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논총 제56집(2010. 12) 5~35쪽 근대 대중지의 역사 수용 방식과 글쓰기 전략* - 별건곤 을 중심으로 1)이 승 윤 ** 차 Ⅰ. 들어가며 Ⅱ. 개벽 에서 별건곤 으로 : 취 미 와 실익 을 통한 민중계몽의 모색 례 Ⅲ. 양식에 대한 인식 부재와 글쓰기 의 전략 Ⅳ. 호출된 역사와 집단기억 의 구성 V. 남은 문제들 국문초록 이 글은 근대 대중종합잡지의 역사 수용 방식과 역사를 소재로 한 다 양한 글쓰기 전략에 대한 연구이다. 본 연구가 일반 대중을 상대로 간행 되는 종합 대중지를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들이 상대적으로 당대의 사 회 역사적인 분위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으며 대중에 대한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개벽사 에서 발행된 별건 * 이 논문은 2010년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0-327-A00302) **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6 한국문학논총 제56집 곤 의 경우는 개벽 의 강제 폐간 이후 변화된 사회 현실과 대중의 코 드에 맞춘 출판물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본 연구의 일차 과제는 별건곤 (1926. 11~1934. 6)에 실린 역사를 소 재로 한 다양한 관련 독물( 讀 物 )을 대상으로 그것의 글쓰기 전략들을 살 피는 것이다. 별건곤 에는 국내외의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한 논평 ( 論 評 ),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한 사화( 史 話 ), 인물의 전기( 傳 記 ), 역사를 소재로 한 애화( 哀 話 )와 실화( 實 話 ), 대담( 對 談 ), 설문( 設 問 ), 그리고 허 구적 요소가 강조된 야담( 野 談 )과 기담( 奇 談 ) 등 다양한 글들이 실려 있 다. 과거 역사에 대한 호출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강력한 귀속성의 느낌과 사고를 부여하는 집단 기억 을 갖게 했으며. 그것은 곧 개벽 에 서 별건곤 으로 이어지는 민중운동의 기본적인 토양이기도 하였다. 창간 당시 취미 실익잡지 를 표방하였던 별건곤 은 저급한 오락거 리가 아닌 역사와 문학, 무용과 음악, 박물관, 동물원, 활동사진, 극장 등 당대 첨단의 근대적 취미와 교양에 맞추어져 있었다. 이는 별건곤 이 지향한 취미 의 최초 취지가 고급의 취미와 교양을 일반 민중들이 쉽게 향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내용 또한 창 간 초기에는 단순히 흥밋거리를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계몽을 위해 동 원되었던 것이었다. 별건곤 에 등장하는 다양한 양식적 명칭은 뚜렷한 양식 개념에 입각 하여 부여된 명칭이라고 할 수 없다. 양식 표기는 특정 양식에 대한 인 식에 기반한 것이라기보다는 독자의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한 편집자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들이 밝힌 양식의 의미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양식의 의미와 동일한 것이라고 볼 수 없으며, 또한 그들이 표기한 특정 한 양식 속에 들어있는 글 역시도 일관성을 갖고 사용되지 않았음을 확 인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결국 당시 편집자들의 양식에 대한 혼란 때문이라기보 다는 양식에 대한 인식 자체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즉, 편집자들의 관심
근대 대중지의 역사 수용 방식과 글쓰기 전략 7 은 양식 자체보다는 어떠한 표기가 보다 더 독자들의 관심을 유발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비슷한 성격의 글이라도 그때그 때 필요에 따라 서로 다른 양식명이 부여된 것이다. 또한 각각의 양식은 부여된 명칭의 경계를 넘어 혼용되는 양상을 보 여준다. 이러한 진술은 하나의 글이 편집자에 의해 무엇으로 표기되든지 간에 각 양식 간의 분류가 불가능할 만큼 차용과 삼투, 그로 인한 다양 한 변개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양식 간 전환과 교섭의 과 정에서 하나의 양식적 개념으로 수렴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뜻한다. 잡지에 실린 다양한 글쓰기 상호간의 변개와 삼투, 차용의 과정 중에 서도 하나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많은 경우 역사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통치 아래서 이러한 글쓰기를 통한 역사담 론의 생산은 소극적으로는 위무의 수단으로 적극적으로는 절멸의 위협 에 맞서는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그것은 곧 민족 성원들 사이의 결속력 을 높여주는 동시에 민족의 개별적 존재성 을 확인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담론 생산 자체가 민족 내부의 모 순을 덮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즉,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도출된 민 족의 개별성 이란 결국 제국으로부터 민족을 분절시킴으로써 특수성과 지방성(locality)을 담보하는 것 이상이 될 수 없었다. 결국 과거의 역사 는 민족적 결집을 위한 매개체였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것은 제국의 식 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주요한 도구였던 것이다. 1930년대 대중지를 통한 역사를 소재로 한 글쓰기의 대중적 소비는 작가들에게는 역사소설 창작의 모티프와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 터가 되었다. 1930년대 중반, 이른바 역사소설시대 라 불릴 만큼 역사소 설의 생산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들 작품이 갖는 대중성, 통속성의 근 간은 바로 대중 종합지가 생산해 낸 역사 소재 글쓰기의 전략과 그것을 소비한 독자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상업적 목적에 의해 출판되는 잡지의 성격상 역사 의 내용은 얼마든지 시대적 변화와 독자의 취향에
8 한국문학논총 제56집 따라 기민하게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주제어 : 근대 대중지, 별건곤, 역사, 역사담론, 글쓰기, 양식, 집단기억, 민족, 독자. Ⅰ. 들어가며 일제 지배 하에서 생산된 역사에 관련된 여러 유형의 글쓰기는 민족 의식에 대한 직 간접의 표현일 수 있었다. 역사 는 식민지인에게 저항 의 무기이거나 위무의 수단이었다. 또한 담론의 생산자나 소비자에게 역사 는 가장 유용하면서도 익숙한 대상이었다. 하지만 저항 민족주의의 이념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이 역사를 필요 이상으로 미화하거나 확대 축소하는 경우를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식민 치하에서 과거의 역사 는 일제에 의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호출되어 재배치 되었다. 역사서술이 갖는 이런 양가성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협력이냐 저 항이냐 민족이냐 반민족이냐 하는 단순도식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그 경계 위에서는 수많은 담론들이 교차하고 충돌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본 연구는 대중종합잡지의 역사 수용 방식과 역사를 소재로 한 다양한 글쓰기 전략에 주목하였다. 과거의 역사 를 호 출한 다양한 글쓰기들은 공식적 담론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말 하기도 하고, 혹은 훨씬 덜 말하기도 한다. 이들은 역사 를 매개로 하여 특정한 대상이나 개념에 관한 지식을 생성시킴으로써 당대의 현실에 관 한 설명을 산출하는 언표로서 작용하였다. 많은 경우 이러한 글쓰기 전 략은 내셔널리즘을 비롯한 복합적인 이데올로기와의 공모 혹은 연대를 통해 생산된다. 본 연구의 일차 과제는 별건곤 에 나타난 역사를 소재로 한 다양한
근대 대중지의 역사 수용 방식과 글쓰기 전략 9 관련 독물( 讀 物 )을 대상으로 그것의 글쓰기 전략들을 살피는 것이다. 별 건곤 뿐 아니라 삼천리 (1929. 7~1942. 1), 조광 (1935. 11~1944. 8) 등의 종합지들도 문학의 대중적 유통이란 측면에서 오히려 전문지를 능 가하는 역할과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잡지에는 소설 시 수필 희곡 등 문학작품뿐 아니라 동시와 동화 야담 사화 과학 교육 분야 의 글들, 신체제론을 비롯한 정치비평,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비상시 화장법 남방의 향기 등과 같은 상업광고 그리고 여 러 단체의 소식과 동정 등이 실려 있다. 본 연구가 역사나 종교, 교육 등 특정 분야, 혹은 여성이나 학생 등 특 정 대상이 아닌 일반 대중을 상대로 간행되는 종합 대중지를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들이 상대적으로 당대의 사회 역사적인 분위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으며 대중에 대한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개벽사 에서 발행된 별건곤 의 경우는 개벽 의 강제 폐간 이후 변화된 사회 현실과 대중의 코드에 맞춘 출판물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표면적으로 이들 매체에 실린 역사소재 글쓰기들은 산문의 형식을 하 고 있지만 그들을 모두 일정한 문학양식으로 귀결시키는 어렵다. 따라서 이 연구는 소설 중심의 연구에서 벗어나 다양한 서사 양식을 포괄한다. 연구 대상의 폭을 확장한 셈인데, 다양한 당대 서사물의 존재 양상을 생 각한다면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본 연구의 구체적인 대상은 별건곤 (1926. 11-1934. 6)에 실린 국내 외의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한 논평( 論 評 ),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한 사화( 史 話 ), 인물의 전기( 傳 記 ), 역사를 소재로 한 애화( 哀 話 )와 실화( 實 話 ), 대담( 對 談 ), 설문( 設 問 ), 그리고 허구적 요소가 강조된 야담( 野 談 )과 기담( 奇 談 ) 등이다. 이러한 다양한 유형의 글쓰기가 당대 일제치하라는 시대적 상황과 대중을 상대로 한 종합 대중지라는 객관적 조건 아래에 서 어떠한 전략적 선택을 하고 있는지, 또한 그러한 글쓰기가 어떻게 생
10 한국문학논총 제56집 산되고 배치되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Ⅱ. 개벽 에서 별건곤 으로 : 취미 와 실익 을 통한 민중계몽의 모색 3 1 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통한 일련의 유화정책을 실시하면서 민족운동의 분열과 개량화를 기도하였다. 따라서 무단통치 에서 문화정치 적 통치로 바뀐 이후 조선에는 민족 자본의 신문이 생기 고 잡지의 창간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총독부 관제의 개편, 헌병 경찰제도의 폐지와 더불어 민간신문과 잡지의 간행이 허용되면서 조선 일보 (1920. 3)와 동아일보 (1920. 4) 등의 일간지가 창간되고, 창조( 創 造 ) (1919. 2), 폐허( 廢 墟 ) (1920. 7), 장미촌( 薔 薇 村 ) (1921. 5), 백조 ( 白 潮 ) (1922. 1), 금성( 金 星 ) (1923. 11), 영대( 靈 臺 ) (1924. 8) 등과 같 은 동인지가 속속 발간되면서 일제하 중요한 작품 활동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1920년대 동인지 문단은 하나의 작은 문학 장으로서 폐쇄적인 성향을 고수했다. 1) 이러한 폐쇄성은 당대의 윤리, 사상계와의 충돌 과정에서 예 술의 독자성을 고집함으로써 상징적인 독립성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폐쇄적인 성격 때문에 소수의 제한된 집단 형태의 수준을 벗어 나지 못했으며, 동인지에 실린 작품 또한 대개는 동인들 간의 윤독물( 輪 讀 物 )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1) 한국문학사에서 동인지가 가지는 의미는 첨언이 불필요하나 결국 일반 대중과의 소통이나 사회의 지배적 담론 형성에 있어서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1920년 대 동인지 문단이 가지는 의의와 한계에 대해서는 김철, 1920년대 동인지 문학 의 전개와 그 역사적 성격, 잠 없는 시대의 꿈, 문학과지성사, 1989. 김춘식, 미 적근대성과 동인지 문단, 소명출판, 2003. 차혜영, 한국근대 문학제도와 소설양 식의 형성, 역락, 2004 참조.
근대 대중지의 역사 수용 방식과 글쓰기 전략 11 한편 이 시기에 대중적인 종합잡지로 등장한 개벽( 開 闢 ) (1920. 6)은 현상문예제도를 도입하여 신인을 발굴하였으며, 조선문단 (1924. 10)과 같은 문학 종합지는 추천 제도를 통해 신인을 발굴하여 문학 활동기반 을 확대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개벽 은 당시 조선 유일의 대표적 사상 잡지 2) 로서 기능하며 조선 민중의 잡지 3) 를 표방하였다. 개벽 은 핵심 주체가 천도교의 조직과 이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개벽 을 천도교를 배경으로 한 종교 잡지라고 볼 수는 없다. 4) 잡지 발간의 주체들은 원칙적으로 종교적 색채를 배제했으며, 조선 민 중의 잡지 임을 표방하면서 방법론상 민중 계도적인 문화운동 의 형태를 취했다. 구체적으로 신사회( 新 社 會 ) 건설을 위한 사회운동과 농촌개발운 동의 책임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며 평등주의에 입각한 사회개조와 민족 문화의 창달을 표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일제에 대한 투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 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개벽 은 창간호에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 다. 1920년 6월 25일에 발행된 창간호와 이틀 후인 27일에 발행된 호외 ( 號 外 ) 역시 모두 일제 당국에 의해 압수되어, 부득이 사흘 후인 30일에 다시 임시호를 발행하였다. 개벽 지는 발행기간 중 발매금지(압수) 33 회 이상, 정간 1회, 벌금 1회의 수난을 겪다가 결국 1926년 8월, 72호를 끝으로 강제 폐간되고 만다. 5)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이 개벽 의 폐간조치에 대한 항의 기사를 연일 싣고, 천도교 청년당과 관 2) 김진구, < 開 闢 社 의 첫 印 象 >, 별건곤, 1930. 7. 19쪽. 3) 開 闢 雜 誌 가 이미 朝 鮮 民 衆 의 雜 誌 이오. 1 個 人 1 團 體 의 所 屬 物 이 안인 以 上 은 民 衆 의 向 上 이 곳 이 開 闢 의 向 上 이오. 이 雜 誌 의 努 力 이 곳 民 衆 의 努 力 인지 라 民 衆 과 한가지로 興 廢 存 亡 을 決 하야 民 衆 의 精 神 으로 精 神 를 삼으며 民 衆 의 心 으로 心 을 삼을 것 밧게 업슴을 斷 言 하는 것이 그 하나이며, <권두언>, 개벽, 1923. 7. 3쪽. 4) 1920년대 개벽 의 성격과 활동에 관해서는, 최수일, 1920년대 문학과 開 闢 의 위상, 성균관대 박사논문, 2002, 참조. 5) 김근수, 한국잡지사 연구, 한국학연구소, 1992, 91-113쪽 참조.
12 한국문학논총 제56집 서기자단( 關 西 記 者 團 )을 비롯한 각종 단체가 일제의 언론 탄압에 강경 히 항의하였으나 개벽 은 끝내 소생하지 못하였다 개벽 의 폐간은 단순히 잡지사의 노선 때문만은 아니었다. 1926년 순 종 서거 이후 6 10 만세운동과 일련의 사회주의 운동 단체들의 등장으 로 정치 활동에 대한 감시가 심화되고 출판물에 대한 통제 검열 활동이 더욱 강화된 데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총독부의 사회주 의 운동 탄압과 출판에 대한 검열 강화를 통해 조선어 잡지는 대중지로 전환하거나 대중지를 표방하게 된다. 하지만 총독부의 통제정책으로 말 미암아 실질적으로 충실하게 발행된 잡지는 많지 않았다. 1920년대에 비 교적 오랫동안 발간된 종합잡지는 개벽, 조선지광, 신여성 그리고 어린이 정도였다. 1926년 개벽 폐간 후에는 조선지광, 현대평론, 별건곤, 삼천리, 조광 정도가 비교적 그 명맥을 이어가며, 대부분 의 잡지들은 창간과 동시에 폐간되는 이른바 三 號 雜 誌 들이었다. 6) 한편 1929년의 공황은 대중들의 서적 구매 능력을 더욱 약화시키고,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출판 사업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7) 이러한 외적 조건 아래에서 개벽 을 발간하던 개벽사( 開 闢 社 ) 에서 는 폐간된 개벽 대신 취미잡지 를 표방한 별건곤 을 창간하였다. 8) 별 건곤 은 1926년 11월에 창간하여 1934년 8월까지 통권 74호가 출간된 6) 일제의 탄압이 심하기는 했지만 이 시기 발간된 대중잡지나 여성잡지가 단지 오 락성만을 겨냥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당시 잡지 출판인들은 잡지를 문명개화 론의 시각에서 대중을 계몽하는 도구로 보았다. 김수진, 1920~30년대 신여성담 론과 상징의 구성, 서울대 박사논문, 2005, 124-128쪽 참조. 7) 하지만 이 시기 일본어 출판에 대한 수요는 증가하였다. 그것은 근대 지식과 사 상 및 신문화에 대한 조선 식자층의 욕구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김수진, 위의 책, 134-140쪽. 방효순, 일제시대 민간 서적발행활동의 구조적 특성에 관한 연 구, 이화여대 박사논문, 2001, 26-39쪽 참조. 8) 이경돈은 별건곤 의 창간 의의를 계몽의 서사가 기울었음 을 징후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는 점과 취미의 영역에서 小 說 外 敍 事 가 하위제도로서 안착되는 과정 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경돈, 別 乾 坤 과 近 代 趣 味 讀 物, 대동 문화연구 46호, 2004. 6. 참조.
근대 대중지의 역사 수용 방식과 글쓰기 전략 13 잡지이다. 이 잡지는 원래 무산대중이 싼 값으로 사서 볼 수 있는 교양 과 재미를 함께 가진 잡지로 기획되었다. 우리는 벌써 一 年 이나 전부터 趣 味 와 科 學 을 가추인 雜 誌 한아를 經 營 하여보자고 하엿섯다 趣 味 라고 無 責 任 한 讀 物 만을 느러놋는다 든지 혹은 放 蕩 한 娛 樂 物 만을 記 事 로 쓴다든지-등 卑 劣 한 情 緖 를 助 長 해서는 안이될 만안이라 그러한 趣 味 는 할수 잇는대로 撲 滅 케하기 위 해서 우리는 이 趣 味 雜 誌 를 시작하엿다. 9) 개벽 의 민중 노선이 방법론상 주로 민중 계도적인 문화운동 의 형 태를 취했다면, 별건곤 은 건전한 趣 味 實 益 雜 誌 를 표방한다. 여기서 취미 란 방탕한 오락물 이나 비열한 정서 를 박멸하기 위한 도구이며, 실익 은 그를 통해 기대할 수 있는 독자의 교양과 민중 계몽의 성취이 다. 10) 별건곤 이란 제호( 題 號 )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별건곤 은 굴절된 모습이긴 하지만 개벽 이 추구하던 민중운동의 또 다른 실천 방법일 수 있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창간호에서는 < 貧 趣 味 症 慢 性 의 朝 鮮 人 > ( 碧 朶 ) 11) 과 < 大 宇 宙 와 趣 味 >( 夜 雷 ) 12) 두 편의 글을 실어 취미의 중요성 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이 두 편의 글은 내용상 편집자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취미 의 중요 9) < 餘 言 >, 별건곤, 1926. 11. 153쪽. 10) 한기형은 개벽 폐간 후 창간된 별건곤 은 개벽 의 진보적 사회운동으로부 터 완벽하게 이탈하였으며, 개벽 이 주도했던 사회주의 선전활동은 조선지 광 으로 넘어갔다 고 지적한다. 하지만 진보적 사회운동 으로부터의 절연이 곧 계몽에 대한 포기로 해석되어서는 곤란하다. 별건곤 이 사회주의 이념으로부 터 이탈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역사 를 통한 민중계몽의 시 도들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한기형, 식민지 검열체제와 사회주의 관련 잡지 의 정치 역학- 개벽 과 조선지광 의 역사적 위상 분석과 관련하여, 동국대학 교 한국문화연구단 연례 학술회의 식민지시기 검열과 한국문화 자료집, 2005. 11. 26. 참조. 11) 碧 朶, < 貧 趣 味 症 慢 性 의 朝 鮮 人 >, 별건곤 1926. 11, 57-61쪽. 12) 夜 雷, < 大 宇 宙 와 趣 味 >, 별건곤 1926. 11, 63쪽.
14 한국문학논총 제56집 성을 강조하는 논설 에 속하는 글이다. 인간 본성으로서의 취미를 누릴 여건을 결여하고 있는 조선 민중의 현실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서 새 로운 취미의 대상으로 민중적 읽을거리 를 주창하고 있다. 무미건조한 생활을 벗어나 위안과 취미가 부속된 생활 을 통해서야 우리의 생활에 희망이 있으며, 취미는 곧 모든 창조력의 근원 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분명 논설 류의 글임에도 불구하고 편집자는 논설 이란 양식 표기 대신 독자들이 쉽게 글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도록 취미론 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시기 잡지들에 실린 논설 에 언제나 논설 이란 양식표기가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취미론 이란 표 기 역시 글의 내용을 독자에게 안내하기 위한 정보제공의 차원일 뿐 양 식명이라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양식 표기를 따로 하지 않고, 논설의 제목과는 별도로 편집 자가 논설의 내용을 유추할 수 있는 제목을 달아 전체 목차에서 따로 분 류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아마도 별건곤 이 취미 실익 잡지 를 표방하고 있고 그 창간호인 만큼 취미 의 내용을 독자에게 강조 하고자 하는 의도로 풀이할 수 있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은 어떠한 양식명이 표기되어 있으며 실제 그 내용과 얼마나 부합되는가라는 사실 보다는, 그때그때 편집자의 판단에 의해 철저하게 독자를 의식하며 선택 적으로 표기되었다는 사실이다. 독자를 의식했다는 진술은 곧 대중성과 계몽성의 획득을 목적으로 했 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때 대중성을 확보하고, 그를 통해 계몽의 목적 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좋은 소재가 역사이다. 역사 를 통해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역사를 소재로 한 여러 글쓰기를 통해 과거에 대한 교 육적 정보의 기능 을 수행하면서 계몽의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 별건곤 이 지향한 취미는 저급한 오락거리가 아닌 역사 와 문학, 무용과 음악, 박물관, 동물원, 활동사진, 극장 등 당대 첨단의 근대적 취미와 교양에 맞추어져 있었다. 이는 별건곤 이 지향한 취미
근대 대중지의 역사 수용 방식과 글쓰기 전략 15 의 최초 취지가 고급의 취미와 교양을 일반 민중들이 쉽게 향유할 수 있 도록 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13) 따라서 그 내용 또한 창간 초기에 는 단순히 흥밋거리를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계몽을 위해 동원되었던 것이었다. 별건곤 은 그 중에서도 사론( 史 論 ) 사화( 史 話 )와 같은 역사물에 많 은 비중을 두고, 따로 야담 혹은 강담란을 두어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조선야담사 의 창립과 더불어 이른바 야담부흥운동이 본격화 된 때이던 1927년을 경과하면서 야담 관련 글쓰기는 한 호당 4-5편을 상회하는 양적 증가를 보인다. 이는 민중 계몽의 수단으로 역사가 효과 적으로 동원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사( 正 史 )나 야사( 野 史 ), 혹 은 야담 등 과거 역사에 대한 호출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강력한 귀 속성의 느낌과 사고를 부여하는 집단 기억 14) 을 갖게 했으며. 그것은 곧 개벽 에서 별건곤 으로 이어지는 민중운동의 기본적인 토양이기도 하 였다. Ⅲ. 양식에 대한 인식 부재와 글쓰기의 전략 대중지를 통해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되었던 많은 역사 관련 글쓰 기들은 아직 뚜렷한 하나의 문학적 양식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별건 곤 에 등장하는 애화( 哀 話 )와 실화( 實 話 ), 사화( 史 話 )와 야담( 野 談 ), 수기 ( 手 記 )와 우화( 寓 話 ), 기담( 奇 談 )과 괴담( 怪 談 ), 만담( 漫 談 )과 한담( 閑 談 ) 등 다양한 양식적 명칭은 임의로 부여된 것일 뿐 뚜렷한 양식 개념에 입 각하여 부여된 명칭이라고 할 수 없다. 동일한 내용이더라도 편집자의 13) 이경돈, 앞의 글, 256쪽. 14) M. Halbwachs, On Collective Memory, translated by L. Coser,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p. 224.
16 한국문학논총 제56집 편의에 따라 어떤 경우에는 野 談 으로 표기되기도 하고, 같은 글이 다른 호에서는 史 話 로 표기되기도 하며, 인물의 전기( 傳 記 )를 서술하면서 論 說 로 표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각 호마다 실린 기사의 내용, 혹은 형식 에 따라 제목을 붙이기도 하고 나름의 양식명을 표기하고도 있지만 그 것이 뚜렷한 원칙에 의해 분류되었거나 호명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1926년 11월 별건곤 창간호는 創 作 / 趣 味 論 / 隨 筆 想 華 諷 刺 / 人 物 訪 問 과 會 見 / 科 學 小 說 傳 記 / 常 識 과 雜 俎 등 크게 여섯 항목으 로 나뉘어 있다. 이중 문학 관련 항목은 創 作 / 隨 筆 想 華 諷 刺 / 科 學 小 說 傳 記 등 세 항목이다. 創 作 란에는 소설 두 편(이기영의 < 朴 先 生 >, 박영희의 < 徹 夜 >)과 시 한 편(이상화의 시 < 地 球 黑 點 의 노래>), 고시조 여섯 편 등 시와 소설을 배치하였고, 隨 筆 想 華 諷 刺 란에는 팔봉의 < 新 秋 雜 感 >, 정진태의 < 洋 行 中 雜 觀 雜 感 >의 수필과 웻딍테블 生 의 < 自 由 結 婚 式 場 巡 禮 記 >와 같은 풍자 형식의 글, 그리고 실존인물에 대한 회고 형식의 < 金 玉 均 先 生 의 배노리> 등이 실려 있다. 한편 科 學 小 說 과 傳 記 를 묶어 창작 이나 수필류 와는 따로 구분하여 싣고 있다. 당시 주로 야사( 野 史 )를 바탕으로 한 저술을 주로 하였던 차상찬의 <만 고정충 임경업장군( 萬 古 精 忠 林 慶 業 將 軍 )>이 傳 記 로 분류되어 있으며, 영국작가 웰스(Herbert George Wells, 1866-1946)의 <타임머신>(1895) 을 世 界 的 名 作 八 十 萬 年 後 의 社 會, 現 代 人 의 未 來 社 會 를 旅 行 하는 科 學 的 大 發 見 이란 설명과 함께 < 八 十 萬 年 後 의 社 會 >라는 제목으로 번 역하여 싣고 있다. 이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수필과 잡문들을 따로 분류하고, 국 내 작가들의 시와 소설은 창작 으로, 같은 창작이라도 외국작가의 작품 과 傳 記 는 따로 구분하여 싣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과 양식에 대한 인식이 언제나 뚜렷한 원칙하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예 컨대 웰스의 < 八 十 萬 年 後 의 社 會 >도 창작 이나 번역소설 이 아닌 과 학소설 이란 별도의 양식 표기가 되어 있는데, 다음호인 1926년 12월호
근대 대중지의 역사 수용 방식과 글쓰기 전략 17 에는 소설, 영화, 시 의 분류 항목에 포함되어 실린다. 연재되고 있는 같 은 작품일 경우에도 호마다 분류목이 달라지는 것이다. 創 作 趣 味 論 隨 筆 想 華 諷 刺 人 物 訪 問 과 會 見 科 學 小 說 傳 記 常 識 과 雜 俎 李 箕 永, < 朴 先 生 > 懷 月, < 徹 夜 > 尙 火, < 地 球 黑 點 의 노래> 고시조 여섯 편 碧 朶, < 貧 趣 味 症 慢 性 의 朝 鮮 人 > 夜 雷, < 大 宇 宙 와 趣 味 > 八 峰, < 新 秋 雜 感 > 鄭 錫 泰, < 洋 行 中 雜 觀 雜 感 > 웻딍테블 生 < 自 由 結 婚 式 場 巡 禮 記 > 金 振 九 < 金 玉 均 先 生 의 배노리> 速 記 者, < 暗 室 鶯 歌 > DTY, <사랑의 마호멧트> 一 記 者, < 周 時 經 氏 의 遺 族 訪 問 記 > 李 益 相, < 婦 人 運 動 者 會 見 記 > 車 相 瓚, < 萬 古 精 忠 林 慶 業 將 軍 > 웰스(Herbert George Wells), < 八 十 萬 年 後 의 社 會 > 李 樂 春, < 世 界 音 樂 名 曲 解 說 > 金 滄 海, < 人 魚 는 美 女 인가 動 物 인가> 盤 松 雀, <제비의 旅 行 과 기럭이의 問 安 > 崔 承 一, < 身 邊 雜 事 > 鄭 顯 模, < 周 王 山 探 勝 記 > < 鼻 下 八 寸 > < 一 蟲 一 言 > < 統 計 室 > -별건곤 창간호(1926.11) 목차 분류표- 별건곤 의 발행인이기도 하였던 차상찬은 1929년 6월 男 兒 二 十 未 平 國 後 世 有 稱 大 丈 夫 란 캐치프레이즈 아래 발간된 別 乾 坤 靑 春 號 에서 東 西 偉 人 靑 春 時 代 란에 본명으로 < 靑 年 大 將 으로 滿 洲 를 드리친 南 怡 將 軍 >을, 靑 吾 生 이란 필명으로 < 新 興 國 의 靑 年 建 國 活 動 記 >를, 靑 吾 란 필명으로 < 天 中 佳 節 端 午 이약이>, < 讀 金 庾 信 傳 有 感 > 등 총 4편의 글을
18 한국문학논총 제56집 싣고 있다. 15) 이 중 < 靑 年 大 將 으로 滿 洲 를 드리친 南 怡 將 軍 > 16) 이나 土 耳 其 (터키)의 초대 대통령 케말 파샤(Mustafa Kemal)를 다룬 < 新 興 國 의 靑 年 建 國 活 動 記 > 17) 는 특별한 양식명이 표기되어 있지 않은 채, 서로 다른 분류목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지만 두 글 모두 역사적인 배경을 토 대로 실제 인물의 활약상을 그리고 있는 사화( 史 話 )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역사적인 사실 뿐 아니라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한 야담류의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도 두 글의 공통점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동일한 성격의 글이 양식 표기 없이 따로 분류되거 나 혹은 다른 양식 표기로 발표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양식 표기는 특정 양식에 대한 인식에 기반한 것이라기보다는 독자의 흥미를 유발시 키기 위한 편집자의 전략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이들이 밝힌 양식의 의미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양식의 의미와 동일한 것이라고 볼 수 없으며, 또한 그들이 표기한 특정한 양식 속에 들어있는 글 역시 도 일관성을 갖고 사용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결국 당시 편집자들의 양식에 대한 혼란 때문이라기보 다는 양식에 대한 인식 자체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즉, 편집자들의 관심 은 양식 자체보다는 어떠한 표기가 보다 더 독자들의 관심을 유발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비슷한 성격의 글이라도 그때그 때 필요에 따라 서로 다른 양식명이 부여된 것이다. 차상찬의 글만 살펴 보더라도 유사한 성격의 글들이 사화( 史 話 ), 열전( 列 傳 ), 전기( 傳 記 ), 비 화( 秘 話 ), 실록( 實 錄 ), 비사( 秘 史 ), 이면사( 裏 面 史 ), 애화( 哀 話 ), 회고( 回 顧 ) 등 다양한 양식명으로 표기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 하지만 15) 차상찬은 김진구와 함께 별건곤 의 단골필자 중 하나였다. 차상찬은 거의 매호 본명과 자신의 호 靑 吾 를 필명으로 글을 싣고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한 호에 서로 다른 필명으로 2-3개의 글을 동시에 싣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이 시 기 잡지들이 필자란을 해결하는 유용한 방식 중에 하나였다. 16) 차상찬, < 靑 年 大 將 으로 滿 洲 를 드리친 南 怡 將 軍 >, 별건곤 1929. 6. 16쪽. 17) 靑 吾 生, < 新 興 國 의 靑 年 建 國 活 動 記 >, 별건곤 1929. 6. 81쪽. 18) 그 중 대표적인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 史 話 : 李 适 元 帥 의 甲 子 反 亂 記 >
근대 대중지의 역사 수용 방식과 글쓰기 전략 19 실제 내용은 역사적 사실의 기록 형태인 실록 이 사화 비사 와 겹치 고, 비화 비사 이면사 의 경우도 뚜렷한 구분 없이 혼용된다. 애화 는 말 그대로 야담 성격의 글을 내용에 맞춰 표기한 것일 뿐이다. 이렇듯 다양한 양식명의 표기와 분류는 부여된 명칭의 한계를 벗어나 다양한 변개와 삼투의 모습을 보여준다. 양식명의 혼란과 표기의 무원칙성에는 당시 열악한 출판환경도 무시 할 수 없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즉, 당시의 원고난 경영난 검열난 등 이른바 삼란( 三 亂 ) 19) 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잡지 발간의 여러 정 황을 미루어볼 때 잡지 편집에 일관된 원칙을 지켜나가기란 쉽지 않았 을 것이다. 실제로 잡지에 연재되던 글이 아무런 설명 없이 중단되기도 하며, 미완( 未 完 ) 혹은 차호속( 次 號 續 ) 이란 설명 뒤에도 다음 호에 실 리지 않거나 20) 몇 호 지난 후에 다시 연재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각각의 양식 난을 고정하고 글을 실기란 사실 불 가능했으며, 따라서 편집자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그때그때 양식명이 표기되거나 혼용되고 있는 것이다. 양식명이 혼용되고 있다는 진술은, 하나의 글이 편집자에 의해 무엇으로 표기되든지 간에 각 양식 간의 분 류가 불가능할 만큼 차용과 삼투, 그로 인한 다양한 변개가 이루어지고 (1927. 3), < 歷 代 陰 險 人 物 討 罪 錄 : 殺 主 魅 害 賢 鬼 反 覆 無 雙 의 奸 魁 鄭 道 傳 > (1927. 8), < 歷 代 叛 逆 者 列 傳 : 綠 林 豪 傑 林 巨 丁 >(1928. 7), < 神 出 鬼 沒 東 學 亂 中 의 秘 話 >(1928. 8), < 三 尺 長 釰 으로 五 百 年 大 業 李 太 祖 建 國 實 錄 >(1929. 4), < 仁 祖 反 正 의 裏 面 史 >(1930. 5), < 羅 末 怪 傑 泰 封 王 弓 裔 秘 史 >(1930. 6), < 端 午 哀 話, 魚 腹 에 파뭇친 美 人 忠 臣 >(1931. 7), < 東 洋 史 上 風 雲 만튼 日 淸 戰 爭 의 回 顧 >(1931. 7), < 薩 水 大 戰 記 朝 鮮 最 初 의 大 戰 爭 >(1932. 12), <노래에 나타난 情 話, 琉 璃 王 과 黃 鳥 歌 >(1933. 4) 등. 19) <편집후기>, 三 千 里 1929. 6. 50쪽. 20) 웰스의 < 八 十 萬 年 後 의 社 會 > 의 경우, 두 번째 연재의 말미에 未 完 이란 표기 와 함께, 점점 신기한 발견과 무서운 광경과 자미잇는 이야기는 다음으로부터 진경으로 드러간다. 이러한 취미 만흔 사건의 발단은 다음호라야 볼 수 잇다. ( 별건곤, 1926. 12. 136쪽)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후 아무런 설명 없이 연재 가 중단되고 만다.
20 한국문학논총 제56집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양식 간 전환과 교섭의 과정에서 하나의 양식적 개념으로 수렴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뜻한다. 하지만 일관되지 않은 양식 표기 자체가 이들 다양한 단형서사들의 문학사적 가치를 절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Ⅳ. 호출된 역사와 집단기억 의 구성 대중매체는 그 본성에 따라 당대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구조와 긴밀하게 관련된다. 대중매체는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을 정보나 사상 신념 등의 측면에서 상징적으로 구축하며 그들 간의 상호 밀접한 관계를 설정하고, 나아가 각각의 요인들을 결합시키는 역할을 수 행하기도 한다. 신문 방송 잡지 등 여러 매체는 그가 속한 집단의 문 화적 기억 들을 소통하게 하는 중요한 매개체 중의 하나이다. 기억 이란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집단의 성격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억 은 각종 집단의 정체성 구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고 과거의 현재적 의미를 재구성하면서, 대 중매체는 과거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역사인식의 방향에 직간접적인 영 향을 미친다. 매체는 단순히 과거에 대한 사실적인 정보를 투명하게 전 달하는 차원을 넘어 기억의 형태와 내용을 조건 짓는 담론을 형성하고 그에 간섭한다. 매체는 과거에 대한 다양한, 때로는 상충되는 기억을 매 개하고 그것에 대한 인식의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 매체는 개인의 기억에 앞서거나 개인의 기억에 영향을 미치는, 이른바 사람들의 집단기억 (collective memory) 21) 형성에 중요 21) M. Halbwachs, On Collective Memory, translated by L. Coser,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p. 224. 집단기억과 담론 형성, 미디어의 관계에 대한 한국 적 적용의 사례는 이동후, 국가주의 집합기억의 재생산-일본 역사교과서 파동 을 중심으로, 언론과 사회, 2003년 봄, 11권 2호 참조.
근대 대중지의 역사 수용 방식과 글쓰기 전략 21 한 역할을 담당한다. 집단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기억을 회수하는 행위 가 아니라 과거를 현재의 맥락에서 재구성하는 것 이다. 집단기억을 공 적 공간에서 전달되고 협의되는 과거에 관한 서사 로 보았을 때, 일제하 신문 잡지 등의 여러 매체 또한 이러한 집단기억 의 생산을 통해 서사를 구체화하고 소통시키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 하나의 담론으로서 집단기 억은 특정한 주체의 위치나 사회적 경계, 혹은 권력 관계로 작동할 수 있다. 22) 잡지에 실린 다양한 글쓰기 상호간의 변개와 삼투, 차용의 과정 중에 서도 하나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많은 경우 역사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별건곤 에 등장하는 史 話 는 역사기술방법 중 하나인 傳 의 방 식이 주를 이룬다. 초기에는 주로 근대적 인물을 다루었다가 점차 과거 의 위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때 근대적 인물들을 다룰 때 는 주로 회고나 자서전, 번역을 통해 소개되며, 과거의 위인들을 다룰 때 는 주로 열전( 列 傳 )의 형식을 고수하고 있다. 이 시기까지도 역사의 강 박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직 역사적 사실( 史 實 )은 허구라 는 자질과 관계를 맺기 어려웠다. 하지만 차츰 전대( 前 代 ) 혹은 가까운 시대 실존했던 사후의 인물들에 대한 가상 인터뷰나 방문기, 토론회 등 23) 을 통해 사실과 허구가 공존할 수 있는 균열을 만들기 시작한다. 22) 예컨대 한 국가의 집단기억을 구성하는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국사( 國 史 )는, 역 사의 기억을 전유함으로써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기제로 작동하기 쉽다. 즉, 특정 권력 주체의 기억에만 정통성을 부여하고 다른 기억은 배제하거 나, 혹은 권력 집단의 기억질서에 맞게 수정하거나 조작하여 집단적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에 관한 논의로는 이영훈, 한국 국사 교과서에 기술된 일제의 수탈성과 그 신화성, 한 일, 연대 21 발족기념 심포 지엄, 한 일, 새로운 미래 구상을 위하여-교과서 문제를 중심으로 발표문, 59-77쪽, 2004년 11월 19일, 서울 프레스센터. 임지현, 국사 : 제국에 포섭된 민 족, 문학 판, 2005년 봄, 통권 14호, 31-44쪽 참조. 23) 별건곤 1927. 3 : < 玄 黃 堂 에서 金 玉 均 地 下 國 訪 問 記, 現 代 朝 鮮 靑 年 에게 與 하 노라> / 張 志 淵 柳 瑾 李 鍾 一, 地 下 國 訪 問 記, <우리가 본 現 下 言 論 界 > / 鄭 生 謹 記 地 下 國 訪 問 記, < 正 音 을 創 製 하신 世 宗 大 王 께옵서> / 康 眞 海 隅 에서 茶
22 한국문학논총 제56집 이러한 여러 시도 중에서 이른바 드면 錄 과 같은 기획은 역사적 사실 자체를 재구성하려는 글쓰기라 할 수 있다. 드면 錄 이란, 과거의 역사를 만약에 그 당시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했더라면 식의 가정 속 에 재구성한 글이다. 24) 드면 錄 은 지난 과거를 당대의 관점에서 바라본 다는 점에서, 당대 역사의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소재는 과 거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결국 그것이 씌어지는 시기의 문제성을 반 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형식은 지난 과거에 대해 비판 적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별건곤 1927년 7월호(제2권 5호)에는 드면 錄!! 그 에 이리햇드면 只 今 朝 鮮 은 엇지 되엿슬가 라는 표제 아래 < 壬 辰 倭 亂 當 年 에 萬 若 栗 谷 이 생존하 엿드면>, < 丙 子 胡 亂 때에 林 慶 業 將 軍 을 信 任 하얏드면>, < 大 院 君 이 만약 外 人 排 斥 을 안햇드면>, < 最 初 의 民 衆 運 動 을 니르킨 東 學 黨 이 政 治 的 訓 練 만 잇섯드면>, < 金 玉 均 先 生 의 三 日 天 下 가 成 功 햇드면> 등 모두 5편 의 글이 실려 있다. 25) 山 丁 若 鏞 地 下 國 訪 問 記, < 經 濟 困 難 에 울고 잇는 同 胞 에게> / 四 溟 堂 任 休 靜 地 下 國 訪 問 記, < 墮 落 하여 가는 現 代 僧 侶 들에게> / 莊 陵 忠 臣 壇 에서 朴 堧 地 下 國 訪 問 記, < 現 代 男 女 音 樂 家 에게 與 하노라> / 먹적골 許 生 地 下 國 訪 問 記, < 所 謂 富 所 謂 貧 者 諸 君 에게> / 矗 石 樓 下 에서 論 介 地 下 國 訪 問 記, < 現 代 의 娼 妓 娼 婦 에게 與 하노라>. 별건곤 1927. 8 : 鶴 步 歷 代 陰 險 人 物 討 罪 錄, < 事 大 主 義 와 依 賴 思 想 의 張 本 人 所 謂 海 東 朱 子 宋 時 烈 > / 車 靑 吾 歷 代 陰 險 人 物 討 罪 錄, < 殺 主 魅 害 賢 鬼 反 覆 無 雙 의 奸 魁 鄭 道 傳 > / 事 實 珍 談, < 死 刑 못해서 國 祿 을 주 어> / 趙 奎 洙 歷 代 陰 險 人 物 討 罪 錄, < 朝 鮮 의 士 禍 를 츠음으로 이르킨 大 凶 孼 大 奸 物 柳 子 光 >. 별건곤 1928. 12 : 金 振 九 < 孫 逸 仙 과 袁 世 凱 의 地 下 面 談 記, (= 黃 泉 探 訪 記 에서)>. 별건곤 1932. 6 : 熊 超 崔 英 淑 地 下 訪 問 記, < 冥 府 行 列 車 를 追 격하면서> 등. 24) 別 乾 坤 의 편집자처럼 드면 錄 이라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三 千 里 와 朝 光 에서도 가상 설정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발견 된다. 三 千 里 의 경우에는 이러한 설정을 활용한 단순히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기사들도 많이 발견된다. 三 千 里 : <돈 十 萬 圓 이 있다면>, <내가 다시 태어난 다면>, 1929. 7. < 大 聖 이 오늘 朝 鮮 에 태어난다면>, 1932. 12. < 世 界 的 思 想 家, 文 豪 招 請 案 >, 1935. 12. <내가 轍 環 天 下 한다면 어느 인물을 보고 올까>, 1936. 2. < 國 史 上 人 物 로 現 時 局 에 가저오고 싶은 사람>, 朝 光 1941. 12. 등
근대 대중지의 역사 수용 방식과 글쓰기 전략 23 드면록 을 기획하면서 편집자가 필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다소 희곡 적으로 취미적으로의 설명 업는 형식 26) 이었다. 어차피 이미 지나간, 현 재로서는 확정된 역사이므로 구차한 설명이나 논설조의 이야기보다는 대중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문학적 형상화에 초점을 맞추어 달라는 요청인 것이다. 나아가 가상의 역사를 현재의 관점에서 재구성함으로써 先 人 의 非 를 指 하는 동시에 後 人 에게 주는 큰 교훈이요 銘 鑑 을 얻고자 하였던 것이다. 드면 錄 이란 결국 가상으로 설정된 공간에서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과 의 만남을 주선함으로써 실제와 허구가 서로 착종되고 변개되어 새로운 역사 이야기를 산출해내는 양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상의 공간에서 지어낸 허구의 이야기라고 해서 드면 錄 과 같은 독물( 讀 物 )의 생산이 단순히 흥밋거리로만 치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편집자 역시도 이러한 기획이 마치 수백년된 塚 中 枯 骨 을 보고 무슨 약을 먹엇스면 죽 지 안엇스리라는 것과 가튼 감이 잇 기도 하지만, 그것은 곧 他 山 의 石 27) 을 삼기 위한 것임을 적시하고 있다. 결국 드면 錄 과 같은 글쓰기의 기획은 낯익은 역사를 낯설게 하고, 과 거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을 현재의 역사와 다르게 가정하고 재구성함으 로써 개인의 의식뿐 아니라 민족의식을 재구성할 수 있도록 하였다. 28) 이러한 기획은 단지 역사 를 실험과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공적 역사에 대한 메타적 인식을 수반하게 하고,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려는 편집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별건곤 1928년 5월(제2권 3호) 조선 자랑호 에는 기사의 절반 이상 이 사화와 야담, 역사 관련 서술로 채워져 있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조 25) <드면록>, 별건곤 1927. 7. 2-25쪽. 26) 洪 承 耈, 위의 글, 별건곤, 위의 책, 4쪽. 27) 車 相 瓚, 위의 책, 11쪽. 28) 이경돈, 별건곤 과 近 代 趣 味 讀 物, 대동문화연구 46호, 2004. 6. 282쪽.
24 한국문학논총 제56집 선 자랑호 의 기획은 사실 위험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발행 이 늦춰지다가 통권 제12 13호의 합본호로 빛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일 제의 검열에 의해 처음 계획했던 내용들을 모두 반영하지 못했으며, 따 라서 왕청 틀리는 내용을 실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편집자는 조선 의 自 尊 과 自 負 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무모하지만 의미 있는 일 이 라 생각하였기에 자랑호 의 발행을 감행했다고 밝히고 있다. 29) 따라서 특정 기사들은 목차에만 나와 있고 실제 내용은 삭제되어 그 내용을 확 인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조선 자랑호 에는 이충무공 관련 기사와 고 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의 세종대왕, 그리고 한글 관련 내용이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으며, 연암 박지원의 사상과 고산자 김정호 등 실학파에 관련된 내용들, 그 밖에 민요, 전설, 야담 등이 실려 있다. 이 중 주목할 것은 東 西 無 比 小 說 以 上 朝 鮮 人 情 美 談 集 이란 대목이 다. 이 시기 별건곤 에는 소설 그 자체보다는, 소설과의 비교를 상정케 하는 小 說 以 上 이란 제목을 붙이거나, 혹은 소설 처럼 앞에 내용을 짐작할만한 다른 수사가 붙은 여러 단형서사들 30) 이 발표되는데, 대개는 전설이나 설화, 기담, 사실담, 회고담 등이 대종을 다루고 있다. 이는 이 미 소설 이 하나의 안정된 양식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 도 하다. 결국 역사를 매개로 한 여러 단형서사들이 소설에 대한 대타항 29) <권두언>, 별건곤 1928. 5. 30) 野 話 小 說 : 김운정, <찬 눈물, 더운 눈물>(1927. 4) / 小 說 보다 기이한 事 實 로- 맨쓰 : 天 外 漢, < 苦 戀 悲 戀 7년 片 愛 奇 錄 >(1927. 7) / 小 說 以 上 事 實 秘 話 : 金 東 進, < 海 蔘 威 의 戀 愛 復 讐 劇 >, 李 有 根, < 秘 密 의 凶 家 >, 李 定 鎬, < 張 小 姐 의 逃 走 結 婚 >(1928. 1) / 小 說 以 上 珍 奇 한 三 大 事 實 秘 話 : 金 東 進, < 春 秋 로 懷 憶 되는 海 蔘 威 의 戀 愛 復 讎 劇 >, 李 有 根, < 秘 密 의 凶 家 >, 李 定 鎬, < 古 代 小 說 가튼 참 事 實 - 張 小 姐 의 逃 走 結 婚, 두 번이나 家 門 을 脫 走 하야 約 婚 한 남편을 좃차>(1928.2) / 小 說 以 上 論 文 以 上 讀 物 中 의 讀 物, 連 作 講 談 : 최남선 외, <아츰>(1928. 8~ 1929. 12) / 小 說 以 上 映 畵 以 上 珍 奇 戀 愛 展 覽 會 : 石 初 生, <얼골도 모르는 戀 愛 >, 林 白 虎, <딴 世 上 에 가서도 눈물로 태우는 戀 愛 >, 龍 塘 浦 人, < 電 話 로 三 年 間 戀 愛 >, 迫 眞, < 二 年 동안이나 편지연애만 하고 서로 맛나면 시치미를 딱>, 雙 S 生, <넘으도 珍 奇 한 戀 愛 >(1929. 1) 등.
근대 대중지의 역사 수용 방식과 글쓰기 전략 25 으로 기능하며, 아직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소설에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였지만 대중의 역사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 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대중적 소비는 그들에게 역사적 계승의식에 입각한 공동의 기 억 31) 을 갖게 하였다. 또한 그것은 식민지하의 민중들에게 자기 정체성 의 확보와 유지를 위한 근원적인 동력이 되었다. 역사에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들이 생산되고 유통되고 소비되면서 하나의 지배적인 담론으로 자리 잡아 나간다는 것이다. 역사적 기억 중 특정한 기억이 현재에 지속 적으로 불러들여지고 의미화 되는 가운데, 공동체 구성원은 자신의 과거 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보편적 역사적 맥락을 가지게 되었다. 대중 인쇄 매체도 역사적 기억을 지속적으로 기념하고 상기시키며 과거와 현재를 연계하는 또 다른 매개체로써 독자들을 민족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호명 해왔다. 역사적 기억으로서의 과거는 이제 단순히 전에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과거 이고 일정한 담론의 틀로 불러들여지는 것이다. 강압적인 식민통치 아래서 글쓰기를 통한 역사담론의 생산은 소극적 으로는 위무의 수단으로 적극적으로는 절멸의 위협에 맞서는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그것은 곧 민족 성원들 사이의 결속력을 높여주는 동시에 민족의 개별적 존재성 을 확인시켜 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담론 생산 자체가 민족 내부의 모순을 덮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즉,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도출된 민족의 개별성 이란 결국 제국으로부터 민족을 분절시킴으로써 특수성과 지방성(locality)을 담보하는 것 이상이 될 수 없었다. 결국 과거의 역사 는 민족적 결집을 위한 매개체였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것은 제국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 고 합리화하는 주요한 도구였던 것이다. 32) 31) 김진수, 역사적 실존에 대한 상상- 역사의 내면화 경향에 대하여, 문학 판 14, 2005, 89쪽. 32) 1930년대 초,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조선 고적 보존 운동 이 총독부의 지원과 관
26 한국문학논총 제56집 V. 남은 문제들 1920년대 중반 별건곤 의 창간은 일제의 언론 탄압과 이로 인한 개 벽 의 폐간에 따른 기획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취미라는 민중의 이해와 요구에 맞추어진 기획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별건곤 이 개벽 의 후속 주자였다는 사실은 불가분 개벽 의 계몽적 색채를 일부 유지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단순한 취미독물 이 아닌 계몽독물 로서의 기 능 또한 담당하게 되었다. 33) 하지만 개벽사 에 의해 또 다시 종합잡지 彗 星 이 발간되면서 그 역할이 분할되자 별건곤 은 별다른 성격 변화 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가벼운 형식으로의 전환을 요구받게 된다. 개벽 의 폐간과, 이후 개벽사 에 의한 잡지 발간의 정황을 편집자는 다 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폭풍광우와 싸호면서 도산검수를 수업시 넘어 오면서 그중에서도 우 리는 개벽 운동의 충실을 도모하기에 한 때도 게으르지 못하엿나니 어 린이, 신녀성, 별건곤, 학생 의 계속 발행이 그것이요 출판물 간 행이 그것이요 십삼도 긔본됴사 운동이 그것이요 사우뎨도의 확충이 또 한 그것이엿다. 그리하야 오늘 개벽사 출판물의 총독자는 수십만으로 혜이고 글발은 해외 각디에까지 퍼지게 되야 스스로 이 수만흔 동지 후 민 합동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이르면, 당시 과거의 역사를 호출하고 영웅을 호명하는 작업이 일제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 차원에서 논의되기보다는 오히려 일제의 식민 지배를 공고화하는데 어떻게 이용되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식민지 당국에 의한 후원을 통한 견제 의 기조는 정치 군사적 지배의 효율성 을 높이고 식민지인 자신에 의한 지배의 내면화와 재생산을 기도한 것이기도 했다. 1930년대 초 민족주의 진영의 고적보존운동에 관해서는 이지원, 1930년 대 민족주의계열의 고적보존운동, 동방학지 77 78 79 합본호, 1993 참조. 33) 이경돈은 취미라는 새로운 범주가 계발되면서 계몽독물에서 취미독물로 전환되 는 과정과 취미독물이 저급문화, 하위문화로 인식되는 데에는 약간의 시차가 있 었다고 지적한다. 별건곤 초기까지도 취미독물이 고급문화의 일부로 인식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계몽담론의 자장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경돈, 별건곤 과 근대 취미독물, 대동문화연구 46집, 2004. 6. 254-259쪽.
근대 대중지의 역사 수용 방식과 글쓰기 전략 27 원의 든든한 힘을 밋게 된 것을 깃버하기에 니르럿다. 그러나 텬하 독자와 함께 섭섭한 생각을 가티하게 되는 것은 지난 병인 녀름에 개 벽 이 죽어 우리의 운동의 한 팔이 떠러진 그것이요 그리하야 이날 우 리의 가슴에 용소슴치는 감회나마 싀원히 이약이 할 자유가 업는 그것 이다. 개벽 대신으로 운동 중에 잇는 혜성( 慧 星 ) 잡지가 새로히 활약 할 날이 갓가운 압날에 잇스며 잡지 간행의 자매 사업으로 새로히 게획 하는 것이 또 한 가지 잇는 바 이리하야 새로운 진용으로써 텬하 동지 와 함께 더욱 용맹히 싸화나감으로써 십 년째부터의 새 긔록을 지을 것 을 스스로 맹서할 뿐이다. 34) 개벽 의 폐간 이후에도 어린이 신녀성 별건곤 학생 등 을 계속 발행하며 개벽운동 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이제 개벽 대신 혜성 을 발간하여 그 운동을 이어갈 것이라는 내용이다. 혜성 은 1931 년 3월 1일에 창간되어 1932년 4월 15일 통권 13호로 종간되었고, 5월부 터는 제1선 으로 개제되어 발행되었다. 별건곤 과 마찬가지로 편집 겸 발행인은 차상찬이 맡았다. 혜성 을 창간하며 별건곤 의 가격을 5 전으로 내리면서 별건곤 은 5전 잡지 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그러 나 혜성 은 개벽 과 같은 호응을 얻지 못했으며, 이것이 곧 제1선 으 로 개제한 이유이기도 하다. 제1선 은 1933년 9월 5일 통권 11호로써 종간되었다. 35) 비록 5전 잡지로 불렸지만 별건곤 의 종간이 1934년 6 월이니 그 명맥은 혜성 과 제1선 을 합친 기간보다 오래 지속된 셈이 다. 별건곤 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내용이 사화와 야담이었음을 감안하면 이에 대한 대중의 수요 또한 짐작할 수 있다. 다양한 역사물의 생산과 대중적 소비는, 역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환기하고 역사소설의 잠재적 독자층을 형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 하에서 발행되던 잡지의 성격은 일제 식민 권력의 지배정책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었고, 이들 잡지에 실린 역사관련 독물( 讀 34) <권두언>, 별건곤, 1929. 8. 1쪽. 35) 김근수, 한국잡지사 연구, 한국학연구소, 1992, 148-151쪽 참조.
28 한국문학논총 제56집 物 ) 역시 이러한 외적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따라서 별건 곤, 삼천리, 조광 등에서 역사 를 동원하고 배치하면서 36) 염두에 두었던 독자는, 근대계몽기 역사 전기소설의 독자나 조선야담사가 주 도하였던 야담 운동 초기의 청중과는 다른 문맥 속에 놓일 수밖에 없었 다. 역사 전기소설과 야담 운동이 민족적 가치를 앞세운 계몽의 수단과 민중 교화의 도구로써 역사 를 전면에 내세운 반면, 이들 잡지가 선택한 역사 는 점차 독자를 유인하고 구독자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 되어 갔다. 1930년대 중반, 이른바 역사소설시대 라 불릴 만큼 역사소설의 생산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920-30년대 대중지를 통한 역사를 소재로 한 글쓰 기의 대중적 소비는 작가들에게는 역사소설 창작의 모티프와 수준을 가 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었다. 이들 작품이 갖는 대중성, 통속성의 근 간은 바로 대중 종합지가 생산해 낸 역사 소재 글쓰기의 전략과 그것을 소비한 독자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상업적 목적에 의해 출판되는 잡지의 성격상 역사 의 내용은 얼마든지 시대적 변화와 독자의 취향에 따라 기민하게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근대문학사 연구에서 신문이나 동인지 등에 나타난 문 학 작품과 문학적 현상에 대한 연구는 많은 성과가 축적되었다. 하지만 잡지라는 매체, 특히 대중지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소홀하였다. 하 36) 비슷한 시기 발행되었던 三 千 里 와 朝 光 의 역사물 수용 방식은 상이하다. 朝 光 은 거의 매호 빠지지 않고 야담 사화 기담 전설 등의 역사물들과 역사 관련기사들을 싣고 있다. 반면 三 千 里 는 1935년 6월에 김동인, 유광렬, 윤백남 등이 참여한 야담 특집 이 한 차례 기획되었을 뿐, 실제로는 야담이나 사화보다 과거 인물에 대한 회고나 소개, 역사 관련 논설류의 글들이 대세를 이룬다. 그렇 다고 이러한 모습이 이들 두 잡지의 독자들이 분화되어 있었다거나, 편집자가 잡지에 실릴 역사물 에 대한 편집 원칙을 가졌기 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다. 아 마도 신문사 발행의 朝 光 은 좀더 많은 필진들을 확보할 수 있었고, 김동환 개 인이 출자한 三 千 里 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실 김동환은 한 호 에 본명과 필명을 오가며 동시에 여러 편의 글을 싣기도 하였다.
근대 대중지의 역사 수용 방식과 글쓰기 전략 29 지만 한국문학사의 주요 작품들이 개벽, 별건곤, 조광, 삼천리 등 대중지를 통해 생산되었음을 상기하면 문학작품 자체뿐 아니라 작품이 실린 매체의 성격과 작품과 함께 실려 있는 다양한 양식의 문학 관련 글 들과 기사 또한 중요한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37) 본 연구의 주된 대상인 역사 담론에 대한 분석 중 많은 부분은 고전문 학과 현대문학의 영역에 걸쳐 있다. 요컨대 잡지에 실린 야담, 민담, 야사, 설화, 괴담 등은 과거의 이야기를 다시 호출해 낸 것이다. 시기 적으로 이들은 예전에 존재했던 이야기가 근대 이후에 재생산된 것이면 서도, 그것의 양식적 특성은 과거의 것과 동일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이 들 이야기 양식에 관한 연구는 아직까지 현대문학과 고전문학 두 분과 어디에서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역사 관련 서사에 관한 다층 적인 접근과 연구는 기존 현대문학과 고전문학 분과 간의 경계를 넘어 상호 학문적 소통과 협력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적 제도인 잡지라는 매체와 출판 시장, 그리고 그를 통해 생산되 는 다양한 양식명의 서사물들을 우리 문학사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본 연구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개별 문학작품보다는 우선 그것이 실린 매체에 주목하였다. 이는 문학 연구의 대상을 구체적 인 개별 문학 텍스트로부터 그와 관련된 매체, 그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출판과 유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으로 확장하는 의미를 지닌다. 개별 서 사물의 의미는 문학 자체의 동력만으로, 혹은 외재적인 조건과 그의 영 향만으로도 해명될 수 없는 상동성을 지닌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당시의 지배적인 담론 형성의 과정을 살피는 일은 문학장의 범위를 넘어 사회 학, 역사학 등 방계 학문과의 소통을 통해 좀더 분명히 규명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 놓는다. 37) 삼천리 를 대상으로 한 다음의 결과물은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출간된 최근의 성과이다. 천정환, 이경돈, 손유경, 박숙자 편, 식민지 근대의 뜨거운 만화경: 삼 천리 와 1930년대 문화정치,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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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대중지의 역사 수용 방식과 글쓰기 전략 33 <Abstract> The Pattern of Embracing History and the Writing Strategies of Modern Popular Magazines Lee, Seung-Yun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look into the writing strategies used in various reading materials which are concerned with history contained in Byeolgeongon(별건곤) (Nov. 1926-Jun. 1934). The withdrawal of past history enabled members of a community to have a collective memory, which endowed them with feelings and thoughts with strong attribution, and this was also the basic foundation of the folk movement, which led to Byeolgeongon beginning from Gaebyeok(개벽). Byeolgeongon, which claimed to be a magazine for leisure and practical benefit at the time of its first publication, was focused not on vulgar pastimes but on modern tastes and culture. Therefore, its contents were mobilized for enlightenment rather than for simple interests. The diverse, stylish names that appeared in Byeolgeongon cannot be thought of as being named on the basis of the concept of clear style. This was not because editors back then were confused about a certain style but because they were absent in perception about a style itself. The interest of the editors was regarding what writing would provoke the attention of the readers more rather than a certain style
34 한국문학논총 제56집 itself. The production of historical discourse through such writing under the forcible Japanese colonial rule functioned as a means of consolation from a passive perspective, and as a means to face threats of eradication from an active perspective. This made it possible to enhance bonding among the people, and, at the same time, confirmed the individual existence of the people. However, the production of such discourse, on the other hand, became a means to hide contradictions within the people. That is, the individuality of the people, which was withdrawn under the Japanese colonial rule, couldn t do more than ensure special characteristics and locality by dividing the people from the empire, in the end. Ultimately, the history of the past was a vehicle for unifying the people, and yet, it was a major tool for justifying and rationalizing the colonial rule of the empire. The production of historical novels was so active as to be called the age of historical novels in the mid-1930s. The root of the popularity and vulgarity of those works could be found in readers who consumed them as well as in the writing strategies of historical substances that were produced by popular magazines. Given the nature of a magazine published for profit, the contents of history could be readily and quickly altered according to changing of the times and to the tastes of readers. Key Words : Popular magazines, Byeolgeongon(별건곤), history, historical discourse, writing, collective memory, reader.
근대 대중지의 역사 수용 방식과 글쓰기 전략 35 논문접수 : 2010년 10월 30일 심사완료 : 2010년 12월 6일 게재확정 : 2010년 12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