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위조(僞造)는 용서할 수 없다.



Similar documents
<B3EBB5BFB0FCB0E8B9FD20B1B9C8B820B0E8B7F920C0C7BEC828C3D6C1BE29A4BB2E687770>

歯 동아일보(2-1).PDF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2월 강습회원의 수영장 이용기간은 매월 1일부터 말일까지로 한다.다만,월 자유수영회 원,자유수영 후 강습회원은 접수일 다음달 전일에 유효기간이 종료된다.<개정 , > 제10조(회원증 재발급)1회원증을 교부받은 자가 분실,망실,훼손 및

> 1. 법 제34조제1항제3호에 따른 노인전문병원 2. 국민건강보험법 제40조제1항의 규정에 의한 요양기관(약국을 제외한다) 3. 삭제< > 4. 의료급여법 제2조제2호의 규정에 의한 의료급여기관 제9조 (건강진단) 영 제20조제1항의 규

노인복지법 시행규칙

凡 例 一. 이 글은 朝 鮮 日 報 에 成 均 館 大 中 文 學 科 全 廣 鎭 敎 授 가 連 載 한 생활한자에서 拔 萃 하였다. 逃 가지런할 도 走 달릴 주 도주( 逃 走 ) 피하여 달아남. 도망( 逃 亡 ). 필사의 도주/그 피의자는 도주의 우려가 없어 보석금을 내고

PDF

< C1A633B1C75FC3D6C1BE5FBCF6C1A4BABB2E687770>

177

제주어 교육자료(중등)-작업.hwp

01Report_210-4.hwp

<C3D1BCB15FC0CCC8C45FBFECB8AE5FB1B3C0B0C0C75FB9E6C7E D352D32315FC5E4292E687770>

¸é¸ñ¼Ò½ÄÁö 63È£_³»Áö ÃÖÁ¾


<C3D6C1BE5FBBF5B1B9BEEEBBFDC8B0B0DCBFEFC8A C3D6C1BEBABB292E687770>


6±Ç¸ñÂ÷

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시험지 출제 양식

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untitled

<C0CEBCE2BABB2D33C2F7BCF6C1A420B1B9BFAAC3D1BCAD203130B1C72E687770>

민주장정-노동운동(분권).indd


최우석.hwp

E1-정답및풀이(1~24)ok

< BDC3BAB8C1A4B1D4C6C75BC8A3BFDC D2E687770>

<C1B6BCB1B4EBBCBCBDC3B1E2342DC3D6C1BE2E687770>

교사용지도서_쓰기.hwp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0429bodo.hwp

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cls46-06(심우영).hwp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상품 전단지

:::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2

DBPIA-NURIMEDIA

화이련(華以戀) hwp

ÆòÈ�´©¸® 94È£ ³»Áö_ÃÖÁ¾

歯1##01.PDF

<5BC1F8C7E0C1DF2D31B1C75D2DBCF6C1A4BABB2E687770>

120229(00)(1~3).indd

<C5F0B0E82D313132C8A328C0DBBEF7BFEB292E687770>

<BFBEBEC6C0CCB5E9C0C720B3EEC0CC2E20B3EBB7A120C0CCBEDFB1E220C7D0B1B3202D20C0DAB7E1322E687770>

2016년 제31차 통신심의소위원회 회의록(심의의결서,공개, 비공개).hwp

<BCD2B0E6C0FCBCAD20C1A62032B1C72E687770>

남사고의 유토피아 2

< B5BFBEC6BDC3BEC6BBE E687770>

<3130BAB9BDC428BCF6C1A4292E687770>

11민락초신문4호


<근대이전> ⑴ 문명의 형성과 고조선의 성립 역사 학습의 목적, 선사 문화의 발전에서 국가 형성까지를 다룬다. 역사가 현재 우리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었음을 인식하고,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으 로 선사 시대의 삶을 유추해 본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국가가 형성되고 문 명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새만금세미나-1101-이양재.hwp

??

652

歯 조선일보.PDF

<33B1C7C3D6C1BEBABB28BCF6C1A42D E687770>

<C1DFB1DE2842C7FC292E687770>

96부산연주문화\(김창욱\)

???? 1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8) 자원의 9) 우리나라 굴할 경우,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채굴할 수 있는가를 계산한 것으로, 자원의 고갈 시기를 나타내는 지표가 된 증가할 것으로 전망돼. 5 비 : 국민들의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 는 국내 곡물 생산 기반을 유지할 필요가 있 어. 8.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 hwp

정 답 과 해 설 1 (1) 존중하고 배려하는 언어생활 주요 지문 한 번 더 본문 10~12쪽 [예시 답]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한 사 람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으며,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해쳐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04 5

<3036B3E231C7D0B1E220B0ED31B1E2B8BBB0EDBBE7B4EBBAF1C6AFB0AD20B1B9BEEE28BBF32931B0AD2D33B0AD2D5BB1E8C0AFB5BFBCB1BBFDB4D45D2E687770>

<34B1C720C0CEB1C7C4A7C7D828C3D6C1BEC6EDC1FD D28BCF6C1A4292E687770>

160215

참고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1. 개인정보보호 관계 법령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령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전자금융거래법 시행령 은행법 시행령 보험업법 시행령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자본시장과

hwp

580 인물 강순( 康 純 1390(공양왕 2) 1468(예종 즉위년 ) 조선 초기의 명장.본관은 신천( 信 川 ).자는 태초( 太 初 ).시호는 장민( 莊 愍 ).보령현 지내리( 保 寧 縣 池 內 里,지금의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는 통훈대부 판무

<C1DFB0B3BBE7B9FD3128B9FDB7C92C20B0B3C1A4B9DDBFB5292E687770>

ad hwp

3. 은하 1 우리 은하 위 : 나선형 옆 : 볼록한 원반형 태양은 은하핵으로부터 3만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 2 은하의 분류 규칙적인 모양의 유무 타원은하, 나선은하와 타원은하 나선팔의 유무 타원은하와 나선 은하 막대 모양 구조의 유무 정상나선은하와 막대나선은하 4.

근대문화재분과 제4차 회의록(공개)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개

교육실습 소감문

1

¼þ·Ê¹®-5Àå¼öÁ¤

109

untitled

단위: 환경정책 형산강살리기 수중정화활동 지원 10,000,000원*90%<절감> 형산강살리기 환경정화 및 감시활동 5,000,000원*90%<절감> 9,000 4, 민간행사보조 9,000 10,000 1,000 자연보호기념식 및 백일장(사생,서예)대회 10

며 오스본을 중심으로 한 작은 정부, 시장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에 대응 하여 노동당은 보수당과 극명히 반대되는 정강 정책을 내세웠다. 영국의 정치 상황은 새누리당과 더불어 민주당, 국민의당이 서로 경제 민주화 와 무차별적 복지공약을 앞세우며 표를 구걸하기 위한

<33352D2D31342DC0CCB0E6C0DA2E687770>

<B9E9B3E2C5CDBFEFB4F5B5EBBEEE20B0A1C1A4B8AE20B1E6C0BB20B0C8B4C2B4D92E687770>

1) 음운 체계상의 특징 음운이란 언어를 구조적으로 분석할 때, 가장 작은 언어 단위이다. 즉 의미분화 를 가져오는 최소의 단위인데, 일반적으로 자음, 모음, 반모음 등의 분절음과 음장 (소리의 길이), 성조(소리의 높낮이) 등의 비분절음들이 있다. 금산방언에서는 중앙

DBPIA-NURIMEDIA

1-1Çؼ³

내지4월최종

주지스님의 이 달의 법문 성철 큰스님 기념관 불사를 회향하면서 20여 년 전 성철 큰스님 사리탑을 건립하려고 중국 석굴답사 연구팀을 따라 중국 불교성지를 탐방하였습 니다. 대동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공의석굴, 맥적산석 굴, 대족석굴,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과 주변의 큰

15강 판소리계 소설 심청전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106월 평가원] 1)심청이 수궁에 머물 적에 옥황상제의 명이니 거행이 오죽 하랴. 2) 사해 용왕이 다 각기 시녀를 보내어 아침저녁으로 문 안하고, 번갈아 당번을 서서 문안하고 호위하며, 금수능라 비

2 국어 영역(A 형). 다음 대화에서 석기 에게 해 줄 말로 적절한 것은? 세워 역도 꿈나무들을 체계적으로 키우는 일을 할 예정 입니다. 주석 : 석기야, 너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인다. 무슨 좋은 일 있니? 석기 : 응, 드디어 내일 어머니께서 스마트폰 사라고 돈

Microsoft Word - 青野論文_李_.doc

1과 첫 수업

<B5B6BCADC7C1B7CEB1D7B7A52DC0DBBEF7C1DF E687770>

No Title

Transcription:

역사의 위조( 僞 造 ) 는 용서할 수 없다. 고노 담화 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2014년 3월 14일 일본 공산당 간부회 위원장 시이 가즈오 시작하며 일본군 위안부 에 대한 정부의 견해를 밝힌 고노 요헤이( 河 野 洋 平 ) 관방장관 담화(1993년 8월 4 일 이하 고노 담화 ) 가 국정의 중대한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일부 세력을 중심으로 고노 담화 를 공격하는 캠페인이 벌어졌는데, 지난 2월 20일 일본유신회 소속 의원은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1 위안부 의 강제연행을 입증하는 증거는 없 으며 2 고노 담화 는 한국인 전( 前 ) 위안부 16명에 대한 청취조사를 바탕으로 그 강제성 을 인정하고 있지만, 청취조사 내용이 엉터리이며 그 근거를 뒷받침할 수 있는 조사 또한 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 새로운 관방장관 담화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며 고노 담화 에 대한 재검 토를 촉구했습니다. 이러한 공격과 관련, 본래대로라면 고노 담화 를 발표했던 정부는 정면으로 반박을 해야 마 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답변에 나선 스가 요시히데( 菅 義 偉 ) 관방장관은, 반박은커녕 당시의 일 을 검증해 보고 싶다, 학술적 관점에서 새로운 검토를 거듭해 나갈 필요가 있다 등과 같은, 기회주의적 대응으로 일관하는가 하면, 급기야 2월 28 일 정부 내에 고노 담화 검증 팀을 설 치하겠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또한 아베 신조( 安 倍 晋 三 ) 총리가 유신회 의원의 질문에 감사한 다 고 말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고노 담화 재검토론은 역사를 위조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고 하는 중대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세력에게 면죄부를 주는 일에 다름 아닙니다. 본 견해는 고노 담화 에 대한 이와 같은 부당한 공격에 반박함과 동시에, 이를 통해 일본 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노 담화 가 인정한 사실, 이에 대한 공격이 갖는 특징은 무엇인가? 우선, 고노 담화 가 인정했던 사실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재검토파 에 의한 담화 공격 의 특징이 어떠한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노 담화 가 인정한 다섯 가지 사실 고노 담화 는 1991년 12 월부터 실시되었던 정부 조사의 결론으로써, 그 내용에 따르면 다 음의 다섯 가지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제1 의 사실. 장기간,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위안소가 설치되고,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던 것이 인정되었다 ( 위안소 와 위안부 의 존재) 제2 의 사실.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설치되었고, 위안소 설치ㆍ관리 및 위안 부의 이송 등에 구( 舊 ) 일본군이 직ㆍ 간접적으로 관여했다 ( 위안소 의 설치, 관리 등에 대한 1

군의 관여) 제3 의 사실. 위안부 모집은 군으로부터 요청을 받은 업자들이 주도했는데, 감언( 甘 言 ), 강압 등 모집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고, 경우에 따라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 위안부 가 된 과정이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는 것이었다 = 강제성이 있었다) 제성 제4 의 사실.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 상황 하에서의 참혹한 것이었다 ( 위안소 의 강 = 강제사역 하에 놓여있었다) 제5 의 사실. 전쟁터로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는 일본을 제외하면 한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 하고 있었는데, 당시 한반도는 우리나라의 통치 하에 있었으며, 그 모집ㆍ이송ㆍ관리 등도 감언 ㆍ 강압에 의한 것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졌다 ( 일본을 제외하면, 다수가 일제강점기의 한반도 출신자였다. 모집 이송 관리 등은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졌다 = 강제성이 있었다) 이상의 사실들에 대해 인정하는 고노 담화 는 본 건은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많은 여성의 명예와 존엄성에 큰 상처를 주었던 문제이다. 정부는 이 기회에 다시금 그 출신지의 여하를 불 문하고, 이른바 종군 위안부로서 수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말씀을 전하는 바이다 라고 표명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역사의 교훈으로서 직시하고자 한 다. 우리는 역사연구, 역사교육을 통해 이와 같은 문제를 오래토록 기억하여, 같은 실수를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거듭 표명한다 고까지 서술하고 있습니다. 위안소 에서 이루어진 강제 사역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 고노 담화 가 인정한 사실들 중 담화 재검토파가 부정하려는 것이 바로 제3의 사실 위안부 가 된 과정이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는 것이었다 = 강제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1 위안부 의 강제연행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없고 2 전 위안부 의 증언을 뒷받침할만한 근거가 없다 면서 마치 고노 담화 전체가 신빙성이 없는 것인 양 공격하는 이것이 바 로 재검토 세력 의 주장인 것입니다. 먼저 이러한 공격 수법 자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않는, 지극히 일방적 인 것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형태로 여성들이 동원되었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 서 자기의사가 반영되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일단 여성들은 일본군 위안소 에 들어가면 감금ㆍ 구속된 채 강제 사역을 당했습니다. 자유가 없는 생활을 강요당하며, 강제로 병사의 성 노리개가 되는 성노예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은 다수의 피해자의 증언과 더불어 일본군의 공 문서 등을 통해 보더라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는 고노 담화 가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 적인 상황 하의 참혹한 것이었다 고 인정하는 그대로의 것이었습니다. 고노 담화 재검토파는 이 사실에 대해 입을 닫고 아무런 말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야말로 군의 성 노예제도 로써 국제사회의 엄중한 비판을 받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가장 큰 문제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고노 담화 재검토 세력이 주장하는 위안부 가 된 과정이 본인들의 의사에 반 하는 것이었다 = 강제성이 있었다는 담화 의 사실 인정은 근거 없는 것 이라는 식의 공격 이 어떻게 등장할 수 있었을까요. 우선 이에 대해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고노 담화 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무시하고, 담화 를 공격 이 공격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문제점은 바로 고노 담화 에 이르게 되기까지의 경과를 철 지히 무시한 채 담화 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중대한 정치 외교적 문제로 부상한 것은 1990 년의 일이었습니다. 이로부터 1993년 8 월 고노 담화 에까지 이르게 되는 경과를 살펴보면 다음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주) 본 견해에서는 고노 담화 에 이르는 사실경과를 검증하면서, 고노 요헤이 전 내각관 방장관과 이시하라 노부오( 石 原 信 雄 ) 전 내각관방부장관의 발언을 인용 하고 있으며, 그 출 처는 아래와 같습니다. ( 출처 a) 오럴 히스토리(Oral History) 아시아 여성 기금 (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 편집 발행) 에 수록된 고노씨의 인터뷰 (2006년 11월 16 일). ( 출처 b) 위의 책에 수록된 이시하라씨의 인터뷰 (2006년 3월 7 일). ( 출처 c) 역사 교과서에 대한 의문 ( 일본의 앞날과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 모임 편) 에 수록된 고노씨의 강연과 질의 (1997년 6월 17 일). ( 출처 d) 아사히 신문 에 실린 고노씨의 인터뷰 (1997년 3월 31 일). 한국은 강제연행 사실을 인정 하라고 호소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큰 피해를 입었던 한국으로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강제연행 사실을 인정 하라는 호소를 받고 있습니다. (1) 1990년 5월 18 일,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 당시) 의 일본 방문을 앞두고 한국의 여성 단체 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 일본 당국의 사죄와 보상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는 내 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 직후 국회에서 위안부 문제가 논란이 되면서 군이나 관헌의 관여를 부정하고 위안부 의 실태 조사 또한 거부했습니다(1990년 6월 6 일). (2) 1990년 10월 17 일, 이와 같은 일본 정부의 입장과 관련, 한국의 37개 주요 여성단체가 공동 성명을 발표, 다음 6 개 항목을 요구했습니다. 하나, 일본 정부는 조선 여성들을 위안부로 끌고 갔던 사실을 인정할 것 둘, 그 일에 대해 공식 사과할 것 셋, 만행의 전모를 스스로 밝힐 것 넷,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위령비( 慰 靈 碑 ) 를 건립할 것 다섯, 생존자와 유족들에게 보상할 것 여섯,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교육을 통해 이 사실을 전할 것. (3) 1991년 8월 14 일, 한국의 전 위안부 중 한 분인 김학순씨가 일본 정부는 정신대( 위 안부 ) 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분노를 느낀다 고 처음으로 실명으로 증언했습니다. 그 해 12월 6 일, 김씨를 포함한 한국의 전 위안부 세 사람( 후에 아홉 사람) 이 조직적, 강 제적으로 고향으로부터 끌려가 도망 갈 수 없는 전장에서 일본군을 상대했다 면서 일본 정부 를 상대로 보상 요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에 일본 국내에서도 시민 단체와 연구자 등에 의한 진상 규명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3

일본 정부, 위안부 에 대한 정부( 군) 의 관여를 인정 이러한 사태로 인해 일본 정부는 1991년 12 월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조 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 1992년 7월 6 일, 가토 고이치( 加 藤 紘 一 ) 관방장관( 당시) 이 담화를 발표하고 관계 자료를 조사한 결과, 위안소의 설치, 위안부 모집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관리, 위안 시설의 축조 증강, 위안소의 경영 감독, 위안소 위안부의 위생 관리, 위안소 관련자의 신분증명서 발급 등의 일 들과 관련, 정부의 관여가 있었음이 인정되었다 면서 일본군 위안부로써 필설( 筆 舌 ) 로 다할 수 없는 신고( 辛 苦 ) 를 겪었던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말씀을 드린 다 고 표명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가토 담화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정부( 군) 의 관여를 인정했습니다. 위안소 경영 감독과 관련한 공문에는 위안소 규정 또한 포함되어 있으며, 위안소 에서의 위안 부 생활이 자유가 없는 강제적인 것 강제 사역이었다는 것 또한 이 조사를 통해 밝혀졌습니 다. 하지만 가토 장관이 조선 여성의 강제징용을 증명하는 자료는 없었는가? 라는 질문에 모 집 방법에 대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고 대답했던 것이 강제연행에 대해서는 부정 했다고 보도되는 바람에 담화는 강한 비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2) 따라서 이 조사에 대해 국내외에서 조사가 미흡 하다는 비판이 가해졌습니다. 특히 한 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조사에 대해 ( 그 가치를 일정정도) 평가한다 고 하는 한편, 전모를 밝히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고 언급 1 앞으로도 일본 정부의 진상 규명 노력을 기대하며 2 한국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독자적인 조사 보고서를 발표하겠다 고 표명했습니다. 그리하여 1992년 7월 31일 한국 정부는 전 위안부 에 대한 청취 조사 등을 거쳐 200쪽이 넘는 보고서( 일제하의 군대위안부 실태조사 중간보고서 ) 를 발표, 정부차원의 위안부 모집 방법 등에 대한 추가 조사를 요구했습니다. 강제성을 입증하는 일본 측 공문을 찾지 못했다 (1) 이와 같은 사태를 계기로 일본 정부는 다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부분까지 포함하는 위 안부 문제의 조사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재조사에서는, 위안부 가 되는 과정에서의 강제성, 즉 ( 여성들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위안부가 되었다 는 사실을 입증하는 공문을 찾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하지만 재조사 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본 정부는 공문을 살펴본 결과, 그러한 문서를 찾지 못했다는 발표를 합 니다. 이는 담화 를 발표했던 고노 전 관방 장관이 여성을 강제로 징용하라든가, 본인의 의사 여 하를 막론하고 데려오라는, 그런 명령서는 적어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존재하지 않았다 ( 출처 c) 고 말하고, 담화 를 정리하는 사무관련 책임자였던 이시하라 노부오 전 관방부장관이 통달 이나 지령 등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해 보았지만, 문서로 강제성을 입증하는 것은 나오지 않았 다 ( 출처 b) 고 증언했던 것에서 나타납니다. (2) 사실 강제적으로 위안부 가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본 측 공문을 찾지 못했던 것 은 신기한 일도, 부자연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납치, 유괴 등과 같은 행위는 당시의 국내법과 국제법에 비추어 보더라도, 명명백백한 범죄행위였습니다. 그와 같은 명명백백한 범죄 행위를 지시하는 공문 등을 정부나 군에 의해 작성할 리가 없습니다. 설령 그러한 내용을 시사하는 문 4

서가 있었다 하더라도 패전을 맞은 가운데, 다른 전쟁범죄와 연관된 자료들과 함께 처분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고노씨도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강제로 데려오라 고 명령하거나 강제로 데려왔다 고 하는 보고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 출처 d), 군 관련 인사들은 그런 명령을 했다 는 내용이 담긴 자료를 가능한 한 남기고 싶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자료는 거의 처분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 출처 a)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강제성을 증명하는 일본 측 문건을 찾지 못한 것을 근거로, 강제적으로 위안부 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전혀 성립될 수 없는 논리인 것입니다. 강제성을 검증하기 위해 전 위안부 에 대한 청취 조사를 실시 (1) 문서가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위안부 가 되는 과정에 강제성이 있었는지 여부와 관련 한 최종 판단을 내리기 위해 일본 정부는 사상처음으로 전 위안부 에 대한 청취 조사의 실시 를 결정하고 조사단을 한국으로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전 위안부 16명에 대한 직접 청취 조 사가 실시됩니다. 전 위안부 로부터의 청취 조사는 강제적으로 위안부 가 되었다는 일본 측의 공문이 발견 되지 않는 상황에서 강제를 당했다는 주장이 진실인지 직접 피해자를 조사함으로써 검증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청취 조사의 목적은 고노 이시하라 두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도 밝혀졌습니다. 고 노씨는 문서 자료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른바 위안부였던 분들에 대한 청취 조사를 정중 하게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 따라, 한국에서 조사를 실시했다 ( 출처 a) 고 증언하고 있 습니다. 또한 이시하라씨는 강제성을 입증할 수 있는 물적 증거 가 없는 상황에서 위안부의 분들을 만나 그 분들의 이야기에 기초해 상황판단 및 심증을 모아 강제로 보내졌는지 여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기로 했다 ( 출처 b) 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2) 그렇게 전 위안부 들의 증언을 들어본 결과, 일본 정부는 위안소 에서의 강제 사역은 물론 위안부 가 되는 과정에 있어도 강제성이 있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판단 에 이르게 된 경위에 대해 담화 를 정리한 고노 이시하라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고노씨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분명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던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상황 설명이 줄줄이 나왔습니다. 그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에는 신빙성이 있고 충분히 신뢰할만하다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보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깨닫게 되었 습니다 ( 출처 a) 라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이시하라씨는 그 보고서 내용을 살펴보면 분명히 본인의 뜻에 반하여 끌려간 사람, 속은 사 람, 보통의 여성노동자 모집에 참여했다가 위안소로 끌려간 사람, 그리고 분명 싫었음에도 불구 하고 조선 총독부 순사가 와서 자기 앞으로 몇 명이 할당되었다고 위협, 또는 압력을 가하는 바람에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는 사람 등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따라서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명백히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위안부가 된 사람들이 16명 가운데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보고를 조사단의 제군들로부터 받았던 것입니다. 총리도 관방 장관도 함께 그 얘기를 들었어요. 결국 저희는 통달이나 지령과 같은 문서적인 것, 강제성을 입증할 수 있는 물적 증거를 찾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실제 강제로 위안부가 된 사람들 16 명의 증언을 들어본 결과, 아무리 생각해 5

도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고노 담화 를 작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출처 b)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노 담화 는 한반도에서는 ( 위안부의) 모집, 이송, 관리 등이 감언, 강압에 의한 것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졌다 는 것을 명기, 위안부 가 되는 과정 에 본인들의 의사에 반한 일= 강제성이 있었다고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다른 증언 기록 과 자료도 참조한 후에 전체적으로 위안부 모집은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들이 주도했지만 여 기에서도 감언, 강압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조집이 이루어졌던 사례가 많다, 심지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경우도 있었다 고 명기했던 것입니다. 고노 담화 의 작성은 물론 고노씨 개인에 의한 것 아니라 당시 총리대신, 관방장관, 관방 부장관, 외무성, 후생성, 노동성 등의 관계 부처 인원들이 집단적으로 검토 퇴고하고 내각이 책임을 지고 있었다는 점은 고노 이시하라 두 사람이 증언하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전 위안부 증언을 통해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 의 판단은 공정하고 정당한 것 (1) 고노 담화 재검토파는 전 위안부 증언에 대해,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사가 이루 어지지 않았다 며 새삼스레 트집을 잡고 있는데, 이는 청취 조사의 목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 는 이야기입니다. 앞서 말했던 바와 같이 전 위안부 에 대한 청취 조사의 목적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서 여성들이 위안부 가 되는 과정에 강제성이 있었는지 여부에 초점을 맞추어 그 실태와 진상을 규명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이는 형사재판에서의 증언과 같이 개별ㆍ구체적인 범죄 행위를 특정하여 심판하는 것을 목적 으로 하지 않습니다. 또한 민사재판의 증언처럼 개별적인 피해 사실을 인정하고 배상시키는 것 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습니다. 16 명의 전 위안부 에 대한 청취 조사는 위안부 가 되었던 분들로부터 직접 증언을 들어 봄으로써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위안부가 되었다 는 호소에 진실성이 있는지 여부를 판단한다 는 것을 목적으로 행해졌습니다. 따라서 이 점에 충분한 확신을 가지고 강제성을 판단할 수 있 는 증언을 얻었으니 그 외의 다른 조사 등은 당연히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2) 원래 전 위안부 의 청취 조사에 대해 그 내용을 뒷받침할만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 았다 든가, 증언에 대해 오류가 있다, 신빙성에 의문이 생긴다 등등의 비판이 가해졌던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 보니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도 고노씨가 이미 1997년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반세기 이상 전의 이야기이다 보니, 그 장소나 상황에 대한 기억에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 다. 그렇다고 한 여자의 인생에서 그토록 큰 상처를 남긴 일에 대해서 상처 자체의 기억이 틀 렸다고 볼 수는 없다. 실제로 청취 조사의 증언을 읽어 보면, 그것이 피해자 아니면 말할 수 없 는 경험임을 알 수가 있다 ( 출처 d). 부분적으로 착각이 아닐까, 이런 일이 없었던 것 아닐까, 즉, 장소에 차이가 있거나 그 외 에 어떤 일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일단 큰 줄거리에서 경험, 즉 체험이 아니라면 결코 증언할 수 없다고 사려되는 부분이 도처에 명확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 출처 c). 저는 그 증언을 모두 들었습니다. 그 증언에 오류가 있다 는 지적을 하시는 분도 계시겠 지만 적어도 피해자로서, 피해자가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증언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6

재차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확실한 것은 위안소가 있었고, 이른바 위안부라 일컬어지는 이들이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 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위안부의 수송에 군이 다양한 형태로 관여했다는 것 또한 자료를 통해 지적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명확한 것은 당시의 사회 정세 속에서 군이 매우 압도적인 권력을 가 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한편, 이른바 종군위안부였다는 분들의 증언이 분명히 피해자 아니 면 말할 수 없는 것들로 느껴졌다는 점 등을 종합해 판단해 보면, 그러한 것( 강제성) 이 없었다 고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저는 판단 했습니다 ( 출처 c). 고노씨는, 설령 부분적인 오해 가 있었다 하더라도, 16명의 전 위안부 의 증언과 당시 자료 등을 통해 종합적으로 판단 해보면,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서 위안부 가 되는 과정에 강제성이 존재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책임감 있는 판단입니다. 당시의 일을 정부가 고노 담화 를 통해 이러한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은 공정하고 정당한 일이었습니다. 일본 사법부에 의한 사실의 인정 고노 담화 의 진실성은 역사적으로 검증되었다 고노 담화 재검토파의 공격이 가진 두 번째 문제점은 담화 가 발표된 이후로부터 20년 남짓, 담화 의 진실성을 뒷받침해주는 무수한 증거가 줄이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깡 그리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해국인 일본의 사법부가 사실을 인정 증거 는 피해자의 증언과 가해자 측의 증언 기록, 내외의 공문서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 중에서도, 가해국인 일본의 사법부가 사실을 인정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 미를 갖습니다. 다음 세계 각국의 전 위안부 들이 일본 정부를 피고로 해서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던 재판으로는 10 건을 꼽을 수 있습니다. 1. 아시아ㆍ 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 소송 (1991 년 제소, 원고 9 명). 2. 부산 종군위안부 여자근로정신대 공식사과 등 청구 소송 (1992 년 제소, 원고 3 명). 3. 필리핀 종군위안부 국가 보상 청구 소송 (1993 년 제소, 원고 46 명). 4. 재일한국인 전 종군위안부 사과 보상 청구 소송 (1993 년 제소, 원고 1 명). 5. 네덜란드인 전 포로 민간 억류자 손해 배상 청구 소송 (1994 년 제소, 원고 1 명). 6. 중국인 위안부 손해 배상 청구 소송( 제1 차) (1995 년 제소, 원고 4 명). 7. 중국인 위안부 손해 배상 청구 소송( 제2 차) (1996 년 제소, 원고 2 명). 8. 산서성 성폭력 피해자 손해 배상 등 청구 소송 (1998 년 제소, 원고 10 명). 9. 대만인 전 위안부 사과 청구 손해 배상 소송 (1999 년 제소, 원고 9 명). 10. 하이난( 海 南 ) 섬 전투 당시 성폭력 피해 배상 청구 소송 (2001 년 제소, 원고 8 명). 7

( 주) 원고의 수는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 등 소송 승계인의 숫자이며, 그 이외의 원고 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원고의 수는 2 차, 3차 제소에 관한 부분도 포함되지 만, 중국인 위안부 손해 배상 청구 소송 이외에는 하나의 판결에 정리되어 있으므 로, 합계로 계산했습니다. 이 재판들은 하나같이 원고의 손해 배상 청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어졌지만, 10건의 재판 중 8 건의 재판( 위의 재판 중 필리핀 종군위안부 국가 보상 청구 소송 과 대만인 전 위안부 사과 청구 손해 배상 소송 을 뺀 나머지 8 건의 재판) 에 대한 판결은 모두 전 위 안부 들의 피해와 그 실태에 대해 사실로써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일련의 판결은 고노 담화 가 인정한 위안소 에 대한 구일본군의 관여, 위안부 가 되는 과정에서의 강제성, 위안소 에서 이루어졌던 강제 사역 등을 전면적으로 입증하고 그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가해국인 일본 법원이 엄연한 증거를 통해 조사한 결과 인정하고 있는 것에는 특 별한 무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고노 담화 재검토파가 부르짖는 강제연행은 없었다 는 주장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고노 담화 가 인정한 다섯 가지 사실 모두가 사실과 증거 에 기초해 있다 위의 판결들 중에서 사실에 대한 인정은 1 사건의 배경 사정 과 2 각 원고의 피해 사 실 에 근거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선 사건의 배경 사정 에 대한 일련의 재판의 판결은 고노 담화 가 인정했던 사실을 거 의 동일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인 전 위안부 들이 제기했던 아시아 태평양 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 소송 의 도쿄고등재판소 판결(2003년 7월 22 일) 은 다음과 같 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본 건의 배경 사정 중 전시( 戰 時 ) 에 있었던 사실과 증거(...) 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인정된다. 가. 일본군에는 쇼와( 昭 和 ) 7 년(1932 년) 의 상해사변 이후부터 매춘업을 목적으로 군사 위안 소( 이하 위안소 라 함) 가 설치되었고, 그 무렵부터 종전 당시까지 장기적으로, 광범위한 지역 에 걸쳐 위안소가 설치되고 수많은 군위안부가 배치되었다. 나. 군위안부 모집은 일본군 당국의 요청을 받은 경영자의 의뢰에 따라, 알선 업자가 주도했 지만, 전쟁의 확대와 함께 군위안부 확보의 필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업체들은 감언, 혹은 사기 ㆍ협박 등에 군위안부를 모집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당국이 이에 가담하는 등의 사례도 나 타났다. 전쟁터로 이송된 군위안부의 출신지는 일본을 제외하면 한반도 출신자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 구일본군은 업자와 군위안부의 수송에 특별히 군속에 준하는 도항 허가를 부여했으며, 일 본 정부는 군위안부에게 신분증 발급까지 하고 있었다. 라. 위안소의 대부분은 구일본군의 개설 허가 하에 민간업체에 의해 경영되었지만, 일부 지역 에서는 일본군의 직접 경영하는 사례도 있었다. 민간업체의 경영과 관련해서는 구일본군이 위안 소 시설을 정비하거나 위안소 이용시간, 이용요금, 이용에 있어서의 주의 사항 등을 정한 위안 소 규정을 설치하고 군의관을 통해 위생 관리를 하는 등 전반적인 위안소의 설치, 운영, 유지 및 관리 등에 직접 관여했다. 8

또한 군위안부는 전쟁터에서 늘 일본군 관리를 받으며 일본군과 함께 행동했다. 이렇듯 판결문은 고노 담화 가 인정한 다섯 가지 사실에 대해 거의 모두 논란의 여지없는 사실과 증거 였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피해자 개개인에 대한 사실인정이 이루어지다 일련의 판결은 전 위안부 가 입은 피해와 관련, 개개인에 대해 상세한 사실을 확인하고 있 습니다. 8개의 재판의 판결에 의해 피해사실을 인정받은 여성은 35 명에 이릅니다. ( 한국인 10 명, 중 국인 24 명, 네덜란드인 1 명. 한 사람 한 사람의 피해에대한 사실 인정은 끝까지 읽기에 고통스 러울 정도로 잔인하고 비참하며, 생생한 사실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그 특징을 정리해 보면, 다 음과 같은 사실이 확인됩니다. (1) 35 명의 피해자 전원이 강제적으로 위안부 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 8개 재판의 판결은 35 명 전원에 대해 위안부 가 되는 과정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고 있었 다 = 강제성이 있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위안부 가 되었던 연령은 재판 기록에서 확인되는 것만으로도 35명 중 26명이 10 대의 미성년이었습니다. 한국인 피해자의 케이스. 감언 등, 사기에 의한 것과 함께, 강압을 이용한 강제연행 사실이 인정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아시아ㆍ 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 소송 의 도 쿄 고등재판소 판결(2003년 7월 22 일), 부산 종군위안부 여자근로정신대 공식사과 등 청구 소송 의 히로시마 고등재판소 판결(2001년 3월 29 일) 로 인정된 피해 사실 중 4명의 사례를 제시해 보겠습니다. (<> 는 인용자). 귀가하던 중, 부산 역 근처 골목에서 일본인과 조선인 남성 2명에게 불러 세워져 구라시 키( 倉 敷 ) 의 군복 공장에 돈 벌러 가지 않겠느냐? 는 권유를 듣고, 승낙도 하지 않았는데 억지로 배에 태워져 라바울로 끌려갔다 일본인이 소개한 좋은 일자리가 있다 는 얘기를 듣고 갔다가 일본인과 조선인 등에 의 해 부강( 芙 江 ) 에서 경성, 톈진을 거쳐 중국 각지의 위안소로 끌려다녔다 일본인과 조선인이 와서 일본 공장에 일하러 가서 1년만 지내면 시집밑천을 벌 수 있 다 는 이야기를 하기에 거절했지만 강제로 랭군에 끌려가 위안소에 감금되었< 다> 일본인과 조선인 청년으로부터 돈 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 따라오라 는 꼬임을 받 고, 따라갔더니 부산에서 배에 태워져 기차로 상하이까지 끌려가, 창문 없는 30개 정도의 작은 방이 늘어서 있는 육군부대 위안소 라는 간판의 연립 주택에 감금되었다 중국인 피해자의 케이스. 모든 경우에 일본군인의 폭력을 매개로 한 문자 그대로의 강제연 행 이 인정되고 있습니다. 중국인 위안부 손해 배상 청구 소송( 제1 차) 의 도쿄 고등재판소 판결(2004년 12월 15 일) 이 인정한 4 명의 피해 사실에 대해 제시해보겠습니다. 일본군 병사에 의해 자택에서 일본군의 주둔지가 있던 진구이( 進 圭 ) 마을로 납치 연행되 어 영내의 야오동( 바위산의 토굴을 이용한 주거지. 횡혈을 파놓은 것이 아니라 벽돌이나 돌 을 쌓아 만든 건물을 말하기도 한다) 에 감금되었다 3명의 중국인과 3 명의 무장한 일본군 병사들에 의해 자택에서 납치, 개머리판으로 왼쪽 어깨를 강타당하고 등 뒤로 손이 묶여 진구이 마을에 있는 일본군 주둔지에 납치 연행된 후 야오동에 감금되었다 9

일본군이 덮치더니 개머리판으로 왼팔을 때리고, 손을 뒤로 묶은 후 진구이 마을로 끌고 가 민가에 감금했다 일본군 병사에 의해 강제로 진구이 마을의 일본군 주둔지로 납치 연행되어 일본군 병사 로부터 남편의 거처를 대라 는 심문과 함께 몇 번이나 구타를 당하다 결국 야오동에 감금 되었< 다> (2) 위안소 생활은 글자 그대로의 성노예 로서 비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피해자 여성들이 위안소 에 들어간 후의 생활은 일체의 자유를 빼앗긴 상황에서 연일 다수 의 군인을 상대로 한 성행위를 강요받는 성노예 로서의 비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는 점이 35 명의 개개인에 대해 구체적인 사실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안소 생활은 성행위의 강요뿐만 아니라 구타 등 야만적인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점 또한 밝혀지고 있습니다. (3) 피해자는 육체적ㆍ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입어, 평생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피해자 여성들이 위안소 에서의 학대로 인해 육체적ㆍ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입고, 평생에 걸쳐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인정되고 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종전 이후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위안소 에서의 학대로 인해 불임은 물론 다양한 신체적 장애, 중증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등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에 대한 인정은, 고노 담화 가 인정했던 감언, 강압에 의해 본인들의 의 사에 반하여 위안부가 된 것, 관헌 등이 이에 직접 가담한 것, 위안소에서의 생활이 강제 적인 상황 하에서의 참혹한 것이었음 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써 재차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고노 담화 재검토파는 일본 사법부에 의한 사실 인정을 앞에 놓고도 강제연행은 없었 다, 강제로 위안부 가 되었다는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 고 억지를 부릴 작정입니까. 국가적 범죄로 단죄되어야 할 반인륜적 행위를 고발 일본 사법부의 판결은, 여성들의 개벌적인 피해 사실에 대해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러한 강제적 행위가 국가적 범죄로 단죄되어야 할 반인륜적 행위라는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감언, 강압 등에 의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위안소로 연행하고, 구일본군의 위안소에 대한 직간접적 관여 하에 정책적ㆍ제도적으로 군인들과의 성행위를 강요받았던 것으로, 이는 20세기 중반이라는 당시의 문명적 수준에 비추어 보더라도 매우 반인륜적이고 추악한 행위임이 명백할 뿐만 아니라, 적어도 일류 국가를 표방했던 제국( 帝 國 )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가담할 만한 행 위가 아니었다, 종군위안부제도가 이른바 나치의 만행에 준하는 중대한 인권 침해이며 이를 통해 위안부가 된 수많은 여성의 입은 손해를 방치하는 것을 재차 중대한 인권 침해를 일으키 는 ( 부산 종군위안부 여자근로정신대 공식사과 등 청구 소송, 야마구치지방법원 시모 노세키지부 판결, 1998년 4월 27 일). 원고들에게 가해진 일본군에 의한 강간 등과 같은 소행은 그것이 중일전쟁 이라는 전시상 황에서 일어났던 것이라 할지라도, 현저히 상도( 常 道 ) 를 벗어난 비열한 만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피해자 할머니들이 입은 정신적 피해는 막대하며, 원고들의 주장대로 참기 어려운 것이었 음이 추론하기 어렵지 않고, 또 그런 피해를 계기로 동포들로부터 까닭 없는 모멸, 차별 등을 받았던 것에 대해서도, 국적, 민족의 차이를 초월, 본 법원에서도 충분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 < 다> ( 산시성 성폭력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소송 도쿄지방법원 판결, 2003년 4월 24 일). 10

지극히 반인륜적이고 추악한 행위, 나치의 만행에 버금가는 중대한 인권 침해, 현저 히 상도를 벗어난 비열한 만행 일본 사법부의 판결에 의해 이루어진 이와 같은 준열한 단죄는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고노 담화 진실성이 명확해졌다 전 위안부 들이 제기한 일련의 소송에 대한 판결이 갖는 의의에 대해, 고노 전 관방장관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헤이세이( 平 成 ) 3 년(1991) 인가 4 년(1992) 에 이른바 종군위안부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일 본에 와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 재판에서 사실관계와 관련한 여러 가지 공방이 있었습니다. 헤이세이 14 년(2002) 에 고등재판소 판결이 나왔고, 최고재판소에 상고되었습니다만 결국 기각 되었지요. 최고재판소의 판단은 이른바 최종적인 판단에 해당하는데, 그 최고재판소의 판단과 관련한 재판장의 설명을 살펴보면, 보상과 관련한 부분은 이제 시간이 경과해 버렸고, 양국의 관계에 있어 조약적( 條 約 的 ) 처리가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개인에게 보상할 것은 없다는 결론이 내려지고 있지만, 이 사람이 종군 위안부로서 어느 정도의 고통을 받았는가 하는 사실 관계에 대해서는 고등재판소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최고재판소가 상고를 기각했던 것이 바로 이에 대한 반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등재판소의 판결문을 읽어 보면 위안부라 불렸던 몇 명의 원 고가 털어놓았던 그들의 경험이 판결문에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결국 사법부의 레벨, 그러니까 사법적인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논의 자체가 마무리 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정계가 이상하다, 혹은 학계에서 학문적으로 어떨는지 모르겠다 운운하는 겁니다. 각각의 입장 에 비추어 이야기하는 것은 자유겠지만, 적어도 사실 관계에 대해서 나는 이제 일본의 사법부가 인정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청취조사를 한 것에 문제가 없었다는 사실을 보장해 주 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출처 a) 고노씨의 말처럼 일본군 위안부 에 관한 사실 관계에 대해일본의 사법부는 인정 을 하고 이미 마무리 가 되었습니다. 사법부의 인정은 16 명의 전 위안부 에 대한 청취 조사에 의거, 당시 일본 정부의 판단에 실수가 없었다는 것을 보증 하고 있습니다. 고노 담화 의 진실성 이 일본의 사법부에 의해 드디어 분명해진 것입니다. 군이나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을 직접 시사하는 기술은 없었다 는 정부 답변 서의 철회를 강제연행을 직접 시사하는 기술은 없었다 는 정부 답변서는 사실과 다르다 고노 담화 재검토파들이 강제연행을 시사하는 증거는 없다 는 주장할 때, 그 근거 로 서 많이 이용하는 것이 바로 제1차 아베 정권이 각의를 통해 결정한 2007년 3월 16일 정부 답 변서( 츠지모토 키요미 중의원 의원의 질문주의서에 대한 답변서) 입니다. 이 정부 답변서에는 다 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져 있습니다. 이날( 고노 담화 를 발표한 1993년 8월 4 일) 의 조사 결과 발표 당시까지 정부가 발견했 던 자료 중에는 군이나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연행을 직접 사시하는 기술이 없었다. 하지만 이 정부 답변서는 사실과 다릅니다. 11

물론, 고노 담화 가 발표되던 시점까지 위안부 가 되는 과정에서의 강제성을 입증하는 일 본 측 공문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 강제적으로 위안부 가 되었음을 입증하 는 외국 측의 공문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다음 2개 공문서에 대해 일본 정부는 틀림없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네덜란드인 여성을 강제로 연행, 위안부 로 만든 세마랑 사건 그 첫 번째는 일본의 점령 하에 놓여 있던 네덜란드령 동인도( 현 인도네시아) 의 세마랑에서 군이 위안소 를 개설하고 억류되어 있던 네덜란드인 여성을 강제로 연행, 위안부 로 만들 었던 세마랑 사건 과 관련 문건입니다. 세마랑 사건 에서는 전후( 戰 後 ) 네덜란드에 의한 BC 급 전범 재판( 바타비아 임시 군법 회 의) 에서 중장, 대령, 소령 등 일본군인 7명과 군 위안소 경영자 4명이 사형 및 금고 15년 등의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 재판 문서를 법무성이 요약한 바타비아 임시군법회의 기록 은 고노 담화 의 발표와 함께 공표된 이른바 종군위안부문제 조사 결과에 관하여 ( 내각 외정 심의실, 1993년 8월 4 일) 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판결 사실의 개요 로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여성의 전원 또는 대부분이 강제하지 않고는 성매매에 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 었음에도 불구, 감독을 게을리 했던 사실 및 위안소에서 여성을 위협해 성매매를 강요하는 등, 또한 부하의 군인 또는 민간인이 그런 전쟁범죄 행위를 하는 것을 알거나, 알면서도 묵인했던 일 ( 사형당한 일본군 소좌) 부하들과 민간인 등이 여성들을 성매매를 목적으로 위안소로 연행, 숙박시키고 위협하여 성 매매를 강요하는 등의 전쟁범죄 행위를 저질렀던 사실에 대해 알고 나서도 묵인했던 일 ( 유기 형 10 년을 받은 일본군 소좌) 이러한 사실은 고노 담화 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각 정부부처에 제출된 문서의 일환으로, 법 무성이 이른바 종군 위안부 문제에 관련된 전쟁범죄 재판에 대한 조사결과 보고 라는 제목으 로 정리했던 문서 속에도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고노 담화 발표 때는 법무성이 정리했던 판결 사실의 개요 만이 발표되고, 그 원인이 된 재판자료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러한 개요 만 보더라도 충분히 강제연행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13년 9월 법무성이 취합한 기소장과 판결문 등 도합 530장에 이르는 자료가 시민 단체의 청구에 의해 국립 공문서관에서 공개되었습니다. 거기에는 판결문을 비롯, 강제연행 사실을 생 생하게 나타내는 증거 자료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판결문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 고 있습니다. 일본 점령군 당국은 상기의 여자로부터 자유를 빼앗아 완전한 종속상태에 두고, 그녀들의 부양, 보호에 대한 책임까지 장악했다. 그것도 모자라, 이 무원( 無 援 ), 부당한 종속 관계를 남 용, 폭력 또는 협박에 의해 몇 명의 부녀자를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선택하고 억류소로부터 연행했다. 이는 군이나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연행을 직접적으로 시사하는 기술 입니다. 게다가, 이 공개 자료 중에 자바군 사령부가 관여했음을 보여 주는 일본군 간부의 증언도 섞여 있었습 12

니다. 고노 담화 의 발표에 앞서 일본 정부가 강제연행을 직접적 형태로 보여 주는 이와 같은 공문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도쿄재판의 판결에 명기된 중국 남부 구이린( 桂 林 ) 에서의 강제연행 두 번째는 극동국제군사재판소( 도쿄재판) 의 판결에 명기된 중국 남부의 구이린에서 강제연행 사례입니다. 도쿄재판의 재판 문서 중에는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에서 이루어진 강제연행에 대한 증 거 문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구이린과 관련해서는 판결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습니다. 구이린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일본군은 강간, 약탈 등 온갖 잔학행위를 저질렀다. 공장을 설립한다는 핑계로 여공을 모집했고, 그렇게 모집한 부녀자들에게 일본군대를 위한 매춘을 강요 했다 이 기술 또한 군에 의한 강제연행을 시사하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일본은 1952년의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도쿄 재판과 BC급 전범 재판의 결과에 대해 모 두 수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내용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 내용에 대해 이의를 말할 처 지가 아니라는 점 또한 분명합니다. 이는 아베 총리 자신이, 우리나라는 일본과의 평화 조약 제11 조에 의해 이 재판을 수락하며, 국가 대 국가 관계에서 이 재판에 대해 이의를 말할 입장 이 아니다 (2007년 4월 20 일 정부 답변서) 라고 답변했던 대로입니다. 따라서 일본 정부가 BC급 전범 재판과 도쿄 재판의 공개 문서에 명기된 강제연행 사실을 몰 랐다고 우기는 것은 결코 통용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실과 다르면서도 지극히 유해한 정부 답변서의 철회를 촉구한다 이처럼 고노 담화 의 발표 시점에서 보더라도 정부가 발견한 자료 ( 혹은 정부가 알고 있던 자료) 속에, 군이나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연행을 직접적으로 시사하는 기술 이 있었음 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고노 담화 발표 이후 일본 사법부의 재판을 통해 밝혀진 강제연행에 대한 수많은 사실 인정 사례를 감안한다면 군이나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을 다룬 직접적 기술이 보이지 않 는다 며 정부 답변서의 입장을 오늘날까지도 반복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제1 차 아베정권의 정부답변서는 고노 담화 재검토파의 명분 으로 이용되며, 역사적 사실 을 왜곡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정부 답변서의 내용은 군이나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 제연행을 직접적으로 다룬 기술이 보이지 않았다 인데 이것이 강제연행을 나타내는 증거가 없 었다 로 오독되고, 급기야 강제연행 이 없었다 고 확대 해석되어,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강제성 전반을 부정하는 최대의 근거로 악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월 일본 공산당은 사실과 달리 역사의 사실을 왜곡하는 유해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이 16 일 정부 답변서의 철회를 강력히 요구하는 바입니다. 2007년 3 13

역사를 정면에서 마주하며, 성실하고도 진지하게 잘못을 시인, 미래를 위한 교 훈으로 삼는 태도를 여성에 대한 국제적 인권보장의 발전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최근 국제사회는 여성에 대한 조직적인 성폭력 강간, 성노예, 강제매춘, 강제임신ㆍ불임 등 을 시효가 없는 반인도 범죄 로 규정하고 국제형사재판소 규정 채택(1998 년) 하는 등 여 성의 국제적 인권보장을 크게 발전시켜 왔습니다. 여성에 대한 일체의 조직적 성폭력을 근절하고, 그를 통해 과거에 저질러졌던 중대한 과오의 청산을 요구하는 국제 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 일본의 태도가 끊임없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일본 정부는 이와 같은 국제사회의 비판에 응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성노예제 를 인정하고, 강제성을 부정하는 논의에 반론을 이것이 세계 여론 (1) 강제연행은 없었다 고 주장하는 아베 정권의 움직임이 강해졌던 2007 년 이후,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강제성을 부인하는 세력의 책동은 국제적으로 호된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현재 미국 하원, 네덜란드 하원, 캐나다 하원, 유럽 의회, 한국 국회, 대만 입법원, 필리핀 하 원 외교 위원회 등이 포함된 7개의 정부ㆍ지역 의회로부터 일본 정부에 대해 수많은 항의와 권 고 결의가 밀려들고 있습니다. UN 이나 국제기구에서도, 이를테면 UN에서 두 건의 조사보고서 (1996년 UN 인권위원회의 크마라스와미 보고서, 1998 년 동 위원회의 맥두걸 보고서 ) 가 작성됨은 물론, UN 인권이사회, 자유권규약위원회, 사회권규약위원회, 여성차별철폐위원회, 고문 방지위원회, 국제노동기구(ILO) 등에서 일본 정부에 대한 시정 권고가 거듭 나오고 있습니다. (2) 2007년 7 월에 채택된 미국 하원 결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로 알려진 젊은 여성들에게 성노예제를 강요했던 일본 황군의 강 제행위와 관련, 명확하고도 애매함이 없는 형태로 역사적 책임을 공식 인정하고, 사죄하며, 받 아들여야 한다., 일본 정부는 일본 황군을 위한 위안부 의 성 노예화와 인신매매가 결코 없었다는 어떤 주장에 대해, 명확하고도 공식적으로 반박해야 한다. (3) 2007년 12 월에 채택된 유럽의회의 결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위안부 로 알려진 젊은 여성들에게 성 노예제를 강요한 일본 황군의 강제 행위에 관해 명확하고도 애매함 없는 형태로, 역사적이고도 법적인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한편, 사죄 하고 받아들일 것을 일본 정부에 요청한다. 위안부 의 예속화와 노예화는 결코 없었다는 어떤 주장에 대해, 공적으로 반박하도록 일 본 정부에 요청한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정부와 군에 의한 성노예제 였다는 사실을 명확하고 애매함 없는 형태로 공식 인정해야 한다. 위안부 제도의 강제성을 부인하는 어떤 주장에 대해서도 명확하 고 공식적으로 반박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일본 정부에 던져지고 있는 세계의 목소리인 것 입니다. 고노 담화 의 재검토를 외치며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강제성을 부인하는 주장은 일본의 극히 일부 극우적인 집단 속에서는 통용될지 몰라도, 국제적으로는 전혀 통용되지 않으며, 가장 엄중한 비판을 받는 주장에 다름 아닙니다. 14

역사를 조작하는 세력에게 미래는 없다 오늘날 일본 정부의 입장이 엄중히 문책되고 있습니다. 아베 정권이 고노 담화 재검토론에 대해 의연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한다면 인권과 인간의 존엄에 관련한 일본 정부의 국제적 신뢰는 크게 훼손될 것입니다. 불편한 역사를 은폐하고, 조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 세력에게는 결 코 미래가 없습니다. 일본 공산당은 일본 정부가 고노 담화 를 통해 밝힌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진실을 정면 에서 인정하고 역사를 위조하는 주장에 대해 단호히 반박할 것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또한 고 노 담화 가 표명한 뼈저린 반성 과 마음으로부터의 사과 에 걸맞는 행동 사실의 철저한 해명, 피해자에 대한 공식적 사죄, 그 잘못에 대한 보상, 장래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 한 역사교육 등 을 취하는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바입니다. 역사는 고쳐 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주 볼 수는 있습니다. 역사의 진실에 정면으로 마주 하여, 성실하고 진지하게 잘못을 시인하며 미래의 교훈으로 삼는 태도를 취할 때, 일본은 비로 소 아시아와 세계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 공산당은 역사의 역류를 일소하고, 일본의 정치 속에 인권과 정의, 이성과 양심을 관철 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입니다.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