元 의 확인인 셈이다. 6~7송과 같은 物 我 一 如 를 바가바드기타 9:4-6 역시 말하고 있으나, 기타 는 박티(bhakti, 信 愛 )적 맥락 속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38) 이샤 우파니샤드 에서 안다는 것, 깨닫는다는 것(vijānataḥ)은 모 든 존재들/ 物 과 자아/ 我 의 하나됨(ekatvam)의 체험을 이르는 것으 로 볼 수 있다. 그런 자에게 어떤 공덕이 따를까? 나와 다른 존재 자들 역시 참 나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미 1송에서 말한 바, 神 에 의해서 덮여진(īśāvāsyam) 존재임을 아는/깨닫는 일에서 37) 拙 稿, 초기 우파니샤드의 명상 개념 Ⅰ, 인도철학 제7집 (서울 : 인도철학회, 1997), p. 84. 참조. 38) 라다크리쉬난은 이샤 우파니샤드 6송과 기타 6:30이 연관된다고 하였으나[S.Radhakrishnan, 앞의 책, p. 572.], 이샤 우파니샤드 에서는 아직 박티적인 느낌이 안 들지만 기타 6:30에서는 박티적인 뉘앙스가 있어서 같은 맥락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차라리 6:29와 더 가깝게 생각된다.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133 명백해졌다. 모든 존재자들이 신이고, 또 아트만의 존재이며, 그런 점에서 나와도 다르지 않다[ 物 我 一 如 ]고 한다면, 다른 존재자들에 게 어찌 미움을 가질 수 있겠는가. 또 무슨 미혹이 있을 수 있으 며, 무슨 슬픔이 있겠는가. 7송에 대한 오로빈도의 번역을 다시 옮겨 보자. 그 안에서, 生 成 인 모든 존재들이 된 것은 자아 안에서이니, 완전한 지식을 갖고 있는 그에게, 어떻게 미혹이 있겠는가? 모든 곳에서 一 元 性 을 보는 그가 어떻게 슬픔을 갖겠는가? [TU : 21] 번역만을 놓고 본다면, 샹카라의 그것과 뚜렷하게 구별지어지 는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논자는 여기서 6송의 2구와 7송의 2구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에서 어느 만큼 적극 적으로 사회윤리적 실천[=카르마요가]이 강조되고 있는가 하는 점 을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다. 샹카라의 경우에는 na vijugupsate 를 해석하면서 物 과 我 를 달리 보기에 反 感 이나 혐오가 생긴다고 보고서, 物 我 一 如 가 된다면 반감이나 혐오가 생길 원인이 존재하 지 않게 된다[EU : 13]는 해석만을 내놓고 있다. 6~7송의 의미를 物 我 一 如 를 깨친 한 개인의 평등한 心 性 에 대한 묘사로만 볼 수밖 에 없을까? 아트만과 萬 物 의 相 卽 相 入, 즉 物 我 一 如 가 他 者 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일으킬 수 있는 형이상학적 기반을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리라. 만약 그렇게 볼 수 있다면 6~7송에서 이미 사랑과 봉사를 일으킬 형이상학적 기반이 조성되어 있음에 도 불구하고 왜 샹카라는 사회윤리적 실천에 대한 강조를 말하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샹카라와 오로빈도 사이에 미세하나마 差 異 가 없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오로빈도는 6~7 송에 대한 解 義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각의 첫 번째 운동은 우주 안에 있는 다른 존재들과의 하나됨이 라는 느낌이다. 그 초기의, 또는 투박한 형태는 타자를 이해하거나 동
134 印 度 哲 學 제10집 정하려는 시도이고, 타자를 위하여 사랑 또는 자비 또는 동료의식(fello w-feeling)을 넓히려는 경향성이며, 타자를 위해서 노동/행위하려는 충 동이다. 그렇게 자각된 하나됨은 진실한 하나됨(real oneness) 보다는 집단성이나 連 帶 에서 결과하는 유사한 단위들/일치들(similar units)에서 이끌어내지는 다원적 하나됨(pluralistic unity)이다.[tu : 47] 여기서 진실한 하나됨 이 體 속으로의 歸 一 만을 말하는 샹카라 의 입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집단성이나 連 帶 에서 결 과하는 유사한 일치들 이라는 것은 存 二 의 二 重 性 을 염두에 두어 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神 的 인 생활(divine life)의 규율로서 규정된 것[TU : 50]이라 평가된다. 비록 오로빈도 역시 7송에 대 한 解 義 에서, 우리가 희망하는 것처럼 카르마요가를 크게/자세히 力 說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해도 샹카라보다는 카르마요가 的 志 向 性 을 갖고 있다는 점을 논자로서는 의미부여하고 싶은 것이다. 물 론 이에는 카르마요가를 중심으로 한 그의 바가바드기타 해석 이나 그에 근거한 그의 독립운동 등에 대한 先 理 解 를 投 影 한 결과 임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39) 하여튼 위의 인용문은 오로빈도의 눈에는 샹카라의 아드바이타 베단타(Advaita Vedānta) 가 시대적으로는 부적절한 것으로 敎 判 되었 다 40) 는 이야기이며, 자신에 의해서 새롭게 통합요가(Integral Yoga) 혹은 완전 요가(Pūrṇa Yoga) 41) 가 요청된다고 보았던 배경이 되기 39) 오로빈도의 기타 해석과 그 실천에 대해서는 Satya p. Agarwal, The Social Role of the Gītā ; How & Why (Delhi : Motilal Banarasidass, 1997), pp. 137-185. 참조. 40) 이는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 1863-1902)의 실천적 베단타(Practical Vedānta) 가 갖는 敎 判 과 동일하다. 이들은 공히 현실적, 물질적 생활세계[계열2]를 중시하지 않는 아드바이타 베단타를 비판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려고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그 해법의 제시에 있어서도 기타 의 카르마요가를 중시한 공통점을 또 갖고 있다. 41) 오로빈도 철학에 대한 명칭으로서는 이들 외에도 통합 不 二 論 (Integral Non-dualism, Pūrṇa Advaita), 통합 관념론(Pūrṇa-Vijñāna), 또는 단순히 통합주의(Pūrṇa-Vāda), 통합 일원론(Integral Monism) 등으로 불리어진다. Kala Acharya, Subhada Joshi ed., 앞의 책, p. 4. 참조.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135 도 했던 것이다. 4. avidyā, 祭 禮 / 無 明 과 多 元 性 논자가 추정하여 再 構 成 한 샹카라의 科 目 에 따르면 9~14송은 知 중심의 會 通 論 [ 主 知 從 行 ]을 설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들 은 다시 9~11송과 12~14송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서로 구조적으 로 相 應 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핵심은 vidyā와 avidyā의 兼 修 문제 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avidyā개념에 대한 해석문제가 논점 의 差 異 를 형성한다. 이에 대하여 中 村 元 은 특히, 從 前 의 古 우파 니샤드의 철학에서는 無 知 가 獨 自 의 장소를 점하는 것이 없었다는 점에서 독자의 존재의의를 갖는 것이다. 42) 라고 평가하고 있다. 먼저, 9송의 원문을 샹카라의 이해를 통하여 읽어보자. andhaṃ tamaḥ praviśanti yo 'vidyām upāsate/ tato bhūya iva te tamo ya u vidyāyāṃ ratāḥ//9// 무지(제례)를 숭배하는 자들은 맹목적인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그 러나 지혜(명상)에 종사하는 자들은 그보다 더 큰 어둠 속으로 들어간 다.[EU : 18]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무지에 종사하는 자들이 어둠으로 간다 면 지혜에 종사하는 자들은 밝음으로 가야할 것이다. 그런데, 무 지를 숭배하는 자들이 어둠 속으로 가는데 지혜에 종사하는 사람 들은 그보다 더 큰 어둠 속으로 간다는 것은 9송에서의 vidyā와 a vidyā를 상식적 의미의 無 知 / 無 明 과 지혜 로 해석해서는 안 됨을 가르쳐 준다. 만약 그와 같이 해석한다면, 無 明 에 덮인 사람보다도 42) 中 村 元, ウパニシャッドの 思 想 ( 東 京 : 春 秋 社, 1995), p. 528.
136 印 度 哲 學 제10집 지혜로운 자가 더 나쁜 과보를 받는 것이 되어서 이치에 맞지 않 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vidyā와 avidyā의 의미를 달리 파악해야 한다. 그런 까닭에 샹카라는 무지를 제례로, 지혜를 (신들의 숭배와 그에 대한) 명상으로 해석하는지도 모른다. 이 같은 샹카라의 比 定 을 받아들인다면 9송의 의미는 어떻게 이해될 것인가? 우선 말할 수 있는 것은 지혜/명상과 무지/제례의 兼 修 를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이어지는 11송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vidyāṁ cāvidyāṁ ca yas tad vedobhayam saha / avidyayā mṛtyuṁ tīrtvā vidyayāmṛtam aśnute//11/ 지혜와 무지, 이 두 가지를 함께 안 자는 지혜를 통해서는 不 死 를 얻고 무지를 통해서는 죽음을 건넌다. 43) 두 가지를 함께 행하는 것, 그것을 兼 修 라고 한다면 兼 修 의 길 을 추구해야 한다. 兼 修, 그것은 실천적인 차원의 會 通 이므로 이 샤 우파니샤드 전체의 맥락에서도 9송의 위상은 적지 않게 중요 하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9송에서는 11송에서 말하는 바와 같 이 兼 修 하지 못하고 兩 者 중의 어느 하나만을 닦는 專 修 에 대한 警 戒 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샤 우파니샤드 에서는 兼 修 를 실천하지 못하는 자들이라면, 그들이 행하는 修 行 法 이 무 엇이든지 同 一 하게 문제가 있다든지 나쁜 과보를 받는다 라고 말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兼 修 가 이상적이긴 하지만, 專 修 중에서도 그 과보/공덕의 얻음에 差 異 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은 샹카라의 입장에서 볼 때 그 길이 무지, 즉 제례의 길 보다는 공덕이 殊 勝 한 것으로 이야기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논자가 보기에는 이샤 우파니샤드 9송의 의미를 그렇 43) 오로빈도의 번역은 ubhayam 을 하나 속의 둘 로 해석하고 있어서 원문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해석학적 創 見 이다.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137 게 해석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專 修 者 의 길은 어느 쪽이든 어 둠( - )에 들어가기는 마찬가지로 생각된다. 샹카라는 그렇기 때문 에 양자를 兼 修 (combination)하라고 제시되었다 한다. 11송의 경우 그렇게 겸수를 설하고 있다. 그렇지만, 논자는 이 9송에서부터 知 위주의 입장이 달라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 이유는 이샤 우파 니샤드 자체가 비록 第 一 義 的 으로는 겸수를 보다 바람직한 것으 로서 제시하지만, 第 二 義 的 으로는 그렇지 못한 專 修 者 들 사이에서 그들이 받는 과보의 차이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과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속에 선택적으로 介 在 되어 있는 공덕에도 차 이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무지(제례)를 숭배하는 자들이 들어가는 맹목적인 어둠 을 -3 이라 본다면 지혜(명상)에 종사하는 자들이 들어가는 더 큰 어둠 은 -3 보다 더 후퇴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5 라고 해두자. 唯 業 無 知 가 -3이라면 唯 知 無 業 은 -5가 된다. 즉 간략히 정리하면, 唯 業 無 知 唯 知 無 業 = -3-5 가 된다. 물론 보 다 바람직한 것은 이샤 우파니샤드 그 자체에서 보다 긍정적으 로 어둠 대신 밝음 을 가지고 양자를 優 劣 化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논자는 이것은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앞서 살펴 본 것처럼, 3송의 경우에도 否 定 的 인 측면에서 자아를 죽이는 자들 의 과보를 말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자아를 보호하 는 자들 의 功 德 을 말하는 것으로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 문이다. 또한 이샤 우파니샤드 의 說 者 가 부정적으로 표현했다고 해서 부정적 가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聽 者 의 긍정적 행위를 요청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부정적 표현들이 널리 쓰였기 때 문이다. 뿐만 아니라 唯 業 無 知 의 -3 속에는 知 를 겸하지 않은 과보가 -3 이지만 업을 행한 공덕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마찬가지 로 唯 知 無 業 의 경우에도 -5이지만, 그 속에는 業 을 행하지 않은 과보가 -5이지만 그 속에는 知 를 행한 공덕은 내포되어 있는 것 이다. 따라서 일률적으로 兩 者 를 陰 (-)으로만 보고서 그 공덕의 세
138 印 度 哲 學 제10집 계를 질적으로 전환하여 陽 (+)의 세계로 전환할 때 그 가치 평가 가 역전된다고, 9송의 의미가 오히려 知 의 공덕이 더 크다고 주 장 44) 하는 것은 無 理 라고 본다. 이러한 논자의 추리가 타당하다면, 9송의 의미를 專 修 를 할 경우에는 唯 知 無 業 보다는 唯 業 無 知 가 낫 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서 좋으리라. 또 샹카라가 견지해왔던 知 위주의 기본적 입장과는 다르게 된 다. 會 通 을 논해도 主 知 從 行 의 會 通 論 을 주장해왔고, 그 같은 입장 에서 이샤 우파니샤드 를 주석해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샹 카라는 지혜(명상)에 종사하는 자 를 명상에만 전념하느라 제례를 무시한 자들이라 [EU : 18] 45) 고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이 주는 뉘 앙스는, 원래 명상이 제례보다 그 공덕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명 상과 제례를 兼 修 하지 않고 명상만을 專 修 하게 된다면 차라리 제 례만 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의미라는 것 이다. 샹카라는 이렇게 명상과 제례를 분리한 부차적인 결과는 양자의 결합을 위한 이유들로서 제출되었다 (p. 18)고 한다. 즉 제 례와 명상을 함께 닦지 않고, 어느 하나만 專 修 하는 것은 올바르 지 않다는 것이다. 겸수하지 못해서 그렇지 본래적인 의미에서는 결코 vidyā의 공덕이 avidyā보다 적은 것은 아니라는 인상을 주 고 있다. 만약 샹카라의 해석대로, 兼 修 해야 하는데 兼 修 하지 않고 專 修 함으로써 초래하는 결과를 말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논자는 이 게송들의 의미에는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9송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읽히기 때문이다. 지혜(명상)을 겸해서 닦지 않고 오직 무지(제례)만을 숭배하는 자들 은 맹목적인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무지(제례)를 겸해서 닦지 않고 오직 지혜(명상)에만 종사하 44)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석사과정 이재준 군의 문제제기이다. 논자의 홈페이지 자유토론실 (http://www.freechal.com/karuna33) 참조. 45) 물론 샹카라는 여기서 vidyā를 브라만에 대한 지식[= 梵 知 ]를 가리킬 수는 없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것(브라만에 대한 지식)이 더 큰 어둠으로 이끌 수는 없기 때문이다. S. Radhakrishnan, 앞의 책, p. 573.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139 는 자들은 그보다 더 큰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결국 有 業 無 知 ( 어둠) 보다도 有 知 無 業 ( 더 큰 어둠)이 더 나쁘다 는 의미가 된다. 즉 원문의 趣 意 가 무지(제례)가 중심이 되는 會 通 論 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9송 이하에서 무지 중심의 회통론(지 행)을 설하는 것으로 보는 이유 는 양자의 兼 修 를 말하고 있으면서도 양자 중 無 知 (= 唯 業 無 知 ) 쪽이 知 (= 唯 知 無 業 ) 보다 더 공덕이 크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것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지식의 길/ 系 列 1을 중심으로 설정한 샹카라의 해석과는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샹카라의 노력 을 보면서 우리는 충분히 샹카라의 고민을 느낄 수 있다. 왜 샹카 라는 이 게송이 知 보다 行 의 공덕이 더욱 큼을 말하는 게송으로 읽지 못하는가? 왜 샹카라는 넓디넓은 우파니샤드 안에서는 知 보 다 行 을 더욱 중시하는 흐름/ 系 列 2도 있음 46) 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샹카라가 행하는 것처럼 근기론에 입각한 二 諦 說 로서 이루고자 하는 會 通 論 [=차별적 회통 론]은 진정한 의미의 회통론[=평등적 회통론]일 수 없다는 사실이 다. 샹카라가 그렇다면, 오로빈도는 이 9송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번역을 다시 옮겨보자. 그들 스스로를 지혜에만 바치는 자는 더 큰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무지를 따르는 그들은 맹목적인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TU : 21] 앞서 살펴본 것처럼, 샹카라가 vidyā와 avidyā를 각기 지혜(명 46) 베다문헌의 또 다른 해석학파로서 미망사학파의 존재를 생각할 때 行 의 계열을 고취하는 베다 문헌의 존재를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같다. 또 우파니샤드 그 자체에 대해서도 지식편(jñānakāṇḍa)과 행위편(karmakāṇḍa)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가. Harold Coward, Derrida and Śaṅkara, Derrida and Indian Philosophy (Delhi : Sri Satguru Publications, 1991), p. 91. 참조.
140 印 度 哲 學 제10집 상)과 무지(제례)에 配 對 함으로써 스스로 갖고 있던 知 중심의 기본 입장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다시 그것을 會 通 하느라 고민하고 있었다면, 오로빈도는 각기 vidyā를 一 元 性 (Consciousness of Unity)으 로 avidyā를 다원성(Consciousness of Multiplicity)으로 이해함[TU : 6 1]으로써 그 같은 갈등에 봉착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자기가 해온 해석과 전혀 상충하지 않는 것이다. 一 元 性 과 多 元 性 의 대립은 명 상과 무지/제례의 대립보다는 날카롭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 로빈도에게서는 일원성과 다원성이 회통해야 할 바 對 立 으로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二 重 性 / 存 二 으로서 주어져 있는 것 이다. 일원성은 없고 다원성만 있는 것이 어둠 속으로 가는 것이 라면 다원성은 없고 일원성만 있는 것은 더 큰 어둠 속으로 들어 가게 된다. 일원성은 없고 다원성만 있는 것이 초래하는 문제보다 는 다원성은 없이 일원성만 있는 것이 초래하는 문제가 더 크다 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일원성 중심의 샹카라 입장에 대한 오로빈도의 비판이라 말할 수도 있다. 47) 물론, 오로빈도 역시 兼 修 論 의 입장에서 이 9송을 해석하고 있 다. 그것이 가장 바람직스럽기 때문이다. 오로빈도는 말한다. avidyā는 vidyā가 지지해주고 그것을 품고 있기에 존재하며, vidyā는 영혼의 보다 더 위대한 일원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준비하기 위해서 아 비드야에 의존한다. 양자 모두 타자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TU : 64] vidyā와 avidyā를 일원성과 다원성으로 해석함으로써 이러한 겸수론에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못한다. 샹카라와는 달리 차별적 평가가 개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원성을 배제한 일원성도, 일원성을 배제한 다원성도 모두 잘못이다. 그것들은 그의 자기인 47) 기실 다원성을 강조하면서 샹카라의 일원성 중시의 입장을 비판한 것은 이미 라마누자(Rāmānuja, 1017-1127)에게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S.Radhakrishnan, The Philosophy of Spiritual Life, p. 52. 참조. 또 다원성의 강조는 Nimbārka에게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p. 79. 참조.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141 식(maya)의 두 측면이고, 그의 에너지(Chit-Sakti)의 쌍둥이 힘들 [T U : 62]일 뿐이기 때문이다. 샹카라는 二 元 그 자체만을 가지고 不 二 로서 會 通 하려 하였음에 반하여 오로빈도는 二 元 을 모두 함께 포괄하는 一 을 設 定 한다는 사실을 앞서 지적한 바 있지만, 그 같 은 특징은 여기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 일원성과 다원성을 포괄 하는 그/ 主 / 梵 /īś/puruṣottama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 는 이샤 우파니샤드 의 神 觀 48) 역시 확인할 수 있으리라 보지만, 논자로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오로빈도의 회통론이 보다 진정 한 의미의 會 通 論 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會 通 이 이샤 우파니샤 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공통적 관점이자 차별화의 계기 이기 때문이다. 5. vināśa, 生 起 와 不 生 起 9~11송이 vidyā와 avidyā를 對 比 시키고 있음에 반하여 12~14 송은 sambhūti와 asambhūti 혹은 vināśa를 대비시키고 있다. 12 송에서는 sambhūti와 asambhūti의 대립이고, 14송에서는 sambhū ti와 vināśa의 대립이다. 그러니까 일단 asambhūti와 vināśa가 同 意 語 임을 알 수 있다. 즉 vidyā와 sambhūti 相 應 하고, avidyā는 as ambhūti에 相 應 한다. 그런데 다소 해석을 어렵게 하는 것은 14송에서 일어난다. 논술 의 편의를 위하여 14송 원문과 오로빈도의 번역부터 먼저 살펴보 자. sambhūtiṁ ca vināśaṁ ca yas tad vedobhayaṁ saha/ vināśena mṛtyuṁ tīrtvā sambhūtyā amṛtam aśnute//14// 48) 오로빈도는 8송에 대한 해석에서 우파니샤드가 다만 非 인격적 梵 만을 설하는 것이 아님을 力 說 한다. TU : 51-52. 참조.
142 印 度 哲 學 제10집 생기와 생기의 해체를 하나 속의 둘로써 안 자는 해체에 의해서 죽 음을 건너고 생기에 의해서 불사를 즐긴다. 오로빈도는 sambhūti를 生 起 / 顯 現 으로 보고 vināśa를 生 起 의 解 體 /소멸로 이해한다. 즉 vināśa를 asambhūti로 보는 것이다. 그러 니까 오로빈도의 이해는 sambhūti vināśa(=asambhūti) 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그의 입장을 옹호하는 데 늘 날카로운 주의를 기울였던 49) 것으로 평가받는 샹카라는 sambhūti에 접두 어 /a/를 집어넣어서 asambhūti라고 원문을 改 變 시키고 있다.[EU : 22] 해석학적 입장이 원문마저 고치게 하는 보기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샹카라의 입장은 asambhūti vin āśa(=sambhūti) 로 보고 있는 것이다. 양자의 對 照 的 관점을 일목요 연하게,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샹카라 : asambhūti vināśa(=sambhūti) 오로빈도 : sambhūti vināśa(=asambhūti) 그러니까 샹카라는 生 起 하는 것이 곧 解 體 라고 보고 있으며, 오 로빈도는 不 生 起 로 回 歸 하는 것이 解 體 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샹 카라는 전개를 곧 해체로 보고 있다. 전개 이전이 더 바람직한 상 태인 셈이다. 전개하지 않는 것, 體 속에 그냥 있는 것이 이상적인 일이 된다. 샹카라의 이같은 해석은 12송에 대한 自 註 와 맞추기 위해서다. 12송의 해석에서 현현, 즉 히란야가르바는 미현현, 즉 프라크리티보다 공덕이 적은 것으로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14송은 12송에 맞추기 위해서 /a/를 삽입한 것이다. prakṛti=avid yā=avyakṛta=asaṃbhūti 로 보면, asaṃbhūti와 vināśa의 관계는 미현현(=prakṛti=avyakṛta) 對 현현(=vyakṛta=hiraṇyagarbha)이 되는 것이 다. 49) A. N. Pandey, Forword ; G. R. Pandey, 앞의 책, p. Ⅸ.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143 이에 반하여 오로빈도는, 앞서 살핀 것처럼, 데바나가리 문자를 있는 그대로 해석한다. /a/의 삽입을 요청하지 않는 것이다. 우선, 다시 한 번 12송과 14송의 원문에 등장하는 술어를 대조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12송 : asaṃbhūti saṃbhūti 14송 : saṃbhūti vināśa 샹카라가 12송과 14송의 상응을 수직적으로 보았다면, 이샤 우 파니샤드 원문과 오로빈도의 관점은 대각선 방향으로 交 叉 하여 상응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빈도는 saṃbhūti 와 vināśa의 대립을 샹카라와는 달리 현현 對 미현현 으로 본 것 이다. 샹카라는 顯 現 이 곧 해체라고 보았음에 반하여 오로빈도는 현현이 곧 해체라고 보지 않는다. 현현은 해체와는 대척적인 자리 에 놓여있다. 해체는 현현 그 자체가 아니라 현현으로부터 미현현 으로 돌아가는 것이 해체라고 보았다. 존재에서 비존재로 돌아감 이 해체라고 본 것이다. 물론, 바람직한 것은 현현과 해체/ 未 顯 現 을 함께 아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현/존재에만 집착하는 것이 더 큰 어둠에 떨어진다.(12송) 그러므로 양자는 서로 相 補 的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顯 現 / 生 起 를 다시 未 顯 現 / 不 生 起 로 해체하는 것의 의미를 크게 생각한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존재라고 하는 관념(idea)을 비존재에로 해체한다는 의식적 경험을 가졌던 것은 존재 그 자체의 가장 완벽하고도 가장 자유로운 소유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말해질 수 있다. 이는 통합적인 관점으로부터 그 가장 넓고도 순수한 본질성에 있어서조차 모든 긍정적인 존재개념을 넘어서려는 불교의 거대한 노력에 대한 정당화일 수 있다.[TU : 72] 오로빈도는 존재 비존재 에로의 해체를 곧 해탈로 본다. 여 기서 오로빈도가 말하는 불교의 거대한 노력 은 무아설을 가리키 는 것으로 생각된다. 생기에서 불생기로 해체/복귀해 들어가기 위
144 印 度 哲 學 제10집 해서는 불교의 무아설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노력 역시 의미있다 는 것이다. 불교의 무아설을 有 我 說 의 차원에서 평가하고 의미부 여하는 것이다. 生 起 에서 不 生 起 에로 다시금 해체/복귀해 들어가 기 위해서는 부분적으로나마 의미있는 노력이라고 평가한다. 50) 이러한 맥락에서 샹카라의 입장을 현현 이전의 미현현을 이상적 으로 본 것이라 평가한다면, 오로빈도의 입장은 현현/존재 이전의 비존재/미현현에로의 소멸을 더욱 바람직하게 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현현/존재를 우리의 현실적 삶이라고 한다면 샹카라보다 오 로빈도가 현실적 삶을 훨씬 더 적극적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 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의 삶/물질/몸이라는 차원이 곧 해탈에의 途 程 에 놓여있는 것임을 말하는 것으로 논자 는 이해한다. 앞서 살핀 것처럼, 샹카라보다 오로빈도가 카르마요 가를 더 역설함은 단순히 시대적 배경(context)의 차이가 가져온 결 과라 볼 수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이러한 철학적 해석의 차이가 가로놓여 있다는 점 역시 看 過 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이샤 우 파니샤드 원문 그 자체가 샹카라가 아니라 오로빈도의 이러한 行 의 길/계열2를 지지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 우리가 다시 숙고해 보아야 할 문제는 앞서 살펴본 9송의 의미 확정을 14송과 관련해서 再 論 하는 일이다. 그것은 9~11송과 12~14송은 그 문체에 있어서나 술어에 있어서나 유사할 뿐만 아 니라 의미상으로도 상응하는 것으로 논자는 보기 때문이다. 즉 같 은 이야기를 變 奏 / 反 復 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우선 비교를 위해 서 필요한 9송, 12송, 그리고 14송에 등장하는 원어와 그 의미해 석을 비교하는 표를 다음과 같이 만들어 본다. 50) 幻 影 論 과 결부시키면서 불교를 批 評 하던 것과는 判 異 한 태도이다.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145 송 원어 샹카라 해석 오로빈도 해석 9송 avidyā: vidyā 無 知 : 知 다원성 : 일원성 asaṁbhūti: saṁb 12송 미현현 : 현현 미현현 : 현현 hūti 미현현(asaṁbhūti): 14송 saṁbhūti: vināśa 현현 : 해체/미현현 현현/해체 어쩌면 샹카라가 14송에서 /a/를 삽입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9송이나 12송과 동일한 구조로 만들 수 있다고 보았기 때 문일지도 모른다. 9~12송의 상응을 그 형식적인 측면에서만 본다 면, 그런 편이 훨씬 편안한 것도 사실이다. 왜 이샤 우파니샤드 는 14송에 이르러 對 句 를 이루는 술어의 등장 순서를 역전시키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우리가 갖고 있지는 않다. 그 렇다고 해서 그 같은 사실만으로 곧바로 원문의 改 變 이 정당화되 는 것은 아니다. 오로빈도는 원문 그대로를 존중한다. 그에 의하면, avidyā=asa ṁbhūti=vināśa 가 同 置 되고, vidyā=saṁbhūti=saṁbhūti 가 同 置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샤 우파니샤드 원문이 바로 이러한 오로빈도의 해석을 정당화해 주고 있다면, 그리고 그 의미가 앞서 논술한 바와 같이 카르마요가적 차원으로 해석될 수 있다면, 12~ 14송의 의미는 行 중심의 兼 修 論 을 주창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 을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살핀 바와 같이, saṁbhūti와 vināśa의 대립에서 카르마요가가 보다 긍정적으로 역설하는 것이 되기 때 문이다. 9~11송의 의미와 이러한 12~14송의 의미가 서로 相 應 하 는 것이라 한다면, 앞서 우리가 상론한 9송의 의미 해석에 있어서 도 唯 業 無 知 가 唯 知 無 業 보다 더 공덕이 큰 것으로, 비록 兼 修 가 이 상적이라 하겠으나 專 修 해야 할 때에는 차라리 唯 知 無 業 보다는 唯 業 無 知 를 보다 選 好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논자의 주장이 타당 성을 갖게 될 것이다.
146 印 度 哲 學 제10집 Ⅳ. 結 論 이샤 우파니샤드 는 주요한 우파니샤드 중에서는 小 品 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의미의 파악은 그렇게 쉽지 않은데, 주석서에 의지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논자가 依 用 한 주석서는 샹카라의 이샤 우파니샤드 브하샤 와 오로빈도의 譯 解 이다. 이들의 해석은 서로 동일한 베단타 사상의 맥락 속에 놓여있다는 공통의 前 提 가 있지만, 비교고찰이 가능할 만큼 서로 다른 점도 적지 않게 드러 난다. 이들 양자의 해석에 나타난 차이의 추출이 본 연구의 목적 이다. 이를 위해 논자는 본론에서 총론적 관점의 차이를 2 節, 각론 적 관점의 차이를 5 節 로 각기 구성하면서 詳 論 하였다. 그러나, 여 기서는 총괄적으로 요약 정리코자 한다. 우선, 샹카라와 오로빈도 모두 이샤 우파니샤드 를 會 通 論 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음은 공통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고찰 의 결과 그 세부에 있어서는 양자 사이에 會 通 의 方 法 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샹카라는 지혜의 길을 體 로 설정하고, 제례의 길을 從 的 으로 包 容 하려는 主 知 從 行 의 입장에 서있었다. 그 전략은 前 者 가 상근기를 위한 眞 諦 로서 설해져 있다 고 보고, 後 者 는 하근기를 위한 俗 諦 로서 설해져 있다고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른바 根 機 論 的 二 諦 說 에 의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오 로빈도는 知 /vidyā와 無 知 /avidyā를 각기 一 元 性 과 多 元 性 으로 보 면서 있는 그대로 회통한다. 샹카라가 不 二 一 元 의 歸 一 이라면 오 로빈도는 一 統 二 元 의 存 二 이다. 샹카라가 근기론적 이제설에 입각 하여 회통을 추구했다면, 오로빈도의 경우에는 二 重 性 의 허용이 곧 회통이라 보았다. 이렇게 오로빈도가 一 로써 二 元 을 평등하게 통괄할 수 있게 된 것은 샹카라와 달리 行 의 입장/ 系 列 2에 대한 평가가 다르기 때문이다. 샹카라가 카르마를 제례 로 이해함에 반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와 오로빈도의 해석 비교 147 하여 오로빈도는 행위 일반으로 이해하면서 이 다원성의 현실/물 질/육체적 측면의 중시로 나아간다. 一 統 二 元 에서 二 元 의 공존을 말하는 점에서, 오로빈도는 샹카라와는 달리 샹키야의 이원론으로 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또 二 重 性 의 인정, 無 知 /avidy ā의 긍정적 평가, 그리고 saṃbhūti와 vināśa의 대립에서 보듯이 현실에서의 해체적 삶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통하여 오로빈도는 그가 기타 해석을 통해서 그토록 강조했던 카르마요가의 이론 적 기초를 다시 한번 더 공고히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오로빈도 가 샹카라를 幻 影 主 義 者, 反 實 用 主 義 者 등으로 혹평하는 데에서 약 여하게 드러난다. 이상과 같이, 논자는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샹카라의 해석 과 오로빈도의 해석을 共 時 的 으로 비교하면서도 오로빈도의 입장 을 보다 타당한 것으로 敎 判 하였음이 사실이다. 이는 곧 논자가 샹카라의 모든 철학을 모두 무의미한 것으로 거부하거나 오로빈 도의 모든 철학을 다 지지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논자의 관점과 그들의 철학은 다만 부분적으로 交 集 合 을 이룰 뿐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이샤 우파니샤드 의 해석을 비교함에 있어서 논자가 오로빈도의 이해가 보다 더 타당한 것으로 평가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이샤 우파니샤드 에 대한 두 사상가의 해석의 핵심이 공 히 會 通 論 에 있다고 볼 때 샹카라의 근기론적 이제설이 포용주의 에 머물고 마는 差 別 的 會 通 論 이라는 한계가 있었다면, 오로빈도 의 二 重 性 이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에 보다 근접하는 平 等 的 會 通 論 이라고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논자는 오로빈도의 입장을 더욱 수용할 만한 것으로 敎 判 한 것이다. 이러한 오로빈도 의 회통론은 會 通 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일깨우기 에 족한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이샤 우파니샤드 의 14송에서 원문에 改 變 을 시도하면서 까지 샹카라는 主 知 從 行 의 입장을 强 辯 하고 있으나, 9송의 경우에 서 보듯이 이샤 우파니샤드 원문은 샹카라의 해석을 지지하지
148 印 度 哲 學 제10집 않는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두 가지 이유는 종래 논자가 가지고 있었던 철학적 주제 會 通 과 카르마요가 등 를 다시 한번 다른 각도에서 논의/정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를 통해서 논자가 깨달은 사실을 몇 가지 정 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會 通 論 의 진정한 모습과 관련해서 근기론을 넘어서야 비 로소 진정한 의미의 회통이 가능해진다고 하는 점이다. 종래 선과 정토의 수용문제를 근기론적 차원에서 파악하여 회통이라 말하는 것과 같은 관점은 수정되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둘째, 오로빈도는 샹카라의 사상에서 用 의 결여를 보고서 反 실 용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실용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의 실용주의는 實 行 主 義 라고 해야 할 것이고 오히려 無 記 說 에 나 타난 붓다의 태도가 더 실용주의적이라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 다. 이 문제는 우리에게 행, 카르마요가의 문제를 실용주의적 차 원과 관련해서 再 考 하라는 숙제를 남겨주었다. 셋째, 샹카라의 이제설/ 歸 一 이 갖는 문제의 하나로서 몸의 否 定 을 말할 수 있고 오로빈도의 이중성/ 存 二 는 몸의 긍정 을 그 입 장으로 취한다고 볼 때, 이는 베단타적 불교(샹키야-요가적이기보다는 베단타와 공유하는 면이 더 넓게 보였던)를 再 考 하고, 身 心 모두를 긍정적 으로 생각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과제를 또 하나 남겨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샹카라와 오로빈도 모두 원전의 무거움 에 결코 기 죽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철학을 제시하였다(샹카라는 원문조차 개변하 는 용기를 보였다)는 점에서, 이들의 해석학적 태도는 우리의 해석학 적 創 見 을 격려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샤 우파니샤드 는 샹 카라와 오로빈도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실제 우리의 해석은 이들 두 해석을 의지하여 선택하는 행위 외에 존재하지 않았다(못 했다). 그런 점에서 이들 해석 외에 이샤 우파니샤드 가 존재하지 않는다(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우 리의 인도철학사 연구에 있어서도 하나의 垂 範 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