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Similar documents
3232 편집본(5.15).hwp

<BFBEBEC6C0CCB5E9C0C720B3EEC0CC2E20B3EBB7A120C0CCBEDFB1E220C7D0B1B3202D20C0DAB7E1322E687770>

참고 금융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 1. 개인정보보호 관계 법령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령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전자금융거래법 시행령 은행법 시행령 보험업법 시행령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 시행령 자본시장과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 hwp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개

<BCBAC1F6BCF8B7CA28C3D6C1BE2933C2F72E687770>

???? 1

새만금세미나-1101-이양재.hwp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3130BAB9BDC428BCF6C1A4292E687770>


3) 지은이가 4) ᄀ에 5) 위 어져야 하는 것이야. 5 동원 : 항상 성실한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해. 에는 민중의 소망과 언어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고,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 는

기사스크랩 (160504).hwp

< FB9AEC3A2B0FA5FC3A5C0DA2E687770>

산림병해충 방제규정 4. 신문 방송의 보도내용 등 제6 조( 조사지역) 제5 조에 따른 발생조사는 다음 각 호의 지역으로 구분하여 조사한다. 1. 특정지역 : 명승지 유적지 관광지 공원 유원지 및 고속국도 일반국도 철로변 등 경관보호구역 2. 주요지역 : 병해충별 선단

김기중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인터넷 내용심의의 위헌 여부.hwp


- 2 - 정보 1 北 조평통, 박근혜 후보 대북정책 공약 비난 "이명박 대결정책과 다를 바 없어" 북한은 8일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가 최근 발표한 대북정책 공약을 `전면대결공약'이라고 비난했다. 북한의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은 이날 조선중앙통신 기자

<B9E9B3E2C5CDBFEFB4F5B5EBBEEE20B0A1C1A4B8AE20B1E6C0BB20B0C8B4C2B4D92E687770>

주지스님의 이 달의 법문 성철 큰스님 기념관 불사를 회향하면서 20여 년 전 성철 큰스님 사리탑을 건립하려고 중국 석굴답사 연구팀을 따라 중국 불교성지를 탐방하였습 니다. 대동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공의석굴, 맥적산석 굴, 대족석굴,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과 주변의 큰

래를 북한에서 영화의 주제곡으로 사용했다든지, 남한의 반체제세력이 애창한다 든지 등등 여타의 이유를 들어 그 가요의 기념곡 지정을 반대한다는 것은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는 반민주적인 행동이 될 것이다. 동시에 그 노래가 두 가지 필요조 건을 충족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 1. 법 제34조제1항제3호에 따른 노인전문병원 2. 국민건강보험법 제40조제1항의 규정에 의한 요양기관(약국을 제외한다) 3. 삭제< > 4. 의료급여법 제2조제2호의 규정에 의한 의료급여기관 제9조 (건강진단) 영 제20조제1항의 규

노인복지법 시행규칙

7,560일간의 드라마 여행

<C3D6BFECBCF6BBF328BFEBB0ADB5BF29202D20C3D6C1BE2E687770>

입장

14백점수학5월3년정답(01~14)

과 위 가 오는 경우에는 앞말 받침을 대표음으로 바꾼 [다가페]와 [흐귀 에]가 올바른 발음이 [안자서], [할튼], [업쓰므로], [절믐] 풀이 자음으로 끝나는 말인 앉- 과 핥-, 없-, 젊- 에 각각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인 -아서, -은, -으므로, -음

177

제주어 교육자료(중등)-작업.hwp

¸é¸ñ¼Ò½ÄÁö 63È£_³»Áö ÃÖÁ¾

민주장정-노동운동(분권).indd

<C0CEBCE2BABB2D33C2F7BCF6C1A420B1B9BFAAC3D1BCAD203130B1C72E687770>

6±Ç¸ñÂ÷

< BDC3BAB8C1A4B1D4C6C75BC8A3BFDC D2E687770>


최우석.hwp

<C3D6C1BE5FBBF5B1B9BEEEBBFDC8B0B0DCBFEFC8A C3D6C1BEBABB292E687770>

E1-정답및풀이(1~24)ok

초등국어에서 관용표현 지도 방안 연구

<C1B6BCB1B4EBBCBCBDC3B1E2342DC3D6C1BE2E687770>

untitled

교사용지도서_쓰기.hwp

cls46-06(심우영).hwp

0429bodo.hwp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01Report_210-4.hwp

<C3D1BCB15FC0CCC8C45FBFECB8AE5FB1B3C0B0C0C75FB9E6C7E D352D32315FC5E4292E687770>



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시험지 출제 양식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상품 전단지

::: 해당사항이 없을 경우 무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검토항목 검 토 여 부 ( 표시) 시 민 : 유 ( ) 무 시 민 참 여 고 려 사 항 이 해 당 사 자 : 유 ( ) 무 전 문 가 : 유 ( ) 무 옴 브 즈 만 : 유 ( ) 무 법 령 규 정 : 교통 환경 재

2

DBPIA-NURIMEDIA

화이련(華以戀) hwp

ÆòÈ�´©¸® 94È£ ³»Áö_ÃÖÁ¾

歯1##01.PDF

<5BC1F8C7E0C1DF2D31B1C75D2DBCF6C1A4BABB2E687770>

120229(00)(1~3).indd

DBPIA-NURIMEDIA

4) 이 이 6) 위 (가) 나는 소백산맥을 바라보다 문득 신라의 삼국 통 일을 못마땅해하던 당신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더 커지는 것이라는 당신의 말을 생각하면, 대동강 이북의 땅을 당나라에 내주기로 하고 이룩한 통 일은 더 작아진 것이라는 점에서,

레이아웃 1

e01.PDF

-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진행과정 후쿠시마 제1원전(후쿠시마 후타바군에 소재)의 사고는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지방 을 강타한 규모 9.0의 대지진으로 인해 원자로 1~3호기의 전원이 멈추게 되면서 촉발되었다. 당시에 후쿠시마 제1원전의 총 6기의 원자로 가

<C5F0B0E82D313132C8A328C0DBBEF7BFEB292E687770>

zb 2) 짜내어 목민관을 살찌운다. 그러니 백성이 과연 목민관을 위해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목민관이 백성 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이정 - ( ᄀ ) - ( ᄂ ) - 국군 - 방백 - 황왕 (나) 옛날에야 백성이 있었을 뿐이지, 무슨 목민관이 있 었던

<C6EDC1FD20B0F8C1F7C0AFB0FCB4DCC3BC20BBE7B1D420B0B3BCB120BFF6C5A9BCF32E687770>

진단, 표시・광고법 시행 1년

망되지만, 논란은 더욱 증폭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단 광주지역 민주화 운동 세력 은 5.18기념식을 국가기념일로 지정 받은 데 이어 이 노래까지 공식기념곡으로 만 들어 5.18을 장식하는 마지막 아우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걱정스러운 건 이런 움직임이 이른바 호남정서

<5BC1F8C7E0C1DF2D32B1C75D2DBCF6C1A4BABB2E687770>

인천 화교의 어제와 오늘 34 정착부흥기 35 정착부흥기: 1884년 ~ 1940년 이 장에서는 인천 차이나타운에 1884년 청국조계지가 설정된 후로 유입 된 인천 화교들의 생활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기별로 정리하였다. 조사팀은 시기를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였다. 첫 번

충남도보 제2072호

<33C6E4C0CCC1F620C1A63139C8A320B8F1C2F72E687770>

2015년 2월 12일 사랑의 동삭교육 제 호 (2월) 년 2월 12일 사랑의 동삭교육 제 호 (2월) 6 겨울이 되면 1-4 박지예 겨울이 되면 난 참 좋아. 겨울이 되면 귀여운 눈사람도 만들고 겨울이 되면 신나는 눈싸움도 하고 겨울이

640..

4. 역사, 신정일 교수님의 글모임4

05.PDF

2015 판례.기출 증보판 테마 형법 추록본.hwp

< B5BFBEC6BDC3BEC6BBE E687770>

지 생각하고, 재료를 준비하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이 작업을 3번 반복 하는 것만으로 하루가 다 간다. 그들이 제작진에게 투쟁하는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재료를 얻기 위해서다. 그 이상의 생각은 하고 싶어도 할 겨를이 없다. 이 땅은 헬조선이 아니다. 일단

11민락초신문4호

13백점맞는세트부록2년(49~57)

<312E B3E2B5B520BBE7C8B8BAB9C1F6B0FC20BFEEBFB5B0FCB7C320BEF7B9ABC3B3B8AE20BEC8B3BB28B0E1C0E7BABB292DC6EDC1FD2E687770>


제1절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대표이사 K, L 4. 주식회사 동진여객 대표이사 M 피고보조참가인들 소송대리인 법무법인(유한) N 법무법인 O 제 1 심 판 결 부산지방법원 선고 2014구합20224 판결 변 론 종 결 판 결 선 고

??

652

歯 조선일보.PDF

194

<33B1C7C3D6C1BEBABB28BCF6C1A42D E687770>

<C1DFB1DE2842C7FC292E687770>

삼외구사( 三 畏 九 思 ) 1981년 12월 28일 마산 상덕법단 마산백양진도학생회 회장 김무성 외 29명이 서울 중앙총본부를 방문하였을 때 내려주신 곤수곡인 스승님의 법어 내용입니다. 과거 성인께서 말씀하시길 道 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어울려야만 道 를 배울 수 있

03 ¸ñÂ÷

ÀϺ»Æí-ÃÖÁ¾

Transcription:

고대 동아시아의 왕성과 풍납토성 - 풍납토성의 성격 규명을 위한 학술세미나 - pp. 46-67 한국의 고대 왕성과 풍납토성 김기섭(한성백제박물관) 목차 Ⅰ. 머리말 Ⅱ. 한국 고대의 왕성 1. 평양 낙랑토성 2. 집안 국내성 3. 경주 월성 4. 한국 고대 왕성의 특징 Ⅲ. 풍납토성과 백제의 한성 1. 풍납토성의 현황 2. 한성의 풍경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500년 가까이 지나서 편찬되었다 는 점을 생각하면 위례성에 관한 모든 사료의 가치는 그리 높다고 할 수 없다. 삼국사기 는 위례성의 위치를 모른다고 하였다. 1 한성의 입지와 관련한 욱리하( 郁 里 河 ) 숭산( 崇 山 ) 의 위치도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백 수십년 뒤에 편찬된 삼국유사 는 오히려 위례성을 지금의 稷 山 이라고 단언하였다. 2 당대 최고의 지식인 관료들이 동원된 관찬사서( 官 撰 史 書 ) 삼국사 기 에서 모른다고 한 곳을 승려 한 사람이 제자 몇 명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사찬사서( 私 撰 史 書 ) 삼 국유사 에서는 자신 있게 안다고 한 것이다. 적어도 1천년~7백년 전의 사실에 대해 승려 일연( 삼국 유사 )이 관료 김부식 등( 삼국사기 )보다 더 정확한 자료를 확보한 것일까?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않 았다. 서기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 에도 위례성 에 대한 기록이 있다. 3 일본서기 는 일본의 고대사 를 천황 중심으로 재구성하면서 많은 부분을 심하게 윤색하거나 왜곡한 책인데, 윤색 왜곡하는 데 쓴 근거사료를 살짝 고쳐 주석으로 싣기도 하였다. 475년 위례성 함락을 묘사한 백제기 를 누가 언 제 왜 편찬했는지 알 수 없으나, 백제기 의 기록은 처음 백제에서 작성되었으며 나중에 왜( 倭 )로 건 너간 사람들이 내용 일부를 고쳐서 왜 왕권에 제출했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4 삼국사기 에서 4세기 무렵부터는 백제 왕도 이름이 어느새 한성으로 바뀌어서 나온다. 언제 왜 바뀌었는지는 설명이 없다. 한성( 漢 城 )은 큰 성[ 大 城 ] 을 중국식으로 바꾼 이름이므로 위례성을 더 크게 정비하고 이름도 바꾸었을 것이다. 한성은 북성과 남성을 합친 이름인데, 5 이를 일본서기 의 1 三 國 史 記 권37 雜 志 < 地 理 >4 三 國 有 名 未 詳 地 分. 2 三 國 遺 事 권1 王 曆 제1대 溫 祚 王. 3 百 濟 記 에 이르기를 "개로왕 을묘년 겨울에 이리[고구려]의 大 軍 이 와서 大 城 을 7일 낮 7일 밤 동안 공격해 王 城 이 함락되니 마침내 尉 禮 를 잃었다. 국왕과 大 后,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고 하였다._ 日 本 書 紀 권14 雄 略 紀 20 년( 細 注 ). 4 김현구 외,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Ⅰ), 일지사, 2002, 97쪽. 5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巨 璉 이 군사 3만명을 이끌고 와서 王 都 한성을 에워쌌다.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못하 였다. 고구려인이 군사를 네 갈래로 나누어 협공하였다. 또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우니, 인심이 매우 불안해 져서 간혹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왕이 궁색해져 어찌할 바를 몰라 기병 수십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 로 달아나니, 고구려인이 쫓아가 살해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對 盧 인 齊 于 再 曾 桀 婁 古 爾 萬 年 등이 군 사를 거느리고 와서 北 城 을 공격해 7일만에 빼앗고 南 城 으로 옮겨 공격하니 성안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왕이 나가 도망 가자 고구려 장수 桀 婁 등이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 왕의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으며 그 죄를 헤아리고, 포박하여 阿 且 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_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개로왕 21년 한국의 고대 왕성과 풍납토성 김기섭 47

대성( 大 城 )과 왕성( 王 城 )에 각각 대응시켜 북성=대성, 남성=왕성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6 도성이 2개의 성으로 구성된 사례는 고대 중국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여러 나라가 치열하게 경 쟁하던 전국시대의 도성 중에는 동-서 혹은 남-북으로 2개의 성이 나란히 선 형태가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로서 한단고성( 邯 鄲 故 城 ), 임치고성( 臨 淄 故 城 ), 연하도고성( 燕 下 都 古 城 ) 등이 유명하다. 이들 은 모두 둘레 10여km가 넘는 도시형 대성( 大 城 )과 작은 규모의 왕성을 합한 이름인데, 대성 속에 왕 성이 있는 이른바 내성외곽( 內 城 外 郭 )의 형태가 아니라 대성의 바깥 서남쪽에 왕성이 연접하거나( 臨 淄 故 城 ) 대성으로부터 60m 혹은 1km가까이 멀리 떨어진 산기슭에 왕성이 위치한다( 邯 鄲 故 城 )는 데 특 색이 있다. 지형을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왕성을 비교적 높은 지대에 배치한 점도 공통된 특징이다. 한성의 북성과 남성은 각각 지금의 풍납토성( 風 納 土 城 )과 몽촌토성( 夢 村 土 城 )에 비정한다. 이는 도성 의 군사적 방어력을 높이면서도 왕의 거처를 도시와 구분함으로써 왕의 권위를 더욱 잘 나타낼 수 있는 구조로서 고구려의 도성체제가 국내성-환도산성(산성자산성)에서 안학궁성(또는 청암리산성)-대성 산성을 거쳐 장안성(북성-내성-중성-외성) 체제로 발전하는 길목에 해당한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고구려의 장안성처럼 왕성과 도시외곽성의 성벽이 서로 연결되기 전단계의 도성체제인 셈이며, 장 차 이루어질 나성( 羅 城 ) 축조를 예고하는 일종의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규모가 작고 강변에 위치하므로 백제 도성일 수 없다는 비판 이 제기되었다. 이미 지난 수십여 년간 수많은 학자들이 거시적, 미시적으로 깊이 검토하고 논증한 사항을 특별한 논거 없이 현대적 감각과 기준으로 연구사를 부정했다는 점은 매우 유감이지만, 아는 길도 물어보고 돌다리도 두드려보는 마음으로 한국 고대 왕성들의 특징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풍납 토성의 고대 성곽으로서의 위상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표 1 위례성과 한성의 위치 및 천도과정에 대한 견해들 번호 연구자 (하북) 위례성 하남위례성 한성 한산 천도과정 1 柳 馨 遠 稷 山 廣 州 漢 城 府 위례성 남한산성(하남위례성?) 북한산성(한 성,한산?) 2 申 景 濬 직산 남한산성 북한산성 위례성 남한산성 (하남위례성?) 한성 3 安 鼎 福 직산 광주 漢 陽 府 위례성 하남위례성 한성 4 丁 若 鏞 三 角 山 東 麓 廣 州 古 邑 漢 陽 古 邑 漢 陽 古 邑 위례성 하남위례성 한성 5 津 田 左 右 吉 남한산성 남한산성 위례성=한산 6 今 西 龍 廣 州 南 漢 山 하남위례성 한산 7 鮎 貝 房 之 進 風 納 里 土 城 廣 州 古 邑 8 李 丙 燾 洗 劍 洞 계곡 春 宮 里 일대 일대 南 漢 山 위례성 하남위례성=한성 6 金 起 燮, 百 濟 前 期 都 城 에 관한 一 考 察, 淸 溪 史 學 7, 1990. ; 金 起 燮, 百 濟 前 期 의 漢 城 에 대한 再 檢 討, 鄕 土 서울 55, 1995. 48 고대 동아시아의 왕성과 풍납토성 - 풍납토성의 성격 규명을 위한 학술세미나 -

번호 연구자 (하북) 위례성 하남위례성 한성 한산 천도과정 9 金 映 遂 積 城 江 남쪽 高 陽 부근 廣 壯 津 의 對 岸 漢 南 土 城 址 廣 州 위례성 한남성 한산성 10 李 弘 稙 한강북쪽 춘궁리일대 남한산성 위례성 하남위례성 한성=한산 11 矢 守 一 彦 풍납리토성 남한산성 12 金 在 鵬 직산 광주 위례성 한산 13 尹 武 炳 二 聖 山 城 14 李 基 白 夢 村 土 城 15 千 寬 宇 江 北 서울 南 漢 山 北 麓 남한산 하북위례성 하남위례성=한성 16 方 東 仁 江 北 서울 광주 濃 山 하북위례성 하남위례성(한성) 한산 하남위 례성 17 中 村 春 壽 풍납리토성 18 鄭 永 鎬 上 溪 洞 일대 몽촌토성 하북위례성 하남위례성 19 藤 島 亥 治 郞 남한산성 20 金 廷 鶴 북한산성 풍납리토성 남한산성 한강북쪽 위례성( 蛇 城 ) 한산성 21 車 勇 杰 中 浪 川 유역 몽촌토성과 이성산성 사이 남한산성 위례성 하남위례성(한성) 한산 한성 22 井 上 秀 雄 풍납동 위례성 한성 23 金 龍 國 彌 阿 里 ~ 춘궁리일대 牛 耳 洞 일대 남한산 위례성 하남위례성(한성) 한산 하남위례성 24 鄭 東 和 직산 위례성 ( 北 遷 ) 25 成 周 鐸 중랑천부근 몽촌토성 춘궁리 남한산성 이성산성 하북위례성 하남위례성 한성 26 崔 夢 龍 權 五 榮 중랑천일대 몽촌토성 춘궁리일대 이성산성 하북위례성 하남위례성 한산 한성 27 盧 重 國 중랑천일대 몽촌토성 28 金 起 燮 중랑천일대 몽촌토성 풍납토성 몽촌토성 남한산일대 하북위례성 하남위례성( 한성) 29 李 道 學 중랑천 풍납토성 하북위례성 하남위례성 한산 하남위례성 몽촌토성 북한산성 일대? 몽촌토성 ( 한성) 30 姜 仁 求 풍납리토성 몽촌토성 뚝섬지구 위례성(=하남위례성) 한성 한산 한성 31 金 起 燮 풍납토성 풍납토성 몽촌토성 남한산 위례성(=하남위례성) 한성 32 李 亨 求 풍납토성 하남위례성=한성 33 朴 淳 發 몽촌토성 몽촌토성 풍납토성 34 金 台 植 풍납토성 풍납토성 북한산 하남위례성 한산 하남위례성(=한성) 35 余 昊 奎 풍납토성 몽촌토성 위례성(=하남위례성) 한산(=한성) 위례성 36 申 熙 權 풍납토성 풍납토성 몽촌토성 하남위례성 한성 1. 柳 馨 遠, 東 國 輿 地 志 漢 城 府 廣 州 牧 稷 山 縣 2. 申 景 濬, 旅 菴 全 書 疆 界 考 國 都. 3. 安 鼎 福, 東 史 綱 目 地 理 考 百 濟 疆 域 考. 4. 丁 若 鏞, 與 猶 堂 全 書 疆 域 考 慰 禮 考 漢 城 考. 5. 津 田 左 右 吉, 百 濟 慰 禮 城 考, 朝 鮮 歷 史 地 理 上, 1913. 한국의 고대 왕성과 풍납토성 김기섭 49

6. 今 西 龍, 百 濟 國 都 漢 山 考, 百 濟 史 硏 究, 近 澤 書 店, 1934. 7. 鮎 貝 房 之 進, 百 濟 古 都 案 內 記, 朝 鮮 234호, 1934.11. 8. 李 丙 燾, 慰 禮 考, 韓 國 古 代 史 硏 究, 博 英 社, 1976. 9. 金 映 遂, 百 濟 國 都 의 變 遷 에 對 하여, 全 北 大 論 文 集 1, 전북대학교, 1957. 10. 李 弘 稙, 백제건국에 관한 제문제(1), 국사상의 제문제 6, 국사편찬위원회, 1960. 11. 矢 守 一 彦, 朝 鮮 の 都 城 と 邑 城, 都 市 プランの 硏 究, 大 明 堂, 1970. 12. 金 在 鵬, 百 濟 舊 都 稷 山 考, 朝 鮮 學 報 70, 1974. 13. 尹 武 炳, 漢 江 流 域 에 있어서의 百 濟 文 化 硏 究, 제2회 百 濟 硏 究 국제학술대회, 1974 ; 百 濟 硏 究 15, 1984. 14. 李 基 白, 百 濟 文 化 學 術 會 議 錄, 百 濟 文 化 7 8,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1975. 15. 千 寬 宇, 三 韓 의 國 家 形 成 ( 下 ), 韓 國 學 報 3, 一 志 社, 1976. 16. 方 東 仁, 三 國 時 代 의 서울, 서울 六 百 年 史 Ⅰ,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77. 17. 中 村 春 壽, 日 韓 古 代 都 市 計 劃, 六 興 出 版, 1978. 18. 鄭 永 鎬, 서울 地 域 의 百 濟 文 化, 馬 韓 百 濟 文 化 3,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1979. 19. 藤 島 亥 治 郞, 朝 鮮 三 國 時 代 の 都 市 と 城, 朝 鮮 三 國 と 倭 國, 學 生 社, 1980. 20. 金 廷 鶴, 서울 近 郊 의 百 濟 遺 蹟, 鄕 土 서울 39,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81. 21. 車 勇 杰, 慰 禮 城 과 漢 城 에 대하여(Ⅰ), 鄕 土 서울 39,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81. 22. 井 上 秀 雄, 朝 鮮 の 都 城, 日 本 の 古 代 都 市, 雄 山 閣, 1982. 23. 金 龍 國, 河 南 慰 禮 城 考, 鄕 土 서울 41,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83. 24. 鄭 東 和, 百 濟 慰 禮 城 硏 究, 경희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3. 25. 成 周 鐸, 百 濟 城 址 硏 究,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5. 26. 崔 夢 龍 權 五 榮, 考 古 學 的 資 料 를 通 해 본 백제 初 期 의 領 域 考 察, 千 寬 宇 先 生 還 曆 紀 念 韓 國 史 學 論 叢, 正 音 文 化 社, 1985. 27. 盧 重 國, 百 濟 政 治 史 硏 究, 일조각, 1988. 28. 金 起 燮, 百 濟 前 期 都 城 에 관한 一 考 察, 淸 溪 史 學 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29. 李 道 學, 百 濟 漢 城 時 期 의 都 城 制 에 관한 檢 討, 韓 國 上 古 史 學 報 9, 한국상고사학회, 1992. 30. 姜 仁 求, 百 濟 初 期 都 城 問 題 新 考, 韓 國 史 硏 究 81, 한국사학회, 1993. 31. 金 起 燮, 百 濟 前 期 의 漢 城 에 대한 再 檢 討, 鄕 土 서울 55,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95. 32. 李 亨 求, 서울 풍납토성[백제왕성] 실측조사연구, 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97. 33. 朴 淳 發, 漢 城 百 濟 의 誕 生, 서경문화사, 2001. 34. 김태식,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김영사, 2001. 35. 余 昊 奎, 漢 城 時 期 百 濟 의 都 城 制 와 防 禦 體 系, 百 濟 硏 究 36,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2002. 36. 申 熙 權, 風 納 土 城 발굴조사를 통한 河 南 慰 禮 城 고찰, 鄕 土 서울 62, 2002. ; 百 濟 漢 城 期 都 城 制 에 대한 考 古 學 的 考 察, 백제도성의 변천과 연구상의 문제점, 서경문화사, 2003. Ⅱ. 한국 고대의 왕성 1. 평양 낙랑토성 평양시 토성동의 대동강 남쪽 강변 대지에 위치한 토성이다. 대지의 북쪽은 대동강과 맞닿은 석회 50 고대 동아시아의 왕성과 풍납토성 - 풍납토성의 성격 규명을 위한 학술세미나 -

암 자연단애이고 동 서 남쪽은 좁은 평야인데, 동쪽 평야에 석암리 방면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려온 작은 하천이 성벽 옆으로 성벽을 따라 흐르다가 대동강에 유입된다. 성벽은 토축이며, 서쪽 및 동남쪽 성벽은 자취가 비교적 잘 남았으나 남쪽과 북쪽의 성벽은 농경 등으로 파괴되어 흔적이 뚜렷하지 않다. 성벽의 평면형태가 부정형이므로 성벽 길이를 방위별로 상 정하기는 어려우며, 대략 동서 650~700m, 남북 550~600m 길이로서 전체 둘레 2,480m로 추산한 다. 7 서 남 북벽에는 각각 문지로 추정되는 지점이 1곳씩 있지만, 하천이 성벽을 감싸 도는 동벽에 는 문지 흔적이 없다. 성안 지형은 동남쪽이 표고 6m로 가장 낮은 편이고, 서북쪽으로 갈수록 조금 씩 높아져 성안 중앙부에서 약간 서북쪽에 위치한 고지대는 표고 23m에 달한다. 성안 중앙부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곳에는 주변보다 높으며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길게 뻗은 평 탄대지가 있으며 그 서북방에도 역시 조금 낮은 장방형 대지가 있는데, 기와편이 많이 출토되어 건 물지로 추정한다. 1926년 4월과 5월에 높은 평탄대지 거의 중앙부와 그 부근에서 낙랑예관( 樂 浪 禮 官 ) 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으며, 낮은 대지에서는 낙랑예관 기와 외에도 낙랑태수 장( 樂 浪 太 守 章 ) 이라고 새겨진 봉니( 封 泥 )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보고자는 명문기와와 봉니가 출토된 점, 지대가 높고 지형이 가장 좋다는 점, 기와가 가장 많이 출토된 점 등을 근거로 낙랑군 관아가 있 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8 1935년에 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인 조선고적연구회가 낙랑토성을 처음 발굴조사하였고, 이후 1937년까지 모두 3차례에 걸쳐 발굴조사하였는데, 실제로는 동경대학에서 고고학강의를 전담한 하 라다 요시토[ 原 田 淑 人 ]가 주관하였으므로 매우 많은 유물이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쿄대학 고고학연 구실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9 당시의 발굴성과에 대해서는 몇차례 간략한 보고가 있었으나 정식보고 서를 간행하지 못하다가 1964년에 현장조사를 담당했던 고마이 가즈치카[ 駒 井 和 愛 ]가 그간의 간략 보고에 일부 유구 유물의 도면 및 사진을 추가해 보고서를 간행하였으며, 1980년대에 들어와 도쿄 대학 고고학연구실의 다니 토요노부[ 谷 豊 信 ]가 낙랑토성 안 개별 유구 및 출토 토기류를 차례로 분 석 검토하였다. 10 그리고 최근에는 정인성이 도쿄대학 고고학연구실의 낙랑토성 출토유물을 분야별 7 윤용구, 낙랑군 초기의 군현 지배와 호구 파악, 낙랑군 호구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0. 8 朝 鮮 總 督 府, 樂 浪 郡 時 代 の 遺 蹟 古 蹟 調 査 特 別 報 告 第 4 冊, 1927. ; 駒 井 和 愛, 樂 浪 郡 治 址 東 京 大 學 文 學 部 考 古 學 硏 究 室 考 古 學 硏 究 第 3 冊, 1964. 9 鄭 仁 盛, 樂 浪 土 城 의 土 器, 한국고대사연구 34, 2004. 10 谷 豊 信, 樂 浪 土 城 址 の 發 掘 とその 遺 構 - 樂 浪 土 城 硏 究 その1, 東 京 大 學 文 學 部 考 古 學 硏 究 室 硏 究 紀 要 2, 1983. ; 谷 豊 信, 樂 浪 土 城 址 出 土 の 土 器 ( 上 )- 樂 浪 土 城 硏 究 その2, 東 京 大 學 文 學 部 考 古 學 硏 究 室 硏 究 紀 要 3, 1984. ; 谷 豊 信, 樂 浪 土 城 址 出 土 の 土 器 ( 中 )- 樂 浪 土 城 硏 究 その3, 東 京 大 學 文 學 部 考 古 學 硏 究 室 硏 究 紀 要 4, 1985. ; 谷 豊 信, 樂 浪 土 城 址 出 土 の 土 器 ( 下 )- 樂 浪 土 城 硏 究 その4, 東 京 大 學 文 學 部 考 古 學 硏 究 室 硏 究 紀 要 5, 1986. ; 정인성, 위의 논문. 한국의 고대 왕성과 풍납토성 김기섭 51

로 정리 분석해 차례로 발표하였다. 11 1944년에 이루어진 4차 조사 성과는 해방과 함께 북한에 그대로 남았으며, 1968년에 북한학계가 낙랑토성을 한차례 발굴조사하였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는다. 12 다만, 벽돌로 만든 우물 3 곳과 도로를 확인했다고 한다. 13 지금까지 낙랑토성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낙랑예관 낙랑부귀( 樂 浪 富 貴 ) 대진원강( 大 晉 元 康 ) 등의 명문이 새겨진 막새기와, 벽돌 초석 등의 건축부재, 낙랑태수장 낙랑대윤장( 樂 浪 大 尹 章 ) 등 관직명이 새겨진 봉니, 오수전( 五 銖 錢 )을 비롯한 화폐와 반량전( 半 兩 錢 ) 거푸집, 전한시대 삼릉 동촉 ( 銅 鏃 )을 비롯한 각종 청동기와 유리제품, 사릉 철촉을 비롯한 각종 철제 무기류와 공구류, 그리고 굽 다리접시모양토기( 高 杯 形 土 器 ), 화분모양토기( 盆 形 土 器 ), 깊은바리( 深 鉢 形 土 器 ), 둥근밑항아리( 圓 底 壺 ), 독 모양토기( 甕 形 土 器 ) 등의 각종 토기들이 대표적인 출토품이다. 낙랑군은 한( 漢 )왕조가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4군( 郡 )의 하나로서 불과 20 여년만에 진번군 임둔군이 차례로 폐기되고 현도군이 요동방면으로 후퇴한 것과 달리 현지화에 성 공하여 400여년간 존속하다가 기원후 313년에 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한왕조가 고조선의 마지막 수 도인 왕검성( 王 險 城 )지역에 낙랑군을 설치했다고 보는 것이 보통인데, 14 왕검성이 지금의 중국 요령지 역에 있었다는 입장 15 과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었다는 입장 16 으로 나뉜다. 북한의 역사학계는 요령지 역설을 주창하고, 남한학계의 대다수는 평양지역설을 따르는 형국이다. 11 鄭 仁 盛, 樂 浪 土 城 と 靑 銅 器 製 作, 東 京 大 學 考 古 學 硏 究 室 紀 要 16, 2001. ; 鄭 仁 盛, 樂 浪 土 城 の 靑 銅 鏃, 東 京 大 學 考 古 學 硏 究 室 硏 究 紀 要 17, 2002. ; 鄭 仁 盛, 樂 浪 円 筒 形 土 器 の 性 格, 東 京 大 學 考 古 學 硏 究 室 硏 究 紀 要 18, 2003. ; 鄭 仁 盛, 樂 浪 土 城 의 土 器, 한국고대사연구 34, 2004. ; 鄭 仁 盛, 樂 浪 土 器 の 鐵 製 品 とその 生 産, 鐵 器 文 化 の 多 角 的 探 究, 철기문화연구회, 2004. ; 정인성, 낙랑토성의 철기와 제작, 낙랑문화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6. 12 오영찬, 낙랑군연구, 사계절, 2006, 95쪽. 13 오영찬, 위의 책, 97쪽. ; 윤용구, 앞의 논문, 158~159쪽. 14 李 丙 燾, 漢 四 郡 問 題 의 硏 究, 韓 國 古 代 史 硏 究, 박영사, 1976, 133쪽. 李 鍾 旭, 古 朝 鮮 史 硏 究, 일조각, 1993, 260쪽. 盧 泰 敦, 古 朝 鮮 의 變 遷, 檀 君,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37쪽. 한편, 고조선의 왕검성은 서기전 107년에 함락되었으며, 그곳에 현도군이 설치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趙 法 鍾, 樂 浪 郡 의 崩 壞 時 點 과 王 險 城 樂 浪 郡 의 位 置, 韓 國 史 硏 究 110, 2000. 15 리지린, 고조선 연구, 과학원출판사, 1963. 최택선 리란우, 고조선 문제 연구, 사회과학출판사, 1973. 리순진, 우리나라 서북 지방의 나무곽무덤에 대한 연구, 고고민속론문집 8, 1983. 윤내현, 고조선연구, 일지사, 1993. 복기대, 朝 陽 지역의 西 漢 유적에 관하여, 고구려연구 15, 고구려연구회, 2003. 16 도유호, 왕검성의 위치, 문화유산 1962-5. 서영수,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한국사 시민강좌 2, 일조각, 1988. 盧 泰 敦, 古 朝 鮮 中 心 地 의 變 遷 에 관한 硏 究, 韓 國 史 論 23,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90. 52 고대 동아시아의 왕성과 풍납토성 - 풍납토성의 성격 규명을 위한 학술세미나 -

낙랑군의 위치를 요령지역에 비정하는 학설은 일제시기 무자비한 발굴조사를 통해 거둔 일본의 학술성과에 대항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굳세다. 그로 인해 새로운 분석틀과 논리를 제시하는 성과 를 거두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한( 漢 )문화와 고조선문화를 이분법적으로 파악하고 종족과 문 화를 동질화하는 함정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17 한왕조의 5만여 대군과 1년 동안 전투를 벌일 정도로 정치 경제력을 갖추었으며 18 흉노의 왼팔에 비유 19 할 정도로 흉노와 긴밀한 유대를 맺으며 20 북방문 물을 접하고 받아들인 고조선의 사회 문화기반이 고스란히 낙랑군에 흡수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 는 안된다. 21 한서 지리지 에 따르면, 전한시대에 낙랑군은 25개 현( 縣 ), 62,812호( 戶 ), 406,748명( 口 ) 규모였 다. 22 후한서 군국지 에는 낙랑군의 규모가 18개 현, 61,492호, 257,050명으로 적혀 있다. 23 현 수 가 줄어든 것은 기원후 30년에 동부도위가 폐지된 것과 관계 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90년초 평양시 낙랑구역의 정백동 364호 나무덧널무덤에서 출토된 초원( 初 元 ) 4년(기원전 45)명 호구부( 戶 口 簿 ) 목간에는 낙랑군 총 인구가 43,845호, 285261명( 口 )이며 전년보다 584호 증가했다고 적혀 있다. 그 리고 예하 25개 현 가운데 군치( 郡 治 )가 위치한 조선현( 朝 鮮 縣 )의 인구가 가장 많아서 9,678호, 56,890 명이었다고 한다. 이는 나머지 24현 가운데 압도적 대형 현이랄 수 있는 둔유현( 屯 有 縣 )의 4,826호, 21,906명 및 대방현( 帶 方 縣 )의 4,346호, 28,941명에 비해 2배를 웃도는 인구이며, 가장 작은 제해현( 提 奚 縣 )의 173호, 1,303명에 비해 거의 50배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24 조선현 5만여명의 인구 중 상당수가 낙랑토성 안팎에 거주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옛 오야리( 梧 野 里 ) 정백리( 貞 柏 里 ) 석암리( 石 巖 里 ) 곧 최근의 평양시 낙랑구역 관문동 승리동일대에 무덤 3천여기가 분포하며, 그곳에서 부조예군( 夫 租 薉 君 ) 은인( 銀 印 )을 비롯해 각종 인장과 명문 장신구들이 화려한 동 반유물과 함께 출토된 데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7 李 成 市, 동아시아에서의 낙랑, 韓 國 古 代 史 硏 究 34, 2004, 8~9쪽. 18 史 記 권95 朝 鮮 傳. 19 東 伐 朝 鮮 起 玄 菟 樂 浪 以 斷 匈 奴 之 左 臂.( 漢 書 권73 韋 賢 傳 ) 20 權 五 重, 樂 浪 郡 硏 究, 일조각, 1992, 26~30쪽 ; 권오중, 중국사에서의 낙랑군, 韓 國 古 代 史 硏 究 34, 2004, 24~ 25쪽. 21 衛 滿 朝 鮮 의 細 形 銅 劍 文 化 와 漢 문화가 복합되어 낙랑문화를 형성했다고 보기도 한다. 尹 龍 九, 樂 浪 前 期 郡 縣 支 配 勢 力 의 種 族 系 統 과 性 格 - 土 壙 木 槨 墓 의 분석을 중심으로-, 歷 史 學 報 126, 역사학회, 1990, 21~25쪽. 22 樂 浪 郡 戶 六 萬 二 千 八 百 一 十 二 口 四 十 萬 六 千 七 百 四 十 八 縣 二 十 五 朝 鮮. 䛁 邯. 浿 水. 含 資. 黏 蟬. 遂 成. 增 地. 帶 方. 駟 望. 海 冥. 列 口. 長 岑. 屯 有. 昭 明. 鏤 方. 提 奚. 渾 彌. 吞 列. 東 暆. 不 而. 蠶 台. 華 麗. 邪 頭 昧. 前 莫. 夫 租.( 漢 書 권28하 地 理 志 ) 23 樂 浪 郡 十 八 城 戶 六 萬 一 千 四 百 九 十 二 口 二 十 五 萬 七 千 五 十 朝 鮮. 邯. 浿 水. 含 資. 占 蟬. 遂 城. 增 地. 帶 方. 駟 望. 海 冥. 列 口. 長 岑. 屯 有. 昭 明. 鏤 方. 提 奚. 渾 彌. 樂 都. 24 初 元 4년명 호구부의 縣 別 인구에 대해서는 윤용구, 낙랑군 초기의 군현 지배와 호구 파악, 낙랑군 호구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10, 188~189쪽 참조. 한국의 고대 왕성과 풍납토성 김기섭 53

그림 1 낙랑토성과 주변 고분군 분포도(정인성, 낙랑토성의 철기와 제작, 133쪽) 기원전 2세기말부터 기원후 4세기초까지 400여년간 대동강유역을 중심으로 정치 경제 문화적 으로 상당한 세력을 구가했던 낙랑군의 치소( 治 所 )는 중국의 도시문화 전통과 현지의 지리환경 및 관 습에 기초한 문화전통을 융합한 형태로 운영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곽축조 및 도시운영 방식은 무 덤조영이라든지 토기 철기 칠기 제작기술 등과 함께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문화 발달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다. 25 2. 집안 국내성 중국 길림성 집안시 압록강변에 위치한다. 북쪽은 노령산맥이 병풍처럼 막아주고 남쪽은 압록강 이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통구분지를 자연스레 요새처럼 만들었는데, 국내성은 북쪽 산지에 서 발원한 통구하( 通 溝 河 )가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과 합치는 곳에 자리잡았으므로 성벽의 서쪽과 남 쪽에 자연해자를 두른 모습이다. 국내성의 동쪽 6km 거리에는 용산이 있고, 북쪽으로 1km 떨어진 곳에는 우산(여산)이 있으며, 서쪽은 통구하 건너편 1.5km 거리에 칠성산이 있다. 통구하를 거슬러 올라가는 길은 환인 통화로 이어지고, 압록강을 따라 내려가면 의주에 닿을 수 있다. 압록강 건너편 25 김기섭, 한국고대문화 형성에 미친 낙랑문화의 영향, 한국고대사연구의 현단계, 주류성출판사, 2009, 26~45쪽. 54 고대 동아시아의 왕성과 풍납토성 - 풍납토성의 성격 규명을 위한 학술세미나 -

으로는 만포를 거쳐 강계에 닿는다. 성벽의 평면형태는 정방형에 가까운 장방형이며, 장축이 압록강의 흐름방향과 대체로 일치한다. 성벽은 외형상 네모지게 다듬은 돌로 쌓았는데, 길이는 동벽 554.7m, 서벽 702m, 남벽 751.5m, 북 벽 730m로서 전체 둘레 2,732m이다. 남벽 서쪽부분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아서 높이 3~4m정도 이고 동쪽부분은 2~3m정도이다. 26 서쪽과 남쪽의 하천 외에도 1949년초까지는 성벽 동쪽과 북쪽 에 폭 10m 정도의 해자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후 발굴조사를 통해 해자가 성벽에서 90m정도 떨 어져 있으며 너비 약 20m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벽은 지점마다 재료와 축조방식이 다르다. 성벽 기단부는 화강암을 잘 가공한 4각추형 석재(길 이 50cm, 두께 20cm)로 점점 올라갈수록 10cm씩 들여쌓기 하다가 4~11단 이후 곧게 쌓는 등 이른바 고구려식 성벽의 특징을 뚜렷하게 나타낸다. 그런데 중 상부는 거친 석재와 잡석을 많이 사용하는 등 근대( 中 華 民 國 滿 洲 國 시기)에 수축한 현성( 縣 城 )의 자취를 보여준다. 석축 성벽의 안벽과 바깥벽 사이 의 거리는 7~10m이다. 1970년대 후반에 성벽 여러 곳을 절개조사하여 석축성벽 아래에 토축성벽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발굴보고자는 항토( 夯 土 )성벽 안에서 중국 전국시대( 戰 國 時 代 )에 해당하는 석기와 토기 조각이 출토된 점을 근거로 전국시대에 처음 토성을 쌓았다고 추정하였으나, 27 최근에는 토착 고구려세력과 관련짓 는 견해 28 가 주목받고 있다. 성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치( 雉 )를 설치하였다. 지금은 북벽에 8개, 동 서 남벽에 각각 2개씩으 로 모두 14개만 흔적이 남아있으나, 1912년 조사에서는 북벽에 15개, 동벽에 10개, 서벽에 2개, 남 벽에 15개 등 모두 42개였다고 한다. 29 치의 길이는 보통 8~10m, 너비 6~8m이다. 치와 치 사이의 거리는 대체로 50~80m이다. 성벽의 네모서리에는 각루( 角 樓 )를 설치하였다. 서북모서리와 서남모 서리는 성벽이 직각으로 꺾이지만 동북모서리는 둥글게 되어 있으므로 2곳에 치를 설치하여 치와 각루를 겸하게 하였다. 서북모서리 부근에서는 동서로 길게 이어진 배수시설이 발견되었는데, 너비 0.7~0.8m, 높이 1.9~2.1m 크기로서, 바닥에 판석을 깔고 한쪽만 판판하게 깎은 큰 돌덩어리를 가 지런하게 놓아 양벽을 만든 뒤 판석으로 천장을 이어 덮은 모습이다. 30 성문은 지금까지 11개를 확인하였다. 동벽과 서벽에 각각 2개, 북벽 4개, 남벽 3개 등인데, 모두 고 26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고구려의 성곽, 조선고고학전서27(중세편4), 진인진, 2009, 233쪽. 27 集 安 縣 文 物 保 管 所, 集 安 高 句 麗 國 內 城 址 的 調 査 與 試 掘, 文 物 1984-1. 28 李 新 全 梁 志 龍 王 俊 輝, 關 于 高 句 麗 兩 座 土 城 的 一 點 思 考, 東 北 史 地 2004-3. ; 박순발, 고구려의 도성과 묘역, 한국고대사탐구 12, 2012, 56~57쪽. 29 關 野 貞, 滿 洲 國 輯 安 縣 における 高 句 麗 時 代 の 遺 跡, 朝 鮮 の 建 築 と 藝 術, 岩 波 書 店, 1941. ;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 소, 고구려의 성곽, 조선고고학전서27(중세편4), 진인진, 2009, 240쪽. 30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위의 책, 239~241쪽. 한국의 고대 왕성과 풍납토성 김기섭 55

구려 때의 성문 흔적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북벽 서쪽 모서리 부근의 성문을 제외한 나머 지 10개의 성문이 서로 마주보며 큰 도로를 통해 서로 연결되므로 고구려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성문은 대개 옹성( 甕 城 ) 방식으로 쌓았다. 서벽의 남문처럼 성벽을 서로 엇갈리게 만 든 옹성, 동벽 남문처럼 한쪽 성벽이 다른 쪽 성벽 앞을 ㄱ 자 모양으로 막은 옹성 등이 있으며, 북 벽의 중문처럼 성문 양쪽에 적대( 敵 臺 )를 쌓은 것도 있다. 국내성 안 여러 곳에서 고구려시대의 건축물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건축물이 있는 곳의 토층은 대 개 5개의 문화층으로 구성되었는데, 1~2층은 근대문화층이고 그 아래 3~5층이 고구려문화층이다. 지금까지 성안의 고구려문화층에서는 4세기 이후의 유물만 수습되었다고 한다. 맨 아래 제5문화층 의 건축물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성안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위치한 4개의 건 축물이다. 1호 건물지는 직경 1~1.5m크기의 구덩이를 파고 강자갈을 채운 뒤 나무기둥을 세운 적 심건물지로서 동측면에 냇돌 벽체 흔적이 29m 길이로 남아있는데 서측면의 대응하는 추정벽체와 의 거리는 21m이다. 2호 건물지는 1호 건물지의 서북쪽 모서리에서 서쪽으로 1m 떨어진 채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형태로 발견되었다. 2호 건물지는 회랑으로 둘러싸인 정방형 건축물로서, 회랑 안 팎의 외벽은 비교적 큰 돌로 쌓고 안쪽을 작은 냇돌로 채워 너비 1.1~1.3m의 벽체를 만들었다. 회 랑의 크기는 남북 14m, 동서 13.5m, 벽 너비 1.2m이다. 회랑과 그 안쪽 10 10m크기의 정방형 건 물지 사이에는 용무늬 등의 무늬가 새겨진 정방형의 갈색 벽돌이 깔려 있었다. 2호 건물지의 서쪽에 같은 방향을 향하지만 5m이상 북쪽으로 물러난 모습으로 3호 건물지가 놓여 있다. 2호 건물지처럼 회랑으로 둘러싸인 정방형 건물지이며, 회랑 안쪽의 건물은 8 8.5m크기이다. 2호와 3호 건물지는 회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3호 건물지의 서쪽 10m지점에 위치한 4호 건물지는 2호 건물지와 거 의 일직선상에 나란히 선 모습이다. 2 3호 건물지와 마찬가지로 회랑으로 둘러싸인 정방형 건물이 며 회랑 안쪽 건물의 크기는 동서 10.4m, 남북 7.5m이다. 이 건물지들을 고구려 궁궐건축의 일부분 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건물지와 그 주변에서는 다양한 건축부재와 생활용기들이 출토되었다. 건축부재는 대개 벽돌과 기와이다. 벽돌은 길이 40cm, 너비 15~16cm, 높이 6~7cm로서 길쭉한 편이며 용무늬와 격자무늬 가 새겨진 갈색 벽돌이 많다. 기와는 맨아래 제5문화층에서 회색기와, 제3 4문화층에서 갈색기와가 주로 출토되었으며, 고사리무늬, 연꽃무늬, 인동무늬, 도깨비무늬 등이 새겨진 수막새가 많다. 고사 리무늬 수막새 중에는 太 寧 四 年 造 瓦 記 年 造 瓦 故 記 歲 등의 명문이 새겨진 것도 있다. 생 활용기로는 입이 벌어지고 목이 짧고 몸통이 둥근 진흙 갈색 단지와 녹색 유약을 바른 단지, 입이 좁 고 목이 곧으며 몸통에 띠손잡이를 붙인 진흙 회색 동이 등이 출토되었다. 31 31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위의 책, 245~244쪽. 56 고대 동아시아의 왕성과 풍납토성 - 풍납토성의 성격 규명을 위한 학술세미나 -

그림 2 국내성 발굴 현황도(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박물관, 국내성, 문물출판사, 2004) 그림 3 국내성 중앙구역 건물지 발굴평면도(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박물관, 국내성, 문물출판사, 2004) 한국의 고대 왕성과 풍납토성 김기섭 57

국내성 바깥에서도 주목할만한 건물지들이 발견되었다. 동벽에서 동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 에 위치한 동대자( 東 臺 子 )건물지는 국가제사를 지낸 사당으로 추정하며, 32 동북 모퉁이에서 북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수원자남( 梨 樹 園 子 南 )유적은 거대한 4개의 초석과 함께 구름무늬 명문와 당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어 별궁 33 또는 제사유적으로 추정한다. 34 국내성 주변지역에는 고구려 무덤이 매우 많이 분포한다. 1997년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무 덤 10,782기가 우산( 牛 山 ) 마선구( 麻 線 溝 ) 산성하( 山 城 下 ) 칠성산( 七 星 山 ) 만보정( 萬 寶 汀 ) 하해방( 下 解 放 ) 6개 묘역에 분포하며, 그중 우산고분군이 가장 커서 3,471에 달한다. 35 삼국사기 에는 고구려 제2대 유리명왕( 琉 璃 明 王 )이 기원후 3년에 도읍을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 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36 이때의 국내( 國 內 )를 지금의 중국 집안시 국내성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지 만, 삼국지 동이전의 발기( 拔 奇 )와 이이모( 伊 夷 模 ) 이야기 37 및 집안시 국내성의 유적 편년 등을 근거 로 국내 천도를 태조왕( 太 祖 王 )대로 보거나 38 산상왕( 山 上 王 )대로 보기도 한다. 39 어느 쪽이든 3~5세기 에 집안시 국내성이 고구려의 왕성이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3. 경주 월성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위치한다. 동서 약 6km, 남북 약 8km 넓이의 경주분지 남쪽 중앙부에 해당하는데, 남산의 동쪽에서 서북쪽으로 흘러내려오던 문천( 蚊 川 ; 南 川 )이 낭산 옆을 지날 즈음 서쪽 으로 꺾어지며 남산의 끝자락을 살짝 잘라낸 것처럼 보이는 하천 옆 얕은 독립구릉에 지형을 따라 성벽을 쌓은 모습이다. 문천은 물길로 월성의 남벽을 오목하게 만든 뒤 구불구불 서쪽으로 2~3km 를 더 내달려 형산강에 유입된다. 경주분지의 서편 끝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형산강은 경주분지 동 쪽의 명활산 뒤편(보문단지)에서 흘러내려온 알천( 閼 川 ; 北 川 )까지 흡수한 뒤 포항방면으로 내달려 바다 32 方 起 東, 集 安 東 臺 子 高 句 麗 建 築 遺 址 的 性 質 和 年 代, 東 北 考 古 與 歷 史 1, 1982. 33 魏 存 成, 高 句 麗 初 中 期 的 都 城, 北 方 文 物 1985-2. 34 임기환, 고구려 도성제의 변천, 한국의 도성-도성조영의 전통, 서울학연구소, 2008. 35 吉 林 省 文 物 考 古 硏 究 所 集 安 市 博 物 館, 洞 溝 古 墳 群 : 1997 年 調 査 測 繪 報 告, 科 學 出 版 社, 2001. ; 박순발, 앞의 논문, 62쪽. 36 冬 十 月 王 遷 都 於 國 內 築 尉 那 巖 城.(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22년) 37 伯 固 死 有 二 子 長 子 拔 奇 小 子 伊 夷 模 拔 奇 不 肖 國 人 便 共 立 伊 夷 模 爲 王 自 伯 固 時 數 寇 遼 東 又 受 亡 胡 五 百 餘 家 建 安 中 公 孫 康 出 軍 擊 之 破 其 國 焚 燒 邑 落 拔 奇 怨 爲 兄 而 不 得 立 與 涓 奴 加 各 將 下 戶 三 萬 餘 口 詣 康 降 還 住 沸 流 水 降 胡 亦 叛 伊 夷 模 伊 夷 模 更 作 新 國 今 日 所 在 是 也.( 삼국지 권30 동이전 고구려) 38 余 昊 奎, 고구려 국내 천도의 시기와 배경, 한국고대사연구 38, 2005. 39 田 中 俊 明, 前 期 中 期 の 王 都, 高 句 麗 の 歷 史 と 遺 跡, 中 央 公 論 社, 1995. 58 고대 동아시아의 왕성과 풍납토성 - 풍납토성의 성격 규명을 위한 학술세미나 -

로 들어간다. 월성에서 북쪽의 알천까지 거리는 약 1.5km, 월성에서 서쪽의 형산강까지 거리는 약 1.8km이다. 경주분지의 동쪽에는 명활산과 토함산, 남쪽에는 남산(금오산), 서쪽에는 선도산(서형산), 북쪽에는 소금강산이 위치하는데, 동쪽에는 명활산성, 서쪽에는 선도산성, 남쪽에는 도당산토성 남산토성 남산신성 등이 있어 일종의 나성( 羅 城 ) 역할을 한다. 이들 산성의 외곽에는 서쪽의 부산성, 남쪽의 관문성, 북쪽의 북형산성이 있어 경주분지에 대한 2중 방어망을 구축한다. 월성은 자연 능선을 따라 쌓은 토성을 토석혼축( 土 石 混 築 )으로 보완한 것으로 알려진다. 성벽 높 이는 안쪽에서 4~11m, 바깥쪽에서 11~16m이며, 성벽의 바닥 너비는 24~32m이다. 성의 규모 에 대해서는 보고자마다 차이가 있어 확실치 않다. 이원근은 동서 900m, 남북 250m로서 성안 면적 193,585m2(58,683평)라고 하였고, 40 장경호는 동서 860m, 남북 480m로서 성안 면적 183,600m2(55,600 평)라고 하였다가 41 최근에는 동서 890m, 남북 260m라고 하였다. 42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고고학사전 에는 동서 860m, 남북 260m로 적혀 있다. 성벽 길이는 1974년에 이원근이 실측하고 1,841m로 보 고하였다. 그런데 2008년 정밀측량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보고자료에 따르면 성벽 바깥 둘레 는 2,340m라고 한다. 43 성문은 최근의 지표조사에서 동쪽 3개소, 북쪽 3개소, 서쪽 3개소, 남쪽 4개소 등 13개소를 상정하 였다. 삼국사기 를 비롯한 기록에는 남문( 南 門 ), 북문( 北 門 ), 귀정문( 歸 正 門 ), 임해문( 臨 海 門 ), 인화문( 仁 化 門 ), 현덕문( 玄 德 門 ), 무평문( 武 平 門 ) 등의 이름이 보이는데, 어느 문지에 대응하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 다. 다만, 1979~1980년에 월지(안압지) 맞은편 동북모서리의 문지를 발굴조사하여 정면 1간, 측면 2 간(4.7 4.7m)의 단층 기와문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44 성벽 바깥에서는 해자 흔적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문화재연구소가 1984년부터 2009년까 지 20여년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문천이 자연해자 역할을 하는 남쪽을 제외하고 동 서 북쪽에는 성벽 바깥의 땅을 파고 해자를 만들었는데,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형조건 때문에 곳곳에 연못 을 파고 물을 가두어두는 연못형해자가 많다. 45 호안( 護 岸 )시설로는 20~30cm크기의 막돌을 2~3단 쌓거나 10~20cm크기의 냇돌을 2~3m너비로 깔아놓았으며, 나무말뚝을 박고 판자를 설치한 곳 도 있다. 연못형해자의 크기는 다양해서 해자1은 길이 155m, 너비 25~50m(1085평), 해자2는 길이 40 李 元 根, 三 國 時 代 城 郭 硏 究, 단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0. 41 張 慶 浩, 통일신라시대의 궁전건축, 考 古 美 術 162 163, 1984. 42 장경호, 경주 월성의 조사연구와 역사적 의의, 경주 월성 연구의 현황과 과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시, 2010. 43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 월성Ⅶ-기초학술조사보고서-, 2010, 21쪽. 44 張 慶 浩, 앞의 논문. 45 이상준, 경주 월성의 변천과정에 대한 소고, 영남고고학 21, 1997. 한국의 고대 왕성과 풍납토성 김기섭 59

76m, 너비 최대 28m(500평), 해자3은 길이 20m이상, 너비 23m안팎m이라고 한다. 46 월지와 마주보 는 추정 동문지 부근에서는 50 20cm크기로 네모지게 잘 다듬은 돌을 10단(170cm), 12단(200cm)씩 높게 쌓아올린 석축해자도 발견되었는데, 연못형해자 위에 다시 만든 것일 개연성이 있다. 47 석축해 자에는 물을 넣고 빼는 시설도 있다. 2007~2008년에는 월성 내부를 14개 구역으로 나누고 비파괴 물리탐사를 실시하여 수십개의 건 물지와 문지, 도로, 연못 등의 시설 흔적을 확인하였다. 48 그 결과 석빙고 앞의 개활지, 월성 동쪽과 서쪽 양끝 방면에서 중요시설로 추정되는 대규모 건물지들이 발견되었다. 49 구체적으로 2 6 9 14 구역의 시설을 왕이 거처하던 대궁, 정치의 중심인 남당,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조원전 등의 후보지 로 추정하기도 한다. 50 신라 월성 주변에는 많은 고분들이 위치한다. 월성을 기준으로 1km 거리 이내에 인왕동고분군, 노동동고분군, 노서동고분군, 황남동고분군, 황오동고분군 등 왕 왕비 귀족들의 무덤으로 보이는 적석목곽분 계열 고총들이 분포하며, 2km거리 이내에는 서악동고분군을 비롯해서 전진평왕릉, 전 선덕여왕릉, 전헌덕왕릉 등 6세기대 이후의 왕릉급 무덤들이 즐비하다. 삼국사기 에는 신라 제5대 파사( 婆 娑 )이사금이 101년 봄에 월성을 쌓고 가을에 거처를 월성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51 459년에는 왜인( 倭 人 )이 쳐들어와서 월성을 공격하다가 물러났다고 한다. 52 487년에는 월성을 수리하였고, 53 496년에는 궁실을 다시 지었으며, 54 674년에는 왕궁에 연못과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한다. 55 파사이사금 때 월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성 벽 축조를 4세기 이후로 추정하는 고고학적 견해 56 와 큰 차이를 보이지만, 대체로 소지마립간 시기 46 김낙중, 신라 월성의 성격과 변천, 한국상고사학보 27, 1998, 198쪽 <표3>참조. 47 김낙중, 위의 논문, 201~202쪽. 48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 월성Ⅲ-지하 레이다 탐사-, 2010. ; 오현덕 신종우, 경주 월성 지하 레이다 탐사 결과보고, 경주 월성 연구의 현황과 과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시, 2010. 49 정자영, 경주 월성의 조사 현황과 성과, 경주월성의 보존정비현황과 과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12.11.30. 발표요지문, 24쪽. 50 박광열, 경주 월성 발굴조사 계획연구, 경주월성의 보존정비현황과 과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12.11.30.발 표요지문, 102쪽. 51 春 二 月 築 城 名 月 城 秋 七 月 王 移 居 月 城.( 삼국사기 권2 파사이사금 22년) 52 夏 四 月 倭 人 以 兵 船 百 餘 艘 襲 東 邊 進 圍 月 城 四 面 矢 石 如 雨 王 城 守 賊 將 退 出 兵 擊 敗 之 追 北 至 海 口 賊 溺 死 者 過 半.( 삼국사기 권3 자비마립간 2년) 53 秋 七 月 葺 月 城.( 삼국사기 권3 소지마립간 9년) 54 三 月 重 修 宮 室.( 삼국사기 권3 소지마립간 18년) 55 二 月 宮 內 穿 池 造 山 種 花 草 養 珍 禽 奇 獸 ( 삼국사기 권7 문무왕 14년) 56 민덕식, 신라의 경주 월성고, 東 方 學 志 66,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 1990. ; 김낙중, 앞의 논문, 190쪽 및 236쪽. 60 고대 동아시아의 왕성과 풍납토성 - 풍납토성의 성격 규명을 위한 학술세미나 -

그림 4 경주 월성 내부의 유구 분포도(지하 레이다 탐사)57 부터는 월성이 신라 왕성으로서 위상이 매우 높았다는 것이 통설이다. 4. 한국 고대 왕성의 특징 고조선의 문화적 전통과 중국의 정치 문화적 영향 속에서 축조 운영된 낙랑토성과 고구려 신라 의 초기 왕성에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1 하천변의 낮은 구릉 또는 평지에 위치한다. 주변에는 평야지대가 펼쳐져 주거 농토 무덤 등 다양한 연계공간을 확보하였다. 낙랑토성은 거의 독립구릉에 가까운 낮은 구릉에 성벽을 쌓았고, 경 주 월성도 남산 자락이 문천 때문에 끊어진 형태의 낮은 독립구릉에 위치한다. 낮은 구릉 옆에는 반 드시 크고 작은 하천이 지나는데, 평양 낙랑토성과 집안 국내성은 각각 대동강과 압록강이라는 거대 한 강으로 지류가 유입되는 지점을 골랐다는 점이 돋보인다. 이러한 입지선정은 교통 운송 전쟁대 비 및 식수확보까지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57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 월성Ⅲ-지하 레이다 탐사-, 2010, 104-2쪽 <그림102>. 한국의 고대 왕성과 풍납토성 김기섭 61

2 성벽은 판축법으로 쌓은 토벽이 기본이다. 중국 고대의 도성들도 모두 토성이라는 점과 통하는 특징인데, 국내성과 월성에서 돌을 사용하였지만 석축 성벽 아래에서 판축한 토벽이 확인되어 기본 적으로 토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토축 성벽은 성의 위치에 따라 재료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쪽을 선 택한 것과 관련이 깊기도 하지만, 석성( 石 城 )은 돌 채취 운반 가공 축조 등의 여러 방면에서 상당수 의 기술자가 필요하고 축성기간이 긴 반면 토성은 설계 내지 축조현장의 감독을 제외한 일반 노동 자는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된다는 점과 축성기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3 왕성의 성벽 길이는 전체 둘레 2.5km 안팎이다. 이는 당시 왕도의 인구밀도와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서 낙랑군의 수현( 首 縣 )인 조선현의 인구가 5만여명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시기 차이 는 다소 있을지라도 행정체계, 상업 및 수공업기술 수준, 기간시설 및 교통로 등의 여건을 감안하면 3~4세기 삼국의 왕도( 王 都 ) 역시 조선현과 크게 달랐다고 보기 어려우며, 그것이 국내성 월성의 크 기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고 생각한다. 4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며 성벽을 쌓기 때문에 성벽의 평면 형태와 내부 건축물의 위치 및 방향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이는 첫째 항과 표리를 이루는 것으로서, 하천 바로 옆에 지형에 맞 춰 성벽을 쌓으니까 성벽의 평면이 자연스럽게 부정형으로 되는 것이며, 중국과 달리 산과 구릉이 많은 한반도의 지형 특성 때문에 성벽을 직선으로 쌓기도 어렵다. 성의 평면은 성안 건물 배치에도 영향을 미쳐 궁궐 및 중요시설의 방위와 도로방향 등이 비교적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인다. 5 왕성 안에는 주위를 조감할 수 있는 토단을 쌓거나 자연적인 구릉성 대지를 선정해 왕궁 관청 을 비롯해 정치 의례 군사적으로 중요한 건축물을 세운다. 이는 당시의 계급차와 그에 따른 구별 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데, 성 내부의 지면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대지 및 건물지의 위치 와 방향이 일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내성에서 궁전지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지가 성의 중부에 집 중된 점이라든지 낙랑토성 월성이 주변 평야를 내려다볼 수 있는 구릉에 입지한 것은 정치 사회적 위계를 건축물 입지에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6 성안에는 일상 내지 유사시를 대비해 상당수의 저장시설, 망루, 수공업공장 등을 설치하며, 충 분한 식수원을 확보한다. 수공업공장을 성안에 배치한 것은 중국 도성의 경우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 는 특징으로서 일상용구와 전쟁물자 조달, 곧 경제력과 군사력 보유라는 측면에서 저장시설과 함께 왕성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요건이다. 7 왕족 귀족 고위관리의 일부를 제외한 일반 백성 상당수는 성 바깥에 설정한 상공업 및 일반 주거지역에서 생활한다. 삼국시대 전기에는 중국처럼 상공업구, 주거구 등 광범위한 지역을 포괄하 는 곽( 郭 )을 만드는 것이 어렵거나 불필요했으므로 유사시에만 안전한 산성 등으로 거처를 옮겨 옹 성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8 왕성 주위에는 산성을 쌓아 방위체계를 구축한다. 국내성 서북쪽 약 2.5km 거리에 둘레 62 고대 동아시아의 왕성과 풍납토성 - 풍납토성의 성격 규명을 위한 학술세미나 -

6,951m의 대규모 산성자산성이 위치하여 국내성과 하나의 세트를 이루었으며, 월성은 도당산토 성 남산토성 명활산성 등 주변의 산성들과 세트를 이루었다. 특히, 신라 명활산성의 경우에는 자비 마립간 18년(475)부터 소지마립간 9년(487)까지 왕이 잠시 이거( 移 居 )할 정도로 도성방위체계에서 중 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9 왕성 가까이에는 그 시대의 지배층 무덤이 떼를 이루며 분포한다. 중국 춘추시대에는 성안에 왕 귀족들의 무덤을 조영할 정도였으며, 연나라의 경우에는 전국시대에도 여전히 도성 안에 왕 귀 족의 무덤을 조영한 것으로 알려진다. 삼국시대의 도성 내지 왕성은 규모가 작았기 때문인지 초기부 터 무덤은 성 바깥에 조영하였지만, 성 바깥이라 하더라도 아무 곳에나 조영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무덤은 왕성 주변에 위치하였는데, 이는 무덤을 보호한다는 측면도 있겠으나 조상의 영혼이 후손들을 지켜주리라는 믿음도 작용한 것으로 본다. Ⅲ. 풍납토성과 백제의 한성 1. 풍납토성의 현황 서울시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한 사적이다. 한강 옆 평지에 쌓은 토성으로서 지금은 2.1km 구간만 남아있지만, 원래는 둘레 약 3.5km였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성벽 윤곽이 마치 옛날 나룻배처럼 생겼다. 1999년과 2011년 2차례에 걸쳐 동쪽 성벽을 발굴 조사하여 성벽의 아랫변 너비가 43m, 높 이가 12m 이상이며, 매우 복잡하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쌓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성벽의 윗변 너 비를 15m, 높이를 12m라고 가정하면, 사다리꼴 성벽을 다져쌓는데 연 인원 약 224만명을 동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고대사회에서 거대한 토목공사는 국가의 온 힘을 쏟아 붓는 중요한 일 이었다. 1925년 큰 홍수가 났을 때 중국제 청동자루솥을 비롯한 유물이 출토되면서 백제 왕성인 하남위 례성 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바람드리 風 納 란 지명 때문에 사성 蛇 城 으로 불리기도 했다. 성안 지 하 4m 깊이에서 백제왕궁의 일부로 보이는 각종 건물지와 우물, 창고, 도로 등이 발견되었으며, 각 종 그릇, 벽돌, 기와, 토관, 장신구 등 귀중한 유물 수십만점이 출토되었다. 백제의 초기 왕성이던 하남 위례성은 4세기 무렵 한성 으로 확대 재편되었는데, 한성은 북성과 남성으로 이루어졌다. 백제 왕과 왕족들은 평소 북성에서 살다가 전쟁이 나면 남성으로 옮겨서 수비 한 것으로 보인다. 북성은 지금의 서울 풍납동 토성이고, 남성은 서울 몽촌토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의 고대 왕성과 풍납토성 김기섭 63

2. 한성의 풍경 한성은 북성과 남성 2개의 성으로 구성되었으므로 도시구획이 정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북성과 남성이 각각 지금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 해당한다면, 그 중심이 어느 쪽이든 나중에 사비 도성( 泗 沘 都 城 )에서 실시된 5부5항제라든가 고구려와 신라의 조방제( 條 坊 制 ) 방리제( 坊 里 制 )처럼 정연 한 도시구획은 애당초 기대하기 어렵다. 왕성이 남쪽에 있고 도시외곽성이 그 서북쪽에 위치하는 형 태의 도성 구조에서는 북위( 北 魏 )와 당( 唐 )의 도성제처럼 궁궐 남쪽으로 도로 관청 사찰 시장 주택 등을 구획할 수 없음은 물론 반대 방향으로도 정연하게 구획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도시를 바둑판처럼 구획하는 조방제는 백제가 나성을 쌓은 사비시대에도 실시되지 않았다고 보 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비도성의 5부5항제와 나성 건설방식이 북위 낙양성( 洛 陽 城 )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58 든가 중국 남조( 南 朝 )의 건강성( 建 康 城 )을 모방했다 59 고 볼만한 부분이 있어, 적어도 조 방제의 흔적만큼은 분명하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한성시대의 도성제에서는 아직 그와 같은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사비 도성의 5부5항제를 백제가 엄격한 신분질서에 입각하여 주례주의( 周 禮 主 義 ) 정치이념을 추구한 증거라고 해석하는 견해 60 가 옳다면 한성시대에는 아직 그와 같은 이념이 반 영될 수 없었다고 해야 한다. 백제의 도성이 2개의 성으로 구성된 데에는 당시의 정치 사회적 여건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하 였을 것이다. 인구 밀도가 증가하고 사람들의 각종 욕구로 인해 경제 활동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자 연히 도시의 규모와 역할도 점점 커지게 되었다. 따라서 도시는 사람들이 활동하기에 편한 하천 근 처의 평지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웃 나라와의 군사적 충돌이 불가피하였던 당시의 정치 적 상황은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를 따로 대비케 하였다. 그 결과가 바로 산성 건 설이다. 전쟁이 있을 때마다 도시의 거주민이 모두 피난해서는 곤란하므로, 평지에도 주요 시설을 감싼 성 곽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인접한 세력과의 빈번한 전쟁으로 빚어진 위기감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방 어 면적이 넓고 성벽의 경사도가 비교적 완만한 평지의 토성은 상대적으로 안정감을 주지 못해 다 소 불안하였다. 따라서 극소수의 지배층은 유사시에 좀더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도심에서 가까 운 높은 지대에 또 하나의 성을 쌓고 때때로 거처하였다고 생각한다. 후대의 사비 도성처럼 정연한 도시 구획은 아닐지라도, 백제의 한성이 기본적으로 정치 경제 문 58 徐 程 錫, 百 濟 의 城 郭 - 熊 津 泗 沘 時 代 를 中 心 으로-, 學 硏 文 化 社, 2002, 179~180쪽. 59 秋 山 日 出 雄, 南 朝 都 城 建 康 の 復 元 序 說, 橿 原 考 古 學 硏 究 所 論 文 集 7, 1984, 24~25쪽. 田 中 俊 明, 王 都 로서의 泗 沘 城 에 대한 豫 備 的 考 察, 百 濟 硏 究 21, 1990, 198쪽. 60 徐 程 錫, 앞의 책, 181쪽. 64 고대 동아시아의 왕성과 풍납토성 - 풍납토성의 성격 규명을 위한 학술세미나 -

화의 중심 도시였던 이상, 일정한 구획은 갖추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백제 지배층의 무덤은 모두 몽촌토성의 남쪽 가락동 석촌동 방이동일대에 분포하고 있어 능역( 陵 域 )이랄까 공동묘지의 범위를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시가 형성될 만한 곳은 몽촌토성의 북쪽과 동쪽뿐이다. 1926년에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지도( 春 川 纛 嶋 )를 보면, 몽촌토성의 북쪽에는 지금의 성내동-천 호동-암사동으로 이어지는 야트막한 평지성 구릉이 형성되어 있고, 그 양 옆으로 꽤 넓은 논밭이 펼 쳐진다. 풍납토성은 몽촌토성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700m정도 떨어져서 성벽 표시가 나 있는데, 성벽의 장축 방향이 한강의 물길과는 약 25 가량 동쪽으로 비스듬히 틀어진 탓에 서쪽 성벽 약 1km 구간만 완전히 유실된 모습이다. 이와 같은 풍납토성의 평면형태는 매우 교묘해서 평소 성벽과 한강 이 접촉하는 부분을 최소화하면서도 물길을 자연스럽게 통제하고 있다. 그리고 따로 제방을 더 쌓지 않고도 동벽과 북벽 바깥으로 펼쳐진 드넓은 농경지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서울시 송파구일대의 자연환경을 감안할 때, 남성(몽촌토성)과 그 서북쪽의 북성(풍납토성), 그리고 북성의 동쪽에 펼쳐진 도로 취락 농경지 등이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한성시대 도성의 모습 이다. 이러한 모습은 북위 당의 도성제는 물론 한( 漢 )나라의 도성과 비교해서도 큰 차이가 있다. 중 국에서 가장 유사한 예는 전국시대의 도성들인데, 남-북의 자오선( 子 午 線 )이 무시되고 아직은 정연한 도시구획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 공통분모이다. 여기에는 도성을 통해 어떤 사상을 실현한다거나 형 식을 추구하기보다 실질과 실용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시대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면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한성의 풍경을 상상해보자. 먼저, 한때의 왕성으로 추정되는 몽 촌토성 내부에서 서로 교차하는 듯한 도로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남-북의 자오선 이 강조되거나 조방( 條 坊 )이 구획된 자취를 찾을 수는 없다. 그것은 몽촌토성의 입지조건과 외형을 통해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이다. 자연구릉의 지형 조건을 최대한 이용하여 쌓았기 때문에 성곽의 평면형태가 부정형으로 되었으며, 성 내부의 지면( 地 面 )도 중앙의 몇몇 지점을 제외하고는 다소 불규 칙한 요철을 이룬다. 이런 지형 조건에서 방향을 따져 건물을 정연하게 배치하기란 거의 불가능하 다. 따라서 백제의 왕성에서조차 방향에 입각한 정연한 구획은 없었다고 본다. 한성의 정궁( 正 宮 )이 북성과 남성 중 어느 쪽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새로 지은 남성에 극 소수의 지배층과 이들을 보좌하고 호위하는 사람들을 위한 시설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여러 관청 중 에서 경부( 椋 部 )를 비롯한 몇몇 관부( 官 府 )의 부속 건물은 반드시 성 안에 건설되었을 것이다. 삼국사 기 백제본기 진사왕 7년(391)조의 봄 정월에 궁실을 다시 고쳤으며,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기 이한 새와 이상한 화초를 길렀다 는 기사와 비유왕 21년(447)조의 여름 5월에 궁궐 남쪽의 연못 안 에서 불이 났는데, 불꽃이 수레바퀴 같았으며 밤이 새어서야 꺼졌다 는 기사로 보아 4세기 말엽부터 는 궁궐 내부에 연못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발굴 성과를 감안하면, 납성인 몽촌토성보다는 오히려 북성인 풍납토성 쪽에 더 많은 국가 시설물이 배치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그것은 한성에 정궁과 별궁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한국의 고대 왕성과 풍납토성 김기섭 65

서도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다. 아신왕의 아버지인 침류왕( 枕 流 王 )이 즉위한 다음 해에 죽었고, 숙부 인 진사왕( 辰 斯 王 )이 재위 8년만에 죽었으니, 그 뒤를 이은 아신왕( 阿 莘 王 )은 아마도 침류왕이 태자일 적에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한성의 별궁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태자가 평상시 별궁에 기거했 음을 시사한다. 태자가 기거하는 별궁 주변에는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중요한 시설들이 늘어섰다 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풍납토성 내부의 도시구조는 비교적 정연하였을 것이다. 현재 풍납토성의 동쪽 성벽을 거의 같은 간격으로 뚫고 지나가는 4개의 도로가 모두 성문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풍납토성의 동쪽 바깥 지역이 왕성인 몽촌토성의 북쪽 정면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적어도 2~3군데는 성문의 흔 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성문이 거의 같은 간격으로 설치되었다는 것은 내부 구조가 어느 정도 정연하 였다는 뜻이다. 다만, 성벽의 평면 모습이 방향성을 무시한 타원형에 가까운데다 각도마저 틀어져 있기 때문에 조방 개념은 적용하기 어렵다. 중국의 전국시대 도성처럼 백제의 북성 내부에는 일반인의 주거지도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도시 외곽성은 평균 둘레가 15km에 달하는 데 반해, 백제의 북성은 3.5km에 불과하여 많은 인원을 수용 하기 어렵다. 따라서 상당수의 민가는 성곽 바깥에 건축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 왕 21년조의 백성의 집은 자주 강물에 무너지니 라는 기사가 그 사례이다. 고구려 국내성의 경우, 고구려시대의 대형 건물지가 성 내부는 물론 동문 바깥에서도 많이 발견되었는데, 61 그 용도가 무엇 이었든 간에 일단 일부 지배층이 성 바깥에서 거처하였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일반 민가와 농경지 는 물론 각종 경제시설의 일부도 성 바깥에 배치되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은 한성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성벽의 바깥, 특히 풍납토성의 동쪽지역에 주로 형성되었을 도시 내지 취락의 규모라든가 모습에 대해서는 자료가 전혀 없어 구체적인 복원이 불가능하다. 다만, 개로왕대에 벌인 대규모의 제방공사 가 한강의 범람을 막기 위한 한가지 방책일 뿐 아니라 점점 확대되는 도시의 정비까지 염두에 둔 것 이라면, 늦어도 5세기 후반에는 백제 도성의 내 외부를 보다 체계적으로 구획하려는 노력이 경주되 었다고 볼 수 있다. 1926년에 발행된 지도에는 풍납토성의 동벽으로부터 200~400m 정도 떨어진 곳에 성벽과 평행 하며 동북-서남방향으로 길게 이어진 도로 표시가 있다. 송파에서 시작된 도로는 동북방향으로 거 의 직선처럼 뻗었는데, 몽촌토성의 서북쪽 성벽 곁을 지나 풍납토성의 동벽과 거의 나란히 진행하 여 성내동의 평지성 구릉으로 올라선 다음 야트막한 능선을 따라 고덕동방면으로 나아간다. 고덕동 에서부터는 한강변을 따라 선리( 船 里 )로 이어지며, 이곳에서 비로소 방향을 바꿔 동남쪽의 미사리까 61 吉 林 省 考 古 硏 究 室 集 安 縣 博 物 館, < 集 安 高 句 麗 考 古 的 新 收 獲 > << 文 物 >>1984-1. ; 崔 茂 藏 역, < 集 安 高 句 麗 考 古 學 의 新 收 獲 > << 高 句 麗 渤 海 文 化 >>, 集 文 堂, 1985. 66 고대 동아시아의 왕성과 풍납토성 - 풍납토성의 성격 규명을 위한 학술세미나 -

지 연결된다. 그런데 이 길이 몽촌토성 풍납토성에서 선리 미사리방면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는 아 니다. 성내동에서 둔촌동의 구릉에 오른 다음 능선을 따라 동북쪽의 상일동과 하남시 초이동 사이로 빠지고, 여기에서 다시 풍산동을 거쳐 미사리에 이르는 길이 또 있다. 결국, 고덕동 방면의 길과 둔 촌동 방면의 길은 선리 혹은 미사리에서 서로 만나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도로는 모두 몽촌토성의 북쪽, 풍납토성의 동쪽에 형성된 평탄지를 지나며, 또 풍납 토성의 동쪽 성문과도 연결된다. 몽촌토성의 북쪽에는 풍납토성과 성내동의 평지성 구릉 사이에 펼 쳐진 평야뿐 아니라 성내동과 둔촌동 사이로 뻗어나가 길동을 거쳐 멀리 명일동까지 길게 이어지는 계곡평야가 매우 넓게 펼쳐져 있다. 이처럼 풍납토성 동쪽 성벽 바깥으로 성내동의 구릉 일부를 포 함하며 둔촌동 구릉지대까지 형성된 평탄지의 총면적은 어림잡아도 풍납토성 내부 면적의 3배를 웃 돈다. 드넓은 평탄지의 거의 중앙에 성내동의 야트막한 구릉이 자리하고, 그 위 혹은 곁으로 두 도로가 지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성 바깥의 취락은 지금의 성내동 일대에 집중적으로 형성되었을 개연성 이 있다. 마침 성내동 구릉의 동쪽에는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성내천(城內川)과 합친 다음 한강에 유 입되는 작은 하천이 있어 생활과 농경에 매우 유용하였을 것이다. 그림 5 백제 한성지역의 기간도로 추정도 한국의 고대 왕성과 풍납토성 김기섭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