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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년 12 월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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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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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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ㅔ 2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에티오피아군 참전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며 3

Ⅰ발 간 사Ⅰ

2013년 6월 국가보훈처장 박 승 춘

Ⅰ차 례Ⅰ 제1장 남아프리카공화국군 참전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며 8 제2장 남아프리카공화국 개관 17 제1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가 17 제2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정학적 특징 22 제3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약사 27 제4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경제와 사회문화 39 제3장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참전 배경과 부대 편성 54 제1절 6 25전쟁 발발과 유엔의 대응 54 제2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참전 결정 과정 65 제3절 참전부대 편성과 훈련 70 제4장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77 제1절 한국 전선에 서다 77 제2절 평양-수원비행장에서의 작전 82

제3절 진해비행장(K-10)에서의 작전 94 제4절 횡성비행장(K-46)에서의 작전 136 제5절 항공기 기종의 전환과 오산비행장(K-55) 으로의 이동 151 제6절 휴전 이후 활동과 한국에서의 철수 160 제7절 남아프리카공화국군 참전용사의 증언 162 제5장 6 25전쟁 이후 한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우호관계 의 정립과 발전 167 제1절 한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우호관계의 발전 167 제2절 한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의 남아공 참전 기념사업 173 제3절 한국 남아프리카 정부 및 민간 협력관계 187 제6장 향후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관계의 발전과 전망 190 부 록 194 유엔군 참전규모 및 피해 현황 194

* 더반 줄루족 아이들 영국인의 프레더릭 요새(포트 엘리자베스) 케이프타운 항과 테이블마운틴의 전경

하나은행 남아공 소련축구팀 후원 2010년 6월 공군추모탑에서 열린 6 25전쟁 전몰용사 추모식 거행 유엔참전용사의 부산 유엔공원 방문

ㅔ ㅔ 제1장 남아프리카공화국군 참전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8년 8월 15일 건국된 대한민국 은 그로부터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으로부터 기습적인 무력 침공을 받았다. 이로 인해 한국국민들 은 순식간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되어 많은 고통을 겪 게 되었으며, 그 고통은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이루어질 때까 지 지속되었다. 6 25전쟁은 한민족을 미증유의 참화 속으로 내몰았으나, 한편 으로 즉각적인 많은 국제사회의 지원으로 자유와 평화를 지키 려는 세계인의 열망이 마르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피부와 민 족이 각기 다른 우방국의 용기 있는 군인들이 유엔의 기치 아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먼 나라 낯선 땅에서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8 8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참전한 것이다. 북한군의 침공이 있었던 바로 다음날 유엔은 즉각 비상 안전 보장이사회를 열어 적대 행위를 즉각 중지할 것 을 요구했고, 북 한이 이를 무시하자 이틀 후에는 세계평화와 한반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공동 행동 하기로 결의했다. 이날 유엔 결의에 호 응한 16개 국가가 전투부대를 한국에 파병했으며, 5개 국가가 의료지원단을 보내 한국을 지원했다. 유엔군 장병들은 자유민 주주의와 세계평화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한국에서 피를 흘렸다. 이들 참전국 장병들의 용기와 희생이 참으로 값진 것이었다는 사실은 전쟁 발발 63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볼 때, 오히려 더욱 뚜렷해진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1950년 당시 지키고자 했던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며 국제사회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결국 유엔참전 16개국의 군인 들이 3년 간 한국 땅에서 보인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으며, 오 늘날의 번영된 대한민국이 있게 한 밑거름이 된 것이다. 한국국민들은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함께 참전해 피를 흘린 참전국 장병들의 고귀한 희생을 결코 잊지 않 을 것이다. 미국 워싱턴의 6 25전쟁 기념비에 각인되어 있는 자 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그 것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고귀한 희생을 딛고 자란다. 는 문구를 누구보다도 실감하고 있기에. 유엔군은 자유와 평화 수호의 십자군으로서 이역만리 한국의 전장에 뛰어들어 생소한 기후풍토에 시달리면서도 용전분투했 에티오피아군 참전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며 9

ㅔ 다. 그 덕에 한국은 공산 침략을 저지하고 전쟁 전의 현상을 회 복한 상태에서 휴전을 할 수 있었다. 전후 한국은 전쟁복구 과정에서도 유엔 회원국과 국제사회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후 한국은 지금까지 정치 경제뿐 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유엔 참전국과 활발한 교류를 유지해 왔다. 그 결과 63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설 수 있게 됐다.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는 잊혀져가는 6 25전쟁의 의의를 새롭 게 조명하고, 한반도와 세계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피 흘려 싸운 참전 우방 국가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앞으로 미래의 동반자로 서 더욱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그 일환으로 국가보훈처에서는 유엔 참전 16개국과 의료지원 5개국의 숭고한 이념과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고, 나아가 그들과 의 관계사 등을 각각 단행본으로 정리하고자 기획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어려움을 함께 체험한 과거의 지혜를 다시 한 번 되새겨봄으로써 양국의 발전에 좋은 디딤돌이 될 것으로 생 각한다. 이번에 6 25전쟁 발발 63주년을 맞아 발간하게 된 남아프리 카공화국 6 25전쟁 참전사 도 양국 국민들이 한국과 남아프리 카공화국 관계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 책에 다루어질 내용은 남아프리카공화국(당시의 남아프리카연 방, 이하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통일)의 개관에서부터 6 25전쟁 발발과 유엔의 일련의 대응과정,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참전 결 정 과정과 참전 활동, 그리고 전후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10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출항지인 더반 항으로 출발하기 전 가족과의 이별 관계사 등이다. 이 책은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참전 활동에 초 점이 맞추어져 있기는 하지만,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이는 남아프리카공화 국군 참전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차원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양국 관계사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켜 미래의 동반자로 나아가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10년 영국령 자치권 식민지가 되면서 부터 1961년 5월 31일에 독립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Republic of South Africa)으로서 자주정부가 수립되기까지 근 50여 년 동안 을 남아프리카 연방(Union of South Africa)으로 알려져 왔다. 제2 차 세계대전 시에는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국가산업 에티오피아군 참전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며 11

ㅔ 을 전시체제로 전환하여 군수품 생산에 주력하는 한편, 연병력 32만여 명을 동원하여 지중해 및 인도양 등에서 독일군 등 추축 국 군대의 격멸에 크게 공헌하였다. 전후에는 비공산 자유세계 의 결속에도 적극 나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인된 유엔 헌 장의 서문 초안 작성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종전과 더불어 전시동원령을 해제하고 산업발전을 위한 자원 개발에 총력을 경주하는 한편, 6 25전쟁이 발발했을 당시만 해 도 유사시에 즉각 동원할 수 있는 최신장비로 무장하고 고도의 훈련을 쌓은 백인만으로 편성된 12만 5,000명 규모의 병력을 갖 추고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6 25전쟁이 발발하고 1950년 6월 27일 유엔안보리에서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에 관한 결의안이 절대다 수로 가결되자, 7월 1일 즉각 이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구 체적인 대한 군사지원 방안을 논의하였다. 남아공은 전쟁이 발 발하기 이전부터 유엔의 회원국으로서 대한민국의 수립과 평화 그리고 안정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온 우방국이었다. 그러나 전 쟁이 발발할 무렵에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남아공 정부는 제2차 성명에서 지리적인 여건으로 전투부대 파병에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지적하고 간접적인 지원방법을 모색하는 한편, 이를 해결하게 위한 대미 교섭의 뜻을 밝혔다. 그 후 남아공 정부는 거듭된 미국과의 교섭에서도 뚜렷한 대안 을 찾지 못하자 동년 8월초 전투비행대대의 파병을 결정하고, 의회가 특별회의를 소집하여 정부의 해외파병 결정을 합법화하 기 위한 긴급법안을 통과시켰다. 12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일본 요코하마 항에 도착하여 사열하는 모습 남아프리카공화국 군 당국의 최초의 계획은 정규군 가운데에 서 지원자를 선발할 예정이었으나 막상 공군당국이 응모요강을 공포하자, 정규군 장병 외에도 예비역 및 민간인들로부터 많은 지원자가 쇄도하였다. 그리하여 군 당국은 새로 대대를 편성하 려던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제2전투 비행대대의 파병을 결정하는 한편, 작전상 부족요원만을 정규군 중에서 보충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때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는 대대의 소요 항공기 및 장비는 본국에서 수송하지 않고 대대가 극동기지에 도착하 면 즉시 현지에서 조달이 가능하도록 미국 정부와의 구매교섭 에 합의하고, 8월 27일 참전자들의 명단을 발표하였다. 에티오피아군 참전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며 13

ㅔ 이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동부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이 탈리아 및 중동지구 전선에서 용맹을 떨쳐 나는 치타(Flying Cheetah)'라는 별명이 붙은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제2전투비행 대대는 프리토리아 근방의 워터크루프 공군기지에서 9월초부터 본격적으로 참전준비를 서두르게 되었다. 이에 앞서 참전에 따른 제반 행정조치와 유엔군사령부와의 연 락업무를 위하여 1950년 9월 5일에 동경에 남아프리카공화국 공 군 연락본부를 설치하였다. 이어 장교 49명을 포함하여 총병력 206명으로 편성된 대대(대대장 S. V. B. Theron 중령)는 9월 25일 에 프리토리아를 출발, 그 다음날 더반 항에서 선박 트지사단 (Tjisadan)호 편으로 극동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리하여 남아 프리카공화국은 그의 국방사상 최초로 극동지역에 전투부대를 파견하게 되었다. 남아공 공군 나는 치타 대대(연합뉴스 09-6-24(인터넷, 구매 요망) or 공군본부) 14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대는 1950년 9월 26일 더반 항을 출발하여 만 40일간의 긴 항해 끝에 11월 5일 04시30분 일본 요코하마 항에 도착하였다. 이곳 존슨 기지는 미국이 건설한 대규모 공군기지로서 클럽, 체 육관, 영화관 등 반영구적인 각종 오락시설까지 구비하고 있어 마치 하나의 대도시와도 같았으며, 일기가 쾌청한 날이면 흰 눈 에 쌓인 후지산의 정상이 멀리 보일 정도로 그 일대는 광활한 평원을 이루고 있었다. 대대는 11월 6일부터 미 공군으로부터 예정된 무스탕기와 장 비를 인수하기 시작하였으나, 25대로 예정됐던 항공기가 불과 16대뿐인 데다가 장비 및 보급품이 크게 부족하여 현지 훈련계 획에 큰 차질을 초래하였다. 11월 6일 대대 장교들은 대대가 잠 정 배속된 미 제6002전술지원비행단 단장 로우(Low) 대령으로 부터 그의 비행단의 편성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어 조종사들의 비상탈출 및 공산군의 지상포화로부터의 자위 요령 등에 관한 훈련을 받기 시작함으로써 본격적인 현지적응훈련에 들어갔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제2전투비행대대는 참전 후 실질적으 로 전투임무를 개시한 1950년 11월 19일부터 휴전이 조인되던 1953년 7월 27일까지 정확히 만 2년 8개월 8일 동안을 부산 수 영, 평양, 수원, 진해, 여의도, 횡성 및 오산 비행장 등 최전방기 지에 배치되어 주요 작전을 수행하였다. 대대는 연 병력 총 826 명이 참전하여 연 95대의 F-51 무스탕전폭기와 20대의 F-86 세이 버 제트기로 총 1만 2,405회라는 놀라운 출격기록을 수립하여 막대한 전과를 올렸다. 또한 이들이 지불한 대가도 결코 적지 않았다. 34명이 전사하고 9명이 공산군의 포로가 되었을 뿐만 에티오피아군 참전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며 15

ㅔ 아니라 무스탕 74대와 세이버 제트기 4대를 잃는 등 막대한 손 실을 입었다. 이 가운데 11구의 영령은 지금도 부산에 마련된 유엔 공원에 안치되어 세계 인류의 자유 수호신으로서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참전 활동을 조망하면서, 당시 국내외적 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머나먼 대한민국에 군을 파견하여 자 유와 평화를 수호하는데 앞장섰던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과 장 병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이 당시의 유대가 앞으로도 계속되기 를 바라 마지않는다. 또 자유와 평화 수호의 십자군으로서 이역 만리 한국에서 산화한 전몰장병에 대해 이 기회를 빌려 다시 한 번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한다. 16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제2장 남아프리카공화국 개관 제1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가 1) 1.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장 1) 남아프리카공화국 개황과 관련한 내용은 대한민국 외교부 및 주 남 아프리카공화국 한국대사관 의 공식 자료를 근거로 하여 정리하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개관 개관17 17

ㅔ 남아프리카공화국 국기의 여섯 색깔이 한 방향으로 합쳐지는 모양은 다양한 부족과 인종으로 구성된 남아공 사회의 단합을 의미한다. 적색은 독립과 흑인 해방을 위해 흘린 피를, 녹색은 농업과 국토를, 황색은 풍부한 광물자원(금)을, 흑색과 백색은 흑인과 백인을 상징하며, 전체적으로 Y자로 한 방향으로 합쳐지 는 모양은 다양한 종족과 인종으로 구성된 남아공 사회의 단합 을 의미한다. 1994년 정당합동협상위원회(Multi-Party Negotiating Council)가 신문 등을 통한 전국 공모를 하여 최종 선택된 현재 의 국기는 1994년 4월 27일 총선 후 최초 게양하였다. 2.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94년에서 1995년 4월까지는 과거 백인 정부의 국가(Call of South Africa)와 흑인들이 애창해온 곡(Nkosi Sikele'i Africa)을 모두 국가로 사용하였다. 흑인 애창곡은 하나 님 축복하소서 라는 의미로 과거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시 절부터 아프리카민족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의 투 쟁곡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남아공뿐만 아니라 주변 아프리카 흑인들이 오래 전부터 즐겨오던 애창곡이다. 이 곡은 1897년 송 통가(Enoch Sontonga)가 작곡한 아프리카를 위한 찬송가이다. 1995년 정부의 국가제정위원회에서 기존 2개의 국가를 하나로 축약하여 국가로 사용하고 있으며, 현재 국가는 줄루어, 소토어, 아프리칸스어 및 영어 등 4개 언어로 되어 있다. 18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3.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화는 킹 프로티(King Protea)로 그리스 신화에서 변장술이 능한 해신인 프로테우스(Proteus)에서 그 이 름이 유래되었다. 남아공에 많이 존재하는 꽃으로 종류가 100여 종으로 다양하며 색상, 크기 및 모양도 종류에 따라 매우 상이하 다. 우리의 무궁화와 같은 특별한 의미는 없으며, 특히 과거 백 인정권 시절부터 국화로 정해져 내려온 것을 현재 흑인정권 하 에서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화: 킹 프로티(King Protea) 남아프리카공화국 개관 19

ㅔ 4.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목 : 옐로우 우드(Yellow Wood)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목으로 정해진 리어 옐로우 우드는 케 이프 남부 및 동부에 서식하며 테이블마운틴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나무는 성장이 느리며 40미터까지 성장한다. 과거에는 가구 를 만들기 위해 벌목하였으나 최근에서 희소성으로 보존대상이 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목 : 옐로우 우드(Yellow Wood) 20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6.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조와 나라동물 : 블루 크라네(Blue Crane)와 스프링복(Springbok)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나라새 : 블루 크라네(Blue Crane)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나라새와 나라동물 : 스프링복(Springbok) 남아프리카공화국 개관 21

ㅔ 제2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정학적 특징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프리카대륙의 최남단(남위 22 35, 동 경 17 33 )에 위치하고 동쪽으로 인도양, 서쪽으로 대서양을 낀 동고서저 지형을 가진 천혜의 자원부국이다. 고원지대로 된 좁은 해안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원 동쪽으로 드라켄스베르그 (Drakensberg)산맥이 위치하고 있다. 주요 하천으로는 오렌지 (Orange)강, 림포포(Limpopo)강, 케이(Kei)강 등이 있다. 수도는 행정수도인 프레토리아(Pretoria), 입법수도인 케이프 타운(Cape Town), 사법수도인 블렘폰테인(Bloemfontein) 등 세 곳이며, 면적은 1,219,090km²로 한반도의 약 5.5배이며, 남한 면 적의 약 12배에 달한다. 인구는 4,680만 명 정도로 우리와 비슷 한 편이다. 22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 더반 줄루족 아이들(인터넷, 구매 요망) 남아프리카공화국 개관 23

ㅔ 케이프타운 항과 테이블마운틴의 전경(인터넷, 구매 요망) 남아공의 기후는 아열대성 기후로 동부지역이 서부보다 온난 다습(연평균 기온 17 0 )하다. 1년은 크게 여름(11월~3월)과 겨울(6 월~9월)로 나눠지며, 여름과 겨울 사이에 봄, 가을이 짧게 지속 된다. 여름은 우기로 비가 많이 내리며, 겨울은 건기로서 강우량 이 극히 소량이다. 연평균 강우량은 100mm(칼라하리지역)~ 1,500mm(드라켄스버그지역)이며, 지역에 따라 기후가 크게 상이 한 편이다. 수도권은 대체로 청량한 기후로 일조시간이 길며, 여 름은 20 0 ~30 0, 겨울은 0 0 ~20 0 이며, 남단 케이프타운(Cape Town) 은 지중해성 기후로서 연중 10 0 ~25 0 의 쾌적한 기후이다. 남아공의 주요 명소는 프리토리아(Pretoria), 케이프타운(Cape Town),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 포트 엘리자베스 (Port Elizabeth) 등이 있다. 남아공은 입법, 사법, 행정 수도가 분리되 어 있는데, 그중 프리토리아는 남아공의 정부기관과 대통령궁이 소재하고 있는 행정수도로, 역사적 건물과 기념비, 박물관들이 24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많다. 남아공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요하네스버그에서 북 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다. 남아공 의회가 있는 입법수도 케이프타운은 수백 년의 역사 를 가지고 있다. 500여년 전 유럽인들이 케이프타운에 처음 도 착한 이후 오랫동안 유럽 열강의 각축장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 은 비교적 평온하며 치안도 잘 유지되는 곳으로 꼽히고 있다. 남아프리카의 관문을 자처하는 항구 도시로서 어머니의 도시 (Mother City)'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케이프타운 뒤에는 산 정상부에 길이 3km나 되는 테이블처럼 평평한 고원이 펼쳐져 '테이블'이라는 이름이 붙은 테이블마운 틴이 있고, 그 앞에는 세계문화유산인 로빈 아일랜드가 자리 잡 고 있다. 이곳은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18년 동안 감옥생활 을 한 것을 비롯하여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에 앞장선 ANC 인 사들이 투옥되었던 민주주의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포트 엘리자베스 시청 건물(인터넷, 구매 요망) 남아프리카공화국 개관 25

ㅔ 케이프타운에서 남쪽으로 뻗은 반도의 끝은 남아공 최대의 관광지인 희망봉(Cape of Good Hope)이다. 참고로 아프리카 최 남단은 희망봉이 아니라 동남쪽으로 150km 떨어진 곳에 있는 아굴라스 곶이라는 곳이다. 1886년 금광이 발견된 후 금광마을로 출발한 요하네스버그는 미국의 뉴욕과 마찬가지로 남아공의 비즈니스 중심도시이나 정 치 수도는 아니다. 남위 26도에 위치하고 있지만 해발 1700m의 고지대에 있어 서늘한 편이며, 특히 겨울철에는 청명한 날씨가 이어진다. 인근에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야생동물 보호구역인 크루거 국립공원(Great Kruger National Park)에서는 야생동물 사파리를 즐길 수 있으며, 요하네스버그에서 북서쪽으로 두 시간쯤 거리 에는 남아공의 라스베거스 라고 불리는 선 시티(Sun City)가 있 다. 2010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대표팀이 그리스와 첫 경기를 치러 16강 진출의 발판을 마련한 곳이 바로 포트 엘리자베스의 넬슨 만델라 스타디움이었다. 남아공 최고의 휴양도시로, 케이 프타운에서 포트 엘리자베스까지 아프리카 최고의 절경인 가든 루트(garden route)'가 이어진다. 26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제3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약사 1. 백인 정착 이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원주민은 수렵 채취 생활을 하던 부쉬맨 (Bushman) 족과 가축사육을 하던 호텐토트(Khoi-Khoi) 족이지 만, 그 역사의 연원은 분명하지 않다. 두 부족이 오렌지강까지 진출하여 거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잠베지강과 탕가니카호수 및 말라위호수 주변에 주로 거주하 던 반투(Bantu) 족의 선조들은 철기 및 금속문화를 보유하였고, 림포포강 이남으로 진출하여 18세기 후반까지 오렌지강 이북 및 칼라하리 동부지역 등을 포 함한 남아프리가 전역 및 동 부해안까지 진출하였다. 4세 기 이전에 산 종족(San People)이 보츠와나 및 남아 프리카지역에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남아공 전통 목각인형 (구매 요망) 남아프리카공화국 개관 27

ㅔ 남아공 전통춤(인터넷, 구매 요망) 2. 백인 이주 시작 포르투갈인 디아스(Bartholomu Dias)가 1488년 최초로 희망봉 을 발견하고 지금의 케이프타운 부근에 내항하고, 1497년에는 지금의 나탈주 해안까지 도달했다. 1647년에는 네덜란드 선박이 케이프타운에 정박하였으나 이 지역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내륙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 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1652년 자국 선박의 보급기지 및 노예, 천연자원, 귀금속 등을 확보하기 위해 케이프타운에 정 박소를 설립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백인 거주로 기록되어 있다. 동인도회사가 1679년 유럽 이주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함으로써 네덜란드인과 독일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백인들의 정착 농업생활이 시작되었다. 네덜란드인이 전매회사를 통해 호텐토 28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16세기 케이프타운의 성벽(인터넷, 구매 요망) 트족 등과 교역을 시작하면서 기존 사회, 경제체제를 잠식하여 원주민들은 임금 노동자나 노예로 전락하였다. 네덜란드인이나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백인들은 스 스로를 보어(Boer)인이라 불렀으며, 이들은 케이프타운 해안 주 변으로부터 점차 내륙으로 이주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18세기경 동부해안으로 진출한 보어인들과 그레이트 피시 (Great Fish) 강 근처에서 동케이프지역으로 진출하던 반투족과 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약 100년간 분쟁 이후 19세기 후반에 들 어 반투족이 백인에게 굴복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8세기경부터 백인들은 유색인에 대한 차별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절대권한 이라 주장하였다. 그들은 인종 간 평등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백인의 생활양식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였고, 그것은 인종차별의 심각한 배경이 되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개관 29

ㅔ 3. 영국의 진출 남아공은 영국이 1795년 1803년 케이프타운을 점령한 후 한 때 네덜란드령으로 복속되기도 했으나 영국이 재점령하여 정식 으로 영국령으로 편입하였다. 이때부터 영국이 이민을 시작하 면서 보어인을 내륙 오지로 몰아넣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영 국인과 보어인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영국정부는 노예제도를 폐지하였으나, 보어인들은 오렌지강 이북으로 대이주(Great Trek)를 시작하여 내륙으로 진출하면서 토착인들을 노예로 취급하였다. 그들은 원주민을 정복하고 오 렌지 자치국을 설립하였고, 자치국에서는 소수백인의 지배권을 보호하고 기독교 문명의 우월성을 보호하기 위해 아프리카 토 착인을 노예로 취급하여 차별하는 관습을 세웠다. 그러나 영국 영국인의 프레더릭 요새(포트 엘리자베스) 30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네덜란드계 보어인의 교회 (인터넷, 구매 요망) 이 보어전쟁을 일으켜 보어인이 설립한 정부를 합병함으로써 20 세기 초 남아프리카에서 절대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4. 남아프리카연방의 수립 영국 의회는 1909년 9월 20일 남아프리카법(South Africa Act) 을 통과시켜 오렌지자치국, 트란스발공화국, 케이프 프로빈스 (Cape Province), 나탈(Natal) 등 4개 주로 구성된 영연방 내의 자 치정부 형태인 남아프리카연방을 수립하였고, 다음해 영연방국 가로 독립시켰다. 1912년에는 남아프리카원주민민족회의(SANNC)가 창설되어 흑인들의 반정부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하였다. SANNC는 1923 남아프리카공화국 개관 31

ㅔ 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러한 과 정을 통해, 남아프리카인의 백 인사회는 보어계(백인 인구의 60%)와 영국계로 분열되었다. 남아프리카연방 국기(기념우표) 양자는 대립적인 관계에 서게 되었으며, 남아프리카연방이 성립된 이후에도 영국계가 상공업, 금속업 등 경제계에 두각을 나타낸 반면, 아프리카너(Afrikaner) 로 개칭한 네덜란드 보어계는 농촌을 기반으로 정계에서 실권 을 장악하였다. 1948년에는 보어계를 중심으로 국민당 정권이 발족되어 심한 인종차별정책과 아울러 반 영국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백인개척자 기념관 (인터넷, 구매 요망) 32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보어계와 영국계 백인들간의 대립은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치 달았다. 1953년에는 반투 교육법 제정으로 흑인고등교육을 제한 하였다. 1960년 3월 21일 샤프빌에서 통행증명서 휴대에 반대하는 흑 인소요사태가 발생하여 67명이 사망하고 200여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후 1976년 유엔총회에서는 이날을 기념 하여 3월 21을 국제인종차별철폐의 날 (Human Rights Day)로 제 정하였다. 5. 남아프리카공화국 발족이후 백인정권인 버워드(Dr. Henddrik Verwoerd) 내각은 집권이후 1960년 10월 5일 백인만 참여하는 국민투표를 통해 공화제로 이 행하였으며, 다음해 영연방 수상회의에서 정식으로 영연방 이탈 을 선언함으로써 1961년 5월 31일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출범시 켰다. 남아공 정부는 출범을 전후하여 흑인민족주의단체인 아프리 카민족회의(ANC)와 범아프리카회의(PAC, Pan Africanist Congress) 를 불법화하고 흑인저항운동에 대한 억압을 본격화하기 시작하 였다. 이 과정에서 1966년 버워드 수상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 하여 정국이 크게 혼미하였고, 보르스터(B. J. Vorster)가 수상직 을 승계하였다. 반투 홈랜드(Bantu Homeland) 헌법안 발효로 1959년 반투 자 치정부법 제정 후 실시해 오던 흑인민족 분리정책은 더욱 가속 남아프리카공화국 개관 33

ㅔ 화되었다. 이에 유엔이 남아공 대사의 신임장 접수를 거부함으 로써 남아공의 유엔회원국 자격을 박탈하기에 이르렀다. 보르스터 내각은 1974년 4월 포르투갈이 군사쿠데타 이후 자 국 식민지인 앙골라, 모잠비크, 상토메프린시페를 독립시켜 주 려는 정책이 남부아프리카로 파급될 것을 우려하여 흑인국가들 과 화합정책(Detente Diplomacy)을 추진하였다. 보르스터 수상 은 다음해 로데지아 백인소수정권을 협상을 통해 종식시키기 위해 압력을 행사하는 한편, 국제사회의 비판적 여론을 무마하 기 위해 나미비아에 대한 남아공의 정책변경 용의를 표명하였 다. 그는 1975년 SWAPO(South West Africa People's Organization) 봉쇄 및 쿠네네(Cunene)강 댐 보호를 구실로 앙골라 내전에 개 입하여 쿠바군 개입을 초래하였다. 남아공 정부종합청사인 유니온빌딩(행정수도 츠와니 소재)(인터넷, 구매 요망) 34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한편 같은 해 앙골라와 모잠비크 독립의 여파로 남부아프리 카지역의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하는 보츠와나, 앙골라, 모잠비 크, 잠비아, 탄자니아 등 5개국은 짐바브웨, 남아공 및 나미비아 문제에 대하여 공동전선을 펴기로 하고 전선국가(Front Line States)'를 결성하였다. 1976년 6월 인구 100만의 흑인 집단거주지 소웨토(Soweto)에 서 폭동이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유엔안보리는 1977년 대 남아공화국 무기금수 결의를 가결하였다. 마침내 다 음해 보르스터 수상이 사임하고 보타(P. W. Botha) 국방장관이 수상직을 승계하였다. 남아공 정부는 1980년 2월 짐바브웨 독립을 위한 총선 시, 무 소와(Musorewa) 주교의 통합아프리카회의(UANC, United Africa National Council)를 지원하였으나, 무가베(Mugabe)의 짐바브웨 아프리가 민족연맹애국전선(ZANU-PF, 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 Patriotic Front)이 압승을 거두었다. 짐바브웨공화국이 정식 독립하게 되자, 남아공 정부는 동일한 사태가 나미비아에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 하였다. 1981년에 조기 총선을 실시하여 국민당이 전 선거의석 165석 중 131석으로 압승하고, 보타(Botha) 수상은 국민당 당수 로 재선되었다. 1982년 혼혈인 및 아시아인에게 권력공유를 허용하는 헌법개 정안을 둘러싸고 국민당내 극우파는 보타 수상의 인종차별 완 화정책에 반발, 국민당에서 이탈하여 극우 보수정당을 창립하였 다. 보타 정권은 대통령제 채택을 골자로 하는 신헌법을 채택하 남아프리카공화국 개관 35

ㅔ 였다. 신헌법의 발효에 따라 인종별 3원제 의회가 구성되어, 혼 혈인 및 아시아인도 정치 참여가 가능하게 되었고, 1984년 9월 14일 보타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그리하여 다음 해부터 인종차 별 관계 제 규정이 수정 혹은 철폐되기 시작하였고 부도덕법 (1927년 제정) 및 이종족간 결혼금지법(1949년 제정) 등이 폐지 되었다. 남아공에 봄이 찾아온 것이다. 1985년 9월 흑인 거주 지역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하자, 전국 비상사태가 선포되었으며 언론검열이 강화되고 보안군의 권한 이 강화되었다. 다음 해 백인의원 선거결과 집권당인 국민당이 총 직선의석 166석 중 123석을 획득하여 압승함으로써 개혁분위 기가 퇴조하고 다시 보수성향이 강화되었다. 17개 反 아파르타이트 단체에 대한 정치활동 금지조치에 이어 해외 정치자금 도입금지법, 반정부성향 2개 신문 정간 및 노동 법 개정안 의회상정 등 일련의 흑인세력 탄압책이 시행되었다. 1989년 1월 보타 대통령이 뇌졸중으로 입원함에 따라 헤니스 (C. Heunis) 헌법개발기획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잠정 수행 하였고, 총선에서 국민당이 승리하고 크러크(De Klerk) 대통령 이 취임하여 흑인과의 권력공유를 통한 민주화 정책 추진을 시 사하였다. 1990년 3월 남아공 점령지였던 나미비아가 독립하였으며, 클 러크 대통령이 인종차별정책 철폐 및 2월 11일 만델라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부의장을 전격 석방함으로써 본격적인 민주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1990년 비상사태를 해제하고, 다음해에는 드디어 거주지역법, 토지법, 주민등록법 등 인종차별 3대 악법 36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을 폐지하였다.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1991년 7월 공산당(SACP)과 연합, 당 체제 정비에 착수하였다. 만델라(Mandela)를 의장으로 선출 하고, 부의장에 시술루(Sisulu), 사무총장에 라마포사(Ramaphosa) 등을 선출하고 민주화 활동을 가속화하였다. 1994년 과도집행위원회(TEC)를 구성하여 1992-93년간 전 정파 가 참석한 정치협상이 중상과 폭력(1993.4 Chris Hani 공산당 사 무총장 피살) 등 우여곡절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성공리에 마 무리되었다. 마침내 잠정헌법이 채택됨으로써 상기 과도집행위 원회 구성과 함께 1994년 총선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였다. 그리하여 1994년에는 교육차별 관행이 철폐되었고, 최초의 흑 백 다인종 민주총선이 실시되었다. 선거결과 ANC가 63%의 지지 로 압승하여 320여 년간 인종차별정책을 취해온 백인정권이 종 식되었다. 같은 해 5월 10일 만델라 의장을 대통령으로 하는 흑 백연합정부가 수립되었다. 6. 흑인 정부 수립 이후 아프리카민족회의(ANC), 국민당(NP), 잉카타자유당(IFP) 3당 이 참여한 거국연립정부(GNU, Government of National Unity)가 1995년 5월 수립되어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주도하의 민주화 과정을 추진하였다. 신정부는 급진적 개혁보다 화합을 통한 흑 백 공존사회 건설의 온건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같은 해 하반기 UN, SADC, OAU, 비동맹, 영연방 등 관련 국제 남아프리카공화국 개관 37

ㅔ 기구에 모두 가입하였으며, 1996년 7월 국민당(NP)이 연립정부 를 탈퇴함으로써 사실상 아프리카민족회의(ANC) 단독으로 정부 가 운영되었다. 정부는 10월 제헌의회 신헌법을 채택하고 인종 차별 철폐 및 인권보장 강화하는 일련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1999년 6월 제2차 민주총선에서 ANC가 압승하여 음베키 (Thabo Mbeki) 대통령이 선출되어 제2대 흑인민주정부가 출범 하였고, 2004년 4월 3차 민주총선에서 다시 ANC가 압승하여 타 보 대통령이 재선되었다. 2009년 4월 제4차 민주총선에서 ANC 가 압승하여 주마(Jacob Zuma)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제4차 총선으로 선출된 주마 대통령 38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제4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경제와 사회문화 1.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 가. 정치제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중앙정부(Central Government)와 9개 지 방정부(Provincial Government), 284개 시정부(Local Government) 로 구성되어 있다. 남아공은 다당제에 입각한 내각책임제 요소 가 가미된 대통령중심제의 공화국이다. 대통령은 국가원수 및 행정수반으로서의 지위를 보유하고, 입법권은 대통령 및 양원의 회에 귀속되어 있다. 의회에서 대통령이 선출되며, 각료도 대통 령이 지명할 수 있는 2개 이내 자리를 제외하고는 의원 중에서 임명한다. 대통령은 의회의 과반수 찬성에 의한 제한적 하원해 산권을 보유하며, 의회는 대통령 및 내각에 대한 불신임권을 보 유하고 있다. 의회 선거는 정당명부제에 입각한 정당별 득표율에 따른 비 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주요정당으로는 집권당인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외에 백인계 야당인 민주 동맹(Democratic Alliance), KwaZulu-Natal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잉카타 자유당(IFP, 줄 루계) 등이 있다. 나. 의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의회는 5년 임기의 하원(National Assembly) 과 상원(National Council of Provinces)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원 은 400명으로 구성되며 의장과 부의장이 있고, 상임위원회와 현 남아프리카공화국 개관 39

ㅔ 안 발생시 별도로 구성되는 특별위원회가 있으며, 우선 각 위원 회에서 협의와 검토한 후 필요 법안을 전체(본)회의에 회부한 다. 상원은 90명(9개 주에서 각 10명씩 선출)으로 구성되며 중앙 정부와 지방정부의 조정역할을 수행한다, 다. 행정부 남아프리카공화국 행정부는 대통령, 부통령 및 34개 부처 62 명의 각료(장관 및 부장관)로 구성되어 있다. 대통령이 각료 구 성(부처 신설 포함) 및 임명에 대한 전권을 행사한다. 대통령은 헌법상 국가원수 겸 정부수반으로 군 최고 통수권자이다. 부통 령은 제1당 및 하원의석 80석 이상 획득 정당에서 선출되고 대 통령 유고시 부통령이 승계하며, 대통령 권한 행사시 부통령과 상의토록 규정되어 있다. 라. 사법부 남아공의 일반법 체계는 관습법인 로마 화란법(Roman Dutch Law)이며, 민사법, 형사소송법, 증거법 등 일부 분야에서는 영미 법식을 수용하고 있다. 대법원장은 7년 단임으로 대통령이 임명 하며, 헌법재판소장직을 겸임한다. 법원은 310개소의 하급법원 (Magistrate's Court), 각 주에 1개꼴인 10개의 상급법원(High Court)과 대법원(Supreme Court of Appeals)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법관은 법무장관의 추천에 의해 대통령이 임명하며, 국회 의 요구가 없는 한 해임 불가이다. 법관 임명 및 법행정 관련 주 요사항은 법무장관, 헌법재판소장 등 행정부와 사법부 핵심인사 40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로 구성된 JSC(Judicial Service Commission)에서 자문한다. 마. 정치 동향 남아공은 1994년 4월 전 인종의 민주선거를 통한 만델라 (Mandela) 정권 수립에 이어 1999년 6월 및 2004년 4월 총선에서 집권당(ANC)이 압승하여 음베키(Mbeki) 대통령이 연속 집권하 였으며, 2009년 4월 실시된 총선에서도 아프리카민족회의(ANC) 가 압도적 지지(총투표자의 65.9%)를 획득함으로써 주마(Zuma) 대통령 시대를 열었다. 2009년 4 총선결과 ANC는 의회 총 400석 중 264석을 획득하였 으며, 야당인 민주연맹(DA, Democratic Alliance)이 67석, 여타 군소정당들이 69석을 각각 획득하였다. 흑인 민주정부가 수립된 지 17년이 경과한 현재, 정치적 안정과 보수적 거시경제정책 운 용에 따른 제반 경제지표의 안정화는 상당부분 달성되었으나, 실질 경제상황 개선수준은 흑인다수의 기대수준에는 미치지 못 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며, 세계 경제위기 대처 문제도 새로운 과제로 대두 되고 있다. 남아공은 계속해서 실업, 빈곤, 범죄 및 에이즈(580만명 감염 추청) 만연이 주요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가운데, 주마 대통령이 2009년 5월 취임 시 향후 5년간 집중적으로 추진할 아래 5대 국 정과제 천명하였다. 즉 일자리 창출을 통한 실업문제 대처, 교육 제도 개선, 범죄문제 강력대응, 지방 개발 촉진, 보건복지 향상 등이다. 특히 남아공 정부는 고용창출 등 경제위기 극복에 중점 을 두면서 대통령실내 국가계획위원회 와 이행평가감독위원회 남아프리카공화국 개관 41

ㅔ <넬슨 만델라 이야기> 남아공 인권운동의 상징이자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만델라는 1918년 7월 18일 코사어를 쓰 는 템부족 추장의 아들로 태어났 으며, 1942년 WITS 대학에서 법률학위를 취득, 동료인 올리버 탐보와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열 었다. 1944년부터 ANC에 참 여, 이내 흑인해방운동의 지도자 로 부각되었으며, 1956년 반아 파르트헤이트 운동을 이유로 반역죄로 기소되었으나 1961년 무죄 석 방되었다. 1960년 비무장 군중들이 살상되고 ANC 활동 금지령이 내려지자 비폭력 노선을 포기, 대정부 강경 투쟁을 역설하였고 1962년 다시 투 옥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넬슨 만델라는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의 상징으로 부각되었고, 마침내 1990년 프레데 릭 데 클레르크 정부는 그를 석방하였다. 이후 ANC 의장에 취임, 인종 차별을 불식한 민주헌법의 제정을 위해 데 클레르크 총리와 긴밀히 협 조하며 평온한 사회로의 이행을 부단히 추구하였고, 후에 그 공로를 인 정받아 1993년 두 사람은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94 년 4월 실시된 선거에서 국민으로부터 65%의 지지를 받아 남아공 최 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아프리카의 많은 민족해방 운동 가들이 집권 후 독재자로 전락한 것과 달리, 만델라는 5년 단임 이후 재집권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실천하였다. 만델라는 지금도 남아공 사회의 원로이자 정신적 지도자로 남아 있으며, 고령에도 불구하고 남 아공 월드컵 유치전에서 직접 FIFA 위원들을 직접 만나는 유치 활동을 벌여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유치에도 크게 기여한 바 있다. 42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를 두어 정부 정책의 이행과 감독을 강화할 것임을 표명하였다. 주마 대통령은 2011년 신년 국정연설( 11.2)시 금년을 일자리 창출의 해(Year of Job Creation) 로 규정하고 2020년까지 5백만 개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하는 신성장전략(New Growth Path) 이 행을 위해 민간부문 및 지역공동체의 일자리 창출 역할을 강조 하는 동시에 정부 및 공공 부문의 일자리 창출 대책을 함께 제 시하였다. 특히, 6대 분야(인프라 개발, 농업, 광업 및 제련분야, 제조업, 녹색산업, 관광분야)를 일자리 창출 가능성이 높은 중점분야로 선정, 동 분야에 대한 정부지원을 약속하는 한편, 중소기업 육성 을 위한 세제 혜택, 규제 철폐 등을 약속하였다. 2.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제 가. 경제 정세 남아공은 아프리카 경제를 이끌고 있는 선도국이자 아프리카 최대의 시장이다. 아프리카시장 진출을 위한 거점기지이자 남 부 아프리카의 교통 및 정보 중심지이다. 2009년 기준, 남아공의 국내총생산(GDP)은 3,558억불로 아프리카 전체 53개국 GDP의 약 24%(아프리카 전체의 1/4)를 점유하고 있다. 남부아프리카 경제공동체(SADC) 15개국 GDP의 약 80% 점유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2010년 기준, 약 7,246불로 충분한 구매력을 가지고 있는 시장으로 평가된다. 상품교역에 있어서도 2009년 기준 아프리카 최대 규모로서 아프리카 대외교역의 약 16%를 남아프리카공화국 개관 43

ㅔ 점유하고 있다. 남아공은 금융, 유통 등 3차 산업 위주의 성숙된 산업구조를 보유하고 있으며, 남아공 GDP(부가가치 창출 측면)에서 3차 산 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9년 기준 62.9%에 달하며, 1차 산업 비 중은 12.9%, 2차 산업은 24.2%이다. 남아공의 주요산업(3차 산업 제외)은 광산업, 철강, 석유화학, 자동차산업 등으로 분류된다. 남아공은 풍부한 지하자원을 보 유하고 있어, 일찍이 광산업이 발전하였는데, 2009년 기준 남아 공 GDP의 약 9.5%를 점유하고 있다. 나. 남아공의 주요 경제 지표 구 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국내총생산(U$억) 2,613 2,861 2,754 2,844 3,558 1인당 국민소득(U$) 5,455 5,911 5,643 5,792 7,246 GDP 성장률 5.6 5.6 3.6-1.7 2.8 3.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외교 및 안보 정책 1990년대 인종차별 철폐 및 흑인정부 출범 이후 외교 고립에 서 벗어나 UN, WTO 등 다자기구에서 개도국 및 아프리카의 이 해를 대변하는 주요 국가의 하나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남부아 프리카 지역의 선도국가로서 지역 및 국제현안 해결을 위한 주 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G20 회의에도 참가하고 있다. 남아공은 아프리카 정치 경제 통합을 주도하고 아프리카연합 (African Union)과 아프리카 개발 신 경제 파트너쉽(NEPAD)의 주 44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도 국가이며, 범 아프리카의회(Pan-African Parliament)를 남아공 에 유치하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 지역협력에 있어 인도네시 아와 공동주도로 아시아-아프리카지역 연합(AASROC, Asia Africa Sub-regional Organization Conference)을 창설하고, 인도네시아와 공동으로 2005년 4월 자카르타에서 반동 비동맹회의 50주년 기 념 아프리카-아시아 정상회의(AASROC Summit)를 주최하였다. 남아공 정부는 남아공-인도-브라질 3각 협력(IBSA; India- Brazil- South Africa)을 통한 국제무대에서의 영향력도 강화하고, 2004년 9월 유엔안보리 확대 개편시 상임이사국 진출 의사를 발 표하였으며 2010년에는 FIFA 월드컵을 유치하였다. 미국 오바마(Obama) 대통령 취임 이후 아프리카민족회의 (ANC)가 전통적으로 미국 공화당 보다는 민주당 정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왔음에 비추어 이전 부시(Bush) 행정부보다는 관 계발전의 여지가 크다고 볼 수 있으나, 기존 양국관계에 급격한 변화는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해방투쟁 시절부터 미국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쿠바,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란 등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기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발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만, 양국은 매년 2차례 부통령급 협의회를 개최하여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반 분야에서의 협력과 국제문제에 대한 양국입장을 조율하고 있다. 유럽공동체(EU)는 남아공의 최대 투자통상파트너로서 전략적 파트너쉽을 구축하 여 지속적인 경제협력 관계 강화를 추구하고 있다. 남아공의 최근 외교정책 방향은 국내의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남아프리카공화국 개관 45

ㅔ 개발을 위한 외부환경을 조성하는데 중심이 있으며, 그에 기여 하는 외교관계의 유지, 발전으로 설정하고 실용주의 외교노선 강화하고 있다. 남아공 정부는 AU 통합정부 목표에 따라 외교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남부아프리카 15개국 연합체인 SADC(Southern African Development Community)의 정치적. 경제적 통합을 강화해 나가 며, 아프리카 개발을 위한 NEPAD(New Partnership for African Development) 이행에 중점을 두고 있다. 짐바브웨의 경제재건 및 마다가스카르 정치사태 해결을 위한 노력을 강화하는 한편, 콩고, 브룬디, 다푸르(Darfur) 등 분쟁중이거나 분쟁 우발 지역에 서의 갈등이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비동맹과 개도국을 대표하는 남-남 협력 주도국으로서, 인도- 브라질-남아공(IBSA Forum),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AASROC) 프로세스를 적극 추진하고 있으며, G8을 포함한 선진국들과의 관계 증진 및 EU와의 전략적 파트너쉽 강화하고 있다. 아울러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을 도모하며 성 장과 개발을 위한 파트너쉽 구축과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4.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방 남아공 군은 1994년 5월 흑인다수정부 수립 후 약 3년에 걸쳐 과거 백인정권 통치하의 군대인 SADF(South African Defence Force)와 ANC PAC 등 구 흑인해방투쟁단체 산하 무장조직인 MK(국가의 창: Umkhonto We Sizwe: MK라는 약칭으로 불리움) 46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을 규합하여 새로운 남아공국가방위군 (SANDF: South African National Defence Force) 체계를 확립하였다. 남아공의 국방정책은 국내 및 남아공 지역 안보환경 구축 이 라는 정부정책을 기조로 민주국가 수호를 위한 효율적인 국방 태세 확립, 균형 있고, 현대화된, 적정수준의, 그리고 기술적으 로 선진화된 국방력을 통하여 국가, 지역 및 세계안보 증진에 기 여 등의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남아공 정부는 국방력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병력 규모 축소 및 군 장비 현대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현역규모는 1998년 8 만 2천명에서 2001년 7만 8천명으로 2002년 이후 5만 8천명으로 감축 예정이었으나, 신병모집, 퇴직군인 처우, 아프리카 평화활 동 참여 등 새로운 문제 발생으로 약 7만 5천여 명 수준을 유지 하고 있다. 1999년부터 약 10년간 독일, 영국, 스웨덴, 이태리 등 으로부터 약 50억 달러 상당의 무기구매 계약을 체결하여 도입 추진 중이다. 남아공 병역제도는 지원병제도로서 직업군인제 10년제 6년 제 1년제 등의 4가지 유형으로 운영되며, 상비군(Permanent Force)과 비상비군(Reserve Force)의 2가지 형태로 크게 구분된 다. 국가방위군(SANDF : South African National Defence Forces) 은 육군, 공군, 해군, 의무군(Military Health Services) 등의 4군으 로 구성되어 있다. 국방장관이 갖고 있는 군정권은 국방사무차관에 의해 국방부 본부 및 각 국 실에 의해 수행되며, 군령권은 국방군총장을 정 점으로 합동작전본부장과 각 군 총장에 의해 수행된다. 합동작 남아프리카공화국 개관 47

ㅔ 전본부장은 각 군 총장과 동일하게 국방군총장의 직접 통제 하 에 육 해 공 의무군의 제 작전요소를 통합한 합동작전을 계획 하고 수행하는 직책으로서 의전서열상으로는 각 군 총장보다 상위 직책인 점에서는 우리의 합참의장과 동격이라고 할 수 있 으나 실질적인 현역의 최선임자인 국방군총장이 별도로 있다는 점에서 상이하다. 남아공의 방위산업은 1977년 11월 UN의 대 남아공 무기금수 결의를 계기로 국방부 산하에 대규모 군수산업체인 Armscor (Armaments Corporation of South Africa)사를 설립( 77.12)하여 독 자적인 무기체계를 개발 생산하고 있다. 1980년대 초반 이래 이란 이라크 캄보디아 모잠비크 등 30여개 국에 연간 5억불 규 모의 무기를 판매하고 있다. 그러나 냉전 종식이후 세계적인 군축분위기 확산으로 판로가 위축되자 Armscor사의 조직을 개 편( 92.12)하고, 순수 무기생산 임무를 수행하는 국영 Denel사를 설립하고 Armscor사는 방산수출시장 개척 및 남아공 내 획득 임무를 전담토록 하는 등 군수산업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군수산업은 최대기업인 Denel사와 약 700여개 민간기업이 참 여하여 약 5만여명을 고용하고 있고 이중 약 15,000명이 무기 수 출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주요 방산품으로는 자주포, 대공포, 공 격용 헬기, 무인항공기, 미사일, 지뢰방호장갑차량, 탄약 등이 있다. 48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 남아공 군 조직 체계도 국 방 장 관 Minister of Defence 국 방 부 부 장 관 Deputy Minister of Defence 국 방 사 무 차 관 Secretary for Defence 정 책 기 획 국 Policy & Planning Division 예 산 국 Finance Division 물 자 국 Material Division 기획정보체계관리국 Enterprise Information System Management 감 찰 국 Defence Inspectorate 국방사무차관은 국방부의 회계관련 최고 결정권자 (Head of Department Accounting Officer)로서 인사, 법률, 감찰 및 대외관계를 담당하는 중앙참 모부 (Central Staff) 지휘 국 방 군 총 장 Chief of the SANDF 합동작전본부 Corporate Staff Division 육 군 SA Army 공 군 SA Air Force 해 군 SA Navy 의 무 군 SA Military Health Service 합 동 작 전 본 부 Joint Operations Division 국 방 정 보 본 부 Defence Intelligence Division 국 방 군 수 본 부 Defence Logistics Division 남아프리카공화국 개관 49

ㅔ * 병력 현황 구 분 군별 분야별 병력수(명) 여군(명) 육 군 34,462 7,671 해 군 6,244 1,353 공 군 10,653 2,470 상 비 군 의무군 8,044 2,500 국방부/국방군본부 15,683 소 계 75,086 13,994 * 민간인 15,000 육 군 57,385 해 군 1,436 비상비군 공 군 1,832 의무군 7,322 소 계 67,975 총 병 력 143,061 13,994 * 국방비 현황 2) (단위 : 백만 랜드) 구분 2007/2008 2008/2009 2009/2010 행정/일반 1,935 2,054 2,346 육 군 4,215 4.058 4,852 공 군 2,651 2,871 3,176 해 군 1,388 1,488 1,671 의무군 1,831 2,000 2,278 전력증강비 9.011 9,771 8,557 기 타 6,721 5,774 5,722 총 계 25,922 28,016 28,632 2) 국방비 현황은 2007/2008 국방부 연례보고서를 근거로 작성된 것이다. 50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외군사 협력상황은 SADC 내에서의 안보협력을 추진하고 있으며, 01.8월 말라위 SADC 정상회의에서 기존 다자국방안보 위(ISDSC; Inter-State Defence and Security Committee) 체제를 유 지한 가운데, 지역 평화 및 안정을 위해 정치, 국방 및 안보협력 에 관한 새로운 의정서를 채택하였다. 아프리카 연합(AU; African Union) 내에서의 안보협력은 AU 헌장(3조)에 군사사항을 명시하여 회원국간 협력 도모하고 있 다. 평화 지원 작전으로는 2001년 4월 콩고 유엔평화유지군 요 원으로 공군기술인력 위주로 100여명 파병한 것을 비롯하여 만 델라 전 대통령의 중재로 2001년 11월 출범한 부룬디 과도정부 에 참여할 정치인사들의 경호목적으로 1개 대대규모 전투병력 (701명)을 그 해 10월 파견하는 등 약 870명의 병력 파견하고 있다. 2008년 말 현재 콩고 1,248명을 비롯하여 라이베리아 1,000명, 수 단 800명 등 총 3,054명의 병력을 역내 6개국에 파견중이다. 5.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회문화 및 교육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주민 구성은 백인과 비( 非 ) 백인으로 대 별된다. 그 중에 흑인이 79%로 다수이며, 백인 9.6%, 혼혈인 8.9%, 아시아/인도계 2.5%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인 중에는 네덜란드계, 영국계, 프랑스계, 독일계 등이 있고, 비백인은 반 투족(아프리카 흑인), 아시아인(인도인 및 파키스탄인), 각종 혼 혈인(호텐토트, 부쉬맨, 말라야인, 인도네시아인 등)로 나뉜다. 이곳에 최초로 정착한 유럽인은 보어인( 人 )으로 알려진 네덜란 드인으로서 그들의 후손이 현재 아프리카인이며, 영어 외에 네 남아프리카공화국 개관 51

ㅔ 덜란드어에서 파생된 아프리칸스어( 語 )를 사용하고 있다. 반투 족은 부족에 따라 호사(Xhosa), 줄루(Zulu), 츠와나(Tswana), 바 페디(Bapedi), 소토(Sotho) 등으로 분리되어 있다. 남아공 교육시스템은 일반교육(GET, R~9학년), 고등교육(FET, 10~12학년), 대학교육(HE, 대학이상) 등 3단계로 이루어져 있음. 2009년 기존 교육부를 기초교육부와 대학교육부로 확대 개편하 였다. 대학은 25개이며 University 11개(프리토리아대학, 케이프타운 대학, 스텔렌보쉬대학 등), University of Technology 6개 (더반기 술대학, 케이프반도기술대학 등), Comprehensive University 6개 (요하네스버그대학, UNISA 등), National Institute 2개 (음푸말랑 가 및 노던케이프 Institute) 등이며, 전국 총학생수는 1,230만명 이며, 학교수는 26,592개, 교육자수는 387,000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학제는 Grade R~12학년까지 13년이며, 10학년까지 의무교육 이며, 학기는 4학기제(1월 중순 ~ 12월 초순)이다. 국제적으로 공인된 유수대학으로는 케이프타운대학, 스텔렌보쉬대학, 프레 토리아대학, 비트바테르스란드대학 등이 있다. 보건의료 분야는 세계 최초의 심장이식수술을 한 국가로서, 의학기술이 선진국 수준이며 전체적으로 영국의 의료시스템과 유사하다. 의료서비스는 국가의료시스템(NHS)과 1차진료(Primary Healthcare)시스템으로 되어 있다. 사립의료보험가입자를 위한 사립의료서비스 시스템 병행하고 있으며, 의료수준 큰 차이가 있다. 남아공에 거주 또는 근무하는 외국인들은 사립보험에 가 52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입이 보편화되어 있다. 사회복지는 국가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기금들이 있다. *사회복지기금 사회복지기금 지급액 수령자 고령연금(60세이상) R960 23,000,000명 장애인연금(18세-59세, 여성은 62세) R960 1,400,000명 참전용사연금(60세이상 또는 장애보유) R960 N/A 양육연금(18세까지) R650 494,992명 간호/간병연금(18세이하) R960 N/A 아동연금(15세이하) R240 8,300,000명 보호연금(60세이상) R210 N/A 환율 US$1=R8(2009.6월 기준), (2008.11월 기준 월 지급액) 남아공의 치안은 1990년 인종차별 철폐이후 민생사범, 마약, 차량 강탈 등이 증가하는 등 남아공의 치안상황은 세계 최하위 권이다. 최근 요하네스버그 일부와 근교 흑인 집성촌에서 모잠 비크와 짐바브웨 등 주변국가에서 불법 이주해 온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살인, 강도, 상해 및 방화 등 강력범죄가 발생하 고 있다. 남아공의 외국인 혐오범죄는 주변국에서 불법이민해서 남아 공의 흑인 빈민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이들을 대상으로 범죄를 일으키는 외국 흑인 노동자를 추방하려는 흑인 군중들에 의해 발생하고 있다. 이에 남아공 정부는 2010년 월드컵 개최를 전후 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경찰인력 증원(2011년 3월까지 20 만 명 이상 유지) 등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중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개관 53

ㅔ ㅔ 제3장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참전 배경과 부대 편성 제1절 6 25전쟁 발발과 유엔의 대응 1. 북한의 남침과 유엔의 지원결의 6 25전쟁은 북한과 소련이 한반도를 공산화하여 소비에트화 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북한정권 수립부터 내부적으로 무력통일방안을 논의했고, 일찍부터 북한 주재 소련대사를 통해 한반도 무력통일 방안에 관해 스탈린과 논의하면서 시작되었다. 3) 이후 북한군의 전력은 급속도로 증강되어 전차와 항공기, 야포 등을 포함하여 거의 10개 사단분의 무기들이 소련에서 들어왔다. 3) 대한민국 외교부 번역, 한국전쟁 관련 소련 비밀 외교문서 1994(미 간행). 이 문서는 1994년 러시아 전대통령 옐친이 한국전쟁 관련 소 련 비밀외교문서를 한국정부에 공식 전달한 것이다. 이 문서들로 인 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사실들이 밝혀졌다. 54 54 영원한 영원한 동반자 동반자 한국과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특히 T-34전차 242대는 전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무기였다. 이어 북한지도부는 중국의 마오쩌둥과도 전쟁지원 방안을 협 의했다. 이 협의에서 마오는 중공군내 조선인병력 3개 사단을 입북을 약속했으며, 1949년 후반부터 약속대로 그 병력들을 입 북시켰다. 이러한 북한, 중국, 소련의 협의와 지원과정을 거쳐 김일성은 최종적으로 스탈린과 모택동의 동의와 허락을 받은 후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쟁을 개시했다. 북한군은 작전계획대로 38도선 전 지역에 걸쳐 야포와 박격포의 공격 준비사격과 더불어 T-34 탱크를 앞세우고 일제히 38선을 넘었다. 6 25전쟁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이 소식은 주한 외교사절이 나 특파원들에 의해 전 세계로 전파되었고, 세계의 이목은 한반 도로 모아졌다. 불안하게 유지되어 온 한반도의 평화가 북한군 의 남침으로 일순간에 무너지자 주한 미국대사 무초(John Joseph Muccio)는 이 사실을 즉시 본국에 알렸고, 대한민국의 이 승만 대통령도 북한의 남침을 자력으로 격퇴할 수 없음을 우려 하고 주미한국대사 장면에게 직접 미국 정부에 원조를 요청하 도록 지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 소에 의해 분할 점령된 한국을 양국 간의 협의에 따라 통일하고자 하는 방안이 미 소의 입장 차이로 불가능하게 되자, 유엔은 1948년 5월 유엔한국임시위원 단 을 구성해 유엔 감시 하에 선거를 치른 후 대한민국을 한반 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 로 승인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감독했 다. 이러한 관심과 노력이 있었기에 유엔 회원국들은 대한민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참전 배경과 부대 편성 55

ㅔ 6 25전쟁을 지원한 유엔군의 사열 모습 이 북한으로부터 침공을 받은 직후 평화를 깬 북한에 대해 신속 히 유엔의 응징을 결정할 수 있었다. 유엔은 북한이 남침을 개시한 지 하루 만인 1950년 6월 26일 오전 4시에 긴급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었다. 유엔은 북한에 침략 행위를 중지하고 38도선 이북으로 물러날 것을 권고하는 등 원 상회복을 위한 조치를 단계적으로 취하기 시작했다. 트리그브 리(Trygve H. Lie)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 한국위원단 의 보고서를 인용해 유엔은 침략에 직면한 한국의 평화와 안전 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고 역설했다. 또한 유엔 미국대표가 중대 사태의 피해 당사국 대표를 유엔 안보리에 참 석시키자 고 제의함에 따라 한국의 장면 대사가 우리 입장을 호 소할 수 있었다. 이 6 26결의는 6 25전쟁에 있어 유엔이 집단 안전보장 조치로 침략을 제재하고 평화를 달성하려는 첫 번째 행동으로서 중요 56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한 의미를 가지며, 결의의 초점은 북한으로 하여금 침략을 중지 하고 전쟁 전의 38도선 이북으로 물러나도록 하는 데 있었다. 한편 유엔 한국위원단은 6 26결의 이후에도 북한의 침략 행위 가 계속되자 추가조치가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이러한 상황에 서 미국은 유엔 결의를 수행하기 위한 해 공군의 지원조치를 국 제적으로 인정받고, 또 유엔 회원국들의 원조를 요청하는 결의 안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정키로 했다. 이에 따라 안전보장이사회가 6월 28일 열렸다. 먼저 미국의 오 스틴(Warren R. Austin) 대표가 한국 사태의 진전 상황과 미국이 취한 조치를 상세히 설명했다. 이에 안전보장이사회는 8시간의 마라톤회의 끝에 결의안을 찬성 7표, 반대 1표, 기권 2표(인도 이집트)로 가결했다. 이때 소련은 불참했다. 6 28결의의 핵심은 유엔 회원국이 군사원조를 통해 북한의 침 략을 격퇴할 수 있도록 대한민국을 지원한다는 데 있었다. 이 결의는 세계평화를 파괴하는 행위에 대해 군사적 제재를 가함 으로써 평화를 회복하려는 유엔 창설 이후 최초의 집단 안전보 장 조치 라는 의미를 지닌다. 아울러 국군이 유엔군과 함께 공산 침략에 대응하게 됨에 따라 한국과 북한의 전쟁 에서 북한 대 유엔의 전쟁 으로 확대되는 전환점이 됐다. 유엔 회원국들은 유엔의 결의가 있자 자국의 안보 문제 등을 고려해 즉시 참전을 결정했다. 참전의 대의는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수호한다 는 것이었으며, 이는 유엔헌장에 명시된 것처 럼 불법적인 무력행동에 대해서는 유엔이 집단적인 행동으로 이를 저지한다는 원칙을 행동으로 옮긴 조치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참전 배경과 부대 편성 57

ㅔ 2. 유엔군 참전 지원과 특징 참전 16개국과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한 5개국은 유엔헌장에 명시된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수호한다 는 대의에 따라 참전을 결정했다. 유엔 회원국 중 대부분의 국가가 지지하는 가운데 결 성된 유엔군은 한국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갖고 있으며, 파견 병력 규모와 지원능력 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미국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이외 국가의 참전은 주로 미국의 국무부와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의 협의 하에 이루어졌다. 전쟁 초기부터 미국은 좀 더 많은 유엔 회원국이 미국 측에 동참해 6 25전쟁에 참가함 으로써 이 전쟁이 단순히 미국 대 소련 간의 전쟁이 아니라 자 유세계 대 공산세계 간의 전쟁이 되기를 바랐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참전을 지원하는 국가가 실질적 인 기여를 하려면 참전국의 최소 병력 수는 적절히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약 1천 명, 즉 1개 보병대대 로 하고, 또 참전국은 완전 무장한 상태에서 60일 분의 보급품을 가지고 작전지역에 도착 해야 하며, 본국은 계속해서 모든 병참 지원에 책임을 질 수 있 어야 한다 고 생각했다. 유엔은 이러한 기준선을 인정하면서도 가능한 한 많은 나라 들이 유엔의 기치 아래 활동하기를 바랐다. 이것은 자유와 평화 를 갈망하는 좀 더 많은 아시아 국가들로 하여금 6 25전쟁에 동 참케 한다는 중요한 정치적 의의를 갖는 결정이었다. 6 25전쟁에서 유엔군의 핵심 축을 담당한 미국은 파병 규모 58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참전 지원 결의 면에서도 단연 제일이었다. 미국의 병력 규모와 무장 정도, 병참 지원 능력으로 인해 유엔군의 작전 결정은 대부분 미국의 주도 로 이루어졌다. 1950년 7월 14일 리 유엔 사무총장이 상황의 긴 박함을 고려해 각국에 지상군 파견을 촉구하자 참전 회원국의 수가 현저히 증가했다. 그러나 파병의사를 밝힌 대부분의 회원 국들이 한국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2개월 이상의 시간 이 필요했다. 미국을 제외한 유엔 회원국 중 유엔결의에 따라 제일 먼저 군 사지원을 약속한 나라는 영연방 국가들이었다. 영국은 해군 기 동부대의 파견을 통보해 왔고, 29일에는 호주가 해군과 공군의 파견 의사를 밝혔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중국의 공산화 이후 동 남아시아에서 점증하는 공산주의 팽창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아울러 유엔의 깃발아래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참전 배경과 부대 편성 59

ㅔ 미래에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팽창을 막는 유력한 예 방책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네덜란드도 구축함 지원을 약속했고, 대만도 지상군 파견 의사를 전해 왔다. 그러나 대만의 파견 제의는 정치적인 문제와 대만의 전투력 약화 등을 이유로 미국에 의해 거부됐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는 북대서양조약기 구(NATO)의 일원으로서 근본적으로 소련의 유럽 지배 의도에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이들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 국이 NATO에 대해 실질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 었으며, 유럽에서 미국의 확고한 역할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아 시아에서 미국과 함께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아프리카의 남아프리카공화 한국전선에 참전한 남아프카공화국의 용사들 60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국, 에티오피아 그리고 남아메리카의 콜롬비아는 유엔의 활동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참전했다. 미국의 인접국이자 NATO의 일원이었던 캐나다는 초기부터 북한 침공의 배후에 소련의 팽창욕구가 있다고 판단하고, 유엔 의 공동노력으로 이를 강력히 저지하고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 과의 결속을 강화해 두고자 참전을 결정했다. 터키와 그리스는 다르다넬스 해협과 발칸반도에서 소련과 소 련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으 며, 그러한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방호하기 위해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 두 나라는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 하는 유엔의 집단행동에 동참함으로써 강한 결속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했고, 훗날 자신들의 나라에 좀 더 많은 미국의 군사원 조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희망했다. 필리핀과 태국은 지리적 위치로 인해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호주와 뉴질랜드보다 더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다. 인도차이나 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은 베트남의 공산세력이 팽창하고, 필리 핀 공산주의 반군 활동이 급증하는 것이 이들 나라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참전한 유엔 회원국들은 대부분 그들 국가 주변에서 점증하 는 공산주의 위협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으며, 북한 공산주의 자들의 한국 침략을 미래에 있을지 모를 공산주의자들의 공격 이나 전복 활동의 한 시발점으로 보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참전 배경과 부대 편성 61

ㅔ 국제 사회의 한국 지원 상황 구 분 Classification 참전국 Participants (Strength) 의료지원국 Medical Support 물자 지원국 Material Support 전쟁 지원 Wartime 전후 복구 Postwar 국 가 명 Nationality U.S.A, United Kingdom, Turkey, Canada, Australia, France, Greece, Colombia, Thailand, Netherlands, Ethiopia, Philippines, Belgium, New Zealand, South Africa, Luxembourg Norway, Sweden, India, Denmark, Italy Argentina, Austria, Bermuda, Cambodia, Chile, Costa Rica, Cuba, Dominica, Ecuador, Egypt, El Salvador, Guatemala, Honduras, Hungary, Iceland, Indonesia, Iran, Israel, Jamaica, Japan, Lebanon, Liberia, Mexico, Pakistan, Panama, Saudi Arabia, Switzerland, Syria, Taiwan, Uruguay, Venezuela, Vietnam Germany, Haiti, Liechtenstein, Monaco, Paraguay, Peru, Vatican City 비고 Remark 16 Countries 5 Countries 32 Countries 7 Countries 유엔의 지원결의에 따라 유엔 21개국은 유엔 창설 이후 처음 으로 유엔기를 앞세우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6 25전쟁 에 참전했다. 이들은 미군의 작전통제 하에 낙동강과 압록강을 오르내리면서 전쟁을 수행했으며, 이들의 참전 활동은 세계사적 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6 25전쟁에 유엔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은 유엔의 기본정신에 입각한 사상 최초의 집단행동이라는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가 62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용사들의 출격 직전의 모습 치를 지닌다. 이는 유엔 역사상 처음으로 유엔의 집단 안전보장 원칙 을 점검하는 시금석이 됐다. 당시 참전국은 총 21개국에 달 했는데,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전투병력을 파견하고 5개 국가 는 의료지원단을 보내왔다. 그리고 그 외에도 많은 국가들이 물 자를 지원했다. 이들의 참전 의의는 회원국들이 파견한 병력의 규모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평화의 파괴자 에 맞서 국제기구의 집단적 행동으로 평화를 회복하려는 노력이었기 때문이다. 세계대전의 전화가 가신 지 얼마 되지 않 은 상황에서 평화와 자유의 위협에 대해 세계는 유엔헌장에 입 각해 이를 집단행동으로 막아야 한다 고 입을 모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참전 배경과 부대 편성 63

ㅔ 유엔군은 한반도의 남단 일각마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참전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존망의 기로에 선 한국을 기사회생시키고, 나아가 공산침략을 격퇴하는 데 결 정적으로 기여했다. 유엔의 지원결의에 따라 많은 국가들이 유 엔의 깃발 아래 결속됐다. 이러한 사실은 그 후 전 세계 자유민 들이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인식을 재정립하는 데 좋은 교훈이 됐다. 전쟁 기간 중 남북한을 지원한 여러 국가들은 자유주의적 자 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체제라는 이념적 이해관계 에 근간을 두고 양국을 지원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과정 에서 싹트기 시작해 전후에 본격화됐던 동서 냉전체제는 6 25전 쟁을 계기로 더욱 고착화하고,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심화시키 는 계기가 됐다. 한편 한국은 전쟁으로 국민들의 생활터전과 사회경제체제의 기반이 황폐해졌으나, 전쟁이 끝난 후 유엔의 지원으로 점차 생 활안정과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해 행정기구가 마비된 탓에 이재민 구호정책은 전적으로 유 엔군사령부에 의존하게 됐다. 유엔군 예하의 유엔민사원조사령 부는 원조물자의 도입은 물론 피난민 구호사업, 의료시설과 교 육시설 지원 등을 담당했다. 64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제2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참전 결정 과정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전시동원 령을 해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 6 25전쟁이 발발할 당시 즉각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125,000명에 달했다. 이들은 최신장비로 무장하고 고도의 훈련을 쌓은 백인들로 구성된 병 력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 )은 6 25전쟁이 발발한 직후 인 1950년 6월 27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한국에 대한 군사지 원 결의안을 가결하자, 7월 1일 즉각 이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 한 후 구체적인 대한 군사지원 방안을 논의하였다. 남아공은 유 엔의 창립 회원국으로서 대한민국의 수립과 평화에 큰 관심을 가져온 우방국이었다. 남아공 정부는 8월 4일 내각회의에서 유엔의 호소를 지지하는 한편, 1개 전투비행대대와 지상군 병력을 파병하기로 결정하였 다. 그리고 남아공 정부는 특별의회를 소집하여 해외파병 결정 을 합법화하기 위한 긴급법안을 통과시켰다. 남아공 군당국의 최초 계획은 정규군 가운데에서 지원자를 선발할 예정이었으나 막상 공군 당국이 응모요강을 발표하자 정규군 장병 외에도 수많은 예비역들이 지원하였다. 당시 남아 프리카공화국의 한 일간지에는 한국 파병과 관련해 한국 근무 지원자 쇄도(Flood of Volunteers for Service in Korea) 라는 제목 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참전 배경과 부대 편성 65

ㅔ 1개 비행대대를 한국에 파견한다는 정부의 결정 사실이 오늘 아침에서야 각 공군기지에 전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후가 되기 전에 지원자들이 물밀 듯이 몰려들고 있다. 여러 세부적인 사항 들이 여전히 미국과 논의 중에 있지만, 파견부대의 규모는 결정되 었다. 비행대대는 장교 31명(25명의 조종사 포함), 사병 172명으 로 구성할 것이다. 비행대대는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수송기를 이용해 한국으로 갈 예정이지만, 출발 일자와 최종 목적지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된 바가 없이 논의 중에 있다. 한국에서 비행대대가 사용할 기종 또 한 여전히 고려중에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은 전쟁지역에 서 현재 사용되고 있는 항공기 중 가장 최신의 기종을 갖기를 열 망하고 있다. 지원자는 현역뿐만이 아니라 예비역들도 몰려들고 있다. 현역 만을 고려하였지만, 예비역 지원자들도 등록하고 있다. 한국 파병 결의안이 오늘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남아공 정부가 파병을 결정한 다음날 프레토리아의 총사령부 에서는 파병 규모와 관련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총 사령부는 장교 31명, 참모와 부사관 및 사병 172명, 노무자 75명 등을 포함하여 약 300명으로 참전 병력을 구성하며, 조종사들은 대부분 전쟁 경험을 가진 장교들로 구성할 것 이라는 방침을 수 립하였다. 이날 남아공 공군사령관 더렌트(J. T. Durrant) 준장은 <스타지(The Star)>와의 인터뷰에서 지원자들은 현역만을 고려 대상으로 하지만, 많은 예비역 장교들이 프레토리아 공군본부로 몰려들어 지원자 명단에 등록되고 있다. 지원자들은 지위고하 를 막론하고 한국에서 유엔군으로 복무할 기회를 얻는 것을 대 66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참전 관련 기사 단한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고 밝혔다. 또한 그는 남아공 공군이 현대전에 참여한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남아공 군당국은 새롭게 대대를 편성하려던 당초의 계획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참전 배경과 부대 편성 67

ㅔ 6 25전쟁 참전 이전 남아공 공군이 보유한 주력기(스피트파이어 전투기) F-51 무스탕 전투기 68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변경하여 남아공 공군 제2전투비행대대의 파병을 결정하고, 작 전상 부족한 인원만을 추가 보충하기로 했다. 그리고 제2전투비 행대대가 사용할 항공기와 장비는 본국에서 갖고 가지 않고 대 대가 극동기지에 도착하면 즉시 현지에서 조달이 가능하도록 미국 정부와의 구매교섭에 합의하였다. 당시 남아공 공군이 보 유한 전투기는 뱀파이어(vampires)와 스피트파이어(spitfires) 기 종이 있었지만, 남아공 정부는 미국의 F-51 무스탕기의 도입하 여 사용하기를 원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참전 배경과 부대 편성 69

ㅔ 제3절 참전부대 편성과 훈련 미국 정부는 8월 27일 한국에 1개 전투비행대대를 파견할 수 있다는 남아공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날 남아공 참모총장 드 토이트(C. L. de Wet du Toit) 소장은 1개 비행대대가 가능한 한 빨리 극동에 파견될 것이며, 이 비행대대는 테론(S. van Breda Theron)중령이 지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32살의 나이 로 비행대대장을 맡은 테론 중령은 남아공 공군에서 가장 화려 한 경력을 보유한 장교였다. 그는 3,500시간 이상의 비행 경력을 가졌으며, 제2차 세계대전시 공군 최고훈장인 무공십자장(DFC) 을 수여받은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남아공 정부는 1950년 8월 27일 참전자들의 명단을 발표하고 참전 준비를 서둘렀다. 9월 1일 주미남아공 대사 주스테(G. P. Jooste)는 미국이 남아공 조종사들과 항공기들을 극동으로 수송 하기 위해 즉시 준비할 것이며, 남아공 정부의 전투비행대대 한 국 파견 제안이 오늘 미 국방부 행사에서 공식 표명되었다 고 밝혔다. 이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 중 동부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이탈 리아 및 중동지구 전선에서 용맹을 떨쳐 나는 치타(The Flying Cheetahs) 라는 별명이 붙은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제2전투비 행대대는 남아공 프레토리아 근방의 워터크루프(Waterkloof) 공 군기지에서 본격적으로 참전준비를 서둘렀다. 9월 5일 49명의 장교와 157의 부사관 및 병사들이 신체검사와 예방접종을 실시 하고 행정적인 세부사항들을 마무리 지었다. 70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장병들을 수송한 트지사단(Tjisadane)호 본대가 파견되기에 앞서 참전에 따른 제반 행정조치와 유엔군 사령부와의 연락업무를 위하여 1950년 9월 10일 프레토리우스 (Pretorius)가 이끄는 소규모의 연락단이 일본을 향해 출발하여 도쿄에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연락본부를 설치하였다. 이어 장교 49명을 포함하여 총병력 206명으로 편성된 제2 전투비행대 대(대대장 S. V. B. Theron 중령)가 9월 25일 열차편으로 프레토 리아를 출발, 다음날 더반 항에서 선박 트지사단(Tjisadane)호 편 으로 극동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리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국방 역사상 최초로 극동지역에 전투부대를 파견하게 되었다. 제2전투비행대대는 1950년 9월 26일 더반 항을 출발하여 만 40일간의 긴 항해 끝에 11월 5일 04시 30분 일본 요코하마 항구 에 도착하였다. 비행대대는 도쿄 외곽 약 32km 지점에 위치한 존슨 공군기지로 향했다. 존슨 기지는 미국이 건설한 대규모 공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참전 배경과 부대 편성 71

ㅔ 환송행사 선상 위에서의 생활 군기지로서 클럽, 체육관, 영화관 등 반영구적인 각종 오락시설 까지 구비하고 있어 마치 하나의 대도시와도 같았으며, 일기가 쾌청한 날이면 흰 눈에 쌓인 후지산의 정상이 멀리 보일 정도로 일대가 광활한 평원을 이루고 있었다. 6 25전쟁에 참전한 남아 프리카공화국 공군 조종사 제임스 스위니는 당시의 상황을 다 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남아공 항구 도시 더반에서 배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 항구에 닿았지. 1만6000km가 넘는 거리여서 44 72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아공화국군의 요코하마 항구 도착 일 동안 배를 탔네. 그러고는 도쿄 근처의 미군 존슨공군기지로 이동해 머스탱 비행 훈련을 하고선 한국에 들어왔지( 동아일 보 2010. 6. 24). 대대는 11월 6일부터 미 공군으로부터 예정된 무스탕기와 장 비를 인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25대로 기대했던 항공기는 불과 16대뿐이었으며, 장비와 보급품도 크게 부족하여 현지 훈 련계획에 큰 차질을 초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공 제2 전투비행대대는 배속된 미 제6002전술지원비행단 단장 로우 (Low) 대령으로부터 비행단의 편성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어 조종사들의 비상탈출 및 공산군의 대공포 공격에 대한 자위요 령 등에 관한 훈련을 받기 시작함으로써 본격적인 현지적응훈 련에 들어갔다. 남아공 제2비행대대는 11월 8일 첫 번째 비행훈련을 시작하였 고, 12일 첫 실전에 참가하였다. 비행훈련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는 11월 12일 미 제6002전술지원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참전 배경과 부대 편성 73

ㅔ 행단이 대대의 한국 파견을 결정하자 5대의 무스탕을 처음으로 한국에 파견하였다. 이와 관련해 당시 남아공의 한 일간지는 다 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조종사들이 일요일 6 25전쟁에 참전하였다. 제2전투비행대대의 장교 4명이 미 제5공군 제6002전술지원비행단 제12전투비행대대(12th Fighter Squadron) 소속으로 참전하였다. 맥아더사령부는 일요일과 월요일에 그들이 주로 한반도의 중앙지 역과 철로에 대한 기총소사, 폭격, 로켓 공격에 참가했다고 말했 다. 참전자들은 대대장 브레다(S. van Breda)를 비롯해 리파우스 키(G. B. Lipawsky) 대위, 데이비스(J. F. O. Davies) 대위, 배든호 스트(W. J. J. Badenhorst) 대위 등이었다. 원래 5대의 남아공 무 스탕기들이 도쿄에서 부산으로 날아갔으나,. 4명의 조종사만이 일 요일에 2차례의 출격을 명령받았다. 이들은 스프링복(Springbok; 남아프리카산 영양으로 남아공 공군기의 마크임) 마크를 한반도 74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의 상공에서 최초로 보여주는 영광을 안았다. 제5의 조종사 오덴 달(H. O. M. Odendaal) 대위는 행운을 얻지 못했다. 공군 선임연 락장교 프레토리우스(Pretorius)는 한국에서 도쿄로 돌아와 다음 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부산에서 우리가 배속된 미 공군비행단장 로우(Low) 대령으로부터 환대를 받고 부산에서 몇 마일 떨어진 수영비행장에 여장을 풀었다. 이곳에서 비행대대는 모피 안감의 부츠(fur-lined boots), 스키양말, 방수 방풍 바지와 재킷, 후드, 장갑, 귀마개 등으로 구성된 미군의 겨울 복장을 지급받았다. 부산에서 첫 이틀은 미 공군과 작전방식, 격추당할 경우의 탈 출 절차에 관한 교육에 참석하였다. 그런 후 4명의 조종사들이 첫 번째 전투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났다. 그들은 부산으로 돌 아오지 않고 자신들이 배속된 미 공군 제6002비행단이 주둔할 예정인 평양으로 날아갔다. 미 공군 비행단은 어제 평양으로 이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가 한국에 처음 도착한 부산 수영비행장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참전 배경과 부대 편성 75

ㅔ 동하였다. 존슨기지에 있던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 본대는 1950년 11 월 15일 미 제6002비행단 본부로부터 장교 13명을 포함한 34명 의 선발대를 편성하여 즉시 한국으로 이동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 받았다. 다음날 선발대는 미 공군 수송기편으로 존슨기지 를 출발하여 부산 수영비행장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6 25전쟁 이 발발한 지 약 5개월 만에 남아공 공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서 6 25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76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제4장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제1절 한국 전선에 서다 1950년 11월 16일 오후 늦게 부산의 수영비행장(K-9)으로 이 동을 완료한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 선발대는 미 제18전투비 행전대(18th US Fighter Group)에 배속되었다. 당시 미 제5공군의 부대 편성은 다음의 표와 같다. <표> 주한 미 제5공군 부대편성 비행단(Wing) 비행전대(Group) 비행대대(Squadron) 제6002전술지원비행단 제18전투비행전대 제12전투비행대대 제67전투비행대대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 호주 제77전투비행대대 제6131전술지원비행단 제8전투비행전대 제35전투비행대대 제36전투비행대대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주요 전투 전투 활동 활동77 77

ㅔ 비행단(Wing) 비행전대(Group) 비행대대(Squadron) 제6150전술지원비행단 제6133전술지원비행단 제6149전술지원비행단 제1공수특 수임무부대 (임시) 제35전투비행전대 제3폭격비행전대 제49전투비행전대 제374공수비행단 제374공수비행전대 제314공수비행전대 제1공수비행전대 제39전투비행대대 제40전투비행대대 제8폭격비행대대 제13폭격비행대대 제7전투비행대대 제8전투비행대대 제8전술사진정찰대대 제162전술정찰대대 제6공수비행대대 제21공수비행대대 제22공수비행대대 제37공수비행대대 제50공수비행대대 제61공수비행대대 제62공수비행대대 제46공수비행대대 제47공수비행대대 제48공수비행대대 부산의 수영비행장은 1950년 9월 미 제18전투비행전대가 주둔 하면서 많은 보수공사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거친 활주로 와 격납고 및 정비시설의 부족으로 인해서 작전에 차질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에 더하여 날이 저물면 매서운 해풍이 불 어 닥치는 한국의 늦가을 날씨는 따뜻한 날씨에 익숙한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원들을 긴장시켰다. 부산으로 이동한 지 4일 후인 11월 20일 밤늦게 남아공 제2전 투비행대대 선발대는 북한지역으로의 이동 명령을 수령하였다. 78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부산 수영비행장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일본 존슨기지에서 C-47에 오르고 있는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 선발대 북한지역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분주히 움직이는 대원들의 표정에는 새로운 긴장과 굳은 결의의 기색 이 역력하였다.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의 북한지역 이동은 11 월 24일로 계획된 유엔군의 최후 공세, 일명 크리스마스 공세 를 위한 조치의 일환이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한반도의 최남단인 낙동강선까지 밀린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 을 정도의 대승리였던 인천상륙작전은 낙동강 일대에 투입된 북한군 13개 사단의 주력을 고립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 여했다. 반격에 나선 국군과 유엔군은 9월 말에 38도선까지 진 출하면서 전쟁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였다. 최초 유엔이 결의했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79

ㅔ 던 전쟁목표를 달성한 셈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정부와 국민 들의 열망은 이번 기회에 남과 북이 합쳐진 통일정부를 수립하 는 것이었다. 미국과 유엔 또한 북한군이 남침하기 이전부터 추 구해 왔던 한반도 통일정부 수립의 기회를 포기할 수 없었다. 10 월 1일 동해안 지역의 국군이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을 시작했 다. 이어 유엔의 북진결의에 따라 10월 9일, 유엔군도 38도선을 돌파했다.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은 거침없이 진행되어 10월 말 에 서부전선에서 한 만국경선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러나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해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중공군의 개입을 알게 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장군은 공산군 의 조직적인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전쟁을 종결하고자 11월 24 일을 기해 대규모 공세를 단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이 작전과 관 련해 맥아더장군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종결짓기 위한 최후공세 로써 작전에 성공하면 미 제8군 장병들은 늦어도 성탄절까지는 모두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격려하였다. 크리스마스 공세 가 결정되자 미 제5공군사령관 패트리지 (Earl E. Partridge) 소장은 제공권을 계속 유지하여 작전을 효과 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조치를 취하였다. 먼 저 만주지역의 단둥에서 이륙해오는 중공군 MIG-15기의 항적을 포착하고자 조기경보레이더 부대인 제606항공관제경보대대가 육로와 공로로 신안주비행장(K-29) 근처로 이동하여 11월 21일 부터 레이더 운용을 시작했으며, 제6150전술지원비행단이 11월 10일부터 19일까지 포항에서 연포비행장(K-27)으로 이동하였다. 80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고 11월 22일 제6002전술지원비행단이 평양 미림비행장 (K-24)에 전개하였으며, 11월 25일 제6131전술지원비행단이 평 양비행장(K-23)에 이동을 완료하였다. 이에 따라 제6002전술지원비행단 소속의 남아공 제2전투비행 대대도 11월 21 22일 사이에 평양 미림비행장으로 이동하였다. 이날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장 테론(Theron) 중령은 극동공군 사령관 스트레이트메이어(George F. Stratemeyer) 중장으로부터 남아공 제2대대가 유엔군의 일원으로 항공작전에 참여해 항상 성공하기를 바란다 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이로써 미 제5공 군은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를 비롯해 F-51 8개 대대를 북한지 역에 전개함으로써 작전거리를 단축하여 북한 북부지역에서 중 공군과 대치한 국군과 유엔군에 대한 근접항공지원작전을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81

ㅔ 제2절 평양-수원비행장에서의 작전 1. 평양 미림비행장(K-24)에서의 작전 부산에서 평양으로 이동을 완료한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 선발대는 11월 23일부터 연일 출격하여 한만국경선의 공중초계 와 후방차단작전을 수행하였다. 전선과의 비행거리 단축과 항 속시간의 이점에도 불구하고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평양 미 림비행장의 악조건 때문에 조종사들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 었다. 당시 미림비행장은 유엔 공군의 폭격과 북한군이 평양을 철 수할 때에 감행한 방화로 인해서 모든 시설이 잿더미로 변한 데 다 활주로에는 깊숙이 파헤쳐 놓은 여러 개의 웅덩이가 존재하 였다. 비행대대장 테론(Theron) 중령은 즉시 비행장 인근의 주 민들을 동원하여 간이막사와 격납고를 건설하고, F-51 무스탕기 의 이착륙이 가능하도록 활주로를 임시로 복구하였다. 그러나 활주로가 겉으로 살짝 잔디를 입혀 놓았을 뿐, 그 밑이 온통 진 흙바닥이어서 전투기들이 이착륙할 때 언제나 자욱한 먼지가 일어 조종사들의 시계를 제한하였다. 최악의 활주로 상태로 인해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는 미림 비행장에서 임무를 개시한 지 4일째 되던 11월 26일 2대의 무스 탕기를 잃는 비운을 맞이하기도 했다. 이날 오덴달(H. O. M. Odendaal) 대위가 출격임무를 마치고 기지로 복귀하여 착륙하 는 순간에 시계가 불량하여 때마침 활주로에서 고장난 무스탕 82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기를 견인작업 중이던 견인차와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 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일시에 2대의 전투기가 파손되는 큰 사고였다. 이날의 사건은 제2전투비행대대가 6 25전쟁에 참전 한 이래 가장 큰 손실을 입은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활주로의 상태에 더하여 서울에 있는 합동작전통제소(JOC)와 의 잦은 교신 두절은 제2전투비행대대의 작전에 차질을 빚게 하 였다. 합동작전통제소와 연결된 유선 및 VHF라디오마저 적시에 교신이 제대로 되지 않아 믿을만한 것이 못되었으며, 미 제5공 군으로부터의 일일정보보고도 적시에 입수하는 것이 불가능하 였다. 이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는 연일 청천강 북쪽의 군우리와 개천 상공으로 출격하여 유엔 지상군 의 크리스마스 공세 를 지원하는 한편, 신의주-신안주간의 도로 상공을 오르내리며 공산군의 보급차량들을 공격하였다. 이 무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83

ㅔ 렵 일본에 잔류 중이던 제2전투비행대대의 본대에서는 조종사 들을 계속해서 한반도에 증원시켰다. 작전 중에 남아공 조종사들을 가장 긴장시킨 것은 공산군의 절묘한 위장술이었다. 조종사들이 공격목표를 발견하고 이를 공격하기 위해 급강하할 때면 언제나 방향을 분간할 수 없는 곳 으로부터 총 포탄이 날아와 조종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 다. 특히 전투경험이 부족한 젊은 조종사들에게 공산군의 기습 공격은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다음 일화는 남아공 조종사들의 뛰어난 임기응변의 사례를 잘 보여주고 있다. 11월 24일 13시 50분경 청천강 북쪽 신의주 도로를 공중정찰 중이던 존스(Tinky Jones) 중위가 여러 대의 적 차량을 발견하고 네이팜탄 공격을 개시하자, 갑자기 도로 양쪽의 논바닥에 군데군 데 쌓인 볏 집단 속에서 5명의 적병이 뛰어나와 총격을 가했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존스 중위는 순간적으로 방향을 돌려 급선회 한 다음, 다시 적병을 향하여 급강하하면서 기총소사를 가해 이들 을 모두 사살하고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때부터 남아공 조종사들 은 출격 중에 볏 집단을 발견하면 무조건 이를 불태워 버리는 것 을 하나의 관례로 삼게 되었다. 이 무렵 남아공 장병들에게는 적의 대공포화보다 힘겨웠던 상대가 한국의 겨울 날씨였다. 장병들 사이에서는 이럴 줄 알 았으면 차라리 냉장고라도 몇 대 갖다 놓고 교대로 그 속에 들 어가 앉아 있을 것을... 이라는 농담이 오고 갔으며, 한 참전자의 회고담에서는 엉성한 막사에다 진흙바닥에 모포를 깔고 야전침 84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낭 속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던 상하( 常 夏 )의 나라 남아공 장교 들에게는 무스탕기 조종실만이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곳 이어서 저마다 출격순서를 기다리는 것이 목표였다 고 밝힐 정 도였다. 한반도 북단의 겨울은 남아공 장병들에게 육체적인 고 통은 물론, 눈보라와 적설로 인해 공격목표의 확인이 어려워 작 전에 지장을 초래하였다. 11월 24일 야심차게 시작된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는 작전 개시 3일 만에 중공군의 거센 반격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27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미 합동참모본부에 지상군의 공세가 완전히 실패했음을 보고하면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 면하였다 고 언급하였다. 12월 1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국군과 유엔군에 대해 38도선 이남으로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중공군의 참전과 유엔 지상군의 후퇴가 공식화되면서 38도선 북단에 있던 공군 전술부대들은 시차를 두고 남쪽으로 철수하 는 동시에 제5공군의 전면적인 조직개편작업이 이루어졌다. 12 월 1일자로 이루어진 제5공군의 조직개편은 임시로 편성된 전술 지원비행단을 미 공군에 정식 편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표> 한국 전개 공군 전투부대의 재편성(1950. 12. 1) 구 편성 신 편성 주둔 기지 제6002전술지원비행단 제18전투폭격비행단 이타츠케 기지 제6131전술지원비행단 제8전투폭격비행단 존슨 기지 제6149전술지원비행단 제49전투폭격비행단 요코다 기지 제6150전술지원비행단 제35전투요격비행단 미자와 기지 제6133전술지원비행단 제3폭격비행단 이와쿠니 기지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85

ㅔ 이러한 정식편제로의 승격은 부족한 인원과 장비로 상당한 어려움을 안고 있던 한국 전개 전투부대에 인원과 장비의 획득 을 용이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향후 전시편제를 기준으로 인 원과 장비 획득을 가능하게 하여 장기화될 전쟁 국면에 대처하 기 위한 기본적인 조치였다. 미 제5공군의 편제조정에 따라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는 제 18전투폭격비행단에 소속되었으며, 12월 2일 평양의 미림비행장 에서 철수를 개시하여 4일 정오를 조금 지나 수원비행장(K-13) 으로 철수를 완료하였다. 이 때 장비와 병력의 일부가 진남포항 을 통해 LST편으로 철수하였으며, 육로로도 장비 일부가 철수하 였다. LST편으로 철수한 장비와 병력은 인천항에 무사히 도착했 지만, 육로로 수송된 장비의 일부는 철수로의 혼잡으로 인해 분 실되거나 파괴되었다. 2. 수원비행장(K-13)에서의 작전 수원비행장은 일제시기에 건설된 비행장으로 1,560m의 활주 로를 가지고 있었다.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가 이동했을 당시 수원비행장 또한 활주로를 비롯한 모든 시설이 엉망이었다. 활 주로의 콘크리트 포장은 산산조각으로 파괴되어 거의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에 평양 미림비행장에서 함께 철수한 미 제882공병항공대대(88nd US Engineer Aviation Battalion)가 긴급 보수공사에 착수하여 활주로를 비롯해 비행장 주변의 통로를 모두 PSP(구멍이 뚫린 동철판)로 포장하였다. 86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출격 준비 중인 남아공 대대 F-51무스탕기 수원비행장으로 이동한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는 지상군의 철수작전 엄호와 유엔군이 유기한 각종 장비의 폭파임무를 수 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군 조종사들은 고군분투하면서도 훌 륭한 귀감을 보여줬다. 그 일례가 바로 12월 5일 남아공 전투비 행대대의 작전 중에 일어난 영웅적인 미담이다. 남아공 전투비행대대는 12월 5일 참전 이래 처음으로 작전 중 에 무스탕기 1대를 잃었다. 이는 유엔군이 미처 후송하지 못하 여 중공군의 수중에 들어간 폭발물을 실은 화차를 파괴하고자 출격했다가 입은 손실이었다. 이날 아침 일찍 데이비스(J. F. O. Davis) 대위와 리파우스키(G. B. Lipawsky) 대위는 각각 6발의 로켓탄과 50mm기관총탄으로 무장한 채 수원비행장을 출발하여 청천강 북쪽 안주 상공으로 향했다. 현지 상공에 도착한 이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87

ㅔ 목표물을 발견하고 즉시 공격을 가했다. 공격은 리파우스키 대 위가 1,700m 상공에서 엄호하는 가운데 데이비스 대위가 저공비 행을 하면서 화차를 폭격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5발의 로켓탄 공격을 가한 후 데이비스 대위가 다시 급강하하여 발사한 마지 막 로켓탄이 중앙에 있는 화차에 명중하면서 큰 폭발음을 내는 순간 데이비스 대위의 기체도 좌우로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리한 저공비행으로 화차가 폭발하는 순간에 날아든 파편이 기체에 명중한 것이었다. 데이비스 대위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 에서도 끝까지 조종간을 놓지 않았다. 비상탈출의 기회마저 놓 친 그는 끝까지 침착성을 잃지 않고 얼마 후 엔진이 멎자 그의 무스탕기와 함께 안주 동북방의 한 야산에 추락하였다. 다행히 추락 순간 무스탕기의 한쪽 날개가 나뭇가지에 걸림으로써 데 이비스 대위는 오른쪽 어깨에 가벼운 찰과상만을 입었다. 무스탕기의 추락하는 동안에 상공에서 이를 끝까지 지켜본 리파우스키(Lipawsky) 대위는 추락지점 주위를 경계하면서 무전 기로 데이비스 대위와 교신을 시도했다. 기적적으로 데이비스 대위와의 교신이 이루어지자 리파우스키 대위는 신속히 구조헬 기의 투입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본부로부터 전해온 것은 구조 헬기가 모두 출동 중이어서 대기하라는 응답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때마침 인근 상공에서 관측임무를 수행 중 이던 조종사 로렌스(Lawrence) 대위와 관측장교 밀럿(Lewis Millit) 대위가 탑승한 미 제25사단 소속의 헬기 1대가 현장을 목 격하고 구조작업에 나섰다. 로렌스 대위가 조심스럽게 현장에 접근하여 헬기를 착륙시키자 밀럿 대위가 급히 달려가 데이비 88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수원비행장(K-13) 스 대위를 부축하여 자신의 헬기 좌석에 앉혔다. 부상당한 데이 비스 대위를 구출하고 대신 적지에 남겨진 밀럿 대위는 일몰직 전에 무사히 구출되었다. 밀럿 대위와 로렌스 대위의 국적을 초 월한 전우애는 후일 모든 유엔군 조종사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되었다. 이 무렵 남아공 장병들은 공산군의 MIG-15기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었다. 12월 7일 MIG-15기 1대가 수원비행장 상공을 저공 으로 비행하다가 북상한 데 이어 9일에는 MIG-15기로 추정되는 2대의 항공기가 수원비행장 부근에 폭탄을 투하하고 북상하였 다. 또한 10일에는 대대장 테론(Theron) 중령이 지휘하는 1개 편 대가 초계 임무를 수행하던 중 B-29폭격기를 엄호하던 미 F-51 기 9대와 MIG-15기 9대 간에 공중전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하였 다. 이 광경을 목격한 테론 중령은 MIG-15기의 뛰어난 고공회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89

ㅔ 구조헬리콥터 전과 상승 및 순간 기동성은 미 F-51무스탕기가 도저히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했다 고 회고하였다.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는 1950년 12월 13일에 6 25전쟁 참전 사상 또 하나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날 남아공 대대는 정식 으로 독립전투비행대대로서의 임무가 부여되었다. 이에 따라 12 월 17일에는 그동안 일본 존슨기지에서 잔류 중이던 본대가 한 국의 진해비행장(K-10)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선발대는 계속 수원비행장에 남아서 임무를 수행했다. 이 무렵 유엔 지상군은 30만 명에 달하는 중공군의 출현으로 미처 방어태세를 갖출 겨를도 없이 철수하였다. 유엔 지상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였고, 12월 중순에는 38도선 북방까지, 12월 말에 이르러서는 임진강-연천-춘천 북방-양양을 연하는 38 90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진해비행장을 이륙하는 F-51(1951. 1. 30). 도선 부근까지 철수하여 방어선을 형성하고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청천강을 넘어 평양을 점령한 중공 군은 12월 하순 개성-철원까지 진출하였다. 미 제5공군은 남하하는 중공군의 추격을 저지하고 적의 병참 선을 차단하는 데 주력하였다.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도 연일 개성-평양 상공으로 출격하여 중공군의 부대 집결지와 수송차량 을 공격하였다. 특히 12월 20일 남아공 대대는 20회를 출격하여 사리원-수안 지역에서 건물 57동, 트럭 15대, 철도역 1개소를 파 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50년 12월 하순 38도선 북방에 전개를 완료한 공산 군은 12월 31일을 기해 제3차 공세(신정공세)인 38도선 돌파작 전을 개시하였다. 미 제5공군 산하 전폭기들의 필사적인 저지에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91

ㅔ 도 불구하고 1951년 1월 4일 수도 서울은 또다시 공산군의 수중 에 넘어가게 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사전에 계획된 방어선인 북위 37도선(평택-삼척선)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수원비행장에 있던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 선발 대도 1월 5일 수원비행장에서 철수해 본대가 있는 진해비행장 으로 이동하였다. 이로써 남아공 대대는 이곳 진해비행장을 기 지로 하여 1953년 1월까지 약 2년 동안 항공작전을 전개하게 되 었다. 진해비행장 전경(1951. 12) 92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요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제2전투비행대대의 기지 이동 경로 (1950. 11 1953. 7)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93

ㅔ 제3절 진해비행장(K-10)에서의 작전 1. 유엔지상군의 재반격작전 지원 1951년 신년벽두에 중공군의 총공세로 또다시 수도 서울을 상 실한 국군과 유엔군은 북위 37도선인 평택-삼척선에 새로운 방 어선을 편성하고 재반격을 위한 전열을 정비하였다. 이 무렵 공 산군은 1월 7일에 수원-여주-강릉 선까지 진출하는 데는 성공하 였지만, 그동안에 입은 전력 손실로 인하여 더 이상 남진하지 못 하고 방어로 전환하였다. 극동공군사령관은 중공군의 공세가 둔화되자 제5공군 및 폭 격사령부에 공산군의 병참선을 차단하라는 지시를 하달하였다. 1951년 1월 19일부터 시작된 극동공군의 항공차단작전은 1950년 12월 15일에 하달된 극동공군사령부의 차단작전계획 제4호 (Interdiction Campaign No. 4) 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 차단작전 계획 제4호 는 북한전역을 11개 구역으로 구분하고 총 172개소 의 파괴대상 목표를 선정, 식별부호를 부여하였는데 철교 45개 소, 교량 12개소, 터널 13개소, 철도조차장 39개소, 보급소 63개 소가 망라되어 있었다. 스트레이트메이어 극동공군사령관은 북 한의 서북부와 중부 국경에 이르는 모든 철교와 철도조차장을 가용전력을 총동원해 파괴할 것을 폭격사령부에 지시하고, 제5 공군에는 중부전선과 연결된 모든 주요 철도와 간선도로의 교 량을 파괴하도록 임무를 부여하였다. 1월 19일부터 31일까지 진행된 이 작전은 6 25전쟁 기간 중 94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가장 규모가 크고 지속적인 차단작전이었다. 13일 동안 계속된 이 작전에서 유엔 공군은 철교, 교량, 철도조차장 등 80여 개의 목표물을 파괴하였다. 이 작전기간 중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는 주로 중부전선의 차단작전에 참가하였다. 대대는 북에서 한강 이남의 전선으로 이어지는 교량을 비롯하여 중공군의 부대집결지 및 보급소를 폭격하였다. 특히 대대는 1월 25일 춘천지구에서 적의 야전보급 소로 추정되는 건물 12동과 중공군이 집결한 5개의 부락 및 교 량 1개, 그리고 적 차량들을 파괴하였으며, 1월 26일에는 김화- 춘천지구에서 다음과 같은 전과를 올렸다. <표>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의 김화-춘천지구 차단작전 전과 목표 파괴 목표 파괴 유류탱크 1 부락 7 교량 2 탄약보급소 1 차량 4 대공화기진지 1 건물 75 산병호 15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는 김화-춘천지구에 더하여 동해안의 적 보급로 차단작전에도 참가하였다. 유엔공군에 의해 서북부 의 주요 수송로가 타격을 받자 공산군은 동부지역 해안에 인접 한 철도와 도로로 전환하여 보급품 수송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 동해안의 길주와 청진 철도조차장에서 500량 이상의 화차가 발 견되었고, 회령에서 청진, 함흥, 원산에 이르는 함경선을 따라 대규모의 적 병력 이동이 확인되었다. 이에 남아공 제2전투비행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95

ㅔ 대대는 진해비행장에서 미 제18전투폭격비행단 산하의 폭격기 들과 함께 동해안지역으로 출격해 적의 화차를 공격하였다.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는 차단작전 기간 중 나는 치타 로서 의 명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으며, 참전 이후 1951년 1월 말까 지 총 출격 868회에 비행시간 총 1948.20시간을 기록하였다.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를 비롯한 유엔 공군은 1951년 1월 31 일을 기해 차단작전을 종료하고 반격작전에 나선 지상군을 지 원하는 근접항공지원에 주력하였다. 신정공세 후 조중연합사령 관 펑더화이( 彭 德 懷 )는 전군에 전진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하달 하였다. 펑더화이는 식량보급의 문제, 혹심한 추위로 인한 낙오 병의 증가, 그리고 지나친 남진으로 또다시 유엔군에게 상륙작 전을 허용할 경우 치명적인 손실을 입게 될 것이라는 판단에 따 라 더 이상 진출하지 말도록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중공군과 북 96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한군은 1월 8일부터 전 전선에서 더 이상의 진출을 시도하지 않 은 채 휴식과 정비에 들어갔다. 갑자기 전선에서 사라진 적은 오히려 유엔군에게 불가사의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공세를 감행할 것으로 판단했던 중공군의 모습은 전선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 었다. 유엔군은 무작정 중공군의 공격을 기다리는 것만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인식을 버리고 전선에서 사라진 중공군을 찾아 나 서기로 했다. 당시 제8군사령관이던 리지웨이(Methew B. Ridgeway) 장군은 정찰부대의 규모를 확대해 증강된 1개 연대 규모의 위력수색으로 중공군의 배치와 규모, 앞으로의 의도 등 을 파악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를 미 제1군단에 지시했다. 제8군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미 제1군단이 1개 연대를 투입해 울프하운드(Wolfhound)작전 을 수행하였다. 1월 15 16일 이틀 간 실시된 위력수색 결과, 중공군의 방어선은 수원-이천을 연하 는 선이며, 화력지원과 보급수준이 매우 열악하다 는 사실이 확 인됐다. 또 중공군이 가까운 시일 내에 대규모의 공세를 취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는 점도 확인했다. 울프하운드작전 의 결과만으로 볼 때는 한강 선을 목표로 일 거에 밀어붙이는 적극적인 공세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울프하운드작전 보다 한 단계 높은 위 력수색을 실시하기로 했다. 오산과 여주를 연하는 서부지역에 서 한강까지의 구간에 5개의 통제선을 설정하고,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이 각각 1개 사단을 앞세워 통제선을 차근차근 점령해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97

ㅔ 나간다는 계획이었다. 작전의 명칭은 울프하운드작전 보다 강 력하고 신속하게 실시한다는 의미로 썬더볼트작전(Thunderbolt Operation) 이라고 명명했다. 이 계획에 따라 유엔 지상군은 1월 25일 07시 30분을 기해 오 산-여주를 연하는 선을 공격개시선으로 삼아 공격을 시작했다. 이 작전에는 유엔군의 지상군 병력 25만명(16개 사단, 3개 여단, 1개 공수연대)과 전차를 비롯해 각종 포가 총동원되었다. 썬더볼트작전 의 결과, 유엔 지상군은 1월 말 한강선까지 진출 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중부전선 에서 적의 압력을 제거하고 썬더볼트작전과 보조를 맞추어 한 강 남안에서 홍천으로 연결되는 선을 확보할 목적하에 라운드 업(Round Up) 작전 을 계획하였다. (사진) 혹한 속의 진해비행장 (사진자료를 어디서 구해야는지?... ) 98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유엔 지상군의 공격계획에 따라, 미 제18전투폭격비행단 예하 의 폭격기들과 함께 동해안지역에서 차단작전을 수행하던 남아 공 제2전투비행대대는 주력을 중부전선으로 돌려 유엔 지상군 의 라운드업 작전 을 지원하게 되었다. 이 때 공산군은 개전 초기에 비해 월등히 증강된 대공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공산군은 1950년 11월까지 1개 대공포연대와 10개 독립대공포대대, 2개 대공기관총중대를 추가로 신설하였 으며, 12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영양-강계 간 도로에서 유엔 공군 의 상시 비행경로를 따라 화기진지를 구축하였다. 또한 공산군 은 소위 비행기 사냥꾼 조 를 운영하였다. 1950년 12월 29일 북 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명의로 하달된 명령에 따라 비행기 사냥꾼 조 가 연대별로 2 3개씩 조직되었다. 비행기 사냥꾼 조 는 중기관총 및 경기관총을 포함한 보병 소화기로 항공기에 사 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며, 1951년 1월 중순 이후부터 군단 이하 모든 부대와 동 서해 연안을 방어하고 있던 전 부대 에서 대규모로 운영되었다. 이들 비행기 사냥꾼 조 는 유엔군의 항공기를 유인하기 위하여 배치지역을 은폐하고 모의차량과 대 포들을 설치하는 등의 기만활동을 벌여 매우 효과적인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공산군의 대공방어능력 향상은 유엔 공군조종사들에게 작전 상 큰 장애요소가 되었다. 2월에 들어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 에서도 참전 이래 처음으로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2월 2일 원산 상공에서 초계임무를 수행하던 윌슨(Wilson) 중위가 적의 대공 사격으로 대대의 첫 희생자가 되었으며, 2월 7일에는 동해안의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99

ㅔ 남아공 제2전투대대의 첫 전사자 레아(D. R. Leah) 소위 고원에서 적의 수송차량을 공격하던 레아(D. R. Leah) 소위가 적의 대공사격에 의해 격추되었고, 2월 15일 에는 개성부근에서 중공군 진지를 공격하던 도베튼 (G. D. Doveten) 중위가 대 공포화에 맞아 격추되었 다. 이렇듯 2월 한 달 동안 대대는 적의 대공사격에 의해 3명의 조종사를 잃는 비운을 맞았다. 한편 유엔군 측이 위력 수색작전과 소규모의 제한 목표 공격을 실시하는 동안 공산군은 재편성과 재보급과정을 통하여 차기 공세를 은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공산군은 서부 전선에서 유엔군과의 접촉을 피하면서 그동안 많은 병력을 중 동부 산악지대로 이동시켰다. 그들은 유엔군 전선 중에서 취약 한 중동부 지역을 선택하여 돌파를 실시하고 서부전선의 유엔 군 주력에 대하여 측면포위를 실시한다는 개념의 공격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공산군은 중동부전선에서도 지평리 지역과 횡 성 지역의 두 돌출부를 놓고 상당히 심사숙고 했다. 그들의 판 단에 의하면, 지평리는 서부전선의 유엔군을 동요시키고 동서 양 전선을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지만, 그곳은 유엔군 100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이 담당하는데다가 강력한 진지가 구축되어 있어서 공격이 용 이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단기간에 전투를 끝내지 못하면 후방의 유엔군 병력이 증원될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오히려 매우 불리한 위치에 처하리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반하 여 횡성은 비록 상대방 병력은 많으나 한국군만이 담당한 지역 이어서 화력이 약하였으며 병력 또한 고정 진지가 아닌 노출상 대에서 이동 중에 있었으므로 공격이 쉽고 초전기습을 통하여 한국군을 크게 혼란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즉 중공군은 미 군보다는 한국군이 맡은 취약지점을 찾아서 공격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중공군은 2월 9일 횡성을 목표로 하는 공격준비명령에 따라 신속히 병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한 후 2월 11일 17시 부를 기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른바 2월 공세 의 시작이었다. 이 지역을 맡고 있던 국군은 용전분투하였으나 워낙 중과부적이었 기 때문에 퇴로까지 차단된 상태에서 큰 혼란을 겪으며 거의 지 리멸렬되었다. 그 결과 한반도의 중앙지역이 공산군에게 돌파 되어 자칫하면 서부전선의 유엔군이 고립될 수도 있는 위기상 황이 초래되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미 제8군사령관은 지평리-원주 선을 확보하여 적의 돌파구를 막고자 결심하고, 이 지역에 대해 공군 의 집중적인 근접항공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5공군 은 2월 14 16일 사이에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 소속의 F-51편 대를 포함해 총 10개의 F-51편대를 연일 지평리-원주 일대에 투 입하였다. 이들은 T-6정찰기의 통제 하에 기총소사와 폭격을 가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101

ㅔ 하여 중공군의 2월 공세를 격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 을 수행하였다. 2월 24일 남아공 제2전투 비행대대는 참전 이후 처음 으로 7명의 조종사를 보충 받았으며, 2월 27일에는 대 대장 테론(S. V. B. Theron) 중령, 데이비스(J. F. O. Davis) 대위, 오덴달(H. O. M. Oddendaal) 대위, 리파 비행대대장 테론(S. V. B. Theron) 중령 우스키(G. B. Lipawsky) 대 위, 바덴호스트(W. J. J. Badenhorst) 대위 등 5명의 남아공 조종사들이 미국 정부로부터 미 공군십자훈장(Distinguished Flying Cross)을 수여받았다. 중공군의 공세를 격퇴시킨 여세를 몰아 유엔 지상군은 적을 추격하기 위해 곧바로 킬러작전(Killer Operation)에 돌입했다.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의 무스탕기들도 미 제18전투폭격비행 단의 전폭기들과 함께 계속해서 공격하였는데, 3월 1일 36회의 출격으로 제18전투폭격비행단 예하 부대들 중 최다 출격횟수 기 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날 남아공 대대는 공산군의 차량 7대, 전차 2대를 파괴한 것을 비롯해 적의 집결지로 추정되는 부락 7개 소를 전소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날 남아공 대대는 또다시 2명의 조종사를 잃었다. 전사자 중에는 3일 전 102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미 공군십자훈장을 수여받은 바덴호스트(W. J. J. Badenhorst) 대 위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신안주 상공에서 초계임무를 수행 하던 중 적의 대공포화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리고 원산 상공에 서 초계임무를 수행하던 루이터(D. A. Ruiter) 중위가 적의 대공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103

ㅔ 포화에 맞아 해상에 추락하여 전사하였다.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는 3월 4일에도 16회 출격하여 차량 12, 적의 야전보급소 1개를 파괴하였으며, 3월 5일에는 20회를 출격하여 차량 13대(완파 11, 파손 2), 교량2개(완파 1, 파손 1), 광산 및 터널 2개(파손 1), 부락 9개(완파 2, 파손 1)를 완파하거 나 또는 파손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2월 21일부터 진행된 킬러작전의 결과 유엔군은 어느 정도 전 선의 균형을 찾았지만, 제8군사령관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작전 명칭에 걸맞은 성과, 즉 공산군을 대 량살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제8군사령관은 곧바로 새로운 작전을 구상하고 3월 7일부터 작전개시에 돌입하도록 했다. 리퍼작전(Ripper Operation)이라 명명된 이 작전은 중동부전선에서 킬러작전의 연장선상으로 적 104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을 계속해서 압박하는 가운데 서부전선에서 본격적인 공격을 실시하여 수도 서울을 탈환한다는 것이었다. 미 제5공군 산하 유엔공군기들은 지금까지의 일일 평균 175회 의 출격회수를 약간 상회하는 일일 평균 182회를 출격하여 유엔 지상군의 리퍼작전을 지원하였다. 공격 개시 첫날인 3월 7일 미 제5공군은 575회를 출격하여 미 제25사단의 한강도하를 엄호하 였으며, 3월 8일에는 미 제5공군과 미 해병대의 전폭기들이 유 엔 지상군의 한강교두보를 공중 엄호하였다. 3월 9일 남아공 대 대는 제18전투폭격비행단 소속이 폭격기들과 더불어 중부전선 의 철원지역으로 출격해 적 차량 22대를 파괴하였다. 3월 10일부터 사기가 크게 떨어진 공산군은 14일에 전 전선에 서 저항을 포기하고 북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따라 유엔군은 서 부전선에서 서울을 재탈환하고, 중동부전선에서 홍천-주문진 선 을 확보하였다. 3월은 남아공 제2전투대대에 희비와 행사가 겹친 달이었다. 우선 3월 10일에 미 공군십자훈장을 받은 베테랑 조종사 데이비 스(J. F. O. Davis) 대위가 동해안에서 초계임무를 수행하던 중 적의 대공포화에 맞아 격추된 후 실종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 러한 안타까운 상황이 있었던 반면에 대대에는 미 극동공군사 령관으로부터 테론(Theron) 중령과 리파우스키(Lipawsky) 대위 가 미 공군훈장을 수여받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또한 3월 16일 에는 초대 비행대대장 테론 중령의 후임으로 암스트롱(R. F. Armstrong) 중령이 제2대 비행대대장에 취임하였다. 이러한 가 운데 3월 23일 남아공 대대는 기지를 진해에서 부산의 수영비행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105

ㅔ 장(K-9)으로 옮겼다. 이는 진해비행장의 시설보수를 위한 일시 적인 조치로서, 약 1개월간 대대는 수영비행장에서 임무를 수행 하였다. 리파우스키(G. B. Lipawski) 대위 남아공 제2대 비행대대장 암스트롱(R. F. Armstrong) 중령 106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2. 1951년 중공군의 춘계공세 저지 부산의 수영비행장으로 이동한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는 4 월 초까지 주로 2대의 F-51기로 정찰 임무를 수행하다가 4월 10 일이 지나면서부터 500파운드의 폭탄을 무장하고 적의 부대집 결지와 보습소 및 차량을 공격하였다. 4월 16일 대대는 참전 이 래 최대의 일일전과를 기록하였다. 이날 대대는 차량 33대, 전차 1대, 화차 12량, 대공화기 진지 2개 소 등을 파괴하였다. 이 시기 남아공 대대의 항공작전은 유엔 지상군의 철의 삼각 지 확보 작전에 조응한 것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3월 15일을 기해 1 4후퇴 이후 70일 만에 다시 서울을 탈환하였으며, 전진을 계속하여 3월 말에는 38도선을 다시 회복하였다. 계속해서 유엔 군은 38도선 방어에 유리한 지역으로서 일명 캔자스선 으로 불 리는 임진강-영평천-화천저수지-양양을 연결하는 요지를 점령하 였고, 중부지역에서는 캔자스선을 발판으로 와이오밍선 으로 불 리는 철원-김화로 다시 진격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공군은 다섯 번째 공세인 춘계공세를 개 시하였다. 이때 공산군 측은 6 25전쟁에 참전한 이후 최대 규모 인 3개 병단 11개 군 35개 사단의 중공군과 북한군을 총동원하 여 4월(4. 22 30)에는 서부전선(개성-화천)에, 5월(5. 16 22)에 는 동부전선(양구-인제)에 각각 주공을 지향해 총공세를 취하였 다. 남아공 제2전투행대대는 4월 23일 진해비행장으로 복귀하였 다. 약 1개월 만에 돌아온 진해비행장은 모든 시설들이 크게 개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107

ㅔ 선되어 있었다.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의 1951년 4월 24일자 전투일지(War Dairy) 에는 개선된 진해비행장이 현재 남아 프리카공화국에 있는 어떠한 비행장보다도 훌륭하다 고 기록하 였다.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는 중공군의 4월 공세 기간 중 임진강과 한강 상공으로 출격하여 적의 공세를 분쇄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참전 후 약 5개월간 나는 치타 로서의 진면 목을 유감없이 발휘한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의 활약에 대해 4월 말 극동군사령관 스트레이트메이어(George E. Stratemeyer) 장 군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감사장을 전달하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제2전투비행대대는 참전 이후 1951년 2월 12일까지 총 출격횟수 1,000회를 돌파하였고, 그 후 불과 2개월 만인 4월 12일을 기하여 총 출격횟수 2,000회라는 놀라운 기록을 수립하였다. 이와 같은 경이적인 출격률로 유엔군 지원에 크게 공헌한 귀 대대의 대대장 이하 장병 여러분들에게 본인은 아낌없 는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미 제5공군사령관 패트리지(Earle E. Patridge) 중장도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의 공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나는 미 극동공군사령관의 찬사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그 동안 귀 대대가 이룩한 빛나는 전투기록은 오직 평화를 사랑하는 남아프 리카공화국 국민들의 감투정신의 발로임을 확신하는 바이다. 대 대장 및 대대 장병들의 공헌을 높이 치하하며, 이는 귀 대대에 뿐 만 아니라 유엔참전국 모두의 영광임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108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진) 출격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조종사들과 환담하고 있 는 대대장 암스트롱 중령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의 기지인 진해비행장의 가장 큰 결 함은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 전상의 문제는 제18전투폭격비행단이 1951년 5월 2일부터 재무 장과 급유를 받을 수 있는 전진기지로 수원비행장(K-13)을 사용 할 수 있게 되면서 해소되었다. 수원비행장은 일제시기에 건설 된 비행장으로 전쟁 초기 1,560m이었던 활주로를 1951년 3월에 2,770m로 확장한 제5공군의 핵심 기지 중 하나였다. 남아공 대 대는 5월 7일 수원비행장에 전진기지요원을 파견하였다. 이로써 남아공 대대는 진해비행장에서 출격한 F-51기들이 수원비행장 에서 탄약과 연료를 중간 보급 받게 됨에 따라 일일 평균 2회의 출격을 더 할 수 있게 되었다. 중공군의 춘계공세 기간 동안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는 항 공차단작전과 근접항공지원, 그리고 북한지역의 비행장에 대한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109

ㅔ 폭격작전에 참여하였다. 제2전투비행대대의 차단작전은 평양-사리원-개성-주저항선 사이의 도로와 철로 등 공산군의 주보급로를 목표로 이루어졌 다. 특히 제2비행대대의 공격 목표물은 교량이나 터널처럼 보수 가 어려우면서도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지점을 대상으로 하였 다. 또한 공산군의 보급 트럭과 부대들은 나는 치타 의 좋은 표 적이 되었다. 5월 9일 신의주비행장 폭격을 제외하고 대대는 5 월 한 달간 차단작전에 전념하였다. 신의주비행장 폭격은 MIG-15기의 신의주비행장 이동설과 관련이 있었다. 당시 공산 군의 M-15기는 중국의 단동에서 출격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1951년 4월에 들어 북한기지로의 이동설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이에 미 극동공군사령부에서는 사전에 신의주비행장을 폭격해 사용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의 일환 으로 5월 9일 미 극동공군 예하 폭격기와 전폭기들이 신의주비 행장을 비롯해 반경 26km 일대에 대해 대규모 폭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이날 신의주비행장 폭격에는 미 극동공군 예하 4개의 폭격 및 전투폭격비행단에서 300대 이상의 폭격기와 전폭기들 이 참가하였다. 남아공 대대도 블라우(J. P. D. Blaauw) 소령이 16대의 F-51기를 지휘하여 압록강 유역 상공에서 유엔 해군의 항공모함과 구조함대들을 엄호하였다. 차단작전 수행 과정에서는 비상탈출 한 조종사를 구출하기 위하여 블라우 소령이 발휘한 전우애가 동료 조종사들의 눈시 울을 뜨겁게 만들었던 다음과 같은 일도 있었다. 5월 11일 편대장 블라우 소령의 지휘 하에 F-51 4기가 신계 110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111

ㅔ 신의주비행장 폭격을 지휘한 블라우(J. P. D. Braauw) 소령 부근에서의 차단작전을 수 행하기 위해 출격하였다. 이날 16시 40분에 편대는 신계 서쪽 10km 지점의 상 공에서 10여대의 적 차량을 발견하고 네이팜탄 공격을 가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 에서 크루거(V. R. Kruger) 중위의 F-51기가 적의 대공 포에 맞아 갑자기 붉은 화 염에 휩싸여 추락하였다. 다행히 조종사 크루거 중위 는 낙하산으로 탈출에 성공 했지만 어깨뼈가 탈골되고 왼쪽 손과 얼굴에 2도 화상을 입었 다. 블라우 소령은 크러로우(Clulow) 대위와 멘츠(Mentz) 중위에 게 크루거 중위의 주위를 공중 엄호하게 하고, 무전으로 구조대 와의 긴급연락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구조대와의 연락은 실패 하였으며, 설상가상으로 연료마저 부족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 다. 블라우 소령은 부하들을 즉시 수원비행장으로 귀환시키고 홀로 남아 크루거 중위를 엄호하면서 구조대의 도착을 기다 렸다. 크러로우 대위와 멘츠 중위가 기지로 돌아간 지 얼마 후 대대 로부터 4대의 무스탕기가 현지로 증원되었다. 이 때가 18시 45 분 경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블라우 소령의 무스탕기는 연 112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료가 떨어져 기지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급히 새 로 도착한 편대장에게 크루거 중위의 엄호를 당부하고 서서히 지상으로 하강해 기체착륙을 시도했다. 잠시 후 그의 기체는 크 루거 중위의 기체로부터 조금 떨어진 산기슭에 곤두박질쳤다. 블라우 소령은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코에 심한 찰과상을 입 어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었다. 그는 기체에서 나와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크루거 중위에게로 달려갔다. 이날 일몰 시간이 가 까운 19시 15분에서야 구조 헬리콥터가 도착해 이들 두 조종사 를 구출하여 지지로 돌아왔다. 크루거 중위는 즉시 병원으로 후 송되었으며, 다음날 미 공군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참전 이후 74회의 출격을 기록한 크루거는 얼마 후 병원에서 귀국 조치되 었다. (사진) 군목이 출격하는 조종사를 격려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113

ㅔ 1951년 공산군의 춘계공세는 가용전력을 총동원한 유엔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의해 구파발-홍천-하진부리-강릉을 연하는 선 에서 저지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공산군의 대규모 춘계공세 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자,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5월 말에 세 번 째로 38도선을 회복하고, 6월 중순에는 문산-연천-철원-김화-화 천-간성에 이르는 주요 지역을 점령한 다음 강력한 방어선을 구 축하기 시작하였다. 5~6월 사이에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는 뜻밖의 사고로 2명 의 조종사를 잃었다. 5월 15일 진해비행장에서 활주로를 이륙한 로크(M. H. Rorke) 중위가 원인불명의 추락사고로 사망한데 이 어, 6월 9일에는 리벤버그(T. LiebenBerg) 중위가 또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로 진해 외곽에서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6 25전쟁이 개시된 이후 공산군과 유엔군은 남과 북을 오르내 리며 일진일퇴를 거듭한 격동의 1년을 보내고, 다시 형성된 38 도선 부근의 새로운 전선에서 상호 대치하게 되었다. 이처럼 쌍 방이 새로운 방어선에서 대치하게 된 이유는 중공군이 춘계공 세에서 입은 치명적인 인명 손실로 인한 급격한 전력의 약화로 공격능력을 상실하였고, 미국 역시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유리한 상태에 있었으나 전쟁 이전의 상태에서 휴전을 모색한 다는 정치적인 결정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동안 수차례에 걸친 유엔과 미국의 휴전 제의를 묵살하고 있던 공산군 측이 1951년 6월 23일, 소련의 유 엔대표를 통해 휴전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7월 10일부터 휴전회담이 개시되었으며, 6 25전쟁은 새로운 국 114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공산군 측이 휴전을 제의한 다음날인 6월 24일 남아공 제2전 투비행대대는 22회를 출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는데, 특히 마샬 (G. M. Marshall) 중위가 이끄는 4기의 F-51편대의 활약이 유엔 공군조종사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이날 일몰시간이 거의 다된 19시 45분에 수원기지를 출발하여 서해안을 따라 목표지점인 개 성 북방으로 북상 중, 갑자기 항공통제반으로부터 공격목표가 개성 동남쪽 10km지점의 중공군 집결지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급히 기수를 돌려 이들이 목표상공에 도착했을 때 에는 이미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데다가 주변의 지형도 전투기 들의 저공공격에 대단히 불리하였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공격 을 주저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더욱이 이들이 도착하자마자 골짜기에 위장 배치된 적의 대공화기가 불을 뿜기 시작하였다. 목표상공에서 한 바퀴 큰 원을 그리며 선회한 이들은 편대장의 무스탕기를 선두로 하여 대공포화 속을 뚫고 급강하 공격을 개 시하였다. 이 공격으로 마샬 중위가 이끄는 편대는 중공군의 40 mm포 2문과 2개의 자동대공화기진지를 파괴하였다. 6월 28일 진해비행장의 대대본부에서는 미 제18전투폭격비행 단 참모들을 비롯해 대대 전 장병들이 참석한 가운데 존스(E. R. Jones) 중위, 리쳐(F. B. Richter) 중위, 딘스(D. D. Deans) 중위 들 3명의 조종사들이 미국 정부로부터 미 공군십자훈장을 수여받 았다. 1951년 4월 22일부터 1951년 6월 24일까지 남아공 제2전투비 행대대는 1,130회의 출격회수를 보였으며, 작전별 유형은 차단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115

ㅔ 작전이 84.4%, 근접항공지원이 8.4%, 구조활동이 3.6%, 비행장에 서의 대공작전이 3.6% 등이었다. 도로와 철로를 목표로 한 공격 시 F-51 한 대당 기본 무장에는 500파운드(227.3킬로그램) 다목적 폭탄(G.P. bombs)과 5인치 (127밀리) 고속항공로켓 6발이 포함되었다. 보급지역에 대한 공 격과 근접항공지원 임무를 수행할 때에는 네이팜이 채워진 110 갤런(416.35리터)의 낙하탱크 2개가 다목적 폭탄을 대신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네이팜탄으로 무장한 무스탕기 2대와 다목적 폭탄으로 무장한 무스탕기 2대가 동시에 출격하여 임무를 수행 하기도 했다. 공격 시에는 먼저 목표물에 다목적 폭탄과 네이팜 탄이 사용되었으며, 이후 보조화기(secondary ordnance)가 임기 표적(target of opportunity)에 활용되었다. 이 보조화기는 간혹 합동작전통제소(JOC)에 의해서 차단임무가 지상군에 대한 근접 항공지원 임무로 전환되었을 때 매우 유용하다는 점이 입증되 었다.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의 근접항공지원은 주로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에 집중되었다. 1951년 6월 이후 전선이 고착되자 7 월부터 근접항공지원작전 소요는 이전보다 급감하였다. 이는 지상전이 소규모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전선에 위치한 공 산군이 항공공격에 적합하지 않은 소규모로 광범위하게 은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모스키토 항공통제기와 육군부대에 파견 나가있던 공군 연락장교들의 정찰결과도 이러한 사실들은 뒷받침하고 있었는데, 모스키토기 조종사들은 공산군이 지하에 깊숙이 들어가 있지는 않으나 광범위한 분산으로 항공공격 목 116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표로는 부적합하다고 평가하였고, 미 제1기병사단에 파견되어 있던 커리(Roswell E. Currie) 소령은 공산군의 벙커가 병력 5명 이하만이 들어갈 수 있는 소규모이며 전선지역의 공산군도 최 소단위로 최대한 분산 배치되어 있어 항공표적으로는 너무 빈 약하다고 보고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근접지원 비행규모의 감 소로 나타났다. 미 제5공군사령관은 근접항공지원 임무를 남아 공 제2전투비행대대가 소속된 공군 제18전폭비행단과 미 제1해 병비행단에 전담시켰다. 3. MIG-15기와의 대결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개시될 때,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쌍 방은 협상이 최종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군사작전을 계속한다는 전제하에 회담을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휴전회담 기간 중의 군 사작전은 휴전회담의 추이와 밀접한 관계 하에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즉,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에는 전선이 소강상태를 유지하였으며, 회담이 결렬 또는 지연될 경우에는 전투가 치열 하게 전개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전투는 휴전회담의 주도권 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으며, 제한적 성격을 벗어 나지 못하였다. 휴전회담 기간 중 공산군의 전쟁목표는 38도선 을 군사분계선으로 하는 휴전 이었고 전략목표는 휴전회담에서 의 유리한 여건 조성과 그들의 손실된 공세역량 회복을 통한 군 사력 우위의 확보 이었다. 이는 소련의 스탈린과 북한의 김일성, 그리고 중국의 마오쩌둥 간의 합의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117

ㅔ 하지만 이러한 전쟁목표와는 달리 그 이면에는 공산군 측이 밖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은 전략적 의도가 담겨 있었다. 공산군 측에게 휴전은 단지 밖으로 드러난 명분상의 전쟁목표였을 뿐 이고, 그들이 휴전회담 기간을 이용하여 실질적으로 수행하고자 했던 군사전략은 적극적 방어를 통한 지구전과 춘계공세에서 입은 전력손실을 만회하기 위한 공세역량 만회, 전선지역의 방 어진지 요새화, 그리고 그들의 열세한 공군력과 화력을 집중적 으로 증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적 의도 하에 공산군 측은 휴전회담에 임하였고 작전을 지도하여 나갔다. 마오쩌둥은 1951년 6월 중순에 지구작전( 持 久 作 戰 )과 평화회 담을 통하여 전쟁을 마무리 짓는다. 는 전쟁지도방침을 결정하 면서 이를 수행할 군사전략으로 지구작전과 적극방어를 강조하 였던 것이다. 즉, 마오쩌둥은 조선에서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한편으로는 적극방어의 수단으로 유엔군의 유생역량을 대량 살상시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적 극적인 장비개선과 훈련의 강화로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증 대시켜 점차 적군과 아군과의 전력대비( 戰 力 對 比 )를 바꾸어 최 종적으로는 승리하거나 또는 적군으로 하여금 어려움을 알고 물러나게 한다. 는 전쟁지도방침을 택하였다. 중공군은 이러한 전략에 따라 휴전회담으로 인한 전선의 소 강상태를 이용하여 그들의 방어선을 3중으로 편성하고, 유엔군 의 항공폭격이나 지상포격에도 견딜 수 있는 유개화( 有 蓋 化 ) 또 는 엄체화( 掩 體 化 ) 진지를 구축하였다. 또한 중공군은 야포와 고사포 등의 화기와 장비를 전방으로 추진하는데 그들의 역량 118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을 집중하였다. 아울러 그들은 소련으로부터 항공기가 2개월 내 로 지원될 것을 고려하여 9월 공세를 목표로 전력의 정비와 강 화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특히 중공군은 휴전회담이 시작된지 불과 10일 밖에 안 된 7 월 20일부터 이미 유엔군 전초선으로부터 1~5km 떨어진 지역의 주요 지형지물에 전초저항선을 설치하고 이곳에서 유엔군의 작 전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하였다. 유엔군은 이러한 공산군의 전 술적 변화가 종전의 적 방어전술의 관행이나 교리와는 다른 것 으로 판단하였다. 실제로 중공군은 유엔군의 정찰활동에 대해 보다 강력히 대응하면서 유엔군의 주요 작전지역에 대한 정찰 및 탐색활동을 강화하였다. 또한 중공군은 장마로 인한 불량한 기상조건을 이용해 부대를 전방으로 추진 배치하였다. 이러한 중공군의 활동에 대해 유엔군은 중공군이 부대배치의 조정 없 이 곧바로 공격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춘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처럼 중공군은 처음부터 휴전회담의 조기 타결에 뜻을 두 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숨은 의도는 휴전회담을 지연시키면서 춘계공세에서 입은 전력손실을 신속히 보충하고 나아가 공세역 량을 축적하여 군사적 우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공산군은 군 사적 우위를 확보하면 이를 토대로 군사적 대공세를 취하거나, 휴전회담장에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려고 하였다. 그런 점에 서 휴전회담은 그들에게 전력의 복구와 지구전에 의한 승리획 득의 한 방편일 뿐 휴전회담의 조기타결 자체가 전략적 목표가 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휴전회담은 시작부터 지연된 반면 공 산군의 전력은 점차 강화되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119

ㅔ 한편 유엔 및 미국의 전쟁목표는 명예로운 휴전 이었다. 미국 은 이러한 전쟁목표를 추진하는데 있어 유엔의 수락과 유엔 기 구를 통해 당면 현안을 해결한다는 방침이었다. 이러한 토대위 에서 미국이 수립한 휴전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휴전협정으 로 적대행위를 종결한다. 둘째, 38도선 남쪽에서 대한민국의 통 치권을 수립한다. 셋째, 한국에서 외국군을 단계별로 철수하게 한다. 넷째, 북한의 새로운 침략을 저지하거나 격퇴할 수 있도록 한국군의 건설을 허용한다. 한편 미국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가 소련과의 전면전으로 이 어지거나, 동맹국의 지원을 얻지 못한 채 한반도를 벗어나 중국 으로 확대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휴전협정이 체결 될 때까지 미국은 침략자에 대한 징벌을 계속할 것이라고 주장 하였다. 또한 미국은 휴전회담에서의 토의 주제는 한국과 한국 내의 군사문제로 엄격히 제한되어야 하며 어떤 정치적 영토적 문제(중국의 유엔가입, 대만문제 등)와 관련되어서도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미국의 휴전정책과 전략을 지원하고 군사적으로 뒷받침할 유 엔군사령부는 미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전략지시를 받 아 이를 수행하였다. 유엔군사령부는 지상 작전에 대해서는 미 제8군사령관을 통해, 해군작전은 미 극동해군사령관을 통해, 그 리고 공군작전은 미 극동공군사령관을 통해 작전을 지도하였다.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이 휴전회 담을 전후하여 워싱턴으로부터 하달 받은 전략지시는 휴전을 위해 노력하면서 대한민국이 통치하게 될 38도선 이남지역을 반 120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드시 확보하라는 것이었다. 이 에 따라 휴전회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캔자스-와이오밍선 이 북으로의 북진을 제한하였다. 이에 따라 휴전회담 기간 중 유엔군의 작전목표도 휴전회담 의 타결을 지원하고 유엔군의 방어선을 개선하며 공산군의 공세역량을 저지하는데 중점을 두게 되었다. 아울러 유엔군의 버스터(J.P. Verster) 소위 군사작전도 이러한 제한전쟁전 략에 따라 제한된 목표에 대한 작전만을 실시하게 되었다. 휴전회담이 시작된 1950년 7월의 항공작전은 기상악화로 인 해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에게 있어 7 월은 또 다시 유능한 한 명의 조종사를 잃는 것으로 시작되었 다. 7월 1일 아침 일찍 진해비행장에서 새로 보충된 F-51전폭기 1대를 전진기지로 운반하기 위해 출발한 조종사 버스터(J. P. Verst) 소위가 도중에 행방불명되었다. 그는 이틀 후 대구 북쪽 산악지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기체의 잔해와 함께 발견된 것으로 보아 기관고장으로 인해 추락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1951년 7월 8일은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가 6 25전쟁에 참 전한 이래 말로만 듣던 MIG-15제트기와 첫 공중전을 벌인 날이 었다. 이날 대대장 암스트롱(R. F. Armstrong) 중령은 2개의 F-51 기 편대를 이끌고 미 제18전투폭격비행단 소속의 F-51전폭기 24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121

ㅔ 대와 함께 강동비행장(평야 동북방 30km) 폭격에 나섰다. 현지 상공에 도착한 남아공 2개 편대는 사전 계획에 따라 선 두의 미 전폭기들의 공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4개의 미 F-51 6기 편대가 일렬종대로 비행장을 가로지르며 일제히 폭격을 가 하고 급선회하여 북쪽으로 사라지자 남아공 비행대대장 암스트 롱 중령이 각 편대에 일렬 종대형의 공격을 명령하였다. 이는 공격 목표에 대한 조종사들의 시계를 고려한 공격대형이었다. 8 대의 남아공 무스탕기들은 일제히 활주로를 가로지르며 급강하 하여 500파운드의 폭탄을 투하한 후 급상승 하여 정상고도를 회 복하였다. 이와 같은 남아공 조종사들의 저공폭격으로 투하한 16발의 폭탄 중 15발이 활주로에 명중하였다. 남아공 무스탕기들이 폭격을 마치고 대형을 정리하고 있을 122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야간정비에 여념이 없는 남아프리카공군 정비사 때 북쪽 상공에서 MIG-15기들이 출현하였다. 2대의 MIG-15기가 미 전폭기들의 뒤를 바짝 추격하면서 사격을 가한 후 기수를 돌 려 남아공 무스탕 편대 쪽으로 돌진해 왔다. 당시 남아공 제2전 투비행대대의 무스탕기 8대는 고도 7,000ft 상공에서 동쪽으로 비행 중이었는데, 북쪽에서 공격해 오는 MIG기 2대 이외에도 남 쪽에서 갑자기 출현한 2대의 MIG기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2대의 MIG-15기가 대대 무스탕기들의 상공을 선회하며 접 근해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상황의 위급함을 직감한 대대장 암스트롱 중령은 각 편대에 기수를 뒤로 돌리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8대의 무스탕기들이 일제히 급선회하면서 방향을 180도 전 환하여 정반대인 서쪽으로 비행을 하였다. 이렇게 되자 남쪽과 북쪽에서 거리를 좁히면서 협공의 기회를 노리던 MIG-15기들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하여 잠시 멈칫하더니 MIG기 특유의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123

ㅔ 공산군의 주력항공기인 MIG-15기 급상승력을 이용해 수직으로 태양을 향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에도 MIG기들은 수차례에 걸쳐 남아공 무스탕 편대에 공격 을 시도했지만 별다른 실효를 얻지 못하고 기수를 북쪽으로 돌 렸다. 때마침 긴급연락을 받고 출격한 35대의 미 F-80제트기가 상공 에 나타나 MIG기와 공중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3대의 MIG-15기가 격추되었으며, 나머지는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MIG-15기와의 첫 공중전 이후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는 장 마철의 기상 악화로 대기하다가 7월 22일 오래간만의 화창한 날 씨를 맞아 총 15회를 출격하였다. 이날의 출격 중 12회가 적 후 방 차단임무였으며, 3회가 유엔 지상군의 작전을 근접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날 작전에서는 귀국을 불과 며칠 앞둔 스타트(Staat) 중위가 동해안 지역에서 대공포를 맞고 격추되었다가 구사일생 으로 구조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124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미 공군의 F-80슈팅스타 전투기 같았다. 이날 스타트 중위는 14시 40분에 온정리 동쪽 5km 상공 에서 중공군의 야전보급소를 발견하고 폭격을 가하던 중 적의 대공포화가 무스탕기 왼쪽 날개에 적중하였다. 그는 기지로 돌 아갈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비상탈출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지상 에는 적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낙하산 탈출 시에 적의 포로가 될 것이 분명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지상보다 해상에서 비상탈 출 하는 것이 안전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참전 후 그는 여러 차 례 동해안지구로 출격한 바가 있어 원산항 부근의 지형에 밝은 데다가 원산 앞바다에는 항상 여러 척의 유엔 해군 구축함이 해 상작전을 수행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동료들의 엄호 하에 해상으로 나아가 탈출한 후 미 해군에 구조되어 구축 함 편으로 일본의 사세보 항을 경유해 7월 26일 진해비행장에 복귀하였다. 1951년 7월 23일은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가 최악의 불운을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125

ㅔ 겪은 날로 기억된다. 이날 출격한 F-51기 편대 중 편대장을 포함 한 3명의 조종사가 행방불명되었다. 베이커(F. M. Bekker) 대위 를 편대장으로 한 드 프루이(du plooy) 중위, 그린(D. A. R. Green) 소위, 할리(M. I. B. Halley) 소위 등 무스탕 4기 편대는 각각 500파운드 폭탄 2개, 로켓탄 6발, 그리고 50mm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서해안 정찰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5시 50분에 전진기 지를 출발해 한강을 따라 서북쪽으로 향했다. 고도 450m의 저공 비행으로 한강 하구에서 기수를 북쪽으로 돌릴 때부터 기상이 악화되어 더 이상의 진출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은 구름 속을 뚫고 계속 서북진하여 해주 동쪽까지 진출했다. 편대장 베이커 대위는 더 이상의 정찰활동이 불가능하다고 판 단하고서 적절한 공격목표를 찾아 폭격을 가한 후 기지에 돌아 가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그 곳에서 마땅한 공격목표를 발 견하지 못한 남아공 비행편대는 다시 기수를 돌려 15시 30분 경 시변리 상공에 도착하였다. 이 무렵 기상은 더욱 악화되어 210m 450m의 낮은 구름층이 일대를 완전히 뒤덮었다. 잠시 시변리 외곽을 맴돌며 공격목표를 찾던 이들은 15시 40분 경 시변리와 금천을 잇는 교량 하나를 발견하고 즉시 공격을 개시 하였다. 이들은 급강하하면서 폭격을 반복한 끝에 교량을 완전 히 파괴한 후 다음 목표를 찾아 다시 그 일대를 선회하기 시작 하였다. 이들 편대가 90m정도로 추정되는 자그마한 구릉을 막 통과할 무렵이었다. 돌연 편대장 베이커 대위의 무스탕기에서 검은 연 기가 일기 시작하더니 덮개가 떨어져 나가고 왼쪽 날개가 온통 126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화염에 휩싸였다. 불길이 차츰 조종실 쪽으로 번져 베이커 대위 의 모습이 환하게 들여다보이는 순간, 쾅하는 폭음과 함께 기체 가 크게 좌우로 요동치며 고도를 잃고 지상으로 곤두박질하였 다. 그 순간 그린 소위의 무스탕기마저 베이커 대위의 기체에서 날아오는 파편을 피하느라 급하게 구름층으로 방향을 돌린 탓 에 자동방향조정기가 고장이 났다. 한동안 구름 속에서 방향을 잃고 헤메던 그린 소위는 과감한 급강하 비행으로 구름 속을 벗 어나 정상위치를 되찾았다. 구름 속에서 벗어난 그린 소위는 약 60m의 야산 중턱에 추락 한 편대장의 무스탕기를 발견하고 지상 6m까지 급선회 강하하 여 베이커 대위의 생사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이 때 그는 또 하 나의 낙하산이 내려오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다른 동료의 무스 탕기들과 무전교신을 시도한 결과, 할리 소위가 갑작스러운 기 관고장으로 탈출하게 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할리 소위는 편대 장 베이커 중위의 무스탕이 추락한 야산 건너편 좌측 골짜기에 낙하하여 수신호로 동료들에게 무사함을 알렸다. 이렇듯 순식 간에 2명의 동료를 잃은 프루이 중위와 그린 소위는 추락한 동 료들을 엄호하면서 구조본부에 구조요청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무전의 교신상태가 불량하여 구조의 요청마저 불가능한 데다가 기상이 점점 악화되었다. 결국 연료의 부족을 염려한 이들은 최 후의 수단으로 프루이 중위가 현지에 남아 공중엄호하고 그린 소위가 구조본부와 교신이 가능한 곳까지 남하하여 구조요청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쉴 사이 없이 날아드는 적의 50mm기관총탄 과 20mm 공포탄 속을 뚫고서 기수를 서남쪽으로 돌린 그린 소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127

ㅔ 위는 저공으로 남하하면서 구조본부와 계속해서 무전연락을 시 도하였다. 현지로부터 서남쪽으로 약 10km를 남하한 끝에 그린 소위는 기적적으로 구조 요청 교신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최악 의 기상조건하에서 구조헬기가 현장에 직접 접근하는 것이 불 가능하다고 판단한 그린 소위는 구조본부에 현지의 기상상태를 설명하고서 구조헬기를 기상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개성 동쪽 16 km 지점 상공으로 보내주면 자신이 직접 현지로 안내하겠다고 하였다. 그린 소위가 구조본부와 교신하는 동안에 현장의 프루이 중 위는 사방에서 할리 소위를 생포하고자 달려드는 적병들에게 쉴 사이 없이 기총소사를 퍼부으며 구조헬기의 도착을 기다렸 다. 숨가쁜 상황 속에서 약 45분이 경과했을 무렵 프루이 중위 는 탄약이 떨어져 더 이상 할리 소위를 엄호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비통한 소식은 무선을 통해 그린 소위에게도 전달되었 다. 그린 소위가 구조헬기를 인도해 현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 미 할리 소위가 적의 포로가 된 후였다. 그린 소위는 구조헬기의 조종사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전달 한 후 프루이 중위와 교신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프루이 중위로 부터는 어떠한 응답도 없었다. 얼마 후 그린 소위는 요란한 폭 음과 함께 무스탕기 1대가 지상으로 추락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또한 그는 추락하는 무스탕기 옆에서 낙하산 하나도 목격하였 다. 그러나 그는 구조헬기를 엄호하는데 잠시 동안 정신을 빼앗 겨 낙하산의 낙하지점을 끝까지 확인하지 못하였다. 그린 소위는 계속해서 프루이 중위와의 교신을 시도했지만 128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끝내 응답을 듣지 못했다. 게다가 무스탕기의 연료가 불과 15갤 런에 지나지 않아 그는 더 이상의 수색을 단념하고 헬기를 호위 하면서 기지로 돌아왔다. 이리하여 이날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는 3명의 조종사를 잃 게 되었다. 할리(M. I. B. Halley) 소위는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 음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으나 베이커(Bekker) 대위와 프루이 (Du plooy) 중위는 영영 행방불명자의 명단에 남게 되었다. 얼 마 후 프루이 중위에게는 미국 정부로부터 은성무공훈장이 수 여되었다. 7월 27일에는 대대장 암스트롱(R. F. Armstrong) 중령이 임기 를 마치고 귀국하게 됨에 따라 그의 후임으로 참전 초기부터 부 대대장을 역임한 블라우(J. P. D. Blaauw)소령이 중령으로 승진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129

훈장을 받고 동료들과 기뻐하는 남아공 제2전투비행대대 장병들 함과 동시에 제3대 대대장으로 취임하였다. 8월 17일 진해비행장 대대본부에서는 미 제18전투폭격비행단 의 참모들이 참석한 가운데 무공훈장의 수여식이 거행되었다. 130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ㅔ

로저스(R. H. Rogers) 대위가 미 공군십자훈장을 받았으며, 우이 스(M. J. Uys) 대위, 스트리덤(M. Strydom) 대위, 보타(W. P. B. Botha) 상사, 레이콕(T. C. Laycock) 기사가 미 동성훈장을 받았다. 4. 스트랭글 작전(Operation Strangle) 1950년 7월, 휴전협상이 시작되면서 지상에서의 전선은 교착 되었다. 이 기회를 이용해 공산군은 보급품과 장비를 전선지역 으로 추진하여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였다. 유엔군사령부의 정 보판단에 의하면, 공산군이 전선 배후에 매일 최소 800톤 이상 의 보급품을 추진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유엔군의 입장에서는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들어오는 전쟁 물 자와 후방에서 전선으로 추진되는 보급물자의 차단이 무엇보다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선의 제한을 받지 않는 항공 전력은 공산군의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는 유일 한 군사적 대안이었다.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극동공군사령부에 북한지역 내의 군수시설과 교통요지에 대한 강력한 후방차단작전 수행하 도록 지시하였다. 극동공군사령부에서는 제8군사령부의 정보판 단에 근거해 철도를 주요 공격목표로 선정하였다. 이는 다음과 같은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공산군은 사리원 이남지역에 총 60개의 사단을 보유하고 있다. 각 사단의 보급품 소요를 40톤으로 가정할 때, 1일 총 2,400톤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131

ㅔ 의 보급품이 필요하다. 이는 2톤 트럭 1,200대 또는 20톤 화차 120대의 분량이다. 공산군은 화물수송에 주로 철도를 이용한다. 이는 화차가 차 량에 비해 적재량이 많고 연료인 석탄이 북한 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도수송은 노출이 크고 차 량처럼 우회로를 이용할 수 없다는 취약점을 갖고 있다. 따 라서 철도를 공격목표로 선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철로를 통한 보급품 수송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교량, 열차(화 차), 궤도 및 노반을 파괴하는 방안이 있었다. 극동공군사령부는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열차와 교량보다는 궤도와 노반을 파 괴하는 것이 공격효과를 높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극동공군사령부는 본격적인 작전에 앞서 7월 말에 궤도 및 노 반에 대한 시험 공격을 실시하였다. 미 제5공군 소속의 전폭기 들이 철로에 대한 도약, 강하, 활공 폭격을 실시하여 매우 훌륭 한 결과를 얻었다. 특히 100파운드 폭탄을 이용한 활공폭격은 명중률이 대단히 높았다. 이 시험공격의 결과를 바탕으로 극동 공군사령부는 철도차단작전의 주목표를 궤도와 노반으로 선정 하고, 궤도보수를 위한 이동을 지연시키기 위해서 교량파괴를 보조목표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제5공군에 철도차단작전 임무 를 부여했다. 철도차단작전을 맡게 된 제5공군은 작전기간의 단축과 성과 의 극대화를 위해 극동해군과 폭격기사령부에 지원을 요청하였 다. 즉 제5공군사령관은 극동해군사령관에게 한반도를 횡단하 132 영원한 동반자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요도) 스트랭글작전 임무지역 는 삼동리-고원간의 철도지선과 길주-원산-평강으로 이어지는 동해선의 차단을 요청하였으며, 폭격기사령부에는 평양, 순천, 신안주, 선천 지역의 주요 철도교량에 대한 폭격을 요청하였다. 이 철도차단작전은 교살작전(Operation Strangle) 이라 명명되 었으며, 8월 18일부터 작전환경에 문제가 없는 한 매일 지속될 예정이었다. 제5공군은 선천-사리원간 복선철도와 희천-군우리-순천을 연 결하는 단선철로의 파괴에 주력하였다. 제5공군은 일일작전명 령을 통해 예하 각 전투폭격비행단에 15~30마일의 철도구간을 할당하고 매일 두 차례씩 지정구간을 공격하게 하였다. 임무를 남아프리카공화국군의 주요 전투 활동 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