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문화의 명암 - 적자와 서자 安 承 俊 (한국학중양연구원 책임연구원) 조선왕조가 활력을 잃고 결국은 국망이 길을 가게 된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이유를 꼽으라면 인재등용의 실패, 요컨대 인력 등용시스템을 제때에 업그레이드하 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닌가한다. 양반들에게 노비의 세전( 世 傳 )을 사실상 허용해주거나, 조선 말까지 중인층(서얼층, 향리층)을 국가 기간 인력으로 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사 회 불만세력으로 내버려 둔 것이 조선정부의 가장 큰 실수였지 않았나 생각된다. 19세기, 좁은 땅에 인구는 많았으나 이들에게 비젼을 제시하고 국가 발전에 동참시키는 정책, 이러 한 아젠다를 제시하고 관철해가는 리더쉽과 엘리트집단이 없었다는 것이 조선 백성들의 불 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상도 경주 땅에서는 양반 중심, 적자 중심의 사회에서 자기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대대로 노력한 이들이 있었는데, 곧 여주이씨 옥산파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1. 피로 만든 자식( 血 子 ), 붓으로 만든 자식 경주 옥산 여주이씨가 사람들은 회재 사후 500 여 년간 사회적 시대적 과제와 정 면으로 맞부딪치면서 살아왔다. 이들이 직면한 문제 가운데는 가문 스스로 떠안기 에는 벅찬 내용이 많았다. 잠계 이전인( 李 全 仁, 1516~1568)이 회재 이언적( 李 彦 迪, 1492~1553)의 혈자( 血 子 )라는 사회 신분적 문제, 영남 사림파의 정치적 성향과 학 문적 전통에 관한 문제, 옥산서원( 玉 山 書 院 ) 및 장산서원( 章 山 書 院 )의 건립과 운영 에 관한 것이 대외적으로 제기되었던 문제라면, 가문 내적으로는 관서문답( 關 西 問 答 )의 저술과 출판, 회재 관련 서책의 보관, 족보 편찬 등 회재 유업의 계승과 그 정통성에 관한 문제가 있었다. 이글에서는 이씨가 사람들이 처하고 있었던 당면 과 제를 중심으로 옥산 여주이씨가 500년 역사의 단면을 재구성해 보고자 하였다. 적서 형제 간에 행한 노비상환 : 1565( 明 宗 20) 명종 20년 11월에 이전인과 이응인이 서로의 노비를 교환하고 이 사실을 경주부로 부터 공증 받은 입안 및 그 일련문서. 5건의 개별문서들이 함께 점련되어 있다. 먼 저 이전인의 입안신청 소지, 둘째 이전인과 아우 이응인 간에 노비를 서로 바꾸는 - 1 -
문서, 셋째 이응인의 사실진술서인 초사, 넷째 증인인 이희무의 초사, 다섯째 경주 부 공증문서인 사급입안으로 구성되어 있다. 점련된 순서대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 번째 소지에서 이전인이 자신의 동생인 이응인과 노비를 교환한 사실에 대해 사 급입안을 발급해줄 것을 경주부에 청원하고 있다. 이에 대해 경주부는 사실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證 筆 執 人 率 來 向 事 卄 三 日 이라고 하여 증인과 필집인을 데리고 오 라고 하면서, 이 사무의 처리를 11월 23일자로 지시하고 있다. 둘째는 앞의 소지를 제출하기에 앞서 11월 20일에 잠계공과 이응인이 서로 노비 2구씩을 교환하면서 작성한 상환문기이다. 노비를 상환하게 된 이유는 이전인이 이응인의 비 조금을 작 첩하여 아들 몽호를 낳았는데, 이들 노비에 대한 소유권은 아직 이응인에게 있었기 에 노비 모자의 처지가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형제지간에 이를 가련히 여겨 잠계공 의 비 2구를 이응인의 비 조금 및 그 소생 노 몽호와 맞바꾸었던 것이다. 이 상환 에 대해 증보( 證 保 )로서 7촌숙인 이희무가 참여하였다. 셋째로 잠계공이 소지를 올 린 지 6일 후인 동월 29일에 이응인은 관정에 나와 본 상환거래가 사실임을 진술 하게 되는데, 이 진술서를 초사( 招 辭 )라고 한다. 넷째로 상환시에 증보로 참여한 이 희무로부터 받은 사실진위여부에 대한 초사이다. 여기서도 해당 노비의 상환 및 자 신이 동참하였음도 확실함을 진술하고 있다. 다섯째로 경주부의 사급입안인데, 노비 교환의 상대방인 이응인과 증보 이희무로부터 초사를 받은 당일인 29일에 발급된 것으로 되어 있다. 경주부에서는 잠계공이 제출한 소지와 상환문기 및 초사 등을 검토하고, 가정30년(1551)에 이응인이 양부 이언적으로부터 노비전답을 받은 허여 문기를 제출받아 상환의 대상이었던 노비 2구의 전래내력을 상고하는 과정을 거쳐 입안을 사급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상환문기와 그 일련의 입안문서를 통해 비첩과 그 소생의 불안정한 처지를 위해 비록 적서형제지간이었지만 합심하여 노비를 상환한 경우로 잠계공과 아우 이응인의 우애를 엿볼 수 있는 문서라고 하겠 다. <상환문서 국역> 가정 25년 을축년 1월 20일 서형 이전인에게 주는 성문 이 성문을 작성하는 것은 형께서 저의 비 조금을 작첩하여 다행히 남자아이를 얻으 매 가련한 마음이 있어 형제간에 차마 할 수 없는 마음에 그 소원을 따라, 양부로 부터 전득한 비 복덕의 4소생비 조금 병오년생, 동 비의 1소생노 몽호 계해년생 등 을 형 호비 억금 정유년생, 동 비의 1소생비 윤매 을묘년생 등과 그 후소생을 모두 영영 교환하므로 차후에 잡담이 있거든 관에 고하여 바로잡을 일 비주( 婢 主 ) 자필 이응인[착명][서압] 증보( 證 保 ) 칠촌숙 이희무[착명] <원문> 嘉 靖 四 十 四 年 乙 丑 拾 㱏 月 貳 拾 日 庶 兄 李 全 仁 前 成 文 - 2 -
右 成 文 事 段 兄 亦 矣 婢 趙 今 矣 身 乙 作 妾 幸 得 男 兒 有 可 憐 之 意 兄 弟 之 間 有 所 不 忍 之 心 從 其 所 願 養 父 前 傳 得 婢 卜 德 肆 所 生 婢 趙 今 年 丙 午 同 婢 壹 所 生 奴 夢 虎 年 癸 亥 等 矣 身 乙 同 兄 戶 婢 億 今 年 丁 酉 同 婢 壹 所 生 婢 閏 梅 年 乙 卯 生 等 果 後 所 生 幷 以 永 永 相 換 爲 可 乎 後 有 雜 言 爲 去 乙 等 告 官 辨 正 事 婢 主 自 筆 李 應 仁 [ 着 名 ][ 署 押 ] 證 保 七 寸 叔 李 希 茂 [ 着 名 ] 證 人 嘉 靖 四 十 四 年 十 一 月 二 十 九 日 慶 州 府 立 案 右 立 案 爲 斜 給 事 粘 連 所 志 明 文 證 人 招 辭 是 置 有 亦 文 記 取 納 相 考 爲 乎 矣 嘉 靖 三 十 年 辛 亥 六 月 十 八 日 繼 後 子 應 仁 處 許 與 內 婢 趙 今 及 他 奴 婢 田 畓 等 許 與 是 如 繼 後 父 及 弟 李 母 朴 氏 着 圖 署 訂 保 前 察 訪 李 忠 義 衛 孫 筆 執 學 生 李 全 仁 等 着 名 署 成 文 是 乎 等 用 良 向 前 婢 趙 今 及 所 生 奴 夢 虎 等 乙 良 後 所 生 幷 以 依 法 相 換 以 斜 給 立 案 者 府 尹 [ 署 押 ] 判 官 2. 신분적 굴레를 벗어나는 출구 - 허통사로( 許 通 仕 路 ) 잠계 이준의 아들, 구암 이준( 李 浚, 1540~1623)은 1583년 자기 자신과 그 후손들 의 멍에를 걷어 버리는 엄청난 일을 해낸다. 바로 혈손이라는 신분적 굴레를 벗어 던지는 한편 벼슬로 나갈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는 일이었다. 이른 바 납속( 納 粟 )을 통한 허통사로( 許 通 仕 路 ) 가 이것이었다. 예조에서 발급한 증서, 급첩( 給 帖 )은 이 집안의 운명을 좌우한 문서이다. 이 문서는 1583년(선조16) 예조에서 왕명을 받들어 구암 이준에게 발급한 교첩( 敎 牒 )인데, 구 암 자신뿐만 아니라 이씨가 후손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건이다. 요약하자 면, 나라가 어려울 때 비록 서얼일지라도 납속을 한 자는 벼슬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국가적 방침, 즉 허통 사목( 事 目 )이 정해졌다는 것이다. 이에 당시 학생 ( 學 生 ) 신분이었던 이준은 벼 80석을 안변부에 납부하여 그 자신과 자손들이 벼슬 을 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적 비상사태가 발생하는 경우 군량미 조달의 한 방편으로 서자들뿐만 아니라 관직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영직 ( 影 職 ) 즉 실직을 주지 않은 채 그 사회적 지위만을 인정하는 방법 등 여러 가지 국가 차원의 재정 확보책이 강구되었다. 이에 구암이 그 기회를 잡아 그 자신과 후 - 3 -
손들의 벼슬길을 열었던 것이다. 옥산 이씨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대소 관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구암의 과감한 선택이 그 실마리가 된 것이다. 이렇게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곧 이씨 가문 인물들이 명실공이 양반 신분으로서 법적 지위를 갖추었다는 것을 뜻한다. 양반만 이 과거에 응시하거나 관직을 제수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씨가의 신분을 두고 경주, 나아가 영남지역에서 사림들이 한 문제제기는 제도적 문제라기 보다는 사회 관습적인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1) 법적으로서의 신분 상승 -납속( 納 贖 )- 이준예조급첩 ( 李 浚 禮 曺 給 牒 ), 1583( 宣 祖 16) 예조에서 납속사목에 의거하여 이준에게 발급한 서얼허통 문서. 이준은 이전인의 장남으로 퇴계선생의 문하인이며 호는 구암( 求 菴 )이다. 1583년 경 북로의 창궐로 인하여 군량이 소진되고 국방이 위급한 실정이었는데, 이 급첩은 그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 문서라 할 수 있다. 그 내용은 학생 이준이 쌀 80섬을 안변부에 헌납하였으므로 사목에 의거하여 전후 소생자에게 허통( 許 通 )한다는 것이다. 허통은 서얼에게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을 말한다. 즉 1485년부터 시행된 경국대전 에는 서얼에 대한 차별 규정이 마련되어 각 품계의 양첩자손과 천첩자손 에 따른 서용범위에 대한 제한이 법제화되어 있었지만, 국난으로 국고 및 군량이 바닥나게 되자 이러한 성문법적인 규제를 완화시키면서까지 납속을 받아 이를 보충 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 당시의 납속사목은 그 전문이 사료상 남은 것이 없고, 이로부터 10년 뒤인 1593년(선조26)에 임란으로 인한 납속사목이 호조( 戶 曹 ) 의 건의로 발령되게 되는데 이에 근거한다면, 80섬은 동반( 同 班 ) 8품에 오를 수 있 는 납속량이었다. 어쨌거나 이와 같은 시대적인 상황은 이전인 사후 15년간 가계를 이끌면서 신분적 굴레와 억압을 견디며, 당시 마흔을 넘긴 이준으로 하여금 납속이 라는 조치를 통해서라도 사로에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로 포착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급첩을 예조로부터 발급받은 것을 기점으로 하여 그의 허통실현을 위한 의지와 노력은 실제로 임란시 원종공신( 原 從 功 臣 )에 녹훈되 는 결과에 이르게 되며, 그 후 만경현령과 경산 및 청도군수를 지내는 성과로 이어 지게 되어 종국적으로 임란 후 1616년( 光 海 君 8) 유향소허참상서( 留 鄕 所 許 參 上 書 )에 까지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 때 이준이 이 때 납속한 쌀 80석은 커다란 상징적 의 미를 지니는 것으로 그 자신은 물론 후손들까지도 신분적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것이었다. 조선시대 사회에서는 법률상 명문화되어 있지 않은 사안이라할지라 도 그것이 신분에 관련된 것이라면 조정의 논의를 통해 얻은 왕명에 근거하여 철저 히 규제하였던 폐쇄적인 측면이 있었던 동시에, 신분에 관한 특정규정이 엄연히 존 재하더라도 상황과 시의에 따라 실질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개혁하고 완화한 측 면도 있었던 것이다. 참고적으로 본문 상에 쓰인 평팔십석( 平 捌 拾 石 ) 에서 평석( 平 - 4 -
石 ) 은 15말을 1섬으로 보는 것으로 소곡( 小 斛 ) 이라고도 하며, 20말을 1섬으로 보 는 전석( 全 石 ) 혹은 대곡( 大 斛 ) 에 대비되는 용어이다. <원문 국역> 예조에서 만력 11년 12월 초1일에 받은 수교. 병조에서 받은 수교 내용에 국가가 불행히도 북로로 인해 국방은 급박해지고 군량이 모두 소모되었다. 이에 대비하는 계책으로 상규만을 고수할 수도 없는 일이니 서얼로서 무예가 없으나 납속하는 자 는 모두 벼슬길을 허통하도록 하고 비변사 또한 같은 논의로 사목을 만들라는 계하 가 있었다 고 하기 때문에 이번에 학생 이준이 식용가능한 쌀 평( 平 ) 80석을 안변 부로 납부하였으므로 사목에 의거하여 전후소생 자손을 모두 허통함.(하략) <원문> 禮 曺 萬 曆 十 一 年 十 二 月 初 一 日 受 敎 兵 曺 受 敎 內 國 家 不 幸 北 虜 作 耗 防 戌 孔 棘 兵 粮 俱 闕 措 備 之 策 不 可 徒 守 常 規 庶 孼 無 武 才 而 納 粟 者 並 許 通 仕 路 亦 備 邊 司 同 議 成 事 目 啓 下 爲 白 有 如 乎 節 學 生 李 浚 亦 納 可 食 稻 米 平 捌 拾 石 于 安 邊 府 爲 有 昆 依 事 目 前 後 所 生 子 孫 並 許 通 者 萬 曆 十 一 年 十 二 月 日 給 牒 正 郞 佐 郞 判 書 [ 署 押 ] 參 判 參 議 [ 署 押 ] 正 郞 佐 郞 [ 署 押 ] 正 郞 佐 郞 2) 향촌에서의 처지 <향원자격청원상서> 1616(광해군8) 광해군 8년 11월에 이준( 李 浚 )이 향원( 鄕 員 )이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향청( 鄕 廳 )의 첨존( 僉 尊 )들에게 청원한 문서. 이준은 이금해( 李 金 海 ) 형제가 향원이 된 근래의 실 례를 들어 자신도 향원이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향청에 청원하였다. 이에 대해 향 청 쪽에서는 향청에 참여시키는 제도가 공론( 公 論 )에 의한 타천( 他 薦 )에 의해 이루 지는 것이지 스스로 단자( 單 刺 )를 올려 자천하는 것은 향청을 가볍게 여기는 처사 라는 이유로 향청에의 참여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임란 이후 서얼 집안으로서 제 - 5 -
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소외당하는 일단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향원은 향관( 鄕 官 ) 과 같은 말로, 향청의 좌수( 座 首 ) 별감( 別 監 )을 이르는 말이다. (국역) 통정대부( 通 政 大 夫 ) 전( 前 ) 군수( 郡 守 ) 이준[착명] 황공하옵게도 여러 존위( 尊 位 )께 아룁니다. 삼가 아뢰옵건대, 더러운 물건과 싫어하는 물건을 받아들이고 간직하는 것은 산과 바다의 포용력이며, 남의 악행을 감춰주고 선행을 드러내는 것은 군자의 사업입니 다. 산과 바다가 더러운 물건과 싫어하는 물건을 받아들이지 않고 간직하지 않는다 면 그 높이와 깊이를 감소하게 되는데, 군자는 역시 남의 악행을 감추어주고 선행 을 드러내어서 넓은 덕을 더욱 더 넓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힘껏 다른 사람들 을 용납하여 그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선행을 이룩하게 해준다면, 어찌 여러 존위의 성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행적( 行 迹 )이 심히 미미( 微 微 )하고 하찮지만 다행하게도 선비들의 반열에 끼어 들었습니다. 이는 모두 여러 존위께서 돌보아주시고 긍휼( 矜 恤 )히 여겨주신 소치가 아님이 없사오니, 분수로 헤아려봄에 감당하기가 어렵고 자신을 반성해봄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고장에서 태어나 이 고장 사람이 되었는데도 이곳 부로( 父 老 )들의 뒤를 따르지 못하고 이곳 부로들의 의론( 議 論 )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언제나 개탄( 慨 歎 )하는 마음을 품은 채 하소연할 곳이 없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 넓으신 도 량을 활짝 열어젖히시고 널리 선비들을 불러서 나아오게 하신다고 하는데, 이금해 ( 李 金 海 ) 형제도 또한 향원( 鄕 員 )의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참 으로 여러 존위께서 돈후한 덕으로 다른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어주시는 때이자 미 천한 제가 진심을 하소연할 시기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여러 존위께서는 이쪽저쪽의 심정을 한결같이 보아주시고 공정한 의 론을 보여주심으로써 함께 맛있는 음식을 맛 볼 수 있다 는 희망을 갖게 하시고 혼자 따돌림을 당했다 는 아픈 마음을 가지지 않도록 하여주소서. 이렇게 해주신다 면 단지 제가 제 자신만 감은( 感 恩 )하는 심정을 품을 뿐만 아니라, 조상의 영혼도 또한 지하에서 감격하여 우리 고장 사람들이 나의 자손들을 돌보아주는 것은 내가 우리 고장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곧 옛 사람이 이른바 죽는 날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사는 날이다 는 것이니, 비록 이 몸이 만 번 죽는다 할지라도 은혜 갚을 길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 존위께서 살펴보시는 마당에 혹시 조금이라도 잘나고 못난 데 대 한 판단이 불공정하여, 보고 듣는 우리 고장 및 우리 이웃 사람들로 하여금 탄식하 면서 아무개는 향원에 참여했고 아무개는 향원에 참여하지 못했으니, 아무개의 자 손은 도리어 아무개의 자손보다 못하다 고 말하게 한다면, 저는 마땅히 공정( 公 庭 ) 에 달려 나가 저의 마음속에 있는 말을 남김없이 다 토로할 것이며, 비록 한번 죽 는다 할지라도 또한 무엇을 후회하겠사옵니까. - 6 -
삼가 바라건대 여러 존위께서 상대방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살펴보시고 공정한 마음 으로 추측하시어 다른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어주신다면, 매우 다행스럽겠사옵니다. 지극히 떨리는 심경과 지극히 간구( 懇 求 )하는 마음을 이길 길이 없사옵니다. 삼가 바라건대 여러 존위께서는 살펴보시옵소서. 만력( 萬 曆 ) 44년 11월 일. <뎨김( 題 音 )> 우리 고장의 향원 참여 허용은 예로부터 공론에 따라 천거하여 나아오게 한 것이었 으며, 스스로 단자( 單 刺 )를 제출하는 일이라면 아직까지 그런 규식이 없었다. 이와 같이 스스로 나아오는 것은 마음을 먹음에 마치 향청( 鄕 廳 )을 얕보는 뜻이 있는 듯 하니, 그 청을 들어주어서는 아니 되겠다. <원문> 通 政 大 夫 前 郡 守 李 浚 [ 着 名 ] 惶 恐 仰 瀆 僉 鑑 伏 以 納 汚 藏 疾 山 海 之 量 也 隱 惡 揚 善 君 子 之 事 也 山 海 不 以 納 汚 藏 疾 而 損 其 高 深 君 子 亦 以 隱 惡 揚 善 而 增 益 其 恢 弘 之 德 則 今 者 務 以 容 人 使 之 成 美 豈 非 僉 尊 一 盛 事 乎 生 迹 甚 微 末 幸 添 衣 冠 此 莫 非 僉 尊 眷 恤 之 攸 及 也 揆 分 難 堪 撫 躬 罔 惜 第 以 生 於 此 鄕 爲 此 鄕 人 未 隨 父 老 之 後 塵 未 參 父 老 之 餘 論 常 懷 慨 嘆 無 所 籲 告 幸 聞 玆 者 廓 恢 弘 之 量 廣 取 引 進 而 李 金 海 兄 弟 亦 爲 許 參 云 此 正 僉 尊 厚 德 成 人 之 日 賤 生 得 訴 悃 愊 之 秋 也 伏 願 僉 尊 一 彼 此 於 胸 臆 示 公 正 之 論 議 共 效 屠 門 之 嚼 俾 免 向 隅 之 痛 則 非 但 賤 生 啣 恩 於 一 身 先 世 之 靈 亦 感 於 地 下 曰 鄕 人 之 眷 我 子 孫 者 以 我 之 不 見 棄 於 鄕 人 也 則 是 古 人 所 謂 雖 死 之 日 猶 生 之 年 也 雖 滅 身 萬 萬 不 知 其 所 報 如 或 僉 鑑 之 下 一 有 姸 蚩 之 不 公 而 使 鄕 隣 見 聞 者 歎 之 曰 某 也 得 參 某 也 不 得 參 某 也 之 子 孫 返 不 如 某 也 之 子 孫 乎 云 爾 則 生 當 趨 進 公 庭 吐 出 心 肝 少 無 所 蘊 雖 有 一 死 亦 何 悔 焉 伏 願 僉 尊 恕 以 察 之 公 以 推 之 俾 得 成 人 之 美 不 勝 幸 甚 無 任 戰 慄 懇 祈 之 至 伏 惟 僉 尊 鑑 向 敎 是 事 萬 曆 四 十 四 年 十 一 月 日 < 題 辭 > 吾 鄕 許 參 自 古 以 公 論 薦 進 而 自 呈 單 刺 未 有 其 規 如 是 自 進 作 意 似 有 輕 鄕 之 義 不 可 施 之 - 7 -
3. 무과를 통해 立 身, 벼슬길을 열다 옥산 이씨들은 이준, 이굉( 李 宏 ), 이홍후( 李 弘 煦 ), 이수담( 李 壽 聃 ), 이익규( 李 益 圭 ) 이기원( 李 紀 元 ) 등의 과거 합격 및 관력( 官 歷 )을 보여주는 교지들을 보관하고 있다. 홍패( 紅 牌 ) 백패( 白 牌 )가 4건, 관직 임명이나 역임한 사실을 기록한 고신( 告 身 ) 교지 가 22건 전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준이 1599년(선조32) 무과에 급제하고 받은 합 격증인 홍패에 주목해야 한다. 이 문서가 바로 이씨가의 인물로서는 처음으로 사환 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준은 벼슬길의 시작을 무과로 출발하 였다. 이 홍패와 다른 고신 교지들을 통해 그의 사환 과정을 추적해보자. <구암 이준의 과거와 관력> 번호 연 대 발급자 수취자 주요 내용 1 1583( 宣 祖 16) 禮 曺 李 浚 許 通 給 牒, 納 粟 2 1595( 宣 祖 28) 兵 曹 李 浚 訓 鍊 院 主 簿 訓 鍊 院 判 官 3 1595( 宣 祖 28) 兵 曹 李 浚 主 簿 勵 節 校 尉 訓 鍊 院 判 官 4 1599( 宣 祖 32) 宣 祖 李 浚 武 科 及 第 紅 牌 5 1603( 宣 祖 36) 宣 祖 李 浚 通 訓 大 夫 行 軍 器 寺 僉 正 6 1603( 宣 祖 36) 宣 祖 李 浚 通 訓 大 夫 行 萬 頃 縣 令 7 1608( 宣 祖 41) 宣 祖 李 浚 通 政 大 夫, 納 粟 堂 上 8 1608( 宣 祖 41) 宣 祖 李 浚 折 衝 將 軍 行 龍 驤 衛 副 司 猛 9 1610( 光 海 君 2) 宣 祖 李 浚 通 政 大 夫 行 淸 道 郡 守 10 1610( 光 海 君 2) 宣 祖 李 浚 折 衝 將 軍 行 忠 武 衛 司 果 11 1610( 光 海 君 2) 宣 祖 李 浚 折 衝 將 軍 行 龍 驤 衛 司 正 12 1610( 光 海 君 2) 宣 祖 李 浚 折 衝 將 軍 行 忠 武 衛 司 勇 이를 통해 간단하게나마 구암의 삶과 그 전략을 추적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 로 그는 44세 때인 1583년에 예조 급첩( 給 帖 )을 통해 벼슬길을 열었다. 그 후 1595년 훈련원 주부를 지내는 등 이러 저러한 관직을 지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은 영직( 影 職 ) 이었다. 하지만 이씨가의 힘은 그 경제력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암뿐만 아니라 아들 이굉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굉이 실제 벼슬을 한 것은 1597년 군자감 첨정이 처음인데, 이때 실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납미실직 ( 納 米 實 職 ) 즉 미곡을 바치고 그 대가로 제수 받은 것이었다. 구암 자신 또한 이것 은 1608년(선조41) 고급관료인 통정대부 즉 당상관이 될 때에도 납속을 통해서였 다. 정리하자면, 1583년에는 벼슬에 나아가는 데 있어 신분적 걸림돌을 제거하였고, 60 세 때인 1599년에는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 할 수 있는 자격을 확보하였다. 이와 함 께 구암은 자신과 가문의 재력을 바탕으로 영직( 影 職 )을 벗어나 실직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1608년에는 모든 관인들의 소망이라 할 수 있는 당상관이 될 수 있었던 것 - 8 -
이다. 사실 이씨 가문의 사회적 위상과 그 기틀은 구암대에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 으며,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집안의 경제력과 구암과 그 자손들의 개인적 능력 이었다. 4. 가문 내에서 삶의 전략 - 회재 이언적의 유업 계승 회재 사후 잠계 이전인의 후손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회재 후손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독락당( 獨 樂 堂 )과 계정( 溪 亭 ) 등 퇴계 이황이 강조한 소위 옥산별업( 玉 山 別 業 )을 수호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회재를 위한 위선사업 차원을 넘어서서, 경주 등 영남 선비사회에서 이씨들이 생존할 수 있는 최우선 조건이었다. 이씨들이 옥산 별업을 수호하는 첫 번째 조치는 자손들 간의 재산상속 대상에서 계 정과 독락당을 제외하는 한편, 계정 독락당을 유지 보존하기 위한 일정한 규칙을 정 하는 일이었다. 이일을 위해 잠계의 아들 구암 이준과 치암( 癡 菴 ) 이순( 李 淳, 1544~1580) 형제가 주도하여 다음과 같은 화의문( 和 議 文 )을 작성하였다. 만력29년 신축 3월 12일 화의문 이 글은 화의하기 위함이다. 계정과 독락당은 선조고 문원공 회재선생의 별서이다. 유택( 遺 澤 )이 완연하여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우리 형제가 당우( 堂 宇 )를 삼가 지키고, 겨우 물 뿌리고 마당 쓸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였다. 그러나 혹 후손들이 궁벽 잔악해짐이 걱정되고, 불초한 후손들이 수호하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남들에 게 꾸지람을 듣는다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자손된 정리로서 어찌 양심의 가책 을 느끼지 않겠는가. 이에 형제와 더불어 상의하여 약간의 토지 노비를 출현하여 뒷 날의 계당을 수호하는 비용을 마련한다. 종자 종손은 이 토지 노비를 수호하여 이 뜻 을 바꾸지 말 것이다. 여종 만향의 둘째 소생 노 순이(15세, 정해생), 여종 덕강 4소생 여종 벽강(13세, 기축생), 야마리 소재 기자( 起 字 ) 답 34부 3속(1섬지기), 하포원 자 제 23답 11부 (4두락) 낙산원 연자 제 12전 15부 2속 등의 곳을 계당 위토로 정하되, 뒷날 자손 가운데 이 노비와 토지를 가지고 다투는 경우가 있거든 불효로서 논단할 일이다. 재주 자필 형 통훈대부 경산현령 이준(착명) 증인 아우 이순(착명) 和 議 文 右 文 爲 和 議 事 溪 亭 與 獨 樂 堂 乃 先 祖 考 晦 齋 文 元 公 先 生 別 墅 也 遺 澤 宛 然 羹 墻 慕 切 吾 兄 弟 敬 守 堂 宇 僅 備 洒 掃 而 或 慮 後 孫 窮 殘 不 肖 未 能 盡 守 護 之 道 於 人 瞻 聆 豈 不 愧 哉 子 孫 之 情 寧 不 寂 哉 玆 與 兄 弟 相 議 略 出 田 民 以 備 日 後 溪 堂 守 護 之 資 宗 子 宗 孫 守 此 田 民 勿 替 此 意 婢 萬 香 二 所 生 奴 順 伊 年 十 五 丁 亥 婢 德 江 四 所 生 婢 碧 江 年 十 三 己 丑 野 麻 里 起 字 十 - 9 -
六 畓 三 十 四 負 三 束 一 石 落 下 浦 員 字 二 十 三 畓 十 一 負 四 斗 落 洛 山 員 筵 字 十 二 田 十 五 負 二 束 等 庫 乙 以 溪 堂 位 出 定 是 去 乎 日 後 子 孫 中 如 有 爭 望 此 田 民 者 以 不 孝 論 斷 事 財 主 自 筆 兄 通 訓 大 夫 慶 山 縣 令 李 浚 ( 手 決 ) 證 弟 幼 學 李 淳 ( 手 決 ) 구암 형제가 결의문을 채택하며 계당 수호 절차를 마련 한 것이 17세기 초인 1601 년이었다. 두 형제가 작성한 문서 명칭은 화의( 和 議 )였다. 화의란 만장일치, 즉 의견 이 일치되어 그 결과를 문장으로 작성한 일종의 합의문이다. 화의를 통해 이들이 마련한 재산은 노비( 奴 婢 ) 2구( 口 )와 논[ 畓 ] 19두락( 斗 落 ), 밭[ 田 ] 15부( 負 ) 2속( 束 ) 이다. 즉 노비 2명과 전답 약 40 두락의 위토를 내어 계당 수호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화의는 재산을 상속할 때 계당은 분재대상에서 제외한 다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 인용문에 언급된 바와 같이 이들 재산은 종자 종손( 宗 子 宗 孫 )에게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후대의 분재기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즉 형제간 철저한 평균 분급이 시행된 17세기 초였지만 독락당과 계당의 수호 자산을 종손만 이 상속할 수 있도록 조치한 이 화의문을 통해, 회재의 정체성을 이어가려는 옥산 이씨들의 결의와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독락당 계당이 종가 종손으로 상속되고 철저 히 관리되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분재상의 특별조치가 전재되었기 때문이다. 어서각( 御 書 閣 )을 건립, 운영한 것 또한 이씨가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 다. 어서각을 건립한 것은 인종이 회재에게 보낸 어찰( 御 札 )을 보관한다는 차원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근본적으로는 회재 후손들으로서의 위상을 스스로 지 키기 위함이었다. 1542년 인종 임금은 사부인 회재 선생에 편지를 보내었다. 이언적이 세자시강원의 좌우부빈객( 左 右 副 賓 客 : 종2품)을 역임할 당시 맺었던 친분으로 인종이 회재의 편 지에 대해 답장을 한 것이다. 지금 공이 외임으로 나갔으니 공의 효를 얻었도다. 내가 공의 훌륭한 격론을 듣지 못한 때에 특별히 간절한 말을 나에게 들려주니 마음이 감격스럽다. 今 受 外 任 於 公 之 孝 則 得 矣 余 恐 久 未 聞 嘉 言 格 論 之 際 特 贈 至 切 之 辭 感 激 于 懷 銘 心 服 膺 이씨 가문 사람들은 이 인종의 어서( 御 書 )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였고, 어서각은 바로 그러한 연유로 인해 건립되었다. 이후 이씨가의 다른 문서들도 여기에 보관되 었는데, 이는 이씨가의 정체성의 상징인 회재의 문적( 文 籍 )과 유물을 지키는 것이 곧 독락당 수호와 더불어 그들의 삶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회재의 유품 유물을 잊어 버린다는 것은 곧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어서각은 오 랜 세월동안 철저하게 관리되었으며, 그 서책의 출입에 있어서는 경주부윤의 명으 로 통제하기도 하였다. 오늘날까지 수많은 이씨가의 문적이 전할 수 있었던 것도 - 10 -
이러한 공사 간의 노력의 결과였다. 御 書 閣 守 護 簡 札 朴 慶 新, 1618( 光 海 君 10) 광해군 10년 11월 13일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하던 박경신( 朴 慶 新, 1560-1626)이 내린 문기( 文 記 ). 임진왜란에 회재선생의 구려( 舊 廬 )가 다행히 병화( 兵 火 )의 재앙을 면하여 선생의 수택( 手 澤 )이 뭍은 서책( 書 冊 )과 궤안( 几 案 ) 따위가 모두 보존되어 선생의 학덕( 學 德 )을 상상할 수 있으니, 자손과 외부인들은 마땅히 애호( 愛 護 )하여 빌리거나 빌려주지 않고 잘 보존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박경신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죽산( 竹 山 ), 자는 중길( 仲 吉 ), 호는 한천( 寒 泉 ) 또는 삼곡( 三 谷 )이니, 장령 사공( 思 恭 )의 아들이다. 1582년(선조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광해군 때 광주목사( 光 州 牧 使 ) 양주목사 판결사 등을 지내고, 광 해군 10년 6월 8일에 경상감사가 되었다. 1624년(인조2) 이괄( 李 适 )의 난으로 인한 인조의 파천을 호종( 扈 從 )하지 않은 죄목으로 문외출송( 門 外 出 送 )당하였다. 시를 잘 쓰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2) 번역 임진왜란( 壬 辰 倭 亂 )에 선생의 구려( 舊 廬 )가 다행히 병화( 兵 火 )의 재앙을 면하여 평 상 시 선생의 수택( 手 澤 )이 뭍은 서책( 書 冊 )과 궤안( 几 案 ) 따위가 모두 보존되었습 니다. 이로 인하여 선생의 학덕을 상상하는 것이 보통 심정보다 갑절이나 되니, 외 부인들도 진실로 마땅히 애호( 愛 護 )하여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평천( 平 泉 : 경치 좋은 정자)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 비길 수 없을 뿐만 아닌데, 하물며 그 자손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이제부터 크고 작은 서책은 자손들도 마땅히 남에게 빌려주지 말아야 하고, 비록 외부 사람들도 자손에게 빌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만 방백( 方 伯 ) 이하만 그럴 것이 아니라 본부( 本 府 : 경주)의 부윤( 府 尹 ) 이하도 동구( 洞 口 )에서 벗어날 수 없다 면 1) 사민( 士 民 )들도 진실로 손을 대지 않을 것입니다. 이로써 영원히 항식( 恒 式 )으 로 삼아 혹시라도 감히 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혹시 이 규칙을 따르 지 않고 마음대로 빌려가거나 빌려준다면, 자손들은 불효하다는 이름을 받을 것이 고 오비 사람들도 나의 벌을 범하게 될 것이니, 이런 폐단이 없도록 각자 특별히 마음을 다하기 바랍니다. 만력( 萬 曆 ) 46년(1618) 11월 13일 관찰사 박( 朴 ) [서압] <원문> 壬 辰 之 難 先 生 舊 廬 幸 免 兵 火 之 禍 平 時 先 生 手 澤 書 冊 及 其 几 案 之 屬 咸 獲 保 存 因 此 而 想 - 11 -
先 生 者 有 倍 於 常 情 卽 在 外 人 固 當 愛 護 而 勿 失 不 啻 平 泉 一 草 一 木 之 比 況 其 子 孫 乎 自 今 以 後 大 小 書 冊 子 孫 非 不 當 假 之 於 人 雖 外 人 亦 勿 切 借 之 於 子 孫 非 唯 方 伯 以 下 爲 然 在 本 府 府 尹 以 下 亦 [ 不 ] 得 出 諸 洞 口 則 士 民 固 不 敢 下 手 矣 以 此 永 爲 恒 式 或 毋 敢 或 逾 如 或 不 遵 此 規 擅 敢 假 借 則 在 子 孫 蒙 不 孝 之 名 在 外 人 獲 犯 我 之 罰 其 無 此 弊 事 另 各 盡 心 萬 曆 四 十 六 年 戊 午 十 一 月 十 三 日 觀 察 使 朴 [ 署 押 ] 5. 약자의 삶의 전략 - 관부 및 서족들과의 연대 1) 친정부적 정치 노선과 관료와의 유대강화 이씨가에서 남긴 고문서 가운데에는 경주부윤 등 관부 및 유력 사족 인물과 교류하 거나 경제적 부조를 주고받은 문서가 많다. 예컨대, 문안단자( 問 安 單 子 ) 가운데에는 전 현직 고관들에 대한 칭념( 稱 念 )의 실제를 보여주는 극히 희귀한 문서들이 포함 되어 있다. 칭념이란 원래 잘 살펴봐 달라 는 뜻의 의례 문서이지만, 상당한 부조행 위를 동반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구암 이준의 경우 경주부윤과 경상도 관찰 사를 경유하여 해평부원군 등 당시 조정의 고관들에게 대해서도 안부를 묻고 예물 로 곡식을 부쳤다. 구암은 수시로 칭념을 행하였고, 지면이 없는 고관의 경우 경주 부와 경상감영의 수장들에게 요청하여 칭념을 넣었다. 이는 조선조 양반 및 고위관 료들 사이에 상호 부조적 교유관계의 일면인 동시에 가문을 경영해가는 입장에서 필요불가결한 요소였다. 이렇게 조선 사회의 성격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문안단자 등은 매우 중요한 사료들이다. 이러한 관부와의 유대 강화는 다음 같은 문서를 통 해 가문의 재산 경영에 큰 이득으로 돌아왔다. 이씨 가문에 남아있는 20 여종의 완문( 完 文 )의 대부분은 바로 이러한 관부와 이씨 가문과의 특별한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이때의 특별한 관계란 관부에서 이씨 가문 에 대하여 배타적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1789년(정조13)의 옥산계정수 호시탄초획급완문( 玉 山 溪 亭 守 護 柴 炭 草 劃 給 完 文 )에는 보다 구체적인 특권이 명시되 어 있다. 경주부사는 계정 수호인( 守 護 人 )인 이립( 李 笠, 1740~1805)에게 계정 부근에 있는 - 12 -
기계의 벌치동 32호( 戶 )로 하여금 땔나무 32단(묶음)과 숯 16말, 풀 64짐을 봄 가 을로 납입하도록 하였다. 향촌생활에서 땔나무와 탄 그리고 풀( 柴 炭 草 )은 쌀 보리 등 주식을 제외하면 가장 중요한 생필품이다. 이러한 중요한 생필품의 상당량을 인 근의 주민들로 하여금 부담하게 했던 것이다. 물론 이때 부담이란 관부에 내는 조 세를 제해주는 조건과 맞바꾸어진 것이다. 위와 같은 관부와 양반과의 관계는 회재 선생의 장리지소( 杖 履 之 所 )라는 배경에 기 인한다. 하지만 훌륭한 조상을 둔 자체로 그러한 특권의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후 손들의 직 간접적 노력이 수반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씨가 사람들은 관부뿐만 아니라 중앙과 지방의 유명 관료들 및 사족들과 끊임없 이 교류를 주고받고 있었다. 잠계집과 구암집에는 이들과 교류한 수많은 간찰이 실 려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등 당시 정계 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많았다. 또한 옥산 독락당 계정에는 시인 묵객들의 시서( 詩 書 )와 현판이 즐 비하다. 이 또한 가문의 위상을 대변하고 있으나 내재적으로는 가문 경영의 중요한 방법이었다. 2) 奴 主 契 의 결성과 운영 <1801년 李 希 誠 奴 主 契 田 畓 別 給 文 記 > 嘉 慶 六 年 辛 酉 十 二 月 十 五 日 宗 子 岦 處 許 與 文 右 文 爲 許 與 事 昔 在 辛 酉 年 間 吾 與 故 奴 日 先 次 奉 禾 里 同 等 十 名 相 議 刱 出 四 石 租 谷 爲 設 契 而 二 石 吾 出 之 二 石 奴 輩 出 之 因 之 曰 奴 主 契 多 年 貨 殖 者 保 奴 屬 爲 宗 家 計 也 宗 家 坦 檣 修 毁 之 日 及 其 他 雜 役 使 喚 之 時 皆 出 契 谷 以 爲 要 用 是 遣 又 値 年 荒 則 契 中 出 用 分 給 者 已 多 年 數 矣 中 間 契 穀 或 食 或 逃 亡 者 或 食 身 死 者 則 全 不 收 捧 閪 失 頗 多 故 更 議 買 畓 每 名 各 給 二 斗 落 次 知 耕 食 而 傳 子 傳 孫 永 爲 規 例 矣 目 今 奴 屬 中 或 有 無 去 處 逃 亡 者 或 有 身 死 後 無 後 者 又 或 娶 良 女 所 生 者 及 娶 他 婢 所 生 者 不 肯 使 喚 自 退 契 中 還 納 同 畓 則 無 歸 屬 處 故 上 典 次 知 自 有 前 例 此 後 段 汝 亦 次 知 永 爲 宗 家 保 用 之 地 是 旀 且 無 前 戶 首 處 劃 給 四 斗 落 段 自 刱 而 自 罷 則 誰 禁 而 誰 咎 乎 曾 有 奴 輩 中 不 得 參 分 畓 時 遺 漏 者 二 名 而 龍 世 時 同 處 均 給 爲 㫆 其 餘 三 斗 落 段 契 中 次 知 要 用 是 旀 奴 輩 處 各 耕 食 畓 庫 果 字 號 卜 數 後 錄 成 給 爲 去 乎 永 永 次 次 傳 給 以 爲 遵 奉 吾 意 事 通 政 大 夫 僉 知 中 樞 府 事 父 ( 着 名 署 押 ) ( 後 錄 -생략) 6) 바위 틈에서 핀 들꽃 - 장산서원( 章 山 書 院 )의 건립과 운영- - 13 -
이씨가문의 500년 역사는 조선의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씨가 인물들이 당면했던 모순의 실체는 옥산서원에서의 원임( 院 任 ) 참 여문제, 관서문답( 關 西 問 答 )의 출판 문제, 장산서원( 章 山 書 院 ) 건립과 운영문제, 서 얼 허통( 庶 孼 許 通 ) 등이었다. 어찌 보면 이씨 가문에 국한되는 문제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당시 사회의 신분 문제를 총체적으로 대변하는 사안이기도 했다. 이씨가 사람들이 제기한 문제는 모두 조선 정부나 양반 사회 전체와 상관되는 대단 히 크고 근본적 문제에 속하였다. 그러나 이씨 인물들은 때로는 역사의 흐름에 거 슬려 정면 도전하기도 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시대의 물결에 편승하기도 했다. 이씨 가 인물들의 생존 전략은 이러한 시대조류에 대응하면서 전개되었다. 신분적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납속을 통해 사로( 仕 路 )를 개척하거나 문반 사족으로 발전하기 위해 무과와 무관직을 통해 우회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하였다. 또한 옥산 서원 원임 참여문제로 다수의 사림과 마찰을 빚자 장산서원의 건립과 운영을 통해 지역 사회에서 그들 스스로 사회적 위상을 격상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이씨가 사람들이 택할 수밖에 없었던 생존 전략이었다. 이들의 생존 전략은 단순히 기존 양반들의 특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앞선 예지와 안목에 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점이 500년 옥산 이씨 가문 역사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점이라 하겠다. - 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