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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法 學 제53권 제3호 2012년 9월 617 638면 Seoul Law Journal Vol. 53 No. 3 September 2012. pp. 617 638 <자료소개> 1) 1920년~1941년 경성 발행 법정신문( 法 政 新 聞 ) * ** 吉 川 絢 子 Ⅰ. 머리말 이 글에서는 일제시기 조선에서 발간된 법정신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신문은 법률을 주로 하며 정치 경제를 가미한 만선( 滿 鮮 ) 유일의 법률신문 1) 으로 1920년 6월 창간되었다. 이후 1941년 7월 언론통제로 말미암아 폐간될 때까지 20년 이상에 걸쳐 발간되었으며 조선사법협회잡지, 고등법원 판결록 등과 아울러 조선 사법계를 대표하는 저널이었다. 1922년 조선총독부 법무국 및 법원 감옥의 판임관 대우 이 상의 현직자 를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사법협회 2) 의 조선사법협회잡지가 논설, 협회 결의, 훈령회답통첩 그리고 고등법원 판결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비하여 법정신문은 시기마다 기사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논설, 법조인들에 대한 인터뷰기사, 각급 법원판결, 법조계 소식, 각종 수험정보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조선사법협회잡지에는 없는 기사도 많다. 따라서 법정신문은 일제시기, 특히 1920년 대 이후부터 1940년경까지 법제도의 실태를 파악하는 데 결코 놓쳐서는 아니 될 자료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법정신문은 소장기관이 한국과 일본에 뿔뿔이 흩어져 있으며 일부 도 서관 홈페이지에서는 검색조차 되지 않아 3) 연구자료로서 활용하는 데 어려움이 * 이 논문은 2008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KRF-2008-332-B00546). **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 박사과정. 1) 東 亞 法 政 新 聞 (1921.7.1.). 2) 조선사법협회 회칙 제4조: 이 회칙은 조선사법협회잡지 제1권 제1호(1922.1)에 부록으 로 게재되어 있다. 3)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및 법학부 도서관에는 東 亞 法 政 新 聞 이 소장되어 있으나 같은 대학 부속도서관 홈페이지(http://www3.kulib.kyoto-u.ac.jp/)에 들어가 法 政 新 聞 을 검색어로 장소 검색을 해도 인문과학연구소 소장본만이 검색될 뿐이다. 다만, 법학부도서관 입구 정면에 설치된 목록카드함 중 和 文 雜 誌 目 錄 T Zㆍ 新 聞 이라는 서랍에는 東 亞 法

618 서울대학교 法 學 제53권 제3호 (2012. 9.) 많았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흩어져 있는 자료의 소장상황을 점검하며 초대사장인 아 시쿠라 도모테츠( 朝 倉 外 茂 鐵 )의 경력과 창간에서 폐간에 이르기까지의 사장 사 무소 소재지 회사명 등을 정리하고자 한다. 나아가 신문 기사 분석을 통하여 자료 이용 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던 일제시기 법사연구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II. 소장현황 법정신문은 현재 한국 국사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고문헌실과 법학 도서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아단문고( 雅 丹 文 庫 ), 일본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도서관과 법학부 도서관, 고베( 神 戶 )시립 중앙도서관 내 세이큐문고( 靑 丘 文 庫 ) 등에 소장되어 있다. 필자가 그동안 수집한 호( 號 ) 및 그 소장처, 보존형태 등은 아래와 같다. <표 1> 법정신문의 소장상황 소장처 소장 호수 발행 연도 보존형태 국사편찬위원회 6, 8, 16 17, 21 1921년 MF/제본 고려대학 도서관 166 177, 234 246, 248 258 1928년 1932년 교토대학 법학부 도서관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도서관 서울대학교 법학도서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고문헌실 5, 17 44, 46 52, 54, 56 81, 83, 85 106, 108 125, 127 163 1921년 1927년 잡지 6, 8, 16 17, 21 1921년 MF/제본 365, 368 372, 374 380, 382 386, 388 390, 392 394, 402, 404 415, 418 421, 427 1938년 1940년 잡지 183 214, 216 233, 247 1929년 1932년 잡지 政 新 聞 東 亞 法 政 新 聞 社 (SM) T9 京 城 no.5(t9) no.17(t10) 44(T11) no.46(t11) 52 (T12) no.54(t12) 라 적혀진 목록카드와 東 亞 法 政 新 聞 no.56(t12) 81(T13) no.83 (T13) 106(T14) no.108(t14) 125(T15) no.127(t15) 163(S2) 라 적혀진 목록카드가 들 어있다.

1920년 1941년 경성 발행 법정신문( 法 政 新 聞 ) / 吉 川 絢 子 619 소장처 소장 호수 발행 연도 보존형태 아단문고 171 182 1928년 세이큐문고 124 139, 141 145, 147 163, 165 230, 232 259, 261 350, 352 375, 422 424, 426 438, 440 451 1927년 1941년 잡지 소장현황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일제시기 조선고등법원, 경성복심법원, 조선 사법협회 등에 소장된 잡지 4) 를 소장하고 있는 법원도서관 서고에 법정신문이 배치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5) 그리고 2011년 12월부터 2012년 2월까지 필자는 부산 지방법원, 대구지방법원, 대전지방법원, 광주지방법원 그리고 법원도서관 등을 각각 방문하여 2008년까지 각 법원이 소장하던 1945년 이전 발간 도서 및 잡지 목록 6) 과 법원도서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는 1945년 이전 발간 도서 및 잡지 목록을 입수 하였는데 이들 목록에도 법정신문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1922년 4월부터 1931년 7월까지 법정신문은 조선사법협회에 거의 매월 기증되었다 7). 이 사실을 생각하면, 법원도서관 서고에 없다고 해서 조선고등 법원을 비롯한 사법기관이 신문을 소장하고 있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 리고 각급 법원에서 발송된 1945년 이전 발간 잡지 및 도서들이 법원도서관 서고에 배치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직 정리되어 있지 않는 자료 가운데 법정 신문이 섞여 들어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4) 법원도서관에 소장된 잡지 중에는 표지에 조선총독부 법원의 인장이 있거나 뒷면에 당시 법원에서 일하던 판사들의 이름이 적혀진 대출표가 붙여진 것이 있다. 5) 현재 법원도서관 서고에는 京 都 法 學 會 雜 誌, 公 法 雜 誌, 國 際 法 外 交 雜 誌, 國 家 學 會 雜 誌, 司 法 協 會 雜 誌, 日 本 法 學, 法 學 ( 東 北 帝 大 ), 法 學 協 會 雜 誌, 法 學 志 林, 法 學 新 報, 法 學 論 叢, 法 曹 會 雜 誌, 法 曹 記 事, 法 律 新 聞, 法 律 論 評, 民 商 法 雜 誌, 早 稻 田 法 學 이 소장되어 있다. 6) 법원도서관은 1945년 이전에 발간된 자료를 일괄적으로 보관하기 위하여 각급 법원에 소장된 자료를 목록과 함께 2008년 7월 31일까지 법원도서관에 보내도록 요청하였다. 법원도서관 1945년 이전 자료 보관전환 협조요청 (2012년 1월 4일, 대전지방법원도 서관에서 입수하였음). 7) 1922년 2월호에서 1931년 7월호까지 사법협회잡지 회보란에는 조선사법협회에 기증된 잡지 등의 목록이 게재되어 있으나 그 중에는 동아법정신문도 포함되어 있다. 1931년 8월호 이후는 기증서목란이 없어져 조선사법협회에 법정신문이 기증되어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620 서울대학교 法 學 제53권 제3호 (2012. 9.) III. 초대사장, 아사쿠라 도모테츠( 朝 倉 外 茂 鐵 ) 아사쿠라 도모테츠는 1893년 1월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石 川 縣 金 澤 市 )에서 태어났다. 1879년 2월 이시카와현 사범학교부속중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884년 2월 같은 학교를 졸업하였다. 8) 그후 1885년 11월 아오야마영화학교( 靑 山 英 和 學 校 )에 진학하여 영어를 배웠다. 9) 1886년 계약법 및 불어선과생( 佛 語 選 科 生 )으로 제국대 학 법과대학에 입학, 10) 1889년 7월 같은 대학 법률학과 제1부를 졸업하였다. 11) 이후 도쿄고등상업학교, 일본법률학교, 도쿄전문학교, 英 吉 利 법률학교 등에서 강사로 일하였다. 12) 1890년 다가와탄광( 田 川 炭 鑛 ) 고문에 취임함과 동시에 도쿄지방재판소 검사국에 변호사등록을 하였다. 1898년 11월에는 도쿄시 상급조역( 上 級 助 役 )에 취임 하였으나 13) 1900년 9월 사직하여 다시 변호사가 되었다 14). 그 후 1902년 8월 도쿄 시의회 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하였으나 이듬해인 1903년 이른바 교과서의 옥사건 15) 으로 말미암아 중금고( 重 禁 錮 ) 1월(공탁금비소죄) 16) 을 선고받아 복역하 였다. 17) 1904년 1월 29일 변호사등록을 취소하였다. 18) 8) 日 下 南 山 子, 日 本 辯 護 士 高 評 傳 (1891), 151. 9) 日 下 南 山 子, 같은 책 (1891), 153. 10) 帝 國 大 學, 東 京 帝 國 大 學 一 覽 (1886), 14. 11) 東 京 帝 國 大 學, 東 京 帝 國 大 學 卒 業 生 氏 名 錄 (1939), 2. 12) 朝 鮮 公 論 社, 在 朝 鮮 内 地 人 紳 士 名 鑑 (1917), 447. 13) 東 京 市 助 役 補 欠 選 挙, 朝 日 新 聞 (1898.11.23.). 14) 東 京 市 助 役 更 迭, 朝 日 新 聞, (1900.9.2.); 朝 日 新 聞, (1900.10.3.). 15) 교과서의옥사건: 1902년 발각된 검정교과서를 둘러싼 뇌물 사건. 1886년의 교과용도 서검정조례 제정 이후 초등학교 교과서는 문부성의 검정 인가, 각 부현의 심사를 거 쳐 정식으로 채용되었다. 그러므로 교과서 회사 간의 경쟁이 심해졌으며 이에 대하여 당국도 단속을 강화하고 있었으나 1902년 12월 교과서심사위원과 출판사 사이의 비리 가 발각, 지사ㆍ학교장ㆍ시학관( 視 學 官 )ㆍ학교 교사 등 200여 명이 구속되었으며 그 중 116명에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 결과, 문부대신이 사직하였으며 한때는 문부성 폐지론까지 주장되었다. 가츠라 다로( 桂 太 郞 )내각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이듬해인 1903년 교과서 검정제를 폐지, 국정 교과서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교과서에 대한 관료 통제를 강화하였다. 16) 1882년 1월부터 시행된 일본 구( 舊 ) 형법 제395조에서는 수기( 受 寄, 임치를 가리킴)의 재물 차용물 또는 전물( 典 物 ) 기타 위탁을 받은 금액 물권을 비소( 費 消 )한 자는 1월 이상 2년 이하의 중금고에 처한다. 만약 편취( 騙 取 ) 괴대( 拐 帶 ) 기타 사기의 소위가 있는 자는 사기 취재로 논한다. 라고 규정하였다. 17) 教 科 書 事 件 裁 判 確 定, 朝 日 新 聞 (1904.3.29.). 18) 印 刷 局, 官 報 6174 號, (1904.2.3.).

1920년 1941년 경성 발행 법정신문( 法 政 新 聞 ) / 吉 川 絢 子 621 기록마다 약간 차이가 있으나 아사쿠라가 한국으로 건너간 것은 1905년경인 것 으로 보인다. 19) 수년간 인천에서 제염업에 종사하다 20) 1913년 거처를 경성으로 옮 겼다. 21) 1913년 9월 23일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 변호사등록을 하였으며 같은 해 12월경 경성 서소문동 경성신보사 터에 변호사사무소를 개소하였다. 22) 1915년에는 조선은행, 동양생명보험주식회사, 조선흥업주식회사 등의 법률고문에 취임하였다. 23) 이 외에 경성일보 법률고문으로서도 활동하였으며 1920년 6월 동아법정신문 을 창간하였다. 변호사의 활동으로서는 1920년 대동단사건에서 기오 도라노수케( 木 尾 虎 之 助 ), 마츠모토 마사히로( 松 本 正 寬 ), 최진( 崔 鎭 ), 김우영( 金 雨 英 ), 이조원( 李 祖 遠 ) 등과 함께 변론을 맡았으며 24) 1921년에는 최중범( 崔 仲 範 )과 조기연( 趙 箕 衍 )이라는 자 사이에 일어난 명예훼손 및 폭행사건에서 변호를 담당하였다. 25)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는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변호사대회에 가코 사다타로( 加 古 貞 太 郞 ), 아카오 도라키치( 赤 尾 虎 吉 ), 다카하시 쇼노수케( 高 橋 章 之 助 ), 오쿠보 마사히코( 大 久 保 雅 彦 ), 박승빈( 朴 勝 彬 ), 윤태영( 尹 泰 榮 )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26) 그리고 1927년 6월 14일 사망하였다. 27) 저서로 商 事 代 理 法 (상사대리법), 海 商 法 (해상법), 羅 馬 法 (라마 법), 手 形 法 (어음법), 商 法 (상법), 英 國 商 船 法 (영국상선법) 등이 있으며 28) 논문으로 倒 産 法 ノ 目 的 (도산법의 목적), 29) 法 律 學 と 社 會 學 (법률학과 사회학), 30) 抵 當 借 財 代 償 ノ 件 (저당차재대상의 건), 31) 商 法 ニ 就 テ(상법에 대하여), 32) 商 19) 在 朝 鮮 内 地 人 紳 士 名 鑑 과 京 城 市 民 名 鑑 에서는 1904년 7월로 되어 있으나 朝 鮮 及 満 蒙 に 於 ける 北 陸 道 人 史 에서는 1905년으로 되어 있다. 朝 鮮 公 論 社, 在 朝 鮮 内 地 人 紳 士 名 鑑 (1917), 447; 朝 鮮 中 央 経 済 会, 京 城 市 民 名 鑑 (1922), 286 287; 荻 野 勝 重 編, 朝 鮮 及 満 蒙 に 於 ける 北 陸 道 人 史, 北 陸 道 人 史 編 纂 社, (1927), 383. 20) 1909년 6월 아사쿠라는 자본금 10만엔으로 인천제염소를 설립하였다. 인천부 하마마치 ( 濱 町 )에 본점을 설치하였으며 1912년에는 반소쿠마치( 萬 石 町 )에 분공장을 설치하였다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21) 荻 野 勝 重 編, 朝 鮮 及 満 蒙 に 於 ける 北 陸 道 人 史, 北 陸 道 人 史 編 纂 社, (1927), 383. 22) 朝 倉 辯 護 士 開 業, 毎 日 申 報 (1913.12.5.). 23) 朝 鮮 公 論 社, 在 朝 鮮 内 地 人 紳 士 名 鑑 (1917), 447. 24) 全 協 事 件 의 공판은 아직 언제 될지 모르고 변호사는 김정목 외 7인, 東 亜 日 報 (1920. 9.15.). 25) 아비를 위하여 僞 造 電 報, 東 亜 日 報 (1921.10.13.). 26) 朝 鮮 側 出 席 者 國 際 辯 護 士 大 會 에, 東 亜 日 報 (1921.10.2.). 27) 朝 鮮 総 督 府 官 報 第 152 号, (1927.7.2.). 28) 이들은 동경법학원, 일본법률학교, 동경전문학교 등의 강의록으로 1889년에서 1903년 사이에 발간된 것이다. 29) 龍 門 雑 誌 17 号, (1889.9.) 30) 龍 門 雑 誌 19 号, (1889.11.).

622 서울대학교 法 學 제53권 제3호 (2012. 9.) 法 修 正 意 見 一 班 (상법수정의견일반), 33) 殖 民 事 業 (식민사업) 34) 등이 있다. IV. 법정신문 기사 해제 1. 아사쿠라 도모테츠 사장 시절 (1920년 6월~1927년 6월) 1920년 6월 동아법정신문이 창간되면서 이후 7년에 걸치는 아사쿠라 도모테츠 ( 朝 倉 外 茂 鐵 ) 사장 시절이 막을 열었다. 東 亞 法 政 新 聞 제5호 1920.12.27. 31) 法 学 協 会 雑 誌 67 68 巻, (1889) 32) 龍 門 雑 誌 31 号, (1890.12); 法 学 協 会 雑 誌 77~78 巻, (1890). 33) 法 学 協 会 雑 誌 9 巻 8 号, 1891 34) 龍 門 雑 誌 47 48 号, (1892.4 5).

1920년 1941년 경성 발행 법정신문( 法 政 新 聞 ) / 吉 川 絢 子 623 창간 당시 본사는 아사쿠라의 사무소가 있는 경성부 명치정 2정목 4번지에 설치 되었으며 정가는 1부 20전이었다. 그리고 발행빈도 및 분량은 각각 월 2회(1일, 15일), 15 16페이지였다. 1920년 12월에는 대구와 인천에, 이듬해인 1921년 12월에는 다롄 ( 大 連 )에, 1922년 10월에는 부산에 지국이 각각 설치되었다 35). 기사에서는 1922년 11월 현재 부산, 대구, 펑톈( 奉 天 ), 톈진( 天 津 ) 등지에 지부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6). 그 후 1924년 8월에는 사무소를 정동 1정목으로 옮겼으며, 37) 같은 해 12월 에는 전라남도 광주에도 지부가 설치되었다. 38) 1926년 9월 말 현재 신문의 발간 부수는 총 82부로 39) 이후 시기에 비하여 발간 부수가 훨씬 적었음에도 7년 동안이나 아사쿠라가 사장의 자리에 머물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로 그가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조선권업신탁주식회사 등에서 법률 고문으로 일하고 있었음을 들 수 있다. 이 시기 신문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조선은 행이나 조선식산은행 등 아사쿠라가 법률고문을 맡고 있었던 회사의 광고가 매호 게재되었다. 광고료는 1페이지 당 100엔으로 40) 회사 입장에서는 독자 500명의 구 독료에 해당되는 액수의 광고 수입을 확보한 셈이었다. 이러한 광고주의 존재는 독자층이 법조인에 한정된 신문의 지속적인 발행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 시기 신문 지면은 사설, 시론( 時 論 ), 잡보, 고등법원 판결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설에서는 사법 관련 문제를 위주로 하면서도 참정권 문제, 부인 경찰관 채용 문제, 일본 작가 아리시마 다케오( 有 島 武 夫 ) 정사 사건 등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시론에서는 법률 관련 논문 등을 소개하였다. 여기에 소개된 논문 중에는 일본에서 발간되는 법학 잡지에 게재한 글을 인용한 것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1923년 6월 1일과 15일자 신문에는 교토제국대학 교수 나카지마 다마키치( 中 島 玉 吉 ) 의 民 法 第 744 條 廃 止 論 (민법 제744조 폐지론) 이라는 논문을 실었는데, 이것은 그해 5월에 교토대학 법학회 발간 法 學 論 叢 (법학논총) 9권 5호에 발표된 것이었다. 또한 1923년 9월 1일, 15일, 10월 1일자 신문에 걸쳐 게재한 이나다 슈노스케( 稻 田 周 之 助 )의 自 然 の 法 則 と 國 家 の 法 律 との 關 係 (자연법칙과 국가의 법률과의 관계) 라는 논문은 같은 해 8월의 法 學 新 報 (법학신보) 를 전재한 것이었다. 법학논총 35) 東 亜 法 政 新 聞 (1920.12.27.); 東 亜 法 政 新 聞 (1921.12.1.); 東 亜 法 政 新 聞 (1922.10.1.). 36) 東 亜 法 政 新 聞 (1922.11.15.). 37) 東 亜 法 政 新 聞 (1924.8.15.). 38) 東 亜 法 政 新 聞 (1924.12.15.). 39) 京 城 地 方 法 院 検 事 局, 大 正 15 年, 昭 和 元 年 分 新 聞 紙 要 覧. 40) 東 亜 法 政 新 聞 (1926.5.5.).

624 서울대학교 法 學 제53권 제3호 (2012. 9.) 이나 법학신보 등 당시 일본에서 발간된 법학잡지는 조선고등법원을 비롯한 각급 법원이나 사법협회 등에도 비치되고 있었으나, 재야법조인들은 열람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신문을 구독하면 사무실에서도 일본 법학계의 연구 동향을 파악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었다. 잡보에서는 한국 내외의 법률 관련 기사가 게재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변호사 대회, 변호사 등록 및 취소, 변호사시험 합격자, 변호사회 총회, 변호사시험 문제, 변호사 사무실 개설 등 변호사 관련 기사가 많다는 점이다. 예컨대 1923년 4월 15일자 신문 잡보에 게재된 乾 柿 の 沒 收 から 弁 護 士 及 第 (곶감의 몰수에서 변호사 급제) 라는 기사에서는 1923년도 제2차 변호사시험에 이인( 李 仁 ), 공진태( 孔 鎭 泰 ), 홍종률( 洪 鍾 律 ) 등과 함께 합격한 서한욱( 徐 漢 旭 ) 41) 이 변호사를 지망하게 된 계기와 어떻게 일본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는지 등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일화는 그동안 연구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일제시기 변호사상( 像 )을 복원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변호사 관련 기사들이 많았던 가장 큰 이유는 먼저 아사쿠라가 경성에서 활동하는 현직 변호사였기 때문이었겠지만, 그 이외에 독자층의 문제도 꼽을 수 있다. 신문에는 사무실 소재지와 전화번호를 등을 적은 경성 소재 변호사 안내 라는 광고가 자주 실렸으며 연말에는 변호사들의 망년회 사진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6년 3월 15일자 신문의 법정 포스트 라는 독자 기고란에는 市 內 揚 生 이라는 자의 매일 오후 7시부터 법률 연구를 위하여 사무를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고용해 주시는 변호사 선생님 안 계십니까? 보수는 안 주셔도 됩니다. 라는 투고 가 게재되었다. 市 內 揚 生 은 법률문제에 대하여 질문하면 신문사 편집부가 대답해 주는 질의응답 라는 코너에도 누차 투고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보면 신문의 주된 독자는 변호사 또는 변호사를 지망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2. 다무라 나오카즈 및 구보다 다쿠지 사장 시절 (1927년 12월~1929년 9월) 1927년 6월 아사쿠라가 사망한 후는 다무라 나오카즈( 田 村 直 一 )가 회사를 인수 하였으며 본사는 봉래정 1정목 27번지로 이전하였다. 다무라 사장 시절에는 신문 41) 1923년도 제2차 변호사시험에는 정항기( 鄭 恒 基 ), 김영수( 金 永 洙 ), 김명진( 金 明 鎭 ), 진 직현( 晉 直 鉉 ), 홍종률( 洪 鍾 律 ), 이종태( 李 鍾 台 ), 김윤배( 金 允 培 ), 공진태( 孔 鎭 泰 ), 손치은 ( 孫 致 殷 ), 서한욱( 徐 漢 旭 ), 이인( 李 仁 ) 등 11명이 합격하였다. 印 刷 局, 官 報 3171 號, (1923.2.27.).

1920년 1941년 경성 발행 법정신문( 法 政 新 聞 ) / 吉 川 絢 子 625 크기가 국판( 菊 版 )으로 변경되었으며 분량이 50페이지 내외로 늘어나는 등 형태상 변화가 있었으나 독자층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1928년 6월 5일자 신문에는 후원 경성 변호사회 라고 적힌 변호사회 명단이 게재되었다. 이 시기 주목할 만한 기사로서 변호사 보수에 관한 논평을 들 수 있다. 먼저 변 호사 다카하시 쇼노스케( 高 橋 章 之 助 )의 弁 護 士 料 及 謝 金 に 就 て(변호사 수수료 및 사례비에 대하여) 라는 글에서는 당시 변호사들이 특별한 계약 없이도 착수금을 받을 수 있으며 승소 또는 무죄 판결을 받았을 때에는 착수금과 아울러 사례비까지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42) 또한, 변호사 이승우( 李 升 雨 )의 弁 護 料 6 万 円 也 の 鑑 定 書 (변호사비 6만엔의 감정서) 라는 글에서는 경성의 변호사들이 일반적으로 변호사 보수를 어떻게 산출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기사에 의 하면 당시 경성에서는 일반적으로 착수금보다 사례비를 더 많이 받았으며 소송에서 얻을 재산상 이익의 10%를 사례비로 받고 있었다고 하였다 43). 이 문제와 관련하여 변호사 다케오 사다야스( 武 尾 禎 泰 )의 弁 護 士 と 紹 介 料 問 題 (변호사와 소개료 문제) 또한 주목할 만하다. 44) 여기서 다케오는 최근 들어 각지 에서 변호사가 늘어나면서, 상호 간의 경쟁이 심해져 변호사에게 사건을 소개하여 주는 대신 변호사 수수료와 사례비의 일부를 챙기는 소위 소개인의 횡포가 심해지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 논평은 1927년 별건곤 제3호의 現 代 珍 職 業 展 覽 會 중에 나오는 싸홈만 차자서 먹고 사는 사람 이 실제로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45). 이와 같은 글은 당시의 변호사들이 처한 환경이나, 소송을 제기하면서 변호사에게 사건을 의뢰하기까지의 사회적 실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무라가 사장을 그만둔 후는 구보타 다쿠지( 久 保 田 卓 治 ) 46) 가 회사를 인수하였다. 47) 정가는 1부 30전으로 발행빈도는 월 1회(8일)로 바뀌었으며 사무소 또한 경성부 황금정 2정목 28번지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고문에는 마츠모토 다케마사( 松 本 武 正 )와 다시로 사이하치( 田 代 才 八 ) 48) 가, 주간에는 요시다 간지로( 吉 田 寬 二 郞 )가 각 42) 東 亜 法 政 新 聞 (1928.3.). 43) 東 亜 法 政 新 聞 (1928.10.). 44) 東 亜 法 政 新 聞 (1928.4.). 45) 별건곤 제3호, (1927.1.), 48-56. 46) 이번에는 구보타 다쿠지의 경력에 대하여 조사하지 못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구보타는 동아법정신문 사무소와 같은 소재지에 있는 北 鮮 の 開 拓 編 纂 社 에서 1928년 12월 이와 모토 요시후미( 岩 本 善 文 )와 함께 北 鮮 の 開 拓 (북부 조선의 개척)을, 1932년에는 경성의 지리키신코가이( 自 力 信 行 會 )에서 인간독본( 人 間 讀 本 )을 각각 출판하였다. 47) 東 亜 法 政 新 聞 (1929.6.8.).

626 서울대학교 法 學 제53권 제3호 (2012. 9.) 각 취임하였으며, 49) 부산, 대구, 전주, 광주( 光 州 ), 평양, 신의주 등지의 일본인 변 호사 사무소에 통신부가 설치되었다. 50) 3. 요시다 간지로 사장 시절(1929년 9월~1932년 1월) 1929년 9월 구보타가 사장을 그만두자 주간인 요시다 간지로( 吉 田 寬 二 郞 )가 일 체의 사무를 인수하였으며 51) 사무소도 남대문통 5정목 74번지로 옮겨갔다. 52) 1930년 3월까지는 종전과 마찬가지로 1부 30전, 월 1회 발행, 50페이지 분량이었으나, 4월 부터는 발행빈도가 월 2회(5일, 20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가격도 1부 20전, 2부 30전으로 인하되었다. 53) 사장이 구보타에서 요시다로 교체될 무렵부터 경찰과 행정 관련 기사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1929년 8월 8일자 신문에는 경기도 보안과장 아사쿠라 노 보루( 朝 倉 昇 )의 新 聞 と 警 察 問 題 (신문과 경찰문제), 함경남도 보안과장 서기순 ( 徐 紀 淳 )의 搜 索 知 識 (수색지식), 警 察 法 質 疑 (경찰법질의), 전 형사부장 곽공생 ( 郭 公 生 )의 搜 査 奇 談 (수사기담), 文 官 普 通, 警 部 考 試 試 驗 問 題 (문관보통, 경부 고시 시험문제), 군청자( 群 靑 子 )의 警 察 署 の 窓 から 眺 める 社 會 相 (경찰서의 창에서 바라보는 사회상) 등 6개의 경찰 관련 기사와 當 面 せる 地 方 改 良 事 業 と 郡 面 職 員 の 頭 腦 改 善 問 題 (당면한 지방개량사업과 군 면 직원의 두뇌 개선 문제), 경기도 양주생( 良 州 生 )의 面 の 帳 簿 と 其 の 實 際 的 取 扱 に 就 て(면 장부와 그의 실제적인 취 급에 대하여), 朝 鮮 の 道 地 方 費 と 公 務 所 の 關 係 (조선의 도 지방 비용과 공무소의 관계), 전 경상남도 양산군수 임홍순( 任 洪 淳 )의 朝 鮮 行 政 要 覽 (조선행정요람), 경상남도 동래군속( 屬 ) 문정창( 文 正 昌 )의 面 會 計 事 務 要 覽 (면회계사무요람), 경상 북도 영덕군속 김정석( 金 廷 錫 )의 面 統 計 事 務 槪 要 (면통계사무개요), 경기도 농무 48) 다시로 사이하치: 1874년 구마모토현 출신. 1896년 철도국에 입사하였으며 후쿠이출 장소, 가나자와출장소, 나고야출장소 등에 근무하였다. 노일전쟁 중인 1905년 2월 임시 군용철도부 소속으로 한국으로 건너갔다. 그 후 1908년 2월 통감부철도관리국으로 옮겼 으며 1914년 12월부터는 조선총독부 철도국 참사보로 원산출장소에 근무하였다. 1917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입사, 경성관리국 공무과 등에서 근무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한 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49) 東 亜 法 政 新 聞 (1929.8.8.). 50) 東 亜 法 政 新 聞 (1929.7.8.). 51) 東 亜 法 政 新 聞 (1929.8.8.). 52) 東 亜 法 政 新 聞 (1929.9.8.). 53) 東 亜 法 政 新 聞 (1930.4.5.).

1920년 1941년 경성 발행 법정신문( 法 政 新 聞 ) / 吉 川 絢 子 627 과장 야히로 이쿠오( 八 尋 生 男 )의 面 技 手 諸 君 (면기수 제군), 경성부 서기보 이종현 ( 李 鍾 賢 )의 朝 鮮 戶 籍 令 新 論 (조선호적령 신론), 行 政 質 疑 (행정질의) 등 10개의 행정 관련 기사가 게재되었다. 모두 44페이지 중 30페이지 가량이 경찰 또는 행정 관련 기사로 채워졌다. 이처럼 게재 기사의 비중이 달라지면서 독자층에도 변화가 생겼다. 위에서도 본 바와 같이 종전에는 변호사를 비롯한 법조인이 주된 독자였으나, 이 시기 신문사가 한 캠페인 당첨자나 질의응답 코너에 기재된 질문자의 신분을 살펴보면 독자층이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1930년 8월 5일자 신문에 게재된 懸 賞 行 政 質 疑 應 答 當 選 者 發 表 (현상 행정질의응답 당선자 발표) 라는 기사에서는 신상환( 辛 尙 煥 ), 유광하( 劉 光 夏 ), 최종천( 崔 鍾 千 ) 등 10명의 이름이 근무처와 함께 게재되었다. 1930년도 朝 鮮 總 督 府 及 所 屬 官 署 職 員 錄 에서 그들의 직위를 확인하여 보면, 최종 천(상주군청, 괄호의 소속은 신문에 게재된 것임, 이하 같음)은 상주군속, 임한덕 ( 林 翰 德, 경원군청)은 경원군속, 김정배( 金 政 培, 함안군청)은 함안군속, 심상우( 沈 相 禹, 충청남도지방과)는 충청남도내무부 지방과속, 김상형( 金 相 瀅, 갑산군 동인면 사무소)은 갑산군 동인면장으로 각각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유광하(정선군 동면사 무소)처럼 1930년도 직원명부에는 이름이 없었으나 몇 년 후 면장으로 이름이 실 리게 된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창간 10주년을 맞이한 1930년 7월 5일자 신문에 게재된 경상남도 산청군청,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직원 일동, 경상남도 산 청군 단성면 면장 손병국 등 군청, 면장, 면직원 명의로 된 축하광고에서는 군청 이나 면사무소에서 구매한 신문을 한국인 말단관리들이 읽으면서 행정문제를 공부 하고 질문하였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4. 후루하타 세이조 사장 시절(1932년 1월~1935년 11월) 1932년 1월 요시다가 주간을 사임하자 회사 사무이사였던 후루하타 세이조( 降 旗 淸 三 )가 주간이 되었으며 54) 구니토모 나오카네( 國 友 尙 謙 ) 55) 를 새로이 고문으로 맞 54) 후루하타 세이조: 1892년 나가노현 출신. 1913년 11월 한국으로 건너가 조선신문사 평양지국장와 대구지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2년 1월 동아법정신문사를 매수하여 주간에 취임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일물자료). 55) 구니토모 나오카네: 1876년 이바라키현 출신. 1898년 6월 일본 재판소 서기 등용시험에 합격한 후 미토구재판소, 시모즈마구재판소 등에 근무하였다. 1901년 2월 서기를 그만 두고 경시청에 들어갔으며 1903년 6월에는 경부로 승진하였다. 1905년 한국정부의 초청을 받아 한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평양경찰서장, 경무창감부 경무과장 등을 거쳐 1919년

628 서울대학교 法 學 제53권 제3호 (2012. 9.) 이하였다. 56) 또한, 사무소도 경성 태평통 2정목 85번지로 이전하였다. 57) 같은 해 6월 5일에는 회사명을 동아법정신문사에서 법정경찰신문사로 변경하였으며 제호도 法 政 警 察 新 聞 (법정경찰신문) 으로 바꾸었다. 58) 5월 20일과 6월 5일자 신문은 제호 변경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애초는 단지 재야법조인의 기관지 였기 때문에 법조 관련 기사만 게재하면 되었으나 독자층이 확대되면서 도저히 종전과 같은 기사의 제한 하에 있음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위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경찰 관련 기사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사장이 구보 타에서 요시다로 바뀐 1929년 9월경으로, 제호가 변경되기 훨씬 이전이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 이 시기에 제호를 바꾸었는지 정확한 내막은 알 수가 없다. 법정신문 제호의 변화 왼쪽에서 1921년 당시의 제호, 1932년 당시의 제호(한반도 위에 옥, 검, 거울 등 일본 전설에서 유래한 3종의 신기와 저울이 그려짐), 1932년 6월 당시의 제호, 1934년 9월 당시의 제호 8월 조선총독부 사무관이 되었다. 1936년 9월에는 경성부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국 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56) 東 亜 法 政 新 聞 (1932.1.20.). 57) 東 亜 法 政 新 聞 (1932.1.20.). 58) 法 政 警 察 新 聞 (1932.6.5.).

1920년 1941년 경성 발행 법정신문( 法 政 新 聞 ) / 吉 川 絢 子 629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1932년 2월 20일자 신문에 게재된 구니토모 나오카 네의 朝 鮮 警 友 會 に 關 與 と 法 政 新 聞 の 顧 問 を 承 諾 した 經 緯 (조선경우회에 관여함과 법정신문의 고문을 승낙한 경위) 라는 글이다. 이 기사에 의하면 1931년 3월경 이 마무라 도모( 今 村 鞆 ), 박인종( 朴 麟 鍾 ) 등에게서 전직 경찰관들로 조직된 경우회를 창설하자는 이야기를 들은 구니토모는 같은 해 4월 경우회를 조직, 이마무라와 함께 부회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6월 중순부터는 전직 경찰관에게 경우회가 조직되었 음을 통지하여 회원을 모집하였으나 기대만큼 회원을 유치하지는 못하였다. 그리 하여 회원을 모으기 위해서는 회보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구니토모는 9월 경 동아법정신문 경찰부 고문 가토 요시하루( 加 藤 好 晴 )를 만나 회보 발간 등에 대 하여 상의하였다. 그러다가 10월 14일 그동안 경우회 이사를 맡고 있던 박인종이 사임하여 그 후계로 가토가 새로 이사에 취임하였다. 그 결과, 신문은 경우회 기관 이 되었으며 제호도 경찰신문으로 바뀌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전직 경찰관들을 조직하기 위하여 제호에다 경찰이라는 단어를 넣은 것이다. 제호가 동아경찰신문으로 변경된 후 신문의 발행 부수는 크게 늘어났다. 1931년 당시 551부에 불과했던 발행 부수 59) 는 1933년에는 1,052부로 2배 가까이 늘어났다. 60) 그 이후 1934년에는 774부로 떨어졌으나, 61) 1935년에는 다시 983부까지 늘어났다. 62) 이처럼 발행 부수가 크게 늘어난 배경에는 경우회 회원의 존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호가 변경된 지 약 2년이 지난 1934년 8월, 발행자 겸 편집자가 다무라 나오카즈에서 후루하타 세이조로 바뀌면서 제호도 법정경찰신문에서 법정신문으로 바뀌었다. 63) 1934년은 마침 신문이 창간 15주년을 맞이한 해이자 그 기념사업의 하나로 고등법원 판결록을 매월 발간하게 되는 등 편집 방침에 변화가 생긴 해였다. 그러나 1934년 9월 이후에도 법정신문은 법률에 근거를 둔 경찰계 제1의 지도기 관이다. 경찰관으로서 경정( 警 政 )의 지침을 알고자 하는 자는 먼저 본 신문에 문의 하라. 라는 구호가 여전히 사용되었다 64). 다시 말하여 신문지명 변경 이후에도 경찰 관계자를 독자로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내용면에서 볼 때 이름의 변경은 적절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제호가 법정 59) 朝 鮮 總 督 府 警 務 局, 朝 鮮 に 於 ける 出 版 物 概 要, (1932), 21. 60) 朝 鮮 總 督 府 警 務 局, 朝 鮮 出 版 警 察 概 要 ( 昭 和 8 年 ), (1933), 16. 61) 朝 鮮 總 督 府 警 務 局, 朝 鮮 出 版 警 察 概 要 ( 昭 和 9 年 ), (1934), 15. 62) 朝 鮮 總 督 府 警 務 局, 朝 鮮 出 版 警 察 概 要 ( 昭 和 10 年 ), (1935), 17. 63) 京 高 檢 秘 第 1945 號 新 聞 紙 發 行 兼 編 輯 人 竝 題 字 變 更 ニ 關 スル 件, (1934.8.31.). 64) 法 政 新 聞, (1934.9.5.).

630 서울대학교 法 學 제53권 제3호 (2012. 9.) 경찰신문으로 변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부터 경찰 관련 기사가 줄어들기 시작 하였으며 대신에 법학 관련 기사가 다시 늘어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32년 10월 20일자 신문은 논설 7개, 잡보 13개 등 모두 20개 기사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 중 경찰 관련 기사는 편집부의 司 法 警 察 界 雜 錄 (사법 경찰계 잡록) 뿐이었다. 5. 마루야마 도라노스케 사장 시절(1935년 11월~1937년 11월) 1935년 11월 마루야마 도라노스케( 丸 山 虎 之 助 ) 65) 전 조선중앙신문사 사장이 신 문사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사무소도 한강통 3정목 113번지로 이전하였다. 66) 1935년 11월 20일자 신문은 본사 사장으로 마루야마 도라노스케 씨를 맞이한다. 라는 기 사에서 마루야마를 언론계에서 온갖 고생을 겪은 대선배이자 열혈한이라 평하면서 사장 취임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본인도 인정하듯이 마루야마는 언론인이지 법조 인은 아니었다. 67) 따라서 법률의 개폐, 판례의 경개, 검찰 방침의 변경 등에는 관 심이 그리 많지 않았다. 68) 이러한 마루야마에 대하여 변호사이자 신문사 고문인 미야자키 다케시( 宮 崎 毅 )는 이 신문은 변호사 아사쿠라 도모테츠가 조선 재주 재야 법조인들을 위한 기관지로 창간한 것이었으나 아사쿠라 사망 후 누차 어려움에 부딪 히면서 애초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임 사장에게 재야 법조 인들을 위한 신문을 만들어 달라고 강하게 요구할 수는 없으나 사장에 취임한 이 상 창간 당시의 정신을 고려하여야 한다 고 말하였다 69). 이처럼 신문사 고문 가운 데는 독자층이 법조인 이외의 자에게도 확대되면서 신문의 특성이 창간 당초의 취 지에서 벗어났음을 우려하는 자도 있었다. 다만, 이러한 미야자키의 주장이 얼마나 받아들여졌는지는 의문이다. 이 시기 신문 에는 법조인이나 경찰 관련 관계자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기사들이 자주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먼저 1936년 1월 20일부터 신문에는 부인이 알아야 할 법률을 구어체로 설명한 法 律 と 婦 人 (법률과 부인) 이라는 코너가 신설되었다. 그리고 실 65) 마루야마 도라노스케: 1876년 나가노현 출신. 1906년 8월 한국으로 건너가 충남 공주 에서 농업 경영에 종사하는 한편 전당포나 연초도매업을 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인물자료). 66) 法 政 新 聞, (1935.11.15.). 67) 社 長 就 任 に 際 して, 法 政 新 聞, (1935.11.20.). 68) 社 長 就 任 に 際 して, 法 政 新 聞, (1935.11.20.). 69) 法 政 新 聞 の 使 命, 法 政 新 聞, (1935.11.20.).

1920년 1941년 경성 발행 법정신문( 法 政 新 聞 ) / 吉 川 絢 子 631 제로 일어난 사건 등을 에피소드 풍으로 소개한 判 例 解 說 (판례해설) 이라는 기사 도 자주 게재되었다. 게다가 1936년 12월 5일자 신문에 게재된 광고는 이 신문이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밝히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1936년의 발행 부수다. 1936년의 발행 부수는 2,176 부로 70) 신문사 창립 이래 가장 많은 부수를 기록하였다. 이처럼 발행 부수가 크게 늘어난 배경으로는 신문의 성격이 대중화된 것 이외에 지역 명망가의 존재도 고려 하여야 한다. 일례로 1936년 6월쯤 경성 동부지국장에 취임한 조정환( 曺 正 煥 )을 보자. 71) 그는 대구부 서기, 경상북도 재무부 서기, 경북 청송군 경산군 영천군수, 대정생명보험주식회사 및 일본교육생명보험주식회사 경성출장소장 등을 역임하다 1936년 현재 경성 혜화정 총대( 總 代 )로 있던 사람이다. 72) 이러한 사정을 미루어 살펴보면, 이 시기 신문은 지역 명망가의 손을 거쳐 일반인에게 판매됨으로써 한편 으로는 발행 부수가 크게 늘어났으며 또 한편으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기사가 늘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6. 오키아유 도시히로 사장 시절(1937년 11월~1938년 11월경) 1937년 11월 법정신문 고문이자 경성변호사회 부회장인 오키아유 도시히로( 置 鮎 敏 宏 ) 73) 가 사장에 취임하였다. 74) 초대 사장인 아사쿠라 도모테츠 사망 이래 법조 인이 사장에 취임한 것은 약 10년 만의 일이며, 오키아유의 사장의 취임에 대하여 70) 朝 鮮 總 督 府 警 務 局, 朝 鮮 出 版 警 察 概 要 ( 昭 和 11 年 ), (1936), 19. 71) 法 政 新 聞, (1936.6.1.). 72) 조정환의 경력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를 참조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1930년 5월경 일본 시마네현 야츠카군 구마노무라에 시찰하러 나갔는데 그 때 쓴 일기의 일부는 1930년 6월 5일자 법정신문에 게재되었다. 73) 오키아유 도시히로: 1901년 후쿠오카현 출신. 1925년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한 후 한국으로 건너갔다. 1929년 4월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변호사등록을 하였다. 해방 후는 일본으로 돌아가 1949년 6월 2월 요코하마변호사회에 입회하였으며 사쿠라기쵸사건 등에서 변호를 담당하였다. 이 사건은 1951년 4월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소재 국철 ( 國 鐵 ) 사쿠라기쵸역에서 발생한 열차내 화재로 사망자 107명, 85명의 부상자를 낸 것이다. 1952년의 요코하마지방재판소 판결, 1954년의 도쿄고등재판소 판결을 거쳐 1960년 4월 15일 최고재판소 제2소법정에서 상고기각이 되어 피고인에게 대한 금고 6월 1년 10월 판결이 확정되었다. 1973년 7월 6일 사망으로 변호사등록을 취소하였다. 저서로 朝 鮮 法 律 判 例 決 議 総 覧 ( 大 阪 屋 号 書 店, 1927), 実 例 改 正 民 事 訴 訟 法 ( 大 阪 屋 号 書 店, 1928) 등이 있다. 桜 木 町 事 件 初 公 判 開 く, 読 売 新 聞, (1951.8.20.); 日 本 弁 護 士 連 合 会, 昭 和 30 年 度 版 日 本 弁 護 士 名 簿, (1955), 104; 요코하마변호사회 전화 문의(2012.6.4.). 74) 法 政 新 聞, (1937.11.20.).

632 서울대학교 法 學 제53권 제3호 (2012. 9.) 신문은 어미 품에서 일단 날아간 새끼가 다시 어미를 찾으러 보금자리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라고 말하였다 75). 그리고 경성변호사회 회장 미야자키 다케시 ( 宮 崎 毅 ), 전 회장 사쿠마 미츠구( 佐 久 間 貢 ), 동료 변호사 이노우에 이치로( 井 上 一 郞 ) 등도 법조인 출신 사장의 탄생을 축하하였다. 76) 오키아유 자신도 독자적인 입장에서 세론을 지도하며 법률, 정치, 경제에 절대적인 포부와 경륜( 經 綸 )을 이루 고자 한다. 라는 아사쿠라 토모테츠의 창간이념을 의식하면서 사법은 물론이고 정치, 경제를 비롯한 사회의 여러 현상에 대하여 늘 엄정하고 자유로운 입장에서 비판 적인 태도로 임하며 그 원만한 발전에 기여하여야 한다. 라고 포부를 말하였다 77). 그러나 이러한 포부와 반대로 오키아유의 서명기사는 재조 재야 법조인에 대하여 사법 분야에서의 전쟁협력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표 2> 오키아유 도시히로 서명기사 게재일 1937년 11월 20일 1937년 12월 5일 1938년 1월 5일 1938년 1월 5일 1938년 2월 20일 1938년 4월 5일 1938년 6월 20일 1938년 7월 20일 1938년 8월 20일 기사명 社 長 就 任 に 際 して(사장 취임에 즈음하여) 歲 晩 雜 記 (세만 잡지) 地 方 法 院 支 廳 に 於 ける 予 審 制 度 の 改 廢 (지방법원 지청의 예심제도 개폐) 戰 勝 新 春 を 迎 へて(전승 신춘을 맞이하여) 再 び 支 廳 予 審 制 度 の 改 廢 に 就 て (다시 지청 예심제도 개폐에 대하여) < 時 評 > 司 法 雜 觀 (<시평> 사법잡관) 恩 給 獻 金 運 動 と 銃 後 の 報 國 (은급헌금운동과 총후 보국) 國 民 精 神 總 動 員 と 司 法 に 對 する 理 解 と 協 力 (국민정신총동원 및 사법에 대한 이해와 협력) 利 息 制 限 令 改 正 に 就 ての 希 望 (이자제한령 개정에 대한 희망) 먼저 1937년 12월 5일과 다음 해 1938년 1월 5일자 기사에서는 파죽지세로 공 격을 계속하는 황군( 皇 軍 ) 병사에게 감사 감격 함과 동시에 동양의 평화를 위협 75) 本 社 社 長 に 置 鮎 敏 宏 氏 を 迎 ふ, 法 政 新 聞, (1937.11.20.). 76) 新 社 長 置 鮎 君 に 寄 す, 法 政 新 聞 と 置 鮎 社 長, 法 政 新 聞, (1937.11.20.). 77) 社 長 就 任 に 際 して, 法 政 新 聞, (1937.11.20.).

1920년 1941년 경성 발행 법정신문( 法 政 新 聞 ) / 吉 川 絢 子 633 하며 지나 4억의 민중 을 괴롭히는 국민정부를 근저까지 도로 박아 넣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비상시국 속에서 우리 법조인은 그 조( 朝 )에 있든 야( 野 ) 에 있든 간에 현하 사회상황을 생각하며 식견을 한층 높여 사무 쇄신을 도모하며 능률을 높여 서로 사회의 위신( 威 信 )을 지니며 민중의 요망에 답하여 그 믿음을 확보함에 노력하며 서로 사법 보국을 실현 함으로써 국가 진운에 기여 공헌 하여 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78) 또한, 황군 병사의 노력에 보답하기 위하여 돈을 아껴 가능한 한 최대의 성실함을 가지고 황군 위문, 국방헌금 등을 하여야 한다. 고 주 장하였다. 79) 그리하여 전주변호사회 소속 사타케 가메( 佐 竹 龜 )와 강철모( 姜 哲 謨 ) 등을 발기인으로 한 은급헌금보국운동에 대하여 두 손을 들어 절찬함을 금치 못 하는바 라면서 높이 평가하였다. 아울러 고액은급을 지급 받으며 변호사로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자도 적지 않은 조선의 재야법조인이 하나가 되어 헌금운동을 전선적 ( 全 鮮 的 ) 아니 전국적 으로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80). 아울러 오키아유는 1938년 4월의 한국인 합의재판장의 등장, 같은 해 10월의 경성 변호사회의 등장을 높이 평가하였다. 전자는 1938년 4월 경성복심법원 판사 이상기 ( 李 相 基 ) 81) 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경성지방법원 재판장에 임명된 것으로 오 키아유는 이를 시의적절한 최선의 인사로서 절호의 롱 히트 라면서 높이 평가하 였다. 82) 후자는 1919년 7월, 변호사회 회장 선출 문제로 분열한 이래 일본인과 한 국인이 별도로 조직하여 온 경성의 2개 변호사회가 통합되어 230여 명의 변호사로 구성된 경성변호사회가 조직된 것이다. 83) 이에 대하여 신문은 반도 법조 역사에 78) 戦 勝 新 春 を 迎 へて, 法 政 新 聞, (1938.1.5.). 79) 歳 晩 雑 記, 法 政 新 聞, (1937.12.5.). 80) 恩 給 献 金 運 動 と 銃 後 の 報 国, 法 政 新 聞, (1938.6.20.). 81) 이상기: 1898년 서울 출신. 1911년 부산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18년까지 부산 경남은행 서기로 있다가 1919년 거처를 대구로 옮겨 미곡 상에 종사하였다. 1923년 도쿄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1926년 졸업하였다. 1927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였으며 이후는 경성지방법원 및 경성지방법원 검 사국 사법관시보, 경성지방법원 검사대리, 경성복심법원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1938년 3월부터 1942년 3월까지 경성복심법원 단독심 재판장과 민사합의부 재판장을 맡았다. 1944년 3월 대구복심법원 판사 겸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옮겨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 방 후는 대법원 대법관, 법무국 법정보고위원회 위원장, 특별범죄심사위원회 위원, 법 전편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 제5조로 말미암아 현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서울에서 변호사 활동 등을 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 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문제연구총서 인명편 2 친일인명사전, (2009), 900. 82) < 時 評 > 司 法 雑 観, 法 政 新 聞, (1938.4.5.). 83) 京 城 의 兩 辯 護 士 會 合 同 組 織 認 可, 동아일보, (1938.10.27.).

634 서울대학교 法 學 제53권 제3호 (2012. 9.) 빛나는 사적( 事 蹟 ) 이라며 크게 보도하였다. 84) 그러나 오키아유가 한국인 재판장의 등장과 변호사회 통합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유는 한국인 법조인을 배려한 것이 라기보다는, 비상시 조선통치의 근본 85) 인 내선일체를 사법계에서 실현하는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쟁에 적극 협력한 법조인은 오키아유만이 아니었다. 예컨대 사법 보국의 성의를 현현( 顯 現 ) 하기 위하여 1937년 11월 21일 설립된 조선변호사협회의 축하 식에서 마스나가 쇼이치( 增 永 正 一 ) 고등법원 검사장은 지나사변에 조우하여 국가 중대의 시국에 직면 한 일본제국에서는 사법에 건흥( 健 興 )하는 자의 책임이 더욱 중대 해지고 있다면서 비상시 법조인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86). 그리고 1938년 7월 7일 조선변호사협회는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신문에 서는 조선법조계가 시국에 영합해 가는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7. 나가노 나오히코 사장 시절(1939년 5월경~1941년 7월) 1938년 11월부터 1939년 5월 사이 신문사 사장은 오키아유에서 나가노 나오히코 ( 長 野 直 彦 )로 바뀌었으며 사무소도 서소문정 36번지로 이전하였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오키아유 사장 시절은 재조 재야 법조인이 하나가 되어 사법 보국에 노력할 것이 강조되고 있었으나 나가노가 사장에 취임하면서 법조인을 향한 메시지는 그 다지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오키아유가 현직 변호사인 데 대하여 나가노는 신문기자 출신이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나가노는 사설에서 국민은 이미 황국의 존폐를 걸어 외국과 싸울 각오를 한 상황으로 황국에 보답하 는데 어떻게 법률의 지시를 받거나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기개를 갖고 있어 법률 제정은 오히려 국민의 멸사봉공( 滅 私 奉 公 ) 각오 를 흩뜨릴 우려가 있 다는 인식을 보이고 있었다. 87)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 나가노는 국가 비상시 법조 인의 역할이나 그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호소할 필요성을 그다지 인식하지 않 았을지도 모르겠다. 이 시기 눈에 띄게 되는 기사는 시국 관련 사설들이다. 1939년 5월에서 1941년 7월까지 신문은 적어도 39편의 사설을 게재하였다. 그 중 20편 이상이 內 閣 更 迭 84) 内 鮮 一 体 の 具 現 新 京 城 弁 護 士 会 誕 生, 法 政 新 聞, (1938.10.20.). 85) < 時 評 > 司 法 雑 観, 法 政 新 聞, (1938.4.5.). 86) 朝 鮮 弁 護 士 協 会 創 立 総 会, 法 政 新 聞, (1937.11.20.). 87) 平 ならざれば 鳴 る, 法 政 新 聞, (1939.5.20.); 時 局 と 法 律 と 法 律 観, 法 政 新 聞, (1941.2.20.).

1920년 1941년 경성 발행 법정신문( 法 政 新 聞 ) / 吉 川 絢 子 635 (내각 경질), 新 国 民 政 府 (새 국민정부), 蘭 印 を 何 とする(네덜란드령 인도차이 나를 어떻게 할까?), 內 鮮 一 体 と 家 族 制 度 (내선일체와 가족제도) 등 시국에 대 하여 언급한 것이었다. 특히 경제정책에 관한 논평이 많았다. 이처럼 경제정책에 관한 논평이 많이 게재된 배경에는 정( 政 )이 있어야 법이 있으며 경제가 있다. 법정을 망각한 경제는 노 없는 배와 마찬가지다, 88) 다시 말해 법과 정치와 경제를 삼위일체로 여기는 인식이 편집자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40년 7월 18일에서 20일의 전선경제계( 全 鮮 經 濟 係 ) 판검사협의회 개최나 89) 각종 통제법령의 개정 시행 등에서 알 수 있듯이, 90) 통제경제가 강화되면서 법조 인들 역시 경제정책에 큰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신문 논설에 나타난 경제정책에 대한 나가노의 인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중일전쟁 이후 경제정책은 무리임을 뻔히 알면서 수립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소 비 절약에 중점을 두어야 할 미곡 대책에 대하여 쌀값 억제정책을 세우는 등 현실 성과 안정성이 떨어진 정책을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세금 인상 역시 사치 품의 공정가격은 그대로 유지하는 한편 생필품의 공정가격을 인상하였다. 게다가 통제란 적어도 엉망의 반대 여야 함에도 국가의 이름으로 관리의 의사 가 관철 되었거나 91) 죄를 범하려다 법의 판단을 받고 있는 자나 사회를 문란하게 한 비리에 대하여 아직 속죄의 정을 보이지 않는 자 가 그 업무를 맡은 사례가 종종 보인다. 92) 따라서 당국의 정책은 하필 궤변을 국민에게 가르치며 견인( 堅 忍 )의 각오마저 흩 뜨리게 할 모험을 굳이 범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93) 요컨대, 사설을 통하여 나가노 는 당국의 경제정책 또는 경제 통제를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문은 결국 통제 로 말미암아 폐간을 맞이하게 되고 말았다. 1941년 7월 20일 나가노는 언론기관 통제 방침이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인지 여부는 일단 제쳐 놓고 저는 법정신문을 존속할 의의 또는 필요성에 대하여 의문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라면서 폐간을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법정신문은 451호를 마지막으로 20여 년 역 사의 막을 내렸다. 88) 有 漏 無 漏, 法 政 新 聞, (1939.12.20.). 89) 全 鮮 経 済 係 判 検 事 協 議 会, 法 政 新 聞, (1940.7.20.). 90) 1940년 10월 5일자 법정신문에는 한국에서 개정 또는 시행될 각종 통제령이 게재되 었다. 91) 統 制 といふこと, 法 政 新 聞, (1940.6.20.). 92) 真 剣 になれ( 完 ), 法 政 新 聞, (1941.2.5.). 93) 強 引 時 代, 法 政 新 聞, (1940.3.5.).

636 서울대학교 法 學 제53권 제3호 (2012. 9.) 法 政 新 聞 제451호 1941.12.8. V. 맺음말 이 글에서는 법정신문의 소장 상황, 초대 사장 아사쿠라 도모테츠의 경력 그리 고 창간에서 폐간에 이르기까지의 보도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들 작업을 통하여 신문이 법조인뿐만 아니라 경찰 관계자, 한국인 말단 관리를 비롯하여 일 반인에게도 읽히고 있었음을 밝혔다. 그동안 일제시기 법사연구는 조선사법협회잡지와 조선고등법원 판결록에 게재 된 기사나 판결 등에 주로 의존하였으나, 앞으로는 법정신문도 분석 대상으로 삼

1920년 1941년 경성 발행 법정신문( 法 政 新 聞 ) / 吉 川 絢 子 637 는다면 자료의 외연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언급하지 못하 였지만, 당시 일본에서 발간된 法 律 新 聞 (법률신문), 94) 日 本 辯 護 士 協 會 錄 事 (일본 변호사협회녹사). 95) 正 義 (정의) 96) 등 법률 관련 잡지에도 조선 사법 관련 기사가 많이 게재되고 있었으므로, 이들 자료도 체계적으로 수집하며 적극 활용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한일 양국에 남아 있는 자료를 폭넓게 수집, 분석하면서 일 제시기 법과 사회의 양상을 복원하고 고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94) 법률신문: 일본 메이지~쇼와 전기의 신문. 1900년 판례의 신속한 보도, 법률지식 보급 등을 목적으로 변호사 다카기 마스터로( 高 木 益 太 郞 ) 등이 중심이 되어 창간하였다. 대심원뿐만 아니라 하급심 판결도 많이 게재되었다. 그리고 외국의 입법례와 사법 상 황에 관한 기사, 법조인이 편집부에 보낸 서한 등을 수시로 게재하였다. 창간 당시는 주간이었다가 나중에 5일간(월 6회)이 되는 등 발행 빈도에는 변화가 있었는데 1944년 8월 폐간될 때까지 4,922호가 발간되었다. 그리고 1929년 12월 다카기가 사망한 후는 사위인 오카자키 겐이치( 岡 崎 源 一 )가 발행자로 취임하였다. 95) 일본변호사협회녹사: 일본 메이지 쇼와 전기의 신문. 1897년 2월 도교변호사회 하 토야마 가즈오( 鳩 山 和 夫 ), 기쿠치 다케오( 菊 池 武 夫 ), 이소베 시로( 磯 部 四 郞 ), 기시모토 다츠오( 岸 本 辰 雄 ) 등을 중심으로 발족한 일본현호사협회 기관지로 같은 해 7월 창간 되었다. 이법, 사법제도, 정치 관련 논평, 외국법 연구, 판례 비판 등이 게재되었다. 법률 신문과 함께 전전 일본을 대표하는 법률 잡지 중의 하나다. 96) 정의: 메이지 쇼와 전기의 잡지. 1925년 5월 설립된 제국변호사회 회보로 같은 해 6월 창간되었다.

638 서울대학교 法 學 제53권 제3호 (2012. 9.) <부록> 법정신문사의 변천과정 사 장 기 간 사무소 기 타 아사쿠라 도모테츠 ( 朝 倉 外 茂 鐵 ) 다무라 나오카즈 ( 田 村 直 一 ) 구보타 다쿠지 ( 久 保 田 卓 治 ) 요시다 간지로 ( 吉 田 寬 二 郞 ) 후루하타 세이조 ( 降 旗 淸 三 ) 마루야마 도라노스케 ( 丸 山 虎 之 助 ) 오키아유 도시히로 ( 置 鮎 敏 宏 ) 나가노 나오히코 ( 長 野 直 彦 ) 1920년 6월 1927년 6월 1927년 12월 1929년 6월경 1929년 6월경 1929년 9월 1929년 9월 1932년 1월 1932년 1월 1935년 11월 1935년 11월 1937년 11월 명치정 2-4 정동 1 봉래정 1-27 황금정 2-28 남대문통 5-74 태평통 2-85 한강통 3-113 월 2회 발행, 1부 20전 부산 등지에 지국 설치 월 1회 발행, 1부 30전 월 1회 발행, 1부 30전 나중에 월 2회, 1부 20전 (2부 30전)으로 변경 월 2회 발행, 1부 20전, 2부 30전 법정경찰사 법정경찰신문 으로 명칭 변경 그후 법정신문사 법정신문 으로 명칭 변경 월 2회 발행, 2부 30전 매월 호외로 발행하던 고등법원 판결집을 부정기로 함 1937년 11월 1938년 11월경 황금정 1-197 월 2회 발행, 2부 30전 나중에 2부 40전으로 1939년 5월경 1941년 7월 서소문정 36 욱정 1-143 월 2회 발행, 2부 40전