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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았다. 임진왜란으로 권위가 실추되었던 선조는 명군의 존재를 구세 주 이자 王權을 지켜주는 보호자 로 인식했다. 선조는 그 같은 인 식을 바탕으로 扈聖功臣들을 높이 평가하고 宣武功臣들을 평가 절하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려고 했다. 이제 명에 대한 숭 앙과 충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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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

時 習 說 ) 5), 원호설( 元 昊 說 ) 6) 등이 있다. 7) 이 가운데 임제설에 동의하는바, 상세한 논의는 황패강의 논의로 미루나 그의 논의에 논거로서 빠져 있는 부분을 보강하여 임제설에 대한 변증( 辨 證 )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을 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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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과 학기 술부 고 시 제 호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11년 8월 9일 교육과학기술부장관 1. 초 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은 별책 1 과 같습니다. 2.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별책

시험지 출제 양식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체험합시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5. 우리 옷 한복의 특징 자료 3 참고 남자와 여자가 입는 한복의 종류 가 달랐다는 것을 알려 준다. 85쪽 문제 8, 9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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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통권 제12 호 (2012) 제에 의하여 라는 외부적인 포스트- 식민화의 문제점을 노정하는지, 그리고 4 3이나 5 18과 비교 할 때 근대 국민 국가 성립 전의 조선과 대한민국을 포괄하여 일본군위안부가 어떻게 법적 언어로 구성되고 있는지는 국가주의,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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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중반부터 일부 지방에서 자체적인 정책 혁신 을 통해 시도된 대학생촌관 정책은 그 효과에 비자발적 확산 + 대한 긍정적 평가에 힘입어 조금씩 다른 지역으로 수평적 확산이 이루어졌다. 이? + 지방 A 지방 B 비자발적 확산 중앙 중앙정부 정부 비자발적

2 佛敎學報 第 48 輯 서도 이 목적을 준수하였다. 즉 석문의범 에는 승가의 일상의례 보다는 각종의 재 의식에 역점을 두었다. 재의식은 승가와 재가가 함께 호흡하는 공동의 場이므로 포 교와 대중화에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둘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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越 境 하는 화폐, 분열되는 제국 - 滿 洲 國 幣 의 조선 유입 실태를 중심으로 181 越 境 하는 화폐, 분열되는 제국 - 滿 洲 國 幣 의 조선 유입 실태를 중심으로 - 조명근 고려대학교 BK21+ 한국사학 미래인재 양성사업단 연구교수 Ⅰ. 머리말 근대 국민국가는 대내적으로는 특정하게 구획된 영토에 대한 배타적 지배와 대외적 자주성을 본질로 하는데, 그 수립과정에서 국민통화가 창출되었다. 국 민통화는 대내적으로는 국민경제를 효과적으로 통제 관리하는 수단으로, 대 외적으로는 독립적인 주권을 상징하고 있는데, 특히 화폐주권은 근대 국민국 가의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되었다. 1) 이와 같이 근대 국민국가의 영토적 배타 성은 영토적 통화(territorial currencies) 2) 와 맞물려 있다. 따라서 국가의 고유 한 권리인 화폐주권을 생각한다면, 국경을 넘어서는 화폐의 유통은 원칙적으 로 불가능하다. 이 글은 식민지기 조선 만주 국경 간의 화폐 유입 실태를 통해 일제 대외 투고일: 2013년 5월 20일, 심사일: 2013년 8월 20일, 게재 확정일: 2013년 11월 22일 1) 고병권, 2005, 화폐, 마법의 사중주, 그린비, 156~160쪽 2) 영토적 통화란 국가의 영토적 경계선 내에서 사용되는 동질적이고 배타적인 통화를 말한다. 벤저민 J. 코헨 지음, 박영철 옮김, 1999, 화폐와 권력, 시유시, 43쪽

182 동북아역사논총 42호 금융정책이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일제 대외금융 정책의 기본원칙은 각 식민지와 점령지마다 별도의 발권은행을 수립하여 일본 은행권이 아닌 각 지역 통화를 발행케 한 점에 있다. 이들 통화는 일본은행권 과 等 價 로 연계되어 거대한 円 係 통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3) 일본 본토를 중 심으로 한 제국의 동심원적 확장은 곧 엔계통화권의 확대과정과 그 궤를 같이 한다. 또한 일제는 이 확대과정에서 발생될 수 있는 위험이 일본 본토에 파급 되는 것을 저지해야만 했다. 중일전쟁 이후 중국 점령지의 인플레이션이 엔계 통화권을 통해 연쇄적으로 전이되고 있을 때, 조선 만주 국경선은 일본을 보 호하기 위해 설치된 통화 방어선이었다. 戰 時 期 조선의 인플레이션은 일본 본 토 보호를 위해 조선이 최후 방어선이 됨으로써 심화되었는데, 이 실태를 滿 洲 4) 國 幣 의 조선 유입을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만주국폐의 조선 유입에 대해서는 주로 조선은행권 증발 요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연구되어왔다. 대표적으로 朝 鮮 銀 行 史 를 들 수 있는데, 조선은행 조사 자료를 중심으로 만주국폐의 유입 현상과 이것이 조선 내 인플레이션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음을 증명하였다. 위 연구에서는 주로 조선은행의 換 관계 분석을 통해 만주국폐의 조선 유입 현상을 설명하였다. 5) 반면 야스토미 는 이 문제를 만주국의 시각에서 검토하였는데 조선은행권 증발 원인에는 만 주국폐의 유입뿐만 아니라 조선 내 자금 수요도 주요 원인을 차지한다고 반박 하였다. 그는 만주국폐 유입이 조선 내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주었지만, 그 내 용이 과대평가되어 있다는 만주국 측의 입장을 소개하여 조선과 만주국 사이 3) 일반적으로 엔계통화라고 함은 일본은행권을 중심으로 조선은행권, 대만은행권, 만 주중앙은행권(만주국폐), 몽강은행권, 중국연합준비은행권, 중앙저비은행권 등을 말한다. 4) 1932년 만주중앙은행이 발행한 만주중앙은행권은 태환 규정이 없는 불환지폐로 출 발하였다. 만주국이 발행한 화폐라는 의미에서 당시에는 만주국폐라고 불리었다. 이하 본문에서도 당시 통용되고 있던 만주국폐로 사용하겠다. 5) 朝 鮮 銀 行 史 硏 究 會, 1987, 朝 鮮 銀 行 史, 東 洋 經 濟 新 報 社, 632~638쪽(이하 朝 鮮 銀 行 史 ).

越 境 하는 화폐, 분열되는 제국 - 滿 洲 國 幣 의 조선 유입 실태를 중심으로 183 의 서로 다른 견해를 제시하였다. 6) 그런데 야스토미는 분석 시기를 1942년 이 후로 한정함으로써 1930년대 후반부터 문제시되고 있던 만주국폐 유입의 실태 와 조선 내 대처 등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 기존 연구의 가장 큰 문제는 조선은행과 조선총독부를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존재로 보고 있는 점이다. 본문에서 확인하겠지만 양측은 만주국폐의 조 선 유입에 대해 상반된 인식과 서로 다른 대응 양태를 보이고 있었다. 조선총 독부는 초기부터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유입을 저지하고자 한 반면, 조선 은행은 그와 반대로 방임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7) 만주국폐 유입 문제 를 두고서 보이는 양측의 균열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양자 모두 일 제의 대륙침략이라는 동일한 목적을 공유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행한 기관 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다만 조선총독부는 조선이라는 관할지역 내에서 인플 레이션을 억제해야 할 책무가 있었던 반면, 조선은행은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 점령지 전비조달기관으로서 전체 엔계통화권의 유지가 우선시될 수밖에 없었 던 것이다. 양자 모두 제국의 붕괴를 막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할지라 도 대처에서 차이가 나는 그 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은행이 이 문제 를 경시했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가지는 이해관계 속에서 나온 대처라 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양자가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속성을 지닐지라도 세부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이 균열이 발생한 지점에서 만주국폐 의 조선 유입이 가지는 함의를 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다. 6) 安 富 步, 1997, 滿 洲 中 央 銀 行 と 朝 鮮 銀 行 日 中 戰 爭 アジア 太 平 洋 戰 爭 期 を 中 心 に, 人 文 學 報 79, 京 都 大 學 人 文 科 學 硏 究 所, 52~56쪽. 戰 時 期 인플레이션 에 미친 만주국폐 유입의 책임론에 대한 조선 측과 만주국의 입장 차이는 상당히 흥 미롭기에 검토해볼 대상이다. 양자 모두 만주국폐의 조선 유입이 심각했고, 은행권 증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다만 보다 주된 요인을 어디에 서 찾느냐를 두고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었다. 7) 조선은행이 만주국폐 유입에 대해 194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조사를 실시했다는 것 도 이 점을 방증한다. 만약 조선은행이 초기부터 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대 처하고자 했다면 이보다 훨씬 더 빠른 시점에 조사가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일반적 이다.

184 동북아역사논총 42호 이 글에서는 양자의 대응을 분리, 조선총독부의 적극적 대처 8) 와 조선은행 의 방관이라는 구도 속에서 논지를 전개하고자 한다. 우선 만주국폐의 조선 내 유입 실태부터 파악해야 한다.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와 점령지의 통화금융정 책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이 정책이 정작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래 연구가 조선총독부와 조선은행을 동일한 주체로 파악함으로써, 조선 측의 입장이 결 여되었다면, 이 글에서는 식민지 조선의 시각에서 일제의 통화금융정책이 어 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9) Ⅱ. 중일전쟁 이후 인플레이션에 따른 円 係 통화권의 붕괴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은행권은 화북지역에서 유통되고 있던 현실을 감안하여 군용통화로 지정되었다. 10) 이는 잠정적인 조치로써, 이미 개 전 이전부터 화북지역의 발권중앙은행을 설립할 구상이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 8) 본문에서 확인하겠지만 만주국폐의 조선 유입을 저지하고자 한 주체는 조선총독부 였다. 그러나 한 가지 짚어둘 것은 그렇다고 해서 조선총독부의 견해가 수용되는 것 은 아니다. 제국 전체의 이해가 우선이기 때문에 조선총독부의 대응이라는 것도 그 틀 내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9) 만주국폐의 조선 유입은 만주국과도 깊은 관련성이 있다. 그러나 본 논문은 분석대 상을 조선에 한정하고 있기 때문에 만주국의 입장에 대해서는 검토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본 논문에서는 만주국폐의 유입 실태와 조선 측의 대응 및 조치를 규명하 기로 하고, 양자의 입장 차이를 비교 검토하는 작업은 추후 만주국 측의 견해를 재 검토하여 별도의 논문에서 종합적으로 다루기로 하겠다. 10) 전쟁 이전 조선은행 천진지점이 치외법권을 이용하여 조선은행권을 발행하고 있었 는데, 당시 중국 주둔군도 조선은행권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선 이것을 증발 하여 군사비 지출에 사용한다는 방침이었다. 이 결정에 따라 조선은행원은 배낭에 조선은행권을 가득 채운 채 군대를 수행하면서 군비 지불 업무를 수행하였다고 한 다( 朝 鮮 銀 行 史, 545쪽).

越 境 하는 화폐, 분열되는 제국 - 滿 洲 國 幣 의 조선 유입 실태를 중심으로 185 에 11) 곧 일제는 중국 점령지마다 발권은행을 세우고 현지에서 은행권을 발행하 여 전비를 조달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12) 그 일환으로 화북지역에서는 1938년 3월 10일자로 중국연합준비은행(이하 연은 )이 개업하고, 연합준비은 행권(이하 연은권 )을 발행하였다. 이제 조선은행권을 대신해서 현지 통화인 연은권을 발행시켜 전비를 조달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일제는 특수한 금 융조작을 통해 새로운 전비조달 방식을 개발하였다. 조선은행과 연은 사이에 이른바 예금협정 이란 것을 체결하였는데, 이 방식에 따르면 일제의 전시회계 인 임시군사비특별회계에서 지출된 군사비는 실제로 중국에 송금되지 않은 채 조선은행과 연은의 예금구좌에 금액만이 기재될 뿐이었다. 연은은 조선은행에 대한 일본엔 예금을 준비로 하여 은행권을 발행하였는데, 이 엔자금은 모두 조 선은행 도쿄 지점에 고스란히 축적되었다. 조선은행은 예금협정 과정에서 확 보한 거액의 엔자금을 국채 소화에 운용함으로써 전비조달과 함께 일본 내 인 플레이션 억제에 기여하고 있었다. 일본은행권 증발을 통해 대부분의 전비를 조달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이 중국 점령지에 실제로 엔자금을 공급하지 않은 채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고안한 방식이 다름 아닌 예금협정 이었던 것이다. 13) 그런데 당시 중국 경제는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발행하는 法 幣 가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원래 중국은 전통적인 은본위제 국가로서 일제는 조선 은행을 중심으로 만주 화폐제도를 금본위제로 통일하려고 수차례 시도하였으 11) 柴 田 善 雅, 1999, 占 領 地 通 貨 金 融 政 策 の 展 開, 日 本 經 濟 評 論 社, 273쪽 12) 중국 점령지역의 주요 엔계통화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설립일 발행권 소재 가치 蒙 彊 銀 行 券 1937. 12. 1 몽고연합자치정부 엔 등가 中 國 聯 合 準 備 銀 行 券 1938. 3. 10 화북정무위원회 엔 등가 中 央 儲 備 銀 行 券 1941. 1. 6 국민정부 100원 대 18엔 출전: 日 本 銀 行 調 査 局 編, 1943. 4, 戰 時 金 融 統 制 の 展 開, 日 本 銀 行 調 査 局 編, 1970, 日 本 金 融 史 資 料 27, 大 藏 省 印 刷 局, 459쪽 13) 이상 예금협정 에 대해서는 조명근, 2004, 1937~45년 일제의 戰 費 調 達 과 朝 鮮 銀 行 券 發 行 制 度 전환, 韓 國 史 硏 究 127, 111~115쪽 참조. 또한 예금협정 의 방법은 같은 논문 139쪽의 <부표 2> 중국점령지에서의 일제 전비조달 방식 참조.

186 동북아역사논총 42호 나 번번이 실패했을 정도로 강고한 지반을 갖고 있었다. 중국은 1935년 기존 은본위제를 포기하고, 관리통화정책으로 이행하여 국민정부계 은행의 지폐만 을 유일한 法 幣 ( 法 定 貨 幣 )로 정하고, 모든 조세 납부와 공사 금액의 거래를 법 폐로 한다는 幣 制 改 革 令 (1935. 11. 3)을 공포하였다. 14) 일제는 중국 점령지마다 수립한 발권은행에서 발행한 엔계통화를 유통시 켜 법폐를 축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일전쟁 초기부터 일제는 통화전에서 는 법폐에게 밀리고 있었다. 발발 직후 조선은행권을 군비로 사용할 때부터 이 미 가치가 하락하기 시작하였는데 15), 1938년 2월경에는 법폐 100원에 대해 일 본엔 120엔의 시세가 형성되어 있었다. 16) 더구나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은 대부 분이 소비지이거나 물산의 집산지였지 생산지가 아니었다. 중국 화북지역 주 민들이 엔계통화 사용을 거절함에 따라 일본군은 이를 법폐로 바꾸지 않으면 물자를 조달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일본군은 필요한 물자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법폐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법폐를 몰아내기 위해 발행된 엔계통 화가 법폐에 의존하여 유통되는 모순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법폐에 대 14) 국민정부는 은화 유통을 금지하는 대신 은화와 태환된 중국 내 모든 現 銀 을 중앙에 집중하여 국유화하고, 中 央 中 國 交 通 銀 行 세 은행이 발행하는 불환지폐만을 법폐로 인정하였다(1936년 1월 中 國 農 民 銀 行 券 이 추가). 중국이 은본위제를 이탈 하여 관리통화제로 이행하게 된 계기는 1935년 9월에 실시된 미국의 은매상 정책 때문이었다. 미국의 은매상 정책으로 인해 은 가격이 상승하여 중국에서 은 유출이 격심해지자 은본위제 유지가 불가능해졌다. 이에 국민정부는 영국에게 도움을 요 청하였고, 영국은 리스로스(Leith Ross)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리스로스의 기본 입 장은 중국이 은본위제를 포기하고 파운드와 연계된 관리통화제도를 채용해야 한다 는 것이었다. 이상은 金 正 賢, 1998, 中 日 戰 爭 期 通 貨 戰 硏 究, 연세대학교 박사 학위논문, 29 44쪽을 참조. 15) 1937년 9월에 법폐 100원에 조선은행권 107원의 시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를 두고 조선은행 당국은 과도적인 현상으로 보고 조만간 법폐 가치가 하락할 것으로 예측 하고 있었다( 平 津 地 方 國 幣 高 朝 鮮 銀 行 側 의 觀 測, 東 亞 日 報, 1937. 9. 15). 16) 1938년 2월 5일 中 國 聯 合 準 備 銀 行 條 例 가 공포되었는데, 그날 북지나방면군 사 령관인 데라우치[ 寺 內 壽 一 ] 대장은 중국 주둔 재무관으로 부임한 오노[ 大 野 龍 太 ] 에게 일본엔 120엔이 법폐 100원으로 교환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이를 등가로 해 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오노는 이 요구가 무리한 것이라면서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朝 鮮 銀 行 史, 539쪽).

越 境 하는 화폐, 분열되는 제국 - 滿 洲 國 幣 의 조선 유입 실태를 중심으로 187 한 수요는 증가하게 되고, 엔계통화의 가치는 더욱 하락하게 되었다. 엔계통화 의 가치 하락이 법폐의 신용을 강화시키고 있는 실정이었다. 17) 당시 조선은행 조사자료에서는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법폐는 종이를 가지고 윤전기에 의해서 만들어낸 지폐에 불과하지만 국민정부의 유일한 화폐라는 점에서 지폐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 법폐가 지폐 이상이라는 것은 그것이 아직 의연히 구매력을 가지 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법폐에 대한 민중 信 認 의 표시다. 18) 법폐는 일본계 통화를 능가하는 구매력을 가졌기 때문에 강한 생명력을 가 질 수 있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다름 아닌 법폐에 대한 중국인들의 신 뢰라는 것이다. 따라서 법폐는 단순히 국민정부가 발행한 지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국민정부의 전쟁을 지탱할 수 있는 바로미터 이고 국민정부의 생명 선 이 된다. 일본으로서는 이 법폐를 몰아내지 않는다면 중국을 점령할 수 없 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9) 그런데 중국 경제에 강고하게 뿌리를 내린 법폐를 배제하기 위해서는 일본 에서 물자 공급이 강력하게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즉 엔계통 화의 가치 유지는 일본의 생산력에 달려 있었는데, 일제가 취한 방식은 현지에 서의 물자조달이라는 정반대의 방법이었다. 따라서 통화 자체의 구매력이 저 17) 金 正 賢, 1998, 앞의 글, 56 57쪽 18) 朝 鮮 銀 行 調 査 課, 1939, 法 幣 を 繞 る 支 那 經 濟 の 動 向, 1 2쪽 19) 이와 같이 일본계 통화가 법폐보다 낮게 평가되는 이유 중 하나는 외환 태환성이 없기 때문이다. 연은권은 정화 태환이나 외환 매도에 관한 규정이 없기 때문에 외 환에 대해 대응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연은권은 법폐를 통해 간접적으로 외환 업무 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연은권이 법폐를 필요로 하는 통화이면서 동시 에 법폐를 공격해야 하는 모순된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연은권은 항상 법폐의 하위에 서 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金 正 賢, 1998, 앞의 글, 59쪽). 당 시 조선은행은 법폐는 물질적 기초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외화 태환에 다름 아 니다. 오히려 법폐의 취약성을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금일까지 명맥을 유지한 이유 는 법폐로서 외국환을 살 수 있기 ( 朝 鮮 銀 行 調 査 課, 1939, 앞의 책, 2쪽) 때문이 라고 진단하였다.

188 동북아역사논총 42호 하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물자의 보증을 받지 못한 엔계통화 가치를 유지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인 유통량의 통제는 이런 상황 속에서는 전혀 실시될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자체구매력을 갖지 못한 엔계통화에 의한 현지물자 조달은 그 통화가치를 저하시켰고, 그 결과 더욱더 통화남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악 순환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20) 엔계통화권은 일본은행권과 등가로 하여 각 엔계통화와 연계되어 있었다. 화북의 경우 對 화중과의 결제는 연은권과 저비권의 직접 결제방식으로, 만주 에서 對 화북은 만주국폐와 연은권이 결제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21) 조선과 만주도 또한 동일한 결제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즉 저비권 연은권 만주국폐 조선은행권으로 엔계통화는 거대한 연쇄고리를 형성하고 있었 다. 인접지역 간의 직접결제 방식은 결국 고물가 지역의 인플레이션이 저물가 지역으로 전가되는 통로가 되고 있었다. 22) 전쟁이 장기화 되자, 점령지별로 통 화가치는 심각히 괴리되고 있었는데,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換 시세의 변동뿐 이다. 환시세가 무리하게 고정되어 있다면 물자 자금의 유통 결제가 혼란해 질 것은 명백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23) 따라서 일본 당국에서도 換 환산율 개정 을 여러 번 검토하였다. 특히 태평양전쟁 개전 직전, 財 政 당국은 연은권 100원 을 일본엔 40엔으로 절하하는 방안을 제시하였으나, 육군이 일본엔 절상은 중 국에 대한 일본의 경제지원의 후퇴로 받아들여지게 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또한 일본 민간 사업투자 등에서 환차손을 입게 된다는 우려 도 연은권 절하에 대한 강력한 반대 이유였다. 이후 대장성은 점령지의 물가등 20) 日 本 銀 行 調 査 局 特 別 調 査 室 編, 1948, 滿 洲 事 變 以 後 の 財 政 金 融 史 ( 日 本 銀 行 調 査 局 編, 1970, 日 本 金 融 史 資 料 27), 160쪽 21) 日 本 銀 行, 1944, 大 東 亞 各 域 間 決 濟 方 法 一 覽 ( 日 本 銀 行 調 査 局 編, 1971, 日 本 金 融 史 資 料 30), 361 362쪽 22) 당시 통화증발 상황과 인플레 수준이 화북에서 제일 높고, 만주, 조선, 일본의 순서 였다. 이는 당시 엔계통화권으로 묶여 있던 지역에서의 인플레 파급이 화북 만 주 조선 일본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조명근, 2004, 앞의 글, 127쪽의 <표 4> 참조. 23) 山 本 有 造, 1997, 大 東 亞 金 融 圈 論, 人 文 學 報 79, 京 都 大 學 人 文 科 學 硏 究 所, 19쪽

越 境 하는 화폐, 분열되는 제국 - 滿 洲 國 幣 의 조선 유입 실태를 중심으로 189 귀로 인한 군사비 예산 팽창을 막기 위해 수차례 換 환산율의 개정을 추진하였 으나, 결국 실행되지는 못했다. 24) 일본이 환시세의 조절을 포기하고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점령지 식민지 와 일본 본국의 단절뿐이었다. 전쟁 말기에 작성된 일본은행 조사자료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인플레이션 문제의 초점은 두 가지로) 첫째 현재 외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인플레의 영향을 내지의 인플레에 대해서 어떻게 단절하는가 둘째 내외지를 總 觀 하여 이 인플레의 진행에 어떤 수단을 취할 것 인가 내외지를 일체로 하여 인플레 대책을 고려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부담을 증가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부담하는 일본의 실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외지 인플레에서 단절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25) 즉 일본을 살리기 위해서는 본토와 식민지 점령지 엔계통화 간의 연계를 끊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래 일본은행권과 등가로 출발한 엔계통 화의 원칙은 지켜질 수 없었다. 만약 엔계통화와 일본엔의 등가교환을 자유롭 게 두게 되면, 방대한 엔계통화의 증발이 연쇄적으로 파급되어 일본의 인플레 이션을 격화시킬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본은행권을 중심으로 한 엔계통화권은 붕괴되었던 것이다. 24) 엔을 실제 이상의 높은 비율로서 유지하는 것과 같은 것은 나치가 유럽 피점령지에 강제한 환시세 정책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는 지도국 통화로서의 엔에 대한 심리적 우월감을 만족시킬 뿐 아니라 일본의 교역조건을 개선시키는 것으로 되었던 점에 서 중요 물자의 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전시 환정책의 상투수단으로도 볼 수 있다. 島 崎 久 彌, 1989, 円 の 侵 略 史, 日 本 經 濟 評 論 社, 371쪽 25) 日 本 銀 行, 1944, 外 地 インフレと 內 地 インフレとの 關 係 如 何 ( 日 本 銀 行 調 査 局 編, 1971, 日 本 金 融 史 資 料 30), 360쪽

190 동북아역사논총 42호 Ⅲ. 부분적 통제: 환전을 통한 만주국폐 흡수 만주국폐의 유입현상에 앞서, 우선 그 발행경위부터 살펴보자. 1932년 만주국 이 수립된 후, 7월 1일자로 만주중앙은행(이하 만주중은 )이 개업하였다. 만주 국의 통화제도는 1932년 6월에 제정된 화폐법 에 규정되어 있는데, 만주국은 은본위제로 출발하였다. 26)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제1조에서 화폐의 제조 및 발행의 權 은 정부에 속하고 만주중은으로 하여금 이를 행하게 한다 라고 규정 한 점이다. 즉 만주중은이 발행하는 지폐는 엄밀하게 말하면 은행권이 아니라 국가지폐, 즉 國 幣 가 된다. 만주국폐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서 연유한 것 이다. 27) 당시 조선은행은 만주국에서 은본위 통화지역의 금본위계 통화로서 유통 을 허락받고, 종래와 같이 영업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잠정적 인 조치였다. 만주국이 금본위제로 이행하면 만주국 내 조선은행권의 유통은 당연히 정지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28) 1935년 들어 세계적인 은가격 상승과 중 국 국민정부의 은본위제 포기로 인해 만주국 또한 기존 화폐제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만주국폐는 일본엔과 등가연계로 변경하게 되어 제도적으 로 金 券 과 등가관계로 되었고 조선은행권은 만주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29) 26) 만주중앙은행권은 화폐법(1932. 6) 제2조에서 純 銀 양목 23.91g을 가격의 단위로 하고 이를 圓 이라 칭한다 라고 규정하여 은본위제로 출발하였다. 만주국이 23.91g 을 기준으로 삼은 것은 중국과 만주 각지에서 유통되고 있던 각종 現 代 洋 ( 円 銀 )의 평균 순은 중량이었기 때문이다( 朝 鮮 銀 行 史, 464쪽). 27) 화폐법 제9조에서 만주중앙은행은 지폐발행고에 대해 3할 이상에 상당하는 은 괴, 금괴, 확실한 외국통화 또는 외국은행에 대한 금은예금을 보유할 것을 요한다 라는 발행준비 규정을 두었으나 법령 어디에도 태환에 관한 규정이 없었다. 즉 만 주국폐는 불환지폐로 출발한 것이다. 安 富 步, 1997, 滿 洲 國 の 金 融, 創 文 社, 85쪽 28) 朝 鮮 銀 行 史, 421쪽 29) 1935년 12월 6일에 만주중앙은행은 조선은행과 업무협정을 맺고, 조선은행권을 회 수하게 되었다. 계속해서 조선은행은 1936년 12월 14일의 임시주주총회에서 재만 주 20개 지점을 신설 만주흥업은행에게 이양할 것을 결의하였다. 같은 날, 일본 측

越 境 하는 화폐, 분열되는 제국 - 滿 洲 國 幣 의 조선 유입 실태를 중심으로 191 당시 만주국폐는 조선 만주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 었는데, 그 이유를 다음 기사가 잘 요약하고 있다. (만주국폐는) 조선 내에 강제통용력을 가지지 않았고 또 이에 대한 아 무런 법제나 조약도 없는 중이지만 두 지역 사이에 교통이 빈번해짐에 따라 만주국에서 조선 안으로 들어오는 손은 자연 만주국 지폐를 가진 채 들어오는 일이 많고 특히 북조선인 나진 청진 나남 등지에는 신 의주 중강진 등 국경 일대와 같이 만주국 화폐가 여관 기타 일용품시 장에 유통하기 시작하여 최근에는 상당한 지역에 달하여 당지 사람들 은 사실상 여기에 통용력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북조선을 경유해가 지고 일본 내지로 가는 승객이 적어도 1년에 200만 명에 가까우므로 그들이 한 사람 평균 2원씩만 떨어트리고 간다손 치더라도 4백만 원의 만주국 화폐가 넘치게 되어 이것이 점차로 흘러들어서 현재는 경성에 까지 만주국 지폐가 흘러다니고 있는 중이다. 30) 위 기사는 법적 근거를 갖지 않은 만주국폐가 어떻게 조선에서 통용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첫째, 조선 만주 국경 사이의 활발한 교류에서 기인한다. 육상으로 국경을 접하여 이동이 용이하여 상호 왕래가 활발하기 때 문에 이 과정에서 국폐가 유입될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만주에서 오는 사람들 은 대개 만주국폐를 가지고 와서 거래에 사용하기 때문에 이것이 그 유통의 단 서가 되고 있었다. 즉 압록강 철교를 결합한 鮮 滿 一 如 를 문자 그대로 실현하 고 있는 2대 국경도시 안동, 신의주 에서는 만주국폐 一 圓 은 똑같이 선은권 1 원과 교환 되고 있었기 때문에 상점, 시장, 노점 상인 등을 중심으로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결과 신의주 부민의 돈지갑 중에는 오히려 만 주국폐가 많은 날이 있 을 정도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만주국폐를 교환하는 은행인 正 隆 滿 洲 銀 行 의 해산과 이것을 계승하는 형태로 만주흥업은행이 설립되 어 1937년 1월 1일에 개업하였다. 만주흥업은행은 만주국 중공업 자금 공급을 담당 하였다. 安 富 步, 1997, 앞의 책, 58쪽 30) 滿 洲 貨 幣 가 朝 鮮 에 汎 濫, 國 境 에는 流 通 이 一 般 化, 京 城 에까지 侵 入 할 形 勢, 惡 幣 의 潮 水 로 經 濟 界 影 響 至 大, 東 亞 日 報, 1939. 8. 4

192 동북아역사논총 42호 사람들 중에 신의주 토지의 사람은 1인도 없 을 정도로 국경지방에서는 사용 에 전혀 불편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 언론에서는 만주국폐의 유통금지는 도저 히 불가능한 것으로 보여진다 고 진단할 정도였다. 만주국폐가 조선에서 유통 되는 현실 이면에는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의 편리함이 암묵 적으로 침윤한 것 이기 때문에 이를 금지하게 되면 생활의 불편뿐만 아니라 해 당지역 경제계에 혼란을 초래하는 것 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고 할 정도로 깊게 침투해 있었다. 31) 둘째, 만주에서 조선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가는 사람들 이 사용하는 만주국폐도 상당한 양에 달한다. 정상적이라면 만주국폐를 조선 은행권으로 교환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채 조선 내에서 그대로 사용함 으로써 이 유통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주국폐의 조선 유입을 두고서 조선총독부와 조선은행 측은 상반 된 견해를 보이고 있었다. 우선 조선총독부는 만주국폐의 유입문제가 발생하 던 초기부터 이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조선은행이 만주에서 철수한 후) 총독부의 의향은 외국 지폐가 유통되 는 것은 외국위체관리법에도 저촉되고 또 체면상 不 良 하다고 하여 양 국 지폐의 혼류를 금지하랴는 의향으로 각 금융기관에 대하여 양국 화 폐의 태환을 강제하랴는 의향인데 이에 대하여 조선은행은 양국 화폐 의 혼류는 실제상 지장이 없을 뿐 아니라 금융기관에 강제 태환케 하더 라도 兩 替 店 이 족출하여 결국에는 兩 替 店 의 단속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태를 生 케 될 것이다라고 하여 양국 화폐의 자유 유통을 하등 차질 없다고 보므로 이 결말은 未 해결문제로 주목된다. 32) 31) 貨 幣 の 日 滿 一 如 に 崇 る 鮮 銀 の 後 退, 夥 しい 滿 洲 國 幣 の 進 出 を 國 境 經 濟 界 は 如 何 に 裁 く, 京 城 日 報, 1936. 11. 25. 당시 조선상업은행 신의주 지점 지배인에 따르 면 이 유통금지가 엄격하게 되면 安 義 (안동 신의주) 사람들은 이것은 만주국폐, 이것은 일본 지폐이기에 2개의 돈지갑이 필요하게 되고, 안동에 갈 때에는 이 돈지 갑, 신의주에서는 이것이라는 모양으로 비상히 不 利 不 便 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국경의 경제거래 상에서도 원활을 결여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었다. 32) 鮮 滿 貨 幣 의 混 用, 本 府 當 局 은 不 可 視, 鮮 銀 側 과 見 解 가 相 異, 每 日 申 報, 1936. 12. 5

越 境 하는 화폐, 분열되는 제국 - 滿 洲 國 幣 의 조선 유입 실태를 중심으로 193 위 기사가 작성된 시점은 1936년 말로 조선은행의 만주 철수가 확정된 때 인데, 조선총독부는 만주국폐를 외국 지폐 라고 분명히 규정하면서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화폐가 조선에 유통되는 것은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이는 만주 국이 독립국 이란 이름하에 조선은행권의 만주국 유통을 반대했던 논리와 차 이가 없다. 특히 체면상 좋지 못하다는 언급 속에서는 일종의 주권 침해로 받 아들이고 있는 듯한 뉘앙스까지 풍겨진다. 반면 조선은행 측은 만주국폐의 조선 유입문제에 대해 이대로 방치해도 하등 상관없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 었다. 이미 1910년대 후반 조선은행이 만주 에 진출한 후 법적으로는 조선은행권의 유통범위는 관동주 및 만철부속지에 한정되었 으나 실제로는 만주 일원에 걸쳐 상당히 광범위에 유통 되었는데, 이에 대해 당시 중국 정부가 어떤 대책도 세우지 않았던 사실을 들고 있다. 그 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조선은행권과 만주국폐가 등가이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는 것이다. 33) 즉 이 전제가 무너진다면 만주 국폐의 유입은 심각한 상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조선에서는 등가관계가 훼손된 만주국폐가 유통되는 현실을 그대로 방임 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고 있었다. 34) 가령 1939년 8월 당시 조선 내에서 금 한 돈에 16원 50전가량 가는 것이 만주국 내에는 이미 30원을 넘기어 매매되는 현상 이 나타나고 있었다. 등가는커녕 거의 50% 가까 이 평가 절하된 만주국폐와 조선은행권을 등가로 유지하는 종래의 정책을 지 속하게 되면 결국 악화는 양화를 구축하는 이론 이 그대로 적용되어 헐한 화 폐가 조선 내에 덤핑하는 셈 으로 될 것이고, 그 결과 조선에 만주국폐가 범람 되어 경제계에 일대 파동을 일으킬 것 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35) 조 선 내 만주국폐 유통의 문제점은 여기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33) 朝 鮮 滿 洲 兩 行 券 國 境 地 帶 에 混 用, 朝 鮮 銀 行 은 放 置 方 針, 東 亞 日 報, 1938. 3. 20 34) 朝 鮮 銀 行 券 과 換 錢, 新 義 州 羅 津 等 支 店 서, 東 亞 日 報, 1939. 8. 4 35) 滿 洲 貨 幣 가 朝 鮮 에 汎 濫, 國 境 에는 流 通 이 一 般 化, 京 城 에까지 侵 入 할 形 勢, 惡 幣 의 潮 水 로 經 濟 界 影 響 至 大, 東 亞 日 報, 1939. 8. 4

194 동북아역사논총 42호 조선은행이 수수방관하는 가운데 조선총독부는 문제 해결을 위해 만주국 과 직접 협의에 나섰다. 당시 기사에서는 현재의 화폐가치를 기준으로 하여 양 국 간에 환전을 실시한다는 소식도 있었다. 36) 즉 실질가치로 평가절하된 만주 국폐를 조선은행권과 교환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양 화폐의 등가원칙이 파기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등가원칙의 파괴는 전체 엔통화권의 붕괴 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총독부가 독자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성 질의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대책을 수립하는 데 기본전제는 조선은행권 만 주국폐의 등가교환 원칙을 유지함에 있었다. 1939년 10월경 조선총독부 이재 과장은 만주국으로 출장을 떠나 정부 관계자 및 만주중앙은행과 협의하였는 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만주국 측에서는 만주중앙은행의 지점을 강을 경계로 하여 만주국 측에 다수 설치하여 교환을 하게 하고 2. 조선 측에서도 역시 조선은행을 비롯하여 각 은행 지점, 금융조합 등에서 교환을 실시하게 하고 3. 따라서 무제한 교환제를 실시하는 동시에 조선 내 유통을 철저히 금 지하기로 하여 단속을 엄하게 하기로 함. 37) 양측 합의의 골자는 환전을 통해 상대방의 통화를 최대한 흡수하겠다는 것 이다. 이를 위해 국경지대에 다수의 금융기관을 설치하여 환전의 편의를 제공 함으로써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들이 손쉽게 통화를 교환할 수 있도록 하겠다 는 것이다. 이 후속대책으로서 조선총독부는 1940년 1월부터 만주국폐의 조선 내 유통을 금지한다는 방침을 발표하였다. 다음은 조선총독부 재무국장이 밝 힌 담화의 일부다. 조선과 만주의 교역이 점차 왕성함에 따라서 교역상 수취감정의 지위 36) 現 在 도 折 衝 中, 理 財 課 岡 村 事 務 官 談, 東 亞 日 報, 1939. 8. 4 37) 朝 鮮 侵 入 의 滿 洲 貨, 積 極 沮 止 策 遂 成 立, 朝 鮮 銀 行 과 金 融 組 合 等 에서 交 換 을 實 行, 兩 當 局 者 意 見 合 致, 東 亞 日 報, 1939. 11. 2

越 境 하는 화폐, 분열되는 제국 - 滿 洲 國 幣 의 조선 유입 실태를 중심으로 195 에 있는 조선으로의 국폐 유입도 점차 증가하고 특히 최근에는 만주국 의 물가 상승의 관계도 있어 그 유입은 일층 증가되어 조선 측 국경지 대에서는 통화 총유통량의 대부분인 80~90%, 적어도 30~40%를 국 폐로서 점하게 되는 상황이여서 장소에 따라서는 조선은행권의 影 子 를 보지 못하는 곳도 상당히 있었다. 대체 국내에서 강제통용력을 有 치 아 니한 외국 통화의 유통을 인정하는 것은 화폐 정책상 좋지 못할 뿐 아 니라 통화의 위조 제조의 단속 기타 종종 곤란한 문제를 生 하므로 금회 1개월간(1939년 12월)의 유예기간을 設 하여 1940년 1월 1일부터 국폐 의 조선 내의 유통을 전면적으로 인정하지 아니함과 함께 조선 측 국경 강안지대의 약 30여개소의 금융조합으로 하여금 실비(교환금액의 2%) 를 징수하여 국폐와 조선은행권과의 교환을 행하게 되었다. 즉 명년 1월 이후는 관공서 금융기관 등뿐 아니라 일반 시중에서는 국폐의 수수는 일체 인정하지 아니한다. 38) 국경 일부 지역에서 조선은행권은 그림자조차 찾아보지 못할 정도로 만주 국폐가 아무 거리낌 없이 유통되고 있었는데, 조선총독부로서는 이런 현상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조선 내 통화금융 통제력이 크게 훼손당한다는 점에서 그 냥 묵과할 수 없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1939년 12월 한 달 동안의 유예 기간을 거친 후 1940년 1월 1일부터는 조선 내에서의 만주국폐 유통을 전면 금 지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실행 조치로 조선에 유입되는 만주국폐 는 금융조합에서 교환금액의 2%를 수수료로 징수하여 교환토록 하였다. 이 조 치가 제대로 시행된다면, 1940년 1월 이후부터는 만주국에서 조선으로 물건을 구입하려 할 경우, 조선 측 상인이 국폐로 대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조선의 금융조합 등에서 국폐를 조선은행권으로 교환하여 구입해야 하는 것으로 되었 다. 39) 종래 관공서나 금융기관 등에서 유통이 금지되었던 만주국폐는 1940년 38) 滿 洲 國 幣 鮮 內 流 通, 一 月 一 日 부터 禁 止, 當 分 無 手 數 料 兩 替, 每 日 新 報, 1939. 11. 25 39) 환전을 금융조합에서 취급한 것은 국경 지역에 조선은행 지점이 거의 없었기 때문 이다. 당시 청진지점(1920년 3월 개설), 나진지점(1935년 8월), 신의주지점(1937년 2월), 함흥지점(1939년 9월), 웅기출장소(1933년 8월 개설, 1941년 9월 폐쇄)만으 로는 제대로 된 환전을 실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지점망을

196 동북아역사논총 42호 1월을 기해 일반 거래에도 적용시켰다. 그러나 이 조치는 효과를 전혀 거두지 못했다. 1940년 8월경에는 (환전을 통한 국폐 흡수도)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고 그 후 국경에서의 국폐 유통은 의 연 빈번히 되어 신의주로부터 정주에 이르는 일원 및 남양에서 북선 3항에 이 르는 일원에서는 盛 히 유통을 하는 상태 라는 기사가 뜨고 있었다. 결국 만주 국폐의 조선 내 유통을 금지하는 방법은 조선과 만주 양자 사이의 화폐정책의 근본적 재건 이외에는 없다 라고 하여 보다 근본적인 조치가 필요함을 확인했 을 뿐이다. 40) 위의 조치를 무력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양 지역의 물가 차이였다. 조선총 독부 물가조정과장에 따르면 신의주로서 제일 문제되는 것은 만주돈[ 滿 洲 幣 ] 이 신의주의 商 街 로 범람하고 있는데 압록강을 격하여 만주국 안동은 물건 값 이 비싼 까닭에 전부 안동으로 물건이 흘러나 감으로써 신의주는 물자가 부족 한 형편 이라고 한다. 그런데 신의주는 물건이 싸니까 안동서는 신의주로만 물건을 사러오는 까닭에 신의주뿐만 아니라 삭주, 강계 같은 殷 賑 산업지대에 는 물건이 부족한 상태로 되어 물가통제와 통제경제를 문란케 하는 점 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만주돈이 들어오는 것을 전혀 막을 수 없다는 것과 조선은행권과의 교환시 2%의 수수료를 지불하므로 자 연 불편이 생기는 까닭에 그대로 유통이 되는 모양 이라고 그 실태를 전하고 있다. 41) 특히 신의주 경제는 안동의 구매력에 대한 의존성이 크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는 것이 어려운 실정이었다. 42) 조선총독부 대책이 실패로 끝나자, 조선은행 측은 만주국폐의 유입이 사실 가지고 있던 금융조합에서 이를 대행한 것이다. 당시 조선은행은 조선에서 발권과 함께 상업금융도 겸영하였기 때문에 일반은행과 경쟁관계에 있었고, 따라서 이들 의 반대로 인해 지점 증설이 여의치 않았다. 國 幣 流 通 問 題, 鮮 銀 中 銀 折 衝, 每 日 新 報, 1939. 11. 16 40) 國 境 의 滿 洲 國 幣 依 然 히 流 通 狀 態, 每 日 新 報, 1940. 8. 28 41) 國 境 의 頭 痛 꺼리, 흘너오는 滿 洲 國 幣, 時 急 한 對 策 이 必 要, 每 日 新 報, 1941. 7. 16 42) 國 幣 流 入 阻 止, 鮮 銀 調 査 課 長 談, 每 日 新 報, 1941. 9. 19

越 境 하는 화폐, 분열되는 제국 - 滿 洲 國 幣 의 조선 유입 실태를 중심으로 197 좋지 못한 현상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이를 전면 유통금지로 가게 되면 조선과 만주국 양국 간에 상당히 델리킷한 마찰 이 일어날 우려가 크기 때문에, 당분 간은 동향을 靜 觀 하는 외 의 다른 방법은 없다고 하여 여전히 방임하는 자세 를 견지하고 있었다. 43) Ⅳ. 전면적 저지: 만주국폐 유통 금지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조선은행권이 증발되고 인플레이션은 가속화되었다. 당시 조선의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주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이 원인 중에 서 換 관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인정하는 바 다. 조선은행에서 조사한 1942년도 은행권 발행 상황을 보면 환거래에 의한 발 행 2억 576여만 원과 대출증가로 인한 증가액 1억 3,376여만 원에 예금증가로 인한 회수액 6,634여만 원과 기타 회수액 1,983여만 원을 빼면 약 2억 5,300 여만 원의 증가로 된다. 조선은행 측은 은행권 증발의 직접적인 원인을 환거래 지불에 따른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는데, 특히 만주국폐 교환을 위한 발행이 1억 6,118여만 원으로 조사되어 환거래 중에서 약 78%를 차지하고 있었다. 44) 당시 조선총독부 재무국장이었던 미쓰타[ 水 田 直 昌 ]도 조선이 일본에 비해 물 가가 높다는 사실에 비상히 부심 하고 있었는데, 그 원인을 보면 조선은행 및 총독부 각각의 손에서 어쩔 수 없는 원인, 즉 조선 外 로부터의 수취초과 에 있 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45) 당시 조선은행이나 조선총독부에서는 은행권 증발을 43) 滿 銀 券 鮮 內 流 入, 鮮 銀 에선 靜 觀 方 針, 每 日 新 報, 1940. 9. 5 44) 조선은행은 환관계로 인해 발행에 대해서는 당행이 지배할 수 없 는 것이라고 서 술하고 있었다. 朝 鮮 銀 行 史, 688~689쪽 45) 水 田 直 昌 土 屋 喬 雄 編 述, 1962, 財 政 金 融 政 策 から 見 た 朝 鮮 統 治 とその 終 局, 財 團 法 人 友 邦 協 會 朝 鮮 史 料 編 纂 會, 109쪽

198 동북아역사논총 42호 <표 1> 만주국폐 교환이 조선은행권 발행에서 차지하는 비율 (단위: 천 원, %) 만주국폐 교환고 조선은행권의 조선 내 발행고(비율) 전년대비 증가액(비율) 1940 73,103 486,146(15.0) 111,932(65.3) 1941 69,346 621,069(11.2) 134,923(51.4) 1942 118,516 771,412(15.4) 150,343(78.8) 1943 191,565 1,255,991(15.3) 484,579(39.5) 출전: 만주국폐교환고는 近 藤 一 編, 1961, 太 平 洋 戰 下 の 朝 鮮 (5), 友 邦 協 會 朝 鮮 史 料 編 纂 會, 116쪽; 조선은행권 발행고는 朝 鮮 銀 行 調 査 部, 1949, 朝 鮮 經 濟 年 鑑, Ⅳ 74쪽 자신들이 제어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 만주국폐의 교환이 조선은행권 발행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위 <표 1>을 보면 관동주 발행액을 제외한 조선 내 조선은행권 발행고에서 만주국폐 교환이 차지하는 비중이 최대 15%까지 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 주국폐가 조선은행권 증발에 미친 영향을 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발행초 과액에 대한 비율을 보면, 최대 78%, 최소 40%에 이름을 알 수 있다. 가장 심 각했던 1942년의 경우 새롭게 발행된 조선은행권 100원 중 80원은 만주국폐 교환을 위해서 발행된 것이다. 조선은행권 증발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할 정도 로 매우 심각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1944년이 되어서야 조선은행은 뒤늦게 만주국폐의 조선 유입 실태를 전면 적으로 조사하였다. 46) 이 조사에 따르면 1943년 8월 1일 1944년 7월 31일까 지 1개년간의 만주국폐 교환고는 2억 7,275여만 원으로 조선은행권 발행초과 액 8억 5,855여만 원의 31.8%에 이르고 있었다. 47) 그 실태를 보면, 1944년의 경우 함북 회령 상삼봉 지방은 약 70%, 남양 지방은 약 80%, 또 평북 국경지 46) 1944년 7월 18일부터 8월 11일까지 25일간 감사 芳 賀 文 三, 본점 조사부의 原 正 保, 청진지점의 장기영이 국경 지방과 만주 주요 도시를 실지 방문하여 조사하여 보고 서를 작성하였다( 朝 鮮 銀 行 調 査 部, 1944. 9, 鮮 滿 國 境 地 帶 の 國 幣 問 題 と 滿 洲 國 內 における 鮮 銀 券 退 藏 事 情 ). 47) 朝 鮮 銀 行 調 査 部, 1944. 9, 위의 글, 46쪽

越 境 하는 화폐, 분열되는 제국 - 滿 洲 國 幣 의 조선 유입 실태를 중심으로 199 방에서도 대체로 70% 정도를 만주국폐가 차지하고 있었다. 48) 조선은행은 시 간이 지날수록 만주국폐 유입이 증가하는 이유로 크게 세 가지 정도를 들고 있 었다. 첫째는 아편을 중심으로 한 밀수, 둘째는 물자난과 양 화폐가치 차이에 기인한 물자의 유출, 셋째는 송금이다. 49) 당시 밀수출에서 아편이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여전히 그 기세가 왕성하였고, 또 부녀자를 중심으로 소량 의 물자를 휴대해서 반출하는 경우가 상당하였다고 한다. 지역별로는 남양의 경우, 면화 공출 장려책으로서 책임량의 공출을 끝낸 자에게는 잔여의 면화에 대해서 자유 처분을 인정하였는데, 이중 상당부분이 만주로 흘러들어 간 것 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양 지역간의 물가차를 노리고 조선 내에서는 가정용 소 장품들이 상품으로 되어 만주로 유출되고 있었다. 그 밖에 만주의 대일본 송금 제한을 우려하여 만주 내 소재 재산을 조선 내로 이전하는 자가 많았던 것도 역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특히 밀수출은 당국자들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함경북도와 평안북도 의 각지 경찰서 관계자에 따르면 양 화폐의 교환보고서에 기재된 성명의 절반 이상이 가공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밀수출을 하는 주 대상은 조선인 여성 이었는데, 그 비율은 대체로 함북 국경지방에서 약 80%, 평북 지역에서는 약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세관의 검거실적에서 보면 밀무역의 주 된 물품은 아편과 섬유제품으로서 금액으로는 아편이 전 밀수의 70%를, 나머 지 대부분을 섬유제품이 점하고, 건수에서는 섬유제품이 약 80%에 달하였다 고 한다. 50) 이상과 같이 상황이 심각해지자 1944년에 들어서 조선총독부는 종래 만주 국폐의 흡수책을 버리고 유입저지책으로 돌아섰다. 1944년 2월 8일자로 조선 총독부 재무국에서 작성한 만주국폐의 수출입 및 국폐의 단속에 관한 대책 에서는 국폐의 수입은 모두 허가를 받도록 하고 여행자의 휴대 이외에는 원칙 48) 朝 鮮 銀 行 調 査 部, 1944. 9, 위의 글, 47~48쪽 49) 朝 鮮 銀 行 調 査 部, 1944. 9, 위의 글, 51~52쪽 50) 朝 鮮 銀 行 調 査 部, 1944. 9, 위의 글, 59쪽

200 동북아역사논총 42호 적으로 허가하지 않도록 하였다. 원거리 여행자는 200원까지, 근거리 여행자 는 50원까지로 한도를 설정하였다. 51) 이에 따라서 1944년 5월부터 총독부는 국경지대 금융조합의 만주국폐 교환고에 한도를 설정하여 환전을 제한함과 동 시에 환전상의 교환허가 한도도 종래의 절반으로 줄였다. 계속해서 조선총독 부는 외국위체관리법실시규칙 중 일부를 개정( 府 令 제251호, 1944. 6. 17)하 여 1944년 7월 1일 이후부터는 조선에서의 만주국폐 유통을 전면 금지시켰다. 다만 국경에서 2리 이내의 거주자에 한해서는 1회 20원, 1개월을 통틀어 300원 이하의 사용을 인정하고, 만주국폐의 조선 반입은 허가제로 하되 여행자의 경 우 200원까지는 허가를 요구하지 않을 것 등을 결정하였다. 52) 1940년의 조치 에 비해 훨씬 엄격해진 것은 종래 무제한으로 조선 내로 가지고 들어올 수 있 었던 만주국폐를 허가제로 한 것이다. 동시에 국폐의 조선 내 유통은 동일 이 후는 관공서 금융기관뿐만 아니라 일반 시중에서도 국폐로서 물품을 매매하는 것은 법령상 금지 53) 되었다. 이전 조치는 법적 강제력이 수반되지 않은 것임에 반해, 이번 조치는 법령으로서 발표되었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만주국폐의 조 선 내 유통금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 내 만주국폐의 유통이 법적으로 금지된 것은 1944년이 지 나서였다. 1938년경부터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던 이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조치가 왜 이렇게 늦게 취해졌는가? 표면적으로는 양 국경 간의 밀 접한 경제적 관계를 고려할 수 있다. 즉 압록강 철교를 사이에 두고 동일한 경 제 권역을 형성해 온 신의주 안동을 비롯한 조선 만주 국경지대에서 만주국 폐의 유통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조선은행권 만주국폐의 등가교환 원칙의 준수, 51) 만주국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여객에 대해서는 화폐 교환액을 선천, 강계, 백암, 고무산 또는 아오지 이남의 여행자는 200원까지, 그 밖에 여행자는 50원까지 로 제한하였다. 國 幣 流 入 을 防 止, 列 車 乘 客 交 換 額 制 限, 每 日 新 報, 1944. 5. 13 52) 朝 鮮 銀 行 史, 634~635쪽 53) 滿 洲 國 幣 輸 入 制 限 强 化, 爲 替 管 理 規 則 改 正, 七 月 一 日 施 行, 每 日 新 報, 1944. 6. 18

越 境 하는 화폐, 분열되는 제국 - 滿 洲 國 幣 의 조선 유입 실태를 중심으로 201 즉 엔계통화권의 유지를 위해 무리한 환정책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원래 엔계 통화권의 정책목표는 각 엔계통화가 엔과 등가로 연결되어 내국환과 같이 작 동함으로써 대동아공영권 내의 국제수지가 일본의 국제수지와 일체화되는 것 에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태환규정을 가지지 않은 완전한 관리통화인 엔계 통화와 엔의 등가교환을 자유롭게 하면, 대륙의 인플레이션이 일본에 파급될 우려가 매우 높았다. 따라서 일본으로의 송금을 엄격히 제한함으로써 엔계통 화는 換 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54) 즉 이미 등가관계가 깨 진 만주국폐를 조선과 등가로 묶어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른바 대동아공 영권 의 엔블록을 유지해야 한다는 정치적 고려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사정 하에서 만주국폐의 조선 내 유통은 더욱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 이다. 엔계통화권 붕괴의 연장선상에서 당시 만주국에서도 연은권의 유입으로 인해 큰 곤란을 겪고 있었다. 55) 만주중은은 이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 었다. 북중국 물가의 이상한 앙등은 만주산 잡곡, 아편 등의 접경 밀수를 자 극하고, 이 때문에 다량의 연은권이 아국 내에 반입되어, 국경 지대에 서의 통화 팽창을 초래함과 함께 다른 한편 入 滿 노동자의 북중국 송 금, 통화 소지 귀환, 기타 여행자에 의한 圓 系 通 貨 반입은 상당한 다 액에 이르러 연은권 팽창의 유인도 되고 있음에 비추어, 정부에서는 이러한 양국 통화의 교류가 통화정책은 물론 무역정책, 환 관리상 매 우 큰 지장을 초래할 뿐 아니라 경제상 각종의 악영향을 초래할 두려 움 때문에 이들 외국통화의 국내유통을 억제하는 조치를 執 하기 에 이르렀다. 56) 북중국의 연은권이 만주로 유입되는 양상과 그 폐해가 만주국폐의 조선 내 54) 日 本 銀 行 調 査 局 特 別 調 査 室 編, 1948, 앞의 글, 160쪽 55) 滿 州 國 의 聯 銀 券 流 通 禁 止 실힐 터, 每 日 申 報, 1940. 5. 17 56) 滿 洲 中 央 銀 行, 1942, 滿 洲 中 央 銀 行 十 年 史, 180 181쪽

202 동북아역사논총 42호 유입과 매우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중국 점령지 인플레이션이 어떻게 연 쇄적으로 조선에까지 파급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북중국의 인플레이션을 만주에서, 만주의 인플레이션을 조선에서 저지하 려고 할 때, 조선 만주 국경은 중대한 대동아의 통화 바리케이드 라고 조선 은행은 언급하고 있었다. 57) 즉 조선은 일본 본토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선으로 서 희생당해야 했음을 조선은행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었다. 대륙 인플레이션 의 방어선으로의 조선은행의 역할은 일본은행권과 대만은행권의 증가율과 비 교해보면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인플레이션이 최고조로 달했던 1944년도와 1945년도에서의 통화증발 추이를 비교해보면, 조선, 일본, 대만은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조선은행권이 일본은행권이나 대만은행권에 비해 월등 히 빠른 증가율을 보이고 있었는데, 일본은행권과 비교해보면, 최고 48%p, 최 저 20%p, 평균 37%p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으며, 같은 식민지 은행권인 대만 은행권과 비교해도 역시 최고 49%p, 평균 25%p 정도 높은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58) 조선은행권 증발 원인이 조선은행이나 조선총독부가 통제할 수 없었 던 환관계에서 비롯되었고, 그 대부분을 만주국폐 유입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 실을 고려하면, 조선은 일본을 위해 인플레이션을 고스란히 감수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는 일본이 점령지 식민지와 본국을 분리시킴으로써 점령지 57) 朝 鮮 銀 行 調 査 部, 1944, 앞의 책, 57쪽 58) <표> 주요 엔계통화권의 전년 동월 대비 증가율 비교 (단위: 배) 1944년 (기준년도: 1943년도) 1945년 (기준년도: 1944년도) 1 2 3 4 5 6 7 8 9 10 11 12 1 2 3 4 5 6 7 평균 조선 1.70 1.78 1.88 1.92 2.00 2.10 2.15 2.21 2.27 2.26 2.21 2.14 2.20 2.24 2.27 2.34 2.42 2.41 2.45 2.15 은행권(a) 일본 1.49 1.55 1.61 1.64 1.67 1.67 1.73 1.76 1.79 1.79 1.80 1.73 1.76 1.75 1.87 1.94 1.99 2.12 2.25 1.79 은행권(b) 대만 1.48 1.49 1.57 1.57 1.58 1.62 1.67 1.73 1.85 1.97 1.97 1.92 2.02 2.15 2.23 2.33 2.47 은행권(c)? 2.32 1.89 a b (%) 21 23 26 28 33 43 42 45 48 47 41 41 44 48 41 40 42 28 20 37 a c (%) 22 29 30 35 42 49 48 48 42 29 24 22 18 9 4 1 5? 13 25 출전: 日 本 銀 行 統 計 局, 戰 時 金 融 統 計 要 覽 (1947.10), 日 本 銀 行 調 査 局 編, 1971, 日 本 金 融 史 資 料 30, 大 藏 省 印 刷 局, 117~118, 157~158쪽

越 境 하는 화폐, 분열되는 제국 - 滿 洲 國 幣 의 조선 유입 실태를 중심으로 203 식민지의 인플레 영향을 최대한 회피하고자 했던 것과는 매우 대조되는 것임 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Ⅴ. 맺음말 일제는 중일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점령지마다 별도의 발권은행을 수립하여 현지에서 은행권을 발행하여 전비를 조달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국민정부 가 발행하는 법폐가 강력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본의 엔계통화는 전쟁 초반부터 법폐에게 밀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엔계통화는 일본 본토로부터의 강력한 물자 공급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그 가치가 유지되기 힘든 구조였으 나, 일제는 정반대로 현지에서 물자를 조달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 결과 일제 는 중국 점령지에서 물자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법폐를 구입해야 하는 모순에 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엔계통화의 가치는 더욱 하락되었고, 이는 결제기 구를 통해 연쇄적으로 파급되고 있었다. 일제는 인플레이션이 일본 본토에 미 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본국과 점령지 식민지를 분리하였고, 이를 전가 하였다. 1917년부터 만철부속지를 비롯한 관동주와 만주 지역에서 법화로서 통용 되던 조선은행권은 1932년 만주국폐가 발행되자 금본위계 통화로 존속하였고, 1935년 말에 만주국에서 유통이 전면 금지되었다. 그런데 국경지역을 중심으 로 만주국폐는 여전히 유통되고 있었는데, 만주와 경제적으로 밀접한 연관성 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주국폐의 실질가치가 조선은행권보다 저하됨에 따라 이 유입현상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만주국폐가 양 지역 의 물가 차액을 노리고 유입됨으로써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조선은행권은 퇴장 되는 반면, 만주국폐가 유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조선총독 부는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화폐의 유통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 만주국

204 동북아역사논총 42호 과 협의하여 교환을 통해 만주국폐를 최대한 흡수하겠다는 대책을 수립하였 다. 이 조치는 실패로 끝났는데, 실질가치가 괴리된 양 화폐를 등가로 억지로 묶어둠으로써 실효를 거둘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조선은행은 만주국폐의 조 선 유입이 그리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면서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엔계통화권 의 등가원칙을 유지해야 하는 한 이를 그대로 둘 수밖에 없다는 것이 조선은행 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중국 점령지에서의 인플레이션은 격심해졌 고, 이는 엔계통화권을 통해 연쇄적으로 파급되었다. 그 결과 만주국폐 교환이 조선은행권 증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정도로 매우 심각한 상황이 되자 1944년에 들어서 종래 만주국폐의 흡수책을 버리고 유입저지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특히 만주와 조선의 물가 차액을 노리고 기승을 부리던 밀수출은 당시 전시통제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동일한 물건이면 조선보다 만주에서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밀무역을 통해서 물자가 조선 밖으로 유 출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조선 내 물자난이 더욱 가중되고 있었다. 조선총독 부로서는 이를 그대로 두고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이미 등가관계가 깨진 만주국폐를 조선은행권과 등가로 묶어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 의 엔블록을 유지해야 한다는 정치적 고려에서 비롯된 것이었 다. 이러한 사정 하에서 만주국폐의 조선 내 유통은 더욱더 심각한 상황을 초 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제국의 확대와 1국 1화폐주의라는 근대 자본주의의 고유한 속성은 서로 모순관계에 서게 된다. 이 점에서 고마고메의 다음 지적은 이 글의 문제 의식과 상통한다. 그에 따르면 일제의 지배는 내셔널리즘의 발전이자 동심원 적 확대였다는 기존 개념과는 반대로 식민지제국 일본의 이민족 지배 역사 속 에서 내셔널리즘의 자기 부정의 계기가 배태되고 자기 모순이 심화되는 과정 이라는 것이다. 제국은 초민족적 권력단위를 전제로 하는 반면 국민은 단일민 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체제하에서 통합된 인식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양자는 모순관계에 서게 된다. 제국주의적 팽창은 반드시 다민족적 상황을 노출시킴 으로써 통합논리의 수정이나 재정의를 불가피하게 만드는데, 이 과정에서 국

越 境 하는 화폐, 분열되는 제국 - 滿 洲 國 幣 의 조선 유입 실태를 중심으로 205 민 공동체라는 관념의 애매함과 불안정성이 뚜렷해졌다고 한다. 59) 이 모순관계를 일제는 식민지 통화의 확장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일제는 제국주의 팽창과정에서 발생될 수 있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일본은행권을 일본 밖에서 유통시키지 않았다. 조선에 일본은행을 진출시키지 않은 채 조선 은행을 설립한 이유는 일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60) 대외 침략과정에서 발 생할 수 있는 위험과 불확실성을 일본은행이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었고 이를 대리해서 실행해줄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조선은행에게 부여된 사 명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과정을 일종의 원운동에 비유해보면, 円 의 확 대과정은 일본은행권의 구심력과 조선은행권의 원심력이 작동한 원운동을 통 해서 가능하였다. 일본을 보호해야 하는 일본은행권은 국가 경계선 밖으로 이 탈시키지 않은 반면, 조선은행권은 끊임없는 확장을 추구하도록 규정되었다. 일본은행권처럼 중앙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구심력만으로는 제국은 확 장할 수 없었다. 조선은행권이라는 조선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원심력의 작동 이 있어야 가능했다. 일본은행이 일본 경제를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면, 조선은행은 제국주의 팽창에서 초래되는 위험을 식민지에 전가하는 역할을 담 당하였다. 국가 간의 경계 내에서 작동해야 할 일국통화의 운동이 끊임없이 밖 59) 고마고메 다케시 지음, 오성철 이명실 권경희 옮김, 2008, 식민지제국 일본의 문화통합, 역사비평사, 23~24쪽 60) 조선은행법 제정시 일본 정부는 조선에도 일본은행권을 유통시켜야 한다는 일부 의원들의 의견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정부위원인 아라이[ 荒 井 賢 太 郞, 조선총독부 탁지부장관]에 따르면 일본은행은 일본 금융기관의 중추로써 태환권의 기초를 정말이지 견고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태환권의 기초 에 동요를 가져올 수 있 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항상 피해야 한다는 것을 유념 해 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조선에도 일본은행권을 유통시킨다면 조선 경제가 동요될 경우 이로 인해 태환권이 크게 위협받게 될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에는 특수의 은행을 설치하고 일본은행권 이외의 태환권을 발행케 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안전 하기에 특별히 조선은행을 설립한 것이라고 답변하고 있다. 여기 서 아라이가 가장 힘주어 강조한 것은 바로 일본 본토경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본 국의 화폐를 조선에 유통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1911년 3월 10일 제27회 帝 國 議 會 衆 議 院 朝 鮮 銀 行 法 案 委 員 會 議 錄, 日 本 國 立 國 會 圖 書 館, 帝 國 議 會 會 議 錄 檢 索 システ 厶 (http://teikokugikai i.ndl.go.jp)).

206 동북아역사논총 42호 으로 이탈하고자 하였던 것, 그것이 조선은행권에 내재된 근본적인 모순이었 던 것이다. 식민지 조선은 조선 경제를 보호할 장치를 전혀 갖추지 못한 채 식민 본국의 팽창과정에서 야기된 위험을 고스란히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 이다.

越 境 하는 화폐, 분열되는 제국 - 滿 洲 國 幣 의 조선 유입 실태를 중심으로 207 참고문헌 京 城 日 報, 東 亞 日 報, 每 日 新 報 近 藤 一 編, 1961, 太 平 洋 戰 下 の 朝 鮮 (5), 友 邦 協 會 朝 鮮 史 料 編 纂 會 滿 洲 中 央 銀 行, 1942, 滿 洲 中 央 銀 行 十 年 史 水 田 直 昌 土 屋 喬 雄 編 述, 1962, 財 政 金 融 政 策 から 見 た 朝 鮮 統 治 とその 終 局, 財 團 法 人 友 邦 協 會 朝 鮮 史 料 編 纂 會 日 本 銀 行 調 査 局 編, 1970, 日 本 金 融 史 資 料 27 日 本 銀 行 調 査 局 編, 1971, 日 本 金 融 史 資 料 30 朝 鮮 銀 行 史 硏 究 會, 1987, 朝 鮮 銀 行 史, 東 洋 經 濟 新 報 社 朝 鮮 銀 行 調 査 課, 1939, 法 幣 を 繞 る 支 那 經 濟 の 動 向 朝 鮮 銀 行 調 査 部, 1949, 經 濟 年 鑑 朝 鮮 銀 行 調 査 部, 1944, 鮮 滿 國 境 地 帶 の 國 幣 問 題 と 滿 洲 國 內 における 鮮 銀 券 退 藏 事 情 고병권, 2005, 화폐, 마법의 사중주, 그린비 金 正 賢, 1998, 中 日 戰 爭 期 通 貨 戰 硏 究,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조명근, 2004, 1937~45년 日 帝 의 戰 費 調 達 과 朝 鮮 銀 行 券 發 行 制 度 전환, 韓 國 史 硏 究 127 고마고메 다케시 지음, 오성철 이명실 권경희 옮김, 2008, 식민지제국 일본의 문화 통합, 역사비평사 벤저민 J. 코헨 지음, 박영철 옮김, 1999, 화폐와 권력, 시유시 島 崎 久 彌, 1989, 円 の 侵 略 史, 日 本 經 濟 評 論 社 安 富 步, 1997, 滿 洲 國 の 金 融, 創 文 社 柴 田 善 雅, 1999, 占 領 地 通 貨 金 融 政 策 の 展 開, 日 本 經 濟 評 論 社 山 本 有 造, 1997, 大 東 亞 金 融 圈 論, 人 文 學 報 79, 京 都 大 學 人 文 科 學 硏 究 所 安 富 步, 1997, 滿 洲 中 央 銀 行 と 朝 鮮 銀 行 日 中 戰 爭 アジア 太 平 洋 戰 爭 期 を 中 心 に, 人 文 學 報 79, 京 都 大 學 人 文 科 學 硏 究 所

208 동북아역사논총 42호 [ABSTRACT] Currency Crossing Borderlines and an Empire Split: The Inflow of Manzhouguo Currency into Colonial Joseon Cho Myungkeun The essence of modern nation states is exclusive management of a specific area and external autonomy. To achieve these purposes, monetary sovereignty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requisites. A national currency was established to control and manage a nation s economy for internal purposes, and to indicate an independent sovereignty and give a national identity for external relations. In this way, the territorial exclusivity of the modern nation state is strongly related to territorial currencies. Thus, the circulation of currencies across borders is fundamentally impossible when considering monetary sovereignty as an essential right of a modern nation state. Yet, national currencies of the Bank of Chōsen and of Manzhouguo ( 滿 洲 國 ) were being circulated in Joseon and Manzhouguo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is phenomenon was connected with basic principles of financial policies in the Japanese colonies. Japan established banks of issue in every colony and occupied territory. In each area its then government issued a local currency, not a Japanese note. These local currencies had equal values and were closely linked to the Japanese currency, forming a Yen Currency Region ( 円 係 通 貨 圈 ). This region was constructed under the ideal of unifying the currencies of the Japanese colonies into the Japanese note. Therefore, the

越 境 하는 화폐, 분열되는 제국 - 滿 洲 國 幣 의 조선 유입 실태를 중심으로 209 expansion of Japan with its mainland as a concentric circle is in line with the expansion of the Yen Currency Region. This study examines the circulation of currencies between Joseon and Manzhouguo, and the internal breakdown of Japanese imperialism during the process of colonial expansion. The Manzhouguo state used currencies issued by the Manzhouguo Central Bank in 1932, which had an equal value to notes issued by the Bank of Chōsen. After its defeat in a currency war against the Chinese legal currency during the Sino Japanese War, the Japanese yen currency brought about severe inflation. The inflation, which started in central China, spread to other regions which were directly connected through the yen region, such as northern China, Manzhouguo, and Joseon. As a result, the real value of the Manzhouguo state s currency depreciated to around one half against the Bank of Chōsen s currency by 1939.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in Joseon, which had the responsibility to guard against an inevitable inflation, tried to deny equivalent exchange of the currencies, but the Bank of Chōsen and Japanese military authorities maintained their views to keep the policy. Japanese military authorities could not accept the abolishment of the equivalent exchange of currencies policy, as abolishment could cause the collapse of the entire Yen Currency Region. However, due to severe inflation from the excessive issuance of notes from the Bank of Chōsen in exchange for the national currency of Manzhouguo, the circulation of Manzhouguo s currency was banned in July, 1944. The border between Joseon and Manzhouguo was a currency defense line to protect Japan in the course of the conception and realization of Greater East Asia based on the Yen Currency Region. The problems caused by this course were shifted directly to the Japanese colony of

210 동북아역사논총 42호 Joseon. The inflow of Manzhouguo currency into Joseon clearly showed the result of the policy that the Bank of Chōsen enacted as a substitute for the Japanese central bank. In other words, it indicated the true reason why the Bank of Chōsen, instead of the Japanese central bank, carried out the national policies, which were destined to be risky and of uncertain outcome on the continent. Keywords The Bank of Chōsen, the Manzhouguo central bank, Manzhouguo currency, Yen Currency Region ( 円 係 通 貨 圈 ), inf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